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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교육연구와 실천제3호 1/12 지속가능성의 학습: 개인과 사회체계의 중층성 1 한숭희 (서울사대 교육학과 교수) 1. 지속가능성 학습하기 창조적 학습사회의 저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최근 200 년간 진행된 현대경제의 발전과 이전의 수천년간의 시대를 구분짓는 요소를 '학습'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그의 생각은 경제성장과 혁신의 전파자로서의 학습을 이야기한 것이지만, 이 생각은 비단 경제분야에만 한정된 것은 아닙니다. 정치적 민주주의, 인권과 사회의 연대와 포용, 문화적 다원주의와 공생의 의미 현대사회를 규정짓는 대부분의 '선진적 요소'들은 바로 학습의 활성화를 전제합니다. 사회의 변화는 학습에 의한 변화이며, 학습사회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모든 면에서의 선진화의 조건입니다. 한국은 역동하는 학습사회였습니다. 비록 나라는 아니지만 고대에서부터 지금까지 한국인의 빠른 학습력은 사회적 차원에서 수많은 변화들을 수용하고 적응하며 오히려 변화를 선도하는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유럽에서의 천년에 걸친 공화주의의 역사를 70 년 동안 빠르게 학습함으로써 연이은 구테타와 군사정부를 넘어 정치민주화를 이루어 내었습니다. 빠른 경제발전과 GDP 성장 속에서 독자적인 생산기술에 대한 연구개발과 학습을 이루어왔습니다. 고령화와 저출산, 청년일자리 새롭게 1 글은 2018 8 30 경기도 수원시에서 개최된 세계평생학습포럼 "Learning Cities, Learning Societies and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Connecting Research, Policy and Practice" 기조연설로 발표된 내용입니다.

지속가능성의 학습 개인과 사회체계의 중층성eduresearch.snu.ac.kr/Vol_03/PDF/pdf/04-han.pdf사회의 파괴를 향한 열차는 기관사 없이 속도를 높여 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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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교육연구와 실천」 제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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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성의 학습: 개인과 사회체계의

중층성1

한숭희 (서울사대 교육학과 교수)

1. 지속가능성 학습하기

창조적 학습사회의 저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최근 200 년간 진행된 현대경제의 발전과 이전의

수천년간의 시대를 구분짓는 요소를 '학습'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그의 생각은 경제성장과 혁신의

전파자로서의 학습을 이야기한 것이지만, 이 생각은 비단 경제분야에만 한정된 것은 아닙니다. 정치적

민주주의, 인권과 사회의 연대와 포용, 문화적 다원주의와 공생의 의미 등 현대사회를 규정짓는

대부분의 '선진적 요소'들은 바로 학습의 활성화를 전제합니다. 사회의 변화는 곧 학습에 의한 변화이며,

학습사회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모든 면에서의 선진화의 조건입니다.

한국은 역동하는 학습사회였습니다. 비록 큰 나라는 아니지만 고대에서부터 지금까지 한국인의 빠른

학습력은 사회적 차원에서 수많은 변화들을 수용하고 적응하며 오히려 변화를 선도하는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유럽에서의 천년에 걸친 공화주의의 역사를 70 년 동안 빠르게 학습함으로써 연이은

구테타와 군사정부를 넘어 정치민주화를 이루어 내었습니다. 빠른 경제발전과 GDP 성장 속에서

독자적인 생산기술에 대한 연구개발과 학습을 이루어왔습니다. 고령화와 저출산, 청년일자리 등 새롭게

1 이 글은 2018 년 8 월 30 일 경기도 수원시에서 개최된 세계평생학습포럼 "Learning Cities, Learning

Societies and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Connecting Research, Policy and Practice" 기조연설로

발표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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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분명한 해결책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지만 아마도 조만간

합리적인 사회적 협의와 해결의 실마리가 나타날 것을 기대합니다.

'지속가능성'의 문제는 제가 볼 때 지금까지 대한민국이 학습해왔던 어떤 모든 과제들보다 더 난해한

과제임에 분명합니다. 지속가능성을 학습하는 일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새로운 지식과 능력을 덧대어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에게 익숙하던 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방향에서 재학습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의 프레임을 바꾸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욕망의

지배를 받으며 생산하고 소비해오던 사회경제구조가 이제 스스로의 욕망을 제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지구의 자전축을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돌려야 하는 것처럼, 빠르게 달리던

자동차를 순간적으로 유턴시키는 것처럼 어려운 일입니다.

