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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Chindia plus 9 July/August 2017 외환위기 발생 20년, 동남아 국가들의 고민 ▶10 태국, 바트화 폭락으로 외환위기 발생 ▶14 인도네시아, 핫머니 유출로 통화위기 경험 ▶16 외환위기 시기 상대적 반사이익 누린 중국 ▶18 한국, 적극적 구조조정으로 외환위기 극복 ▶20 외환위기 쓰나미 겪은 지 스무 해 새로운 도전 직면한 아시아 국가들 1997년 11월 21일 한국 정부는 처음 겪는 외환위기로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이후 한국 경제는 IMF 관리체제에 들어가면서 격동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위기의 시작은 태국이었다. 바트화 폭락으로 외환이 바닥난 태국이 그해 8월 IMF 구제금융을 신청했고, 10월 인도네시아에 이어 11월 한국까지 ‘쓰나미’가 몰려온 것이다. 20년 후 이들 국가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경제의 역동성이 떨어지고 중국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Cover Story Shutterstock

Cover Stor y - POSRI...경제위기가 심각해지자 태국 국민은 방콕 시내에서 달러 모으기 등 대규모 경제살리기 캠페인을 벌였다. [중앙포토] 외환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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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Cover Stor y - POSRI...경제위기가 심각해지자 태국 국민은 방콕 시내에서 달러 모으기 등 대규모 경제살리기 캠페인을 벌였다. [중앙포토] 외환위기

8 Chindia plus 9July/August 2017

외환위기 발생 20년, 동남아 국가들의 고민 ▶10

태국, 바트화 폭락으로 외환위기 발생 ▶14

인도네시아, 핫머니 유출로 통화위기 경험 ▶16

외환위기 시기 상대적 반사이익 누린 중국 ▶18

한국, 적극적 구조조정으로 외환위기 극복 ▶20

외환위기 쓰나미 겪은 지 스무 해 새로운 도전 직면한 아시아 국가들

1997년 11월 21일 한국 정부는 처음 겪는 외환위기로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이후 한국 경제는 IMF 관리체제에 들어가면서 격동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위기의 시작은 태국이었다. 바트화 폭락으로 외환이 바닥난 태국이 그해

8월 IMF 구제금융을 신청했고, 10월 인도네시아에 이어 11월 한국까지 ‘쓰나미’가

몰려온 것이다. 20년 후 이들 국가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경제의 역동성이

떨어지고 중국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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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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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Chindia plus 11July/August 2017

박번순 고려대 경상대학 경제학과 교수

[email protected]

아시아 외환위기 20년 투자 부진 새 과제

中과 차별화, 자국 기업 육성 전략 등 필요

시작은 태국이었다. 경제 상황 악화, 특히 수출 부진 때문에

태국 바트화는 1996년 말부터 런던·뉴욕·홍콩 등 역외 금

융시장에서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태국 중앙은행은 외환보

유액으로 바트화를 사들여야 했는데, 바트화 방어를 위해

5월 14일 밤 100억 달러 이상을 쏟아붓기도 했다. 외환보유

액 고갈로 태국이 7월 2일 바트화의 달러화 페그를 중단하

자 바트화 가치는 하루에 20%나 급락했다. 태국과 IMF는

8월 14일 170억 달러에 이르는 구제금융 패키지와 함께 경

제개혁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시작은 태국 바트화에 대한 투기적 공격과 위기의 확산

태국에 대한 IMF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금융시장에서 동

남아 통화가치는 계속 떨어졌다. 두 달이 채 가기도 전에 인

도네시아의 루피아화 가치가 30%나 떨어졌다. IMF와 인도

네시아는 10월 31일 400억 달러에 이르는 구제금융 프로그

램에 합의했다. 11월 중순 이후에는 한국 시장에서 자금이

이탈하면서 환율이 급등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11월 21일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고, IMF는 한국을 위해 570억

달러에 달하는 전례 없는 대규모 패키지를 마련했다. 12월

IMF의 1차 자금이 공급됐고, 일부 외채 조정도 이뤄지면

서 이듬해 1월 중순에는 인도네시아를 제외한 동아시아 국

가의 환율이 더 이상 상승하지는 않았다. IMF 프로그램 이

행을 두고 인도네시아가 1998년 들어 불투명한 행보를 보이

기 시작했다. 경제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난 이후 인도네시

아가 4월 IMF에 완전히 손을 들고 긴축정책의 일환으로 유

류 보조금을 삭감하자 타격을 받은 자카르타의 저소득층

이 시위에 나섰다. 인도네시아를 1967년부터 철권통치해 온

수하르토 대통령을 향한 분노, 그의 가족에 대한 특혜로 대

표되는 부정부패에 대한 염증, 주로 화교 자본으로 대표되

는 연고자본가에 대한 분노가 시위대를 거리로 불러냈다.

화교에 대한 무차별 공격이 있었고, 주요 화교 은행에서 예

금 인출사태가 발생했다. 다른 위기국의 외환시장이 안정된

이후에도 인도네시아 루피아화 가치는 1998년 6월까지 계

속 떨어졌다.

아시아가 다소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 즈음 위기는 아시아

밖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먼저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경제개

혁의 일환으로 민영화를 추진해 왔는데 취약한 금융, 옐친

정부의 불투명한 의사결정 등에 의한 부작용으로 경제난

에 빠졌다. 이 시기 IMF는 러시아에 긴급자금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의 방만한 재정 운용 등 개혁 조

치가 미흡해 IMF와 러시아는 계속 대립했다. 주식시장이

급락하는 등 위기가 악화되면서 러시아는 마침내 8월 루블

화 평가절하와 외채에 대한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기에 이르

렀다. 위기는 이제 러시아에서 브라질로 옮아갔다. 미국이

나 일본의 자본시장은 여전히 우울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고도성장 과정에서 경제체질 강화 실패로 위기 초래

그렇다면 왜 위기가 발생했을까? 아시아 경제위기는 통화가

치의 급격한 하락으로 촉발된 외환위기에서 시작해 금융위

기와 실물경제 위기, 정치사회적 위기로 퍼져나갔으며 지역

적으로도 확산됐다는 점에서 종합적이었다. 그러나 가장 많

이 언급된 위기 원인은 금융시스템 문제였다. 선진국의 금

융 개방 압력 아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방했고, 우연

찮게 태국에서 자금이 철수하면서 금융시장에 심리적 공

포가 만연하게 됐다는 것이다. 마치 어두운 극장에서 “불이

야” 소리에 관객들이 앞다투어 탈출하려는 상황과 같았다.

