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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初 洪武帝의 말 强要와 麗明關係 * 1) 林 常 薰 (全北大) Ⅰ. 序 言 Ⅱ. 明初 東아시아의 情勢와 麗明 關係 Ⅲ. 軍馬 充當과 洪武帝의 最初 對高麗 軍馬 要求 Ⅳ. 洪武帝의 軍馬 强要를 通한 對高麗 壓迫 Ⅴ. 結 語 Ⅰ. 序 言 14세기 중엽부터 말은 동아시아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이다. 中國에서는 元의 몰락과 明의 교체가 일어났고, 곧이어 한반도에서 역 시 高麗가 무너지고 李成桂에 의해 朝鮮이 들어서는 격동의 시기였다. 중국 대륙과 한반도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단순한 왕권 교체만으로 볼 수 없다. 이는 중국에서 宋 이래로 흔들려 결국 무너졌던 漢族 中心의 國際秩序가 朱元璋의 명 건국 이후로 다시 재건되려 함을 나타낸다. 이에 명은 각종 정책을 활용하여 주변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나갔다. 이중 명과 한반도 고려ㆍ조선과의 관계는 우호와 적대를 무수히 반복 하는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 이 논문은 2013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 된 연구임(NRF-2013S1A5B5A07048474). 중국사학회 제86회 학술발표회에 서 발표한 논문을 수정ㆍ보완한 것이며, 토론자이자 본고의 완성에 많은 조언 을 해주신 김경록 선생께 감사를 드린다.

明初 洪武帝의 말 强要와 麗明關係 - KNUchina/CHR/chr2015/chr99pdf/chr99-05... · 2016-01-03 · 明初 洪武帝의 말 强要와 麗明關係* 1) 林 常 薰 (全北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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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明初 洪武帝의 말 强要와 麗明關係*1)

    林 常 薰 (全北大)

    Ⅰ. 序 言

    Ⅱ. 明初 東아시아의 情勢와 麗明

    關係

    Ⅲ. 軍馬 充當과 洪武帝의 最初

    對高麗 軍馬 要求

    Ⅳ. 洪武帝의 軍馬 强要를 通한

    對高麗 壓迫

    Ⅴ. 結 語

    Ⅰ. 序 言

    14세기 중엽부터 말은 동아시아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이다.

    中國에서는 元의 몰락과 明의 교체가 일어났고, 곧이어 한반도에서 역

    시 高麗가 무너지고 李成桂에 의해 朝鮮이 들어서는 격동의 시기였다.

    중국 대륙과 한반도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단순한 왕권 교체만으로 볼

    수 없다. 이는 중국에서 宋 이래로 흔들려 결국 무너졌던 漢族 中心의

    國際秩序가 朱元璋의 명 건국 이후로 다시 재건되려 함을 나타낸다.

    이에 명은 각종 정책을 활용하여 주변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나갔다.

    이중 명과 한반도 고려ㆍ조선과의 관계는 우호와 적대를 무수히 반복

    하는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 이 논문은 2013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

    된 연구임(NRF-2013S1A5B5A07048474). 중국사학회 제86회 학술발표회에

    서 발표한 논문을 수정ㆍ보완한 것이며, 토론자이자 본고의 완성에 많은 조언

    을 해주신 김경록 선생께 감사를 드린다.

  • 中國史硏究 第99輯 (2015.12)136명초 洪武帝는 명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국제질서에 고려를 편입

    시키기 위해 고려에 먼저 사신을 보내 명의 건국을 알리는 등 비교적

    우호적인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이도 잠시 북원과 고려의 관계를 의

    심한 홍무제는 고려를 적대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北元은 漠北으로 밀

    려나긴 했지만, 여전히 명의 존폐를 위협하는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

    다. 게다가 고려는 恭愍王代에 들어 비록 親明反元을 주장했지만, 忠

    烈王 이래 원의 駙馬國이 되면서 ‘舅甥之好’라는 매우 특수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점들로 인해 홍무제는 고려와 북원의 通交를

    극도로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일어난 反元親明을 내세운

    공민왕의 弑害, 明使의 살해, 李仁任의 親明과 親元의 반복 등 연속된

    악재는 홍무제의 고려에 대한 호감을 점차로 猜疑心으로 변모시켰다.

    이로써 홍무제는 고려에 여러 가지 강압책을 사용하여 고려와 북원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 하였다. 막대한 조공품 요

    구와 陸路를 통해 사절단이 오게 되면 명의 군사 정보를 북원에 유출

    시킬 것이라고 의심하여 海路를 이용하게 한 것, 그리고 고려를 무력

    으로 멸망시키겠다고 위협하던 것 등이 그 대표적인 강압책이었다.

    홍무제가 고려ㆍ북원의 관계 단절, 고려에 대한 통제력 강화 등의

    목적으로 실시한 여러 對고려 강압책 중 무리한 軍馬 强要는 많은 가

    시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실제로 홍무제는 홍무 7년(공민왕 23년,

    1374년)부터 홍무 25년(공양왕 4년, 1392년)까지 19년간 고려에 2만

    3천 여필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의 말을 요구했으며, 고려는 이 막대한

    양의 말을 준비하기 위해 많은 힘을 낭비해야만 했다. 또한 당시 전쟁

    의 주요 수단이었던 말을 수탈함으로써 고려의 군사력을 크게 감소시

    킨 만큼 반대로 일정 정도 명의 군사력 증강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

    다. 이렇듯 홍무제의 고려에 대한 말 강요는 홍무제의 바람대로 군사

    ㆍ경제ㆍ사회 등 다방면에서 고려를 옥죄어 북원과의 단교는 물론 고

    려의 명에 대한 군사적 위협 정도를 상당 가량 감소시킬 수 있었다.

    이처럼 당시 홍무제의 고려에 대한 말 강요는 명초 麗明關係에서 중요

    한 부분을 차지하는 문제이나 이에 대한 연구는 그다지 많지 않다. 더

  • 明初 洪武帝의 말 强要와 麗明關係 (林常薰) 137욱이 이러한 연구들은 말을 주로 교역물로 삼아 경제적인 측면을 강조

    하고 당시 한중관계에서의 중요성은 소략하거나, 지나치게 명의 강압

    과 고려ㆍ조선의 피해에만 초점을 맞춘 경향이 있다.1) 또한 앞선 연구

    1) 이 시기 말 진헌에 관한 연구 성과로는 먼저 꾸준히 馬政에 대한 연구를 해

    왔던 南都泳의 논문을 들 수 있다. 그는 먼저 당시 명의 고려와 조선에 대한

    말 요구가 조선을 얼마나 경제적으로 수탈했는지 설명했고, 당시 말이 매매되

    던 자세한 과정과 가격을 많은 사료들을 인용함으로서 정리해 놓아, 명초 고

    려와 조선의 말 가격과 명에 대한 말의 진헌 수량 등을 일목요연하게 확인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남도영의 논문은 아래와 같은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즉,

    명의 고려와 조선 공마를 지나치게 收奪的 성격과 그 賣買 과정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점이다. 명초는 동아시아 세계에 漢族 中心의 천하질서가 새롭게 재

    편되어가는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명이 왜 고려와 조선에 막대한 수의 말

    을 원했는지, 또 고려와 조선 역시 이러한 과정에서 말을 진헌하면서 어떻게

    사대질서의 약자로서 적극적인 면을 발휘하였는가 등은 당시 급변하는 한중관

    계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만, 그는 논문에서 이와 같은 내용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즉, 남도영은 ‘대명관계’라는 제목과는 달리 명과의 말을 통

    한 교류, 그리고 그로 인해 고려와 조선이 당했던 피해에 집중하여 미시적으

    로 공마로 인해 발생했던 피해와 그 자세한 과정을 살펴보는 데 그쳤던 한계

    가 있다. 실제로 이러한 막대한 수의 공마로 인해 고려와 조선이 감수해야 했

    던 경제적 피해와 부당성은 그의 논문 ‘3장 대명(중국) 외교관계’의 1절 ‘명의

    징마 요구와 그 수탈성’에 잘 나와 있는데, 논문의 약 1/7이라는 많은 부분을

    사용하여 기술하여 공마의 폐해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면이 있다(南都泳, 「麗末 鮮初 馬政上으로 본 對明關係」 (東國史學 6, 서울: 동국사학회, 1960), pp.26-74); 김위현은 방대한 사료를 인용하여 이 시기 공마의 과정을 자세하

    여 기술하였으나, 당시 명과 고려의 관계라든지, 명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

    와 같은 내용에 대해선 별다른 언급 없이 공마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나열

    하는데 그쳤다(金渭顯, 「高麗與明之間的貢馬問題」, 韓國學論文集 7, 北京: 北京大學 韓國學 研究中心, 1998, pp.289-295); 김순자는 공마의 가격과 매매 등 경제 교류의 내용과 성격을 밝히는 것으로 당시 對中國關係의 성격을 이해

    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논문은 공마를 對中國 公貿易의 특수한 한 형태로 인

    식하며 그 규모와 가격을 살펴보는 것을 중심으로 그쳤다. 그 결과 명과의 馬

    貿易은 교역 형식을 취하긴 했으나, 고려와 조선의 입장에서는 경제적 측면에

    서 그 가치를 인정하기 어려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경제사적인 측면에

    서 당시의 공마를 살펴보는 것도 매우 의의가 있지만, 당시 공마가 시행된 국

    제정세에 대해 논문의 결론 부분에서 소략했던 점 또한 안타깝다. 또한 명ㆍ

    고려ㆍ조선 이 삼자 중에서 공마의 교역에서 주도권을 쥐고 강제적으로 요구

    했던 명의 입장보다는 주로 고려와 조선의 입장에서 살펴보아 명에서 과연 무

    슨 목적으로, 어떠한 이유에서 고려와 조선에 그러한 무리한 요구를 했는지

    알아 볼 수 없는 문제점도 존재한다(김순자, 「麗末鮮初 對明 馬貿易」, 韓國史

  • 中國史硏究 第99輯 (2015.12)138들은 事大秩序 속에서 朝貢의 일환이었던 進獻馬와 홍무제의 고려에

    대한 懲戒를 목표로 한 말 강요와의 구분을 두어 설명하지 않고 있다.

