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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년대 초반 증권파동이 갖는 함의 성 승 제* <目 次> . 시대적 상황 . 증권파동 직전 상황 . 증권파동과 주식시장 침체 . 증권시장과 자본주의 4 단계설 . 맺음말 Ⅰ. 시대적 상황 1. 거래소의 탄생 (1) 서구 문물 수입의 연원 태초에 말이 먼저 있었듯이 증권이 먼저 있은 뒤에 시장이 있었다. 거래소에서 거래되는 지분증권은 회사 그 중에서도 주식회사가 발행한다. 자본주의 산업문명은 회사제도에 의해 시작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유지된다고 있는데, 자본주의 경제를 이끌고 나아가는 기업활동은 규모의 성장을 위해 필연적으로 공동기업형태에 의존하게 되며, 중에서도 주식회사를 중심으로 하는 회사형태는 대중자본을 집중시켜 주고 합리적인 경영조직을 마련해 줌으로써 기업의 무한한 성장의 가능성을 마련해주게 된다. 공개회사의 출자자들에게는 증권시장을 통해 지분을 자유롭게 처분함으로써 투하자본을 회수하여 보다 이윤이 높은 기업에 투자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으므로 회사제도는 금융자원의 효율적 배분이라는 효과를 준다. 그러나 회사 제도가 이와 같은 공리적 기능을 수행하기에는 상당한 시간을 소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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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 년대 초반 증권파동이 갖는 함의

    성 승 제*

    Ⅰ. 시대적 상황

    Ⅱ. 증권파동 직전 상황

    Ⅲ. 증권파동과 주식시장

    침체

    Ⅳ. 증권시장과 자본주의

    4 단계설

    Ⅴ. 맺음말

    Ⅰ. 시대적 상황

    1. 거래소의 탄생

    (1) 서구 문물 수입의 연원

    태초에 말이 먼저 있었듯이 증권이 먼저 있은 뒤에 시장이 있었다. 거래소에서 거래되는

    지분증권은 회사 그 중에서도 주식회사가 발행한다. 자본주의 산업문명은 회사제도에 의해

    시작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유지된다고 할 수 있는데, 자본주의 경제를 이끌고 나아가는

    기업활동은 규모의 성장을 위해 필연적으로 공동기업형태에 의존하게 되며, 그 중에서도

    주식회사를 중심으로 하는 회사형태는 대중자본을 집중시켜 주고 합리적인 경영조직을 마련해

    줌으로써 기업의 무한한 성장의 가능성을 마련해주게 된다. 공개회사의 출자자들에게는

    증권시장을 통해 지분을 자유롭게 처분함으로써 투하자본을 회수하여 보다 이윤이 높은 기업에

    투자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으므로 회사제도는 금융자원의 효율적 배분이라는 효과를 준다.

    그러나 회사 제도가 이와 같은 공리적 기능을 수행하기에는 상당한 시간을 소요하였다.

  • 그럼에도 한국은 이미 구한말 당시 서양 문물을 상당한 정도로 소개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던

    바, 상법학 분야에서도 적지 않은 문헌이 발견되고 있을 정도였다. 오욕의 역사를 겪었지만

    그것은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 아래에서 어쩔 수 없는 곤욕이었을 뿐 구한말 당시에도 치열한

    노력이 경주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위 개항이 1876 년인데 이미 1882 년에 서양의 회사

    제도를 소개한 문헌들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개항전 이미 자본주의의 맹아가 보였다고

    평가되는 일본과 달리, 자급적 농경위주 경제체제하에 폐쇄성을 줄곧 유지해왔던 조선은

    생면부지의 서구문물을 흡수하고 정착시키는 기나긴 진통기를 겪지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반면 일본은 당시 열강들로부터 강요된 불평등조약을 시급히 개정하고자 서양식 법전

    제정원칙(소위 泰西主義)에 따른 법전 제정에 온 국력을 기울인 끝에 영국과의 불평등조약

    재개정에 성공하는데, 그 개정조약 자체가 일본이 서양식 법률 제정을 조건으로 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본은 영국의 치외법권을 종료시키면서 관세 자주권을 회복하는 등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조약들을 개정해 나갔다. 이는 소위 Great Game 으로 불리워지는,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한

    19 세기 영국의 세계 전략에 편승하는 행운을 거머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원동력은 앞서

    적었듯이 서구식 법률을 베끼다시피 신속히 채택⋅흡수하면서 서구 열강 특히 영국으로부터

    파트너로 낙점받은 덕이었다. 일본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제국주의 열강 대열에 합류하는 등

    일약 대성공을 거두었던 것데, 이는 구한말 조선의 어두운 행로와 명료한 대조를 이룬다.

    (2) 증권거래

    1) 해방전 증권거래

    1920 년 5 월 주식회사 경성주식현물거래시장이 설립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증권거래소에

    가까운 의미의 것이었다. 1932 년 1 월에는 종전의 경성주식현물거래시장과 인천米豆거래소를

    흡수하여 朝鮮取人所를 설립하였면서 종전의 전자를 유가증권시장으로 하고 후자를 米豆거래소로

    지정하였던 바, 朝鮮취인소는 그 조직상 회원제를 원칙으로 하였으나 종전의 두 현물시장을

    합병하는 과정에서의 경과조치로서 주식회사제로 발족한 이래 끝내 주식회사로 존속하였다. 다시

    1943 년 7 월 일본 제국주의의 ‘朝鮮證券取人所令’ 에 의하여 朝鮮證券取人所가 설립되었는데,

    투기를 배제한 營團 적 성격을 띤 특수법인으로 조직되었으며, 軍需國策회사의 주식의

    인수ㆍ매출 및 모집 등의 발행시장기능까지 부여하였고 단기청산거래를 폐지하면서도

    장기청산거래만은 존속시켰는데 다시 1946 년 1 월 美軍政法令 제 43 호로 해산되고 다시 같은

  • 달인 1 월 韓國興業銀行이 청산ㆍ관리하게 되었고 1954 년 4 월 조선증권취인소청산위원회가

    구성되어 1957 년 2 월 청산을 완료하였다.

    2) 해방후 증권거래소

    증권을 거래하는 회사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대한증권주식회사가 1949 년 11 월에 설립되었는데,

    증권거래소도 없었던 당시에 증권업 면허를 준 것은 전시에 주식이 산재되어 개인끼리의 매매에

    따르는 폐단이 발생하는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일본 제국주의 하에서 주식자본은 거의

    일본인의 손에 의한 것이었고 해방후 적산기업이 정부 관리하에 들어가

    정부소유주식(귀속주식)으로 고정된 여건에서 공식적인 주식의 유통이란 생각할 수 없었으며

    다만 산재된 전시중의 주식의 산만한 사적거래로 인한 공정가격체계의 문란을 방지하자는

    의도에서 증권회사의 점두거래가 이루어졌을 뿐이라고 하는데, 다만 1951 년 부산피난당시에도

    4 개의 증권회사가 있었으며 그 취급 대상이 토지개혁(1950 년 초에 이루어진 농지개혁)의

    보상으로 교부된 地價증권과 전시재정적자를 보충하기 위하여 발행한 건국국채의 매매일

    뿐이었다고 한다.