그렇다면 왜 태국에서 투기적 공격이 있었는가를 설명해

야 한다. 그것은 태국과 다른 동남아 국가들이 고도성장 과

정에서 경제체질을 강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방 선진

외환위기 발생 20년, 동남아 국가들의 고민 | Cover Story Cover Story | 외환위기 발생 20년, 동남아 국가들의 고민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태국은 바트화 가치가 5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경제위기가 심각해지자 태국 국민은 방콕 시내에서 달러 모으기 등 대규모 경제살리기 캠페인을 벌였다. [중앙포토]

외환위기 시기 아시아 국가의 환율 추이

주: 환율은 매입 종가 기준

97년 6월말(A) 최고환율(C) 가치변동(A/C)

한국 8861,960

(97.12.23)-54.8%

태국 24.6555.5

(98.1.12)-55.6%

인도네시아 2,43115,000

(98.6.17)-83.8%

말레이시아 2.5244.68

(98.1.8)-46.1%

위기 전염국의 무역수지 및 경상수지 대 GDP 비율 (단위: 억 달러, %) / 자료: 세계은행

1990~1996

1997 19981999~2005

2006~2010

2011~2015

한국-83.2 -84.5 390.3 175.7 198.2 481.1

-1.4 -1.8 10.6 2.1 1.6 5.1

태국-109.4 -54.8 114.9 29.7 85.0 -73.3

-6.9 -2.0 12.5 3.7 3.7 2.6

인도네시아60.1 49.9 150.9 184.9 215.7 52.1

-2.6 -2.3 4.3 3.1 1.6 -2.2

말레이시아-6.2 -2.9 149.9 191.5 341.3 286.4

-5.6 -5.9 13.2 11.2 14.8 5.4

무역수지 경상수지(대GD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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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Chindia plus 13July/August 2017

위기 이전인 1996년의 실질소득을 회복하기까지는 인도네

시아가 거의 10년, 말레이시아가 5년, 태국은 7~8년이 걸렸

다. 위기 발발 20년이 된 지금 경제 규모는 대폭 커졌다. 수

출 규모도 증가했고 경상수지는 흑자로 고착되고 있다. 증

권시장도 부침을 겪었지만 대폭 상승했는데 인도네시아 지

수는 최저치에서 10배 이상 오르기도 했다. 외채문제도 거

의 해소했다. 예컨대 1998년 인도네시아의 외채는 GNI의

168%에서 2015년 37%로 줄었고 태국의 경우도 96%에서

35.2%로 감소했다. 또한 충분한 외환보유액을 쌓았고 동아

시아의 금융협력체제도 가동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금리

인상, 영국의 브렉시트, 최근의 수출 부진 등 동남아 위기 국

가의 외환시장에 영향을 미칠 요소는 많지만 곧 다시 위기

를 겪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동남아 위기 국가들은 지속 가능한 성장의 길

로 들어섰는가? 이들은 외환위기에서 회복하기는 했지만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첫째는 위기국의 투자부진이 현재도 계속돼 경제적 역동

성이 대폭 하락했다는 점이다. 투자부진은 미래의 생산 능

력 확충을 더디게 하는 대표적 요인인데, 말레이시아 등에

서 투자율은 GDP의 20%를 밑돌기도 했다. 최근 투자율이

증가하고 있지만 1990년대 전반의 높은 투자율로 돌아가지

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국내 기업의 해외투자

가 늘어가고 있는 점도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이다. 국내에서

투자수익률이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성장률도 대

폭 하락했다. 같은 개발도상국인 중국의 성장률이 10% 이

상 될 때도 동남아의 성장률은 5% 정도에 그쳤다. 많은 전

문가는 동남아 위기 국가가 중진국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전망한다.

둘째는 중국 주도의 아시아 경제질서에 동남아 위기 국가

들이 어떤 전략으로 대응해야 하는가가 아직도 분명하지 않

다는 점이다. 동남아 위기 국가들은 중국의 세계무역기구

(WTO) 가입과 고도성장으로 대중국 수출을 대폭 늘릴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중국의 고도성장 기간이 종료되면서 자

원가격이 하락하고, 중국이 부품에서 최종 조립품까지 생산

하는 체제를 갖춰가면서 동남아 위기 국가들의 대중국 수출

이 더 이상 늘어나지 않고 있다. 비아시아권 시장에서 중국

제품은 기존의 노동집약적 동남아 위기 국가들의 상품을 밀

어내고 있다. 현재 동아시아 각국의 통화가치는 아직도 위기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지 못했음에도 인도네시아·말레이시

아·태국 등의 최근 수출은 2010년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중

국과 같은 발전 모델을 따를 것인지 대안 모델을 추구할 것

인지는 위기 이후 20년이 되어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다.

셋째, 동남아 위기 국가들은 수출 부진과 투자부진에 대

해 소비 중심의 성장을 중시하고 있으나 이 또한 여의치

않다는 것이다. 위기는 개방을 확대했고, 이는 계층 간 경

제 격차를 더욱 심화시켰다. 크레디스위스 은행이 추산한

각국의 자산 소유 구조를 보면 태국과 인도네시아의 경우

2016년 현재 상위 1%가 차지하는 자산 비중이 태국 58.0%,

인도네시아 49.3%에 이르렀다. 내수 확대를 위한 방안으로

정부 지출 증대도 생각해 볼 수 있으나 이는 정부 채무가 늘

어나는 문제가 있다.

이런 대내외적 도전에 직면한 아세안은 2015년 경제공

동체를 출범시켰다. 역내 무역을 확대하고 시장통합을 통해

외국인직접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기대만큼

역내 무역이 늘어나지 않고 있다. 투자의 경우도 위기국이

아닌 베트남·싱가포르에 더 많이 몰리는 상황이다. 중국이

가진 거대한 흡인력이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중국과 차별화하는 전략이 필요해 보인다. 권위주의적 체제

를 보다 민주적 체제로 전환하고 개인의 창의성이 발휘되는

사회로 만들어 가야 한다. 또한 다국적기업이 아닌 기술 기

반의 자국 기업을 육성해야 한다. 그런 사회가 쉬이 오지 않

을 것 같다는 것이 외환위기 발발 20년이 지난 현재 동남아

위기 국가들이 가진 고민이다.

외환위기 발생 20년, 동남아 국가들의 고민 | Cover Story Cover Story | 외환위기 발생 20년, 동남아 국가들의 고민

국이 1985년에 결정한 플라자 합의로 일본 엔화가치가 상

승하면서 수출경쟁력을 상실하게 된 일본 기업들이 동남아

에 투자를 확대했다. 1990~96년 태국의 연평균 투자증가

율은 12.7%, 말레이시아는 그보다 더 높은 17.9%에 이르렀

다. 투자와 수출의 증가로 이 기간 연평균 성장률은 태국이

8.3%, 말레이시아가 9.5%, 인도네시아가 7.2%에 이르렀다.

수출이 급증했으나 동시에 자본재와 내구소비재 수입 증

가로 무역수지는 적자를 기록했다. 무역수지 적자는 고스란

히 경상수지 적자로 나타났다. 태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이

기간 평균 국내총생산(GDP) 대비 6.9%에 이르렀고 말레이

시아도 5.6%, 심지어 무역수지에서는 흑자를 내던 인도네

시아조차 경상수지 적자가 GDP의 2.6%로 나타났다. 서구

의 투기자본이 동남아가 환율제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없

을 것이라고 본 것은 당연했다.

