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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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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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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공동체

생 활 문 화 공 동 체 만 들 기 사 업결 과 자 료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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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간사

. 생활문화공동체 만들기 사업 소개

. 24개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전남 영광군 우평마을 - 우도농악보존회

인천 부평구 십정 1동 - 자바르떼 인천지부

경남 진주시 강남동 - 진주YMCA

부산 북구 화명 2동 - 부산 MBC 부설(사)문화도시네트워크

울산 울주군 상북면 소호마을 - 문화예술창작집단 울림

충북 제천시 덕산면 대전리 - 예술과마을네트워크

전북 완주군 삼기리 마을 - 지역문화자원연구회

전남 보성군 가마실 마을 - 보성문화원

광주 서구 금호 1동 - 빛고을문화예술봉사단

부산 금정구 남산동 - 금샘마을공동체

인천 남구 우각로 - 우각로 문화마을

충남 아산시 종곡리 마을 - 아산YMCA/아산문화재단

강원 춘천시 효자 1동 - 춘천시문화재단

강원 원주시 호저면 - 성공회원주나눔의집

경기 성남시 봇들마을 6단지 - 마을공동체 문화로숲

강원 철원군 동송읍 - 철원종합문화복지센터

울산 북구 농소 1동 - 농소1동 주민자치위원회

서울 성북구 삼선동 - 함께사는 성북마을문화학교

경기 안산시 원곡동 -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

서울시 마포구 염리동 - 마포문화재단/우리동네 나무그늘

경기 광주시 퇴촌면, 남종면 - 너른고을생협

대구 중구 성내 2동 - 도심재생문화재단

경남 통영시 명정동, 중앙동 - 문화예술교육연구소 사람과 삶

경남 창원시 진해구 중앙동 - 경남독립영화협회

. ‘마을사람들’을 마무리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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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지금 우리 사회는 급속한 사회발전으로 고립되어있는 개인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살률은

높아지고 있으며 흉흉한 사건들로 불안이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바로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

지 모르고, 오가는 길에 어쩌다 만나는 이웃은 서먹서먹하기만 합니다.

이러한 고립과 단절의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소통과 돌봄의 문화’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생활문화공동체 만들기 사업」은 사회의 경계와 편견의 잣대를 허물고 소통을 만들어내

는 힘이 여전히 우리가 사는 마을과 일상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했습니다.

공동체 문화예술 활동을 통해 나와 이웃 사이에 존재하던 담들을 허물어 서로 바라보게 하고,

손 내밀게 하며, 궁극에는 함께 노래하고 춤추게 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2009년부터 현재까지「생활문화공동체 만들기 사업」을 통해 전국 51개 지역에서 10만 명

이 넘는 지역주민과 만나 소통과 돌봄의 문화를 회복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해왔습니다.

이웃 담장에 꽃과 나비를 그려주며 서로의 사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50년 넘

게 농부로 살아오신 할아버지의 일상은 삶의 철학을 담아내는 시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웃

과 연극을 만들고, 노래를 부르고, 마을을 기록하기 위해 매일같이 만나다 보니 어느새 서로

를 위해 기꺼이 지칠 수 있는 소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지난 4년여의 여정을 통해 만들어진 크고 작은 울림을 돌아보려 합니다. 앞으로 지역의

주민 공동체와 지속 가능한 마을을 꿈꾸는 모든 분에게 우리의 경험이 적으나마 보탬이 되는

계기였으면 좋겠습니다.

2012년「생활문화공동체 만들기 사업」이 의미 있는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마음으로 발로 뛰

어주신 24개 주관단체의 관계자와 참여주민 여러분, 그리고 각 마을의 사례가 깊은 공감과 감

동의 이야기로 거듭날 수 있게 노력해주신「마을 사람들」제작 관계자 여러분에게도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생활문화공동체의 아름다운 울림이 우리 사회의 가장 낮고 깊은 곳까지 이어지길 기원합니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원장 박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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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공동체 만들기 사업 소개

「생활문화공동체 만들기 사업」은

문화소외지역에서 다양한 문화예술활동을 통해 마을의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하고,

지속가능한 생활문화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주민과 지역단체의 꿈과 열정을 지원합니다.

2009년 18개 단체, 2010년 19개 단체, 2011년에는 25개 단체가 전국에서 78,929명의 마을주

민과 만나왔습니다. 2012년에는 24개 단체가 마을 곳곳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생활문화공동체 만들기 사업은 최대 3년의 연속 지원을 통해 문화예술을 매개로 한 자생적 주

민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지원합니다.

주민공동체 구축 4단계

생활문화공동체가 일구는 마을

1단계공동체 발아

(준비기)

공동체 형성 위한

문화예술프로젝트 실행

1단계 추진 사업

심화활동

공동체 활동과

지역 자원 연계

2단계공동체 구축

(기반조성기)

3단계공동체 발전

(안정기)

4단계자생적 주민-

공동체 운영

나와 이웃이 주인인 마을

연대하고 협동하는 마을

이웃과 함께 하는 마을

문화예술로 소통하는 마을

블로그 livingcultures.tistory.com

페이스북 www.facebook.com/livingcultures

기타문의 02-6209-5944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사회교육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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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24개 단체가 들려주는 마을 사람들 이야기”

1년차

부산 금정구 남산동금샘마을공동체

아빠밴드를 소개합니다

인천 남구 우각로우각로 문화마을

우각로의 연가이버

충남 아산시 종곡리 마을아산YMCA/아산문화재단

우리의 재발견

강원 춘천시 효자1동춘천시문화재단

효자동 낭만골목에서 만난 사람들

강원 원주시 호저면성공회원주나눔의집

호맷골의 보배

경기 성남시 봇들마을 6단지마을공동체 문화로숲

행복 봇들의 리더

강원 철원군 동송읍철원종합문화복지센터

황이장과 박중사

울산 북구 농소1동농소1동 주민자치위원회농사와 예술이 만나다

서울 성북구 삼선동함께 사는 성북마을문화학교

우리는 성북마을문화학교입니다

경기 안산시 원곡동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

국경없는 마을

서울시 마포구 염리동마포문화재단-우리동네 나무그늘

우리가 꿈꾸는 마을

경기 광주시 퇴촌면, 남종면너른고을생협

우리마을 조 선생님

대구 중구 성내2동도심재생문화재단

30대의 브레이크 댄스

경남 통영시 명정동, 중앙동문화예술교육연구소 사람과 삶

우리마을 홍보대사 Mr.빈

경남 창원시 진해구 중앙동경남독립영화협회

우리는 꽃비 내리는 동네에 살고 있습니다

3년차

전남 영광군 우평마을우도농악보존회

우평마을굿 축전의 주인공들

인천 부평구 십정1동자바르떼 인천지부구시장의 골목대장

경남 진주시 강남동진주 YMCA

모두의 축제마을

부산 북구 화명2동부산MBC 부설 (사)문화도시네트워크

이제는 우리 마을이 보입니다

2년차

울산 울주군 상북면 소호마을문화예술창작집단 울림

소호마을의 해결사

충북 제천시 덕산면 대전리예술과마을네트워크

마을이야기학교 지킴이

전북 완주군 삼기리 마을지역문화자원연구회삼기리의 보물지기

전남 보성군 가마실 마을보성문화원

가마솥의 온기가 묻어나다

광주 서구 금호1동빛고을문화예술봉사단

우리가 만든 마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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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평마을굿 축전의 주인공들

3년차

전남 영광군 우평마을

우도농악보존회

소의 형상을 닮았다 하며 이름이 붙여진 우

평마을.

이 마을은 한국 전쟁 때도 마을 굿을 빠뜨리

지 않았을 만큼 사람들이 당산을 진심으로 믿

는 마을이라고 합니다. 최근에는 이 마을굿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한 마을 사람들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는데요. 이 노력에는 유난히 눈에

띄는 몇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평마을 마을굿

지키기의 주인공들이시죠.

첫 번째 주인공, 오문석 단장님

마을에서 8년 동안 많은 행사들이 진행되며

즐겁고 유쾌한 일도 많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행사인 만큼 성가시고 불쾌한 일들도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축제 때는

노상방뇨를 하는 관광객들도 있었고, 행사 후

나오는 엄청난 쓰레기로 마을 주민들이 고생

도 많이 하셨었죠. 또, 행사 음식 뒷수발을 마

을 어머님들이 챙기다 보니 정작 주민들이 놀

이판을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일만 하다 끝

나는 경우도 발생했습니다. 또, 다른 신앙을

갖고 있는 몇몇 주민들은 이런 전통을 미신

이라며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경우들도 있었

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 마다 늘 상황을 수습

하고 주민들을 다독이는 분이 계셨으니 바로

마을예술단 오문석 단장님 이십니다. 그는 우

도농악보존회와 마을이 연대를 맺고 사업의

성과를 잘 이룰 수 있도록 늘 조정자의 역할

을 해 오셨습니다. ‘우평마을의 문화유산에 자

긍심을 갖고 이 정도의 불편함은 감수하자며’

늘 주민들을 다독이고 독려하는 역할을 자청

해 오셨죠.

이번사업을 진행하며 오문석 단장님은 가장

큰 성과로 어머니들이 좋아하던 드라마를 뿌

리치고 시간에 맞춰 프로그램에 참석하는 점

을 꼽으셨습니다. 또 지난 읍민의 날 행사 때

시연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것에 대해서도 여

러 번 자랑을 하셨지요. 처음이라 많이 서툴

렀을텐데 모두 흥겹게 연주하는 모습에 많은

읍민들이 호응을 해 주셔서 신명나는 놀이 한

마당이 펼쳐졌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의

읍민의 날이 기대된다는 말씀도 빼놓지 않으

셨어요.

두 번째 주인공, 남생이 이요순 이장댁

사업을 시작한 지 두 달이 지났을 무렵, 하루

는 강강술래 프로그램 시간에 늦게 와서 미안

하다며 들어오는 분이 한 분 계셨습니다. 바로

이 마을 이장 댁 이요순 님이셨어요. 그녀는

이 마을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기도 했지요. 이

프로그램에 늦게 참여하셨음에도 타고난 자

신감과 신명 덕분인지 배우는 즉시 스펀지처

럼 흡수를 잘 하셨어요. 특히나 남생이 놀이를

아주 맛깔나게 잘 추셔서 어르신들 사이에서

인기도 아주 높으셨어요. ‘남생이 한 마리 제

대로 잡았다’며 주위에선 칭찬이 자자했었지

요. 그녀는 두레풍물패에서는 북을 맡았습니

다. 우도농악 전문치배 공연 때는 설익은 솜씨

에도 불구하고 북 개인 놀이에 합세했는데 놀

이판의 어울림에 전혀 손색이 없었습니다. 그

녀가 가는 곳은 언제나 흥겹습니다. 그리고 그

녀는 남다른 오지랖으로 정도 많고 일복도 많

은 여성입니다. 매년 김장철이 오면 400~500

포기의 김치를 담굽니다. 모두 자신의 가족과

이웃들과 함께 나누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

렇게 사는 것이 힘들지 않냐고 물어보니 그녀

는 이렇게 대답을 해주셨어요.

“내가 먼저 베풀면, 내가 받는 복은 그 이상

이더라구요.”

세 번째 주인공, 김정섭 아짐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대망의 우평 마을 개근상 수상자는

김정섭 아짐.!

마을 행사 어디서든 늘 함께 계셨던 분, 바로

김정섭 아짐입니다. 아짐은 8년 넘게 진행된

마을의 행사에서 늘 묵묵히 자리를 지켜주셨

던 분입니다. 프로그램이 있는 날이면 누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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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와 춤 솜씨도 많이 발전하셨다고 합니다.

또 다른 인물, 최용 회장님

여기 마을굿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한 분

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우도농악보존회 최

용 회장님. 그는 98년부터 영광 7개 마을을 대

상으로 꽹과리, 장고, 북, 징 등의 악기를 마을

주민들에게 직접 가르치며 마을 주민들 스스

로 마을굿을 지낼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을

해왔습니다. 그러던 그가 2005년, 우평마을을

주목하게 됩니다.

앞서 말했든 우평마을은 주민들의 마을굿에

대한 애정이 아주 각별한 마을입니다. 또 한

국 전쟁 때도 마을굿을 빼뜨리지 않았다고 하

죠. 하지만 90년대 중반부터 우평마을은 굿과

풍물(농악)등은 생략한 채 제사만 지내왔습니

다. 바로 이농 등으로 음악을 연주할 인맥이

끊어졌기 때문이지요. 이에 그는 우평마을 주

민들에게 마을굿을 함께 살려보자고 제안했

습니다. 이렇게 하여 우도농악보존회는 2005

년 11월(음력 10월 정월 보름) 우평마을에서

우도농악 무형문화재 정기발표회를 열면서

주민들과 마을굿 복원을 시작하게 되었고 올

해는 벌써 8회째를 맞이하게 된 것이죠. 2010

년부터는 문화체육관광부의 ‘생활문화공동체

사업’의 지원을 받으며 전승기만을 더욱 탄탄

히 다지고 있지요. 마을 주민들이 일주일에

1~2번 모여 함께 풍물을 배우고 강강술래를

복원하는 등 여러 활동을 3년 동안 꾸준히 해

오고 있습니다. 또 2011년 12월까지는 매달

넷째 주 토요일에 ‘치병 치유 음악제–당산할

아버지’라는 무료공연을 열기도 했었지요. ‘당

산제’를 지낸 뒤에는 전문연희패들과 마을두

레풍물패의 공연이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매년 11월 첫째 주엔 금요일과 토요일 이틀 동

안은 줄굿과 판굿 등이 포함된 우평마을 굿을

원형대로 선보이기도 했었죠. 제사상엔 도깨

비들이 좋아하는 수수떡과 메밀묵이 빠지지

않았고, 주민들이 장만한 밥상을 관람객들과

함께 나누며 온 마을 주민이 함께 하는 축제들

이 펼쳐졌습니다.

최근 추운겨울을 보내며 마을 어르신들에게

크고 작은 사고들이 생겼습니다. 퇴행성 관절

염으로 다리 수술을 하신 분도 계시고 눈길에

골절상을 입으신 분들도 꽤 계셨습니다. 다들

연로하셔서 회복 속도가 더뎌 참 안타까웠습

니다. 얼른 회복이 되셔야 할 텐데 강강술래도

더 흥겹게 하시고 마을굿 축전도 쭉 함께 하셔

야 할 텐데 이런저런 걱정들이 많이 들었었지

요. 모두들 늙더라도 아프지 않고 건강하시길

간절히 빌어봅니다.

다 먼저 오셔서 방을 정리하고 방 온도를 맞춰

두셨고 행여 입이 심심할까 고구마도 삶아주

시곤 하셨지요. 더운 여름날에는 부채를 부쳐

가며 모기를 쫒아주기도 하십니다. 늘 묵묵히,

큰 바위처럼 우리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어머

님 같은 존재입니다.

아짐은 <둥당헤 타령>이라는 토속민요를 복

원하여 노래하는 작업에도 함께 참여하셨습

니다. 특히 이 노래는 아짐의 구수하고 아늑한

목소리와 잘 맞아떨어졌었습니다. 몇 년 전,

혈압으로 쓰러지셔 수술을 한 이후에는 빠르

고 힘 있는 노래를 부르시는 것은 힘들지만,

천천히 아짐의 선창을 따라하며 주거니 받거

니 하다보면 어느새 구수하고 흥겨운 가락에

흠뻑 취해듭니다.

그리고 오세동 이장님

오세동 이장님은 처음 이 생문공 사업을 처음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많은 고심을 하셨다고

합니다. 우선, 우평 마을의 평균연령이 65세

이상인 고령 인구인터라 과연 잘 해낼 수 있을

까란 걱정과 우려가 들었고 또, 괜히 우도농악

보존회측에 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하는 점 때

문이었다고 해요. 하지만 최소한 이 사업을 하

게 된다면 마을의 어르신들이 즐겁고 유쾌하

게 살 수 있을 꺼라는 생각에 과감히 시작하시

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업을

진행하며 처음의 우려와는 달리, 기대 이상의

높은 참여도와 만족도에 놀라하며 함께 하길

잘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무엇보다 어르신

들의 얼굴에 웃음이 많아지고 늘 노래와 춤으

로 마을이 흥겨워졌으니 이것보다 더한 행복

이 어디 있겠냐고 하시죠. 그리고 어르신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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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부평구 십정 1동

자바르떼 인천지부

며칠 전 휴일, 집에서 쉬고 있는데 휴대폰 전

화벨이 울렸습니다.

“나여~ 어디야~?”

“네, 집입니다”

“집이 어디야?”

“예, 부개동입니다. 어쩐 일이세요?”

“어, 가래떡을 뽑았는데 가까이 있으면 따끈할

때 좀 가져다 먹으라고. 오늘은 여기 오기 힘

들겠구먼, 낼이라도 한 번 들러.”

“네, 고맙습니다. 들어가세요.”

보기만 해도 구수한 이 대화 속의 주인공은 누

구일까요?.

바로 대화 구 시장 골목에서 남도 방앗간을 운

영하시는 전춘자씨입니다.

작년에 마을잔치를 준비하면서 우리는 처음

전춘자씨를 만났습니다. 마을축제 홍보전단

지를 돌리던 중 우연히 구 시장 골목을 지나게

된 것이 계기였죠. 우리가 지나간 구 시장 골

목은 다른 골목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골목 양

쪽으로 여러 채소들로 꾸며진 화분 텃밭들이

있었어요. 조금 더 골목 안으로 들어가니, 사

람들의 유쾌한 웃음소리와 이야기들이 흘러나

왔습니다. 싱싱하고 푸른 채소만큼 생기가 있

었어요. 뭐하는 사람들일까, 뭐가 이리 즐거운

것일까 라는 호기심으로 조금씩 그들에게 다

가갔습니다. 그들은 바로 구 시장 골목 사람

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전춘자씨

가 계셨습니다.

이 만남 이후, 해님방 대표였던 신소영 선생님

과 구 시장 골목사람들과의 만남을 포함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다 갑

자기 마을잔치에서 구 시장 골목 사람들과 떡

매 치기 프로그램을 진행해보면 어떠냐는 이

야기가 나왔습니다. 본격적으로 사람들과 이

야기를 나누며, 분위기가 무르익자 전춘자씨

가 사람들에게 한 말씀을 던지셨죠.

“그렇게 하면 되겠네. 야, 너네 그 날 무슨 일

없지?”

이 말 한마디에 분위기는 한 번에 정리가 되

었습니다. 전춘자씨를 중심으로 구 시장 골목

사람들의 참여는 더욱 활발해졌어요. 마을잔

칫날에도 결혼식에 참석하시는 한 집 빼고는

모두 하나가 되어 마을 사람들을 위해 판을

벌이셨죠.

올해는 마을축제에서 사용할 막걸리를 주민

들이 함께 만드는 “가양주 담그기”가 제안되

었습니다. 그리고 밑술을 담그는 날, 구 시장

골목은 또 한번 작은 잔칫날이 되었습니다. 전

춘자씨는 아침 일찍부터 미리 쌀을 불려놓으

셨어요. 적당하게 쪄진 쌀밥을 펴서 식히는 동

안 골목의 다른 식구들은 부침개를 만들고 협

찬 받은 막걸리를 풀어놓으셨죠. 밥과 누룩을

적정한 비율로 섞고 가까운 약수터에서 떠온

약수를 부어 비비는 작업은 동네 사람들 모

두가 함께 하였습니다. 밑술이 익는 발효과정

이 보름, 덧술을 치고 또 술이 익는 발효과정

은 일주일, 거르기를 하고 약수를 부어 적당

한 도수를 맞추어 패트병에 포장하기까지는

한 달. 이 긴 시간 동안 전춘자씨는 자신의 방

앗간 공간을 내 주시고, 많은 이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거리낌 없이 늘 방앗간 문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7월 중순에는 이웃마을 가좌

구시장의골목대장3년차

Page 10: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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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년스러워져 갔습니다. 또, 이 마을은 아파트

주민들의 빼고 나면 저소득층 밀집지역이라

공장노동자나 일용노동자의 수가 많았고, 경

기 흐름에 따라 실직가정이나 이혼가정도 늘

어나 경제적,정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정

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열우물 주민들은 가난하지

만 서로를 의지하여 정을 나누며 사는 즐거움

을 알고 있었습니다. 서로가 처한 문제에 대해

공동의 지혜를 모아 함께 해결했던 공동체적

인 삶의 기억과 흔적들을 지니고 있었지요. 80

년대 중반 지방자치제도와 주민자체제가 국

가의 제도로 갖춰지기 전부터 ‘열우물 주민회’

라는 주민조직을 중심으로 마을에 필요한 자

치적인 활동을 도모했습니다. 1986년부터 해

님공부방을 시작했으며, 주민의료, 치안 등 주

민들이 처한 공동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였고,

마을 공동체의 단합을 위해 매년 단오제, 체육

대회, 지신밟기 등의 문화행사를 개최하던 전

통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했지요

열우물 마을만의 매력

하루는 전춘자씨에게 열우물 마을만의 매력

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단박에 ‘이웃

과의 정’이라고 힘주어 답했습니다. 십정동에

서 아이를 키워 시집, 장가 보내고 자신의 인

생 대부분을 십정동에서 살았다며, 이사왔을

때부터 구 시장 골목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왔

던 세월들을 회상하셨어요. 젊었을 때는 직장

다니느라 지금처럼 자주 모여 어울리지는 못

했지만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부터는 25년 정

도를 거의 매일 한 식구처럼 어울리다보니 친

해지셨다고 합니다.

생문공 사업을 보면서 달라진 것이 있는지 또

다시 여쭤보니, 동아리가 만들어지니 갈 곳 없

던 아이들이나 어르신들이 우리 마을이 더 좋

아졌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에게 주기 좋아하고, 사람들과 놀기 좋

아하고, 사람들과 나눠먹기 좋아하는 전춘자

씨.

그녀는 ‘해님방(생활문화공동체만들기 사업

도 해님방 사업으로 알고 계십니다)에 매월

얼마씩이라도 후원하고 싶은데 벌이가 시원

찮아서......’라며 아쉽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돈 몇 푼 후원하는 것 이상으로 이미

그녀는 마을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하고 계십

니다. 그리고 이런 가치 있는 일들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더욱 필요한 것일지도 모

르겠습니다.

