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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adelphia€¦  · Web view2012. 3. 25. · 분명하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과 또는자기의 해석과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는 부디 사양하시지 말고,질문해주시기를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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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구 인덱스

聖書

基本 知識

D.HEASTER 著

盧 賢 基 譯

基督敎 敎理 學習 敎科書

韓國 聖書 硏究院 發行

聖書

基本 知識

Carelinks, PO Box 152 Menai NSW 2234 AUSTRALIA

www.carelinks.net

[email protected]

D.HEASTER 著

盧 賢 基 譯

聖書 眞理를 體系的으로

定立하여 明確하게 體得하게 한

聖書 敎科書

韓國 聖書 硏究院 發行

序 文

야웨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리고 성서는 사람에게 주신 그의 계시라고받아들인 모든 사람은 그 기본 멧시지가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인이라고’ 칭하는 많은 사람이 일요일 날 교회당에서 신약성서 몇 구절을 읽을 뿐, 성서책은 집안 어느 구석에 내팽개치고 열어보지 않으며, 몇몇 성서 이야기들을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는 매우 빈약한 성서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능력있는 진리의 말씀에 대한 그런 나태한 태도에 의해서, 교계의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교에 확신이 없이 혼동의 생활에 빠져 있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를 알지 못하는 불신자가 성서를 배우고 그리스도교를 믿으려고 교회에 나가지만, 그들에게 성서의 내용은 가르치지 아니하고, 인간의 정욕을 자극하는 거짓 교리와 인간의 철학만을 설교하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우리가 생업을 계획하는 것같이, 조직적으로 성서의 멧시지를 분석하고 체계화 해놓은 것이 본 ‘성서 기본지식이다’. 본서는, 한 묶음의 책으로서 읽어나갈수 있고, 또는 통신 성서강좌 교재로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고안해 만들어 놓았다. 매 학습 끝에는 문제와 그 해답란이 있는데, 해답을 기입하여 보내주시면 된다. 당신의 답안지는 당신과 통신할 수 있는 우리 개인 담당 성서교사에게 넘겨져 당신의 학습을 촉진하게 할 것이다. 분명하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과 또는자기의 해석과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는 부디 사양하시지 말고,질문해주시기를바라며, 우리는 그것들에 대하여 성심껏 답해 드릴 것을 굳게 약속한다.

성서에 관한 이 기본 멧시지는 투명하고 결정적인 것이라고 본 저자는 확신한다. 그렇지만, 피상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바, 성서 일반의 주제와 일치하지아니할 수 있는 어떤 구절들과 논제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들의 일부는, 몇몇 독자들만 관심을 가질 것이지만, 복음의 다른 국면과 일치시켜, ‘그릇된 해석들’난에서 논의하였다. 물론 그 ‘그릇된 해석들을’ 읽지 않고서도 성서의 기본 멧시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저자는 모든 ‘그릇된 해석도’ 읽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학습 교본에서는 주로 흠정역본을 사용하였다. 그렇지만, 해석이 모호한 것에서는 여러 역본을 대조하여 명백히 하려고 하였다.

본서 출판에 협조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려야 하겠다. 감명깊은 여러장의 사진을 게재하게 해주신 Cliver River씨, 그리고 적합한 의견으로 원고를 수정해주신 분들에게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내가 은혜를 입고 있는중요한 사람들은 수백명의 아프리카 사람, 서인도 사람, 필리핀 사람, 그리고 동유럽 사람들이다. 그들의 성서진리 탐구와 그 갈망은 저자에게 본 ‘성서 기본지식’ 집필을 강행하게 하였으니, 그들에게 재삼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그들의아름다운 마음씨와 진리 탐구의 기력은 나로 하여금 여러 각도에서 성서진리를조명해 보도록 하였다. 만원의 택시 속에서, 트럭 위와 화물 차간에서, 조용한회의실과 무더운 호텔 발코니에서, 그리고 별빛 찬란한 숲속 마을에서, 각계각층의 성서 연구자들에 의해서 본서의 주제들은 논의되고 토론되고 열광되었던 것이다. 본 사업을 진행하도록 나에게 특권을 주어온 우리 그리스도아델피안 형제들이 나에게 끊임없는 힘과 도움의 원천이 되었다. 본서에서 논의된 그 ‘그릇된해석들의’ 내용은 우리가 자주 호텔방에서 검토를 거듭하여 파악하고, 성서 강좌 수강생들 간의 격렬한 논쟁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다. 본 성서진리의 교리들에 의해서 서로 맺어진 친교와 친구로서의 사귐은 확실히 인간의 어떤 경험도 능가할것이다. 이제 저자는 본서가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자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소망하면서,“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모든 분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성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바, 그 복음진리의 파악은 우리 생활 모든 분야에서효과를 발휘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영광을 이제로부터 영원히 그에게 드리게 될 것이다. 그 진리를 찾아낸 자마다“밭에 감추인 보화를”발견한 자로서,선지자 예레미야가 느꼈던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옵나이다”(렘.15:16).이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본서를 붙잡고 씨름하는 여러분께 그 말씀을 이해할 수있도록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드리는 바이다.“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로 능히 튼튼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20:32).

1996년 3월 20 일

著者 DUNCAN HEASTER

[email protected]

聖書 冊名 略字表

갈 ..........갈라디아서 몬.............빌레몬서에.............에스더서

겔.............에스겔서 미.............미가서엡 ............에베소서

계.............요한계시록민.............민수기옵.............오바댜서

고전.........고린도전서벧전.........베드로전서왕상.........열왕기상

고후.........고린도후서벧후.........베드로후서왕하.........열왕기하

골.............골로새서빌.............빌립보서요.............요한복음서

나.............나훔서사.............이사야서요일.........요한일서

눅.............누가복음서살전.........데살로니가전서요이.........요한이서

느.............느헤미야서살후.........데살로니가후서요삼.........요한삼서

단.............다니엘서삼상.........사무엘상욘.............요나서

대상........역대기상삼하.........사무엘하욜.............요엘서

대하.........역대기하삿.............사사기욥.............욥기

딛.............디도서수.............여호수아서유.............유다서

딤전.........디모데전서스.............에스라서잠.............잠언

딤후.........디모데후서슥.............스가랴서전.............전도서

레.............레위기습.............스바냐서창.............창세기

렘.............예레미야서시.............시편출.............출애굽기

롬.............로마서신.............신명기학.............학개서

룻.............룻기아..............아가합.............하박국서

마.............마태복음서암.............아모스서행.............사도행전

막.............마가복음서약..............야고보서호.............호세아서

말.............말라기서애..............애가히.............히브리서

학습마다 끝에 있는 문제들의 해답은 4지 선다형과 주관식 두가지가 있습니다. 별지를 준비하여 4지 선다형의 것은 그 중에 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시고, 주관식 문답은 그 학습에서 배운 것을 짧은 작문으로 작성하여, 아래의 주소로 보내주십시요.

www.carelinks.net [email protected]

聖書 基本 知識

1 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들”

(행.8:12)

학습1: 하나님.............................................1

1.1 하나님의 존재

1.2 하나님의 실재성

1.3 하나님의 이름과 그 특성

1.4 천사들

그릇된 해석 1:“하나님은 영이시니”(요.4:24)

그릇된 해석 2: 하나님의 이름 사용

그릇된 해석 3: 하나님의 현현(顯現)

학습2: 하나님의영....................................27

2.1 하나님의 영: 그 정의

2.2 영감

2.3 성령의 은사들

2.4 그 은사의 철수

2.5 성서의 권위

그릇된 해석 4: 성령은 인격체인가?