    해방후 나타난 증권회사들이 취급하는 증권거래의 주된 품목이었던 地價증권은 1950 년 1 월

    대한민국 정부 초대 농림부 장관인 조봉암에 의하여 이루어진 농지개혁의 부산물이다. 남한이

    실행한 농지개혁에 대하여 보자면, 이미 모순이 누적되었던 구한말은 물론이고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 총독부는 그들의 식민지 통치를 위하여 지주들에게 경제적 안정을 보장해고자 함으로써

    당시 소작농들은 오늘날로서는 상상을 초월한 수탈로 인한 열악한 생존상황에 놓여 있었고,

    한반도 전체는 해방과 더불어 사실상 혁명전야의 상황에 놓인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남북한 모두 농지 또는 토지개혁은 필수적인 상태였는데 이에 대한 인식은 일반적 논의와는 달리

    미군정도 마찬가지일 정도이어서 小作減租 등 대책과 아울러 농지개혁을 누차 시도하였으나 남한

    지주층의 반발로 인하여 추진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던 것을 실행하였던 것이고 그 대가로서

    地價證券이 지주들에게 지급되었다. 이마저도 전쟁에 따른 인플레이션으로 인하여 지주들이

    그것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할 수 없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6 ㆍ 25 로 인하여 남한은 마지막 남은

    한톨까지도 모두 사라져버렸다고 요약할 수 있다.

    1953 년 11 월 설립된 대한증권업협회에 의하여 營團 조직의 대한증권거래소가 12 개

    상장회사로써 개소(1956.3.3)하였으나 주식분산이 되지 않아 국채를 주종으로 하는 국공채위주의

    시장으로 운영되어 1961 년 상반기에도 채권거래가 70% 였는데, 1962 년 1 월 15 일

    증권거래법이 제정됨에 따라 증권거래소는 주식회사 형태로 대한증권거래소가 다시 출범하였으며

  • 그 주식이 바로 증권파동의 주된 소재가 된 것인 바, 그 충격파로 인하여 한국증권거래소라는

    이름의 公營制 형태로 다시 1963 년 4 월 27 일 재출범하였다.

    2. 통화개혁

    1950 년대의 경제적 과제는 전쟁복구와 생산능력의 회복을 통한 자립적 경제구조를 수립하는

    것이었지만, 6 ㆍ 25 전후 복구와 재건에 필요한 자금은 원조를 통하여 조달되었다. 사실은 이미

    그 이전부터 경제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광복 후 미군정하에서 남한경제는 일본제국주의

    지배하에 일본에 종속된 상태로서의 식민지 경제구조와 생산체제도 그나마 급격히 위축되고

    불안한 상태였으니, 예컨대 1946 년은 미곡과 수산물 생산량이 1940~1944 의 연평균에 비해

    36.5%와 45.4%, 광업생산량은 그것의 23.3%, 그리고 공업부문은 1939 년 대비 25%에

    불과하였으며 일본제국주의에 종속된 무역부문의 위축은 더 심각하였다고 한다. 아울러 물가도

    폭등하였다.

    한국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독자 화폐 발행과 관리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제시대부터

    사용되어 오던 원화(일본 엔화와 1:1 교환된 식민지통화)가 한국전쟁기까지도 사용되는 등

    통화체제 수립 자체가 시급한 사안이 되었기 때문에, 통화개혁이 1953 년에 실시되면서 남한

    정부가 임시적인 정부가 아니라는 것과 남한이 과도적 체제가 아닌 독립적 경제단위로서

    출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한국은 한국전쟁기간 발행된 통화는 투자와

    소비자금으로 활용되지 못한 채 부동화(浮動化)되어 있어서, 대부분 농민이었던 일반 대중은 현물

    화폐를 활용함으로써 물가와 경제권역도 2 중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통화정책을

    정상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우선 정부가 발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급선무였는데, 이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증발된 군사비로 촉발되었고, 이 군사비는 한국은행차입금(통화발행)과

    현물세로 충당되었는데 UN 군 주둔비가 ‘UN 군 대여금’ 항목으로서 전체 통화량의 70%를

    차지하였다. 1945 년 7 월을 기준으로 삼으면(100), 통화발행고가 1952 년 12 월말 21,592 에

    그리고 소비자물가지수는 무려 112,834 에 달하였던 바, 이는 물가상승률이 통화량 증가율의

    5.2 배에 달한다는 의미이며, 그 결과 사재기와 투기 그리고 달러를 사들이는 환투기가 발행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다. 물론 전쟁으로 인한 화폐발행고의 폭증도 물가앙등에 한 몫 하였음을

    찾아볼 수 있다.

    휴전 전 정부가 부산에 머물던 당시, 기습적인 액면가 절하(소위 리디노미네이션) 방식으로

    통화개혁이 실시되었는데, 이는 구권 100 원(圓)을 신권 1 환(圜)으로 교환하는 방식으로

  • 이루어졌으며, 그 목적은 지하에 머물던 음성자금을 포착하여 세원을 확보하고 고리대금업의

    자금축적을 차단함으로써 산업자금으로 물줄기를 돌리고자 하였던 것으로서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과잉유동성이 투자자금으로 유도되지 못하고 부유층은

    이미 자산을 상품이나 달러 화로 바꾸어 수입이 증가하였으며, 농민이 대부분인 민간 영역은

    자급자족적인 현물경제가 지속되었던 것이기에 가계 및 상인이 축적한 민간자본은 사금융

    시장에서 유통되었으며 은행이 투입한 자금도 상품유통과정에서 인플레이션에 기반한 이득만을

    추구함으로써 산업자본화하지 못하고 상업자본 영역내에서만 유통되었던 탓에 은행은

    민간부문에서 따로 놀아 정부재정에 종속되고 사금융 시장에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다.

    3. 공적ㆍ사적 신용조직

    원조물자의 수입면허로 발생한 독점이윤의 일부는 은행주식으로 전환되었으며 대주주인

    독점대기업에 대한 특혜융자의 가능성이 이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여기서 소외된 중소기업,

    중소상인, 서민들은 공금융을 통한 자금조달이 사실상 불가능하였는데, 이는 만성적인

    자금초과수요상태에서 정부재정자금이나 중앙은행으로부터 차입에 의존하였던 은행의 자금이

    사채이자율에 비해 낮아서 대출받는 자체가 이권이었기 때문이다.

    공금융을 통한 가계자금 공급경로가 차단된 상태에서 사채금리는 상승하였고 저축자금도

    사금융시장으로 유입되었다. 대표적인 민간신용조직인 契는 개인신용에 의존할 뿐 법적 보호에는

    취약하였으므로 어떤 계 모임이 ‘깨질’ 경우 전체 계 가입자이 위험에 노출된다. 1954 년

    5 월에는 휴전이후 최초의 총선이 실시되었는데 선거자금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발생을

    방지하고자 은행융자가 중지되었고 투기자금의 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밀수 단속도 엄격해졌는데,

    이 때문에 선거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契를 조직하였던 것이 깨지고 계원과 경찰이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계조직에 대한 불안감이 일파만파로 번지면서 契 파산 및 자금회수요구로

    인해 인쇄업자 및 소상인의 파산이 속출하였다.