동의 마을축제학교 수업과정에 열우물 생활문

화공동체만들기 사례를 발표하는 기회가 있었

습니다. 밤새 생문공 사업과정의 이야기를 구

성하고 자료를 만들고 사진을 고르는 중, 문

득 생문공 만들기 사업 곳곳에 담긴 전춘자씨

를 발견하였습니다. 마을잔치, 공동체학교, 네

트워크포럼, 문화파티 등 그녀가 없는 곳은 없

었어요. 그리고 그녀의 주변엔 늘 구 시장 골

목 사람들도 함께 계셨지요, 구 시장 골목을

주름 잡는 골목대장, 생활 속에서 문화를 만

들어가고 있는 사람, 바로 전춘자씨가 그러한

분이셨죠.

열우물, 아니 십정동 마을 이야기

올해 63세이신 전춘자씨는 마음만은 2~30대

만큼 순수하고 젊습니다.

십정동에서 35년을 사셨고, 방앗간을 운영한

지는 30년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우리에게 처

음 십정동에 왔을 때를 들려주었습니다.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동네는 허허벌판이고 논과 호

박밭뿐이었다고 버스도 잘 다니지 않는 동네

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남편의 고향사람이 있

는 동네였고 주변에 공장도 많아서 이사를 오

게 되었다고 해요.

잠깐 더 십정동 마을 이야기를 하자면, 십정1

동 신덕촌 일대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공동

묘지와 과수원과 밭이 널려있던 야산자락이었

다고 합니다. 그러다 1960년대 말, 도화동에

선인재단이 대학교를 비롯하여 중,고등학교

를 세우면서 많은 철거민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들 중 다수는 신덕촌 또는 철거촌으로 불리

는 이 지역으로 옮겨와 산자락을 개발해서 집

을 짓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초기 동네를 이루

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1970년대 초에는 동

네 길 건너에 갯벌이 매립되고 주안수출 5,6공

단이 들어서면서 노동자와 그의 가족들이 모

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시장이 생겨나고 많은

집들이 생겨나며 동네는 커지기 시작했죠. 90

년대 들어서는 주거환경개선사업 지구로 예정

되어 많은 투기꾼들이 몰려들었고, 집을 팔고

떠나는 주민을 비롯하여 빈집과 빈집들이 하

나둘씩 늘어났습니다. 재개발 사업에 대한 기

대와 실망이 교차하며 마을 분위기는 점점 을

Page 11: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20 21

경남 진주시 강남동

진주 YMCA

소외된 마을, 베건네 강남동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남동이라고 하면 서울

강남구를 떠올리겠지만 진주에도 강남동이

있습니다. 그러나 강남구와 강남동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옛날부터 진주의 강남동은 외

면당하는 마을이었습니다. 옛 사람들은 사천

이나 남해에서 진주로 들어올 때, 우리 마을의

나루터 길을 지나 남강의 나루터에서 배를 타

고 진주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

을은 ‘성밖’, ‘성밖의 사람’이란 뜻을 가진 ‘베

건네’라고 불려져 왔습니다.

옛날부터, 우리 마을에는 소외된 사람들이 많

이 살았습니다. 특히 백정과 천민이 함께 모여

사는 마을이었죠. 남강댐이 생기기 전에는 홍

수 대비를 위한 큰 둑의 그림자가 우리 마을을

덮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둑 위로 아침마다

둑 시장이 열렸습니다. 댐이 건설된 후에는 둔

치 정비 사업으로 주변환경이 쾌적해졌지만

아침마다 열렸던 둑 시장은 마을로 들어와 5

일 장이 되었죠. 우리 마을은 아직 도시 정비

사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옛 골목길이

많이 남아있기도 합니다. 30년 전 새댁이었던

4통 통장님은 마을로 막 이사와 동네에서 길

을 잃어버렸던 적도 있다고 하세요. 강남동길

을 다 알면 진주길을 다 안다는 속설에서도 알

수 있듯 강남동의 옛 골목길은 유명합니다. 마

을에는 100년도 넘은 탱자나무 길과 나루터

길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매년 10월이면 진주에서 남강 유등축제와 개

천예술제가 열리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그

축제가 바로, 이 강남동에서 열립니다. 하지만

이 축제는 강남동 마을 사람들에게는 그리 달

갑지 않은 축제입니다. 오히려 마을 사람들에

게는 조용했던 일상에 소음과 교통대란을 안

겨다 주는 불편한 축제이기도 합니다.

강남동, 유등 마을이 되다

2009년, 우리 마을에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마을 주거환경 개선을 위한 ‘거점

확산형 주거환경 개선사업’ 지구로 강남동이

선정되면서 우리 마을도 좋아질 수 있다는 기

대로 마을에 활력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

다. 그리고 진주 YMCA와 함께 ‘365일 모두

의 축제 마을 진주강남‘ 이라는 주제로 2010

년 생활문화공동체시범사업을 시행하며 우

모두의 축제마을3년차

리 마을은 생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강남

동 주민이 유등축제의 주인공이다’, ‘유등축

제가 365일 우리 마을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열리면 좋겠다’, ‘유등을 우리 마을의 자산으

로 삼아 마을 발전의 동력으로 삼자’ 등의 사

업 구호들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

습니다.

이렇게 해서 처음 시작된 것이 바로 등 만들

기입니다. 매주 강남동 주민자치센터 2층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며 등을

만드는 광경이 펼쳐집니다. 처음에는 기본적

인 등 만들기 작업조차도 힘들었지만, 이제는

프로못지 않은 솜씨를 뽑냅니다. 자신만의 색

을 담은 등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완성된 작품들이 유등축제 때 마을 골목에 걸

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밖의 축제라 생각했

던 유등축제가 이제는 마을 사람들의 품 안으

로 들어 온 것입니다. 이제는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 되어 축제에 함께 참여합니다. 또, 아

직 옛 정취가 살아있는 4통 골목길에 유등학

교 수강생이 만든 등으로 우리 마을만의 유등

축제를 열기도 합니다. 우리의 남편과 아이들

이 매일 오고 가는 골목길을 우리가 만든 등

으로 환하게 비추면서 마을도 밝아졌습니다.

동사무소에서 내 준 공간에서는 주말 저녁마

다 동네음악회가 열렸습니다. 진주성이 바라

보이는 강변의 중앙광장이 멋진 무대로 바뀔

줄이야 상상도 못했었지요. 우리 마을은 이렇

게 유등으로 환해졌고 활기가 돌기 시작했습

Page 12: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22 23

니다. 정말 유등마을이 된 것이지요.

마을 사람들의 소망이 담기다

2012년 진주남강유등축제가 열리기 1주일

전, 마을에선 최근 유행하는 ‘강남스타일’ 노

래와 함께 한바탕 잔치가 열렸습니다. 지난 사

업의 성과로 9월 24일 창작유등체험관이 개

관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죠. 사업을 함

께 진행하며 매주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의

소망이 결실을 맺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매주

모여 함께 등을 만들고, 우리들의 유등 축제를

만들어 가는 사이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모두 ‘유등은 우리 마을의 것’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작유등체험프로그램

을 처음 시작 할 때가 생각납니다. 그 당시 1

기로 참여했던 40명의 마을분들, 사실상 이분

들이 진정한 이번 사업의 주인공들입니다. 아

무것도 없었던 시작단계에서 우리 마을에 대

한 애정으로 익숙하지도 않았던 등 만들기를

시작해주셨던 분들이시죠. 그리고 이 분들은

지금도 마을 곳곳에서 도움을 주시며 든든한

기둥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말합니다.

생활문화공동체만들기 시범사업이 진행된 3

년간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되갚는 길

은 ‘우리 마을이 계속 유등마을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하는 일’ 뿐이라 말입

니다. 늘 소외받아왔고 그 소외감으로 늘 위

축되어 있었던 강남동은 이제 정과 생동감이

넘치는, 365일 행복한 유등 마을로 변화하였

습니다.

유등마을,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2013년이면 동 통합 사업으로 인해 강남동과

칠암동이 합쳐져 천전동으로 이름으로 새롭

게 태어납니다. 진주 남강유등축제도 유료화

와 타 지자체 등축제와의 차별화 요구로 새로

운 변화에 직면하게 됩니다. 생활문화공동체

사업도 올해로 졸업하게 됩니다.

사업을 실행한 실무자 입장에서는 이런 변화

들이 두렵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함께 해준 마

을 사람들이 있기에 든든합니다. 그리고 앞으

로 YMCA는 좀 더 넓은 시선으로, 행복과 화

합의 가치를 중심에 놓고 우리 마을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펼쳐나가려 합니다. 또, 마을

사람들 스스로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렇게 진

주 강남동은 365일 모두의 축제마을, 유등마

을로 다시 시작됩니다.

Page 13: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24 25

부산 북구 화명 2동

부산MBC 부설 (사)문화도시네트워크

백복주님의 내가 만난 마을 사람들

나는 이번 생애사 북(Book) 만들기 프로그램

의 글쓰기 보조강사로 활동하며 많은 마을 사

람들을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

씩 그들을 만나는 것이 어색하기도 하고 부담

스러웠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것은 사람을 만

나는 설레임으로 바뀌었지요. 이렇게 우리의

만남은 지속되었습니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 대부분은 정말 이 마을의 토박이 분들이셨

어요. 특히 40~50대의 마을 언니들은 마을 축

제나 행사에 정말 적극적인 분들이셨죠. 사실,

저도 나름 마을 행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

만 이분들을 보며 조금 부끄러운 마음이 들더

라구요. 우리들은 함께 모여 인생의 많은 부

분들을 이야기 했어요. 처음에는 서로 어색해

서 서먹서먹했지만 만남이 잦아질수록 우리

는 아주 친밀해졌습니다. 배꼽이 빠질 정도로

같이 웃기도 했고, 가끔은 눈이 안 보일만큼

함께 울기도 했어요. 이제는 저녁에 모여 맥주

한잔을 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

죠. 그리고 우리에게는 공통의 꿈이 생겼습니

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함께 마을 축제를 하

는 꿈입니다. 꼭 큰 축제는 아니더라도, 우리

의 명절이나 특별한 날 예를 들면, 대보름 때

가마솥을 걸고 떡국을 끓여 다 같이 나눠먹는

그런 꿈 말인거죠. 소소한 행사들 말이에요.

서로의 환경과 생각은 달랐지만 우리는 만남

을 통해 서로를 존중하게 되었어요. 우리는 같

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었으니깐요.

그린경로당 할머니들과의 만남도 처음에는

참 많이 어색했었습니다. 언니들과의 만남과

는 또 달랐어요. 서로 특별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특별한 일들이 일어나지도

않았죠. 아주 일상적인 모습들이었습니다. 할

머니들은 경로당에 오시면 누워계시거나 밥

을 먹거나 고스톱을 치셨어요. 저는 옆에서 이

런 할머니들의 일상을 기록하고, 가끔씩 먹을

걸 주시면 감사히 얻어먹고 서로 하시는 이야

기들을 가만히 듣고 있었죠. 하지만 할머니들

의 이야기 속에는 좀 남 다른게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가슴이 먹먹해 질 정도로

큰 일들이었는데 할머니들은 정말 아무렇지

않게 너무나 담담하게 말씀을 하셨죠. 이제는

모두 지난 간 일이고, 세월 속에 흘러간 것들

이라고 그냥 물 흐르듯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

는 거라고 이야기 하시는 것 같았어요. 오히려

이제는 우리 마을이보입니다

3년차

가슴이 먹먹해지는 저와는 달리 웃음으로 말

씀하셨죠. 이렇게 이야기를 듣고 나누는 사이

처음의 어색함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지금

은 길을 지나가더라도 서로 보면 손을 잡고 인

사를 나누며 반가워합니다. 우리는 이제 서로

아는 사이가 된 거지요.

저는 언니들과 할머니들과의 만남을 통해 마

을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도서관과 마을 단

체와의 네트워크도 돈독해졌습니다. 예전에

는 길에서 마주쳐도 서로 모르는 사람으로 지

나갔지만 이제는 서로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

습니다. 언니들과는 여행도 같이 가고 저녁에

만나 삼겹살을 같이 구워먹기도 합니다. 사업

이 끝났지만 그림책 한권을 들고 그린경로당

할머니들을 찾아가는 일도 잊지 않습니다. 이

런 만남의 시간들은 이젠 나의 한 일상이 되

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만남은 계속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좀 더 많은 마을 사람들을 만나

는 꿈을 꿔봅니다.

마을의 아저씨들도 만나고, 마을의 어린이들

도 만나고, 마을의 장애우 친구들도 만나고,

우리 마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만나는

그런 꿈을 꿔봅니다.

이제는 마을이 보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우리 마을이 보입니다.

늘 입으로만 마을마을, 머리로만 생각했던 것

들이 이제는 정말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런 생문공 사업들이 지속적으로 10

년, 20년 쭉쭉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정말로 많은 마을들이, 그리고 그 마을

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따뜻해지지 않을까요?

지금 제가 너무나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Page 14: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26 27

울산 울주군 상북면 소호마을

문화예술창작집단 울림

최근 베이비붐 세대의 대거 은퇴에 따라 귀

농, 귀촌 인구가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

리가 있는 울산 지역도 예외는 아닙니다. 울산

외곽의 여러 마을 중 소호마을은 울산 시내에

서 한 시간 내 거리에 있어 주중 도시 생활과

주말 농촌생활을 영위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

이 좋은 마을입니다. 하지만 어느 시골마을에

서도 볼 수 있듯 토착민들과 귀농,귀촌으로 인

한 이주민들 간의 갈등은 피해 갈 수 없는 숙

명 같은 것이었습니다. 생활문화공동체 사업

을 주관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하는 입장

에서 아마 가장 어려운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2011년 처음 소호마을문화학교를 시작했을

때, 6년 동안 소호마을을 알아가며 교류를 해

왔던 터라 다른 단체에 비해 비교적 어려움 없

이 사업을 진행할 수 있었고 이에 대한 자부심

도 매우 컸었습니다. 하지만 사업이 점차 진

행이 되고 마을 사람과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내가 그동안 주로 접했던 사람들은 소호마을

의 토착민들보다는 아이들의 교육환경 또는

도시생활에 염증을 느껴 이주해온 귀농, 귀촌

이주민들이 그 주된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알

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주민들과 토착민

들간에 아주 극심한 갈등이 존재함을 직접 느

끼게 되었고 이주민들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한 소호마을문화학교도 토착민들과의 거

리가 생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난관 속에 등장한 해결사

초기 진행되었던 프로그램 중 가장 어려웠던

것은 바로 마을 주민 전체가 참여하는 ‘소호

마을대동제’였습니다. 원래 이 대동제는 가을

걷이를 마치고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진행

하는 것으로 계획 되어있었습니다. 하지만 진

행 과정에서 마을이장님을 비롯하여 토착민

들의 동의를 얻지 못해 연거푸 행사를 연기해

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난

관 속에서 우리에게 해결사처럼 나타난 분이

계셨으니 바로 그 분이 김득용 개발위원장님

이십니다.

김득용 개발위원장님은 소호마을에서 9대째

대를 이어가며 살아온 토착민이십니다. 젋은

시절에는 학업과 개인사업 등을 위해 타지로

출향을 하기도 하셨었죠. 2007년에 다시 귀

소호마을의해결사

2년차

향을 하셨는데 이런 삶의 배경 때문이었는지

그 누구보다도 토착민과 이주민의 심정을 가

장 잘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또, 마을이 살아

야 우리 모두가 산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셨

던 분이기에 생활문화공동체사업에도 상당히

긍정적이셨습니다.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함

께 들어와 살아야 더욱 더 활기가 넘치는 마을

이 된다는 것에도 상당히 공감을 해주셨습니

다. 이주민과 토착민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신 분도 바

로 김득용 위원장님이셨죠. 2012년 마을주민

을 대상으로 생문공 사업설명회가 있던 날, 아

직 부정적인 시각이 남아있던 토착민들을 직

접 설득해 주신 것도 김 위원장님이셨습니다.

우리의 입장을 대변해 주시기도 하시고, 이 사

업의 취지와 필요성을 직접 말씀하시며 대표

인 저보다 더 열정적으로 토착민들을 끝까지

설득해주셨습니다. 항상 이렇게 어려운 순간

에는 김득용 개발위원장님이 계셨습니다.

김 위원장님의 활약상은 생문공 사업에만 그

치지 않습니다. 지지부진 하던 녹색농촌체험

장을 농업회사단법인 소호리 고헌산 주식회

사로 설립하여 사회적 기업으로 지정을 받았

습니다. 마을 주민의 일자리 창출에도 큰 몫을

하고 계십니다. 지난 여름에는 소호마을에 있

는 소호분교를 살리기 위해 시작된 산촌유학

생들을 위해 기숙사를 준비해 주기도 하셨습

Page 15: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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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소호마을 내 주택을 개인 사비로 구입하

셔서 산촌유학센터에 저렴한 비용으로 임대

해 주신 겁니다. 소호마을을 위해서라면 어디

든, 무엇이든 진행하시는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소중한 분으로 자리 잡고 계십니다. 또, 최근

에는 소호마을 문화학교 내 문화예술교육 프

로그램 [브라스밴드-섹소폰반]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계십니다. 2013년에는 시골아저씨

들의 서울상경 게릴라 콘서트도 야심차게 준

비해 보자며 벌써부터 팔을 걷어 부치고 계십

니다. 그 변화가 어디까지 진행될련지 자뭇 궁

금하고 기대됩니다. 대신 연습은 열심히 하셔

야 하는 거 아시죠? 개발위원장니임~~~

한 사람의 깨인 생각이 마을 전체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직접 느끼게 해준 김득

용 위원장님. 소호마을 뿐 아니라 매년 1만가

구의 귀농, 귀촌이 새로 생겨나고 있는 전국

곳곳의 시골마을에 이런 분이 한분씩 계셔서

우리 농촌이 좀 더 다양하게 변화하고 또 여

러 방면의 문화혜택을 받으며 사는 곳이 되었

으면 좋겠습니다.

충북 제천시 덕산면 대전리

예술과마을네트워크

추운 겨울, <마을이야기학교>의 하루는 따

뜻한 이불 속과 사투를 벌이고 빠져나와 손을

호호 불며 교실 난로에 불을 지피는 것으로 시

작됩니다. 추워지기 전 산에서 해온 나무도 있

고, 얻어온 나무도 있고, 지난 겨울 농한기 마

을교실 때 주민분들이 가져다주신 나무도 있

지요. 대전리 마을에서 벌써 3번째 겨울이지

만 난로에 불을 피우는데 30분은 족히 걸립니

다. 교실 안을 가득 채우는 매캐한 연기는 말

할 것도 없고요. 평생 마을에서 살아오신 분

들의 손길에 비할 수나 있겠냐마는 익숙해질

만도 한데 아직 서툴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

만 아무것도 모르던 처음보다는 확실히 나아

졌습니다.

마을이야기학교가 자리한 대전 1리는 비교적

젊은 50대 장년층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농

사도 규모가 크게 지으시고 농번기에는 얼굴

도 못 뵐 정도로 바쁘세요. 처음 마을에 갔을

때 우리는 마을 살림을 책임지는 부녀회의 마

음을 얻자고 생각하고 졸졸 쫓아다녔습니다.

담당했던 제가 그분들의 막내 딸 뻘 되기 때문

에 가능했지요. 밝게 웃으며 인사하고 모르는

것들은 쉴새없이 물어보고 동네 얘기, 옛날 얘

기 해달라고 조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부녀

회와 만나며 마을이야기학교를 연 첫해 겨울,

생문공 사업을 하기 전 자체적으로 마을잡지

를 만들고 농한기수업을 하고 전시를 열었습

니다. 그때에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 대전 1

리 부녀회. 특히 부녀회장님은 마을이야기학

교의 바로 맞은편에 사시면서 학교가 빈 동안

에도 학교 주변 화단을 꾸며주시던 분이에요.

알고 보니 돌아가신 남편분께서 이 학교를 나

와서 20년 동안 학교를 가꾸고 돌보는 일을 하

셨다고 합니다. 아주머니의 추억도 많이 서린

학교에 낯선 단체가 들어와 마을을 돌아다니

며 이야기를 모으고 농한기 교실을 열고 하니

궁금해 하시기도 하고 걱정도 하시면서 여러

모로 도움을 많이 주셨어요.

2011년 겨울, 첫 번째 ‘생활문화공동체만들기

사업’으로 지원을 받아 그간 모은 마을의 이야

기와 물건들로 ‘마을이야기박물관’ 문을 열었

을 때에도 제일 먼저 달려와서 구경하신 분들

이 부녀회였어요. 한해 동안 조금씩 모은 본인

들의 이야기가 담긴 이야기 상자를 열어보면

서 즐거워하셨지요. 이렇게 함께 보낸 첫 번

마을이야기학교지킴이

2년차

Page 16: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30 31

째 겨울과 봄이 부녀회와 마을이야기학교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관계를 이어주어 지

금까지 힘이 되고 있습니다. 부녀회는 마을을

움직이는 숨은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적극적

이고 주체적인 활동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

하지만 부녀회의 호응 덕분에 저희 활동도 다

양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2011년부터 시작

한 ‘생활문화공동체 만들기 사업‘은 저희끼리

소소하게 하던 활동이 좀 더 넓어지고 새로운

고민들을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대전

1리에 머물러있던 <마을이야기학교>의 활동

의 폭이 바로 옆 마을인 대전2리로까지 넓혀

지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외부의 기획자와

예술가들이 협력하여 좀 더 적극적으로 마을

곳곳을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모

았지요.

대전 2리, 이대웅 할아버님

그러한 과정에서 만난 분이 대전 2리의 이대

웅 할아버님이십니다. 할아버님은 마을과 사

람들의 이야기를 소중히 여기고 모으는 저희

의 활동을 진심으로 지지해주고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세요. 저희의 활동을 단순히 젊은 사

람들의 봉사라거나 좋은 일이 아닌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이라고 이해해주시고 지지해주시

는, 거의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당장 눈에 보

이는 결과가 나기 힘든 공동체 문화예술 활동

에 대해 고민하고 주춤하던 저에게 오랫동안

마을을 지켜온 어르신께서 마을이야기학교의

활동을 공감하고 지지해주신다는 것이 굉장

히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대웅 할아버지는 군인 출신이신데 굉장히

영민하시고 감수성이 뛰어나신 분이셨습니

다. 젊었을 적 마을 이장일을 맡아보셨을 때,

마을조사사업을 해서 자세한 기록으로 남기

고 싶어 하셨으나 못해서 안타깝게 생각하고

계셨어요. 몇 번이나 그 이야기를 하시면서 마

을의 이야기를 모으는 저희의 ‘이야기 아카이

브’ 프로젝트를 이해해주시고 응원해주셨습

니다. 할머님이 먼저 돌아가셔서 혼자 사시는

할아버지댁에 자주 놀러가고 함께 밥도 해먹

고 하면서 이야기도 듣고 많은걸 얻었습니다.