    이에 본 연구는 이러한 先學들의 연구 성과와 한계를 기초로 하여, 고

    려말 복잡다단한 여명관계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홍무제의

    고려에 대한 말 강요의 성격ㆍ영향 등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Ⅱ. 明初 東아시아의 情勢와 麗明關係

    14세기 중엽부터 말까지는 동아시아의 정세가 급변하는 시기로, 이

    시기 한중관계에서도 역시 상당히 복잡다단한 면모를 보인다. 이 시기

    한중관계에서 말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아보기 이전에 이 시기 동아

    시아의 정세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는 선행 작업이 필요하다.2)

    의 構造와 展開, 서울: 혜안출판사, 2000, pp.513-547; 「麗末鮮初 明과의 馬貿易」, 同書, pp.223-287); 중국의 李岭은 명초 고려와의 외교 관계에서 공마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술하여 당시 여명관계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일면을 공개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측

    면, 즉 명의 고려에 대한 공마가 가지는 정치ㆍ군사 등의 의의에 대하여는 다

    루지 않은 한계가 있다(李岭, 「明朝ㆍ高丽的贡马之争与明丽关系」, 内蒙古大学学报(哲学社会科学版) 44-6, 中国 内蒙古: 内蒙古大学, 2012, pp.100-106).

    2) 이 시기 국제관계는 대륙에서의 원명교체, 한반도에서의 고려ㆍ조선의 교체가

    동시대에 출현하고 새로운 국제질서의 수립 등 수많은 문제로 일찍부터 학계

    의 많은 관심을 받아왔다. 국내에서는 강상운, 「여명(한중) 국제관계연구」 (중앙대 논문집, 서울: 중앙대학교, 1959), pp.235-268; 고석원, 「여말선초의 대명관계」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서울: 고려대학교, 1977); 황운룡, 「고려 공민왕대의 대원명관계 –관제변개를 중심으로」 (동국사학 14, 서울: 동국대학교, 1980), pp.1-14; 김성준, 「고려와 원ㆍ명관계」 (한국사 8, 서울: 국사편찬위원회, 1981), pp.177-203; 황원구, 「여말선초의 대명관계」 (한국사의 재조명, 서울: 민성사, 1986), pp.305-311; 김순자, 「여말선초 대원ㆍ명관계 연구」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서울: 연세대학교, 2000); 김경록, 「공민왕대 국제정세와 대외관계의 전개양상」 (역사와 현실 64, 서울: 한국역사연구회, 2007), pp.197-231; 「여말선초 국제질서의 변화와 조ㆍ중관계」 (세계 속의 한국사, 파주: 태학사, 2009), pp.155-184 등의 훌륭한 연구 성과가 존재한다. 외국의 연구로도 張士尊, 「高麗與北元關係對明與高麗關係的影響」 (綏化

  • 明初 洪武帝의 말 强要와 麗明關係 (林常薰) 139朱元璋은 明玉珍, 陳友諒, 張士誠 등의 群雄을 물리치고, 1368년 正

    月 應天府에서 稱帝하며 明을 건국하였다. 아직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

    고 있던 元은 같은 해 8월, 명의 장수 徐達, 常遇春 등에 의해 수도인

    大都가 攻破되며 漠北으로 도주하였다. 이로서 명은 中原에서 宋代 이

    래로 붕괴되었던 漢族 위주의 中華秩序가 다시금 재건하려 하였다. 하

    지만, 원의 수도가 함락되었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명의 안정된 통치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원의 황실은 다시 본거지인 몽골 고원으로 물러갔

    을 뿐, 北元이라는 이름으로 虎視耽耽 중원으로의 捲土重來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納哈出와 같은 원의 遺將 등 원의 잔존 세력이 여전히

    신생국 명에 강한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중국 대륙에 이와 같은 큰 변화가 발생하자, 한반도의 고려에서 역

    시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당시 고려에는 忠烈王 이래로 많은 附元勢

    力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고려 국왕이었던 恭愍王은 원 황궁에서 質

    子로 있을 시기부터 원의 부패를 몸소 경험하여 장차 그의 몰락을 예

    감하였다. 또한 왕권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奇氏 세력과 부원세력들의

    제거는 안정된 통치를 위해서도 시급한 문제였다. 이렇듯 반원의 뜻을

    품고 있으며, 왕권 강화를 위해 부원세력의 일소를 계획하고 있던 공

    學院學報 1, 中國 黑龍江: 綏化學院, 1997), pp.48-50; 薛瑩, 「明洪武年間明朝與高麗朝關係略論」 (社會科學戰線 4, 中國 吉林: 吉林師範學院, 1997), pp.165-169; 刁書仁, 「洪武時期高麗ㆍ李朝與明朝關係探析」 (揚州大學學報8-1, 中國 江蘇: 揚州大學, 2004), pp.58-63; 姜龍范ㆍ劉子敏, 「明太祖在位時大明與高麗的關係」 (延邊大學學報 2, 中國 吉林: 延邊大學, 1998), pp. 61-65; 末松保和, 「麗末鮮初に於ける對明關係」 (青丘史草 1, 日本 東京: 笠井出版印刷社, 1965), pp.295-485; 宮崎市定, 「洪武から永樂へ -初期明朝政權の性格-」 (東洋史研究 27-4, 日本 東京: 京都大學, 1969) 등이 있다. 기존의 연구 성과들은 각 학자들마다 자신의 논지에 따라 매우 설득력 있게 이 시

    기 한반도와 대륙의 국제관계를 논술하였다. 대체적인 관점은 명초 홍무제의

    고려에 대한 감정과 정책을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즉, 공민왕대의 전반적

    으로 우호적인 감정에서 우왕 이후의 적대적인 감정이라는 것이다. 본문에서

    는 홍무제의 대고려 압박책인 공마를 설명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시대적 배

    경을 간단히 언급한 것으로 대략적인 내용만 살필 뿐, 상세한 내용에 관해서

    는 생략토록 한다. 이 시기의 연구에 관해서는 상술한 연구자들의 논문을 참

    고하길 바란다.

  • 中國史硏究 第99輯 (2015.12)140민왕은 元末 漢族들의 봉기로 원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그 속박에

    서 벗어나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다.3) 洪武 元年(공민왕 17년, 1368

    년) 명의 사신 偰斯가 고려에 도착해 명의 건국을 알린 후, 공민왕은

    본격적으로 親明反元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공민왕의

    노력은 한족 중심 국제질서의 재편을 희망하던 홍무제의 의도에 부합

    하여, 홍무제는 초기에 고려에 많은 호감을 보이며 여러 우호적인 정

    책을 사용하였다.4) 공민왕대에는 말기에 홍무제가 고려를 몇 차례 힐

    책한 것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우호적인 관계였다. 하지만, 禑王代

    에 이르러 홍무제는 고려와 북원의 내통을 확신하며, 그의 고려에 대

    한 시의심은 극에 달하여 각종 악의적인 정책으로 고려를 압박하기 시

    작하였다.

    아래 明太祖實錄의 기사들은 홍무제가 고려를 비난하는 내용들로 아래의 내용을 통해 대체 그가 고려에 대해 어떤 불만을 가졌는지 엿

    볼 수 있다. 또한 이는 홍무제의 언행을 직접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詔書 등의 형식으로 한 번 여과된 高麗史의 기록과는 또 다른 면을 보인다. 시간 순서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5)

    고려에서 京師에 사신을 보내왔는데, 그 죽은 故王 王顓(恭愍王의 諱)

    의 시호를 청하기 위함이었다. 上께서 顓이 그 신하에게 弑害된 것으로

    중서성 신하에게 勅書를 내리셨다. “……즉위 초에 四夷 酋長에게 보내

    중국에 君主가 생겼음을 알게 하였다. 고려 국왕 왕전은 명을 듣자마자

    3) 공민왕은 원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朱元璋, 張士誠, 陳友諒 등 漢人 群雄들

    이 할거할 때부터 이미 이들과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였다(김혜원, 「고려 공민왕대 대외정책과 한인군웅」, 백산학보, 서울: 백산학회, 1998, pp.61–120).

