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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는 인간이 발명한 첫 번째 작품들 중 하나라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 선사시대의 인간은 나무 막대기를 들어 어떤 물건이나 누군가를 강타하 공격하였다 이것은 인간이 불을 이용하는 법을 알거나 바퀴를 발명하기 훨 씬 전에 일어난 일이다 무기의 발명은 인류의 발전에 있어 커다란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무기는 선사시대 인간에게 너무 커서 손으로 잡을 수 없 는 동물을 사냥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였고 특히 가장 큰 위협인 적으로 부터의 보호를 제공하였다 힘이 센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 자신의 폭력에 맞 서기 위해 발명한 무기를 사용할 때 한가롭게 앉아 있지만은 않았으며 곧 자신의 무기를 찾아내었다 또 다시 강력한 지적 인간은 더욱 발전된 무언가 를 찾아내었다 무기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 경쟁은 인류의 역사로 정의 될 수 있다 일반 무기와 특별한 화기가 역사의 진로를 결정하는 역할을 하 였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지금까지 화기 가 어떻게 발전하여 왔는가를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초기 석기 시대에 도끼 칼 그리고 창이 출현하였으며 약 년경에 활이 첫 무대에 등장하였다 이것은 투창 이후 비록 돌을 던지는데 투석기가 사용될 수도 있었지만 의도된 목표물로부터 얼마간 이격된 곳에서 사용할 수 있었 던 첫 번째 무기였다 활과 화살은 중세가 끝날 때까지 휴대용 사출 무기였 사거리를 향상시키고 이런 사출 무기를 더욱 쉽게 다루기 위해 가스트라 페테스 석궁 및 석궁 과 같이 많은 신형 장비들이 개 발되었다 그러나 힘의 원천은 장치로부터 일정량의 기계적 에너지의 방출에

09년 연구논문-A Short Story of Firear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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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화 기 의 역 사 개 관 (槪觀 )

(A short h is to ry o f f irea rm )

1. 序 論

무기는 인간이 발명한 첫 번째 작품들 중 하나라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

다. 선사시대의 인간은 나무 막대기를 들어 어떤 물건이나 누군가를 강타하

공격하였다. 이것은 인간이 불을 이용하는 법을 알거나 바퀴를 발명하기 훨

씬 전에 일어난 일이다. 무기의 발명은 인류의 발전에 있어 커다란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무기는 선사시대 인간에게 너무 커서 손으로 잡을 수 없

는 동물을 사냥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였고 특히 가장 큰 위협인 적으로

부터의 보호를 제공하였다. 힘이 센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 자신의 폭력에 맞

서기 위해 발명한 무기를 사용할 때 한가롭게 앉아 있지만은 않았으며 곧

자신의 무기를 찾아내었다. 또 다시 강력한 지적 인간은 더욱 발전된 무언가

를 찾아내었다. 무기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 경쟁은 인류의 역사로 정의

될 수 있다. 일반 무기와 특별한 화기가 역사의 진로를 결정하는 역할을 하

였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지금까지 화기

가 어떻게 발전하여 왔는가를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2. 本 論

가. 초기

석기 시대에 도끼, 칼 그리고 창이 출현하였으며 약 BC 6,000년경에 활이 첫

무대에 등장하였다. 이것은 투창 이후 비록 돌을 던지는데 투석기가 사용될

수도 있었지만 의도된 목표물로부터 얼마간 이격된 곳에서 사용할 수 있었

던 첫 번째 무기였다. 활과 화살은 중세가 끝날 때까지 휴대용 사출 무기였

다. 사거리를 향상시키고 이런 사출 무기를 더욱 쉽게 다루기 위해 가스트라

페테스(gastraphetes-석궁) 및 석궁(crossbow)과 같이 많은 신형 장비들이 개

발되었다. 그러나 힘의 원천은 장치로부터 일정량의 기계적 에너지의 방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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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500년 경의 석궁

트레부세 : 중세부터 사용된 공성

기계

머무르고 있었다.

날이 있는 무기와 활촉은 처음에는 부

싯돌로 만들었다. 약 BC 4,000년 경에

금속가공술이 개발되어 칼, 도끼와 활촉

그리고 창이 청동으로 만들어 졌고 약

BC 2,000년 경에 철로 대체되었다. 강철

날이 있는 무기와 갑옷의 생산은 아주

높은 정교한 수준에 이르렀고 카타나와

같은 일본도에서 그 정점에 이르렀다.

이 기간에 대규모 전투가 발달하여 대형 사출 무기 또는 발리스타(ballista),

트레부세(trebuchet)와 카타펄트(catapult)와 같은 “장치”의 도입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무기들은 현대 포병의 조상들이었다.

나. 화약

비록 많은 나라들이 화약의 원조를 주장하였지만 화약을 발명한 사람이 누

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화약에 대한 제조법이 처음 문서화된 것은 1260년

경 영국에서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이 화약은 초석(硝石), 황, 목탄

의 혼합물로 구성되었으며 이 제조법은 6세기 동안에 걸쳐 실질적으로 변함

없이 사용되었다.

오늘날 “흑색 화약(black powder)”이라고 알려진 화약은 비교적 부드러운

폭약이다. 공기중에서 점화되면 폭발하지 않고 단지 맹렬히 탈 뿐이다. 폐쇄

된 용기 내에서 점화되면 적당한 압력을 발생

시킨다. 기본 물질에 있는 불순물 때문에 사격

시 흑색화약은 많은 화염과 불꽃 그리고 커다

란 회색 연기 구름을 만들어 낸다. “전쟁의 안

개(Fog of battlefield)”란 표현은 전장을 뒤덮

는데 사용된 많은 양의 연기에서 발생하였다.

흑색화약의 탄매는 매우 부식성이 강하고 흑색

화약을 발사하고 남은 탄매가 있는 무기는 매

우 신속하고 광범위한 부식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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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색화약을 사용하는 무기는 많은 화염과

연기를 만든다.

1327년 Walter de Milemete,가

그린 “De Notabilitatibus et

Prudentiis Regum”에 있는 첫

번째 캐논

최초에 흑색 화약은 폭죽처럼 소음을 만들기 위해 사용되었다. 약 1300년 경

에 첫 번째 캐논이 출현하였다. 캐논의 첫 사용에 대한 기록은 1346년 크레

시 전투(battle of Crẻcy)에서였다.

