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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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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작품추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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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호·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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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례

contents권두언

처음으로 돌아가기_ 문학부장 윤 호 병

펴내는 글

문학의 성장통(로)_ 24대 문학부학생장 류 민 아

제17회 추계문학상

_ 시 부문

심사평 시인 김 기 택 ....................................... 11

최우수상 <티벳 감성> 외 4편 _ 정 성 희 .................. 15

우수상 <전기의 바다> 외 4편 _ 윤 민 우 ............... 25

장려상 <푸른 파문> 외 2편 _ 김 보 아 라 .............. 33

장려상 <선한 연극> 외 2편 _ 박 으 뜸 .................. 37

장려상 <제 7요일> 외 3편 _ 이 상 현 ................... 41

장려상 <하모닉스 튜닝> 외 2편 _ 이 호 석 ............. 49

장려상 <접시> 외 1편 _ 임 채 연 ......................... 57

_ 소설 부문

심사평 소설가 박 상 우 .................................... 63

최우수상 괘양이 _ 이 승 빈 ................................ 69

우수상 즐거운 하루 _ 임 채 연 .......................... 95

장려상 기록 _ 김 웅 호 ..................................121

장려상 내가 그녀를 찾아간 이유 _ 송 민 정 ..........147

장려상 누군가 리본을 달았다 _ 윤 민 우 .............175

장려상 통로 _ 이 청 조 ..................................200

장려상 꿈에 살다 _ 조 선 욱 ............................216

‘‘‘

17L I T E R AT U R E & C R E AT I V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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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두언 - 윤호병

권 두 언L I T E R AT U R E & C R E AT I V E

처음으로 돌아가기

새로운 해가 시작되면 무척이나 분주해 집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열기 위해 집안을 청소하기도 하고,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거나 방문해 새해 인사를 건넵니다. 학교 안에서도 여러 가지 행사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신경 써야 할 것은 바로 신입학 전형이죠.추계예술대학교 문학부 문예창작전공이라는 곳에서 4년이라는 시간 동안 공부하기 원하는 학생들이 무척 많습니다. 학생들을 선별하고 선발하는 일을 하다보면 여러분들이 떠오릅니다. 삼삼오오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여러분의 모습. 밑 빠진 독을 받아 든 것 마냥 시험지와 답안지를 받아 든 여러분의 모습. 무엇보다 좋은 건 선배·후배 할 것 없이 모여 왁자지껄 떠드는 여러분의 모습입니다.여러분의 후배가 될 09학번 후배들이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새내기들이 추계에 와서 처음으로 선배를 만나는 곳은 어디일까요? 바로 『추계문학』입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다녀오면 추계문학을 한 권씩 받아듭니다. 선배들은 이런 시를 쓰는 구나, 이런 소설을 쓰는 구나, 하며 선배들을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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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문학 제17호6

여러분은 어떠셨나요? 여러분은 추계에 어떤 첫 인상을 가지고 계신가요? 매년 입학하는 학생들을 볼 때마다 저는 항상 들뜬 마음을 갖습니다. 신입생들의 모습 하나하나와 행동 하나하나에서 문학에 대한 열정을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열정을 지닌 청년들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에 저를 들뜨게 합니다.여기 한 권의 책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들고 있는 책 안에 있는 작품들은 ‘한때’ 열정을 가졌던 청년들의 작품이 아닙니다. 현재 진행형인 열정입니다. 또한 미래지향적인 열정이기도 합니다. 추계가 존재하는 한 문학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과 열정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마지막으로 수고한 학생회 편집진과 작품을 투고한 학생들, 그리고 작품을 심사해주신 김기택, 박상우 선생께 감사를 전합니다.

2009년 2월

문학부장 윤 호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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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펴내는 글 - 류민아

문학의 성장통(로)

안에서도 밖에서도 유난히 말 많고 탈이 많았던 한 해였습니다. 그래서 인지 어느 해 보다도 시간이 빨리 흐른 것 같습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2009년을, 매년 그래왔던 것처럼 『추계문학』을 펴내는 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추계문학상에 응모한 여러 학우들의 작품을 보며 문학을 향한 열정과 애정을 느꼈습니다. 좋은 작품을 용기 있게 내준 학우여러분께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매년 추계문학상이 열릴 때마다 작품 공모에 어려움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은 남에게 작품을 보여주기 부끄럽다는 이유로 출품을 거절하는 학우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하지만 『추계문학』은 한 발자국 앞을 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임이 분명합니다. 많은 문예잡지나 신춘문예를 목표를 하는 학우들에겐 작은 경험의 기회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학우들에게도 자신의 글을 보여주고 평가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입니다. 이렇게 좋은 취지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추계문학』임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이지 않은 참여율로 발간에 어려움이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해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추계문학』을 바라

펴내는 글L I T E R AT U R E & C R E AT I V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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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문학 제17호8

보았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학우 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 덕분에 활기찬 분위기로 『추계문학』을 이끌 수 있었습니다. 일학년부터 사학년까지 많은 학우여러분이 완성도 높은 작품을 투고해주었습니다. 내년, 내 후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이런 적극적인 참여와 완성도가 계속되어 『추계문학』이 더 많이 발전해 나가기를 기대합니다.분명 『추계문학』은 제일 우수한 작품을 뽑아 시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추계문학』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에 있지 않습니다. 『추계문학』의 취지는, 재학생들 각자의 한 해를 마무리하며 투고한 작품을 한 데 모아 열정으로 이루어낸 『추계문학』을 발간하고, 그것으로 하여금 재학생들의 의지와 열정을 함께 나누는데 있습니다. 추계문학상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고 한 해의 시작을 『추계문학』으로 하는 것도 그것 때문 일 것입니다. 『추계문학』이 재학생들에게 수상 여부에 관계없이 자신의 열정과 가치를 높이는 계기로 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용기 있게 완성도 높은 작품을 투고해준 학우여러분께 감사의 말을 전하며, 다음 『추계문학』을 기대해봅니다.

2009년 2월

제24대 문학부학생장 류 민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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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김 기 택(시인)

최우수상 <티벳 감성> 외 4편 _ 정 성 희

우수상 <전기의 바다> 외 4편 _ 윤 민 우

장려상 <푸른 파문> 외 2편 _ 김 보 아 라

장려상 <선한 연극> 외 2편 _ 박 으 뜸

장려상 <제 7요일> 외 3편 _이 상 현

장려상 <하모닉스 튜닝> 외 2편 _ 이 호 석

장려상 <접시> 외 1편 _ 임 채 연

L I T E R AT U R E & C R E AT I V E

2008년도 제17회 추계문학상

시 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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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 부문 심사평 - 김기택

심 사 평L I T E R AT U R E & C R E AT I V E

대학 문학상은 신인의 등용문도 아니고 문학적인

업적에 수여하는 상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가 결코 작지 않은 것은 그것이 문학에 대한 순도

높은 열정과 생산적인 고뇌가 살아 숨 쉬는 현장이며

잠재력과 가능성이 내일을 향해 무한히 열려 있는 축

제의 장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심사를 하면서 그 시적

성과가 의외로 만만치 않음을 보고 그 점을 확인한 것

은 행복한 일이었다.

정성희의 「까마귀에게」 외 4편은 인식의 힘을 인상

적으로 보여준다. 이 시들은 세상에서 은폐된 채 자신

을 억압하는 기만적인 허위를 예민한 촉수로 포착하

여 보여준다. 「티벳 감성」은 티벳의 현실과는 관계없

이 상품화되고 장식적으로 사용되는 티벳 이미지를,

「까마귀에게」는 한 사람의 일생을 지배하고 대신하는

늙은 까마귀와 같은 의식을, 각각 흥미롭게 관찰하여

드러낸다. 「통조림 뚜껑」은 일상 속에서 이 허위가 어

떻게 작동하는가를 통조림으로 유통되는 물고기들을

통해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대상을 보는 시선이 다양

하고 넓으며 그것을 형상화하는 힘이 강하고 활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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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문학 제17호12

다는 점이 장점이다.

윤민우의 「요가」 외 4편은 대상을 보는 개성적인 시

각과 감각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요가」는 삶 또는 세

상에 대한 사유를 요가의 운동적인 특성으로 변형시

켜 보여주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양립하기 어려운 바

다와 사막을 양서류처럼 오가며 사는 현대 노동자의

고통스러운 삶을 나타낸 「양서류」나 꿈의 힘으로 자라

는 식물성 유기체인 수염을 깎아내야 살아갈 수 있는

현대인의 모순적인 삶을 표현한 「에프터 쉐이브」에서

도 이런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들은 모순과 부

조리의 고발보다는 우회적인 표현을 통해 그것을 미

적으로 변용시킴으로써 낯설게 하는 효과를 갖는다.

두 응모자의 시들은 나름대로 흥미로운 특징을 지

녀 우열을 가리기는 쉽지 않았지만, 정성희의 시들이

지닌 자연스러움과 힘, 속도감에 좀 더 높은 점수를

주어 최우수작으로 선정하였으며, 윤민우의 시들을

우수작으로 선정하였다.

비록 수상을 하지는 못했지만 이호석의 「가을은 거

미줄을 타고 왔다」 외 2편도 만만치 않은 역량을 보여

주고 있다. 거미줄을 관통하고 있는 계절의 순환, 삶

과 죽음의 반복을 관조적으로 관찰한 「가을은 거미줄

을 타고 왔다」는 거미와 먹이와의 관계에 주목한 기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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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시 부문 심사평 - 김기택

의 많은 시들과는 다른 독특한 시각을 보여준다. 거

미줄 위의 배고픔과 발버둥, 먹고 먹힘, 삶과 죽음은

관념일 뿐이며 이와 같은 삶들의 거대한 집합체인 자

연은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다는 냉철한 시각이 그것

이다. 현악기의 음을 감각적인 몸의 정서로 변용시킨

「하모닉스 튜닝」도 볼만하다. 그러나 이번 응모작에서

는 종종 수사와 장식이 시를 산만하게 하고 있다는 것

도 지적해야 하겠다. 꼭 필요한 이미지에 힘을 집중하

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한다면 시의 완

성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이상현의 「농밀한 위로」 외 4편도 매력적이다. 이

시들은 일상의 틈 속으로 들어가 그 진부함이나 답답

함을 유희적으로 가볍게 제시하는 방법이 눈에 띈다.

집에 있다가 환한 바깥으로 나올 때의 기분을 “광합

성”하기, “밤의 허기”, 햇빛을 먹으려는 “식욕을 위

한” 추임새 등으로 표현한 것이 그 예이다. 살아있는

순간을 구체적인 실감으로 드러내려고 애쓰는 태도는

바람직하다.

김보아라의 「푸른 파문」 외 2편은 동화적인 따뜻한

시선과 서정적인 문체가 잘 어울린다. 그것은 부정적

인 대상들을 긍정적인 힘으로 변용시키는 기능을 한

다. 다만 익숙한 시어들로 인해 시적 긴장이 떨어지는

점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박으뜸의 「선한 연극」 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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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문학 제17호14

편은 일상적인 삶의 편린들을 극적으로 연결하고 재

구성하는 즐거움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극화가 관념

적이기 때문에 극적 효과는 낮은 편이다. 어떻게 경험

적인 생생한 순간을 극화할 것인가를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임채연의 「무덤」 외 1편은 삶에 대한 반성

적인 시각을 비교적 성실하게 드러낸다. 이 시들 역시

관념적이라는 점을 지적해야 하겠다. 이들의 습작 기

간이 그다지 길지 않으며 지금은 모색의 과정을 지나

고 있는 중임을 고려한다면 이런 지적들은 사소한 것

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잠재력을 믿고 꾸준히 노력하

여 단점을 오히려 개성으로 만들기 바란다.

이번의 모든 응모자들에게 지금의 시 몇 편으로 일

희일비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싶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시들이 있게 한 모든 열정과 고뇌의 시간들이며,

더 큰 성취를 위한 밑거름의 시간들이기 때문이다. 그

시간들은 먼 후일 돌아보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소

중한 자산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 시들을 쓰는데 불

을 밝혔던 모든 밤의 시간과 아프면서도 이상하게 행

복했을 열정들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2009년 2월

시인 김 기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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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티벳 감성 - 정성희

티벳 감성

정 성 희

티벳은 거기 있지

티벳은 여기 없어

파도가 밀려오면 티벳의 깃발이 아우성을 치고

티벳은 여기 있고 티벳은 거기 없네

누가 티벳을 여기 세웠을까 누가 티벳에 간판을

세웠을까

누가 티벳을 포장했을까 누가 바코드를 찍었을까

나는 편의점에서 티브이에서 티벳을 먹었네

나는 티벳을 끊었고 나는 티벳을 할부했지

티벳은 여기저기서 떠들어대고 티벳은 여기저기서

광고하네

티벳은 인스턴트 티벳은 식습관 티벳은 나의 디저트

티벳은 조리되었고 양념되었고 잘 버무려서 입맛

에 맞게

제17회 추계문학상

시 부문 최우수상 정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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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문학 제17호16

누군가 내 구미에 딱 맞추어서 티벳을 넘겨주었는데

나는 티벳을 씹고 티벳을 넘기고 티벳을 나누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정답인 것 같았는데

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내가 뭘 잘 못 본 것일까 여기에도 거기에도

어디 먼 나라에도 티벳은 없네

없는 티벳을 누가 사갔을까 없는 티벳을 누가 광

고했을까

없는 티벳을 누가 폐간 시켰을까

울지 않는 티벳을 먹지 않는 티벳을 말하지 않는

티벳을

누가 팔았을까

나는 티벳에 있네 티벳이 아예 없을 때

울고 웃고 먹으면서 신나게 떠들면서

나는 티벳과 말을 나누지 티벳의 목소리로 말하지

나는 멀리멀리 나는 거기 없고 나는 여기도 없어

누군가 나를 모를 때

티벳은 여기도 거기도 없이 멀리 멀리 갔을 때

문득,

티벳은 어디에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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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시 부문 최우수상 - 정성희

통조림 뚜껑

정 성 희

끔찍한 이빨이었어

파도의 급속해동 이라고 할까?

캔을 따자 철썩, 밀려왔어

무리지어 떼 지어

물소처럼 하이에나처럼

몰려왔어

야생성이라 날카로웠어

바람의 칼날이라도 온 줄 알았어

하지만 이상한 일이야

죽은 물고기는 꼬리를 흔들지 않는데

저 물결은 무엇이지?

어딘가에 틈이 있었던 거야 이 시간과 저 시간

죽은 것과 산 것들이 이리저리 날뛰도록

끔찍하지 혹은

틀니에 혀가 베었거나

젊은 나이에 죽은 어떤 여배우처럼

Page 20: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추계문학 제17호18

내가 알고 지내던 사내의 투신자살처럼

어느 순간 갑자기 살아있는 행세를 하지

조간신문 속에 쫘악 펼쳐져서

신경질적으로 페이지를 넘기는 내 손을

쓱싹 베어 버리는 거야

끔찍하지

통조림처럼 얌전히 담겼다가 쫘악

금이 간 상처마다

붉은 입을 벌리고 있었어

어느 거대한 국적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뭐라 뭐라 중얼거리는 걸

들어보려 한참 애를 쓰다가

나는 신문을 던졌어 퍽 하고 쏟아지는 것들

짐승처럼 날뛰다가 파도의 경계선

모래사장 속에 다시 잠잠해 지는

일순, 방은 고요했어

…그 바다에 다시 한 번 가볼까?

나는 티브이를 마저 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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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시 부문 최우수상 - 정성희

까마귀에게

정 성 희

한 마리 늙은 까마귀가 나에게 묻는다

접혀진 날개로 내 발바닥 맞은편에서 움츠린다

쿨럭, 쿨럭

엉덩이를 비틀고 내 얼굴위에 앉은

이 표정들은 낯설다

나는 얼굴을 조금 구겨 앉아 본다

옆에 앉은 저 사람은 모르는 것 같다

창문이 자꾸 중얼거린다

나는 텅 빈 동공을 몇 페이지 넘겨본다

나는 액자에 갇혀

예감처럼 불쑥불쑥

내 눈동자를 힐끔거린다

나는 저 사람을 모르게 만드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다

한 마리의 늙은 까마귀가 저 사람의 눈동자에 갇혀

얼마나 저 사람을 모르게 만들었는지를

Page 22: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추계문학 제17호20

이미 창문이 저 사람의 것이 되었고

그 뒤로는 날갯죽지들이

펄럭펄럭 날아다니고

계절은 벌써부터 저 사람의 편을 하고 넘어 다닌다

이런 친근함에 관하여 나는 시시각각

퍽 불편하고 예민한 표정으로

모르는 척을 하고 앉아 있는데

내 표정에 오래 앉아 있다가

엉덩이를 고쳐 앉은

요란한 말투가 쏟아진다

콜록 콜록

한 마리의 늙은 까마귀가 그의 입가에서 웃고 있다

나를 비웃는 것처럼

이제는 나를 모르게 만들 것처럼

Page 23: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21시 부문 최우수상 - 정성희

개의 눈

정 성 희

내가 개를 때리면

개의 눈이 보인다

개를 밟고 선 내 몸이

개 눈에 갇혀있다

내가 개의 목줄을 잡아당길 때

개가 열어놓은 동공의 사육장이

목 졸린 나의 얼굴을 불러오는 것을 본다

개의 눈은 내게 꼭 맞는 지구

내게 꼭 맞는 둥근 형틀

나는 개의 눈동자의

순한 가축이 되고

그 구체 속에 묶인다

이 갑갑한 자유 속에서

살고 있다 저 얼굴

Page 24: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추계문학 제17호22

개처럼 질질 끌려 다니는

얼굴!

개가 나를 본다

바람이 개처럼 묶여 짖을 때

빙빙 도는 하얀 눈알에서

춤을 추는 저 얼굴

온통 누렇게 웃고 있는 얼굴

나무에 달린 개들이 투신한다

개가 나무에 달릴 때

나는 개의 눈에서 투척 당한다

개를 때릴 때마다 튀어나오는 감옥

내 손에서 팽팽해지는

저 참을 수 없는 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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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시 부문 최우수상 - 정성희

신의 서

정 성 희

아마존에서 나의 제국은 신을 섬겼다

이글거리는 태양 밑에 이빨을 드러낸

누런 얼굴의 부족들이

고무나무의 제단위에서

나의 신을 짜냈다

젖가슴 풍만한 여인들의 액체를

두 손에 받아 마시는 저 손길

가장 부드럽고 연약한 영혼은

신을 애무한다

이 무한한 순수 속에서

어린이들의 동경 속에서

나의 신의 그곳은

뜨겁게 달아오른다

풍만한 젖가슴을

남자들의 입으로 쥐어짜면서

Page 26: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추계문학 제17호24

신비의 대륙으로 퍼즐을 맞추며

태초의 판게아처럼 그렇게

발가숭이인 나의 신은 뛰어나왔다

직립한 그들의 성기에

꼭 맞는 이름으로 그들은

성전에 들어가기를 열망한다

신의 은혜를 덧입기를

신의 이름으로 우리의 이름이 불려지기를

이 열망의 숨결 속에서

신의 이름이 나의 이름이 되기를

곳곳마다 신을 부르는 주문

나의 여신이여

우리는 가슴마다 그 제국의 형상을

여인의 가슴을 동경한다

그리고 신을 동경하기를

너도 나와 같은 신의 이름을 부르기를

너도 나와 같은 대륙을 열망하기를

나의 여신 오 나의 여신

나의 승리의 여신이여

Page 27: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25시 부문 우수상 - 윤민우

전기의 바다

윤 민 우

줄이 끊어진 하프가 먼지의 음표를 노래할 무렵 나

는 출정하네 돌고래 비늘처럼 싱싱해져 돌아오려네

수면 위에 투사된 철자들을 해독하는 건 바야흐로

선장의 몫 키잡이여 너무 급히 하강하지 말게나 과

부하가 걸린단 말일세 자네는 한 움큼 머리털을 그

을려도 좋은가 딴은 그렇군 이곳은 바다가 아니겠는

가 애석하게도 한 선장은 인어가 쳐놓은 그물에 낚

였다던데 나는 그에게 동정을 전송했네 답장은 먼

우주, 스푸트니크 1호로부터 날아왔다네 ‘소금은 갈

증을 부를 뿐’ 고이 접어 휴지통에 넣어두었지 쇠비

린내가 지독했거든 그런데 가만 이곳은 어디인가 나

침반을 꺼내자 그 속에 웬 장님 하나가 창을 휘두르

고 있을 뿐이네 창끝을 빛의 속도로 갈았다지만 오,

나는 알았네 그에겐 통 살기殺氣가 없다는 걸 때마

침 섬 쪽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네 한데 조상들은 어

째서 실체도 없는 이정표를 발명했을까? 섬을 향해

질문을 달던 찰나, 도사리고 있던 사이렌의 그물에

제17회추계문학상

시부문우수상 윤민우

Page 28: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추계문학 제17호26

걸리고 말았지 멧돼지처럼 날뛰던 내게 세이렌이 남

긴 귓속말 ‘소금은 갈증을 부를 뿐’ 침몰하는 메아리

허파의 마지막 남은 숨처럼 똘똘 뭉친 시간들이 기

포로 풀어지는 순간이었네 우지끈 일어난 방전, 사

각의 암해暗海에 비친 얼굴을 좀 보게 콧속에서 붉

은 점액이 타고 흐르네 혀로 핥자 온몸에 도지는 금

속성의 예감이라니 누가 내게 고무장갑을 선물해주

Page 29: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27시 부문 우수상 - 윤민우

양서류

윤 민 우

AM

구둣발 아래 모래가 서걱인다

세상에서 반쯤 내려앉은 현관 앞 오늘도 사내는

양탄자처럼 말아놓은 혀를 뽑아 열쇠구멍으로

밀어넣는다 쉬릿

문 저편 심해어들 날렵하게 몸 비트는 소리 물에

잠긴다 수심 속에서 창백한 형광등 하나 깜빡거린다

더듬이 달린 물고기들이 벽을 타고 장판을 긴다

거대한

수압의 수갑 사내는 단단히 손목을 붙들린다

PM

봇짐을 진 인부들이 사막으로 우 몰려간다

짓다 만 시멘트 건물처럼 군데군데 선인장이 솟았고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고독을 품은 전갈들이 인부

들의 발목을

노렸다 행렬의 맨 하단 사내는 아직 덜 마른

Page 30: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추계문학 제17호28

지느러미를 퍼덕인다

이봐 자네 아가미에 모래가 잔뜩 묻었다네 그러게

물기를 잘

닦아내야지 붉은 눈곱을 단 누군가가 사내에게 충

고했다 사내는 호흡을

가다듬다 문득 아주 오래전에 올랐던 어느 고원을

떠올렸다

거기서 사내는 깔밋한 조개피 하나를 주운 일이

있었다

Page 31: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29시 부문 우수상 - 윤민우

애프터 쉐이브

윤 민 우

아침이면 얼굴이 부어 있다 간밤에

꿈이 얼굴에 다녀간 흔적이다

꿈의 두께만큼 얼굴은 부풀어오른다

의식 바깥으로 점차 부풀어오르는 얼굴이란

익사체처럼 습해서 그곳은 자주 검은 식물을 키운다

만약 당신의 얼굴에 식물이 자라지 않는다면

당신은 꿈이 없는 사람이거나

얼굴이 없는 사람이다

칼을 쥐고 풀을 썬다

이 단정해지려는 사역은 늘 비겁하다

오늘도 껍질을 도려내지 않음으로써

낯이 따갑다

Page 32: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추계문학 제17호30

요가

윤 민 우

입이 열리네 처녀의 숲에서 불어온 질액의 바람

침샘을 돋우고 혀끝에 담석 같은 열망을 쑤석이지만

어느 꿈 토막 허방 위의 질주처럼 소모적이네

A는 B이다 사이에 놓인 거리에 발이 빠지네 굳기

전의

시멘트를 디뎌본 사람은 알지 온갖 혼음과 빙자가

뒹구는 저

레미콘 속에서 수태되는 건 거리를 지우는 거리

사유의 갑각이라네

마침내 이 거리는 뼈의 밀도를 획득했네

선 채로 허리를 굽혀보게나 손끝과 지표가 만들어

낸 허공이 바로

당신과 세계 사이에 놓인 애잔한 거리라네 한데

수축이란

이완의 요원한 메아리 아니던가? 이처럼

Page 33: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31시 부문 우수상 - 윤민우

뼈를 녹이는 담금질이란 가장 배반적인 왕복 사이

에 있다네

그러나 이 모든 명상은 목가적이지 않네

음탕한 호흡은 단전을 거스르네

사지의 뼈마디들이 덜그럭대며 탈구의 신호를

보내오네

아무리 둥글게 몸을 말아보았자 나는 내 성기를

핥을 수 없었네

Page 34: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추계문학 제17호32

아는 사람

윤 민 우

모르는 사람이 있는 자리 모르는 사람에

대한 아는 사람과의 빈 수화

몰라도 좋거나 알아봤자 모를 뿐인 헛간의 역사

돋보기처럼 부딪치는 술잔

딴전처럼 부려진 안주

어느 모르는 사람을 알게 되기까지

안다는 것을 시인하기까지

모른다는 것을 부정하기까지

기요틴의 도끼가 내려지기까지

모르는 사람의 아는 얼굴이 달아나기까지

아는 사람의 모르는 얼굴이 刑을 집행하기까지

그 모든 서먹함의 수명이 바닥날 때까지

얼굴 없는 사람들끼리의 악수

더없이 살가운,

Page 35: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33시 부문 장려상 - 김보아라

푸른 파문

김보아라

안개의 포말 속에 촘촘히 떠 있는 철새들

바다 위엔 오랫동안 불안을 적신 배들이 서서히

몸을 흔들면

물의 끝없는 골목길에서 사람들은 밤마다 바다로

정차한다

사람들은 파도의 푸른 속살을 곱씹으며 서서히

낙하하고

뱃고동 소리가 새벽마람에 하얗게 엉겨 붙으면

슬레이트 지붕에 소금바람이 몰려와 쌓인다

하나 둘 젖은 불빛을 우렁우렁 달고

금이 간 담벼락 밖으로 드문드문 피어난 이끼들이

멸치 때처럼 흘러있는 어촌

그물을 손보는 노인의 주름살도 바다의 피부를

닮아가는 것일까

조개껍질이 푸르르 피어난 손등이며

배의 바닥에서 말라가는 오징어처럼

그의 납작한 발바닥을 매일 물결이 부풀어 오른다

제17회추계문학상

시부문장려상김보아라

Page 36: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추계문학 제17호34

이때 멀리 수평선 물위를 달려가는 순환열차처럼

제 비늘들이 흔들며 일어나고

섬에서 수신되는 또 하나의 물결 소리를 듣는다

사람들은 하나 둘 추락하고 바다에 노래를 실어

보내면

점점 푸른 파문들이 하나 둘 바다를 앓기 시작한다

Page 37: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35시 부문 장려상 - 김보아라

만두

김보아라

오늘도 찾아온

계절의 경계를 구분하는 도마

한 사내는 지금 막 따온

싱싱한 초록 새순들을 얇게 다지고 있다

사내는 한 올 한 올 잎을 빚어낸다

푹푹 끓고 있는 창밖의 폭설이

찜통 안에서 제 몸을 한껏 부풀고

새순들은 눈을 틔우기 시작한다

환풍기를 따라 꽃내음이

창문에 달라붙은 성에들을 녹아들이면

거리마다 찬 서리 맺은 전기줄에

꽃봉오리가 색색가득 매달린다

접시 안에서 둥둥 피어올린

만두꽃들이 입 안 가득 돋아나고

사람들은 맛있는 봄을 혀로 읽는다

Page 38: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추계문학 제17호36

후아유

김보아라

아름다운 당신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당신들은 이

곳저곳 바람같이 후 하고 불려오면 귓가를 간지럽게

하는 장난스런 아이들 어느 하루는 노랗게 익는 맛

있는 열매처럼 나를 설레게 한다 어떤 하루는 내 마

음을 결제시키고 아프게 하는 이름 없는 구매자 흩

어진 당신들이 다시 돌아다니기 시작하면 만나고 싶

은 낯선 누군가가 밤마다 사라지고 거리에는 붉은

파문들이 여기저기 솟아난다 또 다시 순환되며 돌아

오는 당신들은 그 해 탐스럽게 굴린 맛좋은 불안을

가득 가지고 찾아오고 똑똑똑 당신들이 두드린 불안

은 결코 유기 되지 않는다 강제로 부재된 나는 그리

고 당신들은 어느 곳에도 정박하지 못한다 어느덧

만개하는 이별은 순식간에 펑 터지고 마는 나는 이

모든 불안을 끌어안는다 이미 내 것이 아닌 모든 것

들, 결국 어린 대리자가 되는 당신들 도대체 누구세

Page 39: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37시 부문 장려상 - 박으뜸

선한 연극

박 으 뜸

눈을 뜨는 순간 극이 시작된다

자신이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속이는 연극

커튼콜이 울리고 막이 내려도 끝날 줄 모르는 언

제까지나 선한 연극

웃음이 새겨진 가면, 얼굴에 붙어 떨어질 줄 모르

는,

욕설을 퍼붓고 커튼을 찢고 뺨을 세차게 갈겨도

끝나지 않는 연극

내동댕이치고 싶은,

웃고 있는 얼굴, 홀로 있는 방의 한구석에서 집어

드는 웃음어린 가면

눈을 감아도

꺄르륵

끊이지 않는 흐름 속에 몸을 뺄 수 없는, 다시 시

작되는.

제17회추계문학상

시부문장려상 박으뜸

Page 40: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추계문학 제17호38

나는 신처럼 인간을 믿어왔다

박 으 뜸

어딘가 나의 밑바닥에선

인간은 떨어질 대로 떨어지더라도

어느 선만은 지켜낼 거라고

너는 하나의 커다란 우주라

사실 그 속에는 많은 것을 담고 있을 거라고

모든 인간이 다 그럴 거라고

그 많은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고

자신의 것만을 사랑하는 것이란 것을 모르고

누구의 것도 아닌 나는

너를 믿었다

나는 신처럼 인간을 믿어왔다

Page 41: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39시 부문 장려상 - 박으뜸

미역국

박 으 뜸

프랑스가 어쩌니 왕관이 어쩌니

한참을 가게 앞을 서성이다

이틀치 식비를 털어 주먹만 한 케익을 샀다

점원은 한참을 내 파란 입술을 바라봤다

깜깜한 방에 처박혀

꾸역꾸역 밀가루 죽 같은 크림을 마셨다

미끄덩거리는 미역을 생각하니

구역질이 올라왔다

질식해 가는 듯 한 입술을 틀어막고

턱 끝까지 올라온 토사물을 뱉지 않기 위해 노력

했다

당장이라도 전화를 들어

목구멍에 끼어버린 미역 줄기를 뽑아내고 싶었다

Page 42: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추계문학 제17호40

아니

미역국을 한 그릇 주세요,

하고 말을 할까

다시 전화기를 붙잡고

이루어질 수 없는 글자들로 조합된 문자들을 보며

결국 입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Page 43: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41시 부문 장려상 - 이상현

제 7요일

이 상 현

모든 일요일이 외출했다

밋밋한 시간의 틈을 벌려

오늘의 커피는 모든 일요일이야

닫아버린다

모닝커피는 하루를 추가한다

없었던 요일이 덩그라니 꼬리표를 달고

월요일1, 화요일, 화요일1, 수요일3

같은 요일을 수 없이 사는 중

낮잠을 자기 전에 기억한다 구석구석 닦아도

몸은 그저 숨어있는 나체

잠도 숨어 있다

기억이 한 시간씩 늦춰지고 있다

아마 생각도 외출 할 모양이라

모든 생각이 외출할 즈음

나체는 활짝 피어있겠다

전부 외출한 사이 텅텅 비어있는

모든 틈들은

제17회추계문학상

시부문장려상 이상현

Page 44: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추계문학 제17호42

숨바꼭질에서 이기고 돌아온다

Page 45: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43시 부문 장려상 - 이상현

농밀한 위로

이 상 현

촘촘히 추위가 온다

입 안이 헐고 메마른 숨

깊어진다 남미식 연애는 한 줄 채우고도 남는 긴

형용사로 끝났다 맨몸은 이제

산책을 한다

살갗에 들러붙는 헐벗은 비밀에 안겨

손잡이 달린 질문들을 텅텅 비워내자

말,말,말로 옮아가는 흥미로운 사생활

뱀처럼 농염한 움직임 그

맨몸은 옷장에 감춰둔

철 지난 껍데기 속을 뒤척인다

그것들 사이를 비집는 호수와 눈,비,낙엽

진한 포옹 그리고 속삭임

닫혀버린 책

그 속에 살아 숨쉬는 활자들의 채찍

산책은 추위가 그렇듯 숨쉬는

활자를 입는다 입 안이 헐었다

Page 46: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추계문학 제17호44

밥 먹을 때 불편하고 이 닦을 때 아프고

말하기도 입술에 침 바르기도 힘들다

잠은 많고 요즘따라 침대는 부쩍 따듯하다

겹겹이 따듯하다

Page 47: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45시 부문 장려상 - 이상현

식욕의 강요

이 상 현

하루는 광합성을 위해 밖에 나선다

날씨 좋군

온 몸으로 받는 기운은 분명

밤의 허기일 것

후루륵 들여 마실까 아니면

쩝쩝 소리의 소리를 씹어볼까

어떤 추임새가 이렇게 맛 좋은 영양을 유혹할까

하고 숨을 들이 쉬는데

모든 것이 정지하고 빈껍데기가 된 기분이라

털털털 덜어 낸 살가죽 사이로

묘한 소음이 일어

그것은 삿대질을 하며 쏘아 붙이는

어느 눈부신 광합성 현장

무언가를 배설해내는 힘은

다시 허기를 향한 빠른 질주거니 하고

여기에 거름 저기에 물 한 모금

이렇게 잦은 광합성에 무감한 허기를

Page 48: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추계문학 제17호46

오늘도 가벼운 통증으로

날씨 좋군!

Page 49: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47시 부문 장려상 - 이상현

어떤 의문

이 상 현

우유를 보라

얼마나 흰 발광체를 가졌는가!

자네는 우유의 속살을 덮어 봤는가

그 보들한 감상에 젖으면

혹시 형체 없는 작자들을 떠올리는가

그렇다면 고단하다

뼈 없는 유기체는 찢어지는 게 어때?

간단하게 그 덮개는 담백하다 하면 되지

고소하다고 숨을 참고 고개를 묻으면 된거지

뼈 없는 대화를 나누려거든

저기 물통에 물감 풀어 마시길

아침에 문지방 너머로 건네는 우유를

덥석 잡았어

곧 어떤 이의 볼록한 두 덩어리를 떠올렸지

그걸 머리끝까지 덮고 자면

양치기 소년이

늑대 떼들을 몰고 달려들까

Page 50: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추계문학 제17호48

그 소년이 자네라면

저기 깡통에 동전이나 모아두게

매달려 떨어질 줄 모르는

취향은 넌더리가나

누구 자손들이 저렇게 목말라 하는지

댐 만들어 우유의 엄청난 홍수 보라지

그렇다면 자 보라 덮어보니

우유는 흰 색이었는가!

