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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예술대학교 청사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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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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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사 문 예제23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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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4 |

권두언 진실한 감정의 울림•문학부장윤 호 병 6

총장인사말 No pain, no gain•총 장임 상 혁 10

펴내는 글 ¡Hasta la vista!•편집장김 경 진 13

시 강래윤•「자양화」 외 4편 17 김유라•「문이 사라진다」 외 4편 23 민경진•「장난감 죽이기」 외 4편 33 박슬기•「참치샌드위치」 외 4편 39 박지원•「봉숭아 물들이기」 외 5편 47 이승우•「둥근 사진」 외 4편 61 이현주•「팝콘」 외 4편 73 임영은•「구름의 뿌리」 외 4편 81 정인혜•「폐경」 외 4편 91 최미선•「걸음」 외 4편 101 한정남•「환영일기」 외 4편 109

C o n t e n t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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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목 차

소설 고건•「흔 적」 121 김경진•「하늘을 올려보다」 145 김일균•「물고기 비」 171 박미경•「소리 가는 길」 195 박주석•「심동춘 살인미수사건」 217 이나리•「아직, 세 번째 마누라」 245 이노아•「그림자 놀이」 275 장민희•「낯선 질문」 297 허란경•「존재의 아름다움」 321 황인형•「그리고 그가 사라졌다」 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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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6 |

진실한 감정의 울림

세계적 경제공항이라는 극심한 한파가 몸을 움츠려들게 합니다. 서민들의 생활은 어려워지고, 도산하는 기업들도 생겨납니다. 일자리는 줄고, 경제성장률에 대해 마이너스를 예측하는사람들이 늘었습니다. 무엇이든 줄이고 아껴야하는 이 시대에 4년간의 대학생활을 마치는 여러분을 지켜본다는 것이 이렇게 마음 무거운 일일 줄은 몰랐습니다.

2009년을 시작하는 설날에는 유난히도 눈이 많이 왔습니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고 하지만 폭설로 인한 사고들을 보면서 많은 것이 좋은 것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많은 것, 높은 것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갑니다. 토익점수, 각종 자격증, 해외 언어연수, 봉사활동 등 소위 ‘스펙’이라고 하는 취업의 잣대들은 많거나 혹은 높은 것이 좋다고 합니다. 그것뿐이겠습니까. 돈, 지위, 학력등도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암묵적으로 정해지는 사회의 기준들은 해가 바뀔수록 늘어납니다. 다다익선의 판단 기준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회사에서는 새롭게 사원을 선별하기 위해 판단 기준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로또 번호 뽑듯 무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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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권두언

위로 신입사원을 뽑을 수는 없으니까요. 때문에 판단 기준이라는 것은 꼭 필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회사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판단 기준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인재를 선별하기에 편리하기 때문이겠죠.그렇다면 문학에서도 판단 기준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문학에서는 ‘스펙’이 필요 없습니다. 오로지 ‘작품’만이 존재합니다. 판단 기준은 간단합니다. 작품이 좋은가, 그렇지 않은가. 사회의 현상들을 어떻게 작품에 녹여냈는가. 개성 넘치는 문체와 새로운 시선을 가지고 있는가. 어떠한 소재를 사용했으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새로운가. ‘작품’안에는 이러저러한 판단기준이 있을 수 있지만 작품을 쓴 작가에게 ‘스펙’은 필요치 않습니다. 작가의 토익점수도, 국가공인자격증도, 외국어구사 능력도, 봉사활동 시간도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좋은 작품만 쓸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합니다.우리는 좋은 작품을 이야기 할 때 ‘새로움’을 앞세우곤 합니다. 새로운 시도, 새로운 시선, 새로운 이야기들로 좋은 작품의 판단 기준을 삼습니다. 새로움과 낡음의 분기점은 어디일까요? 여러분이 진정으로 새롭고 좋은 작품을 쓰고 싶다면 곰곰이 생각해볼 문제 같습니다.비평계의 찬사를 받는 작품이라면 분명 새로운 작품일 것입니다. 비평가들에게 할 말이 많게 하는 작품이라는 말이죠. 대중들에게 찬사를 받는 작품이라면 분명 재밌는 작품일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재미는 웃음과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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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8 |

물을 아우릅니다. 그렇다면 비평계와 대중의 찬사를 받는 작품은 어떤 작품일까요. 재밌으면서 새로운 작품일 겁니다. 실제로 외국 작가들의 작품 중에는 비평계와 대중들을 아우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만큼 다른 나라에서는 문화적 간극이 사라지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좋은 작품을 쓰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프 켜는 소녀가 노래불렀다.진실된 감정과 잘못된 음조로,하지만 난 그녀의 연주에무척 감동받았다.

- 하이네(H. Heine)의 「독일. 겨울동화」 中

개인적인 성향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위 시에 나오는 소녀의 노래에 감동합니다. 소박 하지만 진실한 감정이 갖는 울림이 좋습니다. 저는 추계의 푸른 청년들이 진실한 감정을 가지고 작품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무작정 새로울 필요도 없고, 문학적 ‘스펙’을 갖추지 못해도 좋습니다. 문학을 사랑하는 진실한 마음이면 그걸로 충분합니다.지난 4년간의 진실한 마음들을 담은 한 권의 책이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아마도 울고 웃었던 푸른 청년의 때를 책 한 권에 담아내기는 어려울 겁니다. 언제나 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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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 권두언

어들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에 이 책을 놓아두기 바랍니다. 지금은 작은 한 권의 책일 뿐이지만 십 년 후, 이 십년 후에는 무엇보다 소중한 여러분의 진실한 마음일 테니까요.작품을 쓰느라 수고한 졸업생들과 편집위원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졸업 작품집의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2009년 2월추계예술대학교 문학부장

윤 호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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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10 |

No pain, no gain

문학부 학생들의 노력의 결실인 「청사문예」의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졸업생 여러분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청사문예」를 접할 때마다 여러분에게 감사함과 놀라움을 매번 느끼게 됩니다. 한 편의 글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뇌의 시간과 싸웠을까를 생각하다보면 학생 개개인의 노력과 고통을 이렇게 단 한 권의 책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없이 소중하고 소중한 졸업 작품집입니다. 문학부 학생들의 졸업 작품집을 보며 그저 단 한 권의 졸업 작품집이 아니라 여러분의 문학에 대한 4년의 열정을 담은 것이라 더욱이 가슴 뜨거워졌습니다.여러분이 처음 추계예술대학교에 들어와서 시작했던 새로운 마음가짐과 각오가 생각나시는지요. 졸업은 더 이상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학교를 처음 다녔던 그 마음, 문학을 처음 접했던 그 순순한 마음과 용기로 다시 출발점에 선 여러분이 자랑스럽습니다. 졸업이라는 단어는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신호탄일 뿐입니다.추계인의 울타리를 벗어나 각자 새로운 삶을 설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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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 총장 인사말

야 할 시점입니다. 졸업을 한 후 여러분의 행로는 서로 다를 수 있겠지만 졸업생 여러분들의 가슴속에는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언제 시작했느냐가 아니라 시작한 일을 끝까지 맞추었느냐 입니다. 여러분은 아직 젊습니다.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문학에 대한 열정이 있기에 여러분은 충분한 가능성과 그 가능성을 실현시킬 추진력이 있습니다.어느덧 새해가 밝았습니다. 21세기 사회는 지금도 격변을 거듭하고 더 새로운 문학을 원합니다. 그리고 순수 예술보다는 대중문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중문화의 기반은 바로 순수예술입니다. 이제 한 발자국 내딛는 출발점에 서 있지만 여러분들의 또 다른 시작을 응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문학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인재는 이 시대의 문학을 이끌 여러분들입니다.흔히 예술은 어렵고 고달프다고들 합니다. No pain,

no gain 이라는 말이 있듯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습니다. 고통을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자기 자신이어야 합니다. 외적인 고통보다는 내적인 고통이 큰 것이 바로 예술입니다. 자신과의 싸움, 내면의 혼란을 이겨내야만 진정한 예술혼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예술은 어렵고 고달픕니다. 그래서 더욱 가치 있는 것입니다.자랑스러운 추계예대 졸업생으로서 사회에 한 발자국 내딛은 여러분에게 도전과 용기를 북돋아 드리고 싶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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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12 |

니다. 여러분의 도전정신에 있어 이 시대의 여러분의 건필을, 행운을 기원합니다. 더불어 학생들을 이끌어 주신 은사님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추계예대 문학부 여러분의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09년 2월추계예술대학교 총장

임 상 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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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 펴내는 글

“¡Hasta la vista!”

눈이 내렸습니다.많이도 내리더군요. 눈이 쌓인 건너편 산을 바라보면서 지난 학창 시절을 떠올렸습니다. 겨울이라 당연히 눈이 내리는 것처럼, 입학이 엊그제 같은 우리도 당연하게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졸업 작품집입니다. 네, 애절합니다.

한 학우가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이제야, 4학년이 되어서야 글을 쓰며 뭔가 보일 것 같은데, 뭔가 알 것 같은데 졸업을 하게 되었다며 아쉬워했습니다. 모두가 동감했을 것입니다. 저마다 똑같은, 혹은 비슷하지만 다른, 어쨌든 아쉬움이란 것을 남긴 채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네, 졸업합니다.

졸업 작품집에 시와 소설을 내며 다들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학창 시절을 마무리하는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아쉬웠을 것입니다.하지만 이 말은 하고 싶습니다.“이것은 우리의 끝이 아니라 우리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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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14 |

이 작품집이 우리의 마지막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지금까지 글을 써온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앞으로 글을 쓸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지금까지 행복하고 즐거웠던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앞으로 행복하고 즐거울 시간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저마다 각자의 길로 걸어가겠지만 우리가 많은 날을, 같은 장소와 같은 시간 속에 있었다는 사실은 변치 않을 것입니다.진심으로, 졸업생들의 무한한 창작활동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끝으로 여기까지 저희를 이끌어주신 한광구 교수님, 김다은 교수님, 윤호병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김기택 교수님, 박상우 교수님을 비롯해 출강 교수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차승훈 조교 선생님에게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립니다.

2009년 1월 28일 눈 덮인 고향에서

추계예술대학교 문학부 졸업작품집 『청사문예』 편집장 김 경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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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강 래 윤 _ 「자양화」 외 4편 _ 17p

김 유 라 _ 「문이 사라진다」 외 4편 _ 23p

민 경 진 _ 「장난감 죽이기」 외 4편 _ 33p

박 슬 기 _ 「참치샌드위치」 외 4편 _ 39p

박 지 원 _ 「봉숭아 물들이기」 외 5편 _ 47p

이 승 우 _ 「둥근 사진」 외 4편 _ 61p

이 현 주 _ 「팝콘」 외 4편 _ 73p

임 영 은 _ 「구름의 뿌리」 외 4편 _ 81p

정 인 혜 _ 「폐경」 외 4편 _ 91p

최 미 선 _ 「걸음」 외 4편 _ 101p

한 정 남 _ 「환영일기」 외 4편 _ 10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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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강 래 윤

자 양 화

外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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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18 |

자양화(紫陽花)1)

우리가 서로에게서 뜯겨져 나온 날붉게 터진 꽃망울등의 상처는 날마다 자랐다

잃어버린 절반떨어져나간 자리마다 핀열꽃

하나 둘씩 내려앉는선홍색 꽃잎더운 피가 물관을 타고 돈다

비의 계절짊어진 멍울이 무겁다

_______________________1) [명사]<식물> = 수국(水菊). 범의귓과 수국속의 식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 수국, 등수국, 넌출수국, 산수국, 바위수국 따위가 있다. 범의귓과의 낙엽 활엽 관목. 높이는 1미터 정도이며, 잎은 넓은 타원형이고 톱니가 있다. 가을에 보라색 또는 흰색 꽃이 취산(聚散) 꽃차례로 피고 열매는 맺지 못한다. 말린 꽃은 해열제로 쓰고, 관상용으로 재배한다. 일본에서 개발되었다. ≒ 분단화(紛團花), 수구화(繡毬花), 자양화(紫陽花), 팔선화(八仙花). (Hydrangea macrophylla for. otak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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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 자양화 외 4편 _ 강래윤

경계에 서다

연못가의 개구리밥생(生)은 늘 부유물이었다단단한 바닥에 뿌리내린 적 없다꽃 한 번 피지 않았다

물 위에 떠 있는 것은 의지였으나물살에 떠밀려 가는 것은 의무였다잠기지 않았다섞이지 않았다

물과 바람의 경계,그 가는 선 위에 섰다오늘도 물 밖에서 숨 쉴 것이다한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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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20 |

순환선

열차에 올랐다유리 밖 오래된 물자국처럼어두운 창 위로 희멀건 얼굴 하나 떠있다말라비틀어진 표정이 낯익다

뒷걸음질 쳐 사라지는 풍경선로를 따라 달리는 시선돌아가는 길은 멀다

저녁 어스름이 길게 누운 저녁궤도는 지하로 이어진 긴 연장선창백한 전등빛에 젖어열차는 캄캄한 밤을 돌아온다

오늘 내가 내릴 역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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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 자양화 외 4편 _ 강래윤

삶, 단단히 웅크린

할아버지는 드러누워 일어날 줄 몰랐다꼬박 삼일을 보내고다 늙은 뿌리를 언 땅에 묻었다죽어서야 허리 펴고 누웠다

땅 위에서땅 속에서땅 밑에서겨우내 단단히 웅크린 굳은 살

그 해 봄,동그마하게 솟아오른 봉분슬픔이 웅크린 자리

오래된 뼈움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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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22 |

항구에서

항구를 등진 수평선바람을 타고 온다너울거린다

물을 넘을 때,비로소 물결의 수를 헤아린다천천히

기억의 네 귀가 닳을 때까지

물을 건넌다발자국을 삼키는 파도흔적 없는 길아닌 길 위에 서있다

섬을 나가는 배의 흰 꼬리가 사그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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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김 유 라

문이 사라진다

外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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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24 |

문이 사라진다

어딘가, 문을 찾는 방법이 나와 있을 것이다나는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거나책장에 꽂힌 책들을 순서대로 읽었다

벽 너머에서밖으로 나오라는 소리가 희미하게들렸다 목소리를 좇았다목소리는 천장이며 벽을 기어 다니는작은 벌레처럼, 뱅글뱅글 돌다 사라졌다오른쪽 벽을 더듬을 때왼쪽 벽에서 문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나는 벽에 문을 그렸다 천장에도바닥에도 수백 개의 문이 그려졌다열리는 문은, 없었다그림의 문이라도 열어보리라바닥이며 벽을 쿵쾅쿵쾅 두드리던 날천장에서 밝은 빛이 새어나왔다위를 보니천장에 문이 열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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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 문이 사라지다 외 4편 _ 김유라

문 밖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오고 있었다나는 책상으로 올라가 까치발을 하고손을 뻗었다 달려오는 사람들도 일제히손을 뻗었다 나를 향한 것인지손잡이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나는 가까스로 손잡이를 잡았다무리 속 한 사람도 반대편 손잡이를 잡았다사람들이 방안으로 쏟아질 듯 가까워졌다나는 힘껏, 문을 밀쳤다문이 닫혔다 천장이 낮아졌다문이 자꾸 사라져,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나는나가고 싶은, 히키코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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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26 |

오후

햇살이 구겨진다

그림자들이 아코디언 소리를 낸다

사람들이 그림자를 일으켜 찰싹찰싹

뺨을 때린다

기울어, 얼기설기 엮이는 가로수들

이파리들이 빛난다

허리 잘린 버스들의 행렬,

길과 길을 리본으로 묶는다

입 언저리에 손을 오므려 부르는 이름

구겨진 햇살의 모서리에 부딪쳐

음(音)이 된다

구겨진 자리엔 소리들이 고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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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 문이 사라지다 외 4편 _ 김유라

단수

○일부터○일까지 단수가 될 예정이오니 대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공지라도 하나 있었더라면 생각한다 쪼그리고 앉아 기다리며. 녹슬지 않은 여전히 반짝 빛나고 있는 당신의 수도꼭지에선 아직 아무런 기척이 없다 오른쪽으로 돌아가 있는 수도꼭지를 다시 확인한다 내 수도에선 아직도 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다 온수 냉수인지 알 수 없지만 굵은 물줄기가 거품을 일으키며 여전히. 그러고 보니 꽤 오래 됐구나 세차게 쏟아지던 당신의 수도가 멈춰버린 지도. 내 수도에선 아직도 물이 쏟아지고 있다 단수가 되어버린 오른쪽으로 열려 있지만 소리 없는 기척 없는 당신의, 수도꼭지를 가만히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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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28 |

Club dd

정수리를

코를

반들거리는 허벅지를탁탁 떨어뜨리는 사이키조명온힘을 다해벽 바닥 천장으로 몸을 부딪는 음악우리는 몸부림치는 음악을 쫓지종일 자기소개서 수십 장을흩뿌렸던 여자의 머리칼,수초처럼 흔들리는 것 좀 봐여자들 가슴만 보면 안겨 울고 싶다는남자의 어깨 위로주황색 조명이 후드득 떨어져미니드레스를 뽐내는 앳된 여자달싹이는 입술, 어제 같이 잔 남자는아빠를 좀 닮았대 여기는오래 전 아빠가 꾸며줬던 어항 같지 않아?이렇게 둥둥, 떠다닐래어항 속으로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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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 문이 사라지다 외 4편 _ 김유라

손가락만한 금붕어랑 놀고 싶었어모든 어항은 찰랑거려 축축해투명해, 계속 살고 싶어질지도 몰라해가 뜨지 않았으면 좋겠어바깥은 너무, 눈이 부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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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30 |

빗어주다

얼굴 가득 쏟아지던 햇살, 기울어무릎 위에 옹기종기 모인다별 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버스 문이 열리고 닫힌다사람들이 쏟아지고쏟아져 들어온다 파도처럼덜컹이며 가는 버스사람들이 들썩일 때마다햇살에 무늬가 생긴다

창밖, 멀리 보이는 둥근 지붕삐죽 나온 안테나 틈으로겹겹의 하늘이 한올한올감겼다 풀어진다 가벼워져흩어지는 하늘, 이번엔높이 솟아오른 안테나 틈에말려 올라간다 훤히 드러난, 쪽빛 속살안테나들이 하늘을 빗어준다하늘엔 수많은 결, 안테나에 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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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 문이 사라지다 외 4편 _ 김유라

하늘빛 자욱, 딩동끊임없이 버저가 울린다 물방울처럼흩어지고 차오르는 사람들의어깨 위 다리 사이사이손가락 틈으로 햇살이 감긴다내리는 사람들의 등 뒤에 내 무릎 위에남는 따뜻한 결.가만한 하루늘 같은 자리에서 서로가 만들어준 결들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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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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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민 경 진

장난감 죽이기

外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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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34 |

장난감 죽이기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않은 날들이 계속되었다얼굴이 도화지가 되기도자라지 않는 팔다리가 길어지기도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가늘게 떨리며 벽에 부딪쳤다홀로 어둠을 지키는 시간이 길어졌다지난 상처들이 밤거리에버려지면 심장이 사납게 뒤척였다붉은 가로등이 하나씩 즉사하고아무도 깨우지 않는 아침이 되면검은 비닐봉투에 묶여썩지 않는 무덤으로 끌려간다신원을 알 수 없는 시체가 하나둘씩 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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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 장난감 죽이기 외 4편 _ 민경진

지하철 안에서

지하철은 자유로 가기 위한 통로생경한 시선들이 꽂힌다지하철은 돌고 돈다

유리창에 비친 나는 검은 머리를 늘어뜨리고52분 후에 내릴 역을 곱씹고 있다촉수를 뻗치는 시선이 간지러워모퉁이에 몸을 숨긴다나는 불안한 눈동자를 굴린다주위를 둘러보면 빈 의자만이 나를 응시하고곳곳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온다

2분마다 사람들은 솎아지고 메워진다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은 허공에흩어졌다 돌아온다시간이 흐를수록 몸이 문으로 기운다나는 오늘도 해방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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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36 |

무덤

찬 대리석 바닥이 무덤의 터가 되기도 하는가 온 신경이 살아 움직이는 것들을 더듬기도 하는가 시한부 선고는 작은 벌레의 존재조차 싫어 어둠으로 덮어버리고 문을 잠그게 한다 사람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은데 굳어진 감각으로는 예측할 수 없다 새끼손가락부터 굳은 신경은 나를 불구로 만든다 나는 결이 갈라지는 관으로 변해가고 있다 나의 숨을 확인하러 오는 이의 발자국 소리가 울려 퍼져 죽음을 재촉한다 철제침대가 대리석 바닥을 뚫고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꾼다 묘비명은 다시는 세상에 태어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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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 장난감 죽이기 외 4편 _ 민경진

죽음의 시간

여기 한순간에 죽은 인생 하나가 있다췌장이 썩어 호스로 오줌을 누는얼굴빛이 누런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엄마 잃은 아이는 일 년에도 몇 번씩필통이 없어졌다필통 없이 멀뚱멀뚱 앉아 있다 선생님한테 혼나고필통이 필요 없는 체육시간에는 피구공이 자꾸 달려든다

피해도 피해도 달려들어 죽이는 체육시간이 끝나면반 아이들은 아이의 일기장 내용을 다 알고 있다그들은 아이를 위해 노래를 불러준다엄마가 보고플 땐 사진 한 장 꺼내 놓고엄마 얼굴 보고 나니 눈물이 납니다어머니 내 어머니 그리운 내 어머니……무거운 현관문을 열어도 빈 바닥만이 있다학교 다녀왔습니다혼잣말이 아이의 가슴에서 메아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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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38 |

시가 시작되다

처음엔 어색했지. 입만 오물오물 거리다 끝나곤 했으니까. 남들은 본성처럼 아무 때나 툭툭, 잘도 나오는데 말야. 남들이 하는 건 쉬워 보이기 마련이지. 난 잘 하고 싶었어. 남들은 비웃을지 몰라도 사놓고 한 번도 읽지 않은 스테디셀러 당신도 시를 쓸 수 있다,를 괜히 들춰보기도 아무렇게나 찢은 벽에 소리 내어 흉내내보기도 하면서. 나조차 웃음이 났어. 처음은 다 그런 법이라 생각했지. 기침 하고 싶은데 못 하면 화나고 괴로운 것처럼 일단 비슷하게 가래라도 뱉고 나면 시원할 것 같았지. 그게 시작이었어. 내 소망은 내가 하고 싶을 때 시발(詩發)!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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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박 슬 기

참치샌드위치

外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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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40 |

참치샌드위치

가슴에서 파내야 할 것이 많은데정작 무엇부터 파내야 할지 몰라 고민이시라구요거꾸로 파내시면 됩니다꼬리부터 꺼내시구요 머리는 맨 마지막에 파내세요

제한시간이 있으니 한번에 성공하셔야 합니다정작 어떻게 파내야 할지 몰라 고민이시라구요알람시계를 하나 산 다음 후추를 듬뿍 뿌려주세요아무렇게나 다 파내고 나니 구멍난 가슴을어떻게 메워야할지 몰라 고민이시라구요사과 한 개, 참치 한 캔, 양파 반 쪽 순으로 준비하세요

울기 싫으신 분은 양파를 물에 두 번 헹궈주시구요

재료들은 모두 잘게 썰어주세요거기 기차표도 잘게 썰어주세요도망가지 않게 어항 속에 보관하시구요잘게 썰린 재료부터 넣구요 어항은 맨 마지막에 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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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 참치샌드위치 외 4편 _ 박슬기

자기 자신도 묻어 버리시겠다구요구멍난 가슴에 묻게 삽이 하나 필요하시군요허나 삽은 팔지 않습니다아마 어느 마트를 가도 팔지 않을텐데요묻고 싶은 것들이 생각보다 많은 모양이네요무엇을 묻고 싶으세요그 전에 자신에게 충분히 물어보셨습니까그럼 어항을 다시 꺼내시구요금빛 물고기가 먹은 기차표로다음 기차를 타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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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42 |

당신은 달, 나는 비행기

낡은 피아노 건반을 혀가 두드린다익숙한 음율에 귀가 만들어지는 과정입술을 움켜쥐고 다시 한번 키스 시도 중허나 완성된 귀는 맨몸으로 도망쳤다기억하십니까?이제 거기엔 없는데, 거기는 잘 있나요?이제 거기는 없는데, 날더러 거기에 있으라니요이제 거기는 없는데, 거기에만 있네요유통기한 지난 통조림을 열자허를 찌르는 혀 없는 오렌지의 비명항상 꿈을 꾸는 여자의정갈한 꿈이 꿈틀거린다벌거벗은 육체와 벗겨진 정신기계화된 눈물로 만들어진 비행기당신이란 달에서이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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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 참치샌드위치 외 4편 _ 박슬기

겨울코트 습득 장소와 따뜻한 목도리의 필요성

내 시선은 당신이 서있던 자리에 여전히 멈춰있다침대와 스웨터의 따뜻한 온기겨울코트와 장갑에 숨어있던 긴 손가락젖은 머리카락에서 나오던 낮은 목소리수백 가지의 바람이 스쳐지나간 선명한 흔적차가운 겨울바다가 온몸을 덮어 버린다기억은 잘려진 채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다

12월12일 pm 10:14시퍼렇게 질려 달아나던 시간재촉하던 숫자의 점들이 비겁하게 깜빡거린다미처 달아나지 못한 기억의 다리들은 허공 속을 헤매고

파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상냥하게 말한다귓가에 맴도는 내 목소리가 들리나요?목구멍으로 넘어가지도 못하고 파랗게 피어오른 소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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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44 |

당신의 귀로 흘러들어가지 못하고 이내 부서져버리는 먼지 같은 것그림자 없는 단어들은 소가 되새김질 하듯하나씩 다시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만비눗방울처럼 잠시 떠오르다 터져버리고 마는한순간의 것들로 치부되는 우리의 것시간이 정지했다그런데 시간은 자꾸자꾸 흘러간다간밤에 당신이 다녀간 바다가 흉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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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 | 참치샌드위치 외 4편 _ 박슬기

어느날 밤 반쪽으로 갈라진 달 속에서 엄마가 내려왔어요 상처투성이의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울기 시작했죠 왜 우는 걸까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엄마는 원래 울보니깐 나는 엄마를 업고 그늘숲으로 달려갔어요 숲은 바람에 흔들리고 엄마는 울어요 나는 동굴 안에 엄마를 넣어요 엄마 안녕 안녕 엄마는 동굴 안에서 울어요 더 슬프게 더 애절하게 동굴은 숲 안에서 울어요 나는 엄마가 내려온 달 속으로 올라가요 엄마가 따라오지 못하게 쉬지 않고 소리 없이 달 속으로 올라가요 반쪽으로 갈라진 달 속에 몸을 웅크리고 달을 꿰매기 시작해요 엄마가 들어오지 못하게 달을 숨겨요 그렇게 나는 달이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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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46 |

계절 어지럼증

그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어제 점심을 누구와 먹었는지오래된 식탁이 왜 집밖에 버려져 있는지그의 연인이 떠나갔는지 떠나가지 않았는지어떤 것도 기억나지 않았지만왜 생겼는지 모를 그의 가슴에 큰 구멍은알레르기로 자꾸만 재채기를 하고 있었다그의 가슴으로 파고는 계절을재채기 하듯 힘껏 토해내고 있었다차디찬 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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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박 지 원

봉숭아 물들이기

外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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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48 |

봉숭아 물들이기

꽃이 예전처럼 보이지 않는다

꽃이 피는 계절이 꽃에게는가장 죽고 싶은 시간이다

아이를 지우고 온 언니의 손톱위에꽃잎을 짓이겨 올려준다

푸른 잎 두 장 얹어 싸매려다가아직 모양을 버리지 못한물봉선 꽃잎 조각을 들여다본다

곤히 잠든 얼굴물방울 길게 번진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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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 봉숭아 물들이기 외 5편 _ 박지원

에피파니(Epiphany)

만약은 날개, 훌쩍 날아가서 보기. 두고 보자는 혁명, 오기로 일어나 실패로 끝나기 쉬운 하찮고 무서운 말. 사랑은 비누, 향으로 머물지만 점점 작아지는. 나는 신발, 어디든 가고 가끔 벗겨지네. 어둠은 아가미, 다른 감각의 호흡. 초승달은 쳬셔 고양이1), 몸은 사라지고 입만 보이는. 세계는 기차, 한 칸은 앞 칸을 가늠할 뿐,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네. 얼굴은 산호, 저 밑에 가라앉아 소리치는 조각들. 울음은 문고리, 벽에도 문이 있다고 알려주는 단추. 자살은 월담, 죽음은 돌아오지 않는 정탐꾼. 춤은 이발소의 삼색봉, 시작도 끝도 황홀하게 돌아가는. 그림은 필터, 색안경으로 보여주기. 웃음은 리본, 묶지 않으면 생기지 않는. 그냥은 물, 인위의 텁텁함을 씻어내는. 시선은 거울, 투과하고 반사되는. 게으름은 뭉게구름, 하염없이 머리위에 떠있는. 기억은 하극상, 배반하느라 정신이 없네. 추억은 미궁, 끊임없이 같은 곳을 맴도

_______________________1) 체셔 고양이(Cheshire Cat) :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신비롭고 기묘한 고양이. 웃고 있는 표정이며 몸의 일부분을 사라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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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가족은 종교, 안식이자 율법인. 폭력(violence)은 보라(violet), 검푸른 멍 자국. 너는 위(胃), 내 안에서 바깥을 소화시키는. 여름은 뭉크, 출렁이는 관능. 음악은 물고기, 반짝이며 유영하는. 동생은 마을버스, 같은 골목에서 마주치는. 언니는 줄넘기, 넘기 전엔 부딪히고 들어가면 같이 뛰는. 정의는 가장 두꺼운 책, 넘겨도 넘겨도 남아있는 페이지. 처세(處世)는 광고, 유통의 매커니즘 이해하기. 나무는 기둥, 뽑으면 무너지는. 에어컨은 피드백, 더 뜨겁기 위해 냉기를 뿜어야 하나? 육식은 아스팔트, 지표를 덮는 소들의 발자국. 진리는 소실점, 도처에 숨어있는. 상실은 배설, 소화된 것들이 떠나는 순간. 젠더는 홈페이지 스킨, 덧씌워진 옷. 인식은 그림자, 어디를 가든 따라다니는. 죽음은 무심결, 지금도 죽을 만큼은 늙어있지. 삶은 기회비용, 두 마리 토끼를 쫓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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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 봉숭아 물들이기 외 5편 _ 박지원

아름답습니다

오늘도 많은 이들이 불쌍하였습니다이 불쌍함 앞에서 나는 무력하였고무력하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었습니다지구 반대편에서 아이들이 진흙으로 된 쿠키를 먹고 있다는지나간 방송 영상이 인터넷 창에선 언제나 현재입니다

24시간 해가 지지 않는 세계입니다아이들은 24시간 진흙 쿠키를 구워 먹으며 웃고눈가에 날아다니는 파리 역시 24시간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동물보호협회의 인터넷 사이트에다친 유기견들의 사진이 매일 올라옵니다사람들은 마우스를 한번 클릭하는 순간 불쌍하다, 하고

눈물을 흘리는 이모티콘을 타자로 옮기지만그들이 화면 밖에서 정말로 울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다친 개들은 현재 다치지 않은 개들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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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나는 이제 그 사진 속의 개들이 불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친 개들은 24시간 다친 상태로사람들을 올려다 보고 있습니다의도치 않은 기만입니다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의 기만보다나는 잡상인의 프로페셔널한 입담이 듣기 좋습니다최첨단 ‘뚫어 뻥’을 선전하는 잡상인은 고급 양복을 입고 있고화학 약품을 하수구 구멍에 부으면 머리카락이 잘 녹고

막힌 하수구는 뚫을 수 있지만 환경이 오염되지 않겠냐며

환경을 생각해서라도 최첨단 ‘뚫어 뻥’을단돈 3000원에 구매하라고 웅변합니다지하철에서 내린 그는 진흙쿠키가 아닌 삼겹살을 구워 먹습니다그 순간 머리카락이 녹는 대신 녹아내리는 빙판 위에서

웅크리고 누워있는 북극곰이 있습니다그는 북극곰의 죽음을 팔아 뚫어 뻥 한 개를 더 팔고 있습니다그러나 그 북극곰은 이제는 죽었습니다하여 나는 이제 그 북극곰이 불쌍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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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 | 봉숭아 물들이기 외 5편 _ 박지원

이미 멸종한 도도새는 불쌍하지 않습니다불쌍하였던 도도새입니다그리고 박제된 도도새는 아름답고 기괴합니다언젠가 나도 아름답고 기괴할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폼페이 최후의 화석들은 화석이 되지 못한 불쌍한 사람들 보다오래 남아있습니다우리가 그들처럼 남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오늘도 많은 이들이 불쌍하였습니다이제 그들은 불쌍하지 않습니다지구 반대편에서 불쌍하고 있을 이들이오늘 새벽이나 내일부터 - 뉴스에 나온 순간 -24시간 불쌍하게 될 것이지만그들이 지금은 이미 불쌍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세상은 너무나도 평화롭고 아름답습니다오염된 도시의 스모그가 빚어내는 풍경도죽어가는 우리의 육체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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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54 |

다 나쁜 놈들이다

이 세상에는 착한 척 하는나쁜 놈들만 산다

길에 떨어진 쓰레기를 잘 줍는 우리 어머니는10년 기르던 개를 버리고 이사를 갔다우리 개 바코는 추운 겨울 굶어 죽거나차에 치여 죽거나복날까지 살았다면 잡아 먹혔을 거다

백석의 「수라」에서는거미 가족을 염려하는 선인(善人)을 읽으면 안 된다

거미 가족을 죽여 놓고마지막까지 자기를 합리화 하는 수라를 보아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면서교회가기 싫다는 딸을운동기구로 패는 아버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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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 | 봉숭아 물들이기 외 5편 _ 박지원

독재자는 위험하다며독재자의 딸을 찍는다상처에 약을 발라주며미안하다고 우는 모습이 지겹다

나는 한 여자에게서 애인을 빼앗았다계획된 일이었다처음으로 자살을 생각했다

두 번째로 자살을 생각한 날은낙태를 하고 돌아오는 밤이었다친구에게 전화했지만친구는 경험하지 못한 일이라서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오래된 친구와 의절했다내가 가르치는 여학생은급식에 나오는 미국산 쇠고기가 싫어서난생처음으로 가출을 했다도시는 아이들을 재워줄 공간이 없다

김수영이 다 해먹었음에도 불구하고이렇게 쓰면 안 되는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도 되고사진도 시가 되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도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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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더 이상 안 된다는 것인가?산문과 시가 구별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

역사의 종언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랭보가 펜을 꺾었을 때 서정시는 역사적으로 이미 끝났다)

(파울첼란이 죽었을 때 실험시도 종지부를 찍었다)밀란 쿤데라가 소설은 현대의 시라고 말했다장편(掌篇)소설과 담시(譚詩)를 누가 구분할 수 있는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는 시인가 소설인가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 것은 세련된 것이 아니다이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아카데미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 나쁜 놈들이다한 놈도 빠짐없이

나는 안 나쁘다고 하는특히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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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 | 봉숭아 물들이기 외 5편 _ 박지원

(시가 아니라고 말해보라, 불편하니까 아니라고 말해보라,여기 있는 모든 이야기는 픽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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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58 |

미리 쓰는 편지

천 년 전에 아기를 안고 죽은 여자의 미라,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프랑스 가발,25명을 쏘아죽인 희대의 살인마,책을 읽을 때 사진은 손으로 가리고 글만 읽는다먼 곳에서 죽어있던 사람들의천국은 나의 기억이라는 것을 안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어깨와 어깨가 부딪친다천년 뒤 아무것도 없는 얼음 위에 바람이 선회할 거다

지표에 빙하기가 찾아오면여태껏 눈에 보이지 않던 공기가사실은 눈물이 기화된 풍경이란 걸 알게 될까?고드름이 얼어붙은 빈 터에는고요만이 꽃다발을 들고 방문할 거다

여자는 물속에 잠기는 중이다그녀는 언젠가 애인에게서 「미리 쓰는 편지」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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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 | 봉숭아 물들이기 외 5편 _ 박지원

제목의 시를 받았다오랜 시간이 지난 뒤 그녀를 만났던 날을 기억하는 목소리는그녀가 가장 고통스러운 날에 그녀의 인생을 대신 살고 지나갔으므로앞으로 고통이 오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책상 깊숙하게 넣어둔 편지지를 꺼내「미리 쓰는 편지」를 쓴다물은 점점 차올라 그녀의 허리에서 찰랑거린다이 편지의 독자는 그녀 자신뿐최후의 인류에게 보내는 작별인사다

다시없을 미래와펜이 물속에 잠긴다잉크가 번진다

순수 시간이 흐르고

천년 뒤에 바람이 분다천 년 전의 기억을 가진 그 바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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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60 |

북방점박이푸른부전나비

이름이 길어 외우기 힘든외워주는 이가 없어 사라져가는북방점박이푸른부전나비는

환경오염도

서식지와 먹이 불충분도 아닌다른 이유로 멸종 위기에 처해있다고이 나비가 사라져가는 단 하나의 이유는유충기에 공생하는 개미가점차 사라져갔기 때문이라고오랜 시간 유전자에 깊이 뿌리내려아무것도 대신 할 수 없는필요충분조건

어제 신문에서 너의 부고를 읽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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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이 승 우

둥근 사진

外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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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62 |

둥근 사진

당신에게 길을 물으면 당신은 말끝을 흐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헤어집니다

그때 그 버스를 탑니다 차창을 열면 네모난 바람이 불어옵니다 네모난 바람 안에 그 골목이 있고 우리는 그 길을 걷습니다 가끔 어깨가 부딪힙니다 골목을 따라 바람은 접혀지고 접혀져 모퉁이 구멍가게로 들어갑니다 난로 위 주전자 뚜껑이 달그락거립니다 수증기 속 그대 얼굴이 일렁입니다 그대 살결이 입술의 빗금을 따라 타들어갑니다 그대는 입술을 꼭 깨뭅니다 난로 속을 들여다봅니다

바람을 꼬깃꼬깃 구겨 난로 안에 버렸습니다 찰칵, 난로 뚜껑을 닫습니다

당신은 해가 지는 바다로 갑니다 네모난 바람이 멈추는 정거장에서 당신은 파도를 기다릴 겁니다 버스는 정거장을 잃고 바다를 돕니다 바다는 두께를 벗습니다 어제의 수첩을 넘기자 오늘은 파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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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 둥근사진 외 4편 _ 이승우

칩니다 바다의 속살을 봅니다 한 마리 새 그림자를 머금은 입술이 떨립니다 그대가 입을 열면 바다가 쏟아질 것 같습니다 수평선은 재가 되었습니다 재를 털어내며 갈매기 한 마리가 날갯짓합니다

우체통 하나가 모래사장 위에 서있습니다 나는 꼬깃꼬깃한 바람을 네모 반듯하게 펴고는 To.

하얀 종이 뭉게구름밖에 그려 넣지 못했습니다 한 장 바람이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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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64 |

공무도청계천가(公無渡淸溪川歌)

1. 청계1가

손과 손 사이 숨이 차올라 물의 凹凸마다 마디를 펴는 소금쟁이들 깨금발로 딛고서 입맞추나 볼래 징검다리 건너며 깍지 낀 손가락들이 손등 눌러가며 뼈마디를 하나, 둘, 찾아가던 말, 수줍은 징검돌인 줄 알았는데, 눈을 감지 마 눈을 삼킨 속눈썹들이 가늘게 떨리면 돌과 돌 사이 암수 뒤엉킨 소금쟁이 두 마리 몸을 떨며 가라앉잖아 물속 어디쯤일까 물을 움켜쥔 눈꺼풀 사이 손가락 넣어 벌릴래 두 손 담글래 낡은 손톱이 부러지는 피아노 건반 문양의 타일 위로 검은 음표들이 떠올라 툭, 터지는 공기들 십원만한 태양들이 쏟아지고 있어 내 살갗에 차가운 흠집을 내고는 타일 틈새 박힌 반음들 꾹 누를 거야 거뭇한 이끼들이 자꾸만 내 살갗에서 멀어져 살색의 플라나리아들처럼 흩어지는 손가락들 분수대에 앉은 눈먼 악사만이 기타현을 퉁기지 돌과 돌 사이 분무 되는 물의 점자들, 손가락의 마디마다 지문처럼 퍼지면 난 바람 현을 퉁길 거야 활짝 울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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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 | 둥근사진 외 4편 _ 이승우

터트리면 처음, 그 웃음만큼 바람 불어와 착지를 모른 채 공중에 흩어지는,

2. 종로2가

너와 나의 거리에 신호등이 놓였다 횡단보도 건너편 자꾸만 손짓하는 빨간 모자티를 입은 네가 보인다 신호등은 아직 빨간불이다 모자 속 네 얼굴 잘 보이지가 않아 빨리 가야 하는데 빨리 건너가서 네 귀에 이어폰 한쪽 꽂아주고 피아노거리를 걷고 싶은데 견인된 차 앞바퀴가 허공을 가르고 그 사이로 구름 같은 풍선이 떠오르고 뻥튀기 아저씨가 핸들을 놓은 채 뻥이요, 소리칠 때 목이 푸른 비둘기들 날개 아래 중력이 있었을까 붉은 발톱이 아직 무거운 거지 종종걸음의 너, 나한테 손짓하는 거 맞지 그때 그 거리 다시 오라 손짓하는 거지 보너스 트랙이 흐르는 다섯 번째 골목 새끼손가락 걸고 내일을 약속할 거지 왜 네가 손짓할 적마다 바람이 불지 왜 발이 땅에 닿질 않는 건지 푸르스름한 빛 속을 걸어가는데 깜박깜박 너 잊힐까 뛰어가는데 빨간 모자 속 네 얼굴 보이질 않고 네 손은 빨간 옷소매에 숨어있고 빨간 옷자락 나를 스치고 다시, 뒤를 돌아보면 길 건너 붉게 그을린 네가 허공에 서 있고 캄캄한 허공에 갇힌 나는 다시, 걸어야지 하는 자세로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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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추길 기다렸는데 색깔 없는 바람이 파닥거리는 여기는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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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 | 둥근사진 외 4편 _ 이승우

모나미 153 0.7 사라지는 날

검은 원뿔. 흰 육각기둥. 검은 원기둥. 텅 빈 幾何의 寺院들이 무너지네 아무런 문양도 기록하지 못하는 폐허 속으로 길은 사라지네 빛을 머금은 자오선 밖으로 나는 백태 낀 혀를 내미네 나선형의 결이 새겨진 검은 목을 돌리네 한 줄기 빛이 육각의 밀랍 속에 고이면 심장이 마르고 혀를 감싸던 탄성은 녹이 슨다네 응고된 노을 너머 낯익은 야생의 여인이 창을 들고 달려오네 심장이 꿰어져 있는 창으로 나를 겨누네 흑백의 잔해들이 소실되는 동공을 바라보네 텅 빈 幾何 속 벌컥거리는 심장을 바라보네 창 끝에 달린 시퍼런 혀가 내 입속을 관통하네 아, 나는 오랫동안 눌려있던 탄성을 혀 깊숙이 끼운다네 혀와 심장 사이 기다란 투명함이 꿈틀거리네 밀랍을 빚어낼 줄 모르는 여인의 손가락들은 짐승의 뿔로 만든 악기를 연주하네 목울대부터 꼬리뼈까지 그대 숨을 공명시키는 내 몸의 마디들이여 다시는 인공의 형틀 위에 묶여 비명 지르지 않겠네 내 척추는 그대 혀와 이어져있으니 그대가 뛰놀던 툰드라의 이끼를 머금고 가장 낮은 울음을 터트리겠네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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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68 |

은 발바닥이 온 힘으로 바닥을 차네 뚝, 딱, 幾何가 되지 못한 혀들은 맥박을 쏟아내네 검붉은 피톨들이 투명한 핏줄 속으로 스미네 온몸을 휘감는 핏줄이여 내 몸은 그대를 태우고 얼음의 橋脚위를 달리겠네 달리다가 달리다가 사라질 내 발목이여 허공 위에 그대 뼈가 흩어지네 핏빛 눈보라 속을 할딱이며 달리겠네 안구마저 휘감는 채찍이여, 흰자 위 점점이 맺히는 검붉은 혈청들은 心을 그리네 이름 잃은 짐승의 발자국이 심장처럼 벌컥거리네 온 혀로 핥아보겠네 혀끝으로 일어서겠네

Page 69: 추계예술대학교 청사문예

| 69 | 둥근사진 외 4편 _ 이승우

여행연습

차창에 붙은 노을을 뜯어내고 싶어 손톱을 짧게 자르고 지문 없는 새살로 기타 현을 꾹 누르면, 아파, 조율을 풀게 힘없는 음들은 바람에게 말할 거야 여행을 가자고 우리 손을 마주 댄 적이 있지 손금을 따라 빨간 수성펜으로 낙서처럼 운명을 그리고는, 덜컹, 낙엽 하나가 차창에 부딪혔어 노을 위를 달리던 기차는 바다가 보이는 그 역에 멈출 거야 방파제에 부딪히는 하얀 포말 위로 붉은 살점들이 떠다니고 부리가 더러운 갈매기 떼 모여들면, 소금 머금은 바람의 속살 속을 걸으며 헤어지자 말할 거야 고등어 배를 갈라 뒤집어놓은 이 길을 걸으며, 가짜 눈물을 뿌려놓은 푸른 껍질들과 이별할거야 포말이 사라지는 바다 속으로 여행을 가자 입술 끝에 고인 침은 어느 음을 품었을까 사마귀의 거품 알이 매달린 민박집 처마 밑에서 기타 줄이 새겨진 손끝으로 고등어 통조림 뚜껑을 뜯으면, 아—녹슨 구멍 속으로 사라지는 음들, 푸름이 삭은 붉은 살들이 꿈틀거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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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70 |

네모난 날

1다이어리 첫 장을 넘깁니다 달력 칸칸이 내가 만난 사람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형광색 옷을 입은 사람들은 등산을 가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예배당에 갑니다 그런 날 나는 지하철을 탑니다 리본을 맨 여자 아이가 칸칸마다 돌아다닙니다 엉엉 우는 아이를 꼭 내가 울린 것만 같아 아이야 뚝, 그러자 아이는 두 눈을 꼬옥 감았다 뜹니다 눈이 파닥거립니다 눈망울들이 헤엄치며 창밖으로 달아납니다 태양이 파닥거립니다 철근에 태양이 찔렸습니다 그 위로 콘크리트가 쏟아집니다 콘크리트가 형광색이라 안심입니다 터널을 지나 다이어리를 닫습니다 열차와 승강장 사이 그림자들이 하나, 둘 빠져듭니다 지나간 날들이 사라지고 칸칸이 벽이 생깁니다 하얀 계단을 오릅니다 전광판 속 뉴스가 끊겼습니다 보도블록 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빌딩 위에 한 여자가 자살을 시도합니다 몇몇 사람들은 구경을 하고 몇몇 사람들은 그냥 지나 갑니다 이빨 하나가 흔들립니다 저 여자 발목에 이빨을 매달아 놓으면 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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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 | 둥근사진 외 4편 _ 이승우

게 빠질 텐데

2이 근처엔 지붕이 없어 헌니를 땅에 묻습니다 땅에서 혀가 자라납니다 녹슨 워크맨에 늘어진 테이프를 넣고 걷습니다 B-side를 걷습니다 수족관을 지납니다 네온테트라 한 마리가 수면으로 떠오릅니다 줄무늬 사이 아가미가 벌름거리질 않습니다 아가미 속을 들여다봅니다 통통한 알을 물 아래로 뒤집어 줍니다 비눗방울들이 얼굴을 스칩니다 방울이 터지면 비릿한 냄새가 납니다 가로수 한그루가 길을 막고 있습니다 수초처럼 긴 머리를 한 여자가 벌거벗은 채 두 손으로 태양을 받들고 있습니다 목울대에서 자라난 혀는 태양을 뚫고 있습니다 투명한 핏줄 속으로 하얀 수액이 흐릅니다 핏줄이 끝나는 손가락 끝에선 피톨 같은 오디열매들이 피어납니다 나는 나무 위에 올라가 열매를 따 먹습니다 딱딱하지 않은 기다란 혀가 부럽습니다 혀에 입을 맞춥니다 잇몸으로 앙앙 혀를 끊습니다 혀를 뽑아낸 태양의 살갗에서 피가 솟구칩니다 태양은 점점 하얗게 변해갑니다 여인은 딱딱한 고목이 되어갑니다 후두두 쏟아진 오디뭉치들이 땅을 빨갛게 물들입니다 혀가 축 늘어져 무겁습니다 입에서 혀가 미끄러집니다 혀가 땅 위에서 파닥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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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72 |

3테이프를 뒤집습니다 빨간 열대어 한마리가 아가미를 벌립니다 가볍게 걸어야 겠습니다 누구를 만나러 가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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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이 현 주

팝 콘

外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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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74 |

팝콘

팝이 흐른다. 돌아가는 레코드판 위에서 음을 튀긴다. 튕겨난 음이 숨 참고 있다. 템포가 빨라졌다. 부딪칠 때마다 잠이 확 달아났다. 부풀어 오른 음들은 폭죽을 터트렸다. 폭죽 터지는 리듬에 맞춰 발을 통통 구른다. 폭탄이 떨어졌다. 와르르 음이 무너졌다. 노래가 끝났다.

