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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인권교육 첫걸음, 인권교육 활동가를 위한 워크숍 인권교육 오르락내리락 고개넘기 [일시] 1차 기초교육 2014.5.23.(금) 오후1시~6시 / 5.24(토) 오전9시30분~오후5시 2차 기초교육 2014.5.30.(금) 오후1시~6시 / 5.31(토) 오전9시30분~오후5시 3차 기초교육 2014.6.13.(금) 오후1시~6시 / 6.14(토) 오전9시30분~오후5시 [장소] 이룸센터(여의도 9호선 국회의사당역 4번 출구)

2014년 인권교육 첫걸음, 인권교육 활동가를 위한 워크숍 인권교육 …³ 개넘기... · 2014년 인권교육 첫걸음, 인권교육 활동가를 위한 워크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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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인권교육 첫걸음, 인권교육 활동가를 위한 워크숍

인권교육 오르락내리락 고개넘기

[일시]

1차 기초교육 2014.5.23.(금) 오후1시~6시 / 5.24(토) 오전9시30분~오후5시

2차 기초교육 2014.5.30.(금) 오후1시~6시 / 5.31(토) 오전9시30분~오후5시

3차 기초교육 2014.6.13.(금) 오후1시~6시 / 6.14(토) 오전9시30분~오후5시

[장소] 이룸센터(여의도 9호선 국회의사당역 4번 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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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정>

♣ 1차 기초교육

5.23(금) 인권감수성

5.24(토) 차이와 차별 / 인권의 가치 Ⅰ

날짜 시간 프로그램 진행

5/23(금)

13:00~14:00 몸풀기 마음열기우진아

14:00~15:30 인권감수성 1

15:30~16:00 휴식

16:00~18:00 인권감수성 2- 내 안의 인권세포를 깨우다! 날맹

5/24(토)

09:30~10:00 몸풀기 마음열기

10:00~12:30 차이와 차별 1-차별의 감각을 깨우다 묘랑

12:30~13:30 점심식사

13:30~15:30 차이와 차별 2-‘찌질한 것들’의 탄생과 역습 문희

15:30~17:00 인권의 가치 1-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른 가치의 해석 루트

** 매회 프로그램 끝난 후 가벼운 평가서 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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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정>

♣ 2차 기초교육

5.30(금) 인권의 가치 Ⅱ 5.31(토) 인권의 권리목록&쟁점 살피기

날짜 시간 프로그램 진행

5/30(금)

13:00~13:30 몸풀기 마음열기

13:30~14:30 과제점검

14:30~15:00 휴식

15:00~18:00 인권의 가치 2-난감한 상황들에 맞서는 연습 마로

5/31(토)

09:30~10:00 몸풀기 마음열기

10:00~12:30 인권의 권리목록 -인권 몬스터 카드 만들기 공현

12:30~13:30 점심식사

13:30~14:00 몸풀기 마음열기

14:00~17:00 인권의 쟁점 살피기-냉정과 열성 사이 양미

** 매회 프로그램 끝난 후 가벼운 평가서 받기

- 4 -

<일 정>

♣ 3차 기초교육

6.13(금) 인권교육의 원칙 / 인권교육 기획하기

6.14(토) 인권교육 기획과 시연 day~~

날짜 시간 프로그램 진행

6/13(금)

13:00~13:30 몸풀기 마음열기

13:30~16:40 인권교육의 원칙(중간휴식 15분) 묘랑/공현

16:40~17:00 휴식

17:00~18:00 인권교육 기획하기 공현

6/14(토)

09:30~10:00 몸풀기 마음열기

10:00~12:30 모둠별 인권교육 기획하기

12:30~13:30 점심식사

13:30~16:30 시연~~

14:30~17:00 고개넘기 워크샵 전반 평가 및 소감 나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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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집 순서

▎똑똑, 인권감수성 깨우기 -------------------------------------- 6p 인권 감수성이 쑥쑥! 내안의 인권세포를 깨우다 [읽을거리] 인권의 의미와 원칙 / 9p

▎▎반차별 : 인권,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다 ------------------------------ 16p 차별의 감각을 깨우다 ‘찌질한 것들’의 탄생과 역습 [읽을거리] 인권이 차별에 주목하는 이유 / 20p [읽을거리] 소수자의 삶과 정치 / 26p

▎▎▎새록새록 인권의 가치 --------------------------------------- 47p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른 가치의 해석 난감한 가치 상황들에 맞서는 연습

▎▎▎▎ 인권의 권리목록 & 쟁점 살피기 ---------------------------- 51p 인권 몬스터 카드 만들기 인권의 쟁점 : 냉정과 열정사이 [읽을거리] 인간의 권리를 어떻게 이야기 할 것인가 / 55p

- 6 -

똑, 똑,인권감수성 깨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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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감수성이 쑥쑥! *진행: 우진아

[교육목표]: 몸 풀기 마을열기를 통해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서로 마음의 빗장을 연다.

: 활동 프로그램으로 자연스럽게 참가자들이 자기소개를 할 수 있도록 한다.

: 인권에 대한 생각을 몸으로 표현하는 시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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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인권세포를 깨우다! *진행: 날맹

[교육목표]: 우리의 일상과 주변을 인권의 관점에서 살피는 과정 속에서 인권에 대한 이해와 감수성을 돌아본다.: 인권의 의미와 기본원칙에 대해 알아보고 현재 이슈에 어떻게 적용/활용할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

[진행방법](1) 도입: 사회적 몸짓 살피기① 사회적으로 부여된 혹은 장려된 몸짓이 가지는 훈육의 효과를 살피면서 몸의 감각을 돌아보는 것이 인권감수성을 일깨우는 것과 이어져있음을 확인한다. (예: 전형화된 스튜어디스의 몸짓과 항의, 국무총리의 사과)

(2) 어떤 존재의 일과표① 진행자는 준비한 존재들의 사례를 공유한다. ② 모둠 별로 한 존재씩 골라 일과표를 만들어본다. 시간대별 상황에서 일과표를 만드는 과정에서 각 존재들에게 어떤 권리가 필요할지를 전지에 함께 정리한다. (특정 상황에서 어떤 감정일지 떠올려보는 것도 한 방법)

한부모 여성-비정규직

노동자

방과 후 알바를 하는 고2 청소년

파트너와 함께 거주하는 20대

동성애자

시설 거주 지적 장애인

폐지 주워서 생활하는 독거노인

③ 모둠별로 발표하고 공유한다. 일상 속에서 인권이 어떻게 구성되고 연결될 수 있는지 살핀다.

(2) 닫는 강연 : 인권의 의미와 원칙을 PPT로 살펴본다.

*준비물: 전지, 매직(크레파스), 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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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인권의 의미와 원칙

- 인권교육센터 ‘들’

인권(Human Rights)이란 말은 단순해 보이면서도 뭔가 알쏭달쏭합니다. 인권은 ‘인간의 권리’, ‘인간이면 누

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로 설명되지만, 이런 뻔한 설명으로는 인권이 가진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기 힘듭니다.

세상에 무수히 존재하는 권리들 가운데 그 모든 것이 인권에 포함되는지도 혼란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흔히

말하듯 인권은 하늘이 내려주신 선물(천부인권)도 아니고, 국가가 허용한 권리(실정법상의 권리)도 아닙니다.

인권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뿌리로부터 자라난 사회적․역사적 산물, 곧 많은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힘들게 싸워서 얻어낸 결과물입니다. 대출을 받으려면 갚을 수 있는 능력을 입증해야 하지만, 인권은 다른 자

격이나 능력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은 존엄성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인권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존엄하다는 생각은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 역사와 더불어 움터 왔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존엄을 권리

의 체계로 구체화시킨 것은 근대시민혁명을 통해서였습니다. 권리의 체계란 권리의 주체와 권리의 구체적 내

용, 그리고 그 권리를 보장해야 할 의무를 진 대상이라는 3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근대시민혁명 이

후 인권을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원리로까지 격상됩니다.

정말 누구나 인권의 주인이 될 수 있나, 인권의 목록에 들어가야 할 권리는 어디까지인가, 특정한 조건에서

인권이 제한된다면 그 제한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등 인권의 주체와 내용, 범위를 둘러싼 긴장은 인권의 역사

에서 늘 존재해 왔습니다. 누구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한 권리가 누구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권리로 생

각되기도 하고, 특권이 인권으로 위장하여 약자들에게 패악을 부리는 일들도 일어납니다. 누구의 ‘입장’인가에

따라 인권을 해석하는 방향과 범위도 달라집니다. 이러한 혼란과 긴장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고 인권의 가

치를 지켜나갈 수 있으려면, 나침반 역할을 하는 원칙이 필요합니다.

1948년 유엔이 채택한 세계인권선언의 전문(前文)에는 인권을 아끼는 사람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원칙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세계인권선언은 다양한 종교와 역사와 사회적 조건을 지닌 나라의 대표들이 모여 인권에

대해 오랜 기간 논의한 끝에 인류 공통의 기준으로 합의한 문서입니다. 세계인권선언은 국제인권법의 모법(母

法)이라고 불릴 정도로 인권에 관한 중요한 기준 역할을 하고 있고, 다른 국제인권조약들과 선언들을 탄생하

는 기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인류 가족 모든 구성원의 권리” 인권의 보편성

세계인권선언은 인권의 주인이 ‘인류 가족 모든 구성원’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자기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

해서 보장받아야 하는 것이 인권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바로 ‘인

권의 보편성’입니다. 그런데 인권이 모든 사람에게 보장되었던 적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권의 보편성’은 허구라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러한 현실의 불평등 때문에

인권의 보편성은 더욱 더 위력적인 힘을 갖게 됩니다. 인권을 부정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우리에게도 모든 권

리를 보장하라!’고 요구할 근거를 제공해주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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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가족 모든 구성원의 타고난 존엄성과 평등하고도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전 세

계의 자유와 정의와 평화의 기초이며,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이 인류의 양심을 짓밟는 야만적 행위로 귀착되었으며,

인류가 언론의 자유와 신념의 자유를 누리고 공포와 궁핍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은 보통 사람의 지

고한 열망으로 천명되었고,

인간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반란에 호소하도록 강요받지 않으려면, 인권이 법

에 의한 통치에 의해서 보호되어야 함이 필수적이며,

(……중략)

점진적인 국내적 및 국제적 조치를 통하여 회원국 국민과 회원국 관할권 아래에 있는 영토의 국민들

양자 모두에게 권리와 자유의 보편적인 효과적인 인정과 준수를 보장하기 위해 힘쓰도록,

모든 국민들과 나라들이 성취해야 할 공통의 기준으로서 본 세계인권선언을 선포한다.

특권과 예외에 맞서온 인권

인권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인권은 늘 ‘특권’이나 ‘예외’에 맞서 싸움을 벌여왔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우열

을 가르고 우월한 사람들에게만 권리를 부여하는 ‘특권의 세계’에 맞서고, “거긴 인권보다는 다른 논리가 우

선하는 곳이야”라는 식으로 인권의 예외지대를 만들고자 하는 흐름에 맞서 왔던 것입니다. 인권의 보편성은

장애인이니까, 가난하니까, 못 배웠으니까, 어리니까, 여성이니까, 흑인이니까, 너희 나라가 아니니까 등 갖가

지 이유로 인권을 부정당해온 사람들에게 힘을 주어 왔습니다. 한 예로 ‘근대 인권 혁명’이라고 불리는 프랑

스혁명이 터진 지 2년 후, 올랭프 드 구즈라는 여성은 이렇게 프랑스 사회에 되물었습니다. ‘당신들이 말하는

인권의 주인인 인간은 과연 누구인가. 남성들에게는 보장된 권리가 왜 여성들에게는 보장되지 않는가. 여성들

에게 연단에 오를 권리는 왜 주어지지 않는가.’라고 말입니다. 이 질문의 밑바탕에는 인권의 보편성에 대한

요구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힘은 수많은 여성들이 동등한 권리를 얻어내기 위한 싸움을 불러일으켰습니

다.

보편성은 획일성과 다르다

인권이 보편적이라는 말이 곧 모두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말로 이해되어서는 곤란

합니다. 조건의 차이를 가진 사람들에게 똑같은 조건을 강요하는 것은 외려 차별적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장애를 가진 어린이가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집 가까이에 학교가 있고 입학이 거부되

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어린이가 가진 장애를 고려하여 학교의 공간도, 교육 방식도,

교육 기자재도 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의 인권 수준을 개선하고 불평등과 차별을

바로잡을 때까지 한정적으로 제공되는 ‘적극적 차별 시정 조치’를 역차별이라고 공격해서도 안 됩니다. 이는

세계인권선언 전문(前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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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을 일구기 위한 한시적인 우대 조치이기 때문에 차별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인권이 진정 보편적으로 보

장되기 위해서는 현실에 존재하는 차별과 맥락을 적극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권은 평등하고도 양도할 수 없는 권리” 인권의 기본성

세계인권선언은 인권이 차별 없이 보장되어야 하고 결코 ‘포기하거나 빼앗길 수 없는 권리’라고 말하고 있

습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권리가 아니라 사람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권리라는 뜻

입니다. 기본적인 권리와 기본적이지 않은 권리가 격돌할 때는 기본이 되는 인권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구급

차가 먼저 지나갈 수 있도록 다른 차들이 자리와 순서를 내어주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이지요. 인권의 기본

성은 각 개인에게 기본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권리가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 사회나 국가가

그 구성원에게 최소한으로 제공해야 할 기본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기도 합니다. 산소가 공급되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본이 되는 인권이 박탈되었을 때 그 상황은 중대하고 긴급한 상황으로 간주되

어야 합니다.

인권과 비필수적 권리가 충돌할 때는...

약이 없어서가 아니라 약이 너무 비싸서, 값싼 약조차 살 돈이 없어서 속절없이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환자

를 떠올려 봅시다. 환자의 생명권과 약에 대한 소유권이 격돌할 때 무엇이 우선되어야 할까요? 당연히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겠지요. 또 다른 예로 한 교사가 학생을 마구잡이로 때리고 있습니다. 교사

의 권위나 체면을 세워주는 일을 우선하여 이 장면을 팔짱 끼고 보고만 있다면 학생의 인격과 신체의 자유는

계속 짓밟히게 됩니다. 그렇기에 학생의 인권이 교사의 권위보다 우선해서 보장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공포와 궁핍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 인권의 상호불가분성

세계인권선언은 인류는 공포와 궁핍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열망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공포로

몰아넣는 것도, 사람을 궁핍으로 몰아넣는 것도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인권을 떠받치

는 두 개의 기둥이 자유와 평등인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존엄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빵’과 ‘자

유’, 평등과 자유, 사회권(경제․사회․문화적 권리)과 자유권(시민․정치적 권리)이 모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권리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서로 기대어 있

는 권리인데도 말이지요. 사회권과 자유권이 서로 기대어 있다는 것은 하나를 잃고서는 다른 하나도 지킬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인권의 상호불가분성이라고 말합니다.

궁핍한 사람은 공포에 놓인다

가까운 예로 경제적으로 독립된 권리를 갖지 못한 채 남편에게 생존을 절대적으로 의탁하고 있는 여성을 떠

올려봅시다. 이 여성이 남편의 폭력을 피해 집을 나오는 선택을 하거나 남편에게 맞서 폭력을 중단시키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또 매일 장시간 중노동에 혹사당하는 사람들이 매체에 실린 뉴스들을 꼼꼼 따라잡

으면서 정치에 대한 의견을 내어놓거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 일당을 포기한 채 투표를 하러

가는 일도 여간해선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소득이 높은 지역의 투표율이 높다는 통계도 나와 있지 않습니까.

이 같은 현실은 경제적 불평등이 자유를 잠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유를 잃으면 평등도 잃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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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자유의 상실이 경제적 평등을 잠식하는 일도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등장한 이후 아주 오랫동안

노동자들에게는 선거권이 없었습니다. 노동자들은 모임을 만들 수도 없었고 정치적 영향력도 형성할 수 없는

상태였기에 상상하기도 힘든 비참한 노동조건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당시 노동자들에게 부여된 권리란 ‘굶어

죽을 자유’뿐이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지요. 그래서 노동자들은 노동조건과 생활조건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모여서 외칠 자유, 모임을 만들어 힘을 보여줄 수 있는 자유, 자기 손으로 직접 대표를 선출할 자유를 얻어내

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노동권이라는 경제적 권리는 노동자의 시민․정치적 자유 없

이는 확보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자유와 평등, 자유권과 사회권은 대립하거나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의존하고 있습니

다. 더 많이 자유로워질수록 더 많이 평등해질 수 있고 더 많이 평등해질수록 더 많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

입니다.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 반란” 인권의 저항성과 역사성

세계인권선언은 인권을 짓밟은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은 ‘반란’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인

권을 억압하는 권력에 맞서 싸우고 잘못을 바로잡거나 새로운 권력을 세우는 일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뜻입니

다. 맹자의 말처럼, 국민(사람)을 바꿀 수 없으니 폭정을 일삼는 ‘왕’(오늘날에는 대표자, 정권, 법, 기업 등)을

바꿀 수밖에 없겠지요. 이 말을 뒤집으면 국가가 정당성을 가질 수 있으려면 인권 보장에 힘써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흔히 국가에는 3대 인권 보장 의무가 있다고 얘기됩니다. 국가권력이 직접 가해자가 되어 인권을 침

해해서는 안 된다는 ‘존중의 의무’, 제3자에 의한 인권 침해를 예방해야 한다는 ‘보호의 의무’, 그리고 인권 수

준을 지속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목표와 일정을 정하고 적극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실현의 의무’가 바로

그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타인의 인권을 침해해서는 안 될 책임이 있지만, 그 책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게끔 지원해야 할 책무는 국가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국가의 인권 보장 의무는 일반 시민의 인권 존중 책임

보다 더욱 무겁다고 봐야 합니다. 이 의무를 스스로 거스르거나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국가권력은 정당성을

얻기 힘들도 시민의 지지를 받기도 어려울 겁니다.

불의한 권력을 바로잡을 권리

사람들이 정당성을 잃은 국가권력에 맞서 스스로 빼앗긴 인권을 되찾거나 부인당한 권리를 얻어내기 위해

일어서는 것은 당연한 권리 행사입니다. 물론 저항 혹은 불복종의 형태와 수준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저항과

불복봉의 대상도 다양할 수 있습니다. 법 조항 하나가 문제일 수도 있고, 책임을 지닌 공직자 한 사람이 문제

일 수도 있고, 정책 방향 하나가 문제일 수도 있고, 정권 전체가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를 문제라고 말

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 권리를 우리는 ‘저항권’이라고 부릅니다. 인권은 근대시민혁명과 더불어 등장했습니다.

불의한 봉건체제에 맞서 저항권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인권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처럼 저항성은 인권의 탄생

비결이자 인권을 지속적으로 밀어가는 힘이 되는 원칙입니다. 우리 헌법도 부당한 정권에 맞서 떨쳐 일어났던

4.19 혁명의 저항정신을 헌법 정신의 하나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저항은 권리이면서 권리를 얻어내는 효과적인 수단이기도 합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미국의 인종차별에

항거하며 흑인들의 시민권을 얻어내기 위해 흑인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백인들이 수많은 집회와 행진을 열었습

니다. 현행법 위반으로 수많은 이들이 감옥에 갇히곤 했지요. 이 투쟁을 이끈 지도자 가운데 하나였던 마틴 루

터 킹 목사는 왜 협상을 시도하지 않고 연좌데모를 하고 직접행동을 하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비폭력 직접행동은 위기와 긴장감을 조장시켜, 협상을 거부하는 사회를 곤경에 빠뜨리고 더 이상 협

상에 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즉 사회의 쟁점들을 본격적으로 부각시켜 더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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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지부지 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 직접행동이 추구하는 바입니다.”라고 말이지요. 더 높은 양심의

법, 인권의 법을 따르면서 현실의 법이 가진 폭력성을 고발하는 저항이 없는 한, 인권 보장은커녕 협상의 기회

조차도 오지 않는다는 통찰이 엿보입니다.

저항을 통해 확장돼온 인권

저항권은 불복종할 권리, 인권을 옹호할 권리라고도 얘기될 수 있습니다. 이 저항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인

권의 무대로부터 배제됐던 사람들이 인권의 주체로 인정받는 일도, 시대에 따라 새롭게 요구되는 인권을 얻어

내는 일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인권이 등장했던 근대 초기, 인권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은 많지 않았

습니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선거권을 확보하는 데만도 2백년 가까운 세월이 필요했고, 20세기 초반에서야

여성의 선거권을 인정하는 나라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도 인권이 보장되어

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이 국제인권법으로 자리를 잡은 것도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정보사회가 발

전하면서부터는 정보의 집적이나 유출로 인한 피해가 급증함에 따라 ‘정보인권’이라는 새로운 권리가 등장하

기도 했습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도 전쟁에 반대하여 평화를 이루려는 사람들의 희생과 끈기 속에서 간

신히 인권의 무대에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권리나 새로운

이름의 권리가 새롭게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인권의 역사성’이라고 부릅니다. 인권을 아무리

현재 상태에 붙들어 매고 고정시켜 두려 해도 인권은 끊임없이 꿈틀거리며 확장을 거듭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권을 억압하는 사슬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의 저항이 인권의 역동성과 역사성을 만들어온 것이니까

요.

“법에 의한 통치로 보호” 실정법보다 더 높은 인권

세계인권선언은 인권이 ‘법에 의한 통치’(the rule of the law)에 의해 보장돼야 한다고 말합니다. 권력자의

기분이나 자의적 기준에 따라 인권 보장의 잣대가 좌지우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인권을 보장하겠다

는 의지, 인권이 어떻게 보장되는지가 명확하게 약속되어 있지 않으면 사람들은 불안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데 이때의 법은 현실에 존재하는 법, 법전에 기록된 법(실정법)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만약 실정법이

더 큰 양심의 법, 인권의 법을 위반하고 있거나 그에 못 미친다면 실정법보다 ‘더 높은 법’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 바로 ‘법에 의한 통치’ 또는 ‘법의 지배’의 참뜻입니다. 법의 지배와 준법의 의미가 달라지는 지

점도 바로 여기입니다.

법 이전에 사람, 실정법 이전에 인권

인권이 성문화된 법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보장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인권 기준에 부합하는

법은 인권을 보장하는 중요한 장치가 됩니다. 반면, 인권을 억압하는 도구나 부당한 정치권력을 유지하는 수

단으로 법이 악용되는 사례도 많습니다. 악명 높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흑백분리․차별정책)

도, 히틀러정권의 유대인 차별과 학살도, 한국의 민주화운동 탄압도 당시에는 모두 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합

법적 인권침해’였습니다. 법이 인권을 보장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대표적으로 국민기

초생활보장법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이름과는 달리 국민의 기초생활을 보장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생계 지

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질병에 노출될 위험이 더 크고 병에 걸려도 치료조차 못 받는 일

이 허다한데, 국민의 건강권을 보장해야 할 국가의 손길은 그에 미치지 못합니다. 실정법에 보장된 만큼만 인

권이라고 수용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법이 있기 전에 사람이 있고, 실정법이 있기 전에 인권이 있습니다. 그

러므로 우리는 법의 틀 안에서 머무를 것이 아니라 인권의 틀 안에서 법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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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높은 양심의 법, 인권의 법

1994년 영국의 여성 세 명은 인도네시아로 수출될 전투기에 몰래 숨어 들어가 준비해간 가정용 망치로 무기

발사 장치를 망가뜨렸습니다. 그 전투기가 동티모르라는 나라를 불법 점령하고 있는 인도네시아로 팔려간다면,

무고한 동티모르 시민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건 물론이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동티모르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데 쓰일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전투기를 망가뜨린 행위는 ‘파괴’ 행위가 아니냐는 비난을

받은 그 여성들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생명을 죽이는 무기를 부수는 행위는 파괴가 아니라 생명을 구

하는 일이다.”라고 말입니다. 이 여성들은 결국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실정법은 어겼을지언정 그보

다 더 높은 양심의 법, 인간의 법에는 충실했다는 것을 법원조차도 인정한 셈입니다.

“국내적․국제적 조치와 보편적 준수 요청” 인권의 상호의존성

세계인권선언은 인권 보장을 위해서는 국내적 조치뿐만 아니라 국제적 조치도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모든

나라에서 모든 사람의 인권이 보편적으로, 함께 보장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나 홀로, 외따로 존재하

지 않습니다. 다양한 정체성과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있고, 그 관계는 한 나라의 경계

를 뛰어넘어 연결되어 있습니다. 존재가 연결되어 있고 의존하고 있기에 당연히 여러 권리들도 유기적으로 연

결되어 있고 상호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권리와 타인의 권리를 대립하거나 경쟁하는 것으로 바라

보는 한, 혹은 나만의 권리를 이기적으로 주장하는 한, 나의 권리도 보장받을 수 없게 됩니다.

타인의 인권이 무너질 때 나의 인권도 무너진다

나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타인의 권리를 빼앗아 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권리를 얻기 위해 다른

집단을 희생시켜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와 타인, 내가 속한 집단과 다른 집단이 마치 대립하는 것처럼 만

드는 ‘틀’, 곧 질서와 구조 자체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학생 인권이 무참히 짓밟히는 학교에서는 교

사들의 처우도 엉망인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적 약자인 학생의 인권이 보장되는 학교라면, 교사의 인권도 소

중히 여기는 학교이겠지요. 또한 한 사람을 함부로 잡아가둘 수 있는 사회는 누구라도 함부로 잡아가둘 수 있

는 사회입니다. 처음에 정치적 반대자들을 몰살하기 시작한 히틀러 정권은 나중에 그 폭정의 망치를 유대인,

동성애자, 장애인에게로 확대했습니다. 내가 표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침묵한다면, 다른 집단을 겨누었던 화살

은 결국 나를 향해 돌아오게 됩니다. 자기 국민에게 폭정을 휘두르는 나라는 다른 나라를 향해서도 언제 선전

포고를 할지 모릅니다. 다른 나라를 함부로 점령하는 나라는 자기네 국민들 중에서도 가장 힘없는 사람들을

총알받이로, 전쟁 도구로 동원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한 나라 한 나라가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만큼, 내가 숨 쉬는 공기도 달라질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인권이 이야기하는 책임이 나옵니다. 인

권은 다른 사람의 인권이 침해되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연대할 책임을 일깨웁니다. 이 때 연대는 타인의 삶

에 책임을 다하는 행위이자 나의 권리를 지켜내기 위한 행위이기도 합니다.

인권의 세포를 되살리는 일

앞에서 살펴본 인권의 원칙과 성격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인권

이 격려되고 소중히 여겨지는 사회가 아니라 인권이 함부로 취급되는 사회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인권의

주인들도 자기 권리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 채 인권을 쉽게 포기하거나 인권 침해를 용인하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그 자체로 존중받는 사회가 아니라 능력과 부가 인격을 좌우하는 사회에서 살아왔습

니다. 그래서 인권의 주인들도 사람을 가르고 우열을 평가하고 희생양을 찾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나치즘

이 히틀러라는 개인의 잔혹성으로부터 싹터 자라온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동의를 기반으로 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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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지요. 우리는 넓은 바다에서 꿈틀거리는 인권이 아니라 작은 어항 안에 갇힌 제한된 권리만을 바라보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잔혹한 고문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소식에는 분노하면서도 한겨울에도 거리에서

잠을 청해야 하거나 촛불 하나에 의지해 잠을 청하다 화마에 휩쓸린 사람들의 처지에 대해서는 그저 안타깝

게만 여길 뿐 국가에 대해 격노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회가 끊임없이 반(反)인권의 질서를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으로 이야기할 때, 죽어버린 인권의

세포를 되살려 인권 감수성과 의식을 벼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인권의 세포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일상 속

에서 인권의 원칙을 기억하고 나 자신의 삶부터 인권적으로 변화시키는 노력이 뒤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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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차별

인권, 차별 없는세상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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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의 감각을 깨우다 *진행: 묘랑

[교육목표]: 당연하게 여겨져 온 차별 상황들을 살피면서 반차별 감수성을 일깨운다.: 무엇이 차별인가, 차이/차별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살펴보면서 차별은 정체성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모든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문제임을 알아간다.: 차별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을 어떻게 기를 수 있을지 함께 찾는다.

[진행방법]① 6~7명이 한 모둠을 구성한다.② 모둠별로 일상에서 차별이라고 느끼거나 생각됐던 경험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충분히 이야기를 나눈 후 다음의 형식에 따라 나온 이야기를 정리한다. 가능하다면 각각의 경험들을 유형화하여 정리해도 좋다.

인정, 존중 속상했다.무시, 모욕

차별일까?아리송해~

내가 다른 사람을

다른 사람이 나를사회, 제도, 정책 등이 우리를

③ 모둠 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모둠별로 전체 공유한다. 다음의 질문들을 고려하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 우리는 무엇을 혹은 어떤 상황을 차별이라고 생각하나? √ ‘나’라는 정체성은 고정되어 있나? 아니면 언제, 어떻게 변하는가? √ 내가 맺고 있는 관계, 나의 위치가 변할 때 나의 경험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 현재의 사회질서는 ‘능력’을 기준으로 구성되는데, 그것도 차별이라고 할 수 있을까?

④ 차별이란 무엇인지, 사회적 약자, 소수자는 우리사회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 정리하면서 마무리 한다.

[준비물]- 전지 5장, 매직 등 필기도구, 스카치 테이프, 화이트보드, PPT 사용 기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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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질한 것들’의 탄생과 역습-인권,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다

*진행: 문희

[교육 목표]-차별이 특정 소수자 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상성의 척도로부터 멀어진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 문제임을 느낀다.-차이와 차별의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작동에 대해 생각해본다. -차별을 넘어 연대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본다.

[진행방법]

1) 몸 풀기 마음 열기 ▪ 간단한 놀이 진행

2) 기준에서 멀어진 사람들을 초대하다▪ 각 모둠별로 다음 모임에 초대할 수 있는 사람들을 브레인스토밍 방식으로 찾아본다. 한 모둠의 활동이 끝나면 다른 모둠과 과제를 바꿔 위키백과 형식으로 과제를 더욱 풍성하게 채워 본다.

▪ 모둠 활동이 끝나면 진행자와 전체 참여자가 함께 정리한다.

3) 정리 강연 ▪ 모듬 활동에 나눴던 문제의식을 정리하며,▪ ‘소수성과 차별’ PPT로 정리하며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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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물]▪ 화이트보드, 보드마커▪ 빔프로젝터, 스크린, 노트북, 포인터▪ 전지5장, 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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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1]

인권이 반차별에 주목하는 이유?

- 인권교육센터 들

인권이 반차별에 주목하는 이유?

- ‘획일주의-같음’이 아니라 ‘보편주의-공정함’을 기준으로 인권의 가치가 실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따

라서 ‘권리’가 인권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아무 때나 누구에게나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차별을

정당화하는 지배규범에 대한 사회적 약자의 저항일 때만 존중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차별의 지향

이 사회적 소수자에게 기존의 권리를 확대 적용하려는 것을 넘어 인권개념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제기하

고 재구성하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1)

- 차별을 예방하고,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는 방식으로 사회는 가장 손쉽게 ‘법’이라는 제도를

선택하곤 한다. 물론 법제화가 무의미 한 건 아니지만 결국 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사람들 또한 사회의

지배집단으로 법 테두리 내에 들어올 수 있는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을 나눠 또다시 차별의 기제로 작

동할 수 있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차별의 문제를 절차나 제도화로만 귀결시킬 때 결국 차별을 판단하는

것 또한 지배집단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삶의 가치와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기획

과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권한강화와 사람들이 자기 안에 소수자성을 바라

보고 사회적인 연대를 할 때 가능하다. 나아가 지배집단의 전유물로 작동하고 있는 제도들의 내용과 집행

을 바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역할을 수행하기에 인권교육은 그야말로 ‘안성맞춤’ 그 자체!

차별, 필요한 거 아냐?

• 자기 발전의 자극제가 될 정도로 ‘적당히 불평등한’ 것은 좋은 것 아닌가?

• ‘능력’에 따라 대우하는 것과 차별은 다른 것이지?

• 구조기능론자 : 숙련된 사람이 필요한데 그러려면 훈련이 필요하고, 그 기간에 수반되는 희생을 훗날

보상해 줄 수 있는 유인요소가 필요. 그것이 바로 그 지위에 따른 권리와 보상이며, 결국 계층간 불평등

을 초래하지만 긍정적인 기능을 갖고 있어 불가피한 현상으로 봄.

- ‘운명’ VS ‘노력’ 또는 ‘선택’ : 차이에 대해 사회적으로 얘기되는 방식은 소위 ‘운명’적으로 가지게 된

차이(예를 들어 선천적 장애, 성, 인종 등)VS 본인의 ‘노력’이나 ‘선택’에 의한 차이(예를 들어 학력, 성정

체성, 전과, 가족형태 등)로 나눠 ‘배려’해야 하는 사회적 소수자 VS ‘일탈자’로서 사회적 소수자를 구분하

곤 한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구분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나머지 것은 개

1) 정희진, 「편견을 넘어 평등으로-인권을 위한 강의 : 인권의 성별정치학」, 창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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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의 ‘노력’이나 ‘선택’의 문제로 보면서 노력 여하에 따라 차별적인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는 착각을 하

게 만든다. 또한 불평등이 개인의 ‘잘못’이나 ‘무능함’ 또는 ‘부도덕’ 때문에 받게 되는 것이라고 간주하게

돼 사회적 소수자들이 겪는 차별을 순전히 그들 개인의 탓으로 돌리게 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 차별의 위계화 : 이처럼 이런 담론은 차별이 다 나쁜 게 아니라 ‘적당히’, ‘능력’에 따라, ‘동기 유발’을

위해 해도 되는 차별과 그렇지 않은 차별을 나누게 됨으로써 ‘차별의 위계화’를 가져온다. 2008년 국회에

서 입법예고했던 차별금지법(물론 지금은 아예 논의조차 되고 있지 않지만)에 대한 반응 중에도 이런 문

제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성별, 연령, 인종, 피부색, 출신민족, 출신지역, 장애, 신체조건, 종교, 정치적 또

는 기타의 의견, 혼인, 임신, 사회적 신분에 의한 차등 대우는 차별이고, 학력,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병

력, 출신국가, 언어, 성적 지향, 범죄 및 보호처분의 전력에 의한 차등 대우는 차별 기준의 범주에도 들어

가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도대체 차별에 순위를 매기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결국 불평등에 대

한 이런 인식은 차별을 금지하자면서 한편으로 차별에 줄을 세워 또다시 차별을 하는 말도 안되는 상황

을 만들게 될 뿐이다.

- ‘인간’ VS ‘비인간’ : ‘모든’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갖는다. 물론 현실에서 이런 인권의 보편

성은 당위적인 진리가 아니라 여전히 도달해야 할 가치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회불평등을 ‘불가피한’ 그리

고 ‘당연한’ 현실로 인정할 때 ‘모든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갖는다’는 진리는 쓰레기통에나 버

려야 하는 휴지조각으로 전락하게 된다. 결국 범주를 정해 ‘인간’ VS ‘비인간’으로 인간을 구분하게 되고,

비인간의 범주에 속하는 이들에게 가하는 냉대와 무시는 어차피 이들은 인격을 갖춘 인간이 아니라는 등

식 속에서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차이’는 필연적으로 차별을 불러온다?

- 차별이란?

: “구체적 개인들과 집단들 간에 존재하는 차이가 차별로 전환되는 것은 그 차이가 위계성을 띠게 될 때

이다.”2)(조순경),

: “특정 집단 내지 인구 범주의 특정한 속성이나 정향, 활동양식을 이유로 그 집단이나 집단의 구성원이

사회적 삶에 등권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인 방식으로 박탈하고, 이로써 그 집

단이나 구성원에게 물질적 측면에서 경제적 불이익을, 상호주관적 측면에서 종속관계를, 주관적 측면에서

정체성의 훼손과 같은 부정적 영향을 발생시키거나 지속시키는 제도, 기준, 조치, 실천이다.”3)(한국여성개

발원)

: “평등권침해의 차별행위라 함은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종교, 장애,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지역, 출

신국가, 출신민족,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상황, 인종, 피부색, 사상 또는 정치

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 된 전과, 성적 지향, 병력을 이유로 고용, 재화․용역․교통수단․상업시설 등

의 이용, 교육이나 직업훈련기관의 이용에서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다. 다만 다른 법률에서 특정한 사람

(집단 포함)에 대한 우대를 차별행위의 범위에서 제외한 경우 그 우대는 차별행위로 보지 아니한다.”4)(국

2) 조순경 외, 「차별과 인권」, 『차이의 신화와 차별의 현실』, 한국인권재단, 2002 3) 한국여성개발원, 『차별에 대한 국민의식 및 수용성 연구』, 2004 4)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연구모임, 『국가인권위원회법의 「차별」판단을 위한 지침』,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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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권위원회법)

- 간단하게 정리하면 차별이란 차이들 중 특정한 것을 골라내 어떤 것은 특별대우하고 어떤 것은 부당하

게 대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만 정의할 때 우리는 차별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데, 마치 현 상태에서

서로의 차이만을 인정해주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과연 우리가 서로 다른 존

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차별은 사라지는 것일까? 더욱이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취한 적극적인 조

치 또한 역차별이라며 주장하는 사람들을 볼 때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등 차별에 대한 논의

가 보다 구체화될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 그렇다면 차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살펴보자.5)

1. 임의로 겨누는 표적. 어떤 ‘차이’가 선택된다. 그것은 기준(일반적으로 규정을 맡는 집단)과의 차이를

명시하는 하나 혹은 여러 개의 특징이나 범주일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여성이고, 어떤 사람은

검은 피부를 지녔으며, 어떤 사람은 보스니아인으로 불리는 집단에 속하며, 어떤 사람은 유대인이다.

