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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Ⅰ. 머릿말

    Ⅱ. 詩經에 나타난 부녀의 성개방과 연애관

    Ⅲ. 선진시대 부녀의 혼인상의 금기

    Ⅳ. 맺음말

    先秦時代 婦女의

    性開放과 婚姻上의 禁忌

    鄭 愛 蘭 (誠信女大)

    Ⅰ. 머리말

    중국고대 전통사회에서 여성의 역할과 지위는 남성에 비해 상당한

    부분에서 제약과 구속을 받아 왔었다. 하지만 고대로부터 부녀의 혼인

    생활과 관련한 여러 방면의 생활상에 대해 매우 중시 받아온 사실로

    미루어 당시 부녀가 지역사회의 전반적인 생활에 큰 비중을 차지한 것

    을 알 수 있다. 예컨대 詩經에 반영된 고대부녀들의 연애 및 혼인에관한 시가가 바로 이러한 사실을 그대로 나타내 주고 있다. 이는 선진

    시대 부녀의 생활의식 특히 정신적인 감정생활의식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지위와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고대부녀들이

    자신들의 감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직접적인 감정표현 그 자체라고 해

    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통해 당시 사회풍조와 아울러

    고전 특히 시경에 묘사된 남녀간의 정감어린 감정생활 외에도 그들의

    사상, 사회풍기, 예교, 및 이러한 생활방식들을 당시 부녀들이 주관하

    고 해결해 나가는 방법 등 다각도로 투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中國史硏究 第61輯 (2009.8)326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당시 부녀들이 애정문제라든가 혼인방면에

    있어 봉건사회에서 예교라는 구속과 굴레 속에서는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대담성과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신들의 의식구

    조를 유감없이 표현해 내고 있다는 점이다. 詩經중의 詩歌에는 부녀의 혼인과 애정생활이 공동주제로 대다수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 이

    를 확연히 증명해 준다고 할 것이다. 이는 애정이라는 감정생활이 고

    대나 현대를 막론하고 인류사회생활가운데 소홀하거나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회 환경과 질서의 테두리에서 비교적 보편적인 생활의 일환

    으로서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폐쇄적이고 가부장적인 남

    성위주의 중국 전통사회에서도 여성의 역할과 작용이 얼마나 중요한가

    를 인식하게 하고 우리들에게 당시 사회, 역사문화현상의 단면을 생생

    하게 생동적인 사실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에 대한 개방적 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사회에서 부녀에 대한

    혼인상의 금기 또한 부녀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녀양성관계에 있어 여성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남녀관계의 목적

    은 생리상의 필요뿐만 아니라 종족번성에 더 큰 의의를 부여하고 있

    다. 이는 고대나 현대를 막론하고 남녀혼인관계를 통해 달성되는 것이

    다. 그러나 혼인이라는 남녀양성관계 속에서 많은 구속과 제약이 존재

    하고 이를 혼인예의의 금기라는 범주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문은 선진시대 여성들의 삶 속에 내재해 있는

    감정생활을 통해 선진시대 부녀들의 성 관념과 연애관을 고찰할 것이

    다. 아울러 고대 혼인의식 중에 부녀에 대한 금기사항을 살펴봄으로서

    당시사회의 부녀에 대한 고정관념과 인식을 탈피하여 선진시대 부녀의

    역할과 작용을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Ⅱ. 詩經에 나타난 부녀의 성개방과 연애관

  • 先秦時代 婦女의 性開放과 婚姻上의 禁忌 (鄭愛蘭) 327

    고전에 나타난 부녀의 남성에 대한 감정과 그 내용은 다양한 양상

    으로 표현되고 있다. 우선 대표적으로 시경 중에 묘사된 부녀들의 감

    정이 매우 자유분방하고 대담하여 당시 봉건사회의 예속생활의 굴레를

    과감하게 탈피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특히 일반서민사회에서 부녀들

    의 일상생활과 남녀간의 감정표현은 예속에 얽매인 귀족층의 부녀들보

    다 자유로왔음을 충분히 엿 볼 수 있다. 기록을 보면 부녀의 연애와

    감정생활의 비중이 매우 크게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이는 대체

    로 부녀가 혼인전과 혼인후의 결혼생활과 연애감정생활에 중요한 지위

    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남녀감정생활,

    사상, 사회풍기, 예교 및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 등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대부녀가 표현해 내고 있는 그들의 애정문제, 혼인방면에도

    이미 대담하게 자유롭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당시의 풍기를 엿 볼

    수 있다. 특히 고대 서정시가중에는 부녀생활은 애정과 혼인생활이 거

    의 공동의 주제로 자리 잡을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고

    금을 막론하고 인류사회 생활 중에서 애정 이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일환이며 또한 인간생활에서 비교적 누구나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동일하지

    않는 형식의 연애와 혼인생활방식과 감정생활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

    다. 이러한 점은 그 시대의 부녀혼인생활과 제도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으며 동시에 마침 중국전통사회사상과 부녀생활의 역사적 특징을 반

    영하고 있다.

    1. 부녀의 연애감정생활

    우선 우리는 詩經에서 묘사하고 있는 부녀의 짝사랑과 남녀 간의정기적인 모임을 통한 성애와 연애감정에 대해 몇 가지 대표적인 예를

    들어 보겠다. 衛風․有狐에서는 상대방에게 짝사랑의 고통을 표현해짝을 이루고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 中國史硏究 第61輯 (2009.8)328

    여우가 수수히 걸어가니 저 기수의 돌다리에 있네, 마음의 근심은 치

    마가 없음이다.

    여우가 수수히 걸어가니 저 기수의 건널목에 있네, 마음의 근심은 띠

    가 없음이다.

    여우가 수수히 걸어가니 저 기수의 곁에 있네, 마음의 근심은 옷이 없

    음이다.1)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여우가 홀로 유유히 거닐며 짝을 구하고자 하

    는 간절한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이 가운데 소위 ‘치마’ ‘띠’ ‘옷’을 배

    우자로 비유하여 이것을 가지지 못한데 대해 스스로 근심 걱정을 표현

    한 좋은 예이다. 또한 당시 시대에 남녀혼인의 구애방식을 풍자한 일

    면을 엿볼 수 있다. 이는 단순한 남녀의 연애감정만을 표현한 것이 아

    니라 중국전통사회상에서 가정을 이루는 것은 바로 생육의 중요성과

    일맥상통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 결코 소홀할 수 없는 사회현상의 일환

    을 보여주고 있다.

    큰 밭은 갈지 마라, 잡초가 무성할 것이다.

    멀리 있는 사람은 그리워하지 말라

    애끓는 마음만 가득하여 근심할 것이다.2)

    이 시는 여자가 신분적 차이를 초월하여 남자와 사랑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남쪽에 교목이 있는데 가서 쉴 수가 없구나.