경제적 위기의 심화와 구조조정

태국·한국·말레이시아 등의 외환시장은 1998년 들어 더 이

상 악화되지는 않았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나왔다. 태국·인

도네시아·한국 등 구제금융 지원을 받은 국가들은 IMF 프

로그램을 이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IMF 프로그램의 핵심

은 긴축이었다. 재정 지출을 축소하고 금리를 대폭 인상하

도록 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방만한 재정 운용이나 저금리

로 물가가 상승하고 경쟁력이 저하됐으며 비효율적인 투자

가 이뤄졌다는 것이었다. 고금리는 당장 탈출하는 외화를

붙들어 매는 역할도 할 것으로 믿어졌다. 돌아보면 IMF는

아시아 외환위기의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재정긴

축과 고금리로 외환시장이 안정될 것이고 경제는 정상으로

복귀할 것이라고 기대한 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이었다. 경

기 침체로 고도성장기에 대규모의 차입금을 안고 있던 기업

들은 매출이 감소했는데 고금리는 또 다른 타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증권시장은 폭락을 거듭해 말레이시아·

태국·인도네시아의 1998년 6월 말 주가지수는 1년 전에 비

해 모두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진행 중이던 투자는 중단됐

고 신규 투자도 이뤄질 수 없었다. 1998년 동남아 위기 국가

의 투자는 전년 대비 30~40% 감소했다. 당연히 경기는 급

락했다. IMF와 태국은 8월 합의한 1차 구제금융 패키지에

서 1998년 경제성장 목표를 3.5%로 잡았고, 인도네시아와

1997년 10월 합의한 1차 협약에서 1998년 성장률을 3.0%

로 예상했다. 그러나 1998년 인도네시아의 경제성장률은

-13.1%였고 태국의 성장률도 -7.6%를 기록했다. 인플레이션

의 경우 태국 5.0%, 인도네시아 9.0%로 예상했지만 실제로

인도네시아의 물가상승률은 58.4%에 이르렀다. 대신 경상수

지는 적자에서 큰 폭의 흑자로 전환했다. 이는 일차적으로

환율 상승으로 수출이 급증했고, 투자 급감으로 수입이 감

소했기 때문이었다. 1990년에서 1997년까지 연평균 100억

달러 이상의 무역적자를 기록했던 태국은 1998년 115억 달

러의 흑자로 돌아섰다. 말레이시아도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

섰고 인도네시아의 경우 흑자 규모가 대폭 증가했다.

경제 회복과 재건을 위해 위기 전염 국가들은 고통을 분

담하는 형태로 구조개혁을 추진했다. 금융 기능을 정상화

하고 기업이 생산하도록 해야 했다. 한국·태국·인도네시아의

구조개혁은 유사했다. 생존 가능성이 있는 부실기업에 대해

서는 채권 금융기관의 출자전환이나 증자를 추진했고, 금

융 구조조정을 위해 회생 가망이 없는 금융기관은 폐쇄했

다. 회생이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금융기관에 대해서는 부실

채권은 자산관리공사를 설립해 인수하고 새로 공적자금을

은행에 투입하는 형태였다. 동시에 ‘국부 유출’이라는 비판

을 받으면서도 기업이나 은행의 해외 매각도 권장됐다. 노동

시장의 유연성 제고라는 이유로 해고가 더 자유로워졌다. 아

시아 국민들이 근면과 절약으로 만든 자산이 저가에 해외에

매각되면 새 주인은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고용을 축소했다.

위기 극복을 위한 지역적 노력도 병행됐고, 좀 더 장기적

으로 추진됐다. 동남아 위기의 직접 당사자인 동남아국가연

합(아세안) 국가들은 경제적 통합을 추진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에 박차를 가했다. 무역과 투자뿐 아니라 정치·사회문

화 협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협력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동아시아 차원에서도 외환위기로 동아시아 지역 경제가 밀

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점, 아시아 경제가 외부 금융에 과도

하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 인식됐다. 1997년 12월 처음으

로 아세안 10개국과 한국·중국·일본이 아세안+3 정상회의

를 개최했다. 이 회의는 이후 항구적 회의로 정착했고 외환

위기를 방어하기 위한 통화스와프체제인 치앙마이 이니셔

티브, 미 달러 의존도를 줄이고 역내 자원을 활용하기 위한

아시아 채권시장 육성 등에 대한 노력도 이뤄졌다. 아시아

역내 무역자유화에 대한 논의도 활발히 전개됐다.

위기 국가는 성장을 지속할 수 있을까?

동남아 위기 국가들의 경제적 상황은 국가마다 다르지만

자산 상위 그룹별

자산 소유 비중(2016)

자료: Credit Suisse,

Global wealth Databook 2016. table 6-5

1%5%10%

인도네시아

태국

일본

한국

49.3 66.8

75.7

58.0 72.9

79.9

18.5 36.3 48.4

38.2 56.8 67.1

아시아 국가의 성장률과 투자율

(단위: %) / 자료: 세계은행

1990~1996

1997 19981999~2005

2006~2010

2011~2015

한국

8.0 5.8 -5.7 6.2 4.1 3.0

34.4 32.8 27.8 30.5 30.9 29.5

11.7 -2.3 -22.9 5.5 2.7 2.2

태국

8.3 -2.8 -7.6 5.2 3.8 2.9

40.5 34.6 22.2 23.1 25.2 25.6

12.7 -21.8 -44.0 7.1 1.5 3.4

인도네시아

7.2 4.7 -13.1 4.2 5.7 5.5

28.0 28.3 25.4 20.7 27.8 32.4

10.6 8.6 -33.0 5.1 7.1 6.5

말레이시아

9.5 7.3 -7.4 5.5 4.6 5.3

38.7 43.1 26.8 23.1 21.9 25.2

17.9 9.2 -43.0 4.3 5.6 8.4

경제성장률 투자(대GDP) 투자증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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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Chindia plus 15July/August 2017

금융기관 정리 등 구조개혁을 단계적으로 추진했다. 1997

년 금융재건청(FSRA·Finance Sector Restructuring

Authority)을 신설해 태국 경제의 구조조정, 금융기관 합

병 및 자기자본 조정 등 금융기관 개혁을 총괄했다. 금융자

산 안정화를 위해 태국중앙은행 산하에 금융기관개발기금

(FIDF·Financial Institutions Development Fund)이

라는 보험제도도 도입했다. 1998년 8월에는 금융개혁안을

발표하고 42개 금융회사에 영업정지 명령을 내렸다. 태국은

부실 금융기관을 과감히 퇴출시켰으며 금융감독 및 규제를

강화했다. 또한 금융기관의 자기자본 비율을 강화했으며, 재

무구조가 취약한 금융기관의 통폐합 및 합병을 실시했다.

IMF의 요구에 따른 결과 국내 수요의 위축과 경기 침

체, 금융 혼란, 대규모 해고 사태가 발생해 1998년 말 실업

자가 200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같은 뼈를 깎는 구

조조정 이후 태국 경제는 안정을 되찾았다. 무역수지는 흑

자로 전환됐고, 외국인 투자가 증가하면서 1998년 1월 달

러당 56바트에서 1998년 말 36~38바트로 환율도 안정됐

다. 태국의 외환보유액도 1997년 말 270억 달러에서 1999

년 말 348억 달러로 증가했다.

위기상황에 구원투수로 등장했던 추안(Chuan) 총리는

총 200억 달러에 달하는 금융기관 자산을 매각하는 한편

부패한 공무원을 퇴출시키는 등 강력한 개혁정책을 실시했

다.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해 쌀·소금을 제외한 산업 전 분

야의 외국인 투자 규제를 철폐했으며, 시멘트·인쇄·사료·건

설업의 경우 외국인 지분 한도를 기존 50%에서 100%로 상

향 조정했다. 이외에 농수산물, 유통, 회계, 법률 서비스 등

외국 자본 진출 금지 12개 분야도 전면 해제했다. 투자도 회

복세를 보여 당시 홍콩 금융계에서는 태국이 ‘투자 최적지

1순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집권했던 탁신 총리는 농촌 개

발사업, 공기업 민영화, 인프라 확충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탁시노믹스(Thaksinomics)’를 추진해 경제위기 이전의

성장률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태국은 2003년 7월 IMF

구제금융액 중 최종 잔여액 16억 달러를 상환함으로써 당

초 상환 일정을 2년여나 앞당겨 위기관리체제를 종료했다.