2. 집단 정체성 강요. 부정적인 특징들이 임의로 선택되어 그 집단에 첨부된다. 다음에는 이런 부정적인

특징들이 그 집단의 성원 각자에게 해당한다고 여겨진다.

3. 제도화된 차별. 표적으로 설정된 집단은 차별적인 법률과 관행으로 인해 권력과 자원, 특권에 동등하게

접근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이는 그 집단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서 그들의 열등성을 둘러싼 관념들이 심

화된다. 제도화된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반유대주의, 동성애 혐오 등은 편견과 인위적으로 창조된 ‘일

탈’을 강화한다.

4.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 ‘일탈자’로 지정되고 제도화된 차별에 의해 희생당한 집단의 성원들은 지배 집

단과는 다른 역사적 현실을 경험한다. 그들은 모든 집단적 사건들을 피억압자의 관점에서 경험한다. 그러

나 이런 분리된 경험은 한편으론 그들이 생존하고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이 된다.

- 러다 거너가 분석한 차별의 사슬을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차이가 필연적으로 차별을 불러 온다’는 말

속에 숨은 함정을 찾아보면 차별의 구조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

첫째, 차별의 조건으로 범주화된 ‘차이’를 다루는 개념이 적절한가? 많은 반차별 프로그램의 목표는 ‘서로

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 정도로 되어있다. 이때 ‘차이’ 자체는 자연적이고 생물학적이며, 실재하는 것으로

차별은 이런 ‘차이’ 때문에 생겨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예를 들어 이성애와 동성애를

‘차이’로 보는 것은 인간을 양성으로만 구분하기 때문에 생겨난 구분이다. 생식기(또는 XX, XY 염색체?)를

기준으로 인간의 성을 나누게 될 경우 엄연히 존재하는 ‘양성구유자’나 ‘트렌스젠더’는 이런 구분에서 배

제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을 ‘남’과 ‘여’로만 나누는 기준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역사적, 정

치적으로 만들어낸 ‘발명품’에 불과하다. 이처럼 ‘차이’가 그 자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판단되고 규정되는

것임을 보여주는 예는 ‘장애’의 개념에서도 드러난다. 실제 1961년 보건사회부와 한국아동복리위원회가 간

행한 「한국장해아동조사보고서」에는 장애의 종류에 ‘혼혈아’와 ‘사생아’를 포함시키고 있다.6) 인간을 남

성과 여성으로 분류할 때 그 기준이란 ‘남성’과 ‘비남성’을, 성인과 청소년은 ‘성숙한’ 인간과 ‘미성숙한’

인간을, 일반인과 장애는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이성애와 동성애는 ‘일반’과 ‘변태’를, 그리고 백인과 흑

5) 러다 거너, 『왜 여성사인가?』, 푸른역사, 2006 6) 정근식, 「장애의 새로운 인식을 위하여」, 당대비평 14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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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은 ‘표준적인’ 인간과 ‘비표준적인’ 인간을 만들어낸다. 즉, 차별의 조건이란 원래 존재하는 ‘차이’라기

보다는 흑과 백처럼 선택의 폭을 제한하고, 그 틀을 중심으로 ‘차이’를 창조해낸 것에 불과한 것이다. 결

국 인간을 구분하는 ‘기준’ 자체를 문제 삼지 않을 때 반차별은 지배적인 규범을 넘어서지 못하게 된다.

둘째, 전체를 하나의 특수성으로 정의하는 것은 가능한가?7) 예를 들어 ‘노인’을 나이라는 하나의 정체성

으로만 볼 때 그 안에 작동하는 다양한 차별은 사라진다. 삼성 이건희와 달동네의 허름한 단칸방에서 살

고 있는 할아버지가 단일한 입장에서 ‘노인’으로 자기를 정체화할 수 있는가? 당연히 아니다. 이처럼 하나

의 특수성으로 ‘노인’을, ‘여성’을, ‘10대’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성별이나 나이, 피부색 등을

기준으로, 한 인간의 모든 것을 환원하여 규정하려 들 때 성차별주의, 연령주의, 인종차별주의가 되며, 그

안에 존재하는 계급, 성, 학력 등 다양한 정체성에 따라 자원과 권력이 불평등하게 작동하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된다.

- 그렇다면 누가, 무엇을 기준으로, 왜 하나의 특수성으로 집단을 정의하려 하는가. 실제 ‘여성다움’은 ‘남

성’중심사회에서 ‘남성’의 시각으로 정의되어 왔다. 우리나라에서 ‘여성다움’은 ‘젊고, 예쁘고, 잘 빠진’ 사

람들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할머니, 아줌마, 여아’ 등은 ‘여성’이 아니라 그저 무성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물론 ‘성’으로만 해석되지 않는 더 많은 차별의 조건들이 숨어 있다.) ‘여성다움’은 매우 제한적으로 해석

되며, 아주 특정한 시기의 특정한 상태의 ‘여성’만을 ‘보편적인 여성’으로 설명한다. 이처럼 집단의 정체성

또한 지배집단의 이해와 관점에 따라 결정되며, 이를 은폐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편견과 고정관념을 만들

어 낸다.

- ‘과학’이라는 이름까지 동원해 부정적인 표식을 붙인 예로 ‘인종차별주의’가 대표적이다. 피부색이나 생

김 등에 따라 인종을 나누고, 두뇌의 크기를 비교해 위계질서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또한 인간의 사회 행

동은 환경이 아니라 유전 형질이 결정한다는 우생학은 ‘범죄자, 정신박약자’ 등을 ‘생물학적으로 오염된

인종’으로 분류했고, 실제 1907년 미국 인디애나 주에서 입법화돼 1914년까지 15개 주가 이 법을 제정하

기까지 했다. 도시 빈민이 증가하고, 호전적 노동조합 운동이 전개되면서 미국의 보수적 지배층이 자신들

의 생활양식을 위협하던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악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우생학을 받아들인 것이다.8) 이렇

게 만들어진 ‘차이’의 위계질서는 자원과 권력을 불평등하게 나누는 것을 정당화하고, 은폐해 또다시 지배

규범을 유지하고, 강화하게 된다.

- 결국 ‘차이’가 필연적으로 차별을 낳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구성하게 되고 그것이 차별로 이어

지는 구조9)를 살펴야 한다. 현재 구획된 ‘차이’를 서로가 그저 인정하는 것(이것 또한 받아들이지 않으려

고 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지만) 정도로 반차별에 대한 논의가 진행될 때 기존의 지배규범에는 아무런

균열을 내지 못한 채 사회적 소수자들을 끼워주는 형태로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배려’와 ‘시혜’의 관점

을 넘지 못하게 된다. 자칫 ‘차이’간에 존재하는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간과하게 만들기도 한다. 따라서 반

차별은 지배규범과 기존의 질서에 도전하는 문제제기이며 대안이어야 한다. 또한 사회적 소수자들이 어떻

게 배제․소외되어 왔는지 권력관계를 분석하고 나아가 이들에 공감과 이해, 연대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

7) 더 자세한 논의는 문현아의 「차이와 차별너머 : 경계선 횡단과 편견의 정치」(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4) 참고

8) 정근식, 「장애의 새로운 인식을 위하여」, 당대비평 14호, 2001 9) 러다 거너, 『왜 여성사인가?』, 푸른역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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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이들을 또다시 집단적인 정체성에 가두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구체적’ 타자들을 불러내야 한다.

차별이 유지, 강화되는 이유가 뭐야?

그렇다면 문제투성이 차별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유지되고 심지어 강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 한국사회를 살펴보면 유교 문화 내의 성, 연령별 위계 구조는 충, 효, 부덕, 또는 장유유서라는 도덕 또

는 선으로 이해되고 있다. 또한 소수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문제를 제기하고 저항하는 것을 마치

예의도 모르거나, 조화와 화합을 해치는 행위로 간주해 왔다.10) 결국 사람들은 사회질서 혹은 관습으로

굳어져왔기 때문에 이를 차별로 인식하지 못하기도 한다. 더욱이 한 사회 내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차별

의 벽들은 소수자들로 하여금 두려움과 절망감을 내면화함으로써 저항의 싹이 트는 것 자체를 억제하기

도 한다.

- 지배집단에 의해 선택된 차이를 근거로 사회적 약자들은 권력과 자원에 대한 접근을 박탈당한다. 하지

만 이런 과정에서 지배집단은 억압받는 집단들에게 차별화된 이점들을 제공하고 이를 통해 그들 간에 경

쟁이 붙도록 만듦으로서 새로운 위계를 만들어 억압적인 체제를 유지하고 강화한다. 사람들은 차별을 ‘능

력’,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내면화하고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악순환의 고리로 빠져들게 된다.

이렇게 차별은 은폐, 왜곡되면서 존속해 왔다.

- 차별이 계속 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동안 차별이 발생했을 때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왔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발생한 문제에 대해 원인을 찾고 해소하는 방식이 아니라 또다시 차별적인 방안을 만들어 본질적으

로 차별을 해소하지 못했다. (장애인용 화장실을 성의 구분 없이 하나만 만들거나

여성화장실에만 있는 유아용받침대 등) 또한 어떤 사안은 여전히 차별로 인식되지 못한 채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기도 한다.

반차별, 어떻게 해야 하나?

- ‘차이’와 ‘다양함’을 새롭게 쓰기 :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통해 만들어진 획일화된 해석 안에 갇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나는 장애를 뭐라고 생각하는지, 나이 듦이란 무엇인지 등등을 살피면서 자기 안에 어

느새 자리 잡고 있는 편견의 고리를 끊기 시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차이를 드러내는 방식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차이’ 자체에 대해 문제제기할 수 있어야 함과 동시에 기

존의 부정적인 표식을 바로잡고, 존재 자체가 인정받기 위함이다. 그렇지만 사회적 소수자 안에서도 대상

에 따라 차이를 드러내는 것의 의미는 다르다. 예를 들어 동성애자는 성소수자로서 존재 자체를 인정받아

야 차별의 문제가 해결되지만, 집이 없는 사람은 노숙인으로서 정체성을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노

숙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데 그 목표가 있다. 따라서 각 대상에 따라 권한강화라는 게 어떻게 이루어지

10) 조순경 외, 「차별과 인권」, 『차이의 신화와 차별의 현실』, 한국인권재단,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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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지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 차별의 조건이 되는 차이들은 서로 동떨어진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또한 어떤 차이가 어떤

차이보다 더 우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차별은 사회적 소수자들의 일상에서 연속적이며 동시적이고 다층

적으로 나타난다. 여성이며 비혼에 비정규직인 사람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따로, 비혼 따로, 비정규직 따

로 차별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 가지(물론 수도 없이 더 많겠지만...)가 복합적으로 작동한다. 민족

주의는 ‘같은 민족’에 포함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만을 가려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건강

함’을 필요로 하던 시기(한국의 경우 식민지 시기)와 결합해 장애인, 여성, 아동을 차별하는 기제로 작동

하기도 한다. 따라서 ○○차별주의를 통해 드러나는 차별뿐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 차별이 무엇인지, 그것

이 자신의 어떤 특정 정체성과 만나게 될 경우 어떤 차별이 발생하는지 등을 이해하고 사회적인 연대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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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자료 2] 제4기 장애해방학교 강연록(2010.10.07)

[특강] 소수자의 삶과 정치

- 고병권(연구공간 수유+너머)

고병권입니다. 아 정말. 제가 여기 왜 있는지를 알 수 없는데요. 굳이 있는다면 앞자리에 앉아서 들어야

하는데. 학교라면 이 자리가 선생의 자리인데;;‘ 오늘 소수자 문제를 다루는데, 장애문제를 다루는 것에 있

어서 잘 몰라서 많이 배워야 할 텐데. 제가 조금 하다 보면 여기 계신 분들이 여기 왜 왔는지 걱정할까봐

걱정도 됩니다.

단어들이 다 어려운데요. 소수성, 삶정치, 인문학. 이 단어 중에 한 단어라도 잘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

어요. 더군다나 최근에 더 그러한데, 어제는 여성단체에서 강연을 했는데. 저는 여성문제에 대해서 잘 아

는 것이 없어요. 그리고 탈성매매 관련해서 얘기도 잘 모르는데.

말하게 되다보면, 배워야 하는 곳에 가서 얘기를 하고 있다 보니 이래저래 마구 실례를 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강연 스타일이 최근에 하나 만들어지던데, 제 고백하고 하는 것 같아요. 감 놔라 배 놔

라 하는 건 아닌 것 같구. 제가 이 문제와 어떻게 만나게 되었고,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지를 말하게 되더

라구요. 이 강의를 하라고 제안을 받았을 때 계속 거절하고 별 짓을 다 했는데, 일정마저 저에게 맞춰주

시더라구요. 그리고 원고도 쓸 수 없다고 하니 예전에 강의안으로 하셔도 된다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래

서 예전 강의안으로 그냥 하기는 너무 민망해서; 조금 수정을 하긴 했습니다. 그 강의안에서 출발을 해서,

제 나름의 생각을 덧붙이도록 할게요. 이야기가 많지 않아서 같이 이야기를 나눠도 좋을 거 같아요.

사실 노들하고 인연을 맺은 건, 맺은 게 어쩌면 장애문제와 인연을 맺은 거 같아요. 저는 정말로 이 문제

를 기회도 있었을 테지만 간절히 그 문제에 대해 고민이 있을 때 찾아올 텐데. 그런 게 없었었죠. 노들과

만난 것은 2006년도에 활보 삭발투쟁을 서울시청 앞에서 하고 계셨었어요. 시청앞에서 삭발 투쟁을 했는

데, 저희는 그때 FTA라는 문제, 그 선언을 했던 해였어요. 그리고 새만금에 물, 그것을 막겠다고. 갯벌,

뭐라고 하나요. 방조제 공사가 거의 끝났는데 환경단체가 급히 정지시켜달라고 법원에 해서 대법원 판결

이 4월에 났어요. 그것을 정지했을 때 경제적 피해가 엄청나다 해서 허용을 했을 때에요. 그리고 대추리

에 농민들이 농사짓는다고 논에 물 끌어다 대면 정부에서 계속 다시 물을 도로 퍼내고 하던 때였어요. 그

때 수유너머에서는 욱해서 뭔가를 해야 하지 않겠나 했었고. 그 전 해에 3보 1배가 시위 문화로 잡혔을

때 우리도 그걸 해봄으로서 한국 사회 문제들을 멈추도록 해보자고 그랬어요. 그래서 대추리에 갔는데 그

게 무릎관절도 안 좋아지고 종교인들이 많이 하는 거라 해서 그냥 걷기로 했어요. 그래서 그냥 걷기는 왠

지 쪽팔리고 그래서 새만금에서부터 2주를 걸었는데, 행진을 준비할 때부터 보니까 이 문제가 노동자, 농

민의 문제로 보는데, 이런 일들이 특별한 일이 아닌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다. 직장을 얻고, 직장에서 쫓

겨나고 그런 사람들에게 이문제가 어떨까 했는데 그렇지 않을 수 있겠다. 수세기 동안 그런 사람들이 있

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어떤 사람들에게는 새삼스러운 문제가 아닌.

어떤 사람들이 경제 위기라고 서브프라임 위기. 미국도 경제 위기가 오고 실업률이 높아졌는데 그것도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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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스럽지 않다고 어떤 사람들이 글을 썼더라구요. 나는 몇 년째 백수라고 하면서.

거기서 어떤 분에게 얘기를 들었어요. 나이가 서른이 넘으셨다고 했는데, 글 쓰게 되고 말을 한지는 10년

넘었다고 했어요. 말씀은 잘 하시는데 , 글은 자기가 잘 못 쓴다고 했어요. 시설 문제가 저는 익숙한 문제

가 아니라 충격을 받았었는데, 그분은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식당에서 밥을 먹어본지가 30년이 된

사람도 있다고.

FTA얘기하면서 비정규직 문제를 얘기도 했는데. 월마트화 된다는 얘기가 있었어요. 비정규직들은 보면

하는 일들이 부차화 되요. 그 사람들이 그 꼭 필요한 일이 아닌 것처럼, 숙련되어도 진급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는. 월마트에서 박스를 5개만 나를 수 있다가 숙련되어서 20개를 날라도 승진이 아니라.이마트

로 넘어가는.

중간 범위가 가족 부양하고 그런 일자리가 많아 졌는데, 그런 일자리가 많아져도 숙련이 일어나도 의미가

없는 일자리에 저평가 받는 일자리.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월급이 낮죠. 최저생계비도 안 되어서 살 수도

없는데. 그런데 월마트에 가면 소비를 하는 사람들이 월마트에 가서 사면 살 수 있데요. 물건들이 싸죠.

그러니 거기서 사먹으면 된다는 거예요. 원래는 그런 물건을 파는 곳이 없으면. 싼 임금 받고 싼 물건 사

고 그러면서 뱅뱅 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점점 주변으로 밀려나고. 의료 통제 보고도 깜짝 놀랐는데.

IMF 이후로 상위 20%는 의료비용이 더 늘어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하위는 달라요. 더 늘었어요. 사망위

험율도 50만원 당 20%씩 증가한데요. 돈 없으면 학교 보내는 것도 안되고, 그러니 취직도 안되고, 다시

싼 거 먹어야 되고, 몸 아프면 치료도 못 받고. 상위는 잘 되고. 소위 양극화죠. 비정규직의 삶이 그런 거

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삶의 주변으로 밀려난다 생각했었는데.

시설장애인의 문제를 접하고 다른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보다 더 잘 아시겠지만 시설에 가면 다들 티비

보고 밥먹고 그러면서 삶이 끝난다는 거죠. 직장을 못 구하고 의료도 못 받고 그런 것이 자식에게 넘어가

는 것이 대중의 일반적인 것이다 해서 흥분해서 뛰쳐나가보니 그 일이 어떤 이들에게는 IMF이후의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노들을 접하면서 알게 되었고. 장애인 활동보조 투쟁하는 걸 보면서 많이 알게 되었어

요.

그렇게 보니 왜 이전에는 이 사람들이 내게 안 보였을까 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우리 사회 권력은 투쟁

이 가시화 되는 것은 상당히 힘이 있는 거예요. 권력의 핵심은 가시화 비가시화인거 같아요. 이랜드 위원

장이랑 인터뷰를 했는데, 노역장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데요. 물건 막 쌓아놓고, 거기 가보면 누가 쓰러져

울고 있고 아주 처참한 곳이래요. 그런데 그게 안 드러나고 감춰져 있는 거죠. 그 분말대로라면 진실을

보려면 노역장을 봐야 한데요. 비가시화, 안 보이게 해놓는 거죠. 가령 노점상들에 대한 대책을 보면 항상

변함이 없어요. 대책이 안 보이게 하는 거죠. 거리청소나 행정처분 하는 거. 노점상이 왜 많아지는 가를

찾으려고 하지 않고 안 보이게 하려고 하죠.

비가시화 되는데 장애인들이 저에게 장애문제가 왜 접할 수 없었을까. 간단히 말해 비가시화 된거죠. 간

단히 말하면 투쟁은 가시화하는 건데.

몇 개월 전에 탈시설 관련해서 발표를 했는데 서울시에서 관리하는 시설에 장애인들이 3천명이 넘는다고

해요. 왜 그런 것들이 한번도 제대로 보여지지 않았을까. 뭔가 안 보이게 하려고 하는 것이 있는 거죠.

여기 교장샘이 계실 텐데. R이라는 책을 만들 때 인터뷰를 했었어요. 이런 질문을 했는데, 싸움을 잘 하

더라구요. 장애인차별철폐연대. 굉장히 잘 싸우시던데. 과격하게 보이고. 그게 폭력적인 것이라고 느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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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않아요. 경찰이 다치는 것도 가장 적은 집회가 아닐까 해요. 심각하게 경찰이 다친 적도 못 봤고. 비

폭력 과격시위 같다고 얘기를 했었죠. 그때 교장샘이 그게 평소 우리의 삶이다. 집에서도 보호받으려고

쇠사슬을 매어 놓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리고 한강대교에서 기어가는 투쟁도 있는데, 외국에서 유명한

장애인이 왔을 때 한강대교 기어가는 투쟁도 했었는데. 원래 기어다니는데 그것을 집에서가 아니라 길거

리에서 한 거라고.

그게 왜 저는 인상적이냐 하면 하나는 가시적인 문제. 집에서 기면 안 보이는데, 길거리에서 기면 굉장히

다른 거 같아요. 권력은 안 보고 싶은데 계속 들어오니까요. 또 하나는 보통 투쟁은 자신의 삶을 멈춰놓

고 싸우는데, 이 싸움은 삶을 확장하는 투쟁이더라구요. 그래서 보통은 대추리 농민 싸움도 그런데, 올해

도 농사짓고 싶다 라는 구호가 인상 깊었어요. 올해도 농사짓겠다고 하는 게 싸움이 되는.

장애인도 나를 집에서만 살게 하는데, 나는 나와서 살아야 겠다고 하면서 삶을 확장시키면서 싸우는 거.

그래서 비가시화된 영역을 가시화시키는 투쟁이었던 거 같아요. 그런 소수성을 봤던 거 같아요. 보통 알

고 있는 싸움과 다른 거 같아요. 경찰이랑 부딪히는 것은 같지만 결과는 다른 거 같아요. 대학로에 노들

이 이사올 때도 비슷하게 이야기한 거 같아요. 장애인들이 계속 드러나고 나타나야 한다고. 마로니에에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투쟁이라고. 경기도 산 좋은 곳에 있는 것이 투쟁이 아니라.

존재한다고 알리는 것이 투쟁이고 그것이 소수성에서 중요한 거 같아요.. 자기를 그대로 보이고, 밀려나지

않고 그대로 있기. 이게 중요한 거 같아요. 사실 저에게도 그렇고, 장차연, 이동권연대 투쟁, 탈시설 투쟁

그 뿐만이 아니라. 여성문제, 성매매 해결을 위한 연대를 꾸려서 싸움을 시작했었고 요즘에 노숙인 운동

도 있고. 예전에는 못 보던 투쟁들이 많아졌죠. 그리고 또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쪽으로 밀려나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최근 몇 년 들어서 그런 쪽에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까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 우리 사

회에 그런 영역들이 좀 더 늘어나고. 이런 지대가 저는 주변이라는 말로 많이 쓰는데. 이것을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거 같아요. 보통 영어로는 margin이라고 하고. 부차적으로 되었다, 주변화되었다는 것은 핵심

이 아니라고 하는데. 철학적으로 보면 주변이 핵심인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을 거 같아요. 고대 그리스인

들은, 테라스라고 하는데. 어떤 것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을 형상이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형상이 뭘 의미

하냐면 모양을 정의해주는 것은 윤곽이죠. 그러니까 제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라면 테두리를 그리면 되죠.

사람들이 어디를 그리냐면 한반도를 이렇게 그려요. 테두리를 주변으로. 무엇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것

은 테두리에요. 한 사회가 어떤 것인지 알라면 주변을 알아야 해요. 청운동 사람들을 보면 아는 것이 아

니라.

한국사회는 이성애가 지배하는 사회라고 말하는데, 이성애라고 믿는 사람들은 보통 몰라요. 그 단어를 공

부해야 아는 거지. 그런데 가량 홍석천씨같은 경우 동성애자인데 그렇게 사회에 드러나니까 사람들이 자

신이 이성애자인걸 아는 거예요. 우리사회 정규직 비정규직도 그래요. 비정규직 50,600만, 900만까지도 보

죠. 정규직은 작게는 400만에서 많으면 800만 되겠죠. 비정규직이 더 많은데. 단어는 어떻게 쓰죠. 비비정

규직이라고 쓰는 건가요. 그러면 정상적인 사람들을 먼저 정의하고 해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가

않죠. 비정규직, 비정상을 보면, 비정규직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떻게 알 수 있냐면 비정규직의 삶이 역설

적으로 보여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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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장애인들은 더 잘할 수 있는데 실업률이 월등하게 높아요. 한 사회의 실업률이 70%가 넘으면 위

험합니다. 왜 직업을 갖느냐가 중요한 가는 안 가져 본 사람이 알지, 갖고 있는 사람은 모른다구요. 한국

사회의 성격이 뭔지를 보려면 주변을 봐야한다는 거예요. 중심이 핵심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러나 거꾸로

예요. 권력이 뭔지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주변이에요. 가령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대한민국 주

권이 어디가 젤 강한지 아세요? 서울에 있는 사람들은 남녀차별 몰라요. 나는 승진이 안되는데 얘는 별

볼일 없는데 승진이 쭉쭉 되요. 아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사는 것은 뭔가를 안다는 거예요. 그런 게 한

국사회가 뭔지를 알려주는 척도인데 이성애자 비장애인 남성은 모르고 주변에 있는 사람이 안다는 거예

요. 국가권력이 뭔가 주권이 뭔지는 잘 몰라요. 투표를 할 때 아는데, 그건 대단한 것도 아니에요. 국가

정부의 힘이 엄청나게 클 때 알아요. 대추리의 농민들 수십 년 동안 살아왔는데 나가라고 미군기지 건설

하겠다고 나 안 팔 거야 여기 살래라고 말할 수 있지만 판매가 안 이뤄지면 구매가 이뤄질 수 없습니다.

유독 살 수 있는 주체가 있어요. 국가는 살 수 있어요. 토지를 강제수용 해버리면 되죠. 적정하게 토지가

격 책정해서 군부대 가져가라고 하면 나는 안 팔았는데 판 게 돼요. 이 펜이 보기 좋았는데 만원주고 샀

대요. 만원주고 가져가면 도둑인데 국가는 그걸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물건 안팔았는데도 살 수 있는. 대

추리 사람들은 앉아서 범죄자가 됐어요. 팔아놓고 계속 있다고. 그때 주권이 세구나 느끼는 거예요. 주변

이라는 지대가 이처럼 중요한 거예요.

주변이라고 하는 건, 주변화된다는 건 중요한데. 주변이라는 말 가지고 의미를 풀어볼게요. 주변화된다는

것은 비정규직 노동자 얘기를 했지만 영어사전에 네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부차화됐다. 부차적인 일이 됐

다. 펀드매니저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박스 나르면 부차적인 일을 하는 것처럼. 한 사회에

없었으면 좋겠는 존재, 있어서 짐만 돼는 존재가 부차적인 존재죠.

또 하나의 의미는 한계라는 의미가 있어요. 끝.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 생계자체가 달려있는 삶 자체가

굉장히 불안정한 말. 요새 엣지라는 말이 있잖아요? 좋은 의미도 있지만 끝에 매달려있는 삶. 우리사회의

많은 사람들, 소수자의 삶이 그런 거예요.

또 하나는 상인들의 마진의 의미가 있어요. 돈 얼마 벌어서 마진이 얼마 남아. 얼핏 보면 부당한 대우를

많이 받는데 노조는 3%밖에 안돼요. 노조를 만들면 바로 짤리고 보호장치가 취약하니까요. 점장이 들어오

면 정규직이 인사할까요 비정규직이 인사할까요? 비정규직이 인사한대요. 잘 보여야지 계약이 연장되니까.

비정규직은 4대보험도 못들어요. 10%도 안들어요. 보험 들어줘야 하는데 안 들어주고 월급 짜게 주고 그

럼 이익이 생길 것 아닙니까? 이렇게 비정규직이 많이 생기면 사장이 이익이 생길 것 아닙니까? 시설에

서도 시설장이 돈을 많이 번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기에 마진의 결정적 의미가 있어요. 이걸 보시면 마진

이 어딘 줄 아세요? 검은 글자 밖의 하얀 부분. 공백의 의미를 가져요. 주변에 살면 안 드러나고 얘기하

지 않아요. 우리사회에서 그 문제가 중요한 문제라고 아무도 논의하지 않아요. 마진은 안에 있는데 공백

처럼 존재해요. 농촌에서 FTA 반대 행진할 때 농민들이 나는 이 나라 국민인데 시장개방하면 제대로 얻

어맞는 기분이라고. 내가 대한민국의 국민 울타리 안에 있는데, 시장개방을 했다 하면 보호장치 없이 싸

대기를 얻어맞는 느낌이라고. 우리사회에서는 항상 사회가 나아가기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고 말을 합니

다. 그런데 항상 비슷한 사람들이 지목돼요. 조금만 참아보라고. 예를 들어 예산이 없으니까 조금만 참아

보라고. 너가 조금만 견뎌주면 잘살게 되면 너까지 챙겨준다고. 너가 조금만 참아라. 너라고 지목당하는

사람은 제비뽑기로 결정이 안나요. 가령 시장개방하면 농민들이 그러는데. 우리사회가 나아가려면 몇 %가

희생해야한다고. 너가 조금만 희생해달라고 하는 ‘너’가 또 나고 또 나고 또 나에요. 무슨 일만 있으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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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피해봐요. 무슨 일 있으면 맨날 저 사람만 이익 보고. 구조화되어 있어요. 우리에겐 정부가 없는 것 같

고.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어도 당하는 문제를 계속 당하는 거예요. 주민등록 상에는 내 정부 맞는데 정부

아닌 것 같은 느낌이라고. 안에 있는데 밖에 있는 느낌을 가지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거죠. 바깥에 있

으면 그냥 살게 내버려둬야 하는데 척도의 명령은 제일 세고. 바깥에 있지만 주권의 명령을 세게 받고,

그러면 보살펴 줘야 하는데 보살펴주지는 않고. 그 지대에 서게 되면 해준 거 없이 때리기만 하는데. 그

러면 맞서 싸워야 하잖아요. 이 정부 내 정부 아닌 것 같으면 혁명이라도 일으켜야 할 것 같은데. 그러지

않아요. 오히려 자기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사람을 뽑을 것 같은데 이명박 뽑는다구요. 사회과학자들은

‘계급위반 투표’를 했다고 표현을 합니다.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을 찍던지 지가 출마하던지 해야 하는데,

왜 자기의 이익에 반하는 투표를 하는지. 그건 이 지대에 안 살아본 사람이 말하는 거예요. 이 지대에 살

면 불안하게 살아요. 새벽 인력시장이 요샌 없죠? 요새는 핸드폰으로 날라온대요. 집장이 일이 있으면 전

화를 해준다는 거예요. 전화가 울리면 일이 있고 없으면 일이 없으니까 공치는 거죠. 이렇게 불안하니까

그나마 나를 안전하게 해줄 누군가를 찾으러 다녀요. 비정규직들이 충성도가 먼저 인사하고 먼저 무엇을

할라고 하고. 오히려 보험도 안 만들어 주고 하니까 생까야 할 것 같은데. 배제하니까 매달려요. 그런 사

람일수록 자식하게 엄하게 공부를 시키려 해요. 윽박을 질러대요. 오히려 배운 놈들이 우리를 억압하니까

너는 배우지 마라고 할 것 같은데. 아니, 너라도 안에 들어가라고. 그렇게 된다구요.

조금 딴 얘기가 될지 모르겠는데. 옛날에 한 사람이 유태인들을 참 벨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을 했어요.

독일에 가면 독일인보다 충성하고 미국에 가면 미국인보다 충성하고. 이게 소수자들의 특성인데. 자기가

나치한테 쫓겨서 프랑스에 갔거든요. 유태인의 대표가 프랑스 사람한테 연설을 하라고 하니까. 자기는 독

일에 살면서 어떤 독일인보다 독일인이었으니까 프랑스에 살면 프랑스인보다 더 프랑스인으로 살 수 있

다고. 되게 서글픈 연설이죠. 독일에서 유태인은 몇 대째 독일에 살고 있어요. 인종이 유태인이지 독일시

민 맞는데 히틀러가 이등시민으로 만들었거든요? 독일시민한테 독일시민임을 증명하라고 했어요. 전쟁터

에 먼저 뛰어가고 하는 것을 요구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나중에 프랑스에도 독일군이 들어와서 나

치 정부가 수립되잖아요. 독일인이 들어오기 전에, 독일인을 받아줬던 프랑스인들이 제일 먼저 체포한 것

이 유태인들이었어요. 얘들은 금방 변절할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일단 잡아넣어야 한다. 미국에서 태평양

전쟁할 때 미국에 살고 있는 일본계 사람들을 강제 수용했어요. 일본과 전쟁하는데 이 사람들은 의심스럽

고 확실히 충성을 입증할 수 없으니까. 희한하게 차별받는 사람일수록 차별하는 질서에 저항해야 하는데

그 질서에 필수적으로 매달리는 거예요. 더 불안하니까. 왜 이 사람들이 노무현을 싫어했을까 생각했는데,

노무현보다는 이명박이 더 안정적이라고 생각했다는 거죠. 불안정한 것을 못 참는 사람이었던 거죠. 그나

마 살기 힘든데 이 질서가 어지럽혀 지고 사회가 불안하면 더 살 수 없다고 느껴지니까 더 애국적으로

됩니다. 그래서 차별받는 사람들이 더 보수적이에요. 아주 예외적으로 차별받는 사람들이 진보적이고. 대

개는 어떻게 해서든 안에 들어가려고 해요.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모험을 안해요. 물론 어느 한계가 있죠.

그러다가 더 이상 희망이 없을 때는 개길 수가 있죠. 그러나 보통의 경우에는 내치니까 필사적으로 붙잡

는다. 시설에서도 그럴 수 있어요. 시설관리자의 눈에 조금이라도 들려고 하는 것이 정상이지, 싸우기 보

다. 옆 사람 보다 더 나은 대우 받으려고 하는데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 행동이에요. 내치는 데에도 달라

붙는. 정확히 말하면 내치니까 달라붙는. 이게 배제적 통합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런 사람들을 소수성.

소수자와 구별하고 싶어요. 이런 사람들을 주변인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차별받기 때문에 차별을 조금이

라도 줄여보려고, 차별받는 질서를 깨려는 생각이 아니라 내가 아니라면 자식이라도 조금이라도 들어가길

바라는. 보수적이고 극우가 자라는 곳이 주변의 불안정한 지대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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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상한 사람이 있어요. 차별받는 질서를 문제삼는 사람이 있어요. 여기계신 분들이 그럴 수 있죠.

내가 매달리고 싶다가도 나를 이렇게 만드는 질서 자체를 문제삼는 사람이 있어요. 그걸 소수성이라고 부

르고 싶는데. 만물이 소수자라는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충청도 아산쯤 왔는데 왜 소수냐, 우리가 다수

인데. 왜 소수라고 부르냐고. 맞아요. 외국학자들이 쓰는 용어를 번역해서 그러는데. 마이너라고 말할 때

이것은 숫자가 아니에요. 메이져, 마이너라고 말할 때에. 메이져가 물론 더 많죠. 하지만 숫자를 말하는

건 아니죠. 그럼 주류, 비주류라고 하지. 그런데 소수성. 비주류라는 말은 부차화된다는 느낌이 강해서 공

격성을 표현할 때 약해서. 그냥 소수성을 씁니다. 사람들이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왜 이 말을 쓰냐가 본론

인데요.

원래 이 말을 들뢰즈. 프랑스 학자들이 쓰는 개념이에요. 소수성이라는 것은 척도로부터의 거리를 뜻한다

고. 그것은 수적인 문제가 아니다. 백인이 주류고 다수다. 인종으로 보면. 그런데 백인의 숫자는 몇 명 안

돼요. 남성과 여성이 있으면 남성이 메이져에요. 그런데 지구적 수준의 인구규모는 남성과 여성의 숫자는

차이가 나지 않아요. 그러면 척도를 누가 지고 있냐는 거예요. 미국에서는 칼라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을 부르는데, 그런 것은 화이트가 주류라는 거에요. 프랑스 학자가 알고 보면 서구에서 주류는 35세 이상

의 백인, 기독교, 대졸자가 메이져이고 그것 아닌 사람은 다 소수자라고.

