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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Review 49 Contents Review 49 김수정_충남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에 나타난 ‘재미’와 ‘감동’의 페르소나 Contents Review 프롤로그 제게 <복면가왕>(MBC)이라는 음악쇼에 대한 리뷰를 해달라는 부탁이 들어왔습니다. 약간 망설였습니다. 흔히 방송 프로그램 리뷰는 대중의 관심이 쏠리는 콘텐츠의 인기 이유 등을 유려한 문장력으로,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으로 가려운 곳 긁어주듯 시원하고 간결하게 씁니다. 그런 글은 맛깔스럽고, 내용도 프로그램 비판보다는 칭찬이 훨씬 더 많아서 읽어도 마음이 가볍습니다. 그에 비해 소위 논문이라는 글을 쓰는 저 같은 사람의 미디어 평론은 영 글이 재미(?)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인기 방송 프로그램을 비평할 때, 인기의 이유보다 자꾸 뭔가를 따지고 평가하려 합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논리적인 근거도 있어야 하죠, 다른 연구와 달라야 하죠, 각종 참고문헌도 동원해야죠. 그러다보면 마치 밀가루와 물만 넣고 반죽한 딱딱한 빵처럼 재미없고 맛없는 글이 되기 십상입니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사설을 늘어놓는 이유는, 분석적인 논문쓰기에 익숙한 저자라서 재미있는 평론쓰기는 힘들다는 변명의 막을 미리 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다른 하나는 이 글을 읽는 독자의 특성이 매우 다양할 것 같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글을 누구에게 도달할지 모르는 ‘편지’처럼 쓰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쓰려고 하는 <복면가왕>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의 비평을 비판보다는 주로 칭찬을 통해서 우리 미디어 프로그램과 우리 사회,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려고 합니다. 비판만 하는 꼰대의 이미지를 벗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무엇부터 얘기를 시작할까요? 그래도 근본을 파헤치려는 학자의 버릇을 못 버리고 결국 원론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Contents Review - kocca.kr · 나타난 ‘재미’와 ‘감동’의 페르소나 Contents Review 프롤로그 제게 (MBC)이라는 음악쇼에 대한 리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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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방송 트렌드 & 인사이트 2015.8-9 l vol.02 Contents Review 4948 방송 트렌드 & 인사이트 2015.8-9 l vol.02 Contents Review 49

김수정_충남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에 나타난 ‘재미’와 ‘감동’의 페르소나

Contents Review

프롤로그 제게 <복면가왕>(MBC)이라는 음악쇼에 대한 리뷰를

해달라는 부탁이 들어왔습니다. 약간 망설였습니다. 흔히

방송 프로그램 리뷰는 대중의 관심이 쏠리는 콘텐츠의 인기

이유 등을 유려한 문장력으로,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으로 가려운 곳 긁어주듯 시원하고 간결하게 씁니다. 그런

글은 맛깔스럽고, 내용도 프로그램 비판보다는 칭찬이 훨씬 더

많아서 읽어도 마음이 가볍습니다. 그에 비해 소위 논문이라는 글을 쓰는 저 같은 사람의 미디어

평론은 영 글이 재미(?)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인기 방송 프로그램을 비평할 때, 인기의 이유보다 자꾸

뭔가를 따지고 평가하려 합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논리적인 근거도 있어야 하죠, 다른 연구와 달라야

하죠, 각종 참고문헌도 동원해야죠. 그러다보면 마치 밀가루와 물만 넣고 반죽한 딱딱한 빵처럼

재미없고 맛없는 글이 되기 십상입니다.

