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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힐튼호텔 다자이후 오사카 백두학원 건국학교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 보고서 1.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 주요 내용 가. 첫째 날 (2016년 11월 27일) • 조선통신사의 길을 따라 이번 탐사여행은 '일본 속의 한민족사'의 탐방 길이라서 우리는 가능한 한 옛날 조선통 신사의 길을 따라 갔다. 통신사라 이름한 것은 '交隣之, 交隣之, 交隣之, 交隣之'을 바탕으로 지은 말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그의 망상적인 조선 침략을 깊이 반성한 도꾸가와 이에야쓰가 조선국과 선린우호를 위해서 통신사절단 파견을 요청하면서 12회에 걸쳐서 매회 평균 446 명이 참여하였다. 그 행렬에다가 일본에서 동원된 3~4천여 명까지 합하여 1열로 서면 3~4km로 일본의 중대한 국가적 행사였다. 이 사신은 막부장군인 관백이 교체 될 때마다 축하를 위한 조선사절단이었다. 통신사의 길은 부산에서 대마도를 거쳐 구주로 해서 시모노세키, 나라, 교토, 도교로 이어 지는 길이지만 이번 우리들의 답사 길에서는 대마도와 도쿄는 생략되었다. 인천공항에서 8시 아시아나 항공기를 타고 일본 후쿠오카공항에 도착하여 입국수속을 마 친 후, 점심을 먹고 오리엔테이션과 학술강연을 하였다. 저녁식사 후 힐튼호텔에서 숙박을 하게 되었다. 나. 둘째 날 (2016년 11월 28일) 호텔에서 조식을 한 후, 버스를 타고 처음 도착한 곳은 다자이후였다. 다자이후는 백제 를 생각나게 하는 유적이다.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백제 부흥운동 을 이끌던 복신의 요청을 받은 사이메이 여제는 백제를 구원하려한다. 하지만 사이메 이 천황은 같은 해 7월 현지에서 급사한다. 이에 황태자 나카노오오에가 663년 8월, 마침내 400여 척의 배에 2만7000여 명의 군사를 태우고 백제 땅으로 건너온다. 8월 27일과 28일 이틀간의 백촌강 전투에서 참패를 하고 만다. 3000여명에 이르는 백제 지 배층이 이 때 패전한 일본 수군과 함께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텐지천황 은 신라가 규슈까지 쳐들어올 것으로 믿고, 하카다만 연안에 있던 전진기지를 철수하 는 동시에 이곳에 방어요새를 만들었다. 백제 유민들의 선진기술을 이용해 백제식 토 성과 산성을 만들어 신라 침입에 대비한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성이 바로 다자이후로 가는 길에 볼 수 있는 수성이다. 수성과 함께 축성된 방어진지 중 하나가 다자이후 주변에 있는 오노성이다. 백촌강 패전 이후 열도로 건너온 백제 귀족들의 지도에 따라 665년 축성됐다. 산등성이에 토루를 쌓고 골짜기에는 석축을 쌓는 형식이다.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 보고서 - tour.chosun.comtour.chosun.com/review/201602-kjw.pdf · 마침내 400여 척의 배에 2만7000여 명의 군사를 태우고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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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튼호텔 다자이후 오사카 백두학원 건국학교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 보고서

1.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 주요 내용

가. 첫째 날 (2016년 11월 27일)

• 조선통신사의 길을 따라

이번 탐사여행은 '일본 속의 한민족사'의 탐방 길이라서 우리는 가능한 한 옛날 조선통

신사의 길을 따라 갔다. 통신사라 이름한 것은 '交隣之信, 交隣之道, 交隣之義, 交隣之禮'을

바탕으로 지은 말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그의 망상적인 조선 침략을 깊이 반성한 도꾸가와 이에야쓰가

조선국과 선린우호를 위해서 통신사절단 파견을 요청하면서 12회에 걸쳐서 매회 평균 446

명이 참여하였다. 그 행렬에다가 일본에서 동원된 3~4천여 명까지 합하여 1열로 서면

3~4km로 일본의 중대한 국가적 행사였다. 이 사신은 막부장군인 관백이 교체 될 때마다

축하를 위한 조선사절단이었다.

통신사의 길은 부산에서 대마도를 거쳐 구주로 해서 시모노세키, 나라, 교토, 도교로 이어

지는 길이지만 이번 우리들의 답사 길에서는 대마도와 도쿄는 생략되었다.