나는 턴테이블의 뚜껑을 열었다. 음들이 바삭바삭한 소리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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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 | 팝콘 외 4편 _ 이현주

농구경기

농구대가 쓰러졌다. 공은 튕겼다가 땅 속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코트에 앉아 작전회의를 했다. 다리 부러진 의자에서 피가 흘러 내렸다. 관중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공을 주우러 갈 사람을 지목했다. 손은 떨리고 있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공을 놓쳤다. 휘슬이 울렸다. 손에는 푸른 멍이 퍼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박수갈채가 터졌다. 땅을 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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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76 |

이상한 뉴스

안녕하십니까. 오늘의 뉴스속보를 알려드립니다. 남자에게 실연당한여자가 옥상에서 떨어져 자......관심 없다고요? 그럼 두 번째 속보입니다. 외로움에 지쳐 우울증 판정을 받은 여자가 자살 기도를 했는데 전치 8주의 진......짜 무뚝뚝 하시네요. 다음은 해외토픽입니다. 눈과 귀는 있는데 입이 없는 얼굴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정체는 동물일까요, 가면을 쓴 사람일까요. 전혀 제 말을 믿지 않으시는군요? 마지막으로 날씨예보입니다. 현재기온 영하 30도로 구름 없이 화창한 봄날입니다. 담소를 나누며 쓸쓸한 오후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채널을 돌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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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 | 팝콘 외 4편 _ 이현주

세일즈맨

매일 아침 우리 동네를 지나는 남자차파는 차대리가 떴다아홉시가 되면인사하는 굿모닝맨두 손에 꽃바구니 들고생화를 건넨다양복 자락 위로 바람이 미끄러진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발품 파는 남자넥타이가 그의 목을 점점 조인다석 달 째 계약서 한 장 쓰지 못해애꿎은 빈 벽만 발로 차댄다성실한 피해자금문교(金門橋) 위를 걷는 상상을 한다

매일 아침 우리 동네를 지나던 남자차대리가 이 세상 뜨려고 한다썩은 한강물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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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78 |

금문을 통과하여번지점프를 한다CCTV가 그를 찍고 있다

서울은

죽으려고 해도 죽을 공간이 없다이승과 저승사이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집값 떨어지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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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9 | 팝콘 외 4편 _ 이현주

버스정류장에서

아줌마의 검은 점퍼에서얼굴 하나가 나온다토마토만한 손에하얀 식빵을 들고 있다볼이 빨개지도록빵을 뜯어 먹는다아기는 엄마의 등을 꽉 잡고 있다

효도신발을 신은 할머니마을버스를 기다리다 아기를 본다할머니의 미소에아기의 웃음소리빵 터진다주름진 손으로 어루만진다엄마는 한 발짝 도망간다

할머니가 기다리는 버스는오지 않고아기엄마는 팔번 버스를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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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80 |

나도 따라 탄다

할머니 버스를 타는 순간떨어져 사는 손자의 얼굴스쳐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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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임 영 은

구름의 뿌리

外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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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82 |

구름의 뿌리

구름 밖으로실처럼 펼쳐진 뿌리들

구름 밖의 구름들

가는 구름들은더해지고

늘어진다

넓은 하늘 펼쳐진 구름가느다란 구름은 하나의 구름으로하나의 구름은 가느다란 구름으로몸을 바꾸고

하늘을 향한 깊은 나무들구름의 뿌리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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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 | 구름의 뿌리 외 4편 _ 임영은

패스!

야구방망이가 어깨를 스쳤다땀에 젖은 머리카락은스윙 연습 중이었다공도 없이

밤이 오고달빛이 오고어깨의 멍이 환하다

천천히 멍을 만진다

달콤하고

텅 비어 있다비명 소리가 들려온다비명은 빛 보다 빠를까, 멀리 갈까

손가락 보다 긴당신의 시선을 기억한다달콤하다 그리고 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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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84 |

비어있다

스치는 헤드라이트흔들리는 머리카락구르는 웃음소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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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5 | 구름의 뿌리 외 4편 _ 임영은

하나

오른쪽 얼굴과 왼쪽 얼굴을 번갈아 볼 때그때마다 너를 생각해 하나

아카펠라를 누군가 자꾸 튼다

낮에는 공장의 재봉틀 소리가 들려오고밤에는 수많은 아파트 창들이 보인다1302호 안으로 생선 냄새가 들어오고나는 엄마를 기억하지

닫힌 팔레트 틈에서 물감이 떨어진다툭

그걸 받아 마시고 있어 하나 하나

나는 싱크대에 서 두부를 썰고나는 나무를 세고나는 커피를 마셔하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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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86 |

빨강색 물감 한 방울이 물속으로 떨어진다

하나, 나는 너와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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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 | 구름의 뿌리 외 4편 _ 임영은

디데이

뒤 돌아보면 접속사들언제부턴가 우리는하나씩 모으기 시작했다그리고

사진들

음악들

하지만

사라진 사진들, 떠오르지 않는보컬을 모집 중인 밴드의 연주 소리

우리는 몰래 날짜를 지우고가방 지퍼를 꼭 닫았다안녕 어디가니

찻잔 속 불개미 떼강 위를 떠가는 원피스피아노 건반 사이로 녹은 초콜릿이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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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88 |

우리는 자주 새 노트를 사고 말아말하는 네 표정은 하얗게 버려진 페이지들

창 밖으로 구름이 이동하고 있다창 밖으로 구름이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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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 | 구름의 뿌리 외 4편 _ 임영은

미래지향적인 고백모임

매주 토요일 밤 우리는 원탁에 모여 앉는다 유리잔에 고이는 우리의 모습우리는 지난 일주일로 간다 한 사람의 말과 함께누군가를 죽이고혼자 걷는다……

겨울의 비키니브래지어 속의 검은 털유리잔에 고인 우리의 모습

다가올 일주일로 가며유리잔에 고인 우리의 모습

기온은 쉽게 섞이고온도계의 빨간 눈금이 움직인다

일요일 아침 향이 좋은 모닝커피를 마시자 우리는 비로소

고백한 것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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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90 |

고백하지 못한 것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아침에는 물과 사과를 먹고 눈을 감을 땐 고요한 수면 아래로 유유히 움직이는 돌고래를 상상하자 나만의 찬송가를 자주 들어야지 긍정하는 지경에 이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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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정 인 혜

폐 경

外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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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92 |

폐경

창틈으로 나무 타는 냄새가 기어든다 반쯤 벗겨진 슬리퍼가 딸깍 딸깍 베란다에서 울리고 궁둥이는 딸깍 소리 보다 한발 앞서 씰룩거린다 나무 타는 냄새가 창틈으로 기어들어와 그녀의 눈가를 기웃거린다 그녀의 궁둥이가 탄력 있게 안으로 모아진다 간질대는 나무타는 냄새는 결국 재채기를 만들고 말았다 에이취 그녀의 궁둥이가 힘없이 벌어진다 궁둥이 사이로 섬단풍나무 한 가지가 빠끔히 얼굴을 내민다 딸깍 소리에 단풍잎 하나 붉게 물들고 단풍잎 하나 떨어진다 떨어지는 단풍잎 나무 냄새를 따라 그녀의 목덜미를 감싼다 얼굴을 타고 오른다 단풍잎 하나의 붉은 물 눈가에 스민다 나무 타는 냄새가 창틈 너머로 도망간다 한 잎도 남김없이 떨어뜨린 섬단풍나무 한 가지 검게 말라버린다 반쯤 벗겨진 그녀의 슬리퍼가 딸깍 딸깍 그녀의 궁둥이를 울린다

병원에 다녀온 그녀는 하반신이 검게 말라서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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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 | 폐경 외 4편 _ 정인혜

왔다 붉었던 그녀의 궁둥이는 더 이상 붉지 않았다 검게 변한 섬 단풍나무 한 가지가 바르르 떨며 간신히 매달려 있다 베란다 창문 틈 사이로 나무 타는 냄새 기어들어 오고 단풍잎을 어디에 떨어뜨렸는지 얼굴엔 붉은 물이 스며들어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베란다에 서서 딸깍 딸깍 소리를 만들어 내다 검게 말라버린 그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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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94 |

분재

저 방 아랫목에 그가 앉아있다 날이 한참 지난 일간지를 넘기는 손가락에서 매화꽃이 피어난다 동강난지 오래된 나무기둥같은 두 발은 그의 엉덩이에 찰싹 붙어 펴질 줄을 모른다 어머니는 그가 눕지 못하는 병에 걸렸다 했다

매화 꽃잎이 바람결을 따라 도망치는 중이다 그의 눈은 매화꽃을 맨발로 쫓았다 놓쳤다 목구멍이 벌름거린다 어깨가 격하게 흔들린다 벌어진 목구멍에서 고름냄새가 난다 어머니는 그가 분재(盆栽)되어 그렇다 했다

나는 사과를 깎고 나보다 어린아이는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그는 매화꽃과 함께 앉아 있다 그의 뺨은 고목나무처럼 까칠해 키스를 해 줄 수 없다 좀벌레 여러 마리가 그의 몸에서 기어 나와 벌거벗은 사과를 해치우고 사라진다 어머니는 이제 그가 누웠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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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5 | 폐경 외 4편 _ 정인혜

면 좋겠다 했다 나와 어린아이도 그러했다

그가 사라졌다 그가 품었던 욕창들이 뱉어놓은 흔적만 있을 뿐이다 사과즙에 몸이 무거운 좀벌레 몇 마리가 방바닥에 눌러 붙은 일간지 사이에서 퉁퉁거린다 어머니는 그가 매화꽃을 따라갔을 것이라 했다

바람이 분다 매화꽃을 닮은 바람이다 바람이 내 몸에 닿는 게 싫다 나는 그의 자리에 앉아 다리를 모으고 가슴을 오그렸다 어머니는 나와 그가 꼭 닮았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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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96 |

욕실

욕실에 갇혔다 그와 내가 이 집에 이사 온 날부터 나는 욕실에 있다 그는 매일 같이 욕조에 물을 받는다 나는 몸을 담그고 눕는다 쑥 배가 가라앉는다 욕실 문을 열고 그가 들어온다 그는 옷을 벗고 욕조에 들어와 눕는다 욕조의 벽이 조여든다 나는 다리에 힘을 주고 그를 품는다 그의 코를 가슴께로 당긴다 가라앉는다 바람이 분다 바람결 따라 출렁이는 물. 헤엄치는 악몽을 그에게 건넨다 핏대가 파랗게 선 그의 손이 내 다리를 꽉 잡는다 나는 그의 손을 걷어낸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며 꿈에서 빠져나온다 형광등 불빛이 그의 그림자를 따라 질퍽한 발걸음으로 욕실을 떠난다 거울에 비친 그의 뒷모습이 볼록하게 부푼 내 배를 짓누르며 느릿하게 움직인다 수챗구멍으로 빠져나가는 나의 눈과 귀가 일그러진다 물이 완전히 빠져나간 욕조 안에는 창백한 유방과 그의 머리카락이 박제되어 있다

Page 97: 추계예술대학교 청사문예

| 97 | 폐경 외 4편 _ 정인혜

그녀와의 동거

식탁위에 그녀가 놓였다 그녀는 국을 끓이고 조기를 굽고 수저를 놓고 식탁위에 올라간다 그녀는 국을 먹고 조기를 먹고 그녀를 먹는다 식사를 마치자 행주로 식탁을 훔치고 밥을 짓는다 밥을 짓는 동안 텔레비전 속에서 재잘거리는 그녀 앞에 마주 앉아 그녀를 보며 한참을 웃다가 일어나 국을 끓이고 계란프라이를 하고 겉절이를 무치고 수저를 놓고 밥을 푼다 그리고 식탁위에 올라간다 그녀는 계란프라이를 먹고 그녀를 국에 말아 먹고 겉절이를 먹는다 식사를 마치자 행주로 식탁을 훔치고 밥을 짓는다 밥을 짓는 동안 장롱 속에 여름내 묵혀있던 그녀를 꺼내 바느질을 한다 그녀는 몸에 곰팡이가 피어버린 그녀를 세탁하기로 한다 꼼꼼히 바느질을 하고 욕조에 물을 받아 그녀를 담근다 그녀의 몸에서 곰팡이 냄새가 피어오른다 세제를 풀고 그녀를 잘근잘근 밟다가 욕조를 황급히 뛰어 나와 밥을 짓고 있는 가스 불을 끈다 탄내가 온 집안을 채웠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 후 밥솥을 연다 밥솥에는 까맣게 탄 채로 죽어 있는 그녀가 있고 오늘 식탁엔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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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98 |

맣게 탄 그녀가 놓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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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9 | 폐경 외 4편 _ 정인혜

나는 당근

이 계단을 마저 내려가 보자. 우린 계단 수만큼 부풀어있거나 오그라들어 있겠지너는 당근 알러지가 있다고 했어 나는 카레를 시키고 당근은 너에게 골라내 당근을 집어 삼키는 네 얼굴을 바라봐계단을 내려가는 네 허기진 뒷모습을 보며 당근을 연상하는 내 머리는 호두과자처럼 지글거리지 나는 당근이라고 네게 말했을 때 넌 여자에 대한 지론을 한참이나 펼쳤어 바람이 스물다섯 번 강하게 부는 시간 만큼. 나는 날 때부터 껍질이 없어 그래서 단단할 수 있지 네가 좋아하는 석류보단 말이지 그러나 감추고 감춰진 알맹이를 욕망하는 남자들의 눈이 빨간 내 몸통을 큐브모양으로 잘라냈어저 계단을 다 내려가면 우린 계단 수만큼 부풀어 있거나 오그라들어 있을거야 아니 정확히 말하면 네가 그렇게 될 테지 난 껍질이 없어 단단하니깐 내가 바람을 맞으면서 자랐다면 껍질을 두를 수도 과즙을 품을 수도 있었겠지만 난 바람을 맞지 못 했어하늘이 파랗구나. 바람이 불 것 같아 너는 계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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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100 |

내려가고 있고 저 계단을 다 내려가면 나는 또 너에게 당근을 먹일테야 나는 너와 달리 계단 수를 정확히 알아 넌 이번에도 하나 하나 계단 수를 세면서 느릿느릿 내려가겠지 나는 그렇게 너를 기다리고 지켜보고 바라봐 네가 당근을 먹으면 오돌토돌 두드러기에 온 몸이 뒤틀리리란 것을 알아 그리고 계단 막바지에서 계단 수를 놓쳤다고 붉고 단단한 나를 향해 울상 짓는 얼굴을 하리란 것도 알아 하지만 나는 가장 깊은 속까지 붉고 단단하단다 기다려 주는 것 외엔 내가 할 일이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붉고 단단한 몸을 안으로 안으로 말아 넣는 일 밖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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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최 미 선

걸 음

外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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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102 |

걸음

신발에 끌려 다니지 말고 한 음 한 음 소리를 낸다고 생각해 봐 어렵지 않아 정해진 박자는 없어 리듬은 스스로 만드는 거야 혼자 걸으면 독주곡, 함께 걸으면 행진곡인 거야 달팽이 지나간 자리처럼 발소리가 길에 남아 끈적끈적 하지만 곧 말라 은빛으로 반짝일 거야 새로운 길이 돼서 다른 발소리가 그 길을 따라올 수 있을 거야 또 어떤 느낌이더라 그래 지금 입고 있는 그 스웨터 같아 한 걸음씩 땅과 맞물려 잘 짜여진 할머니의 스웨터 같지 걷는다는 느낌은 그래 조급해 말고 물 흐르듯 천천히 차 한 잔 마신다 생각하면서 내 발은 늘 묵묵하고 신발 또한 불편해 그저 앞으로만 가야 한다고

이제는 닳지 않는 운동화 뒤꿈치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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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 | 걸음 외 4편 _ 최미선

바통터치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늘 즐겁답니다 보세요 이렇게 구를 수도 있고 밤새 춤출 수도 있는 걸요 운이 좋으면 흥에 겨워 리듬 타는 나의 랩도 들을 수 있을 거예요

물을 좀 더 넣어주시겠어요? 이곳은 수영하기 안성맞춤이군요 오래된 물고기가 그리워요 눈이 튀어나왔다고 놀림받던 그 물고기의 보글보글 방울은 참 달콤했지요

벽이 점점 허물어져요 살려주세요 여기서 나가면 오래된 물고기를 만날 수 있는 건가요? 그렇지만 무서워요 아직은 일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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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104 |

장대 피에로

장대 피에로가 풍선을 분다사람들이 다가가 손을 내민다손끝과 발끝의 인사가 보물 지도를 만든다때 아닌 보물찾기에 사람들은 환호한다힌트는 손목에 남은 빨간 손자국

풍선 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찢어지는 보물 지도, 땅에 떨어진다보물을 챙긴 사람들이 사라진다남겨진 힌트만 빨갛게 부풀어 오른다

장대 피에로가 끝없이 풍선을 분다하늘로 올라가지 않는 풍선과찢어진 보물 지도 틈에서사람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커다란 보물이 지도를 들고 서 있다

Page 105: 추계예술대학교 청사문예

| 105 | 걸음 외 4편 _ 최미선

우주 마인드(Would you mind,)

버블을 읽는다 다양한 버블들, 사람들 머리 위에 떠다닌다 누구에게나 버블이 있다 크기와 모양, 색깔 모두 다르다 다른 사람과 만나 모양이 변하는 버블도 있고 더 작아지는 버블도 있다 한 번 변한 버블이 원상복귀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평생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많다 버림받아 본 버블은 어떤 모습의 버블이든 분류하려 들지 않는다 버블은 절대 터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버블 자체를 인정할 것 그런데 언제쯤 여름을 즐길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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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106 |

겨울의 빛

호바박 호바박 난로 안 고구마눈 내리는 할머니의 겨울앞마당에는 백구와 나 둘 뿐이었다일년 만에 서울 물이 들어버린 열한 살의 나는난롯불에서 튄 불똥에 놀라서울에 가고 싶다고 엉엉 울고 있었다고구마 먹으라는 할머니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더 크게 울었다 백구가 컹컹 짖었다집 앞 가로등 불빛이 자꾸 번져 눈을 비비고 또 비볐다

한동안 백구의 울음은 계속 됐다

눈병에 걸렸다올해 유행하는 전염성 눈병이라 했다어디서 옮았을까 생각하다십 이년 전 할머니의 겨울난롯불이 문득 떠올랐다그 빨간 불빛이 눈에 전염 됐을까눈 비비시면 안 됩니다

Page 107: 추계예술대학교 청사문예

| 107 | 걸음 외 4편 _ 최미선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불똥이 튀었을 때 눈 비비지 말라고 했던할머니의 말씀을 그제야 들었다

백구도 할머니도 난로도 없는 서울의 밤불빛에 눈이 자꾸 시큰거렸다잔잔히 번지던 겨울의 빛이마음을 은은히 울린다

Page 108: 추계예술대학교 청사문예

청사문예 제23호| 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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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한 정 남

환영일기

外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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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110 |

환영일기

1.절전모드의 모니터가 밤새 우주의 별들을 지나치는 동안 나는 작은 방에 꼭 한 모양으로 박혀 잠을 잔다 꿈은 어지러운 몽정과도 같아 잠 속의 나는 아이인지 어른인지 알 수 없다 이따금 식물의 몸이 되어 척추에 달린 이파리들이 火르르 火르르 사그라지는 환영을 볼 뿐

오늘도 먼 땅에서 한 새가 길게 울었다 새로운 기형을 보았다는 새들의 경보 날개를 잃어가는 새의 나라는 공명空冥을 알렸다 새들의 날개는 점점 물러지고 새들의 집은 아래로 아래로

2. 어느 노래의 유효기간은 2099년 12월 31일 그 노래를 들으며 2099년을 꿈꾼다 그때가 되면 나를 알리는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어린 손자들은 이 노래를 오래된 노래로 흘려들을까 내 몸의 피가 세대에 전해져 2099년 12월 어느 길을 지나고 있을 때 혹

Page 111: 추계예술대학교 청사문예

| 111 | 환영일기 외 4편 _ 한정남

여 길거리에서 오래된 영화관에서 이 노래를 마주할 때 오늘의 심장박동처럼 이 노래의 유효를 즐겨주길

3.벽에 침을 꽂는다 길을 둔 사진들과 유럽의 미술관에서 고른 그림엽서들이 벽을 두른다 못이 아닌 침은 옆으로 옆으로 뉘면 된다 종이의 네 귀들이 순하게 자기의 시간 안에 정박해있는 동안 난 오랫동안 집을 비웠다 삼백육십오 일하고도 더한 시간들 숱한 장면들만 쫓다 어느 기억 하나 짙게 남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오래 비워둔 방 안에 서서 그전의 시간들을 고르는 중이다, 지금 난 벽이다 나의 몸에 침을 뉜다

Page 112: 추계예술대학교 청사문예

청사문예 제23호| 112 |

블랙고등어

난 식탁 위에서 말라가는 고등어 나는 고등어로 태어나고 죽고 다시 또 고등어로 태어난다네 주공아파트의 기울어진 식탁다리가 날 받들고 있다고 해도 좋네 내가 저 다리 밑으로 들어가게 될 일은 없잖은가자 오늘도 말라가는 연습을 해볼텐가 말라가고 말라가다가 바싹 마른 내 껍질을 누군가 본다면 나는 또 죽은 시늉으로 푸른 쓰레기통에 들어가면 되잖은가 아직인가, 뼈들을 바르던 젓가락들은 싱크대에서 날 노려보고 있지 젓가락들의 혀 맛을 아는가 비린 香을 풍기며 가락을 퉁기는 그 맛을 아는가 날린다네 비린내, 비린 네곁 스치는 바람들이 내게서 떨어져나간 비늘을 찾는다네 나는 몸들을 뜯어가며 비늘들을 찾아 나서는 꿈을 꾼다네 기울어진 식탁다리를 잡고 나는 우주선을 유영하듯 힘껏 힘껏 저어나가는 그 꿈에서 나는 검푸른 생선이 되어가네

살들의 쉰 노래가 들리네 팡팡대는 곰팡이들의 합창을 들으며 살들은 깜깜하게 번져간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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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3 | 환영일기 외 4편 _ 한정남

페트 협주곡

페트들이 악기가 되었고 그들은 날마다 춤을 췄다 감정을 모르는 눈들은 지구 밖으로, 페트의 세계 넘어 우는 소리들은 담을 타고 흘렀다어느 때부턴가 눈들은 슈퍼 맨의 냉장고에서 페트들을 모았다 비워진 페트들이 내는 소리는 주술처럼 한 지역을 지키는 슈퍼 맨들에게 퍼져갔다 할당량 이상의 페트들이 팔렸다 춤출수록 가벼워지는 그들이 악, 악樂 비워지는 데에 환호하는 동안 남은 눈들의 고막은 찢겨지지 않고 질겨졌다페트들이여 네 안에 담긴 원형의 소리는 우리들의 호주머니로 산 것 슈퍼 맨의 냉장고에서 널 꺼내들은 것은 우리들의 눈이란다 꿀꺽꿀꺽 슬픈 기록들이 목을 넘기고 떠나간 눈들이 지구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막의 울음은 오아시스다 바람이 호외를 돌려보지만 그걸 듣는 이는 없지 여행자와 방랑자들은 샘을 발견하고 기뻐 물을 푸지만 그들의 물통에 담겨진 건 바람의 신기루, 사막은 모여 울지만 그걸 듣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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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없지 페트들의 몸은 계속해서 젖어가네 여린 울음들로 강하게 흔들어지네 사막의 儀式을 알아보는 발 많은 종족들 울며 목을 축이네

건조한 눈들이 지구를 벗어났다는 보도 우주에서 본 지구는 또 하나의 오아시스 모여 우는 이들의 행방을 찾아서 별들은 이목을 모네 울지 않던 눈들은 울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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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변성기가 왔다 여러 목소리가 성대를 척추 삼아 포즈를 취한다

아기공룡둘리는 1억년 전 빛나리 둘리엄마는 둘리야 둘리야를 외행성에서만 외칩니다 내 얼굴은 지구의 얼굴 내 몸은 구체 밤마다 주인집아저씨는 날 둥글게 둥글게 말아요 오늘은 점프볼을 던져보자 아저씨 난 반작용을 알아요 아저씨는 내가 갖고 놀아요 자화상을 그리는 둘리 둘리는 스케치북에 둥근 성기를 그립니다 물이 흐릅니다 지구가 푸른 건 바다가 푸르기 때문. 둘리는 지구의 색을 입고 사라집니다 둘리야 둘리야 둘리엄마의 애간장녹이는 연기를 위하여 자, 컷

보물찾기를 하고 있다고요 그래요 오늘 난 보물이에요 시커먼 개들이 보이는군요 개들에게 내 뼈를 물리게 할 생각은 말아요 당신들의 수사 놀이는 흥미없어요 내 말이 들리지 않는군요 이쪽으로 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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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아요 나는 이제 쉬고 싶다고요 봤군요 불행을 보는 눈이 싫었어요 당신들의 실적하나 불행하지 않은 일들이 있나요 보물찾기도 시시하네요 보물을 찾았는데 멀리서 곡소리 들려오고요 보물을 가지려는 이들은 없고요 나는 더 깊은 곳에 묻어진다하고요 누구도 찾지 않는 보물찾기 이제 시작이고요

가면들과 먼 시간을 걷고 있습니다 여기까지의 걸음수를 잊을 땐 꽃잎 따다 물고요 무수한 해들이 뜨고 지고 손안에 죽은 식물의 씨앗만이 남았습니다 버려지기까진 늘 긴 이야기가 필요한 걸요 늘, 긴 이야기가 필요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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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왕국

새의 깃털 줍는 이 하나 없다 하늘을 날던 것들의 멸종을 난 죽은 몸이 되어 기억한다 그날의 새는 부러진 날개를 지녔음으로 새에 대한 기억은 별의 추락 정도로 여기자 먼 우리에서 얼룩을 핥는 말이 보인다 난 棺에 갇혀 장례를 기다린다

당신의 입은 火를 머금은 채 타버리고 뇌의 입들이 대신 말을 전합니다. 영혼이 떠날 때 잠시 흔들립니다.

거리마다 거북들이 다닌다 태양이 사라지는 시간 목을 숨긴 거북들은 배를 하늘로 들어 보이고 태양의 흑점을 받는다 등껍질 속에서 거북들의 목은 깊은 주름을 만든다 밤이 오기까지 열을 식히며 물과 뭍 사이의 음을 찾는다 그들의 성대가 점점 더 말랑해져온다 내일 탄생할 거북들은 성대의 기억이 녹아있을 것. 이 땅은 침묵, 침묵뿐이다

거북들이 기계의 입을 켠다 죽음을 예고한 죽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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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파트 옥상에서 골목의 차안에서 욕조에서 벌어지고 곧이어 지구촌 뉴스에서 물소와 키 큰 나무의 모습이 이방인처럼 전해진다

밤의 예식마다 검은 옷을 입고 술이 가득한 욕조로 들어선다 고래의 속살이 욕조의 바닥에서 술을 뿜고 나는 그 술을 마신다 신부 없는 식을 올린 고래의 살을 바르며 나는 취해간다 술과 잠에서 깬 후의 그림일기. 이 도시에서 죽어간 동물들을 가둬둔다 오늘은 얼룩말의 얼룩이 남겨지고 내일은 거북이의 성대가 그려질 것 빠르게 일기장을 넘겨라 그 앞과 맨 뒤에 나의 장례가 보이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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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說

고 건 _ 「흔 적」 _ 121p

김 경 진 _ 「하늘을 올려보다」 _ 145p

김 일 균 _ 「물고기 비」 _ 171p

박 미 경 _ 「소리 가는 길」 _ 195p

박 주 석 _ 「심동춘 살인미수사건」 _ 217p

이 나 리 _ 「아직, 세 번째 마누라」 _ 245p

이 노 아 _ 「그림자 놀이」 _ 275p

장 민 희 _ 「낯선 질문」 _ 297p

허 란 경 _ 「존재의 아름다움」 _ 321p

황 인 형 _ 「그리고 그가 사라졌다」 _ 34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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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

l

고 건

흔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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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지에 코를 대자 눅눅한 냄새가 났다. 여름에 유통기한을 아슬아슬하게 넘긴, 팽팽하게 부푼 우유팩을 열었을 때의 냄새. 냄새의 끝은 약간 시큼한 기운이 있어서 살짝 미간에 주름을 잡는다. 하지만 그것도 순간일 뿐이다. 냄새에 몽롱하던 정신이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한다. 킁킁거리며 다시 냄새를 맡는다. 있는 힘껏 냄새를 맡으면 어지러움에 비틀거리기 십상이다. 짧게 두 번이 제일 적당하다. 두 번 맡고 멈췄다가 다시 두 번을 맡는다. 그렇게 다섯 번을 쉼 없이 하게 되면 서서히 냄새를 맡을 수 없게 된다. 오늘 허락된 냄새는 여기까지다. 아쉽지만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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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기약해야 한다. 밖에서는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있다. 가느다랗게 실눈을 뜨고 현관문을 연다. 현관은 문턱보다 40센티미터쯤 낮다. 아니. 집 전체는 지면보다 문턱만큼 낮다. 누군가를 확인하기도 전에 고개가 저절로 돌아간다. 빛 때문이다. 눈부신 빛이 눈을 아프게 찌른다. 이건 냄새와 다르다. 아무리 익숙해지려고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한번 찡그린 인상을 펼 수가 없다. 손차양을 하고 가까스로 고개를 올려다보니 2층의 주인남자와 복도 끝에 살고 있는 끝집여자였다. 복도에 서 있는 그들에게 나도 합류한다. 점점 몸이 노곤해진다. 정신을 놓을 것만 같다.문 앞에는 주인남자와 끝집 여자가 서 있었다. 주인남자의 귀걸이가 계속 신경이 쓰인다. 둥근 씨앗 같은 귀걸이는 금빛으로 반짝이면서 남자의 귓불에 깊이 박혀 있다. 남자는 끝집여자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입을 움직인다. 남자가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귀걸이에 반사된 빛이 내 눈을 찌르고 들어온다. 빛은 아직도 눈부시다. 가까스로 가늘게 뜬 눈으로 남자의 귀를 피해 입 언저리를 노려본다. 오늘따라 유난히 번들거리는 남자의 입술에 구역질이 난다. 남자의 입주변의 피부가 오늘따라 붉다. 그 붉은 피부에도 번질거리며 기름기가 돈다. 높이 솟은 광대뼈에서 시작된 광택은 주름을 만들면서 입과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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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퍼져나간다. 마른 체형의 주인 남자를 보면서 어디서 저런 번들거림이 나오는 것인지를 생각하고 있을 때, 그는 손가락으로 굳게 닫힌 가운데 집으로 다가간다. 남자는 문을 두어번 흔들다가 주먹을 쥐고 문을 두들긴다. 가운데 집은 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반응이 없다. 남자는 고개를 저으면서 나와 끝집여자를 향해 돌아선다.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으며 남자가 입을 연다.- 이번 달 수도요금이 만만치가 않어. 다들 좀 신경 썼으면 좋겠는데.그는 곧 바지 뒷주머니에서 수도요금 고지서를 꺼내 우리에게 보여준다. 40만원이 넘는 금액을 보고 끝집여자는 호들갑을 떨지만 잠에서 덜 깬 나는 숫자를 보고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 아니, 오히려 눈앞에 펼쳐지는 숫자들 때문에 어지러움이 더 심해진다. 남자는 어디선가 수도가 새고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다들 확인해보라고 말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지러움이 사라지기를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끝집여자와 주인남자의 수다가 길게 이어진다. 그들의 대화는 모두 시시콜콜한 것이어서 내가 끼어들 틈은 없어 보인다. 여자는 하수구가 잘 빠지지 않네, 뒷집 배관공사가 상수도를 건드렸을지 모르네 하는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다. 끝집여자의 말을 다 들은 주인 남자는 월세면 자신이 고치겠으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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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전세이니만큼 스스로들 고치라는 말을 남기고는 2층으로 올라간다. 주인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다시 현관문으로 되돌아온다. 이제 빛이 드는 이 곳에서 도망치고 싶다. 막 문을 열고 현관으로 한쪽 발을 넣자 끝집여자가 나를 향해 묻는다.- 혹시 집안에 하수구 냄새 안 나요?여자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나를 휘감고 옥죌 것 같은 눈썹에 다시 어지러움을 느낀다.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면서 여자를 본다. 여자의 눈썹에 찍힌 점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나는 여자의 말에 고개를 젓는다. 어지러움을 버티기 위한 것인지 여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인지 나도 모르겠다.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모르지만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복도 끝을 향해 걷는다. 나는 그런 여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걸음을 뗄 때마다 골반을 의식적으로 흔들며 걸어가는 그 모습이 희끄무레하게 보인다. 몽롱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집으로 피신한다. 문을 닫기가 무섭게 맡아지는 냄새에 몽롱하던 정신이 조금 돌아온다. 문을 닫고 신발을 벗었다. 현관에 맨발을 딛자 차가운 감촉이 종아리를 타고 허리까지 올라온다. 조금 더 정신이 돌아온다. 완전히 정신을 차릴 요량으로 억지 기지개를 켠다. 높이 치켜든 어깨가 뻐근해질 만큼 몸을 젖힌다. 휘었던 몸이 서서히 제 모습으로 돌아오면서 부엌 천장에 진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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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으로 물든 얼룩이 눈에 들어온다.

병원에서는 심리적인 문제이거나 일시적인 문제라고 야지랑스럽게 말했다. 혼란스러웠지만 몽롱한 시간은 계속 이어졌다. 정신을 잃을 때마다 사람들은 내가 잠을 잤다고 했다. 그런 일은 점점 잦아졌다.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면 으레 눈이 시렸다. 저절로 눈을 반쯤 감고 살았다. 컴퓨터의 모니터나 텔레비전의 브라운관, 형광등에서 나오는 빛은 그나마 견딜 수 있었지만 햇빛은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오면 으레 정신을 놓았다. 정신을 차리면 으레 누워 있었다.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방안에서야 제정신을 유지하고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횟수는 적었지만 간혹 방안에서도 정신을 잃었다가 시린 눈으로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정신을 잃는 시간은 점점 길어져 하루 반나절까지도 기억 속에서 사라지곤 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정신을 잃은 날이면 해가 뜨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이 오지 않는 그 시간 동안엔 일을 했다. 일을 하다보면 정신을 놓았고 정신을 차렸을 땐 얼음이 눈에 박히는 느낌에 눈을 뜨곤 했다. 반복되는 졸도 때문에 몸은 낮과 밤을 모르고 제멋대로 살았다.일에 지치면 방에 몸을 뉘였다. 누워서 주로 하는 일은 공상이다. 공상 속에서 나는 여섯 장의 날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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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영웅이 되기도 하고, 오래된 신화에 나오는 짐승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일을 마치고 밤늦게 들어오는 누나에게 그날 했던 공상들을 엮어 하나의 이야기로 들려주면 누나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갸웃거리거나 했다. 공상은 나름 즐거운 일이었지만 다음날이 되면 금세 잊혀졌다. 공상조차 못한 날에는 그날 있었던 일들을 그대로 누나에게 들려주었다. 대부분 영화의 이야기나 게임의 이야기였지만 누나는 대부분 고개를 끄덕거렸고 가끔 고개를 저었다. 일을 하면서 공상을 해보려고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집중하지 않으면 일은 금세 엉망이 됐고, 머릿속에서 피어나는 공상의 속도를 일을 하면서 따라가기란 버거웠다. 일을 하다보면 공상을 멈추고, 공상을 하다보면 일이 엉망이 됐다.- 수도가 새고 있는지도 모른데.누나는 수저를 내려놓으면서 입을 오물거렸다. 누나는 무엇인가를 먹을 때 턱을 좌우로 움직인다. 오른쪽으로는 열두 번, 왼쪽으로도 열두 번이다. 도합 스물네 번을 움직여야만 목으로 넘어간다. 나는 상 위에 올려진 반찬의 이름들을 속으로 되뇌었다. 계란말이, 연근조림, 멸치, 김치, 계란말이……. 반찬마다 세 번씩 이름을 부르도록 누나는 말이 없다. 누나가 다시 내려놓은 수저를 들었다. 누나가 수저를 듦과 동시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천장에는 아직도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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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색 얼룩이 남아 있다. 어린애 손바닥 하나 크기의 얼룩은 인터넷에서 보았던 심해어 사진과 묘하게 닮아 있다. 머리를 모으고 빙 둘러선 심해어들은 꼬리를 파닥이면서 좀처럼 그 대형을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지하 수천 미터에서 수압을 견디고 살던 것들이 뭍으로 올려졌을 때, 압력에 익숙해졌던 몸은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을 것이고 바깥보다 높은 몸 안의 압력은 내장을 뒤집고 피부를 찢었을 것이다. 그런대도 심해어들은 대열을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머리를 모은 채 죽어간 그것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곰팡이가 생겼네.내 눈을 좇아 천장을 바라보던 누나가 말한다. 밥그릇에는 아직도 밥이 반이 넘게 남아 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반찬 그릇들이 머리를 한데 모은 심해어의 모습으로 보인다.레이스가 달린 리본은 자꾸만 쌓여갔다. 해질녘에 나가 일감을 받아와서 정신을 잃을 때까지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남대문에서 받아온, 크리스마스트리에 달릴 장식용 리본을 만드는 일은 의외로 고된 일이다. 폭 2센티미터의 플라스틱 원통에 둥글게 감겨있는 리본을 길게 풀어내서 한 가운데를 쥐고 고리를 만든 다음 그 고리의 밑으로 길게 S자를 그리며 리본을 겹치다가 다섯 겹이 되면 금박 철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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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본이 풀리지 않도록 묶는다. 철사가 뒤틀리며 리본은 완성된다. 철사로 하는 마무리는 항상 중요하다. 자칫 잘못하다간 리본이 전체적인 모습이 흐트러진다. 하지만 리본을 만드는 내내 생각하는 것은 철사 없이 만드는 리본이다. 갖가지 방법으로 매듭을 지어 봤지만 매듭은 항상 헐겁거나 가까스로 만들어 놓은 리본을 헝클였다.부드러운 리본은 철사를 대는 순간 사라져 버린다. 그것은 그저 만들어질 뿐이고, 어딘가에서 사용되어질 뿐이다. 누군가가 돈을 주는 대가일 뿐이고 돈을 버는 원동력일 뿐이다. 곡선을 그리는 리본에게는 죄가 없다. 그래서 이유도 없다. 가윗날 사이로 천이 물릴 때만큼 안쓰러운 일도 없다. 가위는 날이 무뎌서 단박에 자르지 못한다. 으적대는 소리가 반복될수록 리본의 끝은 허술해진다. 특히 제비의 꼬리처럼 양 옆으로 갈라지는 마무리 부분은 나달나달하게 닳아서 이맛살이 찌푸려진다. 이번에 돈을 받으면 바로 새 가위를 사야한다. 리본의 끝에 매듭을 지을 수 있다면 일은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가윗날에 무뎌진 이유는 금박 철사를 자르느라 힘을 너무 주었기 때문이다. 가윗날은 이제 이가 빠져서 날의 한 부분은 핑킹가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단번에 자를 수 없는 가위는 자꾸만 손에서 헛도는 것이 느껴진다. 날과 날 사이가 너무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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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져 있다. 리본을 만지면서 금박 철사를 쓰지 않고 매듭을 짓는 방법을 계속해서 생각했지만 매듭은 자꾸만 풀리거나, 리본 본래의 형체를 망가트리거나 했다. 매듭을 단단히 한다고 바짝 조이면 리본은 금세 제 모습을 잃었다. 매듭은 필요 없다고 속으로 되뇌였지만 머릿속에선 계속해서 매듭으로 리본을 완성하는 시뮬레이션이 움직이고 있었다.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들어온 누나는 커다란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끙끙대며 들어온 누나의 토드백은 어느 때보다도 배가 불러 있었다. 현관에서 내팽개치듯 상자를 내려놓은 누나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두 팔을 걷어붙였다. 누나가 상자 속에서 꺼낸 것은 음식물 쓰레기 봉투였다. 봉투를 꺼내자마자 누나는 냉동고를 열어 그 안에 있던 것들을 봉투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야?내 말에도 누나는 대답하지 않고 냉동고를 비워나갔다. 얼린 생선이며 아직 채 포장도 뜯지 못한 소고기가 봉투에 들어갔다. 아침식사로 얼려둔 밥과 양념으로 쓰이는 다진 마늘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얼음을 얼리는 얼음판을 꺼내어 싱크대에 쏟아 붓는 것으로 봉투는 반쯤 채워졌다. 그리고 누나는 냉장실을 열었다. 냉장실에서 제일 먼저 꺼낸 것은 야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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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이었다. 양파와 당근, 대파 따위를 반으로 분질러 넣자 봉투 하나가 다 찼다. 다 찬 봉투의 입구를 단단히 매듭지으면서 누나는 새 봉투를 꺼냈다. 그리고는 이젠 완전히 바닥에 주저 앉아서 반찬통을 하나씩 꺼내 봉투에 쏟아 부었다. 커다란 통에서 한 포기씩 꺼낸 김치와 손바닥만한 밀폐용기에서 장조림을 붓자 또 봉투 하나가 찼다. 과일은 껍질 채 봉투 안으로 들어갔다. 반찬을 정리하는 누나의 손은 매서웠다. 비워진 반찬통이 층층이 탑을 이루면서 쌓여나갔다. 누나가 손을 떼자 쓰레기봉투 다섯 개가 꽉 찼다.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싱크대에 비우고서 누나는 손을 씻었다.- 쌀도 버려야겠다.아직 반도 먹지 않은, 20킬로그램 정부미의 터진 입구를 노란색 테이프로 둘둘 감은 누나는 들고 온 상자의 입구를 열었다. 상자에는 전자렌지에 데워 먹는 일회용 밥과 밀봉된 레토르트 식품들이 그득했다. 레토르트 식품 밑에는 600밀리리터 생수들이 테이프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상자 바닥에는 통조림이었다. 통조림들은 생선과 과일, 스팸 따위의 것들이었다.- 샤워하고 나서 이걸로 소독해.누나가 가방에서 내민 것은 양호실에서나 볼 수 있었던 소독용 알코올이었다. 붉은 플라스틱 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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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움직여도 찰랑였다. 모든 일을 마친 누나는 싱크대로 가서 알코올을 부어가며 손을 씻었다. 미친 듯이 손을 비비면서 누나는 고개를 들었다. 천장에는 아직도 곰팡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더러워죽겠어. 이놈의 세균들.들었던 고개를 다시 내리깔면서 누나는 손을 씻었다. 누나가 손을 비빌 때마다 알싸하게 퍼지는 알코올 냄새에 정신이 멍해지기 시작했다. 뒷머리를 타고 올라오는 그 냄새에 다시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나는 문설주에 기대어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흔들었다. 손을 씻은 누나는 다시 가방에서 살충제처럼 생긴 통과 황색 가루가 든 비닐 주머니를 꺼냈다. 위아래로 통을 흔들면서 내 방으로 들어온 누나는 벽에 생긴 커다란 곰팡이를 향해 스프레이를 뿌렸다. 벽지가 흠뻑 젖었지만 누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위에 황색 가루를 문질러댔다. 곰팡이 위에서 원을 그리며 문지르는 가루들이 조금씩 바닥으로 떨어졌다. 곰팡이가 피어있던 벽지가 서서히 찢어지기 시작했지만 누나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수십 번 문지른 끝에 누나는 곰팡이가 핀 벽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비닐봉지와 스프레이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는 누나가 문지른 곰팡이 벽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힘껏 들이마셨지만 쉽게 정신이 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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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않았다. 누나가 문지른 가루에는 흙냄새가 진하게 났다. 갈색의 가루는 곰팡이 냄새를 완전히 차단한 모양이었다. 정신이 맑아지던 곰팡이 냄새가 나지 않을수록 코를 점점 곰팡이에 바짝 들이댔다. 냄새를 맡으면 맡을수록 어지러움이 더 강해졌다. 나는 벽에서 물러서서 방을 둘러보았다. 곰팡이는 찾을 수 없었다.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세상이 돌기 시작했다.

곰팡이의 냄새가 점점 옅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두 번만 맡아도 냄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냄새가 옅어지자 몽롱한 정신으로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온 몸에서 기운이 없었고, 뒷머리가 자꾸만 무거웠다. 저절로 눈은 감겨왔고 움직임이 둔해진다. 발걸음을 내딛어도 발바닥에서 바닥이 느껴지지 않는다. 누워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평소 하던 공상도 머릿속에서 그려지지 않는다. 누워 있는 것조차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끝없이 추락한다. 빛이라곤 전혀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으로 계속 떨어지기만 하는 기분이다. 온 몸의 신경은 곤두선다. 손가락 끝과 발가락 끝에서 파닥거리는 고동은 느껴지지만 움직일 힘이 없다. 귀가 예민해져서 평소에는 들리지 않던 동네 꼬마들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또다시 정신을 놓을까 불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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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문을 두드린다. 아마도 곰팡이 제거제가 온 모양이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현관까지 나간다. 문을 열어야 할까. 그럼 난 무엇으로 정신을 차려야 하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문을 깨고 들어올 기세다. 현관문을 연다. 주인남자가 서 있다. 현관보다 높은 문턱에 서서 나를 내려다본다. 남자의 뒤쪽에서 해가 비쳐 나는 다시 가느다랗게 실눈을 뜨고 남자를 본다. 남자는 물이 새는 곳이 없는지 묻는다. 물이 새는 곳은 없다고 말하자 남자는 방안을 구석구석 살피기 시작한다. - 아직 학생이라 잘 모르지?남자는 문턱 위로 다시 발을 디딘다. 구부린 무릎이 내 턱 앞까지 와 있다. 남자는 허리를 숙이며 무릎을 더 내민다. 남자의 옷에서 지독한 냄새가 난다. 말라비틀어진 소금 냄새다. 그 냄새 때문에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한다. 얼굴이 뜨겁고 귓불이 홧홧하다. 그런 나를 보는 남자가 자신의 귀를 만진다. 귓가에 매달린 둥근 귀걸이는 내 숨통을 틀어막는다.- 신경 써서 다시 살펴봐요.주인 남자가 돌아가자마자 나는 코를 싸쥐고 문을 닫는다. 부엌 천장에 자리 잡았던 곰팡이도 흙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다. 냄새는 전혀 맡을 수가 없다. 현관문과 마주보는 누나의 방에 창문이 열려 있다. 왜 도대체 창은 열어놓는가. 거친 발걸음으로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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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다가가 문을 닫는다. 누나 방에서는 이제 곰팡이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을 아득하게 하는 방향제와 화장품 냄새뿐이다. 방안에는 미약하게나마 곰팡내가 남아 있다. 연신 숨을 들이마셨다. 예전처럼 정신이 들지는 않는다.

- 계속 번지는 것 같지 않아?누나의 말에 나는 안도했다. 곰팡이는 죽지 않았다. 스프레이로 분사되는 곰팡이 제거제에도, 벽에 문지르는 흙가루에도 지지 않았다. 현관 가운데에서 천장을 올려다보던 누나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지면서 점점 크게 눈을 뜨고 있었다.- 물은 윗집에서 새는지도 몰라. 봐. 곰팡이 주변이 누렇게 변했어.누나는 입을 매만지던 손으로 곰팡이의 가장자리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곰팡이의 테두리를 빙빙 도는 손가락은 적군을 가리키는 지휘관의 손짓처럼 잔뜩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다가오지 마라. 더 이상은 양보할 수 없다는 일종의 경고가 손가락 끝에서 곰팡이를 향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누나는 다시 팔짱을 낀 채 흙으로 범벅된 곰팡이를 보았다. 자신을 덮은 흙의 경계선을 뚫고 곰팡이는 천장에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한동안 천장을 보던 누나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벽과 천장을 잇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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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에 흙으로 범벅이 된 곰팡이가 보였다. 그것도 자라났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누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내 방에 핀 곰팡이를 자세히 보았다. 흙과의 경계선에서 점처럼, 아주 조그맣게 튀어나온 초록색이 눈에 띄었다. 나는 누나의 눈치를 살피면서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한번 들이마시자 더 이상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마음이 진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히 곰팡이는 살아 있었다. 곰팡이가 내 방을, 아니 우리 집을 완전히 덮는 상상을 했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온전한 정신으로 있을 수 있을 것이었고, 영화나 게임으로 시간을 죽이는 것이 아닌, 뭔가 특별한 일을 할 수도 있을지 몰랐다. 더 이상 잠을 자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육체의 피로만 없다면 맑은 정신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뭐해?나는 벽에서 코를 떼고 뒤를 돌아보았다. 누나는 돌아선 나를 마뜩찮아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무 일도 아니라고 얼버무렸지만 누나는 내 등 뒤를 넘겨다보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입을 비틀면서 누나는 입을 열었다.- 내일 공사할거야. 그렇게 알고 있어.

