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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권 전통이 살아있는 터전 제3편 구비문학 490 전설은 일정한 지역에서 자연과 문화, 또는 인물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하여 오는 것을 말한다. 대체로 지리적 자연적인 특성이나 그 지역의 자랑거리가 있을 때에 전설이 만들어진다. 그런 예로서 기묘한 지세(地勢)나 빼어난 경치, 특이한 기암절 벽, 뛰어난 인물 등이 있다. 인물의 경우는 장군 위인·충신·학자·장사·효자· 열녀·미인·예언자·점술사 등이 있다. 그러므로 전설은 한 고을의 역사와 자연환경의 특색과 인물을 설명하고 있다. 따 라서 전설은 발생 시대를 암시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증거물이 제시되고 있다. 그 이야기를 비록 누가 만들어 낸 허구 일지라도 그 지역민은 사실로 받아들이고 전승 한다. 거기에는 그 지역 주민들의 자존심과 애향심이 내포되어 있으며, 나아가서는 그 지역 사람들의 정신적 또는 정서적인 구심점이 되고 있다. 이런 연유로 전설은 그 지역 주민들의 향토에 대한 사랑과 자긍심이 표현되고 있다. 전설은 크게 자연전설·문화전설, 인물전설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자연전설은 산천이나 암석이 주요 소재지만, 문화나 인물과도 복합적으로 얽혀지는 경우가 많 이 있다. 문화전설은 한 마을이 지닌 신앙·윤리·습관 등 제도에 관한 전설이다. 그리고 인물전설은 그 지역과 관련 있는 인물의 기행, 출세, 효도, 정열 등 특이한 삶을 표현하는 전설이다. 금산의 전설은 문화전설이 절대적으로 많고 다음으로 인 물전설이 많았으나 자연전설은 수려한 산과 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은 편이다. 이러한 전설은 그 지역 주민들의 생활과 의식 내지는 가치관을 보여 준다. 그리 고 그 지역문화를 창조해온 문화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전설은 삶의 교훈과 계몽성을 지닌 지식체계를 이루고 있다. 전설은 주민들로 하여금 지역공동체에 속 한 인간으로서 자기를 인식하고 공동체 안에서 생활규범이나 윤리의식, 또는 행동 지표를 제시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전설은 그 지역에서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해 온 것이다. 금산전설은 지리적인 조건으로 산천과 관련된 전설이 많이 있다. 그리고 역사적 으로 전략적 요충지였으므로 전쟁과 관련되어 있는 전설이 많이 전승되어 오고 있 다. 이에 비례하여 인물에 관한 전설도 전승되고 있다. 금산지역에서 채집되는 전설은 전설로서 완형을 갖춘 것보다는 단편적이고 불 제1절 전설 분류

전설 분류 - geumsan.go.kr 그리고 인물전설은 그 지역과 관련 있는 인물의 기행, 출세, 효도, 정열 등 특이한 삶을 표현하는 전설이다. 금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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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권 전통이 살아있는 터전

    제3편

    구비

    문학

    490

    전설은 일정한 지역에서 자연과 문화, 또는 인물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하여 오는

    것을 말한다. 대체로 지리적 자연적인 특성이나 그 지역의 자랑거리가 있을 때에

    전설이 만들어진다. 그런 예로서 기묘한 지세(地勢)나 빼어난 경치, 특이한 기암절

    벽, 뛰어난 인물 등이 있다. 인물의 경우는 장군 위인·충신·학자·장사·효자·

    열녀·미인·예언자·점술사 등이 있다.

    그러므로 전설은 한 고을의 역사와 자연환경의 특색과 인물을 설명하고 있다. 따

    라서 전설은 발생 시대를 암시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증거물이 제시되고 있다. 그

    이야기를 비록 누가 만들어 낸 허구 일지라도 그 지역민은 사실로 받아들이고 전승

    한다. 거기에는 그 지역 주민들의 자존심과 애향심이 내포되어 있으며, 나아가서는

    그 지역 사람들의 정신적 또는 정서적인 구심점이 되고 있다. 이런 연유로 전설은

    그 지역 주민들의 향토에 대한 사랑과 자긍심이 표현되고 있다.

    전설은 크게 자연전설·문화전설, 인물전설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자연전설은

    산천이나 암석이 주요 소재지만, 문화나 인물과도 복합적으로 얽혀지는 경우가 많

    이 있다. 문화전설은 한 마을이 지닌 신앙·윤리·습관 등 제도에 관한 전설이다.

    그리고 인물전설은 그 지역과 관련 있는 인물의 기행, 출세, 효도, 정열 등 특이한

    삶을 표현하는 전설이다. 금산의 전설은 문화전설이 절대적으로 많고 다음으로 인

    물전설이 많았으나 자연전설은 수려한 산과 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은 편이다.

    이러한 전설은 그 지역 주민들의 생활과 의식 내지는 가치관을 보여 준다. 그리

    고 그 지역문화를 창조해온 문화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전설은 삶의 교훈과

    계몽성을 지닌 지식체계를 이루고 있다. 전설은 주민들로 하여금 지역공동체에 속

    한 인간으로서 자기를 인식하고 공동체 안에서 생활규범이나 윤리의식, 또는 행동

    지표를 제시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전설은 그 지역에서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해 온 것이다.

    금산전설은 지리적인 조건으로 산천과 관련된 전설이 많이 있다. 그리고 역사적

    으로 전략적 요충지였으므로 전쟁과 관련되어 있는 전설이 많이 전승되어 오고 있

    다. 이에 비례하여 인물에 관한 전설도 전승되고 있다.

    금산지역에서 채집되는 전설은 전설로서 완형을 갖춘 것보다는 단편적이고 불

    제1절 전설 분류

  • 491

    제3장

    전설

    완전한 전설이 더 많이 전승되고 있다. 여기서 완형이라 함은 전설로서 서사구조를

    갖춘 전설을 말한다. 이러한 이유는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로 공통적인 요인을 가

    지고 있다. 첫째, 전승계층의 단절 내지는 교체이고, 둘째는 전설에 대한 낮은 인식

    도와 무지이고, 셋째는 전설로 인하여 감수해야할 재앙이나 피해의식이고, 넷째는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잊혀지는 것이라고 하겠다.

    금산지역의 전설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문화적으로 외래문화와 교섭이 빈

    번했던 옛 고을의 읍치인 금산읍과 진산면에 집중되어 있다. 다만 금산읍에서는 전

    설의 결과만 말해주는 단편적인 전설이 많았고 진산면에서는 전설로서 서사구조를

    갖추어서 완형에 가까운 전설이 많은 편이다.

    오늘날 현지조사에서 느끼는 결론은 주민들이 많이 교체되고 전설을 전수받을

    젊은이가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우며, 있다하더라도 삶의 현장에서 도움이 되지 않

    기 때문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연령이 많은 노인층은 기억력이 약하여 단편적인

    전설마저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많지 않다.

    다음에 소개하는 전설은 금산지역에서 채집한 전설 가운데 서사구조를 갖춘 것

    만 선별하여 원형이 손상되지 않는 한도에서 복원한 전설이라는 사실을 밝혀둔다.

    1. 전쟁전설(戰爭傳說)

    1) 부수바위

    진산면 부암리 부수바우는 진산에서 금산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

    을은 뜬바우라도고 하는데 이 뜬바위에는 임진왜란 때 이야기가 전하여 오고 있다.

    한순(韓楯)은 임진왜란 때 금산에서 고경명 장군과 함께 순절한 남평 현감이다.

    한순의 군사들은 의병장 고경명과 함께 호남지방으로 진출하려는 왜적을 막기 위하

    여 전라도 여산에서 연산을 거쳐 진산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며칠 전부터 계속 걸었

    기 때문에 모두들 지쳐있었다. 더러는 길을 걷다가 너무 지쳐서 쓰러지기도 했지만

    한사람이라도 빨리 가서 왜적을 쳐야한다는 생각으로 강행군을 했기 때문에 더욱

    피로한 기색이 역연했다. 진산성에 들어서자 의병들은 모두 주저앉았다. 누구 하나

    기운이 있는 병사는 없었다. 이럴 때 왜군이 쳐들어오면 전멸하기 꼭 알맞았다.

    “군사들을 이끌고 빨리 배치재로 갑시다.”

    군사들은 진산성에서 왜적을 맞아 싸우는 것 보다는 협착한 산골짜기로 적과 싸

  • 492제

    3편 구

    비문

    우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이 모두 이처럼 지쳐서야 어떻게 갈 수 있겠습니까?”

    한순의 의견이었다. 결국 군사들은 진산성에서 하루 쉬고 내일 일찍 금산성으로

    가서 적을 치기로 했다. 병사들은 아픈 다리를 쓰다듬으며 밤을 맞이했다. 마침 보

    름달이 동산 위에 둥실 떠올랐다. 군사들은 유난히 밝은 달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

    기도하고 잡담을 하기로 하였다. 긴 행군에서 오랜만에 취해보는 휴식이라 한때나

    마 모두들 즐거운 표정이었다.

    대장 한순도 흥건히 취한 얼굴로 어쩌면 내일쯤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비장한 각

    오를 하며 달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모습으로 한참동안 생각하다가 한순은 들고

    있던 술잔을 내던지고 아들에게로 갔다.

    “아들아, 우리 부자는 나라에 목숨을 바친 몸이니 내일 죽으나 모레 죽으나 마찬

    가지이다. 사람은 죽을 때 의롭게 죽어야 하느니라.”