2. "변화" 그 안의 물신성

지난 20 년을 사로잡은 정보사회와 지식경제, 그리고 소위 제 4 차 산업혁명 등이 가지는 한 가지

특징은 이들이 "사회변화의 속도"를 현격히 높여 놓았다는 것입니다. 정보와 지식의 폭발적 증가는

사회를 그만큼 빨리 변하게 만듭니다. 빨라지는 지식의 사이클은 그와 연결된 물적 상품들을 폐기하고

대체하는 물적 생산의 사이클을 가속화시킵니다. 이 주기가 빨라질수록 우리 사회는 '변화'에 대한

맹목적 추종자가 됩니다. 산업화 이후 지난 200 년간 인간은 '슬로우'보다는 '패스트'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였고, '변화'가 '안정'보다 우위를 점하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휴대전화는 2 년마다 교체해야

하고, 한번 산 여름옷은 그해를 넘기면 영원히 옷장안에 박혀 있게 됩니다. 변화의 마케팅은 끊임없이

삶의 위기의식을 부추기며, 그 스트레스는 오히려 변화에 순응하는 에너지가 됩니다.

변화의 가치를 생산하는 사회가 물론 멋져보이지만, 그 실상은 그리 아름답지 않습니다. 변화의

속도가 제어되지 않는 사회는 더 많은 생산물을 만들어내는데 집중하게 되고, 그 안에서 '변화에 대한

민감성'이 세련된 교양의 기준이 됩니다. 그런 변화가 추동하는 사회는 끊임없이 남들과 차별적이고

우월한 자기이미지를 사회계급으로 재생산하고 배타적으로 전유하기 위해 자원을 사적으로 독점하는

집단들을 만들어냅니다. 변화에 무감한 사람들은 즉시적으로 사회적 낙오자가 됩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숨겨진 컨스피러시에 편승하며 숨가쁘게 따라갑니다. 변화의 이익은 소수에게 집중됩니다.

'변화'는 상품의 생산과 폐기 주기를 빠르게 합니다. 수많은 폐기물들을 만듭니다. 환경착취는 갈수록

심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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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허상은 또한 우리를 패배주의자로 만듭니다. 변화는 스스로를 물화된 형태, 즉 불가역적

변화로 자신을 포장합니다. "어쩔수 없는 변화이고, 적응하는 수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논리를

정당화합니다. 예컨대 세계는 지금 제 4 차 산업혁명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런 세계가 인간의

생각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외부로부터 불가역적으로 주어지는 객관적 조건'인 것처럼 표현합니다. 이런

세계는 우리 앞에 물신처럼 다가서 있고, 우리는 그저 그 변화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역할만 주어진

조연배우같습니다.

우리는 '사회의 변화'와 '인간의 적응'이라는 두 가지 축이 마치 처음부터 분리되어 있었던 것처럼

생각합니다. 마치 우리가 태풍이라는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방파제를 쌓는 것처럼, 우리 사회의

변화들을 그런 환경적 변화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 변화와 적응의 고리 자체가 우리 자신이

구축해 온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변화도 인간문명이 만들어낸 것이고, 그에 대한 적응도 인간문명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는 마치 서로를 외계를 대하듯 합니다. 적응은 변화를 외적 변화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형성된 적응을 통해 또 다른 변화가 시작됩니다. 연쇄작용입니다. 마치 원자로의

원자분열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처럼 변화와 적응의 연쇄반응이 지구라는 원자로 안에서 끝없이

이어집니다. 우리는 그것을 자연현상처럼 바라봅니다. 더 이상 그 방향을 제어할 수 없으며, 환경과

사회의 파괴를 향한 열차는 기관사 없이 속도를 높여 달립니다. 우리는 지금 <설국열차>를 보는

중일까요?

