갈라디아서제1장 - christianmonitor.netchristianmonitor.net/jusuk/Galatians.pdf ·...

Preview:

Citation preview

갈라디아서�제1장

=====1:1�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이암은� 것도� 아니요� -� 사도� 바울은� � 자신의사도권

이� 인간적인� 기원이나� 수단에� 있지� 않음을� 분명히� 밝힌다.� 이처럼� 자신의� � 사도권을� 편지의� 서두에서�

강조하는� 것은�당시� 바울이�예수의� 열두� 제자들� 중에� 하나가� 아니었다는�이유를� 들어� 바울의� 사도성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 유대주의를� 고수하는� 거짓� 교사들로� 당시� 갈라디아� 교인들

을 심하게 미혹(迷惑)하였던것으로� 보인다.� 한편� 바울은� 실제로� 예수의� 열� 한� 사도들처럼� 예수의� 지상� 사역을� � 목격하거나� 맛디아처럼� 공식적으로� 선출되지� 않았으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

님을목격하였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소명을� 받았으므로� 조금도� 사도의� 자격에� 부족한� � 것이없었다(행�

9:1-17;26:14-18).�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고전� 4:1-5� 주제강해� '바울의� 사도적� 자기�

인식과� 고린도� 교회의� 오해'를� 참조하라.� � �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 본문은� '알라'(*� � � � � � � � ,� '그러나')로� 시작되고� 있어� 바울의� 사도권이� 하나님으로부

터� 유래되었음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바울은� 자신이� 가진� 사도권의� 기원을� � 언급할� � 때마다예수� 그리

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함께� 언급하였다.� 이는�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가� �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가

지신� 분이심을� 전제하였음을� 보여준다.� � �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 바울은� 자신의� 사도

직의� 기원(起源)이� 부활하신� 주님에� 있음을� 밝힘으로써� 더욱� 그의� 논지를� 분명히� 한다.� 주의� 부활은�당시� � 초대� 교회성도들의� 신앙의� 근거요� '다메섹의� 경험'(행� 9:1-18)을� 통해서� 회심한� 바울� 자신의� 신

앙의� 근거였다(Longenecker).� � � 사도된� 바울� -� '아포스톨로스'(*� � � � � � � � � � � � � � � � � � ,� '사도')는� 관사�

없이� � 사용되었다.� 이는� 사도� 바울� 자신만이� 유일한� 사도인� 것은� 아님을� 암시한다.� 사실� 예수의� 열두

제자들�외에�다른�사람들에게도� '사도'라는� 칭호는�사용되었다.� � 원래� � '아포스톨로스'는�헬라어를�사용

하는�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개인이나� 단체의� 권익을� 옹호하는� 대표자를� 의미했으나� 예수께서� 오신� 이후

에는�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자들을� 가리키는� � 말로사용되었다(Boice).� 한편� 초대� 교회는� 사도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두� 가지를� 제시한다(행� 1:21-26).� (1)� 그리스도의�공생애� 사역과� 부활하신� 주를� 목격하

고,� (2) 그리스도에�의해�복음�사역자로�택함받은�자가�그것이다.

=====1:2� � 함께� 있는� 모든�형제� -� 바울은�보통� 그의� 서신서의�서두에서�인사말을�할� 때에� � 동역자들

의� 이름을� 밝히지만(고전� 1:1;고후� 1:1;빌� 1:1;골� 1:1� 등),� 단지� � '형제들'이라고� 표현한� 경우도� 종종�

있다(살전� 1:4).� 여기서� '형제들'이� 누구를�가리키는지에�대해서는�견해가�분분하다.� (1)� 혹자는�믿음으

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성도들의� � 무리라고� 한다(Lenski).� (2)� 혹자는� 바울과� 함께� 선교� 여행�

중에� 있는� 선교단� 전체를� 의미한다고� 한다(R.E.� Howard).� (3)� 혹자는� 바울을� 지지하는� 예루살렘� 교회

의 지도자들을� 의미한다고� 한다.� (4)� 혹자는� 이� 편지가� 수리아� 안디옥에서� � 남쪽� 갈라디아에� 보

내는� 것이라고� 보고� '형제들'이� 안디옥� 교회� 지도자들을� 가리킨다고� 본다(Longenecker).(5)� 혹자는� 이�

편지가�고린도에서�북쪽�갈라디아에�보낸� 편지라면�고린도에� 선교가�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아� 믿기시

작한�사람들을�통틀어� 가리킨다고� � 본다(Hendricksen).위의� 견해들�중(4),(5)번이� 가장� 타당한�듯하다.� �

�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 다른� 서신들에서� 나타나는� 수신자에� 대한� 칭찬과� 존경에대한� 언급이� 없

는� 것은� 아마� 그의� 불편한� 심기(心氣)가�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교회들이� 구체적으로� 어느� 교회냐�하는� 문제는� 논란이� 많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1차� 전도� 여행� 때(A.D.� 47-48)� 복음을� 전했던� 곳

으로서� 바울로부터� 복음의� 진리를� � 들었던� 교회들임에� 틀림없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받았음에도� 불

구하고� � 곁길로� � 가고있는�자들을�책망하기�위해�본서를�쓰고있다.

=====1:3� �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 바울은� 하나님에� 대하여� '아버지'(*� � ,� 파트로스)로�

부르고�있으며�예수� 그리스도에�대하여는� '주'(*� � � � � � � � � � � � ,� � 퀴리오스)라는�칭호를�붙여�쓰고� 있다.�

이� 두� 칭호는�사도� 바울의� 신앙을�대변할� 뿐만� � 아니라�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을�암시하고�있다.� 여기

서�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 '퀴리오스'는� 히브리어의� '아도나이'(*� � � � � � � � )와� 같은� 뜻으로� 70인역에

서는� '야웨'(*� � � )를� 읽을� 때� 사용되었다.� 따라서� 신약에서의� 예수의� 호칭� 가운데� 하나인� '주'의� 헬라

어� '퀴리오스'는� 구약의� '야웨'와� 예수� 그리스도가� 본질상� 동일함을� 보여준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

를� '주'로� 섬김으로써� 유일한�믿음의�대상(행� � 5:14;9:42;11:24)으로� 여겼으며�또한�그들의� 기도를�들

어� 응답하시는� 분으로(행� 7:59,� 60:고후� 12:8)� � 믿었다.� � � 은혜와� 평강� -�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

카리스'(*� � � � � � � � � � )는� 죄로� 인해� 더러워진� 인간에게� 자유와�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게속적인� 선

물을� 뜻하며� '평강'의� 헬라어� '에이레네'(*� � � � � � � � � � � � )는� 히브리어의� '샬롬'(*� � � � � � � � )으로� 그리스

도로� � 인해�하나님과�죄인사이에�이루어진�평화를�뜻한다.

=====1:4� � 이� 악한� 세대에서� -� '세대'(*� � � � � � � � ,� 아이온)의� 시간적� 개념은� 현재적인� � 시점과다가오

는�시점을�포함한다.� 그러나�본절에서의� '악한세대'는� '다가오는�세대'� 즉� 영원한�축복의�세대와�대조를�

이루는� 것으로서� '이� 세대'를� � 의미한다.� � 한편� � 유대인들은'메시야의� 오심'을� 기준으로� 이전� 시대를�

가리켜� '이� 세대'(*� � � � � � � � � � � � � � � � � � ,� � 하올람� 하제)라� 칭하였고� 메시야가� 도래한� 이후의� 시대를� '

올� 세대'(*,� 하올람�합바)라고� 하였다.� 결국� '세대'에� 대한� 신약의� 개념은� 구약에서� � 유래(由來)된� 것이다.� 바울은�본절에서�이러한�맥락을�염두에� 두고� '이� 세대'를� 언급하면서� � '악한'(*� � � � � � � � � � � � � � ,� 포

네루)이라는� 형용사를� 덧붙여� '이� 세대'가� 갖는� 특성을� � 강조하였다(Longenecker).� � � 자기� 몸을� 드리

셨으니� -�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돈토스� � 헤아우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은� 앞� 구절의� '예수� 그리스도'를� � 수식하는� 형용사절이다.� 이렇듯� 그리스도에� 대해� 설명하

는� 예를� 다른� 서신들의� 서문에서는찾아볼� 수� 없다.� 이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가지고있

는� 오류가� � 독특하였고,� 따라서� 바울이�이를� 시정해�주기� 위해� 본� 구절을� 덧붙여�설명하고�있음을� � 보

여준다(Mare).� 즉� 바울은�복음의�진리를�희석시키고자�하는�유대주의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을�

제시하여�그리스도의�죽으심과�부활외에�다른�것을� 통해 구원받고자� � 하는행위는� 그리스도를� 보

내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며,율법을� 섬긴다는�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무시하는� 행위

는�하나님을�볘반하는�일임을�경고한�것이다.

=====1:5� � 영광이�저에게�세세토록�있을지어다� -� 바울은�십자가�위에서�우리의� � 죄를� � 위하여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다.� 이는� 흔히� 인사말� 뒤에� 나오는� 부드러운� 송영(頌詠)의� 의미라기보다는� 롬� 1:25절에� 나타나는� 송영과같이� 하나님과� 아들� � 예수에� 대한� 헌신과� 충성다짐하는� 의도를�

지닌다.� � � 아멘� -� 헬라어� '아멘'(*� � � � � � � � )은� 히브리어(*� � � � � � ,� 아멘)에서� 유래되었다.� � 바울에게�있

어서� 아멘은� 하나님께� � 대한� � 찬양이나� � 서신서의� � 결미어로� � 사용되었다(롬16:27;빌� 4:20� 등).� 본절

에서� '아멘'은� 하나님께대한� 찬양과� 영광이� 영원히�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이� 악한� 세대'의� 일

시적이며�덧없는�속성과�선명한�대조를�보여준다.

=====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 -� '부르신� 이'는� 3절에� 나오는� '우리� � 하나님아버지'

이시다.� 구속� 사역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 구원의� 계획을� 세우시며(엡� 1:3-5;벧전� 1:2)� 또한� 계획하신�

대로� 당신의� 백성을� 부르시는� 분이시다(고전� 1:9).� 바울은� � 이처럼� 당신의� 자녀를� 부르시는� 분이� 삼위�

중에� 제일� 위격인� 성부� 하나님이라는� 것을� 여러번� 강조했다(15절;롬� 8:30;9:24;고전� 7:15,� 19;살전�

2:12� 등).� � 하나님이�성도를�부르시는�것은�명백한�계획으로�되었고�그�계획은�완전하며� � 하나님의�의

지에� 속하는� 것으로� 분명한� 목적과� � 의도를� 갖는다.� 그러면� 성부� 하나님이� 성도들을� 부르시는� 목적은

무엇인가?� (1)�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케� 하기� 위해서� � 부르셨다(고전1:9).� (2)� 성도

들로� 하여금� 부정한� 가운데� 있지� 아니하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 부르셨다(살전� 4:7).� (3)� 평화를� 위하

여� 부르셨다(고전� 7:15;골� 3:15).� (4)� 하나님의� 나라와그의� 영광을� 위해서� 부르셨다(살전� 2:12).� (5)�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얻게� � 하기위하여부르셨다(살후� 2:13).� 이와� 같이� 성부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부르셔서�구원을�얻게하셨다.� 그러나�갈라디아�교회에는�부르신�하나님으로부터�떠나는�자들이�있었다.� �

당시갈라디아�교회에는�거짓된�유대주의자들이�하나님을�빙자(憑藉)하여� 율법의 교훈들을가르침으로�

성도들을� 미혹하고�있었던� 것이다.� � � 이같이�속히� 떠나� -� '이같이'(*� � � � � � � � � � ,� 후토스)라는�말속에는�

바울의� 깊은� � 탄식과� 안타까움이� 있으며� '속히'(*� � � � � � � � � � � � ,� 타케오스)라는� 표현� 속에는� 전혀� 기대

하지� 못했던� 상황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거짓� 복음을�

좇은� 것도� 이상한데,� 상상외로� 빠르게� 복음을� 떠나는� 모습들을� 보았을때� 더욱� 의아해� 하고,안타까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갈라디아� 교인들� 중� 유대주의를추종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떠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잃어버리고� � 하나님께서� � 부르신거룩한�삶과�하나님�나라의� 영광과�진리를�버리고�구원에서� 떠

나는�자들이�되었을� � 것이다.

=====1:7� � 다른� 복음은�없나니� -� '다른'(*� � � � ,� 알로)은� 6절에� 사용된� '다른'(*� � � � � � � � � � � � ,헤테론)

과� � 차이가�있다.� � 즉� '알로'는� 많은� 것들이�있는� 가운데�다른�것을� 지칭하고,'헤테론'은� 단�두�가지� 중

에� 하나를� � 가리킨다(TDNT).� � 이렇게� 볼� 때� 본절에� '헤테론'대신� '알로'가� 사용된� 것은� 복음의� 절대성

과� 유일성을� 강조하려는� 시도에서� � 비롯되었음을� 알수� 있다.� 한편� 6절의� '다른� 복음'은� '또� 하나의� 복

음'이� 아니라� 왜곡된� 복음을의미한다(Cole).� 왜곡되어� 그릇된� 복음은� 이미� 복음이� 아니다.� 왜냐하면� 복

음은� �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완전하기� 때문이다.� � � 너희를� 요란케� 하여� -� 헬라어� '타랏손테스'(*� � � � �

� � � � � � � � � � � � � � � � � )는� � 문자적으로� '소란케� 하는� 자들'을� 의미하며� 여기서는� '거짓� 교사들'을� 가리킨

다.� 이단어는� � 행17:8에서� 바울을� 시기하는�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소요를� 일으켰던� 일에� 사용되기

도했다.� 거짓� 교사들이� 교회를� 소란케� 하는내용은� (1)� 복음을� 변질시키며,� � (2)� � 교회의질서를� 혼란시

키는�것이다.

=====1:8� �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 갈라디아� 교회의� 율법주의자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거

짓의� 율법을� 강조하면서� 천사에� 대해서도� 가르쳤는지� 모른다(Cole).� � 유대인들은일반적으로� 천사를� 율

법의�중보자(仲保者)로� 생각했다.� 특히� 이러한�사상은� 후기� 유대교의�이단들에게서�부각되었다.� 아무튼�바울은�그릇된�사상을�가지고�복음을�왜곡시키려는�것은�도무지�용납될�수� 없음을�단호하게�설명한다.

=====1:9� � 누구든지...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바울은� 8절에� 이어� 저주를� 반복한다.�

'저주'의� 헬라어� '아나데마'(*� � � � � � � � � � � � � )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 것으로� 우상이� 파멸되는� 것

과� 갈은� 저주를� 뜻한다(신� 7:26).� 바울은� 이� 단어를�같은� � 의미를�가진� '카타라'(*� � � � � � � � � � � � )와� 구

분하여� 사용하였다.� '카타라'는� 3:10,� 13에서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관련하

여� 사용되었다.� 주께서� 십자가위에서� 받았던� 저주는�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저주를� 대신� 지신� 것이

다.� 이제�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받은� 저주를� 부인하고� 다시� 율법의� 저주� 아래로� 들어가려고� � 하는자

는� 우상의� 파괴와� 같은� 멸망을� 받게� 될� 것이다.� 한편� '누구든지'라는� 말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모든�

자들'을� 의미하는봐�앞절의� '어떤� 사람들'(7절),� '하늘로부터�온� 천사들'(8절),� 심지어는�사도� 바울� 자신

까지� 포함하는� 모든� 자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인(否認)하는�자는� 누구를�막론하고� � 저주를�받을� 것임을�바울은�극령하게�보여준다.

=====1:10� �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 갈라디아�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적인� � 배경을�

갖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헛된� 것에� 불과하다고� 가르쳤던� 것� 같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만을� 증거한� 바울의� 가르침은�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율법의� 요구들을� 포기한� 것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바울은�이에� 대해� 자신을�추종하는�세력을�얻으려는�인간적� 야심을�결코� 갖지� 않았다고�분명하

게� 선언한다.� � �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종

'(*� � � � � � � � � � � � ,� 둘로스)은� 한� 주인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율법에�열심을�가진� 자였으나�이제�율법의�완성자이신� � 그리스도에게�철저히�복종한다.

=====1:11� � 형제들아� -� 헬라어� '아델포스'(*� � � � � � � � � � � � � � )가� 신약성경에서는� � '같은� � 조상을가진

사람'(행� 3:22;롬� 9:3),� '믿음으로� 연합한� 가족'(마� 23:8;롬� 1:13).� � '그리스도의동역자'(고후� 1:1)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포괄적으로� 그리스도의�십자가를� � 믿음으로�받아들이고� 참된� 복음의� 진리를� 따르

는� 모든� 자들을� 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여기서� 갈라디아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지칭하여� 이�

말을� 사용했음이�분명하다.� � � 사람의�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 헬라어�본문에서는�본절의� '뜻'에� 해

당하는� 단어가� 없고� 다만� '사람을� 따라'(*� � � � � � � � � � � � � � � � � � � � � � � � � � ,� 카타� 안드로폰)로� � 되어있다.�

그러나�문맥상� 4절의� '하나님의�뜻을� 따라'(* � � ,� 카타� 토� 델레마� 투데우)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된�

것으로�보아� � '사람의�뜻을� 따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이처럼�바울은�반대되는�개념을�사용하여�자신

의사도권이� 사람의� 전승이나� 인위적인� 교육등에� 의한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강조하고� 있

다.

=====1:12� 사람에게서�받은�것도� 아니요� -� 바울은�하나님을�섬기는�열심에서�유대교의�사도로일한적

이� 있었다.� 당시� 사도의� 개념은� 산헤드린이나� 여제사장� 등� 높은� 직위에� 있는�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명

령을� 받아� 임무를� 완수하는� 자들을� 칭하기도� 했다.� 바울이� � 다메섹으로� 향할� 때에� 그의� 임무는� 이러한�

성격의� 것이었다(행� 9:2).� 그러나� 바울� � 사도는지금�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이전에� 사람들의� 명령에� 따

라� 하는것과� 다르다는� 것을� � 주장한다.� � �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 바울은� 반복적으로� 부정어를�

사용하여� 사도권의� 근거를� 피력하다가� 이제� 접속사� '알라'(*� � � � � � � � ,� '그러나')를� 사용하면서� � 자신의� �

전한복음이�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사실을� 강조한다.� 예수의� 열� 두� 제자들과는� � 달리바울은� 예수

와� 함께하는� 삶을� 통해�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다는� 점에서� 사도적� � 권위에도전을� 받을� 수� 있었다.� 하

지만�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나타나신� 주님과의� 만남을� 기점으로� 사도의� 사명을� 받았다(행� 9:4-26).�

또한� 열� 두� 제자들이� 비록� � 바울보다� � 먼저사도가� 되긴� 했지만,� 그들� 역시� 성령에� 대한� 약속(요�

14:16;16:13)이� 오순절� 사건으로성취된� 이후에야� 비로소� 사도가� 되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이� 오순절�

다락방에서� � 성령을� 받아� 비로소� 사도로서� 활약했듯이� 바울은� 다메섹의� 도상에서� 부활하신� � 주님을� �

직접�만나� 이방인의�사도로�부르심을�받았다.

=====1:13� 유대교에� 있을때에� 행한� 일� -� '행한'의� 헬라어� '아나스트로펜'(*� � )은� 역사적인� 사건뿐만�

아니라� 그가� 행한� 일들과� 근본적인� 삶의� 태도와� 방식을� 포함한다(Huxtable).� 바울이� 여기서� '유대교

'(*� � � � � � � � � � � � � � � � � � � ,� 유다이스모)라는� �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비록� 바울이� 이전에� 유대교에� 속하

여� 모세� 율법을� 삶의� 절대적� 표준으로� 삼고�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자� 했지만,� 유대교가� 단지� '인간�

종교�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한다.� 바울은� 이제� 유대교에서� 벗어나� 객관적� 입장에서� � 자신

이� 과거에� 유대교를� 위해� 일했던� 사실을� 회상(回想)하고� 있다.� � �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있어서� 가히� � 광신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편견과� 교

만으로� 교회를�핍박했다.� � 본절에서� '하나님의�교회'(*�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엑클레시아� �

투� � 데우)라는말을� 사용한� 것은�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1)�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메시야이신� 예수

를�향한�것일� 뿐만� 아니라�하나님께�대적하는�것임을�보여준다.� (2)� 구약 시대에는유대�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아� 특권을� 누리고� 있었으나,� 신약� � 시대에는� 교회가� 참� 이스라엘로� 전

이되었다.� 따라서� 바울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하는�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한� 것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

하는�결과가�되었다.

=====1:14�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 바울이� 과거에� 유대교를� 신봉했던� � 정도를� � 나타내는데,'지나

치게'의� 헬라어� '프로에코프톤'(*� � � � � � � � � � � � � � � � � � � � )은� '길을� 밝히다',� '숲에서�앞서서� 길을� 개척하

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Robertson).� 유대교의� 대학자인� 가말리엘� 문하에서도� 뛰어난� 제자였고� 유대교

에� 속한�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서� 나아가고� 있었다.� 이처럼� 유대교에� 대해� 열심이었던� 바울은� 율법과�

랍비들의� 전승에서� 해방되어� � 복음으로� 말미암은� 완전한� 자유를� 선포하게� 되었다.� 만약� 바울이� 그리스

도� 안에서� � 완전한� 자유자가� 되지� 못했다면� 할례와� 율법을� 돌아보는자(행� 15:5)가� 되고� � 말았을� � 것

이다.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하여(12절)� 그� 높은� 율법의� 벽을� 훌쩍� 넘어설� 수있었다.� � � 내�

조상의� 유전� -� 유대인의� � 율법은� � 두� � 가지� � 형식을� � 취했는데� � 하나는� � 정언적(categorical)� 또는� 절

대적(absolute)이며� 또� 하나는� 결의법� 또는� � 판례법� � 형식이다.전자는� 십계명과� 같이� 예외가� 없는� 지

상� 명령의� 성격을� 띤� 것으로�운율을� 가지고� 있어예배시에� 낭송되거나� 암송하기에� 편리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반면에� 후자는� 실제� 생활속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관습법과� 같은� 것으로� 본절의� � '유

전'(tradition)은� 후자에�가깝다.� 랍비들은� 613개� 조항의�법� 조문을�만들었는데�이것은� 바로� � 전자를실

생활에� 확대� 적용하여� 세분화(細分化)한� 것이다(Lenski).� 결국� '유전'은� 인간이� � 만들어� 놓은� 것이다.�바울은�인간이�만든� 유전의�울타리에�갇혀�하나님의�교회를�핍박하였다.

=====1:15� �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 '택정하시고'의� 헬라어� '아포리사스'(*� )는� '어떤� 경계로부

터� 떨어지게� 한다'는� 뜻으로서� 어떤� 특정한� 직분이나� 사역에� 관련하여� 성별(性別)됨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2:12;행� 19:9).� 구약� � 시대의� � 선지자들은그들의�부르심이� '어미의�태로부터'� 된� 것임을�고백하

고� 있다(사� 49:1;램� 1:5).� � 바울은�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이� 가지고� 있던� 사상을� 잇고� 있는� 것으로� 보

인다.� 또한� � 바울은�이러한�하나님의�영원한�구원� 계획과�예정을�선지자나�사도�같은� 특별한 사

람들에게만�국한시키지�않고�하나님의�백성된�모든� 사람에게�적용시키고�있다(롬� 9:11).

=====1:16� �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때에� -� 예수께서� 바울의� 영혼과� 마음속에� 내적계시

를� 통하여� 자신을� 나타냈음을� 말한다.� 바울은� 내적� 계시를� 통하여� � 예수가� 누구시며� 그의� 죽음과� 부활

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본절은� 또한� 역사적으로� 다메섹� 도상의� 체험(행� 9:1-9)을� 시사

하며� 아울러� 바울이� 성령의� � 충만함과� � 그리스도의말씀을� 소유하고� 있음을� 암시한다(Chrysostom,�

Huxtable).� 이렇듯� 바울이� 내적� 계시를통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말씀을� 소유한� 것은� 자신의� 이

해를�위한� � 것일뿐만�아니라� � 이방에�그리스도를�전파하기�위함이었다.

=====1:17� �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 부르심을� 받아� 이방인의사도

된� 것을� 강조하기� 위해� '오직'(*� � � � � � � � ,� 알라)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또한� 구태여� 먼저� 사도된� 자

들을�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과�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는� 것(16절)을� 언급하고� 있는것도� 이와� 같은� 사

실을�강조하기� 위해서이다.� 한편� '아라비아'는� � 매우� 광범위한� 지역이기�때문에� 바울이�갔던� 장소가�어

디인지� 정확하개� 알수� 없다.� 사실다메섹도� 아라비아에� 속한� 곳이므로� 다메섹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

으로� 갔으리라� 추측된다(Cole,� Huxtable).� 혹자는� 모세가� 율법을� 받았던� 것을� 상기하여� 이곳을� � 시내

산이라고�주장하기도�한다(Lightfoot).� 그러나�이� 견해도�명확한�근거가� � 없다.� � 의미상'아라비아'는� 예

루살렘과� 상관없는� 장소이며� 또한� 바울� 자신이� 개인적으로� 예수의� � 계시를� 체험하고� 이해한� 장소이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남으로� 그의� � 삶과가치관이� 변화되었지만� 자신이� 경험한� 계시를� 체

계화시키는� 데는� 많은� 시간이� � 필요했을� 것이다.� 이는� 마치� 예수께서� 그의� 사역을� 준비하시면서� 세례

를� 받으시고� 광야에� 나가� 기도하신� 것과� 유사하다.� 바울은� 광야에서� 혈육과� 분리되고,� 예루살렘에� 있

는� 다른그리스도인의� 영향도� 받지� 않고�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통하여� 자신에게� � 주어진특별한�

계시,� 즉� 이방인들을�향한�하나님의�뜻을�발견하고�그� 사역을�위하여�준비하는기간을�가졌다.

=====1:18� � 그� 후� 삼� 년� 만에� -� 본� 구절에� 대하여는�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 (1)� � 바울이회심

하고나서� 삼� 년이� 지났다는� 것이다.� 즉� 문맥상� 바울이� 자신의� 독특한� 회심을� 강조하고� � 있기� � 때문에� �

회심에� � 역점을� � 두었을� � 것이라는� � 견해이다(Boice,� � Huxtable,Lenski).�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다메섹

으로� 돌아온� 때로부터� 삼년이� 경과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본절에서�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게

바를� 만나기� 전에� � 상당� � 기간이소요되었다는� 사실이다.� 한편� 어떤� 학자는� 3년이란� 기간을� 문제삼아�

본문의� 기록이� 행9장에� 나타난� 바울의� 행적과� 모순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누가가� 행� 9장에서� � 바

울의� 행적에� 대하여� 기록할때� '아라비아로� 간것'에� 대하여는� 침묵하고�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누가의� 침

묵이� 바울의� 아라비아행을� 부정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는� 못된다.� 누가는� 단지�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아니한� 기간에� 대하여� 침묵한� 것뿐이며,� 그� 반면에� � 바울은� 본서에서� 게바를� 만나기� 전에� 일정� 기간�

동안�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통해자신의� 신앙과� 신학을� 재정립(再定立)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는것이다.� � � 게바를� 심방하려고� -� '심방하려고'의� 헬라어� '히스토레오'(*� � � � � � � � � � � � � � )는� � 영어의� '히

스토리'(history,� '역사')의� 어원이� 되는� 말로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의미이다.� NEB는� 이를� '게바와�

가까워지려고'(to� get� know)라고� 번역하였다.� 본� 구절은� 행9:26-30에� 기록된� 사건으로� 바울은� 바나

바에� 의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 소개된� � 이후에베드로를� 찾아갔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성

을�주장하면서�베드로와의�만남을�언급하는�이유는�무엇일까?� 이에� 대하여는�두� 가지의�추측이�가능하

다.� (1)� � 2절에서� 언급한� 자신을� 지지하는� '형제'� 가운데� 베드로가� 포함되었음을� 암시하기� � 위해서이

다.� (2)�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이� 방문이� 사적인� 방문이며� 어떤� 인간적인� 권위의� 지지를� 얻으려는� 방

문이� 아니었음을� 밝히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바울은� 자신의� � 사도권이� 주께로부터� 유래되었음을� 밝

히는�것이다.� 양자가�조심스럽게�적용되어야 하겠으나문맥상� 후자를� 택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사도는�

지금� 예루살렘� 교회의� � 영향을� � 받지아니한� 자신이� 사도권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15일� 동

안� 머무르며� 게바를�통하여� 예수에�대한� 지식과� 경험을�들을� 수� 있었을� 것이며,� 바울은� � 그때에� � 그리

스도에관한� 사실들과� 가르침을� 바르게� 정립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을� 이방인의� � 사도로� 부르신�

하나님의�섭리에�대하여�설명하였을�것이다.

=====1:19� � 주의� 형제� 야고보� -� 바울이� 만난� 야고보가� 세베대의� 아들이면서� 요한의� 형제인� � 야고보

(마� 10:2)나� �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 10:3)가� 아니라� 예수의� 친형제� 야고보라는것을� 분명히한다.� 예

수의�선교� 초기에�그의� 형제들과�친족들은� 예수를�믿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미친� 자로여겼다(막� 3:21;

요� 7:5).�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그들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을�체험하고�진실한�신자가�되었으며(행� 1:14)� 야고보는�예루살렘�교회에서 영향력있는� � 지도자

가� � 되었다(2:9,� � 12;행12:17;21:18� 등).� 어떤� 학자는� 바울이� 야고보를� 사도로� 인정하느냐� 또는� 인정

하지� � 않느냐에� 관심을� 가지지만(Cole),� 당시� 교회의� 보편적인� 사도� 개념으로� 이해할� 때� � 지도자인� 야

고보를� 사도로� 인정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바울이왜� 열두� 제자� 중� 베드로�

외에� 야고보만을� 보았다는� 것을� 강조하는가� � 하는� � 문제이다.바울은� 예수에� 대한� 보다� 넓고� 많은� 지식

을� 얻기� 위하여� 수제자를� 택했으며� 또한� 예수의� 친형제를� 택한� 것� 같다.� 야고보는� 이방인들에게도� 너

그러웠으며� 온유한� 인격을� � 소유하였으므로� 바울에게도� 친절하게� 예수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을� 것이

다.