    “아버님,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러다가 왜놈들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합니

    까?”

    “그래. 나도 그걸 염려해서 너를 찾은 것이다. 내가 군마를 줄 테니 병사 두 명과

    함께 부수바우에 있는 딴들봉으로 가서 잠복하고 있다가 혹시 적이 야습을 해오면

    목숨을 걸고 거기서 저지하여라. 너도 알다시피 지금 이런 상태로 적이 들이닥치면

    우리 병사는 모두 전멸하고 만다.” 한순은 비장하게 말했다. 그의 아들도 마음속으

    로 굳은 결의를 하고 병사 두 명과 함께 뜬바위로 갔다. 뜬바우는 협착한 골짜기 사

    이로 금산에서 들어오는 좁다란 길목이었다. 길 양쪽에는 가파른 돌산이 길에 바짝

    다가서 있었다.

    한순의 아들은 병사 두 명과 함께 이 골목에서 길을 지키기로 했다. 한편 왜적들

    은 진산을 점령하기 위하여 선발대가 예상대로 진군해왔다. 훤한 달밤 길목을 지키

    고 있던 세 사람은 이쪽으로 오는 적을 향하여 바윗돌을 굴리기 시작했다. 너무 좁

    은 골짜기라 왜적들이 도저히 이 길을 지나갈 수가 없었다. 그들은 쉬지 않고 계속

    돌을 굴렸다. 산 밑에는 수많은 왜적들이 돌에 맞아 쓰러졌다.

    날이 밝아올 때까지 그들 세 사람은 기진맥진한 채 계속해서 돌을 굴리고 활을 쏘

    아댔다. 날이 밝자 왜적들은 산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너무나 많은 수의 왜적

    이라 이 세 사람은 그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 세 젊은 병사들은 딴들봉 위에서 구

    국의 한을 품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튿날 진산에 있던 한순의 군사들은 뜬바우로 달려와 적군을 물리쳤다. 왜적들

    은 지난밤 딴들봉 싸움에서 겨우 군사 세 사람의 위장공세를 대부대인줄만 알고 밤

    새워 싸운 끝에 너무나 지쳐있었던 탓에 기력을 잃고 싸울 용기조차 내기 못하고 있

  • 제3장

    전설

    493

    었다.

    이때 한순의 군사들은 용기를 얻어 왜군 선발대를 통쾌하게 무찔렀으니 이것이

    야말로 소중한 아들을 희생시키면서 전공을 세운 한순의 위대한 전략 때문이었다.

    2) 닥실나루 전투

    제원면 저곡리 금강변에 닥실나루가 있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때 왜군들과 싸우

    다가 순절한 금산군수 권종(權綜)을 추모하는 권충민공순절유허비(權忠愍公殉節

    遺墟碑)가 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여 오고 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동래·밀양·문경을 넘어 한양으로

    쳐들어왔다. 한편 코바야카와타가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왜군은 추풍령을 넘

    어 영동을 치고 금산을 향하여 진군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달 전에 금산군수로 부임한 권종은 이를 알고 600여명

    의 군사를 모아 왜군의 진로를 막기로 했다. 권종은 나라의 위급함을 보고 신명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도내에 있는 수령들에게 혈격문을 보내어 이지시와 백

    광언 등의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한결같이 권공은 너무 나이가 많고 금산

    은 너무 협곡하니 군사를 자기들에게 달라고 하면서 권종에게는 후방에서 군량이

    나 조달해 달라고 하였다.

    권종은 이들의 의사를 뿌리치고 금산성을 자기 힘으로 지키기로 하였다. 그는 적

    은 군사지만 영동에서 금산으로 진격해오는 왜적을 닥실나루에서 저지하기로 결심

    하고 강기슭에 있는 저곡산에서 진을 치려고 작전계획을 세웠다.

    왜군은 권종의 예상대로 영동에서 금산을 향하여 진군해왔다. 권종은 군사를 이

    끌고 닥실나루를 향하여 행군을 시작했다. 군사들은 얼마 되지 않았으나 모두 사기

    가 드높았고 훈련이 잘 되어서 늠름한 모습이었다. 이미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

    기로 작정한 권종도 결연한 모습이었다.

    군사들은 두 줄로 서서 씩씩하게 행진하였다. 한참동안 행군을 하고 있는데 그

    때 왠 여자 하나가 행군하는 군인들 앞으로 길을 끊고 지나갔다.

    “웬 여자가 재수 없게 부대 앞을 가로 질러 가느냐.”

    목숨을 걸고 싸움터로 나가는 군인들은 격분하여 모두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그

    뿐 아니라 군인들은 모두 불길한 징조라고 생각하였다. 한참 긴장했던 군인들은 부

    대를 돌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때 권종이 그 여자 앞으로 달려갔다.

    “이 요망한 계집 같으니라구.”

    권종은 칼을 빼어 들고 내리치면서 이렇게 말하려다가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 여

  • 494제

    3편 구

    비문

    자는 보잘 것 없는 여자였지만 권종은 칼을 멈추었다. 그 여자는 젊은 날 권종을 짝

    사랑하다가 자살한 처녀였다. 그 여자는 목을 숙여 인사를 하고는 이 길을 가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뭐라구.”

    권종은 약간 격앙된 목소리로 이렇게 외치면서 칼을 힘껏 휘둘렀다. 순간, 그 여

    자는 간 곳이 없고 칼은 허공을 후리쳤다. 권종은 뭔가 불길한 생각이 들었지만 군

    사들을 이끌고 저곡산으로 가서 진을 쳤다. 그리고 왜적이 내일이면 닥실나루에 당

    도한다는 정보를 듣고, 군사를 금강 상류로 보내어서 흙을 강물에 뿌려 흙탕물이

    흐르도록 하였다. 그것은 왜적들이 강물의 깊이를 알지 못하게 위장전술을 편 것이

    었다. 드디어 왜군이 나루터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수심을 모르는 왜군은 강을 건

    너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 때 웬 여자가 뽕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한 손으로는 치맛자락을 휘어잡

    고 강을 유유히 건너는 것이었다. 이를 본 왜군들은 강물이 깊지 않은 것을 알고 일

    제히 강을 건너 저곡산을 함락하고 금산성까지 점령하였다. 강을 건넌 여인은 바로

    권종을 짝사랑했던 그 여자였다고 한다.

    3) 대둔산 상여바위

    진산면 행정리 청림골에서 중봉절터를 거쳐 조금 더 올라가면 상여바위라고

    도 하고 장군바위라고도 하는 큰 바위가 있다. 상여바위는 전면에서 볼 때 높이가

    100m~150m가량 되고, 측면에서 바라보면 약 50m, 그리고 후면에서는 약10m가량

    되는 바위인데 후면에서 올라가면 평평하고 넓은 공간이 있고, 아래로도 또 넓은

    공간이 있다. 이곳에서 진산동학농민군 30여명이 숨어서 살다가 최후를 보냈다고

    한다.

    1894년 조선 말기 전라도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혁명의 불길이 보은에서 불붙고,

    이어서 방충리에서 1천여 명의 동학군이 모여 동학의 의지를 만방에 떨치었다. 그

    러나 금산 보부상 김치홍 등으로부터 습격을 받아 114명이나 죽고 시그머니에 있던

    피촌 마을은 전쟁터가 되어 폐촌되고 말았다. 이처럼 참혹한 전쟁을 치른 진산동학

    군은 좌절하지 않고 더욱 분발하여 금산에 쳐들어가 복수를 하고 멀리 용담까지 진

    격하여 용담현을 쑥대밭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학군 주력부대를 이끄는 전봉준, 김개남 등이 공주 우금치에서 패함으

    로 말미암아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동학의 불길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거기다

    가 일본군대가 신식무기를 가지고 전국을 누비며 동학군 섬멸에 혈안이 되어 있었

  • 제3장

    전설

    495

    다.

    당시 동학운동은 반역행위이기 때문에 포로가 되어도 살길이 없는데다가 삼족

    (三族)을 멸하던 시대이니 만큼 관군이나 일본군에게 쫓기게 된 패잔병들은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진산출신 동학군들은 대둔산 청림골로 숨어 들어왔다. 청림골에는 중봉 조헌이

    젊은 날 공부했다는 청림사(靑林寺)란 절이 있고, 그 아래 마을에는 10여 가구의 민

    가가 있었다. 이들과 유대가 깊었던 동학군들은 청림사로 들어가서 살길을 찾았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의 보호를 받으며 절 뒤에 있는 지금의 상여바위 아래로 가서

    그 아래에 있는 석굴에 은거하면서 바위 위에는 만약을 대비해서 요새를 만들어 놓

    고 세월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마을에서 일본군이 들어오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 왔다. 동학군들

    은 재빠르게 바위 위에 만든 요새로 올라가 경계를 펴고 있었다. 일본군은 바위 아

    래에 와서 총을 쏘아댔지만 사정거리가 먼데다가 요새 속에 있는 동학군을 섬멸할

    수는 없었다. 전면에서 공격으로 동학군을 섬멸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일본군은

    안개가 자욱하게 낀 어느 날 상여바위 뒤 쪽으로 침투하여 사다리를 놓고 바위 위로

    올라갔다. 그런 줄도 모르는 동학군들은 안심하고 있었다.