그러나, 이런 물화된 패배주의는 허상입니다. 사실 이런 모든 변화는 우리 '내부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화성에서 온 것도 아니고 우주대폭발로 생긴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만든 변화이고, 인간이

그에 적응한 결과입니다. 다만, 이런 변화와 적응이 연쇄적으로 작용하면서 마치 우리 통제범위를

벗어난 물화된 자연현상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인간이 만들었으니 인간 스스로가 그 변화를 다시

되돌리는 것이 그리 불가능해보이지만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논리를 간파하는 것도 무슨 로켓

사이언스를 이해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이제 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나와 상관없는 불가지적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변화되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인간의 역할은 그 변화에 적응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적응의 고리는 그 자체가 물신화된 허상입니다. 종교적 믿음같은 것들입니다. 우리를

"공멸"의 길로 몰고 가는 변화-적응의 맹목적적 연쇄반응을 다른 종류의 연쇄반응으로 바꾸어줄 새로운

상징적 키워드가 필요합니다. "지속가능성"은 아마도 그런 키워드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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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속가능성의 문제: 결국 개념과 방향전환의 문제입니다.

유엔에 의하면 지속가능발전은 지속가능성에 기초하여 경제의 성장, 사회의 안정과 통합 및 환경의

보전이 균형을 이루는 발전을 의미하며, “지속가능성”이란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미래

세대가 사용할 경제·사회·환경 등의 자원을 낭비하거나 여건을 저하시키지 아니 하고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UN Brundtland Report(’87)).

한국에는 지속가능발전 기본법이 제정되어 있고, 그에 따라 환경부는 2 년마다 지속가능발전 평가서

및 기본계획을 마련합니다. 이에 따라 각 지자체, 예컨대 서울시나 경기도는 각각의 지속가능발전지표와

계획을 수립하여 시행하고 있습니다. 서울시의 경우 이 계획은 크게 (1) 환경차원의 회복력 증대, (2)

사회적 차원의 형평성 및 문화적 활력 제고, (3) 경제적 차원의 일자리 창출 등을 포함한 30 개의

지속가능발전 지표를 만들었고, 경기도의 경우 '녹색경제로의 전환' 등을 포함한 6 대 목표 17 개 전략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속가능성은 하나의 총체적 가치변화를 전제로 하는 개념이며, 결코 수십개의

하위지표들의 단순합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예컨대 서울시의 30 개 지표 각각은 분명히 지속가능성을

높이는데 도움을 주는 것들입니다만, 이들을 모두 달성한다고 해서 우리 땅과 사회와 경제의

지속가능성이 현저히 높아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날 지속가능성을 실천하기 위해 제안된

글로벌 차원, 국가 차원, 혹은 도시 차원의 다양한 목표와 실천방법들은 지나치게 많은 요소들과

목표들을 포괄함으로써 기본 전제 혹은 기본 철학을 흐리게 만들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지속가능발전'이라는 말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근대주의적 발전론의 한계에 여전히

발목잡혀 있는지 모릅니다.

'지속가능발전지표'라는 개념은 앞에 붙은 '지속가능'과 뒤에 따라오는 '발전지표'의 결합어이지만,

어느 쪽에 방점이 직히는지에 따라 그 의미는 전혀 달라보입니다. 방점이 뒤의 '발전지표'에 찍혀있는

경우, 그 의미는 '지금처럼 발전을 그대로 지속하고 싶고, 그게 지속 가능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겠다'는

소극적 접근으로 이해됩니다. 사실, 아닌게 아니라 한국의 지속가능발전지표는 이정도의 의미밖에는

담아내고 있지 않아보입니다. 반면, 앞에 붙은 '지속가능'에 방점이 찍혀있는 경우는 그야말로

'지속가능성이 실현되는 방향으로 발전의 가치를 완전히 바꾸겠다'는 전방위적 의지가 담겨 있는

경우입니다. 그야말로 혁신이며 완전히 새로운 학습을 요청하는 일입니다. 어차피 현재와 같은

발전프레임을 완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지구생태의 지속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때, 우리는 이 의미를

후자로 해석하는 과감함 속에 우리 논의를 지속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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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성'이라는 개념 하나에 비추어 글로벌 사회 및 한 국가, 혹은 그 아래 한 도시의 발전정책이

통째로 바뀌는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지속가능성의 문제는 우선 유한한 가용자원과 무한한 인간욕망 사이의 모순적 충돌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용자원이 더 늘어날 수 없다면 답은 인간욕망의 수위를 조절하는

