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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가 귀신같아야 부하가 움직인다sedo.or.kr/board/board_pds/pds_53/B114.doc · Web view주식회사 장성군 - 공무원이 경영하는 회사- 양병무 지음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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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가 귀신같아야 부하가 움직인다

주식회사 장성군

- 공무원이 경영하는 회사 -

양병무 지음

21세기북스 / 2005년 10월 / 222쪽 / 12,000원

▣ 저자 양병무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와이 주립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KDI 주임연구원, 미국 이스트웨스트센터 연구원, 경총 노동경제연구원 부원장을 역임했고, 현재 한국인간개발연구원 원장과 한국리더십학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감자탕교회 이야기』와 『디지털시대의 리더십』을 비롯 총 28권의 책을 발간했다.

▣ Short Summary

혁신이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되었지만, 공무원 사회에는 아직 이 말이 멀게만 느껴진다. 절차만 고집하는 융통성 없는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특히 장사를 하거나 공장을 지으려는 기업인의 입장에서는 공무원의 답답한 일처리가 가장 큰 벽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중국으로 인도로 공장을 옮기는 기업인들의 첫 번째 하소연이 바로 “공무원이 기업마인드를 이해하지 못 한다”이다. 하지만 장성군은 다르다. 기업의 경영마인드를 도입하여 성공적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기업인과 군민, 찾는 관광객 모두 장성군은 다르다고 손꼽고 있다.

지방자치제가 시행되기 전인 10년 전만 해도 장성군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전라남도의 작고 외진 마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는 지방자치나 학습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장성’을 알고 있다. 바로 ‘장성아카데미’를 통해 공무원과 군민 모두 커다란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10년에 걸친 지속적인 학습과 교육을 통해 공무원에 서서히 경영마인드가 스며들었다. 홍길동 캐릭터 제작과 생가 복원 작업을 통한 군 이미지 브랜드화, 문화 자원을 활용한 선진적인 관광사업, 미래를 내다본 환경 농업의 체질화는 다른 어느 지자체보다 앞선 장성군만의 특징이다.

학습을 통한 경영마인드 도입은 실질적인 성장으로 이어졌다. 2004년에만 장성군에 29개의 공장이 들어왔다. 실질적인 부가가치가 공무원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다. 규율과 원칙의 틀에 갇혀있던 공무원들이 이제는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지식근로자’로 거듭나고 있다. 장성군의 변화과정은 혁신을 통해 성장을 이뤄내는 좋은 사례일 뿐 아니라, 성공적인 지방자치의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시금석이 될 것이다.

▣ 차례

머리말

제1장 새로 태어난 장성군 주식회사

'장성'이요? 거기가 어디에요? / 대체 장성에서 무슨 일이? / '주식회사 장성군'을 부르짖는 CEO형 군수 / 『목민심서』를 읽으며, 이광요 수상을 좋아하는 CEO / 규정과 관례의 벽을 무너뜨리며 / 주식회사 장성군의 전략 본부, 경영관리팀 / 주식회사 장성군의 설립 밑천 / 주식회사 장성군의 비즈니스 파트너, 장성군 의회 / '주식회사 장성군'의 혁신 경영 / 장성군청의 '민원인 10대 권리장전'

제2장 변화는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

중국에는 만리장성, 한국에는 아카데미장성 / 장성군의 혁신과 장성 아카데미의 성공 요인 / 장성 아카데미의 탄생 / 주식회사 장성군이 주주들에게 준 최고의 배당 / 장성 아카데미 강연자의 눈에 비친 장성 / 장성 아카데미를 다녀간 이들의 장성군 사랑 / 아름다운 장성 그림 전시회

제3장 사람이 세상을 바꾸고, 교육이 사람을 바꾼다

콩나물과 사람은 밑 빠진 독에서 자란다 / 장성 군민의 지식 창고, 장성 아카데미하우스 / 글로벌 마인드를 길러주는 해외 배낭연수 / 내 안의 울타리를 넘어 나를 키우는 여행 / 지자체 최초의 민간기업 위탁 연수 교육 / '범국민 품격 높이기 운동'으로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세상 / 명문으로 떠오른 장성고등학교

제4장 브랜드를 만들어야 기억에 남을 수 있다

소설 밖 세상으로 걸어 나온 홍길동 / 21세기에 부활한 홍길동에게 옛집을 찾아주다 /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홍길동 / 장성군과 SBS의 홍길동 캐릭터 전쟁 / 연극인 Y씨의 '홍길동 캐릭터' 특허 취소 심판 청구 / 홍길동이 일깨운 문화 콘텐츠 산업의 가능성

제5장 단풍만으로는 안 된다, 서비스를 함께 팔아라

장성 하면 오색 애기단풍, 축제 하면 백양사 단풍 축제 / 해설이 있는 장성 관광, 1일 버스투어 / 선비의 향기 가득한 필암서원 / 청백리의 상징, 박수량 선생 백비白碑 / 마음이 씨앗 되어 일군 숲, 축령산 조림지 / 숲 속의 별천지, 세심원洗心阮 / 임권택 감독과 금곡 영화마을 /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장성호 / 체험 관광의 산실, 한마음 자연학교

제6장 환경이 살아야 농촌이 산다

우리 장성군 농민들 복 받은 겁니다 / 환경을 살리기 위한 장성군의 선진 행정 / 친환경 농업만이 살 길이다 / 친환경 농업의 선두주자 '한마음 공동체'와 '학사농장' / 장성 사과, 없어서 못 팔아요 / 내 자식도 농사짓게 할 거요

제7장 장성은 대한민국의 희망이다

전국 최초를 만들어가는 사람들 / 마스터플랜을 세워라 / 전국 각지에서 몰려 오는 견학 인파 / 상을 싹쓸이하는 비결이 뭡니까 / 복지 행정에도 앞장선다 / 삼성과 LG는 왜 장성으로 달려왔을까 / 나노 산업을 유치하라 / 여기 공무원은 다릅니다!

글을 마치며

주식회사 장성군

- 공무원이 경영하는 회사 -

양병무 지음

21세기북스 / 2005년 10월 / 222쪽 / 12,000원

제1장 새로 태어난 장성군 주식회사

‘장성’이요? 거기가 어디예요?