    한편 일본군은 바위 위로 올라가자마자 총부리를 휘둘렀다. 동학군은 응사할 겨

    를도 없이 모두 죽게 되었다. 이렇게 위급한 상황이 벌어지자 그 중에 한 사람은 옆

    에 있는 아이를 안고 바위 아래로 뛰어 내렸다. 다행히 그는 다래넝쿨에 걸려 죽지

    않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일본군은 청림사와 마을을 불 지르고 물러갔다. 그 절

    이 있던 곳을 중봉절터라고 부르는데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이 살던 곳을 버리지 못

    하고 움집을 짓고 살았다.

    그런데 이런 사건이 있은 뒤부터 비가 내리는 밤에는 바위에서 상여 나가는 소리

    가 들려서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상여바위, 또는 장군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이

    렇게 전화를 겪은 이곳 사람들은 1950년 한국전쟁의 와중에서도 공비들이 몰려와

    서 다시 고향을 버리고 떠나야 했다. 지금은 집터도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삼림이

    우거졌을 뿐만 아니라 그 옛날의 전설조차도 사라지고 있다.

    2. 아기장수전설(將帥傳說)

    1) 백마산

  • 496제

    3편 구

    비문

    진산면 부암리에 백마산(白馬山)이라는 산이 있다. 이 산은 높이가 490m나 되고

    바위가 많아서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뭔가 신비감을 주기도 한다. 이 산을 백

    마산이라고 부르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여 오고 있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에 이곳 부수바위에는 부지런하고 마음씨 착한 농부가 살고

    있었다. 그는 아내와 화목하고 먹을 것도 넉넉하여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결혼한 지 십여 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는 것이었

    다. 농부의 아내는 아이를 갖는 것이 소망이었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남보다 먼저 우물물을 길어다가 장독대에 놓고 아들 하나를 점지해 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하느님 쇤네에게도 아들을 딱 하나 낳게 해주셔요. 하느님……”

    농부의 아내는 여름이나 겨울이나 똑같이 날마다 이렇게 빌었다. 농부는 아내가

    이렇게 빌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래서 농부도

    이따금 아내와 같이 장독대 앞에서 같이 손을 비비며 빌었다. 이렇게 몇 년을 기도

    하자 하늘에 빈 효험이 있었던지 농부의 아내는 아이를 갖게 되었다.

    농부도 말할 수 없이 기뻤다. 그는 밭에서 일을 하면서 아이 생각이 나면 입을 벙

    긋거리면서 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그러면서 아직 낳지도 않은 아기의 이름을 생각

    하면서 아이의 얼굴을 상상하기도 했다.

    “왜 열 달이 이렇게 길까?”

    농부는 아이를 낳는 날을 기다리면서 이따금 아내에게 이런 푸념을 했다. 하루라

    도 빨리 아이를 보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럴 때 아내는 배시시 웃음을

    짖고 말지만 아내는 아내대로 하루빨리 아이를 낳고 싶었다. 이처럼 아이를 갖는

    날을 농부와 그의 아내는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농부의 아내가 아이를 낳았다. 그것도 딸이 아니라 잘 생긴 아들이었다.

    거기다가 더 없이 귀엽고 예쁘고 튼튼한 아이였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한 이

    레가 지나고 두 이레가 되면서 부터는 아이가 몰라보게 자랐다. 그런데 한 가지 기

    이한 것은 백일이 지나면서부터 겨드랑이에 조그만 날개 같은 것이 나오는 것이었

    다. 농부와 농부의 아내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겨드랑이 아래서 팔이 하나 더 나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아무래도 병신을 낳았나 보아요.”

    농부의 아내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농부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농부의

    아내가 밭에 나가 일을 하고 돌아와 보니 아이가 없었다. 농부의 아내는 눈이 등잔

    만 해 가지고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 제3장

    전설

    497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농부의 아내가 이렇게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아이가 천정 위에 붙어서 웃는 소리가

    났다.

    “아,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농부의 아내가 이렇게 말하며 달려가 아이를 잡으려고 하자 아이는 살며시 방바

    닥으로 내려왔다. 농부의 아내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은 아이가 방안을 날

    아다니는 것이었다. 그리고 보니 아이의 겨드랑이에서 팔처럼 뾰족하게 나오던 것

    은 팔이 아니라 날개였다.

    농부의 아내는 아이가 아무래도 예사 아이가 아니라 앞으로 이 나라를 휘어잡을

    장군이 될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농부의 아내는 걱정이 되었다.

    “이 일을 나라에서 알면 우리를 역적으로 몰고 삼족을 멸하지 않을까? 그것보다

    도 이놈이 커서 나라를 뒤엎는다면 이것보다 더 불충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농부의 아내는 이렇게 걱정하다가 남편이 돌아오자 낮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고

    아이를 죽이기로 했다. 그래서 농부내외는 홍두깨로 아이의 목을 눌러 죽였다. 아

    이는 뭔가 호소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숨을 죽였다. 그러자 어디선가 별안간

    백마 한 마리가 뛰어나와 이리저리 헤매다가 부수바위 앞산에 가서 죽었다. 그것은

    장차 아이가 타게 될 말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이 산을 백마

    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3. 지명전설(地名傳說)

    1) 다금이 들

    금산읍 신대리 건너편 들을 다금(多金)이 들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이 들을 가로

    지르는 냇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지만 옛날에는 하나의 마을이었다고 한다.

    옛날도 아주 오랜 옛날 이곳에는 정장자(程長者)라는 사람이 다금리 약바위 아래

    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늘 부지런해서 조금도 쉴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햇볕이

    불볕처럼 내려 쪼이는 여름날이나 살을 애이는 듯한 겨울날에도 그는 조금도 쉬지

    않았다. 이런 정장자를 보고 이웃 사람들이 간혹

    “어지간히 일하게, 그렇게 일만 하다 죽으면 무슨 소용 있나. 더러 사람이라는 게

    놀 때도 있어야지”

  • 498제

    3편 구

    비문

    이렇게 누군가 한마디 건네기라도 하면,

    “죽을 때는 죽더라도 일을 하여야지요.”

    하고 대답한 뒤에 묵묵히 일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쉬지 않고 일만 하기 때문에

    정장자는 남들처럼 술에 흥건히 취해 본 일도 없고, 노름에 빠져 투전짝을 만져 본

    일도 없다. 이런 정장자를 보고 마을 사람들은 비웃기도 하였다.

    “저 사람은 무슨 재미로 사나 모르겠어.”

    “죽을 때 재산을 싸 짊어지고 갈 모양이지?”

    이렇게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떠들며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장자는 이런 소

    리를 들으면서도 조금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자기는 비록 가난하게 살았지만 자식

    들에게 가난을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만하였다. 그런 결과로

    해마다 재산이 늘어갔다. 식량도 먹고 남아서 여기저기 쌓아두고 남들에게 장리를

    주며 살았다. 그렇다고 인색한 것도 아니었다. 더러 어려운 사람들이 양식을 꾸러

    오기라도 하면 그는 이자를 싸게 주며

    “부지런히 일해서 자네도 나처럼 일어나야지”

    이렇게 말했다. 그뿐 아니라 살림이 어려운 사람이면 남들 몰래 도와주기도 하였

    다. 이처럼 마음씨 좋은 것을 알기나 하는 듯이 동네에 있는 쥐들은 모두 정장자네

    집으로 몰려와서 살았다. 정장자는 힘껏 일하여 얻은 곡식을 쥐들에게 빼앗기는 것

    이 안타까웠지만 워낙 많은 쥐들이라 어찌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 집

    에는 쥐들이 가지를 않았다. 정장자는 쥐들을 식구처럼 여겼다.

    그런 어느 날 아침이었다. 정장자는 아침을 먹기 전에 소먹이풀이라도 한 짐 베

    어와야겠다고 했다. 정장자가 머슴을 깨워 가지고 대문을 나서려는 순간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아니 저게 뭐야. 그는 놀라움과 함께 이렇게 말했다. 머슴도 놀

    라서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정장자네 집에 있던 쥐들이 한 줄로 서서 산으로 가고

    있었다.

    “이제 시원하게 되었네요.”

    정장자는 불길한 생각이 들어다.

    (우리 집에는 먹을 것이 많은데 왜 쥐들이 산으로 갈까.)

    이렇게 생각한 정장자는 아무래도 집에 무슨 재난이 닥칠 것 같았다. 정장자는

    부랴부랴 서둘러서 쥐들이 이사 간 신대리 구셋들이라는 곳에 집을 짓고 이사를 갔

    다. 마을사람들은 농사철에 이게 무슨 북새통이냐고 비아냥거렸지만 그는 생각한

    대로 이사를 한 것이다.