    한수에 놀러 나온 여자가 있어도 구할 수가 없구나,

    한수가 넓어 헤엄쳐 갈수 없고 강수가 길어 뗏못으로 갈 수가 없구

    나.3)

    1) 衛風․有狐, “有狐綏綏, 在彼淇梁, 心之憂矣, 之子無裳有狐綏綏, 在彼淇厲, 心之憂矣, 之子無帶. 有狐綏綏. 在彼淇側, 心之憂矣, 之子無服.”

    2) 齊風․甫田, “無田甫田. 維莠驕驕. 無思遠人, 勞心忉忉.”3) 周南․漢廣, “南有喬木, 不可休息, 漢有遊女, 不可求思. 漢之廣矣, 不可泳思,江之永矣, 不可方思.”

  • 先秦時代 婦女의 性開放과 婚姻上의 禁忌 (鄭愛蘭) 329

    여기서는 알 수 있듯이 남자가 여자를 사모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이외에도 詩經의 많은 시가 가운데 당시 남녀가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서정적인 애정으로 상대방에게 표현한 시가 적지 않

    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동문의 못에, 삼을 담글수 있네,

    저 아름다운 숙희와 함께 노래를 부를 수 있어라4)

    언덕가운데 삼이 있어 저기에서 자차를 만류하네.

    저기에서 자차를 만류하니 장차 그가 기쁘게 오겠는가.

    언덕가운데 보리밭이 있는데 저기에서 자국을 만류하네.

    저기서 자국을 만류하니 그가 나에게 와서 밥을 먹겠는가.

    언덕가운데 오얏이 있는데 저기에서 그분을 만류하네.

    저기서 그분을 만류하니 나에게 패옥을 주겠는가.5)

    이 시가들은 부인이 함께 私通하는 자가 있기를 바랐으나 결국 오

    지 않았다는 내용의 의미를 담고 있다. 언덕가운데 삼과 보리와 오얏

    이 있는 곳으로 그를 머물게 하려하는데 그리운 이는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예부터 음식은 원래 성교를 상징하는 은어의 일종이며 패옥으

    로 남자가 여자의 환심을 사서 만날 기회를 만들고자 하는 상징적의미

    를 내포하고 있다.6) 이 시 중에서 알 수 있듯이 순수한 서정적인 감정

    을 가지고 강열하고 솔직담백한 표현으로 부녀에게 연애감정을 받아들

    이게 함과 동시에 부녀의 열정적이고 활달한 성격을 유감없이 묘사해

    내고 있다. 이외에도 남녀의 사랑과 정기적인 만남에 대한 환희를 노

    래하고 있는 시가도 적지 않다.

    고전중에 나타난 당시 남녀의 연애생활과 감정생활 그리고 부녀의

    결혼생활은 기본적으로 건강하고 적극적이며 자유롭게 스스로의 생활

    에 충만한 분위기속에서 형성되고 있었다. 중국전통사회의 보수적인

    4) 陳風․東門之池, “東門之池, 可以漚麻, 彼美淑姬, 可與唔歌.”5) 王風․丘中有麻, “丘中有麻, 彼留子嗟. 彼留子嗟, 將其來施施. 丘中有麥, 彼留子國. 彼留子國, 將其來食. 丘中有李, 彼留之子, 彼留之子, 貽我佩玖.”

    6) 聞一 多, 神話與詩 (臺中, 藍燈文化事業印行, 1975), p.98.

  • 中國史硏究 第61輯 (2009.8)330

    성격으로 볼 때 이와는 달리 또 다른 일면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 가운데 대부분은 남녀의 솔직담백한 애정표현, 순수한 감정, 열정적

    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고대 부녀들의 연애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웠

    음을 반영하고 있으나 그 반면 구속과 압박 속에 우울한 생활도 토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미 선진시대 부녀에 대한 예교규범과 사

    회적 압박도 여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실 이러한 상황이 바로 당

    시 부녀의 연애생활과 혼인생활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중국사회는 대개 서주초기이후에 예교속박이 없이 자유롭게 연

    애하는 환경 속에서 남녀교제가 이미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

    중 하나의 절일로 중춘절이 되면 남녀가 함께 모여 자유연애를 즐기고

    심지어는 남녀가 함께 사랑의 도피도 허용하는 풍습이 있었다.7) 그리

    고 젊은 청춘남녀가 성문 밖에서 만나 자유롭게 연애하는 모습을 아래

    몇 가지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동문을 나서니 여자들이 구름같구나

    구름같이 많을지언정 내 마음을 사로잡는 여자는 없다.

    흰옷에 파란수건을 쓴 여자만이 나를 즐겁게 해 주는구나8)

    들에 죽은 노루가 있거늘 흰 띠풀로 싸도다

    아가씨가 봄을 그리워하거늘 선비가 유인하도다

    숲에 떡갈나무가 있으며 들에 죽은 사슴이 있거늘

    흰 띠풀로 묶으니 여자가 옥처럼 아름답도다

    가만가만 서서히 와서 내 수건을 움직이게 하지 말며

    삽살개가 짖게 하지 말라9)

    위의 예에서 보면 춘절이 되면 부녀들이 그리움이 더하는 것을 묘

    사하고 있다. 이러한 감정을 부추겨 여인을 옥으로 비유하며 유혹하려

    는 선비의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꼬임에 넘

    7) 周禮․地官: 媒氏掌萬民之判, 仲春之月令會男女, 于是也奔者不禁.8) 鄭風․出其東門: 出其東門, 有女如雲. 雖則如雲, 匪我思存. 縞衣綦巾, 聊樂我員.

    9) 召南․野有死麕: 野有死麕, 白茅包之. 有女懷春, 吉士誘之. 林有樸樕, 野有死鹿, 白茅純束. 有女如玉. 舒而脫脫兮, 無感我帨兮, 無使尨也吠.

  • 先秦時代 婦女의 性開放과 婚姻上의 禁忌 (鄭愛蘭) 331

    어가지 않고 정절을 지키려는 부인의 곧은 의지를 조용히 찬미한 시로

    당시 사회의 남녀풍절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唐을 캐기를 沬의 시골에서 하도다.

    누구를 그리워하는가 아름다운 맹강이구나.

    나와 桑中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으며

    나를 上宮에서 맞이하고 나를 淇水가에서 전송하도다.10)

    위의 시는 위나라 부인을 풍자한 시로써 부인들이 음란하여 군자를

    섬기는 도리를 잃어 이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시가다. 본문의 맹강은

    제나라의 여자로 남자와 정을 통하는 내용이다.

    정녀가 예쁜데 나를 모퉁이에서 기다리는데

    사랑하지만 만나지 못하여 머리를 긁으며 머뭇거리도다.

    정녀가 아름다운데 나에게 붉은 대통을 선물하는구나.

    붉은대통이 붉기도 하고 너의 아름다움을 좋아하누나.

    교외로부터 삘기를 선물하니 진실로 아름답고 또 특이하구나.

    삘기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미인이 선물해서이니라.11)

    이시는 서로가 선물을 주고 받으며 은근히 마음의 뜻을 전달하여

    만남을 맺으려는 것이다. 당당하게 그녀의 아름다움을 좋아한다고 고

    백하는 내용으로 보아 감정의 솔직담백함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남자의 방탕함이여, 완구의 위로다.