것이겠지요. 인간욕망을 줄이는데 교육보다 효과적인 수단이 없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적어도

지속가능성의 문제는 온전히 교육의 몫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치와 윤리에 의해 학습된 욕망을

만드는 일이 필요합니다. 가치가 개입된 욕망은 생물학적 욕망으로부터 "학습된 욕망"으로 전환을

요청합니다 . 욕망의 재해석이 필요합니다. 생물학적 욕망 안에 인문학과 윤리학이라는 가치를 집어넣어

재해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교육이 제일 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을 자세히 드려다보면 문제는 조금 더 복잡해집니다. 자원과 욕망 사이에 보이지 않는

제 3 의 무엇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 정체는 바로 사회장치들입니다. 개인의

생각은 이따금, 아니 대부분 사회장치의 톱니바퀴 안에서 미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개인의 욕망으로

보였던 그 욕망은 사실은 가만히 드려다보면 사회적이고 집단적으로 부풀려진 광기입니다. 이건 마치

괴테와 헤겔, 베토벤과 브람스를 사랑했던 독일인들이 어이없이 나치를 수용하는 무기력함과 같습니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설명한 라인홀드 니버가 말한 그런 모순과 같습니다.

우리가 대결하고 해체해야 하는 파괴적 사회장치는 다음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1)

대량소비를 통해 지속가능성을 획득하는 (생명을 부지하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이기적 생산체계 및 (2)

그 안의 과시적 인간군상들을 대량소비의 주체로 전화하고 이들에 대해 독점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대량소비가 사회적 관계 안에서 우위를 점하며 재생산될 수 있도록 하는 불평등 계층사회의 배타성이

그것이며, 이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파괴적 생산양식은 지속적으로 재생산됩니다. 혹은, "이기적

생산체계"와 "과시적 소비체계"가 배타적 사회권력구조를 매개로 서로 연동하는 구조라고 말하는 것이

더 편하겠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단순히 "자원을 아끼는" 문제를 넘어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본주의에

관한 근본적 문제, 혹은 과시적 소비를 통해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사회계층생산구조에 그 기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개별적 사안들을 보더라도 지속가능성은 기존 발전정책을 '보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과

대결'합니다. 왜냐하면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발전'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모든 것이 '선택'의 문제이며, 오른쪽인가 왼쪽인가를 선택하는 것처럼

상호 충돌하는 지점들이 생깁니다. 예컨대 주당 52 시간 노동규정이 생긴 것은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둔

선택이었습니다만, 그건 어찌 보면 지금보다 천천히 가자는 것, 소득이 줄어든다는 것 등 반대 측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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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로 한 개념입니다. 요컨대 '지속가능성'은 하나의 가치(value)이며, 한쪽의 가치를 위해 다른 쪽의

가치를 희생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서울특별시의 환경, 경제, 사회

영역에서의 지속가능지표들을 보더라도 어느 하나도 상대적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녹색교통수단을

늘리기 위해서는 디젤이나 휘발류 차량을 제한해야 합니다.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서는 에너지

사용량을 줄여야 합니다. 여성경제활동참가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남성경제활동참가율이 줄어들어야

합니다. 1 인당 공원면적을 늘이려면 그만큼 공유지를 늘려야 하고, 그에 상응하는 사유지의 축소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건 결코 천사와 악마의 대결이 아닙니다. 사실은 개별 이익들의 충돌의

문제로 나타나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상호 이해관계가 정치적으로 대립하게 됩니다.

이렇게 볼때, 지속가능성의 문제는 개인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작동하는 작동적

체계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모든 과정에 내포된 정치적 갈등을 집단지성적 학습과정으로 승화시키는

장치를 통해서 비로서 사회변화의 모멘텀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개인의식의 변화를 넘어 제도적

장치의 진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개인과 사회를 연결한 변화의 고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교육과 제도화가 결합되어 작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속가능성의 문제는 이에

합당한 사회장치들을 만들고 그에 지속적으로 익숙해지는 학습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개인차원의

변화를 넘어 사회차원의 변화가 어떻게 가능할지를 고민해야 하는 과제입니다. 이를 위해서 저는

'학습사회'라는 개념이 요청된다고 주장합니다만, 이 문제는 다음 절에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4. 지속가능성과 가치혁신-학습의 이중고리: 학습사회 개념의 도입