Page 51: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49시 부문 장려상 - 이호석

하모닉스 튜닝

이 호 석

처음에는 5현

왜 여기부터 시작인지 묻지 않기를

흥분해있는 체온들로 인하여

공연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5현 12프렛 현 위에 손가락을 닿게 한 후

태어나기 전의 나를 치고 손가락을 떼면 울리는

떨림 없는 소리 아니 세상과 공명하는 소리

이것이 하모닉스

다시 처음에는 6현

몸이 없을 때 다시 태어나는 것

이것이 가장 굵은 현

언제나 첫 음은 두껍고 추상적으로 울려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건 이마에 맺힌 땀방울과 흥분된

제17회추계문학상

시부문장려상 이호석

Page 52: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추계문학 제17호50

체온들

6현 5프렛의 하모닉스와 5현 7프렛의 하모닉스

를 맞추면

흔들림 없는 출산, 세상의 태동

되돌아온 5현

몇 번을 다시 시작해도 결국 지나갈 길

추상적인 음이 두꺼운 관념으로 머릿속에서 울리

고 있다면

자궁 속의 온기를 뱉어내길

5현 5프렛의 하모닉스와 4현 7프렛의 하모닉스

를 맞추면

바닥에 넘어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걸어가는 4현

고도에 따라 변하는 현의 굵기

흥분된 체온들을 등지고 한 음 높은 곳으로

빗방울과 양수가 섞여 구분할 수 없는 밤

머릿속의 음은 점차 페이드 아웃 속으로 잠기고

Page 53: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51시 부문 장려상 - 이호석

4현 5프렛의 하모닉스와 3현 7프렛의 하모닉스

를 맞추면

탯줄을 끌고 걸음마를 시작하는 날

돌아가는 3현

걸을 수 있으면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절벽의 공간

떨어지지 않는다면

자꾸만 얇아지는 현의 음을 읽을 수 없을테니

3현과 2현의 경계야말로 이질감 넘치는 비틀림의

공간

6현 7프렛의 하모닉스와 2현의 개방음을 맞추면

맹렬히 울려 퍼지는 열기 환상으로의 발진

갈 수 없던 2현

갈 수 없기에 환상으로 빠지는 길

다시 시작할 각오로 한 발자국 내딛으면

점점 얇아지는 음을 확인이라도 하듯 고도는 높아

지고

Page 54: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추계문학 제17호52

2현 5프렛의 하모닉스와 1현 7프렛의 하모닉스

를 맞추면

그것은 현 토하는 기타

환상으로써의 1현

추상적인 음을 스스로 해체하며 올라선 고지

하모닉스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찾아낸 개방음

남은 것은 단 하나의 진실

더 이상 소리 낼 수 있는 다른 현이 없었네

음을 바로 잡을 하모닉스도 필요 없었네,

난 솔로를 쳤네, 현 끊어지는 소리 그것은

기타가 현을 토하는 소리

Page 55: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53시 부문 장려상 - 이호석

가을은 거미줄을 타고 왔다

이 호 석

가을은 거미가 떠나자 찾아왔다

주인 떠난 거미줄에 걸린 먹이가 도망치듯

구멍 난 거미줄 사이로 낙엽이 떨어졌다

수많은 계절이 거미줄에 걸렸다가 사라졌다

새순이 돋아날 때도 있었고

잎새가 창창해 배부를 때도 있었고

거미와 함께 낙엽이 떨어질 때도 있었고

거미줄만 남기고 거미도 먹이도 사라질 때도 있었고

사실 거미는 어디에도 없었다

언제나 거미줄을 바라보고 걸었지만

살아있는 것들은 다 날아갔다

날아갔다 돌아오는 것들은 먹이가 아니었다

거미줄에 잠시 앉았다 갈 뿐

발버둥치지 않았으므로

Page 56: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추계문학 제17호54

관념들이 날아다닌다

날아가는 것들에게 눈을 돌리면

나무를 차고 나온 나뭇가지들이 얽혀있다

그물치고 배고파서 떨고 있다

떨어져 발버둥치는 거미의 마음이 뚫려있다

낙엽이 발버둥친다

거미줄을 쳐다보는 것은 거미밖에 없다

계절은 거미와 같이 온다

Page 57: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55시 부문 장려상 - 이호석

사마리아

이 호 석

머리가 뭉개진 것을 두 번 본 적이 있지

원조교제 하다 경찰에 쫓겨 모텔에서 뛰어내린

친구, 바수밀다1)

수많은 남자들과 바람피우다 집에서 뛰어내린

엄마, 사마리아

바닥에 떨어진 찰흙처럼 한 부분이 평평해지는

소리

굴곡 많은 이들의 얼굴에 엷은 웃음 지어지는

소리

그녀, 낯선 풍경을 품 안으로 포옹하던 소리

관통되듯 밝으면 발정기가 빨리 온다는 이야기

베란다에 갇혀 나가지 못 하는 고양이가

성욕에 숨도 못 고르고 신음할 때에도

형광등 아래에서 그녀의 소리에 집중했지

_______________________1) 김기덕 작. 사마리아.

Page 58: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추계문학 제17호56

그렇게 갈망하던 소리가 관통되는 소리는 아닌지

벽에 귀를 대고 그녀의 소리를 따라 읊었지

아, 아, 아, 아이…… 으, 우리……의 앙, 아이

친절이란 배덕의 또 다른 이름이지

그녀가 낯선 것들을 포옹하며 받아들였을 때

은혜 입은 남자 한 명이 그녀에게 주먹을 휘둘렀지

바닥에 떨어지는 찰흙처럼 한 부분의 주름을 기다

리는 소리

굴곡 생긴 이들의 얼굴에 떫은 웃음 지어지는 소리

그녀, 낯선 풍경에 환한 웃음 날리던 소리

자살한 고양이를 본 적이 있니

베란다 창문에 박은 머리에서 흘러나오던

그날의 이유 모를 낯설음이 왜 자꾸 떠오르는지

Page 59: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57시 부문 장려상 - 임채연

접시

임 채 연

뜨거운 연기와 물이 구멍에서 토해 진다

마미손표 빨간 고무장갑에 끼워진 수세미

하이얀 거품을 내뱉으며 접시를 훑는다.

계란후라이의 미끌거리던 흔적과 토마토케첩의

혈흔

수세미 두 번의 움직임에 접시는 깨끗이 지워낸다.

얼룩덜룩 묻은 김치 국물과 잔 멸치들도

미련 없이 접시는 놓아준다.

지붕 위에 고요히 쌓이는 눈 같이

접시는

차곡차곡 쌓여만 간다.

행주로 접시의 눈물을 닦는다.

뜨거운 물을 견디며

매운 퐁퐁과 거친 수세미를 견디며

제17회추계문학상

시부문장려상 임채연

Page 60: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추계문학 제17호58

접시는 다시 이토록 하얘졌다.

나도 접시라면 좋겠다.

선명히 남은 흔적들 깨끗이 지워내고

또 다시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접시라면 좋겠다.

이가 나가고 하나 둘 주름이 생기는 접시여도 좋다.

뜨거운 물 견뎌내고 새롭게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하는 접시

나도 접시라면 좋겠다.

Page 61: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59시 부문 장려상 - 임채연

무덤

임 채 연

묵은해를 벗겨내느라

술독에 빠진 사람들은

정신이 없다

서로 부딪히는 술잔을

나는 오만으로 가득했던

한 사람을 묻고 기울였다

거짓으로 가득했던

한 사람을 묻고

술잔을 기울였다

후회로 가득찬 또 한사람을 묻고

또 한번 술잔을 기울였다

두툼하게 올라온 무덤을 바라보며

나는 온전히 나를 묻었다

Page 62: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추계문학 제17호60

묵은해가 가고

새로운 해가 떠도

오만으로 가득한, 거짓으로 가득한,

그리고 후회로 가득찬 사람은

무덤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Page 63: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심사평 박 상 우(소설가)

최우수상 괘양이_ 이 승 빈

우수상 즐거운 하루_ 임 채 연

장려상 기록_ 김 웅 호

장려상 내가 그녀를 찾아간 이유_ 송 민 정

장려상 누군가 리본을 달았다_ 윤 민 우

장려상 통로_ 이 청 조

장려상 꿈에 살다_ 조 선 욱

2008년도 제17회 추계문학상

소설 부문

L I T E R AT U R E & C R E AT I V E

Page 64: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Page 65: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63소설 부문 심사평 - 박상우

심사 의뢰를 받은 작품은 총 7편이었다. 각자의 개성을 발휘한 작품들이라 한 편 한 편 나름의 장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아직 ‘소설’이라는 형식에 부합되는 ‘글맛’을 느끼게 할 만한 작품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아쉬움이 많았지만 앞으로 추계예대 문창과의 소설 분야가 좀 더 뜨겁고 치열하게 심화되기 위해서는 오히려 자성의 기회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응모작들을 보면서 전체적으로 느낀 공통점은 현실에 대한 인식력 부족, 소설의 설정과 구성력 부족, 그리고 작품 전체를 관류하는 응집력 부족을 꼽을 수 있었다. 소설이란 누가 뭐라고 해도 ‘남에게 읽히는 것’이므로 ‘어떻게’ 전달하고 ‘무엇을’ 전달하려 하는지에 대한 작가적 사유가 또렷한 실상(實像)을 형성하고 있어야 한다. 대충 생각하고 적당히 익힌 것을 퍼내려니 이끌어가는 게 아니라 이끌려 가는 형국이 되고 그러다보니 독자적 관점에서의 흡인력이 저하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쓰고자 하는 내용을 잘 익히고 그것에 대해 넘치는 자신감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야 독자와 주고받는 ‘새빨간 거짓말 게

심 사 평L I T E R AT U R E & C R E AT I V E

Page 66: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추계문학 제17호64

임’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정쩡하고 어설플 때는 차라리 쓰지 말고 쓰고자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게 나을 터이다. 독자의 뒤통수를 후려칠 결말을 예비하는 과정은 지적으로는 즐거운 게임이지만 소설적으로는 치열한 전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꿈에 살다』(조선욱)는 역사소설로 기성작가 못지않은 입심과 전개를 보여주었다. 나름 공력을 들인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천하를 알고자 하고 또한 도모하고자 하는 난세의 영웅들 이야기가 너무나도 오래된 주제라서 새로움이 없었다. 인물과 시대를 배경으로 삼아 그것을 21세기의 관점에서 구현해야 할 필연성이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하고, 만약 그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새로운 형식의 개발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왕 문예창작과에서 소설을 공부하고자 한다면 새로울 게 없는 역사 분야에 공력을 들일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생에 대한 섬세한 안목과 견성을 얻고 그것을 바탕으로 ‘지금, 바로, 이곳’의 문제의식을 소설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 작품을 기대하고 싶다.

『기록』(김웅호)은 소설적 압축과 절제가 필요한 작품이다. 아버지-아들의 대물림된 불행에 대하여

Page 67: 추계예술대학교 추계문학

65소설 부문 심사평 - 박상우

중심성을 지닌 사건보다 불행이라고 강변하는 정황을 나열하고 열거함으로써 소설적 탄성과 긴장감을 약화시킨다. 아버지-아들을 연결하여 형성할 수 있는 인생의 구심력은 무엇일까. 명료하고 선명한 작의가 필요하겠다. <순수했던 나의 아내는 그 씹새끼의 수작에 넘어갔을 것이고 그 미친 새끼를 따라 쫄래쫄래 도망을 가버린 것일 것이다>와 같은 불완전한 문장이 작품 전체에 숱하게 널려 있어 문장의 완성도를 높이는 훈련을 많이 해야겠다. 같은 문장에서 동일한 인물을 ‘씹새끼-미친새끼’라고 번복하는 이유가 무엇이고 대화도 아닌 묘사 부분에서 등장인물에 대해 쌍욕을 구사해야 할 필요가 무엇인가. 아울러 ‘~가버린 것일 것이다’라는 중복 종결보다 ‘~가버렸을 것이다’로 하면 깔끔하지 않겠는가.

『통로』(이청조)는 어설픈 설정 때문에 소설의 골조가 전체적으로 부실해진 작품이다. 소설 한 편을 모두 주인공의 망상 상태로 버텨내기엔 배경과 내적 필연성이 너무 빈약하다는 말이다. 더구나 흐지부지한 콩트 식 결말은 이 작품의 애초 작의를 의심하게 만든다. 좀 더 명료한 설정, 객관성을 지닌 사건을 통해 이야기의 구심력을 형성하는 연습이 필요하겠다.『내가 그녀를 찾아간 이유』(송민정)는 산만한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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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문학 제17호66

품이다. 단편소설로 소화하기엔 시간적 배경이 과다하고 정수기 회사 얘기와 희정과의 사랑 얘기가 공존하기도 어렵다. 정수기 회사의 얘기만을 압축하고 특정한 사건을 중심으로 구성하고 전개할 필요가 있겠다. 콩트 식 결말도 사뭇 작위적이라 공감하기 어렵다. 도입부와 결말에 곁들인 ‘그녀’를 없애는 것이 소설의 구심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누군가 리본을 달았다』(윤민우)는 이야기의 선명도와 독자적 공감대가 떨어지는 작품이다.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설정, 객관적인 사건 구성을 통해 감상적 각질을 깨고 나와야 할 필요가 있겠다. 좋은 단편소설을 많이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결국 최종적으로 남은 작품은 『괘양이』(이승빈)와 『즐거운 하루』(임채연)였다. 『괘양이』는 개인지 고양이인지를 알 수 없는 특이한 동물 하나를 놓고 독자적 고정관념을 자극하고 의심하게 만드는 설정이 호감을 살 만한 작품이었다. 결말에 대한 사유가 아쉬웠지만 소설의 설정에 대한 면피로 “이히히히히힝”을 불러들인 건 나름 효과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그 지점에서 어설픈 판정과 설명이 곁들여졌다면 소설 한 편이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즐거운 하루』는 단편소설에서 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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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어려운 다자시점을 성공적으로 구사해 호감을 얻은 작품이다. 아울러 각 등장인물들의 개별성을 각인하는 폭넓은 현실 수용력도 높이 살만하다. 하지만 작품 전체를 연결하는 중심사건의 결여가 결국 평범한 가족소설의 결말을 불러오고 말았다. 하지만 08학번으로 이 정도 필력을 보이고 등장인물과 현실에 대해 폭넓은 수용력을 보인다는 건 상당한 재능이 아닐 수 없다. 건필!

두 작품 중 『괘양이』를 최우수작, 『즐거운 하루』를 우수작으로 선정한다.

2009년 2월

소설가 박 상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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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 먹는 김밥이 지난번에 비해 지독하게 맛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그러니까 성범죄자들에게는 전자 팔찌를 꼭 도입해야 해. 다시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높거든.”그녀는 긴 이야기를 마치고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개만 끄덕이던 난 뭐라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이중처벌은 바람직하지 않을 거 같은데. 차라리 형기를 늘리는 게 어때?”그런가? 내가 볼 땐 성범죄자도 일반 범죄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중독성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지만 다른 범죄도 중독성이 있긴 마찬가지다. 재범이 발생하는 통계로 죄질의 상대적 우위를 주장한다 해도, 범죄는 범죄에 대한 처벌로만 다스려져야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었다. 팔찌를 도입하는 건 영원한 범죄자로 낙인찍는 거다. 그러나 난 그런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런 토론들은 논리

괘양이

이 승 빈

제17회추계문학상

소설부문최우수상이 승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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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을 향상시키는 훈련에 지나지 않는다.그래, 무엇보다 급했다. 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초미니스커트가 길거리에서 조금씩 사라지던 가을이었다. 그녀가 흥분하는 날에 얌전히 있으면 잠자리를 같이 할 확률이 높았다. 물론! 나는 이성적이고,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사람이다. 피가 펄펄 끓는 이십 대이고 어제 본 포르노에서 본 필살기를 발휘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라는 점만 빼면 말이다.눈썹을 치켜 올리며 그녀가 나를 바라봤다. 햇살이 그녀의 뺨을 타고 지나가고 있었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 위로 살짝 찡그린 미간이 오늘따라 더 예뻐 보인다. “그건 이중처벌이 아냐. 전자 팔찌를 도용해도 개인정보는 철저히 보호 할 수 있어. 강간은 살인이야. 교수형을 내리지는 못하니까 팔찌를 도입하는 거야. 원랜 무기징역을 내려도 부족해.”아니. 절대 동의할 수 없지만 그 이야기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오늘 집중적인 세미나를 했기 때문에 너무 피곤했다. 난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란 말만 반복했다. 막연한 문제였고 실감도 나지 않았다. 아무렴 어때? 어쨌든 처벌 받지 않을까? 나하고는 별 상관없는 얘기다. 비정한 말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인간은 아니다. 내가 당했다고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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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찌를 채운다고 당한 사람의 피해가 복구되는 것도 아니잖은가. 난 감히 입 밖에 못 낼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떠들며 김밥을 집어 먹었다.도시락에 담겨져 있는 김밥들이 서서히 바닥을 드러냈다. 두 개 남은 김밥 중 하나를 집어 들자 풀섶 너머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사이로 한 팔에 안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갈색 털의 동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상한 고양이네.”“이상한 개네.”우리는 동시에 소리를 외치고 서로를 쳐다봤다. 익숙한 멜로디에 불협화음이 섞인 것 같은 소리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똑같은 소리가 왜곡되어 증폭되는 느낌이었다. 세련된 피아노 연주를 방해하기 위해 슬그머니 울림 페달을 밟았을 때처럼 말이다. 같은 소리를 외쳤다는 것은 신기한 느낌을 주었지만 우리가 외친 말은 달랐다. 하지만 숨 고를 틈도 없이 연이어 뱉은 말조차도 우린 달랐다. “저게 괘양이라고!!”우리들은 서로 장난스런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머금었다.불분명해 보이는 얼굴 판때기는 다소 신기하게 생겼다. 개로 착각할 법도 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데! 그것은 고양이였다. 일종의 직감 같은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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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보고서 고양이라고 생각할 때 말이다, 찬찬히 뜯어보고 아, 저것은 고양이구나,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게다가 고양이란 느낌이 든 이후에 그 동물을 찬찬히 뜯어본 결과 나는 내 주장에 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느긋한 걸음걸이, 동그란 눈동자, 굽이쳐 오르는 허리라인, 얼굴이 조금 기다랗긴 했지만 그건 분명히 고양이였다. 그녀는 고양이를 닮기는 닮았다며 동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색한 기분이 밀려왔다. 불쾌감이었을까? 스코어에서 뒤지고 있는 삼성라이온스를 응원하는데 두산팬이 옆에 앉아있을 때 같은 기분 말이다. 나는 하나 남은 김밥을 주물럭거렸다. 동물이 금방 사라졌다면 그저 지나가는 에피소드로 간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동물은 멀찍이 떨어져 우리들의 시야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잘 보라고. 저건 고양이야.”자연스레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눈에 뻔히 보이는 것을 두고 다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사이의 남녀가. “그런가,”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신뢰하지 않는 눈치였다. 난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 할 필요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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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소설 부문 최우수상 ‘괘양이’ - 이승빈

느꼈다. “쉽게 구분할 수 있어. 얼굴 생김새를 봐. 일반적으로 개는 주둥이가 튀어 나와 있잖아? 하지만 고양이는 그렇지 않다고.”“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고양이는 갸름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저 동물은 사각형인걸, 주둥이도 좀 튀어나와있네. 밑으로.”그녀가 이렇게 구체적으로 반박하며 이야기하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불편한 감정을 느꼈지만 분위기를 전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 작은 캐릭터를 그리기 시작했다.“자, 봐봐.”“이게 뭐야?”그 그림은 웃음을 띤 타원형의 눈을 가지고, 양쪽 귀는 좌우로 늘어지고, 작은 팔 두 개가 오징어처럼 구부러진, 매우 귀여운 캐릭터였다. “이건 고양이야.”“그래?”그녀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평소 같으면 귀엽다고 재밌어 했을 텐데 말이다. 나는 그녀가 오늘 마법에 걸린 그날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유명한 캐릭턴데, 모른단 말야? 이건 스노우캣이란 고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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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 스노 캣?”“음. 대학시절에 고양이를 일곱마리나 기르는 ‘고양이광’, 아니 아니 아니 광녀! 그래, L이라고 있었거든. 처음엔 나도 이거 보고 어라? 웬 개지? 아니 오징언가? 하고 생각했거든. 근데 고양이래. 이거 그린 만화가가 자기가 기르는 고양일 보고 그린거래. 내가 반박한 적이 있었지. 이건 겉으로 보면 완전 개다. 작가가 말한 거 말고 그 캐릭터가 고양이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느냐. 그 애 말에 의하면 행동하는 걸 보면 고양이라는 걸 알 수 있대.”나는 능청스런 연극배우의 말투를 흉내내며 이야기를 했다. 앞서 이야기한 것의 절반은 완전한 거짓말이다. “L이라는 사람, 이뻤어?”“어? 아니. 그게 무슨 상관이야.”생뚱맞은 그녀의 질문에 난 다소 당황했다. 나는

L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했고 대화도 많이 나누지 않았다. 예뻤냐고? 그 아이에 대해 기억나는 거라곤, 개인 홈페이지에 항상 조용한 음악이 흘렀다는 거? 귀여운 캐릭터가 들어간 면티와 후드티…가지런한 몸짓에 가지런한 소설들을 쓰던 거? 초등학교 시절, 그림일기를 그리기 위한 크레파스가 항상 깨끗한 아이 말이다. 10년 전에 산 휴대용 시디플레이어를 새 것처럼 사용할 것 같은 사람. 뭐 그런 이미지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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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소설 부문 최우수상 ‘괘양이’ - 이승빈

다. 하긴, 고양이를 무척 좋아했다. 미니홈피 배경도 고양이가 책 읽고 있는 배경이었으니까.그녀는 고개를 돌려 김밥을 집어먹고는 우리들 눈앞에 있는 동물을 째려봤다. “저건…개야. 분명히 개야.”“어째서?”나는 당혹스러웠다. 스터디 그룹에서 최종 결론을 말하는 진행자의 말투처럼 들렸다. “고양인 매우 깔끔한 동물야. 저렇게 풀들이 무성하고 잎사귀가 많이 떨어져있는 곳을 오랫동안 거닐지 않는다고. 걸음걸이도 그래. 고양이 걸음걸이가 얼마나 우아한데.”대체 어떤 개가 저렇게 걷냐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다시 보니 그녀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확실히 저 녀석은 제멋대로 걷고 있었다. 이마도 고양이라 하기엔 조금 넓어보였다. 마당에서 키우는 누렁이 정도랄까. 하지만 저 귀모양을 보라. 저렇게 쫑긋한 귀를 가진 개는 없다. 주인이 일부러 성형을 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게다가 고양이 종류는 무수히 많다. 집고양이도 있고 들고양이도 있다. 사람들은 쓰레기통 뒤지는 고양이는 쉽게 연상해도 개는 그렇지가 않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거지? 한 번 정도 잠자코 있으면 그만하리라 생각했다. 그 정도의 인내심은 나에게 충분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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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봐, 봤지? 뒷발로 흙 채고 있잖아. 고양인 저런 행동 안 해. 저건 개가 영역 표시하기 위해 하는 행동야.”여기까지도 참을 만 했다.“너도 참…개를 고양이라고 하고.”하나도 우습지 않은데 그녀는 가볍게 소리를 내며 웃고 있었다. 마치 최종 결론이라도 난 것처럼 말이다. 오늘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학교에 오지 않는 건데. 젠장, 나는 말아 쥔 손을 입가에 대고 가볍게 기침을 했다.“내 미학적 관점에서 볼 때, 저건 개가 아니라 고양이야. 확실해.”“미학? 웬 미학?”“고양이가 생긴 형태를 보면 알 수 있어. 개에게는 허리에 곡선이 없거든. 저 동물은 곡선이 있다고.”“흥, 미학은 주관적인 학문야.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잖아. 그래서 죽은 학문이라고 한다고.”“그렇지 않아!”자그마한 메아리와 함께 나무에 앉아있던 새들이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렸다.“그래 그래, 그만하자. 그만하자고. 소리 지른 거 미안해. 하지만 저건 고양이야. 고양이를 개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나는 이야기가 길어지면 쓸데없는 새로운 논쟁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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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소설 부문 최우수상 ‘괘양이’ - 이승빈

리를 만든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화가 나면 늘 그랬던 것처럼,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김밥을 신경질적으로 씹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 나는 그만 집에 가자고 얘기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뜻밖의 말이었다.“그럼 한번 실험해보자. 우리, 대학원생이잖아?” 뜻밖의 제안에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까의 흥분은 가신듯 보였지만 무언가 결의에 찬 얼굴이었다.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동물을 포획하기로 결정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괴상한 동물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예민했다. 조금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도 달아나버려 우리는 반경 일 미터도 접근할 수 없었다. 장장 한 시간에 걸친 숨바꼭질을 거듭한 끝에 우리들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나와 그녀는 이대론 저 동물에게 접근할 수 없으리란 눈빛을 주고받았다. 핸드폰 카메라로 동물의 사진을 찍고는, 내일 같은 시간에 다시 와 잡는 방법을 강구하자고 했다. 그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꼭이야.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마치 전쟁을 하루 앞두고 있는 잔다르크를 보는 것 같았다. 그녀와 헤어진 후 나는 독서실을 찾아가 논문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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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하고 있는 T를 찾았다. T는 대학원에서 기초물리학을 전공하고 있는 수재였다. 높다랗게 쌓인 책 사이로 얼굴을 파묻고 있는 어깨를 두드렸다. T는 얼마 전부터 사회과학부 교수님을 도와 논문자료를 모으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린 T에게 팔을 굽혀 엄지손가락으로 뒷문을 가리켰다. 복도로 나온 나는 자초지정을 설명하고 동물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네가 생각하기엔 어때? 고양이 같지?”T는 희한하게 생기긴 희한하게 생겼다는 둥, 털을 보니 오래 방치한 것 같다는 둥 혼잣말을 하더니 나를 쳐다봤다.“근데 그게 중요해?”“개인거 같아 고양이인 거 같아? 그것만 말해줘.”T가 잠시 나를 쳐다보다 다시 사진을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자신도 그 동물을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무언가 영역을 침범당한 기분이 들었지만 확실한 목격자가 있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그녀가 눈썹을 찡그리며 내 쪽을 쳐다보았다. T는 너무 궁금해서 왔을 뿐이라며 뒤통수를 긁었다.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우고 있을 때 주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쫑긋하게 세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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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풀밭 사이에서 이리 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동물은 원래 장소로 와 있었다. 비록 멀찍이 떨어져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나는 동물에게 가까이 다가가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었다. 야옹야옹, 하는 소리를 듣자 동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수풀 사이를 뛰어갔다.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고양이였다. 내셔널지오그래피에서 고양이과 동물들이 뛰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저 긴, 뒷다리야말로 도약을 위한 고양이의 특징 중 하나다. 기다랗게 내려온 코가 내내 신경이 쓰였는데 호랑이 역시 콧등이 길기는 마찬가지였다. 외양은 속일 수 있어도 골격은 속일 수가 없다. 종류를 알 수는 없지만 고양이과 동물이 분명했다. 그녀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우리는 동물이 있는 위치를 확인하고는 모여앉아 대책을 강구하기로 했다.“돌을 던져 확인하는 건 어때. 울음소리를 들으면 확실할 거 아냐.”“야만인. 그건 동물학대라고.”“그래. 그건 나도 반대야. 우린 지성인이니까 보다 신사적인 방법을 찾아보자.”서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난감한 얼굴을 전시한 박물관에 온 기분이 들었다. 저 괴상한 동물은 어디에서 온 것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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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어색한 침묵 속에서 나는 돌로 땅바닥에 스노우캣을 그리기 시작했다. 스노우캣의 귀 부분을 꺾어 내려왔을 때 T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근데 고양이인지 개인지가 꼭 그렇게 중요해?”“나는 고양일 싫어해.”나는 스노우캣을 그리다 말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언제부터?”“어제부터.”“하하……그런 이야기 말고, 저게 고양이든 개든 너희에게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졌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계속해서 침을 다셨다. 시간이 몸을 휘감으며 천천히 목을 조르고 있었다. 이대로 둘 다 바보가 되는 건 그녀도 원하지 않을 터였다.“왜 중요하지 않아? 개는 개고 고양이는 고양이라고. 눈앞에 멀쩡히 돌아다니고 있는데. 저게 갠지 고양인지도 모르면서 살아가야한단 말이야? 난 그렇게 세상을 헐렁하고 대충대충 사는 걸 싫어해. 나무들도 배나무 감나무 다 다른데 모두 나무라고 뭉뚱그리는 거랑 마찬가지라고.”“흥, 장황하네. 저건 개야.”그녀는 내 이야기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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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다. 나는 언성을 높여 반 정도 농담이 섞인 어투로 말했다.“인류의 역사는 호기심에서 시작됐어. 저게 갠지 고양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돌연변이일 수도 있겠지. 그럼, ‘어머나! 세상엔 이런 일이?’ 라는 프로그램에 출현하면 돼. 어쩌면 학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지도 몰라.”“언제는 고양이라더니.”나는 이야기를 하면서 어쩌면 정말로 학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퉁명스런 어투 따위는 더 이상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세상일은 모르는 것 아닌가. 센세이션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희귀한 동물로 텔레비전에 반영될지도 모른다. 교수님이 강바닥에서 돌을 주워 판 수집가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다. 그 모습이 우리나라 지도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가격이 무려 수천만 원을 호가했다고 한다. 때문에, 교수님은 우리들에게 항상 주변에 있는 미학을 발견하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고 강변하셨다. 상상의 나래에 빠져있는 나와 멍하니 동물을 쳐다보는 그녀에게 해결책을 내놓은 것은 T였다. “그래. 그렇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물리과학 밖에 없어, 그물총을 빌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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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는 총포상을 운영하는 삼촌으로부터 그물총의 성능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물총이란 말에 거부감이 느껴졌지만 마땅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 역시 상처를 입히지 않고 잡을 수 있다는 이유로 그물총 사용에 동의했다. 우리는 다음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다시 모이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대학기념관이 있는 동산에 다시 모였다. 제일 먼저 와 있는 것은 T였다. 그녀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T는 나를 보자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동물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다급히 동물을 보았던 곳으로 달려갔다. 여기 저기 풀들이 눕혀져 있는 것을 보자 왠지 멀리 가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와 T는 기다랗게 자란 풀들을 헤집고 다니다가 계곡에서 흘러나와 흐르고 있는 개울가까지 내려갔다. 그곳에 동물이 있었다. 동물은 개울 너머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기쁨에 차 있는 내게 T가 옆구리를 치더니 동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양 다리를 모으고 앉아 동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T가 반갑게 손짓을 했지만 그녀는 나와 T를 보자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보자 놀라웠던 기분이 말끔히 사라지고 화가 치밀어 나 역시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T는 내 손을 잡고 그녀가 있는 곳으로 건너갔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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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에서 나와 그녀는 T가 가져온 그물총을 볼 수 있었다. T는 이 그물총이 최신기종이라 무려 16미터까지 날아가서 목표물을 포획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와 그녀가 그물총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동안, T는 과학의 진보와 발명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예찬했다. 사실 그 그물총은 그렇게 멋지게 생기진 않았다.그물총은 전신이 검은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언뜻, 작은 망원경처럼 보였다. 아니 뭐랄까. 망원경이라기보다는 ‘뚫어뻥’이라고 부르는 구식 플런저(Plunger)와 비슷하게 생겼다. 나무 막대기에 고무 깔대기가 달려 있는 거. 화장실 변기가 막혔을 때 흔히 사용하던 그거 말이다. 그 생각을 하자 왠지 그물총을 들고 있기가 찜찜해졌다. 발사구에서 똥이 나갈 것만 같은 상상이 들었다. T는 이제 우리가 품고 있는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되었다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T가 장담한대로 그 이상한 동물을 포획하는 것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우리는 동물을 향해 버튼 한 방을 누르는 것으로 모든 일을 마무리 지었다. “이제 어떡하지? 신기하긴 신기하네. 그물에 갇혔는데도 울질 않아.”

T가 신기하다는 듯 동물을 구석구석 살펴보며 말했다. T는 동물의 입을 강제로 열려다가 그만 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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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을 물려버렸다.“아얏! 이빨 좀 확인하려고 했는데.”“하지마. 다치겠다.” “잠깐, 사진 좀 먼저 찍고. 디카 갖고 왔어.”“불쌍해.”그녀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동물을 쳐다보는 그녀를 보며, 좀 더 인간적인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 고양이라면 분명 생선을 좋아할 거다. 이 이상한 동물이 고양이가 맞는다면 말이다. 개라면 생선을 먹기 위해 가시를 발라내는 섬세한 작업에는 서툴 것이 분명했다. 나의 이런 주장에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우린 동물에게 먹이를 주어야만 했다. 나와 T는 학교 앞 동네마트에 가서 자반 고등어 한 마리를 사 왔다. 그녀가 조심스레 그물 사이로 고등어 한 마리를 밀어 넣었다. 우리들은 다시 내일 같은 장소에 모이기로 약속하고 곧 헤어졌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신기한 사진을 올리는 인터넷 사이트를 찾아 동물의 사진을 올렸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올라가는 조회 수와 댓글들을 보며 나는 적잖이 흥분에 잠겼다. 사람들 역시 이건 처음 보는 동물이라며 놀라워했다. 나는 처음으로 동물에 대해 아무런 걱정 없이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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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앞에.

생선은 그대로 있었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고, 소지금을 모조리 갈취당한 느낌이었다. 나는 허탈한 기분을 느끼며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분명 득의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으리라. 그러나 동물을 보며 서 있는 그녀는 그다지 기뻐 보이는 얼굴이 아니었다. T는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게 아니냐며 고개를 저었다. “수의대에 가져다가 보여 주는 게 어때?”“안돼. 그랬다간 뺏길지도 몰라. 어제 인터넷에 사진을 올렸는데 반응이 장난 아니었어.” 나와 T가 이런 저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그녀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풀…풀을 뜯어먹고 있어!”우리는 황급히 동물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과연 그 녀석은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꼬리를 흔들면서 부풀어 오른 볼을 움직이며 우적우적 씹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개나 고양이 모두 육식성 동물이 아니던가? T가 처음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도저히 볼 수 없는 장면을 본 것처럼 말이다. 언젠가 술집 앞 도로에서 누군가 큼직하게 구토를 한 자국을 보았을 때 짓던 표정이었다.“역시 개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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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중얼거렸다.“뭐라고?”“개 풀 뜯어먹는다는 소리는 있어도 고양이 풀 뜯어먹는다는 소리는 없잖아.”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녀를 바라봤다. “개그를 칠 상황이야! 그런 비논리적인 소리가 어딨어?”갑작스런 소리에 깜짝 놀라 옆을 보았다. T가 얼굴을 붉히고 처음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이상한 동물을 발견했을 때는 즐거워했지만 아무래도 이 엉터리 같은 상황에 열이 받은 모양이다.“그래. 방법은 오직 하나 밖에 없어. 유전자 전문 기업에 직접 가져가서 유전자 검사를 하자.”

T가 들릴락말락한 숨소리를 내뱉으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T역시 고양이 아니면 개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T는 그물총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어쩐지 사건이 너무 커져버린 것 같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발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날 같은 시간에 모이기로 약속했다. 이 망할 놈의 미스터리는 내일이나 되면 모두 풀릴 것이다.집에 돌아와 텔레비전을 켜니 이라크 주둔 미군에 대한 테러 뉴스가 나왔다. 예전 같으면 동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봤을 것도 같은데 오늘은 그런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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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소설 부문 최우수상 ‘괘양이’ - 이승빈

들지 않았다. 영원히 사랑할 것 같은 여자하고도 싸우는 마당에 전쟁이 대수일까. 예전에는 총을 들고 사람을 쏴 죽이는 전쟁에 커다란 의문을 가졌지만 이제는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것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채널을 돌리니 미 국무장관인 ‘라이스’가 보스턴대(大)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별로 덥지는 않았지만 텔레비전을 끄고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샤워를 하는 내내 내일 결과가 어떻게 날 것인지 궁금해졌다. 몸을 씻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아 보았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베개 오른쪽에는 두 번째 정독하고 있는, 노벨상 수상자 오르한 파묵의 『눈』이 있었다. 한차례 펼쳐보기는 했지만 영 집중이 되질 않았다. 머릿속에는 내일 그 괴상한 동물이 고양이냐 개냐 판가름 나는 것만이 가득했다. 고양이는 고양이여야만 했고 개는 개여야만 했다. 고양이를 개라고 할 수는 없고 개를 고양이라고 할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고양이가 개가 될 수도 없고 개가 고양이가 될 수도 없다. 나는 잠이 들기 위해 속으로 계속 해서 외쳤다. 개, 고양이, 개, 고양이, 개, 고양이, 개, 고양이, 개, 고야이, 고애아야이, 고애야이?, 괘양이……괘양이?…….

T는 가슴에 동물을 안고 있었다. 그녀가 조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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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자리에 앉자 T는 동물과 함께 뒷자리에 타겠다고 말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T에게서 동물을 빼앗고는 무릎 위에 앉히고 운전하면 된다고 하고 더 말이 길어지기 전에 차에 올랐다. 심장소리를 느꼈던 것일까? 녀석은 얌전히 있지를 못하고 무릎사이에서 발을 뻗어 내 가슴을 자꾸만 문질렀다. 네비게이션에서 목적지까지 남은 시간을 알려주자 두근거림이 더 심해졌다. 동물을 맡기게 되면, 그 뒤는 어떻게 되는 걸까? 무릎 사이에서 바둥이는 동물의 움직임이 커져갔다. “L이란 사람, 어떤 사람이었어?”그녀는 여전히 엉뚱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몰라. 알게 뭐야. 방해 돼.”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킬 궁리를 하며 동물을 내려다보았다. 왼쪽 백미러로 보이는 동물은 창밖을 내다보며 서글퍼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틱을 쥐던 오른손으로 핸들을 잡고 왼손으로 동물을 쓰다듬자 그녀의 머리칼이 생각났다. 야생에서 오래 있었던 때문일까? 뻣뻣한 감촉과 단단하게 느껴지는 몸통. 운전을 하는 중만 아니라면 동물을 들어서 좀 더 자세하게 보고 싶었다. 나는 다리를 벌려 조금씩 몸 위로 올라가는 동물이 들어가도록 하고, 다시 살짝 다리를 조였다. 가랑이 사이에 낀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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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처음으로 낑낑거리며 옅은 신음소리를 냈다. 동물은 이내 가랑이 사이를 나왔지만 전보다는 얌전하게 있었다. 뒷발로 몸을 지탱하고는 멍하니 창문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룸미러 속에 있는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녀는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차에 탄 이후로 계속 그랬을 거다. 햇살이 그녀의 긴 머리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햇살이 뺨 위에 멈추자 나는 저도 모르게 브레이크 페달을 밟았다. 차가 멈추어버릴 것처럼 느려지다가 다시 원래의 속도를 찾았다. 등 뒤에서 살살 운전하라는 T의 말이 들려왔다. 오른쪽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보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백미러에 비치는 무표정한 얼굴이 낯설게 느껴진다. 웃음을 지을 때도, 뾰로통해 졌을 때도 낯설지 않던 얼굴이었다. 두근대는 심장이 더 빨라지면서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전에도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형편없는 성적표를 받고 부모님께 보여주기 직전 느끼던 공포였다. 이게 무슨 꼴인가 싶은 생각이 몰려왔다. 이 동물이 정말 개라면 그녀는 평생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낑낑거리는 동물의 신음소리를 듣자 나는 왼쪽 창문 버튼을 눌렀다. 동물이 허벅지 위를 밟고 창문 틈새로 고개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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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덥네.”스산한 가을바람이 뺨을 스쳐지나갔다. 나는 동물과 함께 팔을 창문 너머에 걸치고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바라봤다. 고개를 숙인 검은 머리카락이 백미러에 비치고 있었다. 이제는 백미러를 통해서도 그녀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가로수들이 백미러를 스쳐 지나갔다. 가을로 접어들고 있는 나무들은 저마다 화려한 색들을 잃어가고 있었다. 룸미러로 시선을 돌렸지만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이 놈은 대체 무엇일까. 이제 곧 알게 되겠지. 보다 분명하고 명확하게. 판도라의 상자, 그래, 열기 전에는 알 수 없던 수수께끼. 갑자기 그 생각이 들었다. 판도라가 상자를 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제우스가 나쁜 놈이다. 그는 일이 그렇게 될 줄 알았을 거다.