    4. 한국전쟁과 완전한 파괴로 인한 만성적 자금초과수요

    당시의 만성적인 자금초과수요는 한국전쟁과 그로인한 원조물자 대량유입 등으로 인하여

    촉발되었다. 이 상태는 산업화 또는 공업화가 마무리되고 IMF 외환위기로 인한 보수적

    기업경영이 요청되기 시작함으로써 설비투자가 주춤하게 된 1998 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로

  • 인하여 한국의 법제에는 다른 나라에서 찾기 힘든 몇가지 제도들이 탄생하고 사용되어왔다.

    예컨대 양도담보, 계, 약속어음의 광범위한 사용이 그것이다. 어음제도는 진성어음의 경우

    실물수령시기와 지급시기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금융위기 당시 기업 파산이 도미노 현상처럼

    연쇄되게 하였던 원흉 중 하나로 지목되면서, 1997 년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대폭 축소시키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약속어음의 사용이 과거보다 대폭 축소된 이유는, 오직 만성적인

    자금초과수요 현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며 정부 정책에 힘입은 것이라고 판단하면 안된다.

    만성적인 자금초과수요가 사라짐과 아울러 그 이전 한국에서의 산업자본에 대한 국가 차원의

    “몰빵” 투자에 의존한 leverage 극대화 효과와 그에 따라 고도성장도 종언을 고한 것이다. 다만

    왜 한국에서 인플레이션은 더 심했을까. 1970 년대에는 30~40%의 고도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었다. 비록 1980 년대부터 소위 한자리수 물가를 달성했다고 당시 정부는 자랑했지만,

    대만, 홍콩, 싱가폴 등 한때 아시아의 4 룡으로 지칭되던 신흥공업국들 중 한국에서만 유독

    극심한 고물가 현상이 벌어졌으며 최근의 중국이 고도성장을 달성하고 있는 사례에서도 과거

    한국에서 보였던 30~40%를 오르내리는 고물가 현상은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1940 년대말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중국의 자본과 자본가들은 대만, 홍콩, 싱가폴 등지로 피신하게 되었으며

    때문에 중국의 공산화와 아울러 이들은 자본축적을 이룩하게 된 셈이었다. 그렇다면 중국은 왜

    고율의 인플레이션에 시달리지 않았을까. 최근 중국의 사례 역시 세계 공업화의 축으로써 그

    동안 돌진적 경제성장을 이룩해 왔다. 우리와 다른 점은 중국은 세계 투자자금의 대부분을

    빨아들였던 것이다. 사실상 자본축적이 선행되지도 않고 충분한 자본공급이 이루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산업화 또는 공업화가 진행되었던 나라는 세계 역사상 한국이 유일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의 경우 일본은 식민지 정책을 용이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사실상 소수의 지주와 대다수의

    소작농으로 분할 통치하면서 계급분리적 상태를 조장하였다. 그로 인하여 남북한 양측 모두

    농지를 위주로 한 농지개혁(남한)과 전체 토지를 대상으로 한 토지개혁(북한)을 하지 않으면 안

    될 혁명적 상황에 봉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존을 위협받는 심각한 착취하에 놓여있던 국민의

    대다수를 점하고 있던 소작농들은 해방후 그 동안의 착취상태의 개선을 바라지 않을 수 없었으며,

    남북한 양측 모두 그것을 외면하면 체제가 붕괴할 수도 있었던 상태에 놓였다.

    토지개혁 및 농지개혁에 대한 것은 아래에서 필자의 다른 글에서 적은 내용을 전재하겠거니와

    자본축적과 관련하여, 남한은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파괴되었을 뿐 아니라, 농지개혁으로 인하여

    자본축적의 가능성은 소멸하였다. 토지개혁 또는 농지개혁의 의미하는 바와 같이 토지의

    재분배는 해방이라는 혁명적 상황하에서 불가피한 선택일 수 밖에 없었지만, 산업화를 위한 자본

  • 축적으로는 전혀 연결되지 못한 것이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남한의 농지개혁은 전국민 중

    대다수를 점하는 소작농의 생존권을 위하여 불가피했던 것은 당연하지만, 아무튼 지주들에게는

    얼마 안 되는 채권을 분배했을 뿐이었고 그 채권은 6 ㆍ 25 전쟁후 전쟁인플레이션과 맞물려서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Ⅱ. 증권파동 직전 상황

    1. 대한증권거래소 설립과 1958 년 국채파동

    1950 년대 경제의 구조적 불안요인은 만성적인 재정적자와 원조물자의 불안정한 공급이었고

    재정적자는 군사비 부담의 영향이 컸으니, 군사비가 세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53 년에는 73%,

    1956 년에도 60%에 달하였다. 통화증발의 요인을 차단하면서 정부지출을 확대하기 위한

    방법으로, 정부는 금액과 조건을 국회가 의결하는 방법으로 국채를 1950 년부터 매년 발행하였다.

    극심한 전쟁 불황하에서 1956 년 대한증권거래소가 설립되었고 여기서 정부의 국채가

    주거래종목으로 부상하였다. 거래소 개장시에는 주식 12 개 종목과 국채 3 종목이 거래되었으며,

    거래할만한 증권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원리금 상환의 안정성과 이자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국채의 인기가 상승하였는데, 국채 투자수익률은 사채금리를 능가할 정도였다. 식민지기와

    마찬가지로 대한증권거래소에서도 증권거래는 청산거래를 위주로 이루어졌는데, 이 청산거래는

    오늘날의 선물거래와 유사하였고 공매매(空賣買)가 가능하였기 때문에, 1958 년 1 월 ‘1.16

    국채파동(소위 제 10 회 국채파동)’은 결국 주식없이도 매도할 수 있고 돈없이도 매수할 수

    있었던 공매매 방식으로 인한 투기성 자금 유입으로 촉발된 것이다.

    한편 이는 전후 점차 경제안정에 따라 시중금리가 인하되고 그에 따라 浮動자본이 국채로 쏠리게

    된 탓이고 이로 인하여 1961 년까지 대한증권거래소는 국채시장으로 화한 것인데 이나마

    1958 년 11 회 국채 등 전술한 1 ㆍ 16 국채파동으로 소송이 잇다르고 업자의 도산도 빈발하여

    심각한 침체로 접어들어간다.