유엔은 SDG2030 을 통해서 17 가지 개별 과제들을 제시했습니다. 17 개의 개별과제는 다시 그 아래

수없이 많은 하위과제들을 나열합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달성도를 모니터링합니다. 어찌보면, 이들

과제들 사이에는 서로 충돌하는 과제들도 있을겁니다. 하지만 SDG2030 이 유엔이 도출한 이 과제들은

전세계적 차원에서 지속가능성 달성을 위해 현재까지로서는 최선을 다해 디자인하고 장착한 사회적

장치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 자체가 불완전하지만, 일단 최선을 다해 만든 사회체계적 장치이고,

앞으로 지속적으로 개선하게 되겠지요.

여기에서 핵심은, 우리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차원의 제도적 장치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며, 이 제도 역시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통해 개선되어 나갈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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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DG 를 만들었고 이미 실패했습니다. 그것을 개선한 SDG 는 아마도 MDG 의 실패경험을 반영한 것일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해봅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체계는 조금씩 조금씩 스스로의 적응방식에 대해

학습해가고 있다고 말입니다. 개인만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체계도 학습해갑니다. 제도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 제도를 매개로 인간과 인간이 소통하고 관계하고 결합하는 방식을 새로 배워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학습이라고 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개인학습의 결과가 뉴런의 변화이며 그

반응으로서의 인지와 행동의 변화라면, 사회체계의 학습은 제도적 안정화 및 그 지속적 개선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런 제도로 인해 사회적 작동방식의 변화라는 수행성의 증가가 나타납니다. 제도의 개선은

지속적 사회체계학습의 결과입니다. 어차피 '제도'라는 것은 인간행동의 관습적 반복과 안정화를

만들어내는 규약같은 것이며, 제도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법률 한줄이 쓰여졌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법을 배워간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지속가능성은 개인을 넘어선 사회체계의 적응방식에 관한 문제이며,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학습사회'라는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학습사회는 평생학습담론의 산물입니다. 1970 년대 스웨덴 교육개혁을 배경으로 하는 후센의

학습사회 프레임과 1972 년 유네스코의 존재를 위한 학습 보고서 (Learning To Be)는 학습사회라는

개념을 교육개혁과 평생학습의 촉발을 가능하게 했던 배경논리였습니다. 이후 수많은 연구와

보고서들이 출간되었습니다. 얼마전, 미국의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학습사회창조하기(creating

a learning society)'에서 학습사회를 혁신과 학습의 이중고리로 설명합니다. 사회변화는 세부적 변화를

넘어 전체 프레임의 혁신을 통해 가능하며, 그 혁신은 또한 학습(learning by doing)에 의해 증폭되고

확산되며 그 가치가 현실화된다는 것입니다. 논리상, 적어도 우리가 왼손으로 혁신을 말하면, 자연히

오른손에는 학습이 쥐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혁신경제는 학습사회와 뗄수없는 관계에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가 보기에 시장은 결코 스스로 학습과 혁신을

효율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뒤따릅니다. 그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정부가 지식경제에서의 혁신경제를 디자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학습을 디자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가 보기에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갈라놓는 차이는 바로 '지식의

차이'에 있으며, 비록 자원과 생산체계가 갖추어졌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사회 전반에서의 학습의

강화와 파급력을 증대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가 말하는 학습은 '실행학습(learning by doing)'입니다. 몸에 익은 실행학습이 지역, 도시, 국가,

사회 등을 단위로 '지역화(localized)'되어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말하자면, 한 사회는 그 사회

나름의 실행학습의 양식을 내장하고 있는데, 이것이 지역화된 학습양식이며, 그 양식의 우열에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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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가 내장하는 지식의 양, 그리고 그것을 혁신하는 속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혁신과

학습이 빠른 사회는 그만큼 빨리 선진국 클럽에 진입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회는 여전히 그 경계

밖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스티글리츠가 말하는 학습론은 사실 그리 정련되거나 세련된

이론체계가 아닙니다. 적어도 교육학자의 눈으로 볼 때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가 대단한 것은 그런

풋풋한 이론을 세계경제질서의 변화라는 거대한 그림 위에 투영하고 설명을 시도했다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교실 안에 갇힌 아이들에게 교과를 우겨넣는 일에 익숙한 교육학자들이 겸허히 배워야 할

스케일인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때, 지속가능성은 우리 사회 전체가 진화적 혁신의 한 축으로 학습해 나가야 할 가치입니다.

