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김영중: 복합적 예술세계의 이해

kimyoungjung.comkimyoungjung.com/about/Patrice de la Perriere,“Kim young-jung”.pdf · $# Z ° l Xr N d pq9 ze_ pöro ÎÚZ ÛÜX > kc ! ª³ Cb w~ V W P zc à X \BN Î@ m Z F

Embed Size (px)

Citation preview

1 김영중연구소

LD3.1998.0216/RF3B 딸린자료/MS. 1998.0216/RF3B(French) Patrice de la Perriere,“Kim young-jung” 파트리스 드 라 뻬리에르(고여송·서명수 역), 「김영중: 복합적 예술세계의 이해」, 1998. 2. 16 김영중: 복합적 예술세계의 이해 파트리스 드 라 뻬리에르 난생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고 김영중 같은 훌륭한 예술가를 만난 것은 확실히 일생에서 흔히 일어나는 행운은 아니다. 한국미술계의 원로인 김영중을 보고 있노라면(만나 보면) 그의 내면세계가 청정하게 발현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진정한 바램과 이타적인 태도로 사물에 접근하려는 놀라운 의지가 그로부터 발산된다. 인본주의자 김영중은 커다란 사회문제에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그의 작품들을 일괄하여 보면 첫인상에서부터 이 점을 지울 수가 없게 된다. 서울에 있는 그의 작업실은 조각의 영광 앞에 바친 신전에다 비유할 수가 있을 것이다. 내가 방문하였을 때에 마침 그의 대단히 넓은 조각실 한 쪽에서는 점토원형 하나가 완성되고 있었는데, 선열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말을 탄 전쟁영웅의 형상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그 작품은 나로 하여금 고대문명시대나 이탈리아 르네상스시대까지도 성행했던 위인들, 신화에 나오는 영웅들, 상상과 우화에 등장하는 신상(우상) 등을 표현한 작품들을 연상하게 하였다. 그 기마상은 시간을 초월하여 어떤 전쟁의 승리나 전투 혹은 위대한 어떤 인물을 기념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리라. 김영중은 기념할만한 역사적인 교항곡을 작곡하여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그의 조수들이나 실무자들을 지휘하는 것 같았다. 결코 단 한 번도 정복당한 적이 없고 또 침략에 대항하여 끝까지 존엄성을 지키며 저항해온 조국의 역사를 노래하는 듯한 아름다운 태도였다. 위의 조각실 옆 또 다른 쪽에서는 소규모 군대나 마술의 숲 속에서처럼 대리석, 화강석, 청동 등 여러 종류의 재료로 된 조각작품들이 겹겹이 진열되어 있음을 볼 수가 있었다. 한 인물을 접하고 나면 그에 대해서 더욱 더 자세히 알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

그림 1 "Movement of the head" - granit noir -126x105x43 cm.

