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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 회고록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김우재 지음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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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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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홍사 회고록

인도네시아에핀무궁화

김우재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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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회고록인도네시아에핀무궁화

초판1쇄인쇄 2009년9월24일초판1쇄발행 2009년9월28일

지은이·김우재펴낸이·이기현펴낸곳·현문미디어

등록|2001년 10월15일(제03-01326호)주소|서울시용산구한강로2가314-1 용성비즈텔802호전화|(02)706-2367팩시밀리|(02)718-5752홈페이지|http://www.hmbooks.co.krE-mail|[email protected]

ISBN|978-89-92751-65-0 03800

·잘못된책은구입하신서점에서바꾸어드립니다.·가격은표지뒷면에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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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김우재(洪史金優載)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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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유통본사사옥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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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가한자리에모인어느행복한날. 어머니와저자를비롯한 3남매,

그리고며느리와외손자들이함께했다.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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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김우재와박은주의결혼식. (19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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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집에서아버지(고 김사희)와 어머니천순복여사. (1970년)

▼ 김우재청년과박은주규수의약혼식때모습. (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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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종헌의가족과단란한한때를보내는저자부부.

며느리양수려와큰손자범구, 둘째손자민구, 셋째손자윤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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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에서졸업식을마치고부모님에게감사하는아들종헌.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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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부인회회장재임시절국민훈장석류장을받은

아내와기쁨을나누는저자.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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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무실로김수환추기경님을찾아뵙다. (2003년)

▼ 성베네딕트부산수녀원으로이해인수녀를방문하고.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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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프로모이민청장부인에게이리안자야불우이웃돕기연말성금을전달하는

저자. (1997년)

▼ 마르화티한센병재활원에위문품을전달하는저자와김우진사장, 그리고김정렬모세

신부, 요한 수녀의모습.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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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폭동때수프랍토수경사령관(중앙)을 만나교민의신변안전을약속받고타룹

대통령자문위원과인사하는저자. (1999년)

▼ 자카르타남부시청에서담당간부와지역사회개발을위한여러의견을나누며협력을

다짐하는모습. (2002년 10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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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동기생인밤방수실로유도요노와친분이두터운헌병감과함께.

왼쪽으로부터밤방수실로유도요노(현 대통령) 안보장관,

자스리마린전헌병감, 저자.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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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유통의불우이웃돕기행사에나선저자와아내. 처음에는수혜자가 5명에불과

했으나 1천여명으로늘어났다. (2001년)

▼ 화산폭발재해민을돕기위한구호식품을대통령궁으로전달하는저자.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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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음악회에서모은한센인재활원을위한수익금을이경재신부(중앙)로부터전달받는

레오수코토주교와밴드슐렌신부, 강루치아나수녀, 봉이수녀, 마리젬마수녀, 저자.

(1995년)

▼ 한센인자녀들에게구호품을나누어주는저자.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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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병어린이수술돕기모금행사에초대된가수이미자씨와수하르토대통령며느리,

민형기대사부인, 주최자인아내박은주한국부인회회장. (1996년)

▼성나자로마을돕기자선음악회에오신김수환추기경님을영접하는저자부부.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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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로김대중대통령예방.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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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UN 사무총장취임환영식에참석한저자부부. (2006년)

▼ 로스앤젤레스오렌지카운티가든그로버시장으로부터명예시민권을받는

저자와아내박은주사장. (2008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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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우수남(중앙), 김종덕프로골퍼와함께한저자. (1995년)

▼ 인도네시아재향군인회부인회장의불우이웃돕기자선골프대회에서.

왼쪽부터저자, 파무지대통령자문위원, 수리얏나대통령자문위원,

트리스트리스노전부통령, 타룹 중장, 프트라전경찰중장.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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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인한국항공대학교여준구총장으로부터명예의전당에오르는최고영예상인

항공우주상을수상한저자. (2007년)

▼ 모교후배 350여 명이모인가운데「시장경제와성공한기업인」이라는주제로특별

강연하는저자. (2008년 1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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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국회부의장을방문한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인도네시아지회김우재회장

일행. 좌로부터김종헌총무, 양영연수석부회장, 저자, 고문에추대된화트와부의장,

최동묵부회장. (2008년)

▼ 후생성장관으로부터인도네시아보건복지훈장을받는저자.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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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사옥증축을축하하며평소우의를다져온현지종교지도자들과한마음으로

기도하는저자. (2008년)

▼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동남아연합회회장으로선출된뒤권병하전임회장으로부터

대회기를넘겨받는저자. (2009년 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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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세안최고경영자(CEO) 특별정상회의에서이명박대통령에게인사하는저자.

저자는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동남아시아협의회회장자격으로참석하였다.

(2009년 5월 31일 제주국제컨벤션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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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에핀무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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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해외사업가로서남기고싶은이야기

1977년, 나는오지중의오지칼리만탄에서원목개발사업장에뛰

어들면서인도네시아와인연을맺었다. 첫직장이었던대한항공공사

(KNA·지금의대한항공) 오사카지점생활 3년을포함, 10년간쌓은

근무경력을미련없이청산하고해외사업개척의꿈을펼치기위해

뛰어든대변신이었다.

그렇다고믿는데가있었던것도아니었다. 짧지않은직장생활경

력과 30대중반의젊음을담보로결행한, 어찌보면무모하기까지한

모험이었다. 그러나 정글지대의 벌목사업은 뿌리내릴 겨를도 없이

무산되고말았다. 전혀예상치못한현지정부의원목수출금지조치

때문이었다.

이리하여호구지책으로시작한것이교민을대상으로한김치제

조납품이었다. 다행히주문이쇄도함에따라가내수공업이식품유

통업으로발전하고, 이를발판삼아건설업과관광업, 부동산관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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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까지진출하는등어엿한중소기업의모습을갖추게되었다.

내인생의발자취를더듬어보면, 남못지않게굴곡이많았다고생

각한다. 무모한도전과시행착오로후회하기도했고, 역경에처하여

절망감에빠진적도적지않았다. 그런가운데주위로부터많은도움

을받았다.

나는글재주는없지만, 크고작은일을겪을때마다메모해두는

습관이있었다. 인도네시아생활이 30여년되다보니어느새많은분

량이되었다. 4년전문득이기록을그냥묵혀둘게아니라, 한권의

책으로엮어보는게어떨까하는생각을하게되었다.

그런데정작원고를쓰기시작하고보니생각보다훨씬어려운작

업이었다. 분량만쌓였지잡다하고중복되는부분이많았다. 대충정

리해서될일이아니었다. 게다가나는문필가도아니다. 그래서도

중에포기하려고했다. 그러나내가인도네시아에와서곤경에빠져

난감했을때지푸라기라도붙잡고싶은심정으로누군가를찾던순

간을떠올리게되자, 겪은일들을그대로밝히고싶은충동이일었

다. 경험자로서특히해외로나가사업의꿈을펼쳐보고싶은젊은이

들에게길잡이가되고싶었던것이다.

여하튼인도네시아는천혜의자원을보유하고있는자원대국이자

인구 2억 4천만을헤아리는매력적인거대수출시장이다. 재외동포

750만시대를맞은한국의상황에비추어볼때미래의강대국인인

도네시아와의교류는필연적이며, 상호이익증진에기여할가능성이

매우크다.

물적·인적 교류는 새로운 문화를 형성한다. 나는 식품유통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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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서식품문화가한나라의전통문화와도직결되고있음을체험하

였다. 거기에는 나의 조국에 대한 애정과 30여 년 동안 살며 정든

‘제2의고향’인도네시아에대한고마움이스며있다. 이책의제목

을『인도네시아에핀무궁화』로붙이게된이유다.

그런데회고록형식을취하다보니가족과관계되는사소한얘기

들도나오지않을수없었다. 이점이다소쑥스러웠지만, 오히려이

런데서인간적인체취를느낄수있을것이라는생각에서자연스럽

게기술하였다.

출간을준비하는가운데존경하는김수환추기경님께서친히분에

넘치는격려의글을남겨주셨다. 안타깝게도선종을하신뒤에출판

을하게되어죄송하기한량없다. 이자리를빌려삼가김수환추기경

님의명복을빈다. 아울러지난 3년간시간을내어원고를읽고꼼꼼

하게보완할부분을지적하며정리작업에도움을주신사돈어른양

영식전통일부차관과부미관광박훈규사장에게도감사를드린다.

이책은나의회고록일뿐아니라, 사랑하는아내젬마의인생발자

취라할수있다. 부족한남편을위해평생을함께하도록아내를주

신주님께감사할따름이다. 끝으로이책으로인해얻어지는수익금

은무궁화재단을통하여인도네시아의어린이심장병수술비용에보

태게될것이다. 이모든이들에게하느님의가호가있기를바란다.

2009년 8월

자카르타에서

홍사 김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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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글|

『인도네시아에핀무궁화』가준감동

해외에서조국을빛낸훌륭한분들의이야기를우리는가끔접하

게됩니다. 그 중의한분으로인도네시아에계시는김우재베드로

회장님과박은주젬마님을꼽을수있겠습니다. 두분내외분은교포

로서, 신자로서교민을위해, 동시에신자공동체를위해복음선교와

이웃사랑실천으로수없이많은업적을남기셨습니다.

더욱이현지주민들로부터도존경과신뢰를받고있다니,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그중에서도인도네시아에서 30년동안산림개발을시초로무궁화

유통을비롯한여러사업체를일구기까지, 여기에따르는많은어려

움과시련을이겨내고끝내는성공한이야기는아름답고감동적입니

다. 그런뜻에서『인도네시아에핀무궁화』의출판은대단히뜻이깊

습니다. 진심으로축하드립니다. 이제많은분들이이책을읽고감

동과기쁨을함께나누기를바랍니다.

(한국천주교초대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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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의글|

인니에한국식품문화정착에기여

먼저김우재회장이인도네시아에서 30년의삶을엮은책을발간

하심을진심으로축하드립니다. 나는한국사람중에서김회장을처

음친구로사귀면서 27년간변치않는오랜우정을나누고있습니다.

그는외국에살면서자녀들을모두잘교육시켜세자녀모두훌륭한

배우자를맞이하여혼사를치렀음을, 혼사때마다참석한본인은잘

알고있습니다.

김우재회장은나의친구이자한국을알리는사업을하여성공한

분으로서, 인도네시아와한국간의경제발전과인도네시아에한국식

품문화를정착시키는데크게기여하였습니다. 뿐만아니라, 외국인

으로서는보기드물게현지사회의불우한이웃을돕는일을지속적

으로펴나가는모범적인한국인사업가입니다.

나는이처럼민간인으로서인도네시아에한국의이미지를훌륭하

게심어준김회장에게박수와함께감사를드립니다. 앞으로도우리

인도네시아에서하는사업과가정이번영하고한국의아름다운모습

을계속심어주시기바랍니다.

인도네시아체육회장, 전교통부장관, 퇴역육군대장

아굼구멜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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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TA SAMBUTAN

Terlebih dahulu saya ucapkan selamat atas peluncuran buku

kehidupan selama 30 tahun di Indonesia oleh Chairman Kim Woo Jae.

Sahabat saya yang pertama diantara orang ? orang Korea adalah Bapak

Kim Woo Jae dan selama 27 tahun persahabatan tetap sejati dan tidak

pernah berubah. Saya melihat beliau sukses dalam mendidik anak ?

anaknya, ketiga orang anaknya sudah sukses dalam berkeluarga dan

setiap mereka merayakan pernikahan saya selalu hadir.

Bapak Kim Woo Jae adalah teman saya yang sukses dan salah satu

orang Korea yang mengembangkan budaya Korea di Indonesia. Beliau

telah berpartisipasi untuk mendorong perekonomian Korea dan

Indonesia serta berperan besar dalam memperkenalkan makanan dan

minuman Korea di Indonesia. Selain itu beliau sangat aktif dalam

membantu orang? orang yang kurang mampu dan banyak bekerja di

bidang kesejahteraan sosial terhadap masyarakat Indonesia. Ini dicontoh

sebagai suri tauladan terhadap masyarakat Indonesia dan juga sebagai

orang yang sukses dalam bidang bisnis diantara orang ? orang Korea.

Saya secara tulus hati memberikan penghargaan dan rasa kagum yang

setinggi ? tingginya kepada beliau yang telah memberikan citra yang baik

khususnya citra Korea kepada Indonesia secara pribadi. Untuk

selanjutnya saya mengharapkan beliau tetap sukses baik alam bidang

bisnis maupun keluarga serta terus menanamkan citra Korea yang baik di

Indonesia.

KETUA UMUM KONI PUSAT

AGUM GUMELAR, Msc

Jenderal (Purn) T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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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프롤로그/ 세월의빗장을열며─36

제1 장/ 충청도소년상경기

방앗간김대부집맏아들─42

‘바른길’가라고당부하시던아버지─45

동네가부러워한서울유학길─47

활공의체험속에서키운야망─54

눈매고운처녀박은주와의만남 ─63

제2 장/ 열정만믿고덤빈정글에의도전

새로운삶의무대를찾아서 ─68

인도네시아는흙냄새부터다르더라 ─70

원목개발의꿈안고칼리만탄정글로 ─74

경비행기타고임지탐사에나서다 ─77

정글, 또다른고행의길 ─81

급류에뛰어들어구해온장비부품 ─90

산돼지, 맹수들이야기 ─94

대침으로정강이핏줄을따다 ─99

목숨을건원목수송작전 ─102

탈진속의나를살린숨바쿵강의밧줄 ─106

제3 장/ 인내로버틴시련의세월

고생한보람도없이빚만떠안다 ─112

학비부담덜어준소중한장학금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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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이사라진아내 ─120

원목사업접고식품업으로전환 ─126

전세비행기까지동원한김치수송 ─129

배짱으로따낸공사장의식당운영권 ─133

새우잠으로버틴코리아가든시절 ─136

제4 장/ 맨손으로실현한코리언의꿈

은행빚없이물류센터신축 ─144

건축공사장에서태어난여덟마리의강아지 ─150

상호가된‘무궁화’의배경과성장추세 ─152

스나얀지역이코리아타운으로불리기까지 ─156

각종면허도따고건설업에진출하다 ─160

방부제쓰지않는본브레드제과점개업 ─164

제5 장/ 신앙생활로시작된봉사활동

아내의기사노릇하다가종교에입문 ─170

중보기도에감사하며보답의길모색 ─176

이해인수녀와의만남 ─178

한센인촌위문과성나자로마을돕기 ─182

김수환추기경님을뵙게되다 ─189

재활양로원방에걸린부부의명패 ─194

심장병어린이수술지원에나서다 ─197

불우이웃돕기는나를돕는것 ─200

이슬람성전에서드린가톨릭신자의기도 ─205

장학회설립으로자녀가받은은혜에보답 ─207

세계순방으로발전한조국통일기도회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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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 장/ 인도네시아에서사업하기

뜬구름잡기안성맞춤인나라 ─222

기반이되는이름석자의신용 ─227

위험에서도생명을건지는자기관리 ─229

법을지키지않는사람들 ─231

인도네시아에서성공하는비결 ─233

사업가에게는기(氣)가무기다 ─235

한국기업들의실패사례 ─237

한국투자자들의고충 ─243

고용인해고의난제들 ─245

어떻게투자해야성공할수있나? ─248

현지파트너의결정은신중히하라 ─252

제7 장/ 인도네시아에서살며, 겪으며

인도네시아로오세요! ─256

이나라의고유문화와관습 ─259

후회한적없는선택, 제2의고향 ─262

부모세번죽인현지인의기막힌거짓말 ─264

도둑질은‘내손이했다’는식모의변명 ─267

물들어오는셋집에서밤도둑잡기 ─268

지팡이에과일이열리다 ─269

원주민의쌀밥이야기 ─272

두리안과일을손톱으로쪼개다 ─277

김우재표선물1호가된생강사탕 ─280

이곳에서골프는사치가아니다 ─282

열대지방에서건강을유지하는비결 ─285

아름다운신들의섬발리 ─287

Page 3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자바섬의‘파리’반둥 ─301

자바문화의중심지족자카르타 ─306

언어와격언에얽힌에피소드 ─313

제8 장/ 열대의나라에한국을알리다

수하르토박물관에걸린낡은한복 ─320

세계적규모로성장한한국국제학교 ─325

인도네시아전역으로퍼진한국식품 ─327

차세대동포위한기성세대의역할 ─333

폭동이겨낸한국교민의의지 ─336

인도네시아를방문한한국의역대대통령 ─352

제9 장/ 고생끝에낙이오더라

흠없는성공의열매를따기위하여 ─358

잘이루어진3남매의혼사 ─361

대희년에입맞춘천국의문 ─372

꿈에본지옥과천국사이 ─377

‘해피통신’의취재대상으로 ─379

회갑맞아찾은여행지페블비치 ─382

봉사하는마음으로맡은직책 ─386

손자의재롱과아들의분가 ─394

스스로느끼는행복 ─397

4대가한집에모인기쁨 ─400

에필로그/ 나는아직도할일이많다 ─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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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세월의빗장을열며

“오늘하루도힘차게, 열심히, 그리고행복한마음으로지내길!”

앞사람의어깨와등을두드리면서나는속으로몇번이나중얼거

렸다. 50여명의본부직원들이둥그렇게원을그려서로의등을두드

리고있었다. 무궁화유통본점의아침은이렇게시작되었다.

모든직원이함께하는아침조회가끝나면서로등을두드려주며

격려와따뜻한정을나누는것이우리회사의전통이다. 활짝웃는

얼굴로서로에게힘이되어주면서시작하는하루는매일매일보람차

고활기가넘친다.

조회를마치고사무실로돌아와무궁화유통사장직을맡아회사를

알차게꾸려가고있는아내인박은주사장과함께새로시작하는제

과사업에대해의논을했다.

의논이거의끝나갈즈음에김종헌이사가들어왔다.

3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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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식품의약품안전청에새로등록하는물품입니다.”

김이사가들고온결재서류를꼼꼼히살펴본다음사인을했다.

인도네시아에있는대부분의식품회사들은자신들이유통시키고있

는식품들을식약청에신고하지않고사업을하고있었다. 그런데이

제는정부에서강력하게규제를하기때문에등록하지않는식품의

경우사업을할수없다.

나는사업을시작할때부터모든식품들을식약청에신고했다. 다

들뭐하러돈들이고시간들여서번거롭게그렇게하냐고말했지만,

나는원칙을지켜야한다는나의신념대로일을추진했다.

그런일이전화위복이되어지금에와서는오히려사업상의이득

을보고있다. 무궁화유통이공급하는모든식품들은식약청에신고

가되어있어서공식적으로거래를할수있기때문이다.

나는가끔선견지명이있다느니, 사업적안목이뛰어나다느니하

는말을들을때가있다. 무슨일이든원칙대로하자는신념에따르

다보니그렇게되었다고할수있다. 아내의말처럼 1+1=2일수밖

에없는나로서는그로인해답답하다는소리를듣기도하지만, 길게

보면그것이옳은길이었음을깨닫게될때가많았다.

그점이확인될때까지는몇년이채걸리지않았다. 2008년 11월

에이르러중국식품에서멜라민이발견되는소동이일어났다. 인도

네시아정부의강력한정책으로부정식품이단속되고, 외국식품수

입통관규정이엄격히시행되면서등록되지않은부정식품이뿌리를

뽑히게되었다.

이에따라이듬해정초부터그동안경쟁적으로등록절차를밟지

프롤로그 / 세월의 빗장을 열며• 37

Page 3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않고불법으로식품을유통해온중국, 일본등일부업체들이사업을

정상적으로할수없는처지가되었다.

그러나 무궁화유통은 예외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자유무역협정

(FTA)에대비하고정부의규정을준수한결과였다. 그러다보니어느

새전세계식품수입회사가운데서가장많은식품을등록하고정상

적인사업을해온건실한업체라는평판을듣게되었다. 이는회사가

지속적으로성장할수있는근간이되었다.

나는사장인아내가나간뒤에창밖을바라보았다. 남들은가족기

업이라혹시부정적인시각을가지고볼지도모르지만, 내겐기업과

가족이하나일수밖에없었다. 다행히아내나아들도사업을함께하

는동지로서손색이없으니이또한복이아닌가싶다. 그래, 감사하

고또감사할일이지. 나는자리에서일어나창쪽으로걸어갔다.

“무슨생각을그렇게골똘히하십니까? 또옛날생각하세요?”

아들의목소리에나는현실로돌아왔다.

“오늘따라그때일이생각이나네. 서른살이넘은내가모든것을

걸고이땅에오던일말이야.”

이런날은그냥사무실에앉아있을수가없었다. 특별히잡힌일정

도없어아들과함께나들이에나서기로작정하였다. 나들이라고는

하지만, 대개는드라이브삼아교외로나갔다가물류창고에다녀오는

경우가많았다. 왕복 2시간이넘는거리였다. 그러나오늘만은안락

한승용차의자에몸을기댄채아무데나부담없이달리고싶었다.

차는어느새고속도로를달리고있었다. 공항고속도로를타고 30

분가량달려야우리나라읍정도의도시풍경이사라지고, 길양쪽에

3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3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고층빌딩들이나타난다.

자카르타는해안가에위치한평지도시이므로우리나라와는달리

산을쉽게볼수없다. 중심부에서고속도로를통해약 1시간반을

외곽으로달려야보이기시작한다. 산이없는도시의중심가나오래

된주택가를제외하고는교외에는집들이빽빽이들어차있는모습

을볼수가없다.

그런데빈공간이많은데도자카르타의주택난은심각하다. 도심

의큰길은국제도시에비해크게뒤지지않지만, 중심대로나주택가

를벗어나면빈민촌의모습이고스란히드러난다. 사실자카르타를

처음방문한사람들은어수선하다는인상을받기쉽다.

가장큰이유는한국과는정반대인차선때문이다. 운전석이오른

쪽인데다, 반대차선으로달리는자동차들, 행인들은신호등은있으

나마나한존재인듯아무데서나길을건넌다. 더욱신기한것은그

모습을보고도전혀신경을쓰지않는교통경찰이다.

시내를돌아다니다보면, 도로 곁에모여노는젊은이들, 뭔가를

악기처럼두드리며돈을구걸하는어린이와아이를안고있는아줌

마들, 이와함께담배나음료수를팔고다니는행상인들을흔히보게

된다. 이모든모습들이그리좋은인상은아니지만동남아도시라면

어디서나예사로목격하게되는풍경이기도하다.

그런데도묘하게생명력을느끼게되는곳이자카르타이다. 어수

선하면서도정겹고무질서하면서도에너지가넘치는이도시는지금

까지내삶의의지를꽃피워준중심무대임이분명하다. 그래서조국

인한국과는또다른의미로내게더없이소중한곳이다.

프롤로그 / 세월의 빗장을 열며• 39

Page 4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이주초기에는죽음과도같은온갖고초를겪기도했으나, 그러한

경험이오히려나를자극시키고오기를키우게했다. 그런시련앞에

서낙담하여주저앉고말았다면, 아니, 결단의기회를놓치고망설이

다가도전조차하지못했다면, 오늘날의무궁화유통은존재하지않

았을것이다. 지난세월을되돌아보면인도네시아로건너온것은참

으로잘한일이라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성공하겠다고다짐했던산림산업은실패했지만, 난

한번도인도네시아로향했던그날을후회해본적이없다. 시간이갈

수록 30년전내가내린결단에스스로만족하고고마워하고있다.”

차에동승한아들이나의말에화답했다.

“저도늘감사드리고있습니다.”

길가에시골특유의풍경이나타나면서나의상념은어느새유년

시절의고향으로달려가고있었다.

4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4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제1장

충청도소년상경기

Page 4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방앗간김대부집맏아들

중서부서해안에자리잡은홍성군은광천(廣川)과홍성(洪城), 2개

의읍을거느리고동쪽에예산군이, 서쪽에는안면도가, 남쪽은청양

군과보령시가, 북쪽으로는서산시와예산군이에워싸고있는충청

남도의 9개군가운데하나이다.

차령산맥의지맥인오서산(烏捿山)과지기산(智基山)이각각동남쪽

과북서쪽에뻗어있고, 꽤 큰개천이중앙을가로질러천수만으로

흘러들어가는광천읍은 35.16㎢의면적에광천리와대평리등모두

13개의마을로이루어져있다.

면이었던광천이읍으로승격된것은내가태어나기 1년전의일

이었다. 나는이가운데하나인월림리라는시골의부유한농가에서

1943년음력 2월 28일, 3남3녀중장남으로태어났다. 호적에는이

보다늦은 5월 3일생으로되어있다.

사자(思字), 희자(熙字)의이름을가진무주(茂朱) 김씨사정공파(寺

正公派) 19대손인아버지는안면도가본향으로, 머슴을두고농사를

지으면서방앗간까지했다. 갑부는못되었지만해마다땅을늘려나

갈만큼동네에서알아주는부자였다.

일제강점기때행정구역의개편에따라월곡리(月谷里)와죽림리(竹

林里)가하나로합병될때두마을이름에서한자씩따서지었다는

월림리(月林里)는 뒷동산에서 보면 차령산맥 줄기인 오서산이 우뚝

솟아보였다.

4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4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월림리는‘달이뜨는숲’이라는뜻의낭만적인분위기를주는그

런마을이다. 마을 사람들은아버지를대부(代父)라고불렀다. 믿고

기댈수있는어른이라는의미였다. 그래서주변에서는어려운일이

있거나문제가생기면자문을하러올때가많았다.

대청마루와사랑채를포함하여 6개의방이있는우리집은양쪽에

대문이있는전형적인초가집이었다. 당시농촌에는기와집이없었

다. 대추나무가지가지붕위로늘어진대문을나서면보리밭이시원

하게 펼쳐지고, 집 뒤로는 소나무와 밤나무들로 숲을 이루는 산이

150여m 거리에서정겹게굽어보고있었다.

농촌의봄은한가로웠다. 매화와철쭉, 진달래가흐드러지게피었

다가질무렵이면어느새초여름이다가와있었다. 토끼풀을뜯는다

며동네조무래기들이한바탕북새통을치고지나간들녘에는이슬

머금은풀잎들이햇볕을받아눈이부셨다.

나는이들과진배없는농촌아이였다. 친구들과어울려마을을돌

아다니노라면 대청마루나 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즐기는 어른들의

모습을어렵지않게볼수있었다. 행복하게느껴지는정경이었다.

정초에는시골아저씨들이사랑방에모여먹고마시며놀았다. 우리

집사랑방은동네쉼터나다름없었다.

초겨울이되면보리밭에는개똥이많았다. 동네어른들은망태기

를어깨에메고이른아침부터그것을주으러다녔다. 지금도우리

집앞에까지와서개똥을줍던어른들의모습이어른거리곤한다.

개똥도먼저일어나는사람이줍는다. 부지런한사람에겐당할재

간이 없다. 영어 격언에도“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먼저 잡는

제1장 / 충청도 소년 상경기• 43

Page 4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다.”(Early bird can catch the worm.)는말이있다. 나는이격언을매

우좋아한다. 사업초기에도이말을염두에두고일했다.

나는보통시골출신의한국인이라면공유하는전원적인환경아

래서자랐다. 어린시절의나는개구쟁이였다. 공부보다는동네아이

들과어울려놀기를좋아했다. 동구밖논두렁에나가개구리와미꾸

라지를잡거나토끼풀을뜯는다며들판에서시간을보냈다.

여름날에는 마당에서 힘차게 울어대는 매미를 잡으러 나무 위에

올랐다가발을헛디뎌무릎이다치는가하면, 제대로잡지도못하면

서산에올라새를잡는다고소란을떨기일쑤였다.

한번은숙부님이휴가나올때가지고온카빈소총을몰래산으로

갖고나와꿩을잡는다며설치다가부스럭대는나무꾼을꿩으로잘

못알고방아쇠를당길뻔했다. 중학교시절이었다.

이처럼나는어머니가만들어준무명바지저고리를입고등잔밑

에서밤을맞아야하는시간보다꼬마대장노릇을할수있는낮이

한결좋았다. 달리기도잘해서학교운동회때는예외없이공책과

연필따위를상품으로타와우쭐거리는가하면, 싸움도마다하지않

았다. 그래서아버지께꾸중을듣거나맞기도하였다.

중학교에진학해서도그런기질은크게바뀌지않았다. 남에게지

지않으려는기질과동네제일가는부잣집아들이라는우월감때문

이었다. 그러나살림이어려워중학교에못들어간한살위의머슴

아들을때려상처를입힌일은두고두고후회되었다.

그래도아버지는장에서씁쓰레한인삼조각을사다가나에게먹

이곤하였다. 서울에서고등학교를다니다가방학때내려와보니그

4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4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아이는이미죽어서모습을볼수가없었다.

‘바른길’가라고당부하시던아버지

나는 집에서 3㎞나 떨어진 대평(大坪)초등학교를 걸어서 다녔다.

등굣길에는다행히황씨네아이들과동행할수있어서심심하지않

았다. 산길양쪽에진달래와철쭉꽃이화사하게피어나는봄철에는

혼자서도느긋이다닐수있었지만, 겨울철이문제였다. 귀가시려

종종걸음으로발길을재촉해야했다. 그럴때는어깨에둘러멘책보

가어느정도보온이돼주었다.

서두를필요가없는하굣길은여유가있었다. 아이들과달리기반,

장난질반이런식으로걷다보면어느새집에다다랐다. 장난이지나

쳐싸움으로번지는일이더러있긴했지만, 서로말동무가돼주어지

친줄몰랐다.

그런데어느날등굣길에풀밭을지나다가지폐한장을줍게되었

다. 돈의가치를알리없는여덟살철부지가돈에대해관심을갖게

되는첫계기였다.

발이부어유난히집이멀게느껴지는날에는학교앞개울가에서

기다렸다가지나가는트럭을얻어타기도했다. 엄살과손짓한번으

로통하는공짜맛이라니, 그렇다고이런기회가자주있는것은아

니었다.

아들의교육에누구보다적극적이셨던아버지는내가걸어다니

제1장 / 충청도 소년 상경기• 45

Page 4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는게안쓰러웠는지 5학년이되자박공민교감선생님댁에하숙을

시켰다.

박 선생님은남의집을빌려쓰는처지였지만, 교육자곁에두어

공부를시키고싶어하시는아버지의간곡한부탁을거절하지못했

다. 나는부모님과떨어져있어야한다는두려움이앞섰지만, 여우와

용천배기(한센인)가나와사람을해친다는산길을피해다닐수있어

서좋았다. 이곳을지날때마다식은땀을흘리며책보를어깨에메고

뛰어가야했다. 이렇게여건이좋아지기는했으나생각만큼공부가

되지않았다. 책을펼치면얼마못가졸기일쑤였다.

하루는이불을뒤집어쓴채등잔밑에서공부하다가조는바람에

이를본박선생님이나를소나무가울창한뒷동산으로끌고가서벌

을준적도있었다. 나는대평리의끝자락인최씨네집보다도떨어진

인적이드문이곳에서졸업할때까지 1년동안하숙생활을했다.

하지만이시절, 여러가지겪은일가운데서아직도눈에선한것

은아버지가하숙을정한뒤어린아들이덮고잘무명이불을이고

책가방을들고쫄래쫄래따라오는나를돌아보며앞장서산비탈길

을걸어가시던어머니의모습이다.

예양(汭陽)천씨가문인어머니(순복·順福)가 1921년생인한살아

래의아버지에게시집온것은스무살때였다. 그리고이듬해나를낳

으셨다. 부지런하고어진어머니는아버지를먼저보내고어느새여

든여덟살이되셨다. 그러나아버지는내가쉰두살이되는해에일

흔네살의나이로세상을떠나셨다.

초등학교를마치자나는지금까지보다 1㎞나더먼광천중학교를

4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4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다녔다. 집에서 4㎞나되는거리였다. 남녀공학이었다. 그때까지도

나는공부에큰취미를붙이지못했다. 운동신경이예민해서체육은

잘하는편이었다. 아버지는이런아들에게공부하라고다그치지않

았다. 언제까지저러나하고지켜보는눈치였다.

그래도광천장터에오는날이면국밥을사주셨다. 그런날엔밥을

맛있게먹고달구지까지얻어타는호강을누렸다. 아버지께서는기

회가날때마다“남자는글을쓸때획하나하나를확실하게써야한

다.”고강조하셨다. 정도(正道)를지키라는뜻이었다. 정성없이적당

히써버린글자에무슨진심이담기겠는가. 처음부터원칙을지키는

자세야말로매사를튼튼히하며바르게사는첩경이라는것이다.

아버지는그뒤에도어른을알아보는겸손함과부모를섬기는일

을잊지말라고당부하셨다. 이무렵나도다른아이들과마찬가지로

사춘기를경험했다. 예쁜여학생과마주치면괜히긴장되고가슴이

두근거렸다.

동네가부러워한서울유학길

열여섯살이되던 1958년쌀쌀한이른봄날, 나는청운의푸른꿈을

안고장항선에몸을실었다. 동행한아버지의손에는쌀한가마니가

들려있었다. 사람들은월림리에서처음있는서울유학길이라며부러

워했다.

우리가떠난광천역은오서산을옆에끼고서해안의안면도와대

제1장 / 충청도 소년 상경기• 47

Page 4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천등이가까워상업적인왕래가번성했던곳이다. 특히부근에있는

독배는토굴새우젓과김이유명했다. 알찬굴을회로만들어먹는

맛은일품이었다. 내가고등학교과정을서울에서시작할수있었던

것은남다른아버지의교육열은물론, 장남이라는프리미엄이있었

기때문이다.

한국인이라면 어렵게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던 1950년대, 그것도

보수적인충청도의농촌가문출신으로유교적남아선호사상과가

부장적권위의식이강했던당시아버지의입장에서는당연한선택이

었을것이다.

내가서울영등포구대방동에있는성남고등학교의입학시험에합

격하여서울학생이된것은이승만대통령이통치하던자유당정권

말기였다. 이시기는 6·25동란때끊긴한강교가그대로남은상태

여서강을건너려면드럼통을띄워나무로만든부교를이용하지않

으면안되었다. 노량진한강교앞에는노점상들이즐비했다. 인분

냄새가나는흑석동쪽에는호박넝쿨이무성했고, 국군의날행사

때면인산인해를이루다시피했다.

학교는 이른바‘카이젤 수염’으로 유명한 김석원 장군이 설립한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이분은 19세기말에서울에서태어나사관양

성기관인한국무관학교 2기생으로입학했으나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면서군대생활을시작했다. 광복전에승진한일본군대좌(대

령에해당) 계급을광복후에도유지한채제1사단장으로송악산전

투에참전해육탄10용사의신화를남겼으며, 6·25동란때는수도사

단장직을맡아혁혁한전공을세우기도했다.

4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4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나는그가 1956년육군소장으로예편한후성남중고등학교의이

사장과교장직을함께맡아초석을다지던시기에가까스로이학교

의신입생이되었다. 그는학생들에게자주충절을강조했다. 그중에

도특히잊혀지지않는것은“병들어죽지말고국가와민족을위하

여싸우다죽자.”라는말이었다. 그분은 1978년에여든다섯살을일

기로작고했다. 내가인도네시아에첫발을딛고어렵게본격적인해

외활동을시작하던시기였다.

등교첫날내가처음본것은본관정문에붙어있던“쇠파이프를

불에달구어배를지져도의로운일에는충절을지킨다.”는글귀가

들어간사진이었다. 아마도사육신의모습이담긴사진이아니었던

가여겨진다. 그밑에“병들어죽지말고나라와민족을위하여싸우

제1장 / 충청도 소년 상경기• 49

고등학교시절저자는수업이끝나면영어공부를하기위해서울용산에서

영어학원이있는종로까지전차를타고다녔다. 사진은보신각과

화신백화점(현 종로타워) 사이로달리는 1960년대종로거리의전차모습.

Page 5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다죽자!”라는구호가적혀있었다.

어쨌든나의서울생활은각오부터달랐다. 중학교때거의하지못

한영어공부를할요량으로거처인노량진에서종로에있는 EMI라

는영어학원에다녔다. 당시영어강의로유명했던안현필이라는분

이경영하는곳이었다. 수업이끝나면노량진에서한강까지걸어간

뒤용산에서전차를타고학원이있는종로3가까지다녀야했다.

첫날은처음보는시가지풍경에정신이팔려여유가없었지만, 차

츰익숙해지자전차를타고가는시간을영어단어를외우는기회로

활용하였다. 차창으로스쳐가는영어간판도공부가되었다. 그뿐만

아니라깨알같이쓴영어단어를성냥갑처럼생긴통을구해다가넣

어서다니며암기했다. 처음엔이해하기어려웠던강의내용이속속

귀에들어오기시작했다. 자신이생기자서울아이들과실력을겨뤄

이겨야겠다는오기가일었다.

그러다보니교양이될만한독서에관심을가질여유가없었다.

오래지않아전교에서상위권에오를만큼영어실력이향상됐다. 서

울에올라오면서굳게결심한두가지목표가있었다. 첫째는몰매를

맞지말것, 둘째는영어를잘할것이었는데그중한가지가성사된

셈이다. 아버지는이소식을듣고크게기뻐한나머지이웃사람들을

초대하여막걸리판까지벌였다고한다.

이에자극받아나는다른과목에도욕심을부렸다. 효과적인공부

를위해반에서늘 1등을차지하는학생을고모집에끌어들여하숙

생으로만들고, 그아이가잠잘때는깨어나공부를했다. 강적을꺾

기위한이런노력의덕으로얼마되지않아그를앞지를수있었다.

5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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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되기까지에는고모의보살핌이큰도움이되었다. 객지라

는것을크게의식하지않아도될만큼주거환경이안정되었기때문

이다. 고모부(이종원교수)의학업을돌봐야하는고모의처지로서는

조카를마다할이유가없었다. 그덕분에남다른패기를가지고학업

에열중할수있었다.

하지만지방학생을얕보는서울학생들의텃세는견디기어려웠

다. 자칫하면트집을잡아구타를일삼는그들을피하기위해서는덜

맞는방법을터득해야했다. 여럿이사방에서공격해올때는길가를

피하고벽에붙는것이상책이었다. 이런방위수단도모자라나중에

는손목에다시골에서사용하던둥근쇠붙이를붕대로감고다녔다.

힘이부치면무기로사용할요량이었다.

그러던어느날장대순이라는영등포토박이가한번붙자고제의

해왔다. 평소나를벼르던고1 학생이었다. 강당뒤인유도장옆으

로장소를정하고예산과광천쪽 2, 3학년선배들에게알렸다. 서로

맞서내가밀리는상황아래서지방선배들의보호로별일이없었지

만, 47년이지난지금까지도가끔그학우의모습이떠오른다. 그를

다시만난다면그옛날학창시절의추억을서로나누며밤새도록소

주잔을비우고싶다.

이런일이있은뒤부터나는담력을기르는일에도게을리하지않

았다. 아울러나쁜일을보고도외면하는것은옳지못한행동이라고

여겨졌다. 이런방편의하나로상급반에오르자특수반에들어가검

도와유도를배우기시작했다.

첫수업때부터머릿속에깊이새겨진“의(義)에살고의에죽자.”

제1장 / 충청도 소년 상경기•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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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교훈(校訓)이은연중에영향을끼친것이다. 이교훈은좌우명처

럼 사춘기로 접어드는 예민한 소년의 가슴속에 의협심을 심어주는

동력이되어주었다. 그러나아무리고모가잘보살펴주어도기운이

한창뻗치는나이라서그런지배가고플때가많았다. 그때간식으로

먹은풀빵은참으로꿀맛이었다.

나는여름방학이되어고향에갈때마다뒷산으로올라갔다. 큰밤

나무밑에접는책상을펴고밀짚방석을깔고앉은뒤엉덩이가아플

때까지책을읽었다. 이럴즈음엔저녁밥을짓는연기가발아래마을

지붕위로모락모락피어오르곤하였다. 갑자기배가고파지는것이

었다. 내가교양서적을읽었다면아마도이런시기가아니었나싶다.

이순간머리에떠오르는것은어느명절전날막차로광천역에내

렸을때의일이다. 허기진상태로요기할곳을찾았으나통행금지시

간이임박하여문을연식당이있을리없었다. 할수없이발길을돌

려길가의밭에들어가무를한개뽑아먹으며집으로걸어갔다.

그러나고갯길이걱정스러웠다. 인가가없는곳을지나면용천배

기가나오고, 성황당이있는곳에여우가힐끗힐끗쳐다보며따라온

다는무서운고갯길이있었기때문이다. 대낮도아닌인적이끊긴한

밤중에들어가자니겁이날수밖에없었다. 그날따라어떤때는도

깨비가 나온다는 어른들의 말처럼 도깨비불 같은 형상이 번쩍이며

소리없이나타났다가사라지고또나타나곤했다.

식은땀이절로났다. 그렇게무서울수가없었다. 주먹을불끈쥐

고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간담이 서늘했다. 부스럭거리면서 불빛과

함께나타나는도깨비를발로차려는순간, 아차정신을차려야겠다

5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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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생각이들었다. 그때자세히보니성황당에걸려있던울긋불긋한

천들이억새풀과맞닿아비벼지며소리를내고있었다. 가뜩이나긴

장했던터라도깨비에게홀렸다고착각을했던것이다.

마을사람들사이에성황당고갯길에여우가나온다는말이퍼진

것은이런상황에서빚어진해프닝이었던셈이다. 이렇게자정이가

까운한밤중에야고향집에들어서면어머니는그때까지도주무시지

않고호롱불아래서명절음식을준비하느라여념이없었다.

이처럼잠시다녀가는명절에는그럴새가없었지만, 벼르던여름

방학이돌아오면뒷산에올라가목소리를단련시키는훈련을했다.

담력을기르기위해서였다. ‘야호’소리를지르거나큰소리로대중

제1장 / 충청도 소년 상경기• 53

‘3·17의거기념비’제막식에참여한성남고 18회 동문들. 우측의선사람부터

박정웅, 김영환, 저자. 이종석, 박병운, 안병조, 김만옥, 정준교, 이인일, 이진구,

안문성, 이중길, 김석호, 송진웅, 장기국, 김순성, 이충석씨. (2006년 3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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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흉내를냈다. 우선민가와떨어진산이라남의눈치를보지않

아도돼무엇보다좋았다. 서울에서기죽지않으려는내나름의생존

방식이었다.

고등학교졸업을눈앞에두고이승만정부의 3·15 부정선거를규

탄하는데모가연일일어나고있었다. 우리성남고학생들도무리를

지어영등포시내까지진출하였다. 나도어디서그런용기가나왔는

지운동선수들틈에끼어부정선거의무효를외쳤다. 죽도(竹刀)로칼

빈총을든경찰과대치했다가나는일부학생들과함께경찰서로붙

잡혀갔다.

그러나다행히교장인김석원장군이경찰서로찾아가“의로운학

생들을 석방하라.”고 강력히 요구해준 덕분에 풀려날 수 있었다.

1960년봄이었다.

그해 3월 15일이승만자유당정권의정·부통령부정선거는 4·

19 학생의거의도화선이되었다. 그후 46년이라는오랜세월이지나

모교인용마산기슭에‘3·17의거기념비’를세우게되었다. 해외에

있었지만, 나도당연히참여하였다. 관계동창생들이모이고보니예

전의혈기왕성했던청소년의기개는사라지고, 어느새반백의노인

네가다되어있었다. 감회가깊은재회였다.

활공의체험속에서키운야망

이런격동의나날속에서도나는어느새대학생이되어있었다. 학

5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5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교법인 정석학원이 운영

하는 국립 한국항공대학

에들어간것이다. 1979년

대한항공이 인수하면서

교명이 바뀌어 지금은 학

교법인 정석학원이 운영

하는 한국항공대학이 되

었다.

나는이대학의국비학

생을 노려 우수한 성적으

로 합격했으나 종합대학

이 아니어서 처음엔 후회

하기도하였다. 그래도장

하게 여긴 아버지는 아들

을 남대문시장으로 데리

고가비로드반코트를맞추어주고새잡이공기총도사주셨다.

개학한지얼마안돼서울에서일어난 4·19학생의거바람이항

공대학에도휘몰아쳐왔다. 이번에도젊은의협심은나를가만히놔

두지않았다. 신입생이었으니망정이지자칫했으면크게휩쓸릴뻔

했다.

대학가의소요사태가진정되면서나는운동을열심히했다. 유도

를계속익히는한편사이사이에태권도와검도도배웠다. 나는운동

하는동안차츰체력단련이단순히육체를연마하는데에만머물지

제1장 / 충청도 소년 상경기• 55

1962년 후배들과심신을단련하던갓 20세인

대학생때의저자(오른쪽).

Page 5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않고심신을정화하는작용까지한다는것을깨달았다.

신입생딱지를벗게되자나는파라슈트(낙하산) 동아리에가입하

였다. 1961년이었다. 이무렵대학에서는특수체육활동으로파라슈

트, 글라이더, 조정등세가지훈련을실시했는데, 나는글라이더훈

련에참가하였다. 활공훈련을위해모인다른대학생들과함께여의

도공군비행장에마련된임시막사에서합숙을했다.

짧은기간이었지만, 고참공군상사들이배치된합숙생활은마치

군에입대한신참병사처럼긴장된기분이들게하였다.

처음에는윈지카로활공기를끌어공중에뜨게하고, 윈지(줄)를

릴리스하여활공할수있도록교육을받았다. 그 다음단계는아예

경비행기로공중까지끌어올려고공에서윈지를릴리스하는과정이

었다. 두려움속에서활공에성공하자어지러웠던시야가트이기시

작했다.

여의도상공을선회하는동안에는비행장가에서빨래하는아낙네

들의모습이보였지만, 차츰익숙해져신촌근방에까지이르자이화

여대캠퍼스의전경이눈앞으로다가왔다. 상승기류에따라높이활

공하노라면모든잡념이사라지고세상이내발밑에있다는쾌감이

생겼다. 이러한활공훈련체험은뒷날사회생활을하는데활력과신

념을불어넣는힘이되어주었다.

파라슈트동아리학생들가운데는김학영이라는동기생이있었다.

아직도그와동아리의우정을나누고있는데, 여의도상공에서낙하

하던그시절의기억이새롭다. 그는인상이좋고생각이깊은학생

이었다. 김학영은나에게『신념을가져라』라는책을선물로건네주

5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5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었다. 그는대학졸업후사회에나오자미국이민을준비하고있었

고, 나는주위의만류에도불구하고주위에서선망하는좋은직장을

버리고어려운모험의길을선택하였다.

어쨌거나소년기에시골에서중학교를마치고고등학교때부터서

울로유학, 대학까지무사히나올수있었던것은아버지의적극적인

교육일념과어머니의열성이뒤를받쳐준결과라고할수있다. 대

학문을나서면서나는이런부모님에게보답하기위해서라도반드

시성공하리라고굳게다짐했다.

그러나나는군생활로사회를향한첫걸음을내디뎠다. 1965년한

국항공대학교통신전자공학과를졸업하자육군에입대하였다. 처음

배치된곳은강원도양구였다. 소양호를비롯해산과물로둘러싸여

마치섬처럼느껴지는지역으로우리현대사의상처인 6·25전쟁의

흔적이고스란히남아있는곳이다. 머지않은거리에비무장지대가

있다. 나는여기에서손톱이실밥같이보일정도로식기를닦고당번

노릇을했다.

당초계획은이런모습이아니었다. 공군이되고싶었다. 의기양양

하게공군사관장교시험을본것까지는괜찮았으나옆사람과잠깐

말을한것이화근이돼퇴장을당하고말았다. 육군으로전환할수

밖에없는동기였다.

내가부대안에버려진영자신문을읽는것을눈여겨본중대장이

접근해왔다. 영어를꽤잘하는것같은데, 짬짬이회화를배우게해

달라는것이다. 졸지에중대장의가정교사아닌‘막사교사’가된인

연으로얼마후사단장실에배속되는행운을얻게되었다. 점차사단

제1장 / 충청도 소년 상경기• 57

Page 5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장의자택에까지왕래하는단계에이르자기회를엿보다가떼를써서

카투사(KATUSA)로전출하는발령을받아냈다. 1966년의일이다.

경기도부평미군부대에스캅에서시작된카투사생활은지금까지

와는전혀다른환경이었다. 국도에서보면에스캅사령부쪽으로물

자를실어나르는미군의차량행렬이꼬리를물었다. 풍부한미군

물자의유통이활기를띠면서이일대는생기를되찾은것같았다.

음식점과 술집이 늘어나고 집창촌이 이어졌다. 미군들과 더불어

24시간을보내야하는만큼긴장이되기는했으나한결자유로웠다.

경직됐던표정도제법부드러워졌다. 영내의도서관출입도가능하

여필요한책을읽을수있었다.

인간은환경적인동물이라더니미군복을입고영어를자주쓰게

되면서세상을보는눈이달라졌다. 미군의눈높이에서모든것을바

라보게되는일종의착시현상이생긴모양이었다.

그런데내가병장으로진급한제대말년, 지시를따르지않았다는

이유로일등병인미군사병을구타하는사건을벌였다. 그야말로겁

없이저지른일이었다. 이일로인해나는다른부대로전출되는불

이익을감수해야했다. 그나마이정도로해결된것은관내에내이

름이꽤알려진덕이라고할수있었다. 미군을상대로한교육중에

거침없이영어로의견을발표해의사소통이잘되는한국인으로인

식되고, 검은띠의태권도실력이감안되었기때문이었다.

당시군제대말기부터사회진출을준비했는데, 대전중도공고에

서의 3개월영어교사가첫직장경험이었다. 그러나처음부터지방

에서직장생활을할의사가없었기때문에기회를보다가대한항공

5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5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공사신입사원모집에합격하였다. 국립항공대학교출신이라는이점

과군에서다진정신력, 오기의경쟁심으로사회진출의첫관문을

무난히통과한셈이다. 짧은대전에서의교편생활을정리하고나온

1967년의일이다.

대한항공공사는남들이부러워하는직장이었으나, 그때만해도만

성적자로고전하는국영기업체였다. 사무실이서울의한복판인을지

로에있다보니세상을보는눈이달라지고덩달아세련된도시샐러

리맨의모습으로변하기시작했다.

근무한지 2년이되던 1969년 3월 1일, 대한항공공사는주식회사

대한항공(KAL)으로민영화되면서경영정상화와국제경쟁력강화의

발판을마련한다. 조중훈회장은강당에서가진아침조례시간에사

원들에게이런훈시를하였다.

“인간은항상연극배우와같다. 연극배우가좋은연기를하면많은

관객이모인다. 여러분은항시예술인의입장이되어야한다. 언제나

최선을다하는대한항공인이되기를바란다.”

항공사사원이나승무원들의승객에대한역할과몸가짐을연극배

우의연기와비유하여설명한것이다. 최선을다한서비스정신이야

말로관객, 곧 고객을향한예술가(사원)의 사명이라고강조하였다.

나는존경하는조회장의이훈시를매우인상깊게들었다.

그런데이해 12월 11일, 나는자칫했으면앞으로의운명을갈라놓

을아찔한순간을맞이할뻔했다. 사고전날밤강릉에서성길웅선

배와술을마시다가과음하여서울행비행시간을놓치는바람에위

기를모면한것이다. 세상을떠들썩하게만든대한항공소속여객기

제1장 / 충청도 소년 상경기• 59

Page 6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납북사건, 이날 12시 25분강릉에서승객 47명을태우고날던서울

행YS-11기가대관령상공에서대남고정간첩에의해납치되는일

이 벌어진 것이다. 대한항공공사가 민영화된지 불과 9개월밖에 안

된시점이었다.

공교롭게도 사건 다음날 아내는 고향인 충주에서 첫딸을 순산했

다. 장모님은진통중에임산부가충격을받을까봐텔레비전을보지

못하게하였다. 그대신누군가에게김서방이납북된것같은데뉴

스에이름이나오는지잘보라고당부했다는것이다. 이 말을듣고

아내는고함도지르지못했다고한다.

이때나는강원도북평소재삼척지점에발령받아근무중이었다.

서울본사로복귀한것은 2년뒤였다. 자리를옮기고보니부서간에

갈등이있다는것을알았다. 소통의문제였다. 게다가내가속한부

서를우습게여기는경향이있었다.

보다못해스스로해결사역을자임하고나섰다. 논란의중심에있

는다른부서의담당자를불러내업어치기로기부터꺾어놓았다. 소

득없이시간만끄는설왕설래보다는순식간에힘으로제압하는방법

이효과적이라는것을부서원들에게보여준셈이었다.

두부서간의불협화음은소강국면에들어섰다. 어떤동료는듣기

좋으라고덕택에규율이잡혔다며나를추켜세우기까지하였다. 다

행히해프닝같은이작은폭력사건은더이상비화되지않았다. 소

문이비화됐다면시말서를냈거나사표를썼을것이다.

부서의일이잡히자나는또한차례비상을시도했다. 일본으로

발령받기위해일어공부를시작한것이다. 외국어에는타고난재능

6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6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이있었던탓인지얼마안돼수강자중에서가장뛰어난성적을차

지할수있었다. 내가굳이일본파견근무를바란것은해외견문을

넓히려는생각보다는한결나아진급여를받을수있는여건이보장

된다는데에있었다. 아무튼나는오사카지점으로발령받아 1971년

부터 3년동안근무하였다.

이런어려운가운데서도아내는첫딸에이어장남(종헌)을낳았다.

다카하라라는 병원에서였다. 이때부터 나는 미역국을 끓이고 밥을

짓는일을자연스럽게했다. 퇴근후나주말에는아내를도와기저귀

를빨고아이를목욕시키는일도마다하지않았다. 식구가늘다보니

어쩔수없는일이었다.

아내는생활비를충당하기위해일거리를얻어다가일본인들이신

는조리끈을꿰매는일을했다. 골무를끼웠지만몇번이나바늘에

제1장 / 충청도 소년 상경기• 61

대한항공관리자연수 1차 수료자들. 윗줄 오른쪽에서세번째가저자. (1975년)

Page 6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손이찔려곪는바람에고생을하곤했다. 당시대한항공의급여는

450달러정도였다. 일반기업체의대우에비해서는약한편이었다.

하지만오사카근무는외국생활에적응하는힘과일본어를불편없

이구사하게하는상당한소득을안겨주었다.

오사카 근무를 마치고 본사로 돌아오자 나는 과장으로 승진하였

다. 이 무렵회사에서는각대학의간부졸업생을대상으로관리자

교육을실시했는데, 나에게연수강사의임무가주어졌다. 진짜관리

자가되고싶었다. 잠시동안이었지만이런교육경험은뒷날사업을

계획하고사회공동체를만드는데큰도움이되었다.

이시절나는명동 KAL 빌딩에근무하면서무산되긴했으나엉뚱

한일을벌였다. 건물의파지를수집해팔기로하고트럭까지빌려

처마밑에대기시켰다가상이군인인폐기물수거인들이나타나칼침

맞고싶으면계속하라고협박하는바람에포기하고말았던것이다.

6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꿈만같았던약혼시절. (1968년)

Page 6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눈매고운처녀박은주와의만남

여기에서잠시아내의이야기를해야겠다. 내가박은주(朴恩珠)라

는처녀를알게된것은대한항공강원도삼척지점에근무할때였다.

그시절에는지금처럼일반승객이많지않아웬만하면눈에띄게마

련이었다. 하루는매표창구에나타나뭔가확인하고가는여성과마

주쳤다. 전에도먼발치에서한두차례본기억이있어낯설지가않

았다.

그런데정작앞에서보니범상한얼굴이아니었다. 눈이맑고아름

다웠다. 긴눈썹이조화롭게그눈을받쳐주고있었다. 아직까지저

런눈을가진사람을본적이없었다. 필시아이콘테스트에라도나

제1장 / 충청도 소년 상경기• 63

자카르타로떠나기 2년전인 32세 때세자녀와함께. (197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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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입상할게분명한매력적인눈이었다. 순간, 온몸에전류가흐

르는느낌이었다. 나는한눈에반하고말았다. 그녀에대해궁금해서

당장수소문에나섰다.

6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1975년 서울합정동에처음으로집을장만하고맏딸

현미(6세, 오른쪽), 아들 종헌(4세)과 함께.

Page 6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알아본결과, 이지역쌍용시멘트공장비서실에근무하는여성이

라고했다. 아, 바로그여자였군! 그렇지않아도나는진작부터시멘

트공장비서실에미인비서가있다는소문을듣고있던참이었다. 충

주가고향이고장래가촉망되는재원이라고했다. 단단히마음을먹

고돌격자세로달려들기로작정하였다. 의도적인접근이었다.

나는오래전부터여자를잘만나야성공한다는말을들어왔고, 그

렇게믿고있는터였다. 그래서“용감하지못하면미인을얻지못한

다.”(Faint heart never win fair lady.)는 격언이머리에박힐정도였

다. 아울러여자란매력적이어야하며, 현명해야한다는생각을간직

하고있었다. 그러나쉽지않았다. 몇차례만날기회가있었지만, 안

타깝게도그녀에게서는아무반응이없었다. 그래도포기하지않고

계속대시하였다.

그런데얼마후새침하던그녀에게서약간의감정변화가감지되

었다. 관심이없는체하면서도나의신상에대해묻고, 하는말에의

견을다는빈도수가많아졌다. 이렇게만나는동안나는그녀가명석

하고지혜롭다는것을느꼈다. 한마디로가정교육이잘된사람이라

는확신이들었다. 어느새나의의식속에그녀가이상적인배우자감

으로자리잡기시작했다.

아울러“현명한아내는남편을성공의길로이끈다.”는말이그녀

의 얼굴과 겹쳐 떠올랐다. 깊이 사귀지도 않았는데 나는 벌써부터

‘내조’를염두에둔욕심쟁이가되고있었던것이다.

결국나는박은주를아내로맞아들였다. 사귄지 1년반만이었다.

1968년 8월 20일스물일곱살때였다. 충주예식장에서혼례를치르

제1장 / 충청도 소년 상경기•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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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제주도로신혼여행을다녀왔다. 신접살림의어려움속에서첫딸

현미(賢美)를 낳고, 장남 종헌(鍾憲)에 이어 둘째딸 현아(賢雅)를 얻

었다.

아내는손에물도안묻힐정도로여유있는집안에서살다가결혼

후시골서올라온시집의많은가족들을뒷바라지하느라고생을하

면서도남편을위해헌신적으로내조를하였다.

6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6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제2장

열정만믿고덤빈

정글에의도전

Page 6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새로운삶의무대를찾아서

불안하지만완벽한변화와힘찬도약을꿈꾸며홍콩경유인도네

시아행비행기에오른것은결코젊다고볼수없는서른네살때였

다. 지난세월과다가올미래에대한생각으로시간의흐름을잊은

채나는미지의세계를향해날아가고있었다. 직장생활 10년, 이미

안정기에접어든한가정의가장으로서는무모하다고밖에달리표현

할수없는도전이었다.

당연히주위에서말렸다. 친구들은우려의시선을거두지않았다.

한심하다는듯이고개를돌려비웃는사람까지있을정도였다. 그야

말로남들이부러워하는좋은직장을하루아침에박차고나와자기

나라도아닌다른나라에서굳이모험을하겠다는것인지이해가가

지않는눈치였다.

“야, 대한항공이면모두못들어가서안달인곳이야. 최고직장에

서, 그것도능력을인정받으며잘있는사람이뭐? 인도네시아로간

다고? 그곳에서나무를잘라팔겠다고?”

“꼭있는놈들이한번씩쇼를해요, 쇼를.”

“남자로태어나서뭔가일생을걸고해볼만한일을찾고싶은건

나도이해한다. 하지만이건너무무모해. 넌세아이의아버지야.”

“안정된탄탄대로를두고가시밭길을자청해서가겠다니. 내 참,

네가무슨영감을얻어야만작품이되는예술가냐? 철없는짓이야.

잘생각해봐.”

6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6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그래도아직젊어혈기와야망을갖고있다고자부하던친구들도

고개를저었다. 그들은간곡하게만류하였다. 이런걱정뒤에는경험

도없는네가무슨원목사업이냐, 그것도우리보다더열악한환경인

인도네시아에서인생을걸고도박을하겠다니, 엉뚱한짓이아니냐

는힐난의뜻이담겨있었다. 이와함께더위문제도거론되었다.

“더위도많이타면서, 인도네시아가얼마나더운나란데, 아무리

사서고생한다지만이건아니잖아?”

게다가당시인도네시아는사회주의성향이강한나라였다. 그래

서마음한구석에는이나라가좌경으로돌아선다면한국으로돌아

오는게쉽지않을지도모른다는불안감이없지않았다. 이처럼성공

여부가불투명한상황아래서잠시나마생각이흔들렸으나, 나는이

미심사숙고한끝에내린결심을바꾸지않았다.

10년동안젊음을바쳐일한직장을떠난다는게결코쉬운일이

아니었지만, 서운한마음을애써다독이며평소의성격대로밀고나

갔다.

그러자내가슴은이미새로운포부로불타오르기시작했다. 그포

부는다름아닌산림개발이라는목표였다. 이사업을성공적으로일

구어냄으로써세계에우뚝서는큰기업인이되고싶었다.

기백과열정으로뜨거워진내가슴은그어떤장애도녹여낼만큼

에너지로충만했다. 앞으로헤쳐나가야할곳이열대지방이며문화

가다른이국땅이라는점은문제가되지않았다.

“직장에서아무리인정을받더라도결국피고용자야. 나는내사업

을하고싶어. 내젊음, 아니내삶을걸고올인하고싶어. 그것도편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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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하고만만한조국땅에서가아니라더넓은세계를무대로말이야.

모두들걱정하지만, 난반드시해낼거야. 성공할수있어!”

