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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eb: sfmissio.wordpress.com | twitter: @sfmissio | contact: [email protected] October 28, 2012 “경계를 걷는 그리스도인”은... 열림의 대화, 나눔의 영성, 자유의 복음을 지향합니다. 주일 기도 모임: 매주 일요일 오후 5시 목요 대화 카페: 매주 목요일 오후 7시~9시 Chromatic Coffee, Lawrence & Stevens Creek, Santa Clara 요 카페 풍경 우리가 모이는 카페 의 집주인이 바뀌어 이름도 달라졌습니 다. Chromatic Coffee 라네요. 다양 한 ‘색채가 깃든’ 카 페로 풀어보니 아마도 우리 목요 대화 카페를 염두 에 두고 이름을 바꿨나 봅니다. 목요 대화 카페는 다양한 삶의 색채가 깃들어서 서로 나누고 어우러 지는 곳입니다. 이번 대화 카페에서는 스스로 신앙인도 아니요, 종 교인도 더더욱 아니라는 분도 찾으셔서 종교 바깥 에 선 입장에서 삶의 이런저런 문제와 고민을 들려 주셨습니다. 삶은 다채롭지요. 그러니 어떤 하나의 종교가 모든 대답을 줄 수는 없습니다. 아니, 종교 는 대답을 주는 곳이 아닙니다. 종교는 물음을 가 진 사람들과 함께 대화하며 동행하는 곳이라고 해 야 더 옳습니다. 우리는 삶의 외로움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었습니 다.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고 자녀가 커서 떠나가면 부쩍 외로워진다고요. 홀로 사시는 분이나 가족을 이뤄 사시는 분이나 외로움을 느끼기는 비슷하다 고 합니다. 열정적인 사랑도 젊은 시절 한때라고 맞장구치며 떠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과 한인 사회에서 이혼율 높은 것을 들어 결혼의 의미 가 뭘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지요. 참사랑은 무엇일 까요? 700여 년 전 어느 신학자는 변하지 않는 사랑의 가 장 좋은 표현은 ‘우정’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아 무래도 ‘열정적인 사랑’이 희미해지는 지점에서 ‘우정’으로 옮아가야 영원할 수 있다는 뜻으로 풀 어봅니다. 친구든 남녀이든 부부이든 가족이든, 이 제는 “우리가 나누는 우정이 뭘까?” 하는 물음을 두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일 기도 모임 앞이 보이지 않는 사 람이 한 손에 빵을 들 고 마실 것을 찾아 더 듬는 이 그림에 시선 을 멈춥니다. 우리는 이 바쁜 삶 속에서 무 엇을 더듬으며 찾고 있나요? 주일 기도 모임은 이 질문을 두고 서로 생각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경계를 걷는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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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걷는 그리스도인 2012년 10월 마지막 주 모임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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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경계를 걷는 그리스도인 경계를 걷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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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 sfmissio.wordpress.com | twitter: @sfmissio | contact: [email protected] October 28, 2012

“경계를 걷는 그리스도인”은... 열림의 대화, 나눔의 영성, 자유의 복음을 지향합니다.주일 기도 모임: 매주 일요일 오후 5시 목요 대화 카페: 매주 목요일 오후 7시~9시 Chromatic Coffee, Lawrence & Stevens Creek, Santa Clara

목요 카페 풍경

우리가 모이는 카페의 집주인이 바뀌어 이름도 달라졌습니다 . C h r o m a t i c Coffee 라네요. 다양한 ‘색채가 깃든’ 카페로 풀어보니 아마도 우리 목요 대화 카페를 염두에 두고 이름을 바꿨나 봅니다. 목요 대화 카페는 다양한 삶의 색채가 깃들어서 서로 나누고 어우러지는 곳입니다.

이번 대화 카페에서는 스스로 신앙인도 아니요, 종교인도 더더욱 아니라는 분도 찾으셔서 종교 바깥에 선 입장에서 삶의 이런저런 문제와 고민을 들려주셨습니다. 삶은 다채롭지요. 그러니 어떤 하나의 종교가 모든 대답을 줄 수는 없습니다. 아니, 종교는 대답을 주는 곳이 아닙니다. 종교는 물음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대화하며 동행하는 곳이라고 해야 더 옳습니다.

우리는 삶의 외로움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고 자녀가 커서 떠나가면 부쩍 외로워진다고요. 홀로 사시는 분이나 가족을

이뤄 사시는 분이나 외로움을 느끼기는 비슷하다고 합니다. 열정적인 사랑도 젊은 시절 한때라고 맞장구치며 떠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과 한인 사회에서 이혼율 높은 것을 들어 결혼의 의미가 뭘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지요. 참사랑은 무엇일까요?