처음 만나는 사람들 사이의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듦으로써 가장 쉽게 친근감과 유대감을 형성하는 방법으로 한국 사회에서 이보다 유용한 질문이 또 있을까. “고향이 어디세요?” 그런데 조심해야 한다. 상대방이 고향의 지명을 서너 번 반복해서 들려주어도 도무지 들어본 적 없는 낯선 곳일 때, 질문한 사람이나 대답한 사람이나 당황스럽고 난감할 수밖에 없다.

“고향이 어디세요?”

“혹시 장성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정선군이요?”

“아니요, 전라남도 장성군입니다.”

“저, 죄송하지만 장성이 어디죠?”

“…….”

‘장성군長城郡’이라는 지명은 불과 10년 전만 해도 전국구라고 할 수 없는 철저한 지역구, 아니 강원도 산골의 어느 오지만큼이나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그래서 항상 마지막에는 말을 줄이는 것으로 설명을 포기하거나 마지못해 바로 옆의 광역시인 ‘광주’가 고향이라는 말로 지루하고 귀찮은 설명을 대신해왔다.

장성 사람들의 ‘말줄임표’는 광고 및 마케팅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한마디로 장성군이라는 브랜드의 ‘아이덴티티Identity'와 ’파워Power'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 경제 무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양상을 살펴보면, 개인부터 기업이나 국가에 이르기까지 아이덴티티를 확립하고 브랜드 파워를 키우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성은 지방자치제 실시 이전까지 브랜드 파워, 혹은 장성을 한마디로 대표할 수 있는 이미지를 갖지 못했다. 부산 하면 ‘영화의 도시’, 남원 하면 ‘춘향의 고장’, 여주ㆍ이천은 ‘쌀’이라고 하지만 장성은 이들처럼 하나의 이미지로 대변할 수 있는 아이덴티티가 확립되어 있지 못했다. 그런데 지방자치제가 실시되기 시작한 1995년, 즉 민선 자치에 의해 민선 군수가 등장한 그해 7월 1일 이후 장성군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그 어떤 기관이나 단체, 어떤 사람들도 전라남도 북단의 작은 군에서 시작되고 있는 놀라운 변화의 조짐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장성 사람들조차도.

대체 장성에서 무슨 일이?

일단은 장성군이 대한민국의 지자체 중에서 ‘전국 최초’로 이루어 낸 일들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청와대가 홈페이지를 개설하기 일주일 전인 1995년 12월에 장성군은 전국 지자체들 가운데 가장 먼저 홈페이지(http://www.jangseong.jeonnam.kr)를 열었다. 대한민국 디지털 행정의 큰 걸음이 장성에서 첫 발을 뗀 셈이다. 디지털 행정의 첫걸음을 내디딘 장성은 이후에도 연이은 전국 최초의 실적을 과시했다. 대표적인 예가 홈페이지 개설과 함께 벌인 1인 1PC 운동이었다. 이어서 1997년에는 전국 최초로 전자 결재 시스템을 도입하기도 했다. 장성군은 또한 CI(Country Identity)를 군 단위 지자체 중에서 최초로 도입했으며, 토지민원행정 종합전산화를 최초로 추진했다. 장성군에서 다양한 실적들이 ‘전국 최초’로 이루어져오고 있다는 사실은, 장성의 공직자들이 그만큼 자신의 업무를 개선하고 개발하여 끊임없이 ‘혁신’을 이뤄내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와 같은 변화와 혁신에 힘입어 장성군은 대통령 앞에서 세 번이나 업무 및 혁신 사례를 보고하였다. 또한 중앙 정부나 상위 지자체들로부터, 그리고 경실련을 비롯한 민간 시민단체 등으로부터 각종 혁신 관련 상을 휩쓸어 지난 10년 동안 수상한 상금이 무려 100억원에 이를 정도이다. 장성군을 벤치마킹해 공무원의 의식을 전환하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지자체도 이미 80여 곳이 넘는다. 그러다 보니 공무원들 사이에는 이런 우스갯소리가 유행하고 있을 정도이다. “장성군을 모르면 간첩이지!” 그만큼 장성군의 지명도와 브랜드 파워가 지난 10년 동안 엄청나게 격상되었다는 의미다. 이는 장성군을 배우기 위해서 다른 지자체나 기업체로부터 파견되고 있는 견학 인파를 보아도 증명이 된다.

‘주식회사 장성군’을 부르짖는 CEO형 군수

21세기 지식ㆍ정보화 사회의 변화 속도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다. 생각의 속도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지구상의 모든 기업들은 ‘변즉생 불변즉사(變則生 不變則死)’, 즉 변하면 살고 변하지 못하면 죽는다는 각오를 경영 마인드로 정립해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공무원 조직은 아직도 변화에 둔감하다. 빠른 속도로 변화를 좇아야, 아니 변화의 속도를 앞질러야 생존할 수 있다는 기업들의 절대 명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04년 스위스의 국제경영개발원(IMD)이 발표한 국가 경쟁력 부분에서 한국이 51개국 가운데 하위권인 35위를 기록한 데에는 공무원 사회의 이와 같은 폐단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IMD의 한국 측 책임자인 경쟁력평가원의 정진호 원장은 “대한민국의 변화와 발전, 그리고 혁신의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공무원 사회의 정체 현상과 경직성이다”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21세기 정보화 사회의 변화 속도와 대한민국 공무원 사회의 경직성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이를 바로잡아 변화와 혁신을 불러오겠다는 이가 있었다. 바로 초대 민선 군수로 당선된 이래 3선으로 10년 동안 장성군을 위해 일해오고 있는 김흥식 군수이다. 하지만 문제는 공무원의 변화 가능성을 어디에서 찾아 어느 방향으로 이끄느냐 하는 데 있었다. 그는 이 문제의 해답을 자신의 경험과 이력에서 찾아냈다. 바로 ‘고객 제일주의’와 ‘책임 경영’으로 대변되는 기업의 경영 마인드가 그것이었다. 즉 공무원의 장점을 살려 기업의 경영 마인드와 접목시킬 수 있다면 대한민국 공무원은 세계 제일이 될 수 있으며, 대한민국의 선진국 진입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발견한 것이다. 결국 그는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던 첫해인 1995년 민선자치단체장 1기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 당시 그가 내건 선거 전략의 모든 핵심은 이 한마디에 응축되어 있었다. ‘주식회사 장성군!’ 그는 스스로를 주식회사 장성군의 준비된 CEO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장성 국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규정과 관례의 벽을 무너뜨리며