나는자신감으로가득찼다. 결심을하기전에나름대로분석하고

검토한결과, 산림산업의호황은꽤오랫동안지속될것이고, 또한

외국에서성공할수있는사업이바로이것이라는판단이섰기때문

이다. 이런계획이단시일내에성사된데에는원목사업경기가좋을

때먼저와서자리잡은산림개발전문가인집안동서의영향과아내

의권유가크게작용하였다. 내가산림산업을첫사업으로선택한이

유이다.

인도네시아는흙냄새부터다르더라

내가장차새로운삶의무대가될인도네시아땅에첫발을내디딘

것은 1977년 7월 7일이었다. 오직나를믿고따라준아내와아이들

을뒤로하고자카르타의할림국제공항에내린것이다.

이공항은크지는않지만나지막한곳에자리잡은공항모습이오

히려정겹게와닿았다. 처음이공항에내릴때나는서울과는다른

후텁지근한공기와여기에실려오는특이한냄새를맡았다. 그것은

코끝에서한동안지워지지않았다.

이 냄새가 인도네시아인들이 즐기는 클로버(층케)라는 향료가 들

어간크레텍종류의담배에서뿜어나오는것이라는사실을알게된

것은얼마뒤였다. 매번그런것은아니지만, 이공항에오면그독특

7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7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한냄새가가끔파브르의조건반사처럼나를 30년전의시간으로데

려가곤한다.

인도네시아는 1만 3천 7백여개의크고작은섬들로이루어진나

라다. 크기는한반도의 15배에이르며, 인구 2억 4천만여명으로세

계 4위에해당된다. 동서약 5천 1백㎞에걸쳐흩어져있는이나라

는열도의바깥쪽, 즉동쪽에파푸아뉴기니와아라푸라해, 서쪽으로

는인도양, 남쪽에스마트라·자바·발리·티모르섬등이있으며, 열

도북쪽에는인도네시아어로칼리만탄이라고부르는보르네오섬이

있다. 파푸아뉴기니섬서쪽절반을차지하는이리안자야 (2002년이

후파푸아주로개명)에는본토에서이주해온 50%의인도네시아인이

살고있다.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71

이리안자야원주민부족장의모습.

Page 7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세번째큰섬인보르네오는대부분구릉과산으로형성되어있다.

가히섬의천국이라할만하다. 적도바로밑에위치해있어서무더

우며습기가높다. 연간평균기온이섭씨 28도전후이지만, 비가내

려도온종일쏟아지지는않는다.

농촌에서는산밑과밭사이에자라는바나나나무와삼베같은싱

콩나무를흔히볼수있다. 야자수나무가색다른모습을보여주지

만, 어떤곳은한국의시골풍경과흡사한경우도있다. 특히저녁때

연기가모락모락피어오르는산속마을의정경을보고있노라면, 한

국의옛시골풍경을옮겨다놓은것같은착각속에빠지게된다.

이곳에는많은야자단지가있는데, 2억 4천만인구가사용하는식

용유가바로이야자열매에서나온다. 신기한것은야자열매가익어

서떨어지게되면풍랑에굴러다니다어딘가에서정착하게되는데,

떨어질때터진윗부분에서싹이트고자리를잡게된다는점이다.

겉은섬유질이많아서공업용으로쓰이고, 속은숯을만들어활성탄

으로사용하며, 코프라라고하는안쪽은식용유로가공한다. 그래서

야자열매는아무것도버릴것이없다.

인도네시아는 250종의서로다른언어를사용하는 300개이상의

집단으로이루어져있다. 하지만대다수국민은오스트로네시아(말

레이폴리네시아)어족에속하는언어를사용하는말레인이다.

나는자카르타에도착하자이렇게복잡한언어때문에걱정했다.

업무용주택을준비하고사업을추진하는데현지어를모르니여러

가지로불편하였다. 당장언어를익히는일부터시작하였다.

인도네시아의언어는하나로통일되기전까지는아랍어처럼꼬불

7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7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꼬불한 자바의 전통언어(Kauci)를 사용하였다. 이와 함께 지방별로

각기 다른 고유의 전통문자가 혼용되었다. 그러다가 말레이시아와

함께로마글자인알파벳으로이루어진말레유어(Melayu)를 사용해

왔는데, 인도네시아인구의 85퍼센트가동일한언어를쓰고, 그밖에

는방언같이각지방의전통언어(舊語)를사용해왔다.

지금도말레이시아와인도네시아는거의같은언어를쓴다고보면

된다. 2차대전 이후부터는 국어를 바하사 인도네시아(Bahasa

Indoneia)로정하고인도네시아의통일된언어로사용하고있다.

알파벳으로구성된말레유어는영어를하는사람이라면쉽게터득

할수있는마인어이다. 처음에는아랍어를사용하는줄알고걱정했

지만, 배우는데큰부담이없었다. 빠른시일내에익혀현지생활에

쉽게적응할수있었다.

물론저절로그리된것은아니었다. 평소의신념대로‘하면된다’

는일념이좋은결과를가져오게했다. 잠자리에들때를제외하고는

일하면서도단어를외우다시피했다. 그런노력이쌓이다보니 6개월

만에마인어를익히고, 통역없이업무를수행할수있게되었다.

하지만혼자지내려니어려워도푸념할데가없는것이큰애로점

이었다. 서울에두고온처자생각이날때면흘러간노래를부르며

시름을달래야했다. 이따금아내로부터안부전화가걸려와도내색

을하지않고여기는천국이나다름없으니, 사업이시작되면머지않

아가족이잘살게될것이라고안심시키곤했다. 아내가걱정할까봐

상황과는달리과장하여말한것인데, 이말을곧이들은아내는 1년

뒤항공회사다닐때어렵게마련한서울합정동집까지처분하고식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73

Page 7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솔들과함께자카르타로날아왔다.

당혹스러웠지만 어차피 저질러진 일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한층

긴장의고삐를조였다. 새삼가장으로서져야할의무가마음깊이

새겨지면서어깨가무거워짐을느꼈다.

환경이나모든것이낯선데도불구하고뭐든지녹여버릴것같은

의욕으로하루하루를버티며치열하게살았다. 무슨일이든하게되

면한눈을팔지않고집중하는근성있는내성격때문이었다.

흙냄새가다른자카르타에발을디딘이후내가지금까지지켜온

생활철학은바로‘정직’(正直)과‘근면’(勤勉)이다. 도중에시련과많

은고난을겪었지만, 그정신만은잃지않았다고자부할수있다. 이

러한인생관이지금의나를만들어준원동력이되었다고생각한다.

물론여기에는아내를비롯한가족과주위에서지켜봐준분들, 그리

고하느님의사랑이있었기에가능한일이었다.

원목개발의꿈안고칼리만탄정글로

인도네시아에서의첫도전은원목개발의꿈을안고보르네오섬에

자리한칼리만탄타라칸정글로뛰어드는것으로시작되었다. 산림

개발, 즉원목을벌채하는사업의첫걸음이었다.

세계에서세번째로큰섬인보르네오는전체면적의 70%가량되는

남부지역이인도네시아령이고, 나머지북부대부분이말레이시아령

을이루는가운데작은면적의보르네오왕국이말레이시아령에둘러

7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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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여있다. 보르네오란이름은네덜란드식민지시절그들에의해붙

여진것이다. 현재인도네시아에서는칼리만탄이라불린다.

칼리만탄은세계최대의원목생산지로서합판원료인나왕목(羅

王木)이집중채취되는곳이다. 면적만해도 53만 9천㎢로남한(9만 9

천㎢)의 5.45배에이른다. 열대성기후로강우량이많아나무가잘자

라고계절의구분이없다보니나무에나이테가없는것이특징이다.

산림지의크기는임지의크기에따라다른데, 허가된크기별로따

지자면군소재면적, 면보다더작은마을(里), 더작은지역으로나

뉘게된다. 원목개발사업의성패는원하는수종이널리퍼져있고

집중적으로서식하는임지를제대로찾아내느냐에달려있다. 성공

할경우대박이터지게된다.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75

식민지시절에는보르네오라불린칼리만탄섬의지도.

Page 7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칼리만탄에는일부잡목도섞여있지만, 거의나왕목이주종을이

룬다. 필리핀, 인도, 보르네오등에서산출되는나무로서회백색, 연

붉은색또는엷은갈색을띠며가구·건축용재로쓰인다. 이수종이

경제성을가지려면 1ha당 3내지 4개의원목이들어서있어야한다.

서너개의원목이서있는경우에는원목밀집지역으로구분된다.

이런조건을갖춘지역을찾기위해서는현지탐사가필수적이다.

마땅한 임지가 발견되면 지도를 만들어서 위치를 확인하고 원목을

표시한다. 초기에는판단을비교적정확하게해준다는이유로이방

법을많이채택하였다.

이보다발전된것이경비행기를이용하는방식이다. 저공비행으로

임지를촬영하여수종의규모와크기를보고경제림여부를가리게

된다. 원목이집중된지역을순차적으로모자이크한다음, 원목의잎

줄기윗부분(crown)을확대경으로판독하는것이다. 비용이많이드

는게부담이지만, 이방식은더욱과학적이어서믿을만하다. 다만,

경험부족으로항공사진을잘못찍어올경우판독이어려워실패할

확률이높다.

경제성이있는임지인지의여부를파악하기위해서는원목수송을

위한수로의상태와채취할수종의분포를정확하게조사하지않으

면안된다. 그래서필요한것이직접임지위로날아가서조사하는

서베이(survey) 과정인것이다.

이단계에이르면임지의소유권자와계약을맺는절차가필요하

다. 대충임지의소유권자의말을믿거나, 육지에서보이는것만을

근거로결정을내렸다간낭패를보기십상이다. 위험부담이매우크

7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7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다는의미이다.

경비행기타고임지탐사에나서다

나는여러경로를통해원목개발에대한예비지식을어느정도익

히게되자, 직접탐사에나서기로작정하였다. 인도네시아에온지 1

년이채안된시점이었다.

“직접서베이하시게요?”

현장감독이놀란표정으로나를쳐다봤다.

“나도해보고싶어요. 그래야함께일하는분들의애로사항을알게

되지요.”

“하지만그게위험한일이라서…….”

경비행기를타고진행하는탐사는종종악천후등예기치못한상

황에직면하는경우가있다며달가워하지않았다.

“걱정하지마세요. 위험하다면다른사람들은안위험한가요? 그

럴수록저도해봐야지요.”

결심이확고하다는것을느꼈는지탐사팀장은더이상만류하지

않았다. 나는그들의걱정스러운표정을뒤로하고성큼성큼먼저앞

으로걸어나갔다.

“공항으로갑시다.”

발릭파판공항에서기다리고있던 6인승경비행기는우리일행을

싣고동쪽으로날아갔다. 내옆에는현찰이가득채워진가죽가방이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77

Page 7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분신처럼놓여있었다. 비행이끝나면그자리에서지불해야할운행

요금이다.

40여 분쯤 날아가니 말레이시아와의 경계지점이 나왔다. 울창한

정글이구름사이로눈앞에펼쳐졌다. 그야말로모든나무들이원목

으로보였다. 하지만순간, 기류가나쁘거나조종이미숙하여생기는

추락사고가적지않다는말이귓전을맴돌았다.

“기류가나쁘지않아야할텐데.”

내가날씨걱정을하자

“괜찮을겁니다. 최고의조종사니까요.”

현장팀장이나를안심시키는말을했다.

“이번임지는산세가그리가파르지않다죠? 이정보가사실이면

좋겠군.”

“그러게말입니다. 일단직접확인해야죠. 말이야그렇게하지만.”

경제성이높은임지가되려면원목만으로는부족하다. 아무리그

런조건을갖추었다고하더라도산세가너무가파르면가치가떨어

지기때문이다. 산세가지나치게가파르면전기톱(chain saw)으로자

를때넘어지는원목이급경사를따라수십미터씩미끄러져내려가

게된다. 그러면원목을끌어올릴길을만들기위해장비를오래가

동해야하는데, 시간이훨씬많이들어경제적이지못하다.

“일한지 1년남짓되었지만, 산세가가파르면원목개발은성공할

수없겠다는걸알겠더군요. 너무높은산지의경우도어렵고요. 강

우량이많아서비때문에작업할수있는날이적어생산량의목표를

달성할수없으니까요.”

7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7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맞습니다. 산림이아무리좋아도원목을산지에서바다까지운반

하기어려우면경제성을갖췄다고볼수가없지요. 그래서우리같은

서베이팀들의역할이큽니다. 정확하게조사해야제대로판단할수

있으니까요.”

탐사팀장의반응이었다. 그러니까경제성이높은임지란좋은원

목이많고그것을바다까지큰무리없이수송할수있는주변적여건

이갖춰져있는곳이어야한다는뜻이다.

대개는산과산사이의강물을이용하여원목을이동한다. 그런데

날씨가건조한시기에는물이얕아서바위에걸리거나걸치게되다

보니뗏목이터지고분산돼운반이어렵게되는경우가많다. 뿐만

아니라작업팀들에게필요한일반식품이나자재, 기물등의수송도

어려워져실패하는원인이될수도있다.

따라서 건기에도 스피드 보트와 원목을 끌어내기 위한 배(tug

boat)의왕래가가능할정도로수심이깊은강줄기를끼고있으면좋

은산지로인정받는다. 또한거리가너무멀지않고육로를이용하

여원목이나물자수송이가능한곳이라면일단성공적이라고할수

있다.

이때문에여러가지여건을보아가면서생산할구역을순차적으

로정하게된다. 중장비가투입되는도로건설이시작돼야원목운반

이가능해생산을많이할수있다. 따라서도로건설이덜필요한곳

부터선택적으로시행한다. 항공정찰이매우중요한이유이다.

하지만그것은쉬운일이아니었다. 사실경비행기로는며칠을탐

사해도충분치않는임지가바로칼리만탄이었다. 바다처럼넓은임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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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가모두나무로덮여있어아무리경비행기를타고정찰을해도수

종을분간하기어려웠다.

수관(timber crown)을확인할수있어야경제성여부를가릴수있

는데 200여m의상공에서는아무리내려다봐도산세의높고낮음

조차짐작이되지않을정도였다. 하는수없이위험을무릅쓰고좀

더하강해야했다.

“말대로나왕목의수종은넓고둥글게퍼져있는데요. 이제곧계

곡가까이, 강가로깊숙이하강합니다. 위험하니조심해야합니다.”

팀장의말에긴장이되었다. 사실사업자가직접정찰하는경우는

드물었다. 경비행기탐사가위험하다는말을듣긴했으나그래도그

실정을정확히모르는처지로서는큰감이오지않았다.

모르는것이약이라고할까. 아니, 무지에서오는용기였을까. 긴

장이되긴했지만끝까지최선을다하고싶었다. 바람이전보다거세

어지는듯했다. 변덕스러운날씨는이곳의특징이었다. 솔직히겁도

났다. 하지만나는후회하지않았다. 무슨일이든올인하고최선을

다하고싶었다.

비행기가더낮게산림위로바짝내려가자황급히달아나는산짐승

들의기척이느껴졌다. 산짐승들이많은처녀림이라난데없이이상한

물체가공중을나니놀란모양이었다. 산짐승들뿐만이아니었다. 강

가에는화전민으로보이는토착민들의모습도보였다.

위험한고비를넘겼다는생각이들면서마음의여유가생겼다. 어

떻게이런정글에서살아갈수있을까? 경험이미천해서그런지의아

한생각이들지않을수없었다.

8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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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캠프위치는저곳으로정해야겠습니다.”

지도를보고있던탐사팀장의말에다른팀원이응답했다.

“강폭도원목을견인하기에무리가없겠습니다.”

이제항공사진결과에따라판독을하고, 다시서베이팀이현장을

직접답사하여확인한뒤최종판정만내리면되었다. 이렇게나의

첫항공조사참여는무사히끝났다. 결과도긍정적이어서더욱보람

이있었다.

사실나의임무는현지상황을파악하는데에있었지결정을내리

는역할을맡은게아니었다.

정글, 또다른고행의길

인도네시아에 온지 어느새 8개월, 우리가 계약을 체결하여 단독

개발하게된곳은인도네시아국영회사인후타니영림공사와협상중

인약 10만㏊에이르는임지였다. 이지역의한가지단점이라면고

산지형으로작업의난이도가높아조건이별로좋지않다는데에있

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일은 산림개발 자금을 어떻게 조달하느냐는

문제였다. 그때만해도나는손윗동서에게많이기댔다. 그대신몸

을던져대표인그를도왔다. 다행히여러방면으로노력한결과산

림개발의서광이비치기시작했다.

당시이곳에서산림개발전문경영인으로통할만큼좋은평판을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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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고있던동서가현지상업은행위달사총재의도움으로담보없이

융자를받을수있게된것이다. 이사실은세상사람들에게큰뉴스

거리가되었다.

이자금으로자카르타시내에사무실을마련하고중장비를구입하

였다. 생산본부를중심으로사업과탐사를총괄하는기획실과총무

과, 생산보급과등세파트로조직된회사는동부칼리만탄타라칸

작업현장과강가에각각중간보급소를두었다.

이렇게되다보니얼마뒤에는한국인작업및보급책임자, 불도

저운전수, 정비사, 경리, 일꾼등고용인이무려 500여명이나되었

다. 이들대부분이처녀림인칼리만탄정글에투입됨으로써비로소

원목생산과수출전쟁이시작된것이다. 1978년, 공식명칭‘트리부

디위스누산림개발회사’는이렇게출발했다.

나는다행히항공회사에다닐때관리자교육과정을이수했고, 신

입자와해외파견자의교육을담당하는교관을한경험이있어이사

업에여러가지로도움이되었다.

본사에서작업현장까지는이틀이소요되었다. 통신사정도좋지

않았다. 사업장이정글에있다보니현장과자카르타본사사무실간

의 SSB 통화만가능하였다. 이런상황아래서연락이두절되다시피

한가족들의고생은말이아니었다. 명색이 2인자격인상무의직책

을맡긴했지만, 월급조차제대로받을처지가못되었다. 당장의수

익이없는초창기의경영체계로는어쩔수없는일이었다. 영문도모

른채나만믿고한국에서집까지처분하고온아내에게는면목이없

었다.

8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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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알게된사실이지만, 아내는이무렵몸을가누지못할정

도로심한열병을앓았다. 티푸스였다. 6개월동안침상에서내려오

지못할지경이되다보니체중은 39㎏까지줄었다. 하지만나에게는

알리지않았다. 남편의일에지장을주지않기위해서였다.

아내가얼마후골프를치게된동기도이때의일이계기가되었

다. 산림지주인인후타니공사영업이사카딜씨부부의적극적인권

유에따른것이었다. 이분들과의식사중에“노냐김(미시즈김)은건

강을회복하기위해운동을해보는게어떻겠느냐.”며 3개월동안스

나얀인도어골프장에서레슨을받도록주선해주었다.

처음에는가벼운골프채를골라쥐어도제대로들지못할만큼체

력이딸렸으나건강이좋아지면서스윙폼도제대로잡혔다. 그뒤연

습장에서골프를가르쳐주었던코치노인을만났더니, 드라이버로

티샷연습을해서건강해진것이라고축하해주었다. 우리내외는그

때카딜이사의조언에대해늘감사해하고있다.

영림공사는우리의파트너국영영림공사에속해있었는데, 중역인

와르도노살레씨의가족과도좋은유대관계를유지했다. 나는그의

가족명의를빌려서첫사업을시작했다. 훌륭한가문에서생활하여

그런지여러해동안사업하면서도아무지장이없었다.

나는이곳산림개발현장에서한국인불도저운전수와식모각 1

명, 조수등으로이루어진생산팀을운영하였다. 숙식은대형원목 2

개위에만든이동막사에서해결하였다. 불도저로움직일수있는최

전방의거점인셈이었다. 최전방밀림지역은사람의왕래가전혀없

는곳이태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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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에는한국인들이묵는연립식막사와이와좀떨어진곳에현

지인일꾼들을수용한막사가있어조그마한촌락을이루었다. 시설

이라야드럼통에빗물을받아채우고장작으로데운물을사용하는

그야말로원시시대를방불케하는수준이었다.

또한위생환경도말이아니었다. 목욕을할때면말라리아와같은

병을피하기위해높이매달아놓은드럼통에받아둔빗물을밑에서

피운장작불로데워사용하였다. 정상적일때는줄을서서기다렸다

가파이프로연결된찬물로몸을씻었다.

정글생활의고충은이루말할수없었다. 정글이어떤곳인지구

체적으로알수없으니상상하기도쉽지않을것이다. 이가운데서도

특히견디기어려운것은바로‘먹는문제’였다.

칼리만탄에는채소생산이되지않을뿐더러공급이거의안돼최

악의상태였다. 원시생활과다름없었다. 안남미로지은밥과라면을

주식으로삼았으나찬거리가마땅치않았다. 강가에서잡은민물고기

와산나물, 깡통장아찌와중국제런천미터가고작이었다.

제대로된채소는물론한국식품이없으니, 그어려움은이루말할

수없었다. 명절때라야소한마리를잡아서잔치를벌일정도였다.

그러다보니자카르타시내에일을보러나왔다가식사를하게되는

경우가있어도고생하는직원들생각이나서젓가락을들기가송구스

러웠다.

장마철에는생산지인정글과저목장(강가)까지의도로가산사태로

막혀불통이될때가많았다. 워낙돌이없는지역이라망가질수있

어마르지않은도로는사용할수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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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낮없이비가오는날에는귓전을때리는빗방울소리로깊은잠

을이룰수없었다. 왜냐하면캠프숙소와사무실지붕이모두양철

로돼있어외부소리에민감한데다비가자주오면원목을생산할수

없었기때문이다. 또땅이마르기까지는시간이걸리고, 시간이지나

면수백명에이르는인부(현지인, 외지인)의급여가계속늘어나적자

가쌓이기때문이다.

이런가운데홍수라도나면, 캠프가까이있는원목저장소에라킷

을짜놓은나무들이범람하는강물에못이겨터지게된다. 강가의주

민들이이런기회를노리고있다가떠내려오는원목을산사이의작

은개울가로흘러가게만들어결국잃어버리는경우가많다.

개발초기에는이렇게고충이많았다. 그렇다고소득이전혀없었

던것은아니다. 척박한환경에도적응하며극복할수있는경험과

현지인과의 자연스러운 유대가 자산으로 생겼다. 그중에도 중장비

운전수인현지인과의생활은인도네시아말을실용적으로터득하는

첩경이되었다.

정글에서반드시가지고있어야하는것은컴퍼스이다. 컴퍼스없

이는반나절도산을탈수가없다. 하늘만보일뿐이어서좌우를판

가름못하게되는것이정글속이기때문이다. 그래서움직일때도

혼자다니는것은금기로되어있다.

산에들어가는까닭은산림의원목수량과생산할원목의위치를

스케치하고, 원목에번호까지붙이기위해서이다. 1개팀에 10명또

는 15명으로조를이루어일주일씩입산하게된다. 팀장은한국인이

주로맡게되며, 경력자를조장으로쓰고조수(helper)는물품을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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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책임을맡게되는데텐트, 주방도구, 식품, 옷, 비옷, 긴칼(바랑

이라고도함)등을준비해야한다. 거의에베레스트등정과맞먹는규

모로보면된다.

여기에다워키토키까지갖추게되면더욱완벽해진다. 가끔탐사

원들이혼자산속에남아개울에서목욕을하거나실족하여목숨이

위태로울때산짐승의공격을받는경우를대비하기위해서다.

“이놈아예머리를처박았군.”

앞서가던생산팀원중 1명이주저앉은채고개를자신의사타구니

사이에처박으며중얼거렸다. 그는곧자신의허벅지를파고든거머

리한마리를양손가락으로집어냈다. 일반인들은상상하기조차어

려운일이지만정글속에서는가끔겪는일이다.

사실 대대로 살아온 토착민이 아니고서는 정글의 깊은 산속까지

8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저자(앞)는 칼리만탄타라칸정글에서 3년간원목개발에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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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는것은위험한일이다. 산세가완만하다고만만히봤다간큰일

난다. 일단들어가면아주넓은데다나무가울창하여자칫방향을잃

기십상이다.

대부분의산은나뭇잎이떨어져두텁게지면을덮고있는경우가

많다. 떨어진나뭇잎이거름이되는데다비가자주내려서나무가쉴

새없이자란다. 그런곳에는이상하게도거머리가많았다. 그래서

긴양말을바지위에신고각반을찬뒤등산화(예전에는군화를신었

다)를신고입산을하게된다.

하지만이렇게완벽한준비에도불구하고어느틈에거머리가허

벅지까지기어들어가는경우가있는데, 이는허술한준비탓이다. 한

번은발이몹시가려워서군화를벗고발을보니거머리가살속깊이

들어가머리가안보일지경이었다.

“이놈의거머리들은지독해. 어떻게이렇게입고, 신고 있는데도

파고들지?”

그팀원이투덜거렸다.

“그래도전갈보단낫잖아.”

나는팀원의어깨를툭쳤다. 정말전갈은소름이끼쳤다. 정글에

서지내다보면그런전갈을심심찮게보게된다.

나뭇잎밑이나원목작업때벗기다남은나무껍질사이에전갈이

숨어있는경우가흔하다. 크기는 15~20㎝정도되는데꽁무니를들

어쏘게되면사람이즉사할수도있다.

원목을체인쇼로켜서지은임시막사는강가라서그런지가끔방

에까지전갈이들어와서괴롭혔다. 새끼전갈에물리면살갗이부풀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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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오르긴해도대개는어렵지않게가라앉는다. 하지만큰전갈은

독을품고있어경계하지않으면안되었다. 물리면생명이위험해지

므로항상신경을써야했다. 전갈이자주나타나는곳은습한지역

이다.

전갈얘기를하다보니, 힘든정글생활을하다가휴가를떠나던인

천출신직원이경복씨의생각이난다.

산림현장에서는 선적을 제때에 하기 위해 생산한 원목을 수시로

옮기는데, 대개는강을통하여뗏목으로운반한다. 강을순찰하거나

작업현장으로가다가강을따라떠내려오는자신들이생산한원목

을보게되는경우, 얼마나반가운지모른다. 이때의기분이란실제

로경험해보지않고는실감하지못할것이다.

강을순찰할때의일이었다. 우연히우리가생산한원목을실은뗏

목을발견하자반가운나머지동행한직원과뗏목에올라탔다. 그직

원은정글에서고생하다가휴가를가던중이었다. 잠시나마몸을쉬게

되자우리는담배를나누어피며칼리만탄의강을내려오고있었다.

그런데갑자기그직원이소리를질렀다. 놀라서보니덜떨어져

나간나무껍질사이에서아주큰전갈이기어나오고있었다. 자칫했

으면쏘여서큰변을당할뻔했다.

그런전갈에비하면거머리는수월한편이었다.

“하긴같이자자고덤비는구렁이도있는데, 이깟 거머리쯤이야,

그죠?”

이번에는팀장이킬킬거리며웃었다.

“그땐정말기절초풍하는줄알았지.”

8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8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그랬다. 며칠전, 새벽녘에침상위로무언가움직이는낌새가있

어불을켜고보니, 큰능구렁이한마리가몸을사리고있었다. 얼마

나놀랐는지나는뒤로자빠질뻔했다. 여러개의연립식방이있는

막사안이었다. 원목을잘라서만든침상머리맡에는책과라디오등

물품을둔칸이있었는데, 그놈이그밑에서징그럽게위세를뽐내고

있었다. 현지인의도움으로치워버리기는했으나매우꺼림칙했다.

그런일이있은뒤부터는취침하기전에반드시침상을살펴봐야만

안심이되었다.

“그얘기아시죠? 개울을건너는데다리가움직여서보니, 그게다

리가아니라능구렁이였다는…….”

산판에서는개울에다나무를잘라서다리를만든다. 한사람이그

다리를건너고있을때다리가움직여서보니, 그게다리가아니라

능구렁이였다는것이다. 산림개발초기에있었던어느한국인사업

가의이야기이다. 흔한발견은아니나대개이런구렁이는사람이치

우기엔너무커서트랙터로치우게된다.

이처럼정글에서살다보면구렁이뿐만아니라거머리, 전갈등조

심해야할생물들이많다. 더욱이초록뱀(Green Snake)은산속의나

뭇잎에묻혀있다가사람이나동물이움직이면날아오르듯몸을솟

구쳐독을쏘기때문에조심해야한다.

한부부가살림할수있도록개인사택을통나무로지어준적이있

는데, 그들의어린남매가모기와조그만전갈에물려서피부가무섭

게부풀어오르던일을기억한다. 다행히조그만전갈은독이약하여

쏘여도살갗이부풀어오를뿐생명에는지장이없다. 자카르타와같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89

Page 9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은도시에도습기가많은집에서는이런전갈이나오는수가있어간

난아이가있는부모들은주의할필요가있다.

모기는육안으로보이지않는점모기(아가스)와전갈새끼등이정

글에사는사람들을괴롭히는경우가많다. 열대지방은모기에물려

말라리아에걸리는경우도있고, 기력이쇠퇴하면티푸스종류를앓

게도된다.

이럴때는대개고열이나면서온몸이아프고기력을잃게되는데,

즉시병원에입원시키지않으면안된다. 또위험한것은탈수가올때

까지배탈난상태를방치하면생명을잃을수도있다는점이다.

급류에뛰어들어구해온장비부품

우리회사는인도네시아동부칼리만탄타라칸에서스피드보트로

약 8시간걸리는숨바쿵강을이용하여원목개발을 3년동안했다.

아주험준한산맥이어서건기(乾期)와우기(雨期)를구분하기어려울

정도로비가자주오는지역이었다.

이지역숨바쿵강가에본부캠프를설치하고이곳에서제2캠프까

지, 약 38㎞의육로를건설했다. 이도로는대형트레일러가원목을

수송하는주도로였는데, 우천으로산사태가자주나서막히는경우

가많았다. 갑자기도로중간중간이막힐때는전방의일이중단되

는곤란한일이벌어지곤했다.

1979년 9월경트랙터D7G가도로작업중산사태를만나미끄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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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9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지면서엔진이꺼진채 200m나되는골짜기로추락하는사고가발

생했다. 중요하게다뤄지는장비추락은그자체의파손은물론, 여

기에투입되는장비가많아단시간내에끌어내야한다. 가장먼저

해야할일은고장난장비의부속품을공급받는일이었다. 그런데

육로는막혀버렸고스피드보트도없었으며, 통신까지두절된상태

였다. 그야말로사면초가였다.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91

원목개발의주장비인캐터필러 D7G 앞에서. 이 장비는

도로를건설하고원목을끌어내는데사용한다.

Page 9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결국내가택한방법은고무타이어튜브를준비시켜강줄기를따

라 3㎞나되는먼거리를수영으로본부캠프까지내려가는것이었

다. 이런중요하고위험한일을부하직원에게시킬수는없었다. 내

가직접그일에뛰어들기로작정하였다.

홍수가난직후라강은무서운기세로넘실거리고있었다. 강폭도

평상시보다훨씬넓었다. 족히 250m나되는거리였다. 홍수뒤에는

종종원목을잘라서수송하기좋게연결해놓은라켓들이터져서원

목들이각각떠내려가는모습도눈에띄었고, 산에서떠내려오는나

무줄기들이촘촘하게강을타고내려오는광경도보였다. 이럴때스

피드보트가지나가다보면스크루가부러지는일도흔했다.

막상튜브를타고수영을시작하자겁이덜컥났다. 하지만물러설

수없는일이었다. 한시라도빨리부속을공급받을수있도록손을

써야했다. 물살이너무세어 2시간이넘어서야겨우본부캠프에도

착할수있었다.

그동안엔물뱀이엷게입은여름바지에달라붙는바람에혼이나

는일도있었다. 강에는흔히장어가있게마련인데, 그때는물뱀이

나의오른쪽다리를감고있었던것이다. 장어인줄알고손으로잡다

가그놈에게물려서순식간에오른손이부어올랐다.

급하게팔중간을동여매고물린곳을째고서피를많이빼낸다음

비상약을 먹었다. 그렇게 응급처치를 했기에 망정이지 지체됐다면

큰일날뻔했다. 생명에는이상이없었지만아찔했던순간이었다. 악

어에게물리지않은것만도천만다행이었다.

이때깨닫게된것이어떤상황에서도무리수를쓰면위험을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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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9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하기쉽다는가르침이다.

어쨌거나 그때 정신없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튜브를 타고 가서

제때에중장비부속을공급받을수있게조치한일은지금생각해도

잘한결정이었다고생각된다. 중요한순간에빠른판단이절실함을

다시한번인식시켜준일이었다. 이부품으로중장비를움직여먼

거리에서열악한현장까지많은장비를가져오지않아도되도록수

월하게일을처리하게해주었다.

외국생활에서는비단정글에서만이아니고일반사업, 일상생활에

서자주부딪치게되는유사한경우가많다. 고생은되지만중요한

처리중의하나로, 튜브타고업무를처리한비정상적인위기탈출의

기회가있었다. 원시적이지만이방법밖에는달리묘책이없었다. 그

러나이일은내가살아가는데에어떤고초도이겨낼수있는강인

한체질을키워주었다고생각한다.

‘제때결정! 제때처리!(Strike the iron while it is hot.) 얼마나적절

한속담인가.

“잘되어가나?”

“걱정했는데부사장님덕에일정을맞출수있을것같습니다.”

팀장이밝은표정으로대답했다.

“무슨, 우리모두가하나가되어최선을다한덕이지. 그럼수고해

주게나.”

팀장과함께커피를마신뒤나는가벼운발걸음으로다시다른작

업장을향해떠났다.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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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돼지, 맹수들이야기

인도네시아는지역자체도넓은데다섬마다산이넓고커서많은

맹수가우글거리는나라중의하나이다. 지역적으로는북부수마트

라아체지역에는코끼리가많이서식하고있다. 이곳코끼리는자주

대로변을건너기도하고, 변두리주택가를떼지어지나가기도하는

데대로변을지날때는중형차량은속히피해야한다.

코끼리를공격한다든가성나게하면반드시코끼리의공격을받아

주택이나차량이큰손실을보게된다. 인근주택에서코끼리떼가화

나면그부락민은전부대피해야하는소동이벌어진다.

산돼지는각지역에분포되어전국적으로개체수가엄청많다. 산

돼지는대개물줄기가있는개울을길삼아저녁에는산에서내려오

거나길을따라다니게된다. 사냥은주로야산에서하게되는데사

냥개와군인병사들을배치시키고돼지몰이를시키면, 한쪽으로몰

리게되어의외로쉽게산돼지를잡을수있다. 옛날에는군·경이

무기를사용하였으나요즘은수렵용총을사용하여점차질서가잡

혔다고할수있다.

칼리만탄산림현장에서저녁늦게본부캠프로돌아가다생긴일

이다. 지프차로언덕을달리는데새끼산돼지가줄을지어가다가헤

드라이트에눈이부셨는지우왕좌왕하였다. 나는새끼들이차에치

일것같아한놈이라도손으로잡아보호하려다언덕을오르던차가

급정거하는바람에떨어져서어느새차밑에깔린경험이있있다. 그

래서산돼지이야기만나오면산돼지새끼구하려다사람잡을뻔했

9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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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이야기한다.

산돼지고기는비계가없는것이특징이다. 맛은생각보다별로없

다. 다만, 고기가남자들의정력에좋다하여선호하는경우도있다.

철이바뀌면보금자리를이동하는경우가있는데, 강가에서만나는

산돼지는 줄지어 가다가 주변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각 방향으로

흩어져한번에여러마리를잡을수는없다.

칼리만탄에는우기가되면강줄기마다물이범람하게된다. 이때

는상류에서뗏목이터져서원목이분산되어떠내려오는경우가많

다. 이럴때동네마다에서는원목하나라도예인하여깊숙이숨겨놓

는것이원주민들의일이다. 이윽고물이빠지면원목은집주위에

가지런히있게마련인데, 너무먼거리에흩어진원목은대부분회수

가되지않는다.

이런 우기에는 산돼지가 건너편 산으로 헤엄쳐가는 모습을 흔히

볼수있는데, 이것은산에별미의나무뿌리와열매가많아서그렇다

는것이현지인들의얘기였다.

산돼지는정글속의원주민들이가장좋아하는일용양식으로통

한다. 그래서정글이아닌도시근교의산에서식하는산돼지는사냥

꾼들에게인기가높다. 그들은사냥개와동네주민들을동원하여산

돼지를계곡으로몰아넣는다. 재미있는것은산돼지가강물따라떠

내려갈때등줄기만보여서큰것인지, 작은것인지알수없다는점

이다.

실제로필자도산돼지가도강하는현장을목격한적이있다. 휴가

차시내로떠나는인부들과함께지점에볼일이있어동행했는데, 스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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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드보트를운전하던직원이별안간‘으악’하고소리를질러살펴

보니산돼지몇마리가헤엄을치고있었다.

순간, 8m 길이정도의보트에타고있던몇사람이앞뒤에서긴칼

을들고헤엄쳐가는산돼지들을쫓기시작했다. 하지만여러마리를

겨냥해보트를이리저리선회하다보니방향을잡기가어려웠다.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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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발적인사태에대비해야했던 1970년대말

원목저목장에서개발팀과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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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한마리만을쫓다가진흙에빠진산돼지를잡는광경을보고, 나

는세상의이치도이와같다고생각했다. 그것은한가지일에만집

중해야확실히성공할수있다는교훈이었다.

곰은자바섬과칼리만탄깊은산에도없고, 대개수마트라팔렘방

지역에서많이서식하고있다. 곰을잡는방법은웅덩이덫이나올가

미를많이사용하는데, 주로웅덩이를파놓으면깊은곳에빠져나오

지못하게되어생포할수가있다.

요즘도생포된곰새끼를주문하면배달이가능하다. 나도곰을사

육해봤는데식성을정확하게맞춰줄수가없어제대로생육하지못

하는경우를보았다.

곰의쓸개는큰곰의쓸개도아주작아서말라도수분이완전히빠

지지않아약간말랑거린다. 그런관계로대개의현지인들은산돼지

쓸개를말려서곰의쓸개로둔갑시키는것으로알고있다. 곰의쓸개

는교통사고나운동중타박상을입어생긴어혈을푸는데뛰어난효

능을보인다. 또한피로를급격히느낄때소량을술에타서마시는것

도좋다고한다.

이런예도있었다. 어떤한국인은현장에서곰을잡아쓸개를꺼내

다터졌는데터진쓸개를다먹어치웠더니시간이지나자복통이나

고귀국후사망한경우도있었다. 가족들의요구에의해부검을실

시했는데, 창자가구멍이날정도로독한쓸개를먹은것이사망의

원인으로판명이나서안타깝기그지없었다고한다.

러시아에는 2m 이상되는대형곰이서식하고있으며, 한겨울에

곰사냥을많이하는데굴을파고동면하는곰을발견하면굴입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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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천을낮게걸어놓는다. 그러면곰이그것을갑자기공격하는

버릇이있어이때를이용하여곰을잡는다고한다.

또한담력을기르기위하여곰사냥을한다고한다. 블라디미르푸

틴전대통령은보좌관시절에대통령과곰사냥을나갔다가아무도

엄두를못내는위험한상황에서용맹성을발휘하여곰을사냥한적

이있었다는것이다. 그때부터그는용맹함을인정받아대통령후계

자로발탁되어대통령이되는데일조했다는이야기가있다.

호랑이는수마트라를비롯해잠비쪽에도많이서식하고있다. 호

랑이사냥을따라가려면죽음을각오하고가야한다. 잡는방법은

군인들이주로사냥을나가는데호랑이가다니는길목에개나염소

고기를달아놓고, 주위나무위로올라가몸을동여매고밤을새워

총구를겨누고있는방식을주로쓴다.

호랑이는 총을 설맞으면 순간적으로 뛰어오르는 점프력이 3m를

넘는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3m 높이에 걸터앉았다가 명중시키지

못하고나무에서떨어져혼쭐이난경우도있었다. 그래서호랑이를

잡다가오히려사람을잡는경우도있게되는것이다.

이런사고가있은후부터는나무위에서호랑이를기다리려면 3m

이상인 나무 위를 선택하여야 안전한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호랑이사냥꾼들은 4~5m 높이의나무위에몸을튼튼히

동여매고, 총도 떨어지지 않게 줄로 묶어서 안전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상책이라는사실을터득하게되었다.

동행하는 사람도 역시 주위의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가 몸을 묶고

호랑이가나타날때까지숨어있어야한다. 대개의호랑이는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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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칼빈총정도로잡기때문에호피가길게찢어진경우를자주보

게된다.

호랑이도깊은함정에빠지게하여잡기도한다. 5m 이상되는깊

이의함정을파놓고기다리면빠지는경우가있어생포할수가있다.

그러나총으로사살하는경우수의사가쓰는수면실탄이없으면

산탄이나군인의총을이용하여살상하게된다. 호랑이앞발은통뼈

인데아주단단하다. 이뼈는류머티즘, 관절염에특효가있다하여

찾는사람이많다. 호랑이살은힘을쓰지못하는환자, 즉시름시름

원인도모르게힘이빠져가는사람에게효과가크다는말이있다. 호

피는대개사무실에두고맹수의기를얻는다하여사업가의사무실

에서발견되는경우가많다.

이제인도네시아의호랑이는보호를받고있다. 호랑이사냥은법

으로금지하고있어군인들도호랑이사냥을금하게되었다. 그렇지

만차츰인도네시아호랑이의숫자도줄어듣고있다는보고가있다.

대침으로정강이핏줄을따다

지난 1975년항공회사에다니던시절, 직원들중처음해외근무지

로발령받아나가거나파라과이, 아르헨티나등남미쪽으로이민을

가는사람들은대개위급사태에대비하여수지침을배웠다. 그때내

가후배들틈에서배운침술도그런이유로익혀둔것이었다.

내가책임지고있던동부칼리만탄타라칸에서숨바쿵강가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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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드보트로약 10시간만올라가면산림사업장의베이스캠프가나

오는데, 이곳에서침술을익혔던것이돌팔이침술사행세를하게된

계기가되었다. 기술이라야고작곽란, 즉음식이체하여토하고설

사를하는급성위장병이생겼거나급체했을때에사지의관절에침

을놓거나손발에서피를빼주고, 실신하여인사불성인사람에게는

정강이를째고피를나오게하는정도였다. 그런수준의침술을칼리

만탄의산림개발현장에서수시로사용하게될줄은미처생각조차

하지못했다.

여러종족이섞인 300명에가까운인부들을임지에서지휘하다보

면인성파악이쉽지않다. 그가운데는일하기싫어꾀병을부리는

경우도있지만, 실제로아침에오한이나고고열이생겼을때침을

놓아주면오후에는거뜬히작업장으로돌아올정도였다.

급체인경우는상당히효험이있었다. 배탈이났을때에도침술로

다스릴수있었다. 임시변통에불과했지만, 현지인들을대상으로임

상실험까지하게된셈이었다. 정글같은오지에서는침통정도는가

지고다녀야노동자들이만만하게보지않는다.

1980년대 초의 일이다. 그때 원목개발팀의 운송장비는 트레일러

트럭이주였고트랙터와같은중장비가많았다. 이런중장비의정비

를위해임시정비소를중간지점에두었는데, 필리핀인요셉이라는

정비책임자가급체를견디다못해쓰러졌다는전갈이왔다. 긴급히

대침통(大鍼桶)을들고달려가보니이미그는혼수상태였다.

인공호흡을시키며정강이를따고피를빼내어혈이통할수있도

록대침을놓았다. 하지만시간이너무지난상태라그런지체온이

10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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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떨어지고핏방울대신엉킨피만나왔다. 노력한보람도없이

그는현장에서숨지고말았다. 아직까지도그를살려내지못한안타

까움이마음한구석에서지워지지않는다.

대침얘기를하다보니그후유럽여행중의일이생각난다. 2주동

안 버스로 스칸디나비아반도를 이동해 가며 관광하고 어느 계곡을

지나휴식을취할때였다. 별안간동행하던여성들이나에게몰려와

머리와배가아프다며고통을호소해대침으로사혈(瀉血)을해준적

도있었다. 사혈이란환자를치료하기위해얼마간의피를몸밖으로

뽑아내는것을말한다.

그뒤다시배우게된것이부항(附缸) 뜨는법이었다. 부항기가잘

발달되어있는경우에는피부에상처를내지않고부항을뜨고, 사혈

을했다. 운동중에갑자기허리가아프다든가, 발목이삐었을때도

큰효과를보았다.

1977년내가인도네시아에온이후고열과설사, 급체에걸린사람

들을수지침과대침을이용해사혈하는방식으로꽤많이치료해주

었다. 돌팔이가사람잡는다지만, 그래도내가시술한응급조치가여

러모로통했다. 칼리만탄시골선착장에서물뱀에물린직원의발을

째고피를뽑아독을빼내목숨을건진일들이그대표적인예라고

할수있다.

열대지방에는뱀과코브라가많아풀이우거진곳은특히조심해

야한다. 어린아이들이설사, 급체, 고열등의증세를보여병원에

갈시간적여유가없을때는비상수단을썼다.

아파서보채는아이의좌우손가락끝을침으로찔러어혈을빼주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101

Page 10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는응급조치로미소를찾게하였다. 나는짧은한의학지식을바탕으

로, 경험을통해이같은치료를통해사랑을베풀수있었다.

목숨을건원목수송작전

임지가해변을끼고있거나해변에서멀지않다면원목생산지로

서는좋은조건에해당된다. 가파른산이없고평평하기때문에모든

면에서경비가절감되고, 신속하게생산량을늘릴수있어대박을터

뜨리기에안성맞춤이다.

이와달리고산지대이면서오지의경우는대개산세가높아우기

가많고, 운반해야하는강이길어서수로로이동하는데어려움이

많다. 특히건기에접어들면원목을엮어서배로끌고내려올때바

닥이낮아원목토막이바위에걸리고원목을엮은것이터져서원목

이흩어지는경우도많았다.

그당시우리가생산한원목은주로부산동명목재와태창목재에

수출하였는데, 원목수송선이입항하여정박을시작하면 3일내에선

적을해야했다. 만약그시간을지키지못하면과징금을물어야하

기때문에회사의존폐에영향을끼칠만큼손해가막심했다. 따라서

생산된 원목이 부족한 상태에서 원목수송선 입항 날짜가 다가오면

직원들에겐초비상이걸렸다.

정글생활을한지 2년이넘은어느날이었다. 원목수송선의입항

은하루앞으로임박했는데실제물량이부족하여속을태우게되었

10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0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다. 들어올배는 6천여 t짜리였는데그배를다채울원목이준비되

어있지않았던것이다. 만약시간내에약속한물량을채우지못하

면선박대기료까지우리가물어야하고그렇게되면회사가무척어

려워지는상황이었다.

정글의책임자였던나로선의무와책임감에애간장이탔다. 여기

저기수소문을하다가칼리만탄다른임지에서일부물량을구매할

수있다는정보를얻고이를확인하기위해동부칼리만탄에있는그

곳으로가기로하였다. 급한마음에산림개발업자들이많이왕래하

는어시장겸항구에서 7m 정도되는스피드보트를빌렸다. 그작은

배를타고망망대해를가야한다고생각하니솔직히겁도났다. 하지

만그건잠시뿐이었다.

“다섯시간이나가야하는데괜찮으시겠습니까?”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103

칼리만탄산림현장으로사람들을실어나르던스피드보트.

Page 10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모터리스터(배운전수)의얼굴표정이몹시걱정스러워보였다. 그

러나나의결심을흔들지는못했다. 그때내머릿속에는회사가입

을손실을막아야한다는책임감외에는아무것도생각할겨를이없

었다.

목적지의정확한위치를확인하고식량으로바나나, 그리고표류

당했을때표시하기위한손전등, 상어를대적하기위한칼등을준

비하고나니어느덧뉘엿뉘엿해가지고있었다. 초행길이었으므로

다음날아침에출발하는것이원칙이었다. 하지만나는잠시도지체

할수가없었다.

“바로출발합시다. 일분일초가급한상황이오.”

“곧어두워질텐데…….”

모터리스터의말을짐짓외면하고나는내키만큼의밧줄을몸에

매었다. 잠시머뭇거리던그도고개를끄덕이더니이내몸에밧줄을

묶었다. 몸에밧줄을매는이유는상어로부터공격당하는만약의사

태때상어로부터자신을보호하기위해서였다.

상어는상대를만났을때길이를재보고자신보다큰상대에게는

덤비지않는다고생각하는이곳사람들이개발한비법이었다. 그러

니까밧줄로자신의길이를늘이는속임수를쓰는셈이었다.

“이제갑시다. 파도를잘피해가도록합시다.”

내말에모터리스터는고개를크게끄덕일뿐이었다. 그도긴장되

고걱정스러운모양이었다. 갈길은초행인데곧어두워질테니그럴

만도했다. 어찌보면무모한행동이었다. 모터리스터와단둘이알

수없는위험이도사리는바다를달린지얼마되지않아곧어둠에

10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0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갇히고말았다.

사람사는곳이야아무리깊은밤이라할지라도어디서건불빛이

새어나오기마련이지만, 망망대해에선그야말로불빛이라곤찾아볼

수없는암흑이었다. 들리는소리라곤파도를가르는배의모터소리

뿐이었다. 점점불안해졌다.

검은바다를 3시간넘게달리자점점두려움에압도당해혹시큰

배라도나타나면옮겨타고싶다는생각까지들었다. 이대로바다한

가운데서모두사라질것같은기분이들면서앞뒤가리지않고너무

경솔했나하는반성하는마음도들었지만, 산림개발의중요성과성

공해야한다는각오는그런마음을곧약화시켰다.

‘난책임을다해야해. 어떤어려움도그것을이겨내고자하는사

람앞에선어려움이무력해지게마련이야. 난할수있어. 극복할수

있어.’

그러한각오는내속에서다시한번소중한신념으로뿌리내리고

있었다. 나는모든것을하늘의뜻에맡긴채목적지에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도착한목적지는동부칼리만탄의중국인산림개

발지였다. 엄청난손실을막기위해흔적도없이수장될지도모를행

동을했던것이다. 죽다살아온사람처럼배가고팠다. 먹을것이라

곤삶아놓은밥과생선튀긴것뿐이었지만가릴처지가아니었다.

배를채운다음나는바닷가, 물이찰랑이는곳에평상을지어놓고

업무를보기시작했다. 그평상에서일을하며식사를하고, 옆에구

멍을내화장실로사용하였다. 마치영화에서나나옴직한, 공수특공

대가겪음직한그런모습이었다.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105

Page 10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이렇게 임무를 완수하고 대낮에 우리 임지로 돌아가니 그때서야

살아있다는느낌이들었다. 그때들었던스피드보트의굉음이아직

까지도귓전에서지워지지않는다. 어쩌면이런정글생활은뛰어다

니며공중으로날아다니는타잔이라도견디기힘들었을것이다.

가만히생각해보면무모하기도했지만, 강한자신감과신념이있

었기에가능한일이었다.

이일은뒷날내삶에큰버팀목이되어주었다. 목숨을걸만큼나

는일에열정을다한것이고, 그러한고생과시련은나의인생을좀

더쉽게항해할수있게한원동력이되었다.

탈진속의나를살린숨바쿵강의밧줄

한번은정말죽음을뼈저리게실감한적이있었다. 내가타라칸으

로부터스피드보트로약 10시간거리의말레이시아접경정글에자

리잡고있는숨바쿵골짜기에서겪었던일이다.

다른임지보다산세가가파른이곳에자리한제1캠프는본캠프와

제2캠프사이의강가에서약 38㎞상부지역에있었다. 보통건기때

에는강의폭이약 100m쯤될까.

그러나홍수가나면물이범람하게된다. 이럴때에는토착민들의

소유인돼지새끼가떠내려오기도하고, 많은저목장에쌓아놓았던

뗏목이터져산지사방으로흘러내려오게마련이었다. 이런때는스

피드보트를여러대풀어서상부쪽과중간지역, 그이하중간보급소

10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0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까지 무선으로 비상연락을 걸어 떠내려가는 뗏목을 안전한 강가에

매어놓도록지시하게된다.

본래산림개발지에서는선박을자주이용하는데그것은단순히교

통수단이아니라위험을감수해야하는일이었다. 그래서여러가지

주의할점이많았다. 특히속력이낮은터그보트후미부분에있으면

수직으로강에떨어질때배의스크루에걸려다치거나심지어생명

이위태로울수도있었다. 나역시배를타고가다가‘이대로죽을수

도있겠구나’하고생각한적이한두번이아니었다.

그런데실제로그런일을겪게된것이다. 현장점검중이었는데

별안간보트가기우뚱거리는바람에더이상몸을지탱할수가없었

다. 손으로배후미의천장을잡고버티다가그만강물에떨어지고

말았다.

배는불어난강물에실려떠밀려가고, 물속에팽개쳐진나는군화

를신은채수영을하자니다리가무거워개헤엄을치는것조차힘이

들었다. 물살이너무빨라서몇번이나물을마시며허우적거렸다.

기를쓰고앞으로나아가려했으나역부족이었다. 시간이흐를수록

물을많이마시게되다보니체력에한계가왔다. 당장물속으로가

라앉을것만같았다.

“상무님, 이거잡으세요. 상무님!”

순간, 배에같이타고있던한국인탐사책임자가긴밧줄을던져

주었다. 하지만그가던진밧줄의방향이어긋나는바람에빠른물살

속에서허우적대는나를더욱안타깝게할뿐이었다.

“상무님! 상무님! 힘내세요.”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107

Page 10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그는포기하지않고갖은방법을다하여밧줄을던져주었으나, 이

번에도놓치고말았다. 나는이미탈진상태에서서서히강물속으로

빠져들고있었다. 무서웠다. 태어나서처음겪는공포감이었다. 그야

말로숨이턱막히면서머릿속이하얗게비워지는것같은느낌이들

었다. ‘이제죽는구나, 내인생이이렇게끝나고마는구나’라는생각

이엄습했다. 아무리몸부림쳐도힘이자꾸빠져나갔다.

그순간, 몽롱해지는의식속에서가족들의모습이떠올랐다. 6학

년인큰딸현미와 4학년인아들종헌, 막내인현아, 그리고아내젬

마의얼굴이하나씩스쳐지나갔다. 무의식중에팔을허우적거렸다.

하지만역부족이었다. 내나이 38세, 이대로포기하면몸이가라앉

고말것이다. 바로그때, 숨통을틀어막는긴박함속에서도억울하

게죽을수없다는생각이들었다. 가족과내인생을위해낯선나라

칼리만탄정글속까지왔는데숨바쿵강에서주저앉고말다니, 도저

히있을수없는일이었다.

“하느님. 아까운나의젊은영혼을구해주세요. 제발살려주세요.

이대로죽기엔너무억울합니다. 억울합니다.”

머리가수면위로솟구쳤고이제한번만더물을마시게되면모든

것이끝나는순간이었다. 나도모르게주님께기도를드렸다. 아니

그것은기도가아니라차라리절규에가까운호소였다. 이기도의힘

에의해만약살아난다면뭐든지해낼수있을것같은희한한자신

감이생겼다. 눈앞에흐릿하게밧줄이보였다.

마지막힘을다하여수면위로손을뻗었다. 밧줄이손에잡히는

순간, 거짓말처럼맥이빠져나가던몸에서바위라도잡아끌것같은

10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0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힘이솟아올랐다. 나는‘죽어라’하고밧줄에매달렸다.

이윽고배위로내몸이마치물건처럼끌어올려졌다. 나는한동안

탈진한상태에서누워있었다. 참으로묘한기분이었다. 정신을완전

히잃은것도, 그렇다고멀쩡한상태도아니었다. 현실과의끈을잡

고는있되다른세계에있는것같은그런느낌이었다. 잠시뒤에야

숨을내뱉었지만받은충격이컸다.

나는스피드보트로타라칸지점에후송된후말라리아까지걸려

오한으로떨리는몸을고열전구로안정시키지않으면안되었다.

결국자카르타로돌아와휴식을취하며한약을먹고나서야겨우

몸을가눌수가있었다. 그때정인범씨의도움이조금이라도늦었더

라면나는이세상사람이아니었을것이다. 그래서항상생명의은

인인그를잊지못하고있다. 1980년원목생산을총괄하고있던때

발생한일이었다.

원목사업은참으로힘든일이었다. 3년동안새벽 2시전에잠자리

에들어본적이없었다. 작업현장을관리하려면모든것을시간에맞

춰주어야한다. 그래야정글사업이잘돌아가게되는데, 모든것을

시간에맞추어준비하다보니한번도쉬어보지를못했다. 야성의정

글에서겪은이와같은크고작은경험들이뒷날내가사업을하는데

큰힘이되었다. 그어떤고난도이때의시련과는견줄수없었기때

문이다.

제2장 / 열정만 믿고 덤빈 정글에의 도전•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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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인내로버틴시련의세월

Page 11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고생한보람도없이빚만떠안다

월급쟁이 생활에서 탈피하여 한번 멋지게 자신의 기업을 일구어

반드시성공해보겠다는각오로안정된직장을버리고인도네시아로

날아온지어느새 3년. 그런데그기대와믿음은얼마가지않아무

참히깨지고말았다.

1980년초모든원목개발업자는반드시원목가공공장을갖춰야 1

차가공한원목을수출할수있다는인도네시아정부의시책에따라

회사정리가불가피하게된것이다. 아직이익을내지못하는형편으

로가공공장을갖출여력이없었다. 당장수출길이막히게되자이

리저리뛰어다녀도더이상회사의명맥을유지할수없게되었다.

정글속에서목숨과바꾸다시피하며지켜온회사였다. 그저미래

를위한투자이거니여기며피눈물나는고생을감내해왔는데, 그동

안애쓴보람도없이빈손으로주저앉게되었다. 아니, 빈손이아니

라본의아니게회사빚만떠안고수많은채권자들로부터수모를당

하는처지가되었다.

서울에있는집마저처분하고가족들을불러들여원목회사를성

공시키기위해온정열을쏟아부은나로서는막막하기이를데없

었다.

사장이었던동서는미국으로떠나버렸고, 졸지에사장대행격이

되어버린나에게직원들은밀린월급을요구하며괴롭혔다. 그중에

도산판에서사용한 30만루피아(125달러)가량되는스피드보트(Tug

11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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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at)용스크루한개의외상값이나를옥죄었다.

한채권자(중국인상점)는가짜형사를보내수갑을휘두르며행패

를부리기까지하였다. 살림살이를뒤져가는채권자가운데는한국

여성도있었다. 유치원에다니는막내, 초등학생인아들과맏딸 3남

매는겁이나서울고, 아내역시부들부들몸을떨며한마디말도못

한채그저바라보기만할뿐이었다.

죽도록고생하면서정해진월급대신최소한의생활비만겨우타

다가쓴것을그들이알리없었고믿으려하지도않았다. 채권자들

은내가돈을빼돌린것으로오해했다. 무참히인격을무시당한빚

독촉은 3년가까이계속되었다.

법적으로나는채무변제의의무가없었지만, 그많은채권자들과

빈손으로상대하는일은참으로어려웠다. 차라리혼자겪어야하는

고통이었다면그렇게힘들지는않았을것이다.

하지만아무죄없는가족들까지시달리다보니집안꼴이말이아

니었다. 회사차량은물론사는집마저빼앗긴가련한신세가되었

다. 한국에있었다면이렇게시달리지않고남부러울것없이살았을

가족들이었다.

그런데멀쩡한이들을낯선이국땅에불러들여놓고는제대로보

살펴 주지도 못하였다. 행복하게는 못해줄망정 힘들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니괴로움으로잠을이룰수가없었다.

나중에는삶자체를포기하려는극단적인충동에빠졌다가식솔들

을데리고도망갈궁리도하였다. 실제로그루트를세밀하게짜보기

까지하였다. 자카르타에서발릭파판을거쳐타라칸까지항공을이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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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하고, 이곳에서누누칸섬까지보트로이동하여 30분간바다를가

로지르면 말레이시아에 다다를 것이었다. 벌채 지역이 말레이시아

접경지역이어서부근지형을잘알고있었다. 하지만어린자식들을

보자나는그만모든계획을접고말았다.

아내는혼자아이셋을데리고어렵게견뎌냈다. 이런지경인데도

남편에게는싫은소리, 투정한번부리지않았다. 그런가운데채무

자들에게 살림살이마저 빼앗기는 막다른 상황에 처했으니, 아내의

심정이어떠했겠는가.

이처럼 하루하루 견디기 어려운 가운데서도 나는 회사 사무실에

나가자리를지켰다. 그들은사장과연락을하고있는지일거수일투

족을감시하였다. 결국그들은내가돈을빼돌리지않았을뿐아니라

자기네들과똑같은피해자라는사실을늦게나마알아차리게되었다.

3년간원주민이살고있는정글에서고생만하다나오고보니도

시에서의사회적인기반이있을리없었다. 물론육체적으로왕성했

던 30대에는인생의목표달성을위하여젊음을담보로맡겨진일에

정진하는것이보통이다. 그렇더라도이경우는최소한의조건이갖

춰졌을때가능한것이다.

이무렵나는대책없는생활고를해결하기위해한국화물선이들

어오면배의주방담당자에게사정하여고추장, 된장몇통과동태

등냉동어류를받아다가팔았다. 그러다보니어느새그와도허물없

는친구사이가되었다.

이일을하는동안밤에화물선에서물건들을옮기다가발을헛디

뎌물귀신이될뻔했고, 한번은봉고차에이것들을싣고왔다가경찰

11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1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백차가집까지들이닥치는바람에아이들이놀라아내에게매달리며

울었던기억도난다. 이때만큼나자신이무력하고처량했던적은없

었다.