글을 시작하기 전에 사설을 늘어놓는 이유는, 분석적인 논문쓰기에 익숙한 저자라서 재미있는

평론쓰기는 힘들다는 변명의 막을 미리 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다른 하나는 이 글을 읽는 독자의

특성이 매우 다양할 것 같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글을 누구에게 도달할지 모르는

‘편지’처럼 쓰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쓰려고 하는 <복면가왕>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의

비평을 비판보다는 주로 칭찬을 통해서 우리 미디어 프로그램과 우리 사회,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려고 합니다. 비판만 하는 꼰대의 이미지를 벗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무엇부터 얘기를 시작할까요? 그래도 근본을 파헤치려는 학자의 버릇을 못 버리고 결국 원론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50 방송 트렌드 & 인사이트 2015.8-9 l vol.02 Contents Review 51

성공하는 미디어 콘텐츠의 본질 : 재미와 감동

어떤 영화나 어떤 방송 프로그램이 히트를 치는 걸까요? 뻔한 것 같지만 ‘이미’ 성공한

영화나 프로그램을 보면 어느 정도 답은 나옵니다. 좋은 대본, 좋은 연기, 좋은 플롯, 좋은

장면 등등. 사실 제 눈에도 히트작 또는 명작이라면 꼭 갖고 있는 두 가지 요소가 보입니다.

너무 기대하지는 마세요. 바로 ‘재미’와 ‘감동’입니다. ‘재미’란 요소는 감각적인 것과 특히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조금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그냥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기대하는

감각과 갖는 ‘격차’에서 오는 재미입니다. 일상적인 삶에서 우리의 판단 작용은 거의 ‘감’

수준에서 작동하지요. 경험해 보지 못한 시각적인 자극, 기대하지 않았던 논리의 전개, 온

몸의 감각을 상상적으로 자극하는 것. 이것들이 바로 영화, 방송, 사진 같은 시각적 미디어

콘텐츠가 주는 재미라 할 수 있죠. 이걸 잘하는 데가 아마 할리우드 영화들일 것입니다.

보고나면 그 내용은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해도, <반지의 제왕(Lord of Rings)>이든

<엑스맨(X-man)>이든 <분노의 질주(Fast & Furious)>든 그것을 보는 동안 느끼게 되는

새로운 감각이야말로 또 경험하고 싶은 재미죠. 그런 면에서 할리우드 영화는 플롯과 캐릭터

중, 사건을 계속 일어나게 하는 플롯을 단연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해 ‘감동’은 우리가 가진 가치와 관련되는 것 같습니다. 알고 있는 가치를 새롭게

느끼든지, 모르고 있던 가치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감동을 느낍니다. 이것을 잘하는 나라는

아마도 한국이 아닐까 합니다.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로 만들어져서 그렇게 눈요기 할 게

많지 않은데도, 보고 나면 가슴 찡한 콘텐츠들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나라 영화는 인간의

가치와 정서를 표현하는 캐릭터를 통해 스토리 감동을 잘 살리는 것 같습니다. 드라마만

해도 그렇습니다. 한국 드라마는 지겨울 만큼(?) 연애얘기를 가족얘기와 버무려 40년 넘게 해

와서, 그야말로 우리가 작가해도 되겠다 생각할만큼 줄거리가 뻔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봐주게 되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가치를 캐릭터와 아주 소소한 방식을 통해 매번

실감나게 만들기 때문인 거죠.

이런 재미와 감동은 물론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미디어 콘텐츠마다 각각 그 무게중심이

달라서 이 둘 중 어느 하나만 ‘빵’ 터져도 히트작 반열에 오르는 것 같습니다. <런닝맨>(SBS)

같은 프로그램이 재미요소가 강하다면, 휴먼 다큐멘터리들은 감동요소가 크지요. 그런데

진정한 폭발은 당신도 알다시피 이 두 요소가 모두 강하게 존재하면서 시너지를 일으킬

때입니다. 이런 콘텐츠는 일부러 홍보하지 않아도 마법에 걸린 듯이 대중들이 따라오고,

자연스레 국경을 넘어서 다른 문화권 구성원들의 마음도 사로잡아 버립니다. 할리우드

영화인 <E.T.>, <타이타닉>, <아바타>가 그랬고, 한국 콘텐츠 중에서는 대표적으로

<대장금>(MBC)이 떠오릅니다. 궁중 요리라는 이색적 소재로 시작해 성실, 의리, 인내심,

박애, 재능, 그리고 미모까지 겸비한 여성의 역경 극복 인생 이야기는 세계인의 감동을

자아내기 충분합니다.

