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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시연이는? 시연이는 어딨어?] 이회장과 그의 아내 연옥의 절규 같은 외침에 모두들 침묵할 뿐이었다. 대신 시연이라 불 린 아기와 같은 얼굴을 한 쌍동이 언니 세연만 악을 쓰며 울어대고 있었다. [경찰에 알려. 빨리 찾아.] 연옥은 기어코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다음날 신문사회면엔 "선우그룹 이 상호회장의 3살 여아 이시연양 납치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 할만큼 크게 실종사건이 헤드라인을 장 식하고 있 었다. [여보... 데려다 줘요.] [안돼. 지금 데려다 주면 우린 진짜 납치범으로 몰려 감옥에 간다고] [그래도... 저렇게 대단한 집 아인 줄 몰랐어요. 나 무서워요. 어떡해 해요?] 담배를 입에 문 남자는 말이 없었다. 결혼 후 8년 동안 아이가 없었던 그들 부부는 놀이터 에서 부모 없이 혼자 아장거리며 걸어다니는 시연을 본 순간 충동적으로 아이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 었다. 너무 예뻤다. 하얀 레이스 원피스에, 하얀 원피스만큼 하얀 레이스 양말, 양쪽으로 올려 묶은 곱슬 한 예쁜 리 본머리. 그 아이를 보는 순간 갖고 싶다는 욕망이 너무 강해 그들은 그렇게 엄청난 일을 저지 르고 말았 다. 그러나 뉴스와 신문 라디오 할 것 없이 매일 탑뉴스로 다루어 대는 그 사건을 보고 겁 에 질려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그렇게 떨고만 있었다. 온 방안을 담배연기로 가득메울 것처럼 담배 만 피워대 던 남자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사 준비해. 옆집에서 의심할 거야] [여보?] [우리가 키우자. 이젠... 어쩔 수 없어. 우리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 우리가 키우자] [여보...] 여자는 그런 남편을 보면서 두려움에 떨며 앞으로 두 사람에게 닥칠 미래를 예감하지 못하 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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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시연이는? 시연이는 어딨어?] 이회장과 그의 아내 연옥의 절규 같은 외침에 모두들 침묵할 뿐이었다. 대신 시연이라 불린 아기와 같은 얼굴을 한 쌍동이 언니 세연만 악을 쓰며 울어대고 있었다. [경찰에 알려. 빨리 찾아.] 연옥은 기어코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다음날 신문사회면엔 "선우그룹 이 상호회장의 3살 여아 이시연양 납치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 할만큼 크게 실종사건이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었다. [여보... 데려다 줘요.] [안돼. 지금 데려다 주면 우린 진짜 납치범으로 몰려 감옥에 간다고] [그래도... 저렇게 대단한 집 아인 줄 몰랐어요. 나 무서워요. 어떡해 해요?] 담배를 입에 문 남자는 말이 없었다. 결혼 후 8년 동안 아이가 없었던 그들 부부는 놀이터에서 부모 없이 혼자 아장거리며 걸어다니는 시연을 본 순간 충동적으로 아이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었다. 너무 예뻤다. 하얀 레이스 원피스에, 하얀 원피스만큼 하얀 레이스 양말, 양쪽으로 올려 묶은 곱슬한 예쁜 리본머리. 그 아이를 보는 순간 갖고 싶다는 욕망이 너무 강해 그들은 그렇게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뉴스와 신문 라디오 할 것 없이 매일 탑뉴스로 다루어 대는 그 사건을 보고 겁에 질려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그렇게 떨고만 있었다. 온 방안을 담배연기로 가득메울 것처럼 담배만 피워대던 남자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이사 준비해. 옆집에서 의심할 거야] [여보?] [우리가 키우자. 이젠... 어쩔 수 없어. 우리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 우리가 키우자] [여보...] 여자는 그런 남편을 보면서 두려움에 떨며 앞으로 두 사람에게 닥칠 미래를 예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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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15년 후 [잘 해. 또 실수하지 말고] [니들이나 잘 해] 조금은 애띠어 보이는 세 명의 남녀가 호텔의 로비에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긴장한 얼굴로 속삭이고 있었다. 그리고 막 엘리베이터 앞에 선 부티나 보이는 잘 생긴 남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여자 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경찰이 작전을 펼치듯 셋이 동시에 그 남자 곁에 다가섰다. 띵 ----- 소리가 나며 문이 열리고 네 명은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부자 남자는 비지니스 룸 이라고 써진 43층을 눌렀고 세 사람은 맨 꼭대기 스카이 라운지 버튼을 눌렀다 강혁은 오랜만에 돌아온 고국에서 향수보다는 분노를 더 느끼고 있었다. 성공한 사업가... 젊은 나이에 세계100위안에 드는 기업을 만든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지만 고국을 찾을 때면 언제나 한 맺힌 가슴에 제대로 눈도 감지 못한 아버지가 생각나 치를 떨게 만들었다. 누군가 그의 어깨 근처를 툭치는 느낌에 놀라 시선을 돌렸다. 눈에 확 띄는 미모를 지닌 여자가 놀란 얼굴로 엘리베이터 구석에서 진한 키스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고 물러서다가 그에게 부딛친 것 같았다. 얼굴까지 붉어 진 체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지만 시선 만큼믄 두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런 장소에서 그런 모습을 연출하는 것을 처음 본 사람처럼 놀라고 있는 그녀를 보자 왠지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키스를 하는 두 사람보다 넋을 잃고 있는 그 둘을 쳐다보는 그녀가 더 눈에 들어왔다. '짜식들... 진짜 찐하게 하네... 아무리 시선을 끌라고 했지만 지들 사귀는 거 몰라? 꼭 저런 식으로 키스해서 사람 놀라게 해야 겠어?' 그러나 그 덕에 이 부자 남자처럼 생긴 사람의 지갑이 어느새 그녀의 주머니에 들어와 있었다. 강혁은 43층에서 내리면서도 그녀가 자꾸 눈에 들어와 아쉬움이 남았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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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객실로 향했다가 카드키를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서야 자신의 지갑이 없어진 걸 알고 당황을 했다. 순간 엘리베이터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자신이 소매치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서둘러 엘리베이터로 달려가 보았지만 이미 엘리베이터는 스카이 라운지에 도달했다가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핸드폰을 꺼내 자신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에릭 난데... 지금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긴생머리에 청자켓 입은 여자 잡아서 내 방으로 데려 와. 내 지갑을 소매치기한 여자야] [예 회장님] 강혁은 자신의 객실 앞에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서성이다가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네 명의 보디가드들에게 붙잡혀 끌려오는 여자를 보고 한숨 비슷한 것을 내쉬었다 '딴 생각에 빠져 소매치기를 당하는 줄도 모르다니...' 경호팀장이 그에게 지갑을 내밀자 강혁은 그걸 받아 카드키를 꺼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책상 위에 가방을 던지듯이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여전히 겁에 질린 얼굴로 그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잘만 꾸며 놓으면 꽤나 예쁠 얼굴이었다. 시연은 겁이나 죽을 것만 같았다 언제나 그랬다 한번도 성공해 본적 없는 소매치기...오늘은 성공하나 기뻐했는데 역시나 였다. 게다가 이렇게 붙잡히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이제 남은 건 철창신세일 것이다. 강혁은 불안에 떨고 있는 그녀를 보다가 갑자기 자신의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찾아낸 사진 몇 장을 꺼내 사진 속의 여자와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비교하다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한편으론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경호팀장인 에릭에게 손짓으로 그에게 오라는 표시를 했다. 강혁의 곁에 선 에릭에게 사진을 내밀어 보였다. 에릭 역시 그 사진과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보고 놀란 얼굴을 하긴 마찬가지였다. 강혁은 그 사진들을 받아 다시 가방에 집어넣고 에릭을 향해 입을 열었다. [조사해 봐. 내일 아침에 내 책상에 올려 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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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회장님] [그리고 잘 감시해 어디 도망 못 가게] 그 말이 떨어지자 경호원들은 그녀를 그가 쓰는 객실에 딸린 작은 방에 가두어 두고는 밖에서 문을 잠그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왜 경찰에 안 넘기고... 설마.. 이 사람 조폭 뭐 이런 거 아니야?' 그는 막 잠이 든 그녀의 침실에 문을 열고 문가에 기대고 서서 투명한 액체가 출렁이는 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알 수 없는 잔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2장 - 잔인한 거래- 불안 때문인지 잠은 깊이 들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을 잡은 남자가 그녀의 방문을 열고 문가에 기대어 한참을 서 있다가 다시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든 것 마냥 숨을 죽이고 그가 다음에 어떤 행동을 할지 불안해하며 있었지만 그는 너무도 싱 겁 게 그냥 다시 들어 올 때처럼 문을 닫고 나가버린 것이다. '왜 경찰에 넘기지 않은 거지? 설마 진짜 조폭 뭐 이런건가? 그래서 나를 섬이나 술집에 넘기려고... 아니야 그럴 생각이면 이런 곳에 나를 그냥 둘리가 없는데... 혹시.. 어린 여자 좋아하는 변태 아니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온몸에 소름이 돗는 것처럼 싸한 서늘함이 훑고 지나갔다. 푹신한 침대도 어색했고, 어떻게 꺼야 되는 지도 모르는 침대 옆 스탠드도 어색했다. 창가로 다가가 커텐을 여는 순간 창문 밖으로 보이는 서울시내의 정경에 아찔함을 느끼며 순간적으로 뒷걸음을 쳤다. 매일 올려다만 보던 높던 건물들이 모두 그녀의 발아래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왜... 날 여기에 그냥 가둬두기만 하는 거지? 아침이 되면 알 수 있을까?' 커텐을 다시 닫았다 그러자 커텐이 열려 있을 때보다는 훨씬 더 안정감이 드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그녀의 등뒤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에 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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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 도로 나간 그 남자가 편한 니트와 면바지를 입고 서 있었다. 방금 샤워를 했는지 머리도 젖어 있었고 멀리 떨어진 거리였지만 향수냄새 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좋은 향기가 은은히 퍼져 오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커텐을 움켜쥐며 주춤거렸다. [거기 앉아]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양쪽이 놓여져 있는 1인용 의자 하나를 가리켰다. 편하고 익숙한 자세로 의자에 앉는 그를 보고도 시연은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감히 그의 곁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난 두 번 말하는 걸 싫어해. 앉아] 명령과도 같은 그의 말에 벌받는 아이 마냥 쭈뼛쭈뼛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그래도 혹시라도 탁자 밑으로 그의 다리와 닿지 않도록 최대한 움추리는 걸 잊지 앉았다. [이름?] [네?] 그의 질문을 못 알아들었다는 듯이 '네?'소리를 하자 이마에 주름이 잡히며 인상이 찌푸려지고 있었다. 순간 두 번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그의 말이 떠올라 얼른 입을 열어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이시연이에요] 그러자 묘하게 비꼬듯이 찌푸려지던 입가가 서서히 풀리며 또 다른 오싹함을 느끼게 만드는 미소가 지어졌다. [이시연이라...나이는?] 그의 눈은 그녀의 모든 것을 관찰하고 있었다. 동대문시장에서 그녀의 친구와 새벽에 사 입은 싸구려 남방에 시선이 머물렀다가 집에서 염색해 지저분하고 골고루 잘 되지 않은 염색한 갈색머리에도 시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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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렀다 사라졌다. 불안한 듯 두 손을 비틀며 쥐어짜는 손에도 시선이 멈추었었고 긴장으로 바싹바싹 말라 가는 입술을 축이는 모양새도 지켜보았다. [열여덞살이요] [그래... 그래야 맞지...] [네?] 그의 말이 마치 그녀를 알고 있다는 투로 들려 시연은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가 그의 차가운 눈동자와 부딪치고 말았다. 감정이 없는 눈동자.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동점심도 없는 차갑고 잔인해 보이는 눈동자였다. 그 써늘함에 놀라 시연은 얼른 다시 탁자로 시선을 내려 깔았다. [내가 물어보는 말에만 대답해.] [네] '무섭다...나쁜 자식...넌 말대답하고 싶을 때 없냐?' 그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은 그랬다. 말을 걸기 쉽지 않은 사람. 다가가지 쉽지 않은 사람. 그리고 누군가 다가오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 [왜 이런 짓을 하게 됐지?] [절 경찰에 넘길건가요?]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도리어 묻는 시연에게 강혁의 시선이 머물렀다. [얼굴 들어. 네 정수리를 보면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니까] [네...] 기세 좋게 질문하던 그녀의 목소리는 다시 개미처럼 작아져 있었다. [생각중이야. 어떻게 할지] 그녀가 얼굴을 들어 그를 똑바로 쳐다보자 그는 영어로 써진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번쩍거리는 고급스런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길게 빨아들인 담배연기를 내 뱉는 걸 보고 시연은 흡연에 대한 강한 욕구를 참아 내야 했다. [피고 싶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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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어 거절을 표시했다. [내 눈치 볼 필요 없어. 피고 싶으면 피워]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부류의 인간이 어떤지 시연은 대충은 알고 있었다. 그의 허락과 함께 손을 뻗으면 그는 마치 그녀를 말 잘 듣는 장난감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볼 것이다. 애완동물에게 맛난 먹이를 오랜만에 던져준 주인처럼 스스로 만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다. [아니요 지금은 안피우겠어요] [훗... 맘에 들어. 때와 장소를 가릴 줄은 아는 군] 그는 자신이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있었다. 회색 대리석 재떨이에... [왜 소매치기를 시작했지?] [먹고 살려구요] [언제부터?] [질문하는 의도가 뭐죠?] 반항적인 시연의 질문에 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저 미소가 보일 때마다 정말 온몸의 털이 다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네 질문 여하에 따라 경찰에 넘기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려고 하는데... 잘 보일 생각이 없는 가 보군] [어떤 대답을 원하는데요? 원하는 대답이 있을 텐데요.]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며 다시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가고 있었다. [뒷골목에서 얼마나 굴러먹었나?] [충분히!] 그의 태도가 시연의 오기를 자극하고 있었다. 늘 침착하고 냉정하고 계산적이던 그녀였지만 이 남자 앞에서는 그녀의 침착함이란 새발의 피였다. [충분히라... 별 하나쯤 달아도 상관없겠군] [뭐.. 이 바닥에서는 그게 훈장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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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얼마나 있었지?] 마치 창녀에게 툭 던지 듯 하는 질문에 시연의 자존심이 있는 대로 구겨지고 있었다. 구겨진 자존심에 표정까지 아니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 버리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시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보고 남자는 다시 비웃듯 미소를 지었다. [충분히... 어떤 서비스를 원해요?] 그녀의 대답에 조금 전까지 비웃던 얼굴에 움찔하는 긴장이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시연은 놓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줄 수 있다는 소리군] [얼마든지] '당신이 먼저 싸움을 걸었어' [난 쓰레통엔 관심 없어. 특히 너같이 뒷골목에서 청결하지도 못하게 섹스나 즐기는 여자들에겐 말이야] 그의 말에 시연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 가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피가 있는 대로 아래로 쏠리는 느낌이었다. 쓰레기통? '흥분하지마. 흥분하면 니가 지는 거야. 진정해' [깨끗한 침대에서나 더러운 방구석에서 뒹구는 거나 하는 짓은 똑 같죠.] 편하게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던 그가 두 다리를 꼬며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마치 먹이를 앞에 두고 어떻게 먹으면 맛있게 먹을까 고민하는 사자의 모습처럼. [기분이 나빴나 보군] [좋지는 않군요] [후후.. 그래... 적어도 그 정도는 되야지. 꿈 잘 꾸도록 해. 별을 달지, 안 달지는 자고 나면 알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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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자신의 이름도 가르쳐주지 않은 체 일어서서 여유 있는 걸음으로 방에서 나가고 있었다. 그가 완전히 나가는 문소리가 들리자 물풍선이 터진것 마냥 시연은 축.........늘어져 버렸다. 그와의 몇 마디 대화가 그녀의 모든 진을 다 빼놓아 버린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되지게 되는 일도 없네. 썅!∼' 그녀를 엄습하고 있는 불안을 속으로 욕을 쏟아내며 참아내고 있었다. 아침이 될 때까지 푹신하고 편한 침대에서 가장 불편한 밤을 보내며 뒤척이고 있었다. 아침이 되어도 그녀는 침대에서 나가지 않고 있었다. 아니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가 있는 방문을 여는 순간 그녀는 총알과 포탄이 쏟아지는 전쟁터로 내 몰리는 것만 같아 나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호기심이 그녀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살그머니 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히 내밀자 어제 에릭이라 불린 사내가 남자와 종이를 보며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문을 여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녀에게 시선이 돌아왔고 오가던 대화를 멈추었다. [일어났으면 씻어. 난 지저분한 건 딱 질색이니까] 한마디, 한마디 그녀를 무시하는 듯한 말투에 기분이 너무 상했지만 지금은 그녀가 불리한 입장이기에 참아내야만 해다. [저기가 욕실이야.] 그녀에게 욕실을 가리키고는 남자는 에릭이란 남자와 다른 문으로 들어가 버렸다. [말해 봐] [가출신고 같은 것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별로 정보가 없어 어제 같이 있던 일행들을 족쳐서 알아낸 것을 토대로 찾아 본 결과 이범천 이란 남자가 3살 때 입양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상호회장의 딸이 실종된 시기와 두 달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이범천은 그로부터 5년 후 부인과 이혼했으며 시연양은 어머니를 따라 재혼한 가정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15살에 가출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학력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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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중퇴이구요. 그 뒤로 죽 여기저기 다니면서 살다가 지금의 친구 두 명과 같이 지내기 시작한 것이 1년쯤 되었습니다.] [주로 뭘 하면서 지냈지?] [편의점, 노래방, 호프집등에서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지낸 것 같은데 딱히 한가지를 오래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직 전과도 없고 소매치기도 시작한지는 최근인 것 같습니다. 시연양이 입양이 되던 시기로 봐선 이회장 딸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범천이 전주로 이사가기 전 성북1동에 살았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회장댁은 성북2동이거든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가출한 이유는?] [계부의 매질이 아주 심했다고 했습니다. 친구들 말로는 그래서 가출했습니다.] [그럼, 아직 엄마를 친엄마로 알고 있다는 소리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음....] 강혁은 생각에 잠긴 듯 만년필을 책상에 톡 톡 두드리다가 에릭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 애 부모를 찾아 친자포기각서를 받아와. 받는 건 쉬울 거야. 유아납치엔 공소시효가 없으니까] [예 회장님] [오늘 안으로. 직접처리하고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조심해] [예.] [친구들도 잡아 와] [예] 에릭이 나가고 강혁은 의자를 빙글 돌려 유리 아래로 펼쳐진 시내정경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머리 곳엔 계획이 한가지씩 세워지고 있었다. 그 계획이 완성되어 성공하는 날이 그려지며 입가에도 잔인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기다려라... 내가 당한 것 만큼 되돌려주지.' 욕실에서 겨우 세수만하고 주머니에서 노란고무줄 하나를 꺼내 머리를 묶었다. 어제 소매치기 시작하러 오기 전에 집에서 배달시켜 먹은 통닭포장에서 벗겨낸 노란 고무줄이었다. 화장이 지워진 맨얼굴로 거실에서 서성이는데 에릭이라 불린 남자가 둘이 사라졌던 방에서 나오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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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참...얼굴은 한국사람인데 왜 이름이 에릭이야.' 잠시 후 어제의 그 재수 없는 남자도 모습을 드러내었다. 화장이 지워진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가 다시 소파에 편하게 기대어 앉으며 벽에 걸린 시계를 한번 흘끔 보았다 .10시를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앉아] 시연은 쪼르륵 그와 마주 앉으며 그와 같은 자세로 다리를 꼬고 앉아 그의 표정을 비슷하게 흉내를 내고 있었다. [어떻게 하기로 결정 했나요?] [뭐가 그렇게 당당하지?] [당당하지 못할 건 뭐죠? 감옥에 가거나 그게 아니면 아저씨가 다른 무언가를 요구하겠죠. 아닌가요?] [글쎄...]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지 짐작이나 하고 있을까? [공부는 잘 했나?] [네?] '뜬금 없이 공부는 무슨?' [두 번 질문하게 만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 [공부... 못했어요] [그래... 그럼 고생 좀 하겠군. 간단해. 난 널 키울작정이야. 애완동물처럼 말이야.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거나 마찬가지로. 사람을 키우는 것도 재밌을 거야. 개나 고양이는 말을 못하니 대화를 하고 싶을 땐 쓸모가 없거든. 대신 내 수준은 좀 맞춰줘야 겠어. 지금의 너처럼 무식하면 쓸모가 없으니까] 그녀도 모르게 주먹이 움켜쥐어 졌다. 말끝마다 사람 무시하는게 베어 있었다. 그것도 아주 기분을 더럽게 만드는 타고난 재주까지 있어서 듣는 이로 하여금 뚜껑이 열리지 않고는 베기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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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똑똑한 다른년이나 찾아보세요] [욕도 하지마. 듣기 좋지 않으니까] [씨발! 혼자 고상한 척 다하고 있네. 난 그 따위에 관심없으니까. 차라리 빵에서 몇 달 사는 게 백 번 낫겠군. 애완동물? 웃기고 자빠졌어] [오늘까지만 봐주지.] [필요 없어. 당신이 얼마나 돈이 많은지 몰라도 사람은 애완동물이 아니야. 당신은 같은 사람 애완동물 해 줄 생각 손톱만큼도 없어. 존나게 재수없어.] 그녀의 말이 마치기가 무섭게 얼굴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지며 앉아 있던 의자에서 나뒹굴고 말았다. [말은 조심할 수록 고와지는 거야. 내 앞에서 욕설은 삼가해. 너와 더불어 니 친구들까지 감옥에 가는 걸 바라지 않는 다면 내가 하라는 대로하는 것이 좋을 거야. 알고 보니 대마초까지 했던데... 몇 달가지고는 어림없을 걸...안 그래?] 오른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시연은 바닥에서 일어서며 그를 노려보았다. [발톱을 새울 줄 아는 고양이가 가치가 있지만 넌 아직은 쓰레기야 그 쓰레기 근성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그런 다음에 발톱을 세우면 지금보다는 나은 대접을 받을테니까] '쓰레기...'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가? 그렇겠지..] 그는 그녀에게 정말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듯 담배를 피워 물었다. '폐암에 걸려 확 죽어버려라' 시연은 그 짧은 순간에 머리를 굴렸다. 그는 자신을 맘에 들어한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그는 그녀를 잡아두려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굳이 그러게 숙여가며 비굴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나도 조건이 있어요] [넌 조건을 걸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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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감옥에 가겠어요. 거래는 없어요] 남자의 입가가 기분 나쁘게 일그러졌다. 아마도 자신의 뜻대로 되어가지 않는 상황이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당돌하군] [살아가는 방법이죠] 그녀가 더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문이 열리며 에릭이란 남자와 그녀의 친구 두 명이 들어오고 있었다. 은정이와 현수였다. [이 친구들까지 같이 쇠고랑차고 감옥에 가겠다 이건가?] 은정이와 현수는 에릭이란 남자에게 어떤 협박을 받았는지 잔뜩 얼어 겁에 질려 있었다. 게다가 시연의 얼굴에 난 붉은 손자국을 본 은정의 얼굴은 더 사색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래요 상관없어요. 이 바닥에...] [별은 훈장이다. 이 말을 또 하려고?] [잘 아시는 군요] [입만 살았군] 남자는 다시 새 담배를 꺼냈다. 조금전의 담배도 다 피우지 않은 장초인 체로 .구겨져 있었다 남자가 초조하다는 증거였다. 길게 연기를 뿜어내는 모습도 생각하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었다. '뭔가 있어...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말해봐. 조건이 뭐지?] [저 친구들에게 먹고살 수 있는 가게를 하나 차려주세요] [훗...네가 그만큼의 가치가 된다고 생각하나?] [싫으면 말구요. 나도 미련은 없으니까] 강혁은 짜증이 났다. 이제 열여덞살 밖에 먹지 않은 여자애가 자신의 맘대로 되지 않는 사실이. 그것도 가진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거지에 가까운 여자가... '타고난 핏줄 때문인가... 저 꼬마가 가진 당당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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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뭘 원하지?] [만화가게도 좋고...] [감옥에 안 보내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해야할 마당에, 나 참 기가 막히군] [기가 막히면 단전호흡이라도 하세요. 그럼 막힌 기가 뚫린테니까] 강혁은 각지를 낀 손으로 턱을 받히다가 몸을 쭉 펴며 일으켰다. [그런 썰렁한 농담도 그만해. 에릭, 책상 위에 만들어둔 서류가 있어 가져와] [예 회장님] 에릭은 그 한마디에 민첩한 행동을 보이며 책상이 있는 방에서 종이 한 장을 들고 나왔다. 강혁에게 건네주자 강혁은 받음과 동시에 시연에게 종이를 툭 던지듯 탁자에 밀어 놓았다. 시연은 자꾸만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종이를 집어들고 그 안에 적힌 내용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내용을 읽어 내리는 동안 시연의 얼굴은 그녀에게 요구되는 사항들에 대해 믿을 수 없어 남자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설마 정말 제게 이런 걸 요구하는 게 맞나요? 저를 과대평가하는 걸로 보이진 않는데요] [자신 없으면 우리 거래는 없어] 시연의 얼굴이 복잡해 졌다. '내가 이걸 다 할 수 있을까... 내가... 왜 이 남자는 내게 이런걸 요구하는 거지? ' 시연의 시선이 친구들에게로 옮겨갔다. 당당하게 자신의 요구사항을 말했지만 만약 그녀가 그가 요구하는 사항들을 다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세 사람은 모두 감방에 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한데... [하겠다고 하고 여기 주어진 기간 안에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그만큼의 댓가가 따르겠지...예를 들어... 친구들에게 돌아갈 가계의 명의가 취소된다든지...이렇게 말이야.]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있나요?] 강혁은 웃었다. 그녀는 정확하게 거래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찾아냈던 것이다. [그래 네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있지. 하지만 네가 거절한다고 해도 달라질건 없어.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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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약간의 수정이 들어갈 뿐이지] 시연의 시선이 자꾸 종이에 적힌 내용과 친구들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은정이는 아기까지 가졌는데...' [하겠어요.] 시연의 입이 야무지게 다물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녀 나름대로 결심을 굳히고 있는 모양이었다. [잘 결정했어. 아마 지금 사는 것 보다는 훨씬 나은 생활수준일거야.] [내가 대신 뭘 해주면 되죠?] [그렇게 급하게 굴 것 없어. 천천히 알게 될테니까..] 시연은 그가 내민 만년필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내밀었다. 그러자 강혁은 종이를 들어 한번 쳐다보고 에릭에게 넘겨주었다. [이젠 거래가 성립되었군.] 남자의 입에서 소름이 돋는 차가운 미소가 시연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순간 시연은 또 한번 마음의 문을 닫아 가고 있었다. 집은 나오던 그날처럼...집을 나오던 그날 엄마가 내 뱉은 잔인한 말을 들었을 때처럼 시연은 친구들을 향해 잠시나마 열었던 문을 다시 조용히 닫고 있었다. 앞으로 어디로 어떻게 움직여 갈지 모르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안해했으며 자신이 아니면 안된다는 남자에 대한 두려움도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그리고 그 남자가 가진 마력 같은 끌림도 그녀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 중의 하나였다. 마력... 사람을 얼게 만들고, 두렵게 만들고, 자신의 주변에 흡수되게 만드는 남자의 능력. 계약서에 그녀의 이름을 적어 넣는 순간 시연은 그의 애완동물이 되어 있었다. 이젠 시연은 사람으로서의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그가 요구하는 대로 움직이는 살아있는 장난감에 불과한 것이다. 짖으라면 짖는 시늉까지 해야 하는 애완동물. 자신의 심장도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음을 시연은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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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사람의 감정이란 것이 참으로 묘했다. 시연의 뜻대로 은정은 작은 가게를 하나 가지게 되었고 시연은 강혁이라는 남자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가정교사처럼 붙은 윤선영이라는 여자. 강혁과의 계약에 의해서 시연이 처음으로 해야할 일은 중학졸업 검정고시에 합격해야 하는 것이었다. 품위 있는 애완동물을 만들기 위한 1단계 작업인 것이다. 그 다음으로 고졸을 위한 검정고시겠지... 그는 성북동에 홍익사대부속고등학교가 있는 동네에 꽤나 커다란 빌라를 하나 마련해 두고 시연과 윤비서와 가정부 한 명을 두고 다시 어딘 가로 떠나가 버렸다. 그가 떠나 버린 다음에서야 선영을 통해서 외국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이란 걸 들었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고. 그래도 그와 같이 지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적잖이 안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본 이후로 그녀의 머리 속에서는 그에 대한 영상이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차가운 인상 속에 감춰진 무엇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드는 반면에 감추려 애쓰는 다른 무언가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쓰이게 만드는 그 무언가를 시연은 알아내고 싶지 않았다. 그저 선영과 함께 중학교 교과서를 펴고 수학공식과 영어 문법을 외우며 하루를 보내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그렇게... 6개월만에 시연은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다시 고등학교 과정에 들어갔다 한번의 낙방을 겪고 두 번만에 시연은 고졸 검정고시에도 합격을 했다 . 그리고 그 다음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입시학원. 그의 두 번째 조건. 서울대입학 가능하기나 한 일이란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하지만 하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생겨버렸다. 친구 은정이 아이를 낳았다. 그것도 이뿐 쌍둥이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이란성 남매 쌍둥이를... 그녀에게 생긴 새로운 가족의 행복을 위해 해내야만 했다. 강혁은 2년이 넘도록 그녀를 만나러 오거나 하지 않았다. 물론 선영이 여러 차레 그와 통하는 것을 보긴 했지만 직접적으로 그녀와 통화를 하거나 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11월이 되면서 그와의 만남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21살의 겨울이 시작되면서... [열 좀 봐. 일찍 와서 쉬지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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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시험이 얼마 안 남았는데...일찍 와도 맘 편히 쉴 수나 있겠어?] [그래도... 목도 쉬고, 열까지 나는데 공부가 되니?] [몇 시야?] [12시 30분] [나 내일 6시까지 가야하거든. 언니 깨워줄거지?} [그러다 쓰러진다.] [쓰러져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팔자 없는 공부를 하게 되다니... 이게 무슨 생난리 부르스인지...] [조금만 참아.] 선영은 시연의 말투에 미소를 지으면서도 웬지 평소보다 더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듯 보였다. [삼수, 사수, 장수하는 사람들 무지 존경해. 나 그만 잘거니까 꼭 깨워줘야 해] [알았어] 시연은 가방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침대에 엎드려 잠에 골아 떨어져 버렸다. 옷도 갈아입지도 않은 체... 반쯤 열린 문이 스스르 열리며 커다란 그림자가 문틀에 기대어 서고 있었다. 그전처럼 다시 되돌아 나갈 것처럼 보이던 그림자는 서서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침대 모서리에 기대어 앉았다. 그의 체중이 실리면서 침대가 출렁였지만 그녀는 너무 깊이 잠에 빠져 느끼지도 못하고 있었다. 시연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있는 손길이 부드럽기 그지없었으며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도 부드러웠다. 처음 봤을 때의 천박한 흔적은 사라지고 대신 이젠 그녀의 스물한살에 걸맞은 풋풋함이 드러나 있었다. 코트까지 입은 체 잠든 그녀를 편하게 뉘이고 코트의 단추를 하나씩 푸르는 남자의 손이 잠시 멈칫하고 있었다. 가끔 그녀는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서 그를 당황하게 만들곤 했었다. 첫 만남에서도 그랬었다. [충분히... 어떤 서비스를 원해요?]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줄 수 있다는 소리군] [얼마든지] 그녀의 메마른 입술에서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자신의 온몸을 감싸던 뜨거움을 잊을 수 없었다. 고작 열여덞살의 여자에게 그런 걸 느끼다니... 글래머의 섹시한 몸매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녀의 전체적인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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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가 섹시한 것도 아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오히려 순한 듯한 깨끗하고 청순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왜 그녀를 볼 때마다 그의 몸이 뜨거워지면서 만지고 싶어지는지 알 수 가 없었다. 그에겐... 항상 여자가 있었는데... 멈칫하던 손을 움직여 마저 코트를 벗기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피곤함에 감기까지 들어 얼굴 색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아니 이불 색이 푸른색이어서 그녀의 안색이 더 창백해 보이는 지도 몰랐다. 피곤함에 갈라졌는지 까실해진 입술을 엄지 손으로 쓸어보았다. [회장님 침실 정리 끝났습니다.] 등뒤로 들려온 선영의 목소리에 빠르게 손을 치우며 일어섰다. [그 동안의 진척상황과 지금 성적이 어느 정도인지 듣고 싶으니 서재로 와] [예 회장님] 잠든 시연을 한번더 바라보고 강혁은 서재로 들어와 소파에 기대고 앉았다.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여독이 아직 풀리지 않아 피곤해서 인지 눈이 따끔거렸다. 잠시 후 선영이 몇 개의 종이를 들고 들어와 강혁의 앞에 내밀었다. [그 동안의 성적표입니다. 꾸준히 성적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특히 수리탐구와 과학탐구에서 좋은 성적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어에서는 같은 수준의 아이들보다 조금 떨어지는 편입니다. 수리력과 이해력이 좋고 집중력이 좋아 빠르게 성적이 오른 편입니다.] [목표로 하는 데까지 가능하겠나?] [예 충분히] [기대 이상이군]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평소 생활은 어때? 불평이나 불만은?] [없습니다. 본성이 착한 것 같습니다. 모든 것에 순한 편이고 두덜거리거나 비꼬는 것은 없습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윤실장이 애쓰는 군] [감사합니다 회장님] [건강은?] [지금은 많이 지쳐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인지 감기도 쉽게 나가지 않고 나을 만 하면 다른 감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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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려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보약이라도 지어서 먹여.] [예] [내일은 일 끝나고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 기다리지마] [예] [수고했어 자네도 그만 쉬지] [예 회장님. 편히 주무십시오] 선영이 서재의 문을 닫고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강혁은 길게 늘어지듯이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서른 한살... 스물 한살... 강산이 한번 바뀌었군.' 수능을 보기 전 마지막 모의고사를 보고 점수를 매겨보고 시연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너 잘 본 모양이다. 웃는 거 보니?] [어 주형오빠. 오빠는?] 같은 반에 대학을 다니다 온 주형은 그녀보다 두 살이 많았으며 그녀에게 늘 친절하니 잘 챙겨주고 있었다. [난 갈수록 점수가 안나와. 걱정이다. 휴학한 보람이 있어야 할텐데... 