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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게임비평상 공모전 최우수상> <폴아웃 3>: 비선형 텍스트와 선형 텍스트의 조화, 그리고 미국적 아우라의 만남 신 현 우 1) “박사님, 3차 세계대전에서는 어떤 무기가 쓰일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3차 대전이라면 모르지만 4차 대전이라면 잘 알지요.” “어떤 무기입니까?” “몽둥이와 돌맹이가 날아다닐 겁니다.” - 어느 기자와 아인슈타인의 대담 中 Fallout : 핵 낙진 War, War never changes. <폴아웃> 시리즈의 인트로의 첫 마디는 항상 이 문장으로 시작된다. 국지전이건 전면전이건, 섬멸전이건 포위전이건, 해방 전쟁이건 침략전쟁이건 전쟁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특히 국가나 조직이 아닌 개인의 전쟁은 상대방을 죽여야만 그 목적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형태가 되었건 폭력을 동반하게 된다. 핵폭탄은 폭력성이 완전히 거세된 현대전의 최종 버전이자, 단순히 단추를 누르는 행위만으로도 인류를 수십 번이고 괴멸에 이르게 하는 가장 폭력적 인 에너지의 응결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냉전시대의 문학, 영화 등 서사 장 르는 핵전쟁 이후의 세계를 그린 수많은 묵시록적인 작품을 탄생시켰다. <폴아웃> 시리즈는 수많은 Post Nuclear 작품들의 결정판이자, 핵전쟁 이 후의 윤리, 문화적 현상과 파괴된 커뮤니티 속 개인을 미국적 문법으로 풀어 낸 작품이다. <폴아웃 3>의 중요한 특징은 전쟁의 사라졌던 원초적 폭력과 광기의 현 장감을 소름끼치리만치 리얼하게 재현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머리가 터지고 팔다리가 잘리는 등의 시각적 표현이 아니다. 윤리나 법, 도덕이 사라진 세 1) 85년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 비선형 텍스트와 선형 텍스트의 조화, 그리고 미국적 …...플레이어 는 자신이 창안한 여러가지 방식이나 공식을 플레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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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 비선형 텍스트와 선형 텍스트의 조화, 그리고 미국적 …...플레이어 는 자신이 창안한 여러가지 방식이나 공식을 플레이에

<제3회 게임비평상 공모전 최우수상>

<폴아웃 3>: 비선형 텍스트와 선형 텍스트의 조화, 그리고 미국적 아우라의 만남

신 현 우1)

“박사님, 3차 세계대전에서는 어떤 무기가 쓰일 것이라 생각하십니까?”“3차 대전이라면 모르지만 4차 대전이라면 잘 알지요.”“어떤 무기입니까?”“몽둥이와 돌맹이가 날아다닐 겁니다.”

- 어느 기자와 아인슈타인의 대담 中

Fallout : 핵 낙진

War, War never changes. <폴아웃> 시리즈의 인트로의 첫 마디는 항상 이 문장으로 시작된다. 국지전이건 전면전이건, 섬멸전이건 포위전이건, 해방전쟁이건 침략전쟁이건 전쟁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특히 국가나 조직이 아닌 개인의 전쟁은 상대방을 죽여야만 그 목적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형태가 되었건 폭력을 동반하게 된다. 핵폭탄은 폭력성이 완전히 거세된 현대전의 최종 버전이자, 단순히 단추를 누르는 행위만으로도 인류를 수십 번이고 괴멸에 이르게 하는 가장 폭력적인 에너지의 응결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냉전시대의 문학, 영화 등 서사 장르는 핵전쟁 이후의 세계를 그린 수많은 묵시록적인 작품을 탄생시켰다. <폴아웃> 시리즈는 수많은 Post Nuclear 작품들의 결정판이자, 핵전쟁 이후의 윤리, 문화적 현상과 파괴된 커뮤니티 속 개인을 미국적 문법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폴아웃 3>의 중요한 특징은 전쟁의 사라졌던 원초적 폭력과 광기의 현장감을 소름끼치리만치 리얼하게 재현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머리가 터지고 팔다리가 잘리는 등의 시각적 표현이 아니다. 윤리나 법, 도덕이 사라진 세1) 85년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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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에서 믿을 사람은 누구 하나 없고, 카니발리즘과 노예제도, 인종 차별이 판을 치며, 광신도들과 샤머니즘, 그리고 과학 맹신주의가 뫼비우스의 띠를 그리며 시시각각 주인공을 위협해 오는 핵전쟁 이후의 파괴된 공동체 환경이 바로 그것이다. <폴아웃 3>는 원초적 폭력성조차 거세된 현대전을 넘어, 현재와 과거가 넘나드는 황무지로 플레이어들을 다시 초대한다. War, War never changes. 세계는 파괴되었고, 전쟁과 폭력의 수행 방식 또한 과거로 돌아가 버렸다. 플레이어는 어떤 숭고한 신념이나 도덕적 잣대도 없는 백지상태에서, 철저히 개인으로서 매 순간이 전쟁인 웨이스트랜드를 누벼야 하는 것이다.

핵폭탄의 아우라: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어떤 가까운 것의 일회적 나타남

현실세계 혹은 가상세계의 재현인 게임 속에서 유니코드의 배열로 이뤄지는 이미지와 디스플레이는 단순히 그것을 재현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플레이어를 그 재현된 이미지 속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가져다준다. 아무리 눈부신 그래픽으로 치장되어 있더라도 플레이어의 미학적 인식을 자극하지 못하면, 그것은 죽은 화면이 되어버린다. 컴퓨터 그래픽이 발달하면서 게임이 구현해 내는 이미지들은 더욱 현실감 넘치고 실사에 가까운 것으로 진화해 왔다. 그러나 아무리 실제에 가깝게 꾸며진 그래픽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가상현실(Virtual reality)로서 플레이어에게 인식되려면, ‘아우라’를 가져야 한다. 그것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어떤 가까운 것의 일회적 나타남이다. 벤야민은 대량 복제와 대량 생산, 그리고 시각 기술이 예술작품의 아우라를 파괴한다고 말하지만, 현실과 가상의 차이가 단지 밀도의 차이에 불과해져 버린 지금은 디지털 디스플레이나 디지털 소리가 오히려 자연적인 이미지나 소리보다 더 친숙해지다 못해 아우라를 가지게 되었다. 예컨대 일렉트로니카라는 전자음악 장르가 발생한 것이나, 포토샵 처리를 한 사진이 처리를 하지 않은 원 사진보다 더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지각의 변화 자체를 목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메모리를 쏟아부어 실제에 가까운 이미지를 과시하는 것은 더 이상 플레이어의 미학적 감수성을 자극하지 못한다. CG 영화 <파이널 판타지>는 인간의 땀구멍과 주름까지 재현한 압도적인 화면을 선보이지만, 정작 관객은 그것을 친숙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화려한 그래픽으로 중무장한 <파이널 판타지>의 10 이후 시리즈 또한 더 이상 향수를 자극하지 못했다. 그러나 벽돌 그래픽과 미디 음악으로 구성된 <파이널 판타지 7>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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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은 여전히 비장미가 느껴지고, <블레이드 러너>를 연상케 하는 디스토피아적인 느낌에 사로잡히게 한다 … 즉, 디지털 그래픽의 화면은 벤야민이 내다본 것처럼 아우라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되려 생성하고 있는 것이다. 재즈풍의 미국 특유의 향수를 담은 오프닝 음악은 파워 아머의 육중한 느낌과 파괴되어 철골만 드러난 빌딩의 잔해와 맞물리며 묘한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인터플레이에서 베데스다 소프트로 제작사를 바꾼 <폴아웃 3>에서는 적극적으로 회색 톤을 사용해 핵 낙진이 채 가시지 않은 세계의 공허와 절망을 미묘하고 몽환적인 느낌과 극단적인 콘트라스트를 변주하며 보여준다. 특히 밤이 되면 이 회색의 느낌은 더욱 강해져 완연한 디스토피아에 버려져 있는 느낌, 즉 황무지의 순례자와 같은 느낌을 받게 되며, 낮에는 눈부신 햇빛이 쏟아지는 폐허가 콘크리트 더미의 도시에 치명적이고 위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현실감 넘치다 못해 되려 혐오감을 주는 수많은 캐릭터들의 어두운 얼굴이나 총을 맞을 때 뼈와 연골까지 산산이 부서지며 피를 튀기는 화면은 높은 CG의 기술력이 자아내는 아우라의 극치를 맛보게 해 주는 것이다. 이는, 플레이어가 핍보이의 라디오로 밝은 재즈 음악을 들으며, 눈부신 햇빛이 쏟아지는 어느 일요일 오후에, 폐허가 된 도시 한가운데서 서부의 카우보이처럼 총을 난사해 잔인하게 상대방의 피와 뼈를 분리하는 아이러니컬한 가상현실감을 연출한다. 다시 말해 죽음의 재를 연상케 하는 회색의 아우라와 어우러지며 <폴아웃 3>는 그로테스크와 로맨티시즘이 하모니를 연출하는 미학적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수많은 게이머들이 <폴아웃 3>에 바치는 찬사는, 그 화려하고 설득력 있는 광원 효과와 그래픽의 밀도가 아니라, 바로 이 요소들이 자아내는 황폐한 회색의 느낌 때문이다.

핵폭탄의 아우라를 만드는 다른 것들: 미국의 낭만성과 황폐성, 그리고 냉전의 기억

아우라는 단순히 시각적인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아우라는 시공간의 기억으로 짜여진 직물로서, 홍차에 찍은 마들렌처럼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떠올리는 어떤 느낌을 수반하고 내면에 떠오르는 것이다. 즉, 곳곳에 녹아있는 냉전시대 지배문화였던 미국의 문화적 코드와 아이템이나 미국인들이 내면에 가진 공동의 집단 무의식이 캐릭터의 대사나 행동을 통해 나타나면서 우리는 미국이라는 공간이 가진 특수한 향수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가령, 미국인들이 기저에 가지고 있는 청교도적인 낭만성에 대한 향수는 곳곳에서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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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된다. 미국 독립선언문을 수집하려는 노인과 링컨의 맹신자들, 자신을 토마스 제퍼슨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인공지능 로봇 등은 파괴된 링컨의 동상과 어우러지며 묘한 아이러니를 풍긴다. 한편, 과학기술 박물관의 황폐화된 우주개발 전시는 달 탐사 프로젝트에 열광하던 미국인들의 서부적인 개척 정신을 아련하게 나타내 준다. 미지의 땅을 개척해 나가는 미국 특수한 정서와 아우라들은 파괴된 워싱턴DC를 완벽한 가상으로서 둔갑시킨다. 그러나 이 뒤에는 미국적 낭만성 말고도 황폐성 또한 존재하는데, 이는 방사능 피폭으로 돌연변이가 된 구울들과 인간의 대립, 그리고 노예상인과 뮤턴트, 엔클레이브의 음모를 통해 발견된다. 흑인 노예와 인디언, 유럽의 백인 이주 노동자, 그리고 청교도 출신의 지주계급이라는 특수한 상·하부 구조를 이루는 미국 사회의 모순은 특히 Tenpenny Tower라는 공간에서 적나라하게 암시되고 있다. 기적적으로 제 모습을 갖춘 채 살아남은 호텔 건물과, 그곳을 발견하여 자리잡은 대지주 Tenpenny와, 소작료와 임대료를 내고 안전한 곳에 거주하는 중산층 주민들, 그리고 철저히 외면되어 버려진 채, 그곳에 진입하기 위하여 발버둥치는 구울들의 갈등은 청교도 정신에 은폐된 미국사회의 이중성을 끄집어내며 재조명한다. 노예제도에 대한 미국인들의 병적인 트라우마는 또한 레이더라는 마적단이 노예들을 사고파는 등의 게임 곳곳에서 지나치는 풍경들에 녹아나고 있다. 더군다나 엔클레이브라는, 핵전쟁 이전 미국의 정부를 정통으로 계승하는 집단은 화학무기를 통해 웨이스트랜드의 인종 청소를 감행하고 새롭게 지배 세력으로 부상할 음모를 꾸미는 중이다. 위협적인 괴물로만 보이는 뮤턴트들도 생체 실험과 군용 전투 바이러스의 희생자라는 나름의 사연을 가지고 있으며, 게임에 등장하는 모든 소품이며 조직, 화면들은 어떤 식으로든 ‘미국적 아우라’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모든 일러스트는 50~60년대 미국의 만화풍으로 그려져 있고, 메인 퀘스트 중간에 등장하는 Tranquility Lane이라는 공간이나 캐릭터들의 패션, 자동차, 주택들은 완벽하게 냉전시대 미국 마을을 고증하고 있을 뿐 아니라, 미국의 이상적인 가정주의를 대사 속에서 방백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핍보이에는 크게 두 가지의 라디오 전파가 잡힌다: 하나는 엔클레이브 방송으로, 자칭 미 정통정부 대통령의 궤변에 가까운 냉전 프로파간다가 그 유명한 미국의 민요 ‘팽이치기’와 함께 흘러나온다. 다른 하나는 쓰리독의 갤럭시 뉴스 라디오로, 50~60년대 유행하던 재즈풍의 미국 팝송들을 전후 시대의 일상에 온기를 뒤섞어 틀어준다. 이처럼, <폴아웃>의 모든 요소들은 하나하나 ‘미국의 아우라’를 형성하면서 특유의 회색적 화면과 더불어 마침내 핵전쟁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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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대체 역사의 공간을 하나의 완전 연속 구간으로 연착륙시키게 된다. 속도의 미학 공간: 외연적인 속도를 늦춘 내연적 속도