마을 어르신들 대부분 그렇듯이 젊은 사람들

이 가면 뭐라도 주려고 하셔요. 대부분 직접

키운 농산물들과 손수 하신 음식들이지요. 학

교는 늘 그렇게 마을분들의 도움으로 먹고 살

고 있습니다. 할아버님 마당에 재미난 돌 얼굴

들이 있어서 여쭤보니 할아버님께서 못으로

새긴 돌이래요. 별 뜻 없이 새기셨다 했지만

먼저 가신 할머님과 할아버님, 그리고 두 분을

키지켜주는 산신님 같아 보였어요. 정성스럽

게 가꾼 나무와 꽃, 살림들 사이 이 작은 돌조

각에서도 할아버님의 정갈하고 따뜻한 마음

이 느껴졌어요.

저희는 할아버님의 이야기들도 여러 가지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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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로 담아내었습니다.

2011년 ‘생태문화지도’로 제작했던 ‘12골 이

야기 달력’에는 할아버님의 돌조각 이야기가,

마을이야기 그림책에는 할아버님께서 해주신

이야기와 할아버님의 모습이 녹아있어요.

그런데 올해 여름, 할아버님께서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벌

어진 일이었고, 그대로 악화되셔서 가을에 돌

아가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병문안 갔을 때에

도 무척 약해진 모습이셨지만 반가워하셨어

요. 많은 말씀은 못하셔도 끝까지 저희를 걱정

하고 응원해주시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

다. 함께 보낸 시간보다 길 앞으로 함께 할 시

간 동안 이런 저런 계획을 세웠었는데 그렇게

갑자기 든든한 지원군이셨던 이대웅 할아버

님은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님은 돌아가신 후, 마을 뒷산에 할머

님과 함께 묻히셨습니다. 발인 날, 마을분들

이 다같이 할아버님의 댁에 모여 식사를 했

습니다. 어르신들이 대부분인 대전2리 부녀회

를 도와 저희도 달려가서 집을 정리하고 식사

를 준비했습니다. 할아버님께서 평소 자녀분

들께 저희가 만든 책자와 달력을 보여주시며

저희 이야기를 많이 하셨던 터라 도시에서 모

인 자녀분들도 저희를 알아보시고 고맙다고

하시더라고요. 정말 큰 힘이 되어주시던 분이

라 상실감이 크지만, 할아버지 덕분에 힘을 얻

고 마을에 좀 더 깊이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발인 날, 대전2리 부녀회분들과 음식을 준비

하며 저는 할아버님이 마지막 남기신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하루 동안 할머님들

과 함께 울고 웃으며 음식을 만들고 상을 내고

치우면서 서로 돌보는 마을공동체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을이야기학교>가 활동을 하

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공동체의 힘이란 개인

들의 상처에서 스스로 한걸음 내딛을 수 있게

새로운 힘이 생기도록 돌보아 주는데에 있다

는 것을 가까이에서 느꼈습니다.

이정자 할머님

이날 함께 하신 분 중에는 대전2리 부녀회 총

무이신 이정자 할머님이 계셔요.

이정자 할머님은 대전2리 부녀회 총무일을 하

시면서 마을 살림의 대소사를 살피시는 어른

이십니다. 2011년 이야기아카이브를 하면서

마을을 돌아다니다 열려있는 문으로 불쑥 들

어가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들은 인연으로 만

나게 되었어요. 할머님과 할아버님은 오래된

앨범을 다 꺼내 보여주시면 이야기를 들려주

셨어요. 할아버님께서 어릴적 이 학교를 다니

셨던 이야기며 할머님이 이웃마을에서 시집

오신 이야기, 대가족들을 거두어 먹이며 살아

오신 이야기들을 듣다보면 마을의 변천사가

자연스럽게 그려집니다. 마을 어르신들의 삶

은 마을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머님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희를 많이 챙

겨주시고 도와주십니다. 마을 부녀자들의 오

래된 손맛을 기록하는 ‘손맛아카이브’ 프로젝

트의 첫 타자도 이정자 할머님이셨어요. 집안

의 큰살림을 맡으셔서 음식 솜씨가 굉장히 좋

으십니다. 추석 즈음에는 저희가 졸라 최근 몇

년동안 힘들어서 안하셨던 기정떡 만들기를

가르쳐주셨어요. 할머님뿐만 아니라 마을 대

부분 어르신들이 명절마다 집에서 떡과 한과

등을 다 손수 만들어 드셨다는데, 이제는 힘들

어서 사다가 드신다고 해요. 연세도 있으시거

니와 자식들은 훌쩍 커서 별식이 귀하던 예전

만큼 많이 먹지 않고 또 깊은 손맛을 잘 모르

는 손주녀석들에게는 시중에 파는 과자가 더

입에 맞겠지요. 간만에 직접 반죽을 하고 숙성

시켜 가마솥에서 익혀내니 너무나 예쁘고 맛

있는 떡이 되더라고요. 30년 넘게 지켜온 할머

님의 손맛이 기가 막혔습니다.

이정자 할머님은 저희들을 챙겨주시기만 하

는게 아니라, 저희의 활동을 소중하게 생각해

주시고 다른 분들께 이야기를 많이 해주세요.

덕분에 다른 할머니들과도 더 가깝게 만날 수

있었어요. 늦가을에는 할머니댁에 품앗이를

나가 수수밭을 베었습니다. 몇백평인지도 모

르게 넓은 수수밭을 함께 일하면서 웃고 떠들

고 먹고 나니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요즘에는

서울에 있을 때에도 종종 전화 통화를 합니다.

그냥 잘 있냐고 안부 전화하시고 저희도 잘 계

시는지 궁금해서 전화를 하고요. 어찌보면 마

을분들과 활동이나 사업으로 만나긴 하지만

관계는 정으로 만들어집니다. 우리는 마을과

정을 맺어가고 있습니다.

이분들 외에도 늘 먹을 것을 챙겨주시고 학교

에 일이 있으면 와서 도와주시는 마을 분들이

많이 계셔요. 너무 많은 분들이라 일일이 말하

기가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마을분들이 아직

은 우리 활동에 대한 이해와 공감보다는 좋은

일 하는 좋은 청년들이라며 잘해주시고 참여

해주시는 것이에요. 하지만 그간 나온 마을잡

지 등을 보면서 우리 마을에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스러워하시고 외지에 나간

자녀들에게도 이야기를 전하십니다.

그간 활동을 하면서 모든 일의 중심은 사람들

이고, 관계맺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진

정성 있는 꾸준한 만남으로 천천히 맺어가는

우리들의 관계는 예마네 마을이야기학교의

활동을 ‘너희의 일’이 아닌 ‘우리 마을의 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느린 걸음이지만 마을분

들과 서로 닮아가다보면 한걸음 한걸음 조금

씩 나아지겠지요.

Page 18: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34 35

전북 완주군 삼기리 마을

지역문화자원연구회

나는 삼기리 생활문화공동체 사업에서 마을

신문 제작을 맡고 있습니다. 각 동아리의 일원

들이 활동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마을신

문을 발행하는 것이 주요업무입니다. 마을신

문 1호를 막 발간하고 사진을 정리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문화의 집으로부터 한 통

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이번 마을신문 1호

내용 중 빠진 부분이 있다며 삼기리 주민으로

부터 전화가 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보통 마

을신문의 글을 자세하게 읽는 분들은 많이 계

시나, 그 내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는

드문 편입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는 일도 아

니었던 터라, 궁금한 마음에 얼른 전화를 걸었

습니다. 그 분의 말씀은 이러했습니다. 이번

마을신문의 삼기리 봉림사지 유물을 소개하

는 부분은 석탑과 석등만이 언급되었는데, 사

실은 불상까지 포함해야 옳은 것이라고, 봉림

삼기리의보물지기

2년차

사지의 유물은 세 가지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과연 이분의 정체는 뭐지’라는 생각에 곧바로

인터뷰 날짜를 잡았습니다. 처음에는 향토사

학자 혹은 전통문화원에 관련된 분이거나 관

공서 직원 일 수도 있겠다란 생각을 했습니다.

일반 주민이 문화재에 관심을 갖고 전문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일은 드물고 힘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터뷰 날,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이 분은 바로 삼기리에

서 태어나 평범하게 삶을 살아온 상삼마을의

주민, 오석철 씨였습니다.

그는 봉림사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전

문가였습니다. 그리고 봉림사지에 있었던 세

가지 보물들을 원래 있었던 삼기리에 되돌리

고 싶어 했습니다. 봉림사지란 삼기초등학교

뒤편 봉림산 기슭에 있었던 절터입니다. 오석

철 씨는 어린 시절부터 이 절터에서 놀며 생활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 어른들께 들었

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것

은 일제 강점기, 군산의 한 일본인 지주가 자

신의 집 정원을 꾸미기 위해 봉림사지의 석탑

과 석등을 옮겼으며 불상은 전북대박물관으

로 옮겨졌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유물들을 제 위치로 되돌려 놓아야 한

다는 강력한 의무감에 불타기 시작했다고 합

니다. 이 불타는 의무감은 직접 행동으로 이

어졌습니다. 군산에 직접 가서 석탑과 석등을

조사했으며 사진을 찍고 전북대 박물관에 있

는 불상을 찾아가 자료들을 수집하고 신문 기

사들을 스크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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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37

전남 보성군 가마실 마을

보성문화원

가마실 마을에는 재미있는 위원장님이 한분

계십니다. 가끔씩 마을 사람들에게 퀴즈를 내

고 상품을 증정하는가 하면, 자신의 집을 카

페로 만드시겠다고 한참 집을 꾸미시기도 했

습니다. 사람들이 오고가며 차도 마시고 구경

도 하고, 사진도 찍기 위함이라나요, 그뿐만

이 아닙니다. 마을에 행여 축제라도 있는 날

엔 손에 장갑을 벗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엄

청 바쁘신 분인데 일을 하다가도 마을에 풍물

패가 들어서면 바로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가 멋

진 춤판을 선보이시기도 합니다. 위원장님의

익살스러운 춤을 보고 있노라면 마을 사람들

모두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더할 나위

없는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됩니다. 이 재미난

위원장님은 사실 2002년부터 2011년까지 가

마실 마을의 이장님이기도 하신 손상남 위원

장님이십니다.

이런 재미있는 분이 가마실 마을의 이장이셨

다니, 가마실 마을이 어떤 마을인지 점점 궁금

해집니다. 사람들의 웃음이 끊이지 않는 곳,

늘 유쾌함이 묻어 나오는 곳, 그곳은 바로 가

마실 마을이 아닐까요?

가마실 마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손상님 위원장님

가마실 마을은 꽤 역사가 깊은 마을입니다. 그

리고 오랜 역사를 지닌 만큼 마을 이름의 변화

사도 다양합니다. 백제시대 때는 몰골(沒骨)

이라는 지명으로 불려졌고 그 이후에는 마을

형세가 가마솥과 같다하여 가곡리(可谷里)골

로 불리워졌다고 합니다. 그러다 지금 사용되

는 가마실(加馬室)은 일제강점기에 개칭된 명

칭이라는군요. 또 가마실 마을의 응달 동쪽 산

등에는 청학정이라는 활을 쏘는 곳도 있었다

고 합니다. 이곳은 현재 가마실 마을 뒷등성이

로 이설하여 보성의 국궁 대회장소로 널리 알

려져 있다고 해요. 20년 전에는 주민들로 구

성된 마을 풍물패가 있어, 설날이나 추석날에

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마당 밟기를 하였다

고도 합니다. 역시나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고,

훈훈한 온기가 느껴지는 마을입니다.

하지만, 최근의 가마실 마을은 옛 모습과는 조

금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현대화의

영향으로 마을은 아파트와 일반가옥에 거주

하는 그룹으로 나눠지게 되었구요. 그 사이에

가마솥의 온기가묻어나다

2년차

정적인 절차를 통해 이들을 제자리로 가져 올

수 있는지도 살펴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런 정성에도 불구하고, 그가 들어야 했던 말

은 행정적으로 어렵다는 답변이었습니다. 군

산시가 이미 석탑과 석등을 문화재청에 등록

하여 되돌리는 것은 힘들다는 것입니다. 반면,

전북대 박물관에 있는 불상은 완주군에서 관

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면 돌려주겠다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완주군에 문의

하였지만, 군내 박물관이나 문화재 관리시설

이 미약하여 당장은 어렵고 계획을 세우겠다

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 계획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습

니다. 그는 다시 완주지역경제순환센터(삼기

초등학교)에라도 놓자고 완주군에 제안을 하

였지요. 하지만 역시 돌아온 답변은 관리가 힘

들어서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문화재를 관리하고 이동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제자리로 되돌리고 싶은

그의 뜻도 이해되지만, 여러 가지 행정적인 어

려움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으로 건너

간 우리 문화재를 되찾는 노력을 하듯, 오석철

씨의 노력이 헛된 것만은 아니지 않을련지요?

우리 마을에 있었던 문화재를 되찾기 위한 오

석철씨의 노력은 오늘도 계속 진행중입니다.

우리는 그를 이제 우리 마을의 보물지기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의 바람대로 봉림사지의

세 가지 유물이 제자리로 돌아오길, 그 날이

하루빨리 찾아오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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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39

서 마을 사람들은 점점 더 단절되면서 많은 갈

등들이 생겨났습니다. 손상남 위원장님은 이

런 마을의 모습을 참 안타깝게 느끼셨던 것 같

습니다. 그리고 그 안타까움은 직접 생문공 사

업에 열정적으로 뛰어들게 된 계기가 되었습

니다. 마을 사람들의 화합과 생활문화 소통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생문공 사업이 필요

하다고 생각하신거죠. 운영할 문화예술 프로

그램은 보성문화원과 함께 운영위원들과 협

의를 통해 정해졌습니다. 가마실 마을의 아파

트 주민, 노인, 은퇴자, 그리고 지역토착민 간

의 원활한 소통과 마을의 전통적인 문화가치

를 함께 인식하고 발굴해 나가는 마을공동체

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 주요 취지로 자리 잡

았습니다.

생문공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손 위

원장님은 각종 프로그램에 직접 참여하며 원

활한 진행이 될 수 있도록 보조자의 역할을 해

주셨습니다. 또 접시 및 도자기, 가방 만들기

등 사람들이 직접 참여하여 작품을 만드는 프

로그램을 할 땐 마을 사람 모두가 빠짐없이 참

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고, 강사진 옆에서 업

무를 보조하는 등 프로그램 진행을 직접 도와

주기도 하십니다. 게다가 기사쓰기, 마을 사진

찍기 등 마을 사람들에게 낯선 프로그램은 먼

저 직접 시범을 보여주시며 사람들이 편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해 주셨습니다. 여러 프

로그램들이 운영되며, 단절되었던 마을은 조

금씩 합쳐지기 시작했고 사람들 역시 조금씩

거리가 좁혀졌습니다.

최근, 마을회관 옆 삭막했던 공터에는 가마실

문화관이 들어섰습니다. 이 문화관은 마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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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서구 금호 1동

빛고을문화예술봉사단

사실,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외부에 드러

내는 일은 쉽지만은 않은 일이죠, 특히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여기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가족사를 드러내는 일은 별로 달가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게다 그 이야기를 글로

쓰다니요. 글쓰기가 익숙하지 않은 일반 사람

들에게는 더욱 낯설고 두려운 작업이기도 할

겁니다. 어쩜 우리 장은하씨도 처음엔 이런 두

려움을 가지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던

중 다른 분들이 이야기를 털어 놓는 것을 보

고 장은하씨의 말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

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을 이야기를 담아내는

과정에서 장은하씨의 이야기가 신이 났는지,

다른 분들도 덩달아 신을 내며 매우 적극적으

로 참여하는 분위기가 연출되었습니다. 장은

하씨는 어떤 이야기들로 사람들을 끌어들인

것일까요?

장은하 님의 이야기

“뽑히지 않는 끌텅”

우리 집에는 꿈쩍도 않는 끌텅 셋이 자리 잡

고 있다.

첫 번째 끌텅은 서른일곱, 두 번째는 서른다

섯, 세 번째는 서른둘이다. 첫 번째 끌텅은 착

하고 알뜰하고 순수하다. 다만 낯을 많이 가린

다. 술도 안 먹고 담배도 안 피우고 누가 보아

도 일등 신랑감일 것 같은데 왜 장가를 안 가

는 걸까? 아니 왜 못가는 걸까? 하기야 고슴

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게 보인다는데 내 눈에

만 그렇게 보일런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요즘

은 늦게 혼인하는 젊은이들이 많다지만 혼자

지내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출근할 때

도 뒤통수를 보면 짝이 없는 외기러기처럼 마

냥 쓸쓸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가 보다. 젊

은 아가씨를 보면 우리 며느리면 얼마나 좋을

까 싶은 마음에 한숨을 쉴 때가 한두 번이 아

니다. 모임에라도 가면 여기저기서 아들며느

리, 손자손녀 자랑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야

단이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하고 있다

가 돌아오곤 한다. 집에 돌아와 애들 아빠에게

“여보, 오늘 모임에 갔는데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오” 하니까 “그런 모임에 뭐하려고 가누”

우리가 만든마을 이야기

2년차

람들이 직접 참여하여 문화관 벽화, 현판, 화

단을 조성하는 등 힘을 모은 결실이었습니다.

그 결실의 공간에서 사람들은 함께 모여 당구

도 치고, 개인작품을 전시하고 관람하는 등 즐

겁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 가마실 마을은 옛 모습을 되찾아 갑니다.

마을공동체의식이 되살아나면서 서로 안부를

묻고, 회관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맛

있는 음식도 같이 만들어봅니다. 훈훈한 정이

넘치는 가마실 마을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손상남 위원장님을 비롯한 이종순,

윤화현, 문창의(현 가마실 이장), 김일현, 문

옥출, 주양자, 이순희 등 여러 문화반장님들의

아낌없는 노력도 함께 담겨져 있습니다.

최근에는 KBS 광주방송 ‘필통’, KBC ‘미디어

세상’, 각종 지역 신문 등 다양한 매체에 가마

실 마을 이야기가 많이 소개되었습니다.

우리 가마실 마을의 이야기가 다른 마을에도

새로운 자극이 되어, 긍정적인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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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43

한다. “그러면 애들 결혼 못 보내면 모임에도

못가겠네요” 하고 대꾸하니까 “애들 결혼 못

시키고 지금까지 뭐했는데” 하는 핀잔이 돌아

온다. 그래서 내가 다시 “어찌 우리 마음대로

억지로 시킬 수가 있나요. 본인들이 꿈쩍도 안

하는데” 하면 “그건 그렇지” 하고 금세 수긍

한다. 아들직장 동료들도 이렇게 놀린단다. 여

자도 없고 술도 안 먹고 담배도 안 피우고 세

상을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한단다. 그래서 너

는 무어라 대답했냐고 물으면 “가족끼리 영화

도 보고 구경도 가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얼마

나 좋은데” 라고 말했단다. 그 소리를 들으니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아 억장이 무너지는 소

리가 들린다. 그러는 아들도 속은 좋지 않은지

요새는 입맛도 없다며 부쩍 짜증을 부린다. 그

러면 더 미워진다.

둘째 끌텅은 딸이지만 우리집의 기둥이다. 좋

은 회사에 들어가 착실하게 오래 다니면서 월

급도 많이 받는다. 우리 애들은 한 마디로 온

실 속의 화초랄까. 너무 착하고 세상에 때 묻

지 않은 순수한 애들이다. 그래서 아무한테나

보내기가 어려운 것 같다. 회사와 집 밖에 모

른다. 돌아다니기도 하고 놀기도 해서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할 텐데. 그래도 마음이 따뜻하고

이해심이 많은 큰 딸은 집에 돈 대는 일은 도

맡아 돕고 있다.

셋째 끌텅은 애교쟁이! 싹싹하고 애교가 넘치

는 막내는 언니오빠가 가야 저도 가려나. 그래

도 막내는 제일 이성적으로 말하는 것 같아 조

금은 마음이 놓인다.

이것들을 도끼로라도 찍어내야 할까 보다. 무

슨 도끼? 구박도끼! 아니면 아아. 생각도 안

난다. 에라 모르겠다. 자기네들 인생 자기들이

알아서 할 테지. 아아, 몰라, 나는 몰라.

솔직합니다. 그리고 장성한 자녀를 둔 부모님

세대라면 누구나 공감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장은하 씨의 글은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었

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 외에도 5분의 글

이 이야기 소재로 발굴되었는데요. 최종적으

로는 총 9편의 수필 작품이 창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창작된 수필은 최종 성과발표회에 수

필낭송으로 이어졌으며, 수필 낭송 때는 참석

한 많은 분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동네에는 장은하씨처럼 말

을 하고 싶고 함께 주변사람들과 공유하고 싶

은데 그렇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2013년

에는 우리는 이런 분들의 이야기를 좀 더 다양

하게 담아내기 위해 ‘천에 얼굴을 가진 금호1

동’라는 이야기로 수필책을 편찬할 계획을 가

지고 있습니다.

저희는 수필 만들기 작업 외에도 아이들이 바

라보는 금호1동의 모습에 대한 내용을 그려내

는 ‘동네아이들 다모여라’와 마을 사람들이 금

호1동을 소재로 하여 사진을 찍고 촬영을 해

서 금호 1동 문화잡지를 만들어내는 작업도

함께 진행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작업에는 하나의 공통점

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우리 마을

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것입니다. 장은하 씨처

럼 우리 마을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을만의 사

진을 찍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마을만의 이야기를 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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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금정구 남산동

금샘마을공동체

때는 바야흐로 2012년 7월 복날을 전후한 어

느 날, 여느 해처럼 아빠들은 양산의 작은 계

곡에 모여 솥단지를 걸었습니다. 수 년째 복

날을 맞이하면 우리 마을 아빠들은 원기충전

을 위해 병식이형의 누님집 근처에 위치한 이

계곡에 솥단지를 겁니다. 점심부터 출발한 선

발대가 고기를 삶고 국을 끓이고 양념을 만

들기 시작하면, 서너시경 아빠들이 한 두명씩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작년에는 아이들과 함

께 텐트를 치며 1박을 보냈는데, 올해는 우리

들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아빠들만 모이기

로 했습니다.