정치적 불안정 해소돼야 태국 경제에 우호적 환경 조성될 것

1997년 경제위기 이후 20년이 지난 2017년 현재 태국은 안

정된 경제지표를 나타내고 있다. 대표 지표인 환율은 지난

3년(2015~2017) 동안 달러당 34~35바트 내에서 안정적으

로 유지되고 있다. 경상수지는 2013년 이래 흑자 기조를 유

지하고 있으며 2016년은 377억 달러 흑자로 GDP의 9.7%

를 기록했다. 2017년에도 309억 달러 흑자로 GDP의 7.7%

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경상수지 흑자에 힘입어 외환보

유액도 2017년 4월 현재 1617억 달러로 월별 수입액 기준 9

개월치를 확보하는 등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태국의 신

용등급은 GDP 대비 낮은 외채 비중, 우호적 투자환경, 안

정적 물가 수준을 반영해 2014년부터 2017년 현재까지

OECD 3등급, S&P BBB+, Moody’s Baa1/안정적, Fitch

BBB+/안정적을 유지하고 있다.

대외경제지표의 안정성에도 불구하고 태국 경제는 정

치적 불안정성으로 일부 취약한 모습을 노출하기도 했다.

2006년과 2014년 각각 발발한 군부 쿠데타는 경제환경

에 악영향을 끼쳤다. 2013년 167억 달러에 이르렀던 태국

내 외국인직접투자(FDI)액이 2014년 쿠데타에 따른 정국

불안으로 35억 달러로 줄어 전년 대비 78.8%나 감소했다.

2015년 108억 달러로 다시 회복했으나 정치적 불안정은 여

전히 외국인들의 투자를 제한하는 요소로 남아 있다.

태국은 2006년 이래 탁신을 지지하는 레드셔츠와 이를

반대하는 옐로셔츠로 국론이 분열된 상태다. 특히 2014년

쿠데타 이후 군부는 선거를 통한 민간 정부로의 권력 이양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채 임시정부 체제를 3년 이상 지속하고

있다. 게다가 2016년 10월 지난 60년간 태국민의 정신적 지

주였던 푸미폰 국왕의 서거와 후임 국왕의 즉위 문제로 올해

로 예정된 총선이 또다시 연기되기도 했다. 아세안 경제통합

가속화 등 태국 경제에 우호적 환경이 조성되고 있지만, 동

남아 경제위기 20년 후의 태국 경제 반등을 위해선 태국 정

치의 안정과 국론 통합이 반드시 선결돼야 한다.

이요한 한국외대 동남아연구소

[email protected]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시발점 태국

금융개혁과 탁시노믹스로 극복

태국, 바트화 폭락으로 외환위기 발생 | Cover Story Cover Story | 태국, 바트화 폭락으로 외환위기 발생

1985년 플라자 합의(Plaza Accord) 이후 일본 엔화가 고

평가되자 일본 기업은 동남아 국가에 투자를 확대하면서

태국을 거점국가로 삼았다. 당시 태국 정부는 외자 유치를

확대하고 외국인투자자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1993년 고

정환율제를 실시했고, 방콕역외금융단(BIBF·Bangkok

International Banking Facilities)을 신설해 외환규제

를 완화하고자 했다.

태국 경제는 1990년부터 1996년까지 정치적 안정과 외

국인 투자에 힘입어 연평균 8%의 고성장을 지속했다. 그러

나 1990년대 외화 차입에 의한 유동성 증가와 이자율 하락

(10%에서 5~7%로)으로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 가격이 과

도하게 상승했다. 이후 1994년 중국 위안화의 평가절하로

태국 수출경쟁력이 약화되면서 경제 호황에 가려져 있던

구조적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996년 말 태국 국내총생산(GDP) 대비 총외채 비율은

50%를 넘어섰으며, 낮은 국내저축률로 인한 외국 자본 의

존도 심화로 단기 차입금 비중은 46%에 이르렀다. 태국 기

업들은 금융기관에서 조달한 자본을 생산성 향상과 산업경

쟁력 개선에 쓰기보다 단기에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는 호텔

리조트주택 매입 등 부동산 부문에 주로 투자했다. 외환시

장 개방 이후 시작된 과잉유동성은 자산 버블을 불러와 금

융위기와 실물경제 위기의 원인이 됐다.

1997년 수출 부진으로 외화 유동성 위기가 발생하자 단

기 투자 등 해외 자본이 급격히 유출되기 시작했으며, 태국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막대한 외환보유액을 투입했으나 실

패했다. 이에 1997년 7월 바트화 방어를 사실상 포기하는

변동환율제를 도입했으며, 바트화 가치가 달러당 28바트에

서 40바트로 대폭 절하되면서 경제위기가 촉발됐다. 태국

발(發) 금융위기는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 화폐의

평가절하로 이어져 동남아 경제 전반의 위기로 확산됐다.

IMF, 105억 달러 제공하며 구조조정 프로그램 이행 요구

태국 정부는 1997년 8월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구제

금융을 요청해 일본과 IMF로부터 각각 40억 달러를 받는

등 총 172억 달러를 지원받았다. IMF는 1998년까지 105억

달러를 태국에 지원하면서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목표치를 달성할 것을 요구했다.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환율 안정을 포함한 전반적

인 경제구조 개혁을 담고 있었다. IMF는 1998년 태국에 ▶

경상수지 적자를 GDP 대비 -3% 이내(1997년 -5%)로 개선

할 것 ▶환율이 급등한 상황에서 물가상승률을 8% 이내로

억제할 것 ▶재정수지가 GDP 대비 1% 흑자(1997년 -1.1%)

를 기록할 것 ▶GDP 성장률을 3.5%(1997년 -2%)로 올릴

것 등을 요구했다.

1998년 태국 경상수지는 GDP 대비 10%의 흑자를 기록

했으나 경제성장률은 -7%로 크게 악화됐다. 환율은 달러

당 40바트를 유지하며 안정됐으며, 금리도 1998년 1월 평균

21%에서 10월 평균 12%로 인하됐다. 태국 정부는 IMF의

요구대로 1997~98년(회계연도) 예산을 ‘GDP 대비 1% 흑

자’로 편성하기 위해 세출예산을 전년도에 비해 11%나 감

축했다. 흑자분은 금융 구조조정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했

다. 부가가치세를 7%에서 10%로 인상했으며, 태국항공·방

콕은행 등 공기업의 민영화 또는 해외 매각도 이루어졌다.

부실 금융기관 정리하고 외국인 투자 늘며 위기 벗어나

태국 정부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긴축정책과 부실

1997년 금융위기 당시 태국중앙은행장 렝차이 마라카논다(왼쪽)와

재무장관 타농 바다야가 16개 부실금융회사의 영업정지를

발표하는 기자회견 모습. [중앙포토]-73(-8.5)

11.6

-63(-5.7)

8.5

-147(-8.0)

5.5

아시아 외환위기 전 태국 주요 경제지표

(단위 : %,억 달러)

자료: World Economic Outlook(1998)

실질 GDP 성장률경상수지(GDP 대비 비율)

외채상황

648

825

905

1990년 1993년 1996년

Page 5: Cover Stor y - POSRI...경제위기가 심각해지자 태국 국민은 방콕 시내에서 달러 모으기 등 대규모 경제살리기 캠페인을 벌였다. [중앙포토] 외환위기

16 Chindia plus 17July/August 2017

인도네시아, 핫머니 유출로 통화위기 경험 | Cover Story Cover Story | 인도네시아, 핫머니 유출로 통화위기 경험

1997년 아시아에 급격히 유입됐던 핫머니(Hot Money), 엔

캐리 트레이드(Yen Carry Trade) 자금이 미국 금리 인상,

엔화 약세 등의 경제환경 변화로 급격히 유출되면서 동아시

아 전체에 위기가 전염됐다. 국제금융자본의 투기적 공격은

태국을 시작으로 필리핀과 말레이시아에 이어 인도네시아

까지 확대됐다.

