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노량진탐사대 매거진 Vol. 1 구석구석 숨겨진 노량진 이야기 WWW.YOUTHZONE.KR 문의 [email protected] / www.youthzone.kr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로 10(대방동) * 이 책의 저작권은 무중력지대 대방동에게 있습니다.

[무중력지대 대방동] 노량진탐사대, 구석구석 노량진 이야기

Embed Size (px)

Citation preview

고시원

노량진탐사대 매거진 Vol. 1구석구석 숨겨진 노량진 이야기

WWW.YOUTHZONE.KR

문의 [email protected] / www.youthzone.kr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로 10(대방동)

* 이 책의 저작권은 무중력지대 대방동에게 있습니다.

Chapter

Prologue들어가는말1

32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①Prologue

들어가는 말

여러분들은 '노량진'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어떤 이미지가 생각나세요?

츄리닝 차림을 한 고시생들이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새벽의 어두운 골목길을 빠져나와

학원으로 향하는 모습이 그려지시나요? 노량진엔 고시시험 합격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전국에서 몰려는 청년들로 가득합니다.

고시생들의 작은 섬이라고 불리는 노량진. 매스컴에서는 생기없는 고시생들이 가득한

암울하고 차가운 곳이라는 말로 노량진을 소개하기도 하고, 안정적인 직장이라는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고 노량진에 온 청년들이 있는 곳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일부 매스컴에서 소개하는 노량진 청년들의 단편적인 모습(우울하고, 암울한, 안타까운

청년들의 모습)들이 노량진 청년 전체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지는 않겠지요. 그리고 우울하고

불안함 속에서도 자신만의 꿈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청년들도 있을 것입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청년들의 표정에는 불안함이 가득한 표정만 있는 것이 아닌, 단단한 의지와 결의가

보여지는 표정을 한 청년들도 보입니다.

노량진청년들을 보면서, '수 많은 청년들이 왜 노량진에 몰려들 수 밖에 없는 지' 궁금했습니다.

알고 싶었습니다.

노량진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취업시장이 갖고 있는 불안감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각자 고시시험 합격 말고도, 다른 꿈들을 갖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안정적인 일자리를 원하게 된 배경이 있지 않을까요.

하루에도 몇십 명의 사람들이 드나들고, 또 빠져나가는 곳. 노량진을 찾은 청년들이 생각하는

노량진의 모습은 어떠한지, 얼마나 노량진에 있고 싶은지, 또 언제 가장 노량진을 벗어나고 싶은지

궁금했고, 알고 싶었습니다.

고시생 말고 또 어떤 것들이 노량진을 표현하고 있는지, 노량진청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생활 정보와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슈들을 소개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노량진을 같이 알아볼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지난 6월부터 시작한 1기에는 10명의 청년이, 2기에는

두 곳의 단체(트웬티스 타임라인, 고함20)들과 함께 노량진콘텐츠를 만들었습니다.

노량진탐사대가 찾은 노량진의 모습은 어떤지, 어떤 정보들을 알려줄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자, 이제부터 책장을 넘겨 노량진을 만나보세요. 노량진탐사대의 활동은 2016년도에도

계속될 예정이니, 앞으로의 활동에도 많은 관심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노량진탐사대 함금실 매니저

① Prologue 들어가는말 ① Prologue 들어가는말

54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INDEX

Prologue. 들어가는 말

무중력지대 대방동 소개

노량진탐사대 소개

노량진탐사대 활동 돌아보기

노량진탐사대 어떻게 활동했나?

활동사진

2015년 한해동안 노량진에서 생긴 일

노량진탐사대 활동 톡

노량진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노량진탐사대 기사

02p

06p

08p

09p

10p

11p

12p

14p

17p

19p

Chapter

무중력지대 대방동 소개노량진탐사대 소개2

76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②무중력지대 대방동

소개

서울시 청년공간 무중력지대 대방동은 다양한 청년활동을 지원하는 커뮤니티

공간입니다.

청년들이 청년문제를 해결하고 함께 성장해가는 공간이자 지역의 플랫폼이 되기

위해서 일, 모임, 공부, 취업준비, 문화, 창작활동 등 다양한 청년활동을 지원하고

협력하는 사업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자기다움을 발견하고 함께 할 동료를 만나

커뮤니티를 이루며, 생활속에서 지속가능한 변화를 꿈꾸는 대방동은 청년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청년들의 자유로운 활동과 생활의 안전망이 되기위해 만들어진

청년을 위한, 청년에 의한, 청년의 공간. 무중력지대 대방동.

무중력지대 대방동 홈페이지에 들어가시면,

더 다양한 활동 모습 및 내용들을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청년 문제해결을 위한

다양한 청년활동이 즐겁게 펼쳐지는 공간”

② 무중력지대 대방동 소개

무중력지대 대방동

진행 프로그램

노량진 탐사대

지역 탐사 활동을 통한

고시원, 학원가 등 서남권 청년공동체

생활 이슈 콘텐츠 자료 구축

15인의 청년 기자단(기수운영)

청년주간/청춘운동회

청년허브, 청정넷, 무중력지대 G밸리 등

서울시내 주요 청년 기관들과 단체

함께 힘을 모아 청년이슈 관련

다양한 모임과 행사를 지역에서 주최

서로서로클래스청년활짝아카데미

청년들이 스스로 배움을 향유하는

지식문화 공동체로 성장,

다양한 전문강좌와의 연결

공간이 캠퍼스가 되는 프로젝트

청년 사회적자본 포럼

5개 분야의 사회적 자본 구축을 위한

청년 연구진들의 리서치와 토론회

무중력지대 대방동 사업의 방향과

지역+청년 의제를 강화하는 포럼 추진

청년활동 씨앗사업

청년 스스로 자기다움을 발견하고

아이디어를 실행으로 옮기는

프로젝트 경험 기회 제공

전문가 워크숍, 연수과정 통한

청년활동 인큐베이팅, 20팀 육성 목표

청년활짝 커뮤니티

공간을 기반으로 관계를 맺으며

함께 일하고, 공부하고 밥도 나누며

진정성있는 동료문화를 공유하는

청년활짝 멤버십

정기적인 네트워킹 모임과 행사지원

지역기반

청년자원 구축

청년다움

프로젝트 지원

청년활동

네트워크 형성

② 무중력지대 대방동 소개

②무중력지대 대방동

소개

98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탐사대가 제작한 콘텐츠

② 노량잔탐사대 소개

노량진탐사대는 노량진 지역을 기반으로 생활하는 청년들에게 유익하고 재밌는

생활정보 콘텐츠와 청년이슈를 발굴해 정보를 제공하는 지역기반 리서치 활동입니다.

청년이슈의 상징처럼 부상하는 노량진에서 다채로운 청년의 삶과 가능성에 주목하고

지역에 새로운 활력을 제공하기 위한 정보 콘텐츠를 만들어가는 팀 프로젝트입니다.

* 노량진탐사대의 기사는 무중력지대 대방동 홈페이지를 통해 더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무중력지대 대방동 홈페이지 > 커뮤니티 콘텐츠> 청년 라이프에서 연재 중)

노량진

생활문화

콘텐츠

고시생의 삶

1인 가구 청년*

청년주거

노량진 핫이슈/

지역소식

②노량진탐사대

소개

Chapter

노량진탐사대 활동 돌아보기3

1110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③ 노량진탐사대 활동 돌아보기

③노량진탐사대

활동 돌아보기

노량진탐사대 어떻게 활동했나?

노량진탐사대 시즌 1: 2015년 6월 ~ 9월(4개월)

노량진을 함께 탐색하고자 하는 청년 10명과 함께 14건의 노량진콘텐츠를 발행했습니다.

콘텐츠 수

14건

콘텐츠 수

28건

노량진탐사대 시즌 2: 2015년 9월~ 12월(4개월)

20's Timeline (트웬티스 타임라인), 고함 20이 함께 28건의 노량진콘텐츠를 발행했습니다.

③ 노량진탐사대 활동 돌아보기

③노량진탐사대

활동 돌아보기

활동사진

5월

노량진탐사대

1기 모집

9월

노량진탐사대

2기 모집

6~9월

탐사진행/

콘텐츠 제작

9~12월

탐사진행/

콘텐츠 제작

1312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③2015년 한해동안

노량진에서 생긴 일.

③2015년 한해동안

노량진에서 생긴 일.

③ 노량진탐사대 활동 돌아보기

노량진에는 1년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1. 추억의 노량진 육교 철거

지난 1980년에 만들어진 노량진 육교. 35년

동안 노량진역 1호선과 9호선을 이어주며

시민들의 발이 되어주었던 노량진 육교가

지난 2015년 10월 17일에 철거되었습니다.

세월의 흔적만큼 시설이 낡아 보수가

어렵고, 전동차의 진동과 흔들거림으로

건너가기 불안하다는 민원이 많아 철거하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횡단보도가 육교를

대신해서 그 자리를 메워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노량진 육교가 사라진다는

소식은 아쉬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노량진 육교를 볼 수 없겠지만, 그곳을

지나오던 많은 사람의 가슴 한쪽에 오랜

추억거리로 기억될 것입니다.

“1999년 봄 노량진역. 우리는 햇살을 받아

마른버짐처럼 하얗게 빛나는 육교 위에

앉아 농담처럼 그랬다. 되고 싶은 것?

대학생. 존경하는 사람? 대학생. 네꿈도,

내꿈도 그러니까 대학생” 작가 김애란의

소설 『자오선을 지나갈 때』에서 담아낸

노량진 육교의 모습이다. 35년간 제 자리를

지켜온 노량진 보도육교. 그 오랜 시간 동안

보도육교는 얼마나 많은 수험생들의 속내를

들어왔을까.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오늘의

위로를 찾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내일의

희망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렇게 노량진

보도육교는 공간이기 이전에 하나의 추억으로,

모두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③ 노량진탐사대 활동 돌아보기

노량진에는 1년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2. 노량진의 명물, 컵밥 거리 이전

노량진역 1번 출구로 나오면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컵밥

상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베트남

쌀국수부터 폭탄밥, 김치볶음밥, 닭강정

등 2,000원~4,000원대의 저렴한 가격의

다양한 컵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주머니가

얇은 고시생들에게는 든든한 한 끼 식사로

손색이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노량진 1역

출구가 아닌, 반대쪽 공간(사육신 방향)으로

이동한 상태입니다. 이동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요. 노량진 컵밥 가게들의

손님이 늘면서 좁은 거리가 더 비좁아져

통행에 불편이 생기기 시작했고, 주변 상점들

간의 갈등도 오랫동안 마찰을 빚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문제해결 책으로 동작구는

2015년 5월 상인들과 협의해 특화거리를

추진했습니다. 또한, 컵밥 상인들은 매달 1인당

5만 원씩 역발전기금을 내놓는 방안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옮겨진 곳은

학원가에서 조금 떨어져 있고, 고시생들의

발길이 많은 곳이 아니어서 이전보다

매출액이 줄어들었다고 하소연하는 상인들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하는데요. 새로운 터전이

자리잡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듯합니다.

노량진의 명물로 자리 잡은 컵밥 거리가

다시 예전처럼 활성화되어, 고시생들과 주변

상인들 모두가 웃을 수 있는 활기찬 거리로

재탄생하길 바라봅니다.

78쪽 ‘노량진 육교를 위한 마지막 송가’ 기사 中 일부

1514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③ 노량진탐사대 활동 돌아보기

매스컴에서 다뤄지는 노량진은 공무원 열풍, 컵밥 등 몇 개의 키워드로 규정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처음 언더랜드에 떨어졌을 때와 같은

생경함이 가득했습니다. 우연히 노량진탐사대 활동을 하게 되면서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는

청년들에 대해 이해하려 했고, 불확실한 시대에 불안한 미래를 담보로 각자 삶의 추를 움직여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아픔을 느꼈습니다. 노량진의 청년을 희미하게나마 이해하게

되었지만 그만큼 아쉬움도 많이 남는 활동이었습니다. 청년들이 더 이상 ‘안정’과 ‘열정’의

삶으로 평가되지 않기를 바라며 미완의 활동을 접어봅니다.

1기 노량진탐사대 서은진

노량진탐사대는 노량진의 이야기를 조사하는 모임과 구성원들을 말합니다.

서울로 올라와 동작구 노량진에 자리 잡고 살기 시작할 때, 동네에서 재밌는 일을 하고 싶어

찾아보던 중 '무중력지대 대방동'과 그곳에서 진행하는 '노량진탐사대'프로젝트를 알게

되었습니다. 마침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이면서, 나와 같은 2030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활동이라니! 굉장히 재밌어 보여 앞뒤 보지 않고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노량진탐사대는

4개의 활동팀으로 나눠서 활동했는데, 그중에서 저는 노량진 1인 가구 청년들의 식문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1인가구팀’에서 글을 썼습니다. 청년들이 이곳 노량진에서 잘 먹고

사는지, 무엇을 먹고사는지 궁금했습니다. 탐사대 활동을 하며 나름 고민도 하고 노량진 마트

이곳저곳을 다니며 조사도 했습니다. 지금껏 쓴 글들을 보며 노량진탐사대로서 노량진 청년과

관련된 문제를 제기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기도 합니다. 다음 노량진탐사대 3기에서는

노량진과 청년에 관한 이야기, 이슈들을 사회에 던져주는 역할을 기대하며 앞으로의

노량진탐사대 활동을 응원합니다.

1기 노량진탐사대 김아리

TALK

노량진탐사대

활동 톡

③ 노량진탐사대 활동 돌아보기

어떤 곳을 찾아가서 살펴보고 조사한다는 탐험의 원래 의미처럼, 알고 있는 것 너머의 노량진을

오감으로 알 수 있었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더 많은 노량진의 매력이 무중력지대를 통해

발굴되었으면 합니다.

트웬티스 타임라인

노량진 주변을 가끔 지날 때면, 뭐랄까 노량진은 조금 다른 공간으로 느껴졌습니다. 서울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물가를 가졌으며, 소소한 놀 거리로 가득 차 있는 곳.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가득하고 시끌벅적한 곳. 그런데도 외부인에겐 상당히 음울한 곳으로 여겨지는 곳.

노량진이라는 공간을 다시 보고 싶었고 새로운 것을 읽어내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뜻대로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노량진이라는 공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다는 것에 만족합니다.

고함20 농구선수

취재나 인터뷰를 위해 마주한 노량진은 평범한 노량진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평소 무심히

지나치는 골목이나 공간, 사람들에게도 각자의 삶이 있었음을 일깨워준 곳입니다. 노량진

탐사대는 기자로서 지나치지 말아야 할 수많은 이야기들이 남아있어 앞으로도 계속 안고 가야

할 것으로 남아있습니다. 취재와 인터뷰에 응해주신 모든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고함20 김연희

TALK

노량진탐사대

활동 톡

1716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몇 년 동안 들락날락했지만, 노량진의 이미지는 항상 비슷했습니다. 고시나 재수, 학원가. 그

이미지를 때론 동정하고, 때론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쉽게 소비해왔습니다. 언젠가

그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폭력적이라고 느꼈습니다. 노량진탐사대는 제게

어떤 의미론 반성의 장이었습니다. 그 반성이 잘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놓쳐버린

모습들도, 또 다시 쉽게 생각해버릴 무언가도 노량진엔 아직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탐사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고함20 인디피그

③ 노량진탐사대 활동 돌아보기

....누군가에게는 노량진이 그런 곳일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거기에 고시생들이 있고, 늘 있던

자리에 아무렇지도 않게 컵밥거리가 있으며, 재미있지만 조금은 낡은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는

수산시장이 변함없이 있을 것처럼 생각된다. 작년 찍은 풍경 사진과 올해 찍은 사진이 같고

내년도 그러할 거라고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곳, 노량진은 그런 장소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내가 살펴본 결과, 앞으로 노량진을 생각할 때는 뻔한 사람들이 뻔한 일들을 하면서

뻔하게 살아간다는 고정관념만으로 접근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노량진은 세상의 흐름과

상황에 결코 모자람 없이 반응하고 변화하는 곳이었다. 첨예한 대립부터 상권의 변화, 새

건물의 건설까지. 크고 작은 변화를 받아들이며 보이지 않게 조금씩 탈바꿈하고 있는 노량진은

오늘도 박제되지 못할, 어떤 색다른 모습을 조금씩 만들어가고 있다.

'노량진은 박제되지 않는다’ 기사 일부(트웬티스 타임라인)

③ 노량진탐사대 활동 돌아보기

TALK

노량진탐사대

활동 톡

TALK

노량진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1918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③ 노량진탐사대 활동 돌아보기

노량진은 고립된 곳이지만 고립된 곳이 아니기도 하다. 노량진에 잠깐 있으면서 수산 시장은

근처도 가보지 못했고, 지하철을 탈 일도 없었다. ....그때 나는 노량진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가지고 사는 갇힌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중에야 수산 시장도 가보고, 그

공간을 휘 돌기도 하며 이곳 또한 결국 사람 사는 곳이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에

관한 이야기 역시 앞서 말한 시각과 크게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은 노량진을

굉장히 특수한 공간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는 노량진을 좀 더 현실적으로, 그리고

분석적으로 뜯어볼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노량진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굉장히 한정적이라고 생각한다. ‘낭만’과 ‘고된

현실’이라는 두 가지 초점이 교묘하게 섞이면서 전개되는 이야기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며,

그나마 수산 시장이라는 특수한 공간이 함께 조명을 받는 정도다. 그래서 앞으로는 노량진

탐사대처럼 조금 더 ‘다른’ 시각의 노량진 바라보기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노량진 탐사대를 진행하는 모든 이에게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노량진 : 낭만과 그렇지 않은 사이의 틈에 관하여’ 기사 일부(고함20)

③ 노량진탐사대 기사

Chapter

노량진탐사대 기사4

제 이름은 고시생이 아닙니다

노량진의 과거 그리고

현재를 여행하다

1편<정조와 화성행궁길>

진짜 노량진은 그곳에 없다

미디어가 바라본 노량진

노량진은 어떻게 고시촌이

되었을까요?

노량진 핫플레이스를 다녀오다

노량진 1인 가구를 위한식문화

노량진에 에너지를

전달하고파

the avec과의 만남

'반수생',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젊은이들

청춘의 추석

노량진에서 1인가구로살아가기

24시간의 고사원 일주

모든

사라져 가는 것들에게 경의를

노량진 육고를 위한

마지막 송가

육교 위에서

노량진에 그대를 위한

공터가 있다

TALK

노량진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2120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그것은 방이라고 하기보다는 관이라고

불러야 할 크기의 공간…그 좁고 외롭고…

정숙해야만 하는 방 안에서 나는 웅크리고

견디고 참고 침묵했고…"

작가 박민규는 <갑을고시원 체류기>에서

비좁은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젊은 청춘을

이렇게 그려냈다. 세상이라는 냉정한 문

앞에서 침묵해야 하는 노량진 안 젊은이들의

모습. 이는 비단 한 작가만의 시각이 아니다.

어둡고 조용하고 외로운 노량진 속 청춘들의

모습은 어느새 많은 사람이 은연중에

떠올리는 노량진의 단편적인 모습이 됐다.

획일화된 모습에서 청춘들은 노량진

속의 다양한 얼굴들은 다채롭던 색을 잃고

단편적인 노량진의 모습에 물들어갔다.

‘노량진에 있었다’는 말은 '고시생이었다는

말'과 동급이 되고, 노량진에 발을 디디는

순간 수많은 청춘 또한 자신의 이름 대신

'고시생'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귀결되고

만다.

제 이름은

고시생이 아닙니다글/사진: <Twenties Timeline> 에디터 강연주, 김세림

하지만 길가의 꽃 하나도 그곳에

자리를 잡게 된 이유가 있는 것처럼, 그들도

모두 다 각자 '노량진'에 뿌리를 내리게 된

이유가 있을것이다. '고시생'이라는 이름

아래 잃어버렸던 청춘들의 이름을, 가려졌던

청춘들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어본다. 이들은

어떤 이유로 이곳에 오게 됐을까. 그리고

이들은 어떤 색을 띠고 있을까.

이 이야기는 오늘도 묵묵히 자신의 꿈을

키워가는, ‘노량진 고시생’이 아닌 ‘ㅇㅇㅇ’의

이야기다.

1. 경찰공무원 준비생 오훈

노량진에 있는 친구들만 경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Q.

먼저 자기소개 부탁해요.

A.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경찰공무원 준비 중인

27살 오훈이라고 합니다

Q.

요즘 어떻게 지내요?

A.

항상 똑같죠. 공부, 잠. 공부, 잠. 딱히 특별하게

지내고 있지는 않아요.

Q.

노량진은 어떻게 오게 됐나요?

A.