인천공항에서 8시 아시아나 항공기를 타고 일본 후쿠오카공항에 도착하여 입국수속을 마

친 후, 점심을 먹고 오리엔테이션과 학술강연을 하였다.

저녁식사 후 힐튼호텔에서 숙박을 하게 되었다.

나. 둘째 날 (2016년 11월 28일)

호텔에서 조식을 한 후, 버스를 타고 처음 도착한 곳은 다자이후였다. 다자이후는 백제

를 생각나게 하는 유적이다.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백제 부흥운동

을 이끌던 복신의 요청을 받은 사이메이 여제는 백제를 구원하려한다. 하지만 사이메

이 천황은 같은 해 7월 현지에서 급사한다. 이에 황태자 나카노오오에가 663년 8월,

마침내 400여 척의 배에 2만7000여 명의 군사를 태우고 백제 땅으로 건너온다. 8월

27일과 28일 이틀간의 백촌강 전투에서 참패를 하고 만다. 3000여명에 이르는 백제 지

배층이 이 때 패전한 일본 수군과 함께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텐지천황

은 신라가 규슈까지 쳐들어올 것으로 믿고, 하카다만 연안에 있던 전진기지를 철수하

는 동시에 이곳에 방어요새를 만들었다. 백제 유민들의 선진기술을 이용해 백제식 토

성과 산성을 만들어 신라 침입에 대비한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성이 바로 다자이후로

가는 길에  볼 수 있는 수성이다.  수성과 함께 축성된 방어진지 중 하나가 다자이후

주변에 있는 오노성이다. 백촌강 패전 이후 열도로 건너온 백제 귀족들의 지도에 따라

665년 축성됐다. 산등성이에 토루를 쌓고 골짜기에는 석축을 쌓는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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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후 다자이후 다자이후

후나야마 고분 후나야마 고분 안내도 후나야마 고분 안내도

나고야 성터 안내도 나고야 성터 나고야 성터

다지이후를 본 후 이동하여 도착한 곳은 다마나의 후나야마 고분이었다.

후나야마 고분은 영산강 유역에서 발굴된 백제식 고분과 비슷한 전방후원분 형태이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인 1873년 1월 4일에 이 땅의 주인이 ‘후나야마 꼭대기를 파보

라.’ 라는 계시의 꿈을 꾸어서 땅을 파 보았더니 집 모양의 석관이 나왔다. 석관 안은 단청

이 되어 있고 내부의 길이는 2.2m, 폭 1.1m, 천장 높이가 1.4m였는데 관 뚜껑을 좌우로 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 무덤에서 상감철제검, 금동신발, 금관 등 백제 양식 유물이 모두

92점이 출토되었는데, 모두 국립동경박물관으로 갔고, 일본의 국보와 보물로 모두 지정되어

있다. 그 중 말 그림과 함께 글자까지 새겨져 있는 은상감의 철제 검에는 은으로 상감된 글

자가 새겨져 있는데 다른 글씨는 잘 보이나 중요 부분만 마모되어 더욱 의혹을 사고 있다.

점심으로 일본정식을 먹고 도착한 곳은 가라쓰의 나고야 성터였다.

나고야 성터는 임진왜란, 정유재란은 16세기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과 중국 대륙

으로 진출하기 위해 일으킨 침략전쟁이다. 전쟁은 약 7년간에 걸쳤으며, 그 피해는 조선국

전 국토에 미쳤다. 이 전쟁에는 전국의 거의 모든 다이묘들이 참가 하여 30만 군이 주둔하

던 진영 터와 그 성벽이 나고야성 주변 약 3km 안에 160여 곳의 진영 터가 유적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일본의 특별사적으로 지정 되었다. 당시 이 나고야는 극히 단시간에 대단위의

도시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2년 동안 훈련을 마치고 대륙침략에 들어간 것이다.

저녁을 먹고 숙박지인 후쿠오카의 힐튼호텔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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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평 후손의 안내 이삼평 탑 오르는 길 이삼평 도예지의 마을 전경

요시노가리 유적 요시노가리 유적 요시노가리 유적

다. 셋째 날 (2016년 11월 29일)

아침을 호텔 조식으로 먹고 집을 챙기고 호텔 오프를 한 후 버스를 타고 이동한 곳

은 아리타의 이삼평 도예지였다.

