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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thly Issue ANTENNA, AUGUST,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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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thly Issue ANTENNA, AUGUST,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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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Monthly Issue ANTENNA, AUGUST, 2012

AUGUST THE 3rd Edithion

infinity

Page 2: Monthly Issue ANTENNA, AUGUST, 2012

Page 3: Monthly Issue ANTENNA, AUGUST, 2012

콘텐츠,

ㅇ ㅔ ㅅ ㅔ ㅇ ㅣ

무한급수를 구하려는 동시대의 어깨동무에게 고함

ㅅ ㅣ

김선우,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ㅁㅜㅎㅏㄴㅈㅏㅂㅈㅣ

미드나잇 인 홍대 - <스트리트H>

<월간 이리>

ㅍㅡㄹㄹㅔㅇㅣㅅㅡ

Hello Alcohol holicers! This is Summer

ㅇㅕㅇㅎㅗㅏ

영화,하고 현실,하고 구분 못해?-<영화는 영화다>

월간 <안테나> 8월호Monthly Issue ANTENNA August, 8, Theme Infinity 2012.08.23 staff. Seo Youn hu HongNoh Mi jin

Lee Moa Writter Jeong Ji yeon Kim Jong yeon Monthly IRI’s Editor.

Copyrightⓒ. 2012. ANTENNA .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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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급수를

구하려는

동시대의

어깨동무에게 고함

무한도전이 멈췄다. 친구가 7년 동안 사귀던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김선우 시인은 ‘신을 만들 시간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서로를 의지했

다’라고 시에서 말했다. 김연아가 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빙판으로 돌

아가겠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이 글 하나로도 확인 할 수 있다. 나는 이 글을 2012년 7월

14일 새벽 2시 11분에 쓰고 있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언제인지

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졸자의 기록을 읽는다. 그리고 아주 간소한 협동

심을 느낄 수도 있고, 함께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는 동시대의

어깨동무들이다. 우리의 높낮이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너무나도 다른 존재들이지만, 그 존재를 확인

할 수 있는 가능성의 범위에서 명명하는 어깨동무다. 우리는 동시대에

함께 살고 있다.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죽은 사람 책을 교과서로 공부를 한다. 미래를 위해서.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현재는 어찌

보면 가장 좁은 문이자 좁은 복도다. 가능성이 많은데 잘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꼭 죽음 뒤에 나타나거나 탄생 직전에 발휘

되는 기묘함이기 때문이다.

무대와 관객석이 있다. 함께 호흡한다. 배우들은 연기를 하고 관객들은 장면에 맞는 리액션을 펼친다. 타이밍에 맞게 적절하게,

우리는 모두 실존이지만 모두 연기를 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 내가 말하는 동시대의 개념은 이정도다.

가장 관련 없는 옆사람에 대한 예의는 침묵에서 시작한다. 모르는 척 해주는 일도 종종 있고 아예 관심이 없어서 존재감을 느끼

지 못할 때도 있다. 예전 과거의 이웃은 먹을 것을 나눠주고 다정하게 인사하는 사이였으며 요즘의 이웃은 이웃이라는 실체만을

갖게 만드는 테두리에 불과하다. 미래의 이웃은? 미래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지금 현재도 충분히 걱정스럽고 복잡하

고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 살인의 가능성은 늘 이웃에서 출발한다.

∞. 천재들은 항상 미치광이로 묘사된다.

∞. 지루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 술에 취해 했던 말을 무한대로 반복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말수가 적은 편이다.

∞. 항상 멋있는 주인공은 1등이 아닌 꼴등을 많이 한다.

∞. 재난 영화를 보면서 항상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걱정을 하곤 한다.

∞. 뷔페를 들어가는 마음과 나오는 마음은 격차가 너무 크다.

∞. 기형도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찍어내는 공장은 문을 닫으면 안된다.