=====1:20� �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 바울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갈라디아교회

의� 구성원� 중에는� 아직도�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자들이� � 있었던� 것� 같다.� 아마

도� 바울이� 교회의� 지도자들과� 충돌할때에� 발생되는� 문제는� 그의� 진정한� 사도권에� 관한� 것이었지만,� 교

회의� 구성원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의� 마음을� � 아프게� 하는� 것은� 자신이� 지난� 날에� 그들을� 핍박했던�

사실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자신의� 쓰라린� 과거의� 경험을� 회상하면서� 갈라디아의� 교인들에게� 거

짓�교사들을� � 멀리하고�복음에서�떠나지�말라고�엄숙하게�권고하고�있다.

=====1:21� �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 바울은� 본절에서� 자신의� 연대기적인� � 행적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그는�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를� � 들러� 길리기아� 지방으

로(행� 9:30)� 갔다가�안디옥에서�함께�사역하기를�바라는 바나바의요청에� 의해� 수리아지방으로�

갔다(행� 11:25,26).� 길리기아는� 소아시아의� 동남부� � 연안지대로서� 바울의� 고향인� 다소를� 포함하는� 지

역이며�수리아는�팔레스틴�북부 지역으로수도인� 안디옥을� 중심으로� 하는지역이다.� 바울이� 이� 두�

지역을� 언급하는� 것은� (1)� � 예루살렘� 교회의� 영향을� 받지� 않는� 먼� 곳에서� 사역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며,� � (2)또한� � 예수를� 만난� 이후에� 복음을� 위해서� 열심으로� 헌신했다는� 것을� 증거하기� � 위함이

다.

=====1:22� � 유대에...나를�얼굴로�알지�못하고� -� '얼굴로'에� 해당하는�헬라어� '토� 프로소포'(*

� � � )는� '개인적으로'라는� 의미이다(Longenecker).� 행� � 8장에� � 나타난박해로� 인해� 유대� 지방

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어떤� 인물인지� 익히� 들어� 알고� �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어떤� 인격의�

소유자인지�구체적으로� � 아는사람은 예루살렘교회에� 국한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변방(邊方)에� 있던� 유대인의� 교회는� 바울에� 대해�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Cole).� � � 그리스도� 안에� 있

는� 교회� -� 바울이� 13절에서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였는데� 본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라고�

표현한� 것은� 유대교의� 회당과� � 구분짓기� � 위함인것� 같다(Cole).� 또한� 이러한� 표현은� 살전� 2:14의� '그

리스도� 예수안에서� � 유대에� � 있는하나님의� 교회들'이라는� 표현과� 동일한� 용어로� 보인다

(Longenecker).� � 그러므로� � 본문이,� 유대인과� 이방인이� 따로� 교회로� 모이는� 것을� 시사한다거나,� 유대� �

지역의� � 교회가구체적으로�지역�교회의�형태를�가졌음을�보여준다고�하기는�어렵다.� � 한편 '교회'를복

수인� '엑클레시아이스'(*� � � � � � � � � � � � � � � � � � � )로� 사용하는� 것은� 단지� � 유대� � 지역에있는� 교회뿐만� 아

니라�사마리아와�갈릴리�지역의�교회까지�포함하고�있음을 시사한다(행� 9:30).

=====1:23� � 잔해하던�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 '지금'(*� � � � � � ,� 뉜)은� 현재� 사실을� 과거� � 사실과� 대

조하여� 사도� 바울이� 회심한� 사실을� 보다� 선명하게� 나타낸다.� 교회를� 핍박했던� 바울이� 회심하여� 그리스

도의�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는�사실은� 과거� 바울로부터� 직접핍박을�받았던� 유대지역의� 그리스도인

들에게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가� 되고도� 남았다.� 본문은� 바로� 그와� 같이� 변화된� 바울을� 두고� 유대�

그리스도인들이�이구동성으로�했던�말을�인용한�것이다(Ernst� Bammel).

=====1:24� �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돌리니라� -� 본절의� 이면(裏面)에는,� 바울의� 사도직과� 메시지를�부정하면서� 정면으로� 대적하는� 자들이� 바울에� 대해� 매우� 불만스럽게� 생각한� 모습과� 바울의� 초기� 선교�

사역의�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대조

적으로�암시되고�있다.� 한편� 본절의�내용은� �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에� � 관하여� � 말씀하신 부

분인 사� � 49:3� � 내용과� � 매우 유사하다(Longenecker).� � � � 갈라디아서�제� 2장

=====2:1� � 십사년�후에� 내가� 바나바와�함께�디도를�데리고�다시� 예루살렘에�올라갔노니� -� � 사도행전

에� 의하면� 바울은� 세� 번에� 걸쳐�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 첫번째� 방문은� 그가� 회심한지� 삼년� 후에� 베드

로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고(행� 9:26),� 두번째� 방문은� 안디옥� 교회의� 구제� 헌금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

었으며(행� 11:29,30),� 세번째� 방문은�이방인에게복음을� 전하는�자신의�사도권을�변증하러�예루살렘�공

의회에�참석하기�위한 것이었다(행� 15:1� 이하).� 본절에�나타난� 바울의�예루살렘�방문이�이차� 방문

인지�삼차�방문인지에�대해서는�학자들의�견해가� � 갈라진다. 먼저� � 두번째� � 방문이라고� � 주장하는� �

견해(Bruce,� Calvin)를� 살펴보면�다음과� 같다.� (1)� 행� 15장의� 세번째� 방문은� 공적� � 회의에참석한� 것이

지만,� 2절에� 의하면� 바울은� 개인적으로� 예루살렘� 지도자를� 만났으므로� � 세번째� 방문이라고� 하기� 어렵

다는� 것이다.� (2)� 행� 15장에는� 디도에� 대한� 언급이� � 생략되어� 있으나� 본절에는� 디도와� 바나바가� 동행

(同行)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 본구절의� 방문은� 세번째� 방문�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3)� 본절의� '다시'를� 두번째� � 방문을뜻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견해는,� 만일� 1:18에� 기록된� 방문이� 첫번

째�방문이라면�문맥상�본� 구절의�방문이�두번째�방문이라고�추정하는�것은� � 나름대로의 타당성을가

진다.� 다음으로� 세번째� 방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Berkhof,Eerdman,�

Findlay,� Robertson).� (1)� 행� 15장과� 본장의� 주제가� 동일하다는� 것인데,� � 두곳� 모두에서� '이방인� 그리

스도인들의� 할례'를� 다루고� 있다.� (2)� 행15장에서� � 지도자들간의� 연합을(행� 15:8,9)� 강조하고� 있는데,�

본장에서도� 동일하게� 연합을� 서술하고� 있다(9절).� (3)� 행� 15장이나� 본장이� 모두� 유대주의자들에� 대하

여�단호한�입장을 주장하고있다.� 이상의� 견해들� 가운데� 본절이� 말하는� 바울의� 방문이� 세번째� 방문이라

는� 것이� 더욱� 타당한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예루살렘� 공의회의� 연대를� A.D.� 49년경으로보고�

바울의�예루살렘� 방문�연대를�추정하면� 1차는� A.D.� 35년,� � 2차는� � A.D.� � 46년(행11:30;12:25),� 3차�

방문은� A.D.� 49년에� 이루어졌다.� 여기서� 만일� 본장의� � 방문을� � 2차방문과� 연결시킨다면� 바울의� 1차�

방문은� A.D.� 46년에서� 14년� 전인� A.D.� � 32년의� � 되며또한� 그가� 회심한� 시기는� 그보다� 3년� 전인�

A.D.� 29년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바울이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때가�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

이어야� � 하므로� 불가능하다.(2)� 두번째� 방문을� 주장하는� 자들은� 디도에� 대한� 언급이� 행15장에� 없다는�

이유로� 세번째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디도에� 대한� 기록은� 사도행전� � 전체에서� � 누락되어� � 있다.(3)�

바울이� 두번째� 방문을� 생략한� 것은� 무슨� 속임수나�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 이방인의� 할례� 문제를�

다루는� 본장에서� 다른� 주제,� 즉�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 � 문제를취급한� 두번째� 방문에� 대하여� 언급할� �

필요성을� � 못느꼈기 때문이다.� � (4) '다시'(* � � � � ,팔린)는� 두번째를� 뜻하기도� 하지만� 요�

18:27에서� 베드로의� 세번째� � 부인과� �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두번째'를� 의미하는� 헬라어� '듀테론'(*� � �

� � � � � � � � � � � � � � )을� � 쓰지� � 않고� '팔린'을� 사용한� 것은� 단지� 방문의� 반복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 � �

바나바� -� 그는� 레위� 지파� 출신의� 유대인으로� 구브로에서� 태어나� 바울보다� 먼저� 복음을� 받아들였던� 사

람으로서� 이방인들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 있었다.� � 그래서그는�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안디옥�

교회로� 파송되었다(행� 11:22).� 그의� 본명은� � 요셉이었으나� 사도들은� 그를� '권위자',� '권위의� 아들',� '위

로의� 아들'이라는� � 의미의� � '바나바'로� 불렀다(행� 4:36).그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로소(행� 11:24)�

초대�교회의� � 헌신적인�지도자였다.� 그는� 바울을�예루살렘�교회에�소개하고�바울의 체험을 변

호하며함께�사역하였으나� 2차� 전도� 여행을�떠나면서�마가의�동행� 문제로�바울과� � 결별(訣別)하게� 되었다(행� 15:36-41).� � � � 디도� -� 그는�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으로서� 고린도�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

고있는� 목회자이다(고후� 8;23;12:18).� 본절에서� 이방인의� 할례� 문제로� 등장하는� 그는� 바울이� '나의� 참�

아들� 디도'라고� 말할� 만큼� 바울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에� � 대한� � 성경의마지막� 기록은� 그가� 로마에서�

달마디아로�갔다는�것이다(딤후� 4:10).

=====2:2� � 계시를�인하여� -� 이에� 해당하는�헬라어� '카타�아포칼립신'(*� � )은� 바울의� 이방인� 선교가�

어떠한�인간적인�동기로부터�유래된�것이� 아님을확실히�보여준다.� � 한편� 행� 13장에서는�바울이�바나바

와� 함께� 이방인을� 위해� 파송되는과정이� 안디옥� 교회의� 결정임을� 보여준다.� � 이처럼� 바울의� 선교� 사역

이� 교회의� 결정에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 본절에서� 언급된� 바,� 바울의� 선교� 사역의� 동기가� 하나님

의계시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은� 서로� 상반되지� 않는다.� 바울은� � 안디옥� 교회의� 결정� 배후(背後)에� 하나님의� 계시하심이� 있음을� 확신하였을� 것이다(Hendriksen)� � � 달음질하는� 것� -� 바울은� 개종� 이후부터� 이

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당시의운동� 경기를� 염두에� 두어� 묘사하였다.� � 그의� � 달음질은� � 향방

없는� � 것이� � 아니라(고전9:26)� 분명하고� 확고한� 목표를�향한� 것이었다.그는� 이� 목표를� 이루기�위해� 지

도자들을사사로이�만나는� 면밀한� 계획을� 갖기도�하였으며� 교회의�화합과� 일치를� 위해� 지도자로서의� 사

명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결국� 변하거나� 바울의� 달음질을� 헛되게� 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갈라디아�

교인들이었으므로�본절에는� 바울� 자신이� � 유대주의자들의� � 모든거짓된� 것들을�반드시� 고치고야�말겠다

는�의도가�내포되어�있다고�할�수�있다.

=====2:3� � 억지로� 할례를�받게� 아니하였으니� -� 구약에서�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언약을� � 맺으시고�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자손� 대대에� 이르기까지� 거행하도록� � 명령하셨다(창17:10-14).� 그러나� 세월

이� 경과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할례의� � 언약적인� � 의미보다는종족적이며� 문화적인� 우월감의� 상징으로

서� 외적인� 할례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급기야는� 구원을� 위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러한� 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교회안의�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준수하는� 것과� 함께� 할례를� 시행하는� 것

이�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주장하여� 이방인� 신자들에게까지� 할례를� 강조했다.� 할례에� 대한� 보다� � 자세

한� 내용은� 구약� 호크마� 창� 17:1-14의� 주제� 강해� '할례� 언약과� 세례',� � 창� � 34:25-31의주제� 강해� '할

례� 실시에� 따른� 제반� 사항'을� 참조하라.� 한편� � '억지로...아니하였으니'의� 헬라어� '우데...에낭� 카스데'(*� �

� � � � � � ...� � � � � � � � � � � � � � � � � � )는� 할례를� 주장하는강한� 압력�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는� 바울의� 굳건한�

의지를�나타낸다.� 당시 갈라디아교인들이� 거짓� 교사들의� 회유(懷柔)에� 말려들어� 할례를� 중요하게�생각한�상황에서� � 바울이�할례받지� 않은�디도를� 유력한�증인으로�내세우는�이유는�디도가�갈라디아� 교

회의신임을�받고�있었기�때문임이�분명하다.

=====2:4� � 가만히�들어온�거짓� 형제�까닭이라� � - '거짓� � 형제'의� � 헬라어� � '프슈다델푸스'(* -

� )는� '프슈데스'(*� � � � � � � � � � � � )와� � '아델포스'(*� � � � � )의� 합성어이다.'프슈데스'는� '

거짓� 사도'(고후� 11:13),'거짓� 선지자'(벧후� 2:1)등에서� 처럼� '거짓'이라는� 의미를� 가진� 접두사로� 사용

되었다.� � 바울은�본절에서� '파레이사크투스'(*� � � � � � � � � � � � � � � � � � � � � � � � � � ,'가만히�들어온')와� 함께� 이�

말을� 사용하여은밀하고� 은근하게� 복음을� 훼손시키는� 거짓� 교사들의� 교활한�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한편�

바울이� 1:11에서� 유대주의자들에게� 미혹된� 갈라디아� 교인들을� � '형제'라고� 부른� 것은� 그들을� 향한� 사

랑을� 표현하지만,� 본절에서� 유대주의자들을� 향하여� '거짓� 형제'라고한� 것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공동체� 속에� 그들이� 설� 자리가� 없음을� 나타낸다.그러나� 그들이� 누구인가하는� � 문제는� 쉽지� 않다.� 그들

은� 최소한� 내부에서� 믿음을� 배반한사도들이나� 성도들은� 아닐� 것이다(Lenski).아마� '거짓� 형제'는� (1)�

예루살렘� 공의회에서�이방�그리스도인도�할례를� 받아야�할� 것을� 주장하며� 모세�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

한자들이거나� (2)� 공의회의� 결과가� 갈라디아와� 안디옥� 교회에� 소개되었다(행� 15:30).� 그럼에도� 불구하

고�갈라디아에는�계속해서�교인들을�미혹하는�유대주의자들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 그리스도를� � 믿음

으로� 자유케� 된� 성도들을� 다시� 율법� 아래로� 끌어들이려고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신자인� 것처럼� 가장하

여� 열심은�있으나� 실제로는� 복음을� � 거부하고� 교회를�파괴하려고�하였다(고후� 11:26;벧후� 2:1).� � 이러

한� 갈라디아� 교회의� 형편가운데서� � 디도가� 할례� 받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은� 자유� 얻은� 자로� 하여금�

자유를�잃지� 않도록�하려는�것이다.

=====2:5� 일시라도�복종치�아니하였으니� -� 복종을�요구하던�자는�디도에게�할례를 요구했던무

리들로� 국한시켜� 이해하기보다는� 더욱� 광범위한� 의미에서� 유대주의화를� 꾀하던� � '거짓� 형제'들이� 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사도� 바울� 일행은� 위의� 할례를� � 주장하는자들이나� 율법을� 강조하는� 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어떤� 서방� � 사본들에서는� '호이스우데'(*� � � � � � � � � � � � � � � � ,� '...한� 자

들에게� 조금도...않다')가� � 생략되어� 본� 구절이� '잠시동안만� 복종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사본에�

의하면� 바울이� 잠시� 동안만� 평화를� 위하여� 타협할� 수도� 있었던�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베자(Bezae)� �

사본을� 제외한� 모든� 언셜(Uncial)� 사본과� 오래된� 파피루스� 사본(P46),� 그리고� 고대� 헬라교부의� 번역에

서� '호이스�우데'는� 생략되어� 있지� 않다.� 또한� 본장의�문맥상� 바울이�거짓� 형제들과� 조금이라도� 타협한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지금까지� 달려온� 길이� �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할례는�초대� 교회의�최대� � 논쟁이며�또한� 복음에�대한� 최대의�도전(挑戰)이었다.� 이� 논쟁� 앞에서�바울이� 진리를� 양보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Lenski).� � � 복음의� 진리� -� 이에� 해당하는� 헬

라어� '헤� 알레데이아�투� 유앙겔리우'(* � � )는� 본절과� 14절

에만�나오는� 것으로� � '결함이� 전혀� 없는� 복음'(Lightfoot)� 또는� '진리가� 담겨� 있고� 진리에� � 속해� � 있는� �

복음'(Burton)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복음을� 들어� 언급하는� 것은� 디도의� � 할례� 문제는�

한� 개인의� 구원� 문제에만�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 진리� � 문제에직결된다는� 것을� 보여� 준

다.

=====2:6� � 유명하다는�이들�중에� -� 바울은�세� 번에�걸쳐� '호이�도쿤데스'(* ,'유력한� 자들')를� 사

용하여(2절)� 베드로,� 요한,야고보� 등� 예루살렘의� 사도를지칭하였다(9절).� � 이러한� 호칭� 후에� 곧바로� 하

나님은�외모로�취하지� 않는다고�언급하는� 것을�보면� 바울이�이� 호칭을�풍자적�의미로�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Cole).� � � 내게�더하여�준� 것이�없고� -� 헬라어�본문에�나와�있는� 후치사� � '가르'(*� � � � � � � )는선

행� 구절을� 보다� 충분하게� 설명해� 주는� 삽입구가� 시작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 따라서본� 구절은� 선행� 구

절에서� 제시된� '외모를� 취하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 때문에� 어떤� 유명한� 자들일지라도�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복음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과� 동시에� �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것과� 전혀�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것

이�아니라는�것을�증명하고자�했다.

=====2:7� � 내가� 무할례자에게...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 여기서� '할례자'와�

'무할례자'는� 구체적인�어떤�사람들을�가리키는�것이�아니라�일반적인�의미로사용되어�유대인과�이방인

을�가리킨다(롬� 4:9;엡� 2:11� 등).� 유대주의자들은 베드로와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서로� 다른� 것이�

있다고� 주장한� 것� 같다(Lenski).� 그러나� 바울은사역상� 서로� 다른� 책임이� 있을� 뿐� 어디까지나� 복음의�

내용은� � 동일(同一)하다는� � 것을강조하고� 있다.� 한편� 바울이� 할례자에게� 복음� 전하는� 자로� 열� 두� 제자�가운데� � 베드로를� 대표로� 내세운�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 있다.� (1)� � 베드로가� �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을� 대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Lenski,� Huxtable).� 그러나� 전자는� 타당하지� 않다.� 그� 이

유는�베드로가�이방인� 고넬료의�가정에�복음을�전했을� 뿐만� 아니라� � 가이사랴와� 다른�이방인들에게� 복

음을�전했으며�또한�그� 자신이�이방인들에게�복음을�전하는�것이� 하나님의�뜻임을�깨닫게�되었기�때문

이다(행� 15:7).� 바울� 역시� � 이방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들에게도� � 복음을� � 전한바� 있다(행� 23:11).� 그는� 또한�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이방인에게까지� � 복음을� �

전하는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행� 26:20ff.)보아,� 본절에서� 바울이� 의도하는� 바는�

이방인의� 사도로�부르심을�받는�자신의�특수성을�강조하는�것이�아니라� � 베드로와�자신이�전파하는� 복

음의�동질성을�강조하는�것이다.

=====2:8� � 그를� 할례자의�사도로�삼으신�이� -� '사도로'의� 헬라어� '에이스�아포스톨렌'(* � � �

� � � � )은� 베드로의�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명확하게� 인정하는� 표현이다.� 바울은� 베드로보다� 가문이나� 학

문에서� 뛰어난� 자로소�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 있었으나� 자신을� 베드로보다� 우월한자로� 여기지� 않는

다.� 여기에는� 바울의� 겸손함이� 포함되어�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바울이� 이와� 같이� 겸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사도로세우신� 이가� 동일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바울은� 본절에서� 자신을� 사도로� 세우신� �

하나님과� 베드로를� 사도로� 세우신� 하나님을� 동일시함으로� 자신의� 사도됨을� 증거하고� � 있다.� 두� 사도�

중에�하나는�유대인을�중심으로,� 또� 하나는�이방인을�중심으로 사역했으나� 그들의� 사역의� 내용은� 같은�

것이었으며� 둘� 다� 동일한� 섭리와� � 은혜에� � 의하여(고전15:9,10)사도로� 세우심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서�맺어지는�열매도 무할례자이거나�할례자이거나�동일한�것이었다.

=====2:9� � 기둥같이� 여기는� -� '기둥'(*� � � � � � � � � � � � ,스튈로이)이라는� 표현은� 중요성을� 강조하는� � 말

이다.� 탈무드에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이스라엘의� 세� '기둥'(*� � � � ,암무딤)이라� 하였고� 이스라엘

의� 계약� 공동체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그들� 위에� 세워졌다고� 한다(Longenecker).� 이러한� 개념을� 사용

하여� 바울은�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을'기둥'에� 비유한� 것� 같다.실제로�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어가

는� 권위와� 영향력을가진� 지도자들이었다.� 바울은� 유대주의� 자들을� 향해� 의도적으로� 히브리적� 개념을�

도입해� 논리를� 펴나가면서� 세� 사도가� 갖는� 비중(比重)을� 강조하였다.� � � �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 -� 이�세� 사람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공관� 복음서에� � 나오는예수님의� 제자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

라,�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지도자적� � 입장에� 서� 있었던� 사실에� 역점을� 둔� 것이다(행� 15장).� 먼저� 야고

보에 대해� � 살펴보기로한다.� 바울은� 1:19에서� '주의� 형제� 야고보'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하였으나,�

본절에서는그냥� '야고보'라고� 칭하고� 있다.� 이는� 본장의� 전체� 맥락이� 예루살렘� 공의회를� � 언급하고� 있

기� 때문이다.� 당시에� 야고보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의장이었다(1:19� 주석� � 참조).바울이� 다른� 두� 사도

보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의� 이름을� 먼저� 기록한� 것은� 우연의� 일치라기보다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의장으로서의� 야고보를설명하기� 위함인� 것� 같다(Boice).� 그러나� 다른� 사도

들의� 이름이� 뒤에� � 나왔다고� � 해서예루살렘� 교회� 속에서� 이들의� 서열이� 정해져� 있었다고� 볼� 수는� 없

다.� 그� 다음으로,� 바울은�모두� 아홉� 번에� 결쳐� 베드로를� � 언급하는데� � 일곱번은� � '게바'라고� � 불렀으며

(14절;1:18;고전� 1:12;3:22;9:5;15:5)� 두� 번은� '베드로'로� 칭하였다(7,8절).� 특히� 유대주의자들과�논의

할�때� 게바라는�이름을�사용함으로써�베드로와�자신의�관계를 오해없이설명하려� 한� 것� 같다

(Huxtable).� 끝으로,� 요한이�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하였다는� � 기록은� 성경에서� 본절에만� 나타난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다른� 여러� 곳에서� 함께� 등장하며� 또한� 사역하였다(행� 3:1;4:13;8:14� 등)� � �

교제의�악수를�하였으니� -� 이에� 해당하는�헬라어� '덱시아스�에도칸� � 코이노니아스'(*

� � � � )는� '교제의� 오른손을� 주었다'라고� 직역된다.� 이는� 고대� 사회

에서�우정을�돈독하게�하고�동의한다는�의사 표시였다(Longenecker).� 본절에� 언급된� 다섯� 사람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었음이� 분명하다.즉� 야고보와� 게바,� 요한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였

고,�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을� 위한� 복음� 전파에� 주력하였다.� 이� 두� 그룹은� 서로� 독자적이면서도� 하나

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사역에� 협력하였다(행� 15:25,26).� 이들은� 서로의� 손을� � 잡았다는� � 것은사적(私的)인� 장소에서� 서로의� 손을� 잡았다는� 의미보다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공식� � 석상에서� 결의한� 사항을�실행할�때에� 함께�협력하기�위하여�공식적으로� � 손을 잡았다는것을�의미한다(Lenski).

=====2:10� 가난한� 자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에� '톤� 프토콘'(*� � � � � � � � � � � � � � � � � � � � � )은� � '가난'을�

뜻하는� 일상� 용어로서� 돈이나� 재산이나� 생활� 수단이� 거의� 없거나� � 전혀� � 없다는뜻으로� 쓰인� 단어이다.�

신약에서� 이� 말은� '거지'에게도� 사용되었으며� (눅� 16:20)� 주로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자들에게� 사

용되었다(마� 19:21;눅� 19:8;요� 13:29).� 당시� 가난한� 자들은� 복음� 전파의� 주요� 대상이었다(마� 11:5).�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 부요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가난한� 자가� 되셨으며�자신을�찾아온�부자들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마� 19:21)� 자신과� 제자들이� � 함

께� 거하는� 공동체� 속에�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준비된� 공동궤를� � 가지고� � 있었다(요13:29).� 사도행

전에� 와서는� '엔데에스'(*� � � � � � � � � � � � )라는� 말이� 등장하는데(행� 4:34)이는� 초대� 교회� 안의� '가난한�

자','궁핍한�자'로서� 다른�사람들이�재산을�팔아�나누어준�덕분에�살아가는�자들을�뜻한다.� 초대� 교회에�

있어서�가난한�자들에�대한� 구제� � 문제는�할례와�같이� 논쟁의�대상이�아니라�당연히�행하여야�되는�임

무로� 인식되어� � 있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임무는� 공의회의� 결정에� 의하여� 수립된� 것이� 아니라� 구약

에서(요� 13:29),� 또한� 초대� 교회의�출발부터�교회가�감당했던�사명이다(행� 24:17).� � � �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 바울은� 믿음과� 구제� 문제를� 믿음과� 할례� 문제처럼� � 대립시키지� 않는다.� 바울의� 힘써� 행하

는� 구제는� 남에게� 보이고자� 하는� 외식적인� 것이� 아니다.� 본절의� 구제가� 구체적으로� 언제인지� 알� 수는�

없으나� 바울의� 생애� 가운데� 구제의사건은� 여러� 번� 등장한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가� 모

은� 구제� 헌금을� � 가지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으며(행� 11:29,30)� 여러� 서신서에서� 구제에� 대하여� 강조하

였다(행� 24;17;롬� 15:25-27;고후� 8:1-5).� 또한� � 그는� � 구제에� � 대한� � 교훈을� � 남겼으며(롬12:13;엡

4:28;딤전� 6:18)�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에� 게으르지� 말고� 그� 일을� 위하여� � 정직하게� 살� 것을� 요구한

다(엡� 4:28).� 이러한� 삶의� 요구는� 선행이� 신앙의� 살아� 있는� � 증거요(약� � 2:14-17)� � 신앙� � 고백의� � 진

실성을� � 측정하는� � 기준이� � 되기� � 때문이다(요일3:17,18)

=====2:11� �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 여기서� 베드로의� 행위가� 명백하게� 잘못된�것으로� 드러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 더욱� 뚜렷해진다.� (1)'면책하였노라'의� 헬라어� � '안테스텐'(*� � � � � � � � � � � � � � � �

)이� 문자적으로� '대항하다',� '저항하다'� 혹은� '반발하다'라는의미로� 베드로의� 행위가� '복음의� 진리'를� 훼

손(毁損)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 있었음을� 시사한다.� (2)� '안텐스텐'의� 시제가� 부정과거로서� 바울이�베드로를�성공적으로� � 책망했으며�베드로는�바울의�책망에�대항하지� � 못하고� � 굴복했다는� � 것을� � 시사

해� � 준다(Lenski).� (3)� 더욱이� 바울은�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아니고� 공개적으로� 면책하며� � 저지했다는�

사실로�베드로의�잘못의�심각성이�더해간다(Hendriksen).� 이와� 같이� 바울은�예루살렘에서와는�달리�안

디옥에서는� 베드로보다� 높은� 위치에� 서서� 성도들을� 대하는� � 것같이� 느껴지는데,� 이는� 베드로의� 잘못이�

너무도�명백하여�견책거리가� � 되기 때문이다(Robertson).따라서� 우리는�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1)� 바울이,� 신자라면누구나�소유하고� 있는� 완전한�동등권을�항상�공격하며�반대하는�유대인들의�

좁고� 치우쳐� 있는� 유대� 중심적� 신앙관에� 대항하고� 있다는� 사실이며(Huxtable)� (2)� 예루살렘� � 교회의�

그� 어떠한� 권세자도�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저지를� 수� 있으며� 나아가� 그것에� 대하여� 책망받을� 수도� 있

다는�점이다(Cole).

=====2:12�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 본� 구절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 � 행하던식탁�

교제나� 성찬을� 가리키는� 것같다.� 이것이� 정식� 예배였는지� 아니면� 비공식적인� � 그리스도인의� 모임이었

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본절에서� 초대교회� 당시�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방� 출신� 그리스도인과

의� 식사를� 꺼린� 사실이� 나와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1)� 유대인들은� � 레� 11장에�

있는� 정함과� 부정함에� � 관한� � 규례를철저히� 지켜왔고�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준수하려� 하였다(민� 25

장,� 31장;단 1:8;토비트� 1:1-12;마카베오상� 1:62).�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도� 그� 관습에

서�벗어나지못했다.� 게다가�이방인들이�먹는�음식� 중에는�레� 11장의�정결(精潔)� 규례에 위배되는것

이� 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따라서�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방� 출신의� 그리스도인들과� 식사

를� 함께� 하지� 않으려� 했다.� (2)�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들을� 부연하고설명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제한�

규정들� 때문이다.� 이러한� 규정들은� 그� 종류가� � 대단히� 많고� 다양했는데� 초대교회� 당시에는� 하나님의�

율법� 못지않게� 존중된� � 것으로� � 보인다.� 그� 실례로� 장로들의� 유전에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규정이� � 있는데,� 이는� 단순히� 위생상� 이유� 때문에서가� 아니고� 이방� 사람들과� 접촉하여� 부정하

게� 된손으로� 음식을� 먹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마� 15;1-20;막� � 7:1-23).� � 위와같은� 이유

로� 오랫동안� 유대인들의� 의식� 속에는� 이방인에� 대한� � 배타심이� � 굳어져왔다.이러한� 것은� 사마리아인도�

인식하고� 있는� 일반적인� 사실이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할� 때� 그� 여인은� '당신

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대답한다(요� 4:7-9).� 따라

서� 유대인이�이방인과� 함께식사를�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을�뿐� 아니라� 대단히�죄악된�행동으

로� � 간주되기까지� 했다(Hendriksen).�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약의� 율법이완성

되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함께� 식사를� 하는것은� 실제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 것이며�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행동이며� 삶이다.�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러한� � 사실을� 인식하고� 늘어나는� 이방� 그리스도인에� 대해� 몇가

지� 제한� 사항을� � 제시하고� � 다른어떠한� 율법의� 행위로도� 짐을� 지우지� 않는다는� 결의를� 한� 바� 있다(행�

15:14-21).� � � 저희가� 오매...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 베드로가� 이방� 그리스도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사람이� 오자� 이방인들과� � 식사를� 하지� 않았다.� 이러

한�그의�행동의�동기는�예루살렘에서의�자신의�위치에 부정적인영향을� 끼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Hendriksen).� 또한�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 함께음식을� 먹는� 것은� 사랑이나� 자기� 확신에� 의해� 나

온� 행동이�아니라�거짓과�위선의�행동이었기�때문에�바울은�베드로의�외식적인�행동를�책망했다.