이삼평 도예지는 임진왜란 때 강제로 끌려간 도공 이삼평이 일본에 도자기를 전파해

신으로 추앙되는 사람으로, 조선에서 천민 도공으로 살다 인생을 마감하는 것보다는,

이곳에서 높은 대우를 받으며 현재까지 이름을 날리는 선택을 잘 했다고 생각되었다.

이곳에는 도잔신사와 이삼평 탑이 있었으며, 그의 후손이 나와 설명을 해 주었다.

점심을 먹고 도착한 곳은 간자키의 요시노가리 유적이었다.

요시노가리 유적은 日本佐賀縣神埼郡神埼町, 三田川町, 東脊振村에 걸쳐 위치한 야요

이시대 최대의 환호 취락과 독널무덤 유적으로 佐賀평야의 동부 세부리 산지 남쪽 기

슭에 길고 낮게 뻗은 志波屋과 吉野ケ里의 저구릉상 대지에 걸쳐 남북으로 길게 약

40ha범위에 있다. 유적의 동쪽으로 길게 田手川가 흐르고 있으며, 남쪽 끄트머리로는

JR長崎本線과 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요시노가리 유적을 보고 도착한 곳은 시모노세기의 아카마 신궁과 청일강화 기념관

이었다.

아카마신궁은 1185년에 건립되었으며, 같은 해 여덟 살 나이로 죽은 안토쿠왕을 모신

다. 안토쿠 왕은 헤이안시대의 무장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외손자로, 무사집단 겐지와

헤이시가 최후의 전투를 벌인 단노우라에서 헤이시 일파가 패하자, 함께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단노우라에 가까운 간몬해협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는 조선통신사의 객

관으로 사용되던 건물이며, 건너편에 있는 공원에 조선통신사 상륙 기념비가 남아 있

다. 신사의 상징인 빨간 문은 1958년에 재건되었다. 경내에는 안토쿠 왕릉, 헤이시 일

파를 모시는 시치모리즈카 등이 있다. 매년 5월 안토쿠 왕을 기리는 센테이사이가 열

린다.

청일강화기념관은 조선의 동학농민운동을 평정한다는 명분으로 벌어진 청일전쟁 직후

1895년 4월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을 맺은 장소로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슌판로 안

에 있다. 아카마 신궁 바로 옆이기도 하다. 일본은 이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한반도를 그

세력권에 넣어 대륙진출의 발판으로 삼게 된다. 1895년 3월 20일부터 요정 슌판로에서 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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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사 대불전 전경 대불전 안의 청동대불 동대사 경내의 사슴들

아카마 신궁 청일강화 기념관 조선통신사 상륙 기념비

일전쟁의 강화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는 일본 전권대사인 이토 히로부미와 무쓰 무네

미쓰, 청나라 전권대사 리훙장을 비롯한 양국 대표 11명이 참석했다. 강화를 위한 회의는

여러 차례반복을 거듭해 4월 17일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 이 기념관은 청일강화회의와 시

모노세키 강화조약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기 위해, 1937년 6월 강화회의의 무대가 된 슌

판로의 바로 옆에 개관되었다. 강화회의에서 사용된 비품, 양국 전권대사인 이토 히로부미

와 리훙장의 유묵 등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관내 중앙에는 강화회의 공간을 재현해 당시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아카마 신궁과 청일강화 기념관을 본 후, 정기 훼리선에 승선하였다. 선박내에서 저녁을

먹은 후, 오사카까지의 여정을 즐겼다.

라. 넷째 날 (2016년 11월 30일)

훼리선에서 아침을 먹은 후 오사카항에 입항을 하였다. 하선을 한 후, 제일 먼저간 곳은

도다이지(동대사)였다. 세계문화유산이라는 동대사를 가는 길에 사슴들이 사람들을 졸졸 따

라 다니는 진귀한 모습을 만났다. 이 공원에는 1,200마리의 사슴이 있는데 그 역사도 깊어

서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다는데 그 전에는 사슴을 '신의 사자'로 생각하였다는 것이

다.