아빠 밴드 이야기가 나오건 그 즈음입니다. 생

활문화공동체 사업을 시작하면서 아빠들도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대뜸 아빠들이 밴드를 하나

만들자고 했습니다. 실무를 맡고 있는 나로서

는 도대체 믿음이 가질 않아 수 차례 확인을

해야 했습니다. ‘끝까지 꾸준하게 할 수 있겠

느냐?, 진짜로 할 생각이냐?, 누구누구 참여

할 생각이냐?’등의 질문을 던졌지만 구체적인

확답은 없었습니다. 이날 저녁에는 싱어를 뽑

아야 한다며 계곡이 떠나갈 정도로 돌아가며

노래를 불러댔습니다. 하지만 싱어를 뽑을 심

사위원도 없다보니, 정작 싱어는 결정조차 하

지 못했지요.

그 후, 나는 우선 말이 나왔던 일이었고, 그날

모였던 아빠들 중 몇 명이라도 참가는 하겠지

싶어 마을에 현수막을 몇 개 붙였습니다.

‘아빠밴드 단원모집’.

며칠 후, 몇 명의 아빠들에게 연락이 왔습니

다. 주민센터에서 드럼을 조금 배우고 있는데

참여할 수 있는지, 초보인데도 참여할 수 있는

지 등 문의사항들도 꽤 있었습니다. 예상외로

적극적인 반응에 조금 놀랬는데, 지금 돌이켜

보니 음악이라는 것이 40~50대 남성들의 로

망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 모임을 하는 날, 8명의 아빠들이 모였습니

다. 우리는 매주 월요일 부산대학교 앞 고양이

레이블 합주실에서 연습을 하기로 했습니다.

대학생 선생님 한분도 모셨습니다. 40~50대

학생들과 대학생 선생님. 선생님이 학생들에

게 선생님이라 부르는 야릇한 분위기 속에 연

아빠 밴드를소개합니다

1년차

습이 시작되었습니다. 매주 우리는 꼬박꼬박

합주실에 모였고, 아빠들은 스스로 연습용 기

타와 악보도 구해가며 연습에 열을 올리기 시

작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드

럼을 처음 배우던 길용이 형은 남몰래 학원까

지 끊었다고 합니다. ‘어쩐지 실력이 빨리 늘

더라니......’

처음 우리는 악기를 좀 만져본 메이저 그룹과

이제 처음 시작하는 마이너 그룹으로 나눠 연

습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기초를 몇 주 배우

다, 노래를 한곡 정하고 연습하기로 합니다.

이 시기는 ‘슈퍼스타 남산동’ 프로그램이 기획

되고 시작되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이 프로그

램은 예선과 본선에 걸쳐 총 4회로 진행이 되

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습니다. 나는 당장

이 프로그램 홍보 팜플렛을 아빠들에게 보여

주었고, 우리가 최소한 10월 마지막 예선에는

출전을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지요.

모두들 흔쾌히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때까

지 노래 한곡을 열심히 연습해 보기로 하였습

니다. 우선 두 그룹의 노래 선곡이 진행되었습

니다. 메이저 그룹은 ‘나 어떻게’, 마이너 그룹

은 ‘골목길’을 선곡했고 연습이 진행되었어요.

하지만 몇 주가 지나도, 노래 선곡이 문제였는

지 ‘나 어떻게’를 선택한 메이저 그룹이 영 진

도가 나가질 않았습니다. 또,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아빠들이었기에, 잦은 야근과 출장으로

연습에 빠지는 날도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우

리는 두 그룹을 합쳐 ‘골목길’ 연주팀을 재결

Page 24: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46 47

성 하였고 집중적으로 연습을 하게 됩니다. 팀

의 인원도 줄었습니다. 신디를 치시던 한 분은

개인 사정으로 중도에 하차하였고, 최종적으

로 팀의 멤버는 모두 총 네 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매주 한번이 아니라 틈만

나면 모여 연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쉬운 곡이라 해도 노래 한 곡을 제대로 완성하

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깐요. 그리고 다가

온 ‘슈퍼스타 남산동’ 예선 날. 우리는 기타 좀

치던 정유철 형님을 리더로 하여 남몰래 학원

까지 다니며 드럼을 익힌 길용이 형님, 세컨

기타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싱어를 담당한

병식이 형님, 그리고 베이스를 담당한 나 이렇

게 네 명으로 이루어진 팀으로 우리의 노래를

연주했습니다. 하루 전까지 실수를 연발하던

길용이 형님은 실수 하나 없이 곡을 연주해냈

고 다른 멤버들도 그동안 연습했던 기량을 맘

껏 내뿜었습니다. 모두들 흥에 겨운 시간이었

습니다. 연주가 끝나고 우리는 아주 흡족해 하

며 결과를 기다렸습니다. 모두 예선통과는 자

신하였는데, 결과는?...... 안타깝게도 예선탈

락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날이 마지막 예선전

이라 실력자들이 많이 몰린 탓이 아니었나 싶

습니다. 물론 저희의 연주가 조금 불안정하기

도 했습니다.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아빠밴

드로 연주를 한 그 경험 자체가 즐거운 일이었

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이 마을 사람들에

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 주기도 하였는데요. 모

두들 감탄하며 실력이 상당하다고 칭찬해주

셨고, 베이스 기타가 박자를 놓쳤다고, 싱어

가 노래를 잘 못불렀다고 나름의 평가도 해주

셨습니다. 그리고 이 날, 마을의 아빠들은 싱

어를 다시 뽑아야 한다는 핑계로, 노래방에 가

서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고 새벽녘에야 모두

귀가를 하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 후, 한동안 우리 아빠밴드는 마을의 큰 이

야기 거리가 되었습니다. 부러워하는 아빠들

도 생겨났습니다.

아빠 밴드는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

니다. 우선, ‘슈퍼스타 남산동’ 본선에 축하공

연을 하기로 합니다. 초청을 받은 거냐구요?

 물론 아닙니다. 우리의 자청으로 열린 자청

공연이었지요. 하지만 예전보다 늘어난 실력

으로 노래를 두곡이나 연주했습니다. 이 외에

도 마을의 각종 행사와 송년회에 출연하는 등

아빠밴드의 공연은 계속 늘어갔습니다. 늘 마

을 행사에서 무대를 만들거나 청소를 하고, 현

수막을 설치하는 등의 굳은 일만 맡아 오던 아

빠들이, 이제는 무대에서 연주하는 멋진 뮤지

션이 되었습니다. 아빠밴드의 아빠들도 이런

자신들의 모습에 아주 흥이 났습니다.

요즘에도 우리는 매주 월요일이면 새로 마련

한 동네 합주실에 연습을 핑계로 모여듭니다.

악기를 다루는 아빠들은 8시, 술 한잔 하려는

아빠들은 9시. 그리고 그렇게 모인 아빠들은

함께 노래를 부르며 실력을 뽐내기도 합니다.

늘 직장에 치여 있던, 가족들에게도 소외받던

아빠들이 이제는 함께 모여 노래를 부르고 밴

드를 만들어 그들만의 재미를 새롭게 만들어

갑니다. 남산동 아빠들만의 아지트가 생겨난

것이지요.

아빠밴드를 지원해 준 생활문화공동체 1년 사

업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아빠밴드

는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시작입니다.

아, 오늘부터는 아빠밴드 2기 단원모집이 시

작된다고 합니다. 관심 있는 아빠들은 어서 빨

리 신청하세요.!

아빠밴드 파이팅.!

Page 25: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48 49

인천 남구 우각로

우각로 문화마을

우리를 찾아온 사람

지난 해 늦은 계절, 이 마을에 사는 한 분이

자치센터 직원과 함께 우리 사무처로 찾아왔

습니다. 우리 사무처는 각계 예술인들 단체가

연합하여 한 건물 안에 사무처를 두고 있는 곳

입니다. 보통은 예술에 관련된 사람들 혹은 그

외 특별한 용무가 있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

이죠. 일반인들이 발걸음을 하기엔 낯설고 어

색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를 찾아온

이 분은 전혀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짝이는 눈빛으로 이들은 내게 마을

의 빈 공간에 예술인들이 들어와 직접 작업을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 하나를 했습니다. 예술

인들도, 마을도 좀 더 활기찬 분위기가 되지

않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방문 이후, 우리는 함께 활동하고 있던

예술인들에게 그들이 다녀간 사정을 이야기

를 했습니다.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는 방

안을 생각하며, 예술인들과 함께 마을 현장 답

사를 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우각로 일대는

오랜 세월의 흔적들이 군데군데 스며들어 있

었습니다. 그리고 저마다의 이야기가 곳곳에

숨겨져 있었어요. 우리는 이 매력적인 공간에

급속도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곳

이 가진 매력을 더욱 살리고 의미 있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들이 막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추억의 장소, 우각로

인천광역시 남구의 우각로 109번지 일대는

1900년 중후반의 건축물이 존재하는 곳입니

다. 유난히 좁은 골목길과 낡고 오래된 집들을

보고 있으면 지난 시절이 떠오르는 추억의 장

소이기도 합니다. 한편, 이 지역은 어르신들이

전체 가구에 20%가 넘어 경제적 활동인구가

적은 곳이며 신규 인구 유입이 거의 없는 곳이

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곳은 다른 지역에 비

해 상대적으로 토박이들이 많고, 특히 독거노

인과 저소득층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003년부터 진행된 장기간의 재개발

사업으로 우각로 일대는 빈 집이 증가하기 시

작했어요. 어두침침한 주변 환경으로 우범화

와 방화 등이 계속적으로 발생하면서 마을은

점점 더 활기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어

스름한 저녁이면 거리에서 사람들을 좀처럼

볼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우각로의 연가이버1년차

우선 나와 예술인들은 서로의 네트워크를 활

용하여 한 단체를 구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리고 본격적으로 지역문화활동을 개시하기

위해 각자의 분야에서 빈집을 활용하여 개인

작업실(창작실)을 꾸미기 시작했죠. 또, 이런

작업들이 수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주민자치센터 직원과도 함께 계획을

세워나갔습니다.

하지만 시작은 그리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우

선 지역재개발 조합 측에서 예술인들이 재개

발 지역에 들어가 작업공간을 만드는 것이 재

개발에 지장이 있다고 예술인들의 전원 철수

를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지자체와 주민자치

센터에는 이런 상황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셨

어요. 예술인들의 창작활동은 기초 작업을 하

기도 전에 이런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작업에 참여한 예술인들은 이

미 이 지역이 재개발 지역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한 갈등들도 어느 정도 예상

하고 있었던 터라 크게 동요하진 않았습니다.

그들은 조용히 서로의 활동을 제어하며 재개

발 조합과의 갈등이 잠재워질 때까지 기다렸

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작업실을 꾸미며, 작

업들을 묵묵히 해 나가기 위해 준비하기 시작

했죠. 또 마을 사람들에게 좀 더 다가가기 위

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런 노력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과 자연

스레 소통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

리의 이야기를 먼저 하기보다는 사람들의 질

문과 이야기에 먼저 귀 귀울였습니다. 커피 한

Page 26: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50 51    

잔을 나누며 서로 이야기를 하며 자연스레 친

구가 되어갔습니다. 그리고 늘 휑하게 비어있

던 빈집들이 예술인들의 작업실로 하나씩 채

워지며 마을에는 좀 더 많은 이웃들이 생겨났

습니다. 이렇게 마을 사람들과의 소통이 조금

씩 진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주변을 돌봐주며 빈곳을 함께 채워가며, 여기

저기 따뜻한 정들이 오고 가기 시작한 것이죠.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늘 예술인들 주위를 맴

돌며 떠나지 않는 한 분이 있었습니다.

혹, 지난 해 우리를 찾아왔다던 그 분을 기억

하시나요?

네. 바로 연태성 님이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그를 탐탁치않게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처음과 끝이 같아야 하는데

초기에 나를 찾아와 예술인들과의 작업을 제

안했던 그는 몇 달이 지나도록 도움은 커녕 저

와 예술인을 대하는 태도도 냉랭하기만 했습

니다. 만나면 만날수록 검게 그을린 그의 딱딱

하고도 굳은 얼굴, 늘 굳게 닫혀 있는 입을 보

고 있으면 농담은 아예 통하지도 않을 것 같았

습니다. 그는 예술인들의 활동을 무심히 지켜

만 보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반짝이던 눈빛으

로 우리에게 제안을 건넸던 그는 없는 것 같았

습니다. 도대체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도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니, 그의

입장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초기 재개발 조합

측과의 갈등으로 예술인들은 마을을 위한 활

동보다는 개인 작업공간을 꾸미는데 그쳐있

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몇 주 혹은 몇 달 동안

예술인들이 작업실로 꾸민 빈 집에서는 수많

은 쓰레기들이 나왔고 이 쓰레기들은 한동안

골목에 산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마을의 변화

를 기대했던 그로서는 이런 상황들을 바라보

며 아쉬움과 우려감이 컸을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예술인들의 활동이 마

을 사람들에게 오히려 또 다른 피해를 주지 않

을까란 노파심도 생겼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계속 우리의 주위를 맴돌았습니다. 늘 우리의

활동을 관찰하셨고,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기

다려온 것이었죠.

그는 더 이상 우리 주위를 맴돌지 않습니다.

이제는 예술인들의 고충을 함께 들어주고, 때

로는 그들과 함께 생활하는 이 지역의 또 다른

예술인이 되었습니다. 가끔씩은 지역의 어른

으로써 활동이 뜸한 예술인들에게 일침을 놓

기도 하시고, 예술인들의 작업실을 함께 꾸며

주며 우리와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젠 우

리는 무슨 일이 생기면, 늘 연태성 님을 찾습

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늘 우리 곁을 든든히

지켜주시는 연태성 님, 우리는 이제 그를 우각

로의 연가이버라 부릅니다.

연가이버,

당신이 있기에 오늘도 우리 우각로 문화

마을은 든든합니다.

충남 아산시 종곡리 마을

아산 YMCA

며칠 전, 우리는 마을을 돌며 마을사진과 그

림 대회 작품을 위해 어르신들께 스케치북을

나눠드렸습니다. 다들 ‘그려보지 뭐,’라고 말

씀은 하셨지만 우리 역시 큰 기대는 하지 않았

습니다. 며칠 후, 작품 접수를 위해 우리는 다

시 스케치북을 수거하러 다니기 시작했습니

다. 우선 먼저 찾아간 집은 바로 우리 뒷집의

어르신 댁이었습니다. 그림을 그리셨냐고 말

을 건네봅니다.

“어르신, 그림 그리셨어요?”

“그리긴 그렸는데......”

어르신께서는 말씀을 하시다 말고, 집으로 들

어가서 엊그제 나눠드린 스케치북을 들고 나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

셨죠. 스케치북을 받아 넘기는 순간 우리는 깜

짝 놀랐습니다. 한 장이 아니라 자그마치 7장

의 그림들이 있었고, 각각의 특징들이 그림들

이 우리 눈앞에서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거 다 어머니가 그리신 거예요? 보통

솜씨가 아니신데요?”

“에이, 그냥 그리라고 해서 그려봤어!”

마침 옆에 계셨던 아저씨께 여쭤보았습니다.

“아니, 어르신! 아주머니가 그림을 이렇게 잘

그리시는 줄 아셨어요?”

“글쎄, 나도 첨 봤어. 며칠 동안 밤에 불을 늦

게까지 켜놓고 있길래 뭐하나 했더니 저걸 그

렸나봐. 스케치북 보고서 애들 색깔 칠하는 거

그거 테두리 있는데다가 색칠만 했냐고 그랬

지. 그랬더니 아니라는 거야. 첨엔 안 믿었어.

그랬더니 또 그려서 보여주는 거야~, 참 나!.

내 평생 같이 살았어도 스케치북에 그림 그린

걸 처음 봤는데 이런 재주가 있는 줄 몰랐네

그려. 나한테, 그리고 이런 시골로 시집와서

썩기 아까운 재주를 가졌어.”

아저씨께서는 그 동안 아내의 재능을 알아보

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잔뜩

묻은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그러면서 또 말

씀하셨죠.

우리의 재발견1년차

Page 27: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52 53

“우리 큰 딸이 어려서부터 그림을 화가 뺨치

게 잘 그렸는데, 이제 보니 엄마를 닮아서 그

랬나봐, 그땐 그걸 꿈에도 몰랐으니......”

우리 마을에는 이렇게 자신의 숨은 재주를 발

견하면서 새롭게 자신을 재발견한 분들이 꽤

계십니다. 생활문화공동체 지원사업들로 마

을 분들의 숨은 재능을 소중한 삶의 지혜를 밖

으로 꺼내게 된 것이 그 계기가 된 것이라 볼

수 있지요. 참 반갑고도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특히나 김화자씨의 재발견은 가장 큰 성과(?)

라고 생각합니다. 사업 프로그램에 참여하시

면서 그녀는 잊고 지냈던 자신의 재능을 발견

하고, 서먹했던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도 상당

히 호전되었습니다. 그리고 프로그램 중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풍물강습이었습니다.

4월쯤, 마을 부녀회에 난타 같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강습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어떤 한 분이

제안한 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 마을에서는 풍

물강습이 진행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참여

해주셨는데 이 중에는 바로 김화자씨도 계셨

었죠. 신청을 받는 날, 장구를 둘러메고 본인

도 함께 하고 싶다고 오셔서 많은 분들이 놀랬

습니다. 사실, 그 당시 김회자씨는 남편분이

마을 분들과 사이가 아주 원활한 편이 아니라,

본인도 마을 사람들과 잘 섞이지 못하는 상황

이셨어요. 같은 여자들끼리도 잘 섞이지 못하

셨죠. 그런 그녀가 풍물을 함께 하시겠다고 오

신거였죠. 처음에는 서투른 장단과 튀는 언행,

또 다른 사람의 장단과도 잘 어울리지 못해 눈

살을 찌푸리는 일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하지

만 꾸준한 풍물 강습을 통해 조금씩 이런 일들

은 줄어들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눈에 띄게

좋아진 건 풍물 실력이 아니라 바로 마을 사람

들과 김화자씨 간의 관계였습니다. 특히나 특

별전수 합숙 때, 그녀는 자신의 고된 시집살이

와 남편에 대한 불만들을 토로하며 자신의 이

야기를 풀어내면서 마을 사람들과 좀 더 가까

워졌습니다. 자주 만나 이야기를 하고, 듣다

보니 서로를 좀 더 이해하게 된 것이었죠. 또,

김화자씨는 위의 일화에서도 보듯 그림에 남

다른 소질을 갖고 계셨습니다. 마을 그림대회

때 출품한 그녀의 작품은 많은 마을 사람들에

게 갈채를 받았습니다. 그녀의 그림은 생동감

넘치는 동물 묘사와 배경 표현이 아주 일품이

었어요. 사람들은 연발 감탄사를 내뿜었고, 자

신들의 그림과 그녀의 그림을 비교하며 자극

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마을 축제 때는 대전

KBS와 대전MBC 등의 보도를 통해 그녀의 그

림이 더욱 클로즈업 되었습니다. 작은 참여들

이 큰 변화를 이끌어 낸 놀라운 순간들이었죠.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김화자씨가 탄

생한 순간들이기도 했어요. 하루는 그녀가 우

리에게 잊고 있었던 어린시절 추억을 다시 기

억했다며 그 추억을 들려주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께서는 내게 종종 이런

말씀을 하시곤 했어. ‘화자야, 그림 그리는 것

만큼 열심히 공부도 좀 해 봐. 그러면 참 잘 할

텐테’ 라구.”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학생이었던거죠. 그리고 70이 넘은 지금에서

야 다시 그 소질을, 자신을 재발견했습니다.

이건 비단 김화자씨만의 이야기는 아닐 겁니

다. 지금 우리 마을에 살고 계신 많은 어르신

들도 비슷하실 껍니다.

거의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꿈들. 그들은

그 동안 한 가정의 가장으로, 주부로, 엄마로,

아빠로 살아오며 자신의 많은 것들을 잊고 살

았습니다. 가지고 있던 재능조차 잊은 채 말

이죠. 하지만 생문공 사업은 이들의 잊혀졌던

꿈들을 다시 떠올리게 해주었습니다. 숨어 있

던 재능도 일깨워주었지요. 소원했던 사람들

과의 관계도 호전시켜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런 변화들로 우리는 조금 더 삶이 재미있어졌

고, 행복해졌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우리 마을에 제 2,3의 김화자

씨가 나오길 기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을공동체의 활동들로 더 큰

자신을 발견해 나가고 행복하시길 희망해봅

니다.

Page 28: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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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춘천시 효자 1동

춘천시문화재단

생문공 사업에 대해 마을 리더분들에게 사

업설명을 처음하기 시작한 날, 우리는 이 사

업을 마을분들이 흔쾌히 승낙하실꺼라 예상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예상은 완전

히 빗나갔습니다. 마을 분들은 긍정적이기 보

다 오히려 부정적인 입장이 강하셨어요. 그중

에서도 특히 김 위원장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렇게 말씀하셨지요.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업이 어떻게 마을

에 들어올 수가 있어? 이 사업, 마을을 위한

것이긴 한 것이여? 당신들을 위한 사업은 아

니고?.”

우리는 마을분들에게 외부의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외부인이 처음 등장해서 사업을

논하였으니 그리 썩 달갑지만은 않으셨을 겁

니다. 게다 마을분들의 이해를 구하는 노력조

차 하지 않은 채, 흔쾌히 이 사업에 응할꺼라

고 우리는 생각하고 있었으니 큰 실수였지요.

좀 더 시간을 갖고 마을 사람들과 소통을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업의 내용

을 보다 자세히 말씀드리고, 이해되지 않는 부

분들은 다시한번 설명해드리고, 무엇보다 이

사업이 앞으로 우리 마을에 어떤 긍정적인 변

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지에 대해 차근차근 설

명을 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 속에서

처음 우리에게 일침을 가하셨던 김 위원장님

의 마음도 조금씩 열리기 시작하신 듯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김 위원장님의 마음이 긍

정적으로 바뀌게 된 일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바로 선진지 견학으로 수원의 행궁동을 탐방

한 일이었습니다. 이 탐방에서 김 위원장님은

신선한 충격과 효자 1동의 먼 미래를 보신 것

같았어요. 문화예술로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

게 되면서 김 위워장님은 우리의 핵심리더로

변모하게 됩니다.