이런 초기 캐논들은 조잡하게 만들어졌으며 나무 지지대에 항아리 형 물체

를 설치하였지만 곧 강철 막대를 서로 용접하여 총열을 만들었고 포가라고

불릴 수 있었던 물건에 설치하였다. 이러한 캐논들은 많은 양의 화약을 포구

에 붓고 나무 플러그와 돌 탄환을 넣어서 장전하였다. 화약은 포열의 측면에

있는 작은 구멍(touch hole)으로 타고 있는 부지깽이를 밀어 넣어 점화하였

다. 포열에 꼭 맞는 탄환은 (나무 플러그 때문에) 꽉 차지 않아 무기는 매우

부정확하였다. 사람들은 단지 “적 방향을 향해” 탄환을 발사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화염, 연기 그리고 소음의 심리적 효과가 명중

자체의 위험보다도 더 컸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과는 달리 이러한 초기 캐논들은 포구장전 캐논만 있

었던 것은 아니다. 중세 초에 몇 몇 캐논들은 포열의 후방 끝, 즉 폐쇄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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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포미장전 캐논

부터 장전하였다. 이것은 성탑과 같은 제

한된 공간에 설치할 수 있는 캐논을 더

쉽게 장전할 수 있게 하였고 급속으로 몇

발의 탄을 사격할 수 있게 하였다. 포미장

전 캐논들은 후미가 개방된 포열과 화약

및 탄환을 수용하는 분리 약실로 구성되

었다. 발사하기 전에 이 약실은 쐐기나 로

프로 포열의 폐쇄기에 고정되어야 했다.

본질적인 캐논의 부정확성 때문에 첫 번째 캐논은 커다란 표적에만 효과적

으로 사용되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비잔틴 제국 종말의 전조가 된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터키인들이 도시 성벽을 파괴하기 위해

대형 캐논들을 사용하였다.

다. 휴대용 무기

약 1375년의 핸드곤 두문핸드곤을 사용하는 모습

첫 번째 휴대용 화기는 단지 캐논의 크기를 줄인 것 뿐이었다. 이것들은 약

1380년경에 도입되었으며 일반적으로 “핸드곤(handgonne)”이라고 불렀다. 핸

드곤은 장대 끝에 부착된 주형 포열로 구성되었다. 사격자가 장대를 팔아래

끼고 다른 손으로 부지깽이를 이용하여 총을 발사하였다.

상당히 불만족스러운 핸드곤은 곧 사격 시 몸에 무기를 지지하는 데 사용할

수 있었던 나무 구조물인 개머리판을 가진 무기로 대체되었다. 이것은 “아쿼

버스(arquebus-화승총)”라고 불렀다. 그리고 점화 시스템도 부지깽이에서 총

의 측면에 부착된 죔틀에 보관하는 불이 붙은 부싯돌(심지, 도화선)으로 바뀌

었다(약 1411년). 몇 년 후 스프링 장치가 이 죔틀에 추가되어 사격자는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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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차륜식 소화기.

사냥용

화승식 머스킷

17세기 차륜식 소화기. 유탄발사기

총을 조준하고 버튼을 밀어 사격할

수 있었다; 즉, 방아쇠 장치가 발명

된 것이다.

소화기의 최초 개발이 더 큰 무기

(캐논)에서 이루어졌지만, 이 순간

부터 기술적인 발전은 소화기 분야

에서 시작되었다. 강선, 점화 장치

등이 먼저 휴대 무기에서 나타났고 후에 캐논에 적용되었다.

라. 새로운 점화 장치

화승총(matchlock) 또는 서펀틴(serpentine) 소화기로 알려진 첫 번째 휴대용

화기는 비교적 대형 무기였다. 이들을 사용하는 것은 당시의 야금학이 아직

정교하지 않았고 이런 무기들이 사격시 파열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여 이것

이 목표물보다는 사격자에게 커다란 위협을 주기 때문에 일정한 기술(특히

장전)과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였다.

불붙은 화승 (또는 도화선)으로 무기를 사격하는 것은

불리한 점이 많았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적에게 쉽게

발견된다는 것이다. 적은 불타는 화승의 적열(赤熱)을

볼 수 있거나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다.

16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레오나

르도 다 빈치에 의해 발명되었다.

스프링이 있는 기계장치가 무기의 측면에 부착되었다.

풀림에 의해 스프링이 톱니바뀌를 한 조각의 황철광(黃

鐵鑛) 쪽으로 움직여 불꽃이 튀도록 하였다. 불꽃은 화

약 팬(powder pan)

에 있는 화약을 점

화하고 다음으로 발화 구멍을 통해 주 장

약을 점화한다. 이는 상당한 개량으로서

무기가 격발준비 상태로 공이치기를 유지

하여 언제든지 사격할 준비상태를 유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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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전체 금속 부싯돌발화장

치 피스톨, 1730년

게 해준다. 이것은 또한 무기를 한손으로 사격 가능하게 하였으며 이점은 기

병대에게는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차륜격발식 소화기는 많은 변형들이 개발되었다. 전성기에는 레인타이트

(raintight-방우防雨) 격발장치와 일제사격 총(volley gun - 당시의 기관총으

로서 동시에 여러 발 또는 연속 사격을 할 수 있는 무기)와 같은 새로운 개

념들이 개발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차륜식 소화기는 복잡하여 제작비용이

많이 들었다. 이것은 경제적으로 많은 병사들에게 보급할 수가 없어서 정예

부대원용으로만 사용된 무기였다.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소위 스냅

펀스(snaphaunce) 격발장치가 약 1547년

경에 이탈리아에서 발명되었다. 네덜란드,

스웨덴 그리고 영국 총기제작자들이 디자

인을 개선하였지만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부싯돌발화장치(flintlock)

가 1610년에 프랑스에서 최종 형태로 도

입되었다. 부싯돌발화장치는 여전히 발화

구멍을 통해 주 장약을 점화하는 화약을

채우는 것으로 화약 팬(pan)을 사용였지

만 불꽃을 만들기 위해 강철판(frizzen)에 부싯돌을 충격하는 방법으로 황철

광과 차륜을 대신하였다. 부싯돌발화장치는 차륜식격발장치 보다 훨씬 간단

한 디자인으로 제작비가 저렴하였다. 이 무기는 기능발휘를 위해 고도로 숙

련된 총기제작자가 제작할 필요가 없어졌다. 갑자기 부싯돌발화장치 머스킷

의 출현으로 머스킷으로 군 전체를 무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실현되었다. 또

한 격발장치는 더욱 신뢰성이 있었으며 유지관리가 용이하였고 시스템은 상

당히 견실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발전이었으며 소화기는

다량으로 그리고 소형 포켓용 피스톨에서 7중 총열 일제사격 총까지 많은

변형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세계의 모든 군에서 이러한 무기들로 병사들을 무장시키기 시작하였고 수만

정까지 생산하였다. 이제 전투에서의 주무장은 이러한 무기가 되었으며, 캐

논은 보조장비가 되었고(비록 창병, 기병도 및 대검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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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지만), 이런 포들이 만들어내는 많은 양의 연기에 의한 전쟁의 연무가

전장에서 감소하였다.