    진실로 정감이 있는데 우러러볼 것이 없구나.

    둥둥 북을 치는구나 완구의 아래에서 치는도다.

    겨울도 없고 여름도 없이 백로의 깃을 꽂고 있는구나.12)....

    이 시는 완구아래위에서 남녀가 즐겁게 情思를 나누며 향락과 방탕

    10) 鄘風․君子偕老, “爰采唐矣, 沬之鄕矣. 云誰之思, 美孟姜矣. 期我乎桑中, 要我乎上宮. 送我乎淇之上矣.”

    11) 北風․靜女, “靜女其姝, 俟我於城隅. 愛而不見, 搔首踟躕. 靜女其孌, 貽我彤管. 彤管有煒, 設懌女美. 自牧 歸荑, 洵美且異. 匪女之爲美, 美人之貽.”

    12) 陳風․宛丘, “子之湯兮, 宛丘之上兮, 洵有情兮, 而無望兮. 洵有情兮, 而無望兮. 坎其擊鼓, 宛丘之下. 無冬 無夏, 値其鷺羽······.”

  • 中國史硏究 第61輯 (2009.8)332

    함을 풍자한 노래이다. 이와 유사한 시가는 陳風․東門之枌 鄭風․溱洧 鄭風․蘀兮 鄭風․子衿 鄭風․狡童 등으로 여기서 묘사하고 있는 내용은 모두 남녀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는 것

    이 공통점이다. 더욱 흥미롭고 주목할 만 한 것은 정나라의 부녀의 연

    애와 淫奔생활에 대한 습속을 가장 많이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

    다가 남녀의 애정표현이 매우 대담성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부녀의 연애생활이 얼마나 자유로운가를 짐작케 한다.13) 심지어는 남

    녀가 축제일이 되면 노골적인 성애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때는 종

    교적 의식도 함께 거행하면서 춤과 노래로 구애를 고백하고 성관계가

    이루어진다.

    진수와 유수가 넘쳐흐르는데

    남자와 여자가 막 난초를 잡고 있네

    여자가 “구경갈래?” 라고 하자 남자가 “벌써 갔다 왔어” 라고 하네

    “또 가서 구경하면 유수 밖은 정말 넓고 또 즐거울거야” 하였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즐겁게 장난하면서 작약을 꺾어 선물하는구나14)

    고대 남녀혼인은 父母之命, 媒人之言 을 주로 행하고 있으나 그 반

    면에 여전히 남녀가 자유롭게 만나고 정사를 나누기도 하고 私通이 보

    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는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애정을 상대

    방에게 전달하고 공개적으로 만나서 깊은 정감을 과감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이는 혼인전의 남녀의 감정생활에 있어 당시사회의 예속에 이미

    구속받지 않는다는 점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해 볼 수 있겠다.15) 다시

    말하자면 반드시 부모의 허락 없이도 자유연애를 할 수 있고 남자가

    여자에게 구혼을 청하기도 했다는 점은 오늘날과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인다.

    13) 裵普賢, 詩經欣賞與硏究 (臺北, 三民書局, 1964), p.101.14) 鄭風․溱洧, “溱與洧, 方渙渙兮. 士與女, 方乘蘭兮. 女曰觀乎, 士曰旣且. 且往觀乎, 洧之外, 洵訏且樂, 維 士與女, 伊其相謔, 贈之以勺藥.”

    15) 陳東原, 中國婦女生活史 (臺北, 商務印書館, 1976), pp.25-26.

  • 先秦時代 婦女의 性開放과 婚姻上의 禁忌 (鄭愛蘭) 333

    2. 貞節觀

    선진시대는 예교가 형성되었던 시기이다. 반면에 사회풍기도 매우

    문란하여 남녀유별의 관념이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다. 따라서 남녀간

    의 만남도 구속받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16) 중국에서 최초의 정절관념

    은 易經의 기록에 보인다. 즉 恒其德貞이라 하여 부부간에는 항상변함없이 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늙음도 늘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절을 지키는 요건이고 부녀가 두 丈夫를 두지 않는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당시사회가 여자의 정절을 요구하나 현실적으

    로는 고대인들의 정절의식구조는 확고하지 않으며 매우 복잡한 양상으

    로 나타난다.

    고대 남녀간의 風氣가 아무리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감정생활을 즐

    긴다고 하더라도 당시는 유교예법에서는 정절을 지키는 것이 부녀의

    婦德으로 중요한 덕목중의 하나라고 여겼다. 소위 男女授受不親 으로

    남녀는 서로 가까이 해서는 안되고 오로지 한 장부에게 일부종사를 해

    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17) 물론 부녀의 정절을 중시하지만 전반적인

    사회습속은 아니다. 반드시 정절을 지켜 일부종사(從一而終)할 것을 강

    요하지는 않는다.18) 고대 예교가 발전한 초기에는 예의관념이 있었다

    고 하더라도 아직 전면적으로 민간에 광범위하게 확산된 것이 아니다.

    당시사회가 농업경제의 기초아래 각 가정의 남녀가 다 함께 노동에 참

    여하였으므로 그들 간에 자유롭게 왕래하거나 교제할 기회가 자연히

    많아지게 되므로 부녀의 실제생활과 예의규정과는 거리가 있다.19)

    16) 周禮, “以仲春之月會男女, 是月也, 奔者不禁.”17) 左傳․定公五年, “王將嫁季羋. 季羋辭曰: ‘所以爲女子, 遠丈夫也; 鍾建負我矣.’ 以妻鍾建, 以爲樂尹."

    18) 左傳․桓公十五年, “謂其模母: ‘父與夫孰親?’ 其母曰: ‘人盡夫也. 父一而已,胡可比也?’” 여기서는 부친은 오직 한사람이지만 丈夫는 누구나 다 될 수 있음

    을 말하고 있다.

    19) 劉德漢, 東周婦女生活 (臺北, 學生書局, 1976), p.23; 楊筠如, 春秋時代的男女風紀 (中山大學歷史語言硏究所週刊 第二集 十九期), p.45. 中國文化新論 -

  • 中國史硏究 第61輯 (2009.8)334

    詩經에 묘사된 내용으로 보아서 고대부녀의 생활이 대체로 개방되고 자유연애를 수용하는 사회라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예의와 부모의

    명령 혹은 금지를 중시하고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에 남녀교제가 부자

    유스럽거나 혼인 역시 본인의 의사가 무시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러한 부자유스런 연애와 혼인이 결국 부녀로 하여금 정절이 지켜야 한

    다는 압박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봉건종법사회에서 규정한 정절예의

    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사례를 보도록 하자.