가자 날도 추운데 가다가 떡볶이나 먹고 가자] [그래] 가방을 챙겨들고 주형과 시험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하고 나오는 그녀의 앞에 커다란 사람이 길을 막아서고 있었다. 3년만에 본 강혁의 모습에 시연은 무의식중에 가방끈을 움켜쥐고 말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에 마치 먹이가 나오길 기다렸다가 잽싸게 다가온 사자 마냥 그녀의 앞에 서서 그녀를 노려보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 기세에 눌려 시연은 주형과 웃으며 나오던 미소가 얼굴에서 싸그리 지워져 버렸다. 날씨만큼이나 그녀의 기분이 가라앉아 버렸다. [가자] 강혁은 그 한마디를 하고 돌아섰지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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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연아!] [저 먼저 갈게요. 내일 봐요] 자신을 부르는 주형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시연은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고급 승용차가 학원 앞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집에 돌아가던 학생들이 거의 한번씩 쳐다보고 있었다. [타] 운전사도 없었다. 그녀가 뒷문을 열려고 하자 강혁이 보조석의 문을 열어 앞으로 탈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시연은 가방을 벗어 가슴에 앉고 앞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그가 빙둘러 운전석으로 앉아 시동을 걸었다 흘끔 시연을 보다가 그가 몸을 돌려 그녀의 어깨위로 손을 뻗더니 안전띠를 찾아 메주고 시작했다. [저... 제가할께요] 그가 벨트를 손으로 잡아 다니기 위해 몸을 내밀었을 때 그녀의 목근처에 느껴지던 뜨거운 숨결에 놀랐으며 갑자기 빨리 뛰기 시작한 심장에 긴장해야만 했다. [가만있어.] 그가 차갑게 내뱉은 말에 그로부터 벨트를 받으려던 손을 다시 가방위로 내려놓아 버렸다. 벨트가 찰칵..하고 고리가 끼워지는 소리를 듣고 강혁은 흘끔 시연을 보았다 .고개를 숙인 체 어색해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귀엽게 자랐군] 강혁은 중지로 그녀의 볼을 한번 톡∼ 치고는 운전대에 손을 올려 차를 출발시켰다. 그가 닿던 곳이 화끈거려 손으로 만져보고 싶었지만 그런 행동은 왠지 그를 의식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시연은 스스로의 손을 묶듯이 꼭 쥐며 참아 내야만 했다. 하지만 자꾸만 곁눈질로 그를 보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훔쳐본 그의 모습은 에전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그를 감싸는 어두운 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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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과 빈틈없어 보이는 차가운 인상. 운전대에 올려 있던 손 하나가 들어올려지자 시연은 흠칫 놀라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그의 손은 CD를 플레이시킨 뒤 다시 운전대 위로 올라갔다. 그가 방금 작동시킨 CD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녀는 누구의 곡인지 알지 못했다. [지금 나오는 클래식인 뭔지 알아?] [아니요] [수능 끝나면 음악 공부도 해.] 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았다. 방금 그가 한말에 예 라고 대답하면 정말 자신의 그의 애완동물이 되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베토벤의 비창이야.] 그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에 시연을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12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어서 그런지 도로는 한산했으며 멀리 보이는 아파트도 듬성듬성 하나둘씩 불이 켜져 있을 뿐이었다. 다만 평소와 다르게 그 풍경들이 을씨년스럽지 않게 보이는 건 그와 그가 틀어놓은 비창 때문이었다. [머리를 풀르는게 좋을 텐데...겨울이라 그렇게 하나로 묶으면 귀도 시렵고 춥지 않나?] [공부할 때 귀찮아요] 그녀의 대답에 강혁이 풋--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모범생 같은 대답이군. 네 첫인상하고 전혀 연결이 안 되는데...] 그가 악의 없이 웃는 얼굴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시연은 방금 그 미소에 넋을 잃고 쳐다보다가 당황하며 다시 얼굴을 돌렸다. '왜 이러는 거야. 난 감정이 없어. 난 감정이 없는 사람이야' 스스로를 그렇게 설득시키기에 바빴다. [뭐 좀 먹고 갈까?] [너무 늦었어요. 집에서 가서 쉬고 싶어요] [그래. 그렇군, 집에 가는 동안에 눈 좀 붙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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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래 차라리 눈을 감고 아무 것도 안보는 것이 낫겠군' 시연은 의자를 살짝 뒤로 눕히고 눈을 감았다. 늘 잠이 모자랐기에 기회만 생기면 쉽게 잠이 들었다. 따뜻한 실내와 오래 전에 고인이 된 베토벤이 남긴 음악을 들으며 시연은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빌라의 차고에 주차를 하고도 강혁은 그녀를 깨우지 않았다 아니 깨울 수 없었다. 깊이 잠든 모습이 안쓰러웠기 때문이었다. 녹초가 된 모습. 가방을 움켜쥐고 있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지는 걸 보니 깊이 잠든 것 같았다. 오래 전 미국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잠을 줄여가며 치열하게 공부와 생활전선을 오가던 자신의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동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언제나 그를 분노하게 만드는 사실 때문에... 시동을 켜둔 체 히터를 틀어 놓고 자신도 의자를 눕히고 기대어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 행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둘 다 피곤하게 의자에 기대서 밤을 샐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깨워 조금이라도 편히 침대에서 자도록 해야 했다. 물끄러미 잠든 시연을 보는 순간 다시 뜨거운 느낌이 그를 감싸기 시작했다. 무방비 상태로 잠들어 있는 그녀. 그녀의 입술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으며 여린 그녀의 몸을 만지고 싶었다 . 손을 뻗어 볼을 쓸어보았다. 화장하지 않은 얼굴이 싱그러웠다. 꼭 비누냄새가 날것만 같았다. 비누향기를 확인하고 싶은 충동에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가 살며시 키스를 했다. 그러나 그건 강혁의 가장 커다란 실수였다 그녀의 입술 닿는 순간 이성이 잠깐 그로부터 멀어졌으며 대신 욕망이 그를 부추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입술이 느껴졌는지 살짝 눈을 뜨던 시연이 바로 코앞의 강혁의 존재를 느끼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녀의 반항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녀가 밀어낼수록 그의 혀가 거칠게 더욱더 그녀의 입안을 비집고 들어왔으며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두 팔로 그녀를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욱더 그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건 그의 혀가, 그의 키스가 그녀에게 준 충격과도 같은 뜨거움 때문이었다. 굳게 다물어 절대 벌어질 것 같지 않았던 입술이 서서히 벌어지면서 그가 뜨겁게 찾아 헤매던 그녀의 혀와 닿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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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며 움찔거리는 그녀의 혀를 거칠게 휘감는 그의 테크닉에 시연은 점점 의식이 현실로부터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거친 키스가 서서히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부드럽게 아랫입술을 빨기도 하며 장난처럼 혀끝으로 윗입술을 쓸어주기도 했다. 그의 입술이 잠시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면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나왔으며 그럴 때면 어김없이 그의 입술이 다시 다가와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해주었다. 숨이 막히도록 긴 키스였다. 그의 두 손이 이젠 자유로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기도 하며 매만졌으면 점점 아래로 내려가 흥분으로 인해 커진 가슴에 머물렀다가 다시 목을 쓸어 내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고무줄로 하나로 묶었던 머리를 풀러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그녀의 입술을 그가 원하는 대로 가까이 끌어당기기도 했으며 참을 수 없는 느낌에 혀끝으로 귀볼을 간질거리며 삼푸냄새를 느끼기도 했다. '가지고 싶다. 지금 당장...'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강혁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뚝-- 멈추어져 버렸다. 그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느끼고 시연이 살며시 눈을 떴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에선 그가 행동으로 보여줬던 열정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고 대신 약간의 분노가 느껴지고 있을 뿐이었다.. [떪어. 아직 덜 익었어] 그의 그 한마디에 시연의 얼굴이 붉게 확 달아올라버렸다. 그리고 그를 밀치고는 거칠게 자동차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와 버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체 뛰어서 2층의 그녀가 사는 빌라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문을 열어준 선영이 붉게 상기되어 숨을 몰아쉬는 시연을 보고 놀라는 눈치였지만 시연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 버리고 침대에 뛰어들다 시피 누워버렸다. '미쳤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자신을 휩쓸었던 욕망이라는 이름의 쾌락에 스스로 너무도 당황하고 말았다. 그의 애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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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되지 않기 위해 시연은 나름대로 스스로에게 혹독하게 행동했다. 지난 2년 남짓한 시간동안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검정고시에 합격을 했으며 그리고 1년 동안 입시학원에서 대학에 가기 위해 새벽에 집에서 나서 12시가 되어야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가기란 쉽지 않았다. 검정고시에 합격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과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하는 것은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첫모의고사를 봤던 날의 실망이 아직도 그를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이대로 라면... 은정이와 현수가 겨우 얻은 안정이 물거품이 되고 자신도 강혁이라는 남자와의 거래에서 너 나쁜 상황으로 치달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이기에... 많은 돈을 들여가며 자신을 공부시키는 것일까... 교양 있는 정부를 만들기 위해? 이미 교양을 갖춘 정부를 만드는 것이 더 쉬울 텐데... ' 그녀가 알지 못하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의 손길 한번에 정신을 잃고 매달리던 자신의 모습이라니... 부끄러움과 모멸감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미쳤어' [시연아] [언니 나 너무 피곤해. 그만 자야 겠어] [회장님이 부르셔] [내일 이야기하자고 하면 안될까?] [옷 갈아입고 나와] 선영의 말에 시연은 코트만 벗어 들고 거실로 나갔다. [녹차를 한잔하고 싶은데] [준비하겠습니다 회장님] [시연이 보고하라고 해.] [저...] [두 번 말하게 하지마] [예 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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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시연은 선영과 함께 부엌으로 들어와 주전자에 찻물을 올렸다. [피곤하지? 오늘 시험은 어땠어?] [영어에서 저번보다는 점수가 좀 올랐어] [다행이네.] 장에서 작설차를 꺼내 조심스레 찻잔에 넣고 시연은 뜨거운 물에 잔을 데운 다음 물을 부어 첫맛의 떪은 맛을 우려내어 버린 다음 새물을 부어 찻잔의 뚜껑을 닫았다. [부엌에서 기다릴 거니까 필요하면 불러] [네] 조금전의 일 때문에 신경이 쓰였지만 애써 평온을 가장한 얼굴로 쟁반을 들고 거실로 나가 탁자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찻잔을 내어놓은 다음 그가 말을 하기를 기다렸지만 녹차만을 조용히 음미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가 크게 들릴 만큼 거실에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네가 끓인 거냐?] [네] [맛이 좋군] [비싼 거니까 맛이 좋은 거겠죠] 삐딱한 그녀의 말에 강혁은 조용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생각보다 공부를 잘하던데...머리가 나쁘진 않은 것 같아 다행이야] 그의 모습에서 좀 전의 열정 같은 건 찾아 볼 수 도 없었다. 그녀의 입술을 정신없이 탐하던 남자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과연 그런 일이 있었기나 한 것인지. 잠깐 졸았던 사이 자신이 꿈을 꾸었던 건 아닐지 시연은 혼란스러웠다. [하실 말씀 없으면 전 그만 자야겠어. 내일 일찍 나가봐야 하거든요] [내일 점심 같이 먹을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학원에서 자율 학습하다가 저녁때 올거에요] [토요이잖아. 하루쯤 쉰다고 큰일나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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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다음주 화요일이에요] [그럼 점심 먹고 다시 학원에다 내려줄거니까 그렇게 해] [싫어요] 그의 눈썹이 씰룩였다 . 명백한 그녀의 거부에 기분이 상했다는 뜻이다. [넌 선택권이 없어. 점심시간에 차 보낼 테니까 학원 앞에서 기다려] 시연은 주먹을 쥐었다. 3년이 다 되어 가도록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새삼 점심을 같이 먹자니... [장소 알려주면 제가 찾아갈게요] [쓸데없이 말 길게 만들지. 시키는 대로 해] 들고 있던 찻잔을 소리나게 탁자 위에 내려놓는 태도가 말이 끝났음을 의미했다. 시연은 손도 대지 않은 자신의 찻잔을 그대로 탁자에 내버려 둔 체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밤새 피곤한 몸에도 불구하고 잠을 이루지 못한 체 뒤척이다가 새벽에 늦잠을 자고 말았다. 허겁지겁 뛰어 학원으로 향했으며 오전수업 내내 심란한 마음에 수업내용이 하나도 귀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를 더 기운 빠지게 만든 건 그녀를 태우러 오기로 한 자동차 대신 선영이 대신 와서 그와의 약속이 취소되었음을 알려준 것이었다. 급한 일이 생겨 오전비행기로 미국으로 돌아갔다는 말과 함께. 그가 가버린 것이 후련했지만 왜 허전한 마음까지 같이 드는지... 스스로를 이해해 보려고 애를 썼지만 그 사실만큼은 이해할 수 없었다. 수능날 긴장한 채로 선영이 고사장까지 태워다 줘서 편하게 왔지만 교실로 들어와 시작종이 울리고 마지막 시간의 마지막 과목까지 답안지를 제출하는 동안 한순간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마지막 답지가 그녀의 손에서 떠나는 순간 긴장이 풀어져 꼼짝 할 수 없었다. 모두들 서둘러 가방을 챙겨 교시를 빠져나가고 있었지만 시연은 책상에 엎드린 체로 꼼짝하지 않았다. '드디어 끝났군' 엄마 생각이 났다. 교문 앞에서 더 이상 따라 들어오지 못하는 엄마들이 자신들의 딸에게 도시락 가방을 건네주며 어깨를 토닥여 주던 모습이. 점점 변해가던 엄마의 모습을 기억했다. 다정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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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위해 뭐든 해주려던 엄마의 모습에서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하며 그녀를 귀찮아하던 엄마. 고개를 흔들어 떠오르려는 과거의 기억을 털어 버렸다. 그리고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연필과 컴퓨터용 수성 사인펜을 필통에 넣고 코트를 챙겨 입었다. 교실엔 이미 모든 학생들이 나가고 없어 그녀 혼자뿐이었다. 선영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에 서둘러 교실을 나와 조금은 잰걸음으로 걸었다. 그러나 이미 거의 모든 학생들이 빠져나가 한산한 정문 앞에 검은색 양복위로 기다란 바바리를 입은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걸 발견한 순간 시연의 걸음은 멈추어 졌다. 강혁의 시선이 날아와 그녀에게 꽂혔다.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움직이며 그에게 다갔으며 선영을 찾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가자.] [선영 언니는요?] [없어] 운전사가 그를 위해 문을 열어주는 사이 선영은 반대편 문을 열고 뒷좌석에 나란히 그와 함께 앉았다. [시험은?] [몰라요] [저녁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나?] [없어요] '당신하고 라면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아요' [고분고분하게 굴어. 신경 거슬리게 하지 말고] 경고였다. 더 이상은 삐딱한 그녀의 태도를 봐줄 수 없다는... [차 세워] [네 회장님] 잘 달리던 차를 길가에 세우라고 하더니 그가 먼저 차에서 내려 기사에게 뭐라 몇 마디하고는 운전사를 먼저 보내고 운전석에 앉고 있었다. 자동차는 동국대 근처로 움직인다 싶더니 신라호텔을 목적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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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지 산등성을 타고 올라 호텔의 정문 앞에 차를 멈추었다. 차에서 내려 자연스럽게 도어맨에게 키를 넘기고 강혁은 그녀가 차에서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어맨이 열어준 문으로 시연은 밖으로 내렸으며 그녀가 차에서 내린 걸 확인하고 강혁은 먼저 안으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 번쩍번쩍 잘 닦인 대리석 바닥을 지나 폭신한 카펫을 따라 3층으로 올라간 다음 한정식 이라고 써진 곳으로 들어갔다. 미리 예약을 해 두었는지 그가 이름을 대자 두 사람은 창 밖으로 리틀어린이 야구장이 보이는 곳으로 안내되었다. 미닫이문이 닫히고 두 사람만 남게되자 또다시 침묵이 시연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 동안 애썼어] [......] [말이 줄은 건가 아니면 나와 말하기 싫은 건가?] [둘 다에요] [나를 즐겁게 해주려면 지금처럼 과묵하면 안돼. 이제부터 나는 너와의 거래를 시작할 생각이거든] 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그녀의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대학에 합격하면 휴학하고 미국으로 갈 거야. 거기서 공부해. 처음부터 데리고 가려고 했지만 그때의 학력 가지고는 비자 받기가 어려워서 지금까지 기다린 거야] [꼭 가야하나요?] [난 네게 자선을 베푼 게 아니라는 걸 알텐데?]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를 알고 싶어요] [서두르지 않아도 차차 알게 될 거야. 넌 이제부터 나를 즐겁게 해주기만 하면 되니까] 그의 미소가 또 다시 그녀를 오싹하게 만들고 있었다. 차가운 사랑 4장 3. 서로에 대한 존재감 그의 말에 겁이 나는 건 사실이었다. 앞으로는 그를 즐겁게 해주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도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일까? 그의 침실의 여자가 되는 것 말고 또 다른 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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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안 먹는 군] [입맛이 없어요. ] 이것저것 깨작깨작 하던 젓가락 마저 시연은 내려놓아 버렸다. 수저 받침 위에 나란히 놓여진 은수저에 칠보로 무늬가 놓여진 학의 모습만 뚫어지게 응시할 뿐이었다. [네 이야기나 해 봐] [어떤 게 궁금한데요?] [왜 집을 나왔는지.] 시연은 잠시 그를 올려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내리 깔았다. [그건...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요] [말해!] [애완동물도 주인이 간섭하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이 있어요. 내게 있어서 그 부분이 바로 그런거에요] 강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이 썼던 애완동물이란 표현을 아직도 응어리처럼 기억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귀엽기 마저 했던 것이다. [넌 사람이야.] [네. 사람의 모습을 한 애완동물이죠. 어차피 인간도 동물이니까요] 강혁이 그녀의 말에 막 입을 열려는 순간 그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나야] [......] [그래. 지금 가지] 폴더가 탁! 소리를 내며 닫히고 강혁은 의자를 뒤로 밀치며 일어섰다. [일어나. 가야겠다.] 시연은 그의 말에 망설임 없이 의자에서 일어나 가방과 옷을 챙기고 그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택시 타고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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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택시비를 주려는 듯 지갑을 찾는 걸보고 시연은 '저도 있어요'라고 차갑게 거절을 표시했다. 그리고 그의 차를 주차맨이 정문 앞으로 가져오기도 전에 손님이 내리고 난 빈 택시에 빠르게 몸을 싣고 그로부터 도망치듯이 호텔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가. 그녀가 타고 있는 택시가 멀어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을 택시의 사이드미러를 통해 보았지만 시연은 끝내 뒤를 돌아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저씨 혜화동 대학로에 세워주세요] [예] 학원생들이 시험이 끝나고 그곳에서 모여 쫑파티를 벌이기로 했었다. 정확하게 장소가 어디인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녀의 수첩에 적힌 호출기 번호로 연락을 하면 누군가는 알려줄 것이다. 주형의 호출기로 연락을 하자 곧이어 그녀의 호출기에 그가 있는 곳의 전화번호가 찍혔다. [오빠 어디에요?] [여기? 성대쪽에 있는 호프집인데... 넌 어디야?] [혜화동 c-스페이스 앞이에요] [가깝네. 얼른 와라] 호프집의 이름과 위치를 듣고 시연은 그곳을 찾아갔으며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모여 있었다. 언제나 말이 없고 책만 파는 그녀가 그런 장소에 나타난 것이 약간은 의외였는지 처음엔 그녀의 등장에 어색하던 사람들이 점차 한잔, 두 잔 술이 걸쳐지면서 자연스럽게 대화에 그녀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주형이 담배 한개비를 꺼내고 탁자 위에 담뱃갑을 던져 놓자 시연이 익숙한 손동작으로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자 사람들 모두 일시에 조용해지며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모습이 꽤나 파격적으로 보여졌었던 모양이었다. 모범생의 전형적인 모습만 보이던 그녀가 호프집에 나타났고 그 다음은 담배를 피워 물었던 것이다. [불 좀 줘.] 시연의 말에 주형이 어색하게 라이터를 내밀었다. 불을 붙이고 길게 담배를 빨아들이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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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이 세상 누구보다 맛있게 즐기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빤히 그녀를 쳐다보는 것이 약간은 미안했는지 다시금 시선을 돌려 자기들끼리의 이야기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피웠냐?] 주형이 그녀의 모습에 약간은 놀란 듯 질문을 던져왔다. [오래 전부터.] 작은 소주잔에 가득 담겨있는 소주도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자 주형이 다시 가득 따라 주는 걸보고 그 잔마저 한입에 쭉-- 들이켜 버렸다. [천천히 마셔라.] [이 정도 가지고... 시험 잘 봤어요?] [그럭저럭] [어디 갈건데?] [고대 휴학한 놈이 어디 가려고 또 공부했겠냐? 뻔하지. 세상에 대학이 하나밖에 없는 걸로 알고 계신 울아버지 만족시켜드려야지] 시연은 피식 웃었다. 주형의 아버지 이야기는 자주 들었다 집안 모두가 서울대 출신이라 그 외의 대학은 대학취급도 안 하신다는 아버지. [넌 어디 생각해 둔 곳 있어?] [나도 세상에 대학이라고는 한군데 밖에 없는 걸로 아는 주인님을 만족시켜드려야 해] [주인님?] [응, 나의 주인님.] 시연은 다시 한잔을 또 마셨다. [울아버지도 보다 더 대단하신 아버진가 보구나.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말이야. 너도 나만큼이나 불쌍하구나] 시연은 그를 향해 길게 담배연기를 불어 내었다. [그래... 불쌍하지... 개 같은 팔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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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의 모습과 너무도 다르게 거친 말까지 서슴없이 하는 시연의 모습이 주형에게 너무도 낯설어 보였다. [시끄럽네. 조용한데서 한잔 더 할래?] [그러지 뭐...] 주형은 시연과 먼저 일어서며 남은 어린 친구들에게 술값에 보탤 돈을 남겨주고 밖으로 나왔다. [어디 갈까?] [적은 돈으로 술 많이 마실 수 있는 곳으로] [내가 사줄 테니까 괜찮은 곳으로 가자] [그냥 술이 있는 데면 다 좋아] 결국 두 사람은 숯불에 생삼겹을 직접 구워먹는 소금구이 집으로 들어가 기름이 잘빠져 노릇노릇하게 구워 가는 고기를 안주 삼아 소주를 또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술 잘한다. 솔직히 조금 놀라고 있는 중이야. 너 이렇게 술 먹고 담배 피는 모습에] [보기 안 좋아?] [좋아 보이진 않아] [이게 나야. 그 동안의 모습은 다 가면이야] [네 첫인상이 어땠는지 알아?] [어땠는데?] [순진해 보였거든] 시연은 망설임 없는 움직임으로 입안에 술을 털어 넣었다. [주형오빠는 좋은 가정에 풍족한 생활에서 부족함 없이 살아서 다 좋게만 보는 거야.] [너도 부잣집 딸처럼 보여.] [그래? ... 그렇게 보인단 말이지...] 시연은 주형이 따라준 잔을 다시 단숨에 들이켰다. [천천히 마셔.] [이 정도 가지고 뭘. 나 ...] 왠지 솔직히 자신이 어떤 사람이 털어놓고 싶었다. 주형이라면 그런 자신을 비웃지 않을 것만 같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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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하지만 쏟아내고 싶은 많은 말들을 결국은 도로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고기 더 먹어도 되?] [그래] 주형은 2인분을 더 추가하고 술도 한 병 더 추가를 시켰다. 시연의 주머니에서 호출기가 시끄럽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연달아서 계속... 번호를 보니 집이었다. 선영 언니겠지? [어디야?] [집] '집... 그래... 집...' [전화 안 해?] [이따가 하지 뭐] [그러지 말고 전화해라. 좀 늦는다고 그래야 편하게 마시고 들어가지] [그럴까?] 주형의 말대로 시연은 선영이 기다리지 않게 하려고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언니 나야!] [어디야?] 선영의 목소리가 나올거라 예상했던 전화기에서 강혁의 잔뜩 화가 난 목소리가 튀어나와 순간적으로 수화기를 놓칠 뻔했었다. [대답해!] 아무런 말도 안 하는 그녀에게 더 화가 나는지 소리까지 지르고 있었다. 시연은 그냥 조용히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주형이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늦는다고 했어?] [응] [그래야 술을 먹어도 편하지. 내가 집까지 데려다 줄께] [됐어. 어린애야 내가] [위험하잖아.] [별걱정을 다하네. 얼굴이 무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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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처럼 말하는 시연의 얼굴을 주형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니 자신도 모르게 강한 호기심을 담고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술 더 줘. 자작하는 사람 옆에 앉으면 3년간 재수 없는 거 알지?] [그래. 마셔라] 강혁은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당연히 집에 와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녀는 아무런 연락도 없이 들어와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행방을 모르겠다는 선영에게 괜스레 화를 내고 시연에게 호출을 했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무런 말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린 그녀에게 더 화가 치밀어 올라 미칠 것만 같았다. 시계는 벌써 12시를 넘어 1시에 가까워 오고 있었다. 에릭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회장님] [시연이 친구 집에 가봐. 거기도 없으면 찾아내서 데려와] [예 알겠습니다.] 다시 시연의 호출기가 시끄럽게 울렸다. 은정이었다. 늦은 시간의 호출에 시연은 걱정이 되어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생긴 거야?] [너 어디야?] [그냥 술 한잔하고 있어. 왜?] [저기... 그게... 우리 집에 에릭이라는 사람이 왔어.] 은정의 말에 전화기 너머로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 사람 바꿔 줘.] [시연아 미안해. ] [은정아. 괜찮아. 신경 쓰지마.] 그녀 말끝으로 부스럭대며 수화기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저..대학로에요. 걸어가면 20분이면 간다고 전해주세요] [내가 태우러 가지] [혼자 갈거니까 그럴 필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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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이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시연을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쁜 놈 은정이 한테까지 가다니...' 자리로 돌아와 시연은 가방을 챙겨 들었다. [가려고?] [응. 다음에 한잔 더하자. 오늘은 그만 가야겠어] [데려다 줄께] [아니야!] 그녀가 너무 차갑게 거절하자 주형의 표정이 굳어졌다. [내 말은... 혼자 가고 싶어서 그래. 미안해] [뭐.. 그래.] [고마웠어. 오늘.] 그녀에게 잘 가라는 말을 하고 주형은 멀어지는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힘없이 술기운에 조금은 비틀거리는 발걸음이 불안해 보였지만 그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러나... 결국은 그녀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안전하게 집에 도착하는 것을 봐야 맘이 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술 냄새가 났다. 자신이 내쉬는 숨에서 스스로 술 냄새를 느끼는 걸 봐서는 많이 마시긴 한 것 같았다. 시간이 갈수록 어질어질한 정도가 심해졌지만 의식은 또렷하기만 했다. '넌 이제부터 나를 즐겁게 해주기만 하면 되니까' 나쁜 놈 ... 빌라 가까이 가기도 전에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를 맞이했다. 누군지 안 봐도 안다. [보기 좋군] [......] [누구랑 있었지?] [남자] 강혁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무의식중에. 그러나 그녀의 다음 행동에 강혁은 잠시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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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약간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그녀의 이마를 그의 어깨에 대며 기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른쪽 어깨에 매여진 가방이 주르륵 바닥으로 흘러냈다. [나... 세상에 그렇게 잘못하고 살지 않았어요.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너무 나를 힘들게 하진 마세요. 부탁이에요...... ] 그녀의 말에 강혁이 얼굴이 굳어지고 있었다. 아주 복잡한 표정으로... [나... 지금도 충분히 힘들어요] 시연의 가는 몸을 강혁의 두 팔이 감싸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에 감겨오는 그의 팔이 그녀의 남은 인생을 올가 매는 덫 같아서 숨이 막혔다.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는 늪 같아서 미칠 것만 같았다. [걱정 마라. 곧... 자유로워질 테니까] 강혁의 두 팔이 힘껏 그녀를 자신의 품에 가두고 있었다. 술기운에 취해 비틀거리는 그녀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선영에게 넘겨준 뒤, 강혁의 마음이 무거워지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벽에 걸린 사진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조금전의 미안한 마음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받은 만큼 돌려준다.' 홈 바로 가서 브랜디를 꺼내 얼음도 넣지 않은 스트레이트로 단숨에 마셨다. 40도의 알콜이 목을 태울 듯이 화끈거렸다. 잔을 움켜 쥔 그의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엄마.!] [나가] [엄마!] [너만 아니면 내가 이렇게 살 필요도 없어. 제발... 나가] [엄마...] [엄마라고 부르지마. 난 니 엄마가 아니야. 니가 우리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 버렸어. 누가 니 엄마라는 거야? 너 세살 때 내가 주어다 키운 애야. 그러니까 나가!! 내가 이렇게 된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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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야.. 으..흑...] 주저앉아 울어버리는 엄마. 입가가 누군가에게 맞아 터져 피가 흐르는 모습이 두 모녀가 똑 같았다. 그러나 친딸이 아니라고 외쳐대는 엄마의 모습에 선영은 하늘이 무너진 거 마냥 주저앉았다. [아니지? 거짓말이지?] [거짓말?... 니 아빠와 난 O형이야. 넌 AB이지. 그래도 못 믿겠어?] [엄마.. 아니지? 그렇지? 아니라고 해. 아니라고 내가 친딸이라고 말해 !!!!!!!!] 시연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되돌아 온건 그녀의 남은 희망마저 무참히 짓밟아 버리는 차가운 한마디뿐이었다. [넌 내 친딸이 아니야!!] 눈에 핏줄까지 세우며 시연을 향해 이빨을 악물며 이야기하는 엄마의 모습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절망이란 걸 맛보았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거짓말이야] [나가... 제발 나가버려!!!!!!!]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늘 머릿속에서 악몽처럼 머물던 기억이 이젠 꿈이 되어 나타났다. 지겹도록 머리를 떠나지 않던 기억이었는데... 현실에서 그녀를 괴롭히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젠 꿈속에서까지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처음 엄마에게 그 소리를 듣던 이후로 그녀는 그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정체성이 기초부터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잊으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기억은 언제나 흐려지지도 않고 그녀를 힘들게 만들었다. 머리를 쓸어 넘기자 땀이 흥건히 손에 묻어 났다. 입안이 바싹 바싹 마르고 있었다. 침을 삼키자 목에 커다란 대못이라도 박혀 있는지 날카로운 고통이 느껴져 얼굴을 찡그렸다. 두통에 속까지 쓰리고 게다가 열까지 온 몸을 못살게 굴고 있었다.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가 물을 꺼내 한 컵 가득 따라 마셨다. 삼킬 때마다 목이 따끔거려 아팠지만 위를 쓸고 내려가는 시원함에 기분이 나아지고 있었다. 어지러워 냉장고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어둠 속에서 웅크려 앉은 체 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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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빌라 안을 둘러보았다. 도대체 자신은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그러고 있으면 다음 사람이 물을 마실 수 없잖아.] 강혁의 목소리였다. 그는 왜 이 시간까지 자지 않고 있는 것일까... 시연은 그를 위해 냉장에서 비켜 옆의 싱크대에 옮겨 기대었다. 냉장고에서 작은 에비앙 병을 꺼내 시원하게 들이키며 그는 식탁의 의자를 꺼내 앉았다. [당신... 불쌍해요] 시연의 말에 남자의 눈썹이 씰룩였다. [정신이 피폐한 사람이에요. 그렇지 않고는 인간을 애완동물로 키울 생각을 할 수 없을 테니. 아마... 나만큼 불쌍한 사람이 틀림없어요.] [그래? 불쌍한 사람끼리 즐겨보는 건 어떨까?] 그녀의 비꼼에도, 성공한 남자의 자존심을 긁는 말에도 그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받아치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랬어요? 나 말고 다른 사람도 키워본 적 있어요?] [아니] [내가 시험대상이군요. 아마... 실패할 거예요. 난 별로 말 잘 듣는 애완동물은 아닐 테니.] [애완동물이 말을 너무 잘 들으면 그것도 매력이 없지.] [당신... 정말 불쌍한 사람이에요] '나만큼......' 싱크대에 기대 한쪽 다리를 쭉---뻗고 한쪽 무릎을 세운 체 시연은 머리를 뒤로 기대었다. 그러자 그녀를 바라보던 강혁의 시선과 마주쳤다. 도전적인 그녀의 시선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눈의 강혁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히고 있었다. [넌...... 나에게 익숙해 질 거다. 그리고 나하고 있는 동안은 네가 원하는 것은 다 누리게 해주지. 물질적으로 말이야.] [물질에 만족 못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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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풋--- 나를 모르는 군요. 이 싸움에서 누가 이길까요? 우리 관계가 시한부이겠지만 이 관계가 끝난 다음 누가 더 힘들어할까요?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은 속정이라는 것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자신이 키우던 동물이 집을 나가거나 죽거나 혹은 어쩔 수 없는 사정에 의해서 다른 집에 보내면 두고두고 걱정을 하고 생각하고 안타까워한 다죠... 그러나 동물은 금방 옛주인을 잊고 새로운 주인에게 적응을 하고 행복하게 지내요. 당신도... 처음 키운 애완동물 때문에 가슴아파할 일이 있을 거에요.] [그건......] 강혁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의자를 밀치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때까지도 두 사람은 눈싸움이라도 하듯이 서로를 향하던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주인이 사랑을 주었을 때뿐이지. 넌 그걸 잊으면 안돼. 난 단지... 너이기 때문에 키우는 거야. 네가 아니면 의미가 없는 일이거든.] [감사해야 하나요?] [아니. 왜 내가 너를 키웠는지 알게 된 다음에 감사할지 아니면 미워할지 결정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하죠] 강혁이 무릎을 구부려 그녀와 눈 높이를 맞추었다. [넌 제법 키울 재미가 있어. 생각보다 똑똑하거든.] [감사합니다. 주인님. 그것이 칭찬이라면 말이죠.] 강혁의 차가운 미소와 시연의 차가운 미소가 서울의 겨울을 성큼 앞당기는 것 같았다. ----------------------------- 다음편에 제가 다녀온 겨울바다에 대해 써볼까 해요 예정보다 하루 일찍 서울에 도착해.... 글을 올립니다.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 차가운 사랑 5장 4. 겨울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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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앞으로 기울이자 그에게도 약간의 알코올 냄새가 풍겼다. 알코올이 그의 숨결과 섞여 달콤한 향처럼 느껴졌다. 그의 오른 손이 그녀를 향해 뻗어와 목까지 꽁꽁 잠긴 남방의 가장 윗단추에 손이 올라갔다. [네 세대와는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나 때는 이런 말이 유행을 했었거든] 능숙한 솜씨로 단추 하나를 쉽게 풀러버리자 깃섭이 약간 벌어지며 하얀 그녀의 목선이 드러났다. [단추 하나를 풀고 다니면 지성] 또 다시 그의 손이 아래로 미끄러지며 두 번째 단추에 손이 머물렀다. [유치하긴 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다시 그의 손이 두 번째 단추를 만지작거리자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며 규칙적으로 쉬던 숨의 박자를 놓쳐버렸다. 불규칙적으로 숨을 들이키자 그녀의 가슴이 평소보다 긴장으로 팽팽하게 부풀어올랐다. 그 순간 다시 톡- 하니 두 번째 단추가 풀려졌다. [두개를 풀고 다니는 사람은 지성] 조금 더 벌어진 앞섶 때문에 하얀 브레지어의 어깨 끈이 보였다. 길고 매끄러운 그의 손이 다시 세 번째 단추에 머물렀다. 그녀의 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기분이었다. [세 번째 단추까지 풀고 다니는 사람은 야성이라고 하지] 세 번째 단추마저 가볍게 풀러져 버리자 깨끗한 느낌의 흰색의 브레지어 레이스가 드러났다. 차가운 손이 그녀의 목에서부터 쓸고 내려가 브레이저 위에 멈추었다.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게 손바닥으로 그대로 전해져 오고 있었다. 손끝으로 그녀의 맨 살을 부드럽게 작은 움직임으로 쓰다듬자 시연이 눈을 감아버렸다. 