1) 총구장전 부싯돌발화장치의 피스톨 장전과 사격

먼저 무기에 연기나는 화

약 찌꺼기가 있는지 확인

한다. 그리고 계량된 흑색

화약을 총구를 통해 총열

아래로 붓는다. 탄환(종종

천 조각으로 싼다)을 총구

에 놓고 엄지손가락이나

짧은 막대로 약간 아래로

민다. 그러면 볼은 꽂을대에 의해 총열 아래로 내려간다.

이제 무기를 수평으로 잡고 공이치기를 반 장전한다. 강철판(frizzen)이 들어

올려 지고 아주 고운

작은 양의 화약이 팬

(pan - 발화 구멍 옆

에 있는 속빈 틀) 안

으로 부어진다. 그리

고 강철판(frizzen)은

닫히고 공이치기는 완

전 장전된다. 방아쇠

를 당기면 공이치기가

전방으로 움직이고 부

싯돌이 강철판

(frizzen)을 충격하여 전방으로 민다. 이렇게 해서 팬 안의 화약이 노출된다.

동시에 금속에 마찰하는 부싯돌은 불꽃을 만든다. 불꽃은 팬의 화약을 점화

하고 점화된 불은 발화 구멍을 통해 주 장약을 점화하여 탄환을 방출한다.

이 이후에 장전과 격발의 모든 절차가 반복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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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부싯돌발화장치 소총. 우측에 있는 것은 탈부착 약실이 있다.

마. 소총의 출현

거의 동시에 중요한 개발이 총열 내부에서 발생하였다. 14세기 말엽에 독일

총기제작자들은 총열 내부의 나선형 홈(rifling)이 비행중에 탄알을 회전시키

고 정확도를 더욱 증가시켜 준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총열 내부에 강선을 만

든 장총을 소총(rifle)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최초에 이 시스템은 사냥용에만

사용하였다. 비록 1641년 초에 적은 수의 군부대에 소총이 보급되었지만, 군

사 상황에서 소총의 장점이 명백해진 것은 사냥용 소총을 휴대한 변경 개척

자들이 활강 머스킷으로 쉽게 영국 보병을 장거리에서 맞추던 미국의 독립

전쟁 기간이 되어서 였다. 이때 조차도 일부 정예부대에만 소총이 보급되었

다.

19세기 초에, 소총 장전절차의 시간을 줄이고 후에 장거리 사격 능력을 향상

시키는 방법으로 원통-원추의 혼합 형태 탄약을 사용하는 것이고 이는 탄저

가 비어 있는 미니에 탄알(1849년 특허)에서 그 정점에 이르렀다. 총강 구경

보다 작은 크기로 만든 이 탄알은 신속하고 쉽게 장전할 수 있으며 장약 가

스의 압력이 탄저를 확장시켜 총강에 일치하고 강선에 결합되도록 한다.

바. 대량 생산 및 부속품의 호환성

미국의 소화기 산업에서 발생한 개발은 소화기 제작뿐아니라 일반적인 기계

제작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때까지 모든 소화기는 개별적으로 만들어졌

다: 전체적인 부속이 하나씩 제작되고 조립되었다. 이것은 한 무기에서 다른

무기로 부속이 호환될 수 없음을 뜻하였다. 수리는 고도로 숙련된 총기제작

자에 의해서만 실행될 수 있었다. 이것은 또한 제작 기간도 길고 아주 숙련

된 노동을 요구한다는 것을 뜻하였다. 1798년에 소화기의 부족에 직면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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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포시드의 최초의

잠금장치를 재현. 이것은 일

반적으로 “향수병 잠금장치

(Scent bottle lock)"이라고 알

려졌다.

갓 탄생한 미국 정부는 엘리 휘트니(Eli Whitney)라는 산업가에게 10,000정의

부싯돌발화 머스킷을 주문하였다. 휘트니는 시스템을 개조하여 부속에 캘리

퍼스와 다이스로 점검할 수 있는 정확한 가공과 허용오차를 만들었다. 여기

에 그는 프랑스에서 1777 머스킷 모델의 생산에 처음 사용된 방법학(方法學)

을 적용하였다. 또한 그는 미숙련 작업자도 운용할 수 있는 생산 기계를 설

계하였으며 이 시스템을 통하여 기록적인 시간에 10,000정의 머스킷 생산을

감독하였다. 이것으로 그는 현대 대량 생산과 부속의 호환성, 오늘날의 생산

에 필수적인 특성에 대한 기초를 세웠다.

사. 충격식 격발장치

앞에 언급바와 같이, 부싯돌 발사 무기의 사격은

섬광과 소음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한다. 먼저 섬광

은 팬(pan) 내에서 점화되는 화약에서 발생한다.

두 번째는 실질적으로 총열을 이탈하는 탄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부싯돌발화 소화기는 상대적으

로 저속으로 탄환(또는 발사물)을 발사하였다. 사

냥감(오리, 사슴, 토끼 등)은 종종 점화 섬광으로

부터 경고를 받아 탄환이나 발사물이 자신들에게

도달하기 전에 회피할 수 있었다. 이것은 스코틀

랜드 성직자 알렉산더 포시드(Alexander

Forsythe)에게는 불만이었으며 그는 이러한 문제

를 해결할 해결책을 찾았다. 몇 번의 실험 뒤에,

아마추어 화학자였던 그는 소화기 기술에 대변혁

을 일으킨 점화 시스템을 고안하였으며 현대 소

화기의 기본으로 만들었다.

이 성직자는 어떤 화학 혼합물은 너무 민감해서 충격을 주면 해머로 타격할

때 점화하거나 폭발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제는 점화제라고 알려진 이

러한 물질들을 소화기 장약 점화에 사용하는 방법을 개발하여 1807년에 특

허를 받았다. 결국에는 더욱 진전된 개발로 점화약을 함유하고 있는 구리 컵

이 총열의 뒤쪽에 있는 속이 빈 모루(니플)에 설치되는 점화 체계로 이어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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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러시안의 충격식 카빈, 모델 1823

다. 구리 컵을 타격하면 점화약

이 점화되고 이렇게하여 발화

구멍 역할을 하는 속이 빈 모

루를 통해 총열의 장약을 점화

한다. 이 시스템은 “충격 점화

(percussion ignition)”로 그리고

구리컵은 “충격 캡(percussion

cap)”으로 알려졌다.

충격 점화와 충격 캡의 도입된 1814년경은 소화기 기술에 있어서 “발명의

시대(the age of invention)”이라고 종종 언급되기 시작하였다. 충격 점화 장

치는 생산, 사격과 정비를 단

순화하여 대규모 생산을 가능

하게 하였고 민간 및 군에서

주요 소화기 시장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충격식 격발장치

가 발명된 다음 해부터 수많

은 개발이 이루어지고 최종적

으로 19세기 말까지 이어져 오늘날 우리가 아는 소화기를 낳았다.