나 자지러지고 있어요

“ ”

/ 서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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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

∞. 너무 걱정이 많다. 걱정이 많아서, 많은 걱정들은 또 걱정을 낳고, 걱정을 사귀고 걱정끼리 사랑을 하고

걱정을 낳는다. 걱정 많은 사람들끼리 함께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지가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는 이웃사람들처럼 가벼운 사이일수도, 복닥거리는 관계에 놓일 수도 있다. 어른들은 항상 ‘사람 일

은 모르는 것이다’라고 말을 놓는다. 모르는 일은 무한대로 있고 우리는 그 무한급수를 풀어낸다. 수학을 싫어

하지만 수학에 비유하는 이 모든 문제들은 ‘무엇이 문제인가?’로부터 기인하는 문제들이다. 수학에는 답이라도

있지만 이 학문에는 답이 없다. 그런데 그래서 더 좋지 않은가, 싶기도 한 것이 우리가 내놓은 잠정적인 합리화

다. 예술이 지닌 아킬레스건이다. 예술이 숟가락으로 밥을 먹여주는 것도 아니다. 밥을 먹여주면 재미가 없잖아?

합리화는 합리화를 낳는다.

이 모든 무한함 속에서 우리는 복닥거리며 그래도 잘 산다. 잘 사는 것이 문제다. 해결의 방도는 없다. 해결할

이유도 없다. 그저 우리가 동시대에 살면서 동시대의 우리들에게 어떤 것들을 보여주고 어떤 것들을 느끼게

해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 그런 것이 몇몇 필요하다. 먼 생으로부터 당도한 과거의 텍스트들을 읽고 우리는

현재를 고민했고, 미래나 앞날 따위에 관심이 많은 우리들에게는 숙명과도 같은 문제다.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지. 돈이나 취업 같은 문제들. 지구 한복판에 놓인 사람들이라고 하기엔 너무 지치는 문제를 오랫동안 풀고

있는 것 같다. 졸자도 그렇고. 3번으로 찍기에는 보기가 무한정인 객관식 문제 같다. 이 삶이라는 게 꼭 그런

것이라서 우리 모두가 정답이 되거나 우리 모두가 오답이었으면 좋겠다. 문제를 이렇게 풀어라, 식의 고집 때

문에 우리는 무한도전도 못보는 우울한 토요일을 맞이했고 어떤 미래에 대한 답이 있겠다 싶어 김연아는 다시

돌아왔다. 친구는 여자친구와 다시 사귈 수 있을까? 여자는 많아. 남자도 많고. 이런 조언이나 해주는 것이 우리

동시대의 관계에서 전부가 아니다. 우리에겐 신을 만들 시간이 없다. 영웅을 만들 시간이 없다. 우리는 우리를

의지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우리끼리 구호물품을 발명해 나누게 될 것이다. 우리끼리 살면서 필요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어깨동무, 함께 한다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동시대의 무한함만 있으면 된다. 졸자가 결론지은 이 합

리화가 여러 이웃들에게 무한한 합리화를 낳았으면 좋겠다. 서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결과물을 낳는 것은 반

칙이지만 우리는 사랑할 권리가 있다. 질투할 권리가 있고 아직 꺼낼 것이 너무나도 많은 우리의 서랍은

정말이

지, 무한하

다. 무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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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2011년을 기억함

김선우

그 풍경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신을 만들 시간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서로를 의지했다

가녀린 떨림들이 서로의 요람이 되었다

구해야 할 것은 모두 안에 있었다

뜨거운 심장을 구근으로 묻은 철골의 크레인

세상 모든 종교의 구도행은 아마도

맨 끝 회랑에 이르러 우리가 서로의 신이 되는 길

흔들리는 계절들의 성장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마른 옥수숫대 끝에 날개를 펴고 앉은 가벼운 한 주검을

그대의 손길이 쓰다듬고 간 후에 알았다

세상 모든 돈을 끌어 모으면

여기 이 잠자리 한 마리 만들어낼 수 있나요?

옥수수밭을 지나온 바람이 크레인 위에서 함께 속삭였다

돈으로 여기 이 방울토마토 꽃 한 송이 피울 수 있나요?