17 개, 30 개, 혹은 84 개 등의 낱낱으로 쪼개진 정책들의 집합체로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근본

가치로서 함께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정치적, 사회적, 경게적, 문화적 관계를 근본적으로 규정짓는

하나의 사회규범으로 학습되어야 합니다.

5. 학습사회: 지속가능성을 장착한 사회의 자기진화

서두에서 저는 최근 200 년간 진행된 현대경제의 발전과 이전의 수천년간의 시대를 구분짓는 요소가

바로 학습이었다고 말씀드리면서 이 발표를 시작했습니다만, 학습의 기능을 연 첫 단추는 바로 교육의

대중화로서의 학교사회의 탄생이었습니다. 지난 200 여년 동안 교육은 '가르치고 배우는' 대상과 방식,

그것을 규정하는 형식과 기관, 제도와 문화, 혹은 관련된 자원의 배분방식 등의 변화를 통하여 한 시대의

인간학습의 다양한 차원들을 열어왔습니다. 교육이 발명해낸 몇 가지 장치들은 인류의 문명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는데, 예컨대 문해(literacy)는 가장 대표적으로 문명사의 경로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어 대중문해는 학교제도를 통해서 교양에 기반한 민주주의를 형성함으로써 더 이상

'민주주의=무식한 민중지배체제'라는 도식이 사실이 아님을 입증하였습니다. 이런 '학교사회(schooled

society)'를 통해 인생의 거의 1/4 의 기간을 전일제 학생으로 살아가는 시대를 만들었고, 지구상 모든

인구가 최소한 중등교육 이상을 거의 의무적으로 받게 되는 과정에서 교육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정책사업이 됨과 동시에 학교와 노동시장이 하나로 연결되는 사회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대학의

발명은 학문이 형성되고 재생산되는 양상을 극적으로 바꾸게 되었고, 교육과 연구가 하나의 상호작용

고리 안에 연결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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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최근 우리는 학교를 넘어서는 또 하나의 교육체계가 탄생하는 과정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동이나 청년 뿐만 아니라 성인들도 교육의 대상 안에 포섭됨으로써 성인학습과 평생학습으로

견인되는 평생교육체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과거의 학교사회(schooled society)가 학습사회 (learning

society)로 전환되는 과정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학습사회는 개인학습의 총량이 평생에 걸쳐,

전사회적으로 증가하는 가운데, 이런 학습을 사회적으로 관리하는 양식으로서의 교육체계의 새로운

변환을 일컫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학습사회는 두 가지 층위로 논의되어 왔습니다. 하나는 개인학습에 대한 공급을 확대하는

사회적 지원체제로서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학습은 개인이 하는 것이며, 사회는 그 개인의 평생학습의

기회를 확대하고 공급을 늘리며 자원을 동원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듭니다. 한 사회가 개인의 학습을

늘려야 하는 절박성에 직면하게 되고, 따라서 이것을 촉진하는 사회적 조건을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논리입니다. 우리가 논의하는 대부분의 접근이 바로 이런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지금까지

학습도시들은 학습사회를 이런 방식으로 이해해왔습니다. 이 모델은 개인들의 평생학습을 위한

학습기회를 확충하고 그 접근성을 증대시키며, 교육의 공급, 특히 공적 교육프로그램의 공급을 늘리며,

특히 학교와 대학 등이 수행하는 비형식교육 참여를 증대하거나 온라인 학습을 촉진하는 등의

교육공급혁신방법을 개발하고, 인증되지 못했던 학습결과에 대해 경험학습인증체계를 적용하는 등의

다양한 방법을 활용합니다. 도시마다 평생학습관을 설치하고 성인학습의 공적 기반을 확대하기도

합니다.