이렇게 정의하면 대부분이 소수자니까 소수성이 와 닿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어

요. 책에서 읽은 건데. 와 닿아서. 하나는, 소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 거리감이 있고 척도에서 부차화되고

차별받는 사람들은 단순하게 인정받으려는 사람들 말고. 그런 사람들은 자기 말을 할 때 궁지라고 할까

요? 말을 버벅거리게 할 정도로 내몰린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수화도 그럴 수 있겠는데. 이 말로만 말을

해야 하는데 이 말로는 내 말을 잘 표현할 수가 없어요. 제가 발표를 해야 하는데 어떤 친구가 영어로 번

역을 해줬어요. 이 단어는 어떻게 번역해줘야 하냐? 이거냐 저거냐 하는데 그 단어는 아니에요. 그건 아

닌데 굳이 말하면 그거라고도 할 수 있는 단어들이 있어요. 제가 끊임없이 말하는데 바보가 되어가는 느

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제 말이 단순한 말이 아닌데 말하다보면 단순한 말처럼 돼요. 흑인이 영화에서

단순한 것처럼 나오는데, 아프리카 말로 나오면 다를 수 있어요. 내가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 아닌데 이거

아니면 저렇게 말해야 하니까. 걔가 한국어로 더듬더듬 말할 때 바보라고 했어요. 뭔가 표현되지 않는 뭐

가 있어요. 나한테 주어진 용어는 이거에요. 근데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거 말고 뭔가 있어요. 굳이

말하려면 이거, 그런데 이것으로 말하면 수십 가지가 떨어져 나가요. 그 언어로 말하면. 수화도 그럴지 모

르겠어요. 나는 복잡한 여러 가지 감정이 있는데 표현은 이것으로만 하라고 하면 내가 굉장히 단순한 사

람이 되요. 그때 느끼는 답답함. 불가능한 말에 도전하려고 할 때, 그때 그 사람은 소수성을 경험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불가능성이, 자기 불가능성이 아니에요. 제가 마치 영어로 표현할 때 난 안돼, 도저히

못 하겠다라고 하는데. 사실 내가 안 되는게 아니라 영어의 한계에요. 그건. 저 표현을 할 길이 없다라고

하는 건데 그건 그 언어의 불가능성이 드러난 거예요. 내 한국어실력이 안되는구나라고 느끼는데 그건 한

국언어가 문제가 있는. 한국언어의 불가능성. 소위 혹시 모르겠어요. 비장애인이 갖고 있는 표현. 언어부

터 시작해서 비장애인의 질서속에 있는 어떤 것인데 장애인들이 그것 속에서 나를 표현할 때 그건 나의

한계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비장애인의 한계가 드러나는 거예요. 그것을 끌어내고 문제제기를 할 때 소

수성의 급진성을 끌어낼 수 있어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어요. 정치적 동물이

라는 인간. 인간이 아닌 것을 동물이라고 하는데, 동물은 언어가 없어요. 동물은 소리, 음향이 있어요. 인

간이 된다고 하는 것은 로고스(이성, 말..)를 갖고 있는 것.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라는 것은 말을 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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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거예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로고스를 획득하는 것은, 내가 어떤 말을 하는데 그 사람한테 안 들릴

수가 있어요. 그럼 그 사람은 내 말을 음향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강연을 할 때 어떤 사람이 말을 하면,

상당히 대다수가 말로 안 들리고 음향으로 들려요. 어찌 보면. 재연씨를 설명할 때 단어를 한 글자를 적

어주면, 이거 이거 이것? 이라고 말을 해요. 자기가 갖고 있는 말해야할 것들이 있는데. 저는 재연씨 언어

가 단순하게 느껴져요. 초등학생의 언어처럼. 그때 음향으로 취급받고 비정치적인 존재로 취급받는 거예

요. 가시적인 존재가 비가시화되고 언어로 인정받아야 할 것이 음향으로 취급되는 것. 사실 그렇게 하는

시각, 언어의 한계가 드러나는 거거든요. 소수성이라고 하는 것은 지대에 있지만 언어, 시각 뭐든 좋아요.

주류적인 것들이 부딪치는 궁지라는 것을 드러낼 때 소수성의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스피박이라는

사람이 그런 얘기를 했어요. 언어들이 주류사람의 언어일 때 소수자들이 자기 것을 말할 수 있는가? 말할

수 없다는 거죠. 하지만 말을 하는데 안 들리는 거죠. 그러다보니까 소수자들은 다수자들을 흉내내서 말

해요. 또는 침묵으로 말해요. 말하지 않아요. 입을 닫으면서 말해요. 니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을 드

러내요. 또는 소리를 지르다가 답답하다고 머리를 처박아요. 그럴 때 주류질서의 한계가 드러난다구요.

두 번째는 희한하게도 어떤 문제를 정치 삼는 것은 중요하게 제기하는데. 소수자들은 모든 것이 정치적이

에요. 아주 사소한 것, 활보 투쟁할 때 외박횟수 얘기를 많이 하시더라구요. 우리는 외박 4번도 안해봤다

라고 할때 비장애인은 ‘외박이 뭐가 중요하냐고 얘기를 하더라구요. 너의 성생활까지 우리사회가 고민해

야 하냐라고 묻게 돼요. 무슨 말이냐면, 아주 사소해 보이는 것도 사적이지 않고. 제가 가령 제가 외박 못

하는 것은 제 문제에요. 그런데 소수자들의 경우에는 가장 사소한 문제들이 사회적 환경들과 가장 긴밀하

게 관계가 있어요. 그래서 사소한 문제들이 급진적인문제가 되는 것인 소수자들이에요. 외박을 왜 할 수

없느냐? 장애인들한테 집 다 지어줘도 돈 얼마 안된다. 다 지어줄 수 있다. 고소득 자영업자 탈세해서 4

조원인가 추징했다고 하는데 4조원이라고 하면 다 집 지어줄 수 있는데 별 문제 아닌 것 같은데 왜 해결

이 안될까요? 아주 사소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게 사회의 근간을 가지고 있는 중요한 문제들과 맞닿아

있어요. 여호와의 증인들은 집총 거부하는데. 여호와의 증인들 몇 명 되겠어요? 그냥 군대 면제해주지. 근

데 절대 안해줘요. 장애인들 외출시켜주는 게 왜 안될까요? 그것은 홍석천씨를 그냥 놔두지 않는 이유와

똑같아요. 우리사회의 척도와 긴밀하게 관계있다는 거죠. 집 함부로 못 지어줘요. 활보 해주면 왜 니들만

활보있냐 나도 일하는데 비서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죠. 외출도 못시켜주고 집도 못해줘요. 국방이나

군대가 갖는 의미랄까. 그게 척도라서. 불행하게도 혹은 다행스럽게도 소수자들은 모든 사소한 문제들이

우리사회의 핵심문제에요. 성생활을 못하는 문제 외출하지 못하는 문제, 집을 못 가지는 문제들. 내가 관

여하는 모든 문제들이 우리사회의 근간과 관여있는 것이기 때문에. 소수성과 관련된 모든 행동, 문제들은

다 핵심적인 정치투쟁이 된다는 거죠. 그걸 문제삼지 않고 가버리면 주변화되버리는 거죠. 그러니까 장애

를 탈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이 쪽으로 붙으려고 하고 가버리는 것. 나는 학력차별을 받았으니

까 너라도 좋은 대학으로 가라고. 그걸 문제 삼으려고 하면 내 사소한 모든 것들이 급진적으로 되어버린

다는.

세 번째는 소수성은 항상 떼거리 문제에요. 한 개인일 때조차도. 이상한 말인데 소수성의 정치에서는 거

장이나 위대한 사람이 없어요. 노들에서 박경석 선생님이 중요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소수성이나 그가 제

기하는 문제가 혼자 말할 때조차도 집단적인 문제가 될 수 있어요. 소수성은 척도로부터의 거리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소수성은 척도가 아닌 무엇이라고 정의돼요. 이것을 비가산집합이라고 셀 수 없다고

해요. 성적 소수자들이 자기를 정의해요. 네거티브하게 아닌 것으로 정의하지 말고. 소수자는 무엇으로 정

의해보자고. 그래서 성적 소수자를 ‘이성애 중심에서 차별받는 사람들’ 이반, 양성애자, 양성생식기 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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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퀴어, 인터섹슈얼, 자신의 생식기나 섹슈얼리티에 대해서 궁금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외연이 불분

명해요.

장애인들이 뭐라고 정의할까요? 시각, 발달, 정신장애, 지체장애. 무슨 장애들이 있어요? 말씀해주세요. 제

가 몰라서 그래요. 안면, 장루, 요루.심신. 또 뭐도 있을까? 뇌병변. 무슨 장애.. 장애인을 정의해보자구요.

왜 외연이 불분명해질까요? 우리와 관련된 모든 것은 장애와 관련이 있어요. 적극적으로 정의를 해보려는

순간 불가피하게 익명적으로 떼거리가 되요. 집합이 안 닫혀요. 그래서 김도현 선생님 책을 보니까 혼혈

도 장애인 범주에 들어갔다면서요? 인종장애인가요? 피장애인가요? 이건 뭘 의미할까? 소수성은 어떻게

해도 하나의 아이덴터티를 확정할 수 없고 무리에요. 익명이에요. 뭔가 떼거리 적이에요. 언어장애만 말해

요. 언어의 어떤 장애를 세분화하려면 한도 없어요. 어떤 것이 가장 건강한 언어인가에 따라서 다 장애이

죠. 그 정도, 범위도 확장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소수성의 정치, 소수성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익명적이

고 인칭을 제공받지 못하는 거죠. 뭔가 모호해요. 용산 참사 볼 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얼굴을 가렸는데

대중들한테는 그게 맨 얼굴이에요 대중은 얼굴이 없어요. 대중은 원래 익명이에요. 대중성이 되면 소수성

이 생겨나요. 하나로 정의할 수 없고 정의가 안되게 빠져나가고. 촛불집회때 잡아서 신원을 확증해줘도

누구냐고 또 물어봐요. 민주노총 간부라고 하면 확실히 알아요. 그런데 도봉구 몇 번지에 사는 사람이라

고 하면 더 정확하게 말하는데도 너 뭐냐라고 얘기를 해요. 어제 강의를 했는데 빨리쿠키라고 말을 했는

데 또 물어요. 직접적일수록 익명적이에요. 오히려 간접적일수록. 대표선수. 명료해요.

직접적이면 명료하다고 생각하는데 불명료해요. 이것이 소수성의 정치라고 하면 뭐냐면 이 영역에 있는

사람이 모호한 것이 정치화될 때. 소음인데 말하기를 쏟아낼 때 한 체제가 큰 위기에 빠져요. 이명박 정

부는 민주주의가 후퇴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과제에 부딪친 것 같아요. 오히려 지금 있는 법들. 민주주의

가 퇴행한다고..국정원이 나서고 마스크 착용 못하게 하고 실명제하고 하는 것은 신원을 밝히려는 강박증

처럼 보여요. 난동이니 괴담이니 이런 말들 많아졌잖아요? 괴담이란 것은 알아들을 수 없다는 거죠. 점거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으니까 난동이라고 하죠. 미네르바가 전문대 나왔다 그런데 그게 뭐가 중요해요.

전문대 나와도 충분하고. 잡아보니까 중고생이 문자 돌린다고. 중고생이면 어때요. 역설적으로 중고생도

할 수 있다는 거죠.

베트남전에서 미국이 패한 이유는 전 인민이 베트공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 노인이 걸어가는데 혹시

첩자 아닐까? 꼬맹이가 뛰어가는데 첩자 아닐까? 유일한 방법은 몰살이죠. 모호하고 식별이 안 되니까 다

죽여버리는 거죠. 결국 졌다는 거예요. 이길 수 없는 게임이라는 거예요. 소수성은 주변화됐다고 하는데.

소수자는 못 배운 사람이라고 하는데 보통 이런 사람들은 더 매달리려고 하는데. 다수적 언어의 한계를

폭로하는 사람이 있어요. 시설에 있으면 상관없는데 계속 시설에서 뛰어나와서 어쩔 줄 모르게 하고 당황

하게 하는 사람들. 적응하면 좋을 것 같은데 괜히 뛰어나와서 당황하게 하는 사람. 오세훈 시장이 ‘미리

대책을 세우고 나왔어야죠?’라고 했다면서요? 그때 누가 대책이 없는 거죠? 시설장애인이 아니라 이 사회

가 대책이 없는 거예요. 그 대책 없음을 폭로하는 것.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 소수성의 정치에요.

그리고 모든 사소함이 정치화되는 것이 소수성의 정치에요. 세 번째는 어떻게 해도 정체불명이 되는 것.

한명으로 드러나도 한명이 아닌 집단인 것. 지금 7분이 시설에서 나와서 마로니에에서 투쟁했잖아요. 오

세훈도 알아요. 7명이 아니라는 것. 7명이면 뒷돈 찔러주면 돼요. 근데 아니에요. 시설 입소자만으로 끝날

까요? 장애인문제를 해결하려면 이 규모가 어디까지인지 몰라요. 범주를 정의할 수 없어요. 어디까지 파

장을 미칠지 모르니까요. 이게 소수성의 정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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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 문제를 복원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투쟁을 할 때 소수자 되기를 한다고 하는데.

소수자가 된다는 것은 ‘나는 애당초 장애인이니까 소수자야’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여러 가지 문제가 있

다는 것을 알게 됐는데. 그럼 소수자가 소수자가 되느냐 그렇지 않다는 거죠. 장애인 중에 심한 사람들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정립회관 투쟁 때 소아마비 협회 사람들도 장애인이라면서요? 오히려 실향민들 추

석 때 상봉하고 그랬잖아요? 이 문제 해결을 복잡하게 하는 사람이 실향민들이에요. 보수적인 단체. 전쟁

문제 파병 막아야할 때 걸림돌 되는 것이 고엽제 피해자들 북파 공작원들. 이 사람들이야말로 국가가 배

제해왔는데 가스통 막 들고 와서..반공주의 희생자들인데 가장 반공주의자들이예요. 따라서 소수자들도 소

수자 되기를 해야 돼요. 누구나 다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소수자 운동 소수자되기 소수자 정치

라고 하는 것은 내 이권 투쟁이 아니에요 물론 나를 위한 투쟁은 중요해요. 자기 삶을 팽개치는 투쟁이

아니라 삶을 확장하는 투쟁이 중요하다고. 이 사회 질서를 승인해주는 방식으로, 노조 안 만들어서 이쁨

받을 수 있죠. 파업 안하면 승진도 시켜줄 수 있죠. 그런 이권도 얼마든지 취할 수 있어요. 그렇지 않고

나를 한계 짓던 척도를 폭로할 때 소수자 되기를 시도하는 거죠. 그래서 중요한 것은. 말을 잘 들어서도

집 한 채 얻을 수 있고, 말 안 들어서 탈시설 투쟁해서 집 한 채 얻을 수 있어요. 결과는 하나도 안 중요

해요. 소수성의 투쟁은 결과투쟁이 아니라 과정투쟁이에요. 그 과정만이 그 문제를 정의해줘요. 그것이 소

수자되기를 말해준다는 거예요. 소수자가 됩시다. 소수자 투쟁을 합시다라는 것은 누구의 문제가 아니에

요. 맑스가 중요한 얘기를 했는데 이상한 질문을 던졌어요. 어른이 애의 행동을 하면 유치하다고... 그런데

어른이 아이처럼 천진난만해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했어요. 유치해지는 것 말구요. 그리스 예술은 인

류사에 보면 옛날 예술이고 초기 예술인데 왜 중요하게 여길까? 어린이 돼서도 아이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어른이 돼서 꼰대 되는 사람이 있어요. 말 더럽게 안 듣고..그런데 진짜 어른 돼서도 철 안

드는 사람이 있어요. 오세훈시장이 보기에는 여기 장애인차별철폐 투쟁하시는 사람들이 그렇게 보일 거예

요. 자기 나이를 망각한 듯이 행동하고. 그것이 어른의 아이 되기예요. 일생의 큰 구조로 보면 어른이 누

군가 있고 아이가 있잖아요? 뭔가 그것임을 정의해주는 것이 있어요. 술 먹으면 개 되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 사람이 개 되면 꼬리가 자라나고 이빨이 생기는 게 아니잖아요? 개라는 느낌을 주는 뭔가가 발산되어

나와요. 그런 게 있어요. 정말로. 왜 이 얘기를 하냐면 장애인도 장애인되기를 해야한다. 누구나 다. 전 남

성입니다만(생물학적 성으로는) 여성되기가 가능할 수 있어요. 제가 문제삼고자 하는 어떤 부분. 여성되기

란 뭐라면 남성적인 것이 지배할 때 그것을 문제제기하며 싸울 때 제가 그럴 수 있어요. 광인보다 더한

광기가 튀어나온다고 하는데.. 싸울 때 보면, 싸우기 전에도 그렇지만 붙다보면 저 문제가 나와 이해관계

도 없는데 내가 도저히 못 참는 듯 내가 그 사람인 듯 뛰쳐나갈 때가 있어요. 많은 운동은 그것 때문에

가능할 거예요.

프랑스에서 68혁명이 있을 때 다니엘 꼼방기라는 사람이 있어요. 강의를 제대로 준비안하니까 시간 가는

줄을 모르는데. 프랑스권력자한테는 가시 같은 사람인데 못 돌아오게 막았어요. 쟤는 프랑스인이 아니라

독일계 유태인이라고 퍼뜨렸어요. 용산 들어갈 때 보니까 ‘실제 철거민은 6명이 아니라고 다 외부인들이

라고’ 하죠? 우리가 독일계 유태인이라고 써서 프랑스인들이 행진을 시작했어요. 사회의 보통 정체성이나

그냥 일상에서는 프랑스인일 수 있는데 그 순간 ‘독일계 유태인되기’를 한 거예요. 이 말 굉장히 이상하게

보일 수 있는데. 어떤 개념을 개념 안 쓰고 설명하려고 하니까 어려워지네요. 우리가 사회에서 정체성을

부여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이고 하고 정해진 것이 있잖아요? 남자는 뭐, 경상도는 뭐, 장애인은 뭐. 큰 수

준에서 알 수 있고 분류할 수 있는 것들. 큰 수준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가령 나는 비장애

인인데 비장애인으로 식별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든지 경계를 위반하는 움직임이 있어요. 그런 차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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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프랑스인들을 보면 그 순간 정확히 보면 독일인이 된 건 아니에요. 하지만 프랑스인으로 행동한 것

도 아니에요. 프랑스독일인으로 행동한 거죠. 미묘한 식별행위를 한 거죠. 우준이가 이상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아이가 아니죠? 이 나이대에는 이 행동을 해줘야 하는데 이상한 식별 불가능한 행동을 할 때가 있

어요. 이게 왜 중요하냐면 소수자가 된다 장애인이 된다 싸운다는 것은. 저도 장애인되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런 것을 성공할 때만 운동을 할 수 있어요. 이 사회가 장애인으로 정의할 수

있는 아이덴터티가 있는데 그것을 거부하고 그것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서 장애인투쟁을 할 수 있는 거죠.

저 역시도 비장애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장애인되기를 할 수 있고 이것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사실 제가 이주노동자 방송국이 연구실에 있는데. 네팔 출신의 노동자인데 한국에 온지 18년이 됐대요.

결혼을 하려고 했는데, 결혼을 하면 국적이 나올 건데 오히려 그것 때문에 결혼을 안할까도 생각한대요.

그냥 네팔에서 한국에서 온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거예요. 한국과 네팔 중에 고르라고 해요. 귀화하

거나..식별 불가능하지만 나란히 한국네팔인으로서의 존재가 있는거예요. 제가 시각장애인랑 같이 싸우면

시각장애인이면서 비장애인이라는 거죠. 활동보조를 하는 사람한테 물어보면 나 정체불명이에요. 비장애

인도 아니고 장애인도 아닌 존재로 이동해 가야된다는 거예요. 사실 전태일에 대한 글을 쓰면서 그걸 느

꼈어요. 전태일은 노동자잖아요. 이 사람이 혁명가가 된 것은 노동자이길 거부했기 때문이에요. 노동자로

서 해야 할 마땅한 일들이 있어요. 열심히 일하고 딴 짓 안 피우고 하는 것이 산업 역군 노동자에요. 근

데 쓸데없이 법대생도 아니면서 밤만 되면 법전을 펴놓고 공부를 하고. 여공이 아니면서 여공문제에 관심

이 많아요. 심지어 작가도 아니면서 소설도 습작했어요. 자꾸 노동자 아니려고 한다구요. 예전에 자끄 랑

세르라는 사람이 ‘노동자가 진짜 혁명적으로 변한 게 19세이기인데, 노동자이기를 그만둬서’ 언제부터인가

밤에 잠을 안 잤다는 거예요. 독서토론회 만들고 사람만나서 조직하고. 혁명적인 잡지에 노동자의 시가

실렸어요. 서정적이에요 근데 왜 혁명이라는 잡지에 실릴까? 혁명에 대해서 말해서가 아니라 노동자가 시

를 썼기 때문에 혁명이에요. 장애인이면 거기 있어야 하는데 자꾸 이거 해야겠다고 말하고 저거 해야겠

다고 말할 때 혁명적이에요. 전태일은 신문팔이를 하고 노숙인을 하고 7번을 철거당했더라구요. 철거당할

때마다 안방하나를 크게 키워나가요. 동지들이 와서 회의해야 하기 때문에 방이 커야 된다는 거예요. 노

동자가 철거민이기도 하고, 노동자가 신문팔이기도, 여공이기도, 건축가이기도 하고, 회사를 만들어보려고

사업가이려고 하고. 전태일 안에는 이 모든 것이 다 들어있어요. 전태일 안에 여공, 철거민, 노동자, 소설

가, 법학자가 들어있다고. 이것이 바로 소수자가 되는 거죠. 즉 정체불분명해요. 전태일 도대체 너 누구냐

고 하는 거죠. 경찰이나 권력자는 니 뒤에 누가 있지?라고 하죠? 니가 이럴 리가 없어.

소수성의 운동을 하는 것은 우리를 구획짓는 것이 있어요. 너라고 한정짓는 것. 할당된 장소 행위가 있는

데 그것을 문제 삼을 때. 식별 불가능 감당 못하게 다가올 때 소위 해방이나 혁명이라고 말하든 뭐가 시

작될 수 있어요. 그걸 소수성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운동을 할 때 소수자되기라고 하죠. 죄송합니다 말

을 마치겠습니다. 길어졌죠.

사실 R이라는 잡지에 실렸던 글로 할 걸 그랬어요. 딴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딴 얘기를 할 수 없네요. 혹

시 질문이나 그런 것 있으면? 괜히 찍으셨죠?

재연 누나가 질문하는 건데, 자기가 장애인인 것을 아는데, 자기 외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장애인으로 지

칭하는 것이 기분이 나쁘시다고. 내가 아는데 나한테 장애인이라고 얘기를 하는 것이.

예 아마 둘 다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두 가지 전략이 가능한데. 흑인들이 ‘나 흑인 아니다’ 흑인은 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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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요. 그런데 한번도 흑인은 흑인이었던 적이 없어요. 검정색은 차별의 색깔이에요. 나는 흑인 아니라

고. 나는 블랙맨이 아니라구요. 이미 블랙은 이미 블랙이 아니니까. 거꾸로 ‘그래 나 블랙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요. 내가 왜 장애인이냐고 말할 수 있어요. 아니 ‘그렇다 나 장애인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어요. 둘

다 가능할 수 있어요. 장애인이라는 말이 싫으면 말싸움을 한다는 거죠. 신체적 손상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인투쟁이 다른 투쟁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왜 중요하냐면,

당신은 장애를 아느냐?라는 책을 보고 물어봤는데 사전에 찾아보니까 ‘정상인’이라는 말이 사전에 없다고.

그 얘기를 했더니 어떤 친구가 전자사전을 가지고 다니면서 ‘정상아’가 있다는 거예요. 정상아가 비정상이

아닌 아이라고 되어 있대요. 소수성을 정의할 때는 척도로부터의 거리라고 정의된다고 했죠? 척도는 현실

메커니즘의 반대에요. 척도는 문제있는 집단이 먼저 정의돼요. 유색인은 백인이 있어서 있는 것 같은데

백인은 유색인이 있어서 존재해요. 우리는 어떤 문제를 해야 하냐면 그러니까 장애인되기를 해야 돼요.

처음에 문제를 제기될 때, 남성이라서 차별을 받고 하겠지만 제일 먼저는 여성이 먼저 지목된다는 거예

요. 가시나가 뭘 이런 걸 하려고 한 다음에 그 다음에, 소녀가 먼저 행동규범으로 지적을 받아요. 그 다음

에 소년이 불려 옵니다. 너는 이것을 해야 해. 소년도 차별을 받아요. 사회의 소위 문제, 규범을 어기고

일탈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먼저 지목돼요. 그 다음에 나쁜 역할을 하는데 하나의 예가 돼요. 정상

인이 뭐에요?하면 저렇게 안되는 것. 넌 장애인이라고 말해버림으로써 장애인이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가

능성을 다 뺏어버려요. 그 다음에 뭐냐면 소위 비장애인이라고 하는 사람한테 ‘봐 너도 저렇게 되면 되겠

어?’라고 문제화하고 예로 삼아요. 그래서 여기를 강화시켜주는 덫 역할을 해요. 낙인이 찍힌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그 다음에는 이쪽을 겨냥해요. 봐라 저렇게 돼서 되겠냐? 정치적 도덕적 정책금기

를 심어서. 그럼 이 사람들은 저기를 깨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문제를 해결하고 싶으면

장애인되기를 먼저해야하는 거예요. 여기서 소위 장애인되기라고 하면 장애인, 성매매여성, 재소자 등. 두

가지가 다 가능한 것 같아요. 장애인라는 말을 거부함으로써, 뭐가 장애인이라는 것을 제기함으로써 두

가지가 가능하죠. 장애는 어떤 의미에서 소위 자기를 정상인으로 알고 있어서 갇혀 있는 사람들. 가족이

시설에 맡겼다. 감당 못하고 내보냈다고 했는데 거꾸로의 가능성이 있어요. 그렇다면 시설에 안 간 사람

들은 단란한 가정을 가지고 있을까요? 단란해야하는 것 때문에 피곤하죠? 맨날 전화 오죠? 단란할 것을

강요받죠? 그게 허상이에요 어떨 때는. 그것은 시설장애인되기를 먼저 해서 깨야 되는 거예요. 가족을 이

루는 것이 아니라 코뮨을 만든다. 그것이 가족에 갇혀 있는 사람이 해야 해요. 한부모가정에서 아이를 다

같이 키우더라구요. 아빠가 없고 애들이 많아요. 그것도 사는 형태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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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주간 인권신문 [인권오름] 중 반차별 관련한 기사입니다. http://hr-oreum.net/

[박기호의 인권이야기] 소수자가 차별을 만났을 때

박기호

성소수자들도 AIDS/HIV 감염인에 대한 편견이?

역지사지 易地思之라는 말이 있다.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그 사람이 이해된다는 말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차별적인 언어와 행동을 할 때에는 그 뒤편으로는 무지 혹은 편견, 오해가 숨

어 있다고 생각한다. 역지사지라고, 그렇기 때문에 소수자들이 소수자들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차별이 덜

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또한 차별 당사자들의 인권 감수성도 높아 차별하고는 거리가 있으려니 생각했

다. 그러기에 성소수자들을 비롯한 나는 반차별 감수성도 상당히 높을 거라고 추측했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그것은 나만의 오해인거 같다.

예를 들면 남성 동성애자 커뮤니티 속에서 AIDS/HIV 감염인에 대한 태도는 매우 적대적이다. 일부 몇몇

은 그렇지 않겠지만- 솔직히 이 말마저도 자신 없다. - 대부분 감염인들은 자신의 질병을 절대 말하지 않

는다. 일부러 말하라고 권유하는 건 아니다. 때론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그 친밀함속에서도

AIDS/HIV와 관련해서는 예외가 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성애자들이 성소수자들에게 갖고 있는 무지

혹은 편견, 오해가 남성 동성애자들이 그리고 성소수자 커뮤니티가 AIDS/HIV 감염자들에게 갖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에 이르는 질병, 방탕한 성생활에 대한 대가 등 AIDS/HIV에게 쏟아지는

오해들은 남성 동성애자들과 성소수자 커뮤니티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1980년 말에 한국에 쏟아져 들어온 AIDS/HIV의 잘못된 상식은, 아니 오해들은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하다. 더군다나 성소수자 커뮤니티는 AIDS/HIV 때문에 많은 질타를 받으면서 나름의 지식을 축적하

여 일반 시민들보다는 AIDS/HIV에 대하여서는 나을 것이라는 선입견은 그냥 선입견이었을 뿐이다. 외려

어떠한 상황에서는 일반 시민들도 생각지 못하는 속설들로 감염인들에게 생채기를 남겨주기도 한다. 한

감염인 단체의 행사에 아웃팅을 걱정하여 그 행사의 주체들은 오지 못하고, 행사명에는 AIDS/HIV라는

단어를 감추어야만 했다. 감염인 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 대표는 자신의 이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 할까봐, 혹은 자신을 오해할까봐 자신의 활동명을 바꾸어야 하는 상황이 바로 AIDS/HIV와 연결

된 나를 포함한 남성동성애자들과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현 모습이다.

그러다 보니 성소수자 감염인들은 이중의 억압 속에서 자신을 학대하고 방치하며 자신의 존재가치를 형

편없이 무너뜨리는 경우가 많다. ‘설마, 이해해 줄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역시나…….’로 돌아오면, 더욱

힘들어진다. 또한 같은 편이라 생각되었던 사람들에게서 받는 차별은 다른 이들의 차별보다 더욱 가슴 아

프게 다가온다면 나만의 억지일까?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반차별 감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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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레드리본 페스티벌 포스터

물론 거기에 나는 아니야 라고 발뺌하고 싶지 않다. 나조차도 직업상

많은 행사들을 기획하고 실행을 하지만, 많은 기획 속에서 다른 사회

적 약자를 배려한 적은 매우 드물었다. 장애인의 대한 접근권은 물론

이고, 어떤 경우에는 성정체성이 같은 성소수자들을 위한 배려마저도

매우 취약했다. 거기에는 AIDS/HIV 감염인을 포함한 소수자들도 포

함된다. 물론 일을 하면서 겪는 시행착오로 점점 나아지는 건 당연하

지만, 여전하게도 많은 기획과 실행 속에서 약자들을 위한 배려를 찾

기 힘들다.

‘지네들이 못나서..’라고 남 탓을 하기도 하고 장소 탓을 하기도 하며,

한국 사회가 수용하지 못해서라고, 말하기도 하며, 뻔뻔하게 ‘그래서?’

라고 내 자신을 추스르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배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물론 세상 모두를 위한 행사 자체가 어

려운건 사실이지만 내 스스로 이런 저런 이유로 생각부터 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인 것이다.

‘난 오늘부터 달라질 거야’라고 말하고 싶지만, 대답은 글쎄요다. 이런 무지 혹은 편견, 오해로 근거한 차

별들을 혼자서 개선하기는 어렵다. 내가 비록 그런 생각을 가졌다쳐도 현실에 안주할 때, 혹은 그런 고민

의 깊이마저 하려 하지 않을 때, 누군가는 나에게 가차 없이 말해주어야 한다. 그런 상황은 누군가의 고

민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함께 고민하고 행동할 때 비로소 서서히 개선되기 때문이다.

- 인권오름 제175호 2009년 10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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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리] 한국에서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교차

동등성 담론이 낳는 차이의 낭만화를 경계해야

주성진

지난 7월 10일 버스에 타고 있던 보노짓 후세인(인도인, 남성) 씨에게 어떤 한국인 남성이 갑자기 '냄새난

다,' '더럽다' 등의 욕설을 퍼부었다. 이 남성은 항의하던 후세인 씨의 동료(한국인, 여성)에게도 "조선× 맞

냐?", "조선×이 새까만 자식이랑 사귀니까 기분 좋으냐?"라며 인신공격과 모욕을 가했다. 참다못한 후세인

씨와 그의 동료가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들은 "한국에는 그런 인종차별은 없다"며 외려 가해 남성을 두

둔하기까지 했다. 후세인 씨는 인종차별을 이유로 가해남성을 모욕죄로 고소했고, 가해남성 또한 후세인

씨를 맞고소한 상태다.

이 사건은 한국사회의 인종주의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그간 한국에서 '인종주의'란 단어는 낯설게만 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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껴졌고, 한국인에게 인종주의와 관계된 문제는 언제나 강 건너 불구경 할 수 있는, 나와 상관없는 남의

일로 여겨져 왔던 것이 사실이다. 반만년을 단일민족으로 결집해온 한국에 '인종주의'라는 말을 쓸 수 있

는 것일까? 과연 한국사회에는 인종차별이란 것이 없는 것일까?

근대적 인종주의의 시작

외부 세계의 대상들에게 특정 명칭을 부여하고 구분 짓는 인종주의적 태도는 고대 시대부터 있어왔다. 하

지만 보편적인 사회적 차별 관념으로서 인종주의가 형성된 것은 제국주의 팽창의 시대인 19세기부터였다.

로버트 영이 주장한 것처럼, 실용주의적이고 무계획적이며 경제적으로 추동된, 주변부에 대한 어떤 행동

이었던 식민주의와는 달리 제국주의는 전형적으로 메트로폴리스 중심부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추동된, 전

지구적인 권력 정치의 산물이었다. 제국주의 이념은 식민지를 문명화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 통

념은 인종적 우월성을 전제했다. 왜냐하면 문명과 야만 사이의 근본적 차이 자체가 백인과 비백인 사이의

기본적인 차별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의 전 세계적인 정치 체제를 형성한 제국주의 질서 속에

서 인종적 위계 담론은 하나의 차별 관념으로 체계화되고 보편화되었다.

또한 19세기에 폭발적으로 발전한 과학 이론은 인종 논의와 복잡하고 교묘하게 응집되면서 인종주의적

차별 논리를 보편화시키는데 일조했다. 예를 들어, 고비노의 백작 조제프 아르뛰르와 구스따브르봉 같은

일련의 작가들은 인종들을 서로 다른 유형이나 종으로 차별하는 것을 과학적으로 정당화했고, 인종의 차

이가 절대적인 것으로 묘사했다. 또한 헤켈은 독일 민족의 우월성과 생물학적 순수성 유지를 위해 열등한

인간 혈통의 제거를 목표로 해야 한다는 우생학을 주창하기도 했다.

푸코는 이 시기에 정신의학과 연결된 "비정상인들에 대한 인종주의"가 "하나의 집단 안에서 그 집단에 위

협이 되는 자들을 모두 색출하는 … 내적 인종주의"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푸코가 '신인종

주의'라 명명한 19세기 인종주의는 상이한 외부 인종집단들과 투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종집

단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내부의 일탈적 성원들을 공격하는 새로운 현상이었다.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국가권력의 중심부로 진입한 신인종주의는 생물학적 보편주의로 변질되어 동일성을 상정한 하나의 인종

안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는 "하위인종"의 위협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는" 담론이 되었다.

"한국에는 그런 인종차별은 없다" 고?

근대 국민국가는 형성 과정에서부터 민족공동체의 동원이데올로기를 작동시켰고, 누가 민족이라고 거명하

기보다는 특정 '인종집단들'을 민족이 아니라고 지목하고 공격함으로써 민족의 순수화를 시도했다. 민족이

라는 '상상적 공동체'의 정체성을 구성하기 위해 근대 국민국가는 인종적 타자를 끊임없이 호명해야 했으

며, 그들로부터 민족공동체를 '보호해야' 했다. 물론 인종만이 선별 기준이었다고는 할 수는 없다. 이국적

자, 소수민족 등 다양한 집단들이 민족의 구성원이 아닌 것으로 지목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민족이 기초하고 있는 것이 '허구적 혈연관계'이며 인종이란 유전되는 신체적 특징에 차이가 있다

는 '생물학적 믿음'이라고 할 때, 적어도 타자화된 이들 집단은 그들이 인종 개념으로 분류되건 아니건 간

에 '인종주의적인 관점'에서 '가상적' 순수민족과 구별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와 유

전자가 혹은 혈통이 다르다는 논리 말이다. 한국사회에서도 타자화된 인종차별적 표현들을 찾기는 어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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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다. 깜둥이, 혼혈인, 잡종, 튀기, 라이따이한, 코시안, 짱깨, 백마 등등. 이렇게 호명된 대상으로부터 순혈

의 한국인이 분리되었다.

▲혼인한 한국인과 방글라데시인 (사진 출처: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의 결합

혈연적 가족관계가 근대국민국가의 등장과 함께 민족의 수준으로 확대 ․ 이전되면서 민족은 '확대된 친

족' 또는 '운명공동체'로 인식 되었다. 그러나 가부장적이던 근대 가족관계의 확대는 성차별주의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바로 이곳에서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가 조우하기 때문

이다.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이주여성의 경우와 이주민 남성과 결혼한 한국인 여성의 경우를 비교해 보

자.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베트남처녀, 연변처녀 결혼"이라는 현수막 문구가 보여주듯 전자의 경우는 큰

저항이 없이 용인되는 반면, 후자의 경우는 다면적으로 극심한 반발들에 직면한다. 이것은 '남성이 가계의

혈통을 결정한다'는 가부장적인 믿음과 함께 단일민족으로서 혈통의 순수성이 훼손 또는 오염된다는 인종

주의적 인식 때문이다. 이번 보노짓 후세인 씨 사건이 드러낸 것도 성차별과 인종차별이 교차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현실이었다. 따라서 이번 사건을 계기로 구성된 <성 ․ 인종차별대책위원회>라는 명칭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며,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된다.