주식회사 장성군을 만들기 위한 첫 번째 작업은 기업의 기획조정실에 해당하는 ‘경영관리팀’ 구성이었다. 1995년 7월 1일 민선 군수 취임 후 닷새 만에 김흥식 군수는 전격적인 팀제의 경영관리팀 골격을 마련했다. 그러나 경영관리팀 운영 직후 김 군수는 견고한 벽에 맞닥뜨리게 된다. 위에서 시키는 일만 수동적으로 하면 아무 문제가 생길 리 없는 공무원의 입장에서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일은 잘해야 본전일 뿐이었다. 새로운 일에 의욕을 보였다가 잘못되는 경우 돌아오는 것은 감사와 징계뿐이라는 인식이 공무원들 사이에 팽배해 있었다. 그야말로 무사안일주의와 적당주의ㆍ복지부동ㆍ보신주의의 장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주식회사를 표방하며 변화와 혁신을 주장하는 초대 민선 군수와 기존 공무원들 사이의 갈등은 이미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김 군수 역시 처음 1년 정도는 공무원과 전쟁을 해야 할 거라는 각오를 하고 있었다.

김 군수는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공무원들이 우수한 인재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지식ㆍ정보화 사회로 변해가는 세상의 흐름에 맞춰 방향을 제시하고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면, 1970년대 고도성장 과정에서 공무원에게 쏟아지던 국민의 신뢰를 되찾을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와 같은 확신 속에 김 군수는 경영관리팀뿐 아니라 군청의 모든 조직을 팀제로 개편하고 싶어 했다. 경영관리팀을 운영하는 6개월 동안 서서히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실무 과장 및 계장들이 솔선수범하며 열심히 일하는 풍토가 정착되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개편된 조직에 맞게 인원을 정리하고 능력과 실적에 따라 유능한 인재를 과감하게 발탁해 적재적소에 재배치함으로써 연공서열 중심의 인사 관행을 탈피했다. 미흡하나마 기업형 인사 관리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공무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했던 것이다.

주식회사 장성군의 설립 밑천

사실 지방자치의 실시는 대한민국의 모든 지자체들에게 경쟁이라는 숙명을 받아들이라는 요구에 다름 아니었다. 주식회사가 무엇인가. 주주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인 회사가 아닌가. 따라서 ‘주식회사 장성군’의 설립을 주장한 김 군수는 주식회사 장성군의 CEO로서 주주인 군민들을 자신의 주인으로 소중하게 섬기겠다는 맹세를 한 셈이었다. 그런 만큼 김 군수는 초대 민선 군수로 취임한 이후 군정의 기본 방향을 ‘군정의 경영화’, ‘행정의 서비스화’, ‘농업의 일류화’, ‘지역의 균형화’로 정해 실천해오고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의문이 하나 생긴다. 장성군은 인구 5만여 명에 불과한 이름 없는 작은 군, 더구나 민선 군수 취임 당시의 예산 규모로 볼 때 전라남도에서조차 하위권에 머물던 보잘 것 없는 농촌이었다. 그런 그들이 주식회사 장성군을 설립할 수 있는 밑천, 즉 자본금으로 여겼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김 군수가 주식회사 장성군 설립을 위해 가장 먼저 주목한 밑천은 ‘교육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었다. 그는 평소 이렇게 말해왔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사람이지만, 사람을 바꾸는 것은 교육이다.” 주식회사 간판을 내건 장성군은 공무원과 주민의 의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교육과 연수를 중시하는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교육밖에 없다고 믿고 교육에 대한 투자를 과감히 실행한 것이다. 교육을 중시하는 정책 속에서 탄생한 장성의 명물이 바로 ‘장성 아카데미’이다. 다음으로 김 군수가 주목한 주식회사 설립 밑천은 문화 산업과 관광 산업 발전의 토대가 될 자원들, 즉 장성의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이었다. 또한 첨단산업을 유치할 수 있는 장성의 지리적 여건은 주식회사 설립의 또 다른 밑천이었다. 광주광역시의 하남공단과 첨단과학단지가 가까워 기업하기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주식회사 장성군의 마지막 밑천은 공무원의 열정과 헌신, 그리고 군민의 적극적인 협조였다. 이 밑천을 토대로 민과 관이 협력함으로써 주식회사 장성군의 혁신 경영이 성공에 이를 수 있었다.

‘주식회사 장성군’의 혁신 경영

어떤 조직이든 리더의 생각과 철학이 중요하다. 조직은 리더의 생각의 크기만큼 성장하기 때문이다. 장성군의 경우도 역시 김 군수의 생각과 철학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 그가 어떤 철학과 비전 위에서 장성 호를 이끌고 있는지 먼저 살펴보는 것이 장성군의 혁신 사례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기본은 곧 상식’이라고 믿는 김 군수는 상식을 존중하는 경영 마인드로 군 행정을 펼치고 있다. 그는 행정이란 물이 흐르는 대로 가면 문제가 생길 리 없는데, 상식에 어긋나는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무리가 따른다고 말한다. 기본과 함께 그가 중요시하는 철학이 ‘원칙’이다. ‘원칙은 곧 진리’이기에 공평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어느 한쪽이 불합리하게 손해를 본다면 그것은 원칙이 아니라고 말한다. 원칙인지 변칙인지의 여부는 감추지 않고 공개해야 판가름이 난다고 믿는 그는, 지난 10년의 군수 임기 동안 원칙을 고수해왔기에 많은 어려운 결정들을 단호하게 내리고 추진할 수 있었다.

김 군수는 의사결정을 내릴 때 숙고 끝에 직관에 따라 움직인다. 따라서 빠른 결정과 신중한 결정이 조화를 이룬다. 그가 결정을 신속하게 내리는 경우는 대부분 원칙과 경험을 토대로 할 때이다. 원칙에 맞으면 ‘예스’이고 맞지 않으면 ‘노’라는 의사를 분명히 한다. 또 경험했던 일은 자신 있게 가부를 결정한다. 반면에 이해관계가 상충될 때에는 결정을 내리기까지 뜸을 들인다. 이해 관계자의 의견을 전부 청취한 후에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다. 어떤 일들은 결정을 내리는 데 한두 달이 걸리기도 한다. 그러나 일단 결정이 내려지면 무섭게 밀어붙인다.

