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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Daegu Gyeongbuk Development lnstitute Vol. 12. No. 2 2013. 8. pp 127~147 127 Journal of Daegu Gyeongbuk Development lnstitute 일제강점기 대구노래 고찰 -“대구행진곡” ,“대구소패” ,“대구부민가”를 중심으로- 손 태 룡 * 1) A Study of Song for Daegu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Mainly about“Taegu-Haenggingok” ,“Taegu-Sop'ae” ,“Taegu-Puminga”- Son, Taeryong 국문 요약 1930년대 초반 조선총독부는 대구와 관련되는 노래곡을 창작 의뢰하여 당시 유명한 일본가수를 통해 서 음반에 취입하여 대중화시켰다. 그 곡은 “대구행진곡”, “대구소패”, “대구부민가”이다. “대구행진곡” 과 “대구소패”는 1932년 1월에 콜럼비아음반으로 발매되었고, 조선민보사에서 발매한 “대구부민가”는 1935년 4월에 빅타음반을 통해서 널리 알려졌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음악적으로 더욱 일본화 하는 과정 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음악양식이 완전히 배제된 채 일본풍의 음악이 대구 전역에 울러퍼졌기 때문이 다. 이들 3곡은 모두 일본의 전통적 음체계와 음악적 특징을 이용하여 작곡됐는데, 특히 “대구소패”는 일본의 전통악기를 반주악기로 사용하여 그 특징이 더욱 뚜렷하다. 때문에 우리의 전통적 음악정서는 모두 사라지고 일본풍의 음악이 우리의 음악이 되는 셈이다. 민족시인 이상화(李相和, 1901-1943)는 1926년 개벽 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였고, 1930년에 <대구행진곡>이란 시를 창작하여 별건곤에 발표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조선총독부는 대 구시민들의 한국적 정서를 없애고 일본화 하기 위해 일본형 대구노래를 창작하여 보급에 앞장섰던 것이 다. 이상화의 이들 시(詩)는 대구의 지리적 풍광을 나타내고 있는데, 자신이 늘 보았던 수성들 및 달구성 (達句城, 곧 大邱城)이나 자주 찾았던 요정 도수원(刀水園) 등에서의 추억이 서려있다. 아울러 웃음도 소망도 모두 빼앗긴 우리의 처지를 한탄한 가슴 아픈 내용이 절절히 배어있다. 이러한 이상화의 시가 알려졌음을 일본인들이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한국적 정서를 완전히 배제한 일본을 지향하는 새로운 노래곡이 필요했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대구행진곡”, “대구소패”, “대구부민가”와 관련된 작곡가, 작사가, 가수에 대하여 알아보 았다. 이들은 당시 자신의 분야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한 일본인들이었다. “대구행진곡”은 츠기하라 토우 이치로(月原橙一郞)가 작사하고, 고세키 유우지(古關裕而)가 작곡하였고, 후지야마 이치로(藤山一郞)가 음반에 취입하였다. “대구소패”는 츠기하라가 작사하고, 곤도 세이치로(近藤政二郞)가 작곡하였고, 신바 * 한국음악문헌학회, 대표(President, Journal of the Society for Korean Music Philology), E-mailː[email protected], Telː 010-3505-4481.

일제강점기 대구노래 고찰 · 1930년대 초반) Ⅰ. 서 론 Ⅰ. 머리말:일제강점기 대구노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조선총독부 및 「조선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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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ournal of Daegu Gyeongbuk Development lnstituteVol. 12. No. 2 2013. 8. pp 127~147

    127

    Journal of Daegu Gyeongbuk Development lnstitute

    일제강점기 대구노래 고찰

    -“대구행진곡”,“대구소패”,“대구부민가”를 중심으로 -

    손 태 룡*1)

    A Study of Song for Daegu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Mainly about“Taegu-Haenggingok”,“Taegu-Sop'ae”,“Taegu-Puminga”-

    Son, Taeryong

    국문 요약

    1930년대 초반 조선총독부는 대구와 관련되는 노래곡을 창작 의뢰하여 당시 유명한 일본가수를 통해

    서 음반에 취입하여 대중화시켰다. 그 곡은 “대구행진곡”, “대구소패”, “대구부민가”이다. “대구행진곡”

    과 “대구소패”는 1932년 1월에 콜럼비아음반으로 발매되었고, 조선민보사에서 발매한 “대구부민가”는

    1935년 4월에 빅타음반을 통해서 널리 알려졌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음악적으로 더욱 일본화 하는 과정

    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음악양식이 완전히 배제된 채 일본풍의 음악이 대구 전역에 울러퍼졌기 때문이

    다. 이들 3곡은 모두 일본의 전통적 음체계와 음악적 특징을 이용하여 작곡됐는데, 특히 “대구소패”는

    일본의 전통악기를 반주악기로 사용하여 그 특징이 더욱 뚜렷하다. 때문에 우리의 전통적 음악정서는

    모두 사라지고 일본풍의 음악이 우리의 음악이 되는 셈이다.

    민족시인 이상화(李相和, 1901-1943)는 1926년 「개벽」에 를 발표하였고,

    1930년에 이란 시를 창작하여 「별건곤」에 발표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조선총독부는 대

    구시민들의 한국적 정서를 없애고 일본화 하기 위해 일본형 대구노래를 창작하여 보급에 앞장섰던 것이

    다. 이상화의 이들 시(詩)는 대구의 지리적 풍광을 나타내고 있는데, 자신이 늘 보았던 수성들 및 달구성

    (達句城, 곧 大邱城)이나 자주 찾았던 요정 도수원(刀水園) 등에서의 추억이 서려있다. 아울러 웃음도

    소망도 모두 빼앗긴 우리의 처지를 한탄한 가슴 아픈 내용이 절절히 배어있다. 이러한 이상화의 시가

    알려졌음을 일본인들이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한국적 정서를 완전히 배제한 일본을 지향하는

    새로운 노래곡이 필요했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대구행진곡”, “대구소패”, “대구부민가”와 관련된 작곡가, 작사가, 가수에 대하여 알아보

    았다. 이들은 당시 자신의 분야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한 일본인들이었다. “대구행진곡”은 츠기하라 토우

    이치로(月原橙一郞)가 작사하고, 고세키 유우지(古關裕而)가 작곡하였고, 후지야마 이치로(藤山一郞)가

    음반에 취입하였다. “대구소패”는 츠기하라가 작사하고, 곤도 세이치로(近藤政二郞)가 작곡하였고, 신바

    * 한국음악문헌학회, 대표(President, Journal of the Society for Korean Music Philology), E-mailː[email protected], Telː

    010-3505-4481.

  • 128 손 태 룡

    대구경북연구 제12권 제2호

    시남지 구용(新橋南地久龍)이 노래했다. 그리고 “대구부민가”는 구로모토 슈헤이(黑木周平)가 작사하고,

    나카야마 신페이(中山晋平)가 작곡하였고, 후지야마 이치로(藤山一郞)의 노래로 음반에 담았음이 밝혀

    졌다. 이들은 모두 당시 가장 유명한 작사자, 작곡가, 가수였음을 확인하였다. 아울러 음악의 구조적 관

    계를 확인할 수 있도록 관련 음원을 통해 악보화 하였다.

    주제어 : 대구노래, 대구부민가, 대구소패, 대구행진곡

    Abstract

    Early 1930’s, Chosŏnminbosa(朝鮮民報社) requested to compose songs for Daegu and those

    songs were popularized by famous Japanese singers. Those songs, “Taegu-Haenggingok”(大邱

    行進曲), “Taegu-Sop'ae”(大邱小唄), “Taegu-Puminga”(大邱府民歌). “Taegu-Haenggingok” and

    “Taegu-Sop'ae” were released in January of 1932 by Colombia Record, “Taegu-Puminga” was

    popularized in April of 1935 by Nippon Victor Record. This was during the period of the

    Japanese Rule. These songs totally eliminated Korean traditional musical style as it was in

    Japanese style. These three songs were composed using Japanese traditional tonal structure,

    “Taegu-Sop'ae” was the most popular song and it was played by Japanese traditional

    instruments. So Korean traditional music styles were replaced with Japanese style.

    The national poet Yi Sanghwa(1901-1943) released Ppaeakgin dŭledo pomŭn onŭnga(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from Kaepyŏk(「開闢」) in 1926. He wrote “Taegu-Haenggingok” from

    Byŏlgŏngon(「別乾坤」) in 1930.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made Daegu songs

    written in Japanese style during the period of colonization. Poems written by Lee Sang-Hwa

    expressed some views of Daegu. Familiar places like Talgusŏng(達句城 or 大邱城) and

    Korean-style restaurant Tosuwŏn(刀水園) share this reminiscence. Also it was a sad story

    which condemned our situation like no smile, no hope. Japanese knew that these poems were

    popular at that time. So they needed more new songs made in Japanese style.

    In this article, we trace composer, songwriter and singer related with “Taegu-Haenggingok”,

    “Taegu-Sop'ae”, “Taegu-Puminga" who were Japanese and were hard workers in their field.

    “Taegu-Haenggingok” was written by Chūgihara Tōuichīro(月原橙一郞), composed by Koseki

    Yuugi(古關裕而) and recorded by Hugiyama Ichīro(藤山一郞). “Tae-Sop'ae” was written by

    Chūgihara Tōuichīro, composed by Gondo Seichīro(近藤政二郞) and sung by

    Sinbasinamgi-guyong(新橋南地久龍). “Taegu-Puminga” was written by Namu Suhei(黑木周平),

    composed by Nakayama Sinpēi(中山晋平) and recorded by Hugiyama Ichīro(藤山一郞). Also it

    was made as a sheet music for verifying the relation of its musical structure.