우리마을 멋쟁이, 김운배 위원장님

김 위원장님의 성함은 김운배 님이십니다. 훤

칠한 키에,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리더십으로

마을의 여러 일을 이끌어 가는 분이시죠. 취미

로는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다니는 멋쟁이시

기도 합니다. 또, 마을을 너무 사랑하는 애정

남이시기도 해요. 가을여행과 송년회에서의

불필요한 음주가무를 줄이고 그 예산으로 마

효자동 낭만골목에서 만난 사람들

1년차 을의 어르신들과 생활이 어려운 가정에 지원

을 하시는 따뜻한 분이기도 합니다. 겉과 속이

꽉 차신 그야말로 멋쟁이 어르신이죠.

하지만 이런 김 위원장님께도 아픈 과거가 있

었다고 합니다. 바로 본인이 처음 마을에 왔을

때 외지인이라 마을 토박이분들과 많은 오해

와 갈등이 있었다고 해요. 그리고 그 갈등으로

참 힘들었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여러 노력으

로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놓으셨고, 지금

의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

지 우리 낭만골목 사업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

으로 변화하신 이후에는 사업 전반에 걸친 지

원과 관심을 아끼지 않고 계십니다. 적극적인

열정으로 좋은 아이디어를 많이 제안해 주기

도 하십니다. 하루는 정례회의 때 이런 말씀

을 하셨습니다.

“난 말이지, 효자1동은 ‘효’를 중시하는 마을

이니깐 향후에 효 체험관을 만들어서 효를 기

르는 공간을 만드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라 생

각해. 그리고 어르신들이 직접 효자손을 만들

어 지역 특화상품으로 팔아 보는 건 어떨까?

경로당에서 고스톱 말고 이런 소일거리를 하

면서 삶의 낙을 즐기시면 얼마나 좋아, 그리고

이렇게 하다보면 나중에는 수익 창출까지 가

는 것 아니겠어?”

이렇듯 김 위원장님은 가슴에 우리 마을을 좀

더 살맛나게 만들려는 열정이 활활 타오르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분과 함께 하

게 되어 저희 역시 기분이 좋고 뿌듯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열정들이 2년, 3년 그리고 다

음세대까지 이어져 웃음꽃과 사람꽃이 피어

나는 효자 마을로 퍼질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준비된 기획자, 준비된 활동가 김성란 관장님

효자동에는 담작은 도서관이 있습니다. 이 곳

은 김성란 관장님이 운영하는 어린이 도서관

인데, 이분은 우리보다 마을에 먼저 들어와 활

동을 하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준비된 기획자

란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 어린이 도서관과

관련하여 이미 많은 일들을 기획하고 실행하

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본인 스

스로 마을 사람들을 위한 일을 만들어 해 나가

려는 분이시죠. 김 관장님의 활약을 잠깐 살펴

보자면, 장터에 효자1동 설화인 ‘반희언 이야

기’를 판소리로 만들어 주민들과 외부인들이

공유하는 공연을 기획했었고, 마지막 장터에

서는 정을 나누면서 끝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는 아이디어에서 ‘돌멩이스프’라는 이야기로

호박죽을 나눠먹는 퍼포먼스까지 준비하셨었

습니다. 적극적인 자세로 마을에 필요한 적절

한 기획을 술술 해내는 모습에 우리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좋

은 귀감이 되셨지요. 아주 가끔은 우리를 당황

하게 만드실 때도 계셨어요. 늘 격려를 해주시

다가도 ‘아니,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마을분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라고

쓴소리도 함께 해 주십니다. 누구보다도 마을

분들을 먼저 챙기시는 분이기도 하시죠. 김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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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님은 어린이 도서관을 운영하면서 효자 1동

사람들과의 이해관계가 높아졌다고 말씀하십

니다. 그리고 본인도 처음에는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처음 담작은 도서

관의 설립 공사 과정에서는 대추나무집 할머

니와의 분쟁도 있었다고 합니다. 분쟁의 내용

인 즉, 담작은 도서관이 들어와 시끄럽고, 공

사로 인해 집의 담이 무너져 내릴 뻔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분쟁은 잘 해결이 되었지

만 여러 가지 문제들로 마을 사람들과 관계가

멀어질 수도 있고, 심한 경우에는 등을 돌리는

상황도 발생하기에 우리에게 따끔한 충고를

해 주시는 것도 늘 잊지 않으셨습니다.

저희는 이런 관장님의 조언 덕분에 놓치고 있

는 부분을 다시 챙길 수 있었고 조심해야 할

부분도 확인 할 수 있었지요. 그리고 김 관장

님은 항상 겸손한 태도로 늘 배우려고 노력

하십니다. 하루는 저희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

어요.

“가끔은 감당이 안 될 때가 있어. 근데 사람과

사람이 모여 같이 일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

면서 활동하면 그게 힘이 되고 좋다는 걸 요즘

들어 다시금 깨달아. 낭만골목팀도 계속 이렇

게 팀을 이끌어 갔으면 좋겠어.”

지금도 김 관장님은 마을의 사람들과 원활한

소통을 자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시간들이 마을의

변화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믿음도 갖고 계십

니다. 마지막으로 김 관장님은 효자마을의 기

획자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웃음이 끊이지

않는 마을로 만들어 가고 싶다고 하셨어요. 김

성란 관장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어요.

우리가 찾은 또 다른 보물, 박제숙 님

김운배 위원장님과 김성란 관장님은 낭만골

목 추진위원회에서 만났지만, 박제숙 통장님

은 우리가 마을을 발로 뛰며 찾은 보물 같은

존재이십니다. 박제숙 통장님, 이 분은 효자

동 토박이로 마을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분

이고 누구보다도 마을을 위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직접 활동으로 실천하고

계신 분이시죠. 사랑의 나눔 도시락 봉사활동

도 그 중 하나이구요. 처음 저희가 마을을 잘

모를 때 마을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

습니다. 사업을 진행 할 때는 자신의 네트워

크를 활용해서 많은 도움을 주시기도 하셨습

니다. 그리고 박통장님말이야 말로 우리 낭만

골목투어 프로그램에 최적의 인재라 생각하

게 되었지요. 낭만골목투어 프로그램은 효자

마을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화 된 지도로 만

들어, 이 지도를 토대로 방문객에게 마을 분들

이 직접 가이드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

그램입니다. 처음에는 본인은 정보만 알려주

겠다고 하셨지만, 마을을 위한 일이라고 말씀

드렸더니 흔쾌히 프로그램 투어 가이드까지

도 수락을 해주셨어요.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

람들의 반응들도 좋았고, 박 통장님 스스로도

마을을 위한 일이니, 앞으로도 언제든 요청만

한다면 가이드를 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훈훈하고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지요.!

마을의 애정이 깊으신 박제숙 통장님은 우리

팀에게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하셨습

니다. “이렇게 큰 사업을 하면서 왜 봉사하는

프로그램은 없어!? 다음에 내가 하는 나눔 도

시락 안할 거면 우리 동네 오지도 마!” 그 메시

지 덕분에 나는 실제로 겨울 내내 함께 봉사하

기로 약속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우리

에게 즐거움과 깨달음을 주는 9통장님! 항상

건강하시고 2년, 3년이 지나도 언제나 마을에

대한 애정을 쏟아내시기를 바랍니다.

낭만은 결국 사람과 사람에게

위에 세 분만 보더라도 효자1동은 아주 활기

차고 힘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낭만골목 ‘숨

은예술찾기’를 시작하면서는 갈등이 생겨났

습니다. 갈등의 원인은 골목에 벽화와 설치물

이 들어오면 재개발하는 큰 방해가 된다는 이

야기였습니다. 사실 이 사업을 시작하기 전,

우리는 춘천시청 지적과를 방문해 재개발 여

부를 먼저 확인했었습니다. 물론 해당사항 없

음으로 표시되어 있었지요. 그리고, 나중에 벽

화나 설치물은 재개발과는 관련이 없고 오히

려 재개발이 시작되면 벽화나 설치물로 인해

보상을 더 받는 이점도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

습니다. 우리는 마을분들과 매일 만나며 말씀

을 드렸지만 처음에 외부에서 이득을 취하려

고 들어왔다는 처음 생각 때문에 쉽지만은 않

았습니다. 겨우겨우 허락한 분들 위주로 작업

을 시작했지만 허락하신 분들도 ‘그냥 하지 말

자. 괜히 했다가 나 주민들한테 따돌림 당해’

라고 말씀하시며 갑자기 말을 바꾸기도 했습

니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작업이 중단되거

나 옮겨지기도 했습니다. 변우식 예술감독님

과 함께 우리는 매일 골목을 뛰어다니며 마

을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했습니

Page 30: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58 59

다. 이런 노력들로 마을 사람들은 조금씩 마

음이 열리기 시작했고, 결국 작업을 끝내게 되

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작업들로 소통에 대해 좀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소통은 서로 좋은 말

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계속 부딪쳐가

는 작업이기도 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

으며 이해의 연결고리가 생겨날 때 비로서 시

작됩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웃 이라는 관계

도 형성되는 것이겠지요.

효자동 사람들과의 소통은 ‘숨은예술찾기’에

서 시작되어, 문화센터 프로그램으로 이어져

나갔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프로그램에 참

여하는 사람들만 소통한 것이 아니라 마을을

오가며 얼굴을 익히고 인사를 드리고 가끔

씩을 일을 도와드리기도 하고, 간단한 이야기

라도 나누는 활동들로 효자동의 많은 사람들

과 소통을 하게 되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또 다른 재미있는 일화를 말씀드리자면 경로

당에 계신 어르신들을 중심으로 운영된 리폼

공작소 프로그램은 초기, 완전히 구박을 받았

습니다. 처음 경로당을 찾아갔을 때, 우리에게

어느 한 분도 눈길을 주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어르신들의 옆으로 다가갔죠.

한 어르신이 드디어 말씀을 하십니다.

어르신1: (궁금) 어디서 왔어?

[하지만 고스톱에 열중하고 계신다]

낭만생쥐: 저희는 낭만골목프로젝트팀에서

나왔고요… 블라블라

어르신1: 우리 그 딴 거 안해도 되니깐, 나가.!

낭만생쥐: 그래도 한번 해봐요.! 같이 해봐요.

어르신1: 그러면 우리 고스톱 방해 안 되게 저

쪽 가서 해.!

낭만생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아......네.!

어르신2: 근데 뭘 할건대?

리폼선생님: 오늘은 페트병 화분 만들려고요.

할머님 같이해요.!

어르신2: 그럼 한번 해봐.!

리폼선생님: 그럴까요~, 이렇게도 꾸미고 저

렇게도 꾸미고.

어르신2: 생각보다 이쁘네. 잘 쓸게.

처음에는 무관심 하신 듯 했지만, 우리가 다

가갈수록 어르신들은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

다. 그리고 설치, 벽화를 반대하신 어르신도

경로당에 오셨는데, 점점 우리에 대한 벽을 허

물어 이제는 두부를 사오면 막걸리를 같이 먹

기도 하고, 날씨가 추운 겨울에는 따듯한 커피

한잔을 함께 마시는 관계로 발전하기도 했습

니다. 관계를 맺는다는 건 정말 눈물겹지만 따

뜻한 일입니다!

우리의 진정성은 재개발을 떠나 사람과 사람

으로 통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마을공동

체는 결국 사람이 우선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

닫게 됩니다. 사람들 간의 마음이 통하고 정이

있는 공간, 앞으로도 우리는 웃음꽃 사람꽃 피

어나는 효자마을을 그려봅니다. 아자아자.!!

강원 원주시 호저면

성공회원주나눔의집

오늘도 어김없이 우리 나눔의 집으로 발걸음

을 하는 분이 계십니다. 조용히 다가오지만 그

주위엔 언제나 온기가 가득합니다. 우리 모두

의 어머님 같은 분입니다. 그 분은 바로 호맷

골의 보배, 김기숙씨입니다.

김기숙 씨는 30대 전신마비 아들을 둔 한 어머

니입니다. 그의 아들은 젊은 시절 불의의 사고

로 전신마비가 되었습니다. 어느 여름, 계곡에

서 물놀이를 하다 다이빙을 하다 그만, 목 이

하 신경이 마비된 것입니다. 군대까지 다녀온

건강한 아들이었던 터라 사고 당시, 그녀의 충

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고는 그녀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게 됩니

다.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아들, 2시간 마

다 몸의 위치를 바꾸어 하는 상황, 그녀의 모

든 삶은 아들의 삶과 함께 진행되기 시작한 것

이죠. 그녀는 아들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

다. 늘, 아들과 함께 있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10년의 세월이 훌쩍 흘러가며, 어머니

는 인간관계가 줄어들고 조금씩 지치기 시작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는 아들의 마음도 편치

않았습니다. 어머니께 짐만 되고 있는 자신의

상황이 상당히 괴로웠던 것이죠. 그렇게 두 사

람은 모두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이젠

무언가 변화가 필요한 시기였습니다.

하루는 아들이 어머님께 말을 건냅니다.

“어머니, 다른 사람들은 문화센터 가서 이것

저것 배우기도 한다던데 왜 안 나가세요? 제

걱정하지 말고 놀러도 다니고 그러세요.” 하

지만 24시간 아들을 돌봐야 하는 의무감에 어

머님은 그저 웃음만으로 답하실 뿐입니다. 그

리고 시내에 있는 문화센터로 가기에는 거리

도 너무 멀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어머님은

원주 나눔의 집에서 진행되는 중장년여성 건

강프로그램 ‘요가교실’을 알게 되어 참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옆 동네라 언제나 아들

곁으로 금방 올 수 있었고, 저녁시간에 진행되

었던 터라 부담감도 덜했습니다. 무엇보다 아

들이 적극적으로 환영하며 어머님의 활동에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호맷골의 보배1년차

Page 31: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60 61

단조로운 삶에서 흥겨운 삶으로

사실, 어머님이 요가교실을 결심한 큰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아들을 앞으로도 계속해

서 돌봐줘야 하는데, 자신의 건강을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실함 때문이었죠. 앉으나

서나 여전히 자식 걱정에 여념이 없는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하지만 요가교실을 통해 얻

은 건 신체적 건강 뿐 아니라 정신적 건강이

었습니다. 요가 교실을 통해 어머님은 조금씩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닫혔

던 관계들이 조금씩 열리며 또 다른 세계가

펼쳐졌습니다. 그리고 2012년 생활문화공동

체 만들기 사업을 통해서 더욱 풍성하게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활동은 우리가

기대한 그 이상이었습니다. 틈틈이 클라라공

방에 서 배운 재봉기술을 응용하여 다양한 생

활 소품을 만드십니다. 월요일에는 풍물교실

에 나오셔서 장구를 치고, 화요일에는 몸살림

운동, 목요일에는 복지사각지대에 있는 어르

신들을 위한 무료 반찬 나눔 자원봉사자가 되

어 요리솜씨를 발휘하십니다. 금요일에는 늘

봄학교 어르신들의 점심식사를 만들어 주십

니다. 아들 곁을 오래 비울 수 없어서 요리 봉

사를 하고도 함께 식사를 못하고 집에 가시는

경우가 많지만, 항상 웃는 얼굴로 참여하십니

다. 그리고 생문공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게 되

셨습니다. 덕분에 그동안의 단조로운 삶이 조

금은 분주해졌지만, 그 분의 웃는 모습을 보면

더 젊어지고 더 행복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은 아들대로 더 행복해졌습니다. 어머니

가 나눔의 집에 가실 때면 혼자 있다가 무슨

일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웃

음을 되찾은 어머니의 행복한 모습을 볼 때마

다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고 아들도 나름대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창구를 찾았습니다. 움

직일 수 있는 목과 입을 사용해서 인터넷을 시

작한 요즘, 그는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되어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와 더불어 작은 꿈도 하

나 생겼습니다. 그가 만든 인터넷 쇼핑몰로 바

로 어머님이 직접 만드신 생활 소품과 옷가지

들을 판매하는 꿈입니다. 이제 두 사람은 함께

꿈을 꾸며 행복합니다. 그리고 이런 꿈을 꿀

수 있도록 도와준 마을공동체가 있다는 사실

에 또 한번 행복해집니다.

호맷골의 숨은 보석

어머니 김기숙 님은 수혜자로 머물러 있지 않

습니다. 그녀가 받은 만큼 그 이상으로 마을

공동체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십니다. 자

신이 가진 재능도 함께 나누고 계셔요. 또 특

유의 조용하고도 낙천적인 성격 덕분에 그녀

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함께 머뭅니다. 때로

는 인생 선배로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

며 조언도 해주십니다.

그리고 그녀는 어느덧 호맷골의 보배가 되어

계셨습니다.

Page 32: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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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성남시 봇들마을 6단지

마을공동체 문화로숲

왜소한 체격 어디서 저런 열정과 강단이 내

뿜어져 나오는 것일까? 내가 살고 있는 마을

에 대해 어쩜 저리도 높은 자심을 가지고 살아

가는 것일까? 세대를 넘나드는 저 네트워크의

밑천은 무엇일까?

봇들 6단지의 지영숙씨를 보면 늘 드는 생각

입니다.

그녀는 누가 봐도 마을의 리더감입니다. 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마을의 일에

참여했고 사람들과도 좋은 네트워크를 가지

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생문공 사업을 시

작하여 지영숙씨와 함께 순조롭게 사업을 펼

쳐 나갈꺼라 생각했죠. 하지만 이것은 너무 이

른 생각이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할

때 쯤 마을에 힘든 일이 발생했습니다. 용인에

서 수서까지 연결되는 GTX 노선이 봇들6단

지를 관통하며 매월 벼룩시장이 열리던 단지

옆 어린이 공원에 대형 환기구가 들어선다는

소식이 날아든 것입니다. 이미 철도공사와 시

공업체는 공원을 파헤치기 위한 작업에 착수

하고 있었습니다. 유난히 유아동이 밀집되어

있던 우리 단지 사람들은 강력하게 반대했고,

주민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습니다. 지영

숙씨는 비상대책위원회에서 핵심적으로 활동

하며 엄마들과 함께 공원과 마을을 지키기 위

해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었습니다. 매일 천막

농성과 항의집회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모

든 일들이 하나의 방향으로 갈 수만은 없나봅

니다. 사람들의 맘도 제각각입니다. 공사와 관

련하여 찬반의견이 엇갈리고, 보상 문제가 개

입되면서 마을 사람들 간 갈등이 생겨났습니

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이 난관 앞에 지

영숙씨는 참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그리고 결

국 그녀는 정신적, 육체적 피로감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칩거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외동

딸임에도 친정아버지 병간호조차 제대로 못

하며 돌본 마을이었는데 많이 힘들었을 것입

니다. 그 당시를 회고하며, 그녀는 내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정말 다 놓고, 마을을 떠나고

싶었어요.”

판교 삼평동 봇들마을은 새롭게 조성된 신도

시 마을로 성남에서도 낯선 이름의 동네입니

다. 그중 봇들6단지는 봇들마을에서도 가장

늦게 입주한 임대단지입니다. 다자녀를 둔 젊

행복 봇들의리더

1년차

은 부부들과 노인 세대가 많은 마을이기도 합

니다. 특이한 점은 가장 늦게 입주한 이 봇들

6단지가 봇들 마을 내에서 가장 활발한 커뮤

니티 활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온라

인 카페를 통해 엄마들 간 소통이 활발했고 자

발적인 모임들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또, 벼

룩시장도 열어가며 마을공동체를 일궈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로 지영숙

씨가 있었습니다. 항상, 어디서든 중심에 있었

던 그녀였는데, 많이 지치고 힘든 그녀의 모습

을 보며 우리는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더 이상

함께 일을 하자고 제안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이 생활문화공동체 활동이 힘들고 지친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기만을 바랬

습니다. 그녀가 빠진 채로 우리는 무작정 현수

막을 걸고 홍보물을 배포하며 커뮤니티 프로

그램의 참여자를 모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생

각만큼 쉽지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

속적으로 프로그램 내용과 참여대상층을 마

을 실정에 맞게 수정해나갔습니다. 그리고 이

런 노력에 마을에서도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

작했고 조금씩 참여 신청이 들어왔습니다. 그

러던 중 지영숙씨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토

요가족프로그램에 1학년 아들과 참여를 하겠

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반가웠지만, 한편으

로는 많이 지쳐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참 안

타까웠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함께 하

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우리를 위로하였습니

다. 커뮤니티 프로그램들은 갈수록 소문이 나

며 참여를 원하는 신청자들도 많아졌습니다.

우리 마을에 다시 생기가 온기가 돌기 시작했

습니다. 또, 그동안 마을에서 벌어진 갈등과

그로 인한 서로의 상처들이 공동체 프로그램

을 통해 치유되는 것 같아 고마웠습니다. 그리

고 지영숙씨도 조금씩 활동을 다시 하시기 시

작하셨습니다. 소소한 실무 준비를 도와주기

도 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해결해주시고, 예전

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한 것 같았습니다. 노

인정 점심봉사도 함께 하시며 할머니, 할아버

지들께 생문공 사업도 많이 소개해주셨습니

다. 역시 사람의 본성은 어디 가질 않나 봅니

다. 어느 새 그녀는 마을 사람들 중심에 있었

습니다. 그리고 그녀 역시 공동체 프로그램과

여러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조금씩 상처를 치

유해나가고 있었습니다.

여름은 지나갔지만 여전히 뜨거운 태양이 이

Page 33: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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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거리던 9월, 우리는 커뮤니티 프로그램 참

여자 가족들과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우리는

이 소풍으로 함께 나누는 기쁨을 좀 더 누리

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숙씨가 보다 적극적

으로 우리에게 다시 다가왔습니다. 그녀는 공

사 때문에 흉물스럽게 변해버린 공원이지만

이곳에 다시 벼룩시장을 열자고 제안했고, 그

렇게 반년 만에 벼룩시장은 다시 열렸습니다.

그 후 마을축제로까지 이어져 한 해를 정리하

게 되었죠.