이쯤에서 우리는 "백인이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던 후세인 씨의 말을 곱씹어봐야 한

다. 비서구 사회의 인종주의 문제는 서구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 파농의 말처럼, 비서구 식민지 세계에서

는 서구가 선/우월로, 비서구가 악/미개/야만으로 제시되는 마니교적 이분법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

으며, 식민지민은 열등 콤플렉스를 통한 극단적인 자기부정으로 백인 문명에 동화되고 그것을 열망한다.

이는 비단 이전 식민지 사회들뿐만 아니라 서구가 아닌, 혹은 백인이 살지 않는 거의 모든 지역에 해당되

는 현상일 것이다. 따라서 후세인 씨의 지적은 잘 들어맞는다. 우리는 문명화의 표상으로 백인을 자리매

기고 흰색에 대한 근접 정도에 따라 다른 인종들의 우열이 정해진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후세인

씨와 그의 동료가 봉변을 당한 바로 그 달에 백인인 한국인 이참 씨가 한국관광공사 사장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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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사실이 보여주는 것도 한국 사회의 '백색 신화'와 인종차별이 아닐까?

냄새를 피우자!

바야흐로 자본이 세계화된 시대에 이주는 전 지구적 문제가 되었다. 한국사회의 이주민 숫자도 급격하게

증가했으며, 특히 2000년 이후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의 증가는 '다문화'라는 용어를 보편화시켰다.

그러나 언뜻 보기에 순화된 순기능적인 단어로 보이는 '다문화'에는 '순수문화'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 채야 한다. 다문화 담론 틀 안에서는 순수 민족 혹은 순수 인종의 문화가 중심에 놓이지만, 여

타 다른 문화들은 주변에 위치할 수 있을 뿐이다. 다문화 시대에도 인종적 소수자들은 계속해서 배제될

것이다. 따라서 문화적 다양성의 인정은 결코 한국 사회의 인종주의에 대한 해법이 아니다.

우리는 인종의 생물학적 평등 논리와 함께 문화적 가치의 동질성의 논리 역시 뛰어 넘어서야 한다. 호미

바바의 설명처럼, 문화적 동등성 담론은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차이들 간의 차이는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

리고 차이들 간의 간극, 마찰, 갈등 그리고 정치적 관계 등을 부인하거나 희석해서 차이들의 관계를 낭만

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차이들의 차이를 드러내고 권리를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무엇보다 "냄

새"가 난다는 인종차별적 모욕에 대한 대응은 냄새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냄새들을 피우는

것이어야 한다. 당사자 운동을 통해, 사회의 영원한 타자로 주변에 머물렀던 다양한 사람들은 주체로서

정체성을 재확립하고 새롭고 다양한 연대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당사자 운동을 지지하

고 우리 모두가 운동이 활성화 되도록 지원해야 한다. 이제, 한국사회의 냄새는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보

여줄 차례다. 차이가 있는 그 냄새 하나하나가 우리라고 주장해야 한다. 모두가 각자의 독특한 냄새를 피

워야 하고 냄새들의 차이를 지각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이다. 냄새를 피우자! 이제

"우리 모두는 독일의 유태인들이다, 우리 모두는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이다." 라던 1968년 파리의 학생

운동의 저 멋진 슬로건을 다시 내세워야할 때다.

"우리 모두가 한국의 동남아시아인들이고, 우리 모두가 한국의 아프리카 흑인들이다."

인권오름 제165호 2009년 0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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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차별을 가르치나?

[삘릴리~ 학생인권 마술피리] (5) 차별에 맞서라 … 교육에서의 차별 금지

배경내

‘모두를 위한 교육’이라는 말은 교육에 접근할 기회마저 박탈당한 제3세계 가난한 어린이들의 모습을 가

장 먼저 떠오르게 한다. 교실이 없어 땡볕에서 마당을 공책 삼아 글씨 쓰기를 배우는 아이들, 학교가 너

무 멀어 배움을 포기하는 아이들, 가족을 먹여 살릴 돈을 버느라 채석장이나 카펫 공장에서 밤낮 없이 일

하는 아이들……. 그렇다면 이런 문제들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한국은 모두를 위한 교육을 실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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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9일 이명박 정부의 ‘학교 자율화 조치’를 비판하는 청

소년 촛불집회가 열렸다. [출처;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있을까?

‘찌질이’들을 위한 교육의 자리는 없다

2006년 국가청소년위원회가 남녀 중고생 2,910명을 대상으로 학교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이나 인권침해 사

례를 물었더니 29.6%의 학생이 ‘성적 차별’을, 20.1%의 학생이 ‘인신공격성 폭언’을 꼽았다. 성적 차별과

인신공격성 폭언은 공부도 못하고 뭐 하나 예쁨 받을 만한 구석도 없는 ‘찌질이’들이 경험하는 대표적인

폭력이다.

이제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은 지났다. 가난하고 못 배운 부모 밑에서 ‘똘똘이’가 생겨날 확률은 거의 없

다. 그만큼 집안의 경제·문화적 자본이 학력에 미치는 결정력이 커지고 있는 셈이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

와 지방자치단체들은 이른바 ‘인(In) 서울’, ‘명문대’ 진학률을 높이는 데만 목을 맨다. 최근에는 공부 잘하

는 학생, 공부 잘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학생들만 챙기는 태도가 한층 노골화되고 있다.

2005년 전북 순창군은 전국 최초로 ‘옥천인재숙’이라는 기숙형 공립학원을 세웠다. 순창군은 국영수 성적

만으로 2백 명을 가려 뽑아 매해 10억여 원을 쏟아 붓는다. 옥천인재숙과 비슷한 공립학원은 이미 전국

10개 도시 이상에 들어서 있다. 성적 우수자만을 위한 기숙사나 ‘면학실’을 운영하면서 특별 우대하고 있

는 학교도 부지기수다. 이명박 정부가 발표한 ‘4·15 학교자율화 조치’ 이후, 이른바 ‘소수 1%만을 위한 교

육’은 더욱 가속 페달을 밟고 있는 중이다. 전국 16개 시도교육청이 여론의 눈치를 보며 우열반 편성은

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지만, 학생들 입단속하며 우열반을 편성하거나 성적우수자 보충수업을 따로 실시하

는 학교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우열반이라는 화마는 이제 초등학교까지 집어삼키고 있다.

일찌감치 ‘찌질이’로 낙인찍히고 교육 지원으로부터 제치어진 학생들이 학습에 대한 동기를 잃어버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학교 공부도 지겹고 차별대우에 지친 학생들은 학교를 떠난다. 그리고 학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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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공정한 경쟁의 결과로 포장함으로써 또다시 폭력을 행사한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지난 5월 국가인권위원회는 교육기회의 평등권을 침해하는 차별이라는 결정을 내놓

았다. 특정 과목의 성적을 기준으로 하여 교재나 수업 등을 달리 편성하는 것은 특정 학생만을 우대하고

나머지 학생들에게는 열등감만 갖게 만드는 분리교육이라는 것이다.

유네스코가 채택한 ‘교육에서의 차별 철폐 협약’(Convention against Discrimination in Education) 1조 역

시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게 일정 유형이나 단계의 교육에 대한 접근을 배제하는 것, 저급한 수준의 교육

에만 한정시키는 것을 차별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지난 2003년 유엔아동권리위원회 역시 한국정부가 제출

한 정기보고서를 심사한 뒤, 한국교육의 지나친 경쟁 풍토가 아동의 잠재적 능력을 실현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쟁교육이 모든 아동을 불행에 빠뜨릴 뿐 아니라 특정 아동에게는 차별이 되고

있음을 정확하게 꼬집은 것이다. 그러나 국가인권위의 결정도, 국제적으로 합의된 차별 기준도 신자유주

의 경쟁교육의 광풍 아래서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가난한 학생들, 차별의 덫에 걸리다

전문계(구 실업계) 학생은 고등학교 진학에서부터 ‘낙오자’, ‘열등생’, ‘양아치’ 등 삐딱한 시선과 맞부딪혀

야 한다. 집안 형편이 부유한 학생도 거의 없고, 먹고 살기에 바빠 학교일에 열성으로 참여할 수 있는 보

호자도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학생을 깔보고 함부로 대하는 학교도 많기 마련이다. 지난 6월 광주 송원

여상에서는 학생들 전체가 수업을 거부하는 일이 일어났다. 송원여상에서는 체벌, 언어폭력, 성희롱에다

뺨을 때리고 몸을 뒤지는 일까지 예사로 일어났다고 한다. 심지어 이 학교는 ‘왜요?’라는 질문을 금지어로

정해둘 정도였다. 얼마 전 평택의 은혜고등학교에서 지각이나 복장 불량으로 걸린 학생들을 방과 후에 남

겨 단체기합을 주는 ‘푸른교실’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이 현직 교사의 제보에 의해 밝혀지기도 했다. 인

문계와 전문계가 함께 있는 이 학교에서 전문계 학생들은 더 혹독하고 모욕적인 취급을 당한다고 말한다.

지난 7월 6일 새벽에는 안양 근명정보산업고에 재학 중이던 신나래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있

었다. 신나래 학생은 1급 장애인인 아버지와 노점상을 하시는 어머니와 함께 어렵게 살고 있었다. 나래가

다니던 학교에선 성적에 따른 차별 대우와 인격을 모독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었다는 게 부모님의 주장

이다. 기초생활수급자라거나 학교운영비와 급식비 등을 내지 못한 학생 이름이 반 친구들 앞에서 함부로

공개된 일도 있었다고 한다.

2006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전국 지역아동센터(공부방)를 이용하는 어린이·청소년 1,1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10명 중 2명이 공부를 못하거나 집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교사로부터 차별당한다고 느

낀다고 답했다. 기초생활수급자들을 얕보거나 가난을 개인의 잘못으로 비난하는 교사들의 시선, 급식비나

수업료 등을 지원하면서도 적선하듯 던져주는 학교의 태도는 학생들의 가슴에 예리한 비수가 되어 꽂힌

다. 학교가 가난한 집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을 토닥이기는커녕 외려 더 큰 상처만 안겨다 주는 꼴이다.

유네스코의 ‘교육에서의 차별 철폐 협약’은 교육이 학생의 존엄과 양립하기 힘든 조건을 부과하는 것 역

시 차별이라고 꼬집은 바 있다. 공부 잘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 잘사는 학생과 가난한 학생으로 쉽게

구분짓고 체벌과 기합, 언어폭력 등으로 모욕적으로 대우하는 것은 학생들의 존엄을 해치는 조건을 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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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 은혜고등학교에서 ‘푸른교실’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에게 단체기합을 주고 있다. [출처; 임정훈]

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학생들 사이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아예 ‘없는

존재’로 취급하면서 나타나는 비가시적 차별문제도

심각하다. 성적정체성, 가족형태 등에서 이른바 ‘정

상성’의 범주에 속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학교는

둥지가 되어주지 못한다. 오히려 낙인과 차별에 대

한 두려움 때문에 학생을 움츠러들게 만들고 자기

자신을 부정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데 어버이날에 아빠 손

을 그려오라는 숙제를 받는 학생, 청소년의 성에

개방적인 교사들조차 ‘이성’교제만을 당연시할 때

자기의 사랑을 숨길 수밖에 없는 학생, 밤새 술 취

한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다 지옥 같은 마음으로

등교한 학생, 밤늦게까지 아니면 새벽부터 교통비

라도 덜 요량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다 등교한 학생

들에게 학교는 과연 어떤 공간으로 다가갈까?

차별에 기대 학생을 통제하다

학교가 차별을 조장하고 활용하면서 학생 통제의 편리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잦다. 학교는 고학년에

대한 우대 정책을 통해 저학년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곤 한다. 고학년부터 급식을 배식하는 일, 고학년 학생

들로 선도부를 꾸려 저학년 학생들의 품행을 단속하고 벌점을 매기도록 함으로써 우월의식을 갖게 만드는

일은 학교의 흔한 풍경이다. 두발규정을 정하면서도 여학생에게는 두발 길이를 자유로 해주면서 남학생에게

는 엄격한 제한을 둔다든지, 성별에 따라 기숙사 통금 시간을 달리 둔다든지 하는 학교도 많다. 그러다 보면

학교를 향해야 할 비판이 ‘이성’의 동료 학생들에게로 향하게 마련이다. 차별에 기댄 학생 통제 정책은 자연

스레 학년 사이의 위아래를 굳건하게 만들고 성별 고정관념을 확산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학생들 사이에 위아래를 조장하는 선도부는 차별에 기대서 있기도 하다. [출처; 교육희망]

다양성은 교육의 주춧돌

모든 사람은 어떠한 이유로든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차별받지 않을 권리는 부당하게 구분되고 분리

되지 않는 것뿐 아니라 존재 그대로 다르게 사는 것도 포함한다. 학교가 예뻐하는 ‘주류’, 학교가 당연하

다고 전제하는 ‘정상’에 끼지 못한 학생들은 교육에서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거나 부당한 구별이나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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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 배제에 노출되기 쉽다. 차별에 기댄 교육은 차별을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교육이다. 게다가 학교가

내켜하지 않는 학생을 학교로부터 밀어내고 부당한 ‘실패’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음으로써 차별을 키우고

지속시키는 결과까지 초래한다.

학교는 학생의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고 다양성을 교육의 주춧돌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

는 수업, 학교규정 등을 포함하여 학교생활 전반에서 존재하는(또는 잠재하는) 차별을 확인하고 이에 맞

서기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조직해야 한다. “비차별의 원칙은 권리의 인정과 실현을 위해 특별한 조치

가 필요한 아동 개인과 집단을 찾아낼 것을 요구한다”라는 유엔아동권리위원회의 일반논평(5의 12항),

“비차별의 원칙은 사회권의 점진적 실현과 자원의 가용성에 의해서도 제한될 수 없다”고 꼬집은 유엔사

회권위원회의 일반논평(13의 31항)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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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인권 마술피리 다섯째 소절 : 차별 없는 학교<

○ 학생은 학교생활 전반에서 어떠한 종류의 차별도 없이 존엄하고 동등한 대우를 받을 권

리를 가진다. 합당한 이유 없는 분리, 구별, 제한, 배제는 물론 괴롭힘도 차별이다.

○ 학교는 모든 학생의 권리가 차별 없이 존중, 보호, 실현될 수 있도록 차별 근절을 위한

구체적이고 적극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사회적 약자의 권리 실현을 위한 적극적 조치로서

취해지는 우대 정책은 차별이 아니다. 분리교육은 합당한 이유와 해당 학생의 동의에 기반

을 둬야 한다.

○ 성적을 이유로 한 차별은 금지된다. 교육과정과 학교생활, 시설 이용 전반에서 성적을

이유로 학생을 우대 비교하거나 학생의 참여를 제한할 수 없다.

○ 학교는 합당한 이유 없이 교육과정과 학교생활에서 여학생과 남학생을 구분하거나 한쪽

성에 불리한 대우를 해서는 안 된다.

○ 학교당국은 학년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학생의 의사를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 특히 하급

학년의 경우에는 학생 의사를 충분히 파악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학

교는 학년 사이의 위계와 차별의식을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 모든 학생은 가정의 경제적 수준에 관계없이 동등하게 배움을 누릴 권리가 있다. 학교는

빈곤 가정의 학생이 편견에 노출되지 않도록 ‘권리에 기반을 둔’ 경제적, 정신적 지원을 제

공해야 한다. 가정 형편에 따라 다른 교육활동을 제공하는 것도 차별이다.

○ 학교는 다양한 가족형태의 존재를 존중하고, 특정한 가족형태만을 ‘정상가족’으로 인정

하고 다른 형태의 가족을 비하하는 등 교육과정에서 편견과 차별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주

의해야 한다.

○ 학교는 가출 학생을 대할 때 가출의 원인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지원해야 한다. 가출

자체를 징계 대상으로 삼고 가출 학생에 대해 도덕적 낙인을 부여하는 것은 차별이다.

- 인권오름 제114호 2008년 07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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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록새록 인권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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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교육에서 마주하는 가치들 살피기1 -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른 가치의 해석

*진행: 정주연, 이선주

[교육목표]: 인권교육을 할 때 주로 접하게 되는 가치들의 의미를 꼼꼼히 짚어보는 시간을 갖는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가치의 해석이 달라질 수 있음을 이해한다.

[진행방법]

① 몸 풀기 마음 열기 (5분)

② 인권 레알 사전 (40분) - 인권교육에서 자주 마주치게 되는 가치 낱말과 공간(학교, 집, 경찰서 등을 제시한 뒤, 모둠별로 원하는 낱말과 공간을 선택하도록 한다.

[다룰 가치] 평화, 다양성, 평등, 자유,

공동체, 용서, 연대,권력

[공간]학교, 집, 광장, 사회복지시설, 경찰서, 지하철, 감옥, 대기업

(유시민 발언.. -생명 새누리당 반박...) - 선택한 공간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에게 각각의 가치 낱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고, 한 줄로 소개한다. - 인권의 가치 낱말들이 맥락과 입장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해석되는지를 발표를 통해 정리해 본다.

③ 강연 - 인권의 가치 낱말들이 공간, 사람에 따라 다른 것에서 보여지 듯 인권에서 가치의 맥락이 중요한 이유를 살펴본다. - 다음까지의 과제 : 우리 주변에서 인권의 가치 낱말이 잘못 쓰인 사례 발견해오기. 주변에서 발견한 것은 사진으로 찍어서, 주변에서 없으면 봤던 기사나 광고 혹은 사진 등을 찾아 하나씩 제출한다. ☞ 보낼 곳 :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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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교육에서 마주하는 가치들 살피기2 - 난감한 가치 상황들에 맞서는 연습------------------------------------------------------------------------------------------------------------ *진행: 정주연, 이선주

[교육목표]

: 인권교육을 할 때 주로 접하게 되는 가치들의 의미를 꼼꼼히 짚어보는 시간을 갖는다.

: 상황과 맥락에 따라 가치의 해석이 어떻게 쓰였는지 살펴보고, 이에 맞서 인권의 가치를 되살리는

연습하는 시간을 갖는다.

[진행방법]

① 몸 풀기 마음 열기 (20분)

② 과제 점검 (50분)

③ 인권의 가치 상황 속으로 (1시간 30분)

- 이 시간에 다룰 가치 낱말들을 소개한다.

- 사례지를 공유한다.

- 모둠별로 다루고 싶은 사례를 택하고, 사례 속에 담긴 가치들을 뽑아내 인권적 논리를 개발해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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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갖는다. 이때 인권적 논리를 제시하는 방식은 진행자가 모둠과제로 준 방식에 따른다. 일테면

각주 달아보거나, 댓글 달기 형식 등으로.

- 모둠별로 토론 내용을 전지에 정리하여 발표한다.

⑤ 정리 강연과 토론 (1시간)

- 앞의 사례에서 살펴보지 못한 낱말들의 개념을 정리해보는 시간을 갖는다.

- 여전히 남아있는 의문들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읽기자료]

- 자료 분량이 많아 따로 싣지 않습니다.

- 인권교육 매뉴얼 <인권교육 오르락내리락 고개 넘기>에 ‘인권이 좋아하는 가치, 제대로 만나기’ 원

고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인권교육센터 ‘들’에서 구매 가능합니다.

- 인권교육센터 ‘들’ 홈페이지에서 웹으로 보실 수도 있습니다.

=> http://www.hrecenter-dl.org/manual/01/02.html

*준비물: 전지, 매직(크레파스), 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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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권리목록&

쟁점 살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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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 이름 권리 속성(어느 그룹에 속하는지)

(그림)

권리 설명

권리의 효과 카드 발동 조건

인권의 권리 목록 - 인권 몬스터 카드 만들기

*진행 : 공현

[교육목표] : 권리 목록을 카드 형태로 만들면서 중요한 권리들, 권리의 성격, 분류 등을 이해하고 각 권리들의 연결고리를 찾아서 불가분성을 보여준다.

[진행방법]

★ 권리 카드

2. 빈 카드를 한 사람당 하나씩 나누어 준다. 자기가 떠오르는 인권을 몬스터카드로 만들어보라고 한다. 권리그림으로 권리의 본질을 표현하고 권리에 대한 설명, 권리의 효과를 간단히 적는다. 권리 속성에는 이 권리가 몸의 자유에 속하는지, 생존권에 속하는지 등을 분류한다. 그리고 이 권리가 효과를 내기 위한 발동 조건 (권리가 실현되는 데 필요한 조건 - 다른 권리 카드일 수도 있고 다른 물질적 조건이나 제도일 수도 있음)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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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칠판에 미리 그려둔 권리속성 그룹에 자기 카드를 분류해서 붙인다.

4. 어떤 권리 카드가 어느 분류로 갔는지, 그리고 발동 조건으로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했는지 등을 진행자가 본다.(권리 목록과 분류에서의 쟁점 등) 발동조건으로 연결된 카드들을 선을 그어서 서로 연결시킨다.(불가분성)

[준비물]- 권리카드, 매직, 크레파스 등 - 스카치테이프- 칠판, 보드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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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내 맘을 알아?, 냉정과 열정 사이 -인권의 쟁점

*진행: 빨간거북

[교육목표]

: 인권의 목록에 따른 쟁점들을 살펴본다. : 쟁점적 권리들을 옹호할 수 있는 논리적이거나 감성적인 언어를 찾아본다. : 인권의 상호 불가분성을 이해한다.

[진행방법]

① 각자 가장 이야기해 보고픈 권리에 스티커를 붙여 본다. ② 권리에 따른 쟁점들을 뽑아본다. ③ ‘논쟁적 권리’로 지목되는 권리들에 대해 모둠별로 한 가지씩 고른 후 토론을 진행한다.④ 모둠별 작업 결과를 살펴보면서 ‘논쟁적 권리’로 지목받은 권리들에 대해 추가 토론을 진행한다.⑤ 진행자가 추가로 던지고픈 쟁점적 권리가 있다면, 추가해서 논의를 진행해 본다.

[준비물]- 스티커- 전지(모둠별 1장씩), 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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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권리를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인권의 목록과 쟁점

- 인권교육센터 들

흔히 자유, 평등, 연대를 인권의 3대 기둥이라고 말한다. 자유, 평등, 연대가 있어야 인권이 실현 가능하고, 자유, 평등, 연대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도 인권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유, 평등, 연대를 일구어내기 위한 권리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 답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은 세계인권선언이나 헌법과 같은 문서들을 뒤적인다. 생명권, 신체의 자유, 의사․표현의 자유, 노동권, 교육권 등등. 이들 문서에 나열된 개별 권리들은 각각의 고유한 맥락 속에서 출현했고, 구체적 인권침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개별 권리의 보장을 독자적으로 요구할 필요가 있기도 하다. 정보인권이나 평화권처럼 오래 전 만들어진 인권문서에는 포함되지 못했지만, 역동하는 인권현실 속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권리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 권리는 결코 다른 권리들과 외따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가난은 기본적 생존은 물론 학업과 주거, 건강 등 모든 삶의 기초를 뒤흔든다. 가난은 사람과의 관계도 끊어놓고 미래를 계획할 여유마저 앗아간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의 목소리는 사회적으로 평가 절하되거나 아예 들릴 기회가 없고, 가난한 자들 역시 먹고 살기 바빠 생각할 겨를마저 빼앗긴다. 그래서 가난은 힘겹고 불안한 동시에 치욕적이기도 하다. 이렇듯 인권침해의 상황은 일시적이든 장기적이든 사람들의 존엄에 총체적 영향을 미친다.

다양한 권리들을 엮는 5가지 열쇠말

개별 권리들 사이의 연관성, 그 권리들을 출현시키는 밑바탕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5가지 열쇠말을 꼽아보았다.

이 5가지 열쇠말로는 충분히 포괄되기 힘든 인권현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 5가지 열쇠말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새로운 열쇠말의 출현은 언제나 열려있다. 각 열쇠말이 추구하는 존엄의 내용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도 분명하다. 그러나 각 열쇠말이 내포한 핵심적인 질문들을 나름 깊이 이해하는 것 또한 인권의 의미를 풍성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아래에서는 각 열쇠말이 갖는 의미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좀더 깊은 이해를 위해 도움이 되는 글을 따로 읽을거리로 덧붙이기로 한다.

마음(목소리)의 자유 몸의 자유 사회경제적

존엄평화적생존

저항과불복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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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목소리)의 자유

외부 권력이나 제도, 국가에 의해 마음(목소리)의 자유를 통제하려 하는 문제는 독재, ‘빅브라더’, 감시사회와 같은 말로 다뤄져 왔다. 사상 전향(이런 생각은 위험하니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침묵의 강요(생각을 하더라도 표현하거나 떠들어서는 안된다), 정치적 권리의 박탈(바라기만 할 뿐 정치적인 힘을 갖고 결정하려 해서는 안 된다), 감시감독 혹은 사찰(너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가져서는 안 된다. 내가 좀 봐야겠다)’ 등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고 통제하려는 양상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오랫동안 마음(목소리)의 자유 영역은 마음(목소리)에 대한 외부에 의한 압력을 제거하는 것, 곧 제도(정치)나 권력, 국가의 영향력을 밀어내거나 최소화하여 간섭받지 않을 자유를 확보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후 마음(목소리)의 자유는 세상의 선입견에 의한 압력(예를 들면 누구와든, 어떻게든 사랑할 수 있을 권리 혹은 사랑하지 않을 권리)이나 요구를 강요받지 않을 권리로 확장되어 왔다. 즉, 대열과 정렬에서 벗어날 자유, ‘지배의 철폐’를 요구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자기 검열을 내면화하거나, 오히려 차별을 환영하는 사람들이 출현하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런 현상을 두고 <친애하는 빅브라더>라는 책을 통해 ‘현대의 감시사회가 ‘빅브라더’로 상징되는 감시권력에 의해 이뤄지고 있기는 하나 현대인들의 ‘자발적 복종’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즉 이제는 감시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관리되지 못하거나 주목받지 못함, 방치됨, 추방에 대한 공포가 감시와 차별을 환영하고 당연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파트나 동네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CCTV를 설치할 것을 요구하며 소비자는 소비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신용카드사나 보험사, 쇼핑몰 등에 자신의 정보나 신용을 넘기며 노동자는 감정까지도 포함하여 노동력을 판매한다. 서열이 분명하고 높이 올라가지 못할수록 빼앗기고 포기할 것이 많아지는 것이 당연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스스로 사회가 할당한 위치를 받아들이고 그러면서 ’내 탓이오‘를 외치고 ’이것으로 충분하다‘며 자신을 속인다. 자기검열의 내면화와 느낌이나 감정을 속임으로써 이미 자유의 가능성을 자발적으로 제한한다. 또한 자신의 부자유를 내면화한 사람일수록 폭력에 대한 예감으로 침묵하거나 타인에 대한 차별과 희생양 만들기, 가학행위하기를 지켜보거나 비난하거나 행위에 가담하기 쉽다. 과로노동으로 몸이 아픈 사람에게 그저 ’니 몸이 약할 뿐‘이라고 말하는 동료, 파업하는 노동자를 보고 ’유별나다‘고 비난하거나 구사대로 나서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는 이유다.

“옛날의 빅브라더는 포함 ― 사람들을 대열에 정렬시키고 그곳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통합 ― 하는 데 열중했다. 오늘날의 새로운 빅브라더의 관심은 배제 ― 그들이 있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을 골라내, 거기서 쫓아내면서 ‘그들에게 어울리는 곳’으로 추방하거나 (더욱 바람직한 것은) 아예 처음부터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하는 것 ― 이다.” /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 읽을거리 : 조지 오웰 <1984>, 에티엔느 드 라 보에티 <자발적 복종>, 지그문트 바우만 <친애하는 빅브라더>, <쓰레기가 되는 삶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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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자유

역사적으로 몸의 속박성이라는 문제는 납치, 실종, 구금, 고문 등의 정치적 속박, 법의 예외상태 등에 맞서 신체의 자유를 획득하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노예제 철폐라는 움직임이로 대표되듯이, 몸의 자유는 주로 몸의 속박상태, 곧 타인의 힘에 의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을 구속당하거나 위해를 당하거나 몸 자체가 양도되는 문제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노예제도가 철폐된 후에도 많은 흑인노예들이 노예됨의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두려워했던 것처럼, 몸의 자유는 본인이 처해 있는 존재기반, 조건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또한 노예로서의 신체적 속박은 정신의 노예화를 부르기 쉽다. 몸의 자유는 신체를 부양할 의무와 함께 온다.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신체의 부자유, 정신적·경제적 부자유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좋은 이유가 될 수 있다. 이처럼 몸의 부자유를 부르는 요소들은 신체의 부자유, 정신의 부자유, 경제적 부자유 등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즉 속박성이란 처해져 있는 조건이나 상황을 어떻게 자각하고 개입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신체가 구금된 상태에서 오히려 편안함과 자유를 느끼고, 구금된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두려워한다면? 그이는 정신과 신체가 완벽하게 속박된 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경제적 부자유를 벗어나기 위해 자발적으로 신체와 정신의 부자유 상태를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에는 임금노예성, 학생노예성 등 보이지 않는 통제의 사슬로 노예화하는 장치들로 인한 부자유의 문제가 더욱 부각되고 있다. 또한 나이주의 등 사람들이 내면화한 자기 몸에 대한 통제(구조적 층위 속에서 받아들인 종속성), 임신 출산에 대한 자기결정에 대한 침해, ‘처녀성’을 잃은 여자가족에 대한 다른 가족의 폭력, 폭력에 노출된 사람을 오히려 비난하는 경우 등은 반차별의 관점으로 볼 수도 있지만 몸의 자유를 침해하는 문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유를 논한다는 것은 인간을 논한다는 것이며, 인간을 논하는 것은 결국 세계(조건)와의 관계를 배제하고서는 그 논의가 불가능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란 ‘조건 지어진 자유’이며, 신체적 지평과 지각의 장에서 펼쳐지는 자유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자유는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실현된다는 것이다.”/ 심귀연 <신체와 자유>

사회경제적 존엄

근대시민혁명을 통해 인권이 출현할 당시만 해도 먹고사는 문제는 개인이 감당해야 할 운명의 영역에 불과했다. 기본 생계, 일자리, 건강, 교육 등은 산타클로스나 줄 수 있는 선물이지, 사회적 요구의 대상일 수 없었다. 장 자크 루소는 이미 18세기에 “어느 누구도 자신을 팔아야 할 정도로 가난해서는 안 되며, 어느 누구도 다른 시민들의 굴종을 사버릴 정도로 부유해서도 안 된다. 민주공화국이라면.”라고 썼다. 가난이 자유가 아닌 굴종을 만들어내는 주요 원인임을 꿰뚫어 본 셈이다. 이후 가난과 굴종에 맞선 이들의 싸움 끝에 사회 구성원의 기본적 생존을 보장하는 일은 국가의 책임이 되었다. 그리하여 떠오른 권리의 목록이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이다. 이른바 사회권이라 불리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는 사회 구성원의 기본적 생존을 보장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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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한 최소한의 복지와 기회를 제공받는 수준으로 출발했지만, 이제는 사회 정의와 분배 정의를 요구하는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다. 사회경제적 존엄이 단지 생존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물질적 재화와 서비스만으로는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최저임금은 여전히 최소한의 기본 생계를 보장하기 위한 임금으로 설명되지만, 임금과 소득의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한 적극적 평등 조치의 일환으로 최저임금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임금소득을 넘어선 기본소득을 사회가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도 최근 적극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더불어 사회경제적 존엄이 보장되지 않는 한, 자유라는 것이 한낱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마냥 불안하고 실현 불가능한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밝혀내는 연구들도 늘어나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당신은 마음대로 이 나라를 떠날 자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비행기표를 살 돈이 없을 수 있다. 당신은 흥미를 끄는 직업을 갖고 일하고 싶겠지만, 그런 일거리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비행기표를 살 돈이 없다면 이 나라를 떠날 자유는 있으나마나한 존재임을 우리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반대로 사회경제적 존엄 역시 자유의 뒷받침 없이는 실현될 수 없음도 분명하다. 집을 주고 먹을 것을 준다고 해서 인간의 존엄이 곧장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게는 단지 '살 집'이 아니라, '살만한 집'이 필요하고 '살만하지 않은 집'을 박차고 나올 자유가 필요하다. 단순한 일자리가 아니라, 존중받는 일자리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도 '열악하고 모욕적인 일자리를 거부한 자유'가 필요하다. 단순히 배울 기회가 아니라,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고 싶은 방식으로 배울 기회가 필요하고 '교육답지 못한 교육을 거절할 자유'가 필요하다. 최근 단지 '필요(욕구)에 기반한 복지'에서 '인권에 기반한 복지'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강조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평화적 생존

평화의 문화란 “생명, 자유, 정의, 연대, 관용, 인권, 그리고 남녀의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들에 기반한 문화”를 말한다. 평화의 문화는 전쟁과 폭력을 향한 문화적 경향을 대화, 존중, 공정함이 지배하는 사회적 관계로 바꾸는 것이다. 따라서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만이 아니라 구조적 평화로 확장된다. 즉 평화적 생존의 권리는 침략당하지 않을 권리와 더불어 침략하지 않을 권리, 이런 권리들이 실현될 수 있는 국내적, 국제적 질서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며 이를 위해서는 국가 간의 위계를 없애고 폭력을 만들어내는 자본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자본주의가 국제화되면서 자본이 해외에 나가서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방식과 구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국책개발사업. 해외개발사업 수주, 환경 부정의, 투기성 지역개발 등의 문제가 사람들의 평화적 생존을 무너뜨리는 핵심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최대한의 이윤을 창출하겠다는 자본의 욕구는 저 멀리 동남아의 한 나라에서 저임금으로 착취 받는 노동자를 만들어 내고 우리가 별 생각 없이 그 옷을 구입할 때 완성된다. 부강한 국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무기를 수출하고 수입하는 것을 묵인할 때 평화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의 중장비와 건설업체가 저 멀리 어떤 나라에서 철거를 하고 거주민들을 쫒아내는 것을 묵인할 때 우리의 평화적 생존은 위협받게 된다. 전 세계가 자본으로 위계화 되어 있다는 것은 곧 평화롭고 자유로운 위치에 있는 누군가가 억압받고 착취받는 다수의 누군가를 밟고 서 있을 수도 있음을 의미하고, 이에 대한 자각은 평화적 생존을 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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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데 필수적이다. 평화적 생존에 대한 권리는 나의 생존과 권리를 위해 타인의 생명과 희생을 담보로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권리의 언어로 재구성한 것이다. 평화적 생존의 의미는 확장되고 있고 확장되어야 한다.

저항과 불복종

참을 수 없는 현실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보통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한다. 체념하여 받아들이거나 분노하거나. 체념이 아니라 분노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저항이며 불복종이다. 그럼으로 사실상 모든 권리는 저항권이다. 저항과 불복종을 통해 인권의 목록이 역사를 거듭하며 풍부해졌다. 저항권 없이는 인권도 없다. 그럼으로 '저항'이나 '불복종'은 단지 권리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권리로서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비록 실정법이라 하더라도 잘못되었다면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불복종),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행동(저항)을 할 수 있다. 스스로 불복종과 저항하기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유일하게 의지가 되고 힘이 된다. 즉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무권리 상태가 되었다고 느꼈을 때조차 나에게는 ‘저항’과 ‘불복종’의 권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희망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저항’과 ‘불복종’은 용기와 자유의지를 통해 자기 주권을 선언하는 엄숙한 행위이다. 저항과 불복종은 제도나 법을 보완하여 인권수준을 향상시켜왔지만, 바로 그러하기에 저항과 불복종을 제도화함으로써 관리하려는 움직임도 존재해 왔다. 우리는 제도와 법이 언제나 저항의 내용과 방식을 일정한 틀 안에 가둬두고 그 틀을 벗어났을 때는 불법이라 낙인찍고 무력화하려 한 많은 사례들을 기억한다. 엄연히 파업권이 있음에도 파업 조건이나 방식을 따져 그 자체를 문제시하거나, 파업에 대해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의 벌금형을 부과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저항’을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하도록 만들기 위해 ‘테러리스트, 도심 테러, 말대꾸, 생떼’등의 이름으로 바꿔 부르는 일도 있다. 청소년, 어린이, 학생의 저항에 대해 '자격없음', ‘철딱서니없는 행동’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 역시 저항권을 축소하는 일이다. 저항은 크게는 제도와 법, 체제의 변화를 요구하고, 작게는 나 자신의 소소한 일상, 삶의 변화를 요구한다. 또한 스스로의 용기 없음에 대한 저항과 반인권의 질서에 순응하려는 자신에 대한 불복종도 함께 요구한다. 그런 측면에서 저항과 불복종은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고 외치는 자유의 선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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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

인권 창조의 역사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출처: <인권오름> 제87호, 2008년 01월 16일

인권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인권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인권에 대한 인식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고 오늘날에도 우리가 인권을 지키도록 만들었는가? 이에 대한 많은 설명이 있지만, 이 책의 저자는 인간 내면의 ‘감성과 공감’을 주요소로 들어 인권의 창조와 발전을 얘기하고 있다. 인권은 인간의 이성만큼이나 감정에 의존한다는 점 때문에 정의하기에 불가능해보이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인권이 존재한다는 설명이다.(출처: Lynn Hunt, Inventing Human Rights: A History, W.W.Norton, 2007)

자명성의 역설

노예제에 기초하고, 인간의 타고난 종속 위에 건설된 사회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 어떻게 권리의 평등이 ‘자명한’ 진실이 될 수 있었을까? 노예소유주였던 사람, 귀족이었던 사람이 어떻게 “인권은 자명하다”, “모든 사람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말할 수 있었을까? 권리의 평등이 그렇게 자명하다면, 왜 그런 주장이 있어야 했고, 왜 특정 시기와 장소에서만 이뤄졌는가? 인권이 보편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보편적일 수 있나? 인권이 ‘자명’하다는 주장은 인권의 역사에 주요한 것이었다. 어떻게 그것이 18세기에 그렇게 확신적이었는지 설명하려는 게 이 책의 목적이다.