인도네시아는 루피아화 가치 폭락으로 통화위기를 경험

했으며, 결국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를 겪었다. 경상

수지 적자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환율 방어를 위한 외환보

유액이 소진되자 인도네시아 정부는 IMF에 43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1997년 외환위기 원인은 취약한 재정건전성

1997년 외환위기는 외부 충격에 영향받기 쉬운 금융 부

문 부실화, 실물 부문 취약화 등 인도네시아 내부 환경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인도네시아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미국·유럽 등의 국가에서 투자를 받아 의류·

신발 등 경공업 산업을 육성했다. 외부 투자를 기반으로 경

제성장의 기적을 이루었지만 인도네시아는 금리가 높다는

이유로 헤지 펀드 등 투기성 단기자본의 표적국으로 부상했

다. 국제금융자본은 인도네시아 투자액을 높였고, 이에 따

라 자본의 유출입이 빈번해졌다.

하지만 낙후된 금융시장이 국제금융체제에 편입되면서

자본의 과잉 유동성으로 신용이 팽창했다. 단기적인 자본

유입에 따라 유동성이 증가했지만 인플레이션이 인도네시

아 경제의 발목을 잡았다. 실질 환율이 절상되면서 경상수

지도 악화됐다. 다시 자본유입으로 충당돼야 하기 때문에

재정건전성도 취약해졌다. 즉 헤지(hedge)되지 않은 과다

한 외채와 부채가 확대된 것이다.

국제 투기성 자본의 공격에 대응해 인도네시아 중앙은행

은 외환시장에 적극 개입했다. 환율제도도 태국과 같이 완

전변동환율제로 전환했다. 그럼에도 인도네시아 통화에 대

한 불신은 확산됐고, 대외채무 변제 능력에 대한 대외신인

도가 하락했으며 루피아화 가치는 급락했다. 결국 단기자본

이 외환보유액을 초과하면서 경제위기가 촉발됐다.

조코위 정부, 안정적 경제성장 위한 체질개선 노력 강화

외환위기 이후 약 20년이 지난 2015년 조코위 대통령은 침

체된 인도네시아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투자유치 확대,

사업허가 간소화, 제조업 육성 및 경쟁력 강화 등 총 12차

규모의 경기 부양 패키지를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규제 완

화, 관료주의 철폐, 세금 인센티브 등을 통한 산업 경쟁력 강

화와 외국인 투자유치 활성화 등이다. 서민 경제 활성화를

위한 소상공인 대상 대출금리 인하 등도 포함됐다. 투자허

가 간소화, 석유 및 전기료 인하 등의 내용도 담고 있다.

정부 부양책과 공조를 고려해 인도네시아 중앙은행

은 2013년 이후 7.5%의 기준금리를 2016년 5회에 걸쳐

5.0%로 인하했다. 법인세율도 25%에서 17%로 인하하는

등 기업 친화적 정책으로 전환 중이다. 즉 소비자 구매력

을 높이고 투자를 늘려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도모하는

한편 인도네시아의 산업경쟁력을 향상시켜 경제를 부흥시

키겠다는 의도다.

특히 2015년 유류 보조금 제도가 사실상 폐지되면서 인

플레이션 변동성도 낮아졌다. 인도네시아의 유류 보조금 제

도는 국제 유가의 변동성과 무관하게 유류가격을 고정시

켜 그 차이만큼 보조금을 지급함으로써 유가 상승 시에 국

전기용 포스코경영연구원 수석연구원

[email protected]

투기자본 표적 되며 외환위기 맞은 인도네시아

조코위 대통령, 외인 투자 늘려 경제 체질 개선

가 재정적자를 확대시켰다. 에너지 보조금 폐지 이후 2016

년 국제유가가 다소 상승하는 상황에서도 물가상승률은

3~5%대를 유지하고 있다.

외환위기 가능성 점검, 대외 충격에 여전히 민감하게 반응

인도네시아가 1997년과 같은 외환위기를 다시 경험하지 않

으려면 경상수지가 지속적으로 흑자를 유지해야 하고 외환

보유액이 충분해야 한다.

그런데 경상수지는 2012년 이후 지속적으로 적자를 기

록하고 있으며, 실물 부문도 취약해졌다. 인도네시아 수출증

가율은 2016년 1.8% 감소했다. 2016년 상반기까지 이어진

원자재 가격 하락 탓이 컸다. 인도네시아 경제는 자원을 수

출해 정부지출·산업화·채무상환 등의 재원으로 활용한다.

원유가격이 고공행진을 하는 시기에는 성장의 원동력으로

작용하지만 원유가격이 급격히 하락하면 에너지 자원 수출

액이 감소하고 경상수지 적자가 이어진다. 즉 수출액이 감소

하면 국가 재정수입이 감소하고 산업화 계획을 실행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이에 따라 외국인 투자 의존도가 높아지

고, 대외 환경이 악화될 경우 급격한 자본유출이 발생할 가

능성도 커진다. 자본유출은 투자 감소로 이어지며 민간부

문의 위축을 초래할 것이다. 또한 중간자본재 수입 증가 등

의 영향으로 경상수지 적자에 대한 부담을 상시적으로 안

고 있다. 따라서 유가 하향 안정화 추세가 지속되는 상황에

서도 무역수지 흑자폭이 확대되기 어려운 구조다.

2016년 인도네시아의 정부부채는 국내총생산(GDP) 대

비 27.7%를 기록했으며, 타 동남아시아 국가 대비 낮은 수

준이다. 그러나 외화표시 부채 비중이 41.8%에 달해 환율

이 상승할 경우 정부부채가 증가하는 취약점도 존재한다.

국채시장에서 2016년 기준 38%에 달하는 외국인 보유 비

중도 위험 요인이다. 미국 금리 인상 등에 따른 국제 금융

시장의 변동성 증가는 외국 자본의 급속한 유출을 초래하

고 외환시장에 일시적 혼란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6년 미국 트럼프 대통령 당선으로 국제 금융시장의 변

동성이 커진 상황에서도 국채 시장에서 외국인 자금 유출

이 제한적인 점은 긍정적인 신호로 평가된다.

이와 더불어 2016년 기준 대외부채는 GDP 대비 약

34.1% 수준이며 외환보유액은 1157억 달러로 대외부채의

36.5% 수준이다. 자본통제 여부, 수출대금 및 광의 통화, 단

기 대외채무 및 기타 부채 규모 등을 활용해 적정 외환보유

액 수준을 산출해 실제 외환보유액 수준과 비교한 외환보

유액 적정성 지표(Reserve Adequacy Measure)도 IMF

권고 수준인 100~150%를 충족하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국가 부도 위험 정도를 나타내는 CDS 프리미엄도 2015년

9월 245bp에서 2016년 12월 157bp, 2017년 2월 127bp를

기록하는 등 안정화 추세에 있다.