시연은 그의 손가락이 뜨거운 그녀의 몸 위를 만질 때마다 온몸에 퍼진 쾌락이라는 세포가 눈을 뜨는 것 같아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그의 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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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위로 올라오더니 그녀의 볼을 감싸고 있었다. [아직은 아니야.. 아가야] 숨결과 함께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에 안도감이 퍼짐과 동시에 실망감도 퍼지고 있었다. [네가 맘에 드는 이유가 뭔지 아나?] 그녀가 눈을 뜨고 시선을 맞추자, 강혁은 그녀를 향해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너의 냉정함이 맘에 들어. 그건 너를 위해서도 좋을 테니... 그래야 ... 상처도 덜 받을 거야. 결과적으로 말이야. 알았지? 끝까지 그 냉정함을 잃지 마라. 너를 위해서.] 차가운 손만큼이 차가운 그의 입술이 깃털처럼 가볍게 스치듯 입술을 스치고 지나갔다. [자라.] 그가 우아한 동작으로 일어서 그의 침실로 들어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시연은 움직일 수 없었다. [휴-----------] 언제나 그와 잠깐의 대화를 나누고 나면 기진 해 버린다. 온몸의 기를 그가 다 빨아들이고 가버린 느낌이었다. 잘 돌아간 보일러에 의해 따듯해진 레드오크의 나무바닥이 그녀에게는 차갑게만 여겨졌다. 하이드로시의 싱크대 표면의 번쩍거림도 고급스럽다는 느낌보다는 차가운 느낌만이 더하게 할뿐이었다. 긴 한숨을 몰아쉬며 앞으로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시연은 열이 올라 후끈거리는 몸을 이끌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와 조용히 문을 닫았다. 강혁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뒤로 얼마간은 시연에게도 평화가 찾아 왔다. 아마 수능 점수가 나오기 전까지는 이대로 평화로울 것이다. [시연아∼] [왜?] [삐삐 소리 나는데..]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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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출기를 확인하자 주형의 목소리가 녹음되어 들여왔다. "학원 애들 몇몇이랑 겨울바다 보러 가기로 했는데, 너두 생각 있으면 연락해" 전화기를 내려놓고 시연은 선영에게 쪼로록 달려갔다. [언니 나 1박 2일 쯤 어디 다녀와 되?] [왜?] [학원 애들이 겨울바다 보러 간다고 연락 왔는데... 나도 가고 싶어] [글쎄... 회장님께서 허락을 하셔야] [서울에 없잖아. 갔다와도 우리 둘 다 입 다물고 있으면 모를 거야] [하지만...]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잖아. 왔다간지 얼마 도지도 않은데 또 오겠어. 언니 응? 나... 가고 싶어] 시연의 애원에 선영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언니야∼∼] 선영의 옆구리를 간질거리며 시연은 애교를 피우고 있었다. [이번만이야. 1박 2일 약속 지켜야 해] [역시 언니는 정말 너 멋져. 고마워. 나중에 복 받을 거야] 선영의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시연은 주형에게 그녀도 갈 것을 알렸으며 멤버가 정해지자 사람들 각자 준비물을 챙겨 고속버스 터미널에 모여 들뜬 마음에 다들 시끄럽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모두 18명이었다. 27석이 전부인 우등고속에 18명이 타자 거의 전세 낸 관광버스 마냥 그들의 위세로 버스 안이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어른들도 그런 그들의 행동을 조금은 넓은 아량으로 눈감아 주고 있었다. 속초에 도착해서도 버스를 타고 낙산해수욕장에 도착해 콘도식 민박을 잡고 모두들 바닷가로 달려나갔다. 생각보다 날씨가 좋지 않아 바람이 세게 불고 타도도 거칠게 일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들 수능도 끝났고 집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에 소리를 지르며 넓은 백사장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축구공까지 챙겨온 사람들은 백사장에서 선을 그어놓고 족구를 하고 있었으며 여자들은 불어오는 바람을 조금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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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덜 느껴보고자 따닥따닥 붙어서 백사장에 발자국을 남기며 걷고 있었다.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혼자 덩그러니 모래에 앉아 하얗게 부서지는 거친 파도를 보고 있던 그녀의 몸이 갑자기 붕--- 위로 올려지더니 와--- 하는 남자들의 웃음소리가 그녀의 귀에 시끄럽게 들렸다 . [야--빠뜨려!]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안---돼---] 를 외쳤지만 이미 남자들은 자신의 옷이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물 속으로 데리고 가더니 그네 마냥 하나, 둘, 셋을 외치며 박자를 맞추어 흔들다가 멀리 물 속으로 던져 버렸다. [풍---덩 !] 물에 빠지는 순간 파도까지 밀려들어와 짜운 소금물과 거칠게 치던 파도가 뒤집어 놓은 바닥의 모래까지 한꺼번에 입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뭐야!!!!!!!!!!!! 아우 짜...!∼ 내가 당하고만 있을 줄 알아? 물귀신 작전이다!!!!!!!!!] 홀딱 젖어 차가운 겨울바람에 이까지 부들부들 떨렸지만 시연은 자신을 물에 빠뜨린 사람들을 잡으러 다니기 바빴다. 그러다 누구라도 하나 잡히면 이미 물을 잔뜩 먹은 자신의 코트로 그 사람의 옷에 매달려 젖게 만들며 물 속으로 끌어 당겼다.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그녀에게 잡힌 사람들은 거의 발악을 하며 안 빠지려고 버둥거렸지만 시연은 끝내 그들을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가고 말았다. 추워서 입술이 퍼렇게 변해갔지만 물에 빠진 사람이나 구경하는 사람이나 모두들 즐겁기만 했다. 여기저기서 폭소가 터지며 얼마쯤 지나서는 18명 모두 젖은 옷이 되어 물 속에서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이 겨울잠바나 코트만 아니면 이들이 노는 장면을 보고 여름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이들은 신나게 물 속에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 선영은 연락도 없이 들어서는 강혁을 보고 놀라서 한참을 말도 못하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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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못올데라도 왔나?] 지나치게 놀라고 긴장하는 선영을 항해 강혁은 고용주로서 위엄이 가득한 말투로 한마디 툭 던졌다. [아...아닙니다. 회장님] [집이 조용하군. 시연이 외출했나?] 소파에 느긋한 자세로 앉아 집안을 휘 둘러보며 자신이 왔는데도 나와보지 않는 시연을 찾고 있었다. [저... 그게...] 직감적으로 집에 없음을 느꼈지만 선영의 반응으로 봐서 단순한 외출이 아닌 듯 싶었다. [어딜 갔지?] 갑자기 목소리가 착--- 가라는 강혁 때문에 선영의 심장이 두려움으로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저.. ] [솔직히 말해.] [학원 친구들하고 겨울바다에 간다고 새벽에 나갔습니다.] 그녀의 말이 마침과 동시에 넓은 빌라 안에 정적이 흘렀다. 강혁의 곁에 서 있는 에릭을 향해 도움의 눈길을 보냈지만 에릭은 그저 어깨를 한번 으쓱 했을 뿐 다른 반응은 없었다. 곧... 강혁의 벼락같은 목소리가 떨어질 것이다. 선영은 시선을 내리깔며 눈을 질끈 감았다. [우리도 겨울바다나 한번 보러가지. 나쁘지 않아] 예기치 못한 강혁의 말에 선영는 놀라 둥그래진 눈으로 강혁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잘못들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열심히 표정을 살피었지만 느긋하게 입가에 생각에 잠긴 미소까지 짓는 그를 보니 자신이 잘못들은 건 아니다 싶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나 모든 걸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그가 예고도 없이 서울에 나타난 것하며 시연이 가 있는 바다로 가겠다고 갑작스럽게 결정을 하는 것이며 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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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회장과 시연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2년 동안 강혁의 통역겸 출장비서였던 자신을 갑작스럽게 시연의 가정교사 역할로 바꾸어 버린 뒤로 선영은 강혁을 이해하지 못했다. 시연이 그의 정부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족도 아닌데, 모든 것을 베풀어주며 그녀를 돌봐주고 있었던 것이다. [준비하지. 어디인지는 알고 있지?] [예 낙산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그래...그럼 낙산비취호텔 예약해 둬. 자네도 준비해. 겨울바다 보러가자고] 기분 좋은 미소까지 짓는 강혁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선영은 에릭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역시 어깨를 한번 으쓱 할 뿐 에릭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서둘러 강혁과 자신의 짐을 챙기고 선영은 두 사람을 따라 강릉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호텔에 짐을 풀고 해수욕장으로 이어진 작은 오솔길을 따라 해변으로 내려가는 강혁을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해변에 다다르기도 전에 사람들의 시끄러운 함성이 그들이 있는 곳까지 들리고 있었다 .해안 가상으로 작은 블록으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강혁은 멀리 난쟁이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쯤 다가갔을 때는 걸음을 멈추고 그가 찾고자 했던 한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체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야 춥다.. 그만 들어가자] [이왕 젖은 건데 더 놀다 가자] 들어가자는 패거리와 더 놀자는 패거리로 나뉘고 있었다. 그러나 다들 오랜만의 해방감에 더 놀자는 쪽으로 기울었고, 물 밖보다 물 속이 더 따뜻하다는 약간의 매력이 도로 물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주형이 슬금슬금 뒤에서 다가와 그녀의 목에 팔을 두르며 헤드 락을 하며 물 속으로 밀어 넣어 버리자 불시에 당한 습격으로 시연은 또다시 많은 바닷물을 먹어버렸다. 콜록거리며 재빨리 몸을 일으키려했지만 코트가 흠뻑 젖어 무거워 움직임이 둔하기만 할뿐이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서 주형을 향해 갖은 협박의 말을 하며 도망가는 그의 팔을 붙잡아 물 속에 집어넣으려 안간힘을 섰지만 남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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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당해 내기란 어려웠다. 그러나 커다란 파도의 때문에 두 사람이 동시에 중심을 잃었고, 시연은 이때다 싶어 그를 밀어 넘어뜨리려 했지만 주형은 오히려 그녀를 잡아채고 있었다. 그러자 시연의 몸이 그의 몸 위로 기울어지고 있었으며 우연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가 그랬는지 두 사람의 입술이 물 속에서 부딪치고 말았다. 너무 놀라 바닷물에서 눈을 떠버리는 실수를 저질러 따끔거리는 눈 때문에 놀라 몸을 일으켜 세우고도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고 계속 비벼대고 있었다. 몇 방울의 눈물이 흘러나오고서야 겨우 눈을 떴을 때는 주형은 이미 저만치 멀리 가 있었다 결코 우연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설마... [데려와] 강혁은 주형의 행동을 정확하게 남자로서 알 수 있었다. 우연을 가장한 접촉. 그 장면을 본 순간 티없이 웃으며 즐기는 그녀에게 후해지려는 마음이 일순간 싸늘히 식어버리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 남자를 멍하니 쳐다보며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는 시연의 태도도 맘에 들지 않았다. [예 회장님] 에릭이 절도 있는 대답을 하고 푹푹 빠지는 모래를 밟으며 시연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검은 색 양복에 검은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는 남자가 무리에 접근을 하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흘끔흘끔 에릭을 쳐다보았지만 에릭은 군더더기 없는 행동으로 시연에게 다가갔다. 사람들의 비명소리, 서로를 향한 놀림 등과 같은 시끄러운 잡담이 조용해지자 시연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에릭을 발견하는 순간 이제까지 그녀를 들뜨게 만들었던 해방감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늘 그녀를 힘들게 만드는 답답함이 또다시 가슴을 꽉 매우는 것 같았다. 에릭의 뒤로 동상처럼 서서 자신을 노려보는 강혁도 발견했다. 강혁의 뒤로 어쩔 줄 몰라하는 선영도... [나와. 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서] 시연은 에릭의 무뚝뚝한 말에 그를 한번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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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와서 끌고 가보시죠] 무릎까지 물에 들어가 있는 그녀가 그렇게 대답을 하자 순간이었지만 에릭의 얼굴에 난감함이 떠올랐다. 그 표정에 시연은 쾌감 비슷한 승리의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러자 에릭의 얼굴이 다시 굳어지며 진짜로 물 속으로 들어오려는지 몸을 움직였다. [그럴 필요 없어요. 나갈 거니까] 에릭은 작은 꼬마인 그녀에게 놀림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당당한 그녀가 에릭의 마음에 드는 것은 전부터 조금씩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마도 회장은 이제껏 계획을 실행으로 옮기지 않는 이유도 자신과 비슷한 이유 때문일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물 밖으로 나오자 바람 때문에 체감온도가 뚝--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두 팔을 팔짱을 끼며 몸을 웅크렸지만 이미 젖은 상태였기 때문에 한기는 뼈 속까지 스며 오는 것 만 같았다. 에릭이 자신의 코트를 벗어 그녀에게 걸쳐주려 했지만 고개를 흔들어 거절을 표시했다. 그리고는 강혁에게 걸어가 눈으로 웃으며 인사를 했다. [요즘은 장사가 잘 안되나요? 제 뒤만 따라다니고 계시고.] [주인의 허락 없이 돌아다니는 것에 따끔하게 주의를 주려고 할 뿐이야. 조금 화가 나기도 했고.] 그의 말에 신경을 쓰기도 전에 입술이 부르르 떨리며 이가 따닥따닥 부딪쳤다. [춥네요. 따뜻하게 해줄 거죠?] 그러면서 시연은 그녀의 젖은 옷으로 강혁의 팔에 매달리며 바싹 붙어 섰다. 그러자 금새 그의 코트가 물이 스며들며 젖어가고 있었다. 에릭과 선영이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했지만 시연은 모른 척 더 그에게 바싹 매달리고 있었다. [어머...깜빡 했어요. 다 젖어 버렸네요...] 그의 젖은 부분을 보며 시연은 새침하게 말을 했지만 속으론 무척 고소해 했다. [이거 무지 비싼 옷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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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의도를 충분히 파악하고 있던 강혁은 코트를 벗어 그녀의 어깨 위에 걸쳐주며 목만 나오도록 앞섶까지 여미어 주었다. [가자] [제 짐 가져와야 해요] 그녀의 의도대로 화를 내거나 열받아 하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시연은 내심 실망하는 마음이 들었다. 나쁜 놈...언제 어디서나 냉정하다니. [에릭하고 윤실장이 가져 올 거야] 그의 말이 떨어지자 에릭은 잽싸게 몸을 움직였다 모래까지 흠뻑 묻은 신발을 하고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시연은 자신의 머리카락이 고드름처럼 꽁꽁 어는 걸 보았다. 물이 뚝뚝 떨어지던 머리카락은 뻣뻣하게 굳어서 툭- 치리라도 하면 부러질 것 같았다. 호텔 정문에 설치된 모래 털이 바에 신발을 털고 그를 따라 바람이 없는 로비로 들어서자 그것만으로도 몸이 풀리는 것 같았다. 추운 곳에 있다가 따뜻한 실내로 들어와서인지 그녀의 얼굴이 금새 붉어져 버렸다. 마치 일부러 볼에 붉은 볼 터치라도 한 것 마냥. 엘리베이터에 타자 붕-- 하는 느낌에 속이 울렁거리더니 두통이 시작되고 있었다. 찬바람을 너무 오래 맞아서 그런 것 같았다. [에---취∼] 가볍게 재채기를 하는 그녀를 강혁이 흘긋 돌아보았다. 이제까지 자신만의 생각에 잠긴 사람 마냥 앞서 혼자 걷더니 이제서야 그녀의 존재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바보들처럼 뻔히 감기 걸릴 거 알면서 겨울바다에 들어가다니, 한심하군] [다들 입으로는 그렇게 말을 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내부를 들어다 보면 자기도 저렇게 바다에 뛰어 들어 봤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죠. 다만 표현하지 않을 뿐이지. 아마 당신도 그럴걸요... 바보. 자기 감정하나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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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혁은 그저 그녀의 말에 피식 웃어 줄뿐이었다. 아마 그녀의 말이 사실인지도 몰랐다. 빼앗겨 버린 학창시절. 가족과 함께 즐거운 기억들을 만들며 보내도 모자란 시간들을 그는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했으니까. 그의 행복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면서 그 자신도 무너지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며 살아야 했는지 여기 그의 옆에 서 있는 작은 여자는 모를 것이다. 얼마나 치열하리만큼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는지 그녀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가지지 못한 추억, 그녀가 친구들과 넓은 모래사장을 뛰어다니는 걸 굳이 말리 않은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비록 복수를 위한 중간 매개물일 지언정 그녀에게서 그 작은 즐거움마저 빼앗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자신을 향해 바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저도 유치한 말 한마디 해줄까요?] 그가 궁금하다는 듯이 그녀에게 다시 한번 시선을 돌리자 여전히 퍼렇게 변한 입술을 바들바들 떨면서 시연은 입을 열었다. [바보는 바:바라볼 수록 보: 보고 싶은 사람.이란 뜻이래요. 어떤 정신나간 시간 넘쳐나는 사람이 이런 말을 만들어 냈는지. 진짜 바보들은 이런 말 주고받으면서 히히덕 대겠죠?] 강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바람 빠지는 것 마냥 풋- 소리를 내며 웃고 말았다. 띵 ---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그가 기어코 소리를 내어 웃고 말았다. 시원한 웃음소리. 듣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후련한 웃음소리였다. 그런 그의 뒷모습에 시연은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고 있었다. 결코... 마음을 열어주고 싶지 않은 사람이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고 여유 있게 그녀의 마음에 조금씩 들어오고 있었다. 마치 그것도 그의 계획의 일부인 것 마냥...... 객실에 들어서자 굳이 말하지 않아도 특실인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흔히 말하는 디럭스싸이즈의 왕 커다란 침대하며 복사기에 팩스까지 있는 방이 그런 방이 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니까. 게다가 그녀가 지내고 있는 성북동 빌라의 구조처럼 거실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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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욕실로 들어가서 옷이나 벗어.] [갈아입을 옷이 없는데요] [가운이라도 입고 있어.] 말을 잘 듣는 아이처럼 그가 시키는 대로 욕실에서 옷을 다 벗어 던진 후 샤워부스에서 뜨거운 물을 틀어 놓고 있으려니 온몸이 나른해 지며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속옷에까지 들어왔던 모래가 여기저기 그녀의 몸에까지 붙었었는지 바닥에 모래가 쓸려 나가는 것이 보였다. 머리에서도 짭짤한 소금물이 흘렀다. 샴푸를 듬뿍 짜서 머리 속에 모래까지 다 씻어낼 요랑으로 벅벅 문지르며 개운하게 씻어 내렸다. 비누칠도 두 번씩이나 하며 소금물을 씻어냈다. 그러자 한결 기분도 좋아지고 몸도 나른해 지며 한숨 푹 자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돌돌 말고 가운을 있는 대로 여미고 나오자 그가 신문을 펼쳐들고 읽고 있기에 시연은 조용히 빈방을 찾아 편하게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방금 샤워하고 난 뒤의 뽀송뽀송함과 맨살에 닿는 바삭한 침대 시트가 너무도 기분이 좋았다. 훈훈한 실내의 기운도 그녀가 잠이 들도록 한몫 거두고 있었다. 그래서 에릭과 선영이 그녀의 옷가방을 찾아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깊은 잠에 빠져든 뒤였다. 저녁때가 되도록 일어나지 않는 그녀를 놔 둔체 세 사람은 먼저 식사를 하고 객실로 돌아왔다. 시연이 깨어나면 배가 고플 거라는 생각에 선영이 이것저것 사들고 들어와 냉장고에 넣는 걸 보며 강혁은 지난 3년 동안 둘 사이에 친자매 같은 끈끈한 애정이 생겨났음을 알 수 있었다. 에릭과 선영에게 자유시간을 주자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시연이 깨어나기만을 지루하게 기다리며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베스트셀러를 읽어 내리고 있을 즈음 그녀의 방문이 끼---익 소리가 나며 열리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 다음 하얀 가운에 쌓인 그녀의 팔이 문 밖으로 툭-- 떨어지는 것이 보였을 때 그는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차가운 사랑 6장 흐릿한 시선이었지만 그가 다급한 발걸음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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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있는 그녀를 급하게 안아들고 침대에 눕히는 손길도 당황했는지 거칠기만 했다. 막 누군가를 부르려는지 전화기를 집어드는 그의 팔을 그녀가 잡아 다녔다. [해열제면 되요] [그래.] 한숨처럼 그녀의 말에 대답을 하고 그는 프론트로 연락을 취했다. [여기 해열제 부탁합니다.] 바로 가져다주겠다는 직원의 대답을 듣고 그는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잔뜩 걱정스런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강혁을 향해 시연이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 [꼭... 아빠 같은 눈이네요. 그 눈 말이에요. 지금도 이해를 못하고 있지만 아빤 언제나 미안함과 원망을 담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어요. 그런데 지금 당신 눈이 그러네요] 그녀의 말에 강혁의 심장이 따끔했다. 진실을 보는 눈... 그녀는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살만 한 것 같군. 말이 많은 걸 보니...] [아니 아파서 죽을 것 같아요] [그럼, 죽어.] [고마워요. 허락해 줘서] 시연은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하고는 온몸을 휘감는 고통에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아마.... 자고 나면 나아지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를 하며. 이마에 차가운 손이 올려졌다. 열이 심해지면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간격도 짧아지며 규칙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마를 만져주는 손길에 위안이 되는 것 같았지만 이렇게 그녀가 약해짐 틈에 받는 위로로 그의 존재가 그녀의 마음에 들어오는 건 달갑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그녀가 냉정함을 잃는 다면 남는 건 지금 그녀를 힘들게 만드는 고열보다 더 큰 고통일 테니... 힘이 없는 작은 손으로 그녀의 이마에 올려진 그의 손을 밀어냈다. 그 순간 강혁의 마음에 엄청난 상실감이 몰려와 버려 당황함에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족히 40도는 되는 열에 시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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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도 그녀는 그의 손을 밀어내 버렸다. 사심 없이 걱정스런 마음에 그렇게 해준 것뿐이었는데, 그녀는 그의 그런 작은 몸짓까지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 나중에 혼자 남게 됐을 때 힘들고 싶지 않아요. 어차피... 사랑을 줘서 키울 거 아니면 쓸데없는 희망 같은 거 갖게도 하지 마세요. 지금 이러는 거 나중을 생각해보면 더 잔인한 행동이니까] 숨쉬기도 곤란해하는 그녀가 힘겹게 뱉어낸 말에 강혁은 피식 웃었다. [그건 나중 일이지. 미리부터 미래의 일로 걱정을 만들 필요는 없어.] 시연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난... 난 말이에요. 가장 아주 기본 적인 사람한테서 믿음을 배신당했어요. 하늘이 무너진다는 말... 그날 나는 그 뜻을 온전히 다 이해할 수 있었거든요. 그런 상실의 아픔 같은 거 또 겪고 싶지 않은데... ] 열에 의해 충혈 된 눈에서 눈물이 맺히더니 기어코 얼굴위로 흘러내렸다. [자꾸... 내 맘에...] [그만!] 강혁은 그녀의 말을 자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거친 동작으로 전화기를 집어들어 에릭에게 연락을 취했다. [윤실장하고 당장 들어와. 시연이가 아프다.] [예 회장님]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쾅! 소리가 나도록 수화기를 내려놓고 그는 산만하게 방안을 왔다갔다 서성이고 있었다. 잠시 후 호텔 직원이 그가 주문한 것들을 가지고 와서야 움직이던 것을 멈추었지만 그의 얼굴을 굳어진 체로 펴질 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곧 선영과 에릭이 돌아오자 선영에게 시연을 넘기고 그는 그녀의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벌겋게 달아오른 시연을 보고 급하게 체온을 재던 시연은 체온계의 수은이 40도 부근에서 멈추어 있자 놀란 눈으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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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약 먹고... 한 숨 자면 좋아 질 거야] 강혁은 자신의 침실로 돌아와 베란다 문을 열어 놓고 그를 당황스럽게 만든 그녀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절대... 이건 아니었다. 이런 애매한 감정은 계획에 없던 것이었다. 사업에 개인 감정이 개입되며 그건 100% 실패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지금 그의 가장 큰 계획에 그의 감정이 개입되려 하고 있었다. 복수심이라는 감정이외의 지극히 본능적인 다른 감정이 개입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멀리해야 할 복수의 대상의 딸에게... 거친 바닷바람이 그의 옷과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며 세차게 불어대고 있었다. 밤이지만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것이 보였으며 그의 심란한 마음만큼이나 바다도 조용하지 못했다. 바위에 부딪쳐 부서지는 파도소리가 소음에 가깝게 컸으며 바람소리 또한 웅-- 웅--- 거리며 사람의 심기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소나무가 흔들리면서 겨울의 바닷가는 폭풍 치는 여름날처럼 시끄럽고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지금의 그의 마음처럼. 새벽이 되면서 강혁이 있는 방문이 소리 없이 열리는 것에 흠칫 놀라며 돌아보았다. 시연이었다. 아직도 가운만 입은 체 였지만 그녀의 표정은 이제까지와 다르게 결연해 보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감기로 인해 잔뜩 쉰 목소리였다. [아니...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난 당신 말대로 절대 당신한테 마음 같은 거 열어주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도... 쓸데없이 내게 다정하게 굴지 마세요. 피차 시작부터 악연이었는데... 끝날 때만큼은 깨끗이 끝나도록 말이에요.] 강혁은 입술을 깨물었다. 뭔가 차갑게 그녀를 굴복시키는 말을 해야 했지만 아무런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하얀 가운데 싸인 그녀의 몸매가 궁금했고, 그녀에게 냉정해지라는 요구를 하는 붉은 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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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키스하고 싶은 욕구뿐이었다. '그래... 어차피 넌 내 노리개 일 뿐이야. 내가 즐기다 던져 버려도 무방한 노리개. 처음부터 그게 너의 역할이었으니까' 대답대신 그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부드럽게 얼굴을 감쌌지만 그의 눈만은 차갑게 번득였다. [나의 이런 행동이 애정에서 우러나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라. 난 단지... 정찬을 먹기 위해 약간의 시간을 두는 것뿐이니까. 널 패스트푸드로 먹어치우고 싶지 않거든. 잘 차려서... 내 몸 아래서, 너의 욕구를 만족시켜 달라고 애원하도록 매달리게 만들고 싶을 뿐이야. 이제까지 내가 너에게 보여준 건 준비단계였을 뿐이야. 알아들어? 착각하지 마라. 다정하게 굴지 말라고? 어리석어. 그렇게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었다니 말이야. 분명 말해두겠는데, 난 애완동물에게 감정적으로까지 잘해줄 마음은 없어. 다만 내 즐거움을 위해 필요해 의해 곁에 두는 것뿐이지. 알아들었나?]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질문이었다. 뜨거운 입술에 차가운 그의 입술을 부딪치며 어쩌면 그는 최근 들어 그의 머리에 자주 떠오르던 그녀에 대한 영상을 자유로이 지워버릴 수 있다고 자신했는지도 몰랐다. 이제까지처럼 필요에 의해 여자들과 밤을 보낸 것처럼 그녀에 대한 것도 그와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뜨거운 입술만큼이나 그의 온몸이 불길에 휩싸이며 그의 자신에 찬 생각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늪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늪. 키스할 때마다 그의 몸은 그녀의 모든 것에 문을 열듯 더 많은 것을 갈구하고 있었다. 좀더... 좀더... [넌... 지나치게 건방져. 점점... 그게 맘에 들지 않으려고 해. 순종적인 것도 재미없지만 내 감정까지 임의해석하는 너의 그 태도는 내 기분을 상하게 만들고 있어. 조심해. 경고하는데... 한번만 더 이런 식으로 나오면 그땐 정말 재미없을 줄 알아.] 그녀의 가운 안으로 비집고 들어온 손이 충분히 성숙해진 아름다운 몸을 망설임 없이 애무하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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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의 키스 때문인지, 아니면 고열로 인한 현기증 때문인지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집요하게 그녀가 반응하길 기다리던 그의 입술이 작음 신음을 흘리는 그녀를 확인하고서야 멀어지고 있었다. [아가야...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내가 그 동안 너를 너무 편하게 해준 것 같구나. 네 자유는 오늘로서 끝이야.] 5. 그녀를 길들이다. 품위 있는 애완동물로... 그의 긴 키스가 끝남과 동시에 속삭임처럼 그녀의 귀를 간질거리던 그의 말에 시연의 온몸이 차갑게 식어버리는 느낌이었다. 사심 없이 웃어주던 모습들, 그녀를 따라 바닷가까지 와준 그의 행동들에 시연은 작은 희망 같은 것이 허락도 없이 자라 나는 것을 그냥 묵인하고 있었다. 아니 그 작은 희망을 부여잡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은정처럼... 이젠 뿌리를 내리고 안정적인 생활에 정작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녀의 닫힌 맘을 두드리는 그에게 그 문을 활짝 열어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대상을 잘 못 선택했다. 그는 처음부터 그녀를 무시하고 멸시하던 사람이었고, 그녀의 인격을 사람취급도 안 하는 잔인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희망을 품으려 했던 스스로가 한심하게 여겨졌다. [잘... 알겠습니다. 주인님. 너무 자유스러워... 저도 잠시 제 위치를 망각했던 것 같군요] 그녀의 입술에 낙인처럼 찍어 내리던 그가 멀어지고서야 시연은 그 만큼이나 차갑게 대답을 했다. [그래, 다음부터는 기어오르지 마라.] 강혁은 그녀의 앞에서 냉정히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던 시연은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지려는 것을 입술을 깨물며 참아내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 움직이기도 힘들어하는 그녀를 차에 태우고 서울로 향했다. 하지만 힘들어하는 것을 그에게 보이기 싫어 시연은 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아프지 않은 척 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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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고통이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의자에 기대어 깜빡깜빡 선잠에 빠져들기도 했으며, 얼마쯤 지나서는 그런 노력들이 부질없음을 깨달아 가고 있었다. 그가 이런 자신을 비웃든 말든 시연은 자신을 힘들게 만드는 고열을 이겨낼 힘이 없었다. 그냥.. 이대로 아파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며 자꾸만 감히는 눈을 억지로 뜨려했던 노력을 포기하고 편안히 눈을 감고 잠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가 바라던 대로 잠시 후 그녀는 그녀의 머리가 강혁의 어깨로 기울어지는 지도 모른 체 잠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 닿는 그녀의 볼이 뜨겁기만 했다. 그녀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자신의 무릎으로 머리를 눕히고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어제 밤의 그의 말에 얼마나 커다란 상처를 받고 있는지 그녀는 남김없이 얼굴에 모두 드러내고 있었다. 뭔가 모를 답답함이 자꾸만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 답답함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비겁자처럼 서둘러 미국행 비행기를 예약하고서도 그의 마음속의 답답함은 풀리지 않고 있었다. 잠시... 그녀를 자신의 침실로 끌어들이기 전 잠시동안 그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녀에 대한 호기심을 지울 작정이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욕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건 타고난 기본적인 것이니까. 단... 그 욕구에 개인적인 감정이 가미는 되는 것을 막고 싶을 뿐이다. 자신의 쾌락을 위해 그녀를 안는 것뿐이지, 매끄러운 피부가 못 견디게 그리워서도 아니고, 작고 앵두처럼 앙증맞은 입술이 탐이 나서도 아니고, 아침에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안은 체 깨어나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매혹적으로 그를 향해 탄성을 지르는 상상에 몸이 달아서도 아니다. 절대!!!!!!!!!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강혁은 서둘러 미국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대학 합격의 소식이 들리기가 무섭게 그녀 또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케네디 국제 공항에 내려 자동차로 한참을 달리는 동안에 선영이 자메이카만에 위치한 강혁의 대 저택을 향해 가고 있다고 언질을 주었지만 시연은 어디가 어딘지 스쳐지나갈 뿐 기억에 남지는 않았다. 아마도... 한국에서보다도 훨씬 더 나쁜 생활이면 생활이었지 더 낫지는 않을 테니까. 선영은 강혁의 집으로 가는 것에 들떠 있는지 그의 집이 야생동물 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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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역 가까이 있어 주변 환경이라든지 공기등... 생활하기에 아주 쾌적하고 아름다운 곳임을 강조하고 있었지만 시연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뉴욕 외각의 커다란 저택에 들어설 때도 입이 다물어 지지 않았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일들이 더 놀라게 만들었다. 커다란 철로 만든 대문을 지키는 경비가 둘 씩이나 되었으며 그곳을 지나서도 넓은 땅위에 가득 찬 나무들 사이의 길을 한참이나 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무들 사이를 지나 갑자가 펼쳐진 넓은 평원에 눈이 부실정도 하얀 물을 뿜어대는 커다란 분수가 눈에 들어왔을 때 시연은 언젠가 스쳐 지나듯 본 영국의 버킹검 궁의 무슨 정원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그들의 차가 집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어마어마한 건물 앞에 멈춰 서자 호텔에서처럼 40대 남자가 다가와 문을 열어주었다. 선영과는 이미 안면이 있는 사람인지 두 사람이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것을 시연은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선영이 과거에 그의 비서였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녀는 정말 영어를 유창하게 잘하고 있었다. [이분은 빌이야. 여기 집사를 맡고 계시거든. 필요한 게 있으면 이분께 말씀드리면 되] 시연은 선영의 설명에 빌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는 익숙지 않은 동양의 인사법 때문에 매우 당황하는 듯 했지만 예의바르게 그를 대하는 시연의 태도가 맘에 드는 듯 했다. 뭐라고 빠르게 영어로 말을 했지만 알아듣지 못한 시연은 당황스러워 선영을 돌아보았고, 그러자 빌은 미안한 듯 다시 천천히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의 안내를 받아 그녀의 방에 도착했을 때 시연은 처음 이 저택을 발견했을 때만큼이나 놀라 입이 다물어 지지 않고 있었다. 넓은 방안에 눈이 부시도록 햇살이 부셔져 들어오는 완전히 유리로 된 한쪽 면하며, 커다란 네 개의 기둥이 달린 침대하며, 그녀를 위한 화장대, 작은 티 테이블... 그의 말대로 물질적으로 지나치게 화려한 방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기다리던 또 다른 사람들 골프강사, 수영강사, 댄스강사 그리고 영어강사. 그는 왜 그녀에게 이 많은 것들을 가르치려 하는 것인지... 이런 것들을 다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만 했지만 그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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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는 불평할 권한이 없었기에 묵묵히 그것들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더욱 결정적으로 더 그녀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그녀가 이곳에 온지 거의 4개월이 다 되어 가는 데도 한번도 저택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와 마주하기 싫어서 그런 것인지... 가끔 에릭이 다녀가 그녀의 상황을 살피긴 했지만 그런다고 강혁의 소식을 전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언제가 되어야 이 집에 올까... 그녀도 모르게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시연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6개월쯤 지나 그녀의 퍼팅이 자연스러워져 필드에 나가도 될 만큼의 실력이 되었을 때 강혁은 선영과 함께 그녀를 불러내었다. 태어나서 처음 가보는 골프장으로... 미국에서의 6개월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서남아시아의 석유왕국의 공주들 부럽지 않은 풍족한 생활에 그의 말대로 누릴 것 다 누리며 지내는 생활은 뒷골목 시절의 그녀가 상상도 못했던 모습이었다. 필드에서 거의 6개월만에 만난 강혁의 모습에서 시연은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이 욱신거리며 통증이 느껴졌지만 시연은 그에게 향했던 시선을 돌려 잡았다. 그 말고도 두 명의 일행이 더 있었지만 시연은 그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다만 60대에 가까운 그들 일행이 시연에게 먼저 인사를 하기 전까지는... [혹시... 이세연양 아닌가?] 점잖은 매너를 가진 듯 목을 울려나오는 목소리가 품위가 있었다. 자신을 다른 누군가와 착각하는 듯한 인사말에 시연의 관심이 자연히 그들에게 기울어졌다. [네?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이름이 비슷하긴 하지만요. 저는 이 시연입니다.] 선영에게 지겹도록 받던 예절 교육이 이런 때 요긴하게 쓰이긴 했다. 시연의 말에 여자도 남자도 미안한 듯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실례했군요. 하지만 정말 닮았어요. 마치 쌍둥이 처럼요] 여자의 입에서 쌍둥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때 강혁의 표정이 냉소적으로 잠깐 바뀌었다가 사라지는 것을 에릭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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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그래요? 정말 궁금하네요. 저랑 그렇게 닮은 사람이 누군지요. 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되어 기쁩니다.] [우리도 기뻐요. 시연양 이야기는 한회장 통해서 들었어요. 한회장이 후원하는 장학생이라고?] '그가 후원하는 장학생이라고?' 그와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공식적인 위치가 장학생이라니... 사실 틀린 말도 아니지만. 시연은 강혁을 잠시 바라본 뒤 커다란 실망감에 젖은 눈으로 다시 그들을 향해 거짓 웃음을 만들며 예의 바르게 그들의 말에 대꾸를 해야만 했다. [제겐 너무나 큰 행운입니다. 회장님을 알게 된 것이 제 인생에 아주 커다란 도움이 되고 있으니까요] [시연 양이 영민 하니까 한회장의 눈에 들었겠지요.