2 김영중연구소

로 김영중의 작품을 논한다는 것은 곧바로 조각의 고귀함에 접근하고 빠져 들어감을 의미한다. 이는 곧 예술의 거장을 평가하는 일이다. 예술적으로 근본적인 변화의 시기에 전개된 그의 작품들은 전통적인 정신이나 문화에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그를 우리 시대의 ‘길잡이’로 삼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의 창조의지 측면에서 보면 그의 개성은 강력하고 명확하다. 그는 매우 흥미로운 상징적 존재라 할 수 있다. 사실 한 예술가의 조각작품이 그의 전 생애동안의 작품활동을 통해서 정확성의 정도, 진리탐구의 정도 등을 들어내는 일은 좀처럼 드물다. 그의 조각작품을 연구하다보면, 기념조형물이건 아니건 간에, 하나의 길잡이, 심오한 표현 욕구, 양보 없는 창작활동을 결정 짖는 일관성(엄중함)의 필요성 등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 이미 우리는 그의 1960년대 작품인 <휴머니즘과 메커니즘>(1964)이나 <평화행진곡>(1960) 등에서 미래에 전개될 그의 작업의 감각적이면서 동시에 직관적인 언어의 근원을 찾아볼 수가 있다. 그를 정진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보다 잘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의 거동의 출발을 규정짓고 또 조각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접근방식에 대하여 짚고 넘어가야 한다. 속단은 금물이지만, 김영중에게 있어서 예술은 절대적인 신성보다 우선시 된다. 이러한 정신적 개념규정은 ‘인간’을 위한다는 것이 그의 예술적 탐구의 핵심임을 결코 배제하지는 않는다. 사실 이 작가는 인본주의자인데, 그는 인간을 감동시키는 모든 것, 자유를 구속하는 모든 것뿐만 아니라 재료의 우연성에 의한 모든 자유스러운 것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 증거로써 그의 모든 상징적인 대형 기념물들을 제시할 수가 있다. 그것은, 우화적으로 말하자면, 그 개념에 반대되는 것이라도 우리의 삶에 역시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여러 차례 일상적인 것들에 바탕을 둔 의식의 점거로부터 출발한 김영중은 그 일상적인 것들을 영원이라는 재료 안에 표현함으로써 그의 동시대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어떤 답이 되도록 그것을 초월해나간다. 또 한편 김영중의 작품은 상징성을 지니고 있어서 관람자가 질문을 통하여 스스로 해답을 구하게 하는 작품이다. 김영중의 조각작품들은 거의 서정적인 추상에서부터 대강의 윤곽을 띄고 있는 형상, 완전한 구상조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이를 ‘부채꼴’에다 비유할 수가 있을 것 같다. 그의 미적 비전의 주제는 단지 시적 감동으로부터 일어난 정서를 강렬하게 환기시키는 구실에 지나지 않을 때가 있다. 김영중에게 있어서 형태에 영향을 주는 것은 정신이다. 그에게 작품은 힘(pouvoir)의 전령이다. 이러한 힘(능력)은 그 자신이 동시에 상징적이며 초월적인 보편적 차원을 점유함으로써 평온한 감동

그림 2 "Black Torso 1" -marbre gris 70x23x20 cm.

3 김영중연구소

과 매력을 전달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아름다운 시간을 초월한 언어를 창조할 수가 있게 함으로써 그를 위대한 문명의 시·공을 넘어서 그보다 앞서 존재하였던 조각의 거장(巨匠)들의 계보에 들게 한다. 물론, 겉모양이 다르다해도, 기념조각이건 아니건, 그리스나 로마인들의 작품들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신성(神性)이 그들의 작품 속에 육화(肉化)되고, 신화 속의 영웅들이 형상화되도록 창조할 줄 알았다. 김영중을 이끄는 강렬한 충동은 고대그리스, 로마. 중국, 남미 혹은 파라오들의 고대 이집트 시대의 거장들을 움직였던 것과 같은 성질의 것이다. 확실한 것은, 예술가가 진정한 창작의 문제를 제기하며, 인간의 조건에 대한 초시간적 가치를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 나서는 그 순간부터 예술은 시간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흔히 부르는 ‘역사적 직선상의 시간’으로부터 떠나 종교역사가들이 정의하는 ‘전통적인 순환의 시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는 예술은 승화시킨다고 본다. 작품의 형식이란 예술가에 의해 영감 받은 정신이 그 생명을 불어넣기 위한 틀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는 통일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나 김영중의 조각작품들은 복합적이다. 바로 이점이 그의 작품을 매력적이게 한다. 주문에 의한 기념조각이나 혹은 크기에 대한 상당한 제한이 있는 작품을 동일한 창작태도로 깊은 감동을 주는 능력을 발휘하면서 임하고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주문에 의한 작품제작에 있어서는) 주어진 주제를 재료로 변환시킬 필요에 부응하도록 해야 하고, 후자의 경우에는 (순수작품을 제작하는 경우에는) 스스로 이끌리는 창작요구를 화강석, 대리석, 청동 등의 재료 속에 나타내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김영중은 그의 조형양식과 그의 솜씨를 자기 자신의 고유한 욕구에 적응시키는데, 그것은 바로 조화를 주는 요소로서의 정신적 법칙과 연관되고, 또 자신의 마음속 깊이 뿌리내린 이 의지의 도움으로 가능하다. 김영중은 언제나 여러 가지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일종의 격화된 시대(성) 속에서 ‘움직인그림 3 "An outcry of the torso" - marbre blanc -53x35x22 cm.