    4) 예외적으로 명에서 먼저 사신을 보내 명의 건국을 알렸던 것(明 太祖實錄卷34,洪武 元年 12月 壬辰條), 수많은 하사품을 보내며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다정하게 권유하는 듯한 어투(高麗史 卷42, 恭愍王世家 5, 공민왕 19년 5월 甲寅條) 등은 공민왕 死後 여명관계가 급속히 냉각되어 고려를 다방면에서

    압박하던 것 등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5) 高麗史의 기록은 홍무제의 말을 기록관이 詔書나 勅書의 文語體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순화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비교적 1차 사료에

    가까운 明太祖實錄의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 明初 洪武帝의 말 强要와 麗明關係 (林常薰) 141稱臣하고 入貢하였는데, 이는 힘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기뻐

    서 한 것이다. ……(공민왕이) 신하에게 시해되고 또 몇 년인가? 이제야

    시호를 청함은 우리나라의 명을 빌려 그 백성을 鎭撫하고, 시해의 흔적을

    덮으려는 것으로, 청하는 것이 정성스럽지 않다. 주어서는 안 된다.6)

    고려국에서 사신을 보내와 내년의 正旦을 하례하였다. ……상께서 중

    서성 신하에게 말씀하시길 “……지금 왕전이 시해되고, 간신들이 왕권을

    빼앗았다. 春秋의 義에 따르면 亂臣賊子들은 모두가 그들을 죽여야 하는

    데 또 무슨 말을 하겠는가?……내년에 금 백근, 은 만냥, 良馬 백필, 세

    포 일만을 조공하고, 가두어둔 遼東의 백성을 모두 돌려보내 왕의 진심을

    보이고, 政令을 행한다면 朕은 의심하지 않겠다. 그렇지 않으면 임금을

    시해한 도적들의 행위가 장래에 내 변경을 간사하게 속인다면, 고려의 백

    성에게 큰 화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7)

    고려의 사신을 돌려보내며, 그에게 勅諭하셨다. “너는 간신의 꾀임에

    넘어가 어쩔 수 없이 와서 나를 속였다. 지금 너를 돌려보내니, 마땅히

    짐의 뜻을 元兇에게 말하여라. ‘너는 중국의 죄 없는 사신을 죽였으니,

    그 죄는 깊다. 너희 나라 執政大臣이 오지 않고, 歲功을 약속대로 바치지

    않으면 죄를 물으러가는 군대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8)

    상께서 (遼東邊將 潘)敬, (葉)旺에게 璽書를 내리셨다. “……上奏한 고

    려의 行禮는 공손하게 존경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間諜의 싹이다. 더욱이

    고려는 옛날에 東夷라 불렸다. 聖人의 말씀에 夷狄은 禽獸이므로, 가볍게

    사귀는 것은 반드시 멀리하고, 무겁게 사귀는 것은 반드시 끊어야 한다고

    하였다.”9)

    상께서 (요동변장 반)경 등에게 말씀하시길 “……지금은 그 역적이 그

    임금을 시해하고 또 조정의 사신을 살해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사신을

    보내와 거짓을 꾸며 믿을 수 있다고 하였다.”10)

    고려가 약속대로 조공을 바치지 않자 詔書를 내려 물었다. “……짐은

    원을 대신해 천하를 다스린지 13년이 되었다. 四夷가 入貢하는데 오직

    세 곳만이 예전과 같고, 오로지 너희 동이만이 滄海를 믿고 안에서는 그

    6) 明太祖實錄 卷111, 洪武 10년 正月.7) 明太祖實錄 卷116, 洪武 10년 12월.8) 明太祖實錄 卷121, 洪武 11년 12월.9) 明太祖實錄 卷124, 洪武 12년 4월 庚申條.10) 明太祖實錄 卷132, 洪武 12년 7월 甲午條.

  • 中國史硏究 第99輯 (2015.12)142왕을 시해하고 밖으로는 백성의 禍를 만들고 있다.”11)

    요동도지휘사 반경 등에게 勅諭하시길 “고려의 간신 李仁(李仁任)이

    그 임금을 시해하였으나, 신하와 백성들이 그 당이 많음을 두려워하여 굴

    복하여 따르길 지금까지 몇 년이 되었다.……지금 이인이 비록 다스림을

    따르겠다고 하나 길어지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 卿과 여러 장군들은 그것

    에 신중해라. 고려의 공헌이 한 가지 물건이라도 약속과 같지 않다면 국

    경 밖에서 거절하고, 변경을 잘 지키며, 그 속임에 넘어가지 마라”12)

    요동도지위사 반경, 엽왕에게 칙유하시길 “卿 등은 고려 賀正使를 12

    월 중순에 입경 금지하였다. 그 사신이 요동에 이제 왔는데, 어찌 기한

    내에 경사에 도착하겠는가? 그 계책의 간사함은 단지 ‘저희는 사대의 예

    를 이미 다했습니다’일 뿐이며, 대충 얼버무리는 것으로 어찌 그 정성이

    있겠는가? 경 등이 그 사신을 막은 것은 매우 잘 했다. 지금 마땅히 그들

    에게 칙유하여 ‘賀禮는 기한이 지났다. 조정은 받지 않고 그 죄를 물을

    것이다’라고 하여라”13)

    고려국에서 그 신하 張伯, 崔涓을 보내 방물을 바쳤으나 조서를 내려

    돌려보냈다. 또한 예부에게 명하여 그 나라에 咨諭를 보냈다. “……짐은

    성의의 지극을 보기 위해 그 세공을 한정하였으나, 약속대로 하지 않음이

    5년째이다. 지금 다시 慶禮라며 보냈는데, 또 그 때를 못 맞추어 도착했

    다. 모욕이 어찌 심하지 않은가?”14)

    고려와 절교하라는 勅에서 “이전 봄에 고려의 사신은 水陸 양면에서

    왔다. 모두 신하의 예가 아니며, 속으로는 오만하고, 겉으로는 모멸하는

    것이 여기에 이르렀다.”15)

    위의 기사들에서 쉽게 볼 수 있듯이 홍무제가 고려에 품었던 불만

    은 주로 공민왕의 시해, 명 사신의 살해, 북원과의 통교 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실제로 위의 기사들을 통해 홍무제의 질책 중 명과 우

    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공민왕이 갑작스레 시해당하고, 또한 약 3년

    이 지나서야 비로소 공민왕의 시호를 청한 것을 여러 차례 질책하는

    11) 明太祖實錄 卷129, 洪武 13년 정월 癸巳條.12) 明太祖實錄 卷132, 洪武 14년 12월 乙丑條.13) 明太祖實錄 卷151, 洪武 16년 정월 戊午條.14) 明太祖實錄 卷157, 洪武 16년 10월 戊子條.15) 明太祖實錄 卷162, 洪武 17년 5월.

  • 明初 洪武帝의 말 强要와 麗明關係 (林常薰) 143모습을 볼 수 있다.16)

    하지만, 홍무제의 고려에 대한 불만은 이런 표면적인 원인보다는 당

    시 홍무제의 국제질서에 대한 인식에서 잘 드러난다. 홍무제는 원말

    사회질서 붕괴의 처절함을 몸소 겪은 이로서, 자신의 제국을 안정적으

    로 유지하기 위해 명확한 국제질서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즉,

    명 중심 국제질서의 유지를 확립하기 위해 홍무제는 戰爭을 통한 ‘擴

    張’보다는 禮制에 기반한 ‘安定’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국제질서에 대한 인식은 자신의 후손들이 명의 천하를 공고히 하도록

    간절히 기원하며 쓴 皇明祖訓ㆍ祖訓首章에서 상세히 드러난다. 사방의 여러 오랑캐들은 모두 산과 바다로 막혀 한 구석에 있다. 그

    땅을 얻어도 얻을 수 있는 것이 부족하고, 그 백성을 얻어도 부리기 부족

    하다. 만약 그가 자신의 힘을 모르고 우리의 변경을 시끄럽게 한다면, 그

    의 不祥이다. 그가 중국의 걱정거리가 안 되는데, 우리가 군사를 일으켜

    쉽게 정벌하려 한다면, 역시 不祥이다. 나는 내 후세 자손들이 중국의 부

    강함에 기대고, 일시의 전공을 탐하여 아무 이유 없이 병사를 일으켜 목

    숨을 해할까 두려우니,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胡戎(몽골)은 서

    북 변경에 위치하고 서로 근접하니 대대로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반드시

    장군과 병사를 골라 때에 맞추어 그에 대비해야 한다. 지금 정벌해서는

    안 되는 여러 오랑캐 나라의 이름을 뒤에 나열한다. 동북으로는 朝鮮國

    …… 渤泥國이 있다.17)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賤民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 홍무제에게

    朱明江山을 천세만세에 이어지게 하는 것은 그의 큰 염원 중 하나였

    16) 사실 고려에서는 공민왕이 시해당하고 2달 만에 張子溫과 閔伯萱을 請諡使

    로 명에 보냈다(高麗史 卷133, 辛祐列傳1, 禑王 卽位年 11월). 하지만, 그해 12월 鳳凰城에서 고려의 호송관 金義가 명 사신 蔡斌과 그 아들을 죽이고

    林密을 납치해 북원으로 도주하자, 후환이 두려웠던 장자온과 민백훤은 도망

    쳐 돌아왔다(高麗史 卷133, 辛祐列傳1, 禑王 卽位年 12월).17) 明朝開國文獻 第3冊, 皇明祖訓 권5, 「祖訓首章ㆍ四方諸夷」 (台灣: 學生

    書局, 1966), pp.1588–1589. 皇明祖訓은 홍무제가 홍무 2년부터 직접 집필하여 6년에 완성된 책으로, 자신의 후손들에게 천하를 공고히 하도록 훈계하

    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홍무제가 정벌을 금지한 소위 ‘不懲之

    國’ 15국 중 조선이 가장 앞에 위치하고 있는 사실이다.

  • 中國史硏究 第99輯 (2015.12)144다.18) 이러한 염원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이 바로 皇明祖訓의 내용이며, 이곳에서 홍무제의 확실한 국제질서관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즉,

    다른 주변의 국가들은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정벌하지 말 것이며, 가

    장 위험한 서북 변경의 몽골과도 대비만 하지 무리하게 정벌하지 말하

    는 것이다. 이러한 홍무제의 확장보다는 안정에 중점을 둔 명대의 국

    제질서관은 후대 명대 황제들이 쉽게 어기지 못 하는 祖宗成憲이 되었

    고,19) 명대에 永樂年間의 확장을 제외하고 전반적으로 폐쇄적인 성격

    을 갖게 된 주요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확장보다는 안정을 중시

    하던 홍무제는 공민왕의 주동적인 명의 국제질서 편입을 매우 환영하

    였다. 그러나 공민왕이 갑작스럽게 시해되고, 부원세력이 다시금 득세

    하여 고려가 자신이 구상한 국제질서에 순응하지 않자 이에 강한 불만

    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홍무제의 국제질서에 대한 인식과 마찬가지로 명과 북원의 대치 상

    태와 중간에 위치한 고려의 국제정세에서도 홍무제가 고려를 압박했던

    중요한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북원과 그 遺將들이 명의 변경을 심각

    하게 위협하고 있는 상태에서 명은 고려를 안전한 藩國으로 만드는 것

    이 필수였다. 中原의 명과 漠北의 북원이 대처하는 상황에서 그 가운

    데 위치한 고려는 어느 쪽이 공격을 개시하건 후방을 급습할 수 있었

    고, 그 군사력 역시 결코 간과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고려의 중요한

    전략적 위치 역시 홍무제로 하여금 고려를 높이 인식하게 하여,20) 홍

    무제는 비록 고려가 과거 원의 駙馬國으로서 원과 ‘舅甥之好’의 특수

    한 관계를 맺어 왔던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고려를 友邦으로 만들려

    18) 개국군주가 황권강화를 위해 권신들을 ‘兎死狗烹’한 예는 수없이 많지만, 홍

    무제만큼 ‘胡藍之獄’ 등을 통해 수많은 개국공신들을 숙청한 것은 극히 드물

    다. 이는 홍무제가 얼마나 자신의 후손들에게 안정된 천하를 물려주고 싶어했

    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19) 실제로 조선 초기 조선을 옥죄었던 명에 대한 금은 공납을 철회해달라는 요

    구에서 “이는 高皇帝(홍무제)의 成法으로 바꿀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

    였다(세종실록 권46, 11년 11월 辛未條).20) 김경록, 「여말선초 홍무제의 고려ㆍ조선 인식과 외교관계」 (명청사연구

    35, 서울: 명청사학회, 2011), p.7.