이제와서지난날의일을글로표현하려니절로한숨이나온다. 이

때내나이설흔일곱, 아내가설흔다섯살이었다. 큰딸현미가열한

살이었고, 둘째인아들종헌이아홉살로초등학교에, 막내현아가

여섯살로서유치원에다닐때의일이다.

학비부담덜어준소중한장학금

이런가운데세를내서살고있는집의임대만료기간이눈앞으로

다가왔다. 인도네시아에서는전세라는개념이없다. 자기소유아니

면월세를내고사용하는데, 계약기간만큼의돈을일시불로먼저내

야했다. 하지만그럴만한돈이수중에없는처지였다. 가만히있다

가는그야말로길바닥에나앉는거지꼴이될판국이었다.

바짝바짝타들어가는마음을식히려몇번이고세수를했다. 거울

속에는꿈과희망을잃은채두려움과분노, 그리고절망감으로일그

러진 30대후반의사내모습이보였다. ‘내가왜이런몰골로여기에

서있을까’이렇게생각하자울컥슬픔이복받쳐올랐다. 나는이런

감정을씻어내기라도하듯이계속세수를했다.

이미손바닥에는차가운물이아닌뜨끈한액체가흘러내렸다. 얼

굴에묻은코피가보였다. 이대로주저앉을수는없었다. 나를믿고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15

Page 11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먼 나라에까지 와서 고생하고 있는 아내와 자식들을 생각해서라도

무력하게무너질수는없었다.

“이대로는아니야. 이대로포기할순없어. 죽을때죽더라도다시

한번해보는거야!”

나는거울에비친내모습을보며굳게다짐했다. 아내와아이들이

아빠가자랑스럽게여길수있도록성공해서한국으로돌아가리라.

그러기위해서는의욕을불태웠던초심으로돌아가반드시재기해야

한다고결심했다. 그렇다고당장어떤구체적인계획이나대책이있

는것은결코아니었다.

그길로중국사람인주인을찾아가솔직하게내사정을얘기했다.

현재상황을설명하고, 3년치를일시불로지불할수없으니분기별

로지불하도록편의를봐달라고부탁했다. 처음에는거절했던그였

지만절실한나의태도에마음이끌렸는지청을들어주었다. 한달

가까이찾아간결과였다. 일단집에서쫓겨나는수모는피할수있게

되었다. 그때우리가살았던집은자카르타의변두리지역인스나얀

24번지에있었다.

아이들의교육비도큰부담이되었다. 미국인학교에다니던딸은

졸업을했지만아직상급학교에진학하지못한상황이었고, 아홉살

인 아들은 미국인학교에 계속 보낼 여력이 없어서 간디국제학교로

전학을시켰다. 냄새가날정도로낡고어두컴컴한교실, 청결치못

한교육환경을보고가슴이아팠다. 그런데그나마아들을등교시키

다가큰사고까지낼뻔했으니, 그처절함이란이루표현할수없을

지경이었다.

11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1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어렵게장만한폐차직전의낡은벤을몰고가다가시내중심가에

서핸들이고장나는바람에차량중앙분리대를넘어접촉사고를내

고만것이다. 자칫했으면사상자가나왔을정도로아찔한순간이었

다. 아들을태우고등교시킨지며칠이안되는날이었다. 다시는어

린아들을태우고등교시킬엄두가나지않았다.

괜히화가나서앞으로는불편하더라도버스를타고가라고윽박

지르듯이말했다. 지금생각하면아들에게는차마못할화풀이였다.

그무렵나의심신은지칠대로지쳐있었다.

큰진전없이해를넘기고막내딸이학교에들어가야하는시기가

되었다. 큰딸과아들을계속해서간디국제학교에보낼수는없다는

생각이들었다.

교육은백년대계라고했다. 아이들인생을대신살수는없지만부

모로서해야할최소한의의무는다해야했다. 그의무중빠뜨릴수

없는것이교육아닌가? 좋은학교에서좋은교육을받을수있도록

해주는것이부모의도리이지싶었다.

나는며칠동안고민한끝에장학금을신청하기로마음먹었다. 그

래서정성껏문서를작성하고미국인학교에관계서류를접수시켰다.

지금까지딸과아들이이학교에다녔으나형편이좋지못해다른학

교로전학을했다는것, 이제막내가입학할나이가된처지로서자

식 3명을모두좋은학교에서교육을받게하여졸업후사회를위해

일하는훌륭한인간을만들고자하니기회를달라는내용을첨부하

였다.

교장선생님과의면접때도솔직하게내처지와교육관을말했다.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17

Page 11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아울러내가 3년동안열정을바쳤던사업이잘못돼중도에포기하

는바람에모든상황이심각해졌으며, 그원인은인도네시아의산림

육성책이갑자기변경되었기때문이라는설명을보탰다.

거듭자식들을누구보다잘가르쳐서이사회가필요한사람으로

키우고싶다는바람을강조했다. 진지하게나의말을듣고난교장선

생님은혼자결정할수없으니이사회에서상의해보겠다고했다.

며칠후나의진심이통했는지미국인학교로부터자녀 3명중한

명만학비를내고두명은장학금으로학교를다닐수있게해주겠다

는통보를해왔다. 이런곡절끝에우리는장학금으로미국인학교를

다니는한국인최초의가정이되었다. 진실이담긴인간의감정은국

적을떠나어디서든통한다는것을보여준사례라할수있다.

6개월만에간디국제학교에서환경이좋은미국인학교로전학한

아들은과외활동으로야구부를선택하였다. 그런데아이는누가시

킨것도아닌데야구부모자가일본것이라며기어코쓰지않았다.

인도네시아사람들도한국인들처럼일본을좋아하지않은편이었지

만, 아들이이렇게반발하는기세를보인것은뜻밖이었다. 이런소

문이교내에퍼지면서아들은유명해졌다.

상급반으로진학한뒤에는자기가슴이아빠보다넓다고자랑하는

가하면, 나와함께말을타고고산지대를달리기도했다. 사내답게

키운다며이른새벽에학교운동장에데리고나가몇바퀴씩뛰게하

였다. 그러다보니애가얼마나고단했는지교정의나무아래서졸고

있는모습을보기도하였다. 그뿐이아니었다. 태권도도배우게했

다. 1985년경이었다. 그때의기억이마치며칠전에있었던일처럼

11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1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새롭다

그런데종헌은한국아이들이매를맞으면으레외국아이들에게

대신복수를하곤하였다. 그들을혼내주어다시는한국아이들을손

찌검하지못하게하였다. 그래서학생들사이에서는‘의리있는꼬마

대장’으로통했다. 그동안이런저런일로나는미국인학교교장에

게세번이나불려갔다.

어려서부터아내는아이들에게유난히강조하는말이있었다. 그

것은분수와국가관으로요약되는교육방침이었다. 구체적으로설

명하자면, “네가좋아해도상대방에게방해가된다면하지말아야한

다.”는것과“외국에사는너는항상개인김종헌이아니라대한민국

의아들김종헌임을명심하고행동해야한다.”는가르침이었다.

다행히남매가장학금을받게돼학비부담은덜게되었으나생활

비가문제였다. 어떤사업을해야단숨에일어설수있을까하고궁

리하며사방으로새로운일을찾아다녔다.

이때누군가군에무기를납품하는일을따내면크게한몫을잡

을수있을것이라며벨기에제총알납품을권해왔다. 그일을해

보려이리저리뛰어다니는데하루는낯선사람에게서협박전화가

걸려왔다.

“너콩알먹고싶으냐?”

첫마디부터가심상치않았다. 그말은총맞아죽고싶으냐는뜻

이었다.

“왜남의사업에끼어들어? 뭘 모르는모양인데, 엉뚱한짓하지

말고이바닥에서꺼져!”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19

Page 12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위험을무릅쓰고해야할만큼승산이있는것같지도않아당장

그일에서손을뗐다. 내가일을하려는것은정당한방법으로성공

을하기위해서이지, 개죽음을당하려는것은아니었다. 그 후에도

나는다른일을찾아돌아다녔지만마땅한것이없었다.

하기야나는채권자를피하기위해집을비우는경우가많았다. 한

달에절반이상을수마트라. 술라웨시섬등지를돌아다니면서일거

리를알아보고사업을위한자료도수집했다. 하지만아무진전이없

는나의행동은어찌보면뜬구름을잡는꼴이나다름없었다.

어느정월초하룻날이었다. 보다못한아내가그렇게몇년을구름

만잡으러다닐생각이라면아예이혼을하든지, 귀천따지지말고

힘을합쳐무슨일이든해보자고심각하게말했다.

어려운가운데서도어떻게든살아보려애쓰는아내의눈에는손에

잡히는대책없이밖으로만나도는남편이원망스러웠을것이다.

지문이사라진아내

1980년부터 산림개발사업은 정부 시책으로 인해 도저히 재기할

수없는어려움에처하여모든비즈니스는전무한상태에있었다. 막

막한장래를생각할때처절함을느끼며세월을보내야만했다.

이무렵자카르타에는한국인이라고해야 300여명밖에거주하지

않았다. 인원이많지않다보니아쉬울때서로의지하고싶어도딱

히비빌만한언덕이되어주지못했다. 나는산림개발사업을접게되

12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2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자프리랜서가되었다. 명색이프리랜서이지실은실업자란말을듣

기싫어끌어다쓴포장에지나지않았다. 프리랜서란단어도잘쓰

지않던때였다.

처음에는빈손으로라도귀국하여새로운직업을가져볼까생각했

다. 막상이렇게결심하려들자자존심이용납하지않았다. 그렇다고

미국행을고려하지않았던것은아니었지만, 선뜻내키지않았다. 고

심끝에‘용의꼬리보다는뱀의머리가낫다’는격언을따르기로작

정하였다. 아무연고가없는미국에서백지상태로어렵게출발하는

것보다실패의경험을살릴수있는인도네시아쪽이한결승산이높

다는판단이섰기때문이다.

우선큰욕심없이작은일부터손을댔다. 자카르타무역관에근

무하는유태준부관장의주선으로안내책자와낚싯대, 낚싯바늘견

본을받아다팔았다. 그때지인이었던초대검찰총장자녀인수산토

자매의권유에따라사무실로쓰라고내어준집차고에다쇼룸이랍

시고낚싯대몇개를올려놓고손님을기다렸다.

그러나애쓴만큼수입으로연결되지않았다. 하다못해관심을끌

어볼 요량으로 검찰총장 가족의 주선으로 지방 유지들에게 한국의

새마을사업을소개하는테이프를구해다가방영하는등백방으로노

력했으나별소득이없었다.

나중에는원목개발사업할때사업상의많은의견을나누어우리

의도움을받았던초창기한국인섬유제조업자모씨를찾아가어렵

게된생활고를설명한뒤조금이라도도움을얻고자한국과인도네

시아간에이루어지는수입업무를나에게맡겨달라고부탁하였다.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21

Page 12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하지만기대와는달리냉담한반응이돌아왔다. 그때내가느낀비참

함이란말로다표현할수없을정도였다.

이때는부하직원도, 모실사람도없는그야말로나홀로의인생이

었으니, 그때마음을단단히잡지않았다면모든일이헝클어지고말

았을것이다.

어느날점심을먹으러코리아하우스(현그랜드하얏트호텔자리)에

있는식당을찾아들어갔다. 비빔냉면한그릇을시켜먹고있는데,

어느 산림개발회사 신입사원 여럿이 둘러앉아 즐겁게 점심을 먹는

모습을보자그만서러움이복받쳐먹기를포기하고식당을나오고

말았다.

흘러내리는눈물을억제하느라아까운냉면한그릇을비우지못

했으나, 그시절에겪은고생이뒷날어려운사람들을보면외면하지

못하게하는사람으로만들어주었다.

홀로서기의외로움은실제로당해보지않은사람은실감하지못할

고통이다. 지금돌이켜보면이같은모멸감이오히려나를자극하고

오기를갖게했다. 그러니까나를절망속에서일으켜세운것은 8할

가량이오기였던셈이다. 이무렵나는어려운일들을겪으면서몸이

성치않고는아무것도도모할수없다는인식을갖게되었다.

그러자문득‘건강을못지키면사업도성공시킬수없다’는일본

마쓰시타사사장의명언이떠올랐다. 대한항공에다닐때인상깊게

읽었던그의자서전에나오는말이다.

채권자 등 별의별 사람들이 들락거리며 심기를 건드리는 생활의

여파속에서어떻게든재기해보려는나의의지에도불구하고형편

12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2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은좀처럼나아지지않았다. 얼마나마음고생이심했으면밤낮없이

우느라아내의눈에진물이다났을까. 그러다보니 30대중반나이

에돋보기를쓰게될만큼아내의시력이약화되었다. 그때내가받

은충격이란, 나의모자란문필의능력으로는어떻게표현해야좋을

지모르겠다. 혹독한경제적파탄속에서살아있다는것자체가신

기할따름이었다.

이런가운데이웃에사는수지어머니께서된장을만들어판매해

보는게어떻겠느냐는의견을제시해왔다. 옆집에사는웅식의어머

니는 고춧가루를 보내주고 고추장을 만드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며

적극적으로권했다. 내친김에된장담그는방법도배웠다.

나는아내와상의한끝에윗동서인사장부친에게가래떡뽑는기

계한대만보내달라고부탁하였다. 우선흰떡을만들어팔아볼요량

이었다. 기계에서가래떡이만들어져나오기시작하니온동네에소

문이났다. 1980년초였다. 동남아에서는처음맛보는가래떡이었을

것이다. 보통한국에서말린흰떡을가지고와서물에불려서먹었던

시절이었다.

이를계기로우리집은어느새‘스나얀떡집’으로소문이나기시

작했다. “미시즈킴, 남들이떡집이라고하면어때? 힘을내야지요.”

하며힘을북돋아주던한우석대사님부인의말이생각난다.

뿐만아니라윤영섭공사부부는떡기계를설치하는우리의모습

을보고 25㎏짜리쌀두부대와오렌지봉지를보내주면서이제는언

니도자카르타에없는데외국생활이얼마나외롭겠느냐고위로해주

었다. 그분들이돌아간뒤오렌지를까먹으려던아내는쏟아지는눈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23

Page 12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물을억제하느라고개를들지못하였다. 우정이담긴정말로고마운

선물이었다. 우리내외는이들의도움을두고두고잊지못하고있다.

연말이나설이되면떡을사러오는사람들로우리집은붐볐다.

발을디딜틈이없이없을정도로북새통을이루었다. 오래지않아

지방에서까지떡주문이들어왔다. 이처럼대목때는고단하기는했

지만가게문을닫고저녁때아내와마주앉아수북이쌓인돈을세

는흐뭇함이란이루말할수없었다.

이렇게하루에모이는돈은한자루가되었다. 하지만원료비와생

활비를빼고나면빠듯했다. 그나마인건비가들어가지않는게다행

이었다.

기계에서 뽑아져 나오는 가래떡은 뜨거워서 손을 대기가 어려웠

다. 하지만연약한아내는쉴새가없었다. 이때부터아내의손은거

칠고갈라지기시작했다. 체중도 39㎏으로줄었다. 밤잠을설치며일

을하느라몸을돌볼겨를이없었던것이다. 아내가애처로웠지만어

쩔도리가없었다.

아내의일은여기에서끝나지않았다. 밤낮 없이고추장담그랴,

메주를쑤어내랴정신이없었다. 동그러우면서도넓적한메주를만

들기 위해서는 떡방아에서 나오는 뜨거운 콩을 맨손으로 다루어야

했다. 이런노력의과정을거쳐만들어놓은고추장과된장이각각

5t이넘었다.

이때는자카르타를오가는직항항공기가없었다. 서울서출발하

면홍콩을경유하여자카르타에왔다. 된장과고추장을한초롱씩가

져왔는데비밀봉지를준비해두었다가홍콩의호텔화장실에서물량

12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2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을분산하는일을했다. 그렇지않으면비행기가고공에이를때된

장이폭음과함께터져승객들에게된장세례를줄염려가있었기때

문이었다. 실제로그런일도있었다.

이런가운데아내가과로로쓰러져병원으로실려가는일이벌어

졌다. 게다가신장결석증까지생겨고통을호소하게되었다. 그러나

병원에입원할처지가못되었다. 이웃에사는수지엄마가교민회에

알려서도움을청해보라고했지만, 동네의사가준진통제로고통을

견뎌냈다.

그때맥주를많이마시면효과가있을것이라는의사의권유에따

라시킨대로했더니거짓말처럼돌이빠져나왔다. 나는뜬구름잡느

라고지방으로돌아다니다가전화통화도안되는섬에가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은 정기적으로 현지 이민국의 거주 허가를

받아야한다. 배정받은날짜에우리도이민국엘갔는데, 아내의지문

을채취하던직원이짜증난목소리로지문이나오지않는다고투덜

거리는것이었다.

무슨소리야? 아름다운아내의손이닳아지문이없어지다니! 잠

시후에야그이유를알수있었다. 메주를만드느라, 고추장을담그

느라, 가래떡을뽑아내느라쉴새없이놀려야했던손에이상이생

긴것이다.

처음에는별일이라싶어웃음까지나왔지만얼른거두었다. 순간

아내의얼굴을정면으로바라볼수가없었다. 아울러시집을잘왔으

면이런고생은안해도되었을것이라는자괴감이들었다. 옮겨놓는

발걸음이무거웠다.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25

Page 12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원목사업접고식품업으로전환

사업영역이바뀌었지만생활이어렵기는마찬가지였다. 아무경

험이없는내가감당하기엔낯선것이너무도많았다. 악몽같은정

글생활의실패를딛고새로출발해야하는나의처지는물에빠져

잠기는옷의무게만큼이나버거웠다. 남의도움을기대할수없는상

황이되다보니잠시라도휴식을취할새가없었다. 백인책임자를

상대로시작된식품사업이처음으로납품되는시점에이르기까지는

많은시간과노력이필요했다.

바쁜가운데서도칼리만탄은물론암본, 술라웨시, 마나도와수마

트라두마이현장까지두루살펴야하는식품사업의출발은아주분

주하였다. 비행기를이용해야하는장거리출장때는기내에서휴식

시간을가질수있어좋았다. 이제지나고보니이같이긴장된가운

데열정적으로뛰었던삶의나날은오히려큰도움이되었다. 늘그

막에도노익장을과시하는정도가되었으니얼마나다행스러운일

인가.

긴장의연속된생활은건강을유지하는데큰몫을한것으로판단

된다. 그동안열정적으로뛰었던지난날들이늘그막에건강을지켜

주게됨을새삼느껴본다.

정글에서의 생활은 촌음을 아껴야 하는 시간과의 싸움이었지만,

육지에서의생활역시긴장을풀수없는적자생존의싸움이었다. 무

12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2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에서유를창조하려면한가로울새가없었다. 6·25때남하한피난민

들의처지가그랬을것이다. 나역시무일푼으로오뚝이처럼일어섰

기때문에 6·25때남으로내려온피난민이상으로어려움이있었다

고말할수있다. 바다를건너온중국인들도나처럼누구의도움없

이자생했다는것을알게되었다.

내가소규모이지만식품업에손을대기시작한것은 1981년중반

부터였다. 1년만에‘무궁화식품’으로이름이바뀌긴했으나, 그당

시는‘한국종합식품’이었다.

한국식품은자카르타집에서공장과같이운영하였다. 서로부딪

칠정도의좁은공간에서작업을해야했기때문에항상번잡하였다.

현지에서구입한한트럭분의오징어를식모를포함한 20여명이처

마밑에둘러앉아제록스재단용작두로잘라내어채를만들었다. 물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27

자카르타스나얀주택에서만들어발효중인장독들. 무궁화식품

사업초기에는이처럼가내수공업형태로시작하였다. (1981년)

Page 12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로씻어내어깨끗해진오징어를양념을넣은여러개의솥에볶아내

면무게가몇배로늘어나서그만큼이익이되었다.

그런한편, 한쪽에서는가래떡을만들어야했다. 일을서두르다보

니어린종업원이기계에손을잘못대손가락이말려들어가는소동

이벌어지기도하였다.

당시나는원목개발회사가졸지에문을닫게됨에따라생활비마

저충당하기어려운처지에놓였다. 어떻게든일어서기위해동분서

주하였다. 정부투자회사를찾아다니며제재기(製材機)를팔기도하

고, 냉동설비를판매한답시고인도네시아곳곳을돌아다니며피스

톤타입과스크루타입을설명하느라목이쉴정도였다.

이렇게별소득없이돌아다니는동안아내는온식구가잠든틈을

이용하여뒤뜰에앉아밤새버무린김치를비닐봉지에담아생고무

줄로묶는일을시작하였다.

보다못해나는아내가만든몇봉지의김치를가지고겔라엘슈퍼

마켓을찾아가책임자에게부탁하여납품을하였다. 그러나양이너

무적다보니수금을제대로할수가없었다.

식품사업초기에는정상적인물품수입이어려웠다. 냉장식품은거

의 정기화물선에 의해 비공식적으로 들여왔다. 대부분이 과일이었

다. 그마저냉장컨테이너가아니고선원용식품창고에보관해서운

반해왔다. 그래도연말에대사관에서현지장관들에게선물용으로

구입하는신고배는인기상품중하나였다.

그런데 대사관에 납품한 한국산 배의 상당수가 상했다는 통고를

받았다. 불량품의값을공제하고대금을청구하려했더니, 이미납품

12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2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한전체의금액을그대로지급토록해주었다. 아마도최상섭대사님

(장군출신)의배려가아니었나생각된다. 어렵게첫사업에나선한

국교민을도우려배려한그의마음을읽을수있었다.

그는지성과덕망을겸비한분으로서, 인도네시아대사재임동안

많은한인과현지인으로부터존경을받았다. 수십년이지나도록존

경하는마음에변함이없다. 본국으로귀국한후에도가끔만나대화

를나눌기회가있었는데, 나는그때마다그분의포근한인품에끌

리곤했다.

전세비행기까지동원한김치수송

내가칼리만탄본탕지역의가스채취현장을방문한것은하라판

인사니(Harapan Insani)회사의미국인구매책임자를만나기위해서

였다. 발릭파판공항에서본탕까지경비행기로약 15분날아가면바

탁가스개발회사의현장이있었다. 그때 800여명의한국인기술자

가있었는데, 인사니회사는수하르토대통령의오른팔격인동서가

경영하는곳이었다.

나는사무실로쓰고있는임시막사를찾아가미국인구매책임자

에게단도직입적으로어려운사정을설명하고, 한국인부용부식을

납품케해달라고부탁하였다. 인도네시아정부의시책에따라원목

개발사업을그만두게된경위에대해설명하고, 어린자식들의교육

과가족을부양해야하는가장으로서의책임을감성적으로토로하였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29

Page 13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다. 아울러한국식품의품질은믿을만하다고강조하였다.

나의말에진정성이느껴졌는지 20분이지났을때호의적인반응

이돌아왔다. 경쟁자인싱가포르와중국인이제출한견적서를보여

주며서류를제출해보라고하는것이었다. 나는손님용숙소에서하

룻밤을묵으며견적서를작성한뒤회사의타자로쳐서제출하였다.

뜻밖에도나는납품권을따내는행운을얻게되었다. 그야말로일사

천리로이루어진낙찰이었다.

이때의납품경쟁자는수하르토대통령이관련하는회사의자금을

운영하는대기업체인중국인회장이었다. 결국중국인들과의경쟁에

서그들을물리칠수있었던것이나에게오늘의사업기반을다지게

한계기가되었다.

13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1983년 식품사업초기에김치를납품하기위해치파나스고산지대에채소를계약

재배했다. 사진은수확을돕는저자(왼쪽)와 아내(오른쪽두번째).

Page 13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나는기쁜마음으로자카르타로돌아왔다. 한국으로비자를받으

러나가면서칼리만탄에서미국인이김치이야기를하면짧은영어

로대꾸하려하지말고무조건“예스! 예스!”하라고당부하였다. 아

내의지혜로운대처로서울에도착해본즉자카르타로부터김치오더

가와있었다.

이때부터수소문하여푼착이라는고산지대에다무와배추를재배

하도록조치(계약)하고김치공장을운영하게되었다. 감당할수없을

만큼일손이바빠지기시작했다. 몇백킬로그램도많은양인데, 매일

수톤분량의김치를담가야하니보통일이아니었다. 매운김치를

비비느라아내의눈에진물이날지경이었다. 하루두어시간만자고

밤샘을하게되는상황이계속되었다.

아내의진두지휘에따라몇트럭분량의무를비닐속에담아드럼

통에소금과물을같이넣어보내면자연히무절임이되었다. 수마트

라현지에도착하는사이에제대로익은장아찌가된것이다.

처음에는김치를매일수톤씩가루다항공으로수송하다가나중에

는F27기까지동원하여의자를치운뒤가득실어칼리만탄으로보

냈다. 이어다음비행기로따라가서발릭파판공항에서경비행기로

옮겨싣고본탕이라는현장까지수송해야했다. 경비행기가하루종

일날아야김치수송이완료되었다. 그야말로군대의물품수송작전

을방불케하는만만치않은운반과정이었다. 이때내가받은칭호

가‘김치맨’이다.

수백통이되는김치를오전에출발하는비행기에탑재하는데, 다

른공항에서경비행기로옮겨싣기위해현지인들을독려해야했다.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31

Page 13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비가많이오는날에는비행기밑에서대기중인수많은김치통에물

이스며들까봐노심초사했다.

한번은 칼리만탄 발릭파판행 비행기에 탑승한 뒤 마침 김치통이

실리는것을보고기내에서내려와비에젖지않도록현지항공사직

원들을격려하며옮겨싣고있었다. 그런데모대기업회장이이광

경을보고자기아들에게“저것봐라. 김우재가저렇게열심히일한

다.”고말하는것을들었다.

처음에는이말이‘크게돈번사람이자신의어려웠을때일은생

각하지않고딱한처지에있는남의일을불구경하듯한가롭게여기

는구나’하는 괘씸한 생각이 들어 처량했지만, 수수하게 받아들였

다. 어려운자의어쩔수없는자격지심이었을것이다. 그분의한마

디말이나의귓전에맴돌면서열심히일하여반드시사업을일구어

13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제조한김치를항공기로수송하기위해김치깡통을포장하는현지직원들. (1981년)

Page 13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놓고야말리라고굳게마음을다지는계기가되었다.

공항에서는김치통이터질까봐염려가되었다. 국물이흘러엉망

이되는것을막기위해인부에게뿌린돈이많았다. 그래서인지내

가나타나면인부들이곧잘모여들었다. 그러다보니팁을잘주는

사람으로통했다.

여담이지만, 뒷날수하르토대통령의오른팔격이었던모회장과

대화하던중에대통령회사와경쟁하여내가이겼다니까, “티닥아

파.”(잘했다)라고대꾸하여크게웃었던적이있다.

이때스리랑카인이경리부장이었다. 부인이의사였는데, 그가매

주결재를해서내명의은행계좌로돈을보내주었다. 자금결재가

빨라서신기하기까지하였다. 거래처가원목개발회사의계좌가있던

은행과같아혹시전회사의부채를뒤집어쓰게되지나않을까걱정

했으나별다른문제는없었다.

코인부미(KOIN BUMI)무역으로출발한1983년당시의이야기이다.

배짱으로따낸공사장의식당운영권

1984년중반무렵, 하루는수마트라남부두마이항구의정유공장

건설에한국의H사와D사가참여한다는소식이들려왔다. 3천여명

의한국인기술자들이투입되는대공사라는것이었다. 그들이소비

할식품을댈수만있다면대단한이권을확보할수있는기회였다.

나는이소식이사실임을확인하자며칠동안흥분되는감정을억제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33

Page 13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하지못한채수마트라로향하였다. 결코놓칠수없는기회였다.

파칸바루공항에내려 2시간가량기름으로덮인도로를달리는택

시안에서나는기름을채굴하는메뚜기같은장비를보았다. 미국

캘리포니아와같은지역에서흔히보는석유채굴광경과다름없는

움직임이차창밖으로스쳐지나갔다.

주위에는화전민이살고있었다. 도로중간쯤에이르자음식점간

판이눈에띄었다. 유명한지방음식인파당을전문으로하는곳이

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던가. 마침 배가 고팠던 참이라

잠시내리기로하였다. 듣던대로맛이있었다.

두마이에도착하자, 퍼르타미나게스트하우스로찾아갔다. 사장과

면담한끝에식당운영권을따낼수있었다. 약속을어기지않았던

김치납품실적이꽤알려진모양이었다.

현재의시설을한식당으로개조하고한국인주방장과판매책임자

를고용하였다. 두마이퍼르타미나게스트하우스식당을한국식당으

로합병운영하게된것이다. 사무실은물론통신, 차량과인원등모

든편의를확보할수있어서일거양득이되었다. 처음에현장사무실

로찾아갔을때는앉으라는인사치레조차없이작업용군화를책상

위에올려놓은채시큰둥한표정만짓던사람들이식당을찾는고객

의신분으로바뀌었다. 그저주님께감사할따름이었다.

1천 5백명에이르는많은인원의주·부식공급을전담하면서나

는적지않은고충을겪었다. 상당량의식품을공급하게되다보니

현지업자들의방해가심했다. 그가운데미행의조짐까지보인것은

중국인이었다. 그런움직임자체가나에게는위협이되었다.

13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3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그러자문득이곳에처음찾아올때택시에동승했던안내자로부

터들은말이생각났다. 현지상인들의반발을각오해야한다는조언

이었다.

여기에대비하기위해나는촌장의두목격인홍등가의큰손이되

는집에방한칸을세를내어들어갔다. 휴일에는일부러촌장의지

프차를타고환락가를돌아보며친밀한모습을보였다. 오래지않아

사업을방해할목적으로미행하던중국인들도주위에서떨어져나

갔다.

신변의위협을느낄때를대비하여현지조폭들과인간적으로사

귄것이훌륭한보호막이되어준것이다. 덕택에정유공장공사가끝

날때까지안전하게사업을해나갈수있었다.

나중에는 공사판의 인원이 3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사람이 많다

보니식당에서말썽을부리는일도적지않았다. 그때주방장이서

씨성을가진유도유단자였는데, 해결사노릇을톡톡히했다. 내가

주방장에게지시하기를홀에서시끄럽게말썽을부리는사람이있으

면누구를막론하고밖으로불러내혼내주라고당부하였다. 그랬더

니보통하루저녁에 2~3명이앞마당에업어치기로내던져지는웃

지못할일들이벌어지기도했다.

음식자재를납품하는데는수량이많은소고기를확보하는일이

쉽지않았다. 납품량이많을때는한번에두트럭분이상의소가필

요했다.

파당근교의부킷팅기라는직거래지역도살장에서소고기를수송

할때는 3명 1조로구성된팀이맡아했다. 이들은출발전에강도를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35

Page 13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만나돈털리고몸상하는일이없도록주의를받아야했다. 그리고

돈자루와함께도끼, 칼따위를지프에싣고와서소고기를냉장처

리했다.

이 일에는 당연히 건장한 운전기사와 힘센 거구의 보디가드들이

가담하여만약의사태에대비하였다. 흡사서부활극에서나있을법

한특이한광경이었다.

나는 공사장을 드나드는 동안 인부들의 작업 과정을 눈여겨보며

이에필요한기술과지식을터득하게되었다. 이는향후건설회사를

경영하게된밑거름이되었다. 어쩌면은연중에정유공사가끝나는 2

년이후를대비하고있었던셈이다.

새우잠으로버틴코리아가든시절

재기의꿈을버리지않고술라웨시섬에서말루쿠섬, 자바섬, 수

마트라섬까지두루돌아다니는 5년동안나는지방의특색을잘파

악할수있게되었다. 칼리만탄사마린다근교의정유공장을비롯하

여발릭파판정유공장, 수마트라두마이대형정유공장의공사현장

에식품을납품하는 1차단계를마무리하고, 새일을추진하게되었

다. 이제돌아다니며몸품을파는일에는진력이나있었던참이었

다. 덜돌아다녀도될일을하고싶었다.

그렇다고달리뾰족한수가있는것도아니었다. 결국두마이공사

현장에서얻은요식업의경험을살려보다체계적인식당운영을해

13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3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보자는쪽으로방향이정해졌다. 이사업은지금까지해온식품납품

업과나란히갈수있는것이어서주저할필요가없었다. 일단자카

르타시내로나가자. 식당업으로출발하는이런선택은대개중국상

인들이처음사업을할때밟는수순이었다.

자카르타시내중심지에처음한국말로된간판을걸었다. 뗄테면

떼라는식으로붙인간판이었으나묵인되었다. 한국을전면에내세

운‘코리아가든’은이렇게출발하였다.

인테리어에문외한인내가밤을지새워가며도면을그리고목수와

연구하여작품처럼훌륭하게만들었다. 열심히그리면그대로도안

으로작업할수있어서기쁨도컸지만, 무엇보다비용절감이많이되

었다. 이런준비과정을거쳐‘코리아가든’이문을열게된것이다.

이와동시에만다린·아리아두타호텔등에서한국음식전시회를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37

1989년경인도네시아중앙정보부장요가수고모대장의자녀결혼식에

참석하여축하하는저자.

Page 13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열어인도네시아에처음한국의맛을알리는기회를가졌다. 이행사

에수하르토대통령의고위급비서관도다녀갔다.

개업식이열린후첫손님으로모그룹총회장이찾아온적이있었

다. 음식값을받지않으려고하자“내돈을받아야성공한다.”며한

사코계산을하고갔다. 손님중에는베니국방장관과트리통합군

사령관이자주드나드는편이었고, 여러나라의대사와말레이시아

국왕까지모시게되었다. 미국출신밴신부께는이지역을다녀가는

그분의친구신부에게까지식사를대접하도록각별히신경을쓴기

억이남는다.

그러다보니‘코리아가든’은어느새고급사교장으로서의면모를

갖추게되었다. 나로서도당시실세였던현지고위급군인들과사회

지도층과의친교를통해자연히인맥을형성하는계기가되었다. 그

뒤 10년이흐르고 27년이지나는동안공수특전단장등과친분을두

텁게유지하며대통령자문위원등인사들과도유대를갖게됨으로

써사업기반을쌓는데도큰배경이되어주었다.

나는이무렵누구로부턴가“사람이돈을갑자기많이만지게되면

죽을수있다.”는말을들었다. 우회적인표현이지만나는이충고를

예사로흘려듣지않았다.

식품납품업이몸으로뛰어야만하는제2의서비스업이되다보니

초저녁때면입에서단내가날지경이었다. 체면불구하고 3평이채

안되는문간사무실에들어서기가바쁘게책상위에쓰러져고단한

몸을달래야했다. 이럴때는으레돈에너무집착하면오래못산다

는말이떠올라과욕의충동을버려야한다고다짐하곤했다.

13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3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나는대한항공일본지사근무시절에『중국인의상술』이라는일어

판책을읽은적이있는데, 사업상많은참고가되었다. 세계제2차

세계대전당시중국인들이조국을탈출하여외국에들어가서자리를

잡는데는몇가지유형이있다고하였다.

무일푼인 경우 점원이나 식당 종업원 노릇에서 노점행상을 하다

가, 좀더큰행상을, 그후아주작은규모의가게에서아이들과숙식

을해가며여유를가질수있는안식처를찾는다. 여기서성공하면

일반식당을차리고제법큰규모를갖춰나가게된다. 이쯤되면벤

츠정도를구입하여몰고다닌다. 그이상되면대형술집이나큰사

업체를차리게된다. 이것이중국인의상술일면이다.

나도이런과정을어느새답습하고있었다. 한국인들은요식업도

단독으로할수없어현지인의명의를빌려서하든지동업을하지않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39

코리아가든홀에서. 말레이시아조홀바루국왕(중앙)을 중심으로

오른쪽부터아굼공수특전단장과저자, 말레이시아대사. (1993년)

Page 14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으면안되었다. 나역시현지파트너와동업을하면서타마라총재

에게소지분을주고서합류케했는데, 그때동업자는의심이많고아

전인수격으로매번이익금을챙기려들었다.

매상액을계산할때마다이유를찾아내불리하게만들었다. 이런

일이거의고질이다시피반복되었다. 그러다보니감정이악화될대

로악화되기에이르렀다. 결국하루는좁은사무실의문을걸어잠그

고단둘이서담판을짓기로결심을하였다.

이때마침서울에서긴급한전화가걸려왔다. 잠시통화하는중에

갑자기동업자가큰반지를낀손으로나를가격하여눈썹위가찢어

지는큰상처를입게되었다. 그러나재차강타가들어오는순간, 반

사적으로몸을날리면서비대한동업자의가슴에쥐고있던크로스

14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골프가생활화되다시피한인도네시아에서는대부분의친교가골프장에서이루어

지는수가많다. 사진은페불비치링스골프장을찾은저자부부가클럽하우스의홀

1번티박스에서라운딩을시작하며잠시포즈를취한모습. (2003년 4월 27일)

Page 14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펜을박아버렸다.

호랑이가총에잘못맞으면 3m를뛰어오른다는데좁은공간에서

책상을건너뛰는찰나크로스펜이흉기로변하고말았던것이다. 내

친김에사무실문을열고경리직원에게고함을질러밤방요가씨에

게전화하라고지시하였다. 밤방요가는당시친분이두터웠던중앙

정보부장의둘째아들이었다. 그때는정보부장의아들정도라야권

총을소지하던터라그렇게엄포를놓은것이었다. 실제로그시절엔

정보부장이나 부부장인 로집토 장군과도 절친한 사이였다. 그들은

내가어려울때부탁하면여러모로도움을주었다.

골프가생활화되다시피한인도네시아에서는많은사람들의친교

가골프를통해이루어지게마련이었다. 그러다보니골프는단순한

여가운동이아니었다. 더욱이불우이웃돕기자선골프대회같은행

사에는빠질수가없었다. 이들과한조를이루어친선경기에임하였

다. 때로는노장군이갑자기전화를걸어와골프장으로달려가는일

도여러번있었다. 골프를치면서인생을논하던노장군의모습이

아직도눈에선하다.

이런친분관계는그뒤자녀들에게도이어져서로자연스럽게왕

래하고사업에관해서도스스럼없이의논하며많은도움을주고받는

사이가되었다.

그래서 동업자와 혈투가 있었지만, 물러서지 않는 나의 기세에

눌려마침내꼬리를내렸다. 덕택에잡음없이 사업체를운영할수

있었다.

중국인도 역시 강하게 나오는 상대에게는 눈치를 보고 신중해진

제3장 / 인내로 버틴 시련의 세월• 141

Page 14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것으로판단된다. 그렇지않은개인사업자들은그들과관계를맺었

다가도실패한경우가많았다. 그래서인도네시아에서특히경계해

야될대상으로매단지역과같은수마트라섬에서올라와자리잡은

중국인이지목되기도하였다.

요식업은 나의 전문업종이 아니었다. 목적한 유통사업이 안정될

때까지한시적으로한것이었기때문에현지파트너와문제가발생

하면서 1년이지나정리를하였다. 동시에사전에준비한유통업을

본격화하면서건설회사와관광회사, 제빵사업을시작하여궤도에올

려놓고, 중견회사로발돋움하게하였다. 아울러나는유통사업의체

인화를적극적으로추진하게되었다.

14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4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제4장

맨손으로실현한

코리언의꿈

Page 14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은행빚없이물류센터신축

인도네시아에서는외국인에게주택의소유권을주지않는다. 그래

서임대하여사용할수밖에없는데, 임대조건이전세가아니고 3년

만기에일시불로되어있다. 어려운시절에는대개 3년간저축하고

임대료를내고나면빈손이될때가많았다. 대개개인사업자의경우

이돈을지불하는날은허탈감에빠지게된다.

나역시사업을시작할때에같은경험을했다. 그때의기분은말

로이루다표현할수없다. 현지인들은집몇채만있으면사재기하

여임대료수입으로부호가되는경우도많다. 외국인을상대로한

주택의임대료가비싼대신, 주택가격은옛날에도그리비싼편이

아니었다.

자카르타 잘란 스나얀(JL.Senayan) 거리는 서울로 치자면 강남의

서초동이나강북의남영동쯤되는지역이다. 나는 1978년부터이동

네에들어와살았다. 원목사업을접고무일푼의상태였으나, 스나얀

24번지에서생활하며아침저녁으로오갈때점찍어둔‘명당’이바로

대로변에있는밀키하우스라는통닭집자리였다. 뒷날무궁화유통

본점건물이들어선곳이다.

허름하기는했으나, 나도저런상가가있으면얼마나좋을까하고

생각하며그런희망이이루어지기를바랐다. 마침그상점을판다는

전갈이와서구입의사를표명하고나서기는했으나욕심처럼자금

이따라주지않았다. 당장전세값도없는데그상점을인수한다는것

14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4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은단지희망사항에불과했다.

그런데지성이면감천이라고적절한시기에나에게지불되어야할

거래성사대금이입금되고, 친분을유지하며거래해온정부고위층

가족과의상담이이루어지게되었다.

놀라지않을수없었던것은‘빈집에소들어온다’고적시에구두

약속이이행되었다는사실이다. 나는이런일면을통해인도네시아

에서는유력한가문과의친교가중요하며, 그들이한약속은비록구

두로한약속이라할지라도서명이상의효과를거둔다는사실을알

게되었다.

그러나 정작 구체적인 상담에 들어가자 당초 예상한 구매가보다

훨씬높았다. 그래도포기하지않고거의매일재흥정을시도하였

다. 상가주인의마음을사는데시간이걸렸지만일주일만에동의를

얻어내는데성공하였다. 모자란잔금은반년간에걸쳐분할상환한

다는조건이받아들여지게된것이다. 상가주인이나에게자금을지

원해준것이상의도움을준셈이었다.

그런데문제는토지매매공증인사무실에서계약서를작성하는과

정에서생겼다. 외국인의명의로는구입이불가능하다는것이다. 하

는수없이친구의도움을받아한국인과결혼한중국인인낸시여사

의명의를빌려서구입절차를완료하였다. 여기서부터사업의싹이

움트기시작하였다. 도와준낸시여사에게감사한다. 1985년코리아

가든을시작한지 1년만이었다.

이제새삼말하는것이지만필요할때자금이들어온것이나, 분

할조건으로명의를어렵지않게빌려서상가를매입할수있었던것

제4장 / 맨손으로 실현한 코리언의 꿈• 145

Page 14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은 한마디로‘호박이 넝쿨째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는 행운이었다.

이런결과를가져온데는언어가통한데다잔꾀부리지않고솔직

하고정직하게임함으로써상대방의믿음을얻었기때문이라고생

각한다.

1986년주사니호텔입구의상가를개조하여처음으로상점을세

내어열었다. 의욕에비해초라한출발이어서여러모로체면이서지

않았다. 고심하던끝에드디어상호를‘무궁화’로이름붙인아담한

소형상점이문을열게된것이다.

당시 나는 어찌나 기뻤던지 처음 구입한 트럭을 한국대사관까지

몰고갔는데마치벤츠를타고달리는기분이었다. 나로서는이제야

비로소인도네시아에태극기를꽂은느낌이었다.

이런감격을맞게되면서나는오래전함께근무했던직장선배의

이야기가생각났다. 결혼초부터단칸방셋집에서출발하여차츰방

을늘려가며살다가작지만자기집을마련했을때갖게되는기쁨에

대해말해준사람이었다. 그때나는꿈에도단계가있다는것을실감

하였다. 늘감사하는마음으로주위에사랑을나누며열심히산다면

14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동네의한주택에서창문가리개로사용하고있던‘무궁화’초기의간판. (1984년)

Page 14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그다음엔아파트로옮기고, 다시맨션에서살다가노후에는펜트하

우스나산부근의빌라에자리잡는안락한삶을누리게될것이다.

하지만누구나다바란대로삶이이루어질수는없다. 그래도꾸

준히노력한다면오래지않아그소망은반드시실현될수있을것이

라는확신을갖고살아왔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주택가에 상가를 사들이면 부근의 건물 터를

구매하기시작하여온동네로잠식해들어가는자본증식방법을썼

다. 중국인다운지혜의발로였다. 나도중국인의상술방식을일부

활용하기로작정하였다.

이런식으로주위상가앞뒤와옆쪽의주택을사서건물을늘렸다.

그랬더니임대료지출이없어진대신, 사업에계속투자할수있는

여력이생겼다. 이후우리는주택이든상가든임대해사용하지말고

매입을원칙으로하자고다짐하였다.

무궁화 유통 건물 주변의 주민들은 중국인이 무리해서라도 상가

곁에붙어있는필지를모두사들이는것을오랫동안봐와서만성이

되었다. 하지만나는서두르지않고회사옆의상가와주택을구입하

기위해현지인들의사정에따라끈질기게설득하고기다렸다. 그리

고공을들였다.

뒷집을살때는새벽부터동네청소를하며주민들과어울렸다. 이

렇게사귀다보니모르고있던정보도듣게되었다. 그러다보니크

게기대하지않았던곳에서반응이왔다. 뒷집의자손들이먼저자기

네상점으로나를불러들여모닝커피를대접하며스스로속내를드

러내었다. 부친이오랫동안병환중이어서지금은어쩔수없지만, 돌

제4장 / 맨손으로 실현한 코리언의 꿈• 147

Page 14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아가시면집을팔겠다는것이다. 드디어빗자루외교가효험을보게

되었다고나할까.

나는이말이나오기까지쓴커피를마시며비가새어생기는방안

의악취를견뎌내어야했다. 하지만나의마음은뭔가꺼림칙하고유

쾌하지않았다. 정상적인매매를기대한것인데, 내가마치멀쩡한

노인네가죽기만을기다리는꼴이되었기때문이다. 그렇다고당장

집을사들일수있을만큼의자금이모아진것도아니었다. 매입할

경우에대비하여미리언질을받아놓자는의도였다.

그런데갑자기사망소식이들려왔다. 조문을한지얼마안돼경

쟁자를물리치고이주택을구매하는데성공하였다. 그후다른필

지도사전정보에따라입수하였다. 다행인것은굳이은행의힘을

빌리는무리수를쓰지않아도되었다는점이다.

이곳잘난스나얀 43번지에작은상점을차려타국땅에서부지런

히일해크게키워가는우리내외의모습을보고동네주민들은‘기적

을만드는부부’라고불렀다. 뿐만아니라새벽조깅에나서정해진

코스대로회사주변의주택가와정원을돌고있노라면, 동네사람들

이아내에게‘오싱’이라며말을걸어와우리는‘일본의오싱’이아니

라‘한국인또순이’라고대꾸하여웃음을자아낸적이있었다.

『오싱』은어린나이에가족들을위해더부살이를떠나모진고생

을하면서도꿋꿋이견뎌내는소녀의이야기로, 하시다스가코라는

일본작가가쓴소설이다.

영화로도만들어져 1970년대에인도네시아에서도방영돼화제를

모았었는데, 부지런하게일하여오뚝이처럼일어섰다는의미로아내

14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4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에게‘오싱 코리아’라는 별명이 붙여지게 되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들이 말하듯이 아내는 무궁화유통의 기반을 다지는 데 헌신했고

또큰역할을하였다.

다행히 IMF를맞기전에공장건축을맡아잘건설한덕에여분의

공간이남아일부를임차해쓰기도했다. S공장장은자기네공장을

빌려쓰는나를보고어찌나괄시가심했던지나를자극하여서둘러

유통창고를만들어놓게하는결과를가져왔다.

이런오기는노력을배가시키고앞을내다보게하는힘으로작용

하였다. 어려운시기가지나면용도가많아질것이라는예측아래비

수기일수록성수기에대비해야한다는점과이런준비기간을최대한

으로활용해야한다는판단을갖게하였다. 이는 IMF 이후의사업번

창에큰힘이되게해주었다.

그결과본사사옥은물론, 물류센터를짓는데도은행의도움을받

지않아도되었다. 쓰라는은행돈을제때에이용하지않아크게확장

할수있었던기회가다소늦어지기는했으나, 안정된마음으로사업

을경영할수있었다. 평소다짐해온‘무융자, 무이자, 무임대’의 3무

소신이지켜진것이다.

무궁화유통본부로자리잡게된이건물의대지가온화하게느껴

져서그런것인지, 풍수지리학적으로도좋은위치에있다고말하는

사람들이더러있었다.

제4장 / 맨손으로 실현한 코리언의 꿈• 149

Page 15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건축공사장에서태어난여덟마리의강아지

이지역에서만 30여년간기거하다보니, 동네어린이들과도친숙

해져서그들의부모들과도터놓고지내는사이가되었다. 처음에는

내가대로변의주택과좌우뒤편까지 4필지를사들이는동안거부반

응을보이던그들이었으나, 이런관계로인해태도가많이누그러졌

다.

이런유대속에서드디어잘란스나얀 43번지대로변에철골골조

의 4층 무궁화유통 본점의 신축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공사에

들어간지얼마안돼건축용거푸집과모래더미사이에서갓태어난

여덟마리의강아지를발견하게되었다. 새벽에평소의습관대로동

네를한바퀴돌고공사장엘들렀는데, 이상한기척이느껴져귀를

기울인결과였다.

‘남의땅이라도자주밟아주면내것이된다’는옛말이있듯이,

반드시그런것은아니지만나는오래전부터거의매일이다시피눈

여겨봐두었던동네주변을산책했다. 그런데인적이드문공사현장

의거푸집사이에서낑낑대는소리가나서들여다봤더니, 검정색어

미개가슬금슬금기어나오는것이었다. 남의집공사판에다산실을

만들었으니좀미안했던모양이다. 낑낑대는소리가궁금해서다가

가살펴봤더니, 한무리의강아지가옹기종기모여있는모습이한눈

에들어왔다.

나는강아지들을보호하는과정에서한마리가따로떨어져모래속

15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5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에묻혀있음을발견했다. 혹시죽은건아닌가싶어건드리자다행히

꿈틀거리는것이었다. 서둘러어미개와함께여덟마리의강아지를

트럭으로실어다창고에자리를만들어주고뒤뜰에서기르게되었다.

그때일이아직도눈에선하다. 지금생각하면무궁화유통의미래

를예견하는경사의길견(吉犬)이었던셈이다.

이와유사한기억이또하나있다. 1981년경사업초기였는데, 세

들어살던주택에서하루두어시간밖에눈을붙이지못한채식품납

품을위해일할때였다. 정원의나무위에서부화한새새끼가둥지

와함께떨어져서꿈틀거리고있는것을보게된것이다. 새끼들을

잘보살폈다. 마침집의개도새끼를낳아갑자기집안이분주해진

느낌이들었다. 우연인지이무렵부터일이잘풀려나갔다.

또한예사롭지않았던것은구입한상가의지번이 43이었다는점

이다. 이는나의출생연도인 1943년과같은것이었다. 그뒤추가로

우측에연결된상가를계약하고보니, 이 건물의지번역시아내의

생년과동일한 45번이었다. 오늘날의회사지번과우리내외의생년

이일치하는이같은기막힌우연에대해다시한번놀라움과경이

로움을느끼지않을수없었다.

그뒤내가차량번호를정할때도이뜻을살려지번인 43번을부

여받아 B43BS로사용하고있다. 이번호는 20여년간경찰의취재를

당하지않는것으로일부운전사들사이에서회자되고있다.

아무튼이건물은동네개까지도한무리의생명을안겨주어축복

을받은셈이니, 세상에단순한우연이란없는가보다.

제4장 / 맨손으로 실현한 코리언의 꿈• 151

Page 15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상호가된‘무궁화’의배경과성장추세

1981년구멍가게나다름없는 7평남짓한작은상점에서출발한한

국종합식품은그후확장을거듭하여인도네시아주요도시에한국식

품을공급하는‘무궁화유통’으로거듭나게되었다. 거의 14년만의

일이다.

식품사업이번창하는동안여러상점이추가로매입되어이제무

궁화유통의본사는지하 1층, 지상 4층의엘리베이터가있는건물로

증축하게되었다. 주택차고에서납품할식품을밤새준비하던열악

한조건을극복, 비록작은규모나마독자적인상점으로바뀌고, 다

섯지번을통합한 4층건물을개축함으로써지하창고와유통매장(1

층), 부미관광및본브레드제과점(2층), 유통회사사무실(3층), 사택(4

층)까지어엿하게갖추게된것이다.

이는한우물을집중적으로파나간데서얻어진결과였다. 부끄러

운고백이지만, 그전에는작은일은거들떠볼생각도하지않고큰

일만찾아뜬구름처럼돌아다닌때가있었다. 그러나아내의간곡한

의견을받아들여식품사업에만정진한것이오늘과같은좋은결과

를가져왔다.

사업초기에는몇몇중국유통업체의도움을받았으나시장을선

점하여몇년만에화교업체를앞지르고독자적인기반을갖추게되

었다. 지금은자체소유건물이있는 5개지역에만체인점을갖고현

지업체를상대로유통망을운영하고있다.

15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5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무궁화유통은사업초창기인 1981년한국종합식품으로시작하였

다. 그런데교민들과현지사회에한창알려질때쯤일본식품점‘사

쿠라’가등장하였다. 이때나는조건반사적으로상호를바꿔야겠다

고 결심하였다. ‘사쿠라’는 일본 국화명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

한민족의영원한꽃‘무궁화’를상호로내세워당당하게일본식품점

과맞서겨뤄야한다고생각했다. 식품점의이름으로적절한것인가

는차후의문제였다. 민족사랑, 조국사랑의일념이‘무궁화유통’이

라는명칭을불러온셈이었다.

조지훈님의수필『무궁화』의한구절이떠오른다. “우리는이강산

을빛낼이나라의일꾼으로, 내일이면이누리에피어날무궁화의

꽃봉오리다.”라는대목이다. 나는조국을떠나타국에살면서도‘무

궁화’란 상호를 공공연하게 내세움으로써 한민족의 자긍심을 간직

제4장 / 맨손으로 실현한 코리언의 꿈• 153

무궁화유통사옥준공식때현지주민들과함께이슬람식으로축복식을끝내고

툼펭(노란밥)을 뜨며웃고있는저자와아내. (1995년)

Page 15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하고싶었다.

1995년네번째상점을구입하여본점사옥을신축하고입주한무

궁화유통은‘정직, 성실, 봉사’이세가지를사훈으로내세우고있

다. 나의생활철학과도일치하는내용이다. 이런목표를기업과연결

시켜경영이념으로삼았다. 아울러식품사업을통해한국의상품을

해외에알리려는민간외교의효과도기대했다.

하루의일과는아침일찍각지점의매장에서당일예절교육을마친

현지직원과한국직원50여명이손님을맞이하는것으로시작된다.

타국에서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대부분 그러겠지만,

무궁화유통또한조국의이미지를생각하는측면과현지생활에적응

하며확실한경쟁력을보여주어야한다는두가지점을고려하여운

영해왔다.

15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무궁화유통본사의사옥입구.

Page 15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무궁화유통은 식품·의류·화장품·완구류 등 아이템 별로 2천여

종의생활용품을갖추고, 자카르타를포함한주요도시의 300여상

가에한국식품의대부분을공급하고있다.

그동안의노력으로무궁화유통은식품유통업, 관광업, 건설업등

세가지사업으로확대되었다. 처음엔 10여명에지나지않았던종업

원이 300여명으로늘어났고, 원하는직원을위한조촐한사택도마

련하였다. 다행히그동안사업체가크지않고무리하지않아서그런

지결손없이지속적으로성장해오고있다. 아쉽게생각하는것은

시간과여건, 능력의부족으로큰기업으로성장시키지는못했다는

점이다. 이는다음세대의과제로남게될것이다. 다만, 중소기업을

중·대기업으로뻗어나갈수있는발판을만들어놓았다는데에나

는만족하고있다.

제4장 / 맨손으로 실현한 코리언의 꿈• 155

무궁화유통물류센터준공식을마치고담당부서직원들과기념촬영을한

저자부부(중앙)와 나란히선김종헌이사. (1999년)

Page 15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기업은물론이윤을창출하는데에목적이있다. 그러나기업에서

얻은이윤을사회에환원해야한다. 그래서우리내외는돈많은부

자는아니지만, ‘불우이웃과함께’라는소명의식에따라매년지속

적으로우리보다어려운이웃들을돕는일을꾸준하게해오고있다.

무궁화장학회를비롯한장학금지급과인도네시아심장병협의회와

협력아래심장병을앓고있는불우어린이들에게수술의기회를줌

으로써새삶의희망을주는일과한센인돕기운동등이그일환이

다.

무궁화정신에부합되는기업이념의연장선상에서나는앞으로도

아내와함께이일을조용히, 꾸준하게실천해나갈것이다.

스나얀지역이코리아타운으로불리기까지

자카르타(Jakarta)의뜻은‘많이가진것의기쁨’또는‘풍요로움의

충만’으로풀이할수있다. 기쁨또는크다(Jaya), 왜냐면(Karna), 재

산(Harta)에서유래한말이다. 그래서 Jaya Karna Harta의부문에서

따온것으로전래되고있는데, 오랫동안자카르타에살면서도이뜻

을모르는사람들이많다.

인도네시아의수도인자카르타는크게남대문시장과비교되는크

바요란바루와태평로에해당되는중앙통인수딜만과탐린거리를중

심으로형성되어있다. 이곳은사무실용빌딩이많은지역이기도하

다. 자카르타서쪽에자리잡은차이나타운에는중국상인들의주택

15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5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겸상가와상품창고가밀집해있어주요상거래가이루어진다.

대기업군을이루는시내중심가의빌딩소유자는대개중국인들

이다. 일부외국인이투자했거나관영으로운영하는건물을제외하

고는거의중국인들이차지하여이들이이도시의경제를좌지우지

하고있음을알수있다.

무궁화유통이 자리 잡은 곳은 잘란 스나얀 크바요란바루 지역인

데, 정착초기인 1977년경에는외국인들이주로임대주택에서생활

했다. 나는 1980년초이후이지역에정착하면서식품전시회를주

관하고 판매도 하면서 한국 상품과 무궁화유통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주력하였다.

그이후소·도매업자를확보하는한편, 끈질긴노력끝에유통분

야의대소규모회사들과협력체제를구축하면서사업기반을갖추게

제4장 / 맨손으로 실현한 코리언의 꿈• 157

중국인재벌들과의사교모임에서. 인도네시아재벌림술룡 BCA그룹회장

(오른쪽)과 저자, 그리고타마라은행백택벵총재. (1989년)

Page 15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되었다. 이때나는포기하지않고‘하면된다’는확신을갖게되었다.

이런 가운데나는현지에이미확실한기반을굳힌중국인유통

업자들과의경쟁을피할수없었다. 이제 30여년이지나고보니, 본

인의이름을아는중국인들이 많이생겼고, 만나보지 못한중국인

들조차나에게어떻게부르면좋겠느냐며친근감을표시해오는경

우도있었다.

자기네끼리는미스터킴이요즘외부의작은일에나타나지않고,

내부에서지휘하는형태로운영하는것같다고말하는모양이었다.

이말을전해듣고역시기업은크지않아도견실해야한다는것을

절감했다. 그래서더욱CEO로서의본분에충실하려고했다.

이 지역이 코리아타운으로 여겨지게 된 것은 무궁화유통이 자리

잡은뒤잇따라한국업체들이들어서면서한촌락을이루게된게

계기가되었다고할수있다. 실제로현지의대중일간지인‘콤파스

신문’이“크망이유럽의거리인것과마찬가지로스나얀은코리아타

운(캄풍코리아)이되었다.”고소개할정도였다. 그래서이지역이한

층관심을끌게되었는데, 무궁화유통을취재하러왔던어느기자가

‘무궁화’가이곳에자리잡고한국업체들이들어오면서주위의땅

값이올랐다고말하기도했다.

나는한때동장에게이곳의명칭을한국명칭으로바꿀수있는지

타진하면서도로명칭부터프로젝트화하여추진할수있도록부탁한

바가있었다. 그가능성은미리예측할수없으나이일이추진되면

적극후원하겠다고약속했다.

한때는 잘란 스나얀 거리에 한국 업체가 많이 나타나자 외국인

15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5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불법채용을의심한합동수사대가사무실에들이닥쳐나를어리둥

절케만든적도있었다. 그들을따라온 TV 카메라맨이나의얼굴을

찍으려하자일단제지한뒤이유나들어보자고설득하여가까스로

기세를꺾을수있었다.

나의사업장은외국인채용에전혀문제가없는회사임을천명하

고, 사무실에걸려있는대통령자문위원과공수특전단장, 수경사령

관, 헌병감, 통합군사령관이었던트리부통령과의친교사진을보임

으로써그들을진정시킬수있었다. 잠시후에정식으로인터뷰에응

하며한국인한명이노동허가를연장신청했는데, 해당관청에서제

때에일을수행하지않아지연된것뿐이지, 외국인들의노동허가사

항과는 무관하므로 제재받을 일이 아니라고 설명하였다. 인터뷰를

본지인들이해명이좋았다는전화를걸어오기도했다.

제4장 / 맨손으로 실현한 코리언의 꿈• 159

전략사령관따룹중장취임식에축하차방문한저자.

전략사령관은수하르토대통령이집무했던사무실을그대로사용했다. (1994년)

Page 16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나중에알아보니무궁화빌딩주변에전에는없었던한국업체들이

갑자기많이들어와서이회사가모두나의사업체로오인했던것이

다. 이후나는취재에가담했던방송매체의책임자를찾아가무궁화

유통의성격과사업내용을설명하고이해시키면서오히려친구처럼

가깝게지내게되었다.

매년현지신문에는일본인들에대한활동기사가많이실렸다. 이

는사소한이야깃거리라도제공하여뉴스가되도록신경을쓰는일

본인들의치밀한일면을엿보이게하였다. 이런일본인들의홍보감

각을한국인들은배워야할장점이라고여겼다.