12월 마을 축제를 준비하여 우리는 각 커뮤니

티 프로그램 반장님들과 지영숙씨에게 ‘축제

운영진’을 제안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흔쾌히

받아주셨어요. 매주 만나 회의를 하고, 부족

한 것은 카톡방을 만들어 추가 논의를 진행하

며 축제 준비는 우리 모두의 일상이 되었습니

다. 모두 너무 열심히 준비를 해주셨는데 특히

나 아기 엄마들이 많았던 축제 운영진들은 아

이를 업거나 안으면서까지 열심히 임해주셨

습니다. 축제 당일 날에는 자신들의 아이들은

천막 영화방 선생님께 맡겨두고, 이웃들을 챙

기기에 여념이 없었어요. 처음으로 한 마을축

제라 어설픈 면도 많았지만, 축제를 준비한 이

기간 자체가 감동이었습니다.

한사람이 심은 나무 한그루가 숲이 되고, 그

숲에서 새와 꽃들이 살아가며 아이들이 함께

뛰어노는 세상. 과연 고속경쟁인 이 시대에 꿀

수 있는 꿈일까 싶지만, 어쩌면 그것은 멀리

있는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마을이 내 일상의 공간이 되

고, 그 공간을 지켜가려는 움직임, 그리고 이

런 움직임을 직접 행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함

께하는 마을공동체가 그리 먼 일은 아니라 생

각합니다. 좋은 건물, 넓은 집 평수, 높은 아파

트 값이 인간의 행복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사람들과의 건강하고 공동체적인

관계 맺기가 바로 우리의 행복 지수를 가늠하

는 것은 아닐련지요?

지영숙씨는 올해 다사다난한 과정을 통해 이

웃이 다시 그녀에게 왔다고 했습니다. 상처를

주고 받으며그간 힘들었던 시간을 넘어, 다시

배려와 공감, 따뜻한 나눔으로 치유되면서 이

웃들과 함께 삶의 활력을 되찾는 계기를 마

련했다고 합니다. 지난주에는 탈 많았던 커뮤

니티 도서관이 오픈식을 치렀고 그녀를 비롯

한 다른 이웃들이 함께 했습니다. 냉기가 넘

쳤던 우리 마을에 다시 사람 내음이 나기 시

작합니다. 밝게 웃는 사람들의 모습도 많아집

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지영숙씨도 더 큰 활

력과 열정으로 이웃들과 함께 하며 행복하기

를 바랍니다.

강원 철원군 동송읍

철원종합문화복지센터

사회자 : 오늘은 철원지역에서 진행되는 생

활문화공동체 “황이장과 박중사의 DMZ인터

넷방송국”의 메인MC, 박준식님을 만나 궁금

한 것을 하나하나 파헤쳐 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박준식 : 네!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철원까지

찾아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사회자 : 오늘 날씨가 무척 추운데 철원은 더

추운 것 같습니다.

박준식 : 철원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추운지

역이니까요.

사회자 : 아, 그렇군요. 준식씨는 황이장과 박

중사에서 박중사 역할인가요?

박준식 : 아닙니다. 제가 성이 박씨 이긴 하지

만 역할로 보면 황이장에 더 가깝습니다!

사회자 : 네, 그러시군요. 방송을 보니 방송 멘

트들이 굉장히 깔끔하던데 전문가가 쓰신건

가요? 아니면 직접 쓰신건가요?

박준식 : 모두 제가 직접 씁니다!

사회자 : 아니,그 많은 대사를 직접 다 쓰십

니까?

박준식 :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첫멘트와

마무리멘트는 준비한대로 하고요. 중간 부분

은 방향만 정하고 순간순간 애드립으로 진행

을 하기도 합니다.

사회자 : 그런 애드립을 하려면 경험이 많던

지 끼가 많아아 할 텐데 혹시 직업이 어떻게

되시나요?

박준식 : 제가 끼가 좀 많습니다. 그리고 사회

자님이 아마 예상한 것처럼 말로 먹고 사는 직

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방송MC로 활동하

는 게 전혀 어색하진 않아요. 제 직업은 웃음

전파하는 웃음치료사와 크리에이션 전문강사

를 지역사회에서 하고 있습니다.

황이장과 박중사의DMZ 인터넷 방송국

1년차

Page 34: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66 67

사회자 : 역시, 그래서 이렇게 방송을 전문 사

회자처럼 잘하시는군요. 그럼 준식씨는 원래

철원에서만 활동하셨나요?

박준식 : 아닙니다. 원래 저도 잘나가는 전문

강사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활동을 했었습니

다. 고향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면서 고향에

서 살자고 하여 이렇게 철원에서 활동을 하

게 되었습니다.

사회자 : 고향에서 이러한 활동을 하면서 느끼

는 감정은 남다르시겠습니다.

박준식 : 고향에서 고향을 위해 이러한 재미

있는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한 큰 보람을 느끼

고 있습니다.

사회자 : 그럼 처음 이 사업은 어떻게 참여하

게 되었나요?

박준식 : 제가 철원에서 레크리에이션이나 웃

음치료사로 지역사회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는데요. 마침 ‘황이장과 박중사의 DMZ

인터넷방송국’의 방송진행자가 필요하다는

제안을 받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제가 살고 있

는 아파트를 대상을 한다기에 조금의 망설임

도 없이 바로 흔쾌히 수락을 하게 되었어요.

하다 보니 재미도 있고요. 어려운 일도 참 많

았습니다.

사회자 : 어려운 일이요? 어떤 어려움이었나

요?

박준식 : 처음에는 막연하게 ‘재미있겠구나’

라는 생각하게 무작정하게 되었는데, 얼마 지

나지 않으니 소재가 떨어지고 자연스레 이야

기도 고갈되었지요. 동네 이야기를 만들거나

찾아내는 것이 제일 어려웠습니다. 매일 기사

를 쓰고 보도를 하는 가자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는지 조금 이해도 되더라구요.

또 소재가 떨어지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방송

연출자와 본사업의 기획자와의 의견대립으로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사회자 :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

으신가요?

박준식 : 한 쪽은 방송내용을 아파트에 한정

된 내용으로 진행하자는 의견이었구요. 다른

한쪽은 아파트 뿐 아니라, 철원 전체에 관련된

내용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넓은 주제로 가야

한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저는 이때는 진행자

의 입장에서 듣고만 있어야 했던 터라, 마음이

꽤 불편했었었어요.

사회자 : 아, 그러셨군요, 하지만 즐겁고 보람

된 일도 있으셨나고 들었어요,

박준식 : 아, 갑자기 떠오르는 분이 한분 계시

네요. 바로 전도희씨라는 분인데 저희 방송을

일본에서 보시고 댓글을 달아주신 분이셨습

니다. 깜짝 놀랄 일이었죠.

사회자 : 일본이요?

박준식 : 네, 저희 방송은 이렇게 세계적인 방

송입니다.

사회자 : 뿌듯하셨겠어요?

박준식 : 네, 알고 보니 그분의 고향이 철원이

셨다고 합니다. 고향소식을 먼 타국에서 방송

을 통해 접하니 무척 반가우셨나봅니다.

사회자 : 그러셨군요. 그럼, 지금 방송이 진행

되고 있는 이 지역의 특징을 간략히 좀 말씀해

주시겠어요?

박준식 : 네, 우선 방송국 이름을 보면 아시겠

지만, 이 지역은 군사 접경지역이면서 동시에

농촌지역입니다.

사회자 : 아, 그래서 이름이 ‘황이장과 박중

사’였군요.

박준식 : 네, 사람들은 철원하면 먼저 땅굴,

노동당사, DM, 군인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

다음으로 좀 더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오대

쌀, 한탄강, 평야지대, 두루미 정도를 떠올리

기도 하십니다.

사회자 : 철원 지역엔 어떤 문제점들이 있나

요?

박준식 : 저도 처음엔 잘 몰랐는데 방송국

MC를 하면서 느끼고 알게 된 것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지역주민들과 군인가족

들 간의 미묘한 거리감이었습니다.

사회자 : 어떤 미묘한 거리감인가요?

박준식 : 먼저 지역주민들은 군인가족들을 지

역주민으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조금 있으면

Page 35: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68 69

떠날 이주민으로 철새같은 존재로 생각을 하

지요. 또, 군인가족들도 역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동네 아

파트에 살아도 서로가 정을 주거나 이웃하지

않으려는 분위기입니다. 또, 지역사회에서는

직원채용에 있어서 가급적 군인가족을 채용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회자 : 그건 또 왜 그런가요?

박준식 : 좋은 사람을 채용하면 뭐합니까? 조

금 있으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버리니,

고용주 입장에서는 도 새로운 사람을 다시 채

용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러니 자연

스레 지역사람을 더 선호할 수 밖에없지요.

사회자 : 아, 생각보다 문제가 심각하군요.

박준식 : 그래서 저는 이런 문화를 바꿔야 한

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박준식 : 바로 사람들이 떠나지 않고 계속 머

물게 하는 멋지고 행복한 마을로 우리 철원

을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방송을 지원

해 준 생활문화공동체사업을 통해 이런 바람

이 이루어져 지역사회에 발전에 일조를 했으

면 좋겠습니다.

사회자 :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군요, 그럼 준식

씨는 이번 생활문화공동체 사업을 통해 사람

들의 변화가 있었다고 보시나요?

박준식 : 물론이입니다. 비록 지금은 1년차 사

업이라 참여도와 호응이 기대만큼은 아니지

만, 조금씩 달성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엔 카메라만 보면 도망가던 사람들이 이

제는 ‘아! 인터넷방송국!’ 이라고 말씀하시며

먼저 아는 척도 해주세요. 인터뷰도 잘 응해

주시구요. 이만하면 저는 성공적이라고 생각

합니다.

사회자 : 앞으로 “황이장과 박중사의 DMZ

인터넷 방송국”이 어떤 방향으로 나가길 기

대하시나요?

박준식 : 지금은 저와 다른 몇 분이 진행을 하

고 있지만, 마을 분들께서 더 많이 참여해주셨

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한 사람들이 아닌, 보통

의 마을사람들이 참여하여 만들어가는 조금

촌스럽지만 재미있는 우리동네 방송국이 되

었으면 합니다.

사회자 : 아, 멋진 꿈이십니다. 이젠 동네 유명

인사가 되었겠습니다.

박준식 : 네, 유명인사가 되긴 했는데요. 불편

한 한 것도 있어요.

사회자 : 어떤 불편한 점이 있나요?

박준식 : 저는 모르는 분인데 저한데 아는 척

하고 인사를 해요. 그럼 저도 인사를 하고, 허

허, 이젠 아무데나 못 돌아다녀요. 술도 눈치

보며 먹어야 합니다.

사회자 : 아, 지역 연예인이 되셨군요.

박준식 : 그런가요.

사회자 : 가족들은 참여하는 것을 좋아하시

나요.

박준식 : 처음에는 돈 버는 일도 아닌데 시간

을 너무 뺀다고 불평했지만 지금은 마을 사람

들이 저를 대하는 것이 예전과 다르니 저희 집

사람도 이젠 좋아합니다. 남편이 마을을 위해

일을 한다고 하는 자부심도 있구요.

사회자 : 아, 그러시군요. 말씀 잘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철원지역 아니 세계적인 방송 ‘황

이장과 박중사 DMZ인터넷 방송국’의 메인

MC박준식님의 인터뷰였습니다. 감사합니다.

Page 36: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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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북구 농소 1동

농소1동 주민자치위원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홈골을 몰랐습

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힘으로 홈골을 디자인

하고 홈골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홈골은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드는 것보다 사람들의 관심과 참여가

공동체 생활에서는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

닫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생

활문화공동체 사업은 큰 활력이 되었습니다.

또, 지역의 공간이 주민들의 커뮤니티 디자인

을 통해 중앙부처 (문화체육관광부, 행정안전

부)의 공모사업에 선정되는 등 모범적인 평가

를 받게 되면서 주민들에게 할 수 있다는 용기

를 주었습니다.

공모사업 응모에서 홈골 텃밭 축제까지 달려

오면서, 참 많은 분들이 함께 했습니다. 많은

자생단체, 지도자들, 지역사회의 재능기부자

들 그리고 지역 내 어린이단체들. 모두에게 아

낌없는 감사 박수를 보냅니다. 특히 주민자치

위원회 김면열 위원장, 박병석 위원, 새마을부

녀회 김영희 회장님, 지역 장애 어린이들, 홀

로 계신 어르신, 아동센터어린이들, 재능기부

에 동참해 주신 강사님들의 시간적 투자 가치

는 말로 값을 메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주민자치회 위원장과 위원으로써 섬김의 봉

사 자세를 솔선수범하신 두 분은 이 마을 주

민으로, 지도자로, 일반 직장인으로 사업종사

자로 바쁘신 가운데 1년 월차를 모두 사용하

시면서 시간을 투자하며 주민들의 관심과 참

여를 이끌어 주시는 등 남다른 애착으로 앞

장 써주셨습니다. 그 결과로 행안부 공모사업

인 제11회 전국주민자치박람회 우수사례 공

모에서 울산 시비를 지원받아 2박3일 동안 우

수사례전시관, 우수동아리 발표회, 정책세미

나, 사례발표, 문화행사와 주민자치활동 공유

로 전체 46개 사업 중 “장려상” 수상,언론 보

도 등 전국에 울산 북구 농소1동을 알리는 것

에도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농소1동 새

마을부녀회 김영희 회장님께서도 생활문화공

동체 사업으로 어린이 농부체험으로 시작된

모든 사업 활동 (가족농부학교-60가족 참여),

가족요리 봉사단(13가족 참여), 농기구 예술

작품(100여명 참여), 텃밭도서관 상상화 그리

기(50여명 참여)등)에 어머니의 섬세함으로

일일이 챙겨주시면서 시간을 봉사해 주셨습

니다. 특히 가족 요리봉사단은 올 여름 관내

농사와 예술이만나다

1년차

Page 37: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72 73

초등학생들의 가족으로 구성되어, 홈골에 나

는 채소로 요리하여 홀로 계신 어르신들께 직

접 찾아가기도 하였는데요. 무더운 여름에 장

보기와 배달 등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

다. 하지만 없는 살림에도 아이스크림을 준비

해 놓고 기다려 주시는 할머니들이 계셨고, 아

이들은 어르신들과의 만남을 통해 나눔의 참

의미와 감사를 배우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홈골의 자연에서 활동하는 40여명 장

애 아동들이 함께 한 ‘장애 아동 스토리 북’ 제

작은 참여한 아동들 뿐 아니라 그들의 부모님

에게도 큰 기쁨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기부재능으로 전문사진사 박태준님께도 감사

의 인사를 올립니다. 아이들과 함께 1년 동안

모든 행사 때마다 동행하여 스토리 북을 만들

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홈골 텃밭에서 허수아

비 축제를 접목하여 음악회를 위해 주민자치

센터 수강생들의 재능기부와 활동도 이어졌

는데요, 이 활동은 아이들과 어른들이 지역 자

원을 활용한 문화콘텐츠의 개발이었습니다.

그리고 500여명 주민들의 참여를 이끌어 주

민화합의 축제를 만들어 냈습니다. 홈골이 농

사만 짓는 공간에서 이렇게 주민의 관심과 참

여를 이끌어 낸 공간으로 변화한 것이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을 해요.

이제 홈골은 지역 주민 누구나 찾아와 쉴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해 나

가고 있습니다. 살기 좋은 농소1동이 되어가

는 문턱에서 앞으로도 우리 마을이 살고 싶고,

살기 좋은 마을로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

리 주민자치위원회도 ‘주민들이 화합하는 문

화 예술 마을 만들기’를 위해 더욱 노력할 것

입니다.

Page 38: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74 75

서울 성북구 삼선동

함께사는 성북마을문화학교

아이가 삼선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알았던

학부모회 엄마들이 어느덧 자녀들을 중고등

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습니다. 어느덧 8년이

란 시간이 지난 것이죠.

“사현이는 4반이었고 빛찬이는 2반이었지.”

아이들과 관련된 모든 것, 그 당시 담임선생님

과 교장선생님을 기억합니다. 첫 운동회 때 아

이와 함께 달리던 친구들과 현장학습 뒷풀이

도 기억하고요. 이 모든 관심과 사랑이 기억으

로 남아 마을의 문화학교가 되었습니다. 초등

학교 1학년 신입생이 사춘기를 보내고 농촌봉

사활동도 참여하고, 늦둥이를 초등학교에 입

학시킨 새댁의 아이가 “언제 이렇게 컸니” 하

며 웃을 수 있는 곳, 아들이 군대 갔다고 말하

며 지난 세월을 기억할 수 있는 기억들이 존재

하는 곳, 아이들이 성적이 아닌 성품으로 인

정받을 수 있도록 엄마들아 공동체 건설을 위

해 노력하는 곳, 바로 성북마을문화학교 이야

기입니다.

사단법인 대표 김준용 씨가 2008년 삼선초등

학교 운영위원회 운영위원장이 되면서 우리

들은 토요 휴업일마다 사랑샘 교실을 운영했

습니다. 2009년에는 손실근 씨, 당시 어머니

회장님이 사랑샘 교실에 참여했습니다. 맞벌

이 가정의 아이들의 돌보는 일을 위해 토요 휴

업일마다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사랑샘 교

실을 운영했습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

한 엄마, 미술에 재능이 있는 엄마, 역사 교육

에 관심이 있는 엄마, 풍선 아트 지도사 엄마

등이 재능을 기부하여 독서교실, 미술교실, 풍

선교실 등을 운영했습니다. 학부모가 운영하

는 첫 번째 사랑샘 교실에는 전교생 천 명 중

3백 명이 참여하는 마술공연도 유치했고, 풍

선아트, 슬러시를 만드는 과학교실도 진행하

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아이들의 토요일

을 책임졌습니다. 공동 돌봄의 시작이었지요.

강사비는 받지 않고 아이들을 같이 키운다는

생각으로 매년 100여 명이 참여하는 사랑샘

교실을 4년 동안 아무 탈 없이 운영했습니다.

또, 지역 선배 엄마가 지도하는 난타교실도 있

었고, 탁구선수 출신 엄마가 가르치는 탁구교

실도 있었습니다. 성북구청 교육지원과의 지

원과 교육청 학부모 지원사업의 지원금을 받

아 애벌레 생태 학교에 가서 받아온 애벌레는

6개월 뒤 장수벌레로 크기도 했습니다. 아이

우리는 성북마을문화학교 입니다

1년차

들은 “선생님 장수벌레가 됐어요”라고 또 가

고 싶다고 조르기도 했습니다. 크리스마스 땐

트리도 만들고 리본공예나 양초공예도 하는

등 돈 주고 해야 할 수 있는 체험을 아이들에

게 시켜줄 수 있어 기뻤습니다.

그러던 중, 올해부터 사랑샘 교실을 중단한다

는 말을 듣고 안타까웠습니다. 하지만 이빈파

성북구 급식지원센터장의 도움을 받아 함께

사는 성북학부모회로 이름을 짓고 2012년 3

월부터 토요휴업일 학교를 운영하는 마을기

업 ‘키득키득 맘키드’를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텃밭교실을 맡아 4월부터 학교 텃밭

을 가꾸기도 하고 구청 농부학교에 참여하기

도 했습니다. 생활문화공동체 사업이 선정되

어 아이들에게 골목길 공방도 하고 엄마들이

배우는 리싸이클 공방, 아트팜, 요리공방을 통

해 우리들은 행복을 느꼈습니다. 아이들 교육

비 때문에 자신에 대한 공부는 뒷전으로 미루

던 엄마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엄마

들의 눈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

는 법인의 발전을 위해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성북구는 서울시의 최극빈과 최상류층이 동

시에 공존합니다. 재벌들이 사는 성북동 대저

택도 있고 아직 연탄을 때야 하는 달동네도 있

습니다. 달동네가 사라진 자리에는 높은 아파

트 단지가 들어서고 있습니다. 삼선초등학교

앞에는 재개발과 재건축으로 1천5백 세대가

넘는 두 개의 아파트 단지가 들어왔고 이 동네

Page 39: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76 77

는 다세대 주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또, 삼선

동 일대는 서울시의 재개발 정책의 변화에 따

라 개발/재개발의 불안이존재하는 곳입니다.

삼선동 주민들은 보금자리의 철거와 주택값

의 불안정, 주거의 불안 속에서 삶과 공동체의

안정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재개발 설정 당시

만들어진 조합의 설립과정 속에서 삼선동 주

민들은 갈등관계를 겪었고, 이로서 주민간의

교류가 단절되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가끔 아

파트 단지로 이사 가자고 해도 우리는 아파트

단지보다 지금 살고 있는 다세대를 선택했기

에, 삼선동은 그러한 스트레스가 가장 첨예하

게 나타나 외형적인 커뮤니티의 스트레스 지

점을 초등학교에서 학부모로 만나 해소하고

이해하려 합니다. 개발과 소득의 격차가 커지

면서 지역 공간은 주민 상호 소통의 단절과 다

양한 상호갈등문제를 가져오지만 우리는 우

리 삶의 주인공인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살기

위해 손을 내밀고 나아가는 길은 어렵지만 의

미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경기 안산시 원곡동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

‘국경 없는 마을’로 불리는 안산시 원곡동은

국내에서 가장 많은 외국인들이 살아가는 곳

입니다. 원곡동 주민 중 60%정도가 외국에서

온 이주민이고 또 이중에서 절반 이상이 중국

인인기도 합니다. 이런 지역적인 특색 때문인

지 이곳은 이주민 인권 및 임금 체불 등의 문

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주민 운동이 활발한 곳

이기도 합니다. 많은 단체들이 오랫동안 활동

을 해 오고 있지요. 하지만 다문화 문제는 이

런 운동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

려 투쟁을 넘어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배우

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더욱 더 필요합니다. 이

에 리트머스는 이런 문화적인 노력들을 지속

적으로 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프

로젝트들이 한국어나 영어로 소통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고 짧은 체류 기간의 이주 노동

자들에게는 언어 소통은 큰 어려움이었습니

다. 그렇기에 함께 참여해도 피상적인 존재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단순한 의사소통

과 언어학습을 넘어선 다문화 자치활동 프로

그램 개발은 만만치 않은 과제였습니다. 그러

다 우리는 조금 접근 방식을 달리하여 언어를

통한 생활문화공동체 만들기 <바벨디스코스>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일명 다문

화 소통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프로그램들이

었는데요. 요리로 배우는 언어학습, 노래방에

서 노래로 배우는 어어학습, 언어를 넘어선 몸

으로 교감하며 소통하기, 몸으로 타언어의 구

조 익히기, 반복학습을 통해 언어 익히기 등

많은 세부 프로그램들이 연구, 개발되었지요.