그릇된 해석 5: 의인법( 擬人法)의 원칙

그릇된 해석 6: 칼빈주의

그릇된 해석 7: “성령의 은사를 받으리라”(행 2:38)

그릇된 해석 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막.16:17)

학습3: 하나님의 약속들..........................79

3.1 하나님의 약속들: 서론

3.2 에덴에서의 약속

3.3 노아와의 약속

3.4 아브라함과의 약속

3.5 다윗과의 약속

그릇된 해석 9: 하늘과 땅의 멸망

그릇된 해석 10:앵글로색슨이 이스라엘 족속이라는 주장

학습4: 인간과 죽음.................................111

4.1 인간의 본성

4.2 영혼(靈魂)

4.3 사람의 영

4.4 죽음은 무의식 상태이다

4.5 부활

4.6 심판

4.7 신자가 보상 받는 곳: 하늘인가 땅에서인가?

4.8 하나님에 대한 우리 책임

4.9 지옥

그릇된 해석 11: 연옥( 煉獄)

그릇된 해석 12: 유령과 환생설

그릇된 해석 13: 어떤 몸으로 부활하는가?

그릇된 해석 14: ‘공중 휴거((携擧)’

학습5: 하나님 나라.................................147

5.1 하나님 나라: 그 정의

5.2 그 나라는 지금 수립되지 아니하였다

5.3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 나라

5.4 장차의 하나님 나라

5.5 천년왕국

그릇된 해석 15: 그 나라는 실제로 이루어진다

그릇된 해석 16: 이스라엘 역사의 요약

학습6: 하나님과 죄악.............................173

6.1 하나님과 죄악

6.2 마귀와 사단

6.3 귀신(鬼神)

그릇된 해석 17: 마법사

그릇된 해석 18: 에덴 동산에서 일어난 일

그릇된 해석 19: 루시퍼(Lucifer)

그릇된 해석 20: 예수가 받은 시험

그릇된 해석 21: “하늘에서 전쟁 ”

2 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것들”

(행.8:12)

학습7: 예수의 기원(起源)........................221

7.1 예수에 관한 구약성서의 예언

7.2 예수의 동정녀 탄생

7.3 하나님의 계획에 있는 그리스도의 위치

7.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릇된 해석 22: 역사적인 예수

그릇된 해석 23:“하늘에서 내려온 자”

그릇된 해석 24: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을 창조하였는가?

그릇된 해석 25:“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그릇된 해석 26: 멜기세덱

학습8: 예수의 본성.................................249

8.1 예수의 본성: 서론

8.2 하나님과 예수의 차이점

8.3 예수의 본성

8.4 예수의 육신성

8.5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릇된 해석 27:“예수는 하나님의 본체(form)이시나”

학습9: 예수의 사역.................................265

9.1 예수의 승리

9.2 예수의 보혈

9.3 우리와 그 자신을 위한 제물

9.4 우리의 대표자 예수

9.5 예수와 모세의 율법

9.6 안식일(Sabbath)

그릇된 해석 28: 십자가 형(刑)

그릇된 해석 29: 예수의 생일은 과연 12월 25일인가?

학습10: 침례(Baptism)............................289

10.1 침례의 중요성

10.2 어떤 형식으로 침례를 받을 것인가?

10.3 침례의 의미

10.4 침례와 구원

그릇된 해석 30: 재침례

그릇된 해석 31: 침례 받기에 필수적 성서지식

그릇된 해석 32: 십자가에 달렸던 행악자

그릇된 해석 33: 모범적 침례의식

학습11: 그리스도인의 생활.....................321

11.1 서론

11.2 성결

11.2.1. 폭력 사용

11.2.2. 정치 운동

11.2.3. 세상 향락

11.3 그리스도인 생활의 실천 사항들

11.3.1. 성서 공부

11.3.2. 기도

11.3.3. 전도

11.3.4. 에클레시아 생활

11.3.5. 떡과 잔 기념예배

11.4 혼인

11.5 성도의 교제

부록1: 성서 기본 교리의 요약................................345

부록2: 성서 진리 학습 태도.................................349

부록3: 그리스도의 재림 임박................................351

부록4: 하나님의 공의........................................356

성구 인덱스...................................................359

사 진 (1)

학 습 1

하 나 님

1

1.1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열심히찾는 자들에게 상(賞)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이 학습 목적은“하나님의 존재를”믿고, 그에게 나아가고자 하는 자들에게 도움을 주려고한 것이다. 그러므로 야웨 하나님의 존재를 확증하는 증거는 제시하려고 하지는 아니하였다. 우리 신체의 복잡한 구조와(시.139:14), 들녁에 아름답게 피어난 꽃송이의 무늬를 심사하고, 또는 밝은 달밤에 바라다 보이는 광활한 창공을 바라다보며, 기타 셀 수 없이 많은 존재물을 생각해볼 때에 그 무신론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하나님의 부재(不在)를 믿기에는, 그의 존재를 믿기보다 오히려 더 믿음이 요구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다면, 우주의 질서, 그 목적, 또는 그 궁극적 존재를 설명할 수가 없을 것이며, 또한 무신론자들의 생각대로 실행된다면 세상은 온통 혼란에 빠질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의 대부분, 아니 물질을 인간 생활의 하나님으로 여기고 있는 물질주의 현 사회에서 조차도 어느 정도 하나님의 존재를 시인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막연하게 어떤 위대한 능력자가 있을 것이라는 관념과, 하나님은 확실히 존재하며 그를 충실히 섬기는 자들에게 보상하시는 이라고 확신하는 것과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히.11:6은 이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반드시 믿어야 하며,

그리고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

성서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나라의 역사 기록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시인하는 것과 그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여러번 질책 받았다. 그들은 위대한 지도자 모세에게서,“그런즉 너는 상천 하지에 오직 야웨가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神)은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야웨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신.4:39,40)고 명령을 받았었다.

우리에게도 그와 같이 명하고 있다. 하나님이 존재할 것이라는 인간의 막연한 의식이 자동적으로 하난님께 용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창조주가 계시다고 진지하게 동의한다면,“그의 명령들을 반드시 순종해야 할 것이다”. 이 일련의 학습은 그 명령들과 그것들을 지키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을 실행하기 위하여 우리가 성서를 살펴봄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굳게 믿게 되고, 그 믿음이 발전하게 될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롬.10: 17). 또한 사.43:9-12에는 장래에 관한 하나님의 예언을 이해하는 법을 가리키면서,“나는 그니”(사.43:13), 즉 ‘나는 야웨라’(출.3:14)고 한 하나님의 이름은 온전히 참된 것이라고 하셨다. 사도 바울이 한번은 헬라 북쪽 도성 베뢰아에 가서, 평소와 같이, 하나님의 복음을 그곳 사람들에게 전파하였다. 그들은 바울의 말씀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런가 하여 날마다 성서를 상고하므로(물론 이것은 구약성서이다)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아졌다”(행.17:11,12)고 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믿게 된 것은 마음을 열고, 정기적으로(날마다) 그리고 체계적으로 성서를 연구한 까닭이었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하게 단지 어떤 심정의 변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대중 집회나 또는 부흥 집회에서 갑자기 ‘신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날마다 성서를 상고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서를 기초로 한 신앙이 없는 자들, 그러한 ‘개종자들’은 틀림없이 나중에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헛된 믿음이었던 것이 나타내게 된다. 그것이 복음전파 운동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의 등을 돌리게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본 학습의 목적은 당신의 체계적 성서 연구를 도와서, 당신으로 하여금 바른신앙을 가지게 하고 그것을 굳건히 지키게 하려는 것이다. 참된 복음을 듣는 것과 참된 복음을 갖게 되는 것은 복음 전파 기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되어있다.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침례를 받더라”(행.18:8).

“사도들과 장노들이 이 일을 의론하려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고”(행.15: 6,7).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고전.15:11).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의 말씀에서“그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며(눅.8:11), 그 반면에 겨자씨는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다(눅. 17:6). 믿음은“말씀”을 받아들임으로 오는 것이다. 믿음에는“믿음의 말씀과 선한(바른)교리”(딤전.4:6),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믿으려하는 열린 마음(갈.2:2, 히.4:2과 비교)이 필요하다.