대학 졸업을 앞두고 휴학 후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어요. 처음에는 다양한 대외활동을

목표로 여기저기 많은 경험을 하고자

왔습니다. 그러다 잠깐 마케팅 대행사에서

일도 하며 지냈는데, 생각보다 너무

힘들더라고요. 저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정말 잘할 수 있는일이

무엇인가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고, 결론은

경찰이었습니다. 사실 어릴 때부터 꿈이

경찰이었거든요. 그래서 전공도 법을 택했던

거고요. 그렇게 조금은 늦었지만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이곳, 노량진으로 오게

됐습니다.

Q.

매일 같은 사람들과 공부하고,

스터디하고. 한 공간 안에서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과 비슷한 일상을 지낸다는

건 어떤 기분인가요?

A.

남들은 우리보고 갑갑하다느니, 우물 안

개구리 같지 않으냐는 말을 하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많은 자극제가

돼요. 합격을 위해서는 그 많은 사람을 이겨야

하니까요. 그 사람보다 한 시간을 더 공부해야

하고, 그 사람보다 한 시간을 더 일찍 일어나야

이길 수 있다는 압박감도 있고요, 누구보다

좋은, 서로에게 도움되는 자극제죠.

Q.

미디어에서는 노량진을 주로 무거운

경쟁의 공간으로 표현하거나, 고시생과

취준생들을 위한 공간이라는 고정된

틀에서만 바라보는데요. 이에 대한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2322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Q.

어릴 적 자신에게 노량진은 어떤

곳이었나요?

A.

저한테는 초·중학생 때의 임시놀이터였던

거 같아요. 집에서 한 정거장 정도 거리인

노량진에는 저렴한 옷을 파는 곳도, 혹은

놀잇거리도 많았기에 이곳에서 친구들과 자주

걸어와 놀곤 했었죠.

Q.

노량진을 추억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면?

A.

어렸을 적, 유독 군것질을 좋아해서 그런지

혼자 노량진까지 걸어가서 꼭 참새 방앗간

들르듯 먹고 왔던 가게가 있는데 그곳이

바로 ‘오가네 팬케익’이었죠. 물론 지금은

SNS에 노량진 맛집으로 뜨면서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인기가 늘었긴 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초심 잃지 않고 장사하시는 모습에서 왠지

모를 푸근함과 따뜻함이 느껴지곤 합니다.

이곳을 떠올리면 오랜 시간만큼 노량진의

정서나 이미지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가게라 생각해요.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노량진역에서 옛 동창들을 만나면

무의식적으로 그 가게 쪽으로 발걸음이

향하곤 합니다.

Q.

노량진 토박이였던(인근 지역이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노량진만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A.

노량진을 보면 시골의 삼일장, 오일장 같은

푸근함이 느껴져요. 그리고 이것을 파는

푸근한 인상의 상인들과 저렴한 밥 한 끼

먹으며 힘내려는 고시생 및 취준생들과의

대화 모습을 보고 있다 보면 스스럼없는

모습에 정다운 느낌도 들어요. 허물없는 정과

그 속의 따뜻함. 이게 제가 생각하는, 내가

생각하는 노량진만의 매력이에요.

Q.

미디어에서는 노량진을 주로 무거운

경쟁의 공간으로 표현하거나, 청년들이

‘안정적인 삶을 바란다’며 부정적으로

바라보는데요.

A.

수많은 고시생과 취준생들의 생활터인

노량진. 전 청년들이 좀 더 나은 삶, 또는

미래를 위해 이곳을 찾는 거라 생각해요. 더

나은 삶을 위해 자기 나름의 피나는 노력을

결승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도 지금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요. 그러니 우리, 중간에

지쳐서 포기만 하지 맙시다. 모든 노량지너들

파이팅입니다!!

2. 노량진 인근 거주자 영은

노량진은 미래를 준비하는 이들

을 품어주는 따뜻한 곳이에요.

Q.

자기소개 부탁합니다.

A.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여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재학생이자 과거

대방역(노량진역에서 한 정거장) 거주자

조영은이라고 합니다.

본인의 생각은?

A.

노량진이 고시생과 취준생들을 위한

공간으로만 다루는 건 부정할수 없는 부분이

맞습니다. 노량진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시생들이죠. 하지만 저희들만

경쟁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않아요.

요즘 취업난 때문에 젊은 청년들이 많이

힘들어 하고있죠. 제 주변 사람들도 자소서며

면접이며 엄청 빡쎄게 준비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으니까요.

저희도 같아요. 같은 꿈을 위해 경쟁을 하고

있을 뿐이죠. 그래서 사실 이곳 노량진뿐만

아니라 모든 곳이 청년들에겐 전쟁터라

생각해요. 모든 청년이 ‘꿈’을 향해 달리고

있는 지금, 노력하는 청년들의 삶을 더이상

특별한 취준생, 혹은 고시생이라는 편견의

시선으로 바라보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Q.

마지막으로 노량진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한마디

A.

저도 아직 공부를 오래 하진 않았지만,

힘내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네요. 공부도 체력,

정신력 싸움이다 보니 항상 건강하게 몸 관리

하시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아요. 저는 항상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2524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될 법한 정치외교학과로 선택했죠. 처음

노량진에 온 건 2012년 5월쯤이었습니다.

집에서 혼자 인강으로 공부하기엔 제 의지가

좀 부족하더라고요.

Q.

요즘 자신의 머리를 채우고 있는 고민이

있나요? 일상적인 고민도 좋고요.

A.

사실 매일 뭐 먹고 뭐 마실지가 항상

고민입니다. 여러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노량진 학원가 안쪽으로 들어오면 의외로

맛집이 많거든요. 그런데 장소 자체가 별로

예쁘지 않다 보니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

많아요. 그런 곳들을 알게 되면 나중에 진짜

고민될 때가 있습니다. 큰맘 먹고 거기에 가서

호사를 부려 볼까, 그냥 삼각김밥 먹고 말까,

이게 참 고민이에요.

Q.

공부하며 바쁜 와중에도 노량진을

떠올렸을 때 나는 좋은 기억이나 추억이

있다면?

A.

노량진 육교에서 눈 내리는 걸 바라보던

기억이 좋았어요. 육교에는 항상 눈이 예쁘게

쌓이거든요. 공부하다 말고 한 1분 정도

그 풍경을 멍하니 보는 거죠. 그리고 다시

공부하고. 근데 이제는 철거돼서 육교 눈 쌓인

건 못 보겠네요.

Q.

미디어에서는 노량진 청년들의 삶을

‘경쟁’이나 ‘안정적인 삶을 바란다’는

틀에서만 바라보는데요. 이에 대한

본인의 생각은?

A.

사실 저는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이 맞아요.

노량진 학원 오는 사람 중에 안 그런 사람

거의 없을걸요. 근데 안정을 추구하는 게

왜 나쁜지 모르겠어요. 누군가는 공무원을

해야 하고, 누군가는 공무원이 적성에 맞는

거잖아요. 그게 뭐가 문제인가요? 오히려 안정

추구가 나쁘다느니, 공시생들이 다 철밥통만

원한다느니 하면서 멋대로 말하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Q.

당신은 ‘고시생, 공시생’이 아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나요?

A.

효녀요. 제가 나이가 적은 편은 아니잖아요.

하고있는 사람들인데 왜 그걸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지, 사실 이해가 안 갑니다.

그래서 저는 되려 미디어에게 묻고 싶어요.

왜 이곳을 어둡게만 포장하는지. 매일 최선을

다해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도, 이들의

주머니 사정을 가장 잘 헤아려주는 것도, 그런

이들을 품어주는 따뜻함도 노량진의 소중한

모습인데 말이죠.

Q.

마지막으로 노량진의 청춘들에 한마디.

A.

자신의 목표가 확실하다면 포기하지 마시고,

그렇지 않다면 또 다른 길로 도전해나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어떤 결과가 됐든, 그 목표를

이루는 날까지 힘내서 원하는 바를 이루시길

바라요!

3. 행정고시 준비생 소정

누군가는 공무원이 적성에 맞는 거잖아요.

안정을 추구하는 게 나쁜건가요?

Q.

먼저 자기소개 부탁합니다.

A.

노량진 A학원에서 9급 행정고시 공부하고

있는 소정이라고 합니다. 올해 27살입니다.

Q.

이곳 노량진에 오게 된 계기는?

A.

제 성격이 굉장히 안정추구형입니다. 대학

입시할 때쯤부터 공무원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그래서 대학 전공도 도움이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2726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쉽게 할 수 있을 거라고 해서… 사실 같이

일하는 회사에서 알바생이 그만두는 바람에

정원이 비어서 저를 넣었다고 하더군요.

Q.

영상촬영 알바, 생소하네요. 어떤 일을

하는 거죠?

A.

제 일은 제 스케줄과 강의 스케줄을

비교해서 제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을

맞추고, 강의시간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해서

고시학원의 강의를 촬영해 업로드하는

일이었습니다. 매시간 무거운 장비를 들고

5층까지 오르내려야 했던 기억이 나네요. 처음

알바를 시작했을 때는 제가 중도휴학을 한

상태였어요. 학교가 다니기 싫어서 군대 가기

전에 돈이나 벌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죠. 잠깐 할줄 알았는데 복학하고

나서도 계속하게 됐죠. 물론 이 일이라고 안

힘든 건 아니었지만, 홀서빙이나 다른 힘든

알바하는 친구들을 생각하면 저는 편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했던 알바였어요. 하다

보면 그곳에서 공부하는 많은 학생을 볼 것

같은데. 제가 2학년 때 일을 시작했어요. 1년

정도. 사실 대학교 1학년까지만 하더라도

저도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대로 보고, 공무원

준비하고 고시 준비하는 사람들 한심하다고

생각했던 것 사실이었거든요. 근데 일에

적응하고 슬슬 지루해질 때쯤 강의실에

앉아있는 학생들 한 명씩 바라보는 게 나름

시간 보내는 방법이 되었었죠. 그때 다들

뭔가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많은

걸 느꼈어요. 일단 노량진에 있는 친구들은

목적이 확실해요. 실패하면 안 된다. 이런

분위기가 느껴지고. 여기에서 일하면서 진짜

그 열정이 느껴졌죠.

Q.

학원 영상촬영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면

그곳에서 공부하는 많은 학생을 볼 것

같은데.

A.

제가 2학년 때 일을 시작했어요. 1년 정도.

사실 대학교 1학년까지만 하더라도 저도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대로 보고, 공무원

준비하고 고시 준비하는 사람들 한심하다고

생각했던 것 사실이었거든요. 근데 일에

적응하고 슬슬 지루해질 때쯤 강의실에

앉아있는 학생들 한 명씩 바라보는 게 나름

시간 보내는 방법이 되었었죠. 그때 다들

뭔가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많은

걸 느꼈어요. 일단 노량진에 있는 친구들은

목적이 확실해요. 실패하면 안 된다. 이런

분위기가 느껴지고. 여기에서 일하면서 진짜

그 열정이 느껴졌죠.

그동안 부모님 몸 고생 마음고생이 얼마나

크셨을지를 이제 좀 알겠더라고요. 그걸 좀

갚아드리고 싶어요. 저는 지금 공시 공부

중이니까 합격하는 게 효도겠죠? 그래서 더

빨리 합격하고 싶은 것도 있어요. 그렇게

합격을 해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더불어 지금

제가 다니는 학원에 합격 수기를 써서 붙이고

싶어요. “비결은없다, 비결 있다는 수기는 다

거짓말이다”. 진심을 담은 딱 이 3마디만 써서

내걸어보고 싶어요.

Q.

마지막으로 노량진에서 살아가는 모든

노량지너들에게 한 마디.

A.

저 이래 봬도 처음 보는 사람이랑

쓸데없는 얘기하는 것 좋아합니다. 혹시

노량진에서 만나거든 아는 척해 주세요.

3. 학원 영상촬영 알바 영돈

노량진을 떠날 때, 부디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갔으면 해요

Q.

자기소개 부탁합니다.

A.

안녕하세요. 노량진에서 나는 찌든 짠내를

좋아하는 올해로 반 오십 된 상도동 주민

김영돈입니다. 현재 노량진에서 영상촬영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는 4학년 대학생이죠.

Q.

노량진에서 아르바이트 하게된 계기는?

A.

지인의 소개였습니다. 영상을 다룰 줄 아니까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2928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말이죠.

언젠가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노량진을

떠나게 될 거에요. 어떤이유로든. 그러니까

결론은, 떠날때 부디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갔으면 해요.

노량진 보도육교처럼 말이죠.

제 이름은 고시생이 아니에요.

이름 불러주면 감사해요.

시인 김춘수는 말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지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이름이란 그렇다.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들어주는 것. 나의 다채로움을 증명해주는

존재가 바로 이름이다. 그렇기에 고시생이라는

이름 앞에 자신의 이름을 잃은 이곳의

청춘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곳에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의 당위성을 증명하는 숱한 말들이

아니라, 내 이름을 묻고 내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것이다.

오늘, 나는 고시생이라는 단어 뒤에

감춰진 당신의 이름을 묻는다. 그렇게, 당신은

내게 청춘이라는 이름의 한 떨기 꽃이 된다.

Q.

미디어에서는 노량진을 주로 무거운

경쟁의 공간으로 표현하는데, 이에 대한

본인의 생각은?

A.

솔직히 아니라고는 못하죠.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고 모여서 공부하면서 조금 안정감을

느끼는 공간인 건 맞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사람들도 처음부터 공무원이나 고시준비를

하겠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아닐지도 몰라요.

마치 제가 그 사람들을 보는 시선이 바뀌었던

것처럼. 그 사람들도 자기 미래를 생각하다

보니. 아 여기구나. 하고 찾아온 것일 테니까요.

‘경쟁’이요? 세상에 노량진만큼 평화로운

경쟁을 하는 곳이 있나요? 노량진에 성적순

줄 세우기를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 주변을

한번만 둘러봤으면 좋겠어요. 회사, 학교

안에서는 줄 세우기가 없는지. ‘안정적인

삶’이라. 제가 한 명 한 명 찾아가며 혹시

즐거우세요? 아니면 슬프세요? 이렇게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안정적인 삶이 꿈인

사람이 있을까요. 사실 안정적인 삶은 다음

꿈을 위한 기반일뿐일 걸요… 딛고 서 있는

땅이 불안정한 이곳에서 단단한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게 부정적인 시선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Q.

당신은 ‘노량진 알바’가 아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나요?

A.

저 같은 경우에 지방 출신에 서울생활한 지

5년차. 서울은 항상 낯설어요. 제가 ‘노량진

알바’이긴했지만, 노량진에 있을 때는 노량진

사람이 된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곳,

노량진에서 제가 어떻게 기억되고 싶으냐고

물으시면. 저는 이곳에 소속된 한 사람, 혹은

노량진의 ‘주민’으로 기억되고싶어요.

Q.

마지막으로 노량진에서 살아가는 모든

노량지너들에게 한 마디.

A.

노량진 보도육교가 철거되기 전, 많은 사람이

육교에 한 마디씩 남겼죠. 잘 가라, 수고했다

등등. 다들 그 자리에 있었을 때는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지만, 사라질때 그 가치를

재발견한 거죠. 육교를 떠올리면 왠지 우리

옆에 오래 공부하던 장수생 선배를 보는

느낌이 딱 이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는 선배를 보고 쟤는 언제

합격해서 언제 나가나 하지만, 결국 언제가

되었든 노량진을 떠나잖아요. 합격하던

고시를 포기하던, 육교가 사라진 것처럼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3130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결은 모두 미묘하게 다를 것이다. 애초에 25만

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을 몇 가지 특징으로만

관념화시키는 것 자체가 무리지 않은가.

그럼에도 기존의 미디어는 도심 속 공부의 섬

노량진과 그 속의 사람들을 끊임없이 외부의

시각으로 관념화, 객체화, 수단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마디로 시험 준비전념해야 하는

고시생이 공부 말고 다른 게 있겠냐는 식으로

접근했던 것이다. 분명 그들의 생활에도 공부

외에 다른 삶의 요소들이 아주 약간씩이라도

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우선 몇가지 사례를

통해 미디어가 바라보고, 정립하는 노량진의

모습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1) 뉴스: 청년의 삶을

관망하다

미디어가 노량진을 타자화하는 경향은

뉴스, 예능, 다큐 등 어느 카테고리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뉴스

속 정치인들이 선거 유세를 펼치는 도중

노량진을 찾아가 청년들을 위로하려는 듯한

모습은 가장 대표적이다. 최근의 사례로 보면,

대선 때는 새정치민주연합의 문재인 후보가,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 때는 무소속의 박원순

후보가, 당장 지난해 있었던 새누리당 당 대표

경선 때는 김무성 후보가 노량진을 찾았었다.

이들은 모두 마치 코스가 있다는 듯이

길거리에서 컵밥을 먹고, 고시촌과 학원을

찾아가 청년들과 상인들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곤 했었다.

뻔히 보이듯 그들이 노량진을 방문한

목적은 청년들의 표심을 잡기 위해서다.

그러나 노량진을 찾아간 정치인들 은 대체로

청년들이 느끼는 감정에 공감하지 않았고,

그들이 이곳에서 정착해 사는 와중에 들었던

생각을 공유하지 않았다. 대신 그 동안 해보지

않았던 것을 ‘체험’해본다든가, 성공한 사람

입장에서 위로의 말을 건네는 등의 행동을

했었다. 그리고 미디어는 현장에서 딸 수 있는

몇 개의 장면, 장면을 따 전파를 타고 내보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일어나고 있는 와중에

노량진의 사람들은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주체가 아닌 들러리가 되어버린다. 결국,

뉴스를 통해 노량진 외부에 위치한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건 그들이 컵밥을 먹고, 공부한다는

것뿐이게 된다.

ⓒ서울신문

섬, 모두 익히 알고 있듯이 사면이 물로

둘러싸인 작은 육지를 뜻한다. 그래서

섬에서는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시에 배라는

교통수단을 이용해야만 한다. 그만큼 이동

자체가 다른 일반적인지역에 비해 수월하지

못한 편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지형상의 특성 때문에 섬을

신비로운 미지의 공간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심지어 지도를 펼쳐놓고 다른 육지와

비교해서 보면, 이 섬이라는 작은 공간은

외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여기까지는 물리적인 조건에 의해

형성되는 섬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니,

그렇다면 사면이 물로 둘러싸인 육지가 아닌

섬도 존재한다는 말인가? 말장난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우리사회에는 같은

계층을 중심으로, 혹은 똑같이 특수한 상황에

부닥친 상태를 중심으로 육지 안에서도 섬을

형성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노량진은 그런

아이러니한 육지 속 섬 중에서도 꿈꾸는

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치열하게 사는 섬이다.

이곳은 고시, 공시(공무원시험) 등 여러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흥미로운

하이 소사이어티의 결정체인 여의도와 도심

한가운데서 텃밭을 가꾸는 평화로운 노들섬을

바로 곁에 두고 있음에도 오로지 공부에

전념해야 하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삭막함을

머금고 있어 다른 공간과 단절된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즉, 노량진은 ‘합격’이라는

같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기 자신을 일부러

세상으로부터 격리하는 정서적 의미에서의

섬인 셈이다.

Another.

미디어가 만든 노량진

하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노량진에 온 사람

모두가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 가치,

그리고 이전에 살아온 인생의 서사가 같은 건

아니다. 설령 노량진에 도착해 비슷한 삶을

살아간다고 해도 이곳에 오게 된 이유부터

수험 생활 중에 느끼는 생각과 감정까지 그

진짜 노량진은

그곳에 없다

미디어가 바라본 노량진<Twenties Timeline> 에디터 김정원

Island. 노량진, 섬이 된 동네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3332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무한도전 멤버들은 노량진의

사람들을ㅡ타자화하여 형식적인 위로와

응원만을 해주기보다는 마치 자신의

처지처럼 생각하고 진정한 충고를 해준다.

당시 방영분에서 노홍철은 ‘지금도 정말

힘들겠지만, 이건 아무것도 아니며 취업이

되면 더 힘들고, 사회는 더 지독할거’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물론, 곧바로 유재석에게

제지당하고, 촬영은 밝은 톤을 유지하며

마무리되지만, 이는 정치인이 나오는

뉴스에서도, 노량진 속 삶을 비추려 했던

다큐에서도 하지못한 유쾌하면서도 현실적인

부분이었다. 그들 하나하나를 세밀히 보는

디테일은 부족했지만, 적어도 섣부른 관념화와

나와 다른 존재로 인식하는 타자 화는

없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Real.

노량진 속에서 바라본 노량진

이렇듯 우린 직접 찾아가거나 주변에 수험

생활 중인 사람을 두지 않는 이상 위의

사례와 같은 미디어 속 편집된 노량진만을

접하게 된다. 그렇다면 사실 우린 노량진에

관해 접했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아닐까. 당당하게 알고 있다고

얘기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개인, 그리고

공간의 맥락이 편집되고 왜곡된 감이

없지않아 있다. 그래서 2기 노량진 탐사대는

지금까지 미디어가 해왔던 방식보다 더

세밀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노량진을 바라보려

한다. 물론 우리가 보여주는 노량진이

진짜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노량진’과 그 속의 ‘청년’을 규정하지 않고 좀

더 다양하고 솔직하게 보여줄 뿐이다. 무엇이

진짜인지 판단하는 일은 우리가 담아낸

노량진을 지켜볼 당신께 맡긴다. 이제 아무도

보여주지 않았던 노량진, 그 안 에 담긴 진솔한

청춘의 이야기를 마주할 차례다.