    Keywords : Daegu Song, “Taegu-Haenggingok”, “Taegu-Sop'ae”, “Taegu-Puminga”

  • 일제강점기 대구노래 고찰 -“대구행진곡”, “대구소패”, “대구부민가”를 중심으로- 129

    Journal of Daegu Gyeongbuk Development lnstitute

    가와이아사오(河井朝雄, 1931년)

    이상화(李相和, 1930년대 초반)

    Ⅰ. 서 론

    Ⅰ. 머리말:일제강점기 대구노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조선총독부 및 「조선민보」

    (朝鮮民報)를 발간한 조선민보사에서는 1932년과

    1935년에 대구와 관련되는 노래곡 3곡을 창작 의

    뢰하여 당시 유명한 일본가수를 통해서 음반에 취

    입하여 보급시켰다. “대구행진곡”, “대구소패”1),

    “대구부민가”가 그 곡들인데, “대구행진곡”과 “대

    구소패”는 1932년 1월에 일본콜럼비아음반으로

    발매되었고,2) “대구부민가”는 1935년 4월에 일본

    빅타음반을 통해서 널리 알려졌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음악적으로 더욱 일본화(日本化) 되는 과정

    이 된다. 당시 우리의 전통적 음악양식이나 서양

    풍을 완전히 배제된 채 일본풍 음악이 새롭게 대

    구전역에 울려퍼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1931년부터 처음으로 시작된 곳이 경성, 곧 서울

    이며, 다음으로 대구지역이 된다. 따라서 다른 지

    역보다 앞선다.

    이들 3곡은 모두 일본풍의 특징을 이용하여 작

    곡됐는데, “대구소패”는 일본의 전통악기를 반주

    악기로 사용하여 그 특징이 더욱 뚜렷하다. 때문

    에 우리의 전통적 음악정서는 모두 사라지고 일본

    풍의 음악이 우리의 음악이 되는 셈이다. 당시 각

    지역의 신문사가 주도적으로 주관하여 전국적으

    로 이러한 일을 추진하였다. 한편 조선민보사 가

    와이 아사오(河井朝雄, 1878년생) 사장은 1904년

    에 장사를 하기 위해 일본에서 대구로 왔다. 일확

    천금의 꿈을 안고 일찍이 장사를 시작하여 많은

    돈을 번 가와이는 조선민보사를 맡아 경영하면서

    그동안 대구에서 보고 겪은 바를 서술한 회고담 「

    대구물어」(大邱物語)3)를 남긴 바 있기도 하다.

    1931년에 발간된 「대구물어」를 통해서 당시 대구

    지역의 여러 가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민족시인 이상화(1901-1943)는 1930년 (大邱行進曲)이란 시를 창작하여 1926년에

    창간된 「별건곤」(別乾坤) 10월호에 발표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조선민보사로 하여금 일본의

    “대구행진곡”을 창작하여 보급에 앞장섰는지도

    1) 「朝鮮道邑大觀」(京城:民衆時論社, 1937), 참고로 “대전소패”(大田小唄)의 전체 6절 중 1-3절까지의 원가사와 번역한 내

    용은 다음과 같다. “①モタダン大田半島の都, ヨツホホホイ. 並ぶ五つ橋花の中花の中, 人の好く町誰も好く, テモ大田, よ

    いよいよい. ②ひとつ蛇の目で片袖濡らす, ヨツホホホイ, うれし中橋春の雨春の雨, 人の好く町誰も好く, テモ大田, よいよ

    いよい. ③櫻花浮く盞あげて, ヨツホホホイ, 下旬の卯月の軍旗祭軍旗祭, 人の好く町誰も好くテモ大田, よいよいよい.” “①

    현대의 대전, 반도의 수도, 요트호호호이, 줄선 다섯 다리, 꽃중의 꽃, 사람이 좋고, 마을 모두 좋고. 과연 대전, 좋아서

    좋아, 줄선 다섯 다리, 꽃중의 꽃, 사람이 좋고, 마을 모두 좋고. ②하나 굵은 고리 모양으로 소매 적신다, 요트호호호이,

    아름다운 중간 다리, 봄비의 비, 줄선 다섯 다리, 꽃중의 꽃, 사람이 좋고, 마을 모두 좋고. ③앵화 뜨는 잔 주어, 요트호

    호호이, 하순 4월 군기제 군기제, 줄선 다섯 다리, 꽃중의 꽃, 사람이 좋고, 마을 모두 좋고.” 따라서 “대구소패”의 내용도

    “대전소패”의 가사내용과 같이 대구지역의 풍광을 노래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2) “대구행진곡”과 “대구소패”의 레코드 레이블에서는 조선민보사에서 편찬했다는 기록이 없다. 당시 각 지역의 신문사에서

    그 지역의 노래를 편찬 또는 주도했음이 확인되므로 “대구행진곡”과 “대구소패” 역시 당시 대구지역 대표적 신문사나 전

    국지의 지점에서 편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1935년에 취입된 “대구부민가”는 조선민보사에서 펴냈음이 확인된다.

    차후 이 내용은 밝혀져야 할 것이다.

    3) 河井朝雄, 「大邱物語」(大邱:朝鮮民報社, 1931). 이 책은 손필헌역, 「대구이야기」(대구:대구중구문화원, 1998)로 번역되었다.

  • 130 손 태 룡

    대구경북연구 제12권 제2호

    모른다. 이상화는 1926년 이미 라는 민족시를 「개벽」(開闢) 6월호에

    소개한 바 있기도 하다. 이상화의

    내용은 와 같이 대

    구의 지리적 풍광을 나타내고 있는데, 자신이 늘

    보았던 대구의 달구성(達句城, 곧 大邱城)이나 자

    주 찾았던 도수원(刀水園), 방천(防川) 등에서의

    추억이 서려있다. 아울러 웃음도 소망도 모두 빼

    앗긴 우리의 처지를 한탄한 가슴 아픈 내용이 절

    절히 배어있다.

    이러한 이상화의 시(詩)가 1926년에 「개벽」과

    1930년에 「별건곤」을 통해서 알려졌음을 조선총

    독부에서는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한국

    적 정서를 완전히 배제한 일본을 지향하는 새로운

    노래곡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상화의

    이 1930년 10월에 발표되었고, 일본인 츠기하라

    토우이치로(月原橙一郞)4)가 작사한 은 고세키 유우지(古關裕而)가 작곡하여 당시

    유명한 가수 후지야마 이치로(藤山一郞)를 통해서

    콜럼비아음반에 취입되어 1932년 1월에 출반되었

    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이상화의 와 이 발표되자마

    자 조선총독부에서 위기의식을 느껴 작사 및 작곡

    을 전국적으로 추진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일제강점기 전국적으로 이루어진

    음악의 일본화 중 대구를 나타내는 악곡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대구지역과 관련되는 “대구행진

    곡”, “대구소패”, “대구부민가”에 대하여 작곡가,

    작사가, 가수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고자 함이 연구

    목적이 되겠다. 지금까지 이러한 연구는 전무하므

    로 최초의 연구가 되겠다. 이들은 당시 일본은 물

    론, 우리나라 문학 및 음악분야에 주도적으로 관

    계한 장본인들이다. “대구소패”는 “대구행진곡”을

    작사한 츠기하라가 하였고, 곤도 세이치로(近藤政

    二郞)가 작곡했으며, 신바시남지 구용(新橋南地久

    龍)이 노래했다. 그리고 “대구부민가”는 구로모토

    슈헤이(黑木周平)가 작사하고, 나카야마 신페이

    (中山晋平)가 작곡하였고, 후지야마의 노래로 음

    반에 담겼다. 아울러 음악의 구조적 관계를 확인

    할 수 있도록 관련 음원을 통해 오선보로 악보화

    하고자 한다.

    본 연구를 할 수 있었던 계기는 대구 출신의 천

    재화가 이인성(李仁星, 1912-1950)의 탄생 100주

    년 기념으로 전시회(2012. 8. 29-9. 9)를 대구문화

    예술회관에서 개최되면서 비롯된다. 이 전시회에

    서 1930년대 대구미술과 관련되는 SP음반, 곧 콜

    럼비아음반의 “대구행진곡”과 “대구소패”, 빅타음

    반에 담긴 “대구부민가”를 소개하였기 때문이다.

    이 행사를 주관한 김태곤(대백프라자갤러리) 큐

    레이터에게 연락하여 SP음반을 빌리고, 작곡가

    이철우 교수가 악보화 한 것을 노래선율만 제시했

    다. 그런데 가사를 채록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으나 여의치 못했다. 일본 동경에서 한국음악학

    연구를 하시는 야마모토 하나코(山本華子) 교수

    에게 본 음원을 들려주었으나 전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다만 대구의 허귀진(許貴瑱, 1924년생)과

    그의 경북여고 후배 최수경(崔壽京, 1928년생) 및

    여동생 허영진(許英瑱, 1931년생)의 도움으로 “대

    구부민가”의 가사내용만 확인할 수 있었다. 때문

    에 앞으로 이 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

    4) 한편 시인 이상(李箱, 본명 金海卿, 1910-1937)은 1933년 3월 31일에 (月原橙一郞)란 시를 지은

    바 있다. “章魚를 처음 먹은 건 누구냐 鷄卵을 처음 먹은 건 누구냐 어쨌든 아주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돌과 돌이 맞비

    비어 오랜 동안엔 역시 아이가 생겨나나 보다 돌은 좋아하는 돌에게 갈 수가 없다. 나의 길 앞에 하나의 패말뚝이 박혀

    있다. 나의 不道德이 行刑되고 있는 증거이다. 나의 마음이 죽었다고 느끼자 나의 肉體는 움직일 필요도 없겠다 싶었다.