군민들의 여론을 중시하는 그이지만 이런 경우에 있어서만큼은 절대로 여론에 휘둘리지 않는다. “여론에 항상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여론이 지나치게 현실타협적인 경우에는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는 “리더는 카이사르가 말했듯이 보고 싶은 현실만 보아서는 안 되며 보고 싶지 않은 현실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에게 ‘고집쟁이’, ‘독선가’, ‘불도저’라는 별명이 따라다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장성군 공무원은 결과적으로 그의 결단력에 놀라워한다. 지난 10년 동안 김 군수가 내린 의사결정에 큰 과오가 거의 없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제2장 변화는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

중국에는 만리장성, 한국에는 아카데미장성

장성군은 1995년 9월 15일 이후 매주 금요일 장성 아카데미를 열고 있는데 2005년 현재 10년째를 맞고 있다. 어느덧 500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장성 아카데미를 수강한 인원만도 총 21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이 수치를 단수 계산해보면 장성 군민 한 사람당 네 번 가량의 강의를 들은 셈이 된다. 1995년 9월부터 2005년 8월까지 장성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한 총 448명의 강사들을 분야 별로 분석해보면 그 면면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그들 중 연구원이 106명, 대학교수가 106명, 전문 경영인이 49명, 대학 총ㆍ학장이 45명, 장ㆍ차관이 49명, 언론인이 24명, 국회의원이 14명, 문화예술인이 10명, 외교관이 6명이다. 말 그대로 우리 사회 모든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 총망라되어있다. 그래서인지 전국 자치단체와 공무원들 사이에 이런 말이 생겨났다. 중국에는 만리장성, 한국에는 아카데미장성. 이는 그만큼 장성군이 대한민국 공직 사회에서 학습하는 지방자치단체로 자리를 잡아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장성 아카데미는 산업 사회에서 지식ㆍ정보화 사회로 넘어가는 21세기에 교육이 그 구성원을 변화시키고 재무장시키는 데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준다. 사람이 경쟁력인 지식ㆍ정보화 사회에서는 다음 세대로 전해지는 가장 위대한 상속이 물질이 아닌 지식과 정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생각이 변하면 행동이 변하고, 행동이 변하면 습관이 변하며, 습관이 변하면 운명이 변한다”고 했다. 장성 아카데미 강연을 들은 장성 군민의 말 속에서 느낄 수 있듯이 장성 사람들은 교육을 통해 생각과 행동과 습관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장성 군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러한 변화가 모여 장성군 전체의 운명이 바뀌는 기적을 이루어가고 있다. 장성군 공무원과 군민들의 의식은 이제 개별적이고 자체적인 학습 조직을 구축해 지식 근로자로 거듭날 만큼 성장해 있다. 그리고 장성군은 지식기반 산업의 메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제3장 사람이 세상을 바꾸고, 교육이 사람을 바꾼다

콩나물과 사람은 밑 빠진 독에서 자란다

조직의 힘은 그 구성원, 즉 사람의 경쟁력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에서 공무원 조직은 어느 조직 못지않게 우수한 인재들로 구성돼 있다. 그런데 그 인재들이 규정과 관행에 젖어 현상 유지에 안주하다 보니 자기계발과 발전이 없고, 심한 경우 21세기 지식ㆍ정보화 사회에서 무능한 사람으로까지 낙인찍히기도 한다. 그러나 김 군수는 어떤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변하게 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 교육의 효과를 확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장성 아카데미 강좌를 비롯해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안했을 때 대부분의 공무원과 군민들은 물론이고 장성군 의회와 지역 언론들까지 반대가 심했다. “장성군 같은 시골 농촌에서 교육이 가당키나 한가. 차라리 그 돈으로 다리 하나 더 놓고 길 하나 더 뚫는 게 낫지.” 당시 김 군수는 교육 회의론자의 위와 같은 논리에 대항해 ‘콩나물론’을 주장함으로써 끝내 자신의 교육 철학과 프로그램을 관철시켜 나갔다. “콩나물에 물을 주면 밑 빠진 독을 통해 그 물이 하릴없이 새 나가는 것 같지만, 흐르는 시간과 더불어 콩나물은 조금씩 자라고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꾸준한 교육을 통해 서서히 성장하는 법이다. 내가 장성 아카데미를 애지중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성군은 지난 6월 국민고충처리위원회가 주관한 옴부즈만 평가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등 민선 이후 각종 평가에 입상해 받은 사업비가 154개 분야에서 98억 원을 넘어선다. 해외연수를 비롯한 각종 교육 프로그램에 매년 7억~9억 원씩 투자하고 있는 금액을 초과해 상금으로만 한 해에 10억 원씩을 벌어들이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장성군은 2004년에 총예산 1,655억 원 가운데 교육비로 8억 9,700만 원을 배정했다. 총예산 대비 0.54%를 투자한 것이다. 그리고 공무원 1인당 연간 교육비는 160만 원이었다. 이 수치를 장성군의 수많은 교육 프로그램 성공 사례들과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교육 투자의 정도 차이가 그대로 교육 효과의 정도 차이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성군의 성공적인 교육 사례는 이제 전국 지자체의 선망과 연구대상이 될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동안 304개 팀 4,263명이 장성군을 방문해 각종 시책을 벤치마킹해 갔다. 장성군의 교육 성과와 이를 토대로 가능할 수 있었던 혁신 사례들이 대한민국 전체 공무원에게 좋은 자극이 되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마인드를 길러주는 해외 배낭연수