동물이 낑낑거리며 문손잡이 근처로 왔다. 운전대를 잡은 팔을 벗어나 고개를 창문 밖으로 들이밀고 있었다. ‘가만있어.’ 나는 슬쩍 백미러를 통해 그녀가 고개를 들었는지 확인했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들고 있지 않았다. 나는 유전자 검사 회사가 있는 도시 안으로 들어서며 우회전을 할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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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고양이어야만 하는 거야?”백미러 속에 잠시 드러난 그녀의 어깨가 흔들거린다고 느끼는 순간, 차가 방지턱에 걸리며 덜컹거렸다. 잡생각이 많아져 그런지 오늘따라 차운전이 서툴게만 느껴진다. 눈동자를 굴려봤지만 그녀는 더 이상 백미러에서 보이지 않았다. 뒤에서 긴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T는 지금 무얼하고 있는 거지? 스터디 그룹에서 마지막 발표를 앞두고 흥분한 그녀에게 우황청심환을 먹인 적이 때가 생각난다. 그녀는 우황청심환을 먹으며 연신 가쁜 호흡을 내뱉었다. 발갛게 상기되었던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창문너머에서 서늘한 바람이 옷을 넘어 가슴을 파고들었다.

의자에서 등을 떼자 등줄기에서 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창문 좀 닫으라는 T의 불평이 들려왔다. 거의 다 왔다, 곧 우회전 구간이 나온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더 빨라졌다. 나는 핸들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핸들을 꺾었다. 차체가 쏠리자 동물은 활짝 열려진 창문너머로 폴짝 뛰어 달아나버렸다. 나는 황급히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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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가 소리와 함께 나도 뒤따라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차를 도심 길가에 세우고 밖으로 나왔다. T의 표정이 상기되어 있었다. 신기하게도 더 이상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았다. 조금 뒤에 그녀도 곧 차에서 내렸다.“이제 어떡하지?”난 여기에서 모든 이야기가 끝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현실은 훨씬 끔찍했다. 그녀는 붙임눈썹이 떨어진 채로 화장이 번져 있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난 눈썹이 떨어져서 그녀가 계속 눈썹을 붙이려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멀뚱히 서 있는 날 보며 그녀가 말했다. “전단지 붙여야지.”“그래…뭐, 저기 피씨방도 보이네. 만들어야지,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습니다.”“개라니까.”“끝까지 이럴 거야?”“싸우지 마. 개나 고양이, 라는 문구를 집어넣는 게 어때?”결국.각자 전단지를 만들었다. 우리는 난생 처음 가 본 도시에서,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돌리고, 가로수에 전단지를 붙이며, 개인지 고양이인지 모를 동물을 찾았다. 작은 동네라고 생각했는데 걷다보니 자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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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소설 부문 최우수상 ‘괘양이’ - 이승빈

새로운 건물이 나왔다. 우리는 햇빛이 힘을 잃어 흐리무레해질 때까지 동네를 이 잡듯이 뒤졌다. 시간이 흐르고 다리가 무거워졌다. 누군가 집에 가자고 먼저 이야기 해 주길 바랐지만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가로수에 불빛들이 하나 둘 피어나고, 거리에 뉘엿뉘엿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했다. 공원에서 아이스크림을 팔던 아줌마가 땅바닥에 떨어진 전단지를 보고 말했다. “송아질 많이 사랑하나 봐요. 보기 힘든 젊은이들이네. 공짜로 줄 테니 먹어요.”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이 착하신 분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아주머니 저희는 송아지를 찾고 있는 게 아니고요. 고양이나 혹은 개를 찾고 있는 거거든요.”“아, 그래요?”아줌마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반문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이 나왔다. 순진한 얼굴을 하고 계신다. 꾸깃꾸깃한 옷차림과 여기 저기 묻어 있는 아이스크림을 보니 검은 가운을 입은 라이스의 모습이 떠올랐다.“아주머니 고맙습니다. 개나 고양이를 보시거든 연락주세요.”전단지를 나눠주던 팔을 한 바퀴 돌리고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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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호수 주위에 떨어져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했다. 절반쯤 먹었을까. 아슴푸레한 어둠 너머에서 가로수 주변을 서성이는 뭉툭한 그림자가 보였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빛이 쏟아지면서 풀을 뜯고 있는 그것의 모습이 드러났다. 녀석은 열심히 주둥이를 놀리며 아랑곳없이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모두가 아이스크림을 먹던 것을 멈추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녀는 입을 살짝 벌리고 한 발짝 앞으로 나갔다. 나는 서둘러 입 안에 있는 아이스크림을 삼켰다. 그녀보다 먼저 소리쳐야 했다. 차가운 감촉이 목구멍을 막 넘어가자, 풀을 뜯던 동물이 고개를 들고 우렁찬 울음소리를 터뜨렸다.“이히히히히힝”

“히 히히히 히힝…….”우리는 울음소리를 따라 천천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한동안 가로수를 바라보다 아무 말 없이 다시 전단지를 돌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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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소설 부문 우수상 ‘즐거운 하루’ - 임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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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을 고쳐 쓰고, 뚫어져라 자판을 쳐다보며 두드리지만 옆자리 김 대리만큼의 속도는 나오지 않는다. 당장이라도 모니터를 깨부수고 키보드의 자판들을 모두 빼내어 쓰레기통에 처박아 넣고 싶지만, 참아야 한다. 2시전까지 업무보고를 모두 마쳐야 하고 프레젠테이션도 끝내야 하니까 지긋지긋한 컴퓨터를 살려둬야 한다. “박 과장님. 많이 바빠 보이시네요. 시장하시지 않으세요?”“아, 난 별 생각이 없네만.” “그러세요? 저는 점심 약속이 있어서 나가서 점심 좀 먹고 오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쇼.”일곱 시에 밥을 먹었는데, 당연히 이 시간에 배가 고프지 않을 리가 없지만, 어제 저녁까지 보다가 집에 깜빡 두고 온 자료를 다시 만들어서 제출하려면

즐거운 하루

임 채 연

제17회추계문학상

소설부문우수상 임 채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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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따윌 집어 삼킬 틈이 없었다. 컴퓨터 같은 기계를 만드는 회사의 과장이지만 나는 그 유명한 컴맹에 독수리 타법을 구사하는 구식 과장이다. 이 컴퓨터도 회사에서 만든 것이지만, 나는 판매량과 홍보를 전담하기 때문에 이론으로 가득 찼을 뿐 실제 활용 능력은 집에서 요리 레시피를 찾아보고 지나간 드라마를 찾아보는 아내보다 훨씬 뒤떨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나라고 타자를 빨리 치기 싫은 것은 아니지만, 열 손가락을 모두 이용해 타자를 친다는 건 담배를 끊는 일보다 어려웠다. 난 독수리 타법을 구사하는 구식 과장일 뿐이었다. “말년 과장으로 늙고 싶어? 왜 업무실적이 이따위야? 애들 관리 제대로 안 해? 박 과장 계속 이런 식으로 일하면 사오정이 뭔지 몸소 체험할 수 있을 거야. 나가봐.”나보다 어린 나이의 윗사람에게 머리를 조아린다는 것은 생각만큼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부모님의 피가 섞인 땅을 팔아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는 내내 나는 치열하게 살았고, 지금도 치열하게 산다고 자부한다(디지털 앞에 비록 무릎을 꿇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세상은 녹록치 않다. 치열하게 사는 놈 위엔 부모 잘 만난 놈 있었고 그 놈들 위엔 부모 잘 만났는데도 치열하게 사는 놈이 있었다. 지금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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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소설 부문 우수상 ‘즐거운 하루’ - 임채연

가 문을 닫고 나온 저 사장실에 거만하게 앉아있는 놈은 이 회사의 손자였고, 명석한 두뇌에 치밀한 계획성 그리고 철저한 자기관리로 똘똘 뭉친 밥맛없는 어린 사장이었다. 게다가 컴퓨터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다. 점심도 거르고 기껏 잘 써놓은 보고서를 날려버리고 나서 의욕이 뚝 떨어졌다. 오늘은 집에 가서 바로 쉬고 싶은데 일은 손에 잡히질 않고, 집에 가도 말일이 다가오니 애들 학원비 때문에 가계부가 빠듯하다는 아내의 투정이나 들을게 뻔하고, 요즘은 정말 살맛이 나질 않는다. 젊어서 벌어놔야 노후가 편안하다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여가생활 보다는 일에 더 치중하여 열심히 달려왔는데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의 나이가 코앞이다. 이제 조금 쉬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지만 아직 시집 장가 못 보낸 자식들이 둘이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일하기 위해 태어난 기계인가 하는 회의도 요즘 따라 자주 든다. 휴게실로 들어와 건강에 좋지 않다는 걸 잘 알면서도 밥보다 많이 찾는 담배를 또 한 대 태우고, 주머니에서 동전을 찾아 자판기에 두 개 밀어 넣었다. 밀크커피 버튼을 누르는 순간 정전이라도 난 것처럼 사방이 새카맣게 변하였다. 그러나 주위는 금세 환해졌고, 자판기는 윙 소리를 내며 다시 작동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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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시작했다. 커피가 나오는 곳에 손을 넣고 기다리는데 커피는 나오지 않았다. 허리를 구부려 안을 들여다보았다. 뜨거운 물이 한 방울씩 뚝뚝 떨어지기만 할 뿐 밀크커피를 담아줄 하얀 종이컵을 내려오지 않았다. 조금 전 그 정전 때문에 아마도 내 동전은 그냥 삼켜져버린 모양이다. 가뜩이나 보고서를 날려서 기분이 언짢았는데 동전까지 먹혔다는 생각에 화가나 자판기를 있는 힘껏 발로 차고 돌아서려는데, 그때 자판기에서 무언가 쿵 하고 떨어졌다. 아까 점심 약속이 있다고 나갔던 김 대리였다. 김 대리는 허리가 반으로 접힌 채 자판기 안에서 뱉어져 나왔다. 무표정의 그는 양복바지를 탈탈 털고는 유유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눈을 비비며 자판기를 쳐다보고 또 쳐다봤을 때,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를 내며 잠시 외출 한다고 했던 미스 리가 다가왔다. 나는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미스 리, 미스 리. 지금 방금 나가던 김 대리 봤어?”그녀는 대답이 없었고, 조금 전 김 대리처럼 무표정으로 걸어가 자판기 앞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아무런 말 없이, 표정 없이 버튼을 눌렀다. 또다시 윙 소리를 내며 자판기는 작동 했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또 한 번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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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그녀 허리가 접혀지며 자판기 안으로 빨려 들어 간 것이다. 잠시 후 자판기가 내던 요란한 소리가 멈추고, 반 쯤 돌아온 정신으로 나는 자판기를 주먹으로 쾅쾅 치며 미스 리를 외쳤다. 그러다 맥스웰 하우스 광고로 가득 차 있던 자판기 안쪽으로 무엇인가 보이기 시작했다. 잘 보이지 않아 주머니에 꽂아 뒀던 안경을 꺼내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종이컵 크기만큼 작아진 미스 리가 보였고, 미스 리는 컴퓨터를 바라보며 무표정으로 타자를 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신입 사원들의 얼굴도 보였고 사무실 사람들도 여럿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넥타이가 꽉 조여진 내 모습도 보였다.믿을 수 없는 광경에 나는 눈을 몇 번이나 비비며 자판기를 바라보았지만 자판기 안에서 사람들은 전부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조금 전까지 있었던 그 사무실과 똑같은 상황이 자판기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내가 지금 너무 피곤해 헛것을 보고 있는 거라고 되뇌며 뺨을 세게 쳐봐도 얼얼하기만 할 뿐, 눈앞에 펼쳐진 광경들은 사라지지 않았다.사무실로 돌아가려고 휴게실을 나서는데, 휴게실을 나가는 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는데, 뒤쪽 어디에선가 다시 김 대리가 들어왔다. 역시나 무표정이다. 그리고 그도 역시 자판기 앞에서 버튼을 눌렀고, 허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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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힌 채 자판기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몸을 일으켜 그가 누른 버튼을 살폈다. 그가 누른 버튼은 ‘점심식사 후’라는 버튼이었고, 그 옆에는 ‘외출 후’라는 버튼이 있었다. 그리고 ‘퇴근’과 ‘출근’이라는 버튼도 있었다. 무섭도록 휴게실은 삭막했고 자판기 안에서 들려오는 타자 치는 소리와 종이 넘기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회사는 조용했고 자판기 안의 그들은 일에만 집중했다. 표정 하나 없이 다른 곳은 보지 않고 각자의 책상과 각자의 모니터에만 집중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평소 액정 왼쪽 구석에서 몇 개의 막대모양으로 빛나던 것들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연신 통화버튼을 눌렀지만 역시나 들려오는 건 전파가 잡히지 않는다는 친절한 안내원의 기계음뿐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다시 자판기에 윙 하는 소리가 들려 눈을 떴을 땐 ‘퇴근’이라고 써 있는 버튼에 빨간 불이 켜졌고, 곧 이어 사람들이 하나 둘 뱉어져 나왔다. 휴게실에 걸려있는 시계는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모두들 허리가 굽혀진 채 하나 둘 자판기 입구 앞에 줄지어 섰고, 종이컵처럼 그렇게 뱉어져 나왔다. 미스 리도 보였고 김 대리도 보였지만 나는 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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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다. 아직도 그 자판기 안에서 모니터를 보며 무표정으로 자판을 눌러 대고 있었다. 기계처럼 무표정으로. 그리고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다. 그렇게 정신을 놓아버린 것 같다.

“박 과장님. 박 과장님”흐릿하게 미스 리의 목소리가 들렸고 힘없이 트이는 시야로 흐릿하게 미스 리의 얼굴이 보였다. 무표정이 아닌 평소처럼 상냥한 미스 리의 얼굴이었다.“박 과장님. 많이 피로하신가 봐요. 그래도 이런데서 주무시면 안 되죠. 사장님이 보시면 또 뭐라고 하신단 말이에요”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을 때 휴게소 안이었고, 자판기 안에는 차게 식은 밀크커피 한잔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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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카메라에 대한 자료를 공유하는 카페가 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차곡차곡 모아둔 돈으로 비싼 카메라 하나를 지르고 나니 좀 더 알차게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 활동하게 된 카페이다. 사진을 흔들리지 않게 찍는 법, 화이트밸런스 조절하는 방법, 어떻게 하면 좀 더 선명하게 찍는지, 어떤 각도에서 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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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면 얼굴이 작게 나오는지 등등의 노하우들을 배워가며 하나 둘씩 찍은 사진들을 올리면 꼭 댓글을 다는 사람이 있었다. 찍찍이 라는 닉네임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처음 보는 분이네요. 환영합니다. ^^’라는 댓글을 시작으로 채색을 좀 더 낮춰서 찍으면 더 선명하게 찍을 수 있어요, 라든지 이곳은 서울숲이죠? 사진 찍기 좋은 곳인데 잘 찾아가셨네요, 라든가 처음보다 많이 좋아지셨네요, 등의 댓글을 달았다. 가끔 셀카—셀프 카메라의 준말로, 자신이 (자기 스스로=Self ) 자신의 사진을 찍는 것을 말한다—를 찍어서 올릴 때면 칭찬이 가득한 댓글로 내 기분을 좋게 만들곤 했다. 그리고 나도 차츰 그의 사진에 댓글을 달며 친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사진 찍는 실력은 훌륭했다. 카메라도 나처럼 콤팩트가 아닌 전문가의 카메라를 사용해 사진을 찍었다. 그의 사진은 푸르고 높은 하늘을 배경으로 한 사진이 많았고, 흑백으로 촬영한 사진도 많았다. 그의 게시물들에 푹 빠져 밤을 꼬박 새기도 한 날이 많았다는 건 그는 모르는 사실이다. 그의 나이는 스물일곱이라는 것을 안 것은 ‘처음 보는 분이네요. 환영합니다.^^’ 라는 댓글이 달린지 두 달 후였고, 그리고 일주일 뒤 우리는 말을 놓았고, 그의 이름이 찍찍이가 아니라 안성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사진기 기종이 무엇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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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알았고, 아버지가 하는 사업을 돕고 있지만 투잡으로 사진기사까지 도맡아 하는 열혈 사진 광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의 고향도 알았고, 그의 여성 취향도 알았고, 그의 주 출사지가 남산타워나 한강고수부지 라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음식은 꽃등심부위를 미디움 웰던으로 구운 스테이크라는 것을 알았을 즈음에는 우리가 가야할 길은 사랑이라는 것도 알았다.지루한 수업을 끝내고 힘든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와서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따뜻한 물에 샤워하는 것도 아니고, 침대에 누워 퉁퉁 부은 다리를 마사지 하는 것도 아니었다. 컴퓨터를 켜서 오늘 찍은 사진을 컴퓨터로 전송 시키며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집에 도착할 즈음에는 그가 메신저에 항상 있었고, 내가 로그인을 하면 그가 반갑게 인사를 했고, 안부를 물었고 그날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쌓인 스트레스를 그는 보듬어 주었고, 풍경 사진을 좋아하는 내게 한 장씩 한 장씩 직접 찍은 사진들을 선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었다. 맛있는 스테이크를 사주겠다며 그가 나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였고 —그때 먹은 스테이크가 그가 가장 좋아한다는 스테이크였다—값비싼 스테이크는 처음 먹어 본 나에게 그는 세상 어느 값비싼 스테이크 보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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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로 고백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카메라를 꺼내어 예쁜 내 모습을 담아두고 싶다며 사진을 찍었다.사진을 찍는 것을 즐기는 그는 대한민국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만 데리고 다니며 소개시켜주었고, 여전히 하루에 한 장씩 예쁜 풍경사진을 선물했다. 친구들은 모두 나를 부러워했고, 나는 스물 두해를 살며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간 만나온 남자들과는 다른 처음 느끼는 연상의 노련미와 성숙함과 그리고 생활력에 나는 매료되었고, 정장이 잘 어울려 한 손으로 후진을 하는 폭풍후진을 선사할 줄 아는 그런 남자에게 나는 내 마음을 다 빼앗겨 버렸다. 그리고 내 사진 폴더에 그가 선물해준 풍경 사진들이 아흔 하나가 있던 날 아침, 나는 집밖을 나서며 엄마에게 거짓말을 했다. 있지도 않은 교수와의 프레젠테이션을 만들었고, 뒤풀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외박을 해야 한다는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아흔 두 번째의 사진을 받고 그에게 몸과 마음을 다 주었다.처음 그와 하나가 되었을 때, 그는 내게 사랑한다고 속삭였고,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다. 그의 목을 꼭 감싸 쥔 채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눈물이 났다. 행복함이 치닫다보면 불안함이라는 언덕을 지나게 되는데 나에겐 그 순간이 그때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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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도 그는 나에게 처음보단 좀 뜸해졌지만 풍경사진을 가끔씩 선물했다. 풍경사진보단 전라의 내 모습이 찍힌 사진을 더 많이 선물 받았다. 내 폴더에 차곡차곡 쌓여가던 풍경 사진들은 어느 정도 탑을 쌓고는 정지해버렸다.

하늘이 예쁘고 맑아지는 가을이 오자 그의 작업량이 무척 많아져 연락하기도 버거운 상태가 되었다. 때마침 나도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에서 일손이 부족했고, 그와 더 좋은 데이트를 즐기고 싶어 무리하게 아르바이트를 강행했다. 그도 열심히 일하는데 나만 놀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를 만날 시간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일했다. 가끔 있는 그와의 만남은 달콤했다. 그가 주는 풍경사진도 언제나 예쁜 풍경을 담고 있었지만 사진 폴더를 열어보면 결국 전부 하나의 풍경 같았다. 특별한 한 장 한 장의 느낌이 들어나지 않은 채 그저 풍경들의 나열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런 사진을 보며 왠지 모를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지만 여전히 그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했고 그의 손은 따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진 속의 풍경 사진들의 변화가 없어진지 이주일 정도 지났을 때 그가 메신저에 접속을 했다. 우와. 쟈기 웬일이야 이 시간에 들어오고. 일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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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피곤하지ㅠㅠ.반가운 마음에 내가 그에게 대화를 걸었고, 어쩐 일인지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리고 혹시 컴퓨터를 켜놓고 잠들었냐고 물어보려고 타이핑을 치고 있을 때, 모니터에 나를 찌르는 칼이 곤두서 있었다. 헤어지자. 네 글자는 송곳니 보다 뾰족했고 칼날보다 서늘했고 얼음장보다 차가웠다. 잠들었어? 물음표 뒤에서 깜박이는 커서를 보며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

그는 더 이상 카페에 들어오지 않았고, 나의 풍경사진 폴더에 더 이상 사진은 저장되지 않았으며, 그의 아이디를 친구목록에서 삭제해버려 그가 메신저에 접속했는지 안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늘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던 핸드폰을 보기 싫어 모아뒀던 돈으로 분홍색 예쁜 핸드폰을 새로 장만했고, 그의 손때가 묻은 카메라도 버렸다. 다시는 셔터를 누를 수 없을 것 같았다.구름이 예쁘던 사진, 전봇대에 앉아있는 새가 너무나도 고독해 보이는 사진, 한강위로 비치는 불빛들이 너무 아름다운 사진……. 하나 둘 사진들을 삭제해갔다. 침대위에서 웃고 있는 내 얼굴이 너무나도 바보 같아서 삭제버튼을 거칠게 눌렀고, 이미 사진들이 지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삭제버튼을 누르다 결국 하얀 화면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모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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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소설 부문 우수상 ‘즐거운 하루’ - 임채연

를 붙잡고 엉엉 울어버렸다. 불안의 언덕을 내려왔을 때 나를 반긴 건 다시 행복의 길이 아니라 종점이었다. 끝.

디지털카메라를 공유하는 카페가 있다. 나는 탈퇴신청버튼을 눌렀고 탈퇴사유를 적어달라는 마스터의 부탁에 한참을 고민하다가 카메라를 잃어버려서. 라고 적어 넣었다.

3

나는 해적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해적이 주인공으로, 거센 바다와 높은 파도를 헤쳐 나가며 악당들을 무찌르며 보물을 향해 나가는 내용의 만화였는데—해적이 주인공이므로 악당들은 주로 해군이었다—여느 만화처럼 주인공들은 의롭고 정의롭고 멋있고 강했다. 그래서 나에게 해적이라는 이미지는 사실과는 다르게 우상화 되어있었다. 그런 나의 순수함을 짓밟고 있는 지금 이 역사 시간은 너무나도 화가 난다. 영국의 해적들 바이킹의 실체와 그들이 입힌 피해들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는 저 세계사 선생님의 입을 당장이라도 막아 버리고 싶었고, 선생님이 얘기하는 단어들이 흩뿌려진 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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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의 잉크들을 모조리 뽑아내고 싶었다. 더욱 화가 나는 건 이 사실을 내가 암기하고 그것을 진짜라고 믿는다는 걸 시험으로 증명해 보여야한다는 것이다. 나는 해적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점수를 위해서 그냥 가르치는 대로 외워서 써야 우등생이 되는 것이고 좋은 대학을 가서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아침에 등교를 하면서 나는 내가 어쩌면 해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시계라는 나침반을 손목에 차고, 항해에 필요한 책들과 지침서가 가득한 가방을 등에 메고, 항해 도중 쓰러지지 않기 위한 도시락을 옆에 끼고 항해를 시작한다. 이 시각 늘 출몰하는 해군대령의 복장단속을 피해서 항해를 하는 노하우쯤은 3년 전에 터득한 능수능란한 해적이다. 그러나 가끔 늦으면 나타나는 상어에게 엉덩이를 물리곤 하지만 이쯤이야 금세 훌훌 털어버리고 항해를 하는 털털한 해적이기도 하다. 키를 돌려 정착을 한다. 이미 많은 해적들이 모여서 자신들의 지침서를 공유하기도 하고 약탈하기도 하며 바다를 항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아직은 항해를 하기에 어린 그들이지만 무섭다고 주저앉기엔 너무 깊은 바다임을 알기에 오늘도 그들은 항해술을 배우고 익힌다. 우리들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수험생 해적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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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수업은 거의 대부분 자습으로 돌렸고 학생들은 문제집을 풀거나 PMP를 통해 인터넷 강의를 들었다. PMP는 동영상 플레이어 인데, 요즘 웬만한 수험생들은 모두 가지고 있다. 나도 엄마를 졸라서 샀는데 사실 인터넷 강의보단 영화와 노래를 듣는데 더 많이 할애한다. 한두 푼도 아니고 무려 사십만 원인데, PMP 액정에 EBS선생님 얼굴이 아닌 손예진의 얼굴이나 안젤리나 졸리의 얼굴이 더 빈번하게 나타남을 느낄 때면 발끝부터 엄마에 대한 미안함이 밀려 올라온다. 오늘도 아침에 괜히 내가 늦잠 자놓고 엄마에게 잔뜩 심술 떨고 아침도 안 먹고 나왔는데, 한없이 미안하고 죄송스럽다. 나도 엄마에게 사분사분, 고분고분 말하고 싶은데 공부하기는 싫은데 해야 하고, 할 건 많은데 해 놓은 건 없어서 점점 밀려오는 짜증과 스트레스를 엄마에게 푸는 것 같다. 한국지리 시간에 칠판에 ‘자습’이라고 크게 써놓고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만 덩그러니 남겨 놓은 채 선생님이 나가시고 난 후, 나는 PMP 전원을 켰다. 영화폴더로 손이 갔지만 아침에 엄마한테 죄송한 것도 있고 해서 인강폴더로 들어가서 어제 듣다만 외국어영역 강의를 재생 시켰다. PMP 액정에는 하얀 분필과 노란 분필을 손가락 사이에 끼고 열심히 강의 중이신 선생님이 나왔고 내 귓가에는 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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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영어가 더 많이 흘러 들어왔다. 예전에 할머니께서 내 PMP를 보시곤 세상이 참 좋아졌다며 감탄을 하셨던 적이 있다. 이게 바로 문명의 발전이라고, 이런 게 있으니까 서울대쯤은 거뜬히 갈수 있을 거라던 할머니의 말이 고스란히 얹혀 무거운 어깨를 만들어 놓고 시골로 내려가시던 할머니의 뒷모습이 생각난다. PMP. 전원을 켜면 까만 배경화면이 나타난 후, 내가 눌러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PMP. 내가 가까스로 영화폴더의 유혹을 이겨내고 인터넷 강의 폴더로 회로를 지정해줘야 그제야 액정에 가득히 강의를 품고 나타나는 PMP가 아니던가. 어쩌면 우리는 PMP 같을 지도 모르겠다. 전기 콘센트에 꽂힌 채 열량을 밥으로 보급 받고 체력보충이 다 끝났다는 파란색 표시만을 믿으며, 단지 눈이 떠진다는 이유하나로 우리는 또 열심히 윗사람들이 만들어낸 매뉴얼에 맞추어 공부를 하고 액정에 그들이 시키고 만들어낸 것들을 열심히 나타내 보인다. 정작 내가 나타내고 싶은 건 EBS 강사들의 얼굴이 아니라 안젤리나 졸리의 입술이고 손예진의 다리일지도 모르는데도 말이다. 아니, 어쩌면 난 PMP보다도 못한 놈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PMP는 시킨 건 그대로 제대로 하지 않던가. 그에 비해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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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소설 부문 우수상 ‘즐거운 하루’ - 임채연

집으로 돌아 와서 나는 PMP를 켜지 않았다. 원래 짜놓은 계획대로면 집에 와서 씻고 야식을 간단하게 해결한 뒤, PMP를 켜서 수리 강의를 하나 듣고, 복습을 한 후, PMP에 저장되어있는 수험생을 위한 비타민리듬—이상한 전파 같은 소리가 지지직 흘러나오는데, 그게 집중력도 강화시키고 깊은 수면을 도와준다고 한다—을 들으며 수면을 취해야 한다. 그렇지만 나는 집으로 돌아와 책장위에 꽂혀있던 만화책을 꺼냈다. 원피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책인데 그동안 수험생활에 치이느라고 코빼기도 비추지 못했던 책이다. 혹여 아버지 눈에 띌까봐 깊은 곳에 숨겨놓고 수학의 정석이라는 두꺼운 책 뒤에 감쳐두며 모아온 내 보물1호. 원피스. 그 만화책을 오랜만에 펼쳤다. 해적이 되겠다고 마음을 먹은 주인공은 약 10년간 몸을 키우고 전투력을 키우며 최고의 해적이 되어간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해군 따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뭐 객관적으로 그의 부모님이나 혹은 주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연히 해군이 되어야 옳은 것이겠지만 주인공은 자신이 하고 싶은 해적질을 하고 다니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이 만화에 끌린 결정적인 이유가 아닐까. 아직 완결이 나지 않아 답답하지만, 확실한 건 주인공이 그토록 바라는 ‘원피스’라는 보물을 향해 가고 있다는 점이고, 그토록 바라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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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적’이 되어 간다는 것이다. PMP는 나에게 지식을 선물하지만 원피스는 나에게 꿈을 선물한다. 수능이 코앞으로 다가온 이 시점에 꿈을 먹으며 수능을 맞이한다는 건 어찌 보면 현 시점에서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 같고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꿈도 하나 없이 지식만 가득 찬 사람은 밀가루 반죽도 없이 붕어빵 거푸집에 올려놔진 팥 앙금 같은 사람에 불과하지 않을까.그렇게 한 장씩 한 장씩 만화책을 읽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들어오셨다. 늦게까지 공부하느라 피곤하지? 라고 말씀하시며 문을 여시다가 버럭 화를 내시기 시작하셨다. “어쩐지 이놈의 자식이 야식도 안 먹고 바로 책상에 앉기에 웬일인가 하고 주스 한잔 마시면서 하라고 들어왔더니, 니가 그럼 그렇지. 지금 이 시점에 무슨 만화책이야!” 하시며 내 손에 들려 있던 만화책을 바닥으로 집어 던지시고는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으시고 문을 쾅 닫고 나가셨다. 그렇다. 아직은 이해하지 못하시겠지. 원피스의 주인공이 해적이 되겠다고 했을 때, 그를 키운 마을의 어른들도 모두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반대하셨다. 그렇지만 나중에 가면 뿌듯해하고 그를 자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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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소설 부문 우수상 ‘즐거운 하루’ - 임채연

럽게 여기는 걸. 그래. 그랬다구.나는 방바닥에 널브러진 만화책을 주워 구겨진 페이지를 판판하게 잡아당긴 후 책장에 가지런히 꽂아 넣었다.

그리고 나는 PMP 전원을 켰다.

4

째깍 째깍 째깍. 큰 바늘이 느릿하게 움직이더니 12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여섯 시가 됐다는 걸 알려주려 시계가 큰 소리로 우는 찰나 나는 온오프스위치를 눌러 알람을 꺼버렸습니다. 아직도 곤히 자고 있는 남편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일어나 세수를 하러 욕실에 들어가 불을 켭니다. 어제 말끔히 닦아놓은 세면대와 변기가 환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차가운 물줄기에 졸음을 쏟아내고 하루 중에 나를 가장 많이 담고 있는 부엌으로 가서 불을 켭니다. 늦게까지 공부한 아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야식이 식탁에 널브러져있습니다. 식탁위에 튀긴 김칫국물을 닦아내고 밥그릇에 눌어붙은 밥알들을 싱크대에 넣어 불려놓고 말라붙은 과일 껍질들을 모아 초록색 음식 쓰레기봉투에 넣습니다. 쌀들이 옹기종기 모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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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쌀 항아리를 열어 한 됫박 가득히 퍼 뽀득뽀득 씻습니다. 깨끗하게 씻어진 쌀들은 나란히 누워 밥솥에 안치됩니다. 전기를 타고 밥알들에게 압력이 가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나는 식탁에 앉아 가만히 그 소리를 듣고 있다가, 남편이 내는 헛기침 소리를 듣고 일어나 찌개를 끓일 준비를 합니다. 남편은 잠에서 깨어날 때쯤이면 몸을 뒤척이고 헛기침을 자주하는 잠버릇이 있습니다. 남편이 깨기 전에 찌개를 끓여야지요. 오늘은 남편이 좋아하는 김치찌개를 끓일 거에요. 가스 불을 켜고 맛있게 익은 김치와 비계가 적당히 붙은 돼지고기 한 줌을 썰어 달달 볶은 후 다진 마늘 한 스푼과 설탕 조금 그리고 다시다와 미원을 약간만 넣고 물을 부어 김치찌개를 끓입니다. 보글보글. 재료들이 익어가는 소리와 밥알들이 내는 소리를 들으며 나의 아침은 시작합니다. 잠시 후 남편이 일어나 머리를 긁적이며 화장실로 들어갑니다. 한손에는 신문을 들고 말이죠. 이젠 더 이상 모닝 키스 따위는 해주지 않는 나의 남편입니다. 앞치마에 묻은 물기를 털며 나는 아들 방으로 들어가 아들을 깨웁니다. 아들 일어나렴. 학교 가야지. 으응 5분만. 안돼 지각해 어서 일어나서 밥 먹어. 생각 없어요. 그래도 엄마가 맛있는 찌개 끓였는데. 아 됐다니까요. 그냥 잠이나 더 잘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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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소설 부문 우수상 ‘즐거운 하루’ - 임채연

나는 돌아서 아들의 등을 보며 문을 닫고 나옵니다.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엄마랑 결혼할래. 엄마 없으면 못살아. 내 다리에 매달려 옹알거리던 아들은 이제 더 이상 없습니다.부엌으로 나오니 머리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신문을 보는 남편이 앉아 있습니다. 펄펄 끓은 찌개 한 그릇과 갓 지은 밥 한 공기를 퍼서 남편 앞에 가지런히 놓아 줍니다. 식탁 유리 위로 남편의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과 뻘건 김치 국물과 그리고 쩝쩝 거리는 남편의 소리가 고요히 퍼집니다. 똑똑. 딸아이의 방문을 노크해도 대답이 없습니다. 나는 문고리를 돌려 딸아이 방문을 열어 재낍니다. 빈 방이 덩그러니 날 맞이합니다. 오늘도 딸은 외박을 했습니다. 딸아이 방에 놓인 수화기를 들어 맨 뒷자리가 나와 같은 딸아이의 번호로 전화를 겁니다. 가사는 너무 빨라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지만 신나고 명쾌한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그러다가 “연결이 되지 않아 소리샘으로 연결되오며 삐 소리가 난 후 …….” `차가운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오늘 교수님이랑 프레젠테이션이 있어서 그거 뒤풀이 하느라고 못 들어 갈 거 같아. 기다리지 말고 주무세요. 수화기를 내려놓자 어제 집을 나서며 말하던 딸아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퍼집니다. 딸아이는 연애중입니다. 잦은 MT와 잦은 뒤풀이가 그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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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이야기 해주고 있다는 걸 나는 모르는 척 합니다. 남편이 나가고, 아들은 늦었다며 나에게 잔뜩 짜증을 내고 현관문을 쾅 닫고 나간 후 나는 세탁기를 돌립니다. 목 주변에 때가 꼬질꼬질하게 낀 아들의 교복 와이셔츠, 남편의 사각팬티와 구멍 난 검정 양말, 귀여운 곰돌이가 그려진 딸아이의 발목양말과 이런 것을 입으면 숨을 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타이트한 나시와 짧은 치마 몇 벌, 그리고 어제 내가 입었던 잠옷이 마구 섞여 세탁기 안에서 춤을 춥니다. 세탁기는 좌로 세 번 우로 세 번 방향을 바꿔가며 춤을 춥니다. 윙윙 거리는 세탁기의 기계음과 빨래들이 뒤섞이는 소리들이 어우러져 고요한 집안을 가득히 메웁니다. 까만 코드를 쭉 빼내어 콘센트에 집어넣고 청소기를 작동시킵니다. 거실에 깔린 카펫을 지나가면 청소기의 소음이 잦아집니다. 카펫에 묻어있는 먼지들을 빨아들이느라 정신없는 청소기는 소음 내는 것을 잊었나봅니다. 무거운 청소기를 굴려 아들의 방으로 들어갑니다. 책상 위는 참고서들로 가득 차 있고, 책상 아래에는 지우개가루와 부러진 샤프심이 널브러져 있습니다. 파란 시트가 깔린 침대는 누워있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벗어놓은 잠옷들도 함께 말이죠. 아들의 방에서 청소기를 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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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소설 부문 우수상 ‘즐거운 하루’ - 임채연

시킵니다. 위잉. 지우개가루와 샤프심을 모두 빨아들이고 침대위의 먼지들도 빨아들입니다. 그리고 아들이 나에게 내뿜는 차가운 마음과 짜증스러운 마음들도 모두모두 빨아들이려 나는 청소기를 허공에 대고 돌려봅니다. 위잉. 위잉. 청소기는 열심히 빨아들이지만 오래되어 그런지 성능은 다소 떨어집니다. 지우개가루의 흔적도 약간은 남아있고, 예전부터 아들의 돌아선 마음을 빨아들이려 노력해보았지만 제대로 청소하지 못하는 청소기였습니다. 딸아이는 제 방에 손대는 것을 몹시 싫어하기 때문에 방향을 돌려 안방으로 청소기를 가지고 옵니다. 침대시트를 탁탁 털고, 이불을 반듯하게 펴놓습니다. 햇살이 따스하니 창문을 활짝 열어두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방안이 환해지니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들과 화장대 위로 밤새 뽀얗게 내려앉은 먼지들이 보입니다. 짧고 굵은 건 그의 머리카락, 둥그렇게 말려있는 가는 머리카락은 나의 것입니다. 청소기 안에서 그의 머리카락과 나의 머리카락은 마구 뒤섞입니다. 그의 머리카락과 내 머리카락은 공기를 느끼지 못하며 진공 상태에서 서로 얽혀집니다. 간이 의자를 빼내어 화장대 앞에 앉습니다. 의자를 빼내자 서류 봉투 하나가 툭 하고 떨어집니다. 남편이 어제 늦게까지 보던 자료 같은데, 이게 왜 이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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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요즘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는지 늦게 퇴근하고 지친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플 뿐입니다. 휴지에 물기를 묻혀 화장대 유리를 훔칩니다. 그리고 마른 휴지를 하나를 빼서 또 한 번 화장대 유리를 훔칩니다. 화장대에는 그와 내가 액자 속에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그의 굵은 머리카락 속에 나의 가는 머리카락이 파묻혀있습니다. 화장대 아래 서랍을 열어 나는 앨범을 꺼냅니다.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소녀가 웃고 있습니다. 그 소녀의 손에는 단풍잎이 끼여진 시집이 들려 있었고 교복은 정갈했으며 새하얀 피부도 곱디 고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소녀의 손에는 시집 대신 가계부와 정갈한 교복대신 올 풀린 원피스 잠옷이 입혀 있습니다. 앨범을 넘기니 곰 인형을 들고 웃고 있는 아이가 나옵니다. 22년 나에게 세상의 모든 행복을 다 안겨다 주었던 꼬마 여자아이입니다. 새하얀 원피스가 너무나도 잘 어울리던 귀여운 아이. 그리고 조금 더 앨범을 넘기면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 품에 곰 인형이 아닌 작은 아가가 안겨져 있습니다. 세상에 남겨진 모든 행복을 모아서 안겨주었던 그 아가입니다. 앨범을 넘겨 마지막장을 보면, 양복을 차려 입고 서있는 그와 실크 블라우스와 네이비 정장 치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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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소설 부문 우수상 ‘즐거운 하루’ - 임채연