ⓒMBC, 무한도전

그간 뉴스가 노량진을 객체화, 수단화했다면

다큐의 경우에는 노량진이라는 특수한 공간과

그 속의 사람들을 복합적으로 보여주지

못했었다. 대표적인 노량진 관련 다큐로는

2011년 방영된 KBS스페셜 <꿈꾸는 자들의 섬,

노량진>, 2012년 방영된 다큐 3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량진 고시촌>이 있다. 이중 비교적

최근에 방영된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량진

고시촌>은 노량진에 살거나 오가며 공부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취재한 다큐다.

프로그램 안에는 이제 막 대구에서 올라와

노량진에 정착한 사람, 다니던 대학교를

포기하고 강의 영상 아르바이트를 하며

재수를 결심한 사람, 경찰공무원에 몇 년

째 도전하는 사람이등장한다. 또, 어떻게

보면 주변인이라할 수 있는 늦은 나이에

공인중개사시험을 준비하는 노년의 수험생들,

그리고 이른 새벽부터 공부하는 청년들을

위해 식사를 제공하는 교회의 권사들도

모습을 비춘다. 어떻게 보면 다양한 사람들을

비추기에 다각적이라고할 수 있지만, 다큐는

취재 대상을 선정한 것과 별개로 노량진

사람들을 ‘벼랑 끝에 서 있어 힘들지만, 그래도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전형적인

상으로 균일화시킨다. 서두에서 말했던 것처럼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더라도 그들 각자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 가치, 노량진에 오기

전까지의 개인의 서사에 대해서는 세밀하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 그저 슬프고 안타까운,

하지만 힘을 내야 하고 응원이 필요한 존재로

정립할 뿐이다. 그리고 그 모든 개인의 서사는

청춘을 향한 응원으로만 귀결된다.

(3) 예능: 꾸미지 않은

노량진을보여주다

나름대로 긍정적인 예시도 있다.

예능에서 노량진을 비췄던 경우로는

대표적으로 MBC의 간판 예능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의 멤버들이 2014년 초,응원단에

도전하면서 현장 실습으로 노량진의 대형

학원을 찾아갔던 것을 들 수 있다. 현장

실습의 차원에서 찾아갔다는 점에서 뉴스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노량진을 수단화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앞서

소개한 뉴스, 다큐에 비해서 그 분량은 짧지만,

오히려 화면에 등장하는 수험생들과 보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노량진의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한다.

(2) 다큐: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품은 청년을 그리다

ⓒKBS2, 다큐멘터리3일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3534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양화진과 함께 가장 주요하여 전하의 옥체를

보존하기 위해 군대를 주둔하는 진을

설치하는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고려 때부터 행인들의 왕래가

잦았고, 그 때문에 선왕이신 태종께서는

특별히 별감을 파견하여 나루 관리에 신경을

쓰셨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별감파견과

함께 짐과 사람을 실어 나르는 진선들이

뱃삯을 받지 않게 하도록 관선 15척도

비치하셨지요. 이는 근본적으로 백성들이

도강을 편히 하기 위함이었는데, 그와 함께

수상한 자를 기찰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습니다. 전하, 이곳 노량진은 과천, 시흥,

수원, 더 나아가 충청, 전라, 인천, 개경까지

통하는 만큼 각 지방의 갖가지 특산물이 한데

모여 상업이 발달한 지역이기도 하옵니다.

이는 노량진이 나룻배가 발착하는 도선장을

중심으로 하여 발달한 취락이라는 뜻의

도진취락(渡津聚落)이라 불리우는 연유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무언가를 사고파는 상인들로

가득하고, 그 덕에 도선 시설은 물론이거니와

주막과 객주 집이 많이 들어서 있사옵니다.

하지만 노량진이 이리 마냥 기쁨만 가득한

곳은 또 아니옵니다. 나루의 북쪽 강변에는

새남터라 하는 넓은 백사장이 있는데,

그곳은 왕조 대대로 죄인들을 벌하는

사형장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또 다른

선왕이신 세조께서는 즉위 2년에 반정을

꾀했던 여섯 명의 신하, 사육신(死六臣)을

이곳에서 처형하기를명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사육신묘 역시 노량진에

있사옵니다.

노량진은 항시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하여

전하께서 행차하시기에는 다소 번잡할 수

있습니다. 하오나, 태종께서는 노량진을

관리하기 이전에 사냥을끝내고 환궁하는

길에 노량진 나루터에서 배를 탄 채로

술과 함께 풍류를 즐기신 적이 있사옵니다.

혹여나 전하께서도 노량진에 행차하실

일이 있으시거든 신이 다른 관리들과 함께

버선발로 나와 맞이하도록 하겠사옵니다.그럼

신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만수무강하옵소서, 전하.

乙未年(1895년) 正月

▲ 서울과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잇던 노량진 나루터

▲ 1920년대 노량진하루 평균 상주인구 1만 명, 유동 인구25만 명.

2015년 현재 노량진의 인구관련 데이터다.

수산시장에 대형 학원과 고시촌까지 즐비한

노량진은 이렇듯 매일 바삐 돌아간다.

개중에는 당연히 고시, 혹은 공시(공무원 시험)

등 여러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지금의 시대에서는 노량진이 ‘공부의

메카’로 인식되는게 일반적이지만, 과거에는

어땠을까?

대한민국에 입시 제도가 틀이

잡히고서야 노량진이 그렇게 변했겠지,

처음부터 노량진이 그런 동네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노량진은 언제부터 한해의

노력을 한순간에 쏟아 붓는 시험이라는

거사(?)를 준비하는 곳이 된 건지, 또

그 이전에는 어떤 동네였는지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해서 이 글은 그 내용을

크게 고시촌이 되기 전과 후로 나누어

설명하였으며, 좀 더 흥미롭게 내용을

풀어내기 위해 픽션적인 요소가 가미된 가상

편지 형식을 차용했다. 물론, 편지 속 노량진에

관한 내용은 대부분 사실에 기반을 두어

작성했다.

노량진은 어떻게

고시촌이 되었을까요? <Twenties Timeline> 에디터 김정원

“과천 현감 이노량,

주상 전하께 아뢰옵니다.”

주상 전하, 신 과천 현감 이노량이라하옵니다.

전하께서 노량진(鷺梁津)이 소상히

궁금하다 하시어 감히 이렇게 서한을

보내옵니다. 내용에 미진한 점이 있더라도

굽어살펴주시옵소서.

전하, 노량진은 백로 로(鷺), 징검돌 량(梁),

나루 진(津)이라 하여 본디 ‘백로가 노닐던

나루터’라는 뜻을 품고 있는 지역이옵니다.

수양버들이 울창한 나루터라 하여

노들나루라고도 하며, 외에도 노도진(露渡津),

노량진도(鷺梁津渡)라고도 불리우고

있사옵니다.

이 나루는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듯

사대문 밖에 위치해 경기 과천과 시흥,수원을

도성과 연결하고, 충청과 전라로까지 나갈

수 있는 길목이옵니다. 한성으로 통하는

한강 나루터 중에서도 상류의 한강진 하류와

▲ 노들나루가 표기되어 있는 조선 시대 지도

ⓒ동작뉴스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3736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인구가 많아졌습니다. 그에 더불어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유흥 거리인 오락실이나 술집,

저렴한 가격의 분식집이나 일반 음식점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어 한 가득입니다. 덕분에

학생들이 아닌 일반 주민들도 소비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습니다.

듣기로는 노량진이 지금은 제가

맡고 있는 관악구 소속이지만, 이제 새로운

구를 신설하여서 분리될 예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때는 제 관할 구역이 아니라

뭐라 이야기하기 어렵겠지만, 각하께서

신설되는 구를 맡는 청장에게 노량진에

관해 이야기해주심이 어떨지요? 노량진은

분명 지금보다 더 커지고, 더 활발해질

것입니다. 각하가 꿈꾸는 도시와 나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노량진이 꼭

필요할지도모릅니다. 그러니 각하의 국정

계획에이곳을 염두에 둔 사항을 넣어두심이

어떨지 싶습니다. 주제 넘는 말을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국정에 참고하실 만한 일이

있으면 또 보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각하,

건강하십시오.

1979년 6월

이 가상 편지를 쓴 사람은 현재

노량진이 속해 있는 구인 동작구가 아닌

관악구청장이다. 실제로 노량진은 980년,

동작구가 관악구에서 분할되기 전까지는

관악구 소속이었다. 또한, 수산시장이

형성되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강북

중심가 일대의 학원들이 그 주변으로

내쫓기던 것도 모두 1970년대에 일어났던

일들이다. 물론, 독재 정권하에 대형 학원들이

강제로 타 지역으로 내쫓긴 것 자체는 부당한

사실이지만, 어쨌든 노량진은 이로써 지금의

학원가와 고시촌을 형성하게 됐다.

그 이후의 노량진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도다. 대치동을

중심으로 한 강남 대형 학원들의 성장에

비교적 약세에 접어든 적도 있었고, 또

2010년대 초반에는 공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지금은 재수생보다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공시생들이 많아졌다는

것 정도가 큰일이라면 큰일이었다. 그렇게

노량진은 과거 전략적 요충지에서 ‘공부의

메카’로 변한채로 지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 1971년 지금 위치에 터를 잡은 노량진 수산시장

참고자료

한국콘텐츠진흥원,

“노량진나루터”, http://goo.gl/q74fJv

“노량진 공시촌 블루스”, 『한겨레21』,

제837호, 2010.11.23 http://goo.gl/thu8v

가상 서한에 나와 있듯이 노량진은 고려

시대 때부터 백성들의 왕래가 잦았고, 강북과

강남의 중간에 위치해 조선시대에도 지리적,

상업적,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한강만 건너면 곧바로 임금의 거처로

이어지는 곳이기도 하니 두말 할 것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많은 이들이

이곳에 함께 머물며 (조선시대의 고시라할 수

있는) 과거를 준비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노량진에 학원이 몰려들고,

고시촌이 형성된건 언제부터였을까? 그

해답은 시간을 많이 건너뛰어 1970년대에서야

찾을수 있었다.

“각하, 관악구청장

강노량 보고 드립니다.”

각하, 관악구청장 강노량입니다. 수년 전,

각하께서 종로구를 비롯한 강북 도심지역이

그곳에 밀집한 대형 학원들 때문에 학생들로

시끌벅적했던 것을 타파하기 위해 그들을

중심부 밖으로 밀어낸 일을 기억하시는지요?

한샘, 정진, 대성 등의 그때 밀려났던 그

학원들이 지금 저희 관악구 노량진에 터를

잡고 지역 상권을 활성화시키고 있다는

보고를 드리려고 합니다.

이들 학원은 아무래도 노량진을

중심부에서 완전히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교통의 요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한반도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의

시발지라는 건 둘째치고, 한강 철교와 인도교,

또 몇 년 전에 개통된 수도권 전철 1호선까지

더해지니 학생들이 오고 가기에는 더없이

좋을 거라 판단한 듯합니다. 노량진에서

상도동을 연결하는 터널도 곧 준공될

예정이라 교통적인 측면에서 지금보다 더

발전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시다시피 사실 노량진은 서울수산,

노량진수산(주), 삼호물산이 1975년

한국냉장(주)에게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는

수산시장이 이미 잘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형 학원을 따라 학생들이 많이 몰려오니

이전에 비하면 지금은 말도 안 되게 유동

▲ 1974년, 지하철 1호선 개통 당시 사진

ⓒ동아일보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3938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시장경제까지 반영한 경제 질서까지 아우르는

근대 부흥을 향할 르네상스를 빛낸 정치력을

보였다.

정조가 수원화성을 건설하고자 한

이유는 많은 문헌들과 연구로 남아있지만

그가 원했던 것은 양반 몇몇의 세력사회가

아닌 백성을 위한 강력한 국가건설이

아니였을까하는 추측을 조심히 해본다.

1800년,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과

함께그의 꿈도 물거품이 되어버렸지만, 양반

세도가의 사회가 되어 정조의 화성건설의

꿈을 저울질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서두른 것처럼 보인다.

노량진에는 강력한 국가건설의 염원을

담은 화성으로 향하는 그의 몇몇 발자취가

남아 있다. 현재의 나는 그가 꿈꾼 강력한

왕권이며 국가와는 동떨어진 한 개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노량진은 오히려 그런 그의 염원이

무색하게 백성의 꿈을 담아 공직에

종사하고픈 청춘들의 삶 하나로 채워지고

있다. 학원이 가득한 노량진이라는 외딴

섬에서 나는 정조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노량(노들나루)에 배다리를

건설해서 도하한 정조

화성으로 가기 위해서 가장 어려운 일은

한강을 건너야 하는 일이였다. 왕이 살고

있는 한양에서 화성으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한강을 건너야하는데 보통은 배를 통해서

한강을 건넜다고 한다. 처음엔 뚝섬에

배다리를 놓고 건넜놓고 건너는 방법을

택했다고 한다. 배다리는 수십 척의 배 위에

널판을 대어서 그 위를 지나가는 방법이다.

배다리설계와 건설에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어 정조가 얼마나 고심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맞아

함께 화성행궁을 한 기록이 [화성능행도]에

남아 있고 그 중 <노량주교도섭도>을 통해

수십의 배 위에 다리를 놓아 행렬한 모습이

남아 있어서 그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그만큼 노량진에 배다리를 놓는 것은 당시의

기술로는 파격적인 일이였다. 여러 사료의

기록에 의하면 노량배다리는 한강철교와

한강대교 사이에 놓아졌을 거라고 하지만

▲ 왼쪽 <노량주교도섭도> 용산쪽에서 본 모습으로

노량행궁, 오른쪽 (현재의 용양봉저정)과

노량진 나루터

“진실이 아닌 게 없는 과거가 지나간 자리”

“근대 문명의 하나인 경인선 철도의 시발점”

현재는 바쁘게 지나간다. 누군가의 삶이 지고

피고 또 새롭게 태어난다. 노량진의 삶은

정체된 듯 보이지만 나는 이 노량진이 역사

속에서 과거, 현재 그리고 나를 잇는 무언가가

있는 곳이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노량진에는 정조가 남긴 몇 안되는 흔적들을

발견하게 되었고 과거와 현재를 잇는 이

장소를 탐험하기로 했다.

과거, 노량진 그리고 현재

노량진은 참 신기한 곳이다. 아침 이른 시간

노량진역으로 향하면 역사로 연결된 허름한

육교를 사람들이 표정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직장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몇몇

있는가 싶고, 편안한 옷차림에 백팩을 둘러맨

젊은 사람들도 보이고 두꺼운 책을 가슴에

안고 바쁘게 발걸음을 재촉하는 이들도보인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노량진’이였다.

노량진의 과거 그리고

현재를 여행하다 1편

<정조와 화성행궁길>기사: 서은진

언제나 ‘노량진역’을 시발점으로 다른 곳으로

향하는 나에게는 그런 그들의 바쁜 발걸음이

의문으로 남았다. 공무원시험의 메카로

알려진 노량진은 저렴한 물가로 유명하고

컵밥거리라고 불리는 노점상이 유명한 곳이다.

그리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보이는 어떤 역사가 있었다. 노량진은 1897년

우리나라 철도의 시발점인 경인선 철도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정조의 효심과 화성행궁,

노량진을 경유한 역사의

흔적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서

재위기간 동안 총 13회 행궁을 하였다고

역사적으로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정조는

조선조 마지막 왕조부흥의 모색했던 초월적

군주로 알려져있다. 그는 왕권을 확립하고

지방사회를 포용한 사회통합을 모색했으며,

18세기 급격도로 발전하는 과학기술과

▲ 1897년도 경인선 개통 당시의 철도 모습 (노량진역)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4140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나타날 것만 같은 울창한 숲이였다고한다.

화성에 있는 사도세자의 현륭원으로 가는

정조의 어가는 한번쯤 쉬어 가야 했으나, 숲이

우거진 이 지점에서 쉬기란 적적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정조는 “이곳에 장승을 세워라.

하나는 장사 모양을 한 남상 장승을 세워

천하대장군이라 이름을 붙이고 또 하나는

여상을 한 지하여장군으로 하여라.” 하고

명하였다. 어명으로 곧 두 개의 높다란 장승이

세워지게 되었고 현재의 ‘장승배기’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다. 정조는 아버지의 묘소

참배 길에 이 장승 앞에서 어가를 멈추고

쉬었다.지금도 장승백이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지키고 있다. 사람들은 이 곳을

무심히 지나치지만 누군가는 멈추고 과일을

바치기도 한다.

▲ 전설처럼 남은 장승백이역의 장승들

여정의 끝, 그리고 나는......

아마 정조는 여기 잠시 쉬어가고 길고

긴 능행길을 채찍했으리라 여기서 다시

번대방길(지금의 대방길)을 통해 까마득한

화성까지의 길, 노량진에서의 여정은 이렇게

끝이 나는 것 같다. 화성능행길에서 노량진은

겨우 10분의 2정도밖에 차지하지 않는 짧은

길에 불과하다. 그러나 정조는 한강너머에서

지친 몸을 늬울 장소로 노량행궁을 만들었고

숲이 험하고 맹수가 있는 장승백이에는

장승을 세우라 했다.

몇백 년의 시간을 지나서 사람들은

정조가 남긴 능행길을 연구하고 남은 흔적을

찾고 있었다. 나는 과거와 완전히 동떨어진

역사속 정조의 흔적에서 그냥 공시족의

메카라고만 알려진 노량진에서 다른 모습을

보았다. 나는 현재에 있지만 정조는 과거에

있다. 몇백년의 시간을 넘어서 같이 장소에

서있다. 오롯이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상관없이 그냥 똑같은 자리에

나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서있었던 곳,

그렇게 과거와 현재는 시간은 제멋대로

흘러가고만 있었다.

정확한 위치에 대한 표식도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노들역에서 노들나루의 비석을

보면서‘그냥 이쪽이였겠구나’하는 추측을

할뿐, 도로와 여러 가지 시설로 가려진 한강을

어렴풋이 바라본다. 지금은 그냥 멀리 한강

너머로 고층아파트와 지나가는 차들이 과거로

회귀하는 길을 막아서고 있다.

노량배다리를 건너

하루 쉬어갔다는

용양봉저정(노량행궁)

노들나루 맞은 편에 행궁 중에 하루

쉬어갔다는 용양봉저정이 쓸쓸하게

집한 칸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누군가

알려주지 않으면 정조와 인연이 있을곳인지

알 수 없는 용양봉저정은 김흥도가 그린

<노량주교도섭도>에 남겨진 노량행궁의

규모와 비교해서 초라하기 그지 않다.

이 곳에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생각하며 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200년이 훌쩍 지난 후, 완전히 그

모습을 탈바꿈한 용양봉저정이지만 그 앞에

서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행궁길의

피로를 푸는 한 남자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용양봉저정에서

만안고개를 통해 장승백이로

용양봉저정에서 사실은 상도터널을 통해서

장승백이로 가는 길이 정조의 능행길이였지만

나는 노량진의 현재를 누구보다 느껴보고

싶은 마음에 노량진역으로 해서 차도가

이어진 큰 길을 통해서 가기로 했다.

노들쪽의 한산하고 조용한 느낌과 비교해서

노량진역으로 오면 올수록 왁자지껄한

사람들과 큰 학원가 건물, 활발한 노점상 등이

눈에 띈다.

수백 배는 빠르게 시간이 흐른다.

과거에서 현재로 이동한 노량진역

근처의 학원가의 모습, 초라했던

노들나루와용양봉저정과 비교해서 사람의

냄새가 난다. 이렇게 사람 많은 노량진을

지나서 다시 조금 한산해지는 장승백이역으로,

정조와 관련된 설화가 남겨진 곳앞에 섰다.

당시 장승배기 일대는 낮에도 맹수가 ▲ 한칸만 쓸쓸히 남은 용양봉저정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4342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이곳은 사육신묘가 있는 곳인데요, 경사

길을 올라가다보면 두 갈래 길 중 오른쪽에

있습니다! 참배시간, 즉 안에 입장할 수 있는

시간은 동절기의 경우 9:00 ~ 17:00, 해가 긴

하절기의 경우 9:00 ~ 17:30 입니다. 안에는

아래처럼 세면에 각각 사육신 선생님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이제 사육신묘에서 나와 왼쪽 길로

올라가보니 또 두 갈래 길이 나왔습니다! 왼쪽

길로 걸어 올라가다 보면 건물이 하나 보이는

데, 사육신 역사관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사육신역사관에서는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하는데요, 영화를 상영하기도 하고,

공부장소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옆의 샛길을 따라가다 보면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 운동

기구들과 배드민턴을 칠 수 있는 장소가

제공되어 있으니 체육활동을 하고 싶다면 이

곳에서 가볍게 운동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육신 공원 안에는 또 다른 자랑거리가

있는데요, 그것이 바로 전망대입니다!