오래 흔들린 풀들의 향기가 지평선을 끌어당기며 그윽해졌다

햇빛의 목소리를 엮어 짠 그물을 하늘로 펼쳐 던지는 그대여

밤이 더러워지는 것을 바라본지 너무나 오래 되었으나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번져온 수많은 눈물방울이

그대와 함께 크레인 끝에 앉아서 말라갔다

내 목소리는 그대의 손금 끝에 멈추었다

햇살의 천둥번개가 치는 그 오후의 음악을 나는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는 다만 마음을 다해 당신이 되고자 합니다

받아줄 바닥이 없는 참혹으로부터 튕겨져 떠오르며

별들의 집이 여전히 거기에 있고

온몸에 얼음이 박힌 채 살아온 한 여자의 일생에 대해

빈 그릇에 담기는 어혈의 투명한 슬픔에 대해

세상을 유지하는 노동하는 몸과 탐욕한 자본의 폭력에 대해

마음의 오목하게 들어간 망명지에 대해 골몰하는 시간이다

사랑을 잃지 않겠습니다 그 길밖에

인생이란 것의 품위를 지켜갈 다른 방도가 없음을 압니다

가냘프지만 함께 우는 손들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는 일을 위해 눈물 흘리는

그 손들이 서로의 체온을 엮어 짠 그물을 검은 하늘로 던져 올릴 때

하나씩의 그물코,

기약 없는 사랑에 의지해 띄워졌던 종이배들이

지상이라는 포구로 돌아온다 생생히 울리는 뱃고동

그 순간에 나는 고대의 악기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태어난 모든 것은 실은 죽어가는 것이지만

우리는 말한다

살아가고 있다!

이 눈부신 착란의 찬란,

이토록 혁명적인 낙관에 대하여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온갖 정교한 논리를 가졌으나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옛 파르티잔들의 도시가 무겁게 가라앉아 가는 동안

수 만 개의 그물코를 가진 하나의 그물이 경쾌하게 띄워 올려졌다

공중천막처럼 펼쳐진 하나의 그물이

무한 하늘 한 녘에서 하나의 그물코가 되는 그 순간

별들이 움직였다

창문이 조금 더 열리고

두근거리는 심장이 뾰족한 흰 싹을 공기 중으로 내밀었다

그 순간의 가녀린 입술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나는 들었다 처음과 같이

지금 마주본 우리가 서로의 신입니다

나의 혁명은 지금 여기서 이렇게

시집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창비, 201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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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혁명은 무한에 대한 명명의 과정이다. 우리 모두에게 신의 권능을 부여하여 이름 없는 것들의 이름을 규정한다. 또한 모호하고

추상적인 대상을 알레고리의 영역으로 가져온다. ‘낭만주의가 그 완성된 형상을 비판적으로 능가하고자 할 때, 알레고리적 깊은

응시는 사물과 작품을 일순간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문자로 변모시킨다.’라는 벤야민의 말처럼, 분명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이 무한의 지점에 의식의 통로를 열어준다. 유기적 총체성과 내재적 완결성이라는 말로 표상되는 ‘유한’의 총체적 의미작용에 대

한 알레고리의 비판적 전복의 기능, 그리고 그 이상으로 잠재된 벡터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시인의 작품은 이 세계를 쇠락하는 폐허의 잔해라고 보는 묵시록적 세계관과 만난다. 크레인의 계절이 가진 특유의

낯설음은 바로 이 세계관을 바탕으로 발현된다. 또한 인간 실존과 평행을 이루려는 시인의 미학적 태도 역시 그 묵시록적 세계관

내부에서 탄생하게 된다. 단편적인 조각에 불과한 현대적 인간 실존을 적나라하고 입체적으로 드러내려는 방법론적 의도와 정치

성을 가지고 그 실재의 잔인한 리얼리즘을 형상화하려는 시도에서 그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크레인의 계절은 하나의 언어가 분열되고 모든 혼돈의 시작이자 끝의 유예 자체가 된, 비존재에 가까운 존재로서 다가

온다. 이 크레인은 특이하게도, 정확한 이미지를 가진 구조물이 아니다. 현실세계와 맞닿은 실재와 상징 그 사이에 수직적으로 존

재하고 있지만, 혁명이거나 혁명이 아닌 방향으로 무한히 기울고 있는 역학구조를 기반으로 재정립된 수직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지평선을 기준으로 상반되는 밤과 낮이자 사랑이 가진 망명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무한은 사실 하나의 실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

야기한다. 이 무한은 자명한 불확실성에 지배받는 카오스적 공간이다. 무한이 가진 영속성은 이해되지 못함에 기반을 둔다. 또한

무한은 신의 공간이라는 모호한 확신이 작품 전체를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어법으로만 표현될 수 있는 이 공간은 혁명적인 낙

관에 닿아있는 것이다.