인부들은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들이닥쳤다.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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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수건을 뒤집어 쓴 중년의 여자 3명과 비슷한 연배인 남자가 2명이었다. 인부들이 집안에 성큼 들어와 가구를 들어낼 때까지도 나는 누나를 설득하고 있었다. 꼭 그래야만 하는가. 곰팡이는 언제든지 생겨났다가 없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누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없애는 거 지금 없애는 거야. 어차피 없애야 되는 거라고.누나는 말을 마치고 일어섰다. 인부들은 냉장고와 책장, 책상을 들어냈다. 남자 인부들이 무거운 짐을 옮기는 동안 여자 인부들이 자잘한 짐들을 드러냈다. 여자들은 할 말이 많았는지 짐을 나르면서 저들끼리 무어라고 쑥덕거렸다. 좁은 집은 다섯 명이 들고 나며 금세 텅 비었다. 여자들은 벽지를 가져온다, 풀통을 연다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세간이 모두 복도로 나오자 사람 하나가 옆으로 겨우 움직일 수 있을만한 공간만 남기고 중간 집 문 앞까지 빼곡하게 찼다. 여자들이 끌칼을 가지고 벽지를 긁어대기 시작했다. 여자들이 제일먼저 긁어대기 시작한 벽은 곰팡이가 피어 있는 벽이었다. 여자들이 벽을 긁어대는 사이에 남자들은 부엌의 장판을 걷어냈다. 장판을 걷어내자 그 밑에 웅크리고 있던 곰팡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부들은 코를 싸쥐면서 남아있는 장판을 모두 걷어냈다. 벽지를 긁어내던 여자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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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팡이가 피어 있던 부분을 완전히 긁어낸 뒤 창문을 있는 대로 열었다.- 아니, 냄새도 안납디까? 이러고 어찌 사셨나 그래?장판을 걷어 집 밖으로 나오던 남자가 말했다. 남자는 계속해서 장판을 들고 나왔다. 남자가 들고 나오는 장판에는 누나는 벽지를 긁어대는 여자들의 뒤에 서서 곰팡이가 완전히 없도록 시멘트까지도 긁어달라고 한명 한명에게 일일이 부탁했다. 누나가 부탁을 할 때마다 벽을 긁던 인부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웃음을 쳤다.장판을 걷어낸 남자들은 사각형 철통을 들고 와서는 입구를 완전히 따고 긴 막대가 달린 롤러를 담갔다. 투명한 액체는 톡 쏘는 냄새가 났다. 그 통이 무엇인지를 묻는 말에 남자들은 방수제라고 말했다. 여자 인부들 뒤에서 열심히 지시를 하던 누나는 집 밖으로 나와서 남자들의 뒤편에 섰다. 남자들은 방수제가 든 통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에 남자들이 들어가자 누나는 화장실 문 앞에 서서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구석구석 발라주세요.남자 인부들도 여자인부들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방진 마스크를 쓰고 천천히 붓을 움직였다. 누나는 그런 인부들의 동작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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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았고, 나는 어지러움에 휘청이면서도 그런 모습을 보는 누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화장실 벽에 붙어있는 타일을 완전히 부셔버리고 그 위에 방수제를 바르고 싶은 게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지러움이 한층 더 심해졌다. 이젠 더 이상 곰팡이 냄새를 맡을 수 없을 것이고, 나는 하루 종일 어지러움과 싸우게 될 터였다. 그뿐인가. 기억을 잃어버리는 일도 더 생길 것이었다. 하루나 이틀, 혹은 일주나 이주까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날이 계속될지도 몰랐다. 나는 집에서 나와 복도에 서 있는 가구에 다가갔다. 벽에 세워두었던 가구들 뒤편에는 적어도 곰팡내가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가구의 뒷면에 코를 대고 냄새를 찾고 있는 사이에 끝집 문이 열리면서 여자가 나왔다.- 공사하시나 봐요.흐릿하게 보이는 여자를 보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신기한 듯이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인부들을 지켜보았다. 여자의 집에는 이제 냄새가 나지 않을까. 나는 여자에게 냄새를 물었다. 여자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 뒤로도 얼마나 많이 나는지…… 이번에 업체 불렀어요.여자는 내 옆에 서서 공사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화장실에서 남자들이 나오자 누나는 나에게 다가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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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끝집여자와 눈인사만을 나누고는 내 앞에서 지갑을 흔들었다.- 일하시는 분들 마실 거라도 사올 테니까. 네가 사람들 뒤에서 잘 지켜봐. 조금이라도 곰팡이 남아 있으면 금새 번지니까 알겠지?누나가 나가자마자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졸도할 것 같은 기분에 최대한 현관문에서 멀리 떨어졌다. 벽을 긁어대기 시작하면서 차가운 시멘트 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 이게 뭔 일인가?감겨가던 눈을 억지로 뜨자 눈앞에 주인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벌게진 얼굴로 집안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벽지를 벗겨내고 벽을 긁어대는 모습에 남자는 집안으로 불쑥 들어갔다. 주인남자는 해반닥거리며 집을 살폈다. 싱크대의 모서리와 문지방을 살피던 남자는 바닥에 잔뜩 웅크리고 있던 곰팡이를 발견하고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남자의 코에서 씩씩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니, 이렇게 될 때까지 도대체……주인남자의 말에 끝집여자가 내 곁에서 한 발짝 떨어졌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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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그저 눈을 감고 어지러움을 견디는 것도 힘들었다. 남자는 나에게 무엇인가 바라는 눈치였지만 나는 아무것도 해주고 싶지 않았다.- 조금씩만 신경 쓰면 될 일을 가지고…… 안되겠구만, 안되겠어.남자는 끝집여자에게 다가갔다. 곰팡이가 있는지, 수도가 새는 곳은 없는지 직접 확인하겠다는 말에 여자는 쌜쭉거리며 나를 보더니 복도 끝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주인남자는 집으로 들어가더니 다시 나왔다. 그리고 좁은 틈을 헤치고 가운데 집 앞에 섰다. 주인남자는 소리를 치면서 사람을 불렀지만 안에서는 묵묵부답이었다. 남자는 주먹을 쥐고 문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문을 흔들고 소리치기에도 신물이 났는지 남자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깊이 숨을 쉬었다.- 이노무 영감쟁이, 오늘은 내가 결딴을 내고 말지.주인남자는 몸을 돌려 2층으로 올라가는가 싶더니 열쇠뭉치를 들고 도로 내려왔다. 주인남자는 다시 가운데 방 앞에 섰다. 열쇠를 쥔 남자의 손이 벌벌 떠는 것이 보였다. 아무런 표시도 되지 않은 열쇠들은 가운데 집 현관 열쇠구멍과 쉽게 맞지 않았다. 열쇠를 꽂고 돌아가지 않으면 다른 열쇠를 끼웠다. 네 번째가 되어서야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림과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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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주인남자는 인상을 쓰면서 코와 입을 막았다. 열린 틈으로 고개를 내밀자 바로 몸을 돌려 복도 벽을 붙잡고 토하기 시작했다. 토하는 중간에도 주인남자는 숨이 거친지 켁켁거리며 목을 붙잡았다. 그런 남자의 모습을 보며 끝집여자는 뒷걸음질치며 인상을 썼다. 나는 주인남자가 열어둔 문틈으로 살며시 다가갔다.문틈으로 보인 것은 파리였다. 파리가 떼를 지어 날고 있었다. 더운 바람이 훅 끼쳐왔다.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감았다. 그러나 냄새에 자연적으로 감긴 눈이 떠졌다. 그것은 곰팡내였다. 이제는 더 이상 맡아볼 수 없는 곰팡이 냄새였다. 그 냄새에 나는 문을 막고 있는 것들을 치우고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멍하던 정신이 일순간 또렷해졌다. 집안으로 고개를 내밀자 벽을 덮은 곰팡이들이 보였다. 바닥에서부터 가슴높이까지 진초록색에 검은 점이 드문드문 찍힌 곰팡이가 점령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발을 내딛으려 했지만 현관문턱까지 차오른 물이 보였고 현관 한 가운데 누군가가 큰 대자로 누운 채 떠 있는 것이 보였다. 계속해서 물소리가 났다. 얼굴은 이미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다. 눈과 코에서 누런 것이 흘러 나와 물에 섞이고 있었고, 볼과 턱에선 하얀 구더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미 눈은 사라지고 검은 구멍만 남은 상태였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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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았다. 시신은 분수대에 띄워 놓은 모형 범선처럼 천천히 현관을 향해 떠밀려 왔다. 반쯤 벗겨진 이마에 짧은 백발이 보였다.- 무슨……일이에요?여자가 내 뒤로 조용히 다가와 안을 훔쳐보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돌아서서 토하기 시작했다. 현관턱에 시신의 머리가 부딪치자 목 언저리에 앉아 있던 파리떼가 날았다. 검은 점들이 내 눈앞에 어지러이 펼쳐지자 그제야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거칠게 문을 닫고 끝집여자와 주인의 틈을 비집고 토하기 시작했다. 먹은 것이 없는데도 계속해서 무엇인가가 솟구쳐 올라왔다. 한참을 토하고 나자 누군가가 뒤에서 내 등을 두들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등을 두들기던 누나를 보자 눈앞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누나가 샤워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속이 쓰렸다. 냉장고를 열고 생수병을 꺼냈다. 조금만 움직여도 자꾸만 메슥댔다. 구급차와 경찰이 번갈아 오고 갔다. 주인은 토하다 결국 정신을 잃었고, 여자는 머리를 붙잡고 엠뷸런스를 탔다. 샤워를 마친 누나는 화장실 문 앞에서 머리를 털었다. 허리를 잔뜩 숙이고 고개를 외로 돌린 머리 아래로 머리카락이 길게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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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왔다. 물기를 머금고 펄럭이는 머리카락이 꼭 파리떼가 나는 소리 같아서 나는 또 눈을 감았다. 냉장고에 기대어 앉았지만 속은 진정되지 않았다.- 이사가자.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물을 마셨다. 명치 부근이 답답했다. 무엇인가가 꼭 맺혀 있는 것 같았다. 누나가 내 곁을 지나 방으로 들어갔다. 누나가 나를 스쳐 지나갈 때 너무나 익숙한 물내음에 누나에게 눈을 돌렸다. 나에게서 등을 돌린 채 문지방에 걸터앉아 헤어드라이기를 쥐고 있었다. 그 냄새는 너무나 익숙한 것이어서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누나를 부르려고 했지만 곧이어 맹렬한 소리를 타고 뜨거운 바람이 얼굴로 불어왔다. 뜨거운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냄새를 맡으며 눈을 감았다. 여느 때보다 진한 곰팡이 냄새가 맡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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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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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경 진

하늘을 올려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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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날은 더워지고 있었다. 더운데다 꿉꿉해져가는 것을 보니 곧 큰비가 내릴 철이다. 큰비가 내리기 전에 성벽 안쪽의 잡초를 제거해야 한다. 지금 제거하지 않고 큰비가 내리면 잡초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잡초가 뚫고나온 틈새는 더욱 벌어진다. 굳센 성벽이 한낱 잡초 때문에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있는 곳은 서문과 남문 사이에 있는 성벽이었다. 물을 먹지 않아 퍼석한 잡초들은 잡아당기는 족족 뽑혔다. 덜 자란 잡초들은 뿌리 채 뽑히지 않고 이파리만 끊어져 애를 먹었다. 뽑아놓은 잡초들을 갈무리하고 손을 털며 일어나는데 남문 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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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올라오는 네 명의 어영청(御營廳) 병사들이 보였다. 어영의 병사들은 황색 도포를 입었고 주로 궁궐의 각종 문(門)과 대문을 지켰다. 우리끼리는 그들을 ‘문지기’라 불렀다. 성벽을 따라 올라오던 어영의 병사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훈련도감(訓鍊都監) 병사들 아니오. 여기서 뭣들하고 계시오?”어영의 병사들 중 한명이 말했다. 딱히 나에게 물은 것은 아니지만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니 내가 어영의 병사들과 가장 가까웠다. 그러다 십장영감과 눈이 마주쳤다. 십장영감은 씩 웃더니 헛기침하는 시늉을 하며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나는 십장영감에게 알아들었다는 표시로 고개를 살짝 끄떡이고는 어영의 병사들을 향해 바로섰다. 어영의 병사들 중 가장 뒤쪽에 서있던 병사의 전립(氈笠)이 눈에 들어왔다. 모자1)의 상단에 둘러져있는 끈이 색동 실을 꼬아 만든 것으로 보아 지위는 있는 인물이나 금실이나 은실은 아니었기에 품(品)을 받은 인물은 아니었다. 상모가 달려 있지 않았기에 지휘권자도 아니었다. 아마도 권무군관(勸武軍官)2)일 것이었다. 그 외 나머지는 나와 같은 일반 병사였다.“문지기가 도감이 하는 일에는 왠 참견이슈. 가던

_______________________1) 갓의 원통 부분을 지칭2) 모병을 권장하고 사무를 관리하던 사무직 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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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나 마저 가시오.”내가 보란 듯이 팔짱을 끼며 말하자 어영의 병사들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도감의 병사들은 킥킥댔다. 얼굴이 벌게진 색동 끈 전립이 같이 있던 병사들을 재촉했다. 어영의 병사들이 툴툴거리며 자리를 뜨자 남아 있던 색동 끈 전립이 나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고는 한마디를 던졌다.“도감의 훈련은 진하기로 유명하다 들었소만, 그래서 그런지 잡초 하나는 잘 뽑는구려.”색동 끈 전립이 자리를 뜨고 서문 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고개를 숙여 나의 청색 도포를 살폈다. 도포의 무릎 부분에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허리를 굽혀 손등으로 툭툭 털어내고 일어서는데 누가 내 뒤통수를 툭 쳤다. 십장영감이었다. 훈련도감의 도포는 청색이다. 도감은 고된 훈련으로 유명했고 모두가 자원병(兵)이었다. 평상시에는 근무 없는 훈련만을 받다가 성문 안에서 일이 터졌을 때 가장 먼저 출동하는 정예군이기도 했다. 청색은 곧 도감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 훈련을 거르는 일이 잦아졌다. 훈련이 없을 때에는 사역에 동원되었고 사역마저 없을 때에는 하루 종일 대기만 하다 끝나기도 하였다.“이번 달 군료도 도착하지 않았다지요?” 십장영감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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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말일세. 벌써 반년이 다 되어가도록 이거 원.”십장영감이 덥수룩한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군료에는 급료뿐만 아니라 훈련 및 군영 생활에서 쓰일 식량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다행히 종사관(從事官) 어르신의 보은으로 끼니를 때울만한 것들이 내려오기는 했지만 기운찬 장병들의 허기를 달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십장영감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같은 하부 병사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상부에서는 재촉하고 있다는 말로 병사들의 입을 막았다. 상부에서 상부로 전달되는 군료 지급 재촉이 어디쯤에서 멈추는지 알 길이 없었다. 상부는 상부를 재촉하고 그 상부는 또 상부를 재촉했다. 상부를 재촉하고 있다는 말이 길어지자 도대체 얼마만큼 높은 곳에서 일어난 문제인지 하부는 알 길이 없었다.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은 뜬소문들이더군요. 며칠 전에는 통행을 위해 이 성벽을 헐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자네는 그 소문을 믿나?” 나의 말에 십장영감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믿지는 않습니다만……, 흉흉한 소문은 뭔가가 흉흉하기 때문에 도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십장영감은 나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뒷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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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 남문 쪽을 응시할 뿐이었다.“자네는 왜 훈련도감에 들어왔나?” 십장영감이 뒤돌아서며 말했다.“네?” 뜬금없는 질문에 즉답이 나오질 않았다.“뭔가 이유가 있으니 도감에 자원해서 들어온 것 아닌가.”십장영감의 말에 곰곰이 생각해보는 척을 했지만 이유는 간단했다. 특출한 글재주 없는 평민이 할 수 있는 것이란 그리 많지 않았다. 저잣거리에서 자라면서 보고 배운 것이라고는 말재주뿐이었다. 말재주가 글재주로 나오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극성맞은 권유로 서당에 나가기는 했지만 서당에 느긋하게 앉아 있는 시간보다는 저잣거리를 활개치며 뛰어다니는 시간이 더 많았다. 동네에서 뜀질 하나는 잘했지만 뜀질이 밥 먹여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가는 나이가 되자 조금 답답하기는 했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업(業)을 이어받기도 마땅치 않았다. 아버지는 노역 잡부였다. 어떻게 하면 성안으로 들어가 살 수 있을까를 궁리하던 차에 떠오른 것은 하나였다. 그 성을 지키는 사람이 되는 것. 그뿐이었다.“매년 중추절에 서문에서 출발해 중문3)까지 이어지는 어가(御駕) 행차가 있었지요. 어가를 따르는

_______________________3) 현 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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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렬에서 언제나 저의 눈을 끌었던 것은 오군영의 행차였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훈련도감의 청색 물결이 준 감동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다른 군영을 압도하는 강맹한 기운! 그걸 보는 순간 저는, 커서 꼭 훈련도감에 들어갈 것이라 마음먹었지요.”

“말은 잘한다.” 내 말을 다 들은 선배가 말했다.말이라도 잘해야 했다. 말만큼 글이 나오지 않으니 가진 것은 말뿐이었다. 말만 잘해도 반은 먹고 들어가는 시대라고 하지만 글을 쓰려는 소설가 지망생이 말뿐인 것은 문제였다.“그래서 졸업하면 뭐할 건데?” 선배가 물었다.“일단 졸업을 하고 싶지 않은데요. 뭐 배운 게 있어야 졸업하죠.”“배운 게 왜 없어?”“뭐랄까, 배우면 배울수록 더 모르겠더라고요. 가까이 다가갔다 생각하면 더 멀어지고 정말 가까이 다가갔다 생각하니까 이제는 보이지도 않아요. 소설이 뭔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써야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러다보니 뭘 배웠는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그래요.”“졸업할 때 되면 다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마.”위로를 원한 것은 아니니 위로되지 않았다. 걱정이 거짓이었으니 위로가 진실 될 리 없었다. 마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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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직자리가 없고 소설로 돈벌기 힘든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그럴싸한 말로 진짜를 대신했다. 하고 싶은 것이 없지는 않았다. 다만, 지금의 자리에서 현실과 환상간의 거리는 가늠할 수 없이 멀고멀었다. 선배와 헤어지고 학교를 나와 신촌으로 향했다. 여자친구와 영화를 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담배 한 대 피며 여자친구를 기다리는데 저 멀리 높다란 건물이 보였다. 영화관이었다. 건물 외벽에는 두층을 합친 높이의 대형 포스터가 여러 장 걸려있었다. 내가 서있는 곳 바로 옆에 있는 작은 건물에는 서점이 있었다. 서점은 지하에 있었다. 서점의 간판은 작았고 잘 보이지 않는 곳에 걸려 있었다. 언젠가 읽은 글에서, 영화계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연인들 때문이라고 했다. 마땅히 갈 곳 없는 연인들이 마땅히 갈 곳은 영화관뿐이기에, 대작 영화가 천만관객을 돌파하고 대충 만든 영화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의를 달 수 없었다. 여자친구가 도착하면 같이 서점이나 갈까 생각하다 관두었다. 여자친구는 책을 읽지 않았다.“영화? 그냥 재미로 보는 거지 뭐. 감독이름? 잘 모르는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잘 알지.”여자친구가 말했다.여자친구에게 리들리 스콧은 ‘7천원에 2시간’을 제공했을 뿐이었다. 영화를 예매하고 시간이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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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리들리 스콧은 미대 출신이야. 그래서 한 장면, 한 장면 마다 색감의 배치가 뛰어나지. 중요하지 않은 장면조차 색감의 대비가 선명해 뇌리에 박히니까 매 장면마다 탄성이 나올 정도라고. 눈을 크게 뜨게 만들 줄 아는 감독이랄까. 동생인 토니 스콧도 영화감독인데, 토니는 영상미는 리들리에 비해 떨어지지만 흡입력 있는 연출을 하는 감독이야. 그의 영화를 보고 있자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니까. 눈을 잡아둘 줄 아는 감독이라고 할 수 있지. 듣고 있어?”나의 말에 여자친구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난 스콧 형제를 좋아하지만 이야기꾼으로서의 감독으로는 데이빗 핀쳐나 데니 보일도 좋아해. 그들이 만들어내는 서사적 흐름은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지. 물론 영화이기 때문에 흥행을 생각 안할 수가 없는데, 그 방면에 최고를 꼽으라면 제리 브룩하이머를 들 수 있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제작자야. 그는 정말 마이다스의 손을 가지고 있는 거 같아. 손만 대면 월드 와이드에서 좋은 흥행 성적을 내고 마니까. 근데, 듣고 있어?”여자친구는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웃을 뿐이었다.“너 책은 읽냐?”“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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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라던가, 황석영 같은, 이외수도 몰라?”“몰라. 전공책 펼치고 있는 것도 짜증나 죽겠는데 다른 책을 읽으라고? 오빠야말로 소설 쓴다고 그만하고 영화 쪽으로 넘어가지 그래?”여자친구가 뾰로통한 얼굴로 툭하고 한마디를 던졌다. 말처럼 쉽다면 무엇이 문제겠는가. 노벨문학상과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발롱도흐4)를 한 해에 휩쓰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영화 시간이 다 되어 카페를 나와 영화관으로 향했다. 해가 기울며 노을을 만들고 있었다. 노을은 스모그에 섞이며 탁한 노란색을 띄었다. 정말로, 하늘이 노랬다.

모든 것은 별기군(別技軍) 때문이다.내가 훈련도감에 입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별기군이 창설되었다. 별기군은 왜(倭)에서 들여온 조총이라는 무기로 무장한 군대였다. 훈련교관 역시 왜놈이었다. 별기군은 윗도리, 아랫도리가 모두 흑색으로 된, 몸에 딱 달라붙는 군복을 입었다. 우리는 그들을 왜별기(倭別技)라고 불렀다. 도감에 반년 째 군료가 내려오지 않을 때도 별기군에는 군료는 물론 각종 식량, 피복, 장비의 보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졌다는 말이 들려왔다. 도감의 병사들은 군료가 내

_______________________4) 유럽 최고 축구선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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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오지 않는 이유를 왜별기에서 찾았다. 그들 때문이라는 말이 여기저기에서 솟아났다. 그러던 어느 날, 종사관 어르신이 나눠준 감자를 포대에 담아 어깨에 메고 오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자 한 왜별기가 서있었다. 왜별기가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고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어렸을 적 동네에 살았던 친우(親友)였다. 내가 도감에 들어오면서 소식이 끊어졌는데 왜별기에 들어가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다 친우의 아버지가 왜놈들과 무역을 하던 사람이라는 것이 기억났다. 감자 포대를 막사에 내려놓고 친우와 종로 주막으로 향했다. 친우는 막걸리를 시켰고, 나는 국밥을 시켰다. 오랜만에 먹는 따뜻한 국물이라 허겁지겁 입에 밀어 넣다가 고개를 들어 친우를 바라봤다. 친우는 웃고 있었다.“청색 도포 참 멋있다. 나는 입고 싶어도 입지도 못해.”친우의 말에 나는 얼른 소매를 감추었다. 낡아빠져 올이 삐져나왔지만 더 이상 꿰맬 실이 부족했다. 팔꿈치나 무릎 근처에 덧댄 부분은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너 훈련도감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들었어. 들어가기 쉽지 않다던데, 부럽더라.”“뭘. 끼니도 마음껏 못 때우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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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우 앞에서 괜한 소리 하기 싫어서 왜별기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국밥을 다 먹고 나니 배는 든든했지만 마음이 허했다. 친우가 연초(煙草)를 내밀었다. 연초는 군료가 끊기기도 전에 제일 먼저 끊긴 품목이었는데, 친우가 내민 것은 한지에 쌓인 고급 연초였다. 날아가는 연기를 바라보다 불현듯, 호기심이 동했다.

“조총이라는 것은……, 어떠한가?” “왜? 관심 있어?” 친우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친우와 헤어지고 막사로 돌아오는 내내 친우가 말해준 조총이란 것을 되뇌었다. 조총은 총구에 화약과 한지, 쇠구슬을 차례로 집어넣고 쑤신 다음, 화약에 심지를 박고 불을 붙여 쇠구슬을 발사하는 무기였다. 화약은 매우 위험하고 다루기가 힘들어 도감에서도 포수(砲手)들만이 사용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왜별기에서는 모두가 화약을 다룬다고 했다. 조총은 활보다 배우기도 쉽고 다루기도 쉬워 누구나 조금만 훈련받으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도감에서도 활을 다루는 사수(射手)들은 다른 병사들에 비해 월등히 많은 훈련을 해냈고 눈도 비상하게 좋아야 했다. 하지만 조총을 다룰 때에는 그런 것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활이 근거리 적들에게 약한 것과 달리 조총은 근거리에서도 강했기에 조총으로 무장한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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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에는 사수를 지켜줄, 검이나 창을 다루는 살수(殺手)가 필요 없었다. 빨리 달리지 않아도, 힘이 세지 않아도 배울 수 있고 다룰 수 있는 병기가 바로 조총이었다. 기본만 해내면 뭉치기만 해도 능히 적과 대적할 수 있기에 개인 수련이 크게 필요하지 않게 하는 병기가 바로 조총이었다. 조총은 그런 무기였다.막사에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밝게 웃고 있던 친우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막사 안을 둘러보았다. 몇몇은 자고 있었고 몇몇은 저고리를 벗어 이를 잡고 있었다. 무엇을 하고 있든 무표정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창을 세워놓은 병기함으로 다가갔다. 오른손으로 창을 꼭 쥐었다. 낯설고 차가웠다. 창날을 보니 밑동부터 녹(綠)이 올라오고 있었다. 낮에 먹은 국밥이 입에 맞지 않았는지 속 깊은 곳에서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나며 무엇인가 장을 타고 위로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창을 놓고 자리로 돌아와 몸을 눕혔다. 밤새 배가 아파 잠을 자지 못했다.다음날 십장영감이 굳은 표정으로 막사에 들어와 말을 전했다. 이제까지 오군영으로 유지되던 체제가 이군영 체제로 개편될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십장영감은 그 외에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런 말도 없었고,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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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 묻지 않았다. 몇몇은 청색 도포를 벗어 조심스레 개켜 잠자리 한 쪽에 밀어두었다. 답답한 마음에 막사를 나와 군영을 걷고 있는데 친우가 찾아 왔다.

“같이 영화 해보지 않을래?”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불쑥 꺼낸 말은 같이 영화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친구는 영상학부에 진학해 영화감독의 꿈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친구도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졸업 작품을 만들고 있는데 이것을 독립영화제에 출품하고 싶다고 했다. 예전에 친구와 같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나리오를 몇 개 만든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친구와는 소위 말하는 코드가 맞았기에 둘이 뭉쳐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쉽게 승낙하기도 어려웠다. 나 역시 졸업 작품으로 소설을 써야 했고 마지막 학기는 다 잊고 글만 쓰겠다고 결심했었기 때문이다. 만약 친구와 같이 영화를 시작하게 되면 마지막 학기를 버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영화는 꼭 해보고 싶은 것이지만 소설도 포기하기 싫었다. 둘 다 취하기에는 이도저도 못하고 끝날 것이 분명했다. 선택이 필요한 순간이었다.“21세기는 영상의 시대야. 소설책은 보는 사람만 보지만 영화는 누구나 보지. 니가 언젠가 말했지. 너의 꿈은 너의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들어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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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법이 꼭 글자에만 있는 건 아니잖아. 영상을 통하면 쉽고 빠르게, 많은 사람들에게 너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어. 니가 원하는 것에 더 적합하잖아?”친구에게 생각해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친구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한참동안을 무작정 밤길을 걸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눈앞에는 왕복 2차선의 대로가 펼쳐져 있었다. 정신없이 달리는 차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서있는 인도에는 가로등이 꺼져 있었다. 반대편 인도에는 가로등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건널까 해서 횡단보도를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불규칙하게 달려오는 차들 때문에 무단횡단도 쉽지 않아 보였다. 반대편 인도까지의 거리는 십만 권과 천만 관객의 차이만큼 멀어보였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책을 내고 십만 권이나 팔기는 무리겠지. 그래도 천만 관객을 끌어 모을 영화를 만드는 데에는 일조할 수 있지 않을까. 현재 거의 모든 돈과 시선이 영화에 몰려 있는데. 나도 못할 것은 없는데. 내가 잘 써지지도 않는 소설을 붙잡고 앉아 있을 이유는 없는데.언젠가 수업 시간에 나왔던 말이 생각났다. 문학의 위기란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하는 말이었다. 힘들다, 힘들다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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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힘들고. 죽겠다, 죽겠다 하니까 정말 죽을 것 같은. 사실은 힘들지 않고, 죽지도 않을 텐데.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가기 지치니까 투정을 부린 것은 아니었을까. 무선호출기에 대한 사유가 채 끝나기도 전에 휴대폰이 세상을 지배해버려서? CD에 대한 사유를 해보려는데 MP3로 바뀌어서? PC통신 좀 해보려고 했더니 인터넷이 대중화되어서? 그놈의 돈이 뭐기에 라고 한마디 했더니 돈이 하나도 없어서?아, 내가 뭘 힘들어하고 있었지?

외롭다.

실은 외로웠던 것이다. 관심이 멀어지자 외로웠던 것이다. 한때 모두가 우러러봤지만, 지금은 아무도 우러러보지 않아서. 그래서 힘들었던 것이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가방을 뒤적여 휴대폰을 꺼냈다. 그때 무엇인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숙여보니 발치에 연필이 떨어져 있었다. 연필을 주워 흙먼지를 털어냈다. 떨어질 때 머리부터 떨어졌는지 연필심이 부러져 있었다. 연필을 꼭 쥐었다. 낯설고 차가웠다. 갑자기 배가 아팠다. 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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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배를 부여잡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별기군에 온 걸 환영해.”친우와 별기군 병사들은 나를 친근하게 맞이해주었다. 몸에 딱 붙는 흑색 옷은 헐렁하지 않아 움직이기가 편했다. 세끼 모두 따뜻한 밥이 나왔다. 별기군의 군영은 서문 밖에 바로 있었다.“이 친구가 훈련도감에서 온 병사인가? 도감이 명불허전(名不虛傳)은 아니었군. 어디 내놔도 부족하지 않은 천상 군인이구만.”지나가는 사람마다 나를 보고 한마디씩 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별기군에 들어온 지 사흘이 지나고 드디어 조총을 지급받았다. 길고 가는 원통형 철기를 나무가 떠받치고 있었다. 두 손으로 받아들었더니 묵직한 느낌이 좋았다. 나무는 느낌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으로 보아 호두나무일 것이다. 별기군으로서의 첫 훈련은 사격훈련이었다. 총구를 표적 쪽으로 겨누고 심지에 불을 붙였다. 화약이 터지는 소리는 짧고 날카로웠다. 마치 도깨비의 비명소리 같았다. 처음에는 귀가 먹먹해져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이내 익숙해졌다. 쇠구슬이 날아가 박힌 통나무는 깊게 패여 있었다. 활이나 칼, 창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친우는 쇠구슬이 아니라 납덩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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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사람의 몸에 박히면 찌그러져 빼내기도 힘들고 상처부위는 금세 썩어 들어간다고 했다. 이후에는 단체 훈련을 받았다. 오랜만에 받는 훈련다운 훈련이었다.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전술적 대형을 이루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앞밖에 볼 수 없지만 네 사람이 모이면 사방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일본인 교관의 설명이었다. 그렇게 많은 수가 모여 정확히 자신의 역할만 해내면 그 어떤 적과도 대적할 수 있고 수많은 적도 물리칠 수 있다고 했다. 어느새 나는 일본인 교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별기군에 들어온 지 한달여가 되었을 때 성문 안을 걷다가 멀리서 십장영감을 발견했다. 십장영감은 여전히 청색 도포를 입고 있었다. 십장영감의 뒤에는 청색 도포를 입은 병사와 황색 도포를 입은 병사, 적색 도포를 입은 병사가 뒤섞여 십장영감을 따르고 있었다. 적색 도포는 금위영의 병사였을 것이다. 일부러 대로에서 벗어나 골목길로 들어섰다. 괜히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두 달여가 지났을 때, 군영이 시끄러웠다. 지휘관들은 삼삼오오 모여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친우에게 듣자니 다른 군영의 몇몇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인천으로 일본 군대가 도착했으며 청(淸)나라 군대는 이미 사대문 안으로 들어왔다는 말이 이어졌다. 또한 우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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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군 숙청에 투입될 수 있다고 했다. 다른 병사에게 들은 바로는 구(舊) 훈련도감 병사들에게 일 년여 만에 한 달치 군료가 지불되었는데 쌀에 겨와 모래가 섞여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에 분노한 구 훈련도감 병사들이 지급 담당자를 구타하고 실상 공개를 원했으나 상부에서 받아들이지 않자 조직적인 항거를 시작한 것이라 했다. 친우에게 반란이란 말을 들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다른 병사에게 훈련도감이란 말을 듣고 나서부터는 손이 떨리고 발이 후들거려 걷기가 불편했다. 그냥 그대로 잊혀졌으면 좋았을 것을. 맑은 하늘에 작은 먹구름 덩이들이 끼어 지저분한 하늘을 보기가 심란했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바람을 타고 멀리 사라져버려도 될 것을. 끝까지 맑은 하늘을 가리며 바람에 휩쓸리는 것을 거부하는 모습이 역시 보기에 심란했다. 떨리고 후들거리고 심란함을 멈추려면 거두거나 없애버려야 했다.지휘관은 우리의 숫자가 많지 않기에 반으로 나눠서 한패는 일본 공사관으로, 다른 한패는 중문으로 보낼 것이라 했다. 병력을 나누자 친우와 나는 중문으로 가게 되었다. 해가 질 때쯤 별기군 병사들이 중문 앞에 도착했다. 이미 다른 군영의 병사들도 배치되어 있었기에 반란군의 난동은 보이지 않았다.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하는데 골목길에서 한 무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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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이 뛰어나왔다. 그들은 창, 칼로 무장하고 있었고 청색, 황색, 적색 도포를 입고 있었다. 그들이 대로변으로 모두 나왔을 때 서른에서 마흔 명 정도 되어보였다.“중문을 사수하라!” 지휘관이 외쳤다.총구에 화약과 한지, 납 구슬을 차례로 집어넣고 쇠막대기로 쑤셔 넣었다. 심지를 꽂고 지휘관의 명을 기다렸다.“사격대형!”지휘관의 외침에 우리는 반란군을 향해 이열 횡대로 모였다. 나는 이열 왼쪽 끝에 붙었다. 내 앞에 있는 일렬의 병사는 친우였다. 일렬은 무릎을 대고 앉았고 이열은 일렬 뒤에 붙었다.“발화!”일렬의 병사들이 심지에 불을 붙였다.“발사!”병사들은 반란군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고 심지가 타들어간 조총에서 납 구슬이 발사되었다. 반란군 대여섯 명이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사격을 마친 일렬의 병사들이 재장전을 하며 이열의 병사들과 자리를 바꾸었다. 나 역시 앞으로 나와 무릎을 땅에 대고 앉았다. 열을 바꾸는 동안 반란군 병사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일렬과 이열이 자리를 바꿀 때마다 반란군 병사들은 대여섯씩 떨어져나갔다. 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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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나는 열심히 자리를 바꿔가며 사격을 계속했다. 반란군 병사들이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에는 고작 십여 명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일렬에 앉아 있었고 총구는 반란군 병사들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남아 있는 반란군 무리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십장영감이었다. 총구를 십장영감에게 겨누면서 심지에 불을 붙였다. 다행인지 몰라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어서 빨리 발사하고 친우와 자리를 바꿔야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귀를 찢는 소리와 함께 납 구슬이 발사되었다. 십장영감이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명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친우와 대형을 바꾸려는 찰나 반란군 무리가 별기군의 대형을 덮쳤다. 대여섯 명이 남았을 뿐이었지만 근접전에 익숙한 반란군들은 능숙하게 별기군의 대형을 흩트려 놓았다. 재장전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한 반란군 병사가 내 앞에 섰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적색 도포인 것으로 보아 근위영의 병사였을 것이다. 짧은 검을 들고 있었기에 달려들어도 조총으로 막고 떼어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순간 뒤에서 귀를 찢는 소리가 들렸다. 총소리가 나고 이상하게도 갑자기 배가 아팠다. 쓰라리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 손가락만한 큰 바늘로 장을 콕콕 찌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반란군 병사가 달려들면 막아야하는데, 막고 떨쳐내고 재장전을 하고 쏴야 하는데,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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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무릎이 그대로 땅에 부딪혔는데 아프지 않았다. 내가 쓰러지면 내 앞에 있던 반란군 병사는 내 친우를 노릴 것이 분명했다. 친우가 걱정되어 뒤를 돌아보았다. 친우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친우의 총구는 나를 향하고 있었다. 허리를 지탱할 힘도 없어 그대로 배를 땅에 깔고 누워버렸다. 이제는 팔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하늘이 보였다. 해가 지고 있었다. 해가 지는 하늘은 소름끼칠 정도로 붉었다. 붉은 하늘이었다. 붉은 하늘은 이내 어두워지고 말았다.

한참을 어둠 속에서 허우적댔다. 분명히 눈을 떴는데 사방이 어두웠다. 손을 앞으로 뻗어 내저어봤지만 잡히는 것이 없었다. 덜컥 겁이 나려는데 어둠이 일시에 걷히며 빛이 들어왔다.“험난하게도 잔다.”정신을 차려보니 친구의 자취방이었다. 그래, 친구와 밤새 시나리오를 쓰다 잠들었지.“심했냐?” 친구에게 물었다.“이불 속에서 허우적대더라.” 친구가 웃으면서 말했다.친구와 시나리오를 완성시켰다. 야밤에 왕복 2차선 대로를 건너려는 한 남자가 겪는 황당한 일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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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주는 20분짜리 독립영화였다. 친구의 지인들로 스태프와 배우를 모집했고 순조롭게 첫 촬영을 할 수 있었다. 근 한 달을 소비해 촬영을 마쳤다. 대부분의 촬영이 밤에 이루어졌기에 더위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드문드문 비가 내렸지만 비가 내리고 난 뒤 습기 가득한 아스팔트가 주인공의 애처로운 모습과 맞아떨어져 근사한 장면을 낼 수 있었다. 촬영이 끝나고 편집 작업에 들어갔다. 감독을 맡은 내 친구와, 시나리오를 맡은 나, 영상 편집 장비를 다룰 줄 아는 친구의 후배, 이렇게 세 명이 모여 밤새 편집 작업을 계속했다. 편집 작업은 친구의 자취방에서 이루어졌다. 친구가 약속이 있다며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면 나와 친구의 후배 둘이서 작업을 계속했다. 편집을 맡은 친구의 후배는 2살 아래의 여자였다. 그리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편집 장비를 다루는 모습을 뒤에서 보고 있을 때에는 그녀의 하얀 목덜미만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쉴 때면 서로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영화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고, 나와 비슷한 영화적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와의 대화는 언제나 즐거웠다. 편집이 거의 마무리될 때쯤 그녀와 나는 자연스럽게 몸을 섞었고 편집이 완성되었을 때 나는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편집을 마치자 날 것이었던 촬영 영상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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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대로 영화 같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영화 파일을 DVD에 옮겨 담았다. 친구의 학교 강의실에서 제작에 참여했던 모든 스태프를 모아놓고 완성된 영화를 상영했다. 반응이 좋았다. 친구는 한 소도시에서 열리는 독립영화 페스티벌에 영화를 출품하기로 결정했다. 영화의 제목은 ‘건널 테면 건너봐라’였다.우리가 만든 영화는 페스티벌 개막작 바로 다음 상영으로 배정받았다. 운이 좋았다. 개막작에 쏠려있는 관심이 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개막작으로는 항상 뛰어난 작품이 선정되기에 비교가 될까봐 조금 겁나기도 했다. 그래도 괜찮은 순번이었다. 그녀와는 행사장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녀를 찾아 돌아다니느라 개막작을 보지 못했다. 이윽고 우리의 영화가 시작되었다. 개막작을 본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녀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객석 뒤쪽에 서서 영화를 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관객들이 박수를 쳤다. 환호성도 간간히 섞였다. 스크린에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감독에는 친구의 이름이, 편집에는 그녀의 이름이 올라갔다. 뒤이어 각본에는, 친구의 이름이 올라가고 있었다. 설마, 실수겠지, 하며 엔딩 크레딧을 끝까지 지켜봤지만 어디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기억을 더듬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기억의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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냅샷들이 영상처럼 겹치고 겹쳐 오버랩 효과를 만들어냈다. 엔딩 크레딧은 분명 스태프들과 함께한 상영회가 끝나고 만들어졌다. 엔딩 크레딧을 만들 때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이별을 통보받은 여자친구가 찾아왔기에 한창 싸우고 있을 때였다. 그때, 그 자리에는 친구와 그녀 둘만 있었을 것이다. 친구에게 전화를 했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그때 멀리서 친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친구의 옆에는 그녀가 있었다. 둘은 손을 잡고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혼자서 행사장을 빠져나오며 하늘을 올려보았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은 잿빛 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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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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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일 균

물고기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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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예보

처음으로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은 기상 캐스터였다. 내일은 비가 올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남자였다. 평소와 다를 것 없던 어느 날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자가 도심의 사거리에 추락했다. 아스팔트에 충돌한 남자는 산산조각이 났고 경찰은 신원확인을 위해서 시신을 수거하느라 도로를 봉쇄했다. 뉴스는 종일 의문에 쌓인 그의 정체를 추측하는 보도를 내보냈다. 뉴스 앵커는 추락사에 관한 문의전화 때문에 경찰서의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라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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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전화를 건 사람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이 자신들이 잃어버린 친구나 연인 혹은 부모나 자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신원 확인이 되는대로 그가 누구인지 보도하겠다며 뉴스는 말을 맺었다. 뉴스의 마지막은 늘 내일의 날씨였다. 기상 캐스터는 확신에 찬 얼굴로 기상도를 가리키며 ‘내일은 비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거짓말하고 있네,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전날도, 그 전날도 그렇게 말했지만 날씨는 맑은데다가 사상최고 기온을 갱신 중이었다. 브라운 관 속의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다음날 그는 사라졌다. 기상캐스터의 실종은 그렇게 화제가 될 만한 소식이 아니었다. 문제가 된 것은 신원확인 결과 하늘에서 추락한 사람이 사건 당일 예보를 했던 기상 캐스터였다는 사실이었다. 분명 그날의 기상예보는 생방송이었다고 뉴스 앵커는 말했다. 이미 죽은 사람의 기상예보가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방송됐던 것이다. 더구나 그를 부검한 의사는 사체가 근처의 건물 옥상이나 창문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고 밝혔다. 아무도 그가 추락한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뉴스는 얼마간 의문의 추락을 당한 기상 캐스터에 대한 뉴스를 집중보도했다. 동료들은 그가 최근 매일 기상예보가 맞지 않아서 고민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지인들은 그가 일을 그만두겠다고 심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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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한 적이 있다고 대답해 증언을 뒷받침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예순의 노모는 아들이 최근 몹시 힘들어했었다고 말했다. 요즘은 늘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어요. 사람 만나는 일도 적어졌고 늘 방에 틀어박혀 있었어요. 무슨 말을 해도 거짓말처럼 들릴 것 같다면서 말수도 적어졌고요. 티비 속에 자기 모습을 보는 게 제일 싫다고 했어요. 왜 그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자살도 아니고 타살도 아닌 그의 죽음을 뭐라고 명칭지어야 할지 고심하던 수사팀은 결국 어디선가 발을 잘못 디뎌서 떨어진 것으로 판단하고 실족사로 처리했다. 모든 일들이 그저 이상한 일이었다는 말과 함께 잊혀질 것만 같았다.얼마 후에 두 번째 실족사가 일어났다.

어느 날

여름은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몇 일째 사상 최고 기온이 갱신되었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나는 버스 정류장에 간신히 몸을 걸치고 햇볕을 피하고 있었다. 그날도 도심으로 향하는 버스는 만원인 듯 정류장에는 빼곡히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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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사람들은 햇살 아래로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나마 입은 옷마저 벗어버리고 싶은 표정이었다. 평소에 옷 속에 감추고 있던 피부가 버스정류장에서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며 맞닿았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묵묵히 서로를 참아내고 있었다. 땀에 젖은 피부의 낯선 감촉과 열기는 평소처럼 부끄럽고 짜증나기보다는 묘한 친밀감마저 느끼게 했다. 서로 끈적끈적하게 맞붙었다가 떨어진 살갗의 감촉은 한참동안이나 피부 아래를 간질였다. 그녀와 나는 틈만 나면 도심을 찾곤 했다. 오늘은 인도카레를 먹으러 가볼까? 오늘은 꼭 그 옷을 사고 말겠어. 이유를 붙이자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굳이 도심으로 가야할 이유는 없었다. 주변은 이미 구석구석 새로운 것들로 채워지고 있었고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물건들을 집에서 받아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날이라도 우리는 굳이 이유를 만들어서 도심으로 몰려갔다. 꼭 이유라는 것이 필요하다면 새로운 뭔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도심에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일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었다. 일상의 무료함에 비한다면 도심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순간에 우리는 살아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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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것을 느꼈다. 물론 별다른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면 도심은 혼자 갈 만한 곳이 아니었다. 혼자서 도심으로 나가면 특별한 목적이 없는 한 거리를 거니는 것을 즐길 수가 없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누군가와 함께 있지 않으면 그 기억을 공유하고 확인받을 수 없어서 결과적으로 더욱 외로워질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녀와 나는 마음이 잘 맞았고 서로를 파트너 삼아 함께 도심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녔다.우리가 서로를 알아본 것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서도 새로운 것을 계속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가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새로운 물건이 출시되면 갖고 싶어 했고 새로운 일이 있으면 과감하게 도전해보고 싶어 했다. 그녀와 나는 친구가 되었고 매일 함께 앉아서 서로가 발견한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했다. 그것은 서로의 남자나 혹은 여자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가 사귀었던 이성에 대해서 전부 알고 있었고 방법론적으로 틀린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제일 중요한 건 첫 인상에서 끌리는 부분이 있어야 돼.” 그녀가 말했다.“그럼 우선 잘생겨야 되는 건가? 하지만 네가 저번에 만나던 남자는 그렇게 잘 생긴 얼굴은 아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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잖아?”“중요한 건 포인트야. 외모가 아니어도 한 구석에서 매력을 발견할 수 있는.”“아 그래서 그 말 더듬던 이상한 남자와 사귀었던 거야?”“꼭 데이빗 헬프갓처럼 더듬었단 말야.”“알았어. 알았어. 근데 오래가진 못하잖아? 그 남자랑 일주일 사귀고 헤어졌지 아마?”“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 사……사랑……이라기에 전화하지 말라고 말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 버렸어.”“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잖아? 그럴 바엔 차라리 처음부터 좀 지켜보다가 사귀면 되잖아?”“그렇게 쉽게 싫증이 날줄 몰랐어. 그리고 너처럼 상대방에 대해서 상상만 하다가 딴 놈한테 뺏기는 것보다는 낫잖아.”“그 앤 아마 지금쯤 후회하고 있을 거야.” 나는 침울해져서 대꾸했다. “그 남자랑 여전히 잘 사귄다며? 너야말로 후회만 하고 있으면서.”“닥쳐.” 그녀는 낄낄대면서 웃었다.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대방의 어떤 이상형으로서 상대방을 판단하고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에 서툰 점이 서로 닮아 있었다.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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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히도 우리는 서로 이성으로서의 이상형에 대극에 서 있었으며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을 사이에 두고 서로 좋은 친구일 수 있었다. 오랜 시간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친구로서의 임무를 다했다. 그 말인즉 힘든 일이 있으면 맥주잔이라도 기울여주고 좋은 일이 있으면 서로 축하해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에게도 다른 친구들은 있었지만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하는 사람은 늘 서로였다. 매번 그녀는 전화요금 고지서를 가져와서 통화내역을 보여주면서 ‘너 때문이니까 반 내놔’라고 말했다. 그럼 나는 가방에서 조용히 내 전화요금 고지서를 꺼내서 통화내역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연애를 할 때면 서로의 연인에게 불편한 존재가 되곤 했는데 한번은 그녀의 남자친구가 내게 전화를 해서 무슨 사이냐고 묻기에 두 시간동안 설명한 적이 있었고 내 여자 친구는 그녀에게 전화했다가 오 분만에 내 따귀를 때리고 사라지기도 했다. 나는 여자 친구의 수신 거부 목록에 등록됐고 그녀는 남자친구와 한동안 잘 사귀다가 얼토당토않게 길 가던 남자와 그를 구분 못해서 헤어졌다. 그런 일들이 있었지만 여전히 그녀와 나는 친구 사이였고 그 순간을 ‘기억나?’라며 추억할 수 있었다. 전화를 붙잡고 밤새도록 그런 순간들을 이야기했고 우리는 그 이야기만큼의 사이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날은 조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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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이유라는 것이 필요하다면 여름은 점점 더 뜨거워졌고, 몇 일째 사상 최고 기온이 갱신되었고, 나는 사람들이 꽉 들어찬 버스 정류장에 간신히 몸을 걸치고 서 있었고, 그녀가 저 멀리서 짧은 반바지와 탑을 걸치고 건강한 다리와 어깨를 드러낸 채 내게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고기 비

“오래 기다렸어?”나는 입을 반쯤 벌리고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 옆에 붙어 서서 손 부채질을 했다. 어느새 내 눈은 훤히 드러낸 그녀의 몸을 훑고 있었다. 그녀의 가쁜 숨과 맞닿은 살갗이 나를 간질였다. 나는 술집 앞에 함께 구토를 해놓고 도망쳤던 그녀의 모습을 계속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녀를 피해 눈길을 하늘로 돌렸다.“아, 덥다. 일기예보에서는 비가 내린다고 했는데.”“그걸 믿어? 그러다가 사람이라도 하늘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하냐.”그녀는 낄낄거리면서 Rainy man을 흥얼거렸다. 그녀도 뉴스에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본 모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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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고작 한 사람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것뿐이었는데 세상은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자 현실은 그 확정성을 잃어가고 있었다.나는 문득 티비에서 방송된 물고기 비에 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예전에 하늘에서 도심 한가운데로 물고기가 비처럼 내리는 일이 발생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했고 있을 수 없는 일을 규명하기 위해서 수많은 학자들이 가설을 발표했다. 그 중 가장 설득력을 가졌던 가설은 물고기들이 바다에서 생성된 소용돌이를 타고 왔다는 것이었다. 주장은 일견 설득력이 있어보였지만 곧 반론들이 이어졌다. 그 때 태평양 어디에서도 소용돌이의 존재 따위는 보고되지 않았고 혹여 그렇다하더라도 어떻게 도심의 한복판에만 그 많은 물고기들이 떨어져 내릴 수 있느냐는 말이었다. 그 가설은 결국 설득력을 잃어버렸지만 누구하나 그 이상 신빙성 있는 주장을 펼칠 수 없었다. 그들은 결국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말과 함께 조작극에 불과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만 논쟁이 끝난 후에도 목격자들의 제보는 이어졌다. 분명히 수천수만의 물고기들이 금방 바다 속에서 건져 올린 것처럼 펄떡이며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는 제보였다. 지면에 닿는 순간 곧 죽어버렸지만 떨어지는 그 순간에 분명히 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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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떡이고 있었다고 그들은 공통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은 결국 이상한 일이었다는 말과 함께 흥밋거리정도로 잊혀지고 말았다.남자는 정말 죽어버린 것일까? 내가 티비를 보고 있을 때에 그는 분명 살아있었고 ‘내일은 비가 올 것’이라고 말했었다. 브라운관 바깥을 향해서 웃고 있던 남자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만약에 남자가 살아있다면 또 다른 우리도 여기와 다른 어딘가에 살고 있지 않을까? 나는 그녀를 보지 않기 위해서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내가 어색해 할수록 그녀는 더 가까이 다가왔다.“무슨 생각하고 있어?” “너 오늘 다른 사람처럼 보여.”“너 웃긴다. 옷 좀 짧게 입었기로서니.”그녀가 다가설수록 생각은 흐려져 갔다. 그녀가 짧은 옷을 입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날은 여느 때와 달랐다. 숨어있던 우리의 살갗이 달라붙어 있었다. 내 옆에 선 그녀는 여전히 내가 아는 익숙한 친구였지만 그녀의 몸은 낯설었다. 살갗이 맞닿은 것만으로도 나는 거짓말처럼 그녀를 여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서로의 몸이 바깥으로 드러나자 내가 그녀와 나누던 이상형이라는 단단했던 틀이 헐거워져 갔다. 그녀의 젖은 피부가 햇살을 받아서 반짝이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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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 없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 갇혀 있었다. 손잡이조차도 먼 버스의 한가운데로 밀려나서 들어찬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끼여 버린 것이다. 사람들이 내 뿜는 뜨거운 숨과 맹렬한 더운 공기가 뒤섞여 버스 안은 부글부글 끓을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우리가 꼭 안은 모양새로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최대한 거리를 벌이려고 했지만 등 뒤를 떠미는 수많은 사람들에 끼여서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내 팔을 꽉 붙들었고 땀에 젖은 살갗이 맞닿을 때마다 그 감촉이 자꾸만 피부 아래에서 간질거렸다. 열이 올라서 몽롱한 정신 속에서 그 간질거림은 자꾸만 몸을 자극하고 있었다. 나는 주문처럼 ‘우리는 여기에 없다’라고 되뇌었다. 그것은 그녀의 말버릇이었다. 나는 여기에 없어. 그녀는 늘 내게 말했다.“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내가 아니라는 거야.”“그럼 지금 여기 있는 너는 뭐야?”“지금 여기 있는 나는 겉으로 보이는 나일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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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그럼 진짜는 어디쯤 있는 건데?”“아마도 하늘 위를 날아다니고 있지 않을까?” “웃기고 있네.” 대개 실없이 웃어넘기고 마는 말들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말 같지 않은 것이어도 우리는 서로의 말을 믿었다. 그녀가 여기에 없다고 말하면 그녀는 여기에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늘 서로의 말을 진지하게 들었고 진지하게 답해주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믿으려 애썼다. 버스가 흔들렸고 그녀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나를 붙잡았다. 그녀의 손이 내 허리를 잡아채자 가슴이 뜨거워졌다. 기압이 높아진 것처럼 숨이 가빠졌고 하늘을 나는 것처럼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녀는 자꾸만 중얼거리는 내 입모양을 보고 물었다.“무슨 말이야? 잘 안 들려!” “우리는 여기에 없어!”“잘 안 들려! 뭐라고?”웅성거림 속으로 내 말은 묻혔고 버스가 멈춰 설 때마다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더욱 가까이 달라붙었다. 맞닿은 살갗은 끈적이며 들러붙었다. 그 감촉은 틀림없이 그녀가 내 앞에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것처럼 내가 그녀에게 더욱 달라붙도록 재촉하고 있었다. 우리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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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사이를 표류하는 그 순간에 우리가 지켜내던 사이가 뭉개졌다. 발기한 몸이 그녀에게 닿았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그녀도 어쩔 줄 몰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우리는 얼굴을 가린 채 서로에게 안겨 있었다. 전화 속에서 들려오던 먼 목소리는 거기 없었다.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버스는 도심을 향해서 질주하고 있었다.