    2. 5 ㆍ 16; 1962 년 통화개혁과 자본시장육성시도

  • 1958 년 미국이 달러방위를 목표로 정책전환하면서 환율인상과 긴축정책 등을 요구하였고

    한국은 장기적 경기침체에 봉착하였는데, 1961 년의 5 ㆍ 16 은 농민, 중소상공업자 등 원조의존적

    경제구조하에서 소외된 계층의 불안과 독점대기업에 대한 반발심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5 ㆍ 16 직후 구성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3 개월 내에 농민과 중소기업 등 서민을 위한

    경제조치를 마련하겠다고 공언하였으며, 농민의 고리사채를 정리하고 부정축재자 단속 그리고

    중소기업에게 자금을 제공하겠다는 취지하에 농협과 중소기업은행을 설립하는 등, 1961 년 한 해

    동안 농민과 중소기업에 대한 신용배분을 급격히 증가시켰다. 1962 년에는 구권 10 환을 신권

    1 원으로 교환하는 통화개혁을 실시하였다.

    한편 1962 년 1 월 15 일 증권거래법 공포에 따른 대한증권거래소 출범은 종래의 영단제에서

    주식회사제로 전환하였으며 이는 한국의 증권시장이 종래의 침체했던 국채시장으로부터

    주식시장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으나, 1961 년 5 ㆍ 16 이후 소위 혁명세력은 통화량을

    2,245 억환(61.5.15)에서 1 년후 3,398 억환(1962.5.15 현재)으로 급증시켰다. 더구나 1960 년

    4 ㆍ 19 혁명부터 5 ㆍ 16 에 이르기까지 소위 부정축재기업체 환수를 외쳐 온 탓에 그러한

    자본들의 태업과 그들에 기식한 중소상공업자의 자금융통의 길이 막혀서 경제침체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등 경제침체하에 급속한 통화팽창으로 말미암아 거대한 浮動자본들이 이윤의 돌파구를

    찾는 대기상태에 있었다. 이를 부채질하듯이 군사정부는 민간자본동원의 주요정책으로서

    증권시장육성에 눈을 돌리면서 거래소를 주식회사조직으로 개편하는 한편 기술적으로 증권 붐을

    일으키는 정책을 취하고자, 은행주 및 정부관리기업체 배당실시ㆍ자산재평가를 재실시하여

    평가차익추구와 이익배당보장법 그리고 은행법 개정에 따른 은행보유자금을 주식토자로 유치하고,

    국영기업체의 주식공개와 기업자산축적의 보장조치 등 유도정책을 연달아 내놓았다.

    전술한 이유로 증권시장의 장래성이 호평받게 되면서 거래금액이 폭증하자 대한증권거래소의

    자산내용이 우량한 것처럼 보이게 되자 대한증권거래소는 급히 增資하고 그 增資한 것이 매력을

    불러 일으키면서 61 년 2 월부터 액면가를 넘기 시작한 대한증권거래소 증권시세는 61 년 최저가

    28 전으로부터 62 년 5 월파동 직전에 60 환 이상으로 되었으니 실로 200 배, 액면가로 보더라도

    100 배를 넘기게 되고 당시 한국전력주도 50 여배로 치솟는 현상을 보였던 것이다.

    3. 1963~1964 년 외환파동

  •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일련의 정책은 대부분 실패하였는데, 고리채정리사업과 통화개혁은 군사정부

    스스로 실패를 자인한 바 있으며 사금융은 개선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기업의

    자금압박만을 가중시켜 경기가 위축되었고, 원조가 단절된 탓에 외화부족이 심각해져

    1963 년초에는 외환고갈로 인한 경기침체가 우려되었다. 외화자금이 고갈되고 국내저축은 빈약한

    상황하에서 정부는 신용배분 과정에 직접 개입하는 강력한 금융통제를 시행하기로 하고

    경제개발계획을 뒷받침하고자 우선 정부가 금융권을 장악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일반은행

    대주주의 의결권을 제한하고 은행감독원장의 금융회사 사장 선임권을 규정하며 부정축재자

    재산환수로써 일반은행 보유주식을 정부에 귀속시키면서, 금융통화위원회를

    금융통화원영위원회로 변경함과 동시에 외환정책 수립권을 포함한 통화금융정책의 결정권을

    장악할 뿐 아니라 산업은행의 자본금을 증액하면서 외자조달 권한을 부여하는 등의 방법으로

    신용공급능력을 확충시켜나갔다. 이어 1964~1967 년 환율 현실화, 금리현실화, 무역자유화 등을

    통해 예금 규모를 팽창시키고 유휴 통화량을 저축으로 유인하였는데 특히 금리현실화는

    공금융시장을 일거에 확장시킬 수 있는 조치로서, 1965 년 이후 5 년간 명목 GNP 에 대한

    금융자산잔액 비율이 2 배 이상 증가하고 통화량(M2)도 3 배 이상 증가하였다.

    Ⅲ. 증권파동과 주식시장 침체

    1. 거래소 상황

    대한증권거래소는 1956 년 3 월 3 일 공식 출범하였는데, 1958 년 1 월 17 일 소위 “1 ㆍ 16

    국채파동(소위 제 10 차 국채파동)” 에도 흔들렸듯이 주로 국채중심의 거래소로서 역할하였으며

    청산거래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큰 취약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주식분산이 이루어지지 않아

    국채를 주종으로 하는 국공채위주의 시장으로 기능하여 1961 년 상반기까지도 채권거래가

    70%를 차지하였다. 이 증권거래소는 개장 당시 상장회사가 12 개였으며 1961 년 증권파동

    당시에도 17 개에 불과하였을 뿐 아니라, 증권파동으로 인한 여파로 증권시장의 침체가 지속되어

    60 년대 내내 유사한 상황이었다. 1970 년대에 들어서야 정부가 자본조달을 위한 창구로서의

    역할을 정착시키기 위한 강력한 기업공개정책을 견지(물론 경제성장에 따른 상장에 적당한

    회사가 대폭 증가한 시기인 것과 맞물려서) 함에 따라 비로소 상장회사 수 및 상장자본금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 1970 년대 증권거래법은 이 글이 다루는 부분이 아니기에 여기서는 상세는 略하지만 정부는

    회사상장을 유도하여 자본시장 규모를 키우기 위하여 당근과 채찍을 병용하면서 상장을 독려하기

    위하여 기존의 경영주들로 하여금 일종의 경영권을 보장하는 규정들을 대폭 도입하였다가

    1990 년대에 들어서서 폐지시킨 바 있는데, 이와 같은 경영권 보장을 위한 조항들의 폐지는

    1980 년대 고도경제성장에 자신감을 얻은 정부의 “과도한” 자본시장 자유화 정책과 맞물려서

    오늘날 주식시장시가총액 대비 외국인 비중이 과도하여 외부 경제효과에 한국경제가 휘둘리는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각설하고 후술하듯 증권파동 당시의 거래금액은 그나마 대부분 증권거래소 주식이었다. 아래

    기술과 같이 1961 년 증권거래소가 주식회사 형태로 변경되기 전까지는 소위 영단제

    증권거래소로써 운영되었는데 이는 증권단, 금융단 및 보험단이 출자하였다는 의미이다. 1961 년

    증권거래법 제정시 주식회사 제도로 전환하였으나 바로 동년의 증권파동을 계기로, 주식회사

    제도를 채택한 증권거래소가 영리를 목적으로 공정한 시장관리를 소홀히 하였다 하여 1963 년

    5 월 공영제 한국 증권거래소로 발족되었다. 그 후 정부의 공기업 민영화 계획에 따라 1988 년

    3 월 회원제 형태의 소위 무자본 특수법인으로 전환되었다.