전망대에 도착하면 서울의 모습이 아주

아름답게 펼쳐져 있습니다.오른쪽을 보면

한강이 보이고, 정면에는 63빌딩이 그

위용을 보여줍니다. 저는 낮에 갔지만, 저녁

야경으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 사육신묘가 있는 곳

▲ 사육신역사관 전경

(사진출처 : 아시아경제 신문기사)

노량진에는 대부분 고시생활이나 대입시험을

위해 많은 1인 가구들이 거주한다. 1인

가구들이 자신만의 생활 때문에 매우

바쁘지만 가끔씩 그들만의 생활을 영위하고

싶을 때가 많다. 하지만 노량진 특성상 그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다른 지역에서

노량진으로 온 경우가 많기 때문에 노량진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 어렵다. 특히

1인 가구는 혼자이기 때문에 노량진에 대한

정보를 얻기 어렵고 혼자서 여가 생활을

영위하기도 힘들다. 이러한 노량진에 거주하는

1인 가구들을 위한 정보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조용히 자연과 함께 쉬고

싶을 때: 사육신 역사공원

노량진에 거주하시는 여러분들이 대부분

볼 수 있는 큰 종로학원에서부터 걸어가

노량진 핫플레이스를

다녀오다기사: 김나영

보았는데요. 더운 금요일 오후3시에

걸어가도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습니다.

1호선 노량진역 1번출구로 나와서 직진으로

쭉 약 6~7분 걸어가니 어느새 사육신 공원에

도착했습니다!

약간의 경사길이 있었지만 충분히

걷기에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위로 조금만

올라가다보면 옆에 조그마한 풀 숲 속에

아기자기한 돌계단도 있었는데요. 저는 그런

길을 좋아해서 그길로도 나가봤습니다. 결국

경사길과 만나긴 했지만 돌길이 완전히 숲에

들어온 느낌이라서 좋았습니다! :)

▲ (위)사육신공원 올라가는 길

(아래) 돌계단이 놓여있는 산책로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4544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첫 컨텐츠 제작 그 막중한

임무를 맡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노량진을

열심히 탐사하다가 의문의 명함을 하나 받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적힌 건 공연날짜와 장소, 그리고

뒷면엔 공연순서였습니다. 날짜는 6.16(화)

오후 8:00, 장소는 노량진 요거프레소 라고

되어있었는데요. "요거프레소는 유명한 카페

아닌가?"라는 의문과 함께, 노량진에서도

이런 공연을 하시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는 순간 이였습니다. 저는 들뜬

마음으로 서둘러 인터뷰질문지 작성 후

공연날인 6월 16일에 찾아갔습니다.

노량진에 에너지를

전달하고파.

the avec과의 만남취재/사진: 차붐

▲ 의문의 명함 앞

그 곳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이미

공연 준비가 한창이였는데요. 외부에서

팀원들과 잠시 인사를 나눈 후 바로 내부로

들어갔습니다.

커피숍 내부의 테이블과 의자를 돌려다

함께 볼 수 있도록 꾸며진 공간. 이 공간에

들어서니 공연을 기다리는 노량진 청년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과 공연 팀의 열정에 찬

눈빛이 맞닿으면서 내부를 밝게 밝히고

있었습니다.

그 빛을 보며 가슴속 깊숙이 숨어있던

제 열정도 밝은 빛을 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청년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잠시 멈추고,

간단한 팀 소개 및 공연소개 후 the avec팀의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찬 내부

2. 나 혼자 신나게 놀고 싶을

때: 1인 노래방(코인 노래방)

24시 코인 노래방은 금요일 오후 4시쯤에

방문했는데요, 낮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3명

정도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혼자서 노래방을

가고 싶다면 저렴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는

코인 노래방에 저도 한 번 체험하러 들어가

보았습니다.

코인 노래방 내부는 약 두 명에서

세명까지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방형식입니다.

지하이고 여름이라서 더울 수도있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방 안에는 에어컨도

나오고 선풍기를 틀 수 있어서 시원하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가격은 2곡에

500원으로 매우 저렴하게 즐길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입니다.

3. 오늘만은 고급스럽게 먹고

싶다!: 노량진 수산시장

세번째 <노량진 핫플레이스>는 노량진

수산시장입니다!

노량진수산시장은 노량진사람들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입니다. 아직 학생인지라 회를 사먹을 수는

없지만 가격과 다양한 해산물들을 구경하기

위해서 방문했습니다!

노량진수산시장 입구는 노량진역에

매우 인접해있어서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계단을 내려가다 보면 여러 수산물 상가들이

즐비하고 있습니다. 위층계단에서 보면 굉장히

넓게 분포되어있습니다.

지나가다보면 요즘 새우가 제철인지

새우들이 종류별로 늘어져있습니다. 가격이

궁금해서 4인으로 어느 정도 가격이냐고

여쭤보니 좋은 물고기 3마리와 연어로

4만원이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거절하고

나왔지만 그 긴 길목을 지나가면서 수많은

가게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가게로 오라고

손짓하셨습니다. 나오느라 고생하긴 했지만,

좀 더 여유가 있다면 다시 들려서 회를

먹고싶었습니다!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4746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avec페이지에 공연날짜를 공지

중입니다. 당일에는 공연순서 대기하고

있는 팀원들이 거리에서 명함을

나눠주면서 홍보하고 있어요.

Q.

노량진이라는 공간이 청년들이 많이

있지만 우울할 수 있는 공간인데 어떤

마음가짐으로 공연하시나요?

A.

일단 말마따나 젊은 사람들이

많잖아요. 공부하러 올라온 사람들도

많고..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 모이면

홍대, 대학로처럼 번화하기 마련인데

노량진은 이상하게 침울한 뉘앙스가

풍기는 촉박한 땅인 것 같아요. 그런

공간을 우리가 서로 공감하는 느낌을

보여주면서 에너지를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팀원들 모두 음악을

좋아하고 하려고 노력하는 친구들이기

때문에 노량진 공간에 무대가

주어진다는 것 그것에 감사하는 마음도

갖고있습니다.

Q.

에너지를 전달하고 싶다는 의미를

가슴속에 품고 있네요. 혹시 그런

에너지를 받아 음악을 맘속에만 품고

있던 노량진 청년들이 음악을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이나 팀에 들어오는 법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A.

앞서 말씀 드렸듯이 교회에서 부터

시작된 팀이다 보니 찬양 팀에 먼저

오셔야 해요(웃음).

강남교회 청년1부 2시50분

예배 오시면 됩니다!

Q.

the avec라는 팀이 있지만, 혹시 또

다른 팀이 있나요?

A.

아까 피아노 치던 ‘노래하는 감자’ 그

친구는 유재하경연대회에서 대상 탄

친구거든요. 현재 혼자로도 아티스트

활동 많이 하고 있는데 저희와도 같이

하고 있어요.

Q.

노량진에서의 공연이라는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가져다 줄 수 있을까요?

A.

이 질문에서 많이 생각했었어요.

(소리)

(리더)

(소리)

(리더)

(리더)

▲ The avec 공연모습

좋은 노래들을 1부, 2부로 나누어

불러주시고는 관객들의 박수갈채와 함께 멋진

공연도 끝이 났습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팀원들에게 다가갔는데요, 사전에 흔쾌히

인터뷰 허락을 해주셔서 어렵지 않게 the

avec의 '리더(문지훈)'님과 보컬 '소리'님을

인터뷰 할 수 있었습니다.

▲ 소리님(좌), 리더님(중), 차붐(우) 인터뷰모습

Q.

안녕하세요! 저는 대방동에 있는

무중력지대에서 노량진 탐사대

프로젝트를 맡고 있는 차붐이에요.

the avec란 팀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A.

저희 팀은 노량진 강남교회

찬양팀에서부터 시작된 팀인데요,

avec란 이름이 아름다운 백성이라는

의미가 있고 불어로써 함께하자는

의미도 갖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함께 하자는 의미로 avec라는

팀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노량진

청년들아 함께하자는 의미도 될 수

있겠네요(웃음).

Q.

첫 공연은 언제 하셨나요? 공연날짜는

어떻게 정하세요?

A.

첫 공연은 4월말 이였어요.

언제였더라...?

4월26일이요!

공연날짜는 팀원 개개인 스케줄에

맞춰서 하다 보니 큰 의미는

없었어요(웃음). 페이스북 the

(리더)

(리더)

(소리)

(리더)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4948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얼마나 더 의미 있게 잘 버티고 잘

살아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까요?

예전에 저에게 많은 의미를 주었던

한마디가 있어요. ‘넘어진 곳에서 주울

수 있는 것들을 다 주워라’ 넘어진

곳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일어 섰으면

좋겠어요.

멋진 인터뷰와 함께 the avec과의

시간도 끝이 났는데요. 열정 가득한 목소리로

노량진에 에너지를 전파하고 싶다는 the avec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다음 공연도 꼭 참석하고 싶네요!!

the avec 팀의 다음공연이 궁금하시거나

더많은 정보를 원하신다면 http://facebook.

com/theavec1로 가시면 함께 소통 하실

수있습니다!

▲ the avec 단체사진!!

(리더)

에필로그

노량진에서의 지친 일상에 도피하듯지원했던

노량진 탐사대, 그 첫 컨텐츠로 운명처럼

the avec를 만나게 된 것 같다.

그들이 불러주는 노래는 기교 섞인

가수들의 노래가 아닌 노량진 청년들의

풋풋함과 진심이 담겨있어 더욱 와 닿았다.

이렇게 밝은 빛이 넘치는 청년들이

사는 노량진이 어쩌다 빛을 잃게 되었는지

참 안타까울 따름이다. 공부하는 자식을

둔 수많은 부모들의 간절한 바램과 소망이

오히려 노량진 하늘을 뒤덮어 빛을 잃은 것

일까. 아니면 그 바램이 노량진으로 향하도록

만드는 우리사회가 이미 어두운 것 일까?

많은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노량진 탐사대원으로써 작은

성냥불이되어 이곳을 밝혀나가고 싶다.

노량진엔 정말 청년들이 많아요

공부하러 온 친구들이 많겠지만,

사람이 공부만 하고 살 수는 없잖아요.

그런 청년들이 누릴 문화시설이

너무나도 부족하다고 느껴요.. 노량진

주민으로써도 그렇고요. 그래서 이

곳에서 공연하는 것으로 청년들에게

에너지를 주고 문화컨텐츠를

제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Q.

그럼 노량진 주민으로써 좋은 점이나

바꾸고 싶은 점들이 있나요?

A.

노량진은 정말 값이 싸요.

대중교통이 정말 편리해요

1호선 9호선 다 있고 좋아요.

노량진에서 공부하러 올라오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까 군대에서 봤던

선후임들도 만나게 되더라고요. 어떤

만남의 장이라고 할까?

저도 비슷하게 노량진에 있으면서

인맥의 스펙트럼이 넓어 진다고 해야

할까요? 노량진 동에 살면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정말 많은데

교회에서 만나다 보면 얘기할 기회도

많고 관계도 많아지다 보니 인맥구축에

좋은 것 같아요.

(리더)

(소리)

(리더)

(소리)

Q.

장점들이 많이 있네요. 다른 나쁜

점이나 바꾸고 싶은 점은 없을까요?

A.

청년들이 누릴 공간이 너무 없고 거리에

쓰레기.. 그리고 간판이 잘 정비가

안돼있는 느낌이라 보기에 깔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지나다니는 사람들 자체가

위축되어있고 친구들한테 ‘나 노량진

살아’ 이러면 ‘거기 사람도 살아?’ 이런

반응이에요.

Q.

마지막으로 청년들에게 힘이 될 수있는

한마디씩 해주시겠어요?

A.

음.. 제 생각엔 요즘 청년들이 많이들

고통 받고 있잖아요. 취업도 그렇고..

경제도 그렇고.. 어떻게 보면 너무 뻔한

얘기일 수 있지만, 그 고통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특권이 아닐까 생각해봐요.

사람은 고통 없이 너무 행복하기만 한

공간에 있으면 오히려 우울증에 빠질

수 있다고 해요. 어느 정도 고통은

인간에게 필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가 그 고통을 겪는 시간을

(리더)

(소리)

(소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5150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힘들게 학교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다니던 학교를 포기하고, 자신의 꿈

혹은 이상을 위해 돈이나 시간 등을 투자하여

보다 발전된 삶을 살아가려는 젊은이들이라는

것이죠.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반수생을 '사회적

낭비를 조장하는 이들' 이라는 부정적

시선으로바라보기도 합니다. 바로 ‘사회적

비용’ 때문인데요, 반수를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어갈까요?

이처럼 대학교 등록금과 더불어,

반수생들이 다닐 재수학원의 학원비는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 반수생 중에는 대학 입학 전부터

다시 수능을 볼 것임을 결심하고도, 현실적인

상황과 심적인 부담의 경감을 위해 소위

‘안전빵’으로 맘에 들지않는 대학을 등록만 해

놓는 학생들도 대다수 라고 합니다.

이런 반수생들은 첫번째로는 비싼

대학등록금을 내고 한학기만 흐지부지

다니다가 다시 재수학원 비용을 지불하는

식의 비용적인 낭비를 유발합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반수생들이 임시방편으로 등록해

놓은 학교가 다른 학생들에게는 큰 교육의

기회였을 수 있었다는 면에서는 사회적인

인재 발굴의 효율성을 저하시킨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이렇게 반수생에 대한 여러 가지

사회적 시선들이 존재하는 중에, 저는 문득

노량진에서의 ‘실제 반수생’은 이러한 사회적

시선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또한 그들의 반수생으로서의 삶은 어떤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실제

노량진에서 반수 중인 A양을 찾아가 직접

인터뷰를 해 보았습니다.

▲ 2014 대학교 연평균 등록금 순위

(1-10) (출처: 대학알리미/ http://freest80.

blog.me/220395162745)

▲ 2015 재수(반수)정규반 학원비

대부분 대학의 여름방학이 시작된 7월,

sns에는 수 많은 피서지에서 각기 다른

포즈를 취하고 있는 대학생들의 즐거운

사진이 올라오곤 합니다. 그러나 한편, 1학기

내내 즐겁게 활동했던 sns를 비활성화하고

노량진에 발을 내딛은 대학생들이 있습니다.

바로 ‘반수생’들인데요.

이들은 일정한 기간 대학 생활을 하다,

다시 수능을 보기 위해 노량진 학원가로

몰려든 청년들이라고 합니다. 저는 ‘재학생’과

‘n수생’사이의 애매한 위치에 있는 그들은

누구인지와, 그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들, 또

개인적으로 그들이 이렇게 늦은 시기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된 사연과, 지금 노량진에서

그들의 삶은 어떠한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반수생',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젊은이들.기사: 엄지민

▲ 노량진의 반수반 모집 학원 배너들

반수란 일정한 기간 대학을 다니다가

다른 대학을 가기 위해 현재의 대학생활을

지양하고 다시 수능을 공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재수나 삼수와 같은 n수는 대학을

다니지 않고 전년도에 이어 계속 수능을

준비하지만, 반수는 대학생활을 일정기간 하고

다시 수험생활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n수와

구분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반수생이 수능장에서

과연 얼마나 많은 비율을 차지할까요?

위의 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체

수능응시생 중 20퍼센트 이상이 졸업생이고,

졸업생 중 절반 정도의 비율을 반수생이

차지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전체 수험생 중 적지 않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반수생들에 대해서,

사회적으로는 두 가지 평가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꿈을

좆아 다시 도전하는 청년들’이라는 긍정적인

평가입니다.

▲ 평가원, 헤럴드 경제 기사 참고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5352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가끔 쉬고 싶을 때 빼고는 그 점에서는 별로

힘들진 않아요.

Q.

재학생이나, n수생은 이르면 12월부터

시작하기도 하는데, 반수생은 훨씬 늦은

7월에 시작하잖아요. 혹시 시기적으로

다른 수험생보다 늦게 시작했는데,

시간적인 압박감은 없나요?

A.

엄청나죠. 일단 놀다가 공부를 시작하니

공부 내용을 완전히 까먹어버렸어요..(웃음)

다시 개념익히고 감까지 익혀야 하는데

7월에 시작하는건 엄청 촉박해요. 그리고

학원 선생님들도 그러고 수능 관련해서

인터넷 사이트를 들어가도 반수생 시간 엄청

부족하다고 그러니까 뭔가 더 불안해요.

빨리개념 익히고 약점 위주로 해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공부해야죠, 뭐.

Q.

여러 고민을 하시는 것 보니, 반수전과

지금 반수하고 있는 중의 마음이나

생각이 변하셨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A.

반수 전에는 반수하기로 마음 굳혀서 그런지,

학교 기말고사도 싫고 빨리 반수해서 더

좋은 대학 가야지 이런 생각이 많았어요.

기말고사 끝나고 반수 시작하기 직전에는

또 괜히 불안하고 걱정되고 그랬고요. 근데

또 막상 시작하니까 그냥 적응하고 생활도

단조로워지고 맘도 편안해지고 그래요. 근데

이러다가도 수능이 무섭고 불안하고 이러면

학교로 돌아갈까 생각도 들고, 너무 내 인생의

일부를 낭비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무휴학 반수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하고. 그냥

여러모로 복잡한 생각이 들어요.

Q.

혹시 다니던 대학에서의 생활이나

교우관계에 대한 미련 때문에 힘든 점은

없었어요?

A.

일단 교우관계는 별로 크게 넓거나 깊지

않아서 전혀 신경쓰이는 건 없었어요. 근데

가끔 학교가 그립긴 해요. 그것도 수험생활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때만 가끔 그러는

거라서.. 큰 미련은 없어요.

Q.

덤덤하시네요. 아, 작년에도, 올해에

도 노량진에서 공부하시는데, 노량진에

서 공부하면서 좋은 점 혹은 나쁜 점

Q.

반수를 하게 된 계기는 뭔가요?

A.

대학 생활이 제가 상상한 대학 생활이랑

너무 달랐어요. 우선 여대 특유의 분위기도

저랑 조금 맞지 않았어요. 그것 때문에 학교에

적응하기 힘든 상태에서, 과 자체도 적성에

너무 안맞더라고요. 제 대학이나 과가 제가

원했던 곳이 아니라, 작년 수능 성적 맞춰서 갈

수 있는 최선의 대학에 넣은거였어요. 처음에

학교에 붙었을 때는 그냥 마냥 기뻤죠. 근데

시간이 지나고 수업을 들으면서, 수업이 저랑

너무 맞지 않으니까 그때부터 고민되더라고요.

과연 내가 이 과에서 4년을 버틸 수 있을까. 또

이런 적성적인 문제와 더불어 성적에 미련도

사실 있었죠. 재수까지 열심히 했는데, 공부한

만큼 성적이 덜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엄청 복합적인 이유죠(웃음) ‘삼’반수라는

재수때와 다른 부담감도 있었고, 놀다가 다 시

수험생을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긴

했는데,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기로 했죠, 뭐. 이렇게 선택하고 만약

실패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냥 미련

없애는 경험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근데

그 전까지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반수를 결심하기로 하니 대학 이름 자체에도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Q.

대학 다니다가 수험생활로 돌아가니

어때요?

A.

일단 처음에 적응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첫

번째로 몸이 너무 힘들어요. 아예 생활 리듬이

통째로 바뀌니까요. 대학 다닐 때는 2시

취침에 10시 기상하다가 학원 들어오고는

12시 취침에 6시기상.. 진짜 처음에는

아침마다 죽는 줄 알았어요. 아침마다 졸고, 또

소화도 잘 안되고.. 어쨌든 몸이 적응하는게

가장 힘들었죠. 근데 지금3주 지나고 나니까

또 적응이 되가는거 같아요. 음 그리고 막

주위에서 놀다가 공부하니까 놀고 싶지

않냐고 묻기도 하는데, 저는 오히려 재수 때

보다 놀고 싶다는 생각은 덜 들더라고요.

대학을 가보기 전까지는 ‘대학 가면 어떻게

놀까..? ‘대학에선 진짜 재미있게 놀겠지?’

이런 호기심 비스무리한 생각들에 더

대학가고 싶고, 대학 간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는데, 막상 대학 다녀보니 별거 없더라고요.

놀거 다 놀고 별거 없다는거 알고 공부하니까

그다지 대학생 친구들도 부럽지도 않고, 그냥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5554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혼자 공부하면 계속 아는 것만 반복하게

되거든요. 괜히 돈 아낀다고 흐지부지 시간

낭비하는 것 보다는 어짜피 할거 제대로

조금 비용 들여서 하는게 결과적으로는 대학

가는데 효율적이라고 생각해요.

Q.