=====2:13� � 남은� 유대인들도...외식하므로� -� 주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 중� 한� 사람이요� � 공적인� 위

치에� 있었던� 베드로가� 한� 외식은�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복음의� 자유가� 첨예(尖銳)하게� 대립되고� 있는�초대교회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베드로의� 이러한� 실수는� 단순히� 개인적인� 외식으로만� 그치는� 것

이� 아니라� (1)� 다른� 사람들� 심지어� 바나바같은� 지도자까지도� 외식적인�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근거가�

되며� (2)� 예루살렘� � 공의회(A.D.49)의� 율법� 무용론에� 대한� 결정을� 무효화시키는� 것이고� (3)� 결과적으

로는� � 율법주의에굴복한다는� 위미를� 지닌다.� 여기서� 우리는� 공적인� 위치에� 있는� 지도자의� 행동의� � 중

요성과� 함께� 한� 사람의� 외식적인� 행동은� 중요성과� 함께� 한� 사람의� 외식적인� 행동은� 다름사람들에게까

지도�영향을�끼친다는�사실을�분명히�알�수�있다(막� 7:1-23).

=====2:14� � 모든� 자� 앞에서� -� 바울은� 베드로가� 저지른� 실수에� 대해� 공개적으로� � 책망을� � 했다.이는�

(1)� 베드로뿐만� 아니라� 여러�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잘못을� � 했으며(2)� 공적인� 잘못은� 사

적으로� 고칠� 수� 없기� 때문이고(Lenski)� (3)� 그러한� 실수를� � 베드로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 범하지� � 않게� � 하기 위함이다(Hendriksen).

=====2: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 본절에서� 바울이� '본래� 유대인'임을� 밝히는� � 것은� � 그도� 태어

나면서부터�유대인의�종교적� 특권을�지녔음을�보여주어�다른� � 유대인들로� � 하여금�자신에�대한� 반감을�

줄이게� 하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Cole).� � �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 이방인들에게� '죄인'(*� � � � � � � � � �

� � � � � � � � � � ,� � 하마르톨로이)이라고� 말하는� 것은� 윤리적인� 판단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유대인의� 독선에서� �

나오는� 이방인에� 대한� 통상적인� 언급이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 특권을� 누리고�

있었지만� 본문에서� 바울은� 그� 특권을� 자랑하거나� 또는� 이방인들을� 조소하기� 위해� '죄인'이란� 말을� 사

용한� 것이� 아니다.� 비록� 바울이� 유대교� 내의� 용어들을� 사용하여� '이방� 죄인'으로� 표현하였지만� 이� 말�

속에는� 매우� 반어적(反語的)인� 의미가� � 내포되어� 있다.� 즉,� 당시� 유대인들에� 의해� 죄인으로� 간주된� 이방인들에게�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있었던�사실은� 스스로� 선민의식에�사로잡혀�이방인들을� 하찮게� 여기

며� 조금도� � 가까이� 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독선적이고� 교만한� 태도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이다

(Cole).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 본절에는� 법정� 용어인� '디카이오스'(*� � � � � � � � � � � � � � � ,'의로

운')에서� 파생된� 말이� 세� 번� 반복되고� 있다.� '의'는� 하나님의� 속성에� 속하는� � 것이므로� 그� 근원은� 인간

에게�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있다.� 본절에서도� 이� 용어가� 수동태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인간� 스스로

의� 능동적인�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의

롭다고� 선언한다'는� 뜻이지� '의롭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의로움에� 이를� 수가� 없다(롬� 3:20).� 그러나� 의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 그

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길을� 열어� 주셨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 인정하시는� 것은� 인간

의� 윤리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적인� 선언이며� 신적� � 표준에서� 발생하는� 하나님의� 행위이

다.� � �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 본서에서� 처음� 나타나는� '율법'에� 해당하는� � 헬라어� '노모스

'(*� � � � � � � � � � )는� 바울� 서신� 중� 특히� 로마서와� 본서에� � 많이� � 등장하는데� '의'(*� � � � � � � � � � � � � � � � � � � �

� ,� 디카이오쉬네),� '행위'(*� � � � � � � � � � ,� 에르곤)� 등과� � 함께� 복음의� 핵심을� 설명할� 때마다� '믿음'(*� � � � �

� � � � � � � � � � ,� 파스티스)과� 관련되는� �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본절에서� 관사없이� 사용된� '노모스'는� 모세

의� 율법을� 지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선한� 행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고자� 하는� 인간들이� '자기�

의'를� 위해� 구축한� 규범들을�가리킨다.� 그것은� 유대주의�사회가� 만들어낸� � 거짓된� � 규범들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규범으로� 하나님의� 의를� 소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 �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

로� -� 인간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의롭다고� 선언하시게� 되는� 수단일뿐� 절대적인� 자격이나� 요건이�

되지� 못한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자들을�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이

다(롬� 5:18,19).� 죄악된�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만이� 인간들을� 하나님� 앞에서� �

의롭다� 함을� 얻게� 할� 수� 있으며� 이를� 신뢰하는� 것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며� 이러한� � 믿음은� 생

명력이� 있어�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역동적(力動的)인� 삶을� 살도록�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유대주의자들은�그� 믿음에다가�할례와� � 같은� � 율법적이요� 외적인�조건을� 더� 하려고�하였다.� � � 율

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 -� � 본절은� � 시� � 143:2(LXX,� 142:2)의� 인용이며�

아울러� 롬� 3:20� 내용과� 병행을� 이룬다.� 아래의�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편의� '파스존'(*� � � � � � � � � � �

� � ,� '모든� 생명')� 대신에�로마서에서는� '파사� 사륵스'(*� � � � � � � � � � � � � � � � � ,� '모든� 육체')를� 사용하였고,�

로마서와� 본절에서는� 시편에� 없는� '율법의� 행위'를� 부가(附加)시키고� 있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결단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2:17� 그리스도� 안에서� -� 이� 말은� 바울� 신학에� 있어서� 핵심적인� 용어로서� 그리스도와� � 성도� 간

에� 누리는� 친밀한� 개인적� 교제를� 시사한다.� 그가� 이방인에� 대한� 복음� 전파� � 사역을� 강조하는� 것도� 자

신이�그리스도�안에�있기� 때문이며,� 예수에�대한� � 지식과� � 믿음을�전파하는�것과�미래� 세계에� 대한� 거

룩한� 소망을� 가지는� 것도� 그가� 그리스도안에� �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유일한� 신앙

의� 대상이며� 동시에� 전부라고� 고백하고� 있다.� 특히� � 바울� � 신학에서� � '그리스도� � 안에서'라는� � 표현은� �

'아담� � 안에서'(롬� 5:12-19)라고� 표현과�대조를� 이룬다.� 아담은�죄와� 사망의�옛사람을�대표하지만,� � 그

리스도는� 자유와� 생명의� 새� 사람을� 대표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표현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실현하신� 그리스도와� 실존적으로� 연합하여(롬� 8:39;14:7;빌� 2:1)� � 구원받은�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

� 죄인으로� 나타나면� -� 본절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견해가� 있다.� (1)� 바울이� � 유대주의자들의� 입장에서�

이� 말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Hendriksen).� 다시� 말해서� � 유대주의자들이� 의롭게� 되기� 위하여�

예수를� 믿음으로� 율법을� 폐기하는� 죄인이� �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할� 경우에� 대하여� 그들을� � 위로하고� �

회심을� � 독려하는� � 문구로� � 해석한다(Cole).� 이� 견해에� 따르면,� 유대주의자들이� 예수를� 믿고� 율법을�

폐기했다면� 그들은� 스스로� 이방인과� 같이� 율법을� 도외시하는� 죄인이� 된� 것이고� 그것은� 모세� 율법보다� �

저급한� 수단의� 삶으로� 여겨질� 것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그리스도마저� '죄를� 위한� 봉사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하마르티아스� 디아코노스)로� 전락시키는� �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과� 같다.�

(2)� 바울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있다는� 견해이다.� 즉� �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았지만�

여전히� 자기속에� 죄악의� 본성이� 남아�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도� 죄악된� 옛� 사람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롬� 7:24)라

고� 고백한� 바� 있다.� 본문에서� 바울은� 오히려� 유대주의자들�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한다.� 이는� 유

대주의자들이� 가진� 의식법과� 율법주의적� 관점에서는� 언제나� 죄인인� 것을� � 시인하는� 역설이다(R.E.�

Howard).� 그가� 유대주의자들의� 관점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 시인한다고� 해도� 더� 이상� 두렵지� 않은� 것

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을� 정죄할� 수� � 있는� �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8:1).� 본절의� 해석은� 자신이� 계속해서� 죄인으로�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는�전체의�맥락과� � 연결시킬�때� 후자가�보다� 타당할�것� 같다.

=====2:18�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며� -� 본문은� 다분히� 베드로가� 유대주의자들을� 두려워하여� 그

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로부터� 떠나� 다시� 유대인의� 옛� 습관으로� 돌아간� �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다

(2:11).� 바울은� 다메섹의� 체험(행� 9:1-7)이후에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아니한� 일관된� 삶을� 살았음

을� 고백한다.� 또한� 율법의� 공로를� 다시� 세우고자� 하는� 의도가� 결단코� 없음을� 밝힌다.� � � 범법한� 자로�

만드는�것이라� -� '범법한�자'의� 헬라어� '파라바텐'(*� � � � � � � � � � � � � � � � � � )은� 하나님과의�관계에서�그�의

미가� 정의되는� '하마르톨로스'(*� � � � � � � � � � � � � � � � � � � � ,� '죄인')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파라바텐'은� �

문자적으로� � '배신자','이단자'를� 뜻하며�본절자서는�바울�자신이�다시� 율법을�세우는�것은� 하나님의�사

랑에�대한� � 배신(背信)� 행위가�된다는�점을� 말해준다.

=====2:19� � 내가� 율법으로�말미암아� 율법을�향하여�죽었나니� -� 바울은� '나'라는� 1인칭� � 대명사를� 사

용함으로� 자신에게� 있었던� 실제적인� 경험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을� 향하여� '죽는다'는� 표현은� 모든� 관

계가� 단절된� 것을� 의미하며� 더이상�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었나니'의� 헬라어�

'아폐다논'(*� � � � � � � � � � � � � � � � )은� 다음� 절에� � 나오는�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 � � � � � � � � � � � � � � �

� � � � � � � � � ,� 쉬네스타우로마이)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들은� 둘� 다� 단회적인� 것으로서� 다

시� 율법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다시� 십자가에� 못박힐� 수� 없는� 옛사람의� 죽음을� � 의미한다.� � 역설적으

로�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는� 것은� '율법으로부터� 벗어나� 살아났다'는� 표현이다.� � 로마서에서는�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다'고� 표현했는데(롬� 7:4),� 이� 두� 표현은� 모두� � 단순히� 사변적인� 표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경험한� 것을� � 고백한� 말이다.� 율법의� 행위로는� 죄악으로부터� 밀

려오는� 좌절감과� 실패를� � 극복할� � 수가� 없다.� 오히려� 율법은� 인간� 속에� 있는� 죄를� 더욱� 죄되게� 만든

다.� 율법은� � 단지� � 죄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믿음과� 새� 생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도록�하는� 기능을�감당하게�된� 것이다.

=====2:20� �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 본� 구절은� 본서의� 여러� 곳에� 거듭� � 언급되는�

내용으로(1:4;3:1,13;6:12,14)�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초대� 교회의� 가르침의� � 초점이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본절은� 예수님을� 핍박했던�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 변화와� 율법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신

학적인� 논증을� 나타낸다.� 실로� 그토록� 교만하고� 자존심� 강한�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예수와� �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유대교에� 철저했던� 그에게� 있어� 종래의�

모든� 삶과� 사랑에� � 대한� 부정이요� 새로운� 삶을� 향해� 전환(轉換)을� 이루는� 실로� 엄청난� 변화였다.� 이�변화된� 삶은� 그리스도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지고� 고난� 가운데서도� 자기를� 부인하며� � 그리스도를� 따르

는� 제자의� 삶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이후에� 그가� 지고� 가는� �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고통의�

삶이� 아니라�오히려�영광과� � 승리의� � 삶이었다(W.G.Coltman).� 한편� '함께� 십자가에�못박혔나니'에� 해

당하는� 헬라어� '쉬네스타우로마이'(*� � � � � � � � � � � � � � � � � � � � � � � � � � � )는� 성도가�그의� 십자가를�짐으로써�

그리스도의� � 죽음에� � 영적으로� 동참하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본서에� 처음� 등장하는� '십자가'는� 율법

의�요구를�완성하는�의미로�나타난다.� 그리스도의�죽음은�율법의�요구를�이루려�함이며(롬� 8:4),� � 또한�

실존적으로� 구약의� 모든� 율법적� 요구들을� 완성한� 역사적� 사건이다.� 바울은� �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이제까지� 자기가� 메고� 있던� 율법의� 요구들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었다.� � �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 이� 짧은� 구절� 안에� � 그리스도의� � 죽음과� 부활이� 모두� 언급되고� 있다.� 바

울은� 십자가� 위에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시고�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

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롬� 6:4).� 그리스도와� 바울의� 완전한� 연합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는� 것이

며� 그� � 결과� � 그리스도의�풍성한� 열매를�맺는� 것이다.� 옛� 사람의�자기� 교만과�바리새인의�자존심을�버

리는� 것이� 잠시� 동안� 자신에게� 패배감과�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 안에� � 사심으로� 인하

여� 얻은� 자유와� 평화는� 그� 고통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었다(롬� 8:18).� � � 이제� 내가� 육체� 가운

데� 사는� 것은� -� 본절에는� 세� 가지� 변화가� 나타난다.� (1)� � '나'� 대신에� '그리스도',(2)� '율법'� 대신에� '믿

음',(3)� 과거의� '옛� � 사람'� � 대신에� � 현재의� '새� 사람'으로의� 변화가�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

울로� 하여금� � 모든� � 변화를� 경험하게� 했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율법�

아래서� � 종노릇하는� 것으로부터�해방되어�의와� 사랑의� 종이� 되었으며(롬� 6:19),� 비록� 제한된� � 육체� 가

운데� 살지만� 더이상�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으며,� 성령을� 좇는� 삶을� 살게� � 되었다(롬� 8:4).� � � 하나

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 � 안에서'사는� � 것이다.� 이는� 과거에�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고� 애썼던� 삶과는� � 판이하게� � 다르다.� 예수께서는� '내� 말이� 너희� 안에'(요�

15:7)라고� 말씀하셨지만,� 바울은� '아들을� � 믿는� 믿음안에'라고� 말한다.� 이는� 주께서� 우리� 안에� 계실때

에는�말씀으로�존재하시며�우리가�그리스도안에�있다는�것은� 믿음으로�그를�따른다는�의미이다.

=====2:21� 하나님의� 은혜�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바울� 자신이� 그� 죽으심과� � 부활에�

참여하게� 된� 신비적� 연합의� 사건이� '하나님의� 은혜'로� 묘사되고� 있다.� � '은혜'의� 헬라어� '카린'(*� � � � � � �

� � � )은� '하나님이�주시는� 값없는�선물'이다.� 하나님께서� � 아들을�십자가에서�죽게�하신� 것과� 우리로�아

들을� 믿게� 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 �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 '헛되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레안'(*� � � � � � � � � � � � � )은� '연고없이','이유나� 목적이�없이','불필요하게'등의�의미를�

지닌다.� 갈라디아�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이� 다시� 율법으로� 도아갈� 것을� 주장하는� 것은� 단순히� 율법에� 대

한� 애착심과� 관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결정

적인� 잘못이다.�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옛� 생활에� 대한� 단순한� 향수(鄕愁)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다시�십자가에�못박고자�하는�범죄이며�하나님의� � 은혜를�저버리는�배신�행위이다.� � � 갈라디아서�제� 3장

=====3:1� � 어리석도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노에토이'(*� � � � � � � � � � � � � � )는� � 돌이킬� � 수없는�

죄에� 대해� 책망하는�것이라기보다는�죄를� 분별할�수� 있는� 능력이�있으면서도� � 그능력을�사용하지�않는�

것을� 질책하는� 것이다(롬� 1:14;딤전� 6:9;딛� 3:3).� 본절과� 3절에서� 두� 번에� 걸쳐� 사용되는� 이� 단어는�

매우� 도전적이고� 통렬한� 어투로� 진술되고� � 있다.바울은� 앞으로� 전개될� 결론에� 대하여� 보다� 준엄하고�

냉정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 �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밝히� 보이거늘� -� '밝히� 보이거늘'의� 헬라어� '

프로에그라페'(*� � � � � � � � � � � � � � � � � � )는� '공적� 선언으로� 발표하다'� '미리� 기록하다'� 등의� � 뜻으로부정�

관계형이다.� 이는� 이미� 과거에� 편지를� 통해서나� 직접� 방문하여� 복음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음을� 보여

준다.� 바울은� 자신이� 처음� 갈라디아를� 방문했을� 때� 선포하였던� 복음의� 진리들을� 상기시키면서� 그때에�

그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선명하게� � 전파하였음을강조한다.� 그� 의미는� 너무나� 선명하여� 마치� 공공� 계

시판이나� 그림과� 같이� 육안으로� 볼수� 있게끔� 제시했다는� 뜻이다.� � 특히� � 바울은� � 본절에서� � '십자가에� �

못박히신� � 것'(* � � � � ,에스타우로메노스)를� 분사� 완료형으로� 기록하고� 있는데그� 의

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사건이� 과거에�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밝히� � 보

인다'고� 하는� 것은� 그� 십자가의� 공효(功效)가� 여전히� 지속적으로적용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전�2:2,10).� 그� 효과의� 지속성은� 갈라디아� 교인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성도들을� 포함하여� 복음의� � 핵심을�

듣고� 믿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작용한다.� � � 누가� 너희를�꾀더냐� -� '꾀더냐'의� � 헬라어� � '

에바스카넨'(*� � � � � � � � � � � � � � � � � � � )은'거짓된� 칭찬이나� 음흉한� 눈으로� 악을� 가져오다'� 또는� '악한� 술

책으로� � 타락시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로서� 신약에서는� 본절에서만� 사용되었다.� 바울은� 지금� �

갈라디아� 교인들의�마음을�어지럽게�한� 거짓� 교사들이� 누구냐하는�것을�문제삼고�있는� � 것이아니라� 선

명한� 복음의� 핵심을� 잃어버릴� 수�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다.� 한편� � '에바스카넨'은� '시기하다'는� 뜻으

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즉� 유대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 있는자유를� 부러워하여� '너희를� 시기� 하느냐'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전체적인� 문맥이� 의도하는� 목적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 같다(Cole).

=====3:2�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 '율법'의� 헬라어� '노모스'(*� � � � � � � � � � )는� � 구원에� 이

르는� 수단으로서의� '믿음'과� 상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율법은� �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

생(24절)으로서의� 역할을� 할� 뿐이지만� 갈라디아의� 율법주의자들은� 오히려�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율법의� 행위를� 강조하였다.� 이에� 대하여� � 바울은�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

음으로냐'라는� 양자� 택일의� � 문제를� 던진다.� 이것은� 곧� 율법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들음이� 요구된다는�

점을� 암시한다.여기서� '들음'은�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반응이다.� 이와� 관련하여� � 바울은�

로마서에서�믿음은�들음에서�난다는�점을� 강조하였다(롬� 10:14-17).� 또한�베드로는믿음이�들음에서�난

다는� 것을� 주장하며� 전파하는� � 자의� � 소명을� � 강조한� � 바� � 있다(행15:7).� '들음'은� 전파하는� 자와� 성

령의�사역으로�되어지는�것이기에�불완전한� � 인간이행하는�행함과�족히� 비교할�수� 없는� 은혜의�방편이

다.

=====3:3념으로� 등장한다.� '육체'(*� � � � � � � � ,사륵스)는� 본서에서� 크게� 두� 가지� 의미로� � 사용되었다.�

(1)� 할례를� 자랑으로�여기는� 자들이� 내어보이는� 인간의� 신체를� 가리킬� 때� � 사용되었으며(6:13)� (2)� 본

절에서와�같이�성령의�하시는�일과� 대조를 이루는 인간적인삶의� 방식을�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되었

다.� 본절에서� 바울이� 의도하는� 바는� 두번째� � 의미로서� 육적인� 자아(自我)를� 십자가에� 못박은� 성도가(2:20)� 어떻게� 다시� 그� 육체적� 자아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은� 성도는� 성숙한� 신앙의� 열매(5:22,� 23)를� 맺기� 위해� 부단히� 정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

며다시는�율법의�종으로�돌아갈�수� 없다(Howard).

=====3:4� � 괴로움을� -� 헬라어� '에파데테'(*� � � � � � � � � � � � � � )는� '파스코'의� 부정� 과거� 형태이며'파스코

'는� '선한� 또는� 악한� 경험을� 하다'라는� 뜻이다.� 개역� � 성경은� '악한� 경험을� 했다'는� 뜻으로� 번역하였으

나� NEB는� '영적인� 놀라운� 일'� � 즉� 영적인� 축복들을� � 의미하는'선한� � 경험'으로� � 번역하였다.'파스코'가�

성경에서� � 주로� � '고난당하다',� � '괴로움을받다'(마� � 27:19;막� � 9:12;눅� 22:15;24:46;고전� 12:26;빌�

1:29;히� 2:18;9:26)의� � 의미로�사용되나,� 본절에서�선한�영적�경험으로�사용되었다는�주장도�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 악한� 의미에서의� 괴로운� 경험과� 선한� 의미에서의� 영적� 경험이라� 해석하는� 두� 견해를� 각

각�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악한� 경험,� 즉� 박해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본문이� 바울과� 바나바가�

남갈라디아�지방에서�교회를� 세울� 때에� 받았던� 고난을(행13:50;14:2,� 5,� 19,� 22� 등)� 의미하는� 것이라

고� 받아들인다(Lenski,� Robertson).� 비록� 본절의박해가� 남갈라디아에서의� 박해(행� 14장)를� 의미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바울은� 지금� � 유대주의자들로부터� � 받았던� 모든� 박해를� 회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Cole).� (2)� 축복된� 영적� 경험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너희가� 그렇게� 풍성한� � 영적� 축복들을� 받았는데�

그것을헛되게� 하려느냐?'라는� 의미로� 본문을� 해석한다(Boice).이�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은� 갈라디아� 교

회가� 성령의� 풍성한� 능력을� 받았다고� 말하는� 5절과� 본문을� 연결시킨다.� 또한이들은� 갈라디아� 교회가�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는� 놀라운� 능력을� 체험했음에도� � 불구하고� 육체의� 소욕(所欲)을� 따라� 행하려느냐는� 3절과� 본문을� 연결시킨다.� 사실� 본절과� 긴밀하게� 연결된� � 문맥을� 살펴본다면� 하나님께서� � 성령� 주

심(3절),� 하나님께서� 갈라디아사람들� 가운데� 능력행하심(5절)등� 긍정적이고� 영적인� 경험으로� 번역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 � 과연� 헛되냐� -� 바울은� 여전히� '아니오� 헛되지� 않습니다'라는� 대답을� 기대

하고� 수사의문문을� 사용한다.� '헛되냐'의� 헬라어� '에이케'(*� � � � � � � � )는� '아주� 보잘것� 없는� � 무가치한�

것'을� � 의미하며� � 여기서는� � '믿음으로부터� � 벗어나� � 있는� � 상태'를� � 가리킨다(Lenski).� 진정� 그들이�

믿음에서� 떨어져나간�상태에� 거하게�된다면�그들을�부른신� � 하나님의�사역과�성령의�풍성한�은사와� 또

한�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가졌던� � 사랑과� 수고한� 모든� 열심이�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4:11).

=====3:5� 너희에게...행하시는� 이� -� 본절은� 형식상� 2절과� 유사하나� 그� 내용에� � 있어서는� � 몇가지의�

차이점을� 가진다.� (1)� 2절에서는� 성령을� 보내시는� 하나님이� 주체가� 되신다.� 즉2절에서는� 갈라디아� 교

인들이� 성령을� 받았던� 근거가� 무엇이냐에� 관심을� 두는� 반면,� 본절에서는� 하나님이� 어떠한� 기준에� 따라

서�성령을�주시느냐는�물음에�초점을 두고� � 있다.� (2)� 2절은� 갈라디아�교인들이�성령을� 받았던�

과거� 사실에� 역점을� 두어� 과거� � 시제로� 표현했지만� 본절은� 현재� 시제로� 되어� � 있다.� � 특히� � 하나님이� �

성령을� � '주시고'(* � � � � ,에피코레곤),� '능력을� 행하시는'(*� � � � � � � � � � � � � � ,에네르곤)�

두사역은� 현재� 분사를� 사용하고� 있다.이는� 과거에도� 사역하셨지만� 지금도� 사역하시는� 현재적인� 의미를�

보다�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바울은� 지속적(持續的)� 의미를� 나타내는두개의� 현재� 분사를� 사용하여�하나님께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처음� 회심할� 때� �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 역사하고� 계심을� 강조하고�

있다.한편� '능력'의� 헬라어� '뒤나메이스'(* � � � � � )는� '에네르게오'(*� � � � � � � � � � � � � � ,� '행하

시는')와� 연결되어� 현재적� 의미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만� 베풀어질� 수�

있다는� 제한성을� 보여준다.� � � � � 성령을� � 주시고� -� 바울� 서신에서는� 보통� '주다'라는� 의미로� '디도미'(*� �

� )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고전� 12:7;고후� 1:22).�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은� 일반적인용어인� '디도미'를�

사용하지� 않고� '에피코레곤'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21절에서� � '율법을� 주셨다'는� 의미로� 사용된� � '디

도미'와� 구별하기� 위함인것� 같다.� 또한� � '에피코레곤'은� '값없이� 제공하다'� 또는� '지원하다'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 바울은� 본절에서'에피코레곤'을� 사용함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 보혜사� 성령이� 율법

과는�달리� � 값없이�주신�선물임을�강조하고�있다.

=====3:6� � 본절은�바울이� 4:7까지� 믿음과�율법을�번갈아가며�전개하고�있는�순차적(順次的)인논증의�첫번째� 항목이다(Boice).�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아브라함에� 대해� 잘� � 알고있다고� 전제하고� 구약의�

내용에서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하고� 있다.� � �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의로�

정하셨다� -� 유대인의�조상� 아브라함은� � 무엇으로� 하나님�앞에서�의롭다고�인정을� 받았는가?� 그리고�그�

'의'의� 성격은� � 어떠한� � 것인가?� 바울은� 로마에서�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하기� 이전에� 의롭다함을� 받았

다고� 설명하였다(롬� 4:10).� 바울이� 갈라디아의� 유대주의자들� 앞에서� 특별히� 아브라함을� 논쟁의� 중심으

로� 삼고� 있는� 것도� 바로� 무할례시에�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사실� 때문이다.� 그렇다면� 본절의� '의

'(*� � � � � � � � � � � � � � � � � � � � ,� 디카이오쉬네)는� 어떤� 의미로� � 쓰였는가?(1)� '법률적인� 칭의'를� 의미할� 수

도� 있다(Boice).� 아브라함의� 행위� 역시� 하나님께� � 의롭다함을� � 인정받기에는� 부적합한� 것이었으므로�

아브라함의� '의'역시� � 선언적� � 의미가큰�것은� 사실이다.� (2)� 또�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가

지는� 그의� 올바른� 태도를� 의미할� 수도� 있다(E.D.� Burton,� Cole).� 창� 15:6에서� 볼� 수� 있듯이� 아브라함

이�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한� 것이� 하나님께� 의로� � 인정되었다고� � 본다.즉� 하나님

과의�바른� 관계� 속에서� 아브라함이�하나님을� 향하여�신실한� 태도를� 보임으로말미암아� 하나님이�의롭게�

여겼다고�본다.� 즉� 하나님과의�바른�관계� 속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향하여� 신실한� 태도를� 보

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의롭게� � 여겼다고� � 본다.� 두� 견해들� 모두에게서� 중요한� 것은� 의롭다� 하는�

것이� 아브라함을� 근거로� 하지� � 않는다는� 사실이다.� 의롭다하시는� 이는� 바로� 의롭다고� 여기시는� 하나님

이시다.� 아브라함의� '의'� 역시� 신약� 백성이�우리의�의와� 같이� 대속하신�구세주의�은혜로�얻게� 되는� � 것

이며� 단지� 아브라함은� 이미� 계획된�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선취(先就)된� '의'일� 뿐이다(고후� 5:21).� 시간상으로� 아브라함의�의는�할례를�받기� 이전에�인정되었으며� 아들� � 이삭을�하나님께�바치려고�한� 믿음

과� 순종의� 태도를� 보이기� 이전임을� 상기시키면서� 바울은� 자기� 교만과� 의를� 자랑하는� 유대주의자들을�

책망함과�동시에�할례의�무용성을�강조하고�있다.