아. 리벌버

소화기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재장전없

이 한발 이상 사격이 가능한 총의 필요성

을 느꼈다. 소화기의 개발 초기에는 다중

총열 디자인이 사용되었다. 권총에서 다중

총열 소화기는 페퍼박스(Pepperbox)라고

알려졌다. 페퍼박스의 가장 큰 불리한 점

은 많은 수의 총열로 인한 무게에 있었다.

1800년 경에 총기제작자인 콜리어(Collier)

와 휠러(Wheeler)는 실린더 총열 뒤에 위치하는 다중 약실(chamber)이 있는

소화기를 개발하였다. 다음 탄을 사격하려면 실린더를 회전하기만 하면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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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실질적인 리벌버인 콜트 패터

슨(Colt Paterson)

충격식 총미장전 소화기용 종이 카트리지

다. 이것의 단점은 각 약실에 화약이 들

어 있는 팬이 있어야 한다는것과 소량의

무기만 생산된다는 것이었다.

충격 캡의 개발은 갑자기 리벌버를 실행

가능한 무기로 만들었으며 새뮤얼 콜트

(Samuel Colt)는 공이치기가 격발 준비

상태가 되면 실린더가 자동으로 다음 위

치로 회전하는 무기에 대한 많은 특허를 1836년에 획득하였다. 특히 영국과

미국에서 수많은 개발자들이 자신들만의 고유의 디자인을 개발하였지만, 그

가 디자인한 리벌버는 모든 현대 리벌버형 무기의 기본이 되었다. 이 것은

연발총을 실제적인 무기로 만들었다.

이 시스템은 소총에 적용하기에 적당하지 않은 몇 가지 선천적 결점있다. 하

나는 사격시 일부 납과 가스가 실린더와 총열 사이의 공간을 통해 측면으로

새는 것이다. 이 가스는 사격자의 팔에 상처를 준다. 한 동안 단발 총구 장

전총이 가장 실질적일 견착식 무기로 남아 있었다.

자. 총미 장전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시기에 이미

탄환과 포장하지 않은 화약 또는 연소

성 포장지에 동시에 포장되는 많은 양

의 추진장약과 추진체로 주로 구성되

는 총미로부터 장전되는 무기가 존재

했었다. 이러한 무기들은 낙하 블록이

나 회전 노리쇠와 같은 기계장치에 의

해 총미가 닫혔지만 충격식 뇌관은 여

전히 무기의 일부분을 형성하는 니플에 분리되어 설치되어야 했다.

19세기가 시작될 때, 프랑스에서 폴리(Pauly)가 완성탄(catridge) 개발을 시작

하였다. 그의 아이디어는 추진체와 추진 장약 및 뇌관을 단일 유닛, 즉 자체

일체식 카트리지에 결합하는 것이었다. 그의 디자인은 당대를 앞서는 것이었

고 1840년에야 아이디어가 실현되었다.

첫 번째 실제 실용적인 디자인은 독일에서 드라이제(Dreyse)에 의해 개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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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약을 통과한 후 바늘형 공이 핀이 (탄알 후방에

있는 구멍에 위치한) 뇌관 구성품을 타격하는 드라

이제 소총

었다. 이것은 탄환과 추진장약

이 가연성 종이에 포장된 것으

로 구성되었다. 뇌관 구성품은

탄환의 후방에 있는 오목한 곳

에 위치하였다. 총열의 약실에

카트리지를 장전하고 나면 회

전 노리쇠가 폐쇄된다. 방아쇠

가 당겨지면, 길고 경사진 공이

핀(바늘이라고 함)이 종이를 뚫

고 장약을 지나 탄환의 뒤에

있는 뇌관 구성품을 타격한다. 이 행위는 탄이 발사되도록 하고 동시에 구성

품들을 싸고 있는 종이를 태운다. 이것은 카트리지가 반드시 황동 케이스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소총은 현대의 노리쇠 작용식 소총의 선조

로 생각할 수 있다.

드라이제 바늘식 사격 소총과 프랑스의 상대품인 샤스포(Chassepot)에는 한

가지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화약이 탈 때 고압이 소총의 기계장치에 의해

밀폐되어야 했으며 만약 시스템이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으면 압력이 누출하

여 사격자에게 부상을 입히는 결과를 낳았다. 화약의 찌꺼기에 의한 막힘도

동일한 효과를 냈다. 폴리(Pauly)의 최초 아이디어는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

을 포함하고 있었다. 화약, 탄환과 뇌관을 사격 시 총열의 총미와 노리쇠 또

는 폐쇄기조립체 사이의 간격을 밀폐하는 금속 케이스에 포함하였다. 최초의

카트리지는 뇌관이 여전히 분리 설치되는 상태에서 화약과 탄환만이 포함된

것으로 만들어 졌다. 후에 뇌관 구성품들이 케이스에 통합되어 금속 또는 일

체형 완성탄(cartridge)라고 부르게 되었다.

차. 일체형 완성탄

완성탄의 개발은 한 장소에서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완성탄 구조

에 있어서 주요 차이점은 점화가 케이스에 통합된 방법에 있다. 초기에 모든

총기제작자들과 모든 병기제작창은 자신들의 고유 아이디어를 고안해냈고

어떤 것들은 다른 것들에 비해 좀 더 실용적이었다. 커다란 잠재적인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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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수 많은 특허가 이루어 져서 “특허 점화(patent ingnition)”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특히 많은 수의 이러한 디자인들이 이미 발생한 특허에 대한 특

허권 침해를 피하기 위한 의도뿐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디자인 중에 아주 극

소수만이 몇 년간 유지될 수 있었다. 일단 이러한 특허가 종료되면 가끔은

서투른 다른 디자인들이 폐기되고 제작자들은 검증된 디자인의 생산에에 집

중하였다.

첫 번째 실제적인 일체형 완성탄은 카시미르

르파슈(Casimir Lefaucheux)가 1835년에 프랑

스에서 특허를 냈다. 이것은 공이핀이 설치된

채로 약협 내부에 뇌관이 위치한 디자인이었

다. 이 공이 핀은 케이스의 측면에서 돌출하

였다. 공이치기에 의해 타격이 되면 이 핀은 뇌관 구성품을 폭발시키고 추진

장약을 점화한다. 이 완성탄은 핀파이어 완성탄(pinfire cartridge)라고 알려졌

다.