그렇다면, 만약에, 아주 만약에, 반수에

실패하는 경우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

있나요?

A.

당연히 있죠. 늘 생각해요. 불안하죠. 그래도

지금은 그냥 실패해도 가치있는 경험이라고

생각하려고요. 최소한 ‘더 해볼걸’하는

미련이나 학교 간판에 대한 미련은 없앨 수

있는거니까요. 다시 돌아가면 ‘그래도 해볼건

다 해봤으니까’ 하고 그냥 다니던 학교에

만족하려고요.

Q.

반수는 ‘꿈을 위한 도전’이다. vs

‘사회적 낭비’다.

A.

낭비죠. 사실 웬만하면 그냥 학교

들어가서 적성이 완전히 다르지 않는

이상 욕심 없이 적당히 잘 지내고, 만

족하면 그게 자신 스스로에게도, 사회

적으로도 최고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욕심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시

많은 비용을 들여 공부를 하는거잖아

요. 심지어 잘된다는 보장도 없어요.

물론 꿈이나 도전도 좋지만, 자기가 조

금만 욕심을 줄이고 스스로 만족을 하

는게 제일 나은거 같아요. 그니까, 반수가

최선은 아니라는 거죠.

Q.

그러니까 반수가 개인의 욕심의 문

제라는 건가요?

A.

개인의 만족의 문제죠. 근데 그게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문제기도 하죠.

우리나라에서는 학벌 무시할 수 없잖아요.

아니 사실, 매우 중요하잖아요. 이런 사회적

현실에서 사람이면 당연히 학벌에 대한

욕심이 생기는 거니까요. 그런데, 제 말은 그

문제가 온전히 사회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거에요. 왜냐면 사람마다 기준이 너무 달라요.

만족하는 정도, 그니까 욕심이 다 다른거죠.

사람마다 같은 학교를 다니고도 만족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고, 지금 여기서 반수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거잖아요. 예를 들어 저희

학원 반에도 서강대 다니다가 반수하는

친구가 있어요. 저였으면 서강대에서 반수

안해요. 근데 그 친구는 거기서 만족 못하고

이 있나요?

A.

일단 나랑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많으니까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좋아요.

그리고 63빌딩과 한강경치가 잘 보인다는

점도 큰 좋은 점이에요. 힘들 때 마다 옥상에서

좋은 경치 보며 혼자 사색하는 시간이 정말

많이 위로가 되거든요. 안 좋은 점은 비올 때면

수산시장 비린내가 너무 심하다는 점. 그리고

주말 식사 시간에는 외출해서 밥을 먹을 수

있는데, 거리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복잡한

점인 것같아요.

Q.

오.. 여러 이유들이 있네요. 이제 학원

관련된 질문들을 할텐데요, 우선 왜

굳이 재수종합반을 선택했나요?

단과라든지 독학의 방법도 있고, 또

요즘에는 인터넷강의도 많이 활용할 수

있을텐데요.

▲ A양의 평일 반수 일과와 수칙

A.

의지력이 엄청나게 뛰어나지 않는 이상

혼자 하면 망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실제로도 혼자하는 친구들을 보면 저 말이

사실이고요. 학원 다니다가 중간에 혼자

한다고 나간 친구들 조차 혼자 하면 엄청

풀어지더라고요.. 저는 의지가 그렇게

뛰어나지도 않고, 혼자 할 자신도 없어서 그냥

학원에 들어갔어요.

Q.

그렇긴 하지만, 300만원 상당의 학교

등록금이나, 매달 100만원 이상의

학원비에 대한 부담은 없었나요?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수종합학원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A.

사실 학교 등록금은 아빠 회사에서

나와서..(웃음) 별로 부담 없었어요. 그래도

학원비에 대해서는 많이 갈등했어요. 작년에

재수하면서 너무 많은 돈을 써서 부담이

되었거든요. 근데 그런 비싼 학원비를

내더라도 학원에 다니는게 훨씬 효율적이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남은 시간이 없는

반수생에게는 효율적인 공부가 필요하거든요..

학원에 있으면 의지 측면에서도 많이

도움되고, 또 강의도 모르는 부분을 채우는

식으로 해서 더 효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어요.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5756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나는 노량진 2동에 자리 잡아가고 있는 20대

청년이다. 꿈과 직장을 찾아 작년 여름 서울로

올라왔고 우연히 노량진에서 서울드림을

시작하였다. 어느 덧 노량진에서 산지 1년.

혼자 살아가면서 좋은 점도 있지만, 아쉬운

점도 하나 둘 씩 생겨난다. 가장 아쉬운 점은

‘먹고’ 사는 문제에서 온다. 같은 고민과

아쉬움을 가진 1인 청년 가구들과 '먹는 것'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논하고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찾아가고싶다.

우선 첫 시작은 노량진 일대의 청년들의

‘식생활’을 소개하고자한다. 노량진 하면

제일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컵밥이다. 빠르게 조리되어 먹을 수 있는

간편함, 3천원이면 한 끼 해결할 수 있는

저렴함 등 많은 청춘들이 한 끼 식사로 컵밥을

선호하고있다. 하지만 노량진 청년들이 컵밥만

주구장창 먹으며 공부하진 않는다. 그럼

노량진 청춘들이 무엇을 먹고 살아가는지

그들의 식문화를 알아 보자! Let's Go!

노량진은 행정구역이 1동과 2동으로

나누어진다. 노들역~노량진1/9호선 및

장승배기 부근까지가 포함된다. 노량진 1동은

대체적으로 지하철역과 가깝고 대부분의

학원들이 밀집해 있다. 학원을 따라 컵밥

노점과 음식점들도 즐비하다. 이 많은 메뉴들

중 어느 것을 먹을지 고민하고 선택하느냐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달렸다. 노량진에

살고 있는 나의 ‘밥’ 기준은 간단하다. 안/밖

첫째로 가게 안에서 먹는 음식이냐, 가게

밖(즉, 길거리)에서 먹느냐 하는 것이고 두

번째의 의미는 집 안에서 먹느냐(손수 해

먹느냐), 집 밖에서 먹느냐(외식)의 기준이다.

첫 번째, OUT

가게에서 먹는 것

노량진 1호선 앞 맥도날드를 뒤편으로 꽤

큰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맥도날드, 버거킹

등 패스트푸드점을 비롯하여 프랜차이즈

식당(백종원씨 체인점, 유가네 닭갈비, 놀부

부대찌개 등)과 백반 위주의 고시식당, 고깃집

등 다양한 가게들이 자리해있다. 다양한 가게

수만큼 메뉴 선택권도 넓다. 가게형 컵밥

노량진 1인 가구를

위한 식문화기사 :김아리

반수하는거죠. 결론적으로, 반수가 온전한

사회적 문제는 아니라는 거에요. 개인의

욕심문제도 크죠.

Q.

반수에 대한 생각이 확고하시네요.

그렇다면 반수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어떻게 하실지 궁금한데요.

A.

욕심, 미련, 불안 그러나 희망. 지금은 그렇게

좋게만 보이지는 않네요(웃음)

Q.

그렇다면, 혹시 반수를 고민하는

친구들에게 한마디만 해주실 수

있을까요?

A.

이러다 망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조금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막상 시작하면 그냥

할 수 있는 거 같아요! 안 해보고 후회하느니

하는 게 나을 것 같고, 또 모든 경험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다들 망설이지 말고 같이

해봐요!

반수생에 대해 세간에서 이런저런 말이

많지만, 그러한 말들은 반수를 하려는 학생,

그리고 반수를 하고 있는 학생의 실제와는

동떨어진 이야기 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반수생, 그들은 그저 우리 모두와

다르지 않게 그저 자신의 삶을 찾아가고

있는 청년이며, 스스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젊은이들 중 하나일 뿐

인 것이죠.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찾는 과정을 놓고 사회적 잣대를 들이대며

평가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것 아닐까요?

혹시, 앞으로 반수생을 마주친다면,

‘꿈’이라는 거창한 단어로 올려다 보거나

‘사회적 낭비’라는 부정적인 단어로 내려다

보지 말고, 그저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환하게

활짝 한번 웃어주고, 등 한번 토닥여 주는 것이

어떨까요?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5958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뭐니뭐니해도 밥은 집밥이지!’ 라며 집에서

먹고자 노력하는데 모든 반찬과 국 종류를

직접 해먹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도

집밥을 먹기위해 나는 노량진의 1인가구를

위한 인프라를 잘 활용하고있다.

집 근처 마트의 위치를 파악한다.

마트에서 파는 김치와 간편식(국 또는

즉석요리)을 구매해서 집에서 밥을 먹을

경우 밑반찬과 메인요리로 먹는다. 김치와

국 종류들이 다양하게 판매되고 있고 가격도

행사를 잘 이용하면 저렴하게 구매 가능하다.

또 보관이 편리하고 두고두고 먹을 수 있어서

편하면서 요긴하게 끼니에 활용된다. 김치는

종류와 양에 따라 다르지만, 2~3끼 먹을

분량의 소포장 김치가 1,000원 대이다. 즉석

국 종류 역시 행사할 경우 1,000원 ~ 2,000원

대 로 구매 가능하다.

마트 외에도 편의점 역시 1인가구를 위한

즉석식품류와 도시락들이 다양한 종류로 잘

나와 있다. 편의점 도시락의 경우 개인적으로

‘쌀’에서 화학적인 맛이 느껴져 선호하진

않지만 가끔 끼니를 간편하고 든든하게

해결하기엔 좋다. 청년 1인 가구 식생활에

‘편리함’을 떼 놓고 이야기 할 수 없나보다. :)

즉석 식품 1,000~2,000원 대, 편의점 도시락

3,000~4,500원 대 이다.

편리한 것도 좋지만 맛이나 건강함도

무시할 수 없기에, 집에서 밥을 경우 최대한

건강한 음식을 먹고자 한다. 계란 후라이나

간단한 야채볶음은 야채를 구매해서 사먹고

반찬 종류는 반찬가게에서 구매해 먹는다.

노량진에서는 7호선 장승배기역 밑(동작구청

방향으로 내려오는 길) 진로마트에

반찬가게가 있다. 또 삼익아파트 옆 수협바다

마트 내에도 반찬가게가 두 곳 있다. 마트

내/마트 구역 밖 상가에 있다. 가격은 3팩에

5,000원이고 김치 종류는 무게에 따라

판매하고 있다. 웬만한 반찬 종류는 팔고

있어서 입맛에 따라 구매하여 집에 밥과

먹으면 말 그대로 집밥이 된다.

내가 지난 1년간 노량진에서 살고 먹으며

느꼈던 '맛'의 점수표이다 :) 개인마다 맛을

소화하는 차이는 있겠지만, 노량진에서 어떻게

먹고 살아갈지 고민하는 청춘이라면 가볍게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메뉴부터, 백반, 김치찌개, 돈가스, 쌀국수,

중화음식, 분식 등 일주일 내내 다른 메뉴를

골라 먹을 수 있다.

가게에서 먹다보니 다른 것들에 비해(노점

혹은 편의점 등 간편식) 가격은 비싼 편이다.

가게에서 먹기 위해서는 백반 등 한식과

분식위주의 메뉴는 3,000원 ~ 5,000원 대,

중식, 돈가스 등 메뉴는 5,000원 ~ 6,000원

대, 고기 뷔페 등 고기 메뉴를 먹을 경우

6,000원 ~ 12,000원 대로 가격이 형성 되어

있다. 나는 앉아서 먹고 싶거나, 편안하고 여유

있게 식사하고 싶을 때, 또 맛있는 한 끼를

먹고 싶을 때 주로 식당에서 먹는다. 보통 오후

12시~1시, 오후 6시 전후가 식사시간이기 때문

에 많이 붐빈다.

두 번 째, OUT

노점에서 먹는 것

현재 노량진 1호선 맞은편 인도를 따라 길게

노점들이 영업하고 있다. 메뉴도 컵밥부터

닭꼬지, 떡볶이와 튀김, 토스트, 햄버거,

팬케이크 등 다양하다. 밥 종류로 한 끼

든든하게 먹을 수도 있고 야식처럼 간식으로

먹을 수 있는 메뉴들도 많다. 노점이기에

주문하여 서서 먹어야 하지만, 가격대가

저렴하고 주문 즉시 제품이 나오기 때문에

빨리 먹어야하는 수험생들이게 특히 인기가

좋다.

나도 분식종류를 좋아해서 떡볶이

메뉴들을 노점에서 자주 사 먹는다. 가끔

저렴하게 한 끼 하고 싶을 땐 컵밥을 이용한다.

다양한 소스와 건더기가 있기 때문에 조금

짜거나 자극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가격은

저렴하다. 컵밥 종류는 3,000원 ~ 4,000원

대, 분식류는 떡볶이 + 튀김 콤보 가격이

2,000원 ~ 2,500원 정도 한다.

세 번째, IN

집에서 먹는 것

집에서 밥은 해 먹어요? 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나는 보통 집에서 끼니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워낙 번거롭고(장보기-손질-

요리-정리의 4단계 과정) 1인가구이기에

식재료 구매 시, 가짓수나 많은 양 때문에

선택권이 본의 아니게 박탈당하기도 한다.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6160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에서

체험기 형식으로 작성된 ‘대한민국 최저로

살아가기’에는 최저 생계비로 사는 1인가구의

어려움이 잘 드러나 있다. 2010년 당시

1인 가구의 주거비는 8만원 남짓, 교육비,

의료비는 2만원을 간신히 넘었다. 릴레이

체험을 통해 최저 생계 식비 6300원으로 하루

식사를 했던 차명진 前의원이 이를 ‘황제의

식사’로 칭하며 논란이 되기도 했었다.

최저임금과 1인 가구

최저 생계비와 더불어 최저임금에

관한 이야기를 짚어보자. 지난 7월 8일

최저임금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최저임금

인상안이 의결됐다. 인상률은 8.1%로

6030원의 시급이 확정되었다. 임금 인상에

관한 논란은 뒤로해두고, 과연 이러한

최저임금 인상이 1인 가구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일까.

취업이 어려워지며 최근에는 20대

후반 심지어는 30대에도 취업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따라서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청년들이

많아졌다. 이들은 안정적인 소득원이 없기에

대부분 1인 가구로서 생활하고 있다. 즉, 1인

가구에 있어 아르바이트, 최저 시급은 그

관계가 더욱 밀접해지고 있다고 할 수있다.

그런데 2013년 전체 단신

근로자(1인가구)의 월평균 생계비는

150만 6179원으로 드러났다. 이는 최저

임금을 월급으로 환산한 126만 270원보다

24만5900원 정도를 초과한다. 즉, 단순한

지표상의 비교에서도 아르바이트를 하는 1인

가구는 매월 빚을 지게 되는 것이다.

차명진 前의원의 ‘황제의 식사’ 관련

기사와 체험수기 참고.(한계레신문)

http://www.hani.co.kr/arti/society/so

ciety_general/432231.html

1인 가구로 살아간다는 것은 겉으로 봤을

땐 꽤나 매력적이다. 바로 구속받지 않을

수 있다는 자유로움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외로움, 불안함과 같은

정신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자유롭다는

건 동시에 신경 써야 할 일이 늘어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어려움은

월세, 생활비, 식비, 각종 요금 등과 같은

경제적 어려움이다.

과연 노량진에서 1인 가구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노량진에서

1인 가구로 살아가기기사 :황민혁

▲ 1인 가구의 삶을 소재로 하는 MBC '나혼자 산다'

최저 생계비와 1인 가구

먼저 1인 가구의 최저 생계비부터 살펴보자.

보건복지부에서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1인가구의 월 최저 생계비는 617,281원이다.

최저 생계비란 법적으로 ‘국민이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소요되는

최소한의 비용(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2조의6)을 의미한다. 생각보다 적은 금액에

과연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이

든다. 노량진은 물가가 싸기로 유명하지만

60만 원 정도의 돈은 생활하기에 터무니없이

부족해 보인다.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6362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취업준비생 등인 경우가 많다. 재수 종합반의

경우 평균 한 달 약 80~90만 원 (급식비,

모의고사비, 교재비 등 제외) 단과는 한 달에

6~10만 원, 한 시간 기준 평균 1~2만 원정도의

비용을 보였다. (논술, 특강 제외) 공무원

학원의 경우 종합반 40만원, 인터넷 강의는

프리패스 형태로 평균 월 10만원, 단과는 월

20만원 (교재비 별도) 정도의 비용을 보였다.

그러나 탐사를 통해 얻은 정보는 한계가

있다. 때문에 실제로 생활을 해본, 그리고

노량진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을 통해 좀

더 사실적인 정보를 얻어 볼 수 있었다.

Q.

하루 평균 지출 비용은 얼마나 됐

죠?

A.

식비가 제일 많이 들었어요. 노량진은

한식뷔페 같이 식권으로 운영되는 유명한

곳이 몇 군데 있어요. 식권 10매에 3만원

안으로 구입할 수 있죠. 하루 2끼 정도 먹고

한 끼는 라면이나 간식으로 간단하게 때웠죠.

식비랑 이거저것해서 하루에 7000원정도

들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돈 아끼려고 많이

안 쓴 경향이 있어요.

Q.

그 외에 지출되는 비용은요?

A.

매달 독서실비가 23만원에 두 달에 한번 꼴로

모의고사비 2만 원 정도, 방값은 50만 원정도

줬어요.

Q.

학원은 따로 안 다녔나요?

A.

학원을 알아보긴 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비싸더라고요. 기숙학원은 한 달에 제일 싼

곳이 130만원 정도였고 유명으로 등하교 하는

곳은 한 달에 90만원 정도 했었죠. 그래서

저는 인터넷 강의로 공부했어요. 3개월에

7만원 정도로 3개 정도 들었었죠.

▲ 지난 2014년 노량진에서

반수를 준비했던 이OO(20)양

노량진 1인 가구의 지출

노량진에도 이처럼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며 취업을 준비하는 혹은 학업을

이어가는 1인 가구들이 있다. 과연 노량진에서

1인 가구로 생활하게될 경우 지출되는 비용은

어느 정도일까?

먼저 식비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노량진은 본디 저렴한 가격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노량진의 유명 먹거리인 노점상들에서

파는 컵밥의 가격은 3000~4000원 선으로

저렴하게 한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간식도 비교적 싼 가격에 구입 가능했다.

맛에 있어서는 주관적일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것으로 보아 대부분을

만족시키고 있는 듯 했다.

▲ 노량진에서 판매중인 컵밥

▲ 1000~2000원 의 가격이 매겨져 있는 간식들

이외에도 노량진 근처 음식점을

탐사해본 결과 한 끼 2000~5000원, 하루

평균 약 만 원정도로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격 경쟁을 위해 제품의 질이

낮아진다는 점, 조미료 맛이 많이 난다는 점,

길거리 음식의 경우 특성상 위생적인 측면이

걱정된다는 점 등이 문제로 꼽혔다.

그렇다면 주거비는 지출은 어느

정도일까?

방세 평균 가격 조사 결과 노량진 평균

원룸 가격은 500 / 50 즉,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50만 원 정도였다. 4~5평 정도에 싱크대,

에어컨, 냉장고, 세탁기, 인덕션, 책장, 책상,

옷장 등이 제공된다. (관리비 별도) 고시원,

고시텔의 경우 평균 30만 원의 가격을 보였다.

노량진은 학원가가 밀집한 곳이다.

노량진에서 생활하는 1인 가구의 다수도

학원을 다니며 공부를 하기 위한 학생 혹은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6564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Q.

식비가 생각보다 적은데 주로 먹는

것은 무엇인가요?

A.

주변 음식점에서 주로 해결해요. 귀찮을 때는

컵밥을 먹거나 편의점에서 때우기도 하죠.

Q.

지출비는 어떻게 해결하나요?

A.

공부를 시작하기 전 일을 했었어요. 그때

모아둔 돈으로 해결하고 있죠. 또 학원

근로를 해서 지출을 최대한 줄였어요.

그래도 생각보다 부수적으로 들어가는 돈이

많아요. 교통비라든지 교재비라든지.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생각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사실상 아르바이트를 하는 건 공부할 시간을

너무 뺏길 것 같았죠. 조금 더 아끼면서 공부에

시간을 투자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주변에 자취하면서 공부하는 친구들은

어쩔 수 없이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해요.

Q.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A.

가장 큰 건 막연함이에요. 잘 될 거라는

보장도 없고. 생각보다 성적이 안나올

때는 좌절하기도 하죠. 혼자 공부하다보니

외로움도 크고, 가끔은 외부, 내부 사람들과

비교하게 되더라고요.

- 조OO(21)양 과의 인터뷰

* 바쁜 가운데 인터뷰에 응해주신 두 분께

감사를 표합니다

단순 지표의 조사와 현장조사, 인터뷰를

통해 1인 가구의 대략적인 삶과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표에

집계되지 않거나 인터뷰를 통해서도 전하기

힘든 어려움이 물론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량진의 1인 가구들은 오늘도

각자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며 그 어려움을

극복해나가고 있다. 그들의 꿈과 도전을 응

원한다.