동대사(도다이지)는 일본의 최대 목조인왕상인 금강역사상(국보)이 있고,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대불전이 있다. 이 대불전은 세계에서 제일 큰 단일 목조건물이다. 이

속에 청동대불이 있는데, 너무 커서(높이 15m) 대불을 먼저 안치하고 전각을 세웠다. 그러

니 건물의 규모가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동대사를 창건할 때 큰 공을 세운 이가 후지와라가문인데 후지와라 가문을 모신 신사가

경내에 있다. 물론 후지와라 가문은 백제에서 건너온 한반도 계열이다. 대불전을 벗어나 나

지막한 언덕에 오르면 고구려식 창고인 부경이 2개 보였다. 성보전과 정창원인데, 동대사가

백제는 물론 고구려의 영향도 받았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4개의 기둥을 세워 아래는 공

간을 비워 바람이 들게 하고, 보관공간도 창살로 잇댄 독특한 형태이다.

동대사 답사를 마치고 일본정식으로 점심을 먹은 후, 담징의 금당벽화가 있는 호류지(법

륭사)로 향했다.

법륭사(호류지)는 요메이 천황이 자신의 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절과 불상을 지을 것을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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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류지 전경 호류지 5층 목탑 절 입구의 하마비

하였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훗날 쇼토쿠 태자가 요메이 천황의 유언을

받들어 607년에 절과 그 본존 약사여래상을 건립하였으나, 670년에 소실되어 재건한 절이

다. 그럼에도 15세기에 세워진 정문인 남대문과 금당, 오중탑, 강당 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가람배치는 백제양식이다. 그럼에도 금당의 벽화는 고구려 담징이 그렸다.

그러니 백제의 가람배치와 기와, 담징으로 상징되는 고구려 영향은 고구려 백제와의 교류

가 비슷한 시기에 동시에 이루어 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금당과 나란히 있는 오중탑은 화

려하고 웅장하였다. 원래는 목탑이었으나 새로 보수한 것은 콘크리트로 세웠다. 그럼에도

고풍스럽고 외형은 원형대로이다. 호류지에는 국보만 50여 점이 있는데, 현재 금당의 벽화

는 진품이 아니다. 1940년대 말 실내 보수 중 일부가 불타 훼손되어 박물관 지하로 옮겨

보존 중이고, 지금 금당의 벽화는 모사한 것이다. 모사품도 실내 조명이 어두워 상세히 볼

수가 없어 아쉬웠다.

아스카는 794년 교토로 천도하기 전까지 야마토 정권의 요람이었으며, 삼국과의 교류와

영향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지역이다. 아스카 시대에 일본은 불교가 공인되고 발전되었으

며, 율령을 통하여 정치질서가 확립되었고, 국제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아스카 시대에

일본 문화사가 일대 변혁을 일으킨 셈이다. 그 결과 아스카 문화는 일본의 고대국가가 질적

으로 성숙하고 비약하는 과정에서 거쳐야 할 많은 것을 채워준 시대가 됩니다. 그래서 일본

인들은 아스카를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백

제, 신라, 고구려의 문화가 큰 배경이 되었다. 삼국통일 후 건너간 백제인과 고구려인이 그

주역이었을지도 모르지만…….

호류지를 본 후 백제 황흥사를 모델로 한 아스카테라(비조사)로 이동하였다.

아스카테라(비조사)는 아스카시대 최초의 불사로 소가우지에 의해서 야마토평야 남쪽

아스카지방에 건설된 것이다. 스이준 텐노 1년(588)에 백제에서 사공과 와공을 초청하

여 건설공사를 시작하였으며, 그 당시 곤도의 혼요를 갖고 왔다고 전한다. 소가 우마고

는 그의 권세와 재력(財力)을 기울여서 이 공사를 추진하여 스이코텐노 4년(596)에 토

가 완공되었으며, 609년에 금동석가상이 안치되었으므로, 아스카테라는 20년 동안 걸

려서 완결되었다. 아스카데라의 창건은 그 당시 새로운 문화창출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거의 진북에 가까운 중심축선상에 좌우대칭으로 건물들이 배치되었다.

아스카데라의 가람배치는 토를 중심으로 그 뒤와 좌우에 토에 면하여 3개의 곤도가

서 있으며, 그 주위에 가이로가 돌아가고, 남쪽에는 주몬이 있어서 1탑 3금당식의 배치

로 되어 있다. 고도는 가이로 외부의 뒤쪽에 배치되어 있다.