사도 요한은 우리 주님의 생애의 기록에서,“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진리)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요.19:35)고 하였다. 그리고“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라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믿을 수 진리라고 하였다.

1.2 하나님의 실재성

하나님께서 몸을 가진, 만질 수 있는 실제 인간으로서 나타난 것이 장엄하고도 영광스러운 성서의 주제이다. 또한 그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리스도교의 근본 교의(敎義)인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형체가 있는 존재가 아니시라면,“그의 형상”(히.1:3)을 가진 아들은 가질 수가 없을 것이다. 더욱이, 만일에 ‘하나님이’ 공간 대기속 어디엔가 있는 얼핏 스치는 바람(風) 같은 존재로, 우리 마음에 자리잡은 한 개념이라면,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 생활로 인격을 발전시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세상 종교의 대부분이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만질 수 없는 하나의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는 이것이 인간의 비극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보다 더욱 위대하시므로, 많은 사람이 궁극적으로 그를보게 될 것이라는 분명한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실제 형상이 있는 분이라고 이스라엘에게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하나님의 형상을 보지 못하였다”(요.5:37). 믿음은 하나님을 알고 그의 말씀을 믿는데서 생기는 것이다.

“마음이 정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마.5:8).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계.22:3,4).

만일 우리가 그것을 진정 믿는다면, 이와 같은 놀라운 소망이 우리의 실제 생활에 큰 영향을 줄 것이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이루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마.23:22)고 하셨다. 만일 하나님이 형체적 형상으로존재하지 아니하신다면, 이 말씀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가(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2-3).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늘 아버지에 관한 인식이 매우 불완전하므로, 이 혼잡한 어두움에서 벗어나 그를 만나, 밝히 인식하게 될 때를 기대하고 있다. 그를형체적으로 보게 될 때에 그것은 우리가 지금 그를 이해하고 있는 것과 일치될것이다. 인간의 고통의 깊은 늪에서도 욥은 장차 온전히 경험하게 될 하나님과인격적 관계를 생각하고 기뻐할 수 있었다.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지만, 나는 나의 육체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욥.19:26,27).

사도 바울도 이 세상의 극한 고통과 환란 중에서도 그 때를 생각하며 큰 기쁨을 소리높이 외쳤다.“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라”(고전.13:12).

구약성서의 증거들

신약성서의 이 약속들은 대부분 인격적이며 형체적인 하나님이라는 증거를 뒷받침하고 있는 구약성서에서 세워진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성서를 기초로 한 종교이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의 인식이 근본인 것을 강조하고 있다. 구약성서는 일관되게 인격적인 하나님에 관해 말하고 있다. 구신약성서 모두가 하나님에 관하여 인격적으로 말하고 있는 바, 그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특유한 소망인 것이다. 다음 구절들은 하나님이 인격적이며 형체적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논증하고 있는 것들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1:26). 이처럼 사람은 천사들을 통하여 생겨나게 된 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이다.“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라”고 약.3:9 에는 말하였다. 이 말씀들은 사람의 심성에 적용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은 본성으로 하나님과는 멀고 근본적으로 그의 의(義)와는 반대가 되기 때문이다.“야웨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의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의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물려받은 그의 형상과 모양은 형체적인 것이다. 천사들이 나타난 곳에는 어디든지, 그들이 사람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기록되어있다. 아브라함이 천사들을 보통 사람들로 생각하고 부지중에 대접했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오직 그의 형상의 실제 대상(對像)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반영된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어떤 애매모호한 것이 아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반영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같이 말씀하였다.“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야웨의 형상을 보았느니라”(민.12:8). 이것은 야웨의 이름을 지닌 천사에 의하여 모세가 율법을 받은 것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출.23:20,21). 만일 그 천사가 야웨의 형상과 같았었다면, 비록 그의 육체가 우리 혈육보다는 높은 본성은 가졌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육체적 형상과 같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사람이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야웨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니라”(출.33:11;신. 34:10). 야웨께서 그의 천사를 통하여 나타났었으며, 그 천사의 얼굴과 입은 야웨의 것을 반영하였던 것이다.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시.103:14),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한 인격적 존재로, 우리와 친밀하게 관계할 수 있는 아버지로 알기를 원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팔, 손, 눈, 귀 등등, 그 몸의 지체들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인격적 존재를 부인하고 있는 것같이, 만일 하나님이 그 일반 개념과 같이 하늘 공간 어느 곳엔가 떠있는 보이지 않는 존재라면, 이 모든 인용구들이 가르치는 목적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처에 관한 성서의 기록은 분명하게“하나님께서”인격적 존재로 계시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느니라”(전.5:2).“야웨께서 그 높은 성소에서 하감하시며, 하늘에서 땅을 감찰하셨으니”(시.102:19,20),“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그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왕상.8:39). 이보다 더욱 분명하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보좌에 앉아 있다는것이다”(대하.9:8;시.11:4;사. 6:1;66:1). 이와 같은 말은 하늘 영역 그 어느곳에 확실하게 존재하지 않는 어떤 요소(Essence)에 대해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그가 내려오셨다고”말하였다. 이것은 그의 하늘 처소를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적 본성의인식이 없는 한,“그의 현현(顯現)”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사.45장 전장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사건들에 인격적으로 개입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나는 야웨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 나는 야웨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 나 야웨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있을진저. ...내가 친수로 하늘을 펴고, ... 땅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마지막 구절은 특별히 하나님의 인격적 존재를 가리키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며, 믿음의 눈으로서 그의 실제의 인격적 존재의 개념을 가지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며, 우리의 과실을 용서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셨다. 용서의 말씀은 인격적인 것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것은 정신적 행위인 것이다. 또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다(삼상.13:14)고 하므로, 하나님은 마음이 있는 분인 것을 가리키며, 사람이 본성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합할 수 없음으로,“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창.6:6)고 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은, 그 어느 곳에 떠있는 바람과 같은 추상적인 유령적 존재가 아니라, 감정을 나타내시는 의식적 존재로, 그의 마음은 사람들 때문에 어느 정도 후회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육신의 자녀가 그 아비에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든가 불쾌하게 하든가 하는 두가지를 하게 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이 인격적 실재가 아니라면,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실제 인격적 존재가 아니고, 어떤 유령적 존재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절대 의로우시지만, 민일 형체적 존재가 아니시라면, 인간의 존재들에 나타난 그의 의는 의식할 수가 없을 것이다. 성서에서 이탈한 그리스도교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하나님의 정신적 형상으로 만들어 그에게 용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 모호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생명체에 들어온다는 개념을 가지게 하고 있다. 그것과는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불리우는 인격적 존재를 한번 인식하게 된다면, 우리 존재에 하나님의 성품이 반영하는 바, 그의 도우심과 그의 말씀의 영향으로 우리 성품의 발전을 위해 노력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많은 영광된 무리에게서 그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그의 이름, 야웨 엘로힘(Yahweh Elohim)은 `능력자들이 되실 분'(He who shall be mighty ones)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이 형체적 존재가 아니시라면, 그 충성된 자들이 받을 보상은 하나님과 같은 비육체의 유령적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성서에는 장차 세상에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에서 충성된 자들이 받을 보상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연약한 육체는 아니지만, 역시 우리가 만질 수 있는 육체적 존재라고 기록되어있다. 욥은 그가 육체의 부활을 가지게 될“그 마지막 세대를”동경하고 있었다(욥.19:26-27). 아브라함은“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단. 12:2) 중의 하나로, 이 땅에서 육체적 인간으로 거처할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약속 받았던 것이다(창.17:8).“성도들은 즐거움으로 외치리로다.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저희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시.132:16;149:5,7).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이 구절들과, 아브라함에게 하신 실제적인 그 중요한 약속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인간 존재의 실제 형체를“불멸의 영혼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성서의 뒷받침을 전혀 받을 수가 없다. 하나님은 불멸의 영광스러운 존재로, 장차 세상에 세워질 그의 나라에서 살며 그의 본성을 가지고 그것을 형체적으로 나타낼 수 있게 될 사람들을 부르시고 있는 것이다.