50 방송 트렌드 & 인사이트 2015.8-9 l vol.02 Contents Review 51

문제는 재미와 감동이 어떻게 해야 터져 나오는지를 예측해 만들어 내기 어렵다는

것이겠지요. 세계 정상을 100년 넘게 차지해온 할리우드 영화들도 정작 엄청난 돈을 쏟아

붓고도 자주 실패하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실패를 면하려고 예전에 성공한 영화의 시리즈

편을 궁색하게 내놓으며 옛날 팬이라도 잡으려고 애씁니다. 방송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새로운 것이 대박을 치면, 유사 프로그램이 줄줄이 나옵니다. 시청률을

높여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제작 책임자들은 일선 피디들의 모험을 장려하기는커녕 막는

것도 같고요. “왜 우린 저런 거 못 만들어?”라는 고위 제작책임자들의 말 한 마디가 지침이

되어, 일선 피디들은 ‘아류’ 프로그램이라는 불명예를 감수하고라도 타 채널의 인기

프로그램을 따라 하기도 하죠. “공부 잘해서 들어간 피디들이 왜 남 따라해” 라고 냉정하게

비판할 수 없을 정도로, 원래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워낙 리스크가 큰 산업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창의적이거나 실험적인 자세가 없는 것에 대한 완전한 변명이 될 수는

없겠습니다만. 어쨌든 시청자의 기대를 알아채고 가지고 노는 것이 쉽지 않아서, 뚜껑을 열기

전까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게 우리 대중의 느낌이라는 거겠죠. 그래서 프로그램들이

성공하려면 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익숙함’과 기대를 넘어서는 ‘새로움’을 잘 짜 넣어야

하는 게 모든 콘텐츠의 공통의 과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재미나 감동이라는 것은

우리 한국사람 특유의 정서나 가치와 밀접히 관련되면서도 동시에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의

보편적 정서와 가치의 씨앗도 품고 있어야 되거든요. 그래서 방송 프로그램을 그저 재미를

주는 오락에 불과한 걸 뭐 평까지 하냐면서, 하찮게 말하고 치워버릴 수 없다는 겁니다. 너무

뜸 들였나요? 이제 정말 <복면가왕>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네요.

<복면가왕>의 재미와 감동 : 장치들과 의미

자, 그럼 이제 <복면가왕>이 왜 인기가 있는지 (이미 당신도 다 알고 있겠지만) 이유를

말해볼까 합니다. ‘미스터리 음악쇼’라는 수식어를 붙인 <복면가왕>은 지난 15회(7. 12

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익숙함’과

기대를 넘어서는 ‘새로움’을 잘 엮는 것이

모든 성공하는 콘텐츠의 본질

52 방송 트렌드 & 인사이트 2015.8-9 l vol.02 Contents Review 53

방영)에서 16.3%의 시청률(닐슨 코리아 조사)을 기록했습니다. 요즘같이 시청률 올리기 힘든

세상에서 지상파 채널 입장으로서는 참 기특한 프로그램일 것입니다.

방송 프로그램은 드라마, 다큐멘터리, 뉴스, 그리고 예능오락 이렇게 간단히 4개의 장르로

나눠도 될 것 같습니다. 그 중 특히 예능오락은 <복면가왕> 같은 리얼리티쇼가 대세이지요.

예전에 별도로 존재했던(물론 지금도 있긴 합니다만) 퀴즈쇼, 음악쇼, 게임쇼, 토크쇼,

요리쇼라는 장르들이 흔히 ‘리얼리티쇼’라는 장르로 블랙홀처럼 모두 빨려 들어가

버린 것 같습니다. 이러한 리얼리티쇼는 각본 없이 출연자의 행위를 보여주며, 그 개성을

캐릭터로 드라마틱하게 구축하는 장르로, 그야말로 세계적으로 지배적인 장르이지요.

