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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1 - 대한지리학회지 제52권 제5호 2017(561~577) 1910~1931년 두만강 북안과 압록강 북안 조선인 이민과 인구 분포 최산산*·류제헌** The Population and Distribution of Korean Immigrants on the Northern Banks of the Yalu and Tumen Rivers between 1910 and 1931 ShanShan Cui* · Je-Hun Ryu** * 한국교원대학교 지리교육과 박사과정 수료(Ph. D. Candidate, Department of Geography Education, Korea National Uni- versity of Education, [email protected]) ** 한국교원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Professor, Dept. of Geography Education,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Education, jhryu @knue.ac.kr) 요약 : 본 연구는 역사지리학과 문화지리학의 관점을 결합하여 1910~1931년 두만강 북안(북간도)과 압록강 북 안(서간도)으로의 조선인 이민 과정과 이에 따른 인구 분포를 분석하고 조선인 이주 과정에 작용한 환경적 요인 과 문화적 요인을 탐색하고자 한다. 1910~1931년 조선인 이민은 주로 연길현(延吉縣)과 화룡현(和縣)을 중 심으로 두만강 북안에 집중되었으며 인구수는 압록강 북안보다 훨씬 많았다. 1910년대 압록강 북안에서 조선인 은 주로 압록강 중·상류와 혼강(江) 유역에 거주하다가 1920년대 벼농사의 발전에 따라 점차 길림성(吉林省) 중부에 있는 현(縣)과 시(市), 그리고 봉천성(奉天省) 서북부로 거주지를 확대하였다. 1910~1931년 논농사는 조선인 이민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생계 수단이자 문화적 요인이었으므로 조선인은 벼농사 개간에 적합한 저습 지와 하천 유역을 거주지로 선호하였다. 논농사는 조선인 이민을 진일보 촉진시켰으며 이러한 논농사의 발전은 중국 동북지방 곳곳에서 밭농사 위주의 농업경관을 논농사 위주의 농업경관으로 변화시켰다. 조선인 이민과 이 에 따른 논농사의 확대 과정에서 조선인, 그리고 한족을 비롯한 중국의 타민족 간 교류는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 면서 중국 동북지방 전체적으로 조선인 문화의 전파가 촉진되었다. 주요어 : 두만강 북안, 북간도, 압록강 북안, 서간도, 조선인 이민, 인구 분포, 논농사 Abstract : Combining the perspectives from both historical geography and cultural geography, this study aims to examine the population and distribution of Korean immigrants onto the northern banks of Yalu River and Tumen River, and the role of environmental and cultural elements in the migration process be- tween 1910 and 1931. Between 1910 and 1931, Korean immigrants were mainly concentrated on the northen bank of the Tumen River, that is North Gando, with a population far greater than the northern bank of the Yalu River, which corresponds mainly with Yanji county and Helong county. On the northern bank of the Yalu River, in the 1910s, Korean immigrants were mainly concentrated in the middle and upper reaches of the Yalu River and Hunjiang valley. In the 1920s, with the development of rice farming, settlement of Ko- rean immigrants gradually expanded to the counties which lay in the valleys of Jilin province and the north- western Fengtian province. Rice farming was the most important cultural element working in the process of Korean immigration during this period. In order to grow rice, Korean immigrants decided to settle down mainly in the low-lying areas including river basins. The development of rice cultivation further promoted the migration and settlement of Korean immigrants and changed the traditional agricultural landscape, which had been dominated by the dry farmlands. As Korean immigrants interacted more closely with local

1910~1931년 두만강 북안과 압록강 북안 조선인 이민과 인구 분포kgeography.or.kr/homepage/kgeography/www/old/publishing/journal/52/... · 구가 있다. 이 연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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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지리학회지 제52권 제5호 2017(561~577)

1910~1931년 두만강 북안과 압록강 북안 조선인 이민과 인구 분포

최산산*·류제헌**

The Population and Distribution of Korean Immigrants on the Northern Banks of the Yalu and Tumen Rivers between 1910 and 1931

ShanShan Cui* · Je-Hun Ryu**

* 한국교원대학교 지리교육과 박사과정 수료(Ph. D. Candidate, Department of Geography Education, Korea National Uni-

versity of Education, [email protected])

** 한국교원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Professor, Dept. of Geography Education,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Education, jhr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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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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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본 연구는 역사지리학과 문화지리학의 관점을 결합하여 1910~1931년 두만강 북안(북간도)과 압록강 북

안(서간도)으로의 조선인 이민 과정과 이에 따른 인구 분포를 분석하고 조선인 이주 과정에 작용한 환경적 요인

과 문화적 요인을 탐색하고자 한다. 1910~1931년 조선인 이민은 주로 연길현(延吉縣)과 화룡현(和龙縣)을 중

심으로 두만강 북안에 집중되었으며 인구수는 압록강 북안보다 훨씬 많았다. 1910년대 압록강 북안에서 조선인

은 주로 압록강 중·상류와 혼강(浑江) 유역에 거주하다가 1920년대 벼농사의 발전에 따라 점차 길림성(吉林省)

중부에 있는 현(縣)과 시(市), 그리고 봉천성(奉天省) 서북부로 거주지를 확대하였다. 1910~1931년 논농사는

조선인 이민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생계 수단이자 문화적 요인이었으므로 조선인은 벼농사 개간에 적합한 저습

지와 하천 유역을 거주지로 선호하였다. 논농사는 조선인 이민을 진일보 촉진시켰으며 이러한 논농사의 발전은

중국 동북지방 곳곳에서 밭농사 위주의 농업경관을 논농사 위주의 농업경관으로 변화시켰다. 조선인 이민과 이

에 따른 논농사의 확대 과정에서 조선인, 그리고 한족을 비롯한 중국의 타민족 간 교류는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

면서 중국 동북지방 전체적으로 조선인 문화의 전파가 촉진되었다.

주요어 : 두만강 북안, 북간도, 압록강 북안, 서간도, 조선인 이민, 인구 분포, 논농사

Abstract : Combining the perspectives from both historical geography and cultural geography, this study aims to examine the population and distribution of Korean immigrants onto the northern banks of Yalu River and Tumen River, and the role of environmental and cultural elements in the migration process be-tween 1910 and 1931. Between 1910 and 1931, Korean immigrants were mainly concentrated on the northen bank of the Tumen River, that is North Gando, with a population far greater than the northern bank of the Yalu River, which corresponds mainly with Yanji county and Helong county. On the northern bank of the Yalu River, in the 1910s, Korean immigrants were mainly concentrated in the middle and upper reaches of the Yalu River and Hunjiang valley. In the 1920s, with the development of rice farming, settlement of Ko-rean immigrants gradually expanded to the counties which lay in the valleys of Jilin province and the north-western Fengtian province. Rice farming was the most important cultural element working in the process of Korean immigration during this period. In order to grow rice, Korean immigrants decided to settle down mainly in the low-lying areas including river basins. The development of rice cultivation further promoted the migration and settlement of Korean immigrants and changed the traditional agricultural landscape, which had been dominated by the dry farmlands. As Korean immigrants interacted more closely with lo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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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산산·류제헌

1. 서론

19세기 중반 이후 한반도에서 조선왕조의 정치적

혼란과 자연 재해에 따른 기근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

들이 중국 동북지방으로 대규모로 이주를 하였다. 19

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조선인의 월경과 이

주 과정은 세계 이민사 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

며 이러한 이민의 시기는 크기 다음과 같이 세 개의

시기로 구분 된다: ① 1860~1910년 ② 1910~1931

년 ③ 1931~1945년. 첫 번째 시기, 즉 1860년부터

1910년까지는 청나라의 “移民實邊(이민실변)”정책

이 실시되는 상황에서 한반도 북부의 수해와 가뭄으

로 인한 경제적 곤란을 피하려는 조선인들이 중국 동

북지방으로의 자발적인 이주가 실행하였다. 두 번째

시기, 즉 1910년 한일합방부터 1931년 9.18사변까

지는 일제의 침략이 심화됨에 따라 자발적인 농민 이

주자와 더불어 항일운동 인사들이 집단으로 대규모

이주하는 경우가 급속히 증가하였다. 세 번째 시기,

1931년 9.18 사변 이후부터 1945년 일본제국의 멸망

까지는 주로 일제의 이민정책에 의거하여 강제적 이

민이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세 개의 시기 가운데 특히 두 번째 시기

(1910~1931년)는 자유의사에 의한 이민으로 그 규모

와 분포 범위에 있어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었다.1) 또한 이 시기의 이민 활동은 오늘날과 같은 중