<폴아웃 3>가 강조하는 것은 스타크래프트에서 중요시되는 극단적 반사신경의 ‘외연적 속도’ 가 아니라 사고 중심의 ‘내연적인 속도’ 이다. 웨이스트랜드의 사건과 서사는 철저히 플레이어의 사고 중심으로 돌아간다. 플레이어는 자신이 창안한 여러가지 방식이나 공식을 플레이에 도입해 동시성의 영역에 진입하게 된다. 이를테면 구울과 인간 두 조직 간의 대립에 개입해, 평화적으로 중재하는 방향으로 진행할 수도, 인간의 편에 서서 구울들을 학살할 수도 아니면 인간을 도와주는 척하며 구울에게 일러바쳐 파멸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등, 각각의 방식은 동시에 맞물리며, 어떤 식으로 결말이 나건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상반된 요소로서 플레이에 직접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누군가를 죽이라는 지시를 받고 행동할 때, 플레이어는 비밀 루트를 발견해서 남몰래 그를 죽일 수도 있고, 화술이 좋다면 상대방에게 죽였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돈을 뜯어낼 수도 있으며, 람보처럼 적진으로 뛰어들어 몽땅 학살할 수도 있다. 까칠한 캐릭터와 대화할 때 덩달아 까칠하게 말해주면 그는 삐쳐서 대화를 거부한다. 대화가 거부되면 어떤 퀘스트는 할 수 없게 된다. 자신이 악당이 되어 노예를 사고 팔 수도 있는데, 이렇게 되면 특정 마을에는 아예 들어갈 수도 없게 된다. 이 다양한 동시성을 발견하는 것은 전적으로 플레이어의 몫이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는데 초당 몇 번의 클릭을 한다던가 화면을 초당 몇 번 바꾼다던가, 무슨 테크트리를 탄다던가 하는 외연적 연산 속도는 요구되지 않는다: 우리는 갤럭시 뉴스 라디오를 틀어, 쓰리독의 익살넘치는 DJ를 음미하고, 누카콜라를 이따금 따면서 유유자적하게 황무지를 거닐면 된다. <서든 어택>처럼 반사신경에 몸을 맡긴 채 헤집고 다니건, 찬찬히 대화 중심으로 곱씹으며 극중 전개를 하건 그것은 플레이어의 몫이며 내연적인 속도가 플레이의 볼륨을 결정하는 것이다. 비선형 서사를 가장한 선형 서사

이렇듯 <폴아웃 3>를 완연한 가상 세계, 능동적 연출의 미학적 공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뛰어난 상호성(Interactivity)에 기인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난점이 발생하는데, <폴아웃 3>의 상호성을 발생시키는 기제가 바로 수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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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캐릭터들이 살아 숨쉬기 때문이 아니라 수많은 스크립트가 각 캐릭터 안에 삽입되었기 때문이다. 이 방대한 스크립트들, 즉 소매치기를 하면 공격을 한다든지 욕을 하면 같이 욕을 한다든지 하는 일련의 리얼한 리액션들은 그 캐릭터가 스스로 사고할 줄 아는 인공지능이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행동하도록 몇 가지 스크립트가 삽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자고 먹고 마시고 말하는 이 캐릭터들은 삶을 살아가는 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실은 예측 가능한 패턴을 가지고 있어서, 종국엔 플레이어도 주변인이 될 수밖에 없다. ‘군중 속의 고독’이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밀려온다. 수많은 퀘스트들을 하고 수많은 이야기들의 끝을 맺었으나, 막막해진 플레이어는 어디서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한다. 불연속적인 시간의 틈에는 균열이 발생하고, 결국 스크립트의 무수한 향연 속에서, 우리는 <폴아웃 3>가 가상 세계이며 등장인물들이 정해진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폴아웃 3>는 불완전하고 파악 가능한 시뮬라시옹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무수한 스크립트로 짜여진 불완전한 시뮬라크르의 모자이크를 채우기 위해 ‘메인 퀘스트’ 가 등장한다. 비선형적으로 보이지만 결국은 선형적인 단편 서사들의 군집인 시뮬라시옹을 매끄럽게 돌리기 위해서는 잘 짜여진 한 편의 굵은 선형 서사가 필요하다. 여기서부터 <폴아웃 3>는 마침내 하이퍼텍스트이기를 포기하고 선형 텍스트에 진입하게 된다. 그리고 플레이어 또한 이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결론적으로는 메인퀘스트라는 주된 임무를 암묵적 동의하에 충실히 임하게 된다. 볼트101의 과학자인 아버지의 뒤를 쫓아 버려진 세계 바깥으로 뛰쳐나가고, 수많은 고초 끝에 아버지를 찾아내 Water purity 프로젝트를 도운 다음,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도 그 뜻을 이어 세계를 구해내는 숙명을 띈 플레이어의 메인스토리는 잘 짜여진 영웅 서사이자, 모든 퀘스트와 이야기들을 한 점으로 이어주는 하나의 소실점이다. 방랑에 지친 플레이어들은 결국 이 메인 퀘스트의 줄기를 따라 웨이스트랜드를 구해내는 작업을 수행한다. 비선형성을 추구하는 가운데서 이처럼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내러티브는 마침내 불완전한 시뮬라시옹을 한 편의 극 속으로, 즉 3.84차원의 세계에서 2.34차원의 세계의 교차지점을 형성한다. 세계를 파괴하는 모종의 음모로부터 세계를 구해낸다는, 전통적이고 극적인 영웅 서사를 메인 퀘스트로 도입해 플레이어들을 인도한다는 점은 1,2와 3이 크게 다르지 않다. 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는 이중의 동작을 요구받으며, 주어지는 정보를 최종적으로 수신해서 기억 속에 보관하고 처리하기 위해 행들을 좇아가야 한다.2) 이러한 작업 속에서 텍스트보다 이미지와 기호에 더 익숙한 대중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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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텍스트를 대충 훑거나 건너뛰어, 마침내 탈 시간적인 공황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과거 <폴아웃 1,2> 시리즈와 비슷한 시기에 출시된, 무수한 퀘스트들로만 이뤄진 높은 자유도의 게임 <루나틱 돈>이 실패한 이유이자, <WOW>가 리치왕 아서스를 중심으로 메인 세계관과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이유이기도 하다. 만약 이런 중심 서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WOW> 또한 군중 속의 고독에 지친 개인들이 유령처럼 배회하는 사이버 광장이 될 여지가 높다. 그리고 이런 권태로운 플레이어들이 가득한 공간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폴아웃 3>와 같은 스크립트 시뮬라시옹에 비해 훨씬 가상현실감이 떨어질 것이다. 권태에 지친 인간의 행동 패턴은 때때로 짜여진 대본보다 다양성이 결여되기 마련이다. 이것은 대다수의 한국 게임이 겪는 서사적 빈곤과 일치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선형 서사와 비선형 서사의 전략을 동시에 사용하는 <폴아웃 3>는 텍스트와 이미지의 세계 한 가운데에서 방황하는, 탈 역사적이 되어버린 대중들에게 더없이 큰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 즐거움은 단순히 내 멋대로 선택할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니라, 내 멋대로 선택할 수 있도록 강요받는 즐거움이다. 만약 플레이어가 미국적 낭만성과 황폐성이 교차하는 핵전쟁 이후의 폐허에서 길을 헤매고 방황하는 것을 사랑한다면, 메인 퀘스트는 잠시 미뤄둔 채 무수히 많은 인물과 공간을 오가며 나름의 모험을 즐기면 된다. 그렇지 않다면, 메인 퀘스트를 따라가며 그 극적인 이야기에 몰입하면 되는 것이다. 게임은 30분 만에 클리어할 수도, 100시간 만에 클리어할 수도 있다. 그리고 클리어한 다음 자신이 미처 도달하지 못한 지역이나 퀘스트들을 다시 한 번 점검할 수도 있다. 수많은 모드를 통해 변용된 플레이를 즐길 수 있다. <폴아웃 3>는 ‘열린 게임’ 이다. 출구가 존재하는 시뮬라시옹이다. 그리고 그 열린 공간은 아름다운 아우라와 디테일한 미적 시뮬라크르들로 채워져 있다. 아우라 없는 모방의 연속인 오늘날 한국 게임들과 견주어봤을 때, <폴아웃 3>의 빽빽한 내연적 밀도는 좋은 표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이 부분은 빌렘 플루서의 「그림의 혁명」(커뮤니케이션 북스, 2004) 53쪽 12행을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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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게임비평상 공모전 우수상>

기업가 정신과 자기계발 담론의 게임화-스포츠 매니지먼트 게임의 경우

오 근 창1)

스포츠 매니지먼트 게임의 등장 게임 같지 않은 게임들. 흔히 게임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통념을 뒤집어 놓는 게임들이 있다. 요사이 인기를 끌고 있는 스포츠 매니지먼트 게임(sport management game. 이하 ‘매니지먼트 게임’으로 약칭)이 그것이다. 대개 스포츠 장르의 게임은 구기 등의 운동을 게임 속에서 재현하도록 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으며, 따라서 <NBA LIVE>나 <FIFA> 시리즈 같은 게임은 실제 스포츠 경기와 같은 그래픽을 얼마나 완벽하게 구현하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위와 같은 스포츠 게임에 참여함으로써 게임 사용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농구 선수나 축구 선수가 될 수 있으며, 또한 부수적으로는 선수 기용을 통해 좋아하는 팀의 감독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반면에 매니지먼트 게임은 선수 역할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특정 구단의 구단주가 되어 구단을 운영한다. 따라서 매니지먼트 게임은 실제로 스포츠 스타가 되어 경기를 펼치는 것이 아니며, 그래픽의 개선을 그 필수적인 요소로 삼을 필요가 없다. 매니지먼트 게임의 완성도에서 중요한 것은 선수들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통계들(연봉, 선수들의 세분화된 능력치 등)에 실제로 부합하는 데이터들이다. 가령 <프로야구 매니저>나 <풋볼 매니저 온라인>과 같은 게임이라면, 유저는 소속선수 관리, 경기일정 관리, 전술 관리, 재정 관리 등 전반적인 관리업무를 맡게 된다. 이때 게임의 매니저는 마치 주식회사의 경영에서처럼 치밀한 계산과 전술의 고안을 통해서 전략적 의사결정을 수행하는 것이다. 매니지먼트 게임의 주된 특징은, 게임이 실제 통계에 근거한 방대한 데이터

1) 84년생.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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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이미지나 동영상과 같은 시각적 요소들보다는 텍스트에 주로 의존한다는 점이다. 일견 이것은 게임 제작사 입장에서 보완해야 할 단점으로 비춰지기 쉽지만, 실상 매니지먼트 게임에 열광하는 유저들에게는 오히려 정반대이다. 이와 관련된 매니지먼트 게임의 또 다른 특징은, 복잡하고 방대한 데이터에 비해 매니지먼트 게임의 진행방식 자체는 매우 단순해서 진입 장벽이 낮다는 점이다. 즉 특정 연령대와 성별의 제한을 넘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게임을 즐기도록 하는 것이다. 조작의 단순성은 또한 스마트폰과 같은 매체를 통해서 시간적, 장소적 제한을 극복하고 게임의 범용성을 넓히는 것에도 기여할 수 있다. 또한 이 게임들은 대개의 온라인 게임에서처럼 개별 캐릭터의 양성에 아주 많은 시간을 투자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여타의 게임들과 차별성을 보인다.