    2. 증권파동의 개요

    증권거래소의 주요 거래종목은 거래소 자체의 주식인 대한증권거래소 주식(소위

    “대증주”)이었는데, 전체 거래액에서 증권관련종목(대한증권거래소,

    증권금융주식회사(연합증권금융의 주식으로서 소위 “연증주)))이 차지하는 비중이 50%를 넘었고

    1962 년에는 여기에 한전주식까지 포함한 3 종목의 집중율이 93%에 달하였으며, 액면가를

    밑돌던 주가가 1962 년 일제히 상승세로 돌아서고 대한증권거래소와 한전의 주가는 4 배 가까이

    상승하였다. 주식시장은 이 사태가 발생하기 진전에는, 1961 년의 5 ㆍ 16 으로 인한 정치변혁과

    그에 뒤이은 전술한 바와 같은 긴축정책으로 인해 마비상태에 빠져 있었다.

    우리나라의 증권시장은 당시 모든 제도가 미비한 채 좁은 유통시장에 한정한 것으로서

    자본시장에서 증권자본의 기능은 이미 상실한 것이어서 제 1 차 경제개발계획에서도 내자동원 즉

    장기자산조달에서도 하등의 공헌을 하지 못하였고, 화폐ㆍ금융시장과의 연계하에 직접금융을

    담당하여 현대적 신용기구를 고도화하는 것은 더욱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었다.

    소위 증권파동은 1962 년 정부가 제 1 차 경제개발계획을 시행하면서부터 자금수요가 급증하는

    여건 속에서 대부분 정부가 소유하였던 한국전력의 주식 등을 급매하는 것으로부터 활기를 띠는

  • 모습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이 속칭 대증주와 연증주에 대한 매기를 불러일으켰고 거물급

    투기자들의 책동도 곁들여져서 신주의 권리까지 감안한다면 반년만에 5~6 배로 오른 주식이

    나타났으며, 1962 년 5 월 발행된 대증주 신주는 액면가의 30 배에 公賣買되기도 하였다.

    5 월말에는 당시 청산거래하에서 월말에 受渡決濟하기로 약속한 매수자가 결제하지 못하면서

    주가는 급전직하로 폭락하여 다시 원점으로 떨어지며 증권거래소와 증권금융회사는 빚더미 속에

    빠지게 되었으며, 마침내 1963 년 2 월에는 증권시장이 마비 상태에 빠진 채 장기휴장에

    돌입하였다.

    3. 원인 및 전개

    증권거래소가 주식회사제로 전환되면서 일부 증권업자가 대한증권거래소 주식을 매점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법이 통과되기 직전에 1961 년 12 월 26 일 대증주와 한전주가

    폭등하는 움직임이 나타났으며, 1962 년에 접어들어 대증주, 한국증권금융주식, 한국전력주 세

    종목에 거래가 집중되면서 대증주와 한전주가 폭등하였다. 거래소는 증거금 제도를 도입하고

    가격상한선을 설치하였지만, 상승세는 멈추지 않았다. 당시 일흥증권과 통일증권이 농협으로부터

    한전주를 높은 가격으로 매도하기 위해 실물거래는 물론 청산거래까지 행하면서 한전주를

    매수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통해 막대한 차액을 얻을 수 있었다. 더불어 증권거래소 증자설에

    자극을 받아 한전주 매매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누린 증권업자들이 대증주 매입에 뛰어들었다.

    이들의 대증주 점유율은 점차 높아졌고 대증주 가격은 당연히 급등하고 거래액도 급등하였다.

    당시 증권거래소 주식회사의 대주주는 주식시장의 과열을 수습하기보다는 주가상승에 따른

    이익을 향유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을 뿐이었으니, 증권거래소는 주식회사 조직으로서

    트리미엄을 차지하는 증자를 시도함으로써 대증주의 폭등을 부추기고만 있었으며, 대증주의

    상장폐지까지 검토하겠다고 말하기도 하였으나 사실상 주주 반발을 이유로 무산시키는 등

    주식시장 과열을 수습하기보다는 주식매집을 통해 폭리를 취하는데에만 관심을 보이는 자세를

    보이는 등의 이유로 인하여 사태는 걷잡을 수 없었다. 이로써 1962 년 2 월 증권거래소의

    거래액은 85.4 억환이었지만 불과 두 달 뒤인 1962 년 4 월에는 1,184.5 억환의 거래액을 기록할

    정도였다. 증권업자는 보통 거래에서 이연료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결제를 연기할 수 있지만,

    매도자가 매매성립 다음 날에 주식을 가지고 오면 매수자가 결제를 하지 않더라도 거래소가 이를

    대신해서 결제해 주었다. 거래소는 거래량의 폭증에 따라 결제자금을 늘리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것을 증자를 통해 해결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래서 거래소는 신주를 발행하여 구주주와

  • 종업원에게 배당하고 그 나머지를 액면가 이상으로 처분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구주의 가격이

    1962 년 3 월 9.2 환에서 4 월에 42.5 환으로 폭등하였다. 당시 주식시장이 과열되고 있었으나

    주식회사 대증주 가격 폭등으로 결제대금이 늘어나서 거래소의 대주주이자 대증주 매수

    그룹이었던 통일증권, 일흥증권, 동명증권은 물론이고 다른 증권회사들도 결제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고, 시중은행으로부터 차입을 통해 결제 불이행 문제를 일시적으로

    해결하였다. 그러나 5 월에 접어들어 계속 거래액이 증가하여 4 월에 비하여 2 배 가량 늘어나

    2,520 억환에 이르렀고 결제대금은 850 억환이었는데, 이 중에서 246 억환이 결제되지 못하는

    결제불이행 상태에 빠져 증권거래소는 6 월 1 일부터 휴장에 들어갔다.

    청산거래의 수도결제에 책임이 있는 증권거래소는 결제를 재개하기 위해 재무부장관에게

    수도결제대금을 긴급히 융자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정부가 280 억환을 지원하면서 5 월말의

    수도결제는 6 월 4 일에 종결시켰지만, 여전히 6 월말 결제액 390 억환이 문제였다. 이

    결제대금은 증권업자의 협의와 정부의 지시에 따라 解玉이 결정되어 증권파동은 비로소

    수습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와 같이 증권파동은 정부와 시중은행의 구제금융과 해옥이라는

    비상조치로 간신히 수습하였으나 거래소 조직, 청산거래, 증권금융 등 제도상의 미비점을

    드러내었고, 주식시장의 발전에도 오랫동안 역효과를 미쳤다. 우선 증권거래소와 주식시장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여 장기간 증권투자자의 이탈을 초래하였으며, 증권시장을 통한 자본조달의 길을

    막힘에 따라 정부가 은행으로 하여금 정책금융기관화하게 되는 동기를 주게 된 것이고 정부가

    외자 동원에 주력하는 계기로도 작용하였다.