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에요] 한국에서 온 모 대학의 교수부부라는 두 사람의 친절한 말에도 시연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게다가 18홀의 게임을 시작한 이후로 어설픈 그녀의 실력에 그녀 스스로 더 짜증이 나려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장원영이라 자신을 소개한 장여사가 그녀를 다독였지만 시연은 내내 짜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왜 자꾸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지... 9번째 홀에서 강혁이 두 타만에 홀 컵에 공을 집어넣자 캐디를 비롯해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치며 축하를 하고 있었다 . 그러자 갑자기 조정운 교수가 시연에게 질문을 한가지 했고, 시연은 대답을 통해 이제까지의 꿀꿀한 자신의 기분을 한방에 날려보내기로 결심했다. [시연양 이렇게 두 타만에 홀 컵에 공을 넣는 것을 전문용어로 뭐라고 하는지 아나?] 시연은 그 질문에 이미 답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다른 대답을 했다. [그럼요. 정답은요 ' 회장님 나이스 샷'이에요] 그러자 강혁이 홀 컵에 공을 넣어 받은 박수보다 더 큰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으며 강혁의 옆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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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서 있던 에릭도 그 순간만큼은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그러나 강혁은 시연을 노려보며 엉뚱한 대답을 한 그녀를 나무라고 있었다. [교수님 정답은 엘버트로스에요] 강혁의 째림에 기가 죽어 힘없이 정답을 다시 이야기했지만 조교수는 유쾌하게 시연을 토닥여주었다. [난 첫 번째 대답이 더 맘에 드는데 하하하하.......] 이로써 오전 라운딩이 끝나고 간단한 점심식사에 들어갔다. 강혁은 교수부부와 스스럼없이 가까워진 시연을 몰래 한번씩 보았었다. 아무래도 그녀에게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무언가가 있어 보였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그의 부모님의 친구였던 조용운교수 부부인데... 그런데 그들이 시연의 엉뚱한 대답에 기분 좋게 웃는 거하며, 게임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뚱해 있는 그녀를 토닥이는 거 하며 강혁으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장여사와 조금씩 뒤쳐질 때마다 자신의 눈이 그도 모르게 그녀를 찾고 있는 사실에도 기분이 언짢았다. [유쾌한 아가씨야.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사람이 말이야. 자네가 저 아가씨를 후원하는 걸 이해하겠어.] [과찬이십니다.] [나중에 저 아가씨가 자네 둥지를 떠날 때는 많은 아쉬움이 들 거야. 나도 애착이 가는 제자들이 졸업을 하고 학교를 떠날 때면 늘 많이 아쉽고 서운하고 마음이 허전한 느낌이 들거든. ] [예.....] 부정도 긍정도 아닌 에매한 대답을 하며 강혁의 시선이 다시 한번 시연에게 머물렀다. [두 사람이 나이차이만 나지 않아도 자네에게 한번 고려해보라고 권해보고 싶은데... 너무 어려 아쉽군. 몇 살 차이지?] [10살 정도입니다.] [많이 어리군. 누군지 몰라도 저 아가씨와 결혼할 사람은 진짜 행운아 일거야.] 조교수의 말에 강혁의 시선이 다시 한번 시연에게 머물렀다. 마지막 18홀까지 돌고 싱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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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한 조교수를 축하며 강혁은 저녁을 제의했고, 네 사람은 고급스런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함께 했다. 주로 강혁의 회사이야기가 전부였고 시연이 따분해질 무렵 장여사가 시연에게 말을 걸어왔다. [사귀는 사람은 없어?] [네] [왜? 한참 이성에 관심이 많을 나이인데...]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요. 사실은 회장님처럼 멋진 분이 옆에 계셔서 그런지 눈이 높아졌나봐요. 웬만한 사람은 다 애들 같고 별로 멋있어 보이지도 않는 걸요] 일부러 그렇게 말을 했지만 강혁의 얼굴이 그녀의 대답이 별로 맘에 들지 않는지 약간 찡그렸다 펴졌다. [하긴 그렇긴 할거야. 시연이는 사람 보는 눈도 있네. 나중에 좋은 사람 생기면 내게도 소개시켜 줄 거지?] [그럼요. 제가 영광이에요.] [기다려지는데, 시연이가 어떤 사람을 만날지 말이야.] 교수부부와 저녁을 마치고 처음으로 강혁은 저택으로 그녀와 함께 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오는 내내 그는 말이 없었고, 따라서 그녀도 그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다만... 그녀는 그와 함께 돌아오는 길의 차안에서의 침묵을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와 함께 하는 침묵을... 저택으로 돌아와서도 그는 그녀에게 쉬라는 말만 무뚝뚝하게 하고 그의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의 말대로 시연은 그녀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지만 늘 잠겨 있던 그녀의 침실 안쪽으로 나 있는 문 저쪽에서 부스럭대는 사람소리가 들리자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늘 비어 있었는데... 그녀가 외출한 사이 누군가 온 것일까? 호기심에 문에 귀를 대고 소리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시연은 너무 놀라 문에서 멀찍이 떨어져 버렸다. '그 사람 방이었어? 설마....' 그리고 강혁은 그 사실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려는 듯이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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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다. [뭘 그렇게 놀라는 거지? 이리 가까이 와.] 시연은 그의 명령에 오히려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왜냐면 그의 눈에서 분명한 욕망의 흔적을 읽어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오늘이 가기 전에 그는 그녀를 가지고 말 것이다. -------------------------------- 조금 늦었죠? 죄송합니다. 음... 매끄럽게 안풀리는 것 같아 끙끙대고 만 있다가 겨우 올리네요 ^^::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이 단호했다. 그러나 시연은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 자신도 모르게 멈칫거리며 물러서다 벽에 부딪치고서야 자신이 뒷걸음을 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강혁이 비웃듯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생각대로 움직여지고 있어서 기분이 좋아. 어디에 데리고 다녀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유머까지 겸비해서 말이야.] 강혁이 그녀의 방안으로 성큼 들어와 그녀를 향해 다가오자 시연의 얼굴빛이 창백하게 변해지는 것 만 같았다. 지독한 공포였다. 긴 손가락이 그녀의 턱 끝에 와 닿을 때 움찔 놀라는 그녀의 반응을 재밌어 하듯 그의 입가가 호선을 그리며 올려졌고, 엄지 손으로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듯 입술을 쓰다듬었다. [피... 피곤해요. 쉬고 싶어요.] [난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너도 기억하고 있나?] 그녀의 눈이 의심스럽게 그를 올라다 보았다. 무엇을 기억 하냐는 말일까.... [남자는 얼마나 있었지?] [충분히... 어떤 서비스를 원해요?]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줄 수 있다는 소리군] [얼마든지] 그의 입술이 그녀의 가녀린 목을 향해 다가오던 순간 그녀는 그와 처음 만났을 때 나누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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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가 스치듯 떠올라 평정을 잃고 말았다. [기대가 되. 네가 어떤 기교를 나를 즐겁게 해줄지 말이야. 경험이 풍부하니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겠지?] [오.... 오늘은... 별로...] [내가 정해. 오늘 그 날이야] 그의 입술이 다시 그녀의 입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고 시연은 두 팔을 올려 그를 밀어내려 하고 있었다. [날... 내버려둬요. 싫어요] 그의 입가가 다시 잔인한 미소로 번지고 있었다. 지독히도 사람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미소였다. [싫다... 넌... 거부할 권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싫어요. 싫다구요!!] 그의 손가락에 아프도록 힘이 들어갔다. 턱 끝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며 그를 향해 얼굴을 치켜들게 만들며 강혁은 시연의 눈에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제발.... 부탁이에요. 날 내버려둬요] 거칠게 반항하는 그녀의 몸에 그의 몸을 밀착시킨 체 강혁은 그녀의 반항을 무시하고 있었다. [소리 지를 거에요] [맘대로] 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시연은 저택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고, 그 비명이 메아리가 되기도 전에 그의 입술에 의해 소리가 막혀버렸다. 아프도록 잔인한 키스였다. 시연의 비명 소리를 들었는지 에릭과 선영이 급하게 그녀의 방문을 열며 뛰어 들어왔으며 강혁에 의해 몸이 가려져 있는 시연을 보고 선영은 당황하며 말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문가에 서 있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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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 없었다. [나가!] 강혁의 말이었다. [저 ... 시연이 비명소리가...] [내말 안 들리나? 나가!!!!!!!] 강혁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에릭이 선영의 팔을 붙잡고 끌다시피 밖으로 나갔다. 에릭에게 끌려가는 선영을 애절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강혁의 어깨에 가려 그녀의 시선은 선영에게 닿지도 못하고 있었다. [에릭 이거 놔요. 지금 회장님 뭐하는 거에요?] 선영도 슬슬 화가 나려하고 있었다. 3년을 넘게 같이 지내다 보니 시연은 강혁에 지시에 의해 돌봐야 되는 대상에서 동생 같은 존재로 바뀌어 있었다. 3년이라는 시간동안 선영이 시연에게 느낀 것이 있다면 그녀의 눈이 항상 정에 굶주려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쉽게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언니로서 마음이 아팠었다. 미국에 들어오면서도 시연에게 좀더 나은 많은 기회가 주어질 많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시연은 언제나 늘 불안해했었다. 무엇에 대한 불안인지 의아하게만 생각했던 선영이었는데, 오늘에서 선영은 시연이 불안해했던 대상이 바로 강혁이었음을 알아버린 것이다. 이건 옳지 않은 일이다. 강혁에게는 시연을 저렇게 함부로 대할 권리가 없었다. 아니 기본적으로 사람을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강제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여자를 힘으로 제압하려는 강혁의 모습에서 선영은 처음으로 인간에 대한 실망감이 몰려들고 있었다. [선영씨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시연이가 도와 달라고 한거라구요.] [선영씨가... ] [뭔가 있죠? 처음부터 시연이를 이렇게 가르친 이유가 있는 거죠?] 선영은 문득 불안해 졌다. 시연의 미래에 대해... 강혁이 무엇을 바라고 많은 것을 베풀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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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지는 모르지만 결코 좋은 일 만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른 척 해. 곧 알게 되겠지만.] [시연인 알고 있는 거에요?] [자세한 건 모르지만 대강 짐작은 하고 있어] [잔인해요. 적어도 나는 회장님께서 시연이에게 인간적으로 끌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럴지도 모르지...] 에릭의 그 말은 너무 작아서 선영의 귀에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무겁게 떨어지지 않는 발을 하고 있는 선영을 에릭은 다른 곳으로 데리고 조용히 사라져야 했다. [이 집에서는 내가 법이야. 네가 소리를 지르고 아무리 악다구니를 써도 도와줄 사람은 없어] 평소처럼 그를 노려볼 수 도 없었다. 그가 뿜어대는 분노에 가까운 욕망에 다만 시연의 몸이 두려움으로 부들부들 떨릴 뿐이었다. 그의 몸에 밀착되어진 체 그녀의 떨림이 온전히 다 전달되고 있음이 느껴지는 대도 그는 그녀를 향한 일말의 동정의 눈빛도 보내지 않고 있었다. [오래 기다린 만큼 기대가 크다는 것도 알아 해.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악마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의 귓가에 그의 숨결을 뿜어대며 쏟아내는 말들로 인해 그녀는 자신의 몸이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작은 그녀의 목이 커다란 그의 손에 한줌으로 쥐어지면서 그 힘에 목이 졸려 죽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매끄럽게 훑어 내리며 느껴지는 부드러움에 만족한 듯 점점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의 뜨거운 입술을 그녀의 목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귓볼을 혀로 핥으며 탐스럽게 자라난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그의 품으로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고 있었다. 살아있음을 알리는 목의 혈관이 펄떡이는 부분에 길게 빨아들이듯 키스하며 보라색 흔적을 남기고 그는 다시 그녀의 움푹 파인 쇠골에 입술을 옮겨갔다. 그사이 그의 나머지 한 손이 랩스커트 에 들어 있던 티셔츠를 꺼내 서서히 위로 밀어 올리고 있었다. 등뒤로 돌려지던 손이 가슴을 가리던 속옷의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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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를 가볍게 풀러버렸다. 답답하게 조이던 가슴이 풀어져 시원하다기 보다는 그의 손이 속 옷 속으로 밀고 들어와 가슴을 덮어 버릴 때 시연은 더한 답답함을 느꼈다. 그런데... 그녀를 감싸던 공포가 서서히 삭으러 들기 시작했다. 부들부들 떨리던 몸이 안정을 찾듯 온기가 돌기 시작했으며 그이 거친 손이 닿는 곳마다 화상을 입는 것처럼 뜨겁게 흔적이 남는 것 같았다. 거칠지만 강압적이지 않았던 손길이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며 다시 시연의 입술을 덮쳐 오고 있었다.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 쓰는 그녀의 두 손을, 그의 한 손에 가볍게 움켜쥐고는 강혁은 그녀를 침대에 던지듯 밀어버렸다. [제발 그만 해요] 침대 위에서도 뒤로 물러나며 그가 멈춰주길 바랬지만 강혁은 그녀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옷을 벗어 던지고 있었다. 다부진 몸이 드러나면서 시연은 시선을 돌려버렸다. 실오라기 한 올 걸쳐지지 않은 그의 맨몸을 차마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침대가 출렁이며 그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져 시연의 몸을 다시 긴장한 체로 경계에 들어갔지만 힘으론 그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넓은 침대에 대각선으로 그녀의 몸이 뉘어지면서 강혁은 그녀의 모든 옷을 벗기지 않고 다만 그녀의 깊은 여성을 감싸고 있는 속옷만을 거칠게 잡아뜯듯 찢어버리고 다른 전희도 없이, 손톱만큼의 배려도 없이 그녀를 향해 거칠게 밀고 들어갔다. 그녀도 모르게 비명소리가 저택을 흔들고 말았다. 그의 움직임이 잠시 멈칫하는 것 같았지만 그것뿐이었다. 그는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그녀의 고통을 무시한 체 자신의 욕구를 채워가고 있었다. 두 손에 시트를 움켜쥐었다. 그녀의 내부를 갈기갈기 찢고 있는 고통을 참아내기 위해 피가 나도록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이 부풀어오른 욕망이 폭발하고 나서야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그녀의 펼쳐진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그의 거친 숨이 가라앉기도 전에 강혁은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깨무는 그녀를 내버려 둔 체 바지를 챙겨 입고 그의 침실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뜨듯한 것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붉은 흔적. 고통의 흔적이. 비틀거리며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가장 쌘 압력으로 틀어놓고 시연은 참았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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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터트렸다. 오열처럼 흐느낌이 새어 나오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수채 구멍으로 흘러내리는 물이 그녀의 혈흔과 섞여 분홍빛이 되어 있었다. 아프게 등을 때려대는 물세례를 받으며 시연은 웅크린 체로 얼마나 있었는지 몰랐다. 차가운 물에 체온이 내려가고 있었지만 그건 방금 전 그녀가 겪은 정신적인 충격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욕실의 문이 열리고 선영이 커다란 수건을 가지고 들어왔다. 물을 잠그고 울고 있는 시연의 몸에 수건을 둘러주며 선영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일어나... 침대서... 자고 나면...] [언니....... 나.... 저 침대로 가고 싶지 않아.] 아직도 울음 섞인 목소리로 시연은 방금 전 강간하듯 그녀의 순결을 빼앗긴 침대로 가길 거부하고 있었다. [나랑... 자자. 내가 옆에 있어 줄께] 선영의 손에 이끌려 선영의 침대에 누워서도 시연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온몸을 짓누르는 통증과 충격에 약간의 쇼크상태까지 온 것 같았다. 서둘러 진정제와 수면제를 찾아 먹이고 나서야 시연은 겨우 잠이 들 수 있었다. 강혁에 의해 부풀린 듯한 입술 사이로 잠결임에도 흐느낌이 섞여 나왔다. 선영는 시연이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 둔 것에 죄책감이 들고 있었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자신의 주위에 수없이 많은 벽을 둘러쌓았음에도 그 벽들은 너무도 쉽게 무너져 버리는 것 같았다. 투명한 크리스탈잔에 담겨진 액체를 단숨에 들이키고서 강혁은 다시 한잔 가득 따라 채웠다. 그리고 그 잔마저 입안에 털어 넣어버리고 들고 있던 잔을 벽을 향해 던져 버렸다. 투명했던 크리스탈이 조명을 받아 사방으로 부서져 흩어지며 무지개를 만드는 것 같았다. '미친놈...... 이건... 복수라는 이름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어' 강혁은 레미마르뗑리모쥬 꼬냑을 병째로 들어 마시기 시작했다. 아침에 넓은 식탁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 있던 강혁은 선영을 소리쳐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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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연인?] [아직 잠들어 있습니다.] [깨워!] [저...회장님] [말이 많군. 어디지? 자네 방에서 잤나?] 꼬냑을 한 병 다 비우고 나서야 강혁은 그녀의 침실 문을 다시 열어보았었다. 그러나 그에게 나쁜 놈이라고 욕을 해대는 듯한 혈흔만 남아있는 침대는 텅 비어있었다. 강혁이 식사도 하지 않은 체 일어서자 선영이 다급하게 그를 막아섰다. [쇼크상태였습니다. 약 먹고 겨우 잠들었습니다. 지금은 그냥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를 말리는 선영의 어투에 경멸의 기색이 숨어져 있었다. 식탁 위에 있던 강혁의 손이 핏줄이 튀어나올 것처럼 세게 움켜쥐어지더니 부르르 떨렸다. 그러나 선영을 향해 던져져 온 말에는 일말의 동정도 없었다. [내가 퇴근하고 왔을 때는 같이 식사를 했으면 한다고 전해 줘] 그건 분명한 명령이었다. [예 회장님] 강혁의 차가 저택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시연은 창문에 기대어 초점을 잃은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차가운 사랑 8장 거의 하루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체 선영의 방에서 정신이 나간 사람 마냥 멍한 얼굴로 우두커니 앉아 있는 시연을 보면서 선영은 강혁에 대한 분노로 치가 떨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시연아... 온실에 가볼까?] 선영의 말에 그제야 시연은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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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불쌍해 보여?] [조금은...] [아줌마한테 시원한 주스 만들어 달래서 온실에 가자. 정원사가 최근에 온시디움(댄싱 난이라는 별명을 가진 노란 꽃을 피우는 난)을 많이 꽃피웠데, 예쁠 거야] 한 여름 속의 온실은 오히려 시원한 느낌마저 들었다. 선영의 말대로 노란 꽃이 가득한 온실은 시연의 마음을 충분히 안정시켜주고 있었다. [이거 별칭이 댄싱 난이다. 왜 그런지 알아?] 시연이 모르겠다는 듯이 어색하게 웃자 선영이 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기 시작했다. [꽃 잘 봐 봐. 여기 작은 것하고 넓은 것하고 붙어 있잖아. 작은 것은 남자고 넓은 것은 같이 춤추는 여자의 스커트가 넓게 펼쳐진 모양 같다고 해서 그렇게 지어졌어] 선영의 설명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런 모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지금 나오는 음악은 뭐야?] [이거?] 온실에 잔잔히 흐르는 음악을 시연이 묻자 선영은 미소를 지었다. 음악에 마음을 쓸 정도인걸 보니 이제 좀 마음이 안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트로이메라이야] 온실 한쪽에 둥글게 마련된 의자에 앉으며 선영은 시연을 자신의 무릎에 머리를 눕혔다. [내가...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잦아드는 선영의 목소리에 시연은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언니... 새옹지마가 무슨 뜻인지 알지? 중국에 북방에 살았던 점쟁이의 말이 하루는 도망을 갔데, 말을 잃어서 억울해 하고있는데 그 말이 다른 야생말 한 마리를 데리고 돌아와 아주 좋아했었거든 그런데 점쟁이의 아들이 야생마를 타다가 떨어져 다리를 저는 장애자가 되 버렸어. 그런데 그 덕에 전쟁이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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졌는데도 아들은 무사히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게 됐거든. 내 삶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 지금은 내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다친 상태고 곧 다른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언제까지 이렇게 나쁘진 않을 거라고 말이야... ] 시연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우리 엄마 아빠는 정말 다정하신 분이었어. 정말 나한테 잘해주셨는데... 늘 말끝에는 '시연아 미안하다 더 잘해주지 못해서...'라는 말을 항상 하셨거든. 왜 그러셨나 몰라.] [집은.... 왜 나온 거니?] [엄마가 아빠랑 이혼을 하고... 다시 재혼을 하셨어. 그런데... 새아버지가 전 부인과 이혼한 이유가 심한 매질 때문이란 걸 모르고 재혼을 하신 거였어. 엄마랑 나랑은 거의 매일 맞고 살았는데 엄마는 나 때문에 항상 참고 계시는 거야. 그러다 하루는 엄마의 인내에게 한계가 왔는지... 내가... 내가.... 친딸이 아니라며 제발 엄마 앞에서 사라져 달라고 너무 간절하게 외치시는 거야. 내가 엄마 인생에 끼여들게 되면서 엄마의 불행이 시작됐다면서... 너무 견딜 수가 없었어. 더 이상 엄마가 맞고 사는 것도 싫었고, 그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것도 싫었고...] 자리에서 일어난 시연은 온실의 여기저기를 거닐기 시작했다. [곧... 끝날 거야. 곧......]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 듯 시연은 입 속으로 그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길 바라면서...... 어스름 태양이 기울어 가도 강혁은 오지 않았다. 같이 저녁을 먹자는 말을 남기고 갔다는 그는 10시 조금 넘은 시간이 되서야 돌아왔고 시연은 선영의 방에서 한발국도 나가지 않으며 그와의 대면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영의 방문이 벌컥 열리며 약간 화가 난 듯한 강혁이 들어서자 시연은 벌떡 일어서 그로부터 최대한 멀리 도망을 치고 있었다. 그 쓸모 없는 행동을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음을 섞어 조롱하고 있었다. 그가 시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라는 듯이... 그러나 시연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가면서 자신의 두 손을 꼭 쥔 체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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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그에게 이젠 그 두려움의 실체를 알게 되 버리고 나자 잠시도 그의 가까이에 가고 싶지 않았다. 강혁은 마치 자신을 멀리해야할 문둥병환자라도 되는 냥 자신을 피해 달아난 시연에게 화가 났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사무실에 나가서도 그녀에 대한 생각들로 멍한 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정확하게 뭐라 꼬집어 말 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세상에 때어나 꿀이란 것을 처음 맛본 사람의 기분 같은 거랄까... 파괴하듯 그녀를 가지고 나서 더 많은 걸 원하는 그의 몸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단순한 욕구가 아니었다. 채워도...끊임없이 채워도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감정을 담아 그녀를 갖고 싶지 않았었다. 그러나 상처받았을 그녀가 마음에 걸렸고, 자신을 피해 달아나는 모습에 좌절감 같은 것도 그를 괴롭혔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머리 속이 온통 뒤죽박죽 되어 정리되지 않은 책상 서랍 같았다. 그가 그녀를 향해 내민 손을 두려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때 때문에 강혁은 뻗었던 손을 접는 대신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오지마... ' 그녀의 발 아래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그가 한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손바닥과 이마에 진땀이 송골송골 맺혔으며 현기증이 그녀를 잡아먹을 것처럼 휘감기 시작했다. '오지마... '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어야 했지만 벙어리가 되 버린 것처럼 목에서 소리가 되어 울려나오지 않았다. 그의 모습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자 손톱이 바닥을 파고들만큼 세게 주먹을 쥐며 겨우겨우 서 있던 그녀가 기어코 휘청이기 시작했다. 너무나 힘없이 주저앉듯 기울어지는 그녀를 다급하게 안아든 강혁은 자신의 품안에 축 늘어진 그녀를 당황한 체 바라보았다. 음악이 흐르고... 달콤한 코코아 향이 났으며, 침대보다는 조금 딱딱하지만 온돌바닥보다는 푹신한 느낌을 등으로 느끼며 시연은 눈을 떴다. 벽난로가 눈에 들어왔고, 커다란 나무를 그대로 통째로 잘라 만든 것 같은 탁자가 보였으며 그 탁자 주위로 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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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는 얇은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가 몇 개 있었다. 의자도 역시 통나무를 그대로 잘라서 만든 것이었다. 갈색의 체크무늬 커튼이 여름의 강한 햇살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었으며, 내부를 시원하게 만드는 에어컨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푹신하고 고운 카펫 위에 그녀는 누워 있었다. 앙증맞아 보이는 커다란 강아지 쿠션을 베개 삼아 있었고, 2단 짜리의 시디장을 차곡차곡 쌓은 높이가 1미터는 족히 되어 보였다. 그리 크지 않은 작은 오디오가 있었으며, 백합 같은 카라블랑카가 크리스털 화병에 꽂혀 있었다. 한 손으로 묵직한 이마에 손을 대며 한숨을 쉬었다. 동화 같은 이 방은 어디인지... 분명 선영의 방에서... 그가 ... 의식을 잃기 전의 일이 떠오르자 시연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럽게 일어나 앉자 현기증으로 인해 다시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그녀의 어깨에 올려지는 손에 놀라 대경실색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였다. 그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시 눕도록 강요하듯이 힘을 주어 내리 누르고 있었다. 시연은 그의 강압적인 행동에 말없이 누었지만 그녀의 머리맡에 앉아 있는 그 때문에 결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아니 다시 그가 어제처럼 그녀를 향해 덤벼들까 봐 두려움이 일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손을 대는 대신 오디오를 작동시켰고 그녀의 귀에도 익은 비발디의 사계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계야] 그의 목소리가 낮게 잠긴 듯이 흘러나왔다. 시연은 눈을 감았다. 음악에 젖을 수도 그렇다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도 없었다. 다만 입술을 깨물며 지금의 상황을 견디어 내야만 했다. [비발디가 '붉은 머리의 사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 알아?] 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조용했으며 다정했다. 대답이 없는 그녀에게 신경 쓰지 않고 그는 다음 말을 다시 조용히 이어나갔다. [스물 다섯이라는 나이로 최연소 사제로 임명되고도 그는 음악활동을 왕성히 한 사람이아. 한번은 미사를 집전하다가 악상이 떠올라 그걸 잊지 않으려고 악보에 적어 놓기 위해 그냥 제단에서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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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와 버린 적도 있었거든. 그 뒤로 미사 집전의 권리가 금지되었고, 그의 음악적 재능만큼 많은 돈을 벌었지만 사제를 지냈던 사람치고는 낭비벽이 심했지. 그래서 그가 죽었을 때는 '작은 종 밖에는 사용되지 않았다'라고 할만큼 남은 것이 없었어. 그는.... 바로크 음악을 대표하는 음악가 중의 한사람이지] 그리고 그는 사계가 끝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친절하게 바로크시대에 태어나 오스트리아 빈에서 죽음을 맞이한 비발디라는 인물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규칙적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결을 따라 매만지는 손길에 시연은 점점 안정을 찾아갔고, 창백했던 얼굴에 혈색도 돌아오고 있었다. 다리를 길게 뻗고 앉아서 은은한 시선으로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시연을 강혁은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음악이 끝나고 다시 적막이 흐르자 시연은 눈을 떴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강혁과 눈이 마주쳤다. [의아해 하고 있겠지. 내 이런 행동에...] 그녀의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질문에 뜨끔했지만 시연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약간 ... 다른 방향으로 계획을 수정했어. 네게... 남녀가 나누는 행위가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니라는 걸 가르치고 싶어졌거든.] 그의 말에 질겁을 하고 시연은 벌떡 일어나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앉았다. 그러나 강혁은 그녀의 팔을 힘껏 움켜쥐며 바로 그녀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순결을 받은 보답은 해야 하니까...] 말을 할 때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부딪치더니 끝말이 잦아들면서 그는 불안스레 떨고 있던 입술에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꽉 다문 입술에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부드럽게 키스를 했다. 귀여운 아랫입술을 사탕처럼 살짝 빨기도 했으며, 그녀의 코에 자신의 코를 살짝 부벼대는 앙증맞은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녀의 팔을 아프게 움켜잡았던 손을 풀어 두 볼을 다정하게 감싸며 그녀를 좀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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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이 그에게 끌어 당겼고 혀끝으로 윗입술을 쓸어 내리며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래도 끈질기게 입술을 다문 체 열지 않자 그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로부터 잠시 입술을 떼었다. [그냥... 느낌에 몸을 맡겨 봐. 아프지 않을 거니까] 그는 그녀에게 또다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 하루에 만족하지 않고 또다시 그녀를 가지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 부탁이에요. 혼자 있고 싶어요] 너무나 힘겹게 한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눈물이 흘러내려 볼을 적셨다. 축축하게 그의 손등을 적시는 눈물을 강혁은 부드럽게 입술로 쓸어 닦아주고 있었다. 이마에도, 코에도, 눈에도, 그는 마치 소중한 사람을 다루듯 그렇게 키스를 하고 있었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두려움보다는 새롭게 무언가가 그녀의 심장을 옥죄고 있었다. 그의 손길에 점점 마음이 안정이 되어 가고 있었고, 부드러운 키스가 멈춰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래고 있었다. 길게 자란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은 그가 다시 그녀의 입술을 그에게 끌어당기며 어제와는 차원이 다른 키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급해 하지 않으며 그녀의 입술이 벌어질 때까지 강혁은 조심스럽게 키스를 했으며, 망설이며 벌어지는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그녀의 입안으로 그의 혀를 밀고 들어왔다. 움찔하며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그의 손이 그녀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러나 점점 그녀 또한 그의 키스에 몸을 맡기기 시작했고, 그가 흘리는 신음인지 아니면 그녀가 흘리는 신음인지 모를 탄성이 강혁의 욕망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그의 손이 점점 그녀의 가슴을 향해 움직이는 지도 몰랐으며, 비단 같은 몸을 매만지는 지도 몰랐다. 그만큼 그의 키스에 정신을 잃고 그녀는 매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손에 의해 브레지어의 고리가 탁- 하고 풀리는 순간 그녀의 이성도 탁- 소리를 내며 돌아와 버렸다. 옷 속에 있던 그의 손을 거칠게 밀어내며 그에게 보인 자신의 반응에 수치스러워 하며 시연은 몸을 일으켰다. 또 다시 이대로 그에게 그녀의 몸을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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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할 수 없었다 . 이젠... 절대로... 그가 그렇게 강간하듯 그녀를 가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녀가 문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도 그는 도망가는 그녀를 붙잡으려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뒷모습과 함께 쿵-- 소리가 나며 문이 닫혀 버렸을 때도 강혁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반갑지 않은 자신의 반응을 저주하며..... 차가운 사랑 9장 6. 익숙해지기 그리고 발상의 전환- 그녀 그를 길들이다. 강혁이 출근을 할 때까지 선영의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숨어 있었다. 그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창문에서 지켜본 뒤 안도의 숨 같은 것을 내쉬며 시연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문이 열리며 선영이 들어왔고 선영은 그녀를 향해 작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열어 봐] [뭔데?] [글쎄...] 봉투를 열어보니 노란 금딱지로 만들어 진 것 같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가 번쩍이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이 선명하게 찍혀진 체로. [회장님께서 집에만 있지 말고 쇼핑도 하면서 보내라고 하던데.] 쇼핑... [이거... 내 맘대로 써도 되는 거야?] [그래. 걱정하지 말고] 시연의 입가가 묘하게 뭔가를 꾸미는 사람처럼 피식 웃음으로 번졌다. [이거... 한도가 얼마나 될까?] [응?] [아니야. 나... 외출하고 싶어.] 밤새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가 원하는 일... 오늘처럼 쉽게 피하며 살수는 없을 거라고... 스스로를 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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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하며... 조금만 참자를 반복해서 중얼거리며 시연은 그와 부딪칠 결심을 했던 것이다. 충실한 그의 애완동물이 되어주기로... 그리고... 그를 길들이기로... 강혁은 그녀 생각으로 복잡한 머리를 식히기 위해 그의 본사 건물 아래로 개미처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상념을 깨듯 비서의 인터폰이 울리며 그를 찾았다. [회장님, 이시연씨라는 분입니다.] 그 이름 석자에 강혁은 낚아채듯 수화기를 집어들었고, [말해] 라는 짧고 거만한 명령조의 말을 꺼내자 수화기 너머로 약간 비꼬인 듯한 그녀 특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왕 만들어 주는 카드 좀더 후하게 쓰시지 아쉽게 기분 내다 말게 되버렸어요.] [무슨 말이지?] [카드 한도 초과됐어요. 처리해 줘요] 그리고 시연은 건방지게 그가 다른 말을 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끊어진 전화기에서 뚜-- 소리가 흘러나올 때까지 잠시 멍하니 있던 강혁은 몇 초가 지나서야 제대로 그녀의 말이 이해가 됐으며 사무실이 떠나갈 것처럼 큰소리로 웃고 말았다. 그리고 비서에게 들어오라는 말을 해서 새로 만든 카드의 한도를 조정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만족한 얼굴로 손끝으로 책상을 톡톡... 치고 있었다. '피하지 만은 않겠다. 이거로군.' 결코 적지 않은 한도였음에도 그녀는 그에게 도전하듯 카드가 초과되었음을 알려왔다. 마치 자신의 가치는 그가 정한 카드의 한도보다 더 된다는 듯이 말이다. 그녀는 언제나 그렇게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쇼핑한 물건들로 가득 찬, 다시 돌아온 그녀의 방에서 시연은 곱게 포장된 물건들을 뜯을 생각도 하지 않은 체 멍하니 화장대에 앉아 있었다. 그저 객기를 부리듯 엄청난 쇼핑을 하고, 그가 잠시라도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카드가 초과되었다는 전화를 해서, 그에게 잠깐의 승리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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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해 만족한 미소를 짓는 것도 잠시 뿐이었다. 선영이 강혁의 비서가 한 전화라며 카드의 한도가 다시 조정되었으니 언제든지 다시 쇼핑을 시작할 수 있다는 내용을 전달해 주었을 때 잔뜩 부풀었던 풍선이 펑- 하고 터진 기분이었다. 이런 식으로는 그를 괴롭힐 수는 없을 것이다. 다른 것이 필요했다. 좀더 지능적으로 그를 괴롭히는 방법이 필요했다. 한참을 화장대의 거울 속에 앉아 있는 여자를 노려보다가 시연은 다시 한번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쇼핑한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남자를 유혹할 때 입어라'라고 써진 것처럼 생긴 야한 드레스를 꺼내 시연은 정성스럽게 샤워한 그녀의 몸에 드레스를 입혔다. 어깨는 끈으로 처리되어 있었고, 스커트의 길이는 무릎까지 내려왔지만 속옷을 입고는 절대 입을 수 없는 드레스였기에 꽤나 육감적인 형태였다. 거울 속의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시연은 바로 후회를 했다. '이런 옷을 입을 수는 없어. 너무 야하잖아' 이마를 찡그리며 좀더 점잖은 옷을 찾기 위해 일어서자 강혁의 방과 이어진 문이 열리며 그가 느슨하게 풀어진 넥타이를 한 셔츠차림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도 물론 놀랐지만 시연의 모습에 더 놀란 얼굴을 한 건 강혁이었다. 마치 자신이 잘 못 본 것은 아닌가 하는 얼굴로 그녀를 너무도 뚫어지게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젠장할... 이런 때 들이 닥치다니...' 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빠르게 방안을 둘러보며 자신의 몸을 가릴 다른 것을 찾고 있었지만 잘 포장된 물건들만 보일 뿐 그녀의 희망에 부응하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강혁은 왠지 웃음이 나오려고만 했다. 자신을 피해 달아나던 모습 때문에 혼란스럽게 만들던 그녀였는데 지금은 또 다른 모습으로 그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크드레스 밖으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유두의 흔적이 그를 유혹하듯 시선을 끌고 있었던 것이다. 