    달이 둥그래지는 내 잔등을 흡사 墓墳을 비추듯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慘殺 당한 現場의 光景이었다. ㅡ 3. 31.” 「문

    학사상」(서울:문학사상사, 1976), 7월호. 이와 같이 시인 이상이 지은 시 가 바로 “대구행진곡”

    과 “대구소패”의 가사를 지은 사람일 것으로 짐작된다.

  • 일제강점기 대구노래 고찰 -“대구행진곡”, “대구소패”, “대구부민가”를 중심으로- 131

    Journal of Daegu Gyeongbuk Development lnstitute

    Ⅱ. 일제강점기 사회적 상황

    기존 연구에 의하면,5) 일본제국주의(이후 일제)

    는 한국을 식민지로 강점(强占)한 다음 식민지정

    책을 실시하였다. 그것은 한민족 말살정책과 식민

    지 수탈정책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사회적 경제적 수탈뿐만 아니라 한민족을

    일제에 종속시킬 목적으로 강행한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 한민족은 그들의 식민지정책으로부터 민

    족을 지킴으로써 일제를 몰아내어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쟁취하려고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한민족의 독립운동과 연합국의 승전으로 일제는

    한국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동안에 한

    국사회를 정체시키고 온갖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

    으며, 결국은 남북분단까지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식민지 무단통치체제를 만들어 아무리 탄압을

    가해도 한민족은 불굴의 투지로 독립운동을 전개

    하였다. 애국자들과 한민족이 대규모 독립운동을

    일으킬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듬해인 1919년 1월 파리에

    서 강화회의(講和會議)가 열리게 되었다. 승전국

    의 미국대통령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1924)이 회담원칙으로 14개 조항을 발표한

    내용 중 패전국의 식민지 처리에 민족자결원칙이

    적용된다는 항목이 있었다. 이에 중국 상해의 신

    한청년당과 일본 한국유학생의 조선청년독립단이

    독립운동을 일으킬 기회임을 국내에 알렸다. 국내

    애국자들이 이러한 움직임에 자극을 받아 민족대

    연합전선을 결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1919년 3월

    1일에 민족대표들은 서울 태화관(泰和館)에서, 학

    생과 시민들은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

    행하고 독립만세시위에 들어감으로써 3·1운동이

    폭발하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은 역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다.

    그것은 1910년부터 9년간 실시한 식민지 무단통

    치와 한국민족 말살정책이 근본적으로 붕괴되었

    던 것이다. 일제는 3·1운동에 의하여 큰 타격을 받

    고 문화정치로의 전환을 표방하였다. 일제의 문화

    정치 내용은 종래 육해군 대장으로 조선총독을 임

    명하던 것을 고쳐 문관도 그 자리에 임명할 수 있

    고,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전환한다는 것이

    었다. 또한 한국인이 경영하는 한글신문의 간행을

    허가하고, 필요하면 내정에 한해서 한국인에게 참

    정권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총독을

    한 번도 문관으로 임명한 적이 없었다. 3·1운동 이

    후 한민족의 항일독립운동이 워낙 맹렬하여 일제

    는 한민족 말살정책을 후퇴시키지 않을 수 없었

    다. 반면에 일제는 사회·경제적 수탈정책을 강화

    하기에 급급하였다.

    1920년대 초에는 민족독립운동에 일부 민족주

    의자들이 일제의 문화정책에 휘말려 독립을 포기

    하고 일본제국의 자치를 주장하는 자치론이 대두

    되었다. 또한 사회주의운동이 강력히 대두하여 민

    족주의독립운동과 사회주의독립운동 사이에 분열

    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연합하여 1927년 2월에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

    었다. 신간회가 창립되자 1927년 5월에는 여성자

    매단체인 근우회(槿友會)가 조직되어 여성독립운

    동의 단일전선이 결성되었다. 한편 1920년에 「조

    선일보」(3월 5일), 「동아일보」(4월 1일), 「시사신

    보」(친일신문, 4월 1일)의 창간을 허가했어나 한

    국인의 언론을 분열시켜 통제하려는 교묘한 수단

    으로 취해진 조치였다.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여 민족문화운동

    으로 민족과 민족문화를 보존 및 발전시키려는 운

    5) 네이버 백과사전(http://terms.naver.com/entry.nhn?cid=1593&docId=537253&mobile&categoryId=1593)에서 요약하였다.

  • 132 손 태 룡

    대구경북연구 제12권 제2호

    동이 전개되었다. 1921년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

    회 전신)가 조직되어 기관지 「한글」을 간행하고,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시작함과 함께 민족어

    와 한글을 발전시키려는 투쟁이 전개되었다. 문학

    부문에서도 「창조」(1919), 「개벽」(1920.6), 「폐허」

    (1920.7), 「백조」(1922), 「조선문단」(1924), 「조선

    시단」(1927.11), 「예술운동」(1927.11), 「조선문예」

    (1929.5), 「문예공론」(1929.5) 등의 문학 및 잡지가

    창간되어 민족어와 민족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공

    헌을 하였다. 한편 이상화의 (1926)는 「개벽」에 실렸으며, 또한 (1930)은 「별건곤」에 실렸던 것이다.

    일제는 1931년 9·18만주침략 이후부터 조선주

    둔 일본군을 2개사단에서 5개사단으로 증가시켜

    탄압무력을 강화한 다음 한민족 말살정책을 적극

    적으로 강화하였다. 한국어를 말살시키는 것이 한

    국민족을 말살하는 모체라고 판단하고 한국어 말

    살에 광분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오자 관청에서

    는 한국농민의 민원을 일본어를 사용한 경우에만

    접수하도록 하여 한국어 사용을 금지시켰고, 사립

    학교에서의 한국어 교육과 사용을 엄금하였다. 또

    한 1935년부터는 한글을 농민들에게 가르치는 학

    생들의 하기계몽운동을 총독부령으로 못하도록

    하였다. 이후 1937년 중국침략 때부터는 한국인들

    의 일상 사회생활에서의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여

    일본어만 사용하도록 명령하였다.

    한국어로 간행되는 신문과 잡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간 등 탄압을 가하다가, 1936년에는 「신

    동아」를 폐간시켰으며, 1940년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모든 한국어 신문과 1941년에는

    「문장」과 「인문평론」 등 모든 한국어 잡지들을 폐

    간시켜버렸다. 그리고 한국인의 성명을 말살하고

    일본식 이름을 짓도록 하는 창씨개명을 1937년부

    터 본격적으로 강행하였다. 1939년에는 조선민사

    령(朝鮮民事令)을 개정하여 일제는 1940년까지 한

    국인의 성명말살과 창씨개명을 강행하였다. 창씨

    개명에 응하지 않은 한국인에게 자녀의 학교취학

    을 못하게 하고, 학생들에게 매질을 가했으며, 직

    장에 채용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심지어 우편물

    수송까지 금지시켰다. 따라서 이에 불응하고는 생

    활을 영위해 나갈 수 없었다.

    1940년대에 들어와서 일제의 폭압이 극에 달하

    던 시기에도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무수한 지하

    서클들이 조직되어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하면서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

    의 일제강점기 식민지정책 중 문화정치의 일환으

    로 일제는 1931년부터 각 지역별로 노래곡을 창작

    하여 일본콜럼비아음반과 일본빅타음반을 통하여

    보급하게 되었던 것이다. 각 지역을 상징하는 일

    본노래를 창작하여 한국시민들에게 알리는 시기

    는 중일전쟁이 시작되는 1937년까지 지속되었다.

    1931년 경성에서의 “경성행진곡”을 시작으로, 이

    듬해 1932년 1월 “대구행진곡”과 “대구소패‘가 대

    표적이며, 더욱 1935년 4월에 ”대구부민가“를 창

    작하여 SP음반을 통해 대구시민들에게 알렸다.

    이러한 내용을 다음 항목에서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Ⅲ.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대구노래

    본 항목에서는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작사

    작곡되고 가수에 의해 음반에 취입된 대구노래 3

    곡에 대하여 알아볼 것이다. “대구행진곡”, “대구

    소패”, “대구부민가”가 바로 그 곡들이다. 이러한

    현상은 전국적으로 이루어진 공통된 사실이나 서

    울지역 다음으로 대구지역이 된다. 이미 1931년에

    “경성행진곡”을 대판매일신문경성지점에서 제공

    하여 일본콜럼비아음반에 두 번 취입되었고, 또한

  • 일제강점기 대구노래 고찰 -“대구행진곡”, “대구소패”, “대구부민가”를 중심으로- 133

    Journal of Daegu Gyeongbuk Development lnstitute

    “경성소패”와 “대경성행진곡”이 경성일보사에서

    편찬하여 일본빅타음반에 담겨진 바 있다. 그럼,

    “대구행진곡”, “대구소패”, “대구부민가”는 어떠

    한 음악이며, 누가 작사하고 작곡했으며, 어느 가

    수가 노래하여 어떠한 음반에 취입했는가를 확인

    하고자 한다. 아울러 “대구부민가”의 가사내용을

    알아볼 것이다.