특히 리얼리티쇼는 일반 시청자의 ‘참여’와 ‘공감’을 핵심 키워드로 하면서, 이를 방청객

판정단이든 문자를 통한 시청자 참여든, ‘투표’와 ‘관찰’ 카메라라는 장치를 통해 실현해

내는 공통점을 보입니다(김수정, 2010). 근데 <복면가왕>은 이미 시청률이 10%를 넘지

않았을 때부터 입소문이 돌았고, 저도 우연히 봤다가 눈을 떼지 못하고 계속 보게 되었으니,

시청률로만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이 프로그램의 홈페이지를 보면,

이렇게 쓰여 있고, 프로그램이 시작할 때 일부가 나레이션으로 읊어지기도 합니다.

“가수에게 계급장은 곧 인기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는 더 좋게 들린다. 하지만 만약 인기라는 계급장을 떼고 진정한 노래실력으로만 최고의 가수를 뽑는다면 누가 될까?

인기라는 편견을 버리고 진정성 있는 가수로 자리할 수 있는 무대! 바로 <복면가왕>이 희망하는 무대이다.”

출처 : MBC <복면가왕> 홈페이지

말이 되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습니다. 인기가 편견인가요? 이게 노래실력 최고의

가수를 찾는 프로그램이었던가요? 뭔가 프로그램과 딱 맞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뭐, 예능

프로그램이 시청자와 공감해가며 더 변화를 시도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또 그래야 하는

거겠지요. 어쨌든 프로그램 컨셉이 정확하게 표현된 것 같지는 않지만, 프로그램이 갖고 있는

전제는 ‘음악세계가 가수의 인기 따라 서열화 되어 있더라’ 그리고 ‘우리는 누구인지 아는

순간, 편견에 사로잡히더라’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실 ‘가수의 얼굴을 가리고 노래를

들어보자’는 아주 단순한 콘셉트 아래 <복면가왕>이 구상되었을 것입니다.

그 포맷은 8명의 출연자가 가면을 쓰고 나와 두 명씩 노래 대결을 펼치면, 무대 앞을

둘러싼 일반인 판정단과 연예인 판정단의 합산평가로 승부를 가르고 다음 4강전, 준결승,

결승으로 가는 간단한 토너먼트입니다. 토너먼트 최종 승자는 가왕의 타이틀을 갖게 되고,

가왕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새로운 도전자들이 계속 등장하지요.

52 방송 트렌드 & 인사이트 2015.8-9 l vol.02 Contents Review 53

목소리로만 평가하는 프로그램 포맷들. <보이스 오브 코리아>(Mnet) <너의 목소리가 보여>(Mnet) <히든싱어>(JTBC)

그런데 이러한 포맷이 시청자들에게는 낯설기는커녕 익숙할 것입니다. 뭔가 어디서

본 듯한, 유사한 컨셉의 음악 리얼리티쇼들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세계 최고의

리얼리티쇼 제작사인 존 데몰(John de Mol)사가 미국에서 2011년 제작해 시즌 8까지

만들고 있는 성공적인 가수 오디션 리얼리티쇼인 <더 보이스(The Voice)>가 떠오릅니다.

심사위원들이 오디션 참가자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의자를 돌려 등지고 앉아 노래만 듣고

평가한 후에야, 의자를 돌려 경연자 얼굴을 확인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보신 적 있으신가요?

그 포맷을 수입해서 한국판 <보이스 오브 코리아>(Mnet)를 시즌 2까지 방영했으니, 익숙한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듣고만 평가하자’는 <복면가왕>의 콘셉트는

낯설지 않지요. 이뿐인가요? 한국에서 만든 음악 리얼리티쇼로 중국에도 수출해 인기를 끌고

있는 <히든싱어>(JTBC) 역시 그렇지요. 이제는 심사위원이 돌아앉기보다는 아예 출연자를

커튼 뒤에 숨기고 누가 노래하는 건지 모르게 만듭니다. 가수도 아닌 사람들이 이렇게

‘똑같이’, ‘잘’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 것에 감탄하며 오직 듣기에만 열중하게 만들어 성공한

프로그램입니다. 생각난 김에 하나 더 말해보죠. 이미 시즌 2에 들어선 <너의 목소리가

보여>(Mnet) 란 프로그램은 일반 출연자들이 노래를 부르는데, 진짜 자신이 부른 것인지,

녹음한 타인의 목소리를 립싱크하는 것인지 그 사람이 하는 말을 통해 진위를 추리해 맞추는

음악 게임쇼입니다. 이것은 출연자를 감추거나, 심사위원이 돌아앉을 필요없이, 눈으로

보면서도 우리가 우리 판단을 믿을 수 없다는 점에서 역시 흥미로운 프로그램입니다.