    증권파동 사태를 공식적인 상황에 대하여 시간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62.1.15 증권거래법 제정

    1962.5.31 증권파동 결제 불이행 등 문제화

    1962.6.1 거래중지

    1962.6.6 정부 증시정상화 방안

    1962.8.31 증시휴장

    1962.9.4 증시 재개장

    1962.11.28 증권거래세법 제정

    1963.2.25 주가폭락으로 증시 휴장

    1963.4.27 증권거래법 1 차 개정

    1963.5.8 한국증권거래소 개장

  • 1963..7.20 증시 가격제한폭 확대

    1963.10.14 은행 대주주 주식양도 금지조항 폐지

    1964.10.31 증권거래법 2 차 개정

    1965.6.28 증권업계 무기한 휴장결의

    1965.6.29 증권거래소에 대한 현물출자 우선이행 결제

    요컨대 아래 증권거래법 제정 상황에 대하여 적었듯이, 증권거래법이 제정되고 그 시행과 동시에

    대한증권거래소가 개소하였는데 개소 이후 한달이 조금 지나서 거래소 주식 자체가 주된

    투기주식으로 등장하여 거액의 결제 불능의 사태를 초래한 것이 소위 증권파동이다. 종전의

    영단제 형태에서 주식회사 형태로 전환하면서 상장된 대한증권거래소 주식에 대한 투기가

    파국적인 충격파를 던진 것이다.

    1962 년 5 월 증권파동은 그 후 끝없는 충격을 미쳐 장기간에 걸친 증권시장 불신의 근본요인이

    되었으나, 1961 년 상반기까지만 해도 70%를 점하던 채권거래 비중이 1962 년에 이르면

    대한증권거래소 주식 거래를 중심으로 하여 주식거래비율이 90%를 넘게 되었지만, 영리위주의

    주식회사제를 시정하고 투자자보호와 公正한 관리를 위하여 1963 년 5 월부터는 公營제의

    한국증권거래소로 개편되는 모습을 보였으나 1967 년 증권거래량이 100 억원에도 미달하는 등

    60 년대 내내 증권시장은 최악의 상태로 低迷하였다.

    Ⅳ. 증권시장과 자본주의 4 단계설

    1. 1962 년 제정 증권거래법

    증권거래법은 법률 제 972 호로서 1962 년 1 월 15 일 제정되고 동년 4 월 1 일 시행되었다. 동

    1962 년 제정법은 제 13 조 및 제 44 조에서 거래소가 주식회사로 설립될 것을 정하였다.

    납입자본금 5 천만환 이상의 주식회사로 한다고 규정(동조 제 1 항)하였고, 재무부 장관의 허가를

    얻도록 하였다(제 13 조 제 2 항). 아울러 이 주식회사의 자본의 반액이상 또는 의결권 과반수

    이상은 대한민국의 법인 또는 자연인에게 속하도록 하면서 임원 전원이 대한민국 국민이어야

    한다고 하였다(동조 제 3 항). 1962 년 증권거래법은 “유가증권의 발행과 매매 기타의 거래를

    공정하게 하며 유가증권의 유통을 정상화시켜 국민경제의 발전과 투자자의 보호를 목적으로 한다”

  • 고 천명(제 1 조)하였는데 이와 같은 동법의 목적은 2009 년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이 출범하면서 증권거래법이 폐지될 때까지 거의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아무튼 1962 년 증권거래법 제정에 대해서 거래소 육성에 대한 기대가 발생하였던 데다가

    유휴자금이 투자처를 찾지 못한 채 가격변동폭을 조작하여 차익을 얻으려는 증권회사들의 작전이

    사실상 공개적으로 주목받으면서, 증자설 및 주식시장 육성에 대한 낙관적 기대가 널리 유포되는

    사회적 분위기까지 겹치면서 결국 5 월에는 공매매의 한계가 드러나 결제불이행 사태가 속출하는

    등 파국에 직면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증권거래소는 다시 준 공영적 성격을 갖는

    한국증권거래소로 전환되고 1963 년 개장되었으나 주식시장은 침체를 면하지 못하고

    1964 년까지 불과 17 개의 상장회사만의 주식이 거래되는 수준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는데, 이는

    기업의 자금조달을 위한 발행시장이 성숙하지 못한 때문이다.

    2. 증권파동 이후 증권거래소 형태변화

    (1) 1963 년 4 월 개정증권거래법상 공영제 형태의 주식회사

    증권거래소가 주식회사임을 규정하였던 1962 년 증권거래법은 1963 년 4 월 27 일에 개정되었다.

    증권거래소가 주식회사임을 규정하였던 1962 년 증권거래법 제 44 조는 1963 년 개정법에서

    “주식회사는 법인으로 한다(제 44 조 제 2 항)” 고 변경되었다. 한국증권거래소의 목적도 그

    전년의 증권파동을 의식한 듯, “유가증권의 공정한 가격의 형성과 안정 및 그 유통의 원활을

    기하기 위하여 한국증권거래소를 둔다(제 44 조 제 1 항)” 는 주의적 규정을 두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1963 년 개정법 제 13 조 제 1 항은 “증권업자는 발행된 주식의

    총액이 2000 만원 이상의 주식회사로 한다” 는 규정을 두었으나 상장만 폐지한 형태이다.

    증권시장의 발달 또는 자본시장의 발달의 역사는 한국경제 발전의 각 단계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정부의 자본시장육성책에 의존하였다.

    (2) 자본시장육성법(1968.11 제정)과 기업공개촉진법(1972.12) 제정

    재본시장육성에 관한 법률(이하 ‘자본시장육성법’)이 제정될 때까지 증권시장은 유통시장에

    한정되었으며 그것도 미비하여서 발행시장은 1968 년 이전에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으니, 주식

    공모는 전무하였고 약간의 신주발행도 舊주주의 인수 또는 무상증자에 의한 것일 뿐이었고

    국공채발행조차 강제인수 또는 첨가소화에 의해 발행한 非자율적인 것이었다. 증권시장이 유통과

  • 발행시장 양 측면에서 현대적인 의미에 가깝게 된 것은 기업공개촉진법 제정 이후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3) 1988 년 1 월 개정증권거래법상 무자본특수법인

    증권거래소는 회원조직으로서의 법인이 되었다(1988 년법 제 71 조 제 1 항). 동조에는

    증권거래소는 영리를 목적으로 한 업무를 영위하지 못한다(동법 제 73 조 제 2 항)고 함으로써

    증권파동의 상흔이 남아있는 조항이 있다(이 조항은 1987 년 11 월 28 일 개정에서 삽입되었다).