그래서나역시인터뷰에임할때자신과관련된것일망정모국을

홍보한다는자세로활용하였다. 이런사정을모르는일부에서는개

인을내세워재미보려는장사속이아니냐며오해하는경우도있었

다. 하지만이에개의치않았다. 이는회사의상호를‘무궁화’로정한

이유와도맥락을같이하는일관된나의인식이요, 생활자체라고할

수있기때문이다.

각종면허도따고건설업에진출하다

공사현장에식품을납품하다가요식업을시작하고더이상지속

할수없는시기에자체매장을건축하는일이생겼다. IMF 시절, 일

이없을때건설회사를활용하여몇채의집을짓고확장하는일을

한경험이있어건축의요령과경비절감방법은어느정도터득한터

16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6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였다. 이힘을바탕으로현지인들을데리고확보해둔주변의대지에

자체식품물류센터를준공하게되었다.

건축비가마련되자계열사로하여금물류센터를시공하게했는데,

이것이 자회사인 푸리마무다 건설회사를 설립하게 된 동기가 되었

다. 1997년의일이다. 자카르타교외에무궁화유통창고를짓고, 주

식회사부미관광을설립한지 1년만이었다.

나는대학에다닐때기계학을배운적이있어기술과기계에관련

된업무에도친밀감이있었다. 이일을위해기계와전기설비에필

요한각종면허까지취득하였다. 다행히일을시작한지얼마안돼

푸리마무다건설회사는한인건설업계에도꽤이름이알려지는존재

가되었다.

대개새로운사업을하게되면주민들의텃세는두말할것없고,

군과경찰등관할공무원들이찾아오기마련이다. 이들을적절히처

리하지못하면두고두고속을썩여사업에지장을초래하게된다. 외

곽지역인치카랑대형공단공사장의전기공사를맡았을때도예외

가아니었다.

나는이점을의식하고이동이가능한컨테이너사무실을준비하

면서중위시절부터친구였던아굼공수특전단장과같이찍은사진

부터사무실에걸어놓았다. 모든공사장은물론, 무궁화지점이추가

되면신설사무실에도이렇게군인친구들과찍은사진을걸어놓고

사업을시작하였다.

이런방식은많은중국인이인도네시아권력층과의인맥을과시하

는수단으로활용되었다. 당시는군인들의권한이막강했다. 그들은

제4장 / 맨손으로 실현한 코리언의 꿈• 161

Page 16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경찰까지관장할정도였다. 이런사실이주변에알려지면서나의사

업장은 자연스레 안정권으로 들어갔다. 방해꾼들이 접근을 못하게

되자건설수주가원활해졌고공사를무사히마칠수있었다.

더욱이특전단장이었던아굼구멜라준장(대장예편)의메모는약

발이셌다. 지방에도움이필요할때현지사령관을소개받을수있

어일이잘풀렸다. 뿐만아니라가까운선후배군인들에게까지도다

리를놓아주었다. 이렇게직간접으로늘신세를지면서도제대로보

답하지못했다. 그의우정에진심으로감사할따름이다.

아굼대장은박정희대통령처럼예리한인상을주었다. 그러나의

리있는장성이었다. 이 무렵그는한국의모기업에도움을주었지

만, 퇴역이후이기업에서보답하려하자발리에축구장을건설해

달라고요구하는것으로대신하였다.

16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아굼구멜라공수특전단장(후일육군대장예편)의 취임을축하하기위해

그의집무실로방문했을때. (1993년)

Page 16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이런일면을통해사리사욕이없는그의인간됨을알게되면서나

는아굼장군을존경하고좋아했다. 그래서본부건물이나지점사무

실과같은나의사업장에는예전특공단장시절에그와찍은사진을

거의예외없이걸어놓았다.

치안이불안했던 1980년대를무사히보내고현재까지안정된생

활을할수있었음은이와같은훌륭한지인들이있었기에가능한일

이었다. 나역시어느새발이넓은사람축에끼게되었다. 외국에서

살면서기반없이사업을해야하는나의처지로서는현지인들과의

유대가튼튼한배경이되어주었다.

외국에서생활하면서자력으로기반을잡은경우와그토대를이

어받아사업을하는경우

가 있는데, 사업 기반을

잡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과 삶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젊

었을 때의 그런 노력은

노년기에 안정된 생활을

할수있는초석이된다.

사업 초기에는 주위에

서눈여겨보는사람이많

아서남의입방아에오르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이런시기의말은

제4장 / 맨손으로 실현한 코리언의 꿈• 163

저자가경영했던건설회사의작업현장. (1997년)

Page 16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듣는즉시흘려버렸다. 마음에담아두지않는것이정신건강상유익

하다고여겼다. 내가아는어떤분은아예무시해버린다는것이다.

주위에서보더라도남이잘되는것을헐뜯거나시기하는사람들

이성공하는예를보지못했다. 사업초기에는이런일로상처를받

고좌절할수도있다. 그러나이에개의치않고묵묵히앞만보고걷

다보면긍정적인평가를얻어낼수있을것이다.

결국중요한것은독단이아니라, 더불어사는공동체의식이아닐

까. 관계되지않는일에대해비방하거나시기하는사람들을상대로

일희일비(一喜一悲)할필요가없다고생각한다. 이와같은연장선에

서매사에감사하는마음으로사업에도활력을불어넣고싶었다.

그래서 가능한한 반목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려

하고있다. 그것은웬만한일에는무시(ignore)하는, ‘이그노어원칙’

이라고할수있다. 나는사업에도이원칙을지키려부단히노력하

고있다.

방부제쓰지않는본브레드제과점개업

2007년섣달그믐날무궁화유통 2층건물에본브레드제과점을정

식개점하고신부님과수녀님들의참석아래축복식을가졌다. 25년

전황무지인수마트라정유공장건설공사현장에식빵을조달한경험

이있어그이후줄곧식빵에관심을가져왔는데, 이것이제과점사업

에손을댄계기가되었다. 1980년대부터외국여행중에는줄곧빵집

16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6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을살폈다. 규모와장식은물론선호하는빵은어떤것인지유심히관

찰하였다.

상호를본브레드(BON BREAD)라고한것은아내의이름인은주의

‘은’자의발음을따서붙인것이다. 본브레드의특징은방부제와쇼

트닝을일체사용하지않는데에있다. 벌써부터본브레드의소형코

너를대형백화점코너에들어와달라는제의를받아놓고있다. 5년

후, 혹은 10년뒤에는큰회사로발전할것으로예측하고있다. 이사

업은기본식품사업을끼고있기때문에유리한점이많다.

나는이날본브레드의개점을축하해주기위해어려운걸음을해

주신여러분들을돌아보면서 2006년연말의일을생각했다. 그날,

자카르타의우리집에서는구수한음식냄새와사람들의즐거운웃

음소리가끊이지않았다. 평소좋아하는이들이한자리에모여맛있

제4장 / 맨손으로 실현한 코리언의 꿈• 165

부미관광과함께자리잡은무궁화유통본관의본브레드제과점.

Page 16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는음식을먹으며이런저런담소를나누는모습들이마냥즐겁고행

복하게보였다.

저무는한해의끝자락에서나는찾아온손님들의얼굴을감사하

는마음으로바라보았다. 김정렬모세신부님을비롯한수녀님네분

과성당을위해수고하신역대신도회회장부부, 대자(代子)내외, 그

리고가깝게지내는친구부부등마흔네명의지인들이다. 이들은

16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저자는아내와해외여행중에도제과사업을염두에두고

시내의빵집을유심히살폈다. (2000년, 로마)

Page 16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한해동안아낌없는격려와도움을주신분들이다. 배경으로깔린

감미로운음악보다이들이주고받는말소리, 웃음소리가더욱정겹

게들린것은한국의젊은가수안치환의노래처럼‘사람이꽃보다아

름답기’때문일까.

특히조국이아닌, 이국땅에서동포들이주는친근감은각별하다.

조국에서느끼는이웃이나지인에대한감정을훨씬웃돈다. 아무리

이국이라지만, 이곳인도네시아는내인생의절반을보낸삶의근거

지가아닌가. 고향을떠난후그들이겪었을고초를생각할때남의

일같지않는감회를갖지않을수없다.

개업축복식후가진 2부다과회가끝날무렵, 나도모르게화살기

도(남을위해드리는기도로서지향기도라고도함)를올렸다. 우리가족

이감사한마음을잊지않고, 내가받은축복을조금이라도많이나

눌수있도록도와주십사하고. 막화살기도를끝내는데아내젬마가

내곁에와있었다.

“지금막화살기도했어요.”

“어? 나도그랬는데…….”

“그래요?”

우리는서로마주보고웃었다. 죽음같은역경을함께손잡고건너

온부부만이맛볼수있는일체감이다. 나는이런순간이한없이행

복했다. 내용이궁금해서묻자아내는한동안미소만짓고있다가새

해에는당신책마무리잘되게해달라고기도했다는것이다. 나는

아내의손을가만히잡았다. 좀거칠어지기는했으나여전히부드럽

고따스한손길이다.

제4장 / 맨손으로 실현한 코리언의 꿈• 167

Page 16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본브레드의개점은아내에게도각별한의미가있다. 내가원목개

발사업에실패하여살아갈길이막막했을때아내가팔을걷어붙이

고만들어팔기시작한것이김치와가래떡이었다.

나는아직도그일로손등이갈라져한동안고생했던아내의모습

을잊을수가없다. 본브레드에는이처럼최악의여건아래서나를

도와격려하며용기를준아내에대한헌사의의미가담겨있다고해

도과언이아니다.

16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6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제5장

신앙생활로시작된

봉사활동

Page 17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아내의기사노릇하다가종교에입문

나는한낱보잘것없는인간으로서부족한점이많지만, 이슬람

대국인인도네시아에거주하면서가톨릭에입교하였다. 성당에나가

기전인 1980년부터교회공동체에참여하다보니여러수도자님과

사제님들을가까이에서뵐수있는기회가많아졌다.

이시기에아내를포함하여 4명의여신자들이모여아이들의성서

와교리를가르치기위한모임을가졌다. 딱히정해진모임이없었으

나, 한국에서영세를받은젊은엄마들이한두명씩모이다보니자

연스럽게자카르타공동체의모체가되었다. 이때부터아내의적극

적인권유와인도에따라종교에입문하는사람들이차츰늘어났다.

자녀들의교육도신앙을중시하는방향으로나아갔다.

나는이무렵만해도종교에관한아무런지식이없었다. 고작아

내가이웃성당의한공간을빌려교민자녀들에게교리를가르치러

갈때운전을해주는정도였다. 때로는빌려쓰던산타성당에서어린

이들이하도떠드는바람에쫓겨나기도했지만, 그래도꾸준히교리

공부를시키는아내를도와성탄절행사때사용한크리스마스트리

등물품을정리해주거나수송하는일을도맡다시피했다.

지금은고인이되셨지만, 성나자로마을원장이경재신부님이원

내한센병환자를돕기위한기금을모으러 1983년자카르타를방문

한적이있었다. 신부님은이때아이들이교리를공부하는모습을보

고적극적으로활성화할필요가있다고방향을제시해주었다. 이를

17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7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계기로모임이차츰활발해지기시작했다.

나는그후 2년만에이경재신부님이집전한미사에서비로소베

드로라는세례명으로영세를받게되었다. 아내를돕는동안귀동냥

으로듣고배운신앙에대해깨우친결과였다.

1986년부터나는멘텡소재카니슈스외국인전용성당에나가면

서필리핀사람들과의합동미사에참여했다. 열심히성당일을돕다

보니 공동체의 가톨릭 평신도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는 덤을 얻게

되었다. 한국신부가주재하기전이었다.

이때부터공동체의역할에대해관심을갖게되었고, 해야할일이

무엇인가를깊이생각하게되었다. 이때나는이경재신부님으로부

터공동체의역할에대한조언과가르침을받았다.

이런가운데한국인교우들이차츰늘어나기시작했고, 이경재신

부님의노력에힘입어부산베네딕트수녀원에서두분의수녀님을

파견해주었다. 최안젤라수녀님이원장재직시였던 1987년이었다.

이해인수녀님이비서수녀시절이었다고후에들었다. 수녀님들이

자카르타에파견될수있도록후원해주고, 이에따른서류를맡아

준비해주신것으로나중에알게되었다. 그뒤이수녀님과는오랫

동안친분을갖게되었다

수녀님들의숙소가자카르타불록엠성당앞에정해져있었는데,

찾아가 봤더니 환경이 좋지 않았다. 구석방에 채광이 제대로 되지

않아낮인데도어둡고모기가많아서기거하기가불편한곳이었다.

좀더나은여건의숙소를찾아다니다가집근처인스노파티지역

에서 2층짜리작은건물을발견하고우리내외는이정도면수녀님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171

Page 17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의숙소뿐만아니라유치원을해도되겠다고생각했다. 동시에가톨

릭공동체를활성화시킬수있는유치원운영이좋겠다는아이디어

가떠올랐다. 나는이안건을평신도협의회의에올려합의를이끌어

냈다.

나는즉각실천에옮겼다. 각개전투식으로자카르타에사는모든

지인들을찾아다니며유치원설립모금을시작했다. 그러자일부에

서는왜강제로기금을모으느냐며불만을나타내기도했지만, 이런

분에게는유치원교육은종교와상관없이필요하지않으냐고설득하

여공감을모으기에이르렀다.

이모금에탄력을불어넣어준것은타마라은행총재인백택뱅씨

였다. 그가사용하던봉고차한대를기증해주면서모금에가속이

붙었다. 교우들은물론종교가없는분들과한인회회장까지성금을

내주어서드디어 9개월만인 1991년 3월 5일프라판차거리에 2층

집을세내어비록무허가였지만, 성모유치원을개원할수있었다.

이때나는이경재신부님과공동으로첫번째성작과신부용제의

를구입했다. 굳이공동구입이된것은이신부님의꼭참여하겠다는

의지를존중했기때문이다.

나는이런과정을통해공익을위한모금의성취와공동체를이끌

어나가는원동력이무엇인지실천을통해실감하였다. 물론여기에

이르기까지는동남아에처음나와고생하는수녀님들의기도와바자

를열어기금을모으는일에나선일반신자들의도움이컸다.

수하르토가집권했던당시에는가톨릭에서운영하는유치원을비

롯해성당건축허가도나오지않았다. 하는수없이당분간무허가

17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7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로강행하기로하고, 경찰이나동사무소에서문제가생기면내가몸

으로때울각오를하였다.

유치원에는일반인선생두분과수녀두분이근무하였다. 무허가

였으므로신분의합법화를위해나의회사의직원으로, 그후에는아

트마자야 대학의 편입생으로까지 등록하였다. 다행히 유치원은 큰

무리없이 5년간잘운영되었다. 원아들을돌볼선생들은조옥진신

부님이알아서뽑아주셨다.

주재수녀님들의고통은이루말할수없을정도였다. 여권에너무

표시가나서수녀복을일반복장으로바꾸고여권을재발급받아싱

가포르에가서비자를받아오는일은지겨울지경이었다. 그나마싱

가포르 가톨릭평신도회 정영수 초대 회장님 내외의 도움으로 비자

수속과숙소가해결될수있어서다행이었다.

수녀복을일반스웨터로갈아입으며너무안어울린다고서로웃

던 마리젬마 수녀님과 강루치아 수녀님의 모습이 그림처럼 떠오른

다. 홍수가들면물이들어와곰팡이가마를새가없는열악한방에

서지내야했던그시절의수녀님들, 정말고생이많으셨다. 이모두

십자가를지고우리를위해희생하신예수님의사랑없이는감당하

기어려운일이었다.

더욱이어려운생활속에서도평협회장인나에게성전건립기금으

로미화 10만달러가예금된개인통장을건네준또순이마리젬마수

녀님이너무나존경스럽다. 그런큰뜻에힘입어한인성당신축자금

으로각계각층에서그두배이상의건축헌금이봉헌되었음을감사

드린다.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173

Page 17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성모유치원이자카르타에개원되면서나는행복한기쁨을맛보았

다. 다른교우들도같은느낌이었을것이다. 외국에서, 더군다나이

슬람종주국에서한인후세들이유아교육을받을수있는여건이조

성되었다는것은흥분되고도남을일이었다. 이렇게신앙으로모인

공동체의힘은장차성전건축의토대를마련하는계기가되었다. 나

는임기가끝나자추가로모은성금을차기회장단에게넘기고, 이슬

람국가에서는처음으로한국인전용성요셉성당을자카르타에건

립, 봉헌(2002년 2월 18일)하게되는기적적인경사를보게되었다.

그러고보니, 2001년성전첫축하미사때주교님께바친성전열쇠

는 내가 봉헌할 것이 아니라 인도네시아까지 수녀님들을 보내주신

베네딕트수녀원장님이하셨어야하지않았나하는생각이든다.

17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자카르타한인성요셉성전준공후가진열쇠헌정식에서

율리우스추기경님(왼쪽중앙)에게열쇠를봉헌하는저자.

추기경우측은부산교구장정명조주교. (2002년 2월 18일)

Page 17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이에앞서 1986년경자카르타를방문한서울교구의김옥균주교

님이영어발음으로된미사통상문을보내주어, 밴드슐렌외국인담

당신부께서월 1회한국인을위한미사를효과적으로진행할수있

게해주었다. 그후나는중학생인아들종헌을데리고명동성당으로

김주교님을찾아가뵙고, 김수환추기경님께드릴바틱을전달하였

다. 그때주교님은아들에게세상을밝게살아가라고격려해주셨다.

내가굳이아들과동행한것은여러가지를보고느끼게함으로써좋

은인성을길러주기위함이었다.

차츰교회의공동체가커지면서나는해외이주사목위원장이었던

고정명조주교님(당시군종주교겸임)을상도동주교관으로방문하여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175

제3대 부산교구장정명조주교의착좌식에참석한뒤

축하인사를드리는저자부부. (1999년)

Page 17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인도네시아가톨릭의현실을설명하였다. 주교님은친히점심식사

까지대접하면서한국인사제의필요성과파견을요청하는나의말

을경청해주었다.

그후에도나는주교님을찾아가자정이넘도록대화를나누며자

카르타공동체의활성화를위한지침을받아오기도하였다. 여기에

서머물지않고용산으로주교관이이사한뒤에도찾아가뵈었다. 점

심때가되자용산의한‘멍멍탕집’으로안내하여즐겁게식사를하시

고는주인이교우라며나에게소개시켜주기도했다.

결국이렇게트인정주교님과의대화창구는오래지않아효험을

보게되었다. 그분의주선으로부산교구에서자카르타에처음한국

인신부가파견되는기록을세우게된것이다. 이렇게정명조주교님

은이경재신부님과함께자카르타한인천주교의기반을다지는데

큰역할을해주셨다.

2009년현재는큰성당으로발전하여본당과세곳의공소를두고

있으며, 두분의한국사제님과세분의수녀님이주재하고있다. 유

치원도모범적인공동체로발전하여잘운영되고있다.

중보기도에감사하며보답의길모색

프로테스탄트(개신교) 교회에서는 중보기도란 말을 사용한다. 이

말은다른사람을위하여드리는기도라는뜻이다. 가톨릭교회에서

는다른사람을위한기도란말로표현하기도하는데, 이런중보기도

17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7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를받게될때마다감사한마음으로몸둘바를모르고살아온나로

서는면구스럽기까지하다.

존경하는박풀로리아나수녀님은베드로인나와아내젬마가정이

융성하도록자주기도한다고하였다. 왜그런기도를하시느냐고물

었더니, 돈많이벌어서좋은일더많이할수있도록하기위함이라

고대답하여서로웃은적이있다. 우리부부는오늘날까지줄곧그

렇게되려고노력해왔다.

어느수녀님은편지에우리부부를위해기도를드린다고하여송

구스럽게하였다. 과분하게도우리부부를위해연간기도를해주셨

던김선태야고보신부님, 잠시고향광천성당에들러미사에참여했

을때보내주신격려를잊을수가없다. 만나면반갑고, 방문하고떠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177

천주교자카르타교구장인율리우스추기경님의착좌식에참석하여

축하하는저자. (1980년)

Page 17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나올때면항상기도해주시겠다는인도네시아한센인재활원의수

녀님들, 저희를늘기억해주시는사제님과수녀님들께도주님의은

총이함께하시기를기원한다.

더욱이평소에도가르침을주시고, 막내딸결혼미사때는명동성당

입구까지오셔서“내가꼭축하해야지.”하면서손을꼬옥잡아주시

며회의에참석하기위해총총걸음으로떠나시던고정명주주교님

의명복을빈다. 그리고바쁘신가운데서도최근에쓰셨다며시두

편을 이메일로 보내주신 이해인 수녀님에게도 늘 감사한 마음으로

소중히기억하고있다.

나는외국에살면서많은사제님들과수도자님들을모실수있었

다. 이는우리가정에내려진축복으로알고있다. 더욱이많은사제

님과수도자님들로부터받아온기도의은혜를생각할때, 늘빚을지

고산다는느낌을지워버릴수가없었다. 이때부터나는본격적으로

주위에서보내주는격려와중보기도에보답하는길을모색하기시작

했다. 무엇인가사회를위해내가해야할몫이기다리고있는느낌

이었다.

이해인수녀와의만남

2003년 3월, 이해인수녀님이자카르타한인성당피정지도차이

곳을방문하게되었다. 인사를드리려고하는데나의명찰을보더니,

이름을기억하였다. 사순절때였다. 주일미사가끝나고특강에들어

17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7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가기전제단에오른수녀님이인사에이어율동의동작을취하며손

끝을머리위로올리는순간, 나도모르게뜨거운눈물이흘러내렸

다. 특강후수녀님을뵙게되었을때이말을하자, 은총을받은것

이라며그눈물이특별한의미가있는것같다고시인다운해석을해

주었다.

초창기인 1988년수녀파견당시부터원장수녀의비서직으로있

을때까지줄곧자카르타와서신연락을시작하신분이바로이해인

수녀님이아니셨던가! 이해인시인수녀님과는내가가톨릭평신도

회초대회장으로서, 성모유치원의개원을준비하는단계부터유치

원과전교담당수녀로파견되는수녀님들의초청과비자문제로자

주연락하면서알게되었다.

자카르타공동체를방문한이수녀님이, 이곳한인성당의역사적

배경을상기시켜주어아주흐뭇했다. 그시절최안젤라수녀원장님

을비롯한산증인들이한자리에모일수있었다는것은매우의미

있는일이었다.

이런인연으로 2001년나는아내와함께부산성베네딕도수녀회

의초대를받아하룻밤을보내는영광을누릴수있었다. 부산에있

는강동석형제의마중을받으며수녀원을찾아갔던기억이새롭다.

수녀회는 언덕 쪽에 세워진 건물이라서 이름도 언덕방이라 불렸

다. 나는이곳으로안내받아일찍이자카르타한인공동체와인연이

깊은페트라·오스텔라두수녀님의영접아래이해인수녀님과환

담을나누었다. 초창기교회이야기로부터옛날어려웠던시절을회

상하며이야기꽃을피웠다.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179

Page 18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기도시간이되자우리내외도교육중인예비수녀를포함한 150

여명의수녀들과함께기도에참여하였다. 기도중에성당철탑에서

울리는종소리가모자란나의신앙심을깨우치게하는천둥소리처럼

들렸다. 나는외로운고행길에들어서삶의모든것을이시간에바

치는듯한그들의경건한모습을보며깊은감동을받았다.

한편 수녀회 뒷동산에 안장된 수녀님들의 묘지는 숙연하기 이를

데없었고, 오랜세월보관중인옛자료들은말없이그분들의성스

러운발자취를말해주고있었다. 철사로만든가시돋친허리띠유품

은예수님의가시면류관을연상케했으며, 주님을섬기게인도하여

주었다. 수녀회에서보낸하루는이처럼값진것이었다.

이해인 수녀님의 안내로 수도원 언덕방에서 수줍은 1박을 한 뒤

우리내외는아침미사를봉헌하고절제하기어려운욕망과싸워야

18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부산광안리소재성베네딕도수녀회에초대되어수녀회박물관을관람한후

이해인수녀와함께. (2004년 6월)

Page 18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하는속세로다시나왔다. 이제길을알았으니또찾아오라는노수

녀님들의말을뒤로하며광안동을떠났다. 부산역까지배웅나온이

해인수녀님은고향처갓집을찾아온사위를보내듯이, 대합실에서

오래도록손을흔들어주었다.

그후자상하신이수녀님에게는가끔한국에가면전화로안부를

드리곤했는데, 어떤때는음악회를겸한시낭독회에초청돼시낭독

을하신다고하여동행한적도있었다. 가랑비가내리는가을저녁,

노래하는형제들의허름한차량에동승했다가숙소에내리면서작별

인사로나의얼굴에볼을대시던수녀님의모습이아직도눈에선하

다. 그래서수녀님회갑때는건강하여좋은시계속쓰시라고난과

장미를보내드렸다.

이시기에수녀님은미발표시한편을우리부부에게보내주었다.

발표하기전에는공개하지말아달라는부탁이있어서, 소중히간직

해왔다. 이렇게보내주신「부끄러운고백」은나에게는값으로환산

할수없는보배같은선물이었다. 시간이꽤흘렀으니, 양해하시리라

믿고그일부나마여기에소개하고자한다.

이러면안되는데

늘이렇게말하다가

한생애가끝나는것은아닐까

그런생각을자주해요.

하느님과의수직적인관계

이웃과의수평적인관계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181

Page 18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나자신과의곡선의관계

시원하고투명하길바라지만

살아갈수록메마르고복잡하고

그래서부끄러워요.

지금병환중인수녀님이하루라도빨리쾌유하시기를기원할뿐

이다.

한센인촌위문과성나자로마을돕기

자카르타근교탕그랑에위치한시타날라한센병원은이지역에서

는제일큰규모의한센인전문병원이다. 지금도 100여명가량이치

료를받고있다. 그옆에는마르화티협회라는이름의한센인재활원

이있다. 완치된환자들이자생력을갖고활동할수있도록도와주는

곳이다.

1984년경처음자카르타를방문하고지금은고인이되신성나자

로마을알렉산더이경재신부님이‘그대있음에’의음악회에서얻은

수익금을 외국에서 고난받고 있는 한센인들을 위하여 돕기 시작할

때 이곳 재활원도 보살피게 되었다. 그후 1993년에도 이 신부님은

입원중인자카르타교구장레오수코토주교님을통하여한센인재

활원봉이원장수녀님에게미화 2만달러를전달하였다. 그때현지

신문‘자카르타포스트’에서‘한국에서보낸사랑의손길’이란제목

18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8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으로보도하여이사실이널리알려졌다.

나는이에자극받아몇몇교우들과함께한센인재활원과시타날

라한센병원의환자들에게위문품을보내기시작했다. 비록작은성

의에지나지않았지만, 기뻐하는그들의모습을보면서그들이얼마

나인정에목말라하는지를실감하게되었다. 이후이일은매년계

속해오고있다.

2003년 11월 12일에는봉두완성나자로마을돕기회회장과성나

자로마을원장김화태신부님이이곳병원과재활원을방문하였다.

그들은 여러 병동을 돌아보며 고통받고 있는 환자들에게 생필품을

나눠주고위문하는시간을가졌다.

신부님을기다리는그들의모습은매우애처로웠다. 무슨기적이

라도안겨주기를바라는그런표정들이었다. 한센인나자로가예수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183

이경재신부가입원중인레오수코토자카르타주교를통하여마르화티봉이원

장수녀에게한센인재활원을위한기금을전달했다. 양쪽은초대성모유치원마

리젬마원장수녀와저자.

Page 18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님에게병을고쳐달라고간절히간구했던광경이바로이랬을것이

라고생각했다. 차례를기다리며안수해주기를바라는모습이며, 서

너살된아기가침대위에서호기심에찬눈망울로위문온일행을바

라보며재롱을떨던모습이한센인엄마의얼굴과오버랩되어가슴

을아프게했다.

그병동에는이처럼멀쩡한아기가한센인부모와격리되지못한

채침식을같이하는경우가있는가하면, 절망적인환경속에서도

미소를잃지않는특별한환자도있었다. 건강한사람들에게서도좀

처럼찾아보기어려운그해맑은표정의소녀환자는천생에타고난

아름다운천사의마음을그대로간직한듯이보였다. 그런점이오히

려슬프게느껴졌다. 나는안타까운마음으로그침상을비껴나갈

18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시타날라한센병원에생필품을전달하고나서. 왼쪽 중앙부터김성규신부,

병원 관계자, 저자와문효건, 한윤희, 김경애, 아내, 안복자, 김광선, 임숙재,

김금재, 장혜숙, 김순희씨. (1996년)

Page 18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수밖에없었다.

병원건너편에위치한한센인재활원을방문하였을때는분위기부

터새로운느낌이었다. 한센병이완치된대신앞이안보인다는장님

할머니의사연을듣기는했으나, 그래도재봉틀을돌리며재생의길

을걷고있는사람들이있어그나마안도감을갖게했다. 이들에게는

일감을찾아주어재기의희망을주는수녀님들이천사와같은존재

일수밖에없었다. 나는새살이돋고있는한센인의문드러진발바닥

을어루만져위로와용기를주는신부님을보며큰감동을받았다.

방문한우리일행은하느님이주신건강에대해감사의마음을갖지

않을수없었다.

그런가운데몇몇낯익은재활원식구들이나를알아보고반갑게

인사를하여무어라형언할수없는감회를느꼈다. 위문단일행이

전달하는 선물을 받고 고마워하는 재활원 식구들과 환자들의 상처

부위를 일일이 보살피는 신부님들의 모습이 대비(對比)되면서 깊은

인상을심어주었다.

한센인들은일단치료주사를맞기시작하면병을옮기지않는다

고한다. 하지만외관상의혐오감이나감염에대한두려움이아주없

어질까? 아무튼범인으로서는엄두도못낼그런참사랑을베푸시는

신부님이정말존경스러웠다.

그러한신부님을염려하여주치의인채규태박사로부터만일을위

해환자를너무깊이접촉하지않는게좋겠다는권유를받았지만,

그는이에구애받지않았다. 사회로부터격리되고소외돼대접받지

못하는한센인들의실상을보며나는일행과함께완치되기를기도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185

Page 18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한후무거운발걸음으로병동을나왔다.

그후우리내외는김우진삼인도사장과자카르타시타날라한센

인을위하여중환자실에텔레비전을설치하고생활필수품을나누어

주었다. 한센인재활원에도생필품을전달하였다. 이곳을방문한지

1년 6개월만이었다.

이렇게 지속적인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이경재 신부님의 기도와

지도아래시작되고, 나스스로작은일이나마뜻있는실천을다짐했

기때문이다.

이경재신부님의칠순때우리내외는발리로모시고가서즐거운

시간을가질수있었다. 이것이신부님을세상에서마지막으로모시

는기회가될줄은몰랐다.

18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인도네시아시타날라한센병원을방문하여환우들에게위문품을전달하고

격려하는성나자로마을원장김화태신부(중앙)와 저자.

서 있는사람은봉두완후원회장. (2003년)

Page 18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2005년 5월로 기억된다. 안양 성나자로마을 한센인 돕기 바자가

열렸다. 나도아내와함께참석하였다. 나름대로성의껏준비한물품

을기증하고아내는막내딸과함께식품판매를도왔다. 며칠후인 6

월 5일우리일행도세종문화회관에서열린한센인돕기모금음악

회‘그대있음에’에참관하였다.

우리부부도매년이자선행사에기부금을내놓았다. 그런데마침

막내딸이결혼전신랑감과첫미팅이있는날이어서이자리에동행

했다. 나는그때참석한전직총리부인, 경기도지사, 한센인돕기회

봉두완회장님등여러귀빈들에게딸을소개했다.

그런데음악회를마치면서봉회장님이최주교님을비롯한경기

지사, 일본및독일후원자부부와함께우리부부를기립시켜관중

들에게소개하고, 한센인을위해노고가많다며격려의박수를부탁

했다. 이장면을보며막내딸도느끼는바가없지않았을것이다.

사회를맡은김병찬 KBS 아나운서가여기에참가하신모든분들

은이시간이후놀라운주님의은총을받아기쁜일이많을것이라

고축복했다. 그런데그뒤나는 16시간이채안돼레이크사이드에

서평생처음홀인원하는행운을맛보았다. 그때나는사회자의말이

덕담의수준을넘어예언의무게로와닿았음을느꼈다. 그래서더욱

자선음악회의참여를뜻깊게생각하게되었다.

그후에도매년서울에서열린같은행사에우리부부는인도네시

아주재성나자로마을후원회회장자격으로참석하여 1만달러이

상을모금하여전달하고있다. 이모금에참여해주시는분들께주님

의은총이함께하시길기도드린다.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187

Page 18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또한 김화태 신부님도 격년으로 자카르타 주변의 한센인 병원과

수마트라매단까지한센인을돕기위한성금을보내주었다. 나도이

일에일원으로참여하였다.

내가한센인에게관심을갖게된이면에는유년시절에겪은경험

과도깊은관련이있다. 그때는‘문둥이’라고해서이병을앓는사

람은동네에서살지못했다. 전남고흥군소재소록도라는남해안의

섬으로보내사회와격리시켰다. 그래서좀유식한사람들은문둥병

을천형병(天刑病), 곧하늘이준병이라고했다. 그만큼몹쓸병으로

인식되었다.

요즘은이렇게부르는사람이없다. 나환자또는한센병환자라는

의학적인용어를사용한다. 치매라는직접적인지칭보다는알츠하이

머라는 전문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환자의 입장을 배려하는 경우와

같다고할것이다.

내가고향인충남광천읍에서초중등학교를다닐때는한센병환

자를‘용천백이’라고불렀다. 중학교졸업후서울에와서용천백이

라고했더니알아듣는사람이없었다. 아무튼그시절에등교하기위

해용천백이가산다는고갯길을넘을때는등골이오싹할정도로무

서웠다.

오래전부터용천백이를만나면죽는다는말을듣고있던터라, 나

와같이산길을걸어서학교에가야하는아이들에게는용천백이가

두렵지않을수없었다. 그래선지성인이된후에도한동안이말이

머리에서사라지지않았다. 그런데이병은치료가가능하며아무데

나전염되는게아니라는사회적인식이확산되면서한센병에대한

18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8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느낌도달라졌다.

하지만나역시처음에는한센병환자앞에서자연스럽지못했다.

이경재신부님으로부터영세를받은지얼마안돼성나자로마을을

방문했을때구내식당에서식사를하다가자꾸한센인들의일그러진

얼굴이떠올라구역질이나는바람에식사를하지못한기억이있다.

그랬는데 이 신부님의 환자들에 대한 헌신적인 보살핌과 미래가

불투명한비관적인상황아래서도어린자식을어르며돌보는한센

인부모의모습을보고감동을받지않을수없었다.

나는그때사회와어쩌면가족으로부터도외면당한이들을조금이

라도 도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따금씩이라도 자카르타

교외의시타날라한센인병원과마르화티한센인재활원을찾게되

는이유이기도하다.

김수환추기경님을뵙게되다

나는이와같은한센인돕는일을계기로 2003년초겨울김화태

신부님, 봉두완회장님과함께김수환추기경님의집무실을찾아가

인도네시아한센인병원을위문한사실과실태를알리는기회를갖

게되었다. 아울러세계이슬람국가에서는처음으로한인가톨릭성

전을 건립한 사실을 보고 드리고, 자카르타 한인 공동체를 방문해

주실것을요청하면서발리까지모시겠다고말씀드렸다.

그러나추기경님의사정이여의치않아다음기회로미루어졌다.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189

Page 19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그때추기경님은방문약속을지키지못해미안하다는내용을연하

장에적어보내주셨다.

그뒤 2005년 4월에도일정을잡아놓고인도네시아공항영접허가

까지받아놓았으나예기치않은교황바오로 2세의서거로말미암아

김추기경님이로마로직행하는바람에인니방문계획이무산되고

말았다. 이때도많은교우들이바라던일이이루어지지않아실망했

지만어쩔수없는노릇이었다.

이해 5월 9일나는또다시집무실로김추기경님을찾아뵌후영접

계획을말씀드리고승낙을얻었다. 이자리에서추기경님은자신이

서명한『김수환추기경이야기』라는책과신임베네딕도 16세교황

성하의사진을받는기쁨을얻었다. 나는전혀예상치못한추기경님

의배려에너무감격한나머지갑자기목이메어옴을느꼈다. 얼른

19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집무실로김수환추기경님을방문하여인도네시아시타닐라한센병환자를위문한

사실을보고하고초청의말씀을드리는김화태신부와저자. (2003년 11월 11일)

Page 19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물을마시고동행한봉두환회장님이건넨허브캔디를입에물고서

야가까스로목이트여감사의말씀을드렸다.

“참으로감사합니다. 저의소원이한가지있습니다. 저는부친께

서중병이드셨을때발리까지모시어맑은물에발을담가드린적

이있습니다. 제소원은추기경님을아버님처럼발리로모셔서깨끗

한바닷물에발을담가드리는것입니다. 하루속히추기경님의건강

이회복되시어발리의맑은바닷물에발을담그실수있도록기도하

겠습니다.”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191

인도네시아방문이이루어지지못한데대해유감의뜻을담은

김수환추기경님의친필연하장. (2004년)

Page 19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우리내외는그후해가바뀔때마다신년초에추기경님의집무실

을방문하여인사를드리곤하였다. 뵐때마다건강이예전같지않

다는걸느꼈지만, 언제나인자한미소를잃지않은평화로운모습이

었다. 2007년 벽두에 봉두완 회장님 내외분과 같이 세배를 드리러

찾아뵈었을때였다.

한해가지났는데도추기경님은저의간곡한부탁의말씀을잊지

않으시고내가준비하고있는책자의추천사를미리써두었다가주

셨다. 분에넘치는영광이었다. 지금도안타까운것은추기경님께서

건강이좋지않아장거리여행을하지못하므로끝내인도네시아로

모시지못하게된점이다.

내가김수환추기경님을처음뵌것은 1989년말경홍콩을경유하

여서울에들어가는캐세이패시픽항공기안에서였다. 이때아들종

헌의대학입학관계로귀국중이었다. 마침비행기앞좌석에김수환

추기경님이 탑승하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여승무원에게

뒤에있는탑승객신자가추기경님께인사를드리고싶다는말씀을

전해달라고부탁하였다.

얼마후잠시눈을붙이고나신추기경님이몸소일반좌석으로걸

어나오셔서나를비롯한많은승객들과인사를나누셨다. 추기경님

은나에게사인까지해주셨다. 영세받은지몇년이안된시점이어

서나의직분을말씀드려야하는데얼른말이나오지않아잠시망

설이다가 엉겁결에“저는 인도네시아 대표입니다!”라고 큰 소리로

인사를드리고말았다.

기실성당의조직에대표라는직함은없었다. 얼떨결에나온말이

19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9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었다. 그때나는인도네시아한인가톨릭평신도협의회회장직을맡

고있었는데, 추기경님을뵙고있다는흥분때문에차분하게내직분

을말씀드리지못했던것이다.

내가김추기경님을다시뵙게된것은 1995년주말부부모임인엠

이(ME)한국 20년경축행사가열리는잠실체육관에서였다. 그때추

기경님이 봉헌미사를 집전하셨다. 나라의 일을 걱정하고 대통령을

비롯한정치지도자들이겸손한자세와사랑으로국가와국민을위

해정도(正道)를걸어야한다는고언을서슴지않으셨다.

그렇지 않아도 인도네시아에 배달되는 한국 신문을 통해 나라가

혼란에빠질때마다시의적절하게시대적경고와지침이되는말씀

을해오신것을알고있던터라, 그날의봉헌미사집전은참으로감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193

천주교부산교구장정명조주교의착좌식에참석하러오신김수환추기경님(중앙)을

영접하는자리에서. 왼쪽부터막내딸현아, 김계춘신부, 저자부부, 성체조배

최회장, 평신도협의회유회장등과함께. (부산하얏트호텔에서 1999년)

Page 19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동적이었다.

이런일이있은후얼마되지않아나는추기경님에게실크로만든

인도네시아산(産)바틱한벌을선물하는기회를갖게되었다. 1999

년경이었던것으로기억한다. 당시정명조주교님의부산교구장착

좌식에참석하기위해부산에갔을때나의뜻을말씀드렸다. 이에

정명조 주교님은 추기경님을 뵈려면 해운대에 있는 하얏트 호텔에

투숙하라고귀띔해주었다.

나는주교님의말씀대로호텔에여정을풀고로비에서기다리다가

영접팀의친절한안내로추경님에게바틱한벌을직접입혀드리게

되었다. 김추기경님은호텔방안에서옷을입어보이시며고맙다고

말씀하셨다. 그때소년처럼미소를지으시던김추기경님의모습이

아직도눈에선하다.

재활양로원방에걸린부부의명패

앞에서잠시언급했듯이, 우리부부는매년자카르타근교시타날

라한센인병원앞에있는재활원을찾고있다. 무궁화유통의달력을

걸어주고생필품을나누어주며정을나누곤하였다. 2004년에는양

로원이독지가들의정성으로재활원안에지어졌는데, 기거하는방

의시설이워낙열악하여성금으로조금씩시설을보완해나아가는

실정이었다.

그런데어느날양로원으로부터연락이왔다. 도와준분들에대한

19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19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감사의뜻으로재활원내의방에명패를부착했다는것이었다. 양로

원방의문턱위에는나와아내의세례명인베드로와젬마의이름을

새긴명패가걸려있었다. 원장수녀님의설명에따르면, 성금을낸

분들의이름을나무로조각하여영구보존할뿐아니라언제고와서

그방을사용할수있다고하였다. 작은정성일뿐이었는데뜻밖에

과분한대접을받은셈이라당황했지만, 그분들의성의의징표를뿌

리칠수없었다.

여기서고백하자면, 처음한센인재활원을방문했을때는솔직히

꺼림칙하게느꼈다. 아는체인사를한뒤악수하려손을내미는데

물컹하는기분이왠지거북하고마음이편치않았다. 그런데자주

가다보니차츰익숙해져서반가운사람이왔다고수줍어하며악수

를청하는사람들에겐나도스스럼없이자연스럽게손을내밀수있

게되었다.

일부는수줍어서거나, 상대편의마음을배려해서인지는몰라도조

심스러워했다. 손을내밀다가멈칫거리는경우도있지만, 많은사람

들이천진난만할정도로다가왔다

100여호가되는이들은일용할양식을위하여땀흘리며봉제작

업을하고있다. 그러나반신불수가된사람들은길가로나가서앵벌

이로연명할수밖에없는현실이다. 자카르타길거리에앉아서구걸

하는사람들은대개재활치료를받고나온한센인들이다. 이들에대

한국가적차원의구호와복지대책이시급한실정이다.

2006년봄성나자로마을을방문하였을때의일이다. 기능공으로

한국의어느기업에고용되었다가한센인임이드러나이곳에서치료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195

Page 19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를받으며마을청소를맡아하는인도네시아청년을만나게되었다.

유심히살펴보니그의피부에는큰반점이생기고, 검게탄자국이

팔에나타나있었다.

그런데이청년은여기에서치료를받아회복중에있었고많진않

아도급여까지받는보기드문혜택을누리고있었다. 사람이란어떤

환경에처하든자기하기나름이라는생각이들었다. 이와함께일반

국민들의마음한구석에남아있는한센인에대한왜곡된인식도바

뀌어야함을절감하였다.

이런양성의보균자가전염시키지나않을까하는불안감이씻겨지

기까지는앞으로도상당한시간이필요할것이다. 내자신도한동안

한센병은전염성이강한것으로오해하고있었기때문이다. 한센인에

대한정부와종교계의배려와보살핌이더욱확대되기를바란다.

19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마르화티한센병재활원에위문품을전달하는저자(왼쪽)와 김정렬신부,

김우진사장(앉은사람), 요한 수녀. (2002년)

Page 19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심장병어린이수술지원에나서다

심장병어린이환자를돕기시작한것은 1995년민형기대사가재

임하던시절부터였다. 그때아내는인도네시아한국인부인회회장으

로봉사하고있었다. 무료봉사를기꺼이수락한가수이미자씨를특

별초청하여심장병어린이수술지원을위한기금(7천 5백만루피아)

마련자선음악회를개최하였다.

많은교민과인도네시아여성지도자들이내준성금으로 10여명의

심장병어린이가수술을받게되었다. 인도네시아심장병협회는수하

르토영부인에의해설립되었는데, 이일은인도네시아심장병재단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197

심장병협회하나피아회장(오른쪽)에게심장병어린이돕기성금을전달하는

아내박은주회장. (1995년)

Page 19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의기록책자에까지수록하게되었다.

우리내외가본격적으로더욱심장병어린이를돕게된것은 2002

년 1월MBC TV에서해외거주사업가를선정하여소개하는프로인

‘이홍렬의해피통신’에내가마지막회에 50분간출연하게되면서

부터였다.

‘해피통신’촬영팀이자카르타로날아와나의현지활동상을녹

화하기위해심장병재단본부를방문하는시점에우리부부는기왕

이면지금부터라도심장병으로고통받는인도네시아어린이들에게

새생명을찾아주는일에지속적으로나서자는데뜻을모으고서면

으로약속을공지하였다.

이사업을정례화하기위해무궁화재단을설립하고, 이때부터매

년‘무궁화인도네시아심장병어린이수술돕기’란지속적인나눔

19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한인부인회회장시절아내(오른쪽)는 가수이미자씨를초청하여심장병어린이

돕기자선음악회를열었다. 오른쪽두번째부터민형기대사부인이순자여사,

수하르토대통령큰며느리하나피아심장병협회회장과부인회임원들. (1996년)

Page 19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의사업을시행해오고있다. 심장병이악화되어피부가파래진어

린이, 학교에 다니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숨이 가빠 거동이 어려운

모습을보는것도안타까웠지만, 그때수술받은초등학교어린환자

의어머니에게심정이어떠냐고기자가묻자“어두운밤에둥근달을

얻은것같다.”고대답하는장면을보며가슴벅찬감동을받았던것

이다.

무궁화심장병어린이돕기재단은매년가정이어려워수술을받

지못하는심장병어린이에게최소한 1명씩의수술비부담을약속하

고, 그해 11월두살난남자아이부터혜택을주었다.

사업수익금의일부나마현지사회에환원하고사랑과고통, 기쁨

을나눈다는취지로시작된심장병어린이환자수술돕기는 2009년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199

무궁화심장병재단어린이수술지원으로완치된 31명째어린이루티캐트린

사만다를방문한저자부부(오른쪽)와 하나피아전심장병협회회장및관계자들.

(2004년 5월)

Page 20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초까지 42명이수혜를받기에이른다. 매년새로등록된심장병어린

이명단이계속나의사무실로들어오고있다. 아무리여건이어렵다

하더라도우리는힘닿는대로어린생명을살리기위한이일을계속

해나갈것이다.

불우이웃돕기는나를돕는것

사업초기자카르타에서셋집을얻어살때의이야기이다. 동네안

에는베착이라고하는인력거가있어서, 이것을이용하는주민들이

많았다. 투캉베짝이라 불리는 인력거꾼들은 대개 지방에서 올라와

일정한주거지가없이그룹을지어주로주택가의처마밑이나상점

주위에서살았다. 인도네시아는더운나라이기때문에우기에대피

할수있는곳이면되었다.

내가살던집앞이바로그들이모여지내던곳이었다. 어느날술

을마시고동네를떠들썩하게하던취한이한밤중에대문밖에서소

란을떨자그들이나서서쫓아내었다. 주위에서불량배가행패를부

려도저지해주었다. 그만큼단결이잘되어있었다.

얼마전우기가닥쳐왔는데도비옷이없어행동에제약을받는그

들의모습을보고아내가 5명에게비옷을마련해준적이있었는데,

이일을기억하고있었던것이다. 나는그후인근마을의인력거꾼에

게까지도더많은비옷을나누어주었다. 그러다보니그들사이에서

우리부부의이름이오르내리게되었다.

20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20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이때가아마도 1980년초쯤으로기억되는데, 나역시많은사람들

의도움이필요하였다. 반면주위에는나보다더어려운이웃이많았

다. 주택가뒷동네에는시냇물이흐르고있었는데, 홍수가나면이곳

빈민지역은바로침수가되기마련이었다. 그곳과가까운데에살다

보니그런빈민가사람들과도자연히안면을익히게되었다.

그래서침수를피해가까운초등학교로거처를옮기고구호의손

길을기다리는수재민들을외면할수가없었다. 나는창고에서식품

을꺼내어보내는한편, 식수를공급하였다. 이렇게시작된수재민

돕기일을 1년에한두번은하게되었는데어느새기본적인구호체

계를갖추게되었다.

나는같은마을에있는이슬람사원이필요로하는일반적인물품

을지원하는데도인색하지않고적극적으로대처해나갔다. 그러다

보니동회와구청에서주최하는불우이웃돕기행사가있을때는으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201

우리부부가맨처음마련해준비옷을받아입은인력거꾼의모습.

Page 20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레무궁화유통의책임거리가별도로책정되었다.

언젠가 한번은 구청 모임에 참석하자 구청장이 유지들에게 나를

소개하며, 이분은우리들에게아주소중한분이므로자주얼굴을보

이는게좋다고하여모두가폭소를터뜨린적도있었다.

이처럼주민들과의화합분위기가조성되기까지는인도네시아에

온 후 능동적으로 현지 생활에 적응하며 생활방식까지도 바꿔나간

노력의결과였다. 외국인이돈을좀번다고티를내며모나게굴었다

간낭패보기십상이라는것을항상염두에두었다. 그래서내가먼

저그들에게다가갈필요를느꼈다. 그러기위해서는뭔가베푸는일

이선행되어야한다고여겼다.

처음에는비가와도몽땅젖은채일하는인력거꾼을보고비옷을

20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자카르타의남부지역불우한주민들에게구호품을전달하는저자.

뒤는이행사에참석한구청장및지역경찰과관계자들. (2002년)

Page 20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마련해주는아주작은일부터시작하였다. 이런일은일회성으로끝

나선안된다고생각해정기화된것이주변의어려운사람들에게생

필품을나누어주는것으로확산되었다.

매년이슬람명절인하리라야때본사건물앞에서여는불우이웃

돕기생필품전달행사는대상이어느새 1천여명의규모로늘어났

다. 인원이많다보니하루에다끝낼수없어사전에조사된구호대

상자에게는동회나이슬람사원대표들을통해물품을전달하였다.

나는 30여년간이나줄곧한동네에거주하고있어현지인의경조

사에도참여하게되었다. 풍속이한국과다르다보니생소한광경을

목격할때도있었다.

처음상갓집에조문하러갔을때의일이다. 안방까지안내하여들

어가조의를표하려는데망자의얼굴이노출되어있는것을보고깜

짝놀란적이있었다. 이슬람종교특유의방식이라는걸나중에알

기는했지만, 이때질겁을하고나서부터는그후상가에가더라도아

예방안에는들어갈생각을하지않았다.

현지인과 가까이 살며 먼저 정을 주다보니까 공생한다는 마음이

들었는지 1998년자카르타폭동때는인근주민들이내사업체의차

량들을자기집으로대피시켜주고, 건물을보호하기위해팀을짜서

야간경비까지서주었다. 자카르타본토박이들은자기네동네에들

어온외지사람들을‘물건너온사람들’이라고경계하였다.

여기에는수마트라, 술라베시, 암본같은섬사람들이해당되었다.

이들이바다를건너와서자바섬에정착하는동안본토인들에게잘

협력하는지아닌지를구분해서대우하였다. 협력하지않는사람으로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203

Page 20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낙인이찍히면차별대우를받았다.

차별대우라는것은다툼이있다든가하면절대불리해지고, 특히

젊은이들이협력을하지않아서발붙이기가어려운경우가있다.

나의집과가까운곳에암본사람이살고있었다. 그는그곳에서인

종차별폭동이일어났을때나에게다짐하기를서로공격을받게되

면서로돕자고제의해왔다.

그러나정작그런일이일어나자외면했다. 그러다보니타지에서

온지방사람들은제실속만챙기고남을배려할줄모른다는인식이

박혀항상고립되어어려운생활을하게마련이었다. 하여튼외지인

이현지에자리잡으려면인근주민들과불목하지않고협력하면서

화목하게사는것이최선임을체험하였다.

나는차츰현지생활에적응하고동네의고참이되면서홍수나화

20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자카르타홍수수재민현장을방문하여구호물품을전달한후아굼구멜라체육

회장(전 육군대장) 및 수혜자들과함께. (2007년)

Page 20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산폭발과같은재해가생기면동네이웃들과함께이재민돕기운동

에도적극적으로참여하였다. 그러다보니현지신문에무궁화유통

과동네에관한기사가보도되는경우도가끔있었다.

구수두르대통령시절, 화산이폭발하여이재민이발생했을때는

구호식품을대통령궁으로수송하여궁내창고에서식품전달식을갖

기도하였다. 당시만해도외부의지원이절실히필요할때여서현지

요로에서도움을요청해오는경우도더러있었다.

이슬람성전에서드린가톨릭신자의기도

2007년 2월초에홍수로인하여자카르타시내여러곳이침수되

었을때였다.

새벽부터나는아내와함께인근주민들의피해상황을살피고즉

시직원들과함께당장필요한식량과음료를비상방출하였다. 나는

가끔있는일이기때문에자동적으로대처하는습관이되어있었다.

자카르타 북부 클라파가딩 지역에 일어난 홍수로 인하여 3일 동안

아파트에서나오지못한한국동포아낙네들은무궁화유통에서보내

준음료수와긴급식품을받고고맙다는전화를이른새벽에까지걸

어왔다.

무궁화유통 인근에서는 물이 빠지고 난 후에야 본격적인 수습과

수재민돕기에나섰는데, 나의부탁을받고같이인근피해주민을

찾아가구호품을전달한퇴역육군대장인친구아굼체육회장은주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205

Page 20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민들로부터인기가대단하였다. 주민들중에는젊은아기엄마들이

나의사무실까지찾아와서어린아기에게먹일우유가없으니도와

달라고호소하기도하였다.

지체없이아내와함께분유와아동복을구입하여전달장소로정

한이슬람성전으로달려갔다. 먼저이슬람성전정문에‘수재민돕

기구호품전달’이라는현수막부터건뒤옷을일일이나누어주고성

전안에서는분유를전달하였다.

그런데나는우선분배에앞서이슬람성전에모인사람들에게간

단한인사말을하면서“수해로피해받은여러분의빠른복구를바라

며어린이와여러분의가족들의건강을위하여하느님께다같이기

도합시다.”라며가톨릭식으로성호를그으며기도를드린바있다.

20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무궁화장학금을전달하고아내박은주사장과충주여고윤경로교장(중앙)을

중심으로기념촬영하는 20여명의장학생. 이 사업은 1996년부터 13년째

계속해오고있다. (2003년)

Page 20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과격한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이슬람 국가에서는 문제의

소지가있는가톨릭식기도의선창이었다.

이런일이특별히문제가되지않았던것은인도네시아주민들과

가족처럼스스럼없이지낸덕분이아닌가생각된다.

장학회설립으로자녀가받은은혜에보답

앞에서도언급한바와같이무궁화유통사업초기에는자카르타의

미국인국제학교에다니던자녀들의교육을중도에포기할까고민했

을정도로어려웠다. 여러생각끝에작심하고미국학교교장선생님

을찾아가사정을털어놓고어린자식들이사회에나와이웃과사회

에봉사할수있도록기회를달라고호소함으로써세자녀모두미국

인학교에서장학생으로무사히교육을마칠수있었다.

이는장학금제도가있었기에가능한일이었다. 후일우리내외가

장학회를설립하게된것도이와같은혜택이하나의동기로작용했

다고볼수있다. 그렇다고처음부터작정하고장학제도를실시한것

은아니었다. 여기에매개역할을해준것은아내가실천해온소년소

녀가장돕기학비지원이었다고할수있다. 1996년경부터아내가고

향을방문하면서주위에불우한독거노인들이많다는말을듣고그분

들을조금씩돕는가운데소년소녀가장들이있음을알게되었다.

그래서이들에게학비를대준것이여자중고등학생으로까지대상

이확대되었다. 이일이한두번에머물지않고지속되다보니, 아예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207

Page 20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장학사업으로 정착시키는 게 좋겠다고 생각되어‘무궁화장학회’로

발전하게된것이다.

충주에서는충주여고를중심으로, 기타여학교는소녀가장을위주

로시행하고있다. 자카르타에서는한국말을배우기위해한국어학

과에들어간현지학생들을대상으로장학생을선발하여전액장학

금을지급해오고있다. 앞으로여건이닿는대로수혜자를더늘리고

싶다. 어쩌면인도네시아장학생들을통해현지에한국어를보급할

뿐아니라한국의이미지를부각시키는효과도기대할수있을것으

로생각한다.

20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자카르타소재유니버시티내셔널한국어과대학생5명에게장학금을전달한후.

왼쪽부터크리스난문조노학장, 장학금수혜자들과저자부부, 박진교수. (2004년)

Page 20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세계순방으로발전한조국통일기도회

2001년 5월 15일, 노르웨이야일로(Geilo의현지발음)에서는북극

조국통일기도회가 개최되었다. 독일 주재 이순하 목사 집례로 9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해외지역협의회장과지회장및위원들 47명

이참석하여기도회를가졌다.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등스칸디나비아 4개국을순방

하는일정으로, 독일프랑크푸르트에서버스로각나라를순회하며

조국통일의지를선양하고해외동포들의기여방안을협의하는시

간을가졌다.

기도회중자연스럽게유명관광지를돌아보게되었다. 저녁에는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209

북극조국통일기도회(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구주북부, 서울중구협의회합동)에

참석한일행들. 왼쪽부터저자, 서울중구지역협의회김장한회장,

이순하목사및각국회장단. (2001년 5월)

Page 21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호화여객선에승선하여북유럽국가와국가간을이동하였다. 핀란

드로가는여객선에는물론면세점이있으나술이워낙비싼나라라

서술과안주를많이준비해갔다. 여객선에있는바에는취한핀란

드젊은이들이승객들사이로떼를지어다니며시비를걸어오기일

쑤였다. 이들은아주사나워서대꾸를피하는게상책이었다.

5월인데도노을이질무렵이면아주쌀쌀하여점퍼가필요했다. 그

래도나는저녁바다풍경이좋아와인병을든채선상으로올라갔

다. 대자연이만들어낸오묘한주변의절경에압도되어이경득회장

과함께‘오솔레미오’를소리높이불렀다. 둘다부부동반이었다.

노르웨이의아름다운경치는그곳을방문해봐야진가를알수있

21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대자연이만들어낸오묘한게이랑에르피오르드.

Page 21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다.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사람들이가장많이찾는곳은피오르드

이다. 무게를견디다못한빙하가떨어져내려오면서녹은물들이깊

은계곡과폭포를만들고, 거기에바닷물이흘러들어지형의변화를

가져오게마련이다. 이렇게형성된부조화속의오묘한균형감이노

르웨이특유의풍경이라고할수있다.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211

노르웨이야일로에서보쓰계곡으로가는길에잔설이남아있는설산을

배경으로알프스의강을건너며아내와함께. (2001년)

Page 21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야일로에서플롬(flam)행관광열차에오르면서나는쉰아홉살나

이에어울리지않게중학시절처음도시구경을할때처럼들뜬기

분을억제하지못했다. 나는누군가로부터이날이마침노르웨이의

무슨국경일이라는귀띔을받고는여차장에게마이크를빌려축하의

뜻을전하고한국인으로서이열차에타게된것을기쁘게생각한다

고말하였다.

열차가플롬역에가까이오면서험준한산맥과거대한폭포의모

습이한눈에들어왔다. 노르웨이빙하중가장아름답다고하는이

야일로피오르드의폭포는우리나라등선폭포의 50배쯤된다면과

장일까? 기차가멈추고사진을촬영케하는곳도있어바람을쐬고

기분을전환케해주었다.

21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장관을이루는브락스달가는길의폭포.

Page 21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열차가도착한플롬은인적이거의없는산간지방이었다. 나는일

행과함께기차안에서커피를마시면서한적한노르웨이의풍광을

마음껏즐겼다. 역사앞넓은강가에는승객을실어나르는배(open

ferry)가대기하고있었고, 유럽관광객들이부르는노랫소리가은은

하게들려왔다. 멀리눈이쌓인높은산이보이고, 산자락에자리잡

은농장들이북부유럽풍의주택들과어우러져평화로운촌락을이루

고있었다.

이런정경을보며나는평안함을느꼈다. 아내도비슷한생각을하

는지한동안그방향에서시선을거두지못했다. 여행을하는동안

10여년에걸친유럽여행의경험을갖고일정을짠북구주협의회이

종수박사님의세심한준비를엿볼수있었다. 그야말로최상의접대

코스라고해도과언이아니었다.

처음으로간이식을시술한이박사는식사때레드와인에건강의

비결이있다면서매일한두잔은안드시는분보다드시는분이심장

병에 걸릴 위험이 적다는 말을 했다. 위스키의 온 더 록(ON THE

ROCK)은피하는게좋고, 물에섞어마시는것이부담을덜준다고

하였다. 같은양이면폭탄주가빨리취하게하는편이며, 온더록보다

낫다는등의건강강의가곁들여져식사시간을유익하게만들었다.

그뿐만아니라전여정을웃음으로이끌다시피한프랑크푸트의박

호산변호사부부도일행에게깊은인상을심어주었다.