외국과의 교류를 통해 앞선 문물을 부단히 받아들이려는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마인드를 갖느냐 못 갖느냐는 한 국가의 흥망을 결정해왔다. 전국 지자체들이 놀라워하고 부러워하는 장성군의 눈부신 변화와 발전, 그리고 혁신에 있어서도 선진국의 발전상과 문화를 접하기 위한 노력들이 큰 힘을 발휘하였다. 재미있는 통계를 하나 살펴보자. 재정 자립도가 16~18%에 불과한 장성군은 현재 재정 자립도 98%를 기록하고 있는 서울시의 한 구청과 자매결연 하고 있다. 그런데 이 구청 공무원들의 여권 소지 비율이 20% 정도인 데 반해 장성군 공무원들은 100%를 기록한다. 여권 소지 비율에서 보이는 이 재미있는 현상의 가장 큰 이유는 장성군이 1995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장성군 공무원의 해외 배낭연수 때문이다. 1995년부터 2001년까지 7년에 걸쳐 370명의 공무원이 유럽으로 배낭연수를 다녀왔다. 본인의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전 공무원에게 동등한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장성군 공무원은 해외 배낭연수에 참가한 뒤로 많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우선은 넓고 할 일 많은 세상의 낯선 나라에서 손짓과 발짓을 동원해 여러 우여곡절을 극복해 보았기에 어떤 상황에 놓여도 대처해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아울러 장성군이라는 좁은 지역에 안주하거나 우물 안 개구리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겠다는 글로벌 마인드가 생겨났다. 또한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며 수동적인 성격을 보이던 이들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일에 임하며 능동적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유럽인의 앞선 시민의식과 질서의식, 정중한 매너 등을 배워 성숙한 선진 시민으로 거듭나고 있다. 한편 연수 참가자들은 배낭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면 자체 평가 회의를 가진 뒤 소감문을 정성스럽게 작성해 제출한다. 머릿속의 기억은 망각에 의한 휘발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소감문은 배낭연수를 통해 얻은 것들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제본하여 보관된다. 이것은 『배낭 메고 세계 여행』, 『세계는 넓고 일정은 짧다』라는 제목의 수필집으로 발간되기도 했다.

지자체 최초의 민간기업 위탁 연수 교육

장성 아카데미는 출범 1년 만에 장성군을 대표하는 교육 상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장성 아카데미는 모든 군민과 공직자에게 공통적으로 제공하는 ‘총론 교육’이었다. 그래서 공무원만을 위한 보다 세분화된 ‘각론 교육’이 필요했다. 즉 총론에서 배운 폭넓은 교양을 바탕으로 공무원이 자신의 의식 수준과 업무 능력, 그리고 대 군민 서비스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심화 교육 방안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고민 끝에 장성군은 민간기업에서의 위탁 교육 방안에 대한 검토를 시작했다. 이후 민간기업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방식과 내용을 파악하느라 동분서주한 장성군 교육계의 노력 덕분에 1996년부터 공무원들을 1년에 한 번씩 3박 4일 동안 민간기업에 위탁해 집합 교육을 받게 하는 프로그램이 마련되었다. 장소도 한 장소를 고집하는 대신 다양한 기업들의 연수원을 활용함으로써 교육 참가자들에게 늘 새로운 교육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제 장성군의 민간기업 위탁 교육은 여러 지자체들이 벤치마킹을 시도할 만큼 그 성과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또한 장성군 공무원들 스스로도 이 연수 교육의 의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장성군청 김용화 총무과장의 말을 들어보자. “3박 4일 동안 민간기업 연수원에서 위탁 교육을 받다 보면 장성군청 내 실ㆍ과 공무원은 물론이고 읍면과 읍면 사업소 직원까지 자주 만날 수 있어 자연스럽게 친분이 쌓이게 되더군요. 유대관계가 돈독해지니 인적 네트워크가 형성되고요. 사회가 분화될수록 복합 민원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장성군은 본청에서 사업소에 이르기까지 빠르고 편리한 대 군민 행정 서비스가 가능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장성군의 김형수 교육담당은 이 교육 프로그램의 성과가 높아질 수 있었던 요인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시설을 갖춘 전국 각지의 기업 연수원에서 받는 교육은 정신 재무장과 재충전의 기회일 뿐만 아니라 휴식과 화합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항상 장성군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연수를 떠날 수 있도록 합니다. 공무원들이 일상과 업무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려는 배려인 셈이죠.”

명문으로 떠오른 장성고등학교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서울 강남이라고 해서 더하고 전라남도 장성군의 농민들이라고 해서 덜할 리 없다. 농민들이 조상 대대로 살아온 정든 땅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가 자녀들에게 보다 좋은 교육 환경을 마련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 때문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장성군 농민들은 자식 교육을 위해 고향을 등질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서울대학교 5명,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 및 이화여대에 14명을 비롯하여 서울ㆍ경기 등 수도권 소재 4년제 대학에 127명, 전남대에 58명, 조선대에 64명 등을 포함해 3학년 학생 전원이 4년제 대학에 진학. 특히 4년제 대학 합격률 100%라는 기록을 1998년부터 8년 동안 이어오고 있음.’

이는 결코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 고등학교의 진학률 통계가 아니다. 바로 장성고등학교의 2005년 진학 통계이다. 장성고등학교 학부모들이 그토록 자신하는 이유를 알 만하다.

교육과 학습을 강조하는 장성군에게 장성고등학교는 훌륭한 교육모델이자 큰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장성군청은 다양한 방법으로 장성고등학교를 지원하고 있다. 우선 도시계획도로 건설의 일환으로 2005년 안에 장성고등학교 진입도로를 놓아줄 계획이다. 현재 토지 소유자들의 허가를 받아 설립 단계에 있다. 다음으로 ‘장성장학회’를 통한 장학금 지급을 들 수 있다. 1992년부터 장성군 공무원들과 군민들이 참여해 기금을 모으기 시작한 현재는 해마다 1억에서 2억 원 정도씩 기금이 모이고 있다. 교육 환경의 낙후로 인한 농촌 지역의 급격한 인구 감소는 대한민국 대부분 지자체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고민거리이다. 자녀들의 대학 진학을 위해 도시로 이주하는 현상을 막을 방법이 없다. 그러나 장성에는 명문 고등학교로 부상한 장성고등학교가 인구 감소 추세를 저지해주는 역할을 한다.