고전적인 게임으로부터의 일탈 놀이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는, 최첨단 기술의 산물인 오늘날의 각종 비디오 및 컴퓨터 게임에도 큰 무리 없이 적용될 수 있다. 즉 게임은 자유롭고, 분리되어 있으며, 확정되어 있지 않고 비생산적이며, 규칙이 있는(단 일상의 법규를 정지시키고 일시적으로 새로운 법규를 확립한다는 의미에서), 허구적 활동이다.2) 이 중 매니지먼트 게임이 고전적인 게임의 속성에서 일탈하는 것은, 그것이 근본적으로는 허구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게임과는 비교되지 않는 수준으로 ‘생산성’ 추구를 가장 유력한 목표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기존의 다른 장르의 게임들 역시 경쟁이나 운의 작용 등을 구성적 요소로 가지지만, 매니지먼트 게임의 유저는 우연적인 운의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려고 노력하며, 이때 운의 요소를 대신하게 되는 것은 도구적이고 전략적인 합리성이다. 즉, 매니지먼트 게임은 사용자로 하여금 한정된 자본금을 가지고 최소의 투자에서 최대한의 효과를 이끌어내도록 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경제적 합리성을 구현하도록 한다. 물론 이와 비슷한 유형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매니지먼트 게임에서 이러한 경영의 게임화는 아무런 위장이나 은폐 없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이러한 논리와 가장 이질적일 수 있는 스포츠의 영역

2) 로제 카이와, 놀이와 인간, 이상률 옮김, 문예출판사, 1994, p. 34. 로제 카이와는 이에 추가해 놀이를 분류할 수 있는 범주로 경쟁, 운, 모의, 현기증 등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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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경영의 논리가 가장 중요한 관점으로 관철된다는 점이다. 이처럼 게임 같지 않은 게임들이 등장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게임들이 나름의 인기를 구가한다는 것은, 게임의 진화 양상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주지하다시피, 기존의 게임들은 현실을 최대한 유사하게 모사하거나 또는 현실을 가장 상이하게 변용시키는 가상현실(비현실)로의 도피를 가장 큰 지향점으로 가졌다. FPS(1인칭 슈팅게임)이나 레이싱 게임 등은 현실과 비슷할수록 각광을 받았으며, 많은 MMORPG(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나 환타지 게임은 현실과 다를수록, 또 환상적인 내러티브를 갖추고 있을수록 각광을 받았다. 즉 게임은 현실에 대한 생생한 간접 체험이거나 비현실에 대한 간접 체험이라는 범주로 구분 가능했다. 반면, 매니지먼트 게임은 일견 일상의 일탈에 관계되거나 여가에 즐길만한 게임처럼 보이지 않는다. 물론 매니지먼트 게임을 하는 것은 현실 속에서 일어날 수 없는 체험이지만, 이는 단순히 내가 광적으로 좋아하는 팀, 예컨대 첼시나 기아와 같은 팀을 직접 운영한다는 성취감으로는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매력을 갖는다. 이 게임 같지 않은 게임을 함으로써, 우리는 실제 현실이 아닌 가상현실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가상현실 속에 또 다른 현실을 건축하게 되는 셈이다. 그것은 어떤 현실인가? 그것은 승리와 패배, 땀과 눈물이 교차하는 스포츠의 감동이 아니라, 투자와 실적, 효율성의 엄격한 계산이 난무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주의적 현실이다. 매니지먼트 게임의 승리는 유저의 능란한 컨트롤 능력이 아니라 각종 통계 등에 대한 적절한 계산, 예측, 관리에 달려 있다.

기업가 정신과 자기계발의 의지 위와 같은 분석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가설 중 하나는 매니지먼트 게임의 등장이 현대 한국 사회에서 지배적인 담론으로 부상하는 1인 기업가 및 기업가 정신의 고취와 무관하지 않으며 심지어 일정 부분 조응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물론 단순한 반영은 아닐 수 있다). 일부의 사람들, 그러나 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매니지먼트 게임에 자신의 시간을 ‘투자’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시대적 징후인 것 같다. IMF의 대규모 구조조정 이후,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전형적인 시대정신은 지식기반경제에 걸맞는 기업가 정신의 고취, 자기 경영에까지 이르는 1인 기업가 표방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산업자본주의 시대에나 적합한 수직적인 체제에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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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적인 기존의 근로자 모델은 오늘날 급변하는 세계적 변화 속에서 적응하지 못한다. 따라서 능동적으로 자기 자신을 계발하고, 근로자 역시 기업가처럼 경영 전반에 창조적으로 참여할 줄 알아야 한다. 수동적으로 경영자의 지령을 따르는 근로자가 되기 이전에, 그는 이미 그 자신 스스로를 ‘경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3) 이렇게 보면 매니지먼트 게임의 유행은 이러한 시대정신의 충실한 반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매니지먼트 게임을 플레이하는 당사자들에게는, 아무리 스타플레이어일지언정 더 이상 한 명 한 명의 선수를 플레이하는 것보다 직접 그 자신이 구단주가 되어 팀 전체의 ‘경영’에 참여하는 것이 더 흥미롭다. 이들에게는 게임 속 박지성이 되어 직접 패스와 드리블을 하고 골을 넣고픈 욕망보다도, 마치 주식 투자하듯이 적은 몸값을 가진 좋은 선수를 찾아내는 것(또한 이른바 ‘먹튀’를 피하는 것)이 더 재미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가 생산이든 소비이든,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항상 행하고 있는 이와 같은 계산적 행위를 게임의 세계에서까지 연장하도록 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계속적인 트레이드와 적절한 연봉 상한선을 계산하고 드래프트에 골몰하면서 유저 자신을 한 명의 기업가로 나타나게 하는 시대적 강박은 위에서 설명한 기업가 정신의 호명에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그 기본적 형식상 많은 시간을 투자할 필요도 없는 이러한 매니지먼트 게임은, 유저의 소중한 시간을 게임에 ‘허비’하지 않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또한 많은 시간을 투자하도록 요구하던 기존의 온라인 게임과 구별된다.4) 다른 한편, 매니지먼트 게임을 잘 해나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팀의 상태 및 전반적인 경쟁 상황을 정확히 알고 전략적으로 대처해나갈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는 한 구단의 탁월한 경영을 위해서는 구단과 그를 둘러싼 온갖 ‘시장’의 상황에 대한 탁월한 앎이 필수적으로 요구됨을 뜻한다. 앞서 말했던 기업가 정신의 고취와 자기 관리와 자기 경영에 필수적인 수반물이 바로 끊임없는 자기 계발이다.

3) 서동진,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 신자유주의 한국사회에서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탄생, 돌베게, 2009. 특히 위 책의 4부 참조.

4) 물론 영국에서 「풋볼 매니저 온라인」같은 게임이 ‘이혼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었던 만큼 강한 중독성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누구나 인정하듯 “시간은 금”(벤자민 프랭클린)이기 때문에, 이처럼 자주 접속하거나 많은 시간을 투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게임을 자주 하지 않는 이에게는 장점이 될 수 있다. 반면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유저들과 그 게임에 많은 시간을 쏟는 유저들이 비슷한 성적을 거두게 될 경우 이는 불리한 점이 될 수 있다. 게임에 쏟는 시간에 비례하는 보상을 제공하기 위한 방책(연습게임 등)을 일정 부분 생각해볼 수 있지만 이는 매니지먼트 게임의 애초의 의도와 상충될 수 있다. 이 점은 매니지먼트 게임에서 양날의 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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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에 관해서는 닌텐도 Wii 등이 기존의 게임과는 이질적인 소프트웨어들, 예컨대 토익이나 한자 테스트, 두뇌 계발 등의 프로그램을 ‘게임’이라는 당의정을 통해서 판매했던 사실을 상기해보는 것이 유용할 것으로 보인다. 대개 공부와는 무관하며 일탈과 시간 낭비의 대명사로 간주되어왔던 게임은 이제 공부를 보다 흥미롭고 재미있게 할 수 있게 해주는 매개, 예컨대 PMP나 전자수첩과 같은 일종의 학습도구가 된다. 이는 공부가 단지 학교의 울타리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늘날과 같은 지식기반경제에서 공부란 단지 학생 때뿐 아니라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평생’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의 전환과 관계된다. 즉 시대정신은 공부란 특정한 나이 제한없이 이루어지는 평생 학습이어야 하며, 더 나아가 생산 활동, 심지어 놀이와도 결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닌텐도 Wii가 활용했던 주요한 광고전략 중 하나 역시 이런 점을 공략한 것이다. 즉 게임은 더 이상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미취학 아동이나 직장인, 노인에 이르기까지 각종 학습을 도와주고 두뇌 노화를 예방하는 기능까지 수행해야 한다. 물론 닌텐도 Wii의 여러 소프트웨어와 매니지먼트 게임은 일견 서로 호응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게임 속에서 가장 유희적이지 않은 요소, ‘학습’과 ‘지식’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이를 통해 상당히 많은 호응을 얻어냈다는 점에서 양자는 중요한 공통점을 갖는다. 매니지먼트 게임에서도 유저가 속한 리그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나 이적 정보, 드래프트 및 FA 시장에 대한 포괄적인 숙지가 마찬가지로 필수적이다. 선수들의 세부적인 능력치와 연봉, 다른 팀들의 일정 등 각종의 통계 정보가 중요한 것은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지배가 팀 전체의 성공적인 경영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고전적인 정식은 오늘날 지식의 고부가가치 창출과 탁월한 경제적 효용으로 번역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끊임없이 자격증을 따고 지속적인 학습을 통해 자기계발하도록 강제되는 현대인들의 형상은 매니지먼트 게임의 유저에게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남는 질문들

요컨대, 매니지먼트 게임의 유저는 스스로를 더 이상 비생산적인 ‘잉여’로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투자하고 소비하며 각종의 리스크를 관리하는 생산적인 ‘경영자’로 자신을 체험한다.5) 오늘날 유통되는 많은 경영 담5) 이 점에서 매니지먼트 게임의 유저는 아즈마 히로키 등이 이야기하듯 포스트모던 시대에 거대 서