그런데하마터면산길을따라버스로이동하던중낭떠러지로굴

러떨어질뻔한아찔한순간을겪지않으면안되었다. 큰산맥을넘

기위해서는밑에서터널을이용하는방법과정상을타고올라가면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213

Page 21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서계곡의아름다운폭포를즐기는두갈래의길이있었는데, 우리가

탄 12.5m의대형버스는이정상코스를택해오르다보니, S커브에

서미처운전대를꺾을수없어부득이후진을해야만하는위기의

순간을맞게되었다.

버스의길이가커브의최대회전가능길이와거의같아 50㎝정도

밖에는여유가없었다. 죽음의문턱에서있는듯한느낌이었다. 모

두가혼비백산! 무거운침묵의시간이흐르고어쩔수없이독일운

전수에게생명을맡길수밖에없는상황이었다.

이때 47명의승객은모두숨을죽이고운전사의동작만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누군가가승객은내려서위험한구간을걸어가고, 버

21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조국민주평화통일기도회참석여행중오스트리아의인스부르크로달리는

버스에서찍은평화로운목축마을의전경. (2003년 6월)

Page 21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스는먼저보내자고제안을하였다. 그러나정작찬성하는사람이많

지않았다. 대다수는운전기사가신경을쓸까봐겨우입속말만하는

처지였다. 게다가자동컴퓨터장치가고장나는바람에함부로내릴

수도없었다.

발밑을내려다보니약 500m가량급경사를이룬가파른계곡이었

다. 물론눈앞에아름다운폭포의절경이펼쳐지고있었지만안중에

도없었다. 오직공포의존재로만다가올뿐이었다.

운전기사의조심스런동작과섬세한차량조종끝에버스가위험

한커브를통과할수있었다. 47명의승객은하마터면황천길을직행

할뻔한위기일발의순간을경험하였다. 긴대형버스를이용할때는

위험한계곡의정상으로운행할것이아니고, 반드시터널을이용하

는것이사고예방에바람직하다고우리는입을모았다.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215

통독 10주년기념한반도평화통일문제세계한민족토론대회에참석했을때.

왼쪽부터통일부김경웅국장, 최영철부총리, 이경득콜롬비아회장과저자.

(2000년 베를린)

Page 21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집단 초상이 날뻔한 보스(VOSS) 계곡의 교훈은‘무리는 절대 금

물’이라는것을새삼일깨워주었다. 이일은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

시절세번째찾은유럽에서칼리만탄정글이후처음으로겪은죽음

에대한공포였다.

민주평화통일위원회 9기자문위원으로있던 2000년마침둘째사

돈인양영식박사가통일부차관이되었다. 나는당시베를린에서개

최되는독일통일 10주년기념한반도평화통일문제세계한민족토

론대회에초청돼참가하게되었다. 참가자는최영철부총리를비롯

한통일부관계자, 북한문제전문가들과동독의전국회의장등이었

다. 참석하고보니아시아에서는나혼자였다. 이를계기로동남아대

표격인연사로지명되어차례가올때까지나는긴장한나머지등줄

기에서식은땀이흘러내렸다. 아무런준비도없이순서에따라연단

에올라갔는데처음에는떨렸지만, 차츰말이잘풀려나갔다.

21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통독 10주년기념한민족토론대회에참석하고베를린장벽을찾은

민족통일연구원(KINU) 학자들과저자및아내. (2000년)

Page 21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나는앞에서전문가들이좋은발표를해서더이상할말이없다고

전제하고먼저외국에사는교민으로서의조국을위한활동상을간

단히소개하였다. 그러고나서남북간의대화가안되고있는점을

감안하여 인도네시아 대통령에게 중재 역할을 부탁해 남북 대화의

물꼬가트이도록하는게어떻겠느냐고제안하였다. IMF를맞아어

려운시기에국제적인뉴스가될수있다는점도덧붙여말하여뜻밖

의박수를받았다.

당시 2000년베를린에서열린통독 10주년기념한민족평화통일

토론대회에참석하여내가처음만났던민주평화통일자문회북유럽

협의회 이종수 회장과 프랑크프르트의 박호산 회장이 모임을 갖게

되어이듬해부터모이기시작, 각나라를순회하며평화통일기도회

를열게된것이세계여행모임으로이어지는계기가되었다.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217

다뉴브강조국통일기도회를마치고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제9기해외회장단및

지회장단과함께한저자(왼쪽첫번째). (2003년, 헝가리)

Page 21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이에따라 2001년부터유럽을중심으로매년해당국의신부나목

사님을초청, 조국평화통일기도회를열고그지역의회장이준비한

일정에따라여행코스로들어갔다.

먼저 스칸디나비아 4개국을순방하는것으로합의되어노르웨이

야일로에서북극조국통일기도회를개최하고, 스웨덴으로이동하는

순서였다. 당시개최국인노르웨이박경태대사와스웨덴김정호대

사가참가자들을위하여만찬을베풀어주었다.

그 뒤 동유럽의 다뉴브강 선상에서 가진 조국평화통일기도회와

2003년오스트리아비엔나에서가진모임도잊지못할추억거리가

21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비엔나교외의한정원식당에서‘9평회’회원들과부인들이노래를부르며

오후한때를즐기고있다. 비디오촬영중인분이광주MBC 관계자이며,

그 오른쪽이이경득회장. (2003년)

Page 21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되었다. 그때우리일행은비엔나에서 1시간거리에있는그린칭마

을의정원식당을찾아가덜숙성된홀리게이포도주를음미하며흥

겨운식사시간을보냈다. 잠시나마여독을풀게하는가족적인자리

였다.

이처럼매년세계여러나라를순회하며치르는기도모임으로인

해참가자들간의친교도더욱두터워지고있다.

어느새노년기에접어든나도해가바뀔때마다다음번의모임을

기다리는자신을발견하고‘이제나도늙었구나. 어쩔수없이인생

의종장에접어들었구나’하는감상적인생각이들어그만혼자쓴웃

음을짓고만다.

제5장 / 신앙생활로 시작된 봉사활동• 219

Page 22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Page 22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제6장

인도네시아에서사업하기

Page 22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뜬구름잡기안성맞춤인나라

인도네시아는열대성기후로사시사철더운나라이다.

그러다보니산림과더불어흔한대나무는무가자라듯쭉쭉뻗어

올라가어린아이베개만한두께가되기도한다. 그렇다고더위때문

에생활에지장이있을정도는아니다. 오히려대자연의웅장함에경

이로움을느낄수있는곳이인도네시아이다.

세계에서네번째로인구가많은이나라는여섯번째로풍부한자

원을갖고있다. 그중에도보르네오의칼리만탄정글이나수마트라

이리안자야일대의광활한숲이말해주듯이세계적인산림보유국

으로서의명성을갖고있다.

특히술라웨시북부쪽에서는흑단목(黑檀木 : ebony)이 생산되어

높은가격을형성하고있다. 흑단목은감나무과에속하는상록활엽

고목으로서동남아와중남미등열대지방에분포한다. 크게는 25m

높이까지자라며, 잎의 길이는 10㎝내외, 너비는 3~5㎝가량이된

다. 단성(單性)인 꽃은담황색이나, 익을 때는적황색으로변하면서

감과비슷한작은열매가열린다. 짙은흑색의목재는고급재로각광

을받는다. 그러나나무가단단한만큼성장이느린것이단점이라고

할수있다.

벌목을한후한동안바닷가모래속에묻어두었다가선박을이용

하여다른지역으로보내지는데, 이렇게견고해진목재는주로가구

나악기등의재료로사용된다고한다. 이밖에다른목재로는동티모

22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22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르에서많이생산되는향나무가있다. 1970년대에는벌목한향나무

를비행기로실어서일본으로보내는경우가많았다.

동부칼리만탄에서산림개발을할때겪었던잊지못할일은도로

공사중에갑자기시커먼능선이발견되었을때이다. 중장비로산줄

기를따라파다보면석탄광맥이나타나흥분하게마련인데, 대개는

위치가너무험준한산맥에있어서좋다만경우가더러있었다. 수

송이어려워경제성이없기때문이다. 그런데한국기업이이보다입

지조건이좋은칼리만탄사마린다에서광맥을발견하여석탄생산에

성공한사례가있다.

서부칼리만탄에서많이나오는금광석은 1970년대부터 1980년대

까지는독점개발권을획득한회사만개발허가를받을수있어이들

이외국인의투자를알선하여금덩이를무더기로캐낼수있었다. 이

시기에는지역원주민들이강가에서사금을모으는일이주된생업

수단이되다시피했다.

한국에서도노다지에눈이멀어광산을찾아다니다가가산을탕진

한사람들이있다는말을들은적이있다. 적지않은사람들이일확

천금을노려금광개발에뛰어들었지만, 성공하지못한것은전문성

이없는데다사전조사없이맹목적으로참여했기때문이다.

광산물중에서도세계적인매장량을가지고있는주석은인도네시

아정부가직접나서상당한성과를올리고있다. 또하나빼놓을수

없는것이동광(銅鑛)인데, 일찍이그가치를인정한미국인들이이

개발사업에투자하였다.

이곳은자카르타에서 7시간비행거리에있는이리안자야섬으로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23

Page 22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프리포트(free port)란회사명을갖고동광을대형으로개발, 운영중

이다. 이러한광물을채취하여운반하는중장비페이로더의타이어

크기의직경이 5m나되는점으로봐그규모가어느정도인지짐작

이갈것이다.

이곳은눈이녹을새가없을만큼고산지대인데열대성기후인인

도네시아에서는보기드문지대이다. 이리안자야의 5천 30m 정상은

만년설로덮여있는데, 이곳에는한국의허영호등산대장이 1995년

에등반했다는기록이남아있기도하다. 중요한점은이광산지역에

서캐는구리광석에구리보다는금의비중이더크다는것이다. 이렇

게일반인들이미처모르는허술한점을외국인들이이용한다.

수마트라해변에는유리를만드는원료인규사(硅砂: silica)의 양

이엄청나지만, 자원수송을위한기반시설이낙후되어포기하는경

22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숲의바다를이룬칼리만탄의정글.

Page 22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우가많다. 제2차세계대전말기 3년간일본군이인도네시아를식민

통치하였는데, 당시군부가후세를위하여주요자원이매장된위치

와술라웨시북부마나도지역의바다를조사하고보물선이침몰한

위치까지기록한해도를만들어보관한것으로알려져있다.

뿐만아니라일본에서많이사용하는곤야쿠(こんやく)의원료(인

니어로탈라스라고함)까지지방여러군데에심어오늘날까지수집

해가고있다고한다.

인구가많은대신농업이발달하지못한이나라의사정을파악한

일본에서 1967년부터공산품에대해평균 35%의 관세가인하되는

케네디라운드를적용하여농기구를무상원조함으로써인도네시아

에는일본의농기구가판을쳤다.

1980년대초이런상황을감안하지못한채내가새마을운동의취

지를 사업에 연결해볼 요량으로 현지 농협 중앙간부들에게 홍보용

농기계를갖다주고설득하려고했으니, 결과가좋을리없었다.

이런과정을거치면서나는일본인들이현지시장개척을위해얼

마나치밀한계획을세우고, 얼마나많은노력을했는지를알수있

었다. 그결과인도네시아전역을놓고볼때육상에는일제차량이

대다수를점령하고, 바다에는야마하엔진을이용한선박이주종을

이루게되었다.

더욱이일제자동차와크고작은선박에장착한엔진에소요되는

부품만해도가히기하학적이라할만큼엄청난수량이소모되고있

다. 이는오늘날의일본인들선조가일찍이 1920년대부터인도네시

아에진출하여시장과정보를선점하고노력한결과라는점을상기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25

Page 22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할필요가있다.

인도네시아는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중에서 3.2%에해당

하는원유가생산되며, 세계제2의가스생산국일정도로가히자원

대국이라할만하다. 하지만원유는많으나정유시설이부족하여인

접국가에서원유를정유해다쓰고있는실정이니, 국가적인손실이

막심하다.

이곳에서는“되는것도없고, 안되는것도없다!”라는말이유행어

처럼나돈다. 이런표현은한국인들이지어낸말이기도하지만, 시스

템과문화가다르다보니간혹낭패를당하는경우가있게마련이다.

그러나처음인도네시아에온한국인들은모든사업이다잘될것

으로믿는경우가많은데, 전문성없이덤벼들었다가는십중팔구실

패하게마련이다. 함정은쉽게보이는데에있다. 쉽게보일수록더

욱정신을집중하고신중을기울여야한다는것이내가인도네시아

에와서실제로겪으며배우게된학습효과이다.

현지의한사업가친구에게“너는왜모든것에대해물으면전부

다할수있다고하느냐?”고물었더니, “그냥무턱대고가능하다고

말하는것이일반적인인도네시아인들의사고방식인것같다.”는대

답이돌아왔다.

내가인도네시아에서 30여년을살다보니까이제야이들의성격을

다소나마알게되었다. 겨우 1~2년을지내고인도네시아를잘안다

고말하는사람들이있는데, 이는상황을제대로파악했다고볼수

없는사람이라고생각한다.

그동안나는풍부한자원과인심좋게생긴현지인들사이에서뜬

22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22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구름 잡는 일로 허송세월하다가 주저앉고야 마는 동포들의 경우를

더러보았다. 그런가운데서도동시에산림사업을비롯한신발산업,

전자·봉제·식품·제조업등다양한분야에서땀흘려성공한분들

이많이있음을보고있다.

이런결과는 2008년말인도네시아내에서한국인기업이연간무

려총 120억달러에해당하는수출고를달성하고있다는사실에서도

엿볼수있다. 이렇게성공한분들의공통점은한결같이쉽게좌절하

지않고꾸준히기반을굳혀나간인내와끈기에있다고하겠다.

기반이되는이름석자의신용

인도네시아는비공식집계지만중국인이전체인구의5% 내외라고

한다. 그숫자가약 1천만명쯤될것인데도주요사업은거의중국인

들이장악하고있다. 예전에는서로메모에성명만들어있으면비즈

니스가통한다는화교들의사회였다. 어느가문의창시자는 60년전

부터이런신용이소문난화교였다. 그러다보니그의후손까지신용

이두터워사업이점점번창해지는것을볼수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수표(GIRO)가 부도나도형사적인책임을지지

않는것이통례처럼되어있다. 물건을사고팔때당좌수표를발행

해도은행에가서현금화해야주문한물품이인도되는것이상례로

되어있다. 화교간에는모든상행위가잘이루어진다. 하지만그들

은만나도사업이야기만하지일반문화나스포츠에관한대화는거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27

Page 22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의하지않는것으로알려져있다.

나는화교은행의백택뱅총재와해로유통그룹의회장을비롯한몇

몇거상들과오랜교분을가져왔다. 사업초기에납품을할때였는

데, 마침수입품이라서칼리만탄발릭파판까지주문받은물품을제

날짜에대지못하게되는어려운처지가되었다. 이때화교인현지

납품업체를소개받아앞의한사람과의친분관계를꺼냈더니두말

없이한컨테이너분의수입캔류를외상으로내주어납품에차질이

없도록해주었다.

나는도움에보답하기위해즉시송금조치를했다. 이사실을여

러현지인한테이야기하자, 그들은화교들끼리도잘알지못하는사

람에게는외상을주는법이없다는데이번경우는특별히배려해준

것이라고놀라워하였다. 신용의소중함과가치를절감하게해준외

상거래의한사례였다.

이런일이있은후부터화교와의거래는착오가없도록더욱신경

을쓰게되었다. 앞에서도잠시언급한바있지만, 인도네시아인들과

도신용거래가성사된적이있었다. 1985년경이었을것이다. 정부

고위급인사아들과사업이성사되었는데, 구두로약정만했음에도

큰액수가나의통장에입금된적이있었다. 이는고위층과관련된

약속은구두만으로도잘이행된다는사실을말해주는대표적인예

라고할수있다.

22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22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위험에서도생명을건지는자기관리

적도에위치한나라는대개기온이높아사람들이나태한생활을

하기쉽다. 인도네시아의경우, 한국인들은대개운전기사와가정부

를두고있으며집안일은거의가정부에게맡기게된다. 한국에비

해인건비가싸다보니상류층의생활을하는셈이다.

요즘에는기후까지조금씩낮아져서후텁지근했던 20년전에비해

쾌적한날씨가많아자카르타에서살기가좋아졌다. 그런탓인지어

떤방문객은세계적인휴양관광지발리를다녀와서는한국보다인도

네시아생활이더지내기좋다고말하기도했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곳에는 사고도 따르게 마련이어서 동네에서

막노동자인인력거꾼을업신여기다가칼에맞아죽은현지사업가가

있는가하면, 육군소장이집앞에서사망한사건도있었다. 대개의

경우, 주위사람을깔보다가생긴보복성사고가아닌가한다. 지역

출신에따라다르지만, 자바인은대개조그만칼(kris)을등뒤옷속에

갖고다니는습성이있다고들말한다.

일반회사인이나고급생활자들보다는막벌이노동층빈곤자들에

게그런경향이많다. 특히외국인이사는마을에서는현지인들과의

관계가부드러울필요가있다. 인심을잃게되면자칫사고를자초할

수있기때문이다. 거듭말하지만, 어려운이웃에게베풀어가며사는

것이자기자신을돕는일임을알아야한다.

사람으로인해겪게되는인재(人災) 못지않게주의해야할것은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29

Page 23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돌발적인재해(災害)이다. 바다낚시를나갔다가잔잔했던파도가갑

자기쓰나미처럼몰아닥쳐생명을앗아가는사고도있기때문이다.

인도네시아는무풍지대라서예상치못한파도의공격에당황하게되

는일이더러있다. 이럴때에는바위에몸을지탱하면생명을건질

수있다고한다.

사무드라비치(Samudra Beach)라는호텔이해변에있어해수욕을

즐기기는아주좋은데, 호텔오른쪽해변은수심이갑자기깊어지고

파도가휩쓸어들어가기때문에혼자힘으로는나올수가없어서그

냥수장되는사고가여러번있었다. 이런곳의해변엘갈때에는특

별주의를요한다고하겠다.

특히자가운전중에사고가발생했다면무조건빨리가까운경찰

서에신고해야한다. 그자리에서우왕좌왕하다가는주위에서몰려

드는인파에구타당하여생명을잃을수도있기때문이다.

업무와관련하여보복을받지않으려면아무리타당한사유가있

어직원을해고하더라도원한관계에이를만큼상황을악화시켜서는

안된다. 상대방의감정이풀릴때까지조용히원만하게화해하고이

해시키는진솔한노력이필요하다. 또한추가퇴직금을주는방안도

고려할만하다. 냉랭하게대처하여방치했다가한국인관리자가현

지직원으로부터살해된극단적인사례도있었다.

이와같은불행한사태를사전에예방하기위해주의가요구되는

몇가지사항을열거해보면다음과같다.

현지인의종교를무시하는행위, 장난삼아머리를가볍게라도때

리거나귀엽다고만지는일은절대해서는안된다.

23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23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운전을하다가사상자를냈을때도일단사고현장을피한뒤신고

하는것이현명하다. 집안에있는물품을심부름온사람에게무턱대

고내주지않도록주지시켜간접도난을방지하고, 평상시에도주택

인근에있는이웃주민들과좋은감정을가질수있도록원활한관계

를유지해야한다. 무시하는태도는스스로고립시키는화근이될수

있다.

만일현지인으로부터괴로움을당하는일이생기면우선관계기관

에도움을요청하고, 그래도효과가없을때는덕망이있는지도자급

교민을찾아가도움을요청하는것이좋다.

또한특정한일에대해현지인을선동하거나지나치게정부를비

판하는행위는삼가야한다. 어떤경우든현찰은액수가클수록은

행에예치하되, 가능한한사무실이나 주택에많이보관하지말아

야한다.

현금을은행으로옮길때에는강도가있을수있으므로나누어이

동하거나, 현지인을대동하는게좋다. 세금이과다하게부과되었다

고여겨지게될때는정당한이유를대고변호사를동원하여시간을

확보하면서합리적인적정선을이끌어내는조정협상을해보라고권

하고싶다.

법을지키지않는사람들

사업환경이기복없이안정될때에는사업가들은대체로준법정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31

Page 23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신이보편화되어있다. 그러나혼란한시기에는다르다. 인도네시아

에서는 대체로 중국인들이 대형사고를 일으킨 경우가 많았다고 한

다. 특히중국인소유의은행들이정부관할로넘어가야할만큼관

리를잘못한경우가있었다. 이제는 IMF를계기로거의정화된상태

라고할것이다.

통큰중국인들의기질은 2002년월드컵때한국과스페인전의승

자맞히기베팅에서도잘나타나고있다. 인도네시아의중국인들가

운데는두나라의경기를놓고전화로베팅했는데, 어떤중국인은집

한채를걸었다는말도나올정도였다.

그런데어떤사람은무모하게게임에달려들었다가베팅에실패하

여목을매자살하는소동을벌이기도했다고한다. 알고본즉, 이사

람은집한채를베팅금액으로건넸으나그만큼의돈이더미지불

상태로남아있었다는것이다.

어릴적에어른들이“중국인들은놀음빚독촉에마누라까지내준

다.”는말을들었지만, 그런일은아직까지본적이없다. 그런데베

팅때문에자살한사건은이곳에서처음들은셈이다.

이른바어깨들은악성해결사로통한다. 그러므로사업을하더라

도그들과얽히지않도록각별히유의해야한다. 일단그들의그물망

에들어가게되면빠져나오기란어렵기때문이다. 그래서일부사업

가들은신변을보호받을수있는그룹과일정관계를유지하며위협

에서벗어나기도한다.

그들은상상만해도끔찍한행태를보인다고한다. 부채가밀릴경

우, 집안에한자루의코브라를풀어놓고밖에서대문을잠가버리는

23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23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일도서슴지않는다는것이다. 온식구가초죽음의공포에휩싸이는

것은물론, 어린아이가코브라에물려생명을잃은경우도있었다는

말이아직도사라지지않고있다.

그리고칼부대라는것이있는데, 이들은현지말로바랑이라고하

는큰칼을차고채무자의집으로몰려와서난동을벌이면버텨낼재

간이없다. 이렇게어깨들은악성해결사노릇을했다고한다. 하지

만지금은법보다주먹이먼저라는말은옛날이야기가되어버렸다.

민주적이고합리적인사회분위기속에서활동할수있기때문이다.

인도네시아에서성공하는비결

인도네시아에서는중국인들이상권을쥐고있다고해도과언이아

닐정도로그들의영향력이크다. 2차대전이후부터중국인들과이

들에맞선일본인들이상권을놓고치열하게경쟁해오고있다. 지금

은대다수기간산업에두루그들의뿌리가내려지고있다. 그런상황

이고보니외국인투자자나사업을시작하려는사람들은그들과경

쟁하여이겨야만된다는논리로귀착될수밖에없다.

그들과승산있는경쟁을하기위해서는무엇보다상대를먼저알

아야한다. 사전에철저하게연구하고대비해야만승산이있다고할

수있다. 따라서사업을대충하다가빠진다거나몇년만해봐야겠다

는안일한생각을갖게되면백전백패의멍에를쓰기십상이다. 나는

처음인도네시아땅을밟기전부터이곳에뼈를묻을각오로사업을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33

Page 23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시작했다. 몇년해보다가안되면떠나야겠다는생각은한번도해

본적이없다.

이곳에서어떤사업이든성공할결심을했다면반드시인도네시아

어는익혀능란하게구사할수있어야한다. 사업자금이있으니된다

든가, 통역에맡기면해결된다는식의안이한발상으로는결단코경

쟁에서살아남을수가없다. 외국에서의사업은그래서살얼음판의

걸음마와같은것이라고할수있다. 어느나라이건통역에의존하다

보면의사소통에문제가생겨상황판단이어려워지고일을그르치

게되는경우가많다.

내가아는어느대기업의경우는해당국가에미리직원을유학시

켜현지사회와문화를익히고적응케한뒤주재원으로파견하여회

사를설립하는과정을거쳤다. 이는사전에철저한준비로시행착오

없이처음부터기반을잡겠다는의지로보였다.

다시말하면언어와문화를익히지않는한인도네시아도사업하

기가쉬운나라가아니라는얘기이다. 만일이나라에서사업을할

생각이라면, 앞의대기업의예를벤치마킹해보는것도한방법이라

고할것이다.

그리고 사업 준비자금은 일정수준 사전에 마련되어야 하며 이를

시행하기위한자금지원대책이세워져야한다. 개인에따라다르겠

지만, 자기자본비율을높여가면서은행의신용을얻고사업을하는

것이현명한방법이라하겠다.

그다음으로중요한것이업종의선택이라고할수있다. 기존의업

종이아니고새로운업종을선택하고자한다면현지에서의판매전망

23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23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이나수요측정, 수출입가능여부등의진단을비롯하여세밀한입지

조건분석과전략적계획수립, 예측등적절한준비가필요하다.

특히지방에따라인건비와대지, 여타경비가크게다르기때문에

많은인원을고용해야하는경우는사전에세심한조사와검토가필

수적이다. 현지인을너무믿고덤볐다가는실패할가능성이있기때

문에성공한교민들이나기업인들에게자문을얻는것도한방법이

라고생각한다.

내가처음무자본의상태에서사업을시작하며겪은난관이나어

려움은형언하기어려울만큼많았다. 또이런저런종류의사기도여

러번당했다. 자본없이사업을하다보니어려움이한두가지가아

니었다. 설움과고통, 좌절감으로중도포기의지경에까지이를정도

였다.

지금생각하면조금이라도세심한주의를기울이고은행의자문으

로힘을얻을수만있었어도그토록고생을하지는않았을텐데하는

후회와아쉬움이남는다.

사업가에게는기(氣)가무기다

근면과정직을생활신조로삼고열심히일을하다보니, 나에게는

기가빠져나갈새가없었던것같다. 뒤를돌아보건대오늘날까지

30년간좌절감과한숨의시간은많았어도결코배짱의기까지허망

하게내버린적은한번도없었다고생각한다. 항상긴장된상태에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35

Page 23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서아내와함께주님께기도하며체력과정신을가다듬은결과일것

이다.

나는일단목표가정해지면돌진하는코뿔소형스타일인것같다.

끈질기게일을추진하고끝장을봐야직성이풀리는그런성격이라

고할수있다. 이따금작은사업에매달려큰일을할수있는기회를

놓쳐버린건아닐까하는생각을할때도있었으나결코미련이나아

쉬움은없다.

스스로는‘느리지만확실한’(slow but sure) 사업을일궈왔다고자

부할수있다. 현지중국인들과는대조적이다. 그들은사업성이있다

고판단되면일단하겠다는대답부터하고나서야일을추진해나가

는쪽이었다.

나는큰것이냐, 작은것이냐보다는내가할수있는것이무엇인

가를중요시했고그목표가확정되면어떤역경에처하더라도지속

적으로추진전략을깊이연구검토하고노력하는데에전력을다하

였다. 이를뒷받침하는두개의큰기둥은자신감과건강이었다.

외국의오지에나가서도끈질기게버틸수있는필수적인조건은

집념과자신감, 그리고심신의건강이라고믿고있다. 이는외지의

기업가가갖추어야할자기관리의기본이기도하다. 목표를향해가

는과정에서험로에봉착하게될때초지일관할수있는자기최면은

큰힘이된다.

나는자카르타에서도경쟁이치열한유통분야에서사업을해오는

동안중국인들과엄청난경쟁을벌여야했다. 제품의질, 가격의적

정성, 고객의만족을위한서비스의질등차별화전략으로대응하며

23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23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한국내주요식품제조업체와의협력으로무궁화유통만이한국식품

을공급할수있는잠정적독점업체라는장점을살려식품수요와공

급의원활한체계를유지할수있었다.

또한고유의판매전략으로개업당시의초심을잃지않는고객제

일주의와사업초기부터장래의 FTA 시행에대비한정부규정을준

수하여수많은종류의식품을정부에등록함으로써 2009년초부터

우리회사는인도네시아에서유일하게우수기업으로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와같은경쟁력은앞의노력못지않게일관되게지킨신용

과사업가특유의기, 심신의건강에있다고믿는다.

이제무궁화유통은경쟁대상인중국계기업을상대로유통망까지

펴나갈수있는관계를형성하게되었다. 유수한중국계유통회사를

찾아가도책임자가만나주지않았던사업초기에비하면격세지감이

아닐수없다.

한국기업들의실패사례

인도네시아에는 공식적으로 약 1천 2백개의 한국기업이 있으며,

개인사업체가 500여개에이른다고한다. 인도네시아에서한국기업

체가제조수출하는생산품은연간전자 32억달러, 섬유봉제 60억

달러(인도네시아봉제전체의 60%에해당), 기타석탄, 합판, 제지, 신

발, 악기등 25억달러에이른다. 연도에따라통계가달라지긴하지

만, 60여만명의현지인을고용하는효과를내고있다.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37

Page 23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기업체가많은이유는풍부한노동인력에생활방식과외환규정이

까다롭지않아제재받지않고운영할수있는여건이갖추어져있기

때문이다. 또한대기업군들이성공적으로회사를경영하고있어관

련기업들이계속늘어나는것도한이유가된다. 사업에관심을가

진분들에게참고가될것같아몇가지유의해야할실패사례를살

펴볼까한다.

상호계약이미비한가운데공장을한국으로부터이전할계획으로

성급하게공장을운영하며, 뒤늦게회사설립을준비하는경우이다.

현지회사명의로임시계약을할때동업자가된사람이만에하나

불량한마음을먹었다면이계약서를담보로은행에서대출받아자

금을챙길위험성이있다.

이경우는정식으로투자법인을세우지못한단계여서현지인임

의로권리를행사할수있기때문에마치호랑이입에생고기를물려

준것이나다름이없다. 특히외국인과의관계에서유의해야한다.

흔히나타나는일이다. 이런최악의사태를피하기위해서는현지한

국인사업가의조언이나변호사를통하여자문을구하는것이최선

의방법이다.

또한가지의경우를보자. 인도네시아는기업에복수노조를인정

하게되어있어서한쪽이파업하는바람에연쇄적으로기업활동이

마비된적이있었다. 그중에한국인업체도포함되어있었는데, 한

조가 25명인라인에반은작업을하고반은파업에돌입하는사태가

벌어졌다. 생산라인이 1개조로이루어져서 50%의작업만으로는생

산품이나올수없는지경에까지이르렀다. 결국공장문을닫고회

23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23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생이불가능하게되었다.

이런일을미연에방지하기위해서는노사관계를면밀히파악해야

하며노조의실태, 임금노동조건등계약서상의규정작성과숙지

가필수적이다. 또노사분규발생에대비하여사전에상황별대책을

마련해두어야한다. 아무런방안이없을때에는이슬람교지도자의

힘을빌려기도하고마음을열게하는방안을마지막수단으로시도

하기도한다.

회사설립계약을할때는반드시계약서의내용을충분히파악하

고서명을해야한다. 모두현지언어로되어있어서더욱조심해야

한다. 영문으로작성됐을때도마찬가지이다. 계약서를잘못작성하

여잘나가던수출업체가현지인손에넘어가빈손으로떠나는경우

도있었기때문이다. 믿을만한전문가의자문과도움을받아야하는

이유이다.

또한외국어를모르는업주가현지에파견되어있는법인장의허

위보고에투자를계속하다가가산을탕진했는가하면, 남에게사업

을일임한어떤기업주는대리자가위임장을악용하여엉뚱한인물

로다시경영을책임지게하여잘일구어낸사업을접게만든안타까

운일도있었다.

이는기업마인드가적극적이지못하고인재의중요함을인식하지

못한데서생긴아쉬운실패의사례였다. 인도네시아의중국사업가

들은창업주의세대에서끝나는일이거의없다. 어떤장사를하더라

도온힘을기울여끈기있게한다. 엉덩이가무겁다고할만큼웬만

해선자리를옮기지않으며, 잘된다고사업장을함부로개축하거나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39

Page 24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꾸미지도않는다. 그지구력과끈기는본받을만하다.

오래전에어느중국인가구점에들어갔다가나오는길을찾지못

해헤매다가안내를받고서야나온적이있었다. 그들은자손대대로

장사를하면서도큰가게로옮기지않는것을알았다. 동네집을수

십채구입해서연결하여쇼룸과창고로사용하다보니규모가커졌

고굳이옮길필요가없어진것이다.

나는그런중국인의운영방식에서배울점이있다고생각한다. 그

래서무궁화유통건물도단계적으로확장해나가는방식을취하고있

다. 말하자면현재건물은완료된것이아니라현재진행형인셈이다.

또한가지예를들어보자. 공장을운영할때생산성을높이기위

해종업원들에게“빨리하라.”고독촉하는것은사업주자신의위안

은 될망정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생산성을 높이기는커녕

오히려품질만떨어뜨리는결과를가져오기십상이다. 상관의눈치

나보고적당히서두르는일이제대로될리없는것이다.

중요한것은쌍방통행의의사소통이다. 잘못한다고사원을윽박지

르면앞에서는순종하는체하지만불만만키우고반감을사는꼴이

된다. 정해진기한내에생산성을높이는것은회사를성공시키는열

쇠인데, 이로말미암아차질이생긴다면회사에이익을낼수없음은

당연하다. 이런일이한두번에그치지않고누적되다보면여유자금

을비축할수없는회사는비상시에대비하지못해결국야반도주하

는사태에까지이르게된다. 특히 IMF 직후여러나라기업인들사이

에이런일이발생했다.

또하나의사례를소개하면, 외국에서주재원으로근무하다가임

24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24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기가끝나도계속상주하며개인적으로기반을잡고자하는경우이

다. 이는성공가능성보다실패의확률이높다는것을유념하여잘

대처해야한다. 그나름으로는현지생활에익숙하고언어도잘통한

다고자만하여모든일을안이하게생각하는경향이있는데, 결코자

만해서는안될일이다.

이런사람들은보장받은직장에서임지에발령받아꼬박꼬박월급

을받아생활해온터라살얼음판같은불안전한사업장을헤쳐나가

는데에는경험과적응능력에한계가있다.

사업에대해유혹을받기쉬운또한가지의이유는인도네시아에

선매사가쉽게이루어지는듯이보인다는점이다. 사람들이흔히말

하듯이이곳에서는되는것도없고, 안되는것도없기때문이다. 이

나라의사회이면을들여다보면, 아주불가능할것처럼여겨졌던일

이해결되는가하면, 쉽게될것으로믿었던일이시간이걸려도해

결이안되는경우가있다.

몇가지이런저런이유가있겠지만, 여기에는무엇보다도인간관

계가크게작용한다. 세상만사가쉽기도하고어렵기도한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래전부터 현지인들과의 유대에 각별히 신경을 써왔

다. 이런점을잘알고있는유수한중국인기업체에서는퇴역한유

력인사를중역으로영입하여이들을활용하는일이적지않았다.

회사를설립하여본격적으로운영에들어갈경우, 참고가될만한

몇가지조언을해야겠다. 회사건물에전기나소방시설이완벽하게

갖춰지지못하다보면누전이생기는경우가있다. 만일의사고에대

비해서항상안전점검과시설체크로손실을최소화해야하는데, 사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41

Page 24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업주나관리자는실무자만믿고그냥지나쳐버리기쉽다.

자카르타공단에있는어느대기업의현지시멘트공장이전소한사

건도이에속한다. 이런일에대비하여보험을들게마련인데, 예전에

는화재보험가입때부담금을많이내면유사시에전액을보상받을

줄알고보험에드는일이많았다.

사전에전문감정가로부터공인된증빙서류를받아야하는데, 그

렇지못해허위기재라는이유로기대한만큼보상을받지못하는일

이벌어졌다. 결국보험금은많이내고보상은적게받게된기업이

도산위기에까지몰리게된것이다.

어떤경우든해당관청의시정요구나지적에는흘려듣지말고세

심히귀를기울여야한다. 자칫경시하여지나쳤다가는쉽게해결될

수있는문제를어렵게만들수있기때문이다. 관청에서는엄격하게

정상적인절차를밟으므로결정권자의결정이난후에는변경하기가

쉽지않다.

따라서어떤경우든관청의서류는항상주의하여처리해야한다.

나는인도네시아어를터득하여직접세무와은행, 세관, 경찰의민·형

사관련서류를살펴보며이치에맞지않거나잘못된점이있을때는

사전에수정조치를해오고있다.

만일서류에미비한점이있을때는반드시이분야의전문가나친

분이두터운변호사를찾아가자문을구했다. 자신의잘못된판단을

사전에방지하기위해서이다. 번거롭지만이런노력을하지않았다면

여러차례큰손실과불이익을받았을것이다.

특히민·형사상직접수사를받게된다하더라도불리한사항은

24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24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최대한배제하고수사내역에서명할수있어야하며, 현지변호사를

선임하여 처리하는 경우도 변호사가 작성한 문서를 식별할 정도의

언어구사력은갖춰두는것이좋다.

또한감당하기어려운사업은시초부터검토대상에서제외시켜야

한다. 무리하게사업에손댔다가잘못돼한꺼번에만회하려했다가

는스스로깊은수렁으로빠지기쉽다. 아무리‘지독한경영자’소리

를듣더라도결단을내릴때는냉정하게처리해야한다.

한국투자자들의고충

외국에서는기업이성공적으로운영되고있다고해도고충이따르

게마련이다. 다행히내가사업을시작할무렵에는인력수급이순조

롭고임금이저렴하여많은기업이선호하게되는좋은조건을가지

고있었다. 그러나 1998년수하르토대통령이물러난뒤노조의활

동강화에따른변화로기업여건이많이달라지고있다. 과거에비해

상대적으로노동자에게유리한쪽으로노동법이개정되면서순탄대

로였던기업운영은까다로운험로를지나야하는새로운상황에봉

착한셈이다.

그가운데중요한대목이퇴직금지급규정이다. 충당금조로근로

자가더많은퇴직금을받아갈수있도록하여사전에퇴직금을적립

하지못한대규모기업들은퇴직금을일시에지급하는데에상당한

어려움을겪게되었다. 본국에서출자한대기업이외에대규모노동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43

Page 24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인력을가진현지기업은특히 IMF때큰어려움을겪었다. 그이후부

터 대다수 기업은 노동자들과 계약직 연봉제로 변경하여 운영하고

있다. 그렇지않으면누진제퇴직금이힘겨워기업을운영할수없기

때문이다. 신정부가들어서면서이런문제를개선하기위한노력이

엿보여노무규정이원만하게개정될것으로전망되고있다.

지방과수도권의최저임금이 60% 정도차이가나서다수의노동

자를고용할때는인건비비중이매우높아진다. 따라서처음공장

지역을결정할때부터업종별로주변환경을고려하여신중히검토

해야한다. 수출업체는수출후부가세환급이적기에이루어지지않

아자금의압박을받는예가있다는점을감안하여자금계획을맞추

는게좋다.

문제는선납법인세인데, 하청을줄때도 6%의법인세를공제하게

되어하청업체의어려운점으로지적되고있다. 임가공부가세의경

우, 수출업체에서는자재를대주고임가공을주어도 10%의부가세

를내게되어있어큰부담이된다. 각국투자업체들이현지정부에

건의하고또국회가문제가된세법을개정하는데관심을보임으로

써외국기업에대한과세문제가개선될가능성이높아진것은다행

스러운일이다.

현지에나와있는한국기업의경우, 생산품이계속불량품으로쏟

아져나와곤욕을치른적이있었다. 나는현지의사업을책임지고

있는문제의모대기업체사장에게고충을들어본적이있다.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제품이라서 특수 처리과정을 통해 생산품이 나와야

했다. 그런데어쩐일인지불량품만계속나와현지어에능통한한국

24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24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인노무전문가를소개하여투입했다.

결과는역시한국인기술자와현지노무자들간에언어소통이제대

로되지않아서생긴일이었다. 이를해결함으로써정상적인제품이

나오게되었다. 이런과정에건물의환풍기를바꾸고건물개조를통

해실내온도를조절하는등근로환경의개선도동시에이루어졌다.

여기에서잠시언어소통의부재로내가겪은일화한토막을소개

하고자한다. 1978년경칼리만탄정글에서겪은일이다.

산림개발지역에노상정비소를두고한국인두사람과여러명의

현지정비기능사를배치해고장난수송차량을정비하고있었다. 어

느날갑자기현지인들에게쫓겨도망가는한국인의모습이보였다.

알고보니한국인서씨가뭐라고지시해도알아듣지못하자분통이

터져엉겁결에뺨을때린것이사건의발단이었다.

현지인들의반발을사면서두나라사람들간에패싸움으로번진

것이다. 하마터면수적으로수세에몰린한국인들이정글에서맞아

죽을뻔했던해프닝이었다.

정글에는사무동과직원숙소가따로있었는데, 현지인과한국인

사이에분쟁이일어나면파견된경찰이‘팔이안으로굽는다’는말

처럼자기나라일꾼편을들어주는건어디를가나마찬가지였다.

고용인해고의난제들

다시한번강조하지만, 사업에는언어가무기이지, 총기가무기가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45

Page 24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아니었다. 칼리만탄정글에서수백명의많은현지인을데리고산림

사업을했던사업초기때의일이생각난다. 수마트라바탁족인직원

이장비와부품창고의관리를맡았는데, 일을잘하고우수하여신임

도컸었다.

그런데이종족은혼자서는제대로능력을발휘하지만, 여러명이

있을때는영딴모습이었다. 기타를치면서노래를즐겼다. 이들은

성격도한국사람과비슷했다. 그래서인지이들과가깝게지내다보

면자기네는인도네시아의한국인이라는농담을곧잘하곤하였다.

우연의일치였는지문제아는역시성질급한현지인이었다. 업무

처리능력이탁월해서사무실의주요한업무를맡겼었는데, 그직원

이병원에입원하자일가친척 20여명이몰려와과중한업무때문에

병이생겼다며무턱대고보상을요구하였다.

문제는돈이었다. 전후 관계를사정에맞게따질수는있었으나,

인도네시아의 일상적인 관행의 연장선에서 아무 조건 없이 적절한

보상으로원만하게해결해주었다. 원한을갖지않도록하는것이지

혜롭기때문이었다.

현지인을해고한경우에는특히 1년간은뜻하지않는보복에주의

해야한다. 그래서나는어떤경우에도그들에게원한을남긴채해

고해본적이없다. 문제의직원이조금이라도분이풀리지않았다고

여겨지면, 다풀렸다고판단될때까지카운슬링하고앞으로어려운

일이있으면다시찾아오도록진솔하게다독여보냈다.

외국에서사업을하다보면여러유형의일을겪게된다. 1980년대

후반어느날외부일을보고사무실에들어오니현지인이칼을들고

24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24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행패를부린다는보고가있었다. 일단담당자인한국인을피신시킨

다음소동이벌어진현장으로가서원인을알아봤더니, 의사전달이

잘안돼생긴소동이었다.

업무상의문제가자존심싸움으로번진일이었다. 다행히흥분한

현지인의마음을달래칼부림소동을진정시킴으로써직원들에게는

좋은모양새를보여준셈이지만, 경찰을부르지않고흉기를든사람

을직접해결한것은위험하기짝이없는일이었다.

나는아직도“함께생활하는현지인을항상더존중해주고중요하

게여기라.”고충고해주던고(故)이경재신부님의말씀을잊지않고

있다. 그래서사경을헤매는직원이있으면지체없이병원에입원시

키고, 열악한시골병원에있어치료가마땅치않다고여겨지면도시

로후송시켜돌보게해주었다. 이런일이여러번있다보니직원들

도‘무궁화가족의일원’이라는공동체의식을갖게되고회사의일

을자기의일처럼열심히해주었다.

중부자바말랑은슬래마트(slamat)라는 3천 404m나되는높은산

이있는소도시로밤낮으로일교차가크지만, 저녁이면기후가한국

인에게알맞아빨간사과까지재배되는살기좋은곳이다.

여기서공장을운영하던한국인이현지인을해고시키고나서한밤

중에칼에맞아비참하게죽는사건이있었다. 이런경우는십중팔구

현지인직원과의관계가원활치못해원한을샀기때문이라고할수

있다.

자바인과같은현지인들이천대받고무시당했다고믿게되면, 원

한을사서몸뒤에숨겨갖고다니는크리스(구부러진녹슨칼)로공격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47

Page 24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당하기가쉽다. 앞에서얘기했지만, 어느육군소장이자택앞에서

하차하다가이런무기의공격을받아피살된사건도바로이런예에

속한다.

여기에기술한몇가지예는외국인이생활하는데주의해야할사

항으로서내가직접겪은일과공개된내용중에서선별하여적어본

것이다. 그러나이런경우는어느나라를막론하고조금씩은있을수

있는문제라고생각한다. 요컨대인도네시아는지금도‘외국인에게

는천국’이며, 상당히안전한나라에속한다고나는믿고있다.

어떻게투자해야성공할수있나?

인도네시아는섬나라이지만국민이 2억 4천만이넘는풍부한인

력자원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소비인구가 많다는 뜻이다. 광대한

해안을 끼고있어 바다에서 얻을수 있는풍부한 수산자원과 석유

매장량이엄청나다. 칼리만탄과수마트라, 이리안자야임지를합치

면세계굴지의 임산자원과 지하자원을 보유하고 있음을 알수있

다. 열대성기후로강우량이많아서농사와수목이자라는데에더

없는조건을형성하고있다.

이렇게인도네시아는천혜의많은자원을보유하고있는복을받

은나라다. 시대가변함에따라일부산업은괄목할만한발전을한

반면, 아직도많은산업부문이낙후되어있다. 선진화된기술을접목

시켜야할분야가많아서앞으로여러부문에투자할가치가상당히

24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24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많다고생각한다.

외국에나와서하는교민들의사업가운데는대기업만있는것이

아니라, 중소기업과소상인들도많다. 기업의규모가크든작든분명

히말할수있는것은사업의성공을위해사전에수집한정보의분

석을토대로실행하라는것이다.

개인사업자들은대개정보를얻어사업을시작하는데실패할경우

는소비자, 시장조사등사전검토가충분치못했거나, 잘못된판단

에따른결과라고할수있다.

특히개인사업자가투자하는데는여러가지를고려해검토해봐

야한다. 당분간이른바‘한탕주의’로사업을할것인지, 아니면장

기적지속사업을할것인지를구분하는것이중요하다. 임시로 10여

년간하다가그만둘수있는그런업종도있겠지만, 가능한한영구

적인사업을찾아전력투구하는것이바람직하다. 그래야사업하는

재미도있고보람도기대할수있다.

나의경우모든것이열악하고불투명했지만, 처음부터한가지결

심, 즉‘이곳에뿌리를내린다’는각오로시작했다. 하다가안되면

돌아가겠다는소극적인태도로임했다면벌써주저앉고말았을것이

다. 요행만믿고기다리는자에게는기회가찾아올리없다. 어느부

문에기회가주어진다면부부가합심하여배수의진을친다는결의

로사업에매달리는수밖에없다.

일정한준비자금이마련되면계속하여사업을유지·확대할자금

조달대책부터세워야한다. 개인에따라다르겠으나, 자기자본비율

을높인상태로은행의신용을얻어가며사업을하는것이바람직하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49

Page 25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다. 또중요한것은업종선정이다.

일반적으로자기가하던일을계속하는경향이있는데, 성공하기

위해서는판매전망, 수요측정, 수출가능여부등을연구하여적절

한업종과장소를신중하게선택해야한다. 지방에따라인건비와대

지, 여타경비가다르기때문에특히많은인원을고용하는경우에는

세심한사전검토가필요하다.

외국인투자법에따라외국인이단독으로법인설립이가능하고또

투자를가족명의로할수도있다. 현지인과공동투자하는경우는투

자비율에따라운영주도권이결정되므로파트너의결정은특히신

중히해야한다. 한국인이인도네시아에살면서법인을설립할때는

현지인의이름을빌려쓰게되는데, 이럴경우에는좋은가문의인사

나유명한자바인의명의를빌려쓰는것이여러가지로유익하다.

명문가문이나사회적으로존경받는이들은명예와책임감을중요

시하기때문에거의안심할수있다. 실제로나도사업을시작할때

이방식을활용하여큰도움을받았다.

이런방법과는달리아예학력이나사회적인지도를고려하지않

고평범한현지인을파트너로내세우는사례가있다. 이들에게는월

정금액이나연봉을주기도한다. 하지만일부는이런식으로한두

번성의를표시하다가외면해버려좋지않는뒷말을남기기도했다.

사업의규모가작다보면은행의도움을받기도어렵고, 자기자본

으로만감당해야하기때문에외국에서의홀로서기는마음먹은만큼

쉽지않다.

사업자가유의해야할것은현지인의명의를이용할때실질적인

25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25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투자자가한국인임을명시하는약정등공증을반드시받아놓아야

한다는점이다.

그래서처음부터백지위임장까지받아두는사람도있다. 작은사업

이라서대충하거나, 상대를무작정믿고서둘다가는허점을노출하여

낭패를보기십상이다. 분쟁의여지를남기는꼴이어서결국은자기

재산을보호받지못하는사태에까지이르게된다. 이런실수를저지

르지않기위해성공한분들의자문을받아보는것도한방법이다.

외국인투자회사에는과세를엄격히적용하기때문에불이익이없

도록세제에도각별히신경을쓰고대처해야한다. 무엇보다고용인

원의적절한배치와활용이중요하다. 아울러상호관련된제반업무

를관리하는시스템이잘되어있으면회사는일단성공단계로진입

했다고할수있을것이다.

대규모 사업이 아니라면 현지인의 명의를 빌려 운영하는 경우라

하더라도관리능력이있어야지, 끌려가는입장에서는순조롭지못하

다. 어떤기업이든사내의인화와거래처와의신뢰, 관련기관과의

유대가기업성공의요건이라할수있다.

아울러 땀 흘려 얻은 이윤이지만 현지에서 얻은 이익의 일부는

공익을위해환원한다는 확고한기업정신을 잊지말아야한다. 아

니, 실천에 옮겨야 한다. 이는 결국 사업을 번창시키는 자산이 될

뿐아니라, 대한민국의 이미지를높이는데도큰보탬이되리라고

확신한다.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51

Page 25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현지파트너의결정은신중히하라

인도네시아진출초기에는파트너도다양하였다. 솔로, 족자, 수마

랑등중부자바인과수라바야등의동부자바인, 수마트라의파당

인, 우중판당과마나도의술라웨시인, 자카르타토박이인브타위족

등이그대상이었다. 특히장사를잘하는기질을타고난수마트라의

파당인이인상적이었다. 끈질기고책임감이강했다.

상속관례를많이따르는파당사람들은여자에게주로재산이상

속되고할머니의재산은손자들에게승계되지않았다. 그래서파당

남자들은고향을떠나게되면자바섬쪽으로많이나오게된다. 그런

부류들을일반적으로‘바다를건너온사람’이라고하는데, 어느종

족보다도성공에대한집착이강한것으로알려져있다.

그런데수마트라의바탁족은기골이굵고뚜렷하며남녀모두목

소리가크고거친성격이라지혜롭게대처하지않으면한국인과부

딪치는일이종종벌어진다.

나의경우, 바탁족이나술라웨시족, 누사퉁가라족은직원으로채

용할때매우신중하게대하게된다. 경험상자바인이비교적온순하

고모든면에서가장무난하다. 또한파트너구하기가아주어려운

경우라면학력이낮더라도반드시성품과책임감, 성실성을고려하

여선정하는것이좋다.

중국인과의파트너는특히조심스러울수밖에없다. 한국인이만

나는중국인은대부분부유층으로왠지모두갑부처럼여겨지게한

25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25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다. 어떤면에서는좋은부분도있지만, 다른면에서는동업자에게

불이익을주는예가없지않아신중해야한다. 동업자가지쳐사업을

포기하도록술수를쓰는경우가있기때문이다.

일반적으로합자계약을필요로하는파트너의입장에서주의할몇

가지를요약하면다음과같다.

첫째, 합자계약서에는 한국계 기업과 인도네시아 합자선의 사업

내용, 합자목적등을명료하게기재하며, 또한주식양도에관한규

제, 자금조달방법, 주주간의자기자본과부채의상세내역과각각의

의무, 배당조건등을빠짐없이기입해야한다.

둘째, 계약서에는배당이자, 로열티, 기술제공료등에대한구체

적인항목을넣는것이바람직하다. 기술원조등에대해서는합자계

약서이외에별도로상세하게기재한기술원조계약서를작성한다.

셋째, 인도네시아에서는 분쟁시 소송보다는 원만한 중재를 통해

해결하는것이일반적이고효과가있으므로계약서에중재해결방

법, 장소등을기재한다.

넷째, 합자자가계약을위반했거나또는파산했을경우, 계약을무

효조치할수있도록계약서에기재한다.

그런데 2002년경부터외국인단독으로투자할수있는길이열렸

다. 외국인투자법에의하여현지인과굳이동업할필요없이회사를

운영할수있게된것이다.

제6장 /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 253

Page 25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Page 25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제7장

인도네시아에서살며, 겪으며

Page 25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인도네시아로오세요!

인도네시아는세계 5위에해당하는국토면적을갖고있으며, 인

구는중국, 인도, 미국에이어세계 4위의거대국가다. 인도네시아

는다섯개의주요군도, 즉수마트라, 자바, 칼리만탄, 술라웨시, 이

리안자야로이루어져있고, 사람이살고있는 6천여개의섬을포함

하여총 1만 3천 7백여개의섬이있다. 국토의길이는서쪽수마트

라의사방에서동쪽이리안자야의메라우케까지 5천 1백㎞이며, 남

북으로 1천 9백㎞나되는아주광활한지역이다.

동서의길이 5천 1백㎞는인도네시아에서우리나라까지의거리로,

항공기로 7시간이나걸린다. 그위치는호주와아시아대륙사이의

적도에동서로놓여있고, 북위 6도~남위 11도사이, 동경 95도~141

도의태평양과인도양사이에있다. 이곳의평균기온은섭씨 25~30

도사이이고, 건기와우기에따라다소차이가있다. 기후는고온다

습하며건기와우기로나뉜다. 건기에는평균기온이섭씨 30도에육

박하고, 우기에는평균섭씨 25도정도이나, 덥고하루에한차례씩

비가내린다.

인도네시아는 2억 4천만의인구속에 300여종족이 250여가지의

언어를사용한다. 1945년에제정된헌법에의해국어를인도네시아

어로통일하여사용하고있으나, 교육수준이현저히낮은오지의경

우는그지방의언어외에는전혀통하지않는경우가많다.

세계최대이슬람국가로인구의 90%가이슬람교, 나머지 10%는

25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25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가톨릭, 개신교, 발리힌두, 불교이다. 천연지하자원이풍부하며노동

인구가많은곳으로한국기업들이진출을선호한다. 한국기업의많

은성공사례를찾아볼수있다.

인도네시아는한국의세번째투자대상국이며, 한국은이나라의

네번째수출대상국이자, 다섯번째의수입대상국이다. 2008년까

지약 1천 2백여한국기업이진출했으며, 1967년교역이시작된이

래점차증가하여 2007년현재대인도네시아수출이 58억달러, 수

입은 91억달러에이르고있다. 이들한국계기업의대인도네시아

수출규모는섬유봉제 60%, 신발과완구류각각 31%, 33%를점유

하고, 연간한국기업의수출액수는대략 120억달러로서인도네시아

의 60만근로자에게일자리를주는고용창출의효과를가져왔다.

한국기업의진출초기에는산림개발사업이주종이었다. 이에따

라인도네시아상위그룹에들어가는한국인재벌이탄생하는성과가

있었다. 1990년대초부터노동집약산업이진출하고, 1995년이후에

는전자, 가전, 건설등이주종을이루었다. 2002년경부터전자산업

이더욱활발해지면서이에따른부품사업체의투자가늘어나고, IT

업계의진출이활기를띠고있다. 이에따라일반개인사업자들의투

자가급증하여그수가늘고있다.

인도네시아는신정권의출범이후정치적안정을회복하면서빠른

기간에경제발전을기대할수있는잠재력이큰투자유망국으로부

각되고있다. 더욱이서울과자카르타사이에직항로가개설돼매일

양국을편리하게왕래할수있게됨으로써한국은인도네시아와더

욱친밀한관계가되었다. 교민이나관광객은편리하게원하는날짜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57

Page 25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에자유롭게오갈수있게되었으며, 크고작은사업에투자할가치

가있는나라로인식되었다.

해가갈수록우리교민들도계속늘어나고있고, 인도네시아정부

와사업가들의한국에대한관심도매우높아졌다. 한국의유수기업

들과건설회사들이현지에서맹위를떨치고, 한국의사업가들이계

속인도네시아를노크하고있음을볼때앞으로양국간의경제협력

이크게증진될것으로전망된다. 조만간인도네시아에거주하는한

국인의역할과비중이크게높아질것임을믿어의심치않는다. 이런

의미에서인도네시아는‘희망의나라’라고할수있다.

인도네시아는적도에위치하고있어특히비가많이내리는칼리

만탄과수마트라, 수라웨시등인접지역섬에는특수농작물이나저

탄소녹색산업을육성하기에적합한곳으로서각광을받고있다. 또

한지하천연자원외에도산림육성, 바이오에너지개발용원자재생

산등을기대할수있어세계적인기회의땅임을인식하여높게평가

되고있다.

이런분석은세계온난화와기후변화로인한물부족현상이미대

륙과중국대륙에서일어나면서나타난결과이다. 자연히우량이풍

부한인도네시아와같은나라에관심이쏠리게된것은당연한일이

라고할수있다. 골드만삭스의예견에따르면, 인도네시아는 2050

년에이르러세계 5대강국이된다는것이다.

이곳의한국교민들의생활수준은다른나라의교민들에비해높

은편이라고할수있다. 교민들이생활하는데에불편을느끼지않

는이유는저렴한인건비로다른지역국가와는달리가정부와운전

25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25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수를둘수있다는점이다. 또한신이민법이발효된후 55세이상의

외국인들이기본조건을갖추면언제든지인도네시아에서편안한노

후를보낼수있는점도빼놓을수없다. 이는주변국가들이이민규

정을완화하고있어점차아시안국가간에도동질의규정을확대해

나가는것으로풀이된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이슬람교의 덕성과 네덜란드로부터 약 350

년간에 걸친 식민지 생활을 한 탓인지 비교적 온순하며 순종하

는 경향이 있다. 기업을 하는 입장에서는 관리하기가 비교적 쉽

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은 자가운전을 하는 경우가 드물며, 가정

부가 직접 식사준비를 하고 집안 청소까지 한다. 현지인 식모가

대체로 가정 일을 잘 도와주고 있어 교민 가정주부들이 크게 신

경을쓸일이없게된셈이다.

이나라의고유문화와관습

인도네시아는 90% 정도가 이슬람교를 믿어 어느 곳을 가더라도

새벽기도소리를들을수있기때문에이슬람문화를이해하며살아

야한다. 금요일정오는온국민이기도하는시간이므로이때약속이

나관공서방문은피해야한다. 한달동안계속되는이슬람대명절인

하리라야금식기간중에는심하게꾸중을하거나, 해고하는일은삼

가야한다.

또한무슬림들에게는절대로머리를때린다든가구타를해서는안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59

Page 26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된다. 그들은이런행동을치욕적이라생각한다. 자칫불시에공격을

받음으로써봉변을당할수도있음을명심해야한다. 종교적인이유

보다도무시당한것자체를치욕으로여긴다.

나도 운동을 하다가 무의식중에 현지 어린이의 머리를 귀엽다고

건드린적이있었는데, 그 곁에있던부모로부터당장“너죽고싶

냐?”는반응이돌아와달래느라아주혼이난기억이있다. 한국에서

는흔히있는일이라그저별생각없이한친근감의표시였지만, 이

곳에서는통하지않았다. 잘못된일인줄알고얼른사과로무마하여

위험한일은당하지않았지만, 아주당황하였다.

또한가지조심해야할것은이쪽에서는무의식중에한행동인데,

무시당했다고여긴상대방이오랫동안마음속에서벼르다가갑자기

보복하는경우이다.

인도네시아인은자존심이강하다. 기골이장대하든왜소하여힘이

없는사람이든사람의인격을중요시해야하는데, 일부한국인들은

이를잘이해하지못하고직원이나식모, 운전수등고용자를마치

하인취급을하는인상을주는경우가더러있다. 심지어이런식으

로무시당했거나함부로해고시켰다고생각한사람들이앙심을품은

나머지목숨을해친극단적인일이실제로지방에서있었다. 매사에

후환을남기지말아야한다는것이내가이곳에살면서터득한삶의

지혜이다.

성격과표정도종족에따라다른것같다. 자바인은얼굴의표정을

보아서는그내심을알수가없다. 포커페이스를할때도웃음을지

으면서마음이상한표시를하지않는다. 주로순하고인내심이많다

26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26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고할수있다. 반면에수마트라바탁족은기골이크고목소리가거

세며거친모습을하고있다. 법조계인사가많은것이특징이다. 한

국인처럼성미가급하고과격한면이있는데, 처음대면할때이들은

자기네가인도네시아의한국인이라고말하는일이더러있다. 만약

이들에게사건을위임시키는일이있으면, 치밀하고확실하게유도

해나가는것이좋다.

북쪽마나도쪽에사는술라웨시종족은백인종에가까울만큼미

인이많으며, 매우적극적이다.

외국에서는그나라법을잘지켜야하는데, 일부한국인들은그렇

지못한경우가있어불이익을당하기도한다. 일단법을지키면서

모든일을해결해야하는것이원칙이다. ‘돈이면해결된다’는따위

의해결방법은이곳에서도더이상통하지않게되어있다. 일부한

국인들은 사업상 미비사항이 많은데도 막연하게 돈만 주면 허가가

되는줄알고행동하다가창피당하는경우가많았다.