    1. “대구행진곡”

    “대구행진곡”이 수록된 콜럼비아음반(26680-A)

    대구행진곡”이 수록된 음반레이블

    대구행진곡

    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구행진곡”은

    내림마장조로 한 절이 18마디로 되어 있다. 그런

    대 본 음원에서는 8마디를 전주로 시작하여 1-2절

    을 노래하고, 간주로 한 절 연주하며, 이어서 3절

    을 노래하고, 후주로 8마디 연주하고 마친다. 점음

    표의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전체적으로 깡총리듬

    (♩♪♩♪ 또는 ♪♩♪♩) 및 부점리듬 형태를 이

    용하고 있다. 또한 서양의 7음음계를 사용하고 있

    어나 ‘파’와 ‘시’가 미약하게 5-6음을 주로 사용하

    고 있다. 따라서 선율진행이 일본음악 형태라 서

    양풍이 아닌 일본풍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기

    존 음악형식과 다른 음악형태를 꾀하고 있는 것이

    다. 이렇듯, 3절로 노래하고 있는데, 전주, 1-2절

    노래, 간주, 3절 노래, 후주로 되어 있다.

    콜럼비아음반으로 1932년 1월에 발매된 “대구

    행진곡”은 츠기하라 토우이치로(月原橙一郞, 본명

    原嘉章, 1902-1989)6)가 작사하였다. “대구행진곡”

    을 작사한 츠키하라는 1902년 시코쿠(四國) 카가

    와현(香川県)에서 태어났다.7) 그의 아버지는 전기

    자동중계기 장치를 「전학지」(電学誌)에 발표한 전

    기·전신 기사(技師)로 원주지로(原住治郎)이다.

    츠기하라는 1923년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 전문

    부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초나이토책(内藤

    鋠策)의 「서정시」(抒情詩), 시라토리 세이고(白鳥

    省吾)의 「지상낙원」, 그리고 1937년에 무라카미

    나루미(村上成実)의 「시보」(詩報) 창간에 참여한

    바 있다. 또 구어노래(口語歌)를 시작해 「단가창

    조」(短歌創造)나 이시하라 준(石原純)의 「입상」

    (立像), 전후(戦後)에는 코야마 케이치(児山敬一)

    의 「문예심」(文芸心)에 들어 활동하였다.

    1954년에는 일본민요시인협회(초대회장 白鳥省

    吾)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이 협회는 1962년에 발

    6) “月原橙一郎. つきはら とういちろう. 1902.2.8(明治35)-1989.9.30(平成1). 昭和期の詩人、歌人. 埋葬場所:2区 1種 11側原

    家). 香川県出身。父は明治期に電信自動中継機装置を「電学誌」に発表した電気・電信技師の原住治郎(同墓)。本名は原嘉章。1923(T12)早稲田大学専門部政経科卒業。はじめ内藤鋠策の「抒情詩」、ついで白鳥省吾(11-2-8)の「地上楽園」に

    拠って活躍。'37(S12)村上成実が発起人の「詩報」の創刊から携わる。また口語歌をはじめ「短歌創造」や石原純の「立

  • 134 손 태 룡

    대구경북연구 제12권 제2호

    전적으로 해산하고, 같은 해 일본가요예술협회로

    발족하였다. 또한 매년 발간되는 시집 「일본가요

    시선」(日本歌謡詩選)에도 종사했다. 츠기하라의

    주된 작품은 「동선」(冬扇, 1928), 「남유집」(南有集

    -詞華集, 1932년 편), 「삼각주」(三角洲-거리의 가

    요집)(1933), 「잔홍」(残紅-시집, 1981), 「남유집」

    (南有集-詞華選, 1982) 등이 있다. 1989년 사망 후

    그의 시가 담긴 유작집 「기복춘추」(起伏春秋,

    1991)와 「초원」(草原) 등이 간행된 바 있다.

    “대구행진곡”은 고세키 유우지(古關裕而, 1909-

    작사가 츠기하라 토우이치로(月原橙一郞)의 묘지(왼쪽)

    1989)8)가 작곡하였다. “대구행진곡”을 작곡한 고

    세키는 1909년 후쿠시마시(福島市) 출생으로 초등

    학교 때 음악에 감흥을 느껴 스스로 작곡을 시작

    하였다. 아울러 후쿠시마의 구금사(口琴社) 단체

    에서 지휘활동을 하였다. 1929년에는 관현악 무용

    조곡 “다케토리 모노가타리”(竹取物語)가 영국의

    작곡콩쿠르에 입선된 바 있다. 1930년에는 콜럼비

    아레코드사의 전속작곡가로 도쿄(東京)로 왔으며,

    1935년에 발표한 “사공 카아이적”(船頭可愛的)이

    널리 알려졌다. 전쟁 중 “노영지가”(露營之歌)와

    “향초효기도”(向初曉祈禱) 등을 작곡했는데, 애수

    적이며 아름다운 선율을 깊이 있게 동적으로 표현

    한 인간적 심영(心靈)의 표현이었다. 또한 NHK광

    파극(廣播劇) “종이 울리는 언덕”(鐘の鳴る丘), 목

    표 주제가 “첨정모”(尖頂帽), 화일수 주제가 “목표

    성씨”(妳的名字), 또한 전쟁 중 진혼기도가 “나가

    사키의 종”(長崎の鍾) 등, 많은 작품을 작곡하여

    호평을 받았다. 특히 1936년 채규엽(蔡奎燁, 1907

    년생)이 부른 “마라손 제패가”와 “가미가제 특별

    특공대”(鳴呼神風特別攻擊隊, 野村俊夫 작사)를

    작곡한 장본인이기도 하다.9)

    像」、戦後は児山敬一の「文芸心」に拠る。1954(S29)日本民謡詩人協会の創立メンバー、初代会長は白鳥省吾。'62同協会

    は発展的解散し、同年日本歌謡芸術協会として発足、年に一度詩集「日本歌謡詩選」にも携わった。主な作品に『冬扇』

    (1928)、『南有集(詞華集)』(1932・編)、『三角洲(街の歌謡集)』(1933)、『残紅―詩集』(1981)、『南有集―詞華選』 (1982)などがある。享年87歳。没後、起伏春秋―詩集』(1991・今岡弘、原花子 共著)、『月原橙一郎追悼特集「草原」』なども刊行されている。<日本近代文学大事典など>*墓石は和型「原家累代墓」。左側に墓誌がある。墓誌には本名の原嘉

    章の名のみで月原橙一郎の名は刻まれていない。戒名は誠諦院信解日嘉居士。妻は花子。”

    7) 츠기하라 토우이치로(月原橙一郞)에 대해서는 일본구글에서 제공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였다.

    8) 福島縣政府(우편번호:960-8670. 주소:福島県福島市杉妻町2-16. 전화번호:024-521-1111(대표). 메일주소:

    [email protected])에는 작곡가 고세키 유우지(古關裕而)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古關裕而(1909-1989.

    トップページ(Home)> 福島縣出生的偉人> 古關裕而(1909-1989). 響徹激越昭和史的希望的旋律. 說明文. 1909年,福島市出

    生。小學時即對音樂感興趣,以自學作曲爲開始,並進行福島口琴社團的作曲和指揮活動。1929年,他所做的管弦樂舞蹈組曲

    “竹取物語” 在英國切斯特作曲比賽中入選,這是日本人作曲家首次入選。1930年古關21歲時,作爲Columbia公司專屬作曲家赴

    東京。1935年作品 “船頭可愛的” 第一次廣爲流傳。戰爭之中,爲“露營之歌”、“向初曉祈禱” 等 作曲。帶著哀愁的優美旋律深

    深打動了當時人們的心靈。戰後,他全身心投入到用音樂爲荒蕪破敗的日本的堅強複興注入活力的作曲中去。NHK廣播劇 “鍾

    鳴之丘”的主題歌 “尖頂帽”和另一首主題歌 “妳的名字”,以及爲戰爭中死去的人們鎮魂祈禱之歌 “長崎之鍾” 等,他作了很多

    給與人們希望與激勵的曲子,廣受好評和歡迎。此外,全國高中棒球選手權大賽歌 “榮冠因妳閃耀”、“大阪(阪神)Tigers之

    歌”、東京奧運會選手入場進行曲 “奧運進行曲” 等,他還發表了這些清晰、有動感的優秀運動音樂作品。古關一生之中作曲總

    數據說大約有5000首。從歌謠到校歌等,各個不同門類的歌曲,在激越的昭和時代,持續提供了給人以希望的優秀作品。因這

    一功績,他被授予紫授褒章。奇聞異事 不僅是福島,他幫全國各地的校歌作曲。據統計,福島縣內他作曲的校歌達101首。他

    爲北海道一小學無償作校歌。之後,因有了自己的校歌而歡喜的同學們,作爲作曲的謝禮,一人從家裏拿了一顆小豆,集合了

    一小缸小豆寄到了古關那裏。

  • 일제강점기 대구노래 고찰 -“대구행진곡”, “대구소패”, “대구부민가”를 중심으로- 135

    Journal of Daegu Gyeongbuk Development lnstitute

    파견종군 당시. 왼쪽이 작곡가 고세키 유우지(古關裕而), 오른쪽이 시인 사이죠 팔십(西條八十)

    또한 일본 전국중고등학교의 봉구선수권대새가

    (棒球選手權大賽歌)인 “영관인니섬요”(榮冠因妳

    閃耀)를 비롯하여, “오사카(阪神) Tigers노래”, 도

    쿄 오운회(奧運會) 선수입장행진곡인 “오운행진

    곡” 등을 발표하였고, 우수한 운동과 관련되는 음

    악작품을 작곡하였다. “올림픽 행진곡”, “종이 울

    리는 언덕”(鐘の鳴る丘), “남진용아의 노래”(南進

    勇兒の歌), “이요만테의 밤”(イヨマンテの夜), “흑

    백합의 노래”(黑百合の歌), “순풍에 돛 달고”, “시

    달린 가슴”, “우편마차”(邱燈志夫 작사) 등 생애

    5,000여 곡의 노래곡을 작곡하여 일본인들의 사랑

    을 듬뿍 받았던 유명한 작곡가이다. 아울러 가요

    와 교가(101곡), 가곡 등을 작곡하여 포장(褒章)을

    받은 바 있다. 한편 59곡이 수록된 「신흥수풍금독

    주곡집」(新興手風琴独奏曲集)10)이 1937년에 발간

    됐는데, 여기에 그의 풍금곡 12곡이 수록되어

    있다.