충성된 자들은 하나님의 본성을 물려받도록 약속을 받고 있다(벧후.1:4). 만일 하나님이 인격적 존재가 아니시라면, 이것은 우리가 어떤 비물질적 상태로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서의 가르침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와 같은 신체를 받게 될 것이며(빌.3:21), 그리고 우리는 예수께서도 그 나라에서 손과 눈과 귀가 있는 실체의 육체를 가질 것으로 알고 있다(슥.13:6;사.1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격체에 관한 교리는 그 나라에 관한 복음과 불가분의 관계로 되어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으나, 지금 불완전한 형상이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정신적 형상으로 발전하여 그의 나라에서 그의 육체적 형상을 온전히 입어야 되겠지만, 인간은 형체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 즉 하나님이 인격적인 것을 인식하기까지는 그에 대한 우리의 예배 의식(意識), 종교 또는 개인적 관계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비하신 아버지로서, 육체의 아버지 같이 그의 자녀를 징계하신다(신.8:5)는 말씀에서 우리는 그에 관한 지식을 더 많이 얻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록한 구절들에서, 우리는“그가 환란에서 야웨께 아뢰며, 그의 소원을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그의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시.18:6)라고 하신 것과,“야웨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사.53:10)라는 것을 읽게 된다. 다윗의 한 자손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다윗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 수행에는 기적적 출생이 필요하였다. 만일 하나님이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시라면, 그는 그와 같은 아들을 소유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바른 인식은 성서의 중요한 여러 교리를 밝히는 열쇠가 된다. 그러나 한가지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게 되므로, 하나님에 관한 거짓 개념도 또한 성서가 제공하는 하나님의 진리 체계를 모호하게 한다. 만일 당신이이 부분을 온전히, 또는 부분적으로나마 깨닫게 된다면, 당신 자신에게 문제가일어날 것이다.‘나는 진정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이제 우리는 더욱 하나님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을 밝히려고 한다.

1.3 하나님의 이름과 그 특성

만일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자신에 관하여 우리에게 하신 말씀에는 그가 계획한 어떤 의미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보내신 그의 계시이므로, 우리는 그것에서 그의 특성을 터득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에서 작용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특성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을 형성하는 까닭에(약.1:18;고후.5:17),“그의 씨라”(벧전.1:23)고 묘사되어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적용시키고 우리의 교훈으로 삼을수록, 우리 성품은 더욱 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 되신(골.1:15)“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될 것이다”(롬.8:29). 성서의 역사 부분의 연구는 가치있는 것으로, 역사는 항상 동일한 기본 특성으로 연출되어 있는 바,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국가들을 다루시고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성서에 있는 인명(人名)은 종종 그의 특성을 반영하며 또는 그에 관한 것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구주'-“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리라”(마.1: 21)는 의미이다.

“아브라함”=“많은 무리의 아버지”-“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창.17:5)고 하셨다.

“하와”=`산(生) 자'-“그녀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창.3:20)고 하셨다.

“시므온”=‘들으심'-“야웨께서 나의 총(寵)이 없음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이 아들)도 주셨도다”(창.29:33)고 하는 의미이다.

예레미야서 48:17 에는, 모압의 백성을 알고 있는 자는 모압의 이름을 알고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예시되고 있다. 시편에는 자주 하나님 자신을 그의 이름과 그의 말씀과 행동들과 동일한 것으로서 예시하였다(시.103:1;105:1;106:1,2, 12,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과 칭호들은 그 자신에 관한 것들을 우리에게 알리고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특성과 목적에는 너무나 많은 국면이 있기 때문에 그 칭호도 다양하다. 그는 실제로 한가지 이상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의 이름에 표현된 그의 특성에 관한 평가는 주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평생 동안 계속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상세한 연구는 당신이 침례를 받은 이후에 하기로 하며, 다음의 것들은 그 서론에 지나지 아니한다.

모세가 그의 생애에서 정신적 상처가 매우 깊었던 때에 그의 믿음을 강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에 관한 보다 깊은 지식을 얻고자 하였었다. 그 때에, 천사 하나가“야웨의 이름을 반포하실새, 야웨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야웨로라, 야웨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출.34:5-7)고 선포하였다.

하나님의 이름들을 이해하는 것은 그의 특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특성들을 소유하였다는 것은 그가 인격적 존재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므로으로, 우리 인간이 평생 동안 추구해야 할 과제애며, 또한 그것을 추구한다해도 모두 터득하지 못할 것이며, 더구나 하루 밤의 영적 감동으로 그것을 터득한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알고 기억해야 할 하나의 특별한 이름을 선택하셨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그의 게획과 목적을 요약한 것이며, 그것들의 개요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 노예로 있었을 때에, 그들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기억하고 있어야 했다. 모세는 그들이 애굽을 떠나 그 약속의 땅을 향하여 출발할 수 있도록 하는 동기가 되게 하기 위하여(고전.10:1,비교)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라는 분부를 받았었다. 우리도 역시 침례를 받고 하나님의 나라로 향하는 여정을 떠나기 전에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철저한 인식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그의 이름이 야웨(YAHWEH),“I am that I am”, 좀더 정확하게 번역하여‘I will be who I will be’(출.3:13-15)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에 이 이름에 부연하여 말씀하셨다.“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야웨라', 또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야웨'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해야 할 나의 칭호니라”(출.3:15)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온전한 이름은“야웨 하나님이시다”. 이 이름의 영역(英譯)이나 한역(韓譯)은 아주 오역되어있다. 우리 말로 `하나님'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엘로힘(Elohim)'은 하나의 보통명사로 `능력있는 자들'(mighty ones)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바, 우리가 기억해야 그의 이름인,

“YAHWEH ELOHIM”은

“HE WHO WILL BE REVEALED IN A GROUP OF MIGHTY ONES”로,

“능력자들의 한 그룹으로 나타나게 되실 분”이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한 그룹의 사람들에게서 그의 특성과 그의 존재 요소를 나타내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며, 목적이다. 우리는 지금 그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성품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서 신자의 생활에서 어느 정도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이 세상에 하나님 자신과 같은 성품과 본성을 가진 백성으로 가득차게 될 때가 오게 된다는 하나의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벧후.1:4과 비교).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과 같은 완전한 도덕적 사회에서 영원히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의 이름과 부합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우선 그의 이름, 야웨 엘로힘의 이름으로(마.28:19) 침례를 받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이 땅의 영원한 후사로 약속 받은(창.17:8;롬.4:13) 아브라함의 자녀, 곧 하나님의 이름이 예언하고 있는 바와 같은 그 “능력있는 자들”,곧 (Elohim)이 되는 것이다(갈.3:27-29). 이 주제는 하나님의 복음에 있어서 가장 궁극적 목적이므로 학습 3과와 4과에서 더욱 상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1.4 천사들

본 학습에서는 천사들에 관한 모든 것을 고찰해 볼 것이다. 천사들은;

육체적이며 인격적인 존재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뜻을 역사하게 하는 채널이다.

하나님의 목적과 그의 성품과 일치한다.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현현하신다.

학습 1.3에서 ‘하나님’이라고 널리 알려진 히브리어 `Elohim'은 `능력 있는 자들'(mighty ones)이라는 의미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이 `능력 있는 자들'은 그들이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불리었다. 이 존재들은 천사들이다.

창세기 1장 천지 창조의 기록은 하나님께서 창조에 관한 명령들을 발하고, “그것이 이루어졌다”고 말하였다. 그 명령들을 수행한 자들은 천사들이었다.“능력이 있어 야웨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야웨를 송축하라”(시.103:2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 그 사역이 실제로는 천사들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욥.38:4-7에는 그것이 암시되어 있다. 이제는 창.1장에 기록된 창조의 사건을 요약하고자 한다:

첫째 날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더라”(3절).