드러난 어깨 위로 펼쳐진 머리도 탐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도발적으로 차려입은 본인은 정작 눈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방안 이곳저곳을 휘저으며 다니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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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신체를 가리고 싶어 안달이 났음에 틀림없어 보였다. 강혁은 그녀를 향해 다가가 드러난 한쪽 어깨를 두 번째 손가락으로 매끄럽게 미끄러지듯 선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어깨에서 시작한 손가락이 팔을 지나 손목까지 내려간 뒤 작고 하얀 손을 잡아 그의 입술로 가져가 손바닥에 뜨거운 키스를 남기기 시작했다. [넌... 내 기대 이상으로 많은 걸 만족시키는 군.] 그녀가 살며시 손을 잡아 빼자 이번엔 목에 키스를 하기 시작했으며 점점 아래로 내려가며 그녀의 가슴 골짜기에서 멈추며 피부에서 은은히 베어 나오는 쟈스민향기에 취한 듯 눈을 감았다. 그녀를 안고 난 뒤 그의 코끝을 떠나지 않던 그녀의 체취였다. 그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그녀를 안지 않고는 베길 수 없게 만드는 마술 같은 향기였다. 이렇게 이성을 잃고 행동을 했던 적이 언제였던가 기억도 나지 않는 그였다. 그런데 어린 그녀와 함께 있다보면 언제나 그의 인내심이 바닥이 나버리는 느낌이었다.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날 밤의 공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기에 그녀의 입술을 깨물며 참아도 입술은 점점 더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그런 미세한 떨림의 진동을 느꼈는지 강혁의 얼굴이 그녀를 얼굴을 향해 다가왔다. 떨리는 입술에 손을 대던 그의 입술에서 작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왜 마음을 바꿨지?]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면 정면으로 부딪치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가르쳐 주세요.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랑의 기술을 말이에요.] 아직도 입술과 표정엔 그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그를 향해 그렇게 대담한 말을 하고 있었다. 강혁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앞으로의 밤이 절대로 길지는 않을 거다.] 속삭이며 강혁은 자신의 육감적인 입술로 그녀의 혼을 빼놓는 키스를 시작했다. 그러나 강혁이 만족스런 미소를 짓는 동안 시연은 그가 모르게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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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도... 때론 애완동물에게 길들여지죠. 당신도 그렇게 될 거에요' 차가운 사랑 10장 6-1 밀어붙이기. 확실히 그날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이 느낌은 언제나 그가 그녀를 향해 키스를 할 때마다 쾌락 세포를 흔들어 깨우던 그런 달콤한 키스였다. 강혁의 움직임에 거칠고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몸 위를 움직이는 손길에서 얼마큼 절실하게 그녀를 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부끄러움과 수치로 인해 아직은 이성이 멀어지지 않은 그녀의 귀에 강혁의 작은 신음처럼 들리는 탄성이 그녀의 귀를 자극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색하게 서 있는 그녀의 팔을 그는 자신의 허리에 두르게 하며 부서질 것처럼 세게 그의 가슴으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긴머리에 얼굴을 묻으며 들뜨고 흥분된 지금의 기분을 가라앉히려 애쓰는 게 보였지만 그 순간 시연은 자신이 행동을 시작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행에 옮겼다. 계산적인 그녀의 두되 회전과 달리 그의 셔츠로 뻗는 손이 자꾸만 떨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는 그녀가 그를 피하려는 몸짓인 줄 알고 강혁이 놓아주려 하지 않으려고 더 힘을 주려하자 시연은 그에게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벗겨드릴게요]] 그녀의 한마디에 그의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말이 그에게는 약간의 자극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강혁은 그녀의 한마디가 얼마나 자신의 몸에 불을 지피고 말았는지 과연 그녀가 알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녀만큼 그의 성욕을 자극하는 여자도 없었다. 아마도 그녀가 자신의 신체적 매력을 무기로 그를 굴복시키려 계획을 세운다면 한동안... 영원히는 아니겠지만 한동안은 완벽하게 그녀에게 굴복하고 말 것이다. 지금 감정으로서는 그는 그녀의 매력에서 빠져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가 질리고.. 더 이상 그녀의 몸에 흥미가 가지 않을 때까지 그는 그녀를 가질 것이다. 육체관계란 그런 것이니까... 몰랐을 때는 엄청난 궁금증으로 사람을 미칠 것처럼 만들지만 막상 경험하고 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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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맹이 적은 호두를 깨고 났을 때의 실망감 같은 거라는 것을... 그러나 한동안은 그녀가 주는 즐거움에 강혁은 기꺼이 빠져들 예정이었다. 순진한 그녀의 몸 여기 저기에 퍼져있는 성감을 자극할 때마다 그녀는 탄성을 내질렀다가 그의 시선을 느끼면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어지곤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자신의 셔츠를 향해 뻗어오는 손끝이 떨리면서도 입으로는 당당하게 그의 옷을 벗겨주겠다고 했을 땐, 그 작고 작은 앙증맞은 입술을 모두 마셔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손이 자꾸만 떨리는지 그녀는 쉽게 그의 셔츠 단추를 풀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더 그를 애타게 만들고 있었다. 결국은 그녀의 손을 그의 두 손에 잡고 그의 마지막 단추까지 모두 열어주길 기다리지 못하고 그의 입술로 가져와 입을 맞추었다. [기다리다가 밤새겠군] 그녀의 어깨에 걸쳐진 끈을 한 손가락에 걸어 어깨 아래로 내리자 옷은 너무도 쉽게 아래로 흘러내려 버렸다. 한번의 손짓으로 그녀는 완벽한 몸매를 자랑하듯 나체로 그의 앞에서 서버렸다. 시선을 돌려 그의 뜨거운 눈을 피하고 있었다. 빠른 시일 안에 자신을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서 욕망을 읽어내고 싶었다. 자신을 볼 때마다, 그가 그녀를 볼 때마다 안고싶어 미칠 지경에 이르는 것처럼 그녀도 그를 볼 때마다 그가 안아주길 바라는 시선으로 그를 보아주길 원했다. 커다란 침대에 그녀를 눕히며 조용히 눈을 감아버리는 그녀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며 강혁은 그녀가 느낄 수 있는 최대한의 즐거움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서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곧... 매혹적인 입술로 그를 향해.... 그를 원한다는 말을 할 것이다. 그것도 간절히... 부드러운 시트가 등에 닿자, 다시 그 날밤의 기억이 떠오르며 온몸이 긴장되었다. 다시금 그녀를 덥칠 고통도... 그러나 강혁의 손길을 그날과 달리 눈물이 날 정도로 부드러웠다. 불안스럽게 닫혀있는 입술을 부드럽게 키스하며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녀 스스로가 그를 받아 들일 때까지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녀를 위해 그가 무겁게 느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팔꿈치로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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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주어 버티며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강혁은 마음껏 그녀를 향해 키스를 하고 있었다. [너의 향기가 맘에 들어. 은은한... 쟈스민향 말이야. 이 향수 좋아하나?] [향수요? 전... 향수 안 쓰는데...] 사람의 몸에서 이런 향이 날수 있을까? 그녀의 말에 강혁은 아무래도 자신이 그녀에게 단단히 빠져들고 있는가보다고 생각했다. 부드럽던 움직임이 조금씩 빨라지며 그의 숨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런 그의 흥분에 시연까지도 점점 몸이 달아오르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그녀의 몸 구석구석에 키스를 하며 그녀의 감각을 일깨우고 있었다. 입술에서 시작해 구석구석 빼놓지 않고 온몸에 키스자국을 남기는 그 때문에 그녀의 신경은 끊어질 것만 같았다. 10개의 발톱에도 빼놓지 않고 사랑스럽다는 듯이 키스를 하고선 그녀의 다리사이 허벅지에 뜨거운 숨결을 뿜어대고 있었다. 입술이 닿을 때마다 짜릿한 감각이 움찔거리게 만들었다. 한없이 들뜨게 만들고 온몸의 피가 뜨겁게 달구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몸을 그가 가득 채워 주길 바랬고, 그의 손길이 끊임없이 이어주길 원했다. 그의 입술이 다시 그녀의 입술에 다가왔을 때는 이미 시연은 그의 육체적 마술에 빠져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사랑의 행위가 이렇게 사람의 혼을 빼놓을 수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그저 놀라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녀도 모르게 그의 등을 감싸며 그가 좀더 한 치의 틈도 없이 그녀 가까이로 다가오길 바라는 무의식에 표출처럼 그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손을 집어넣어 손바닥에 느껴지는 감촉을 즐겼으며 그의 입술이 다가왔을 때는 그보다 더 적극적으로 그를 탐하기 시작했다. 그의 신음소리가...그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지만 모든 것이 환청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충분하게 촉촉이 젖어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그녀를 향해 그의 남성이 서서히 밀고 들어갔지만 그녀는 미처 그 사실을 깨닫지도 못한 체 그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가득 채우듯 그가 깊이 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아---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허리가 휘어지며 짜릿한 쾌감에 몸을 떨었다. 아프지 않다니... 그가 그녀의 속살을 스칠 때마다 입술을 깨물며 참으려 했던 신음이 저절로 흘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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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고 말았다. 죽을 것만 같았다. 그가 주는 쾌감에, 온몸을 부셔버릴 것 같은 충격이었다. 그녀를 위해... 그는 그녀가 충분한 절정을 느낄 수 있도록 오래도록 정성스럽게 움직여갔다. 부끄러움을 감추듯 망설였던 처음 움직임과는 달리 그녀는 그가 이끌어낸 본능에 의해 충실히 사랑의 행위를 즐기고 있었다. 많은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가르친 기술로 그녀가 그에게 즐거움을 되돌려주실 바랬다. 그녀를 위해 최대한 참고 있었지만 그녀가 절정의 순간에 올랐는지 강한 수축으로 그의 남성을 조이는 순간 강혁은 자신도 그녀의 몸 안에서 화산을 터뜨리고 말았다.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처음 느끼는 아득한 오르가즘이었다. 이 작은 여자가 평생 느끼지도 못하고 죽는 사람도 있다는 오르가즘을 그에게 선사했던 것이다. 절정에 오른 뒤 숨을 몰아쉬던 그녀는 완전히 녹초가 되 버린 얼굴이었지만 양 볼에 붉은 홍조를 가득한 것이 방금 전의 일이 무척이나 맘에 든 것 같았다. 그 역시 온 몸에 만족감이 가득 퍼져 있었다. 잠이 들려는 듯이 숨이 잦아지는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의 잔잔한 손길에 편안함을 느끼는지 그녀의 얼굴표정 또한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빙글 돌아 편히 등을 대고 누으며 그녀에게 팔베개를 만들어주며 강혁은 시연을 그의 품 가까이 끌어 당겼다 그의 가슴에 살짝 손을 올리며 얼굴을 기댄 체 그녀의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던 열정의 후유증으로 인해 너무도 쉽게 수면의 세계로 떨어지고 있었다. 아쉬웠다. 그녀와 사랑이 끝 난 뒤의 여운을 공유하고 싶었다. 그러나 잠든 그녀의 정수리에 입술을 대며 그녀가 그의 품에서 편히 잠들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주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그녀도 잠결에 편한 자세를 잡으려는 듯이 그를 향해 몸을 돌려 그의 다리사이에 그녀의 길고 예쁜 다리 하나를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강혁은 그녀를 향한 욕망이 다시 꿈틀거리는 자신을 느꼈다. 하지만...오늘은 그녀를 위해 이제 그만 참기로 했다. 그리고... 그도 오랜만에 느끼는 만족감으로 편하게 깊은 잠에 몸을 맡겼다. 누군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 엄마가, 학교에 가기 전 머리를 땋아줄 때 느꼈던 편안함을 주고 있었다. [잠꾸러긴데... 기다리는 사람 애타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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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목소리에 시연은 설마 하며 눈을 떴고, 바로 가까이 에서 그가 웃는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당황함에 얼굴이 화--악 붉어져 버렸다. 밖엔 이미 해가 중천 가까이 올랐는지 눈이 부셨지만 언제나 해뜨기 전에 출근하던 그는 아직도 그녀의 곁에 있었다. 아직도 그녀는 그의 팔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아니 마치 그가 그녀를 안고는 밤새 놔주지 않았던 것 같은 자세로 있었다. [아...난...] 막 잠에서 깬 무시시한 머리와 얼굴을 한 자신을 그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창피함이 그녀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솔직히... 부시시한 얼굴을 예쁘다고 말하진 못하겠지만.... 귀엽긴 해. 특히 그렇게 붉어질 때면 말이야] '나쁜 놈. 너도 부시시해. 임마...' 시연은 그렇게 흘끔 그를 노려보고는 시트를 끄집어올리고 있었다. [더 못 기다리겠는데...] 그로부터 자신의 신체를 가리려던 행동을 강혁이 제제하며 그는 그녀에게 키스하기 시작했다. 어젯밤에 그녀를 휩쓸던 욕망이 다시 그녀의 몸에서 꿈틀거렸다. 아침햇살 속에서 그들은 또 한번의 절정을 맛보고 있었다. 6-2 당기기...- 그를 길들이다. 출근준비를 하는 그에게 다가가 시연은 수줍게 한마디 건네고 있었다. [저에게... 가르쳐 주세요. 넥타이 매는 법] 넥타이를 고르던 강혁의 손이 멈춰지며 그의 곁에서 쭈뼛거리며 서 있는 시연에게로 눈이 돌아갔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 깐 채로 어색해 했지만 그녀의 한마디가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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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와 봐] 그의 앞으로 다가가자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의 목에 두른 넥타이를 보여주며 천천히 매는 법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순간 시연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걸 확 조여서 당신 숨이 조여지는 걸보고 싶군' 그러나 얼굴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보여주는 걸 열심히 보고 있는 척 했다. [내가 해봐도 되요?] 완벽하게 매어진 넥타이를 보며 시연이 물었을 때 강혁은 그렇게 하라는 듯이 빙긋이 웃어 보였다. 그의 표정에 허락한 걸 알고 시연이 다시 넥타이를 맸지만 너무도 엉성해서 한쪽으로 삐뚤어지고 말았다. [생각보다 어렵네요] 그녀가 매준걸 풀러 다시 매는 강혁을 보며 시연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그러자 강혁이 손가락으로 그녀의 볼을 톡 치며 한마디했다. [오늘 집에서 연습 많이 해.] 서류 가방을 챙겨들고 나가는 그를 현관까지 따라나가 차에 오르는 그에게 시연은 상냥하게 웃으며 한마디했다. [다녀오세요] 마치 신혼부부가 신혼 여행이 끝난 뒤 첫출근하는 남편에게 하듯이... 차가 출발하고 느긋하게 뒷좌석에 앉아서 강혁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강혁은 매일 그녀를 안은 체 잠들었으며 그녀가 그의 머리맡에 가져다주는 커피향기를 맡으며 눈을 떴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현관까지 달려나와 그의 가방을 받으며 '다녀오셨어요?'라고 생긋 웃으며 그를 맞이했고,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은은한 쟈스민차를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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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두곤 했다. 매일 매일이... 그를 즐겁게 했으며, 회사에서의 시간을 너무도 지겹고 지루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가 가르쳐 주는 많은 사랑의 기술을 그녀는 빠르게 습득해 갔으며 이제까지 어떤 여자도 주지 못했던 만족감을 그에게 주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 아침엔 달가닥 하며 커피 잔이 놓여지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을 때, 그는 처음으로 그녀의 눈에서 욕망을 읽어냈다. 그 순간 그는 남자로서 가지는 묘한 승리감에 취했다. 그로 인해 성에 눈을 뜨게된 그녀가 스스로 그에게 욕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감싸며 '원해요'라고 말했을 때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 지경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모든 것에서....그를 만족시켜 주고 있었다. 그러나 시연은... 그녀에게 익숙해지는 그를 위해 마지막 테스트를 시작하고 있었다. 회사 일로 바쁜 그가 오늘은 못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말을 남기고 간 날... 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그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 Hello? ] 부드러운 그의 원어 발음을 들으며 시연은 그의 목소리에 취하고 말았다. 정작 그를 길들인다는 계획을 세우고 실제로 길들여지고 있는 것은 그녀가 아닌지... 아무 말이 없자 끊으려는 듯 부시럭 소리가 들리자 시연은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저에요] 조용하게 그러면서 수줍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처음 강혁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었다. [저... 시연이요] 그러나 수화기를 타고 또렷이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그는 그 목소리만으로도 온 몸에 열이 확 뻗치는 느낌이었다. [그래... 무슨일 있나?] [......] [말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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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혁은 부드럽게 그녀가 말을 하기 기다렸다. [정말 오늘 못 오나요?] [벌써 그리워 진 건가?] [......] [......] [나... 잠이 안 와요.] 그 한마디에 수화기를 움켜 쥔 강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를 그리워하며 잠못이루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상상이 되면서 얼굴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하루만 참아. 내일은 들어 갈 거니까] 그렇게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그녀를 달래고 있었다. 연인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투로... [보고싶어요. 너무 늦게까지 일하지 말고, 쉬면서 해요. 그럼 저 끊을께요] [그래] 수화기를 내려놓는 그녀에게 많은 아쉬움이 몰려왔다. 실패다. 역시 그는 너무도 이성적이라 그녀의 계획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녀의 뜻대로 따라주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녀의 한마디에도 움직일 수 있게 만들 수 있지... 허탈해진 그녀는 이제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한 초가을저녁 베란다에서 멍하니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허탈해질 뿐만 아니라 온몸의 기운이 쫘--악 빠져버렸다. '내가 너무 무리한 계획을 세웠던 것일까...'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시연은 의자에 기댄체 선잠에 빠져 들고 있었다. 적어도... 그녀의 볼을 간질이는 뭔가가 느껴지기 전까지는... 그녀의 볼에 닿는 느낌에 눈을 떴고 그녀 앞에 무릎 을 구부리고 앉아 있는 남자를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거짓말을 한 줄 알았으면 안 오는 건데. 잘만 자고 있으면서...실망인데] 그의 모습에 시연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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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런 게 사랑일거야. 그가 나의 한마디에 이렇게 달려와 주는 것... ' 시연의 눈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그를 사랑해서는 안되지만 지금 그는 너무도 그녀를 감동시키고 있었다. [못 온다고 하고선...] [네 목소리가 귀를 떠나지 안아서, 도저히 일을 할 수가 없었어.] 강혁은 부드럽게 그녀의 볼을 감싸며 입을 맞추고 있었다. 때론 주인은 애완동물의 재롱이 못 견디게 그리워 자신의 개인약속도 일도 모두 팽개치고 집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그건.... 이미 주인이 애완동물에게 길들여져 버렸다는 뜻이다. 지금... 강혁의 행동처럼.... 차가운 사랑 11장 7. 복수 열정이 지나가고 시연은 배부른 고양이처럼 그의 품에서 만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젠 규칙적으로 변한 그의 심장박동을 들으며, 앞으로의 그녀의 삶도 그의 심장박동 만큼이나 규칙적이고 평화롭길 바랬다. 그 삶 속에 강혁이 영원히 존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무슨 생각해?] 그의 질문에 시연은 승리자만이 지을 수 있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팔꿈치로 무게를 실어 버티며 약간 몸을 일으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젠... 나 없이는 못살 거 같죠?] 그는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대답해 봐요, 네?] 그녀가 그의 옆구리를 간절거리자 그녀의 손을 붙잡아다가 입을 맞추어 주었을 뿐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미소짓고 있었다. 대답만 하지 않을 뿐이지 그렇다는 긍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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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알아요? 점점... 나에게 길들여지고 있다는 거?] 행복에 취해 내 뱉은 그 한마디가 그녀의 미래에 일어날 일을 얼마나 많이 빠르게 앞당기고 말았는지 시연은 모를 것이다. 좀더 많은 행복을 누린 뒤, 강혁의 사랑에 푹 빠져 지낼 수 도 있던 그 많은 나날들을 한꺼번에 날리는 순간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그때까지도 몰랐다. 예쁘게 조잘대던 시연의 입에서 나온 말에 강혁의 몸이 순간 긴장으로 굳어져 버렸다.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던 입가도, 일자로 다물어져 표정이 사라져 버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인을 보는 듯했던 시선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다만 차갑게 번뜩이는 눈으로 서서히 몸을 일으켜 아무런 말도 없이 거친 손으로 시트를 걷어붙이고 그의 방으로 성큼성큼 가버린 뒤 쿵--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아버리고 사라져 버렸다. 시연은 당황스러웠다. 그를 길들였다는 말에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던 건 아닌지... 그의 기분을 풀어줘야 했다. 다만...그녀가 그런 말을 한건... 그녀가 이미 강혁이라는 남자에게 중독이 되어 더 이상 그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없게 되버렸기 때문에 그 또한 그녀에게 그래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말을 한 거라고... 가운을 걸치고 그의 방문을 열었지만 잠겨져 열리지 않았다. 그가... 문을 닫았다. 그녀를 항상 열렸던 문을 굳게 닫아 버렸다. 지금 그녀의 앞에 놓여진 문처럼... 시연은 오랫동안 문 앞에서 떠나지 못하고 서 있었다. 어제의 어색했던 일에도 불구하고 시연은 출근하는 그를 배웅했지만 늘 보여주던 미소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긴 해외출장을 가버렸다. 안돼는 것일까... 그와 난... 안돼는 것일까... 아직도 한 낮엔 따가운 햇살인데도 시연은 정원의 이곳 저곳을 거닐고 있었다. 그가 없는 며칠이 이리도 크게 텅빈 듯한 허전함을 줄줄 몰랐다. 모든 것에 무력해 지고 있었다. 뭐가 잘 못된 것일까? [여기 있었네..!] [어 언니, 왜 찾았어?] [오늘 저녁때 집에서 파티가 있을 거야. 너도 참석할 거라고 준비하라고 연락이 왔어] [누가... 연락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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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이] 그 한마디에 시연은 다시 희망을 가졌다. 공식적인 만찬이나 파티에 그녀를 동행한 적은 없었다. 한번도... 아니 그와 함께 동행할 자격이 되지 않는 그녀였지. 그런데 그가 지금 많은 사람들 앞에 그녀를 동행한다고 했던 것이다. 이제 당당히 그의 연인으로 소개되는 것이다. 어쩌면 며칠 동안 그가 보인 냉대가 그의 고민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녀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고민. '그래... 그래서 그랬을 거야. 아마... 그럴 거야..' 시연은 혼자서 들뜨기 시작했다. [가자. 화장하고 옷입고 하려면 지금도 빠듯해.] 선영의 눈에도 분명히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보이는 시연이 예뻐 보였다. 그녀가 행복해 하는 모습에 선영의 마음도 따듯해지는 느낌이었다. 오늘... 시연을 위해 선영은 최대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면 아무리 차갑고 이성적인 강혁이라도 그런 그녀의 매력에 빠져들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하긴 요즘 그의 행동을 보면 굳이 그녀가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보이지만. 이제 겨우 스물 둘인 시연은 같은 여자인 선영이 보아도 예쁘다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매력적이었다. 긴 목선을 모두 드러내면 섹시해 보이겠지만 오늘은 아마 청순한 이미지를 강조하는 것이 드레스와 어울릴 것 같아 양쪽 옆머리만을 반쯤 웨이브로 만들어 고정시켜 나머지 뒷머리가 자연스럽게 어깨로 흘러내리게 만들었다. 이러면 아마도 이야기를 하며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머리카락이 살짝 살짝 움직이며 매혹적으로 보일 것이다. 결혼을 한 남자든, 혹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남자든 그런 시연의 모습에 다들 한번쯤은 시선이 머무를 테고, 강혁은 그제서야 조금은 시연의 가치를 좀더 높게 평가해 줄 것이다. 약간의 질투심을 유발할지도 모르지. 한 듯 안한 듯 화장으로 고운 시연의 피부를 강조했다. 깨끗한 피부만큼 사람을 매혹시키는 것은 없으니까. 여러 겹으로 하늘하늘함을 강조한 약간, 물에 한방울 정도 풀어놓은 듯한 연한 보라색이 가미된 쉬폰 드레스였다. 어깨가 드러나지만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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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드러나지는 않고 어깨 끝선 쯤에 같은 쉬폰소제로 만든 작은 매듭에 한번 천이 모여졌다가, 다시 손목 아래까지 팔의 선이 다 드러나도록 얇은 한 겹의 쉬폰의 소매로 이루어졌다. 바로 가슴아래에 또 한번의 매듭으로 다트를 넣은 것처럼 가슴을 강조하며 물결치듯 바닥까지 흘러내린 스커트는 청순미를 최대한 살려주고 있었다. 걸을 때 조심해야 하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시연이라면 충분히 주의하며 잘 소화를 해낼 것이다. 분명... 오늘밤 강혁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할 것이다. 선영은 혼자서 이런 상상을 하면서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단순한 사교 파티라고 했지만 그와 처음으로 동행하는 거라 긴장이 되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잘해 낼 수 있을까... 그녀의 방에서 초조하게 강혁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맞이로 이며 시끄러운 저택이었지만 초대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도착하는지 저택은 자동차 소리로도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예쁘게 네일아티스트가 장식해준 손톱도 하마터면 물어뜯을 뻔했다. 너무 긴장이 되고 있었다. 그 순간 마침 문이 열리며 언제나 그를 감싸는 검은 색 양복을 잘 차려입은 강혁이 나타났다. 그의 눈은 순간 당혹스러운 것처럼 흐려졌지만 이내 그 특유의 냉정함을 찾고 그녀에게 오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고 가는 동안 시연은 그에게 사과를 하고 싶었다. 아마 누구든지 그런 말을 들었다면 기분이 나빴을 테니까... [저... 사과 드리고 싶어요.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시연의 말에 강혁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런나 다시 걷기 시작했고 그는 그녀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게 너무나 무심하게 대답을 하고 있었다. [됐어. 잊어버려.] 그러나 그녀가 다른 말을 더 하기도 전에 이미 홀에 도착해 버렸고, 강혁은 사람들에게 그녀를 소개하지 도 않은 체 포도주 잔을 하나 건네주고는 다른 사람들에게로 가버리고 말았다. 사람들 속에서... 그녀는 마치 와서는 안 되는 곳에 온 사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모두들 대동한 일행과 대화를 나누고 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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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아는 얼굴을 입구에 나타나는 것 같으면 반갑게 맞이하며 그 동안의 안부 인사를 나누는 걸 멍하니 지켜보면서 그가 왜 자신을 이 파티에 데리고 왔는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눈으로 그를 찾았다. 매혹적인 여자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즐거운 듯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그녀에게 보여주었던 미소였다. 시연은 자신의 방을 향해 몸을 돌렸다. 더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여긴 그녀가 속해 있는 곳이 아니니까... 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호기심을 보이고 있었다. 어떤 이는 노골적인 시선으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이미 매혹 당한 듯 넋이 빠진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 만큼 오늘 파티에 온 여자들 중에서 단연 돋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곁엔 파트너가 누군지 보이지도 않았으며, 전혀 즐거워하는 눈빛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 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어떤 이는 야비한 시선으로 마치 한겹한겹 싸인 쉬폰드레스의 여러 겹의 천을 벗겨내는 듯한 눈이기도 했다. 그런 시선을 발견한 강혁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죽도록 주먹을 날리고 싶었지만, 대신 들고 있던 잔을 세계 움켜쥐는 것으로 인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녀... 우울한 얼굴이다 못해 슬퍼 보이기까지 하는 그녀의 가냘픈 어깨를 감싸주고 싶었다. 늘 자신에게 기대어 오며 안도감을 느끼던 표정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젠... 시작할 때다. 그리고 이미 그는 시작하고 있었다. 와인 잔을 지나가는 웨이터의 쟁반에 내려놓으며 몸을 돌리는 순간 그녀 또래의 젊은 남자가 그녀에게 반가운 얼굴을 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자신이 아는 얼굴인가? 하며 자세히 보았지만 역시 그 남자는 처음 보는 남자였다. [야-- 세연아 너 오랜만이다. 오늘 늦는다고 했다면서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구나. 잘 지냈지?] 세연이? 두 번째다 자신을 세연이라 부르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저...] [그리고 옷이.... 너 답지 않다. 분위기도 확 틀리고... 평소의 너대로 하지 이게 뭐냐? 저기 한회장 유혹이라도 해보려고 그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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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을 잘 못 보신 것 같은데요. 제 이름은 세연이 아닙니다.] [야... 장난치지 마라. 겨우 1년만에 보는 널 내가 못 알아 볼 줄 알아?] [저...] 또 한번 아니라는 부정을 하려는 순간 시연의 시선이 입구에 붉은 와인의 섹시한 드레스를 입고 들어오는 여자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도플갱어..... 설마... 시연의 놀란 눈을 따라 남자의 시선도 움직였다. 그리고 그는 더 놀란 눈으로 시연과 방금 들어선 여자를 한참동안이나 번갈아 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세상에... 세상에....] 남자도 믿을 수 없는 얼굴인 것 같았다. 시연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와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같은 얼굴을 한 여자에게 빠르게 달려갔다. 그녀도 달려오는 시연을 보고 놀란 사람 마냥 굳어진 채로 들어서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두 사람이 1미터도 체 안 되는 거리만큼 가까이 다가섰을 때 주변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파티에 온 많은 사람들도 그 둘의 모습에 어찌된 일인가 하고 놀라는 듯했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화이트와인을 한입에 털어 넣는 강혁의 눈만은 차갑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것도 잔인한 미소를 띄우면서까지... [저...당신이 세연씨인가요?] [그래요. 당신은 누구세요?] 조심스럽고 조용한 시연의 말투와 달리 그녀는 톡톡 튀며 어딘지 모르게 신경질적인 억양이었다. [전... 이 시연이에요] [세상에... 이런데서.... 만나다니...그렇게 찾았는데... 말도 안돼. ] 뭔가를 아는 듯한 세연의 말이었다. [너... 너.... 아니 당장 집에 전화해야 해. 당장. 이건 말도 안돼.] [제 서재를 쓰도록 하세요] 언제 다가왔는지 강혁이 두 사람의 곁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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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감사합니다.] 세연은 강혁의 얼굴을 아는지 그의 서재를 써도 된다는 말에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시연의 머리는 멍한 상태였다. 강혁과 세연을 따라 서재에 들어서 세연이 전화하는 내용을 듣기 전까지도 상황이 파악되지 않고 있었다. [엄마. 나 세연이에요. 다른 말 말구요. 빨리 이리 날아오세요. 아니 아니지. 아니 아... 그게 아니고. 시연이요. 시연이 찾았어요. 세상에 미국에서... 그것도 믿을 수 없어요. 엄마 빨리요. 시연이 찾았다구요. 네? 데려오라구요? 아..네.. 그래요 그게 낫겠다. 그럴 게요 최대한 빨리 갈게요] 전화기를 내려놓는 세연에게 다가갔다. [무슨 말이에요?] [너 바보야? 내 얼굴보고도 몰라?] [내가... 그러니까...] [우린 쌍둥이야. 넌 3살 때 잃어버린 내 동생이라고] 세연의 말에 시연의 얼굴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니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어떻게 미국까지 와 있는 거냐고? 세상에 죽은 줄 알았는데... ] [이 시연양은 내가 후원하는 장학생입니다.] '장학생...' 강혁의 목소리에 시연은 그를 돌아보았다. '그 이상은 안 되는 걸까... 내가 그렇게 그에게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나는 그 이상은 안 되는 걸까...' 강혁은 시연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시연이 제가 데려가겠어요. 회장님께서 불우학생들을 많이 도와주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우리 시연이도 그렇게 도와주신 모양인데... 이젠 가족을 찾았으니까 저희가 돌 볼거에요. 아빠가 아시면 충분히 감사드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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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말씀을... 저도 기쁘군요. 그런데...아버시라면?] [아..죄송합니다. 제 소개가 늦었네요. 너무 정신이 없어서. 한국의 선우그룹 세째딸 이 세연입니다. 아버님은 이 상호회장님이시구요] [아 이런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제가 세연양을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도 시연이가 가족을 빨리 찾을 수 있었을 텐데요... 그러고 보니 그때 기사를 본 것 같군요.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빠지지 않던 기사 말입니다.] [그래요...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이렇게 살아있었다니...] [저...] [넌 내동생이야. 이름도 그대로 였는데 왜 이제서야 찾았을까. 세상에...] 그리고 그 다음 일들은 너무도 빨리 지나가 시연은 정신을 차릴 수도 없었다. 세연의 불같은 독촉에 옷 몇가지만 가방에 넣고 그녀를 따라 나섰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에게 강혁은 잔인함을 감춘 체 부드러운 억양으로 잘 다녀오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가족을 찾은, 그것도 대그룹의 딸이라는 신분으로 가족을 찾은 시연보다 더 기뻐하는 선영의 축하를 받으며 시연은 다시 한국의 서울땅을 밟았다. 강혁의 빌라와 불과 10거리에 있는 성북동의 집. 높은 담장 안의 집으로 들어섰을 때 그 웅장함과 화려함에 놀라고 있었다. 그녀에게 가족이 생겼다. 어쩌면 이젠 좀더 자신을 가질 수도 있을지 몰랐다. 내 가족은 강혁 만큼 부자다. 이젠 집을 나온 뒷골목에서 살았던 초라한 과거를 가진 여자가 아니라 재벌의 딸이니까... 좀더 자신을 가지고 당당히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렇게 시연은 강혁의 속내도 모른 체 새로운 희망을 심어가고 있었다. 가족들과의 재회... 두 명의 오빠. 아버지 어머니, 들어서는 시연을 안으며 오열하는 어머니. 시연을 품에 안고 어머니는 한마디 말도 못한 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왜... 어머니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일까... 그녀의 머리엔 새아버지에게 맞던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이렇게 부잣집 딸이라는 걸 알면 엄마도 좋아할까? DNA 검사까지 마치고 이회장 집은 잔치분위기였다. 그녀를 잃어버리고 19년만에 찾은 것이다. 그것도 당당한 서울대생에, 세계에서 알아주는 한강혁회장이 후원하던 장학생이었던 딸을. 현재의 시연의 모습에 가족들은 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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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뭇해했다. 모든 것을 다 갖춘 완벽한 재벌의 딸이었던 것이다. 그녀도 즐거웠다 아니 이젠 많은 것을 가지게 된 그녀였기에 강혁조차도 그녀의 남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가짐으로 해서 그녀는 다시 행복한 여자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마치 그녀의 희망에 부응이라고 하려는 듯이 강혁이 한국에 들어온다고 했다. 강혁이 한국에 들어온다는 말에 이회장은 그 사람까지 초대해 성대한 파티를 계획 중이었다. 호텔의 그랜드볼륨에서 기자들까지 초대하는 대대적인 파티를 할거라고 했다. 다시 찾은 사랑스런 딸을 위해서 그 정도는 해야 한다면서 말이다. [이회장 측에서 답변이 있었나?] [예. 아마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을 겁니다. 반도체 시장이 세계적으로 불황인 가운데 이회장의 선우반도체도 자금난으로 인해 정부에 압박을 받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 [그쪽에서 넘겨준 회계 자료는?] [역시 예상대로 많은 부분에서 조작되어 있습니다. 아마 실적을 조작함으로해서 저희와의 합병에서 우위를 차지하려 하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무덤을 파는 군, 이걸 기다렸어. 늙은 여우도 때론 제가 판 함정에 빠질 때도 있어야 반성할 기회를 갖지. 비행기는 언제로 예약했나?] [2틀 뒤입니다. 서울에서 4일 뒤에 이회장이 대대적인 파티를 한다고 합니다. 물론 기자들까지 초대해서 말입니다.] [그날로 하지. 우리의 D-데이 말이야.] 강혁이 한국에 도착한 한 후 그녀에게 연락을 할거라고 기대했었지만 그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왜... 너무도 실망해 기운이 빠져버렸을 때, 선영이 직접 그녀의 집을 찾아왔다. 양손 가득 선물을 가지고. [회장님께서 축하드린다는 말씀을 보내셨습니다.] [그 동안 시연이를 돌봐주신 것도 감사한데... 우리가 인사를 먼저 했어야 했는데 정신이 없었네요] [저 회장님께서 한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으셔서 제가 대신 이렇게 왔습니다.] [말해보세요] [시연이 이젠 가족을 찾았으니 앞으로는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것이 당연할 겁니다. 