이러니 최근 몇 년 동안 케이블 및 종편채널에서 만들어진 이런 프로그램들에 익숙한

시청자들은 <복면가왕>이 그런 아이디어를 따왔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복면가왕>은 한 요소를 변형시킴으로써 우리에게 또 다른 차원의 새로운 재미와 감동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으니, 나름 ‘진화’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도 잘 알다시피,

그 작은 요소가 바로 ‘가면’입니다. 위에 언급한 각각의 프로그램은 그 나름대로의 재미가

확실히 있지만, 심사위원과 시청자를 돌아앉게 만들지 않고도 눈을 가리는 효과, 칸막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지 않아도 되고, 밝혀져야 할 진실이 목소리만 아니라 사람 자체이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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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서프라이즈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장치를 단지 ‘가면’ 하나로 만들어냅니다. 가면을 쓰고

노래한다는 포맷 하나가 프리즘이 되어 다음과 같이 여러 빛을 내기 시작한 겁니다.

1) 알고 싶은 욕망, 추리의 재미 : 기대는 기대를 쌓고, 그래서 기대가 무너지길 기대하고…

인간은 호기심이 많지요. 그런데 작정하고 우리 앞에 가면을 쓰고 노래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리고 그 사람을 내가 알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에 그 가면을 벗기고 확인하고

싶어지는 건 당연합니다(그런데 결승까지 한 번에 녹화한 것을 2주에 걸쳐 방영하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출연자의 신분이 누설되어 기대하는 재미를 떨어뜨리기도 하지요).

알고 있는 가수는 많지 않아도, 그래도 내가 아는 그 누구일까 하고 막연히 기대하면서

연예인 판정단이 추리를 해가는 모습 역시 재미있게 듣습니다. 내 기대는 접어놓고, 목소리,

바이브레이션, 옷차림, 발음 하나 하나, 춤 동작을 근거로 들며, 그럴 듯한 추리를 펼치는

연예인들의 말에 따라 이리 저리 기대를 옮겨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 중 누가 잘 맞힐지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음악 전문가들이 가수라고 단언했던 출연자가 가수가 아니어도

그 전문가가 엉터리라고 생각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확신이라는 게 명백히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재미있을 뿐입니다.

2) 가면의 재미 : 현대판 마당놀이가 벌어지고…

출처 : MBC

<복면가왕>에서 재미있는 요소 중 하나는 분명 가면일 것입니다. 리얼리티쇼가 실제라고

내세워도 우리가 항상 빨려드는 것은 ‘스토리’이기 때문에, 리얼리티쇼도 스토리를 만드려고

애를 씁니다. 스토리는 바로 재미와 감동이 함께 있는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이 스토리텔링에서

중요한 것이 캐릭터 형성이라 할 수 있겠지요. <복면가왕>에서는 얼굴을 가린 출연자에게

가면의 모습과 이름을 통해 캐릭터를 부여합니다. 그게 아주 어이가 없어서 웃게 만듭니다.

‘황금락카 두통썼네’, ‘화생방실 클레오파트라’, ‘꽃피는 오골계’, ‘어머니는 자외선이 싫다고

하셨어’ 등. 게다가 목소리 변조까지 더하니 웃음이 나옵니다. 뭔가 품위나 세련미 같은 것은

다 던져버린 것 같아요. 그렇다고 그게 저급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좀 거칠지만 오히려 우리의

54 방송 트렌드 & 인사이트 2015.8-9 l vol.02 Contents Review 55

일상 속 사물과 즉물적 느낌이 드러나는 소박함을 느끼게도 되고, 어떤 해학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가면 뒤 출연자들은 땀으로 범벅이 돼서 힘들겠지만, 시청자들은 이번엔 어떤 황당한

이름이 나오고, 또 그것을 어떻게 가면으로 형상화했을까를 은근히 기대하게 됩니다.