    이사를 한 다음 날이었다. 산 아래로 점점 내려오던 먹구름은 소나기를 퍼붓기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큰 장마가 시작 되었다. 하루 종일 장대 같은 소나기기가 쏟

  • 제3장

    전설

    499

    아졌다. 그리고 하룻밤을 자고 일어니 보니 정장자네가 살던 약바위 아래에 있던

    마을은 흔적도 없이 떠내려가고 큰 내가 생겨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그곳

    은 금같이 귀한 쌀이 많이 생산된다고 하여 다금이들이라 부른다

    2) 돌매기[石幕里]

    진산면 석막리에 채덕바우라고 하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석막리 명막골과 말

    걸이 사이로 돌출한 진동날 이라는 산에 있는 바위인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

    여 오고 있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에 진동날 아래에 과부가 한 사람 살고 있었다. 그는 채덕이

    라는 어린 딸과 같이 근근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과부는 어떻게

    해서라도 잘 살아보려고 낮이나 밤이나 품팔이를 다녔다. 낮에는 밭에 나가 김을

    메주고 밤에는 길쌈하는 사람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베를 짜주기도 하고 바느질을

    해주기도 하였다. 그는 이처럼 늘 부지런히 산으로 들로 혹은 남의 집으로 뛰어다

    니며 일을 했다. 그래서 그는 집에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

    어쩌다가 집에 있다하더라도 그는 쉴 시간이 없었다. 이렇게 바쁜 어머니와 사는

    채덕이는 늘 혼자였다. 어머니가 일을 나가면 채덕이는 사립문가에 기대어 서서 혼

    자 손가락을 빨다가 그것도 시들하면 방으로 들어와 손가락을 세다가 잠이 드는 것

    이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이날도 채덕이의 어머니는 산으로 나물을 캐러 가고 채덕이는 혼자 울밑에 쪼그

    리고 앉아서 놀다가 방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채덕이는 한참을 들어서 자다가

    자기 몸이 뜨거움을 느꼈다.

    채덕이는 잠에서 깨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랬더니 집에 불이 나서 방안까지 타

    들어 오는 것이었다. 채덕이는 너무 엄청난 일이라 엉겁결에 마당으로 뛰어나갔으

    나 어느새 옷에는 불이 붙어 있었다. 채덕이는 불을 끄려고 했지만 너무 겁이 나서

    아침에 어머니가 나물을 캐러 가던 산으로 어머니를 찾아 올라가다가 오늘날 채덕

    바위가 있는 산마루에 와서 타 죽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 그곳엔 이상하게도 바위가 땅 속에서 나와 자라더니 드디어

    오늘날의 크기만큼 크고는 더 자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매년 이 마을에는 불이 일어났다. 어느 집이나 불

    이 나지 않은 집은 한 집도 없었다. 그런가하면 어떤 집은 두 번이나 화재를 만난 집

    도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어떤 집은 보따리를 싸 짊어지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 집도 있었다. 이사를 가지 않는 집도 늘 화재에 대한 불길한 생

  • 500제

    3편 구

    비문

    각이 가시지 않아 괴로운 나날을 보내면서 살아갔다. 이처럼 불안을 느끼며 그 곳

    사람들은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별별짓을 다했다. 무당을 데려다가 굿을 했는가

    하면 절에 가서 빌기도 했다. 그리고 좋다고 하는 방법은 다 해보았다. 그러나 아무

    런 소용이 없었다.

    “이 일을 장차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마을에서 가장 어른 되는 노인 한 분은 늘 이렇게 걱정을 했다. 그는 이날도 길가

    에 나와서 마을을 바라보며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럴 즈음에 마침 그의 앞에는 중

    이 하나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문득 지나가는 중에게 한번 물어보자고 생각했다. 그는 중에게 마을의 사정

    을 이야기하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중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

    는 듯이 대답했다.

    “이 마을에 불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저기 있는 저 바위 때문이오.”

    중은 고갯마루에 생긴 채덕바위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채덕바위 때문이라니요?”

    “바위에는 불에 타 죽은 채덕의 혼이 있어서 불빛만 비추어지면 그만 놀라서 불

    빛을 뿌리기 때문이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다시 말하자면 그 바위에 불빛이 비추어지면 그 빛이 다시 반사되어 비추는 곳

    에 불이 난단말이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은 그 바위에 불빛이 비추지 못하도록 하고 바위 밑에 소금을 두어 가마니

    묻어 두도록 하시오.”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는 금방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노인은 중의 말대

    로 우선 바위에 빛이 비치지 않도록 나무를 심고 바위 앞에는 소금을 묻었다. 나무

    들은 무성하게 자랐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이 마을은 불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은 채덕

    바위에 불빛이 비치지 않도록 막아야 하는 마을이라고 해서 돌매기(돌막이)라고 부

    르게 되었는데 마을 이름을 한자로 돌막리(乭幕里)라 하다가 오늘날은 석막리(石幕

    里)로 변했다고 한다. 오늘날 채덕바위를 화산바위라고도 한다.

    3) 마수리(馬首里)

    금성면에 마수리(馬首里)에 말머리 형상의 산이 있다. 그래서 이 마을을 마수리

  • 제3장

    전설

    501

    라고 부르는데, 이 마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오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이 백제를 칠 무렵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 서당골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아이들은 공부하러 조석을 오가곤

    하였다. 아이들 가운데는 멀리서 말을 타고 서당을 오가는 소년이 있었다. 소년의

    집안은 지체 높은 집이어서 가율(家律)이 엄격한 가운데 성장하였다. 거기다가 소

    년은 총명하고 품행이 모범적이어서 학생들 가운데 특출하였다.

    소년에게는 친구가 한 사람 있었다. 친구도 말을 타고 멀리서 서당에 다녔다. 두

    소년은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늘 말 타기 시합을 하였다. 그들은 서당

    에서부터 집에 도착할 때까지 수목이 울창하고 오르막이 험한 산길을 서로 지지 않

    으려고 열심히 달리기를 하였다. 그런 결과 그들은 아무리 험한 곳이라도 바람처럼

    달릴 수 있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이 날도 소년은 험한 산길을 달려가는 시합을 하였다. 소년

    은 힘껏 달려서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친구는 뒤 이어 따라오지 못하였다.

    소년은 산마루에서 말을 멈추고 땀을 식혔다. 솔바람이 무척 시원하다고 느꼈다.

    소년은 친구가 달려오기를 기다리면서 멀리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두 눈이 휘

    둥그래졌다.

    바로 그곳에 군인들이 말을 타고 몰려오고 있었는데 모두들 낯선 옷차림이었다.

    소년은 신라가 백제를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들어서 아는 일이었지만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소년은 바위 뒤에 숨어서 신라군의 동태를 살폈다. 그러다가 친구가 도

    착하자 소년은 신라군이 달려오는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신라군이 쳐들어오고 있다. 너는 빨리 관가에 가서 알려라. 나는 저 놈들의

    동태를 살핀 후에 뒤따라 가겠다.”

    소년의 친구는 소년의 말대로 관가로 달려갔다. 소년은 그 자리에 서서 적군의

    동태를 살피다가 묘안이 없는가 생각하였다.

    그 때 신라군은 한곳에 이르더니 말을 멈추게 하고 휴식을 취하였다. 군마(軍馬)

    는 모두 200여 기 되는데 냇가에서 목을 축인 뒤에 풀밭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바

    로 그 순간 소년은 묘안이 떠올렸다. 소년은 말안장에서 짚을 뜯어내어 두 개의 횃

    불을 만들었다. 소년은 횃불을 들고 말을 달려 군마들이 풀을 뜯고 있는 풀밭으로

    비호처럼 달려갔다. 그리고 횃불을 이리저리 휘둘러댔다. 그러자 군마들이 기겁을

    하여 사방팔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신라군은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어찌할

    줄을 모르고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소년은 통쾌하기 짝이 없었다. 소년은 군마를 다 쫓고 난 뒤에야 그곳을 빠져 나

    왔다. 그제서야 신라군은 소년을 향하여 화살을 날렸다. 소년은 소나기처럼 퍼 붇

  • 502제

    3편 구

    비문

    는 화살을 피하여 관가에 도착했을 때 관가에는 군대들이 집합하여 출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비호처럼 달리던 말이 갑자기 힘이 빠져 주저

    앉고 말았다. 그제야 살펴보니 말의 한쪽 눈에 화살이 박혀 있었다. 말은 그 자리에

    서 머리를 동네 쪽으로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 뒤로 마을 사람들이 말무덤 위에 흙

    을 덮어 말머리 모양의 산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은 뒤부터 이 마을을 마

    수리라 부른다고 한다.

    4. 신이전설(神異傳說)

    1) 세마지(洗馬池)와 어풍대(御風臺)

    제원면 제원리에 세마지(洗馬池)와 어풍대(御風臺)라는 애각이 있다. 이 글씨는

    제원리로 들어가는 동네입구에 있는데 깎아 세운 듯한 바위에 새겨져 있다, 이 글

    자가 새겨지기까지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옛날 이 바위 아래에는 큰 연못이 있었다. 지금은 메워져서 없지만, 옛날에는 물

    이 맑고 경치가 아름다워서 여름철이면 마을 사람들이 미역을 감고 노는 놀이터였

    다고 한다. 그런데 제원에 역(驛)이 들어서면서부터 역원(驛員)들이 곧잘 말을 몰고

    와서 물을 먹이고 말을 씻기었다. 마을사람들은 이것이 늘 불만이었다. 여름철이면

    마을사람들이 와서 미역을 감고 노는 곳에 와서 말을 씻기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걸핏하면 역에 달려가서 항의를 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

    래도 사람들은 역으로 달려가 계속 항의를 하였다. 그러자 제원역 역장 이상형(李

    尙馨)은 연못 이름을 세마지라 정한 다음 이를 바위에 새겨 넣고 주민들의 출입도

    금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어느 청년이 제원역으로 찾아가서 항의를 하였다. 역장은 이

    청년이 다시 찾아오지 못하도록 볼기를 몇 대 쳐서 돌려보냈다. 그런 어느 가을날

    오후였다. 볼기 맞은 청년이 지나다가 세마지 근처 마른 풀밭에서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어 먹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마침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옳지 이런 때 원수를 갚아보자)

    이렇게 생각한 청년은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펴본 뒤에 마른 풀밭에 불을 질렀다.