이제 조금 더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사유구조를 무한과 유한으로 이분화 시키기로 한다. 허나 이 모든 구별은 유한 내에서 진행

된다는 것을 먼저 밝혀두어야겠다. 무한은 유한의 내부에 있다. 유한의 내부에서 유한과 함께 공존하는, 하지만 유한의 목적성을

띄고 이 공간에 출입한 사람의 눈에는 포착되지 않는 일종의 구석이다. 총체적인 혁명은 바로 이 유한 내부의 무한에 있다. 유한이

라는 말 자체와 공간은 인간의 닿을 수 없음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그곳은 그렇지 않다. 수많은 우연성을 통해, 그 하나의 공간을

제외한 모든 공간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여기서의 유한은 이성적인 공간이며, 반대로 무한은 나머지 속성들을 모두 배제하고 불

안과 균열, 진실을 대면할 수 있는 하나의 구멍으로 이야기하는 공간이다. 유한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현실이자 실체이고 일

반화가 보편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세계를 다스리는 공간이다. 진리를 탐닉하지 않는 존재자들이 가진 의미와 가치관이 팽배한

공간이다. 이곳의 사물들에겐 가능성이 없다. 두려운 낯설음은 물론 수줍은 실재 역시 없다. 이름을 가진 것들의 차이를 삭제하고

일반화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낯선 것을, 결국 그것이 잘못된 방식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이해하고 다스리고 익숙한 것들

과 동질화시키며 유한 안에서 제자리를 찾아준다. 모든 사고구조는, 무한적 세계의 질서정연함처럼 그들이 정립한 일종의 이데올로

기를 따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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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반대로 무한은 비가시성의 원칙을 충실히 이행한다. 그곳은 가능성과 미결정상태의 존재, 실체가 아닌 이미지가 떠도는 곳이

다. 세계를 일반화하기 위하여, 세계를 구성하기 위해 부정된 요소들이 추방되어 있는 곳이 바로 무한이다. 허나 이곳의 궁극은 규

범적 세계 너머의 또 다른 세계가 아니라, 모든 현실이 부정되었을 때 드러나는 비현실성이자 불가능성 그 자체이다. 여기서의 불가

능성은 가능성을 내포한다. 부정의 방식이 전도되어 나타나는 부정에 대한 부정인 것이다. 위에 말한 유한에 가득한 존재자들의 의

미와 가치가 사라지는, 그 사라짐 자체의 현현이다. 무한은 미결정 상태 속으로 존재자들을 돌려보낸다. 무한 속에서 유한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시간마저 역행하여 구성의 인과관계를 뒤집어 무한만이 유한 내부에서 존재하도록 만들어 불투명한 텅 빈 열림 상태

로 전환된다. 그것은 미결정 상태의 존재의 가능성으로 가득 찬 열림이다. 우리가 이 무한의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유한에서 추방당

하게 되며 익숙했던 모든 사물들과 결별하게 되는 것이다. 무한에 있는 낯선 것들의 미시적 표상들은 우리 앞에 그 몸을 내보이며 유

한의 질서정연함에 편입되지 않고 비질서와 비인간성의 상태를 잃지 않는다. 바로 이 자리가, 시인이 이야기하는 혁명의 본질이자

문학의 문법이 적힌 책이 독립하는 공간인 것이다. 무한의 출입카드는 긍정의 어법이 아니라 부정의 어법이며 모순어법이다. 우리는

우리가 머무는 세계에서 빠져나와야 하며 불가능한 동일시를 우호적으로 성립시켜야한다. 우리의 화두가 끝내 우리까지 부정하고

야 마는 타자화라고 한다면, 유한은 분열된 주체를 보여주는 거대한 알레고리이기 때문이다. 구조 속에 우리의 지위를 조성해놓는

유한은 우리의 환영적인 이미지를 허용하고 순응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주 간단한 난해성으로서 우리로부터 빠져나와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발화의 인칭은 비인칭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무한의 발화자는 비인칭에 가까운 다성성의 발언이다.