4 김영중연구소

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한 번 눈으로 보고 읽을 수 있는 구상적인 혹은 오히려 이미지 재현에 우리의 감성과 성스러운 도약을 자극하는 정서적 지각이 결합되도록 한다. 바로 이것이 그의 작품에 초시간적 특성을 부여한다. 그래서 우리가 김영중의 모든 작품들을 들여다 볼 때면 그 어느 것도 전통적 문명의 산물인 ‘3가지 차원’안에 들지 않는 것이 없다,. 어원적 뜻에서 거의 교조주의적인 태도에서 나온 독특한 형태는, 법적 증서와도 같은 효력을 반영한다. 그의 각각의 작품들은 작가의 절대적인 필요에 따라서 다소간 구상적인 방법으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불국의 한국인상>이라는 명제가 붙여진 주목할만한 작품에서는 단순한 시각적 겉모습을 뛰어넘어 운동감(동세)이 작품의 주된 원동력임을 볼 수가 있다. 그는 작품 속에 이 역동성을 통해, 제한적인 알레고리에 빠지지 않고도 한국인의 자긍심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구현하는 강한 사실감을 주고 있다. 거기에서 정신은 서로 교감하는 상징물로 만듦으로써 작품을 한껏 고양시킨다. 이것이 작가의 직관적인 확신의 증거이기도 하다. 그가 지닌 예술적 자질과 인간성으로 인하여 김영중은 예술의 발전에 기여한 소수의 현대작가 반열에 속한다. 그에게서 (우리는) 형태의 순수성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탐구와 아울러서 전통과 현대간에 제기된 해결책을 찾는 노력들을 엿볼 수가 있다. 김영중의 작품에 깔린 이러한 심오함은 (작품에) 생기를 더해주고 표현을 명확하고 완숙한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인공적인 표현방식을 벗어 던지고자 하는 필요에 기인한다. 이처럼 그는 작품에서 모든 중압감을 제거하고 새롭게 조화로운 균형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것은 어찌 보면 김영중이 조각을 지적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제 스스로 탄생하고 스스로 역동적인 필연성을 부여하도록 내버려두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작가의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방식은 모든 생각하는 존재들에게 ‘’’우주의 질서 내에서 우리는 과연 어디에 위치하는가?”라는 하나의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림 4 "Torso with crossed legs" - granit vert -68x24x30 cm.