우리는 원곡동에 가장 많이 정주하고 있는 5

개국(중국,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네팔)의

언어학습을 통한 커뮤니티 구축을 위해 16회

간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매주 1회씩 자치

모임으로 운영되었는데 자율적인 참여 형태

인 대화형 수업 방식으로 진행되었어요. 다양

한 지역민들이 참여를 해 주셨는데요. 이주근

로자에서부터 평소 다문화에 관심이 많으셨

던 분들, 일반 직장인과 학생들, 전업주부, 그

리고 다문화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계셨던

분들 등이셨어요. 그 중에서 평소 안산에 거주

하며 우리 리트머스와 교류를 해오다 이번 <

바벨디스코스>에 참여했던 분이 계셨는데요.

바로 34세의 건축가 정인교씨입니다. 그는 우

리에게 이번 활동에 함께 참여하며 든 생각들

을 말씀해주셨어요.

국경없는마을

1년차

Page 40: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78 79

“안녕하세요, 정인교입니다. 저는 건축을 전

공하였고 실험적인 건축에 대한 끊임없는 도

전과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평소 리

트머스의 활동에 관심을 갖고 소극적인(전시

관람, 프로젝트 참관 등)방식으로 참여를 해

왔었는데요. 이번 <바벨디스코스>프로그램

에 참여하면서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는 과정

들을 포함하여 많은 부분에 대해 함께 이야기

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평소 아시아권 문화에

대한 관심은 있었으나 언어를 직접 배우는 등

의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는 않았는데 단순한

언어학습만이 아닌 예술과 교차되어지는 이

번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직접 인도

네시아 분들에게 그 나라의 문화와 언어를 배

울 수 있어서 너무 좋았던 프로그램이였습니

다. 처음에는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어떤 것들

이 이루어질까 하는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참

여하였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인도네시아 언

어를 익히는 것에 흥미를 느껴 문화 안에서 배

우는 혹은 예술 안에서 배우는 인도네시아어

학습에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지요. 특히 안무

가였던 저희 강사님이 소개해준 인도네시아 (

무용)예술을 통해 그동안 리트머스에서 접했

던 시각예술과는 다른 지점을 알게 되기도 했

습니다. 건축, 시각예술을 넘어 인도네시아 혹

은 무용이라는 폭넓은 지점의 예술까지 경험

할 수 있어서 참 좋았었어요. 그리고 개인적으

로 안산에 유휴공간이라 할 수 있는 교가 밑의

공간을 실험적인 건축으로 풀어보고 싶은 생

각이 있었지만 실행되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 프로그램을 하면서 제가 고민하고 있는

것들의 실행지점으로 이어보면 어떨까 란 생

각이 들었는데 아직 많은 노력이 필요한 작업

들이긴 하죠. 하지만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원

곡동에 많이 정주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문화

를 알게 되었고 언어를 익히게 되는 과정을 통

해 그들과 (저의 전공 혹은 고민, 장점을 발휘

할 수 있는)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좀 더 구체

적으로 고민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번 프로그램이 언어를 통해 아시아

5개국의 문화를 실질적으로 이해 할 수 있는

다국어 공동체 형성의 발초가 된 것 같다는 생

각을 합니다. 그리고 원곡동 내 다문화적인 일

상을 예술과 문화로 발전시킬 수 있는 생활문

화공동체 구축이라는 목표에 한 걸음 다가가

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양한 지역민과 언어학

습을 통해 문화와 예술로 교류할 수 있었던 건

가장 큰 장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프로그

램이 새로운 견인차가 되어 원곡동 내 새로운

공동체들이 많이 생겨나길 바라봅니다.

Page 41: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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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마포구 염리동

마포문화재단-우리동네 나무그늘

우리마을 생활공방의 도자기 선생님

마포 염리동에서 개인작업실 겸 공방인

‘Clay&Joy’를 운영하고 있는 흙쟁이 구창모

선생님. 지역에서 처음 시작하는 생활 공방인

도자기 강좌 프로그램을 체계적이고 생활맞

춤형 강좌로 만들 수 있게 도와주신분입니다.

마을 공동체를 위해 선뜻 강사를 맡아준 마음

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모양에 중점을 둔 전시

작품이 아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작품위주로 강의를 구성하셨고, 본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제작상의 유의점까지 꼼

꼼히 조언해 주셨어요.

제 1회 소금꽃 마을축제에서는 지역단체를 돕

기 위해 판매용 제품을 별도 제작하자고 수강

생들에게 제안을 하셨는데요. 수강생들을 설

득하여 컵, 접시, 종지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도자기 물품을 제작하여 판매하였어요. 판매

금 157,000원은 지역 장애인 단체인 ‘맑음터’

에 전달하기도 하셨지요. 맑음터는 약 1년 전

부터 구창모 선생님이 재능기부를 하던 단체

입니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거의

못 받는 곳인데, 소액이긴 하지만 성금을 전달

할 수 있어 의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역

내 복지단체와도 교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

할 수도 있었어요.

목공예반의 자랑

목공예 첫 수업인 오리엔테이션에 다른 분보

다 유난히 작은 체구를 지닌 40대 후반의 여

성분이 계셨습니다. 우리가 준비한 목공예강

좌는 버려지는 목재를 재활용해 사용하고 직

접 톱질에 망치질까지 해야하는, 일반적인 목

공예 강좌에 비해 다소 힘든 과정으로 짜여진

프로그램이었어요. 우리는 작은 체구를 지닌

이 여성분이 유난히 걱정되었죠. 하지만 우리

의 우려와는 달리 그녀는 궂은 날씨에도 굴하

지 않고 꾸준히 수업에 나오셨고, 수강생들에

게 수업의 즐거움과 동참을 호소하기도 하셨

습니다. 10월 초에는 보조강사님께 직접 전화

를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전화 내용은 이러

했습니다.

“아파트 단지에 가구가 버려져 있는데 너무

아깝네요. 저거 충분히 재활용 할 수 있는데

제가 힘이 부족하니 좀 도와주세요.”

결국 수거된 가구는 목공예 수업시간에 아이

우리가 꿈꾸는마을

1년차

용 침대 목재 프레임에서 근사한 탁자로 변신

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그 탁자는 집에서

다용도로 잘 활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목공예 수강생들이 전체작업으로 마을지도를

제작한 적이 있는데 이 아이디어 또한 그녀

의 역할이 컸습니다. 문화 활동을 통해 공동

체와 마을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민하는 마음이 무척 고맙고 아름다우셨죠.

조용하고 차분하게 톱질과 망치질을 잘하셔

서 별명이 “톱질의 여왕”이기도 하셨어요. 목

공예 수업장소를 제공해 주시는 교회의 집사

님으로도 계셔서 여러모로 참 많은 도움을 주

셨습니다.

수업이 끝난 이후에도 마을에서 주민들과 관

계를 계속 이어가고 싶다는 권태림씨, 바로 우

리 목공예반의 자랑입니다.

드림아이 ‘밴드 동아리’

툭툭 내뱉는 시니컬한 말투, 셀카는 열심히 찍

어도 누군가에게 사진 찍히기를 너무 싫어하

는 종잡을 수 없는, 매일 매순간이 다른 감정

의 아이들. 처음 밴드동아리 학생들의 모습이

었습니다. 드림아이 밴드 동아리 친구들은 이

시대 최고의 오묘한 중딩들이었습니다. 밴드

선생님들과 보조교사는 매주 마음을 수련 하

듯,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낯가림이 심하고,

때론 한없이 철 없다가도 갑자기 조숙한 모습

을 보이며 수줍어했던 아이들. 이들은 선생님

들의 우려와는 달리, 그 짧은 3개월의 시간동

안 기본기를 익히고 어설프지만 밴드 연주도

해내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아이들을 열정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우리는 아이

들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이죠. 올

Page 42: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82 83

한해 첫 생문공 사업은 이렇게 마무리가 되었

습니다. 아이들은 마무리를 아쉬워 하며, 선생

님들이 너무 멋지게 잘 가르친다고 수업을 계

속할 수는 없냐고 말했습니다. 선생님들도 말

합니다. 나눔지역아동센터를 통해 만났던 수

빈이 둘과 빈지, 그리고 혼자 신청해 끝까지

밴드를 함께 해낸 종환이, 모두들 너무나 사랑

스러운 아이들이었다고 말입니다.

발도르프 인형 만드는 미도리

나무그늘이 문을 열 때부터 지금까지 학부모

들과 발도르프 인형만들기 모임을 진행하고

있는 미도리(본명 김소연). 그녀는 자신의 아

이들을 키우면서 ‘아이를 키우는데 마을 전체

가 필요하다’라는 말을 실감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무그늘에는 이렇게 같은 생각과 고

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공동

체, 마을을 그리워하며 발도르프 인형을 함께

만들며, 우리 마을 만들기를 직접 현실로 만

들어 나가는 이들이었죠. 미도리도 이 중 한

분입니다.

올해 소금꽃 마을 축제에도 그녀는 적극적으

로 동참해 주었습니다. 준비위원회 회의에도

참석하고, 축제 때는 학부모와 아이들의 참여

를 이끄는데 앞장 서 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리

고 축제 이후, 정말 우리 마을이 생긴 것 같다

고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이렇게 생문공 사업은 염리동, 대흥동에 주민

이 직접 만드는 마을, 공동체에 가능성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24개의 단체와 모임이 함께 마

음을 모았습니다. 이웃이 만들고, 단순히 사는

공간이 아닌 살고 싶은 곳, 우리는 이제 그런

마을을 꿈꿉니다.

경기 광주시 퇴촌면, 남종면

너른고을생협

퇴촌면 이야기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은 인구 1만1천명을 넘

어선 비교적 큰 면소재지입니다. 서울까지 직

통하는 시내버스가 있고, 성남과 하남시 등과

가까워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하

지만, 팔당호를 끼고 있어 한강오염방지를 위

해 각종 개발이 금지되어 있는 곳이기도 합니

다. 새로 이사를 들어오는 이주민들 수가 원

주민 수를 넘어선지 오래지만, 소통이 원활하

지 않은 편입니다. 퇴촌은 토마토가 유명합니

다. 매년 6월에 토마토 축제를 크게 치루고 있

지만, 지역 주민들의 문화 축제라기보다 지역

특산물을 홍보하고 판매하는 축제로, 지역 주

민들이 어울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또, 면에

는 초등학교, 중학교, 대안학교 등이 한 개씩

있습니다. 정규 고등학교가 없습니다. 고등학

생 이상 청소년들은 광주 시내나 주변 대도시

로 다니기 때문에 마을에서는 젊은이들을 보

기가 쉽지 않습니다. 진로에 관심이 많은 중학

생 친구들도 롤 모델이 없어 방황하거나 어려

워하는 때가 많지요. 이런 와중에 지역에서 먹

고 사는 문제와 문화적인 욕구를 해소하기 위

해 작은 규모의 생활협동조합운동이 시작합

니다. 사라져가는 공동체 문화, 그래서 점차

개별화되고 삭막해져가는 우리의 삶, 무한 경

쟁으로 내몰리는 우리 아이들을 보며 2010년

에 너른고을생협(준)을 발족하게 됩니다. 손

수 먹거리를 심고, 가꾸고 수확해먹고, 아이

들에게 마음 놓고 놀고 배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언제라도 찾아가 차 한 잔, 술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이웃을 만들기 위해 100가

구가 넘는 분들이 동참해주셨습니다. 너른고

을생협은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작은 생협을

지향하며 생활 문화 운동을 병행하고 있습니

다. 퇴촌에는 조선 개국 공신 중 한 명인 조영

무 선생의 묘소가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광동

리 퇴촌면사무소 뒷편에 자리 잡은 퇴촌재입

니다. 2010년 학생들과 함께 ‘우리 동네 알기’

프로그램을 위해 방문했을 때, 농사일을 하던

어르신 한 분이 학생들을 반갑게 맞으며 친절

하게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그 때 처음 뵌, 조

종호 선생님은 조상을 모시며 사는 평범한 시

골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당시 생협에서는

중요한 생협 활동으로 공동텃밭 경작과 논농

사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땅한 장

소를 빌릴 수 없는 형편이라, 사업 포기를 생

각하고 있었죠. 이 때 바로 조종호 선생님이

우리 마을조 선생님

1년차

Page 43: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84 85

흔쾌히 밭과 논을 빌려주셨습니다.

조종호 선생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선생

은 원래 서울에서 일반 직장생활을 하셨다고

합니다. 학원과 대안학교 등에서 수학강사로

활동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다 뜻한 바가 있어

도시농부학교에서 농사를 배우고 귀촌하셨다

고 했습니다. 귀촌생활인들의 큰 고충인 원주

민들과의 갈등도 이때는 이미 넘기셨던 터라,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려는 생협에게는 큰 도

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선생의 과거사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바로 선생의 집안에 들어섰

을 때였습니다. 집 안에는 직접 먹을 갈아 쓰

신 글씨와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그 분야의 문

외한이 봐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조 선생님은 ‘너른고을생협’을 붓글

씨로 써주셨고, 이는 현재 우리 생협의 로고가

되었습니다. 또 한번 놀랐던 사실은 조 선생님

이 취미로 클라리넷과 색소폰을 연주하신다

는 것이었습니다. 다재다능한 재주에 우리는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언제나 밤늦게 찾아가

도 늘 환대해 주셨고, 소주 안주로 손수 만든

두부조림을 내 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렇게 소

주 한 잔을 기울일 때면 선생님의 색소폰 연주

도 들을 수 있었지요.2010년과 2011년에 진

행했던 지역 청소년 축제에서는 직접 색소폰

연주도 해주셨습니다.

지금 마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대다

수의 분들은 최근 10년 이내에 이사를 오신

분들입니다. 이들은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았

고, 마을 내 청소년들이 이용할 수 있는 교육

이나 문화시설이 부족한 것에 안타까움이 많

으셨죠. 그리고 이런 부분들에 대해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차츰 필요한 것들을 스스

로 만들어가는 활동이 이뤄지기 시작했습니

다. 올해 생활문화공동체 만들기 사업을 하면

서 우리는 마을에 대한 생각과 우리가 하는 일

들의 목표와 비전 등에 대해 조금씩 틀을 잡아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역 원주민들과

의 소통을 위해 노력도 함께 해나갔습니다. 하

지만 소통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소통의 문

제로 난관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조종호 선생

님을 만나는 큰 행운을 얻었습니다. 이미 원주

민들과 갈등을 겪으셨기에 우리에게 큰 도움

이 되어주셨고, 우리의 많은 일들에도 함께 참

여하고 자신의 재능도 거리낌없이 내주셨습니

다. 선생님의 이런 솔선수범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이야기

합니다. 조종호 선생님이야말로 우리 청소년

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살아있는 교과서라고 말입니

다. 그리고 조선생님은 우리가 가장 이상적으

로 생각하는 ‘지역사회를 무대로 하는 르네상

스 형 인간’이기도 합니다.

- 너른고을생협 이상우

조종호 선생님이 말하는 자신의 이야기

처음 퇴촌으로 내려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모르는 것도 많았

기에 이웃에게 물어보고, 도움을 청하는 일도

잦았습니다. 하지만 이 덕분에 이웃과의 교류

가 시작되었습니다.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이

웃이 있는 반면 그것도 모르냐고 윽박지르고

무시하는 이웃도 있었습니다. 참 다양한 사람

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나의 이웃들은 나보

다 훨씬 먼저 이곳에 자리 잡고 농사를 지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퇴촌남종생

활문화네트워크의 주체 역할을 하고 있는 너

른고을생활협동조합을 준비하고 고민하는 이

들을 만났습니다.

조합원이 될 수 있는 대상자들과 대화를 나눌

만남의 장소가 필요하다고 내가 사는 곳을 방

문했고 나는 흔쾌히 자리를 내어주었습니다.

나보다 젊은 나이의 사람들이었지만 부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며 ‘나는

저 시절, 무엇을 했나’라고 돌이켜보는 시간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함께하는 공동체적인 삶

보다는 사사로운 개인감정에 치우친 삶을 살

았던 내게 이들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

가왔습니다. 그리고 나도 조금씩 이들과 함께

하기 시작했어요. 내가 농사짓는 밭은 분양해

서 함께 농사를 짓고, 인근 교육기관에서 필요

로 하는 일에 동참도 하고, 이렇게 함께 살아가

는 삶을 새롭게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개인적

으로는 제 2의 삶이 펼쳐진 셈이죠. 그리고 이

제는 나만이 아닌 너를, 그리고 우리를 생각하

는 퇴촌남종생활문화공동체가 만들어져서, 우

리의 보다 밝은 미래가 펼쳐지길 기대합니다.

Page 44: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86 87

대구 중구 성내 2동

도심재생문화재단

춤이 좋았습니다. 빠른 비트에 반응하며 바

람을 가르듯 몸을 움직이는 브레이크댄스가

좋았습니다. 그래서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

작한 비보이의 생활은 공고를 다니며 기계와

씨름하던 서글픈 10대의 마지막을 비쳐줄 해

방구였습니다. 대구YMCA의 대구춤판에 어

울리며 피가 나도록 그야말로 꼭지가 돌도록

춤을 췄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쇠와 금속을

다루는 공장에 다니면서도 춤을 버릴 순 없

었습니다. 그러던 중 대구YMCA에서 설립한

사회적기업인 “희망자전거제작소”에서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왔습니다. 평소 부

속만으로 자전거를 뚝딱 만들어내던 제 솜씨

를 알아봤던 탓이었습니다. 아트바이크는 용

도와 디자인에 맞게 자전거를 창의적으로 만

드는 작업이었습니다. 가끔 춤을 추기도 했고

여러 가지 재미있는 자전거를 설계하고 만들

어 냈습니다. 목공일도 짬짬이 익혀 갔습니다.

열정과 재미로 일에 빠져 사는 어느 날, 갑자

기 어깨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몸을 돌

보지 않고 일한 탓에 어린 나이에 오십견이 와

버린 것입니다.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

다. 치료와 요양을 해야했지요. 그렇게 일을

관두고 치료를 하고 몸을 추스린 뒤 이번엔 수

제 명품자전거를 만들기 위해 혼자서 일을 시

작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주위의 도움과

악전고투로 모은 돈으로 일을 시작하기 직전,

또 탈이 났습니다. 이번엔 아주 목숨이 위험할

정도였어요. 몸을 과신하고 너무 무리를 한 바

람에 부정맥으로 폐에 물이 차서 갑자기 쓰러

진 것입니다. 병원에 실려간 뒤 심장 전기충격

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깨어난 뒤 찾아

온 느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다행

히 몇 달간의 치료는 그간 몸을 돌보지 않고

달려 온 나를 돌아보고 새롭게 가다듬을 수 있

는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동안 들

어간 병원비와 빌린 돈을 먼저 갚아야 했습니

다. 그리고 빚을 다 갚는 순간 일을 그만 뒀어

요. 또 다시 시작해야 했지요. 이번엔 마음을

추스르고 그 간 관계를 맺어 온 커뮤니티 활동

가 및 독립예술가들과 대안공간을 시작했습

니다. 자전거를 만들 수 있고 사람들과 많은

것을 나눌 수 있는 ‘스페이스 우리’라는 커뮤

니티 공간이었어요.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자전거를 만드는 일과 도시농업을 위한 폐목

을 활용하는 작업도 함께 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 사용하고 버려지는 폐 팔레트를 이용해

내가 추는 30대의브레이크 댄스

1년차

서 작은 가구도 만들고 텃밭상자를 만드는 일

이었습니다. 대구사회연구소와 녹색소비자연

대와 협력해서 물건을 만들어 납품도 하기 시

작했습니다. 관심 있는 사람들과 만나며 활동

을 하며, 작은 규모의 프로젝트 사업도 함께

진행하였지요.

그러던 중 중구에서 생활문화공동체 사업인

‘상화와 함께하는 골목주민 다다프로젝트’의

‘주민목공소’ 운영에 대한 제의가 들어왔습니

다. 귀가 솔깃했어요. 평소 하고 싶은 일이기

도 했고 무엇보다도 마을 사람들과 가까이 만

날 수 있다는 것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리고 약간 망설여지기도 했습니다. 목공에 대

한 경험도 일천할뿐더러 주민목공소를 알리

기 위해 상근도 해야 할 입장이라 생계가 막막

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후배와 의논해서 무작

정 뛰어 들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생계용 벌

이는 다른 쪽에서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구

요. 주민목공소의 일을 이렇게 시작이 되었습

니다. 수업계획표를 짜고 목공샘플도 만들고

주민들을 만나는 일을 해나갔어요. 동네 주민

들은 수준 낮은 강사들을 반갑게 대해 주셨고

같이 해 주었습니다. 근대 골목에 위치한 주민

목공소는 조금씩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성

장해 나갔고, 참여 문의가 늘고 주위 중학교에

서 단체수업 의뢰가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그

렇지만 어설프게 시작한 목공소 일은 매끄럽

지 못했고 공동체로 만들어 나가는데 여력도

딸렸습니다. 도시 한복판에 살고 있는 주민들

은 문화센터 매끈한 문화수준으로 눈높이가

맞춰져 있었고, 아파트에 살면서 이웃 간의 관

계도 그리 많지 않은 편이라 결합도가 약하기

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몇몇 열성적인 주민들

의 분위기 때문에 목공소는 그런대로 자리를

잡아 나갔습니다. 이런 저런 문제들을 해결하

Page 45: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88 89

기 위해 뛰어다닌 덕분에 많이 배우기도 했습

니다. 나무의 성질과 종류, 마감재, 목공장비,

칠의 종류 등 현장이 아니면 익힐 수 없는 것

들을 몸소 익히면서 성장도 하였지요. 주민들

이 고민하면서 직접 디자인해서 만들어 낼 근

대역사골목의 기념품은 끝까지 하지 못했지

만 낯선 사람들끼리 어울려 함께 작업을 진행

한 이 시간들로 공동체의 씨앗 정도는 뿌려 놓

았다고 생각이 들어 뿌듯합니다. 그리고 이 와

중에 현대자동차에서 공모하는 청년사업 지

원사업에 덜컥 선정되는 행운도 잡았습니다.