=====3:7� 믿음으로�말미암은�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 -� 바울이�할례받지�아니한� 믿음의�무리들을�아

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유대주의자들에게는� 매우� 놀라운� 일이다.� 여기서� 바울이� '아들'(*� � � � � �

� � ,휘오스)이라고�한� 것은� '아이'(*� � � � � � � � � � � � ,� 테크논)라는�말과� 의미상�차이가�크다.� '아들'은� 일차

적으로� 육신을� 통하여� 태어난� 자손들을� 의미하지만,�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조직의� 일원임을� 나타내는�

단어로서�가계(家系)와� 상관없이�사용되기도�하였으며�마� 12:27에서는�종파의�일원을�뜻하는 말

로� � 사용되기도하였다.� 본절에서�바울이�믿음으로�말미암은�자들을�아들이라고�부른� � 것은 믿음으로의

롭다함을�받은�아브라함과�이들을�동격으로�취급하기�위함이다(Lenski).� 그들은� � 아브라함의�영적�자녀

들로서�아브라함에게�부여된�구원의�약속을�상속받는�자들이기� � 때문이다(29절;롬� 4:13;엡� 3:6)

=====3:8� � 정하실� -�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을� 계획하신다(롬� 3:21).� 하나님의� 작정은�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에� 세워져서� 역사의� 과정� 속에서� 변함없이� 지속되는� 영원한것이다(엡� 1:11).� 따

라서� 한번� 작정된� 하나님의� 의지는� 변하거나� 죄인의� 반항에� � 의하여� 실패하거나� 좌절되지� 않는다(사�

46:10).� 하나님의� 포괄적인� 작정은� 아브라함의� � 구원� 계획을�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셨다.� � � 성

경이� 미리� 알고� -� 보통� 구약을� 인용할� 때에는� '말하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레게이'(*� � � � � � � � � � � )나� '

에이페'(*� � � � � � � � � )등이� 사용되나�본절에서는� '알다'(* ,프로이두사)라는� 보다� 의인화

된�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의인법(擬人法)은� 22절의� '다두었느니라'는� 단어에서� 더� 선명하게�나타난다.� � 성경을� 의인화시키는� 것은�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좀더� 밀접하게� 묘사하기� 위

함이며,또한� 두� 개의� 주어,� 곧� 하나님과의� 말씀이� 동격에� 있음을� 보여준다.� � � 복음을� 전하되� -� 아브라

함에게� 작정되고� 전하여진� 복음은�기록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 있지만,� � 그� � 주된� � 내용은� � '너를� � 통

하여� � 모든� � 이방이� � � 복을� � � 받으리라'(창18:18;22:18)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이� 장래에� 관

한� 하나님의� 구원의� � 약속을믿었음을� 나타낸다.� 또한�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 믿음으

로 말미암아구원을�받게�된� 것과� 일맥상통하며�그것이�곧�복음의�내용임을�보여준다.

=====3:9� �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 일반적으로� 구약에� 나타난� '복'(*� � � � � � � � � ,베라카)은�

말로써�부모가� 자녀에게�빌어주는� 것으로,� '건강',� '장수',� '재산'� � 등� � 다분히현세적이며� � 물질적인� � 성

격을� � 가진� � 것이었지만(신� � � 28:6),� � � 본절에서의� � � '복'(* � � � � � � � ,율로기아)은� 영적� 의미를� 강조

하는�것으로�믿음으로�인하여�아브라함과�같이� � 의롭다고�칭함을�받는� 구원을�의미한다(벧전� 3:9).� '복

'은� 어느� 개인이나� 특정한� 민족들에게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 모든� 이방민족들도� 믿음으로� 말미암

아� � 아브라함이� � 누렸던�축복에�동참하게�되는�것이다(롬� 4:24)

=====3:10� �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저주� 아래� 있는� 자라� -�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 방편으

로�삼고자�하는� 자는�모두� 저주� 아래�있다는�바울의�말은� 죄의 보편성(普遍性)을전제하고� 있다.� 이말은� '율법을� 따르는� 자들은� 칭의를� 받을� 수� 없다'라는� 율법� 자체에대한� 부정적� 시각이라기보다는� 율법

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모든� 율법을� 지키더라도� � 하나의� 율법을� 어기면�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는� 인간

의� 완벽할� 수� 없는� 연약함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만약에� 인간이� 하나의� 율법도� 어기지� 아니하고� 모든�

율법을� 지킨다면� 그는�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아와� 같이� 말하는� 것은�

율법의�기능이�인간의� 죄인됨을�드러내는� 것이며�또한� 모든� 사람이� 율법을�따라야�하는� 필연적인�의무

를� 가졌음에도(레� 19:2)� 불구하고� 이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롬� 7:24).� �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지

킬� 수� 없는�율법은�단지�정죄와�진노의�기능을�가질� 뿐이다(롬� 4:15;5:16,� 18).

=====3:11� �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으로� 칭의를� 설명해� 온� � 바울은�

이제보다�긍적적이며�적극적인�시각으로�칭의에�접근한다.� 바울이�구약에서�인용한'의인이�믿음으로�살

리라'(합� 2:4)는� 구절은� 구원에� 관한� 여러� 구절들� 중에� 하나이다.본� 구절은� 원래� 하박국이� 갈대아인의�

침공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즉� 사악한� � 자들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하박국은� 하나

님을� 향한� 겸손과� � 신뢰로� � 이와같이� 고백하고� 있다.� 바울과� 하박국의� 입장이� 다른� 것은� 사실이나� 필

할� 수� 없는� � 위기와� 저주� 가운데서� 믿음으로(롬� 1:17)� 여호와를� 바라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Boice).�

결국�하나님과의�올바른�관계를�맺고�그�앞에� 살고자�하는자는�오직� '믿음'에� � 의지해야할�것이다.

=====3:12� �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 바울은� 갈라디아의� � 유대주의자들� � 앞에서구약

을� 인용하여(레� 18:5)� 믿음과� 율법이� 조화될� 수� 없는� 관계임을� 증거한다.� � 율법으로� 행하려는� 자들은�

끝까지� 율법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율법을� 행치� 않으면� � 저주를� 받는다(27:26).� 결국� 율법주의

자들은�자신들의�행한�바� 의로운�행위로 구원하시지� 아니하는� 심판에� 이르러서야� 그들의� 저주를�

깨닫게�될� 것이다(딛� 3:4,� 5).

=====3:13� � 속량하셨으니� -� 이에� 해당하는�헬라어 -� '엑세고라센'(*� � � � � � � � � � � � � � � � � � � � � )은'값

을� 치르고� 사다',� '되돌려� 사다'� 등의� 의미를� 가진다.� 본절에서� 이� 말은� 율법의� 노예가� 된� 우리를� 그리

스도께서� 값을� 치르고� 사셨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께서치르신� 대가는� 십자가의� 피였다.� 죄�

없으신�그리스도의� 죽음은�속전(贖錢)의� 개념에서해석되며(출� 21:30)� 아들을� 나무에�달리게�하는� 저주(신� 21:23)까지� 받게� � 하신� � 것은성부�하나님의�사랑에�기인한다(사� 53:6).

=====3: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 하고...성령의� � 약속을받게�

하려� 함이니라� -�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성도들을� 구속한� 목적이� 두� 가지로나타난다.� (1)� 아브라

함의� 복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려는� � 것이며(2)� 믿는� 자들이�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복은� 믿음으로� � 인해의롭다함을� 받은� 신약의� 성도들에게� 널리� 미치게� 되었

고(9절� 주석� 참조),� 성령의� 약속은� 예수의� 부활� 이후� 성취되었다(요� 14:16-18;행� 1:4).� 이처럼� 의롭다

함을� 얻는� � 것과성령을� 선물로� 얻는� 것은� 아브라함이� 받은� 복과� 같은� 성격이다.� 왜냐하면� � 이방인에게

미치는� 아브라함의� 축복이� 하나님의� 약속이듯이(8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의롭게� 되고� 성령을�

받게�되는� 것� 역시� 하나님의�약속이기�때문이다(눅� 24:49).

=====3:15� �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 � '언약'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데케'(*� � � � � � � � � � � � � � )는� 주로� '유언이나� 유언장'이라는의미로� 사용되나� 70인

역에서는�몇번의�예외를�제외하고�대분분� � '언약'이라는� � 의미로해석되었다.� 이� 말이� '유언'이라고�번역

될� 수도� 있으나� 본절에서� '유언'이라는� 뜻으로해석될� 수� 없는� 것은� 유언은� 유언자가� 죽어야� 그� 효력을�

발생하기� � 때문이다.� � 따라서하나님의� 유언이� 되려면� 하나님의� 죽으셔야� 한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 죽으심을� 가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이� 단어를� '유언'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바울은� 본절에서� 사람� 사이의� 언약의� 견고성(堅固性)을� 예로� 들어� �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언약의�불변성(16절)을� 설명한다.� 하나님의�언약은� � 사람이� � 맺은언약과�큰� 차이가� 있다.� 창�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는� 정황을� 살펴보면� 그�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계약

자들을� 쪼갠� 짐승� 사이로� � 지나가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언약의� 주권자로서� 기필코� 하신� 약속을� 이루

시겠다는�강한� � 의지의�표현이다(히� 6:13-15).� 바울이�이처럼�하나님의�언약과�본질적으로�차이가� � 있

는사람의� 언약을� 예로� 들어� 하나님의� 신실성을� 표현하는� 것은�하나님의�언약이� 절대적으로� 성취된다는�

점을�극명하게�보여주기�위함이다.

=====3:16� �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 '자손'에� 해당하는� 헬라어� � '스페르마티'(*� �

� � � � � � � � � � � � � � )는� 복수형인� '스페르마신'(*� � � � � � � � � � � � � � � � � � )과� 함께� � 집합적� 의미로� 사용된다.�

그럼에도� 바울이� '오직� 하나'라는� 강조� 문구를� 덧붙인� 것은� 바울이� 헬라어를� 잘� 몰랐다거나� 바울� 자신

이� 랍비적� 논증� 방식을� 사용하여� 랍비적� � 배경을가진� 사람들에게� 설득하려고� 했음을� 나타내지� � 않는

다.� 바울은� '스페르마티'를� 집합적인� 의미로� 사용한� 예도� 있지만(롬� 4:16-18;9:6-8),� 본� 구절에서는� 단

수의�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궁극적인� 메시야의� 축복이� 한� 사람을� 통해� 이루어질� 것임을� � 강조하고� � 있

다(Boice).� � � 곧� 그리스도라� -� 바울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언약의� 중심을� � 그리스도에게로끌어

온다.� 아브라함에게� 제시된� 언약은� 당대의� 육신적인� 자손들이나� 율법에� 의하여� 성취된� 것이� 아니라� 예

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본절을� � 궤변적인� 랍비적� 논쟁� 방법에� 의한� 삽입

구로� 간주하려고� 한다(Howard,� Cole).�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이� 분명하게� 주장하는� 바는� 약속의� 성취

는�그리스도에게�집약되어 이루어졌다는�사실이다.

=====3:17� � 사백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 -� 이것은�출� 12:40에� 근거한�기간이다.� 그러나� 이� � 기간은�

접근�방법에�따라�다양하게�설명된다.� (1)� 애굽에서�노예� 생활을�했던 기간으로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한�근거는�히브리어�본문을�기초로�한� � 번역본들에서 나타나고있다(Boice).� (2)� 아브라함과�

모세� 사이의� 기간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 이는� � 헬라어사본(LXX)에� 근거한� 견해이다(Hendriksen).�

(3)� 아브라함의� 언약이� 확정된� 야곱때로부터� 시내산� 율법을� 주신� 때까지의� 기간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견해는� (2)의� � 견해와비슷하지만� 다른� 점은� 아브라함의� 언약이� 야곱에게와서� 확증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본절에서�바울이�말하고자�하는�바는� 주어지기까지�상당한�기간이�지났다는 사 실 이 다

(Lenski,� Howard,� Cole).

=====3:18� �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 바울은� 다시� 한� 번� 율법과� 약속을� 대립시킴으로� 율법이� 약속을� 파기할� 수� 없다는� 것

(17절)을� 강조한다.� 율법과� 약속이� 본질적으로� 대립되는� 이유는� � 율법이� 행함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

다.� 행함은�구원을�이룰� 수� 없으며�가까이�가면� � 갈수록�더� 큰� 저주를�초래할�뿐이다. 한편� � '은혜

로� � 주신'의� � 헬라어� � '케카리스타이'(* � � � � � )는� '카리스'(*� � � � � � � � � � ,� '은혜')에서� 온�

말로�구원이�값없는은혜임을�보여주며,이� 말이� 완료형인�것은� � 구원의�영원� � 불변성을 나 타 낸 다

(Boice).또한� � '유업'(*� � � � � � � � � � � � � � � � � � � � � ,� 클레로노미아)이� 약속에� 의하여� 주어졌다는�사실은� 구

원이� 율법에� 의하여� � 성취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율법은� 구원을� 이루는� 수단으로� 주어졌다는� 것을� 나

타낸다.

=====3:19�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 지금까지� 율법이� � 약속을� � 폐하지못하

리라는� 것을� 증명한� 후에� 이제� 바울은� 율법의� 목적에� 대하여� 설명한다.� 율법의� 목적은� '범법함을� 인하

여� 더한� 것'이라고�한다.� 공동� 번역은� '범법함을�인하여'� � 대신에'죄가� 무엇인지�알게�하시려고'� 율법을�

주신� � 것으로� � 번역하였다.� � 그러나� � 본절에서'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 � � � � � � � � � � � � � )

를� 사용하지� � 않고� � '파라바시스'(*� � � � � � � � � � � � � � � � � � ,� '범함')를� 사용한� 것을� 기억해야�한다.� 바울은� �

로마서에서도� 율법의� 목적을� 논하면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에서는� � '하마르티아'

를� 사용했고�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롬� � 4:15)에서는� � '파라바시스'를� 사용하였다.� 본

절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인간들은'죄'가� 무엇인지� 몰랐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세상에� 죄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죄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인식하도록� � 했다는� � 것이다(롬� 5:20� 주석� 참조).� � �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손을� 빌어� -� 율법

이� 주어질� 때� 천사가� 함께� 했다는� 암시는� 신� 33:2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스데반은� 율법을� 천사가�

전한�것으로 언급한다(행� 7:53).� 바울은�스데반이�따랐던�개념을�그대로�사용한다.� 그러나�본절에

서� 바울이강조하는� 바는� 천사가� 중보자가� 되었다는� 사상이� 아니라� 율법이� 누군가에� 의하여,� � 즉최소한�

천사와�모세에�의하여�전달되었다는�사실이다(Boice).

=====3:20� � 중보는�한편만�위한� 자가� 아니나�오직� 하나님은�하나이시니라� - 본절은 본서에서가

장� 난해한�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학자들은� 견해도� 250-300여개� 정도로� � 너무� � 많이있어� 하나의� 견

해를� 취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수많은� 견해들을� 세� 가지� 부류로� �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중보'(*� �

� � � � � � � � � � � � ,� 메시테스)는� 일반적인� 의미로� 앞절에서� 제시한� 중보� 그� 자체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즉�

율법은� 중보를� 통해� 사람들에게� � 간접적으로� 주어졌으나� 하나님의� 약속은� 중보를� 내세우지� 않고� 직접�

세우셨다는� � 것이다(15-18절).(2)'중보'를� 모세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는� 문맥에� � 비추어본� � 해석으로

서앞에서� 줄곧� 모세� 율법에� 관해� 언급한데다가� 본절에서는� 정관사� '호'(*� � � � )가� 있다는사실에� 근거한

다.� 그러나� 정관사가� 있다고� 하여� 그것이� 꼭� 한� 개인을� � 지칭한다고� � 볼수는� 없다(Boice).� (3)� '중보'

를� 그리스도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는� 바울이� 딤전� 2:5에서� � '중보'라는� 말을� 그리스도에� � 관해� � 사

용하고� � 있다는� � 것에� � 근거한다(Jerome,Chrysostom,� Cole).� 그러나� 이� 해석은� 문맥에� 비추어� 보면�

어울리지� 않는다.� 결국� � 위의� 여러� 견해들이� 일치를� 보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본절에서� 바울은� 율법이�

중보에� 의하여� 전달된� 반면� 약속은� 하나님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 강조하려고한다.�

이는� 약속의� 직접적인� 전달과�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일방적인� 언약� 체결을� � 보다선명하게� 나타내� 준다.�

또한� 그리스도가� 중보가� 되었든지,� 천사나� 모세가� 중보자가� 되었든지� 간에� 율법이� 직접� 주어지지� 아니

한� 것만은� 사실이다.� 이에� 바울은� � 약속이� � 창15장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무조건적인�

일방성(一方性)에� 의하여�주어진것임을�강조하면서�율법보다�약속이�우월하다는�것을�증명한�것이다.

=====3:21�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 율법이� 약속을� � 폐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율법과� 약속은� 서로� 대립되지� 않는다.� � 왜냐하면� 양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율법과� 약속이� 서로� 대립된다면하나님의� 속성이� 내부에서� 서로� 대립되

는� 것이� 되고� 만다.� 약속과� 율법은� � 서로� � 다른목적을� 위하여� 주어졌다.� 율법이� 죄인을� 그리스도에게

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면,� �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게� 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 둘은�

서로�다른� 역할을�가지고�있으면서도�동일하게�하나님의�구속�경륜에�필요한�요건이�되었다.

=====3:22� � 성경이�모든� 것을�죄�아래� 가두었으니� -� '성경'에�해당하는�헬라어� '헤� � 그라페'(* � � �

� � � � )는� '율법'(*� � � � � � � � � � ,노모스)과� 동일한� 의미로� 쓰인� 것이� 분명하다(Bruce,� � Cole).� 바울은� 앞�

구절에서의�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히보여준�뒤� 본절에서는� 율법이� 가진� 실제적인�

기능은� 모든� 사람을� 죄의� 굴레� 속에� 가두는� 것이�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

기� 때문에� 사람이� 율법주의를� 통해� 하나님께� 의롭다고� 여김을� 받을� 수� 없으며�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다.� � � 모든�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판타'(*� � � � �

� � � � � � � � � � � )는� 중성으로� 쓰였는데� 이는� 가장� 포괄적(包括的)인� 범위를� 뜻하는� 용법이다.� 바울이� 이�말을� 사용한� 것은이례적이다.� '타� 판타'가� 지시하는�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1)� � 유대

인뿐만�아니라�이방인을�포함한�모든� 사람들을�가리킨다.� (2)� 타락한�인간이�소유하고있는�모든�것,� 즉�

말,� 행위,� 생각� 등을� 가리킨다.� (3)� 인간의�타락으로�말미암아� 타락된�모든� 피조� 세계(롬� 8:22)를� 가리

킨다.� 아담의� 타락에� 의하여� 모든� 피조� 세계가� � 타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타� 판타'가�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유추하는� 것은� � 무리가� 있다(Boice).� 오히려� 본절에서는� '모든� 것'이� 하반절의� '믿는� 자'

라는� 인칭� 대명사와의� 연관하에� 이해됨이� 타당하다.� 물론� 본절에서� 바울이� 이방인에� 대한� 율법의� � 적

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이말이�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에의하여� 구원될�

자들의�옛� 상태를�지시하는�말로�사용된�것만은�사실이다.

=====3:23� � � � 율법� 아래� 매인�바�되고� -� '매인�바�되고'의�헬라어� '에프루루메다'(* � � � � � � )는� '

프루레오'(*� � � � � � � � � � � � � � )의� 미완료� 수동태로서� '점진적으로� 조여오다'는� � 의미이며� 때로는� '보도하

다'는� 의미로�사용되기도�한다.� 이� 단어의�시상이미완료인�것은�매여있던상태가� 모세가� 율법을� 받은�

때로부터�지금까지�계속되었음을암시한다.

=====3:24�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 -� 율법의� 한계는� 명확하게� 드러났다.� � '몽학선생'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다고고스'(*� � � � � � � � � � � � � � � � � � � � � � )는� � '아이를� � 돌보는자',� '어린아이에게� 시

중드는� 자'라는� 의미로� 원래� 6세에서� 16세까지의� 아이들을� 돌보는� 노예� 신분의�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

였다.� 몽학� 선생은� 가정� 교사로서� � 가정의� � 예법(禮法)을� 가르치기도� 하며� 아이가� 학교에� 오고� 갈� 때에� 길을� 인도하는� 노예로� 이해� 되기도� 하였다.� 몽학� 선생은�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교사'(*� � � � � � � � �

� � � � � � � � � � � ,� 디다스칼로스)로서의� 개념으로만� 이해되지는� 않았다.� 바울은� 율법이� 그리스도보다� � 낮은

지위에�있다는�것을� 설명하기�위해�율법을�몽학� 선생에�비유하고�있다.

=====3:25� 믿음이�온� 후로는� -� 믿음이�오기� 전까지(23절)� 율법은�자기의�임무를�수행할� � 뿐이다.� 그

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는� 역사적인� 성육신� 사건에� 의하여� 율법의� 임무는� 끝났다.� 율법으로부터� 믿음

으로� 옮겨지는� 역사적�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든� 자들에게� 있어서� 되풀이� 되어� 나타나는� 구

체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궁극적인� 목표가� � 성취된� 율법은� 더� 이상� 그리스도안에� 있는� 성숙한� 자녀들

을�지배하지�못한다(롬� 7:6).

=====3:26막�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곧� '양자'(*� � � � � � � � � � � � � � � � ,휘오데시아)가� 되었다는� 것을� � 의미한다.� � 이는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진다.� (1)� 죄� 아래� 놓여� 있던� 자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 창조주�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회복되었음

을� 의미한다.� 하나님은�창조주로서� 모든� 만물을만드신� 자이시며(행� 17:28)� 모든� 인간들의� 아버지가� 되

시나,� 죄� 아래� � 매인 인간들을이제� 죄로� 부터� 해방되어� 회복된� 질서�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 � 특권을누리게� 되었다.� (2)�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성령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준다(14절).�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

도록� � 하시며� � 우리가� � 하나님의� � 자녀된� � 것을� � 증거하시기� � 때문이다(롬8:14-16).�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것을� 증거하는�자가�있다는�것이�곧�성령의�약속이성취된�증거이다.

=====3:27한다.� 세례는�복음의�핵심을�설명하는�데�있어서�매우�중요한� � 개념이다. 본절에서세

례는� 할례를� 대신하는� 구원의� 방편으로� 제시되지� 않았다.� 세례는� 믿음을� 통해서� � 이미� 이루어진� 그리

스도와의� 연합을� 나타내는� 외적� 의식(儀式)� 이상의� � 의미를� � 갖는다.즉�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새�생명에� 연합하게� 되고� 이로써� 삶의� 변화를� 경험할� 수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이러한� � 일련의사실은� 약속된� 성령의� 사역으로서� 구원의� 인치심을� 확증한다.� � � 그

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 '세례받는� 자'의� 또� 다른� 표현이다.� '옷� 입었느니라'의헬라어� '엔뒤오'(*� � � � � �

� � � � )는� 일반적으로� '겉옷을� 입는다'는� 의미로� 사용되나� 바울서신에서는� 새로운� 인격과� 연합한� 삶의�

모습을�나타내는�의미로� � 사용되곤� � 하였다(롬13:14).� 성령으로�거듭난�자들은�세상� 가운데서�의와�진

리와�거룩함을�따라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은� 세상의� 정욕과썩어져� 가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것이며(엡� 6:11,14)

구원의�옷을� 입는�것이다(사� 61:10).

=====3:28�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 하나님의�

자녀가�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지체로서� 하나가�된다.� 즉� '믿음'을공통� 분모로�하는� 자들

은� 인종이나� 신분이나� 성별의� 차이에� 상관없이� 하나이며� 믿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 � � � � � ,헤이스)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교회가� 통일성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아마도� 바울은� 갈라디아� � 교회가� 혼란과� 분쟁� 가운데� 빠져있음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방

인들에게�할례를�요구하는�유대주의자들의�독선적인�우월주의(優越主義)를� 의식하였을�것이다.

=====3:29� 그리스도께�속한�자면...약속대로�유업을�이을� 자� -� 유대주의자들은�율법을�통해서만�유업

을� 이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유대인이� 되려면� 먼저�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할례를� 행하는� 자

들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으며� 아브라함에게� � 약속된유업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

다.� 바울은� 이러한� 상태에� 있는� 갈라디아� 교회의유대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율법이� 갖는� 역할과� 의미

를� 아브라함의� 약속과� 견주어� 설명하고� 나서� 지금까지의� 논쟁을� 결론짓는다.� 곧� 진정한� 의미에서,� 아

브라함의� � 자손으로�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나� 인종에� 관계없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 자신의� 주(主)로� 영접한�자를� 가리키는�관용구였다.� � � 갈라디아서�제� 4장

=====4:1� 내가� 또� 말하노니� -� 이것의� 헬라어� '레고데'(*� � � � � � � � � � � � � � � )는� � 바울이� � 새로운진술을�

시작할때� 앞서� 언급된� 사건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할때� 일반적으로� 사용된� � 형식이다(롬� 15:8;� 고전�

1:12).� 그는� 3장� 마지막� 부분(3:23� -� 29절)에서� 언급한� 내용에� 대하여� 비유를� 사용하여� 계속� 설명하

고� 있다.� 즉,� 바울은� 율법� 아래� 있던� 상태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변화를� 마치� 다른� 사람

의� 보호를� 받던� 유아기로부터� � 스스로� 선택권과� 자유를� 가지는� 성년으로� 변화되는� 것에� 비유한다.� � �

어렸을� 동안에는� -� '어렸을'에� 해당하는�헬라어� '네오피스'(*� � � � � � � � � � � � � � � � � � � )는� '말을� 못하는�자'

라는� 뜻이다.� 바울은� '네오피스'라는� 단어를� 기독교� 진리의� � 장성한� 분량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젖

'을� 먹어야�하는� 연약한�자들을�비유하는데�사용하였다(고전� 3:1,� 2).� 본절에서는� � 성년과�대조하여�미

성년의� 상태를� 가리킨다.� � 유대에서는� 만� 12세까지를� 미성년으로� 취급하였는데� 이들은� 재산을� 소유할�

수는 있었으나재산권을�행사할�수�없었다는�점에서�종과�다를� 바가� 없었다.

=====4: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 로마� 시대의� 관습법상� 미성년자는� 14세까지� 그의� � 아버지가�

의뢰한� 후견인� 아래� 있었으며� 재산권은� 25세가� 될� 때까지� 청지기가� 대신� � 관리했다.� 그러나� 명확히�

고정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다(Lightfoot).� 아마도� 이들이� � 성년이되는� 것은� 아버지의� 재량권(載量權)에� � 달렸던� � 것으로� 보인다.� 로마의� 아이들은� 매년3월� 17일에� 열리는� '리베랄리아'(Liberalia)라는� 가

족들의�잔치에서� � 성인이� � 되었고,그� 아이는�공식적으로� � 아버지에 의해� � 인정되는 아 들 이 자� �

상속자로� � 받아들여졌다(Boice).� 이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이�언급하는� '그� 아버지의�정한�때까지�후견인

과� � 청지기� 아래'� 있다는� 말은� 로마의� 관습을�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하다.� 바울이� 비유한� � 논리� 속에서�

우리는� 율법의� 종된� 상태에서� 믿음으로� 자유자가� 되는� 것은� 그� 작정한� 때를따라�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달려있음을� 선명하게� 알� 수있다.� � � 후견인과� 청지기� -� 앞에서� 바울은� 율법을� '파이다고

스'에� 비유하였고� 여기서는� '보호자'(guardians),� '어린� 아이를� 책임지는� 자'� 등의� 뜻을� 가진� '후견인

'(* � � � � � � � ,� 에피트로푸스)과� '가문의� 재산을� 관리하는� 자'라는� 뜻을� 가진� '청지기'(*� � � � � � � � � � �

� � � � � � � � � � � � � ,� 오이코노무스)에� 비유했다.� 바울이� 몽학선생보다� � 더구체적이고� 법률적인� 지위를� 가진�

직책들을� 비유로� 사용한� 것은� 율법� 아래� 매인자들의종속� 상태를� 강조하기� 위함인� 것� 같다.� 비록� 유대

주의자들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 자녀라고� 생각할지라도,� 그들은� 율법의� 청지기와� 후견인에게� 매인자들

로서�실제적인� � 권한은�없고� 참자유를�누리지�못하는�미성년자의�상태에�처한� 것과� 같았다.

=====4:3� �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 '초등� 학문'의� 헬라어� '스토이케이아'(*� � � � � � )는� '차례',� '질서',�

'순위'� 등을� 의미하는� '스토이코스'(*� � � � )에서� 유래한� 말로� 크게� 세�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1)� 헬라�

사회에서�세상을� � 구성한다고�하는�기본적인�네� 요소,� 즉� 물,� 불,� 흙,� 공기� 등을�뜻하는�것으로 사

용되었다.� (2)�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이� '초보적� 영들'(elemental� spirits)에� 의하여� 움직여진다고� 믿었

던� 점성술에서의� 천체� 숭배를� 가리킨다(Ambrose,� Augustine,� Chrysostom).점성술에� 대한� 내용은� 구

약의� 유다� 왕� 므낫세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데,� � 유대인들� � 중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바벨론� 포로� 생활

이� 므낫세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의� '별� � 숭배'때문이라고� 믿었다(Cole).� 초대� 교회� 당시에는�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 영지주의자들이혼합주의적인� 신비� 종교를� 만들면서� '스토이케이아'를� 하늘과� 땅의� 모든�

공간에� � 존재한다고�믿는� '모든� 영과� 천사들과�마귀들'을� 뜻하는�단어로� 사용하였다.� � (3)� � 종교적지식

의� 미숙한� 단계� 또는� 어떤� 분야에� 있어서의� 초보� 단계(행� 15:10;� 골� 2:8,� 20;� � 히5:12� 등)를� 의미한

다(Jerome,� Tertullian,� Calvin,� Lightfoot).� 본절에서� '스토이케이아'는� (2)와� (3)의� 뜻을� 가리킨다고� �

보는� � 견해가� � 지배적이다.� � 이렇게� 볼때� 바울이유대인의� 율법주의나� 천체� 숭배� 및� 그리스도� 신앙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의식과� � 사상들을� '� 초등� 학문'이라는� 독특한� 개념� 속에� 포함시키고� 있음을� 알� 수� �

있다(9,� � 10절;롬� 8:38).� 즉� 바울은� 그리스도� 신앙� 이외의� 모든� 다른것들을� 우상적이며� 유치한� � 것으

로�취급하였다.