무한과 유한, 두 진영의 지력선 사이를 관통해 제3의 진영으로 망명할 때 촉발하는 실패에 대한 자행이 우리를 분열됨으로서 존재

하게 해준다. 언어가 있기 이전에 언어가 가리켜 보일 사물 세계가 먼저 존재하고 있기에 이 유한의 세계는 차이의 체계로서 직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한이 있기에 무한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이 아이러니한 이원체계는 우리의 인식 능력을 뛰어넘어 의미와 존재의

근원을 밝혀준다. 한 마디 이후론 모두 부질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이 구조에서 침묵의 연장은 가장 시끄러운 진술이다. 또한 A를 위

해 B를 읽고, B를 찾기 위해 C를 참고하는 역행적 방법론의 순환에서 인생을 탕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도 많은 철학자와

작가들이 제3의 진영을 찾기 위해 온 우주를 섭렵하며 이전의 순환구조에 갇히는 일만으로도 평가를 받는 이 카오스적 세계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우리가 유한의 세계에서 꺼내든 서적은 모두 같은 내용을 품고 있지만 고유하지는 않다는 것. 무한으로 직조된 세계

의 힘은 무너진 잔해가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 데 있다. 그렇기에 무한은 내가 될 수 있으며, 네가 될 수 있고, 우리가 될 수 있다. 비록

무한은 비합리의 원리에 지배받지만 그 무한의 중심에는 소멸하는 수많은 의식들이 잠재되어 있고, 그 의식의 층위에는 의지적 소

멸을 관장하는 공허가 있다. 허나 모든 인과관계를 생략하고 궁극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궁극적이라는 말 역시 진리의 소실점이 촉발

되는 순간에 지배를 받지만, 결국엔 무한으로 진입하려는 혁명처럼 무너질 운명이다. 허나 영원한 순례자는 혁명을 바라는 것이 아

니다. 혁명이 가진 창문의 배열, 계단의 각도, 외벽의 무늬 등 혁명의 외부에서 목격할 수 있는 사소한 반복의 구조다.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혁명은 얼마나 많은 진보를 이룰 것이며 무한과 혁명이 마침내 마주치는 그 접점은 얼마나 많은 비가능성을 생산해낼 것인가

. 우리는 이 모호한 전제만으로도 기꺼이 순례자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혁명은, 우주는, 세계는 소멸의 방식으로 영원히 소멸되

며 지속된다. 사실 누구나 다 안다. 언어는 모두 어느 정도의 운명성을 가지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꽃이라던가, 어쩔 수 없이

부는 바람. 우주 역시 마찬가지다. 어쩔 수 없이 넓어지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우주의 초입에 서있는 거울 때문에. 시인은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길 원한다. 질서가 없으면 무질서의 질서 자체를 질서로 수용하면 그만이다. 우리는 유일하며, 또한 유일하게

소멸하는 과정에 있는 신이자 사랑이기 때문이다.

창밖에 개들이 산책을 한다. 어떤 개는 목줄을 메고 있고, 어떤 개는 목줄 없이 산책을 한다. 목줄의 유무는 무한과 유한을 가르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무한과 유한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니까. 목적지는 하나다. 살거나 혹은 죽거나. 혁명이 실패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혁명도 혁명을 싫어하니까. 그래도 나는 산책한다 개처럼. 그들의 수명으로 생각할 때의 내가 무한에 무한히 다

가가고 있다고 해도, 나 역시 조용히 늙기를 기다린다. 일단은 무한의 인장이 무한히 겹친 올림픽이 이제 시작하니까.

‘지금 마주본 우리가 서로의 신입니다. 나의 혁명은 지금 여기서 이렇게’

쓴 사람 김종연견과류를 주지 마세요

싫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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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인 홍대정지연

1.