게다가 가면은 그걸 쓴 연예인들에게 자유를 느끼게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오히려

자기의 숨은 실력을 발휘하거나 노래를 평가받고 싶다는 기대로 가면 뒤에서 더 떨린다고

말하는 출연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출연자들은 “가면을 쓰니, 못할 게 없을 것 같습니다”,

“자신감이 생겨요”, “마구 장난치고 싶어요” 라는 자유의 기분을 밝힙니다. 사회 속 인간이면

익명성이 주는 자유를 누구나 알지요. 특히 ‘체면’ 중시가 너무 깊이 뿌리내려져 있고,

그래서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아주 중요한 우리 사회에서는 더욱 그 의미가 남다를

것입니다. 소위 개인주의가 팽배하다는 21세기라고 하지만, 사실 한국에서는 남의 시선을

무시할 수 있기는커녕, 남의 시선에 상관없이 자기 생각대로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사회의

질서와 규범을 지키지 않는 사람인양 눈치를 먹을 때가 많죠. 연예인들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프로그램은 시청자들만이 아니라 연예인들에게도 잠시 해방감을 주는 놀이의

한마당이 되는 것 같습니다.

3) 선입견과 경계를 허무는 재미와 감동 : “내가 누구게?” “어…너였어?!”

출처 : MBC

저는 이 부분이 진짜 이 프로그램의 진가를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이라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외모지상주의의 굴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드물 겁니다.

날로 겉모습이 중시되고, 그 겉모습에서 모든 것을 평가하려고 합니다. 이런 겉모습에는

나이, 성별, 직업, 인기, 아이돌 등도 포함이 됩니다. 그런데 가면을 쓰고 노래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의 공통점만 발견하게 됩니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 노래를 즐기는 사람,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 그것으로 교감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맞추려고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열심히 듣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추리하기도

잊어버리고, 다만 그 사람의 노래에 빠지게 됩니다. 일반인이든 연예인 판정단이든 무대에서

노래하는 사람에게 감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복면을 벗는 순간,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인물을 발견하는 놀라움을 맞이합니다. 웃기는 재주만 봤던 개그맨에게서, 또박또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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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던 아나운서에게서, 리듬체조 선수에게서, 투병에서 이기고 여장을 하고 나타난 백청강

씨에게서, 게이 연예인이라는 타이틀이 따라다니는 홍석천 씨에게서, 노래 한곡 전체를

들어볼 수 없었던 그룹 래퍼에게서, 댄스 가수에게서, 우리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그들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그저 놀라 입을 벌릴 뿐입니다. 뛰어난 가창력의 싱어송라이터인데도

불구하고 미남이 아니어서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임세준씨가 가면을 벗고 “엄마,

할머니, 나 텔레비전 나왔어”라며 웃을 때,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의 허물을 일시에 깨닫게

되지 않던가요? 그래서 이 프로그램은 다른 사람의 고정된 시선과 편견에서 벗어나 자신의

다른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복면가수들에게 제공합니다. 고정된 인식에서 해방되어

사람을 재발견하는 귀한 순간이 되는 것이지요. 기존 예능 프로그램들에서 출연자들이

기존의 인식과 편견에 기대고 그에 맞춰 연기해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우리 자신이 만든

인식의 감옥을 떠나 해방감을 맛볼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 좀 멋지지 않나요?

4) 경쟁을 하모니로 바꾸는 재미와 감동 : 대결인 줄 알았더니 듀엣?