둘째 날

“하나님이 가라사대, 궁창(하늘 공간)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 물과 궁창 위의 물(구름)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6,7절).

세째 날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바다와 대양의 형성)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9절).

네째 날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땅에 비취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14,15절).

다섯째 날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을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게 하라 하시고, 하나님이 모든 생물을 창조하시니,- 곧 그대로 되니라”(20,21).

여섯째 날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 그대로 되니라”(24절).

사람 역시 그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다.“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1:26). 이 구절에 그 ‘우리’에 관해 학습1.2에서 설명한 바가 있다. 여기서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은”그 유일하신 야웨 하나님 자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한 하나님(우리)은 한 분 이상의 여러분을 가리키고 있는 바, 단수(單數)로 기록돼있지 아니하고 복숙(複數)로 돼있다. 하나님이라는 그 히브리 단어‘엘로힘’(Elohim)은‘능력 있는 자들(mighty ones)’로 그 천사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천사들이 그들의 형상대로 우리를 창조하였다는 사실은 그들이 우리와 같은 육체적 모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 분이신 하나님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바, 실제로 우리가 만질 수 있는 형체의 존재이다.

여기서 ‘본성’(Nature)이라고 사용한 그 낱말은 야웨 하나님의 본성으로,모든 천사들의 육체적 구조가 근본적으로 야웨 하나님과 동일한 본성인 형체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서에는 상호(相互) 절대 수용할 수 없는 두가지 본성을 가리키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과 우리 인간의 본성이다. 다음의 그 대조표는 우리가 깊이 음미하여 마음에 명기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신자의 믿음의 소망을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본성(本性)

하나님은 죄를 지을 수가 없는 완전하신 분(롬.9:14;시.90:2;마.5: 48;약.1:13;그리고 롬.6:23과 비교).

하나님은 죽음이 없는 절대 불멸의 존재이시다(딤전.6:16).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가지신 분이시다(사.40:28).

이것이 하나님과 천사들의 본성이며, 그 본성을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받으셨다(행.13:34;계.1:18;히.1:3). 이 본성이 또한 신자들에게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눅.20:35,36;벧후.1:4;사.40:28,31).

인간의 본성(本性)

사람은 본성이 부패하였고(렘.17:9;막.7:21-23), 시험을

받는다(약.1:13-15).

사람은 죽음의 지배를 받아 멸망할 수 밖에 없다(롬.5:12,

17;고전.15:22).

사람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한정된 능력을 가지고 있다(사.

40:30;렘.10:23).

이것은 우리 인간 모두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이 특성을 가진 인간은 죽음으로서 끝이 나고만다(롬.23:). 그것은 또한 예수께서도 세상에 계실 동안,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본성이다(히.2:14-18;롬.8:3;요.2: 25;막.10:18).

천사들의 형상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천사들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롬.6: 23) 죄를 지을 수가 없고,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육체적 형체의 존재이다. 이런 까닭에 천사들이 세상에 나타났을 때에 그들은 보통 사람으로 보이곤 하였다.

천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려고 아브라함에게 갔었다. 그들은 사람의 모양이었던고로, 아브라함이 보통 인간들을 대하는 것같이 대접한 바,“세사람”으로 기록되어있다.“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창.18:4).

그리고 그 중의 두 천사가 소돔성에 있는 롯에게로 갔었다. 다시 그들은 롯과 그 도성의 사람들에게 보통 사람들로 인식되었다.“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렀을 때에”, 롯이 자기 집에서 자라고 그들을 초청하였다. 그러나 소돔성 사람들은 롯의 집에 가서 협박하면서 그들을 내놓으라고 요청하였다.“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상관하리라”. 롯은 그들에게 간청하였다.“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말라”. 성서에는 계속하여 그들이“사람들”이라고 기록되어있다.“그 사람들(천사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 들이어”, 롯을 집 안으로 끌어 들이었다.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야웨께서 우리로 이 곳을 멸하려 보내셨느니라”(창.19:1,5,8,10,12,13).

이 사건에 대하여 신약성서는 그 천사들이 사람의 형상이었던 것을 확인하여 설명하고 있다.“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13:2).

야곱은 얍복강 나루에서 밤새껏 낯선 사람과 씨름을 한 적이 있다(창.32:24).그 사람을 나중에는 천사라고 하였다(호.12:4).

예수께서 부활했을 때와 승천하실 때에, 광채 나는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었다(눅.24:4; 행.1:10). 그들은 분명히 천사들이었다.

“사람의 척량(尺量), 곧 천사의 척량”(계.21:17)이라는 말씀을 생각해보라.

천사들은 범죄하지 아니한다

하나님의 본성을 가진 천사들은 죽을 수가 없다. 죽음이 범죄 때문에 온 것이므로, 그들은 범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천사’로 번역된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단어는 ‘멧신저’라고 되어있다. 따라서 그 천사들은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는 그의 멧신저 또는 심부름꾼이므로, 그들에게 범죄란 있을 수가 없다. 이처럼 ‘천사’로 번역된 그 헬라어 ‘앙겔로스(Αγγελοs)’는 ‘사자(使者)’로도 번역되어있다. 침례자 요한(마.11:10)과 그의 사자들(눅.7:24), 예수의 사자들(눅. 9:52)과 여리고 도성을 정탐했던 사람들(약.2:25). 물론, 그 천사가 아닌 인간 사자들은 범죄할 수가 있다.

다음 구절들은 모든 천사들이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므로, 범죄할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다:

“야웨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하늘에서 하나님께 반역이란 절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능력이 있어 야웨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야웨를 송축하라. 야웨께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天軍)이여, 야웨를 송축하라”(시.103:19-21).

“그의 모든 사자들이여,...그의 모든 군대들이여, 찬양할지어다”(시.148:2).

“모든 천사들은 봉사하는 영들이 아니더뇨? 그들은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느니라”(히.1:14).

“모든 천사”라고 한 것은 천사들이 선한 자와 악한 자(범죄한 자)의, 두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지 아니한 것을 가리키고 있다. 천사의 본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 충성된 신자들의 보상이 천사들의 본성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 다시 죽을 수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눅.20:35,36).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파악하고 있어야 할 중요한 점이다. 천사들은 죽을 수가 없다.“죽음이 천사들을 붙들지 못하느니라”(히.2:16 - Diaglott 역본의 주를 보라). 만일 천사들이 범죄한다면, 그리스도에게 합당히 여김을 받아 천사와 같은 본성을 입은 자들도 범죄할 수 있게 될 것이 아닌가? 죄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롬.6:23)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영생을 얻었다고 할 수가 없다. 만일 그 영생을 얻은 사람이 범죄할 수 있다면, 그는 죽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천사들이 범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그런 천사들의 본성을 보상으로 받게 된다고 생각할 때에 영생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가치 없는 것이 된다.“천사들에”관한 것(눅.20:35,36)을 생각해보면, 천사들은 선악의 두 부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부류만 있는 것이다.

만일 천사들이 범죄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에서나 세상 일에 있어서 공의롭게 행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천사들을 통하여 역사하신다(시.103:19-21)고 선포하였으므로, 그들의 행동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천사들을 통하여 행하시며,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인 영(靈)으로 모든 일을 성취하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이다’(시.104:4).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은‘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마.6:10). 만일 하나님의 선한 천사들이 하늘에서 범죄한 천사들과 다투고 있다면, 하나님의 뜻은 그곳에서 온전히 시행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와 같은 상태가 장차 세워질 그의 나라에서도 생겨날 것이 아닌가? 죄와 불순종이 끊임없이 일어날 전투장인 세상에서 영원히 지내게 될 것을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하나님의 복음의 소망은 그런 것이 아니다.