국 동북지방의 조선족 인구의 분포 패턴과 사회·문

화가 형성되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므로 현재 중국 동

북 지방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인구분포, 사회, 문화

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1910~

1931년 조선인 이민의 규모와 과정, 그리고 이러한

이민에 따른 인구 분포를 조금 더 면밀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분석에서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질문은 “자연환경이 거주에 대한 일정한 한계를 규정

하고 일정한 조건을 제공하는 가운데 조선인들은 어

떠한 환경을 선호하고 선택하였는가? 이러한 선택에

영향을 준 문화적 요인은 무엇이었는가?”이다. 그런

데 조선인이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주한 경로를 보면

그 하나는 두만강을 건너 두만강 북안, 즉 북간도(현

재의 연변조선족자치주)로 이동하는 것이었으며 또

다른 하나는 압록강을 건너 압록강 북안, 즉 서간도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양 갈래의 조선인 이주 과

정을 압록강 북안과 두만강 북안의 인구 규모와 분포

의 측면에서 상호 비교하는 것은 조선인 이민의 과정

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는데 일정한 기여를 할

것이다.

1910~1931년 조선인 이민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

구를 종합해 보면 통사적 연구물이 대부분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현규환(玄圭煥)이 편찬한 『조선유민

사(韓國流移民史)』(1967), 중국 조선족략사편찬조

(朝鮮族簡史編寫組)가편찬한 『조선족간사(朝鮮族

簡史)』(1986), 그리고『중국조선족역사연구(中國朝

鮮族歷史研究)』[박창욱(朴昌昱), 1995], 『중국조

선족이민사(中國朝鮮族移民史)』 [손춘일(孫春日),

2009)], 『중국조선족통사(中國朝鮮族通史)』 [김춘선

(金春善), 2009] 등으로 조선인 이민에 대한 역사적

자료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시기에

대한 연구는 이미 1970년대 이래 개설적인 연구가 진

행되어 왔으며, 80년대 이후에 들어서면서 사회사 방

면의 연구가 성장함으로써 이에 관한 연구가 더욱 활

성화되었다. 사회사에 관한 연구들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내용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① 조선인 이

민정책과 이민사회의 형성 과정 ② 재만 한인들의 경

제 상황과 생활실태 ③ 민족운동과 민족교육 ④ 조선

residents including Han nation in the rice cultivation, the culture that they had carried over from the Korean peninsula was further transferred and transplanted on the northen banks of the Tumen and Yalu Rivers and even beyond them.

Key Words : North Gando, Northern bank of the Tumen River, Northern bank of the Yalu River, West Gando, Korean immigrants, Population distribution, Rice far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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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931년 두만강 북안과 압록강 북안 조선인 이민과 인구 분포

인의 이민 활동에 따른 벼농사의 발전 등내용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박영석(1979; 1981)은 재

만(在滿) 한인 사회의 형성과정과 실태를 분석하였으

며 일제의 한인에 대한 이민 정책과 중국당국의 한인

에 대한 이민 정책을 연구하였다. 오세창(1970)은 이

른바 만주(滿洲)의 특수성과 한·중·일 삼국 국제관

계, 그리고 이에 따른 재만 한인의 지위와 생활실태,

그리고 중국당국의 조선인 이민에 대한 정책을 분석

하였다. 1910~1920년대 동북지방 조선인 이민의 사

회·경제 상황에 대해서는 홍종필(1992; 1993)의 연

구가 있다. 이 연구는 ‘만주 사변’ 이전의 재만(在滿)

조선인에 의한 논 개간 상황을 고찰하고 조선인 이민

사회의 소작관계(小作關係)와 금융기관(金融機關)

및 생활상태(生活狀態) 등 불안정한 농사 경영의 원

인을 분석하였다. 장려매(张丽梅)(2011)는 중화민국

시기 중국 동북지방의 조선인 이민의 분포상황, 직업

구성, 귀화입적상황, 교육상황 등 다방면을 통해서 조

선인 이민의 생활실태를 탐색하였다. 최재헌·김숙진

(2016)은 국내외 자료를 기초로 ArcGis를 이용하여

중국 동북3성에 분포하고 있는 중국 조선족의 정착

과정의 특색, 시기별 인구분포의 특징과 이주패턴 그

리고 조선족 사회의 문제점을 공간적 시각에서 고찰

하였으며 조선족 이민에 관한 연구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였다. 또한 이 시기의 교육은 항일운동의 일환

으로서 민족교육의 형태로 진행되었으며 조선인 교

육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천경화(1986)는 1915

년 이후 만주사변 이전을 중심으로 재만 한인의 이

주 시기 및 동기, 그리고 이주민의 분포상황과 생활실

태를 분석하고 재만 한인에 대한 민족교육의 실태와

학교의 설립 분포 상황을 탐색하였다. 박주신(1988;

2000)은 1920년대 민족교육기관의 하나였던 종교계

사립학교의 설립과 교육 활동을 고찰하였다. 특히 벼

농사는 조선인 이민사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이에 대

한 연구는 『近代 滿洲 벼농사 발달과 移住 朝鮮人』

(김영, 2004년)이 대표적이다. 이는 봉천성(현재의 요

녕성)에서 조선인 벼농사의 발달 과정과 조선인 사회

의 형성 과정을 분석하고 벼농사의 발달은 조선인 사

회의 형성과 발달을 촉진시켰다고 주장하였다.

이상의 연구내용을 종합해 보면 지금까지 조선인

이민에 관한 연구가 주로 역사학과 민족학과 같은 학

문에 집중되어 있으며 지리학 방면의 연구가 상대적

으로 적고 종합적 연구 방법론의 개발이 미진하다. 특

히 사회사에 관한 연구물은 조선인 이민의 역사적 고

찰에 중점을 두고 있는 까닭에 이주 과정에 작용하는

자연적 요소와 문화적 요소, 또는 환경과 인간의 상호

관계에 대한 분석이 거의 시도되고 있지 않다. 상이한

학문 분야의 시각과 연구 내용을 하나로 종합하는 체

계적인 연구가 부족하고 연구 자료의 미비로 말미암

아 심층적인 연구가 미진하다. 게다가 연구 지역은 주

로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 밖

의 지역에 있어서 조선인 이민의 이주와 정착 과정

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하고 있다. 본 연구는 이러

한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1910~

1931년 두만강 북안과 압록강 북안을 중심으로 조선

인 이민에 따른 인구 분포 양상을 지도화(mapping)

를 통하여 분석하고자 한다. 그리고 본 연구는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이와 같은 조선인 이주 과정에 작용한

다양한 환경적 요인과 문화적 요인을 탐색함으로써

1931년 이후는 물론이고 중국 동북지방 조선인 이민

에 따른 인구분포양상을 이해하는 기초를 구축하고

자 한다.