순간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처럼 낯설었다. 몇 번씩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나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고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도심 입구를 향해서 걸어가고 있었다. 빌딩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수많은 층들이 겹겹이 포개진 빌딩들은 마치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처럼 높이 솟아 있었다. 인파들이 끝없이 도심의 안쪽으로 밀려들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몰릴수록 스카이라인은 점점 더 높아졌다. 그리고 빌딩들이 끝 모르고 솟아오를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녀는 성큼성큼 사람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도심에서는 까딱 잘못하면 인파에 파묻혀 옆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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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리기 일쑤였다. 나는 그녀의 뒤를 좇아서 인파를 헤쳐 나갔다.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녀는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한 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걷고 있었다. 처음 만난 사람 같은 어색함이 사이를 메우고 있었다.그녀는 큰 길을 따라 도심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우리가 예전에 들렀던 장소들을 지날 때마다 그녀는 뒤로 돌아서 내게 말했다. 야, 기억나? 우리 저기서 술 마셨던 일? 너 엄청 취해서 비틀거리면서도 그만 돌아 가야된다고 허우적거렸잖아. 기억나? 길을 가는 내내 그녀는 우리가 함께 했었던 장소를 하나하나 되짚으며 내게 상기시켰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찾아서 이 거리를 내내 함께 돌아다녔고 주어진 시간들을 거리에서 소비했다. 우리는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는 순간들 속에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어쩌면 우리는 그 일부로서 새로워진 자신을 서로에게 확인받고 싶어 했는지도 몰랐다.“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기다.”우리의 입버릇이었다. 그 말은 이 순간의 새롭고 특별한 서로를 기억하자는 약속이었다. 전화 너머에서 전해지는 먼 목소리가 그 순간을 상기시키면 다시 한 번 그 시간 속으로 되돌아가 서로를 확인해주자는 말이었다. 시간이 지난 후에 그때의 장소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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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 번 발들이면 특별했던 것들은 식상하고 낡은 것이 되어 버렸고 옛 순간은 빛이 바랬다. 우리는 추억하기 위해서 더 새로운 것들을 찾아서 거리를 헤매 다녔고 새로운 기억들을 거리에 쌓아나갔다. 나는 그녀와 함께였던 그 수많은 순간들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새로운 그녀의 뒷모습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걷고 있었다. 걸음걸음마다 사람들의 몸이 와 닿았다가 멀어져갔다. 그들과 나는 아마도 서로 영원히 모른 채 살아갈 테지만 서로가 와 닿을 때마다 느껴지는 분명한 친밀함은 살갗 안쪽을 간질였다. 좁아진 사이에서 서로의 살갗이 숨을 교환할 때 나는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 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은 그녀와 함께 했던 추억들처럼 새로운 것이었다. 사람들의 좁은 틈 사이에 갇혀 우리가 서로의 몸을 인지했을 때 모든 것이 달라져 버렸다. 그녀의 물음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그녀가 기억나? 라고 묻는 모든 순간들을 우리는 소비했고 그것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 성질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순간들이 거리에 있었고 수천수만의 추억들이 도심 그 자체가 되어있었다. 추억들은 점점 더 쌓이고 도심은 끝없이 위를 향해서 치솟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우리에게 새로운 것이 더 이상 없었고 새로운 모든 일들은 그 이전에 겪었던 일들의 재판에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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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했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순간들은 그녀가 내게 기억나? 라고 물을 때마다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기억나? 그 순간 모든 풍경들이 익숙해졌고 추억들은 낯설게 멀어지고 있었다. 남아 있는 것은 우리 자신뿐이었고 낯선 우리의 몸은 서로에게 마지막으로 새로운 것이었다.저물어가는 태양은 도심에 내려앉아 가장 강렬한 마지막 열기를 흩뿌리고 있었다. 그녀가 멈춰선 곳은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사거리였다. 사방으로 길이 뻗어 있었지만 우리는 어디로도 갈 수가 없었다. 그곳은 우리의 막다른 골목이었다. 스쳐가는 사람들 사이에 우리는 몇 걸음 떨어져서 땀에 젖은 서로를 바라보았다.“이제 어디로 가지?”그녀의 물음에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나는 사이를 걸어가서 버스 안에서처럼 그녀를 껴안았다. 맞닿은 가슴으로 서로의 심장 고동이 전해졌다. 우리는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펄떡이고 있었다. 어떤 말도 진실할 수 없는 순간이었고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말을 더듬던 남자를 생각했다. 그는 더듬더듬 떨리는 목소리로 사랑한다고 말하려 했었다. 이러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이렇게 아무 말도 않고 서로를 부둥켜안은 것이? 그녀가 두 팔로 내 등을 껴안았다. 그 순간 모든 생각이 사라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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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녀가 하늘에서 내 눈 앞으로 떨어졌다.

낙하

그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사거리의 가운데로 떨어졌다. 나는 그녀의 어께너머로 헤엄치듯 허우적거리며 떨어져 내리는 또 다른 그녀의 모습을 목격했다. 뉴턴의 사과처럼 그녀는 아스팔트 위로 곤두박질쳤다. 단단한 바닥으로 떨어진 몸은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그녀의 조각과 피가 폭죽처럼 사방으로 흩뿌렸다. 몸에서 떨어져나간 그녀의 머리가 공처럼 구르다 내 앞에서 멈췄다. 나는 움직이지도 못한 채 목만 남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피에 젖은 그녀의 머리는 뭔가 말하려던 것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못한 말이 있는 것처럼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길을 가던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내 품에서 그녀가 말했다.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주위에는 벌써 피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내가 안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녀는 내 앞에 굴러다니는 머리와 똑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팔을 쥐어보고 목덜미에 코를 파묻어 냄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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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았다. 뼈와 살의 감촉을 느껴졌고 땀과 살 냄새가 났다. 그녀는 분명히 내 앞에 서있었지만 동시에 내 앞에서 산산조각이 나있었다. 떨어져 내리는 순간에는 분명히 산산조각 난 그녀도 살아있었다.멀리서 사이렌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붙들고 거리의 샛길로 걸어갔다. 그녀를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떨어뜨려놓아야 했다. 골목 끝에 이제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옛 여자 친구와 자주 갔었던 모텔이 있었다. 우리는 프런트에서 키를 받아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폐쇄된 조용한 공간 속에서 나는 살아있는 그녀와 함께 있었다. 여트막하게 들리는 그녀의 숨소리가 정말 그녀의 것인지 나는 확인하고 싶었다. 엘리베이터는 다른 세계로 가는 것처럼 끝없이 위로 올라갔다. 피 냄새가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우리는 키홀더에 쓰여 있는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방은 사용자를 위해서 잘 정돈되어 있었다. 나는 그녀와 침대에 걸터앉아서 입을 맞췄다. 그녀가 들이쉬던 숨을 빨아들였다. 축축하게 젖은 혀끝으로 그녀의 혀를 핥았다. 살갗들이 서로 들러붙고 엉켜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우리는 실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 맞잡은 살갗에서 그토록 확실하게 느껴지던 우리의 몸은 흩어져 재구성되고 있었다. 하나가 될 수록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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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는 분명하게 사라져가고 있었다.그녀와 나는 서로의 몸을 꼭 껴안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 가까이 있었고 그래서 더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떠올리기 위해서 애썼다. 우리가 나누었던 수많은 이야기들부터 서로의 몸이 맞닿아 지금에 이르기까지를. 넌 누구지?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그 물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전화 속에서 들려오던 먼 목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만큼 먼 곳에 와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를 밀어낼 수 없었다. 의미 없는 기억이라도 그것 이외에 우리는 기댈 곳이 없었다. 창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우리는 너무 높은 곳에 와 있었다. 그녀와 나는 서로를 부둥켜안고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그때 꺼져있던 티비가 아무 예고도 없이 불쑥 켜졌다. 브라운관 속에서 기상캐스터가 그들을 향해서 웃음 지었다.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소와 다름없이 브라운관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깔끔한 수트를 입고 은회색의 넥타이를 조여매고서 ‘내일은 틀림없이 비가 올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그 기상캐스터였다. 오늘은 날씨가 참 더웠습니다. 저도 오늘은 출근하는데 너무 힘들었는데요. 이런 날씨에는 일사병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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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수증이 올 수 있으니 한낮에는 되도록 햇빛을 피해서 다니시기 바랍니다. 그녀와 나는 고개를 돌려 티비에 눈길을 붙박았다. 리모컨은 침대에서 한참 떨어진 테이블 위에 있었다. 방 안에는 우리 둘 뿐이었고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살아있었고 그녀를 찾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녀를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가 브라운관의 너머로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온 힘을 다해서 그녀에게 기대었다. 온 힘을 다해서 기대는 한 사람을 서로 견뎌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헤어진 여자 친구는 내게 말했다. 넌 날 너무 힘들게 만들어. 모르겠어? 난 여기 있고 싶어. 가고 싶으면 너 혼자서 가버려. 어린애처럼 왜 이러는 거야? 그녀는 소리 죽이고 오래도록 울었다. 너무 오래 울어서 그녀가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나는 정말 그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흐릿한 브라운관 너머의 그는 어딘지 모르게 그녀의 모습을 닮아있었다. 나는 그제야 그의 외로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일은 비가 올 것입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일기예보가 끝나고 티비가 꺼졌다. 그가 사라지자 가슴 한 구석이 텅 비어 버린 것처럼 휑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녀가 내 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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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들었다. 나는 그녀를 안고서 떨림이 멎을 때까지 기다렸다.

공중도시

그녀의 사체는 사라져있었다. 사거리를 지나면서 나는 산산조각 난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오늘 뉴스는 두 번째 실족사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스팔트의 피 얼룩을 지나갔다. 우리는 거리의 인파를 헤치고 버스정류장을 향해서 걸었다. 도심이 걸음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그녀에게 무언가 말해야만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우리를 확인할 용기가 없었다.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걸어온 길을 되돌아갔다. 모든 기억들의 처음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뒤돌아보지 않았다. 우리는 미아처럼 서로를 의지한 채 길을 헤매 다녔지만 거리는 미로처럼 얽혀서 출구가 없었다. 사람들은 도심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인파 속을 맴돌다 지친 우리는 거리 밖으로 걸어 나와서 우리가 있었던 곳을 돌아보았다.어둠이 내린 도심은 버려진 폐허처럼 보였다. 새로운 사람들이 가득하던 도심의 거리에는 쓰레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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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람에 날려 다녔고 새로운 순간들이 태어나던 건물들은 낡고 더러워져 있었다. 모든 의미를 상실한 도심을 버리고 사람들은 떠나가려하고 있었다. 태양 속에서 빛나던 몸들이 어둠 속에 그 빛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도심을 벗어나려는 그들의 행렬은 흡사 죽은 자들의 행진처럼 보였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새롭지 않은, 텅 빈 우리 자신뿐이었다. 도심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어디로도 갈 수 없었고 어디로든 걸어가야만 했다. 그녀는 버스에서 내렸던 순간처럼 멈칫거리며 더듬더듬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랑해.”그 순간 나는 우리가 허공에 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심은 부유하고 있는 거대한 성채였다. 그녀의 기억나? 라는 물음이,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나? 가 위태롭게 비현실의 도심을 떠받치고 있었다. 끝 모르고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오르던 빌딩들이 그 물음의 빈자리로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의미를 상실한 말들의 빈자리로 공중의 도심은 붕괴되고 있었던 것이다. 거리의 인파들도 그 사이로 발을 헛디디고 지상을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내가 서 있는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발밑은 그대로 허방이었고 조금만 헛디뎌도 끝없이 곤두박질 칠 터였다. 나는 그녀가 기억나? 와 사랑해. 의 사이에서 균형을 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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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렸을 때 발을 헛디디고 지상으로 추락하고 말았다는 것을 알았다. 맞닿은 살갗으로 전해지는 미약한 체온만이 위태롭게 서로를 붙들어두고 있었다.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회신해야 했지만 더듬거리기만 할 뿐 말 할 수가 없었다. 죽어버린 그녀의 얼굴처럼 내 표정은 일그러지고 있었다. 일기예보는 틀리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물고기들은 이상한 바람에 휩쓸려 끝없이 솟아올랐다가 그 끝에서 지상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멀리서 또 다른 내가 발을 헛디디고 지상을 향해서 낙하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하늘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수많은 물고기들이 살아서 펄떡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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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

l

박 미 경

소리(消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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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체인이 어둠을 가른다. 녀석들이다. 녀석들이 따라 붙었다. 차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운전하는 인화의 얼굴이 흔들린다. 인화는 가상공간에서 이기기 위해 게임에 몰두하는 사람처럼 오로지 앞을 향해 질주한다. 검은 어둠이 빛처럼 빠르게 스쳐 지난다. “찐드기 같은 놈들.” 인하는 백미러를 힐긋거리며 페달을 밟은 발에 힘을 준다. 속도계가 어느새 180킬로미터를 넘어선다. 차가 휘청거린다. 입 사이로 웃음이 슬며시 삐져나온다. 길이 물러서고 자동차소리가 사라지고 공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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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발된다. “한 번 더 밟아 봐. 죽여주는데 ……”인하가 속도를 올린다. 초음속으로 사라지는 미사일처럼 차가 앞을 향해 돌진한다. 빛이 도달하는 시간보다 더 빠르게 어둠을 밀친다. 모든 것이 물러서고 속도만이 남는다. 몸이 파편처럼 흩어져 다른 공간 속을 헤맨다. 어둠 속에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난다.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굽은 어깨를 둥글게 말고, 복권 판매점을 기웃거린다. 도둑질을 하려는 사람처럼 가게 안을 흠칫, 넘본다. 그 뒤에서 늙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열 여섯 살 계집애가 보인다. 미친 자식. 어디가서 뒈졌으면 좋겠어. 여자애는 침을 퉤 뱉으며 친구들과 복권판매점 앞을 지나친다. 부러 아버지의 어깨를 탁 친다. 여자애를 발견한 아버지는 급하게 걸음을 옮긴다. 제기랄, 나도 모르게 소리가 튀어나온다. 제기랄, 도로 위에 내 목소리만 메아리처럼 흩어졌다 모인다. 인하는 녀석들이 보이지 않자 속도를 조금씩 늦추기 시작한다. 이제는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밤의 고속도로를 적당한 속도로 질주할 수 있으리라. 그때였다. 두 개의 전조등 불빛이 백미러에 나타난다. 녀석들이 기어코 쫓아온 것이다. “다시 밟아 볼까?”인하가 소리친다. 인하가 속도계를 높이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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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들 중 한 놈이 앞지르고, 또 한 놈은 옆에 바짝 붙는다. 마치 두 놈이 꼼짝달짝못하게 우리 차를 자신들 사이에 끼워 넣으려는 듯 하다. 졸지에 우리 차는 견인당한 꼴이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차 문을 열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노래를 부른다. 노래 소리에 맞추어 점점 차 속도가 빨라진다. 어느새 인하는 중앙선을 넘어 반대쪽 차선으로 나아가더니 오토바이를 추월한다. 가슴속이 서늘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들떠 오른다. 빵, 빵, 빵, 인하가 클랙슨을 울린다. 나는 그 소리에 맞추어 어깨를 흔들며 노래를 부른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밤이 적당히 우리를 가려 주고, 주변에는 녀석들 외에 아무도 없으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단지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드는 녀석들만 따돌릴 수 있다면. 녀석들은 뒤처지지 않으려고 막무가내로 쫓아온다. 어둠 속에서 녀석들의 전조등이 번쩍거린다. 마치 멀리서 손짓하는 신호음 같다. 인하는 옅은 빛조차 허용할 수 없다는 듯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하지만 곧 번쩍거림이 사라지자 속도를 늦춘다. 따라와 보라는 듯이. 마치 녀석들과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 같다. 잠시 후 인하의 의도대로 녀석들의 전조등 불빛이 다시 껌뻑인다. 녀석들은 클랙슨을 빵빵거리면서 앞지른다. 휘파람 소리가 밤의 기운을 가른다. 인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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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들을 추월하려고 속력을 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곧 속력을 늦춘다. 안개가 몰려들고 있다. 삽당령에 올라서자 안개가 점점 짙어지고, 길이 가파르게 좁아진다. 굽이굽이 고갯길이 이어진다. 도로에는 불빛 한 점, 이정표 하나 보이지 않는다. 다만 녀석들이 타고 달리는 오토바이의 안개등 불빛만 보일 뿐이다. 인하는 안개등을 보며, 그 불빛에 의지해 천천히 달린다. 마치, 녀석들과 인하는 잠시 휴전상태에 접어 든 것처럼 평화로워 보인다. 갑자기 앞서가던 오토바이의 안개등이 시야에서 사라진다. “저 녀석들 어떻게 된 거지? ”인하가 중얼거린다. 녀석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주변은 일시에 조용해지고, 앞은 분간하기 힘들다. 길을 향해 나아가지만 마치 길이 아닌, 헤매는 망령의 옷자락 속으로 들어가는 듯하다. 클랙슨을 길게 울리며 인하가 말한다. “이런, 젠장. 더 이상 갈 수가 없어.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봐야 겠어. 근처에 표지판이라도 있을텐데…….”인하가 안전벨트를 풀며 말한다. 나는 서둘러 차창을 내린다. 안개는 빠른 속도로 차내를 잠식한다. 누군가가 연기를 피우고 있는 것처럼 목이 메이고 눈이 침침하다. 주변에 보이는 것은 솜뭉치처럼 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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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져 있는 안개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인하는 안개를 밀쳐내려는 듯 두 손을 휘저으며 문을 열고 나간다. 나는 네모난 액정 속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무심코 내려다본다. 04:40을 가리키고 있다. 40은 불빛처럼 빠르게 점멸되며 41속으로 사라진다. 41, 42, 43 ……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 숫자만이 흘러간다. 숫자는 초가 아닌 시간, 시간이 아닌 세월, 마치 죽음을 향해 치닫는 어떤 한 공간을 의미하는 것 같다. 한 순간에 늙은이로 변해 먹을 것만을 탐하는, 식물 같은 삶을 영위하게 될 것만 같다. 나는 인화가 사라진 곳을 바라본다. 길을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가슴을 짓누른다. ‘가스등’에서 마담의 차를 훔쳐 타고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을 때가 새벽 두 시였다. 그렇다면 세 시간 정도가 소요된 곳이었다. 어디로 갈 거야, 내 질문에 인하가 대답했다. 소리(消浬)로 갈 거야. 인하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기쁨으로 들떠 있었다. 소리는 인하가 평소 입버릇처럼 말 하던 곳이었다. 인하는 어렸을 때 고양리라는 마을에서 할머니와 단 둘이 살았다고 했다. 할머니는 노래하듯 소리로 가고 싶다는 말을 자주했다. 소리는 고양리의 옆에 위치한 마을이었는데 어느날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후, 소리는 소문으로만 존재하는 마을이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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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세대가 바뀌면서 마을 사람들은 소리를 실제의 마을이 아닌 사람들의 상상이 만들어 낸 마을이 아닌가 서로 의심했다. 아니면, 오래전 전쟁 때문에 사라진 마을들처럼 소리도 하룻밤 사이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을 거라고 믿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산에 버섯 캐러 간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찾아보았지만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다. 몇 년이 지난 후 실종된 사람이 마을로 돌아왔다. 자신은 그동안 소리에서 지냈다고 했다.“소리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단지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야. 그 곳에 가면 식량과 보물이 가득 쌓인 빈 집들이 수두룩하지. 평생을 쓰고도 남아돌 거야. 하지만 바깥으로는 가지고 나올 수는 없어. 그 안에서만 사용해야 해. 그게 규칙이거든. 난 규칙을 어겨서 추방됐어.”사람들은 미쳤다고 수군댔다. 그러면서도 가끔 소리에 간다면서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한두 명씩 생겨났다. 그들은 대부분 소리로 가는 입구를 찾지 못해 도로 돌아오거나 미쳐 버렸다. 할머니는 옛날 이야기하듯 인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소리가 아마도 자신의 마을에 살 사람을 고르는 모양이야. 돈이 필요 없는 사람들, 식량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만 길을 열어주는 게 틀림없어.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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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로 갈 거다. 너도 기회가 되면 오거라.”소리, 나는 가만히 되뇌어 본다. 할머니 말대로라면 나는 소리로 가지 못할 것이다. 나는 식량보다도 돈을 좋아한다. 내가 인화를 따라 나선 것은 딱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돈, 돈만 훔쳐서 소리를 빠져 나올 계획이다. 대본대로 된다면 좋겠지만 사실, 나는 소리를 믿지 않는다. 노망난 할머니가 지어낸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지금쯤 ‘가스등’에서는 인하와 내가 도망친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어쩌면 김사장은 죽었을지 모르고, 경찰이 우리를 뒤쫓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나는 뉴스를 듣기 위해 라디오 주파수를 맞춘다. 하지만 잡음만 들릴 뿐 채널이 잡히지 않는다. 지직거리는 소리는 점점 요란해진다. 음소거를 해도 신경을 거스르는 잡음은 멈추지 않는다. 나는 창문을 열고 주머니에 있던 담배를 꺼낸다. 돌연히, 적요 속으로 검은 물체가 휙, 쏜살같이 날아간다. 나는 검은 물체가 사라진 곳으로 눈길을 돌린다. 안개는 일시에 검은 길을 내주었다가 길을 가둔다. 나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습하고 눅눅한 기운이 싸, 하고 몸을 감싼다. 나는 트렌치코트의 깃을 세운다. 코트 속에 받쳐 입은 얇은 탱크톱 원피스가 몸에 감겨든다. 퍼드득, 머리 위로 검은 물체가 안개를 가르며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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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검은 물체가 사라진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얼마쯤 걷다보니, 하이힐이 삐끗 하면서 발이 진창 속으로 빠진다. 질퍽한 흙 속에서 나는 인하를 부른다. 소리는 간신히 입 밖으로 새어 나온다. 까악, 까악, 곳곳에서 까마귀 울음소리만 들려온다. 나는 흙구덩이 속에서 힘겹게 발을 빼내고 신발을 벗어 손에 든다. 발바닥으로 흙의 감촉이 전해진다. 소나기가 쏟아지고 난 후의 물웅덩이 속에 서 있는 것만 같다. 나는 발로 주변 흙을 더듬으면서 걸음을 옮긴다.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길이 아닌 곳으로 나아가는 것만 같다. 드디어 질퍽하지 않은 울퉁불퉁한 흙의 감촉이 발바닥으로 느껴진다. 나는 물기가 없는 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고르고 편평해진 길가에서 나는 고개를 돌려 어둠 속을 응시한다. 하지만 뿌연 안개와 어둠만이 시야를 가득 메울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단지, 안개가 나를 질식시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그냥 ‘가스등’에 있을 걸, 개새끼, 왜 남의 일에 끼어들어서 이 고생을 시킨담. 인화가 던진 병에 맞아 쓰러지던 김사장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까악, 까악, 나는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본다. 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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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가 길 위에 깔려 있다. 내 시야가 닿는 곳은 온통 까마귀 떼다. 고요한 바다에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듯, 검은 물결이 일렁거린다. 나는 검은 물결이 조금씩 조금씩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그것들이 아주 서서히 다가오다가 어느 한 순간 내 발을 타고 다리를 감고, 배를 지나 목을 조여 올지도 모른다. 나는 눈을 감는다. 나는 김사장의 최고급 안주가 된다. 깨끗하게 씻어진 내 몸 위로 꽃과 나뭇잎이 떨어지고 과일 향기가 알싸하게 코끝에서 맴돈다. 과일향은 끈끈하고 달콤하다. 꽃과 나뭇잎이 내 몸에 얹어질 때마다 몸이 축축하게 젖어 든다. 몸을 닫아야 했다. 나는 물 속에서 허우적대던 동생의 부은 얼굴을 떠올린다. 슬픔이 뭉근하게 피어오른다.어디선가, 가까운 곳에서 물 흐르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차갑고 빠른 무엇인가가 아래로 굽이쳐 흐르는 듯한 소리, 새벽의 정적을 깨는 소리다. 강가에서 느낄 수 있는 기운. 이곳은 강가일까. 까마귀 떼는 물을 먹기 위해 이곳으로 모여 든 것일까. 그렇다면 까마귀 떼랑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면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뒤돌아서서 걸음을 옮긴다. 내 발은 자갈과 까마귀의 날개 사이를 오가며 불안스럽게 움직인다. 퍼드득, 날개짓 소리가 물소리에 섞여 간간이 들릴 뿐 주변은 조용하다. 까마귀 무리도 더 이상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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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내지 않는다. 야단 법석을 피우던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자 나는 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검은 무리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는 듯한 기분, 그것들이 호시탐탐 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듯한 불길함. 등을 타고 식은 땀이 흘러내린다. 도대체 이 새끼는 어딜 간 거야.

한 무리의 까마귀 떼가 날아오른다. 검은 무리는 안개를 가르며 시야에서 사라진다. 안개 속에 하얀 덩어리가 희미하게 드러난다. 나는 하얀 덩어리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내 앞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은 흰빛으로 빛나는 커다란 바위다. 나는 바위 앞에 서서 잠시 망설인다. 그리고 바위 위에 살며시 손을 갖다댄다. 섬뜩하고 차가운 기운이 손을 타고 온 몸으로 전해진다. 나는 바위를 돌아 앞으로 걸어간다. 하얗게 부서지는 크고 작은 자갈들이 안개를 뚫고 서서히 내 앞으로 다가온다. 나는 뒤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뒤편에는 검은 물체들이 수증기처럼 일렁거린다. 천천히 움직이는 그것들은 저승으로 가는 다리를 만들어주는 어둠의 새 같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린다. 자갈의 하얀 빛이 눈을 찌른다. 희뿌연 안개 속에서도 자갈의 흰 빛은 눈부시다. 자갈을 따라 걷다 보면 곧 안개가 걷히고 밝은 빛이 나를 안내해 줄 것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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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들기도 한다. 나는 자갈길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발을 옮길 때 마다 몸이 기우뚱하다. 나는 몸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두 팔을 벌린다. 두 팔을 벌리자 어디로든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노래를 흥얼거린다. 물 속에서 허우적대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계집애가 보인다. 그 계집애도 노래를 흥얼거렸다. 소름끼치도록 낮은 노래 소리는 자동차가 물 속으로 가라앉을 때까지 계속됐다. 뒈지려면 혼자 뒈지지. 왜 물귀신처럼 가족들까지 데려가는 거야. 계집애가 뒤돌아서더니 담배에 불을 붙인다. 나는 불 붙인 담배를 깊게 빨아당긴다. 나도 모르게 노래가 흘러나온다. 죽음을 몰아내는 부적처럼, 귀신을 몰아내는 무당의 읊조림처럼 나는 쉴새없이 흥얼거린다. 어디선가 두런두런, 사람들 말소리가 들려온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나는 담뱃불을 끈다. 말소리가 뚝 끊긴다. 잘못 들은 것일까. 나는 끊긴 말소리를 다시 듣기 위해 눈을 감고 주변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인다. 바람 안에 느껴지는 물의 기운, 약간 비릿하면서도 상쾌한 바람의 냄새가 전해져온다. 물이 흐르는 듯한 소리, 넓은 강이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것만 같다. 낙하하는 듯한 소리도 들린다. 조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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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흐르는 물이 한 순간에 깊은 물 속으로 가라앉는 느낌. 강에서 낯선 소리가 들린다. 둔탁한 무엇인가가 넘어지는 소리, 거대한 것이 일렁이며 강을 흐르는 듯한 소리, 다급한 사람들의 발자국소리. 발자국 소리는 나를 향해 다가온다. 나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서서 형체를 응시한다. 흐릿한 모습이 실체를 드러낸다. 내 앞에 나타난 것은 두 명의 사내다. 두 사람은 헬멧을 쓰고 똑같은 점퍼와 바지를 입고 있다. 왠지, 경찰이나 군인의 제복처럼 느껴진다. 확, 기분이 잡친다. 마치 나 자신이 끊임없이 통제당하는 것만 같고, 감시와 처벌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나는 뒤돌아서서 달린다. 어쩐지 사내들로부터 멀어져야 될 것 같다. 신발을 집어 던진다. 자갈길을 지나고 커다란 바위를 지난다. 발 아래 까마귀의 몸뚱이가 밟힌다. 뭉클한 것이 비켜서는 느낌, 나는 주춤거린다. 순간, 우악스런 힘이 내 팔을 잡는다. 나는 잡힌 팔을 뿌리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봐.”의외로 목소리는 온순하다. 어떤 악의나 부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다. 중저음의 낮은 목소리는 순진한 듯 하면서도 부드럽다. 나도 모르게 남자를 쳐다본다. 남자는 헬멧을 벗어 손에 들고 있다. 어둠 속에서 남자의 흰 치아가 드러난다. 친절과 당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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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베인 웃음이다. 짧은 순간, 나는 안심한다. 나는 옆에 있던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옆의 남자는 헬멧을 벗지 않는다. “무슨 일이에요? 도와줄게요.”온순한 목소리를 가진 사내가 말한다. 이 지루한 술래잡기를 단박에 사내가 해결해줄 것만 같다. 그의 말에 나는 내 상황을 속삭포처럼 털어 놓으려 한다. 다른 목소리가 끼어든다. “야, 너 왜 도망갔어. 뭐 죄 지은 거 있어?”옆에 서 있던 사내다. 불손함이 묻어 있는 목소리다. “자식, 너, 왜 그래. 아가씨, 괜찮아요?”온순한 목소리가 말한다. “사실은, 길을 잃었어요. 길 찾으러 간 남자친구도 돌아오지 않구요.”내 말은 끝이 갈라져서 겨우 소리로 나온다. “걱정 마세요. 우리가 찾아 줄게요.”온순한 목소리가 앞서고 불손한 목소리가 내 뒤를 따른다. 불손한 목소리가 등 뒤에 바짝 붙더니 귀에 대고 속삭인다. “야, 너 아까 달리던 차 안에 있던 계집애지? 나는 말이야. 내 앞에서 누가 깝죽거리면 잡아서 족쳐야 직성이 풀려. 아까 그 놈도 깝죽거리지만 않았어도 피 냄새나도록 때리지는 않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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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음의 낮은 목소리는 소름끼치도록 불온하다. 온순한 목소리가 말한다. “너 성질 좀 죽여야 해.”불손한 목소리가 대답한다. “새끼. 까불지마.”말하면서 낮게 웃음을 터트린다. 웃음소리가 털털하고 유쾌하다. 반면에 온순한 목소리의 웃음소리는 안으로 고였다가 조금씩 흘러나온다. 물소리가 점점 거세어진다. 물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듯 하더니 강이 드러난다. 강 주변에는 검은 물결이 일렁이고 있다. 안개는 점점이 흩어지고, 그 자리는 검은 물결이 채워나간다. 검은 물결은 서서히 쓰러지는 도미노처럼 조금씩 안개를 쓰러뜨린다. 그것은 내 발목까지 차오른다. 나는 검은 물결에 밀려 어딘가로 떠내려가는 상상을 한다. 불현듯, 몸에 소름이 돋는다. 물소리와 까마귀 떼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예감, 내 삶은 강과 까마귀 사이를 끝없이 오갈 것 같은 불길함. 강을 향해 차를 달리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물 속으로 차가 들어가기 전 위험을 감지한 계집애는 차에서 뛰어내렸다. 지긋지긋해. 저런 놈을 남편이라고 믿고 사는 엄마도 똑같아. 계집애는 접질러진 다리를 절룩거리며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카드회사에서의 독촉 전화, 학교를 서성대며 감시하던 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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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사람들과도 안녕이었다. 마지막이야, 전세 집을 빼 월세 집으로 이사할 때의 엄마의 씁쓰레한 웃음. 오로지 복권만을 사는 엄마의 둘째 남편 그 남자.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이던 복권들. 유산처럼 남은 5등 당첨 복권 80장, 쓰레기가 되어버린 나머지 복권들…. 강물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축축하고 습한 기운. ‘가스등’에서 늘 맡던 냄새가 나를 덮친다. 축축한 나무 껍질에서 나는 듯한 냄새, 갑작스럽게 재채기가 쏟아진다. 강의 한 쪽에 배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온순한 목소리가 말한다. “아, 씨발, 어떻게 자꾸 이 쪽으로 돌아오느냔 말이야. 오늘 재수 열라 없네. 이게 다 네년이랑 그 놈 때문이야.”사내는 바닥에 누워 있는 까마귀 떼를 향해 발길질한다. 까악, 깍, 까마귀 떼가 울부짖으며 퍼드득거린다. 온순한 목소리가 느릿느릿 내게로 다가온다. “너, 몸 수색 좀 해야 겠어.”사내의 손은 어느새 코트를 헤치고 내 가슴께를 파고든다. 나는 사내의 손을 밀친다. “너, 얌전히 있어. 까불면 맞아 죽을 수도 있어.”사내가 힘을 주어 나를 끌어당긴다. 사내의 손이 코트 속으로 들어오다 잠시 멈춘다. 호흡이 가파르게 변하더니 그악스럽게 치마를 들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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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거 뭐야. 옷이 왜 이래. 그러고보니 내 취향인데…….”사내는 흐믈흐물 웃으며 나를 넘어뜨린다. 까마귀들이 날개를 펴고 달려든다. 이것들이… 온순한 목소리가 손을 휘젓는다. 하지만 까마귀 떼는 멈추지 않고 여기저기서 몰려든다. 까마귀 떼는 사내의 얼굴과, 손, 몸으로 달려든다. 사내는 온 몸으로 까마귀 떼를 막아선다. “안되겠어. 배로 가야지.”사내가 거칠게 내 팔을 움켜잡는다. 사내에게 질질 끌려 배로 간다. “에이, 씨발, 알았어. 도망 안 갈 테니까 이것 좀 놔.”사내가 나를 쳐다본다.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사내는 귀엽다는 듯 내 얼굴을 쓰다듬는다. 느물느물한 것이 얼굴을 기어다닌다. 에이 쌍, 나는 사내의 팔을 밀치며 배로 올라간다. 경마장을 어슬렁대는 아버지가 보인다. 복권판매점의 늙스그레한 모습과는 달리 깔끔한 인상에 눈웃음을 치는 호남형의 모습이다. 양복 주머니에는 늘 한 웅큼의 마권이 들어 있다. 아직 초경도 치르지 못한 어린 계집애가 욕조에 앉아 있다. 바쁜 엄마는 남편에게 목욕을 시키라고 말한다. 남자의 손이 은밀한 곳까지 샅샅이 파고든다.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깨끗이 씻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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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게. 계집애가 몸을 움츠린다. 사내의 손이 깊숙이 들어온다. 까악, 소리만이 어둠 속에 울려퍼진다. 소리가 울릴 때마다 배가 출렁거린다. 배가 출렁거릴 때마다 신음소리가 들린다. 인화다. 인화가 한쪽 구석에 웅크린 채 누워 있다. 사내가 인화에게로 간다. 인화의 몸을 발끝으로 톡톡 친다. 나는 사내에게로 다가간다. 그의 얼굴에 내 얼굴을 바짝 붙인다. “야, 왜 사람은 걷어차고 지랄이니?”“뭐, 이 년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사내의 손이 얼굴로 날아온다. 방심한 탓에 혀를 깨물었다. 진짜, 재수 옴 붙었네. 속으로 뇌까린다. 사내가 내 어깨를 찍어 누르며 숨막히게 덮쳐온다. 나는 ‘가스등’의 향이 되어 나를 맡긴다. 이런데 까지 와서 직업정신을 발휘한다는 것이 좀 우습지만, 까짓것, 두 놈을 떼버릴 수 있다면 상관없다. 김사장처럼 이상한 짓만 요구하지 않는다면 괜찮다. 왜 이리 뻣뻣해, 남자가 내 머리를 잡으며 말한다. 나는 몸을 뒤틀며 신음소리를 낸다. 새벽의 안개 속으로 내 신음이 물그림자처럼 펴져 나간다. 희미하게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질서를 잃어버린 무절제한 울음소리다. 숨어서 바라보던 인화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김사장의 행동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룸으로 뛰어들던 인화. 살기어린 눈빛으로 술병을 들고 유리를 깨트리고 테이블을 엎고, 김사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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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내리치던 모습들이 지나간다. 때마춰 자리를 비운 마담의 자동차 키를 들고 나왔을 때만 해도 사요나라, 굿바이, 아듀를 외치며 낄낄거렸는데. 허탈하다. 웃음소리가 입 사이로 삐져나온다. 온순한 목소리를 가진, 그러나 전혀 온순하지 않은 사내가 일어선다. 내 얼굴을 툭툭 때리면서 말한다. “야, 정신 차려. 이거 미친 거 아냐.”나가면서 인하를 향해 훅을 날린다. 나는 인하 곁으로 간다. 팔에 묶인 줄을 풀려고 시도한다. 어찌나 단단하게 묶었는지 잘 풀리지 않는다. “야, 빨리 들어가 봐.”온순한 목소리가 다른 사내에게 말한다. “글쎄 난 좀 …….”불손한 목소리가 대답한다. “짜식, 빼기는.”온순한 목소리가 이야기를 계속한다. 불손한 목소리가 중간중간 끼어든다. 두 사내는 실랑이를 주고받는 듯 언성이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들의 말을 듣기 위해, 그들의 다음 행동을 짐작하기 위해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음절만 웅웅거릴 뿐 정확한 내용은 들리지 않는다.

잠시 후 불손한 목소리가 배로 올라온다. 올라오자마자 습관처럼 인하를 발로 툭 걷어찬다. 사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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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퍼를 내리고 내 입을 가리킨다. 나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린다. 그는 내 머리를 거세게 잡아 자신에게로 돌린다.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거칠어진다. 그래, 이것도 일이야. 늘 하던 거잖아. 나는 좀더 자극적으로, 좀 더 유연하게 입을 움직인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 멀리 있지만 가까이에서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인하와 마담의 뒤얽힌 몸과 신음소리가 내 귓가를 맴돈다. 모든 사람이 떠난 빈 룸에서 미칠 듯 비명을 지르던 마담과 안으로 삭이는 듯한 울음소리를 내던 인화. 음울하고 낮은 비명소리. 그림 속 남자처럼 비현실적이며 몽롱한 느낌을 자아내는 그의 얼굴. 할머니가 죽은 후 인화는 엄마의 손에 의해 도시로 왔다. 네온사인이 화려하게 돌아가는 골목 어딘가에서 인화는 엄마의 손을 놓쳤다. 인화의 손을 잡아준 것은 마담이었다. 내 몸과 혀가 동시에 춤을 춘다. 뭉클하고 늘어진, 인간의 것이라기에 너무나 슬픈 그것이 자신의 알갱이를 뱉는다. 울컥 속이 메스껍다. 배가 흔들린다. 배에서 내리는 사내의 뒷모습이 보인다. 어둠 속에서 사내들 말소리가 들린다. 이제 어디로 가지. 글쎄, 오늘은 안개 때문에 길을 찾을 수가 없어. 아, 나는 빨리 오토바이 타고 질주하고 싶어. 바람을 가르면서 무조건 앞을 향해 펑…… 펑이고 나발이고, 근데, 쟤들은 괜찮을까? 야, 신경 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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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말인지 모를 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진다. 인하가 몸을 움찔거린다. 찢어진 옷, 피범벅이 된 얼굴, 묶여 있는 손발. 나는 인하의 손발을 풀어 준 다음 옆에 눕는다. 차갑던 인하의 몸이 따뜻해진다. 인하가 몸을 돌려 나를 쳐다본다.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가 싶더니 입이 조금씩 움직인다. 소리로 데려다 줘. 그래, 가자. 인하의 눈가에 웃음이 고인다. 몸을 부르르 떨더니 내 손을 찾는다. 나는 인화의 손을 꼭 잡는다. 인하에게서 젖은 낙엽 타는 냄새가 난다. 불이 서서히 젖은 낙엽을 말리면서 시나브로 태우는 냄새. 나는 인하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인하의 몸에서 송진 냄새가 난다. 고기를 태우는 냄새. 헉, 숨이 막히고 내 몸이 뜨거워진다. 나는 인하에게서 몸을 뗀다. 인하의 몸은 스스로 불을 밝히고 있다. 그의 몸 어느 한 곳이 발화점이 되어 그를 태우고 있다. 그의 몸이 불길에 휩싸인다. 안개가 쓰러지고 까마귀가 일제히 퍼드득거린다. 나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선다. 불길에 휩싸인 인화의 눈빛이 나를 바라본다. 순간적이지만 강렬하게 내 눈을 응시한다. 그는 편안해 보인다. 애틋한 눈빛으로 미소까지 짓고 있다. 갑자기 눈앞이 희뿌예지더니 재채기가 쉴새없이 나온다. 배는 끈적이는 진으로 뒤덮인다. 기름기 가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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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가 주변으로 펴져 나간다. 공기 중에 떠도는 산소가 모두 증발된 듯 숨이 턱 막힌다. 그의 몸에서 일어난 불길이 목선을 태운다. 인하의 몸은 거대한 폭음과 함께 흩어진다. 인하의 몸 주 변으로 푸른빛이 감도는 빛이 번쩍거린다. 소, 리, 로, 같, 이, 가, 자. 인하가 미소지으며 내게 손을 내민다. 나는 손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내 몸은 뻣뻣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는다. 어느새 붉은 기운이 나를 감싼다. 너무 따뜻해서 졸음이 쏟아진다. 폭죽이 터지듯 불꽃이 주변으로 튀어오른다. 까악, 까악, 까마귀 떼가 주위로 몰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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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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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주 석

심동춘 살인미수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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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타운이 들어선다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은 좀처럼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시장골목은 북적였다. 차도와 인도의 경계조차 애매한 거리를 차들과 사람들이 아슬아슬하게 공유하고 있었다. 기대심리로 급등했던 집값은 서서히 떨어지더니 급기야 원래의 집값도 유지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new타운은커녕 점점 old타운으로 늙어가고 있었다. 사태를 지켜보는 내 얼굴도, 속도 나이에 비해 늙어가고 있었다. 하필 이 시기에 신림동에 있는 주공아파트 단지의 재건축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뉴타운에 혹해 팔았던 집이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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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단지 안에 있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 일대에 있는, 부모님이 살았던 빌라단지까지도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될 거라며 술렁였다. 땅값이 오르기 시작한 것은 물론이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아버지가 나발을 불던 소주병을 던지는 모습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바닥에 구르던 소주병을 집어 들고 달려와 문을 두드릴까 무서웠다. 돈에는 별 미련이 없다는 아버지였다. 한사코 고개를 돌리던 아버지를 끈덕지게 설득해 이 근처로 이사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빌어먹어도 이렇게 빌어먹을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었다면 평생 아껴도 모을 수 없을 만큼의 돈을 거저 버는 셈 이었다. 신림동의 아파트는 이미 허물어지고 새로운 뼈대가 세워지고 있었다. 떠도는 매매가를 알아보니 ‘쩍’하고 입만 벌어졌다. 매입은 어림도 없는 금액이었다. 결국 신림동의 집을 팔고, 거기에 웃돈까지 얹어주고 얻은 북아현동의 집을 되팔았다. 꽤나 큰 액수를 손해 본 상태였다. 손해를 만회할 수 있는 방법은 한가지뿐이었다. 어떻게든 재개발의 혜택이 미치는 구역으로 다시 들어가야 했다. 부모님이 살았던 빌라 근처로 다시 이사를 갈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사 후 얼마 지나지도 않아 재개발에 대한 술렁거림은 슬슬 가라앉았다. 그나마 남아있었던 희망과 함께. 3년이 지나도록 재개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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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방은 오리무중이었다. 불가능에 대한 의견들이 갈수록 설득력을 띄웠다. 순조롭던 이십대는 지났다. 안정적인 삼십대는 어디가고 여유로운 사십대를 맞이하고픈 소박한 꿈마저도 날아가고 있었다.

중학교 시절엔 그랬다. 내가 지금의 나이가 될 때쯤이면 어디 큰 회사의 사장까지는 아닐지언정 적어도 폼은 좀 나는 인생을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폼 나는 인생이라……. 새벽 6시면 눈을 뜬다. 피곤한 기색은 없다. 왜? 침대가 아주 푹신푹신할 테니까. 옆자리엔 미모의 여인이 아직도 곤한 숨소리를 낸다. 전원주택들 사이로 요리조리 뻗은 깨끗하고 한적한 길을 따라 동네를 가볍게 달린다. 런닝화를 내딛을 때마다 나는 슉슉 소리가 기분을 상쾌하게 만든다. 이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요, 18만 원짜리 런닝화의 에어쿠션에서 나는 소리다. 마주치는 동네사람들에게 환한 웃음으로 안부를 묻는다. 대기업 상무라는 김씨는 젊은 녀석이 이 동네에 사는걸 보면 능력도 좋은데 인상까지 괜찮다며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청춘을 원망하겠지. 신문을 줍기 위해 나왔던 아줌씨들은 탄력적으로 씰룩이는 내 엉덩이를 보며 저도 모르게 헤~에 하고 입을 벌린다. 발길을 돌리며 만삭에 가까운 똥배를 가진 남편과의 이혼을, 그리고 위자료를 다시 한 번 계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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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것이다. 적당히 땀을 흘리며 마당으로 들어서면 아줌씨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미모의 여인이 수건을 목에 걸어준다. 이어 사과를 통째로 갈아 만든 주스를 건넨다. 그것도 아침에 먹는 사과는 금사과라면서 말이다. 나는 사랑과 정성이 담긴 주스를 원 샷으로 삼킨다. 미모의 여인은 호두알 같은 내 목젖이 꿀꺽이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이 남자와 결혼하길 잘했다는 생각에 뿌듯해 할 테지. 나는 답례대신 왼팔로 허리를 잡아당겨 미모의 여인 뺨에 입을 맞춘다. 오~예. 순간 땀 냄새가 훅하고 풍기지만 미모의 여인에겐 그 땀 냄새마저 유쾌할 거야. 연수기를 거친 샤워기가 뿜어내는 뜨거운 물이 콸콸 쏟아진다. 순식간에 욕실엔 김이 뿌옇게 서린다. 김이 서린 거울을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말끔하게 면도를 한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침대의 모서리에 네모반듯하게 개켜진 속옷이 기다린다. 자기 전에 골라둔 파란색 남방에 코발트블루 색상의 슈트를 입는다.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넥타이 대신 스카프를 매자. 한 벌로 옷을 입을 때는 언제나 깔을 맞춰야 하니까 스카프는 남색으로. 왁스로 머리모양을 만들고 바닐라향이 은은한 향수를 뿌린다. 식사하라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전업주부의 역할을 이백프로 해내는 미모의 여인이 차려준 정갈한 건강 식단을 먹는다. 이제 회사에 가야지. 요즘 성공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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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직장인들에게 유행이라는 일제 승용차에 몸을 싣는다. 룸밀러엔 강아지를 안고 손을 흔드는 미모의 여인이 보인다. 한 세트로 사랑스러운 그들을 돌아보며 씨익 웃는다. 오~예. 오늘 밤을 기대하시라. 봄이라 날씨가 좋기도 좋구나. 스피커에선 가사는 잘 못 알아들어도 듣기는 좋은 멜로디의 팝송이 들려온다. 도로변엔 개나리인지 뭔지, 잡초라도 상관없다. 아무튼 꽃들이며 풀들이 가득 피어있고 나는 창문을 반쯤 열고 담배를 피운다. 담배? 아! 담배는 끊었지. 담배대신 자일리톨껌을 씹도록 하자. 휘바휘바. 노래를 흥얼거리다보면 어느새 회사의 근처에 도착한다. 오전 7시 40분. 회사의 맞은편 공용주차장에 잠시 주차한다. 여대생들이 남 걱정하러 몰려간다는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의 테라스에 앉아 쓰디쓴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는다. 햇살이 참 좋구나. 오전 8시30분. 절대로 지각하는 법은 없지. 다시 차에 시동을 건다. 지하철역 출구는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을 토해낸다. 어이쿠! 불쌍한 인생들. 허겁지겁 빠져나오는 사람들 사이로 미모의 여직원이 보인다. 미모의 여직원이라면 태워주는 것이 마땅하다. 사람들에 치여 오른발에서 하이힐이 벗겨진다. 큭! 귀엽기도 하지. 차를 슬슬 몰아 그녀에게 다가간다. 창문을 내리고 타라는 손짓을 한다. 한 번도 사양이나 거절하는 법이 없다. 웃으며 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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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3 | 심동춘 살인미수사건 _ 박주석

오르는 그녀의 뒤로 상당히 외모와 몸매가 떨어지는 여직원과 눈이 마주친다. 너도 타고 싶은 게냐? 미안하다. 너만은 안 된다. 너의 얼굴에 가득 열린,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듯 누런 고름이 맺힌 여드름을 보면서 기분을 잡치고 싶지 않다. 너는 걸어가는 편이 마땅하다. 슬그머니 눈을 피하고 차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가속 폐달을 밟는다. 오~예. 치마가 짧구나. 매번 이렇게 태워주셔서 감사하다고? 아니다. 매번 그렇게 짧은 치마를 입어주니 오히려 내가 감사하다. 그저 눈이 즐거우니 언제나 오늘처럼 짧은 치마를 입어주길 바란다. 우리 오늘도 미래를 위해 열심히 일하자꾸나. 아! 그런데 무슨 일을 하는 회사지? 아무려면 어떤가. 그 때는 그냥 내가 성공한 삼십대 초반의 직장인이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회사에서 진행되는 하루는 그냥 순식간에 지나가자. 오후 6시 30분. 오~예. 자! 이제 퇴근이다. 야근이란 없다. 금요일은 외식을 하는 날이다. 오후 7시까지 오겠다던 아내는 약속보다 조금 빠른 시간에 도착한다. 결혼 한지 수년이 지나도 여전히 연애할 때처럼 외모를 꾸미고 가꾸는 그대를 두고 어찌 한 눈을 팔 수 있겠어? 아니다. 한 눈은 팔 수 있겠다. 우리는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는다. 캐나다산이라는 아이스와인도 한 잔씩 마시고. 아내가 보고 싶다는 예술영화를 보러간다. 나는 성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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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연걸이 나오는 영화를 좋아하긴 하지만 괜찮다. 참을 수 있다. 꾸벅꾸벅 졸면 아내는 내 코를 살짝 비틀며 웃는다. 나는 멋쩍게 웃고 팝콘을 씹으며 졸음을 쫓는다. 꼭 이런 영화는 길다. 눈 아프게 화면은 꼭 흑백이다. 제발 빨리 끝나라. 결국 ‘the end’라는 자막이 올라간다. 손을 꼭 잡고 공원을 산책하고 집에 들어가면 강아지는 꼬리를 흔들며 내 다리에 몸을 비빈다. 미안하구나. 운동을 시켜주지 못해서. 내일은 꼭 공원에 데리고 나갈게. 오후 11시. 오~예. 이제 오늘의 하이라이트만 남았다. 친구는 그랬다. 결혼하고 이삼년만 지나도 담배는 습관이요, 섹스는 그냥 의무라고. 그 친구의 마누라를 보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불쌍한 녀석. 나는 아니다. 오늘 밤도 최선을 다해 불태워봅시다. 우리는 이웃 주민들을 신경 쓰지 않고 창문을 열어놓고 수차례 사랑을 나눈다. 중학교 시절의 상상력이었으니까 탐스러운 수밀도 같은 유방이나 건포도만한 유두 같은 저질스러운 표현이나 적나라한 장면들은 생략하겠다. 그냥 건강한 신음소리가 쉴 새 없이 창밖으로 울려 퍼졌다는 정도로 생각하자. 체력이 바닥나면 서로를 꼭 끌어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든다. 휴우. 그래. 멋지구나. 이게 바로 행복이다. 내가 중학교 시절 꿈꾸던 행복. 나는 행복한 녀석이다. 그런데 어디서 이렇게 코고는 소리가 들리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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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5 | 심동춘 살인미수사건 _ 박주석

니기미.