    잘 마른 풀밭은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그 뿐 아니라 불길은 마침 세차게 불어

    오는 서남풍에 힘입어 걷잡을 수 없었다. 불길에 휩싸인 말들은 몸에 불이 옮겨 붙

  • 제3장

    전설

    503

    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연못 속으로 뛰어 들어가 모두 죽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세마지 근처에 말을 풀어놓으면 곧잘 말이 물에 빠

    져 죽는 것이었다.

    이를 본 역장은 화가 나서 세마지를 메우게 하였다. 커다란 연못을 메우느라고

    제원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매일 부역을 다녀야 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역

    장도 너무나 큰일이어서 몇 번이나 중단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역장은 연못을 끝내

    메우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마을에 불이 났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달려들었다. 그러나 불

    을 끄기도 전에 서북풍이 불어와서 순식간에 불길은 마을을 삼키고 말았다. 그런데

    이런 화재는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일어났다. 마을사람들은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재산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곤 하였다.

    이 때 자봉산(紫峰山)에서 오랫동안 학문을 닦은 미수(眉叟)ㅁ허목(許穆,

    1595~1682)이 제원역 역장으로 부임하였다. 허미수는 학문이 깊어 초인적인 능력

    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역술에 뛰어나고 선견지명이 있어서 예언을 잘 하였다.

    그런데 마침 허미수가 제원역 역장으로 부임하던 날 마을에 큰불이 일어났다. 그

    것도 온 마을이 삽시간에 불타고 말았다. 이를 본 허미수는 화재 원인을 풀어보았

    다. 잠시 후에 그는 화재가 계속되는 것은 세마지에 빠져죽은 말이 잡귀가 되어 장

    난을 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역원들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자 그는 세마지

    에 있는 절벽에 어풍대라 글씨를 쓰고 새기게 하였다. 어풍대란 바람을 모시는 곳

    이란 뜻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마을에는 화재가 일어나지 않고 마을사람들

    은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고 한다.

    2) 농바우 끄시기

    부리면 평촌리에 하지가 지나도록 비가 오지 않아 날이 가물어 모내기를 하지 못

    하면‘농바우끄시기’라는 기우제를 지내는 풍속이 전하여 내려오고 있다. 농바우끄

    시기는 어재리 농바골과 강가에서 도래말을 중심으로 인근 마을은 물론 제원면 일

    대까지 여러 마을이 사람들이 모여 행하는 기우제이다. 이 기우제는 가뭄을 해결하

    기 위하여 행해지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아주 오랜 옛날에 이곳에 힘이 센 장수가 한 사람 살고 있었다. 장수는 아름답고

    예쁜 아내가 두 사람 있었다. 장수는 아내 두 사람 중에 누구 한 사람을 더 사랑하지

    않고 두 사람을 똑같이 사랑했다.

    그러나 두 아내는 서로 자기가 장수를 독차지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

  • 504제

    3편 구

    비문

    다. 두 아내는 서로 자기가 예쁘게 보이려고 경쟁을 하였다. 장수는 그런 것에 관계

    하지 않고 두 사람을 모두 똑같이 사랑했다. 그럴수록 두 아내는 서로 장수의 마음

    을 사로잡으려고 얼굴을 아름답게 꾸미고 고운 옷을 해서 입었다. 그래도 장수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아내들은 맛있는 음식을 차려서 장수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산해진미로

    음식을 준비하여 장수에게 올렸다. 장수는 두 아내가 해주는 음식을 하나같이 맛있

    게 먹고 칭찬도 똑같이 하였다. 이럴수록 아내들은 속이 타오르고 시샘이 물 끓듯

    하였다. 아내들은 밥만 먹으면 장수의 마음을 독차지하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

    었다.

    그런 어느 날 장수는 임금의 명령을 받고 전쟁터에 나갔다. 장수는 전쟁터에서도

    틈만 나면 두 아내를 똑같이 생각하고 그리워했다. 아내들은 장수가 전쟁을 이기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한편, 장수가 돌아오면 어떻게 그의 사랑을 독차지할

    까 하는 생각에만 골몰하였다.

    마침내 장수는 적군을 섬멸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장수는 전쟁터에서 지친 몸을

    쉬려고 투구와 갑옷을 벗었다. 이를 본 아내들은 각기 투구와 갑옷을 받아서 자기

    방으로 가져가려고 했다. 그들은 그것이 사랑싸움에서 자기가 이기는 것이라고 생

    각했다. 아내들은 서로 투구와 갑옷을 자기 방으로 가져가려고 자기 앞으로 당기면

    서 싸움을 하였다.

    이를 본 장수는 화가 난 나머지 아내들이 잡고 있는 갑옷을 빼앗아 바위로 된 단

    단한 농 속에 넣고 다시는 꺼내 볼 수 없도록 바위를 뒤집어 놓았다. 이 때 장수가

    뒤집어놓은 바위가 바로 농바우다. 장수는 아내들에게 만약 농바우에서 옷을 꺼내

    려고 바위를 뒤집다가 굴러 떨어지면 천지개벽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부터 날이 가물면 마을 여자들은 힘을 모아 농바우를 끌어내

    리려고 한다. 만약에 이 농바우가 밑으로 떨어지면 천지개벽이 일어나므로 하늘에

    있는 옥황상제가 이를 보고 농바우가 밑으로 구르기 전에 비를 내려준다고 한다.

    그래서 가뭄이 들면 농바우끄시기를 하는 풍습이 생겼다.

    3) 태고사 소금

    조선시대에 서해안 어느 어촌에 가난한 어부가 한 사람 살고 있었다.

    그는 비록 가난하지만 누구 하나 원망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갔다. 그는 부모

    님 유언대로 어떠한 경우에도 거짓말을 하지 않고, 남의 물건에 욕심을 내지 않고,

    부지런히 고기를 잡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리고 이웃 사람들 돕기를 자기 일

  • 제3장

    전설

    505

    처럼 하였다. 이웃에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모르는 체 하지를 못 하였다.

    그런 어느 날 바다로 고기를 잡으러 갔다. 늘 나가던 바다로 나가서 그물을 던졌

    다. 그러나 다른 날처럼 고기가 잡히지를 않았다.

    벌써 몇 번이나 그물을 올렸는데도 그물에 올라온 것은 조기 새끼 몇 마리 뿐 큰

    것은 올라오지 않았다. 배를 밀고 더 나갔다. 그곳에서 그물을 던졌으나 번번이 올

    라오는 것은 빈 그물이었다. 다시 배를 밀고 더 멀리 나갔다.

    막 그물을 던지려고 하는 데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하늘에서 우레가 요란하고 번

    개가 하늘을 날아다니며 천지가 요동을 쳤다. 바닷물도 것 잡을 수 없이 요동치는

    데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어부는 노만 두 손으로 힘껏 잡고 있었다. 그야말로 물결치는 대로 바람 부는 대

    로 마치 하나의 나뭇잎처럼 흘러갔다. 어부는 간담이 서늘하였지만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캄캄한 바다에서 파도와 사투를 벌이다가 무엇인가에 부딪히며 배가

    파선 당하는 것을 느낀 그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만인가 어부가 정신이 들어

    서 눈을 뜨고 보니 배는 산산 조각이 나고 자기는 바닷가 모래사장에 누워 있었다.

    어부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부서진 배 조각을 주워 모아 놓고 섬으로 올라갔다. 섬에 사람이 살고 있

    으면 아무 것이라도 얻어먹어야 할 것 같았다. 배가 몹시 고팠다. 한참 섬으로 올라

    가니 조그만 정자에서 노인 두 사람이 바둑을 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부는 두

    노인 앞으로 가서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먹을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주면 고맙겠

    다고 하였다.

    그러자 노인 한 사람이 어부를 힐긋 바라보더니 여기는 생식을 하는 곳이라 먹

    을 것이 없으니 조금 기다리라고 하였다. 그러더니 노인 한 분이 일어나서 잠시 나

    갔다가 오면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밥 한 그릇을 가지고 왔다. 그는 어부에

    게 밥그릇을 내밀면서 여기는 반찬이 따로 없으니 바닷물을 반찬 삼아 먹으라고 하

    였다. 어부는 밥을 맛있게 먹었다. 밥을 먹고 나니 잠이 왔다. 어부는 자기도 모르

    게 잠이 들었다. 얼마동안 잠을 잤는지 모른다. 잠을 깨고 보니 집으로 돌아가야겠

    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부는 노인들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노인들의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원효(元曉)라 하고 저 분은 고운(孤雲)이라 하오”

    한 노인이 이렇게 말하자 다른 노인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자네가 먹은 밥은 대둔산 태고사에서 가지고 온 것이니 집에 가는 길에 태고

    사 주지에게 전해주게, 자네가 가는 길은 청조(靑鳥)새가 안내할 테니 새만 따라가

    게.”

  • 506제

    3편 구

    비문

    어부는 청조새를 따라 집으로 돌아온 뒤에 태고사를 찾아가서 밥그릇을 주지에

    게 전하여 주었다. 주지는 밥그릇을 보자 깜짝 놀라며 며칠 전에 본당에서 없어진

    것이라고 하면서 원효 스님께서 어부를 구하기 위하여 가져 간 것이라고 말했다.