본 연구에서 이용하는 조선인 인구 자료는 일본학

자 牛丸潤亮과 村田懋麿이 공동으로 편찬한 『최근

간도사정(最近間島事情)』(1927)에 실려 있는 조선인

인구에 관한 통계자료이다. 이 자료는 다이쇼 5년(大

正五年)(1916년)과 다이쇼 13년(大正十三年)(1924

년) 현재의 동북 3성, 즉 길림성, 봉천성, 흑룡강성 소

속 각 현(縣)에 이주한 조선인 인구수에 대한 조사 자

료이다. 그 당시 정치·사회적 제약으로 인하여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주한 조선인 인구에 관한 조사 자료

는 많지 않으며 더구나 구체적인 조사 자료는 거의 없

는 상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간도사정(最近

間島事情)』(1927)은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주한 조선

인의 인구수와 호수를 현(縣)별로 조사한 자료를 포

함하고 있다. 이는 비록 어느 정도 오차가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조선인 인구

통계 자료라고 추정된다. 본 연구는 1916년과 1924

년의 조선인 인구 자료를 GIS 분석을 통하여 인구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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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산산·류제헌

포와 거주지 규모를 유형화하고 1910~1931년 두만

강 북안과 압록강 북안의 조선인 거주 인구와 분포 상

황을 상호 비교해 보고자한다.

참고로 앞으로 제시하는 본 연구의 분석 결과를 이

해하는데 필요한 행정구역의 변천 상황을 시기별 변

화와 함께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1910~1931년

현재 중국 동북지방은 북양민국정부(北洋國民政府)

가 통치하고 있었다. 청나라의 행정구획은 성(省), 부

(府), 현(縣) 3급제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중화민국(中

華民國)은 1913년 1월 『획일현행각성지방행정관청

조직령(划一现行各省地方行政官厅组织令)』, 『획일

현행각도지방행정관청조직령(划一现行各道地方行

政官厅组织令)』, 『획일현행각현지방행정관청조직

령(划一现行各县地方行政官厅组织令)』을 반포하

였다. 그 결과 부(府)를 폐지하고 그 대신 도(道)를 신

설하여 성(省)·도(道)·현(縣) 3급제를 실행하였다.

1914~1928년 현재 중국 동북지방은 봉천성(奉天

省), 길림성(吉林省), 흑룡강성(黒龍江省) 3성과 열

하특별구(熱河特别區)로 구분되어 있었다(그림 1).

봉천성(奉天省)은 료심도(辽沈道), 동변도(東边道),

조창도(洮昌道) 3도, 길림성은 길장도(吉長道), 빈강

도(滨江道), 연길도(延吉道), 依兰道 4도, 흑룡강성

은 흑하도(黒河道), 용강도(龍江道), 수란도(绥兰道),

후룬도(呼倫道) 4도로 구분되어 있었다. 1929년 봉천

성(奉天省)은 요녕성(辽宁省)으로 개명되어 이때부

터 1931년까지 동북지방은 요녕성(辽宁省), 길림성

(吉林省), 흑룡강성(黒龍江省) 3성과 열하특별구(熱

河特別區)로 구분되어 있었다.

또한 간도(間島)라는 명칭은 원래 조선 간민(恳

民)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의 하중도(河中島)를 가리

키는 것이었다.2) 그 후 간도(間島)는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 이북의 조선인 거주 지역을 일컫는 지명으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간도라는 명칭이 가리키

는 지리적 범위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오늘날 간도는 현재의 연변조선족자치주(약칭: 연변)

에 해당된다는 견해가 우세한 가운데 역사적으로 그

이상의 범위를 지칭한다는 주장이 또한 제기되어 있

다. 과거에는 간도의 범위를 현재의 연변보다 더 넓게

생각하는 입장에서 두만강 이북, 즉 현재의 연변조선

족자치주 지역을 북간도(또는 동간도), 그리고 압록

강 이북을 서간도라고 지칭하기도 하였다.3) 또한 북

간도라는 명칭은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도 송화강(松

그림 1. 1910~1931년 동북지방 행정구역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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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931년 두만강 북안과 압록강 북안 조선인 이민과 인구 분포

花江) 이동, 즉 연길현(延吉縣), 왕청현(汪清縣), 화

룡현(和龍縣), 훈춘현(琿春縣) 등을 국한하여 통칭하

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본 연구는 ‘과거의 지

리’를 포함하는 역사지리에 관한 연구이므로 간도의

범위가 현재의 연변조선족자치주보다 더 넓다는 견

해를 수용하는 입장에서 두만강 북안을 북간도, 그리

고 압록강 북안을 서간도라고 지칭하는 과거의 관행

을 따르고자 한다.

2. 1910~1931년 두만강 북안

조선인 이민과 인구 분포

1880년대 청(淸)이 “이민실변(移民實邊)” 정책을

실시하면서 조선인들은 두만강 북안, 즉 북간도로 이

주하고 정착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 이

후 조선인 이민들은 두만강 북안으로 대거 이주하였

다. 그 이유는 두만강 북안은 동북지방의 서쪽에 있

는 관내(關內)4) 지역으로부터 거리가 멀고 접근하는

교통수단이 마땅치 않은 결과 중국인 개척민이 상대

적으로 적었으므로 조선인이 이주할 여지가 남아 있

었기 때문이다. 지리적 위치상 북간도는 조선의 변

방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두만강 북안으로 이주하

고자 하는 조선인에게 접근이 상대적으로 용이하였

다. 또한 1909년 9월 일제는 청과 『간도협약(間島協

約)』5)을 체결하여 두만강 북안으로 이주한 조선인의

토지소유권을 일정한 정도 인정하도록 하였다. 토지

소유권은 두만강 북안으로 이주한 가난한 조선인 농

민들에게 최소한의 생계 보장을 제공하였다. 그 결과

1912년부터 두만강 북안의 조선인 이민은 계속 증가

하는 추세를 보였다(표 1). 표 1과 같이, 1912~1929

년 인구 규모면에서 조선인 이민은 중국인 이민을 훨

씬 능가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조선인은 두만강 북안,

즉 북간도 개척민의 주체가 되었다. 1916년과 1924

년 동북지방 조선인 이민 인구수를 보면 두만강 북안

의 조선인 이민 인구수는 압록강 북안을 비롯한 다른

지역보다 훨씬 많았다(그림 2). 1930년까지 동북지방

에 있는 조선인 인구는 총 607,117명이며 두만강 북

안의 조선인 인구수는 395,874명으로 동북지방 조선

인 총인구의 65% 이상을 차지하였다[재만일본대사

관(在满日本大使館), 1934]. 또한 1916년과 1924년

사이에 조선인 이민의 인구수 증가 추이를 보면 두만

강 북안의 조선인 이민 인구수는 더 빠른 속도로 증가

하고 있었다. 그 당시 두만강 북안 4개 현(縣) 중에서

조선인 인구수가 가장 많았던 곳은 연길현(延吉縣)

표 1. 1910~1920년대 두만강 북안 조선인 이민과 중국인 이민

연도 조선인 인구수(명) 중국인 인구수(명) 조선인 비율(%)

1912년 163,000 49,000 76.88

1916년 203,426 60,896 76.96

1918년 253,961 72,602 77.76

1921년 307,806 73,746 80.67

1922년 313,806 70,698 81.61

1923년 313,011 77,709 80.11

1924년 329,391 82,730 79.92

1925년 346,194 82,472 80.76

1926년 356,016 86,349 80.48

1927년 368,817 94,960 79.52

1928년 382,930 100,165 79.26

1929년 381,561 116,666 76.58

출처: 牛丸潤亮, 村田懋麿, 1927, 最近間島事情, 朝鮮及朝鮮人社出版部, 若草町,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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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산산·류제헌

이며 화룡현(和龍縣)은 그 다음으로 많았다. 1916년

과 1924년 통계 자료를 비교해 보면 1916년 연길현

(延吉縣)은 조선인 81,338명에 불과하였지만 1924년

156,026명으로 급증하였다(표 2, 3).