    (4) 2006 년 4 월 한국증권선물거래소법 시행

    2005 년 3 월 31 일 제정되고 2006 년 4 월 1 일 시행된 한국증권선물거래소법에 의하여

    증권거래소의 형태는 물론 선물거래소와 같이 통폐합도 되었으면서 동시에 다시금 주식회사

    형태로 전환되었다. 상술한 증권거래소가 영리를 목적으로 한 업무를 영위하지 못한다는

    증권파동의 상흔이 남겨진 조항은 사라진 셈이다. 물론 동 한국증권선물거래소는 유가증권의

    매매거래 및 선물거래에 있어서 공정한 가격의 형성 및 원활한 유통을 위하여 설립(동법 제 4 조

    제 1 항)하였다고는 하고 있다.

    기존의 한국증권거래소와 선물거래소와 코스닥까지 관장한다(동법 제 2 조). 자본금 1 천억원

    이상의 주식회사일 것을 정하고(동법 제 4 조 제 2 항) 있으며, 본점을 부산광역시에 두고 있다.

    거래소의 의결권 있는 발행주식총수의 100 분의 5 를 초과하여 보유할 수 없도록 주식보유의

    제한(동법 제 21 조 제 1 항 본문)을 두고 있으나, 사모간접투자자가 보유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에 의한 투자신탁 또는 투자회사가 보유하는 경우(동항 제 1 호), 외국의

    증권선물거래소와 제휴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금융감독위원회(현 금융위원회)의 승인을 얻은

    경우(동항 제 2 호) 그리고 정부가 보유하는 경우(동항 제 3 호)에는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

    3. 자본주의 4 단계설

    자본주의경제를 취하는 모든 나라에 대한 논리는 아니겠지만 최근 200 년간 미국 자본주의에

    대하여, 자본주의 4 단계설은 증권시장의 주된 투자 형태에 따라 시대를 4 개로 구분하고 있다.

    19 세기에 해당하는 1 단계는 비로소 회사의 수가 폭증하여 회사가 일반적 현상으로 자리잡게

  • 되었으며 이 때에 일반 회사법이 대표적인 법제도가 되었다. 20 세기 초에 해당하는 2 단계는

    폭증했던 회사들이 경제력이 집중되면서 인수합병 등으로 인하여 대규모공개기업과 전문경영자가

    출현하였던 바 연방증권법이 대표적 법제도가 되었다.20 세기 중ㆍ후반에 해당하는 3 단계는

    자산운용자의 시대로서 기관투자자에 대한 간접투자가 널리 확산되었다. 20 세기 말에 해당하는

    4 단계는 저축 planner 의 시대라고 하는데, 가령 미국에서 종업원 연금 plan 처럼 투자와 그

    투자대상 및 규모를 어떤 단체의 대표자가 결정한다는 것이다.

    1 단계는 단순히 개인을 중심으로 한 회사설립투자의 시대이고 2 단계는 경제력 집중이

    극대화하면서 지배주주란 개념이 사라지고 대중들이 직접 증권시장에 투자하던 때로서,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어 근대적 공개회사가 형성된다. 경영자의 경영상 재량이 확장되고 투자자에 대한

    경영자의 설명책임(accountability)이 중시된다. 광범위한 주식분산으로 지배주주가 사라지는

    2 단계는 경영자지배론으로 특징지워지는 시기이나, 3 단계는 대형주주(기관투자자)가 나타난다.

    3 단계를 분석하면 투자자가 자본제공자인 대중과 투자판단자(기관투자자)가 분화한 것이어서

    2 단계는 개인투자자에 대한 회사정보의 공시가 중요하였지만, 3 단계에는 개인은 단순히

    금융회사와 투자금액만을 결정하여 위탁할 뿐, 그 자금 투자는 금융회사의 자산운용자가

    판단하게 된다. 3 단계의 규율방식은 금융회사의 건전성 확보 또는 나아가 금융소비자 보호

    정도가 중요한 이슈가 될 수 있다. 4 단계는 3 단계에서 분화한 투자자(자본제공자)가 더 분화하여

    plan 가입자와 투자방식을 판단하는 자가 분리된다. 4 단계에 이르게 되면 연금기금 등

    기관투자자에게 장기자금이 집중되고 주식보유를 확대하면서 대규모공개회사일지라도 그

    회사경영자에 대한 교섭력을 갖추는 주주가 출현하는 것이다.

    통상 자본주의의 맹아가 자생하여 산업혁명으로 돌입한 주요국의 경우 산업혁명 시점에 역사상

    최대의 법인수를 보이게 된다. 그 소규모 회사들이 자본주의 경제체제하에서 주기적인 불황과

    호황을 겪으며 30 여년 정도 경과하게 되면 대부분의 산업분야가 3~5 개의 사업자만이 살아남는

    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진입한다. 위 자본주의 4 단계설 중 1 단계는 그 초창기에 회사에

    지분참여한 동업자 수준의 주주들이 많지 않은 소규모 회사에 대해서는 회사법상 지배구조가 잘

    조정되어 있을 것을 요한다. 다시 2 단계로 전이하면 주식지분이 널리 분산하게 되어서 회사법상

    권한 분배에 의존하는 기업지배구조는 한계를 노정하게 되고 소수주주는 경영에 무관심하며 주로

    시세차익에 의존한 주식투자를 하게 되는데 이 단계에서는 증권거래법상 내부자거래제한 등

    대주주에 의한 정보독점과 경영전횡을 제어할 수 있는 법령이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이다.

    한국은 이상 살펴 본 경우와는 달리 자본주의의 맹아가 존재하였던 것이 아니며, 오히려 기존의

    열악한 설비나 경제시설마저도 전무한 상태에서 혼란기를 겪는 그 와중 최후까지도 증권파동이란

  • 황당한 사태를 겪었다. 이로 인하여 대중들의 주식시장에 대한 인식은 최악의 상태로까지

    전락하였으며 자본시장으로서의 기능도 정부주도에 의한 자본시장 육성이 형식적으로나마 형태를

    갖추어가던 1970 년대에 도달하기 전에는 사실상 정지하였다. 1960 년대 성장이 시작되던

    시점에도 자생적 자본주의의 틀을 갖춘 나라들과는 달리 반대로 법인수가 형편없이 부족하였고

    증권시장에 상장할만한 회사도 찾기 힘들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외채에 의존하여 경제성장을

    달성하면서 지속적인 추력으로 발전하였으나, 자본시장의 역부족으로 말미암아 1960~1980 년대

    지속적으로 GNP 대비 외채규모 세계 2 위의 아슬아슬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산업화에

    전력한 탓에 통화가 부족하여 당시 한국은 제도권 금융은 오직 산업자본을 형성하는데에도 힘이

    부쳤다. 시중에는 오랜기간 타국에 유례없이 약속어음이 창궐하고, 계에 의존하여 가계자금을

    만들다보니 각종 사고가 빈발하였으며 민사상으로도 주택저당에 의한 대출도 힘들다보니

    양도담보가 횡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회사법상으로도 적정한 회사법상 제도가 성장하지 못하여

    위 소개한 4 단계설 각 단계에 부합하는 대표소송의 전형적 형태로서 단독주주권에 의한 행사가

    여전히 성취되지 못하고 있으며 제도는 갖추어져 있으나 내부자거래제한에 대한 각종 탈법행위도

    적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증권파동은 한국경제 발전과 법률의 적정한 형성에

    기나긴 파장을 미친 것이다.