입은 내가 앉아있고, 그 뒤로 교복을 입은 딸아이와 아들이 서있습니다. 그의 승진 축하 기념 겸, 딸의 졸업 기념 겸 아들의 입학 기념 겸 찍은 가족사진입니다. 앨범을 서랍 속에 반듯하게 꽂아 넣고 의자를 화장대 안으로 밀어 넣은 뒤, 코드를 빼 청소기를 정리합니다. 세탁기도 고요하고 청소기도 고요해진 집은 너무나도 고요해졌습니다. 아무런 프로그램이 아무렇게나 틀어지고 있는 TV가 고요해진 집을 다시 메웁니다. 탁탁. 세탁기 속에서 차갑게 얽힌 빨래들을 하나씩 하나씩 분리해서 베란다에 널기 시작합니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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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가 아름답기보단 소음으로 들리는 노곤한 휴일의 아침.간만에 늦잠으로 몸이 개운한 어머니가 이미 해가 중천보다 조금 더 넘은 늦은 아침을 차리기 시작한다. 잠시 후, 헛기침 세 번을 한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조금 더 늦게 일어나 거의 차려진 밥상을 확인하고 현관으로 가 신문을 찾다가 “아, 일요일에는 신문이 안 오지. 참.”하며 모닝 키스를 잊은 채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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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들어간다. 찌개가 끓고, 이번엔 앞머리를 헤어밴드로 모두 올려버린 큰 딸이 새로 산 분홍색 핸드폰을 들고 하품을 하며 나와 TV를 켠다. 이번 주 개봉한 영화를 알려주는 프로그램을 넋을 놓고 보고 있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아저씨가 나오자, 아주머니는 밥을 가득히 푼 네 공기를 식탁에 놓고 말한다. 밥 먹어요. 들.아들은 한 손엔 PMP를 들고 나와, 밥을 먹으며 열심히 강의를 들었고, 시선은 TV에 고정시킨 채 밥을 떠넘기는 딸을 보며 혀를 끌끌 차는 아버지는 어제 못 본 스포츠 신문을 읽었다. 어머니는 찌개가 좀 짜네, 하시며 외로운 식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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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소설 부문 장려상 ‘기록’ - 김응호

한창 방황할 고등학생도 아닌데 가출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벌인 아버지에 대해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가 가출을 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며칠 전 나와의 몸싸움, 그보다 며칠 전 도망가 버린 씨발년, 아니 나의 어머니의 전화 혹은 그가 결코 이기지 못할 그의 낭만주의적 역마살. 나는 그냥 코딱지만 한 집의 구석에 코딱지 마냥 들러붙어 버렸다. 설거지를 할 그릇보다 일회용 컵라면 용기나 치킨을 포장했던 박스가 더 많이 쌓여있는 싱크대, 옷가지와 쓰레기들로 발 디딜 틈이 없는 방바닥과 어느 관광지의 이동식 화장실 못지않은 냄새를 풍기고 있는 우리 집의 화장실 등도 그를 가출하게 만든 요인이 아닌가 싶다. 우리 집에서 그나마 집의 기능을 하는 것은 구석에 놓여있는 시트와 텔레비전 뿐이었다. 아버지와 내가 집에서 하는 일이라곤 쓰레기의 바다를 헤치고 시트로 구성된 뗏목에 간신히 몸을 얹은 다음 멍하니 바깥 문명의

기록

김 응 호

제17회추계문학상

소설부문장려상 김 응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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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을 전해주는 텔레비전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무인도에서 탈출하려고 만든 뗏목 위에 갇힌 두 명의 인류는 곧 잠에 빠져 들었다. 우리는 둘 다 무인도에서 탈출한 외로운 인류였다. 우리 집 구석에 놓여 있는 시트의 이름을 붙이자면 무인시트 정도 될까. 그 시트위에는 나 말고 다른 타인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단 한번도. 그저 아버지라는 인류의 한 종이 박물관에 늘어서있는 네안데르탈인처럼 멍하니 텔레비전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라는 종은 버튼을 누르면 실감나게 울음소리를 들려주는 공룡처럼 실감나게 밥은 먹었는지 묻곤 했다. 나는 예, 혹은 아니요로 대답했고 다시 아버지라는 종은 텔레비전에 시선을 정지시킨 채 가만히 정지해 있곤 했다. 아니, 돌이켜보자면 나를 가만히 쳐다본 적도 있었다. 그럼 갑자기 유리창을 깨고 튀어나온 네안데르탈인을 보는 것 마냥 겁을 먹곤 했다. 그러니까 결론은 그가 사라져도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나의 사소한 문제, 그가 우리 집의 경제적 가장이라는 것만 제외한다면. 그는 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오지는 않았지만 스물 먹은 나의 식비와 월세와 각종 세금을 한 달씩 정도 밀려가면서 낼 만큼은 만들어왔다. 그건 거의 기적 같은 일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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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별 다른 기술도 자격증도 기댈만한 인간관계조차 구성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꾸준히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까지 들어오며 돈을 만들어 냈다. 평범한 근로자라고 하기엔 너무 더러운 복장으로, 구걸하는 거지라고 하기엔 또 너무 깨끗한 복장으로 그는 꾸준히 그만큼의 돈을 벌었다. 어쩌면 그는 딱 그만큼의 돈만 벌기에 최적화되어 진화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가 사라졌다는 것은 딱 그만큼의 돈이 사라졌다는 것과 같았다. 나는 딱 그만큼의 돈을 벌어오는 아버지에게 맞춰 진화를 한 탓인지 너무 많은 돈이 필요한 대학에는 진학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약 내가 대학생이란 높은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면 이정도 흔들림에 분명 쿵하고 떨어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대학생이 아닌 스무 살은 밥을 안 먹는 것도 아니었고 아버지가 가출한 새내기 성인에게 주인집 아주머니가 월세를 안 받을 것도 아니었고 막막한 청년을 위해 국가가 세금을 공제해 줄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아주 현실적이게 아버지의 가출을 원망하고 있었다. 때는 꽃이 피는 3월이었고 이제 밥을 줄 학교도 졸업을 했고 아버지는 가출을 했다. 내 생에 가장 끝장나는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한창 파릇파릇한 청춘도 아닌데 바람이라는 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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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니없는 행동을 벌인 아내에 대해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녀가 바람을 피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나의 경제적 능력, 책임져야할 5살 만큼의 밥을 먹어대고 칭얼대는 아들내미, 나도 모르게 나오는 나의 욕설. 그리고 무엇보다 몇 달 전 일하는 동료들을 집으로 들인 것이 그녀의 바람에 가장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날 내가 동료들을 집으로 들이지 않았다면 그녀가 내 직장 동료인 승일이 그 개새끼를 보지 않았을 것이고 그 개새끼가 그녀에게 수작을 부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32살이나 먹었지만 순수했던 나의 아내는 그 씹새끼의 수작에 넘어갔을 것이고 그 미친 새끼를 따라 쫄래쫄래 도망을 가버린 것일 테다. 그 결정적인 증거는 그 미친년과 미친 새끼가 쌍으로 일주일째 연락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마시고 있던 소주병을 내던져 버렸다. 내가 소주병을 내던진 동시에 ‘금모레 슈퍼’의 주인아줌마의 애정 어린 충고가 들려왔다. “아니 갑자기 왜 소주병을 던지고 지랄이야. 나중에 누가 그거 밟으면 어쩌려고. 그거 다 누가 치우는지 알아?”주인아주머니는 곧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사거리에 함부로 깨져있는 유리병을 치우기 시작했다. 사거리의 한 구석에 있는 ‘금모레 슈퍼’는 내가 2년 전에 이 동네로 이사 왔을 때부터 있었다. 듣기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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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라는 개념이 생기고 나서부터 이 동네에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많은 슈퍼들이 멸업하는 사이에서 ‘금모레 슈퍼’는 가끔 외상값을 떼이면서, 담배를 팔아가며, 여러 품목을 할인하며 살아남았고 슈퍼를 자주 이용하는 사람들 치고 주인집 아주머니와 친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나도 그중 하나였다. “이 양반아. 집에 아들 혼자 있을 거 아냐. 여기서 술이나 마시지 말고 어서 들어가 봐.”그리고 아주머니의 특징 중 또 하나는 넓은 인간관계의 덕분으로 여러 집의 소식에 빠르다는 것이었다. 아랫집 부부가 싸우면 ‘금모레 슈퍼’에서 생중계를 해준다는 말이 항간에 떠돌기도 했었다. 나는 천천히, 비틀 비틀 일어났다. 여기저기 다방의 간판들이 둥실 둥실 떠있었다. 처음 저 간판들을 본 2년 전엔 내 마음이 둥실 둥실 떠있었다. 이 동네로 처음 이사 오던 날 우는 아이를 달래려고 급히 아이스크림을 사러 들어간 곳이 ‘금모레 슈퍼’였다. 그날의 우린, 나와 아내 그리고 아들은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우린 들떠있었다. 4년 만에 월세이긴 하지만 결혼 후 처음으로 우리 집을 갖고 의미 그대로 분가를 하는 때였다. 그동안은 밤에 아내와 키스라도 할라치면 장모님이 갑자기 문을 벌컥 열고 우리 방으로 들어오곤 했고 노인네 특유의 신경질을 우리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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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부리기도 했었다. 부부생활이 아니라 내가 장모님의 양아들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나는 열심히 망치질과 못질과 대패질을 하고 아내는 미싱을 돌렸다. 그리고 우린 도심에선 한참 떨어진 곳이긴 하지만 작은 월세 방을 구할 수 있었고 그곳이 바로 년놈이 쌍쌍이 도망가 버린 이 동네였다. 그때는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빌어먹을 희망이 가득 차 있던 때였다. 그땐 내 생에 가장 끝장나는 봄을 맞이하고 있던 때였다.

나는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3월 2일 금요일 2시 26분이었다. 나는 천천히 쓰레기로 가득 찬 15평의 바다를 헤쳐 갈 준비를 했다. 시트 구석에 쳐 박혀 있던 양말을 주워 신고 옷걸이에, 걸려 있다기보다는 쌓여있던 옷을 대충 걸쳐 입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은 날이 쌀쌀했다. 나는 다시 집으로 들어가 퀘퀘한 냄새가 나는 겉옷을 걸치고 나왔다. 그것이 아버지의 것이라는 것은 사거리의 ‘금모레 슈퍼’에 다 와서야 알았다. 어젯밤 누가 길에다 소주병이라도 깼는지 작은 소주병의 입자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그 반짝임을 아드득 밟았다. 우선, 어떻게 되던 간에 그를 찾아야 했다. 스무 살의 봄을 소년가장으로 시작하는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그리고 기분을 떠나서 당장 밥 한 끼 사먹을 돈도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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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금모레 슈퍼’안으로 들어갔다. 주인아저씨가 아는 척을 해주었다. 나는 제발 그 호의가 우리가 나눌 몇 마디의 말 후에도 남아있길 바랬다. “저, 죄송한데요. 빵 하나만 외상으로 주시면 안 돼요?”놀랍게도 아저씨는 우유하나까지 건네주었다. 돈은 천천히 갚으라는 기적 같은 말까지도 남겨주시며 이 삭막한 사회에 남은 약간의 희망을 몸소 보여주고 계셨다. 나는 천천히 빵의 껍질을 벗기고 웃기지도 않은 개구리 스티커를 길가에 버린 후 크게 한입을 베어 물었다. 퍽퍽한 싸구려 카스테라가 한입 가득 들어왔다. 우유를 마실 겨를도 없이 힘겹게 카스테라를 씹었다. 아버지는 그 흔한 핸드폰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그의 진화는 문명단계 어딘가에 정체 중이었다. 나는 카스테라를 한입 더 베어 물며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내가 발품을 팔아 아버지를 찾을 확률은 거의 0에 가까웠다. 아버지의 추억의 장소라든가, 친한 친구의 연락처 따위를 전혀 몰랐다. 심지어 아버지의 씨발년이자 나의 어머니에게 찾아 간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하지만 곧 머리를 털어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가 그럴 리 없었다. 처음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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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를 씨발년이라고 부른 것은 15살의 여름 어느 중간 즈음이었을 것이다. 10년 동안 아버지의 세뇌는 30년 만에 아들을 찾아 나서는 어머니를 그린 감동적인 드라마를 보며 ‘우리 씨발년은 어디 있을까?’ 라는 생각을 아들이 하게 했다. 물론 혼자 그런 생각을 한 후로 나는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분명 어머니도 매일 술에 욕설에 심지어는 가끔 폭력도 휘두르는 아버지의 옆에 있기 싫었을 것이 당연하다. 나는 퍽퍽한 카스테라의 마지막 한 조각을 입에 털어 넣고 우유를 까 한입에 마셔버렸다. 그리고 핸드폰의 폴더를 열어 이 근처 일자리를 꽉 쥐고 있다는 동네형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내가 어머니처럼 먼저 나가기 전에 그가 먼저 사라진 것이 어떻게 보면 잘 된 일이라 여겨졌다. 게다가 월세의 보증금까지 굳었으니. 언제 들어올지는 모르지만 그 동안만이라도 혼자 생활을 하는 것도 괜찮았다. 우선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우리 집이 아닌 내 집은 어감이 좋았다. 가자마자 집을 치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아무렇게나 우유 통을 발로 차 버렸다. 과연 그 집이, 아니 이제 내 집이 치워지긴 할까라는 의문이 들긴 했지만 그리고 집에 갔는데 아버지가 돌아와 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쨌든 스무 살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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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약간 끝장에서 멀어진 기분이었다.

밤에 혼자 집에 들어가는 기분은 좋지 않았다. 그리고 이따금 나에게 덤비는 전봇대와 맨홀뚜껑은 누가 봐도 나를 취객으로 만들었다. 집에 들어가자 다섯 살 난 꼬맹이가 아주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이 어린것을 두고 집을 나가버린 년을 용서할 수 없었다. 지난 6년 동안 얼마나 알콩달콩 살아왔던가. 물론 마지막 1년은 알콩달콩이라기 보다는 시끄럽긴 했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배신감을 혀끝에서 맛봐야 했다. 달력을 보았다. 2월 13일 이었다. 아들의 생일까지 한 달하고 조금 남아있었다. 아들은 아침에 깨자마자 일주일간 한, 지긋지긋한 ‘엄마 언제와?’를 반복할 것이고 그는 끔찍한 기분에 젖어들 것이다. 그는 끔찍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그리고 올 것 같지 않던 잠이 결국엔 왔고 오지 않았으면 했던 아침이 결국 왔다. 그것은 마치 나의 유전자속에 새겨진 어떤 기록에 아침이란 항목 탓인 것 같았다. 날 흔들어 깨우는 아들의 작은 손을 느끼며 아침은 일생의 한번 밖에 없을 하루살이의 유전자를 부러워했다. 아들은 아침 8시 부터 10시까지 약 두 시간 가량 서른 번도 넘게 ‘엄마 언제와?’라는 질문을 했고 열 번도 넘게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 언제 오냐고오오오.’ 그리고 약 서른한 번째 질문이라고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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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될 즈음에 나는 결국 인내심의 한계치가 정수리 부근에서 끝났음을 느꼈다.“너네 엄마 도망갔다! 그 씨발년 얘기는 하지도 마라! 그년이 어디 갔는지 다신 물어보지도 말고!”그 녀석은 눈이 동그래진 채 그리고 그 동그란 눈에 물어보지 못한 질문들을 한가득 머금어 붉어진 채 꼼짝도 안하고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씨발, 이러려던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나는 나의 아버지처럼 아들에게 말도 안 되는 욕설을 퍼붓지는 말자고 그렇게 다짐했었는데 5년 만에 그 굳은 다짐이 허무하게 허물어짐을 느끼며 나는 아들에게 천 원짜리 한 장을 내밀었다. “이, 이거 갖고 슈퍼에 가서 하드나 하나 사먹어.”그리고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왔다. 지긋지긋한 목수 짓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다 그 개새끼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나는 분명 대못을 그 새끼 정수리에 대고 박아버릴 것이 분명했다. 별다른 재주도 없고 있는 건 몸 밖에 없어도 여기저기 개발한다고 공사장은 많았다. 나는 여기저기 벼룩시장을 뒤적거리며 노가다 판이라도 있나 찾아보기 시작했다. 사거리 근처에 쭈그리고 앉아 한참을 뒤적거렸지만 맘에 드는 일을 찾을 수 없었다. 내 처지에 이것저것 고를 형편은 아니었지만 보수가 세다 싶으면 거리가 너무 멀었고 이 근방에는 보수가 너무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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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촌동네라 그렇다할 공사판이 없는 이 개 같은 동네를 씹고 있을 때 앞에 가던 어떤 정신 나간 어린놈이 우유 곽을 발로 차버렸고, 그 우유가 얼굴에 튀었다. 안 그래도 잘 됐다, 너 같은 새끼 잡아다 정신을 바짝 차리게 만들어 줘야지 하던 찰나에 아들이 눈에 선했다. 그리고 우리의 가계상황도 선했다. 잘못해서 이빨이라도 부러진다면 아들과 나, 우리의 가정의 기둥뿌리가 부러지는 것이다. 나는 참고 또 참으며 벼룩시장의 귀퉁이를 찢었다. 그나마 괜찮은 공사판이었다. 집에 가서 전화나 해볼 요량으로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집에 오자 아무도 없었다. 아들은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러 간 모양이었다. 나는 찢어온 귀퉁이에 적혀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당장 내일부터 일을 할 수 있다고 했다. 피상적인 대화가 오고 가고 모레부터 집에서 약간 떨어진 공사장으로 일을 나가야했다. 혼자 남을 아들은 아직 처리 곤란이었다.

집을 다 치운 후 그러니까 이틀 후에 그 형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쥔 채 집 근처 공원에서 만났다. 이 추운 날 무슨 아이스크림이냐고 했지만 그는 추운 날 먹는 아이스크림이 제 맛이라고 했다. 왠지 익숙한 맛을 혀로 핥으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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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건 알바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직장이니까 열심히 해야 된다. 여기서 별로 멀지도 않고 괜찮을 거야. 한 달에 80만 원 정도 받고 하는 일이니까 잘해봐. 간단해. 우리 의류함 같은 데에다가 옷 넣지? 그걸 가난한 나라에 보내는 건데 나쁜 사람들이 버리는 옷이라고 걸레 같은 것도 집어넣은 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그런 옷들 골라내고 티나 바지 같은 것들 분류하는 거야. 어린나이에 이런 일 하긴 싫겠지만 또 이만한 일도 없다. 그리고 부수입이 심심치 않아. 재작년에 형 아는 어떤 사람은 거기서 밍크코트 주워서 팔았더니 수입이 꽤나 됐다더라. 뭐 그런 건 진짜 운이 좋은 경우니까 그런 거 바라지 말고 열심히 해 봐.”나는 당장 내일부터 일을 할 수 있다고 했다. 피상적인 대화가 오고 가고 모레부터 집에 약간 떨어진 공장 같은 곳으로 일을 나가야했다. 사장은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매가 올라간 것이 약간 사납게 생겼다고 해야 할까, 깐깐하다고 해야 할까. 그곳에선 역시 내가 막내였다. 내 바로 위 나이가 36살이었다. 나는 속으로 그 형을 욕했지만 밝게 웃으며 잘 부탁드린다고 했다. 이건 어린나이를 잘 쓰지 않는 수준이 아니잖아. 그리고 우려했던 데로 막내인 나는 이것저것 많은 것을 도맡아 해야 했다. 어느 정도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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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야 커피 한잔 부탁해, 막내야 이 박스 좀 옮겨라, 막내야, 막내야, 아이고 역시 젊어서 그런지 힘이 좋네.”정도였다. 작업은 갖가지 심부름들 속에서 지루하게 흘러갔다. 그들이 말하는 주제는 대부분 요즘 뜨는 인기 여가수나 게임이나 새로 나온 옷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나도 그들의 대화에서 거리가 멀어졌다. 내 머리 위를 아무렇게나 지나다니는 부동산 이야기, 자녀 이야기, 세금이야기들 속에서 나는 땀내에 절은 옷들을 박스마다 집어넣어야 했다. 누군가의 옷을, 버려진 옷을 만진다는 것은 생각보다 역겨운 일이었다. 그 옷들은 모두 새 옷에 밀려, 혹은 사이즈가 작아졌거나 커졌거나 해서 버려진 마치 크낙새와 같은 옷들이었다. 그리고 크낙새처럼 아름다운 울음을 뽐내는 대신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옷을 분류하다 보면 의아할 정도로 멀쩡한 옷이 나오는 경우도 있었고 이런 것을 주면 아무리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이라도 화를 내지 않을까 싶은 옷들도 있었다. 도대체 ‘옷’이라는 개념 안에서 무엇을 해야 상태가 이지경이 되는지 의아한 옷도 많았다. 나는 그 멀쩡한 옷과 천 쪼가리에 불과해진 옷의 기록들이 가끔 궁금해지긴 했지만 그것들은 쉽게 내 손에서 버려졌다. 결국 기록이라고 해 봤자 버려지고 잊혀진 기록이었고 멸종해버린 크낙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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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사냥하러 가는 사냥꾼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래도 가끔 멀쩡한 옷은 주워와 입기도 했다. 처음에는 꺼려지는 일이었다. 이 옷의 주인이 살인마일지 심지어 정치가일지 알 수 없어 꺼림칙했지만 2주 정도가 지나자 그냥 그렇게 입을 만 했다. 그리고 2주가 지나도록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경찰서에 신고를 할까 생각 했지만 그냥 아버지가 없는 편이 더 편했다. 내 집도 집다워져 있었다.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기도 했지만 그건 당연했다. 아버지니까. 피란 그런 것이니까. 나는 괜히 경찰서 앞에서 발걸음을 빨리 했다.

나는 경찰서로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한창 힘들게 일을 하고 있는데 사장이 날 찾은 것이다. 사장은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매가 올라간 것이 약간 사납게 생겼다고 해야 할까, 깐깐하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약간 매서운 그의 눈매는 가늘어져 있는 게 꺼림직 했다. 전화를 받자마자 경찰입니다, 라는 목소리가 내 귓가를 윙윙거리며 돌아다녔다. 나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경찰에서 전화가 올 일이 있는지 생각했다. 옛날이야 경찰에서 전화 오는 게 생활이었지만 지금은 도망가 버린 그 아내 년을 만나고 나서는 거의 없었다. 이제야 사장의 눈매가 이해가 갔다. 혹시 내가 범죄자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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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인간이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던 것이 뻔하다. 그러던 사장이 내가 거의 울먹이며 사연을 이야기 하자 다시 사람 좋은 얼굴로 돌아와 황급히 나를 집으로 보냈다. “길가에 울고 있던 아드님을 어떤 아주머니가 데려와 저희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집 전화번호도 모르고 어디사는지도 모르고. 그런데 그 아주머니가 아저씨를 조금 안다고 이쪽 번호로 전화하면 될 것이라고 해서 전화했습니다.”공사판의 철근 세 개정도가 안전모조차 쓰지 않은 내 맨 살갗이 들어난 정수리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나는 그 이름 모를 아주머니에게 어지간한 신에게도 쓰지 않을 단어들로 찬양하며 급히 집으로 향했다. 그날따라 지하철은 오지 않았고 역에서 집까지 향하는 마을버스도 한참 후에야 도착했다. 물론 나는 그 버스가 오기 전에 경찰서로 뛰어가고 있었다. 경찰서에 도착하자 ‘금모레 슈퍼’아주머니와 그녀가 준 것으로 보이는 새콤달콤을 우물거리고 있는 아들이 보였다. 나는 쪽팔리게도 와락 아들을 껴안고 울음을 터트렸다.“내가 발견했기에 망정이지. 일이 있어서 시내까지 나갔는데 그 멀리서 얘가 울고 있지 뭐야. 아니 지 아들도 하나 못 챙기는 양반이 무슨 돈을 번다고 공사판까지 나가서 지랄이야? 애를 유치원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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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던가.”나는 아주머니가 나에게 욕을 하든 말든 감사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리고 우리 사장 번호를 어떻게 알았냐고 묻자 “내가 모르는 거 있는 거 봤나?”라는 애매모호한 말만 반복했다. 다행히 다친 곳도 없어 보였다. 집에 도착하고, 어느 정도 놀란 마음이 진정되자 화가 치미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일을 나가기 전에 절대 모르는 곳은 가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고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금모레 슈퍼’로 가라고 귀에 못이 박히게 말했었다. “너 거긴 왜갔었어?”나는 물었지만 아들은 계속 대답 없이 새콤달콤만 우물거릴 뿐이었다. 손에는 두개 남은 그 말랑말랑한 간식거리가 꼭 쥐어져 있었다. “왜 갔었냐고!”버럭 소리를 지르자 그 녀석은 개미도 안 들린다고 다시 물을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어, 엄마 찾, 찾으려구요.”많이 참아왔다. 그간 도망가 버린 아내에 대한 울분을 소주와 함께 씹어 먹는 오징어와 같이 씹어 삼켜야 했었다. “야 이 개새끼야! 내가 그 씨발년 잊어버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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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지! 왜 괜히 없는 년 찾는답시고 지랄을 해서 길을 잃어버려! 아빠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지금 그 과자가 넘어 가냐! 당장 못 뱉어!”그 녀석은 기어코 울음을 터트렸고 나는 집을 나와 버렸다. 괜히 경찰서 앞에서 발걸음을 빨리했다.

문제는 한 달간 일을 한 월급이 나올 때 까지였다. 아버지가 모아두었던 돈은 옛날에 다 썼고 밥은 회사에서 주는 밥이나 가끔 하는 회식, 그리고 고등학교 때 친구들에게 빌붙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한참 먹는 스무 살의 위장을 감당하기 힘들었고 특히 밤 10시 쯤 찾아오는 엄청난 허기를 달래기 어려웠다. 나는 온 집을 뒤지기 시작했다. 빨려고 정리해 놓은 옷들의 주머니와 서랍, 침대 밑까지 모두 뒤지자 놀랍게도 1800원이라는 거금이 나왔다. 나는 신나게 ‘금모레 슈퍼’로 달려가 800원짜리 컵라면과 700원짜리 빵을 골랐다. 망할 물가는 거의 2000원 가까이 하는 돈으로 고작 컵라면과 빵 하나 밖에 사지 못하게 했다. 남은 300원으로 또 살게 있나 보던 중에 새콤달콤이 들어왔다. 나는 껌을 집었다. 옛날부터 이상하게 새콤달콤만 보면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리고 나의 궁핍한 생활을 뒤바꿀 사건은 바로 그 다음날에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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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열심히 옷을 분류하고 있었다. 그러다 애기 양말 같은 것에 묵직한 것이 들어있는 것이 손에 잡혔다. 양말 같은 것은 속에 이물질이 있으면 안 되기 때문에 찝찝하지만 손을 넣어 빼내야 했다. 그런데 그 양말은 뭘 그렇게 꼭꼭 싸매놨는지 쉽게 펴지지도 않았다. 냄새나는 양말을 조물락거리며 불평하고 있을 때, 그 속에 손을 넣고 묵직한 것을 빼냈을 때 나는 급히 손을 뒤로 돌리고 주위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누가 봐도, 장님이 보더라도 금 일 것 같은 광물이었다. 누런 돼지와 굵은 반지였는데 무게가 꽤 묵직한 것이 만약 정말 금이라면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금이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잠깐 쉬는 시간을 이용해 화장실로가 돼지의 귀를 깨물어 보았다. 그러자 깊숙이 이빨자국이 남았다. 누런 빛깔, 빛나는 광채. 이건 순금이라는 확신이 내 관자놀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시간은 지루하게 흘렀고 일은 초조하게 끝나지 않았다. 괜히 금을 넣어둔 주머니가 간지러웠고 누군가 말만 시켜도 흠칫 흠칫 놀랐다. 그리고 기어코 퇴근시간이 되고 황급히 문을 나가려는 순간 누군가 어깨를 턱 하고 짚었다. 사장이었다. 잠깐 따라오라는 눈짓을 불길하게 보냈다. 약간 매서운 그의 눈매는 가늘어져 있는 게 꺼림직 했다. “너 뭐 주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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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소설 부문 장려상 ‘기록’ - 김응호

젠장. 혹시나, 가 역시나 였다. 나는 처음에는 발뺌을 했지만 사장은 집요했다. 다 봤다, 부터 시작해서 주머니 뒤져보겠다는 말까지 그는 장장 30분에 걸쳐서 나를 들들 볶아댔다. 그리고 나는 들들 볶이던 옥수수가 팡하고 팝콘이 되듯이 팡하고 터져버렸다. 집에 오는 길은 찝찝했다. 보란 듯이 관두겠다고 더 이상 잡아두면 일하고 있는 불법 외국인 노동자들을 다 신고해 버릴 거라고 협박까지 하고 나왔는데 만약 이 광물이 금이 아니면 나는 괜히 일자리만 잃은 것이 되는 것이다. 나는 다음날이 되자마자 금은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금은방 주인아저씨는 믿을 수 없는 말을 계속 늘어놓았다.“이 돼지는 5냥짜리고 반지가 5돈이니까, 1냥은

10돈이고 1돈에 지금 시세로 12만원이니까 660만원 정도 나오겠구만.”주여. 금의 힘은 대단해서 20년 평생 처음으로 귀하신 이름을 되뇌게 했다. 나는 당장 금을 현금으로 바꿔 가방에 넣었다. 혹시라도 잊어버릴까 어서 집으로 갈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경찰이었다.

월급이 나왔다. 최근에 있던 사건들 중 유일하게 기분 좋은 사건이었다. 전철을 타는데 오랜만에 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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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람까지 나왔다. 전철에서 내려서 걷다가 문방구 앞에 놓여 있는 로봇 장난감이 눈에 띄었다. 아들 녀석은 요즘 길을 잃어버렸을 때 내가 마구 성을 낸 후로 나를 무서워하는지 자꾸 피했다. 아들만큼은 소중하게 잘 키우고 싶었는데, 자꾸 나의 아버지처럼 되는 것 같아 맘이 아팠다. 나는 로봇장난감 앞에서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오랜만에 좋았던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그깟 장난감이 뭐라고 로봇 장난감은 월급의 상당한 부분을 갉아먹을 것으로 보였다. 약 10여분이 흘렀고 10차례 발길을 돌리다 말다가 결국 에라 모르겠다! 장난감 하나를 구입해 포장까지 그럴듯하게 했다. 살 때까진 많이 고민이 되었지만 막상 사고 나니까 빚더미를 청산한 것처럼 가벼운 기분이었다. 좋아할 아들을 생각하자 만화에 나오는 로봇처럼 발에서 불을 뿜으며 날아갈 것만 같았다. 마을버스는 이번에도 한참 늦었지만 그 정도야 뭐,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니까 이해하고 넘어가야지. 나는 오랜만에 관대해졌다. 집까지는 버스를 타고 약 30분을 더 가야 하는 거리였다. 사실 동네가 촌이라 버스가 많이 돌아간다. 그래서 걸어가는 시간이나 버스타고 가는 시간이나 비슷했지만 하는 일이 노가다라 버스에서 잠깐 조는 것이 그렇게 행복한 시간일 수 없었다.버스는 자장가처럼 흔들렸고 노곤한 몸은 금방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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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소설 부문 장려상 ‘기록’ - 김응호

에게 먹혔다. 잠이든지 얼마 안된 것 같았는데 창밖의 풍경은 우리 집이 있는 정류장이었다. 문이 거의 닫히고 있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잠시만요! 를 외치며 황급히 뛰어내렸다. 상황은 황급했고 나는 졸다가 깼고 선물은 정말 오랜만에 사본 것이었으므로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지만 그 로봇 장난감을 차에 두고 내린 나는 분통을 터트리며 차를 쫓아 달릴 수밖에 없었다. 아들 녀석의 웃음과 좋은 아버지라는 내 자신이 버스를 따라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달려도 그 버스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점점 멀어지는 거지같은 버스를 보며 그 누구한테도 해 본적 없는 욕설을 퍼부었다. 버스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을 때 나는 길 잃은 강아지처럼 길을 헤매었다. 혹시나 하는 맘에 버스 종점까지 갔지만 그곳에도 로봇 장난감은 없었다. 그 로봇 장난감이 비싼 것보다 그 비싼 로봇 장난감을 샀다는 것과 자꾸 어긋나는 아버지의 다짐에 나는 견딜 수 없어져 근처의 술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소주와 함께 죄의식을 털어 넣었다. 소주를 한잔씩 털어 넣을 때 동안 지긋하게 반복되던 아버지의 술 마시던 모습이 자신의 모습과 겹쳐보였다. 그리고 겹쳐 보일 때마다 그는 그 반복이 견딜 수 없어 계속 소주를 털어 넣었다. 그는 옛날 어느 작가가 썼던 소설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그 뭐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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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인력거꾼이 나오는 이야기였는데. 아마 거기 주인공도 이렇게 늦게까지 술을 퍼마시다 들어갔는데 아내가 죽어있었지. 그는 퍼뜩 아들생각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도착하니 아들은 텔레비전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보고 인사도 없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그런 아들을 보며 말할 수 없는 서운함과 섭섭함, 그리고 울화가 치밀었다.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마음을 썩였는데 인사도 한번 없이 방으로 들어가 버리다니. 이번에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욕설을 퍼부었고 욕설을 퍼부으면 퍼부을수록 작은 그물로 물고기 떼를 잡듯 계속 속에서 끌려 올라왔다. 아들은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전보다 훨씬 일찍 울음을 그쳤고 다섯 살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문득 입이 다물어졌다. 내 피붙이였고 내 피가 흐르고 있었고 나는 아버지를 지독하게 증오했고 그 피는 다시 흘렀다. 아들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가방에서 돈을 빼냈어야 했지만 경찰의 목소리가 다급하고 위협적이라 곧장 경찰서로 향했다. 나는 어느새 돈에 대한 생각은 저 멀리 둔 채 경찰이 나를 왜 불렀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경찰정도 되는 직급을 가진 사람이 다급하게 부르면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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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소설 부문 장려상 ‘기록’ - 김응호

은 친구가 다급하게 부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자칫 일이 틀어졌다가는 어처구니없게 감옥에 가는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내가 뭘 잘못 했나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최근에 잘못한 적은 없었다. 학생 때는 꽤나 불려갔었지만 정신없는 스물에는 그다지 경찰서까지 갈 일은 한 적이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나는 다급하게 경찰서의 문을 열었고 거기서 낯익은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 직장이었던 곳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넝마 같은 옷차림에 하나가 되어 버린 듯한 떡진 머리와 그 밑으로 나있는 땟국물이 흐른 자국. 덥수룩한 수염 밑에 가려져 있는 눈초리가 약간 올라간 부리부리한 눈과 두꺼운 입술 넓게 벌어진 커다란 코가, 경찰서 벤치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부랑자가 우리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아드님 맞으시죠?”나는 네, 라고 대답했고 경찰은 다시 한 번 한심하다는 눈으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일의 경과는 이렇다. 아버지는 어디서 얻어왔는지 소주를 마시고 만취한 상태로 대낮부터 지나가는 행인에게 시비를 걸었고 그 행인은 적당히 쫄아 주었으면 좋았을 걸 같이 싸움이 붙은 것이다. 예전부터 싸움 깨나 했던 아버지는 기어코 그 행인의 코뼈를 눌러 앉혀 버렸고 이빨도 두 개쯤 부러뜨렸다. 당연히 그 행인은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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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에 신고를 했고 경찰은 기어코 이 부랑자 아버지의 아들을 찾아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주는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아버지의 아들인 내가 그 행인의 치료비를 물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신의 장난인지 치료비는 정확하게 657만원이었다. 내 금을 판돈 모두 갉아먹고 3만원밖에 안될 돈이었다. 나는 가방 속에서 돈들이 여기 있다고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끝까지 없다고 잡아 땠다. 이런 아버지를 둔 스무 살 청년이 무슨 돈이 있겠냐고 하소연 했지만 그 썩을 행인은 그건 내 알바가 아니라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돈이 없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리고 치료비가 없으면 아버지가 형사 처분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조금 아쉬운 일이었다. 솔직히 아버지가 있으면 나야 일을 안 나가도 되고 편한 것이다. 그렇다고 당장 이 돈을 주자니 아깝기도 했다. 결코 장담코 아버지에 대한 연민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장기적인 수입을 위한 희생이냐 아니면 단기적인 한 몫이냐의 문제이다. 아버지가 들어간다면 입이 줄고 나는 독립이라는 해방 상태에 놓이는 것이다. 까짓것 앞으로 혼자 잘 살면 되지만 선뜻 아버지를 형사 처분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왠지 오늘만 아니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곳이 경찰서만 아니라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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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소설 부문 장려상 ‘기록’ - 김응호