사가 몰락한 후 일러스트나 피규어 등에 집착하는 데이터베이스형 인간(오타쿠)과 대비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매니지먼트 게임의 유저 또한 데이터베이스형 인간의 한 변종으로 간주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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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새로운 자본주의의 관건이 건전한 기업가정신의 함양에 있다면, 매니지먼트 게임 류가 호응을 얻는 것은 전반적인 사회적 여건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무의식적인 수준에서라도, 매니지먼트 게임은 이와 같은 기업가 정신의 고취를 위한 일종의 ‘학습장’ 같은 것으로서 작용할 수도 있다. 게임이 다양한 형태로 진화, 변화해왔음을 인정하고 그것이 게임 산업을 포괄하는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와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인정한다면, 아래와 같은 질문을 제기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잠시나마 경기 침체와 청년 취업난의 고달픈 현실을 잊으면서, 온라인에서나마 전능한 경영자로 체험하는 매니지먼트 게임 유저는 게임을 통해서 어떠한 소망을 충족시키는 것일까? 의식하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사실은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들을 끊임없이 계산하고 예측하면서 동시에 그것의 계산 불가능성을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령 <프로야구 매니저> 같은 게임에서 유저는 좋은 타선이나 투수진 배치를 위해 끊임없이 선수들의 컨디션과 능력치, 선수들 간의 상성을 고려해야 하는데, 이때 엄청나게 사소해 보이는 디테일은 예상 외로 결정적인 변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매니지먼트 게임의 유저인 구단주는 형식적으로 전능한 존재인 동시에 실질적으로는 무능한 존재이다. 팀이 거둔 성적 등 플레이의 모든 책임은 형식적으로 구단주인 유저 개인에게 귀속되며, 아무도 그것을 면제해줄 수 없다. 그런데 팀 스포츠가 구단주라는 단 한 명의 개인의 선택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문제로 변형될 때 우리는 스포츠 또는 사회의 복잡성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켜버리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선수들 간의 협동이나 불화, 감독에 대한 반발 등이 현실에서 더 있을 법한 일이며 이러한 집단적 특성 때문에 스포츠가 예측하기 힘들고 더 재미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제기해볼 수 있는 중요한 질문은 가령 이런 것이다. 아무리 실력 있는 스타플레이어라도 언제나 새로운 경쟁과 이직, 트레이드와 퇴출의 위험이 있는 스포츠 선수들의 고용 ‘유연성’을 보면서 유저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보다 높은 연봉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치를 상승시키는 성실한 선수가 되기를 원할까, 아니면 (현실 속 복권 당첨과도 비견되는) FA 대박을 꿈꾸거나 (어쨌거나 고용 계약을 맺어야 하는 선수는 근본적으로 희망이 없는 존재이기에) 구단주가 되기를 바랄까? 컴퓨터를 끄고 현실로 돌아올 때,

있다. 도구적 합리성에 함몰된 기업가적 주체는 역설적이게도 역사의 종말 이후 진정성을 상실한 스노비즘적 주체의 한 변종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이은미 옮김, 문학동네, 2007의 2장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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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저는 실제로 구단주가 될 확률이 거의 0에 가까운 자신에 처지를 비관하며 냉소주의와 무력감에 빠질까 아니면 모종의 성취감을 느끼며 더욱 더 분주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스펙을 쌓도록 다짐하게 될까? 아마도 이러한 게임의 상당한 수요를 구성할 88만원 세대들에게서 우리는 그 일면 또는 양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제기된 질문은 이 제한된 지면에서 단순히 대답되거나 요약되기 힘들며, 또 다른 상세한 연구를 필요로 할 것이다. 다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게임에 대한 비평이 단순히 게임 안의 콘텐츠나 서사에 대한 문학적 분석, 각종 그래픽이나 기술적 요소에 대한 분석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탐구는 게임비평이 게임 유저와 게임 간의 상호작용(interaction) 또는 게임 유저와 사회, 게임과 사회 간의 상호작용에 대한 사회학적 비평으로 확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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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게임비평상 공모전 우수상>

게임 서사의 낯설게 하기, 그리고 새로움- <워크래프트> 시리즈에 내재된 ‘익숙함’의 변형에 대하여

송 세 희1)

익숙함과 낯설음의 경계선

어떤 대상에 익숙하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새로움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체는 늘, 또다시 식상하다. 그렇기 때문에 답답하고 권태롭다. 이런 느낌은 개인마다 모두 다르다. 사람에 따라 둘 이상의 대상을 익숙하다고 느끼건, 혹은 전혀 다르게 느끼는 문제는 개인의 경험과 느낌을 따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익숙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능동적인 태도가 요구된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삶에 익숙함을 느낀다면, 소설이나 영화를 감상하거나 여행을 떠나는 등의 새로운 것을 추구하여 삶 자체에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이 전혀 경험하지 못한 것, 생각지도 못한 것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느낀다. 이러한 '두려운 낯설음'은 옌치와 프로이트에 의해 밝혀진 바와 같이 낯선 환경, 대상, 조건 등에 의한 "지적인 불확실성"에 기인한다. 근대에 들어서 처음으로 기차가 다니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신기함과 함께 두려움을 느꼈다. 당시 사람들은 '기계의 동력을 이용한 운송수단'을 처음으로 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KTX가 처음 운행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기존의 기차보다 빨라진 속력에 감탄했고, '새로운' 기차를 편리하게 이용했다. 결국 새로움이란 기존에 경험했던 것에 대한 연장선상 위에 자리하는 것이다. 또한 프로이트는 더 나아가 두렵고 낯설게 느껴지는 것들은 사실 친숙했던 것들이지만 정서적 움직임에 따라서 정반대로 작용함을 지적하였다. 예를 들어, 우리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인지하고 있지만, 직접적으

1) 85년생. 세종대학교 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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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죽음과 연관된 귀신이나 묘지등과 마주하게 되면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이미 알고 있지만 그것이 막상 자신에게 다가오면 낯설게 느껴지는 것, 그렇기에 두려워지는 것. 이것 또한 '두려운 낯설음'이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모든 예술분야는 '두려운 낯설음'을 느끼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창조가 필연적인데, 이는 게임도 마찬가지이다. 일차적으로 '참여하는 재미'를 추구해야하는 게임의 특성상, 게임 속 배경과 인물 구현, 매력적인 스토리 설정 등 모든 것이 게임을 즐기는 사람의 흥미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러므로 직관적으로 말초적인 재미를 가지면서도 지속적인 흥미를 이끌어야 한다는 과제가 주어진다. 하지만, 이렇게 균형이 잘 잡히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게임이 그리 많지는 않다. 그 가운데 오랜 시간에 걸쳐 전 세계의 신화와 문명, 영웅들의 이야기를 차용한 <워크래프트>2)시리즈가 많은 관심을 받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북유럽 신화를 모태로 삼고 있는 J.R.R. 톨킨의 대작 반지전쟁(영화 <반지의 제왕>)은 <워크래프트> 시리즈의 스토리와 세계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워크래프트> 시리즈 역시 북유럽 신화 이야기에 기반을 두고 있다. 또한 이런 판타지 세계를 처음으로 게임에 도입한 TRPG <던전&드래곤스>에서의 게임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워크래프트> 제작진이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워해머> 시리즈 역시 게임 세계의 일부분을 신화에 의지하며 인간, 엘프, 드워프, 오크 등의 종족이 구현된 게임이다. 비록 <워해머>는 즐기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미 소설 반지전쟁, 혹은 영화 <반지의 제왕>시리즈를 통해 이들 종족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게임 상에 구현한다는 것은 결국 익숙한 것의 반복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워크래프트> 시리즈 이전에도 많은 게임들이 반지전쟁의 세계관에 영향을 받았고, 익숙한 것의 반복이라는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원작 소설에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였다. 익숙함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게임들이 탄생과 소멸을 거듭했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반지전쟁 자체가 하나의 완벽한 이야기 구조로서 변형이 어렵다는 점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토리를 제외한 등장인물이나 배경 등의

2) 워크래프트 시리즈는 PC용 RTS 장르인 <워크래프트 : 오크&휴먼>(1994.1) 출시를 시작으로, <워크래프트2 : 어둠의 물결>(1995.11), 확장팩 <워크래프트2 : 어둠의 문을 넘어서>(1996.5), <워크래프트3 : 혼돈의 시대>(2002.7), 확장팩 <워크래프트3 : 얼음 왕좌>(2003.7)을 발매하고 이후 PC용 MMORPG로 장르를 변경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2004.11), 확장팩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 불타는 성전>(2007.1), 두 번째 확장팩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 리치 왕의 분노>(2008.11)까지 출시된 상태다. 모두 같은 세계관과 이어지는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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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만을 차용하게 되었고, 이를 이용해 새롭게 창조된 독자적인 이야기 구조나 게임 시스템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워크래프트> 시리즈는 이런 익숙함이라는 약점을 극복하고 차별화에 성공하였다. 이는 새롭게 창조된 <워크래프트> 시리즈만의 이야기 구조와 게임 시스템이 사람들의 흥미를 지속적으로 자극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성공의 근원에는 과연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가.

친숙한 문화의 새로운 변형

<워크래프트> 속에는 익숙한 요소들과 새로운 요소들이 공존하고 있다. 기존의 모든 게임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마법 능력이 익숙한 요소라면, 샤머니즘을 통한 불가사의한 힘과 토테미즘을 따르는 자연의 힘은 새로운 요소이다. 하지만 익숙함과 새로움의 차이는 쉽게 눈에 띠지 않고, 게임 속의 새로운 요소라 할지라도 생각해보면 언젠가 들어봤다거나 본 것들인 경우가 많다. 이를 테면, 게임 속 종족 중 하나인 타우렌은 소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풍습은 아메리카 인디언과 같다. 또 뾰족한 귀를 가진 숲의 종족인 나이트엘프가 사는 도시의 정문은 우리의 숭례문과 닮아 있고, 심지어 그 곳의 상인들은 김치와 단팥죽을 팔고 있다. 강력한 오크는 <워해머> 이후로 정립되어 익숙한 녹색 피부에 큰 체격을 가졌지만, 몽골식 천막집인 파오를 연상하는 집을 짓고 살고 있다. 이들이 단순한 괴물이 아닌 인간과 같은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 또한 새롭게 다가오는 요소이다. 트롤 또한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추한, 땅의 요정이 아니다. '부두교'라는 원시 종교를 맹신하는 이들은 얼굴에 문신을 하며 팔다리가 가늘고 긴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는 아프리카 원주민의 모습과 닮아있다. 마지막으로 남성과 여성이 이(異)종족으로 느껴질 정도로 이질적인 드레나이의 건축양식은 아랍, 인도, 그리고 같은 회사 게임인 <스타크래프트>의 프로토스를 연상시킨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워크래프트> 속에는 변형된 실제 세계의 다양한 문화가 담겨있다. 많은 문화들이 배경과 건물양식, 캐릭터의 행동과 복장 등 세밀한 부분까지 모두 반영되며 세계 문화의 총집합체적인 양상을 보인다. <워크래프트> 시리즈는 중세 서양의 판타지로 시작된 초기작 <워크래프트 : 오크&휴먼>부터 지속적으로 발전되는 과정에서 새로움을 더하기 위해 기본 설정 속에 우리에게 익숙한 실제 세계의 문화들을 추가시켰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특히 <워크래프트3 : 혼돈의 시대>부터 추가된 네 종족들과 그들의 영웅들에게는 새로우면서도 익숙한 요소가 하나 이상씩 들어 있다.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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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오크 종족의 영웅 중에는 큰 염주목걸이를 두르고 흰 수염을 기르는 검사가 있다. 등에 일본 사무라이들이 실제로 지고 다녔던 깃발의 일종인 사시모노(指物)를 착용하고 있는 이 영웅의 이름은 일본식 이름을 연상시키는 ‘사무로’다. 또 나이트엘프 종족 중에는 켄타우로스와 같은 형상의 영웅이 등장하는데, 그는 다수 아군의 체력을 회복시키는 기술을 사용한다. 이는 마치 그리스 신화의 켄타우로스 현자 케이론과, 의료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와 같은 모습이다. 이후 RTS에서 벗어나 MMORPG로 거듭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세계 문화의 모습을 더욱 세밀하고 자세하게 묘사했다. 앞서 언급한 부분들의 구현은 대부분 장르를 전환한 이후부터 그래픽으로 확연하게 구분되기 시작했고, 또 다른 문화와 신화들이 추가되었다. 플레이어가 선택하지 못하는, 이른바 NPC나 몬스터 종족들도 이집트, 이누이트, 중세 십자군 등의 문화가 게임에 맞게 변형되어 세밀하게 구현되었다. 물론 게임 제작자가 어떤 신화나 문화를 모티프로 삼았다는 구체적인 언급을 한 적은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워크래프트>에서 보이는 각각의 세계가 어디에 기원을 두고 있는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고, 다양하다. 이는 그만큼 개인의 경험과 느낌이 다르고, 게임에서 구현한 세계가 다양한 문화와 신화를 연상시킬 만큼 혼합되고 변형되어있음을 의미한다. 이렇듯 <워크래프트>시리즈는 기존에 익숙한 북유럽 신화를 기반으로 하면서 그 속에 다른 문화를 덧칠하여 새로움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그 새로움에 낯설음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익숙한 실제 세계의 문화를 변형시켰다. 하나의 익숙함과 또 하나의 익숙함을 결합시켜 새로움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통해 <워크래프트>는 '낯설지 않은 새로움'에 대한 과제를 효과적으로 풀어가고 있는 것이다.