Q.

노량진에서 생활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노량진엔 고시생과 수험생들이 정말 많아요.

독서실만 가더라도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었죠. 보면서 자극 받으려고

그랬어요. 또 사설 학원에서 실시하는

모의고사를 응시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죠.

Q.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A.

수험생이라면 다들 겪는 그런 증상이요.

허리도 아프고 살도 찌고 눈도 아팠죠. 또

지출비를 집에서 보태주셔서 죄송하기도

했어요.

Q.

하루 일정이 어떻게 되나요?

A.

학원에서 아침부터 수업을 들어요. 점심

먹고 오후 수업도 마치고 나면 자습을

시작하죠. 가끔 공부가 안될 때는 카페에 가서

공부하기도 해요.

Q.

하루에 지출하는 비용은 얼마 정도

인가요?

A.

점심, 저녁이랑 커피 값으로 보통 7~8천 원

정도 지출해요. 도시락을 싸오는 날엔 조금 덜

쓰고, 간식을 사먹는 날에는 조금 더 나오죠.

▲ 2015년 현재 수능을 준비 중인

수험생 조OO 21)양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6766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 집에 가기 싫으신 분 환영,

고오급 추석 선물 있습니다

ⓒ청년연대은행 ‘토닥’

▲ 공터에서…전을 부치려던 건 아니었는데…

‘추석인데 그래도 뭐라도 챙겨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을 나선 길. 명절

연휴 첫날인 토요일 아침, 아직 모두가

시골에 내려간 건 아닐 텐데 동네는 눈에

띄게 한산하다. 스무 살 때 올라와 6년 넘게

정을 붙인 곳이건만, 텅 빈 혼자 걷자니 이

도시가 다시 생판 남처럼 느껴져 서운하다.

자주 가던 가게들은 다 문을 닫아 터덜터덜

집에돌아오다 페이스북에서 언뜻 본 포스터

하나가 떠올랐다. ‘추석 연휴에 서울에 머무는

청년’들을 위한 모임을 한다는 <무중력지대

대방동>의 포스팅. ‘생판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랑 어색하지 않을까’ 고민도 잠시,

그래도 집에서 혼자 라면 먹는 것보단 낫겠지

싶어 길을 나섰다.

무중력지대,

청춘이 만드는 추석

<무중력지대 대방동>의 ‘청년연대은행 토닥’

조합원들이 서울에 남은 청년들을 위해

준비한 ‘큰 추석 잔치’.도착한 시간은 오후

1시, 벌써 대여섯명이 모여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색한 내 인사를

밝게받아주는 사람들. 멀뚱멀뚱 앉아있다나도

뭐라도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버섯 전을

부친다며 버섯을 산처럼 쌓아둔 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뭐도와드릴 거 없어요?”

그렇게 처음 이야기를 나누게 된 그녀. 마치

원래 함께 전을 부치기로 한 사람처럼 우리는

어느새 함께 공터에 앞뒤로 앉아 함께 전을

부치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공터에서 바람을

맞으며 전을 부치고 있자니 엄마생각이

들었다. 이 모습을 엄마가 본다면 '집에서도

그렇게 해보라'며 면박을 주겠지. 대충 전

물을 맞춰보고 버섯을 대강 잘라 넣고, 두

번의 불 조절 실패를 경험한 후 세 번째

청춘을 위한 추석은 없다?

하반기 공채는 왜 하필 9월에 다 마감인

건지. 언제나 그렇듯 준비는 부족하고

마감일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추석엔 내려가지 못하겠다고 부모님께

말을 해야 하나 일주일을 망설이다 지원서

마감 일주일을 남기고 마음이 급해져 이번

추석은 고향에 내려가길 포기했다. 물론

청춘의 추석글/사진: <Twenties Timeline> 에디터 김세림

▲ 저도 시골 가고 싶었어요

ⓒ잡코리아

이제 졸업반인 내게 끊이지 않을 친척들의

관심과, 질문들을 웃으며 마주할 자신이

없기도 했다. 거기까지 말하지 않아도 ‘취업

준비 시즌’이라는 내 말에 부모님도 웬만큼 내

사정을 이해하는 눈치셨다.

‘명절’이란 ‘해마다 일정하게 지키어

즐기거나 기념하는 때’이건만 청춘, 특히

‘대학 졸업반’ 이상에게 명절은 즐겁기 보단

괴로운 날이다. 취준생들은 자소서를 쓰기

위한 ‘명절대피소’로 카페를 찾고, 노량진

학원가는 ‘추석 특강’으로 발디딜 틈이

없다. “공부한다고 말씀드렸어요. 아직 뭐

보여드릴게 없어서 미안하고 창피하죠. 요즘은

명절이나 휴일, 주말이 따로 없는 것 같아요”

(JTBC뉴스) 명절은 언제부턴가 우리에게

‘부담스러운, 죄책감을 느끼는, 눈치 보거나,

피하고 싶은 날’이 되어 버렸다. 한때 우리도

생각 없이엄마가 사온 새옷 입고, 큰집에 가서

전을 먹고 사촌들이랑 헤헤거리며 장난치던

때가 있었다. 어른이 된다는 게 ‘가족과

함께하는 명절이 버거워진다는뜻’인 줄은

상상도 못한 채로.

▲ 추석 명절, 딴 세상 얘기

ⓒJTBC뉴스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6968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그녀의 바람처럼 덕분에 내 추석은

생각보다 더 행복했다. 함께 준비한 음식과

즐거운 대화, 예상치 못한 선물까지. 혼자

맞는 명절은 외로웠지만, 다른 청춘과 함께한

추석은 가족과 함께보내는 추석만큼 즐거운

시간이 됐다. 끝으로 수빈에게 ‘당신의 청춘은

어떠냐’고 물었다. “제게 청춘은 제가'생겨

먹은 대로' 행복하게 살아갈 방식을 찾는

과정인 것 같아요.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과 잘

어울리는가, 어떤 지향점을 가진 공동체에 잘

적응하는가, 어떤구조, 혹은 방식의 일을 더 잘

처리하는가를 성찰하며 '저 자신에게 최적화된

삶'을 찾고 '제가 즐겁게 감당할 수 있는 고유의

생활양식'을 만들어나가는 시간이에요.”

▲ 지나가던 청년한테까지 선물을…친절해…!

명절이란 ‘스트레스’거나 ‘취업을 위해

포기하는 외로운 시간’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또 한곳에서 다른 청춘들은 명절을

자신의 색깔로 각자 즐겁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세상에 청춘에게

붙여준 ‘5포세대’나 ‘달관세대’라는 이름을 내

것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취준생이라고

해서 명절을 포기해야 할 필요도, 세상이

청춘이라 만들어 놓은 이미지 속에서 살아갈

필요도 없음을, 혼자보단 함께하는 청춘이 더

행복함을, <무중력지대>에서 추석을 맞으며

깨달았다. 추석 모임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아직 쓰지못한 자소서가 떠올랐지만,

서울에서 홀로 보내는 스물다섯의 추석이 더

이상 그렇게 외롭거나 슬프지 않았다. '언제든

서울에 내 등 비빌 곳 있겠구나'하는 생각과,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만드는 ‘생겨먹은 대로

살아가는 청춘’들을 만나 오랜만에 즐거웠다.

▲ ‘추석 행사’를 기획한 ‘청년연대은행

토닥’ 조합원 김수빈,김진회

쯤에야 그럴듯한 전 모양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은 기다림의 요리구나’ 생각하며 부침이

바삭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몇 사람이 옆에

와서 전을 먹고는 ‘맛있다’는 칭찬을 해주자

내심 뿌듯해진다. 혼자 보내려고 서울에

남았는데, 그래도 이렇게 사람들과 함께 나눠

먹을 요리를 만들고 있자니 서울에서도 명절

기분이 난다.

찜닭, 파전, 버섯전, 볶음밥,

메쉬포테이토, 리코타치즈, 곶감에 과일까지.

빈손으로 와서 이렇게 먹어도 되나 싶을 만큼

한 상 차려진 잔치 음식들. 한것도 많지 않은데

“같이 음식 준비를 해주셔서 고맙다” 인사를

받고, ‘잘 먹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스무 명이

넘는 청년들이 함께 준비한 추석 음식을나눠

먹는다. 그 중엔 서로 얼굴을 아는 ‘토닥’

조합원도, 나처럼 행사 공지를 보고 이곳에

처음 온 사람도 있지만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인사를 나누고,

서로 음식을 챙기며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보내는 ‘가족 같은 시간’. 어느새 나도 그 틈에

어울려 웃으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함께

식사를 한 후엔 윷놀이나 체스를 자유롭게

▲ 식사 후 야외에서 진행 된 연극 '청혼'

▲ 이렇게 클 줄 몰랐던, 정말 ‘큰 추석 잔치’

ⓒ청년연대은행 ‘토닥’

가지고 놀다가, 야외에서 함께 연극 ‘청혼’을

보고, 마지막으로 집에서 하나씩 가지고 온

선물을 릴레이로 주고받았다.

청춘,

생긴 대로 살아도 괜찮아

덕분에 짧게나마 생각보다 즐거운

추석을 지내고, “어떻게 이런 행사를 열게

됐냐”고 행사를 기획한 토닥 조합원 ‘수빈’에게

물었다. “원래 매월 마지막 주에 청년연대은행

토닥에서 조합원의 날을 열고 있었어요.

연휴엔 넘어갈까 하다가, 오히려 연휴라

혼자 있는 조합원들도 있을 것 같아 행사를

기획했어요. 우리 조합원뿐 아니라 다른

청년들도 마음 편히 시간을 나누는 자리가

필요할 것 같아 규모를 확대했고요. 혼자 사는

사람이라면 특히 이럴때 외롭다고 느낄 텐데

잠시나마 다른 사람과 어울리며 명절 기분도

느끼고 맘껏 웃을 수 있길 바랐어요.”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7170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아메리카노 정도밖에 먹지 않았으므로 첫번째

내기는 ‘5시에 노량진 학원가에서 밥 먹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조건이 붙었습니다:

장소는 “공단기1층”, 음식은 “(쌀)밥”으로

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당시 본인은, 조건이

뭔가 미심쩍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큰 의심

없이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학우 여러분께 호소합니다. ‘공단기

1층’이 어디인지 알 수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

얼마나 될까요? 저는 그것이 맥도날드

노량진점 옆 건물의 공단기 고시학원 본관

건물의 2층을 뜻한다는 사실도, 그곳의

내부 구조에 대한 어떤 단서도 제공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본인은 최종 골인 지점을

확인하는 데만 15분을 허비할 수밖에 없었음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또한 제가 점심밥을 구매하는 데

오래걸린 이유도 해명하고자 합니다. 조건

상 밀가루 음식을 선택할 수 없었으므로,

길에서 파는 튀김이나 분식류, 편의점에서

파는 컵라면 등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식당도

많았고, 9호선 노량진역 3번 출구 중간에 볼 수

있는 지하 푸드코트나 “고구려 식당”도 찾아가

보았지만, 거기서 파는 식사는 목적지까지

들고 갈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시간은 없고 ‘밥’을 더 찾아 다닐

수는 없어, 고민 끝에 편의점 삼각김밥을

2700원어치 샀습니다. 일단 공단기 건물로

가면 식당이든 매점이든 있을테니 거기서

데워 먹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공단기 본관 1층에는 그런 시설은

없고 그저 자습공간, 교재 판매대, 접수처,

그리고 ‘hackers bar’라는 이름의 자판기 방

(?)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 고시학원의 통로는 그 안에 들어가는 사람 수에

비해 비현실적으로 좁고 작았다

▲ 노량진 3번 출구 '이데아 푸드코트'

다시는 고시생의 일과를 무시하지 않겠습니다.

만만하게 봤다 큰코다친,

노량진 고시생 체험

[해명문] 노량진

고시생 체험 대결 패자의 변

내기에 졌기 때문에 이 글을 씁니다. 본인

김어진은 졸업 직전 학기를 휴학하고

XX대학교 출결조교로 일하던 중 갑자기 1일

휴가가 생겨서, 그날 노량진 학원가에서 공부

중인 동기 졸업생 송지훈(가명) 학우를 찾아가

세월 좋을 때라고 놀린 사실이 있습니다.

물론 친구 간의 우정과 의리를 돈독히

하기 위한 역설적 발화였다고는 하나, 졸업

직후 전공과 별 관련 없는 고시를 준비하며

고초를 겪고 있는 송 학우의 고통에 연대하지

못하고 경솔하게 조롱조의 발언을 한 것에

대해서는 사과하는 바입니다.

24시간의

고시원 일주글/사진: <Twenties Timeline> 에디터 김어진

그러나 본인이 이 해명문을 쓰기까지의

과정이 과연 공정한 것이었는지를 학우

여러분과 교감하기 원하는 바, 문제의 내기가

어떻게 성립하였는지를 설명하겠습니다.

본인은 송 학우에게“난 요즘 너무 바빠서 니가

부럽다”, “가만히 앉아서 수업 듣고 자습하면

땡이지 않냐”라고 의견을 개진했으며,송

학우는 본인에게 “니가 노량진을 안다녀

봐서 모른다”, “내 평소 하루 일과를 니가

다 따라올 수 있는지 오늘 내기를 하자”라고

도발하였습니다.

본인이 이기면 송 학우가 빕스

스테이크를 사고, 송 학우가 이기면 본인이

출결조교 명의의 사과문 자보를 쓰는 것으로

내기가 성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총 4회의 대결

중 0승 3무 1패로 본인이 진 것은 사실인 바,

이와 같이해명문을 씁니다.

[제1대결] 오후 5시 :

공단기 1층에서 저녁 때우기

내기가 성립한 것은 정확히 한국 시간

4시 11분이었고, 이때 본인도 송 학우도

▲ 노량진 할리스 야외테라스에서 바라본 풍경

©트웬티스 타임라인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7372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생각해낼 수 없는, 매우 치밀하게 승률이

계산된 필승의 도박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송 학우의 노트북을 받아 들고

노량진 학원가의 카페란 카페는 모두

들어가보았습니다. 할리스커피, 커피

그루나루, 파스쿠치는 물론이고 멀찍이

떨어져있는 투썸플레이스며 카페베네까지

가 보았습니다. 하지만 노트북 전원을 꽂을 수

있는 자리는 어딜 가나 극히 드물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다들

손님이 오래 앉아 있지 못하도록 일부러 편의

제공을 중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도, 이미 자리를

선점한 이용객들은 절묘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한 자리씩 차지한 다음 쥐 죽은 듯이

용무에 열중이었기 때문에, 차마 자리를 내

달라고 부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동분서주를 한 끝에 8분 정도를 남겨 놓고

할리스커피 4층에 마침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노트북 충전 가능 좌석을 하나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노트북 전원을 꽂고 숨을 좀 돌린

다음 송 학우에게 전화를 걸어 현재 위치를

알리려는 순간, 아르바이트 한 명이 제게

다가와 주문을 했는지 물었습니다. 안 했다고

대답하자 그의 즉답이 돌아왔습니다. “손님,

여긴 1인 1주문이라, (주문) 안 하시면 (노트북)

못 쓰시는데…

그래서 본인은 송 학우를 위해 고가의

스무디(식사나 커피는 방금 먹었으므로)를

결제하고 제시간에 노트북 자리를

▲ 노량진 파스쿠치 한쪽 구석의 충전용 설비 ▲ 노량진 할리스커피 엘리베이터 옆의 안내문

어딘가에 전자레인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3층까지 올라가 봤지만

허사였습니다. ‘도시락방’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이용 가능 시간대(12~2시,

5시반~7시)도 아니었고 본인에게

사용자격(공단기 수강증)도 없었기에

허탈하게 내려와야 했습니다. 그때 송 학우는

1층 ‘해커스 바’에 이미 와 있었는데, 그가 사 온

것은 컵밥이었습니다. 본인의 차갑고 초라한

삼각김밥과는 비교가 안 되게 따뜻하고

적당히 많은 밥을 노릇노릇한 토핑들과 함께

먹으며, 그는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이게

3천 원이야. 노량진 고시생들이 왜 하필 이걸

먹는지 이젠 좀 알겠냐?”

이리하여 저는 첫 대결에서 상처뿐인

1무를 기록했습니다.

▲ 공단기 본관 1층, 우측에 안내창구가 보인다.

▲ 공단기 본관 1층, 'Hackers Bar'

▲ 노량진 커핀그루나루 2층: 옆 자리에서 노트북 좀

쓰자고 부탁하기 매우 애매한 거리

[제2대결] 오후 6시 :

카페 노트북 자리 잡아놓기

식사를 마친 송 학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배부르다. 난 이제 인강 들어야 되니까

다음 내기는 이걸로 하자. 좀 있다 6시까지

니가 아무 카페나 가서 내 노트북 충전 되는

자리를 확보해 주면 1승 쳐 주고, 그 다음에

니가 아무데서나 한국사 수업 청강을 하는걸

인증샷 찍어 보여주면 또 1승 쳐줄게.”

제가 이 간단해 보이는 대결을

수락할때는 까맣게 몰랐습니다. 이것은 사실

노량진 고시학원 생활을 해 본 사람이 아니면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7574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말았습니다.

정확히 6시 반에 송 학우는 본인에게

전화를 걸어 “못 찾았냐?” 한 마디로 확인

사살을 하고는, 어느 학원 몇 층을 가 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곳은 본인이 방금 전 입장을 포기하고

나왔던 곳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 강좌는

‘번호표 입장’식 수업이어서, 수강 신청 여부에

상관 없이 입장 번호를 받았거나 빈자리가

있기만 하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만큼은 노량진에서 잔뼈가 굵어야

만 알 수 있는 사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이 시점에서 본인의 스코어는 0승

2무 1패가 되었습니다.

[제4대결] 밤 9시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

롯데리아에서 복습하기

적어도 1승은 거둬야겠다는 각오를 다진

본인은 9시 쉬는 시간을 이용해 송학우와

합류했습니다. 그는 노트북 충전을 완료해

둔 채 기다리고 있다가 마지막 내기를

제안했습니다.“노량진 롯데리아에서 내일

아침 8시까지 함께 밤샘 공부를 한다. 더 많이

자는 사람이 진다.”

노량진 할리스에서 롯데리아까지는

도보 3분 정도의 거리입니다. “뭐 하면서 밤

새는데?” “내가 기출 풀고 주는 거 너도 한번

풀어보고, 내꺼 채점해주고 그럼 되지.” 등의

대화로 대결의 세부 내용을 정하다 보니,

롯데리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혹시나 싶어 노트북 전원을 연결할 수

▲ 고시학원의 강의실 배정 현황표

▲ 우여곡절 끝에 입장한 한국사 특강

▲ 노량진 롯데리아 전경, 24H 표지

가 보인다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송 학우는 “야! 하필

할리스가 뭐냐, 나 오늘은 좀 오래 앉아 있어야

하는데 4시간 넘으면 진짜 쫓겨날 수도 있다,

요즘 여기 시간 감독 엄격해진 것 같더라” 의

궤변을 늘어놓으며 본인의 승리를 인정하기

않고 이 대결을 무승부 처리하였습니다.

[제3대결] 오후 6시 반:

한국사 수업청강하기

다음 대결도 본인 혼자서 해내는

종목이었습니다. 송 학우는 스무디를 비열하게

혼자 빨아먹으며 말했습니다. “학원이랑

강사는 상관 없으니까, 6시 반까지 한국사

수업을 찾아서 들어가 인증 사진만 찍으면

돼.” 이것은 간단할 줄로 알았습니다. 어떤

국가 고시든 국사’는 빠지지 않는 과목이기에,

이 시간에 그런 강의를 찾는 것은 식은죽

먹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문제는 강의를 찾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청강이 될 것 같지 않은 칼 같은 분위기라는

게 문제였습니다. 어딜 가나 알아서 자연히

지켜지는 질서 아래 조용히 길게 늘어선

입실 대기열을 볼 수 있었습니다. 뒤에 가서

줄을 서자니 기껏 기다린 끝에 쫓겨날 것

같고, 상황에 따라 중간에 끼어들자니 도저히

그렇게 해선 안 될 것 같아, 어떻게 할지 결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에게 물어 보아도

초보자에게는 감이 오지 않는 간단한 답이

돌아올 뿐이었습니다.

어떤 학원에서는 다들 자신의

휴대전화에 어떤 문자 메시지를 띄워 놓은

상태였습니다. 살펴본 결과, 그것은 입실 예약

승인 문자였습니다. 어떤 학원에서는 아예

출결을 체크하는 수강증인식기가 문 앞에

달려 있었습니다. 두어 군데를 더 찾아다니며

한국사 수업이 지금 없거나 청강이 어려운

상황임을 파악할 때쯤, 제한 시간이 되고

▲ 강의 입장을 기다리는 고시학원의 대기열

▲ 강의 예약 확인 문자 메시지가 있었다니...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7776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소감]

학우 여러분, 고시생은 쉽게

살고 있지 않습니다!