천사들과 신자들

참된 신자들 각자에게는 그를 도와주고 있는 천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야웨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시.34:7).

“나를 믿는 작은 자들(즉, 어린 제자들 - 슥.13:7; 마.26:31),저희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18:6,10).

“1세기의 초기 신자들은 베드로에게는 그를 수호하고 있는 천사가 있는 것을 분명하게 믿고 있었다”(행.12:14,15).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 천사의 인도를 받아 그 약속의 땅을 향하여 홍해를 건너 광야를 거쳐서 갔다. 홍해를 지나갔다는 것은 우리의 침례(고전.10:1)를 나타내는 것으로, 우리도 역시 그와 같이 천사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세상 광야를 거쳐서 가고있는 것이다.

만일 천사가 그런 악성을 가진 범죄한 존재라면, 천사가 이와 같이 우리 생활에 관여하고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축복이 아닌 저주가 될 것이다.

천사들은 다음과 같은 존재인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영원성과 육체의 형상을 가진 자

범죄할 수 없는 자

항상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는 채널로서 그의 영, 곧 그의 능력으로서 말하고 행하는 자(시.104:4)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상의 많은“그리스도교인들은”천사들이 범죄할 수 있고, 그리고 지금 세상 죄와 모든 문제가 그 범죄한 천사들에 의하여 일어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학습 6에서 더욱 깊이 이 그릇된 생각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지금은 다음 요점들만 검토하겠다.

창세기 1장의 기록에는,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천사들을 창조하였다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또한 우리는 현재 천사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과 유사한 것, 곧,“선과 악”(창.3:5)을 구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세대에 살았던 어떤 존재들의 범죄는 통제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마음대로 생각하고 있는 상상일 뿐이다. 성서는현 상태에 대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알게하고 있다. 그것은 죄있는 천사가없다는 것, 모든 천사가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고 있다는 것이다.

“야웨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느니라”(합.1:13)고 하셨으니,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늘에는 죄있는 천사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은 맥락의 말씀인 시.5:4,5에서는“야웨는 죄악을 기뻐하는 하나님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거만한 자가 주와 함께 거하지 못하리이다”라고 하셨다. 죄있는 천사가 하늘에서 하나님께 반역한다는 생각은 이 구절과 대조해 볼 때에 너무나 모순된 것이다.

천사로 번역된 헬라어 `앙겔로스(Αγγελοs)'는“멧신저”를 의미하며 때로는 사람에도 인용하였다. 이와 같은 인간“멧신저”는 물론 범죄할 수 있다.

생활을 부정적으로 사는 악하고 죄있는 모든 사람이 저주받게 된다는 것이 이교(異敎)의 일반적인 신앙이다. 크리스마스 행사도 이교 사상에서 그리스도교에 들어온 것이다.

성구들을 세상 개념으로 곡해하므로 범죄한 천사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생긴 것이다. 이것은 본 간행자가 발간한 책,“사단의 연구”에 충분히 설명해놓았다. 성서 가르침에 반대되는 그와 같은 모순된 구절들은 성서에 용납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릇된 해석 1: 하나님은 영이시니라

학습 2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자세하게 정의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은 그의 힘 또는 호흡이라고 말하는 것으로서 그 논제를 명확하게 요약해 놓았다. 그리고 그 영이 성취하는 바, 행위들을 통하여 사람에게 그 자신과, 그의 존재와 그의 본성을 계시하였다. 그의 영은 그의 인격을 반영하는 까닭에,“하나님은 영이시니라”(요.4:24)는 구절은 적절하게 해석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가지 것들로 묘사되어있다. 예를 들자면,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12:29).

“하나님은 빛이시라”(요일.1:5).

“하나님은 사랑이라”(요일.4:8).

“말씀(Logos 계획, 목적, 생각)은 곧 하나님이시라”(요.1:1).

이처럼“하나님은 그의 본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성서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된 부분을 읽는 까닭에, `하나님의 본성을 추상적인 사랑'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친절하다고 말할 때에, 이것은 그가 육체적 존재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우리에게 친절을 나타내는 바, 그 사람의 속성의 일부를 강조하여 말하는것 뿐이다.

하나님의 능력인 영은, 성서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든가 또는 지시하여 그의 뜻과 성품에 일치하는 것들을 성취하는 존재라고 인식해야 한다. 그는 그 영을 창조하신다고 기록되어있다(암.4:13). 하나님을 그의 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에 대한 중복어(重複語)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하나님의 형체적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그의 영이 분리된 것을 가리키는 바,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지칭한 실례는 성서에 너무나 많이 나온다.

“그들 중에 (하나님이) 성령을 두신 자”(사.63:11).

“내가 내 성령을 그(예수)에게 줄터이니”(마.12:18).

“너희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13).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요.1:32).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행.2:17).

성서에 자주 인용된“하나님의 영”은 그 영이 인격적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잘 입증하고 있다. 하나님과 그의 영의 차이점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고 성령이 동등하다는 그 ‘삼위일체론’을 믿는 자들에게 풀기 어려운 또하나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 삼위일체론이 사실이며, 하나님이 비인격적 존재라면, 예수도 실제의 존재가 아니며 또한 아니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면 우리가 기도할 때에도 큰 문제가 생기는데,- 우리 마음 속에 존재하는 우리의 의식과 하나님의 생각과의 대화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하여 하늘에 형체적으로 거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이며(전.5:2;마.5:16;6:5;왕상.8:30),그리고 지금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예수께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벧전.3:21;히.9:24). 만일 하나님이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면, 그와 같은 구절들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실제이며, 사랑의 아버지라는 것을 한번 깨닫게 된다면, 우리가 신뢰하고 있는 다른 사람이 우리 뜻에 응답하고 또한 응답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만질 수 있는 매우 실제적인 분인 하나님께 기도하게 된다.

그릇된 해석 2: 하나님의 이름 사용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아들 예수의 이름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에 관하여 논하는 것은 그의 사랑과 진리와 그의 목적의 여러 국면을 검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에 사족(蛇足)을 달든가 또는 그릇된 표현으로 헛되이 사용하는 것은 우리의 창조주를 모욕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를 존중히 여기고자 하는 자는 그의 이름을 경히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 여러 곳에 널리 퍼져있는 바, 신성모독(神聖冒瀆)이 현대어의 일부분이 되어있다. 이런 습관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아니하다. 이것에 대한 깊은 반성의 기도가 항상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영향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신성모독의 심각함을 일깨워주어야 한다.“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없는 것으로 인정치 아니하리라”(신.5:11).

다른 한편에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때에, 히브리 단어인 야웨를 계속하여 사용하지 아니하면, 배교(背敎)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그 중에 특히 ‘파수대’라는 잡지 발행자들은 그리스도인이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불리우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부르는 그 사람들은 거룩하고 공경 받으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도 일종의 영적 정예주의자(精銳主義者)가 되는 줄 생각하고, 단지 그 용어 사용으로 다른 신자들을 멸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틀린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한번 합당하게 침례를 받은 신자는 그 이름을 그의 개인 기도에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이것이 하나님께 꼭 필요한 것이며 또한 그가 원하시는 것이라는 지시가 없다. 하나님은 신약성서를 헬라어로 기록하는데 영감으로 지배하여, 오직 한 마디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크신 분’이라고 하였다. ‘하나님’과 ‘야웨’ 사이에 뚜렷한 구별이 없고, 또한 신자들이 그들 스스로 하나의 공동체에서 반드시 어떻게 불러야 한다는 특별한 명령은 없다. 사도 베드로는 ‘신자’를 ‘야웨의 사람’이든가, 또는 그와 유사한 이름으로 부르지 아니하고, 오히려“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벧전.4:16). ‘야웨’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주 예수의 사역과 지위를 평가절하하기 쉽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예수의 이름과 그의 직분을 지나치게 강조하므로서 하나님의 지위마저 무시하는 경우가 되고있다.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대하여 사용한 이름들에는 ‘야웨’라는 이름이 별로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들이 사용한 이름들은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 나라”(엡.2:12).