대개한번사귄친구는몇년을가도변함이없기때문에이런지인

을얻는것도사업에큰도움이된다. 한사람의큰인물과관계가좋

으면그주위에있는훌륭한지인을얻는다는사실을나는절감하고

있다. 내가수하르토대통령시절사귀었던중위가수십년동안친구

가되어오던중에장군으로진급하자, 그 연줄로이심전심으로각

지역의사령관들과도친분을맺게되어여러모로도움을받은적이

있었다.

이와는다른이야기지만, 중국인들의경우중요한인물들과만날

때는항상자식을대동하는일이있는데, 이는주요인사들에게자연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61

Page 26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스럽게자식을사업의승계자로서소개하는기회로삼는것같이보

였다.

후회한적없는선택, 제2의고향

나는여러나라를돌아다니면서현지의기후와자원, 인종 문제,

역사, 문화적차이, 교육환경, 노후의생활여건, 사업의성공가능성

과외국인투자의적절성, 중국인들이어느정도상권을잡고있는지

등을알아보는것을즐겨한다. 이런점을대충파악하게되면어떤

나라가정착여건이좋은지비교하여평가할수있다.

1980년초쯤으로기억된다. 내가개인사업을시작하기위해고심

하고있을때였다. 30년이상각국을돌아다니며선교활동을해온미

국인선교사부인이한국사람이어서자주만날수있었는데, 그선

교사의말이앞으로외국에서생활기반을잡을생각이라면인도네시

아가가장적합하니이곳을떠나지말라는것이었다. 이당부는내가

진로를결정하는데에적지않는영향을끼쳤다.

중국인들의말에따르면, 자기네들은현지인들이열심히하지않

는 3D 업종이나복잡한일들을잘해서성공했다고한다. 여기에인

도네시아에서사업을하고자하는사람들이선택할수있는비결이

있다고생각한다.

인도네시아에 사는 한국 교민들은 다른 나라에 사는 교민들보다

생활에만족을느끼는사람들이많다고할수있다. 그런데이들이

26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26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내세우는자랑은다른어느나라보다도자녀들의모국어교육이잘

되고있다는점이다. 인도네시아어는물론, 외국에나와해이해지기

쉬운한국어를불편없이구사하게되다보니모국의대학입학시험

에거의전원이합격할정도이다. 이런배경에는교민들의조국애와

모국어배워주기의집념못지않게교민들이힘을모아세운자카르

타국제학교교사들의헌신적인노력이깔려있다.

반면에문화환경이열악하여문화생활의폭이좁고, 향유의기회

가많지않다는점이아쉽다. 그러나이곳에서는외국인대접을받아

가며마음놓고저렴한인건비로현지인을고용할수있는장점이있

다. 이는선진국인미국이나유럽, 일본등지와는판이하게다른환

경조건이다.

한국교민들은초기에온갖고생을다했다. 우선언어가통하지않

은데다식품도한국에서수입되는것이거의없어식생활이어려웠

다. 그런데지금은모든여건이좋아져이곳에서안주하기를원하는

교민이많아졌다. 인도네시아정부가수하르토정권초기부터밀입

국하여 살고 있는 화교들의 국적을 합법적으로 인정해주는 정책적

배려도한몫을했다고할수있다.

외국인투자자인경우도 5년동안주재하여일정한자격을갖추면

국적을바꿀수있도록조건이완화되었다. 국적을바꾸고나면회사

를자기명의로설립할수있고, 주택과토지도현지인과마찬가지로

자신의소유가될수있어여러면에서유리하게되어있다. 그래서

현지국적으로바꾸는기업인들이늘고있다.

인도네시아는천연자원이풍부한개발도상국이어서아직도개척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63

Page 26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해야할여지가많다. 바로이점이사업의욕을북돋게하는요인이

된다. 누가나에게인도네시아에서의사업전망을묻는다면이렇게

대답할것이다.

“아직도늦지않다. 결심을했다면, 이제망설이지말고과감히몸

을던져라. 모험없는도전은작은바람에도쉬이날아가버리는모래

성처럼아무의미가없다. 나는이나라를선택한것을한번도후회

한적이없다. 나의제2의고향으로삼은데대해자부심을느낀다.”

부모세번죽인현지인의기막힌거짓말

1970년대 후반에는 인도네시아에서 사는 외국인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한국인이라야고작 500여명정도여서각가정의일을다알

게돼혼자생일을차려먹기도쑥스러웠던시절이었다. 고생을하다

가다소여유를갖게되자한국인들은가정부와운전수를고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시골출신이많았다. 도시의때가묻지않아순

박했다. 심지어회사운전수라도개인용무까지열심히해주었다.

내가산림개발사업을시작하여여러명의운전수를고용하였는

데, 대다수의운전수는예나지금이나차량의휘발유를주입하는일

을 부업으로 삼았다. 그들은 20여년이 지나는 동안 인건비도 많이

올라생활의질이높아졌고어느정도현대화된생활을할수있게

되었다.

그들은부친상을당하면며칠동안휴가를얻게된다. 그런데다음

26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26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해에도‘아버지사망’이라는보고를내어유상휴가를받았다. 무심

코믿고휴가를승낙한것인데, 몇년후에도또같은이유로시골엘

다녀왔다. 결국자신의아버지를세번죽인셈이었다. 통큰이운전

수는내가뒤늦게알고“넌어찌하여부친상을세번씩이나당했느

냐?”고묻자, 대수롭지않다는듯이한번씨익웃어버리는것으로

대답을대신했다.

무심결에세번씩이나속은나도잘못이지만, 능청스럽게자기부

친을세번이나황천으로보낸운전수의거짓말은지금생각해도황

당하기짝이없다. 순진하게보인시골사람이한술더떠도시사람

머리위에올라탄꼴이다. 30년전자카르타시내한사무실의풍경

이긴하지만.

이처럼나는잔꾀를부린현지인을웃음으로꾸짖고따뜻하게대

함으로써스스로부끄러움을깨닫게하였다. 그뒤그운전수는열심

히일하여변두리에집을장만하고중고차도사들여살림을늘려가

며한두아이는대학에까지보냈다. 나는회사에 20여년간일하다가

정년퇴직하는직원에겐퇴임식을열고금반지를기념으로끼워주었

다. 그정도의직장생활이면가족이나마찬가지였다. 그들은경영자

의성격이나가족사항을잘알아서인지매사에마음에들게일을처

리해주었다.

현지인직원들이주인과같은마음으로각자의분야에서성실하게

일을해주면매니지먼트에도큰도움이된다는것은재론의여지가

없다. 최소한 몇몇 중요 직종의 현지인에게는 전문적인 친 한국인

(pro Korean)이되어야한다는생각으로일에매달리면목표를달성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65

Page 26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할수있다고독려하였다.

이런가운데서도나는회사나동네, 거래처등일부현지인으로부

터고발, 방해, 협박, 가해등수없는위협을받는경우가적지않았

다. 미처깨닫지못하거나대처하지못해자초한일이었다. 소잃고

외양간고치는시행착오도많았다.

이‘프로코리언’의취지는회사를보다활기있게만들기위한분

위기쇄신책으로내세운것이다. 일본인들이싱가포르에서프로재

팬(pro Japan)을 외치면서비롯된것이다. 재외일본인들이그런취

지의모임을갖고협력하여현지에일본정신을홍보함으로써국익에

도큰도움을주게하였다. 최소한나부터회사직원들을‘프로코리

언’을만들어야한다는사명감을갖고자마음먹었다.

그리하여이경영방법을도입하여간부들에게이를지시하고인

근현지인과는일치된생활감정으로지내는것을원칙으로하였다.

‘친한국인의길’은먼저한국인스스로이웃사랑의모범을보이는

데서부터출발해야한다고여겼기때문이다.

이런마음과행동자세로동네인력거꾼과도안면을트고지내며

방범대원까지신경쓰는대인관계를형성하였다. 이로인해이웃구

멍가게아저씨는사업상유리한정보도건네주었다. 긴급히팔려는

원주민의주택도적절한가격으로여러채구입할수있었다.

어떤동네애기엄마는나를찾아와서초등학교때캔디를사준적

이있다고말하여놀란적이있었다. 나는기억이전혀안나는데, 20

년전동네샛길을거닐때마주쳤던어린이가이제는 30대의어엿한

엄마가된것이다. 화살같이빠른세월을느끼게하는뜻밖의자리였

26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26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다. 이애기엄마의한마디는나에게큰감동을주었다. 전혀아무것

도아닌작은일에지나지않았는데……. 나는이를계기로이제부터

설령힘에부치더라도이웃을더많이돕고더많은장학금을주어야

겠다고다짐하였다.

부친이세번이나죽었다고거짓말하는직원이라도잘관리하면책

임자로만들수있고, 더불어방패막이가될수도있다. 상대방의닫

힌마음도이쪽에서먼저열면열어보인다는대화의자세, 현지인화

된언행이뒷받침된다면넘지못할벽이있을리없다. 그만큼이웃사

랑의실행과생활화가중요한것이다.

도둑질은‘내손이했다’는식모의변명

자카르타에사는교민들은보통식모를몇명씩두고있다. 좀더

여유가 있으면 갓난아기를 돌보는 간호사를 별도로 채용하기도 한

다. 식모들이시골에서오면대개도시에서쓰는표준어를알아듣지

못하는경우가많았다. 먼저온식모는뒤에들어온식모에게모든

일을시킬수있는상하관계가형성되는것이통례다.

내가인도네시아에자리를잡을무렵에는식모와대화가되지않

아속상해하는한국부인들도있었다. 칼을갖고오라하면포크를

갖다주고, 사발을가져오라하면공기를갖다주었다. 또한식모들

이주인에게현지말을제대로가르쳐주지않아정확히의사가전달

되지않는경우도있었다.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67

Page 26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폰티라는식모가있었는데, 외제커피맛을처음알게된뒤부턴

마시고싶어서집안에혼자있게되면몰래타먹곤했다. 자연히양

이눈에띄게줄어들수밖에없었다.

참다못한주인마님이“너왜말도없이자꾸커피타먹었니?”라고

따져묻자대답이아주걸작이었다. “내가타먹은것이아니고이손

이탄것이에요.”라고태연히말하는것이었다. 좀처럼자신의잘못

을시인하려들지않는고질적인습관탓인듯하다.

그러면서도그들은좀처럼자기네들끼리의잘못을고자질하는일

이없었다. 어떤면에서자존심이강하다고할까, 감싸주는것그자

체만보면대견스럽기조차할지경이다.

물들어오는셋집에서밤도둑잡기

5년이상식품을만들던집을떠나앞동네로이사를하였다. 1986

년말쯤으로기억된다. 식당을개업하고상가를처음구매한지얼마

안되는시점이었다. 집은담장이높아안전하다고생각해세를들었

는데, 문제투성이였다.

자카르타시내에홍수가나자이동네의개울물이넘쳐집안으로

까지 들어왔다. 졸지에 당하는 일이라 당황했지만, 먼저 전기부터

단전시키고침대를옮겼다. 물이빠지지않아어쩔수없이식모들

을납품용식품이실린트럭에서취침케하고식구들만인근의한국

인친척집으로대피시켜하룻밤을묵게했다.

26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26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하지만집안은물이빠져도며칠동안온갖악취가밴시궁창냄

새로견디기어려울지경이었다. 아마이때우리말고는이런열악

한환경에세들어사는사람들이없었을것이다. 상가가가깝고싼

집을찾다보니그렇게된것이었다.

안방과막내딸방사이에는작은못이있고, 그옆담장은옆집으

로통할수있도록연결돼있었는데, 하루는한밤중에도둑을만났

다. 잠결에인기척을느껴창가를바라보니불청객이들어온것이었

다. 도둑을목전에두고도비상전화조차걸수없는상태에서일단

숨을죽인채아내부터안심시켜야만했다.

여차하면도둑이달려들것같은긴장속에서문득문앞의골프채

가눈에들어왔다. 골프아이온두개를접어서잡아당기면칼빈방

아쇠소리가날것이었다. 이를염두에두고용기를내서창문틈을

이용하여밤손님에게움직이면쏘겠다고위협하였다.

다행히총을겨냥한다는말에놀랐는지그가굴복하였다. 그순간

아내가긴급전화를하고골프채총이효과를보는가운데경찰이출

동하였다. 도둑이압송되기까지막내딸과아내는무서워떨고있었

다. 경찰서로끌려들어온후그는시말서를쓰고석방되었는데, 알

고보니마약을하는청년이었다.

지팡이에과일이열리다

우리나라처럼 삼한사온이 뚜렷한 기후 조건을 가진 나라는 드물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69

Page 27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다. 한대지역사람들은추위를이기기위해몸동작이빠르고알코올

섭취량이높은반면, 열대지역사람들은더운기후때문에몸동작이

느리고알코올을섭취하는경우가드물다.

인도네시아에서는노동집약적인사업장의경우집단적인작업순

서에의해순조롭게일이진행되는것이보통이다. 하지만공장이나

단체 내의 일처리가 집단으로 움직이므로 개인이 활동하는 것처럼

민첩하지못하다.

그래서“인도네시아인은대체로게으르다.”는말을하는사람들이

있는데, 이는열대지역의특성을고려한다면적당치않은표현이다.

지역에따라종족의외모와성격은다르지만, 더운나라여서자연히

느릴수밖에없는것이공통적인특징이다.

인도네시아는 1년내내어느지역이나바나나가널려있고, 많은

열대과일을흔하게볼수있다. 자생열매가많아쉽게먹을거리를

구할수있으므로주민들이굶는일이드물다는이야기다. 주위에배

불리먹을수있는먹을거리가많기때문에우리나라처럼몸이부서

져라농사일을하는사람을볼수가없다.

더운날씨가 1년내내지속되니계절옷이필요없고, 겨울이없으

므로식량을저장할일도, 추위를이기기위한보온장치등별도의

준비가필요없다. 또한인근바다의수산자원이풍부하여어획량이

많아여러국가가인도네시아로부터수산물을수입하고있다.

서부칼리만탄폰티아낙지방에는높은산들이많이있다. 그대부

분의정상에는누런황금덩어리가보인다. 이곳주민들은소나기가

그치면강가에서빨래하던아낙네까지뛰어들어강가의모래를걸러

27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27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내어금을캐는사금채취를생업으로하고있다.

인도네시아의 산은 산세가 험준하여 사람들이 등산할 때 생나무

가지를꺾어지팡이를삼는일이많다. 여기에얽힌자바인의이야기

가있어잠시소개한다. 산을오르는도중잠시휴식을취할때들고

있던지팡이를그대로땅에꽂아놓고산을내려온등산객이있었는

데세월이흐른뒤우연히그장소에가봤더니, 지팡이에서뿌리가

내려열매가열려있었다는것이다.

이나라의사람들은자원이주변에널려있다시피풍부하다보니,

힘들게일하거나급할필요를느끼지않게된다. 그러므로현지인과

의대인관계는‘천천히, 그러나확실히’라는마음으로임하는것이

좋다. 자바인과저녁식사를약속하고시간을정할때, 만약오후 7시

반에서 8시사이로정하면비슷한시간에나오지만, 6시나 6시반정

도로약속하면으레 1시간이상기다릴각오를하지않으면안된다.

이것은식사를원래늦게시작하는자바인들의습관때문이다.

벽지의큰강가에는징검다리위에하늘만뻥뚫린칸막이목욕탕

이많다. 온식구들이나와목욕하고빨래를하고볼일까지보는특

유의이런시골풍경은칼리만탄산중으로가는길목에서흔히볼수

있다. 저녁때가되면먹을것을익히는나뭇가지를태우는연기가모

락모락나기마련인데, 어릴때우리시골집동네와흡사한평화로운

전원의모습을느끼게된다.

이런토착민들은흔히자신의나이를알지못하는경우가많다. 계

절의변화가없으니옷의색깔도구분되지않아세월의흐름을의식

하지못하는데서생긴현상이라고할수있다.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71

Page 27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원주민의쌀밥이야기

산림개발현장으로가기위해서는강을따라스피드보트를이용

하게된다. 산중턱의강가에는중국인들이만든영세상점이있는데,

가끔 이 가게를 들르면‘추풍령’이라는 오기택이 부른 한국가요가

중국말로흘러나와향수를자극했다.

산간벽지에서지친몸을이끌고강가를오르내리다보면, 가끔중

국상점에서밥한그릇을얻어먹게되는경우도있다. 나는그때입속

에서음미하던햅쌀밥향내를잊을수가없다. 아마도그쌀은절구에

손으로찧어만든쌀이어서특별한향내가났던것으로기억한다.

더욱이오지정글을왕래할때는몹시지치고허기진상태라그랬

는지천천히씹어먹을수록그햇밥한그릇은더말할나위없는꿀

27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인도네시아에서재배되는커피나무.

Page 27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맛이었다. 그래서쌀밥을볼때마다그시절의일이연상돼절로미

소를머금게된다.

현지인부들은쌀밥을주면배가쉽사리꺼져못견디는사람들이

많았다. 아울러허기진상태로그상점에서얻어먹던한잔의원두커

피의 향은 입술에 묻어나오는 커피 찌꺼기조차 별식처럼 여겨지게

만들었다.

손님이오면일단커피를대접하는데, 이커피는원두를갈아설탕

을많이넣도록되어있다. 투부룩이라는커피인데, 찌꺼기가가라

앉은뒤에마셔야제맛이난다. 그러나시장할때구수한맛에이끌

려빨리마시다보니찌꺼기까지먹게된것이다.

인도네시아의거의대부분지역에서는로브스타종커피를생산하

고있다. 수마트라섬에서재배되는커피는대단히우수한품질로만

데린이라불리며, 쓴맛과신맛이고르게조화되어배합용으로사용

되기도한다.

또한가지커피와더불어빼놓을수없는것이코코아다. 중부자

바지방의커피농장같은데서이상한열매를발견하게되는데, 처음

나선여행자들은특이한모습에살펴보게된다. 바로이열매가초콜

릿의열매가되는코코아열매다. 이열매는끝이뾰족하고매끄럽게

생겼다. 그리고나무의줄기와가지에서불쑥튀어나와열매를맺는

다. 특이하게도이열매는햇빛을두려워해서그런지초록의열매를

다소곳이밑으로늘어뜨려여성적인맵시를보인다.

원목을개발할당시동부칼리만탄은 300㎞쯤되는북부말레이시

아의 접경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원시림이었던 1978년에는 정글의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73

Page 27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수로를이용하는사람이거의드물었다. 왕래하는사람이라야첩첩

산중에사는원주민들뿐이었다

북부쪽에사는원주민들은대개강가에원두막을짓거나나무위

에집을짓고산다. 이들은서너집이모여마을을이루는화전민들

인데, 주로남자들이일과사냥을하며산다. 그들은재배한싱콩을

주식으로삼는다. 싱콩의잎은삼베잎사귀와비슷하고, 열매는땅속

의뿌리에서열린다. 대체로우리나라의고구마와비슷하다. 이것으

로전분을만들며, 주정의원료인타피오카라고한다.

이곳원주민들은싱콩을즐기며, 시장기가있을때싱콩을볶아서

소금으로간을맞추어먹으면별미라고한다. 반찬은강가에그물을

쳐놓기만해도많이걸리는물고기이며, 산돼지를잡아먹기도한다.

27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수줍은듯이밑으로다소곳이늘어뜨린인도네시아의코코아열매.

Page 27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이들은다약족으로키가크며단단한체구에곰처럼딱딱한발바닥

을가졌다. 치아는나무열매를씹어일부러검정색을내는데, 이는

치아의건강을유지하는그들만의비결이라고한다.

산림개발당시그들을일일고용직으로쓰면서신발을나눠준적

이있었는데그들은신발을신지않고허리에묶고다니거나아예

집에두고맨발로다녔다. 식사때는쌀밥을주었는데, 그들만근무

시간에한명씩사라지는것을보고그이유를알아보니다약족은

쌀밥을싫어해서였다.

싱콩은끈기가있어배가빨리고프지않아오래견딜수있는데

비해쌀밥은허기가빨리와서일을하기가어렵다는것이었다. 그

일을안뒤부터는그들에게싱콩을주식으로바꿔주었다.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75

인도네시아의바팀원주민마을. 이곳에서는이런풍경을흔히볼수있다.

Page 27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정글에서스피드보트(speed boat)로약 5시간내려오면강주변에

제법갖추어진시골마을이있는데, 이곳엔통나무를고정시켜만든

목욕탕과화장실, 공동빨래터가갖춰져있었다. 아낙네들이강가에

서목욕하는모습을자주볼수있는데, 그들은대부분긴생머리에

바틱이라는천으로가슴을두르고있었다. 그러나보름밤같은밝은

날에는가슴속으로달빛이스며들어곡선이훤히드러났다.

이런 오지 마을에 사는 중국인들은 강가를 오르내리는 주민들을

상대로물물교환을했다. 기름짜는열매를따오면설탕을주고, 향

료원료를가져오면소금을주었다. 이른바기름을짤수있는바이

오연료는인도네시아전역에서광범위하게사용된다. 바이오연료

는피마자(Jarak pagar), 카사바, 사탕수수, 해바라기등이원료에해

27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연료가되는기름피마자의열매.

Page 27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당된다. 기름피마자는약용으로도쓰인다. 기름생산에적합한피마

자유, 팜오일, 해바라기, 대두등은이나라에서경작이가능한약

60여종의바이오생산물에포함돼있다고한다. 중국인들은이처럼

기름짜는열매에대해서도관심을보였다.

이곳에서 4시간쯤올라가면마리나오라는마을이있는데, 여기에

사는몇몇중국인들은왕래하는스피드보트운전수와짜고부품을

바꿔치기도하고, 산림개발현장에운송되는도중에배에서드럼통

의엔진오일을빼내어팔아먹은뒤물을채워보내기도하였다.

산림개발현장에서는이엔진오일을큰탱크에저장하고수시로

DG캐터필러불도저의엔진오일을교환하는경우가있었는데, 엔진

에물이들어가엔진헤드가깨지는등현지인들의농간으로사업에

많은어려움을겪기도하였다.

그런데이런현장에서는희귀한골동품도자주나왔다. 중국의명

나라와 청나라 시대의 청자가 발굴돼 동네에 숨겨놓았다가 들통이

난적도있었다. 그중에는일반사람이봐도한눈에들어오는범상치

않은항아리도있었다. 보름달속에드러나는시골사립문풍경이며,

복사꽃피는춘삼월의정겨운전원풍경이담긴진품들이었다.

두리안과일을손톱으로쪼개다

1979년의일이다. 말레이시아접경지역타라칸항구로연결되는숨

바쿵강은건기에스피드보트로 15시간이나걸려강줄기를거슬러올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77

Page 27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라가야하는경우도있었다. 이강은높은산악지대에있어서아주조

용했다. 산림개발현장본부캠프와제2캠프사이는아주멀리떨어져

있어통신이두절되든가, 길이막히면본부와연락할길이없었다.

어느날통신두절로본부캠프와연락이닿지않아속을태우던

중에원주민들이교통수단으로자주이용하는조각배를발견해하강

하던원주민중년부부에게겨우손짓발짓을다한끝에승낙을얻고

배에승선하게되었다. 그들은작은천으로간신히신체일부만가리

고망태기와칼자루를몸에지닌완전한원시부족이었다.

뱃머리는남편, 선미는부인이맡아노를저어물결따라깊은계

곡을내려가는데울창한산림속에서까마귀가기분나쁘게까악까

악하고울었다. 언제물에휩쓸릴지모르는조그마한조각배에몸을

의지하고내려가면서나는어쩌다가이런오지에까지와서이런고

생을하나하는처량한생각이들었다.

몇시간을작은조각배에의지하여협곡을내려가는동안처음에

는멀미와두려움때문에앞이캄캄했지만, 시간이조금지나자차츰

대담해지는것이었다. 그때문득가시돋친두리안 3개가눈에띄었

다. 긴장이풀리며마음에여유가생기자별안간배가고팠다. 그러

고보니아침과점심을모두거른상태였다. 말이통하지않는원주

민부부에게손짓과몸짓으로두리안하나를얻어입에넣은뒤깨물

었으나쉽게깨지지않았다. 마땅히깨서먹을도구가없었다.

완전히노랗게익은두리안이라면약간의손힘으로도벌어질테지

만, 아직영글지않은것이어서껍질이벌어지지않았다. 궁리끝에

쇠못같은두리안가시를손가락으로반시간가량하나씩짓이겨겨

27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27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우 엄지손톱이 껍데기를 억

누를수있는공간을만들었

다. 이때부터는 껍데기를 쪼

개야 하는데, 섬유질이 아주

두터워 벗기기가 힘들었다.

하는 수 없이 또 몇 분간 손

톱을 이용하여 껍데기를 긁

어댔다.

그런데 이렇게 힘을 쓰다

가힘의균형을유지하지못

하는 바람에 가뜩이나 약한

배가 뒤집힐 뻔했다. 지금도

그때일을생각하면아찔하다. 우여곡절끝에 1시간이지나겨우두

리안을꺼내허기진배를채울수있었는데, 그때맛본두리안과일

은지금까지먹어본것가운데최고였다.

‘과일의왕’이라고불리는두리안은인도네시아깊은정글에서자

생하며, 20여m나되는큰나무에서열린다. 대체로과수로조림하는

5m의작은나무도있다. 냄새가고약하여특히비위가약한사람은

먹기가힘들다. 냄새가오래남기때문에특히호텔이나비행기내의

반입은금지되어있다. 하지만이과일의맛을제대로알게되면두

리안이왜과일의왕인지실감하게된다.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79

과일의왕으로불리는두리안.

Page 28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김우재표선물1호가된생강사탕

인도네시아에는선물용으로가지고갈만한마땅한것이별로없

다. 그런대로가장많이소비되는것이인도네시아고유의색상을넣

어만든바틱이라는옷이다. 유명한것은그림을그려서만든것인

데, 어떤것은실크로되어있어서막입기는불편하다. 그래서일반

적으로무명바틱이많이나간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정

상회담때김영삼대통령이다른정상들과함께입었던옷이다

인도네시아에서‘텡텡자혜’라고부르는생강사탕은노인네들이입

이심심하거나목이칼칼하고감기기운이있을때빨아먹기에적합

하다. 한봉지를여럿이나누어먹을수있어서우리내외가한국으

로갈때빼놓지않는것이생강사탕이다.

오래전에고향광천을찾아갔을때이사탕을먹어보신어머니가

마을사람들에게나누어주시는것을본후부터나의선물제1호로

삼게되었다. 그러다보니경기도성남시분당구구미동에있는주택

현관한쪽에는자카르타에서우리부부가구입해다놓은생강사탕이

늘쌓여있다.

이생강사탕은세박스가한묶음으로되어있어서여성이들기에

는좀무겁다. 그래서출입국시들고가다보면손마디에자국이나

고멍이들때도더러있다. 30여년동안이일을하다보니잊지않

고준비하는정성에스스로놀라기도한다.

보내는곳은대개정해져있다. 고향어머니, 아타니오, 이해인수

28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28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녀님과유치원, 그리고몇몇신부님과성나자로마을에도부쳐드린

다. 한 수녀님은생강사탕을받고안부와함께「생강사탕감사!」란

제목의시를보내주기도하였다.

처음에는 부모님께 드리고자 마련했던 것인데, 주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것을알고부터대상을차츰확대하게되었다. 생강사탕은

인도네시아를방문한신부님들의귀국선물용으로도적당했다. 나는

성당의어르신들에게나누어드리라고생강사탕을준비해드렸는데,

한박스면수백명이하나씩먹을수있다.

오랜만에귀국하여살림하다보면쓰던물품을어디두었는지몰

라부부가서로물어보기일쑤였다. 아내가식사를준비하면서“여

보! 생강사탕수녀님께택배하는것잊지마세요.”하면, “아차!”하고

매직볼펜을찾느라부산을떨기도한다. 어떤때는주머니안쪽에명

함지갑을두고도주소를찾고, 작은글씨가안보여눈앞에둔안경

을찾느라법석을떨기도한다.

인도네시아에서생강사탕을가장많이소비하는한국인을꼽으라

면아마도우리부부가아닌가싶다. 여러사람에게나눌수있는기

쁨때문에생강사탕은값에비해한층값지게느껴진다. 많은사람이

오가는공항에서정장차림으로생강사탕의박스줄을잡다보면거

추장스러울때가적지않아도이짐은우리부부를행복하게만들어

주는훌륭한사랑의끈임이분명하다.

얼마안되는생강사탕이여러사람에게나눔의기쁨을주고다시

전달하는기회를만들어주고있으니얼마나행복한일인가. 사랑의

실천은멀리있는것이아니라이와같이가깝고아주작은일에도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81

Page 28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있다고생각된다.

이곳에서골프는사치가아니다

인도네시아는계절이건기와우기로나뉘지만전형적인열대지방

이기때문에자연속에서즐기는것외에는문화생활이마땅치않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활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운동을

하는데, 더위때문에과격하거나야외에서하는운동은쉽게접하기

가어렵다.

이렇다보니각종친교골프모임이많이생겨나고, 이를통하여체

력관리도할수있어자주필드로나가게된다. 그래서이곳에서는

골프를남녀노소구분없이주말이나휴일에자주하는운동으로여

긴다. 한국에서처럼사치성운동으로인식하지않는다. 비록현지의

서민에게는 부담이 되겠지만,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그린피 가격도

아주저렴하고골프장이여러군데많이산재해있어접근성이좋아

선호할수밖에없다.

“싱글골퍼가되면노후에 10년을더젊게살수있다.”는말이있

는데, 내가자주골프를치다보니골프인생은장수의비결인듯싶

다. 골프를치는동안나는상쾌한대자연과의일체감을맛보았다.

한국이낳은프로골퍼김종덕씨와인연을맺게된것도이운동이

가져다준즐거움의하나라하겠다. 1980년대말경에아시안서키트

골프대회가인도네시아에서열렸다. 충주출신인김종덕프로가자카

28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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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타에이어발리와싱가포르에참가했는데, 나는자원하여뒷바라지

를해주었다. 경기중에각홀을따라다니며오렌지를까주고, 물수

건을얼음주머니에넣어목을찜질해주기도했다. 하루에두세타를

줄여가는모습을볼때의흐뭇함이란뭐라표현할수없을정도였다.

김종덕프로는발리대회에참석할당시, 일본에서여행온교포사

업가최모회장에게발탁돼스폰서를얻게되었는데, 그곳이바로발

리의누사두아골프장이었다. 이로인해김프로는그뒤일본에서

도움을받아성공을거두게되었다. 아들종헌(鍾憲, 세례명니콜라스)

은내가동참하지못한싱가포르대회에나가서는최신호·박남신선

수의캐디까지하는열성을보여주었다.

1994년발리에서김종덕프로의현지매니저격으로활동할때는

세계적프로골퍼인닉팔도와도알게되었고, 이안우스남등많은

프로들과도만날수있었다.

나는자카르타에서 PGA 세계랭킹인프랭크노빌로와라운딩할

기회를얻게되었다. 그때물론장난기가생긴탓이기도했지만, 그

에게 용감하게 내기를 제안했다. 그러나 심리적으로든 실력으로든

당할재간이없었다. 1~2홀에그만스윙이망가져서라운딩이끝나

자오렌지주스한잔을대접하는것으로물러설수밖에없었다.

지금생각해도웃음을자아내게할만큼무모한도전이었다. 그이

듬해현대클래식한국경기에김종덕프로의초청을받고참석했다가

톰카이트를만나대화의기회를갖게되었다.

내가골프를치게된것은건강을유지하기위한하나의수단이었

다. 또한운동량이모자란이곳생활에서골프는운동뿐만아니라교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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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의친목과현지인과의유대를강화하는훌륭한징검다리역할을

해주었다. 라운딩하기에는한국보다편리하여골프장에서주로건강

단련을하게된다. 솔직히고백하건대이제골프는내몸의한부분

처럼되어버렸다.

인도네시아는지상의골프천국이되고있다. 연중푸른잔디가펼

쳐지는이곳의필드야말로골퍼들에게는활력을불어넣는생활의원

천이라하지않을수없다.

발리에는네군데의A급골프장이있다. 한다라골프장은산위에

위치하여상쾌한기분으로즐길수있고, 카트를사용하는누시두아

골프장은해변과야산그리고많은야자수들로경관이뛰어나며, 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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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의한골프장에서. 저자(왼쪽둘째)와 뉴질랜드출신프랭크노빌로프로.

양쪽은독일인과일본인멤버.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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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파도로유명한타나롯해변에자리잡은니르와나골프장은일부

코스가바로바다에닿아미국의페불비치와흡사한홀로골퍼들의

감탄을자아내게한다.

자카르타에도세계의 100대골프장에드는프라이빗을비롯한퍼

블릭골프장등명소급이많다. 생활골프를즐기는교민들이이런

골프장에서 라운딩을 함으로써 더욱 격조 높은 취미생활을 지속할

수있게된것에대해감사하지않을수없다.

열대지방에서건강을유지하는비결

천만인구가넘는자카르타는이제국제도시화되었다. 30년전만

해도교통량이적어매연이거의문제시되지않았으나요즘은매연

이아주심한편이다. 미국의휴스턴과같이평범한지형으로된이

도시는숲을이룰정도로녹지가많다. 날씨는대체로습한편이어

서폐에좋지않다는설도있으나거의그런현상은나타나지않고

있다.

적도에 인접해 있는 국가 중에서도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더위에

둔감한편이다. 이곳에거주하는한국인들도오래살다보니더위에

잘적응하게되었다. 오히려추운곳보다살기가더좋다고말하는

사람들이있을정도이다. 그런데흥미로운것은한국에서자녀가없

던 부부들이 이곳으로 옮겨와 살면서 득남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의발육상태가좋아부모들의마음을흐뭇하게했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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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얘기도흔히듣는다.

인도네시아의하루는새벽부터각처에서확성기를통해울리는이

슬람의기도소리로열린다. 그런탓인지현지인들에게는아침형인

간이많다. 더위를피하기위해조깅에나서는등모든일을일찍이

서둘다보니자연히아침활동인구가많아진까닭일것이다. 학교

수업도더위가없는이른아침 6시부터시작된다.

열대성기후에사는사람들은일반적으로왜소한편이다. 현지인

들은쌀을주식으로하며, 채소와닭고기, 양고기, 소고기순으로좋

아한다. 주로튀겨먹는데, 이는음식이부패하기쉬워보관상에문

제가있기때문이다. 튀김에서발생하는높은콜레스테롤의수치로

건강을해치거나, 심장병으로갑자기치사하는경우가많다. 그래서

많은심장병어린이가나오지않나생각되기도한다.

열대기후에서자란운동선수들을보면권투나태권도, 축구등지

구력을요하는경기에는지구력자체가모자라서그런지두각을나

타내지못한다.

이곳에흔한야자수열매의원액은노화를방지하고머리가희어

지거나허리가굽는현상을억제한다고한다. 이리안자야에서나오

는부아메라는 1980년대에군인들이공수하여먹던빨간열매로, 요

즈음은건강식품으로개발되어복용할수있게만들었다. 혈액을맑

게해줄뿐아니라노화방지와항암효과가있다고하여한국인들도

많이찾고있다.

현지인가운데중국인들의치사율이인도네시아인들보다높지않

은것을보면기후보다는식생활이건강에더영향을줄수있다는

28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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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알수있다. 현지인들의평균수명은남자 65세, 여자 70세인데,

생활환경의개선으로차츰수명이늘어나고있는추세라고한다.

현지의한국인들은규칙적인운동을통하여건강을유지하려고노

력하는것같다.

나의경우매일아침마다팔짚고몸펴기운동을하며, 이따금사

우나를겸할수있는휘트니스센터를찾아간다. 무리하게업무에시

달렸거나운동량이넘치면이곳의전통인마사지서비스를받을수

있기때문이다.

열대지역에서설사가지속적으로일어나는경우는탈수현상으로

치명적일수있다. 또한 고열병(드맘브르다라)에 걸렸다고여겨지면

망설이지말고병원에입원하여치료를받아야한다. 최고의건강을

유지하는데는사계절의변화를맛볼수있는한국이낫겠지만, 여름

과겨울나기는자카르타가오히려좋은것같다.

아름다운신들의섬발리

세계적인휴양지인발리는인도네시아에서가장아름다운섬으로,

이나라의 26주가운데제일작은주에속한다. 발리는우리나라의

군단위로볼수있는 8개의행정구역으로나뉘어져있다. 행정구역

의모태는옛발리를통치하던 8개의왕국이다.

자카르타가 있는 자바섬 바로 동쪽에 자리한 이 섬은 인구의 약

90% 이상이힌두교가주종을이루며, 발리라는뜻은산스크리트어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87

Page 28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로와리(Wary), 즉‘재물’을의미한다.

발리인들은지구상에서유일하게‘발리힌두교’라는종교를믿고

있는데, 우리가알고있는힌두교와는다른부분이많다. 발리섬에

힌두교가전파된내력은다음과같다.

15세기경동부자바에있던인도네시아역사상가장위대했던왕

조마자파히트왕국이이슬람교의전파로붕괴되자힌두교승려들과

왕족들이도망쳐온것이발리이다. 그후발리원주민은대부분산속

으로들어가고이주민들이발리섬의정치와경제의주도권을장악하

여힌두교를전파시켰다. 이에따라힌두교는발리의토착신앙(애니

미즘)과 중국에서이곳으로건너온대승불교와융합하여발리힌두

교라는독특한종교로탄생하였다.

28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경관이빼어난발리의바닷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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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에는한마을에창조의신, 보호의신, 그리고파괴의신등을

모시는 3개의사원이있고, 크고작은사원만 2만개이상이있다고

한다. 실제로주민들이사는집자체가사당으로되어있어소규모의

사당역할을한다.

발리힌두교의종교관은아주독특하다. 다른종교에서는찾아볼

수없는이원론적인종교관을갖고있다. 선과악은항상공존하며,

선이악을평정할수없고악이선을지배할수도없다는것이다.

그러나선이악으로, 악이선으로변화할수있고, 영원히선과악

은평행을유지하며존재한다고믿는다. 또한발리사람들은악의신

랑다에게도제물을바치고기도를한다. 신은어디까지나절대자이

고언젠가는악이선으로바뀔수도있다는유연한신념을갖고있기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89

발리에있는브라탄사원의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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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다.

발리인들은사람이죽으면그영혼이다른사람의육체에들어간

다고믿는다. 그래서일생동안자신의영혼을순결하게지키기위해

지속적으로의식을치른다. 발리문화의특징인회화, 조각, 가뮬란,

춤등은모두문화의신에게바치는것이며, 그것은신들을기쁘게

하고신에게가까이다가가는교신의수단이라고믿는다.

발리인들은산을신들의고향으로여기고세상의중심이라고생각

한다. 출생, 결혼등세상의모든일에균형을유지하기위해의식을

행한다. 그만큼의식이일반화되어있다.

특히성인식, 결혼식, 장례식은발리인들이가장중요하게여기는

의식이다. 성인식은청소년기에욕망의상징인송곳니를자르는의

식으로이루어지며, 결혼식은종종거짓으로예비신랑신부가도망

29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관광특정지역입구에있는발리의표징가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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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의식을치른약혼식후에행해진다.

장례식은자기가온곳으로돌아간다는윤회의믿음때문에축복

의뜻을담아밝고성대하게치른다. 시신은우주를모방한탑가운

데뉘이고영혼을데려간다는‘사코파거스’라는관에넣어화장해서

바다에뿌린다. 발리만큼종교가삶에서차지하는비중이큰나라도

없을것이다.

■야자나무높이를넘지않는4층건물

발리섬은제주도의 2.8배크기로인도네시아전국토의 0.29%를

차지한다. 인구는 2008년현재 310만정도이며, 이중 30% 정도가이

방인이다. 적도에서약간남쪽으로남위 8도와동경 115도에위치해

있다.

기후는 건기와 우기로 나뉘며, 우기는 11월에서 3월 말까지지만

대개 소나기가 하루에 1~2시간 정도 내린다. 6월부터 10월까지는

호주로부터 불어오는 한냉기류로 인해 밤에는 에어컨이 필요 없을

정도로시원하다. 그래서여름철에는한국인들이가장가고싶어하

는해외휴양지로꼽히는곳이기도하다.

발리에서가장두드러진특징가운데하나는남성과여성의역할

이바뀌어행해지고있다는점이다. 곧남성들은집에서목각을하거

나그림을그리고아이들을돌보는반면, 농사일등바깥일은전부

여성들의몫이다. 이곳사람들은이방인에게아주친절하며, 여성들

은평소토플리스차림이라는사실이다. 이런현상은발리의옛풍습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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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남아있다.

발리의덴파사르공항에첫발을내딛으면가장먼저눈에띄는것

이힌두교식건축양식으로지어진공항건물과절벽을낀아름다운

해변이다. 모든것이깔끔하게정돈되어있음을느낀다.

보통발리는 3개의지역으로구분된다. 특별지역인누사두아, 보

통지역인사눌, 3급지역인쿠타(히피족선호지역)로나뉜다. 중간급

으로러기안지역도있다. 누사두아지역내에는하얏트·힐튼·쉐라

톤·누사두아호텔등이있으며, 이곳에서 10분거리에있는니코호

텔도유명하다. 힐튼호텔은레이건전미국대통령과한국의노태우

대통령이머물렀으며, 하얏트호텔은노무현대통령이머무르다간

곳이다. 이호텔은몇개의동으로분리되어있어서간혹방호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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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하르토박물관에소장중인동전으로만든발리의인형.

Page 29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잘못찾아들어가는경우도있다고한다.

발리의 대부분 호텔은 야자나무 높이와 동일하게 건축허가가 나

있어높이가 4층을넘지못하도록되어있다. 그래서발리는자연미

를그대로유지하고있다.

다만, 한두군데예외가있는데사누르에있는발리비치호텔과해

변과산절벽을이용하여지은니코발리호텔이그것이다. 발리비치

호텔은특별건축법이발효되기전에지어진덕으로, 니코발리호텔

은절벽높이에맞추다보니그렇게돼각기 8층으로남게되었다.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293

발리의관문인덴파사르공항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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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레미오’가절로나온해변의정취

쉐라톤호텔의경우, 칵테일바가바닷가에있어저녁노을이질때

면경치가장관을이룬다. 깨끗한모래가맑은바닷물을더욱정결하

게나타내준다. 이곳칵테일바옆에는평상이 2개쯤있는데 8명정

도는앉아있을수있고, 휴식도취할수있게푹신한방석이준비되

어있다. 한가로이낮잠을즐기는데는안성맞춤이며, 이런곳에서

낮잠을잘경우는세상만사걱정이없어지는경지에이른다.

석양이뉘엿뉘엿질때면색깔이아름답게변하여맛있는금수박

을대하는느낌을준다. 저녁시간은요일별로변하지만, ‘발리고유

의춤’을수영장옆광장에서관람할수가있다. 칵테일바옆에있는

평상위에서레드와인을즐기며, 호텔의 3인조악사에게‘오솔레미

오’(O Sole Mio)를신청하여듣는기분이란지금까지느껴보지못한

최상의흥취였다. 이때동행한사돈어른(양영식전통일부차관)이이

탈리아민요인이노래를파바로티처럼멋드러지게불러서주위관

광객들로부터기립박수까지받았다.

호텔마다 비슷한 모양의 바닷가 평상(pondok)이 있으나, 발리에

있는쉐라톤호텔의것이세계최고일거라고생각한다. 그야말로마

음이맞는친구들과와인을마시며‘오나의태양’을자주듣고싶은

곳이기도하다.

인터콘티넨탈호텔의바닷가야간비치바는높은위치에전망이

좋은망루를만들어놓았다. 10명내의인원이앉을수있어사전예

약이필요한곳이다.

29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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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스터등해산물이풍부한발리에서는장소만잘선택하면좋은

분위기에서맛있는음식을맛볼수있다. 누사두아쉐라톤호텔에있

는시푸드음식점이바로그런곳중의하나인데, 랍스터등신선한

해산물을혼합세트화한최고의음식을제공받을수있다.

짐바란해안의야간해산물관광코스도빼놓을수없다. 이곳은바

닷가 모래사장에 포장마차처럼 식탁을 차려놓고 손님을 맞이한다.

여기에서는집시음악가들이연주하는한국노래까지들을수있다.

호텔에비유하면 4류쯤이이지만그나름으로이색적인관광분위기

를맛볼수있다. 그룹여행자들이쉽게들러가는곳이다.

동굴식당(cave restaurant)은 러기안의발리클리프호텔에위치해

있으며, 호텔절벽쪽에있는에스컬레이터를타고해안으로약 1m

쯤내려가면오픈동굴이나온다. 여기에관광객을유치하는노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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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최고의호텔체인인쉐라톤호텔의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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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이자리잡고있다. 주중에는오더방식이므로사전예약이필요하

다. 이곳에서싱싱한랍스터와와인맛에취하게되면인도양의동굴

요리와정취를잊지못하게될것이다.

식사 때는 발리 고유의‘케착댄스’로 이국적인 분위기에 젖어볼

수도있다. 발리섬최남단의인도양에있는 75m의벼랑위에솟아

있는호텔로서일출과일몰때는장관을이룬다. 특히풀장의물이

바다로떨어져흘러들어가처음보는이들에겐마치바다와풀장이

이어져있는줄로착각하게만든다.

케착은원숭이무용이라고도하는남성합창극이다. 흑백의격자

무늬천을허리에두른남자수십명이횃불을에워싸고원을만들어

“챠챠”나“쵸쵸”등의원숭이소리를내며복잡한리듬에맞춰합창

하는것이다.

이케착은오래전부터행해졌던집단최면적인발리의종교의식에

서그원형을찾아볼수있다. 전염병의감염이나천재지변으로부터

몸을보호하기위해마을사람들이신의계시를듣는의식으로행해

졌다는설이있다. 이 의식은초경전의소녀가최면상태에서춤을

추고, 그에맞춰남성들이합창한데서현재의케착이만들어졌다고

한다. 케착은 1930년대발리에살고있던네덜란드화가올터슈피스

가인도의고대서사시라마야나에서소재를찾아창작한것을관광

객을상대로공연하게된것이다.

쿠타비치지역의호텔은A급서부터장급까지다양하게있으며, 젊

은이들이주로이용한다. 이곳은원래어촌이었으나호주히피족이

모여들면서관광지가되었다. 그들은아예비키니도입지않은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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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많다. 이곳은바닷물이탁하고파도가거세수영에는부적합하다.

그러나선탠하는서양여성들의모습을흔히볼수있고, 노천마사

지가유행이다. 젊은이들의해프닝이벌어지기도한다. 해가기우는

저녁무렵에는푸른색에서붉은색으로변하는바다의화려한변신을

볼수있다.

발리의유명한골프장을소개하면아래와같다.

누사두아호텔단지내에있는발리누사두아골프장은 18홀로서

전체 9홀이야산에위치하며, 7홀정도는바다를멀리서내려다볼

수있다. 카트길따라꽃넝쿨과야자수로조경이되어있어풍광이

아름답다. 인코스 9홀은 7홀이높은코코넛나무밑에서라운딩할수

있게돼쾌적함을느낄수있다. 바다를향한마지막 17, 18홀은바닷

바람이시원하게불어와서파란바다속으로당장뛰어들고싶은충

동을느끼게한다. 그린피는대체로한국과동일하게보면된다.

니르와나 골프장은 르메르디안 호텔에 붙어 있으며, 지역적으로

누사두아힐튼호텔을기준으로약 1시간걸리는곳에있다. 높은파

도로유명한타나롯관광코스에들어가있다. 카트를이용하며 4홀

정도는 샌프란시스코 부근의 태평양 연안에 있는 페불비치 코스를

연상케하는코스도있어흥미롭다. 나는발리를방문하면이틀째되

는날에는이곳을찾아가라운딩한다. 일부코스가해변에닿아발리

에서아름다운골프장가운데하나로꼽힌다.

새로건설된뉴쿠타(New Kuta) 골프장은인도양을끼고드림랜드

해변에자리잡고있다. 드림랜드풀빌라에서 5분거리에있는데, 3

분의 1정도의홀은페불비치에있는아름다운골프장의해변을방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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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한다. 홀 12번의그린에올라가면해변가까이도달한다. 캐디들

은그곳을‘지상의낙원’이라부른다. 그바닷가 12번홀절벽에있는

식당과카페의이름이클라파(KLAPA)이며, 발리인터내셔널이벤트

& 베뉴(Bali’s international event & venue)로표시하고있다.

특색은거대한규모에다해변까지엘리베이터로연결되어있으며,

2중으로연결된듯이보이는풀장의경관이매우아름답다. 이‘클라

파’는샌프란시스코골든게이트하류쪽강가에위치한유명한클리

프양식레스토랑과겨룰만큼세계적인규모와시설을자랑하는곳

으로알려져있다.

한다라골프장은브두굴산정호수가있는 700m가량의고원지대에

있다. 계단식벼농사를하는농촌과힌두교식개인사원이있는지역

을지나는약 2시간거리에있다. 이곳에는부라탄호수가있어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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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의프차투해변뉴쿠타골프코스 12번 홀절벽에있는

세계적인카페레스토랑‘클라파’를찾은저자.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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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이모여들며, 제트스키와패러세일링, 모터보트를즐길수있다.

자연을이용한 18홀골프장뒤편은마치병풍을친것처럼산세가

아름답고녹음이우거져있다. 낮에는더위를못느낄정도로서늘하

며, 저녁에는빌라의방마다온풍기를틀어놓아찬공기를덥게하여

야한다. 많은한국관광객이찾아오기때문에한국말을하는캐디를

배치해놓고있다.

기후는적도부근에위치하고있어 1년내내무덥다. 킨다마니와

브두굴이있는한다라골프장은아침과밤의기온이낮아서스웨터

가필요하고 7, 8월까지는호주의겨울바람이불어와서아주쾌적하

다. 11~3월은우기라해도장마가오는것이아니어서관광이나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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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규모와시설을자랑하는

레스토랑‘클라파’의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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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여행에는지장이없다.

발리인은온순하며관광이주업이라서외국인을괴롭히는일이없

다. 관광객을보호하고관광을육성하는차원에서외국인을대한다.

간혹문제를일으키는경우가있다면, 약 10% 정도되는다른지역

의사람들일가능성이높다고한다.

발리는실버산업의적합지이기도하다. 이런곳으로우선한국인

이시작한울루와트지역의드림랜드풀빌라단지와오션불루풀빌

라단지, 빌라마다전담지배인이상주하여세계적 7성호텔급인바

틀러서비스를제공하는샤토드발리웅아산을들수있다. 울루와

트절벽으로가기전공항에서약 20분거리에있다. 여기에다파당

바이리조트가완공되고나면더욱장관을이루어유명한관광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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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에서유명한울루와트사원이있는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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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광을받게될날이멀지않았다. 이런가운데발리에서호텔로성

공하고있는한국기업인들이늘고있다.

최근에지은울루와트지역의빌라단지는멀리해안이보이는산

등성이에있으며, 성업중인유럽풍의최고급불가리아빌라단지가

공항에서약 30분거리에있다. 그다음은레기안해변으로쿠타비치

의상류쪽에위치하며지역이높지않고한적한농촌해안에접하여

있다.

또하나는짐바란지역이다. 덴파사공항에서 20분거리이며, 해안

을끼고절벽을이루는산등성이에들어선외국인들의고급빌라촌으

로아직실버산업지로서여유가있다. 기존빌라단지는힐튼호텔

건너편산등성이에있는데, 이호텔에서 3분거리에있는아마누사

빌라단지는유명인사들이자주찾는곳이다.

자바섬의‘파리’반둥

인도네시아의반둥은서부자바섬의주도로인구는 350만명정도

이며, 자카르타에서차량으로약 2시간 30분가량걸리는위치에있

다. 2005년에개통된고속도로는 5년간험난한산악지대를뚫는난

공사끝에개통돼시간을꽤많이단축하였다.

350년간네덜란드지배하에있을때‘인도네시아의파리’로불린

반둥은제3의도시로써전체인구의 85%가순다족으로구성되어있

다. 순다족은예의바르고온화한성격으로이나라에서인기가높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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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반둥에는또한미인이많다고한다. 살갗이흰편이어서한국인

과거의비슷하다는말을듣는다는것이다.

시내곳곳에서많이목격되는것은수백년된아름드리가로수인

데, 이나무는마호가니라고불리는가구제작용원목으로쓰인다.

해발 700m에서 1천 2백m가되는반둥은평균기온섭씨 18도내

지 22도로열대지방임에도불구하고에어컨이필요하지않을정도

로시원하다. 인구는 300만에불과하지만, 경제적으로경쟁력이있

어국제회의가자주열린다.

그대표적인모임이 1955년 4월, 20여개국대표들로이루어진제1

회아시아·아프리카국가대표회의(비동맹국제회의)라고할수있다.

이를계기로반식민주의운동에큰영향을끼쳤는데, 이국제모임은

지금도반둥회의로불리며 5년마다주기적으로열리고있다.

30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반둥에서 1시간정도차로달리면이런활화산이나타난다.

Page 30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또한반둥에는 30여개의대학캠퍼스가있어교육도시로서의풍모

를 자랑한다. 그중에도 반둥공과대학교가 유명하다. 약칭

ITB(Institute Technology Bandung)로통하는이대학은독립영웅인

수카르노초대대통령을비롯한수많은각료들과사회각계의지도

자급 인사들을 배출하는 데 공헌하였다. 지금도‘ITB 출신’이라고

하면어디에서나최고의대접을받는다. 또한민족지도자이와크수

마 스만트리에 의해 창설된 파자다란대학은 수많은 문화계 인사를

사회로진출시켰다.

분지인 반둥지역은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적당한 온도와

습도를제공함에따라섬유제직업과방적산업이발달하였다. 그러

다보니인도네시아 2억 4천만인구가살아가는데필요한의상과패

션을해결해주는전초기지가되었다. 지금도자카르타와인근도시

의사람들은 2시간 20분의시간도아깝다하지않고값이싸고품질

좋은제품을구하기위해이곳 200여개의아울렛매장으로몰려든

다. 그래서주말인금요일부터일요일까지는외부차량들의쇼핑행

렬로북새통을이룬다.

반둥시내에서 1시간, 자카르타에서 2시간거리에있는탕궁안풀

라우산의분화구는둘래가자그마치 5㎞에달한다. 자바섬최대인

이화산은배를뒤로돌려놓은듯한모양을하고있다.

순다지방의전설‘산쿠리안이야기’에따르면, 어린시절집을나

간후청년이되어고향에돌아온산쿠리안왕자는자신의어머니인

줄도모르고다얀슨비를사랑한나머지결혼을신청한다. 난처해진

다얀슨비는결혼조건으로하룻밤안에큰배를만들것을제의하는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303

Page 30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데, 그배를만들지못해화가난산쿠리안왕자는배를뒤집어버린

다. 그것이탕궁안푸라우로변해지금도왕자의노여움이폭발하여

화산의흰연기로피어오르고있다는것이다.

해발 2천 180m의이전설적인활화산은 10분간격으로달라지는

정상의기후변화로운이좋아야전체분화구를육안으로구경할수

가있다. 화산밑으로치아트르(Ciater) 노상온천지역까지약 4㎞의

거리양쪽에는고산지대의청정공기에서만재배할수있는차밭이

장관을 이룬다. 이곳에서는 인도네시아에서 소요되는 차의 80%가

생산된다.

치아트르의 노상 온천장은 자카르타에서 가장 가까운 유황 노상

온천장으로대형풀장식으로되어있다. 특히유황온천은한국사람

30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한사모반둥회원들이사무실을열고기념공연을가졌을때저자도 OKTA

인도네시아회장신분으로참가하여격려했다. (2008년)

Page 30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들이좋아해서즐겨찾는다.

현재도 이곳의 활화산에서 분출한 화산용암 물에서 삶은 계란은

별미로알려져있다. 나도머리가무겁거나스트레스를받을때면아

내와함께아늑한이곳을찾아와머리를식히곤한다.

반둥을자주방문하는한국인가운데골퍼들은이곳에숙박을하

며새벽골프를즐긴다. 야외온천욕을즐기면서골프까지겸할수

있다는 이유만으로도‘인도네시아의 파리’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

을듯하다.

여기에서빼놓을수없는것은 2000년에즈음하여학생들스스로

파자란대학(UNPAD)이주관하는‘한국을사랑하는모임’(HANSAMO)

을결성했다는사실이다. 2005년부터반둥한인회와교류하며문화

적인면에서조언과자문역할을하고, 2008년 8월 9일에는사무실

(JL, Naripan No. 89 Bandung 소재 BE MALL LT-UG Block-G12)을오

픈하여나도세계해외무역협회인도네시아지역회장자격으로최동

묵본협회부회장과함께참석하여금일봉을전달하고, 500여명의

모임으로크게발전한데대해축하하였다.

이행사에는엄정호반둥한인회장과한국대사관윤문환공보관

도참석하였다. 당시한사모의헬리나(Herlina)회장과회원들은한국

고유의부채춤공연을선보여인도네시아인들에게깊은인상을심어

주었던것으로기억된다.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305

Page 30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자바문화의중심지족자카르타

자카르타에서비행기로 1시간정도걸리는중부자바섬남쪽에자

리잡고있는족자카르타(Jog jakarta)는서울의약 6배(3,185.80㎢) 넓

이에, 4천 364만명의인구가살고있는인도네시아자바문화의중

심지다. 지금도 1년내내쉼없이유황가스를내뿜고있는해발 2천

914m의메라피화산을정점으로, 동쪽에프람바난힌두사원과서쪽

에보로부두르불교사원이세워져삼각형의모양을이루고있다.

족자카르타는과거에서현재로이어지는문화체계속에전통과변

화가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고 있다. 8세기에는 힌두계 마타람왕국

이, 16세기후반에는이슬람계마타람왕국이융성했지만, 18세기에

는자바섬에서세차례에걸친전쟁이일어나면서네덜란드의보호

아래들어가게된다.

이처럼전통시대와식민통치시대, 근대에이르기까지이곳은정

치활동의중심지가되어왔다. 힌두불교왕조의근거지이자이슬람

왕조의중심지였다. 네덜란드식민통치자들도‘자바마타람왕조지

역’에는특별자치권을부여했다.

또한 혁명기(1945~1949)에는 인도네시아공화국의 수도이기도 했

다. 이러한역사적역할로인해자카르타에이어특별주(州)의지위

를얻게되고, 인도네시아의다른지역과는달리이슬람의수장인술

탄이주지사를맡게된다. 지금도술탄이살고있는왕궁은일반인에

게공개되고있다.

30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30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이지역은그림자연극으로도유명하다. 특히주목되는것은마타

람힌두불교왕조시대이후네덜란드의식민통치기에도인도네시

아역사의전과정을온전하게보존하고있다는점이다. 한국의경주

를연상케하는고대문화유적지이다. 이지역을유네스코가세계문

화유산으로지정한것은너무나당연한일이다.

흔히‘족자’(인도네시아어, Yogya)’로약칭되는족자카르타는족자

와 카르타의 합성어인데, 각각‘고요하고 평화롭고 아늑한’이라는

뜻과‘번영된지역’이라는의미가포함되어있다. 특히‘족자’라는

명칭은고대자바역사의밑동을형성한라마야나(Ramayana)에등장

하는인도고대왕국의하나인야유다왕국에서차용된것이다. 족자

의이름이암시하듯이, 족자카르타는힌두문화의마타람왕국에서발

전하였다.

기원 7세기부터 10세기까지중부자바에서융성했던마타람힌두

불교왕국은힌두문화를바탕으로한산자야왕국과불교를숭상했던

사일렌드라왕국이혈연으로얽히면서서로경쟁하고화합하며공동

번영을누렸다. 산자야왕국은그후동부자바쪽으로세력을확장하

면서프람바난힌두사원을건립하였고, 사일렌드라왕국은대승불교

에심취하여후세에세계 7대불가사의중의하나인보로부두르사

원을남겼다.

족자카르타는 인도네시아의‘살아있는 박물관’이자 또한 예술의

도시이기도하다. 대표적인예로, 마타람왕조가자랑하는그림자연

극인와양(Wayang)을들수있다. 고대와현대를망라한초시대적인

공연물로서, 1천 5백년의마타람왕조를배경으로, 인도의고대아유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307

Page 30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다왕국의역사를서사시체로그린것이다.

전통악기가총동원되는가믈란(Gamelan)은최소 1천년의공연역

사를자랑한다. 이밖에고대와현대의역사적자취들을정교하게묘

사한각종조각과은세공이며, 전통천인바틱(batik)으로만든화려

한의상을빼놓을수없다.

■보로부두르사원과프람바난사원

불교세계어디에서도그유례를찾아볼수없는장대하고복잡한

건축물로꼽히는보로부두르사원은수많은탑의집합체로이루어져

있다. 천연의언덕위에바위를쌓아올려서만든것으로, 면적은약

1만 2천㎡, 높이약 31.5m이며, 2중의기단(基壇) 위에네모의 5층,

원형으로 3층을세워모두 8층이되게하였고, 그정상에큰종을덮

어씌운것같은사리탑(stupa)모양의구조로되어있다.

이곳은거대한화산으로둘러싸인쿠두평원의중앙에위치하며,

풍경이아름답기로유명하다. 사원의불상과부조장식의조각은참

으로뛰어나며그수법도매우섬세하다. 숲에있는승려, 연못근처

의부처, 사자와코끼리의그림, 그리고집을운반하는말과배의모

습등의부조는고대자바인들의관습과생활상을분명하게보여주

고있다.