지리적 위치를 보면 연길현(延吉縣)과 화룡현(和

龍縣)은 한반도 북부 함경북도와 두만강을 사이에 두

고 마주 보고 있으며 특히 화룡현(和龍縣) 남부는 국

경에서 단지 1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1926년을 기

준으로 북간도 조선인 이민의 출신지는 함경북도가

1위, 그리고 함경남도가 2위를 차지하였다(김정주,

1971). 함경북도와 함경남도에서 이주해 온 조선인

들은 주로 밭농사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화룡현(和龍

縣)의 산지, 구릉, 하곡 평원에 정착하였다. 연길현

(延吉縣) 경내에 있는 하얼파통하(哈爾巴通河), 즉

현재의 부르하통하(布尔哈通河), 그리고 해란강(海

蘭江) 유역의 평원은 토지가 비옥하여 벼농사에 유

리하였다. 1890년 두만강 북안 중성외자(鐘城崴子)

[현 용정시(龍井市) 경내]에서 벼농사 시험 재배하

기 시작부터 1900년 용정촌(龍井村)이동 해란강(海

蘭江)유역의 서전(瑞甸)평원에서도 벼농사 시험 재

배를 시작하였다. 그 이후 얼파통하(哈爾巴通河) 하

류지여와 가야하(嘎呀河) 하류지역으로 이어서 훈춘

현 판석향(板石鄉)으로까지 확대 되었다. 1905년 판

석향(板石鄉), 말적달향(馬滴達鄉), 밀강향(密江鄉)

등 지역에서 수전(水田)면적은 12.6경(垧)6)에 달했다

[손춘일(孙春日), 2009]. 수전(水田)를 개간하면서 수

립관개공사도 시작하였다. 1906년 6월 연길현(延吉

縣) 경내 지신향(智新鄉)의 조선인 농민 14명들 함께

1,308m인 용수로를 파고 강물을 끌어 33경(垧)인 논

에 물을 대었다. 이것이 연변지역의 처음인 관개공사

이었다. 게다가 1915년 코타다이(小田代) 5호라는 벼

품종이 수원모범농장으로부터 간도 용정촌(龍井村)

에 도입되면서 벼농사가 두만강, 해란강(海蘭江) 유

역에서 성행하기 시작하였다.7) 특히 1910년 중반 이

후 쌀값이 오르자 각 지방 정부는 벼농사를 권장하였

다. 1919년 5월 연길현(延吉縣)은 벼농사를 권장하

려는 목적으로 중국인과 조선인 모두에게 적용되는

『수정용연길현벼농사임시규칙(修正延吉縣播種水

稻暫行規則)』을 발표하였다. 이 규칙 제2조는 벼농

사가 적합한 모든 토지는 사유지와 소작지를 불문하

고 벼농사를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였다(김영, 2004).

결국 1931년 까지 두만강북안 4현에 수전(水田)면적

은 총 12,688.2 정(町)이었으며 그중 연길현(延吉縣)

8,135.5정(町), 황청현(汪清縣) 2,051.4정(町), 훈촌

현(琿春縣) 1,458.2정(町), 황룡현(和龍縣) 1,043.1

정(町)이었다(그림 5).

1910~1920년대 연길현(延吉縣)은 두만강북안, 즉

북간도(北間島)에서 조선인 인구수가 가장 많았을 뿐

만 아니라 동북지방 전체에 있어서도 가장 규모가 큰

조선인 주거지였다(그림 2). 그 당시 연길현(延吉縣)

표 2. 1916년 두만강 북안 조선인 인구수

지역 연길현(延吉縣) 훈춘현(琿春縣) 왕청현(汪清縣) 화룡현(和龍縣)

현재 지역 연길시(延吉市) 훈촌시(琿春市) 왕청현(汪清縣) 화룡시(和龍市)

인구수(명) 81,338 25,965 22,782 79,486

출처: 牛丸潤亮, 村田懋麿, 1927, 最近間島事情, 朝鮮及朝鮮人社出版部, 若草町, 214.

표 3. 1924년 두만강 북안 조선인 인구수

당시 명칭 연길현(延吉縣) 훈춘현(琿春縣) 왕청현(汪清縣) 화룡현(和龍縣)

현재 지역 연길시(延吉市) 훈촌시(琿春市) 왕청현(汪清縣) 화룡시(和龍市)

인구수(명) 156,029 35,201 26,709 111,452

출처: 牛丸潤亮, 村田懋麿, 1927, 最近間島事情, 朝鮮及朝鮮人社出版部, 若草町, 214.

- 567 -

1910~1931년 두만강 북안과 압록강 북안 조선인 이민과 인구 분포

경내의 용정촌(龍井村)에는 간도일본총영사관(間島

日本總領事館), 조선은행(朝鮮銀行), 간도자혜병원

(間島慈惠醫院), 간도중앙학교(間島中央學校), 연

길지방심판청분청(延吉地方審判廳分廳), 그리고 기

타 회사, 교회, 학교 등 20여개 행정기관이 연속적으

로 설립되었다. 또한 용정촌(龍井村)은 그 당시 애국

인사들이 애국운동을 전개하던 중심지이었다. 이러

한 용정촌(龍井村)에는 애국교육을 위하여 중국 조선

족 최초의 근대 학교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이 1906

년 설립되었다. 이와 같이 연길현(延吉縣)을 중심으

로 하는 두만강 북안은 조선인 인구가 가장 집중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 이민의 정치·문화 중심

지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3. 1910~1931년 압록강 북안

조선인 이민과 인구 분포

1875년 청(清) 정부는 『성경동변황무지개간규칙

(盛京東邊間曠地帶開墾條例)』를 반포하여 240년간

지속된 동북지방에 대한 봉금(封禁) 정책을 정식으로

해제하였다. 이때부터 산동성(山東省), 하북성(河北

省), 하남성(河南省) 등 이른바 관내(關內) 중국인들

이 압록강 북안의 봉천성(奉天省)으로 대거 이주하였

다. 청 정부는 관내(關內)에서 이주해 오는 중국인들

에게 토지소유권을 부여하였다. 특히 한족 이민들은

중국 북부의 전통적인 밭 경작 기술을 가지고 새로이

정착한 동북지방에서 농업 기반을 구축하였다. 1910

년 신해혁명이 발발한 즈음에는 압록강 북안에 위치

그림 2. 1916년과 1924년 두만강 북안과 압록강 북안 조선인 인구수

- 568 -

최산산·류제헌

한 봉천성(奉天省)은 가경지의 80~90%가량이 이미

개간되었다[동북문사편찬위원회(東北文史編撰委員

會), 1983]. 그 나머지 미개간지는 밭농사를 짓기에

어려운 황무지나 습지뿐이었으므로 일제식민지 치하

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다가 이주해 오는 조선인들에

게 수전(水田) 개간의 대상지가 되었다.

『新唐書(신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동북지방의 벼

농사는 최초에 발해국(渤海国)8)에서 시작되었으며

926년 요나라에 망한 후에 벼농사는 동북지방에서

소멸되었다. 1642년에 와서야 성경(盛京)지역 일대,

즉 현재 심양시(瀋陽市)에서 벼농사를 다시 출현하였

다. 『청고종실록(清高宗實錄)』(1682)에 따르면 이 시

기에는 수전(水田) 규모는 크지 않았으며 길림성(吉

林省)과 흑룡강성(黑龍江省)은 아직은 벼농사가 실

행되지 않고 있었다. 청나라가 봉금(封禁) 정책을 실

시한 이후에는 동북지방 벼농사에 관한 기록이 문헌

에서 안 보이다가 19시기 중엽 이후 조선인의 이주에

따라 벼농사가 다시 동북지방에서 다시 출현하였다.