    후쿠시마시는 1979년 고세키를 명예시민으로

    추대하고 1988년에 기념관을 설립하였다. 고세키

    기념관 안에는 그의 생애와 작품을 소개하는 영상

    프로그램과 자택을 재현한 전시실이 있다. 또한

    고세키의 그림과 악보, 당시 활동한 소개 자료 600

    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고세키기념관의 입장료는

    300엔이며, 개장시간은 4월-10월에 오전8시15분-

    일몰까지, 11월-3월까지 오전9시30분-오후4시30

    분까지이다. 기념관이 설립된 이듬해 1989년 고세

    키는 전쟁으로 인하여 몸과 마음을 다쳐 작곡하던

    중 사망하였다.

    가수 후지야마 이치로(藤山一郞)

    “대구행진곡”을 불러 콜럼비아음반에 취입한

    가수는 후지야마 이치로(藤山一郞, 본명은 増永丈

    夫, 1911-1993)이다. 후지야마는 “모습을 사모하

    며”(影を慕いて, 1931)를 발표한 초창기 일본의

    국민적 가수이며, 아울러 수많은 곡을 작곡한 작

    곡가이기도 하다. “술은 눈물이나 한숨인가”(酒は

    涙か溜息か), “언덕을 넘어”(丘を越えて), “도쿄

    Rhapsody”(東京ラプソディ), “푸른 산맥”(青い山

    脈, 1949), “나가사키의 종”(1949) 등을 노래해 대

    부분이 히트하였다. 음악이론 및 악전에 충실히

    노래하여 정격가수로 불리었으며, 또한 작곡가·지

    휘자로도 활약했다. 후지야마는 도쿄에서 태어나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하여 동경방송국에 근무하였

    9) “아아!! 가미카제 특별공격대”(鳴呼神風特別攻擊隊)는 노무라 도시오(野村俊夫)가 작사하고 고세키 유우지(古關裕而)가

    작곡한 곡이다. '黃金の椅子 野村俊夫ショㅡ'(1958년 2월 7일) 관련 사진. 출처: 는 西條八十,「西

    條八十全集」(東京:国書刊行会, 2003), 第九卷(歌謠.民謠Ⅱ).

    10) 「新興手風琴独奏曲集」(東京:新興音楽出版社, 昭和12), 第4編 고세키 유우지(古關裕而)의 악보 참조. 12곡의 풍금곡은

    “輝く春”, “僕の奥さん”, “靑い月夜の戀”, “となりの娘”, “戰友の唄”, “米山三里”, “串本そだち”, “大島くづし”, “あの山越

    えて”, “めをと人形”, “月のキャンプ”, “岬の灯り”이다.

  • 136 손 태 룡

    대구경북연구 제12권 제2호

    다. 바리톤 가수로도 활약한 그는 도쿄 모토하시

    구(中央区) 여각정(蛎殻町) 출신으로 동경음악학

    교(후에 동경예술대학)를 수석졸업하였다. 동경음

    악학교에서 익힌 정통 바리톤 기술, 가창법, 음악

    이론과 하이 바리톤의 음성을 무기로 테너의 국민

    적 가수로 유행가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1911에 태어난 후지야마는 1929년 4월 동경음

    악학교 성악과에 입학하였다. 1931년 재학 중 콜

    럼비아음반에 데뷔했으며, 1933년 3월 졸업하고

    빅타음반에 전속가수가 되었다. 또한 1936년에 디

    치크(テイチク)의 전속가수, 1939년에 콜럼비아의

    전속가수가 되었다. 1940년 4월에 결혼한 후지야

    마는 1943년 2월-7월과 그해 11월부터 1945년 8월

    까지 남방(南方)에 위문단으로 참가하였다. 전쟁

    이 끝난 1945년 8월부터 이듬해 1946년 7월까지 1

    년간 인도네시아에서 포로생활을 하여 1946년 7

    월 25일에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1952년에는 일본

    적십자사의 특별유공자로 수상했다. 1954년에는

    콜럼비아의 전속을 그만두고 NHK의 촉탁이 됐으

    며, 1958년 NHK방송문화상을 수상하였다. 1959

    년에는 사회교육공로장, 1973년에는 자수포장(紫

    綬褒章), 1974년에는 일본레코드대상특별상, 1982

    년에는 봄의 훈장수여로 훈3등 서보장(瑞宝章),

    1992년에는 국민영예상을 수상한 바 있다.

    2.“대구소패”

    “대구소패”가 수록된 콜럼비아음반

    “대구소패”가 수록된 콜럼비아음반 레이블

    대구소패

    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구소패”는 마

    단조로 한 절이 25마디로 되어 있다. 음원을 들어

    보면, 전주 11마디를 피아노를 비롯하여 샤쿠하치

    (尺八)와 샤미센(三味線)이 연주한 후 1-2절을 노

    래하며, 이어 간주로 24마디를 연주하고, 다시 3절

    을 노래하며 후주로 마친다. “대구소패” 역시 “대

    구행진곡”과 같이 깡총리듬 및 부점리듬 형태로

    처음부터 끝까지 대부분 사용하고 있고, 특히 일

    본 전통악기인 사쿠하치와 샤미센으로 반주하고

    있어 더욱 일본풍의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또한

    ‘시’ 음이 전혀 없는 6음음계를 이용하고 있어 서

    양풍과는 다르다. 이렇듯, 3절로 노래하는 것이

    “대구행진곡”과 공통점인데, 전주, 1-2절 노래, 간

    주, 3절 노래, 후주로 되어 있다.

    소패(小唄)는 고우타(こうた)로 원래 일본의 전

    통적 노래(端唄)로부터 파생한 속요(俗謡)이다.

    일반적으로는 에도시대(江戸時代, 1603-1868)부

    터 속요(小唄)로 여겨지는 일본의 전통적 노래의

    약칭이다. 용어로 정착된 것은 메이지시대(明治時

    代, 1868-1912)부터 타이쇼(大正, 1912-1926) 연간

    (年間)이다.11) 영남문화회 하오명선생님에 의하

  • 일제강점기 대구노래 고찰 -“대구행진곡”, “대구소패”, “대구부민가”를 중심으로- 137

    Journal of Daegu Gyeongbuk Development lnstitute

    면,12) “소패(小唄)는 '고우타'(こうた)로 에도시

    대의 전통현악기인 샤미센을 쓰는 속곡(俗曲)을

    말한다.” 또 “고우타는 소가(小歌)로 무로마치시

    대(室町時代, 1336-1573)의 ‘짧은 노래’를 말한다”

    고 하였다. 요약하면, 소패는 일본의 전통적인 노

    래 스타일로 샤쿠하치나 샤미센 등 일본의 전통악

    기13)를 노래반주로 만들어진 기교적인 일본풍의

    노래를 말한다. “대구소패”는 바로 일본 전통음악

    의 느낌이 듬뿍 담겨있는 전통적인 일본노래인 것

    이다.

    1932년 1월에 콜럼비아음반으로 발매된 “대구

    소패”를 작곡한 사람은 곤도 세이지로(近藤政二

    郞)14)이다. 꾀꼬리 같은 목소리의 여자 가수가 부

    른 ‘꽃이거든 아름답게 향기 가득 피어라…’라고

    부르는 노래는 1935년 2월에 발표된 “피지 못한

    꿈”이라는 일본 유행가이다. 이 곡은 ‘봄은 왔네

    봄이 와 숫처녀의 가슴에도...’라는 가사로 유명한

    “처녀총각”의 범오(凡吾, 필명 劉道順)가 작사했

    는데, 작곡은 “대구소패”를 작곡한 일본인 곤도가

    하였다. 때문에 일본 유행가에다 제목과 가사만

    바꾸어 붙인 일종의 번안가요라고 할 수 있다. 이

    렇듯, 곤도는 일본 대중음악 작곡가이임을 알 수

    있다. 당시 널리 알려진 유행가 작곡가를 선정하

    여 만들어진 곡이 바로 “대구소패”인 것이다.