“장자들의 총회와 에클레시아”(히.12:23).

“하나님의 에클레시아”(행.20:28).

“진리의 기둥과 터인 살아계신 하나님의 에클레시아”(딤전.3:15).

“하나님의 집”(딤전.3:15).

그리스도교 역사상, 신자들 자신이 자기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들을 대적하는 자들이 붙여준 이름으로, 신자들이 모임이나 대화 등등, 신자들의 일상 신앙 샐활에서 구주 되시는 그리스도라는 낱말을 자주 부르게 되므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그들을 모욕적으로 부른 호칭이라고 할 수있다.

그릇된 해석 3: 하나님의 현현(顯現)

다음 것들은 한번 읽어서 쉽게 그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 주제의 중요성을 더 깊이 연구하면 보다 더 분명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일러두는 것은 우리가 이 학습을 마칠 때에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성서의 기본 계시를 충분히 납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나타내고자 선택하신 자라면 누구나 지닐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와 마찬가지로 사람이나 천사나 할 것 없이 그의 이름을 지닐 수가 있다. 이것은 성서가 우리에게 열어주는 중요한 원칙이다. 아들은 그 아버지의 이름을 지닐 수 있다. 그는 그의 아버지와 어느 정도 흡사하며, 같은 성(姓)을 가질 것이다. - 그러나 그는 아버지와 동일한 사람은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한 단체의 대표자는 그 단체를 대표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사업차 누구에게 전화로 통화를 할 때에, 나는 그 단체라고 말한다. 그는 아무개가 아니고, 그 단체를 위하여 일하고 있는 까닭에 그 단체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의 경우도 이와 같은 것이었다.

천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출애굽기 23:20,21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그들에 앞서 한 천사를 가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읽게 된다.“내 이름이 그에게 있느니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이름은 ‘야웨’이다. 그러므로 그 천사는 야웨의 이름을 지니고 있었고, 그는 ‘야웨’ 또는 ‘주’라고 불리었던 것이다. 우리는 출.33:20에서는 누구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수 없다는 것을 읽는다. 그러나 출.33:11에서는“야웨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 즉 친구와 같이 긴장을 풀고 말씀하시니라”고 하신 것을 읽게 된다. 하나님을 보고 살아남을 자가 없다고 하셨으므로, 야웨 자신이 모세에게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말씀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지니고 있었던 천사가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했던 자는 실제로 천사였지만 모세와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말씀하셨던 분이 주라고 읽는다(행.7:30-33).

그 외에도 하나님과 마주했던 천사를 칭하여 ‘주’와 ‘야웨’라고 말한 많은 실례가 있다. 그 분명한 실례는 창.1:26에 있는 바,“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한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지닌 사람들

이것을 가장 확실히 입증할 수 있는 구절은 바로 요.10:34-36이다. 그것은 오늘날 소위 `그리스도인들'이 범하고 있는 바, 유대인들이 오해하였던 것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여 그것을 정정(訂正)하였다.“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하나님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서는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 세상에 보내신 자가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요.10:36).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구약성서에서 사람들을 하나님들이라고 불렀었다’고 하신 것이다. 그와 같은 방법으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너희가 화낼 것이 무엇이냐?’ 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실제로 시.82편을 인용하여 말씀하시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는 이스라엘의 재판관을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이미 연구하여 아시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완전한 이름은 ‘야웨 엘로힘(Yahweh Elohim)’이다. 그것은 ‘나는 능력 있는 자들의 한 그룹에 나타날 자이라(I will be revealed in a group of mighty ones)’는 의미이다. 참된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한정된 의미로 능력 있는 자들이지만, 그 나라에서는 온전히 그런 자들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사.64:4과 고전.2:9에서 비교적 아름답게 가르치고 있다.“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하나님을 예로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바울은 이것을 고전.2:9,10에 인용하였다.“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도다’ 함과 같으니, 오직 하나님이 그의 영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느니라”. 사.64장에 있는 그 구절은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그가 신자들을 위하여 예비한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고전.2:10에, 우리에게 보이는 것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이라 한 것은 인격적으로 하나님 자신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으로 침례를 받고 그 진리를 알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현현이라는 것이다.

예수와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의 최고의 현현이셨던 예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지녀야만 했던 것은 별로 놀랄만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이같이 말할 수가 있었다.“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요.5:43).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올리셨고,“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즉, 하나님 자신의 것, 야웨의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레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 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그의 말씀을 읽게 되는 것이다.“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의(신자) 위에 기록하리라”(계.3:12). 재판장이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주실 것이며,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온전히 사용하게 될 것이다. 그는 이 이름을, “나의 새 이름이라”고 부르셨다. 빌.2:9에 설명한 바와 같이, 예수께서 승천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받으신 몇년 후에 계시록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나의 새 이름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그 이름은 그가 그 당시에 받았던 것이다. 우리는 이제 사.9:6을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예수에 관하여 이런 말을 듣게 된다. “그의 이름은 기묘(奇妙)한 자라, 모사(謀士)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평강의 왕이라.할 것임이라”. 이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모든 이름을 지니게 될 것을 예언한 것으로, -그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완전한 현현이 되실 것이라는 말씀이다.“보라 쳐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나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마.1:23). 그가 인격적으로 하나님이 아니었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바, ‘임마누엘’이라고 불리었던 것은 이런 의미에서 그랬던 것이다.

학습 1: 학습 문제와 해답

1. 우리의 신앙을 발전시키는데, 어느 것이 가장 도움이 될 것인가?

a) 교회에 나가는 것

b) 기도하며 성서를 공부하는 것

c) 그리스도인들과 이야기하는 것

d) 자연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것

2. 하나님에 관한 가장 바른 정의는 어느 것인가?

a) 우리 마음 속 생각에 있는 분

b) 영적 존재

c) 하나님은 없다

d) 실제로 존재하는 형체적인 분

3. 하나님은 몇 분인가?

a) 오직 한 분

b) 하나의 삼위일체가 되신 분

c) 하나 안에 있는 많은 하나님

d) 어떤 분인지 정의할 수 없다

4. 하나님의 이름인 ‘야웨 엘로힘(Yahweh Elohim)’은 무슨 의미인가?

a) 스스로 있는 분

b) 많은 능력자의 한 그룹으로 나타나게 되실 분

c) 위대하신 분

d) 능력 있는 분

5. ‘천사’는 어떤 분인가?

a) 사람과 같은 분

b) 날개를 가지고 있는 분

c) 하나님의 멧신저

d) 하나님을 보조하는 자

6. 천사가 범죄할 수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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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 당신은 어떤 개념을 가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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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1

16 하나님

하나님 1

사 진(2)

학 습 2

하나님의 영(靈)

26

1.1 하나님의 영: 그 정의

하나님은 정서가 있고 생각하는 실제의 인격적이신 분이시므로, 그의 자녀인 우리에게 그의 생각과 그의 감정을 함께 하고, 또한 우리 생활에서 그의 성품과 일치하게 행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행하신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그와 실제적으로 관계를 가지려면, 하나님의 영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영”이라는 낱말의 의미를 정의하기는 쉽지 아니하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어떤 결혼식장에 갔었는 데,“그곳은 분위기가 썩 좋았다”고 영어로 하는 말은“There was a really good spirit there”라고 한다. 여기에서 사용한 그 단어 “좋은 영(good spirit)”은 그 결혼식장에 모인 축하객들, 환대하는 좋은 음식들, 모두가 신랑 신부를 축하하고 있는 좋은 분위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이라는 낱말도 모두 하나님에 관한 어떤 상태를 요약한 것이다. 구약성서에서“영”이라는 그 히브리 낱말은“호흡”또는“힘”으로 번역되어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은 그의“호흡하는 것이며”, 바로 하나님의 요소이며, 그의 마음의 반영인 것이다. 우리는 그“영”이라는 낱말이 어떤 사람의 마음 또는 그의 기질(氣質)로 사용된 실례들을 학습 4.3에서 배우게 될 것이다. 그 영은 단지 하나님의 노출된 힘을 가리키는 것만이 아닌 것이 “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롬.15:13)라고 한데서 분명해진다.