    어부는 그 말을 듣자 너무 감사해서 은혜를 갚게 해 달라고 간청을 하였다. 주지는

    정 그렇다면 절에서는 소금이 제일 귀한 것이니 소금을 갖다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어부는 자기가 죽을 때까지 매년 태고사(진산면 행정리)에 소

    금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4) 지남철 동굴

    진산면 석막리 가마골에 자석(磁石)을 캐던 광산 터가 있다. 본래 가마골 이름은

    가마괴목(加磨塊項)이었다. 돌매기 마을 사람들은 흔히 지남철 동굴이라고 하는데

    위치는 석막리에서 오항리로 넘어가는 도로변에서 좌측으로 산을 조금 올라가면

    있다. 이 동굴이 발견되기까지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오고 있다.

    가마골은 돌매기 입구에서 채독바위가 있는 곳까지 길게 뻗어 있는 골짜기로 예

    전에는 오항리로 가는 소로(小路)길이 길게 뻗어 있었다. 지금은 논밭이 많이 있어

    서 주로 돌매기 사람들이 와서 농사를 짓지만 옛날에는 개간 되지 않은 산지(山地)

    였다.

    어느 해 봄이었다. 외지에서 일곱 식구나 되는 한 가족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이

    마을로 들어왔다. 그 집 가장(家長)은 동내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무슨 일이든지 시

    키면 하겠으니 자기 식구들이 먹고 살게 하여 달라고 사정을 하였다. 동네 사람들

    은 자기들도 먹고 살기에 어려운 형편인데 그들을 도와줄 형편이 되지 않았다.

    산골짜기에서 따로 할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연일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사정

    을 하니 외면 할 수도 없었다.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상의를 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자기네 마을로 들어 온 사람을 그냥 죽게 내어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동

    네 사람은 가마골 산자락에 있는 산지에 화전을 일구어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외

    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은 감지덕지(感之德之)하였다. 동네 사람들이 모른 체 하고

    야박하게 쫓아내어도 할 수 없는 처지인데 밭을 만들 수 있는 땅까지 주니 여간 감

    사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동네 사람들로부터 화전을 일구는데 필요한 톱과 괭이와 삽을 빌려 가막

    골로 갔다. 먼저 산에 불을 지르고 나무를 톱으로 잘라냈다. 밭이 되려면 괭이로 나

    무뿌리까지 모두 케어 내야 했다. 그리고 지면이 울퉁불퉁하게 나온 곳은 흙을 깎

    아 내야 했고, 낮은 곳은 다른 곳에서 흙을 파다가 채워야 했다.

  • 제3장

    전설

    507

    이런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불을 지르는 일까지는 쉬운 일이었지만 나무뿌리

    를 캐내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작은 나무는 쉽게 캐낼 수가 있었지만 큰 나

    무는 몇 시간을 싱갱이질 하여도 뿌리가 뽑히지를 않았다. 이렇게 나무뿌리를 뽑고

    나면 온 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리고 몸은 파뿌리처럼 늘어져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먹고 살 터전을 마련한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들은 쉬지 않고 일을 하였다.

    마침 점심때가 되어서 점심밥이 나왔다. 그들은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손에 잡았던

    연장을 그 자리에 놓고 점심밥이 차려진 곳으로 달려가서 밥을 먹었다. 꿀맛 같은

    밥을 먹고 나니 졸음이 왔다. 그들은 잔디 위에서 잠시 눈을 부쳤다.

    그들이 잠에서 깨어나 일하려고 연장을 찾았으나 연장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 연장은 모두 동네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것이었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동안 누가 와서 훔쳐 가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하였지만 그러한 일은 없을 것이

    라고 확신하였다. 그들은 연장을 찾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산 중턱까지 올라갔

    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동굴 속 천장에 연장들이 박쥐들처럼 매달려 있지 않는가. 그들은 신기해서 몸에

    가지고 있던 부시를 가져다 대었더니 그것도 그대로 붙었다. 자석광이었다. 이런

    줄도 모르는 그들은 걱정이 되어서 동굴에 불을 질렀다.

    그러자 자석 기운이 떨어져서 그 뒤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쇠붙이가 그곳으로 딸

    려가지는 않았다. 이런 소문이 관가에 알려지자 세종임금 때는 이곳에 있는 돌을

    채취하여 서울로 보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자석

    을 캐어갔다고 한다.

    5. 축성전설(築城傳說)

    1) 장수산성

    진산면 만악리와 복수면 다복리 사이에 장수봉이라는 산이 있고, 장수봉 둘레에

    는 장수산성(將帥山城)이라는 테뫼산성이 있다. 이 산성은 마전 쪽을 지키는 산성

    이기 때문에 복수면에서는 곡남산성이라고도 한다.

    장수산성은 군청 소재지인 진산을 지키기 위한 산성이라고 사료 되는 데 축성연

    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산성의 둘레는 약 300m 가량 되는 데 만악리 쪽은 낭떠러

    지로 되어 있어서 성을 쌓지 않았다. 성 뒤쪽에는 군사가 약 20명 쯤 들어 갈 수 있

  • 508제

    3편 구

    비문

    는 큰 동굴이 있는데 이 굴을 장수굴이라고 한다. 장수산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

    은 전설이 정하여 오고 있다.

    옛날 장수봉 아래 배내미 골짜기에 홀어미가 있었다.

    그에게는 다 큰 쌍둥이 남매가 있었는데 모두 힘이 센 장사였다. 그들은 어찌나

    힘이 센지 산위에 있는 집채만 한 돌을 들어서 산 아래 던지기도 하고, 큰 바윗돌을

    가지고 공기놀이를 하기도 하였다.

    홀어미는 이들 남매가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날이 갈수록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쌍둥이 남매를 그대로 두었다가 나라라도 뒤엎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되었다. 그

    는 여러 해 동안 고민을 하다가 홀어미는 마침내 둘 중에 하나를 죽이는 수밖에 없

    다고 결단을 내렸다. 그는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하다가 남매를 불러 놓고 말했다.

    “얘들아 너희들이 모두 힘이 장사인데 장사는 한 사람이어야지 두 사람이 있어서

    는 안 되겠다. 그러니 너희 둘이 내기를 해서 지는 사람이 죽기로 하자.”

    효성이 지극한 남매는 자기들의 어머니가 말하는 대로 따르기로 하고 굳게 약속

    을 하였다. 내기는 이런 것이었다. 즉, 석 달 열흘 동안 아들은 무쇠 신을 신고 서울

    을 다녀오는 것이고, 딸은 장수봉에서 성(城)을 쌓기로 하였다. 딸이 성 쌓기보다

    아들이 먼저 서울을 다녀오면 아들이 이기는 것이고, 딸은 오빠가 서울을 다녀오기

    전에 성을 먼저 쌓으면 딸이 이기는 것이다.

    드디어 내기가 시작되었다. 아들은 무쇠신을 신고 서울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딸도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딸은 먼저 배내미 골짜기에 있는 돌을 장수봉 위로 나

    르는 것이 중요했다.

    딸은 배내미 골짜기에 있는 돌을 장수봉 위로 훌훌 던지기 시작하였다. 바윗돌로

    공기놀이를 하던 딸이니 만큼 산 아래에서 산 위로 돌을 던지는 것은 식은 죽 먹기

    였다.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성을 쌓는데 필요한 돌을 모두 산 위에 모아 놓았다. 그

    는 콧노래를 부르며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석 달 열흘이 가까워졌다. 그 사

    이 딸은 성 쌓기를 모두 마치고 이제 문턱만 쌓으면 성 쌓기가 끝나게 되었다. 아들

    이 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를 본 그의 어머니는 이왕이면 아들을 살리기로 작정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아

    들을 살리기 위하여 딸이 좋아하는 뜨거운 팥죽을 쑤어 가지고 가서 딸에게 주었

    다. 딸은 주춤거리다가는 오빠에게 질 것 같아서 어머니의 요청을 뿌리쳤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권하는 바람에 팥죽을 받아서 먹기 시작하였다. 딸이 한참 팥

    죽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오빠가 무쇠신을 신고 집에 도착하였다. 딸은 문턱 돌만

    내려놓으면 되는데 그의 어머니 때문에 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딸은 마침내 죽게 되고 시체는 문턱 아래에 묻은 다음 그 위에 문턱 돌

  • 제3장

    전설

    509

    을 놓았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사람들이 문턱을 밟고 지나가면 문턱 아래에서

    “팥죽이 웬수다”라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6. 위인전설(偉人傳說)

    1) 원효대사(元曉大師)

    진산면 행정리 대둔산에는 ‘태고사(太古寺)’라고 하는 절이 있다. 본래 이름은

    대둔암이었다. 이 절은 신라 제31대 신문왕(紳文王)때에 원효대사가 살구쟁이 남쪽

    대둔산 중턱에 있는 원효암에서 도를 닦은 다음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태고사

    는 원효대사(元曉大師)와 관계있는 전설이 많은 편이다.

    신라 신문왕 때 명산을 순례하던 원효는 이곳을 한듬산(대둔산의 다른 이름)에

    발길이 닿았다. 온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녔지만 이처럼 아름다운 산을 본 것은 별

    로 없었다. 소금강이라고 생각한 원효는 살구쟁이 남쪽에 있는 바위에 자리를 잡고

    불경을 외우며 도를 닦기 시작했다. 깊은 산속이라 보통사람은 대낮에도 함부로 다

    닐 수 없었다. 더구나 밤이면 온갖 산짐승들이 우짖는 소리에 현기증이 날 정도였

    다. 이런 산속에 원효가 자리를 잡고 도를 닦기 시작한지 몇 해가 되었다.