출처 : MBC

<복면가왕>은 토너먼트에서 두 가수의 대결이 ‘듀엣’으로 펼쳐지기 때문에, 그 두 경쟁자가

경쟁이 아니라 듀엣의 하모니 속으로 시청자를 몰입시킬 때가 많습니다. 게다가 둘이 이성

간이면 ‘작업’ 멘트를 하며 핑크빛 놀이까지 보여줍니다. 이건 이전까지 봐왔던 리얼리티

음악쇼와는 다릅니다. 승자에게 부상이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대단한 명예가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결승전 우승자를 가왕이라고 모셔는 놓지만, 복면에 또 하나의 황금가면을 씌워

덥고 거추장스러운, 그리고 우스꽝스럽게 희화화되는 것 역시 경쟁의 심각성을 상쇄시킵니다.

사실 경쟁은 오늘날 리얼리티쇼의 필수 포맷이 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경쟁 포맷의

오락을 보면 우리는 어느새 쉽게 몰입하고 승자를 통해 안전하게 대리만족을 느끼기 때문에,

중요한 장치로 이용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리얼리티쇼는 알게 모르게, 경쟁과 효율이라는

시장의 규칙이 우리 삶의 구석구석을 지배하는 원리가 되어버린 작금의 신자유주의 체제에

우리가 순응해 살아가도록, 자기계발과 자기책임을 자기의 행동을 조직하는 절대 윤리로서

계속 내면화시키는 기능도 하는 것 같습니다(김수정, 2010). 그러니 그 욕망이 클수록, 경쟁도

크게 느껴집니다. 남처럼 되고 싶고, 남에게 인정받고 싶고, 그 서열의 꼭짓점에 서고 싶은

56 방송 트렌드 & 인사이트 2015.8-9 l vol.02 Contents Review 57

욕망은 쉽게 사람들을 파고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욕망이 클수록, 다른

한편에는 평등에 대한 갈구도 절실해집니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리얼리티쇼에서는 그런 평등에

대한 집단적 희구가 경쟁과정에서 정서적으로 독특하게 발휘되는 모습도 있습니다. 오락임에도

공정성을 무척이나 중요하고 진지하게 다루는 모습이나, 실력이야말로 절대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여기거나, 어려운 사연을 가진 사람이 승자가 되길 바라거나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즉, 동전의 양면처럼 서열에 대한 욕망과 평등을 희구하는 정서가 한국사회를 특징짓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 그런 모습이 한국 리얼리티쇼를 관통하는 정서구조라고 보며, 이를 ‘정서적

평등주의(affective egalitarianism)’라고 부릅니다(김수정, 2011).

이처럼 경쟁포맷을 필수로 하는 리얼리티쇼는 우리가 살아가는 신자유주의 현실을

구성하는 일부이기도 한데, <복면가왕>은 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기획에는 “진정한

실력으로만 최고의 가수를 뽑는다면”이라고 써 놨지만, 사실 이 프로그램의 재미와 감동은

실력이 중요한 것도, 최고가 중요한 것도, 가수라는 정체성이 중요한 것도 아님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사회자의 멘트처럼, 그저 출연자의 목소리를 “다음 라운드에서 한 번 더 듣고

싶다”면 충분한 것입니다. 오히려 영광의 순간은 가왕이 되는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복면을

벗고 판정단과 시청자들이 그와 ‘만나는 순간’, 그를 ‘발견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경쟁의 포맷임에도, 경쟁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 최고가 되겠다는 욕망이 아니라 단지

‘놀이’를 작동시키는 순수 장치로만 기능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복면가왕>은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그러므로 가왕에 대한 찬양을 조장하는 분위기가 되면, 최고를 향한 욕망이 다시

이 프로그램의 장점을 퇴색시키겠지요).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은 시청자만 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출연자도 편하게 합니다. 물론 리얼 버라이어티쇼에서 경쟁은 흔히 복불복처럼 사소한

것을 두고 경쟁하는 식의 오락이었지만, 다른 음악쇼의 경우도 그런 건 아니었어요. <나는

가수다>(MBC)를 생각해 보세요. 출연 가수들은 방청객과 시청자에게 그 폭풍감동을 주고

갈채를 받지만, 그러한 대중의 평가와 동료 간 경쟁에 혼신의 힘을 불사르며 자신을 걸어야

했고, 그 긴장으로 부들부들 떨어야 했지 않나요? 저는 그걸 볼 때마다, 명성이란 이름

아래, 방송매체의 권력 아래, 시청자의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뭔가 그 가수들을 고문하는