지금 옆에서 내 목소리보다 반 옥타브 높은 음으로 코를 고는 이 여자의 이름은 심동춘이다. 1970년대 후반에 태어난 여자의 이름이 왜이런지 모르겠다. ‘동춘(動春)’이라는 이름의 뜻보다는 이름을 불렀을 때의 어감이 이 여자와 어울리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올해로 결혼 3년차에 접어들었다. 아니, 우리라고 하기도 싫다. 그러니까 심동춘과 나는 동갑이고 서른한 살이다. 토요일 오전 11시 30분이 넘었지만 아직도 코를 드르렁거리며 자고 있는 심동춘. 나보다 밥을 두 공기 이상 많이 먹는 심동춘. 대통령이 바뀐 것보다 단골 중국집의 주방장이 바뀐 것에 더 관심을 가지는 심동춘. 밥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나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센 심동춘. 마스카라 살 돈으로 김말이 튀김을 사먹는 심동춘. 밤이면 억지로 내 몸에 올라타 관계를 할 때도 겨드랑이와 다리털을 깎지 않는 심동춘. 욱하는 마음에 욕이라도 했다간 나를 매 맞는 남편으로 만들어버릴 심동춘. 키는 이미 다 컸고 옆으로만 자꾸 퍼지는 심동춘. 소리 없지만 냄새는 지독한 방귀를 뀌는 심동춘. 여자이길 포기한 심동춘. “어! 벌써 일어났어? 입맛이 쓰다. 북경반점에 쟁반 자장 좀 시켜봐. 철가방한테 짬뽕국물이랑 단무지 많이 가져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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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배달 오면 깨워.” 저것 봐라. 일어나자마자 쟁반 자장을 처먹겠다는 심동춘의 결연한 의지를. 주문전화를 끊기도 전에 다시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코만 골지 않는다면 저대로 영원히 잠들어버렸으면 좋으련만. 세상에 어느 남자가 저런 심동춘을 사랑으로 대할 수 있겠는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오락실에 갔다가 동네 형에게 아버지가 사준 소니 워크맨과 700백 원을 뺏긴 이후로 이 여자를 보면서 세 번째로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여자가 내 인생이 폼 나기는커녕 이혼한 옆집 아저씨의 술주정보다 못한 인생으로 곤두박질치는데 일등공신이다. 내 주량이 무한대로 늘어나고 있는 것에도 일등공신이다. 20대엔 하루에 반 갑을 피던 흡연량을 하루 두 갑으로 늘려 놓은 것에도 일등공신이다. 똑똑똑. 빌어먹을 초인종이 또 고장 났는지 철가방이 문을 두드린다. 문을 열고 만원을 건넨다. 철가방이 맛있게 드시고 그릇은 문 앞에 놓아달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고요하다. 코고는 소리가 멈췄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듯 골아대던 심동춘의 코는 냄새를 맡기 위해 본능적으로 벌렁거린다. 집안의 모든 냄새가 그녀의 콧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냄새를 감지한 심동춘은 어느새 접시를 식탁으로 옮겨 거칠게 비닐을 뜯는다. 흡사 짐승의 모습과 같다. “왜 이렇게 불었어? 해물도 별로 안 들었잖아! 쿠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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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잘 챙겼어? 몇 번만 더 시켜먹으면 탕수육 서비스 받을 수 있을걸?” 그래. 잘 챙겼다. “안 먹어? 어디 가는데?” 그래. 안 먹는다. 너 혼자 불어터진 쟁반 자장 다 처먹어라. 대답 없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엄마의 말이 부부가 결혼을 하고 한 십년이 지나니까 자식(아마 나겠지)문제로 부딪치고 생활고에 쪼들리게 만드는 무능력한 남편(내 아버지가 확실하다.)이 맞은편에서 쩝쩝거리면서 밥을 먹는 모습만 봐도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하던데. 나는 이제 겨우 결혼 3년차에 접어들었다. 죽이고 싶다. 제명에 죽기를 기다리다간 내가 먼저 벽에 똥칠을 할 테고, 심동춘은 그런 나를 보면서도 태연하게 쟁반자장을 시켜먹을 것이다. 결국 나는 눈도 감지 못하고 세상을 떠날 거야. 심동춘이 죽었으면 좋겠다. 이혼을 하지 않는 이유?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혼해’라는 말이 ‘이혼해줘’라는 말로 바뀌고 ‘제발 나를 놓아줘’라고 바뀌어도 심동춘은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쟁반자장을 먹었다. 그나마 심동춘을 닮은 딸이 없는 것은 그나마 큰 다행이다. 하긴 심동춘을 닮은 아들이 있었다면 그 역시 큰 걱정거리였을 것이다. 벗어나고 싶다. 심동춘이 정 이혼해주기 싫고, 그렇다고 죽기도 싫고, 내가 차마 죽일 수 없다면 심동춘이 집이라도 나가버리면 좋으련만. 더는 미룰 수 없다. 방법을 찾아야한다. 이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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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이 다 가기 전에.

“저런 똥통 고등학교에 다닐 바엔 차라리 때려치우고 검정고시 보겠다.” 성적 때문에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멀리 있는 학교에 다니는 형들이 많았다. 친구는 멀리서 비아냥거렸고(형들의 귀에 들리면 맞을 테니깐) 나도 멍청한 새끼들이라고 코웃음을 치며 동조했다. 정확히 1년 후에 내 친구는 더 멀리 있는 공업고등학교의, 나는 공업고등학교도 못가는 문제아들이 간다는 상업고등학교의 교복을 입었다. 우리는 검정고시를 보지 않고 열심히 다니면서 특기를 하나씩 계발하기로 했다. 그래. 요즘은 공부로 대학가고 출세하는 시대는 지났어. 한 가지만 특출 나면 성공할 수 있을 거야. 친구가 생각하는 성공은 잘나가는 골프선수와의 결혼, 내가 생각하는 성공은 첫 눈에 반한 예쁘고 잘 빠진 여자와의 결혼. 우리는 공원 화장실에 숨어 담배를 피우며 서로의 성공을 기원하며 웃었다. 3년이 지나도 우리는 한 가지도 특출 나지 못했다. 친구는 지리시간에도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곳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했다. 비슷한 형편이었던 나는 더 멀리에 있는 바닷가가 보이는 도시의 전문대에 갔다. 둘 다 한 학기를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우리는 노량진에 있는 재수학원에 등록하고 그 날부터 열심히 당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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쳤다. 결국 그 해에도, 다음해에도 당구만 열심히 치다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겠다는 꿈을 고이 접었다. 친구는 제대하고 얼마 후에 뜬금없이 헤어디자이너가 되겠다더니 미용실 보조로 들어갔다. TV에 가끔 얼굴을 비추는 헤어 디자이너처럼 되고 싶다고 하면서. 한 달에 80만원을 받으면서 12시간씩 남의 머리를 감긴다고 했지만 즐겁다고 했다. 친구의 이름은 김덕출이었다. 나는 김덕출이라는 이름을 그냥 쓰기는 촌스러우니 열심히 머리를 감겨서 나중에 유명해지면 김샤기로 이름을 바꾸라며 웃었다. 친구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어디서 주워들은 어설픈 말들을 늘어놓으며 어른흉내를 냈다. 내게도 정신 차리고 어디라도 취직해서 돈이나 벌라고 잔소리를 했다. 그 무렵에 어머니는 나에게 집에서 나가라는 말과, 아니면 일을 하라는 말만을 되풀이했다. 가진 거라곤 달랑 1종 보통 운전면허증과 태권도 1단 자격증이 전부. 나이는 어느덧 20대 중반. 하고 싶은 일도, 꿈도 없었다. 능력이 없으면 장사라도 해야 그나마 돈을 만진다고 했다. 당시에 살던 곳은 17평 전세 빌라. 아버지는 아파트 경비. 장사할 밑천이 나올 구멍이 있을 리 만무했다. 어머니는 아파트만 있으면 괜찮은 여자와 결혼할 수 있다고 버릇처럼 얘기했다. 어머니가 말하는 괜찮은 여자라 함은 바로 직업이 초등학교 선생인 여자.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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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돈도 없고 마땅한 능력도 없었지만 내 별명은 신림동 드림카카오. 목표물을 정하면 넘어올 확률 99퍼센트. 대상을 찍고, 다가가고, 말을 걸면 넘어오는 시스템. 실패란 없다. 아파트만 있으면 초등학교 교사가 대수냐? 누구라도 상관없다. 나는 아파트를 가지기로 했다. 아파트를 가지면 초등학교 교사와 결혼하기로 했다. 폼 나는 인생은 조금 멀어졌지만 아직 늦지 않았어. 아버지는 남자에겐 무엇보다 자존심이 중요하다고 했다. 빨래를 개키던 어머니는 수건을 던지며 같지도 않은 소리 집어치우라고 했다. 담배를 피우러 슬그머니 베란다의 문을 열고 나가는 아버지의 어깨엔 수건이 걸쳐있었다. 아버지가 이런 수모를 당하는 이유는 쉰 살이 되도록 아파트를 가지지 못해서였다. 인터넷 구직 사이트를 열심히 검색하던 결과 수행기사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발견했다. 「월 200~300보장. 숙식제공. 단정한 용모. 1종 보통 운전면허 소지자. 면접 후 채용 결정.」 괜찮네. 이것저것 따질 겨를도 없이 바로 다음날 면접을 보러 갔다. 이 회사는 중소기업 임원진에게 수행기사를 이어주고 수수료를 받는 중간업체였다. 매니저라는 남자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한쪽 눈을 치켜뜨더니 운전은 잘하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잘한다고 대답했다. 무슨 보험에 가입한다느니 등록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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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27만원을 내라고 했다. 유의사항을 몇 가지 일러주더니 그 외엔 차를 몰면서 사바사바를 잘 하면서 비위나 맞추고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에쿠스의 운전대를 잡게 되었다. 내가 운전하는 차의 뒷좌석엔 아파트 신축현장에 목재를 납품하는 개발회사의 이사가 탔다. 나이가 채 마흔도 되지 않아 보였다. 마산에서 시작해서 어느 정도 회사의 규모가 생기자 서울에 본사를 이전해서 올라왔다며 사투리를 남발했다. 가끔 공사현장에서 덩치 큰 사람들이 형님, 형님 하는걸 보니 명함은 이사였지만 전직, 그리고 현직도 깡패였다. 내가 하는 일은 간단했다. 데리러 오라는 시간과 장소를 일러주면 시간에 맞춰 그 장소에 차를 대기하고, 가자는 곳으로 차를 몰면 그 뿐이었다. 한 달에 한두 번 지방의 공사현장으로 출장을 갔지만 평소엔 지루한 반복이 전부였다. 아침엔 본사에 태워다주고 오후엔 성인 게임장에 데려다 주면 어두워질 때까지 자유였다. 적당히 게임방이나 만화방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으면 전화가 왔다. 대부분 돈을 잃었는데 가끔 따면 용돈이나 하라며 십 만원씩 주곤 했다. 이럴 때 보면 참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저녁엔 매일같이 한남동이나 신사동에 있는 룸살롱에서 술을 마셨는데 차에 데리고 타는 여자가 자주 바뀌곤 했다. 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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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하면 ‘사랑한다.’를 외치며 차 안에 수표를 뿌렸다. 정말 괜찮은 사람이었다. 나는 이사가 매일 술에 만취되기를 기도했다.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 늦게야 집에 돌아왔기 때문에 마땅히 돈을 쓸 곳이 없었다. 월급은 통장에 고스란히 쌓였다. 미래에 대한 계획을 그렸다. 주택청약예금도 붓기 시작했고 이대로만 간다면 서른 살 즈음엔 경기도의 신도시에 작은 아파트를 분양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집을 마련하면 아파트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 교사와 결혼하는 거야. 물론 옵션으로 여유가 좀 있는 집안의 외동딸이라면 감사하겠지만 그것까지 바라지는 않겠어. 단, 얼굴은 예쁘고 몸매는 잘빠져야한다. 왜? 나는 성공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으니까. 나풀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풍금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초등학교 교사. 오~예. 65세까지 매달 돈을 벌어오는 초등학교 교사. 그 무렵에 나는 급매물로 나온 낡은 주공아파트를 살 수 있었다. 시세보다 한참이나 낮은 가격이라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 집값의 반절 이상을 융자받았지만 일단은 아파트를 가지겠다는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성실하게 융자받은 금액을 갚아나가다 여유가 생기면 집도 넓혀나갈 예정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덕출이는 동네에 작은 미용실을 열었다. 덕출이의 가슴팍엔 ‘디자이너 김샤기’라는 명찰도 붙었다. 대부분 손님은 동네의 아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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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들이었고 커트보다는 파마가 많았다. 젊은 총각이 혼자 미용실을 한다는 소문에 음탕한 아줌마들이 자주 들락거려 돈벌이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덕출이는 음탕한 아줌마들이 자신의 엉덩이로 뻗치는 손들을 적당히 물리치고 유일한 아가씨 손님과 연애를 했다. 관계가 꽤나 진지했는지 어느 날 나에게 소개를 시켰다. 여자는 학습지 교사라고 했다. 나는 이목구비가 납작하기 그지없는 외모를 보면서 저런 여자랑 결혼할 바에는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겠다며 웃었다. 덕출이는 나 같은 놈들이나 여자 때문에 신세 조지는 법이라며 성실한 여자라 결혼을 결심했다고 했다. 그래. 드디어 너도 현실과 타협하고 성공에 대한 꿈을 버리게 되었구나. 넌 성실하지만 이목구비 납작한 학습지 교사와 살아라. 나는 성실하고 이목구비 오뚝한 초등학교 교사와 살 테니. 불쌍한 녀석. 나는 덕출이의 성공이 아닌 행복을 빌었다. 덕출이는 해를 넘기지 않고 겨울에 결혼했고 내가 결혼식의 사회를 봤다. 양쪽 다 집안형편이 변변치 않았고 이 부부는 젊어서 고생해야 돈을 빨리 모을 수 있다며 반 지하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덕출이의 결혼식에서 심동춘을 처음 봤다. 심동춘은 학습지 교사의 친구 중에 유일하게 눈에 들어오는 여자였다. 그것도 아주 확연하게 말이다. 학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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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교사가 던진 부케는 심동춘의 가슴팍에 안겼다. 덕출이네 부부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자리를 주선하라며 독촉했다. 마침 심동춘에게도 짝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때가 봄이었나? 떨리는 마음으로 카페의 문을 열었다. 손님은 창가에 앉은 여자 단 한명. 얼핏 그녀를 알아봤다. 그녀가 손을 들었다. 그녀는 초등학교 선생도 아니었고 풍금을 칠 줄도 몰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당뇨를 앓고 있다고 했지만 괜찮았다. 그녀의 집나간 어머니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기별도 없다고 했지만 괜찮았다. 그녀는 아버지의 병간호도 해야 하고 우울증도 있어 돈벌이도 잠시 쉬고 있다고 했지만 괜찮았다. 효녀구나. 외동딸에 얼굴도 예쁘니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겠니. 아무래도 괜찮아. 내가 네 아버지의 당뇨도, 너의 우울증도 치료해주겠어. 그렇게 심동춘이 내 인생으로 들어왔다. 웰컴 투 마이 라이프 심. 동. 춘.

심동춘은 마이다스의 손이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만 그랬다. 결혼을 하자마자 마이너스의 손으로 변했다. 변신의 귀재 심동춘. 놀라운 경험을 수없이 선사하는 심동춘. 연애를 할 때만해도 가끔 취미삼아 들렀던 경마장에서 심동춘이 찍은 말들이 언제나 상위권으로 결승점을 통과했다. 베팅을 워낙 작은 액수만 했기 때문에 크게 돈을 따지는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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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률만은 최고였다. 심동춘이 산 주택복권을 긁어보니 100만원이 당첨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심동춘이 사라던 주식이 2달 만에 13배나 뛰었던 적도 있었다. 심동춘과 함께라면 인생은 탄탄대로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잠자리에선 언제나 발군의 실력과 노력으로 헬렐레하게 만들어주는 심동춘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결혼과 동시에 심동춘의 모습은 불가능이란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주식은 폭락했다. 경마장에 가면 심동춘이 찍은 말들이 어제 피똥이라도 싼 것처럼 비실거렸다. 혹시라도 선두권에서 뛸라치면 기수가 말에서 떨어지거나 말들끼리 부딪혀 자빠져버리곤 했다. 가장 큰 것은 뉴타운 사건이었다. 어디서 들었는지 아현동으로 이사해야한다는 끈질긴 속삭임에 넘어간 것이 결정적인 실수였다. 이는 순전히 불어터진 쟁반자장 2인분을 뱃속으로 밀어 넣고도 빈 그릇을 문밖에 내놓지 않는 심동춘 때문이다. 담배를 물고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가스가 바닥났는지 몇 번을 철컥여도 담배에 불이 붙지 않는다. 이런 시팔. 라이터까지 나를 엿 먹이는구나. 라이터를 던졌다. 펑. 비닐봉지를 들고 가던 아줌마가 화들짝 놀랐다. “깜짝이야.” 아줌마가 눈을 흘겼다. 그런 눈으로 보지마세요. 세상엔 놀라운 일들이 참 많답니다. 거울을 보시면 더 깜짝 놀라시겠는데요. 고개를 돌렸다. 생각이 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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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물고 이어졌다. 심동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융자받은 금액을 고스란히 갚았을 거야. 난 낡았지만 주공아파트를 온전하게 소유하게 되는 거야. 그리고 재건축이 이루어지겠지. 초등학교 교사만 만나면 만사 오케이. 어떻게든 만나기만하면 꼬드기는 건 자신 있어. 그녀의 부모님이 반대하면? 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결혼에만 골인하면 평생을 보장 받을 텐데. 나는 그녀의 아버지를 앞에 무릎을 꿇는다.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자네 직업이 뭔가?” “수행기사를 하고 있습니다.” “수행기사? 으음. 운전수라는 얘기구만. 자네 월급이 얼만가?” “예. 300만원이 조금 넘습니다.” “오호. 그래? 자네 대학교는 어디를 나왔나?” “죄송합니다. 대학교는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으음. 이만 돌아가게.” “비록 많이 배우진 못했지만 따님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진심입니다.” “으음. 아버지는 뭐하시나?” “아버지는 아파트의 경비를 하십니다.” “으음. 집은 어딘가?” “서울의 신림동에 살고 있습니다.” “으음. 미안하네. 이만 돌아가게.”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단단한 모과가 날아와 눈에 맞는다. 나는 오른쪽 눈을 잡고 쓰러진다. 놀란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는 손을 입에 가져다대고 “어떡해.”를 연발한다. 어떡하긴. 어떻게 해서든 허락을 받아내야지. 다시 무릎을 꿇는다. “허락해주시기 전까지 여기서 한발자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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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일 수 없습니다.” “어허. 글쎄 안 돼.” “따님의 뱃속엔 제 아이가 자라고 있습니다.” 더 작지만 보다 더 깡깡해 보이는 모과가 얼굴을 향해 날아온다. 살짝 고개를 숙인다. 모과가 정수리에 맞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얼굴에 맞았으면 큰일 날 뻔 했다. “이런 근본도 없는 빌어먹을 자식. 네가 감히 애지중지 키운 내 딸에게 몹쓸 짓을 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녀의 아버지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골프채를 찾는다.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뜯어말린다. 죽이니 살리니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나는 다리에 쥐가 났지만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잠시 흥분이 가라앉자 그녀의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입을 뗀다. “아이까지 가졌다는데 어쩌겠수.” 그녀의 아버지는 고개를 돌리며 말한다. “자네 집은 있나? 나는 집도절도 없는 놈한테 딸을 내줄 순 없네.” 그렇지. 걸렸어. “아파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부모님이 사주신건가?” “아닙니다. 부모님의 도움은 없었습니다.” “으음. 그래? 오늘은 이만 돌아가게. 또 보세.” 됐어. “앞으로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아버님.” 인사를 하고 그녀의 집을 나선다.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따라 나온다.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등을 다독인다. 그녀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기쁨의 울음을 터뜨린다. “울지 마. 행복하게 해줄게.” 멋지구나. 이렇게 해서 내 아내는 신붓감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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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1등이라는 초등학교 교사. 남들은 결혼하고 10년이 지나도 장만하기 힘들다는 내 집 마련의 꿈을 서른 즈음에 이루게 되는 거야. 그런데 이런 시팔. 내 아내는 베트남 처녀보다 못한 심동춘. 이목구비 납작한 학습지 교사보다 못한 심동춘. 내가 사는 곳은 부모님이 살았던 빌라가 마주보이는 빌라. 평수는 더 작다. 12평. 제자리에서 벗어난 살림살이들로 내 한 몸 온전히 누일 공간도 마땅치 않다. 심동춘이 나에게 북아현동의 뉴타운에 대한 헛바람만 넣지 않았어도 새로 지은 최신식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을 텐데. 이마저도 내년이면 덕출이네 옆집으로 옮겨야할 판. 이는 순전히 문지방에 엄지발가락을 찧어 발톱이 부러졌다며 눈깔을 희번덕거리는 심동춘 때문이다.“살아보면 다 똑같아. 반반한 얼굴과 잘빠진 몸매는 잠시뿐이야.” “넌 얼굴이 반반하고 몸매가 잘빠진 여자와 살아본 적이 없잖아?” 덕출이는 고개를 숙였다. 심동춘이라는 이름까지 사랑스러운 시절이 있었다. 심동춘을 만나고부터 반년동안은 그랬다. 연애를 했던 4개월 동안, 결혼을 하고 2개월 동안은 심동춘이라는 이름은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가 이름을 바꾼다면 예진이나 은하가 어울렸을 것이다. 얼굴이 반반한 여자와 살아본 적도 없는 덕출이의 말대로 심동춘의 반반한 얼굴과 잘빠진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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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는 잠시뿐이었다. 주변의 결혼한 남자들이 가라사대 여자에서 아줌마가 되는 과정엔 출산이 끼어있다고 했다. 심동춘은 출산을 건너뛰고도 여자에서 아줌마가 되었다. 그것도 심동춘이라는 이름이 얼굴과 몸매에 너무나 잘 어울리도록. 연애를 할 때 심동춘은 밥을 먹으러가도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내숭떨 필요 없다고, 잘 먹는 여자가 보기도 좋다고 했지만 원체 입이 짧은 편이었다. 거기에 다이어트중이라며 숟가락을 탁자에 놓았다. 그녀의 몸매는 다이어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오히려 키에 비하면 마른 편이라 몸에 살이 조금은 붙을 필요가 있었다. 지금처럼 많이는 아니었고 그냥 조금만 필요했다. 막상 결혼을 하고보니 심동춘은 입이 짧은 편도 아니었고 더 이상 다이어트를 하지도 않았다. 웬만한 씨름선수만큼, 아니 그 이상을 먹었다. 갑작스럽게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어치우는 심동춘의 모습에 혹시 임신이 아닌지 물었다. 임신은 아니었다. 심동춘은 수년전부터 폭식증을 가지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럼 결혼하기 전엔 나와 헤어지고 집에 가면 매일 이렇게 먹었다는 거야? 폭식증? 폭식증이라면 단시간에 배가 아플 때까지 처먹다가 그대로 게워내고 우울증도 심각하다던데. 심동춘은 게워내지 않았다. 우울증도 없었다. 자기도 더 이상 토하지 않고 우울하지도 않은 게 신기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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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결혼하고 마음의 안정을 얻어서 그런 모양이라고 했다. 나는 그런 심동춘이 신기했고 심동춘 때문에 우울해졌다. 심동춘은 더 이상 폭식증이 아니었다. 그저 폭식이었다. 심동춘은 엄청나게 잘 먹고 엄청나게 소화를 잘 시켜 섭취한 음식물을 몸에 차곡차곡 쌓았다. 차곡차곡 쌓인 음식물은 극히 일부만 배설되었다. 나머지는 몸의 적재적소에 영양분을 공급했고 이는 고스란히 지방으로 변해 심동춘의 몸에 자리를 잡았다. 심동춘은 결혼 한 지 불과 두 달 만에 나보다 덩치가 좋아졌다. 심동춘의 식욕과 성욕은 비례했다. 내 귀가시간은 점점 느려졌다. 심동춘이라는 이름은커녕 심동춘도 더 이상 사랑스럽지 않았다. 심동춘이 초등학교 교사도 아니었고 나는 아직 아파트도 소유하지 못했지만 나는 내심 성공했다는 뿌듯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단 시간 만에 이루었던 성공은 비슷한 시간 만에 실패로 명함을 바꿨다. 누가 그랬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다. 좌절하긴 아직 너무 일렀다. 다이어트를 하겠지. 자기도 거울을 보면서 느끼는 바가 있을 거야.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주자. 심동춘은 살이 찌기 시작하면서 거울을 거의 보지 않았다. 고로 크게 느끼는 바도 없었다. 허구한 날 쟁반자장을 시켜먹었다. 다이어트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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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는 더 큰 실패를 낳을 뿐이었다. 심동춘의 아버지, 그러니까 당뇨에 이어 합병증까지 찾아온 장인어른이라는 인간의 병원비를 대느라 근근이 저금했던 통장에 구멍이 뚫렸다. 심동춘은 자신이 심청이라도 된 것 마냥 병원비 마련에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까다로운 심사 없이 쉽고 빠르게 돈을 빌려주는 몇몇 대부업체에 이자를 갚기조차 빠듯해지자 나는 ‘포기’라는 망치로 머리를 꽝꽝 두들겨 맞고 실패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덕출이는 열심히 아줌마들의 머리를 말았다. 덕출이의 아내는 학습지에 열심히 동그라미를 쳤다. 틈틈이 네일아트도 배워서 자격증도 땄다고 했다. 덕출이는 제법 돈을 모았는지 동네의 미용실을 정리했다. 더 큰 자리를 얻어 ‘샤기 헤어 and 네일아트’라고 새겨진 간판을 걸고 가게를 새로 열었다. 아파트단지의 입구에 자리한 미용실은 금방 아줌마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덕출이는 여전히 아줌마들의 머리를 열심히 말았다. 덕출이의 아내도 학습지에 열심히 동그라미를 쳤고 남는 시간에 예약을 받아 아줌마들의 손톱에 열심히 매니큐어를 칠했다. 덕출이는 반 지하에서 전세로 집을 얻어 이사했다. 전셋집에 사는 주제에 집들이를 하기는 창피하다며 맥주나 마시자는 전화가 왔다. 나는 찬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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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잘 녹는다는 세제 한통을 손에 들고 덕출이네 집으로 향했다. 제법 무거웠다. 덕출이의 아내는 집을 옮기고 제일 좋은 점이 뜨거운 물이 잘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새집 흉내라도 내려고 드럼 세탁기도 샀다며 웃었다. 지금 내 앞에서 자랑하는 거냐? 덕출이를 통해서 드럼 세탁기를 샀다고 미리 자랑을 했으면 드럼 세탁기용 세제를 사왔을 것 아니냐. 잠을 청하기엔 이른 시간이었으나 덕출이의 아내는 술상을 봐오더니 아침에 일찍 나가야한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한참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술상 옆에 빈병들이 나란히 줄을 이었다. “죽여 버릴까?” “누굴?” “심동춘.” “네 마누라?” “응.” “죽이기 전에 네가 죽을 걸?” “도저히 그 년이랑은 못살겠어.” “살아보니 다 똑같더라. 그냥 살아.” “살아봤는데 안 똑같잖아. 이 븅신아.” “살아보니 다 똑같아. 그냥 살아.” 덕출이는 술에 취했는지 실실거리며 살아보니 다 똑같다며 그냥 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간다는 말을 남기고 일어섰다. 덕출이는 잘 가라는 손짓을 하며 그 자리에 몸을 뉘였다. 문이나 잠그고 자라는 말을 건넸으나 대답이 없었다.

빌라로 들어섰다. 아직도 불이 꺼지지 않은 집은 심동춘이 들어있는 203호뿐이었다. 슬며시 문을 열었다. 돌아왔냐는 인사대신 심동춘의 코고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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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3 | 심동춘 살인미수사건 _ 박주석

가 문틈을 비집고 나왔다. TV는 애국가 1절을 부르고 있었다. 통닭을 시켜놓고 드라마를 보다가 잠들었을 것이다. 주말이 되면 재방송을 본답시고 TV앞에서 또 코를 곯아대겠지. 저번 주에도 그랬으니까. 살을 아주 깨끗하게 발라먹었구나. 그래도 신문지는 깔고 먹었네. 신문지를 오므려 쓰레기봉지에 담았다. 따가웠다. 발바닥에 심동춘의 뱃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작게 부서진 튀김조각들이 밟혔다. 이런 시팔. 드라마도 끝까지 보지 못하는 심동춘. 프라이드치킨을 좋아하는 심동춘. 프라이드치킨보다 쟁반자장을 좋아하는 심동춘. 잘 때마다 코를 고는 심동춘. 아무리 애원해도 이혼해주지 않는 심동춘. 초등학교 교사도 아닌 심동춘. 풍금을 다룰 줄도 모르는 심동춘. 이제는 예쁘지도, 몸매가 잘빠지지도 않은 심동춘. 다이어트를 하지 않는 심동춘. 다른 방법은 없다. 심동춘을 죽여야 했다. 부엌으로 향했다. 행주를 들고 가스레인지에 달린 손잡이를 잡았다. 손에 힘을 빼고 손잡이를 돌려 ‘중’이라고 표시된 부분에 맞춘다. 불꽃은 점화되지 않는다. 중간밸브를 열었다. 애국가 4절이 끝났다. TV가 다시 애국가를 부를 때쯤이면 너의 코고는 소리가 멈추길 바란다. 나는 찜질방에서 자고 곧바로 출근할 테니 기다리진 말고. 이번 주말엔 재방송은 보지 못하겠구나. 잘 가라 심동춘. 옷을 갈아입고 불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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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으로 제법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이런. 창문이 열려있었다.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왔다. 덕출이는 살아보니 다 똑같다며 그냥 살라고 했다. 나는 살아보니 똑같지도 않았고 똑같아보이지도 않았다. 찜질방으로 향했다. 발걸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그렇다고 나는 창문을 닫지도 않았다. 창문으로 여전히 바람이 통하고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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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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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 리

아직, 세 번째 마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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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 개최한 월드컵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들썩이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그 무렵 나는, 지금의 마누라가 된 여자와 함께 트레일러에서 ‘들썩’이고 있었다. 우리나라 경기가 열릴 때면 서울 시청 광장에는 ‘Be �e Reds’가 새겨진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서로 하나가 된 듯 거리응원을 했는데 상공에서 바라본 광장은 빨간 물결로 출렁거렸다. 그즈음 나는, 지금의 마누라와 ‘Be �e Reds’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하나가 되어 출렁거렸다. 월드컵처럼 국가적인 행사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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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7 | 아직, 세 번째 마누라 _ 이나리

전 세계에 알리는 것은 물론, 경제창출의 목적도 가지는데 이러한 ‘월드컵 특수’를 톡톡히 보았던 것 중 하나가 야식배달 업체였다. 서울 시청 광장에서 전철역에서 집집마다 심지어 동네 슈퍼를 들렸다가도 우리 선수가 찬 골이 상대방 그물에 걸리는 순간, 사람들은 온 몸으로 기쁨을 만끽했다. 우리 선수들이 게임이 잘 풀리지 않거나 골이 들어가지 못한 안타까운 순간에는 목청껏 ‘대~한민국’을 외치며 구호와 더불어 손뼉을 치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금세 허기가 졌다. 야식배달 업체는 사람들의 허기를 지나치지 않았다. 배달민족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게 야식배달 업체는 전화 한 통이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그들은 고속도로 휴게소의 구석진 곳에 주차된 내 트레일러에도 친절히 배달해 준 적이 있었다. 그 날은 박지성이 동점골을 넣고 히딩크에게 와락 안겼던 날로 기억하는데 바로 그날, 지금의 마누라는 내게 ‘와락’안겨 있었다. 마누라는 나를 박지성과 같은 스트라이커쯤으로 생각했는지 연신 어시스트를 날리며 자신의 골대에 골은 넣어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그러나 나는 마누라에게 골을 안겨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행여나, 여차하다 어시스트를 받을까싶어, 좁은 트레일러 안에서 요리조리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대표 팀에게는 붉은악마가 있었고 나에게는 지금의 마누라가 있었다. 국가대표팀은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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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드에서 울려 퍼지는 붉은악마의 함성소리에, 나는 지금의 마누라의 요란한 소리에 각각 기적과 같은 ‘골’을 만들어냈다. 우리나라의 기적과 같은 결승골이 들어가는 순간 사람들은 진정 하나가 된 듯 서로를 얼싸안고 함성을 질러댔겠지만 나는 그 기적과 같은 골에 짧은 소리 하나 내고는 금세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내 골은 자살골이었다. 그날, 내가 차버린 골은 점점 그녀의 뱃속에서 축구공만큼 커져가고 있었다.

월드컵이 끝나자 각 방송사들은 ‘월드컵 그 후’에 관한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Be �e Reds’라는 문구를 만든 사람의 인터뷰나 불이 들어오는 악마머리띠가 얼마나 팔렸는지 또는 가장 인기 있었던 Best야식은 무엇이었는가? 월드컵 기간 동안 전국 방방 곳곳 한국의 모습은? 등과 같은 영상이었다. 어떤 아나운서는 프로그램 클로징 멘트를 ‘내년 이맘쯤이면 월드컵 베이비로 인해 출산율이 증가할 것이라는 소식도 들리는데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네요.’라고 말했다. 추측하건데, 16강에만 들어라 하는 심정으로 경기를 지켜보다가 강대국에 맞서 승전보를 울리는 우리 선수들의 활약이 국민들을 흥분하게 만들었고, ‘대~한민국’ 구호에 맞춰 자동차 크랙션을 빵빵 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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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보아도 버스 위에서 태극기를 힘껏 휘날려 보아도 수차례 술잔을 비워 보아도 흥분은 삽시간에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경기 후 주요 장면을 편집해서 보여주는 방송은 사람들의 흥분을 더욱 고조시켰다. 그렇게 남편들은 달아오른 흥분과 열기를 홈그라운드에서 아내들에게 쏟아내었고 같이 축구를 본 아내들로 인해 시너지 효과는 극대화되었다. 그리고 젊은 혈기들은 집으로 가는 대신 모텔을 택했다. 그렇게 남자들은 저마다 국가대표팀의 스트라이커가 된 냥 곳곳에서 그들만의 게임을 펼치며 출산율 증가에 기여하게 되었고 그 중에 내가 속하게 될 줄은 우리나라가 월드컵 4강까지 오르리라고 생각지 못한 만큼이었다.

월드컵이 끝나자, 사람들은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불면증을 호소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반짝 매출 증가를 보였던 야식업체들은 금세 떨어진 매출로 인해 울상이었고 여자들은 야식으로 인해 살이 쪘다며 혹독한 다이어트에 돌입하겠다고 비장하게 말했다. 또한 한순간 주체하지 못한 흥분과 열기를 내뿜었던 젊은 혈기들은 하룻밤을 후회하기도 했으며 계획하지 않았던 임신으로 인해 아내들이 남편을 향한 원망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월드컵 후유증’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여과 없이 보여주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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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게다가 월드컵 특수를 톡톡히 누린 이들이 있었다는데 ‘보이지 않는 손’ 소매치기였다. 빨간 물결로 가려졌던 월드컵의 어두운 그림자가 점점 수면위로 드러났다. 점차 ‘이게 다 월드컵 때문이야’라는 말이 습관적으로 사람들의 입에 올랐고 내 입에서도 불쑥 그 말이 튀어나오곤 했다.

축구와는 워낙 상관없는 인생을 살아온 내가 이번 월드컵에 대해 언급할 수 있었던 것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시간보다 휴게소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던 까닭이었다. 월드컵 직전까지 트레일러 노조의 조합원으로서 회사와 국가를 상대로 유가하락과 회사의 졸속행정을 개선하라 외치며 합법적인 집회에 참여했으나 월드컵이 시작됨과 동시에 집회는 열리지 못했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파업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집회는 월드컵이 끝나고 한 달 뒤 열렸으며 그 사이 조합원장은 공금과 함께 사라졌다. 조합원장의 일과 더불어 여전히 정책을 강구하고 있다고 말만 되풀이 하는 국가와 무단 파업임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압박하는 회사의 횡포에 조합원들의 분노는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나 또한 ‘월드컵 베이비’를 생산해 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분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근 십 년간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가만히 앉아서 이마에 ‘투쟁’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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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적힌 빨간 띠를 두르고 구호까지 외치려니 좀이 쑤셔 견딜 수 없었다. 게다가 조합원장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컸는지 노조 임원진들 사이에서 이견으로 인해 언성이 높아지는 일이 잦았다. “아니, 대체 뭐 하자는 겁니까? 백날 이거 집회 해봤자 뭐하냐고! 아군끼리 싸우고 있는 마당에 제대로 돌아갈 일이 있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아차,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말을 내뱉고 말았다. 때로는 생각만으로 머물게 했어야 하는 말들이 있다.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을 내뱉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갖게 될 테니 말이다. 결국 나는, 조합원장이 되었다.

줄반장 한 번 해보지 못한 내가 어느 한 곳의 장이 되니 왠지 모를 책임감에 빠져 더욱 투쟁적으로 국가와 회사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간간히 집에 들어갈 때면 나의 세 번째 마누라는 점점 불러오는 배를 어루만지며 ‘아빠가 너를 위해 큰일을 하고 계신단다’하며 마치 전쟁터의 장군마냥 치켜세웠다. 우리가 무기한 파업을 선언하자, 다른 운송업계까지 파업을 선언하며 투쟁에 돌입했고 결국 수출입에 제동이 걸렸다. 그러자 국가는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책을 마련했으며 회사에서도 우리의 요구조건을 충족시킬 만한 타협안은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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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들은 조합장이 바뀌고 나니 일이 술술 풀린다며 나를 치켜세웠다. 뉴스에서는 사람들이 월드컵 후유증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다고 말했고 나도 곧 제자리를 찾을 것만 같았다.우리는 회사와 극적 타협을 했다. 이후 조합원들의 트레일러가 하나 둘씩 굴러가기 시작했고 노조의 일을 마무리하는 대로 나도 곧 그렇게 될 줄 알았지만 시동을 미처 켜기도 전에 무단 파업의 책임자로 회사로부터 고소당했다. 경찰서를 몇 차례 들락거리고 나니 결국 무단파업의 책임자라는 타이틀과 함께 회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회사에서는 콩밥 먹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알라는 말과 함께 봉투 하나를 쥐어줬다. 결국, 나는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렇게 내 트레일러의 바퀴는 멈추고 말았다.

텔레비전에서는 K리그 경기중계가 한창이었다. 축구 해설자와 캐스터는 귀에 익은 축구선수들의 이름을 대며 중계하고 있었다. 월드컵 시즌 때의 절반도 미치지 못한 관중들이 낯익은 몇몇의 이름을 대면서 응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카메라는 틈틈이 그의 모습과 관중들의 응원하는 모습을 비춰주었다. 부엌에서 그릇들을 부딪치던 마누라는 어느새 내 옆에서 그 중 하나의 이름을 대며 ‘어머나’를 연발하고 있었다. 그는 월드컵이 낳은 스타 플레이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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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는 감탄사 뒤에 ‘멋있다. 잘생겼다. 그런데 축구까지 잘하네’하는 말들을 덧붙였다. 어쨌든 우리는 무료한 오후 시간을 축구중계와 함께 보내고 있었다. 축구가 끝나고 마누라는 나를 졸라대기 시작했다. 말의 요지는 직접 축구장에 가서 그가 나오는 경기를 보고 싶다는 거였다. 그를 알고 축구를 알았다느니 매일 집에만 있으니 산모 우울증에 걸릴 것 같다느니 하는 번지르르한 말로 나를 꾀어냈다. 나는 뱃속 아이를 생각해서 조금만 참아라, 아직까지는 조심해야할 달수이니 행여나 찬바람이라도 들어 감기라도 걸리면 약도 못 먹고 고생이니 하는 말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마누라는 안방 문을 나가면서 뾰로통한 목소리로 ‘혹시, 당신 질투하는 거에요?’하며 부엌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머쓱해진 마음에 채널을 돌려버렸다.

실직 후, 집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본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을 보거나 책을 보거나. 그것들은 트레일러 기사를 하면서도 틈틈이 해왔던 것이다. 달라진 것은 손바닥만한 화면이 19인치 화면으로, 기사 일을 할 때에는 하루에 서너 페이지 읽었던 책이 하루에 한 권 꼴로 늘어나게 되었고 그것들이 하루 일과가 된 것 뿐이었다. 마누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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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근이 내게 다가와서 내가 읽고 있는 책을 읽어 달라고 말했는데 마누라는 그것을 태교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마누라의 태교에 동참하지 못했다. 내가 읽는 책은 주로 무협지나 탐정소설이었는데 그런 내용들은 태교에 별반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마누라는 책을 읽어 주지 않자 곶감 말리듯이 잔소리로 나를 말렸다. 하는 수 없이 한창 읽고 있던 책의 내용을 대충 마누라에게 말해주었다. ‘프랑스의 유명한 도둑의 이야기다. 경찰을 농락하며 수배 중에도 끊임없이 절도를 저지르지만 결국엔 도둑이 경찰에게 잡힌다. 도둑을 수사하면서 생각하지 못한 도둑들의 심리나 수사망을 피해간 그의 행적을 알게 되면서 경찰들은 경악한다. 그동안 도둑생활의 노하우를 경찰에게 전수하여 결국엔 도둑 잡는 도둑이 되어 한국으로 따지면, 프랑스의 경찰서장이 된 내용이다’마누라는 이야기를 다 듣고는 ‘어쨌든 경찰서장이면 엄청 높은 거잖아요. 그런 책이라면 태교에 도움이 될지 몰라요’하는 무식한 말들을 쏟아냈다. 그러고는 ‘당신이 우리 휴게소 식당에 책을 끼고 들어오는 모습에 반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뱃속에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요.’하며 단추 구멍만한 눈으로 추억에 젖었다. 그런 마누라를 보자, 마치 과속방지 턱에 걸린 바퀴처럼 내 인생이 덜컹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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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다 월드컵 때문이다.