인권은 세 가지 서로 맞물린 질을 요구한다. 권리는 ‘자연적’이어야 하고(인간에 내재된), ‘평등’(모두에게 똑같고)해야 하고, ‘보편적’(어디에서나 적용가능)이어야 한다. 인권은 정치적 내용을 획득할 때에만 의미 있다. 따라서 인권은 그것을 가진 사람들의 능동적 참여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18세기에는 ‘인권’(human rights)이란 표현을 흔히 사용하지 않았다. 어쩌다 그렇게 말할 때는 오늘날 우리가 의미하는 것과는 달랐다. 1789년 프랑스 혁명 전에는 대부분 ‘자연권’을 얘기했고, 간혹 ‘인권’이란 말을 쓸 때는 자연권이나 인간의 권리(rights of man)보다 수동적이고 덜 정치적인 뭔가를 의미했다. 예를 들어 미국 독립 혁명의 지도자가 인권이란 단어를 쓸 때는 아프리카인이 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걸 가능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18세기 동안 영어와 프랑스어에서 ‘인권’(human rights, rights of mankind, rights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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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ty)은 너무 막연해서 직접적인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될 수 없었고, 한편으론 신과 한편으론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것을 일컬었다. 즉, 언론의 자유나 정치 참여 같은 정치적으로 관련된 권리라기보다는 인간으로서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그 의미가 달려있었다.

권리는 어떻게 자명해지나

인권은 이성만큼이나 감정에 의존한다는 바로 그 존재 때문에 명확히 정의하기 어렵다. 여기서 말하는 감정이란 인간으로서 “도무지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것”, “내면의 감정”, “내면의 확신” 등으로 표현된다. 철학자들의 사상, 법률, 혁명 정치는 인권이 진짜 자명해 보이도록 인권에 대한 ‘내적인 정서적 언급’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쓴 철학자들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런 느낌을 가져야 했다.

그런 느낌의 토대로 필자는 ‘개인의 자율성’을 든다. 시대에 따라 변하는 자아의 의미가 18세기의 경험 속에서 결정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을 변화시켰다. 타인과 구분된 개인, 스스로 독립적인 도덕적 판단을 행할 수 있는 개인들이 등장하고, 이 개인은 독립적인 도덕적 판단에 기초한 정치사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타인과 공감하고 타인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어야만 했다. 이런 공감은 새로운 사회적 및 정치적 개념(인권)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필자가 그 예로 든 것이 18세기 유행한 소설 읽기와 고문 폐지 운동이다. 필자는 “감정의 폭포”라는 표현을 쓰며 ‘인권’의 개념 출현 직전에 유행했던 서간체 소설 읽기를 든다. 소설 속의 수난받는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모든 사람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독립과 자율성을 열망한다는 것을 공감하고, 투쟁에 수반된 심리적 노력을 가상으로 경험한다. 사람들이 자신과 타인을 동격으로 생각하는 걸 배웠을 때, 어떤 근본적인 점에서 자신과 같다고 생각하는 걸 배웠을 때 인권은 번성할 수 있었다.

프랑스 혁명정부는 모든 형태의 사법적 고문을 폐지했는데 범죄자라도 “우리 친구와 친척들과 같은 물질로 구성된 영혼과 육체를 소유한다”라고 했다. 왜 똑같은 고문이 이어져왔는데 그 이전에는 고문받는 사람의 고통에 대해 측은히 여기지 않았는가? 각 사람은 하나뿐이며 타인과 구별된 개인이고 그의 신체가 또한 그런 것으로 여겨지는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통적 이해 속에서 육체의 고통은 전적으로 개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고통은 종교적 및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도덕적, 정치적, 종교적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범죄인의 신체를 절단하거나 불태울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롭게 부상한 개인주의에서 그 고통과 고통받는 신체는 그 개인에게만 속한 것이었고, 그 개인은 더 이상 공동체의 선을 위해서나 더 높은 종교적 목적을 위해 희생될 수 없는 존재였다. 고문반대자들은 그 이유로 고문은 개인들의 도덕적 기초가 되는 ‘공감’을 파괴한다고 했다. “공개적 처형은 사회적 감정을 훼손한다. 구경꾼을 점차 냉담하게 만들면서, 구경꾼은 ‘보편적 사상’의 감정을 잃고, 범죄인도 자신들과 같은 신체와 영혼을 가졌다는 의식을 잃는다”라고 했다. 공동체를 위해 더 바람직한 것은 교육과 내적인 좋은 인간자질의 경험을 통한 선의 배양이다. 잔혹한 처벌로부터 동료시민은 아무것도 배울 수 없고 덕의 근본인 공감만 잃게 된다. 따라서 고문은 없어져야 했다. 개인들은 자신의 신체를 소유했고, 자신의 신체의 분리와 신체적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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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침성에 대한 권리를 가졌고, 이것은 타인에게도 똑같은 수난, 감정, 공감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오직 모든 사람이 어떤 근본적인 방식에서 똑같은 것으로 보일 수 있어야만 모든 사람은 권리를 가진다. 평등은 단지 추상적 개념이나 정치적 구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면화돼야 했다. 인권이 창조된 18세기에나 오늘날에나 모든 사람이 진짜 평등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공감’이라는 새로 발견된 힘이 모든 편견에 맞서 작동할 수 있었다. 이런 인권 혁명은 성격상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권리 선언하기

개인의 자율성과 공감, 신체적 보전이라는 새로운 문화적 관행에서 싹이 튼 인권의 언어는 ‘선언’에 명시됐다. 왜 권리는 ‘선언’돼야 했나?

필자는 ‘선언’이라는 단어의 역사를 설명하며, 그것을 ‘주권의 전환’으로 설명한다. 영어 단어 선언(declaration)은 프랑스어 déclaration에서 유래했다. 프랑스어에서 이 단어는 원래 봉건영주에게 충성선서를 한 대가로 주어진 땅의 목록을 일컬었다. 그 뒤 17세기 동안 그것은 왕의 공적인 명령에 속했다. 즉 선언하는 행위는 주권과 연관됐다. 권위가 봉건영주로부터 왕에게로 옮겨졌듯이 선언하는 권력 또한 그랬다.

구체제를 약간 수선하려는 것이었다면, ‘인권’ 선언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체제를 재건설할 필요성에 동의했고, 인권 사상은 대안적인 정부의 원칙을 제공했다. 여기에 더 높은 권력에 대한 요청이나 호소를 의미하는 ‘헌장, 청원’(charter, bill) 등의 표현은 부적절했다. 선언은 진부하고 복종하는 분위기를 떨쳐버리고 주권을 잡으려는 의도를 표명할 수 있었다. 미국 독립 선언은 자신들의 주권을 가진 독립된 국가를 가질 것을 선언했고, 프랑스 인권선언은 인권이 정부의 기초를 구성한다는 것을 천명했다.

선언의 결과는 끝이 없을 것이다

선언은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정치적 논쟁의 장을 열어젖혔다. 인권이 정부의 정당성의 기초라면 무엇이 연령, 성, 인종, 종교, 부의 차이를 가진 사람들에게 제한을 가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무산자, 종교적‧인종적 소수자의 권리 등이 꼬리를 물고 문제로 떠올랐다. 누가 그 결과를 통제해야 하고 과연 통제할 수 있었는가?

선언의 추상적 성격은 결국 구체적으로 요구되는 것들에 대한 보다 급진적 해석을 배양했다. 한편으론 ‘배제’를 설명하는 근거도 해명돼야 했다. 왜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기독교인과 유대인 중에서 전자가 우월한가를 설명해야 했다. 권리가 보편적이고 평등하고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권을 창조한 개념 바로 그것이 치명적인 형태의 성차별주의, 인종주의, 반유대주의의 문도 함께 열었다. 제국주의와 인종과학이 공생관계를 이룬 것이 대표적 예이다.

배제된 이들의 인권투쟁은 선언에 새겨진 추상적 평등을 보다 구체적이고 위협적인 것으로 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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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새로 등장한 권리는 그것이 정치적 권리가 아니었다 할지라도 새로운 기회를 열었고, 그걸 부여잡는 사람들도 늘어갔다. 권리란 결국 개인들의 감정, 확신, 그리고 무수한 행동으로 가장 잘 지켜질 수 있다는 것을 인권의 역사는 보여준다. 이 개인들은 내면의 분노에 부응하는 답을 요구한다.

18세기 신교도에 대한 종교적 관용의 부족함을 비난하는 편지를 프랑스 정부 당국에 보냈던 한 사람은 이렇게 썼다. “때가 왔다. 전 세계에 너무 잘 알려진 인류의 권리를 공공연하게 전복하려는 법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때가….” 1776년(미국독립선언), 1789년(프랑스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1948년(세계인권선언)의 선언은 인류의 권리의 초석을 제공했고, 인간으로서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것에 대한 인식을 끌어냈고 모든 침해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도록 돕고 있다. 당신은 인권의 의미를 안다. 왜냐하면 인권이 침해당할 때 당신이 괴롭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인권의 진실은 모순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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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2] 사회경제적 존엄

사회권, 인권을 보는 다른 시선

-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출처: 인권교육센터 들, <인권교육 오르락내리기 고개넘기> 심화워크숍(2012.11.07) 자료집

1.�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를 묶어 부르는 ‘사회권’은 세계인권선언 이후 규약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유권’과 같은 성질의 권리가 아니라는 주장에 밀려 ‘다른 권리’로 고착화되었다. 자유권 대 사회권의 이분법은, 인권의 다양한 내용들이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으며(상호불가분성) 영향을 주고받는(상호의존성) 성격을 숨기고 우리의 시야를 왜곡시킨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회권을 설명하려다 보면 ‘사회권도 인권’이라는 동어반복을 하거나 사회권을 특별히 더 강조하면서 다시 이분법에 갇히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사회권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권리이며 한국사회에도 생소하지만은 않은 권리다.

♧가임(家賃)은 현액(現額)에서 2할이나 3할을 감할 것 ♧가옥 수선비는 가주(家主)가 반드시 일체를 부담할 것

이 요구는 1920년대 서울, 강경, 평양 등에서 결성된 차가인동맹이 주장했던 것이다. 집은 집주인의 재산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세입자에게는 삶을 누리기 위한 장소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노동자들의 저항도 분출했다. 1921년부터 1935년까지, 15년 동안 1,712건의 파업이 결행되었다. 임금에 대한 요구뿐만 아니라 인격을 존중하라고, 여성과 청소년의 야간노동을 폐지하고 동일노동에 대해 동일임금을 지급하라고, 최저임금을 정하고, 자본가 부담으로 사회보험제를 실시하라고, 파업의 조직과 실행에 대한 자유를 보장하라며 목소리를 드높였다. 아플 때에는 치료비를 보조받을 권리가 있고, 아이들은 부모의 신분과 무관하게 교육의 기회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아파서 응급실로 찾아갔는데 그 사람이 에이즈 환자거나 이주노동자거나 가난하다는 등의 이유로 응급진료를 거부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부당하다고 느낀다. 그것이 ‘건강권’의 침해라고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픈 사람이라면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요구할 수 있고 사회는 그 요구에 응답해야 한다는 자각이 있다. 시대와 국가를 넘어, 인간의 역사에서 이러한 주장은 언제나 있어왔다. ‘인권’은 그 열망의 흐름을 따라 탄생한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기본적이고 필수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것들에 대한 갈망이 근대시민혁명을 거치며 ‘인권’이라는 개념으로 자리 잡히기 시작했고,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이 국제인권규범의 형태로 정부에 대해 구속력 있는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인권’이 선언되는 것과 인권이 보장되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때로는 인권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이유가 인권을 부정하는 근거로 둔갑하기도 한다.

최근 복지국가 논쟁과 더불어 사회권이라는 말이 점점 더 많이 회자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말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의 경험 속에서, 우리가 만나 온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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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속에서 보아왔고 들어왔던 이야기다. 그래서 사회권이 무엇이냐는 질문보다, 왜 사회권이 자꾸 ‘인권’에서 미끄러지는지를 묻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렇게 건져 올려진 ‘사회권’은 가까스로 ‘사회권도 인권이다’라는 말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권을 보는 다른 시선을 열어줄 것이다. 이 글은 사회권이 포괄하는 영역들을 살피고, 그것이 인권으로 보장된다는 것의 의미를 확인할 것이다. 사회권을 인권이 아닌 것처럼 여기게 만드는 것들은 무엇이며, 인권으로서 보장하기 위해 기억해야 할 ‘사람다움’의 의미를 헤아려볼 것이다. 이를 통해 ‘인권’을 보는 다른 시선이 열리기를 기대한다11).

2.� 사람답게 ‘먹고살’� 권리

인권은 인간답게 살 권리다.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로 구분되어진 권리들은 사람답게 ‘먹고살’ 권리라고 부연할 수 있을 듯하다. 우리는 살면서 ‘먹고살만하다’, ‘먹고살기 어렵다’ 등의 이야기들을 나눈다. 국어사전은 ‘먹고살다’를 생계를 유지한다는 의미로 설명하는데 사람들은 생존의 문턱에 걸려 있는 상황만을 먹고사는 문제로 보지 않는다.

먹고살만하다사람답게 먹고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흔히 ‘먹고살만하다’라는 말을 할 때가 어떤 때인

지를 살펴보자. 보통 일자리는 있어야 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거나, 하면서 늘 즐겁지는 않더라도 가끔은 설레는 일, 임금을 받을 만큼 받는다 싶은 일일 것이다. 먹고살기 위해 마지못해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 먹고살만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럭저럭 하는 일이지만 “힘들어서 오래 못하겠어요.”라든지, “일해서 먹고사는 게 너무 힘드네요.”라는 말이 붙을 때는 다른 권리들이 문제되는 상황이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무리한 일이라 건강에 위협을 느끼게 되는 경우에 먹고살만하다고 하지는 않는다. 일이 힘들지는 않아도 어떤 질환을 앓고 있어 의료비 부담이 너무 큰 경우에도 먹고살만하지는 않다. 이런 경우 한국에서는 건강의 문제가 먹고사는 문제로 바로 이어진다. 주거비 부담 때문에 먹고살기 힘든 경우도 많다. 먹고살만하다고 할 때는 편안하다 느껴지는 집, 웬만하면 계속 살고 싶은 집이 있을 때다. 자신이 소유한 집일 수도 있고, 세 들어 살더라도 어느 정도 주거비를 감당할 수 있거나 갑작스럽게 세를 올려달라고 할 것 같지는 않은 집주인을 만나면 가능하다. 아이들을 키우는 집이라면 보육이나 교육이 중요하다. 분유값이 늘 아슬아슬하거나, 남들 다 간다는 학원에 못 가 아이가 시무룩해 있거나, 대학 등록금 생각하면 아이한테 미안해질 때도 먹고살만하다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는다. 간혹 문화예술에 대한 얘기를 하면 “먹고살기도 힘든데”라는 말이 나오는 것 역시 자신이 누리고 싶은 문화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것이 먹고사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먹고살만한 사람들은 가끔 영화라도 한 편 보고, 책이라도 한 권 사 보게 되는 사람들일 것이다. 굳이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쉴 만한 시간이 있다고 느껴질 때 먹고살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물론이며, 뭔가 좀 부족하더라도 사회보장이 잘 돼서 내가 나락으로 떨어지지는 않을 거라고 마음이 놓일 때야말로 먹고살만한 때다.

먹고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한 사람의 생애를 통틀어 먹고사는 문제와 관련된 내용들이 사회권규약의 내용12)이라고 볼

11) 이 글은 인권연구소 ‘창’의 사회권세미나에서 발제된 자료나 나눈 이야기들에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다. 하나하나 출처를 밝히기 어려운 점에 양해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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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 그런데 규약은 예시일 뿐이다. 사회권규약을 기초하던 당시 중국 정부는 운송수단에 대한 권리를 언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선적으로 필수적’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반대의견이 있어서 이 제안은 거부됐지만 교통수단에 대한 권리가 배제된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초반 한국사회에서 장애인도 버스와 지하철을 탈 수 있어야 한다며 온몸으로 저항했던 역사는 그것이 소중한 권리임을 일깨워주었다. 또한 몇 년 전 대구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난방기본권을 보장하라는 요구가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난방에너지로 도시가스보다 석유를 쓰게 되는데 기름값이 훨씬 비싸기 때문에 겨울을 춥게 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이들은 난방을 위해 사용하는 석유에 붙는 과도한 세금을 없애라는 주장을 했다. 석유보다 저렴한 도시가스에 대한 접근권, 점점 비싸지는 도시가스 요금의 인하 등의 요구도 가능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겨울에 오들오들 떨면서 보일러를 차마 켜지 못할 때, 전기세를 몇 달 째 못 내서 냉장고와 형광등 몇 개를 켜는 것밖에 하지 못할 때, 먹고살만하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면, 그것이 규약에 명시되었는지에 앞서 사회권의 내용으로 검토되어야 한다13). 한국 밖으로 눈을 돌려보면 물의 사유화에 맞서 안전한 물에 대한 권리가 주장되고, 종자에 저작권을 걸어놓고 농민들이 종자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곡물기업들에 맞서 종자에 대한 권리가 주장되기도 했다. 이처럼 권리의 내용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필요와 권리 사이 사회권에 대한 이해는 먹고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먹고살기 위해 필요한 재화나 서비스가 무엇인지 아는 것으로 사회권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먹고살기 위해 필요한 재화나 서비스들을 보장하거나 공급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돈을 주고 살 수도 있고 누군가의 도움으로 거저 얻을 수도 있다. 추위에 떨며 겨울을 나야 하는 사람들에게, 교회나 자선단체가 연탄을 보내주는 것과 동사무소에서 난방비를 보조하는 것, 또는 도시가스의 공공성을 높여 물리적․경제적 접근성을 높이는 것은 전혀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권리’로 보장한다는 것의 의미를 살펴봐야 한다.

3.� 사람답게 ‘먹고살 권리’

먹고살 권리, 갸웃거리게 되는 순간들앞에서 말했듯 우리가 이미 사회권을 알고 있다면, 어떤 순간에 ‘사회권’이라는 말이 차마

입에 붙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지 살펴보자.

♧� “부동산에서 다 연락하고 집을 보러 갔는데 내가 휠체어 탄 걸 보더니 그새 집이 나갔다고 거짓말을 하지 뭐야.”♧� “그냥 지나가나 했더니 전세금을 이천만 원이나 올려달라고 전화가 왔네. 어떡하나?”♧� “저도 (시설에서) 나가서 자립도 하고 공부도 하고 이성친구도 사귀고 보통 사람들처럼 살

12) 사회권규약에서 다루는 권리 항목들은 다음과 같다. 6조 노동의 권리, 7조 공정하고 유리한 노동조건의 권리, 8조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가입할 권리, 9조 사회보장권, 10조 가정에 대한 지원과 보호, 11조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주거권, 식량권), 12조 건강권, 13조 교육권, 14조 무상의무초등교육의 권리, 15조 문화와 과학기술에 대한 권리. 사회권규약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제인권규약들이 먹고사는 문제와 관련된 권리들을 다룬다. 어떤 권리들이 어떻게 언급되었는지, 직접 찾아서 읽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13) 이런 내용들은 사회권규약의 내용에 대한 해석을 담은 유엔사회권위원회 일반논평 등에서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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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싶었습니다. 제가 시설에서 나가 자립생활을 할 수 있도록 주택을 보장해줄 것을 구청에 요청합니다.”

누군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임대를 거부당하면 우리는 분노할 수 있다. 부당한 일이므로 항의할 수도 있다. 그 자리에서 따질 수도 있고, 여러 권리회복 절차를 통해 당당하게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집주인이 집세를 올린다고 하면 내 형편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돈을 어떻게 마련할까 걱정하고 이사를 가야 할까 고민한다. 서러워진다.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부당하다는 느낌이 바로 따라붙지는 않는다. 그래서 내가 알아서 해결해야 할 일이 되고, 괜히 우울해지거나 친구를 불러내 기분이라도 털어내야 할 일이 된다. 아예 집을 달라고 주장한다면? 온갖 말들이 귀에 와 꽂힐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이기보다는 ‘생떼’이거나 ‘이상’일 뿐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이런 요구는 여러 정책들 중의 하나이니 거리에서 투쟁할 문제가 아니라 의회나 정부가 알아서 할 일이라는 점잖은 훈계도 듣게 될 것이다.

위 상황들은 모두 집을 둘러싼 문제다. 우리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 집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모든 사람이 살만한 집에 살 권리가 있다는 내용이 국제인권규범에서도 확인된다. 그런데 어떤 순간들에는 그것도 권리냐는 질문이 나오고 그것도 권리라고 힘주어 말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이것은 사회권 자체의 성질에서 비롯되는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상황에서 개인이 비용을 지불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뿌리 깊은 전제가 작동한다. 그래서 비용을 지불하거나 비용에 응당하는 무언가를 제공했을 때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것은 권리의 침해로 인식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권리 자체가 부정된다. 그러나 사회권은 소비자의 권리가 아니다.

자유권은 대체로 쉽게 권리로 인식된다. 설령 인권의 실현을 위해 특정한 권리가 일시적으로 제한되더라도 그것이 권리의 본질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 분명하다. 그런데 사회권은 권리가 침해되거나 제한되거나 당장 보장되지 못하는 것이 권리의 본질 자체에 대한 의문으로 돌아온다. 아버지가 말을 잘 하는 사람이라서 그 자녀가 표현의 자유를 조금 더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재산이 많은 집에서 태어난 사람이 더 좋은 집을 물려받는 것은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고들 느낀다. 사회권이 자꾸 ‘권리’에서 미끄러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먹고살 권리와 먹고살 의무 사이

“굶주림은 제아무리 흉맹한 동물이라도 순하게 길들이는 법이며, (…) 무릇 빈민들에게 일하고 싶은 맘이 들도록 자극하고 부추길 수 있는 것은 오직 굶주림뿐이다.”

- 타운센드, <구빈법에 대한 논고>, 1786

공리주의자로 알려진 벤담은 “산업을 위해서 육체적 제재가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결핍 상태를 증대시키는 것이야말로 정부의 과제”라고도 말했다. 근대 자본주의 체제는 일하는 사람으로부터 생산수단을 분리시키면서 형성되었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 그렇지 못한 노동자로 계급이 나뉘어진다. 일은 언제나 있어왔지만 이제 일자리는 자본가가 만들어내는 것이 되었다. 또한 먹고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 대부분을 돈을 주고 시장에서 구매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노동은 권리이기보다 의무가 된다. 일을 하는 것도 의무, 일을 할 수 있도록 건강을 관리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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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도 의무, 학교가 가르치는 대로 배우는 것도 의무다. 빈곤은 개인의 책임일 뿐만 아니라 이런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사회에 부담을 안기는 범죄인 양 다루어지기도 한다.

멀쩡한 몸 두고 얻어먹을 생각이나 하다니. 사람들 다 먹여 살리면 나라는 누가 먹여 살리나. 일자리가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지. 기업이 살아야 일자리가 늘어나고 노동자도 살게 되는 거야. 적당히 경쟁하면서 각자 열심히 일해야 경제도 살고 다 같이 잘살게 되는 거지. 좋은 말이긴 한데 당장 안 되는 걸 어쩌겠어. ……. 이런 말들은 모두 자본주의를 지탱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부터 흘러나온 말들이다. 말로만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라 사회의 제도와 정책과 관습들에 뿌리깊이 자리 잡힌 것이다. 사회권은 이런 구조에 짓눌려 규약의 글자들 밖으로 자유롭게 흘러넘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사회권을 부정하려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만이 아니다. 먹고사는 문제는 ‘가족’이 해결해야 할 것이라며 여성에게 헌신적인 노동과 모성을 강요하는 가부장제를 비롯해 수많은 차별의 굴레들이 사회권을 권리로부터 밀어낸다. 다만, 사회권은 자본주의 체제와 더욱 자주, 그리고 가깝게 부딪치게 되는 듯하다. 우리의 권리이던 것들이 저 밑바닥에서 의무로 탈바꿈될 때, 인권을 일차적으로 보장해야 할 의무 주체가 국가라는 점을 환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가의 의무세계인권선언 이후 규약이 분리되면서 자유권은 국가의 소극적 의무, 사회권은 국가의 적극

적 의무에 대응한다는 인식이 일반화되었다. 이런 이분법의 한계가 꾸준히 지적되면서 국가의 의무를 설명하는 다른 틀이 마련되었다14). 국가는 스스로 인권을 존중해야 하고(존중할 의무), 제3자의 인권침해로부터 권리주체를 보호해야 하고(보호할 의무), 인권의 증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실현할 의무) 것이다. 국가가 소유한 시설이 공기나 물을 오염시켜 개인의 건강을 해치거나, 기업에 의한 노동착취를 방치하거나, 홈리스에게 집을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는 것은 국가의 의무를 위반한 인권침해다. 권리의 보장 수준이 어떤지, 그것이 충족되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의무는 존재한다. 지금 당장 실현해낼 수 없는 것이 있더라도, 권리가 완전히 실현될 수 있도록 그치지 않고 나아가야 할 의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인권이다.

국가가 의무를 이행하는 과정의 불확실성과 자의성을 줄이기 위해 샌드라 프레드만은 그녀의 책 <인권의 대전환>에서 네 가지 구성요건을 제시한다. 첫째는 유효성으로, 국가의 적극적 의무는 적절해야 하고 권리를 달성하겠다는 실질적인 목표를 포함해야 한다. 둘째는 참여다. 관련된 과정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그 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책임성이다. 국가와 정부는 적절한 수준의 권리를 결정한 근거를 설명하고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는 평등성으로, 실질적 평등을 달성할 수 있도록 약자와 취약계층에 더 많은 자원을 제공해야 한다.

사실 국가가 사회권 보장의 의무를 추상적인 수준에서 부정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무언가 요구하면, 예산이 부족하다거나, 재산권이 침해된다거나, 할 만큼 했다거나 하는 핑계를 대며 실질적인 의무를 회피하는 것이 문제다. 그 중 대표적인 핑계 두 가지만 짚고 넘어가보자.

재산권을 침해할 수는 없어?

첫째, 재산은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훔치게 만들었고, 둘째, 훔친 사람을 처형하는 법을 만들었다.

14) 인권운동사랑방 사회권규약해설서팀이 엮은 <사회권규약 해설서1>(1998, 사람생각)를 구해서 읽어보면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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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정의의 법, 1648

재산권은 근대 인권 담론이 형성되던 시기부터 격돌하는 주제였다. 개인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박탈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근대 시민혁명의 요구는 자본주의의 성립과 맞물리면서 사적 소유의 절대적 권리로 격상하고 근대 국민국가는 재산을 보호하는 것을 본연의 역할로 삼게 되었다. 세계인권선언 역시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 그리고 단독으로 재산을 소유할 권리가 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재산을 함부로 빼앗기지 않는다.”라는 조항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국제인권규범이 재산권을 인권으로 규정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의 절대적 권리가 아니라 타인의 권리와 공익을 침해하지 않도록 국가가 보호하거나 제한하는 권리라는 점이다. 사립학교는 재단의 재산이고 주택은 집주인의 재산이고 기업은 사장의 재산이라는 법적 사실이 불가침의 권리를 보증하지 않는다.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어떤 ‘재산’을 보호해야 할 필요15)가 생기거나 어떤 ‘재산’이 인권을 침해하는 이유가 된다면 오히려 실정법을 바꿔야 한다. 세입자의 권리를 보장하면 집주인의 재산권이 침해된다거나, 노동자 권리 보장하다가 기업이 망한다는 말들은, 오히려 거꾸로 바라봐야 할 말들이다. 세입자나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지 못하는 수준으로 집주인이나 기업의 재산권이 보호되고 있다면 바로 그 재산을 보호하는 실정법에 문제가 있다. 주택의 거래나 임대차, 기업의 설립과 경영 등을 규율하는 실정법이 달라져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1987년 개정된 대한민국 헌법 역시 재산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하며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게 해야 한다는 조항을 담고 있다. 재산권이 다른 모든 권리들보다 앞선다는 주장이야말로 ‘생떼’가 아닐까.

한편, 재산권과 사회권을 대립시키는 주장은 인권의 문제를 ‘너희들끼리 알아서 풀 문제’로 떠넘기는 효과도 낳는다. 강제퇴거의 문제는 집주인과 세입자의 문제이며 정리해고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문제라는 식이다. 고문이나 전쟁을 반대한다는 사람에게 3자개입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어색하다. 사회권이 유독 이런 난관에 자주 부딪친다. 가진 자들의 재산에 절대적 권리의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정치적 행위다. 국가는 인권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지니며 재산권은 그 의무를 따라 재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성장이냐 복지냐 물으신다면

“왜 부자들을 돕는 것은 ‘투자’라고 말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은 ‘비용’이라 말하는가.”- 룰라(전 브라질 대통령)

“카라카스 빈민촌의 실직 노동자는 부러워할 만한 GDP 용어로 정의된 생활수준을 자신이 누린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 그런대로 자급자족을 하면서 아주 마음 편하게 살아가는 사모아의 어부도 GNP로 따졌을 때 자신이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 중에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할 말을 잊는다.”

- 장 셰스노(프랑스의 역사가)재산권을 신봉하는 이유 중에는 개개인의 재산이 보호되어야 모두가 돈을 벌려고 노력할

것이며 그래야 경제가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복지는 성장에 대립하거나 성장의 발목을 잡는 것으로 여겨진다. 룰라의 말은 ‘성장 대 복지’라는 대립 구도가 권력을 가진 부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뿐임을 보여준다. 가깝게는 한국의 4대강 사업이 경제 성장을 15) 평택 미군기지나 강정 해군기지, 4대강 사업 등 국책사업들이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 ‘재산’이 얼마나 선택

적으로 보호되거나 박탈되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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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한 ‘투자’가 되고 기초생활보장예산을 늘리는 것은 ‘비용’의 문제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자원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쓸 것인가의 문제다. 사회권의 실현을 위해 자원이 요구되다 보니 경제성장의 구호와 부딪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경제성장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경제와 사회권을 대립시킬 때의 경제란 국민총생산, 경제성장률 등의 숫자일 뿐 사람들의 삶과 맞닿아있지 않다. 누가 잘 살게 되는 것인지, 모두가 지속가능한 삶을 누릴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경제가 성장해야 복지도 가능하다는 말은 복지를 끊임없이 유예시키는 말일 뿐이다.

그런데 복지 역시 투자라는 주장도 있다. 김대중 정권은 ‘생산적 복지’를 내걸었는데 이것 역시 사회투자론이다. 즉 가난한 사람들에게 투자해야 더 잘 성장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성장을 위한 ‘인적 자원’으로 위치 지워진다. 복지가 잘 되어야 경제가 성장한다는 말 역시 경제로부터 사람을 지워버리고 평등보다는 효율을 추구하게 된다. 인권에 기초를 둔 접근이라고 볼 수 없다. 복지에도 다양한 흐름이 있다. 성장이냐 복지냐 묻는 이분법을 넘어서더라도 다시 사회권을 보장한다는 것의 의미를 물어야 한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권리’로 보장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다움’이다.

4.� ‘사람답게 먹고살 권리’

1) 사람다움

“이제 노숙인들에게 자유를 주겠다는 겁니다!”

2012년 한국철도공사는 서울역에서 노숙인을 강제퇴거시키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그즈음 열린 한 토론회에 서울시 노숙인 복지 담당 공무원이 나왔다. 그의 발언의 요지는, 한국철도공사는 (공)기업이라 서울시가 어쩔 도리가 없고 다만 노숙인들이 곤란을 겪지 않도록 복지제도를 정비하는 등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하는 와중에 그는 서울시가 새롭게 시도하는 ‘자유카페’를 소개했다. 기존의 이용시설들은 출입이나 이용에 여러 가지 규칙들이 있어 노숙인들이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평가를 감안한 개선책이었다. 이 정책의 의미를 “이제 노숙인들에게 자유를 주겠다는 겁니다!”라고 설명한 것이다. 자유는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누리는 것이다. 그러나 복지를 제공하면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마치 서울시가 자유를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관계라면 조금 나아진 복지‘제도’일지는 모르나 인권을 보장하는 제도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이 시도는 결국 자유카페를 운영할 공간을 구하지 못해 무산되었다. 인근 주민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노숙인들이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들락날락하는 것이 싫다는 마음들, 그리고 집값 하락에 대한 염려 같은 것들에 밀린 것이다. 자유카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궁금해 하며 기다리던 노숙인들에게 이 소식은 어떻게 들렸을까. 사회로부터 거부당하고 있다는,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물론 아주 충격적인 소식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그런 인식과 반응들에 익숙해졌을 테니까.

“그런데 나는, 뭐랄까, 입고 있던 옷이 하나씩 벗겨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수치. 그런 거. 자식들한테 청소일 한다는 얘기는 했지만, 어떤 조건에서 일한다는 얘기는 안 해봤어요. 그걸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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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면 말렸겠죠. 그런데 이런 게 영상으로 만들어져서 자식들이 내가 일하는 환경을 알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부끄러웠어요. ... ... 그런데 또, 내가 이런 얘기를 할 수 있고 현실을 알리면서 싸우는 게 자랑스럽기도 해요. 하하.”

청소노동자들은 자신의 일이 얼마나 전문적인 일이며 중요한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나 사회는 청소일을 하찮게 여긴다. 그래서 직접 고용하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저임금을 강요한다. 학력이 높지 않은 고령의 여성들이 청소일 외에 일을 구하기 어려운 현실은 문제 삼지 않고, 그럴만한 사람들이 청소일을 한다는 뒤집힌 인식을 강요한다. 그래서 청소 일을 한다는 것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행동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청소일을 부끄럽게 만드는 세상을 부끄럽게 할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인권은 오직 대중들이 타인들을 근본적으로 동등하게 생각하도록 배울 때에만 자랄 수 있다.”- 린 헌트, <인권의 발명>

우리는 모두 근본적으로 동등한 인간이다. 사회권을 보장해야 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어떤 개인이 살아가면서 우연히 부딪치게 되는 상황이나 조건들, 어떤 집단이 역사적이고 구조적으로 처하게 되는 상황이나 조건들이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나 조건들을 바꿈으로써 모두가 지닌 저마다의 역량을 통해 삶을 가꿔나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며 만들어진 제도들이 오히려 빈곤에 대한 낙인을 심화시키고 가난한 사람들을 모욕하기도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역량이 없기 때문에 도와줘야 할 사람이 되고, 재화나 서비스를 받는 사람의 위치에 고정시켜 버린다. 주는 자가 권력을 쥐게 된다. 먹고사는 문제를 인권으로 보장하는 것은 사람들을 시장의 소비자에서 정부의 고객으로 자리바꿈하는 것과 달라야 한다. 사회권 보장을 위한 국가의 의무는 조금 더 나은 주거정책, 조금 더 높은 최저임금 등의 시행만으로 완수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근본적으로 동등한 사람이라는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

‘사람다움’이 없는 권리는 인권이 될 수 없다. 아래에서는 인권과 사회복지를 말할 때 흔히 쟁점이 되는 세 가지 열쇠말을 통해 ‘사람다움’의 의미를 헤아려보려고 한다.

2-1) 낙인과 보편성

몇 년 전 서울시 무상급식 전면 도입이 정치적 쟁점이 된 적이 있다.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은 무상급식은 부자급식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끝까지 반대를 고집했다가 결국 시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때 무상급식의 전면 도입을 주장했던 이들이 내걸었던 대표적인 구호는 아이들이 눈칫밥을 먹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부모의 소득이나 다른 경제적, 사회적 조건들 때문에 급식비를 낼 수 없는 아이들이,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아이들이 수치심을 강요당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선별적인 무상급식이 아니라 보편적인 무상급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회복지제도에서 ‘낙인’이 강화되는 경우는 매우 흔하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의료급여 1종 수급권자들에게 본인부담금을 내도록 제도를 개악할 때 퍼뜨린 이야기는 “본인부담금이 없으니 가난한 사람들이 병원으로 나들이 다닌다”는 것이었다. 소위 ‘도덕적 해이’, ‘무임승차’ 등의 비난이다. 2009년에는 기초생활수급권자의 근로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보건복지부의 평가기준표가 문제된 적 있다. ‘외모가 혐오감을 주거나 심한 냄새가 난다’, ‘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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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이다’ 등의 문제적 표현은 항의에 밀려 수정되었으나 그 시선은 그대로 남아있다. 수급권자가 일을 하기 어려워 자활사업에 참여하는 조건 없이 생계비 지원을 받으려면, 자기관리를 하지 못하고 집중력이 낮으며 근로의욕이 없고 자기통제도 하지 못하고, 대처능력이나 표현능력이 낮다는 점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제도인 것이다. 아비샤이 마갈릿이 <품위있는 사회>에서 지적했던 제도적 모욕이 바로 이런 것이다.