조선인들은 한반도에서 쌓은 벼농사 경험을 토대로

이러한 황무지와 습지에서 벼농사를 실험하며 새로

운 수전을 개간하기 시작하였다. 1875년 압록강 상류

에 이주한 조선인이 혼강(渾江) 유역의 통화현(通化

縣) 상전자(上甸子)에서 처음으로 벼의 시험 재배에

성공하였다. 그 후 조선인들은 동북지방 각지에 부설

된 철로를 이용하여 압록강 북안 지역으로 수전 개간

의 후보지를 찾아 대거 이주하였다. 이와 같이 벼농사

는 그 인접 지역인 통화현(通化縣), 집안현(輯安縣),

환인현(桓仁縣)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는 점차 장백

산맥을 넘어 혼하(渾河)(현재의 요녕성 경내 하류) 상

류의 홍경부(興京府) 부근, 그리고 무순현(撫順縣),

유하현(柳河縣), 해룡현(海龍縣)으로까지 확대되었

다. 벼농사를 짓는 조선인들이 봉천성(奉天省)의 압

록강 북안, 즉 서간도로 최초로 이주한 다음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벼농사에 계속 성공함에 따라 조선인

의 이주 범위는 더욱 내륙으로 확대되어 무송현(抚松

縣), 유하현(柳河縣), 해룡현(海龍縣), 화순현(樺甸

縣) 등지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들은 한족들이 밭농사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버려둔 하천 유역의 황무지나 저습지에서 벼농사를

개척하는데 성공하였다. 수전의 개간 과정에서 조선

인들은 어느 한 곳에서 벼의 시험 재배가 성공하면 이

러한 사실을 친척이나 동향인에게 신속하게 전달하

였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듣고 곧 바로 그 곳에 몰려

든 조선인들은 논농사에 필요한 인력을 제공하고 조

선인 고유의 상부상조(相扶相助)의 전통을 지키며 조

선인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그 결과 1916년 현재 압록강 북안에서 조선인 인구

10,000명을 초과하는 대형 거주지가 통화현(通化縣),

임강현(臨江縣), 환인현(桓仁縣), 집안현(輯安縣)으

로 총 4개가 출현하였다(표 4). 이들 대형 거주지는

주로 압록강 중·상류 유역, 특히 혼강(渾江) 유역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그림 3). 혼강(渾江)은 압록강

지류로 수원이 풍부하고 그 연안을 따라 발달한 충적

지대는 토양이 비옥하며 강수량 풍부하므로 벼농사

에 유리한 자연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압록강 북안

으로 이주하는 조선인들은 이러한 자연 조건을 갖춘

압록강 중·상류 유역에 집중적으로 정착하여 수전을

개간하였다.

조선인 인구 1,000~10,000명 규모의 중형 거주지

는 총 8개가 있었으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관

전현(寛甸縣)과 장백현(長白縣)이었다(표 5). 조선인

인구 100~1,000명 규모의 소형 거주지는 총 9개가

있었으며 이들은 주로 봉천성(奉天省) 중부에 위치하

고 있었다(표 6). 1914년 봉천성(奉天省) 당국은 수

리국(水利局)을 설립하고 이를 통하여 벼농사를 적극

적으로 발전시키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벼

농사의 개척 방향이 내륙으로 향함에 따라 조선인 이

민들은 압록강 연안으로부터 내륙으로 이주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봉천성(奉天省) 내륙에 있는 심양현

(沈陽縣)과 무순현(撫順縣)에 소형 조선인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1910년 중반 이후 벼농사의 수익성을 알게 되면서

각 지역 관헌은 벼농사를 권장하기 위해 관한 법령

과 정책을 반포하였다. 1918년 봉천성(奉天省)에서

는 『화민벼농사작업에대한장려방칙(提倡華民耕種

水稻方法)』를 반포하였다.9) 또한 동년 6월 29일 길림

성(吉林省)은 수전 개간을 장려하고 권장하는 『길립

성벼농사자업장려장정(吉林省獎勸耕種水稻章程)』

- 569 -

1910~1931년 두만강 북안과 압록강 북안 조선인 이민과 인구 분포

을 제정하였다. 이와 같이 벼농사를 권장하는 분위기

속에서 각지의 조선인 이민은 계속 증가하였다. 특히

1918~1919년 조선 남부 수전 지대에서 발생한 흉년

으로 인해 발생한 유민(流民)들은 새로운 생계 수단

을 찾아 압록강을 건너 이주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애국지사들이 일제의 정치적 탄압을 피해

피신처를 찾아 압록강 북안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증

가하였다.

그 결과 압록강 북안 원래의 대형 거주지는 인구수

가 계속 증가하는 가운데 1924년에는 추가로 새로운

조선인 거주지가 출현하였다(그림 4). 1924년까지 조

선인 인구 10,000명 이상 50,000명 이하의 대형 거주

지가 총 7개로 증가하였다(표 7). 대형 거주지 중에서

원래의 임강현(临江縣), 통화현(通化縣), 화인현(桓

仁縣), 집안현(輯安縣) 4개를 제외하고 장백현(長白

縣), 관전현(寛甸縣), 흥경현(興京縣) 3개가 추가되

었던 것이다. 이러한 대형 거주지들은 모두 여전히 압

록강(鴨綠江) 중·상류 유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당시 조선인 거주지 중에서 집안현(集安縣)은 가장

규모가 컸으며 흥경현(興京縣)은 그 다음으로 크다.

표 4. 1916년 압록강 북안 조선인 10,000명 이상 거주지

당시 명칭 통화현(通化縣) 임강현(臨江縣) 환인현(桓仁縣) 집안현(輯安縣)

현재 명칭 통화시(通化市) 임강시(臨江市)환인만족자치현

(桓仁滿族自治縣)집안시(輯安市)

인구수(명) 10,275 10,679 13,480 22,533

출처: 牛丸潤亮, 村田懋麿, 1927, 最近間島事情,朝鮮及朝鮮人社出版部, 若草町, 209-210.

표 5. 1916년 압록강 북안 조선인 1,000~10,000명 거주지

당시 명칭 현재 명칭 인구수(명)

화전현

(樺甸縣)

화전시

(樺甸市)1,398

흥경현

(興京縣)

신빈만족자치현

(新賓滿族自治縣)1,502

해룡현

(海龍縣)

매하구시

(梅河口市)1,507

무송현

(撫松縣)

무송현

(撫松縣)2,220

안동현

(安東縣)

단동시

(丹東市)4,861

류하현

(柳河縣)류하현(柳河縣) 5,356

장백현

(長白縣)

장백조선족자치주

(長白朝鮮族自縣)9,770

관전현

(寛甸縣)

관전만족자치현

(寛甸滿族自治縣)9,838

출처: 牛丸潤亮, 村田懋麿, 1927, 最近間島事情,朝鮮及

朝鮮人社出版部, 若草町, 209.

표 6. 1916년 압록강 북안 조선인 1,000명 이하 거주지

당시명칭 현재 명칭 인구수(명)

봉황현

(鳳城縣)

봉성만족자치현

(鳳城滿族自治縣)580

무순현

(撫順縣)

부순시

(撫順市)377

시양현

(瀋陽縣)

심양시

(瀋陽市)179

녕안현

(寧安縣)

녕안시

(寧安市)169

회덕현

(懷德縣)

궁주령시

(公主嶺市)158

서풍현

(西豐縣)

서풍현

(西豐縣)123

장하현

(莊和縣)

장하시

(莊河市)120

본계현

(本溪縣)

본계시

(本溪市)118

영구현

(營口縣)

영구시

(營口市)118

출처: 牛丸潤亮, 村田懋麿, 1927, 最近間島事情,朝鮮及

朝鮮人社出版部, 若草町, 209-210.

- 570 -

최산산·류제헌

흥경현(興京縣)은 1926년 인구수가 1,502명에 불과

하였지만 1924년에는 23,457명으로 15배 증가되었

다. 흥경현(興京縣)은 지리적 위치상 벼농사의 발원

지인 통화현(通化县)과 인접하였으며 경내 하천이 총

1,750개이었으므로 수원이 풍부하였다. 지형 상으로

는 낮은 산간지역으로 넓은 면적으로 천변(川邊) 간

척지가 있었으므로 벼농사에 유리한 자연환경을 제

공하였다. 1931년까지 흥경현(興京縣) 경내 수전 면

적은 총 4,010.5정(町)에 달했다.