    청컨대 당신(중자)은 내 마음을 넘어오지 말아요

    내가 심어놓은 버드나무를 꺾지 말아주오

    어찌 감이 이것을 애석해 하겠는가

    우리 부모를 두려워함이라

    당신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나

    부모의 말씀이 또한 두려워할 만 하오20)

    윗글에서 부모의 말씀을 두려워하고 또한 諸兄之言亦可畏也 人

    之多言亦可畏也 라 하여 여자의 고충과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부녀생

    활 중에 애정문제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부모

    나 형제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애정생활을 저지당하므로 이

    에 대해 고통과 번뇌와 어쩔 수 없는 모순과 갈등의 심정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여자의 일관된 사랑에 대한 강열한 성격을 묘사한 시를 보

    기로 하자.

    동녘의 해 같은

    저 아름다운 여인이 내 집에 와있네

    내 집에 와서는 내 뒤만 밟아 다니네21)

    宗敎禮俗編 중에 수록된 劉增貴, 琴瑟和鳴-歷代的婚禮 (臺北, 聯經出版社,1982), pp.431-432.

    20) 鄭風․將仲子, “將仲子兮, 無踰我里, 無折我樹杞. 豈敢愛之, 畏我父母. 仲可懷也, 父母之言, 亦可畏也.”

    21) 齊風․東方之日, “東方之日兮, 彼姝者子, 在我室兮. 在我室兮, 履我卽兮.”

  • 先秦時代 婦女의 性開放과 婚姻上의 禁忌 (鄭愛蘭) 335

    위의 시는 여자의 한결같은 마음을 즐거워하는 남자의 감정을 표현

    하고 있다.

    둥둥떠 있는 잣나무 배여 저 황하 가운데 있구나

    더풀거리는 저 兩髦한 분이 실로 나의 유일한 짝이니

    죽을지언정 맹세코 다른 데로 가지 않으리라

    어머니는 오직 하늘이시니 이처럼 사람마음 헤아려주시지 않는구나.22)

    여기서는 부녀의 절개가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한 사람

    만을 섬기겠다는 결의에 찬 심정을 짐작케 한다. 예의규범이 엄격하게

    지켜지던 당시에 아내를 맞이하려면 반드시 부모에게 알려야 하며 아

    울러 중매를 통해야만 혼사가 성립되었다. 이는 바로 예교규범이 형성

    된 부녀의 혼인생활을 그대로 반영해 준다고 할 것이다. 연애생활도

    그렇게 자유롭지만은 않다. 여자가 시집을 가면 부모와 형제로부터 멀

    어지는 것인데 교제를 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아래 정절을 목숨처럼 여

    겨 스스로 정조를 잃지 않는 것이 신의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래의 예

    에서도 충분히 이를 짐작케 한다.

    무지개가 동쪽에 있으니 감히 이것을 가리킬 수 없도다

    여자의 시집감은 부모형제를 멀리 하는 것이라

    아침에 무지개가 서쪽에 오르니 아침만 비가 오는구나

    여자의 시집감은 부모형제를 멀리하는 것이라

    이러한 사람은 혼인을 생각하도다

    대개 신의가 없으니 천명을 알지 못하는구나23)

    이외에도 소위 “穀則異室, 死則同穴. 謂予不信, 有如皦日”(살아서 다

    른 집에 거하나, 죽어서는 같은 움터에 거하겠다. 내가 거짓말하다고

    이르나 밝은 해아래 맹세하노라) 이라 하여 상대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간절하나 차마 종신토록 함께 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죽어서라도

    22) 詩經․鄘風․柏舟, “汎彼柏舟, 在彼中河. 髧彼兩髦, 實維我儀. 之死矢靡他.母也天只, 不諒人只.”

    23) 詩經․鄘風․蝃蝀, “蝃蝀在東, 莫之敢指. 女子有行, 遠父母兄弟. 朝隮于西,終朝其雨. 女子有行, 遠父母兄弟. 乃如之人也, 懷昏姻也. 大無信也, 不知命也.”

  • 中國史硏究 第61輯 (2009.8)336

    곁에 있을 수 있기를 간절히 맹세하는 여성의 정절은 당시 민간사회에

    보편적인 현상으로 짐작 된다.24) 봉건종법사회아래 예교를 어기고 혼

    인한다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허용될 수 없었으나 마음으로 淫奔하고자

    하는 심정은 여전히 저버릴 수 없었다는 것은 부녀의 진정한 연애감정

    생활은 여전히 자유로웠음을 알 수 있다.

    주지하듯이 선진시대 부녀의 감정생활이나 연애는 봉건종법사회아

    래서 예교라는 婦德과 교육아래 구속과 속박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사

    실이다. 이러한 예교규범이 강하게 작용하게 될 때 여성의 戀愛風氣는

    점점 牽絆당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私奔의 행위나 남녀가 부모의 명령

    이나 媒聘의 예법을 어기고 몰래 내통하는 행위는 더욱 大逆 혹은 不

    道로 취급받게 된다.25) 사회의 질타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고대사회에

    이에 반하는 행위도 민간사회에 적지 않게 출현하며 특히 상층계급에

    서도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히 하층계급에서 남녀의 자유로운 교

    제를 통해 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으며 비교적 엄격한 결혼제도가 존재

    했다 하더라도 이에 크게 구속받지는 않는다.26) 예교에 벗어난 남녀관

    계와 혼인은 이미 당시사회의 혼인습속으로 특징된다. 사실 고대 귀족

    남녀간에 정상적인 예법을 탈피해 문란한 성애생활도 이미 보편적으로

    성행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귀족계층의 남녀가 예를 범하

    는 예는 매우 많다. 심지어는 친족간에 사통하는 경우도 있고 손위든

    손아래든 상관없이 문란한 성생활을 한 사실은 문헌에 적지 않게 나타

    난다.27) 성생활이 자유로운 만큼 이혼과 재혼도 크게 구속받지 않고

    24) 詩經․王風․大車, “大車檻檻, 毳衣如菼. 豈不爾思, 畏子不敢. 大車啍啍, 毳衣如璊. 豈不爾思, 畏子不奔. 穀則異室, 死則同穴. 謂予不信, 有如皦日.”

    25) 左傳․成公十一年, “聲伯之母不聘, 穆姜曰: 吾不以妾爲姒. 生聲伯而出之, 嫁于齊管于奚······.” 孟子․勝文公章句 下篇, “丈夫生而願爲之有室, 女子生而願爲之有家. 父母之心, 人皆有之, 不待父母之命, 媒約之言, 鑽穴隙相窺, 踰牆相從,

    則父母國人皆賤之. 古之人未嘗不欲仕也. 又惡不由其道, 不由其道而往者, 與鑽穴

    隙之類也.”

    26) 古頡剛, 春秋時的男女關係與婚姻習慣 (學術 第4輯), pp.5-9.27) 左傳․桓公十六年, “衛宣爲其子伋娶於齊而自取之.” 左傳․僖公十五年, “晉惠公烝其庶母賈君.” 이외에도 左傳․宣公九年, 左傳․定公十四年, 左傳․

  • 先秦時代 婦女의 性開放과 婚姻上의 禁忌 (鄭愛蘭) 337

    성행하였다. 그러므로 선진시대의 정절관념은 사회에서 크게 여론으로

    삼거나 격렬하게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히 엄격한 규정 없이 모

    호하게 받아들여졌다. 고대부녀의 진정한 정절관은 진한이후 명백히

    나타난다.