불금의 자정이었다. 이런 날 홍대앞에서 택시를 잡기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비교적 사람들이 덜 붐비는 산울림소극장

쪽을 택했는데, 택시가 안 잡히기는 여기나 상수역이나 매한가지였다. 갑자기 군청색의 차 한 대가 옆에 섰다. ‘엘란트라라니 정말 오래된

차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창을 내리고 안의 사람들이 외쳤다. “탈래요?” “네?” 2012년에 왠 야타족의 출현이냐. 황당해하는 내게 누

군가 말걸었다. “발전소 갈 건데, 같이 가자고요!” 발전소라니. 그 추억의 록카페 발전소 말인가? “발전소요? 춤추는 곳 말인가요?” “역시

가봤군요? 완전 인기래요. 갑시다!”

차에 일단 올라탔다. 취기에 그랬느냐고? 물론 소맥을 너댓 잔 마셨지만, 취하진 않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한밤의 히치하이킹을 용납한 건,

발전소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90년대를 풍미했던 ‘그 발전소’라니. 내가 모르는 어느 장소에 다시 부활이라도 했단 말인가. 도저히 궁금해

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차 안에는 서태지의 ‘환상 속의 그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운전석의 남자를 포함해 두 명의 남자와 여자가 노래를 따라 불렀다. “환상 속

엔 그대가 있다.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 속엔 아직 그대가 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을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 옆의 여자

애는 담배를 맛있게 피웠다. 그런데 여자의 화장이 좀 이상하다. 가늘고 길게 산을 그린 눈썹에 립라이너로 강조한 팥죽색 입술. 가만 있자….

저거 마몽드 밍크브라운 아니야? 요즘은 ‘저승사자 화장’이라고 부르는, 저 칙칙한 화장법은 내 대학시절에나 유행했던 거였다. 하긴, 남자

들의 헤어스타일도 촌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내 옆 남자는 ‘장국영’ 머리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나도 따라 내렸다. 놀이터 골목이니 친숙한 곳인데, 뭔가 이상

했다. 안상수 선생의 ‘이상체’로 씌여진 간판 ‘발전소’가 눈에 들어왔다. 기억 그대로다.

안으로 들어갔다. 무대 중앙의 바구니로 맥주 캔 하나가 매끄럽게 원을 그리며 날아가

꽂혔다. 너바나의 <Lithium>. 저기, 매끄러운 민머리로 긴 팔을 매끄럽게 움직이며 춤추

는 이는 김백기 대표였다. 하재봉시인이 여자 애 둘의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모습도 보

였다. 이거 뭐야. 다들 왜 이렇게 젊어. 내가 지금 1993년, 아니 1994년 쯤에 온 건가. 어

리둥절해 있는데, 미스 밍크브라운이 입을 뾰죽댔다. “재미없다, 드럭 가자!”

우리는 극동방송국을 향해 걸어 내려갔다. 지금은 사라진, 드럭 간판이 거짓말처럼 짠

있었다. 그물스타킹에 까맣게 손톱을 칠하고 워커를 신은 여자애들이 내 행색을 아래

위로 훑었다. 예전 같으면 쫄았을 테지만, 나도 무심한 눈길로 대응했다. 계단 아래에서

부터 진동이 느껴졌다. 크라잉넛이었다. 낄낄 웃음이 나왔다. 작년에 내가 본 게 15주년

공연이었지, 아마?…. 여드름이 채 가시지 않은 보송보송한 네 명의 땅콩이 거기서, 포효

하고 있었다. 관객들은 미친듯이 발을 굴렀다. 귓청이 떨어져나갈 거 같은 굉음과 담배

와 땀냄새가 섞인 텁텁한 공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담배 한 대가 간절해져서 밖

으로 나왔다. 건너편 꿀벌 수퍼로 향했다. 한 갑을 사고 돌아섰다. 드럭이 보이지 않았

다. 보이는 건 ‘머리에 꽃을’이라 씌여진 술집 간판이었다. 다시, 2012년의 홍대앞으로

돌아온 것이다.

▲ 만들고 있는 잡지 월간 <스트리트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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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 alcohol-holicers! , This is s u m m e 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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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하고 현실하고 구분 못해?