문화에 따라 새롭게 변형된 영웅

초기의 <워크래프트>는 휴먼과 오크의 갈등, 마치 중세 독일의 대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에 등장하는 아틸라의 훈(Hun)족과 게르만 민족의 전투를 연상시키는 종족전쟁으로 시작해 <워크래프트3 : 혼돈의 시대>에서는 서양과 비서양 문명 간의 충돌로 발전된다. 이렇듯 계속되는 충돌과 전쟁 속에서 많은 영웅들이 탄생하고 사라지는데, 이 영웅들은 기존의 게임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워크래프트>역사상 가장 위대하다는 평판을 받는 영웅인 ‘쓰랄’의 종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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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오크다. 오크는 앞서 언급했듯이 몽골제국의 영향을 받아 구현되었다. 이 연장선상에서 쓰랄은 몽골제국의 건국자 칭기즈칸을 연상시킨다. 칭기즈칸처럼 부족 영웅의 아들로 태어나 동족에게 아버지를 잃은 쓰랄은 고생 끝에 흩어졌던 부족들과 옛 동맹종족들을 재규합하고, 다른 종족과의 동맹을 새로 맺으며 이들을 강력한 세력인 호드(Hordes, 묘하게도 유목민을 뜻한다.)로 발전시킨다. 이 호드 통합의 과정에서 샤먼 드렉탈의 도움으로 고대 샤먼을 받아들이는데, 이는 칭기즈칸이 부족을 통일할 때 샤먼 코르치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실제 세계의 역사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을 게임 상에 구현함으로써 영웅의 외모는 낯설지만,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플레이어는 영웅의 일생이 자신이 어느 정도 아는 어떤 이의 일대기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만약 칭기즈칸의 일생을 전혀 모른다고 하더라도, 쓰랄의 일대기는 조셉 캠벨이 다양한 문화권의 신화를 분석해 도출한 ‘원질 신화(monomyth)’의 원칙을 상당부분 따르고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큰 무리 없이 이야기를 이해하고 몰입할 수 있다. 이는 괴물로 대변되던 오크를 위대한 영웅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것에 접촉했을 시의 거부감을 완화하고 오히려 긍정적인 반응을 도출하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휴먼의 경우에는 호드와 정반대의 영웅을 구현한다. 로데론 왕국의 촉망받던 왕자 아서스 메네실은 정의로운 기사였지만 악마의 세력인 스컬지에 유혹당하면서 잘못된 생각으로 백성들을 죽이고, 급기야 힘에 대한 탐욕만이 남아 아버지를 죽인 후, 스컬지의 군주가 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온전한 자신이 되기 위해 자신을 만든 이를 제거해야 한다는 관념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기저에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노스랜드에 이르러 강대한 스컬지의 군주 리치킹이 되었음에도, 결국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 리치왕의 분노>에서 리치왕 아서스는 죽음을 맞게 된다. 완벽한 힘을 얻은 것 같던 아서스가 죽은 이유는, 호머의 <오디세이>에서 언급되는 오디세이와 아들 텔레마코스의 이야기에서 짐작할 수 있다. 왕위에 올라 진정한 남성, 즉 아버지를 찾아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가정을 꾸려 지킬 수 있는, 남자로서의 인정과 축복을 받기 전에 그를 죽임으로써 아서스는 ‘인정받지 못한 존재’로 남게 되기 때문이다. 아서스는 죽기 직전에야 자신의 최후를 지켜주는 아버지의 영혼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고, 인정받게 된다. 쓰랄과 아서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선한 영웅과 악한 영웅의 이야기를 따라가지만, 그 영웅의 모습이 우리가 알던 것과는 정반대로 형상화되었기 때문이다. <워크래프트> 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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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는 게임 속의 각 종족마다 우리에게 친밀한 각각의 문화를 부여하였고, 이를 통해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모습을 구현하였다. 그리고 그 각각의 문화 속에서 원형을 찾을 수 있는, 기존의 그 종족이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는 상반된 영웅의 모습을 통해 익숙하면서도 새롭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항상 새로울 수 있는, 익숙한 것의 변형

<워크래프트>는 낯설지 않으면서도 새로움을 추구한다. 그렇기에 게임 곳곳에 숨겨진, 인간의 흔적을 발견하면서 플레이어는 익숙한 새로움을 발견한다. 괴상하게 생긴 캐릭터의 생활양식은 우리가 알던 어느 지방의 풍습과 비슷하고, 그들이 섬기는 신은 사실 우리의 옛 조상들이 섬기던 신과 유사하다. 푸른 피부에 커다란 송곳니가 튀어나온 한 영웅의 일생에서 우리는 인간적인 감명을 받는다. 또, 촉망받던 한 영웅이 어둠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세계를 위협할 악으로 몰락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를 떠올리기도 한다. 새롭다는 것은 항상 낯설음을 수반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새로움 속에서 익숙한 것을 찾고, 그것을 통해 친숙함을 느낀다. 이 '익숙한 새로움'을 느끼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대상을 ‘인간적’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류가 쌓아온 환상적인 모든 것들은 인간과 닮아 있다. 그렇지 않은, 잘 알지 못하는 것들은 낯설음과 두려움을 수반하며 때로는 거부감과 함께 기피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이러한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과 익숙한 것에 대한 안주라는 모순된 욕구는 모든 창조적 행위의 난제다. 때문에 창조적 행위는 익숙함과 낯설음이라는 두 개의 장대를 들고 재주를 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같다. 게임 역시 이 난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판타지 속에는 어떤 형태로든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 일방적으로 제작된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아닌 직접 참여하는 게임은 우리가 꿈꾸어온 판타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예술 장르이다. <워크래프트> 시리즈는 우리에게 판타지라는 '새로운 세계'와 그 속에 살고 있는 '새로운 나'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 새로운 것들은 다분히 인간적이다. 북유럽 신화라는 익숙한 게임의 요소에 새로움을 주기 위해 사용된 요소가 바로 실제 세계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판타지 세계 속에서 익숙하지만 경험한 적은 없는 세계 문화를 즐기는 것. 익숙한 것의 변형을 통해 새로운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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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현해 낸 것이 바로 <워크래프트>시리즈의 기반인 것이다. 인간은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긴 역사 속에는 다양한 문화들이 존재하고 있다. 아직 <워크래프트> 시리즈를 통해 우리가 발견한 것은 겨자씨만큼 작은 것에 불과하다. 앞으로 즐기고 생각할 여지는 무한하다. 그것이 <워크래프트>이든 아니면 다른 새로운 게임이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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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게임비평상 공모전 가작>

畵中之話, 프레임 속에서 이야기의 흔적을 쫓다-<The Drawn : The Painted Tower>을 중심으로-

윤 혜 지1)

장소가 꼭 미술관이 아니라도 가끔 그림 한 장에 매료되는 순간이 있다. 명화가 아니어도 좋다. 담벼락에 남겨진 크레파스 낙서든, 거장의 손길이 닿아 있는 성당의 벽화든, 어떤 그림에서는 보는 이의 눈길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는 기묘한 힘이 느껴진다. 그림은 바라보는 이의 눈과 물리적인 프레임, 두 가지 시선 안에 갇혀있지만, 그 안에서 요동치는 세계는 결코 고정될 수 없다. 그림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어쩐지 아쉬워지고, 저 프레임 안의 세계가 몹시도 궁금해진다. 포획되지 않는 경계 너머로, 닿을 수 없는 지평을 꿈꾼다. 한 장의 그림이 불러일으키는 은밀한 괄호 속의 욕망, 여기 그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열쇠가 있다.

[그림 1] <The Drawn>의 인트로�

[그림 2] <The Drawn>의 인트로

<The Drawn ; The Painted Tower>2)은 사악한 저주로 무너진 탑 꼭대1) 89년생. 강원대학교 스토리텔링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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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 올라가 그 곳에 갇힌 아이리스를 구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게임을 실행하면 가녀린 아이리스의 뒷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 뒷모습은 마치 한 장의 그림 속 대상인 듯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 쓸쓸히 갇혀 있다. 동시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본격적인 게임의 시작이다. 눈앞에 날아온 붉은 머플러는 앞으로 플레이어가 어떻게, 왜 아이리스를 만나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어디로 가야할 지 막막한 플레이어에게 유일한 실마리는 굳어가는 프랭클린과 만난 적 없는 아이리스의 친구들이다. 문을 열고 탑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문의 손잡이가 없다. 문고리가 없는 문을 무슨 수로 연단 말인가. 난관이다. 첫걸음조차 쉽지 않다. 무언가 계단에 떨어져있어 주워보니 문의 손잡이다. 문고리를 제자리에 놓고 돌리니 그제야 굳게 닫혀있던 탑, 아니 게임의 문이 열린다. 플레이어는 이 순간 게임의 규칙을 주입받는다.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온 보편적인 규칙,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것들을 돌려놓을 것. 모든 것들의 제자리 찾기, 숨은그림 찾기의 규칙이 바로 그것이다.

[그림 3] 문고리 없는 문. 바닥에 떨어진 그림을 갖다 대는 순간, 그림은 문고리가 된다.

2) 빅피쉬게임즈(Big Fish Games,Inc)에서 만든 어드벤처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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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게임 속 숨은그림 찾기의 방법은 이 지점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있다. 잃어버린 물건을 단지 찾는 것뿐만 아니라 찾아낸 물건들을 조합해 '쓸모 있는' 물건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 규칙은 플레이어의 능동적인 행위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낸다. 게임 속 내러티브를 그저 따라만 가는 것이 아닌 내러티브를 조합해가는 방식을 플레이어가 직접 체득해야만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게임을 진행해가면서 플레이어는 아이리스의 친구들이 그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찢긴 그림은 저주에 의해 봉인된 채로 탑 내부 곳곳에 흩어져 있다. 플레이어는 훼손된 그림을 복원하면서, 아이리스에게로 가는 실마리를 하나하나 찾아나간다. 이렇듯 표면적으로 보기엔 단순히 숨은 그림을 찾는 것에 다름없는 일련의 플레이 행위는, 전체적인 틀 안에서 잃어버린 이야기의 편린을 직조하는 서사적 경험이 된다.