5 김영중연구소

흉상이나 초상조각을 제작함에 있어서 김영중은 단순한 묘사적 재현의 차가움에 결코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삶이 느껴지는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그가 존재성을 넘어 마치 그가 상대방의 영혼과 마음속을 체험한 것처럼 그의 모델(대상)이 그가 다루는 재료 속에서 불멸의 모습으로 가시화 되기를 추구한다. 그는 형태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인물의 습관, 품성, 단점 등을 파악하려고 노력하여 단순한 ‘모사’가 아닌 진정한 흉상을 실현하기에 이른다. 김영중은 인간의 영혼을 들여다볼 줄 아는 투시력을 지닌 사람으로서, 그의 앞에 놓여 있는 대상의 겉모습을 넘어 그 속에 내재된 참모습을 포착해낸다. 개산(槪算)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복잡한 세계(영역)에 대해서 그는 섬세한 지각을 지니고 있다. 각각의 인물들은 그의 천부적 재능과 작의(作意)에 따라서 그 인간성과 실재 모습이 세심하게 다루어진다. 볼륨이나 힘찬 선에 의한 탐미주의는 결국 모델의 성격, 내면의 질실, 또는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시각적 조화를 강조하려는 것이다. 기념조각에서 김영중은 그 작품들이 세워지게 될 주변환경의 모든 요소뿐만 아니라 의도하는 바의 주제에 대해서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그의 모든 계획에는 공간에 작품을 통합시키려는 그의 심오한 의지가 담겨있다. 김영중은 그의 재능과 세계에 대한 통찰력을 통해 재료, 조각의 동세와 리듬, 그리고 풍경과의 밀접한 관계의 중요성 등을 서로 결합하여 상당한 충격을 주는 시각적 앙상블(조화)을 창출해낸다. 그리하여 그는 제각각 일상 속에 웅변적으로 새겨진 가장된 공간 속에 작품이 세워질 장소를 창조하는데 참여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술품이란 하나의 오브제(사물)로서, 일상의 삶에서 필요한 것이므로 예술작품을 모든 사람들이 쉽게 감상할 수 있는 위치에 설치하려는 조각가의 바램을 상기하게 된다. 김영중은 예술가의 주요 방정식의 해결에 솜씨 있게 도달하고 있는데, 그는 공간과 장소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 동작의 균형, 말하자면 ‘섬세한 통합’을 허용하는 구체적 실현에 도달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많은 기념조각들은 김영중이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건립하기 위하여 ‘장소성(환경성)’을 구현하므로 진정한 ‘토템’과도 같다. 창작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김영중은 자기 능력과 영역 안에 있는 모든 가능성을 탐색해 왔으며, 그럼으로써 그러한 걸작들을 실현할 수가 있었다. 한국에는 여러 다양한 주제를 ‘설명하는’ 단순한 의지 이상의 소망을 증거하고 작가의 경험과 체험의 증거를 보여주고 있는 약 100여 점에 달하는 김영중의 기념조각작품이 있다. 기존의 기념조형작품들에 새겨져 있는 프레스코와 견주어보아, 화강석과 청동의 혼합에 의한 파격, 혹은 더 나아가 물, 나무, 돌 같은 자연적 요소들의 사용으로 미루어 짐작컨데 김영중의 작품은 하늘과 땅, 인간과 자연을 합일시켜보려는 어떤 탁월함이 담겨져 있는 것 같다. 그림 5 "Movement of the torso" -marbre blanc - 45x38x26 cm.

6 김영중연구소

복합적인 표현방법에 조예가 깊은 김영중은 여러 요소를 동시에 사용하지만, 상호 보완적인 것이 되도록 하면서 그의 조각예술을 조상들의 전통과 끊임없이 밀려오는 근대적 발전이 살아 숨쉬는 독특한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김영중의 스타일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그를 이끌어가고 있는 생각에 대한 정의를 시도해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토루소의 운동>이라는 작품에서 보면 돌의 무게중심으로부터 나오는 역동성을 조각에 불러 넣는 ‘혼’과 동일한 개념인 눈에 보이지 않는 축(軸)이 실재한다. 그 때 (우리는 하나의 생생한 발광체가) 나무 가지들처럼 퍼져 가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고 펼쳐지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중심’, 혹은 조각의 내면세계라 일컫는 것으로서, 보이지는 않지만, 작품의 위력(힘)을 결정짓는다. 물론 이것도 ‘중용’이라고 부르는 것, 내면세계에 자리한 ‘중심정신’과 동의어이기도 한 그것을 상기시킨다. 수많은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방금 언급한 조각에서도 역동성이 작가에 의해 제안된 이미지에 생기를 더해 주는 영겁회귀의 모습 속에 새겨져 있다. 재료 역시 무턱대고 선택하지는 않는다. 이 작가가 대리석의 일부분을 마광처리 하면서도 다른 면은 거친 상태로 그냥 놔두기로 결정한 것도 (사실은) 통일성을 간직한 채 둘로 분열된 내면세계의 극단을 강조하기 위함인데, 서로 상반되는 것의 통합을 연상케 하는 음과 양의 상징과도 같다. 그러한 대비의 양상은 김영중의 작품 속에서 하나의 변수(요인)로 지속되고 있다. 그는 개인적으로 사용되는 하나의 언어 속의 여러 가지 낱말처럼 여러 가지 재료들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리함으로써 그는 그의 의도를 잘 설명하기 위하여 특수한 문법을 창조하게 된다. <두상의 이중성>에서는 청동과 대리석의 대비가 주제를 완벽하게 강조하고 있다. 대리석은 자연상태로 놔두었으나 청동은 통합을 위하여, 아니면 오히려 돌과 완벽하게 결합시키기 위하여 자질구레한 세부까지도 세심하게 다루었다. <옛날 미녀의 토루소>에서는 대리석의 색깔이 소재의 여성적 양상을 강조하고 그럼으로써 부드러움의 정도를 더해준다. 특히 재료의 극단적인 광택이 피부의 매끄러움과 비슷한 투명한 느낌을 자아내는데, 작품에 육감과 미묘한 감성을 일으켜준다. <여인의 포즈> 위에 언급한 조각과 마찬가지로 붉은 대리석을 사용하여 한껏 강조그림 6 "Head of duality 2" - marbre et bronze -108x70x27 cm.