무상급식을 통해 이루고자 한 것은 누구나 “수치심 없이 공공장소에 나타날 수 있는, 또는 공동체의 생활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무상급식은 잔여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잔여적, 선별적 복지는 행정비용이 많이 들고 수혜의 기준선을 설정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근거들도 제시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는 자와 받는 자의 분리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는 누구나 서로 주고받는 관계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 주기만 하는 자와 받기만 하는 자는 없다. ‘무임승차’나 ‘도덕적 해이’와 같은 현상은 가난한 사람들에게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덜 내고 더 받고 싶은 마음, 덜 부담하고 더 누리고 싶은 마음은 사실 누구에게나 있다. 또한 사람들이 언제나 이런 마음으로만 사람을 대하지 않는 것도 분명하다. 가난한 사람들이 마치 받기만 하는 사람인 것처럼 몰아가는 것은, 빈곤에 대한 혐오에서도 비롯되지만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받기 위해서는 ‘기여’를 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노숙인들에게는 거리급식이 ‘눈칫밥’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칫밥’을 걱정하는 사람도 노숙인들이 거리에서 줄을 서서 급식을 받아야 하는 조건에 대해서는 별 문제를 느끼지 않을 수 있다. 노숙인들에게는 ‘기여’가 더 자연스럽게 요구되기 때문이다. 기여를 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 무력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는 개인에게 닥친 불운이나 순간의 실수 또는 잘못을 복지로 감싸 안는다. 복지를 축소하려고 할 때는 그/녀들의 ‘게으름’이 공격당하고 심지어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로 몰아간다. 이런 구도는 설령 혐오의 시선을 거두더라도 시혜의 시선에 머물게 된다. 인간의 존엄은 특정한 기여에 대한 대가가 아니다. 사람이라면 그/녀가 지금 어떤 조건에 처해 있든 존중받을 자격이 있으며 그/녀가 어떤 조건으로 인해 사회에 참여하는 것이 제한당한다면 그 조건을 함께 바꿔야 한다는 인식에서 인권은 출발한다.

선별적 형식 자체가 인권의 보편성을 해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무상급식 논쟁이 벌어질 때 기초생활보장수급 가정의 학생들은 이미 동사무소를 통해 자동으로 급식비를 면제 받고 있었다. 그래서 ‘눈칫밥’은 이들에게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고 한다. 선별적인 제도가 반드시 낙인을 동반하지는 않는 것이다. 보편성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오히려 부적절하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무상급식의 전면화를 그토록 반대하면서, 주택정책에서는 시프트라는 장기전세임대주택을 공급했다. 가난한 사람들만 모여 살던 임대아파트의 이미지를 바꾸고 주거불안을 겪는 중산층도 임대아파트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대상 집단이 늘어나는 것이 바로 보편성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인권의 보편성은 역사적, 구조적으로 인권 침해에 더욱 취약한 집단과 개인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에 우선순위를 두는 데서 만들어지기도 한다. 열악한 주거환경과 주거불안정에 노출되기 쉬운 집단이 정책의 우선순위에 놓이는 것 자체가 반인권적인 것은 아니다. 소득이 최저생계비 이하인 사람들이 소득 지원을 받는다거나 결혼이주여성들이 보육 지원을 받기에 조금 더 유리하다거나 하는 제도가 그 자체로 모욕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해당 사회복지제도가 인권의 보편성에 대한 지향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가난한 집의 아이들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급식을 지원받는 것이 아니다. 모든 아이들은 부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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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지와 무관하게 사회로부터 기본적인 영양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기 때문에 급식을 지원받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현재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나 의사가 있는지와 무관하게 생계비 부족으로 인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그것을 지원하여 모든 사람이 적절한 생활수준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근로능력을 평가할 필요는 없다.

어떤 사람의 자격을 따져 묻는 것과 그/녀가 처한 조건과 상황을 헤아리는 것은 다르다. 인권의 보편성은 ‘어떤 사람들’을 불러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동등하다는 이해로부터 ‘어떤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 그 의미가 있다. 그래서 인권이라는 가치에 담긴 비차별의 원칙과 취약계층 우선의 원칙은 서로 대립하지 않고 보편성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2-2) 생존과 존엄의 문턱

사회복지제도는 어떤 형태로든 ‘기준’을 설정하게 된다. 이런 기준들에는 늘 ‘사람다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주는 자와 받는 자의 분리는, 줄 수 있는 것을 받는 것이 사회복지인 것처럼 여기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받을 만한 것을 받아야 한다.

최저생계비최저생계비는 그야말로 생계비의 최저 수준이다. 2013년 최저생계비는 대략 1인 가구 57만

원, 4인 가구 155만 원이다. 이만큼의 소득이 없는 사람들은 기초생활수급권자로서(물론 그 외 까다로운 기준들을 충족시킬 때) 현금급여를 받게 되는데(의료비, 교육비, TV수신료 등 현물로 지급되거나 다른 법률로 지원되는 것을 차감한 금액) 1인 가구 47만 원, 4인 가구 127만 원이 최대상한액이다. 최저생계비는 지급되는 현금급여의 기준이 되기도 하지만 빈곤선으로 기능하며 각종 복지제도로 진입하는 관문이 되기도 한다. 즉, 최저생계비를 넘는 수준의 소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아서 먹고살만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빈곤을 생계비 수준으로만 추정하는 것은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수중에 얼마간의 돈이 있는지는 살면서 발생하는 여러 상황들에 대한 대처 능력을 결정짓는다. 이런 점에서 최저생계비의 수준이 얼마냐 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어버린다. 2004년 한 중학생이 빈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에게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녀의 일기에는 ‘학비도 마련하지 못하는 주제에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는 게 우습다’는 내용이 남아 있었다. 2013년 최저생계비에서 한 사람당 한 끼 식비는 1620원으로 정해져있다. <노동의 배신>에서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한 자선단체의 사무실에서 식품 상자를 받고 나서 “중산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통상 빈민들의 식습관을 비난하지만 이 자선 단체는 ‘영양가 없는 칼로리’에 의존하기를 권장하는 것 같았다.”라고 썼다. 한국의 최저생계비 역시 최소한의 생존만을 강요하고 있다.

최저임금최저임금은 노사 양측과 공익위원으로 구성된 최저임금위원회에서 결정된다. 2013년 최저

임금은 시급 4,860원으로, 한 달 백만 원이 겨우 넘는 액수다. 민주노총이 요구한 5,600원에 훨씬 못 미치는 금액이다. 한 달 백만 원으로 먹고살만할 리는 물론 없다. 그런데 먹고살만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미국에서 가난한 흑인들이 모여 사는 아파트단지 사람들을 만나며 <괴짜사회학>이라는 책을 쓴 수디르 벤카테시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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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에서 사는 친구와 ‘빈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사회학자들은 가난한 흑인이 직업을 갖는 것을 높이 평가하지 않기 때문에 일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다는 얘기를 건네자 흑인 친구는 이렇게 묻는다. “그럼, 넌 내가 직업에 자부심을 갖길 바라는 거야? 최저 임금만 받으면서? 너야말로 직업에 대해 별로 생각 안 해본 것 같은데.”

서울지역의 대학들 중에는 청소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이 설립된 대학들이 있다. 청소노동자들이 여러 대학들과 집단교섭을 할 때 사용자 측인 대학에서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최저임금보다 훨씬 높은 시급을 요구하는 건 과하지 않습니까? 심지어 민주노총이 주장한 최저임금보다도 높은 액수를.” 최저임금은 노동자가 받아야 할 임금의 최저선이지만 어떤 노동자들에게는 최고선이 되고 있다. 어떤 노동자가, ‘받을만한 돈’이 얼마인지를 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청소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번듯한 직장이 없는 사람이라면, 딱히 가진 기술이나 실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전체 노동자의 25%에 이르는 저임금 노동자들은, 이 정도만 받아도 되는 사람들이라는 평가의 기준이 되고 있다.

우리가 왜 그것만 받아야 하는데?!한국의 기준선들은 마치 기준을 위한 기준인 듯하다. 최저주거기준은 통계청에서 그 기준에

미달하는 가구가 몇 가구나 되는지 계산하는 용도 외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최저생계비는 기초생활보장수급권 등 각종 사회보장제도의 이용 자격을 평가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최저임금은 경영계와 노동계의 힘 겨루기에 정부가 손 놓고 있다가 결정되면 고시만 맡아서 하는 꼴이다. 최저선에 미치지 못하는 삶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기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인권 그 자체가 객관적 지표로 환원될 수는 없다. 그러나 기준선은 인권의 실현을 평가하는 지표이자,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를 설계하기 위한 기준, 국가의 구체적 의무를 강제하기 위한 기준 등의 의미를 가진다. 지금의 최저기준은 마치 극기 훈련처럼 사람이 견딜 수 있는 최저선을 실험하고 있다. 이것이 ‘최저’의 함정이다. 인권적으로 구성된 최저선은 생존의 문턱이 아니라 존엄의 문턱이어야 한다. 즉, 이 ‘최저’ 자체에 ‘인간다운 삶’에 대한 가치판단이 포함되어야 한다. 최소한의 생활이 아니라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이 가능한 기준들이라야 한다. 그래서 유엔사회권위원회나 국제노동기구 등의 인권기구들은 사회보장의 최저선이 ‘존엄’을 보장할 것을 강조한다. ‘적절한 수준’은 가용성, 경제적․물리적․정보적 접근성, 지속가능성, 차별금지, 문화적 수용성, 법적 보장을 충족하도록16) 원칙을 제시하여 존엄을 보장하기에 충분하고 타당한 수준이 될 것을 요구한다.

몇 년 전 최저임금에 대한 집단진정을 받을 때, “임금이 어느 정도 되면 적당할 것 같아요?”라는 질문을 건넨 적이 있다. 모두들 막막해하셨고, 머쓱한 침묵을 넘기느라 질문을 바꿨다. “한 십만 원쯤 오르면 뭐 하실 것 같아요?” 친구들과 찜질방에 가고 싶다고, 냉장고를 바꾸고 싶다고, 이런저런 얘기가 나왔다. 최저임금이든 최저생계비든 사람들은 생존의 결의와 기술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낸다. 그래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그걸로 한 달을 어떻게 살란 말이냐’가 아니라 ‘내가 왜 그것만 받아야 하는가’이다. 받아 마땅한 것, 받을만한 것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 최저기준이 되어야 한다. 기준선은 불평등에 맞서기 위한 전략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16) 의약품에 대한 권리를 생각해보자. 의약품이 필요한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의약품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리고 돈이 없거나 거리가 멀거나 정보가 부족해서 의약품에 접근하지 못하는 상황은 없어야 한다. 이러한 권리는 제한된 기간에만 보장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여성이거나 아동이라는 이유로 이용을 제한당해서도 안 되며 오히려 의약품에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더 집중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문화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의약품을 구할 수 있어야 이러한 조건들은 법을 통해서도 안정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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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수 있는 만큼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누려야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만큼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 얼마를 달라고 사정하거나, 얼마를 줄 수 있냐고 물어보도록 만드는 제도는 반인권적이다. 누군가의 삶이 자선에 내맡겨져 있다는 것은 인권적이지 못하다는 증거일 뿐이다. 자원이 무한한 게 아니므로 얼마를 줄 수 있는지 물어볼 수는 있지만 이때 충분하게 줄 수 없는 사정을 설명해야 하는 것은 권리주체가 아니라 의무주체인 국가다. 이런 기준들은 한 사회가 인간다운 삶의 기준을 무엇으로 보는가에 대한 징표다. 누군가 최저 기준 이하로 밀려날 때 사회가 행동하기 위해 기준을 정하는 것이다. 최저기준이 인간다움에 대한 감수성을 확인하는 기준이므로 최저 기준은 늘 우리 자신을 향한 질문이다. 누군가를 돕거나 구휼하기 위한 기준이 아니어야 한다.

지속가능한 삶이때 기준선은 우리 모두의 지속가능한 삶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어떤 도시에서는 송전탑

문제로 주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데 전기에너지를 더 값싸게, 더 많이 공급하는 것이 인권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반자본 발전사전>의 공동저자인 세르주 라투슈는 ‘생활수준’에 집착하는 현상은 최근의 것이라고 지적한다. 서양의, 근대의, 발전의 지배적 패러다임을 드러내는 말일 뿐이며 삶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생존에 대한 염려에 가두는 말이라는 것이다. 부유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 인권의 근거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높은 수준일수록 좋은 수준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인권이 모든 사람의 권리라면 다음 세대에 태어날 사람들도 누릴 수 있도록 하려는 노력은 필수적이다. 기준선은 어떤 수준으로 사람들의 삶을 끼워 맞추기 위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인간 존재를 구현하는 방식의 환원 불가능한 다양성”을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현될 수 있는 토대를 평등하게 누리자는 것이 인권이다. ‘어떤 사람’의 삶을 기준선 위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모든 사람’의 삶이 놓인 토대를 헤아리기 위한 선이 ‘사람다움’에서 출발하는 최저선의 의미다.

2-3) 목소리와 연대

주는 대로 받아라?

영양 플러스라는 교육에 참가하면 집에 애들 먹이기 좋은 먹거리들을 보내준다. 근데 교육 시간에 지각하면 벌점이 있어서 벌점이 쌓이면 우유가 더 안 오게 된다. 가난한 엄마들이 지각했다고 혼나는 장면을 그려보는데, 학생들이랑 처지가 비슷했다. 나이깨나 먹은 사람들이 ‘애처럼’ 취급당한다는 것이 뭘 뜻하는지를 생각했다. 엄마한테 그냥 그거 가지 말라고 했다.

- 엠건, ‘반(反) 신파를 위하여’, 인권오름“쉼터는 답이 없어요. (…) 한방에 20명씩 지내야 하는 그 안에서는 자유도 없고 사실 잠도 잘 못 자. 그러니까 한번 들어갔던 사람 중엔 다시는 안 들어가려는 사람들도 많아. 그런데도 이렇게 노숙인을 쉼터에 넣으려고만 하는 건 겨울에는 특히 동사무소나 지구대 같은 데에서 자기 관할구역에서 얼어죽지 않게만 하려고 그런 거예요.”

- “거리에 계신 분들을 가장 잘 아는 우리”, 인권오름

사회복지서비스가 제공될 때에는 그것을 받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들이 있다. 겨울철마다 시설을 찾아가 라면박스를 쌓아놓고 웃음을 강요하는 자선은 차치하더라도, 쉼터에 입소하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규칙에 따라야 한다거나 무언가 받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행위를 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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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한다거나 하는 식의 의무들이 요구된다. 행여 사회복지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무언가에 항의하거나 요구하려면 비아냥을 감수해야 한다. 고마운 줄 모르고 더 달라고 한다거나 못 배운 사람들이 목소리만 크다는 식의 말들이 사람들의 등에 꽂힌다. 이런 말들은 모두 주는 자의 관점에서 나오는 말들이다.

먹고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에만 신경을 쓰면, 그것들이 제공되면 끝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필요’를 판단하는 것은 전문가들의 몫이 되고, 정작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그저 주는 대로 받는 위치를 강요당하게 된다. 권리주체들의 목소리는 무시되거나, 좋은 경우 못 이기는 척 들어주는 것에 그친다. 권리주체가 제공받는 서비스에 대해 불만과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내가 기여한 것의 대가가 아니다.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한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런데 민간의료보험은 정작 큰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할 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보장액 지급을 거부한다. 광고와 전혀 다른 보험회사의 반응을 확인한 사람들은 분노하고 그런 항의는 정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국민건강보험의 급여항목이 충분하지 못해서 충분한 의료서비스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본인부담금을 줄여달라고 하는 것은 권리로 충분히 인식되지 않는다.

2011년 한 중증장애인이 시설에서 나와 자립생활을 하고 싶다며 사회복지서비스 변경을 신청한 소송에서 승소했다. 2003년 사회복지사업법 전면 개정에 의해 도입된 ‘사회복지서비스 신청권 제도’를 살려낸 소송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 판결이었다. 정부와 지자체는 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인들에게 기초생활보장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녀가 시설에서 생활하기를 원하는지, 지역사회에서 살기를 원하는지 묻지 않는다. 이 소송은 사법적 경로를 통해 권리주체의 목소리를 드러냈다. 물론 사회복지서비스에 대한 선택권을 강조하는 서구 복지국가들의 흐름은 주의해서 살펴야 한다. 선택권을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서비스 수준을 후퇴시키거나 사회복지영역을 시장에 개방하는 계기로 삼기도 하기 때문이다. 권리주체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서비스의 질이나 양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사회복지 제도 자체를 설계하고 실행하고 평가하는 모든 과정에서 참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민관협치, 거버넌스 등의 유행을 따라 ‘참여’도 제도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자선의 방법에 의하지 않고 질병, 불충분한 임금, 실업 등으로 말미암아 대다수 선의의 노동자들을 빠져나올 수 없는 밑바닥에 가두는 것과 같은 부당한 비참을 없애야 하는데도 그를 위한 대책이 마련되고 있지 않다. 우리는 피부조자가 아닌 평등한 자가 되기를 원하며, 시혜를 배척하고 정의를 바라는 것이다.”

- 1864년 프랑스 노동자 60인 선언

설문조사로 만족도를 평가하고 무슨 무슨 위원회를 만들어 한 두 명을 앉혀놓는 것으로 참여가 완성되지 않는다. 참여는 평등한 자로서 사회에 대한 권리를 가질 때 가능하다. 그래서 참여의 보장은, 단결과 결사, 단체행동의 보장이기도 하다. 사실 거리에서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권을 주장해왔다. 철거민들은 법이 정한 세입자대책이 한계가 있다고, 살던 만큼 살 수 있는 집이나 가게를 보장하라고 외쳐왔다. 백혈병환자들은 치료를 위해 필요한 약을 제약회사가 터무니없이 비싸게 받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건강보험 급여를 요구하고 강제실시를 주장했다. 그/녀들이 목소리를 낼 때 그것은 단순히 집이나 약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람다움’에 대한 것이다. 한 동네에서 같이 살다가 어느 순간 “살면서 집 한 채 장만 못한 주제에 어디 와서 악다구니냐”는 말을 들어야 하고, “제약회사가 약을 개발한 것에 고마워할 줄 모르고 거저 내놓으라고 하냐”는 말을 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스스로의 존엄을 세우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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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이었다. 그/녀가 지키고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들을 때 진짜 목소리를 듣는 것이고 그것이 연대의 시작이다.

주고받는 사람

내가 가진 불만들이 장애인 인권의 측면에서 문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시도 때도 없이 불만이 튀어나왔다. (…) 일을 그만둔 이제 와서야 그 불만들을 거리 두고 볼 수 있다. (…)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해야만 하는 노동자로서 느끼는 불만들. 게다가 ‘다른 사람의 일상을 챙겨주는 일’이 익숙하지 못한 나는 거기서 큰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 이용자의 삶에 대한 불만까지 생겨 버린 것 같다. (…) 그건 그 불만들을 즉각적으로 풀 수 있는 사회구조적인 통로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 오리, ‘나의 일상에서 인권적으로 가장 구린 지점’, 인권오름

연대의 의미와 중요성을 안다고 하더라도 사회복지 현장에서 이용자와 공급자로 직접 마주할 때 서로의 자리를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위의 글을 쓴 사람 역시 활동보조를 하면서 어느새 “장애인을 돌보고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버린 위치에서 그 전까지 가졌던 연대에 대한 고민이 흔들리는 경험을 이야기한다. 무상급식이 정치적 쟁점이 되었을 때 학교급식에서 조리를 맡고 있는 노동자들의 노동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가 되지 않았다. 아이들을 위해 도시락을 싸야만 하는 ‘엄마’들의 노동에 대한 이야기도 많지 않았다. 먹고사는 문제는 어떤 경우에도 개인이나 특정한 집단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의 서로 주고받는 관계가 어떻게 조직되느냐의 문제다.

장애인이 끼니 준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활동보조인이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에게 요리를 도와줄 사람만 있다면 그/녀가 할 수 있게 될 것들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활동보조서비스가 필요한 것이다. 활동보조인은 장애인을 대신 살아주는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의 노동자로서 장애인을 만나는 것이다. 활동보조 서비스의 이용자가 기본적인 영양과 건강, 적절한 주거환경과 일, 배움, 사회적 관계 맺기 등을 응당 누릴 수 있도록 연대하는 사람이다. 아이들이 방과 후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도록 이것저것 해주는 선생님이기보단, 아이들이 홀로 내버려지지 않을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함께 연대하는 선생님. 그래서 직접 그 시간들 동안 아이들을 돌보거나, 더욱 나은 제도를 요구하며 직접행동을 하거나, 그런 정책을 설계해서 제안하는 등등의 일들이 모두 연대가 된다. 이런 관계와 위치성을 확인할 때, 서비스 이용자가 무언가 제공받는 대가로 ‘지켜줘야 할 것’은 사라진다. 오히려 내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으로서 ‘지켜주기를 바라는 것’에 대해 평등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부딪치고 불만도 쌓이기 쉬운 이용자와 공급자의 관계를 서로 연대하는 관계로 인식할 때, 특수한 권리가 아니라 보편적 인권의 실현을 위한 모색도 가능해질 것이다.

3) 사람다움을 향해

사회권은 단순히 결핍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자신의 역량을 통해 누구나 누림직한 사회적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진 사람은 휴식을 선택할 수 있지만, 오랜 시간 실업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은 휴식을 선택하기 어렵다. 야마티아 센은 인간의 삶이 하기(donings)와 되기(beings)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것을 기능(functionings)이라고 정의한다. 이 기능은 영양 섭취나 질병이 없는 상태뿐만 아니라 인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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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성을 보존하고 공동체 생활에 참여하는 것들에까지 걸쳐 있다. 이런 기능들의 조합이 인간의 ‘역량’이다.

<민주적 공공성>의 저자 사이토 준이치는 이걸 두고 ‘재화와 사람의 관계성’에 대한 인식이라고 본다.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과 될 수 있는 것의 범위, 즉 어떤 사람에게 열려 있는 ‘삶의 폭’에서 실제로 무엇을 이룰 수 있는가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욕구는 재화의 필요 자체가 아니라 행위와 존재에 대한 필요로 재정의해야 한다는 것. 마사 너스바움은 센의 역량 이론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발전시켰다. 생명, 건강, 신체적 통합성, 감각과 상상력과 사고의 계발, 실천적 추론 능력, 정서적 능력, 우정과 존중, 놀면서 여가를 즐길 능력, 다른 생명체나 자연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 정치적이거나 물질적인 환경에 대한 통제가 인간의 기본적 역량이며 이것은 인간의 내재적 존엄성으로부터 나온다. 이들은 빈곤을 인간의 역량이 박탈되는 것으로 본다. 국제인권규범이 빈곤을 인권을 누리기 위해 필수적인 자원, 능력, 선택, 안전 및 권력을 지속적이거나 만성적으로 박탈당한 인간 상황으로 정의하는 것과 비슷하다.

일반적으로 사회복지는 사회권 실현을 위한 중요한 제도다. 그러나 사회복지의 양을 늘리고 질을 높이는 것만으로 사회권이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권의 문제를 사회복지의 문제로 등치시키는 것은 우리의 시야를 좁혀버린다. 무엇이 우리들의 역량을 가로막고 존엄을 훼손하고 있는지 질문할 때 사회권의 실현이 가능해진다. 노숙인과 월세가 밀린 세입자 중 누가 더 위태로운가를 따지는 것은 우문일 뿐이다. 월세가 밀린 사람이 더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내몰리거나 거리노숙까지 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될 것은 분명하다. 선을 이탈한 후에야 접근할 수 있는 복지제도를 넘어서, 존엄의 문턱 아래로 누구도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인터넷 실명제 때문에 인터넷에서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할 수 없다고 항의하는 사람들에게, 그/녀들끼리 무제한 얘기할 수 있는 사이트를 열어주는 것이 답이 될 수 없듯, 존엄의 문턱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따로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어떤 사람들’을 존엄의 문턱 아래로 밀어내리는 질서와의 단절이 필요하다.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강요받는 상황은 왜 생기는가, 최저생계비 이하로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왜 생기는가를 묻는 것이 사회권의 질문이어야 할 것이다.

5.� 사회권,� 인권을 보는 다른 시선

사회권은 특별히 더 진보적인 권리가 아니다. 다만, ‘어떤 사람들’을 존엄의 문턱 아래로 밀어내리는 체제의 문제와 직접 부딪치게 되는 상황이 잦을 뿐이다. 사회권이 특별히 더 어려운 권리도 아니다. 다만, 권리의 보장을 위해 총체적인 접근, 다각적인 계획이 요구될 뿐이다. 이것은 사회권만의 특징이라기보다 인권의 의미에 접근하기 위해 사회권이 열어주는 시선이다.

사회적 권리인권이 자유권을 중심으로 이해될 때, 인권은 개인이 국가에 요구하는 것, 국가가 무언가

하지 않음으로써 보장되는 것이라고 오해되기 쉽다. 그러나 인권은 “개인의 삶에 대해 공동체 전체의 배려와 관여”를 요청한다. 그것은 사회가 보장해야 할, 사회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권리다. 이러한 권리는 단순히 국가의 의무만으로 실현될 수 없다. 간병인의 노동조건은 병원자본과 국가정책에 따라 규정되지만 환자나 보호자를 통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인권의 실현을 위한 의무는 국가뿐만 아니라 자본도, 또 다른 제3자들에게도 인식되어야 한다. 의료생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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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거나 대안적인 교육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 역시 인권의 실현을 위한 사회적 행동이다.

사회구성원이 될 권리<키다리아저씨>의 주디는 차별과 배제의 경험을 바꿔나가면서 “내가 묵인을 받아 이 세상

에 끼어든 것이 아니라 진실로 이 세상에 속해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고 일기를 썼다17). 먹고사는 문제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가 된 것만 같은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이주노동자들은 불안정한 체류 자격 때문에 여러 기본적인 사회보장제도로부터 배제된다. 그것은 당장의 생존을 위협하기도 하지만 사회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끊임없이 확인당하는 경험이 되기도 한다. 인권은 시민권과 다르다. 국가가 경계를 정해 부여하는 권리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이며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으로서 살아갈 권리다. 집회시위의 자유도 단지 허가받지 않고 자유롭게 집회를 열 권리에 그치지 않는다. 누군가 나의,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있구나, 억눌린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공동체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는 권리다.

사회적인 것에 대한 권리자유는 개인이 제 안에 있는 것을 마음껏 펼치는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 사상도 양심도 어

떤 결정도 개인 안에서 완성되어 개인이 소유하는 것처럼 접근된다. 그런데 한나 아렌트는 인간은 공공성을 전제로만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했다. 인권은 타자의 존재가 사라진 사적인 권리가 아니다. ‘모든 사람과 관계된 공통적인 것들’을 열어낼 권리다. 충분한 영양과 적절한 건강, 편안한 집과 즐거운 일 등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적’인 것들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재화나 서비스의 생산은 그 시작에서부터 사용에까지 사적이지 않다. 무상급식은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할 수 있도록 충분한 영양을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생산되는 식량과 유통과 조리와 식사 등 일련의 과정들이 인권의 가치를 바탕으로 재조직되는 과정이다. 노동이 먹고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에 대한 권리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사회권은 먹고살 권리일 뿐만 아니라 서로 먹여 살릴 권리이기도 하다는 점이 드러난다. 사회적 행위란 타자의 심신의 필요에 언어나 신체로 대응하는 활동 양식이며, 자원의 분배를 문제 삼으면서 새로운 욕구 해석을 제기하는 정치적 행위와 불가분의 관계(민주적 공공성)에 놓여 있다. 이를테면 표현의 자유도 마찬가지다. 나의 사적인 의견을 개진할 권리에 그 의미가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서로의 생각과 느낌과 상상을 나누는 관계를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권리이다.

사회에 대한 권리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삭스 판사는 노숙인의 주거 문제와 관련된 판결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

다. “노숙인들이 길거리를 헤맬 때 노숙인의 존엄성만 훼손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다함께 비참해진다.” 비정규직 문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만 겪는 문제가 아니라 노동이 점차 불안정해지는 지금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성범죄자에 대한 형벌권의 강화가 사실은 우리 모두를 감시사회, 단속사회로 몰아넣는다. 인권의 문제는 언제나 우리가 어떤 사회를 원하는지 묻는다. “한편으로는 유희의 동작과 생산의 동작을 구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되는 물건과 소비되는 물건을 구분하는 것은 오로지 특정한 문화적 가치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다18).” 인권은 다른 사회, 다른 질서에 대한 권리다. 17) 류은숙, ‘사회보장 최저선에 관한 ILO 권고(2012년 6월 14일)’, 인권오름18) 세르주 라투슈, 생활수준; 무분별한 환원주의, <반자본 발전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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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조 모든 사람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보장제도에 관한 권리를 가지며, 국가적 노력과 국제적 협력을 통하여 그리고 각국의 조직과 자원에 따라 자신의 존엄성과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하여 불가결한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의 실현에 관한 권리를 가진다.

[참고자료 3] 사회경제적 존엄

경직된 이분법을 깨뜨리는 일도 중요한 인권투쟁[세계인권선언의 현재적 의미] 제22조 사회보장권과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실현에 관한 권리

-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 출처: <인권오름> 제129호, 2008년 11월 19일

사람의 삶은 불안의 연속이다. 소득이 끊긴다는 것은 전기와 수도 등 기초적인 필수물의 공급중단, 학업 중단, 주거 불안, 건강 불안뿐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도 끊어놓는다. 가족관계를 포함하여 많은 사회적 관계들이 거센 파도에 따라 출렁거리게 된다. 지금의 경제위기 속에서도 그렇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몇 번씩의 큰 고비를 넘어야 했을 것이다. 살던 집이 넘어가고 모든 저축과 보험을 해약해야 하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하는 고비 말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을 외면하는 것이 인권이라 할 수 있을까?

해체해야 할 인권의 범주

인권은 이런 저런 이름과 범주로 나뉜다. 어떤 식으로 나누는지부터 알아보고 그 문제점을 생각해보자. 흔한 구분은 자유권과 사회권식으로 나누는 이분법이다. 먼저 자유권은 권력에 대항하여 발전한 고전적 인권으로서 주로 국가의 불법적이고 부당한 행위로부터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권리이다. 자유권은 다시 시민적 권리와 정치적 권리로 구분된다. 시민적 권리는 국가권력이나 타인의 간섭으로부터 침해돼서는 안 되는 개인의 삶의 특정 부문을 보호하기 위한 권리이다. 신체적 보전에 대한 권리, 자유와 안전에 대한 권리, 정당한 절차와 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 등이 포함된다. 이런 시민적 권리가 가만히 앉아서 보장될 수는 없다. 권력이라는 건 잠시만 틈을 줘도 인권보장이라는 제 본분을 망각하고 오만한 것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민적 권리가 보장되려면 사회 구성원들이 쉴 틈 없이 국가권력을 적극적으로 감시하고 비판해야만 하고, 주권을 행사하는데 참여해야만 한다. 이런 것에 관계된 표현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등을 정치적 권리라 한다. 시민적 권리는 정치적 권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세계인권선언 21조까지의 권리가 자유권 또는 시민‧정치적 권리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사회권은 인간의 기본적 생존을 보장하고 분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국가의 적극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권리이다. 경제적 불평등이 지배하는 사회 현실을 외면한 채 시민‧정치적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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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을 인권이라 했을 때 그 폐해는 컸다. 인권이란 일부 가진 자만이 누리는 권리에 지나지 않았다. 인권의 역사에서 참정권은 재산에 따라 엄격히 제한됐고, 표현의 자유는 시장거리와 선술집에서 논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의사당 안의 의원들과 지식인들의 전유물이었다. 인신의 자유는 절차를 따지고 현란한 변호를 펼칠 수 있는 소수에게는 의미 있을지 모르나, 배고파서 빵을 훔친 이에게는 딴 나라 얘기였다. 사회권은 이런 식의 인권에 대한 비판과 반성에서 발전했다. 모든 사람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간다운 생활을 누릴 권리를 가지며 국가와 사회는 그 권리의 실현을 위한 생활여건과 자원을 제공할 의무를 가지는 것이다. 사회권을 다시 세분화하면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대개가 일을 해서 살아간다. 즉 누군가에게 일과 서비스를 제공한 대가로 생활을 이어간다. 그런데 그렇게 해야 하는 일이 무지막지한 조건에서 강요돼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직업을 선택할 자유가 있어야 하고, 정당하고 유리한 보수를 받을 수 있어야 하고, 노동시간은 합리적으로 제한돼야 하고 휴가도 있어야 한다. 이런 권리들을 고용주가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일하는 사람들은 노동조합을 만들고 행동하고 고용주에게 다짐을 받아둘 권리가 있다. 이런 권리들을 경제적 권리라 한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일을 해서 생계를 도모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경제적 권리만으론 충분치 않다. 우리 모두가 원하지는 않지만 아플 때가 있고 선천적 후천적 장애를 가질 수도 있고 일자리를 잃거나 나이 들게 된다. 자기 의지로 어쩔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사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인간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에 대해 부양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이것을 사회적 권리라 한다. 건강권, 주거권, 식량권,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교육권 등이 여기에 속한다. 지금까지 말한 경제사회적 권리를 우리는 특정 공동체 속에서 누린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그 문화생활에 자유롭게 참여하고 예술을 감상하며 그 진보의 혜택을 같이 나눌 권리가 있다. 이것을 문화적 권리라 한다.

인권의 불가분성․상호의존성

뉴딜정책으로 유명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와 “공포로부터의 자유”라는 간결한 말로 인권을 표현했다. 이 둘 중 어느 하나만으로 된 인권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온전한 인권일 수가 없다. 정치적 독재는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불평등한 체제에 대한 불만을 억압하기 위해 자유는 억압될 수밖에 없다. 배고프고 몸 누일 곳 없고 일자리 없는 사람이 자유를 누린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런 인권의 성격을 인권의 ‘불가분성’ 또는 ‘상호의존성’이라 한다. ‘자유 없이 평등 없고, 평등 없이 자유 없다’는 말, ‘평등할수록 더 자유롭다’는 말, ‘자유 없는 평등은 노예의 평등’이라는 말이 다 이런 인권의 성격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인권의 성격은 자주 무시돼왔다. 인권을 나눠서 편을 가르고, 한편은 인권으로 치고 다른 한편은 인권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냥 바라는 것, 욕망하는 것쯤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고질적인 인권의 이분법이다. 어떻게 편 가르기를 하는가 하면 인권의 한편을 ‘자유권’(시민․정치적 권리), 다른 한편을 ‘사회권’(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이라는 범주로 나누는 것이다.

이분 씨와 총체 씨; 누가 진짜 인권인가

자유권과 사회권, 인권을 이 둘로 나누고 자유권은 진정한 인권인데 사회권은 인권으로 보기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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렵다는 주장은 오랫동안 인권을 괴롭혀왔다. 어떤 이유 때문에 나누기를 고집하거나 또는 총체적인 접근을 주장하는지 생각해보자. 두 입장을 편의상 이분 씨와 총체 씨로 구분하고 얘기를 들어보자.

이분 씨: 사회권이라 말하는 권리들의 내용은 인간의 열망 또는 기대일 수는 있어도 권리의 자격을 가질 수는 없다. 사회권에 해당하는 내용들은 사회정책에 의해 그 수위가 결정되고 점차 달성돼야 할 사회적 목표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것을 권리라고 말해서는 곤란하다. 그렇게 되면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약속된 진짜 인권에 물 타기를 하기 때문에 오히려 인권에 위험하다.

총체 씨: 먼저 인권의 가치를 생각해보자. 인권이란 건 존엄한 인간을 가능하게 만드는 권리다. 무직, 배고픔, 질병, 무주택, 문맹, 빈곤에 시달리는 인간이 존엄성을 존중받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회권은 인간 존엄성에 필수적인 것들에 관한 것이다. 이런 필수적인 것들이 없는 인간은 이분 씨가 ‘진짜’ 권리라고 가정하는 다른 어떤 권리도 충분히 누릴 수가 없다. 인간의 존엄성은 고문과 검열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경제적 한계상황에서도 침해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권은 단지 ‘인간의 열망’이나 ‘기대’가 아니라 기본적인 권리다. 너무나 기본적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나머지 인류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합당한 요구이다.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 가령 굶거나 아픈 사람에게 ‘치료받고 싶어요? 밥 먹고 싶어요? 그런데 당신이 치료받고 싶고 밥 먹고 싶은 것은 인권으로 인정받을 현실적 전망이 없어요.’라고 하는 것은 심한 모욕이다.