=====4:4� 때가� 차매� -� '때'에� 해당하는� '크로노스'(*� � � � � � � � � � � � )는� 2절의� '아버지의� � 정한때'(*� � � �

� � � � � � � � � � � � � � � � ,� 프로데스미아)와� 연관이� 있다.� 따라서� � 본문은� � 하나님이주권적으로�작정한� 기간이�

지났음을� 시사한다.� 또한� 때가� 차기� 전에� 일정한� 기간� 동안율법에� 매여� 있었던� 암담한� 상태가� 끝났음

을� 암시한다.� 한편� NIV는� 본문을� '시간이� 충만하게� 임하였을� 때'(When� the� time� had� fully� come)라

고� 번역하였다.� 이는� 율법이�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함으로� 그들이� 더이상� 견디기� 어려운� 무기력과� 곤고

함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 �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 바울� 서신에서� '보내다'라는� � 뜻으로�

사용된� � 헬라어는� 세가지가� 있다.� (1)� '아포스텔로'(*� � � � � � � � � � � � � � � � � � � � � � � )는� 특별한� 임무를� � 주

어� 보낸다고� 하는� 데에� 역점을� 주고� 있다(요� 17:18).� '사도'(*� � � � ,� 아포스톨로스)가� '보냄을� 받은� 자'

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와� � 같은� � 사실을잘� 설명해� 준다.� (2)� '펨포'(*� � � � � � � � � � )는� 하나님이� 아

들을� � 보낸다는� � 의미로� � (롬8:3)� 아버지께서�성령을�보내신다는�의미로� (요� 14:26)� 쓰였다.� 이는� � 단

지 보낸다고하는�사실에�역점을�두고� 있다.� (3)� 본절에서�사용된� '엑사포스텔로'(* � � � � � � )는�

보냄을� 받은� 사람이� 그를� 보낸� 사람이나� 장소,� 사회적� 지위에� 귀속되어� 있다는� 점에� 역점을� 두고� 있다

(눅� 1:53;� 행� 7:12;� 11:22).� 이에� 본절의� � '엑사포스텔로'는� 아들이� 하나님에게� 귀속되어� 있다는� 것과�

그를� 보낸� 실존적� 공간,� 즉� � 하늘나라를� 염두에� 두고� 씌여진� 것으로� 본다(E,� Huxtable).� � �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 본절에는� 바울의� 기독론이� 포함되어� 있다.� 바울은� � 다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창조물� 보다� 먼저� 나신자'라고� 묘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낸다(빌� 2:5,� 6:� 고� 1:15,� 16).�

반면� 본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한�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하였다.� 즉� '여자에게서'라는� 말은�

메시야의� 계보인� �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음을� 의미하고(롬� 1:3)� 따라서�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을� � 입

었다는� 것을� 의미한다(3:13).� � � 율법� 아래� 나게� 하신것� -� 본� 문장� 또한� 앞� 문장과� 마찬가지로� 예수께

서� 완전한� � 인성을� 가진� 사람의� 몸으로� 태어났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강조점에� 있어서� 단지� � '사람'으

로� 오신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의무를� 가진� '유대인'으로� 오셨다는� 것이다(Longenecker).�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삶속에서� � 율법의� � 요구를� � 만족� � 시키시고(마5:17,� 18)� 죽음으로� 율법의� 진노

를�짊어지셨다(3:13;� 빌� 2:8).

=====4:5� �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아들의� 명분'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오데시

안'(*� � � � � � � � � � � � � � � � � � � )은� '양자됨'이라는� 뜻으로서� 신약성경에서� � 바울만이사용하였다.� 바울이�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됨이� 자연적으로� � 발생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에� 의한� 것임

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TDNT).� 하나님의� � 유일한�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제도와� 율법을� 순종

하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셨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으로� 태어나신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시고(눅� 2:21),� 유월절� 절기를� 지키셨으며(눅� 2:41;� 요� 2:13)� 그밖의� 모세� 율법을� �

지키면서� 자라나셨다.� 뿐만� 아니라� 율법의� 속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하나님이� 그들들을� 아들

로서�받아들일�수�있는� 근거를�주고자�십자가에서�죽으셨다(빌� 2:8).

=====4:6� 아들의� 영� -�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들의� 영'이� 증거하기� 때문

이다.� '아들의� 영'은� '하나님의� 영'(롬� 8:14)� 또는� '그리스도의� 영'(롬� 8:9)으로서� '성령'을� 가리킨다.�

성령은� 약속대로� 오순절� 다락방에� 강림하신� 이후에� 모든� �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양자됨'을� 증거한

다.� � � 아바� 아버지� -�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으며,� 그들은� 또한� '하나

님의�아들'이라고�불렀다(출� 4:22;� 사� 63:16;� 렘� 3:19).� 그러나�예수� 당시의�유대인들�중에�실제로�하

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므로� � 예수께서� '우리� 아버지'라고� 불렀을때� 불경하다고�

말한� 것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성령의� 내주(內主)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졌고� 그� 새로워진� 관계를� '아바'라고� 표현했다(Longenecker).� '

아바'는� 아람어로서� '아버지'를� 뜻하며� 탈무드에서는� 아기가� 태어나서�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라고� 기록

하고� 있다(Jeremias).� 이는� 어린아이가� '아빠'라고� 하는� 것처럼� � 아버지를더욱� 친근하게� 부르는� 표현이

다.� 바울은�이말을�사용하여�우리와� � 하나님과의� � 관계가아주�가까운�것임을�증거한다.

=====4:7� � 유업을� 이을�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레로노모스'(*� � � � � � � � � � � � � � � � � � � � )는'상속

자',� '후사'� 등의� 뜻을� 가진다.� 본문에서� 이말은� '종'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어� 하나님� 나라의� 백

성들이� 누리는� 모든� � 축복을� � 소유한� � 자를� � 의미한다(롬� � 8:14-17).� 갈라디아� 교인들은� 성령의� 내적

증거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는� � 특권을� 소유하게� 되었다.� 한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 �

� � � � � � � � � � � � � � � � � � � � � � � ,디아데우)는� 본서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3:24,� 26),� '약속으로� 말미암아

'(3:18),�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3:26)등의� 모든� 방편들을� 포괄하는� 표현이다.� 바울은� 이러한� � 표현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양자됨이� 자신의�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 � 은혜의� 결과라는� 것을�

상기시키려�하고�있다(Longenecker).

=====4:8� 하나님이�아닌� 자들에게�종� 노릇하였더니� -� 바울은�갈라디아� 교인들이� 이교도로� 있을� 때의�

상태를�지적한다.� '하나님이�아닌� 자'에�해당하는�헬라어� '메� 우신� 데오이스'(*

� � � )는� 문자적으로� '신이� 아닌� 자들'(those� who� � bynature� are� not� gods,� NIV)이라는�의미

이다.� 바울은� 이를� � '귀신'(고전� � 10:20)� � 또는'신이라� 칭하는� 자'(고전� 8:5)라고� 표현하기도� 했으며�

이것들은� 제우스,� 아폴로� � 등과같이� 인간의� 상상력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들을� 의미한다(E.� Huxtable).�

이처럼� 인간이만든� 형상을� 섬기는� 것은� 우상� 숭배이며� 하나님께서는� 이를� � 분명하게� � 금지하셨다(출

20:4;� 신� 7:25).� 그럼에도�불구하고�하나님을�떠난�인간은�본성적으로�우상의� � 노예가되게�마련이다.

=====4:9� �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 '이제는'(*� � � � � � � � � � � � � � � ,뉜� � 데)은� � 8절의'그� �

때에는'(*� � � � � � � � � ,� 토테)과� 극명한� 대조를� 보이면서� 갈라디아� � 교인들의� � 상태변화를� 설명한다.� '알

다'의� 헬라어� '그노스덴테스'(*� � � � � � � � � � � � � � � � � � � � )는� '기노스코'(*� � � � � � � � � � � � � � � � � )의� 부정� 과거�

수동태로� '오이다'(*� � � � � � � � � � � ,� � '사실적으로알다')� 등과는� 달리� 보다�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 속에

서의� 앎을� 나타낸다.� 즉,� � 하나님을� 아는것은� 믿음을� 통하여� 경험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며� 나아가� 하

나님이� 주권적으로� 선택하신� 은혜에� 의하여� 수동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 �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 -�

본� 구절은� 율법을� 빗대어� 말하는� 표현으로� 3절에서� � 언급한� '초등� 학문'의� 특성을� 지적하고� 있다(3절�

주석� 참조).� '약하고'의� 헬라어� � '아스데네'(*� � � � � � � � � � � � )는� 히� 7:18에서� 율법은� 무력하고� 빈곤하여

서� 인간을� 대속하고� 속량할� 능력이� 없다.� 또한� '천한'의� 헬라어� '프토카'(*� � � � � � � � � � )는� 원래� 사람들

이� � 절대적인� 궁핍으로� 인해� 구걸할� 수� 밖에� 없는� '결핍� 상태'를� 의미한다(TDNT).� 본� 구절에서이러한�

의미의� 단어를� 사용한� 것은� 초등� 학문인� 율법은� 항상� 결핍이� 있고�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율법이� 갖고� 있는� 초라함은� '그리스도의�풍성함'(엡� 3:8)과� 대조되는�개념으로�그리스도를�떠난� 사람들

의�초라함과�천박함을�동시에�시사하고�있다.

=====4:10� � 날과�달과� 절기와�해를� 삼가� 지키니� -� 바울은�유대주의자들의� � 거짓되고 외식적인율

법주의를� 책망하고� 있다.� 본절과� 유사한� 문구는� 골� 2:16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당시� 이방인� 교회속

에는� 거짓된� 외식적� 율법에� 의하여� 상당한� 문제가� 발생한� � 것� � 같다.갈라디아� 교인들이� 의식적으로� 지

켰던�율법의�규례들은�다음과�같다.� (1)� '날'(* � ,헤메라스).�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지켰던� 금

식일과� 안식일을� 뜻한다.� 그리고� 여기에� 하루만� 지키는� 절기가� 포함된다.� (2)� '달'(*� � � � � � � � � � � ,메나

스).� 매월� � 초하루에�지키는�월삭(삼상� 20:5,� 18;� 사� 66:23)과� 달의� 반복적�운행과�관련된� � 절기들,즉�

정월로서� 추수가� 시작되는� 아빕월(출� 13:4),� � 2월이며� � 꽃의� � 계절인� � 시브월(왕상6:1),� 비의� 계절인�

7월과� 8월,� 즉� 에다님월(왕상� 8:2)과� 불월(왕상� 6:38)� 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에� 있어서�

달에� 대한� 절기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월력이� 달랐으므로�그들의� 문화권에서�혼란을� 초래했던�것으로�

보인다(E.� Huxtable). (3)� � '절기'(*� � � � � � � � � � � � � � � � � � � ,� 카이루스).� 레위� 율법이� 규정하는� 3대�

절기,� � 곧� � 유월절,오순절,� 장막절(레� 23장)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 전통에� � 의하여� � 추가된� � 나팔절

(레23:23� -� 25),� 수전절(마카비상� 4:52� -� 59),� 부림절(에� 9:24� -� 32)� 등을� � 말한다.� � (4)'해'(*� � � � � �

� � � � � � � � � � � � � ,� 에니아우투스).� 매�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레� � 25:2� � -7)과� 매�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레� 25:8� -� 55)을� 의미한다.� 바울은�이상에서� � 언급한종교적�절기들을�충실히�지킨� 사실만으로�갈

라디아� 교인들을� 탓하지� � 않는다.� � 오히려바울은� 그들이� 율법의� 참된� 목적을� 깨닫지� 못하고� 율법을� 구

원의� 방편으로� 삼는� � 왜곡된� 신앙을� 소유함으로� 더� 큰� 멍에와� 굴레에� 빠져� 헛된� 열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 책망한다.

=====4:11�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 바울의� '헛될까'라는� 표현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주의에치우쳐�

있음을�염려한�데서� 나온� 것인지�그들이�완전히� 율법주의자가�되어� 예수� � 그리스도의�복음에서�이탈하

였기� 때문에� 나온� 것은� 아니다.� 실제로� 당시의� 갈라디아� � 교인들은� 아직� 할례를� 행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그들� 중에� 절기와�날들을� � 지키는�유대주의자들이�침투하였던�것은�사실이다(9,10절).

=====4:12� 나와� 같이� 되기를� -� 이에� 해당하는�헬라어� '기네스데�호스�에고'(* � � )는� 현재�

중간태� 명령법으로서� 직역하면� '계속� 나와� 같이� � 되기를'이라는� 의미이다.� 이말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

는� 문제를� 알아보기� 위해� 몇가지의� � 견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혹자는�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

들에게 사랑과 정직으로대한� 것을� 상기시키면서� '너희도� 내앞에서� 솔직하라'는� 의미로� 본다

(Cole).(2)� 혹자는바울이�유대인이었음에도�불구하고�유대주의의�모든� � 의식주의(儀式主義)를 폐

기하고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가� 된� 것을� 상기시키면서� '너희도� 나와� 같은� 자유자가� 되라'고했다고� 본

다(E.� Huxtable).� (3)� 혹자는� 바울이� � 갈라디아� 교인들의� 입장에� 선� 것을� 상기시키면서� � '너희도� 내�

입장에서� 나를� 이해하라'고� 권면했다고� 본다(NEB,� Boice).� 이상의� 세�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

지만� � 문맥상� (2)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 같다.� 왜냐하면� 바울은� 계속해서� 율법과� 그리스도로� 인한�

자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지위와� 유대인이� 갖는� � 우월감을�

초라한�것들로인식하고�참된�자유가�그리스도�안에서�이루어졌음을�가르치고�있다.

=====4:13� �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너희가� 아는� 바라� -� 바울은� 처음� 갈라디아� �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때를� 구체적으로� 회상하고� 있다.'너희가� � 아는� 바라'에� � 해당하는� 헬라어'오이다테'(*� � � � � � � � � �

� � � � � � )는� 사적(私的)인� 역사의� � 배경을� � 설명할� � 때에나(고전16:15;� 빌� 4:15)또는� 이미� 확정된� 교리들을� 진술하려� 할� � 때에(롬� � 2:2;� � 3:19;� � 딤전1:8)자주� 사용되었다.� 본절의� 배경이� 되는� 행� 13:13,�

14에� 의하면� 바울은� 제2차� � 전도여행중� 바보와� 버가를� 지나� 속히� 갈라디아� 지방으로� 올라갔다.� 당시�

버가는 저지대로서� 해안의� 습지로� 인한� 유행병들이� 많이� 돌았는데� 특히� 말라리아가� 심했다.� 바울은�

여기서� 얻은� 유행병으로� 인하여� 하루� 속히� 버가를� 떠난것� 같다.� 그러나� � 혹자는� � 바울이루스드라� 지방

에서� 겪은� 육체적� 핍박으로� 인하여(행� 14:19;� 딤후� 3:11)� 원래� 계획했던것보다� 갈라디아에� 더� 오래�

머물렀다고� 추정한다(Boice).� 어쨋든� 바울의� 계획에� � 차질을� 주었던� 그의� 질병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없지만�그가�상당히� '약한� 몸으로'(고전� 2:3)� 갈라디아에서�목회�했음을�알� 수� 있다

=====4:14� � 버리지도� 아니하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셉튀사테'(*� � � � � � � � � � � � � � � � � � � � � )는� '�

퇴짜� 놓다',� '침� 뱉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70인역(LXX)에는� 나타나지� 않고� 신약성경에서도� 본

절에서만� 사용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병자를� 만나면� 그� 병에� � 걸리지� 않기� 위해서� 침을� 뱉는� 관습이�

있었다(Lightfoot).� 그럼에도�불구하고 갈라디아교인들은� 바울에게� 존경과� 사랑으로� 대했다.� 과

거에� 바울은� 신과� 같이(행� 14:12,� � 13)환영받았지만� 자신이� 신처럼� 존경받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반면에� 본절에서는� 자신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환영받은� 사실을� 긍정적으로� 보고� 갈라디아� 교인들을� �

칭찬한다.� 이처럼� 자신을� 후대(厚待)한� 갈라디아� 교인들을� 칭찬한� 이유는� 갈라디아� 교인들이자신에게�보여준�사랑과�환영이�참된�것이었기�때문이고,� 갈라디아 교인들의� � 상태가율법주의적인� 경향으

로�흐르고�있는� 것을�염려하여�과거의�상태를�기억나게�할� 필요가있었기�때문일�것이다.

=====4:15� � 너희의�복이� 지금�어디� 있느냐� -� '복'에�해당하는�헬라어� '마카리스모스'(* � � �

)는� '축복'(blessedness),� '행복'(happiness),� '기쁨'(joy)� � 등을뜻한다.� 한편� 소유격� '너희의'(*� � � � � � � � �

,� 휘몬)는� 단순� 용법으로� 쓰였든지� 재귀� � 용법으로� 쓰였다.� 더욱이� 이� 말은� 주격� 소유격이나� 목적격�

소유격으로� 사용된다.� 본절에서는� 단순� 대명사로� 보이며� 그� 기능상� 소유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는�

것이� 낫다.� 그래서� 본절은� '너희들이� 갖고� 있는� 바� 축복된� 내용들(앞에서� 언급한)이� 어디� � 있느냐?'라

는� 의미이다(Longenecker).� � � 증거하노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르튀로'(*� � � � � � � � � � � � � � � )는�

바울� � 서신에서� 항상� 칭찬할� 때� 사용되었다(5:3;� 롬� 10:2;� 골� 4:13).� 신중하고도� 엄숙한� 이� 표현은뒤

에� 나오는� 구체적인� 내용의� 진실성과� 사실성을� 강조한다.� 본절에서는� � 바울� � 자신을위해서� 무엇이든지�

다� 해주기를�원했던�갈라디아�교인들의�헌신적인�생활을 생생하게설명해주고�있다.

=====4:16� � 참된� 말을� 하므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레듀온'(*� � � � � � � � � � � � � � � � � � )은� � 진리를� �

� 뜻하는 '알레데스'(*� � � � � � � � � � � � � � � � � � )에서� � � 나온� � � 동사� � � '알레듀오'(* )의� 능동태�

분사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본절과� 엡� 4:15에서만사용되었는데� 엡� 4:15에서는� 참말을� 신실하

게� 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거룩한� 삶과� 하나님의� 진리를� 열심을� 다해� 지키고자� 하는� 생활� 습관을� 뜻하

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실제로� 바울의� 삶에� 있어서� 진리는� 단순히� 말� 속에만� 남아� 있지� 않고� 그의� 모

든� 삶의� 모습과� � 습관에서도� 반영되었다(고후� 4:2;� 딤후� 2:4).� � � 원수가� 되었느냐� -� '원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드로스'(*� � � � � � � � � � � � )는� 능동적�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개역성경에는� 번역� 되어� 있지� 않

은� 소유격� '휘몬'(*� � � � � � � � ,'너희의')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바울� 자신이� 갈라디아� 교

인들의� 원수가� 되겠느냐는� 반어법적� 문장이다.� 다시� 말해서� 진리를� 말하는� 것이� '너희와� 원수되기위함

인줄� 아느냐'라는� 뜻이다.� 그런데� 원수� 관계는� 서로� 조화될� 수� 없고� 연합할� 수� 없는� 관계이다.� 따라서�

바울이� 본절에서� 의도하는� 바는� 내가� 너희와� 그토록� � 감격스러운기쁨과� 사랑을� 나누었는데� 어찌하여�

원수의�관계가�될�수�있겠느냐는� � 의미로� � 그것이불가능하다는�것을�보여준다.

=====4:17� �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하는� 거짓교사

들의� 간사함을� 지적한다.� '열심� 내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젤루신'(*� � � � � )은� '시기,� 증오,� 진노의� 감정

으로�가득�차다',� '열렬히�바라다'는� 의미이다.� 본절에서�바울은�거짓�교사들의�위장된�열심을�폭로하고�

자신의� 선하고� 아름다운� 열심을증명하려� 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열심은� 그들을� � 그리스

도에게� � 인도하고,� 접붙임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지체를� 이루게� 하기� 위함이다.� � 그러나� � 거짓

교사들은�갈라디아�교인들을�그리스도로부터�멀어지게�하고,� 복음의�진리를 왜곡시키고� 와해(瓦解)시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된� 것을� 파괴시키려고� � 열심을� � 다한다.바울이� 유대주의자들의� 열심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자세히� 알� 수� 있었던� 것은� 그� � 자신역시� 거짓된� 진리에� 지나친� 열심을� 가진�

경험이�있었기�때문일�것이다(1:13,� 14).

=====4:18� �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 언제든지� 좋으니라� -� 열심으로� � 사모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본절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 (1)� 열심의� 주체가� 바울일� 경우,� 바울은� 그들을� 처

음� 만났을� 때에나� 지금이나� 언제든지� 선한� 열심으로� 서로� 돕기를소원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Burton).� (2)� 열심의� 주체가� 갈라디아� � 교인일� � 경우,� 갈라디아� 교인들이� 처음� 복음을� 받았을� 때� 좋

은� 일에� 열심을� 내었듯이� 지금� � 진리를� 말하는� (16절)� 자신에게도� 다시� 좋은� 열심을� 보이기를� 소원한

다는� � 뜻으로� � 해석할수� 있다(Cole).� (3)� 열심의� 주체가� 율법주의자들일� 경우,� 바울은� 참� 복음을� 전하

는� 사도답게� 율법주의자들의� 열심을� 어느� 정도� 용납하겠다는� 겸손과� 시랑의� 뜻으로� � 해석될수� 있다.�

다시� 말해서� 율법주의자들의� 열심이� 선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 언제든지� 환영한다는� 뜻이다

(Lightfoot,� Ridderbos).� 세� 견해� 중� 우선� (2)와� (3)의� 해석이타당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본절의� '사모

함을� 받음은'에� 해당하는� � 헬라어� � '젤루스다이'(*� � � � � � � � � � � � � � � � � � � � � � � � � )는� 수동태나� 중간태로�

취할� 수� 있기� � 때문이다.� � 즉,수동태로� 볼� 경우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주의자들의� '환심을� 샀다'는�

것이되며,� 중간태를� 취할� 경우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예전처럼� 지금도� 열심으로� 선한� 일을� 추구하기를�

사도� 바울이� 바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단지� 문법적� � 측면에서만� � 본다면� � (2)와(3)의� 해석이� 타당

성을� 갖지만,전후� 문맥상으로나� 본절의� 내용상으로� 볼때� (3)의� 해석이� 더� 많은� 지지를� 받는다.� 즉,� 앞

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한�거짓� 교사들의� 간사하고� 교활한� 특징을� 기술하였고� 계속하여�

본절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에� � 대한그들의� 섬김의� 동기가� 선하지� 않은� 데� 있음을� 역설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사실상� 본절에서� 바울이�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 우호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 복음

의적(敵)인� 그들에� 대해� 바울이� 연속적인� 비난을� 가하고� 있는� 것은� 본절의� � '좋은� � 일에대하여'(*� � � � �� � � � � � � � � � � � ,� 엔� 칼로)와� '언제든지'(*� � � � � � � � � � � � � � � � ,� 판토테)라는반어적� 의미를� 가진� 부사어에�

잘� 드러난다(Longenecker).� 이러한� 맥락에서� 공동번역은본절을� "그들이� 좋은� 동기로� 여러분에게� 열심

을�보인다면야�얼마나� � 좋겠습니까?"라고번역하였다.

=====4:19� � 나의� 자녀들아� -� 이에� 해당하는�헬라어� '테크나�무'(*� � � � � � � � � � � � � � � � � � � � )는� � 그리스

도� 안에� 있으나� 미성숙한� 사람들을� 칭하는� '네피오이'(*� � � � � � � � � � � � � ,� '어린� � 아이들')와� 구별된다(고

전� 3:1).� 바울이� 디모데를� 부를� 때에도� '테크논'(*� � � � � � � � � � � � )을� 사용한� 것을� 보면(딤전� 1:18;� 딤후�

2:1)�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자신에게서� � 양육받았음을� 나타내고자� 한� 것� 같다.� 바울은� 본� 서신에

서� 이말을� 처음� 사용하여� 교회를존속시키려는� 자신의� 헌신적�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Ridderbos).� � � 해

산하는�수고를� 하노니� -� '해산하는'에� 해당하는�헬라어� '오디노'(*� � � � � � � � � � � � )는� 단순히�임심해� 있는�

오랜� 기간보다는� 분만하는� 고통에� 역점을� 두고� 있다.� 즉,�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양육하는� 것을� 어

머니가� 아기를� 출산하는� 고통에� � 비유하고� � 있다.� 이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시� 중생의� 체험을� 해야�

한다는�의미라기보기는� � 중생한�자가� 가야� 할� 성화의�과정을� 전제하고�바울이�그들을�계속하여�양육함

의�수고가�크다는�것을� 시사한다.

=====4:20�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 바울은� 자신의� 심정을� 음성에� 비유하고� 있다.� 그는� � 지금까지�

강경한� 어조로� 말해� 왔지만� 갈라디아� 교인들을� 만나게� 되면� 부드럽고� 온유한� � 말로� 격려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 이는� 바울이� 직접� 그들과� 만나서� 말로� � 가르치는� 것이� 서신으로� 말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인식한� 때문일� 것이다(Ridderbos).� � � 의심이� 있음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루마이

'(*� � � � � � � � � � � � � � � � � � � � � � � )는� '당황하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를� 뜻한다.� 이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어떠한�상태에�있는지를�정확하게�모르므로�당혹스럽다는�표현이며� 그들을�직접� 만나� � 그� � 의문을풀고�

싶다는� 생각을� 나타내는� 말이다.� 바울이� 어떠한� 일로� 인하여� 직접� 갈라디아를� 방문할� 수� 없었는지는�

정확하게� 알수� 없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갈라디아� � 교인들을� 향한� 깊은� 사랑과� 관심이� 남아� 있

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거짓� 교사들의� � 미혹에흔들리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깊이� 타락하지� 않

고�바로�돌아올�수� 있기를� � 간절히바라고�있다.

=====4:21�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 -� 본절의� '율법'(*� � � � � � � � � � � � ,� � 노몬)� � 역시� � 4절과3:23

등과� 같이� 정관사� 없이� 사용됨으로� '율법적� 제도'를� 가리키는� � 단어로� � 쓰여졌다.따라서� '율법� 아래� 있

고자� 하는� 자들'은� 주의� 계명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지키려는� � 자들이� 아니라� 외식에� 치우쳐� 인간의� 자

유를� 구속하려는� 갈라디아� 교회의� 변절자들을� 가리킨다.� 특히� '...하고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델론테스

'(*� � � � � � � � � � � � � � � � � )는� � '원하다',� '지지하다',� '좋아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 '델로'(*� � � � � � � � )의�

현재� � 분사형으로� 과거에� 율법을� 따랐던� 적이� 있는� 사람을� 가리키지� 않고� 현재� 의도적으로� � 율법주의

를�따르며�지지하고�있는�자들을�구체적으로�지시한다.

=====4:22� 두� 아들이� 있으니� -� 실제로�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과� 이삭� 외에도� 후처� 그두라를통한�

여섯명의� 아들들이� 있었다(창� 25:1,�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두� 자녀만� 언급한� 것은� 그들의� 탄

생에� 관계된� 사건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서로� 판이한� 출발점을� �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약속과

(3:6� -� 14)� 관계된�반면,� 다른� 하나는�약속과�관계없이�육신을�따라� 난� 것이다.� � � 계집� 종에게서� -� '계

집� 종'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디스케'(*� � � � � � � � � � � � � � � � )는신약성경에서� 언제나� '노예로서의� 여자'

를� 뜻하는� 단어로� 쓰였다(눅� 12:45;� 요� 18:17;행� 12:13).� 본절에서� 이� 단어는� 사라의� 여종인� '하갈'

을� 지시하며�나아가� � 그녀에게서난� '이스마엘의�신분'과� '율법의�신분'을� 암시한다.

=====4:23� 육체를�따라�났고� -� '육체를�따라'에� 해당하는�헬라어� '카타� 사르카'(* )

는� 수태의� 방법이� 육체의� 질서와� 법칙으로� 인해� 태어났음을� � 보여주고� 그� 아들을� 잉태한� 어머니의� 신

분을�시사한다.� 여기서� '육체'는� 보통� '영'이라는�말과� 대조되어�사용되는데�그것은�때때로�평범하고�자

연적인� 과정으로� 이해되기도� �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육체'는� 영적이며� 비가시적인� �

세계와� � 대조되는세상의 현실적� 삶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롬� 1:3;� 4:1;� 고전� 1:26;� 고후� � 1:17;� �

5:16).� � � 약속으로�말미암았느니라� -� '약속'에�해당하는�헬라어� '에팡겔리아스'(* � � � )는� 본절에서� 관

사없이� 사용되었다.� 관사가� 있는� 경우에는� 명백하게� �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날�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이

지만(3:19),� 관사없이� 사용된� 본절의� � '약속'은� 이삭이� 태어난� 원인이며� 수단이다.� 이� 출생의� 신비는�

초자연적인�것이며�인간이구할�수�없는� 가운데서�얻은�하나님의�은혜이다.

=====4:24� � 이것은� 비유니� -� 비유를� 뜻하는� 헬라어� '알레고루메나'(*� � � � )는� '알레고레오'(*� � � � � � � �

� � � � � � � � � � )의� 현재� 분사형이다.� 이는� '알로스'(*� � � � � � ,� '다른')와� '아고류오'(*� � � � � � � � � � � � � � � � ,'말

하다')의� 합성� 동사로� 그� 문자적인� 의미는� '다른� 뜻으로� 말하다'이지만� 보통� '우의적(禹意的)으로� 말하다'� 또는� '어떤사물을� 비유로� 설명하다'� 등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역사적�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과거의� 교훈을� 현재상황에� 적용시켜� 하나님의� 섭리의� 일관성을� 논증하고� 있다.� � 이렇듯� 현재를� 포함하

여�모든�시대의�사건들은�하나님의�계시�역사를�살펴볼�때,� 그� � 의미가�분명하게�드러난다.