주민목공소로 시작한 일련의 작업이 막 성과

를 거두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이제 1차 주민

목공소 사업을 마무리하고 2013년 1월부터는

2차로 주민들과 함께 주민목공소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힘이 닿으면 대구의 다른 동네에도

주민목공소를 만들어 볼 작정을 하고 있어요.

또, 시간이 나는 대로 미뤄 두었던 춤도 다시

출 것입니다. 30대의 몸과 마음에 맞는 브레이

크댄스를 말입니다.

경남 통영시 명정동, 중앙동

문화예술교육연구소 사람과 삶

위 지도는 ‘우리 동네’ 서피랑입니다. 그저 통

영에 위치한 한 동네라고만 여겼던 서피랑이

점점 ‘우리 동네’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문화예술교육연구소 사람과 삶’은 서피랑의

반대편, 동피랑에서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갑

작스레 동피랑 사무실 자리에 주민 분들이 판

매소를 차리고 싶다고 말씀을 하셔서 우리는

서피랑으로 터전을 옮겨 오게 되었지요. 서포

루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서피랑 마을은 옛 충

무시의 중심지입니다. 그래서 많은 문화유산

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문화유적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유산을

소재로 문화예술교육을 하기 위해 ‘서피랑 마

을’에 문화예술교육연구소 사람과 삶이 자리

를 잡았습니다. 서피랑 마을은 지금은 상대적

으로 많이 소외된 지역입니다. 충렬사 유적으

로 고도제한에 걸려 아파트를 지을 수 없는 서

피랑은 아직도 꼬불꼬불한 골목길이 남아있

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골목길을 탐방하며

서피랑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생활문화공동체 사업을 하면서 서피랑 마을

의 많은 주민 분들과 만났습니다. 주로 70세

이상의 어르신들입니다. 처음에 저희가 동네

어르신들과 노래교실을 열었는데, 한 달 정도

되었을때였을까요, 한 어머니께서 “이젠 그만

하면 됐으니, 서류 갖고 오나. 도장 찍어 주꾸

마” 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더운 여름날

에 무릎 꺾이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동네 Mr. 빈

동네 어르신 중에는 저희들에게는 Mr.빈으로

통하는 빈석용 님이 계십니다. 매일 저희 사무

실에 들러서는 커피 한잔과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시는 분이시지요. 저희가 모르는 마을

의 이야기도 들려주십니다. 저희에게는 홍보

대사 같은 분이시지요. 마을에 교직을 하셨던

분이 계시다는 정보를 주시면서 주민강사로

부탁해보라고도 하시고, 저희를 뚱하게 바라

보며 쟤들이 뭘 하려고 그러는지 의심하시던

주민들에게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니 함

께 하라고 분위기를 만들어주시기도 합니다.

Mr.빈 아저씨는 피부 관리에 철저하신 분입

우리마을 홍보대사 Mr. 빈

1년차

Page 46: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90 91

니다. 매일 선크림을 바르고 다니십니다. 축제

당일에도 썬크림을 안 바르고 나왔다며 다시

집에 갔다 오셨답니다. 여름에는 피부를 위해

항상 양산을 쓰고 다니시지요. 그리고 여름에

는 항상 영양탕을 즐겨드시며 저희에게 권유

를 하기도 합니다. 참, 저희가 유명한 코미디

영화의 주인공 Mr.빈으로 별명을 불러드리고

는 어떠시냐고 했더니, 빈 라덴 때문에 손해

가 막심하다고 하셔서 저희를 폭소케 하셨답

니다. 또, 집 앞 텃밭에서 여러 가지 작물을 재

배하시는 Mr. 빈은 저희 토요문화교실에서도

배추심기를 가르쳐주시면서 주민강사로도 참

여하였습니다. 서포루 일대를 돌면서 아이들

에게 마을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셨어요. 이

번 겨울 축제에서는 어묵담당을 하시면서 도

우미로 큰 활약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동네 형

님들을 불러 모아 주민노래자랑 참가를 독려

하기도 하셨지요. 앞으로도 Mr.빈 아저씨는

저희의 든든한 홍보대사 역할로 저희를 도와

주실 겁니다.

생활문화공동체사업의 마무리로 1년간의 성

과를 모아서 전시회도 하고, 주민잔치도 벌였

습니다. 많은 주민들이 오셔서 함께 해주시고

격려도 해주셨습니다. 이제야 조금씩 생활공

동체가 되어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

이겠지요. 진정한 생활문화공동체가 되기 위

한 한걸음을 내딛었을 뿐이지만, 그래도 시작

이 반이라는데 또 다시 힘찬 발걸음을 내딛

어야겠습니다. 서피랑의 어르신들, 고맙습니

다.!!!

Page 47: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92 93

경남 창원시 진해구 중앙동

경남독립영화협회

안녕하세요. 생문공 TV입니다.

오늘은 경남 창원시 진해에 위치한 ‘꽃비 내

리는 동네’에 살고 계신 마을 사람들을 만나

그 이야기를 들어 보려 합니다. 다들 어떤 삶

을 살고 계신지 한번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첫 번째 주인공으로 김남주 님을 모십니다. 꽃

비 내리는 동네, 올 한해 어떠하셨나요?

김남주

한여름 더위에 시작했던 ‘꽃비 내리는 동네’프

로젝트가 겨울이 되어서야 끝이 났습니다. 그

동안 배웠던 사진과 영상찍기, 동네를 찾아다

니며 만났던 어르신들, 내가 촬영한 장소들을

오래 간직할 것 같습니다. 처음 촬영할 때는

사람들이 옆에 보이면 너무 부끄러워서 카메

라를 내놓을 수도 없었어요. 사람들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살짝 찍고 얼른 챙겨서 나오

고 그랬으니깐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이런

부끄러움과 쑥스러움도 익숙해지나봐요. 이

우리는 꽃비 내리는동네에 살고 있습니다

1년차

제는 이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잠깐 찍어도 될까요’ 라

고 이야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많이 발전한

것 같아요. 또 여기저기 촬영을 하러 다닌 것

이 진해의 근대문화유산에 대해 공부하는 계

기가 되었어요. 더불어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애정까지 듬뿍 생겼습니다. 여러모로 큰

배움을 많이 가져다 준 시간이었어요.

다음에는 제가 직접 기획과 촬영, 편집까지 전

체를 모두 다 하는 감독이 되어 하고 싶습니

다.

아, 그러셨군요. 앞으로 멋진 김남주 감독님

을 기대하며, 다음은 김미라님의 이야기를 들

어보겠습니다.

김미라

전시된 사진을 보니까 그동안 해 왔던 게 쭉

생각나면서, 감동입니다. 동네 건물들을 그냥

볼 땐 무심코 지나갔는데, 이게 100년의 역사

가 있다는 걸 알고 보니까 새롭게 보이는 거예

요. 그리고 역사가 지금도 그 건물 안에서 여

전히 진행되고 있잖아요. 새로운 발견이랄까

요. 언제 우리가 이렇게 카메라를 들고 그 안

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보겠어요. 진해

의 100년 역사의 숨결도 느끼고, 이 곳에서 삶

을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만남도 너무 소중했

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에 할 수 있게 되어 즐

거웠고 새로운 걸 많이 배웠습니다. 다음에는

내가 찍은 걸 내 손으로 편집해 보고 음악도

한번 넣어보고, 영화처럼 만들어보고 싶어요.

아하, 김남주 감독님에 이어 김미라 감독님도

곧 탄생하실 듯 합니다. 그 다음은 안선희님

이야기를 좀 들어볼까요?

Page 48: 2012 생활문화공동체 '마을사람들

    94 95

안선희

저는 동생이 생기는 아름이에게 선물을 하나

해주려는 생각으로 동화 만들기를 시작했었

어요. 동화 만들기를 하며 한번 더 아름이를

생각하게 되었고 좀 더 잘해줘야겠다는 반성

도 하게 되었습니다. 동화 만들기는 저희 식

구 모두에게 큰 선물이 되었습니다. 처음엔 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시작했는데, 선생님

들의 도움으로 끝을 맺게 되어 너무 감사드

립니다.

멋진 엄마, 안선희 씨의 이야기였습니다. 아,

방금 들어 온 속보입니다. 안선희씨가 동화 내

레이션 녹음을 마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둘째

를 순산하셨다고 합니다. 산후조리 때문에 함

께 마을축제에 참석하지 못해 안타깝다는 이

야기를 꼭 전해달라고 하시는군요. 다음에는

태어난 둘째를 위해 멋진 동화를 만드시길 바

랍니다. 정은숙, 우경애, 주홍진 님의 이야기

도 들어보겠습니다.

정은숙

‘꽃비 내리는 동네’ 참 예쁜 말이죠. 그런데 사

실,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내가 뭘

하고 있는지 감을 잡지 못해서 한참을 헤맸습

니다. 이제 조금 감 잡으려고 하는데 끝나버

렸네요. 참 아쉽습니다. 우리가 취재했던 여

좌동 관사가 있는 그 골목길은 사실 저에게

추억이 아주 많은 곳이었습니다. 왜냐면 저는

거기서 초등학교를 나왔거든요. 그래서 어릴

적 기억이 되살아났고 지금도 그대로인 모습

이 참 좋았습니다. ‘진해 시간과 마주보기’라

는 우리 다큐멘 터리 제목처럼 정말 시간과 마

주볼 수 있었어요.

다큐멘터리 화면 속에 나오는 제 모습을 보고

는 좀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화면 속의 모습이

사실 저의 지금 나이 그대로의 모습일텐데, ‘

아, 내가 이제는 나이가 들었구나.’ 하는 생각

이 들더라구요. 내가 지나온 세월만큼 늙어 있

었고, 여좌천도 내가 놀던 여좌천이 아닌, 또

다른 여좌천이 되어 있었다는 걸 보니 모든 게

새로웠습니다.

우경애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여러 장소를 다녔

는데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제가 찍은 선학곰탕

하고 장옥사거리예요. 거기 집들이 그냥 지나

다닐 때는 몰랐는데 사진으로 남겨진 컷들을

보면서 정말 우리가 간직해야 할 건물들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이 프로젝트는 우리가 안방처럼 드나드는 장

난감도서관에 모여 진행을 하니까 오고 가는

길들이 편해서 참여하기도 정말 좋았습니다.

또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

라 좋았어요. 인터뷰를 생애처음으로 해 봤는

데 인터뷰를 당하는 쪽보다 하는 우리가 더 떨

리고 신났던 것 같아요. 하지만 너무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다 보니 아직 제대로 익히지 못

한 것 같아서 이런 부분들은 아쉽습니다. 새로

운 걸 배워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하던데 이번

작업을 계기로 나의 열정을 사회로, 이웃으로

나누고 싶습니다. 함께 한 선생님들, 우리들,

모두 파이팅!

주홍진

사람과 사람이 만나 특별한 이야기를 나누고

공간과 사람이 만나 세월과 시대를 공유합니

다. 진해의 숨겨진 모습, 그리고 과거에서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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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된 지금의 모습, 한 번도 접근해보지 못했

던 진해를 짧게나마 이 프로젝트를 통해 만났

습니다. 작은 시도였지만 나 스스로의 시각과

관점을 키우는 데 큰 몫을 했습니다. 또한 제

가 경험하지 못한 앞 세대의 삶의 이야기들을

우리 다음 세대들에게 진실하게 전달하기 위

해, 보존과 기록이라는 작업을 서툴지만 뿌듯

한 마음으로 해봤습니다. 하지만 시작의 어려

움과 어색함으로 한동안은 적응을 못했었습

니다. 카메라, 그리고 촬영, 이 모든 게 제게

는 넘어야 할 산이었으니깐요. 또, 이제껏 저

는 사진 찍는 감각이 아주 둔하다고 생각하고

살아왔었거든요. 다큐 수업, 사진 수업 덕분

에 사진에 대한 부담과 촬영에 대한 불안감도

이젠 어느 정도 해소되었습니다. 이태웅 선생

님 말씀처럼, 직접 찍어보는 것, 그보다 더 좋

은 연습은 없을 것 같습니다. 참 좋은 의미 있

는 경험이었습니다. 좋은 작업을 함께 할 수

있는 행운과 제 눈에 비친 진해를 함께 바라

보고 나눌 ‘우리’가 있어 행복했습니다. 문화

를 만든다는 것, 그리고 이끌어 가는 것. 이 근

사한 일에 참여했다는 뿌듯함이 마음 가득 따

스한 꽃비가 되어 전해집니다. 이제 좋은 카메

라 갖고 싶네요.

주홍진님, 꼭 멋진 카메라 가지시길 바랍니다.

서정표, 송복년, 오순아 님의 이야기도 마져

들어보겠습니다.

서정표

진해에 신도시가 생기면서 구도심이 자꾸 죽

어가고 있는데 이곳에 생활문화공동체를 만

들어서 문화적으로 활성화시킬 수 있으면 정

말 좋겠습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여기

저기 취재도 다니고 촬영도 하다보니까 진해

에 이렇게 예쁜 곳이 많고 자랑할 게 많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동네 취재를 나가서 처

음에는 망설여지기도 하고 또 주민들이 대답

을 잘 안 해주면 어떻게 하나 이런 걱정을 많

이 했는데 의외로 모든 분들이 너무 취재도 잘

해주시고 적극적으로 해주셔서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또 좋은 사진을 많이 찍게

되면서 사진촬영이라는 새로운 취미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그래서 너무 감사합니다. 이번

기회에 많은 걸 배웠지만 프로젝트 기간을 좀

더 길게 해서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고 좋은

사진을 더 많이 찍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래도 짧은 기간에 좋은 사진들이

나왔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계속 이렇

게 사진을 찍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도 계속 만들고 싶습니다. 첫 번째 마을잡

지가 나왔지만 내년 내후년에 2권 3권이 계속

나올 수 있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송복녀

인터뷰 작업에서 많은 아쉬움이 남아요. 동네

사람들 인터뷰를 하려고 가기 전에 뭘 물어볼

건지 일단은 적어가긴 했는데 현장에서는 하

다보니까 그게 뒤죽박죽이 되더라구요. 사실

질문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대답이 바뀌는

거잖아요. 좋은 인터뷰를 할 수 있었는데 연습

량이 부족했던 탓인지 많이 아쉬웠습니다. 또,

새벽시장 찍으러 밤에 촬영을 나가면 조명 때

문에 사진을 몇 컷 찍어도 간판 글자가 안 나

오는 경우가 있었는데요. 어떻게 찍긴 했지만

마음먹은 대로 사진이 나오질 못했어요. 일일

모델로 선정되신 마을 사람들도 피곤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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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일을 하시는 분들이라 은근히 귀

찮아하시던데...... 가게도 마쳐야 하고, 손님

도 오는데 우리가 귀찮게 하니까 좀 미안하

긴 하더라구요.

오순아

저는 만났던 사람 중 인상 깊었던 건 진해우체

국에서 만난 허 인 과장님이셨어요. 저희가 아

무리 통신기기가 발달하고 스마트폰 세대라

해도 마지막까지 지켜야할 감성이 있죠. 아날

로그 방식의 그 감성. 허 과장님은 그 감성을

우체국에서 끝까지 지키고 싶다고 하셨어요.

최근에 MBC경남 <보물상자>에 우리 프로젝

트 ‘꽃비 내리는 동네’를 방송한다고 해서 제

가 진행자가 되어 카메라 앞에 선 적이 있었습

니다. 그 동안 엄마로, 여자로, 딸로 살면서 참

많이 양보하며 참고 살았던 탓인지 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참 어색하고 어려웠던 부분이

었는데요. 이 날은 저 개인이 아니라 우리 전

체를 위해 자랑하며 드러내고 싶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기도 하며, 무엇보다 우리가 일궈낸

예쁜 모습들을 많이 보여주고 싶어 평소에 안

쓰던 힘까지 바짝 내어 씩씩하게 촬영을 했었

습니다. 참 즐거웠어요.

요즘 저는 ‘힐링이 필요해’ 라는 노래를 많이

듣는데, 이 작업을 하면서 제가 많이 치유가

됐어요. 다들 서울로 가고, 성공해야 되고, 많

이 벌어야 되고, 남 앞에 서야 된다는 마음들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이 위축이 되어 있었습

니다. 지방에 있으면서 주부로 살아가며 집에

서 늘 누구를 기다려야 하는 수동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 때문에 주눅이 들어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이 프로젝트를 위해 주도적으로 일거

리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고, 숨겨져 있던 것들

을 찾아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부분들이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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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았어요. 특히나 늘 가까이에 있기에 스쳐 지

나갈법한 우리 동네 장인들. 이분들의 삶을 취

재하며 정말 예쁘고 아름답다란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저렇게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을 하

게 되었습니다. 또, 저도 ‘한 엄마로, 여자로,

딸로 사는 게 이름도 없이, 잊혀지는 삶은 아

니구나’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도 저분들처

럼 정말 내가 있어야 할 곳에서 정확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아

름다움인지를 느낀거죠. 정말 제가 많이 치유

를 받은 것 같아요. 그래서 참 이 작업들이 엄

청 고마웠어요. 가을 타고 외로울 수 있는 시

간이었는데 풍성해지고 푸근해지고 넉넉해지

고 그랬어요. 감사합니다.

와우, 너무나 멋진 말씀들이었습니다. 꽃비가

아닌 행복이 내리는 동네가 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꽃비 내리는 동네에서 생문공TV 였

습니다.

사실 이 ‘꽃비 내리는 동네’는 2012년 생문공

사업으로 진행된 프로젝트입니다. 초기에 참

여자들이 지역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질 수

있도록 마을탐방활동을 펼치며 그 내용들을

사진, 다큐멘터리 영상, 잡지 이렇게 세 분야

로 나눠 담아내는 작업이었습니다.

간략히 설명을 드리자면 사진찍기 사업은 주

로 우리 마을 사람들이 주요 모델이 되셨구요,

임신 중인 아기엄마와 정기적인 참여가 힘든

분들을 위해 그림 동화 만들기 작업이 진행

되었습니다. 마을 다큐멘터리 작업은 인물 보

다는 공간에 포커스를 두어 진행되었어요. 참

가자들이 만든 다큐멘터리 <진해, 시간과 마

주보기>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이 마을은

1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가 아니라 ‘

어머, 어릴 때 놀던 그 골목 그대로네! 아직도

옥상에 안테나 있는 집이 있다! 아, 주택이 그

립다!’ 하며 끝나는, ‘동네 아줌마’표 다큐멘터

리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을잡지는 사진 활

동과 다큐멘터리 활동을 펼치면서 취재하게

된 다양한 이야기들이 실린 잡지였습니다. 아,

마을잡지의 표지모델은 바로 수선집 할아버

지셨다고 하네요.

꽃비 내리는 동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을 맺습

니다. 하지만 꽃비 내리는 동네 사람들의 삶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지금을 시작으로 앞

으로도 그들이 찍은 사진과 취재 내용으로 마

을잡지가 발행되고, 다큐멘터리가 제작되는

멋진 삶을 꿈꿔봅니다. 계속해서 우리 마을에

는 꽃비가 내립니다.

‘마을사람들’을마무리하며

문화활동가들에게 생활문화공동체 만들기 사업의 매력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첫째는 문화예

술적 가치와 프로그램을 통한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 마을공동체를 변화시켜보고자 하는 도전

정신을 지원받을 수 있다는 것. 둘째는 3년 연속 실험해볼 수 있는 장기지원이라는 점. 셋째는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사업비의 규모가 꽤 크다는 점일 것이다.

2012년 생활문화공동체 만들기 사업 역시 2년차 연속지원사업과 1년차 신규지원사업이 진행

되었다. 신규지원사업의 경우, 기초단위의 문화재단들의 의욕적 진입이 있었고, 딱히 문화예술

단체라고 명명하기는 어려우나 지역 내 마을공동체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작은 조직들이 본 사

업에 진입하였고, 각 사업별로 성과도 좋았던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이들 두 비교집단들은 궁

극적 목표는 유사하나 접근방식에서는 다소 차이를 보였다. 기초단위 문화재단은 전문적인 문

화예술향유에 집중한 반면, 마을단위의 자발적 결사체의 경우는 그들 나름의 소박한 방식으로

주민결속력을 다졌다. 그리고 그들은 마을주민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문화예술로 마을단위의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은 아니며, 장기적인 반복학습과

사소한 듯 보이는 갈등들이 문화적인 방식으로 풀어가는 과정에서 습득되는 그 무엇들이 공동

체를 결속해내는 것이라 생각된다.

큰 공연 몇 개 보여주고 함께 즐기는 것을 넘어 작은 것 하나라도 내 것, 우리 것이 되어가는 과

정에 좀 더 주력하는 것이 생활문화공동체 만들기 사업의 의의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이춘아(한밭문화마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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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공동체에서 문화예술적 접근은 우리가 사는 삶의 터에서 더 나은 방향과 방법을 함

께 사고하고 찾게 하는 삶의 창의성이다. 그래서 내 삶과 우리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하고,

그 속에 가치를 발견하게도 하며, 나와 이웃이 함께 즐기며 미래를 설계하게도 할 수 있다. 하

지만 그것이 빠른 시일, 결과로 나올 수 있다고는 장담을 할 수 없지만, 그 과정을 통해 사고와

인식의 변화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의 가능성은 볼 수 있다 여긴다.

생활문화공동체 사업이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4년 차에 들어왔는데 그것은 다양한 축척의 시

기라 할 수 있다. 분명 다양한 모색의 방법들을 찾아가며 험난한 과정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사업 또한 현장의 여건과 사업단체의 현실을 고려하며 확장되고 진정성 있게

깊어져 가고 있다고 본다. 그 점에서 현재 지역에 대한 관심의 폭이 높아지고 있는 우리사회의

상황으로 볼 때, 생활문화공동체 사업은 지역공동체 관련한 사업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중요한 사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은 지속적인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추진해온 과정

이 이 사업의 성과라 보기 때문이다. 주민과 사업단체의 관계 또한 하루아침에 형성될 수 없다.

주민 간에도 그 점은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이해

와 소통의 시간이었음을 사업을 통해 알았기 때문이다.

생활문화공동체사업은 지역주민이나, 사업단체나,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나 이해와 소통

을 위해 그 관계의 끈을 놓지 않고 나아가고 있기에 그 속에서 배우며 만들어가는 과정이라 생

각한다. 그래서 이것은 일시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앞으로가 더 깊어지고, 다양하게 확장되

어, 함께 미래로 가는 사업이라 믿는다.

채성태(문화공간 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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