    Ⅴ. 맺음말

    일반적으로 1960 년 초 증권파동은 긴 기간 동안 한국 자본시장의 정상적 성장에 장애를

    초래하였던 큰 파동이었다는 평가로써 요약할 수 있다. 1961 년은 산업시설이 희소하고 미국의

    원조물자에 의존하여야만 재정을 꾸려나갈 수 있는 남한 정부로서는 아직 전후 복구도 제대로

    이루어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한국의 경제는 일본 제국주의 하에서의 산업마저도 전쟁 중에 다

    파괴되어 無에 가까운 상태로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증권거래소라는 것은 단지 사치스런 요상한

    장식품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상장회사 수가 17 개라는 것이 웅변해준다. 그나마 1962 년 5 월

    증권파동 당시 대한증권거래소의 주식 거래량이 그 증권거래소에 거래되는 주식대금의

    대부분이기도 하였다.

    당시 한국은 시장경제의 발달 상황은 미미하며, 오늘날과 비교한다면 실질적으로 많은 부분이

    물물교환 또는 자급자족 시대인 듯한 측면도 있었기에 화폐경제가 완전히 정착되었다고 하기에도

    망설여질 수 있는 상태였다. 국민 대다수를 점하는 농민들이 화폐의 필요성을 느끼는 때도 많지

  • 않았을 것이다. 증권파동 와중에서 몰려들었던 浮動자본은 비록 지금과 비교한다면 얼마 안 되는

    금액이었지만 당시 한국경제는 그나마 그것을 흡수해서 경제의 혈류로써 움직일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 浮動자본은 국민경제와는 유리된 것이었고 원조물자 및 적산처리 과정에서

    나타났던 것이었다. 당시 한국의 화폐경제는 오늘날에 비교한다면 매우 미약하였다. 그 때 한국

    경제의 浮動 자본은 금액규모가 오늘날과 비교할 수도 없었지만 투기처를 떠돌아다니는

    가공이었던 것이고 그 거품도 증권파동의 배경이 된다.

    한국의 재정은 미국의 원조에 의하여서 유지될 수 있었다. 재정을 뒷받침하여야 할 稅收는 그

    존재가 매우 미약하였고 재정수요를 충당할 근거가 되어야 할 세법도 사실상 장식품이라고 할 만

    했다. 기업은 몇 개 존재하지 않았고 미국의 원조로 유지되는 정부가 관할하는 공기업들만이,

    취직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장이었기 때문에 실업도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다. 1960 년에

    발생한 4 ㆍ 19 의 저변이 청년실업이라 한다면 과언이겠지만 도외시할 수 없는 원인이다.

    증권파동은 5 ㆍ 16 을 계기로 하여 나타난 소위 혁명세력들이 민간 이양을 기치로 내걸고 권력을

    장악하는데 필요한 소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자본을 조성하기 위하여 이용하였다는 것이

    사실상 공식적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전술한 자본주의 4 단계설을 감안하여 생각하여 본다면 각

    단계마다 갖추어야 할 법제도가 존재하는데, 증권파동으로 말미암아 정상적인 발전이 저해된

    측면이 있음을 부각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1960 년대 내내 이 증권파동의 여파로 인하여

    증권시장은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후일인 1970 년은 넘어가야 자본시장육성법 등

    법률을 제정하게 되고, 정부는 미흡한 자본축적으로 인한 경제성장을 위한 최고 효율을 달성하기

    위하여 경영권 보장 등을 포함한 당근과 채찍을 병행해 가면서 자본시장 육성에 나서게 된다. 그

    결과 1970 년대 말에 이르게 되면 많은 기업을 갖춘 한국경제와 증권거래소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하였다. 증권거래소는 1970 년대 말에 이르면 이미 상장기업수로만 따지면 현재와 별반

    차이가 없는(코스닥 시장은 제외할 경우) 정도에 다다르게 된다. 하지만 그 결과 자본주의

    4 단계설에 비추어 볼 때 초기 1 단계에 필요한 회사법 정비 즉 대표소송의 단독주주권화 등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2 단계에 필요한 구 증권거래법상 내부자거래제한 등

    정비는 이루어졌지만, 1 단계에 필요한 회사법 제도가 불비하게 되고 다만 명목적인 제도만

    나열하게 됨에 따라, 오늘날 경영자들의 전횡을 감시할 대표소송의 단독주주권화와 다중대표소송

    등이 아직도 남소(濫訴)를 우려하는 반대론에 부딪쳐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당초 일본 법률을 본

    받은 이러한 제도 개선은 이미 1990 년대 중반에 일본 법률들이 모태라고 할 수 있는 미국

    회사법처럼 단독주주권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찬가지 반대론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재계의 반대론에도 어느 정도 영향받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주주의 대표소송권의

  • 단독주주권화는 선거를 의식한 정부 또는 정치권의 대증요법적이고 임시방편적인 재벌 또는

    대규모기업집단을 규제하고자 하는 법규들을 양산하는 것 보다는 더 근본적인 치유법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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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 년대 초반 증권파동이 갖는 함의

    성 승 제

    주제어:

    Implications of Stock Market Crisis in Early 1960

    성 승 제

    Stock Market Crisis which occurred between the end of 1961 and 1962, was caused by the

    conversion of Stock Exchange into a corporation system and some security dealers coempted

    the stocks from Korea Stock Exchange. At such time, Stock Exchange only tried to enjoy the

    privileges of run-up in the stock prices rather than settling down the fever in stock market.

    The amount of stock exchange surged from 65 hundred million hwan in February to 1,184

  • hundred million hwan in April, and 2,520 hundred million hwan in May, and as a result, the

    stock exchange could not make any payment which resulted in closing of the market from

    June 1 until the reopen in 1963.

    Even though official case record denies it, it is known that the stock market crisis was

    caused by Kim Jong-Pil, one of the main forces that raised 5.16 incident. The reason being is

    that there was no other source where he can bring in funds to fulfill the political financial

    needs, which was surged by the creation of Democratic-Republican Party. However,

    regardless of his specific plan, since 6.25, Korea's financial market was being sustained by

    disposition of enemy's property and economic aid by U.S.A, and the farmers, which were

    most of the population, were still depending on barter and self-sufficing system. Thus

    currency liquidity could not set its root on merchandise and object-economy, and wafting

    capitalization has been established. Second reason due to disintegration of Korea's land asset

    by 6.25 war, there was no no sponge to absorb financial capitals. However, ironically even

    though Korea did not have any commodity economy and accumulation of capital, its economy

    gradually recovered and started its development.

    Key Words:

    ■ 투 고 일 자 : 2013.08.31

    ■ 심 사 일 자 : 2013.09.20

    ■ 게재확정일자 : 2013.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