황금빛 들판을 뒤져가며 허수아비의 조각난 몸을 찾고, 주술사를 만나 마법의 약을 만들어 차갑게 굳은 심장에 뜨거운 숨을 불어 넣기도 하며, 저주에 걸려 메말라버린 뿌리를 생명수로 적셔 죽은 나무를 되살려 내기도 한다. 수많은 계단을 정신없이 오르내리며 곳곳에 숨어 있던 그림들을 찾아내고, 끼워 맞추고, 짜깁기하는 과정을 거듭하다보면, 어느 사이 이야기의 중심으로 향해가고 있다. 어지간한 퍼즐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정도로, 이 혼란한 세계에 적응해간다. 아이리스를 구출하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 자신감이 생긴다. 그러나 게임의 변주된 규칙은 플레이어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탑 꼭대기로 이어지는 계단 끝에서 만난,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낯선 공간. 방 한 가운데 놓인 칠판, 그 옆에 놓인 분필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 이것은 고도의 퍼즐이다. 직관적일 필요가 있다. 본능적으로 분필을 집어 들고, 잠시 고민한다. 무엇을 그려야 하나. 무엇이 필요한가. 공간의 어둠을 걷어내려면 태양이 필요하다. 분필로 해를 그린다. 어둠이 걷히고 태양이 떠오른다. 낮이다. 이제야 시계탑 앞으로 들어갈 수 있다. 시계 부품을 수리하던 시계탑의 관리인은 이 시계탑이야 말로 이 연극의, 아니 이 게임의 핵심이라고 말하면서, 지금까지 풀어 온 퍼즐은 앞으로 전개될 모험의 연습에 불과하다고 경고한다. 조금만 더 가면 그녀에게 닿을 줄 알았건만, 갈 길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 이제 단순히 찾아내어 조합하는 방식으로만은 부족하다. 지금부터는 아이리스의 그림을 함께 그려가야 한다. 해를 그려 낮을 만들고, 달을 그려 밤을 만든다. 텅 빈 하늘에 시계탑과 구름을 그려 길을 만들고, 기사를 그려 공주와 만나게 해야 이야기가 나아갈 수 있다.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가며 집을 짓듯이 차곡차곡 그림을 그려 이야기를 쌓는다. 예정된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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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따라 탑을 오르는 것이 아닌 스스로 이야기의 탑을 쌓아가며 아이리스를 향한 길을 놓는다.

[그림 4] 시계탑 무대의 낮과 밤(左/中), 플레이어가 그리는 시계탑과 하늘(右上),

색칠해서 완성한 기사(右下)

<The drawn>이 가지는 또 다른 매력은 시의적절하게 들려오는 섬세한 사운드와 퍼즐을 풀어가는 형식을 포함한 견고한 내러티브 설정에 있다. 게임 속 내러티브를 사실처럼 믿게 만드는 데는 사운드의 역할이 지대하다. 시선은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지만, 귀로 들어오는 다양한 사운드는 2차원에 존재하는 아이리스의 세계를 3차원으로 변환하여, 플레이어가 그녀의 세계 속에서 실제로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메마른 나무를 되살리기 위해 나무가 그려진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나무가 꺾이는 효과음이 들린다. 플레이어는 마치 실제 숲속으로 뛰어 들어가고 있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진다. 나무를 살려내기 위해 주술사를 만나러 가는 길엔 귓가에서 마법이 펑펑 터지고, 얼음 속 그리폰의 세상으로 들어갈 땐 얼음 갈라지는 소리에서 냉기가 풀풀 느껴진다.

더 어려운 관문으로 향할 때마다 프랭클린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아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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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옛 이야기를 듣노라면, 이 연약한 소녀를 더 빨리 구하러 가지 못하는 것이 원망스럽고, 얼른 그녀에게로 가기 위해 마음이 조급하다. 플레이어는 정교한 그래픽과 풍성한 사운드가 어우러져 만드는 이 매혹적인 이야기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다. 또한 연극, 미술, 문학 장르를 넘나들며 게임의 전체적인 틀을 형성하는 예술적 모티프는 플레이어의 시선을 끌 뿐만 아니라 게임 속 내러티브를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비록 게임에서 주어진 숨은그림 찾기의 규칙이 일차원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주어진 퍼즐을 정해진 대로 맞추어야만 게임을 무사히 진행할 수 있다는 점은 플레이어에게 다소 수동적이고 도구화된 느낌을 갖게 할 수도 있다. 조금이라도 규칙에 어긋나면 아이리스에게로 향하는 길은 더욱 깊숙이 숨어 찾을 수 없게 되고 플레이어는 잠시 절망감을 느낀다.

만약 지정된 연극, 미술, 문학 콘셉트 안에서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이야기를 진행시킬 수 있도록 했다면, 플레이어는 아이리스를 구하러가는 용사인 동시에 작품을 완성해가는 예술가일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게임의 분위기는 더욱 다양했을 테고, 게임을 끝낸 플레이어의 만족도는 더욱 높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게임의 내러티브가 여러 갈래로 열려 있었다면, 아이리스의 구출이라는 하나의 목적만을 향해 달려야하는 용사의 다급함과 절박감은 반감되고, 전체적인 내러티브는 희석되었을 수도 있다. 목적이 분명한 제한된 설정은 플레이어의 몰입을 강하게 만들고, 게임 속 이야기에 사실성을 더한다. 더욱이 이러한 폐쇄된 설정이 프레임 안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는 그림의 운명을 암시한 것이라고 본다면 이 게임의 내러티브는 더욱 완전무결해진다.

일반적인 경우에 목적이 있는 게임을 할 때, 일정한 시험을 거쳐 임무를 완수한 뒤에 플레이어를 기다리는 것은 시원한 쾌감이다. 그러나 <The Drawn>의 엔딩은 플레이어의 마음에 기묘한 여운을 남긴다. 가까스로 꼭대기에 도착하니 가녀린 소녀만이 위태롭게 서 있다. 그녀임을 확인하자마자 돌아오는 것은 감격적인 해후가 아닌, 외침인지 속삭임인지 모를 단호한 목소리. "Run!" 어떻게 된 상황인지 생각할 시간 따위는 없다.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정신없이 계단을 달려 내려온다. 탑을 나가기 위해 문을 여는 순간 섬뜩한 기운에 멈춰 설 수밖에 없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땀방울. 두렵다. 간신히 피해 다녔던 그를 마주하자, 아니 체념과 비감이 섞인 아이리스의 공허한 눈빛과 마주하자 한없는 두려움에 몸이 굳는다. 엔딩에 도달해서야 플레이어는 거대한 진실과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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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탑의 꼭대기에서 마주친 아이리스와 그녀의 마지막 대사

탑 꼭대기로 올라오며 만났던 모든 그림들과 그 속의 이야기들은 아이리스의 일기의 한 부분이었고, 프랭클린이 아이리스에게 들려준 그녀의 과거였다. 그런데 엔딩까지 도달해서도 어쩐지 속이 시원하지가 않다. 모든 비밀을 풀어냈다고 믿었지만 그 이야기들은 단지 그녀의 일부일 뿐이고, 게다가 그녀마저 눈앞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림 6] 플레이어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아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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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탈하다.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이 까마득한 탑을 올라 왔으며, 그토록 구하려 애썼던 존재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대로는 그녀를 구했다고 말할 수가 없다. 사소한 퍼즐을 목숨 걸고 풀어가며 여기까지 왔으나, 이야기의 퍼즐만큼은 아무래도 풀 수가 없다.

문고리도 없는 문을 열고, 결국 도달한 곳은 막다른 골목. 그 충격과 허탈감은 그래서 더욱 이 마지막을 특별하게 만든다. 천 하루의 밤을 하얗게 지새울 수밖에 없었던 세헤라자데의 이야기가 그러했듯, 닫힘 없이 열려진 이야기는 듣는 이를 안달하게 만든다. 어쩌면 아이리스의 그림이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아닌 책 속에 그려진 이유는 엔딩을 위한 은밀한 복선이었는지도 모른다. 앞서 게임을 진행해오면서 알 수 있었듯이 프레임 속의 그림은 찢기는 동시에 이야기를 전달하는 기능을 포기해야만 한다. 프레임 속의 세계는 무한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 이야기는 일정한 프레임 안에 갇혀 오로지 시각에 의존해서만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는 비극적 운명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책 속에 문자로써 기록된 이야기는 페이지가 찢겨 나가도 여전히 남는다. 문자로 쓰인 이야기는 눈앞에서 형체를 상실한다고 해도 굳건하게 그 존재를 지킬 수 있다. 그림을 복원한 것은 다만 형식에 지나지 않다. 복원된 그림은 단지 표상에 불과할 뿐, 정작 탑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들이 말하고 보여준 이야기에서 나왔다. 아이리스가 끝내 탑을 나서지 않고 사라져버린 이유는 이 지점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아이리스가 갇혀 있던 탑 역시 표상일 뿐이다. 그토록 간절하게 찾으려 했던 아이리스는 곧 '이야기'다. 액자도, 책도, 탑도 플레이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아이리스가 구상한 또 하나의 프레임이다. 지금까지 캔버스를 통해 보아 온 그것, 프랭클린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었던 그것, 프레임 이곳저곳을 넘나들고 계단을 허겁지겁 뛰어올라가며 온 몸으로 느끼고 겪었던 그것은 결국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였다.

게임을 모두 마치고 나서야 이 모든 경험이 이야기를 접하기 위한 특별한 방식이었음을 알게 된다. 동시에 다른 어딘가에서 틀림없이 아이리스를 다시 만나리라는 이상한 확신도 든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 같지만, 그녀의 흔적이 기억 속에 놀라움으로 각인되어 남아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의심도 견뎌낼 수 있는 자명한 것, 의심하는 나 자신의 기억 속에 아이리스의 마지막 외침이 빛보다 푸른 슬픈 눈의 잔상으로 분명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이야기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뜻이며, 어느 날 갑자기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또 다른 모습으로 문득 찾아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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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다. 말한다, 기록한다, 담는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원초적인 욕망은 인류가 존재해 온 세월만큼 긴 시간을 따라 그 모양을 달리했다. 어느 날은 바위벽에 아이의 장난처럼 함부로 그려졌다. 어느 날은 고운 목소리에 담겨 많은 이들의 귓가에 아름답게 그려졌다. 또 다른 어느 날은 배고픈 시인의 손을 빌려 쓸쓸하게 그려지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차가운 기계의 눈을 지나며 뜨거운 숨으로 꿈결처럼 그려지기도 했다. 시각적이거나 청각적인 혹은 시청각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접하는 방식은 다양하게 발전해왔다. 그러나 눈 닿고 손닿는 모든 것에서 이야기를 감각할 수 있는 지금, 단순히 보고 듣는 2차원적 경험만으로는 넘치는 그 욕망을 다 끌어안을 수 없다. 새로운 차원으로의 돌파구가 필요하다.