이분 씨: 불평등한 것이 현실의 삶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현실에서 보장 가능한 평등은 법 앞의 권리의 평등이요, 기회의 평등일 뿐이다. 노동이 불가능하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자선이나 기타 구제를 통해 도와줄 수는 있지만 그것을 권리라고 하는 것은 곤란하다. 빈곤은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누가 누구의 자유를 침해한 결과는 아니다. 그런데 국가가 사회권을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개인의 삶에 간섭하는 것, 재분배를 실현하겠다고 시장의 자율에 간섭하는 것은 자유를 억압할 뿐이다. 사회권을 실현하려면 국가가 재정을 제공해야만 하고 그 결과 국가기구의 비대화를 가져온다. 이것은 자유에 위험스럽기 짝이 없다.

총체 씨: 사회권 보장을 위해 국가가 재분배다 뭐다 해서 나서는 것이 자유의 침해라고 하는 주장은 자유에 대한 단단한 오해이다. 시장의 자유를 염두에 두고 이런 소릴 하는 것 같은데, ‘통제와 규율 없는 순수한 시장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절한 규율이 있기에 시장이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경제학자가 아니어도 아는 상식이다. 시장의 자유라는 것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 요구되는 것이지 시장을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인간이 살기 위해 무역을 하는 것이지 무역을 위해서 우리가 사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인권의 주인공은 인간의 자유이지 시장의 자유가 아니다. 인간의 자기존중은 자기 신체와 정신에 대한 자유 없이는 불가능하다. 자유는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기본재이다. 그런데 이 자유의 향유자가 생존 불가능하다면 자유는 비현실적이 된다. 자유가 현실화되려면 그것을 위한 사회적 조건이 필요하고, 의식주와 아플 때 치료 등 그 조건을 규정한 것이 사회권의 내용이다. 자유를 누리는 것을 현실적으로 가능케 하는 생존의 기본재를 사회에서 분배받는 것 자체가 자유의 중요한 부분이다. 따라서 사회권은 자유보장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보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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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 씨: 사회권에는 자원, 즉 돈이 많이 든다. 자유를 보장하는 일에는 국가가 간섭을 자제하는 것 말고는 특별히 돈 들일이 없으니까 즉각 보장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권 보장에는 경제적 자원과 국가의 적극적 조치가 필요한데, 이것은 쓸 수 있는 자원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노력하여 점차 좋아지도록 하겠다고는 할 수 있지만 즉각적으로 보장할 의무를 지는 권리일 수는 없다. 모자라는 자원 때로는 없는 자원에 대해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다.

이분 씨와 총체 씨; 사법심사가능성의 문제

총체 씨: 이분 씨가 자유권이다 사회권이다 구분하는 권리가 그런 식으로 똑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노동권은 자유권이면서 사회권이다. 개별 노동자가 자기 권리를 위해 자유의사로 뭉칠 권리가 노동권의 자유권적 속성인데 왜 툭하면 정부가 개입하여 결사를 방해하는가. 교육권은 어떤가. 교육권에는 교육비, 학교시설, 교사고용 등도 중요하지만 교육의 내용을 정부 입맛대로 좌지우지해서는 안 되는 정신적 자유의 의미도 크다. 자유가 국가의 불간섭만으로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이분 씨가 중요시하는 자유가 보호되려면 국가가 보다 강하고 공격적인 주체들로부터 이분 씨를 보호해줘야 한다. 가령 생명권을 생각해보자. 국가가 나서서 이분 씨에게 해코지를 해서도 안 되겠지만 제3자의 폭력과 학대로부터 이분 씨를 보호해줘야 한다. 건강에 유해하거나 위험한 상품의 거래와 판매로부터도 보호해줘야 한다.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건강보험제도 같은 것으로 기본적인 의료접근권을 보장해줘야 한다. 어디까지가 자유에 대한 간섭이고 어디까지가 자유에 대한 보호인가? 이분 씨는 그렇게 명확하게 선을 그을 수 있는가? 없는 자원, 모자라는 자원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말도 모순 된다. 사회권이 더 많은 자원을 필요로 한다는 건 사실일지 모르나 자원이 들지 않는 권리란 없다. 안전권을 위한 경찰력의 유지가 맨손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공정한 재판권을 위한 사법공무원도 돈 주지 않고 쓰는 것이 아니다. 사회권에만 돈이 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권리에는 돈이 든다. 반대로 큰 자원을 들이지 않고도 당장 실현할 수 있는 사회권의 항목도 있다. 가령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참가할 권리를 보장할 의무는 자원과 상관없이 즉각 효력을 가져야 할 권리이다.

이분 씨: 진짜 인권은 자유권의 내용처럼 재판을 통해 청구하고 구제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사회권이란 인권은 모호하여 재판의 심사대상으로 삼기 어렵다. 사회권에 해당하는 내용은 입법과 행정부의 정책결정 권한에 속하는 문제이므로 사법부가 이를 대신할 수는 없다. 사회권은 어떤 정책의 불가피한 영향이나 개인의 행운과 불운,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결과 등 재판으로 따질 수 없는 성격의 내용을 담고 있다.

총체 씨: 사법심사가능성과 불가능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불가능성이 사회권의 특성인 것도 아니다. 모호함은 사회권의 특성인 것이 아니라 일부 정교화된 권리와의 정도 차이일 뿐이다. 자유권 중에서도 모든 권리가 정교화된 것이 아니라 법리는 계속 형성되고 있다. 인권은 어떤 권리를 꿈꾸고, 그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명문화하고, 실현하는 과정을 밟아왔다. 오늘날 명백한 것으로 보이는 재판구제 사안도 그것이 시작될 때는 청구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 구체적 사건과 도전에서 시작됐다. 사회권의 사법심사가능성도 권리 내용에 따라 편차가 있고 국내외적으로 일정정도 현실이 된 내용도 많다. 따라서 자유권은 재판 가능하고 사회권은 그렇지 않다는 이분법은 시대착오적이다. 이에 대해 유엔 사회권위원회는 “경제․사회적 권리가 법원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으로 엄격하게 분류․채택하는 것은 자의적인 것이고, 두 종류의 인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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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뉠 수 없고 상호의존한다는 원칙에 위배”될뿐더러 그렇게 하는 것은 “사회에서 가장 약하고 소외된 집단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원의 권한을 현저히 축소시킬 것”이라 했다. 또한 현실에서 오히려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사법심사가능성이 아니라 사법제도 자체의 불평등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권리에 대한 판단과 구제를 사법심사에 의한 것으로 제한하여 생각하는 것은 인권에 위험하다. 가령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범죄형량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헌법에 보장된 노동권에 대해서는 박하게 해석하고 기업주의 재산권 위주로 유리한 판결을 해주는 것, 재산권에 대한 사회적 제약을 솜방망이처럼 다루는 것도 ‘유전무죄 무전유죄’이다. 권리에 대한 구제를 재판에 의한 것으로 한정하는 것과 인권회복수단으로서 사법적 구제절차를 강조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권리에 대한 구제는 사법절차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각도로 모색돼야 한다. 가령 재산권이란 건 그 내용이 법률로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권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토지’ 같은 재산의 내용과 한계를 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재판가능성 만이 아니라 어떤 법률을 만드느냐, 어떤 권리를 우위에 두는 사회적 합의를 만드느냐를 같이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주거권의 보장을 위해서는 법원명령이 없는 강제퇴거의 금지나 이에 따른 구제조치 뿐 아니라 주거현황에 대한 실태조가, 최저주거기준이나 주거기본법 등의 마련, 주거권에 대한 인식 향상과 교육 등 다각도의 노력이 요구된다.

이분 씨: 권리라 할 때는 법적으로 그 권리를 보호하고 보장하고 실현할 의무 주체가 있어야 한다. 의무 주체가 이를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 인권침해라 한다. 하지만 사회권의 경우에는 의무주체가 모호하다. 뿐만 아니라 사회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 다양한 부문의 자발적인 원조, 동의와 협력이 절실한 데 거기다 대고 인권침해라고 지적하는 것은 찬물을 끼얹는 것이고 적절치 않다.

총체 씨: 가난이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것과 가난은 인권침해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다르다. 흔히 사람들은 누군가가 고문당하거나 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했다면 무의식적으로 국가의 책임을 묻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굶주리거나 도시빈민이 살던 곳에서 내쫓길 때 세상은 누군가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이름 없는 경제개발의 힘 또는 나라님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가난의 불가피성을 탓한다. 더 심하게는 그런 암울한 운명을 자초한 것은 피해자들 자신의 탓이라고 한다. 대부분 자유의 박탈에 대해서는 끔찍하게 여기면서 식량, 의료보호, 살 곳 같은 삶의 기본적인 필요가 (예방할 수 있음에도) 박탈당함으로 인한 인간의 고통이나 죽음에 대해서는 상당한 관용을 보인다. 사회권을 인권으로 규정하고 그 침해를 인권침해로 규정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이 아니라 마땅히 받을 것을 받지 못한 권리 주체로 바라보는 것은 크게 다르며,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이 방임되고 침해됐다고 봐야 진짜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

물론 인권침해를 규정하는 일이 간단하지는 않다. 침해라는 용어를 신중하게 사용할 필요도 있다. 모든 안 좋고 불쾌한 상황에 죄다 인권침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침해라는 용어의 심각함을 훼손하게 될 것이다. 침해라는 용어는 그에 상응하는 의무와의 관계 속에서 가려서 사용돼야 한다. 많은 국가들과 국제사회는 사회권에 대한 국가 및 주요행위자들의 의무를 분석하기 위한 방법을 개발해왔다. 가령 유엔사회권위원회는 국가가 해선 안 되는 일을 하는 것(작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부작위)을 사회권에 따른 의무 위반으로 본다. 가령 작위의 의무 위반은 이미 향유하고 있는 권리를 고의적으로 철회하거나 후퇴시키는 행위, 보호적 법률을 개악하고 특정 집단을 향한 차별을 강화하는 행위, 사회권에 해로운 정책 강요 등이 있다. 부작위의 예로는 사회권과 관련된 지표를 만들지 않고 모니터도 안하는 것, 즉각적 성격을 갖는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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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법률상의 차별 제거 등)를 불이행 하는 것, 정당한 안전조치를 취하지 않고 규정된 법적 의무를 따르지 않는 것 등이 있다.

경직화된 범주를 깨는 일의 중요성

흔히 사회권에 따른 국가의 의무라 하면 국가가 직접 나서서 자원을 제공하는 것만을 떠올린다. 물론 그런 국가의 직접 지원이 필요하기도 하다. 직접 제공하는 것 말고는 생활의 필수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권리가 실현될 다른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을 때가 있다. 노인이나 장애인처럼 사회경제적으로 불리하게 된 사람들, 위기나 재난, 갑작스런 실업 상태 등이 그렇다. 하지만 국가의 의무는 직접 제공자로서의 의무에만 있는 게 아니다. 국가는 일차적으로 개인들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 개인적으로나 타인과 결사하여 생존을 추구할 방법을 보장해야 한다. 가령 토지 이용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사람들에게 토지의 보호는 직접 다른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무보다 훨씬 중요하다. 토지는 오직 경작하는 농부만이 소유할 수 있도록 한다거나 무분별한 개발과 투기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의무가 파산한 농부에게 생계보조금을 주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노동자의 집단적 결사와 행동권을 보장하는 것은 부당 해고된 노동자에게 쌀 한말을 주는 것보다 중요하다.

또한 국가는 직접 제공자로서가 아니라 보호자로서의 의무를 진다. 이것은 자유권에 있어서 보호자로서의 국가의 역할과 기능적으로 유사하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보다 강하고 공격적인 주체들로부터 개인의 행동의 자유와 자원의 이용을 보호하는 것이다. 보다 강력한 경제적 이해로부터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생존재의 보호, 무역과 계약 관계에서 각종 비윤리적인 위협으로부터의 보호, 유해하거나 위험한 상품의 거래와 투매로부터의 보호 등이 요구된다. 이런 경우에는 사법심사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회권은 자원이 필요하고 자유권은 자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직접 제공자로서 국가가 나서는 단계에만 초점을 두고 다른 의무들을 고려치 않는 과도한 단순화이다.

인권의 상호의존성은 권리개념을 설명하고 분석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개념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개념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잘못된 이분법의 구속을 받기보다는 무엇보다 중요한 목적이자 근본가치인 인권존중이라는 견지에서 추구돼야 한다. 잘못된 이분법은 인권을 형식적인 것으로 몰아갈 수 있다. 어떤 권리가 어떤 범주와 법률에 속하느냐가 아니라 인권의 기초인 인간애에 일관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경직된 범주화를 깨뜨리는 것 자체도 중요한 인권투쟁이다. 효과적인 인권보장이란 불리하고 취약한 집단의 구성원에 특히 유념하여, 권리를 진정으로 모든 사람의 것으로 만들기에 뭐가 필요한가를 총체적으로 해석해서 나오는 결과여야 한다. 범주는 임시로 만들어진 것이고, 전체의 부분에 불과하며, 관계 속에서만 이해된다. 가령 자유권에 있는 생명권은 사회권에 있는 건강권과 관계 속에서 보면 아주 달라 보인다. 부당해고 당하여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노동자의 일할 권리와 결사의 권리는 노동자가 부양하는 아동의 권리와 연관시켜 볼 수 있다.

사회보장권의 의미

선언의 다른 조항들과 마찬가지로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보장의 직접 배경이 된 것은 나치즘의 경험이었다. 물론 그에 앞서 1919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 그리고 대공황의 여파로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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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에 위협을 느낀 자본주의 국가들 내부에서부터 사회보장의 중요성은 점차 강조되는 과정에 놓여있었다.

1940년 여름 정책적으로 “노인, 정신질환자, 불치병자, ‘쓸데없이 밥만 축내는 이들’은 특별기관으로 옮겨졌고 거기서 죽었다”(전쟁범죄에 관한 유엔 보고서 중에서)“자신의 건강을 위해 싸울 기력이 더 이상 없다면 이 투쟁의 세계에서 생존할 권리는 끝난다”(히틀러의 나의 투쟁 중에서)

대규모 실업과 빈곤으로부터 인간생활을 지켜내지 않으면 나치즘과 같은 악몽이 언제든지 재발해 사회를 지배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컸다. 기본적인 생존을 인권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는 생존권을 구체화하기 위한 기본적인 권리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필요성에는 다들 공감했지만, 누가 얼마만큼 의무를 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이 달랐다. 어떤 국가들은 주거권과 의료권을 헌법에 보장하지만 어떤 국가들은 사회보장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국가가 비용을 지불하거나 의무를 져야 하는 것으로 해석되길 꺼려했다. 결국 선언에는 사회보장의 의미가 무엇이며 누가 얼마만큼 책임져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얘기는 없다. 사회보장이라는 단어는 그것 자체가 의미를 가지거나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이고, 사회보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나타내는 구체적 목록과 함께 있어야 그 의미가 규정된다. 선언에서 우리는 간접적으로 ‘의식주, 의료, 필수적인 사회서비스’를 통해 그 의미를 짐작할 뿐이다. 선언 내에서도 22조에서 말하는 사회보장과 25조에서 말하는 사회보장의 의미는 다르다. 22조의 사회보장은 막연하지만 넓은 의미의 권리, 즉 ‘인간존엄성과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권리를 말한다면, 25조의 사회보장은 ‘최소한의 예시목록’으로서 실업, 질병, 장애, 노령 등의 특정상황에서 인간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어떤 걸 고려할 수 있는지를 얘기하는 것이다.

“자선이 사회적 제도로서 완전히 무력하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는 때에 자선의 방법에 의하지 않고 질병, 불충분한 임금, 실업 등으로 말미암아 대다수 선의의 노동자들을 빠져나올 수 없는 밑바닥에 가두는 것과 같은 부당한 비참을 없애야 하는데도 그를 위한 대책이 마련되고 있지 않다. 우리는 피부조자가 아닌 평등한 자가 되기를 원하며, 시혜를 배척하고 정의를 바라는 것이다…”(프랑스 노동자 60인 선언, 1864)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란 예전 시대의 구빈이나 자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구빈차원의 사회부조에서는 수급자의 권리를 부인하고, 베풀어준다는 은혜성과 그에 따른 굴욕적 조건을 달았다면 권리로서의 사회보장은 다르다. 개인의 잘잘못이 아니라 이 체제 속에서는 ‘어쩔 수 없는’(세계인권선언에서의 표현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생활 곤궁이나 불능상태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구조적 문제를 인정한 속에서 사회보장의 권리가 인권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이 권리는 개인의 기본적 인권이기 때문에 수급자의 기여에 의존하지 않고 공적 부담으로 이뤄지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권리이기 때문에 구빈의 차원을 벗어나 법적 권리로 인정하는 단계로 발전한 것이고, 사회는 자기 내부에서 발생하는 위험으로부터 구성원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권의 구체적 내용은 선언 23-27조에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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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4] 평화적 생존

[인권연구_창] 평화에 대한 인권(Douglas Roche, The Human Right to Peace, 2003, Novalis)

-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출처: <인권오름> 제55호, 2007년 5월 22일

국제인권무대에서 널리 활약한 프랑스 법학자 카렐 바삭은 1977년 세계인권선언 30주년 기념연설에서 국제인권의 발전을 요약하며 3세대 인권을 언급했다. 즉, 1세대 인권은 자유의 가치를, 2세대 인권은 평등을 강조한다면 3세대 인권은 우애에 초점을 두며, ‘연대에 대한 권리’라는 특유한 표현을 쓸 수 있다. 카렐 바삭은 3세대 인권으로 발전권, 평화권, 환경권, 인류의 공동유산에 대한 소유권, 커뮤니케이션의 권리를 언급했다. 혹자는 여기에 인도주의적 원조와 재난 구조를 받을 권리, 민족 자결권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이에 대해 ‘연대권은 구체적 의미가 없고 구체적 의무도 없다’, ‘따라서 평화권 같은 건 없다’, ‘1·2세대 인권과 달리 3세대 인권은 어떤 법적 조약으로도 공식화된 바 없다’, ‘평화권은 오직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며 인권실현의 수단이나 과정을 권리 자체와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식의 반론이 거세다.

<평화에 대한 인권> 책 표지 오늘 살펴볼 『평화에 대한 인권』(출처: Douglas Roche, The Human Right to Peace, 2003, Novalis)은 이런 비판에 대한 답으로 평화권을 “인류의 신성한 권리”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수세기 동안 국제법과 국제관계의 주요 목적으로 일컬어진 것이 평화임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국제무력분쟁과 그로 인한 엄청난 규모의 사망, 파괴, 고통은 현세기에 발생한 것만으로도 정당한 평화를 성취하고 유지하려는 노력이 실패했음을 증명한다. 하지만 목표와 현실간의 엄청난 격차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그 격차 때문에 국제사회는 평화에 대한 인권이 존재한다고 엄숙하게 선언해왔다. 평화권은 2차 대전 이후 국제사회의 건설적인 평화 관련 노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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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현이 이론적 용어로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평화권을 위한 국제적 노력

필자는 평화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노력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 기본 규정: 유엔헌장 전문 및 1조, 55조, 세계인권선언 28조‧ 1978년 유엔총회: 평화로운 삶을 위한 사회 준비에 관한 선언 - 국내 및 국제 정책이 평화로운 삶의 성취를 지향할 것. 특히 젊은 세대에 관하여 그리할 것을 강조.‧ 1981년 아프리카 인간과 인민의 권리에 관한 헌장 - 모든 인류는 국가적 및 국제적 평화와 안보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 1984년 유엔총회: 평화에 대한 인류의 권리선언 - 우리 지구상의 인류에게 평화에 대한 신성한 권리가 있음을 엄숙히 선언한다. 평화권의 행사는 전쟁위협의 제거를 요구한다. 평화권은 여타 인권의 전제조건이다. 인권‧발전‧평화는 서로 고립해서 존재할 수 없는 조건이다. 평화 없는 인권은 환상이다. ‧ 1997년 유네스코 사무총장: 평화에 대한 인권 선언 - 갈등의 근본원인, 즉 구조적 원인에 초점을 맞추고 조기단계에서 진화에 나설 때 분쟁을 피할 수 있다. 전쟁의 문화로부터 평화의 문화로의 변화가 우선 필요하다. 국제사회는 전쟁비용과 평화 비용 두 개에 동시적으로 몰두할 수는 없다. 이 선언과 기존 선언의 차이점은 평화권을 인권의 전제조건으로 확인했을 뿐 아니라 성취를 위한 전략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선언이 요구하는 두 개의 전략은 1) 빈곤, 환경파괴, 국제정의 등과 같은 긴급한 문제에 대해 즉각적인 행동에 나서는 것이다. 2) 평화와 정의의 가치를 이해하고 타문화에 대한 이해와 관용을 배양하기 위한 대대적인 교육 운동이다. ‧ 1997년 오슬로 기초 선언 - 평화권을 세 개의 연관된 요소로 나누었다. 1) 인권으로서의 평화: 모든 인간은 인간성에 내재된 평화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어떤 종류의 전쟁과 폭력도 평화에 대한 인권과 본질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2) 의무로서의 평화: 모든 지구의 행위자들은 평화의 유지와 건설에 기여할 의무, 무력분쟁 방지와 폭력 예방의 의무를 갖는다. 3) 평화의 문화: 평화권이 성취될 수 있는 수단으로서 평화의 문화, 교육, 대화, 윤리적 및 민주적 이상을 통해 인류의 마음에 평화의 뿌리를 추구하는 전략‧ 2003년 유엔총회: 무력분쟁 방지에 대한 결의안 채택

실천의 장애물

위에서 열거된 국제사회의 노력에는 큰 장애물이 있다. 필자는 주요 강대국들의 지지 부족과 저지를 지적한다. 그런 사례는 아주 많다.

1984년 유엔의 ‘평화에 대한 인류의 권리선언’은 핵전쟁의 위협 제거를 언급했다는 이유로 서구 국가들이 다수 기권(34표 기권)하여 빛을 잃었다. 1997년의 유네스코 사무총장의 평화권 제안에 대해서는 사무총장이 월권을 했다고 비난하며 평화권에 대한 공격과 기권표시로 대응했다. 이에 대해 남반구 국가들은 무기 산업을 보호하길 원하는 북반구 국가들을 비판했다. 결국 합의 도달에 실패했고 평화권에 대한 회의주의는 계속됐다. 1999년 ‘평화의 문화를 위한 행동 프로그램’에 관한 비공식 유엔 토론에서 미국 대표는 “평화는 인권의 범주로 고양돼선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을 시작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라 발언했다. 2002년 평화권의 증진을 요구하는 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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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 대부분의 서구 국가들과 나토(NATO)의 동유럽 신규 가입국들의 압도적인 반대표(50표)로 작동할 수 없었다. 평화권을 인권 무대가 아닌 국제관계의 다른 영역에서 다뤄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

인도의 바그와티(P.N.Bhagwati) 전 대법관 <출처; usinfo.org>

인도의 전 대법관(P.N.Bhagwati)은 평화권의 주요기능을 “평화적 분쟁해결을 통해, 국제관계에서의 폭력 사용 또는 위협의 금지를 통해, 핵무기의 제조·사용·배치의 금지를 통해, 그리고 전면적 군축을 통해 생명권을 증진하고 보장하는 것”이라 했다. 이 말에 담긴 하나하나의 요소, 즉 군축, 핵무기의 금지 등이 거센 반발을 사고 있는 것이다.

전쟁의 문화

오늘날 98개국의 1천여 기업이 전 세계에 유통되고 있는 6억3천9백만여 소형무기를 생산하고 있다. 불법 무기 교역은 이 숫자를 넘는다. 최대 무기 거래상은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독일, 즉 세계의 강대국들이다. 이런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필자는 군산복합체의 탐욕 등 여러 배경 요인들 중에서 ‘전쟁의 문화’의 지배를 우선으로 꼽는다.

필자는 군국주의의 동의어로 ‘전쟁의 문화’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 의미는 갈등 해결에서 군사적 가치가 고양되는 것이다. 그 결과 공격적인 군비태세와 군부의 지배적인 정치적 지위가 초래된다. 전쟁과 대량 폭력은 고의적인 정치적 의사결정의 결과이며, 전쟁은 적을 필요로 한다. 또한 전쟁은 군비와 군인, 정보의 통제를 요구한다. 이것은 환경파괴, 빈곤, 민주주의와 인권의 파괴를 야기한다.

전쟁의 문화의 심연에 자리한 생각은 폭력의 뿌리가 인간 본성의 타고난 부분이라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인간은 언제나 전쟁을 해야 하고, 기껏 잘해봤자 최악의 폭력 발산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뿐이다. 필자는 이 논리를 부정하며 인간은 유전적으로 전쟁을 위해 프로그램화되어 있지도 않고, 인간의 본성에 폭력을 양산하는 타고난 생물학적 요소 같은 건 전혀 없다고 잘라 말한다. 결국 전쟁을 만들어낸 종(인류)은 평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역설한다.

평화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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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문화란 “생명, 자유, 정의, 연대, 관용, 인권, 그리고 남녀의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들에 기반한 문화”를 말한다. 이 목록을 더 풀어서 얘기하면 다음과 같다.

· 생명, 존엄성, 인권에 대한 존중· 폭력의 거부· 남녀의 동등한 권리를 인정하는 것· 민주주의, 자유, 정의, 연대, 관용의 원칙을 지지하고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 인종·종교·문화·사회 집단과 국가들 간의 상호소통과 이해

전쟁의 문화와 평화의 문화는 다음과 같이 대조된다.

전쟁의 문화 ;· 적의 이미지· 군비증강과 군대· 권위주의적 지배· 비밀주의와 선전· (구조적·물리적) 폭력· 남성의 지배· 전쟁을 위한 교육· 약자착취, 환경착취

평화의 문화 ;· 이해, 관용, 연대· 군축· 보편적이고 완전한 민주적 참여· 정보와 지식의 자유로운 흐름· 모든 인권에 대한 존중· 여성과 남성간의 평등· 평화의 문화를 위한 교육· 지속가능한 경제·사회적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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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그냥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평화의 문화 실현은 매일 매일의 헌신과 책임을 요구한다.<출처; mormonstories.org>

평화의 문화는 전쟁과 폭력을 향한 문화적 경향을 대화, 존중, 공정함이 지배하는 사회적 관계로 바꾸는 것이다. 평화의 문화는 이러한 삶의 태도와 방식을 배양하기 위하여 교육을 필수적인 도구로 사용한다. 그 교육의 내용을 이루는 대표적인 예는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이 2000년에 기초한 평화의 문화 건설을 위한 실천행동에 관한 선언이다.

‧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 차별이나 편견 없이 각 사람의 생명과 존엄성을 존중‧ 폭력의 거부: 적극적인 비폭력 실천, 모든 형태의 폭력에 대한 거부, 특히 가장 착취당하고 취약한 사람들을 향한 폭력, 아동과 청소년을 향한 폭력을 포함하여 신체적·성적·심리적·경제적·사회적 폭력 및 모든 형태의 폭력에 대한 거부‧ 타인과의 공유: 배제, 불의, 정치·경제적 억압을 끝내기 위하여 아낌없는 정신으로 내 시간과 물적 자원을 공유하기‧ 이해하기 위해 귀 기울이기: 표현의 자유와 문화적 다양성의 사수, 언제나 대화를 우선시하고 광신, 비방, 타인에 대한 배제에 빠지지 않고 귀 기울이기‧ 지구의 보존: 책임성 있는 소비자의 태도 증진, 모든 형태의 생명을 존중하고 지구상의 자연 균형을 보존하는 발전의 실천‧ 연대를 재발견하기: 새로운 형태의 연대를 함께 창조하기 위하여 여성의 완전한 참여와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존중과 더불어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하기

이러한 평화의 문화 실현은 매일 매일의 헌신을 요구한다. 우리가 이런 책임성을 움켜쥘 때, 평화에 대한 인권은 보장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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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5]

평화에 대한 권리(The Right to Peace)의 의미와 실현 방안

- 배경내(인권교육센터 들)* 출처: 인권연구소 발표문

이 글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세계체제라는 시공간적 조건 하에서 ‘평화에 대한 권리’(이하 평화권)를 어떻게 개념화하고 기존의 인권체계 내에 통합할 것인가를 탐색해보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는다. 전쟁과 폭력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일 테지만, 폭력의 극대화된 형태이자 과정으로서의 전쟁이 인민 전체의 운명과 자유, 권리 등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분명 근대 자본주의에 이르러서의 일이다. 특히 경제와 정치의 융합이 강화됨과 더불어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른 거대 군수산업의 발전과 무기의 양적․질적 팽창은 총력전의 시대를 열었으며, 핵무기․생화학무기 등 가공할 만한 폭력의 수단들을 양산해 왔다. 누구도 전쟁과 분쟁의 위협으로부터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오늘날, 평화권에 대한 탐색은 전쟁과 평화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밝히지 않아 왔던 기존의 인권체계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1. 기존 인권체계 내에서의 평화/평화권

○ 유엔헌장(1945) : 2차대전 이후의 국제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제도로서 설립된 유엔은 헌장에서 ‘세계평화와 안전’의 보장을 자신의 주요 목표로서 규정하고, 평화적 방법을 통한 국제 분쟁의 해결이라는 접근법을 취하였다. 다만, 자위(自衛)를 목적으로 한 무력 사용, 그리고 국제분쟁이 발생하였을 때 평화적 수단을 통한 해결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을 경우 유엔안보리의 결의에 따른 유엔군의 무력 사용만을 허용하고 있다. 이후 유엔은 (실제적으로 어떻게 행동해 왔는가와는 달리) 주권을 침해하는 침략전쟁은 물론, 전쟁시 가해지는 반인도적 범죄나 전쟁법 위반 행위를 규제하는 원칙적 태도를 견지하고 전쟁법과 인도주의법 등을 구축해 왔다.

○ 세계인권선언(1948) : 전문(前文)에서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이 국제평화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나아가 세계인권선언 28조는 “모든 사람은 이 선언에 규정된 권리와 자유가 완전히 실현될 수 있도록 사회적, 국제적 질서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인권이 실현되는 국제적 질서의 내용 가운데 국제평화의 실현이 포함되어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평화권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으며, 이후의 각종 국제인권조약들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과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1966) : 두 규약은 각각 제1조에서 인민의 자결권을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대외적 자결권을 부정하는 침략전쟁이 인권의 이름으로 간접적으로 부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나, 평화권 자체가 승인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 Declaration on the Use of Scientific and Technological Progress in the interests of Peace and for the Benefit of Mankind(유엔총회 결의 3384(ⅩⅩⅩ), 1975년 11월 10일 채택) : 과학기술의 성과가 무기경쟁을 강화하고, 민족해방운동을 억압하며, 개인과 인민의 인권과 기본적 자유를 빼앗는 데 사용될 수 있음을 우려하면서, 과학기술의 발전이 국제평화와 안전, 자유와 독립이라는 목적에 부합되어야 함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선언은 인권체계 내에 의미있게 결합되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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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claration on the Preparation of Societies for Life in Peace(유엔총회 결의 33/73, 1978년 12월 15일 채택) : 침략전쟁의 금지, 모든 국가의 자결권 보장, 군비 경쟁의 제거, 각종의 식민주의와 인종차별주의의 금지 등을 평화로운 삶을 위한 조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선언 역시 인권체계 내에 통합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 인간과 인민의 권리에 관한 아프리카헌장(1981) : 아프리카지역의 인권협약으로서, 23조 1항에서 “모든 인민은 국내적 및 국제적 평화와 안전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지역적 수준이지만 평화권을 독자적으로 개념화한 것은 이 헌장이 최초라고 볼 수 있다.

○ 평화에 대한 권리 선언(유엔총회 결의 39/11, 1984년 11월 12일 채택) : 유엔의 이름으로 평화권이 최초로 공식화되었다. 이 선언은 전쟁이 없는 삶이 모든 나라의 물질적 안녕과 발전, 진보, 권리와 자유의 완전한 이행을 위한 국제적인 필수 요건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민들에게 ‘평화에 대한 신성한 권리’가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단 4개의 조항으로만 구성된 이 선언은 단지 92개국만의 동의를 얻었을 뿐, 많은 서방국들을 포함한 34개국이 투표를 거부함으로써 국제적 지위가 상당히 약한 편이다. 당시 기권의 주요 이유는 ‘평화권’이 인권을 ‘집단적 권리’로 이해함으로써 인권의 개인적 의미를 약화시켰다는 것이었다.