700여 년 전 어느 신학자는 변하지 않는 사랑의 가장 좋은 표현은 ‘우정’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열정적인 사랑’이 희미해지는 지점에서 ‘우정’으로 옮아가야 영원할 수 있다는 뜻으로 풀어봅니다. 친구든 남녀이든 부부이든 가족이든, 이제는 “우리가 나누는 우정이 뭘까?” 하는 물음을 두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주일 기도 모임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한 손에 빵을 들고 마실 것을 찾아 더듬는 이 그림에 시선을 멈춥니다. 우리는 이 바쁜 삶 속에서 무엇을 더듬으며 찾고 있나요? 주일 기도 모임은 이 질문을 두고 서로 생각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경계를 걷는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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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상처와 틈에 드는 구원의 빛

“아직 소리나는 종을 울려야 하리 / 너를 완전히 하여 봉헌할 생각일랑, 잊어야 하리 / 깨지고 금 간 틈이 있지, 모든 것에는 그런 깨진 틈이 있

어 / 바로 거기로 빛이 들어오리니 / 바로 거기로” ~ Leonard Cohen, “Anthem”

상처는 모두 꿰매고 틈은 모두 메우는 것이 문제의 해결인 양 말하는 세상입니다. 꿰매고 메워도 상처의 자리는 남습니다. 또 그 자리마저 감추려다가 무리한 일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삶은 그 상처에 난 틈을 통해서 새롭게 펼쳐지곤 합니다. 완전하기 위하여 모질어지기보다는, 자신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그 약함에 구원의 빛이 스민다는 것이 고금(古今) 현자들이 들려주는 노래요, 지혜입니다.

정지 - 자유 - 의식

정지 - 자리에 앉아 지금 있는 그대로 우리 자신을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극한 사랑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느님 당신 안에 우리를 고이 안아 품어주십니다. 모든 생각을 멈추고 그 순간을 머릿속에 그려봅니다.

자유 - 하느님, 우리가 얻은 자유를 그저 당연한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도록 하소서. 하느님께서 우리 영에 내려 자유롭게 살라고 하신 축복을 기억하게 하소서. 하느님 당신의 평화와 당신의 기쁨을 우리 영 안에 채워 주소서.

의식 - 오늘 내 마음과 감정은 어떤가요? 가벼운 발걸음처럼 내 마음도 지금 가벼운가요? 아니

면, 마음 깊은 곳에 어떤 부담과 무거움이 자리하고 있나요? 우리는 어쩌면 지금 이곳에서 평화롭고 행복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쩌면 지금 이곳에서 절망감을 느끼며, 화가 난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모습 그대로 나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모습 그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복음 - 마르코 10:46~52

그 때 바르티매오라는 앞 못 보는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예수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여러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소리질렀다... 소경은 눈을 뜨고 예수를 따라 나섰다.

성서 대화 길잡이

우리 주위에는 여러 가지 신체적인 장애를 딛고 사람들에게 큰 용기와 힘을 보여주며 살아가는 이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 가족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번 여름 런던 올림픽에서 단거리 육상 선수로 나왔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피스토리우스 선수는 두 발이 없이 태어났지만, 의족을 차고 경기장을 뜁니다.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에는 앨리슨 래퍼라는 사십 대 여인의 전신상 조각이 있습니다. 두 팔은 없고 발도 짧게 태어난 그가 임신한 모습을 담은 상입니다. 그는 두 팔 대신 짧은 두 발로 아이를 키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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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불행이나 불운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에 더 깊은 성찰을 가져다주는 선물로 변화시키는 이들과 그 가족이 우리 곁에는 참으로 많습니다.

이분들이 던지는 질문은 분명합니다. 어떤 장애도 없이 모든 능력을 갖추고 태어났다는 이른바 ‘정상’인 우리는 그 능력을 하느님의 선물로 깨닫고 다른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나누는 삶을 살고 있나요? 우리가 태어나면서 얻은 신체적인 조건을 두고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그 건강한 손과 발로 부족한 이들의 손과 발이 되어주고 있나요? 그러기는커녕 우리는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이분법을 무의식 속에서나마 당연시하여 그분들을 불편해하며 차별하지는 않나요?

눈에 보이는 장애가 없더라도, 우리는 여러 모양으로 내적인 장애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장애와 한계를 인정하면서 하느님께 도와 달라고 외치며, 이웃과 더불어 겸손하게 살아가고 있나요?

시각 장애 탓에 거지가 된 바르티매오는 자신이 앞을 볼 수 있다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남들의 구박을 무릅쓰고 당당하게 외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 태도를 그의 신앙으로 인정하십니다. 그의 당당함이 그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아니 그를 구박했던 ‘수 많은 제자들’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기쁜 제자가 됩니다. 예수를 따랐다는 ‘많은 제자들’과, 시각 장애인이요 거지였던 바르티매오는 어떤 점에서 달랐을까요? ‘쫄지 않는 당당함’은 신앙의 큰 덕목인 것이 분명합니다. ***

그리고 우리는 오늘 Ubi Caritas “사랑 베푸는 곳마다” 를 함께 불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