=====4:25� �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 개역성경의� '하가'라는� 번역은� '하갈'의잘못된�

표기이다.� 헬라어�사본들과� � 다른 영역본들은� � 한결같이� � '하갈'('*� � � � � � � � ,Hagar)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본절에서�이름과�연관지어�논쟁이�되는� � 것은 '하갈'을시내� 산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점� 때문이다.� 수많은�주석가들이� � '하갈'이라는�이름의�지명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기울였지만�쉽지�

않았다.� 하지만� 본절을� � 바울이� 사용한� 우화로� 푼다면� 그� 의미는� 보다� 쉽게� 상징화된다.� 시내� 산을� 하

갈� � 산이라고� 불렀든지� '하갈'이라는� 말� 자체가� 시내산을� 의미하는� 단어인지의� 문제는� � 중요하지않다.�

바울이� 본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하갈과� 시내산� 및� 지상의� 예루살렘이� 동일선상에� 있다는� 사실

이다.� � � 지금� 있는� 예루살렘� -� 이� 말은� 그� 당시에� 유대의� 율법주의자들이� 본부로� 삼고� 있던예루살렘을�

상징한다.� 예루살렘에� 있는� 율법주의자들은� 혈통적으로� 유대인� 중에� � 유대인이요� 누구보다도� 순수한�

사라의� 후손임에� 틀림이� 없으나�그들은�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시고� 율법을� 완성시키신� 그리스도를� 영접

하지� 아니함으로� 여전히� 율법� 아래� 있는� 종의� 신분을� 갖게� 되었다.� 이들의� 종됨은� 이방인들이� 믿음을�

통하여�진정한� � 아브라함의후손이�되는�것과� 대조를�이루고�있다.

=====4:26� � 위에� 있는� 예루살렘� -� 이는� 땅에� 있는� 예루살렘과� 대조를� 이루는� 천상의� 새� 예루살렘을�

상징한다.� 그곳은� 율법에게� 종� 노릇하는� 자들을� 해방시키신� � 예수� � 그리스도께서통치하시는� 영적� 예루

살렘이다.� 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새로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의하여(히� 12:24)� 현재적으로� 이루어

지는� 거룩한� 도성이기도� 하다(빌� 3:20).� 믿음으로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리

스도와�연합한�자들은�모든� � 시대에�걸쳐� 현재적으로�새� 예루살렘의�백성이�되며� 성령이�친히� 이� 일을�

증거할� � 것이다.그러나�새�예루살렘은�궁극적으로�예수�그리스도의�재림으로�완성된다(계� 21:2).

=====4:27� � 기록된� 바� -� 바울은� 본절에서� 사� 54:1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이사야는� 이� � 구절을�

통하여� 그리스도로� 인한� 화해를� 선포하고� 영적인� 평화의� 상태가� 도래할� 것을� � 묘사하면서� '많은� 주의�

종'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가� 이루어질� � 것을� � 예언하였다.� 바울은� 이�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새로운� 섭리로� 인하여�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것과� 믿음의� 자녀들이� 핍박자들의� 고

난을� 물리치고� 믿음의� 자녀들이� 궁극적으로� 승리한다는� 것을� 증거하고자� 한다.� � � 홀로� 사는�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레무'(*� � � � � � � � � � � � � )는� '과부된� � 자'라는� 뜻으로� 남편� 잃은� 한� 고부의� 고독하고�

불행한� 상태를� 나타낸다.� 본� 구절이� � 이사야서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을� 비유하는� 바,� 바벨론에� 포로된�

유다를� 가리킨다.� 바울은� 이러한� 의미의�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 90세가� 넘어� 도저히�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사라에게� 주어졌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서술한다.� 사라에게� 주어졌던� 약속이란� 직접적으로는�

자손에� 대한� 것이지만,� 이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본절

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자손의� 어머니� 사라(26절)를� � 통하여� � 복음을주시며,� 그� 복음으로� 교회가� 크게�

확장된다는� 계시의� 역사를� 함축하고� � 있다.� � 교회의확장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인� 것이다(롬� 14:11;�

빌� 2:9� -� 11).� 한편� 이� 말이� 꼭� � 이방인만을�상징한다고�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자유하는� 여인이�

낳은� 아들� � 중에는유대인이나� 이방인이� 구분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태어난� 모든� 양자들을� 포함하기� �

때문이다.

=====4:28� 너희는� � 약속의�자녀라� -�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이� 비유에� 적용시키고� 있다.약속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작정과� 섭리를� 통하여� 주신� 선물이다.� 따라서� 하

나님의�자녀가� 되는� 것은� 자의적(自意的)� 행위로� 말미암지� � 않고� 부르시는� 이의� 뜻을� 따라� 이루어지는�것이므로� 이는� 육체의� 족보를� 따르지� � 않는다(롬� 9:8).� '위에� 있는� 예루살렘'의� 자녀들은� 믿음을� 통하

여� 태어나며,� 성령의� � 세례를통하여� 새롭게� 거듭나는� 자들이다.� 바울은� '자유하는� 여자'와� '이삭'과� '약

속의�자녀'들과� 갈라디아의�교인들을�동일선상에서�취급하면서�궁극적으로�그리스도의 구속사에포

함될�모든�자들을�약속의�자녀로�선포하고�있다.

=====4:29� � � 핍박한� 것같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디오켄'(*� � � � � � � � � � � � � � � � )은� � '핍박하다'

라는� 뜻을� 가진� 동사� '디오코'(*� � � � � � � � � � )의� 미완료� 능동태형이다.� 바울이,�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

힌� 것을� 계속적인� 사실을� 현재�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핍박의� 현실감을� 강조

하기� 위함이다.� 창� 21:9에�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했다'는� 사실을� 묘사한� 히브리어� '차하크'(*� � � � � � � �

)는� '경멸하며�비웃다',� � '희롱하다'의� 뜻으로�이스마엘의�시기는�단순한� 조소에서�그친�것이� 아님을�보

여준다.� 바울은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에� 대한� 핍박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사라가� 하

갈을� 내쫓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공동체� 속에서� 거짓된� 이복� 형제들,� 곧� � 율법주의자들을� 멀리하라고�

권고한다.

=====4:30� � 더불어�유업을�얻지� 못하리라� -� 유업을�이을� 자는� 오직�자유하는�여자의 아들뿐임을�

강조한다.� 이는� 율법과� 믿음이� 공존할� 수� 없으므로� 블가피하게� 믿음이� � 선택되어야한다는� 것이다

(Lightfoot).� 유대주의자들은� 유업을� 이을� 자가� 유대인뿐이라고� � 믿었기때문에� 이방인들을� 핍박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입장을� 반전시킨다.� 유업은� �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믿는� 자들에게만� 해방되

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라는� 것이다(7절).� 율법의� 정죄� 아래� 계속� 머

물러� 있는� 자들은� � 육신의� 신분을� 따라� 죄의� 종으로� 머물게� 되며(롬� 3:23;� 6:16;� 7:14),� 결굴� 아버지

의� � 유업으로부터�제외된다.

=====4:31� 그런즉� -� 바울은� 21절부터� 서술한� 하갈과� 사라에� 관한� 이야기의� 비유적인� 재해석을결론

짓고� 있다.� 그� 결론은� 앞서� 3:6-9에서� 제기되었던� 바� '누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녀이며� 상속인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귀결된다.� 특별히� 바울이� 지금까지� 사용한� '너희'� 또는� '저들'이라는� 말� 대

신에� '우리'(*� � � � � � � � � � � ,� � 에스멘)라는� � 1인칭동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자녀

가� 된� 모든� 자들은� 더� 누리는� 약속의� 자녀임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함이다.� � � � 갈라디

아서�제� 5장

====5:1� � 그리스도께서� 우리도�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 여기� � "자유"란� � 무엇인가?� 이것은�

사회� 생활에� 관한� 것이� 아니고,� 신자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의� � 정죄에서� 놓인(롬(� 8:1-1)영적�

자유를� 말한다(요� 8:36).� 영적� 자유란� 것은� 다음과� 같이� � 해설된다.� (1)사람이� 율법� 하래서� 행복을� 도

모하는� 동안은� 우선� 자기� 자신의� 노예가� 된다.자신의� 욕구는� 무수한데� 그것들을� � 그� 자신의� 힘으로는�

만족하게� 실현시킬� 수� 없다.� � 그는� 평생� 기쁨� 없이� 그것들의� 종이� 된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는� 자기의� 모든� 문제를� 그리스도께� 맡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을� 얻는다.� 이런� � 의미에서�

그는� 우선� 자기� 자신에게서� 해방된다.� (2)금생� 내세에� 율법의� 정죄에서� � 그는� � 해방된다.� 롬8:1�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죽으신�목적이�우리의� 죄값을�담당하신� � 것이므로�하나님은�진실히� 믿는� 우리를� 용

서하시되�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용서하신다.� � 다시� 말하면,� 그는� 우리르�마얼마든지�용서하신다.� 그

렇지만�용서를�빙자하여�범죄를� � 두려워하지�않고�짐짓� 죄를� 범하는�자는� 하나님이�용서하하시지�않는

다.� 히� � 10:26-31� � 참조,� 이� 자유는�자유� 그것을�위한� 것이� 아니고,� 그� 자유를�가지고�감심(甘心)으로�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다.� � � 다시는� 종의� 멍애를� 메지� 말라� -� 기독� 신자가� 율법에서� 놓인� 줄� 모르

고� 아직도� �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 줄� 안다면� 그것은� 다시� 율법의� 종이� � 됨이다.� � 이방인들은�

모세의�율법을�받은� 적이� 없는데�여기서� "다시는(*� � � � � � � � � � )...메지말라"라고� � 경계한�것이� 그들에게�

부합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인류의� 첫� 조상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지말라"는� 율법� 아래� 있었

던� 것이니� 만큼,� 이방인들도� 그� 점에서는(그들이� 복음을� 믿기� 전에는)율법의� 멍에� 아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모세의� 율법은� 본래� �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인류에게� 주셨던� 행위� 계약(율법)을� 확장한�

것� 뿐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령하여� 선악과를� "먹지말라"고� 하신� 것은� 행위계약� 혹은� � 율법의� �

조종(祖宗)이다.

=====5:2� �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리� -� 여기에� "나"란� 대명사와� "바울"이란� 고유명사를� 붙여� � 기

록함으로� � 사도� � 바울은� � 그의� � 말하고자� � 하는� � 내용의� � � 중대성을� � � 나타낸다(Greijdanus).� � � 너희

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유익이� 없으리라� -� 곧� � 갈라디아� 교인들이� 구원의�

공로로� (의를� 얻으려고)� 할례를� 받는다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완전한� 구주로� 믿지� 않음과� 같다는� 것이

다.� 따라서�완전한�구주이신�그리스도께서� � 그들과는�상관이�없게� 될� 것이다.

======5:3� �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 누구든지�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에� 이르는� 의를�

얻는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율법의� 일부분인� 할례만� 지켜서� 될� 것인가?� 인간으로서� 율법을� 완전히� 지킴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

러므로�구원의�길은� 그리스도를�완전한�구주로� � 받는�믿음밖에�없다.

=====5:4� �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 끊어지고� � 은혜에서� 떨어

진� 자로다� -� 율법은� 그� 의식적� 부분이든지� 도덕적� 부분이든지� 그� � 행하는� � 자에게� 구원의� 의를� 주지�

못한다.� 구원에� 이르게�하는� 의(義)의� 최소(最小)부분도�율법� � 지킴에� 있다고�생각할� 수� 없다.� 만일� 그것이� 율법� 지킴에� 있다고� 생각하는� � 자가� �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와� 은혜를� 포기하는� 자이다(Calvin).�

2:21� 참조.

=====5:5� � �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리� -� 헬라� 원문에는� 이� 귀절의� � 초두에� "왜�

그런고� 하면"이란� 이유� 접속사(*� � � � � � )가� 있다.� 진정한� 의를� 얻는� 소망은� 율법이� 이루어주는� 것이�아

니고� 성령님이� 이루어�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 공로(功勞)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를�믿음으로�거저�받아지는�것이다.

=====5:6� �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 이것은� 신앙의� 특징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진정한�

신앙의� 소유자는� 사랑의� 행위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사랑을�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가?� 그런� 것

은� 아니다.� 이것은� 신자가� 그� 신앙의� 증표로� 사랑을� 지니고�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행위는� 믿음이� 내

어주는� 열매이니,� 선한� 행위가� 없으면� 죽은� � 믿음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약� 2:21-26).� 물론� 사랑의�

행위가� 구원의� 공로는� 아니지만� 참� 신앙은� 그것을� 지니고� 있다.� 신앙� 그것도� 구원의� 공로를� 받는데� 있

어서� � 믿음은� � 절대� 필요한�것이다.� 이것도�하나님의�선물이다(엡� 2:8).

=====5:9� �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 이것은� 여기서� � 거짓교훈을� � 가리킨다.� � 고전� 5:6�

참조,� (1)� 적은� 죄악을� 용납하면� 큰� 죄악으로� 확대되는� 법이다.� (2)� 누룩이� � 소리� 없이� 은근히� 떡반죽

에� 퍼짐과� 같이,� 적은� 죄악도� 사람의� 생활을� 지배하기까지� � 은근히� 그의� 마음을� 점령하게� 된다.� 마귀

의� � 장난은� � 이렇게� � 암암리에� � 죄를� � 퍼뜨린다.� � 마� 13:24-25;딤후� 2:16-17� 참조.

=====5:10� �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 "다른� 마음"은� 바울이� 이때까지�

가르친바�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以信得救)교리가� 아닌� 다른� 사상을� � 의미한다.� 그는� 이때까지� 그들에게�엄하게�훈계하였다.� 그러나�여기서는�그들에게�소망이�있음을�표시한다.

=====5:11� � 십자가의� 거치는� 것� -� 여기� "거치는� 것"이란� 말(*� � � � � � � � � � � � � � � � � � )은� � 넘어지게� 하

는� 돌� 같은� '장애물'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고전� 1:23)이� 된다

고� 하였다.� 그들의� 메시야상(象)은� 이� 세상에서� 큰� 권세와� � 능력으로� 행할� 자라고� 깊이� 믿어� 왔다.� 그런데,� 미천하게� 살으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메시야� 자격을� 그들은� 믿을� 수� 없었던� 것이

다.� 여기서�그들은�넘어진다.

=====5:12� �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 "스스로� � 베어� � 버림"

이란�말(*� � � � � � � � � � � � � � � � � � � � � � )은� 몇� 가지� 해석을� 가진다.� (1)스스로� � 교회에서�떨어져�나가는� 것

을� 의미한다는� 것,� (2)유대주의자들이�할례를� 주장할진대,� 이방의�풍속대로� 아주� 생식기를�수술한는�데

까지� 철저히� 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바울이� 풍자적으로(諷刺的)으로� 유대주의자들을� 공격한�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구주자격을� 무시하고� 할롑를� 구원받는� 조건으로� 삼는� 것은� �

복음을� � "어지럽게�하는� 하는"� 큰� 죄악이다.� 그러므로�바울은�풍자적으로까지�그들을�공격한다.

=====5:13�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 여기� "너희가"(*� � � � � � � � � � )란� 말은� 헬라� 원

어의� 어순(語順)대로� 강세형(强勢形)이다.� 그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유대주의자들에게� 비교하여� 그들의� 특수한� 처지를� 지적함이다.� "자유"란� 말(*� � � � � � � � � � � � � � � � � � )은� 종들을� 놓아줌에� 대하여�흔히� 사

용된� 말이다(Greijdanus).� 인간은� 죄악의� � 종이었음에� 따라서� 거기� 심판자로� 임한� 율법에도� 종이� 된것

이다(요� 8:34;� 갈� 4:1-3,� 5: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들은�

죄에서� � 해방되었고,율법에서도� 놓였다(요� 8:32,36;� 롬� 8:1).� � �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 "육체"란�

말은� 헬라� 원어로� 삵스(*� � � � � � � � )인데,� 여기서는� 인간의� 부패성과� 죄악성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 희생시켜서� 우리를� 대속(代贖)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정죄에서� 구원받을�뿐� 아니라,� 다시는� 죄를� 짓지� 아니하게� 하려는것이다.참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죄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이� 실제적� 경험의� 사실이다.� 롬� 3:31� 참조.� 그러므로� 복음을� 믿어� 영적� � 자유를� 얻은� 자로서�

죄악에�접근한다면,� 그는� 하나님의�속죄�사업의�본의(本意)를� � 무시하는�죄까지�범하는�자이다.� � �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 복음을� 믿어� 영적� 자유를� 얻은� 자가� 율법의� 멍에� 아래� 있지는� 않으나,� 그와�

율법과의� 관계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는성령에� 의하여� 기쁜� � 마음으로� 율법을� 행한다.� 이렇게� 행함이�

곧,� 사랑이다.� "종노릇�하라"란� 말(*� � � � � � � � � � � � � � � � � � )은� "섬기라"(serve)고� 번역되어야�한다.� "섬긴

다"는� 개념과� � "종이� � 된다"는� 개념는� 다르다.� 우리가� 섬긴다는� 것은� 상대방의� 유익을� 위하여� 돕는� �

행위이고,� � 그의� 의지(옳은� 소욕이나�옳지� 않은� 소욕)에� 맹종함은�아니다.� 우리가�상대방의�불의한� � 소

욕에는� 응종하지� 않음이� 그를� 사랑함이다.� 그는� 사랑의� 동기로� 율법을� 행하고� � 노예적� 심리로� 행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율법을� 행함은� 사랑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실에� 대하여는� 다음� 귀절이�

밝힌다.

=====5:14� �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 � 신구약�

성경에� 인간의� 행위의� 법칙에� 괸하여� "하라"혹은"하지말라"라고� 한� 명령들은� � 모두� 다� 율법에� 속한� 말

씀이다.� 이런� 명령들이� 많지만�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사랑하라는� � 말씀이다.� 온� 율법은� 이웃� 사랑에서�

그� 완성을� 본다.� 만일� 누가� 사랑의� 동기� 없이� � 율법을� 행하였다고� 하면,� 그것은� 율법을� 참되이� 행한�

것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만일� � 누가� 사랑을� 행하면서� 율법을� 범한다면,� 그것은� 사랑을� 참되이� 행한�

것이� 아니다.� � 율법의� 실행은� 사랑� 없는� 기계적� 동작이� 아니며,� 또한� 사랑은� 법� � 없는� � 무질서(無秩序)가� 아니다.� 사랑은�법을� 초월하나�법을�무시하지�않는다.

======5:15� �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 율법주의자들은� 실상� 사랑을� � 제외

하고� 율법을� 본다.� 드들은� 육체적� 방법,� 또는� 사람의� 힘만으로� � 율법을� � 기계적으로� 순종하려� 한다.� �

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자유에서� 얻어지는� 사랑의� 동기로� � 참되이� 행할� 줄은� 모른다.� 따라서� � 그

들은� 율법을� 네세우면서� 율법을� 잃어버렸고,� � 이웃을� 해롭게� 하는� 불의한� 싸움을� 교회에� 가져온다.� 그

들은�사랑의�정신으로�살지�못하는�것만큼,� "서로�물고� 먹는"악행을�연출한다.

=====5:16� �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유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 율법주의자들은� 인

력으로�조문(條文)을� 하나� 하나� 실행하고자�한다.� 그것은� 결국� 실패한다.� 그러나�복음으로�말미암아�성령을� 받은� 기독신자는,� (1)� 사랑의� 동기로� 행하면서� 율법을� 괴로운짐으로� 여기지� 않고� 순종하며,� (2)�

성령님의� 도우시는� 힘으로� 말미암아� 그의� 실행력이� 강하고,� (3)그의� 행실에도� 약점이� 있으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시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 이� 의미에서�

신자�육체의�욕심대로�따라가는�자는�아니다.

=======5:17� �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 헬라� 원문에는�

이� 귀절� 첫머리에� "왜� 그런고� 하면"이란� 말(*� � � � � � )이� 있다.� 그러므로� 이� 귀절은� � 앞절의� 이유를� 보

여준다.� 성령을� 좇아� 행함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하는� � 이유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는� 육체

를� 거스려�싸워� 육체의�야욕을� 이루지�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 �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너희의� 원하

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곧,�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서로�

싸움으로� 인하여� � 육체(인간의� 부패한� 성질)의� 소원이� 이루지� 못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영전(靈戰)은�참된� 기독신자에게만� 있다.� 영전이� 있으므로� 죄악에� 대한� 승리가� 온다.� 이� 세상� 전쟁에� � 있어서는� 언

제나� 필승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영전에� 가담하는� 자는� 반드시� � 승리하는� � 법이다.� 요� 16:33� 참

조.

====

====5:18� �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 -� � "성령의� 인도

하시는바가� 되"는� 것은� 무엇으로� 식별할� 수� 있는가?� 루터는� 다음고� 같이� � 말한다.�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된다는� 것은� 사람이� 감심으로� 육체(옛� 사람)를� 죽임이니� 곧,�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을버리며,� 심지

어� 자기� 자신을� 버림이다.� 그것은� � 죽음과� � 죽음의� 친구들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며,� 허탄한� 이� 세상�

쾌락과� 그것으로� 말미암은� 부패하고� 더러운� 열매를� 내어� 버림이며,� 이� 세상의� 모든� 좋다는것들을� 버리

고� 그� 대신� � 고난(환란)을� 위함이다.� 이것은� 우리� 본성의� 특징이�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의� 역

사이다."(Vorlesung� � ber� den� R� merbrief,� 1965,� s.270).� 루터의� 이� 말은� 물론� 성령의� � 인도하심이�

된� 자들의� 그� 표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위의� 표준에� � 맞지� � 않는� 행동� 곧,� 결점이� 전연� 없

다는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도�결점이있으나�그들에게는� � 회개(悔改)가� 있다.� � � � 칼빈은�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된"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미� �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마음이� 간절하다.� 그는� � 자기의� 사욕을� 따르지� 않는다(벧후� 1:21).� 양이� 목자를� 따르는것

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좋아한다.� � 이런� 사람은� 벌써�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정죄를� � 면한� 자이니(롬� 8:1),� 율법� 아래� 있지� 않다.� 하나님� 앞에서� 그의� 행실에� 허물과� 결점을� � 이�

있을지라도�하나님께서는�그를�허물� 없는� 것과�같이� 보아주신다."

====

====5:19� �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 "육체"란� 것은� � 하나님과� � 원수된� � 부패성을� � 의미한다(롬� 8:7).�

이런� 괴악한� 것의� 움직임이� 우리의� 눈에� 감취어서� 보이지� 않느다면,� 우리는� � 그것을� 정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현저히� 나타나� 있으므로� 우리는� � 그것을� 지적하여� 멸절할� 방침을� 세울� 수� 있

다.� � �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 -� 이� 세� 가지는� 성적� 죄악(性的罪惡)이다.� 하나님과� 원수된� 육체(인간의� 부패성)는� 무엇보다� 먼저� 성적� 죄악으로� 나타나서�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더럽힌다.� 고전�

3:16-17,6:13-20참조� 성경은� 사람의� 성적� 죄악이� 자기� � 몸에� � 대한� 범죄라는� 의미로� 말하기를,"사람

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라"(고전� 6:18)고� 하였다.�

곧,� 그� 성적� 죄악은�몸이� 주님의� � 성전된�거룩한�소속임을�위반한다는�것이다.� 다른� 죄악은�외계(外界)의� 남들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지만,� 성적� 죄악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손해를� 주는� � 것이다.특히� �

그� 손해는�종교적인�면이�더욱� 크다.� 고전� 6:15-17에� 말하기를,"너희� 몸이� 그리스도의�지체인�줄을� 알

지� 못하느냐�내가�그리스도의�지체를�가지고�창기의� � 지체를� � 만들겠느냐�결코�그럴� 수� 없느니라�창기

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

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 몸을� 가지고� 성적� 죄악을� 범하면,� 그것은� 주님

의� 성전을� � 더럽히는� � 범성죄(犯聖罪)이며,� 주님� 앞에� 정절을� 지키지� 않는� 훼절(毁節)의� 죄도� 된다.� �안셈(Anselm)은� 말하기를,� "다른� 죄들은� 대항하여� 싸움으로� 이길� 수� 있으나,� 성적� 죄악은� 피함으로야�

이긴다"고� 하였다.� 요셉이� 이� 죄를� 이긴� 방법도� 그러하였다.� (창� 39:1-18).� 안셈의� 말은� 물론� "음행을�

피하라"(고전� 6:18)는� 성경에� 의거한� 것이다.� 죄악의� 많은� 종류� 중에는� 매력을� 가지고� 유인하는� 것들

이�있는데,� 성적� 죄악이�거기에�속한다.� 성적� � 죄악은�외모의�미(美)를� 가지고�사람을�꾀어� 넘어뜨리는�독한�것이다.� 그것은� � 마치� � 독사(毒蛇)의� 이빨에서�나오는�살인독(殺人毒)과� 같다.� 또� 그것은�마치� 알프스산의� 아름다운� 잔디� 언덕과� 같다.� 많은� 여행자들은� 아름다운� 잔디가� 있는� 땅을� 든든히� 디디고� � 발

을� 붙이려다가� 떨어져� 죽는� 일이� 많다고� 한다.� � � � 음행은� 멸망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음행자를� 가리

켜� "소가� 푸주로�가는� 것� � 같고� 미련한�자가� 벌을�받으려고�쇠사슬에�매이려�가는� 것과� 일반이라�필경

은� 살이� 그� 간으� 뚫기까지에� 이를� 것이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일반이니라"(잠� 7:22-23)고� 하였고,� 그런� 죄를� 범하게� 하는� 집에� 대하여� � 말하기를� ,"그� 집은�

음부의�길이라�사망의�방으로�내려가느니라"(잠� 7:27)고� 하였다.� � � "음행"(*� � � � � � � � � � � � � � )은� 특수한�

범행(犯行)으로서의� � 성적� � 죄악이고,� � "더러운�것"(*� � � � � � � � � � � � � � � � � � )은� 일반적인�성적�불결의�행습을� 의미하는� 바,� 남들에게� � 알려지지� 않은� 것들일� 수도� 있다고� 한다.� "호색"(*� � � � � � � � � � � � � � � � )은�

방종스러운�노골화한�불결의�행습을�의미한다고�한다(Trenchm� Syn� New� Testament).