1831년과 1849년에 두 개의 특허가 J. A. 로버츠(Roberts)와 L. N. A. 플로베

르(Flobert)에 의해 각각 이루어졌다. 이 특허들은 플로베르가 더 유명해지기

는 했지만 본질적으로 동일한 원리를 포함한다. 이 특허들에서 약협은 매우

얇은 벽으로 만들어졌다. 탄저의 림(rim)은 속이 비었고 뇌관 구성품은 이

속이 빈 림 내부에 위치한다. 한쪽으로 치우쳐 설치된 공이 핀은 림을 격발

하고 움푹들어가게 한다. 이렇게 해서 뇌관 구성품이 으깨지고 점화된다.

세 번째 디자인은 실제로 모두 동일한 기본 원

리를 가진 수많은 상이한 특허를 포함하였다. 이

완성탄에서 특별한 모양의 충격식 캡이 탄저 중

심에 있는 구멍에 위치하였다. 이러한 종류의 점

화에 대한 특허는 포렛트(Pottet), 니덤

(Needham), 모스(Morse), 복서(Boxer) 및 베르단

(Berdan)과 같은 발명가에 의해 1850년에서

1870년까지 미국과 영국에서 있었다. 이러한 완

성탄들은 집합적으로 센터화이어 완성탄(centerfire cartridge)라고 한다.

앞에서 언급된 각 완성탄은 자신들의 강점과 결점을 가지고 있다. 핀화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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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화이어(Lipfire) 티트화이어(Teatfire) 컵화이어(Cupfire)

완성탄은 만약 공이 핀이 우발적으로 (완성탄이 바닥에 떨어질 경우와 같이)

격발되면 완성탄은 무기의 외부에서 폭발하기 때문에 불안전하였다. 또한 이

것들은 탄창 연발 시스템에서 사용될 수 없었다. 림화이어 완성탄은 벽이 아

주 얇고 고압(플로베르 특허품은 실제로 화약을 포함하지 않고 뇌관 구성품

의 폭발력에 의해서만 탄환을 추진하는 완성탄을 포함하였다)을 견딜 수 없

었다. 게다가, 림화이어 완성탄은 재사용이나 재장전에 사용할 수 없었다.

다음과 같은 기타 여러 가지 시스템이 있다. 탄저에 있는 속이빈 립에 뇌

관 구성품이 있는 완성탄(립화이어), 탄저로부터 돌출된 속이 빈 티트(teat)에

뇌관 구성품이 있는 완성탄(티트화이어), 외부로 움직이는 공이 핀에 의해 충

격되는 속이 빈 림에 뇌관 구성품이 있는 완성탄(컵화이어). 이러한 완성탄

중에 서로 호환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언급된 바와 같이, 이러한 디자인

은 처음 세 가지 디자인보다 훨씬 실용성이 떨어졌으며 아주 짧은 기간 사

용되었다.

금속 완성탄 디자인에 있어서의 성공은 황동을 길고, 가는 컵의 형태로 만들

수 있는 금속 가공 기술의 개발의 공이 아주 크다. 새로운 기계적 생산 방법

들과 대량 생산 개념 역시 산업 혁명 기간 중에 생산 기술의 개발로 이러한

품목 생산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카. 무기 개조

미국 남북전쟁(1861년 - 65년)은 총미 장전이며 실제적인 연발 소총이 군사

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독일의 드라이

제 뿐아니라 영국은 엔필드(Enfield) 총구장전 총보다 월등히 우수한 탄도 성

능을 가진 연소성 완성탄을 사용하는 11mm 단발 총미장전 총인 샤스포를

1866년에 프랑스에서 도입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모든 나라들이 무기 개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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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미장전식으로 개조된 충격식 총구장전 총

: 스프링필드 Trapdoor 소총

처음부터 총미장전총으로 디자인된 레밍

터 롤링 블록 소총

박차를 가하게 하였다. 이러한 것을

갖출 여력이 있는 나라들은 현대의

고성능 총미장전총을 찾게 되었고 잠

정적으로 경제적인 수단으로써 자신

들의 총구장전 총을 개조하였다. 스프링필드 “트랩도어(Trapdoor)”와 스나이

더 개조품은 이들 중 가장 잘 알려졌다.

미국의 레밍턴 “롤링 블록(Rolling Block)”, 영국의 마티니 헨리(Martini

Henry), 독일의 모제르 71(Mauser 71), 오스트리아의 웬들(Werndle), 스위스

의 베털리(Vetterli), 프랑스의 그라스(Gras)와 네덜란드의 보몬트(Beaumont)

M 1871처럼 처음부터 총미장전총으로 디자인된 새로운 모델들이 시장에 출

현하였다.

미국의 스펜서(Spencer)와 같은 연발 무기들이 전투에서 스스로의 능력을 증

명한 이후, 또 다시 많은 정부에서 자신들이 보유한 무기들을 개조하기로 하

였다; 이번 경우에는 단발에서 연발로 개조하였다. 네덜란드의 보몬트 M 71

소총에 네 발들이 탄창이 1888년에 적용되어 보몬트 M 71/88이 되었다. 많

은 수의 무기들이 제작 방법 때문에 개조되지 못했고 신속하게 예비 임무로

좌천되었다. 새로운 형태의 연발 무기들은 출발점에서부터 군용과 민간 시장

용으로 개발되었다. 헨리(Henry) 연발 소총은 윈체스터 회사에 의해 아주 실

용적인 무기로 개발되었으며 유럽에서는 모제르 71/84처럼 노리쇠 작용 연

발총이 출현하였다.

탄창을 추가하여 Beauont 모델 71을 Beauont-Vetterli 모델 71/88fh 개조한 전후의 네덜란드 Beaumont 소총

타. 완성탄 리벌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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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를 평정한 총 : 콜트 단동식 육군

모델 1873 피스메이커(peacemaker)로

더 잘 알려졌다.

권총에서도 유사

한 개발이 이루

어졌다. 그러나

권총에서의 차이

점은 다중 발사 무기의 개념이 이미 리벌버의 도입과 함께 확립된 것이다.

완성탄 소총이 출현하자마자 총미 장전 개념은 권총에 적용되었으며 최초에

는 단발 및 다중 총열 무기에서 나중에는 리벌버에 적용되었다.

미국에서는 소총의 상황과 달리 총미 장전 완성탄 리벌버의 개념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총미 장전 디자인을 포함할 만큼 광범위하게 특허에 의해 적

용되었다. 이 특허는 롤린 화이트(Rollin White) 특허로 알려졌으며 림파리어

완성탄에 특허를 낸 스미스 앤 웨슨(Smith and Wesson) 사에 판매되었다.

그 결과 1869년에 롤린 화이트 특허 시한이 종료된 순간까지 스미스 앤 웨

슨사가 미국에서 총미 장전 완성탄 리벌버를 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회사가

되었다.