럴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은 그럴 수 없는 묘한 기분이었다. 이건 모두 마음이 약한 내 심성 탓일 게 분명했다. 독하게 마음먹고 형사 처분으로 넘기려는 순간 벤치에 누워있던 아버지의 손이 내 가방을 잡아 당겼고 가방이 열렸다. 그리고 자연스레 가방에 있던 돈이 쏟아져 내렸다. 정확히 660만원 이었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끝난 것이다. 나는 660만원과 원치 않는 아버지를 맞바꾸고 경찰서 밖으로 나왔다. “아들, 미안하고 생일 축하한다.”그리고 그제야 오늘이 나의 생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 상황이 낯설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마 내가 5살 쯤 되던 해…

오늘은 아들의 생일이었다. 아무리 못난 아비이지만 아들의 생일까지 그냥 넘길 수 없어 처음으로 동물원이라도 데려가야겠다는 심산으로 아들과 집을 나섰다. 아들은 정말 오랜만에 즐거워했다. 처음 오는 동물원이었고 아들은 내내 웃고 있었고 나도 내내 웃고 있었다. 그리고 먹고 싶다던 아이스크림을 잠깐 사러 간 사이 나의 아들은 다시 미아가 되고 말았다. 이곳에는 ‘금모레 슈퍼’ 주인아주머니도 없고 동네도 아니었다. 나는 애타는 마음으로 동물원을 모두 훑고 다녔지만 아들은 찾을 수 없었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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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엉 울며 동물원 구석에 쓰러져 앉았다. 그 순간 안내방송에서 보호자를 찾는 다는 방송이 흘렀고 나는 당장 미아보호소로 달려갔다. 아들은 울먹이며 그곳에 있었다. 나는 말없이 아들의 손을 꼭 붙잡고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밖으로 나왔다. “아들, 미안하고 생일 축하한다.”나는 최대한 목소리의 떨림 없이 말하려 애쓰며 툭 던졌다. 아들은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 자식이 쪽팔리게 운다고 놀리는 건가? 내가 또 한소리 하려고 할때 그 녀석은 가만히 말했다. “아빠 울지 마. 괜찮아.”나는 내 유전자에게 위로받은 기분이었고 그의 말과는 다르게 펑펑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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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소설 부문 장려상 ‘내가 그녀를 찾아간 이유’ - 송민정

*

그녀는 열흘이 넘도록 연락이 없었다. 행여나 내가 사람을 잘못 찾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찾는 사람이 확실했다. 젖살이 빠진 탓인지 한쪽 눈에 선명하게 진 쌍꺼풀만 봤더라면 그녀일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쌍꺼풀보다 더 먼저 내 눈에 들어 온 것은 오른쪽 눈썹이 유난히 꺾인 그녀의 눈썹이었다. 그녀는 한쪽 눈썹을 씰룩거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꼭 오른쪽 눈썹만 씰룩거렸다. 자유자재로 움직여지는 오른쪽 눈썹에 비해 아무리 노력해도 요지부동인 왼쪽 눈썹은 그녀의 작은 고민거리였다. 그녀는 늘 거울을 들여다보며 오른쪽 눈썹과 왼쪽 눈썹을 번갈아 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하, 전혀 다르게 생겼단 말이야.’ 그러면 나는 이렇게 묻곤 했다. ‘어느 쪽이 더 나은 것 같은

내가 그녀를 찾아간 이유

송 민 정

제17회추계문학상

소설부문장려상 송 민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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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그녀의 대답은 언제나 똑같았다. ‘글쎄, 이쪽이 더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이쪽이 더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그녀는 열일곱에 만난 나의 첫사랑이다. 붉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를 처음 본 것은 학원 봉고차 안이었다. 그녀는 늘 새침한 표정으로 문 앞자리 창가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때도 그녀는 유리창에 반사된 자신의 눈썹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그녀의 대각선 맞은편 자리에 앉아 그녀의 반대쪽 유리창에 비친 그녀의 옆모습을 훔쳐보곤 했다. 학원 간판들이 불야성처럼 켜져 있던 밤, 검은 유리창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그 어느 간판보다 눈부셨던 걸로 기억한다. “저기… 핸드폰.”그러던 어느 날, 내게도 기회가 왔다. 매일 일등으로 교실에 들어와 맨 앞자리 구석에 앉아 있던 나는 3개월 동안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한 번에 80명씩 듣는 단과 수업이었는데, 아득히 먼 뒷자리의 거리와 그 거리를 빽빽이 채우고 있는 158개의 눈과 마주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나는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모두 강의실을 빠져나간 뒤에야 비로소 나가곤 했는데, 이런 나의 바보 같은 짓이 살면서 가끔은 도움이 될 때가 있었다. 그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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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소설 부문 장려상 ‘내가 그녀를 찾아간 이유’ - 송민정

바로 그 행운의 날이었다. 교실 맨 뒷자리에서 핸드폰 진동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핸드폰을 놔두고 간 것이었다. 내가 핸드폰을 집자마자 진동이 뚝 멎었다. 나는 누구의 핸드폰인가 싶어서 폴더를 열었다. 핸드폰 바탕화면에는 그녀의 사진이 떠 있었다. 나는 이게 꿈인가 생신가 싶어서 다시 한 번 그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그녀가 확실했다. 사진 속 그녀의 오른쪽 눈썹이 씰룩, 움직였다. 나는 당장 봉고차로 뛰어 내려가 그녀에게 핸드폰을 건넸고, 그녀는 고맙다며 예의상 내 핸드폰번호를 물어갔다. 예의상이었을지, 아니면 찌질이에 대한 호기심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날 밤 콩닥거리는 가슴 위에 동그랗고 무거운 아버지 베개를 얹고도 잠이 오지 않아서 그 위에 두 손바닥을 얹고서야 잠이 들었다. 그러니 내가 어찌 그녀의 오른쪽 눈썹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나는 컴퓨터 화면 한 쪽에 떠 있는 그녀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44분과 45분 사이에서 초침이 씰룩거리고 있는 탁상시계의 건전지를 갈아 끼웠다.

- 어이, 뭐하나.넋을 놓고, 시계바늘을 한없이 돌리고 있었을 때, 내 귓가에 대고 부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깜짝 놀란 나는 부뚜막에 엉덩이를 데인 송아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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냥 의자에서 튀어 올랐다. - 아, 자, 잠깐…….부장은 눈동자에 힘을 주고 흠, 하더니 자리로 가서 앉았다. 앉으면서 부장은 한마디 했다.

- 김 과장, 자네 직원들 신경 좀 쓰게.커피를 마시고 있던 김 과장은 커피가 목에 걸린 듯 켁켁거리다가 애처로운 목소리로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부장이 퇴근하고 나면 김 과장은 또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것이 뻔했다. 직원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일제히 나에게 날아와 박혔다. 괜한 식은땀이 흘렀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렇다 저렇다 할 미래가 없었던 나는 학교 앞에 있던 정수기 회사에 취직했다. 월 100만원 지급, 계약 1건당 인센티브 지급. 88만원 세대인 나에게 월 100만원과 인센티브는 지나칠 수 없는 근로조건이었다. 그래서 나는 전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시장경제의 원리가 행해지고 있는 바닥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러나 공급이 수요를 능가한 탓인지, 이미 집집마다 정수기 한 대쯤은 심심찮게 들어가 있었다. 때문에 입사 후 2개월 동안 나는 공황상태였다. 이렇게 많은 집들이 정수기 물을 마시고 있는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고, 결국 나는 제발 한 집만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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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소설 부문 장려상 ‘내가 그녀를 찾아간 이유’ - 송민정

계약을 해 주기를 간곡히 바라야 했다. 계약 한 건을 따야지만 정직원으로 채용되어 100퍼센트의 월급와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었다. 일종의, ‘등업’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수습직의 연장이냐, 정규직의 채용이냐의 기로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수습직을 일주일 남긴 어느 날이었다. 우리 집에 있던 정수기에서 물을 빼 마시다가 정수기 곳곳에 물때가 끼여 있는 것을 보았다. 이름도 없는 회사의 정수기였는데, 구입 시기를 보니 족히 3년은 되었음직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필터를 교체한 기억이 없다고 했다. “얘, 필터도 교체해야 하는 거냐?”정수기 회사 2개월차 새내기였던 나는 어머니 앞에서 그간 교육받았던 내용을 줄줄 말했다. 화학약품의 찌꺼기들과 염소와 낡은 파이프에서 나오는 녹물과 이런 것들이 낡고 물때가 낀 필터 속에서 또 한 번 오염되고 어쩌고저쩌고…. 어머니는 반쯤 알아듣고, 반쯤은 한쪽 귓구멍으로 흘려듣는 듯 했다. “야야, 그냥 하나 새로 들여 놓아라.”순간 나는 눈물이 핑 돌 뻔 했지만 대신 어머니를 한번 꼭 껴안았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처음으로. 그리하여 나는 이 회사에 정직원으로 채용되었고, 김 과장의 일장연설을 듣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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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들 알고 있겠지만 말이지.김 과장은 언제나 ‘다들 알고 있겠지만 말이지’로 운을 뗐다. 직원들이 알든 모르든 그것은 김 과장이 알 바가 아니었다.

- 우리가 서로, 쪼금만 더, 열심히 하면, 되는 문제란 말이지. 연봉 일 억, 누구나 다 할 수 있어요. 노력은, 우리를 절대, 배신하지 않아. 고객 한 명, 한 명에게 최선을, 최선을, 다 하면 된단 말이지. 응? 다들 알다시피 말이야. 연봉 이천을 받는 김 과장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허우대만 좋은 김 과장의 자리는, 그의 인맥이 대준 자리였다. 한국사회는 역시, 연줄이다. 부장만 해도, 젊은 나이에 이 조그만 영업소에 피땀흘려가며 저 자리에 앉지 않았던가. 부장이 정년퇴임을 하고 나면 김 과장이 저 자리를 꿰차고 앉을 것이었다. 그러나 부장은 50대가 꺾였는데도 어쩜, 점점 활력이 넘쳐나는 것 같았다. 그것이 정말 활력일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김 과장의 일장연설은 퇴근 시간이 40분이나 지나서야 끝이 났다. 김 과장이 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직원들은 일제히 궁시렁거리며 의자를 집어넣고, 가방을 들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직원들이 퇴근 하는 동안, 나는 내 자리에 그냥 앉아 있었다. 직원들은 나를 흘끗 쳐다보기만 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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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퇴근하지 않느냐고 아무도 묻지 않았다. 하, 그나저나 아무리해도 그녀 같단 말이지…. 나는 그녀의 사진을 골똘히 쳐다보다가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연락을 남겼다.

[저번에 방명록 남겼는데 못 봤나봐? 일촌신청하고 간다. 이 글 보면 연락해라. 한수미.]

*

저번 달 실적은 내가 최악이었다. 나의 첫손님이 우리 어머니였으니, 그럴 수밖에. 월급은 저번 달부터 꼬박꼬박 100만원씩 입금되고 있었지만 인센티브는 전혀 없었다. 내 맞은편 자리에 앉은 최 대리의 얼굴은 연신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저번 달에 랭킹1위를 했으니 월급에 인센티브가 꽤 쏠쏠하게 들어 온 모양이었다. “캬, 내가 이 맛에 이 짓거리를 한단 말이야. 팁이 월급보다 더 많으면 어쩌겠다는 거야!”최 대리는 거드름을 피우며 모두가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최 대리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미스 홍이 ‘홍홍홍’ 웃으며 최 대리의 팔에 자신의 팔을 슬쩍 갖다 대었다.“어멍, 최 대리님, 너무 좋으시겠당! 그럼 이번 휴가 때 어디로 놀러 가실 거예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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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언젠가 연봉이 오르면 미스 홍의 막힌 코부터 뚫어 주리라.“미스 홍은 어디 가고 싶은 데라도 있나보지?”그리고 최 대리의 목에 과도하게 발달 된 힘줄도, 같이 끊어 주리라.“글쎄용, 저는 경포대에 가고 싶어용. 여름하면 역시, 바다 아니겠어용? 홍홍홍.”“바다라? 거기도 좋겠군.”“어멍, 최 대리님, 그럼 경포대 가는 거예용?”“미스 홍의 시간이 되려나 모르겠네.”최 대리는 9월에 새신랑이 될 사람이다. 그는 이 사실을 사무실에서 철저하게 숨기고 있었다. 아무래도 호색가인 그의 천성이 자신의 입을 본능적으로 틀어막았을 것이다. 그는 이 사무실 사람들 중 나에게만 딱 들켰는데, 때는 최 대리의 야근 날이었다. 나는 학원 강의실에서 맨 마지막으로 빠져나가던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던 탓에 할 일도 없으면서 괜히 의자에 앉아 뭉기적거리곤 했다. 그날도 나는 구석진 내 자리에 앉아서 대학후배들의 미니홈피를 훔쳐보고 있었다. 경량급 역도선수로 나가도 될 만큼 우람했던 여자후배가 살인적인 다이어트 끝에 딴 사람이 된 것을 보고 나는 ‘헥’하는 소리를 냈다. 아주 가볍고 한숨 같은 소리였다. 그 소리에 약혼자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던 최 대리가 깜짝 놀라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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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질렀다. 그리하여 나는 최 대리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최 대리는 그것이 무슨 그리 큰 비밀이라도 되는지 그 길로 나에게 저녁까지 사주면서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한 대리, 자네 말이야. 그렇게 사무실에 쥐새끼처럼 숨어 있지 말라구.’

사무실은 그리 넓지 않았다. 사실 말이 회사였지, 일개 동네 정수기 대리점이었다. 직원은 10명쯤 되었는데 10명이 왔다 갔다 할라치면 복작복작했다. 그래도 늘 반쯤은 외근을 나가 있었기 때문에 낮에는 왠지 모를 한가함마저 흐르는 사무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가함을 가만히 놔두지 못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무실 입구 맞은 편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벽시계와 실적표였다. 미스 홍이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나지막한 음악소리가 흐르고 딱히 할 일이 없는 내가 마우스를 굴리며 한껏 한가함에 취할 때쯤이면, 조금씩 내 심장이 빨라지면서 발가락이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자꾸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사무실을 이리저리 돌아봤다. 김 과장은 부장이 없는 틈을 타, 책상 위에 발가락 양말을 신은 발을 올려놓고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몇몇 직원들의 책상 위에선 커피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아무도 나를 쳐다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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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없었다. 그러나 부장이 혓바닥을 차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부장은 사무실에 없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내 시선과 부딪히는 시선은 바로 시계였다. 쯧쯧거리며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 저 놈의 벽시계. 반지의 제왕에 사우론의 눈이 있다면, 이 사무실에는 부장의 눈이 있다. 바로 저 벽시계다. 벽시계에 한 번 눈길이 잡혔다면 그 다음에 바로 내 숨통을 죄어 오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벽시계 바로 옆에 아주 커다랗게 붙어 있는 실적표. 저번 달 실적도 내가 최악이었는데 어쩐지 이번 달 실적도 내가 최악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최악인 것은 최악의 기록갱신을 할 것 같은 예감이었다. 직원들은 어찌나 재주가 좋은지, 한 달에 정수기 네다섯 대씩은 거뜬히 계약했다. 나는 한두 대 하기도 버거워 죽겠는데. 사돈의 팔촌까지, 내가 아는 사람들은 이제 동이 날 지경이었다. 나의 핸드폰 전화번호부, 4권의 졸업앨범, 엄마가 아파트 부녀회장에게 점심을 한 번 사고서 얻은 주민명단은 초저녁에 뗐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달의 실적, 한수미, 실적 없음. 처절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가방을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나는 건물 입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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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발을 떼기가 무서워서 오줌 마린 강아지처럼 한참 서성거렸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손바닥에 침이라도 뱉어서 튀겨볼까. 동전던지기라도 할까. 동네 이름을 적어서 제비뽑기라도 해야 하나. 그런 생각들을 하며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대뜸 인사를 했다. “어, 수미선배, 오랜만이에요!”상대방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내가 3학년이었을 때 1학년이었던 여자후배였다. 대학을 다닐 때도 구석진 자리를 고수했던 나는 갑자기 신비의 대상이 되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별 볼 일없던 사람취급을 당했던 내가, 대학에 들어와서는 갑자기 신비로운 사람이 된 것이다. 그것은 후배가 들어오고 나서 더욱 심해졌다. 나는 그런 후배들이 나의 실체를 파악하고 나서 내게 실망할 것이 두려웠다. 그 애들이 나에게 씌워 놓은 신비주의적 가면 속의 나를 들키지 않도록 나는 더욱 구석진 자리를 파고들었다. 나는 전보다 더 사람들에게서 고립되어갔고, 그 애들은 그런 나를 ‘한결같이 신비로운 선배’를 줄여, ‘한신선 선배’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 애들 중 어느 한 명도 나와 친한 애들은 없었다. 아마 지금 인사한 후배도 그 애들 중 한 명이리라.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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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여기서 뭐하고 있어요?”나는 잠깐, 아직도 이 후배에게 나에 대한 신비감이 존재할까, 생각했다. “어, 나는, 여기서…”잠깐, 말을 더듬을 뻔 했다. 이 후배의 기억 속엔 나의 어수룩한 모습은 저장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후배가 눈치 채지 못 하도록 침을 꼴깍 삼켰다. “볼 일이 좀 있어서.”후배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내가 서 있는 건물 위를 둘러보았다. 내 머리 위에는 ‘OO정수기 신촌영업소’라는 간판이 커다랗게 붙어 있었다. “정수기 회사에요?”후배는 의외라는 듯 내게 다시 물었다.“아, 정수기 좀 사려고. 집에 있는 정수기가 좀 낡았거든.”후배는 의심의 눈초리로 ‘아, 그래요?’하고 물었다. 식은땀이 다 나려고 했다. 후배가 어서 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우리 집 정수기도 바꿀 때 됐는데. 요즘은 정수기에서 얼음도 나온다면서요?”나는 후배의 그 한마디에 무너지고 말았다. 신비주의 선배고 뭐고 일단 쪽박은 면하고 봐야겠다는 심산에서 덜컥 후배의 손을 잡고 그대로 계약서에 사인을 하게 만들었다. 이제 후배는 학교에 가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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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쿵저러쿵 나에 대해서 다 안다는 듯이 떠벌리고 다닐지도 모른다. 한신선 선배 있잖아, 아 왜 그 ‘한결같이 신비로운 선배’. 그 선배가 글쎄 학교 앞에서 정수기를 팔고 있더라니까! 나도 얼떨결에 따라가서 사인하고 왔잖아. 어휴, 그 선배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하긴 뭐, 구석자리에 앉아 있고 별 친한 사람도 없으니까 우리가 신선이니 어쩌니 이러면서 쫓아다녔지. 사실, 별 볼일 없는 선배였잖아? 라고 하면서 말이다. 왠지 이제 동창회에 나가긴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자리에서도 구석진 자리를 선호하는 나였지만, 빠지진 않았었는데. 괜히 나갔다가 ‘저 놈 정수기 팔러 온 거 아니야?’하는 오명을 쓰긴 싫었다. 나는 단지 월급 100만원에 만족했을 뿐이라고.어쨌든 이번 달은 이 후배 덕분에 쪽박은 면했다. 나는 최악의 기록 유지 중이었다. 이 달의 실적, 한수미, 1건, 사면초가다.

*

그러나 저러나 나에게도 결혼 할 사람은 있었다. 나 스스로도 내가 결혼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이던 시절이었다. 스물여덟이란 나이가 누군가를 호기심에 만나는 일은 더 이상 할 수 없게 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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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고, 나는 내 과거의 여자들을 모두 청산했다. ‘과거의 여자들’이라고 거창하게 말하긴 했지만, 다섯 손가락을 조금 넘길 정도였다. 어쨌든 모든 여자를 청산하고 나니 ‘누구와’ 결혼할 수 있을지 스스로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더 빠른 방법일 듯했다. 그런데 그럴 때, 희정이 나타났다. 나보다 세 살이 어린 여자였다. 희정은 지친 얼굴로 내 어깨에 기대어 말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모두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고, 자기는 이제 너무 지쳤다고. 아무것도 안 해줘도 좋으니 이렇게 어깨만 빌려주면 된다고. 나는 자신 있었다. 어깨를 내어주고 가만히 있는 일은 정말, 자신 있었다. 그리고 희정은 달콤하게 속삭였다. ‘오빠랑 결혼하면, 정말 편할 것 같아’ 라고. 나는 스무 살 연애 촌뜨기도 아닌데 희정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온몸이 움찔거리곤 했다. 그녀를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해서 헌신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도 희정의 말 한 마디마다 반응을 하는 내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무뚝뚝한 척 했다. 그래도 희정은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있었다. 나는 그런 게 그녀의 사랑인가 보다 했고, 이런 게 우리의 사랑인가 보다 했다. 나는 희정과의 미래를 그려보았다. 월급 100만원을 벌고 있는 지금의 나. 답이 없다. 어느 세월에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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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모아서 집을 사고 결혼을 한단 말인가. 희정이 꿈꾸는 ‘편안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는 최소한 그녀를 고생스럽게 만들진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웬만한 집에 전세를 얻고, 살림살이를 들여 놓고, 자식들이 태어나고, 그럼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해야 하고…. 월급 100만원으로는 감당해 낼 수 없는 미래였다. 답답한 마음에 나는 5분 일찍 점심을 먹으러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회사 주변 음식점들은 점심시간엔 언제나 시장통이었다. 맛있는 집이건, 맛없는 집이건 모두 사람들로 득실거렸다. 테이블에 앉아, 대학생들 틈에 섞여, 땀을 뻘뻘 흘리며, 밥을 먹는 직장인들. 어느 테이블에선 국밥이 후루룩후루룩 넘어가고, 또 다른 곳에선 알밥이 입안에서 고돌고돌 씹혔다. 메뉴를 고를 수 있는 결정권은 내게 없었다. 그 결정권은 빈 테이블이 있는 음식점에게 있었다. 나는 빈 테이블이 있는 백반집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릇과 그릇들이 부딪히는 소리, 후루룩후루룩 음식이 넘어가는 소리, 젓가락이 마주치는 소리, 숟가락을 내려놓는 소리들이 빨리 메뉴를 고르라고 재촉했다. 나는 그 소리들에 떠밀려 얼떨결에 제육볶음을 시켰다. 2분도 지나지 않아서 제육볶음이 나왔다. 밥과 제육볶음을 비벼서 한 입 뜨려는 순간, 전화가 왔다. 김 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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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대리, 어디야! 몇 건이나 했나?“저 지금 밥 먹으려고요.”- 팔자 한 번 좋다.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 가나? 나는 자네 때문에 입맛 다 떨어졌어! 이번 달에도 허탕칠건가?김 과장의 일장연설은 수화기를 통해서도 시작되었다. 나는 제육볶음 그릇 옆에 핸드폰을 내려놓고 꾸역꾸역 제육볶음을 다 먹었다. 마지막 한 숟가락을 입에 넣었을 때, 김 과장의 마지막 한마디가 들렸다.

- 자네도 알다시피 말이야, 오늘 한 건이라도 못 해오면 당장 해고일 줄 알아!김 과장의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지나가던 식당 아주머니가 그 소리를 들었다. “뭔 놈의 소리를 그러코롬 지른디야?”“저희 회사 과장님이에요.”“뭔 일인디?”오지랖이 넓은 식당 아주머니는 빈 접시를 가득 담은 쟁반을 주방으로 들고 가던 중이라는 것을 까먹은 듯 제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핸드폰 폴더를 닫으며 대답했다.“정수기 팔아야 되거든요. 집집마다 정수기가 다 들어차 있는데 어딜 가서 또 팔아오라는 건지. 안 그래요,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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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려? 총각이 정수기를 팔어? 우리 집 정수기 오래 됐는디.”나는 순간, 식당 아주머니를 와락 끌어안을 뻔 했다.식당 아주머니는 카탈로그에서 제일 좋은 정수기를 주문했다. 하루에 사람들이 족히 50명은 넘게 오는데 깨끗한 물을 줘야 되지 않겠냐면서 말이다.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식당 아주머니는 흔쾌히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나는 식당 아주머니의 사인이 든 종이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가고 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식당을 하면 어떨까? 하루에 50명이 식사를 한다 치고, 4천 원짜리 메뉴를 먹는다 치고, 한 달에, 50퍼센트만 남는다고 쳐도… 내 월급의 3배였다. 내 월급의 3배. 그렇다면, 희정과의 ‘편안한’ 결혼 생활을 3배쯤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갑자기 이런 생각에 나는 마음이 부풀었다. 나는 희정에게 당장 주말에 데이트를 하자고 전화를 걸었다.

오후 4시의 햇살은 언제나 황홀하다. 공원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한가로워 보였다. 배드민턴을 치는 연인, 이제 막 걷기 시작하는 아이를 보며 웃는 부부, 다과를 즐기는 아내들과 족구를 하는 남편들, 그 틈에 희정과 나도 잔디밭에 앉아 있었다. 환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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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며 지는 햇살을 온몸으로 덮고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으면, 나는 세상 부러울 것 없이 행복했다. 그 순간은 모든 것이 용서가 되는 순간이었다. 모두 아는 얘기만 지껄이는 김 과장도, 눈칫밥만 더럽게 주는 부장님도,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정수기도, 나에 대해서 수군덕거리고 있을 후배들도, 이 더러운 세상도, 쿨 하게 ‘까짓 거, 괜찮아’ 하고 넘길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나 회사 관둘까?”“그게 또 무슨 소리야?”희정이 무릎을 탁, 빼버렸다. 순간 내 머리가 돗자리 위로 쿵, 하고 떨어졌다. 돗자리 밑이 잔디여서 다행이었다. 희정의 무릎이 꽤 높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제 딱히 정수기 살 사람도 없고, 회사 앞에 식당이나 하나 차릴까봐.”희정은 손바닥으로 내 이마를 딱, 소리 나게 내려쳤다. 그녀의 손은 은근히 매웠다. “정신 차리세요. 차 팔고, 집 팔면, 결혼은 어떻게 할 건데?”“가게 자리 잡고 나면, 한 달 수입이 적어도 내 월급의 3배는 되니까,”입에 넣은 감이 떫은지 희정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섰다. 나는 하던 말을 멈췄다. 그녀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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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시계를 한 번 보더니,“빨리 이거 치우기나 해, 가자.”하고 말했다. 희정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나의 식당이 잘 되면 좋아할 거라고 믿었다. 워낙 모험을 싫어하고,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추구하는 희정이니까. 나는 그런 희정을 이해했다.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사직서를 썼다. 그런데 막상 사직서를 쓰려니까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 봉투에 ‘사직서’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것만 봤지, 내용을 어떻게 썼는지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러 번 썼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했다. 이래저래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것보다 짧고 명쾌하게 쓰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흰 종이에 딱 한 줄을 쓰고 봉투에 넣었다.

[회사 앞에 가게 하나 낼 겁니다. 점심 드시러 오십시

오.]나는 그것을 내 양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언젠가 김 과장의 일장연설이 내 고막을 찢는 순간이 오면, 그의 얼굴에 확 내던지고 나오리라.나는 그 뒤로 틈만 나면 사업구상에 열중했다. 퇴근 후에는 회사가 몰려 있는 곳에 가서, 사람들이 제일 북적거리는 식당으로 들어가 저녁을 먹으며 그곳을 염탐하기도 했다. 주말 아침에 하는 요리 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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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램도 빼놓지 않고 보았다. 특히 연예인들이 자신의 맛집을 소개하는 코너를 유심히 보아두었다. 그 중에서 몇 군데를 추려 직접 가서 먹어보기도 했다. 한 달쯤 지나니 감이 오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나는 종이에 기가 막히는 아이템들을 몇 가지 적어서 안주머니에 넣었다. 사직서와 아이템이 적힌 종이가 내 심장이 된 것 마냥 두근거렸다. 나의 양복 안주머니에 두 장의 종이가 들어온 뒤로 나는 용기가 생겼다. 살다 살다 안 되면, 내가 가진 히든카드 두 장을 세상에 던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럼 한 장은 알아서 현실을 정리해 줄 것이고, 나머지 한 장은 나의 미래를 눈앞에 펼쳐놓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나는 세상에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내가 카드 마법을 부려 세상을 구하는 만화 캐릭터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그러나 내가 너무 사업구상에만 몰두했던 탓인지 희정과의 연락이 조금씩 뜸해졌다. 전화 연결이 되는 날보다 안 되는 날이 더 많았고, 문자를 보내도 답문이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나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마음이 쓰였지만, 가끔씩 연락을 받는 그녀의 목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나는 그냥 가을이 되어서 그녀의 기분이 좀 울적한 탓이려니, 했다. 그러다 문득, 나의 첫사랑이 다시 생각났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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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쪽 눈썹이 유난히 꺾여 있던 나의 첫사랑. 그녀는 가을이 다 지나가도록 연락이 없었다.

*

첫 눈이 내렸고, 나는 희정과 헤어졌다. 희정은 나에게 결혼 한다고 했다. 나는 생각보다 이른 그녀의 말에 당황했다. 나는 아직 가게를 내기 전이었고, 가게를 내고 안정적인 수입을 내려면 6개월쯤은 있어야 했다. 이러한 사정을 희정에게 말했다. 그녀는 그러냐고, 그럼 다른 여자를 만날 시간은 충분하겠네, 하고 대답했다. 나는 무슨 소리인지 몰라 한참 그녀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봤다. 그리고 기껏 내 입에서 나온다는 말은, “나랑 살면 편할 것 같다고 니가 그랬잖아.”였다. 아, 이런 씨발. 차라리 입이나 처닫고 있을 걸. “오빠랑 살면 편하겠지만, 행복할 것 같진 않아.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을 만났어. 안녕.”안녕이라니. 나의 미래에 어떻게 저렇게 쉽게 ‘안녕’을 고할 수 있는지, 나는 당장 그녀의 발목이라도 비틀어버리고 싶었다. 구두의 굽이라도 부러져라. 제발. 씨발.그리고 최 대리는 결혼을 했다. 약혼녀가 아닌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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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 홍과 함께. 결혼 준비는 약혼녀랑 실컷 해 놓고 막상 결혼식장에는 미스 홍이랑 서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얼마 전에 우리 정수기 회사 본부장 딸이 미스 홍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게 거짓말이 아니었나 보았다. 이래서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고 하는 것일까. 어쨌든 내가 이해하기엔 참 복잡다단한 인생들이다.인센티브고 뭐고 이제 최 대리는 부장의 자리를 넘볼지도 모른다. 부장은 단물 빠진 껌처럼 길바닥에 내버려지겠지. 적응력 빠른 김 과장은 최 대리의 발이라도 핥을 것이다. 아, 이 더러운 꼴을 또 어떻게 보나. 나는 더러운 꼴을 보기 전에 회사에 미련 없이 사표를 던져야 했다. 그래, 그 때 사표를 던졌어야 했어. 더러운 김 과장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듯, 퉤 하고 던져주는 거였는데. 아니, 아구창을 날리듯 사표봉투로 힘껏 뺨을 갈기는 거였는데. 용기 없는 인생은, 그저 서글프기만 하다. 애인에게 버림받고, 월급은 100만원에 20만원도 안 되는 인센티브를 챙기느라 급급하고, 또 다시 어디에서 정수기를 팔아야 할지 난감하고, 날은 점점 추워오고. 하, 어쩜 이런 인생이 다 있나 싶었다. 나는 마우스 휠을 굴리다가 무작정 카탈로그를 챙겨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여전히 갈 곳은 없었다. 이 넓은 서울 바닥에 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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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이 없다니.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살고, 사람들이 물을 너무 많이 써서 곧 물 부족 국가가 될 거라고 난리북새통인데, 도대체 물을 쓰는 사람들은 죄다 어디 가서 처박혀 있는지, 제발 누가 손 좀 들어 보라고, 손이 있으면 좀 들어 보라고, 숨어서 침만 꼴깍꼴깍 삼키지 말고, 나와서 이 정수기 물 좀 꿀꺽꿀꺽 마셔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용기 없고 조용한 한수미일 뿐이다. 정말 한숨이 나온다, 한숨이. 이리저리 걷다 보니 회사 근처에 있는 한 아파트에 도착했다. 한 개 동 밖에 없는 이 아파트는, 학교 정문과도 가까워서 학생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아마도 돈 많은 부모님을 둔 학생들이겠지만. 나는 갑자기 저 아파트 안에서 돈 걱정 없이 한량처럼 늘어져 있을 사람들이 괘씸해졌다. 88만원 세대가 되어도, 경제가 불황이어도,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여도, 알바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도, 세상이 무너져도 저 아파트 안에서 애벌레처럼 누워 팝콘과자나 주워 먹으며 낄낄거리며 웃고 있을 사람들. 나는 무작정 아파트 안으로 쳐들어가기로 했다. 그곳에서 누가 정수기를 계약하든 안 하든 상관없었다. 나는 그저 그들의 달콤한 시간을 방해하며, 세상에 나처럼 사는 사람도 있다고, 당신 같은 사람들이 뒤룩뒤룩 속 편하게 살이나 찌우고 있을 시간에, 나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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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사람은 비참하게 정수기나 팔러 다니고 있다고,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고, 무언시위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이, 거기 뭡니까?”나는 비장한 얼굴로 아파트 출입구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그런데, 어디선가 경비가 헐레벌떡 나를 향해 뛰어왔다. 그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내 서류가방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당신, 다단계판매원이오?”다단계판매원이라니. 어허, 이거 사람을 잘 못 봐도 유분수지. 나는 엄연히 OO정수기 신촌영업소 직원, 한수미 대리다. 그런데 내 입에서 나온 말은 고작 한마디였다.“아니요!”“그럼 당신 뭐요? 이 시간에 수상한데?”“이 시간이 뭐 어때서요?”“3신데 벌써 회사가 끝났단 말이오? 그리고, 당신은 처음 보는 얼굴인데?”나는 당황했다. 어떻게 말하지. 입에서 아무 말이나 튀어 나올 것 같았다. 정수기 팔러 왔어요. 아, 아닌데. 여기 이사 올 사람이거든요. 이것도 아니야. 여기 누구누구 살아요? 에이 씨발, 이것도 아니잖아.“여기 제 친구 살거든요?”“몇 호 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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썅. 살지도 않는 친구가 어디에 있다고. 입에서 말이 함부로 터져 나왔다. “702호요.”“702호? 거긴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는 덴데?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저씨 친구요?”하필이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게 뭐야. 나는 여기서 그냥 튀어버릴까, 아니면 호수를 잘못 알았다고, 여기 누가 사는지 좀 알아볼 수 없겠냐고 사정을 할까, 아니면 차라리 사실대로 나 정수기 판매원이오, 하고 말을 해버릴까 고민했다. 이 고민들은 사실 1초만에 내 머릿속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그러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무얼 해도 나는 미친놈으로 오인하기 십상이었다. 경비원과 나 사이에 칠흑 같은 몇 초의 정적이 흘렀고, 그 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이 상황을 정리해 줄, 천사의 목소리가.“아저씨 뭐 하세요?”여자는 아파트 출입구를 막아서고 있는 나와 경비원을 번갈아가며 물었다. “아니, 이 아저씨가 헛소리를 하네. 702호 할머니 할아버지가 친구라면서 들어간다고 하잖어. 별 미친놈을 다 보겠구먼. 아저씨, 똑바로 말해요. 당신, 피라미드지?”경비원은 출입구에서 비키라는 듯, 내 몸을 뒤로 밀었다. 나는 남세스러워서 출입구를 막고 있는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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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창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내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자, 유리창에 여자의 얼굴이 반사되었다. 그 여자의 오른쪽 눈썹이 씰룩, 움직였다. 봉고차 유리창으로 보이던 그녀의 얼굴이, 유리창 안에 들어 있었다. 경비원은 아무 대꾸도 없는 나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녀의 목소리만 계속해서 울렸다. 아저씨 뭐 하세요? 아저씨 뭐 하세요? 아저씨 뭐 하세요? 그녀는 유리창 속의 나를 ‘뭐야’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고는 휙, 유리창 너머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의 오른쪽 눈썹이 반사되었던 언저리가 다시 씰룩, 하고 움직였다. “저 여자가 바로 내 친구예요!”“뭐라고? 이 양반이, 보자보자 하니까, 아무나 붙잡고 다 친구라네? 하, 야 이 미친놈아!”“아, 제 친구 맞다니까요! 야, 수미야!”나는 애타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경비원도 고함을 멈추고 그녀의 뒤를 쳐다봤다. 그녀가 멈춰 섰다. 그래, 나야. 나야, 한수미. 너랑 이름이 똑같은 수미야, 수미라구. 그녀는 천천히 돌아섰다. 마치 자신이 헛소리라도 들은 양, 미간을 찌푸린 채.

그 때,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 건 실수였다.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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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소설 부문 장려상 ‘내가 그녀를 찾아간 이유’ - 송민정

라리 경비원에게 뺨 한 대 맞고 쫓겨나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좀 더 멋진 모습으로, 우연을 가장하여, 때에 따라 오버액션을 섞어서 그녀와의 재회를 멋지게 했더라면, 내가 이렇게 비참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손에 쥐어진, 그녀의 사인이 그려진 종이 한 장을 무자비하게 구겨버리고 싶었다. 구겨진 내 자존심을 위해서. 내 자존심을 구겨버리느니, 이 종이 한 장을 찢어버리고 말지. 갈기갈기 찢어버리자. 조각조각 난 서류조각들을 들고 사무실로 들어 가, 김 과장의 얼굴에 냅다 뿌리며, 이깟 종이 한 장이 뭐라고 내 자존심을 이렇게 망가뜨리느냐고, 이게 내 자존심보다도 중요한 것이냐고 따져 묻자. 그리고 침을 뱉고 사직서를 휘갈기고 나오자. 이 더러운 사무실, 이 거지 같은 세상!그러나 내 손에 쥐어진, 그녀의 사인이 그려진 서류는 고스란히 사무실에 제출되었다. 내 손에 의해서. 나는 내 자존심도 못 지키는, 용기 없는 한수미일 뿐이었다.