것처럼 느낄 때도 많았습니다. <불후의 명곡>(KBS) 역시 많은 감동과 재미를 주는 인기

프로그램입니다. 더구나 아이돌을 좋아하면서도 은근히 댄스가수로 폄하하는 세태 속에서

노래를 못 할 거라는 편견을 깼을 뿐 아니라, 지난 가요를 부르며 세대 연결을 시도한

좋은 프로그램이지요. 하지만 그 프로그램만 해도 ‘실력파 보컬들의 경쟁’이란 강조에서

우리 사회의 실력 지상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무대라는 생각이 얼핏얼핏 든 것은 저만의

과민일까요? 그에 비해보면 <복면가왕>은 그저 노래하는 순간을 즐기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잘하는 사람이 이기기를 기대하는 심리보다는 빨리 떨어져서 우리에게 정체를 밝혀주기

바라는 마음이 앞서게 합니다. 떨어져도, 그는 자신이 준비한 노래를 시청자들에게 들려주며,

자신이 보여주고 싶었던 모습을 다시 진지하게 어필해 볼 수도 있습니다.

58 방송 트렌드 & 인사이트 2015.8-9 l vol.02 Contents Review PB

5) 대중문화를 공유하는 재미와 감동 : 그때와 지금을 잇고, 여기와 저기를 아우르고…

마지막으로 이 프로그램이 주는 재미를 하나 더 꼽고 싶습니다. 연예인 판정단이

복면가수를 추리하는 과정에서, 언급한 연예인의 과거 자료화면을 통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시청자들에게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그것은 잊고 있었던, 대중문화가 만들어 놓은

우리의 집합적 기억을 소환합니다. ‘그래 우리가 그 노래에 열광했지’, ‘그래 저 사람이

있었지’라는 감정들을 당신도 느끼지 않았나요? 오랫동안 활동했던 가수든, 잠시 반짝했다가

곧 잊혀진 사람이든, 한때 우리가 따라했던 유행어를 만든 개그맨이든 간에 말입니다. 과거에

활동하던 연예인이 우리 지난 삶들의 일부였다는 느낌, 그리고 지금 연예인들이 우리의 삶을

함께 이뤄나가고 있다는 느낌은 우리 모두를 한국 대중문화의 일부로 함께 묶고 있는 감정의

끈을 느끼게 합니다. 너무 감상적으로 들릴지는 몰라도, 작은 프로그램 하나가 대중문화

속에서 우리의 공동체 정서와 의식을 형성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나가면서

지금까지 <복면가왕>의 포맷이 어떻게 재미를 유발시키는 장치를 마련했는지, 그것이

우리 사회의 어떤 정서와 가치를 건드리며 감동을 일궈내는지 정리해 봤습니다. 사실 우리는

조리법을 생각하지 않고도, 앞에 놓인 요리의 맛을 백퍼센트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고 먹을 때, 더 맛을 음미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 리뷰는 후자의 사람들께 보내는 글이 될 것 같습니다.

아, 제 얘기가 지나치게 칭찬일색이어서, 저를 설마 <복면가왕> 제작팀이나 방송국 홍보

요원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직접적인 비판만큼이나 칭찬을 통해서도 비판적인 성찰이

가능할 수 있을 것 같아 시도해본 것 뿐입니다. 현명한 제작진이라면, 작은 칭찬을 통해

한국의 대중문화를 가꾸는 보람과 책임의식을 같이 느끼시겠지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참고문헌

김수정 (2010). 글로벌 리얼리티 게임쇼에 나타난‘자기통치(self-government)’의 문화정치 : <프로젝트 런웨이>와 <도전 슈퍼모델> 프로그램을 중심으로.『한국방송학보』 24권 6호. pp. 7~44.

김수정 (2011). 한국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정서구조와 문화정치학.『방송문화연구』 23권 2호. pp. 37~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