  • 明初 洪武帝의 말 强要와 麗明關係 (林常薰) 145고 노력하였다. 마침 고려에서도 공민왕이 反元을 천명하며 명의 국제

    질서 편입 의사를 밝히자 홍무제는 공민왕을 매우 신임하며 여러 우호

    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그런 공민왕이 갑작스레 시해당하자 홍무

    제는 부원세력들이 다시금 고려 정권을 장악한 것이라고 의심하며, 고

    려와 북원의 관계가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후 우왕

    대에 李仁任이 집권하며 친원과 친명을 반복하자 홍무제의 의심은 확

    신이 되어, 고려 사신을 감금ㆍ심문21)하거나, 遼東都司를 통해 고려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려 했다. 이를 통해 고려 내부를 감시하여 李仁人

    또는 李仁이라고 이름을 잘못 알고 있지만, 李仁任이 실권을 가지고

    있고, 그가 공민왕 시해를 주도했다고 확신하였으며,22) 또한 북원과의

    관계를 재개한 것까지 파악하였다.23)

    하지만, 이인임 집권 시기 고려의 대중국 정책은 잘 알려진 바와 같

    이 명이나 북원에 대한 일방적인 事大가 아닌 이인임 자신이 權臣으로

    서 자신의 권력 유지라는 목적에 따라 외교 정책을 결정한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고려는 반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던 원의 유장 나하추와

    도 교류하였고, 명의 定遼衛ㆍ遼東都司 등과도 관계를 유지하였다.24)

    21) 高麗史 卷133, 辛禑列傳 1, 禑王 4년 6월.22) “是歲(홍무 7년, 공민왕 23년, 1374년),顓為權相李仁人所弒”(明史 卷

    320, 朝鮮列傳), 현대 중국어에서 ‘人’과 ‘任’은 聲調만 다를 뿐 같이 ‘런’이라고 읽는다. 과거 중국과 한국의 교류에서 고유명사의 同音異義의 단어를 오

    기하는 예는 수없이 많다(임상훈, 「魚呂之亂硏究」 (全北史學 39, 전주: 전북사학회, 2011), pp.369-390).

    23) 이는 고려가 명과 북원의 연호를 번갈아 가며 사용했다. 즉 고려는 우왕 3

    년 북원, 4년 명, 5년 북원, 이후 다시 명의 연호를 사용했다. 또한 우왕대 고

    려가 명ㆍ북원과 동시에 외교를 진행한 것은 김순자, 「여말 대중국관계의 변화와 신흥유신의 사대론」 (역사와 현실 15, 서울: 한국역사연구회, 1995)의 p.125, ‘ 우왕대 명ㆍ북원 사신 왕래표’에 잘 정리되어 있다. 홍무제는

    당연히 그 중심에는 權臣 李仁任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으며, 당장 북원과의

    내통을 금지하라며 정료위를 통해 고려를 정벌하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高麗史 卷133, 辛禑列傳 1, 禑王 2년 8월). 24) 定遼衛는 홍무 4년 遼東을 수복한 후 북원에 대한 방비를 위해 세운 것으로

    홍무 8년에 遼東都指揮使司(遼東都司)로 개칭하였다. 고려는 이미 정료위일 때

    부터 이와 관계를 맺어 이를 통해 중원의 정보를 구했다.

  • 中國史硏究 第99輯 (2015.12)146고려가 이렇게 여러 곳과 관계를 맺었던 것은 홍무제의 생각과 같이

    명을 위협하는 ‘불손한 움직임’이 아니었고, 불안한 중원의 정세에 촉

    각을 곤두세워 장차 일어날 수 있는 급격한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

    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홍무제는 牛家莊 습격 등 일련의

    사건에 고려가 명의 군사 기밀을 북원에 넘겼다고 확신하며 명에 직ㆍ

    간접적인 군사적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여기에 설상

    가상으로 발생한 고려 護送官 金義의 명사 蔡斌 살해 사건, 海路를 통

    한 朝貢으로 불가피하게 기한을 지키지 못했던 사건 등 각종 악재는

    홍무제의 고려에 대한 감정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물론 우왕대 냉각된 여명관계에도 약간 호전되는 시기가 존재하였

    다. 예를 들어 홍무제가 明使 살해 등의 이유로 고려에게 막대한 조공

    을 강요하자,25) 홍무 17년(우왕 10년, 1384년)에서야 고려는 밀린 5

    년치 조공을 어렵사리 완수했다.26) 그러자 홍무제는 이에 대한 대가로

    ‘釋彼臣非, 允其所請’27)이라며 공민왕의 諡號와 우왕의 承襲을 인정하

    여 다시금 정상적인 관계가 회복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우왕대

    홍무제의 고려에 대한 이러한 호의적인 모습은 매우 이례적이며, 이

    시기 양국관계는 대체적으로 적대와 긴장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홍무 21년 중국 東北을 점거하던 納哈出의 투항

    이후, 홍무제가 이전 원의 영역을 고려의 영역이라고 주장하며 鐵嶺衛

    설치를 통보하고 시행하려고 하자 고려는 강력하게 반발하여 나라의

    25) 그 양은 자그마치 금 100근, 은 1만근, 良馬 100필, 細布 1만이었다(明太祖實錄 卷117, 洪武 10년 12월).

    26) 이와 같은 홍무제의 무리한 요구에 고려는 수차례 減貢을 청하였지만 모두

    묵살되었다. 시대가 약간 다르긴 하지만, 조선초 世宗代의 물가에 따르면 十品

    金 1錢은 正布 10匹, 十品銀 1兩은 正布 9匹, 正布는 每匹 米 4斗였다고 하니

    (經國大典 戶典ㆍ國幣條), 홍무제가 강요했던 공품의 양이 가히 어느 정도로 막중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또한 이 시기부터 공납을 강요받은 금은은 조

    선 전기까지도 지속되었다가 宣德年間에서야 비로소 중지되었다(임상훈, 「明初 朝鮮 貢女 親族의 政治的 成長과 對明外交活動 ―權永均과 韓確을 中心으로―」 (명청사연구 39, 서울: 명청사학회, 2013), pp.26-27).

    27) 高麗史 卷135, 辛禑列傳3, 禑王 11년 9월.

  • 明初 洪武帝의 말 强要와 麗明關係 (林常薰) 147명운을 걸고 요동정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게 되었다. 결국 이

    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의 실권이 그에게 넘어가고 몇 년 후 親

    明을 闡明한 조선이 등장하지만, 이후 홍무제의 조선에 대한 태도는

    우왕대의 적대적인 것과 그다지 큰 변화가 없다.

    이처럼 우왕대 홍무제는 고려에 대해 적대감을 품고, 고려를 자신의

    통제 하에 두고 북원과 단교시키기 위해 각종 악의적인 정책을 실시하

    였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 사신을 拘留하여 심문한 것, 공민왕

    의 諡號와 우왕의 承襲 불허했던 것, 고려가 육로를 통하여 조공을 할

    경우 명의 東北 지역을 경유하며 그곳에 위치한 명의 군사시설과 자세

    한 상황 등을 북원에 통보할 수 있다고 의심하여 고려의 육로를 통한

    조공을 금지했던 것, 고려의 동북진출에 과거 중국과 한반도의 군사적

    대립을 언급하며 고려를 무력으로 응징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것, 경

    제적으로 고려를 옥죄어 북원과의 왕래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5년

    치 조공품과 금은을 공납하게 한 것 등은 이 당시 홍무제가 고려를 압

    박하던 여러 정책들이었다. 홍무제의 이와 같은 고려에 대한 여러 압

    박 정책 중에서 특히 그가 기대했던 효과를 냈던 것은 고려에 대한 軍

    馬 강요였다. 이는 고려와 북원의 단절, 고려에 대한 통제 강화, 고려

    의 군사적 위협 정도 저하 등의 효과를 가져옴과 동시에 명의 군마 결

    핍 현상의 해결에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貢馬와 軍馬의 차이로서, 둘 다 고려의

    말을 명에 보냈다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 즉,

    전통시대 조공과 책봉이라는 禮制의 일환으로 해마다 약 50필의 最上

    級馬를 진헌하던 것은 貢馬이며, 일명 進獻馬, 歲馬라고도 불린다. 또

    한 예제의 일환이었던 공마는 당시 명의 수도였던 응천부로 진헌되었

    지만, 군사ㆍ징계용 목적이었던 군마는 명의 동북부ㆍ고려 북부에 위

    치했던 遼東都司로 진헌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차이점을 감안하였으며, 공마와 군마를 포함한 홍무제의 고려에 대한

    말 강요가 가진 정치적 성격과 당시 여명관계에서의 중요성을 밝히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홍무제가 실시했던 최초의 대고려

  • 中國史硏究 第99輯 (2015.12)148말 강요는 고려를 압박하기 위해 실시한 것은 아니었다.