    비록 봉건종법사회의 통치아래 기본적으로 부녀가 엄격한 예법을

    지켜야 하나 실제생활에서는 이들의 혼인관과 연애관은 예의규범이라

    는 구속과 속박을 받지 않고 매우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한 성향을 가지

    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Ⅲ. 선진시대 부녀의 혼인상의 금기

    양성은 부녀의 혼인과 동시에 발생되는 문제인 만큼 이에 따른 부

    녀의 의식구조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음

    식은 인간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방식중의 하나라면 남녀양성의 관계는

    후손번창의 중요한 관건이다.28) 그러므로 남녀성애의 목적은 생리적

    신체적뿐 아니라 이보다 더 가장 큰 의의는 多子多孫에 있다고 할 것

    이다. 이는 남녀양성의 혼인과 성애관계를 통해 달성된다. 물론 상고시

    대에는 양성의 결합이 없이도 자손번성은 가능하였다.29) 그러나 사회

    가 발전함에 따라 개체가정이 성립되고 당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의례

    제도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혼인도 각종 인륜관계의 기초를 이루는 주

    요한 요소이다.30)

    成公十七年, 左傳․昭公二十二年 등 많은 사례를 문헌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사회의 성생활의 자유로움을 그대로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28) 禮記․禮運, “飮食男女, 人之大欲存焉.”29) 呂氏春秋․恃君覽, “昔太古嘗無君矣, 其民聚生群處, 知母不知父, 無親戚, 兄弟, 夫婦, 男女之別, 無上下長幼之道.” 이와 같은 문헌 자료의 기록은 많다(莊子․盜跖, 商君書․開塞 등 참고).

    30) 周易․序卦, “有天地, 然後有萬物; 然後有男女; 有男女, 然後有夫婦; 有夫婦,然後有父子; 有父子, 然後有君臣; 有君臣, 然後有上下; 有上下, 然後禮義有所錯.”

  • 中國史硏究 第61輯 (2009.8)338

    혼인제도가 점차 예의로 규범화되고 이러한 儀式을 통한 혼인행위

    여야만이 합법적인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합법적인

    혼인의식을 통하지 않는 私奔行爲를 한 남녀는 사회에서 인정해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질타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생리적 혹

    은 심리적 기능에 의거하여 정상적인 양성행위가 종족을 번성시키고

    더 나아가 사회구성원과 사회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심리적으

    로 발생한 양성행위가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사회구조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개인의 성행위에 대해 제

    한을 가하는 것이다.31) 이들 많은 제한은 혼인예의의 금기 중에 규정

    지어져 있다. 금기는 원시시대의 일종의 문화현상이며 사회풍습현상이

    기도 하다. 금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무형법률이며 그 존재는 늘 신

    의 관념과 그 어떤 종교 신앙의 출현보다도 빠른 시기에 나타난 현상

    이다.

    인간의 일상생활가운데 빠져서는 안되는 의, 식, 주 심지어는 생, 노,

    병, 사 등 이 모든 것이 금기 가운데에 처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각종 금기규범의 출현은 결국은 인간의 길흉화복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할 것이다. 부녀생활 중에 금기는 고금을 통해 볼

    때 다양한 형태로 형성되어 왔는데 그 가운데 생육과 혼인의 금기는

    고대인의 생명관념과 함께 매우 중시 받아 왔다. 왜냐하면 중국인의

    전통사상의 기초를 형성하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의식구조의 하나

    이기 때문이다.

    1. 부녀의 婚姻上의 禁忌

    고대문헌중 특히 유가경전에 나타난 남녀양성에 관한 기록을 보면

    고대 양성혼인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陳鵬, 中國婚姻史稿, 北京, 中華書局, 1990, p.14).

    31) 宋兆麟, 生育神與性巫術硏究 (臺北, 漢忠文化, 1997), p.84.

  • 先秦時代 婦女의 性開放과 婚姻上의 禁忌 (鄭愛蘭) 339

    당시 사회의 혼인습속과 금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상생활 중에

    부녀는 남자와 분명히 구별하여 행동하여야 하며 여기에는 연령별로

    금기사항이 명시되어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으로 규정지었다. 즉 남녀

    는 7세 이후부터 남녀유별이 엄격하게 지켜야 하므로 서로 접촉할 수

    없고 특히 10세 이후는 내외활동도 분명히 구분하여 행동하고 학습하

    여야 한다.32) 여자는 대외적인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자신의 형제와

    丈夫에 대해서 양성의 금기를 준수해야 한다.

    이러한 남녀유별의 금기는 남자보다 거의 여자에게 더욱 엄격하게

    요구되어 왔다.33) 예를 들면 여자가 외출을 할 때는 반드시 얼굴을 가

    려야 하며34) 만약 남자와 한 번의 접촉이 있으면 반드시 그 사람과 결

    혼을 해야 한다35)는 등 대부분이 여자가 준수해야 하는 예의수칙이다.

    이는 당시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女子不祥 관념과 깊은 관련을 가지

    고 있다.36) 여자는 상서롭지 못하므로 이를 기피하고자 하는 고정관념

    에서 오는 관습이다. 그리하여 대대로 여러 가지 금기사항을 규정하여

    지켜오고 있다. 여자에 대한 금기가 출현하게 된 주요한 원인은 우선

    불결한 것은 재앙을 불러온다는 관념이고 또 하나는 남권위주사회에서

    여자의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이다.37) 이는 남성우월

    주의사회에서 필연 나타나는 남존여비의 사회현상이다.

    양성금기와 그 원인은 역사적 연원이 있고 당시 시대적 배경과도

    32) 禮記․內則, “男不言內, 女不言外, 非祭非喪, 不相授器…男女不通衣裳, 內言不出, 外言不入······道路, 男子由右, 女子由左.” “七年, 男女不同席, 不共食…十

    年, 出就外傳, 居宿於外······女子, 十年不出······學女事以共衣服, 親於祭祀.”

    33) 公羊傳․襄公三十年, “宋災, 伯姬存焉. 有司復曰: ‘火至矣! 請出.’ 伯姬曰: ‘不可! 吾聞之也: “婦人夜出, 不見傳母, 不下堂.’ 傳至矣, 母未至也, 逮乎火而死.”

    34) 禮記․內則, “女子出門, 必擁蔽其面.”35) 左傳․定公六年, “王將嫁季羋, 季羋辭曰 : ‘所以爲女子, 遠丈夫也. 鍾建負我矣.’ 以妻鍾建, 以爲樂尹.”