며칠 후, 우리는 옆 도시인 수원 월드컵 경기장 응원석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제 스포츠뉴스에서 마누라가 좋아하는 축구선수가 해외로 이적할 것이라는 인터뷰가 나간 후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마누라는 올해가 그 선수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면서 나를 볶아댔었고 하는 수 없이 뒤뚱거리는 마누라를 이끌고 축구장에 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인터뷰를 본 사람이 많았는지 평소보다 관중석이 꽉 차 있었다. 마누라는 그 선수가 전광판에 소개되자 마누라는 푸짐한 몸을 들썩이며 그의 이름을 연발했다. 그래봤자 들리지도 않을 텐데. 마누라가 좋아하는 축구선수는 ‘진공청소기’라는 별명답게 상대방 선수의 테크닉을 차단시켜 모두 빨아들였다. 홈그라운드에서 열린 그의 활약에 팀은 승리했고, 그는 정말 마지막 경기였는지 축구장 한 가운데에서 관중석을 향해 큰 절을 날렸다. 마누라는 감동한 것처럼 코를 훌쩍거리며 ‘어떻게요 흑흑’하며 내게 위로를 바라는 눈치였다. 그런 마누라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코를 훌쩍거리며 감동한 마누라의 모습이 아니라 그녀와 함께 축구장 관중석의 한 귀퉁이에 앉아있는 것이, 축구공보다 더 불러올 마누라의 배가 낯설음과 동시에 무겁게 느껴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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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관중들이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는 마지막으로 몇 개의 축구공을 관중석으로 차고 있었다. 마누라는 무거운 몸을 들썩이며 우리 쪽으로 날라 오는 공을 잡으려고 했지만 본능적으로 그 공을 요리조리 피해 버렸다. 그날 우리는 오랜만에 외식을 하기로 했다. 마누라는 수원에 오면 무조건 갈비를 먹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꾸만 고기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니 틀림없는 아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마누라는 고기뿐만 아니라 육 ·해 ·공 모든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입안으로 들여보냈다. 수원시내의 갈비 골목을 들어서자 음식점 앞에 많은 호객꾼들이 손님들을 유혹했다. 간판에는 저마다 원조임을 내세웠지만 우리는 ‘수원에서 세 번째로 잘 하는 집’이라는 간판이 걸린 곳으로 들어갔다. 세 번째라는 단어가 원조 보다 진실해 보인다는 나의 주장이었다. 종업원은 숯불을 넣고 불판 위에 고기를 올려 주었다. 고기는 올려짐과 동시에 연기를 뿜으며 지글지글 익어갔다. 마누라는 불판 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종업원은 마누라의 배를 보고는 막달에는 더 잘 먹어야 된다고 말했다. 피식 웃음이 났다. 그리고 고기를 뒤집고 나서는 ‘엄마 아빠가 금술이 좋은가봐. 늦둥인가 봐요. 요즘에 월드컵 때문에 늦둥이가 많이 생겼다고 하는데 호호호 월드컵 베이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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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그거죠?’하며 남의 가정사를 제 맘대로 작성했다. 숯불만큼이나 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생각해보니 종업원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만 했다. 임신 전에도 남산만한 배의 소유자였던 마누라의 배는 임신 사 개월인 배를 막달로 둔갑시키기에 충분했고 게다가 내 나이 마흔에 마누라는 세 살 적었으니 충분히 늦둥이로 보일만 했다. 우리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정직하게 묻어 있었다. 지금의 마누라는 내게 세 번째 마누라였지만 뱃속의 아이는 내게 첫 아이였고 마누라도 임신은 처음이라고 했다. 종업원의 말을 듣고 나니 아이가 태어난 후에 엄마, 아빠가 늙었다고 놀림을 받기 전에 꾸준한 관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잘려진 고깃덩어리들이 마누라의 젓가락에 걸린 채 그녀의 입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어느덧, 집에서 펀들펀들 거린지도 한 달이 다 되었다. 시간은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 바퀴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오늘도 우리가 사는 반 지하방 창문에 얼룩 한 점 없이 어둠이 내렸다. 그 시각 나는, 일일드라마가 끝나고 어제처럼 탐정 소설에 한창 빠져있었고 내 세 번째 마누라는 옆에서 뜨개질에 한창이었다. 마누라는 간간히 내 몸에 뜨개질을 대어 보며 사이즈를 재고 있었고 이 스웨터로 한 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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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을 거라며 기대해도 좋다고 말했다.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는 했지만 마누라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 어둠이 내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한창 소설에서 범인이 밝혀지려고 하는 찰나, 현관문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마누라는 뜨개질을 손에 쥔 채 현관문 앞으로 나갔다. 몸이 무거운 마누라를 너무 부려먹는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방에서 현관까지는 몇 보 되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소설에서 중요한 대목을 읽고 있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 곧이어 현관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마누라가 밖으로 나갔다. 문 밖에서 마누라의 목소리와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다시 소설 속으로 빠져들어 결국 범인을 알아냈다. 범인은 전혀 뜻밖의 인물이었다. 역시 명탐정 ‘탐’이었다. ‘탐’은 소설속의 탐정 이름이다. ‘탐’은 모두가 아니라고 했을 때 뜻밖의 인물을 지목하여 수사해 나갔는데 결국 ‘탐’이 지목한 인물이 범인이었다. 책을 다 읽고도 여운에 취해 ‘이야’하는 탄식을 내뱉음과 동시에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마누라는 손에 든 뜨개실뭉치처럼 뭉개진 얼굴을 하며 방으로 들어왔다. “휴, 어떡해요. 엄동설한에 쫓겨나게 생겼어요,”마누라가 주인집 여자의 말을 풀어놓았다. 이 집이 재개발에 들어가게 생겼으니 이 주 안으로 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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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줄 것. 보증금에 이사 비용까지 섭섭지 않게 챙겨 줄 테니 나중에 얼굴 붉히는 일 없이 나가 주었으면 좋겠음 하는 짧지만 우리에게는 호환마마, 토네이도 보다 더 강력한 말이었다. 주인집 여자의 말들이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겨붙어버렸다. 이럴 때 해결사 명탐정 ‘탐’이 나타났어야 하는 대목인데. 탐은커녕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세 번째 마누라의 임신과 나의 실직으로 인해 마누라의 안성 집에 머무르기는 했으나 그것은 일시적인 정착이었다. 비록, 전셋집이기는 했으나 나에게도 집은 있었다. 경기도 시흥에 위치한 다세대 연립주택이었는데 앞으로 3개월 후 계약기간이 끝나는 집이었다. 마누라의 전세금과 내 전세금을 보태어 안성에 집을 마련하려던 것이 익명의 누군가의 계획으로 인해 무너져버렸다. 익명의 누군가의 계획이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이곳을 무너뜨리기 전에, 주인집 여자의 얼굴이 붉어지기 전에 우리는 옮겨져야 했다. 이삿짐을 정리하고 보니 내 짐은 물론, 마누라의 짐도 많지 않았다. 마누라는 세간이 이렇게 없었냐며 모두 증발해버린 것 같다고 말했다. 어쨌든 심부름센터를 이용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 같았다. 이삿짐 보따리를 하나씩 대문 밖으로 옮기고 있을 때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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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집 여자가 내려왔다. 여자는 보증금과 이사비용을 건네주며 잘 살라고 말했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붉히지 않고 그 집을 나올 수 있었다. 이삿짐을 밖으로 거의 옮겼을 때, 골목 초입으로 용달차 하나가 들어왔다. 우리가 옮겨질 차였다. 용달차 기사를 하고 있는 후배가 이삿짐센터 대신에 시흥까지 짐을 옮겨주기로 했다. 갑작스레 추워진 날씨 탓에 나와 후배는 서둘러 짐칸에 짐을 싣고 차에 올랐다. 마누라가 두꺼운 코트로 온 몸을 감싼 탓에 조수석이 비좁았다. 나는 마누라의 코트 자락을 요리조리 피하며 공간을 마련했다. 마누라는 차에 오르자마자 뜨개질에 한창이었다. 후배가 시동을 걸고 골목길을 빠져 나가는 순간 과속 방지턱에 걸렸는지 우리는 이삿짐과 함께 덜컹거렸다. 마누라는 곧 고속도로에 들어서고 얼마 후 코까지 골며 잠에 빠졌다. 손에는 뜨개질 하던 것이 들려있었다. 후배는 마누라를 힐끔 보더니 내게 ‘그 코에 형님이 낀거유, 아님 형수가 낀거유?’하며 실실 웃었다. 나는 ‘이게 다 월드컵 때문이지 뭐’하는 무책임한 대답을 내놓았다. 고속도로가 막히지 않은 탓에 한 시간 후 시흥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전의 마누라들이 쓰던 물건이 남아있을까 싶어서 어제 급하게 집을 청소 해놨기 때문에 짐만 제자리에 놓으면 되었다. 시흥 집에 있는 가전제품이나 가구들을 그대로 쓰기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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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이삿짐이라고 해봤자 보따리를 옮기는 수준이었다. 집으로 오르는 몇 개의 계단이 어제 밟았는데도 낯설게 느껴졌다. 후배와 서너 번 계단을 오르니 거실 가득 짐이 옮겨졌다. 조수석에 있던 마누라도 어느 새 집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마누라는 다행히 시흥 집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마누라는 집 안의 문이라는 문은 다 열어보고는 다른 집을 구할 필요 없이 여기서 살아도 괜찮겠다는 말을 늘어놓았다.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렸는지 바로 윗집에 살고 있는 주인집 남자가 인기척을 냈다. 마누라는 호들갑스럽게 ‘잘 부탁드려요’하며 세입자 특유의 본능으로 주인집 남자를 알아보았다. 남자는 마누라의 푸짐한 배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이번이 세 번째잖아’하는 궁금증 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남자의 호기심에 ‘저희 재계약 하겠습니다’하는 말로 남자의 시선을 돌리려고 애썼다. 남자는 시선을 돌리기는커녕 ‘작은 고추가 매운 법이지. 이번엔 임신까지. 자네, 재주 있네 그려’하는 표정을 지으며 조만간 계약서를 가지고 오겠다며 나갔다. 그 모습을 본 후배는 민망했는지 ‘갈게요’하며 서둘러 나갔다. 마누라는 ‘식사도 안하고 보내서 어떻게요’하며 배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허기진 뱃속이 금세 사그라졌다.전에 다니던 운송회사에서 위로금이라는 명목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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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쥐어준 퇴직금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언제까지 집에서 펀들펀들 거리며 마누라의 배만 쳐다볼 수 없는 형편이었다. 마누라의 배는 이미 축구공보다 커져 있었고 조만간 터져버릴 것 같아 조마조마 했다. 마누라는 직접적으로 취직얘기는 꺼내지 않았지만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올 때면 종류별로 무가지신문을 챙겨오곤 했다. 그렇게 무협지 대신에 무가지 신문을 넘기면서 에누리 없는 현실의 출발선에 들어서고 있었다. 다행히 시흥에는 공장이 많았기 때문에 무가지 신문에는 구인광고로 빈틈이 없었다. 문제는 신문을 넘길수록 빈틈은 내게 있었다는 점이다. 업체들이 내건 자격조건에 부합되는 곳은 얼마 되지 않았다. 대부분 소규모 공장지대인 시흥에서는 나이는 많고 경력이라고는 십 오년 트레일러 기사일이 전부인 나를 기꺼이 맞아주는 곳은 없었다. 사실, 운송업계로 재취업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운송업계도 워낙 손바닥만해서 불법파업 주도자로 낙인찍힌 나를 받아줄리 없었다. 신문을 넘길수록 내가 가진 빈틈에 빠져버리는 느낌이었다.며칠 동안 방안에서 무가지 신문을 뒤적였던 탓에, 신문지 냄새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머리를 시킬 겸 점퍼를 걸쳐 입고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에는 주인집 빨래들이 한 줄에 걸쳐져 겨울바람에 방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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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었다. 옷가지 가운데마다 빨래집게들이 매섭게 집혀있었다. 점퍼 주머니로 손을 넣어 담배를 꺼냈다. 마누라가 임신하면서 끊었던 담배였다. 담배를 한 모금 뱉고 나니 겨울 밤 허공 위로 연기가 멀리멀리 날아갔다. 연거푸 연기를 들어 마시고 내보냈다. 그때 점퍼 주머니 속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대리운전 광고 문자였다. 이전에도 몇 번 ‘경기도 전 지역 이만 원에 모십니다’와 더불어 ‘기사모집’이라고 찍힌 솔깃한 문자를 받았었다. 새벽마다 배부른 마누라를 두고 나가자니, 그마저도 못할 짓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이전의 마누라들처럼 ‘당신은 나를 너무 외롭게 만들어’하는 말로 나를 떠나갈 것이 분명했다. 다시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삭제했다. 그새 다 타버린 담배는 꽁초가 되어 재떨이가 된 꽁치 통조림 깡통 속으로 들어갔다.

아침부터 마누라는 네모난 좌식 상이 휘어질 정도로 음식을 만들어 내왔다. 내가 기억하는 한 아무날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행여 마누라에게 특별한 날일까 싶어 조심스럽게 물어봤지만 마누라는 아무날도 아니라고 했다. 다만, 당신이 요즘에 취직 때문에 입맛을 잃은 것 같아서 솜씨를 발휘해보았다고 말했지만 이미 두 번의 마누라들을 경험한 나로서는 갑자기 달라진 반찬은 절대 공짜가 아니란 것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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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었다. 휴게소 식당일을 오래한 마누라의 솜씨는 녹슬지 않아 보였다. 상 위에 놓인 고등어가 적당히 그을려 있었고 언제 담갔는지 시큼한 오이소박이 향이 콧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게다가 생태찌개에 불고기에 오징어 볶음까지. 통장의 잔고는 무사하겠지? 어쨌든, 마누라 얼굴은 삼 년, 음식솜씨는 삼십 년이라고 했던가. 이전의 두 명의 마누라보다 외모는 덜했으나 음식솜씨는 최고였다. 게다가 식사를 마치고 마누라는 ‘후식드세요’하며 바구니에 귤까지 담아왔다. 마누라는 귤껍질 같은 손으로 귤을 까서 기어이 내 입에 넣어주었다. 그리고는 텔레비전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 앞에 슬며시 밀어 넣었다.

핸드폰 조립 공장은 집에서 버스로 15분 되는 거리였다. 그곳은 어제 아침 마누라가 빨간 색으로 별표 친 구인지에 나온 곳이었다. 어제 오후, 공장에 구인광고를 보고 전화 드렸다고 말하니 내일 ‘점심식사 후에 오세요’ 하며 툭 전화를 끊었다. 급하게 전화를 끊은 것을 보니 많은 구직자들이 전화를 했거나 공장이 바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전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게다가 점심식사 후란 몇 시란 말인가? 사회생활이라고는 기사일 밖에 해보지 않았는데 그 때 점심식사는 시간이 날 때 간간이 해결했기 때문에 도통 몇 시에 오라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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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이 잡히지 않았다. 마누라는 두 시쯤 공장에 가보면 될 것이라고 했다. 넉넉히 삼 십분 전에 나가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 말에, 마누라가 나를 밀어내고 있다는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공장에 도착하니 두시가 채 안 됐다. 수위실에 면접 보러 왔다고 말하자 공장 안으로 들어가서 좌회전 우회전 할 필요도 없이 계속 직진하면 사무실이 보인다고 말했다. 수위가 가르쳐준 대로 가보니 공장 안, 맨 끝에 사무실이 있었다. 사무실 문을 열자 남자 둘이 네모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다. 공장장으로 보이는 남자는 밖에서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했다. 문 앞에 서성이는 동안 공장 안 모습이 펼쳐졌다. 어림잡아 백 평은 되어 보이는 곳에서 사람들이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소리라고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고 파란빛이 도는 작업복을 모두가 입고 있었다. 등 뒤에서 사무실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공장장은 들어오라고 말했지만 나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다. 공장을 빠져나왔는데도 기계소음이 귓가에 윙윙 거렸다. 도저히 덜컥이는 버스를 탈 수 없어 빠른 걸음으로 공장 지대를 빠져나왔다. 머릿속에는 마누라가 친 빨간 별 수만 개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대로 바로 집으로 돌아간다면 마누라의 눈 속에 박힌 별들이 내게 빛을 쏘아댈 것이 분명했다. 집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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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으로 목적 없이 걷기 시작했다. 걷다 보니 시흥 시내에 들어섰다. 시내에는 대형 마트가 있어서 전 마누라들과 자주 왔던 곳이었다. 얼핏 보아도 시내는 많이 변해 있었다. 단골 이발소는 분식집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고 제빵사 이름을 간판에 걸었던 빵집은 커피전문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걷다 보니 바뀐 간판들이 많았다. 간판들은 형형색색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내 눈에 뜨인 간판은 따로 있었다. 백색 바탕에 굵은 검은 글자체의 간판이었는데 형형색색으로 치장된 간판들 사이에서 더욱 뚜렷이 보였다. 간판에는 ‘PIA 한국탐정 시흥지부’라고 적혀 있었다. 탐정? 요즘에는 심부름센터도 간판 걸고 영업하나?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그리고 심부름센터를 생각하니 두 번째 마누라의 일이 떠올라 걸음을 재촉했다. 재촉하는 걸음에도 두 번째 마누라 생각이 가라앉지 않았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걸음을 되돌려 백색간판에 시선을 올렸다. PIA? 그건 명탐정 ‘탐’의 직업인데, 가만, 심부름센터라면 정식 허가가 나지 않았을 텐데, 저렇게 간판까지 걸고 버젓이 영업한다면 정말 한국의 PIA? 자세히 보니 열린 창문에는 ‘요원 수시모집’이라고 테이핑 되어 있었다.

PIA는 사설탐정의 줄임말이었다. 그동안의 탐정소설에 수없이 등장한 탐정들은 대부분 외국의 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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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소설 안의 내용을 빌리자면, ‘PIA는 인력부족으로 인해 수사에 어려움을 겪는 경찰과 수사를 공조하거나 기업 간의 스파이들을 추적하거나 혹은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주기도 하는 심부름센터와는 전혀 다른 직업이었다. 외국의 경우에는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때로는 경찰이 오랫동안 미해결 난제로 방치해 놓은 사건들을 수사하기도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에는 경찰의 수사력을 통탄하며 PIA를 도입하자는 의견은 있었으나 아직까지는 정식으로 법이 통과되지 않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어쨌든 휴대폰공장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요원이 되는 편이 나았다. 휴대폰 공장에서 일하다가는 휴대폰이 되던지 기계가 되던지 둘 중 하나가 될 것만 같았다. 태어날 아이를 생각한다면, 아버지가 공장 근로자보다는 탐정인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되돌린 발걸음이 어느새 탐정 건물 앞으로 성큼 다가서 있었다. 탐정 사무실은 3층에 있었는데 한 층을 오르고 나니 혹시나 심부름센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그때 휴대폰 진동이 요란하게 울렸다. 수신자 이름에 마누라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연신 울리는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는 서둘러 사무실로 올라갔다.

3층에는 탐정사무실과 노래방이 있었다. 노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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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아직 영업을 시작하지 않아 복도 전체는 조용했다. 탐정 사무실 문 옆 벽에는 간판에 적혀있던 글씨들이 축소되어 붙어 있었다. 글자 하나하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정말일까? 하는 생각에 갸우뚱거렸다. 휴대폰에서 짧은 진동이 왔다. 마누라의 부재중 전화를 알리는 진동이었다. 휴대폰 전원을 끄고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 문을 두드렸다.

사무실 분위기는 예전에 심부름센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무실에는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 한 명과 삽 십대 초반의 남자 한 명이 있었는데 그들 모두 말쑥한 정장 차림이었다. 심부름센터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의 옷차림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책상 옆에 태극기가 걸려 있었고 옆에는 PIA마크가 새겨진 깃발이 있었다. 의자에 앉아서도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자 내 또래의 남자는 “아직도 심부름센터로 의심하고 계신가요?”하며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남자의 말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남자는 말을 이었다.“뭐. 선생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 오시는 분 대부분이 처음에는 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찮습니다. 아직까지는 이쪽 분야에 대해 모르는 분도 많고, 호기심에 찾아오는 분들이 대부분이죠, 남자들이 그렇잖습니까? 탐정에 대한 호기심.”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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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덧붙여 아직 국회에 PIA가 승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거의 임박했으며 이곳에서 시범적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자의 말을 들으니 혹시나 했던 마음들이 사라져버렸다. 남자는 말을 끝내고 명함을 건네주었다. 남자의 명함에는 ‘탐’이라고 적혀있었다. 내게는 익숙한 이름이었다. 남자는 아니, 탐은 책상 앞에서 무언가 뒤적이는 남자를 소개시켜주었다. 그는 중국에서 파견 나온 ‘챙’이라는 중국인이었다. 소개를 받은 챙은 두 손바닥을 모으며 중국식 인사를 했다. 중국 무협지에서 본 장면이었다. 나도 자연스럽게 챙에게 중국식 인사를 했다.“아이고. 오시는 분들마다 의심이 많아서 저희 소개만 했네요. 요원이 되고 싶다고요?” 남자는 까만 뿔테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네. 제가 지금 구직 중이라서요. 몇 달 전에 실직을 했고, 게다가 제가 의심도 많고, 탐정에 관심도 많고......시켜만 주신다면 자신도 있고요.” 말해 놓고 보니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 말이었다.“그럼 이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죠?” 탐은 어느새 노란 파일을 손에 들고 내가 하는 말을 받아 적고 있었다.“불과 몇 달 전까지 트레일러 기사를 했습니다. 사정이 생겨서 그만 두게 되었고요.” 조합원장 감투를 쓰고 불법파업을 주동했다는 일은 혹시나 요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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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에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해서 ‘사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가족관계는 어떻게 되시나요? 뭐, 남다른 가정사가 있다면 그것도 좋고요. 요원도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필요하거든요” “지금 마누라가 임신 중이고, 세 번째 마누라인 것도 남다른 가정사가 되나요? 허허허. 아무래도 기사 일을 하다 보니 집에 자주 들어가지 못했고 남자 품이 그리웠던지 이전의 마누라 둘 모두 바람이 났었죠. 첫 번째 마누라는 하도 이혼을 해달라고 해서 해줬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남자가 있었더라고요. 두 번째 마누라는 제가 직접 심부름센터에 의뢰해서...... 모텔을 급습했죠. 법정에서 당당하게 말하더군요. 외로웠다고요.” 두 번째 마누라 이야기를 할 때에는 그때의 기억이 스쳐서 짐짓 울컥했다. 탐은 괴로운 기억이었겠다며 요원 역할을 정할 때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말했다. “혹시 중국어는 할 줄 아세요?”“아뇨. 중국어를 못 하면 요원 자격이 없나요?” 아, 이럴 줄 알았다면 지금의 마누라 옆에서 일하던 중국 동포와 만났어야......“하하하, 아닙니다. 물론 중국어를 하시면 바로 중국파견을 보내드릴 수가 있어서요. 그리고 저희가 요원 양성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중국어를 가르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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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습니다. 중국에 한국기업들이 많이 있잖습니까? 가지 많은 곳에 바람 잘 날 없다고. 중국 쪽에 일이 많아서요.”중국으로 파견을 나간다면 태어날 아이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돈을 들여서 중국 유학을 가는 마당에 파견근무를 나가면 아이는 자연스레 중국어를 익힐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탐은 책상으로 가서 서랍을 뒤적이고는 ‘중국어 첫걸음’이라는 책을 내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챙이 중국어를 가르쳐 줄 것이며 정식 요원이 되기까지는 몇 개의 테스트를 거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일 아홉시까지 사무실로 나오라고 말했다. 아직 정식 요원이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마음은 중국에 있었다. 손에는 ‘중국어 첫걸음’이라고 적힌 책이 들려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마누라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면접은 어땠는지, 휴대폰은 왜 꺼져있는지, 이 시간까지 대체 어디에 있었는지 맹수처럼 물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내일부터 공장에 출근하기로 했으며 앞으로 작업하게 될 일도 배우느라 시간이 늦어졌다고 말했다. 휴대폰은 배터리가 부족해 꺼져버렸다고 둘러댔다. 정식 요원이 되고 난 뒤에 말해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PIA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마누라에게 설명을 늘어놓자니, 것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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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는 요즘에는 초저녁부터 잠이 쏟아진다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방이 두 개인 것이 다행이었다. 작은방으로 들어가 점퍼를 벗자 중국어 책이 모습을 보였다. 마누라가 의심할까 해서 집에 들어오기 전에 한 행동이었다. 임무완수. 어쨌든 나는 저녁도 거른 채, ‘중국어 첫걸음’을 떼고 있었다. 오래전에 굳어 버린 머리를 원망하며.

* 텔레비전에서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이 열리고 있었다. 이번 올림픽에 ‘중국을 걸었다’라는 중국은 개막식부터 웅장함과 화려함의 극치였다. 3년 전, 굳은 머리를 원망하며 ‘중국어 첫걸음’ 책으로 익힌 중국어는 어느새 자막 없이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향상되었다. 아직, 세 번째 마누라는 중국어에 익숙지 않아서 내 통역에 의존하고는 했다. 마누라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던 내 첫 아이는 어느새 걸음마 연습에 한창이었다. 요새는 말문이 트였는지 옹알옹알 거렸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그것이 중국어라는 점이다. 그리고 아이는 남자 아이였고 주위에서 아빠를 더 닮았다고 했지만 아직, 아이의 얼굴은 완성되지 않았다. 마누라는 아이가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을 닮아간다며 피는 속일 수가 없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이 씨가 될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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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했다. 어쨌든, 나는 중국에 건너와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탐정 사무실의 ‘탐’이 말했던 것처럼 중국에는 한국기업들이 많았고 한국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서 나는 일이 많았다. 얼마 전, 올림픽을 취재하러 온 한국 기자들을 만나 인터뷰까지 하게 되었다. 그들은 중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한국 사람들의 열기도 대단하다며, 관광객들을 위해 현재 중국의 상황에 대한 인터뷰였다.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쑥스러워 마다했지만 마누라는 식당에서 인터뷰를 한다면 공짜로 가게 홍보가 될 것이라고 부추겼다. 결국 마누라의 성화에 못 이겨 인터뷰까지 하게 되었다. 우리 식당의 간판 앞에서 말이다.마누라와 나는 ‘중국에서 세 번째로 잘하는 한국식당’이라는 식당을 열어 생활하고 있다. 사방이 빨간 간판인 중국에서 백색 간판에 굵은 글씨로 까맣게 쓰인 우리 간판은 유독 눈에 띄었다. 결국 나는 탐정이 되지 못한 채, 가게를 운영하며 살고 있다. 시범 PIA사무실임은 내세웠던 그곳은 내가 임시 요원이 된 지 3개월 만에 불법 심부름센터로 고발당했고 경찰과 긴밀한 협조는커녕 배운 것이라고는 정식 요원의 기본기라는 도청과 미행이었다. 도청과 미행으로 충분히 증거가 확보가 되면 더욱 확실한 증거를 위해 모텔을 급습하기도 했다. 가끔씩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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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을 나가기도 했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택시 운전기사인 의뢰인이 마누라를 모텔에서 급습한 일이었다. 의뢰인의 마누라는 급습한 모텔에서도 당당하게 외로웠다란 말을 연발하며 통곡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두 번째 마누라의 모습이 떠올라서 의뢰인보다 더 흥분해 버리고 말았다. 의뢰인은 그때의 내 모습처럼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고 그날 소주잔을 기울이며 의뢰인을 위로했었다.‘이봐요. 당신에게는 아직 첫 번째 마누라일 뿐인데 아직 죽지 않은 사내를 달고 뭘 그렇게 낙심하십니까? 앞으로 당신에게 몇 번째 마누라가 더 생길지 모르는 일이니 세상 다 산사람처럼 행동하지 마시고. 혹시 모르죠 당신 부인 말처럼 당신이 택시 바퀴를 굴리는 동안 마누라를 외롭게 했을지도 말입니다.’ 더 이상 한국에서는 할 만한 일이 없다고 생각해서 세 번째 마누라와 중국으로 건너왔다. 마누라는 며칠 전부터 음식을 넉넉히 만들어야겠다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번 올림픽을 계기로 잠시 주춤했던 매상을 올려야겠다며 올림픽 특수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정작 내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올림픽 특수는 따로 있었다. 낡았다고 생각했던 중년의 몸이 아직도 들썩이고 있다. 아직, 세 번째 마누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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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새벽 세 시를 넘은 시간이었다. 가로등 빛은 방안 대략의 내용물들을 지나 내 머리맡까지 뻗어있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방 깊숙이 차올랐다. 창문을 닫아야 해결될 문제일 것 같았다. 잠기운에 둔해진 몸을 억지로 일으켜 창문으로 향했다. 무의식적으로 목소리의 얼굴을 찾았다. 하지만 목소리만 거리에 겉돌 뿐 목소리의 얼굴은 없었다. 호기심에 잠을 잊은 채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잎이 없는 긴 가로수와 가로등 사이로 두 개의 그림자가 늘어져 있었다. 분명 내 방안에 들여오던 목소리의 주인일 것이다. 두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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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그림자는 엉겨 붙어 하나의 그림자로 변했다가, 곧 본래의 형태로 변하기를 반복했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점점 살기 묻어났다. 그 살기는 내방 까지 전해 졌다. 소름이 돋았다. 문득, 좋지 않은 느낌의 정적이 흘렀다. 내 숨소리와 눈꺼풀의 깜박임까지 조심스러워 질 정도의 적요. 그림자를 주시했다. 그림자들은 하나의 괴기한 형체로 가만히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짧은 정적이 흘렀다. 괴기한 형체의 그림자가 너울너울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림자 하나가 빠져나갔다. 그 뒤, 그림자는 더욱 형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것은 하나의 부동(不動)의 물체 같기도 혹은, 가로수와 가로등 사이를 나누는 하나의 선 같기도 했다. 휴대폰을 열어 보았다. 새벽 네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소리가 사라지자, 그림자도 멈췄고, 누군가 불을 꺼버린 것처럼 갑자기 방안이 어두워졌다. 창밖도 마찬가지였다. 가로등이 모두 꺼져있었고, 듬성듬성 불빛이 번져있던 도로변 주택의 창문에도 불은 꺼져있었다. 또, 정전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소란스러운 아침이었다. 경찰차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거리와 내 방안을 술렁이게 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창문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이른 아침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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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주변에 모여 있었다. 그중에 목소리가 큰 할머니는 하 씨가 변을 당했다는 말을 오는 사람마다 중계를 해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혀를 끌끌 차는 예의도 잊지 않았다. 경찰은 사고 현장에 흰색 스프레이로 선을 그어 현장표시를 했다. 흰색 스프레이가 잘 나오지 않는지 경찰은 신경질적으로 스프레이를 흔들었다. 가로수와 가로등 사이로 흰 선이 생겼고, 출입금지가 적힌 띠가 둘려졌다. 그 지점은 새벽에 내가 본 그림자의 위치, 그리고 움직이지 않았던 그림자의 위치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무수한 상상과 추측을 난무하고 공유하며 경찰보다 면밀히 사건현장을 주시하고 있었다.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 알람이 울리면, 내 삶이 아닌 현실이자 끔직한 일상이 시작되었다. 기다렸다는 듯 문자가 쏟아졌다. 현재 KOSPI, KOSDAQ, KOSPI200 지수부터, 다우, 나스닥, 환율까지. 하지만 제대로 꼴이라도 갖춘 건 하나도 없었다. 출근 시간까지는 두 시간이 남았다. 하 씨가 죽던 김정일이 죽던, 회사 사장이 고혈압으로 목덜미를 부여잡으며 죽지 않는 이상, 난 출근을 해야 한다. 아니 회사 사장이 죽더라도 영안실에서 단체묵념을 하고 어째든 회사로 가야한다. 먹고는 살아야 한다.

회사 내에서는 며칠째, 회사를 나오지 않은 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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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 대한 입방아를 찢기 바빴다. 옆자리에 앉은 김대리는 하대리의 주식이 반토막이 났다는데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지난 날 하대리가 돈을 꿔달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거절을 했고, 그 후로 은행이며, 일분이면 오케이를 외치는 그런 곳에서 돈을 빌려 주식에 몽땅 박았다고 김대리가 정의했다. 덧붙여 아마 한강에서 뛰어내리지 않는 이상 못 버틸 것이라 단언했다. 여기저기서 반토막난 주식을 보며 한강을 찾으니, 봉이 김선달이 환생해 번호표를 나눠 주며 노잣돈을 받아내면 그야말로 불황기에 황금기를 보내겠다는 미친 상상을 해본다. 김대리는 내 어깨를 툭 건드리며 자기 말 듣고 있냐며 되물었다. 듣지 않으려고 한 상상을 이내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대리의 주식이 반토막 나든 말든, 일단 내 주식도 반토막도 모자라 코푼 휴지조각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누가 누굴 위해 위로의 혀를 차 주겠는가. 전전긍긍 살기 싫어 나름 대학부터 지금까지 익혀온 증권의 감을 믿고 목돈을 뻥튀겨 볼 생각을 한 내가 미련했던 것이다. 내게서 날아가 버린 반토막이 의미 하는 것은, 접어 두었던 꿈 과 그리고 내 삶이었다. 끔직한 직장을 그만 두고, 돈이 바닥이 날 때까지 여행을 하고 싶었다. 단순한 신선놀음을 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직업으로 글을 쓰고, 보고 느낀 그대로 그림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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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 나라마다 작은 책을 만들고 싶었다. 회사를 입사한 후, 마음이 가는 곳으로 가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마음을 굳힌 채 내 발로 걸어 들어온 회사였다. 내 삶을 위해서는 현실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은 선이었다. 선에 기준은 모호했고, 모호한 선이지만 나는 그 선을 밟거나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증권회사원이 되었다. 그만 둘 수도 있었다. 당장 떠날 비행기 삯만 있어 떠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매번 그 선택의 기로에 서면, 달리기 시합을 하는 것처럼, 선을 넘어설 마음에 자꾸 손에 땀이 찼다. 그래서 더욱 단단한 돈이 필요했다. 날아간 내 반토막은 정확이 그 부분만을 오려갔다.

주가 곡선이 파도를 쳤다. 그 통에 나와 각 부서의 대리들이 총대를 메고 컴퓨터 앞에서 점심을 먹어야 했다. 밥이 잘 먹힐 리가 없었다. 그러던 중, 김대리가 빅뉴스라며 소리를 쳤다. 나와 대리들은 놀란 기색으로 김대리를 주목했다. 김대리는 휴대폰을 보여주며 말했다. 연예인 이별이 죽었데. 김대리가 보여준 휴대폰 속 기사에는 연예계에 잇따른 사망사고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더욱 큰 화제가 된 건, 스타덤에 올라 주가를 한참 올리고 있을 때,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자살이란 말에 이맛살부터 찌푸리며 다시 파도치는 주가 곡선을 응시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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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나 역시 컴퓨터를 응시했지만 좀처럼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도대체 뭐가 부족하다고 죽은 거지? 억소리나게 돈도 많이 벌어들이면서 뭐가 문제인건지.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밥도 제대로 못 먹으면서 살아보겠다고 일하는데, 참 복에 겨운 발악을 하다가 세상을 등지는 삶도 부러워해야 할지. 아님 딱하게 봐줘야 할지. 계속 나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중얼거리며 검지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결국 세 시간 정도 늦게 퇴근하게 되었다. 요즘처럼 주가 곡선이 눈 깜박일 틈조차 주지 않을 때, 야근의 연속이 아닌 것 만해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거리를 지나고, 버스를 타도 한결같이 사람들의 입과 입에서는 이별의 자살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우울증이 심했다느니, 부모가 없으니 수십 억대의 재산은 모두 형제들이 나누어 가지겠다느니, 등에 걱정을 가장한 심심한 돌 던지기를 했다. 나 역시 머릿속으로는 이별의 자살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할수록 궁금해졌고, 궁금증을 풀어갈수록 화가 났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인터넷을 했다. 물론 인터넷에도 온통 이별에 자살사건을 두고, 기자며, 네티즌들이 입방아를 바쁘게 놀려댔다. 이별의 미니홈페이지 조회수는 기하학적인 숫자로 늘어나 있었고, 사진에는 실시간으로 달리는 댓글이 늘어졌다. 일부는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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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나비모양의 이모티콘과 함께 명복을 비는 글이, 일부는 자살을 선택한 것에 대한 비난을 하는 글이었다. 나는 댓글과 사진들 그리고 기사 글을 확인하며 내심 알 수 없는 화를 삭이고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보는 것만으로 답답함은 풀리지 않았다. 어차피 사람들 앞에서 입으로 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 아니니 지워 버릴 수도 있었다. 이별이 가입한 홈페이지에 가입을 했다. 그리고 다시 이별의 미니홈페이지로 갔다. 네티즌이 올린 글에 섞여 들어가 맘대로 지껄이고 댓글을 다는 것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직설적인 반응은 가식적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ID가면을 쓴 채, 서로가 서로에게 모두 말보다 가벼운 글을 뱉어냈다. 이곳에서 난, 나보다 솔직한 내가 되어 글을 말처럼 지껄였다. 내 글은 거짓보다 더 비린 구라가 되기도 했고, 글이 말이 되고, 말이 진실이 되기도 했다. 참, 살맛나는 곳이었다.

*온몸이 멍투성이고 피투성이다.몸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또 누군가에게 끌려갔다. 말을 하려고 하면 그 누군가는 끝이 뾰족한 못이 박힌 몽둥이를 사정없이 휘둘렀다. 아악— . 나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이상했다. 몽둥이에 맞은 팔에서 피가 흐르는데도 고통이 없었다. 팔에 못이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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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 있고, 다른 곳도 피가 흐르는데도 고통이 느껴지질 않았다. 왜? 내가 말을 내뱉자 그 누군가는 또 몽둥이를 휘둘렀다. 아악—. 나는 다시 비명을 질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프지 않았다. 식은땀을 훔치는 손등은 퍼렇게 변해있었다. 그 누군가는 갑자기 나를 향해 몽둥이를 던졌다. 그리고는 미친 듯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소리는 비웃음 같기도 했고, 언뜻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한참을 웃는 그 누군가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무언가 말을 했다. 하지만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니, 목소리가 없었다. 분명한건, 나에게 말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온몸이 뻐근하다. 꿈만 꿀뿐 자는 것 같지 않아 개운치 않았다. 컴퓨터 앞에서 새우잠을 잔 탓을 하기엔, 자주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일요일 새벽에 잠을 깨버리면 도통 잠을 다시 이룰 수 없었다. 나무가 많은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꿈 때문에 달아난 잠을 위로하는 내 버릇이었다. 인터넷에 다시 접속을 했다. 가볍게 산책 할 곳도 찾고, 내가 적은 글들에 대한 네티즌의 반응도 살펴야 했다. 여전히 이별의 자살에 대해 시끄럽게 나불나불 거리고 있었다. 나는 잠시 검색을 잊고 이별에 대한 댓글을 읽고, 또 댓글을 달았다. 내가 올린 글에 네티즌은 미친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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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미친놈이니 욕부터 하기 시작했다. 나는 욕보단 내 글의 반박을 할 만한 혹은, 나를 납득가게 할 만한 댓글을 살폈지만 거의 없었다. 시끄러웠다. 역시 이곳도 약간의 이성과 가벼운 감성이 떠도는 그림자밖에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창을 닫아 버리고, 또 다른 검색을 시작했다. 서울 근처에 나무가 많고 산책을 하기 좋은 곳을 찾자, 서울숲이 나왔다. 성수대교 쪽으로 지나다니면서 몇 번 본적이 있는 곳이었다. 간단히 그림을 그릴 수첩과 카메라를 들고 집을 나섰다. 집밖으로 걸어 나오다 보니 엊그저께 본 사고현장이 보였다. 아침에 언뜻 창문으로 본 관경 그대로였다. 가로수과 가로등사이 흰 색으로 선이 그어져 있었고, 사람 형태를 한 흰 선은 새벽에 본 그림자의 모습과 비슷했다. 순간 새벽에 싸우던 두 개의 그림자가 스쳤다. 가로등에는 현장 목격자를 찾고 있는 전단지가 붙어있었다. CCTV의 선에서 벗어난 사건이었기 때문에 잡힌 건 없었고, 더구나 사건 직후 전정이 일어나서 도주한 범인의 동선마저 파악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현상금이 내가 날려버린 반토막과 비슷했다. 피해자가 개별적으로 건 현상금 같았다. 나도 모르게 혀를 차며 씁쓸히 걸음을 재촉했다.

2008년 11월 2일 서울숲. 무선 노트에 날짜와 장소를 적었다. 심심풀이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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렸다. 유동성이 빠른 피사체만 카메라에 담았고, 대부분 노트에 그려 담았다. 스케치를 하는 중, 옆자리에 앉은 남자와 부자연스럽게 시선이 부딪쳤다. 그 남자는 자신을 보는 것이 불편하다는 듯, 얼굴을 창가에 고정한 채 시선을 흩트리지 않았다. 그럴수록 내 노트에 담겨지는 스케치의 선은 세밀하고 예민해졌다. 그 남자는 짐이 없었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는 짐작이 되지 않는 가벼운 행색이었다. 자연스럽게 아래로 시선이 떨어졌다. 땅을 많이 디뎌 본적이 없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도 서울숲에는 드문드문 사람들이 지나쳐갔다. 멀리 걷지 못하고 다시 노트를 가방에서 꺼냈다. 마음에 드는 나무였다. 가장 굵은 나뭇가지에서 뻗어나간 잔가지들이 다시 굵은 나뭇가지를 향해 잔가지를 쳤다. 스케치를 하는 펜촉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멈칫, 펜촉을 눕히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김대리에게 온 전화였다. 전화의 내용은 뻔했다. 쉬는 날, 김대리에게 걸려오는 전화 대부분은 일할 손이 부족하다는 호출이었다. 전화를 받지 않자, 김대리는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펜촉을 세웠다가 금세 음성 메시지를 확인한다. 김대리는 회사에 급하게 한건 터졌으니, 연락을 기다린다고 했다. 음성 메시지를 들었지만 담담했다. 만약 집에 쉬고 있는 상태에서 받은 전화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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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면, 쉬는 날을 망쳤을 것이다. 회사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일상에 한부분이 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견고하고 단단해졌다. 그것은 곧 내 일상이자 전부가 되었다. 결국 내가 만든 성의 주인이 내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사이에도 휴대폰은 쉬지 않고 울렸다. 배터리를 빼볼까란 생각을 했지만, 고의적으로 받지 않는 티를 내기는 싫었다. 나무 스케치를 마무리 짓고, 나무에는 73번호를 달았다. 내가 그린 나무는 실물보다 더 왜곡되어 있었다.얼마나 길을 걸었을까. 생각했던 것 보다 산책로가 많았고, 복잡하게 엉켜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해가 지는 시간을 계산해서 발을 재촉했다. 자주, 지나는 사람들이 내가 가는 길을 잠시 막아 세워 해가 지는 모습이 잘 보이는 곳을 물었다. 처음엔 잘 모르겠다고 대답을 했지만, 질문이 잦아지자 나는 오히려 그들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인터넷에서 봤는데 잘 몰라서 물어보았다고 했다. 나는 짧은 목례를 하고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다리 쪽으로 향했다. 휴대폰은 여전히 불규칙적으로 울렸다가 잠잠해졌다. 메시지만 확인한 채 주머니에 넣기를 반복했다. 휴대폰이 계속 울릴수록 회사에 일어나고 있을 상황을 상상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한적한 시간이, 회사에 대한 잡념을 억눌렀다. 내심 괜찮은 휴일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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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신발이 내 앞을 지나갔다. 시선이 서둘러 신발을 따라 올라갔다. 아까 버스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남자였다. 낯설지만 나에겐 구면인 남자가 내심 반가웠다. 나는 시선 내에서 남자의 행동을 쫓았다. 남자는 나와 비슷한 방향으로 길을 선택했다. 어차피 나도 다리 위에서 한강을 내려다 볼 참이었으니, 상관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남자는 가던 길을 되돌아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남자의 돌발 행동에 발걸음을 멈췄다.— 더 이상 제 뒤를 따라 다니지 말아주십시오. 따라 다닌 것이 아니라도, 다른 산책로로 가주세요. 죄송합니다.뒤를 따라 다니다니. 어이가 없어 횡설수설 하던 사이. 남자는 되받아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길속으로 흐려졌다. 별 희한한 사람이었다. 남자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휴대폰은 계속 울렸다. 괜히 기분 탓에 주머니 속 휴대폰을 꺼내어 배터리를 빼버렸다. 남자가 걸어간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나무가 보였다. 앉아서 여유롭게 스케치를 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대충 굵은 나뭇가지의 틀을 그려놓았다. 잔가지는 나무를 보지도 않고 선이 가는대로 그렸다. 해가 짙붉게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림을 그리다 말고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다리 쪽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무엇을 하는데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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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전경을 둘러보자, 붉은 구름이 하나의 선이 되어 하늘과 강을 가르고 있었다. 이곳은,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다웠다.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들어 사진을 찍었다.

— 기어코, 여기로 오셨군요. 다른 다리도 많은데 하필.그 남자였다. 단번에 직설적인 말들을 내뱉었고, 잠시 차분해졌던 마음이 요동을 쳤다. 하지만 시비를 걸어온 사람을 받아줄 만큼은 아니었다. 나는 해가 지는걸 기다렸으니 이제 곧 갈 것이라고 대답했다. 남자는 자신의 바지 뒷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뜯지 않은 담배 한 갑을 꺼냈다. 하지만 라이터는 찾지 않았다. 남자는 담배를 보이며 말했다.— 이거 다 피고 내려가려 갈 테니 그동안 멀리 내려가세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혼자 있고 싶군요. 미안합니다. 매번.불편한 내색을 감출 길이 없었다. 나는 사진 한장만 찍고 내려가겠다고 했다. 더 이상 남자도 나도 건넬 말이 남아있지 않았다. 남자는 나를 등진 채, 한강을 응시했다. 남자는 계속 담배에 불을 붙지 않았다. 그 사이 해는 더 붉게 구름을 삼키고 있었다. 남자 뒷모습과 구름이 겹쳐진 지점에서 셔터를 눌렀다. 하지만 찍은 사진을 확인하면, 남자의 모습은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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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강한 빛에 반사되어 앵글에 담겨 있지 않았다. 위치를 바꾸어, 뷰파인더 사각의 초점을 남자에게로 맞추었다. 그러던 찰나, 남자가 초점에서 사라졌다. 뷰파인더로 본 조금 전의 상황이 의심이 되어, 카메라를 내리고 남자가 서있던 곳을 응시했다. 남자가 없었다. 초점을 맞추던 상황에서 남자가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움직일 리가 없었다. 내 눈조차 의심스러울 만큼 혼란스러웠다. 온통 주위는 깊은 강물뿐인 이곳에서 그 남자 향한 곳은, 믿기 힘들었다. 카메라와 가방을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고 다리의 난간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남자는 난간의 끝에 매달려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남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남자는 힘겹게 내 손을 바라보았다. 조금이라도 남자의 손에 힘이 풀리면 떨어질 기세였다. 몸을 최대한으로 바닥에 지탱한 채 손을 더 길게 내밀었다. 하지만 남자는 내 손을 잡지 않았다. 남자의 얼굴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담담했다. 금방이라도 다리위로 올라 올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의 두 팔만은 난간에 간절히 매달려있었다.나는 남자에게 빨리 손을 잡으라고 소리쳤다. 나와 남자의 시선이 부딪쳤다. 하지만 곧 남자는 내 시선을 피했다. 남자의 두 눈은 아래로 향하다 곧 눈꺼풀이 단단하게 닫혔다. 나는 이런 상황을 이해할 겨를이 없이 무의식적으로 남자에게 다시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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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남자는 기필코 내손을 잡지 않았다. 나는 남자의 양 손목을 붙잡고 안간힘을 다해 버텼다.굳게 감은 남자의 두 눈꺼풀이 열리고,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는 남자는 힘겹게 말을 건넸다.— 모르는 척 그냥 가세요. 안 그래도 지금 살고 싶어지니까.남자는 끝까지 완고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남자는 힘이 바닥이 난 듯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내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남자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 같이 휩쓸려 떨어지고 싶지 않으면 꺼져. 이번에도 내 손목 붙들고 있음, 물고 늘어 질 테니까.남자의 말에, 나도 모르게 손을 웅크려 주춤했다. 그때 남자의 한손이 난간에서 떨어졌다. 남자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나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남자에게 손을 뻗으며 손부터 잡으라고 소리쳤다. 남자는 힘겹게 눈을 떴다. 빠르게 흔들리는 남자의 눈동자가 보였다. 아까와는 다른 간절한 눈빛이었다. 남자의 바위에서 떨어진 한 손이 내 손을 향해 뻗었다. 좀 더 남자의 손이 가까워 질 수 있도록 몸을 조금씩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남자가 한말에 주눅이라도 든 듯, 나도 모르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조금씩 몸을 사리는 행동이 섞였다. 마침내 남자는 내 오른손의 중지와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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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를 잡았다. 남자의 손은 유난히 내 검지에 힘이 들어가 있었고, 특히 검지에 낀 반지에 걸쳐 의지를 하는 느낌이었다. 점점 남자의 손이 내손에서 미끄러져갔다. 내가 힘을 더 이상 내지 못하는 것인지, 남자가 내손을 점점 놓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바지 뒷주머니에서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선명한 느낌이었다. 남자는 내손을 끝내 다 잡지 못했다. — 허…….남자는 한숨 소리와 함께 아래로 떨어졌다. 남자가 붙잡던 손의 감촉이, 남자의 입에서 허무하게 뱉어지던 한숨이, 허공에 뜬 남자의 모습이 모두 거짓말처럼 펼쳐졌다. 풍덩 이는 물소리와 함께 남자가 사라졌다. 그리고 또, 내 바지 뒷주머니에서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어둠에 구름이 사라 질 때 까지, 나는 그 남자가 사라진 그 곳에서 넋을 놓고 앉아있었다.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그 남자가 이 바위에 서 있었다는 흔적도, 다리 아래로 떨어졌다는 흔적도, 그리고 그 남자가 죽었다는 흔적도 없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휴대폰 진동의 떨림과 그 남자의 손에서 느껴지던 끈적임. 그리고 남자와 함께 빠져버린 내 반지. 나는 반지가 빠진 허전한 내 검지를 만지작거렸다. 검지에 반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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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어 있던 자리에는 반지의 모양대로 가는 선들이 굳은살이 되어 있었다. 점점 추위가 느껴졌다. 뒷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찾았다. 하지만 휴대폰은 없었다. 선명하게 두 번의 휴대폰 진동을 느낀 건 단순한 착각이었을까. 가방을 뒤적이며 찾아 낸 휴대폰의 배터리는 남자를 만났을 때 분리한 그대로였다. 다시 배터리를 끼워 넣고 휴대폰을 켰다. 손에 실감나게 떨리는 휴대폰은 현재 시각을 알려주며 전원이 들어왔다. 4/2(수) PM 06:42. 여덟 통의 메시지와 여섯 건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모두 회사에서 온 것이었다. 하나씩 문자를 읽었다. 나를 찾는 메시지와 각종 주가지수 변동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전원이 켜져 있는 휴대폰을 보자 안도감이 생겼다. 보고 싶었던 사람에게 전화를 걸듯, 김대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음이 몇 번 울리지도 않아 김대리가 전화를 받았다. 김대리는 반색을 띈 목소리로 내게 회사 상황을 설명했다.현재 회사에서 거래 하고 있는 금화철강이 이틀 연속 큰 폭으로 하한가를 친다는 거였다. 벌써 네 방 째인데, 부장이 개거품 물고 난리도 아니라고 했다.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지금 곧 회사로 가겠다고 대답을 했다.전화를 끊고, 나는 다시 그 남자가 사라진 허공을 바라보았다. 저녁에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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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과연, 이 남자와 있었던 일들을 경찰에 신고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님 좋지 않은 일에 괜히 설레발치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갈등이 되었다. 신고를 했다가는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남자가 자살을 했다는 것은 지금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불경기인 상황에 지금껏 신뢰를 쌓아온 회사에 좋지 않은 이미지를 남길 위험한 사건이 될 수도 있다. 왜 하필, 내가 있을 때 남자는 목숨을 끊으려 한 것일까. 그 남자가 확실히 자살을 선택했다면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혼자 있는 상황에서 자살을 하려 했을 것이다. 남자는 분명 내가 카메라로 자신의 주변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을 때 자살을 선택했다. 그것은 남자가 누군가 잡아줄 사람이 필요했다는 것일까. 아님 내가 있건 없건 상관이 없었던 것일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나는 다시 양손을 펼쳐 남자의 손의 감촉을 떠올렸다. 끈적거렸으며, 그만큼 간절했던 마지막 손의 감촉은 반지의 자국만큼 생생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 남자가 살아있으면 어떻게 될까란 생각이 스쳤다. 만약, 우연히 한강을 수색하고 있던 해양 수색대에게 발견이 되어 그가 살게 된다면, 그래서 나를 찾는다면, 난 그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당신은 자살을 하려 했던 것이고, 내가 굳이 신고를 해야 할 의무는 없지 않겠느냐 라고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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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할까. 아님 신고를 하려 했는데, 급한 일이 생겨 미처 못 했다고 해야 할까. 아님 난 당신을 최선을 다해 살리려고 했다고 호소를 해야 할까. 잔인하지만, 남자가 살아있지 않기를 바란다. 이대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회사를 가고, 퇴근을 해서 집에서 따뜻하게 샤워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나불나불 싱거운 장난질이 하고 싶었다. 아무런 잡념 없이 다음날 회사에 출근을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 모든 바램은, 그 남자만 없으면 모두 순탄하게 이루어질 것들이자, 내가 그토록 진저리 치던 일상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뒷주머니에 넣었다. 서울숲을 빠져나오는 동안 한 번도 휴대폰의 진동은 울리지 않았다. 내려오는 길목 중간 중간에는 썩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가을에 생명을 다한 꽃잎들과 열매들이, 그리고 자주 보이는 곤충들과 사슴들의 배설물이 썩는 냄새였다. 그 냄새는 소멸을 거부하듯 처절했고, 비리고 역겨웠다. 지독한 썩은 내는 식은땀에 젖은 내 옷에 스며들었고, 곧 내 몸에서 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일상은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자연스럽게 들어와 있었다. 일상은 여전히 빈틈없이 반복 되었다. 눈앞에서 한 남자가 사라져도, 대스타 연예인이 자살을 해도, 그림자 놀이처럼 한 사람이 자신이 살던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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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5 | 그림자 놀이 _ 이노아

에서 죽어도, 내 일상의 견고함은 단 한 줄의 균열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결근을 하던 하대리도 돌아왔고, 이틀 연속 하한가를 치던 철강회사도, 부장님의 거품도 사그라졌다.

*깊게 들지 못한 잠에서 깨었다. 방은 햇볕이 닿지 않아 습하고 어두웠다. 곧 비가 내리기 시작할 것 같다. 허벅지 밑에 깔려있는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 전원을 켰다. 이별의 재산에 형제들 끼리 법적 소송을 걸고 나섰다는 뉴스가 나온다. 몸이 점점 늘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새벽 세시가 조금 넘은 시간. 인터넷으로 최근 올라오는 뉴스를 살폈다. 하지만 한강에서 30대 초반의 남자의 시신이 발견 되었다는 아직 없었다. 나는 이별의 미니홈페이지에 접속한다. 네티즌들의 열기는 조금씩 사그라진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한 개의 쪽지가 날아왔다. 강제탈퇴. 라는 빨간 글씨가 눈에 띄는 쪽지였다. — ID명 그림자님은, 수차례 악의성 글과 댓글을 작성하셨습니다. 그로인해 현재 여러 건의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사이버 규율에 따라, 강제탈퇴를 조치합니다. 강제탈퇴 이후에는, 3개월 동안 재가입이 불가능함을 양해 부탁드립니다.갑작스러운 통보에 황당했지만, 별 일은 아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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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296 |

다. 나는 인터넷과 거리가 먼 아버지의 주민번호를 입력하고 새로운 ID를 만들었다. 여전히 사건, 사고를 터트린 공인들을 널리고 널렸다.한참을 인터넷을 하다 보니, 몸이 뻐근하고 답답했다. 창밖에서는 빗소리가 제법 시원하게 들렸다. 창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내린 비 냄새가 방안으로 들어오니 나쁘지 않았다. 여전히 가로등 불빛은 사고 현장을 흐리게 비추고 있었다. 나는 지난 날 새벽에 보았던 두 개의 그림자를 떠올렸다. 이 시간쯤 이었을 것이다. 나는 비에 씻기는 목격자를 찾는 전단지를 응시했다. 전단지는 한쪽 끝이 떨어져 반으로 접힌 채 비에 젖고 있었다. 나는 옷을 대충 다시 입고 외투를 걸쳤다. 터덜터덜 사건자리로 걸어갔다. 흰색 선은 빗물에도 좀처럼 씻기지 않은 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가로등 불빛에 생긴 내 그림자는 여러 개로 나눠져 조각나 있었다. 몸을 조금 웅크리자 흰색 선 안으로 하나씩 내 그림자가 들어갔다. 순간, 소리 없이 주위가 온통 깜깜해졌다. 가로등 불빛도 건너편 주택과 아파트 불빛도 모두 사라졌다.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습관적으로 검지에 반지를 낀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반지가 없는 검지는 반지 모양 그대로 살이 움푹 패여 있었다. 내 그림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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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7 | 낯선 질문 _ 장민희Nove

l

장 민 희

낯선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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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은 없다. 오로지 낯선 질문만이 있을 뿐.