제4장 브랜드를 만들어야 기억에 남길 수 있다

소설 밖 세상으로 걸어 나온 홍길동

한국 사람치고 조선 중기 광해군 때의 문인이었던 허균의 소설 주인공 ‘홍길동’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 초인 15세기 중엽 장성군에서 태어난 역사 속 실존인물로서의 홍길동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 홍길동을 현실 속으로 걸어 나오게 하는 작업은 아주 작은 계기를 통해 시작됐다. 지금은 퇴직한 장성군청 변범석 계장이 1997년 2월에 제안한 아이디어가 그 발단이었다. 그런데 홍길동 생가 복원 사업이 검토단계에 들어간 지 한달이 채 못 되어 1997년 3월 강원도 강릉시에서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 선생 선양 사업의 일환으로 홍길동을 강릉시의 마스코트로 정하려 한다는 언론 보도가 터져 나온 것이다. 까딱 잘못하다간 강릉시에 ‘홍길동의 고향’이라는 엄청난 프리미엄을 빼앗길 판이었다. 엄청난 프리미엄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이 “대한민국에서 홍길동 모르는 사람 없다”는 말 자체가 어떤 홍보 수단으로도, 아무리 막대한 돈을 쏟아 부어도 이룰 수 없을 정도의 지명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장성군청의 담당자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장성군은 관련 자료를 준비해 언론에 제공하면서 대응에 나섰다.

이렇듯 장성군과 강릉시가 홍길동 원조 논란을 벌이고 있던 어느 날 귀한 손님이 장성군을 방문했다. ‘실존 인물 홍길동’이라는 논문을 쓴 바 있는 연세대학교 국문과의 설성경 교수였다. 그는 홍길동이 장성 사람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전문가를 찾고 있던 장성군으로서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얼마 후에 장성군은 정식으로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에 홍길동의 실존 여부와 정확한 생가의 위치를 가려달라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연구 용역을 의뢰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7년 11월 서울의 전경련 회관에서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공개 세미나가 개최됐다.

홍길동을 역사에서 현실 속으로 끌어내는 과정에서 주목할 점이 장성군 공직자의 일하는 방식이다. 만일 장성군이 적당히 구전 자료를 모아 ‘홍길동은 장성에서 나고 자란 역사적인 인물이다’라고 주장했다면 홍길동은 햇빛을 볼 수 없었다. 전문 학자들에게 연구 용역을 줌으로써 철저한 고증을 위임했기에 자랑스러운 선조로서 홍길동을 장성에 모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장성 사람은 누구를 만나더라도 장성이 ‘홍길동의 고향’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아니 고향이 장성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홍길동을 연상하기 시작한다. 소설 속에만 갇혀있을 뻔했던 역사 속의 홍길동이 소설화된 지 500년 만에 실존 인물로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21세기에 부활한 홍길동에게 옛집을 찾아주다

홍길동 생가에는 홍길동과 관련된 모든 것을 숙지하고 있는 도우미와 해설자가 있다. 의심의 눈길 속에 확신을 바라는 마음을 감추고 찾아온 이들에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증거들을 제시하고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방문객이 제일 먼저 찾게 되는 곳은 홍길동을 문헌으로 만날 수 있는 홍길동 역사관이다. 해설자는 홍길동 관련 『조선왕조실록』 사본을 보여주며 하나하나 설명을 곁들인다. 해설을 들으며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홍길동의 이름을 직접 확인한 방문객은 갑자기 얼굴이 환해진다. 그렇게 바라던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해설자의 확신에 찬 설명은 장소를 옮겨 『만성대동보』라는 고문서 앞에서 이어진다. 이 고문서는 일제시대인 1920년경 명문가의 족보 속에서 성씨 별로 주요 인물만을 모아 편찬된 책이다. 그런데 이 고문서에도 홍길동은 형 일동과 함께 홍상직의 아들로 올라있으며, ‘도술을 부렸던 자’라는 부가 설명이 기록되어있다. 방문객의 확신은 홍길동이 조선을 떠나 일본 오키나와에서 율도국을 건설한 내용의 문헌 기록을 보면서 최고조에 이른다. 국내 문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홍길동의 마지막 행적이 오키나와에서의 이상국 건설로 마무리되는 일본의 관련 자료들을 통해 확인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의구심을 잔뜩 품고 찾았다가 홍길동이 실존 인물임을 알고 기뻐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장성군 홍보요원인 김철영 씨는 자신의 일에 대해서 느끼는 보람을 이렇게 말한다.

홍길동이 일깨운 21세기 문화 콘텐츠 산업의 가능성

김 군수는 1999년 청와대에서 전국 지자체 단체장, 국영기업체장, 교육기관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홍길동 캐릭터 사업에 관해 발표했다. 보고가 끝나자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홍길동 군수님, 안녕하세요?” 대통령의 이 말에는 21세기의 최고 유망 분야 가운데 하나인 문화콘텐츠 산업의 선도 지자체로 장성군을 인정하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있었다. 실제로 이 날을 계기로 전국의 지자체들이 자신들의 고장을 대표할 수 있는 캐릭터를 발굴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기 시작했다. 장성군의 이와 같은 문화 콘텐츠 산업의 위상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홍길동의 실존 여부에 대한 역사적 고증과 생가 복원, 유물 발굴, 테마파크 조성 등의 치밀한 준비 끝에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홍길동 캐릭터 사업이 차츰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홍길동을 내세워 전국 자치단체 중 유일하게 문화 콘텐츠 산업에 뛰어든 장성군은 지난 1998년에 문화학습교재 등 21개 회사와 캐릭터 라이센스 계약을 체결, 1억 5,000만 원에 달하는 수익을 올렸다. 전국 지자체 최초의 캐릭터 사업이었고, 실적이었다. 홍길동 캐릭터 사업의 성공에 힘입은 이 실적 덕분에 장성군은 지난 1999년 기획예산처와 행정자치부가 공동 주관한 제 1회 공공부문 경영혁신 대회에서 경영관리혁신 대상을 수상했다. 장성군은 이외에도 1998년 이래 매년 5월 초에 ‘장성 홍길동 축제’를 개최해오고 있다. 그야말로 실존 인물 홍길동의 전국 홍보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소설 속의 가상 인물로만 여겼던 홍길동의 체취를 축제 현장에서 생생하게 느낄 수 있기에 아이들의 손을 잡고 찾아오는 관람객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농산물 판매에도 홍길동 문화 콘텐츠 사업은 십분 활용되고 있다. 우선 장성 ‘홍길동 쌀’ 공동 브랜드화 및 판촉 활동이 강화되고 있다. 이미 장성군의 5개 단위 농협이 생산하는 쌀을 ‘홍길동 쌀’로 통합시켰다. 유기농인 홍길동 쌀은 지난해 7,500가마 정도가 수도권에 판매됐다. 이밖에도 홍길동 쌀 시식용 샘플 제작, 홍길동 쌀 평생고객 확보를 위한 택배비 지원 사업, 230여 종 이상의 소포장재 지원 사업 등이 홍길동 캐릭터 사업의 도움을 받아 적극 추진되고 있다. 김재찬 경영기획실장은 문화 콘텐츠 산업 중점 추진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3차 산업인 홍길동 문화 콘텐츠 산업을 성공시켜 1, 2차 산업을 육성시키는 게 장성군 발전 전략입니다.”