불상의다리를만지면행운을얻는다고하여돌밑으로손을집어

넣으려다가어깨를다치는사람, 상처를감수하고목적을이루어어

린애처럼좋아하는관광객의모습도심심치않게목격하게된다. 여

30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30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기에서는이렇게추억거리를만들어가기도한다. 건립자가누구인지

는분명하지않으나, 1천 1백년전사일렌드라왕조의사마라퉁가왕

재임때에‘선(善)으로쌓아올려진산’이라는이름으로건립된것으

로추정되고있다.

보로부두르사원에견줄만한족자의문화유산중하나가프람바

난힌두사원이다. 고을이름을딴프람바난사원은메라피화산의동

남쪽기슭, 족자카르타에서동쪽으로 17㎞떨어진곳에자리잡고있

다. 프람바난사원은 3개의사원을거느리고있는데, 그중에서거대

한불꽃모양으로중앙에우뚝솟은시바사원, 또는로로종그랑사

원은동남아최대의힌두사원으로알려져있다. 탑안에서시바상을

발견하면서그렇게부르게된이사원은높이가 47m이고, 밑동의너

비가 34㎡나된다.

시바사원은하단부, 중단부, 상단부등 3개의부분으로나누어져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309

세계 7대 불가사의중의하나인보로부두르사원의조각.

Page 31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있는데, 하단부와중단부는인간의욕망으로둘러싸여있는속세를,

상단부는신들의세계를의미한다고한다. 신전의외벽을장식하는

치밀한부조는고대인도의서사시‘라마야나의이야기’를약동적으

로새겨놓은것이다.

특히연꽃위에서있는시바상은불교와의관계를말해주며, 관

능적인 두르가상은 전설로 전해지는 로로 종그랑 처녀의 저주받은

모습으로유명하다. 프람바난사원은 9세기중반산자야왕궁의발리

퉁마하삼부왕에의해건립되었다고한다.

부근에는 8세기경에 건조된 칼라산 물의 사원 등이 있어 개화한

힌두·자바문화의화려함을엿볼수있다. 건기인 5월부터 10월사

이에는야외극장에서라마야나발레공연을한다. 야간조명을받은

프람바난사원을배경으로한야외공연은우기의실내공연에서느낄

수없는색다른운치가있다.

■왕의휴식처물의궁전

‘아름다운정원’이라는뜻을가진물의궁전(Taman Sari)은 왕(술

탄)의휴식처이면서사슴사냥이나, 보트놀이등여흥을즐기던연

희장이었다. 또한국가의정책을구상하고개정하기위한장소로도

이용하였다. 왕이국책을정할때는남쪽바다의여신인칸젱라투기

둘(Kanjeng Ratu Kidul)과의영적인결합을통해서였다고한다. 이회

의장은영적인힘이미친다는믿음때문에관람은허용하지만, 사진

촬영이금지되어있다.

31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31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동문으로들어서면여인들을위한전통무용인글라덴연습장이보

이고, 그곳을지나면술탄의여인들만이사용할수있었다는수영장

이나타난다. 수영장남쪽으로술탄의침실이있는 3층건물이있고,

이건물뒤에목욕실이있는데, 술탄은혼자목욕하는일이없었다고

한다. 외부에있는왕궁의수로와연결된물의궁전인공호수중간에

지은건물풀로크농오(Pulo Kenongo)가 예사롭지않는것은, 크농

오란왕실정원에서자라던꽃나무의이름으로그향기가왕궁밖멀

리까지퍼졌기때문이다.

풀로크농오안에는침실, 거실, 바틱제작실과전통무용공연장이

있었으며, 호위병들이지키고있었다고한다. 지붕은도시의경치와

아름다운메라피산을보기위해사용되었다고하며, 지하통로는 2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311

부조 장식이돋보이는족자카르타의보로부두르사원.

Page 31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층원형우물로연결된것으로알려져있다.

물의 궁전은 1758년 술탄 하멩코부오노 1세에 의해 지어졌으나,

1867년지진으로폐허가된이래수영장만복원되고대부분완전한

복구가이루어지지않고있다. 그나마궁전내에바틱과목공예등

가내수공업이발달할수있었던것은이지역대부분의사람들이예

술가들의후손이기때문이라는것이다.

족자카르타에는이밖에소노부도요박물관과디엥고원등이유명

하다. 소노부도요박물관은왕궁과북쪽광장사이에위치하고있는

데, 1935년네덜란드건축가에의해전통자바건축양식으로지어졌

다. 자바문화에대해알고싶은사람에게는좋은유적지라고할수

있다. 산스크리트어로‘신들의자리’라는뜻을가진디엥(Dieng)고원

은고대부터산악숭배의성지였다. 이고원은해발 2천m 높이의화

산 칼데라에 자리하고 있어 주변에서 신기한 자연경관들과도 만날

수있다.

이곳으로가기위해서는 26㎞앞의원노소보를거쳐야한다. 원노

소보와디엥이란고원지대는중부자바에서버섯을재배하기에적당

한온도를가진지역으로버섯을재배하는기업이많다. 이 지역의

콜룩승차장에서디엥까지는 1시간가량이소요된다. 족자에서하루

코스로이른아침부터서두르는것이좋다.

31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31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언어와격언에얽힌에피소드

인도네시아정착초기에는한국인가정주부들이인도네시아어를

배우는데필요한사전이나회화공부를할수있는자료가없어서어

려운점이많았다. 한국인가정에는대개 1~2명의가정부를두는데,

어떤가정에는시골에서올라온아이들이인도네시아표준어가통하

지않아의사전달이어려웠다. 심지어는주인한테말을잘못가르쳐

주어서혼동을일으키는경우도있었다.

한번은내가어느교민가정에초청을받고갔다가그런사실을발

견하고바로잡아준적도있었다. 지금생각하면호랑이담배피우던

시절의얘기가아닐수없다. 말인즉칼이숟가락이되고, 컵이사발

이되었다. 이런단어들을뒤죽박죽섞어서한국인주부에게알려주

었으니, 돌팔이의사에게치료를맡긴것이나다름없었다. 그러다보

니어처구니없는일이벌어지곤했다.

어느부인이호텔로빨리가야하는데말이얼른안나와마음이

급한나머지택시기사에게‘오랑반약반약티둘’하는곳으로가달

라.”고부탁하였다. 그런데차가도착한곳은엉뚱하게도공동묘지

였으니어리둥절할수밖에! 배운대로호텔을오랑(사람) 반약(많이)

티둘(잔다), 곧‘사람이많이잠자는곳’으로표현한것인데운전기사

는공동묘지로잘못알았던모양이다.

외국에서사는사람들이현지어에익숙하기전에는말실수를하는

경우가더러있긴하지만, 황당한실수로상대방을난처하게만든일

도더러있었다. 어떤사람은차량이동중에에어컨이작동이안되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313

Page 31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자“창문을열어달라.”고부탁한다는것이그만“바지를벗으라.”고

표현하여운전수를당황하게만들었다. 알고보니, “부카(열라)진델

라(창문)”라고해야할것을“부카(열어라, 벗어라) 츨라나(바지)”라고

말을잘못한것이었다.

어디그뿐인가. 결혼식피로연장에서정장한한국부인이손님을

앞질러가려고“슈푸로미, 슈푸로미.”라고했더니사람들이얼른비

켜 주었다는 이야기인데, 본인은“실례한다.”(퍼르미시)고 말한다는

것이그만슈푸로미(라면)로튀어나와배꼽을잡게했다는것이다. 이

일화는한동안식탁의화젯거리가되었다.

인도네시아는 300여개의종족으로구성되어있다. 이중에서대표

적인종족이순다족과마두라족으로이루어진자바인이다. 자카르타

를중심으로형성된부타위족(자카르타토종), 수마트라의메단지역

의바탁족도이에버금한다.

술라웨시섬에는부기수, 마나도에는우중판당종족이주류를이루

고있다. 이중중국및몽골인과 2차대전을전후하여일본과한국인

의피가혼혈된것으로추정되는북부마나도의여인들의피부는한

국인보다더흰경우가많다. 성격또한활달하며생활수준도높은

편이다. 이곳에서는참치가잘잡히고향료와코코넛기름이대량생

산돼수출될뿐아니라인도네시아에서맥주판매량이제일많은곳

으로도유명하다,

이리안자야에는파푸아뉴기니아족이살고있는데, 원시인들이남

아있는유일한곳이다. 티몰쪽에는포르투갈족과암본족, 발리에발

리종족이있다. 발리인들은근본적으로온순하며자기고향을지키

31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31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는성향이강하다. 암본과누사퉁가라에는사삭족이있으며, 칼리만

탄에는다약족이많은데, 다약족은팔과다리가짧은것이특징이다.

자바인은 체격이 큰 편인데다 순하고 겸손하며 미인과 미남형이

많다. 그대표적인인물로수카르노초대대통령과수하르토대통령,

6대수실로밤방유도요노대통령을꼽을수있다.

특히중부자바왕국이있었던곳의쏠로인과족자인들은순박하며

웃음을띤사람들이많으나남자들은때로는무표정하여속을알수

없는경우도흔히있다. 쏠로여인들은아주조용하며부드럽고고운

마음씨를가진것으로알려져있다. 그래서조용하고편한여자를아

내로삼으려거든쏠로여인을맞아들이라는말이자바의남성들사

이에퍼져있을정도다.

이런경우쏠로의여인들은“팅갈베레스.”라고하기도하는데, ‘팅

갈’은‘산다’는뜻이고, ‘베레스’는‘잘끝내다, 잘처리한다’는의미

로, 한국식으로말하면“끝내준다.”는표현이된다. 매사에조심스러

운자바인들에게는“알론알론아살쿨라콘.”이라는일상적인격언이

있는데, 이는천천히(알론랄론), 확실히(아살꿀라꼰)라는것으로, “천

천히해도확실히만하라.”(Slowly but sure.)는뜻이다. 이런격언에

서도이민족의생활습성을엿볼수있다.

달콤한음식을좋아하는자바인들은커피를마시더라도굵은설탕

을여러티스푼씩넣어서마신다. 나는시골에서처음이광경을보

고놀란적이있었는데, 설탕이잘정제되지않아당도가떨어져서

그런것이었다. 자바인들은“굴라아다스뭇아다.”란격언을자주쓴

다. 굴라=설탕, 스뭇=개미, 아다=있다로풀이되는이말은‘설탕이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315

Page 31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있는곳이면어디든반드시개미가있다.’라는뜻이다. 그러니까이

격언은주위에건수가있으면여기저기서달려들어한몫끼려는사

람들의기회주의적속성을빗댄것이다.

자바인들이가장많이쓰는격언중에‘감팡감팡수사’라는것이

있다. 이를풀이하면, ‘감팡’은‘쉽다’, ‘수사’는‘어렵다’는말이므

로즉‘쉬운것같은데실제는어렵다’는뜻이다. 가끔이런표현을

사용함으로써현지인을깜짝놀라게하는수도있다.

내가경영하던건설회사의하청업자가직원기숙사를건축중이었

는데, 옆집에서일조량을막는다는이유로손해배상운운하며문제를

삼은적이있었다. 이때문에골치를앓고있던중시청담당부서에서

이치에맞지않으므로그런요구는무시하라는의견을보내왔다.

이런경우합당한격언이‘안징뭉공공칼틸라부르랄루’라는것

인데, 이는‘개가짖어도장사꾼은지나간다’라는것이다. 우리식으

로설명하면‘개짖는소리는듣지도말라’가되는셈이다. 이것은

‘개소리말라’로직역을할수도있다. ‘닭의목을비틀어도새벽은

온다’라는좀고급스러운표현으로바꿀수도있을것이다.

또한비슷한예로, 골프라운드중에플레이가잘되면흔히‘운퉁

투루스’즉, ‘이익(운퉁)이계속된다(투루스).’라는표현을쓴다. 좋은

일이계속된다는뜻이다. 이에화답하는말이대개‘카판(언제)루기

(손해)’이다. ‘언제손해가있겠느냐’인데, 배꼽을쥘만큼크게웃은

적이있다.

이밖에‘담장이농작물을먹는다’로풀이할수있는‘템복마칸타

남안’을비롯하여많은격언이있다. ‘템복’은‘담장’, ‘마칸’은‘먹

31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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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타남안’은‘농작물’이니, 직역으로 앞의 해석이 가능하지만,

좀더실감나게한국속담에서인용하면, ‘믿는도끼에발등찍힌다’

또는‘고양이에게생선을맡긴다’쯤될수있을것이다.

다음은재미있는격언을모아풀이해본것이다.

▶므낭자디아랑칼라자디아부

(Menang jadi arang kalah, jadi abu)

“이기면숯이되고패하면재가된다.”

즉, 싸움에서는이기든지든손해라는말이다.

Menang(므낭)=이긴다

jadi(자디)=무엇이된다. arang(아랑)=숯

kalah(칼라)=패하다. abu(아부)=먼지, 재

▶삼빌므늘람미눔아일

(Sambil menyelam minum air)

“물뿌리면서물마신다.”

즉, ‘일거양득’이라는표현이다.

Sambil(삼빌)=무엇무엇을하면서

menyelam(무늘람)=물뿌리다

minum(미눔)=마시다. air(아일)=물

▶스프르티안징등안쿠칭

(Seperti anjing dengan kucing)

제7장 / 인도네시아에서 살며, 겪으며• 317

Page 31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개와고양이같다.”즉, 항상싸운다는뜻이다.

Seperti(스프르티)=무엇무엇과같이

anjing(안징)=개, dengan(등안)=무엇무엇과함께

kucing(쿠칭)=고양이

▶하리마우마티므닝갈칸블랑, 마누시아마티므닝갈간나마

(Harimau mati meningalkan belaang, manusia

mati meningalkan nama)

“호랑이는죽어서가죽을남기고, 사람은죽어서이름

을남긴다.”는것이다.

Harimau(하리마우)=호랑이. mati(마티)=죽는

meningalkan(므닝갈칸)=남기다

belaang(블랑)=색깔있는가죽

manusia(마누시아)=인간, nama(나마)=이름

▶아말반약하실푼바구스

(Amal banyak hasilpun bagus)

“좋은일많이하면복을받는다.”는의미.

amal(아말)=좋은일, 축복받은일

banyak(반약)=많이

hasilpun(하실푼)=결과도, baik(바구스)=좋다

31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31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제8장

열대의나라에한국을알리다

Page 32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수하르토박물관에걸린낡은한복

나는아내와함께우연히수하르토대통령박물관을찾게되었다.

1996년 2월이었던것으로기억된다. 영부인인이브틴여사가세운아

시아최대규모로정식명칭은‘뮤지움푸르나박티페르티위’이다.

수하르토 대통령은 1997년 외환위기로 권좌에서 물러날 때까지

32년간인도네시아를집권하였다. 1967년수카르노대통령으로부터

정권을이양받은후천연가스와석유등풍부한자원을기반으로국

가주도경제발전을촉진, 집권 20년만에 1인당국민소득(GDP) 70

달러에서무려 1천달러로크게올렸다. 연평균 6%의고속성장률을

이끌며‘인도네시아의아버지’로불리기도했으나, 친미·반공노선

32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수하르토대통령재직시외국의정상들과귀빈들로부터받은선물과수집품으로

가득채워진뮤지움푸르나박티페르티위박물관.

Page 32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을내세운강압정치로원성을사면서국민들과멀어졌다. 그는 2008

년 1월 27일, 심장과폐기능이상등으로작고했다.

자카르타의중심메르테카광장에서동남쪽방향으로 30분가량달

리면닿는인도네시아민속촌앞에자리한수하르토박물관에는수하

르토대통령재직시세계각국의정상들과유명인사들로부터받은

선물과개인유품이진열되어있다. 그래서인지외국인들이자주찾

는관광명소가되었다.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자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높이 7m, 너비

5m가량되는거대한나무뿌리가마치기둥처럼천장을받치고서있

는대형목조조각이었다. ‘라마탐박’이라고불리는이작품은인도

네시아최고의조각가들이이슬람, 힌두, 불교를상징하는형상을나

무에부조로새겨수하르토대통령에게헌정했다는것이다. 박물관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21

수하르토대통령의재직당시모습.

Page 32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을세울때이목재조각을정문을통해운반하지못할것같아아예

처음부터건물을작품에맞춰지었다는일화를남겨화제가되기도

하였다.

2층으로된박물관은 1층입구부터중간왼쪽에수하르토대통령

재직시절여러나라의원수로부터받은훈장이별개동으로나눠진

열되어있다.

2층에오르자여러나라의문화적특색을엿볼수있는부스가따

로마련되어있었다. 인도의정교한상아조각품과보석함이며, 중국

의도자기와자수병풍, 일본의자개장롱, 사우디아라비아의가죽제

품과낙타조각상, 아랍의경전등국빈들로부터기증받은진귀한물

품들이적당한촉수의조명아래반사되고있었다.

2층중간쯤에갔을때한국에서보낸신라왕관도눈에띄었다. 김

영삼대통령이보낸것으로기록되어있었다. 그런데문제는이와함

께진열된마네킹의한복이너무낡아서신라왕관이오히려초라하

게보였다는데에있다. 게다가옷깃과옷고름도얽혀있었다. 한국

을대표하는한복모양이이지경이니더이상무슨말을할것인가.

관람중에내가관리소장을찾아가이사실을알리고, 아내는우선

부스속에들어가옷걸이에걸려있는한복을정리하였다.

그리고한국을상징하는옷이습기에훼손돼볼품이없으니바꿔

주겠다고제의하였다. 그러나관리소장은기존의것을없앨수있는

규정이없다며난색을표시했다. 그렇다고물러설수는없는일이었

다. 우리가새로옷을만들어올테니바꿔입히게해달라고계속설

득하였다. 결국시간이한참지난후에야수락을받을수있었다. 그

32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32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후얼마지나지않아하나의부스와함께남녀한쌍의한복나들이

옷을새것으로바꾸고영구보전할수있는허가를얻어냈다. 소품

은민형기대사부인이마련해주었다. 1996년 8월이었다.

이를계기로‘자카르타포스트’지는한국의의복문화에대해특

별히소개해주었다. 감사한일이었다. 당초이옷이완성되면영부

인에게직접전달할계획이었다. 그런데뜻밖에영부인이사망했다

는뉴스가나오는바람에무산되었다.

우리의기증품은남녀마네킹에입혀보전, 전시되고있다. 그뒤

로박물관안내원인산토소사스트로씨는한국관광객들이방문하면

유창한영어로한복의기증유래까지곁들여설명해준다고하였다.

그후세월이지나면서빛이바래기시작한박물관의한복을또한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23

박물관에한복(마네킹)을 기증하고나서. 왼쪽부터저자, 박물관장, 민형기대사

부인이순자여사와아내. (1996년)

Page 32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번새것으로교체해주었다. 그때가 2004년이니, 어느덧몇년이흘

러갔다. 앞으로도여러차례갈아줘야할것이다. 이박물관의한복

을교체해가다보면우리내외도한복과함께늙어갈것이다. 뒷날

언젠가우리내외가손자들의손을잡고이박물관을찾아오게되면

이렇게말하리라.

“얘들아, 할아버지와할머니가먼이국땅에와서도한복을소중히

여기면서우리의조국대한민국을사랑했단다. 너희들도이한복을

볼때마다민족과조국을잊지말고늘사랑하는마음을간직하기바

란다.”

32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기공식에서교민들과함께기쁨을나누는서세호무관

(퇴역소장)과 저자. (1992년)

Page 32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세계적규모로성장한한국국제학교

1976년경교민의숫자가몇백명밖에안될때는한국어린이를위

한정규교육을할수없었다. 일부교민주부들이자카르타포종퐁안

개인주택에서유치원과한글학교과정을시작한것이한국학교가태

동하는계기가되었다.

1977년박정희대통령으로부터미화 5천달러의자금지원과자

카르타에 파견되어 주재하는 한국기업과 현지에서 사업하는 개인

기업인들이모은성금을기반으로인도네시아정부의공식인가를

받고비로소교민들이기다리던‘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가설립되

었다.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25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현관에동판으로제작된교사신축기부자명단.

무궁화식품명칭도오른쪽하단에보인다. (1995년)

Page 32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물론학교라곤하지만처음부터정상적인규모와시설을갖춘것

은아니었다. 자카르타한국대사관옆현교민회사무실자리에전

학년 50여명의학생이모여공부를하기시작한후 1980년초등학교

과정 1회 4명의졸업생을배출하면서교민사회의중심적인교육기

관으로자리잡게되었다. 이에따라교민들의자녀교육에대한관심

도높아졌고학생들도점차증가되었다.

1995년 11월 23일, 재인니(在印尼)한국교민회가주도하는사단법

인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는한국정부및이곳진출업체, 기타단체

의지원으로대지 2만 1천 503㎡에연건평 7천 509㎡의건물을신축

하여이전하였다. 기공식(1992년 7월 16일)을가진지 3년 4개월만이

었다. 재외국민의배움의전당이된학교의현관벽에는건물을확

장·신축할때도움을준한국내대기업과현지진출기업체명단이

32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나화정교장(왼쪽)에게충남향우회의장학금을전달하는

저자. 양쪽은최준영교감과민경희부회장. (2002년)

Page 32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동판으로새겨져보존되고있다. 나도무궁화식품명의로소액의성

금을내었다.

이제개교 30년이넘는연륜과국제학교로서의규모를갖추게된

이학교의진학률은전원이한국의대학에합격하는수준이다. 초중

고전교생 1천 2백명을헤아리는규모로, 학교장은한국의교육인적

자원부에서파견하며교사도 130여명이나된다. 교민들이운영하는

학교로서는세계에내놔도손색이없을만큼인정을받고있어서인

도네시아교민들이이학교에거는기대와자부심이대단하다.

인도네시아전역으로퍼진한국식품

무궁화유통은 한국 상품과 잡화까지 수입하여 도소매, 유통까지

겸하는체제를갖추고있다. 1980년대에는인도네시아전역에일본

과중국에서수입해오는상품이시장의주요부문을거의독차지하

여한국상품은찾아볼수없었다. 이런시절에무궁화유통이한국

상품을현지에공급하게되면서한국상품의인지도가점차높아지

게되었다. 20여년이지난지금은한국상품이인도네시아전역으로

퍼지고있다.

뿐만아니라중국과일본상품의진열대에까지한국상품이쌓이

고있다. 앞으로는머지않아‘거의매일’이아니라‘매일’몇컨테이

너씩수입하는시기가도래할것으로예측된다.

이러한 전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한국 브랜드의 가치가 한층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27

Page 32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높아져야한다. 아울러일본과중국의상품자리를한국제품이메워

나가면서 한국 붐을 일으키고 장차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한국

물품을선호하게만드는기반조성이요구된다.

그래서나는 2억 4천만명이나되는인도네시아의엄청난소비층

을상대로이른바‘PRO 한국’을지향할필요가절실하다는점을강

조하고싶다. 이를테면‘친한국소비자’를만드는전략이다. 그러

기위해서는물량을공급하되, 다른경쟁제품보다질도좋지만, 빠

르고저렴하게공급할수있어야한다.

또가격에차이가나는경우에는무엇보다품질의차별화가중요

하다. 그리고기본적으로친절을생활화하여야함은두말할필요가

없다.

그러나이에못지않게중시되어야할것은한국상품을팔면서조

32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저자는한국식품을널리알리기위해한인야구동호인들을모아

‘무궁화코리아나야구단’을창단하였다. (2007년 11월)

Page 32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국의이미지도판다는마음가짐이라고생각한다. 무궁화유통이칭찬

을받거나욕을먹으면, 이는한국사람이칭찬을받거나비난받는

것과직결되므로나는매사에한국인을대표한다는자세로임했다.

홍보할기회가오면주변여건을가리지않고적극활용했다.

예를들면, 야구단창단을들수있다. 인도네시아한인야구동호

회를확대하여 2007년 11월‘무궁화코리아나야구단’을창단하게

되었던배경이그렇다. 또한 2004년 6월에는‘한국상품문화전’을특

별기획으로추진하게되었다. 무궁화유통본점과다이야몬드화티마

와티점에서‘한국상품문화전’을개최하여효능과품질이우수한인

삼류, 김치등한국식품을인도네시아소비자들이직접맛볼수있

는기회를제공하였다. 아울러현지인들에게한국의태권도시범과

사물놀이를 보여줌으로써 한국의 문화와 전통예술을 직접 실감하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29

한국상품문화전시회에참석한인사들. 우측부터타룹장군, 저자,

이원종충북지사, 윤해중인도네시아주재대사, 권영관충북도의회의장,

양인규싱가포르무역관장, 디아몬중역, 아내. (2004년)

Page 33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게 하였다. 이 특별전시회에는 주 인도네시아 한국대사와 한인회

지도자들은물론, 전 대통령자문국방위원장인 타룹장군과이원

종충청북도지사, 권영관충북도의회의장, 천성호동조그룹회장,

양인규 농수산물유통공사 싱가포르 지점장 등 내빈들이 참석하여

행사를더욱빛나게해주었다.

이날윤해중인도네시아주재한국대사는축사를통해“예로부터

인삼및인삼제품류는한국산이최고의효능을가지고있다고인정

되어왔고, 최근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이동남아를강타할때

도한국김치의효능과우수성이널리공인된바있다”고강조하면서,

주최측인무궁화유통이한국과인도네시아의경제교류에많은기

여를해오고있다고격려의말도해주었다. 아울러이전시회를계기

로양국민간의교류와이해증진에도더욱기여하리라는것을믿어

의심치않는다고기대를표명하였다.

33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무궁화유통이개최한한국상품전시회를보기위해몰려든자카르타시민들.

Page 33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이일이성사된데에는한국농수산물유통공사의도움이컸다. 이

행사후우리는메가와티대통령관저에도한국의김치를선물로보

냈다. 예상밖의호의적인반응을얻었다. 이는한국식품의이미지를

홍보할수있는좋은기회가되었다.

한국상품문화전이후눈에띌만큼현지인들의한국상품과식품

에대한선호도가높아지고있음을실감하고있다. 또한무궁화유통

에국한해보더라도제2의도약을기대할수있는청신호로느껴질

만큼좋은조짐이었다.

이렇게나름대로조국을사랑하고우리의것을성의를다해홍보

하는 가운데 현지에서 성실히 활동하다 보면 상상밖의 엔도르핀이

샘솟는순간의기쁨을만끽할때가많다. 어쩌면‘작지만아름답게!’

란표어를새삼스럽게읊조리게한다.

한꺼번에많은일을벌이는것보다는작은한가지라도충실하게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31

무궁화유통의식품전시회에앞서양해각서(MOU)를 체결한농수산물유통공사와

마타하리그룹. 왼쪽부터양인규아태팀장, 우상대지사장, 윤장배사장,

김호영대사, 저자, 카멜리토중역. (2009년 4월)

Page 33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해나가다보면승산이보인다는뜻이다. 비록작지만어렵게라도이

루어지는 목표는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인도네시아에서

살아오는동안터득한삶의지혜라고나할까. 별로색다른것은아니

지만이따금씩되뇌어보는생각이다.

그동안내가일궈온사업을꽃으로비유하자면, 무궁화가이제한

창피고있는단계라고할수있다.

비행기로동서남북으로 7시간이걸릴정도로큰나라이지만, 인도

네시아에는이리안자야의원시인촌락까지한국상품이안가는데

가없다. 향후자유무역협정(FTA)이완전히실행되면물동량이기하

급수적으로증가될수있어앞으로한국상품의인도네시아시장진

출은보다밝아질것으로보인다.

물론글로벌시대를맞아한국과인도네시아간에는큰거리감없이

왕래하고있다. 현재양국간의업무는당일처리가원칙이다. 물동량

도급한것은어떻게하든지당일에해결하도록밀어붙이고있다. 오

늘날에는선박이라도10일내에운송이완료되는시절이되었다.

그러다보니시간과공간의개념이좁아져서먼곳에서산다는느

낌이 없어졌다. 추진하는 사업이 한류열풍으로 이어져 인도네시아

시장에한국식품의홍보판매가극대화됨으로써모국의경제성장에

도기여할수있는기틀이되어주기를희망한다.

33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33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차세대동포위한기성세대의역할

인도네시아한인역사는 2009년현재 48년의역사를기록하고있

다. 한국의 1천 2백여기업이이나라에서사업을하고있으며, 투자

비중또한세계에서다섯번째로크다. 자원이풍부한데다노동력이

풍부하고저렴한편이어서많은부문에투자가치가있다.

선배세대들이현지에서쌓아놓은신뢰의발판위에차세대는더

많은 주요 기간산업과 자원 부문까지 투자하여 국가경제를 돕는데

일조할것으로믿어왔는데, 2009년현재벌써부터여러부문에걸쳐

투자가이루어지고있다.

다소부담이되는일이기는했으나, 2007년 7월 29일각분야의유

수한몇분의전문가를초빙하여차세대를위한제1차무역스쿨을운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33

2008년 인도네시아제2차차세대무역스쿨에서강의하는저자.

Page 33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영하였다. 그리간단한프로그램이아니었으나다행히성공리에마

칠수있었다. 내가회장직을맡고있는사단법인세계해외한인무역

협회(OKTA) 인도네시아지회가주최한이행사는기성세대들의경

험과해외현지에서얻은지식을신세대에게전수할목적으로열게

된것이다.

나는수강자들에게격려사를통해이스라엘민족이세계에흩어져

살면서도각고의노력끝에미국경제를움직이는큰세력으로성장

한것을교훈으로삼을것을강조했다. 아울러한국을대표한다는긍

지와확고한신념을갖고각자자기위치에서최선을다해달라고당

부하였다.

이프로그램의시종을지켜본부모들은 40년인도네시아한인역

33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제2차차세대무역스쿨수료식. 임원진과김춘호건국대부총장, 코트라김병건관

장, 양영연수석부회장, 한정국부회장, 최동욱부회장, 김재욱이사, 이승민고문,

배응식부회장, 엄정호반둥한인회장, 김호영대사등의모습이보인다. (2008년)

Page 33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사상처음있는좋은산교육이었다는반응을보였다. 이에고무되어

우리는다음해인 2008년에도 50여명을선발하여 7월 25일부터 3일

동안제2차차세대무역스쿨을성공적으로마칠수있었다.

이차세대무역스쿨교육프로그램은그결과를정밀분석하여문

제점을보완, 개선하여발전적과정으로확대해나갈계획이다. 나는

이와같은유형의교육과정이야말로외국에나와있는 54개국한인

사회 OKTA 회원과차세대공동체의네트워크형성에기여함은물

론, 정서적교감과친교또는상호사업에도음양으로많은도움이

되리라믿고있다.

일찍이기성세대들이낯선땅에와서겪은역경의체험과성공담

을차세대들에게전수할수있는교육과대화의장을마련하게된것

은때늦은감이없지않지만, 우리세대가마땅히해야할몫이라고

생각한다.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35

차세대무역스쿨에서분임토의하는장래의 CEO들. (2008년)

Page 33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폭동이겨낸한국교민의의지

1998년 5월 16일, 미국의 CNN 뉴스에서수하르토정권의붕괴를

예고하는보도가나왔다. 장기집권으로국민들의여론이악화된가

운데미국의 CNN 뉴스가이사실을집중적으로보도하고, 뒷날노

벨평화상수상자가된동티모르벨로추기경이 CNN 기자들과의인

터뷰를통해수하르토의독재정권을신랄하게비판했다

사태가심각해지자한국교민들은소요에대비하여대사관 3층에

모여숙의하고, 비상시에지역별로한국인공장과인근호텔, 한국학

교를지정하여집결하기로의견을모았다. 현지에부임하자마자일

을겪게된홍정표대사는교민들의비상식량부터체크하였다. 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무궁화유통은 1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쌀과

라면을비축했다고보고하였다.

5월 16일저녁, 32년동안인도네시아를통치했던수하르토대통

령이권좌에서물러난후하루만인 17일부터약속이나한듯이폭동

이일어났다. 실각한수하르토를지지하는사람들과반대하는세력

간에벌어진충돌이었다. 일부에서는폭동의배경에대해수하르토

측이조종한것이라는음모설이나돌기도했다.

이런가운데이들과는상관없는약탈자들이나타나혼란을부추기

는양상으로번지기시작했다. 주요도로의차량을방화하고슈퍼마

켓과상점들의물품을탈취했다. 어느슈퍼몰에서는입구에휘발유

를부어놓는바람에화재가발생해수백명의사상자가나오기도했

33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33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다. 사태를파악하기위해옥상에올라가사방을돌아보니여러군데

에서불길이치솟았다. 마음이불안해지기시작했다.

미국인들은폭동전에모두인근국가로대피하여안전했고, 일부

남은일본인들은지정된호텔에모여서조직적으로움직였다. 공항

에서마지막으로탈출하던날도일본인들은질서정연한모습을보여

주었다는후일담을남겼다. 한국정부는대한항공을증편하여비상

수송에임했으나, 늦게도착한데다수송기수가충분치못해공항은

아수라장이되다시피하였다.

5월 17일은수하르토대통령의하야와함께폭동이시작된날이었

다. 아침일찍부터자카르타중국인상가와슈퍼몰상가에는마치사

전에계획이나한것처럼여기저기서방화가시작되었다.

나중에알게되었지만, 프리부미(Pribumi)란 표시를해놓은원주

민의집은폭도들이그냥지나갔다고한다. 그러나방화와겁탈은사

전에주택담장에페인트나스프레이로표시해놓은건물에서이루

어졌다. 겁탈은거의중국여성이대상이었다는말도떠돌았다.

자카르타에는 로스앤젤레스처럼 외벽에 마피아식 낙서가 많다.

이는 360년간에걸친네덜란드식민지시절부터성행하여온일반

적인행위다. 이같은소요속에서공항에서는고급승용차를헐값

에양도하고떠나는중국인들도있었다고한다. 그들의일부는 5년

이지나도록돌아오지않아파손되어방치된건물을여러곳에서볼

수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사회적인문제가발생하면먼저피해를보는것

이중국인상점이었다. 옛날부터일부인도네시아사람들은중국인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37

Page 33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들을공격하는것으로사회에대한불만을표출해왔다. 이런현상은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주변을 돌보거나, 사회에 환원하는 경제윤리

자세가미흡한데서빚어진결과라고할수있다. 그러다보니원주

민들로부터미움을사기일쑤여서소요사태가일어날때는화를입

게마련이었다. 이때부터많은중국인이이나라를떠났다고한다.

이때교민대표들은대사관에모여폭동에대비해많은의견을교

환하였다. 시급한문제는교민을수송하는일이었다. 그날오후부터

나는자발적으로오랜친구인전육군참모장타룹중장의도움으로

긴급히배정받은무장군인들과함께버스를대절하여공항으로한국

교민들을운송하는일을맡았다. 버스임차료는물론나의몫이었고

인솔책임까지떠맡게되었다.

무궁화유통 1층에자리잡은부미관광회사는항공권을발급하느라

33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한국교민들의긴급탈출에대비하여저자는계열사인부미관광으로하여금

공항까지셔틀버스를운행케하였다. (1998년)

Page 33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일손이모자랄지경이었다. 항공권을구하기위해줄을선교민들로

인해회사안팎은발을들여놓지못할정도였다. 이런형편이니직

원들은사무실에서라면을끓여먹으며밤늦게까지교민들의귀국행

을도와야했다. 밤새공포로부터탈출한아낙네들이새벽녘에우리

건물로 몰려드는 바람에 북새통을 이루었다. 무궁화유통이 보유한

라면이바닥날때까지비상식량을이들에게제공하였다. 당시땀을

뻘뻘흘리며라면을끓이고나눠준직원백정희씨와곽씨아줌마의

따스한손길을지금도잊을수가없다고그들은입을모은다.

이때는설령항공권을확보했다고하더라도공항까지나가는일이

걱정이었다. 도중에일부포악해진현지인들이도로를점령하여구

타하거나약탈하는일도적지않았다. 위험을각오해야하는공항까

지의운송은적지에서의탈출작전을방불케하였다.

일부 아낙네들은 막힌 길을 우회하느라 골목길을 헤매다가 진이

다빠질지경이었다. 이런험악한사태를알리없는한교민은서울

을다녀오다가노상에서약탈을당한뒤가까운군부대에들어가서

야겨우보호를받을수있었다.

아울러교민들의식량부족도염려되는상황이었다. 우리는이를

예상하여긴급히다량의비상식량을추가로확보했다. 이는식량을

팔기위한것이아니라, 교민을보호해야한다는일념에서나온비상

조치였다.

5월 18일에이르러폭동은방화, 약탈, 겁탈등으로이어지는형태

로나타났다. 큰길가상점은폭도로변한과격시민들의방화로거

의화염에휩싸였다. 폭력배들이거리를질주할때는군인들도함부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39

Page 34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로사격할수없어위협적인몸짓이나표정만지을뿐이었다.

무궁화유통건물옥상에도언제폭도로변한무리가들이닥칠지모

른다는공포감이엄습했다. 이런위급사태에대비하여우리도지붕을

통한탈출계획까지세우고전개되는상황을예의주시해야만하였다.

저녁때가되니회사로폭도들이몰려올것이라는첩보가들어왔다.

곧이어근처에있는시장이불타고회사건물에불을지르겠다는협

박전화까지걸려왔다. 문자그대로위기일발의순간이었다.

분위기가험악해진긴급상황아래서나는동네주민들의도움으

로회사보유차량을모두그들의주택에대피시킬수있었다. 동네

인력거꾼들이회사건물을지켜주고, 젊은주민들이자발적으로 24

시간경비를맡아주었다. 덕분에회사가무사했다. 정말고마운동

네이웃사람들이었다.

내가거듭고맙다고말하자주민들은“당신이우리를도와주었으

니우리도당신을도운것일뿐.”이라고화답하여나를감동시켰다.

내가동네에서인심을잃었다면어떻게되었을까. 생각만해도끔찍

한일이었다. 훗날한TV 인터뷰에서이런도움에대한일화를소개

한적이있었다.

폭동사건이후나는더욱동네이웃, 특히불우한사람들에게사

랑나눔의시간을많이가져야하며, 물질과마음으로도와야겠다는

결의를가슴깊이새기게되었다.

소요사태가더욱심해지자무궁화유통은통합군사령관의배려로

정문앞에소형막사를설치하고무장군인들의보호를받기시작했

다. 아울러나는언제공격을당할지모르는긴장속에서최악의사

34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34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태에대비하여직원들에게구체적행동지침을알려주었다. 만일폭

도들이회사로몰려와방화를하려고든다면최대한만류하되, 저지

하기어려울때는매장에있는물품을모두방출하여이웃주민들에

게나누어주도록하라는내용이었다.

그런한편, 몇몇친분있는회사사장들에게는사태가악화돼장기

화될것같으면, 보안대와정보부의친분있는현지인에게회사와재

산을다맡기고떠나자는제의를해놓기까지하였다. 통합사령부의

참모장인친구타룹장군으로부터는위급할때자신의집에와서기

거하라는권유까지받아놓은상태였다. 당시의위급한상황은말로

다형언하기어려울정도였다.

수하르토가실각한지이틀째가되는 5월 18일이었다. 소요사태가

다소가라앉기는했으나일부건물에서는여전히연기가피어오르고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41

인도네시아폭동당시특공대원의보호아래한인회사무실을방문한뒤

양시환사무국장에게교민용비상식량을전달하는저자. (1997년 5월)

Page 34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있었다. 나는밤새비상식량을준비하며출국하지못한채공포속에

서굶고있을교민들을생각하니그냥집에앉아있을수가없었다.

누군가가힘이닿는사람부터먼저나서도와야한다고생각했다.

이른아침부터무장군인(특공대원)의보호를요청한뒤밤잠을설

치며준비한비상식량을트럭에싣고대사관으로달려갔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대사관의요청에따라곧바로한인회관으로차를몰고

갔다. 비로소대기중이던교민회양시환사무국장에게라면을전달

할수있었다.

회사로돌아오니새벽녘에린치를당해간신히무궁화유통뒷문으

로피신한몇명의교민아낙네들이온몸이늘어진상태로누워있었

다. 공포와아픔과불안에떨고있는모습이내눈에들어왔다. 그나

마무궁화유통은위험한소요사태의한복판에서피난처가되고있었

34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자스리마린헌병사령관에게한국교민의신변안전을부탁하는저자. (1997년)

Page 34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다. 당시교민들의심정은목숨만이라도무사하기를바라면서한국

에서보내는항공기에오르는것이급선무였다. 무엇보다교민에게

는안전이제일중요했다. 이를위해서는강력한인도네시아군병력

의보호가최선책이라고생각되었다.

나는누구와상의할겨를도없이연락이닿는대로그동안가깝게

친분을맺어온군장성들과접촉하여협조를요청키로하였다. 그리

하여대사관홍은표공사와함께자스리마린헌병대사령관집무실

로찾아갔다. 우리는한국교민들의신변보호를간곡히요청했고, 고

맙게도마린장군은적극돕겠다는확약을해주었다. 대사관과한인

회측은교민들이안심할수있도록인도네시아정부와군의안전보

호약속을널리알리는데힘썼다.

5월 18일저녁부터는인도네시아를떠나김포공항에내려안도하

는교민들의모습이한국텔레비전뉴스화면에소개되기도했다. 이

렇게광풍이휘몰아친자카르타의 5월도다지나가고있었다.

■군인맥활용해교민신변보장받다

자카르타 지역을 휩쓸었던 폭동이 지나간 지 1년이 되었으나 그

여진은여전히남아있는상태였다. 더욱이인도네시아의총선은이

런분위기에자칫불을댕길수있는요소가강했다. 그래서개표과

정에서일어날지모를만일의소요사태에도대비해야했다. 이는지

난해 5·17 폭동을겪으면서배운학습효과라고할수있겠다.

이번에는통합군참모장인타룹중장을찾아가협조를구하기로하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43

Page 34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였다. 대사관김웅남공사(후일시드니총영사역임)와자카르타수도

근교까지관장하는수도경비사령부를방문하고자자수파르만사령

관(소장)에게교민의안전조치를부탁하였다. 김웅남공사와동행한

자리였다. 한국인들이병력지원을요청할경우, 적극지원해주겠다

는약속과함께사태가위급할때에연락이닿도록부관(중령)의전화

번호까지적어주었다. 이전화번호는‘한인뉴스’1999년 5월호에게

재하였다. 많은교민이위급시이용할수있게하기위해서였다.

그후 2년이흘렀는데도자카르타는비교적안정된지방과는달리

정상을완전히회복하지못했다. 자카르타근교치트룹지역엔떼강

도가한국인공장을습격하는일이벌어진데다금고까지탈취해가는

사례도있었다. 재발방지차원에서우리는전국헌병대의비상연락

34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교민들의안전조치를약속해준수푸랍토수경사령관(군복)과 타룹

대통령자문위원(왼쪽두번째), 저자와김웅남공사. (1999년)

Page 34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망을이용할수있도록협조요청을하기위해또다시정래현정무공

사와함께자스리마린헌병사령관을찾아갔다. 여기에서받은비상

연락망도대사관을통하여교민들에게전송되었다.

폭동이일어난지어느새 10년이훌쩍넘었다. 이제그날을회고하

면서나는새삼스레인생의교훈에대해다시되새김질하게되었다.

어느나라나한지역에오래거주하다보면그동네토박이로여겨

지게되겠지만, 외국인이가까운이웃으로인정받기란그리쉽지않

다. 그런데다행히평소에보인격의없는언행과도움을주는선한이

웃의자세로가까이한덕분에나는동네사람들에게거부감을주지

않았던모양이다. 그저좀있다고잘난척하는외국인이아니라, 인도

네시아말로인사와농담까지건네는‘털털한이웃인사’정도로대

해준우리동네노인, 어른들과아낙네, 청년들이고맙기만하다.

사실시골에서상경하여동네처마밑에서기거하는인력거꾼은물

론, 주변의수해이재민들에게도가까이다가가려고노력했다. 종교

가 다를망정 구역 내의 이슬람사원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

다. 그러다보니자연히현지민의애로사항을알게되고형편을안

이상돕지않을수없었다. 그러는사이에나를‘동네의유지’쯤으로

받아들여준셈이었다.

그러나내가남을돕는과정에서한가지깨우치게된것은성급한

도움은오히려후회를자초할수있다는점이었다.

1989년이었던것으로기억된다. 사업이어느정도안정돼가자당

시가까이지내온공수특전대대장인아굼구멜라준장(그후대장예

편)에게그냥우정의표시로운동화두트럭분을선물한적이있었다.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45

Page 34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그런데얼마후나는이일이매우신중치못한처사였음을깨닫게

되었다. 수출재고품을염가로구입했던터라신발의짝이맞지않는

것이나올수있다는점을미처고려하지못했던것이다. 신발을연

병장에풀어놓곤군인들이골라가게해당장엔눈에띄지않았겠지

만, 짝이맞지않아불만을털어놓는군인들이분명히있었을것이기

때문이다.

이점이바로마음에걸렸다. 사전에확인해보냈어야했다. 지금

도아굼장군에게미안한마음을금할수가없다. 그는아무런불만

이나꼬집는말을하지않은채미소로넘어갔지만, 당시내마음은

쥐구멍이라도찾고싶은심정이었다. 이일은나에게참으로귀한교

훈이되었다.

■현지군인들과맺은인연

나는 유독 인도네시아 군인들과는 오랫동안 친분을 쌓아 왔다고

할수있다. 특히공수특전사령관과는연속 3대째가까운사이로지

내게되었다. 군타라특전사령관(베이징대사역임)에이어타룹사령

관(그후대통령자문위원), 아굼구멜라사령관(대장예편, 교통부장관

역임, 인니재향군인회회장)의순으로친분을유지해오고있다.

이중에도 28년간우정을나눈아굼장관과타룹대통령자문위원

과는가족까지서로왕래할정도로가까운사이다.

타룹중장은공수특전단장, 이리안자야야전사령관, 육군작전사

령관과통합군사령부참모장을지내며하비비, 구스두르, 메가와티

34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34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정부내에서대통령군사담당자문역을맡아왔다. 그는공수특전단

부사령관시절부터지인이되어많은후배들을나에게소개해주었

다. 그가운데자스리마린이란헌병중령이있었다. 그는요도요노

대통령의육사동기생으로, 아들종헌과도골프실력을겨루는라이

벌사이가되었는데, 진급을거듭하여빠른기간에헌병사령관이되

었다. 타룹장군이하비비대통령자문위원일때는특별히나에게조

언과도움을주기도했다.

IMF로인도네시아에자금줄이묶이자채무가너무많아당분간자

금의유입이어려울것을예측, 방향을진단하고대책을세우도록조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47

친구인타룹중장의통합군사령부참모장의취임을축하하며.(1995년)

Page 34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언해주었다. 나도그에게기회가닿는대로정책적제언이나자문을

해주기도하였다. 특히남북관계와관련해서는평통자문위원으로서

북한문제, 남북한관계에관한내의견을제시하곤했다.

그래서 한번은 그에게 한반도 정책의 중요성과 평화관계 설정을

위한아이디어를제안하였다. 그때는남북한의대화가어려웠던시

절이어서나는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의입장에서북한과외교관계

를맺고있는인도네시아정부가한반도의평화에기여할수있는교

량역할을담당해줄수있음을강조했다.

나의진지한제안을받은타룹자문위원은대통령에게이를건의

한바있었다. 메가와티정권당시인도네시아대통령이국빈자격으

로북한을방문하는계획을세울때‘인도네시아의교량적역할’의

중요성을 부각함으로써 방북 실현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그가국정자문회의때이제안을공론화했다는이야기를듣고

개인적인친분과상호신뢰속에갖는의견이얼마나소중한가를절

감하였다. 나는그에게진심으로감사하다는말로우정에대한예의

를표시한바있다. 메가와티대통령이한국을순방할때는나도교

포경제인의일원으로양국경제인모임에참여하였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전 통합군사령부 참모장이었던 타룹

장군은 1999년총선개표과정의소요사태에대비하여교민의안전

을 부탁할 때도 부하였던 수도경비사령관 자자 수파르만 소장에게

나를소개시켜주었다.

이에앞서수하르토대통령하야직후사회가극도로혼란하여치

34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34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안이불안에빠졌을때교민들의신변안전을도와준것도친구타룹

장군의후배인자스리마린헌병사령관이었다.

2001년 12월 7일에도망설이지않고다시그를찾아가게된것은

오랜친구, 격의없는사이라는믿는구석이있었기때문이다. 그때

까지도한국인이경영하는공장에가끔떼강도사건이일어나고있

어서그의도움은아주큰힘이되었다.

1980년한국의개천절에는통합군사령관과주요장관을초대한

‘한국의날’기념행사가개최되었다. 한국대사관이주최한이행사

는매년자카르타의힐튼호텔그랜드볼룸에서주로열렸다.

이때나는일반복장을한현지인과만나게되었는데, 3명의일행

가운데서유난히눈동자가또렷하고짧은머리의한젊은이와통성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49

자스리마린헌병사령관을방문하여한국인신변안전대책을건의한저자와

정내권한국대사관공사, 아들 종헌.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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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을하게되었다. 그의이름은아굼구멜라라는현역중위였다. 그

러니까당시이청년장교는다른 2명의젊은이와함께고위장성을

수행하기위해온보좌관이었던것이다. 나보다세살아래였으니, 그

때나이서른네살이었다. 바로젊은위관장교가뒷날대장이된인

물이다.

이장교가수행한상관이베니부르다니장군으로서당시통합군

사령관이었다. 이분은후에초대한국주재총영사가되었으며, 한국

말을약간구사할줄알았다. 인삼을보면한국말로“몸에좋아요!”

라고설명할정도였다. 그와는뒤에몇번더볼기회가있었다.

나는아굼구멜라장교와친해지면서다른군인들과도사귀게되

었다. 이 친구의 주특기는 정보를 분석, 판단하는 일이었다. 그가

대위 시절에 나는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여기저기 부지런히 뛰던

무렵이었다. 당시자카르타에주재하는한국인은 1천명이채되지

않았다.

어느날나는욕심에이친구의이름을빌려형식상의사업파트너

로삼으려했다. 그러자자기는군인의길로나가야하기때문에사

업목적으로명의를사용할수없다고정중히거절하는것이었다. 그

대신미스터김의사업이어려워지면능력이닿는한적극적으로도

와주겠다고약속해주었다.

나는현역인친구의입장을고려하지못한행동이부끄러웠다. 그

래서 거절당한 섭섭함보다는 오히려 어려울때 적극 돕겠다는 말에

신뢰감과고마움을느꼈다. 그후아굼구멜라는변함없는우정을보

여주었다. 내가어려움에처할때마다바람막이역할을해준참으로

35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35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소중한존재였다.

소령시절, 그는수경사의정보담당관으로보직을받아근무한적

이있다. 이때그의메모한장으로이곳에외상수출하였으나자금

회수가안돼나에게어려움을호소해온서울친지의어려움을해결

할수있었다. 그덕분에지방어느정보담당관의수고로지독한중

국인빚쟁이의소재를알아내돈을받아낼수있었다. 그후작은교

통사고와같은사소한일에도자신의보좌관을경찰국으로보내조

치해주었다.

그의골프실력은싱글수준이었다. 중령이된그와라운딩할때에

는유머와적절한위트가따르게마련이어서언제나즐거웠다. 내가

마지막퍼터로홀인할때는홀속에미리지폐를집어넣고상대편이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51

아굼구멜라대장이메가와티정부의교통체신부장관으로입각하던날

그의집을방문하여축하와함께환담을나누는저자. (2002년)

Page 35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게임에이길것을알리는등상대방에게기쁨을더해주는유머와행

동으로분위기를고조시켰다.

나는그가중령일때도공수특전단장, 부단장과자주만나어울렸

다. 이렇게그는나에게따뜻한마음과정을줌으로써남달리호감을

갖게하였다. 또한나는그로인해알게된공수특전단장, 부대장과

도가까이지냈다.

아굼은중령때수경사보안과장, 수마트라람풍지역사령관을지

냈다. 자카르타에서가장가까운곳이었는데, 그의지역사령관취임

을축하하기위해한국대사관이상산참사관과함께방문했던기억

이불과몇달전의일처럼뚜렷하다. 그뒤보안사 1국장으로전보

발령받아진급까지하였다. 공수특전단장은퇴임뒤주중대사로부

임하였고, 차석인타룹이준장진급과함께특공단장이되었다. 나는

이때도타룹의집무실을찾아가축하해주었다. 그는나보다한살많

았으나마치죽마고우처럼가까운사이가되었다.

당시 인도네시아의 정치 현실은 군인이 정치에 참여하고 육군이

경찰국까지지휘하는상황이어서외국인인나는음으로양으로그로

부터많은도움을받았다.

인도네시아를방문한한국의역대대통령

국가원수의외국방문은교민들의지위를높이는계기가됨은물

론쌍무협정을통해상호국익을증진하는국가간의중요한행사라

35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35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할수있다.

내가 자카르타에서 뵌 대통령은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대통령등이었다. 노무현대통령은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참

석하기위해발리에왔을때교민대표자와의환담자리에서잠시뵌

적이있다.

전두환대통령이방문했을때자카르타만다린호텔에서가진교

민들과의만찬모임에는경제인들이대거참석했다. 나도교민경제

계대표의한사람으로초대받아헤드테이블에앉는영광을얻었다.

당시를회고해보면, 신문기자출신이라던모상사의지점장은신

문기자행세를하며교묘히보안요원을피해대통령에게까지접근하

는용감성(?)을발휘하여우리를놀라게하였다. 또발언순서를정하

지않아서그런지산림업계를대표해나온모회장은다른교민들이

말할틈도주지않고독대하다시피혼자서길게발언하여눈총을받

는일도벌어졌다.

그런데아직도잊혀지지않는것은지금까지악수해본대통령가

운데전두환대통령의손이가장크고두툼하며힘이있었다는느낌

이다.

노태우대통령의자카르타방문때는영부인이한국부인회를찾았

는데, 누군가뒤에서갑자기무슨서류를전달하려하는바람에경호

원들을당황하게하였다. 마침아내가부인회회장시절이어서각별

히신경을쓰고있던터라여간긴장되지않을수없었다. 알고보니

어느부인이청와대에진정서를낸다고벌인행동이었다.

내용인즉, 국가공무원이나상사주재원또는정식투자자의직원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53

Page 35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가족만허용되는자녀대학특례입학을일반개인사업자나교민자녀

에까지확대하여혜택을볼수있도록해달라는요청이었다. 그 뒤

이건의문이효력을봤는지일반사업자자녀도한국대학입학특례

혜택을받을수있도록규정이바뀌었다.

김영삼대통령은장기집권과부패로지탄받은수하르토대통령의

국빈자격으로방문(1994년)하여이곳샹그릴라호텔에서경제인, 한

국대표자들과오찬회를가졌다. 이날김대통령은연설하는가운데

“나는지금까지정치자금을 10원한장받은적이없다.”고역설하였

다. 이는수하르토대통령을빗대어한연설로오해를받을까봐참석

자들을긴장시켰다. 그런데다행스럽게도통역이그대목을빼버려

무사히넘어갔다.

김영삼대통령얘기를하다보니, 아내박은주가국민훈장석류장

을받은일이새롭게떠오른다. 아내가재인도네시아한국부인회회

장직을 맡고 있던 1995년 12월 말일이었다. 대한민국의‘사회분야

발전에진력하여국민복지향상에이바지했다’는공로로김영삼대

통령명의의훈장을받게된것이다.

그동안나름대로고향과조국, 인도네시아에서불우이웃과노인

보살피기, 장학금지급, 심장병어린이수술돕기운동등사회복지

활동을꾸준히해왔는데, 이점을한국대사관과한국정부가평가해

준셈이다.

2003년 10월 6일노무현대통령의발리만찬간담회때는격식을

가리지않는노대통령의인사말로좌중에폭소를자아내게하였다.

대통령이서두에“인도네시아의더운나라에살고계시는여러분들

35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35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은 얼굴이 까무잡잡할 줄 알았는데, 나보다 더 얼굴이 빤질빤질하

다.”는덕담으로시작하여간담회분위기를부드럽게풀어나갔다.

나는인도네시아를방문한몇분의대통령과상면하면서이런생

각을하게되었다. 외국에국빈으로방문할때는의례적으로끝날게

아니라에너지개발이라든가자원확보등보다규모가큰장래성있

는 프로젝트를 마련하여 쌍방의 이익을 모색하고 합의하는 모습을

내외국민들에게보여줄수는없을까하는바람이었다.

제8장 / 열대의 나라에 한국을 알리다• 355

ASEM 정상회의참석차발리를방문한노무현대통령부처와

민주평통자문위원단의일원으로간담회에참석한저자.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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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35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제9장

고생끝에낙이오더라

Page 35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흠없는성공의열매를따기위하여

인생에있어서의성공이란일생동안각자가맡은분야에서만족

할만한성취를이루었을때의가치를말한다. 성공이란단어는누구

나자신있게쓸수있는말이아니다.

일반적으로사람들은부를성공의잣대로삼는경우가많은데, 비

록 큰 부를 축적하였더라도 사회적으로 부도덕하다면 이는 진정한

성공이라고볼수없다.

하지만큰부를이루지못했다하더라도가정이화목하고자녀교

육을잘시켜좋은혼처만나후손까지융성하게됐다면이또한성

공이라하지않을수없다. 이기준을잣대로삼을때, 권력과부와

가족의화합이곧성공의조건이되는셈이다. 그런데일부성공한

분들의면면을살펴보면, 부는이루었으나가정관계가원만치못하

거나사생활이복잡해그의미가퇴색되는경우가적지않다. 어렵게

성공이라는열매를따내기는했으나흠집으로인해상등품이될수

없는이치와같은것이다.

어느한사람이성공했는지의여부는스스로내세우기에앞서사

회다수의공감을얻었을때의평가로이어진다고생각한다. 그래서

누가보더라도성공한자의삶은아름다워야한다. 그런데성공못지

않게중요한것이이를지키고보존하는일이다. 오죽했으면, 도전보

다는수성(守成)이더어렵다고했을까. 수성은지금의문제점이무엇

인지를파악하고, 해결할줄아는리더십과미래를내다보는예지,

35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35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그리고근면에있다고믿는다.

“살고있는집안에풀이돋는다면집안이흥할수없다.”란말이

있듯이당면한상황을도외시한미래의설계란공염불일수밖에없

다. 이말은게으른사람은집안에풀이돋든뿌리가뻗어나가든관

심이없다는뜻으로도통한다. 성공적인부(富)는부지런한사람만이

딸수있는열매다.

오래전부터사람들은‘다복한가정’을최상의가치로인식해왔다.

부부가잘만나화목하고, 자녀가잘배워사회에진출하면오복의

기본으로쳤다. 또한건강을유지하는것이중요한데, 일찍이치아를

오복의하나라고한것은사실건강의중요성을말하는것이다. 여기

에부모가장수해자녀에게좋은가르침을줄수있다면얼마나축복

받을일인가. 생활의기본수단이돈이니, 물질적여유까지있게된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59

아름다운성공을꿈꾸는저자부부가브라질코파카바나해변에서. (2008년)

Page 36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다면오복은다갖춰지는셈이다.

세상이날로자기중심적사고와이기주의적삶의방식에빠지면서

사람들은남을돌보며살아갈만큼여유를갖지못하게되었다. 그렇

다보니어려운이웃과더불어사는공동체의식이희박해졌다. 만일

이런배려와실천이따라준다면이또한보람을찾게된셈이니, 육

복도기대해볼수있을것이다.

외국에서사업을하다보면애로가많은데, 현지인을돕는일은사

업이윤을현지에환원한다는의미뿐만아니라애로를극복하는자기

방어수단이되기도한다.

나이가들어늦게나마갖게되는종교가육복에해당된다면, 은퇴

기인칠순의나이에도불구하고사회활동을하며봉사의기회를갖

36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자카르타라이온스클럽회장단과함께. 왼쪽에서세번째가저자. (2008년)

Page 36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게되는일복이야말로일곱번째에해당하는축복이아닐수없다.

나는칠순을눈앞에두고이런나눔의복을얻고자노력하고있는데,

그런결정에스스로만족하고있다. 아내역시이런나의생각에전

적으로동의해주는입장이어서큰힘이되어주고있다.

이런저런이유로공동체의식이흐려질때마다“사람이선을행할

줄알고도행하지아니하면죄니라.”(야고보서 4장 17절)는성서의구

절을떠올리며이를실천하기위해노력하고있다. 우리부부는마지

막인생의종착역까지잘영근성공의열매를딸수있기를희망하며

이를위해최선을다하고자오늘도다짐하고있다.

잘이루어진3남매의혼사

청춘시절을적도의나라인도네시아에서지낸기나긴 30여년의

세월을되돌아보게된것은막내딸의약혼식에참석하기위해서울

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였다. 기내에서 서비스해주는 적포도주를

몇잔마셨더니, 약간의취기가돌면서흘러간나날들이마치디지털

메모리에저장된것처럼스쳐갔다. 게다가귀에꽂은이어폰에서는

때맞춰감미로운멜로디가흘러나왔다.

장거리여행때는음악을들으면피로를덜느끼게돼자주음악을

듣는편이다. 클래식을듣다가기분이나른해지면재즈나팝송채널

로바꿀수있어편리하다. 나는큰사위가사준대형이어폰(bosse)을

애용할만큼음악듣기를좋아한다. 그러다보니비행중인기내는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61

Page 36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내가몇시간동안임대한음악감상실이나다름없는곳이다.

2005년 7월 12일, 이날따라깊은감회에빠지게된것은막내까지

출가시키고나면자식들의혼사는다끝난다는홀가분함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런감정의이면에는어느새노년기에접어들어지난세월

보다는앞으로살아갈날이짧아졌다는아쉬움이남아서일것이다.

그래서기쁘면서도서운하고섭섭하다. 그러나큰기쁨이작은아쉬

움을꼬옥감싸고있음을느낀다. 바로그날에대비하여며칠전나

는색상이맞는넥타이와포켓행커치프까지새로준비하였다.