    Ⅲ. 軍馬 充當과 洪武帝의 最初 對高麗 말 要求

    전통시대 중국의 漢族과 遊牧民族의 대립에서 전쟁의 승패를 좌우

    하는 여러 요소 중 말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미 漢 武

    帝 시기부터 匈奴와의 전쟁에서 말의 중요성을 깊게 깨달은 한 무제가

    李廣利를 大宛에 파견해 汗血馬로 일컬어지는 大宛馬를 가져온 것은

    매우 유명한 일화이다. 이 이후 중국의 역대 왕조는 馬政에 힘을 쏟으

    며 군사력의 증강에 유의해왔다. 명초 북원과의 대립에서 홍무제 역시

    말의 중요성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하며 군마의 사육에 많은 힘을 쏟

    았다.28) 하지만, 홍무제가 장악한 중원은 말의 양육에 그다지 유리한

    조건이 아니었으며, 백성들 역시 농민 위주였기 때문에 군마의 조달에

    심각한 차질을 겪었다. 거기에 연이은 전쟁으로 인한 말의 소모는 명

    의 군마 결핍 현상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

    하여 홍무제는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했다. 기존의 牧監들을 통합ㆍ발

    전시키는 과정에서 홍무 6년에 전문적으로 마정을 담당하는 太僕寺를

    정식으로 설치하였다. 홍무 7년에는 목감과 群官 27處를 증설하여 태

    복시의 관할에 두는 등 지속적으로 규모를 확장해 나갔다.29) 한편으로

    는 사방으로 사신을 보내 馬市를 열어 말을 사들였지만,30) 이 또한 명

    의 고질적인 말 부족 현상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군마 충당의 문제에 시달리던 홍무제는 고려를 떠올렸다. 주지하다

    시피 元 世祖 至正 10年(1273년), 원 세조는 고려의 林衍을 소탕한다

    28) “自古有天下國家者,莫不以馬政為重. 故問國君之富者,必數馬以對. 周禮六卿夏官,以司馬為職,特重其事也. ……其下太仆寺ㆍ諸牧監,各令脩職,毋怠所事”(明太祖實錄 卷111, 洪武 10년 4월 戊戌條).

    29) 明史 卷74, 職官志 2, 「太僕寺」.30) “太祖起江左,所急惟馬,屢遣使市於四方”(明史 卷92, 兵志 4).

  • 明初 洪武帝의 말 强要와 麗明關係 (林常薰) 149는 명목으로 耽羅, 즉 제주도를 점령하여 屯鎭을 설치하고 1700명의

    군인을 이주시켰다.31) 이로써 제주도는 원의 직접 관할지와 중요한 말

    사육지 중 하나가 되었다. “元은 耽羅를 牧馬의 들판으로 삼았다”32)라

    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홍무제는 고질적인 군마 결핍을 해결할 방안

    으로 제주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홍무 7년(공민왕 23년, 1374년), 홍

    무제가 고려에 대량의 말을 요구한 최초의 기사가 등장한다.

    戊申, (홍무제)황제께서 禮部主事 林密과 孳牧大使 蔡斌을 파견하여 왔다. 中書省의 咨文에 이르기를, “‘……나는 고려국에 전에 원나라 조정이

    말 2∼3만 필을 濟州에 남겨 두고 사육하였으니 많이 번식하였을 것이라

    고 생각한다. 중서성은 사람을 파견하여 문서를 가지고 가서 고려 국왕에

    게 이 뜻을 전하여 알게 하고, 그에게 좋은 말 2천 필을 골라 보내게 하

    여라’라고 하셨다” 그리하여 門下評理 韓邦彦을 耽羅에 보내서 말을 가져

    오게 하였다.33)

    위의 홍무 7년 기사는 사료 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홍무제의 대고

    려 말 강요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 이는 조선 초기까지 지속되었다.

    홍무제가 고려에 강요했던 말과 실제로 고려가 진헌했던 말에 관한 기

    록은 아래의 표와 같다.

    高麗末 洪武帝의 말 强要와 高麗의 進馬34)

    31) “(至正十年)六月,平之,於其地立耽羅國招討司,屯鎮邊軍千七百人”(元史卷208, 耽羅列傳).

    32) 明太祖實錄 卷162, 洪武 17년 5월.33) 高麗史 卷44, 恭愍王世家7, 공민왕 23년 4월 戊申條.34) 高麗史와 明太祖實錄 사료 정리. 홍무 7년, 홍무제가 고려에 말 2000필

    을 강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공민왕대에 명이 말을 요구했던 기록과 그 수를

    찾아볼 수가 없다. 자세한 원인에 대해서는 본문 참조.

    시기 명의강요고려진마 비고

    洪武 5年(恭愍王

    21年,1372年)3월

    명태조실록에서는 “방물을 진공하였다(貢方物)”, 고려사에서 역시 “말을 진헌하였다(獻馬)”라고만 기록되어 있어 자세한 수량은 알수 없다.(明太祖實錄卷73, 洪武 5년 3월; 高麗史卷43, 恭愍王世家7, 공민왕 21년 3월甲寅條)

  • 中國史硏究 第99輯 (2015.12)150

    4월 68월 1711월 50

    洪武 6年(恭愍王

    22年,1373年)

    6월

    명태조실록에서는 “방물을 진공하였다(貢方物)”, 고려사에서 역시 “다시 말을 진공하였다(復貢馬)”라고만 기록되어 있어 자세한 수량은 알 수 없다.(明太祖實錄卷86, 洪武 6년 12월 丙寅條; 高麗史卷44, 恭愍王世家7, 공민왕 22년 6월 辛卯條)

    7월말 19나귀 2

    10월

    원래 말 24필, 노새 2필을 진공하기 위해 배를타고 떠났으나, 靈光 慈恩島에서 배가 침몰하여 진공하려던 말은 물론 당시 正使였던 周英贊 등 역시 익사하여 일부만 생환하였다.(高麗史卷44, 恭愍王世家7, 공민왕 22년 10월乙酉條)

    洪武 7年(恭愍王

    23年,1374年)4월 2,000

    9월 甲子, 密直副使 金義가 공마 300필을 호송하나 12월에 명의 孶牧大使 蔡斌 살해하고 북원으로 도주하여, 공마 300필도 북원에 갔을가능성이 크다.9월 甲申 공민왕 시해.

    洪武 8年(禑王

    元年,1375年)

    3월 100

    9월 50

    洪武 9年(禑王2年,1376年) 9월 歲馬

    歲馬라고만 기록되어 있는 것은 進獻馬로서관례대로 50필일 가능성이 크다.(明太祖實錄卷170, 洪武 18년 1월 戊寅條)

    洪武 10年(禑王

    3年,1377年)10월 60

    12월에 홍무제는 고려 賀正使 沈德符와 金寶生에게 명하여 고려에게 막대한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홍무제의 이러한 강요는 홍무 12년3월에서야 고려에 알려지게 되었다.(明太祖實錄卷117, 洪武 10년 12월)

    洪武 11年(禑王4年,1378年) 4월 60

    洪武 12年(禑王

    5年,1379年)10월

    매해1,000

    2003월에 명 사신을 죽인 죄를 면하려면 약속한세공을 바치라고 협박, 金 一百斤, 銀 一萬兩,良馬 百匹, 細布 一萬을 요구

    洪武 13年(禑王6年,1380年) 12월 450

    洪武 14年(禑王7年,1381年) 11월 933

    洪武 15年(禑王8年,1382年) 4월 1,000

    洪武 16年 5,000 밀린 5년치 조공품 진상 강요(말 5천필, 금 5

  • 明初 洪武帝의 말 强要와 麗明關係 (林常薰) 151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사료 상으로 볼 수 있는 기록은 위의 홍무 7

    년의 기사이지만, 실제로 홍무제가 고려에 말을 요구한 것은 홍무 5년

    부터이다. 사료 상으로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지만, 홍무 5년 이전 고

    (禑王9年,1383年)

    백근, 은 5만냥, 포 5만필)

    洪武 17年(禑王

    10年,1384年)

    5월 1,000 금 대신 말로 공납(은 300백냥, 금 50냥=말 1필)6월 2,0008월 1,000

    10월1,000 명의 말 교역 요구1,233 금과 은을 말로 대납

    洪武 18年(禑王

    11年,1385年)

    9월 5년치 조공품 완납 후 공민왕의 諡號와 우왕의 承襲 인정12월 1,066 66필은 금과 은 대신

    洪武 19年(禑王

    12年,1386年)

    9월 50 조공의 경감

    12월5,000

    홍무제의 말 교역 요구(재상의 말은 1필 당 段子 二匹, 緜布 四匹; 관과 백성의 말은 段子一匹, 緜布 二匹)

    3,000 교역(大緜布 八匹, 段子 二匹)

    洪武 20年(禑王

    13年,1387年)

    6월 1,000 교역(上等 段二匹, 布八匹; 中等 段一匹, 布六匹; 下等 段一匹, 布四匹)

    9월9월 나하추 명에 투항

    16

    洪武 21年(禑王

    14年,1388年)

    5월명의 철령위 설치와 고려의 요동정벌,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당시 고려의 군마 21682필.

    12월 환관과 말 요구洪武 23年(恭讓王2年,1390年)

    9월 50

    洪武 24年(恭讓王3年,1391年)

    4월 10,000 말 1만 필과 환관 2백 명 요구

    洪武 24年(恭讓王3年,1391年)

    5월 2,000

    총계 23,000

    말16,360나귀 2

    이중 4000필은 교역으로 명에서 교역해 간 것이다.