창건 당시 아스카테라는 3개의 금당이 탑을 둘러싸고 있는 대사찰이었으나 가마쿠라

시대에 대부분 소실됐고, 현재 본당은 에도 시대에 재건된 것이다. 창건을 위해 백제로

부터 많은 기술자들을 초청해 불당과 탑을 축조했다. 기와를 제작한 기술자들은 호류

지(법륭사) 등의 축조에도 관여했고, 이후 관련 기술을 익힌 기술자들과 제자들이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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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테라 앞 전경 일본정식 호류지 경내 회랑

다카마쓰 고분 앞 전경 하얏트 리젠시 오사카 호텔 일본 정식-초밥과 우동

전역에 퍼져 사찰 건설에 기여했다.

아스카테라(비조사)를 본 후 가장 확실한 고구려 문화의 흔적인 다카마쓰 고분으로 이동

하였다.

다카마쓰 고분은 아스카 지방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보 ㄴ열도 내에 가장 확

실한 흔적으로 남아있는 고구려계 유적이다. 다카마쓰 고분은 한때 일본 전후 최대의

발굴로 평가됐다. 무덤의 남쪽 경사면에서 땅을 파던 농부가 발견했는데, 정식 발굴은

1972년 인근 카시하라 고고학연구소에 의해 이루어졌다.

다카마쓰 고분은 회석(灰石)을 다듬어 석곽을 만들고, 그 안에 목관을 안치한 뒤 가

옥형 천정석으로 덮고 봉토를 씌운 원형의 횡혈식 석곽봉토이다. 크기는 직격이 약

18m, 높이 5m로 주변 무덤에 비해 크지 않다. 석곽의 규모는 작고 협소한데, 벽면에

회칠을 한 뒤, 남녀 군상(群像)과 사신(四神), 일상과 월상을 채색을 써서 표현했으며,

천정부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성수도(星宿圖)를 그려 넣었다.

이 고분이 발견되자 일본 학계에서는 일대 센세이션이 일어나 수많은 학자들이 피장

자와 연대, 출토품, 벽화 등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다. 피장자는 끝내 누구인지

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연대는 대체로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로 의견이 모아졌다. 하

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고분이 우리나라의 문화, 특히 고구려 미술의 전통을 계

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장품들은 거의 도굴되어 발견된 유물은 많지 않다. 다만 고분

의 천장과 벽에 그려진 그림들이 눈길을 끈다.

벽화의 내용을 보면, 벽면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사신도를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는

데, 이는 강서대묘나 중묘, 통구 사신총 등으로 대표되는 고구려 후기 고분벽화의 전통

을 말해준다. 인물상 중에서 돋보이는 것은 역시 동서 양쪽 벽에 4명씩 그려진 여인군

상이다. 노랑, 빨강, 초록 등 화려한 색깔의 품이긴 저고리와 색동의 주름치마를 입고

있다. 이런 복식은 고구려 수산리 고분 벽화와 덕흥리 고분 벽화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들이다.

다카마쓰 고분을 본 후 버스를 타고, 오사카 남항 근처에 있는 하얏트 리젠시 오사

카 호텔에서 숙박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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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륭사 입구 니조성 입구 사무라이 투구를 닮은 출입문

마. 다섯째 날 (2016년 12월 1일)

호텔에서 조식을 먹고 이동한 곳은 고류지(광륭사)였다.

고류지(광륭사)에는 너무도 유명한 일본국보 1호인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다. 신라시대

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재료만 다를 뿐 닮은 점이 너무 많다.

불과 30년 전 이 반가사유상의 손가락이 부러졌던 적이 있다. 그 때 이 반가사유상의 재

료가 한반도 춘양과 부안 지방에서만 나는 적송(춘양목)임이 밝혀지면서 일본에서는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어떤 형태로든 신라에서 건너간 것이 분명함이 입증되었다.

이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적송에다가 칠박을 덧붙여 흙빛이 감돈다. 반가사유상은 원래

석가모니가 태자 시절에 인생무상을 느껴 고뇌하는 명상자세에서 기원하며, 출가 이전

의 이러한 태자 모습은 중생 제도를 기다리는 미륵보살 모습과 비슷하므로 미륵보살상

도 '반가사유'의 모습으로 조성되었다.

실존철학자인 독일의 야스퍼스(1883-1969)는 이 불상을 찬찬히 살펴본 뒤에 크게 감

동한 나머지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불상이야말로 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의 그 어떤 조각 예술품과 비교할 수 없

을 정도로 매우 뛰어난, 감히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살아있는 예술미의 극치이다.”

라고 극찬을 하였는데, 아마추어의 눈에 비친 그 모습 또한 감동 그 자체였다.