    36) 左傳․襄公二十五年, “六月, 鄭子展, 子産帥車七百乘伐陳. 宵突陳城, 遂入之.陳侯扶其大子偃師奔墓. 遇司馬桓子, 曰: ‘載余!’ 曰: ‘將巡城.’ 遇賈獲, 載其母妻,

    下之而授公車. 公曰: ‘舍而母.’ 辭曰: ‘不祥’ 與其妻扶其母以奔墓, 亦免.”

    37) 林明峪, 臺灣民間禁忌 (臺北, 聯亞出版社, 1981), pp.137-138.

  • 中國史硏究 第61輯 (2009.8)340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러한 금기규정이 청춘남녀의 애정과 성애에 대

    한 생리적 추구에 제약을 가하게 된다. 남녀가 혼인을 할 때 중매인을

    통해 혼사가 결정되면 合婚의 단계를 진행하게 된다. 이때 주요한 의

    례중 하나는 問名 과 納吉 이다. 즉 중매인이 여자의 姓名과 生辰八

    字를 물어 남자에게 알린다. 이것으로 남자의 부모는 길흉을 점쳐 만

    약 결과가 吉하다고 하면 배우자로서 합격이므로 여자에게 정식으로

    구혼을 요청한다.38) 이때 남녀쌍방의 합혼은 비로소 확정된 것이다.

    고대 혼인대상은 원래 卜筮의 방식을 거쳐 그 적합성을 결정한다.

    남녀가 혼인하기까지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금기규정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혼인대상의 선택에 대한 금기이다. 주나라는 원래 동성불혼을

    규정하여 동성과의 결혼을 금기시하고 있다.39) 소위 不參一族 40)이라

    하여 한 남자가 동족인 세 명의 同胞姊妹와 동시에 婚配할 수 없다.

    그런데 왜 不參一族 의 금기가 생겼을까? 이것은 바로 자녀의 생육에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즉 不參一族 의 이유는 바로 傳異氣 즉

    질병을 포함한 다른 유전적인 특성 때문이다.41) 그러므로 동성자매를

    아내로 맞이하면 부부는 물론이고 자손들에게 재앙을 가져다주는 등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금기시하였다.42) 인류학적인

    38) 儀禮․士昏禮, “問名曰 : ‘某旣受命將加諸卜, 敢請女爲誰氏.’ 對曰: ‘吾子有命且以備數而擇之, 某不敢辭.’ ······ 納吉曰 : ‘吾子有貺命某加諸卜, 占曰‘吉’, 使某

    也敢告.’ 對曰: ‘某之子不敎, 唯恐弗堪. 子有吉, 我與在. 某不敢辭.’”

    39) 주대의 동성불혼은 원래 圖騰社會의 外婚制로부터 변천해 내려온 혼인제도로

    서 종족의 질서유지의 목적이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李玄伯, 中國古代社會新硏(上海, 文藝出版社, 1988)에서 수록된 〈中國古代婚姻制度的幾種現象〉pp.251-253. 참조).

    40) 國語․周語上, “恭王游於涇上. 密康公從之, 有三女奔之. 其母曰 : ‘必致之於王. 夫獸三爲群, 人三爲衆, 女三爲粲. 王田不取群, 公行下衆, 王御不參一族. 夫

    粲, 美之物也. 衆以美物歸女, 而何德以堪之? 王猶不堪, 況爾小醜乎? 小醜備物,

    終必亡’, 康公不獻. 一年, 王滅密.” 이에 대해 史記․周本紀에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즉 “御, 婦官也. 參, 三也. 一族, 一父子也. 故取姪娣以備三, 不參

    一族之女也.”

    41) 白虎通․婚娶, “不娶兩娣何? 傳異氣也.”42) 白虎通․婚娶, “娶三國女何? 廣異類也. 恐一國血脈相似, 俱無子也.” 左傳․僖公二十三年, “男女同姓, 其生不蕃.” 國語․鄭語, “夫和實生物, 同則不繼.

  • 先秦時代 婦女의 性開放과 婚姻上의 禁忌 (鄭愛蘭) 341

    관점에서 볼 때 고대사회는 훨씬 엄격하게 성금기를 중시하였다. 물론

    성적금기에 대해서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지만 동성불혼의 금기는

    매우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어 후대 혼인예속에 중대한 영향을 끼

    친 것은 사실이다. 중국 고대 성문화의 중요한 내용 중의 하나로서 어

    떻게 하면 후손을 번성케 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하면 우수한 인자를

    유전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도 중시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밖에 다섯 가지 부적합한 항목을 지닌 집안의 여자는 부인으로

    맞을 수 없다는 규정이다. 즉 逆道,인륜을 어지럽히는 집안, 범법자가

    있는 가정, 惡疾을 가진 집안, 그리고 喪婦를 금기하였다.43) 배우자 선

    택에 있어 여자의 家敎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특히 여자의 정서

    가 가정과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도 적지 않다. 가정의 화목은 부녀의

    심리작용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불건전한 집안의 여자를 금기하였

    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後嗣문제이다. 봉건종법사회에서 이는 그 무

    엇보다도 금기습속이 강하게 작용하는 부분이다. 惡疾禁忌는 동성불혼

    의 금기와 마찬가지로 생육에 생리적 유전적인 악영향을 자손들에게

    전수될 수 있다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에서 비롯되었다. 뿐만 아니라 종

    묘제사 등 종교 활동에도 참여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이혼의 이유가

    된다.44) 그리고 부모의 상을 당한 여자도 기피대상이었던 것은 만약

    부모의 교육이 결핍되면 손윗사람모시기와 집안일을 제대로 돌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선진시대 부녀가 가정에 얼마나 중요한 작용과 영향을 끼치는

    가를 충분히 반영한 금기습속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

    로는 부녀에 대한 불공평한 대우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於是乎先王聘后於異姓, ······務和同也.43) 大戴禮記․本命, “女有五不取: 逆家子不取, 亂家子不取, 世有刑人不取, 世有惡疾不取, 喪婦長子不取. 逆家子者, 爲其逆道也; 亂家子者, 爲其亂人倫也; 世有

    刑人者, 爲其棄於人也; 世有惡疾者, 爲其棄於天也; 喪婦長子者, 爲其無所受命

    也.”

    44) 陳鵬, 中國婚姻史稿 (北京, 中華書局, 1990), p.7.

  • 中國史硏究 第61輯 (2009.8)342

    2. 兩性關係의 禁忌

    혼인은 부부관계의 중요한 수단이다. 고대 남녀쌍방관계에는 많은

    금기규정이 있다. 그 가운데 성에 관한 금기는 개인의 존엄뿐만 아니

    라 사회전체의 풍기와 관련되므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매우 중요한

    의식형태를 갖추고 있다. 비록 경서에는 제례와 의례는 하층민에게는

    미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그 지역의 공동체 안에서는 그

    들만의 다양한 금기사항이 존재하며 오늘날에도 그 잔존이 남아 있다.