<The Drawn>이 아이리스를 통해 보여준 세계는 태초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과정이기도 하고 이야기를 다양하게 느끼고자 하는 현 시대의 욕망이 투영된 흥미로운 방법론이기도 하다. 그녀를 더 알고 싶다. 시간이 흐른 뒤 성숙한 아가씨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날 아이리스의 모습이 궁금하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낯선 감각. 세헤라자데의 달콤한 유혹에 영원을 약속해버린 샤리아르와 같은 마음으로, 지금과는 또 달라져 있을 그녀와의 만남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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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게임비평상 공모전 가작>

규칙 내에서의 즐거움과 규칙을 파괴하는 즐거움- <포탈>의 장르 분석을 중심으로

허 권1)

게임에서의 자유와 퍼즐게임의 규칙

진정한 자유를 원하는 사람은 없고 오직 구속받는 인간만이 있을 뿐이라는 말이 있다. 진정한 자유란 결국 아무에게도 관심 받지 않고 관심 주지 않는 무(無)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이러한 것을 결코 견딜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소속감과 사회적 유대감, 책임감 등으로 포장하여 스스로를 구속하게 마련이다. 게임은 이러한 현실에서의 구속과 규칙을 가상으로나마 파괴하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하지만 게임이 정말 100%의 자유를 가지고 있을까?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게임은 자신만의 규칙을 가진다. 최근 자유도가 높은 게임들이 인기를 얻고 있는 추세이긴 하나, 자유도가 다른 게임에 비해 조금 ‘높을’ 뿐이다. 모든 게임은 여전히 이동의 제약, 시간의 제약을 가지며 그 게임의 세계관 안에 갇혀있다. 만약 도시 한가운데 덩그러니 주인공을 떨어뜨린 후 아무 임무도, 규칙도, 설명도 주어지지 않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게임이라면 그것이 과연 재미있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살펴보면, 모든 사람들은 구속과 규칙이라는 것에 거부

감을 가지고 있다. 실제의 무정부 상태와 대혼란 상태에서 생활 할 수 없음을 생각해보면 이는 참 아이러니 하지만 항상 모든 사람은 새장에 갇혀 있으며 절대 나가지 않을 새장 문을 꼭 열고 싶어 한다. 따라서 이러한 일탈의 장이 되어야 하는 게임은 자신의 규칙과 게임내의 한계점을 어떻게든 숨겨야 한다. 아주 멋진 시나리오와 혹은 멋들어진 세계관과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훌륭한 시나리오는 게이머가 자유롭게 행동하기보다는 주어

1) 83년생. 인하대학교 경제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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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임무를 수행하여 다음 시나리오에 다가갈 수밖에 없게 하며 멋지고 잘 짜인 설정과 세계관은 그 자체로 게임의 한계점을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전부 퍼즐 외의 장르에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퍼즐

이라는 장르는 장르 특성상 규칙이 시나리오이며 세계관이다. 체스의 기물이 움직이는 방식은 체스 게임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변하지 않으며, 테트리스의 블록을 채워 한 줄을 소거하는 기본 규칙은 수많은 테트리스의 아류작과 시리즈의 홍수 속에서 단 한 차례도 바뀌지 않았다. 만약 규칙이 바뀐 체스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이미 체스가 아닌 것이다. 즉, 퍼즐에 있어서만은 규칙이 곧 게임의 전부이며 아이덴티티이다. 또한 퍼즐 게임에 있어서 게이머는 게임과 분리되어 있다. 여타 RPG장르

와 액션 등의 장르의 게임을 즐길 때 게이머는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하며 함께 긴장과 스릴을 느낀다. 하지만 퍼즐 게임을 즐길 때는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이 게임기 혹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음을 실감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세상의 어느 누구도 체스를 즐기며 기물에 감정을 이입하는 경우는 없다. 규칙은 주어져 있고 게이머는 규칙에 따라 수를 생각하는 게임기 앞에 앉은 사람일 뿐이다. 이에 다른 모든 게임이 자유도를 강조하며 게이머에게 일탈을 선사할 때

퍼즐 게임은 규칙성을 더욱 강조하고 멋들어진 규칙과 규율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다. 과거 TRPG에서 턴 방식 RPG를 지나 실시간 MMORPG까지, 2차원 액션게임에서 1인칭 액션게임까지 모든 게임이 자유도를 부르짖고 조금 더 실감나는 일탈을 추구하며 발전할 때 퍼즐 장르는 결과적으로 도태되며 사라져 갔다(가장 널리 알려지고 가장 많이 즐긴 퍼즐게임인 테트리스의 경우, 기본 틀은 이미 25년 전에 완성되었다). 최근의 퍼즐 게임은 모바일 게임 시장과 여러 앱스토어들에서 시간 죽이기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며 퍼즐 게임으로서의 킬러 타이틀이라는 것은 하나의 농담처럼 들리게 된다. 그런 까닭에 2007년 발매되어 올해의 게임상을 수상한 밸브 사의 <포탈>

은 가히 충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 FPS장르지만(실제 게임분류도 FPS로 되어있는 곳이 많다), 실상 플레이는 완벽하게 퍼즐 게임의 공식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시나리오와 자유도가 존재하는 퍼즐 게임. <포탈>이 비주류 장르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점은 과연 어디 있을까?

등잔 밑에 기물을 숨기다 - 장르의 혼합을 통한 감정이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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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밝혔듯 <포탈>은 FPS 장르를 표방하며 때문에 대부분의 이러한 장르가 그렇듯 <포탈> 역시 게이머가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하는 것에 있어서는 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엄청나게 신선한 발상이다. 왜냐하면 사실상 <포탈>은 FPS에 퍼즐의 규칙을 적용한 게임이라기보다는 퍼즐 게임에 FPS의 시점만을 적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추어 프로그래머가 만든 플래시 게임인 <포탈> 2차원 버전을 즐겨보면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는데, 이 플래시 버전은 긴장감과 스릴이 있는 게임인 <포탈>이 아닌 단순한 수 싸움의 퍼즐 게임일 뿐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시점을 바꾼 것만으로 긴장감과 생동감을 조성한 것일까? 1인칭 시점으로 체스를 둔다고 해서 체스 게임의 긴장감이 더해지지 않는

다. 테트리스의 아류작인 3차원 테트리스는 단순히 눈이 아프고 복잡할 뿐이다. 때문에 게이머는 포탈이 퍼즐적 요소를 가진 것은 눈치 챌 수 있으나 끝까지 <포탈>을 퍼즐로 분류하는 데는 주저하게 된다. 퍼즐 게임에서 중요한 요소를 차지하는 기물, 혹은 블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인데, 이러한 기물은 사실 발칙하게 숨겨져 있을 뿐 분명히 게임 내에 존재하고 있다. 바로 <포탈>의 주인공, 즉 게이머 자신이 출구까지 이동시켜야 하는 하나

의 기물이고 <포탈> 건은 기물의 이동과 운용방식을 결정하는 규칙이다. 기물에게 생명력을 주고 1인칭 시점을 줌으로 해서 <포탈>은 퍼즐 게임

에 없는 자유도를 마치 있는 것처럼 속이고 있다. 물론 게이머는 스테이지 내의 일정지역에서 자유롭게 시선을 옮길 수 있고 이동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체스를 즐길 때 한 칸 안에서 기물을 이리저리 돌려보거나 테트리스에서 블록을 계속 회전시키는 것처럼 무의미한 움직임이다. 진정한 게임 플레이는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기 위해 <포탈>건의 사용 위치를 고민할 때이며 이외의 모든 움직임은 <포탈>의 기물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하는 것에 대한 속임수 이다. 이렇게 장르 혼합을 통한 잘 짜인 속임수로 규칙과 기물이라는 퍼즐의 요

소를 감춰버린 <포탈>은 그 대가로 게이머의 감정이입과 긴장감, 영화와 같은 시나리오를 얻을 수 있었다.

규칙의 파괴의 즐거움을 선사하다 - 또 하나의 속임수

이렇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이 퍼즐게임임을 철저하게 속인 <포탈>은 굉장히 재미있게도 ‘글라도스‘라 이름 붙은 여성의 목소리를 띈 AI를 통해 규칙을 직접 말해준다. 그토록 공들여 규칙과 기물이 존재하는 퍼즐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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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을 숨긴 후 게임 내에서 직접 차분하게 규칙을 설명하는 것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포탈>의 또 하나의 귀엽고도 신선한 속임수일 뿐이다. 첫 스테이지부터 주인공을 따라다니는 글라도스의 냉정한 기계음은 <포

탈>건의 사용법과 규칙을 친절하게 설명하기 시작한다. 마치 다른 퍼즐게임의 How to play 메뉴역할을 대신하는 듯 한 그녀의 음성을 통해 게이머는 스테이지가 지날 때마다 <포탈>건의 응용법과 새로운 규칙들을 알게 된다. 이에 따라 게이머는 글라도스가 게임의 규칙이라고 느끼게 되며 결과적으로 앞서 밝힌 장르 특성에 의해 글라도스의 음성이 <포탈>이라는 게임 자체라고 생각하게 된다. 때문에 스테이지가 지날수록 무언가 완벽하지 않고 의심점을 남기는 글라

도스의 음성은 서서히 게이머를 의혹을 가지고 몰입하게 만든다. 마침내 게임 중반에 다다라면 글라도스는 주인공을 죽음의 길로 인도하게 되는데, 이때 게이머는 그동안의 플레이에서 게임 그 자체를 구성하고 있던 규칙의 배신으로 순간 공황상태를 느낀다. (실제로 전혀 사전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플레이했을 경우, 이곳이 게임의 마지막인 줄로 알고 탈출 시도 없이 그냥 죽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 지점을 통과하고 난 후부터는 글라도스의 도움말 없이, 아니 방해를 헤치며 플레이하게 되는데, 이러한 플레이는 곧 규칙의 파괴와 일탈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최후의 글라도스와의 일전을 통해 그녀를 파괴하고 나면 게이머는 <포탈> 내에서 자신을 속박하던 모든 규칙과 규정을 부순 것 같은 착각을 받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바뀐 규칙은 아무것도 없다. 글라도스의 배신 이후에도

<포탈> 건은 여전히 같은 원리로 운용되었으며, 주인공의 탈출 역시 <포탈> 건을 통해서만 출구로 향할 수 있었다. <포탈>은 단순히 규칙을 설명하는 설명자를 따르지 않고 맞서는 형태를 취함으로 해서 실제로는 바뀌지 않는 규칙을 파괴하는 즐거움만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글라도스의 배신 전과 후의 플레이 방식은 완벽하게 똑같으나 매우 다른 느낌을 선사한다. 규칙을 하나하나 알아가며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즐거움과 규율을 벗어나는 짜릿함. 이 모두를 하나의 퍼즐 게임에서 구현한 것이다.