스미스 앤 웨슨사는 처음에 림파리어 완성

탄용으로 리벌버만 생산하기로 하였고 이렇

게 해서 더욱 독점적이 되었다. 롤린 화이

트 특허가 종료된 시한까지 림화이어 완성

탄은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수 많은

회사들이 합작을 원하였다. 이 때, 더 강력

하고 더욱 신뢰성이 있는 완성탄을 사용하

기 위해 스미스 앤 웨슨사는 센터화이어 완

성탄용 리벌버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콜트(Colt)는 신속하게 지금은 자신들

의 명품이 된 모델 1873 피스메이커(Peacemaker)로 추격하기 시작하였다.

롤린 화이트(Rollin White) 또는 스미스 앤 웨슨사는 유럽에서 특허를 낸 적

이 없다. 유럽에서의 리벌버 개발은 유사하지만 다른 길을 걸었다. 전방위적

특허가 없었기 때문에 총기제작자들은 새로이 나타난 소수의 “신종” 시스템

의 특허 침해를 피해기 위해 모든 종류의 독립 시스템을 개발할 필요가 없

었다. 르파슈(Lefaucheux) 핀화이어 완성탄의 도입은 플로베르의 림화이어

완성탄 보다 10년이 앞서고 단발 및 다중총열 무기용으로 실용적인 총미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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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 프랑스의 Javelle 특허 리벌버

1871년의 흑색화약으로 채워

진 .40-70 완성탄은 1897년

의 6mm Lee Navy보다 3배

무거웠다.

전 완성탄임을 스스로 입증하였다. 이것은

연발 시스템에 차용되지 않았지만 곧 리벌

버에서 사용되었다. 림화이어 완성탄이 수

많은 군용 및 민간용 무기에서 사용되었지

만,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고 미국에서는 종

종 표적 사격용이나 실내용 총으로서의 역

할로 좌천되었다. 미국에서 총미장전 센터화

이어 리벌버가 개발된 거의 동일한 시기(1869년)에 영국에서도 개발되었다.

파. 무연 화약

1846년에 스컨베인(Schonbein)이라고 불리는 스위

스의 화학자가 무명이 질산처리 될 수 있고 그 결

과로 고도의 화학 에너지를 함유한 매우 빠르게

연소하는 물질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물질

은 불안정하여 1885년이 되어서야 프랑스의 비에

유(Vieille)가 이 화약을 안정하게 다룰 수 있게 되

었고 성능을 안정시켰다. 이 새로운 화약의 특성은

당대의 흑색 화약보다 매우 우수하게 하였으며 프

러시아의 슐츠(Schultze) 소령이 1864년에 발명한

질산화 목재 펄프 화약보다도 더욱 우수하였다. 이

것은 더욱 강력한 화학 에너지를 함유하였고 더욱 큰 압력을 발생할 수 있

었으며 더 적은 총열 탄매를 만들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사격시 훨씬 적은

화염과 연기를 만든다. 이 영속적인 특성은 “무연 화약(smokeless powder)”

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유럽에서는 “질산 화약(nitro powder)”라는 이

름으로 불렸다. 신형 화약은 매우 큰 향상으로서 프랑스 정부는 1886년에 사

용을 결정하였다. 이 화약은 소화기 구조를 혁신시켰다.

화약 자체만이 소화기 기술에 있어서 혁신을 유발한 것은 아니다. 산업 혁명

의 한 부분인 기술 발전은 금속 특히 강철이 생산되고 처리되는 방법을 바

꿨다. 처음으로 질산 화약이 만들어내는 고압을 견딜 수 있는 고급 강철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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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복탄환과 무연화약으로 채워진 전

형적인 현대 핸드건 탄약

무연 화약의 출현은 일시에 이전에 생산된

것들을 모두 쓸모없게 만들었다. 흑색 화약

소화기는 에너지를 전달하기 적당한 속도로

움직이는 아주 크고 무거운 탄자에 의존하

였다. 이제는 가벼운 고속 탄자가 동일한 일

을 할 수 있었다. 탄자가 더 가벼웠기 때문

에 군인들은 더 많은 탄약을 휴대할 수 있

었다. 또한 더 작은 탄자가 장거리에서 소총

을 사용하고 표적에 더 많은 에너지를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적은 탄매

는 자주 무기를 청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였으며 반면에 연기의

제거는 사수의 위치를 덜 노출하고 전장에서의 가시도를 더욱 선명하게 하

였다.

거의 시작단계부터 새로운 완성탄이 신형 화약용으로 개발되었다. 이것들은

구경의 축소, 탄자 무게의 경감 및 피갑탄(종종 “full metal jacket" 탄자라고

불린다)의 도입을 포함하였다. 이는 이러한 새로운 무기에서의 탄자 속도가

빨라서 납이 총강 내에서 녹아 내렸기 때문이다. 메커니즘이 크게 바뀌지 않

았지만 소총은 더욱 강력해 졌고, 전달하는 에너지에 비해 더 가벼워졌다.

무연 화약이 흑색 화약보다 더 높은 압력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정부가 무

연화약을 전적으로 사용하고 싶어 하였지만 신형 화약용 무기로 현재고량의

흑색 화약을 간단하게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프랑스 육군이 1886년에 무연 화약 사용을 소총에 처음 채택하였고 다른 나

라들은 신속하게 뒤를 따랐다. 20세기가 시작될 때까지 대부분의 강대국은

무연 화약용 소총으로 대체하였다: 영국은 리 엔필드(Lee Enfield), 독일은 모

제르(Mauser) 88 및 98, 프랑스는 레벨(Lebel), 오스트리아는 슈타이어 만리

헬(Steyr Mannlicher), 이탈라아는 만리헬 카르카노(Mannlicher Carcano), 러

시아는 모신-나강(Mosin-Nagant) 그리고 미국은 크래그-요르겐슨

(Krag-Jorgensen) 소총을 사용하였다. 변이(變移)는 상당히 빨랐다. 흑색화약

을 단계적으로 제거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만, 흑색화약은 아주 신속하

게 제2선 기능으로 좌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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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대의 첫 번째 소총: 프랑스의

1886년형 레벨(Lebel)

무연 화약의 사용에 적합한 견고한 프

레임과 회전 개방 실린더가 있는 현대

리벌버.

하. 권총에서의 무연 화약

권총에서도 동일한 일이 발생하였다.