    부부쌍방의 관계는 실지로 대부분 부녀의 침소관계를 지칭하는 말로서

    성금기도 여기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성을 남자를 혼란하게 만

    든다고 생각한다. 고대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기록에 의하면 소위 여

    덕 이라고 하여 덕을 많이 지닌 여자는 남자를 꼼짝 못하게 하는 능력

    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45) 그러므로 이에 따른 다양한 성적금기

    도 있었을 것이다. 중국고대인의 관념 중에 자연의 천기와 인간의 성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고대 중국사회에서 지배

    계급 혹은 피지배계급이건 간에 그들에게 종교적인 신념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해진 규칙과 금기를 어겼을 때는 반드시 그에 따른 하늘의

    응징이 있다고 철저히 믿고 있다. 고대인들에게 있어 성이란 자연의

    질서조화에 순응해야만 갖가지 재앙과 위험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

    다.

    고대 중국 최초의 성금기에 대한 기록은 禮記에서 보이는데 부부는 예의를 갖추고 천지자연의 운행을 거스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즉 천둥번개가 칠 때 부부관계를 금지해야 하며 만약 이를 어기게 되

    45) 左傳․昭公24年, “女德無極, 婦怨無終.” 여기서 말하는 덕은 인간의 기를증대시켜주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다. 만물에는 모두 덕을 지니고 있는데 덕

    과 자연의 질서조화를 같은 맥락에서 해석한 것이다. 이시대의 여자가 특히 강

    한 덕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R. H. 반홀릭, 장원철 옮김, 中國性風俗史, 서울, 까치, 1993, pp.25-26).

  • 先秦時代 婦女의 性開放과 婚姻上의 禁忌 (鄭愛蘭) 343

    면 큰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46) 이것으로 보아 고대 성금

    기를 어길시 가족이나 자손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 수

    있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論衡 卷2에서 더욱 자세하게 보인다. 즉雷聲이 있을시 성금기를 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태아뿐 아니라 태어

    난 아기도 殘廢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47) 고대 문헌 중에 나

    타난 성금기는 천기와 관련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무지개의 출현과 성금기를 들 수 있다. 하늘에 무지개가 출현할 때 부

    부가 예를 어기고 성금기를 위반하는 것은 천지의 淫氣로 보고 있

    다48). 무지개는 일종의 하늘위의 두 마리의 동물로 보았다. 다시 말하

    면 무지개의 출현은 자웅교배의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다.49) 이는 부부

    관계가 禮를 지나치면 안 되고 게다가 시기도 적적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만약 부부관계에 절제가 없게 되면 신체적 상해 심지어 생

    명의 위협을 가져올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50) 오늘날 의학적 관

    점에서 보더라도 양성관계를 통해 자식을 얻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는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변의 환경과 조건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인다. 아울러 태교가 優生에 유익하다는 중요한 이치를 고대인들

    도 너무나 잘 알고 있음을 문헌을 통해 쉽게 확인된다. 그러므로 고대

    인은 이를 천지변화에 접목시켜 부부교합과 상관관계를 설명하고 있

    다.

    46) 禮記․月令, “是月也, 日夜分, 雷乃發聲, 始電, 蟄蟲咸動, 啓戶始出. 先雷三日, 奮木鐸以令兆民曰 : 雷將發聲, 有不戒其容止者, 生子不備, 必有凶災.”

    47) 論衡 卷2, “是月出, 雷將發聲, 有不戒其容止者, 生子不備, 必有天凶, 瘖聾跛盲, 氣遭胎傷, 故受性狂悖.”

    48) 詩經․鄘風․蝃蝀, “蝃蝀在東, 莫之敢指.” 이에 대해 毛傳에서 해석하기를 “蝃蝀, 虹也. 夫婦過禮則虹氣盛, 君子見戒而懷諱之, 莫之敢指.” 古今圖書集成․藝術典 404, 醫部匯考 348에도 이와 같은 내용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49) 高亨, 詩經今注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1980), p.73.50) 左傳․昭公元年, “晉侯求醫於秦. 秦伯使醫和視之, 曰: ‘疾不可爲也. 是謂: ‘近女室, 疾如蠱. 非鬼非食, 惑以喪志. 身臣將死. 天命不佑.’ 公曰: ‘女不可近乎?’ 對

    曰: ‘節之.······女, 陽物而晦時, 淫則生內熱惑蠱之疾. 今君不節不時, 能無及此

    乎?’”

  • 中國史硏究 第61輯 (2009.8)344

    다음으로 남자가 여자를 맞아들이는데도 때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진대자료인 日書에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남자가 부인을 맞을 때朔日(음력초하루)과 望日(보름)은 금기로 여겼다.51) 다시 말하면 부부

    는 이때 교접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런 습속은 고

    대중국의 전통적인 관념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즉 남녀를 음양으로

    구분하여 남자는 양, 여자는 음이라 하였다. 달(태음)은 가득 찰 때도

    있고 기울 때도 있다. 초하루와 보름이 바로 극(가장 쇠락할 때)과 극

    (가장 성할 때)을 나타내는 때이다. 만약 이를 부녀의 생리현상에 비유

    하면 두 단계의 극단적인 양상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삭망일에 부부가

    교합을 하면 반드시 화를 입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를 금기하였

    다52). 이러한 규정은 다분히 미신적인 성향이 농후한 것처럼 보이나

    오늘날 여성이 생리현상이 있을 때 교합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이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볼 때 위생적, 과학적인 해석이 가능한 것으로 보인

    다.

    부부의 성금기 가운데 빠질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장소금기이다. 고

    대인들은 천지순환의 질서뿐 아니라 풍수지리방면도 매우 중시하였다.

    예를 들면 神廟, 佛寺, 측간, 우물 옆 혹은 부뚜막 옆, 무덤이나 시체관

    의 옆 등이다.53) 이는 부부침실의 위치 또한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

    음을 의미한다. 만약 금기를 어길 시에는 자손 혹은 개인에게 닥치는

    정신적 혹은 신체적 후환이 치명적일 수도 있다고 믿기 때문에 더욱

    조심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미신적, 종교적, 심리적 사고의식이

    크게 작용한 결과라고 본다. 오늘날 의학적인 해석으로는 이해하기 힘

    51) 睡虎地秦墓竹簡․日書乙種, “正月, 七月朔日, 以出母(女), 取婦, 夫婦必有死者. ······凡月望, 不可取婦, 家(嫁)女”, p.241.

    52) 周易․姤卦, “姤, 女壯, 勿用取女.” 부녀의 생리현상에 따른 금기규정의 가장 좋은 예는 李時珍의 本草綱目 권52〈婦人月水〉에서 상세히 해석하고 있다.

    53) 宋․陳自明 撰, 婦人大全良方․求嗣門 卷9, 禁忌法 , “凡欲要兒子生吉良日,交會······避日月火光星辰之下, 神廟佛寺之中, 井灶櫃廁之側, 塚墓屍柩之旁, 皆悉

    不可”(影印文淵閣四庫全書 第七四二冊), p.602.