  • 中國史硏究 第99輯 (2015.12)152려는 명에 말을 진헌한 적이 없으며, 5년 이후 많은 수는 아니지만,

    명에 꾸준히 말을 진공했던 사실 등에서 이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예부상서 吳季南을 보내 말을 진헌하게 하였다. 비서감 劉景元을 宥旨

    別監 兼 揀選御馬使로 삼아 계남과 함께 탐라에 가게 하였다.35)

    고려 국왕 王顓(공민왕)이 禮部尙書 吳季南, 民部尙書 張子溫 등을 보

    내 表, 貢馬 및 方物을 바쳤다.36)

    상술한 홍무 5년의 두 기사는 고려에서 명에 최초로 진헌한 말에

    관한 내용이다. 먼저 위에 있는 고려사의 기사를 통해 볼 때 고려에서 탐라, 즉 제주도로 사신을 보내 徵馬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으며,

    아래에 있는 명태조실록의 기사에서는 같이 보내온 表에 고려의 탐라 정벌을 청하는 간략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이 표의 자세한 내

    용은 4월 壬寅의 高麗史 기록에 상세하게 나와 있으며, 이 중에는 특기할만한 내용이 등장한다.

    임인, 민부상서 장자온을 京師에 보내 탐라 토벌을 청하였다. 표문에

    이르기를 “……貢獻의 기한이 늦어진 것은 본의가 아닙니다. 금년 3월에

    예부상서 오계남을 탐라에 보내 마필을 싣고 서울에 와서 바치려고 하였

    습니다.……韃靼 牧子 등이 먼저 보낸 秘書監 劉景元, 濟州 牧使 李用藏,

    判官 文瑞鳳, 權萬戶 安邦彦 등을 모조리 살해하고 오계남이 도착하였을

    때에도 먼저 상륙한 弓兵 3백여 명을 모두 살해하였습니다.37)

    “공헌의 기한이 늦어진 것은 본의가 아니다”라는 기사는 홍무제가

    이전에 고려에게 말을 요구했음을 알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이다. 이

    에 고려는 유경원 등을 제주도에 보내 말을 싣고 고려 王京에 간 후

    그것을 명의 京師에 보내려 했었지만, 원의 구세력에 의해 살해되고

    다시 보낸 오계남마저도 살해당할 뻔하여 기한이 늦어졌던 것이다. 여

    기에서 비록 사료 상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홍무제가 제주 혹은 고려

    35) 高麗史 卷43, 恭愍王世家 6, 공민왕 21년 3월.36) 明太祖實錄 卷75, 洪武 5년 7월 庚午條.37) 高麗史 卷43, 恭愍王世家 6, 공민왕 21년 4월 壬寅條.

  • 明初 洪武帝의 말 强要와 麗明關係 (林常薰) 153의 말 진헌을 요구하였고, 이에 고려는 명에 바칠 말을 모으기 위해

    탐라에 남아있는 舊元 세력의 정벌을 奏請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홍무 6년 홍무제가 고려의 말 진헌이 늦어진다고 강력하게 힐책하는

    기사에서 홍무제가 고려에 말을 강요했던 시기를 추측해 볼 수 있다.

    7월 임자, 贊成事 姜仁裕, 同知密直司事 金湑, 成元揆, 版圖判書 林完

    및 洪師範, 書狀官 鄭夢周 등이 京師에서 돌아왔다. …… (12월) 20일,

    早朝 시 奉天門 아래에서 宣諭를 들었다. “…… 제주의 마필은 오늘 온

    다, 내일 온다하며 1년을 끌었다”38)

    홍무 5년에 명에 있었던 강인유 등은 그 해 12월에 위와 같은 홍무

    제의 힐책을 들었다. 특히 “1년을 끌었다”라는 말에서 사료의 부재로

    정확한 수량을 알 수는 없지만, 홍무 5년 전후로 홍무제가 고려에 말

    을 강요했음을 알 수 있다.

    홍무제가 한 번도 고려에 요구한 적이 없던 말을 홍무 5년에서야

    갑자기 요구했던 원인은 당시 명의 정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홍

    무 5년은 홍무제가 徐達을 대장군으로 15만 대군을 파견하여 북원에

    대한 대대적인 정벌, 즉 嶺北之役을 실시한 해였다. 명은 漢唐 이래

    완성되지 못 한 역사적 대업을 이루기 위해 徐達ㆍ李文忠ㆍ馮勝을 장

    군으로 15만 대군을 준비하였다.39) 하지만, 이 전쟁에서 명군은 대패

    하며, 기존의 몽골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주장하던 무신들의 주장에

    서, 문신들의 만리장성을 경계로 방어에 치중하는 성격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홍무제는 확장보다는 안정을 택하게 되었다

    고 여기기도 한다.40) 여하튼 이러한 대군이 출정할 때 다수의 軍馬가

    필요했음은 쉽게 생각할 수 있다.41) ‘한당 이래 완성되지 못 한 역사

    38) 高麗史 卷44, 恭愍王世家 7, 공민왕 23년 7월 壬子條.39) 明太祖實錄 卷71, 洪武 5년 正月 庚午條.40) 唐豐姣, 「洪武至宣德時期明朝對蒙古的經略」 (中央民族大學 博士論文, 中國

    北京; 中央民族大學, 2010), p.72.

    41) 한 연구에 의하면 명초 대규모 군단을 파견할 때 최대 30만필 이상의 말이

    소요되었다고 한다(吴仁安, 「明代马政概述」, 安徽师大学报 3, 中国 安徽; 安徽师范大学, 1983, p.67).

  • 中國史硏究 第99輯 (2015.12)154적 대업의 완성’이라는 큰 목표를 가지고 대전을 준비하던 과정 중에

    평소에도 군마의 공급 부족에 시달리던 홍무제가 戰馬를 충당하기 위

    해 고려에 말을 요구했을 가능성은 적지 않아 보인다.

    Ⅳ. 洪武帝의 軍馬 强要를 通한 對高麗 壓迫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홍무제의 고려에 대한 최초의 말 요구는

    군마의 충당이라는 현실적인 이유에서 출발하였지만, 최초의 것을 제

    외하고는 점차로 고려를 통제하여 북원과의 내통을 막고, 군사력을 저

    하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어 갔다. 위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홍

    무제가 고려에 말을 강요한 때는 주로 고려와의 관계가 극히 악화되었

    던 시기로, 홍무제는 고려에게 한 번에 보통 수천, 수만 필의 말을 준

    비하고, 운송하게 하였고, 고려는 이로 인해 말의 준비와 운송에 여념

    이 없었다. 또한 홍무제는 고려의 관리ㆍ부자와 같은 지배계층만을 지

    정하여 말 1만 필을 징발하도록 하였으며, 또 관리와 부자들의 자제를

    시켜 요동에 보내라고도 명령하기까지 하는 등42) 고려로 하여금 수많

    은 人力과 財貨를 동원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려가 입었던 극심

    한 경제ㆍ사회적 폐단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43)

    또한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엄청난 수의 말 강요는 고려의 말 사정

    을 급속도로 악화시키기도 하였다. 처음 공민왕대 명에 대한 말 진헌

    이 막 실시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徵馬의 어려움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

    지 않는 걸로 보아 말의 결핍 현상은 그렇게 까지 심각하지 않았던 듯

    42) 高麗史 卷46, 恭讓王世家 2, 공양왕 3년 4월 壬午條.43) 수천 필의 말을 준비하고 운송하는 과정에서 소모되는 인력과 馬草, 도적의

    위협 등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명의 고려에 대한 공마 요구로 고려

    사회가 입었던 폐해에 관해서는 조선 초기 공마로 인한 폐해를 다룬 남도영의

    논문에서 상세하게 다룬 바가 있어 참고할 만하다(남도영, 「여말 선초 마정상으로 본 대명관계」, 동국사학 6, 서울: 동국대학교, 1960, pp.26-74).

  • 明初 洪武帝의 말 强要와 麗明關係 (林常薰) 155하다. 하지만, 우왕대에 이르러 공민왕의 諡號와 우왕의 承襲을 위해

    수시로 정기적인 50필보다 더 많이 진헌해야 했던 최상급 말들과 한

    번에 수천 필씩 군마를 강요하고, 明使를 죽인 죄로 부과한 말을 포함

    한 막대한 조공 등은 고려에서의 심각한 말 부족 현상을 초래하였다.

    이에 고려는 수차례 명에 “말은 두 종류로 胡馬는 북방에서 온 것이

    고, 鄕馬는 나라에서 나는 國馬로서 당나귀와 같아서 좋은 것을 얻을

    수 없음”44) 등을 강조하며 말의 減貢을 주청하였다. 하지만 이는 5년

    치 조공품을 완납하기 전까지는 받아들여지지 않아,45) 이에 고려는 盤

    纏色을 설치하여 大小 문무관리에게서 말을 상납 받거나,46) 부족한 말

    들은 고관들의 良馬로 충당하고,47) 관직과 품위에 따라 말을 헌납하게

    하는48) 등 비상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홍무제는 또 한편으로 약

    속을 지키지 않으면 무력으로 정벌하겠다는 위협을 가해 고려에서는

    말의 질을 가리지 않고 양만을 맞추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고려에서 명의 京師 應天府(현 南京) 또는 遼東都司까지 엄청난 거리

    를 걸어야했던 말의 운송 과정 중에서 말이 죽거나 병에 걸리는 일이

    허다했다.49) 이는 홍무제가 고려를 비난할 수 있는 좋은 빌미였고, 수

    차례 고려에서 進貢한 말의 질과 수를 가지고 고려를 압박하였다.50)

    44) 高麗史 卷134, 辛祐列傳 2, 禑王 5년 10월.45) 고려가 힘겹게 밀린 5년치 조공을 완납하자(高麗史 卷135, 辛祐列傳 3,

    禑王 10년 10월) 곧바로 공민왕의 시호를 내리고 우왕의 승습을 인정하였다.