하지만 헤어지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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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 서운하신가 봅니다. 한국에 머무르는 마지막 하루는 시연양과 보내고 싶으시다고 허락을 구하셨습니다.] [물론이지요. 그럼요. 시연아 어떠냐?] [네? 네. 네 저도 좋아요] 그가 나를 보고 싶어한다. 그래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가족들하고 보내는 걸 방해하지 않으려고 연락이 없었던 거야. 그래 그랬을 거야. [저... 내일 파티에 입을 드레스와 보석을 직접 선물하고 싶다는 양해도 부탁하셨습니다.] [그렇게 까지...] 그러나 이회장 부부는 흐뭇한 얼굴이었다. 강혁이 한국에서 제휴할 기업으로 그의 회사를 선택하고, 또 자신의 딸에게 단순히 후원자 이상의 관심을 보이는 것에 이회장부부는 은근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혹시... 그는 아직 미혼이니까. 그렇게 되면 두 기업의 합병이지만 이회장은 전혀 손해보는 것이 없으니까. 아니 오히려 그의 기업이미지가 좋아질 것이다. 세계굴지의 재벌을 사위로 둔 선우그룹 기울어져가는 그의 그룹의 제2의 발판이 되어줄 것이다. 선영과 함께 집을 나서는 시연을 보며 이회장 부부의 얼굴에서는 흡족한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그녀가 3년 가까이 보냈던 빌라에 들어서면서 강혁을 보고는 단숨에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겨버렸다. [내가 얼마나 보고 싶어했는지 모를거에요] 선영이 보는 앞에서 대담하게 달려오는 시연을 어색하게 안았다. 그러자 선영은 두사람을 위해 조용히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의 아늑한 품에 얼굴을 기대며 시연은 앞으로도 영원히 놓지 않을 사람처럼 너무도 꼭 그를 안고 있었다. 강혁은 깊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그녀의 쟈스민 향기를 느꼈다. 그리웠다. 그녀의 향기가... 하지만 이젠 마지막 전야제를 치를 차례다. 이제까지 그녀를 만족시켜주었던 그 어떤 밤보다 강혁은 뜨겁게 그녀를 안았다. 마치 오늘이 그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밤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밤새 그녀를 안고, 또 안았다. 새벽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그녀의 이름을 속삭였고, 시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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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또 한번 확인하고 있었다. '난... 그를 사랑해. 내가... 재벌의 딸이 되었으니 이젠 장학생이 아니라 그의 연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둘 다 지쳐 새벽이 되서 잠이 들었지만 다음날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흐려 있었다. 마치 곧 겨울이 온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처럼...아니...폭풍이 휩쓸 거라는 걸 알려주는 것처럼. 강혁이 선물한 거라며 그녀에 내민 드레스를 봤을 때 시연은 감동의 탄성을 질렀다. 와인 빛의 자극적인 드레스... 과연 이런 대담한 드레스가 어울릴까 싶었지만 그가 선물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녀가 이화장의 딸임을 정식으로 소개되어지는 자리였다. 긴장이 되고 가슴이 떨렸다. 그러나 그녀를 더욱 떨리게 만드는 것은 파티가 끝난 후 그녀가 그에게 하고 싶은 말 때문이었다. 오늘은 고백할 것이다. 그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 그녀가 얼마나 그를 사랑하는지... 알려줄 것이다. 섹시한 드레스를 다 차려입고 거울 앞에 섰을 즘 강혁이 그녀에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벨벳으로 쌓인 상자. 그리고 보란 듯이 상자 뚜겅을 열었을 때 시연은 두손으로 입을 가리며 그녀에게 내밀어진 보석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드레스에 어울리는 루비였다. 목걸이와 팔찌 귀걸이... 반지가 없는 세트... 그는 직접 목걸이도 걸어주었고, 귀걸이도 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팔찌를 걸어주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오늘은 너와.... 네 가족에게 가장 잊을 수 없는 파티가 될 거다.] [고마워요. 너무 아름다워요] [네 아름다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그와 함께 나란히 파티장에 들어설 때까지도 그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조금 일찍 가족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지만 그랜드볼륨 입구에는 이미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강혁과 나란히 들어서는 시연을 향해 수없이 많은 플래쉬가 터지고 있었다. 그들을 피하듯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초대된 손님들을 아직 들여보내지 않은 상태여서 가족들과 친척들만 조촐하게 있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선 순간... 시연은 또 한번 얼굴이 굳어지고 말았다. 세연과 마주치면서.... 세연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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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연과 별반 다르지 않은 충격적인 눈으로 시연의 옷을 보고 있었다. 세연과 같은 옷. 시연은 강혁을 돌아보았다. 그가 선물한 옷이었다. [두 사람은 쌍둥이니까. 나의 깜짝 선물이야.] 그가 웃으며 말했지만 불길한 예감이 그녀를 휨쓸었다. 뭔가... 잘 못 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그가 짓는 서늘한 미소.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서늘한 미소가 입가를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회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회장은 은근히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혹시 시연을 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럼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으니까 [한 영규사장을 기억하십니까?] [뭐?] 순간 주변이 싸늘해지며 정적이 흘렀다. [16년 당신이 기술을 가로채 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한영규 사장 말입니다. 모른다고는 못하시겠죠?] 과거의 일을 들추는 강혁의 말에 이회장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그 기술을 바탕으로 참으로 튼튼해 지셨더군요. 한영규 사장과 그의 부인을 자살로까지 몰아서 말입니다.] [자... 자네 누군가?] [16살에 미국에 고아처럼 버려진 그분의 아들입니다. 당신 때문에 한순간에 부모를 잃고 한국으로 돌아올 비행기표도 구하지 못한 체 살아남으려고 밑바닥에서 벌레처럼 산 한영규사장의 아들. 부모님의 장례식조차 보지 못한 그 분의 아들이지요. 누구냐고 묻는 걸 보니 기억은 하고 계신가 보군요. 이회장님] [그....그...건 기업이란 건 원래 그런 거 아닌가. 자네도 해봐서 알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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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그런 식으로 이만큼 키웠습니까? 교수였던 아버지가 하실 수 있는 건 연구와 기술개발 뿐이었습니다. 당신은 그분이 평생을 바쳐 만들어낸 기술을 가로채 간 것이고. 그것도 아주 비열한 방법으로 말입니다. 16년을 기다렸습니다. 당신에게 되돌려주기 위해. 이젠 당신이 받을 차롑니다.] [무... 슨 말인가?] [선우반도체 합병건. 취소됐음을 알려주는 겁니다.] [말도 안돼. 그렇게 일방적으로 취소하면 자네가 손해배상을 해야 할텐데...] [손해배상이라, 아마도 저에게 손해배상을 하셔야 할 듯 한데요. 조작된 회계 자료로 인해 그 동안 우리가 헛된 시간과 돈을 들인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한국 정부에 공식으로 항의를 보낼 예정입니다. 기업의 감사에 좀더 철저하든지 아니면 적어도 외국기업과 합병을 추진하려는 기업의 회계사는 제대로 된 자질을 갖춘 사람을 쓰라고 말입니다. ] [안...돼...] 이회장의 눈에 그의 기업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이대로 합병이 무산된 것이 보도 된다면 회생할 수 없을 정도로 타격을 받을 것이다. 합병을 담보로 끌어다 쓴 돈도 엄청난데... [아 잊을 뻔했는데... 그 동안 댁의 따님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에는 감사를 드려야 겠군요. 아주 훌륭한 따님입니다. 특히 침대에서는 말입니다.] 그 말에 시연은 사색이 된 얼굴로 강혁을 보았다. [뒷골목에서 소매치기하며 굴러먹는 거 데려다 이만큼 키운 것에 대한 보답은 충분히 받았으니까 따님을 찾은 것에 대한 보답은 안 하셔도 됩니다. 회장님]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이거 였어...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엄청난 충격을 던져준 주인공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회장 가족을 남겨 둔체 그곳을 떠나고 있었다.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나였어야 하는 이유... 강혁은 마지막으로 육중한 문이 닫히며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체 서 있는 시연의 모습을 보았다. 그건... 자신이 부모를 잃었을 때 가졌던 눈빛이었다. 모든 것을 다 잃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 너는 이회장의 딸이다. 그래서 네가 필요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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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 뿐이다. 그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은 그래요. 이제 이해했어요 내가 아니면 안되었던 이유를... 라고 말하고 있었다. 너무도 담담하게... 멀어지는 그를 보면서... ---------------------------------------------------- 사이트에서 직접 찾아 드레스에 대한 소재와 자료를 주신 실버송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옷에 대해 멀 알겠습니까... 사진까지 직접 자료로 보내주셔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차가운 사랑 12장 8. 슬픔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강혁이 사라진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시연의 등뒤로 많은 사람들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시연은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밖에 있는 사람들 돌려보내. ] 이회장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 여기 모인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야 할 대상이 필요할 것 같았다. 지금 일어나는 많은 불행한 일에 대한 책임을 전가할 사람이 그들에겐 필요했고,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 불행을 그녀가 몰고 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가족들 중 누군가가 강혁이 사라졌던 문을 열었고, 밖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향해 오늘 열리기로 예정되었던 화려한 파티가 취소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더불어 시연이 이회장의 딸이라는 사실이 취소 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젠 자랑스런 딸이 아니라 한 남자의 침대에서 뒹굴고 돌아온 정숙하지 못한 외면하고 싶은 딸이 되고 말았다. 그녀가.... 돌아갈 곳은 있을까...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빨리 따라와] 그녀와 같은 얼굴을 한 그녀. 시연은 이리도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그녀는 모든 것에 너무도 당당했다. 정작, 가장 상처받아 위로 받아야 할 사람은 시연이었는데, 시연은 사람들로부터 불행을 가져온 사람처럼 되 버렸다. 그녀가 돌아갈 곳은 있을까... [어떻게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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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대대적으로 탑뉴스로 다루고 있습니다. 주식은 벌써 하한가를 기록하고 있고, 채권단의 움직임도 심상치가 않습니다.] [더 조여. 외국에서 끌어들인 자본이 얼마나 되지는 알아봤나?] [현 부채의 15%정도입니다.] [주 거래는?] [현지은행들입니다.] [은행에 미리 손을 써. 우리가 선우를 인수하는데 도움을 주면 은행에 그만큼의 메리트를 주겠다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미리 작성해둔 계약서 사본, 보내. 전부를 잃고 싶지 않으면 그 가격에라도 넘길테니까. 철강 분야에서 덤핑으로 기소될 소지가 있음도 넌지시 던져 줘.] [예 회장님] [철저하게 부셔버리겠어.] 강혁이 계획했던 것보다 선우는 너무도 쉽게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선우를 지탱하던 가장 큰 골격이라 할 수 있는 반도체를 헐값에 가까운 가격으로 넘기라는 제안에 그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저들의 움직임은?] [채권단이 더 이상의 부채상환을 미룰 수 없다고 최종 통보를 했습니다. 선우에서 내놓은 자구안을 수용할 수 없다는 쪽으로 결론이 난 것 같습니다. 선우를 매입할 만한 자금력을 가진 국내 기업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채권단으로서는 저희에게 팔 것을 종용하는 눈치였습니다. 만약 저희에게 넘긴다면 나머지 부채에 대해서는 상황을 연기할 의사가 있다고 단서조항까지 달았다고 합니다.] [더 조여야지. 자신도 살점을 빼앗기는 고통이 어떤지 알아야 하니까. 나머지 계열사들은?] [대부분이 일가친척들이 최대주주로 경영권을 소유하고 있긴 하지만 이회장의 입김이 아직도 작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흑자를 내는 기업들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자금을 대고 있습니다. ] [음성적으로 탈루를 하고 있는 거겠지. 최대한 터트릴 수 있는 것은 다 터뜨려 버려. 제발 살려달라고 두손들고 나올 때 까지 말이야. 아직도 배가 불렀어. 버티고 있는 것을 보니까. 그리고 선우의 해외 판로 다 막아버려.] [예 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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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만 없다 뿐이지 초상집이나 같은 분위기였다. 누군가 한 사람쯤은 매일같이 숨넘어가듯 달려와 앞사람이 전하고 간 다른 소식보다 더 나쁜 소식들을 전하기 바빴다. [이.... 이 나쁜놈, 한강혁.. 내..너를....] 그렇게 소리를 치며 강혁의 이름을 독기 품어 가며 부르던 이회장은 기어코 화를 참지 못하고 혈압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악재의 연속이었다. 회장의 쓰러짐으로 선우의 앞날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은 더해갔고, 결국... 반토체를 강혁에게 넘기는 쪽으로 결론지어지고 있었다. 처음 선우를 일으켰던 건설과 전자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기업이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계획이라 선우는 정말로 뼈대만 남을 꼴이 되 버렸다. 불과...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제만 보면 신경질 나 죽겠어. 차라리 눈에 보이지나 말던지. 매일 방구석에 쳐 박혀서... 지금 누가더 열 받는지 제는 정말 모른 거야? 내 약혼까지 깨졌단 말이야. 어떻게 그런 남자랑 놀아나서는... ] [세연아. 시연인 니 동생이다.] 세연의 거친 말을 막아서는 오빠 세훈의 목소리에는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다만 세연보다는 더 나이를 먹은 사람으로서 심한 말을 하지 않고 있는 것 뿐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 애가 동생이야? 차라리 없었을 때가 나았지 이게 뭐야? 이게 뭐냐구?] 차라리 세연의 저런 노골적인 비난이 더 들을 만 했다. 이회장이 쓰러지고, 엄마 연옥 마저도 몸져 누었을 때 그녀를 위로한답시고 나타난 고모나, 작은 어머니들은 숙덕거리며 시연이 마치 창녀라도 되는 냥 그녀를 씹어대고 있었다. [소매치기 였었다며? ] [그러게 말이야. 그러니까 그 남자 침대에 얼씨구나 하며 뛰어 들어겠지. 그때는 봉잡았다고 생각했을 거 아니야?] [누가 아니래? 아주버님 딸이라는 거 알기 전까지는 아주 사람 잘 잡았다고 생각했을 거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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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야. 세상에 ... 아무리 그래도 소매치기라니.] [그전엔 무슨 일을 하고 살았는지 어떻게 알아? 그 남자 여자였으면 전에도 그러고 살았을지 모르지... ] [쉿-- 조용히 좀 해요. 가뜩이나 아픈 형님 귀에 들어가면 더 난리 나니까] 그렇게... 시연은 새로 생긴 많은 친척들 사이에서 창녀가 되어 있었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며칠 전부터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던 구역질이었다. 욕실로 달려가 먹은 것을 다 게워내고서 시연은 쏟아지는 수돗물에 입을 씻어내고 욕실의 거울을 한참동안 노려 보고 있었다. 입술에서 피가 나도록 깨물며... 그리고 나서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코트도 입지 않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뛰고 또 뛰었다. 산부인과라는 커다란 간판을 보기 전까지... 유리문을 밀치고 들어서며 그녀는 다짜고짜 간호사를 향해 달려갔다. [손님 의료보험카드 주세요] [없어요. ... 애기가 생긴 것 같아요] 눈물을 글썽이며... 얇은 남방하나만 걸치고 온 여자를 간호는 약간의 동정 섞은 눈으로 보았지만, 시연은 그녀의 눈동자 저 편의 비난을 볼 수 있었다. '너 사고 쳤구나?' 하는 눈이었다. 어린 나이에 책임질 수 없는 일을 저지른 여자라는 시선으로... [이쪽으로 오세요. 여기에 소변 받아 오시구요.] 몇 가지 검사를 더 하고 시연은 초조하게 의자에 앉아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발 ... 그녀가 걱정하는 일이 아니길... 또 다시 그녀만큼 불행한 아기가 생겨나지 않길...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연을 부르는 간호사의 목소리는 사형을 언도 내리는 판사처럼 차갑고 냉정하기만 했다. [임신입니다. 7주 됐어요] 병원으로 달려올 때보다 더 정신이 나간 얼굴로 병원 문을 나섰다. 호텔로 향했다. 그를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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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 했다. 그녀의 아이를, 그의 아이를 불행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의 있는 호텔, 호수는 귀가 닳도록 집에서 듣고 있었기 때문에 시연은 그를 찾아 헤매지 않고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가 머문 호텔... 그녀와 처음 만났던 그 호텔. 그리고 그때 그가 묵었던 그 방 벨을 누르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시연을 향해 문을 열어준 건 선영 이었다. 시연의 모습에 당황하는 것 같았다. [강혁씨... 안에 있지 그렇지?] [시연아..] [할 말이 있어. 언니..] 선영을 밀치고 시연은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그리고 그가 있을 만한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에릭과 중요한 이야기라도 나눈 듯 두 사람은 바싹 붙어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시연의 모습에 에릭도 강혁도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뼈 속까지 스미는 매서운 찬바람이 불어대는 한 겨울에 시연은 달랑 남방하나만 입고 그의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에릭 나가있어.] [에 회장님] 에릭이 나가고 둘 만 남겨졌을 때, 강혁은 그제서야 시연의 모습을 살피기 시작했다.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그녀는 너무도 야위어 있었다. 아마... 편한 생활은 아니었겠지... [할... 말이 있어요] [말해.] 강혁은 흘끔 손목의 시계를 보았다. [10분 주겠어.] 갑자기 눈물이 차 올랐다. 그녀가 기대한 그의 모습이 아니다. 적어도... 이렇게까지 차가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10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야]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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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얼굴 근육이 실룩였다. [이 정도에서 그만 둔 것에 감사해야 할 텐데. 적어도 밥줄은 남겨 두었으니까] [우리... 아니... 나는... 이제 당신에게 필요 없는 존재겠죠?] 강혁은 대답대신 그가 앉아 있는 책상의 서랍을 열더니 봉투 하나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결자해지군. 완벽한 장소에서. 넌 이제 자유다. 4년 전 계약에서 해방이야] 시연은 그가 내민 봉투를 보았다. 그리고 통장하나와 또하나의 서류봉투까지 있었다. '자유다.... 구속보다 더 잔인한 자유' 그에겐 이제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었다. 아무것도...... [성북동 빌라는 네 앞으로 해둔 것이다. 네게 악감정은 없었으니가. 그동안의 일에 대해 약간의 보상이라고 생각하면 되겠군.] 시연은 그에게 다가가 그가 내민 봉투를 받아 들었다. 그러나 나머지 것에 대해서는 손을 대지 않았다. 만약 정말로 그것들에게 손을 댄다면 그녀는 그의 여자였던 댓가로 돈을 받는 사람이 되 버릴 것 같아서... [내가.... 이 종이를 가져가는 순간... ] 자꾸만 흐느낌 때문에 목이 잠기려하고 있었지만 시연은 숨을 크게 몰아쉬며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두 가지를 잃게 될 거에요.] 그녀가 말한 두 가지가 뭘 의미하는 지는 모르지만 강혁은 순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손에 주먹을 쥐었다. [난 네게... 늘 말 했었다. 기대하지 말라고.] 기어코 시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말았다. 벌떡 일어나 그녀의 눈물을 닦으며 가슴에 안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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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싶었다. 울지 말라고... 그녀를 미워했던 것은 결코 아니라고... [혼자 생각할 시간이 생기면 곰곰이 짚어 보세요. 복수를 해서 얻은 것이 뭐고... 잃은 것이 무엇인지. 당신이 잃은 두 가지는 평생 다시 얻을 수 없을 거에요..] [10분 지났다.] 더는 그녀를 마주 대할 수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한마디, 한마디 나올 때 마다 그의 심장을 찌르는 날카로운 칼 같아서 그는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이회장을 무너뜨리며 유일하게 그의 양심을 괴롭히는 일이었다. 그녀는.... 어쩌면 지금 이 자리에서 그는 그녀가 그에게 매달리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제발...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울며 그를 사랑한다고 자신을 떠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며 자신에게 매달리기를 기대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가 그가 높이 평가하는 냉정함으로 그를 비난하고 있을 뿐, 정말로 한번이라도 자신을 사랑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담담해 하고 있었다. 사랑...... 사랑이라고..... 그가 그녀에게 할애한 시간이 모두 지났음을 말하는 모습에서 시연은 마지막 희망까지 접어 버렸다. 아이를 지우라는 잔인한 말을 듣고 싶지 않아 그냥 뒤돌아 설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지는 얼굴을 하고서 시연은 그가 보는 앞에서 뒤돌아 서고 있었다. 흐느낌으로 인해 가늘게 떨리는 어깨를 하고서 그녀는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윤실장] [예 회장님] 시연이 문을 열자 강혁이 선영을 불렀다. [시연이 집까지 데려다 줘] [예 회장님] [그리고 공항으로 바로 오도록 해.] [예] 강혁의 말을 듣고서 거실로 나서며 시연은 그제서야 많은 가방들이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다. '떠나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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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을 들었는지 아니면 듣지 못했는지 시연은 거절도 혹은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 그저 앞만 보는 사람처럼 앞으로만 가고 있었다. 선영이 자신의 코트와 지갑을 챙겨들고 서둘러 시연을 따라 나가는 것을 강혁은 열러진 문틈으로 보고 있었다. [정말..... 저대로 보내실 겁니까?] [뭐라고 했나 지금?] [지금 보내시고 후회 안하시겠냐고 묻고 있습니다.] [자네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군] [시연이... 이회장의 딸이지 이회장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닙니다.] 선영이 오기만을 공항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선영은 결국 오지 않았고 강혁과 에릭 그리고 나머지 일행들만 먼저 미국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저택으로 돌아오고 그들보다 몇 시간 뒤 선영은 바로 다음 비행기로 왔는지 강혁의 서재로 들어서고 있었다. [늦었습니다.] [그래 가서 쉬어] [회장님] 할말이 있는 사람처럼 망설이며 선영이 서 있었다. [할 말이 있는 가 본데, 급한 일 아니면 다음에 하지.] [회장님!] [내말... 들었으면 그만 가봐] [시연이...] [그만 나가!!!!!!!!!!!] 화가 났다. 그의 양심을 사정없이 날카로운 것으로 찔러대고 있었던 것이다. 자꾸 시연이라는 이름을 언급함으로해서... 강혁이 소리를 질렀지만 선영은 나가지 않고 있었다. [유산했어요.] 그리고 주먹을 꼭 쥐며 힘겹게 선영의 입에서 나온 말에 강혁은 한순간 얼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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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연이에게 회장님이 필요해요. 제발... 시연이에게 가주세요. ] '두가지를 잃게 될거에요' [나가......] [회장님!] [나가!!!!!!!!!!!!] 도망치고 싶었다. 그녀를 다시 데려오고 싶은 마음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두 가지를 잃게 될 거라는 그녀의 말이 그의 귀에 공명처럼 울려대고 있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미래의 아이까지 잃은 것이다. 이젠....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되 버렸다. 일이라는 것에 미친 듯이 파묻혀 지내고 있었다. 선우의 절반을 강혁이 인수했다. 이회장이 빼앗은 아버지의 기술로 이룩한 거대기업 선우의 반을 강혁은 빼앗은 것이다. 일 속에 파 묻혀 지내는 그에게 언제부턴가... 말없는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전화를 하고서는 아무 말도 없는 전화... 처음 몇 번은 짜증을 내며 전화를 끊었지만, 수화기 너머로 전달되는 익숙한 침묵에 언제부터인가 그도 상대방이 먼저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Hello?'하던 것도 '여보세요?'라고 자연스럽게 바뀌어 있었다. 언제나 같은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 그의 목소리를 듣는 상대방은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녀라는 것을... 그녀가... 그에게 전화를 한 것임을... [끊지 말아요] 처음이었다. 매일 침묵은 지키던 그녀가 말을 한건... 그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절절함에 강혁의 심장이 너무도 아프게 조여오고 있었다. 어떻게 감히... 전화를 끊을 수 있을까... 그도 모르는 사이 그녀가 전해주는 침묵마져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고 있을까... 그녀임을 알고 난 뒤에 침묵을 깨고 끊임없이 그녀의 이름을 불러대고 싶었던 그의 마음을 그녀가 알기나 할까... 그는 절대 그녀 먼저 수화기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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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견딜 수가 없어요. 마지막이에요...] 마지막...... [이젠... 다시는 전화 안 할 거에요. 한번만... 한번만 목소리 들려주면 안되요? ]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순간 그의 목이 꽉--매여버려 아무런 소리도 나오고 있지 않았다. [다시는 이런 부탁 안 할 거에요. 나... 강혁씨 미워하지 않아요. 이해할 수 있어요. 당신 부모님을 잃은 슬픔이 얼마나 큰지 다 이해할 수 있어요. 지금... 당신 이러는 거 다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서 나...... 당신 미워할 수가 없어요. ]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너무나 보고 싶어서... 우리... 좋았을 때도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한번만... 제 이름 불러주면 안 되요? 다시는... 전화 안 할께요. 마지막으로 한번만... 제발... 한번만...] 그녀가 울고 있었다. 자신으로 인해... 그녀가 울고 있었다. [시...] 그러나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엔 전화는 끊겨져 버렸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그와 함께 그녀의 목소리도 끊어져 버렸다. [시연아...] 공허하게 끊어진 전화기 너머로 그의 목소리만 울릴 뿐이었다. [너 미쳤구나? 널 이따위로 만든 놈한테 전화를 걸어? 너 제정신이야? 우리 집을 이렇게 만든 놈한테 전화를 걸어? 니가 지금 제정신이야?] [넌...몰라... ] [정신차려. 니가 아무리 그래도 그놈이 다시 너를 찾을 것 같아?] 세연의 혀가 너무도 날카롭게 시연의 가슴을 후벼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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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몰라... 잃어 본 적이 없으니까. 넌...소중한 것을 잃어 본적이 없으니까...] [그래 난 몰라. 하지만 한가지 확실하게 아는 건 있지. 널 이따위로 만들고 우리집을 망가뜨린 나쁜 놈이 다름 아닌 한강혁이라는 사실 말이야. 그건 똑바로 알고 있어] 세연이 소리를 지르고 그녀의 방을 나가버린 뒤에도 시연은 전화를 멍하니 바라보며 같은 소리를 되 뇌이고 있었다. [넌.... 몰라... 잃어 본 적이 없으니까...] 선우 반도체의 정식 인수를 앞두고 두 달쯤 지나 다시 한국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한국이란 나라.... 지겹도록 그를 괴롭히는 나라였다. 40여명의 인수팀를 위해 강혁은 늘 그가 묶는 호텔에 숙소를 정했다. 그리고 축하를 위해 나이트의 특실을 여러개 예약했으며,, 앞으로 그들이 해야할 엄청난 일들에 대한 격려로 마음껏 먹고 마시고 놀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그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이회장을 무너뜨리고도 강혁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 무거운 생각의 중심엔 언제나 시연이 있었다. 떨쳐내기 위해 미친 듯이 일에 몰두해도 그녀에 대한 생각은 떠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그녀의 전화는 없었다. 정말... 그녀의 말처럼... 그 전화가 마지막이 되어 있었다. 연거푸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취하고 싶었다. 그의 머리를 가득 매우는 그녀에 대한 생각들을 지우고 싶었다. 그의 옆에서 말없이 앉아 있던 에릭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며 투명한 유리 아래의 홀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왜 맘에 드는 여자라도 보았나?] 그러나 에릭은 대답대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정말로 홀을 향해 가려는 듯이... 조금 전까지 에릭의 시선이 머물렀던 곳으로 강혁의 시선도 옮겨졌다. 그리고 그는 얼어붙었다. 짧은 스커트에, 진한 화장, 속이 훤히 비칠듯한 상의하며, 아무리 다시 보아도 그녀가 확실했다. 미친 듯이 홀에서 흔들어 대더니 음악이 바뀌었는지 몇몇 부르스를 추는 사람들을 내버려 둔 체 그녀는 테이블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독한 양주를 스트레트로 마시고 있었다. 그녀가 왜...강혁은 그녀를 향해 움직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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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녀가 왜 저런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지... 그가 뛰듯이 달려갔을 때는 시연의 옆엔 이미 에릭이 다가가 있었다. 강혁이었다. 그는 여전히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담배하나를 피워 물었다. 길게 연기를 내 보내며 시연은 다리를 꼬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양주 한잔을 더 따라 마셨다. 목을 태울 것처럼 넘어가는 술에 눈을 찌푸렸다가 다시 폈다. 천박한 자신의 모습에 그가 어떤 조롱을 보낼지 뻔했다. 갑자기 모멸감이 그녀를 휩쓸었다. 이렇게 흐트러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 강혁의 시선을 가리고 싶었다. 얼마나 그리워했던 그의 모습인가... 매일 괴롭게 ... 그가 다시 그녀에게 손짓해주길... 그녀를 감싸고 있는 가족이라는 지옥 속에서 그녀를 데려가 주길 얼마나 간절히 바랬는지... 과연 그는 알고 있을까. 그를 잊기 위해 매일 술에 취해 잠들어도... 여전히 꿈속에서마저 괴롭게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을까... 네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망가지길 바란 건 네가 아니라 이회장이다. 네가... 네가 이런 모습으로 망가지길 바란건 아니다. 넌..언제나 냉정하고 침착했으니까... 나와의 일 같은 건 빠르게 잊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언제나 너를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 아는 너였기에 너는 이겨낼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이게 뭐지? 네가... 왜 이러고 있는 거냐? [구경왔어요? 얼마나 망가지나 보려구?]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 [뭘 하는 걸로 보이는 데요? 즐기고 있어요. 인생을. 어차피 개떡같은 인생 이렇게 라도 즐겨야지요. 매일매일이 아주 즐거워요. 웃고, 춤추고, 술마시고... 부럽지 않아요? 일에만 파묻혀 사는 당신한테 말이에요. 아하... 아니지. 오늘 여기 나타난 걸 보니 당신도 즐기긴 하는 군요] 작은 스트레이트 잔에 따라 먹는 것에 짜증이 났는지 시연은 아예 병을 들어 마시고 있었다. 이건.... 적어도 시연이 이렇게 되는 것은, 강혁이 생각했던 것이 아니었다. [보기 싫으니까 그만 내 앞에서 사라져 주세요. 이젠 내가 사양할테니까요] [그... 전화... ] [전화? 무슨 전화요? 그새 다른 여자라도 생겼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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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잔뜩 비웃는 잔뜩 비꼬인 목소리. [에릭... 데리고 나가] [에] [상관마. 나쁜 자식아. 니자식이 죽었다고 했을 때도 안 와봤으면서 이제 와서 왜 이 지랄이야? 니가 뭔데? 이 나쁜자식아. 니가 뭔데 날 데리고 나가라 마라 하는 거야? 나 원래 이렇게 굴러먹던 애였어. 내가 술을 먹든 춤을 추든 상관하지 말란 말이야] 악을 쓰는 그녀 때문에 순간 나이트의 음악도 심란하게 움직이던 조명도 멈추어지며 실내가 조용해졌다. 강혁의 주위를 에워싸는 경호원들... 시연은 또 다시 병을 들어 술을 마셨다. 그러나 몇 모금 마시지도 못하고 강혁의 손에 의에 빼앗기고 말았다. [내 놔.] [에릭 데려가] 에릭이 그녀를 잡아채려고 할 때쯤 다른 한 무리가 나이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손 놔. 이젠 내 동생이니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야] 이회장의 큰아들 세훈이었다. 시연에게 다가서던 에릭의 걸음이 멈추어졌다. 세훈이 가볍게 눈짓을 하자 세훈의 뒤에 있던 건장한 청년 둘이 다가와 거칠게 시연의 양쪽에서 그녀를 잡아채고 있었다. [이거 놔. 왜 이러는 거야? 이거 놓으란 말이야] [집안 망신 그만 시켜. 데려가. 그리고 시골 촌구석 요양원에 쳐 넣어.] 차갑게 내 뱉는 세훈의 말에 시연은 경악에 찬 눈으로 세훈을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넌 알콜중독이야. 그래서 오빠 된 입장에서 널... 치료차 요양소에 보내는 거고. 알겠냐?] [이젠 별 핑계를 다 대는 군. 솔직히 눈에 가시같다고 말해. 사라져 줄테니까.] [사랑으로 동생을 돌보겠다는 오빠의 마음을 그런 식으로 외곡 시키다니 네가 정신이 어떻게 되긴 했구나] 시연은 두려움을 느꼈다. 세훈은 그녀를 아마 감옥 같은 요양소에 보내 평생 그곳에서 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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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못하도록 할지도 모른다. 죽을 때까지 집안의 수치인 그녀를 영원히 그곳에서 매장시켜 버릴 것이다. [난 안가.] [넌 가야 되. 그리고 이미 그곳에 네 자리가 마련되어 있어.] 시연은 강혁을 보았다. [살려줘요. 나... 보내지 말아요. 제발요] [너 미쳤구나 부탁할 데다 부탁을 해야지. 널 이렇게 만든 놈에게 그런 부탁을 하다니] 그러나 시연은 애절한 눈으로 강혁을 보았다. 제발... [나... 가고싶지 않아요. 제발요. 나 ... 나 데려가줘요. 없는 것처럼 지낼테니까 미국으로 나 데려가줘요. 여기는... 더 이상 살 수 없어요. 날 창녀 취급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더 이상 지낼 수 없단 말이에요 제발요...] 사내들에게 양팔을 매달린 체 시연은 몸부림치고 있었다. [뭐해 빨리 안 끌고 가고] [강혁씨 제발요. 나 버리 말아요. 제발요. ] [이제 후련한가?.... 이렇게 우리 집,, 시연이 망가진 모습을 보니까?] 강혁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 그녀가... 이렇게 지내고 있었다니... [강혁씨... 제발... 나... 나 버리지 말아요. 이거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 비명처럼 그녀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움직이지마. 이건... 내 가족의 일이다. 더 이상.. 우리 집 일에 끼어 들게 놔두지 않을 거다. 시연인 내 동생이니까] 강혁이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개처럼... 짐승처럼 사람들의 손에 끌려가고 있는데도 그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영원의 지옥의 나락으로 끌려가는데도 그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한순간도 나를 사랑했던 적이 없었나요? 정말요? 그래도 당신 믿었어요. 내게 보여줬던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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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들이 얼마나 다정했는지... 그들은 모르니까요. 보고 싶다는 한마디에 달려와 준 당신이었다는 걸 그들은 모르니까요. 그런데... 그게 다 거짓이었나요? 그런 가요?'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강혁을 보며 시연은 정말로 무너지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그녀를 지탱해주던 힘이 되었던 기억마저도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한번도 날 사랑한 적이 없었나요? 차가운사랑 13장 9, 깨달은 사랑, 그리고 다가오는 사랑 이렇게까지 힘든 환자는 처음이었다. 그가 요양원에서 정신과전문의로 경험을 쌓아 가는 기간동안 벽에 부딪치는 느낌을 들게 만든 최초의 환자였다. 보통 아무리 큰 상처나 정신적 충격을 받은 환자라 해도 침묵을 1주일 이상 지키는 환자는 없었다. 의사와 혹은 간호사, 아니면 비슷한 증상의 환자들과 함께 있다보면 자연스럽게 입이 열리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정말 그에게 벽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우는 며칠동안 만지작거리기만 하며 건네주진 못한 책을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 이미 손때가 묻어 모서리 부분은 새까맣게 때가 묻어 있었다. 그녀가... 의사인 그에게 문을 열지 않는다면 다른 것에라도 반응을 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가 택한 것은 책이었다. 웬만한 원룸 부럽지 않은 방안에 그가 들어서는데도 시연은 그에게 눈길한번 주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민우도 그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탁자에 책만 놓고 나갔다. 그러나 오후 회진때 그녀의 방에 들어가 보았을 때도 책은 그가 놓아 두었던 모양 그대로 있었다. 무엇이 그녀를 세상으로부터 단절하도록 만들었을까... 역시 안 되는 것인가... 그녀는 여전히 창 밖으로 고정된 시선을 움직이지 않은 체 였다. 낮게 한숨을 내쉬고 밖으로 나섰다. 그러나 다음 날 그는 그가 내밀었던 책 위에 메모지가 한 장 올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고맙습니다. 눈 맑은 은빛연어는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와 편한 안식을 찾은 거 같네요. 잘 읽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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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녀가 처음으로 반응을 했다. 그러나 그가 느끼는 기쁨은 의사로서가 아닌 새로운 감정이었다. 그녀가 이 요양원에 들어선 이후로 그의 시선을 붙잡았던 색달랐던 이유... 민우의 마음이 떨렸다. 그는 자신의 책장을 세심하게 다시 뒤지고 있었다. 그녀가 볼 수 있을 만한 다른 책을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지 못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차를 몰아 시내로 향했다. 