성서는 사람의 생각이 그의 행동에 나타난다고 가르치고 있다(잠.23:7;마.12: 34). 우리는 무엇인가 생각하고 그것을 실행한다. 우리의‘영’또는 마음은 우리가 시장하여 음식이 필요한 사실을 상기하고, 부엌에 놓아둔 바나나를 생각하게 된다. 그‘영’의 소원을 행동으로 연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손을 내밀어 그 바나나를 꺼내어 껍질을 벗겨 먹게 된다. 이것은 호흡이던가 또는 마음, 그리고 힘을 의미하고 있는 바,‘영’이라는 그 히브리어 단어가 가리키고 있는 매우 단순한 실례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요소인 우리 영은 우리 생각이며, 또한 행동을 말하는 것으로, 행동들은 우리에게 있는 그 생각이나 기질이 나타난 것이다.보다 더 영광스럽고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영도 역시 그와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그의 존재 요소를 나타내는 것이며, 그의 기질과 목적이 나타난 힘인 것이다. 하나님은 생각하시고 그것들을 행하신다.“만군의 야웨께서 맹서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어지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사. 14: 24)고 하셨다.

하나님의 힘

성서의 많은 구절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영이 그의 힘과 동일하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이 우주의 창조에 있어서,“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그리고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더라”(창.1:2,3)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은 빛이든가, 궁창 등등 모든 것을 만든 힘이었다.“그는 그의 영으로 하늘을 단장하시고, 그의 손으로 꼬부라진 뱀을 만드셨느니라”(욥.26:13).“야웨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의 입의 기운으로 이루어졌느니라”(시.33:6).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을 다음 같이 가리키고 있다.

하나님의 호흡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손

하나님께서 성취하는 모든 것은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따라서 신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거듭나며(요.1:13),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요.3:3-5). 그의 영의 작용으로 그의 뜻이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다. 천지 창조에 관하여 말하기를,“주께서 당신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였나이다”(시.104:30)라고 하였다. 이 영, 곧 그의 힘은 또한 만물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유지하며 경영하고 있는 것이다.이 비극적 세상은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지 않으므로 비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지쳐 피곤해졌던 욥은 이것에 관해 깨달은 한 선지자였다.“그(하나님)가 만일 그 자신에게 그의 영과 그의 호흡을 거두신다면, 모든 육체는 일체로 멸망할 것이요, 사람도 진토로 돌아갈 것이라”(욥.34:14-15). 다윗은 의기 소침해졌을 때에, 이 영으로 계속하여 그를 지탱하게 해주기를, 그의 생명이 보존되기를 하나님께 간구하였었다(시.51:12).

우리가 받은 영과 모든 피조물을 유지하고 있는 영에 관하여는 학습 4.3에서 공부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출생시에 주신 바(시.104:30,창.2:7), 우리에게는“생명인 영의 호흡”(창.7:22)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모든 육체의 영의 아버지, 또는 하나님”(민.27:16, 히.12:9과 비교)이라고 그를 부르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모든 피조물을 양육하시는 생명력이기 때문에, 그 영은 있지 아니한 곳이 없다. 다윗은 그가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이 영으로 말미암아 계속하여 그에게 나타나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 영의 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과 그 생각하는 것을 모두 다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은 그가 비록 하늘 처소에 인격적으로 거처하시지만, 어디든지 나타날 수 있게 하는 그의 수단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야웨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2-10).

.이 주제를 바르게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으로 행사하시는 존재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막연하게 하나님을 믿으면서 성장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에 하나의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그들의 뇌에서 하나의 블랙 박스가 되어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의 영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의 실제적 나타나심을 바로 이해하게 되면 우리의 삶에 관한 개념이 바꾸어질 것이다. 그의 영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며, 계속하여 그의 행동들이 나타나서, 그것들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다. 다윗은“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139:6))라고 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그와 같은 지식에 대한 책임이 큰 것을깨달았었다. 우리는 생각과 행동들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해야 할 것이다. 그의 앞에 나아갈 우리의 신분을 살펴봄으로서, 특별히 침례를받으려고 생각할 때에,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레미야에게 하신 장엄한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게 해야할 것이다.“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야웨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23:24).

성령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터득해야 할 광범위한 개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그의 마음이며 기질이며, 또한 그의 생각들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능력이다.“대저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 하느니라”(잠. 23:24);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그의 생각이며, 그의 영이다(요.4:24).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인격적자가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영의 광대함을 파악할 수 있도록, 우리는 그의 “성령”에 관한 말씀을 많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령”이라는 낱말은 신약성서에서 아주 많이 나타난다. 우리말 개역성경의“성신(聖神)”이라고 번역된 곳은 마땅히 성령이라고 해야 된다. 이것은 구약성서의 구절들에 있는 바,“하나님의 영”또는“주의 영”은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행.2장에 있는 구절에서 분명해지는데, 그것은 오순절 날에 사도들에게 성령 부어주심을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는 이것이 선지자 요엘의 예언의 성취였다고 설명하였다. 거기에는“나(하나님)의 영”의 부어주심으로 묘사되어 있다(행.2:17). 다시 눅.4:1에는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돌아왔을 때에“성령으로 충만해져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중에 예수는 그것은 사.61장의 예언의 성취라고 말하였다.“야웨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하였느니라”.이 두 경우와 기타 여러 경우에서, 성령은 구약성서의 낱말“하나님의 영”과 같은 것이다.

다음 구절들은 읽어보고 성령이 하나님의 힘을 가리키는 낱말임을 유의하라.

“성령이 네게(마리야)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눅.1:35).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한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롬.15:13,18).

“우리의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살전.1:5).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내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것이라”고 하셨던,‘그 위로부터 내리는 능력은’성령이었다(눅.24:49).

“하나님께서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셨다”(행.10:38)고 기록돼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성력의 능력으로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던 것을 확증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파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 곧 성령으로 뒷받침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아니하고 다만 영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였느니라”(고전.2:4)고 하였다.

2.2 영감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하나님의 힘, 그의 생각, 또는 그의 성품, 등등으로 정의하였다. 하나님의 모든 것은 영의 시행으로 나타나게 된다. 우리는 이전 학습에서 하나님의 영이 천지 창조에 역사한 것을 언급하였다.“그 영으로 하늘을 단장하시고”(욥.26:13) , 그 천지 창조를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이 수면에서 운행하였다(창.1:2)고 하였다. 또한“하나님이 말씀하시니”, 만물이 창조되었다는 창세기의 예시와“주의 말씀으로 그 역사가 이루었도다”(시.33:6)라고 하는 이야기를 읽었다. 그러므로 우리 말들이 우리의 생각들과 소원들 -바로 정확하게“우리”를 나타내듯이, 하나님의 영은 바로 그의 마음을 반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것을 지혜롭게 지적하셨다.“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12:34). 그러므로 우리가 말을 통제하려면, 먼저 우리 생각을 제어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 또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너무나도 큰 축복이다. 영감의 과정을 통하여 말씀이 기록된 것은 하나님의 영이 기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용어는 항상 그 낱말“영”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영의 행동

“영”은 호흡을 의미하며,“영감”또는“호흡하는 것을”의미하기도 한다.하나님의 영의 말씀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영감”을 받아 기록한 말씀을 의미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인 말씀의 경이로운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고, 하나님에 관한 바른 지식 터득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고 있는 성서와친숙하라고 디모데를 권면하였다:-

“네가 어려서부터 성서를 알았나니, 성서는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서는 하나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