제5장 단풍만으로는 안 된다, 서비스를 함께 팔아라

장성 하면 오색 애기단풍, 축제 하면 백양사 단풍 축제

“우리 지역에 장성의 백양사 같은 관광자원만 있어도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느라 머리를 쥐어짜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100만여 명의 관광객이 몰린다는 함평 나비 축제를 담당하고 있는 함평군청의 한 공무원이 한 말이다. 하지만 10년 전까지만 해도 백양사의 아름다운 자연은 꿰지 못한 구슬에 불과했다. 호남 지역에서와는 달리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는 백양사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장성군은 백양사라는 관광자원을 전국의 관광 명소를 개발한다는 목표 아래 축제 형태로 발전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우게 됐다. 그리고 백양사를 관광 축제의 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계획에 장성군의 또 하나의 명물이자 백양사의 단아한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오색 애기단풍’이 더해졌다. 백양사라는 관광자원에 오색 애기단풍만이 갖는 독특한 특성을 찾아내 보태고 나자 장성군 공무원들은 자신들이 만들려는 축제를 차별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렇게 해서 1996년에 제1회 백양사 단풍 축제가 열리게 되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백양사라는 관광자원이 축제라는 테두리 안에서 더욱 부가가치를 높인 셈이다. 백양사와 오색 애기 단풍은 축제 형태로 전환되면서 이제 장성을 대표하는 관광 상품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기업의 경영 마인드와 행정 서비스 정신을 문화ㆍ관광 산업에 접목한 결과이다. 하지만 문화관광과 이대원 과장의 말을 들어보면 장성군 공무원들에게 그 노력은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영원한 진행형의 과제일 듯하다.

“보령의 머드 축제나 담양의 대나무 축제 같으면 머드 목욕탕, 머드 화장품, 대나무로 만든 술, 죽세공품처럼 머드와 대나무로 할 수 있고 만들 수 있는 게 많지 않습니까. 하지만 백양사의 단풍은 안 그렇죠. 수익 사업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아이템을 찾아야 합니다. 또 지자체의 특유의 정체성을 살릴 수 있는 행사 프로그램도 개발해야 합니다. 가을 산사 음악회같이 격조 있는 분위기 속에서 ‘격조 높은 문화와 자연’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행사들로 채워나갈 계획입니다.”

해설이 있는 장성 관광, 1일 버스투어

외국의 유명한 관광지에 가면 인기 있는 관광 상품이 바로 버스투어이다. 짧은 시간에 많은 관광 명소를 밀도 있게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장성군 역시 주식회사답게 경영 마인드를 발휘해 지난 2004년 4월부터 ‘관광 장성 1일 버스투어’라는 상품을 내놓았다. 정기 노선버스가 닿지 않는 관광지들을 테마 별로 연결해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관광을 할 수 있도록 한 상품이다. 특히 문화유산 해설자가 동행하며 각 방문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해주기 때문에 관광객들은 옛 선현들의 지혜와 땀, 그리고 당시의 삶의 모습을 보고 느끼며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장성의 참맛에 눈을 뜨게 된다. 현재 장성군의 버스투어 상품은 몇 주 전부터 관광객들의 예약이 거의 차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아졌다.

버스투어 상품이 이렇게 빠르게 궤도에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실무 담당자인 문화관광과 공영갑 씨의 공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장성군의 문화와 역사에 정통해 장성군청 내에서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으로 통한다. 또 한학에 조예가 깊고 각 문중의 인물에 대해서도 해박하다. 그는 ‘보고, 즐기고, 먹는 관광’을 주장한다. 일방적으로 보기만 하고 가는 관광에는 감동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남도립대학교 해설사 양성 과정을 이수한 문화해설가 2명을 초빙해 ‘해설이 있는 관광’을 만들어냈다. 장성군은 앞으로 여가의 중요성이 더욱 높아질 것에 대비해 1일 버스투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체류형 관광 상품을 개발할 예정이다.

제6장 장성은 대한민국의 희망이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오는 견학 인파

장성 아카데미와 장성군청의 혁신 성공 사례가 알려지면서 장성군을 방문하는 인파가 줄을 잇고 있다. 작은 시골 마을에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뿐만 아니라 전국 각 지자체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넘쳐나니 새삼 소문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장성군에서는 지식 경영을 철저하게 강조하고 있다. 이 때문에 공무원 상호 간에 자신의 업무 노하우를 100%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다른 여러 조직이나 기관 및 단체에서 곧바로 모방하는 일이 생겨 힘이 들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장성군 공무원도 부분적으로만 공개하고 싶은 마음을 갖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장성군 공무원은 지식과 정보의 공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교육을 통해서 절감했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공개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장성군 공직자는 견학 인파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더욱 성실하고 겸손한 자세를 갖추기 위해서 노력한다. 다른 시군에서 시행하는 훌륭한 정책이 있으면 언제든지 벤치마킹을 위해 달려가는 것도 그러한 성실성과 겸손한 업무 자세에서 기인한다. 실제로 전산화 및 정보화에서 가장 앞서가고 있는 서울 강남구청이나 친환경 농업 분야를 선도하고 있는 경기도의 양평군청을 장성군 공무원이 직접 방문해 열심히 보고 듣고 배운 적이 있다. 사실 장성군 공무원이나 군민도 장성군 안에만 있을 때는 그런 변화를 잘 느끼지 못한다. 장성군청의 각종 교육 프로그램이나 연수 프로그램들이 자신의 삶과 사고를 얼마나 변화시켜 놓았는지를 말이다. 하지만 장성군 밖으로 나가 다른 지자체 공무원을 만났을 때, 다른 지역 사람을 만났을 때 그들은 느낄 수 있다. 자신이 얼마나 달라졌고,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자신의 모습을 부러운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를.