*

“나 기억 안 나니? 고등학교 때 너랑 같은 학원에 다녔던 한수미인데.”“한수미? 글쎄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제가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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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학교 때 학원을 워낙 많이 바꿔서요.”“같은 봉고차 타고 다녔는데, 정말 기억 안 나? 내가 니 핸드폰도 찾아 줬었잖아.”“아……기억이 안 나네요, 죄송해요.”“…….”“그런데, 무슨 일로 절 찾아 오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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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소설 부문 장려상 ‘누군가 리본을 달았다’ - 윤민우

태초에 빛은 요원했다. 끝간 데 없이 뻗은 어둠은 자체로 세계이자 한 땀의 점과 같아서 그것이 한낱 무無였노라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시간과 공간이 자멸해버린 암흑 속엔 생에 대한 예감만이 소문처럼 떠돌 뿐, 어떤 모서리도 잡히지 않았다. 불쑥, 어둠의 저 두터운 갑각 내부로부터 메아리가 들려오기 전까지. 소리는 비로드처럼 어둠을 쓸었다. 빛이 있으라. 그러자, 거기에 빛이 있었다. 이후로 빛은 우리를 인도해왔다. 빛의 인도 없이 누가 감히 칠흑 같던 자궁을 벗어날 수 있었겠는가. 빛은 생을 유혹한다. 우리는 대개 빛이 드리워진 산도産道를 엉금엉금 기다 생을 마감할 뿐이다. 인류는 끊임없이 빛에 다가가길 원했다. 저 타오르는 불빛들을 보라.폭우가 내리치는 검은 밤. 대낮처럼 빛나고 있는 저 도시를 보라. 저 요염한 전광판과 네온사인들을

누군가 리본을 달았다

윤 민 우

제17회추계문학상

소설부문장려상 윤 민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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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이제 누구도 번갯불 따위에 놀라지 않는다. 우리는 휘황찬란한 도시의 불빛에 젖어 그 스스로 발광發光하길 꿈꾼다. 그리하여 서로를 눈멀게 하길 기도한다. 이들은 결코 놀라지 않는 자들이요, 누군가를 놀라게 하길 바라는 자들이다.그런데 이들을 깜짝 놀래킬 만한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다. 성난 번개의 무리들이 도시의 송전탑을 습격한다. 장작을 쪼갤 듯한 파열음. 도미노처럼 도시의 불빛들이 쓰러진다. 빛이 쓰러진 자리에 어둠이 등을 편다. 온통 어둠이 참관한 도시의 비명. 그 검은 입들을 틀어막기 위해 비는 더욱 세차게 퍼붓는다. 어둠 속에서, 서로가 자신의 꺼진 불씨의 행방을 더듬는 동안, 그래서 이 도시가 송두리째 마비된 동안, 낮게 가라앉은 먹구름이 열리고 빛의 풍선이 유유히 모습을 드러낸다. 영민한 몇몇 사람들이 홀린 듯 이 풍선을 보았다. 저건 구원의 한 종류일까. 폭우가 걷힌 이튿날, 그들은 도시의 암전 속을 선회하는 호박빛 애드벌룬을 보았노라고 누구에게나 말해보았지만 그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비에 씻긴 대낮의 도시. 강과 산이, 다리와 굴뚝이, 도로와 빌딩이, 도시를 뒤덮다시피 한 간판들이, 잘 닦인 비석처럼 반짝인다. 소년과 소녀는 이 모든 것을 한눈에 내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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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소설 부문 장려상 ‘누군가 리본을 달았다’ - 윤민우

오빠, 저기 벌.바보, 저건 새야.새? 그럼 참새야?아냐.그럼?소년은 새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비둘기란다. 곁에서 불을 지키고 있던 노인이 말했다. 그가 힘껏 풀무질하자 애드벌룬의 불꽃이 사납게 몸을 키웠다. 순풍을 탄 애드벌룬이 도시의 중심을 가로질렀다. 새 모이를 사러 나왔다가 길을 잃었단다, 나는. 노인이 깃털처럼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저기 저 친구는.쓸데없는 말씀 마세요.무전기 앞에 팔짱을 끼고 있던 군인이 노인의 말을 잘랐다. 탈영을 했단다. 빌어먹을! 아직 꼬마들이라구요. 옳아. 그러니까 저 잔뜩 골이 난 친구는 제 발로 집을 나온 게야. 왜요?소녀가 물었다. 노인은 불편한 무릎을 굽혀 소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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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처럼 귀여운 꼬마들의 집을 찾아주기 위해서란다. 고맙습니다. 소녀가 군인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군인은 고개를 저편으로 돌려버렸다. 맞아. 비둘기였어. 비둘기. 소년은 속으로 새의 이름을 되뇌었다. 구구구, 하고 울던 새야. 참새는 짹짹이었고. 다른 새들은 또 뭐가 있었지. 소년은 간신히 까치를 기억해냈다. 꼬꼬댁이었던가? 소년은 자신이 없었다.

오빠, 몇 밤 자면 엄마 아빠가 데리러 와?나도 몰라.왜 몰라? 몇 밤 자면 오는데?그치만 여긴 계속 밤인걸.어둠 속에서 소년은 소녀의 손을 꼭 쥐었다. 무섭지 않아. 등 뒤에서 철컥, 쇠문이 닫히던 순간부터 소년은 홀로 싸우고 있었다. 절대로 무섭지 않아. 오빠 초콜릿 먹고 싶어.나도. 나 있지. 엄마가 사준 초콜릿 아직 안 먹었다?그럼?냉장고에다 감춰뒀어. 그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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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소설 부문 장려상 ‘누군가 리본을 달았다’ - 윤민우

이담에 반 줄게.고마워.어둠은 초콜릿처럼 서서히 소년의 마음을 녹였다. 어둠에 친숙해지자 소년은 그곳이 춥지도 덥지도, 배가 고프거나 졸리지 않은 곳이란 사실을 알았다.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소년은 심심해졌다. 소년은 서랍을 뒤지듯 기억을 헤집어보았다. 소년은 간신히 낡은 동화의 페이지들을 발견해냈고, 그걸 어둠 속에 새겼다. 소녀는 매번 이야기를 더 해달라고 소년을 졸랐다. 이야기는 금세 바닥났고, 여러 번 되풀이되었다. 될 수 있는 한 자주, 소년은 기억의 서랍을 꺼내보았다. 그때마다 서랍의 무게가 점차 가벼워져가고 있음을 소년은 느꼈다. 문득 소년은 소녀에게 자신의 이름과 나이를 물었다. 절대로 잊으면 안돼. 나도 너를 잊지 않을게. 그러고 나서 소년은 소녀와 함께 엄마아빠의 얼굴을 검은 캔버스에 그려보았다. 오빠 왜 그리다 말아?생각이 안나. 소년의 빈 서랍을 소녀가 채워 주었다. 소녀의 빈 서랍은 또 다시 소년이 채워 넣었다. 소년과 소녀는 자신들이 겪은 모든 일들에 대해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그 순간 자신들을 둘러싼 어둠에 관해서만 빼고. 오빠, 엄마아빠가 우릴 찾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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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과 소녀는 그날 숲 속에 있었다. 지천에 널린 호박 넝쿨 사이로 꿀벌들이 날아들었다. 노란 호박꽃 수술 사이로 소년과 소녀의 작은 손가락이 들락거렸다. 소년과 소녀는 빈 요구르트병 속에 벌들을 담았다. 그만 돌아가자. 해가 지겠어.벌들은 어떻게 해?풀어주자.오빠 다리 아파. 이걸 붙잡아.소년은 나무 작대기를 소녀에게 건넸다. 서두르지 않으면 엄마한테 혼날 거야. 소년은 숲의 정상에 솟은 높은 첨탑을 길잡이 삼아 걸음을 쟀다. 좁은 개울과 고추밭과 무덤 터를 지나야 했다. 그리곤 조그만 둔덕을 넘어 철책의 개구멍을 통과해야했다. 그러면 아스팔트가 나오고 거기에 쥐포가게들이 즐비해 있었다. 가게들은 모두 노점이었다. 그곳들 중 한 곳에 소년의 부모가 있었다. 소년은 소녀의 손을 붙잡은 채 길쭉해진 자신의 그림자를 열심히 밟아나갔다. 오빠, 나무에 공이 걸려 있어.소년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소년은 소녀가 작대기로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저게 뭐지? 검고 우중충한 나무의 겨드랑이에 축구공만한 무언가가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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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소설 부문 장려상 ‘누군가 리본을 달았다’ - 윤민우

달려 있었다. 소녀가 소년의 손을 뿌리치고 나무에 다가갔다. 그리곤 작대기로 공을 겨냥했다. 잠깐만!소년이 말했지만 소녀는 툭, 하고 공을 건드렸다. 공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소녀는 소년을 돌아보았고, 소년 역시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가 다시 있는 힘껏 작대기로 공을 때렸다. 소용이 없었다. 소년이 다가가 소녀의 팔을 끌었다. 그들이 다시 오솔길로 들어섰을 때 등 뒤에서 털썩, 하고 열매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년과 소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작은 구체毬體 속에서 불현듯 소음이 일었다. 소음은 빵처럼 부풀어 올랐다. 야단스럽고, 날렵하고, 공격적으로. 소녀가 소년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달리자. 내달리기 시작한 소년과 소녀의 등 뒤에서 말벌들이 날아올랐다.

오빠, 우리가 죽은 거야?아냐, 아직은. 어떻게 알아?그냥 알아.

그래도 용케 그곳에서 빠져나왔구나. 노인이 기특하다는 듯이 소년과 소녀의 뒤통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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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어내렸다. 무전기 기판을 조작하던 군인이 소년과 소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자, 얘들아 이 할아버지한테 말해줄 수 있겠니?뭘요?그 캄캄한 방에서 어떻게 나올 수 있었는지 말이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랬어요. 소년이 새침하게 말했다. 누가 그러든?할아버지보다 더 하얀 할아버지가요.치사한 양반 같으니! 소년과 소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노인은 군인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노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군인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 노인이 군인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그제야 군인은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건빵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뭔가를 끄집어냈다. 그걸 받아든 노인은 소년과 소녀에게 다가갔다. 얘들아 이게 뭔지 알아보겠니?소년과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초코파이야!소녀가 비명을 질렀다. 너희들 거란다. 노인과 군인은 귀를 쫑긋 세운 채 소년과 소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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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소설 부문 장려상 ‘누군가 리본을 달았다’ - 윤민우

초코파이를 먹어치울 때까지 기다렸다. 저희가 빛나고 있었대요.마침내 초콜릿 범벅이 된 입으로 소년이 말했다. 노인과 군인은 놀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얘야, 거짓말하면 엉덩이에 뿔난다.정말예요.그러니?네.

소년과 소녀는 새하얀 방으로 안내되었다. 벽도 천장도 없이 온통 창백하기만 공간이었다. 그 중심에 책상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문지기는 책상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문지기의 허리춤에서 열쇠꾸러미가 달그락댔다. 책상 위에는 서류더미들이 탑처럼 쌓여 있었다. 문지기는 서류의 탑에다 대고 나직이 읊조렸다. 데리고 왔습니다요.누굴?탑 너머에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들 말입죠. 왜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문 밑으로 빛이 새어나오길래 들여다봤더니 글쎄 욘석들이 실컷 빛을 뿜어대고 있지 뭡니까. 제가 조금만 늦게 발견했더라도 아주 큰일이 났을 겁니다요. 창고의 다른 녀석들이 깰지도 모르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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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하고 책상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종잇장들이 문지기의 머리 위로 낙엽처럼 떨어져 내렸다. 문지기는 입맛을 다시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소년과 소녀는 그가 가엽다고 생각했다. 소년과 소녀는 한참동안 재채기를 참는 듯한 끙끙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종잇장이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그랗게 구겨진 종이 뭉치가 책상 옆구리로 튕겨져 나왔다. 이 과정은 수없이 반복되었다. 종이 뭉치 하나가 소녀의 발밑으로 또르르 굴러왔다. 소녀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소녀가 종이를 펼쳐 소년에게 보였다.

우리는 하루에도 천만가지 일을 해야 하죠.

밥하기. 청소하기. 빨래하기.

비타민 챙겨 먹기.

개똥 치우기.

아이들 예뻐 해주기.

그리고 지구를 구하기!

그렇다고 해도 이를 닦는 걸 잊어선 안 되죠.

- 코카콜라

어때? 소년과 소녀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웬 노인이 책상 옆구리로 빠끔히 얼굴을 내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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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소년이 솔직하게 말했다. 둘 다 이리 가까이 와봐. 노인은 하얀 신사복 차림을 하고 앉아 있었다. 그의 머리칼, 그가 걸친 안경테와 목에 멘 보타이, 팔뚝에 두른 토시까지 온통 하옛다. 소년과 소녀는 이 으스스한 하얀 노인에게 한 손씩을 내주었다. 하얀 노인은 소년과 소녀의 손을 잡은 채 눈을 감고 말했다. 너희, 지금 콜라가 마시고 싶지?네!소년과 소녀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럴 줄 알았어. 하얀 노인은 책상 서랍을 열어 빨간 콜라캔 두개를 꺼내 소년과 소녀에게 건넸다. 캔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소년과 소녀는 단숨에 콜라를 마셨고, 동시에 트림했다. 자, 이제 뭘 할 차례니?하얀 노인이 물었다. 소녀는 소년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이를 닦아야 하나요?소년이 답했다. 하얀 노인은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정답이야. 너 제법 똘똘하구나. 거 봐봐. 이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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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지?소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봐봐. 너흰 내가 적은 이 문구를 보기 전까지 콜라에 대해선 일절 생각하지 않았어. 근데 이 문구를 읽자마자 갑자기 갈증이 부글부글 끓어오른 거야. 그렇다면 이 문구는 성공이야. 그치만 이는 닦고 싶지 않아요. 소녀가 말했다. 안다 알아. 하지만 콜라를 마시고 나면 반드시 이를 닦아야 돼. 그 두 가지 일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어. 엄마가 그런 것도 안 가르치디? 들어봐. 우린 하루에도 천만가지 일을 해야 해. 아무리 그래도 꼭 이는 닦아야 해. 왜냐고? 하루에 천만가지 일 중에 콜라를 마시는 일을 빼놓지 않았으니까! 복잡해요. 소년이 말했다. 엉터리! 이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일이야. 애들도요?나 참, 너희도 좀 아까 이 문구를 보고 콜라가 마시고 싶었잖아.처음부터 그냥 콜라를 주셨어도 마시고 싶었을 거예요. 그건 모르고 하는 소리야. 애초부터 콜라를 원하는 사람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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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원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이니까. 그래서 내가 이 고생을 하는 거 아냐. 창작. 창작 말이다. 창작이 뭔 줄 알아? 필요 없는 걸 필요하게끔 만드는 거야. 콜라처럼. 왜 그런 일을 하시는데요?갑자기 귀찮다는 듯이 노인이 코를 후비기 시작했다. 그래야 모두가 나를 필요로 할 거 아냐.소년과 소녀는 하얀 노인이 가엽다고 생각했다.

문지기 말로는 빛이 났다며?네.그 반품 창고에서?깜깜한 방에서요.그럼, 누군가 너희를 원한단 소린데. 엄마아빠가 저흴 찾고 있을 거예요.그건 아무도 몰라. 너흰 20년을 묵었어. 소년과 소녀는 더럭 겁이 났다.그럼 어쩌죠?어쨌든 주문이 들어온 이상, 방출이다. 기한은 하루. 그 안에 팔려야 돼. 차를 내주마. 근데 저, 집을 까먹었어요.어쩌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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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한테도 해주시면 안 돼요?뭘?창작요.

애드벌룬이 첨탑을 선회했다. 소년은 그 탑을 기억해냈다. 숲 속에서 소년에게 길잡이가 되어 주었던 바로 그 탑이었다. 저기가 남산이란다. 노인이 설명해주었다. 이 근처가 좋겠어요. 소년은 소녀의 손을 잡고 그때까지 딛고 올라서 있던 종이더미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오빠 비행기 접어줘.안돼. 이건 그냥 뿌릴 거야. 노란 종잇장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우뚝 솟은 남산타워 주위로, 철갑을 두른 듯한 소나무 숲 사이로, 연인들이 팔짱을 끼고 거니는 산책로 위로, 노인들이 장기를 두고 있는 나무 정자 지붕으로, 학생들의 교복 어깨로, 전망대에서 시가지를 내려다보던 꼬마들의 망원경 속으로, 노란 낙엽이 우수수 내렸다. 공원관리인이 뛰쳐나와 허공에 대고 호루라기를 불어댔지만 낙엽의 비를 멈추진 못했다. 아직 낭만을 간직한 소수의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상공에 떠 있는 호박빛 애드벌룬을 발견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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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순식간에 기분을 잡쳤다. 애드벌룬에는 ‘I need you’ 라는 하얀 로고가 박혀 있었다. 또 뭘 팔아먹으려는 수작이지? 그들은 기껏 주워들었던 노란 종이를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공원관리인의 호출을 받고 청소부들이 투입되었다. 청소부들은 묵묵히 일에 착수했다. 그들은 쓰레기에 관한 한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쓰레기란 이 세상에 없었다. 그들은 무수한 쓰레기들을 보아왔다. 쓰레기들엔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을 것.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 그들은 10ℓ들이 비닐봉지에 종잇장들을 우겨넣었다. 청소부들 중 누군가가 마지막 종잇장을 주웠고, 작업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쓰레기를 봉투에 우겨넣기 전 무심코 내용을 읽어보았다.

어른을 찾습니다. 이    름 : 임희우(당시 만8세) ·임희주(당시 만5세)

실종일자 : 1988년 5월 5일

실종지역 : 서울시 중구 남산

상    의 :  녹색 미키마우스 긴팔 티셔츠(희우), 노란색 소염

남방(희주)

하    의 : 하늘색 면바지(희우), 분홍색 주름치마(희주)

신    발 : 흰색 조다쉬 운동화(희우), 녹색 에나멜화(희주)

신체특징 :  신장 150㎝. 몸무게 40㎏. 송곳니 1개 빠짐. 귀 

옆에 사마귀. 얼굴 하얀 편(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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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 130㎝. 몸무게 18㎏. 앞니 아랫니 1개 빠짐.  

갈색머리. 얼굴 하얀 편(희주) 

발생경위 :  어린이날 남산 숲 속에서 실수로 벌통을 건드렸답

니다. 벌들에게 쫓기다 길을 잃었구요.

※  이 아이들을 알고 계신 어른들은 즉각 공중전화부스로 뛰세

요. 국번 없이 19880505를 누르시면 됩니다. 연락 기다리

겠습니다. 

청소부는 종잇장을 쓰레기봉지에 쑤셔 박았다.

군인은 이 모든 광경을 쌍안경으로 지켜보았다. 군인은 노인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 무전이 수신될 리 없겠다고 판단한 군인은 긴장을 풀었다. 소년은 소녀에게 비행기 접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얘들아, 사람들이 더 많은 쪽으로 가보자.거기가 어딘데요?어디든 말이다. 노인은 명동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영감님, 누가 먼저 다녀간 모양인데요?쌍안경으로 명동 거리를 내려다보던 군인이 말했다. 무슨 소리야?노인이 군인의 쌍안경을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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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다 뭐람?노인은 인파의 발길에 채이고 있는 온갖 종잇장들을 눈으로 훑었다. 왜요?소년이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여긴 더 있어봐야 소용이 없겠다. 왜요?여긴 죄다 눈먼 놈들뿐이구나. 좀 봐도 되요? 어떤 곳인데요?볼 것 하나도 없는 곳이다. 노인은 시청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시청 광장은 한창 선거유세 중이었다. 수많은 플래카드와 팸플릿들이 바람에 나부꼈다. 연단에 선 후보는 모두가 잘사는 나라에 살고 싶느냐고 청중들에게 묻고 있었다. 팸플릿을 들고 있던 청중들은 모두 그렇다고 답했다. 연단의 후보는 그럼 누굴 뽑아야겠느냐고 청중들에게 물었다. 청중들이 기호 3번을 연호했다. 후보가 연단에서 큰절을 올렸다. 저 중에 엄마아빠가 있을까요?소년이 물었다. 제발 없었으면 좋겠구나. 노인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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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데로 가요. 어디로 말이냐?어디든요.

오빠 저기 뱀. 엄청 커. 바보, 저건 열차야.청룡열차란다. 타본 적이 있니?노인이 물었다. 아뇨. 타보곤 싶었어요. 소년과 소녀는 양손으로 턱을 괸 채 유원지를 내려다보았다. 여기라면 해볼만 하겠구나. 노인이 종이더미 한 단을 품으며 말했다. 그치만 다들 즐거워 보이는데요. 너희들은 그렇지 않니?잠깐만 내려갔다 와보면 안돼요?소년이 묻자 소녀가 방방 뛰었다. 그건 안돼.군인이 말했다. 보기에만 신나지 사실은 시시하단다. 노인이 소년을 달랬다. 아주 잠깐이면 돼요. 그래, 별 수 없겠구나. 자 꽉들 잡거라. 노인이 군인에게 신호를 보냈다. 군인이 애드벌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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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소설 부문 장려상 ‘누군가 리본을 달았다’ - 윤민우

의 로프를 조작했다. 노인이 별안간 애드벌룬의 불씨를 꺼뜨렸다. 거의 추락하다시피 애드벌룬이 급강하했다. 소년과 소녀는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비명을 질렀다. 노인이 재빨리 불씨를 살려냈다. 그러자 하강이 멎고 둥실, 애드벌룬이 떠올랐다. 노인이 호탕하게 웃었다. 놀랐니?죽는 줄 알았어요.재밌진 않고?한 번 더 해주시면 안돼요?곁에서 소녀가 팔짝팔짝 뛰었다. 자꾸만 떼를 쓰는구나. 죄송해요. 괜찮다. 그럴 나이잖니.

어스름이 깔리자 도시의 불빛들이 명멸한다. 낮 동안 한번도 하늘을 쳐다보지 않은 숱한 사람들은 숙명처럼 이 불빛에 현혹된다. 그들은 누가 자신들을 짓밟고 자신들이 누굴 짓밟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이 온 우주에서 가장 외롭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이 불운한 행성들은 그러면서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밝게 빛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바로 이러한 자들의 발아래 소년과 소녀가 짓밟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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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문학 제17호194

이제 종이도 바닥났구나. 노인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 말했다. 소년 역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소녀는 소년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군인만이 꼿꼿한 자세로 무전기 앞을 지키고 있었다. 전화가 걸려올까요?기다려봐야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데요?한 시간.군인이 말했다. 만약 전화가 걸려오지 않으면 저희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아마도 폐기처분되겠지, 그러나 노인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 무전기에서 수신음이 잡혔다. 군인은 신속한 동작으로 수화기를 잡았다.

통신보안?나야. 네 말씀하십쇼.너는 대답하지 말고 듣기만 해. 알겠어?군인은 대답 대신 검지로 수화기를 톡톡 두드렸다. 모로스 부호였다. 애들은 잘 데리고 있지. 무사히 데리고 올 수 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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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소설 부문 장려상 ‘누군가 리본을 달았다’ - 윤민우

록 해. 그게 네 임무니까.그게 무슨 말씀이신지?군인은 모로스 부호로 물었다.듣기만 하랬잖아! 오늘 괜한 데서 헛물 켠 거야. 걔들 부모는 그 땅에 없어. 미국에 있다고. 니들이 하도 꾸물거리길래 내가 직접 수소문을 했잖아. 걔들 부모, 미국서 쥐포를 팔아서 한몫 잡았더군. 양키들이 쥐포에 환장할 줄 대체 누가 알았겠어. 애들도 한 다스야. 검둥이들까지 입양해서는 떵떵거리고 살더라니까. 그게 무슨 뜻인 줄 알아? 그 애들 부모는 예전 자식들을 잊은 거야. 이 세상 천지에 그 애들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그렇지만, 모든 걸 처음부터 아셨을 거 아닙니까?군인은 더 이상 말을 참을 수 없었다. 노인과 소년과 소녀가 군인을 골똘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봐, 마음대로 생각해. 하지만 나도 잘은 몰라. 왜 그 애들이 창고에서 빛나고 있었는지는. 이후로 교신이 끊겼다. 돌아가야 돼요?소녀가 군인의 바지자락을 잡으며 물었다. 뭐,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붉어진 얼굴로 군인이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천둥이 내렸다. 후두둑, 굵은 빗줄기가 애드벌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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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문학 제17호196

을 때렸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괜찮니?뭐가요?너희들 말이다. 모르겠어요. 괜찮은 게 뭔지. 하기야, 나도 가끔 그렇단다. 대체 괜찮은 게 뭘까? 아무래도 너랑 얘기를 좀 해야겠구나. 저편에서 군인과 소녀가 왈츠를 추고 있었다. 소녀의 작은 발이 군인의 군화 위에 올라가 있었다. 아까 내가 새 모이를 사러 나왔다가 길을 잃었댔지? 실은 거짓말이란다. 거짓말하면 엉덩이에 뿔이 나는데도요?하하. 그것도 거짓말이었다. 왜 거짓말을 하셨어요?괜찮다고 믿고 싶어서랄까. 나는 자식들한테 버려진 몸이란다. 짐만 됐거든. 갑자기 소년이 노인에게 등을 돌렸다. 그리고 마치 딸꾹질을 할 때처럼 소년의 어깨가 마구 들썩이기 시작했다. 왜 그러니 얘야. 소년이 왕 울음을 터뜨렸다. 소녀와 군인의 왈츠가 멈췄다. 모두가 소년을 향해 다가왔다. 소년이 울자 소녀도 따라 울었다. 소년과 소녀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 지치도록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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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소설 부문 장려상 ‘누군가 리본을 달았다’ - 윤민우

저도 그랬어요. 사실은 저도 엄마아빠가 보고 싶지 않아요. 너무 희미해져버렸어요.노인은 그런 아이들의 등을 쓸어주었다. 괜찮다, 얘야. 내가 괜찮다고 했으니 괜찮다.

우리 왔던 길이랑은 다른 길로 가보자.말을 마친 노인이 고도를 높였다. 먹구름을 뚫고 올라서자 비가 그쳤다. 까만 밤하늘에 별이 그득했다. 군인이 쌍안경을 내어주자 소년과 소녀가 번갈아 별들을 들여다봤다. 애드벌룬은 계속해서 상승했다. 소년과 소녀는 갑자기 숨이 막혔다. 어느 겨울밤, 엄마아빠의 솜이불 속을 파고들었을 때처럼. 할아버지 어디까지 올라가실 거예요?저 별들이 있는 곳까지다.

검고 깊은 연못 속에 빠진 듯 몸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소년과 소녀는 천천히 가라앉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등 뒤편에서 쏟아지는 부신 빛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걸 삼켜보렴. 뭔데요?멀미약이란다. 소년과 소녀가 정신을 차렸을 땐 코앞에 무수한 별들이 가로등처럼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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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문학 제17호198

너무 예뻐요.소녀가 말했다. 뒤를 한번 돌아보렴. 둘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할아버지 저게 대체 무슨 별이에요?지구란다.제가 저기서 살았었나요?모두가 저기서 산단다. 소녀는 볼이 황홀하게 달아올라 두 눈 속에 지구를 담았다. 엄마아빠도요?그래, 저기 계실 게다. 애드벌룬은 지구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소녀가 군인에게 쌍안경을 빼앗았다. 오빠 보여? 뭐가?누가 지구에다 빨간 리본을 달아놨어. 안 보이는데?소녀가 소년에게 쌍안경을 내밀었다. 어, 정말이네? 오빠, 누구한테 줄 선물일까?갖고 싶니?아니. 소녀가 소년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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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소설 부문 장려상 ‘누군가 리본을 달았다’ - 윤민우

필요 없어. 소녀는 소년과 함께 지구로부터 등을 돌렸다. 노인과 군인은 왜 이 아이들이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소년과 소녀의 등 뒤에서 지구가 검게 소멸하는 소리를 들은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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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문학 제17호200

*

그가 실종됐다. 나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안다. 아니, 정확히는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고 있다. 그가 내 앞에서 마지막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던 곳으로 나는 가고 있다.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때문에 난 이 긴 교통체중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멀고 먼 길을 돌아,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는 나에게 살인당했다. 내가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나는 그가 욕실에서 나오길 기다리며 마음 정리를 했다. 반드시, 그래야 했을까? 나도 확신할 수 없다. 내가 한 일이 옳았는지, 나는 다만 끝이 나길 바랐다. 그의 시선을 견딜 수가 없었다. 언뜻언뜻 보이는 그 눈초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끝까지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극단적이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나의 결단이 없었다면 끝은 없었을 테니까. 구차

통로

이 청 조

제17회추계문학상

소설부문장려상 이 청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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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소설 부문 장려상 ‘통로’ - 이청조

하고 반복적인 감정의 소모가 반복되고 결국엔 소리치고 화내고 던지고, 결국은 돌고 돌아 힘겹게 끝이 보이는 곳에 있었을 테니까.내가 끝을 내길 잘했어. 네가 끝을 냈어도 괜찮았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그랬듯. 나의 머리를 냉장고에 있던 병맥주로 내리 치는 거야. 물론 젖은 유리병은 미끄럽지. 실수하지 않도록 단단히 쥐어야해. 손은 땀과 병에 맺힌 물기로 점점 젖어가. 욕실에서 나온 나를 기습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네가 그랬듯 나도 널 보지 못 할 테니까. 모든 일은 쉬워. 머리를 내리쳐서 틈을 만드는 일도, 깨져버린 맥주병의 주둥이를 끝까지 놓지 않는 일도 내가 놀라고 방심하는 동안 넌 날카로운 맥주병으로 계속, 계속 날 찔러야해. 물론 그걸로 끝나진 않아. 재빨리 움직여 냉장고에서 맥주병과 음료가 꽉 들이찬 캔들을 모두 꺼내 하나, 하나 날 맞춰야해. 어렵지만 머리를 조준하는 게 좋아. 흘러내린 맥주와 흩뿌려진 나의 피가 널 곤혹스럽게 만들더라도 참아둬. 그리고 끝까지 ‘왜?’라는 이유는 나에게 말해주지 않아도 좋아. 계속 내가 널 사랑하도록 너의 마음이 진심이라면 이유는 중요하지 않아. 그래. 넌 그렇게 죽었어.내가 그랬듯 너도 나를 질리게 만들었어. 감정이 일방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내가 너를 견딜 수 없었던 것처럼 너도 그랬을 거야. 우리 관계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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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문학 제17호202

엇을 위해서 지속되었어야 했던 걸까?나는 너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너를 견디기 힘들다고 말했어. 밝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지. 사실 그랬어. 너는 우리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했어? 나는 네가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을 거라고 확신해. 너는 미래에 대해 생각할 줄 모르는 아이잖아. 장래성도 없어. 정말 최악이야. 그래서 나는 내심 너와 끝내고 싶어 했던 거야. 네가 그랬듯이. 그래. 나야. 끝을 원했던건 나였어. 너를 위해서라는 말은 거짓말이야.

그는 그가 죽는 순간까지 알지 못했다. 내가 왜 그를 죽였는지, 어떤 마음으로 욕조 옆 화장대에 웅크려 맥주병을 쥐고 있었는지를 말이다. 마음이 약해질 뻔 했다는 말은 우스운 말이다. 마음은 단 한 번도 강했던 적이 없다. 단지 확신할 수 없었을 뿐이다. 지금도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반복된다. 잊을 수 없다. 당연하지 나는 그가 내 속에 자리 잡을 줄 알았다. 그와 나누었던 사랑, 첫 만남, 첫 키스, 첫 관계. 모든 기억이 까마득하다. 시간이 흘러, 지금 이순간이 후회되고 그가 나와 함께 나이 먹는 모습이 보고 싶을 때 즈음엔 기억이 나겠지. 아니, 불현듯 떠오른 기억으로 나는 그가 그리워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잊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단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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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소설 부문 장려상 ‘통로’ - 이청조

그의 죽음뿐이다. 그는 미처 침대에 눕지도 못하고 바닥의 까슬까슬한 카펫위에 널브러졌다. 그가 허리춤에 감은 타월은 풀릴 듯 말 듯 한 모양으로 묶여져 있었다. 눈을 멍하니 뜨고 천장으로 바라보고 있던 그는 생채기 투성이었고 잔뜩 젖어있었다. 맞거나 찔린 흔적 말고도 병에 쓸려 자잘한 상처가 많았다. 그리고 나는 그의 열린 동공을 보며 그의 죽음을 알았다.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의 곁으로 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호흡을 확인했다. 그는 죽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였다.

나는 그의 시체를 뒤로 하고, 옷을 천천히 껴입었다. 그가 풀러 내렸던 브래지어와 팬티를 입고 길고 하얀 셔츠를 입었다. 평소라면 그의 시선을 즐기며 쑥스러운 척이라도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의 시선이 없어진 지금의 옷 입는 시간이 더 길게 느껴졌다. 곳곳에 가득 할 그와 나의 유전자. 영화에서처럼 그의 죽음이 알려지고, 나는 구속되겠지. 뭔가 잊고 가는 물건이 없을까? 더 이상 아무런 의미 없는 이 장소에 나의 흔적을 남기고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슬쩍 가구처럼 누워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두려움을 느꼈다. 앞으로 나의 미래가 감옥에서 마감될 것이라는 두려움보다 지금의 이 사태를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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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문학 제17호204

들에게 어떻게 말해야하는가가 걱정될 뿐이었다. 어떤 좋을 말로 포장해도 남자친구의 시체가 싸구려 모텔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사람들의 많은 상상력을 자극할 뿐이다. 더군다나 그는 반 나신의 상태였다. 그마저도 천쪼가리 하나를 걷어내고 나면 부끄러운 몰골의 나신이었다. 피투성이에 상처가 많았지만 그의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고, 어쩌면 우발적이라 말할 수도 있었던 나의 살인에 더 이상 잔인함은 존재할 수 없었다. 지문을 지운다거나 얼굴을 뭉개서 그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한다던가. 그의 피를 모두 빼버리고 불로 태워서 그의 유전자와 나의 유전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도록 하는 잔인함은 번거롭게만 느껴졌다.구두를 신어 또깍거리는 소리를 내며 모텔을 나오며 CCTV를 확인했다. 그가 자신의 승리감에 도취되어있을 순간에 그와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끝냈다는 사실이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CCTV를 쳐다보며 주눅 들지 않으려 평소보다 더 허리를 피고, 발을 뻗어 걸었다. 내가 내딛는 발걸음이 시계초침처럼 규칙적인 소리를 냈다.나는 이제 모든 것을 정리 할 준비가 되어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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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소설 부문 장려상 ‘통로’ - 이청조

이상하게도 그의 죽음이 조용하다. 오히려 떠들썩할 것을 각오했던 내가 무색해진다. 한통의 전화가 왔다. 너머의 목소리는 자신이 그의 실종을 담당하고 있는 형사라고 말했다. 나와 그의 관계를 알고 있다며 그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 아냐고 물었다. 나는 지금 바쁘다고 대답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당연히 무례한 취급을 받을 거라 예상했다. 용의자로서 그럴 것이라 각오해두었다. 하지만 의외로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묻는 그 음색에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혹시 그가 다시 살아난 건 아닐까? 내가 죽음에 대해 너무도 간과했던 것일까? 나는 혼란을 느끼며 나의 행동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가 만약 죽은 게 아니라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창살 너머 그의 시선을 견디며,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런 삶은 싫다. 그를 죽이기로 마음먹은 이전에 놓인 상황보다 더 끔찍하다. 나는 어떻게 해서도 그에게 지고 싶지 않다. 사랑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과 관련된 일이 아니다. 우린 분명 연인이었다. 그것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할로 바뀌었을 뿐이다. 연인의 관계 또한 그렇다. 더 사랑하는 쪽이 지는 것이고, 덜 사랑하는 쪽이 이기는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상황은 어떠한가?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그것뿐이다. 늘 그가 날 더 사랑하길 바랐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자수를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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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문학 제17호206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형사에게 전화가 왔다. 이번에 그는 비꼬는 것 같은 목소리로 내게 지금 바쁘지 않는지를 물었다. 이전과 지금이 동일한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긴히 할 말이 있는데 어디로 가면 되는지를 물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그럼 5시에 서대문 경찰서로 오라고 말했다. 알겠다고 대답하고 이 이상 어떻게 통화를 끝내야 되는지 망설이는 내게 형사는 그럼 그때보자며 전화를 끊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는지,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하는지 고민을 할 때였다. 시간은 2시간 남짓 남아 있었다.