====

====5:20� 우상� 숭배와� 술수� -� 이것들은� 종교적� 죄악이다.� "우상� 숭배"라는� 것은� 하나님늘� 보이는� 형

태로� 만들어� 섬기려는� 동기에서� 생긴� 행동이나.� 하나님� 아닌� 것을� � 하나님으로� 알거나,� 혹은� 하나님께�

드릴� 영광을� 그것에게� 돌림이다.� 그러므로� � 하나님을� � 육안(肉眼)으로� 보고� 야� 믿겠다는� 마음이� 역시�우상� 숭배의� 사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 영광과� 존엄성을� 무시하는� 교만이요� 어리석음인� 것이다.� 보

이지� 않으시는� � 것이� � 하나님의� 본질상� 속성인데,�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분으로�

여긴다면� 그� � 얼마나�교만한�행위인가?� 죄� 없는� 스랍들도� 두� 날개로� 그� 얼굴을� 가리우고,� 하나님을�보

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한다(사� 6:2).� 출� 33:20에� 말하기를,� "네가� 내� 얼굴을� 보지� � 못하리니� 나를� 보

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하였다.� 욥� 9:11에는,�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보지� 못하며�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라"� 하였고,� 딤전� 6:16에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안니함이� 있

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 돌릴지어다"라고� 하였고,� 요일� 4:12에는� 말하기를,�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

없으되"라고� 하였다(시� 18:11;골� 1:15� 참조).� 히� 11:3에,�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고� 하였으니,� 보이지� 않으시는� 그가� 모든� 보이는� � 것을� � 지으셨다.� 그러므로� 그의� 보

이지� 않으시는� 성질은� 더욱� 우리의� 신앙을� 끈다.� 예수님께서� � 말씀하시기를,� "나를...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라고� 하셨다.� 보지� 못하나� 믿는� 그� 신앙은� 더욱� 고상하다.� 그� 이유는� ,(1)�

보이는� 감각� 세계에� � 의존하지� 않는� 참� 신을� 그대로� 믿는� 까닭이며,� (2)� 신앙을� 방해하는� 감각주의(感覺主義)의� 마음을� 이기며� 믿는� 까닭이다.� � � "술수."� "우상� 숭배"가� 제사적(祭祀的)인� 방면의� 범죄라면,�"술수"(*� � � � � � � � � � � � � � � � � � )는� 예언적(豫言的)인� 방면의� 범죄이다.� (1)�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 나온� �예언은� 천국을� 중심한� 하니님� 말씀이지만,� "술수"(術數)는�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행위이다.� (2)�예언은� 인간으로� 하여금� 회개케� 함을� 목적한다.� 그러나� "술수"는� 인간으로� 하여금� 낙심케� 하든� 지� 혹

은� 요행수를� 바라보게� 하여� 도덕적� � 반성을� � 잊어버리게� � 만든다.(4)� 예언은� 그것을� 받는� 자가� 거의�

뜻밖에� 자주� 의식(自主意識)에� 의하여� 하나님의� 객관적� 계시(客觀的啓示)를� 받아� 말한� 것이다.� 그러나�술수하는� 자는� 솔선적으로� 공교히� 만든� 소위� 예언으로써� 사람들을� 속인다.� 기독신자들� 중에� 무의식적

으로�그리스도의�미명(美名)� 아래� 숨어서� "술수"의� 죄를� 범하는�자들이�적지� 아니하다.� 예를� 들면,� � 신자가�하나님의�영광을� 위하지�않고� 자기의� 육적� 야욕을�위하여� 성령을�구하며� � 이용하려�하는� 것,� � 신

자가� 지식에� 절제할� 줄� 모르고� 하나님만이� 아실� 수� 있는� 고급� 여계(靈界)의� 깊은� 지식까지� 알고자� 하여� 분수에� 넘치는� 사색을� 일삼는� � 것,� � 하나님을� � 신종(信從)하고� 일상� 생활의� 평범한� 책임을� 다함에�주력하지� 않으면서� 기이(奇異)한� � 것만을� 탐하여� 그것에� 주력하는� 것이다.� � �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려진� 하나님의� 말씀(성경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 이적(異蹟)을� 보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적을� 믿는다.� 특별히� 성경에� 기록된� � 표준� 이적들을� 믿는다.� 하나님� 말씀의� 사역에� 따라� 그런� 이적들

이� 나타났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시대에도� 우리가� 믿음으로� 바로� 살기만� 하면� 주님의� 뜻인� 경우� 특별�

섭리의� � 일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에도� 부족함이� � 없을� � 것이다.� 우

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술수"의� 잔재(殘滓)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 그� 이유는,� "술수"는� 우리의� 신양을� 해롭게� 하며� 또한� 하나님께� 욕을� 돌리기� 때문이다.� � �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 -� 이� � 여덟� 가지� � 죄악은� � 육체적으로� � 범하는� �

불화(不和)의� � 죄악이다.� � "원수르� � 맺는� � � 것"(*� � � � � � � � � � � � )은� 성경이�여러� 가지로� 금한다.� 사람이�원수를� 맺음은� 자기와� 충돌된� 상대방의� � 죄를� 용서하지� 않음에서� 기인된다.� 신자는� 원수를� � 용서하고� �

그를� � 도와주어야� � 한다.� � 출� 23:4-5에,�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

려두고�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지니라"� 하였고,� 욥31:29에는,"내가� 언제� � 나를� 미워하는자의�

멸망으� 기뻐하였으며�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 뽐내었던가"라고� 하였고,� 잠� 24:17에는,�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 때에� 마음에� 기빠하지� 말라"고� 하였다.� 롬�

12:21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 악을� � 이기라"고� 하였다.� 우리가� 원수에� 대하여� 선을� 행함으로�

몇� 가지� 아름다운� 열매를� � 맺게된다.� (1)� 하나님의� 완전성이� 나타남(마� 5:48).� (2)하나님� 앞에서� 나� �

자신이� � 심판장이� 되는� 참람한� 죄를� 면함(롬� 12:19).� � (3)� � 용서하는� � 자� � 자신에게� � 영광이� � 돌아옴

(잠� 19:11).� 원수를� 갚는� 자는� 상대편의� 악을� 이기지� 못하고� 도리어� 나를� 대적하는악을� 더� 많이� 만들

어� 놓는다.� 요한� 번연은� 진리� 파수를� 위해서는� 강경하였으나,� 진리의� 적들이� 그를� 욕할� 때에는� 온유하

게� 참았다고� 한다.� � � "분쟁"(*� � � � � � � � )은� "원수를� 맺는"일에서� 나오는� 법이다.� 분쟁은� � 언제나� � 그것

이� 확대될� 위험성의� 있고� 확대되면� 수습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성경은� � "분쟈"에� �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경계한다.� 잠25:8에,� "너는� 급거히� 나가서� 다투지� 말라"하였고,� � 잠17:14에는� "다누는� 시작은� 방축에

서�물이�새는� 것� 같은즉�싸움이� 일어나기�전에�시비를� � 그칠� 것이니라"하였고,� 잠18:19� 에는,�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고� 하

였다.� � � "시기"(*� � � � � � � � � � )는� 남이� 나� 자신보다�웃해진� 것을� 보고� 불쾌하게� 여기는� � 것이다.� 사람은�

마땅히� 남이� 자기보다� 우수함을� 볼� 때에� 기뻐해야� 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나보다� 우수한� 자

를� 나의� 선생으로� 알� 때에� 기쁨을� 가지게� 됨.� 선생이� � 없는� 사람은� 인도자� 없는� 소경과� 같다.� (2)이�

세상에는� 할� 일이� 너무� 많다.� 그것을� � 다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보다� 우수한� 자들이� 많이� 있어야� 한다.� �

� � 교회� � 역사를� � 보면,� � "시기"의� � 죄가� � 교회에� � 큰� � 손해를� � 끼쳤다.� �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교권자� 데오빌로� 감독의� 시기로� 인하여� 억울하게� 탈직을� � 딩하였으며,� 마침내� 사막에� 망명하여� 종신

(終身)하였고,� 유명한� 사무엘� 루더포드(Ruderforth)도� 사이드� 셀프라는� 교권자의� 시기로� 인하여� 투옥되어� 수난하였다.� 예수님은� 대제� 사장들의� 시기로� 인하여� 잡히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 � "분내"(*� �

� � � � � � � � )에� 대하여� 성경에� 여러가지� 훈계가� 있다.� � 잠12:26에� �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

거니와"라고� 하였고,� 잠� 16:32에는� "노하기를� 더디하는� � 자는� 용사보다� 낫고�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자보다� � 나으니라"� � 하였고,� � 잠27:33에는,� "돌은� 무겁고�모래도�가볍지�아니하거니와� 미

련한� 자의� 분노는� 이� � 둘보다� 무거우니라"� 하였고,� 전7:9에는,�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하였고,� 잠� 27:4에는,�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 같거니와"라고� � 하였

다.� � � 사람이� 선한� 일을� 많이� 한다.� 할지라도� "분노"하는� 성질이� 있으면,� 그것으로� � 인하여� 많은� 손해

를� 당한다.� 고대(古代)의� 유명한� 학자� 제럼(Jerome)은� � 성경을� � 라틴어로� 번역한� 공적이� 있으나,� "분노"하는�성질이� 과도하여�어거스틴(Augustine)에게� 보낸� 편지에도� 분노를�나타냈다.� 그것은�그의� 업적

에�커다란�오점(汚點)이� 아닐� 수� 없다.� � � "당� 짓는것"이란�말(*� � � � � � � � � � � � � � � � )은� 어원적(語原的)으로는� '임금� 노동자'(賃金勞動者)를� 의미한다(Greijdanus).� 이� 의미에서,� 이것은� 육체의� � 유익으로� � 매수되어� 단결해서� 진리를� 항거(抗拒)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진리를� 위하여� 성령으로� � 하나되게� 된� 단결은� 작든지� 크든지,� 집에� 있든지� 밖에� 있든지� 그것은� 당을� 지음이� 아니다.� 다만� 비진리를� 세우기� 위하

여� 육체적� 수단으로� 서로� 단결한� 것은� 작당(作黨)� 행위이다.� � 고대의� 제2에베소회의는� 당파를� 짓는� 악한� 사람� 디오스코루스(Dioscorus)가� � 주회(主會)한� 회의인데,� 그� 회는� 비상하게� 경건한� 플라비아누스(Flaviaus)를� 축출하였고,� 이단자(異端者)� 유두게를� 포용하였다.� 칼빈은� 말하기를� ,"이� 회의는� 성령이�주장하시기� 않았다.나는� 그것이� � 교회가� � 아니라고� � 생각한다"라고� � 하였다(Institute� � of� � Christian�

Religion,� BK.� 4.� chap.� 10).교회사(敎會史)에� 나타난� 대로� � 교황� � 그레고리(Gregory)� 11세가� 죽은(1378� A.� D.)후에� 교황권�쟁탈전으로� 인하여� 울반(Urban)� 6세는� 로마에서,� 클레멘트� 7세는� 프랑스의�

아비뇽에서�각각�교권을� 가지고�근� 30년을� 분립하였으니,� 이것은�순전히� 권리를�위한� 당쟁이다.� � � "분

리함"이란� 말(*� � � � � � � � � � � � � � � � � � � � � � )은� 개인주의에� 입각하여� 화합성(和合性)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참됨과�거짓됨은�그� 교회의�공동� 고백과�권징� 실시� 여부(與否)로써�판별되고,� 그� 교회의�성원인� 개인� 신사들의� 사생활의� 완전� 여부는� � 별도의� 문제이다.� 만일� 누가� 교회의� 개인� 신사들의� 결점으

로� 인하여� 교회적� 생활을� 버리고� 물러선다면,� 그것은� 혹시� "분리"� 행위가� 되기� 쉽다.� 그러나� 만일� 누

가� 교회의� � 부패를� 경고하며� 진리와� 의(義)를� 증거하다가� 교권의� 억압(抑壓)으로� 축출을� � 당한다면� �그는� "분리"의�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영광을� 얻을� 것뿐이다.� 사무엘� 루더

포드(Samuel� Ruderforth)는� 16세기의� 영국인으로서� 건전한� 개혁교의� � 정신을로� 신앙생활을� 했던� 신

앙� 위인이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경� 작성위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찌기� 어느� 교직자의� 시

기를�받아� 수감(收監)되었던�일이� 있었는데,� 그가� 옥중에서�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말하기를,"이� 땅의�목사들을� 따르지�말라"고� � 하였다(1637년� 7월� 14일� 아벧딘�옥에서).� 그러나�그것은�결코� 그가� "분리"

의� 죄를� � 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양떼로� 하여금� 이리와� 같은� 거짓� 스승들에게� 가지� 않도록� 하려

는� 것이요,� 양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한� 것뿐이다.� 마� 7:15� 참조� � � "이단"이란� 말(*� � � � � � � � � � � � � �

� � )은� "채택함"을� 의미한다.� 곧,� � 이것은� � 신자들이�공통적으로�가지는� 진리와�표준에�위배되는�의견을�

채택함이다.� 그러나� � 교회� � 역사를� 보면,� "이단"이란� 칭호가� 타파(打破)에� 대한� 편견으로� 사용되니� 실례(實例)들이� � 적지� 않다.� 이것은� 옳은� 편에서� 그릇된� 편을� 향하여� 부른� 파명(派名)인� 동시에,그릇된�편을� � 향하여서도� 사용하였다.� 공정한� 의미에서� "이단"은� 역사적으로� 고백해온� 성경적� � 교리를� 위반하

고� 다른� 의견을� 채택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 잘못된� 다른� 의견을� 채택하였다가도� 조만간� 그것을� 버

렸으면�그는�이단자�아니다.

====

=====5:21� � 투기� -� 이것은� "시기"가� 좀더� 약화된� 것이다.� 이것은� 남이� 소유한� 것에� 대하여� � 심술이�

나서� 그것을� 빼앗으려고까지� 생각하는� 악심(惡心)이다.� � � 술취함� -� 신� 구약� 성경은� 술에� 취하는� 것을�금한다.� 잠23:29-35;엡� 5:18� 참조.� � 술을� 약으로� 사용함이� 허락되었는데� (딤전� 5:23),� 그것을� 빙자하

여� 술을� 탐해� 먹는다면,� 그것은� 속이는� 죄까지� 범함이다.� � � 신자가� 술에� 취하는� 것이� 불가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생각할� 때에� 알� 수있다.� (1)� 신자는� 하나님의� 제사장이니(벧전� 2:9),술에� 취하

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 일과� 진리를� 분별하는� 일에� 실수하게� 된다(레� 10:9;겔� 44:21),� (2)� 술에� 취하

면� � 일반적�행동에도�실수�하게� 된다.(잠� 23:29-35).� 신자가�올바른�정신을�가지고도�하나님의�진리를�

다� 준행하지� 못하는데,� 술에� 취하여서� 어떻게� 경건한� 생활을� 할� 수� 있으랴?� � (3)� 술에� 취함은� 건강을�

해하는� 것이다.� � � 방탕함� -� 이것은� 음란� 이외의� 모든� 무절제(無節制)한� 향락주의를� 말한다.� 누구든지�그리스도의�공로로� 구원받는�진리를� 악용(惡用)하여� 이� 세상� 향락을� 방종스러이� � 취할� 수� 있다고� 생가하면� 안된다.� 신자는� 율법에서� 해방되었으나� 이제는� � 감심으로� � 율법을� 지켜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

다.� 그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순종할� 자유인이� 된� 것이� �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들을� 감심으롤� 섬겨야�

할� 종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향락을� � 자기� 마음껏� 취할� 처지가� 아니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극기

(克己)하며� � 사랑의� � 수고를�해야만�한다.

=======5:22� � 성령의�열매� -� 여기� "열매"란� 말(*� � � � � � � � � � � � )은� 단수명사�되었다.� 그것은� � 신자의�

여러가지� 덕행(德行)이� 성령의� 단일하신� 역사로� 말미암아� 여러� 방면으로� 나타난� 것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모든� 덕행을� "열매"라고� 한� 것은,� 그것들이� 사람의� � 노력을� 주로� 하고� 성립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 모든� 것들은� 성령에게서� � 나오는� � 것이다.� � � � 사랑� -� 이� "사랑"은� 믿음과� 함계� � 있는� �

사랑인� � 사실을� � 우리가� � 알아야한다.고전� 13:13에� 말하기를,�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다.� 신자의� 사랑은� 그가� 하나님의� 속죄의� 사랑을� 믿는�

데서� � 반영된� 사랑이니만큼,� 하나님의� 사랑을�원천으로�하고�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요일� 4:10-11참조.� �

� 희락� -� "희락"은� 언제나� 성령으로� 말미암은� 사랑의� 열매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희락(喜樂)이� 있나니,�사랑하는� 자도� 기쁘고� 사랑을� 받는� 자도� 기쁜� � 법이다.� � 언제든지� 남을� 미워하는� 자의� 얼굴에는� 수심

과� 번민과� 고통의� 그늘이� 있지만,� 남을� 사랑하는� 자의� 얼굴에는� 즐거움이� 속에서부터� 솟아난다.� 희락

의� 필요성은� 육체의� 건강을� 위한� � 의미도� 있지만,� 그� 보다도� 신앙을� 건전하게� 하려는� 것고� 하나님께�

감사를� � 많이� � 하려는� 것이다.� 희락이� 있어야� 신앙이� 자라나고� 감사가� 넘친다.� � � � 화평� -� 이것도� 성령

으로� 말미암은� 사랑의� 열매인데,� (1)� 서로� 사과함으로� 이루어지며(마� 5:24-26),� (2)� 서로� 용서함으로�

성립된다.(엠4:2-3).� 이� 두� 가지� 방법으로� 화평이� 이루어지지만,� 그것도� 하나님께서� 사모하는� 자(힘쓰

는� 자,� 히� � 12:14)에게� � 주시는� 선물이다.(약3:17-18).� 마� 5:9;� 막9:50� 참조.� � � 오래� 참은(*� � � � � � � � �

� � � � � � � � � � � )� -� 이것은� '따가움을� 멀리함'이란� 뜻이다.� � 사람은� 대인관계(對人關界)에� 있어서� 혹은� 무엇이� 마음대로� 안될� 때에� 그� � 심령이� � 따갑게(안타깝게)� 되기� 쉽다.� 이런� 떼에� 이기는� 방법은� 신앙으

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 기다림이다.� 우리가� 인력으로� 할� 수� 없는� 떼에는� 침착하여�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좋다.�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기다림이� 우선� 안식의� 복이� 아닌가!� 애굽� 사람들이� � 이스라엘�

백성을� 잡으려고� 홍해까지� 따라� 올� 떼에� 모세는� 말하기를,� "다희는� 두려워� 말고� � 가만히� 서서� 여호와

께서�오늘날�너희를�위하여�행하시는�구원을� � 보라"(출� � 14:13)하였고,� 모압과�압몬� 족속이�큰� 무리로�

유대에� 육박하였을� 떼에� 여호사밧� 왕이� 말하기를,� � "이� 전젱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

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대하� 20:17)고� 하였다.� 히� 10:36에� 말하기

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하였고,� 갈6:9

에는� � 말하기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 이르매� � 거두리라"고�

하였다.� � � 자비.� -� "자비"란� 말은(*� � � � � � � � � � � � � � � � � � )� 남에게� 주는� '친절'을� 의미한다.� � 그러므로� "

친절"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친절은� 행실로만� 아니라� 말로도� 나타난다.� � 우리의� 말은� 중요하다.� 잠�

12:18에�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良藥)과� 같으니라"하였고,�잠15:1에는�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하였고,� 잠15:4에는,�

"온량한� 혀는� 곧� 생명� 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고� 하였다.� 영시(英詩)에� 말하기를� ,� "노여운� 말� 한마디가� 한� 친절한� 마음을� 상하게� 만들고,� 부지중에� 나온� 실언(失言)이� 앞날을� 캄캄하게� 만들고,� 찌르는� 가시를� 일평생� 남겼도다.� 그러나� 친절한� 말� 한� 마디가� � 슬펐던� 마음에� 광명을� 주

고,� 동정의� 말� 한� 미디가� 한� 영혼을� 살려� 놓고,� 기쁨의� 말� � 한마디가� 캄캄하던� 앞길을� 광명하게� 만든

다.� � � 남의� 마음을� 섭섭케� 만드는� 것은� 네가� 발표한� 말뿐이� 아니다.� 네가� 말하지� 아니하는� 그� 때에� 많

은� 마음들이� 아픈� 상처를� 받는다.� 네가� 말했더면� 많은� 아픈� 마음이� 풀어졌으리라.� 사림들이� 언필칭(言必稱)� 공평을� � 부르짖으며� 사람에게� 사납게� 행한다.� 그러나� 격분된� 말로� 의(義)를� 말할진대�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라고� 하였다.� � � � 양선.� -� "양선"(*� � � � � � � � � � � � � � � � � � )은� 자선� 행위를� 말하는데� 성령께

서� � 주신것이니만픔,� 질적으로� 선하다.� 이� 세상에는� 자선� 사업이나� 적선(積善)을� 말하는� 자들도� 많고�실행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흔히� 질적� 선미(善美)를� 지니지� 못한� 외부적� 행동에� 그치므로� 하나님이�보시기에는� 자선이� 아니라� 생명없는� 사업� 혹은� 외식(外飾)에� � 불과하다.� 진정한� 자선은� 끝날의� 심판�때에� 그대로� 다� 드러낼지라도� 전정한� � 가치가� � 있는� 것이� 되도록� 행해지는� 것이다.� � � � 충성.� -� 이것은�

진실하게� 주님의� 부탁을� 지킴이다.� 우리는� 구원의� � 소식을� � 전함에� 있어서� 우리� 자신이� 어떤� 새로운�

공의(功義)를� 기증할� 필요는� 없다.� 만일� 그럴�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루신� 구원이� 불완전하다는� 뜻이� 된다.�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그러면,� 우리의� "충성"이

란� 것은� �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구원의� 복음을� 그대로� 전함이다.� � � � 충성하는� 자는� 구체적으로� 다음고�

같은� 자들이다.� � � � (1)� 주님을� 두려워하는� 약한� 자.� 주님께� 충성하는� 자는� 반드시� 영웅적� 기질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겁약한� 자라도� 주님만을� 두려워하게� 되면� 주님께� 충성하는� 자가� 된다.� 이� 세상에� 속한�

충성을� 살펴보면,� 생래적(生來的)으로� 영웅적�기질을� � 가지고� � 국가에�충성한� 자들이�있다.� 예를� 들면,�헬쿨라네움(Herculaneum)이� 함락당할� 때에� 로마� 파수병이� 죽기까지� 자리를� 옮기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임무를� 다한� 것과� 같다.� 또� � 예를� � 들면,� 당(唐)나라의� 충신� 장흥(張興)이� 역적(逆賊)� 안록산(安祿山)의� 부하에게� 잡혀서도� 항복하지� 않고� 콥에� 키워� 죽으면서� 끝까지� 원수를� 꾸짖은� 것� 등이다.� � 그러나� �

그것은� 인력을� 가지고� 썩을� 것에게� 충성한� 것이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은� 반드시� � 호걸이어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 호걸은� 자기의� 잘난� 것� 때문에� 하나님을� �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기� 때

문이다.� � � � (2)� 주님� 앞에� 진실한� 자.� -� "충성"으로� 번역된� 말(*� � � � � � � � � � � � )은� 진실을� � 의미하기도�

한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님께서� 원하신다.(시51:6).� 주님께� 사로잡히지� � 않은� 지식인이나� 모사는� 하

나님의� 교회에� 해를� 끼치지만,� 무식하여도� 주님의� 복음을� � 그대로� 진실해� 전하는� 자는� 주님의� 일에� 유

익하다.� 사람이� 거짓되게� 행하기는� � 어려워도� 진실히� 행하기는� 쉽다.� 거짓되게� 행하는� 자는� 계속적으

로� 거짓을� 꾸미며� 또� 그렇게� 처신하게� 된다.� 그것은� 양심에� 괴로움을� 주는� 어료운� 길이다.� 그러나� 사

람이�진실히� � 행하면�양심이� 평안하고�그� 길도� 단순하다.� � � � (3)� 주님을�위한� 의로운�생활(혹,� 사업)에�

변절하지� 않는� 자.� -� 그는� 언제나� � 한결같으며� 유종의�미(有終之美)가� 있다.� 누구든지�선미(善美)한� 길을� 가다가� 변하면� 그는� 썩은� 뒤에� 그들의� 존재는� 교회에� 해가� 된다.� 그러나� 썩기� 시작할� 때에� 서둘러� �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다.� 그것은� 시급히� 회개함이다.� 회개는� 신자의� 부패를� 막는� 유일한� 치료제이다.�

인류� 역사는� 부패로� 이어져서� 보기도� 싫은� 역사이다.� 그러나� 니느웨의� 회개� 역사는� 모든� 부패를� 막아�

역사를�미화(美化)� 시켰다.� 그� 역사는�보기�싫은� 것이� � 아니라,� 도리어�부패했던�적이�없었던�역사보다�하나님� 앞에서� 기쁨이� 되는� 역사이다.� � 우리는� 변절로� 인한� 허물된� 인걱이� 되지� 말아야� 한다.� 교역자

들이� 처음에는� � 잘� � 하다가� 점점� 잘못한� 예(例)가� 얼마나� 많은가?� 혹은� 명예심,� 혹은� 물질에� 대한� 탐심,� 혹은� � 시기심,� 혹은� 정욕,� 혹은� 혈기� 등으로�잘못되어�타락하고�만다.�

=======5:23� � 온유와� 절제니�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온유"란� 말(*� � � � � � � � � � � � � � )

은� 특히� 대적에게� 복수하지� 않고� 부드러운� 인격으로� 이기는� 덕을� 가리킨다.� 위대한� 지도자들은� 이� 덕

을� 소유하였다.� 모세는� 그� � 시대에� � 가장� � 온유의� � 근본이시다.� � (마� 11:28-30,12:17-21).� 크렌머

(Cranmer)에� 대한� 후세(後世)의� 속담은,� "캔터베리의� 감독� 크렌머와� 충돌하여라.� 그리하면� 네가� 영원히� 그의� 친구사� 되리라"고� 하였다.� 중세대의� 성자� 버나도(Bernard)는� 그� 눈이� 비둘기� 눈같은� 온유한�

인물이었고,� 보나벤츄라를� � 보면� 아담이� 범죄하지� 않은� 것다"고� 하였다.� 오리겐(Origen)은� 말하기를� ,�

"우리는� 남을� 위해서� 지음이� 되었고,� 남을� 저주하기� 위함은� 아니라"고� 하면서� 논쟁에� 있어서도� 온유를�

주장하였다.� 키프리안(Cyprian)은� 교회�정치가로서�권위를�존중히�여기면서�온유를�실천하였다.� � � � "절

제"란� 말(� � � � � � � � � � � � � � � � � � )은� '자기� 자신을� 분잡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 죄를� 범하지� 못하게�자기

를�제재함이다.� 바울은�자기를� "쳐� � 복종하게"한다고� � 하였는데(고전9:27),� 그것이�바울의�자기� 제재라

고� 생각된다.� � � �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율법이�

서로� 충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령에� 의하여� 그기스도� 신앙으로� 행하는� 자의� � 행실(사랑으로� 행하

는� 모든� 행실)은� 율법을� 이루는� 것뿐이다.� 롬� 3:31,13:8-10참조.� 이� 점에� 대하여� 다음� 귀절이� 도욱�

밝혀준다.�

====

=====5:24� �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유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 본

절부터� 26절까지는� 앞� 부분(13-23� "육체"대로� 범죄하지� 말고� 사랑을� 행하라고� 한� 보든� 말씀)에� 대한�

결론이다.� �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속죄하여� 그의� 소유로� 삼으쇼가� 백성을�

가리킨다.� "육체"는� 인간의� 부패성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모든� 죄악의� 근원이다.� "정"(*� � � � � � � � � � � � )

은� 의지적(意志的)으로� 하려고� 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 일어나는� 죄악의� 심리를� 가리킨고,� "욕심"(*� �� � � � � � � � � � � � � � )은� 따갑게� 일어나는� 죄� 되는� 욕구를� 말한다.� � � � "십자가에�못� 박았"다� 함은� ,(1)� 그리

스도께서� 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떼에� 그들과� 정욕� 사이의� 관계는� 원칙적으로� � 끊어졌

다는� � 것이고(고후� � 5:14-17),� (2)� 예수님이�죽으셨다가�다시�사셨음으로�인하여�그들이�받은� 영적� 새�

생명은� 부단히� 정욕과� 싸워� 그� 정욕이� 주장하지는�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았"

다� 함은,� 그것을� 현세에서부터� 아주� 없애버렸다는� 의미가� 아니다.� 현세에� � 기독신자에게서� 정욕이� 아

주� 없어진다는�교리는�성경의�다른� 부분에도�없다.(갈� 5:17;요일� 1:8)

======5:25� � �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 "성령으로� 삶"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아� 성령님의� 역사가� 신자들을� 중생케� 하며,� 그들로� 하여금� � 거룩하게� � 살도록� 함을� 가리킨다

(고후� 3:17).� "성령으로� 행할지니."� 여기� "행함"이란� 말(*� � � � � � � � � � � � � � � � � � )은� 행렬(行列)을� 지어�서거나� 가거나� 함을� 의미한다.(Greijdanus).� 이것은� � 신자들이� 한� 단체의� 행렬처럼� 성령님의� 인도대로�

규율�있게� 순종함을�가리킨�듯하다.� 빌� 2:12-13� 참조

=======5:26� �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 � 교회생활에� � 있어서�

분쟁은� 허영을� 구함에서� 일어난다.� 교회의� 단체� 생활에서� 누구든지� � 높아지기를� � 원하면,� 그것은� 허영

심이다.� 그� 이유는,이�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을� 언제든지� 헛된� � 까닭이다(벧전� 1:24).� 천국에서는� 낮아

지는�것이�실상� 높아짐인데,� 그와� 반대로� � 높아지기를�원함은�어리석은�생각(마구적)이다(눅� 18:14).� "

서로� 격동함"은� 서로� 노엽게� � 함이고,� "서로� 투기함"은� 남의� 잘됨을�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방해하는�

악독한�행동이다.� � � � 갈라디아서�제� 6장

=====6:1� � 무슨� 범죄한� 일� -� '범죄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프토마티'(*� � � � )는� 문자적으로� '넘어

지다',� '따로� 떨어지다'등의� 의미로� '타락하다'라는� � 개념을포함한다.�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하여� 고의

적이고� 계획적인� 죄의� � 개념을� � 제거하고자한다(Ridderbos,� Lenski).� 본절의� 범죄는� 어떤� 유혹에� 의하

여� 부지중에� 저질러진� � '실수'나� '허물'을� 가리킨다.� 그러나� '파라프토마티'가� 무지와� 연약함에� 의하여�

저질러진것이라� 할지라도� 범죄에� 대한� 책임마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 겸손한� 마음

으로� 그들의� 책임을� 나누어� 질� 것을� 권고한다(2절).� 한편� 바울이� 본절에서� '범법한� 자'라는� 의미를� 가

진� '파라바테스'(*� � � � � � � � � � � � � � � � � )를� 사용하지� � 않은� � 것은여기서�취급하고자하는�범죄가�적극적인�

것이�아니라�우발적(偶發的)이거나�육신의�약함을�인하여�범한� 것임을�시사한다.� � � 드러나거든� -� '드러나거든'에� 해당하는�헬라어� '프롤렘프데'(*� � � � � � � � � � � � � � � � � � )는� '발견하다',� '놀라게�하다'� 등의� 뜻을�

가진� '프롤람바노'(*� � � � � � � � � � � � � � � � � � � )의부정�과거� 수동태�가정법으로�어떤사람이�부지중에�범죄한�

후� 스스로�깨닫지�못하다가어느�날� 갑자기�범죄한�자신을�발견하게� 될때에�느끼는�당혹감과� � 놀라움을

의미하며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범죄한�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혹자는� 이� 단어

가범죄의� 수단이나� 원인보다는� 단순히� 범죄한� 현장에서� 발견되었다는� 현장성을� 강조한다고� 설명한다

(Ridderbos).� 그러나� '프롤렘프데'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언급할� 때에(요� 8:4)� 사용된� '

카탈람바노'(*� � � � � � � � � � � � � � � � � � � � � � )란� � 단어와� �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카탈람바노'는� 사건의� 현

장성,� 곧� 범죄의� 증거를� 강조하는� 한편� '프롤렘프데'는� 사건의� 진위성(眞僞性)� 곧� 범죄한� 사실이� 있었느냐�없었느냐는�사실�관계를�강조한다.� � � 온유한�심령� -� 이것의�헬라어� '프뉴마티�프라위테토스'(* � �

)는� '온유한� 마음'으로� 번역되기도� 하였다(고전� 4:21).� 물론� � '프뉴마티'는본절에서� '인간의� 영'을� 뜻하

며� 성령의�열매인�온유로� 특징지어지는�사람의�심리적� 상태를�의미한다.� 특별히�성령의� 9가지�열매� 중

에서� '온유'를� 언급한� 것은� � '프라위테토스'가� 교만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겸손'을� 의미하며� 또한� '화

내지�않고� 관용하는�마음'을� 함축하고�있기�때문이다(R.E.� Howard)

=====6:2� 짐을� 서로� 지라� -� '지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스타제테'(*� � � � � � � � � � � � � � � � � � )는일시적

인� 도움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관계성을� 갖고� 돕는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공동체적� 관계는� '알렐론'(*� � �

� � � � � � � � � � � ,� '서로')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이들이� � 나누어져야� 할� '짐'(*� � � � � � � � � � ,� 바로스)은� '가

혹하여서� 감당하기� 힘든� 일이나� 짐'을� � 뜻하는� 단어이지만,� 때로는� 긍정적인� 의미로� '영광과� 충만'의�

의미를� 함축하기도� � 한다(고후� 4:17).� 본절에서� 의미하는� 바는� 다음�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범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감당해야� 할� 책임을� 뜻한다(Huxtable).� (2)� 그리스도인이� 삶의� � 현장에서�

겪는� 시험이나� 인생의� 좌절을� 뜻한다(Boice).� (3)� 죄를� 짓도록� 유혹하거나� � 영적으로� 억압하려는� 세력

을� 뜻한다.� 이경우� '짐을� 서로� 지는'것은� � 그리스도인들을� � 범죄의유혹과�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자� 예

비적으로� 협력하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 위의� 세� 견해�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한다고�할지라도�지

체들의� 유기적(有機的)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부적합한� 것은� 없다.� 성도는� 이상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서로의�짐을� � 나누어져야�한다.