    그는 마침내 도가 트여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대사가 되었다. 원효는 대사가 된

    뒤에 제일 먼저 절을 짓기로 작정했다. 그는 지금의 태고사를 창건하고 한동안 이

    곳에서 머물렀다. 그래서 그는 제자가 되고자 하는 젊은 중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

    다고 한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제자들과 함께 태고사 뒤에 있는 낙조대(落照臺)에 올라가

    산 아래에 있는 가까운 산에서부터 멀리 서해까지 굽어보았다. 제자들은 기껏 산

    아래에 있는 마을 밖에 볼 수 없었지만 원효대사는 제자들의 시야 밖에 있는 것까지

    살펴보았다. 한참 동안 세상을 굽어보던 원효는 얼굴에 수심 같은 것이 감돌았다.

    “어허, 이것 큰일 났구나. 지금 당나라에 있는 만보산에는 수백 명의 승려들이 죽

    게 되었는데 그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구나.”

    원효는 이렇게 말하면서 붓과 벼루를 가져오라고 했다. 아무 영문도 모르고 있던

    제자들은 어리둥절한 채 붓과 벼루를 가져다가 원효에게 주었다. 원효는 석자 정도

    되는 판자에다가 척판구중 동방 원효(擲板求衆 東方元曉)라고 썼다. 그것은 “동방

    에 있는 원효는 판자를 던져 많은 무리를 구하노라.”는 뜻이었다. 원효의 제자들은

  • 510제

    3편 구

    비문

    저것으로 멀리 있는 당나라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의아해 하였다. 판자

    에 글씨를 다 쓴 원효는 그것을 힘껏 서쪽으로 던졌다.

    (오십 보나 나가면 많이 나가겠지!)

    제자들은 모두 한결같이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원효가 던진 판자는 공중으로 높이 오르더니 마치 나비처럼 나풀나풀 서

    쪽으로 날아갔다. 제자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판자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

    보다가 할 말을 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대사님,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몇 달 뒤에는 알 수 있을 것이니라.”

    원효대사와 제자들은 이와 같이 말을 주고받으며 산을 내려왔다.

    한편 당나라 만보산에 있는 어느 절에서는 점심을 먹고 난 어느 중이 밥을 먹은

    그릇을 씻으러 우물가로 나가다가 하늘에서 이상한 물체가 떠돌고 있는 것을 보았

    다. 그것은 금빛 찬란한 금궤로서 공중에서 서서히 움직이며 절 앞산 쪽으로 내려

    오고 있었다. 이를 본 중은 하도 이상한 일이어서 다른 중들에게 알렸다.

    그러자 점심을 먹던 중들은 모두 절 앞으로 나와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물체

    는 공중에 떠 있다가 바로 건너편에 있는 산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무엇인가 달려가 보자!”

    이상한 물체를 눈 여겨 보던 주지스님이 이렇게 말하자 가뜩이나 호기심에 사로

    잡혀있던 중들은 모두 건너편에 있는 산으로 달려갔다. 중들이 씨근대며 이상한 물

    체가 떨어진 지점에 거의 이르자 뒤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중들이 뒤를 돌아

    보자 절이 있는 뒷산이 무너져 절은 흙 속에 묻히고 말았다. 중들은 하늘에서 떨어

    진 물체를 찾았다. 그것은 원효가 던진 판자였다.

    “동방의 원효는 이 판자를 던져 많은 무리를 구하노라.”

    이를 본 중들은 자기들이 모르고 있는 것을 동방의 원효대사가 먼저 알고 있었음

    에 부끄러운 생각과 함께 그를 경모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이들은 사람들을

    보내어 태고사에 있는 원효대사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였다고 한다.

    2) 길재(吉再)와 불이리(不二里)

    부리면 불이리(不二里)에는 고려 충신 삼은(三隱) 중에 한 사람인 야은(冶隱) 길

    재(吉再, 1353~1419)를 추모하는 사당 청풍사(淸風祠)가 있다. 청풍사의 본래 이름

    은 불이당(不二堂)이었다. 불이(不二)란 두 성의 임금을 섬기지 않았던 길재의 충절

    을 뜻하는 말이다.

  • 제3장

    전설

    511

    청풍사는 조선왕조 초부터 건립을 추진하다가 영조 17년(1741)에 지방 유림과

    군수 민백흥에 의하여 건립하고 길재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 뒤 고종 8년

    (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고종 41년(1904) 지방 유림과

    전라북도 관찰사 이용식의 지원으로 중수하였다. 청풍사는 금산군에 있는 사당 가

    운데 가장 오래된 사당으로 총면적은 5,482㎡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세워졌

    다.

    청풍사는 서원을 개설하고 길재의 충절과 도덕을 이어갈 인물을 양성하였다. 원

    래 마을 이름은 부리(富利)였으나 길재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기리기 위

    해 불이(不二)로 고쳤다고 한다.

    길재는 공민왕 2년(1353) 경북 선산에서 출생하여 금주지사(錦州知事)로 있던

    아버지를 따라 금산에 와서 살았다. 그는 1370년 박분(朴賁)에게서 『논어』,『맹자』

    를 배우고, 그 뒤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권근(權近)에게서 학문을 익혔다.

    1374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우왕 9년(1383)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하였다.

    1388년에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1390년 계림

    부(鷄林府) 교수가 제수되었으나 고려가 쇠망할 것을 알고 부임하지 않았다. 1392

    년 조선이 건국한 뒤 정종 2년에 이방원(李芳遠)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하였

    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고 거절하였다. 그 후 선산에 내려가 후

    진양성에 힘썼다. 길재는 세상의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을 연구하였기 때

    문에 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

    (趙光祖) 같은 이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아 학맥을 이었다.

    길재를 추모하는 청풍사가 이곳에 세워진 것은 금주지사 (錦州知事)로 있던 아버

    지 길원진(吉元璡)을 따라 금산에 와서 우왕 9년(1383)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

    하고, 그해 중랑장 신면(申勉)의 딸과 결혼하여 살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가 사망한

    뒤에는 부리면에 묘를 쓰고 3년간이나 시묘살이를 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사대부들

    은 백일탈상을 하고 백일 간 시묘살이를 하였으나 길재는 3년간 시묘살이를 하여 3

    년 시묘살이의 효시가 되었다

    청풍사에는 ‘지주중류(砥柱中流)’라는 석비와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커

    다란 석비가 짝을 이루고 있다. 지주중류비란 경북 구미시 오태동 산1에 있는 석비

    를 1948년에 탁본하여 가지고 와서 그대로 세운 것이다. 이 비는 본래 인동현감 유

    운룡(柳雲龍)이 선조 20년(1587) 길재(吉再)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석비 앞면에는 중국의 명필 양칭츄[楊晴川]의 글씨로 지주중류(砥柱中流)라는 글자

    를 새겼고 뒷면에는 유운룡의 동생 유성룡(柳成龍)이 길재의 충절을 후학들에게 물

    려주기 위하여 비문을 썼다.

  • 512제

    3편 구

    비문

    지주(砥柱)란 중국의 허난성(河南城) 황하(黃河) 중류에 있는 지주산(砥柱山)을

    말하는 것으로 황하가 범람할 때마다 탁류가 이 산을 휩쓸고 지나가지만 무너지지

    않는 데서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킨 길재를 이 산에 비유한 것이다.

    백세청풍비란 석비는 황해도 해주 수양산 청성사(淸聖祠)에 있는 비문을 탁본하

    여다가 건립한 것이다. 청성사는 이성계의 장남 이방우(李芳雨, 1354~1393)가 이

    성계의 혁명계략을 미리 알고 밀직부사란 벼슬을 버리고 해주 수양산으로 숨어들

    어가 살다가 죽은 뒤에 태조가 건립한 사당이다. 비문(碑文)은 중국으로부터 주자

    (朱子)가 쓴 백세청풍(百世淸風)이란 글자를 받아다가 새겼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중국에서 글자를 받아가지고 황해를 건너오는데 풍랑이 심

    하여 배가 더 이상 항해할 수가 없었다. 그 원인이 백세청풍에 바람풍(風)자가 있어

    서 그렇다는 사실을 알고 풍(風)자를 떼어서 바다에 버렸더니 풍랑이 멎었다고 한

    다. 그리하여 백세청(百世淸)이란 세 글자를 무사히 가져왔으나 풍(風)자가 없어서

    안평대군으로 하여금 풍(風)자를 쓰게 하여 비문을 완성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청

    풍사에 지주중류(砥柱中流)와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석비가 있게 되었다.

    3) 송시열(宋時烈)과 호랑이

    조선시대 성리학자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은 젊은 시절 대둔산 태고사(太古

    寺) 에서 공부를 하였다. 그래서 태고사 인근에는 송시열이 젊은 날 바위에 써놓은

    글씨가 많이 남아 있다. 그 예로는 태고사 가는 길목인 묵산리 접바우 냇가에는 ‘甲

    岩(갑암)’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고, 태고사 입구에 있는 암벽에는 ‘石門(석문)’이

    란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복수면 곡남리에는 ‘水深臺(수심대)’, 완주

    군 운주면 옥계동에는 ‘玉溪(옥계)’란 애각이 있고 그 외에 남이면 석동리 보석사

    (寶石寺) 근처에도 우암(尤庵)의 필적이 암벽에 새겨져 있다. 송시열은 가는 곳마다

    명소에는 필적으로 행적을 남기고 다녔다.

    하루는 태고사에서 공부를 하다가 고향 회덕(懷德)에 다녀올 일이 생겼다. 그는

    대둔산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면서 산을 유유히 내려오다가 갑자기 뒤가 마려웠다.