반면, 학습사회를 보는 또 다른 방식은 학습사회란 개인학습의 총체가 아니라 사회 그 자체가

학습하는 현상이며, 사회변화는 곧 사회가 수행하는 학습의 결과라고 보는 것입니다. 사실, 사회가

학습한다는 말은 아무래도 우리에게 낯선 표현입니다. 자비스는 그의 여러 논문과 책에서 "학습은

궁극적으로 개인차원의 활동이며, 사회는 학습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학습이란

'의식을 가진 생명체(conscious living)가 할 수 있는 활동이라고 말합니다. 혹은 파울로 프레이리 조차도

"우리가 직접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사람을 바꾸고 그들이 세상을 바꾸도록 할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회나 조직은 학습활동의 주체가 될 수 없으며, 단지 배경이나 조건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보기에 인간의 존재적 차원에서의 새로운 학습, 즉 평생학습이 필요하게 되었고,

학습사회는 그런 활동이 활성화될 수 있는 조건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가 정말 학습활동의 주체가 될 수 없을까요? 여기에서 학습사회를 이해하는 또 다른

관점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즉, 학습사회란 '학습하는 사회'라고 봅니다. 학습도시 역시 이런 관점에서는

'학습하는 도시'라고 보는 것이지요. 물론 여기에서 '학습'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개체 차원의 심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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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학습이 아니라 사회가 수행하는 비교적 영속적 제도변화 및 그에 수반하는 집합적 의식변화와

수정과정을 의미합니다. 학습의 개념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학습을 달리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의

의미도 달리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류문명사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교육사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문명사를 통해 사회가 지속적으로 변화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족사회에서 국가개념이

탄생하고, 그것을 재생산하는 장치들이 탄생합니다. 점차 정교화되면서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되는 것을

견제하는 방식들이 탄생합니다. 소수를 제외하고는 그런 장치들이 과거로 퇴화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사회가 학습한 것입니다. 20 세기 초반의 전쟁의 세기를 거치면서 인류는 전쟁방지를 위한

다양한 장치들을 마련합니다. 이제 세계적 전면전이 일어나는 것은 과거보다 훨씬 어려워졌습니다.

아무리 트럼프나 김정은, 혹은 아베라고 할지라도 쉽게 전쟁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합니다. 환경에 대한

인식도 높아져서, 플라스틱과 이산화탄소에 대한 개념이 모든 정책의 중심에 등장합니다. 과거보다 더

자연을 착취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해서 이것이 무한정 지속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쓰레기분리, 플라스틱 사용금지, 온실가스배출억제 등은 이제 사회적 장치들로

자리잡았습니다. 사회가 학습한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모두 '개인변화'의 총합을 넘어선 '사회적 창발성'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체계가

학습하는 방식입니다. 즉 학습하는 사회의 모습입니다. 지구가 환경보호에 대해 인식을 갖고 사회적

장치들을 마련하기 시작했다고 해서 모든 인간들의 머리속에 환경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이에 반대하며, 거부적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집단적으로는 어쨌든 그쪽 방향으로

정책이 지속됩니다. 일종의 지속가능성입니다. 개중에 시스템적 사고를 통해 사회적 차원의 문제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대부분은 그에까지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럴 경우 개인적 사고가

시스템사고로 전환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조건과 계기들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6. 자기학습하는 사회체계 (a social system that learns)

사회가 학습한다는 뜻은 사회가 어떤 환경에 대해 새로운 반응방식을 구축하고 그것을 습관화 혹은

안정화한다는 뜻입니다. 새롭게 만들어진 사회작동방식이 비교적 긴 시간동안 유지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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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사회도 일단 학습된 적응방식은 시간이 지나면서 관습화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문화라고 부릅니다.

지속가능성의 문화를 만들어내는 일이 우리의 목표라면, 지금까지는 주로 개인학습에 의존했습니다.

즉, '지속가능발전교육(이것을 ESD 라고 말합니다)'이라는 이름으로 개개인들에게 지구의 지속가능성이

무엇이며 왜 필요한지를 교육합니다. 그 결과 사회 전체가 지속가능성을 제고하게 된다고 가정합니다.

사실 이것이 지금까지 교육과 학교가 해 온 일입니다. 그러나 한 사회가 '지속가능성'이라는 새로운

특성을 획득하게 되는 일은 이런 개인차원에서의 학습을 쌓아가는 것과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복잡계 이론의 차원에서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기에서의 전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1) 사회는 개인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2) 개인들의

개별적 총합으로는 사회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복잡계의 제 1 전제, 즉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라는 전제에 기초해 본다면, 한 사회는 개인들의 단순합 이상의 변화를 포함합니다. 즉, 개인학습의

총합만으로 한 사회의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 사회는 개인들의 관계를 통해 구성됩니다.