국가신용등급 상승, CDS 프리미엄은 안정화 추세

인도네시아 경제는 자원수출 의존적 구조를 가지고 있어

대외경제환경 변화에 취약하다. 국제 자원 가격의 하방 압

력이 커질 경우 경상수지 적자 기조로 경제 위기 상황이 반

복해서 나타났다. 또한 외환보유액·대외부채 등은 안정화

추세에 있지만 외화유동성은 아직 취약한 것으로 판단된

다. 따라서 외국인 투자 확대를 위한 조코위 정부의 전방위

적 규제 완화 정책은 인도네시아 경제 체질 개선을 위한 효

과적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도네시아 정부의 노력을 반영하듯 3대 신용평

가 회사 중 하나인 S&P(Standard & Poor’s)는 1997

년 외환위기 이후 20년 만에 인도네시아를 투자적격등

급인 ‘BBB-’로 상향 조정했다. 루피아화가 2016년 이후

안정적인 추세로 전환됐으며, 인도네시아 경제성장률이

2016년 5%대로 재진입하는 등 안정적 성장세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재정적자는 GDP 대비 3% 이하를 유지하고 있

으며, 2000년 GDP의 70%에 달하던 정부부채가 30% 이

하로 축소됐다. 골드만 삭스는 신용등급 조정으로 인도네시

아에 50억 달러 규모의 신규 자금 유입 등 외국인직접투자

(FDI)가 확대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번 정부의 경제 체

질 개선에 대한 기대가 높은 이유이기도 하다.

인도네시아 경상수지 추이

자료: IMFIFS (2016년 자료는 IMF 추정치)

상품수지 서비스수지 경상수지

1990년 20162005

40.00

30.00

20.00

10.00

0.00

-10.00

-20.00

-30.00

-40.00

(단위 : 십억 달러)

인도네시아 GDP 및 환율변동 추이 인도네시아 대외준비자산 및 단기외채비율 변동 추이

주: Exchange Rate , IDR/USD (Annual average)

GDP(% change, 좌) 환율(우)

단기외채비율(%, 좌)

대외준비자산(십억 달러, 우)

자료: IMFIFS

자료: IMFIFSWorld bank

10.0

5.0

0.0

-5.0

-10.0

-15.0

16,000.0

14,000.0

12,000.0

10,000.0

8,000.0

6,000.0

4,000.0

2,000.0

0.0

1994년 2001 20162009

200.0

150.0

100.0

50.0

0.0

120.0

100.0

80.0

60.0

40.0

20.0

0.01980년 201620092001

Page 6: Cover Stor y - POSRI...경제위기가 심각해지자 태국 국민은 방콕 시내에서 달러 모으기 등 대규모 경제살리기 캠페인을 벌였다. [중앙포토] 외환위기

18 Chindia plus 19July/August 2017

외환위기 시기 상대적 반사이익 누린 중국 | Cover Story Cover Story | 외환위기 시기 상대적 반사이익 누린 중국

20년 전 동남아 국가에 발생한 연쇄적인 외환위기로 각국

의 환율은 급등했다. 1997년 6월 기준으로 외환위기를 겪

은 국가들은 태국 -55.6%, 인도네시아 -83.8%, 말레이시아

-46.1%의 통화가치 하락을 경험했다. 당시 중국 위안화의

안정성도 논의 대상이었으며, 중국의 수출 확대를 위한 환

율의 상향 조정 가능성이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단기간 내의 위안화 환율 상향 가능

성을 일축했다. 달러당 위안화 환율은 1996년 8.314에서

1997년 8.289, 1998년 8.279로 오히려 소폭 떨어졌다. 중국

이 위안화 환율을 유지한 덕분에 동남아 국가들의 추가 피

해를 막을 수 있었다. 외환위기에 빠진 국가들이 환율 급등

을 배경으로 그나마 수출을 늘리고 경상수지 적자로 전환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처럼 아시아 외환위기의 구원투수는 아니었지만 위기 탈출

의 간접적 조력자였다고 보는 이유다.

중국은 아시아 외환위기 탈출의 조력자?

그런데 당시의 중국 경제 상황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조

력자라는 평가는 다소 과장된 것일 수 있다. 천안문 시위 사

건의 여파로 1989년과 1990년 중국 경제의 성장률은 직전

의 3분의 1 토막이 났다. 이에 덩샤오핑은 1992년 남순강화

로 사회주의 시장경제 시스템을 공식화하며 개혁개방을 확

대하고 경기 활성화를 위한 재정 투입도 크게 늘렸다. 주로

중공업 부문의 투자였다. 1990년대 중반 중국은 내수 부진

에 빠지게 된다. 1995년 공산품의 경우 공장 가동률 50%

이하 품목이 전체의 56%(중국거시경제정책보고 2000,

2000년)로 국내의 유효 수요 부족 현상을 돌파하기 위해

수출 증대가 필요했다.

1994년엔 위안화의 대폭적인 평가절하가 이루어진다. 중

국 정부는 1980년대 이중환율제도를 운영하며 공식 환율

과 함께 공식 환율의 위안화 가치가 높아 수출을 꺼리는 기

업들을 위해 높은 수준의 내부 결산 환율을 운영했다. 1985

년 내부 결산 환율에 맞춰 평가절하를 단행하며 단일화를

시도했으나 다시 공식 환율 외에 기업 간 외환 및 외환사용

권 거래에 사용되는 외환거래센터 고시 환율을 운영하게

된다. 1993년에는 두 환율 간 격차가 45%나 됐는데 1994년

공식 환율을 외환거래센터 환율에 맞춰 대폭 평가절하하며

다시 한 번 일원화에 나서게 된다.

수출을 통한 유효 수요 창출 필요성과 환율 상승이 결합

하며 중국의 수출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94년 달러 기

준으로 전년 대비 31.9%(위안화 기준으로는 평가절하를 반

영해 무려 97.2%)가 증가했다. 1995년에도 수출증가율은

23%나 됐으며 아시아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에도 21%

에 달했다.

위안화 가치 대폭 절하로 위기의 간접적 원인 제공

이와 같이 1990년대 초·중반 중국 내부의 정치·경제적 변화

와 함께 중국의 세계시장 편입이 확대되면서 당장 동남아

국가들의 중저급 제품 수출이 큰 영향을 받게 됐다. 특히 태

국과 인도네시아 등 동일 상품 수출국에 대한 타격이 컸다.

중국의 대규모 평가절하로 중국 상품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

진 태국은 급작스러운 수출 둔화와 함께 경상수지 적자가

확대되면서 통화가치가 과대평가됐다는 의심으로 환공격

에 노출됐던 것이다.

알려진 바대로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전까지 동남아 국가

들이 누렸던 고성장은 일본의 투자와 고수익을 노리고 몰려

심상형 포스코경영연구원 수석연구원

[email protected]

아시아 외환위기의 최대 수혜자 중국

역내 주도권 넘어 리더십 국가로 성장할까

든 미국 등 글로벌 자본의 유입 때문이었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 환율이 3분의 1 수준으로 급락하며 수출이

막히자 일본 기업들은 임금 등 생산 코스트가 싼 동남아로

생산기지를 대거 이전했다. 미국의 저금리와 달러 약세를 피

하려는 달러 자금도 아시아로 몰려들었다. 그런데 1995년 미

국의 금리 인상과 함께 달러 강세, 엔화 약세로 전환되며 자

금 흐름에 역류가 발생하자 과잉 투자와 거품에 균열이 발생

했다. 달러 강세로 동아시아에 들어왔던 자금을 달러로 바

꾸어 나가려는 수요가 급증했고, 일본 역시 엔화가 약세로

전환되는 상황에서 투자자금을 빼냈다. 이 같은 미국과 일본

의 자금 역류가 직접적 원인이 됐다면 위안화 평가절하와 수

출 확대에 나섰던 중국 역시 간접적인 원인 제공자라 할 수

있다. 다만 중국에 의한 충격은 중국경제의 성장에 따라 동

남아 국가들이 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할 필연적 문제였다.