대부분의 정부에서 사용 중인 리벌버

는 다소 부피가 컸다. 무연 화약은 특

히 이러한 형태의 무기에서 중요한 크

기와 무게를 리벌버에서 줄일 수 있게

하였다. 구형 디자인은 일반적으로 현대 화약의 상당히 큰 압력을 다루기에

부적절하여 새로운 디자인이 필요하였다. 콜트사의 피스메이커처럼 일부 구

형 디자인이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무기조차도 무연 화약에

적합하도록 수많은 변화를 겪어야 했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무기는 일반적으로

구형 디자인의 강화 버전에 지나지 않았

으며 사용할 수는 있었지만 최적의 형태

와는 거리가 멀었다.

거. 흑색 화약에서 무연 화약으로 이

흑색 화약은 일시에 사라지지 않았다. 민간 분야(평화시의 군에서와 같이)에

서는 가격과 보수적 성향이 아주 크게 작용하고 흑색 화약은 군에서 바뀐

이후에도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그러나 무연 화약이 출연한 이후에 이미 사

용중인 일부 디자인이 오랫동안 계속 생산되었지만 아주 소수의 무기들이

흑색 화약만을 사용하기 위해 도입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38년까지 소수

의 총구 장전 무기가 벨기에에서 인도에 수출하기 위해 생산되었고 일본에

서 2차대전 기간중에 총구 장전 “비상” 피스톨이 디자인되었다. 이러한 것들

은 예외적인 것들이었다. 흑색 화약 무기의 일반적인 생산은 실질적으로

1906년까지 중지되었고 현대 소화기가 전쟁 지원을 위한 대량생산이 시작되

었을 때인 제1차세계 대전의 초기에는 부적절한 것이 되었다.

흑색 화약 소화기 대 무연화약소화기의 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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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에서 1935년까지 : 레밍턴 데린저

.42인치 대구경 림파이어

핀화이어 완성탄은 무연 화약용으로 전환

되지 않았다. 이 완성탄의 구조는 무연 화

약이 발생시키는 고압을 견딜수 없었다.

아주 적은 수의 핀화이어 무기들이 1900

년 이후에도 생산되었고 최후의 핀화이어

엽총이 1942년에 스웨덴에서 생산되었다.

대구경 림파이어 완성탄은 좀더 나은 대

접을 받았다. 이 탄약이 무연 화약의 장약

과 함께 생산되었지만 구형 디자인 무기에서의 안전한 사용을 위해 장약은

상당한 양을 줄여야 했다. 게다가, 얇은 벽을 가진 완성탄은 완전한 양의 무

연 장약을 충전하였을때의 압력을 견딜 수 없었다. 이것은 공이가 림을 충격

하는 지점에서 파열하여 가스가 방출되어 사격자를 다치게 하였다. 대구경

림파이어는 급속히 센터파이어 완성탄에 자리를 내주었다.

가장 마지막까지 생산된 대구경 림파이어 완성탄 사격용 무기는 쌍발용 포

켓 피스톨인 레밍턴 데린저(Remington Derringer)였다. 이 무기는 1866년에

서 1935년까지 형태를 변형하지 않고 생산하였지만 현대의 디자인에 의해

물러났다.

물론 예외도 있었는데 그것은 22구경 림파이어의 완성탄 그룹이었다. 이 구

경의 무기는 표적 사격, 소형 사냥감용 사냥에 사용되었다. 이러한 무기는

일반적으로 저렴하고 튼튼하며 대중성이 있었다. 이러한 구경의 탄약 (22구

경 단소총, 22구경 장소총 및 22구경 매그넘과 같은 수 많은 변종형)은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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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구경은 실내용 총으로 전형

적인 표적 사격용 구경으로 오

랫동안 여겨졌다.

모델 1873 개틀링 총

도 생산되고 있으며 무연 화약의 장약을 사용한

다. 구형 (흑색 화약) 소화기에 현대의 22구경

완성탄을 사격하면 지극히 위험한 시도로 여겨

진다.

실제적으로 센터파이어 완성탄과 22구경 림파이

어 완성탄은 흑색 화약에서 무연 화약으로 천이

하면서 살아남은 유일한 탄들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절하게 사용된다.

너. 자동 소화기

전투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아주 짧은 시

간에 많은 발사체를 발사하는 능력이다. 소화기 개발의 초기부터 이것은 레

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유명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총기개발자들의 목표였

다. 동시에 발사되는 여러 개의 총열이 있는 디자인은 14세기에 출현하였다.

미국 남북전쟁과 프랑코-프러시안 전쟁에서 다중 총열 무기는 보병을 지원하

는데 사용되었다. 남북전쟁 기간에 현대 기관총의 선조라고 생각되어지는 개

틀링 기관총도 출현하였다. 개틀링 기관총은 수동으로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통해 장전, 사격 및 재장전이 가능한 다중 총열을 가지고 있는 무기였다. 총

열들은 중심 축 주위를 회전하는 덩어리로 설치되어 있었다.

개틀링 총은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협의의

단어로서 기관총은 아니었다. 무기의 작동은

수동으로 돌리는 손잡이에 의해 실행되므로

개틀링 총은 기관총이라기 보다는 연발 소화

기의 극단적인 형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것은 가끔 “기계적 기관총(Mechanical

machinegun)”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무기는

버튼을 간단하게 눌러 작동시킬 수 있는 전기 또는 유압 모터가 적용되었을

때만이 진정한 기관총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무기는

1956년이 되어서야 실용될 수 있었다.

첫 번째 진정한 기관총은 1884년에 하이람 맥심(Hiram Maxim)에 의해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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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기관총의 조상: 맥심 모델 1884의

시제품

20세기의 기관총 : 독일의 1908년 스판다우(Spandau), 러시아의 1943년 고리노프

(Gorynov)와 벨기에의 1958년 MAG. 기본 원리는 무연 화약이 소개

된 이후 거의 변하지 않았다.

되었다. 이것은 탄피를 추출하고, 천 탄띠

로부터 총열 안으로 다음 탄을 송탄하고

발사하는데 발사 탄약의 반동을 이용한 무

기였다. 맥심 1884는 메커니즘을 운용하기

위한 에너지 저장에 플라이휠을 이용하였

다. 설계 상으로는 기능 발휘가 가능하였

지만, 시험평가하는 중에 가장 큰 결점 중

하나가 발견되었다: 무기가 엄청난 양의

연기를 만들어 내고 메커니즘을 더럽혔다.

이것은 군사 상황에서는 아주 비현실적으

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무기의 아주 제한적인 숫자가 군에 팔렸

다.