    “대구소패”를 불러 콜럼비아음반에 취입한 가

    수는 신바시남지 구용(新橋南地久龍)이다. “대구

    소패”(1932)를 취입한 가수 신바시남지는 당시 무

    라야마 키요익(村山清益)이 작사하고 “사사홍화”

    (佐々紅華)와 “카시와자키속요”(柏崎小唄)를 취입

    한 바 있다. 당시 「카시와자키일보」(柏崎日報)에

    의하면, “카시와자키속요”는 에치고(越後) 타임즈

    현상모집에서 당선된 곡이다. 이미 신바시남지는

    1931년에 나카사토 새벽(中里東雲)이 작사하고 코

    마츠 미츠코(小松光子)가 작곡한 “타카사키속요”

    (高崎小唄, 1931)를 부른 바 있다. 이렇듯, 1930년

    대 당시 신바시남지는 일본의 전통적 노래인 속요

    를 노래한 전문적 가수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

    의 대표적 고우타 가수가 바로 신바시남지인 것이다.

    3.“대구부민가”

    “대구부민가”가 수록된

    빅타음반(53385-A)

    “대구부민가”가 수록된

    음반 레이블

    榮光の 夢か 二千年 新羅の 旧都に 隣して

    我が 大邱の 建設を 命に掛かえし 先人の

    强き力を 思う時 淚の跡ぞ 偲ばるる

    대구부민가

    11) “小唄(こうた)には、もともと端唄から派生した俗謡である。一般には江戸小唄とされる端唄の略称。略称として定着した

    のは、明治․大正年間である。ほかに現代小唄․清元小唄․常磐津小唄・義太夫小唄(豊本節)新内小唄などがある。ここでは主に江戸小唄について述べる。” http ://ja.wikipedia.org/wiki/ 관련 항목.

    12) 2012년 10월 29일자 전자메일([email protected])로 전달받았음.

    13) 샤쿠하치(尺八)는 일본의 전통악기로 대나무로 만든 세로잡고 부는 피리이다. 우리나라 큰 퉁소와 같은 독특한 음색을

    지니고 있 관악기이다. 그리고 샤미센(三味線)은 3개의 현과 가죽으로 된 일본의 전통 현악기이다.

    14) 「오마이뉴스」, 2003년 11월 14일자 “은 북한 유행가?” 기사 참조.

  • 138 손 태 룡

    대구경북연구 제12권 제2호

    “대구부민가”의 가사내용은 대구가 역사적인

    도시로서 선인(先人)들의 노력으로 현재 강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눈물겨운 일이라고 밝히고 있

    다. 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구부민가”

    는 다장조로 한 절이 12마디로 되어 있다. 음원을

    들어보면, 일본빅타관현악단의 반주로 처음 전주

    가 4마디 연주되고, 이어 1-2절을 노래하며, 간주

    를 한 절 연주하고 3절을 노래하며, 끝으로 후주를

    4마디 연주하고 마친다. “대구부민가” 역시 “대구

    행진곡”과 “대구소패”에서와 같이 일본풍을 자아

    내는 깡총리듬 및 부점리듬을 대부분 사용하고 있

    다. 더욱 ‘파’와 ‘시’가 전혀 없는 5음음계(도-레-

    미-솔-라)를 사용하고 있어 서양풍과는 전혀 다

    르다. 이렇듯, “대구행진곡”과 “대구소패”와 같이

    모두 3절로 노래하는 것이 공통점인데, 전주, 1-2

    절 노래, 간주, 3절 노래, 후주가 또한 같다.

    1935년 4월에 빅타음반으로 발표된 “대구부민

    가”를 작사한 사람은 구로모토 슈헤이(黑木周

    平)15)이다. 구로모토는 당시 대구 및 포항의 교유

    (敎諭), 곧 교사이었다. 1932년에는 대구고등보통

    학교에 관등 4급으로 근무했으며, 1939년에는 경

    북중학교에 7등7급(관등) 종7(공훈)로 재직한 바

    있다. 이후 1943년에는 경북 포항중학교에 5등 종

    6으로 근무하였다. 따라서 “대구부민가”는 1935년

    4월에 발매되어 대구고등보통학교에 교사로 재직

    중이던 시기에 작사됐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지금

    도 학교가 개교하여 교가를 작사할 때 그 학교에

    근무하는 국어교사 등이 작사한 경우가 많다. 그

    것은 그 학교를 가장 알 아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

    이다. 당시 “대구부민가”도 지금의 “대구시민의

    노래”와 같은 대구를 가장 잘 나타내는 노래인 셈

    이다. 당시 이 노래를 통해서 대구지역에 일본적

    정신 및 정서가 심게 되었던 것이다. 더욱 당시 가

    장 유명한 작곡가 나카야마 신페이(中山晋平)를

    선택한 것으로도 짐작이 가능하다.

    작곡가 나카야마 신페이(中山晋平)

    아사쿠사초등학교 재직시(앉은이 왼쪽부터 1번이 나카야마 신페이)

    “대구부민가”를 작곡한 사람은 나카야마 신페이 (中山晋平, 1887-1952)16)이다. 나카야마는 나가노

    1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참조.

    16) “童謡『シャボン玉』で知られる大正時代の作曲家・中山晋平。出身は長野県ですが、彼の記念室が浅草の小学校にあります。子どもたちは偉人とのつながりに誇りを持ち、地元からは地域活性化への切り札にとの期待も高まっています。中山

    晋平記念室は台東区立千束小学校にあります。中山が10年間音楽の教員をしていたことを記念したものです。有名な『シャ

    ボン玉』は、千束小勤務時代につくられました。千束小では20年前に空き教室を記念室に改造して、当時のレコードや楽

  • 일제강점기 대구노래 고찰 -“대구행진곡”, “대구소패”, “대구부민가”를 중심으로- 139

    Journal of Daegu Gyeongbuk Development lnstitute

    현(長野県) 시모타카이군(下高井郡) 니이노마을

    (新野村, 현재 中野市 大字新野)에서 태어났다. 유

    명한 동요 “비눗방울”(シャボン玉)이 그의 창작품

    이다. 1915년 고향을 떠나 도쿄로 와 시마무라 호

    게쓰(島村抱月)의 제자로 동경음악학교 예과에

    입학하였다. 동경음악학교를 1922년에 졸업하고

    1928년에 “카츄샤의 노래”(カチューシャの唄)를

    작곡했는데, 이 노래는 마쓰이 스마코(松井須磨

    子)가 불러 대히트 했다. 이후 나카야마는 다섯 살

    많은 시인 노구치 우죠(野口雨情)와 만나 새로운

    동요와 민요의 창작에 대한 정열에 자극을 받았

    다. 1935년에 “사공속요”(船頭小唄)와 “파부의 항

    구”(波浮の港)가 음반에 취입되었다.

    그의 신민요의 작곡활동은 1937년 “스자카속

    요”(須坂小唄)로 시작됐지만, 1925년부터 전국에

    서 작곡의뢰가 급증했다. 고향을 위해서 만든 “나

    카노속요”(中野小唄)도 그 하나이다. 스즈키 미에

    키치(鈴木三重吉)가 주재한 아동잡지 「붉은 새」

    (赤い鳥)가 창간되어 키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

    나 사이죠 팔십(西條八十)17) 등 당시 문인이 빠짐

    없이 여기에 동참했다. 또한 나카야마는 “초등학

    교 여성”(小学女性)이나 “돈의 배”(金の船) 등에

    수많은 동요곡을 발표하였다. 잡지 「돈의 별」(金

    の星)에 “증성사의 리잡자”(證城寺の狸囃子), 잡

    지 「코드모노크니」(コドモノクニ)에는 “그 마을

    이 마을”(あの町この町)와 “국과 영주”(鞠と殿様)

    등을 발표하였다. 1952년 사망할 때까지 나카야마

    는 가요·동요·신민요·사가·교가 등 다양한 분야의

    곡을 남겼다. 더욱 키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 사

    이죠, 노구치 우죠(野口雨情) 등 시인들과 함께 만

    들어낸 일본인의 마음의 노래라고 할 수 있는 여

    러 가지 곡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

    고 있다.

    나카야마가 사용한 아사쿠사초등학교의 풍금

    아사쿠사초등학교 교가를 작곡한

    나카야마(中山) 친필

    한편 나카야마를 기념하는 기념실은 아사쿠사초

    등학교(浅草小学校)에 있다. 아이들은 위인과의

    연결에 자랑을 가져 현지에서는 지역 활성화의 홍

    보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나카야마기념실은 타이

    토구립(台東区立) 센조쿠초등학교(千束小学校)에

    있다. 이곳은 나카야마가 10년간 음악교사를 하고

    있던 것을 기념한 것이다. 유명한 노래 “비눗방울”

    을 센조쿠초등학교에 근무하던 당시 작곡하였다.

    譜、中山の写真などに加え、『シャボン玉』を作詞した野口雨情とやり取りした手紙も展示されています。そして、千束

    小学校の校歌も中山の作曲したもので.” 나카야마 신페이(中山晋平) 홈페이지(http://www.city.nakano.nagano.jp/shinpei/)

    참조.

    17) 西條八十, 「西條八十全集」(東京:国書刊行会, 2003), 第九卷 歌謠.民謠Ⅱ. 관련 사진 참조.

  • 140 손 태 룡

    대구경북연구 제12권 제2호

    나카야마 신페이(정원에서)

    센조쿠초등학교에서는 20년전에 교실을 기념실로

    개조하고, 당시의 레코드나 악보, 나카야마의 사

    진 등에 더해 “비눗방울”을 작사한 노구치 우죠

    (野口雨情)와 교환한 편지도 전시되고 있다. 센조

    쿠초등학교 교가도 나카야마가 작곡한 것이다. 그

    리고 나카야마기념관은 그의 탄생 100년을 기념

    해 1987년 7월에 생가 근처에 지어졌다.