이하의 내용은 최종적으로 (방해를 잔뜩

넣어서) 내기에 이긴 송지훈 학우의 요망을

반영하여 본인이 작성한 승부 소감문임을

알려 드립니다.

학우 여러분, 고시생들의 삶은

무위도식도 아니고, 강사와 안내 직원이

알려주는 대로 따라만 가는 안온한 삶도

아닙니다. 적어도 본인 김어진이 송 학우와의

하루 동안의 내기를 통해 체험한 바에

따르면, 고시학원 학생의 삶이란 사실은 매일

번번이 혼자 고민하고 혼자 결행하는 일의

연속입니다. 내가 어느 강좌의 어느 줄에 서든,

어떤 점심을 어디에서 먹든, 몇 시에 어디서

밤샘을 하든 누구도 옆에서 ‘그러면 된다/안

된다’ 따위의 팁을 알려 주지도 않고, 어떤

선택도 더 좋거나 나쁘지 않기에, 이들에겐 그

일상사가 매번 까다롭고 외로운 고민거리로

다가옵니다.

대다수 학우 여러분께서는 고등학교

시절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정해져 있는

자리와 스케줄에 맞춰 모두가 똑같이

공부하다 집에 간다는 사실 자체는 우리를

안심시켜 주었지요. 하지만 그들은, 예를

들자면, 등교 시간과 하교 시간만이 정해진,

그 사이에 각자 언제어디에 가서 뭘 하면

되는지는 전혀 정해지지 않은 고등학교를

다니는 것 처럼 살고 있습니다. 합격에 대한

그들의 부담감은 훨씬 처절한 채로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독과 불안과 매순간의

결정을 반복하며 노량진을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의 하루하루 일과를 “그저

가만히 앉아서 수업 듣고 자습”하는 것뿐으로

일축하여 무신경한 생활인 양 빗댄 것은,

송지훈 학우를 포함한 노량진 고시학원

학생 여러분의 일상을 비하하고 모멸하는

언사였음을 통감하며, 이에 사과합니다.

다시는 고시학원 학생의 일과를 무시하지

않겠습니다. 이상입니다.

2015년 10월 15일

철학0X 김 어 진

있는 콘센트가 있는지 찾고 있는데 송학우가

그만 두라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노량진의 햄버거 체인점에 콘센트가 있을

리가 없다고. 가뜩이나 지금도 피크 타임에

자리 점거하고 스터디하는 사람들 때문에

말이 많은데, 만약 전기까지 쓸 수 있게 해 주면

그땐 아마 싸움이 날 거라고 말입니다. 그나마

지금이 밤이고, 여기가 다소 변두리이기

때문에 괜찮을 것 같아서 굳이 여기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물어 보았습니다. 노량진에서 밤샘

공부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냐고. 답이

돌아왔습니다. 왜 없겠냐고, 꽤 많다고. 다시

물었습니다. 여긴 이렇게 한산한데, 그럼 그

사람들은 다 어디 가서 밤을 새고 있는 거냐고.

잠시 후 송학우는 무심하게 답했습니다.

나도 모른다고. 24시 하는 곳이면 아마도

그루나루나 맥날에서 새고 있을 텐데, 뭐 다들

알아서 한다고.

갈아 2시간씩 자고 끝내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되어 결국 동시 기권 무승부

처리되었습니다만, 송 학우가 곤히 자고

있던 오전 4시쯤 밖을 보니 심야택시 몇

대가 이따금 돌아다닐 뿐 아무것도 없고

조용하기만 한 노량진이 보였습니다. 저

조용함 속에서 지금도 누군가는 공부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 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그렇게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기묘하다고 느껴졌습니다.▲ 흔한 고시생의 밤샘공부 현장

©flickr.com/photos/mazefind

▲ 한밤 중의 노량진 거리, 그야말로 썰렁하다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7978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이들은 노량진 보도육교에 대한

어떤 추억을 갖고 이 자리에 다시 온 걸까.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보도육교의 마지막을

담아내었을까. 공간이기 이전에 추억으로

자리해왔던 노량진 보도육교. 35년간 제

자리를 지키며 노량진을 지나치는 모든

사람에게 공간과 추억을 선물해준 육교.

노량진 거리로 향하는 거점이면서도 만남의

장소였던 육교. 이것은 우리가 함께한 시간의

기록이 며, 노량진 보도육교에게 보내는

우리들의 마지막 송가다.

1. 흔들리던

스무 살의 나침반-서영

서울 노량진역에서 학원가로 가기 위해선

노량진 육교를 건너야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다리를 보며 ‘속세로 가는 다리’라고 부른다.

하지만 난 육교의 초입에 빼곡히 붙어있는

학원 전단을 보며, 모두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이곳에 온다는 생각에 오히려 이곳이

희망의 섬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육교 위에서 보이는 수 많은 학원을

내려다보면서는 나 뿐만 아니라 모두가

이곳에서 청춘을 잠시 덮어두고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생각에 조금은 위안이 든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육교 위에서 희망 만을

찾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육교 위에서의

내 모습은 이런 긍정적인 생각들보다도 항상

많은 것들에 다 투덜거리는, 그런 나날들이 더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능이 100일도 안 남았을 무렵, 육교

위에서 내려다본 노량진 거리의 모습을

기억한다. 노량진 육교의 모습은 참 낯설다.

한 편에서는 화려한 63빌딩의 모습이, 다른

한 편에서는 학원 건물들로 빼곡하게 채워진

거리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며칠 안

남은 수능을 앞두고 막막함과 불안함이

가득했던 그때엔 그 풍경이 참 야속했다. 왜

나는 저 너머에 가지 못하는지, 저기는 저렇게

화려하게 빛나고 있는데 왜 내가 속한 이곳은

낡은 건물들과 학원전단만이 가득한건지.

심지어는 육교 아래에서 내다보이는

파스쿠찌를 바라보면서도 마음속

불안의 화살을 돌렸던 적도 있다. 굳이

ⓒ 트웬티스 타임라인

ⓒ 블로거 '스피아민트'

<INTRO>

“1999년 봄 노량진역. 우리는 햇살을

받아 마른 버짐처럼 하얗게 빛나는 육교 위에

앉아 농담처럼 그랬다. 되고 싶은 것? 대학생.

존경하는 사람? 대학생. 네 꿈도 내 꿈도

그러니까 대학생”

작가 김애란의 소설 『자오선을 지나갈때』에서

담아낸 노량진 육교의 모습이다. 35년간 제

자리를 지켜온 노량진 보도육교. 그 오랜 시간

동안 보도육교는 얼마나 많은 수험생들의

속내를 들어왔을까.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오늘의 위로를 찾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내일의 희망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렇게

노량진 보도육교는 공간이기 이전에 하나의

추억으로, 모두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노량진 육교를 위한

마지막 송가글/사진:. <Twenties Timeline> 에디터 강연주

이처럼 1980년 신설 후 지금까지,

노량진과 역사를 함께해왔던 노량진

보도육교. 노량진의 상징이었던 이 다리가

오는 17일과 18일에 걸쳐 철거된다. 철거의

이유는 안전문제 때문이다. 그동안 전동차로

인한 진동과 흔들거림으로 꾸준히 문제가

됐던 육교는 안전등급을 C등급으로 판정받게

되면서 철거가 불가피하게 됐다. 더불어

교통약자가 이용하기 힘들다는 민원과 함께,

차량 중심이던 차로 정책이 보행자위주로

바뀌면서 육교를 없애고 건널목을 설치하자는

얘기가 나오면서 철거가 추진됐다.

사람을 위한 시설이니만큼 더

안전한것이 있다면 대체되는 것이

당연하다.하지만 오랜 시간 노량진을 지켜온

만큼, 노량진의 상징이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육교가

사라진다는 소식을 접한 사람들 역시 같은

마음이다. 주민들은 아쉬운 마음에 육교에

현수막을 걸었고, 사람들은 저마다 육교를

찾으며 그 마지막 모습을 담아내었다.

ⓒ 트웬티스 타임라인

ⓒ 트웬티스 타임라인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8180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지금에서야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래서

이곳에서 이제는 추억 속에만 남아있는

육교에게 뒤늦은 작별인사를 건넨다.

“육교야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너무

투덜거리기만 했던 것 같아. 그리고 학원

지각한답시고 맨날 뛰어다니기만해서

미안했어. 그때 나 무거웠는데 말야. 네게

내 모습이 볼멘소리 가득한 투덜쟁이의

모습으로만 기억되지 않길바라며. 이젠

사진으로 기억될 육교야, 안녕!”

2. 3년의 서울살이를

지켜봐 준 친구-승국

어느덧 10월이 왔고, 보도육교가 철거되는 그

날이 다가왔다. 나에게도 추억이 깃든 장소인

이 육교가 철거된다는 소식에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철거 전의 사진이라도

남겨놓자는 마음에 노량진을 지나는 길,

육교의 마지막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내가 서울에 올라온 것은 2012년

가을이었다. 어느덧 서울살이도 3년이

되어가고 있다. 내가 서울에서 처음 생활했던

곳은 노량진역에서 9호선으로 한 정거장

거리에 있는 노들역 인근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1호선으로 갈아타거나, 9호선

급행열차를 이용할 때 노량진역을 자주

거쳤다.

당시 살던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가장

번화한 곳 역시 노량진이었다. 수산시장도

있고, 값싼 음식점들도 많아서 서울에

갓 상경한 주머니 얇은 청춘이었던 내게

노량진은 최적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마치 고시생들처럼 밥도 사 먹고, 생필품도

샀던 기억이 있다. 지금 살고있는 곳은 중앙대

후문이다. 노량진역에서 육교 건너에 있는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동작 01번 버스를 타면

한 번에 가기 때문에 지금 집으로 이사를

와서도 이곳은 일주일에 3-4번은 꼭 거쳐

가곤 했다. 그래서 노량진의 내게 서울살이의

역사와 도 같았고, 제 2의 고향과도 같았다.

ⓒ 이승국

ⓒ 이승국

노량진에 와서 한 잔에 밥 한 끼 하는 저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은

누굴까? 이렇게 공부하고 있다 보면 정말

저곳에 갈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에

괜스레 육교 위에서 짜증도 내보고, 죄 없는

카페 속 사람들을 한 번 흘겨보고 지나가기도

했다. 조금은 철 없었던, 하지만 치열했기에

더없이 소중했던 지난 날의 기억이다.

하지만 이 추억들 속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육교 위에서 친구와 노량진 너머의

63빌딩을 내다보았던 기억이다. 육교 위에서

친구와 여의도 방향에 보이는 높고 화려한

빌딩들을 바라보며, 각자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 꼭 저기를 가자고 다짐했다. 그래서

육교는 우리에게 나침반과도 같은 존재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은 그 시절에 질투와

동경의 대상이었던 저 멀리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꿈을 다잡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꿈꿔왔던 그곳을 방문했을 때의

감회는 참 새로웠다. 꼭 가보고 싶었던 63빌딩

전망대로 가서는 역으로 노량진 위치를

찾아보기도 했다. 항상 육교 위에서 화려한

건너편의 모습을 바라보며 꿈을 키웠던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노량진을 바라보고 있다니.

그만큼 시간이 흘렀기도 했지만, 결국 이곳에

왔구나, 그때의 나도 내 나름대로 뜨겁게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함마저 들었다.

이렇게 나와 수험생활의 맥락을 함께

해왔던 육교가 이젠 철거된다고 한다. 육교가

많이 노후화됐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육교

지나갈 때 가끔 무섭기도 했다. 열차가

지나갈 때 즈음이면 약간 흔들리는 느낌도

들었으니까. 하지만 육교가 버텨온 35년의

세월을 믿었다. 그렇기에 무너질 것이라는

우려보다는 그저 흔들리는 것 정도는 이

육교의 일부라 생각했다. 마치 지금 내가 걸어

가고 있는 이 길처럼. 누군가는 내 얘기를 듣고

안전불감증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다. 매일 살짝 느껴지던 육교의

진동이, 노량진에서 수험생로 살아가던 시간을

익숙하게 만들어 준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는 오르지 못할 보도육교의 계단,

그리고 건너지 못할 노량진 도로 위의 그 거리.

노량진의 마지막 모습을 담아내고 돌아오는

길, 보도육교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큰

메모판에 인사말 하나 적지 못하고 온 것이

ⓒ 블로거 '스피아민트' ⓒ 트웬티스 타임라인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8382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3. 지친 마음을

위로 받던 장소-소희

며칠 전, 노량진 보도육교가 철거된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육교를 찾았다. 육교에는

35년간 잘 버텨줘서 고마웠다는 말이 적힌

현수막이 걸려있었고, 난관 안쪽으로는

육교에게 작별을 고하는 말이 담긴 메모판이

놓여있었다. 사실 단 한번도, 육교에 대해

특별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일상의

한 부분이었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이 그저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사라진다는 얘기를 들으니 목에 미처 삼키지

못한 가시가 박힌 것 처럼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노량진 보도육교는 당시

재수종합반에서 강사를 하던 몇 년 전의 내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차가 없어 매일같이

지하철로 출퇴근하던 나에겐 육교는 항상

거쳐 가는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내게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존재였던 노량진

보도육교. 아침에 도착하자마자 역에 내리면

가장 먼저 나를 반겨주던 것 역시 육교

근처의 도장 파는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육교를 건너가면 내 하루는

시작됐다.

바쁘고 치열하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어느새 어둠이 짙게 드리운 늦은 저녁이

된다. 시끌벅적하게 붐비던 노량진 길가는

어느새 한산해지고, 도로에도 몇 대의 버스와

택시만 있을 뿐이다. 낮과는 또 다른 노량진의

얼굴이다. 나는 그런 노량진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육교 위가 참 좋았다.

3년 전 이맘때였을까. 가을의 느낌이

물씬 느껴질 무렵에 살짝 취기가 오른

상태로 육교 위에서 노량진의 짠내가 섞인

밤바람을 맞았던 기억이 있다. 딱히 특별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아직도 육교를 떠올리면

그때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과로 피곤함에 지쳐있던 내게

순간적인 위로가 됐던 것일까. 지금도 그날을

기억하면 위로받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내게

육교는 위로의 의미로 남았다. 매일같이

지나치는 장소이지만, 그 장소에 서면 어떠한

말보다 내게 위안이 됐기 때문에. 그래서

ⓒ 트웬티스 타임라인

ⓒ 트웬티스 타임라인

서울에 올라와서 들쭉날쭉한 수입과

거침없이 드는 생활비로 인해 절약하는

습관이 강제로 생길 수밖에 없었던 서울

생활. 이런 내가 유일하게 지갑을 열 수

있었던 공간이 바로 노량진이었다. 캔커피

하나를 250원에 파는 초 저렴한 마트도 있고,

진수성찬 한식뷔페를 4500원에 먹을 수 있는

곳도 있다. 빵 하나에 500원 정도 드는 곳에

서 간식을 사 먹을 수도 있으며, 테이크아웃

아메리카노를 1000원에 마실 수 있는... 이런

공간이 집 근처에 있어 그나마 팍팍하고

넉넉하지 못했던 서울생활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었고, 갑갑한 마음을 풀어낼

수 있는 유일한 소통의 창구가 됐다.

그래서 노량진에 가면 항상 익숙한

기분이 들었고, 편안함마저 들었다. 내가

노량진에서 이러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데에는 분명 육교가 크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역에 내리자마자

보이는 보도육교. 버스를 타도 육교를 보면

안내방송을 듣지 않아도 이곳이 노량진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육교였다.

익숙한 풍경에서 느껴지는 편안한 감정.

서울에서 그러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했다. 이 감정이 있어 조금 더

서울생활에 빨리 적응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기에 나는 이곳을 지나는

고시생들의 애환까지는 겪어보지 못했지만,

인근 동네주민으로 3년을 거주하면서 내

나름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셈이었다.

‘35년... 잘 버텨줘서 고마워!’ 노량진 2동

주민들이 현수막으로 내건 이 한마디.

마치 내 마음을 대변해 노량진 육교에게

수고의 인사를 건네주는 듯했다. 수도 없이

건너다녔던 이 육교. 1호선을 타고 오면

마을버스를 타기 위해 자연스럽게 건널

수밖에 없었던 이 육교. 철거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철거된 모습을 보고 나면 짠한

마음은 감출 수가 없을 것 같다.

“나에게도 많은 추억을 남겨준 육교야, 나의

첫 서울살이를 함께해준 육교야, 수고했어.

그리고 굿바이!”

ⓒ 이승국

ⓒ 이승국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8584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모든 사라져 가는

것들에게 경의를기사: 김아리

▲ JTBC 뉴스룸에서 노량진 육교 소식이 전해졌다

ⓒ JTBC 뉴스룸

이 글을 읽고 있을 즈음이면 노량진 1호선과

노량진 고시촌(동작경찰서방향)으로 이어주던

육교가 철거된 이후겠다. 10월 17일과 18일,

이틀 간 육교가 온전히 없어졌다. 철거를 위해

14일 부터는 통행이 금지되었다.

육교가 철거된다는 발표 이후, 노량진

육교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이들이 많아졌다.

노량진1동과 2동 주민센터에서는 육교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플랜카드로 만들어 걸었고

이후 신문사며 방송국이며 육교 철거에 대한

뉴스를 앞다투며 만들어 내보냈다. 미디어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사뭇 아쉬워하며 이별을

받아들이는 모습들이었다. 육교에 설치된

20미터 길이의 메모판에는 작별 인사와

그 동안 고마웠다는 표현이 빼곡히 적혔고

육교를 통해 오고 가며 저마다 육교의 마지막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기 바빴다.

노량진 육교가 사려지는 이유는

어찌보면 당연하고 아주 분명하다. 육교는

나이가 많다. 지난 35년 간 그 자리에서

사람들이 차를 피해 길을 건널 수 있도록

힘썼다. 하루 노량진 유동인구 3만명, 시간당

육교 이용객 3천여 명. 오랜 시간 꾸준히

많은 사람들이 육교를 오가며 살았다. 육교는

그저 오래된 것이 아니라 많이 낡고 지치기도

한 것이다. 동작구청은 육교의 노후와

시민의 안전한 통행을 위해 육교를 없애고

건널목(신호등)을 만들기로 결정한 것이다.

구청이 육교를 없애고 그 자리에 신호등을

▲ 육교 통행이 금지 되기 전날 밤. 사람들은 이날

마지막으로 육교를 이용했다.

ⓒ 김아리

▲ 육교에게 전하는 시민의 마음

ⓒ 김아리

항상 내일을 다짐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육교는 내게도

특별한 존재로 남았다.

아직도 육교가 사라진 노량진역의

모습이 잘 상상되지 않는다. 처음엔 분명낯설

것이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이 없어졌을

때 오는 상실감도 클 것 같다. 버릇처럼 눈은

이제는 없어진 노량진 육교를 찾아 헤맬

것 같다. 그것도 어느 순간이 지나고 나면

익숙해지겠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추억 속의

육교를 계속 그리워할 것 같다. 아쉬운 마음에

육교의 마지막 모습을 담고 돌아오는 길,

메모판에 육교에게 보내는 마지막 한 마디를

적고 발걸음을 돌렸다.

“항상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서 날위로해 줘서,

그동안 내 고민의 무게를

받아내어 줘서 고마워.

수고했어, 육교야”

<OUTRO>

이제 더는 노량진 육교 위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노량진 육교 위에서

불꽃놀이를 바라보는 경험도, 친구와 술 한

잔 걸치고 육교 위에서 노량진을 내려다보는

경험도, 이제 더는 없다.

하지만 공간은 사라질지라도, 추억은

영원하다. 그렇게 보도육교는 앞으로도 계속

모 두의 추억 속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35년

간 늘 그래 왔듯이.

ⓒ 트웬티스 타임라인

글/사진.

<Twenties Timeline> 에디터 강연주

사진출처

블로거 '스피아민트'

http://blog.naver.com/bsr7546/220499077369

사진출처

블로거 '쿡쌤' (이승국)

http://qookssam.blog.me/220495955364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8786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이제 허물어진들 여한이 많다 할 염치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것이오. 게다가 나의

사라짐은 사회정의에 맞는 길이니 나는

소멸의 이 운명을 달갑게 받아들이려 하오.

(중략)

다만 내가 건네주었던 이가 시간당

2800여명이라 하니 반나절씩만 계산해도

35년 세월, 4억2천9백2십4만 명의 벗들과는

진한석별의 정을 나누려 하오.

(중략)

이렇게 나는 그대들의 추억 속으로

사라져 가오. 지난 35년의 세월,그대들의

추억에 성실하게 복무했다는 공을 안고 나는

물러가려 하오.어느 가수의 노랫말에 빗대어

마지막 인사를 전하오.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부디 그대들이여, 안녕하시라...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이별하지만 동시에 새롭게 변화하는

노량진을 좀 더 열렬히 응원하고 사랑하고자

한다.