조각, 조각, 조각나 버린 생각들이 허공을 맴돈다. 세상은 돌고 있다. 맞다. 돌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의심해선 안 된다. 믿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것이고, 보이지 않으면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때문에 난 아직도 대답할 수 없다. 믿지 않는다고 보이지 않다니. 이건 말도 안 된다. ‘모두’의 공통점은 믿고 있다는 것, 믿기 때문에 보인다는 것, 때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나는 믿을 수 없기에 볼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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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9 | 낯선 질문 _ 장민희

볼 수 없기에 대답할 수도 없다. 답답하다. 무슨 말을 해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그들의 말을 난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시도조차 할 수 없다. 그렇지, 그러니까 그들 역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이것만이 나를 나로써 살게 하는 최소한의 방패라 생각한다. 눈을 감으면, ‘모두’의 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의 발걸음 소리가 작은 방을 울린다. 나는 몸을 웅크린 채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다. 울림이 커질수록 꿈을 붙잡아야겠단 생각만 간절해진다. 간절하게, 그토록 간절하게 손을 뻗는다. 나의 이런 바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 모르는 게 당연하다. 때문에 저렇게 큰 소리를 내지르며 이곳으로 달려오는 것이겠지. 그렇겠지. 그렇게 도로를 지나, 골목길을 밟고, 좀 더 작은 골목길, 그보다 좀 더 작은 골목길로 들어와 계단을 오르면, 일 층을 가볍게 통과해 이 층을 지나면 문 앞, 푸른 현관문에 다다르겠지. 그러면 문을 쾅, 하고 두드릴 거야. 난 잠시 생각에 잠기겠지. 아직 믿지 못했기 때문에 한참을 고민하겠지. 문이 열리자마자 그들은 짐승의 눈을 하고 달려들겠지. 그렇겠지. 믿게 되었느냐고. 그럼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역시나, 정지된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다. 귀를 찢는 두드림이 미처 눈을 뜨기도 전에 굳게 닫혀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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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꺼풀을 가볍게 도려낸다. 가볍게, 눈을 뜬다.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이젠 어둠만이 가득해진 한낮의 풍경을 바라본다. 낯선 풍경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지. 아마 태양이 반쪽이 된 날, 그 날부터임이 확실하다. 창문을 열고 죽어있는 화분들의 개수를 세어나간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의미가 없다. 어느 것에서도 싱그러운 생명력이란 찾아볼 수 없다. 차라리 살아있는 것의 수를 세는 게 빠르겠지. 그게 차라리 의미가 있는 거겠지. 푸른 현관문이 심하게 흔들거린다. 나는 몸을 웅크린 채 미동조차 하지 못한다. 두렵다. 점점 그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는 것만 같다. 문 밖에서 중얼거리는 낮은 음성이 들린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 이젠 발음마저 뭉개져 짐승의 울음보다 더 낯설게 느껴지는 그런 음성. 더 이상 고민할 수 없다. 아니, 고민해선 안 된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진, 그들의 낯선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때까진, 공격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공격. 공격이란 표현이 이 상황에 꽤나 잘 들어맞는다. 나는 잠시 멈춰서 문을 두드리는 그 둔탁한 소리를 가만히 받아낸다. 이 문을 열면 틀림없이 ‘모두’가 있을 것이다. 한 명, 한 명, 그리고 한 명. 한 명은 금세 ‘모두’가 된다. 이젠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아니, 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알고 있음에 감사한다. 아니, 알게 되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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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1 | 낯선 질문 _ 장민희

마땅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은 무척이나 탐나는 존재다. 그들은 나를 탐한다. 믿지 않는 나를, 때문에 보지 못하는 나를, 때문에 대답할 수 없는 나를 탐한다. 생각할 수 있을 때 생각해야만 한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그들을 보는 순간 난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다.

문이 열린다.

푸른 현관문이 넋을 잃고 덜컹거린다. ‘모두’ 중 한 명이 작은 방의 작은 열쇠를 보란 듯이 흔들어댄다. 금빛 열쇠는 작은 종처럼 딸랑거리는 소리를 낸다. 딸랑거리는 울음이 들린다. 딸랑거리는 흐느낌이 구슬프게 눈가를 적신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알고 있음에 난 마냥 웅크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거겠지.

믿는가. 믿을 수 있는가. 믿을 수 있게 되었는가. 믿고 있나. 믿어야만 함을 깨달았는가.

‘모두’가 한 입으로 묻는다. 그 수많은 ‘한 명’의 입이 마치 한 명의 입처럼 동일하게 움직인다. 그들의 눈은 벌겋게 충혈 된 채 금방이라도 물어뜯어 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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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 듯 기세를 낮추지 않는다. 퍼렇게 날이 선 시선들이 폭죽처럼 터져 시야에 가득 찬다. 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추락하는 불꽃들을 요염한 동작으로 피한다. 하지만 다수의 공격에는 누구도 승리할 수 없다. 누구도. 어느 누구도. 아프다. 고통이 온 몸을 할퀸다. 아깝게 목표물에 명중되지 못한 시선들은 허공에 무수한 상처를 입힌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질러댄다. 비명은 비명처럼, 날카롭게 터진다. 비명은 비명처럼, 귓가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머리가 울린다. 온 방 안이 울린다. 떨린다. 떨고 있는 손을 감출수가 없다. ‘모두’의 공격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아니, 아니어야만 한다. 나는 약하지 않다. 약해보이지 않기 위해 손가락을 힘겹게 모아 세게 움켜쥔다. 그들은 성난 표정으로 으르렁거리기 시작한다. 악 다문 이빨 사이에서 끈적거리는 액체가 뭉쳐 흐른다. 지금껏 숨기고 있던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이런 이빨 따위보다 더 매서운 것이 감춰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심장이 뛴다.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 수 없지만, 뛴다. 장님의 달리기와도 같다. 눈을 가리고 무작정 뛴다. 심장은 앞을 보지 못한다. 때문에 끝도 알 수 없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끝을 믿지 않는가. 때문에 끝이라 대답할 수 없는가. 끝을 믿으면 끝이 보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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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3 | 낯선 질문 _ 장민희

이고 그렇다면 끝이라 대답할 수 있게 되는가. 온 몸이 흐르는 땀 덕분에 축축해진다. 후끈거리는 열기가 주먹 쥔 손 안에 가득하다. 뛰는 심장을 잠재우기 위해 심호흡을 한다. 하지만 쉽게 멈추질 않는다. 아니, 멈추면 큰일이지. 멈추면 죽음만이 남을 것이니.

‘모두’는 사나운 곰과 같다.

때문에 죽음과 같은 초연함이 필요하다. 이것만이 그들과의 오랜 싸움을 승리로 끝맺기 위한 나만의 요령이다. 혹시나 약간이라도 움츠러드는 모습을 들켰다간 여지없이 당하고 말 것이다. 차라리 죽음이 나을지도 모른다. 죽음과 같은 초연함이라니, 죽음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엎드려, 숨소리도 멈춘 채, 사나운 그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야 함이 옳다. 마음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모두’를 관찰한다. 아직도 그들의 질문은 멈추지 않는다.

믿는가. 믿을 수 있는가. 믿을 수 있게 되었는가. 믿고 있나. 믿어야만 함을 깨달았는가.

이전보다 더 크고, 더 사납고, 더 강해진 목소리. 분명 늘었다. 한 명, 한 명, 한 명, 한 명, 한 명. 늘어가고 있다. 어디서 소문을 듣고 왔는지 알 순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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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금세 문 밖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모여든다.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차피, 어둠만이 가득할 것이니. 태양은 반쪽이 되었고, 빛도 반 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 빛 따윈 빛이라 말할 수도, 그런 태양 따윈 태양이라 말할 수도 없다. 나는 죽어있는 화분들을 슬쩍 살핀다. 더 이상 자라지 않고, 푸르지 않으며, 꽃이 피지 않는다. 꽃은, 피지 않는다. 나는 가까스로 넋을 잃고 덜컹대는 푸른 현관문의 문고리를 낚아챈다. 매끄러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들어온다. 문을 닫아야, 한다. 그들의 열쇠를 빼앗고 싶다. 저 작은 종을 낚아채 더 이상 이곳에, 나의 공간에, 나의 머릿속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싶다. 하지만 욕망은 욕망만으로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는다. 난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서서 그들의 질문을 고스란히 받아낸다. 시린 기운이 온 몸에 가득 퍼진다. ‘모두’는 내가 문을 닫으려 함을 눈치 챘는지 소매 밖으로 드러난 야윈 손목을 향해 달려든다. 아프다. 어느새 손목이 시뻘겋게 변한다. 눈가엔 내뱉지 못한 신음이 물이 되어 고인다. 질끈 깨문 입술에서 붉은 비명이 새어나와 맺힌다. 잿빛 바닥 위는 고통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그들은 그렇게, 항상 이전과는 다른, 나로썬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할 행동들을 거리낌 없이 해낸다. 오늘은 어쩌면 손목이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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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일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제의 일 역시,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날의 일만은 기억하고 있다. 처음으로 찾아온 ‘한 명’, 그 이후의 기억들은 모두가 반복이다. 아니, 반복일 것이다. 단언할 수 없다. 단언할 수 없음이 불안함을 만든다. 그 불안함이 온 몸 구석구석에 서려있다. 내가 잠에 빠졌을 때, 불안함은 연기처럼 스멀거리며 피어오른다. 연기에 휩싸인 꿈은 악몽이 된다. 악몽, 악몽, 악몽. 악몽의 반복은 기억의 반복처럼, 기억의 반복은 순간의 반복처럼, 나를 닳게 만든다. 온 몸이 닳고 닳고 닳아 사라질 때까지 아무것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모습, 그의 목소리, 그의 대한 기억은 움직이지 않는다. 멈춰있다. 그렇게 그 자리에 멈춰서 닳고 닳고 닳은 나를 비웃는다. 나는 나를 저주해야 함이 옳다. 이렇게 비웃음을 당하고 있는 나를, 저주해야 함이 옳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러기엔 너무 가여워 그럴 수 없다. 그 가여움이 멈춰있는 그를 부른다. 어제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 명’, 그가 있기에, 과거의 나는 아직까지 죽지 않고 이 긴 싸움을 버텨낸다.

*나는 잠에서 쉽게 깨어나지 못했다. 언제나 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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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로 몸이 달궈져야만 일어나는 버릇 때문이었다. 작은 방이 햇살로 가득 찰 때면, 눈을 떴다. 눈을 뜨고 나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깊이 잠들지 못했던 건, 아무것도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언제나 악몽을 꾸었던 건, 아무것도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함 때문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순 없었다. 내가 잠든 사이 그것들은 소리도, 미동도 없이 증발해 버릴지도 몰랐다. 유령처럼, 흐릿하게 남아있는 흔적조차 없이. 그렇게 사라지고 나면 정말로 보이지 않게 되어버릴까 두려웠다. 하지만 그 날은 달랐다. 텁텁한 공기 속에서 몇 시간을 뒤척였는지, 코와 목이 따끔거리고 마른기침이 튀어나왔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 머리맡의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낮 열한시. 하지만 한낮의 방은 새벽녘을 닮아있었다. 낯선 풍경이었다. 언제나 방 안 가득히 스며들던 햇살은 야윈 모습이었다. 시야가 연기로 자욱했다. 담배를 많이 피워버린 까닭이었다. 환기 좀 제대로 해, 얼마 전 다녀갔던 어머니의 충고가 떠올랐다. 숨을 쉴 때 마다 마치 사포 조각을 씹고 있는 듯 입 안이 거칠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바닥에 발을 디뎠다. 걸음 뗄 때마다 끈끈한 소리가 메마른 주변의 침묵을 건드렸다. 나는 불을 켜고,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가시지 않은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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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7 | 낯선 질문 _ 장민희

의 발자국이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빛의 영역을 벗어난 화분들이 고개를 숙이고 틈새로 들어오는 바람에 밀려 흔들거렸다. 무엇 때문인가. 나는 서둘러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이 반쪽이 되어있었다. 때문에 한낮의 하늘 역시 새벽녘의 푸르스름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열린 창문을 타고 시린 공기가 방 안으로 성큼 발을 디밀었다. 한낮은 새벽이 되었고, 이 새벽은 곧 깊은 밤으로 둔갑할 것이었다. 나는 빗나간 추측을 탓하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피어오르는 연기마저 익숙하지 않은 모습으로 스멀거렸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모든 것이 변해있었다.

어제의 하늘마저 기억나지 않았다.

폐 속 깊이 들어온 담배연기가 몽롱한 정신을 흔들어 깨웠다. 점점 저물어 가는 태양은 묵묵히 곁을 맴돌던 그림자마저 지워버렸다. 반쪽 밖에 남지 않은 그림자가 어설픈 모습으로 힘겨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제 곧 사라질 것만 같아.

보이지 않는 입술이 움직이며 유언처럼 마지막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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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뱉어냈다. 다신 볼 수 없을 것만 같아 겁이 났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기력한 팔을 들어 올려 반 밖에 남지 않은 태양을 가렸다. 차라리 없는 게 나을 수도.그 때였다. 푸른 현관문이 둔탁한 소리를 뱉어냈다. 그 두드림은 멈추지 않았고, 내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진 쉽게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문을 두드리는 자는 누구인가. 예고 없는 방문은 의심의 가면을 내밀었다. 문이 덜컹거릴 때마다 목 뒤가 쭈뼛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날 찾아올만한 사람은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가면을 쓰고, 과거를 떠올리려 애썼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 문을 열어주기 전에 먼저, 과거를 되살려내야 했다. 문 밖에 있는 그는 누구인가, 고민하기 전에 어질러진 기억부터 정리해야 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방금 결승점에 도착한 마라톤 선수의 폐처럼 이상하리만치 지쳐있었고, 쉽게 떠올라야만 하는 어제 일 따위는 어렴풋한 흔적으로 밖엔 남아있지 않았다. 그 흔적의 꼬리엔 지워진 그림자만이 선명했다. 그는 잠깐의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어쩌면, 나의 회상을 방해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의 두드림이 멈춰있던 내 등을 떠밀었다. 그 보이지 않는 힘에 밀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버텼지만, 잔뜩 긴장한 발끝은 조금씩 문가로 향해가고 있었다. 문고리를 잡기 위해 내민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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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9 | 낯선 질문 _ 장민희

이 불안함을 내뿜으며 부들거렸다. 왜 떨고 있는가. 나는 문 앞에서 바지에 오줌을 지린 소년마냥 안절부절 거렸다. 그는 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문을 열고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을 선사하기 전까지는 절대 미동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시간은 어느새 같은 모습으로 정지해 있었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내가 움직여야만 비로소 모든 것이 멈춘 호흡을 시작할 것임이 분명했다. 아무것도 살아있지 않았다. 살아있지 않음이 낯선 미소를 머금고 모든 것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나는 끝내 견디지 못하고 문을 열었다.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벽이 무너졌다. 이제, 그와 나 사이를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시린 공기뿐이었다. 살짝 열린 문 틈 사이로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불쑥 작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정말 오줌이라도 지린 것은 아닐까, 겁이 났다. 놀람은 순식간에 공포가 되었다. 급습이었다. 최소한의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어떤 경고도 없이, 어떤 예고도 없이, 그는 내 시간을, 내 공간을, 나를, 침범했다.

믿는가.

무엇을? 무엇을 믿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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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문예 제23호| 310 |

낮은 음성이 나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고, 갈라진 두개골 사이로 무언가가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느껴졌다. 아팠다. 아니, 아프다기보다는 이상했다. 손을 뻗어 벌어진 틈 사이를 더듬었다. 욱신거리는 두피 사이로 무언가가 만져졌다. 이런, 이게 뭐야. 하지만 나는 짓밟힌 잡초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위협적인 자세로 내 행동 전부를 감시하고 있었다. 머리 사이를 더듬던 손을 거두고는, 더욱 두툼해진 의심의 가면으로 그에게 대항했다. 들키면 안 돼. 그는 다행히도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오히려 내 발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움직이고 있는, 지워진 그림자에 더욱 흥미가 있는 듯 했다. 나는 굉장한 취약점을 쉽게 내주었음을 깨달았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기 위해 놀란 표정을 억지로 삼키려 했지만 쉽게 넘어가지 않아 구역질이 났다. 그는 손가락을 뻗어 늠름하게 서 있는 자신의 그림자를 가리켰다. 자만의 미소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의 그림자는 완전한 모습이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여전히 시야엔 변하지 않은 그의 그림자가 각인되어 있었다.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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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서 완전한 그림자를 갖고 있는가. 나는 고개를 뒤로 돌려 꼬리에 간신히 붙어있는 나의 그림자를 측은한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 입술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점점 숨이 꺼져가는 듯했다. 나는 그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가.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기에 아무것도 하려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하려하지 않았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이제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믿음만이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정답의 기회일지도 몰랐다.

믿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믿을 수 있는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그의 질문에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랬다.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믿을 수 없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고민하기 전에 우선 믿어야 함이 옳았다. 그래야 보일 것이고, 그제야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었다. 머리가 과식한 위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더 이상 그의 낯선 질문들을 받아낼 수 없을 지경이 된 것 같았다. 육중한 포만감에 온 몸이 함께 무거워졌다. 기어코, 갈라져 있던 틈새가 열리면서 무언가를 토해내었다. 더러워, 더러워 죽겠네.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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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머리의 붙은 토사물들을 급하게 털어냈다. 역하고 고약한 냄새가 코끝에 뭉쳐있었다. 모든 것들이 쏟아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냄새 때문에 계속 빈 머리를 거꾸로 한 채 멈추지 않는 구역질을 뱉어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물음표. 내 머리가 토해낸 건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무언가 많은 걸 토해냈음이 분명한데. 이것 뿐 이라니. ‘?’ 검은 물음표는 갓 태어난 아이처럼 온 몸을 웅크린 채 떨고 있었다. 비명을 질러, 울음을 터뜨려. 그래야만 살 수 있어. 나는 손바닥을 높이 치켜 올려 물음표를 내리쳤다. 찰싹, 하는 소리가 부서진 침묵 사이사이를 채워나갔다. 하지만 그것은 쉽게 울음을 터뜨리지 못했다. 왜 울지 못하는 거야, 울어. 손바닥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렇게 몇 번을 내리치고 나니, 그제야 굳게 다문 입을 열고 비명을 내질렀다. 살아있구나. 다행이었다. 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들어 주머니 속에 넣었다. 바지 옆쪽이 우스꽝스럽게 불룩, 튀어나왔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서 있었다. 방금 펼쳐진 모든 광경을 애써 외면하려 하는 듯, 이기적인 모습으로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울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의 완전한 그림자는 달랐다.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보이지 않는 큰 눈을 치켜뜨고 내 얼굴과, 갈라진 머리통과, 불룩해진 주머니를 번갈아 보며 중얼거렸다. 무어라 말하고 있는지, 무어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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껄이고 있는지 정확히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어쨌든,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상기된 어조와, 흥분한 말투로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래, 너는 봤으니까 됐다. 나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믿어라. 믿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면 대답할 수 없다. 우리는 믿는다. 때문에 보인다. 때문에 대답할 수 있다.

나는 쉽사리 그 말에 항변할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목 끝까지 잔뜩 차오른 궁금증을 모두 묻고 싶었지만 그건 무리인 듯 했다. 그와 난 그렇게 입을 닫은 채, 정지된 시간을 양분삼아 지루함을 견뎌나갔다. 반쪽 밖에 남지 않았던 해는 저물어 모습을 감추어버렸고, 이젠 그의 형체조차 가려져 버렸기에 문 밖엔 오로지 어둠만이 머물러있었다. 그는 가라앉은 어둠을 뚫고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발끝이 가벼워졌다. 나는 고개를 숙여 그림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 이젠 돌이킬 수 없는 건가. 그는 신기하단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숨고 싶어졌다. 이런 모습으로는 절대 그에게 이길 수 없단 사실만이 덩그러니 남아 투지조차 지워내 버렸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그림자는 그 존재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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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력히 드러내고 있었다. 살아있었다, 그는 살아있었다. 그렇게 완전한 모습으로 내 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는 믿었기에 살아 숨 쉴 수 있었다. 곧 죽음으로 이어질 나의 미천한 공포 따위는 신경 쓸 만한 가치도 없을 정도로, 그는 강한 모습이었다.

마지막 희망은 물음표 뿐 이었다.

나는 불룩해진 주머니를 움켜잡았다. 어느 새 그것은 더욱더 커져있었다. 묵직한 굴곡이 손가락 끝에 만져졌다. 순간, 그가 움찔하는 모습이 눈가에 스쳤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무엇을? 이런 작은 물음표 따위에 흔들릴 만한 그가 아닐 텐데. 나는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곤, 미끌거리는 감촉을 따라 그것을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작은 심장이 두근거리며 신음을 뱉어냈다. 살아있었다. 그것은 살아있음이 분명했다. 감춰진 손을 움직일 때마다 그는 한 발, 한 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만드는가. 이건 그저 물음표에 불과한데. 왠지 모를 용기가 샘솟았다. 나는 믿지 않았다. 아니, 보이지 않기에 믿지 못했다. 물음표는 어느 새 달아올라 주머니 속에서 미친 듯이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 몸부림은 너무나 간절해서 내 힘으론 쉽게 멈춰질 것 같지 않았다.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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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공포의 질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 비명이 커질수록 주머니는 더욱 세차게 요동쳤다. 멈춰있던 시간이 빠르게 움직였다. 뭉쳐있던 탁한 공기와, 역한 냄새가 힘을 잃고 퍼져나갔다. 텁텁했던 입 안에 찬 공기가 스며들었다. 그제야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죽지 않았구나. 다행이라 하기엔 너무 당연한 사실이었다. 나는 살아있었다. 이것만이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

모든 것이 낯설어 견딜 수가 없다.그 후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같은 순간만이 반복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한 명’은 믿음의 그물을 던져 수많은 ‘한 명’을 만들어냈다. 대부분이 지워진 그림자를 안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믿었고, 보았으며, 대답할 수 있었다. 또한 이것만이 변하지 않는 사실이라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새벽녘을 닮은 방 안에서 난 물음표와 함께 지냈다. 물음표는 점점 무거워졌고, 이젠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닐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때문에 외출하지 않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무겁고, 무겁고, 무거워졌고, 무겁고, 무겁고, 무거웠고, 무겁고, 무겁고, 무겁다. 더 이상 무거워질 수 없을 만큼 무겁다. 난 아직도 대답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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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다. 나는 아직도 믿을 수 없다. 때문에 보이지 않았고, 때문에 대답할 수 없다. 때문에 ‘한 명’이 우글거리는 문 밖을 나는 체념한 모습으로 바라본다. ‘모두’는 말한다. 믿는가, 믿을 수 있는가. 누군가는 천사라 부르기도 했고, 누군가는 피자라 부르기도 했고, 누군가는 지팡이라 부르기도 했고, 누군가는 사랑이라 부르기도 했고, 누군가는 절망이나 실패라고 부르기도 했고, 누군가는 진실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럼 나는 이렇게 답한다. 천사는 언젠가 타락할 것이고, 피자는 언젠가 식어버릴 것이고, 지팡이는 언젠가 부러질 것이며, 사랑은 언젠가 이별이 되어버릴 것이고 절망은 언젠가 죽음이 될 것이라고. 하지만 진실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진실의 뒤편엔 거짓이 아닌, 진실이 아닌 사실만이 남아있을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진실을 믿으라고 말하던 그 ‘한 명’이 나타날 때 마다 난 무거워진 물음표를 꺼내들었다. 물음표는 뒤뚱거리며 그에게 다가갔지만, 아무런 위협도 되질 않는 듯 했다. 믿어야만 하는가.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는 이제 다신 오지 않겠다고 했었다. 나는 그의 일을 떠올리는 것조차 힘들다. 어제의 일도, 그 때의 일도, 이젠 지워진 그림자처럼 사라져야 만이 옳다. 나는 ‘모두’를 차례차례 훑는다. 변해있다. 얼굴도, 표정도, 목소리도, 모두 그대로인데 어딘가 교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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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변해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변해가고 있다, 가 옳다. 아저씨도 아저씨가 아닌 것만 같고, 학생도 왠지 학생답지 않으며, 여대생에게도 변질된 향수 냄새가 난다. 피자집 방한복을 입은 사내의 손에는 피자박스가 아닌 다른 것이 들려있고, 노인의 지팡이는 어느 새 기다란 칼날이 되어 바닥에 자잘한 상처를 낸다. 다행스럽게도 손목은 아직 제자리에 붙어있다. 그들의 목소리가 잠들어 있던 물음표를 흔들어 깨운다. 기척도 하지 않던 물음표가 무거워진 몸을 일으킨다. 문 밖은 지옥의 풍경이다. 나는 문고리를 잡은 손을 더욱 강하게 움켜쥔다. 그들의 열쇠를 빼앗고 싶다. 상대방에게 지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나의 노력은, ‘모두’에게 투지로 타오를 수 있는 좋은 땔감이 된다. 지옥의 풍경이다. 이토록 잔인할 수 있는가. 다수의 공격엔 누구도 승리할 수 없음을 그들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수많은 감정들이 잔인함의 텃세에 못 이겨 자리를 내어준다. 친절한 말 따윈 돌아오지 않는다. 언제나 낯선 질문만이 있을 뿐이다.

믿는가. 믿을 수 있는가. 믿을 수 있게 되었는가. 믿고 있나. 믿어야만 함을 깨달았는가.

그들의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물음표가 불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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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움켜쥐고 바닥을 구르기 시작한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음이 분명하다. 두렵다. 이렇게 사라져버린다면 나는 믿어야만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만 한다.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믿어야만 한다. 어느 새 아픔마저 무뎌진다.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생각들이 죽음과 같은 초연함을 건드린다. 이대로 무너질 순 없다. 나는 견뎌야만 한다. ‘모두’의 틈에서 익숙한 얼굴이 성큼 앞으로 다가선다. 진실, 그것은 진실이다. 다신 오지 않겠다고 했던 진실의 모습이 그렇게 그 자리에, 예고 없이 나타난다. 나는 재빨리 손을 뻗어 무거워진 물음표를 들어올린다. 그것은 뒤뚱거리며 문가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진실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점점 둘 사이가 가까워져 간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오로지 물음표를 믿을 수밖에 없다. 진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딱히 공격할 만한 이유조차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초초하다. 더 이상 승산이 없음을 깨닫는다.

‘?’

물음표가 옆구리를 움켜쥔다. 한계. 그것이 발광하며 비명을 내지른다. 죽음을 예견한 비명, 그 비명은 왠지 탄생의 비명과 닮아있다.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다. 매끄럽던 굴곡이 점점 희미해진다.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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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다. 사라진다. 단단하던 뿌리가 점점 희미해진다. 사라진다. 사라진다. 사라진다. 알 수 없는 말을 가득 내 뱉기 시작한다. 도통 알아들을 수 없지만 마치 유언처럼 슬프다. 그리고 이제 그 말마저 의미해진다. 사라진다. 사라진다. 사라진다. 완전히 사라진다.그것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나는 이제 무엇도 증명할 수 없다. 사라짐은 존재의 기억마저 모두 안고 떠나버렸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진실이 비웃기 시작한다. 그 비웃음은 어느 새 ‘모두’의 비웃음이 된다.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다. 그들에게 대항할 만한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때문에 아무것도 하려하지 않는다. 그렇게 멍하니 서서 떨어지는 불꽃들을 받아낸다. 아프다. 고통이 고통으로 승화되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가. 생각을 멈춘다. ‘모두’의 비웃음만이 들린다. 견딜 수 없다. 도망칠 수 없다. 견딜 수 없다. 도망칠 수 없다. 견딜 수 없다. 도망칠 수 없다.

믿습니다.

나는 거짓을 내뱉는다. 하지만, 얼핏 그것이 보이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니, 착각인가. 아니, 정말 보이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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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습니다.

나는 거짓을 내뱉는다. 아니, 이건 거짓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실도 아니다.

믿습니다.

나는 거짓인지, 진실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대답을 내뱉는다. 진실의 뒤편엔 거짓이 있다고 누가 말했는가. 이건 진실이 아닌 사실일 뿐이다.

믿습니다.

나는 믿는다. 때문에 본다. 때문에 대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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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

l

허 란 경

존재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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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하숙생은 오늘도 야근이다. 우리 집에 하숙한지 벌써 3년째인 하숙생은 요 근래 들어 잦은 야근으로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초반에는 항상 집에만 있었던 하숙생이었다. 그러나 회사에 입사한 후 하숙생은 하루가 멀다 하고 야근을 했다. 야근한 날에는 새벽이 다 돼서야 집에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아침 일찍 출근을 했다. 말 그대로 잠만 자고 밥만 먹는 하숙생이었다. 집 주인인 나야 편했다. 신경 쓸 일이 없었다. 더군다나 우리 집 하숙생은 다른 집 하숙생과 달리 요구사항도 적었다. 밥이 맛없다고 투정하지 않았고 집이 작다고 불평하지도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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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하숙생이 바라는 건 오직 한가지였다.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것 그 뿐이었다. 담배 애호가인 내가 그 정도 양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하숙생은 잘 알았다. 하지만 담배를 끊으라는 것도 아니고 베란다에서만 피우지 말라는데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우리 집 하숙생은 다른 집 하숙생과 달리 매달 꼬박꼬박 하숙비를 잘 냈다. 가끔 팁도 줬기 때문에 난 하숙생의 말을 잘 들었다. 우리 집 하숙생은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하숙생이 아니었다. 이런 근사한 하숙생을 잃고 싶지 않았다. 나는 우리 집에 하숙하는 나의 아내를 잃고 싶지 않았다. 아내가 잡지사에 취직한지 이 년이 다 되어간다. 아내는 대학교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나와 결혼했다. 나는 아내와 결혼하면서 한 가정의 가장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그 동안 공부하던 사법고시를 미뤄두고 학원에 출근했다. 그때부터 우리의 결혼은 내가 꿈꿔왔던 생활과는 다른 또 다른 현실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나는 결혼 생활에 있어 아내가 항상 집에 있는 것을 꿈꿔왔다. 그리고 나는 다른 평범한 사람처럼 제 시간에 취직해서 제 시간에 퇴근하길 바랐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람일 뿐이었다. 나는 해가 머리 정수리에 뜨는 두 시에 출근해서 별이 하늘 꼭대기에 뜨는 한 시가 되서야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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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돌아왔다. 아내와 같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내 시간도 없었다. 일 년 동안 학원 생활을 하다 보니 체력도 떨어지고 신경도 날카로워졌다. 나는 말수가 적어졌다. 아내와의 대화가 사라졌다. 최소한의 필요한 말만 하고 싶었다. 집에만 있던 아내는 우울증에 걸릴 것 같다며 남겨둔 마지막 학기를 마쳤다. 한 학기를 마친 아내는 취업난에도 불구하고 잡지사에 취직했다. 여행 잡지사에 취직한 아내는 나에게 다시 공부할 기회를 주었다. 아내는 내 뒷바라지를 하겠다고 했다. 주위에서는 나에게 장가 잘 갔다고 말했다. 부러워했다. 부인이 벌어다 준 돈으로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며 팔자 좋다는 말도 서슴없이 던졌다. 난 아내가 고생하는 것이 싫었지만 학원 강사로 살아가는 인생은 비전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보람되지도 행복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다시 고시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고 잠시만 아내를 출근시키기로 했다. 공부는 잘되지 않았다.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이고 해외까지 취재 나가는 아내가 안쓰러웠다. 미안했다. 미안한 마음에 나는 집안 일 좀 해보겠다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요리하며 하루를 보냈다. 재미있었다. 어쩌면 고시보다 살림이 내 적성에 맞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난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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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에게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아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고시에 합격해 아내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아내의 소원은 내가 검사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번번이 고시에서 떨어졌다. 아내는 그런 나에게 실망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는 회사에서 야근하는 시간이 길어져갔다. 아내는 점점 우리 집의 하숙생이 되어가고 있었다.열두 시가 지나도 우리 집 하숙생은 퇴근할 생각이 없는 듯 집에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베란다에 서서 하숙생의 귀가 길을 살폈지만 가로등이 훤히 켜진 골목에는 고양이 새끼 한 마리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조용했다. 나 혼자 남겨진 대낮의 우리 집처럼 거리는 고요했다. 하숙생의 차는 십 분이 지나도 이십분이 지나도 한 시간이 지나도 보일 기미조차 없는 듯 했다. 저녁 늦게까지 일하며 돌아다니는 하숙생이 걱정돼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새벽까지 야근에 회식을 즐기며 대리 기사를 불러 돌아올 하숙생 때문에 심란해 공부도 할 수 없었다. 우리 집 하숙생이 베란다에서 담배 피우는 것을 반대한 이후 나는 베란다에 부겐빌레아를 길렀다. 학원을 그만 두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기 전 우연히 케이블 TV에서 하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었다. 60년대 가난했던 시절을 배경으로 인간의 욕망과 분노 그 속의 사랑과 운명에 대해 그린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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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특이하게도 드라마 내용보다 드라마 주제곡이 귓가에 맴돌며 떠나지 않았었다. 매력 있는 멜로디와 ‘꿈꾸는 카사비앙카, 바다와 맞닿은 그 곳에 붉은 빛에 부겐빌레아 그대를 기다리네’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노래였다. 중독성 있는 음과 가사를 입 안에서 흥얼거리다 보니 부겐빌레아가 무엇일까라는 호기심이 생겼다. 나는 호기심을 실천으로 옮겨 부겐빌레아를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다. 붉은 꽃받침이 아름다운 분꽃과의 식물이었다. 노래만큼이나 매력적이었다. 나는 블로그 이웃이었던 사람에게서 부겐빌레아를 분양을 받아 기를 수 있었다. 부겐빌레아는 잘 자랐다. 나는 잘 자란 부겐빌레아를 간간이 이웃들에게 분양해 주었다. 부겐빌레아를 기르게 된 것은 매력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하숙생 때문이기도 했다. 더운 곳에서 자라며 폭염을 이겨내고 습기를 싫어하는 부겐빌레아의 습성과 하숙생의 습성이 닮았기 때문에 기르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부겐빌레아를 길러 본 사람들은 빨간 꽃받침과 그 안에 핀 흰 꽃이 아름답고 매혹적이라 했다. 하지만 우리 집 하숙생은 부겐빌레아를 싫어했다. 한지처럼 가녀린 빨간 꽃받침이 강인함을 나타내는 꽃처럼 보이는데 꽃이 아니라 꽃받침이라는 것에 농락당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하숙생은 부겐빌레아의 외향이 갖는 이중적인 모습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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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했다. 난 하숙생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부겐빌레아가 이중적인 것보다는 빨간 꽃받침 속에 꽃의 진가를 숨겨두고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표현하지 않았다. 이 시대 최고의 하숙생이라 불리는 나의 하숙생과 부딪히고 싶지 않았다. 난 하숙생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두 시가 넘어 들어 온 술이 취한 우리 집 하숙생은 오늘도 자지러지게 핀 부겐빌레아를 보며 어김없이 싫은 내색을 비쳤다. “가증스러워. 이중인격. 어떻게 저렇게 다를 수가 있어?”술에 취한 우리 집 하숙생은 식물에게 한 말인지 사람에게 한 말인지 모르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방에 들어가 버렸다. 자신의 방에 들어간 하숙생은 다시 나오지 않았다. 버거운 외투만 벗고 하숙생은 그대로 침대 위에 몸을 뉘었을 것이다. 하숙생은 항상 그래왔다. 나는 하숙생을 간섭하고 싶지 않았다. 걱정되어도 모르는 척 했다. 하숙생은 나의 걱정과 안타까움을 잔소리로 생각했다. 그런 하숙생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보일러의 온도를 높여주는 일 뿐이었다. 하숙생은 추운 것을 싫어했다. 하숙생은 습기 차는 것을 싫어했다. 하숙생은 춥고 습기가 차면 며칠 동안 끙끙 앓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알았다. 그건 아내가 결혼하면서 생긴 습성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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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나는 아내의 방에 들어가 아내를 챙겨해 주는 대신 아내가 싫어하는 부겐빌레아를 치웠다. 베란다는 휑해졌다.

“운전이나 해.”하숙생은 일어나자마자 내가 있는 부엌으로 왔다. 하숙생은 퉁퉁 부운 얼굴을 내밀며 커피를 타고 있는 나에게 차키를 던졌다. 차키를 던진 하숙생의 퉁퉁한 얼굴 표정은 뿌듯해 보였다. 뿌듯한 얼굴을 하고 하숙생은 출근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하숙생의 출근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하지만 하숙생은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차키를 식탁 위에 놓고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었다. 나의 유일한 시간이었다. 집안일과 공부 등에서 벗어난 아침 의식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단 십 분만이라도 나에게 여유를 주고 싶었다. 하숙생도 내가 아침을 커피와 신문으로 맞이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생각했기에 신경 쓰지 않고 신문을 읽어내려 갔다. 눈에 들어오는 신문 기사는 단연 로스쿨에 대한 기사였다. ‘로스쿨 합격자 66% 법학과 출신 아니다’라는 기사는 한동안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로스쿨에 들어가야 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로스쿨에 들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고민이었다. 다양한 분야의 법조인을 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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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것이 로스쿨의 방침이었다. 법학을 공부한 학부생이 로스쿨에 들어가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고시를 빨리 패스해야만 했다. 로스쿨 졸업생이 생기는 몇 년 후면 고시도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었다. 로스쿨이 도입된 이상 법학 공부하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 돼버린 것일 수도 있었다. 이 짓도 그만 끝내야만 할 때가 온 것이라 생각하니 먹먹해졌다. 하숙생은 빠른 속도로 씻고 나왔다. 욕실 앞에서 머리를 털어내던 하숙생은 나의 먹먹한 마음은 개의치 않고 어이없는 눈을 하며 날 바라봤다. 뜨거운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는 소리가 거슬렸는지 하숙생의 시선은 나의 커피 잔을 향해 뚫어져라 흘겨보고 있었다. 하숙생은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며 시동이라도 걸어 놓으라고 소리쳤다. 드라이기 소리 때문에 내가 못 들었을까봐 크게 내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 같은 하숙생의 소리가 아침부터 듣기 좋지는 않았다. 내가 대답을 안 하자 하숙생은 날이 추우니 히터도 세게 켜놓고 차를 따뜻하게 데워 놓으라고 다시 한 번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이며 나를 내몰아붙였다. 어이가 없었다. 하숙생이 나를 하숙집 주인이 아닌 자신이 고용한 아르바이트 생으로 착각하는 것 같았다. 난 하숙생에게 분명하게 내 의사를 전달하고 싶었다. 나는 하숙생의 명령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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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숙생이 우리 집에서 하숙하는 이상 하숙생의 편의를 위해 운전을 해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하숙생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하숙생을 잃고 싶을 만큼 배가 부르지도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오지도 않았다. 나는 하숙생이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집 하숙생을 위한 특별 서비스를 하고 있는 것이기에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내려갔다. 나는 주차장에 세워진 차에 내려가 시동을 켜고 히터도 삼단으로 틀어놓고 하숙생을 기다렸다.“경주 석굴암에 갈 거야. 어떻게 가는 줄 알지? 나 점심 전까지는 도착해야해.”하숙생은 우리 하숙 집 서비스가 익숙해진 탓인지 나를 택시 기사 혹은 버스 기사 아니 전용 기사로 생각한 것 같았다. 하숙생은 미안한 기색 없이 목적지와 도착 시간만을 알려준 채 당당히 뒷좌석에 올라탔다. 뻔뻔했다. 조수석도 뻔히 비었는데 사모님 행세를 하는 것도 아니고 왜 뒷자리에 앉는지 그 심리를 알 수 없었다. 뻔뻔해도 저렇게 뻔뻔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광화문에 있는 회사도 아니고 경주까지 가라는 것이었다. 트레이닝복에 패딩 외투 하나 걸친 나에게 경주까지 운전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서비스는 서비스였다. 룸미러를 통해 뒷좌석에 앉은 하숙생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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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숙생의 낯에는 미안하다거나 일말의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기색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오직 오늘 취재 가는 석굴암에 대한 자료 찾기에 급급해 보일 뿐이었다. 하숙생은 천만 다행인 줄 알아야 했다. 나는 오늘 아침 신문에서 로스쿨에 대한 기사를 보고 기분이 찜찜했던 차였다. 나는 오늘 같은 날에 공부가 잘 안 되었다. 스트레스 받지 않고 공부하려면 오늘 같은 날은 쉬어줘야만 했다. 그래서 경주까지 같이 가주는 거였다. 그리고 이번 달 하숙비는 꼭 올려 받을 것이라 다짐했다. 근로기준법의 임금을 생각해 보면 임금은 시간당 받았다. 추가 시간에 있어서는 더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나도 오늘 추가 서비스를 해주는 것이기에 추가 임금을 요구할 것이었다. 정당한 권리였다. 비록 나는 근로자가 아니라 집 주인이기에 하숙비를 더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하지만 말이다. 나는 운전 중간 중간 룸미러를 통해 하숙생의 모습을 보았다. 하숙생은 아무 말도 없이 자료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 시간 넘게 자료만 들여다보고 있는 하숙생은 피곤했는지 기지개를 켰다. 나는 흔들리는 차에서 책보면 눈이 나빠질 수 있으니 그만보라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하숙생은 대꾸도 하지 않고 다시 자료를 봤다. 나는 피곤해 보이는 하숙생을 위해 조용한 노래를 틀어주며 한 숨 자라고 했다. 하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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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짜증난다는 듯이 조용히 하고 운전이나 하라며 소리쳤다. 난 입 닥치고 운전이나 하라는 하숙생의 말에 화를 냈다. 하숙생도 지지 않고 조용히 하라고 자료 좀 읽자고 같이 오는 게 아니었다고 그것도 못해 주냐고 연신 소리쳤다. 나는 운전수가 아니라는 마지막 말을 뱉고 침묵을 지키며 운전에만 신경 썼다.결혼하기 전 아내와 나는 여행을 자주 다녔다. 분비지 않고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곳들을 찾아 동해 서해 남해 바다는 물론 강원도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 등 전국적으로 돌아다녔다. 그때 우리는 둘이었고 둘만 있었기에 행복했다. 돌아오는 것이 싫을 정도로 떠나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 우리는 많이 달라졌다. 내가 학원에 강의를 나가면서 여행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당시 나에게 여행은 여가도 휴식도 아니었다. 집이 지상낙원이었고 집에서 쉬는 것이 최고였다. 이런 나로 인해 아내도 결혼하고 여행을 한 번도 다녀오지 못하게 되었다. 아내는 항상 집에만 있었다. 아내는 항상 나만 기다렸다. 나는 그게 아내의 도리고 아내도 만족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내는 여행 잡지사 기자가 되었다. 나하고만 있으면 된다고 했던 아내였다. 그러나 이제는 여행을 하며 취재만 다니고 있는 아내로 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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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초만 해도 아내는 여행의 ‘여’자에도 전혀 관심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랑 함께 있는 것이 즐거운 것이지 떠나는 게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아내는 취직을 하고 여행을 하며 결혼 생활에서 잃었던 웃음을 되찾았다. 예전의 내가 알고 있던 그녀로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잘못 안 것일까. 아님 아내는 진짜 내가 알던 그녀가 아닌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신호 대기에 걸려 서 있는 동안 나는 뒷좌석에 앉아 있는 아내를 룸미러를 통해 슬며시 바라보았다. 앞표지에 석굴암 불상이 찍힌 두꺼운 서적을 품에 안고 창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채 아내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나는 아내를 훔쳐보며 지금 내가 잘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는 히터를 한 단 더 올리고 따스한 바람을 아내 쪽으로 가도록 해주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 뿐이었다. 경주 톨게이트를 지나자 하숙생은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깬 하숙생은 석굴암이 아닌 경주 시내에 가자고 했다. 전용 기사가 된 기분이었다. 경주 시내에서는 나이가 지긋하게 드신 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분은 경주에서 태어나 육십년이 넘도록 경주 땅을 떠나 본 적이 없는 경주 지킴이라 자신을 소개했다. 그 분은 우리 집 하숙생의 취재를 도와 줄 분이었다. 백발의 머리가 노년의 멋을 더욱 돋보이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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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가이드였다. 그는 하숙생과 나에게 자신의 이름이 임태욱이라 소개했다. 그는 자신을 임이라 불러 달라고 했다. 하숙생은 그에게 임 선생님이라 부르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던 환한 미소를 보여주며 임 선생님께 말을 편하게 하라고 했다. 이에 임 선생님은 하숙생에게 너털웃음을 보였다. 난 룸미러로 하숙생과 임 선생님을 보며 굽이굽이 토함산 길을 운전해갔다. 토가 나올 것 같았다. 석굴암에 가기 위해서 토함산에 올라야했다. 임 선생님은 불국사를 구경하고 거기서 시작되는 토함산을 넘어 토함산 끝자락의 석굴암에 가야 석굴암의 진가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내는 걸을 시간이 없다며 임 선생님 말을 끊었다. 그리고 미안했는지 하숙생은 마감이 코앞이라 빨리 취재를 마치고 기사를 써야 한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하숙생은 종종 마감 기사를 들고 왔다. 자신의 일이 아닌데도 펑크날만한 기사가 있으면 도맡아 처리했다. 처음에는 하숙생이 남보다 늦은 나이에 입사하고 결혼까지 해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들고 오는 줄 알았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나서는 하숙생이 능력 있어 승진을 위해 마감 기사까지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년이 지나면서 나는 하숙생이 나와 집에 함께 있는 시간이 어색해 마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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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스스로 처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급했기에 나와 함께 왔지만 오는 내내 불편해 아무 말도 안 한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난 언제부터 우리가 이런 사이가 되었는지 답답했다. 우리는 정상적인 부부도 가족도 아닌 다른 것 같았다. 구불구불하게 포장되어 거대한 드라이버를 연상시키는 토함산은 험준했다. 더군다나 안개가 자욱하게 껴 있어 운전하기 불편했다. 그래도 안개가 낀 것을 보니 한 겨울 경주 날씨가 쾌청할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졌다. 적어도 하숙생의 취재가 방해받지 않을 테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 선생님, 이렇게 안개가 뿌옇게 낀 것을 보니 오늘 날씨는 맑겠죠?”나는 처음 본 임 선생님과 서먹함을 풀어보고자 먼저 질문을 던졌다.“하하하, 여기서는 날씨를 논 하시면 안 됩니다. 이곳은 항상 안개가 끼어있거든요. 토함산이 무슨 뜻인 줄 아십니까? 안개를 토하고 구름을 머금는다 해서 토함산입니다. 그러니 이곳은 항상 안개가 껴있죠. 거기에 구름까지 머금고 있으니 날씨를 쉽게 예측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나는 임 선생님 말에서 나의 무지를 느끼고 부끄러워졌다. 사실 하숙생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무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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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고시생이 아닌 연애 시절에 하숙생이 사랑한 똑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토함산의 뜻도 모르는 무식한 고시생이라고 종지부를 찍은 것만 같아 창피했다. 나는 룸미러로 슬쩍 곁눈질해 뒷좌석의 하숙생을 바라봤다. 하숙생은 취재 수첩에만 집중할 뿐 나의 이야기에는 처음부터 관심 없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하숙생과 나의 거리는 영영 이대로 하숙생과 하숙 집 주인 사이로 좁아지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무심한 하숙생의 태도에 화가 나기도 했다. 난 잘해보겠다고 운전도 하고 임 선생님께 말도 먼저 건넨 것이었다. 하지만 모르는 척 하는 하숙생의 태도였다. 서운했다.토함산의 구불구불한 길을 계속 돌고 있으니 귀가 멍멍거리고 속이 울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하숙생도 빈속에 속이 안 좋은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내색 하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그저 몸을 반 쯤 임 선생님께 돌려 석굴암에 대해 물으며 궁금했던 것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듯 보였다. 웃으며 말하는 하숙생을 보고 있자니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의 동요가 일어났다. 난 일 때문에 하숙생이 임 선생님한테 웃음을 보인다는 것을 알면서도 임 선생님이 부러워하고 있었다. 이상했다.그 이상한 기분은 예전에도 그랬다. 그때는 그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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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을 질투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내를 만나면서 내가 질투가 많은 사람인지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군대를 제대하고 칼 복학을 했다. 하지만 열심히 놀았던 덕분에 동기들이 전공을 듣고 있을 때 혼자서 교양을 들어야만 했다. 혼자 듣는 교양이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았다. 같이 교양을 듣는 여학생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발견한 것이었다. 혼자였던 나는 발표 수업을 하면서 짝이 필요했다. 마침 짝이 없던 마음에 드는 여학생과 한 조가 될 수 있었다. 여학생은 얼굴만 예쁜 것이 아니었다. 국문과에 다니는 그녀는 발표 수업 과제도 잘했다. 또한 리액션도 잘했다. 내가 이야기만 하면 맞장구치며 웃었다. 사실 나는 말을 재미있게 할 줄 몰랐다. 후배들까지도 말이 많다고 했지 재미있다고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그녀는 항상 나의 말에 웃어 주었다. 재미없고 관심 없을 만한 이야기에도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런 그녀가 좋았다. 하지만 그녀는 나에게만 웃어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리액션을 했다. 나는 그녀가 나에게만 웃어주길 바랐다. 그리고 나에게만 웃어주던 그녀가 나의 아내가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나만 바라봐 주는 아내가 되었을 때 그 질투는 멈춰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임 선생님과 웃으며 취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또 다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질투라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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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숙생과 임 선생님을 매표소 앞에 내려주고 대형 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 차에서 내려 안개인지 구름인지 분간할 수 없는 토함산 길로 하숙생과 임 선생님의 뒷모습이 점점 사라져 갔다. 나는 하숙생과 멀찍이 떨어져 가면서 연애 시절의 낭만을 찾아보려 노력했다. 안개와 구름은 뭔가 느끼게 해줄 것 같았다. 하지만 찾던 낭만은 안개와 구름 속에도 없었다. 안개는 국제 환경법에서 대기의 협약 중 기후 변화에 미칠 수 있는 것이었지 낭만을 안겨주지는 않았다. 토함산 매표소에서 석굴암까지 걷는 길 역시 계속 안개가 따라오고 있었다. 안개가 자욱하게 껴 있는 것을 보면서 여행 잡지사 취재 기자인 하숙생이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해 기사를 써갈지 궁금했다. 나는 우리 집 하숙생이 쓴 기사는 빼놓지 않고 항상 읽었다. 기행문 식의 기사도 있고, 여행지를 소개 해주는 기사도 있지만 그 중에서도 <한국 문화를 찾아서>라는 단신 기사가 좋았다. 사진 한 컷과 함께 한국 문화를 소개시켜주고 있는 기사는 새롭고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한국에 이렇게 좋은 곳이 있나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직접 와 본 결과 사실에 입각한 기사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관적인 기사가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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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 힘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숙생은 안개가 자욱한 토함산의 석굴암을 아름답게 포장해낼 수 있었다. 그 기사를 읽는 사람들을 속일 수 있는 비상한 능력이 있었던 것이었다. 나처럼 감성적이지 못하고 낭만적이지 못한 사람들은 이 안개를 보았을 때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숙생의 기사를 통해서 감동적이라고 할 것이다. 하숙생은 정신없이 취재 수첩을 채워갔지만 내 머릿속에는 뜬금없이 기온역전 현상에 대해 떠올랐다. 기온 역전 현상은 일교차가 큰 겨울밤에는 지표가 급속히 냉각되어 하층의 온도가 상층보다 낮아지는 상황을 초래한다. 이때 안개를 발생시킨다. 이 안개는 대기 기후의 변화를 가져온다. 그것은 국제 환경법과 연관해서 생각하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나는 생각을 멈췄다. 하숙생의 미소를 보았다. 나는 하숙생의 미소를 자아낼 만큼 안개가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기온 역전 현상을 떠올리게 할 뿐이었다. 안개는 십 여분 산길을 걷자 끝이 났다.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안개 너머로 석굴암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숙생은 석굴암이 삼국유사에서부터 유래되었다는 것에서부터 단단한 화강암이 주류를 이루는 우리나라에서 석굴암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세계 어디에서 볼 수 없다는 이야기들을 녹음하고 일일이 수첩에 적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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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듣고 있었다. 그런 하숙생의 모습을 보니 하숙생이 마감 기사를 자처한 게 아니라 잡지사에서 얼마나 영향력 있는지를 짐작 할 수 있었다. 하숙생을 오해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씩씩하고 멋진 하숙생이었다. 남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나에게 장가 잘 갔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대단한 아내였다. 하지만 활기차고 즐거워 보이는 아내의 모습에서 쓸쓸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남들은 못 볼 아내의 외로운 뒷모습이 한없이 작아보였다. 가여워보였다.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는 듯 보였다. 하숙생과 임 선생님을 따라 석굴암의 본존불을 보러 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양미의 절정이라 말하던 본존불을 지그시 살펴보았다. 감성을 잃고 산지 오래된 나는 거대한 본존불의 형상에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다. 사실 무엇을 봐도 그랬다. 아내와 연애 하던 때는 달랐다. 무엇을 보아도 탄성을 자아내는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것은 함께 즐길 수 있는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달랐다. 본존불 그 자체로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기 힘들었다. 또한 아내와 함께 보고 있는데도 어떤 아름다움도 찾아내지 못했다. 임 선생님께서 동양미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서 아름답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스스로 느끼기도 전에 물상화 되어버린 본존불은 나에게 온전한 아름다움을 선사해주지 못했다. 하지만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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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나와는 달라 보였다. 아내는 아무 표정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넋을 잃고 본존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내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굴 밖으로 나왔다. 겨울인데도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빛이 따사로웠다. “본존불 잘 보셨나요? 어때요? 여자 같습니까? 남자 같습니까?”나는 쉽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여자라고 하기에도 남자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한참 뒤에 나온 하숙생도 임 선생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임 선생님은 다시 안으로 들어가 본존불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다고 했다. “지금 보시고 계시는 본존불이 완벽해 보이나요?”임 선생님은 계속해서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 나에게는 완벽해보였다. 외적으로는 부족한 것도 없었고 손상된 부분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하숙생을 대신해 완벽해 보인다고 했다. 가까이 보지 못하고 유리 너머로 봐야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본존불 자체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고 솔직히 말했다. “완벽하게 보이는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완벽함을 느끼고 싶다면 유리 없이 가까이서 보면 더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네요. 본존불은 유리가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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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안쪽에는 본존불의 습기가 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에어컨이 작동하고 있죠. 본존불은 완벽해보이지만 에어컨 없이 살 수 없는 것입니다.”임 선생님 말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석굴암의 위상을 높이 사 서울로 옮기려다 실패했다고 한다. 그 결과 본존불을 자연 그대로가 아닌 재건축 해야만 했다고 한다. 그 재건축 하는 과정에서 습기 생기는 것을 막아주는 샘물 즉 감로수를 빼내버리고 시멘트로 덧칠한 것이라 임 선생님은 설명을 이어갔다. 결국 본존불은 습기가 차면서 푸른 이끼가 온 몸에 독처럼 서서히 퍼져나가고 그 독은 육안으로까지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 습기를 없애기 위해 증기 세척 등 수증기 분무에 의한 세척 작업을 했지만 상처만 남기게 되었다는 말도 했다. 완치될 방법은 없다고 했다. 자연적으로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기계에 의존해야만 하는 결론밖에는 없다고 했다. 그리하여 본존불은 에어컨에 의해 습기가 제거되었지만 유리 너머의 본존불로 변화한 것이었다. 나는 순간 인공조명의 석굴암에 대해 배신감이 느껴졌다. 24시간 내내, 365일 내내 에어컨의 인공 바람에 의해, 에어컨이라는 호흡기를 달고 숨 쉬고 있는 석굴암이었던 것이다. 에어컨이 없다면 죽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이렇게 남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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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없어지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남게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석굴암은 세계 문화유산이 되었다. 그게 석굴암의 힘이었다. 임 선생님은 확인해 볼 것이 있다며 먼저 석굴암에서 나갔다. 아내와 나 단 둘이 남게 된 것이었다.“당신, 석굴암의 에어컨 같아.”아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내의 말은 뜬금없는 말 같았지만 나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내가 나를 만나고 처음으로 울었던 날이 떠오르면서 아내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사랑했다. 옛날 말에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사랑이 그랬다. 스물세 살 그리고 스물여섯 살에 첫사랑을 시작한 여자와 남자의 사랑은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했다.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고 그리웠다. 만나기만 하면 헤어지기 싫었다. 그녀는 집에 거짓말 하는 말이 많아졌다. 나는 고시 공부만 하기도 벅찬 시기에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다. 우리는 항상 함께 붙어 다녔다. 떨어지지 않았다. 둘이어서 행복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여행을 갔다. 펜션을 빌려 저녁을 해먹고 술 한 잔을 했다. 술 한 잔을 한 그녀는 울었다. 그리고 술기운을 빌려 그녀는 힘겹게 고백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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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당신이 처음이었으면 좋겠는데 아니야.”