무연 화약의 개발은 갑자기 기관총을 실제적인 무기로 만들었다. 무연 화약

의 출현 이후 아주 짧은 기간에 수많은 기관총 디자인이 소개되었다. 상이한

구조의 기관총이 개발되고 있었으며 세계의 많은 강대국에서 생산되었고 각

나라들은 미국의 브라우닝(Browning)과 콜트(Colt)사, 영국의 빅커스(Vickers)

사, 오스트리아의 스코다(Skoda)사, 덴마크의 매드센(Madsen)사 와 프랑스의

핫치키스(Hotchkiss)사와 같은 자신들의 회사들을 지원하였다. 제1차 세계대

전 초기에 모든 나라들의 군은 수 많은 기관총을 자신들의 무기고에 보유하

고 있었으며 포와 함께 기관총은 당시 전쟁의 전투 성격을 형성하는 주요

요소였다. 당시로부터 기관총의 기술적 개발은 더욱 융통성이 있고, 더욱 휴

대가 간편하며 생산이 더 쉬운 무기로 만드는데 주 목적을 두고 있다.

기관총이란 용어는 방아쇠를 당기고 있고 탄약이 공급되는 동안에 메커니즘

이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중(重) 무기 그룹만을 일컫는다. 종종 이러한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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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의 콜트 모델 1991 피스톨(좌)와 현재(우). 세부 사항이 변경되었지만 기본 원리는 동

일하게 유지하고 있다.

강조하기 위해 기관총은 “완전 자동(full-automatic)“ 무기라고 부른다. 방아

쇠를 당길 때마다 한 발만을 사격하는 무기는 ”반자동 ( semi-automatic)“

무기라고 부른다.

더. 반자동 소화기

기관총은 상대적으로 무거운 무기였다. 이 시기까지 소화기 기술의 대부분의

개발은 전형적인 보병 무기인 소총으로 시작하였다. 기술적 문제점으로 인해

새로운 강력한 화약이 이 다음의 중요 개발이 보병 소총이 아닌 피스톨과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리벌버는 1880년대 후반에 완전 성숙기에 도달하였다. 그때 이후 어떠한 극

적인 개발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반자동 피스톨은 새로운 발전이었다. 이

개발은 새로운 화약을 사용하는 권총 완성탄의 개발과 함께 발전하였다. 반

자동 피스톨에는 흑색 화약이 없다. 첫 번째 신뢰성 있는 기능을 하는 반자

동 피스톨은 독일의 휴거 보어하르트(Hugo Borchardt)가 만들었다. 이것은

맥심 기관총에 기반을 둔 디자인으로 부피가 다소 크고 부담이 되었다. 이

총은 무연 화약이 충전된 병목 완성탄을 사용하였으며 토글 메커니즘이 있

는 격발장치가 있었다. 무기는 너무 커서 실용적이지 않았지만 곧 가장 유명

한 후속품인 루거(Luger) 피스톨에 의해 계승되었다.

실제적으로 대량 생산된 첫 번째 반자동 피스톨은 모제르(Mauser) 모델

1896이었다. 이것은 보어하르트 보다 훨씬 양호하며 더욱 신뢰성이 있는 디

자인이었다. 미국에서는 존 M. 브라우닝(John M. Browning)이 경사진 총열

이 격발 장치로 사용되는 장치를 개발하였으며 이러한 종류의 피스톨이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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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반자동 피스톨 : 보어하르트 모

델 1893

윈체스터의 첫 두 소총 : 상부는 모델 1903 반자동 카빈으로 22구경 장총

림파이어이며 아래는 모델 1905 반자동 카빈으로 중간 화력의 구경 32 윈

체스터 센터파이어이다.

럿 개발된 이후 미육군에 의해 모델

1911로서 채택되었다. 이 무기는 여전히

사실상 수정되지 않은 형태로 전 세계적

으로 사용되고 있다.

상당한 숫자로 생산된 첫 번째 반자동

소총은 1903년에 윈체스터(Winchester)에

의해 제작된 22구경 림파이어였다. 이것

은 사냥용 민간 시장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1905년에 같은 회사는 상대적으

로 약한 센터 파이어 완성탄을 사용하는

반자동 소총을 소개하였다.

1896년에 덴마크의 매드센(Madsen)이 완전한 화력의 소총탄을 사용하는 반

자동 소총을 소개하였지만, 군사용으로 처음 사용된 것은 1908년에 멕시코인

이 설계하고 스위스에서 제작된 몬드라곤(Mondragon)이었다. 이 무기는 제1

차 세계대전에서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참호전에서 사용하기에는

너무 민감하여 항공기 무장으로 사용되었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수많은

반자동 소총이 개발되었지만 아주 소수의 나라들만이 자신들의 군에 채택하

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조차 미국과 USSR만이 반자동 소총으로 일부 무

장하였을 뿐이며 다른 나라들은 19세기 말에 설계된 노리쇠 작동식 소총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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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스텐건 Mk2

가장 유명한 돌격 소총 : 러시아의 칼라니시코프

AKS 47

첫 번째 돌격 소총 : 독일의 스투름게베어

(Sturmgewehr) 44

첫 번째 1884 맥심 기관총 이래

흑색 화약을 사용하는 완전 또는

반자동 소화기는 없다. 또한 최근

에 개발된 소총들은 22구경에서

림파이어 격발과 센터파이어 격

발 이외 이러한 탄을 사용하는

무기는 없다.

러. 완전 자동 견착식 무기, 기관단총과 돌격 소총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 기간 중에 특히 제한된 공간에서 사용하기 적절한

새로운 종류의 경(輕)무기가 나타났다. 이 무기는 소총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보병 무기가 되었다. 이것은 양차 대전 사이에 더욱 발전하였지만 오늘날 우

리가 알고 있는 영국의 스텐건(Stengun), 독일의 MP 40 그리고 미국의 M3 "

그리스 건 (Grease gun)“이 채택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이었다.

완전 화력 소총과 기관단총

사이에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무기는 돌격 소총이

다. 돌격소총 개념은 1942년

경에 독일에서 개발되었으며

중간 화력탄을 사격하고 완전

자동 사격이 가능한 짧은 소

총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완전 자동 사격 능력은

돌격 소총의 필수적인 특성이다.

콜트사의 M16과 칼라니시코프

AK 47과 같은 모든 현대 돌격

소총의 아버지라고 생각할수 있

는 무기인 스투름게베어 44에서

개념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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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結 論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소화기가 개발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

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무기는 무연 화약의 소개와 제

1차 세계대전 사이의 수 년동안에 처음 나타난 디자인에 바탕을 두고 있다

는 것이 사실이다. 현대의 노리쇠 작동식 소총은 모제르 98, 슈타이어(Steyr)

95와 리 엔필드(Lee Enfield) 디자인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현대의 기관총은

그 기간의 많은 디자인에 바탕을 두고 있다. 콜트 1911 피스톨은 여전히 사

용되고 있다. 재질도 변경되고 탄창 용량도 증가하였지만 무기의 기능 상의

기본 원리는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의 소화기 뿐 아니

라 무기 전 분야에 걸친 발전은 탄약과 사격통제장치에서의 발전이 두드러

질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