다른 환자들의 진료를 팽개쳐두고 그는 오직 이시연이라는 한여자를 위해 시내로 차를 몰았던 것이다. 뒷좌석에 가득 여러 종류의 책을 싣고 돌아오면서 휘파람까지 불었다. 그는 다시 그녀의 방에 들어와 '모모'를 올려 놓았다. 그녀가 연어를 괜찮게 보았다면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맑은 영혼을 가진 연어나. 순수한 시선을 가진 어린 모모를 주인공으로 한 편한 글이 좋을 테니까... 시연은 의사가 다시 그녀의 방에 들어와 책한권을 놓고 가는 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처음 이곳으로 들어온 뒤로 미치지 않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자신에 대해 대견해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언제 미칠까... 언제 미쳐서 제정신을 잃을까... 막연히 그러길 바라며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정신을 앗아가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미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의사가 나간 뒤 탁자위로 다가갔다. 그는 그 뒤로도... 그녀가 다 읽었다는 표시로 그가 처음 놓아두었던 것과 다른 모양새로 탁자위에 책을 두면 어김없이 다른 책으로 바꾸어 갔다 놓았다. 그리고 그렇게 그가 두고간 책 사이에서 작은 메모지 하나가 그녀의 눈을 끌었다. '지금 몇 월인지 아십니까? 4월 중순이에요. �떤이 흐드러지게 피어 꽃비가 내리는 것 같습니다. 산책하고 싶지 않으세요?' 메모지를 내려놓고 창가로 다가가 보니 정말 요양원의 넓은 정원이 벚꽃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보였다. 얇은 가디건 하나를 옷 위로 걸치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하는 외출이었다. 아니 ... 이곳 요양원으로 온지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처음 방문을 나서는 산책이었다. 요양원엔 그녀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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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이가 많은 노부부도 있었고, 작은 어린아이도 있었고... 다들 다사로운 햇살 아래 담소를 즐기며 벚꽃을 즐기고 있었다. 그중 빈 벤치를 하나 찾아 조용히 앉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연은 이 요양원이 주는 지겹도록 평화로운 시간들을 즐기고 있었다. 여기선 적어도 그녀를 비난하는 가족도, 그녀를 힘겹게 만드는 강혁도 없으니까... 아니 그녀의 주변의 것들에 무감각해지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누군가 그녀의 귀를 간질이는 것에 흠짓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저... 놀랬다면 죄송합니다. 전... 그냥 음악을 들려주고 싶어서..] 그녀의 담당의사였다. 늘... 책을 가져다주는 의사. 그의 한 손엔 CD플레이어가, 나머지 한 손에 이어폰이 들려있었다. [들어볼래요? 우리 한쪽씩 귀에 꽃아 듣는 건 어떨까요?] 그녀에게 한쪽 이어폰을 내민 의사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망설이다가 이어폰을 받아 들었다. 그녀가 귀에 이어폰을 가져갔을 때... 하필이면... 하필이면... 비발디의 사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시죠? 사계. 그가 40대 이후로 작곡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곡이래요. 이 음악을 만들기 전까지는 바이올린이나 첼로를 제대로 잘 만드는 장인이 없었데요. 그런데 그 시기에 훌륭한 장인이 태어나 완벽한 악기를 만들어냈고, 그래서 비발디가 원하는 훌륭한 협주곡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하네요] [붉은 머리의 사제] [네?] [그의 별명이었어요. 바로크시대에 태어났고, 가장 어린나이에 사제서품을 받은 신부가 되었고, 오스트리아 빈에서... 죽었죠] 언젠가 강혁이 조용히 속삭여주던 비발디에 대해 시연은 조용히 잔잔한 목소리로 의사에게 설명을 덧붙였다. [아.. 음악을 잘 아시나봐요. 제가 괜히 잘난체를 했나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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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의 얼굴엔 쑥스러뭄으로 가득차며 붉게 상기되고 있었다. 가운에 써진 이름으로 시선을 옮겼다. 서민우 그의 인상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아뇨. 선생님이 말씀해준 건 오늘 처음 들었어요] [저... 3주만에 처음으로 말을 하신 거 아세요?] 민우의 말에 시연은 이어폰을 빼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읽고 싶은 책 있으면 말씀하세요. 가져다 드릴께요] 그는 매일 책 사이에 메모를 끼워 넣어 보냈다. '벗꽃이 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배꽃이 피었습니다.' 혹은 '감자를 캐고 있어요. 감자 캐는 거 보셨어요?' 그리고 오늘은 '커피한잔 하실래요? 그 때 그 벤치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라고 적혀 있었다. 가디건을 걸치고 한참을 망설였다. 갈까...말까... 그러나 시연은 결국 가지 않았다. 또 사람들과 어떤 관계도 맺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요양원에서의 하루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에릭] [예 회장님] [능력 있는 CEO 한 명 알아봐] [갑자기...] [시키는 대로 해] 에릭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강혁을 매일 보고 있었다. 한국에서 돌아온 뒤로 넋이 나간 사람처럼 무기력한 모습으로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저에게... 가르쳐 주세요. 넥타이 매는 법' 갑자기 넥타이를 엉망으로 만들어 매놓고서는 쑥스러운 듯 어깨를 들썩이던 그녀의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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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올랐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사소한 그 많은 것들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던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이젠... 나 없이는 못살 거 같죠?' 장난스럽게 그녀가 옆구리를 간질이며 속삭이던 것이 지금은 날카로운 무기가 되어 그를 찌르고 있었다. '그래... 시연아... ' 너무나 늦은 대답이 허공하게 공허하게 울려 퍼질 뿐이었다. 쟈스민 향기가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무기력하게 앉아 있던 그가 벌떡 일어나 시연이 있었던 방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하더니 거칠게 문을 열어 젖혔다. 당장이라도 사랑스럽게 웃으며 '다녀오셨어요?'라고 말하며 달려올 것 같았다. '너도 아팠니? 지금 나만큼... 너도 아팠던 거냐?' 강혁은 쓰러지듯 문에 기대어 주저앉고 말았다. 힘으로 남자를 무릎꿇게 만들기는 힘들지만 사랑으로 굴복시키기는 쉽다. 특히... 자존심 하나로 지탱하며 살아온 사람은... ♣ 요양원에서의 하루하루는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와 달리 그녀에게 안정과 평화를 가져다 주고 있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민우라는 의사는 아주 사소한 것들로 그녀를 미소짓게 만들고 있었다. 하루는 엄지손가락 굵기의 실험용 비이커 안에 메모를 적어 넣고는 코르크 마개로 닫고는 그녀의 탁자 위에 올려놓은 적도 있었다. 코르크 마개를 열었을 때 쟈스민 향기가 훅... 하니 그녀의 코를 찌르며 풍겨 나왔다. '당신에게선 쟈스민 향기가 납니다. 당신 생각이 나서... 이 향기를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쟈스민향기... 며칠 뒤 잠결에 그녀에게 향기로움이 가득 느껴지고 있었다. 살며시 눈을 떳을 때, 붉은 사과모양의 향기초가 탁자 위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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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로마향이 들어간 향기 초입니다. 편하게 숙면을 취할 수 있게 해주는 향이죠. 좋은 꿈 꾸세요' 그러나 시연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조용히 소리 없이... 그녀에게 다가오기를 청하는 남자 민우 때문에... 그녀의 속에는 아직도 너무도 뜨겁게 강혁이라는 남자가 타오르고 있는데... 힘겹게 겨우겨우 한 남자를 밀어내고 있는 지금... 또 다른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오기를 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여름이 되어가고 있었다. 3달은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긴 시간도 아니었다. 가끔 그녀의 어머니가 찾아와 눈물짖고 가곤 했지만 시연의 가슴에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다만 생모인 어머니가 다녀가고 나면... 그녀를 키워줬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어김없이 떠오른 다는 것만 빼고... 잉어들이 헤엄쳐 다니는 작은 연못을 보았다. 연꽃이 이미 핀 것도 있고 피려고 봉우리가 맺혀 있는 것도 있었다. 그런 그녀의 옆자리에 누군가 조용히 앉았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누군지 알 수 있다. 언제나 그녀가 가는 곳마다 시선이 머무는 그... 서민우라는 남자...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하세요] [저...사탕 먹을래요?] [네?] [사탕요. 몰라요 사탕?] 그는 버튼 같은 것을 누르면 사탕이 하나 톡--- 나오는 케이스에 들은 사탕을 내밀었다. [드세요] 그녀의 손에 쥐어주는 것을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그녀는 사탕을 꺼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민우가 빤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 미안한 생각이 들어 톡하니 뚜껑을 열고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사탕하나가 그녀의 손위로 떨어졌다. 그런데 그 사탕을 낼름 민우가 집어가 자신의 입으로 넣어버렸다. 물끄러미 그걸 보다가 시연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그녀의 손바닥 위로 떨어진 물건을 보고 그녀는 굳은 체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다만 창백한 얼굴로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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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를 올려다보았을 뿐... 햇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이는 커다란 반지가 그녀의 손위로 덩그렁하게 떨어졌던 것이다. [당신이 그걸 받아준다면 남은 시연씨의 인생을 사탕처럼 달콤하게 만들어 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이 남자는 왜... 그녀에게 청혼을 하는 것일까... [나에 대해 얼마나 아세요?] 민우는 여유 있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니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꼭 많이 알아야 합니까? 차차 알아 가는 것도 좋은 것 같은데요] [난..... 이걸 받을 수 없어요] 시연은 그의 손에 반지를 돌려주었다. [안 돼는 이유를 말해주십시오] [당신을 그보다 먼저 만났다면 .... 아마 기쁜 마음으로 받았을지 모르겠네요. ] '그'라는 말이 언급이 되자 순간 민우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난... 그 사람 아이까지 가졌었어요. 비록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나보다 먼저 저 세상으로 갔지만 ... 그리고 가족은... 나를 알콜중독으로 몰아 이곳에 집어넣었죠. 그는... ] 너무 아프게 그녀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세상에 너무도 많은 고통을 겪은 뒤에나 보이는 초연함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날 멀리하세요... 내 삶 가까이에 다가오면 당신까지 불행해 지니까.] 그녀가 되돌려준 반지를 받아든 민우의 손이 부르르 떨리며 움켜쥐어지고 있었다. 그런 그를 남겨둔 체 시연은 뜨거운 여름 햇살 속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5개월 후 [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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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연아... 나 선영이야] 선영의 목소리에 순간 시연은 목이 메이는 것 같았다. [언니.] [그래 오랜만이지? 나 서울왔어.. 휴가 받았거든. 볼수 있을까? 오늘 가는 날이라. 너 보고 가려고] [그럼 봐야지. 어디에 있는데?] 시연은 선영과 약속한 장소에 빠르게 차를 몰아가면 초조하게 운전대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선영의 모습을 보았을 때 오랫동안 헤어졌던 가족을 만난 것처럼 달려가 그녀에게 안기고 있었다. [좋아 보이네] [언니도. 두 사람은 커피�熾?앉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며 그동안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요양원에서 3개월 전쯤에 퇴원했다던 시연은 에릭에게 들어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밝아 보였다. [다행이다.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내가 공항까지 태워다 줄게] 공항의 출국장 앞까지 와서 막 게이트로 들어가려는 선영을 시연이 다급하게 불렀다. 선영은 돌아서 시연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언니...] [다음에 또 오면 연락할게] [언니... 나... 결혼해!] 순간 선영의 머리에 강혁이 떠올랐다. 결국 시연에게 한마디도 전하지 못한 강혁의 요즘 생활에 대해... [그래? 언제 하는데... 왜 이제야 말하는 거야?] [다음주에... 축하해 줄거지?] [시연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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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이야. 날 아프게 하는 일 따위 할 사람아니야] [시연아..있지...] [언니... 아마 이젠 언니도 만나기 힘들 거야. 그 사람한테 미안하니까] [시연아... ] [아마... 언니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선영은 알 수 있었다. 시연이 진정으로 사랑해서 그 사람과 결혼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결혼한다고 말하는 사람의 눈이 저리 슬퍼 보이지는 않을 테니까. [다녀왔습니다.] 선영의 인사말에도 강혁은 별로 말이 없었다. 전문경영인을 고용한 뒤에 강혁은 언제나 저런 모습이었다. 반쯤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가끔 시연의 방에서 취해 잠들고... [저 회장님...] [아...윤실장이군] [시연이 만났어요.] 그의 눈이 반짝였다. 시연의 소식에 늘 공허한 눈을 하고 있던 그가 오랜만에 생기있는 눈으로 선영을 보았던 것이다. [잘... 지내고 있었나?] [네. 좋아보였습니다.] [그래... 그래... 다행이야. ] [저 회장님...] 선영은 차마 입 밖으로 그 말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말해. 뭐지?] [시연이... 결혼해요. 다음주에] 선영은 더 이상의 강혁의 모습을 볼 수가 없어 그대로 문을 닫고 나왔다. [피곤하죠 너무 늦었네 이렇게 늦을 줄 몰랐는데..] [아뇨. 민우씨 집에까지 가려면 먼데...] [잘자요. 내 꿈꾸고] [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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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연이 손을 들어 살짝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뜨리자 민우는 갑자기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 다녀 손바닥에 작은 물건하나를 올려 두었다. [눌러봐요] 그가 시키는 대로 주먹의 반만한 인형의 배를 누르니 ' 사랑해! 사랑해!' 라며 앙증맞게 반복하고 있었다. [어머 너무 귀여워요] [내 맘이에요] 민우는 가볍게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하며 잘자라는 말을 하고 돌아갔다. 잠깐 그녀의 손에 있는 인형을 보다가 집안으로 들어간 뒤... 그녀가 머물렀던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남자의 깊은 한숨이 울리고 있었다. 팔을 들어 눈을 가리며 뒤로 기대는 남자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녀가 집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오기 훨씬전부터 그렇게 오래도록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는 다른 남자의 품에서 행복해하는 그녀를 보았을 뿐이었다. 호텔로 돌아와서도 술병을 들고 취하도록 마시고 또 마시고 있었다. 그의 머리에서 그녀에 대한 영상이 지워지길 바라면서... 자신이 아니라 다른 남자의 키스를 받으며 행복하는 그녀의 영상이 지워지길 바라면서......그러나 취하면 취할수록 그녀는 너무도 힘들게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시연아...............] 강혁은 마치 그녀가 앞에 있는 것처럼 손을 뻗었다. [시연아..................] [어머 신부 너무 예쁘다. 역시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해야 이쁘다니까]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듣고 있었지만 시연의 마음은 편하지가 않았다. 곧 식이 시작되는지 사람들이 모두 홀로 들어가고 도우미와 그녀만 남게 되었다. 드레스를 챙기며 일어서는 시연의 눈에 한남자가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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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왔다. 초췌하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한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오지도 못하고 그는 신부대기실 앞에서 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이 눈이 부시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그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빈틈없고 완벽한 사람이었는데... 그녀의 심장이 따끔거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눈물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설마... 아닐거야....' 시간이 정지된 듯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는 너무도 아름다운 시연의 모습을, 시연은 너무도 힘겨워 보이는 그를... 그렇게 동상처럼 서있던 그가 말없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100마디의 말보다 그의 그 행동이 더 절실하게 그녀에게 와 닿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 내밀어진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은 그녀를 향해 끊임없이 용서를 구하며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시연아... 나... 죽을 것만 같다. 네가 없는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어 죽을 것만 같다. 난... 전부를 잃은 것 같다. 제발... 내 손을 붙잡아 다오. 제발...' 시연의 걸음이 그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강혁은 두근거리며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그녀가 웃고 있었다. 눈이 부시게... 그에게 다가오는 그녀가 너무도 그리워 가슴아프게 만들었던 그런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곁은 스치고 지나가버렸다. 마치 ... 그의 존재가 그곳에 없는 것처럼... 그녀는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를 스치고 지나가 버렸다. 그녀에게 내밀어졌던 손이 허공에 멈추어 버렸다. 그녀가 스치고 지나간 뒤 텅빈 로비에 강혁은 그녀에게 내밀었던 손을 접지 못하고 한참을 굳은 체 서 있었다. 그녀가... 가버린 것이다. 영원히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호텔로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모르게 돌아와서 그는 미친 사람처럼 웃어댔다. 웃고 또 웃고... 너무 웃어서 진이 다 빠져버릴때까지 웃고 있었다. 그리고는...쓰러지듯 바닥에 누워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혼자 생각할 시간이 생기면 곰곰이 짚어 보세요. 복수를 해서 얻은 것이 뭐고... 잃은 것이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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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잃은 두 가지는 평생 다시 얻을 수 없을 거에요..' 그녀의 말이 너무도 선명하게 그의 귀에 맴돌며 괴롭히고 있었다. 차가운사랑 14장 10 마지막 기회 [알았지?] [예] [실수 없이 잘하도록 해. 만약은 없어. 빈틈없이 완벽하게] [예] 경호원들에게 비밀스런 명령을 내리고 에릭은 강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역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다시 프론트로 전화를 돌렸다. [뉴욕인데, 메모 부탁드립니다. 방에 있는 것 같은데 연락이 안 되서 말입니다.] [말씀하십시오] [본사에 위급한 일이 생겼으니 빨리 뉴욕으로 돌아와 달라고 말입니다. 공항으로 전세기 보냈다고 전해주십시오] [예 손님] 강혁이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시연은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성혼서약, 그리고 혼인서약에 착실히 대답하고 있었다. 결혼식이 무사히 끝나가면서도 시연의 눈은 어느새 넓은 홀 어딘가에 그가 있지나 않을 까 하는 마음에 찾고 있었지만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그들을 축하하고 있었지만 시연의 마음은 너무도 텅 빈것만 같았다. 카페트 위에 널부러져 있는 강혁을 보고 호텔직원이 놀라 달려왔다. [손님...] 혹시 심장마비라도 일으킨 것은 아닌가 놀랬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다급하게 강혁의 팔을 붙잡는 손을 뿌리치며 강혁은 몸을 일으켰다. [무슨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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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에릭이란분이 연락하셨습니다. 본사에 문제가 있다며 전세기 공항으로 보냈다고 메모 부탁하셨습니다.] [고맙소] 빨리 나가란 듯이 말을 하는 강혁을 흘끔 돌아보는 직원의 눈은 아직도 불안해 보였다. 그가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이 아닌게 확실하다면, 지금의 그의 얼굴은 마치 당장이라도 창 밖으로 뛰어 내릴 것처럼 너무 우울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한국이란 나라에 미련은 없었다. 오늘로서 그가 있을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문득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미국이라는 나라에 고아처럼 홀로 남겨진 이후로 여유라는 것을 즐겨본 적이 있나 되짚어 보았다. 오로지 그의 머리를 가득 채우던 복수라는 이름하나로 이제까지 버티고 있었는데, 결국 그는 그걸 이룸으로 더 소중한 것을 잃고 말았다. LA에 도착해서 객실에 들어서자 신혼부부로 미리 예약이 된걸 호텔 측에서 알았는지 커다란 빨간장미와 축하케익, 그리고 샴페인이 예쁘게 포장이 되어 놓여 있었다. [피곤하죠?] [네? 아... 네] [좀 쉬어요. 저녁때 돼서 천천히 시내구경도 하고 카지노에도 가보도록 하면 되니까] [네] 민우는 어색한 듯 서있는 시연을 뒤에서 가만히 안았다.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그는 처음으로 그의 여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행복했다. [당신이 갑자기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불안에 늘 시달렸다면 믿을 수 있겠어요?] [민우씨...] [정말 이제 내 아내가 된 겁니다.] 민우는 그녀의 하얀 목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그녀의 향기에 흠뻑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연은 그런 그의 행동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그가 따뜻한 마음으로 그녀가 가장 힘들었을 때 위로해 주며 감싸주었지만, 그녀의 몸은 그에게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민우에 대한 미안함이 가끔은 그녀를 힘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랑이란건 언제나 불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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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은 아니니까... 서로 믿고, 참고, 이해해주며 지내는 시간이 더 많으니까... 민우라면... 이 사람이라면 그녀를 남은 시간동안 굴곡없는 잔잔한 삶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민우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향해 매끄럽게 올라가려하자 갑자기 밖에서 급하게 노크하는 소리가 뜰렸다. 민우는 낮게 짜증스런 말을 내뱉으며 살짝 문을 열었다. [무슨 일입니까?] [죄송합니다. 손님. 로비에 서민우씨를 찾아오신 분이 계신데요. 방으로 모실까요?] [저를요? 누구라고 밝히던가요?] [한국분이신데... ] [아뇨. 제가 내려가죠] 민우는 시연과의 달콤한 첫날밤을 보낼 그들의 공간에 다른 사람을 들이고 싶지 않아 로비로 내려가겠다는 대답을 했다. [잠깐 갔다 올거니까 쉬고 있어요] [네] 민우가 아쉬움을 가득담은 얼굴을 하고, 시연에게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갔다. 그제서야 시연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무너지듯 침대에 주저 앉아 버렸다. 자꾸만... 그녀의 머리에 '이건 아니다' 란 생각이 떠오르며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아니야 난... 옳은 선택을 한거야. 난 잘한거야. 지긋지긋한 가족에게서 벗어났고, 나만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난 거야. 난 잘한거야' [똑똑!!] [누구세요?] [룸서비스입니다.] 시연은 그때까지만해도 아무런 의심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문일 열리며 커다란 덩치를 가진 몇 명의 남자들이 들이닥치며 시연의 입을 손수건으로 가리며 잡아 챌 때는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또 다른 불행이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의식을 잃으면서 그녀로 인해 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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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불행해질 민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를... 그녀가 또다시 불행 속으로 끌어들인 것 같아서... 그리고 암흑 속에서 시연은 포기하고 있었다. 이젠 정말...살아갈 힘이 없다고... 지친 얼굴로 강혁은 그의 침대에 누웠다. 본사에 급한 일이 생겼다던 에릭은 그를 보자마자 생각보다 빨리 일이 처리되어 본사에 가지 않아도 된다며 그를 집으로 이끌었다. 강혁은 시연의 방문을 열어보았다. 아직도 그녀가 쓰던 물건들이 그대로 있는 그 방이 이젠 그에게 너무도 커다란 고통이었다. [회장님] [당분간 회사일 자네가 알아서 처리해.] [저...] [며칠 여행을 갈까 해.] [우선 좀 쉬십요. 피곤해 보이십니다.] [술을 가져다 줘] [예] 평소의 에릭답지 않게 그는 너무도 순순히 강혁에게 술을 가져다 주었다. [수면제입니다. 드시고 푹 주무십시오] [에릭] [예 회장님] [고맙네] 독한술 한잔과 에릭이 내민 수면제... 강혁은 그렇게 깊은 잠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나른하지만 무거운 두통을 느끼며 다시 눈을 떴을 때, 세상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허탈해하고 있었다. 그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오며 눈을 감아버렸다. 다시 술병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찰라 시연의 방문이 열리며 화가난 듯한 사람의 발걸음이 빠르게 그에게 다가오는 것 같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그 순간을 믿지 않았다. 시연이 화가난 얼굴로 그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입을 앙다물고, 눈은 눈물로 가득차는 것을 참으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강혁은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가 그의 셔츠 앞섭을 두 손으로 움켜쥐며 눈물 섞인 목소리로 그를 원망하고 있었다. [얼마나 더 내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겠어요? 얼마나 나를 흔들어야 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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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리겠냐구요? 내가 얼마나 뭘 어떻게 잘못했길래 나에게 이러는 거에요? 왜요? 왜요?!!!!!!!!!!!] [네가...왜 여기에.....] [이제 그만...날 놔줘요. 그만큼 괴롭혔으면 충분 하잖아요. 제발요...] 움켜쥐었던 그의 셔츠를 잡았던 손이 풀리며 시연은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감정에 겨운듯 어깨까지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앞에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 그녀가 있었다. [시연아...] [나... 그만 좀 괴롭혀요. 나... 너무 힘들단 말이에요] [시연아...] 너무도 불러보고 싶은 이름이었다. [네가...여기 있다니..믿을 수가 없어. 네가..] [또... 이렇게 되버렸어요.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요... 내가 왜...] [시연아... ] [보내줘요. 부탁이에요. 나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이 불행해져요. 제발요...] [시연아...] [사람이 왜 이렇게 잔인해요? 왜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냐구요? 이번엔 뭘 바라는 건데요? 뭘요?] 그녀가 절규하고 있었다. 그녀의 등뒤로 에릭이 서 있었다. 강혁은 설마하는 눈으로 에릭을 보고 있었다. [제가 데려왔습니다.] [뭐라고?] [두 사람... 아니 회장님. 평생 후회하며 보내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젠...좀 솔직해 지십시오] [나가 있어]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다니... [민우씨가 절 찾고 있을 거에요. 나 보내줄거죠?] [이젠... 날 사랑하지 않는 거냐?] 아직도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는 눈으로 시연은 강혁을 바라보았다. [그래요. 사랑 안해요. 그딴거 살아가는데 무슨 필요가 있는데요? 사랑요? 전 이젠 그런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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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믿어요. 사랑같은 거 안믿는다구요.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지옥까지 몰고가서 거기에 밀어넣은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할 말이 없었다. 그가 무슨 말로 그녀의 상처를 치료해 줄 수 있을가. [한번만... 내게 한번만 기회를 주면 안되겠니?] [강혁씨 바보에요? 난 결혼했어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겠다고 선서한 사람이라구요] [넌... ...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너도 아직 날 사랑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어. 그런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수 있는 거야? 내가 안보이니? 내가?] 시연은 그녀의 어깨에 올려진 그의 손을 털어냈다. 차갑게 굳어지고 있었다. 여전히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있으면서고 그녀의 얼굴이 차갑게, 냉정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난 안보였어요? 내가 당신 앞에서 그렇게 매달리며 지옥에서 꺼내달라고 했을 때... 그땐 내가 안보여서 그런 건 가요?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이에요? 당신 밖에 몰라요? 당신 감정만 중요한 거에요? 다른 사람들은 한번도 생각 못 해봤어요? 나.. 솔직히 못 믿겠어요. 당신은 지금 당신의 애완동물이 새주인에게 적응하고 지내는 것에 화가난 것 뿐이에요. 그런 이기적인 감정에 사랑이란 이름 같다 붙이지 말아요] 시연은 그의 앞에서 냉정히 돌아서 그녀의 방으로 돌아가 문을 잠갔다. 언제가 그가 그녀를 향해 문들 잠그엇듯이 그녀는 그를 향해 문을 잠그었다. 모두 묻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을 가득채우던 이 방이 들어왔을 때 시연은 자신이 한순간도 이곳을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그러나... 두려웠다. 너무나 아프게 그를 사랑했던 만큼... 또 다시 아플까봐... 그리고 그녀 때문에 아파할 민우 때문에 그녀는 더더욱 이곳에 있을 수 없었다. 언제나 따스한 미소를 잃지 않고 지어주는 민우였다. 다른 남자의 아이까지 가졌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그녀에게 여전히 따스한 마음으로 대해준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버릴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감정이 뭐란 말인가? 이곳, 이방에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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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면서 이제야 안식처로 돌아온 것 같은 편한 느낌은 뭐란 말인가... 강혁은 시연으로부터 철저한 외면을 당하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서, 그녀가 산책이라도 하면 몇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따라 느긋하게 걷는 그의 존재를 무시하며 시선조차 주지 않아도 그는 항상 그렇게 항상 그녀의 가까이에 있었다. 식사를 하면서 좋은 하루 보냈냐며 일상적인 질문을 해도 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외면에도 끊임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 시연은 어김없이 들고있던 수저를 놓고 자리를 일어섰다. [그렇게 애쓸 필요 없어요. 그래도 난... 남지 않을 거니까] [어떻게 하면 되겠니?] [보내주기만 하면 되요] [앉아] [명령하지 말아요. 당신은 내게 명령할 권리가 없어요] [앉아!!!!!!!!!!] 그가 화가난 듯 소리를 질렀지만 시연은 꼼짝도 않고 서있었다. 그리고는 보란듯이 그에게 등을 돌리며 돌아섰다.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그가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낚아챘지만 시연의 표정은 얼음처럼 차가울 뿐이었다. [그래.. 명령할 권리는 없지 이제. 하지만... 넌 내 집에 있고, 내 손안에 있어.] [그래서요? 전처럼 강제로 제 몸을 가질 수도 있다는 말을 하고싶은 거에요? 난... 이제 당신에게 아무런 감정 없어요. 미워하지도, 증오하지도 않아요. 그저 잠깐 알았던 사람에 불과해요. 그뿐이에요. 어떤 협박도 통하지 않아요.] 말을 다 마치자 그의 입술이 거칠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거칠게 그녀를 끌어안으며 입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그녀가 반응하길 끈질기게 기다리며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지만 시연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허탈한 눈으로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믿고 싶지 않아는 얼굴이었다. '그런 눈 하지 마세요 제발... 이제와서..엉망으로 만들어 놓고...그런 눈으로 나를 보면 어떡하란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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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끝났어요?] 강혁이 먼저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돌아가...] 뒤돌아 서 있는 그의 모습이 너무 아슬아슬해 보였지만 시연은 냉정히 돌아서 그녀의 방으로 돌아왔다. 자꾸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무너지지 마세요. 내가 마음놓고 미워할 수 있게 무너지지 말라구요.' 너무도 그리웠던 입술이었다. 잠들 때, 잠에서 깰 때 그는 항상 그녀에게 키스해 주었다. 잠꾸러기라고 놀리며 일어나기 싫어하는 그녀에게 키스를 해서 아침을 열어주었다. 그의 목에 팔을 둘러 키스를 받고싶었다. 그걸 참아내는 것이 너무도 괴로웠다. '사랑해요. 그래요.. 아직도 사랑하나봐요. 나...이젠 어떡해 해야 하는 건데요? 당신 사랑하지만 민우씨... 그 사람한테도 민안해서... 당신한테 갈 수 없어요.' 저녁이 될 때까지 시연은 멍하니 베란다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상념을 깨뜨린 것은 자동차의 엔진소리였다. 그리고 그 차에서 내린 사람을 보았을 때 시연의 얼굴은 처음 이곳으로 납치가 되었을 때보다 더 창백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민우였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이다. 서둘러 현관을 향해 달려갔다. 현관에서 강혁과 나란히 서 있는 그를 보고 시연은 걸음을 멈추었다. 다가오는 시연을 본 민우가 시연을 향해 달려왔다. 그러나 시연은 자신을 향해 팔을 벌려 달려오는 민우를 망설이며 보고 있었다. 강혁이 보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향해 걸어오던 민우의 걸음이 멈칫하며 늦추어졌다. 그리고 시연의 얼굴을 보고 그의 얼굴도 시연만큼이나 굳어지고 있었다. [내가... 연락했다. 아무 일도 없었소. 당신이 시연일 믿는 다면... 그것도 믿어야 할 거요] [당신 절대 가만두지 거야] 민우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시연이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하듯 그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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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에 팔을 둘렀다. [갑시다. 이곳에 한시도 더 있고 싶지 않으니까] 민우의 손에 이끌려 시연은 그가 타고 왔던 택시에 몸을 실었다. 돌아보고 싶었다.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뒤돌아 보고 싶었지만 시연은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케네디 공항에서도...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도 민우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지난 1주일 동안 아무일도 없었다는 강혁의 말을 믿지 못하는지... 아니면 그녀를 믿으면서도 괴로움에 갈등하는지 그는 이제까지 그녀가 보지 못한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게이트를 열고 나오는 순간 그녀는 민우로부터 그녀를 떼어내려 애쓰는 그의 어머니를 보았다. 예쁜 며느리라며... 다정함으로 그녀를 토닥여주던 분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여자를 보듯이 시연을 보고 있었다. [결혼! 없었던 것으로 잊어라.]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공항의 게이트에서 그녀는 시연을 향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민우를 보았다 항의를 하려는 듯이 입을 열려 했지만 시연을 보는 순간 그는 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시연은... 서서히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해 눈을 뜨고 있었다. 행복이란게 언제나 비켜 가는 운명이라면 이젠 스스로 만들겠다고... 사랑하지 않으면서 단지 그의 안정 속에 뛰어 들고 싶었던 자신의 어리석음도 바로 잡겠다고... [민우씨 미안해요. 죄송합니다. 어머니] [어머니라고 부르지마라 소름끼친다... 깜찍하게 그놈 애까지 가졌었다는 걸 속이고 결혼까지 하다니... 다시는 안보고 살았으면 좋겠구나] [어머니..] [민우야. 나 죽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그만 가자] 민우가 가지 않으면 그녀는 그 자리에서 혀라도 깨물 것 같은 단호한 얼굴이었다. [가세요. 난...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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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혼자만 덩그렇게 남겨졌을 때, 시연은 생각보다 편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이젠... 그녀가 인생을 만들어 갈 것이다.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모르지만 바로잡고 싶었다. 이젠... 내가 만들 것이다. -------------------------------------- 드디어 다음이 완결이네요... 에필하고 같이 올릴께요. 헤헤 ^^* 11장 결자해지 성북동에 들어서는 시연을 바라보는 가족들의 시선이 그리 곱지 만은 않았다. [그 놈하고 짠 거니?] 세연이 비아냥거리며 시연에게 조롱을 보내고 있었다. [너... 그동안은 내가 정신이 없어서 참았는데, 한번만 더 나에게 그따위로 말하면 가만 두지 않겠어] [이야~ 겁난다. 너 갑자기 간이 부었니? 그놈이 니 뒤에서 백이라도 되 주겠다고 그러디?] 시연은 조용히 세연에게 다가갔다. 조용히 다섯 개의 손가락을 접어 주먹을 만들었다. [난 분명히 경고했어]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주먹이 세연의 턱을 향해 날아갔고 세연은 악--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널부러져 버렸다. [니가 뭔데? 넌 나한테 그런말 할 자격 없어. 니가 날 동생으로 인정안하듯이 나도 널 언니로 인정안해. 왠지 알아? 넌... 가족간에 진짜 사랑이라는 걸 모르니까. 너 따윈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절대 모르는 거야.] [너... 