2주일동안거론되던막내딸의혼사가마침내결정되어주위로부

터많은축하를받았다. 더욱이때마침자카르타로모신고향광천성

당의연광흠주임신부님이귀국시간에맞추어나의집에서미사를

올리게되고막내딸리디아의약혼을위한기도까지해주셨으니, 감

개무량하지않을수없다.

나는막내딸의혼사가우연이아니고하느님의오묘한섭리에따

라이루어진경사라고믿고있다. 아내는막내딸의결혼을위하여성

서필사두번째 40쪽을남겨놓고상견례를하게되었는데, 6월 25

일인이날이마침사돈이될어른(손병두한국천주교평신도회회장)이

서강대학교 총장으로 선임된 날이어서 양가의 축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우여곡절끝에자카르타에서고등학교까지마치고본국으로유학

한 3남매는각기전공을찾아제길로갔다. 큰딸현미는이화여대를

졸업하고산호세대학원을나온뒤 1993년인디아나주립대학교대학

원에서경영학을전공한 LG그룹에다니는박형세와결혼했다. 큰사

36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36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돈어른(박봉수님)은일본중앙대학출신으로외환은행창립멤버로

서평생외환은행맨이셨다. 큰아이는서울의광화문소재새문안교

회에서식을올렸다. 결혼피로연은자카르타의힐튼호텔에서가졌

다.

현미는 샌프란시스코 산호세주립대학에서 2006년부터 2년 동안

전임강사로영어언어학을강의했고, 중고등학교교사자격증을획

득했다. 지금뉴저지주에살고있는데, 슬하에 1남(건우), 1녀(수진)

를두었다.

보통큰자녀의혼사가잘이루어지면다음동생들의혼사도순조

롭다는조상전래의말을증명이나하듯이, 아들과막내딸의경우에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63

자카르타힐튼호텔에서가진큰딸현미와사위박형세의결혼식피로연때.

박봉수사돈부부와저자부부. (1993년)

Page 36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도좋은인연을맺게되었다.

연세대학교경영학과를나와 미국의 UCLA 얼바인대학원에서마

케팅을전공한아들종헌은 1993년EBS방송아나운서겸앵커출신

인양수려와인연이닿아결혼하였다. 고려대정책대학원석사과정

을마친며느리는성실한방송인이었다. 사돈어른은통일부차관을

역임한양영식박사이다. 강남의공항터미널에서혼례를올리고자카

르타의샹그릴라호텔에서피로연을가졌다.

종헌은운동신경이뛰어난편이다. 연세대학교에다닐때는 3년

동안미식축구선수로서주전노릇을했을정도이다. 연고전때는격

한몸싸움을벌이다가갈비뼈두대가부러지는사고를당해수술까

지받아야했다. 골프도싱글골퍼로써티칭프로자격을갖춘수준

이다. 장타자로알려져자카르타에서발행되는잡지에소개된적이

있다.

그런탓인지성격도직선적이고의협심이강한편이다. 미국에서

백인학생들이한국여학생에게총격을가한사건이발생했을때는

분개한나머지이종사촌과함께가해자를혼내준다고나섰다가오히

려백인의아파트를습격했다는황당한오해를받은적도있었다.

종헌은이곳한인사회와인도네시아는물론, 국제적인행사와모

임에도자주참석하여국제감각을익히고사회경험을쌓는한편, 옥

타(OKTA)를중심으로국내외 2세기업인들과도꾸준히친분을유지

하며안목을키워가고있다.

아들은나에게 3명의손자를안겨주었는데, 이제초등학교 3학년

이되는범구를비롯한유치원생민구, 그리고신생아인윤구가바로

36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36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그들이다. 며느리는자카르타한인성당의성가대지휘자일을맡아

봉사하고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인도네시아 국빈 방문 때는 한인 지도자들과의

간담회진행사회를맡아차분하게역할을잘해주었다는평을들어

우리내외를기쁘게해주기도하였다. 나는이런며느리가정말대견

스럽고자랑스럽다. 종헌은지금나와함께무궁화유통에서상무이

사로열심히일하고있다.

■막내딸을위한아빠의노력

2004년가을쯤으로기억된다. 서른두살이되는데도막내현아(賢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65

자카르타샹그릴라호텔에서가진아들종헌과양수려(엘리자베스)의

결혼피로연이끝나고. 타룹 전통합군참모장부부와

사돈양영식전통일부차관부부.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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雅)는부모의마음을아는지모르는지자신이하는일에만몰두하는

것같았다. 특히어학에천부적소질이있어서그런지영어와프랑스

어, 일본어등의실력을기르는데만몰두하였다.

나는막내딸의속셈도알아보고부모의생각도넌지시알릴겸함

께시간을갖기로작정했다. 우선기분전환이필요할것같았다. 당

장의스트레스를풀고마음의여유를가지려면여행이상좋은것이

없다고여겼다. 나는딸의동의를얻고제주도행비행기에몸을실었

다. 딸이 20대를넘긴후모처럼갖게되는호젓한동행이었다.

현아는자카르타국제학교를마치자연세대학교신문방송학과로

진학하였다. 졸업후엔프랑스에서베이커리수업을받았다.

제주공항에내리니약속한대로천주교제주교구장이신김창렬주

교님이보낸교우형제가마중나와있었다. 주교님이사제관으로안

내하여조용한집무실에서차를대접받고예정대로골프장으로향하

였다.

라운딩이끝날무렵주교님이리디아(현아의세례명)에게아름답기

도하지만남자못지않게장타를잘치니놀랍다고칭찬하면서너는

시집가서도사랑받으며참잘살것이라고격려해주셨다. 현아가수

줍은미소로얼굴을붉히는모습에나는아빠로서가슴뿌듯한기쁨

을맛보았다.

저녁에는주교님이베풀어주신제주의특산해산물로식사를하

였다. 나는처음으로생선의아가미살을맛볼수있었다. 수녀님들

도합석한만찬은성당의장엄한분위기와는달리성직자들의포근

하고소탈한일상적인생활의단면을느낄수있었다.

36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36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숙소는제주중문관광단지의신라호텔로정하였다. 나는딸과함

께산책하러나섰다. 신라호텔은하얏트호텔을지나해변으로가는

오솔길에닿아있었다. 언덕을낀오솔길은주변의나무와어우러져

운치가있었다. 눈앞의해변은아름답고깨끗했다.

나는과년한딸과함께산책하면서소풍을나온초등학생처럼기

분이들떴다. 막내딸도아주즐거워했다.

우리는포즈를취해가며서로사진을찍어주고바닷물에발을담그

기도하였다. 나는출가전의막내의모습을가슴속깊이담아두고

싶었다. 그리고멀리태평양이펼쳐진수평선을바라보며사랑하는

막내딸이시집을잘갈수있게해달라고주님께간절히기도하였다.

그로부터 7개월뒤현아는같은교우의소개로귀한첫미팅을갖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67

제주오라골프장을찾은정명조부산교구장과김창렬제주교구장.

저자 부부는왼쪽과세번째.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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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되었다. 급진전으로이루어진만남속에사위후보를보게되었는

데, 첫눈에맘에들었고믿음직스러웠다. 사윗감인석기군은손병두

한국천주교평신도협의회회장의둘째아들이다. 사위는카네기넬슨

대학원출신으로, 현대그룹에서근무하는모범적인사원이었다.

이렇게인연을맺고보니, 사돈어른과는몇가지비슷한점이있었

다. 양가모두가톨릭가정이고, 사돈이천주교한국평신도협의회회

장과서강대학교총장직을맡고있었는데, 나는인도네시아한인천

주교초대공동체회장(역임)과모교인한국항공대학의총동문회회

장직을맡아봉사하고있었다.

혼인미사는 2005년 9월 9일명동성당에서정진석대주교님의주

례로이루어졌다. 추기경으로추대되기불과 5개월전이었다. 혼인

36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정진석추기경님의집전아래혼인미사를마친뒤사위손석기바오로와

막내딸현아리디아.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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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는서울대교구신부와예수회신부등모두 10명의사제들이미

사를보좌하였다.

이 자리에는 우리 내외와 친분이 두터운 정명조 부산교구장님을

비롯한김계춘도미니코신부님, 김화태성나자로마을원장신부님

과세분의수녀님, 자카르타한인천주교회김정렬모세신부님, 광

천성당연광흠신부님이참석해주셨다.

이날정진석대주교님은주례사에서“서로사랑하고존경하며, 신

뢰를가지고성스러운가정을이루라”고당부하신말씀은신랑신부

뿐만아니라모든참석자들에게평생삶의지표로서가슴깊이새겨

졌을것이라고생각한다. 막내딸은리디아, 사위는바오로란세례명

으로혼배성사를올리게되었다. 은총받은일이었다.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69

막내딸현아의결혼식피로연을마치고한자리에모인저자부부와

사돈인손병두총장부부. (2005년)

Page 37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시집간막내의텅빈방에서

혼인예식이끝난후나는먼길을마다하지않고특히외국에서

결혼미사에참석하기위해오신분들을경기도분당에있는집으로

초대하였다. 조국통일기도회등을통해더욱가까워진몇몇회장내

외분들이었다.

저녁식사자리는자연히혼인미사이야기와신랑신부를칭찬하

는덕담으로이어지다가결국막내딸을품안에서보내놓고쓸쓸해하

는우리부부의마음을헤아리고위로하는단계로까지이르게되었

다. 이렇게서로주거니받거니하며축하폭탄주까지마시게되었

다. 한참덕담이오가는가운데신혼여행을떠난막내딸이여행지에

서전화를걸어왔다. 안부전화를받은아내는그만북받쳐오르는

감정을억누르지못하고눈시울을적셨다. 시집보내는엄마의마음

이란다이런것인가.

이튿날이돼서야지난밤의어지러워진술상들이잔칫집이었음을

실감나게하였다. 떠날사람은다떠나고혼자가되었을때에야나는

비로소막내딸을시집보낸아버지라는것을실감하게되었다. 리디

아의빈방을들여다보니, 그동안아빠에게달려와스스럼없이안기

던어린시절의재롱이며밤늦도록책상에앉아졸면서책과씨름하

던모습이자꾸눈에아른거려목이메었다.

딸을시집보낸다른사람들의경험담을들을때는그럴수있겠다

고가볍게여겼지만, 막상직접겪고보니그렇지가않았다. 아버지

37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37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만이느끼는묘한상실감으로허전한마음을억누를수없었다. 큰딸

을시집보낼때도약간쓸쓸한느낌이들긴했지만, 아들과막내가

남아있다는위안때문인지이런감정은아니었다.

내가이런데, 아내야오죽하랴싶어저녁에보니, 아내는딸의방

에누워서한동안뒤척이고있는것같았다. 하룻밤을딸의침대에서

지내고새벽녘에야나타나는것이었다. 구석구석방을정리하고시

집간막내딸의사진을챙겨십자가상과함께걸어놓고나니, 눈시울

이뜨거워졌다. 이렇게우리의인생도덧없이흘러가는구나하는생

각이들면서나는감상에빠졌다.

서툴지만 뭔가 마음속에서 출렁이는 느낌을 글로 표현하고 싶었

다. 그래서머릿속에감도는상념들을정리하여이렇게적어보았다.

마음은가벼운데무언가빈것같구나.

남들은시원섭섭하다던데

허전하기이를데없구나.

막내딸이시집가서기쁨이큰데도

지금내가어디에와있나

세월을되돌아보게되고

인생이이런것인가하는생각

깊게만들었네.

막내손녀딸시집가는마지막저녁

손녀딸방에서함께주무시며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71

Page 37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잘살라고손을꼭잡아주시던할머니의

깡마른손등이눈앞에선하게떠오르네.

너무쇠약해진팔순의어머니를보니

자식된나는눈시울이뜨거워

먼산을바라보며눈시울을닦았네.

—「빈방에서」

혼사가끝난후성당에서만난지인들이아내에게몰려와세자식

모두좋은혼처로출가시켰으니, 우리도그런기(氣)를받게해달라

며포옹을부탁하는경우도있었다. 물론나도덩달아축하를받았

다. 뿐만아니라여러사람들로부터한턱내라는성화에못이긴척

하면서기꺼이기쁜마음으로꽤나많은술자리를마련하였다.

대희년에입맞춘천국의문

2000년은가톨릭월력으로대희년(大喜年)이었다. 이에앞서 1999

년 12월 24일자정교황바오로 2세는성베드로성당의육중한청동

성문(The Holy Door)을활짝열었다. 50년마다열리는의식이다. 세

상의죄를대속하고인류를구원하기위해인간의모습으로낮은곳

에임했던예수그리스도의탄생 2000년을기리고새로운천년을맞

37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37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이하는대희년의개막이었다. 천주교신자에게는특별한의미가있

는이런시점에바티칸시국을방문하게된것을우리부부는영광으

로여기고있다.

교황청이있는바티칸시국은이탈리아의수도로마안에있는작

은 독립국가로서, 전 세계 가톨릭의 총본산이다. 1929년 교황청과

이탈리아사이에체결된라테바라노조약으로국제법상주권을인

정받고있다. 한번에 30만명을수용할수있는성베드로광장앞에

흰색 선이 도로 위에 그어져 있는데, 이것이 이탈리아와 바티칸을

구분짓는경계이다. 인구는 1천여명으로, 성직자와수도자가대부

분이다. 평신도와외부에서들어온사람까지합쳐봐야 2천 3백명가

량된다.

성베드로대성전은바티칸시국남동쪽에있다. 이곳에는예수의열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73

바티칸시티에있는성베드로성당을방문한저자부부.

오른쪽세번째가천국의문이다. (2000년)

Page 37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두제자가운데한사람이자로마의초대교황인성베드로의유해가

묻혀 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1506년 4월 18일 율리우스 2세

(1503~1513년재위)가대성전의건립을시작하고, 그후 120년이지난

1626년11월18일교황우르바노8세에의해축성되었다고한다.

베드로 성전은 평소에 꼭 한번 찾아오고 싶은 곳이었다. 길이

200m, 폭 150m, 총건평 7천 2백여평이나되는베드로대성전은돔

부터가가히위력적이었다. 바닥에서바깥에있는십자가의맨끝까

지의높이가 136.57m에이를마큼거대했다. 이는세계에서가장높

은돔임을뜻하는것이다. 돔밑에는모자이크로된 4복음서저자인

마르코, 루가, 마태오, 요한의초상화가네방향으로그려져있었다.

이곳에와보니, 스위스청년으로구성된 200여명의호위병과세계

적인도서관, 박물관도관광객들에게인기가높았다. 보통수백미터

씩네다섯줄로서서몇시간씩입장순서를기다리고있었는데, 이

럴때길바닥에떨어진물건을주워관광객에게건넸다가는소매치

기로오인받기십상이다. 나는이런줄도모르고이같은행동을했다

가달려드는무리에게봉변을당할뻔했다. 자리를피하느라진땀을

빼지않을수없었다.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돈을 뺏어가는 경우가 있으니 주의하라는

말을미리듣긴했지만, 정문에들어서면서도긴장이되었다. 성당

정문계단앞에는성바오로상과천국의열쇠를쥐고있는성베드로

의상이보였다. 이열주회랑의생김새는예수가두팔을벌리고있

는모습을본뜬것으로, 하느님의사랑을나타낸다고하였다. 청동

베드로상은너무많은사람들이쓰다듬고입을맞춘탓인지동상의

37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37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한부분이유난히반질반질해질정도였다.

정결한마음의상태에서이마에성호를그으며천국의문을들어

서는순간, 금방눈물이쏟아질것처럼시야가흐려왔다. 나자신도

모르는사이에눈을닦는손등이젖어있음을느꼈다. 50년만에열리

는대희년을맞아적시에찾아온덕에우리내외는일생에한번있을

까말까한어려운기회를얻을수있었다. 행운이아닐수없었다. 이

처럼천국의문을지난얼마후나는꿈을통해서천국으로가는길

을보게되었다.

대성전내부에는 500개에달하는기둥과 400개가넘는조각상이

세워져있고, 따로분리된 44개의제대와 1천 3백개에이른다는모

자이크그림들이벽면을장식하고있었다. 36m 높이에세워진 126

위성인상과성전바닥의아름다운대리석의색채도눈길을끌었다.

특히성베드로대성전에서나의시선을사로잡은것은미켈란젤

로의‘피에타’(Pieta)였다. 십자가에서내려진예수를무릎위에안고

있는마리아상은신비스러우면서도야릇한느낌을주었다.

더욱이교황성하의선거장을볼수있었던것은더말할나위없

는큰소득이었다. 사람이꽉차있어서나는아내의손을꼭잡고엄

숙한 분위기에서 관람하였다. 교황을 선출하는 장소를 콘클라베

(conclave)라 하는데, 콘(con)은 with, 클라베(clave)는 key를말하므

로, 즉‘자물쇠가잠긴방’을뜻한다고한다.

교황선출권을가진추기경단이선거장에들어가면교황이결정될

때까지일체외부와단절되기때문이다. 그안에서일어나는모든것

은완전히비밀이며, 기록은교황청고문서실에보관된다. 이런선거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75

Page 37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방식은 13세기때 3분의 2의다수결원칙에따른선거의지연을막

기위해제도화된것이라고한다. 보통교황선거는바티칸궁이나성

당에서진행된다.

교황이선출되면선거용지를태워연기로새교황이탄생되었음을

알린다. 그러나검은연기가나올때는미결이라는신호이다. 새교

황이직책을수락하면공포된다. 이어서추기경들의순명선서가있

고, 교황은발코니에나가전세계를향하여첫강복을한다.

37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신비스러운느낌을주는미켈란젤로의피에타상.

Page 37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꿈에본지옥과천국사이

성경말씀처럼살수만있다면오죽좋겠는가마는세상을살다보

면, 여러면에서보이지않는마음의죄를짓게마련이다. 여기서말

하는죄란현행법적인죄가아니라신앙적인것을말한다.

어느날저녁에이상한꿈을꾸었다. 그야말로소름끼치는일이었

다. 밑에는바다가보이고위에는밧줄이바다를향해걸려있는벼

랑꼭대기에서나는질겁할상황에놓여있었다.

밧줄을잡고서서히깊은바다를향해내려가고있는데, 신기하게

도나의손에자동기계장치가장착된것처럼제동이걸리면서갑자

기몸이멎었다. 이어서밧줄에매달린몸이바다밑이보이는낭떠

러지에서벗어나넓은바위바닥으로무사히떨어지는것이었다. 그

순간안도의한숨이절로나왔다.

주위를살피며바위를벗어나담장을넘어가니여러명이취조를

받는장소가나왔다. 산너머산이라고고생길을만났다고당황하고

있었는데, 어느틈에내차례가된모양으로마치최후의심판을받

는모습과흡사한정경이벌어졌다. 이번에는손에장갑도안낀상

태로어둠이싸인커다란공간에서또다시밧줄을잡고시퍼런바다

로내려가야했다.

그런데심판관같은사람이나를보자이사람은괜찮다고하며자

유롭게행동하게해주었다. 하늘의천사들이움직이는것처럼아침

햇살이바다에반사하며나의눈을비추고있었다. 마음이아늑해지

는평화로운아침이었다.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77

Page 37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어느덧나는어림잡아 1만 t급이나되는금빛으로만들어진대형

여객선의선수에서서키를잡고있었다. 나는호화로운금빛갑옷을

입고있었는데, 맑은바닷물에반사된햇빛이나를반기는듯이사방

으로퍼져금빛세계를만들어놓는것이었다. 나는너무나황홀해서

마치스코틀랜드운하를빠져나가는것같은깊은감동을받았다. 천

사의배를타고영광의나라로떠나는느낌이었다.

나는한편의영화를본것같은기분이었다. 그것은단테의지옥

과천국을동시에겪은상반된모순의체험이었다. 전반부는나락으

로떨어지는인생막장의절망이, 후반부는위기에서역전되는환상

적인희망이나를가슴졸이게하였다.

인간은살다보면이제죽게되는구나! 여기게되는순간에부닥치

게되는경우가있다고들한다. 이럴때사람들은누군가에게의지하

게마련이다. 그것은곧기도로귀착되는본능이다. 종교를갖지않

아도자연히손을모아빌게된다. 죄를지은사람이라면기도하면서

도두려울수밖에없다.

그런사람들은기도를드려도아무런소용이없을것이라고판단

할지도모른다. 그래도기도를두려워해서는안될것이다. 기도는

곧구원이기때문이다.

나는밧줄을타고낭떠러지로내려오는꿈을꾸면서식은땀을흘

렸다. 꿈속에서도내가지은죄를생각하고있었다. 그런데나는바

다로떨어지지않았다. 죄의식없이참으로착하고좋은일을계속해

나가야겠다는생각을깊이하게한생생한꿈이었다.

37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37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해피통신’의취재대상으로

내가 MBC TV로부터「이홍렬의해피통신」에출연해달라는섭외

를 받은 것은 회갑을 앞둔 2000년 초여름이었다. 해외동포가 살고

있는세계여러나라에서현지인들과어깨를나란히하며당당하게

열심히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성공담과 감동적인 사연을 취재하여

소개하는교양프로그램이라고했다.

얘기의 핵심은 해외에서 각고의 시련을 딛고 오뚝이처럼 일어선

인물을골라소개하는데놀랍게도내가대상이되었다는것이다.

처음에는어색하고크게내세울만한것이없다는이유로극구사

양했으나, 결국담당자의거듭되는요청과간곡한설득에물러서고

말았다. 뒤에알게된사실이지만, 이홍렬MC와박혜진아나운서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이 프로그램은 2001년 11월 10일(토) 자정부터

방영이된이후「캐나다인들의입맛을바꿔놓은레스토랑대부김규

태」편을비롯하여「라오스의경제를움직이는한국인오세영」, 「보

석의제왕꿈꾸는태국의보석상인이근완」, 「프랑스의젊은만화가

김현아」등 43회에걸쳐소개되었다. 그러니까나는이기획물의마

무리를장식하는 44회의출연자가된셈이다.

끝내는담당김강렬 PD가이끄는촬영팀이자카르타로와서옛날

의자취와관련되는자료를체크하고사업현장까지찍는순서로이

어졌다. 사전에어떤방식으로진행하고또무엇을물을것인지귀띔

이라도해주었으면쉬웠을텐데, 아무런사전지식없이강행했기때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79

Page 38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문에무척당황했다. 게다가사전에적지않은자료를주었으나, 들

어가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번듯한 장면은 빠지고 오히려 부끄럽게

여겨지는사업초기의열악한상황만골라찍히는모양이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의정착과정과관련하여갑자기인터뷰를하게된

아내는어려웠던시절을회고하는대목에서목이메어말을제대로

잇지못했다. 낯선땅에서살아남기위해지문이닳도록일해야했던

지난날의가시밭길이떠올라그리되었을것이다. 다져진땅에물이

고이게된그나름의결실뒤에는이와같은아내의피눈물나는내조

가있었음을또한번절감하게하는순간이었다.

현지 로케이션이 끝나고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인터뷰가 있었다.

구성작가의권유는간편한차림으로나오라고하였으나, 우리부부

38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MBC TV ‘이홍렬의해피통신’에출연하여역경을딛고일어선삶에대해

얘기하는저자부부와이홍렬MC, 박혜진아나운서. (2002년)

Page 38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는당초의생각대로베스트드레서의복장으로나왔다. 나는사실방

송출연경험이없는지라가장좋고깨끗한옷을입고나오는것이

기본예의라고생각했다. 더욱이아리랑텔레비전으로전세계에여

러차례방영이된다하여신경이쓰였다.

긴장한나머지녹화에들어가기전에몇번이나화장실을들락거

렸다. 그러나막상카메라앵글이잡히면서대담에몰두하다보니어

느새긴장이사라지고, 30분간잡념없이녹화가진행되었다.

나는이자리에서이쯤되면성공했지않았느냐는진행자의질문에

성공의잣대는사람마다다르므로재물면에서성공했다고자신있

게말할수는없다. 그러나세자녀를제대로교육시키고손자와외

손자까지보게돼자손이융성하게되었으니, 가정적인면에서는성

공했다고본다고대답하였다.

한편인도네시아에대해서는조심스러운자세를취하였다. 외교적

인배려라기보다는내가반평생이상기반을잡고생활해온나라에

대한신중함과애정의표시였다. 행여사실과다른내용이나의도와

다른표현상의문제로오해가생기는일이없도록각별히주의를기

울였다.

그런데「이홍렬의해피통신」은공교롭게도내가출연한 44회를마

지막으로 2002년 10월 18일(금)종영되었다. 이프로를시청해온많

은해외동포들은한결같이“감동과용기와지식을한꺼번에준유익

한프로그램이사라졌다.”는평가와함께아쉬움을표시하였다. 서

백석이라는시청자는내가출연한프로를보고“무한히가능성이있

는나라인도네시아에서한국의좋은이미지를심고좋은일을하고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81

Page 38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성공하신김우재·박은주회장님부부께감사와격려의편지를띄우

고싶다.”며방송국에주소를문의해왔다고한다.

「인도네시아김우재회장」이라는제목으로방영된‘이홍렬의해피

통신’의개요는다음과같다. 인도네시아로건너간지 25년만에최

고의무궁화유통을세운김우재회장은산림사업에대한인도네시아

정부의 정책 변경과 외국인에 대한 경계로 인해 3년만에 아이들을

학교에보낼수없을정도로집안형편이어려워지자, 7평남짓한조

그만가게에서떡과고추장, 김치를팔기시작해갖은고생끝에오

늘의성공을일구어냈다. 현재무궁화유통의시장점유율은 80%에

이른다.

각기 30여분간에걸친현지촬영과스튜디오녹화로이루어진이

프로그램은이홍렬진행자의유머러스한질문과박혜진아나운서의

미소짓는대화로이어져인상이깊었는데, 그후연락조차제대로못

하였다. 머지않은장래에이분들을꼭발리로초청해야겠다는생각

을갖고있다.

회갑맞아찾은여행지페블비치

샌프란시스코에서자동차로 2시간반거리, 남쪽으로 160마일정

도떨어진몬트레이반도에있는페블비치(pebble beach)는캘리포

니아의 875마일에이르는해안선중에서가장아름다운곳으로정평

이나있다. 태평양연안을끼고달리다보면, 기암괴석에부딪치는

38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38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파도와쾌적한바닷바람, 풀잎에반사되어부서지는햇빛까지느낄

수있다.

페블비치콜프코스에오게되다니, 나에겐꿈만같았다. 회갑을

맞아아내와함께골퍼들이‘꿈의낙원’으로여기는페블비치에여장

을풀면서나는색다른감회로충만했다. 2003년 4월이었다.

오션뷰빌라 2층숙소에는예쁘고길쭉한난이우리내외와미국

에서합류한큰딸현미네식구들을맞이해주었다. 싱그러운난옆에

는목이긴글라스와함께샴페인이준비되어있었다. 샴페인병은

얼음에잠겨있어알맞은온도를유지했다.

얼마후우리내외는 18번홀의초원이보이는롯지클럽식당‘레

스토랑 19’에서회갑기념으로케이크를자르고적포도주로건배하

였다. 그런데솔직히회갑이라는단어가실감나지않고생소하게느

껴졌다. 창밖으로내다보이는깨끗하게정돈된빌라와경관이좋은

숲속에자리잡은맨션하우스들이때마침불어오는태평양의바닷바

람과어울려한폭의풍경화처럼깊은인상을심어주었다.

‘가시돋친장미’로통하는페블비치골프장은평생에한번만이라

도골퍼들이라운딩하고싶어하는장소로유명하다. 보통페블비치

라면페블비치골프링크스코스로여기기쉽지만, 넓은의미로는몬

트레이반도에있는골프코스전체를말한다는것이다. 몬트레이반

도에는스파이클라스힐, 사이프러스포인트, 스패니시베이등빼어

난풍광의골프코스들이즐비하다. 세계의 100대골프코스중에서

도항상상위권을차지하는환상적인코스들이다.

그러다보니이골프장은인기가높아원하는날에라운딩하기가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83

Page 38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결코쉽지않다. 이곳의리조트에머무는투숙객이아니라면그린피

가 300달러가훨씬넘고, 그나마 1년전에예약을해야하기때문이

다. 나도이와비슷한과정을밟아야했다.

나는이골프장에와서야캐럴송으로유명한영화<화이트크리스

마스>의주인공빙크로스비가페블비치의상징으로기억되고있다

는사실을알았다. 악명높은난이도골프코스옆에그를기념하는

동판이걸려있었는데, 1947년부터 1977년일흔여섯의나이로세상

을뜰때까지자신의이름을내건골프대회의호스트로활동했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니페블비치에는이지역을상징하는소나무외에빙크

로스비라는또하나의상징이있었던셈이다. 남태평양을끼고있는

이골프장은문외한인필자가보기에도설계가훌륭한것같았다.

38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회갑이실감나지않는페블비치의바닷가식당에서

아내와적포도주로건배하는저자. (2003년)

Page 38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페플비치바다의중간쯤되는 8번홀짧은파3홀은경사가심해밑

에서위로불어오는강한바람때문에그린에쉽게공을올릴수없었

다. 거기서많은사람들은티박스뒤쪽에서오른쪽바다를향해멀리

볼을치게마련인데, 대개는자신의소원을빈다고하였다. 우리도그

말을염두에두고그렇게하였다. 일행가운데어느부인은흥분한나

머지티박스뒤쪽으로먼저올라가려다넘어지기도하였다.

이골프장은아름답기만한것이아니라운영도잘되는느낌이들

었다. 해변을둘러보는데바위에올라앉은바다사자와새끼한마리

가눈에띄었다. 어미바다사자가뒤뚱거리며바닷물로뛰어들자새

끼바다사자도똑같은동작을취했다.

나중에는뭍으로기어나온새끼가어미등에업혀서바닷물로들

어갔다. 이렇게바다사자들은사이좋게물놀이를하거나, 떼를지어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85

페블비치링스프로숍앞에서. 외손녀수진, 외손자건우및

큰딸, 사위, 아내와함께. (2003년)

Page 38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드러누운모습을여러곳에서볼수있었다. 참으로평화로운정경이

었다.

나는페블비치여행에서돌아온후초콜릿맛을제대로알게되었

다. 산호세쇼핑몰에들렀다가줄을서서기다리는사람들을보고우

리도기다렸다가메리세어(marry sear’s)라는초콜릿을샀는데, 먹어

보니보통맛이아니었다. 달지도않으면서초콜릿향이배어났다.

문득수녀님들에게이초콜릿을선물하면어떨까하는생각이들었

다. 나는초콜릿을사고나오면서이렇게속으로말하였다.

“수녀님, 작은초콜릿에불과하지만젬마와베드로가드리는것이

니즐거운마음으로받아주세요.”

봉사하는마음으로맡은직책

40대에서 50대까지는 사업을 일구고 다지느라 정신없이 살아온

시기였다면, 60대이후는본의와는달리사회활동으로분주하게지

내온나날이었다고할수있다. 외국에서거의맨주먹과맨발로사업

을해온처지로세속적인명예나출세와는담을쌓아왔는데어쩌다

가두가지‘감투’를쓰게되었다.

하나는나의천직인사업과관련된자리였으나, 다른하나는사업

과는전혀무관한동창회간부직책이었다. 전자는세계해외한인무

역협회인도네시아지회의초대회장겸동남아시아연합회장직분이

었고, 후자는모교인한국항공대학교총동문회장자리였다.

38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38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관례없는모교의총동창회장자리

일반적으로학교를나온졸업생이라면자신의모교에대한애정과

자부심이깊게마련이다. 동시에규모가크든작든총동창회를조직

하여모교를돕거나동문과선후배간에친목을다지고단결을도모

하려한다. 대체로대학교총동문회는사회적으로명망이있고물심

양면으로헌신할수있는인사를회장으로추대하는것이관례로되

어있다.

그런데 전혀 뜻밖에 자질과 능력이 부족한 내가 총동창회장직을

맞게된황당한사건이일어났다. 2004년 6월 6일이었다. 여기서전

혀뜻밖이라고표현한데는이유가있다.

외국에거주하는해외동포가모국의학교총동문회회장으로취임

한사례는없으며, 또상식에도어긋나는일이기때문이다. 이런일

이생긴데는우여곡절이있었다. 어찌됐든해외에있는나의처지로

서는내막을알리없었다. 사전에국내의동문들가운데여럿이모

여나를총동창회장으로내세워야한다는데에의견을모으고여타

동문들을설득해총회의결의를받아낸것이었다.

국외거주자로서모교의각종행사와모임에참석치못할경우가

많을게분명하고적임자가못된다는이유로사양했으나, 이미결정

난일이라며받아들이지않았다. 끝내이결정을뿌리치지못한채

졸지에중책을맡고말았다. 나는그저총동문회와모교의발전을위

해열심히봉사하겠노라고간략한수락연설을할수밖에없었다. 국

내제1호해외동포총동창회장직을맡게된배경이다.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87

Page 38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경기도집에돌아와잠자리에들었으나착잡한생각으로잠이오

지않았다. 나중에는부담감때문인지열이나고식은땀까지나왔다.

이를눈치챈아내가보다못해봉사하는마음으로즐겁게하면되지

않겠느냐고격려를해주었다.

이에힘입어회장취임이후거의매월서울을방문하여며칠간모

든분야의행사에참석하고관련단체와의협력도모색하는등활동

을하였다. 며칠안되는서울체류기간동안시간을쪼개뛰느라이

른아침부터움직이다보니잠이모자랄지경이었다.

사람을만나고거절할수없는과음으로그이튿날에는혈압의수

치가매우높아져응급실신세까지지는일도있었다. 동창회장을맡

으면서처음으로혈압약을복용하는계기가되었다. 외국에살고있

는교포가전례없는직책을맡게돼긴장했던것이다.

38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한국항공대학교총동창회장재임시정기총회를주관하는저자. (2005년)

Page 38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그후총동창회장으로서주관하는회의에참석하고, 관련행사에도

나가다보니한국에머무르는시간이많아내거주지가서울인지, 자

카르타인지헷갈릴때가있었다. 이렇게모교의총동창회장을맡고

있는동안나는절반이서울사람이었다.

총동창회장은모든동창회의구심점으로원만한운영을위해동문

간의유대를돈독히하고재단과도협력할뿐아니라한편으로는특

수사립대학으로서총장이재단의눈치를보지않고총력을기울여

발전할수있도록밀어주며, 중재역할을하는자리였다. 향후의회

장에게도이런원칙은존중되어야한다고생각했다.

■한인무역협회지회의창립과역할

2007년 2월 1일, 인도네시아에있는견실한 55개회사의사장단을

회원으로 한 사단법인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World-OKTA) 인도네

시아지회가창립되었다. 동남아여러국가들중뒤늦게창립됨에따

라해야할일이많다는데에공감한회원들이정열적인심부름꾼으

로나를추대하였다. 일복을타고난것같았다.

1주일후쿠알라룸푸르에서열린옥타동남아협의회창립총회에

는각지역국가회장들이나를초대부회장으로선출하였다. 이를

계기로동남아를순회하며협력을구하고, 마닐라에까지가서업무

를협의한바있다.

1981년해외교포무역인들이고국의경제발전에도움을주고자

출범한 월드 옥타(World-OKTA)는 1994년 사단법인으로 설립돼 전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89

Page 39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세계 54개국, 101개지회에 6천여명의회원을두고있는대규모경

제단체이다.

그동안여러나라에거주하는교포 2~4세무역인을대상으로교

육프로그램을만들어각계각층의전문강사로하여금성공한 CEO

로활동할수있도록‘차세대무역스쿨’을실시하여자카르타에서만

2년만에 100명의젊은이들에게교육을마쳤고, 앞으로도매년이와

같은교육을실시할계획이다.

이런교육은후세들에게선배들이현지에서구축한인사들과의유

대관계를연결해주고노하우를전수해준다는점에서매우중요하

다고생각한다. 이처럼차세대교육은전세계에서교육받은 1만여

회원들과의네트워킹이이루어져훌륭한장래의역군들을배출한다

는자부심을가질만한시스템이라할수있다.

39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인도네시아지회창립식에서천용수회장(중앙)으로부터

단기를전달받는저자. (2007년)

Page 39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그래서 국회 차원에서 지식경제부를 독려하여 옥타의 예산을 확

보, 지원해주려는의원들이많다.

인도네시아에서는지회장연임을마지막봉사의길로여기고있는

데, 나는우선자카르타화지보오주지사를방문하여인도네시아옥

타와협력하기로하였다. 이자리에서그는자신을‘자카르타에거주

하는한국인들이안심하게살수있도록해주는주지사’라고소개하

여폭소를자아내게하였다. 유머감각과지혜가풍부한인물이다. 자

카르타시에서하는직업학교를도와달라는그의제안에우리는힘

닿는데까지돕기로하였다.

2008년부터는활동무대를더욱넓혔다. 상공부장관과국회부의

장을만나협력하기로하는한편, 정치및재계의지도자들과도공식

접촉을갖고상호관심사에대해논의하였다.

아울러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인도네시아지회를인도네시아상공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91

자카르타주지사화지보오씨를예방한저자. (2009년)

Page 39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회의소에등록하는것을원칙으로하고, 이나라최고의기업인경제

단체중앙회에들어감으로써한인인도네시아역사 42년만에처음

으로현지경제단체에공식회원이되는계기가되었다. 27개단체로

구성된이거대한경제단체에는수많은업종이가입되어있어한국

인들의기업활동과현지기업인들과의친교에도크게도움이될것

으로전망돼기대가자못크다.

2008년 7월 20일에는『월간중앙』이제정한‘세계를빛낸자랑스런

한국인경영인상’제1회수상자로저자가 32인의한사람으로선정

되어재인도네시아한인의위상을높이는데일조했다는말을주위

로부터들은바있다. 부족한나에게는과분한칭찬이아닐수없다.

더욱열심히봉사하라는권고로받아들이고있다.

2009년 2월 27일에는우리지회가주관하는월드옥타동남아활성

화대회가 3월 1일까지 3일간자카르타소재인티콘티넨탈호텔과발

39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월간중앙』40주년창간기념‘세계가주목하는자랑스런해외경영인’으로뽑힌

수상자들. 앞줄 왼쪽이저자. (2008년 7월 20일)

Page 39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리에서열렸다. 이를계기로인도네시아에기반을둔한국인사업가

들이크게고무되었으며, 앞으로더욱비즈니스의활성화에도적잖

이이바지할것으로기대된다. 일련의이런일들이나의회장임기

중에열매를맺기시작했다는데에보람을느끼고있다.

이런가운데나는이해 6월 1일부터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열

린 한·아세안 CEO 특별정상회의에 인도네시아 경제인들과 함께

월드옥타인도네시아지회장자격으로참석하였다. 아세안 10개국

경제인대표자간담회가끝나고나오는자리에서나는잠시나마이

명박대통령을뵐수있었다.

그러고보니나는전두환·김영삼·김대중·노무현대통령에이어

이명박대통령까지다섯분의한국대통령을직접뵙는기회를갖게

된셈이다.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93

한·아세안 CEO 특별정상회의에참석한아세안경제인회장단과함께한

이명박대통령(중앙)과 대한상공회의소손경식회장.

오른쪽에서네번째가저자. (2009년 5월 31일)

Page 39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손자의재롱과아들의분가

손자(범구)녀석과한집에서살때였다. 나는하룻밤에한번은꼭

일어나게마련이었다.

“할아버지, 나쉬야!”하면조건반사적으로일어나야했다. 아, 이

제는나도할아버지요, 어김없는노인이다. 한동안은숙면을취하지

못해낮잠을자곤했다. 이럴때는어김없는노인이다. 그래도그녀

석이귀엽다. 보통때는아침 6시산타성당의종소리를듣고기도를

하는데, 아내가삼종기도를마칠때쯤에야주섬주섬일어났다.

먼저기도가끝난아내는책상의스탠드불빛아래서성서필사를

계속하는데, 나는두개의촛불을켜놓고아침기도를드린다. 기도를

마칠무렵막내손자가눈을비비며할아버지의기도방으로와서품

에안긴다. 나는귀여운손자를껴안고녀석의궁둥이를쓰다듬는다.

옛날어른들과진배없는손자사랑이다.

4층창밖을바라보니밤새내린비가자카르타시내공기를정화

시켜놓은것처럼나무와건물이햇빛에영롱하게빛나고있다. 몇

년전꿈에서봤던, 황금빛대형선박에황금갑옷을입고항해하며

맞이한찬란한아침같은그런풍경이었다.

기도방에서기도가끝날때쯤이면피아노소리가조용히흘러나온

다. 이느낌은마치앞의꿈에서황금빛대형선박을인도하던천사

들의노래처럼온집안을즐겁게만든다. 며느리의솜씨였다. 성당의

성가대지휘자로봉사하는엘리자벳, 손자들과함께동요를비롯해

39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39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가스벨송을부르며흥겹게피아노반주를하는며느리의존재가우

리에게신앙생활의기쁨을더해준다.

기도가끝나면우리부부는아침스트레치를하면서정원에서바

쁘게아침운동을시작한다. 운동을할때면두녀석이합세하여할아

버지와할머니의등과배에올라타며운동을같이한다고야단법석이

다. 이런것들이사람사는자연스러운일면이아닌가싶다.

그런데막상데리고있는아들네들을분가시키기로결정하고이사

날짜가다가오자갑자기쓸쓸해지기시작했다. 손자들과떨어져산

다는건가슴을뻥뚫게하는것이나다름없는일이었다.

이제우리부부도보통사람들처럼단둘이서만살아야되는구나,

하는생각에이르자한번은겪을일이라는것을잘알면서도솔직히

허전한마음을금할수없었다. 장성한자식들에게는앞으로누리고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95

손자와사무실에서망중한을보내는저자부부. (2001년)

Page 39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살다른세상이있다는것을받아들여야하는때가온것이다.

한편미국산호세에서사는큰딸현미의아들박건우(당시 11세)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도늠름하게하이킹자전거를타고산호세

시내가보이는가파른산을올라가는씩씩한모습을보여주어나를

흐뭇하게하였다. 그때우리내외는건우와외손녀수진을데리고샌

프란시스코스탠퍼드대학건물을둘러보았다. 아이들과함께대학건

물의기둥을껴안고건우와수진이가성장하면이렇게좋은대학에

들어가게지혜와건강을주십사하고기도를드리고기가돋게해주

었다.

그동안우리부부는손자들의재롱으로인하여참으로행복하였

다. 아내가손자를안아주다가균형을잡지못해허리가삐끗거리는

바람에침술치료를받아야했던일도있지만, 그마저즐거운추억거

39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미국뉴저지주에사는외손자박건우(14세)와 외손녀수진(12세).

Page 39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리가되었다. 나는그때아내를위해수마트라에서웅담을구해위스

키에채워서가져왔다. 직접곰에서채취한쓸개로불편한아내의

허리가 완쾌되기를 바라면서 귀가를 서둘렀던 일을 아내는 알고나

있을까?

2006년병술해를맞이하면서우리부부는세번째삶의길로접어

들었다. 첫번째는남남이하나로결합돼가정을이룬점, 둘째는자

식을낳아길러독립시킨어버이의삶이며, 세번째는처음처럼다시

부부만의호젓한생활로돌아오게된길이다.

스스로느끼는행복

한해를마감하기가아쉬운것은어느길을걷든지간에많은사람

들이느끼게되는세모의공통점일것이다. 사람들은한해가기울면

거의예외없이세월의빠름을이야기한다. 나는연말이되면첫딸이

태어나던 38년전함박눈이펑펑내리던날의일이떠오른다. 1969

년 12월 11일, 그날대한항공(포카 F27)이강릉에서이북으로납치되

었다. 나는그때강릉지점으로출장중이었다. 선배와막걸리를마시

다가늦는바람에해산의고통에시달리는아내를보지못하긴했으

나, 납북비행기를놓친것이전화위복이되었다.

그대신오밤중까지꽁꽁얼은길을걸어탑승객의집을가가호호

방문하여위로해주느라며칠간밤잠도자질못했다. 이런사정이되

다보니첫딸이태어났어도충주까지가볼수가없었다. 아내가출산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97

Page 398: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한지 2주만에첫딸의모습을보기위해명동 KAL 빌딩에서퇴근하

여함박눈이내리는명동길을재촉하던나는행복했다. 캐럴송이울

려퍼지는크리스마스이브였다.

그렇게태어난큰딸현미가지금미국산호세에살고있다. 큰외손

자가벌써열네살이되었으니세월이빠르다고하지않을수없다.

연말에대한또하나의기억은 2003년크리스마스이브로돌아간

다. 자카르타에서아내와막내여동생길재와함께열대나무로시원

하게조경된자카르타의북쪽아름다운해변카푹골프장에서골프

를즐기고돌아온날이었다. 저녁에는성당미사에참여키위하여식

사시간에맞춰서둘러온것인데, 3주전부터실내에꾸며놓은크

리스마스트리가전등에반사되어유난히아름답게보였다.

그럴수밖에없는것이인도네시아에는겨울이없어한국에서생

각하는낭만적인화이트크리스마스와같은분위기는기대할수없

기때문이다. 한국에서라면땀을흘리는여름날의성탄절을상상이

나할수있겠는가.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대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준비된 식사는

평소와는달리양식이었다. 보통식사는내가좋아하는된장찌개중

심이어서그쯤되는메뉴인줄알았더니완전히달랐다. 넓죽한누들

과긴피조개를섞은것이며, 푸라운(새우)으로된크림스푸, 사용하

는접시들이크리스마스분위기에딱어울리는것이었다. 빨강, 파

란, 흰색이어우러진접시의선택도마음에들었다.

준비된적포도주는흥을더욱돋아주었고영화주제곡인재즈풍

의멜로디는환상적인분위기를자아내게했으며, 4개의촛대에불

39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399: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을붙이는며느리엘리자베스(양수려)의모습또한환상적이었다. 어

른들의일에는아랑곳없이식탁밑을돌아다니며노는생후 11개월

된둘째손자민구도너무귀엽기만하였다. 나는식탁에둘러앉은가

족들을보며너무나흐뭇했다.

맛있는저녁식사를끝내고아내는서로다투다시피할머니, 할아

버지에게엉겨드는범구(4세)와민구두손자를보고“이보세요! 바로

이런것이진짜행복이겠죠?”하며좋아하였다. 나도“그려! 행복만

점이야.”하고맞장구를쳤다.

그런데이번성탄절은유달리행복했다. 손자들과어울려지냈기에

더욱값진메리크리스마스였다고생각된다. 진정으로크리스마스의

행복을느낀다면그리스도의탄생을기뻐하는만큼, 어려운이웃과

나눔의마음을갖고실천하는삶이뒤따라야한다고다짐하였다.

귀여운손자들을위해우리부부는크고빨간주머니를잠든아이

들의머리맡에걸어놓는것을잊지않았다. 아침에깨면애들은산

타클로스가간밤에몰래갖다놓고간선물로여길것이다. 녀석들이

기뻐하는모습이눈에선하다.

성탄의유래를살펴보면, 초대교회에서는 4세기까지성탄을축하

하는날을따로가진적이없었고, 336년에이르러서야성탄축일을

12월 25일로 지키는 관습이 널리 펴졌다고 한다. 이는 로마인들의

이교적인 국가 축제일이었던‘무적의 태양의 탄신일’(Natale Solis

Invicit)을그리스도교화한데서비롯되었다는것이다.

314년로마의리베리오주교는이날을성탄일로판정, 그해로마

축일표에기록했고, 5세기초에예수성탄일로정식선포하게되었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399

Page 400: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다. 이후 5세기말부터대부분의교회가 12월 25일을예수님의탄생

의미가아닌축일로정해서기리게되었다고한다.

해마다연말이면큰딸이 1년내내수집한가족들의사진으로만든

달력이기다려진다.

4대가한집에모인기쁨

미국에살고있는큰딸은매년여름방학이면남매를데리고경기

도에있는친정집으로온다. 이때를이용하여멀리인도네시아에서

온엄마, 아빠와막내동생과합류하게된다. 그래서우리내외는아

이들과 함께 한국의 한여름을 맞으며 즐거운 추억거리를 만들어간

다.

날짜가한정되어있어서 1주일쯤지나면친정의본거지인자카르

타로옮기게되는데, 외손자, 외손녀와큰딸, 막내딸, 그리고우리부

부가봉고차에타고공항으로떠날때는겨우문이닫힐정도로가득

차서볼만하다. 이렇게자카르타에모인일행은현지의아들네식구

들까지합쳐지면서한달동안떠들썩해진다. 이때는이미고국의노

할머님(우리는왕할머님이라고부른다)이미리도착하여들뜬마음으

로기다리고계신다.

노할머니는 2009년현재연세가여든아홉살로서여느노인분들

과마찬가지로기력이쇠잔하시다. 이런어머님을뵐적마다나는인

생의무상함을느끼게된다. 언젠가어느재벌댁을방문했을때안

400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401: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방양지쪽에앉아있는노인이연상되었기때문이다. 몸이야윌대로

야윈데다움츠리고있는모습이얼마나초라하게보였던지, 돈이많

으면무슨소용이랴싶은생각이들었다. 먹는나이는어쩔수없이

모든것을뺏어간다.

인생은 60부터라던데, 나도그렇게되는가생각하게된다. 64년전

어머니등에업혀서칭얼대던일들이가까운시절의일처럼스쳐지

나간다. 미국에서온외증손자와손녀는노할머니의지팡이를가지

고들어와친손자와함께셋이서꼬부랑할머니의흉내를내어한바

탕웃겼다. 또한노할머니의앉아있는모습을흉내내며자신들을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401

뒷줄오른쪽부터아들종헌, 며느리양수려, 작은사위손석기, 막내딸현아,

큰사위박형세, 큰딸 현미, 중앙 저자부부.

왼쪽 앞줄외손주/손녀박건우, 박수진, 손용주, 손용희, 손자 윤구, 민구, 범구.

Page 402: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402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올여름에도저자부부의 3세들이자카르타에모여즐거운시간을가졌다.

위로부터큰외손자박건우와작은외손녀손영희, 그리고손영주, 박수진,

아래는친손자범구, 윤구, 민구 등꼬마삼총사. (2009년)

Page 403: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쓰다듬는사랑스러운손길까지따라하였다.

이런가운데무엇인가군것질거리를챙겨서갖다드리는손녀며늘

아기와이모습을사랑스럽게바라보는노할머니를보면서나는흐

뭇하기이를데없었다. 아내는아내대로쇠약해진시어머니를병원

에모시고가서친찰을받게하고, 집으로간호사를불러알부민주

사를맞으시게하는등섬세한배려를하였다.

2007년 7월 17일, 자카르타의집에는두사위만빠진열한명의식

구와집안일을돕는여섯명의아이들까지모두열일곱명의대식구

가모여북적대며즐거워하였다. 요즘세상에생후 6개월된증손자

에서 80대후반의증조모까지 4대가한자리에모여있다니, 보기드

문장면이아닐수없었다. 무엇인가특별한은총이우리가족에게

가득채워주시는것같은느낌이들었다.

아이들이노할머니로부터굿나이트뽀뽀를돌아가며받고잠자

리에들어갈때의모습은행복하게어울려사는삶의단면을보는것

같았다. 매년이무렵에는한국에있는막내딸과노할머니까지자카

르타로모시게되는데, 이는우리가족의큰기쁨이아닐수없다. 이

럴때는온집안이시장통처럼왁자지껄하다. 사람사는집처럼활기

가넘친다. 아이들이장난질치다가넘어져울고다투기도하지만,

웃음소리가끊일새가없다.

이런가운데아이들은은연중에어른들로부터배우게된다. 윗사

람을공경하는방법을배우게되고, 서로어울려서사는가족의소중

함을깨닫게된다. 그야말로여름방학동안자카르타의 4층집은아

이들의즐거운놀이터이면서동시에산교육장이된다.

제9장 / 고생 끝에 낙이 오더라• 403

Page 404: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한적한오후, 어린증손자를소파에서안고있는어머니의모습은

마치고목에새순이돋아나는것같은윤회의느낌을준다. 나날이

상태가달라지는어머니가내년에도증손자의엉덩이를만져주고,

기저귀를갈아주시며포근한소파에기대어알맞은온도의에어컨

아래서편안히낮잠을즐길수있기를, 그리고앞으로도오늘같은

행복이계속되기를마음속으로주님께기도하였다.

404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405: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에필로그

나는아직도할일이많다

외국에서는삶자체가항상여유롭고호화스러운것만은아니다.

어떤때는외롭지만의지할데가없어서향수를달래야하는곳이외

국이기도하다. 사업초기에는도움을받아야살수있기때문에남

을돕다가내자신이도움을받게되는수가있다는말에유념했다.

사업가는현재에만족한다면발전할수가없다. 적극적으로발전의

길을모색하고연구하는도전의식이필요하다.

특히사업초기의방심은금물이라는것이다. 내가중간에긴장을

풀고방심했다면오늘의이같은결과는기대하지못했을것이다. 그

래서요구되는것이자기분수에맞는‘잣대경영’이다.

여기서다기술하기는어렵지만, 내가살아오면서체득하게된것

은성실하고정직하게살아간다면, 반드시성공할수있다는확신이

에필로그 / 나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 405

Page 406: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었다. 하지만뼈를깎는듯한시련을각오해야한다. 파란곡절없는

인생은격랑을모른채항해에나선겁없는배와도같다. 언제난파

될지모르기때문이다.

그동안인도네시아에는적지않는한국인들의도전이있었다. 그

대표적인인물이최계월(崔桂月, 90세)이라는개척자다. 그는 1967년

한국인 해외 투자 1호를 허가받았다. 처음으로 원목개발의 야심을

갖고칼리만탄정글에뛰어들었다. 100여명의선발대를이끌고들어

간지 12년만에 45만정보의밀림지대를개발하는데성공했다. 당

연히시련이따랐다. 그는두차례의오일쇼크가휩쓸고간 1970년

대에도해외자원개발에도전하는과감성을보였다.

사업가는아니지만, 일제강점기때인도네시아자바섬에서일본군

과싸우다총상을입고자결한민영학(1916~1945)이라는애국지사가

있다는말을최근가까운지인으로부터듣고감회에젖은때가있었

다. 충북영동에서태어난민지사는일제말기인 1944년 12월일본

군속으로이지역에서연합군포로감시원으로복무했다. 이듬해정

월 4일 싱가포르로 전속 명령을 받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탈출하여

일본군과총격전을벌이다가희생되었다고한다.

이와는정반대로인도네시아와깊은인연을가진사람이있는데,

허영(許泳, 1908~1952)이라는친일파영화감독이다. 그는일제말기

에내선일체를강조한영화<너와나>(1941)를만들고히나츠에이타

로(日夏英太郞)라는일본이름으로행세하다가일본이패망하자인도

네시아에정착하였다. ‘휸’이라는이름으로활동하며신생인도네시

아공화국의영화와연극발전에기여하였다. 그는식민지하의인도

406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Page 407: 인니에 핀 무궁화 책자

네시아의역사를배경으로네덜란드여성과인도네시아청년의사랑

을그린<하늘과땅사이>(1951)등을만들어현지인들로부터우호적

인평가를받았다고한다. 그의무덤이자카르타시내푸탄불란에있

는것으로알려져있다.

이상의인물들은각기활동분야가다르고영욕을달리하고있지

만, 인도네시아와각별한관계가있는사람들이라는점에서이글을

읽는분들에게알리고싶었다.

외국에서생활하다보니비행기를자주타게된다. 항공편을이용

하다보면, 지인들과오랜만에만나게되는우연을바랄수있어기

대가되기도한다. 나이가들수록점차참여하는모임도많아져서잘

기억해야만약속을지킬수있을정도가되었다.

시간 활용면에서 보면 사업적인 일보다는 비사업적인 경우가 더

많아진 느낌이 든다. 어느 후배가 시간적 여유를 묻기에 나는

NBB(Non business is busy.)라는말로시간이없다는푸념을했다. 그

러자저도선배님처럼시니어가되어서NBB가되고싶다고하였다.

후배가그뜻을제대로파악하지못한것같아그내용을설명해주

었더니그때서야크게웃었다.

어떤일이든분주한것은아주좋은일이라고생각한다. 중요한것

은이런생활패턴을계속유지하는일이다. 언젠가는자카르타의라

와망운골프장에서마르타라는프로와라운딩을하는데, 함께조인

한분이일흔아홉살이나되는노인이었다. 그는여유있게골프를

즐겼다. 알고보니이분은개인사무실을운영하며미인비서까지

두는여유로운삶을이어가고있었다. 나는그때이초면의노신사를

에필로그 / 나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 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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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인생의황혼기에임하는노인의생활방식과지혜를배울수있

었다.

나는정치인도아니고군인도아니다. 기질상으로는군인에가깝

다고할수있다. 한때는차라리군인이될것을한적도있었다. 하

지만사업을하며평범한인생을살기로하였다.

그래도나에게는행운이따랐다고생각한다. 사업에실패하여끼

니를걱정했던시절도있었지만, 영구히운영될수있는사업체로안

정시켜우리부부가행복한초로의생활을하게해주었다. 이는주님

이주신은총이라고믿는다. 그래서늘감사한마음으로살고있다.

우리부부는자주말하기를서로 10년씩낮추어아내는 40대, 남편

408 •인도네시아에 핀 무궁화

무궁화유통은저자의인생그자체이며삶의가치를실현하는도구였다.

앞으로는노년에이른경험과경륜으로후세에게조언하며,

공동체적나눔의정신을실천하는여유를더많이갖고싶다.

사진은나폴리항구를지나지중해카푸리섬으로향하는선상에서.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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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50대라고하며아직젊었다고너스레를떨며자랑한다. 이제는일

부러좋게봐주려고하는지주위에서도젊게보인다고맞장구를쳐

준다.

아직도나에게는한가한날이없다. 인간은나이가들어도바빠져

야하고, 바쁜가운데여유를찾아야그여유를만끽할수있다고생

각한다. 바쁜현대인의생활은건강을해칠수도있다고한다. 나는

시니어로접어들면서바쁜생활을할수있게된데대해‘감사’란말

로표현하고싶다.

우리가족은천주교에입문하고서지속적인주님의가호안에서

살게되었다. 그전에이미어린자식들은성당에서교리공부를마

쳤다. 나는 큰딸로부터 우리에게 매년 경사가 겹치고 있어 참으로

은총받은집안인것같다는말을들었다. 나역시이생각에공감한

다. 나는자식들로부터종교에대한유산을물려주어감사하다는말

을들을때마다보람을느낀다. 이처럼자녀들이같은종교를갖고

건강하며, 훌륭한짝을만나혼사도잘이루어냈으니더이상무엇

을바라랴.

나는 가족을중히여긴다. 스스로가정주의자라고말할수있다.

나는아내와함께가족모임에서사업만이삶의전부가아님을강조

한바있다.

또한자손들이부모의사업과사회사업에영향을미칠수없음을

내비쳤다. 왜냐하면나는능력이있는한사업은계속한다는뜻을

가지고있다. 사업을위한계획은연중계속되며, 나이가들어감에

따라별도의조그만사회사업을할수있다는데에도생각이미치게

에필로그 / 나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 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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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

나는졸부도아니고그렇다고대단한부자도아니다. 하지만자식

들잘가르치고, 부부가부족함이없이살면서비록적은것이지만

도움이필요한사람들과나누며살았다. 아내와아들과함께최선을

다하고있는‘무궁화유통’은나의인생그자체이며가치를실현하

는도구다. 헌신적인아내의내조가없었다면, 지금의안정된생활은

기대하기어려웠을것이다.

남편인내가어려워속수무책일때는힘을내도록용기를주고격

려해주었다. 또낙담할때는소매를걷어붙여지문이다닳아보이

지않을만큼김치를버무리고메주를담그며, 고추장을만들어힘이

솟도록독려하였다. 부부가힘을합치면큰시너지효과를거둘수

있다는사실을실천으로증명하였다.

우리부부는사업도같이하고사회봉사도함께하고있다. 때로는

어느쪽이먼저하든서로격려하는것을잊지않고있다.

그동안세월이유수처럼흘러강산이세번바뀌는시간이지나갔

다. 이제는머리카락이세어염색을해야되고, 주름살도늘었다. 하

지만당분간은정년이없다는신념으로살아갈생각이다.

앞으로나에게바람이있다면, 움직일수있는날까지비서가있는

사무실을유지하고, 공동체적나눔의정신을실천하면서현재의사

업이지속적으로발전할수있도록뒤에서돕고싶다.

대부분의일은후세에게넘겨주어실행할수있도록맡기고, 노년

에이른경험과경륜으로조언하며나이는무시하고살아갈것이다.

아직도내게는할일이많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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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경력

아호홍사(洪史)

1943년충청남도홍성군광천읍월림리출생

광천중학교, 성남고등학교및한국항공대학졸업

1967년대한항공공사입사

1977년인도네시아로이주

무궁화재단이사장

무궁화장학회회장

무궁화어린이심장병수술돕기회회장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재단이사역임

자카르타한인가톨릭초대평신도협의회장역임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역임

한국항공대학교총동창회장역임

세계라이온스클럽자카르타메트로폴리탄중역

(사)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인도네시아지회회장

(사)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상임집행위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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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동남아시아연합회회장

무궁화유통회장

㈜코인부미회장

㈜푸리마무다건설회장

㈜부미관광회장

㈜부미인다막물레스타리회장

상훈관계

인도네시아후생복지훈장수훈(2008년)

자랑스런해외경영인상수상(2008년, 월간중앙)

대한민국고객감동그랑프리대상수상(2009년, 한국일보)

한국항공대학교명예의전당헌액

저서(공저) :『인도네시아의명소와명문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