    (高麗史 卷135, 辛祐列傳 3, 禑王 11년 9월) 이 이후 양국의 관계가 약간 정상화되어 막대한 세공도 줄여주고, 말도 진헌이 아닌 구매의 형식으로 고려

    에게서 구입했다(高麗史 卷136, 辛祐列傳 4, 禑王 12년 7월).46) 高麗史 卷134, 辛祐列傳 2, 禑王 8년 2월.47) “命宗親ㆍ宰樞ㆍ代言以上,各出馬一匹,以補進獻”(高麗史 卷44, 恭愍王

    世家7, 공민왕 23년 8월 壬子條).48) 高麗史 卷135, 辛祐列傳 3, 禑王 11년 11월.49) 홍무 6년 말 50필을 명에 운송했던 大護軍 金甲雨는 길에서 죽은 2마리를

    자신의 말로 채웠다가 홍무제의 힐책을 들었고, 후에 이 일이 고려에 알려지

    자 고려는 김갑우를 살해하였다(明太祖實錄 卷85, 洪武 6년 10월 辛巳條; 高麗史 卷44, 恭愍王世家 7, 공민왕 23년 7월 辛卯條). 이는 군마 충당을 위한 말이 아닌 조공을 위해 진헌하던 말이었지만, 말의 상태를 가지고 점으

    로도 고려를 심하게 질책하였다.

  • 中國史硏究 第99輯 (2015.12)156이처럼 홍무제의 고려에 대한 말 강요는 고려 사회 전반에 걸쳐 큰

    혼란을 일으켰지만, 이보다 더 큰 폐단은 고려의 군사력에서 나타났

    다. 홍무제는 고려에 대한 공마 강요를 통해 고려의 전력을 감소시키

    고, 이를 통해 유사시 고려가 명에 대해 행할 수 있는 위협의 정도를

    상당 수준 저하시키려고 의도했고, 결국 그 효과를 제대로 거둘 수 있

    었다. 실제로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우왕 말기, 명의 鐵嶺衛

    설치와 관련하여 고려는 명과 심각하게 마찰을 겪기 시작하였고, 결국

    홍무 21년(우왕 14년, 1388년)에 명과의 決戰을 다짐하고 요동 정벌

    에 나섰다. 이때 징발된 병사들의 수는 左右軍을 합하여 38,830명, 시

    중들던 傔軍이 11634명이었고, 말이 21,682필이었다.51) 당시 이 전쟁

    은 고려의 명운을 건 一戰이었고, 여기에서 고려는 八道의 정병을 징

    발하며 당시 자신이 가진 모든 전력을 쏟아 전쟁을 준비하였음은 당연

    할 것이다.52) 물론 군사 50,464명에 비해 말이 21,682필이었다는 것

    은 고려의 군사 편제로 볼 때 군사수에 비해 높은 비율을 차지하지만,

    당시 전쟁에서 말이 騎兵뿐만 아니라, 운송 등 다양한 곳에 쓰였던 점,

    물론 왜구와 여진에 대한 방어를 위해 많은 병력을 각지에 배치하였다

    고 하더라도, 당시 강대국이었던 명과의 전쟁은 나라의 명운을 건 일

    전이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말 21,682필이라는 숫자는 아마도

    고려가 준비할 수 있었던 최대의 말 수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이때 고

    50) “내가 탈만한 것이 어디 있는가?”(高麗史 卷135, 辛祐列傳 3, 禑王 11년 12월)라며 고려의 事大至誠을 의심하기도 하고, 말이 부실하다는 이유로

    고려 사신을 錦衣衛에 가두기도 하였다(高麗史 卷136, 辛祐列傳 4, 禑王 13년 6월) 홍무제가 이렇게 한 원인으로는 이를 빌미로 고려를 압박했던 것이

    가장 크지만, “고려는 예부터 名馬가 나는 곳”이라고 여겼던 것도 적지 않게

    작용했던 듯하다(高麗史 卷136, 辛祐列傳 4, 禑王 13년 5월).51) 高麗史 卷137, 辛祐列傳 5, 禑王 14년 4월 丁未條.52) 조선건국에서 중요한 威化島回軍과 관련된 고려사의 기록을 전부 신용할

    수는 없지만, 실제로 당시는 농번기였고, 전라도와 경상도는 왜적이 들끓었으

    며, 경기도 등은 성 수축으로 매우 피로한 상태였지만, 강대국 명과 맞서기 위

    해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을 모두 징집했음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高麗史 卷137, 辛祐列傳 5, 禑王 14년 4월 庚子條).

  • 明初 洪武帝의 말 强要와 麗明關係 (林常薰) 157려가 동원했던 군마의 수는 명에 진헌한 말의 수와 큰 차이가 나지 않

    으며, 위와 같은 점에서 볼 때 홍무제의 고려에 대한 말 수탈로 인하

    여 명과의 일전에서 고려가 준비할 수 있었던 말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나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또한 홍무제는 고려와의 관계가 개선되면 말 강요를 중지하거나 賣

    買하는 형식으로 바뀌는 데에서도 홍무제가 말 강요를 정치적 목적으

    로 활용했음을 엿볼 수 있다.

    安翊, 柳和 등이 경사에서 돌아와 聖旨를 宣諭하며 말하길 “나는 말 5

    천필을 사려고 한다. 너는 고려에 돌아가서 먼저 재상들에게 말해 상의하

    고 결정한 후 국왕에게 말하여라”53)

    우왕은 홍무 17년(우왕 10년, 1384년)에서야 홍무제가 강요했던 밀

    린 5년치 조공을 완납하였다. 이 이후로 홍무제는 우왕 초기부터 지속

    적으로 요구해왔던 공민왕의 시호와 우왕의 승습을 인정하며 고려와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또한 고려에 대한 말 강요에서 역시 기존의 고

    압적인 어투와 무력 위협에서 벗어나 위와 같이 매매의 형식으로 전환

    되었다.54) 위의 말 매매에 관한 기사를 통해 볼 때 홍무제가 고려에

    말을 강요했던 주요 원인은 물론 ‘징계’와 같은 형태로 고려를 압박하

    는 데에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북원과의 대치 상황에서 시급했던 군마

    부족 문제를 약간이나마 고려로부터 해결하려 했던 점도 적지 않아 보

    인다.

    이처럼 홍무제의 말 강요는 고려에 대한 통제를 통한 고려ㆍ북원의

    단교, 고려의 군사적 위협 정도 저하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었고, 여

    명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던 禑王ㆍ昌王ㆍ恭讓王代에 들어서 더욱 심

    해졌다.

    53) 高麗史 卷136, 辛祐列傳 4, 禑王 12년 11월.54) 그해 12월에 명은 1필당 大緜布 8匹, 段子 2匹의 가격으로 고려의 말 3000

    필을 사갔다( 高麗史 卷136, 辛祐列傳 4, 禑王 12년 12월).

  • 中國史硏究 第99輯 (2015.12)158 高麗末 王朝別 對明 進獻 軍馬 數55)

    위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공민왕대 말 진헌 수량이 92필에 불과

    했던 것에 반해 우왕대 14,218필, 공양왕대 2050필로 상당한 차이를

    나타내며, 이는 이 시기 대략적인 여명관계를 투영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공민왕대에도 영북지전을

    준비하며 군마 충당을 목적으로 요구한 최초의 것을 제외하곤 비록 적

    은 수량이지만 고려를 압박하기 위해 말을 요구했던 점은 특기할만하

    다. 이는 공민왕 말기에 들어서 여명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된 것과 큰

    관련이 있다.

    홍무제는 홍무 5년에 벌어진 북원과의 전쟁 嶺北之戰에서 대패한

    이후 고려를 심하게 의심하는 모습을 보이며, 고려에 사사건건 불만을

    표하였다. 실제로 이 사건이 벌어지기 이전, 홍무제는 처음 고려에 말

    을 요구하고 말을 진공 받았을 때 말에 대한 별다른 의견을 피력하지

    않았다. 그러나 홍무 6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진헌한 말의 수가 부족함,

    질 낮음 등을 이유로 고려를 강력하게 힐책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

    다.56) 홍무제의 이러한 행동은 마치 고의로 고려를 압박하기 위한 모

    습으로 보이며, 특히 홍무 6년 7월, 찬성사 강인유 등이 명에서 돌아

    55) 高麗史와 明太祖實錄 사료 정리. 56) 明太祖實錄卷85, 洪武 6년 10월 辛巳條.

  • 明初 洪武帝의 말 强要와 麗明關係 (林常薰) 159오며 전한 홍무제의 宣諭 내용에서 그의 고려에 대한 강한 분노를 살

    펴볼 수 있다.57) 먼저 홍무 5년에 明使 孫內侍가 고려에서 자살한 것

    부터, 고려 사신의 정탐 의심, 3年 1使, 공마가 너무 늦다는 등 다방면

    에서 고려를 강력하게 질책하였다. 홍무제는 심지어 “明州에서 解船

    500척을 만들고, 溫州에서 500척, 泉州ㆍ太倉ㆍ廣東ㆍ四川에서 3개월

    내에 7, 8천척의 배를 만들어 정벌할 것이다”라며 고려에 군사적인 위

    협까지 가하였다. 그전까지는 마치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듯이 여

    러 조언을 해주던 홍무제가58) 이렇게 고려를 강력하게 힐책하는 원인

    은 이 선유의 마지막 부분에 잘 드러나 있다.