7 김영중연구소

되고 있다. 석조에 기가 막히게 새겨진 곡선은 동세에 동반되는 필연적인 리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김영중의 작품세계에서는 어떤 작품도 정지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다. 모든 덩어리들은 비정형의 중심 축을 가운데 두고 순환하고 움직인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우리가 작가를 만나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되면 놀라울 것도 없게 된다. 사실 김영중에게 있어서 지적 의지란 고대인들이 ‘영적 존재’라고 부르는 것과 결합, 즉 제3의 눈이 열리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김영중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그는 직관적으로 볼륨을 움직이게 하는 힘의 방향(윤곽)을 느끼며, 조각 속에 혼을 담아 그의 작품으로 인하여 우주를 창조하는 것이다. 납득하기 위해서는 그의 조각실을 방문하여 그의 작품이 들어있는 특별한 방을 방문했을 때 눈을 열어야 하는데, 나는 그의 ‘작품들’이 살아있는 듯하고 역동적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김영중의 작품들은 제각각 같은 시조(근원)에 의해 사유되고 같은 정신(의도)에 의해서 결합된 뚜렷한 개성이 있다. 김영중은 언제나 창조적 발명을 추구하고 있는데, 우리를 놀라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미(美)의 논리, 지혜의 위력과 조화의 참모습 등에 대하여 생각하게 한다. 모든 방법들을 탐색함으로써 그는 현대미술의 파노라마에서는 매우 예외적 존재이다. 왜냐하면 그가 지니고 있는 매우 풍부한 주제의 다양성은 존재를 고양시키는 지속적인 관심과 신성으로 연결되는 특별한 관계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형태의 삶』이라는 저서에서 예술사가 포시옹(Focillon)은 예술작품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예술작품은 시간의 유동성에 빠져 있으면서, 영원에 속해있다. 그것은 특수하고 지엽적이고 개인적이며 한편 보편적 증거이다. 그러나 예술작품은 그것의 다양한 의미를 제어하고, 역사, 인간, 그리고 세상 등을 그려내기 위한 것으로서 그것은 인간을 창조하고, 세상을 창조하며, 그리고 역사

그림 8 "Torso of an aged beauty" - marbre bleu et rose -145x73x66 cm. 그림 7 "Pose of a woman" - marbre rouge 105x59x35 cm.

8 김영중연구소

속에서 다른 어떤 것으로도 바로잡을 수 없는 하나의 질서를 정착시킨다.” 이러한 설명이 너무 일반적인 것이라 해도, 김영중의 모든 작품을 위하여 새겨져 있는 것 같고, 미술사에서의 그의 개인적 지위와 작가로써의 그의 역할을 정의할 수 있게 한다. 실상 김영중은 그의 전 생을 바쳐서, 그리고 성공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실재를 창조자가 되게 하여, 존재의 외관이 아닌 존재의 근본을 탐구하는데 바쳤으며, 조각을 통하여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한 가치를 창조해내기 위하여 불굴의 창작활동을 해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전통에 관여하고 또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 속에서 완전하게 ‘예술의지’를 견지하고 있다. 그의 작품을 통해서 김영중은 작가의 역할을 고귀한 것이 되게 하였다. 그림 9 "Head of duality 1" - marbre et bronze - 95x50x22 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