일본은 이때가 수학여행 시기인지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의 질서 정연하게 관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고류지(광륭사)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입구에서만 사진을 찍었다. 고류지(광륭

사)를 본 후 니조성으로 이동하였다.

니조성은 교토 시내 중심에 위치한 성 전역이 국가 사적일 뿐 아니라,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유적이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 에도막부를 연 초대 쇼군 도

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왕이 있는 교토를 방문할 때 머물 숙소를 짓기로 하고, 1603년 니

조성을 완공했다. 지금의 니노마루 부분이다. 이후 3대 쇼군인 이에미츠가 현재의 규모로

성을 확장했다. 이에야스 시대의 건축양식과 이에미츠 시대의 그림, 조각 등이 총집합되어

있어 모모야마 시대의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동서로 500m, 남북으로 400m 규모의 성벽을 쌓고 그 둘레에 해자를 조성했다. 일본의

다른 성들과 달리 내부가 화려하다. 원래 건물은 18세기에 화재로 소실됐고, 현재는 니노마

루고덴과 혼마루고덴, 니노마루 정원이 남아 있을 뿐이다. 니조성은 1939년부터 교토시에서

관리해 왔고 그 후 일반인에게 공재됐다. 여러 건물 가운데 성의 중심인 니노마루가 가장

훌륭한 건축미를 자랑한다.

성의 가장 안쪽에는 쇼군과 부인, 하녀들이 살았으며 성의 중심인 니노마루고덴에는 복도

로 연결된 6개의 홀이 있다. 각각의 홀은 다른 높이로 지어졌으며, 계급에 따라 안으로 들

어갈 수 있는 방에 제한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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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조성 출입문 장식 니조성 정원 니조성 해자

아라시야마 다리 오사카 중심 거리 오사카 야경

그 가운데 오오히로마는 쇼군이 지방 영주인 다이묘들의 방문을 받던 곳이다. 이곳의 우

구이수바리라는 마룻바닥은 외부의 침입자를 막기 위해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

가 나도록 장치되어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 이에미츠는 천황의 방문에 대비해 당

대 최고의 미술 유파인 가노파 화가의 그림으로 접견실을 꾸몄는데, 1867년 마지막 쇼군이

메이지 천황 앞에 무릎을 꿇고 통치권을 넘겨준 곳(대정봉환)도 바로 이 방이었다.

니노마루고덴의 뒤쪽에 있는 니노마루 정원은 1626년 고보리 엔슈가 조성한 정원이다.

니노마루 정원을 지나면 혼마루고덴이 나온다. 도쿠가와 이에미츠 이후 니조성 역할은 크게

축소되어 막부 말기 동란기까지 역사의 무대 전면에서 사실상 사라진다. 그 230년 동안 폭

풍우와 지진, 낙뢰 등으로 건물은 점차 노후화했다.

막말 제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조정의 요청에 따라 1865년 니조성에 입성하면

서 대대적인 수리작업이 이루어졌다. 이에모치는 다음해 조슈 원정에서 숨지고,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니조성에서 15대 쇼군의 교지를 받지만 머지않아 쇼군직을 사임하고 대정봉환

(大政奉還)이 이루어진다.

메이지유신 이후 1871년 니조성 니노마루는 한때 교토부 청사로 쓰였으며, 1915년에는

다이쇼 천황 즉위식이 이곳에서 거행되기도 했다. 태평양전쟁 후 니노마루 북쪽에 테니스코

트가 만들어졌지만 1965년 정원으로 조성됐다.

니조성을 본 후, 일본정식으로 점심을 먹고, 아라시야마를 산책한 후, 오사카 시내를 탐방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바. 여섯째 날 (2016년 12월 2일)

호텔에서 조식을 한 후 체크아웃을 하고 오사카성으로 출발하였다.