“이게 뭐야.”나의 진술에 따라 함께 모텔을 찾아간 다음에 형사가 내뱉은 말이다. 나는 시간이 꽤 지난 일임에도 그날의 일을 육하원칙에 따라 제법 잘 설명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형사의 눈빛 또한 그랬다. 내 말을 그냥 미친 소리로 듣지 않고 함께 현장검증을 떠나며 나에게 안내를 맡기게 된 것도 나의 깔끔한 진술 덕분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니 만약 그가 발견되더라도 단순상해로 보고되고 자수도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여 악질적인 고의가 아니었음이 판단된다면 제법 짧은 형량이나 보석금을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와 나의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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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소설 부문 장려상 ‘통로’ - 이청조

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를 걱정하며 도착한 장소에 그는 없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그를 내버려두고 닫았던 문과 걸어 나왔던 복도 그리고 엘리베이터, 내가 CCTV를 쳐다봤던 각도까지도 모두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는 없었다. 모텔 카운터에서 미심쩍은 듯 쳐다보며 아르바이트생은 말했다.“시체가 발견됐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요. 혹시 그렇게 됐다더라도 매니저님이 당연히 신고 하셨겠죠.”그는 내가 말한 객실의 열쇠를 뒤적거리다 멈칫하고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거긴 지금 손님이 계셔서… 적어도 9시, 아니 10시는 돼야 들어가 보실 수 있을 텐데요.”모텔을 나와 괜스레 미안해진 나는 형사의 발걸음만을 졸졸 따라갔다. 없던 사실을 말했던 것도 아닌데 괜히 죄스러운 느낌이었다. 사내의 뒷모습을 모텔 아르바이트생의 말을 떠올랐다.“만약 시체가 발견됐다면, 하다못해 뭐… 누군가 발견됐다면 지금 그곳에 손님이 있을 수 있겠어요?”모텔을 나와 형사는 내게 집이 어디냐 물었고, 수원이라 대답하자 학교는 어떻게 다니는지를 평소에 사당에서 버스를 탄다 말하자 사당까지는 어떻게 가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가까운 전철역에서 내려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될지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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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지만 사실을 말했다고, 어떤 일이 일어나든 최악의 상황은 모면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앞날을 너무도 명확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실종된 지 어느덧 이주가 가까이 되었다. 여자도 아닌 남자이기에 경찰에서는 어떤 방향으로 수사를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듯 싶었다. 때때로 나를 불러 그날의 상황에 대해 묻고, 또 묻고 나의 기억을 송두리째 옮겨 가져가려는 듯 싶었다. 처음엔 미친 소리 하는 듯 듣던 경찰은 그의 실종을 미종결사건으로 처리해야하나, 나의 진술을 토대로 수사를 진행해야하나 고민하는 듯 했다.나의 이야기를 100% 신뢰했는지 어쨌는지 나와 그의 주변 누구도 나의 자수 사실을 알지 못했다. 또, 나의 행적이나 행동 또한 전과 다름없이 자유로울 수 있었다. 오히려 그의 부모님도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는 듯 자신의 아들의 변덕스런 가출로 생각의 방향을 돌린 듯싶었다. 어디서든 오죽 잘하겠냐며 네가 마음고생이 많겠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대로 그가 영영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조금씩 생겨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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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소설 부문 장려상 ‘통로’ - 이청조

매일 밤 악몽을 꾼다. 가끔 새벽에 잠이 깰 때도 있다. 그럴 땐 주변을 둘러보기가 겁이 난다. 혹여 옆방에서 들리는 얕은 코고는 소리에 안심을 해, 다시 잠들더라도 또 악몽을 꾸곤 한다. 언제부터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최근에 한 번도 행복한 꿈을 꾼 기억이 없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어떤 악몽인지 모르겠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다만 요즘은 작은 소리에도 잠이 깰 만큼 민감하다. 몸이 뻐근하다. 관절이 저릿저릿해서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그의 꿈을 꿨을까? 나는 악몽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떤 꿈을 꾸고 그것을 악몽이라 생각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목이 마르다. 잠이 깰수록, 물이 마시고 싶다. 하지만 저 문을 열고 나가면 누군가 나를 보고 있을 것 같다. 문 앞에 웅크리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 그가 자신의 인기척을 알아주기를 원하고 있다.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아니라,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소리 같다. 문을 열고 나가면 누군가 나를 쭈그려 올려다볼 것만 같은 두려움에 나는 움직일 수 없다. 내가 죽었다. 낯선 손목이 내 목을 짓누른 그 순간에, 내 지난 이십삼 년이 허무할 만큼 금방 내가 죽었다. 죽는 그 순간에 내가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결국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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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문학 제17호210

나는 눈을 떴다. 내가 점점 메말라 가고 있다. 밥을 먹지만 만족을 몰랐고 밥을 먹지 않아도 허기를 몰랐다. 매일 목이 말랐고 견딜 수 없는 두통이 찾아왔다. 화장도 얼굴에 어울리지 않았고 머리카락도 점점 푸석해져갔다. 밝은 색의 옷보단 무채색의 옷을 찾게 되었다. 또 밝은 옷은 어울리지도 않았다. 거울 속 내 모습만이 그렇다고 느꼈다. 남들이 보는 나는 평소와 다름 없을 거라 생각했고 주변에서도 나에게 뭐라 말이 없었다. 다만 뜸하게 그의 소식을 묻는 몇몇이 있었을 뿐이었다.

*

친구들이 말했다.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친구들이 말했다. 너는 잠깐 여행을 간 거라고 말했다. 친구들이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친구들이 말했다. 곧 돌아올 거라고 말했다. 너와 나는 퍽 다정한 연인이었다. 우리는 사랑을 했다. 네가 생각하는 사랑과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사랑을 했다. 우리는 함께였기에 행복했고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웠다. 적어도 한동안은 그랬을 것이다. 너는 좋은 사람이었다. 나를 기다려주었고, 나의 변덕을 받아주었다. 나를 견뎌주다니. 나는 너의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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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소설 부문 장려상 ‘통로’ - 이청조

마움을 잊고 지냈어. 언제부터였을까.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확신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더 이상은 함께 못 있을 것 같았고, 지긋지긋했다. 하지만 착각이었어. 우리는 그저 익숙해졌던 것뿐이었어. 왜 나는 네가 나를 떠나려한다고 생각했을까. 나를 사랑했던 네가 그랬을 리 없는데. 끝은 내가 냈지. 아니. 네가 냈나? 끝은 언제였지? 시작은 어디였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다시 시작할 수 없을까. 다시 시작할 수 없다면 모든 걸 지울 수는 없을까? 너와 마지막으로 함께 있었던 모텔 근처를 서성인다. 우산을 들고 한참을 배회하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매번 같은 모텔을 이용했다. 우리는 길 건너편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가 콘돔을 사고, 나오면 바로 있는 포장마차에서 붕어빵을 샀어. 오뎅도 한두개 먹고나면 우리는 슬금슬금 모텔로 향해 걸어갔지. 혹시 아는 얼굴을 마주치지는 않을까 고개를 두리번거렸어. 그 순간만큼은 우린 정말 사이좋은 연인이었지. 너는 그 어느 때보다 내게 다정했어. 어디서부터가 잘못된 걸까? 왜 쿨하게 단념할 수 없었지? 너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 예전 같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렇듯 미련 없이 헤어져줘도 괜찮았을 텐데 말이야. 사람들은 어쩜 그렇게 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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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문학 제17호212

까. 나는 생각했어.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말이야. 마음 한구석에서 적신호가 번뜩거렸지. 그래도 나는. 조금 후회하고 있어. 밤이 되면 너의 꿈을 꿔. 네가 나와서 이유를 말해달라고 해.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다른 말없이 이유만 말해달라고 해. 아니.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나는 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해. 하지만 나는 알아. 네가 이유를 말해달라고 하고 있다고 생각해. 너를 처음 본 날은 기억나지 않아. 우리의 첫 만남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나는 사진 속 너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어. 청바지에 회색티셔츠. 소매가 많이 늘어나있었어. 네가 손을 올릴 때면 늘어난 소매 사이로 너의 속살이 보였어. 너의 얼굴, 너의 목소리, 너의 웃음.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소매사이로 보이던 팔목에 작은 점은 잊히지 않았어. 너를 마지막으로 봤던 날, 너를 조금 춥게 내버려두고 떠나서 미안해.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 너를 창피하게 널브러뜨리고 떠나서 미안해. 너에게 마지막 친절함으로 이불이라도 덮어줄걸 그랬지. 내 머리를 말리느라 바빠서 그랬어.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잖아. 머리카락이 젖어있으면 얼어버릴까봐 그랬어. 집으로 돌아가는 긴 길에 머리카락이 녹아서 어깨가 축축해질까봐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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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소설 부문 장려상 ‘통로’ - 이청조

한참을 망설이던 나는 모텔로 들어간다. 늘 옆에 네가 있어, 프론트까지가 이렇게 긴 길인지 몰랐어. 프론트에 간 나는 육백사호를 원한다고 말했어. 프론트에 있던 직원은 내심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잠시 뒤 나에게 열쇠를 건넸어. 나는 엘리베이터로 걸어가. 나를 보는 직원의 눈이 이상해 보이기도 해. 아니. 내 뒤를 살펴보는 것 같기도 해. 누군가 따라오지는 않나 살펴보는 눈초리야.나는 육층을 눌러. 혼자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이 유난히 어둡게 보이기도 해. 내가 느끼기에도 나는 조금 긴장한 것 같아. 엘리베이터에 내려 육백사호를 찾았어. 이곳이었나? 이곳까지 오는데 우리는 참 힘들었지. 누가 먼저 얘기를 꺼냈는지도 모르겠어. 처음에 우린 둘 다 반신반의했어. 사실 누가 먼저 얘기를 꺼낸게 그렇게 중요한건가 싶기도 해. 둘 다 설렘과 망설임으로 가득해 발걸음을 내딛었어. 신발장에서 침대까지 가는 길이 참 멀었지. 지금도 그래. 지금 내가 내딛는 발걸음도 너무 멀게만 느껴져. 너와 함께 본 침대는 늘 하얀색이었지. 하지만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침대는 온통 피칠갑을 해있어. 내리쬐는 조명이 뜨겁게 느껴져. 지금 혼자 힘으로 서있는 게 놀라울 만큼 힘이 빠져나가. 오돌토돌한 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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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문학 제17호214

펫으로 나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져.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거울너머로 너의 모습이 보여. 얼핏 너는 잠든 것처럼 보이기도 해. 머리카락이 피로 잔뜩 젖지만 않았다면 말이야. 내가 너를 부르면 네가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들 것 같기도 해. 너의 얼굴이 보고 싶었어. 기억나지 않아서. 너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너를 불러보았어. 하지만 너는 대답이 없어. 한걸음, 한걸음 내딛어 너에게 다가가. 나의 발은 너의 손길이 매달린 것처럼 떼기가 어려워.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어. 무섭지도 않았어. 그런데 지금은 후회가 되. 내가 마지막을 자초한 것 같아서 후회가 되. 너의 볼을 쓰다듬으면 네가 눈을 떴으면 좋겠어. 이대로 끝이 아니라고, 다시 시작하자고 말해주었으면 좋겠어. 나의 손이 금방이라도 너에게 닿을 듯 해. 하지만 쉽게 너를 만질 수 없어. 네가 입을 벌리고 나에게 천천히 말을 한다면 모르겠어. 네가 입을 열어 나에게 만져도 된다고 허락을 한다면 나는 너를 만질 거야. 너의 입이 살짝 벌어진 듯 보였다. 너의 입에서 불현듯 허락의 말이 나오진 않을까 나는 가만히 쪼그려 앉아 너의 입을 바라본다. 내 핸드폰이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핸드폰의 진동을 느끼며 나는 너의 입이 움직인 것 같은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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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소설 부문 장려상 ‘통로’ - 이청조

이 들었다. 착각이 아닐까? 긴가민가하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어. 너 어디야? 지금 나 학굔데. 재원이 왔어! 완전 멀쩡한데? 나는 내 앞에 누워있는 너를 바라본다. 네가 맞다. 너의 창백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까무잡잡한 너의 얼굴. 너는 지금 잠을 자고 있다. 아니. 너는 내가 죽였지. 내가 죽여 버렸지. 너의 목을 내가 잡았어. 내가 너의 머리를 내리쳤어. 내가 너의 정맥을 끊었어. 내가 너를 밀었어. 내가 너를 죽였어.

-지금 난리 났다. 야. 너네 근데 무슨 일 있어? 재원이가 너 안 찾는데?

-애들이 막 네 얘기해도 그래도 대답도 안한다, 야. 둘이 싸웠어? 그래서 재원이 잠깐 여행 갔던 거야? 대답 좀 해봐. 야. 야. 여보세요? 내가 보고 있는 게, 네가 맞는지 나는 확신할 수 없어졌어. 이대로 끝인 건지, 아니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건지 갈 길이 멀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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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문학 제17호216

219년 형주 번성

사내가 의자에 앉아 이마에 난 구멍을 매만지고 있었다. 화살촉이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만든 상처는 크지는 않았지만 부위가 부위니만큼 매우 위험했었다. 다행히 겉가죽만 상했으니 꿰매면 잘 아물 터.“방덕.”얼굴에 붉은 빛이 도는 사내가 상처를 만든 상대를 나직이 불렀다. 막사 중앙에 털투구를 쓴 무장이 포박당해 꿇려있었다. 나이는 대략 사오십줄, 생김새에서는 변방의 냄새가 났다. 눈을 감고 있던 무장은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죽여라, 관우.”관우는 다시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난전에서 정확히 정수리를 맞춘 화살에게 느낀 것은 공포보다는 경탄이었다. 위(魏)의 기라성 같은 장수들을 꿰고 있는 관우도 방덕의 이름은 들은 적이 없었다. 이

꿈에 살다

조 선 욱

제17회추계문학상

소설부문장려상 조 선 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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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소설 부문 장려상 ‘꿈에 살다’ - 조선욱

토록 무서운 상대를 모르고 있었나. 반성하며 잡고 보니 그 이유를 알만했다. 방덕은 순수 한인이 아니었다. 실력만큼 평가를 받기 어려웠으리라.“옛 주인 마초와 사촌 방유가 촉에 있다. 어찌 항복하지 않느냐.”“죽여라, 관우.”“한어(漢語)를 모르는가.”방덕의 미간에 노여움이 떠올랐다. 중원을 제패한 위의 장수 중에 이민족이 있다니. 이 또한 조조의 사람부리는 법이었으나 동료들의 괄시는 피할 수 없었으리라.“관우의 의협(義俠), 관우의 무명(武名). 수만리 떨어진 양주에서도 새겨듣고 있었다. 마음으로 따르는 주인이 곤경에 처했으나 그 무명을 두려워해 다들 몸을 사리니 내가 온 것이다. 허나 때가 잘못되어 비에 군사들이 휩쓸려 너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원통함이 있다면 그때 활을 당기는 힘이 부족했던 것뿐이다!”피가 다른 민족이라 해도 통하는 것이 있다. 관우는 가만히 방덕을 바라보았다. 방덕의 부릅뜬 눈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없고 그를 죽이지 못했다는 한이 서려 있었다. 관우가 천하를 수십 년 떠돌면서 여러 장수들을 상대했으나 이렇게 가슴 떨리는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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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문학 제17호218

대를 본적이 없었다.무쌍의 장수, 여포를 맞아 수십 합을 싸울 때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관우는 손을 가슴으로 가져왔다.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시감에 가까웠다. 관우는 이런 사내를 잘 아는 느낌을 받았지만 정작 누구인지는 짚어 말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관우는 돌아올 대답을 얼추 짐작하면서도 입을 열었다.“방덕이여, 하나만 묻겠소. 그대는 한번 주인을 바꿨으면서 어찌 위왕에게 이토록 충성하는 것이오?”“한번 유비를 저버려놓고 결국에는 돌아간 네가 더 잘 알 것이다.”크게 외친 방덕은 무릎을 바로 하여 앉고 목을 뻣뻣하게 세웠다. 대나무는 쪼개지거나 부러지지 구부러지지는 않는다. 더 이상 구차한 회유는 방덕과 관우, 두 사람 다 더럽히는 일이었다. 관우는 탁자를 쳐 밖의 병사들을 불렀다. 방덕은 병사들이 잡아 일으키는 걸 팔을 떨쳐 떼어내고는 제 발로 걸어 나갔다. 7군의 대장인 우금이 진즉에 항복한 것에 비해 선봉이었던 방덕은 형장으로 가는 걸음까지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다.“저 사람은 조조에게 깊게 매료되어 마음으로 따르고 있구나!”관우가 길게 탄식하며 눈을 감았다. 방덕이 목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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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소설 부문 장려상 ‘꿈에 살다’ - 조선욱

바친 조조의 천하는 이미 그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

200년 서주 하비

막사에 들어가니 상대는 의자에 앉아 죽간을 내려보고 있다. 관우는 천천히 상대를 살핀다. 나이는 대략 마흔 중반, 관우보다 대여섯 살은 많아 보인다. 가늠해 보건데 8척 장신인 관우에 비해 작은 체구다. 미남자라 보기 어려웠지만 갸웃거리는 옆모습은 차가우면서도 위엄이 흐른다. 손에 힘을 준 관우는 흘낏 대상의 옆에 서있는 사내를 본다. 관우에 비해 좀 작지만 떡 벌어진 어깨와 부리부리한 눈이 여간내기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게다가 상대는 칼을 차고 있다.“관우인가?”그때 문서를 보던 남자가 머리를 든다. 관우는 무뚝뚝하게 머리를 끄덕인다.“간만이오. 조조공.”“허창의 사냥터 이후로 간만인가. 수염은 여전하군.”조조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죽간을 접는다. 그리고는 호위 역을 맡고 있는 상대에게 손짓한다.“잠시 물러가 있어라, 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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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문학 제17호220

“그럴 수 없습니다.”허저라는 사내는 날카로운 눈으로 관우를 살피고 있다. 응당 당연한 반응이다. 갓 항복해온 장수와 총사령관을 단둘이 놔두는 건 멍청한 짓이다. 하물며 상대가 천하무쌍의 관우라면 더욱. 무기가 없다지만 통나무처럼 굵은 팔뚝이라면 사람 목 몇 개쯤은 갈대처럼 꺾어버릴 것이다.“흠, 뭐 그럼 듣고 있던가. 들어도 이해하기 좀 힘들지 모르겠다만.”“상관없습니다.”조조는 낮게 혀를 차더니 관우를 바라본다. 방금 전까지 적이었던 장수를 보는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따뜻한 눈이다.“그럼 관우, 그대가 바라는 것은 이 목이겠지?”관우는 대답하지 않는다. 거짓을 말하는 것은 관우의 협의와 자부심이 용서치 않으니. 조조의 말과 무언의 수긍에 크게 놀란 허저가 칼자루를 쥔다. 조조는 두 무장의 반응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롭게 말을 읊어나간다.“하지만 여포 이후, 대적할 자를 찾기 힘든 무장인 관우라면 응당 군사를 이끌고 와서 내 목을 노리는 것이 그대의 무(武)이자 협(俠)일터. 왜 그렇게 하지 않고 항복을 청했지?”관우는 대답하지 않는다. 조조는 탁상 위의 붓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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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소설 부문 장려상 ‘꿈에 살다’ - 조선욱

쥐더니 허공에 자유롭게 놀려 보인다. 단순한 손 움직임인데 마치 춤을 추는 듯 매끄러운 선이 나타났다 사라진다.“설마 내게 올 테니 진의록의 처를 또 달라고 할 셈인가1)?”일찍이 여포를 처단할 때 관우가 개인적으로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있었다. 거듭된 요청에 조조는 직접 그 부인을 만나보고 자신의 첩으로 삼아버렸고. 하필 이런 자리에서 그런 옛일을 꺼내자 원래 붉은 빛이 돌던 관우의 얼굴이 시뻘개진다.“농담이네. 무쌍의 장수를 얻을 수 있다면야 여자 하나쯤 돌려주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지. 다만 그 부인의 수금가락은 기가 막혀서 말이야. 준다 해도 앞으로 종종 들으러 가는 것만큼은 허락해줬으면 하는군.”농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이야기에 관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항복을 청해 마련된 자리에서 상대가 계속 말이 없자 조조는 입을 다물더니 빙긋 웃는다. 선이 분명한 얼굴이 웃는데 웃는 것인지 화를 내는 것인지 구별하기 모호한 미소다. 한참 뒤에야 분을 삭인 관우가 어렵사리 입을 뗀다.“조조공, 청이 하나 있소.”

_______________________1) 정사를 보면 실제로 이런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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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문학 제17호222

“유비의 부인과 자식의 목숨을 구명하는 것은 아니겠지. 유비는 처자를 의복이라 했으니까. 그딴 것을 위해서 아끼는 수하가 죽는다면 도리어 화를 낼 거야.”“조조공 역시 완성에서 그러지 않았소?”이번에는 조조가 입을 다문다. 완성에서의 패전은 조조의 일생 중에서 가장 뼈아픈 부분이다. 조조가 장수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머물던 차에 장수의 숙모에게 빠져버린 것이 발단이다. 그녀도 남편이 없었고 항복한 마당이었으니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니었지만 장수의 자존심을 긁어 화를 불렀다. 장수가 항복을 뒤엎고 급습해오자 방심했던 조조는 내빼기에 바빴다. 그 와중에 맹장 전위와 적자 조앙이 죽었다. 전위는 추격을 막다, 조앙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말을 건네주고. 이런 자리에서 꺼낼 일은 아니었지만 관우로서는 많이 참은 처사였다. 비굴한 삶보다 떳떳한 죽음이 훨씬 좋다. 아픈 부분을 찔린 조조는 눈썹을 찡그리곤 한숨을 내쉰다.“설마 나를 격분시켜 목이 잘리고자 하는 것은 아니겠지. 관우, 내가 말을 잘못했네.”“나 역시 실례했소.”예상보다 선선하게 조조가 사과하자 관우는 살짝 목례해 보인다. 도저히 항복을 청하러 온 장수답지 않은 뻣뻣함이자 기개다. 턱을 쓰다듬는 조조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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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소설 부문 장려상 ‘꿈에 살다’ - 조선욱

에 흥미가 감돈다.“그럼 묻지, 관우. 이 조조에게 무엇을 구하러 왔나? 그대 같은 장부가 죽음이 두려워 주인을 바꾸지는 않을 터인데?”“조조공의 천하를 알고 싶소.”대화를 듣고 있던 허저는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지만 조조는 박장대소하며 무릎을 친다.“좋군! 그대는 왕이 되고 싶은 것인가?”“그런 것은 관심 없소. 다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조조공의 패업이오. 기업을 다진지 10년도 되지 않아서 천하를 다투는 이유를.”일개 장수의 입에서 나올 소리가 아니었다. 조조는 마냥 기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유비가 좋은 수하를 뒀군. 진심으로 탄복했다. 관우. 아니, 관공이여.”“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이 아니오. 조조공, 이야기해줄 수 있겠소?”조조는 즐거운 웃음을 지우지도 않은 채로 머리를 젓자 관우는 눈썹을 찡그린다.“적어도 조조공이라면 마지막 가는 길에 말은 해줄 도량은 있다고 생각했소만 잘못 본 것이었소?”“내가 걸려하는 부분은 그 부분일세, 관공. 훌륭한 장수가 이만한 일로 죽으면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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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서 일어난 조조는 관우의 앞으로 걸어간다. 조조는 허저가 깜짝 놀라 팔을 잡는 것도 뿌리치곤 당당하게 관우의 앞에 선다. 관우가 조조를 내려본다. 가슴밖에 오지 않는 사내가 대담히 그의 앞에 목을 드러내고 있다. 지금 무서운 기세로 천하를 먹어치우는 조조야말로 주군의 숙적. 그 조조를 저승길 동무로 데려갈 수 있다. 관우의 마음에 순간 갈등이 인다.‘허나 이 사람이 나를 믿고 무방비하게 앞에 선 것. 그 목을 치는 것은 의롭지 못한 짓이다.’잠깐의 갈등을 물리친 관우는 투명한 눈으로 조조를 내려본다. 조조는 웅대한 팔자를 그리는 관우의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한껏 진지하게 속삭인다.“관공, 내 천하를 보고 마음대로 하라. 내게 남아있어도 좋고 유비가 살아있다면 그에게 돌아가도 좋다.”“나를 놀리는 것이오?”생각지도 못한 말에 관우가 당혹해한다. 하지만 조조는 엄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는다.“설사 적이라 해도 훌륭한 장수는 전장에서 쓰러져야 하는 것이 옳은 이치. 게다가 그대는 나를 알려고 한다. 그런 인물을 쉬이 죽일 수는 없지.”어깨를 몇 번 두들겨준 조조는 소리 높여 웃는다. 이것이 간교한 술책인가 의심하던 관우도 웃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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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없음을 깨닫는다.“이 관 아무개, 조조공의 말을 잊지 않겠소.”“유비의 생사가 알려질 때까지 이 조조의 옆에 있게. 그리고 내 천하를 마음껏 활보하고 알게나. 아무리 훌륭한 인재라 해도 섬김 받거나 섬겨지기만을 원하는데 그대는 그것을 뛰어넘어 아래선 입장에서 천하를 알고 싶어 한다. 그것은 일찍이 중화에 없었던 정신이니 소중히 갈고 닦게.”조조의 웃음소리에 관우는 눈을 감고 조용히 머리를 끄덕인다.

219년 형주 번성

“훌륭한 포진이다. 쉽게 깨트릴 수 없겠군.”언덕에 선 관우는 두 번째 구원군이 자리 잡은 평야를 살피고 있었다. 서황이 이끌고 온 군사들은 번성을 구하러 와놓고 정작 번성에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관우군이 성을 치려 등을 보이면 달려들겠다는 이야기였다.“아버님, 서황은 제가 맡겠습니다.”관우의 옆에 있던 청년장수가 조용히 말했다. 형형한 빛을 발하는 눈이 예사롭지 않은 기백을 내뿜고 있었다. 관우는 잠시 흐뭇하게 아들을 내려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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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가로저었다.“네가 미덥지 못 해서가 아니다. 평(平). 저 사람이 나를 부르고 있다.”조조의 천하를 둘러볼 때 관우는 조조의 장수들과 적잖이 교분을 쌓았는데 그 중 특별히 가까운 자를 꼽자면 서황이었다. 잠시 마음속으로 지기의 모습을 그려본 관우는 훌쩍 말에 올라타더니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뒤이은 관평의 손짓에 군사 삼천이 사령관을 따라 전진했다. 그에 호응하여 서황군 측에서도 진문을 열고는 한 장수가 병사를 이끌고 나왔다. 검은 말에 타고 있는 상대는 관우와의 거리가 백보 쯤 되었을 때 말을 멈추었다.“공명의 영용한 풍모는 20년이 흘러도 변치 않는구려.”공명은 서황의 자다. 관우가 반갑게 말을 건네자 서황은 이런 재회가 송구한지 군례를 취해보이곤 말을 받았다.“오늘은 나라의 일로 왔으니 사담을 피하고자 합니다.”“서로 모시는 주인이 다르고 이끄는 군사가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관우공.”서황이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기를 반복하더니 주변의 군사를 돌아보고 목청을 돋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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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 천금을 내리고 제후로 봉하겠다는 위왕의 명이시다. 너희들은 저 자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거라!”“공명! 이 무슨 소리요!”그 말에 놀란 관우가 따져 물었다. 적으로 만났다 한들 서로 갖추는 예라는 게 있는 법인데 서황의 처사는 지나친 데가 있었다. 서황은 고개를 몇 번 저어보이곤 창을 잡았다.“관우공, 말했듯이 오늘은 나라의 일이오.”“으음.”당혹한 관우는 황급히 고삐를 당겨 물러났다. 서황은 손을 들어 돌출하려는 위군의 움직임을 막고는 병사들을 거둬 진안으로 돌아갔다. 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돌아간 관우는 그제야 말을 멈추었다. 서황의 도발적인 언사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으나 이내 그 속내를 헤아려보곤 가만히 탄식했다. “저 사람은 원체 정이 많아 이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결국은 죽여야 할 상대였다. 서황의 도량이 좁은 것이 아니라 혹 정에 매여 군사를 부리는 일에 행여나 소홀하게 될까 일부러 관우에게 박하게 대한 것이라. 관우는 서황이 치고 있는 진을 한참 내려보다가 언덕을 내려왔다. 그가 알고 있는 서황은 19년 전의 서황이었다. 관우가 커진 만큼 서황의 군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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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문학 제17호228

리는 법도 매서워졌으리라. 조조의 천하에서 단련되었을 상대의 전력(戰歷)을 헤아려보던 관우는 가슴이 뛰었다. 육십이라는 나이에 맞은 꿈의 전쟁, 그리고 속속들이 나타나는 강적들. 늙은 피를 데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싸움이었다.언덕 아래에서는 관평이 기다리고 있었다. 관평은 주변의 군사를 좀 물리고는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관우에게 웬 종이 하나를 건넸다. 화살에 매어 쏘았는지 구겨짐이 심한 종이를 펼쳐본 관우의 얼굴이 딱딱해졌다.손오가 강릉을 점거.관우는 한참이나 편지를 내려보다가 물었다.“서황이 보낸 것이냐.”“네.”앞에는 위군, 뒤에는 오군이다. 관우의 이마에 주름이 패였다. 계책일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았다.“평, 회군 준비를 해두어라.”“아버님.”관평이 하고 싶은 말은 알고 있었다. 계략, 번성을 포위한지 벌써 육십일. 성내의 식량은 거의 다 떨어졌을 것이다. 이는 포위를 풀려는 위의 계략. 회군을 하더라도 확인을 거쳐서.

관우는 단번에 이 사고를 부정했다. 그는 계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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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지만 사람은 알았다. 서황은 간계를 입에 담을 자가 아니었다.“강릉을 잃는다면 우리는 돌아갈 곳이 없어진다. 서둘러야 한다.”관우는 단호하게 말하고 말배를 걷어찼다. 물러나있던 병사들은 갑작스레 관우가 말을 달리자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들 하나하나를 여겨보는 관우의 마음속에 불안한 어둠이 피어올랐다. 자칫하다가는 병사 모두가 고향에 뼈를 못 묻을 수도 있었다.

201년 예주 허창

“가는가.”찾아온 손님에게 조조는 조용히 묻는다. 관우는 정중히 군례 한다.“조조공의 은혜는 안량을 베어 갚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유비공의 행방을 알았으니 돌아갈까 합니다.”“안량으론 부족하다곤 생각하네만. 원소의 목까지 베어주는 것이 어떤가?”조조는 엷게 웃으며 농을 던져본다. 관우는 목상처럼 묵묵히 서있다. 실로 한결같은 사내다. 조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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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문학 제17호230

머리를 젓는다.“관공만큼 농이 통하지 않는 사내도 찾기 힘들 것이야.”“조조공의 부하들도 즐기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그럼 가는 것은 좋네만 그전에 관공의 감상을 들어보도록 할까? 나의 천하는 어떠한가?”그 말에 관우는 창밖을 내다본다. 조조가 천자를 봉대하고 만들어낸 도시 허창. 오랜 역사를 가진 낙양이나 장안과 다르게 고풍스러운 품격은 없으나 대신 활기가 넘치는 난세의 수도를.“조공의 천하는2) 재능의 천하. 재능만 있다면 누구도 가리지 않고 쓴다. 그 재능이 패업을 다지고 백성을 윤택하게 한다. 병사는 평시에 스스로 밭을 갈게 하여 식량을 생3)…….”“그만.”조조는 손을 들어 관우의 말을 멈춘다. 평소와 다르게 조조의 눈에는 노기가 어려 있다.“그것은 겉에 지나지 않다. 관공이여, 그대는 그것

_______________________2) 조조가 천하의 주도권을 쥐고 위를 건국하는 데에는 이 파격적인 발상이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형수와 간통을 했어도 재능 있는 자라면 들려 쓰겠다는 조조의 방침과 포고는 그에게 무수한 인제가 몰리는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조조 사후 그 유능한 신하였던 사마의의 자손에게 찬탈 당한다.

3) 둔전제를 말한다. 조조가 위르르 건국할 수 있었던 까닭으로 이것을 드는 경해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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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소설 부문 장려상 ‘꿈에 살다’ - 조선욱

밖에 보지 못했는가?”그 말에 관우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이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가는 조조는 관우를 베려할지도 모른다. 아니, 관우가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해보이지 못한다면 범용한 장수라 여겨 분명히 베어버릴 것이다. 인재를 아끼는 조조지만 반면에 냉혹해질 때는 한 치의 자비심도 없다. 각오를 다지는 관우의 머릿속에 옛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하동 땅의 일개 협객으로 탁현으로 도망쳐 왔다가 유비, 장비와 만난 것. 황건적 토벌과 동탁의 만횡, 무쌍 여포와의 싸움. 그리고 조조와의 만남까지. 문득 조조의 아래서 평생 머무르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그가 봐온 조조의 정치, 조조의 군사, 조조의 문화는 실로 합리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서 그런 말을 할 수도 없다. 조조가 유독 높이 평가하고 원하는 관공은 벼슬과 부귀를 버리고 여전히 무숙자 신세인 유비에게 돌아가려는 사나이다. 세태와 흐름에 영합하는 이가 아닌 것이다. 관우가 천천히 눈을 뜬다. 호랑이를 닮은 매서운 눈이 단신의 사내를 똑바로 본다. “조조공의 천하는 사람의 천하. 먼저 명분과 실리를 합쳐 사람이 모일 환경을 만들고 그 중 재능 있는 자를 가려 쓴다. 오랜 난세의 주림을 해결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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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문학 제17호232

면 자연스레 백성이 모이고 백성이 모이면 유능한 자가 많아진다. 그자들을 속속들이 파헤치고 요소요소에 쓰는 것이 정치며 군사며 문화가 된다. 실로 합당한 이치에 따르니 만민은 모두 머리 숙여 복종하게 된다. 그 끝은 옛날 황건적이 원했던 백성을 위한 정치형태가 될 터4).”“훌륭하다.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내 40년을 꿰뚫어보았군.”조조는 만족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인다. 부하가 아니라 동료를 대하는 듯한 태도다. 고개를 주억거리던 조조는 문득 묘한 얼굴을 하며 묻는다.“그렇다면 관공, 이제 너의 천하를 세울 때가 아닌가? 왜 유비라는 그릇에 묶이려고 하나? 전에 말했듯이 너는 천하라는 말을 알려하고 입에 담고 있다. 그럼 이제 유비에게 떨어져서 너의 뜻을 펼쳐보여도 좋을 터.”“그것은 유비 공의 천하를 다시 본 다음에 결정할 생각입니다.”“곤란하군. 관공, 자네가 붙어있는 이상 유비는 최대의 적이 되겠어.”

_______________________4) 황건적의 난을 제압하는데 조조는 열성적이었으나 그 후에는 황건적의 정신을 가장 지향했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조조는 황건의 잔당과 백성을 받아들이고 그 병사는 청주병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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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소설 부문 장려상 ‘꿈에 살다’ - 조선욱

“분명 그러할 것입니다.”관우는 태연히 말을 받는다. “배웅해도 되겠는가?”조조의 아래에서 뛰쳐나온 순간부터 유비와 조조는 이제 한 하늘을 이고 살기 힘든 숙적. 관우라는 빼어난 장수가 그 숙적의 오른팔로 돌아가겠다는데 조조는 굳이 붙잡지 않는다. 과분한 호의에 관우는 머리를 무겁게 젓는다.“이미 이 일은 큰 은혜, 배웅하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럼 조조공, 언젠가 전장에서.”“잘 가게.”조조는 몸을 돌려 걸어가는 관우의 뒷모습을 못내 아쉬운 듯 쳐다본다.“사람은 각기 정한 주인이 있는 법이지만……. 유비, 자네가 이토록 부러울 날은 앞으로 없을 걸세.”

219년 형주 임저

강릉에 남아있는 가족을 상기시키는 교묘한 책략에 당할 길이 없었다. 힘을 다해 길러온 용맹한 군사들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말을 멈춘 관우가 배꼽까지 기른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름답다 소문이 자자했던 수염은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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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십이 되어서도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아버님.”진영의 그늘 속에서 나타난 준수한 얼굴의 젊은이가 사내를 군례를 취했다. 아버지 앞에서 조신스러운 관평이지만 지금은 이를 갈며 고했다.“이제 남은 병사는 백이 되질 않습니다.”“조루는?”도독의 이름이 나오자 평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오의 병사를 뚫던 와중 이름 모를 화살에 맞은 도독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관우는 아들의 낯빛을 보고 대답을 짐작했다. 사내가 다시 말을 움직여 진영을 걷자 아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부자는 조용히 겨울비를 맞으며 진영을 가로질렀다. 말발굽 소리만이 울리는 진영에는 패배의 기운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비통한 마음을 눌러 참으며 사내는 말을 몰아 외곽으로 향했다. 보초병들이 피로를 견디지 못해 창대를 잡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안쓰러운 눈으로 그들을 내려보던 관우는 팔을 옆으로 들었다. 핏발 선 눈으로 칼자루로 손을 옮기던 아들은 동작을 멈췄다.“그만두어라. 이들은 오래전부터 나와 함께해온 자들이다.”이미 떠날 이들은 다 가고 지금 남은 병사들은 그와 오랜 시간 고락을 함께해온 이들이었다. 격분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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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소설 부문 장려상 ‘꿈에 살다’ - 조선욱

던 아들은 그 말에 화를 가라앉혔다. 병사들을 한참 내려보던 관우는 말을 돌려 막사로 향했다. 막사가 보일쯤에 관우는 결심을 굳혔다.“평, 군량과 돈을 병사들에게 나눠주고 자유롭게 가라고 전하라.”“아버님.”아버지를 하늘처럼 여기는 아들은 말뜻을 알고 깜짝 놀라 불렀다. 언제나 순종만 하던 아들에겐 이례적인 반응이었다. 그 작은 저항에 문득 뱃속의 울화와 근심이 씻겨져 내려갔다. 차가운 바람에 상처를 쑤시는데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버지의 헌걸찬 웃음에 아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촉에는 아버님이 필요합니다. 아버님은 사셔야 합니다.”“살아야할 것은 너다. 촉은 젊어져야 한다. 병사들과 흩어져 대왕에게 돌아가라.”“아버님.”비명 같은 부름에 관우는 시원스레 고개를 가로저었다.“한중왕의 장수로 굴욕의 삶을 살 수는 없다. 허나 죽기 전에 알고 싶은 것이 있구나. 그러니 너라도 가라는 것이다.”“무엇이 알고 싶으신 겁니까?”평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수만의 오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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펼친 촘촘한 그물망에 걸려든 이상 승리는 없었다. 누구도 말로 꺼내지 않았지만 사내도, 아들도 그리고 처자에게 도망간 병사들과 끝까지 남은 어리석은 자들까지 모두 패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부심 강한 사내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들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손권의 천하(天下).”관우는 꺼릴 것 없는 얼굴로 태연하게 말해주었다.