=====6:3� �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 바울은� 동일한� 주제� 속에서� 온전한� 사랑을� 실

천하지� 못하는� 자들의� 내적� 상태를�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이웃의� 무거운� 짐들을함께� 나누어지지도� 못

하면서� 의식적인� 율법의� 구조속에� 빠져� 스스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지켰다고� 착각하는� 자들을� 경고한

다.그들의� 문제점은� 자신의� 재능이나� 역할에� 대하여� 자신감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교만한�

상태에�빠져� � 하나님의 절대적인판단� 기준을� 무시하고� 율법을� 자신의� 유익과� 종교적� 욕구를� 만족

시키기�위해�지켰다는것이다.

=====6:4� � 각각� 자기의�일을� 살피라� -� 앞절이�영적교만에�빠져�자기를�기만하는�몇몇� � 사람들에게만�

제한되어� 적용된� 것이라면,� 본절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교훈이라고� 볼� � 수있다.� 의식하는� 자들은�

율법의� 종이� 되어� 인간적인� 규범으로� 이웃을� 판단하고,다른� 사람의� 범죄에� 자신을� 비교하여� 자신의� 상

대적인� 의로움에� 절대적인� 가치를� 둠으로써� 이웃의� 짐을� 나누려하기보다는�오히려� 이웃의� 짐을� 가중시

키는� 불법을� 행하였다.� 이처럼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생기는� 그릇된� 자존심에서� 탈피하는� 것

이� 진정한� 사랑의� 출발점이다.� 한편� 본절의� '살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키마제토'(*� � � � � � � )는� 제

련소에서� 순금을� 정련(精鍊)하는� 것처럼�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것을� 의미한다(test,� NIV).� 성도들은� 자기의� 생각과� 행동을� 살필� 때� 하나님의� 말씀을� � 표준으로하여� 엄정하게� 해야한다.� 이렇게� 할� 때� 성도들

은� 그리스도� 앞에서�깨꿋한� 양심을�갖게� 되고� 또� 그리스도�안에서� 참기쁨과� 평안을�누리게� 된다.� � � 자

랑할�것이� 자기에게만�있고� -� '스스로�속이는�자들'은� 자신의�자랑거리를�상대방의�실수와�견주어�평가

했던것� 같다(Ridderbos).그러나� 자신의� 업적이�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말미암았다고� 고백하는� 바울의� 자

랑(고후� 1:12;빌� 2:13)에� 비추어�볼� 때� � 이들의자랑이�얼마나� 부끄럽고�어리석은�것인지를�알게�된다.�

바울은� 자신의� 눈을� 다른�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을� 시사하며� 이로써� 성도는� 자신의� 무익

함과 하나님께대한�영광을�깨닫게�될�것을� 보여준다(Boice).

=====6:5�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 바울은� 본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 가져야� � 할의무를�

가르친다.� 그것은� 곧� 자신의� 짐을� 스스로� 지는� 것이다.� 바울은� 본절에서� � '짐'을� 뜻하는� 단어로� '포르

티온'(*� � � � � � � � � � � � � )을� 사용하여� 2절에서의� '짐'에� 해당하는헬라어� '바로스'(*� � � � � � � � � � )와� 구별하

고� 있다.� '포르티온'은� 신약에서� 배에� 싣는� 화물을� 가리키기도� 하였으나(행� 27:10� ),� 어원적으로� '포르

티온'이� � '바로스'보다� 더� 가벼운� 짐을� 뜻한다든지� 더� 무거운� 짐을� 뜻한다는� 것을(마� 23:4)� 증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Ridderbos).� 그러나� '포르티온'은� '바로스'와� 달리� 한� 사람의� '짐� � 꾸러미'를� 의

미한다.� 이� '짐꾸러미'는� 본절에서� 하나님이� 성도� 각자에게� 맡기신� 직무를� � 가리킨다(고전� 12:5).� 모든�

성도는�각자� 자기가�해야� 할� 일을� 감당해야�하며�그� 일에� 대해책임을�져야�한다.� 한편� '질� 것임이니라'

의� 헬라어� '바스타세이'(*� � � � � � � � � � � � � � � � � )는� 미래� 시제로�미래의�심판뿐만�아니라�그리스도인이�감

당하는� 정상적인� 의무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의� 책임성을� 강조한다(Ridderbos,� Huxtable).� 하나님의�

심판� 날에� � 각사람의�모든� 행위가�드러나므로(벧전� 1:17)� 모든� 그리스도인은� � 하나님으로부터� � 받은의

무를�성실히�이행해야�한다.

=====6:6� � 가르침을� 받은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쿠메노스'(*� )의� 동사형� '카테케오'(*� � � � � �

� � � � � � � � ,� '가르치다')는� 원래� '이해하게� 하다',� � '귓가에� 울리게� 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때로

는� '좋지� 않은� 소리를� 귀에� 따갑도록반복해서� 알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행� 21:21,� 24).� 혹자는�

본절에� � 언급된자들이� 유료(有料)교사들의� 집단일� 것이라고� 추측한다(Boice).그러나� 본절� '카테쿠메노스'는� 어떤� 특정한�단체나�조직� 속에� 있는� 자들을�가리키기� � 보다는� '그리스도의�교훈�아래� 있는� 자'들

이라는�포괄적인�의미로�보는� 것이� 타당할�것같다(Boice,� Cole).� � � 말씀을�가르치는�자� -� '가르침을�받

는� 자'들의� 신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듯이� '가르치는� 자'들의� 신분도�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

다.� 이들은� '말씀'을� 가르치는자들로서� 다른� 서신서에서는� '디다스칼로이'(*� � � � � � � � � � � � � � � � � � � )라고�

표현되었으며'교사'라고� 번역되었다(고전� 12:28;엡� 4:11).� 이들� '교사들'이� 본절에�기록된� '가르치는�자

'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인지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둘로나뉜다.� (1)� 혹자는� 이들이� 초대� 교회� 안에서�

목회자적인� 신분을� 가진� 자들로서� '디다스칼로이'와� 같은� 신분의사람들이라� 한다(Ridderbos).� 그러나�

본서가� 다른� 서신들보다� 일찍� 기록되었다는� 것을염두에� 볼� 때� '가르치는� 자'� 즉� '카테쿤티'(*� � � � � � � � � �

� � � � � � � � � � )가� 교회로부터� � 공식적으로� 임명된� 직분자들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2)� 오히려� 본절에서� '

가르치는� � 자'들은� 보다� 초기의�직분자들로서�바울을�포함한�사도들과�바나바와�디도같은 사역자들과�

교회가� 임명한� 장로들을(행� 14:23)� 가리킨다(Huxtable).� 이들은� '교사'들과는� 달리한�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이라기�보다는�복음을�전파하기�위해�여러 곳을� � 돌아다니는전도� 여행자들을� 뜻하는� 것같

다.� 문맥상� (2)의�견해가�무난하리라�본다.

=====6:7� � 스스로� 속이지� 말라� -� '속이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라나스데'(*� )는� 3절에� '프레나파타

'(*� � � � � � � � � � � � � � � � � )와는� 차이가� 있다.� '플라나스데'는� � '길을� 잃게� 하다',� '진리에서� 벗어나도록� 하

다',� '잘못되게� � 유인하다','미혹하다'� � 등을뜻하는� '플라나오'(*� � � � � � � � � � � � )의� 현재� 수동태� 명령법으

로� '어떤� 유혹에� � 미혹되어믿음을� 잃게� 되다'는� 뜻이다.� � �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 '만홀히� � 여김'에� � 해당하는� � 헬라어'뮈크테리제타이'(*� � � � � � � � � � � � � � � � � � � � � � � � )는� '바보� � 취급당

하다'(to� � be� � fooled,NEB)라고� 번역될�수� 있다.� 이러한�태도는�인간의�그릇된�본성과�연관되어�있다.� �

인간의� 이기적본성에� 의하여� 저질러진� 행위는� 결국�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등한시하는� � 결과를� 초래한

다.본절에서� '만홀히�여김을�받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 꿰뚫어�보시는�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 하나님께서(시� 139:1-6;겔� 11:5)� � 인간의� � 행위에대하여� 공의로운� 심판을� 하실� 것을� 의미한다.� 본절에서� 바울은� 율법을� 지킨다고� � 자부하며� 할례를� 행하는� 자들이� 오히려� 진정한� 율법의� 정신인�

사랑과� 선행을� 무시하는� � 것을� 염두에� 두고� 이는� 하나님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교훈하고� 있다.� � � 사람

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 바울은� 인간의� 행위를� 자연� 법칙에� � 비유한다.� � 이렇듯� 행위와�

그� 결과를�설명하기�위해�씨� 뿌리고�거두는�비유를 사용하는것은� 혤라� 문화와� 성경에서� 자주발견된

다(마� 7:16;막� 4:26;눅� 19:21;고후� 9:6).� � 바울은� 고후� 9:6에서� 적게� 심는� 것과� 많이� 심는� 것의� 차이

에� 대하여� 설명하였으나� � 본절에서는� 심는것과� 거두는것의� '질'에� 대하여� 논한다.� '심든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 '스페이레'(*� � � � � � � � � � � � )는� 현재� 가정법� 능동태로� 미래� 조건을� 나타내기� 위해� '에안'(*� � � ,�

'...하든지')과� 연결되어� 있다.� 현재� 가정법은� 동작의� 계속적� 반복을� 나타내므로본절에서� 묘사된� 행위는�

인간이� 지속적으로� 행하는� 각각의� 행위를� 말한다.� 또한� � 미래조건절임을� 나타내는� '에안'이� 사용된� 것

은� 인간의� 모든� 행위가� 미래의� 결과,� 곧� 하나님의� 심판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따라서� 사람들

이� 복음을� 듣고� 그것을� � 어떻게� 실생활에� 실천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가� 미래의� 심판대� 앞에서� 어떠한�

결과를� � 거둘것이냐�하는�문제와�밀접한�관계가�있다.

=====6:8� �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일반적인� 법칙은�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경우에� 적용된다.� 바울이앞장에서� 육체와� 성령

을� 비교한�논리(5:16-18)와는� 차이가�있지만�세상끝의�추수를� 바라보는�시간은� 동일하다.� 타락한�육체

의� 본성을� 따라� 규모없이� 생활한다면� 육체적� � 부패와� 도덕적� 타락을� 초래하게� 되며� 영적인� 성품들을�

잃게� 될� 것이다.� � �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는� 것은� 자기의� 삶을� 성령

에게� 맡기고� 성령의�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을의미한다(롬� 8:14).� 이러

한� 삶은� 인간� 내면� 세계에서�역사하시는�성령으로부터� '영생'을� � 얻게될�것이다.� 이는� 육체적인� 생명전

체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부활� 후에� 하나님의� 영광에참여하는� 영화(榮華)로운� 생명을� 의미한다(Ridderbos).

=====6:9�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 본� 구절은� 마지막� 추수의� 때가� 지연된다는� 것을� 염두에둔�

표현이다(Ridderbos).� 임박한� 종말을� 눈� 앞에� 두고는� 누구든지� 긴장하게� � 마련이지만,� 간사한� 인간은�

이� '지연'으로� 인하여�스스로� 피곤해� 하며� 넘어지게� � 될� � 것이다.� 한편� 본절의�내용은� '너희는� 선을� 행

하다가� 낙심치� 말라'는� 살후� � 3:13의� � 내용과매우� 유사하다.� 본절과� 살후� 3:13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본절'(* � � � � ,� 토� 칼론� 포이운테스� � 메� � 엥카코멘),'살후�

3:13'(*�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메� � 엥카케세테� 칼로포이운테

스).� 살후� 3:13에서는� '메'(*� � � � )와� 연결된�부정� 과거� 가정법� � '엥카케세테'(*� � � � � � � � � � � � � � � � � � � � )

에� 의하여� '낙심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형'을� 뚜렷하게� 설명하였으나,� 본절에서는� 현재� 가정법� '엥카코

멘'(*� � � � � � � � � � � � � � � � � � )과� '메'(*� � � � )의� 구문이�앞에� 있는� '포이운테스'(*� � � � � � � � � � � � � � � � � � ,� '행

함')와� 함께�사용되어� '계속적이고�반복적인�행함'의� 의미를�강조하고�있다.

=====6:10� 그러므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라� 운'(*� � � � � � � � � � � � � � )은� 앞에� 기술된� 사실들을�

결론적으로� 다시� 반복하여� 강조하고자� 할때� 자주� 사용되며� 구약을� 인용하고� 나서부연� 설명을� 시작할�

때� 사용되기도�한다.� 본절에서는�전자의�경우에�해당한다.� � � 기회� 있는대로� -� 혹자는� '있는'의� 헬라어� '

에코멘'(*� � � � � � � � � � � � � )을� � 가정법적인의미로� 이해하여� '기회가� 있으면'으로� 번역한다(Westcott,�

Hort).� 그러나� 바울은� 일반적으로�가정법� 문장을� 사용할때� 언졔나� '안'(*� � � � ,� if)을� 썼다.� � 본절에서는� �

'안'을사용하지� 않았으므로� '에코멘'을� '기회가� 있는� 동안',� 또는� '기회� 있는� 대로'� 등의� 뜻으로� 번역하

는� 것이� 타당하다(Lenski,� Ridderbos,� Huxtable).� 본문은� 한� 개인의� � 생애가운데� 제한되어� 있는� 기회

의� 제한성을� 나타낸다.� � � 착한� 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돈'(*� � � � � � � � � � � � )은� 9절의� '칼론'(*� �

� ,� '선')대신에� 쓰여졌다.� '칼론'이� '윤리적인� 아름다움'이라는� 의미를� � 담고� � 있는단어라면,� 본절의� '아

가돈'은� 철저하게� '이웃과의� 관계'속에서� 이해되는� 단어이다.� 한편� 6절에서는� '아가돈'이� 아니라� 복수�

형태인� '아가도이스'(*� � � � � � � � � � � � � � � ,� � '좋은것들')가� 사용되었으나� 본절에서는� 단수로� 사용되었다.�

비록� � 단수로� � 쓰이긴� � 했어도'아가돈'은� 선한� 모든� 것을� 하나로�묶는� 집합적�의미로�해석되어야�한다.� �

이렇게� � 할때� '아가돈'은� 모든사람을� 대상으로� 베푸는� 자비와� 동정심을� 가리킨다.� 6절에서의� '아가도이

스'는� 영적인것과�물질적인�모든�것을� 함께� 나누는�것에� 역점을� 두고� 있다면�본절의� '아가돈'은� 일방적

으로� 베푸는� 선행에� 역점을� 두고� 있다.� � �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 '더욱'에� 해당하는� 헬라

어� '말리스타'(*� � � � � � � )는� '무엇보다도',� '최고로',� '특히'등의� 뜻을� 가진� '말라'(*� � � � � � � � )의� 최상급이

다.� 바울이� 이처럼� 믿는� 자들에게� 특별히� 잘해주라고� 권면하는� 것은� 갈라디아� � 교인들속에� 있는� 거짓�

교사들과� 유대주의자들을� 염두에두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 '가정들'로� 번역된� 헬라어� '오이케이우스

'(*� � � � � � � � � � � � � � � � )는� 신약에서� 바울� 서신에만나타난다(엡� 2:19;딤전� 5:8).�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무리들은� 신앙� 공동체의� 불가분리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고

자� 함이다.� 이처럼바울이� 성도들을� 하나의� 대가족� 단위로� 파악한것은� 성도들을� '이웃'보다� 긴밀(緊密)한'형제'(*� � � � � � � � � � � � � � ,� 아델포스)로� 보았기�때문이다.

=====6:11� � 내� 손으로는...큰� 글자로� 쓴것� -� 바울은� 이제� 본� 서신� 전체에� 대한� 결론을� � 맺는다

(11-18).� 본절은� '큰'의� 헬라어� '펠리코이스'(*� � � � � � � � � � � � � � � )와� '쓴'의� 헬라어� '에그랖사'(*� � � � � � � �

� � � � )의� 시제를� 어떻게� 취급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이해할�수� � 있다.(1)� '펠리코이스'를� '긴'� 또는� '많은

'� 등의� 개념으로� 이해할� 경우� 바울이� 지금까지� 쓴많은� 내용의� 편지를� 가리키고� 있는것으로� 해석한다

(Calvin,� Luther).� � (2)� � '펠리코이스'가� 시각적으로� '큰'을� 의미한다고� 볼� 경우� 바울이� 쓴� 글씨체를� �

가리킨다.� � 이렇게볼� 때� 본절은� 바울이� 오랜� 여행� 기간� 둥안의� 박해와� 노동으로� 인하여� 적당한� 글씨체

로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호소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Deissmann).(3)� 혹자는�

바울이� 글쓰는� 사람에게� 대신� 쓰도록� 하고� 바울은� 자신의� � 서명만� � 스스로했다는� 점(고전� 16:21ff.;골�

4:18;살후� 3:17)에� 착안하여� 본� 구절에서� 바울� 자신이� 직접� 쓰는� 부분이� 시작된다는� 것을� 강조한다고�

한다.� 이� 견해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 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바울� 자신이� 본서신의� 진실성을� 증명

하기� 위해서� 직접� 펜을� 들었으며�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 특별히� � 강조해야� � 할� � 부분이� � 있었음을� � 알

수� � 있다(Ridderbos).� 한편� '쓴'에� 해당하는�헬라어� '에그랖사'는� 부정� 과거로�발신자가� � 수신

자의� 편지를� 읽는� 시점을� 염두에� 두어� 집필� 시점을� 과거로� 묘사하는� 서신적인� � 용어이다.� 그러므로� 본

절에서는�헌재적인�의미로� '쓰고있는'이라는�뜻으로�이해해야�한다.

=====6:12�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 -�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율법주의자들은� 전

통적인� 유대주의자들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율법을� 진실하게� 지키려는� � 유대인이라기� 보다는� 이

기적인� 욕심을� 따라� 사는�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양을� 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프로

소페사이(*� � � � � � � � � � � � � � � � � � � � � � � )는� � 드물게나타나는�단어로� '좋은� 모양을�낸다'라는� 의미이다.� 이

러한� 의미로� 봐서� 그들은� � 인간적인� 겉치레만을� 일삼는� 자들이며� 겉과� 속이� 다른� 자들이다.� � �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 그들은� 할례를� 행함에� 있어서도� 언약적인� � 관계로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외

형적인� 모습만을� 갖추기� 위해� 행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할례는�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께서� 행하셨던�

할례나(눅� 2:21)� 또한� 디모데에게 할례받게했던(행� 16:3)� 바울의� 할례�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그들

은� 단지� 육신의� � 유익을� � 위해할례를� 행하였다.� 본절의� '육체'는� 부패한� 인간� 본성과� 이웃을� 경멸하는�

종교적� � 자만심을� 뜻하기도� 하며� 인간의� 신체� 중에� 할례받은� 한� 부분을� 더�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말로

서(Ridderbos)� 그들의� 자랑이� 얼마나� 편협되고� 초라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가를� 지적한다.� � � 그리스도

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 -� 할례를� 요구하는� 율법주의거짓� 교사들이� 그리스도를�

선생이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는� 인정하고� 있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기피하고� 싫어하였다.� 율

법주의자들이� 십자가를� 싫어하는� 이유는� � 크게� 두� 가지이다.� (1)� 십자가는� 유대주의자들이� 스스로� 세

워놓은� 율법적인� 의의를� 부인한다.� 그래서� 자신들을� 죄인으로� 인정해야� 하기때문이다.� 게다가�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저주받은� 자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문제� � 때문

이다(Boice).� (2)갈라디아의�율법주의자들이�십자가를�전파하게되면�그리스도의� � 사역과�효력을�증거해

야� 되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할례를� 부인해야만� 한다.� 만약� 그들이� 할례를� 부인한다면� 그들은� 전

통적인� 유대주의자들로부터� 박해를� 받게� 될� 것이다.따라서� 그들은� 십자가�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고�

해도�박해를�받지�않기� 위해서� � 십자가를�회피하고�할례의�정당성(正當性)을� 언급하였을�것이다.

=====6:13� � 할례�받은� 저희라도� -� '할례�받은'에�해당하는�헬라어� '페리템노메노이(* � �

)는� '할례를� 행하다'는� 뜻을� 가진� '페리템노'(*� � � � � � � � � � � � � � � � � )의� 현재� 중간태로서� '스스로� 할례를�

받은'� 또는� '할례를� � 좋아하는'이라는� � 의미이다.어떤� 사본(P� ,B,� F)에서는� 완료� 수동태인� '페리테트메

메노이'(*� � � � � )를� 취하여� 이미� 할례를� 받은� 거짓� 교사들을� 선명하게� 지시한다(Ridderbos).� � 혹자는�

본문이� 현재� 갈라디아� 교회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자들,� 다시� 말해서� 율법주의자들에� 의하여� 할례를�

받은� 자들을� 더�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시제를� � 현재형으로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Huxtable,� Howard).� 또한� 보다� 오래된사본(*� � ,� A,� B)에서는� 현재형을� 취한다.� 이처럼� 현제형을� 취

하면�모든� 거짓� 교사들과�추종자들�다� 지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타당한� 듯하다.� � � 스스로�율법은� 지키

지�아니하고� -� '지키지�아니하고'의� 헬라어� '우데� 퓌랏수신'(* )은� 고의적

인� 율법� � 파기를� 의미한다.� 갈라디아� �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율법을� 지키기위하여� 할례를� 행한다고는�

하지만,� � 실제로는� � 율법준수를� 도외시하는� 거짓� 무리들에� 불과하였다(12절).� 그들은� 유대교를� 따르는� �

자들도아니었다.� 그들은� 눈앞에� 있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며� 자기의� 육체를� 자랑

하기� 위해� 모든� 진리들을� 마음대로� 변질시키는� 자들이었다.� � �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 그

들은� 진리를� 따른다거나� 율법을� 행한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지� 않았다.� 단지� 그들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 하는� � 것을자랑으로� 삼고자했다.� 그들은� 자아� 중심적인� 교만에� 빠져� 육체의� 흔적을� 신

뢰하는� � 거짓�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 자신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할� 뿐만� � 아니라다른�

사람이�멸망의�길로� 가는것을�기뻐하며�다른�사람들의�희생을 통하여 자기들의유익을� 찾고자� 하는�

이기적(利己的)인� 사람들이었다.

=====6:14� �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 � '결코...없으니'에� 해당하는� '메� � 게노이토'(*� � �

� � � � � � � � � � � � � � � )는� 70인역에서�주로� 사용된�용법으로(수� 22:22;24:16)� �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소원

을� 나타내는� 화구법이다.� 이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 십자가를� 부끄러워하면서� 할례를� 자랑하는� 율법주

의자들의� 삶의� 태도와� 대조를� 이룬다.� 세상이� 보기에� 십자가는� 연약함과� 불행의� 상징이었지만(고전�

1:25)� 바울에게� 있어서는� 자랑이었다.� 이러한� 역설적인� 표현은� 바울이� 가졌던� 진리의� 본질과� 삶의� 동

기와�목적을� 선명하게�대변한다.� 한편� '내게는'(*� � � � � � � � ,� 에모이)이라는�표현은�온갖� 불의를� � 무릅쓰

고끝까지� 진리를� 사수하는� 바울의� 열정을� 나타낸다.� � �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 바울

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사건을� � 자신에게� 적용시킨다.� 그도� 한때� 세상의� 영광들을� 구하며� 인간적인� 성공

을� 바라보며� � 살았던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다(빌� 3:3-6).� 그러나� 이제� 그는� 냉철하게� 세상과� 자신을� �

구별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새생명을� 자랑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히고'라는� 절대적인�

표현�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자아(自我)는� 절대로� 세상적인� 방식을� 따라� 살아갈�수� 없다.� 여기서� '세상'(*� � � � � � � � � � � � ,� 코스모스)이란�인간들의�자기�주장에�의하여�움직여

지는� 불신앙적인� 요소와� � 악의� � 총체를의미한다.� 바울이� '세상'과� '나'를� 배타적인� 관계로� 여기고� 십자

가에�못박는�것은� � 오직� �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 유일한� � 구원과� � 생명의� � 근거라는� � � 사실

을 증거한다(Ridderbos).

=====6:15�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자� -� 바울은� 구원의� 조건으로� 무할례를� 강조하지� 않는다.할례와�

무할례는� 상대적인� 요소들로서� 절대성을� 지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

한다(5:6;고전� 7:19).� 바울이� 앞절에서�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다가�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로� 관심을�

돌린� 것은� 매우� 흥미있는� 전황이다.� 이� � 말은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Ridderbos).�

'지으심을� 받은'에� 해당하는헬라어� '크티시스'(*� � � � � � � � � � � � )는� 하나님의� 행위를� 의미하기도�하며� '피

조물'을� 뜻하는� '크티스마'(*� � � � � � � � � � � � ,� 약� 1:18)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특히� '크티시스'는� 본

절에서� '새로'의� 헬라어� '카이네'(*� � � � � � � � � � � )와� 함께� 쓰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재창조된� 하나님의�

피조물을� 강조한다(엡� 2:10).�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들은� 삶의� 동기와�

목적도� 새로운� 것으로� 바뀌었다.� � 이제� � 성도는현재의� 삶� 속에� 미래에� 이루게� 될� 종말의� 삶을� 도입하

며�살아간다.

=====6:16� � 이� 규례를� 행하는� 자� -� '이� 규례'는� 바울이� 앞서� 말한�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그리

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며� 보다� 적극적으로� 성령� 안에서� � 새롭게살아가는� 것이다.� 이

는� 새� 언약� 곧� 복음으로�말미암아�가능하다.� � 이처럼� � 본절에서는본서의�핵심을�요약하고�있다.� 한편� '

행하는'의�헬라어� '스토이케수신'(* � � � )은� '행렬에� 맞추어� 나가다',� '규칙을� 굳게� � 지키다'라는� 뜻을�

가진� '스토이케오'(*� � � � � � � � � � � � � � )의� 미래� 직설법으로� 5:25에서� 성령으로� 행하는� 삶을� � 의미할때�

사용된� 것처럼� 새� 규례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존된� 것임을� 보여준다.� � �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

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 새� 언약의�규례를� 따르는�자들에게�베풀어진�축복은� 본절에서�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1)�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된다는� 것이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그리스도�

안에서�새롭게�거듭난�자들만이�유일한� � 하나님의� � 백성이� � 되며� � 참된� � 이스라엘� � 족속이� � 될 수� �

있다(3:29;4:28,� 29).� 참된� 이스라엘이란�민족적이며� 전통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 복음을믿어�순종케�

된� 자들로� 구성된� '새이스라엘'� 곧� '약속의� 자녀'를� 말한다(롬� 9:7).� (2)'평강'과� '긍휼'의� 은혜가� 주어

진다.� '평강'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레네'(*� � � )는� 5:22에� 제시된�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이다.� 이

는� 신약에서� 일반적으로� � 미래에� 이루어질� 축복과� 행복을� 뜻하는� 말로� 쓰여졌는뎨(눅� 2:14)� 본절에서

는� � 종말론적인구원을�함축한다(Ridderbos).� 한편� '긍휼'에� 해당하는�헬라어� '엘레오스'(*� )는� 구약의� '

헤세드'(*� � � � � � )의� 번역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한번� 택한� 백성을� 버리지� 않는� 변함없는� 은혜'

등을� 의미한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베풀어진� 큰� 은혜를� 가

리킨다.� 특히� 바울은� 이와� 같은� 축복을특정한� 무리들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무리들에게도�같은축복�속으로�초대하고있다(Huxtable).

=====6:17� � 나를�괴롭게�말라� -� '괴롭게'에� 해당하는�헬라어� '코푸스...파레케토'(*� ... � � �

� )는� '내면적인� 고통이나� 슬픔'을� 의미한다(마� � 26:10;눅� � 11:7).바울이� 당한� 괴로움은� 유대주의자들

로부터의� 직접적인� 폭력이나� 폭언이라기보다는� � 갈라디아� 고인들이� 유대주의자들에게� 미혹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안타까움이다.� � 따라서� '괴롭게� 말라'는� 구절은� 더이상� 갈라디아� 교회� 속에서� 이단자들

에� 의하여� � 미혹(迷惑)되는� 자들이� 없기를� 바라는� 호소의� 성격이� 강하다.� � �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흔적'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티그마타'(*� � )는� 소나� 양에게� 낙인을� 찍어� 소유주를� 나타내거나� 종이� 특

정한�주인의�소유임을� 나타내기위하여� '자국'이나� '소인'을� 남긴다는� 것을�의미한다.� 어떤� 신비주의자들

은� � 이'흔적'을�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의� 상처가� 그대로� 바울에게도� 생긴� � 것이라고� � 한다.일례로� 아

씨시의� 프란시스(Assisi� Francis)가� 이런식의� 거룩한� 흔적을� 받았다고� � 전해진다.� 그러나� 본절에서� '흔

적'을� 신비적�체험으로�이해하는�것에는�많은� 무리가� � 따른다(Ridderbos,� Huxtable,� Cole).� 바울이�말

한� 예수의� 흔적은� 복음을� 전파하는� � 가운데서�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수많은� 고난의� 흔적

을� 의미한다.� 그것은� (1)� 수많은� 육체적� 고난으로인하여� 실제로� 남겨진� 박해의� 상처들을� 뜻하며(고후� �

11:22-27),(2)�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의� 실천적� 의미로서� 수많은� 고난에� 동참하였음과� 고난과� �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예수를� 따랐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바울이� 소유한� 예수의� � 흔적은예수의� 고난에� 참여

함으로� 얻은� 거룩한� 증표로서� 율법주의자들이� 육체의� 자랑을� � 위해스스로� 행한� '육체의� 모양'과는� 족

히� 비교할�수� 없는� 영광스러운�것이다(행� 20:24).

=====6:18� �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 모든� 형제들

에게� 거룩한� 인사를� 함으로� 시작했던(1:2)� 본� 서신은� 갈라디아� 교회의� 형제들에게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간구하는� 기도로� 끝을� 맺는다.� � '그리스도의� � 은혜'는바울이� 지금까지� 말한� 모든� 성령의�

약속과�구원을�함축적인�의미로 표현한 것으로서저들의� 구원이� 자의적(自意的)인�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에� 달려� 있음을� 다시� 한번� 확증한다.� 특히�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 � � ,메타� 투� 프뉴마토스)라고�표현한�것은� 외형적인�모양을 추구하는율법주의자

들의�견해와는�대조적으로�하나님의�은혜가�성도들의�내적인� � 존재� � 전체에영향을�끼치길�기원하는� 의

미이다.

Recommend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