오사카의 상징 오사카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3년에 혼간지 절터에 축성한 호

화로운 성곽이다. 하지만 정작 히데요시는 이 성에 살아보지 못하고 그의 아들 도꾸가

와 히데요시가 성주가 되긴 한다. 히데요시의 사후, 히데요시의 충신이었던 대장군 ‘도

쿠가와 이에야스’가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오사카성을 함락하고 도요토미 일족

을 멸망시키며 새로운 막부를 열게 된다. 그 후 전쟁과 낙뢰 등으로 소실된 것을 오사

카 시민의 기부금으로 3번째의 천수각이 재건 된 것이다. 1945년에는 미군의 공습에

의하여 후시미 망루 등 성내의 옛 건조물이 다소 소실되었으나, 이후 오사카성터가 국

가 특별사적으로 지정되고, 성내의 당시의 건조물 13 채가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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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성 해자 오사카성 내부 전시물 오사카성 천수탑

정도로 유명한 성이다. 오사카 성을 둘러싸고 있는 해자는 폭이 70∼90m, 성벽 높이가

20m를 넘는데, 그 화강암 성벽은 총길이가 12km에 달하며 거기 사용된 돌만도 50∼

100만개나 된다. 오사카성문을 들어서면 거대한 성벽돌이 눈을 놀라게 하는데 성내에

서 가장 큰 거석은 사쿠라몬 문안의 네모진 빈터에 놓여있는 거대한 다코이시 거석인

데 그 돌들의 하나하나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성을 쌓을 때 전국의 다이묘들이 바친

충성의 표시이기도 하다. 토요토미는 일본에서 최고 영웅으로 인정받는다. 최말단 하급

무사에서 최고위 장군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 그 배경에는 오다 노부나가라는 장군

이 있었다. 일본 역사상 가장 영웅으로 꼽는 3대 장군이 있는데, 오다 노부나가, 토요

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쓰이다. 이 세 장수의 기질을 빗댄 유명한 일화가 있는

데, 울지 않는 꾀꼬리를 울게하는 방법으로, 노부나가는 ‘울지 않는 두견새는 죽여 버

린다.’하고, 히데요시는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게 만든다.’ 하고, 이에야쓰는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라고 전해진다.

오사카성을 보고난 후, 점심을 먹고 마지막 탐방지인 백두학원 건국학교로 갔다.

백두학원 건국학교는 70년의 전통 속에 민족의 긍지를 지키며 세계로 뻗어가는 학교이

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 후 수많은 재일동포들이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 남

게 되면서 생활이 극도로 어렵고 불안정한 가운데 자녀들의 교육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

었다. 이런 상황을 타개코자 재일동포 사업가였던 조규훈, 이경태씨는 동포 자녀들의 미래

를 위해 문화서업단체인 ‘백두동지회’를 조직하였고, ‘일본은 물론 국제사회에서도 통할수

있는 학교를 세워야 한다’라는 교육이념 아래 1946년 3월에 초대 이사장과 교장으로 학교

법인 백두학원을 설립하였다.

동포사회의 염원을 담은 백두학원은 ‘조국을 일으켜 세운다’라는 숭고한 바람을 담아 ‘건

국’이라는 학교명을 사용하였고 건국공업학교와 건국고등여학교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이후 1947년에 일본의 학제가 6·3·3제로 바뀜에 따라 건국중학교를 개설하고 남녀공학제로

신입생 300명을 받아들였다. 3년 후 이들의 고등학교 입학 시기에 맞춰 1946년에 건국고등

학교를 설립해 현재의 건국학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49년에는 건국초등학교, 1997

년에는 건국유치원이 설립되어 현재의 학교법인 백두학원 건국 유·초·중·고등학교에 이르렀

다.

학교법인 백두학원은 2016년 현재 유치원, 초등학교(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갖추고

있고 총 22학급에 재학생이 2016년 11월 현재 452명이며 교직원은 이광형 교장을 포함해

총 72명이 재직중이다. 재일 한국인, 한국에서 온 상사주재원, 유학생, 파견 공무원 등 일시

체류민의 자녀 그리고 한국교육을 희망하는 일본인 등 다양한 학생들이 함께 공부하고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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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학교 교장선생님 인사 백두학교 학생들 풍물 공연 백두학교 학생들의 수업 모습 백두학교 탐방을 마치고 오사카 간사이공항으로 이동한 후 출국수속을 한 후, 아시

아나 항공편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2. 탐방을 마치고

이번 탐방은 우리의 역사와 관련된 일본의 역사 이해에 많은 공부가 되었고, 좁은

안목을 넓혀준 소중한 체험이었다.

그 옛날 우리는 찬란했던 우리 문화를 일본에 전파해 주었는데, 지금은 주객이 전도

된 것 같은 국제정세에 씁쓸함을 느끼며, 우리와 후손들이 이를 뒤집을 수 있도록 많

은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학생들에게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탐

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