한계와 규칙의 극복

불가능해 보였던 기물과 규칙이 없는 1인칭 퍼즐 게임. <포탈>은 속임수를 통해 그 모두를 숨기고 감추며, 착각하게 함으로써 완벽에 가까운 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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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를 만들어 냈다. 이는 각 장르의 장점을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의 유희에 가깝다. 게임에서의 규칙은 여전히 필요악이다. 일탈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 게임은

최대한 자신들의 규칙에서 다른 쪽으로 게이머의 이목을 돌려야 하며 감춰야 한다. 규칙이 전부라 여겨졌던 퍼즐 장르에서 나타난 <포탈>이라는 치밀한 수를 가진 게임은 하나의 가능성을 열었다고 하겠다. 최근 이러한 <포탈> 외에도 여러 가지 혼합 장르의 게임이 많이 등장하

고 있다. 액션 장르를 결합한 전략 시뮬레이션. 슈팅 장르를 표방한 연예 시뮬레이션 등 다양한 작품이 선보이고 있다. 또한 장르적 특성의 파괴뿐 아니라 게임이라는 매체의 한계를 극복하는 모션 컨트롤러, 3D 게임 등의 발상도 이루어지고 있다. 시도는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각 게임 장르의 단점과 장점을 완벽히

파악한 개발자의 눈부신 상상력은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명작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오늘도 크고 작은 규칙 속에 살고 있고 게임이라는 매체는 이러한 규칙에 얽매인 삶에서의 조그마한 해방구가 되어야 한다. 애초에 일탈과 자유로움의 재미를 선사해야 하는 게임이라는 매체가 장르적 규율과 관습에 매여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자가당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의 게임이 어떤 형태를 가질지 한계 없는 상상력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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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게임비평상 공모전 가작>

<리틀 빅 플래닛>, 무한의 가능성을 말하다- 게임 <리틀 빅 플래닛>이 선사하는 창조적 활동의 즐거움-

이 진 우1)

인간의 창조적 욕구 해소에 도움을 주는 게임

인간의 가장 큰 욕망 중 하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것이다. 어릴 적, 인형의 집을 꾸미거나 모래로 성을 쌓아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창조적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 그리고 창조는 어떤 것보다도 생산적이며, 고차원적인 활동이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2)은 “이 세상의 훌륭한 것들은 모두가 독창성의 열매이다.”라고 말했고, 193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시사평론가인 버틀러(Nicolas Murray Butler)는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째는 무엇을 창조하는 소수의 사람이요, 둘째는 무엇이 창조되는지를 구경하는 수많은 사람이요, 셋째는 무엇이 창조되는지를 모르는 대다수의 사람이다. 우리에게는 무언가를 창조하는 사람이 더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창조적 활동에 대해 상당히 권고적이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창조적 활동은 인간의 삶을 풍족하고 기름지게 한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창조적 활동의 심적 보상을 추구한다. 게임 <리틀 빅 플래닛>은 그러한 창조적 욕구를 해소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미국의 월간 비디오 게임 잡지 <게임 인포머>는 <리틀 빅 플래닛>을 “게임이란 것에 대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정말 많은 것을 바꾼 게임”이라고 말하고 있고, <Play Station-The Official Magazine>은 “이 게임은 혁명의 시작이다”라 말하고 있다. 게임 <리틀 빅 플래닛>이 이토록 찬양1) 국민대학교 영어영문학과2) 존 스튜어트 밀 [John Stuart Mill, 1806.5.20 ~ 187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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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각광을 받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단순하면서도 유저의 능동적 참여를 유도

<리틀 빅 플래닛>에서 플레이어는 작은 ‘리빅’이 되어 모험을 한다. 강을 건너고 장애물을 뛰어넘고 밧줄타기를 한다. 여러 행성들을 돌며 각 맵에 준비된 다양한 콘텐츠를 즐기는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본 게임이 갖는 심도 깊은 게임성에 놀라게 된다. 기본적으로 <리틀 빅 플래닛>은 액션 게임이다. 이동과 점프로 구성된 간단한 조작체계를 가지고 있고, 게임 방식 또한 출발지점에서부터 목적지까지의 이동이 전부일 정도로 심플하다. 비주얼도 차세대 콘솔 게임답게 아주 미려하다. 고해상도 텍스처와 맵 디자인, UI 등은 높은 수준을 자랑한다. 완벽에 가까운 비주얼적 묘사는 동화 속 세상의 기묘하면서도 신비스러운 느낌을 잘 살렸다. 하지만 이런 비주얼적 특성만이 <리틀 빅 플래닛>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아니다. 게임의 질은 크게 내, 외적인 측면으로 접근할 수 있는데, ‘비주얼’과 ‘게임성’이 그것이다. <리틀 빅 플래닛>은 뛰어난 비주얼, 작품 내에서 자연스레 연동작용 하고 있는 물리엔진 등 직관적으로 나타나는 외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또 한쪽으로는 관념적인 게임 플레이로 인한 용이한 접근성과 2차 창작의 범용성으로 인한 유저들의 능동적 참여 등 간접적으로 나타나는 내적인 이점이 있다. <리틀 빅 플래닛>의 장점은 압도적인 고율로 후자 쪽이다. <리틀 빅 플래닛>의 게임 방식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심플하다. 5분 남짓 되는 튜토리얼을 거치면 누구라도 본 게임을 즐길 수가 있다. 이런 직관적 조작과 관념적 룰은 접근성을 높여 유저의 다양성을 도출한다. 이를 통해 <리틀 빅 플래닛>의 최대 강점인 창조적 활동을 보다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게 된다. <리틀 빅 플래닛>은 단발로 끝나지 않는다. 준비된 스테이지를 모두 클리어함으로써 작품의 가치가 끝나고, 중고로 팔려질 만한 게임이 아니란 뜻이다. <리틀 빅 플래닛>의 스토리 모드 이후에는 더 큰 세상이 유저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세상은 또 다른 유저가 창조한 새로운 세계이다. <리틀 빅 플래닛>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플레이어를 기다리고 있다.

타 유저와의 공유를 바탕으로 한 창조적 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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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가진 본능적 욕구는 다양하다. 멋진 옷을 사고 싶어 하거나, 좋은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한다. 때때로 덧없는 일탈을 꿈꾸기도 한다. 이러한 인간의 욕구들은 결국 욕구 충족 활동으로 귀결된다. 창조 욕구 또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 중 하나이다. 인간이 창조적 활동을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창작 활동 자체에서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결과에 대한 즐거움이 아닌, 창조를 하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화가는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에서, 조각가는 조각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 활동만의 재미를 느끼는 것이다. 창조를 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활동 자체에 대한 기쁨’은 쉽게 다가오는 직접적 감정이다. 또 하나는 창조적 활동의 포괄적 단위로, 2차적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이다. 과정의 즐거움이 직접적 감정이라면, 창조적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로 인해 돌아올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간접적 감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창조적 활동을 하는 이유의 다양성을 의미한다. 요리사가 자신의 요리를 먹고 즐거워해 줄 손님의 감정을 기대하는 것이나, 크리에이터가 자신이 만든 게임을 통해 유저의 감동을 기대하는 것이 그런 간접적 측면이라 할 수 있다. 타인의 인정을 기대하는 심리는 창작활동에서 좋은 성과를 내고 싶다는 호승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기대감을 갖게 하고, 나아가 개인의 가치상승을 목표로 한다. 이는 직관적이지 않은 2차적 이유로서, 미래를 기대하는 사고를 가진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고차원적인 감정이다.

‘<리틀 빅 플래닛>의 다른 유저가 창조한 세계’라는 것은 ‘유즈맵’을 의미한다. 플레이어는 크리에이터 모드로 들어가서 여러 오브젝트를 조합하여 새로운 맵을 창조한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맵을 온라인상에 공개하여 많은 유저와의 공유를 목표로 한다. 이것은 <리틀 빅 플래닛>의 캐치 프레이즈였던 Play(놀이), Create(창조), Share(공유)의 3요소를 충족시킨다. 앞서 전개시킨 논리에 <리틀 빅 플래닛>의 크리에이트 맵 시스템을 대입시 켜보자. <리틀 빅 플래닛>을 통해 창조적 유희를 즐기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직관적인 이유는 창조모드에서 맵을 구축하는 행위 자체가 즐겁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는 수많은 오브젝트를 자기 마음대로 배치하여 맵을 창조할 수 있다. 정해진 틀 속에서 한정된 결과물을 만드는 것을 탈피한 것이다. 유저 자신의 손에서 무궁무진한 결과물이 창출된다는 것은 상당히 매혹적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는 <블랙 앤 화이트>3)의 디렉터 3) 2001년 3월에 발매한 실시간 전략 게임. 플레이어가 신이 되어 세상을 가꾸어가는 것이 주된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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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몰리뉴4)가 추구했던 유저의 신격화가 녹아들어 있다. 무한히 펼쳐진 필드를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꾸며가는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간접적으로나마 ‘전능’의 영역을 즐길 수 있다. 이는 대리만족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직접적 감정만으로는 <리틀 빅 플래닛>을 통한 창조적 활동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창조적 활동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창조 활동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이는 창조자의 감성과도 직결되는 문제이다. 간접적 측면으로 접근한 <리틀 빅 플래닛>의 창조세계는 더욱 넓다. 플레이어는 2차적 이유에 따라서 창조적 활동(맵의 구축)을 한다. 자신이 창조한 맵을 공유함으로써 더 넓은 개념의 유희 활동을 하기 위해서이다. 바로 위에 ‘공유를 통한 창조적 활동은 창조자의 감성과도 직결되는 문제다.’라고 술회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창조자의 감성’이라는 말은 창조활동을 통한 즐거움의 추구, 동기 부여, 나아가 개인의 능력 향상을 포괄적으로 정의한 것으로 사용한 말이다. 창조적 활동을 통해 얻은 결과물을 다수와 공유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점을 낳는다. 타인의 창조물을 접하면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고, 자극을 받을 수도 있다. 또한 여러 사람들에게 자신의 맵을 공개함으로써 자신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결점에 대해 깨닫게 될 수도 있다. 지식이나 아이디어의 습득, 동기부여와 개인의 능력향상 등의 특성을 가진 창조적 활동의 간접적 측면은 대단히 중요하다.

위에서 말한 ‘창조활동을 즐기는 이유’에 대한 알고리즘 또한 간접적 측면 중 하나다. <리틀 빅 플래닛>의 창조모드는 생각보다 높은 수준의 테크닉을 요구한다. 사람들의 보편적인 심리를 읽어야 하고, 자연스러운 동선을 계산해야 한다. 대중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다수로부터 외면 받을 수도 있다. 때문에 퀼리티 좋은 맵을 만드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좋은 맵을 구축해 냈을 때의 성취감을 기대하며 창조 활동을 한다. 그리고 좋은 맵을 구축하려는 이유는 타인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이 욕구는 호승심으로 이어진다. 호승심은 결과물의 인정이라는 기대감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욕구와 감정들은 개인의 가치상승을 전제하기도 한다. 타인에게 인정받음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상승시키는 것이다.

소였다.4) <블랙 앤 화이트>, <페이블> 등의 게임을 제작한 디렉터. 게임 업계에서는 최초로 ‘영국 제국훈

장’을 받은 이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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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빅 플래닛>을 작지만 큰 지구라고 표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리틀 빅 플래닛>은 하나의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 프로그래밍과 여러 이미지의 조합일 뿐이다. 하지만 <리틀 빅 플래닛>의 창조 모드를 통한 세상은 결코 좁지 않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그것을 다른 창조자와 공유하며,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새로운 세상은 얼마든지 탄생될 수 있다. 거시적으로 바라볼 때, 이 세상은 무한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인간의 가장 큰 욕망 중 하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것이다. 어릴 적, 인형의 집을 꾸미거나 모래로 성을 쌓아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창조적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 그리고 창조는 어떤 것보다도 생산적이며, 고차원적인 활동이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은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창조 충동을 계발하고 강화하는데 있으며, 창조 충동이야말로 새로운 삶을 여는 열쇠다.’ 라고 했다. 창조적 활동을 통한 생산적이며, 고차원적인 삶을 누리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크나큰 기회이고 권리이다. <리틀 빅 플래닛>에는 주어진 틀과 룰이 존재한다. 하지만 <리틀 빅 플래닛>을 통한 창조적 활동에는 틀과 룰이 존재하지 않는다(시스템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를 즐기고, 감정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누구에게나 가능성은 무한하다. <리틀 빅 플래닛>은 그런 무한의 가능성을 체험하게끔 도와준다. 창조자의 간접적 경험과 공유를 통한 호승심의 충족, 순수한 즐거움의 창조적 활동을 가능케 한다. 자유로운 창조활동의 세계에 빠져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리틀 빅 플래닛의 작고도 큰 세상에 어서 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