    나카야마 신페이기념관(1987년 7월 건립)

    일본대중음악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일본 엔카

    (演歌)는 1914년 나카야마가 작곡한 “카츄사의 노

    래”이다. 엔카의 아버지로 추앙(推仰)받고 있는

    고가 마사오가 1930년대 레코드산업의 비약적인

    선풍을 일으키면서 엔카는 명실상부한 대중음악

    으로 자리잡았다. 한편 가요곡이라는 명칭은 소화

    (昭和, 1926-1989) 초기에 나온 것인데, 실제로는

    1914년(大正 3년) 나카야마가 작곡한 “카츄샤의

    노래”가 가요곡 제1호인 셈이다. 이것은 창가조도

    아니고 연가조도 아니며 속곡도 아닌 새로운 스타

    일의 작곡으로 민중에 넓게 애창되어 그 음반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생애 1,767곡을 작곡했음이

    밝혀졌는데, 동요 800곡, 가요 400곡, 신민요 300

    곡, 교가 및 단체가 200곡 등이다.

    이렇듯, 일제강점기 전국적으로 시행된 일본인

    의 대구노래는 주로 콜럼비아음반과 빅타음반에

    담겼다.(과 참조) 콜럼비아음

    반에 수록된 일본인의 한국노래는 모두 55곡이다.

    이들 중 같은 제목의 곡은 5곡이다. 또한 위탁음반

    중 “조선전매가”와 “조선은행행가”는 가수의 이름

    이 없다. 그리고 1곡에 2명이 부른 곡은 9곡이며,

    3명(합창 포함)으로 부른 곡이 2곡이 된다. 취입한

    가수는 36명으로 이토 히사오(伊藤久男)가 5곡으

    로 가장 많다. 또한 55곡의 작사자는 모두 30명으

    로 5곡의 작사자를 알 수 없으며, 우에다 타다오

    (上田忠男)가 7곡으로 가장 많다. 한편 “조선연맹

    가”[半島進軍譜]는 조동일(趙東一)이 작사하고 카

    와지 에이스케(川路英介)가 내용을 보충하여 완

    성된 것이다. 또한 55곡을 작곡한 사람은 18명으

    로 5곡의 작곡자를 알 수 없다. 한편 11곡이 2명으

    로 작곡에 참가했었다. 따라서 당시 선호하는 작

    곡자를 선택했음을 알 수 있는데, 13곡을 작곡한

    오오바 이사무지조(大場勇之助)가 주목된다. 본고

    에서 다룬 “대구행진곡”과 “대구소패”가 바로 이

  • 일제강점기 대구노래 고찰 -“대구행진곡”, “대구소패”, “대구부민가”를 중심으로- 141

    Journal of Daegu Gyeongbuk Development lnstitute

    콜럼비아음반에 담겨져 있다.

    일본빅타음반에 수록된 일본인의 한국노래는

    모두 26곡이다. 이들 중 같은 곡은 “조선신궁봉찬

    창가”인데, 음반의 앞뒤면 가수를 달리하고 있다.

    26곡을 부른 가수 및 단체는 1곡에 1명이 대부분

    이지만 합창단이 2번 불렸고, 1곡에 2명이 취입한

    것이 4곡이다. 따라서 모두 30명(단체 포함)이 취

    입하였다. 26곡의 작사자는 5곡이 2명이라 모두

    31명이 되는데, 이중에는 4곡이 편찬에 참여하였

    다. 또한 이들 중 사이죠가 14곡을 작곡하여 당시

    가장 주목되는 작사자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26

    곡의 작곡자는 27명이 되는데, 1곡(元山ながし)에

    2명(東儀哲三郎, 岡村雅雄)이 된다. 이들 중 나카

    야마가 19곡이 되므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나카야마를 얼마나 선호하는

    작곡가임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본고에서 다룬

    “대구부민가”의 작곡가가 바로 빅타음반의 나카

    야마이다.

    Ⅳ. 맺는말:일제강점기 대구노래의 이해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만든 대구의 노래를 이해

    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구출신의 민족시인 이상화

    가 창작한 와 의 내용을 이해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민족시가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가 문

    화정치를 펼치면서 시작되어, 이상화의 두 편 시

    가 한국어 잡지에 발표되어 한국인들에게 읽혀짐

    으로써 독립운동 및 국가사랑에 대한 한국민의 갈

    망이 고조되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

    다. 한편 의 전체적인 가사내용을

    보더라도, 당시 대구를 역사적인 도시로 묘사하면

    서 이렇게 강한 도시가 됨은 눈물겨운 일이라고

    은연중에 일본의 업적을 찬양하고 있다.

    일제의 검열을 피해 「개벽」(1926년 6월호)에 발

    표된 는 일제강점

    기 최대 작품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국권을 잃

    은 것에 대하여 슬픔과 절망을 표현하면서 국권을

    회복하고자 봄을 통하여 광복을 이 시에서 소망하

    고 있다. 한편 이상화는 이전에 와

    같은 탐미적 경향의 시를 썼으나, 1924년경부터는

    와 같은 일제강점

    기 민족적 저항정신과 향토적 세계를 표현했다.

    아울러 이러한 현실적 자신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

    바로 「별건곤」(1930년 10월호)에 발표한 인 것이다. 한편 같은 제목인 “대구행진곡”

    은 츠기하라 토우이치로가 작사하고, 고세키 유우

    지가 작곡하고, 후지야마 이치로가 음반에 취입하

    였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위와 같은 이상화의 (1926)와

    (1930)과 같이 민족적 시(詩)가 잡지를 통해 발표

    되면서 전국적으로 사회적 분위기를 더욱 일본화

    하도록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전국적으

    로 각 지역 신문사를 중심으로 그 지역의 행진곡

    과 그 지역의 소패(일본 민속적 노래형태), 그리고

    그 지역을 상징화 하는 시민의 노래(예컨대, “대구

    부민가” 등)를 지어 음반에 취입하게 하였던 것이

    다. 이러한 일환으로 이루어진 곡이 바로 대구의

    일본노래, 곧 “대구행진곡”, “대구소패”, “대구부

    민가”이다. 이러한 곡의 가사와 작곡은 물론 노래

    도 당시 일본 최고의 가수에게 요청하여 이뤄졌음

    이 확인되었다. 때문에 일본정신이 우리민족에게

    깊이 스며들도록 정책적으로 계획하여 이루어진

    결과로 본다. 앞으로 “대구행진곡”과 “대구소패”

    의 가사가 밝혀져 더욱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

    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고에서 살펴본 “대구행진곡”,

  • 142 손 태 룡

    대구경북연구 제12권 제2호

    “대구소패”, “대구부민가”의 작사가와 작곡가 그

    리고 노래한 가수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아보았

    다. 이들은 모두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한 유명한

    문화예술인이었다. “대구행진곡”은 츠기하라 토

    우이치로가 작사하고, 고세키 유우지가 작곡하였

    고, 후지야마 이치로가 음반에 취입하였다. “대구

    소패”는 츠기하라가 작사하고, 곤도 세이치로가

    작곡하였고, 신바시남지 구용이 노래했다. 그리고

    “대구부민가”는 구로모토 슈헤이가 작사하고, 나

    카야마 신페이가 작곡하였고, 후지야마 이치로의

    노래로 음반에 취입했음이 확인되었다. 이들은 모

    두 당시 가장 유명한 작사자, 작곡가, 가수였음을

    확인하였다. 아울러 음악의 구조적 관계를 확인하

    도록 음원을 통해 악보화 하여 분석해본 결과, 모

    두 일본풍의 악곡임이 밝혔다. 아울러 “대구부민

    가”의 가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http://db.history.go.kr(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

    베이스).

    http://ja.wikipedia.org/wiki/(소패 설명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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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cms.pref.fukushima.jp/(福島縣政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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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HK특집, 1958, “黃金の椅子 野村俊夫ショㅡ”.

    加藤正義·福田俊二編, 「昭和流行歌総覧(戦前·戦中編)」.

    西條八十, 2003, 「西條八十全集」. 東京 : 国書刊行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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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2003년 11월 14일자.

    「朝鮮道邑大觀」, 1937, 京城 : 民衆時論社.