너...] [그래 나 이렇게 살아왔어. 뒷골목에서 살아남으려고 편의점에서 술취한 놈하고 껌값 가지고도 싸웠고, 노래방에서 나에게 술먹이려는 변태 같은 놈하고도 싸우면서 지냈어. 왜 그랬는지 알아? 니가 부모님 밑에서 편하게 호의호식하면서 비싼 옷에, 비싼 음식에, 눈 돌아갈 만큼 비싼 보석하고 다닐 때 난 안 굶어죽으려고 그렇게 살아야 했어. 니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비아냥 대는 건데? 니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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슨 자격으로?] 시연의 거침없는 말에 세연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금방이라도 때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눈을 부릅뜬 채 서 있는 시연이 너무도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렇게 지내게 된 게 내탓만은 아니지. 그렇지 않은가요?] 시연은 그녀의 부모를 보았다. [세연이 니가 나처럼 될 수도 있었어. 재수 없게 똑같이 생긴 얼굴인데 내가 선택 되서 누군가가 데려갔다가 버려졌다고. 알아? 말씀해 보세요. 내가 회장님 회사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내가 집을 나가고 싶어서 이렇게 엉망이 된 삶을 살았어요? 말씀해 보세요] [아버지... 라고 불러주면 안되겠냐?] 이회장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처음 그녀를 맞이하던 당당함이 그에게서 빠져나가버린 것 같았다. [생부는 맞으실지 모르지만... 아직 아버지는 아니에요. 생모가 맞으실지 모르지만... 어머니도 아니에요] 어머니 연옥은 기어코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저... 따로 나가서 살거에요. 두 분께서 절 정말로 딸로 생각하신다면 막지 마세요. 두 분께 피해 되지 않게 제가 벌어서... 제가 먹고 살 거에요.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시연아... 같이 살면 안되겠니?] 연옥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전... 제 아픔을 보듬어주지는 못할망정 그런 곳에 집어넣은 사람들하고 한시도 같이 살고 싶지 않아요.] [너 왜 갑자기 당당해 졌다. 정말 그 자식이 니 빽이라도 되어 준다디?] 세연이 두 손으로 턱을 잡고 일어서며 시연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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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연. 어른이 되라. 그럼 그때 내가 나의 대화상대로 고려해 볼 테니까. 네 말엔 대답한 가치를 못 느껴!] 시연은 그녀의 방에서 작은 가방에 필요한 몇 가지만을 챙겨서 내려왔다. [갈께요. 안녕히 계세요. 나중에 전화 드릴께요] [할 필요없어. 너 따윈 처음부터 필요없었으니까] 세연이 드디어 분을 참지 못하고 악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시연은 그런 세연을 바라보며 피식 웃기만 했다. [나도 넌 필요 없어.] 그리고 시연은 이유 없이 죄인을 만들던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났다. 이젠...정말 자유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걸음은 이제까지 그녀를 키워주신 그녀의 엄마에게로 향했다.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너무나 많이... 그러나 그녀가 전에 가출하기 전까지 살았던 집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녀의 엄마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전주에서 깨끗한 여관을 찾아 하루를 자고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를 찾아갔다. 증권회사에서 부장으로 일하는 아버지 범천을 찾아 건물의 로비에서 기다리는 동안 그녀의 심장은 떨리고 있었다. 기억속의 아버지.. 다정하시고 자상하시고.... 늘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사시던 분이었다. 로비의 의자에서 초조하게 손을 쥐고 있는 사이 그녀의 기억보다 훨씬 나이든 아버지가 로비안을 두리번 거리며 찾다가 자신을 찾아 왔다는 방문객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안내의 여직원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10년이 넘었다. 그를 보지 못한지...초등학교 시절..자고 일어나보니 안보이신 이후로 처음이었다. 안내의 여직원이 시연을 손으로 가리키자 그제서야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한참을 보다가 그가 빠른 걸음으로 시연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시연아... 시연이 맞냐?] 범천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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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많이 ... 흰머리가 많아 졌어요] [시연아... 세상에... 이렇게 예쁘게 자랐다니.] [건강하세요?] [네가 어떻게 여기에 온 거냐?] [아빠 보고 싶어서 왔어요] [잠깐만 기다릴래? 아빠 금방 올거니까.] [네] 범천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몇 분 뒤 시연은 범천의 차를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시는 거에요?] [널 보면 좋아할 사람한테로] 범천은 새로 지은 것 같은 깔금한 아파트들이 몰려있는 서신동이라는 곳으로 시연을 데려갔으며 그 많은 아파트들 중에 한 집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벨을 누르고 시연을 향해 문을 열어준 사람을 시연은 너무도 놀란 눈으로 보고 있었다. [엄마?] [시연아... 시연아...네가... 시연아] 엄마 정숙은 시연을 부등켜안으며 시연의 등을 토닥이고 이었다. [두분 어떻게 된 거에요?] [2년 전에 다시 합쳤다. 어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어서 들어와] 집안은 신혼집처럼 너무도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차를 마시며 세 사람은 서로를 향한 강한 유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궁금한게 있어요. 제 이름요... ] [시연아... 엄마가 먼저 말하면 안 되겠니?] [말씀하세요] 정숙이 갑자기 시연을 향해 무릎을 꿇으며 엎드리고 있었다. [엄마 왜 이러세요? 일어나세요 엄마..] [용서해 줘. 그땐... 너무나 아이가 갖고 싶어서... 너를 본 순간 갖고 싶었단다. 인형처럼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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쁜 너를 봤을 때 너를 데려오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가 없었어. 잘 키울 자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 받는 아이로 키울 자신이 있었어.] 범천이 울먹이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엄마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다음날 신문에서 네 사진을 봤다. 설마 했었어. 네가 그렇게 부잣집 딸일 줄은 몰랐다. 그 땐 너무 두렵고...감옥에 갈까 두려워 여기 전주로 내려와 살았다. 그래도 며칠 지내지 않았지만 엄마, 아빠라고 부르며 이쁜 짓을 하는 너를 보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알아볼까 두려웠지만... 네 이름 말이다, 바꿀 수가 없었단다. 그것마저 다른 이름으로 하면 정말 세상에서 너란 아이가 사라질까봐...네 이름까지 바꾸는 죄는 차마 지을 수 없었단다. ] [아빠...] [그 사람이 찾아와 너에 대해 캐물었을 때 너무 두려웠단다.] [그 사람이라면.?] [에릭이라는 사람 말이다. 그런데... 그 뒤로 가끔 네가 검정고시에 합격한 일 하며, 서울대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해주는 걸보고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았단다. 그 사람들 잘 지내고 있는 거냐?] 시연의 얼굴에 슬픈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네 아빠] [시연아.. 엄마가 원망스럽지? 네가 그렇게 힘들게 고생하며 살게 만든 엄마가 원망스럽지?] [처음에만... 엄마가 나 때문에 맞고 사는 게 더 힘들었어.] [시연아 이리와 봐] 정숙은 시연의 손을 이끌고 작은 방으로 갔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그녀가 집을 나가기 전 그때의 그 물건들이 고스란히 그곳에 있었다. 교복이랑... 책가방이랑... 중학교에서 시간이 멈춘 듯 그때의 교과서가 책상에 그대로 꽃혀 있었다. [하나도 안 버리셨네요] [네가... 진짜 가족을 찾아도... 가끔은 와줬으면 하는 마음에 버릴 수가 없었어. 네게 그렇게 모진말을 하고, 네가 집을 나간 뒤에 엄마가... 죄책감에 견딜 수가 없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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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들은... 그녀가 가진 상처보다 더 깊은 상처를 가진 것 같았다. 정작 모든 불행의 시작을 만들어버린 사람들이었지만 시연은 진짜 그녀의 가족들 보다 이들에게서 가족의 정을 느끼고 있었다. 아마... 고통이 어떤 건지 겪어본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동질감 같은 건 아닐까.. [많이 힘드셨죠?] [엄마... 용서해 주겠니? 용서해 줄 수 있어?] [용서라뇨. 엄만 제가 쉴 곳을 만들고 기다려주신 분인걸요. 여기서 며칠 지내다 가도 되요? 나 전처럼 엄마, 아빠 사이에 끼어서 잠도 자고 싶고... 엄마가 만들어주는 떡볶이도 먹고 싶어] [그래.. 얼마든지. 오고싶을 때 얼마든지 와.] 시연은 며칠 간 그녀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가장 길고 편한 휴가를 보낸 기분이었다.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서울로 돌아오는 그녀의 발걸음이 너무도 가벼웠다. 서울에 와서 시연은 장난감을 사들고 은정이와 현수에게 향했다. 만화방에서 책빌림터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살그머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은정이 한참 동안이나 시연을 쳐다보고 있었다 [야...이시연... 너 진짜 이시연 맞아?] [그래 나 이시연이다 어쩔래?] [어머 야~~~~] 은정은 시연의 손을 붙잡고 가게 뒤로 있는 작은 문으로 향했다. [쌍둥이 아빠 빨리 나와 봐. 시연이 왔어 시연이!] 은정이와 현수는 별로 달라보이지 않았다. 처음 그 둘을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사소한 일에 말다툼을 시작해서 결국은 현수가 은정이게 두 손을 들고 마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애들은?] [유치원. 집에 게들이 있으면 아주 전쟁이야] 벽에 걸린 앙증맞은 쌍둥이들을 보면서 시연은 태어나지도 못한 그녀의 아이를 떠올렸다. [가게는 잘 되?] [응 그럭저럭. 이젠 아주 한국으로 들어온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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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이제 여기서 학교 다닐 거야] [그... 사람은?] 은정인 여전히 세상돌아가는 일과 담을 쌓은 모양이었다. 신문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회장이 딸을 찾은 이야기며, 그 딸이 결혼한 일을 특별기사로 다룬 잡지들은 하나도 보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제 자유야.] [정말?] [근데..너 책빌림터 하는 사람 맞아?] [왜?] [아니 그냥...] 시연은 빙그래 웃었지만 그 웃음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서울에 있을 거니까 자주 놀러올게] [그래. 자주 전화하고] 시연은 학교근처를 돌아다니며 하숙집을 구하고 다녔다. 아직 방학이 시작하지 않은 시기라 빈방이 없어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며칠을 여관에서 보내고 있는 그녀에게 갑작스럽게 이회장부부가 찾아왔다.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며 이것만은 거절하지 말라고 그녀에게 원룸하나를 구해줬다. 그녀가 편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편리한 책상, 성능 좋은 컴퓨터까지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방이었다. 그리고 카드와 통장을 남겨 주었다. 매달의 생활비를 보내겠다는 뜻이었다.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지만 이렇게...한가씩 서로에게 도움을 주며 가족이 되가는 건 어떻겠냐는 말에... 시연은 조용히 통장을 받아 들었다. 학교 공부를 따라가려면 힘들 것이다. 합격하고 휴학의 만기기간이 2년을 다 채우고서야 겨우 1학년으로 학교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혼자만의 공간에서 가끔은 인터넷으로 체팅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때론 동내 책방에서 책을 빌려다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개학을 하기까진 이렇게 시간이 많을 것이다. 지겹도록 편한 시간이었다. 간섭하는 사람도 없고, 혼자만의 공간에서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때론 밤을 새가며 사람들과 체팅을 하고... 그러다 답답해지면 혼자서 영화도 보고... 그날도 한아름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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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들고 원룸으로 돌아오다 그녀의 집 앞에서 서성이는 사람을 보고 시연은 한숨을 쉬었다. 늘 아마... 오랫동안 미안함이 남을 남자 민우가 그곳에 서 있었다. 시연은 민우와 함께 작고 조용한 전통찻집으로 자리를 옮기고 뜨겁게 달구어진 다기가 식기를 기다리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시연씨가 호텔에서 사라졌을 때, 나 혼자 방방거리며 찾아다니는 사이 이미 집으로 편지가 배달되어 왔었습니다.] [편지요?] [당신과 강혁이라는 사람의 관계에 모든 게 적힌 편지 말입니다.] [세상에... 그런 일이...] 시연은 놀란 눈으로 민우를 바라보았다. [당신을 데려간다고... 그렇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겠다는 식으로 왔더군요.] [미안해요 민우씨. 정말 미안해요] [아마...이렇게 당신이 되돌아 와도 나와 다시 결혼생활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한 안정장치로 그런 편지를 보내지 않았을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시연은 그 말 이외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당신을 보호해 주고 싶었는데... 그런데 가족들이 모른 걸 알아버렸습니다. 어머니는 .. 용납이 안되셨던 모양입니다.] [그러실 거에요... 네... 아마..누구라고 그랬을 거에요] [이런 말... 남자로서 자존심이 상하지만... 그곳에서 한강혁과 같이 있는 당신을 봤을 때, 아직도 당신이 그 사람 잊지 못하고 있는 걸 알았습니다.] 그러더니 민우는 피식 웃어 버렸다. [정신과 의사 아니랄까봐, 당신표정을 보는 순간 너무도 빠르게 머리가 돌아가더군요. 그 사이에 머리로 당신의 상태를 파악하고 있는 내가 너무 우습지 않나요?] [민우씨...미안해요] [시연씨 몇 살인지 아세요?] [네?] [지금은 스물 셋이에요. 곧 해가 바뀌면 스물 넷이죠. 집에 가면 거울을 한번 봐요. 스물 셋의 얼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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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민우씨..] [나... 시연씨 사랑합니다. 알죠?] 민우의 두 어깨가 너무도 쓸쓸해 보였다. 그녀로 인해 그의 어깨에 너무도 무거운 짐이 들려져 버린 것 같아 시연은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우리.. 어머니 몰래 가끔 만나서 술 한잔해요. 저.. 술 잘 마시는 거 모르죠?] 시연이 빙긋이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민우는 서글픈 듯 시연을 맞바라보았다. [그동안 내가 알았던 시연씨는 전부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민우씨...] [난... 시연씨 마주하고 술 마실 자신 없습니다.] [민우씨...] [참.. 혼자 지내는 거 같던데.. 심심할 때 읽어요. 생각나서 가져왔어요] 민우는 이제 스물세살의 삶을 살라는 애정어린 충고를 남기고 가버렸다. 그가 남겨준 작은 잡지를 손에 돌돌 말아 쥐고 원룸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현관문에 열쇠를 꽃으려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을 때, 그녀와 마주보는 현관문이 열리더니 그녀를 보는 순간 쿵 소리가 나며 닫히고 말았다. 시연은 등뒤로 쿵 소리가 나며 닫히는 소리에 놀라 열쇠를 떨어뜨렸고 그 바람에 그녀가 들고 있던 잡지가 데굴데굴 굴러 계단 중간쯤으로 떨어져 버렸다. 귀찮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을 집기 위해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고, 그녀에게 보란듯이 활짝 펼쳐진 페이지에 시연은 걸음을 멈추었다. 반쯤 초췌한 옆모습의 강혁이 에릭과 속삭이는 듯한 모습의 사진이 실려있었고 헤드라인으로 커다랗게 '재미교포 한국인 재벌 한강혁 잠적'이라고 적혀있었다.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시연은 처음부터 모두 읽어 내리고 있었다. 그녀가 떠나온 다음날이었다. 그가 고용한 전문경영인에게 모든 결정권을 넘기고 사라졌다는 이야기였다. 시연은 페이지를 덮은 다음 한참을 계단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사라졌다...... 잡지가 그라도 되는냥 가슴에 꼭 안고있었다. 민우는 그녀에게 그의 소식을 알려주기 위해 잡지를 주고 간 것이었다. 그녀의 뒤에서 그녀와 마주한 원룸의 현관문이 반쯤 열렀다가 다시 소리 없이 조용히 닫혔다. 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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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서 시연은 선영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수화기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러다 다시 수화기를 들고 전화번호를 눌렀다. [Hello?] [언니 저... 시연이요] [시연아!!!!!!] [저...어떻게 된 일이에요? 잡지에서 강혁씨 소식 봤어요. 잠적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게... 당분간 쉬고 싶다고... 목적지도 안가르쳐주시고 떠나셨어.] [그 뒤로 다른 연락은 없었어요?] [그래.] [알았어요] [회장님 돌아오시면 연락할까?] [아뇨.. 아니! 아니에요. 할 필요 없어요] 조용히 전화기를 내려놓고 시연은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 갑자기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리는 바람에 시연은 깜짝 놀랐다. [여보세요?] [저기요. 오늘 반상회인거 아시죠? 이사 오시고 처음인까 꼭 참석하세요. 이따가 5층 502호로 오세요] [네] [안나오면 벌금 2만원이에요] [네] 시연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풋하고 웃어 버렸다. 반상회라니... 그러나 저녁때가 돼서 시연은 502호로 걸음을 옮겼고 처음 보는 사람들이 그녀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 그러나 그녀에게 다들 고개만 까딱하고 인사만 했을 뿐 여자들은 뭔가에 대단히 열을 올리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봤어? 그 남자 목소리 진짜 죽이더라.] [내가 반상회 나오라고 찾아가니까 벌금만 불쑥 내밀면서 안 온다고 하는 거 있지? 세상에... 그렇게 잘생긴데다가 목소리까지 죽이고 몸매까지 죽이는 남자 첨봤다니까. 겨울인데..자다나왔는지 아니면 샤워하다 나왔는지 바지만 입고 나왔더라구 배에 세상에~~~~~~~~ 왕자가 세겨지는 거 있지. 난 내 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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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 왕자 세겨지는 남자 첨봤어] [303호 내가 보여줄까?] [야 이름 부르랬지? 내가 죄수냐?] 다들 같은 학교 학생들이고 이미 오래 전부터 이곳에서 살아온 듯 친한 듯 해 보였다. 누군가 사람들을 정돈시키고 쓰레기는 어떻게 버리고..아랫층 사람들을 위해 살살 걸어다니라는 둥..등등의 잡다한 이야기를 하고서 시연은 그녀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녀와 마주한 집에 대한 남자의 이야기 같았다. 그녀와 비슷한 시기에 이사를 왔다는 남자에 대해 시연은 인사라도 하고 지내야 할 것 같아서 벨을 눌렀다 그러나 분명 문 앞까지 걸어나오는 사람소리가 들렸음에도 문은 열리지 않고 있었다. 조그만 구멍으로 혹시나 하며 안을 바라보다가 시연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신의 집으로 들어왔다. 아무래도 이웃과 별로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 사람인 것 같았다. 강혁은 그녀를 보기 위해 구멍에 눈을 들이대다가 그녀의 눈이 다가오는 바람에 놀라 뒤로 물러서 버렸다. 커다랗게 확대된 눈이 궁금한 듯 깜빡이다 가버리는 것을 보고 강혁은 참았던 웃음을 웃어 버렸다. 여행을 하겠다고 나선 곳이 겨우 그녀의 원룸 앞집을 차지하고 있는 거라니... ★★★ 시연은 자신의 눈이 착각을 일으킨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분명..강혁이었다. 그가 그녀의 원룸건물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조용히 발소리를 죽여 따라갔다. 그러자... 모든 원룸여자들의 호기심의 되고 있는 남자가 머무는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와 마주한 집으로... 설마... 설마... 그럴 리가... 시연의 심장이 너무나 거칠고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할 일 생겼다. 매일 작은 구멍으로 앞집을 관찰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틀에 걸쳐 확인한 결과 그는 강혁이 확실했다. 그가 왜 이곳에 있는 건지... 시연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방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가...그녀의 앞집에 있다니... 심장이 너무도 빨리 뛰어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 설마 그녀를 따라 여기까지 온 것일까... 확인할까... 아니면 그냥 있어야할지 몰라 그녀는 너무 혼란스러웠지만 한편으론 그가 그녀의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행복하기도 했다. 그가.. 여기에 있어. 갑자기 시연은 지갑을 챙겨들고 시끄럽게 우당탕 거리며 밖으로 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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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갔다. 시연의 현관문이 시끄럽게 열리고 닫히는 소리에 강혁은 그녀가 사라진 뒤의 그녀의 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스스로를 너무 한심스럽게 여기며 머리를 흔들고는 다시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잠시 뒤 그의 집 벨이 울렸고 강혁은 또 구멍으로 밖에 서 있는 사람을 확인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저기요. 앞집 아저씨. 이웃인데 친하게 지내요. 저 앞집에 살거든요. 이웃이 된 거 환영하는 뜻에서 제가 선물하나 샀어요. 대인 기피증인거 같은데.. 저 들어가면 이거 가져가세요. 저희 원룸에 오신 거 환영해요] 시연이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도 강혁은 한참만에 그녀가 놓고 간 물건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잘 포장된 물건을 뜯으니 상자 안에 작은 곰인형이 들어 있었다. 곰인형의 옆구리에 엽서도 한 장 있었다. 엽서를 펼쳐든 순간 강혁은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빙긋이 웃고 말았다. " 이웃인데 친하게 지내는 건 어때요?" 그녀는 항상... 그가 생각지도 못한 것으로 즐거움을 주고 있었다. 그래도 적어도 전처럼,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안심이 들었다. 시연에겐 새로운 즐거움이 하나 생겼다. 앞집에 곰처럼 생긴 커다란 남자를 관찰하는 일이었다. 좀 심술궂긴 했지만 그가 문을 열고 나오는 것 같으면 시연은 일부러 자신도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면 그 커다란 등치를 잽싸게 돌려 낼름 안으로 들어가 버리곤 했다. 저렇게 큰 덩치로 이렇게 잽싼 행동을 보일 수 있다는 게 그저 재밌기만 했다. 그러고 나면 시연은 약올리듯 주머니를 뒤적이는 행동을 하고는 고개를 한, 두번 갸웃거리고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한번은 있지도 않은 우편물을 그의 현관문 앞에 놓아두며 벨을 눌러 우편물 가져다 두었다고 말을 하고 들어가는 척 하며 문 옆에 숨어 있었다. 그리고 자물쇠 열리는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리려 하자 시연은 얼른 '저기요' 라고 소리를 쳤고 강혁이 너무 급하게 문을 닫는 바람에 분명 신체의 일부 어딘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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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에 부딛친 듯 낮게 욕설을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그에게 이런 소심한 면이 있다는 것이 자꾸만 시연의 입에서 미소가 흘러나오게 만들었다. 그렇게 쿵-- 소리를 내고 다시 집안으로 숨어 들어간 그 때문에 현관문 앞에서 한참을 쿡-쿡- 거리며 서 있다가 시연은 "옆집 아저씨가 너무 궁금해서 장난쳐봤어요" 라고 낼름 집으로 들어와 버렸다. 강혁은 문에 이마를 부딪쳐 통증으로 인해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녀의 명랑한 목소리에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며칠 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왠지 자신이 놀림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묘했다. 가끔은 그녀에게 꽃도 보내고, CD도 선물하곤 했다. 물론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체... 게임 같았다. 그가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그녀는 그가 보낸 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딩동~~~~~~~~~~~] 강혁은 어김없이 또 작은 구멍으로 상대방을 확인했다. 그녀가 위아래로 한 벌 같은 운동복을 입고 서 있었다. 상큼한 느낌이 들도록 하나로 올려 묶은 모양새가 신선해 보였다. 하얗게 드러난 목에 전처럼 그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아저씨! 602호에서 반상회 한데요. 쓰레기 분리수거 때문에 심각하게 할 말이 있다고 하니까 꼭 참석하세요. 참석 안하시면 아저씨 집으로 몰려온데요. 지금 원룸 여학생들의 타겟이 되고 있는 거 모르시죠? 분명 몰려오고도 남을 거에요. 이따가 뵈요] 시연은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그에게 그렇게 말을 하고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난감한 일이었다 차라리 외출을 해 버릴까 시끄럽게 전화벨이 울렸다. [네] [회장님 접니다. ] 에릭이었다. [그래] [아직도 그대로 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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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에릭조차도 그를 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뉘앙스가 이상하군] 그러자 전화기 너머로 에릭이 쿡쿡 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예전 같으면 화를 냈을 강혁도 그 웃음에 전염이 된 듯이 같이 웃고 말았다. [너무 오래 끌지 마십시오.] [자네나 잘해] [제가 뭘요?] [자네가 자꾸 나를 비꼰다면 윤실장 다른 곳으로 전출 보낼 수도 있어] [헉...저.. 회장님...] [그만 끊지!] [저..회장님 ! 회장님!] 다급하게 강혁을 부르는 에릭을 외면한 체 강혁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키고 반상회에 참석하기로 결심을 했다. 부딪쳐 보는 것이다. 시연은 조금 늦게 602호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지만 다면 한 남자의 주변에 여러 여자들이 벌떼처럼 몰려있는게 눈에 띄었다. 그 반면에 남자들은 심통이 난 듯한 얼굴로 여자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 오늘의 반상회는 잘 되지 않을 듯 해 보였다. 강혁은 시연이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자신을 보고 놀라 또 도망가거나 하지 않을 까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시연은 강혁을 똑바로 봤음에도 무심히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실망감이었다. 아니... 상실감 같은 것이었다. 강혁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확인하고 시연은 내심 미소를 짖고 있었다. 누가 저 남자가 세계100위 안에 드는 기업을 소유한 남자로 생각을 할까.. 얼마전 시끄럽게 선우의 반을 인수한 냉혹한 사업가라고 생각을 하겠느냔 말이다. 남자들 중 한사람이 손벽을 짝짝 치더니 주위를 환기시키고 있었다. [조용히 하고 빨리 이야기나 합시다.] [저기요... 할 말이 있는데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시연에게로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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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빠지면 벌금이 얼마나 되요?] [2만원이요] 시연은 주머니에서 4만원을 꺼내 장에서 602호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왜 4만이요?] [저 남자꺼 까지에요] 시연은 그때까지도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강혁을 가리켰다. 강혁은 잠깐 놀란 듯한 눈을 하고 시연을 보았다. [저한테 할 말 있죠?] 시연은 웃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를 보는 순간 그의 얼굴에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강혁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좁은 원룸의 거실을 지나 시연에게 다가왔다. [할말 별로 없지만... 꼭 해야할 말은 있어] [여기서 할래요? 아니면 나가서 할까요?] [단 둘이 이야기했으면 좋겠는데] [벌금 냈으니까 나가도 되요] 두 사람이 그렇게 방에서 나가버리자 남아있는 여자들은 일제히 두 사람에 대해 씹어대기 시작했다. [웬일이니 웬일이니...재수없어. 재수없어. 제네들 뭐야 도대체......................] 그 끊임없는 궁시렁에 남자들은 귀를 틀어먹고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시연의 집안으로 따라 들어온 강혁은 문이 닫히자 마자 그녀를 힘껏 안아버렸다. 그녀가 그의 가슴에 쏙 안겨버렸다. 자신의 가슴에 와 닿는 작은 어깨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그녀의 심장소리가 들렸고, 아련한 쟈스민 향기도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입술을 찾아 거칠게 키스를 하면서도 강혁은 그녀가 자신의 품안에 있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있었다. [할 말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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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입술이 떨어진 사이 시연은 힘들게 한마디하고 있었다. [그게... 잊어버렸어] 그리고 그녀의 옷안으로 손을 밀어 넣으며 그녀의 정신을 흐려놓고 있었다. [안돼요.] 이미 그의 유혹에 넘어가고 있었으면서도 시연은 그를 말리는 설득력 없는 말을 하고 이었다. 그의 손이 어느새 그녀의 옷을 하나씩 벗겨내고 있었고, 시연의 손도 그의 단단한 몸을 감싸고 있는 방해물들을 벗겨내고 있었다. 맨살이 맞닿는 순간 두 사람의 입에서는 신음이 흘러나왔고, 그리웠던 시간만큼 너무도 간절히 서로를 갈구하고 있었다. 이미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끝나 있던 그녀의 몸안으로 그가 밀고 들어오면서 시연은 그의 머리키락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입술을 찾고 있었다. 그의 등을 어루만지다가 골반까지 척추를 따라 흘러내린 그녀의 손 때문에 강혁은 자극을 받았는지 참지 못하고 열정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그를 원하는 만큼 강한 수축을 일으키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녀 안에서 폭발을 하고선 무너져 버렸다. 둘 다 땀으로 흠뻑 젖은 체 서로의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애완동물 하나 키울 생각 없어?]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감춘 체 강혁이 묻고 있었다. 그녀가 풋-- 하고 웃자 가슴이 심하게 들썩였다. [제가 키우기는 너무 무거운 애완동물이에요] [살도 뺄게 가볍게] [성격도 나빠서 고려해 봐야겠어요] [물론... 고치도록 노력해야지] [과거에 잘못한 것도 많아서 생각해 봐야겠어요] [지내면서 다 갚을 거야] [그렇다면 ... 앞으로 좀더 두고본 뒤에 결정하죠.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면서 말이에요] [까다로운 주인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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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 줬거든요] [누군지 몰라도 정말 나쁜 놈이었군] [그렇죠? 다들 나쁜 놈이라고 하더라구요] 강혁은 얼굴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부드러움 표정으로 내려보았다. [그 나쁜 놈이 아프게 했던 것, 내가 다 치료해주고 ] [전 그 나쁜 놈이 저한테 한 거 그대로 갚아 주고 싶은데 도와줄래요?] [그건... 좀 고려를 해봐야겠는데] [그래요? 그럼.. 두고볼 필요도 없는데요. 안 키울래요] 시연이 그를 밀어내는 척 하자 강혁은 그녀의 손을 붙잡아 입술에 가만히 가져다 대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 [뭔데요?] [사랑하는 사람한테 사랑한다는 말이 듣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지?] [간단해요. 일이랑 이가 고스톱을 치고 싶은데 한사람이 모자라서 삼을 꼬셨데요. 그랬더니 삼이 싫어! 라고 하더니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뭐라고 했는데?] [4랑해! ] 강혁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누군지 몰라도 정말 시간 많은 사람이 만들어 낸 말이군] [거의 바보랑 같은 수준이죠] [그래... 바보] 두 사람은 쿡- 쿡- 거리며 서로를 향해 스스럼 없는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 음... 완결입니다. 기대 이상으로 많은 분들이 사랑해주셔서 너무 행복했습니다. 본질적으로 해피를 추구하는 우유이기에 전 두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끝에 가서 너무 허접해 졌다고 구박하시는 건 아니죠? 음...이미 구박을 하고 계시는 군요. 후후 또하나의 글이 완결이 되었습니다. 전 제 글에 있는 주인공들이 제가 알지 못하는 현실 어딘가에서 존재할 것만 같아 늘 행복하게 끝을 내고 싶어요. 그래서 제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행복하길 바라구요 건강하세요. 우유는 물러갑니다. 이렇게 완결을 냈는데...에필이 필요 하신가요? (에필이 쓰기 싫은 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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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이야기... [날 사랑한다고 생각한게 언제부터에요?] 시연은 여유 있게 여의도 공원을 산책하며 강혁에게 물었다. [누가 너 사랑한데?] [뭐라구요?] [아냐.. 아냐.. 사랑해. 사랑한다고] [참.. 대못으로 옆구리 찔러서 받아내는 것 같은 기분이네요] [네가 나를 길들였을 때... 그땐 몰랐었는데 지나고 생각해보니, 아침에 커피, 오후에 쟈스민차.. 그리고 배웅하는 모습... 계획적이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 [바보..그렇게 늦게 깨닫다니...나보다 한수 아래인거 인정하시죠?] 강혁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패배를 인정하라는 시연을 바라보았다. [훨씬전부터... 아마...바닷가에서부터 였는지 모르지. 네가... 다정하게 대하지 말라고 했을 때, 그때 어렴풋이 느꼈던 거 같아. 자꾸만... 더 많은게 갖고 싶어 졌으니까... 나를 밀어내던 네 손에 너무도 큰 상실감을 느꼈으니까. 네가... 영원히 내 옆에 있을 거라는 착각을 했었지] [아니 그러고도 나에게 그렇게 심한 말을 했단 말이에요?] [심한말?] [기억 안나죠? 원래 한 사람은 모르니까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강혁이 궁금하다는 듯이 쳐다보자 시연은 목에 힘을 잔뜩 주고는 [기어오르지 마라.] 라고 그가 한 말투까지 그대로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러자 강혁은 민망한 듯 아니면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이~ 애완동물님. 주인이 말씀하시는데 얼굴을 돌리면 안되죠] [난 언제까지 해야 되나?] [벌써 후회되요? 가고싶으면 얼마든지 가세요. 난 젊고 싱싱한 애완동물로 다시 구하면 되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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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연이 한방 먹이듯이 말을 하고 앞서 걸어가 버리자 강혁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그녀를 뻥 하니 쳐다보다가 그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나... 보고 싶긴 했어요?] [아니] [치~~~~~~] [죽는 줄 알았다. 네가 없어서... ] [그런데... 왜 날 찾으러 안 왔어요?] [바보였으니까. 아마 이런 맘이 아니었을까... 넌 내가 손을 내밀면 언제든지 다시 나에게로 올거라는 어리석은 자만심 같은 거 말이야. 눈부신 드레스를 입고 나를 그냥 스쳐 지나갔을 때... 내가 얼마나 커다란 착각 속에 빠져있었는지 깨달았거든. 네가... 다른 사람의 옆에 설 수 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으까. 네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다는 것을 ...]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강혁의 얼굴이 우울해지고 있었다. [네가 더 잔인한 거 아니?] [내가 뭘요?] [넌... 당사자가 모르게 너무도 많은 걸 자연스럽게 길들여 버렸으니까. 네가 아니면 안되게 말이다. 심지어는... 네 말 한마디에 모든 걸 다 팽기치고 달려오게 만들어 놓고... 내 눈앞에서 다른 남자의 품으로 달려갔으니까] 시연은 피식 웃었다. [다시는 그런 일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 되잖아요. 자신 없어요 나 붙잡을 자신 없어서 그렇게 말하는 거에요?] [넌 너무 똑똑해서 내가 머리 써서 붙잡긴 힘들 것 같다.] [그럼... 감정에 호소하세요. ] [어떻게?] [그걸 나한테 물어요? 한번 지금 시도해 보세요] [평생... 나만 사랑해 줄 수 있니?] [한가지가 빠졌어요] [뭐?] [그전에 맹세부터 해야죠!] [무슨 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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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가 정말... 실격이에요] [시연아... ] [네?] [너만... 사랑할거다. 목숨과 바꿔서라도 너만 사랑할거다] 시연은 그제서야 피식 웃으며 강혁의 손을 잡아 주었다. [거봐요. 그게 제대로 된 순서에요] [너는? 대답이 있어야지] [두고 봐서요] [뭐?] [과거에 잘 못한게 많잖아요. 쉽게 용서해 주면 안되죠] 강혁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시연을 보았고 시연은 그런 그를 인과응보라는 식으로 슬쩍 놀리듯 쳐다보았다. ★★★ [정말 잘 �獰楮? 두 사람이요] 선영의 잔잔한 말에 에릭이 헛기침을 해대고 있었다. [사래 걸렸어요?] [아니..저... 이제 시연이 돌봐줄 사람이 생겼으니 다른 사람한테 신경을 쓰는 건 어떻습니까?] [누구요?] [아.. 저... 그게...] [또 누가 새로 오나요?] [아니 그런게 아니라...] 선영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릭 안경한번 벗어 볼래요?] 에릭은 망설이며 안경을 벗었다. 평소처럼 눈매도 차가울거라 생각했었는데, 그의 눈은 마치 겁많은 소년같은 눈이었다. [어머..눈 밑에 뭐가 있어요] 선영이 손을 얼굴에 가져가자 에릭의 얼굴이 금새 붉어져 버렸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에릭의 두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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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의 볼을 감싸더니 격정적인 키스를 퍼붇기 시작했다. 그리고 둘다 거친숨을 몰아쉬면서 떨어졌을 때 에릭은 얼른 몸을 돌려 선영으로부터 도망치듯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와...에릭 무지하게 터프하네요] 시연이 감탄했다는 듯이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녀의 가까이에 온 에릭이 시연을 향해 한소리 했다. [회장님처럼 미적지근하지 않죠] 그러자 시연은 풋하고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그리고 강혁을 버려둔 체 에릭의 옆으로 바싹 다가갔다. [에릭 오빠~~~~~~~ 한 터프 하시는데요. 저랑 데이트 하실래요?] 아주 순간이었지만 강혁의 얼굴이 굳어졌다 펴지는 것을 시연은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다음순간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에릭을 가로채가버렸다. [시연아. 에릭은 내꺼다 꿈도 꾸지 마라] 선영의 말에 시연은 잠시... 멍.... 한 상태로 있었고, 강혁은 시연의 옆에서 쿡--쿡--대며 웃어대고 있었다. [거봐 남의 밥에 손대면 안 되는 거야] [방금 그거 선영언니가 한 말 맞아요?] [이봐요. 아가씨..아가씨도 아가씨 물건이나 챙기는 거 어때?] [이렇게요?] 시연은 그 많은 사람들이 왔다갔다는 곳에서 강혁의 얼굴을 감싸고 키스를 했다. 그 순간 그녀의 등뒤로 호르라기를 부는 소리가 들렸고 공원을 관리하는 경비아저씨의 꾸지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봐... 지금 뭐하는 짓들이야? 애들도 많은 데서...당장 거기서] [앗...뭐해요? 빨리 튀어요.] 시연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4명은 죽어라 달리기 시작했다. 시원한 웃음을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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