    또 納哈出의 동료를 데리고 와서 우리 군영 안의 일을 엿보고 그에게

    소식을 넘겨 우리 牛家莊의 馬糧 10만 糧을 빼앗고, 더욱이 3천의 군마

    를 잃었다.59)

    위의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홍무제가 위와 같이 고려를 강력하게

    비난하는 주요 원인은 遼東의 군수창고였던 우가장(현 遼寧省 昌圖鎭)

    의 습격에 고려가 일조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즉, 홍무제는 고

    려가 북원과 내통하면서 명에 사신을 보내올 때 명의 군사 요지, 지형

    등 군사 기밀을 북원에 제공했다고 여겼던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홍무 5년은 嶺北之戰이라는 불리는 북원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펼

    쳤다가 크게 실패했던 시기였고, 納哈出의 우가장 기습 역시 그해 겨

    울에 일어났던 사건이었다. 거듭되는 패전에 홍무제가 극도로 분노하

    고 예민해졌음은 당연할 것이다. 이때 요동도사 등을 통해 고려와 북

    원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해오던 홍무제는60) 이들이 교류한다고 확신하

    57) 高麗史 卷44, 恭愍王世家 7, 공민왕 22년 7월 壬子條.58) 홍무제는 공민왕에게 불교와 사치를 금하고 백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라는

    등 治國의 道를 일러주기도 하였다(高麗史 卷42, 恭愍王世家 5, 공민왕 19년 5월 甲寅條).

    59) 高麗史 卷44, 恭愍王世家 7, 공민왕 22년 7월 壬子條.60) 요동도사는 북원과 고려 사이에서 밀사 파견 등의 움직임을 상당히 자세하

    게 포착하였다(高麗史 卷134, 辛祐列傳 2, 禑王 5년 正月ㆍ3월ㆍ8월).

  • 中國史硏究 第99輯 (2015.12)160며61) 패전의 책임에 고려와 북원의 내통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고 생각했다. 실제로 이 시기 공민왕은 비록 친명반원을 천명했지만,

    권문세족 중에는 여전히 부원세력들이 많았다.62) 한 예로 홍무 7년

    고려의 護送官 金義가 明使 蔡斌의 살해하고 북원으로 도주한 것 역시

    도 이 시기 많은 고려인들이 여전히 명과 북원 사이에서 확실한 태도

    를 취하지 않다가 명에게 큰 죄를 짓자 그 적대세력인 북원으로 投身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홍무 6년 2월, 실제로 북원에서도 명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어느 정도 자신감을 되찾아 고려에 조서를 내려

    다시금 고려의 원에 대한 복속을 종용하기도 하였다.63) 요동도사 등을

    통해 이러한 사실들을 잘 알고 있는 홍무제가 고려를 극도로 경계했음

    은 당연하며, 이에 대한 조치로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공

    민왕대에도 막대한 양의 공마로 고려를 압박ㆍ통제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Ⅴ. 結 語

    본고는 명초 북원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홍무제가 고려를 통제하여

    북원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유사시 고려의 군사 위협 정도를 낮추기

    61) 실제로 홍무제는 초기에는 고려의 육로를 통한 입경을 허락하였지만, 홍무 4

    년 명이 요동을 점령한 이후에도 고려가 친명과 친원을 반복한다는 이유로 육

    로를 봉하였다(高麗史 卷44, 恭愍王世家 7, 공민왕 22년 7월 壬子條) 이후 홍무제는 고려의 수차례 요청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염탐을 우려하여 고려

    사신이 陸路를 통해 入境하는 것을 강하게 금지하여 고려는 무리하게 海路를

    통해 명에 갈 수밖에 없었고, 고려 사신들 다수가 익사하는 불상사가 발생하

    기도 하였다(자세한 내용은 임상훈, 「明初 朝鮮 貢女 親族의 政治的 成長과 對明外交活動 ―權永均과 韓確을 中心으로―」, 明淸史硏究 38, 서울: 명청사학회, pp.14-15 참고).

    62) 공민왕은 비록 친명반원을 천명했지만, 북원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키지

    는 않고 간혹 이들과 교류하기도 하였다(高麗史 卷42, 恭愍王世家 5, 공민왕 19년 2월 壬午條; 3월 庚寅條).

    63) 高麗史 卷44, 恭愍王世家 7, 공민왕 22년 2월 乙亥條.

  • 明初 洪武帝의 말 强要와 麗明關係 (林常薰) 161위한 강압책으로 공마를 활용했다고 보며, 이를 중심으로 당시의 여명

    관계를 조명해 보았다.

    먼저 본고에서는 홍무제의 고려에 대한 공마 강요는 사료가 존재하

    지는 않지만, 홍무 5년부터 시작했음을 살펴보았다. 홍무 5년의 “공헌

    의 기한이 늦어진 것은 본의가 아니다”, 홍무 7년의 “제주의 마필은

    오늘 온다, 내일 온다하며 1년을 끌었다” 등의 기사에서 이를 확인해

    볼 수 있었으며, 고려에 대한 최초의 공마 요구는 고려를 압박하기 위

    해 활용한 것이 아니라 북원과의 전쟁을 위한 군마 충당이라는 현실적

    인 요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아보았다.

    처음의 공마 요구와는 달리 여명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던 우왕 이

    후, 홍무제는 본격적으로 공마를 대고려 압박책으로 활용하기 시작하

    였다. 먼저 막대한 수의 말을 요구하면서 응하지 않을 경우 정벌하겠

    다고 무력 위협을 가하며, 어렵사리 보내온 고려의 말에도 양과 질을

    탓하며 강도 높게 비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는 당연히 공마의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고려 사회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또한 홍무제

    의 고려에 대한 공마 강요는 고려의 군사력을 심각하게 저하시켰다.

    이는 명의 철령위 설치와 관련하여 고려가 傾國의 역량을 다하여 준비

    한 군대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당시 고려가 준비했던 마필의 수는 2

    만 필이 조금 넘는 수로 그간 고려가 명에 진헌한 수와 큰 차이가 나

    지 않는다. 또한 홍무제는 고려와의 관계가 개선된 시기에는 공마 강

    요를 중지하거나 매매의 형식으로 전환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고려에

    대한 공마 강요는 홍무제가 고려를 압박ㆍ통제하기 위해 실시했던 정

    책이었으며 그의 기대대로 고려와 북원의 내통을 미연에 방지하고 고

    려의 군사적 위협 정도를 크게 낮출 수 있었다.

    공민왕대에 여명관계는 전반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지만, 홍무

    제는 이 시기에도 강압책인 공마를 강요하였다. 이는 공민왕 말기, 즉

    홍무 5년과 6년에 벌어진 명과 북원의 전쟁에서 명의 대패, 나하추의

    우가장 급습 등 악재에 고려가 관련되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본 연구는 홍무제의 고려에 대한 공마 강요가 고려와 북원의 내통

  • 中國史硏究 第99輯 (2015.12)162을 미연에 방지하고 고려의 군사적 위협 정도를 낮추었다는 것을 가정

    하여 진행하였다. 실제로 홍무제는 공마 강요를 통해 고려를 강하게

    압박하여 말의 준비에 여념이 없게 하였고, 유사시 고려의 군사 위협

    정도를 저하시키는 것에 성공하였음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필

    자의 역량 부족으로 주로 고려와 명의 사료만을 활용하여 고려와 명

    그리고 북원의 삼각관계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보다 입체적으로 살

    펴보지 못 한 한계가 있다. 이는 필자가 더욱 노력해야 하는 점으로

    생각하며 이어지는 연구에서 다루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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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國史硏究 第99輯 (2015.12)164(中文提要)

    明初洪武帝的軍馬徵索與麗明關係

    林 常 薰

    十四世紀中期,在東亞發生了巨大的變化. 那即是中國的元明交替和韓

    半島上高麗ㆍ朝鮮的交替. 這不僅僅是代表王朝的興亡盛衰,而是象徵著

    以漢族為中心國際秩序的恢復. 明朝積極將周邊國家納入到自己的體系裡. 其中明朝與韓半島上的高麗ㆍ朝鮮的關係尤為錯綜複雜. 明朝與高麗的關係剛開始比較友好,但種種原因使洪武帝不能完全信任

    高麗. 雖然元朝被明朝從中原撤離,但元朝並沒有滅亡,而在漠北仍然保

    持著強大的軍事力量. 而且高麗也過去從忠烈王開始成為了元朝的駙馬國,并與元朝有著“舅甥之好”的特別關係. 麗明關係開始時就潛在著這些危險因素,後來接踵發生的事情終於讓洪武帝徹底敵視高麗. 如,一向主

    張親明路線的恭愍王被弒ㆍ明使的被害ㆍ高麗權臣李仁任在親元和親明之間的反復無常等等. 因此,洪武帝開始對高麗施行了一些列強迫政策. 洪武帝對高麗施行強迫政策的主要原因,是為了提高明朝對高麗的控制力量,最終達到徹底斷絕高麗和北元關係的目的. 洪武帝對高麗的這種惡劣政策中最有效的是徵索大量的高麗“軍馬”. 從洪武七年到高麗滅亡的洪

    武二十五年僅僅是19年,在這短短的時間中,洪武帝向高麗勒索的軍馬數

    量竟達到兩萬三千多匹. 高麗為了滿足洪武帝的要求,在全國範圍搜集軍馬,並將它們運到遙遠的遼東都司. 可想而知,洪武帝向高麗徵索軍馬給高麗社會引起了舉國上下的混亂. 更重要的是,洪武帝以從高麗剝奪的軍馬來充當明軍的軍馬,即形成了高麗軍馬愈少,明軍的軍馬愈多的局勢.

    如此,在明初麗明關係中,洪武帝向高麗徵索軍馬頗有研究價值.

  • 明初 洪武帝의 말 强要와 麗明關係 (林常薰) 165

    주제어 : 홍무제, 고려, 명, 북원, 말 강요, 여명관계

    關鍵詞 : 洪武帝, 高麗, 明, 北元, 勒索馬匹, 麗明關係

    Keywords: Emperor Hong Wu, Goryo, Ming, Bei Yuan, Extort Horses,

    Goryo-Ming Relations

    (원고접수: 2015년 11월 2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5년 12월 14일,

    수정원고 접수: 12월 21일, 게재 확정: 12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