    논문접수일 : 2013. 6. 17, 심사완료일 : 2013. 8. 23

    최종원고 : 2013. 9. 4

  • 일제강점기 대구노래 고찰 -“대구행진곡”, “대구소패”, “대구부민가”를 중심으로- 143

    Journal of Daegu Gyeongbuk Development lnstitute

    연도 곡명 번호 가수명 작사자 작곡자 비고

    1931년

    京城行進曲 26529-A 丸山和歌子 西東十四春 大場勇之助

    奥山貞吉(編)大阪毎日新聞京城支店提供

    京城行進曲 26529-B 新橋南地久竜 西東十四春 大場勇之助奥山貞吉(編)大阪毎日新聞京城支店提供

    1

    9

    3

    2

    大邱行進曲 26680-A 藤山一郎 月原橙一郎 古関裕而

    大邱小唄 26680-B 新橋南地久竜 月原橙一郎 古関裕而

    元山行進曲 26926-A 中野忠晴 井上武夫 古関裕而 元山毎日新聞社懸賞当選歌

    元山小唄 26926-B 福むら貴美子 波多進 古賀政男 元山毎日新聞社懸賞当選歌

    京城府歌 26970-A 米倉俊英 京城府 大場勇之助 京城府作歌

    京城府連合青年団々歌 26970-B 米倉俊英 岩佐重一 大場勇之助

    仁川行進曲 27017-A 井上ケイ子 岸本勇 大村能章

    仁川小唄 27017-B 福むら貴美子 岸本勇 近藤政二郎

    平壌民謡 27018-A 丸山和歌子 西東十四春 近藤政二郎

    我等の平壌 27018-B 米倉俊英 西東十四春 古関裕而

    漢江節 60739-A

    오리엔트三浦屋信子 西崎義輝

    松井千稔

    杉田良造(編)

    京城メロディー 60739-B 오리엔트

    阿部幸次 小国比沙志 阪東政一 京城第一高等女

    学校々歌 26966-A渡辺光子京城第一高等女学校 坪内孝

    大場勇之助

    奥山貞吉(編)京城第一高等女

    学校愛校の歌 26966-B渡辺光子京城第一高等女学校 今淵武壽

    大場勇之助

    奥山貞吉(編 1933년

    金剛山小唄 27462-A 松平晃 西條八十

    (選・編)古賀政男,

    仁木他喜雄(編)

    京城日報当選歌, 朝鮮総督府推薦

    新興朝鮮の歌 27462-B ミス・コロムビア 西條八十(選・編)

    古賀政男

    仁木他喜雄(編)

    京城日報当選歌, 朝鮮総督府推薦

    콜럼비아음반에 수록된 일본인의 한국노래 목록18)

    18) http://nekonote.jp/toko/fal/colombia6-16.html. 한편 이 자료는 SPレコード60,000曲総目録(昭和館監修), コロムビア総目録邦楽, 昭和流行歌総覧(戦前·戦中編)(加藤正義·福田俊二編)을 참조하여 작성했다고 한다.

  • 144 손 태 룡

    대구경북연구 제12권 제2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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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4

    朝鮮音頭 27876-A赤坂小梅,

    筑波一郎 斎藤寿賀 佐々紅華 パカチ節 27876-B 藤本二三吉 斎藤寿賀 佐々紅華 平壌よいとこ 27881 葦原邦子 酒井慶三 山田耕筰

    釜山小唄 27954-A 藤本二三吉 吉邨春朗 佐々紅華 釜山音頭 27954-B

    赤坂小梅,

    伊藤久男 上田忠男 佐々紅華

    朝鮮おけさ 27963-A 服部逸郎 鈴木かほる レイモンド服部

    朝鮮おけさ 27963-B 分山田和香 鈴木かほる レイモンド服部

    京城ばやし 28090-A 音丸 上田忠男 大村能章

    カチ鴉 28090-B 松平晃 上田忠男 江口夜詩

    1

    9

    3

    5

    躍進朝鮮 28344-A 松平晃 上田忠男 江口夜詩

    白頭しぐれ 28344-B 赤坂小梅 上田忠男 大村能章

    京城をどり 28512-A 音丸 上田忠男 大村能章

    四季の京城 28512-B京城旭町検番百太郎 上田忠男 大村能章

    朝鮮よいとこ 28551-A 音丸 野口雨情 江口夜詩 京城日報社推薦

    伸びゆく朝鮮 28551-B 中野忠晴 佐藤惣之助 古関裕而

    輝け朝鮮 28571新美博義,

    中野忠晴 北原白秋 山田耕筰

    羅津音頭 28591-A伊藤久男,

    赤坂小梅 土岡正次郎 大村能章

    羅津開港4念,

    羅津商工会懸賞当選歌

    羅津小唄 28591-B 分山田和香 鈴木かほる 大村能章

    躍進西鮮三道の

    歌 28543 青山薫 原田貞輔 江口夜詩

    1

    9

    3

    6

    京城帝国大学予科校歌

    28763-A 京城帝大合唱団 都志見吉秋 大塚勇之助

    京城帝国大学予科陸行の歌

    28763-B 京城帝大合唱団 重岡與三彦 大塚勇之助

    大同江筏節 28837-A 音丸 黒田義治 大村能章 平壌毎日新聞社懸賞当選歌

    アリラン夜曲 28837-B 松平晃 西條八十 江口夜詩

  • 일제강점기 대구노래 고찰 -“대구행진곡”, “대구소패”, “대구부민가”를 중심으로- 145

    Journal of Daegu Gyeongbuk Development lnstitute

    京城双六 28982-A 京城本券 百太郎, 服部逸郎 鈴木かほる 江口夜詩

    恋の京城 28982-B 京城本券 百太郎 鈴木かほる 竹岡信幸

    1937년

    城津小唄 29395 音丸 徳田三十四 大村能章

    朝鮮青年歌 29491 中野忠晴,合唱団 田中初夫 大場勇之助 朝鮮文芸会制定

    1939년

    朝鮮連盟歌 30391-B

    霧島昇,

    松原操,

    合唱団 朝鮮連盟選定

    皇国青年歌 30391-B 伊藤久男,合唱団 朝鮮総督府選定

    1941년

    半島進軍譜 100255-A伊藤久男,

    二葉あき子, 合唱団 趙東一, 川路

    英介(補)陸軍軍楽隊 国民総力朝鮮

    連盟推薦

    半島娘 100255-B 菊池章子 川路英介 佐々木すぐる

    불 명(위탁음반)

    朝鮮殖産銀

    行行歌 486-A 伊藤久男 辻恒雄

    大場勇之助

    大場勇之助(編)

    朝鮮殖産銀

    行行歌 486-B 콜럼비아合唱団 辻恒雄 大場勇之助

    大場勇之助(編)

    朝鮮専売歌 526-A 伊藤久男콜럼비아合唱団 北原白秋

    山田耕筰山田耕筰(編)

    朝鮮専売歌 526-B 山田耕筰山田耕筰(編)

    朝 鮮 銀 行 行 歌

    (独唱) 547-A

    朝 鮮 銀 行 行 歌

    (合唱)547-B

  • 146 손 태 룡

    대구경북연구 제12권 제2호

    연도 곡명 번호 가수 작사자 작곡자 비고

    1931년

    京城小唄 51969-A 市丸 西條八十 中山晋平

    大京城行進曲 51969-B 四家文子 西條八十 中山晋平 京城日報社選

    1932년

    咸興小唄 52063-A 藤本二三吉 山口敬一 中山晋平

    咸興行進曲 52063-B 羽衣歌子 相馬御風 中山晋平

    大平壌行進曲 52169-A 日本빅타女声合唱団

    西元詩図雄, 西條八十

    (補作)

    中山晋平 平壌毎日新聞社募集

    平壌小唄 52169-B 勝太郎 西條八十 中山晋平

    温陽小唄 52255-A 勝太郎 西條八十 中山晋平 京南鉄道線の沿線歌

    温陽ぶし 52255-B 市丸 西條八十 中山晋平 京南鉄道線の沿線歌

    1933년

    大田小唄 52529-A 藤本二三吉 湖畔生 中山晋平 大田府の歌

    大田行進曲 52529-B 四家文子 止水生 中山晋平 大田府の歌

    四季の朝鮮 52741-A 藤山一郎 西條八十 中山晋平 京城日報社特編

    朝鮮サンヤレ 52741-B 勝太郎 田中初夫, 西條八十(補)

    中山晋平 京城日報社募集

    一等当選

    京城祭 52897-A 市丸 西條八十 中山晋平

    (流行歌)恋のオンドル

    52897-B 藤山一郎 西條八十 佐々木俊一

    빅타음반에 수록된 일본인의 한국노래 목록19)

    19) http://nekonote.jp/toko/fal/bictor6-16.html. 한편 이 자료는 ビクター邦楽総目録와 昭和流行歌総覧(戦前·戦中編)(加藤正義·福田俊二編)을 참조하여 작성했다고 한다.

  • 일제강점기 대구노래 고찰 -“대구행진곡”, “대구소패”, “대구부민가”를 중심으로- 147

    Journal of Daegu Gyeongbuk Development lnstitute

    1934년

    朝鮮甚句 53234-A小唄勝太郎, 三島一声 西條八十 中山晋平

    朝鮮音頭 53234-B小唄勝太郎, 三島一声 西條八十 中山晋平 東京音頭替唄

    1935년

    (新小唄)新羅ば

    やし 53385-A

    三島一声, 市丸

    朝 鮮 民 報 社

    (編)佐々木俊一 朝鮮民報社編

    大邱府民歌 53385-B 藤山一郎 黒木周平 中山晋平 朝鮮民報社編

    (新小唄)朝鮮ま

    つり 53567-A

    三島一声, 市丸

    西條八十 中山晋平

    (行進曲)若人朝

    鮮 53567-B 藤山一郎 西條八十 佐々木俊一

    朝鮮神宮奉賛唱歌

    53568-A 徳山璉 宮内省楽部, 多忠朝

    朝鮮神宮

    選歌

    朝鮮神宮奉賛唱歌

    53568-B 四家文子 宮内省楽部, 多忠朝

    朝鮮神宮

    選歌

    木浦行進曲 53152-A 島村武男 池田效,

    白鳥省吾(補)中山晋平 木浦新報社編

    木浦小唄 53152-B 市丸 白鳥省吾 中山晋平 木浦新報社編

    1937년

    元山大漁ばやし J

    54178-A

    市丸,

    合唱団 野口雨情 駒井一陽, 元山毎日新聞社編(佐々木俊一 編)

    元山ながし J

    54178-B南邦雄 野口雨情

    東儀哲三郎, 岡村雅雄(編)

    元山毎日新聞社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