아시아 위기 시 위안화 가치 유지도 자국 위한 것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중국 정부는 외환위기

의 전염을 막고 위안화 가치 하락을 억제하기 위해 외환시장

에 강력히 개입했다. 하루 평균 6억 달러 내외의 외화 매입을

통해 중국 정부는 환율을 달러당 8.28위안으로 고정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아시아 외환위기 국면에서 중국이 역내 경

제의 안정성을 위해 판단한 것이라기보다 중국 경제의 현실

적 문제를 고려한 선택이었다는 평가다(오숭렬, 중국경제

의 개혁, 개방과 경제구조, 2001년). 당시 중국 경제 성장에

서 대외 수출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미미했는데 이는 가공

무역 수출 비중이 높았기 때문이다. 가공무역 비중이 50%

를 넘어 국내 수요 창출에 미치는 영향은 여전히 제한적이었

기 때문에 위안화 절하 유인이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공

무역 비중이 높은 상황에서 위안화가 평가절하될 경우 수입

가격 상승을 초래해 결국 수출가격 상승과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아시아 외환위기 시 중국의 역할을 평가

하는 데 참고할 사안이다.

중국, 동남아와 긴밀한 협력관계 구축

아시아를 빠져나갔던 자금은 이후 동남아에서 중국으로

방향을 튼다. 홍콩 및 대만은 개혁개방 초기부터 중국이 수

출상품의 제조기술은 물론 경영관리 노하우 등을 흡수하

던 주요 통로였다. 이들 화교자본의 투자는 1993년과 1994

년만 하더라도 중국 외자유치액의 74.1%와 68.4%로 절대

적이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인 1998년과 1999년에는

각각 47%로 줄어든 반면 중국에 대한 투자국이 다변화됐

다. 아시아 국가들이 IMF 구제금융의 조건에 따라 가혹한

구조조정과 경직된 거시경제 정책을 펴는 동안 중국은 정

부 주도로 경제개발 정책을 추진하며 큰 도약의 기회를 잡

을 수 있었던 것이다. 로웰 디트머 UC버클리대학 교수가 중

국을 아시아 외환위기의 최대 수혜자라고 칭했던 이유다.

중국은 성장과 함께 정치·경제적 영향력이 커지면서 아시

아 경제의 리더십도 확보하게 된다. 2001년 중국의 제안으

로 중국+아세안 자유무역협정인 CAFTA가 받아들여진 배

경이다. 최근 15년간 중국이 고속 성장을 통해 세계 2위 경

제대국이 되는 과정에서 아세안 국가들은 성장의 기회를

누릴 수 있었고, 중국 역시 자국의 성장에 동남아의 시장과

자원을 활용하며 상호 경제협력 관계가 긴밀해졌다. 2015

년 중국과 동남아의 무역액은 4722억 달러로 1991년에 비

해 무려 70배나 증가했으며, 2002년 이후 연평균 20% 이상

씩 증가했다.

중국은 아세안에서 원자재와 전기전자 부품 등을 사들

이며 2010년 151억 달러, 2011년 226억 달러의 대아세안 무

역적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2013년부터 중국의 성장이 둔

화되며 과잉으로 넘쳐나는 상품들이 대거 동남아 시장으로

들어갔다. 2013년 아세안의 대중국 무역수지는 450억 달러

적자로 전환됐고, 2014년에는 657억 달러, 2015년에는 773

억 달러로 적자가 확대됐다. 다국적 기업들은 지금까지 동

남아에 저렴한 생산요소를 활용한 조립산업 형식으로 진출

해 왔다. 이 때문에 동남아는 기술 기반이 취약하고 부품산

업도 발전하지 못한 상태로 중국의 거대한 영향력에 노출

된 것이다.

동남아 국가, 중국 의존도 상승이라는 난제 고민

아시아 외환위기가 발생한 지 20년. 많은 국가가 제도개혁

을 통해 환율의 신축성을 확보하고, 외환보유액 확충과 경

상수지 흑자를 위해 애쓰며 펀더멘털이 개선됐다는 평가다.

특히 세계의 성장엔진 역할을 하는 중국의 존재는 그 위상

이 당시의 일본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상태다. 과거와 같은

외환위기 가능성은 축소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남아는

중국의 정치·경제적 리스크 변동을 주시하는 것과 함께 중

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 상승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

를 안게 됐다.

대중국 외국인 직접투자자료 : 중국 국가통계국

2,500,000

2,000,000

1,500,000

1,000,000

500,000

0

1989년 2010 2015

10,573,000

1989

339,200

4,687,800

2001

중국의 상품 수출액 추이자료 : 중국 국가통계국

2015

2,500,000

2,000,000

1,500,000

1,000,000

500,000

0

1989년 2008

1989

52,540

266,098

2001

1,430,693.07

위안화 환율 추이자료 : 중국 국가통계국

1989년 1994 2008 2015

1,000

800

600

400

200

861.87 694.51

(연평균, 100US$ 기준)

(사용액 기준)

Page 7: Cover Stor y - POSRI...경제위기가 심각해지자 태국 국민은 방콕 시내에서 달러 모으기 등 대규모 경제살리기 캠페인을 벌였다. [중앙포토] 외환위기

20 Chindia plus 21July/August 2017

한국, 적극적 구조조정으로 외환위기 극복 | Cover Story Cover Story | 한국, 적극적 구조조정으로 외환위기 극복

“단군 이래 최대 불황”으로 회자되던 아시아 외환위기도 발

생한 지 벌써 20년이 지났다. 투기공격이 전염확산되면서

1997년 7월 초 태국의 바트화 폭락에서 시작된 아시아 외환

위기가 한국에 상륙하는 데는 몇 개월이 걸리지 않았다. 하

지만 한국에서도 위기의 전조는 연초 한보그룹의 부도에서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후 ‘국민차’ 기아자동차로까지 이어진

기업부도 행렬은 고도성장 과정에서 정경유착과 관치금융으

로 얼룩진 한국 경제의 취약성을 전면에 드러낸 계기였다.

대한민국 고도성장 신화의 붕괴

거시적으로 보면, 1994~95년의 호황이 끝나면서 성장세가

둔화되긴 했지만 1996년 경제성장률은 무려 7.6%에 달했

고, 물가상승률 역시 당시로서는 지극히 안정적 수준인 4%

대를 이어가고 있었다. 여느 위기국의 고질병인 정부 재정

악화도 한국에는 ‘강 건너 불’에 지나지 않았다.

취약고리는 경상수지였다. 1994년부터 적자로 돌아선 경

상수지가 1996년에는 238억 달러 적자를 기록하며 그 폭

이 더욱 늘어난 것이다. 경상수지 적자는 대내적으로 총저

축에 비해 총투자가 많다는 의미며, 그 공백은 해외 자금

의 유입으로 메워야 한다. 그 결과 대외채무는 1994년 말

808억 달러에서 1997년 6월 말 1615억 달러로 두 배로 급

증했다. 특히 1990년대 초 시작된 금융자본 자유화와 결부

돼 국내 금융권의 해외 차입이 같은 기간 589억 달러에서

1069억 달러로 늘어난 점이 문제였다.