▲ 육교에 붙은 육교가

시민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

ⓒ 노영수

새로 만들었다. 육교 철거 전, 신호등을

미리 만들어 개통하여 시민들이 보다 쉽고

편리하게 길을 건널 수있도록 하였다. 사실

육교는 보행권이 모두에게 보장되지 않는

건축물이다. 노인과 아동, 부상자, 장애인들이

육교를 이용하여 길을 건너기란 쉽지 않다.

또 차의 주행을 위해 사람이 피해가는

구조이다. 자동차 중심적 사고로 만들어진

교통시스템이다. 따라서 구청에서 는 육교를

신호등으로 바꿈으로써 보다 인간 중심적이며

모두가 이용 가능한 통행 환경을 보장하고자

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티가

난다는 말처럼 익숙했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쉬운 마음이 많이 든다. 하지만 보다

나은 환경을 위한 조치이므로, 웃으며 육교를

보내준다면 육교도 미련 없이 가지 않을까.

통행이 금지되기 전, 13일 저녁 떠나는

육교를 잘 보내주고자 육교 환송회가 작게

있었다. 동작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육교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자발적으로 모여 여러

가지 행사를 진행하였다. 육교에 대한

사연들도 모으고, 육교와 관련된 퀴즈들도

내며 육교의 추억을 곱씹었다.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불꽃환송! 육교 위에 모인

주민들이 불꽃을 나눠 피우며 육교 위에서

마지막저녁을 밝혔다. 교복을 입은 학생, 동네

아줌마, 동네 아저씨, 동네 회사원 거기에

취재 나온 라디오방송국, 노량진 육교 다큐를

만들고 있는 영상학도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축제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오랜 세월을 피해갈 수

없듯이 육교는 이제 그의 낡고 오래된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육교가 시민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써 붙인 대자보에는 이런 말들이

있었다.

▲ 육교가 철거되고 있는 모습

ⓒ 양유리나

▲ 육교 환송회 행사를 위해

시민들이 만들어온 안내판들

ⓒ 노영수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8988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뭔 대수냐고 그는 코웃음을 쳤다. 하긴,

일이년 공부하러 들어온 J에게 뉴스에서 본

거창한 감성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다. 오히려

지긋지긋할 만도하겠다. 횡단보도 생기면

편하고 좋지 뭐, 하며 우린 잠시 낄낄거렸다.

풍경은 변하기 마련이다.

어디나 그렇다. 학교 앞의 상가들도 1년이면

서너 곳이 바뀐다. 어느 곳엔 대형 건물이

들어서서 거리의 분위기를 뒤집어 놓기도

한다. 그런 광경을 종종 봐 왔다. 자주 가던

홍대 앞 1번 출구엔 쇼핑타워가 들어섰고, 통학

길 이던 가좌동엔 행복주택이니 뭐니 하며

상가들이 꽉꽉 들어찼다.

그런 것들에 비하면 노량진의 소소한

풍경들이야, 사실 그리 크게 다가오지도

않았다. 통학 때, 지하철역에서 마을버스

정류장으로 내달리며 본 풍경들을 기억한다.

그것과 몇 년 후의 이밤 풍경이 많이 다르지

않다. 새로 생긴 프렌차이즈 서너 곳, 뒤바뀐

술집과 카페 몇 군데가 눈에 들어올 뿐이다.

희미하게 자리하는 그 소소한 풍경들

사이엔 그러나 육교가 있다. 오래된 만큼이나

조금 더 무겁게 있다. 그 시간은 몇 년 새

바뀌어온 주변 풍경들을 아득히 넘어선다.

바뀌는 간판들 속에도 도시의 풍경을 지난

시간에 맞추어온 장본. 그렇게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고정된 풍경으로 육교는 있어왔다. 하여

그 커다란 녀석이 사라진다는 건, 아마도 새로

생긴 쇼핑타워와 복잡한 상가들보다도 훨씬

크게, 또 생경하게 다가올지도 모르겠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해 보자

그럼 우리의 이 실소가 참 미안한 일인 거다.

또 괜히 지하철역에서 정류장으로 뛰어가던

육교 위의 달리기도 생각해 보고. 감성팔이

아니냐고 비웃던 글귀들에 동감도 해보는

거다. 육교가 노량진의 풍경이 됐듯 육교 위의

기억도 노량진의 기억으로, 또 그와 얽힌다른

▲ 육교 위, 뒷모습들

육교 위에서기사 글 / 사진 고함20

인디피그([email protected])

육교가 사라진 지 몇 주가

지났다.

노량진역 앞, 도로 위를 가로지르던 그 커다란

게 없어지니 볼 때 마다 참 마음이 허하기도

하다. 흰 줄 죽죽 그어 놓은 횡단보도론 왠지

모르게 성이 차지 않는다고 할까. 익숙한

무언가를 상실할 때 항시 느끼는 그런 기분이

도로 위를 슬쩍 지나간다. 육교가 철거되기

일주일 전쯤이었나, 나는 근처 친구 J를 불러

육교 위에서 만났다. ‘그런 기분’을 좀 더

마주보고 싶어서였다. 횡단보도 앞의 헛헛함에

힘입어 잠시 그 날을 회상해 본다.

J를 만난 건 오랜만의 일이다.

공부하기 지친다며 학교로 찾아온 때가 작년

겨울이니 거의 1년이 다되어간다. 그 해 J는

시험에 떨어졌었다. 몇 차까지 달리고 새벽

때에, 붙을 때까진 보지 말자며 그는 택시를

탔다. 안타깝게도 여태껏 희소식은 없었다.

오랜만의 J는 살이 조금 쪄 있었고, 실없는

미소를 흘렸다. 따라 웃으니 웃지 말라며

외려 장난을 건다. 씁쓸함과 반가움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나는 육교도 볼 겸, 겸사겸사

불러봤다고 했다. 그에게는 실없는 이유였다.

늦은 시간 이었고 육교는 한산했다.

밑에는 줄어든 노랫소리, 줄어든 불빛. 그러나

북적임은 여전하고 소란 위에 35년 된 육교가

힘이 없다. 육교 한편 메모판엔 안녕, 고마워.

사라짐을 애도하는 글귀가 가득하다. 밑으로

차는 달리고 사진을 몇 장 찍는 나에게 J는 별

꼴이라며 핀잔을 줬다.

이거 며칠 후면 철거되지 않느냐,

노량진 살면서 별 느낌 없느냐고 묻자 그게

▲ 육교가 지키던 자리 근처에,

이제 횡단보도가 들어섰다.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9190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에 그대를 위한

공터가 있다<Twenties Timeline>

노량진이 그저 사람 많고 꽉

막힌 곳 이라고만 생각하니?

노량진은 흔히 엄청나게 붐비는 모습으로만

묘사된다. 수산시장이 그렇고, 노량진역

부근의 학원가가 그렇고, 노량진동의 빽빽한

주택가와 언덕길이 그렇다. 실제로도 노량진은

사람 많고복작복작한 곳이다. 여기까지는

서울의 다른 번화가와 하등 다를 게 없다.

다만 명동에는'요우커(중국인 관광객)'가 좀더

많고, 노량진에는 학생이 좀더 많고, 강남에는

직장인들이 좀더 많은, 뭐 그런 정도까지만

이해되고 있을 터이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노량진 주변

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노량진 일대에

공터가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 눈에 띄었다.

물론 주택가가 빽빽이 들어찬 탓에 드문드문

보이는 공원들이 한층 더 푸릇푸릇해 보였던

것도 있었겠지만, 그냥 모두가 ‘사람 많고

붐비는 곳’, ‘삭막한 곳’ 정도로만 이해하고

소비하는 곳에 공원이 이렇게나 갖춰져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래서 잠시 다녀왔다.

그리고 느꼈다. 노량진에 이렇게나 다양하게

공원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좀더 심오한

의미를 갖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송학대공원: 익어가는 사랑을

위한 특별한 데이트 코스

지도에는 노량진 근린2공원이라고 표기돼

있고, 버스 노선도에는 아예 언급이 돼 있지

않으며, 지역명을 따서 ‘송학대공원’이라는

제대로 된 별명도 갖고 있는 이 공원은,

그래서 숨겨져 있고 특별하다. 처음 마주치는

공터는 조금 서운한 느낌을 준다. 정자, 조그만

▲ 다음지도로 본

대방역-노량진역-장승배기역 일대

▲ 동작13 버스를 타고

신동아관리사무소에서 내리면 된다

많은 기억으로 번져나간다.

통학하던 나, 택시를 잡던 J, 주머니에

손을 푹 쑤신 채 걸어가던 육교 위의 사람들.

수험생들, 직장인들, 학생들. 즐겁거나

짜증났을 나와, J와, 다른 사람들. 사라지는

이 날까지 육교 위에선 얼마나 많은 걸음이

있었을까. 또 육교의 위와 아래에서 우린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어갔을까. 하나의

상실은 새삼 우리를 그런 기분에 빠트리곤

한다. ‘모든 사라져가는 것들에 경의를’

한 뉴스의 제목은 육교에 적혀있되 우리

자신에게 온다.

슬프기보단 무섭다고

J는 그렇게 말했다. 또 뭐가 바뀔 때까지

여기서 못 나갈까봐 무섭단다. 우린 다시금

낄낄 웃었고, 나는 그것도 슬픔과 비슷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무 섭든 슬프든 남아있는

사람의 감정이니까. 사라짐이 슬픈 건 그

때문이 아닐까. 뒤돌아봤을 때 달라진 풍경은

슬플 수도 무서울 수도 있겠지. 같이 따라가지

못하니 슬픈 거고, 따라잡을 수 없으니 무서운

거다. 그리고 따라잡을 수 없는 세계에 우리는

있다.

그러나 내 견디기 어려운 감성 공세를

J는 훌륭하게 방어해냈다. “지랄하고 있네.”

웃음이 터질 수밖에. 육교 위에서 우리는

여전히 쌩쌩한 육교 밑 차소리처럼 웃었다. 몇

분 더 농담을 던지다가, J는 이제 가봐야겠다며

인사를 한다. 나는 육교 위에 조금 더 있겠다고

했다. 주접 그만 떨고 집에 들어가라는 그의

웃음엔 여전히 힘이 없다. 육교 위 짧은 만남은

만났을 때처럼 실없이 끝이 났다. 걸어가는

J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상실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기로 한다. 육교 위에서, 사라질

때까지 조금 더 있어보기로 한다.

ⓒ 동작구청

수고했어 노량진 육교야 사진 공모전 최우수작

'고마워 노량진 육교 '(김태호)

메인이미지

ⓒ 동작구청

수고했어 노량진 육교야 사진 공모전 최우수작

'고마워 노량진 육교 '(김태호)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9392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그것은 미디어와 사회가 사랑을 하는

청년들에 대해 늘어놓는 스테레오타입을

조금 비껴가는 모습이다. 사실 우리의 연애의

모든순간이 “오빠! 여기 아닌 거 같아~”

“아냐. 좀만 더 가면 있어. 너, 나 믿지?” 따위

자질구레한 밀당이나 미숙함, 왁자지껄함,

마시고 흔드는 올나잇이기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 이 시기를 화양연화로

누리고 싶은 익어가는 연애의 한가운데 있는

청년들에게, 노량진은 송학대공원이라는

공터를 하나 열어두고 있었다.

노량진 "백로어린이"공원:

세상을 피해 숨고 싶은

청춘의 거점

장승배기역 근처에는 무명의 작은 공원이

있다. (지도 서비스에 따라서 이름이 조금씩

다르다. 백로어린이공원이라고 나오는 곳이

있고, 명칭 표기가없는 곳이 있다. 심지어 공원

정문 간판에는 한자로 “노량진공원”이라고

적혀 있다.) 그렇다고 지도상으로만 존재하는

허위의 공간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엄연히

그곳에도 빈 터는 있었다. 동작12번 버스를

타고 동작청소년문화의집 정류장에서 내려

언덕길을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이곳의 구성은 독특하다.

국제난민보호운동을 하는 ‘피난처’라는

비영리기관의 사무소도 이 울타리 안에

있고, 세움교회라는 교회도 세워져 있으며,

구립 백로어린이집도 운영되고 있다. 공원의

한쪽 끝 가장 큰 정자에는 바람을 막는 벽과

테이블과 12인석 이상의 의자가 들어앉아

있는데, 어린이 놀이터와 운동기구와 간이

▲ 여기서부터는 제반 사정상 사진이

조금 어두운 점 양해 바랍니다

놀이공간, 무대 정도만 갖춘 ‘공터’이기만 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양 옆으로

나 있는 언덕길과 오솔길을 따라가 보면,

그제서야 이 공원의 진가를 맛볼 수가 있다. 양

옆으로 무수히 뻗어나온 단풍나무를 감상하며

걷다 보면, 또 하나의 작은 공터와 정자, 또

다른 벤치들, 아까와는 다른 풍경과 색채가

펼쳐진다. 이곳에서 머리 위로 탁 트인 하늘과

노량진 전경, 한강, 여의도를 내려다보는 것은

실로 특별한 경험이다. 발품을 팔고 약간의

모험을 하는 그만큼 보상해 주는 공원인

것이다.

이곳을 걷다 보면 절로 데이트가 하고

싶어진다. 그것도, 사귄 지 방금 막 되어

서로에게 어떡하면 더 예쁘게 보일까에만

골몰하는 시기를 충분히 지나,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이런저런 미사여구 대신

조용히 단지 같이 걷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경험을 하고 싶어지는 그 시기의 데이트를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마을버스를 함께 타고,

적당한 높이까지 올라가 벤치에 앉아 주변을

바라보면, 정말 자연스럽게 느낄수 있다. 우린

여기까지 왔구나, 라고.

▲ 놀이기구 위에 올라가서 보면 이렇게 보임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9594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이렇달 이름도 없다. 당신의 무명 시절을 숨어

지내기에, 이렇게 좋은 빈터는 드물다.

노량진근린공원:

제대로 운동하고 싶을 때 딱

알맞은 곳

노량진 일대에서 가장 큰 공원은

노량진근린공원이다. 숭의학원 바로 옆에

있다. 이곳이 다른 공원이나 공터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여기는 쉬는 곳이 아니라 달리는

곳, 훈련하고 노력하고 땀흘리는 곳이라는

점이다. 물론 쉬어 가는 공간, 산책하는 곳,

잠시 하늘을 보며 여유를 찾는 곳으로도 즐길

수 있지만, 시설이라든가 규모 등이 운동과

단련에 좀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숭의여중고교 방면으로 진입하면,

일단 높게 나 있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

배드민턴장을 만날 수 있다. 여기도 넓다고

생각한다면, 그 위로 한층 더 올라가

잔디구장을 마주칠 땐 기겁하게 될 것이다.

폭 50m 너비 100m에 달하는 잔디밭과 그

주변을 빙 둘러싸고 있는 러닝트랙이, 당신이

노량진에 대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들을

일거에 무너뜨려 준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직이게 만든다.

애초에, 이 공원의 구조 자체가 운동을

안 할 수 없는 형태로 되어 있다. 한바퀴가

300m나 되는 트랙이 있고, 동작구 한복판에

이렇게나 탁 트인 필드가 있으며, 잔디구장

주변 사방에는 테니스장, 각종 운동기구 등이

꼼꼼하게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운동을

하다가 쉬기 위해서는 트랙 한쪽 구석에 있는

하나뿐인 정자로 굳이 가거나 가장자리에

배치된 운동 기구 설비 쪽으로 가야 하는데,

그나마 거기 있는 운동 기구들도 동네

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보다는 조금 더

본격적인 것들로 구성돼 있다.

▲ 대방동주민센터나 숭의여중고교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정자는 모두 같은 높이에 공존한다. 여기서는

누가 누구를 중간에 만나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더라도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동네 공원이라는 느낌 그 이상의, 조금은

수상하기까지 한, 재미있는 공원이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공원을

빠져나오려는 찰나, 여기라면 ‘숨어

지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죄자나 현실도피자가 되어 노숙을 할

만한 은둔처라는 뜻이 아니다. 노량진

백로어린이공원은,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은 무명의 누군가가 최소한의 자기

관리를 위해 매일 아침 올라와서 조용히

운동과 사색과 잡담과 산책을 하다가 다시

돌아가 어딘가에 틀어박힐 수 있게 도와주는,

그런 목적을 가진 사람에게는 매우 훌륭하고

적절한 공간일 수 있겠다는 뜻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든 청춘들은 안다.

세상은 우리를 도와 주지도 기다려주지도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유일한 방법이라고는,

그저 스스로를 도울 자구책을 충분히

갈고닦다가,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 정확하게 등장하는 것뿐임을.

다만 그걸 실천할 때와 장소가 부족해서

다들 이렇게 안달인 거겠지. 만약 당신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오리바람 같은

세상으로부터 잠시 조금 떨어져서 호흡을

고를 용기가 있다면, 그런 당신에게도

노량진은 공터 하나를 내어줄 것이다. 그게

바로 백로어린이공원이었다. 심지어 이곳은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9796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북적북적한 무중력센터 그곳 자체가, 바로

공터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단지 어떤 공간이 별다른

설비 없이 텅 비어 있다고 해서 공터가 되고

공원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공간의

목적과 가능성이 열려 있을 때, 여지(餘地)가

있을 때에야 비로소 그곳은 공원이고 공터일

수 있는것이다. 오래된 연인들에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여지를 주는 언덕길이어야

한다든지, 자기 자신을 좀 숨기고 활동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든지, 어떤 종목의 운동이든

상황이 허락만 한다면 바로 할 수 있다든지,

청년다움이 있는 활동이면 어떤 것이든

시도해 볼 여지가 있으면, 그곳이 바로 공터다.

그렇게 생각하니, 노량진에 고시촌이

형성돼 있고, 이런 공원들이 있고,

무중력지대가 들어서 있다는 것이 다 하나로

모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야말로, 우리

청년들에게 청년들에게 여지(남은 땅) 를 주는

곳. 무작정 일단 환승부터 하라고 다그치는

신도림도 아니고, 한 뼘 땅바닥에도 주인이

있는 여의도도 아닌 곳. 자기에게 맞는 삶과

템포와 호흡을 찾을 수 있도록, 여러 가능성의

빈 터를 열어둔 곳.

그래서, 청년으로서, 왠지 나를

이해해주고 기다려 주는 것 같은 노량진이,

그곳의 공원들이, 나는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활짝 열린 가능성의 장소가

필요한 청년 누구에게나, 비슷하게 그러할

것이다.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심지어, 이번에 취재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이 근방은 용마산이라는 산이며,

동작구는 이 산 주변을 산책하고 운동하며

즐기기 좋도록 아예 ‘동작충효길’이라는

길을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이 길은

노량진근린공원에서 자연스럽게 다리

하나를 건너며 이어진다. 새벽에, 추리닝

하나 입고 땀 뻘뻘 흘리며 계단을 타고

언덕을 올라 공원까지 달려가서 떠오르는

아침 해 바라보며 잔디밭에 드러누우면 딱

알맞게 운동도 되면서 ‘청춘스러울’ 것임에

틀림없었다. 노량진은, 이런 종류의 트레이닝

필드도 갖춘 지역이었다.

무중력지대: 다시 돌아와

뭔가를 시작하려는 모두의

아지트

이쯤 하고 돌아가려고 대방역 쪽으로가다가

생각이 났다. 대방역에 있는 무중력지대도

공터 비슷한 곳에 자리하고 있지 않았나? 기왕

여기까지 온 것 다시 확인하러 가 보기로 했다.

그리고 거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공터란

궁극적으로 무엇인지, 그것이 노량진과 무슨

상관인지에 대해 제대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무중력지대 일대가 공터이긴 했지만,

지금껏 만나 본 다른 곳들처럼 볼거리가

풍성하다거나 각별한 느낌을 불러

일으킨다거나 하는 곳은 아니었다. 조금

멋없게 묘사하자면, 큰길가에 우연하게 조성된

주말농장 터라고 말하는게 정직할 것이다.

입구를 지나 들어와서 무중력지대 건물에

들어가기까지는 공터다운 공터가 없다는

생각에 초조했는데, 막상 무중력지대로

들어가니, 뭔가를 시작하고 계속하려

▲ 대방동 무중력지대는 현재

동작주말농장 터에 자리잡고 있다

④ 노량진탐사대 기사

9998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

YOUR MEMO발행

편집자

디자인

발행일

주소

전화

팩스

홈페이지

페이스북 페이지

도움

서울시 청년공간 무중력지대 대방동

함금실

디노마드

2016. 2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로 10(대방동)

070-4266-6257

02-812-2679

www.youthzone.kr

www.facebook.com/youthzone2

이선호, 전모경, 황민혁, 김아리, 정의진, 김나영, 차범석, 엄지민,

서은진, 박윤철, 20’s Timeline(트웬티스 타임라인), 고함20

100노량진 탐사대 매거진 Vol.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