    그는 길옆에 있는 숲 속으로 들어가 뒤를 보았다. 송시열이 한참 뒤를 보고 있는데

    뒤쪽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오고 있었다.

    호랑이는 마침 배가 고파서 먹이를 찾아다니고 있던 참이었다. 호랑이는 입맛을

    다시며 송시열이 눈치 채지 못하게 조용조용히 다가가고 있었다. 이를 눈치 챈 송

    시열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호랑이가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다가서려는 순간이었다. 송시열이 갑자기 벽력같

  • 제3장

    전설

    513

    은 소리로 “이놈!”하고 고함을 질러댔다. 그러자 호랑이는 저도 모르게 놀라서 본

    능적으로 물러서고 말았다. 송시열은 두 눈을 부릅뜨고 호랑이를 노려보며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이놈!” 하고 소리를 질러댔다. 이런 때 송시열의 면상은 호랑이 얼굴

    그대로라고 한다.

    호랑이는 송시열의 면상을 바라보고는 그 기상에 놀라 더 이상 달려들지를 못하

    고 뒤돌아서서 달아나려고 하였다. 그 순간 송시열은 얼른 오른발로 호랑이의 꼬리

    를 밟았다. 호랑이는 송시열에게 어찌나 놀랬던지 뒤돌아서서 물줄도 모르고 쩔쩔

    매고 있었다. 송시열은 이렇게 호랑이를 놀라게 해 준 다음 호랑이 꼬리를 놓아주

    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태고사 가는 길에는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4) 어느 원님과 낙조대

    대둔산 천년고찰 태고사(太古寺)에서 절 뒤로 올라가면 낙조대(落照臺)가 있다.

    낙조대는 대둔산의 절경을 내려다보는 곳인데 특히 해가 질 때 낙조가 아름다운 곳

    이다.

    낙조대에서 해가 질 무렵 서해(西海)로 해가 떨어 질 때 노을이 기가 막힌 것이

    다. 그뿐 아니라 낙조대에서 내려다보는 경관은 정말 황홀하리만큼 아름답다. 낙조

    대에서 동쪽으로 서대산(西垈山)까지 이어진 첩첩 산들이 마치 동양화를 펼쳐 놓은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서쪽으로 날씨가 좋으면 멀리 보이는 서해의 푸른 물이 여간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원효대사(元曉大師)는 낙조대에서 경치가 너무 아름

    다워서 가사(袈裟)를 벗어 던지고 춤을 추었다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명승지(名勝

    地)로 알려진 낙조대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오고 있다.

    옛날 어느 선비가 진산고을 원님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조그만 고을의 원님으로

    가는 것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래도 원님 자리가 탐이 나서 진산군수로 부임을

    하였다. 부임하는 첫날 아전(衙前)들이 베푼 환영 만찬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

    는 중에 태고사와 낙조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원님은 낙조대에서 보는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우면 원효대사가 가사를 벗어 던

    지고 춤을 추었단 말인가. 그는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원님은 며칠 뒤 낙조대

    를 가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태고사를 가려면 벼랑박(벽)을 올라가는 것과 같다고

    해서 종들로 하여금 가마를 메게 하였다.

    원님 일행은 그 당시 태고사 가는 길을 따라 을음실로 가서 비지재를 넘어 청림골

    에서 태고사까지 가기로 하였다. 종들 네 명은 교대로 이인교(二人轎)를 메고 가니

    평지에서는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더구나 가마 메는 일은 노상 있는 일이니 만

  • 514제

    3편 구

    비문

    큼 처음에는 원님과 함께 유람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가마를 메고 비지재를 넘으려니까 여간 힘들지 않았다. 온몸에서 땀이 비

    지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이 때부터 이 고개를 비지재라고 부르게 되었다. 비

    지재를 넘어 청림골에서 한 바탕 쉬었다가, 태고사에 올라가 점심밥을 먹고 낙조대

    에 올랐다. 과연 낙조대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일품이었다.

    원님은 경치가 너무 절경이라 어찌 할 줄을 모르고 있다가 감탄사를 두루두루 엮

    어가며 시(詩)를 읊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경치를 다 담을 수 있는 시가 떠오

    르지 않았다. 이렇게 경치에 홀려서 시상(詩想)에 빠졌다가 하산(下山)하려고 보니

    종들이 보이지 않았다. 원님이 아무리 소리를 지르며 종들을 불러도 종들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종들이 가마를 메고 오다가 하도 힘들어서 놀란 나머지 모두 달아

    났던 것이다.

    원님은 할 수 없이 홀로 산을 내려오게 되었다. 한참 산을 내려오다가 바위 위에

    서 잠자고 있는 호랑이를 만났다. 원님은 호랑이가 잠에서 깨면 어쩌나 걱정이 되

    어서 숨을 죽이고 내려오는데 그 시간이 열흘도 더 되는 것 같았다. 그는 어찌나 놀

    라고 긴장을 했던지 바지에 똥을 싼 줄도 모르고 산을 내려왔다. 원님은 간신히 관

    아로 돌아왔다. 아전들이 홀로 돌아온 원님을 보고 모두 놀라서 어찌 된 영문인지

    물었다. 원님이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이야기 하자 아전들은 종들을 원망하며 찾아

    서 주리를 틀겠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원님은 낙조대에 올라가 아름다운 경치를 보았는데 그 까짓게 대수

    냐고 아전들을 꾸짖으면서 과연 대둔산은 소금강(小金剛)이라고 감탄을 했다고 한

    다. 이 때부터 대둔산을 소금강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가 진산원님으로

    오게 된 것을 잘 했다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7. 연기전설(緣起傳說)

    1) 영천암(靈泉庵)

    남이면 석동리에 영천암(靈泉庵)이란 암자가 있다. 이 암자는 보석사(寶石寺)에

    서 계곡을 따라 5리쯤 올라가면 산기슭에 있는데 이 암자가 있기까지는 다음과 같

    은 전설이 전하여 오고 있다.

    아주 오랜 옛날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이곳엔 오랜 가뭄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 제3장

    전설

    515

    먹을 물조차 구하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초봄부터 여름이 다 지나가도록 가

    뭄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들에 있는 곡식들은 모두 말라버리고 산에 있는 나무들조차 비실비실 죽

    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더 가다가는 산천초목이 모두 말라서 사람들조차도 살 길이

    없을 것 같았다. 사실 먹을 물조차 구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물을 파

    고 기우제를 지냈으나 가뭄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이 때 진악산 기슭에서 불도를 닦던 늙은 중이 한 사람 있었는데 어느 날 산 아래

    에 있는 마을로 내려왔다. 그는 늙은 몸을 이끌고 비탈길을 내려오느라고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는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면서 물을 한 모금 얻어 마시려

    고 어느 집으로 들어갔다. 늙은 중은 주인을 찾은 다음 물 한 그릇을 청했다. 그러나

    그는 즉시 거절당했다.

    (어허, 세상인심이 이렇게 박할 수가 있나. 물 한 그릇이 없다니.)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다른 집으로 갔다. 이 집도 마찬가지로 물이 없다고 퉁

    명스럽게 말하고는 얼른 문을 닫았다. 그는 다시 옆집으로 갔다. 마찬가지였다. 그

    제야 그는 가뭄 때문에 먹을 물조차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목적했던 일을 보고

    산으로 올라갔다.

    늙은 중은 갈증에 허덕이는 중생을 구하기 위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그는 자기 몸이 점점 쇠약해지는 것을 알면서도 꼼짝을 하지 않고 계속

    기도를 하였다. 마침내 백일이 되는 날이었다.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려는 기미가

    전연 보이지 않았다.

    (아, 기도가 헛되었단 말인가.)

    늙은 중은 이렇게 한탄을 하고나서 다시 기도를 시작하였다. 그때였다. 암자 옆

    비탈에서 굉음과 함께 큰 물줄기가 터졌다. 물줄기는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마을로

    신나게 흘러 내려갔다. 말랐던 계곡은 장마 때처럼 물이 넘쳐났다.

    오랫동안 가뭄에 시달리던 마을사람들은 드디어 갈증을 풀 수가 있었다. 마을사

    람들은 물을 떠 마시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하고 어떤 이는 두 손을 모아 절을

    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이듬해부

    터는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풍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물은 약수

    이기 때문에 질병이 있는 사람이 마시면 곧 씻은 듯이 낫고, 옴이나 옻이 옮은 사람

    이 목욕을 하면 즉시 깨끗하게 나았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그리고 병을 치료 받은 사람들

    은 이 샘물이 신비롭다고 해서 영천(靈泉)이라 불렀다. 이처럼 신비한 샘을 갖게 된

    마을사람들은 늙은 중이 고맙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고마움을 표하

    기 위하여 늙은 중을 찾아갔다. 그러나 늙은 중은 이미 열반에 든 뒤였다. 마을사람

  • 516제

    3편 구

    비문

    들은 가뭄에서 해방시켜 준 늙은 중에 보답하기 위하여 고심하였다.

    “어떻게 하면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마을사람들이 이렇게 의논하고 있을 때 조국대사라고 하는 사람이 이곳에 왔다

    가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 암자를 짓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암자가 세

    워지게 되었는데

    마을사람들은 모두 자기 집을 짓듯이 정성을 다 바쳤다.

    얼마 후에 이곳에 암자가 세워지고 이름을 영천암이라고 하였다. 지금도 영천암

    약수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집필 : 한상수(대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