  • 先秦時代 婦女의 性開放과 婚姻上의 禁忌 (鄭愛蘭) 345

    든 부분이 많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비과학적으로 볼 수 없다. 민간사

    회에서 소위 태교금기도 이런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

    치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부부관계시 가정의 안녕과 후손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불길한 사람 혹은 사물 그리고 장소, 시간 등

    모두 금기시 한 것이다.

    사실상 이외에도 일상생활 중에 금기와 관련한 문제는 일일이 열거

    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게다가 고대인은 성욕과 성행위에 대해 그다

    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종의 신비로운 행위라고 알고

    있다. 성금기 역시 마찬가지로 예부터 미신과 무지아래 사람들에게 소

    극적이거나 심지어 무서운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막연한 공포심

    이 가져온 결과이다.

    Ⅳ. 결 론

    중국봉건종법사회에서 부녀들의 생활은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들의 일상생활은 대부분 집안에서의 활동으로 제한되었다. 이는 부

    계사회가 형성됨에 따라 점점 여성의 지위가 남성보다 낮아지고 여러

    가지 제약과 속박이 수반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혼인상에서 두드러지

    게 나타난다. 소위 三從之義라는 婦德을 준수해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

    난 것으로 규정했다.54) 유교전통사회에서 부녀의 지위를 낮다고 하더

    라도 전반적인 생활관습을 볼 때 결코 자유를 속박 당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우리는 주시해볼 필요가 있다. 귀족신분이건 하층민이건 남녀 간

    에 자유로운 교제와 연애가 가능했으며 심지어는 私通 혹은 근친상간

    도 주저하지 않았다. 당시 사료에 나타난 기록이 증명하듯이 일정한

    교육을 받았으며 정치에도 참여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종교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남녀간에 성이 개방되

    54) 左傳․隱公二年, “從人者也, 婦人在家制于父, 旣家制于夫, 夫死從長子.”

  • 中國史硏究 第61輯 (2009.8)346

    었다는 점은 매우 경이로운 사실이다. 여자는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귀족계층의 여성보다

    일반 서민여성들이 훨씬 더 자유로운 성생활을 누렸다. 남녀간에 애정

    표현과 구애, 사랑의 애틋함과 안타까움, 私奔을 주제로 한 시가는 당

    시대 부녀의 정서와 감정생활을 대담하게 거리낌 없이 보여주고 있다.

    봉건종법사회아래 선진시대의 부녀생활이 속박과 각 방면의 제약이

    라는 고정관념에 볼 때 위와 같이 자유연애를 즐길 수 있었다는 사실

    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는 혼인생활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부녀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또 하나의 정서는 바로

    성금기이다. 비록 자유분방한 성개방을 외치며 남자들과 자유롭게 어

    울리며 가무를 즐기고 심지어 정기적인 야합의 모임도 주저하지 않았

    다하더라도 고대부녀들에게 있어 종교와 사회습속이 가져다 준 일종의

    심리적 공포심은 떨쳐버릴 수가 없다. 바로 양성관계에 대한 제한과

    금기규정이다. 금기는 초자연적인 역량과 위험이 가져다 준 재앙을 피

    하기 위해 인간스스로 회피하거나 制裁를 가하는 행위이다. 특이 혼인

    상의 금기는 남녀관계에서 결코 소홀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

    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남녀혼인중에 발생하는 여러 요인중에 성금기

    는 생육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더욱 중시 받아 왔다. 인간과

    천지자연의 질서조화와 융합하여 이를 거스르지 말아야 갖가지 재앙과

    위험으로부터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혼인상에서 남녀의 성개방과 성

    금기는 상반된 상황에서 발생하는 현상인데 그 원류는 일찍이 상고시

    대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것이다. 이때는 법률제재는 없었지만 종교와

    그 사회가 허용하는 습속제도에 의해 금기 혹은 제약을 받았다. 이는

    고대 중국의 양성관계는 적절한 통제와 제약을 가함으로서 건전한 혼

    인생활과 자녀의 건강에 유익하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 先秦時代 婦女의 性開放과 婚姻上의 禁忌 (鄭愛蘭) 347

    (中文提要)

    先秦時代婦女的性開放與婚姻的禁忌

    鄭 愛 蘭

    在中国封建宗法社会阶段,妇女们的生活状况各种各样。她们的日常生

    活活动大部分都被限制在家庭以内。随着阶级社会的形成,女性的地位渐

    渐变得比男性低,而且日常活动也受到各种各样的制约和束缚,这样的现

    象在婚姻上表现的比较突出。所谓“三從之義”是指遵守“婦德”的有关规

    定。儒教传统社会女性地位虽然很低,但是整体来看女性也有不受束缚的

    自由活动,这点我们还是有必要关注的。如果贵族和下层人自由交往和恋

    爱的话,甚至毫不犹豫的被定为“私通”或者是“近亲相奸”。当时的资料记

    录证明了当时的人们必须要接受一定的教育、参加政治,更重要的不能没

    有宗教信仰。特别是男女间“性开放”这一点是意想不到的事实。对于男性

    的求婚女性可以接受也可以拒绝。对于这样的现象,比起贵族阶层的女性

    一般市民女性更能自由的享受性生活。男女间的爱情表现和购买,爱的真

    谛和惋惜,主题为“私奔”的一首诗歌,大胆的毫无掩盖的描述了当时妇女

    的情绪和感情生活。

    事实上,古代中国女性生活上的束缚和各方面的制约不得不说是受固定

    观念的冲击而造成的。这点从婚姻生活上可以很容易的看到。

    妇女生活中重要的一部分,也是一种情绪,就是“性禁忌”。即使喊着“自

    由性开放”的口号,可以和男人自由的交往,跳舞甚至可以毫不犹豫的定期

    私自约会,但是对于有着宗教信仰和社会习俗观念的古代妇女来着还是有

    一种摆脱不了的心理上的恐惧,就是关于“两性关系”的禁止规定。“禁忌”

    是指为了避免超自然的力量和危险带来的灾祸,人们自觉回避或增加制裁

    的一种行为。特别是婚姻上的禁忌是男女关系上决不能疏忽的重要因素中

    的一种。不论古今,男女婚姻上发生的各种原因的“性禁忌”都是因为和“性

  • 中國史硏究 第61輯 (2009.8)348

    欲”有密切的关系,所以要多加重视。人们要注重“天地合一”不违背天理,

    就可以避免各种灾祸和危险。“性开放”和“性禁忌”是相反的状况下发生的

    现象,它的源流是早在上个时代留下的根源。现在虽然没有了法律制裁,

    但是却受到了宗教信仰和社会习俗制度的禁忌和制约。古代中国两性关系

    的适当统治和增加的制约希望不是因为相信对婚姻生活和对子女的健康有

    益而制定的。

    주제어 : 부녀, 성, 개방, 금기, 혼인

    關鍵詞 : 婦女, 性, 開放, 禁忌, 婚姻

    Keywords : women, sex, open, taboo, marriage

    (2009년 6월 23일 원고접수, 7월 29일 심사완료, 8월 7일 심사결과 통보, 8월 18

    일 수정원고 접수, 8월 25일 게재 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