또한 벼농사의 발전에 따라 압록강 북안의 조선인

거주지의 범위는 길림성(吉林省)중부에 있는 현(縣)

과 봉천성(奉天省) 서북부로 확대되었다. 조선인 인

구 1,000~10,000명의 중형 거주지는 총 21개이었

으며 류하현(柳河縣)은 중규모 현 거주지 가운데 가

장 큰 거주지이었다. 조선인들은 계속 북쪽으로 이동

하면서 길림성(吉林省) 북부 지역과 봉천성(奉天省)

서북부 지역에서 새로운 소형 거주지를 출현하였다.

1924년 조선인 인구 100명 이상 1,000명 이하의 소

형 거주지는 총 17개였다(표 8, 9). 여기에는 봉천성

(奉天省) 서북부의 요양현(遼陽縣), 강평현(康平縣),

장무현(彰武縣), 법고현(法庫縣), 그리고 길림성 북

부의 유수현(榆树县), 장춘현(長春縣), 서란현(舒蘭

縣)이 포함되어 있다. 이에 따라 조선인들은 수전(水

田)의 개척 방향에 따라 압록강 연안 지역부터 북쪽

방향으로 길림성(吉林省)과 봉청성(奉天省) 중서부

내륙 지역으로까지 이주하는 경향을 보였다(그림 5).

압록강 북안으로 진입한 조선인 이민들은 벼농사

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주로 중국인 지주와 토지조차

제약을 맺고 소작인으로서 토지를 경작하였다. 벼농

사를 지으려고 수로를 파서 물을 끌어들일 때 중국인

그림 3. 1916년 두만강 북안과 압록강 북안의 조선인 거주지 분포

- 571 -

1910~1931년 두만강 북안과 압록강 북안 조선인 이민과 인구 분포

표 7. 1924년 압록강 북안 조선인 10,000명 이상 거주지

당시 명칭임강현

(臨江縣)

장백현

(長白縣)

통화현

(通化縣)

관전현

(寛甸縣)

환인현

(桓仁縣)

흥경현

(興京縣)

집안현

(輯安縣)

현재

명칭

임강현

(臨江縣)

장백조선족자치현

(長白朝鮮族自治縣)

통화현

(通化市)

관전현

(寛甸滿族自治縣)

환인민족자치현

(桓仁滿族自治縣)

신빈만족자치현

(新賓滿族自治縣)

집안시

(輯安市)

인구수 (명) 10,085 12,450 12,999 14,373 19,018 23,457 26,570

출처: 牛丸潤亮, 村田懋麿, 1927, 最近間島事情,朝鮮及朝鮮人社出版部, 若草町, 165-167.

표 8. 1924년 압록강 북안 조선인 1,000~10,000명 거주지

당시 명칭 현재 명칭 인구수(명) 당시 명칭 현재 명칭 인구수(명)

이통현

(伊通縣)

이통만족자치현

(伊通滿族自治縣)1,007

길림현

(吉林縣)

길림시

(吉林市)3,355

신민현

(新民縣)

신민현

(新民縣)1,373

반석현

(磐石縣)

반석시

(磐石市)3,819

해룡현

(海龍縣)

매하구시

(梅河口市)1,475

안녕현

(安寧縣)

안녕시

(安寧市)4,500

돈화현

(敦化縣)

돈화시

(敦化市)1,779

화전현

(樺甸縣)

화전시

(樺甸市)4,761

서풍현

(西豐縣)

서풍현

(西豐縣)2,001

몽강현

(濛江縣)

정우현

(靖宇縣)5,061

봉성현

(鳳城縣)

봉성만족자치현

(鳳城滿族自治縣)2,621

심야현

(瀋陽縣)

심양시

(瀋陽市)5,597

무송현

(撫松縣)

무송현

(撫松縣)2,934

안도현

(安圖縣)

안도현

(安圖縣)5,777

맥목현

(额穆县)

교하시

(蛟河市)3,027

동녕현

(東寧縣)

동녕현

(東寧縣)5,800

쌍양현

(雙陽縣)

쌍양현

(雙陽縣)3,126

안동현

(安東縣)

안동현

(丹東縣)7,699

개원현

(開原縣)

개원시

(開原市)3,155

류하현

(柳河縣)

류하현

(柳河縣)9,106

무순현

(撫順縣)

무순시

(撫順市)3,167

출처: 牛丸潤亮, 村田懋麿, 1927, 最近間島事情,朝鮮及朝鮮人社出版部, 若草町, 165-167.

표 9. 1924년 압록강 북안 조선인 1,000명 이하 거주지

당시 명칭 현재 명칭 인구수(명) 당시 명칭 현재 명칭 인구수(명)

강평현

(康平縣)

강평현

(康平縣)132

서안현

(西安縣)

요원현

(遼源縣)387

장우현

(彰武縣)

장우현

(彰武縣)136

휘남현

(輝南縣)

휘남현

(輝南縣)394

- 572 -

최산산·류제헌

쌍성현

(雙城縣)

쌍우현

(雙城縣)150

동풍현

(東風縣)

동풍현

(東風縣)551

수원현

(绥遠县)

무원현

(撫遠縣)150

분계현

(本溪縣)

분계현

(本溪縣)621

장하현

(莊河縣)

장하현

(莊河縣)150

장춘현

(長春縣)

장춘시

(長春市)654

회덕현

(懷德縣)

공주령시

(公主嶺市)166

서란현

(舒蘭縣)

서란시

(舒蘭市)769

법고현

(法庫縣)

법고현

(法庫縣)172

영구현

(營口縣)

영구시

(營口市)890

요양현

(遼陽縣)

요양현

(遼陽縣)243

철령현

(鐵嶺縣)

철령시

(鐵嶺市)913

유수현

(榆樹縣)

유수현

(榆樹縣)300

출처: 牛丸潤亮, 村田懋麿, 1927, 最近間島事情,朝鮮及朝鮮人社出版部, 若草町, 166-170.

그림 4. 1924년 두만강 북안과 압록강 북안 조선인 거주지 분포

- 573 -

1910~1931년 두만강 북안과 압록강 북안 조선인 이민과 인구 분포

의 생존 기반인 밭농사를 망칠 우려가 있었으므로 벼

농사 개척 과정에서 양 국민 간 분쟁이 적지 않았다.

중국 당국은 이러한 분쟁의 발생을 예방하고 수전(水

田) 면적의 확대를 도모하기 위해 여러 가지 수로관

리규칙(水渠管理條例)을 반포하였다. 1923년 봉청성

(奉天省)은 『관리용수규칙(管理用水规则』을 반포하

였으며, 1929년 길림성은 『길림성정부건설청관리수

전수리임시규정(吉林省政府建設廳管理稻田水利暫

行章程』을 반포하였다. 중국인들은 수전(水田)의 수

익을 알게 되면서 수전(水田) 개간이 적극적으로 참

여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인 지주들은 주로 수전 경작

기술에 숙련된 조선인을 고용하고 황무지를 개간시

키는 동시에, 스스로 조선인의 벼농사 기술을 배워 직

접 벼농사에 종사하기도 하였다(김영, 2004). 그리하

여 동북지방의 수전 면적은 1921년 4만 8000여ha로

부터 1931년 8만1800ha로 증가하였다. 1926년 일제

의 침략 강화에 대응한 중국 정부의 조선인에 대한 규

제 정책으로 말미암아 1926~1931년까지 수전 면적

은 약간 감소하였지만 전체적으로 증가의 추이를 유

지하였다(그림 6). 1931년까지 수전 면적은 급증하였

지만 전체 농업구성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이 보잘 것

없었다. 『동북경제소총서(東北經濟小叢書)』(1947)

에 의하면 1930년 동북지방 각종 농작물의 경작 면

적 비율은 대두 31.3%, 고량 22.9%, 속 17.1%, 소맥

10.3%, 밭벼와 논벼 1.5%, 기타 10%에 달하였다.