184년 유주 탁현

“이봐, 도와.”걸어가던 관우가 뒤를 돌아본다. 양 옆구리에 멍석을 낀 청년이 그를 향해 어깨를 으쓱여보인다.“도와달라고.”멍석은 둘둘 말린 것이 그 안에 무언가 들어있는 것 같다. 어깨에도 오지 않는 사내를 찬찬히 살펴보던 관우는 손을 내민다. 청년은 몸의 왼편을 움직여 관우에게 멍석을 건넨다. 멍석에서 밀려오는 냄새에 관우는 순간 이마를 찌푸린다.“시체요?”“잘 알고 있네. 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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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만난 상대, 그것도 8척장신의 거한에게 시체를 나르라고 시키다니 어지간한 청년이다. 관우는 자신을 잡부로 착각했다는 게 대단히 불쾌했지만 일단 청년을 따라 걷는다. 청년의 행색이 유복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 발밑에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도련님은 아니다. 귓불이 유난스레 늘어졌고 팔은 가만히 서도 무릎에 닿을 정도로 길다. 기이한 청년이다. 이윽고 관우는 불쾌감보다 청년에 대한 호기심이 커져간다. 시체가 궁금한 것은 아니다. 때는 한제국 말기, 이전의 왕조들이 그랬듯이 나라가 망할 때 그 백성의 삶은 참담하다. 이곳 유주에서도 형편은 크게 다르지 않아 날이 밝으면 건넛집 사람이 굶어 죽는 게 일상이다. 게다가 저 먼 마을에서는 돌림병까지 돈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죽음이 당연시 된 세상이기에 시체는 성밖에 버린다. 너무 많이 죽어서 일일이 묻을 수가 없다. 관우도 이 청년 또한 그러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방향이 다르다. 청년은 성문 쪽이 아니라 산으로 가고 있다. 관우가 의아해하면서 산을 타는데 청년의 걸음이 여간내기가 아니다. 그리 강단 있어 보이는 체구가 아닌데 다리가 쭉쭉 나간다. 한참을 산등성이를 오르던 청년은 좀 널찍한 분지에서 멈춘다. 뒤따라 올라온 관우는 놀란 눈으로 분지를 살핀다. 집 서너 채는 세울 수 있을 정도의 공간에 봉분들이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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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딱 맞닿게 생겨있다. 청년은 아직 공간이 남아있는 쪽으로 가더니 멍석을 내려놓는다. 멍석이 풀어지면서 나온 것은 어린 아이의 시체다. 굶어죽었는지 몸이 앙상하고 입가가 허옇게 말라있다. 관우는 청년의 옆에 멍석을 내려놓는다. 그의 멍석 안에 들어있는 것도 어른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상태는 비슷하다.“아는 사람이오?”“모르겠는데.”청년은 봉분 사이에 끼워져 있던 삽을 든다. 관우는 봉분을 눈으로 어림잡아 세어보다가 땅을 파는 청년에게 묻는다.“전부 모르는 사람이오?”“알던 자도 있고 길에 쓰러져 있던 자도 있고, 이름을 알았던 자도 있고 영원히 모를 사람도 있지.”청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받아넘긴다. 관우는 내심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고 다시 묻는다.“어째서 이러는 것이오?”“사람이 죽으면 묻는 건 당연하잖아.”청년은 어이없단 얼굴로 대꾸한다. 당연한 이야기다. 사람이 죽으면 묻는다. 당연하지 않은 이야기다. 죽은 사람이, 죽을 사람이 너무 많다.“왜 도와 달라 하지 않소?”삽을 멈춘 청년이 관우를 살피는 듯 한참을 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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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소설 부문 장려상 ‘꿈에 살다’ - 조선욱

다본다. 마주보던 관우의 가슴이 문득 뜨거워진다.“당신이 옳소. 사람이 죽으면 묻어야 하오.”“삽이 없어.”“내가 하는 것이 더 빠를 것이오.”관우가 손을 내밀자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곤 삽을 건넨다. 관우는 땅을 파면서 묘한 감정에 젖는다. 몸을 위해 탁현으로 도망 온 몸이 어째서 산에서 땅을 파고 있는 것일까. 안지 하루도 되지 못한 청년의 어디가 그를 이렇게 움직이는가. 타고난 힘 때문에 구멍은 금세 파였다. 청년이 시신을 들어 구덩이에 넣자 관우는 삽을 땅에 꽂고는 말한다.“당신이 모두를 파묻을 수는 없소.”“그럼 어째야 할까?”“사람이 죽지 않게 하면 되잖소.”청년의 눈이 동그래진다. 그도 그럴 것이 변방의 산속에서 협객 하나와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청년이 권력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턱을 문지르던 청년은 그럴싸하단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권력이 사람을 죽인다면 살릴 수도 있긴 하겠군. 그게 방향성이란건가? 근데 어떻게 천하를 쥐지?”관우의 호흡이 순간 멈춘다. 지금의 한마디로 앞으로가 결정된다는 직감이 등을 타고 흐른다.“이 관우가 돕겠소.”“고맙군, 나는 유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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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이름을 밝혔다.

219년 형주 임저

포위진을 돌아보고 온 반장은 진중의 소란을 알고 원진으로 다가갔다. 풍채 좋은 몸집을 흔들며 걸어간 반장은 보나마나 병사들의 작은 다툼이겠거니 지레짐작했다. 헌데 어째 원진을 헤치고 접근할수록 조용해지는 게 심상치가 않았다. 폭풍의 중심은 고요한 법이다. 둥그렇게 형성된 병사들을 뚫고 고개를 내민 반장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과, 과…….”팔척장신에 붉은 얼굴. 바람에 나부끼는 아름다운 수염. 천하가 넓다지만 꼭 닮은 다른 사람일 리가 없었다. 반장은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반, 반장님.”상대에게 어린애처럼 붙들려있는 젊은 장수가 사색이 되었다. 사로잡혀있는 부하, 마충을 본 반장이 이를 부득부득 간다.“과, 관우! 어떻게 여기에 왔나!”“이 자가 안내해주더군.”수천 군사가 머무는 진영에 홀로 있음에도 관우는 태연했다. 옆구리에 끼고 있는 마충의 투구를 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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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 두들겨 보인 관우는 의연하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수백의 병졸인데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다. 그 기개에 눌린 반장은 순간 멈칫했다.“반장이라고 했나? 손권을 불러라.”“뭐, 뭣?”“여몽도 함께라면 좋겠군. 최대한 빨리 오라 해라.”주군과 총사령관의 이름이 연달아 불러졌다. 반장은 순간 상황을 냉정하게 가늠해보았다. 병사들이 위축되었다지만 이쪽은 수천, 관우는 하나였다. 제 아무리 관우가 일기당천이라 해도 나이 예순이 되어 노쇠한 몸으론 승기가 희박했다. 저런 미친 소리는 무시하고 사로잡는 게 낫지 않을까?“으음.”반장이 꾸물대는 기세이자 관우는 껄껄 소리 높여 웃었다.“손오의 장수여. 뒤를 칠 줄 알아도 앞에서 대화할 줄은 모르느냐?”“끄응.”결국 반장은 패배를 인정했다. 홀로 진중에 당당하게 찾아온 적장의 면담요구를 무조건 무시한다면 오는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다. 이것은 그의 선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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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다! 관우! 무장을 해제해라!”“고작 칼 한 자루, 창 하나가 무서워서 그러느냐?”관우가 차게 웃자 반장은 입을 다물었다. 관우라는 이름 높은 장수, 적의 총사령관이 홀로 뛰어 들어온 이 상황 자체가 상식 외였다. 설마 항복이라도 하려는 걸까? 그러고 보면 관우는 한번 조조에게 항복한 적이 있었다. 반장이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는 것을 무시하고 관우는 마충을 떨구더니 가볍게 말을 걷게 했다. 그 방향에 맞춰 원형이던 포위진이 타원으로 넓어졌다.“과, 관우. 어딜 가느냐?”“여기는 볕이 적으니 따스한 곳으로 가 기다리려 한다. 빨리 오라 해라.”반장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말을 걷게 하는 관우의 머릿속에 문득 유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208년 형주 융중

“조조는 법가(法家)의 리(理)로 난세를 안정시키고 있는 사람입니다. 유비공이 천하를 얻을 길은 요원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그럼 내가 천하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단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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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소설 부문 장려상 ‘꿈에 살다’ - 조선욱

리인가?”초막에 앉아있는 사내 둘, 그리고 그 뒤에 가만히 서있는 장한 하나. 배까지 드리워진 수염이 인상적인 구경꾼은 마뜩치 않은 눈으로 두 사내 중 젊은 쪽을 노려본다. 얼굴이 하얀 서생의 나이는 이제 이십대 중반쯤 되었을까.“한 가지 빠르고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서생의 달콤한 말에 유비의 귀가 꿈틀거린다. 당장 달려들을 정도로 좋은 먹잇감인데 오십년 가까이 같이해온 감이 이 귀 큰 사내를 가로막고 있다.“그건 조조에게 항복하란 말인가?”“알고 계시는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유비공은 난세의 미꾸라지 이상이 아닙니다. 유비공이 살아 있어봤자 조조를 압도할 기량이 없는 한 천하의 혼란은 깊어져만 가지요. 그리고 그런 기량이 있었다면 진즉에 나왔을 터. 유비공, 당신은 천하를 얻을 수 없습니다.”스무 해가 넘는 세월동안 목표로 삼았던 꿈이 이름 없는 서생에게 짓뭉개진다. 유비는 얼굴 가득 떠오른 노여움을 숨기지 않았다. 언제 어느 때라도 속을 그대로 내보이는 것이 유비의 장점이다.“관형, 검을.”분기를 참지 못해 칼자루에 손을 가져가던 관우가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뒤로 내민 손바닥이 까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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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으로 보아 거두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넘겨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주저하던 관우는 칼을 뽑아 유비에게 건네준다. 상대의 손에 시퍼런 칼이 쥐어졌는데도 서생은 부채를 부치며 작게 웃는다. 울화통이 터진다는 얼굴로 서생을 노려보던 유비는 칼을 자기 목 앞으로 가져간다. 관우는 놀라 소리치려던 것을 이내 눌러 참는다.“그 말대로라면 내가 당장 죽으면 천하가 평화로워진다 건가?”“유비공이 조조의 아래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지금보다는 더 빨리 난세가 종결될 겁니다.”“그렇다는군! 죽을까, 관형?”유비가 크게 소리쳐 묻자 방관자로 남아있던 관우는 입을 열었다. 평소와 달리 목청이 낮다.“죽지 마시오.”“어째서지? 내가 죽으면 천하는 평화로워진다고 하는데? 내가 천하와 같은 가격의 목을 달고 다녔다니 대단하군.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에서야 내가 천하인(天下人)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단 거지. 그거 하나는 고맙네. 제갈량.”제갈량이라 불린 청년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만 짓는다. 눈앞의 일이 큰 연극이라고 생각하는 듯이. 칼은 여전히 유비의 목젖에 닿은 채다. 힘겹게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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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지켜보던 관우는 머리를 가로젓는다. 아무리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만이 장점인 남자라도 이건 지나치다.“죽지 마시오, 유비공.”“어째서지?”“이유가 필요한거요?”“의(義)도, 충(忠)도 이유는 필요 없는 것들이지.”“그럼 충분하잖소.”유비는 크게 웃더니 칼을 뒤로 던져버리곤 제걀량을 은근하게 쳐다본다.“자, 그럼 다음 책략을 말해보라고. 와룡(臥龍).”“천하를 빼앗을 역량이 없다면 천하를 만드시면 됩니다.”“천하를 만든다고?”일찍이 시황제가 중국 전토를 통일하고 황제라 칭하면서부터 천하는 줄곧 하나였다. 황제는 천자(天子)로 하늘과 소통하여 지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존재였다. 그 존귀한 자리는 언제나 하나밖에 인정되지 않았고 나머지는 모조리 참칭이었다. 한왕조 400년 동안 권좌를 탐내 무수한 피가 흘렀지만 천하는 줄곧 하나였고 하늘과 마주할 수 있는 자리 역시 하나였다. 그런데 지금 서른도 안 된 청년이 천하가 둘이라 말하는 것이다. 유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귀를 후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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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소리로군. 천하는 애초부터 하나 아냐?”제갈량의 대답이 없다. 유비는 희미한 미소만을 짓고 있는 서생을 날카롭게 노려본다.“내가 조조에게 항복하지 않는 이유는 놈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라구. 놈의 천하 역시 마찬가지다. 놈은 사람을 끌어 모으고 있지만 그건 가죽 안의 재능들을 탐내는 것뿐이지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냐. 난 그걸 참을 수가 없다. 그런 놈이 차지한 천하는 굉장히 잘 돌아갈지는 몰라도 피는 돌지 않을 거야. 그러니 제갈량, 제대로 된 답변을 내어달라고.”“지금 이 오두막 자리는 조조의 천하는 아니겠지요. 누구의 천하입니까?”“가만, 그렇군. 근데 이걸 어떻게 넓히느냐가 문제겠지. 아냐?”문답을 지켜보던 관우가 주먹을 꽉 움켜쥔다. 저 제갈량이란 서생은 무례하기 짝이 없지만 그와 이야기하면서 유비는 껍질을 깨고 더 커지고 있다. 어느새 유비는 천하가 둘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그것도 조조의 천하와 유비의 천하로. 강한 병사도, 넓은 근거지도 없는 유비가 천하를 거진 다 먹었다고 평가되는 조조와 대등하게 선 것이다. 유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새로이 천하가 태어나 맥동한다. 관우는 문득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고 부르르 몸을 떤다. 몸을 일으켜 싸우기를 이십년, 그의 주인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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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의 근간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남자였다.“야, 제갈량. 자는 척 하지 마.”확장에 이야기가 이르자 제갈량은 눈을 감고 입을 다문다. 이마를 찡그린 유비는 위협해볼까 생각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관형, 이 녀석이 왜 갑자기 말을 않는 거지?”“유비공의 진영에 가담할 맘이 없다는 것 아니겠소?”“젠장, 이 녀석 엄청 탐나는데.”소매를 턴 유비는 눈을 감고 있는 제갈량을 내려본다. 한참을 내려보던 유비는 몸을 돌린다.“제갈량, 난 신야에 있다. 두 번째 천하를 만들어보고 싶다면 나한테 와라. 나도 네가 있으면 천하를 훨씬 더 빨리 만들 수 있을 것 같으니까.”관우 역시 유비를 따라 초막을 나선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제갈량은 천천히 눈을 뜬다. 그의 앞에는 바닥에 꽂힌 검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다.“고조5)와는 매우 비슷하지만 다른 사람이군.”그것이 강점이자 약점. 오늘 마주한 것이 한고조였다면 제갈량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 다행히 목숨

_______________________5) 한고조 유방. 항우를 거꾸러트리고 천자가 된 이 남자의 장점이라곤 사람을 잘 부리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천자가 된 그는 후사를 두려워해 개국공신들을 모조리 참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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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걸고 시험할 정도의 가치는 있었다.“유비, 사람의 천하인가.”

219년 형주 임저

“관우.”관우가 눈을 번쩍 떴다. 말위에서 잠시 선잠이 들었던 듯하다. 수백 명이 형성한 널찍한 포위망은 여전했는데 앞에 반장대신 한 사내가 나와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관우보다 20살은 어려 보였는데 우락부락한 팔뚝과 뼈가 굵은 체구가 제법 힘을 쓸 법 했다.“이름은?”“여몽.” 관우가 형주를 지키고 앉은 이래, 쭉 주의해왔던 인물이었다. 오의 사령관으로서 형주를 노리던 여몽 역시 관우를 높게 여겨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형주를 탈취할 때도 병환이라 자리를 비우고 육손을 대신 내세워 뒤에서 군사를 조정했다. 서로 얼굴을 맞댄 것은 처음이지만 1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계속 경계해온 상대였다. 관우는 천천히 말을 골랐지만 상대는 그럴 생각이 없는 듯 버럭 소리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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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하는 짓인가! 관우! 장수라면 응당 싸움터에서 죽어야 하는 법. 이제서 목숨이라도 구걸할 셈인가! 그러고도 네가 장수라 할 수 있겠는가! 방덕에게 부끄러운 줄 알아라!”여몽은 관우가 항복을 청하러 왔다 생각했는지 대갈일성을 토해냈다. 귀가 먹먹해지는 고함에 관우는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항복할 생각도 없지만 항장을 대하는 태도라면 응당 달래고 어루만져야 할 터인데. 이번의 형주공략전에서 보여준 여몽의 계책과 술수들은 매우 기민하고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자극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서 여몽이란 자가 실로 심계가 빼어나고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 자겠구나 짐작했는데 이렇게 감정적인 남자였다니.“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 관우라는 인물을 높이 산 내가 어리석었어! 무릇 한 번 주인을 섬겼다면 어떤 고난과 역경을 겪는다 해도 그 주인을 좇는 것이 실로 당연한 이치 아닌가! 관우의 위명과 의리가 천하에 울려 퍼졌기에 내 비록 적으로 만났지만 흠모하는 마음이 있었거늘 단단히 사람을 잘못 봤어!”여몽이 무엇이 그리 분한지 씨근씨근 화를 내며 발을 구르고 있었다. 그런 어린애 같은 모습을 보니 뒤통수를 맞아 형주를 빼앗긴 원한이 조금은 수그러들었다. 어차피 싸움터의 일, 계책은 당연한 것 아니었던가. 여몽의 부재를 믿고 마음을 놓은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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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것이었다. 관우는 허허롭게 웃었다.“무엇이 그리 좋아 웃는가, 관우! 너는 이제 개돼지만도 못한 놈이 되어버렸다! 유비를 좇아 수많은 사선을 넘어 도달한 것이 굴욕적인 항복인가! 우금이 웃고 방덕이 웃겠구나! 역사는 너를 시정의 잡배만도 못한 놈으로 취급할 것이다! 이런, 버러지만도 못한 것. 퉤엣!”여몽은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침을 뱉더니 뒤돌아섰다. 관우는 그 뒷모습을 조용히 보다가 창을 들어올렸다. 그에 여몽은 걸음을 멈추고는 낮게 중얼거렸다.“정녕 타락한 것이냐, 관우?”“여몽, 너는 한 가지 큰 착각을 하고 있다.”창을 겨눈 관우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결심을 밝혔다.“나의 주군은 예나 지금이나 한중왕 한 분뿐, 섬기는 주인을 바꿀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음이다. 너의 계책이 훌륭해 형주는 빼앗기고 나의 군사들은 흩어졌다. 하지만 내가 오명을 뒤집어쓸 각오를 하고 지금 이 자리에 온 것은 단 하나, 손권에게 물을 것이 있기 때문이다.”“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여몽은 놀란 얼굴을 숨기지 않고 돌아섰다. 관우는 고요한 눈으로 여몽을 내려보았다. 여몽은 한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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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 그 시선을 맞받더니 이내 군례를 취해보였다.“방금 전, 이 여 아무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하시오. 관운장이시여.”“용서하겠소.”패전을 인정한 장수는 담담히 머리를 끄덕였다. 여몽은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던 병사들에게 눈짓해 거리를 벌리게 하더니 관우의 말고삐를 잡았다. 어지간한 관우도 깜짝 놀라 말에서 서둘러 내렸다.“여몽은 이 사람을 욕되게 하지 마십시오.”승리한 장수가 패장의 말고삐를 잡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관우가 말에서 내리자 여몽은 머리를 깊이 숙여보였다.“내 일찍이 관운장의 이름은 깊이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서로 모시는 주인이 달라 창칼을 맞대게 되었지만 본의는 아니었습니다.”나이가 한참이나 적은 자라지만 승자가 이토록 자신을 낮추니 관우는 할말을 잃고 말았다. 관우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패검과 창을 여몽에게 건네주었다. 이로서 관우의 무장은 해제됐다. 애초에 죽음을 바라고 온 자리에서 병기를 고집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행여나 오군이 그의 요청을 무시하거나 혹은 그를 죽이지 않고 욕보이려 할 때, 싸우다 죽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러나 지금 여몽의 진솔한 태도를 보아하니 그런 일은 없으리라 믿게 된 것이었다. 여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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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건네받은 병기를 자신의 팔다리처럼 소중하게 다루어 부관에게 넘기더니 앞서 걸었다.“주군이 오실 때까지 편하게 쉴 수 있게 안내해드리겠습니다.”“고맙소.”관우는 앞서 걷는 적장의 등을 따라 걸었다. 며칠 전까지 창칼을 맞대 서로를 죽이려 했던 상대였지만 승패가 확정된 순간 서로를 인정했다. 유달리 자부심이 강한 관우는 자신을 인정해주는 상대에게 시시콜콜한 원한을 품는 성격이 아니었다. 형주를 빼앗기고 형제의 꿈이 산산조각이 난 것을 시시콜콜하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애초에 오의 진영으로 단기필마로 왔을 때부터 관우는 반쯤 죽어있었으니까.‘이 사내와 다른 장소에서 다르게 만나 술을 독 째로 마셨다면 좋았을 것이다.’관우는 공손하게 안내하는 여몽의 등을 보고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 후회도 원한도 없다. 단지 알고 싶을 뿐. 조조의 천하는 보았다. 유비의 천하에 살고 있다. 이제 남은 공백을 채워 넣는다면 완성될 터.‘한중왕이시여.’관우의 마음속에 다시금 유비의 천하가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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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년 형주 당양벌

유례없는 광경이다. 뒤를 보고 내심 감탄하던 관우는 고개를 돌려 축 늘어져서 말에 몸을 맡기고 가는 남자를 쳐다본다. 귓불은 이상스럽게 늘어져있고 팔은 기이할 정도로 길다. 그는 피곤한지 반쯤 눈을 감고 있다. 수십만의 민초들을 이끌고 선두에 서있는 남자는 지나칠 정도로 태평스러워 보인다.“관형, 조조는 오겠지?”“올 것이오. 유비공.”유비가 조조의 남진을 피해 달아나는 길에 수십만의 백성들이 합류했다. 어린아이와 노약자, 유표의 병사와 시정잡배, 별의별 무리들이 이 행렬에 끼어들어 유례없는 대이동이 되었다.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분명히 장관이리라. 관우는 감상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온다.“장비가 뒤에 가있다지만 속도를 빨리 하는 편이 좋겠소. 유비공.”“하지만 그래서야 백성들이 따라오지 못 한다구.”입가에 말라붙은 침을 훔친 유비는 눈을 게슴츠레 뜬다. 하루에 십리도 가지 못하는 이런 속력으론 조조의 추격군에게 금세 따라잡힐 것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 사내에겐 긴장감이라는 게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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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공, 무얼 생각하고 있소?”“조조를 생각하고 있었지.”관우보다 나이 어린 사내는 기지개를 피더니 귓구멍을 긁적인다. 귀지를 훅 불어버린 유비는 빙긋 웃는다.“관형, 조조는 너무 빨라. 조조의 정치나 개혁은 너무 빨라서 사람들이 따라가지 못해. 그러니 거기에 도태된 자들이 나에게로 온다. 이 행렬은 그런 무리들이야.”“제갈량이 한 말이오?”“어, 어떻게 알았지? 좀 아는 척 해보고 싶었는데.”여전히 알 수 없는 사람이다. 관우는 내심 감탄한다. 관우의 나이 마흔 아홉, 그리고 유비의 나이 마흔 여덟6). 이 나이가 되도록 머물 땅이 없음을 한탄하던 남자는 갑작스레 여유만만이 되어있다. 관우는 말갈기를 쓰다듬으며 묻는다.“유비공이 요새 기운이 부쩍 나는 것은 제갈량 때문이오?”“응? 분명히 공명의 천하삼분은 귀가 번쩍 뜨이긴 했지.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라구.”

_______________________6) 관우의 출생년도는 정확하지 않지만 유비보다 한살 많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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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은 제갈량의 자다. 20대 중반의 젊은이인데 전격적으로 유비의 군사로 발탁되었다. 얼굴 새파란 놈이 위에 서는 것은 관우로선 고까웠지만 제갈량의 식견은 분명 남다른 데가 있다. 하지만 제갈량이 제안한 천하삼분은 미래의 설계도지 당장의 구제책이 되지 못 한다. 조조가 군을 휘몰아 썰물처럼 쳐들어온다면 한줌도 되지 못하는 모래성인 유비군은 부스러져 흩어질 것이다.“유비 공. 당신은 이제까지 계속 도망쳐왔소. 공손찬에서 여포로 여포에서 조조로 조조에서 원소로 원소에서 유표로.”“중간 중간 계속 싸웠잖아.”유비가 중간에 끼어들었지만 관우는 무시해버린다.“계속 도망쳐서 무엇을 이룰 작정이오?”“나에게 실망했다면 왜 돌아왔지?”유비는 태연스레 그 말을 입에 담는다. 유비, 관우, 장비. 관우는 끝끝내 형제라 부르고 있지 않지만 이미 친형제 이상의 정이 쌓인 사이였다. 그런 세 사람에게 관우가 조조 아래서 벼슬했던 사실은 일종의 금기였다. 관우는 구태여 해명하지 않았고 유비는 돌아왔으면 그만이라는 태도였다. 장비는 관우와 삼일밤낮 술을 마시다 주먹질을 하는 것으로 넘어갔다. 10년 가까이 꺼내지 않았던 화제가 조조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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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쫓기는 와중에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관형. 관형은 말이야. 대단하다고. 천하무적의 장수에다가 이름도 높잖아. 조조에게 계속 머물러있었다면 분명 출세했을 거야. 왜 굳이 나에게 돌아온 거지?”“유비공.”“솔직히 말야. 나도 미안하고 화나고…… 그렇다고. 관형은 계속 조조 아래 있었으면 영화를 누렸을 텐데. 돌아와 준 건 고맙지만 나도 그 이상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현실은 빈털터리고.”“나는…….”관우는 유비가 자신을 진하게 보고 있는 걸 안다. 전란의 난세에 서로 뭉쳐 싸우고 도망치기를 수십 년, 이제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버렸다. 용하게 계속해서 살아남은 유비군이지만 이제 더 이상은 꿈도 희망도 없을지 모른다. 제갈량의 삼분천하는 달콤했지만 현실은 막강한 조조군이 뒤쫓고 있었고 의지할 땅은 한 귀퉁이도 없었다. 관우도 유비를 본다. 기이한 생김새의 사내가 매우 진지한 눈으로 그의 말을 들으려 하고 있다. 이 사내의 이런 진솔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문득 가슴이 뜨거워진다.“형님은 분명 난세의 미꾸라지입니다.”“어?”생소한 호칭에 유비는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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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자신도 당혹해했지만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형님이 조조를 적대하는 동안 아마 난세는 계속될 겁니다. 그럼에도 나는…….”조조의 천하를 보고 온지 9년 째, 마음이 정해졌다.“내가 살고 싶은 것은 형님의 천하입니다.”“과, 관형. 드디어 날 형이라 부른 거야?”관우는 입을 다문다. 유비는 지금 상황을 잊었는지 눈물까지 글썽이다가 머리를 끄덕인다.“그럼 이미 보고 있네.”유비는 팔을 뒤로 뻗더니 손바닥을 펼쳐 보인다. 유비를 따르는 병사들의 뒤로 소박한 가재도구를 짊어진 이들이 황량한 길을 걷고 있다. 누구도 따라오라고 한 적이 없지만 오로지 유비를 믿고, 그 이름을 믿고, 그 덕을 믿어 따르는 수십만의 군중들. 유비의 손바닥 너머의 민초들을 보던 관우가 문득 몸을 부르르 떨었다.“이게 바로 내 천하다. 할머니건 애건 상관없어. 사람이면 충분해. 재능 따위가 뭐냐. 조조가 버린 사람들이라고 해도 좋아. 조조를 무서워해서 도망 온 자라고 해도 좋아. 영토가 없다 해도 나를 따르는 사람이 이만큼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내 천하는 시작된 거 아냐? 이제 무덤은 필요 없어. 살아있는 사람, 그걸로 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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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위에 천하를 세운다. 조조는 황건의 잔병들과 그 백성 백만을 끌어안고 세력을 확장시켰다. 유비의 이 말도 그에 흡사하지만 다른 구석이 있다. 조조의 천하가 재능을, 이치를 따지고 사람을 가린다면 유비의 천하는 그런 것을 바라지 않는다.“재능이 없다고, 힘이 없다고 그게 어쨌다는 거야. 결국 사람과 사람일 뿐인데 뭐가 그리 다르다고 구분 짓는 거지? 안 그래. 관형?”관우는 망연히 사람들의 무리를 본다. 유비가 왜 이리도 자신감이 넘치는 지 알 것 같다. 유비라는 돌이 구르면 구를수록 먼지와 흙이 달라붙어온다. 그렇게 돌의 크기는 날이 갈수록 부풀어 오르고 속력은 걷잡을 수가 없어진다. 바로 지금 이곳이 유비의 천하다.“관형이라 부르면 안 됩니다. 저도 앞으로는 주군이라 부르겠습니다.”창을 움켜쥔 관우는 몸을 앞으로 돌린다. 유비는 인상을 찌푸린다.“형님이란 소리는 한번밖에 안 한다는 건가.”“주군. 앞서 가서 한수의 배를 조달해오겠습니다.”“어? 아까 서서가 말한 그거인가?”관우는 대답을 듣지 않고 말배를 걷어찬다. 상쾌한 바람이 귓가를 어루만지고 지나간다. 아름다운 수염을 휘날리며 관우는 말을 달린다. 달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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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참을 수가 없다. 가슴이 벅차올라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패배와 도망을 변주(變奏)하길 수십 년, 드디어 무덤 위의 세상을 보았다. 이 꿈을 누구도 망가트리게 두지 않으리라. 압도적으로 짓쳐들어오는 조조의 대군이라 해도, 그 어떤 시련이라 해도.

219년 형주 임저

막사 안에 앉아있던 관우의 무거운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밖이 소란스러웠다. 손권이 도착한 것일까. 관우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눈앞으로 가져왔다. 수십 년 동안 창을 잡았던 손에 굳은살들이 구불구불한 산맥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제 창을 잡을 일은 없을 터. 손권과의 문답이 끝나면 죽는다. 오군에서는 여몽만이 이런 관우의 각오를 알고 이해했을 것이다. 서로를 높게 여겨 경계해왔던 상대이기에 알 수 있는 것일까. 관우의 입가가 문득 누그러졌다.“대왕이시여.”한중왕이 된 형님을 부른다. 수십 년간 품어왔던 꿈이 마침내 결실을 맺은 정점에서 관우는 무대 뒤로 퇴장하게 되었다.‘내 삶은 대덕(大德)의 천하를 위해. 다만 죽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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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은 제 마음대로 선택한 것을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관우는 문득 그의 죽음을 알 유비의 반응을 마음속에 그려보았다. 유비의 우는 모습은 일일이 세기 어려울 정도로 봐왔는데도 상상가지 않았다. 죽은 후의 일이라서 떠오르지 않는 것일까.“실례하겠소.”그때, 막사의 휘장을 헤치고 사내 둘이 들어왔다. 넓적한 얼굴에 유달리 큰 입, 여몽이 뒤따라오는 것을 보니 이 자가 손권인 모양이었다. 관우는 상대를 보고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으음.”상대는 관우의 대응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큰 웃음으로 털어버리는 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손권이라 하오. 장군의 위명은 익히 들었지만 직접 뵙는 것은 처음이오. 반갑소.”관우는 순간 속으로 실망을 느꼈다. 유비는 물론 조조도 직접 만나 본 순간, 가슴이 탁 트이는 뭔가가 있었다. 하지만 삼국의 마지막 주인인 이 자에게선 그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관우는 속을 감추지 못 하고 뒤편의 여몽을 응시했다. 행여나 대역을 내세워 골탕 먹이는 수작이 아닐까? 하지만 여몽의 한결같이 진지한 얼굴을 보니 그도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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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칠 정도로 공손한 여몽의 태도를 보면 순간 의심한 것이 부끄러웠다. 이 자가 손권이다. 관우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상대를 세세히 보았다. 눈은 작고 얼굴은 넓적한데다가 코는 주먹코에 입은 컸다. 전체적으로 눈만 빼고 큼직큼직했다. 볼품없는 풍채7)

에 흔들렸던 관우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물었다.“관우라 하오. 오늘은 특별히 공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소.”“물으시오.”“손오, 손권의 천하는 어떤 것이오?”손권은 금방 대답하지 않고 수염을 매만졌다. 관우는 묵묵히 마지막이 될 대답을 기다렸다 . 여몽은 잠자코 숙적의 마지막 물음을 지켜보고 있었다. 탁상에 올려져있던 촛불이 한마디 쯤 짧아졌을 때 손권이 입을 열었다.“오는 내 아버지, 손견이 터를 잡고 형님 손책이 씨를 뿌린 나라요. 나는 그 수확물을 거두었을 뿐. 그리고 나 역시 뒷사람을 위해 다시 씨를 뿌리는 것뿐이오.”“구체적으로는?”

_______________________7) 당시에는 사람의 외모가 재능의 판단기준으로 크게 작용했다. 일례로 유비조차도 명군사로 소문난 방통이 찾아와서 만나보니 그 풍체가 하잘 것 없어서 한직에 임명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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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과 달리 강남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곳이 많소. 그런 땅들을 개발한다면 자연스레 백성들은 윤택해지고 사람들은 강남으로 몰리게 될 것이오.”“천하를 다투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오?”손권은 머리를 저었다.“형주를 빼앗고 그리 말한다면 장군에게 폐가 되는 말이겠소만. 나는 가마를 타고 있는 입장이라서 말이오. 내 가마를 이고 있는 가마꾼들의 의견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소. 특히 그 의견이 옳을 때에는.”본래 손가(孫家)가 강남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루라도 빨리 안정을 바라는 강남 호족들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정과 맞춰 손권의 말을 얼추 짐작해본 관우는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처음 만난, 그것도 어제까지만 해도 적이었던 장수에게 본심까지 말해줄 줄은. 관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실례가 많았소.”“잠깐, 나도 장군에게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소.”손권은 목을 가다듬더니 낮게 물었다.“왜 여기로 왔소? 내가 아는 관우 장군은 의리와 절개를 중시하는 사나이요. 만약 내 진중에 단신으로 찾아왔다 죽는다면 뒷사람들이 오해하고 장군을 곡해할 것이오. 마지막에 절개를 버리려 했다는 의심이 두렵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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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싶은 것이 있어서였소.”“내 장군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니 괘념치 않고 들어줬으면 하오. 장군의 무예는 천하 뭇사람들이 우러러보고 있소. 그러나 장군이 천하, 그것도 다른 나라의 천하를 궁금해 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소. 혹시 조조의 밑에 잠시 있었던 것도 이를 위해서였소?”“그렇소.”관우의 대답에 손권은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나는 오늘 장군을 죽일 작정이오. 조조처럼 살려 보내지 않을거요.”“그럴 생각으로 왔소.”“왜 궁금해 하는 것이오?”“대왕이 천하를 하나로 하실 것이오. 그 천하에 살지 못 한다 한들 그 모양을 알고 싶었소.”오가 멸망할 것이라 받아들일 수 있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손권은 일국의 군주답게 화내지 않았다.“장군은 단순한 무장이 아니었구려. 방덕처럼 죽을 것이라 생각했소.”“훌륭한 장수였소.”방덕의 이름을 듣는 순간 관우는 깨달았다. 어째서 방덕에게 그토록 동요했던가. 닮아서였다. 유비와 만나 유비의 천하에 살려고 결심하기 전의 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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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와 협을 빼면 남는 것이 없는 인물상.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름답다. 관우는 순간 생각에 잠겼다. 그는 의협을 저버렸던가? 그건 아니었다. 유비의 말대로 이유가 필요 없고 이치로 설명되는 것이 아닌 것. 관우는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았다. 방덕은 조조의 천하에 반해 목을 걸었고 관우 역시 유비의 천하에서 꿈꾸었다. 서로 틀리지만 방향은 다르지 않았다.“관운장.”손권이 아쉬운 얼굴로 관우를 불렀다. 관우는 대답하지 않고 막사를 나갔다. 만남 전에 언질을 받았는지 손권은 더 이상 부르지 않았다. 막사 밖으로 나온 관우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수히 많은 별들이 밤하늘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담담히 밤하늘을 보던 관우는 여몽이 나오자 시선을 돌리지 않고 물었다.“여몽, 내 아들은 어찌되었소?”“반장이 붙잡아왔습니다.”여몽의 대답에 관우는 그제야 고개를 내렸다. 여몽은 복잡한 눈을 하고 있었다. 관우에 대한 경애의 마음으로 그 아들이라도 살려주고 싶은 것과 공적인 입장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관우는 그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곤 발을 떼었다. 뭐라 말하려던 여몽은 발을 빨리해 앞서 관우를 이끌었다.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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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숙적이었던 남자를 따라 걸으며 빙긋 웃었다. 손권의 천하까지 안 순간 관우의 마음속에서는 통합된 천하가 떠올랐다. 지금 천하가 솥발처럼 나뉘어졌지만 언젠가 하나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유비가 빛을 발하고 있을 터.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으나 하나 된 꿈을 그릴 수 있었다. 관우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의 별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달의 밝음에 끌려 스스로 빛을 내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처형장으로 향하면서 관우는 껄껄 웃었다. 후회 없는 삶이요, 미련 없는 죽음이었다.

223년. 관우의 복수를 위해 오를 쳤던 유비가 이릉에서 대패, 촉의 국력은 삼국 중 최약으로 내려앉게 되었다. 유비는 울분을 이기지 못해 시름시름 앓다가 제갈량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두 형제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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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쇄 • 2009년 2월 18일

발 행 • 2009년 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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