상을 싹쓸이하는 비결이 뭡니까

장성군을 방문한 사람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이 또 한 가지 있다. 장성군이 정부와 경제 단체 등에서 시상하는 각종 상을 싹쓸이하는 비결이다. 그런데 비결이라는 것이 딱 한 가지가 있어서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굳이 비결을 묻는 이에게 한 가지를 꼭 보여줘야 한다면 장성군은 그 답으로 ‘교육’을 제시한다. 장성군을 방문한 사람들은 무엇보다 공무원의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자세에 놀라게 된다. 그건 학습의 효과이다. 장성 아카데미 교육과 대기업 연수 등을 통해 세상의 흐름을 실감할 수 있었던 장성군 공무원은 자신 있게 변화의 방향을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다. 교육을 통해 깨인 의식을 지니게 된 공무원의 자기계발 노력 또한 대단하다. 가령 고등학교 졸업의 학력을 가지고 있던 공무원 가운데에 장성군의 교육 프로그램에 자극을 받아 야간대학이나 방송통신대학에 진학하는 이가 해마다 늘고 있다. 그 결과 2004년 현재 장성군 전체 공무원의 70% 이상이 전문대학 졸업 이상의 학력을 소지하고 있다.

삼성과 LG는 왜 장성으로 달려왔을까

장성을 대표하는 기업으로는 오래 전부터 보해양조와 고려시멘트가 있었다. 하지만 민선 자치 시대 개막 이후 주식회사 간판을 내건 장성군은 보다 많은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사활을 걸다시피 했다. 완만하게 진행되던 투자 유치 실적은 2004년 들어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게 됐다. 삼성전자와 LG전자 등의 가전 협력 업체와 유망 중소기업 등 29개 업체가 한꺼번에 몰려왔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창출되는 장성군 내 고용 인력은 530명, 투자액은 700억 원에 이른다. 지금까지 장성에 입주한 중소기업이 170여 곳이었음에 비춰볼 때 1년 사이에 무려 17%나 증가한 셈이다. 더욱이 세계적 기업인 삼성과 LG의 협력업체들이 몰려옴에 따라 장성군은 이제 중소기업의 새 둥지로 떠오르고 있다.

2004년 10월 12일 왜 우리나라가 ‘규제 공화국’인가를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한겨레신문의 기사가 있었다. 당시 기사 제목은 이랬다. “공장 짓는데 최소 6개월 걸린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장 건립 허가를 받는 데 필요한 서류가 68건이나 돼 공장을 지으려면 실제로 빨라야 반년이 소요된다. 외국 기업이 한국에 투자하는 것을 기피하고, 한국인 기업인이 공장을 짓기 위해 중국이나 동남아로 발길을 돌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다 보니 공장을 짓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기업인의 불만과 불신이 적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던 한국물산 나정균 사장의 마음을 사로잡아 공장을 짓도록 한 것은 바로 장성군 공무원의 발로 뛰는 서비스 정신이었다.

그를 감동시킨 첫 번째 사건은 토지사용심의 허가를 받을 때부터 시작됐다. 다른 곳에서는 빨라야 2주 걸리는 것을 장성군에서는 하루 만에 처리해주는 게 아닌가. 최금택 투자유치 담당이 사전에 전화로 취지를 설명한 후 서류뭉치를 직접 들고 11명의 심사위원을 일일이 찾아가 결재를 받았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닌 것이다. 갑작스러운 일이 있어 자리에 없었던 한 심사위원에게는 두 번이나 찾아가기도 했다. 공무원이 앞장서서 나서니 모든 일이 그야말로 만사형통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정균 사장은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난관을 만날 때마다 오히려 기대감이 생기기까지 했다. ‘이 사람들이 이번에는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민원실에 가도, 도시과를 가도 마찬가지였다. 놀라울 정도로 친절하게 일을 처리해주었다. 말로만 들어오던 공직 사회의 ‘원스톱 서비스’가 바로 장성군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군청의 모든 공무원이 언제나 기업을 도울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글을 마치며

주식회사 장성군에 얽힌 이야기는 리더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주식회사 장성군 CEO인 김흥식 군수의 철학과 비전이 장성의 기적을 만드는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기업인으로 잔뼈가 굵었던 김 군수는 기업의 경영 마인드를 장성의 행정에 접목하기 위해 자신감과 결단력, 집중력, 실행력을 발휘했다. 또한 비전 제시 능력도 보여주었다. 그런 그는 리더라면 명예와 보람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50대 후반에 고향에 내려와 10년 동안 군정을 이끌며 자신의 열정을 발산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도 축복이었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한 지역에서 군수로 세 번이나 당선됐고, 외부로부터도 어느 정도의 평가를 받고 있으니 명예로웠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명예는 다음 군수가 와서 일을 잘할 수 있도록 골치 아픈 현안들을 가능한 한 남기지 않고 해결한 후 물러나는 데에 있다고 믿는다.

‘주식회사 장성군’이라는 슬로건은 궁극적으로 공무원이 군민을 가장 소중한 고객으로 섬기겠다는 선언이자 다짐이었다. 현재 대부분의 장성 군민은 공무원의 수준 높은 서비스 정신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공무원 스스로 ‘군림하는 공무원’이 아니라 ‘섬기는 공무원’으로서의 모습을 한시도 망각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장성군의 성공 사례들은 다른 지자체에 곧바로 영향을 줌으로써 이 땅의 지자체 전체가 세계화와 지방화를 동시에 구현하는 놀라운 상승의 효과를 가져왔다. 대한민국에 벤치마킹할 수 있는 좋은 사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장성군 이야기가 감동을 주는 것은 군수를 비롯한 장성 사람들이 완벽해서가 아니다. 이곳에도 크고 작은 문제가 있다. 다만 작은 농촌 지자체에서 열악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부족하고 연약한 부분은 서로가 감싸주고 격려하면서 교육을 통해 사람을 변화시키며 꿈과 비전을 갖고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그들의 노력이 놀라운 것이다.

양병무 지음

규율과 원칙의 틀에 갇혀있던 공무원들이 이제는 혁신을 통해 ‘지식근로자’로 거듭나고 있다. 10년에 걸친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 서서히 경영마인드가 스며든 것이다. 장성군의 변화과정은 혁신을 통해 성장을 이뤄내는 좋은 사례일 뿐 아니라, 성공적인 지방자치의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시금석이 된다.

주식회사 장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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