관계란 최소한 두 사람 이상의 주체적 개인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따라서 한 사람의 개인은 그

관계를 온전히 통제하거나 관리할 수 없습니다. 사회는 이런 관계적 산물이며, 그 관계는 개개인들에

의해 통제되지 못하는 중층성을 갖습니다. (4) 이러한 중층성은 개인들로 하여금 그 사회에 대해 제한적

합리성만을 가질 수 있다는 한계를 부여합니다. 사회의 층위는 개인의 층위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이므로, 개인들이 완전한 합리성을 가지고 사회의 변화를 예측하거나 디자인할 수 없습니다. (5)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회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집단적 적응양식을 조금씩 만들어내고,

개인들은 그런 적응양식을 관찰하고 성찰하며 소통합니다. 이런 집단적 적응양식은 적어도 개인의

차원에서 볼 때에는 일종의 창발성입니다. 즉, 개인들에게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성질이 사회적

차원에서 발현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개인들의 제한적 합리성은 점차 경험과 성찰을 통해 보다

완전한 합리성으로 나아갑니다.

물론, 이 과정이 아무런 가치충돌이나 정치적 갈등 없이 부드럽게 전개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과정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이익충돌과 갈등의 문제를 정치과정이 아닌 학습과정으로

풀어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사회가 딜렘마와 이중구속을 계기로 스스로 진화하고 학습하는 과정

(우리는 이것을 확장학습 expansive learning 이라고 부릅니다만)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창발성'은 바로 그런 이중구속을 넘어 새로운 적응방식을 학습한 사회체계의 새로운 특성을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학습사회'는 이런 집단적 학습과정을 일상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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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하면서 그 안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창발적 진화를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사회의

모습입니다.

대부분, 창발성은 사회적 차원에서는 '제도'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말하자면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한 사회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지속가능성을 위한 새로운 지표와 목표,

제도와 정책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단번에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의 제도는 그것이

지속적으로 개선되고 보완되는 과정 속에서 학습해 나갑니다. 제도란 인간들의 행동의 안정화, 영속화

기제라고 볼 때, 지속가능성은 그런 제도적 진화를 통해 지속적으로 그 실체를 분명하게 해 나가야

합니다.

향후 많은 연구와 실험이 필요합니다. 아직 우리 교육학자들은 이런 학습사회에 대한 지식이 부족할

뿐더러 연구경험도 일천합니다. 지금까지 개인학습에 치중하여 이론을 축적해왔을 뿐 개인들이 모인 한

사회, 즉 '거인'을 학습하도록 하는데에는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거인을 굴려서 움직이게

하려고 하지 말고, 그 거인이 깨어나 스스로 걷고 학습하게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학습도시는

학습하는 거인입니다. 지속가능성을 향한 거인의 발걸음을 기대합니다.

끝으로 여려분들과 우화 하나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6 개월전 쯤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만든 것입니다만, 여러분들께서 공감해주셔서 오늘 말씀을 끝내는 말미글로 공유하고자 합니다.

After created the world, God realized he made a huge mistake. Adam and Eve were illiterates, barely remembering what they were ordered to obey. Concerned with the ‘tree of knowledge’ happening again, He decided to educate them.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education. The education was formless and empty. The first day, God said “Let there be letters”, and there were letters. So the people were divided into the literates and the illiterates. The second day, God created Eden of education to be a holy place ceremonial by learning and teaching. God saw that it was good. The third day, God called the Eden ‘school’ and separated the form of learning into formal, non-formal, and informal. And it was so. The fourth day, God upgraded ‘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at the center of the Eden, to produce various fruits of knowledge. Now He call it ‘university’. The fifth day, God so loved those who cannot read and write with compassion, so he sent his only begotten Son, ‘adult education’, to save them. The sixth day, God finally finished his work by making the whole world full of education, so He ordered “all life should live long in learning and education”, which today we call it ‘lifelong learning and lifelong education’. The seventh day, God re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