외형상으로는 금융권의 건전성이 양호했다는 점에서 이

러한 차입 급증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실은 주요 자금

수요자인 기업 부문의 실적이 악화되고 부실이 늘면서 이

미 금융권 건전성에 적신호가 켜진 시점이었다. 게다가 외

자 차입이 1990년대 중반 중남미 위기에서 빠져나온 국제

투기자금이 국내로 들어오는 계기가 됐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그 여파가 원화의 고평가로 이어지면서 국제 자본의

투기적 변덕에 취약한 구조를 초래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펀더멘털은 견고하다”는 정부의 항변은 무

력했다. 외자 유출 공세에 외환보유액만 탕진하다 보니,

1997년 11월 말 정부의 가용 외환보유액은 불과 73억 달러

로 바닥을 드러냈다. 공식 외환보유액은 200억 달러를 넘었

지만, 금융기관의 해외지점 차입보증 등에 상당수가 묶인

탓이었다. 끝내 11월 21일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고 12

월 초 IMF 이사회의 신속한 승인이 떨어졌지만, 국내 금융

시장은 국가부도 위험에 시달리며 환율과 시장금리가 폭등

하는 ‘패닉’에 빠졌다.

IMF 신자유주의 처방의 성공과 후유증

IMF는 1980년대 이후 중남미와 동유럽의 금융위기 경험

에서 배운 방식으로 한국에 안정화 정책과 구조개혁 처방

장보형 KEB하나은행 하나금융경영연구소 Chief Economist

[email protected]

한국, 신자유주의식 구조개혁으로 위기 극복

‘IMF 모범생’ 평가 장기불황 위험성 등 과제도

을 제시했다. 일명 ‘신자유주의’ 해법이었다. 안정화 정책은

환율 안정과 국제수지 개선을 목적으로 한 고강도 긴축, 즉

재정건전화와 고금리가 핵심이었다. 그 결과 경상수지는 환

율 급등 및 강제적 내핍으로 빠르게 흑자로 전환해 1998년

에는 400억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외환보유액도 1998년

말 520억 달러로 회복됐다.

그 대가로 한국 경제는 심각한 침체를 경험했다. 1997년

5.9%로 버티던 경제성장률이 1998년 -5.5%로 급락했다.

외채 만기연장 및 외평채 발행 성공 등에 힘입어 국가부도

위험은 진정되고 있었지만, 고강도 긴축 여파로 실물경제가

망가진 것이다. 이에 따라 IMF는 긴축을 완화해 금리인하

및 재정적자 지출을 용인하기 시작했다. 대신 위기 처방의

무게중심은 구조개혁으로 넘어갔다.

구조개혁은 기업과 금융 부실에 집중됐다. 공적자금 64

조원을 투입해 부실채권을 정리하고, 빅딜과 워크아웃으로

기업 구조조정이 본격화된 것이다. 그 결과 1997년 393%

에 이르던 기업 부채비율(자기자본 대비)은 2001년 182%로

떨어졌다. 또 외환위기의 핵심기제였던 종금사 등 부실 금

융기관이 대거 정리되고, 은행권 부실채권 비율도 1999년

8.3%에서 2001년 2.9%로 하락했다.

구조개혁의 다른 축인 자유화와 관련해서도 외국인직접

투자 제한 폐지, 전면적인 외환자유화, 외국인 주식보유한

도 철폐 등의 진전이 이어졌다. 그 외 통합감독기구 신설이

나 한국은행 물가안정목표제 도입 등 금융통화정책 틀의

재정비, 또 기업 지배구조 등 경영 개선도 중요한 성과였다.

이런 가운데 한국 경제는 이른바 ‘V자형’ 회복을 보이며

1999년 11.3%의 놀라운 성장률을 시현하며 정상화 궤도에

올라섰다. 당초 우려했던 중국의 동반 위기가 현실화되지

않은 가운데 중국을 필두로 새로운 국제분업체계의 진전과

그에 따른 수출 증가가 한국 경제의 회복을 뒷받침했다. 그

영향으로 한국은 IMF 모범생으로 평가되며 2001년 IMF

구제금융에서 조기 졸업하는 개가를 올렸다.

하지만 고도성장 신화가 붕괴되면서 한국 경제의 추세 성

장률은 단계적으로 떨어졌다. 1990년대 연평균 7%를 넘던

성장률이 2000년대 4%대로 낮아진 데 이어 2010년대 3%

대, 최근에는 2%대로 하락한 것이다. 게다가 구조개혁에 따

른 ‘유연성의 역설’로 정작 고용 안정성이 저해되고 소득 양

극화가 확산되는 등의 부작용도 컸다. IMF 모범생의 부끄

러운 이면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의 새로운 도전

잊혀지던 위기의 악몽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10여

년 만에 되살아났다. 2000년대 중반 급증했던 금융권의 외

자 차입이 치명적 결함으로 부활한 것이다. 미국의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 충격에 시달린 유럽계

은행 위주로 국내 차입이 2008년 4분기에만 400억 달러나

빠져나가면서 한국은 심각한 외화유동성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덕택이랄까, 기업이나 금

융 부실이 미미한 가운데 우리나라의 펀더멘털은 ‘견고’했

다. 금융위기 직전 경상수지가 일시 적자를 보였지만, 환율

급등과 맞물려 4분기부터 대규모 흑자로 돌아섰고, 외환보

유액도 2000억 달러를 지켜냈다. 국내 경제성장률은 2009

년 0.7%로 선방했다. 이번에도 중국의 대규모 경기부양이

국내외 경제의 안전판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외환위기와 달리 국내 외채 상환능력

이나 국가부도 위험과는 무관하게 단기적인 외화유동성에

국한된 사건이었다. 이후 정부가 외환건전성 개선에 주력하

면서 한국은 이제 차입 의존성을 낮추며 신흥시장의 ‘원죄’

에서 벗어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도 한국을 더 이상 신흥시

장이 아니라 선진시장으로 간주하는 움직임이 지배적이다.

문제는 대외 건전성 개선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성장 체

력이 약화되면서 가계부채 급증과 같은 대내 건전성 위험이

커진 것이다. 가계부채 급증 역시 외환위기를 거치며 기업에

쏠렸던 금융권 대출이 가계라는 ‘새로운 출로’를 찾고, 정부

나 가계는 부동산 등의 자산가격 상승으로 소득 부진을 보

전하려 했던 결과다. 이제 예전처럼 격렬한 위기에 빠질 가

능성은 많이 옅어졌지만, 일본의 장기불황과 같은 ‘고사(枯

死)’의 위험이 한국 경제를 압박하고 있는 셈이다.

1997년 12월 미셸 캉드쉬 IMF총재

(오른쪽)와 임창열 부총리(가운데),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가 협상 타결 뒤

손을 맞잡고 있다. [중앙포토]

한국의 외채 및 외환보유액 추이

1994년말

500

450

400

350

300

250

150

100

50

0

아시아외환위기

글로벌금융위기

(단위 : 10억 달러)

자료: 한국은행

1997말 2000말 2003말 2006말 2009말 2012말 2015말

장기외채 단기외채 외환보유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