당황스러웠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나는 내가 그녀의 첫 번째 남자인 줄 알았었다. 그녀는 나에게 첫사랑이라고 했었다. 남자 사귀는 것도 처음이라 말했었다. 내가 처음이어서 그래서 더 좋다고 이야기했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내가 처음이 아니라고 하니 황당했다. 하지만 울며 힘겹게 말하고 있는 그녀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거짓말을 하냐고 나쁜 년이라고 머릿속에서 많은 단어들이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내뱉어지지는 않았다. 나는 괜히 속 좁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에게 괜찮다고 말해보라고 했다. 진짜 괜찮은지는 그녀의 말을 들어보고 생각해도 늦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보다도 어떤 놈인지 알고 싶었다. 왜 거짓말을 했는지도 알고 싶었다. 말은 계속 괜찮다고 했지만 술이 먹혔다. 제 정신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없을 것만 같았다.“나…….”그녀는 쉽게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괜찮다고 했지만 답답했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이야기 해줬으면 좋겠는 생각이 들었다. 아예 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하면 내가 그녀를 더 이상 믿을 수 없을 것만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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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 진실을 들어도 안 들어도 그녀를 미워할 거 같아 겁이 났다. 하지만 듣고 싶었다. 안 듣고 궁금해 하며 괴롭히는 것 보다는 듣고 싶었다. 듣고 난 뒤는 듣고 난 뒤에 생각하고 싶었다. “나… 사실… 어릴 적에… 동네 아저씨한테… 성폭행…….”그녀는 펑펑 울었다. 쉽게 그녀는 말을 잊지 못했지만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처음에 느낀 감정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 인간을 찾아서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린 아이였던 그녀를 범한 그 인간을 가만두고 싶지 않았다. 너무 어려서 그것이 폭행인지도 몰랐던 그녀의 아픔을 보상해 주고 싶었다. 평생 그녀를 보호해주고 싶었다. 고시에 패스해 정의를 찾고 싶었다. 나는 만난 지 육 개월 만에 그녀와의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집에 보내기 싫었고 혼자 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들께서는 성급한 우리의 결혼을 반대했다. 친구들은 임신한 거 아니냐며 비아냥거렸다. 우리는 반대도 비아냥거림도 이겨내고 결혼을 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잘 살아 줄 거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결혼은 만만치 않은 현실이었다. 둘이 함께 해야 하는 결혼이 각자의 생활이 되면서 혼란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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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각자의 생활에 충실하던 우리에게 사람들은 헤어지라고 했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아내를 위해, 사법 고시 패스해야 하는 나를 위해 헤어지라고 했다. 다들 헤어지는 것이 서로를 위한 일이라고 했다. 가족도 친지도 친구도 우리를 물과 기름이라며 헤어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헤어지는 것이 그들에게는 남의 일이었기에 쉬운 것이었다. 솔직히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헤어지는 일이 쉬울 수 있었다. 우리 집에서 하숙을 하는 하숙생 아내는 하숙집을 바꾸면 그만이었다. 나도 다른 하숙생을 구하면 됐다. 말로는 쉬었다. 하지만 쉬운 건 없었다. 추위를 싫어하고 습기를 싫어하는 우리 집 하숙생에게 지금 조건보다 좋은 조건은 없었다. 잔소리 싫어하고 관여 받는 일을 싫어하는 나에게 지금 조건보다 좋은 조건이 없었다. 혹여 더 좋은 조건이 있다 해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잃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내를 믿었다. 고시에 떨어진 나를, 살림만 하던 나를 아무 말 없이 지켜봐 주던 아내였다. 아내도 나와 같은 생각하리가 믿었다.

석굴암에서 나와 아내는 필요한 취재를 끝마친 듯 녹음기와 수첩을 챙겨 가방에 넣었다. 아내는 임 선생님께 같이 식사하자는 제안을 했다. 임 선생님은 외국인 가이드를 해야 한다며 주차장 쪽을 향해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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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걸어 나갔다. 천년 고도의 통일 신라 속에 아내와 나만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처음 경주에 다 달았던 때처럼 아내가 하숙생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경주까지 왔는데 바로 서울로 올라가야 해 아쉬워하던 나에게 아내는 경주 빵을 내밀었다. 따뜻한 빵의 온기에서 아내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내는 취재 가방을 뒷좌석에 놓았다. 그리고 뒷좌석에 앉으려 했다. 나는 조수석 문을 열어주며 아내에게 앉으라 했다. 아내는 웃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아내의 마음을 아내는 나의 마음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출발하자마자 하루 종일 피곤했는지 아내는 금세 잠들었다. 고개는 창 쪽이 아닌 운전석 쪽을 향해 놓고.

아내는 오늘도 칼 퇴근이다. 함께 산지 올해로 3년째인 아내는 전에는 볼 수 없던 칼 퇴근으로 나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 요 근래 항상 야근만 했던 아내였다. 그러나 회사에 입사한 후 처음으로 칼 퇴근을 한 아내는 재미가 들렸는지 하루가 멀다 하고 칼 퇴근을 한다. 일찍 퇴근한 날에는 장까지 봐서 들어온다. 그리고 저녁을 차린다. 말 그대로 아내는 나의 내조에 신경 쓰고 있다. 공부를 하는 나로서는 고맙다. 신경 쓸 일이 전혀 없다. 더군다나 나의 아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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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아내와 달리 잔소리도 안한다. 오히려 청소해놔서 고맙다고 빨래 돌려줘서 고맙다고 한다. 그런 아내가 나에게 바라는 건 오직 한가지다.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것이다. 담배 애호가인 내가 끊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아내는 잘 안다. 하지만 아이를 위해서라는데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다. 아내는 다른 아내와 달리 내조를 잘했고 공부할 수 있도록 큰 힘이 되어준다. 나의 아내는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아내가 아니다. 이런 근사하고 하나뿐인 나의 아내를 나는 잃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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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인 형

그리고 그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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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다-------------!누군가의 외침은 조용하던 학교 식당을 한순간에 아수라장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좁은 식당 출입구는 그의 모습을 보기 위해 한꺼번에 빠져나가려는 학생들로 인하여 병목현상의 교통체증을 방불케 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두 끼니나 굶어 허겁지겁 움직이던 숟가락을 식판에 팽개친 채, 아수라장의 틈바구니 속에서 식당입구를 빠져나가기 위해 애썼다. 서로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이리 밀치고 저리 밀치길 몇 차례,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간신히 빠져 나온 결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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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연신 사방을 살펴보았으나 그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뭐야, 없자나. 누가 장난친 것 아냐.함께 식사를 하던 형기가 어느새 내 곁에 와서는 실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연예인의 등장도 이 정도는 아니겠지? 무슨 애들도 아니고... 들어가서 밥이나 마저 먹자.형기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내 몸은 쉽사리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미련을 떨쳐버리기란 쉽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식당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멀리 지성과 분별이란 글을 새긴 바위만이 그의 모습을 대신해 묵묵히 서있을 뿐이었다.

처음부터 그를 의심한 것은 아니었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 학생들은 그를 그저 기인, 부랑자, 마주치기 싫은 존재, 혹 어떤 학생들은 우리 학교의 명물 정도로 여겼다. 그는 대학가에서 ‘원만이’와 함께 확고한 자기 영역을 구축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누구나 한번쯤은 ‘원만이’라는 존재를 들어봤을 것이다. 대학가 인근 전철역이나 버스 승하차장에서 지나가는 행인에게 당당하게 백 원만, 백 원만 하고 구걸을 하는 ‘원만이’. 몸의 어느 한 부분이 불편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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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아니요 정신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없는 듯 보이는 ‘원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당당하게 구걸하는 ‘원만이’. 이런 원만이의 당당함을 가졌으면서도 원만이와는 전혀 다른 그... 가끔, 아주 가끔, 그리고 몇 달 전 어느 날을 마지막으로 그의 행색에 연민이 발동한 한 맘씨 고운-형기는 미친년들이라고 했다-여학생들이 그에게 빵을 사다줬던 날, 그날은 캠퍼스에 그의 괴성이 울려 퍼지는 날이었다. 마치 자신에게 보이는 관심은 그저 값싼 동정일 뿐이라는 것을 항변하는 듯, 그의 괴성에는 분노가 담겨있었다. 그 이후로 그에게 다가서는 용기 있는 학생은 여학생은 물론, 남학생도 없었다.그의 곁에 다가가지 않는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시큼하고 떨떠름한 체취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그가 하품이라도 하는 날에 맡을 수 있는 입 냄새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한 여름의 쓰레기차가 방금 썩은 국물을 흘리고 지나간 것 같은 위력을 발휘하는 그의 등장은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아찔한 충격을 줬다. 오죽하면 애인과 사고를 친 여학생들은 그에게 말을 걸어라 라는 말까지 학교에 나돌았다. 뱃속의 태아에게 그의 입 냄새가 전해지는 순간 굳이 산부인과를 찾는 번거로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끼리 수군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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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그는 아는지 모르는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인지, 여하튼 그가 볼 일 보듯 애용하는 주된 장소는 우리학교 잔디밭이었다. 그렇다고 그를 학교 밖으로 내쫓을 수는 없었다. 이곳은 대학교였고 대학 캠퍼스란 언제나 자유가 함께 하는 공간인 것이 정당했다. 대학교는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낭만이 넘치는 장소여야 했다.

그를 꼭 찾아야만 했다. 우리학교의 학생이면 누구나 그를 찾기 위해-사실 찾는 다기보다는 그를 잡기 위해, 그것도 나와 몇몇의 사람들만-노력한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장난으로 치부해 버렸지만 한 번도 아닌 몇 번의 동일한 사례가 발생하자 모두들 한 가지 가능성에 대해 의심했다. 조용하던 학교를 발칵 뒤집어 놓은 문제, 그것은 다름 아닌 변태의 등장이었다. 변태가 등장한 것은 몇 주 전이었다. 학생들이 모두 귀가하고 수위 아저씨마저 깜빡 잠이든 이른 새벽에 벌어졌으리라고 짐작되는 변태의 행동은 다음날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우리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동물들의 영역표시처럼 변태가 잠깐 쉬었다 가면서 남긴 흔적은 하나의 행위예술이었다. 여자 화장실만 따로 위치한 층의 복도는 난장판이었다. 메스꺼우면서도 묘한 냄새가 건물을 휘감았다. 어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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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도 쓰레기통을 뒤집어 놨는지 복도 듬성듬성 쓰다버린 휴지가 가득했다. 개중엔 대변이 묻은 화장지, 누리끼리하게 변색된 화장지, 화장을 지우고 버린 화장지, 담배꽁초, 곱게 말아서 버린 것이 분명한 생리대까지 갈기갈기 찢어진 채 사람들의 감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고등학교의 규모보다 약간 큰 우리 학교가 난리가 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었다. 처음에 의심을 받은 것은 남학생들이었다. 모든 남학생을 변태로 의심하는 시선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여학생들의 의혹에 찬 눈빛은 남자들의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비록 스스로는 떳떳하다고 여길지라도 변태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은 남학생들의 자신감을 뺏기에 충분했다. 괜히 나섰다가는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에서 남학생들은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공교롭게도 며칠 뒤 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남자화장실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쥐 죽은 듯 조용히 지내야했던 남학생들은 제 철을 만난 듯 여학생들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세상에 변태가 남자만 있는 줄 아느냐, 범인은 여자일수도 있다는 것이 남학생들의 주장이었다. 여학생들은 발끈했다. 변태는 지능범이다. 그리고 분명 남자다. 그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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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는 남자에게 쏠린 화살을 여성에게 돌리기 위해서 이와 같은 동일범죄를 저질렀다. 변태의 수법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여학생들은 여성 중에는 절대 변태가 있을 수 없다며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학생들의 대립은 계속되었고 이 혼란의 와중에서도 변태는 몇 번 더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변태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모두들 한마음으로 변태의 검거를 바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변태가 점점 기승을 부리자 오히려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변태를 지극히 혐오하는 무리였다. 변태의 행위는 도저히 인간의 탈을 쓰고 할 수 없는 일이며 반드시 색출해서 일벌백계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대부분 여학생이 속해있었다. 남학생들도 입장은 마찬가지였지만 남학생 가운데 극히 일부분의 학생들은 오히려 변태의 등장에 환호했다. 딱딱한 일상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간만의 활력을 변태가 가져다주었다는 것이다. 이 변태 마니아 계층은 극소수였지만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건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변태클럽’이란 동아리까지 만들기도 했다. 변태 문제는 결국 총학생회의 주요 문제로 대두되었다. 맨 처음 학생회가 취한 조치는 고작해야 화장실에 경고문을 부착하는 것이 전부였다. 누군가가 저지른 한 두 번의 장난 정도로 치부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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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자 결국 총학생회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무엇보다 여론이 문제였다. 그리고 그 사건의 한가운데 내가 있었다. 학생회에서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하는 변태사건의 총 책임자, 우리학교의 학생회장 이름인 XXX, 이것은 바로 내 이름이기도 했다.내가 다니는 학교는 여타의 다른 대학교에 비해서 좀 특수하다. 정원이 천 명 안팎인 소수정예라는 특징이 그렇다. 인원이 작으니 당연히 규모도 작았다. 사립 고등학교와 비슷한 크기의 대지, 몇 개 되지 않는 학부건물 수, 어느 지방의 무덤만한 학교 잔디밭은 이곳이 대학교인지 고등학교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 중에 가장 큰 특징은 앞서 이야기한 여론, 여론이었다. 적은 수의 인원이기에 소문이 빨리 도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었던 것이다. 사건이 학생회까지 불거진 후 나름 데로 이곳저곳 열심히 뛰어다녔다. 야간 수색조를 자체 조직하고 학교에서 밤을 세워가며 수위 아저씨들과 함께 변태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변태의 그림자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알아주지 않는 노력에 대한 대가는 무능력에 대한 학생들의 괄시와 비방이었다. 학생회 자체적인 힘으로는 해결이 어려워 학교 측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 핑계, 저 핑계로 나 몰라라 하는 학교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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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 날 더욱 무능력한 학생회장으로 만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감투에 대한 책임을 져야했다. 변태가 그라는 소문이 나온 것은 학생들의 대립이 정점에 치달은 시점이었다. 사건의 책임회피를 위해 학생회에서 의도적으로 퍼뜨린 말은 결단코 아니었다. 그가 변태라는 소문은 아주 빠르게 번졌다. 누가 여자화장실에서 그가 나오는 것을 봤다더라, 새벽에 건물로 들어서는 그를 본 사람이 있다 등의 이야기가 꼬리를 물었다. 더욱이 이 소문에 힘을 실어준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그의 행색에 있었다.냄새야 그렇다고 쳐도 시골 허수아비에게도 씌우지 못할 것 같은 밀짚모자, 깍지 않은 덥수룩한 수염, 언제 세수를 했는지 모를 정도로 새까만 얼굴,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변태의 필수품 쥐색 트렌치코트, 일명 바바리. 이 이상 변태에 가까운 조건은 없었다.학생회는 즉시 그를 찾기 위해, 아니 잡기 위해 노력했지만 묘하게도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었던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변태 사건이 발생하기 전부터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는 변태가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그가 부랑자에서 변태라는 새로운 직업으로 변종 했다는 결론을 굽히지 않았다.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연락처도 모르는 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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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야했다.

못다 한 식사를 마저 하기 위해 식당 안으로 돌아왔으나 그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도저히 입맛이 돌지 않았다. 좀 전 소동의 여운이 가시질 않았는지 식당 안은 학생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반면 형기는 자신의 앞에 놓인 그릇을 다 비우고도 허기가 느껴지는지 내가 남긴 식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말없이 형기에게 식판을 밀어주자 고개를 숙이기 무섭게 형기는 숟가락질을 시작했다. 나와 같이 지방에서 상경해 이 곳 서울에서 자취 생활을 하는 형기는 학교에서 가장 친한 친구이자 학생회 홍보부장이기도 했다. 시계를 보니 오후 12시 40분을 좀 지나고 있었다.

1시부터는 연일 계속되고 있는 대책회의가 기다리고 있었다. 남은 식사를 아쉬워하는 형기의 손을 잡아끌고 학생 회의실로 향했다. 1시가 되려면 조금 이른 시각이었지만 대부분의 학생회 간부들이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속셈은 뻔했다. 어차피 뚜렷한 방책이 있지도 않은 시점에서 빨리 지겨운 회의를 끝내고 나가겠다는 심보였다. 또다시 무료하고 해결책 없는 회의가 시작되려는 찰나, 둔탁한 소리와 함께 회의실의 철제문이 열렸다. 열려진 문 틈 사이로 살짝 내민 얼굴의 주인은 여성복지부장 지혜였다.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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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시각에 늦은 것을 꾸짖으려는 찰나 지혜 뒤로 한 여자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두들 문가를 주시했다. 지혜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저, 선배...뭐야? 그리고 왜 이렇게 늦었어?다름이 아니라 여기 이 분이 변태와 만난 적이 있다고 해서요.말하는 지혜의 말투는 지극히 조심스러웠다. 지혜의 말투가 뒤에 있는 여자의 입장을 배려에서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잠시 후 알 수 있었다. 지혜가 망설였던 문제는 신빙성의 문제로 자신이 욕을 먹지는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누구신데?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라고 해.그때서야 지혜 뒤의 여자를 제대로 확인 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여자였다. 여기서 우리란 적어도 남학생들을 가리켰다. 아마 우리 학교에 이 여자를 모르는 남학생은 없을 것이다.안녕하세요. 일단 여기 앉으시죠. 아, 제 소개를 잊었네요. 학생회장 XXX입니다.네... 무용과 한유정이에요.그녀가 무용과 한유정 이라고 힘주어 말하자 그녀의 뒤에 서있던 형기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까 지혜 학우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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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변태를 만난 적이 있으셨다고 했는데 소상히 말씀해 주시면 저희가 큰 도움을 받을 것 같습니다.그녀에게 최대한 정중하게 말하면서 커피 한잔을 건넸다. 얼마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회의실의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우며 그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고 미심쩍은 의문을 지을 수 없었던 나는 그녀에게 재차 확인을 했다.정리해보죠. 그러니까 삼일 전, 늦게까지 혼자 무용 연습을 하고 집에 가는 길에 화장실에 들렀는데, 아니 그 전에 복도 멀찌감치 한 남자를 봤는데 화장실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고요?네.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냥 용변을 보셨고, 이윽고 밖에서 보았다고 추측되는 그 사람이 화장실 문 앞에 섰고요? 네. 화장실 문틈 아래로 신발 코가 보였어요.곧바로 문에 바싹 붙어서 이상한 신음소리를 냈고요?네. 정말 괴상한 신음소리였어요.정확히, 어떤 소리인데요?끄르륵, 끄르륵 하는 소리요.유정씨가 소리를 지르자 밖에 있던 사람은 문을 세게 한번 쿵 치고 도망갔고요?네. 제가 소리를 지르자 다급해서 도망가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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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했어요. 그리고 바로 따라 나섰다고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는 무서워서 꼼짝도 못 할 텐데… 어떻게 따라 나와 확인할 생각을 하셨어요?궁금했어요. 어떤 사람인지…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고 청바지에 잠바를 입고 있었다고요? 키는 180정도 되고요?황급히 도망가는 뒷모습만 보아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랬어요.얼굴은 도저히 기억 안 나세요?복도에서 처음 마주치는 남자를 화장실을 가는 상황에서 빤히 쳐다보게 되나요? 시력도 좋지 않은데 렌즈까지 빼고 있어서… 그는 화장실 근처라고 해도 꽤 멀리 있었어요. 모자까지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이 더 안보였고요.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변태는 여지까지 우리가 추측했던 그가 아니라 제 이의 인물이었다. 어쩌면 우리학교 남학생 중 하나일지도 몰랐다. 잠시 고민을 하고 있는데 형기가 난데없이 그녀에게 질문을 했다.어째서 변태가 유정씨를 따라 화장실을 들어올 생각을 했을까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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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눈으로 형기를 한동안 쳐다봤다. 그리고 재차 말을 이었다.그 때 복도에는 분명 그 사람과 저 밖에 없었고 기회다 싶었겠죠.그리고...그리고 뭐요?잠시동안 침묵하던 그녀가 얼굴에 홍조를 띈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혼자 있는 저를 보고 흑심을 느꼈을 수도 있죠.네? 그쪽을 보고요?설마 하는 어투로 형기가 반문했다. 나는 아차 싶었다. 황급히 그녀를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원망 어린 눈초리로 형기를 바라보더니 이내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곧이어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미처 저지할 사이도 없이 큰 소리로 회의실 문을 닫으며 사라졌다. 나조차 그녀가 변태의 표적이 됐다고 하니 어이가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형기가 그녀에게 반문을 한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학생회장의 입장에서 대놓고 형기 편을 들 수는 없었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형기를 다그쳤다. 하지만 형기는 너무도 태연했다.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아님 변태는 변태인가 보다. 거 특이한 놈이네.이 말에 지혜마저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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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기가 그녀에게 반문했던 질문이 내포하는 의미는 간단했다. 변태가 아무리 미친놈이라지만 어떻게 너와 같은 여자에게 흑심을 느낄 수 있느냐 는 말이었다. 우리학교 남자치고 무용과 한유정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입학 후 처음으로 한유정을 본 남자신입생들이 무슨 절차처럼 항상 묻는 말은 저 여자 정말로 무용과 맞아요 라는 질문이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무용과를 떠올릴 때 어떤 상상을 하는가. 열이면 열, 날렵한 몸매에 하나같이 어여쁜 외모를 떠올리며 침을 흘린다. 이와 같은 사실을 비추어 볼 때 한유정은 그야말로 무용과의 재앙이었다. 오죽했으면 그녀가 입학했을 때 사람들은 모두 무용과에서 짐을 날라주거나 사람을 들어주는 일을 하는 사람을 고용한 줄 알았다. 그녀의 외모가 문제되자 같은 무용과에서조차 그녀를 따돌렸고 그 뒤로 그녀는 항상 혼자였다. 그리고 말 그대로 독한 여자가 되었다. 얼굴 예쁘고 공부도 잘하면 ‘어쩜’, 얼굴 못생기고 공부도 못하면 ‘그럼 그렇지’, 얼굴은 진짜 생겼는데 공부를 잘하면 ‘독한 년’ 중 바로 그 독한 여자가 된 것이다. 듣기엔 유연성하나는 타고 났다고 하는데, 그 몸으로 어찌 날아다닐 수 있는지 나로서는 상상이 잘 가지 않는 일이었다. 여하튼 그녀는 실기에서도 이론에서도 항상 일등이었다. 일등의 주위에는 손바닥을 비비는 무리들이 꼬이기 마련이지만 한유정은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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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였다. 입학을 한 이래 그녀는 누구나 아는 학생이 되었지만 정작 친구하나 없는 학생이기도 했다.두 시간이 지나지 않아 학교 전체가 술렁였다. 한유정이 변태를 보았다고 하더라 는 말은 변태가 한유정을 겁탈하려고 했다 라는 말로 바뀌었다.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학생회에 걸려오는 전화가 제법 있었다. 교정에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한유정과 변태사건에 대해 물어왔다. 특이한 것은 질문을 하는 대부분이 여학생들이라는 점이었다. 이대로 좀 있으면 한유정과 변태사이에 애라도 태어날 것 같았다. 하지만 학생회와 나에게 중요한 것은 한유정의 제보로 변태사건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점이었다. 이제껏 그가 범인이라 단정 짓고 그를 찾기 위해 기울였던 노력을 학교 내부로 돌려야 했다. 그에게서 제 이의 남자로 가능성은 확대대기 마련이었다.

변태 색출로 정신없는 가운데 예상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습격은 날 더 당황하게 만들었다. 일말의 기별도 없이 아버지가 상경한 것이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불구하고 난 아버지가 어떤 목적으로 올라오셨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맞선 문제였다. 늦은 나이에 대학에 입학한 탓도 있었지만 아직도 연애보다는 공부가 하고 싶은 내게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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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됐다는 이유로 부모님은 선을 강요했다. 몇 달 전부터 집요하게 계속된 맞선 요구에 그때마다 은근슬쩍 넘어가곤 했지만 부모님들은 이대로 두면 안돼겠다 싶으셨는지 극약처방을 내렸다. 바로 생활비 공급을 중단한 것이다. 사실 요사이 내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두 달째 생활비 지원이 중단되어 나 하나 살아가는 것도 버거운 판국에 난데없이 학교에는 변태 문제가 터져 기승을 부렸다. 목을 조르는 경제난에 변태의 출현이라는 악재까지 겹친 상황에서 내 짜증은 더해만 갔다. 어쩔 수 없이 집에 전화를 한 것이 이틀 전이었다. 변태의 색출은 내가 원한다고 해서 바로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었기에 일단은 경제 문제부터 해결할 심산이었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생활비를 담보로 맞선을 요구하는 수화기 너머 아버지의 말에 부아가 치민 나머지 사실 지금 사귀고 있는 여자친구가 있어서 선을 볼 수 없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조만간 여자친구와 함께 집에 내려갈 것이니 생활비나 부쳐달라고 부연설명까지 했다. 아버지의 성격에 분명 아들의 여자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여 참지 못하고 올라오신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변명의 틈도 주지 않고 서울에 올라오셨다는 말과 함께 여자친구를 데리고 나오라는 일방적 통보로 통화는 끝났다. 이제는 있지도 않은 애인을 땅바닥에서 주워서라도 아버지 앞에 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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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가야만 했다.가장 만만한 대상은 착하기로 소문난 영미였다.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던 영미를 수소문하여 달래고 윽박지르고 그것도 모자라 무릎을 꿇기를 몇 차례, 간신히 같이 가준다는 영미의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비록 영미의 동의를 얻기는 했어도 그녀가 착하다는 소문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였다. 영미의 동의에는 무려 다섯 끼의 식사와 한 번의 영화 관람이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말이다.아버지를 만난 장소는 학교 앞 커피숍이었다. 먼발치에서 오랜만에 뵙는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난 순간적으로 장소의 선택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돼지우리 같더라도 학교 앞 커피숍보다는 내 자취방에서 뵈었어야 했다. 아버지 딴에는 당신의 아들이 학생회장을 하고 있는 학교에 오신다고 제법 멋을 부리신 모양이지만 아버지의 선택은 작금의 상황에서 정말 최악이었다. 아버지가 입고 계신 옷, 그것은 다름 아닌 짙은 계열의 트렌치코트였다. 상상해 보라. 학생회장의 얼굴을 모르는 학생은 거의 없다. 학생회장이 쥐색 바바리를 입은 50대 남자와 학교 앞 찻집에서 마주하고 있다. 처음 보는 50대 남자의 인상은 그리 좋지 않다. 학교에는 변태가 활개 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상상력은 과연 어디까지 발휘될 것인가. 커피숍을 이용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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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학생들의 시선이 내 뒤통수로 향하는 것을 느끼며 이곳에 오기 전 열심히 말을 맞춘 영미를 아버지께 소개했다.신부감을 처음 보는 대부분의 부모님이 그렇듯 아버지는 태어나 처음 보는 생물체를 접하는 표정으로 영미를 위 아래로 찬찬히 훑어 보셨다. 그리고 쏟아지는 질문. 언제부터 교제를 시작했냐, 부모님은 뭐하시는 분이냐, 나이는 몇 살이냐 등 우리 세대가 판단하기에 사랑과는 전혀 무관할 것 같은 이야기를 묻고 되물었다. 처음에는 잘 나가는 것 같은 영미와 아버지의 조우가 이상한 기류로 변한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직감적으로 난 아버지가 영미를 썩 내키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이 문제일까 생각했다. 아뿔싸, 문제는 바로 영미의 머리 색깔이었다. 아버지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내가 급한 마음에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사람의 머리색깔이 사람의 됨됨이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아버지는 영미의 노란 머리색처럼 노란 색안경을 끼고 사람을 평가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고집은 고향 동네에서도 정말 유명했다. 이 고집이 정의의 편에 서서 불의를 보면 꺽이지 않는 고집이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아버지의 고집은 당신의 생각과 주장이라면 그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굽히지 않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아버지의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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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내가 볼 때 선입견이자 편견이었다. 막 아버지가 영미에 대한 꼬투리를 잡으려는 찰나, 의아해하는 영미를 물리고 아버지에게 항복했다. 결국 아버지는 방학 중에 선을 보겠다는 내 다짐을 재차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비록 영미가 진짜 애인이 아니라고 해도 아들의 여자친구가 앞에 있는 상황에서 맞선 이야기를 하는 아버지는 너무나 당당했다. 아버지를 배웅하고 오는 길에 잠시 뒤돌아 아버지를 봤다. 걸어가는 아버지의 어깨는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활짝 펴져 있었다. 학교에 돌아오자 형기가 급하게 나를 불러 세웠다.야, 너 학교 앞에서 어떤 바바리 남자랑...아버지야.형기의 질문이 시작되기 무섭게 난 곧바로 형기의 말을 잘랐다. 형기가 무엇을 물어볼 것인지 안 봐도 뻔했다. 형기가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아버지도 변태도 학교도 전부 짜증나기는 매한가지였다.

숨이 턱까지 찼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요동쳤지만 죽기 살기로 뛰었다. 머리속은 오로지 그녀에게 잡히지 말아야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녀의 섬뜩한 하이힐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더 빨리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내 의지와 달리 뛰는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결국 그녀의 손이라 짐작되는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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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 느낌의 물체가 내 오른쪽 어깨를 잡았다. 몸이 빠르게 굳어 갔다. 고개를 돌리자 말로만 들었던 그녀가 얼굴을 반쯤 가리고 감정 없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왼 손을 치켜들며 가래 끓는 목소리로 물었다.나 예뻐?

깨어나야 한다는 자기암시를 연거푸 걸고 있을 때 나를 도와 준 것은 형기의 전화였다.그게 정말이야?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당장 갈게.옷을 입는 둥 마는 둥 자취방부터 학교까지 부리나케 달렸다. 형기의 말에 따르면 변태가 잡혔다고 한다. 더군다나 변태는 내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변태의 정체를 듣자마자 마음이 무거웠다. 무엇인가 착오가 있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가 변태일수는 없었다. 형기의 전화를 받기 전 꾸었던 꿈이 생각났다.빨간 마스크. 그녀가 세상에 나타난 것은 1994년이었다. 정신병원을 탈출해 100미터를 하이 힐을 신고 6초에 뛴다는 이 여자는 당시의 초등학생이 가장 두려워하고 믿어 의심치 않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 문제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심각했으면 9시 뉴스에서조차 보도된 바 있었으니까. 그녀는 귀까지 찢어진 입을 빨간 마스크로 가린 채 긴 머리를 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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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며 하얀색 레인코트를 입고 커다란 가위를 들고 밤 12시에 돌아다닌다. 만나는 사람마다 나 예뻐 라고 물어본다. 예쁘다 고 대답하면 너도 똑같이 해줄게 라며 가지고 있는 가위로 입을 찢어발긴다. 못생겼다 라고 대답해도 입을 찢어발기는 것은 마찬가지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운 괴담의 주인공일 뿐인 그녀의 이야기를 당시 아이들은 믿었다. 심지어는 중학생인 나조차 전염병에 걸린 사람처럼 믿고 두려워했다. 마지막으로 악몽을 꿨던 것이 몇 년 전이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내가, 유독 오늘 추억의 빨간 마스크 꿈을 꾼 것은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학생회실의 문을 열자 형기가 양팔을 깍지 낀 채 서 있었고 여자 한 명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상태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여성복지부장 지혜였다. 울었던 모양인지 눈가는 퉁퉁 부었고 양 볼에 눈물자국이 선명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 이마와 콧잔등이 빨갛게 달아오른 사람이 심각한 얼굴로 담배를 피고 있었다. 바로 우리 학교에서 이십 년 정도 정근한 수위 아저씨였다. 학생회 일로 인해 난 평소 가장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있는 편이었다. 여타의 학생들과는 달리 수위아저씨와도 가깝게 지내는 터였다. 그것은 지혜도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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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가지였다. 지금껏 보아온 수위아저씨라면 절대 변태일 수 없었다. 아저씨가 지혜를 추행하다니,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한동안 야간수색을 같이 하던 기억을 떠올리자 이 확신은 더욱 커졌다. 우아앙, 선배...내가 들어서는 것을 보자마자 지혜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몇 분인가 더 훌쩍이는 지혜를 달래고 사건의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 얼마나 무서웠다고요. 오늘 준비할 것이 있어서 학교에 일찍 올 수밖에 없었어요. 화장실에 혼자 가기가 망설여졌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다행히 깨끗하고 조용하더라고요. 잠깐 앉아있는데 갑자기 옆 칸에서 쓰레기통 뒤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어요. 달그락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쓰레기통이 엎어지는 소리가 들렸어요.아 글쎄, 그게 아니라니까 그러네.수위 아저씨가 부은 얼굴을 감싸며 변명하는 듯 지혜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는 한 몇 분을 옥신각신 서로의 주장이 옳다며 싸우기 시작했다. 말다툼을 하는 그들을 떼어놓고 하나씩 의견을 들어보니 내용은 이랬다. 바로 옆 칸에서 들리는 소리로 극도의 공포를 느끼고 있던 지혜는 어느덧 변태의 짓이라 추정되는 그 소리가 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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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졌지만 안심할 수 없었던 지혜는 평소 친분 있는 형기에게 휴대전화 문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화장실 문을 꼭 잠그고 형기가 달려올 때까지 기다리던 지혜는 문 밖에서 인기척을 들었다. 그 인기척이 여학생이었다면 밖에서 벌어졌으리라 예상되는 상황에 소리를 지르며 도망갔을 것이지만 인기척의 주인공은 태연히 칸마다 노크를 하며 사람의 유무를 확인했다. 지혜입장에서는 변태가 분명했던 것이다.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상황에서 노크소리가 한 칸, 한 칸, 지혜가 있는 곳까지 다가옴에 따라 절체절명의 위기를 느낀 그녀는 그녀 자신이 숨어 있는 칸에 노크소리가 들리자마자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힘차게 문을 연 것이다. 갑작스럽게 열린 문에 부딪힌 변태는 신음 소리와 함께 주저앉았고 너무나 겁이 났던 지혜는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며 미처 변태의 얼굴을 확인할 사이도 없이 밖으로 도망쳤다. 그 때 때마침 형기가 도착했고 변태를 잡으러 화장실로 들어간 형기는 수위 아저씨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반대로 수위 아저씨 입장에서는 그것이 아니었다. 마지막 순찰을 하는 와중에 여자화장실이 어지럽혀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곧바로 변태의 소행이라고 판단한 아저씨는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문마다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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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을 시작했다. 이른 시각이라 당연히 여학생 사용자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지혜가 들어간 곳까지 이르렀고,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자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안면부위를 문에 강타 당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수위 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그는 피해자인 셈이었다. 아저씨의 말 데로라면 변태는 이미 사건 장소에서 떠난 후였고 오해를 살 수 있는 기막힌 타이밍에 아저씨가 도착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성을 잃은 지혜는 끝까지 수위 아저씨가 변태라는 의심을 떨쳐버리지 않았다. 정말 빨랐다. 정오가 지나지도 않아서 학교 전체에 변태는 바로 수위아저씨라는 말이 떠돌았다. 이 일에 가장 빠른 반응을 보인 것은 다름 아닌 수위아저씨였다. 학교 내에서 아저씨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어디서 소주라도 한 잔 하시고 계신 것일까. 어쩌면 이후로 학교에서 아저씨의 모습을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교내의 모든 화장실에 C C T V가 설치됐다 . CCTV를 설치하기 위해 난 그야말로 힘든 싸움을 해야만 했다. 싸움의 대상은 학교측과 학생측 둘 다였다. 학교는 쓸데없는 일에 재정을 낭비한다며 나를 공격했고 여학생들은 세상 어느 곳의 화장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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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카메라를 설치하나며 강력한 반대의사를 비쳤다. 그녀들은 인권문제, 사생활 침해문제를 들먹였다. 저질적이고 미개한 발상이라며 카메라 설치를 완강히 부인했다. 난 목욕탕 탈의실에 도난방지용 감시카메라를 설치하는 곳이 바로 대한민국이란 곳이며 정확한 증거도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수위아저씨를 학교 밖으로 몰아 낸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권침해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변태는 앞으로도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변태가 최초의 그 사람인지, 제 이의 남자인지, 아니면 정말로 수위아저씨인지 확실하게 판명 나지 않은 상황에서 CCTV는 범죄를 줄이거나 막을 수 있는 효과가 있다고 맞섰다. 협의가 오가고 한정적인 위치에 CCTV의 설치를 할 수 있었다. 설치기간도 이번 학기까지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개인 프라이버시를 최대한 존중하여 화장실 입구에만 카메라를 설치했다. 남녀화장실 모두 볼일 보는 것은 직접 볼 수 없지만 누군가가 들어가고 나오는 것은 확연하게 보였다. 내 주장에 의해 달게 된 카메라였지만 막상 겪어보니 누군가가 지켜본다는 느낌에 기분이 더러웠다. 그 찜찜한 기분은 몰래 카메라를 알고도 당해주는 배우들의 뻔뻔스러움을 깨닫게 해주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서서 볼 일을 보는 남자들의 경우는 더욱 불평불만이 컸다. 소변을 볼 때마다 몇 발자국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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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가면 카메라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니 나왔던 소변도 자꾸 끊겼다. 더군다나 남자들이 소변기가 아닌 좌변기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 똥 싸러 간다라고 광고하는 꼴이었다.아우, 짜증나. 잡히긴 잡힐까?모니터실에서 새벽사이 녹화된 테이프를 보고 있는데 화장실에 다녀온 형기가 짜증을 부렸다. 나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수위아저씨의 결백을 증명하고 변태를 잡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지금까지 있었던 변태의 출현을 미루어 볼 때, 몇 일안에 변태는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컸다. 만약 변태가 등장하지 않는다면 카메라의 존재를 알고 있는 내부학생의 소행이거나 당신에 대한 섭섭함을 다르게 표현했던 수위아저씨가 변태라는 말이었다. 학교외부인은 카메라의 설치를 몰랐다. 따라서 부랑자인 그가 변태라면 그는 반드시 잡히게 돼 있었다. 내부학생이 범인이라고 가정해한다면 변태는 카메라가 없어지는 다음 학기가 되면 또다시 변태 행각을 벌 일 것이 분명했다.

변태는 한동안 얌전했다. 감시카메라에는 그 어떤 징후도 포착되지 않았다. 변태의 활동이 잠잠해지면서 학교의 분위기는 예전처럼 조용해진 반면, 변태의 정체에 대해 학생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과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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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더 강력해졌다. 그와 제 이의 인물, 수위아저씨, 이렇게 세 명을 둘러싸고 이들 중 한 명에게 변태 타이틀을 주기 위한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다. 그동안 내가 한 일은 오로지 모니터 실에 틀어박혀 뚫어지게 화면만 쳐다보는 것이었다. 하도 오래 앉아 있어서 엉덩이에 진물이 날 정도였다. 고시원에서 고시 공부를 하는 사람처럼 모니터실에서 먹고살았다. 형기는 나의 지독함을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에 비유했다. 학생회의 모든 인원이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 그 날이 찾아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도 사람인지라 체력의 한계에 부딪혔고 부랑자인 그와 몰골이 비슷해져 가는 내 모습에 학을 띤 형기가 새벽에 불쑥 사우나에 가자고 꼬드겼다. 형기의 집요한 요구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여자화장실을 비추는 화면에 새까만 형체가 빠르게 지나갔다. 형기와 난 순간적으로 마주봤다. 새벽 두시 반, 이 시간에 여학생은 없다. 학교에 사람이 없다는 것은 한시간 전 있었던 순찰에서 확인한 뒤였다. 더군다나 여자들로 구성된 순찰조나 여자 수위는 없다. 꼴깍. 형기의 목구멍으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화면에 빠르게 지나간 그 형체는 변태가 분명했다. 카메라의 범위가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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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지 않는 깊숙한 안쪽까지 들어간 상태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었지만 형기와 나는 확신했다. 드디어 변태의 꼬리를 잡았다. 변태가 몇 발자국 옆으로 이동만 해준다면 이 자식은 곧 만천하에 정체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말아 쥔 주먹에 식은땀이 베어 나왔다. 모니터실은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흘렀다. 내 시선은 화면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고정됐다. 이윽고 변태는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변태는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대담하고 민첩하게 행동했다. 마치 우리와 카메라를 비웃는 것 같았다. 변태는 화장실을 한 바퀴 두리번거리더니 좌변기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 익숙한 솜씨로 쓰레기통을 뒤졌다. 그리고는 쓰레기통에 고개를 처박았다. 한참을 처박고 있던 고개가 들리자 변태의 입에는 여인의 배설물이 묻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휴지가 물려 있었다. 변태는 그 어떤 성당의 미사보다 장엄하고 엄숙하게 휴지를 탐닉했고 어떤 때는 야수처럼 그것을 찢어발겼다. 또 다른 휴지 하나를 꺼내더니 이번에는 코 가장자리로 갖다댔다. 황홀한 듯 냄새에 취한 변태는 휴지를 혀로 핥아댔다.후...형기가 담배한대를 입에 물더니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곧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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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가 파악된 변태를 잡으러 가기 위해 움직이는 몸놀림은 아니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화면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모니터에 비치는 변태는 아직까지 무인지경이었다.그 화면의 주인공,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변태는 평소 잘 알고 있는 존재였다. 잘 알고 있었지만 단 한번도 변태라고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존재였기에 충격은 더 컸다. 결국 변태는 그도, 제 이의 인물도, 수위아저씨도 아니었다. 변태는 바로 언제인가부터 우리 주변에 나타나 어슬렁거리며 캠퍼스를 누비던, 누구의 입에서 날 잡아서 된장 한번 발라야겠다고 다짐하게 했던 집 잃은 변견, 똥개였다.똥개를 탓할 수는 없었다. 똥개는 자신의 본분을 다한 것이다. 아무도 없는 새벽, 똥개는 본능이 이끄는 데로 원초적 냄새가 물신 베어나는 화장실에 유혹되어 발을 들여놓았다. 쓰레기통 속에서 그 근원을 확인하고 그저 충실하게 비비고 물어 찢었다. 한동안 화장실은 똥개의 놀이터가 된다. 그리고 다음날 학생들은 똥개가 벌여 놓은 광경을 바라보고 경악하며 소리친다.

학교에 변태가 있다!!!

아침이 되어 변태의 정체가 똥개였다는 사실을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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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된 학생들은 그야말로 똥 씹은 표정들이었다. 몇 번의 거듭된 학내방송을 통해서 이번 사건이 개로 인해 벌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형기와 나는 변태사건의 최종결론에 대한 대자보를 붙이며 돌아다녔다. 학생들의 반응은 정말 가관이었다. 처음, 똥개가 변태일리 없다는 학생들의 표정은 시간이 지나자 마치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표정들로 바뀌었다. 학생들의 표정이 어찌됐건 변태문제가 해결됐다는 사실이, 비난일색의 여론이 잠잠해졌다는 사실이 나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벤치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형기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예전부터 궁금한 것이었는데, 여학교의 바바리맨 말야. 모든 여학교의 전설에는 항상 바바리맨이 등장하자나. 내가 궁금한 것은 바로 수야. 전국의 여학교가 몇 개나 될까? 족히 수천 개는 되겠지. 그럼 학교마다 바바리맨이 있으니 바바리맨의 수도 수천 명이 되어야 하자나. 하지만 바바리맨에게 전국 협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그렇게 많은 바바리맨이 존재할까? 듣고 있어?형기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것은 쓸쓸히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홀로 교정을 걸어가고 있는 그녀는 무용과의 한유정이었다. 그녀를 보자 내 머릿속은 수많은 생각들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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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만났다는 변태는 누구였을까. 그녀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닐까. 혹시 그 변태는 정말로 그녀에게 흑심을 느낀 것은 아닐까. 변태는 그녀의 어디가 맘에 들었을까. 그리고...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그녀의 실루엣 대신에 그 어느 날 보았던 바위하나가 소리 없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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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쇄 • 2009년 2월 18일

발 행 • 2009년 2월 22일

발행처 • 추계예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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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사 문 예 2008년 제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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