압록강 북안의 조선인들은 굶어죽지 않을 만큼 일

정한 정도의 생계를 유지하기는 했지만 그 당시 두만

강 북안에 진입한 조선인 이민에 비해 생활수준이 현

저히 떨어졌다. 1926년 12월까지 두만강 북안에 정

착한 조선인 이민 중에서 개인 자산 10,000~50,000

원을 보유한 조선인은 총 100여 호, 그리고 개인 자

산 50,000~100,000원을 보유한 조선인은 총 15호에

그림 5. 1930년 동북지방 수전(水田)의 분포

출처: 東亞勸株式會社拾年史, 1933, 東亞勸株式會社, 330-335

- 574 -

최산산·류제헌

달하였다[손춘일(孙春日), 2009]. 동 시기 압록강 북

안에 위치한 봉천성(奉天省)에 거주하는 조선인 이민

480명에 대한 조사 결과에 의하면 개인 보유 자산이

3000~10,000원인 조선인은 총 16호, 그리고 10,000

이상인 조선인은 총 2호에 불과하였다.

두만강 북안의 조선인 이민들은 상대적으로 생활

수준이 높았으며 그 일부는 축적한 경제력으로 한

족의 토지를 구매할 수 있기까지 하였다. 1924년 현

재 두만강 북안 조선인 이민의 토지점유율은 48%에

달하였으며 1929년에는 55%로 증가하였다(이훈구,

1932). 두만강 북안에 비하면 압록강 북안의 조선인

이민들은 스스로 토지를 소유한 경우가 드물기 때문

에 전적으로 토지의 개간과 이용의 권한을 전적으로

부여받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이훈구, 1932). 1920년

대 중반에 들어오면 봉천성(奉天省)에 거주하는 조선

인은 소작 조건이 더욱 불안해지고 부담해야 하는 세

금의 종류와 분량이 더욱 증가하였다. 이러한 경제·

사회적 조건의 불안정으로 인하여 조선인 이민들은

더 나은 생계의 기회를 찾아 북쪽으로의 이주를 계속

하여 황무지가 더 많고 인구밀도가 낮은 북만(北滿)

지방, 즉 현재의 흑룡강성(黑龍江省)에까지 도달하였

다. 그들은 주로 철도 교통을 이용하여 북쪽 방향으로

이주하였으므로 거주지가 철로 연변과 목단강(牡丹

江) 유역에 집중되어 형성되었다. 1924년 통계자료에

의하면, 그 당시 흑룡강성(黑龍江省)에 거주하는 조

선인 인구는 빈강현(滨江县), 즉 현재의 하얼빈시(哈

尔滨市) 1,500명, 호림현(虎林县) 1,000명, 아성현

(阿城县) 500명, 쌍성현(双城县) 150명이었다(牛丸

潤亮, 村田懋麿, 1927).

4. 요약 및 결론

1910~1931년 조선인 이민은 주로 두만강 북안, 즉

북간도에 집중되었으며, 여기에 거주하는 조선인 압

록강 북안, 즉 서간도보다 훨씬 많은 가운데 주로 연

길현(延吉縣)과 화룡현(和龙縣)에서 집중되어 있었

다. 1920년대 압록강 북안은 주로 압록강 중·상류,

그리고 그 지류인 혼강(浑江) 유역에 위치한 임강현

(临江縣), 통화현(通化縣), 화인현(桓仁縣), 집안현

(輯安縣)에 조선인 인구가 집중되어 있었다. 1919년

3·1 운동 이후에는 압록강 북안에 벼농사가 보급됨

에 따라 조선인 거주지의 범위가 길림성(吉林省) 중

부의 현(縣)과 봉천성(奉天省) 중서부 내륙지역으로

이어지며 북쪽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두만강 북안의

조선인 이민 인구는 압록강 북안보다 더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구 규모의 측면에서 중국

인 이민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연길현(延吉縣)을 중심으로 하는 두만강 북안은 조

선인 이민의 집중적 거주지를 넘어 조선인 이민의 정

치·문화적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반면에 압록강 북

안의 조선인 이민들은 그들이 이주하기 전에 이미 한

족이 정착하여 있었으므로 이러한 한족 거주지의 틈

바구니를 찾아 정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압록

강 북안에 정착한 조선인 이민들은 “大雜居(대잡거),

小聚居(소취거)”의 형태, 즉 “다수는 한족과 섞여 살

고 오로지 소수만이 함께 모여 사는 형태”로 거주지

를 형성하였다. 또한 두만강 북안의 조선인 이민들은

대부분 토지의 소유권을 보장 받았기 때문에 생활 조

건이 압록강 북안의 조선인 이민들에 비해 우월하였

다. 조선인 이민들은 주로 경제적 이유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경작할 토지가 없으면 다시 이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므로 압록강 북안의 조선인 이민은 두만

강 북안의 경우에 비해 더 높은 유동성을 가지고 있었

다. 이러한 인구의 불안정성으로 인하여 압록강 북안

그림 6. 1921~1931년 동북지방 수전면적추이

출처: 東北經濟小叢書·農業, 1947, 東北物資調節委員,

93-95

- 575 -

1910~1931년 두만강 북안과 압록강 북안 조선인 이민과 인구 분포

에 정착한 조선인 이민 인구수는 증가 속도가 상대적

으로 느릴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 이민들은 이주 과정에서 벼농사를 주요 생

계 수단으로 하였으므로 저습지와 같이 수원의 확보

가 유리한 하천 유역을 개척지로 선호하였다. 또한 조

선인 이민들은 연속적 이동의 편리함을 추구하여 주

로 철도 연선과 그 주변에 정착하였다. 수전(水田)의

개발 과정에서 조선인들은 동북지방의 기후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새로운 볍씨를 찾아내고 벼농사 재배

기술을 적극적으로 개량하였다. 그리고 조선인의 계

속적인 이주 과정에서 개발되고 축적된 벼농사 재배

기술은 동북지방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동북

지방 수전 면적이 1913년 4000여ha에서 1921년 4만

8000여ha로 약 12배 이상, 그리고 1931년 8만 1800

ha로 20배로 증가하였다(東北物資調節委員, 1947).

이와 같은 조선인 이민 주도의 벼농사의 발전은 동북

지방에서 밭농사 위주의 전통적인 농업경관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조선인 이민들은 벼농사에 종사하

며 동북지방의 토지개척을 진일보 촉진시켰으며 동

북지방 농업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던 것이다.

1910~1931년 압록강 북안과 두만강 북안은 벼농

사에 의한 농업의 일대 변혁이 있어났으며, 이러한 변

혁의 과정에서 벼농사는 조선인 이민 활동에서 매우

중요한 문화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압록강 북

안에서 벼농사의 확대 방향은 조선인 이민의 이주 경

로의 확대 방향과 거의 일치하였다. 조선인 이민들은

원래 이주하기 이전 한반도에서 이미 터득한 벼농사

기술을 가지고 압록강 북안의 저습지와 황무지에 진

입하여 벼농사를 이식시켰다. 그들은 벼농사를 통하

여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생계를 유지하고 다른 한편

으로는 밭농사에 종사하는 한족과의 토지이용에 대

한 충돌과 갈등을 피할 수 있었다. 수전을 개간하려면

적지 않은 노동력이 집중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조

선인들은 상부상조(相扶相助)하는 민족 고유의 공동

체를 형성하며 민족의 응집력과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한족을 비롯한 중국인은 수전의 개간 과

정에서 조선인을 소작인으로 고용하는 것 이외에 조

선인으로부터 벼농사 기술을 배워 직접 벼농사를 짓

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장시간 지속되는 벼농사의 개

척과 확대의 과정에서 조선인 이민은 한족을 비롯한

중국인과의 상호 교류를 통하여 조선인 문화를 이른

바 간도, 즉 두만강 북안과 압록강 북안은 물론이고

만주, 즉 동북지방 전체로 전파시킬 수 있었다.