이상을 통해 볼 때, 기존 인권체계 내에서 평화는 주로 ‘국가간의 전쟁이나 국가 내에서의 무력충돌’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국제평화가 인권의 실현을 위한 조건 혹은 질서로서 규정되고 있었을 뿐 독자적 권리로서 승인되지는 못했음을 알 수 있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아프리카헌장과 유엔총회 결의를 통해 ‘평화권’이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성과를 거두기는 하였지만, 아직까지 보편적 승인을 얻지는 못하고 있는 상태이며, 그 결과 인권체계 내에 통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핵전쟁의 가능성이 항시적으로 존재하는 20세기 후반 이후의 현대사회에 있어 전쟁은 ‘더 이상 정치의 연장이 아니라, 정치의 종말은 물론 인류 전체의 종말’을 야기할 수 있는 만큼, 전쟁에 대한 인권진영과 인권체계의 명확한 입장이 확립될 필요가 있다. 또한 탈냉전 이후 오히려 급속하게 증대하고 있는 전쟁이나 무력분쟁들이 인민들을 인권에 대한 총체적 부정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는 점, 1999년의 코소보 전쟁을 계기로 하여 ‘인권을 명분으로 한 전쟁’이 감행됨으로써 인권과 평화의 충돌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 특히 최근 미국의 태도가 아프간 폭격 이후 확전의 가능성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인권과 평화의 관계를 면밀히 검토하고 평화에 대한 권리의 독자적 개념화와 인권체계 내로의 통합이라는 새로운 접근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2. 평화와 비평화: 다양한 개념규정과 평화 실현 방안에 대한 기존의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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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개념 비평화의 내용 평화의 목표 평화에 이르는 길

소극적

평화전쟁, 분쟁, 폭력

․전쟁의 부재

․분쟁의

조정/통제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군사안보의 강화/ 다른 수단

을 통한 전쟁의 연속으로서의 평화) ↔ 모든 전쟁과 폭력을 악

으로 간주(비폭력주의, 합법적으로 행사되는 구조적 폭력에 대

해서는 침묵)

․전쟁법을 통한 정당한 전쟁의 목적, 수단, 절차 등에 관한 규제

․인도주의법을 통한 ‘전쟁 중의 법’(민간인과 군인의 구별, 비례

성의 원칙)을 구체화 → 피해의 최소화

적극적

평화

물리적 폭력

(전쟁, 분쟁, 직접적 폭력)

․폭력을 생산,

지속, 강화하

는 구조 그

자체의 극복

․정의의 실현

․인간안보

<공통>

․인권의 보장과 민주주의의 확대

․집단안보/ 상호군축/ 탈군사화

․유엔등 국제기구를 통한 협력틀 구성

<차이>

■절대적 평화주의

- 평화적 수단을 통한 평화의 실현(합법적 폭력도 폭력으로서 승

인하나, 폭력=수단이라는 전제 하에 목적에 맞는 수단의 채택

을 주장/ 폭력의 악순환에 대한 경계)

■상대적 평화주의

- 비평화의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방어적 전쟁, 대항폭력 등은

긍정하되, 폭력이 승인될 수 있는 구체적 요건을 규정

- 정당한 전쟁(폭력)과 부당한 전쟁(폭력)의 구별→ 정당한 폭력

의 창조적 힘에 대한 일정한 신뢰

■정치, 권력 혹은 반(反)폭력의 조직화

- 대중의 역능, 정치력 or 행동능력(권력)의 강화, ‘신성한 폭력’

(총파업 등)의 긍정과 창조적 변형능력에 대한 신뢰

(“총구로부터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은 권력이다” - 한나 아렌트)

구조적 폭력

- 계급적대

- 빈곤과 착취

- 정체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소수민족에 대한 억압 등)

- (신)식민주의, 제국주의, 경제

제재나 봉쇄, 저발전

- 신체적․정신적 자유에 대한

억압

- 환경파괴

문화적 폭력(상징폭력) - 구조화

된 폭력의 정당화(이데올로기를

통한 지배 혹은 오인의 메커니

즘을 통한 승인 전략)

3. 평화와 인권: 평화권의 개념을 독자적으로 구성해야 하는 이유

소극적 평화뿐만 아니라, 적극적 평화의 실현까지도 비평화의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목표로서 간주한다면, 평화와 인권은 상당히 많은 부분의 교집합을 갖게 된다. 특히 적극적 평화가 극복하고자 하는 구조적 폭력의 개념은 대부분 (협의의) 평화시의 인권에 대한 억압과 침해와 다를 바 없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인권의 개념은 시민․정치적 권리(고문이나 감금, 여성에 대한 직접 폭력 등 물리적 형태의 폭력을 규제),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노동자계급이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착취, 빈곤이나 배제, 환경파괴 등의 구조적 폭력을 규제), 집단적 정체성의 권리(성․인종 등의 정체성을 이유로 한 다양한 형태의 차별과 억압을 규제), 연대의 권리(발전권, 자결권, 환경권, 다를 수 있는 권리 등의 실현을 요구) 등을 모두 포괄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구조적 폭력에 의한 비평화의 상태까지도 인권의 부정 내지 침해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구조적 폭력의 극복은 굳이 ‘평화에 대한 권리’라는 독자적 개념을 구성하고 제기하지 않더라도, 인권과 구조적 폭력과의 역동적 관계를 파악하고 그 결과를 기존의 인권체계 내에 반영하여 인권의 개념을 더욱 풍부하게 해석하고 인권의 체계를 더욱 발전시킴으로써도 충분히 담보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권을 독자적으로 구성해야 하는 이유는 기존의 인권체계가 침묵하고 있거나 자신의 체계 내에 아직도 통합하지 못하고 있는 영역이 평화라는 개념 하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권은 침략전쟁이나 식민주의에 대해서는 자결권의 이름으로 부정하지만, 전쟁이나 무력분쟁 일반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으며, 인권이나 평화의 실현을 위한 전쟁과 폭력의 사용 문제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있다. 나아가 인권은 인도적 간섭(이는 본질적으로 무력의 행사를 포함한다)을 오히려 지지하는 근거로서 활용되기도 한다. 물론 정당하지 못한 전쟁을 규제하고 전쟁 중에 발생하고 있는 반인도적 행위들을 규제하기 위한 일련의 전쟁법과 인도주의법은 광의의 인권체계 내에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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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국제법체계가 전쟁 그 자체에 대한 반대를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평화권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구성하고, 이를 인권의 체계 내에 통합한다는 것은 곧 전쟁 그 자체에 반대하는, 전쟁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질서’에 대한 권리를 인권으로서 승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4. 평화권의 내용과 실현을 위한 조건

1) 전쟁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권리

모든 전쟁은 나쁜 것인가? 나쁘다면 왜 나쁜 것인가? 전쟁에 반대한다면 누구의 입장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것인가? 인권의 이름으로 전쟁에 반대한다고 선언할 때, 우리는 이 모든 질문에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전쟁의 발생 구조 자체에 대한 반대

근대 자본주의의 등장 이후 지구상에 존재했던 무수한 전쟁들의 주요 원인들을 살펴보면 △민족국가 건설(국가건설, 민족해방, 민족통일, 분리독립, 자치권 획득 등) △국가간 세력 충돌(정치․군사적 성격 - 전략지역의 획득, 영토 확장, 동맹국 지원, 지역패권 확보 및 유지/ 경제적 성격 - 통상마찰, 자원획득) △식민주의(노예약탈전쟁, 식민지 정복 등) 및 탈식민화 저지 △제국주의 국가들 상호간의 충돌 혹은 헤게모니 쟁탈전(1, 2차 세계대전이 대표적) △정권 수립 및 정권의 유지 △민족적․종교적․이념적 정체성의 보존과 강요의 충돌 등으로 대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원인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있으며,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근본 구조로부터 파생되는 원인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세계체제론은 그 이론가들 상호간의 일정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①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세계경제’로서 지리적으로 팽창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는 것(외부의 체계내 주변부로의 통합을 필연적으로 요청)19), ②독점을 향한 자본가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이 자본가들 사이에 계서제를 낳게 되고 다국적인 자본이 집중되는 독점의 지리적 중심지(세계도시)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 ③이러한 독점의 형성과 집중은 정치와 경제의 융합을 낳게 되며, 자본의 독점을 위해 가장 유리하고 효율적인 지원을 제공할 수 있는 (민족)국가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정치적 구조로서 선택되었다는 것, ④그리하여 자본주의 세계체계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와 국가간체계로 구성되기에 이르렀다는 것(민족자결주의 원칙의 보편화), ⑤자본주의 세계체계는 지역간 계서제(핵심부, 주변부, 반주변부로 구성)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상․하향 이동이 이루어지는 체계라는 것, ⑥핵심과 반주변, 주변 사이에는 착취와 배제(주변부에 대한 선별적 착취와 나머지 지역에 대한 배제)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으며, 따라서 모든 주변부 국가들이 발전을 성취함으로써 반주변, 혹은 핵심으로 진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⑦자본주의 세계체계의 카오스를 극복하고 세계질서를 규정짓는 경제적, 군사적, 도덕적 우위를 확보한 국가가 헤게모니 국가로 등장할 수 있다는 것, ⑧헤게모니의 균열이 발생하고 쇠퇴하게 되면 다중심적 경쟁구조가 당분간 지속되면서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로 등장하기 위한 국가들 상호간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세계적 수준에서 발생하게 된다는 것(정치․군사적 재편 메커니즘을 통한 새로운 축적체제의 구축) 등이다.오간스키(A.F.K Organski)의 ‘힘의 전이’(power transition) 이론 역시 세계체제론의 헤게모니 이행론과

19) 통합의 방식은 식민지체제일 수도 있고, 초국적 법인자본의 힘에 의한 전세계적 축적체제일 수도 있다. 이는 자본의 축적 메커니즘이 정태적이고 고정된 해답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변형될 수 있는 동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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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한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그 역시 주권국가들이 계서제를 형성하고 있는 국제정치구조 그 자체로부터 전쟁의 원인을 찾고 있으며, 국제정치질서를 지배하고 있는 기존의 강대국과 이 지배권에 도전하는 신흥 강대국간의 쟁탈전의 형식으로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고 설명한다. 물론 그의 이론이 기존의 강대국과 그들의 동맹국들의 힘이 도전 세력들의 힘보다 훨씬 강할 때 평화가 달성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실천적으로는 평화를 위해 현상유지를 주장하게 되는 역설적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현실 분석 자체가 그릇되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이와 같은 세계체제론과 오간스키의 분석을 받아들인다면, 전쟁이 팽창적 성격을 갖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와 계서제를 이루면서 항상적인 이동을 모색하는 국가간체계로 구성된 자본주의 세계체제 그 자체로부터 발생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서로 경쟁하는 혹은 서로 상반되는 ‘민족(국가)적 이해’를 추구하는 양식(노예무역→식민주의→신식민주의→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의 재편 등으로의 변화)은 역사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상반되는 이해의 충돌과 그로 인한 전쟁 그 자체를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아가 정성진(2000)은 자본주의에서는 대량살육과 파괴가 도리어 발전의 요인이 될 수 있음을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이 한국자본주의의 고도축적 메커니즘에 미친 영향을 근거로 주장하고 있다. 그는 전후의 황금시대는 종전과 함께 곧바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2차대전 직후 전세계적으로 분출한 대중투쟁을 분쇄하고 영구군비경제를 다시 작동시킴20)으로써만 가능했다고 본다. 군비경제와 케인즈주의21)의 결합으로서의 국제적인 군사 케인즈주의가 전후 황금시대의 비밀이며, 한국과 일본, 서독의 경제성장 역시 이러한 군비경제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전쟁은 체계의 카오스를 극복하고 새로운 자본축적의 메커니즘을 구축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할 뿐만 아니라, 경제의 군사화와 군사의 경제화의 상호결합이 자본주의 경제에서 결코 예외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탈냉전 이후 군사케인즈주의로부터 일정하게 결별했던 미국 자본주의가 최근에 와서 다시 군사화에 호소하게 되는 이유에 대한 분석도 이로부터 일정한 시사점을 얻어낼 수 있다.그렇다면 전쟁으로부터 근본적으로 해방될 수 있는 권리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변혁을 목표로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 단순히 세력균형정책, 핵전쟁 방지나 무기감축을 위한 국제협정의 체결, 공동안보의 추구, 국제적 협력의 강화 등만을 통해서 전쟁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신자유주의와 군사화에 대한 반대: 금융자본과 군산복합체의 동거가 불러올 파괴적 위협

9․11 테러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보복전쟁 이후,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쿠바, 북한 등으로의 전쟁의 확대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이 중동과 중앙아시아에 존재하는 석유와 천연가스라는 거대한 자원을 확보하는 한편, 자신의 헤게모니에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는 국가들로부터 이들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하다.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뿌리내린 국가에서 군사행동에 대한 호소가 전국민적 지지를 이끌어내는 한편 동맹국들의 지원을 얻어내거나 적어도 다른 나라의 견제를 받지 않으려면, 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9․11 테러는 미국 자본주의와 미국의 지배엘리트들에게는 정치적 ‘선물’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미국이 이른바 ‘악의 축’으로 거론된 나라들을 테러리즘을 지원하는 (비민주적인) ‘실패한 국가들’로 명명하며 개입 위협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렇다면, ‘대테러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이 점점 더 군사화(군국주의와 군비증강)에 호소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세계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와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 이후, 발언권을 강화하

20) 영구군비경제를 통해 자본주의의 위기(대공황)를 극복할 수 있음은 이미 2차대전을 통해 입증된 바 있다.21) 케인즈주의의 핵심은 국가가 재정정책을 통해 법인자본의 성장을 육성하고, 법인자본에 고유한 금융적 불안

정성을 국가가 규제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 재무부가 중앙은행을, 중앙은행이 금융을 규제하는 것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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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시작한 금융자본은 미국정부의 정책적 지원을 등에 업고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를 통해 위기를 돌파하고자 하였다. 이들 금융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새로운 자본의 축적 메커니즘이 바로 신자유주의인 것이다. ‘정치적․군사적 우위’를 앞세운 미국은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세계무역질서를 구축하는 한편, 각국에도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을 강요함으로써 세계 자본을 다시 미국으로 집중시킴으로써 미국 헤게모니의 위기를 일정하게 지연시키고 있다.22)

이러한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양극화와 국가간 양극화를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중심부 내에서도 사회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의 저항이 갈수록 높아지는 결과를 초래하는 한편, 더 이상 냉전체제 하에서의 전지구적 뉴딜정책의 상대적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사실상 배제된 지역으로 전락하고 민족경제적 통합력까지 상실한 남반구 국가들에서는 끊임없는 내전과 군사쿠데타, 테러리즘, 민족적․종교적 정체성에 기반한 미국식 자유주의에 대한 저항 등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군사화에 더욱 더 호소함으로써 얻게 되는 직․간접적 이익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①점차 심화되는 국지적 분쟁을 활용하여 개입해 들어가면서 석유․천연가스 등 핵심자원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함으로써 미국 자본주의의 생명력을 연장시킨다. ②미국의 군사적 우위와 각 지역에 대한 정치적 우위를 계속 확보해나감으로써 자신의 헤게모니에 도전하는 지역패권국가나 잠재적인 헤게모니 경합국의 성장을 가로막을 수 있다. ③테러리즘의 위협을 명분으로 전세계적 공안분위기를 형성함으로써 군수산업의 성장과 투자 확대를 유도함으로써 미국경제가 침체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활로를 모색할 수 있다. 미국이 가장 앞서 있는 분야 가운데 하나가 군의 정보화와 우주화에 있는 만큼, 90년대 미국의 ‘신경제’ 붐을 일으킨 IT산업의 거품이 빠지면서 이 분야에서 철수한 금융자본들이 새로운 투자처로서 군수산업분야를 선택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전쟁의 세계화, IT산업의 군사화).23) ④전세계적 공안 정국을 조성함으로써 전세계적인 ‘반신자유주의’ 저항을 잠재우고, 다양한 사회적 저항들을 억압할 수 있는 민주적 권리들의 후퇴를 이루어냄으로서 초과착취의 메커니즘을 구축할 수 있다. 이러한 미국의 전략이 계속해서 추진될 경우, 전세계적 군사화의 수준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으며 정치군사적 분쟁도 앞으로 계속해서 심화될 것이며, 민주적 제반 권리들이 억압․후퇴하는 역전현상도 더욱 두드러질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미국의 패권주의에 반대하는 전세계적 운동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운동과 반전평화운동과 함께 연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평화권의 실현은 현재의 군사화와 전쟁위협의 고조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 군산복합체에 대한 반대, 전세계적 군사화에 대한 반대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인도적 간섭 ‘전쟁’에 대한 반대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인도적 개입이 이루어진 사례들을 살펴보면, 인도주의나 인권이 서구의 군사행동을 정당화하는 주된 명분으로서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영토 정복과 강압적 선교에 대해서는 ‘문명화’, ‘숭고한 백인의 사명’을 앞세워 정당화하면서도, 이러한 침략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나 대량학살’이 자행되었을 경우에는 인도적 개입을 명분 삼아 군사행동을 본격화함으로써 식민화를 추진해 온 것이 자본주의의 역사였던 것이다.

22) 과거에는 헤게모니 국가의 헤게모니가 쇠퇴할 경우, 자본이 새로운 투자처를 향해 이동함으로써 새로운 헤게모니 경합국가의 성장의 토대를 제공하였다.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다시 미국으로의 헤게모니 이행과정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었다. 이와는 달리, 미국 헤게모니의 위기는 미국에 대항할 만한 헤게모니 경합국의 출현이 뚜렷하지 않은 상태에서 발생하였고, 미국의 군사적 우위 하에 다시 미국으로 자본이 집중되는 현상을 나타내게 되었다. 이는 과잉팽창된 금융자본주의의 위기가 세계경제에 미칠 파급효과가 그만큼 더 큰 파괴력을 가질 것을 예상하게 한다.

23) 탈냉전이 곧 탈군사화로 이어지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미국의 군산복합체는 90년대 초반 합병․인수․민수산업으로의 전환 등의 재구조화 과정을 거쳐 더욱 거대화되었다. 이들 군산복합체는 군사화를 적극적으로 추동해내는 직접적인 행위자로서 기능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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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인도적 개입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살펴보면, 자국의 이해와 긴밀한 연관성이 포착되지 않을 때에는 주권존중의 원칙이나 내정 불간섭의 원칙을 내세워 인권침해의 현실을 무시하거나 형식적인 외교 노력만 되풀이하다가 자신의 이해 관철을 위한 효과적 수단으로서 전쟁이 선택될 수 있는 상황이 오면 인권을 정당화의 명분으로 차용하면서 군사행동을 감행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설령 인권침해의 중지가 개입의 주된 목적이 되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다른 전략적 이해를 부가적으로 획득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지 않는다면 실제로 군사행동에 나서지는 않는다. 더구나 그러한 군사행동은 국제평화를 위해 마련되어 온 제도적 기반을 송두리째 위협하고, 종종 더 심각한 인권침해를 수반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평화권은 인도적 간섭 전쟁에 대한 반대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주권의 우위를 내세워 인도적 간섭에 반대하는 것과 인민(민중)의 평화권을 근거로 인도적 간섭에 반대하는 것과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 전쟁은 본질적으로 국가와 국가 사이의 충돌이 아니라, 각국의 소수 지배엘리트들이 나머지 민중의 희생을 기반으로 벌이는 충돌이기 때문이다. 또한 주권의 우위를 내세울 경우 ‘인권의 국제주의적 원칙’을 후퇴시키고 인권침해에 대한 전세계 민중들의 공동의 저항을 위한 기반을 잠식하게 되는 원치 않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인도적 간섭 전쟁에 반대한다는 것은 주권을 내세운 정치엘리트들의 보호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민중의 평화권을 옹호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인도주의와 인권을 내세운 전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의 국제적 연대의 틀을 넓히고 인권침해에 대한 조기경보장치를 가동하며, 전쟁의 발발로까지 이어지지 않도록 인권침해에 대한 국제적 저항과 해결을 위한 노력을 지속시켜 나가는 것, 그리고 인권침해에 저항하는 국제적 수준에서 전쟁범죄나 반인도적 범죄를 처벌할 수 있는 장치를 발전시키기 위한 지속적 노력이 요청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24)

2) 전쟁시 폭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권리

전쟁시기에는 인권에 대한 총체적 부정 혹은 더 심각한 형태의 인권침해가 자행된다는 것은 자명하다. 한국전쟁은 물론이고 많은 전쟁시기에 자행된 대량학살이 군사전략이나 공포의 확산을 통한 잠재적 적에 대한 위협을 목적으로 한 전략으로서 체계적으로 자행되었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바 있다. 또한 여성들은 흔히 전쟁의 약탈품으로서 간주되어 왔으며, 적의 절멸이나 공동체에 대한 파괴, 아군의 사기 진작 등을 목적으로 여성들을 다양한 형태로 동원, 착취, 학살해 온 것도 전쟁의 역사가 이미 알려주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동성애자나 소수민족, 이주자 등 사회적 약자들이 전쟁시기에 주된 공격의 목표가 된다는 것도 분명하다. 이처럼, 전쟁을 ‘누구의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하나의 전쟁이 아니라 수많은 전쟁들로 경험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의 와중에서 도대체 어떠한 일들이 발생하는지, 누가 주된 피해자가 되는지를 밝혀내고, 그러한 전쟁의 인권 파괴 메커니즘에 구체적으로 반대하고 규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을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한 평화권의 내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동의에 기반하지 않은 강제징집을 당하지 않을 권리, 무기제조산업으로의 강제 투입을 거부할 권리, 아동의 전투병 동원 금지, 전쟁시 성노예 및 여성에 대한 성폭력 금지, 학살 금지, 민간인과 전투력을 상실한 군인에 대한 공격 금지, 전쟁목적상 강요되는 강제 노동이나

24) 본인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공습 경고가 내려졌을 때, 전세계에서 반신자유주의 운동가들과 평화운동가들이 수도 카불로 몰려가 반(反)텔레반과 반전을 동시에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이는 분명 목숨을 건 위험한 행동이고 그 실천을 조직화하지는 못하였지만, 이것이야말로 가장 충실한 반전평화운동이요 인권운동이요 민중들의 국제적 연대를 보여줄 수 있는 운동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만약 전세계에서 몰려든 운동들가들이 아프간 민중과 전쟁의 이유로 거론된 아프간 여성들과 함께 공습 반대를 외치면서 동시에 반텔레반 운동을 전개하였더라면, 과연 미국이 공습을 감행할 수 있었을까? 설명 공습이 감행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전쟁의 본질이 미국과 탈레반의 전쟁도 아니요, 미국과 테러리즘간의 전쟁도 아니요, 미국의 지배 엘리트와 전세계 민중들 간의 전쟁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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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이주 금지, 종교적․민족적․이념적 소수자들에 대한 공격 금지, 예비검속이나 고문․사법외(extra-judicial) 처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 전쟁 자체에 반대할 수 있는 의사표현의 자유 등이 구체적으로 평화권의 내용으로 포괄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들 권리들 중에는 이미 반인도적 범죄나 전쟁범죄 등으로 규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것도 있으나, 그것이 금지되는 행위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그 실현을 요구하는 인간의 권리로서는 확립되지 못하였고 그 실현을 위한 제도적 기반이 아직까지도 완비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또한 양심적 병역거부권이나 전쟁 자체에 반대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 등은 아직도 형성되고 있는 권리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권리들을 평화권의 개념적 우산 하에 적극적으로 포괄하고 이를 기존의 인권체계 내에 통합시키면서 그 실현을 위한 장치의 마련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5. 일상적 폭력과 전쟁폭력의 연관성을 사고하기

앞서 구조적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은 기존의 인권체계 내에서도 충분히 담보될 수 있는 것이라고 서술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폭력이 일상의 폭력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평화권이 실현되기 위한 조건을 만들어가는 평화시의 노력들이 어떻게 인권의 실현과 연결되어야 하는지에 동시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구조적 폭력이라는 개념의 유의미성은 인권에 대한 부정이 비평화의 상태를 야기하게 되는 근본 원인이라는 점, 그리고 전쟁기간 동안에도 평화시의 인권에 대한 부정의 메커니즘이 지속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일례로 전쟁시 여성에게 자행되는 폭력은 평화시 여성에 대한 폭력의 연장이다)을 드러내는 데 있는 것이다. 따라서 평화권의 독자적 내용으로서 일상적 폭력의 내용을 포함시키지는 않더라도, 평화권을 인권의 체계 내에 통합시킬 때에는 이러한 전쟁폭력과 일상의 구조적 폭력 사이의 연관성, 평화권과 다른 인권들과의 상호관계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바로 이러한 연관성을 폭로하고 평화권의 인간의 권리로서 승인받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나가는 것은 인권운동과 평화운동이 연대하여 담당해야 할 공동의 과제일 것이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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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6] 저항과 불복종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시민불복종운동과 저항권을 생각한다

- 박래군* 출처 : <인권오름> 제1호, 2006년 4월 26일

최근 '시민불복종운동'이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군기지 이전 예정지인 평택 팽성읍 대추리, 도두리 일대에 서 인권활동가들이 법원의 대추분교 행정대집행을 저지했고, 국방부의 토지 강제수용을 위해 동원된 용역과 경찰의 제지를 뚫고 농지를 파헤치는 포크레인과 레미콘 위에 올라가 작업을 중지시켰다. 분명 국회에서 제정된 법률과 법원의 결정에 근거한 국방부의 행위는 법적으로는 정당한 행위였고, 인권활동가들의 행위는 불법행위였다. 그럼에도 인권활동가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정당하다며 오히려 국방부의 강제 토지수용을 비판한다. 그 주장의 근저에는 시민불복종, 저항권의 논리가 자리하고 있다. 

의식적인 법 위반 운동

시민불복종운동은 “공적으로 선언되고 윤리적 규범적으로 근거지어진 상징적 항의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의식적인 법 위반” 운동으로 정리되고 있다. “개인이든 단체로든, 공적으로, 폭력에 의하지 않고, 정치적 도덕적 근거에서 금지규범의 구성요건을 충족시킨 행위는(즉, 법규의 위반행위는), 그 행위가 중대한 불법에 대항하여 항의하는 행위이며, 그 항의가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에는 헌법적으로 정당화된다.”고 한다. 

이런 시민불복종운동의 근원에는 근대자본주의 사회의 인권이론의 탄생과정에서 발생한 저항권론이 자리 잡고 있다. 로크는 정부는 “사회구성원의 생명, 자유, 재산을 보호·유지하는 것 이외의 다른 목적과 다른 척도를 가질 수 없다.”고 하면서, 정부가 계약 목적에서 어긋날 때는 국민은 복종의무로부터 벗어나 정당하게 저항하는 것이 허용된다고 주장했다. 루소도 국가권력의 남용은 사회계약을 무효화하고 국가의 해체를 가져온다고 주장하면서 이럴 경우 국민들은 다시 ‘자연적 자유’를 저항권을 발동하여 획득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근대 사상가들은 상당 부분 근대국가의 국민의 기본권을 부정하는 권력행위에 대해서는 저항의 권리를 주장하게 되었다. 

저항권과 시민불복종운동

이런 저항권의 주장은 근대 이후의 헌법들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프랑스 인권선언은 제2조에서 “모든 정치적 결합의 목적은 생래적이고 불가양의 인권을 보호하는데 있다. 그것은 자유권, 소유권, 안전권, 그리고 압제에 대한 저항권이다.”고 선언했다. 독일 베를린 헌법 제23조도 “헌법에서 보장된 기본권이 현저하게 침해될 때에는 모든 사람은 저항할 권리를 가진다.”고 했으며, 독일 브레멘주 헌법 제19조는 “헌법에서 보장된 인권이 공권력에 의해 헌법에 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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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침해될 때에는 저항은 모든 사람의 권리인 동시에 의무이다.”고 규정하였다. 세계인권선언도 전문에서 저항권을 긍정하고 있고, 우리나라 헌법도 마찬가지로 전문에서 4.19 혁명의 전통을 언급하여 이를 긍정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유엔은 1998년 인권옹호자 선언을 채택하여 인권활동가만이 아니라 인권옹호 활동을 펼치는 모든 이들을 보호할 국가의 의무를 천명하기까지 했다. 

이런 저항권은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최후의 권리로서) 인권’이 된다. 인권의 보호를 의무로 갖는 ‘법치국가’가 그 역할과는 반대로 압제의 역할을 할 때 그 국가는 ‘불법국가’가 되며, 이런 국가는 국민의 저항의 대상이 된다. 

저항권은 크게 비판·반대권으로서의 저항권, 헌법수호권으로서의 저항권, 인권보호권으로서의 저항권으로 나누는데, 시민불복종은 비판·반대권으로서의 저항권으로 분류된다. 그래서 시민불복종은 헌법내적 저항권이라고 하고, ‘작은 저항권’이라고도 불린다. 시민불복종운동은 그 발전 양상에 따라 혁명적 불복종운동으로 전화될 수 있으며, 이는 저항권의 성격으로 발전된다고 볼 수 있다. 

시민불복종의 요건으로는 ‘공공적 성격’, ‘비폭력적’, ‘법률을 의도적으로 위반할 것’ 등을 들 수 있지만, 비폭력의 문제는 반드시 필요한 요건은 아니다. 그래서 종합적으로 시민불복종을 정리하면,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의도적이며 공개적으로 법률이나 명령을 위반하거나 법률에 대한 공적인 해석 또는 정의에 대한 일방적 해석에 항의하는 행위이다. 폭력을 행사하지 말아야 하지만 사회적 통념에 의해 인정되는 한계 내에서는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또한 부정한 기업과 사회단체에 대해서도 행사될 수 있다.”로 될 수 있을 것이다. 

시민불복종운동의 사례들

시민불복종운동이 사례는 무수히 많다. 흑인 노예제도에 저항하여 납세를 거부한 미국의 소로우를 비롯하여 영국의 식민지정책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불복종운동을 선택한 간디의 사례, 흑인민권운동은 전개한 마틴 루터 킹의 운동, 반전운동,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운동은 대표적인 경우다. 

1996년 영국에서 네 명의 여성들은 당시 동티모르에서 인종말살정책을 폈던 인도네시아 정부에 판매될 영국제 호크전투기가 보관된 군사기지에 몰래 침입하여 전투기를 파손하였지만, 법원은 이들을 무죄석방하였다. 또 1999년에도 ‘행동하는 동료들’ 소속의 앤지 젤터와 동료들은 트라이던트 핵잠수함 기지에 잠입하여 4시간 동안 기지 내부에 있던 대부분의 컴퓨터와 관련 장비와 자료들을 호수에 던져 수장시켜 버린 뒤 “핵 살인을 위한 연구를 중단하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그렇지만 영국의 법원은 이들이 행위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비록 불법행위였지만, 미래에 있을 더 큰 불행을 막아낸 행위로 인정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사례들은 많다. 1980년대 후반의 KBS 시청료 납부 거부운동은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불복종운동이 대중들의 폭발적인 투쟁과 결합하여 종종 나타났다. 4월 혁명이나 1980년 광주민중항쟁도 그렇고, 6월 항쟁은 집단적인 혁명적 시민불복종운동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당시에는 실정법을 위반한 집단행동이고, 심지어는 폭동이라고까지 규정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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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역사는 이들의 투쟁을 민주화를 위한 정당한 투쟁으로 평가하고 있다. 

불복종운동을 적극적으로 기획하자

최근 중증 장애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장애인 이동권 투쟁은 합법과 불법의 투쟁방법을 결합하여 성과를 낸 투쟁이었다. 장애인들은 도로를 점거하고, 버스에 쇠사슬을 묶어 이동도 할 수 없는 장애인 차별 실태를 폭로했고, 이로써 장애인들을 비롯한 교통 약자들의 이동권을 사회적 이슈로 만들었고, 드디어는 법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인권운동은 이런 시민불복종운동의 원리를 적극적으로 채택할 필요가 있다. 최근 한국의 사회운동은 지나치게 합법적인 영역, 합리적인 대안 제시에 치우치다 보니 역동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국회에서 제정된 법률이라고 모두 긍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잘못된 법은 의식적으로 위반하여 그 법률의 문제를 드러내고,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투쟁을 통해서 그 잘못을 바로 잡는 적극적인 활동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런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인권운동은 끊임없이 인권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다. 

시민불복종운동은 인권을 회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으로 인권운동이 수용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인권운동은 반인권적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시민불복종운동을 기획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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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7] 저항과 불복종

[인권문헌읽기] 시민불복종의 고전들 참을 수 없는 악이 ‘시민불복종’을 정당화한다

- 류은숙(인권연구소 창)*출처 : <인권오름> 제108호, 2008년 6월 17일

시민불복종은 인권운동의 역사에서 중심을 차지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합법성보다는 정의에 따라 스스로의 행동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노암 촘스키의 글이다.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불복종 운동에 대하여 1967년 당시 뉴욕타임스가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십여 명이 넘는 학자와 저술가들에게 ‘무엇이 불복종을 정당화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 글은 그중 노암 촘스키의 답변이다. 본문에서 베트남전에 대해 말한 부분을 생략하고 번역했다. 베트남전을 오늘의 우리 상황으로 바꿔놓고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5, 6월 뜨겁게 펼쳐지고 있는 불복종의 잔치에 시민불복종의 원조들을 초대해보려 한다. 

연행하겠다는 경찰 앞에서 “그래 날 잡아가라”고 전경버스에 오른 사람들에게, 시민불복종에 헌신하는 사람은 기쁘게 투옥을 감내해야 한다는 간디가 박수를 보낸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등장하여 자유발언을 한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합니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습니까? (박수) “불의가 당신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이 되라고 요구한다면, 분명히 말하는데, 그 법을 어기십시오.” (함성)“오늘날 이 정부에 대하여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한 인간으로서 올바른 자세일까요? 나는 대답합니다. 수치감 없이는 이 정부와 관계를 가질 수 없노라고 말입니다. 나는 노예의 정부이기도 한 이 정치적 조직을 나의 정부로 단 한순간이라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혁명의 권리를 인정합니다. 정부의 폭정이나 무능이 너무나 커서 참을 수 없을 때는 정부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정부에 저항하는 권리 말입니다.” (옳소)(옳소)“당신의 온몸으로 투표하십시오. 단지 한조각의 종이가 아니라 당신의 영향력 전부를 던지십시오.” (환호) (더 자세한 내용은 ‘도서출판 이레’의 『시민의 불복종』 참조)

다음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길거리 토론에 나선다. (대답 내용은 비폭력 시위를 벌인 혐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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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목사가 구속됐을 때, 감옥에서 데모를 비방한 동료 목사들의 성명서를 접하고 이를 반박해 쓴 ‘버밍햄감옥으로부터의 편지’에서 발췌해 구성했다.) 

* 왜 다른 의사 표현 방법도 많은데 꼭 데모를 해야 하는 거지요?

“왜 직접행동이냐고요? 왜 연좌데모를 하는 거냐고요? 협상이 더 나은 방도가 아니냐고요? 이러한 그대들의 의견은 전적으로 옳은 것이며 협상이야말로 우리의 행동이 원하는 궁극 목표입니다. 비폭력 직접행동은 위기와 긴장감을 조장시켜, 협상을 거부하는 사회를 곤경에 빠뜨리고 더 이상 협상에 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즉 사회의 쟁점들을 본격적으로 부각시켜 더 이상 흐지부지 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 직접행동의 추구하는 바이기 때문이오. … 더욱 나은 발전을 위해 건설적이고 비폭력적인 긴장은 필요한 것입니다. … 우리의 직접행동의 목표는 위기의식을 조장시켜 협상의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협상을 주장하는 그대들의 의견과 나의 생각은 조금도 다를 바 없소.” 

* 이제 막 시작한 정부 아닙니까? 좀 기다리고 지켜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시민권의 그 어느 한 부분도 압력을 가하지 않고서는 쟁취할 수 없었음을 인식해야할 것입니다. 유감스럽지만 특권층이 그들의 특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일은 역사적으로 한번도 없었소. … 우리는 피나는 경험을 통해 자유라는 것은 압박자가 거저 주는 것이 아니라 피억압자가 강력히 요구해야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 그런데 수 년 동안 ‘기다리라!’는 말만 들어왔소. 이 ‘기다리라’는 말은 항상 ‘결코 안된다!’라는 뜻으로 쓰여왔습니다. ‘지나치게 오래토록 지연된 정의는 부정된 정의다’라는 어느 저명한 법관의 말이 생각납니다.” 

* 불복종하려는 사람들의 편의대로 법을 골라가며 지키고 안 지키고 하면 법질서가 바로 설 수 있겠습니까?

“‘어떤 법은 지키고 어떤 법은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은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법에는 공정한 법과 불공정한 악법 등 두 가지 유형이 있다는 사실이 바로 이러한 질문의 답변이 될 것입니다. 나는 솔직히 공정한 법을 지키는데 제1인자가 되고 싶습니다. 공정한 법에 대해서는 합법적인 책임감뿐 아니라 도덕적인 책임감 때문에도 꼭 지켜야 합니다. 반대로 악법에 복종해서는 안 되는 도덕적 책임감까지 있어야 합니다. … 양심의 명령에 따라 악법이므로 복종하지 않겠다는 사람, 그래서 악법이 조장하는 불법에 도전하여 사회양심을 일깨우기 위해 감옥의 형벌조차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사람은 실제로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법을 존중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 시위대의 행동이 폭력사태를 초래한 것 아닌가요? 경찰만 나무랄 일이 아니잖아요. 

“우리의 행동이 비록 평화적이었다 할지라도 폭력 사태를 재촉시켰으므로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강도사건이 났을 경우 돈을 지니고 다닌 것이 강도를 유발시킨 원인이 되므로 피해자를 비난해야 한다는 논리도 나올 수 있겠습니다. …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쟁취하려는 노력이 폭력사태를 초래할까봐 억누르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연방법원의 판결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회는 마땅히 강도에게 벌을 주고 피해자는 보호해야 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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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악이 ‘시민불복종’을 정당화한다 (노암 촘스키, 1967 뉴욕타임스)

나는 미국의 정책에 대한 저항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느끼지만, -사실상 그것은 도덕적 필수물이다- 의견불일치가 포기돼야 한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 아무리 “자국의 이익”이라 할지라도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힘센 국가가 엄청난 고통과 파괴를 강제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시민불복종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악이다.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당국에 언제나 복종해야만 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어디엔가 선이 그어져야만 한다. 그 선 너머에 시민불복종이 있다. 시민불복종은 아주 수동적으로 정부가 주도한 폭력에 참여하는 걸 단지 거부하는 것일 수 있다. … 시민불복종은 전쟁을 만들어내는 기구에 상징적으로 맞서는 것일 수도 있다. 참여자들이 정부의 무력에 맞서 입장을 고수하고 한걸음도 물러나지 않을 때 그러한 상징적 대결은 시민불복종이 된다. 시민불복종은 상징적 행동을 넘어서서 전진하는 것일 수도 있다.

……

시민불복종의 한도는 대결하고 있는 악의 정도와 전략적 유효성과 도덕 원칙으로 결정돼야 한다. 원칙과 전략에 근거하여, 나는 시민불복종이 철저히 비폭력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지면상 이에 대한 근거와 결론에 대한 토론을 할 수는 없다.

제기된 마지막 질문은 중요한 질문이다. 미국의 정책을 방어하는 자들은 막연하게 공산주의의 “공격”을 말한다. 정확하게 언제 그런 “공격”이 있었던가? … 모두가 아는 것을 기술하려 하지 않겠다. 미국이 행한 바를 말하려고 부적절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의 폭력과 우리의 도덕적 겁으로 인한 희생자들에 대한 모욕이다. 그렇다, 시민불복종은 미국 역사에서 가

다.” 

* 시위대 속에는 순수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일부 극단론자가 배후조종을 하고 있지 않나요?

“극단론자냐 아니냐보다는 어떤 종류의 극단론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위한 극단론자입니까? 증오를 위한 극단론자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부정을 유지하기 위한 극단론자입니까? 정의의 연장을 위한 극단론자입니까? … 아마 전 세계는 창조적인 극단론자가 지독히 필요할 것입니다.”

* 한 달이 넘어가는데 지칠 때도 되지 않았나요? 곧 사그라들겠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과감히 일어나 흑백의 자리를 구분한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다니면서 ‘피로하지 않느냐’는 주위의 물음에 ‘나의 두 다리는 지쳤지만 나의 영혼은 편안하다’고 말한 몽고메리에 사는 72살의 노파. 그 노파로 상징되는 늙고 핍박받고 찌든 흑인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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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수치스러운 장을 끝내려는 노력 속에서 전적으로 정당화된다. 

극단의 도덕적 스펙트럼에서 따온 두 개의 인용구(각각은 매우 진실이다)로 마치겠다.(1) “자연적으로 보통 사람들은 전쟁을 원치 않는다. …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국가의 지도자들이고, 그 국가가 민주주의건, 파시스트 독재이건, 의회이건, 공산주의 독재이건 간에, 언제나 인민을 끌고 가는 것은 간단한 문제다. 목소리를 내건 침묵하건, 인민은 언제나 지도자들의 분부대로 하게끔 끌려갈 수 있다. 아주 간단하다. 인민들에게 이렇게 하기만 하면 된다. 침략을 받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애국심이 부족하며 국가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평화주의자들을 비난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모든 나라에서 똑같이 작동한다.”(2) “정의롭지 못한 법률과 관행이 살아남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에 복종하고 따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두려움에서 그렇게 한다. 악이 지속되는 것보다 사람들이 더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 첫 번째 인용구는 헤르만 괴링(히틀러의 심복이었던 나치장교)의 것이다. 시민불복종을 권하는 사람들은 이런 일이 이 나라에서 “똑같이 작동”하지 않기를 바라는 희망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인용은 에이 제이 무스떼(평화운동가)가 간디에 부연한 것이다. 이들의 말이 오늘날만큼 더 적절한 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