이 창 훈

“누군들 자기 인생이 마음에 들까,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알면서도 자신의 인생은 마음에

안 든다.”라는 어느 드라마 속 대사처럼 우리는 그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결국 내 자신이 싫어진

다. 매일 일상이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고 반복되는 상황에서 결국 일탈을 꿈꾸게 된다. ‘그저 그

렇게 사는 생활’에서 ‘흉내 내는 생활’이 되고, 그게 지속되면 현실과 꿈의 경계는 사라지게 된

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화는 영화다>의 ‘그저 그렇게 사는’ 강패(소지섭)는 배우가 되고 싶은 깡패다. ‘흉내내는

생활’을 하는 수타(강지환)는 배우다. 영화라는 틀 안에서 그리고 현실이라는 틀 안에서 둘은 모

두 지칠 대로 지치고 결국 서로의 생활을 부러워하며 타협점을 찾아간다. 이 시점에서 둘은 이미

헤어 나올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로 들어온다. 이 영화의 설정은 비현실적이고 판타지다. 하지

만 그것을 리얼하고 현실적으로 풀어낸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일탈을 하게끔

유도하고 대리만족을 하게하지만 그만큼 상처를 받는 건 두 주인공 강패와 수타다. 매우 적나라하

게 우리현실을 파헤치고 있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는 결국 우리가 현실과 꿈에서 헤어 나올 때 느낄

수 있는 상실감을 미리 엿볼 수 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지만 영화와 현실의 연관성은 분명 존재

하며 영화는 현실을 모방하고 현실은 영화를 모방하는 속성이 결국 '영화=현실'이라는 착각까지

들게 한다. 깡패였던 강패에게 배우라는 칭호를 갖게 해준 영화는 영화이기도하고 영화가 아니기

도하다. 하지만 강패는 영화라는 해프닝을 깨달을 때 현실에서 이미 느꼈던 차가움을 더 크게 알게

된다. 우리가 꿈에서 깨고 싶지 않은, 뫼비우스의 띠에서 영원히 나오고 싶은 이유 중 하나이다.

영화 강독 <영화는 영화다>

Page 17: Monthly Issue ANTENNA, AUGUST, 2012

1.'영화=현실'이라고 믿는 경우 : 그 돌고 도는 뫼뵈우스의 띠에서 영화와 현실의 타협점을

찾아가며 영화와 현실의 선을 분명히 긋기에서는 서로 너무 큰 영향을 주고받았다. 대부분

의 사람들이 그렇게 산다.

2.'영화≠현실'이라고 믿는 경우 :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현실과 혼돈해서는 안 된다. 현실에

끼치는 영화의 영향력은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어마어마하지만 영화와 현실은 종이 한 장

차이라도 분명히 같지는 않다.

당신은 영화 같은 현실과 현실 같은 영화를 구분할 수 있는가?

영화의 90%이상을 차지하는 두 주인공 강패와 수타가 현실과 영화에서 허우적거릴 때 그 사이를

꽉 잡고 있는 역할이 바로 봉감독(고창석)이다. 조력자인 것이다. 어찌 보면 사기꾼이다. 현실로

오게끔 도와주면 조력자고 영화에 빠져 들게끔 하면 사기꾼이다. 충분히 주위에서 있을만한 있음

직한 인물을 통해 내가 어디에 있는지 혼동되고 그러므로 서로 갈등하게 되고 또 화해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결국 이 대단원의 막은 영화의 FINAL SEQUENCE 갯벌신을 통해 극대화된

다. 두 인물이 나누는 교감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며 진흙에서의 격투로 인해 강패와 수타는 구분

이 안 되기 때문에 서로를 모방하던 둘은 마침내 하나가 된다. 두 인물이 극명한 대비가 되는 흰색

과 검은색 옷을 입음으로써 다르게 보이지만 갯벌결투를 통해 서로의 색에 물들어가고 결국 어느

순간 완전히 똑같은 모습을 갖는다. 즉, 현실과 영화는 말 그대로 한순간 뿐 인 것이다.

영화와 현실과의 관계는 두 가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