현재 중국 동북지방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인구분

포, 사회, 문화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기초 작

업으로서 본 연구를 진행하였다. 1910년부터 1931년

(9·18사변)까지 이민 과정에서 벼농사는 중요한 문

화 요인으로서 조선인의 이민 활동을 촉진시켰지만

그 당시 동북지방의 중·일 양국의 복잡한 관계 속에

서 정치적·사회적인 요인 또한 조선인 이민 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방면에 대한 자료의

부족과 시대적 배경의 제한으로 인하여, 본 연구는 특

정한 촌락을 사례로 하는 조선인 이주와 정착 과정에

대한 미시적이고도 구체적인 분석은 향후의 연구 과

제로 넘기고자 한다.

1) 1910년부터 1920년까지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주해 온 조

선인 이민은 총 192,540명이었다. 1920년까지 중국 동북

지방의 조선인 이민은 총 459,400명, 그리고 1931년까지

총 630,982명에 달했다[장려매(张丽梅), 2011].

2) ‘간도(間島)’라는 명칭은 1885년 조선 감계사(勘界使) 이

중하(李重夏)의 보고서 『乙丑別單』에서 처음 기록되었으

며, 그 위치는 현재의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

州) 용정시(龍井市) 광소촌(光昭村) 부근에 해당한다. 일

본제국주의 세력은 중국 동북지방에 뻗쳐오면서 ‘간도(間

島)’라는 명칭을 확대 적용하며 자신의 이익과 세력권을 유

지하려고 하였다[이화자(李花子), 2017].

3) 1907년 4월 한국통감부(조선총독부의 전신)의 조사보고

『간도시찰보고서』(間島視察報告書)에서 간도(間島)는

동·서간도로 구분되었다. 여기에서 동간도는 해란하(海瀾

河)(현재의 해란강), 하얼파통하(哈爾巴通河)[현재의 부르

하통하(布尔哈通河)], 가아하(嘎呀河) 유역이 포함되며 현

재의 연길현(延吉縣), 왕청현(汪清縣), 화룡현(和龍縣)에

해당한다. 서간도는 그 당시의 이도송화강(二道松花江) 유

역, 즉 현재의 안도현(安圖縣)를 가리킨다. 1907년 8월 용

정촌(龍井村)에 통감부파출소(統監府派出所)가 설립된 이

후 일제는 압록강 북안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원래의

동·서간도를 합쳐 ‘동간도’라고 하고 압록강 북안지역을

- 576 -

최산산·류제헌

‘서간도’ 라고 명명하였다. 1910년 일제는 『중일회의동삼

성정약(中日會議東三省正約)를 통해서 중·조·러시아 3

국 접경에 처해 있는 훈춘현(琿春縣)에 영사관(領事館)을

설립하고 동년 12월 이를 간도(間島) 영사분관(領事分管)

으로 승격시킴으로써 훈춘현(琿春縣)을 ‘간도(間島)’의 범

위에 포함시켰다. 이때부터 연길현(延吉縣), 왕청현(汪清

縣), 화룡현(和龍縣), 훈춘현(琿春縣)이 동간도 또는 북간

도라고 불리기 시작하였다(李花子, 2017). 1932년 일본 제

국은 속칭 만주(滿洲)를 불법 점령한 다음 여기에 괴뢰 국

가인 만주국(滿洲國)을 수립하고 연길현(延吉縣), 훈춘현

(琿春縣), 화룡현(和龍縣), 왕청현(汪清縣), 안도현(安圖

縣)을 관할하는 간도성(間島省)을 설치하였다. 이때 연길

현(延吉縣)은 이러한 간도성(間島省)의 성도(省都)로 지정

되었다. 이러한 간도성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

하에 들어갔으며, 현재는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

自治州)와 장백조선족자치현(長白朝鮮族自治縣)과 같은

행정구역으로 분할되어 있다.

4) 여기에는 ‘관’은 산해관(山海关)을 가리키며 산해관(山海

关) 서쪽과 가육관(嘉峪关) 동쪽 일대는 ‘관내(關內)’ 라고

부른다. 산해관(山海关)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있는 관

문으로 군사 요충지이며 중국 하북성(河北省) 진황도시(秦

皇岛市) 산해관구에 속한다. 산해관(山海关) 북서쪽으로

는 연산(燕山) 산맥, 그리고 동쪽으로는 발해(渤海)만이 있

다. 이에 반해 가육관(嘉峪关)은 만리장성 서쪽 끝에 위치

하는 관문으로 감숙성(甘肃省) 가육관(嘉峪关)시에 속한

다. 이러한 가육관(嘉峪关)은 동쪽 끝의 산해관과 더불어

만리장성을 드나드는 양대 관문으로서 알려져 있다.

5) 『간도협약(間島協約)』은 일본제국이 1905년 제2차 한일

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불법적으로 강탈한 상태에

서 1909년 9월 4일 청나라와 체결한 조약이다. 그 협약 내

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한(韓)·청(淸)의 동쪽 국경을 “백두산 정계비~석을수~

도문강(두만강)”으로 확정한다.

② 일본은 간도에 설치한 통감부 파출소 등을 조약 조인 후

2개월 내 철수한다.

③ 청(淸)은 용정촌(용정), 국자가(연길), 두도구(화룡), 백

초구(왕청현)를 개방하여 일본인의 거주와 상업 활동을 보

장한다.

④ 일본은 위 4개 지역에 영사관 및 영사관 분관을 설치한다.

⑤ 청은 도문강 이북의 간도 지역 내 한국민(韓國民) 거주

를 승인한다.

⑥ 간도 거주 한국민은 청나라의 법권(法權)에 복종하여야

한다.

⑦ 청은 간도 거주 한국민의 재산을 청국민(淸國民)과 동등

하게 보호한다.

⑧ 일본은 길회선(연길~회령 간 철도)의 부설권을 획득한다.

6) 토지 면적의 단위로서 각 지방마다 다름. 예를 들어, 동북

(東北) 지역은 ‘15무(畝)’를 ‘1垧’이라 하고, 서북(西北) 지

역은 ‘3무(畝)’ 또는 ‘5무(畝)’를 ‘1垧’이라고 함.

7) 북간도에서는 1915년까지 여러 가지 벼 품종을 도입하여

시험 재배를 하였지만 기온이 낮은 상태에서 벼 수확의 질

과 양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벼농사의 보급에 한계가 있었

다. 그 당시 멥쌀(粳米)로는 강원도산(江原道產) 종자가

있었지만 수확량이 매우 적어 점차 재배되지 않게 되었다.

1914년 이후 주로 재배된 것은 온도 섭씨 6도에서도 발아

할 수 있는 黃租早稻라는 함경도 경성(鏡城)에서 도입된

품종이었다. 그 밖에도 명칭도 잘 모르는 찰벼(糯稻)가 일

부 실험적으로 재배되었지만 그다지 성과가 좋지 않았다

(김영, 2004, 49).

8) 발해국(渤海国)은 698년에 고구려의 장수였던 대조영이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을 거느리고 동모산에 도읍하여 세

운 나라이었다. 수도는 건국 초기를 제외하고 상경 용천부

에 두고 ‘해동성국’이라 불릴 만큼 국세를 떨쳤으나 926년

요나라에 망하였다.

9) 이 규정은 각 현지사가 경내의 수전면적과 수전 적합지를

2개월 이내에 자세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고, 현(縣)

정부는 농회와 함께 벼농사의 수익성이 높다는 것을 알리

는 책자를 일반 농민에게 널리 배포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벼농사에 종사하는 일반 농민들이 토지를 방매하지

않도록 하며 지방의 신상(紳商)들에게 공적 기금을 보충할

수 있다는 혜택을 이용하여 자금을 모집하여 도전회사(稻

田公司)를 설립하도록 하고 있다(김영, 2004, 6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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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투고일 2017. 10. 3

수정일 2017. 10. 23

최종접수일 2017. 10.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