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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와 아름다운 만남궁중여인열전 옹주의 삶 44 알림마당 문화유산 소식+재단행사 알림 K-HERITAGE 문화상품 전통문화달력 48 한국문화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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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전통문화와 아름다운 만남궁중여인열전 옹주의 삶 44 알림마당 문화유산 소식+재단행사 알림 K-HERITAGE 문화상품 전통문화달력 48 한국문화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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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통 문 화 와 아 름 다 운 만 남

발행일 2016년 2월 1일(통권 374호) 발행처 한국문화재재단 발행인 서도식 외부 편집위원 김기덕, 박인석, 장경희, 전경욱, 전은경 만든이들 조진영, 김경수, 이정현, 김태영

발행부수 8,000부 인쇄등록 강남, 라-00003(1984년 6월 11일) 주소 서울시 강남구 봉은사로 406(삼성동 112-2번지) 전화 02-3011-2603 팩스 02-566-6314

홈페이지 www.chf.or.kr 디자인ㆍ제작 P31 전화 02-3141-2760 이메일 [email protected] 사진 박우진 번역 조윤정 교열 이은실 그림 유환영

*본지에 실린 내용은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차례

사진으로 보는 문화유산

세계자연유산, 제주도

36민속의 어제와 오늘

돌잔치, 생과 사의 경계에서 탄생과 축하

40궁중여인열전

옹주의 삶

44

알림마당

문화유산 소식+재단행사 알림

K-HERITAGE 문화상품

전통문화달력

48

한국문화재재단 소식

취임 1주년을 맞이하며

공예트렌드페어 ‘결結: 손수 만들다’

한국의집 산책

기획특집

무형문화유산이란

무형문화유산의 전승과 활용

새로운 법률 제정 의의와 기대

무형문화재 삼국지 예능·기능

한·중·일 세 나라의 신년 축제

한·중·일 수저의 등장과 사용

04 12 24

한국문화재재단에서 발행한 <월간 문화재> 이번 호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상업적 이용금지, 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사진, 일러스트는 이용할 수 없습니다. 공공누리는 공공기관의 저작물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표준화한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표시제도입니다.

www.kogl.or.kr

24절기는 중국 주(周)나라 때 화북 지방의 기상 상태에 맞춰 이름 붙인 명칭입니다. 천문학적으로 태양의 황경(黃經)이

0°인 날을 춘분으로 시작해서 15°간격으로 24절기를 나눈 것입니다.

당연히 동양적인 구분이기 때문에 영어로 된 공식적인 명칭은 없습니다. 홍콩 천문대 홈페이지에 24절기를 한자의 원뜻을

살려 영어로 의역해놓았습니다. 이를 다시 한글로 번역해보면 24절기의 명칭이 멋진 시구로 표현됩니다.

·소한 小寒 Moderate Cold ·대한 大寒 Severe Cold ·입춘 立春 Spring Commences ·우수 雨水 Spring Showers

·경칩 驚蟄 Insects Waken ·춘분 春分 Vernal Equinox ·청명 淸明 Bright & Clear ·곡우 穀雨 Corn Rain

·입하 立夏 Summer Commences ·소만 小滿 Corn Forms ·망종 芒種 Corn on Ear ·하지 夏至 Summer Solstice

·소서 小暑 Moderate Heat ·대서 大暑 Great Heat ·입추 立秋 Autumn Commences ·처서 處暑 End of Heat

·백로 白露 White Dew ·추분 秋分 Autumnal Equinox ·한로 寒露 Cold Dew ·상강 霜降 Frost

·입동 立冬 Winter Commences ·소설 小雪 Light Snow ·대설 大雪 Heavy Snow ·동지 冬至 Winter Solstice

벌써 봄의 절기가 시작됩니다. 웅크렸던 몸과 마음을 펴고 봄의 소나기에(Spring Showers) 흠뻑 젖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미지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월간 문화재는 한국문화재재단 홈페이지(www.chf.or.kr)의 월간 문화재 구독신청 코너를 통해 신청하시면 무료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꽃과 나비(부분)

조선

남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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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말 한국문화재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한 후 벌써 1년여의 시간이 흘렀습

니다. 그동안 재단의 모든 임직원과 함께 전통문화가 국가 경쟁력의 근간이 되고

시대를 리드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문화유산의 미래 가치를 창

조하기 위해 힘써왔습니다. 문화융성의 국정기조와 문화재청의 주요 정책 과제들

을 바탕으로 문화유산의 보존, 보급, 활용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기획 추진하고, 목

표한 성과에 도달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제1회 궁중문화축전을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 국가의 정통성을 두루 알리고 내외국인 모두에게 우리 전

통문화 체험 기회를 확대하는 데 일조하였으며, 문화가 있는 날과 연계하여 경복궁

왕가의 산책 및 전통문화 교양강좌, 전통예술 공연을 실시하였습니다. 또한 무형문

화유산의 해외 보급을 추진하고 방송사와 협력하여 문화 콘텐츠 보급을 확대하였

으며, 특히 스위스의 고급 시계회사인 바쉐론 콘스탄틴과 ‘함 프로젝트’를 진행함으

로써 대외협력에 의한 문화유산 가치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한국의집에서

는 내외부의 환경을 개선하고 <음식디미방>의 반가음식을 메뉴화하였습니다. 그리

고 국제교류 협력 사업의 일환으로 캄보디아 프레아피투 사원의 보존 복원 사업에

참여하고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 자문 비정부기구NGO로 재

인가를 받음으로 재단과 국가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올해 2016년 병신년丙申年에도 재단은 지금의 성과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모습으로 여러분께 다가가려 합니다.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창경궁 등지에서는 4월 말부터 제2회 궁중문화축전

이 개최될 예정입니다. 전문가에 의해 운영 체계를 새롭게 구축하여 궁궐별 특화 프

로그램을 개발 운영하고 홍보를 강화함으로 행사가 더욱 활성화될 수 있게 할 것입

니다. 특히 경복궁 수문장 교대의식, 종묘대제, 창덕궁 달빛기행, 덕수궁 풍류, 창경

궁 야간 개방 공연 등 기존의 다양한 프로그램과 함께 궁중문화축전이 문화유산 대

표 브랜드로 자리 잡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도록 하겠습니다.

무형문화재 전승 기반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 기존에 시행했던 무형문화

재 지원 사업들을 통합한 ‘2016 무형문화재 대전’을 개최합니다.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작품전, 기능종목 합동 공개 행사를 비롯한 이수자 전승활동 사업 등을 통

합하여 전시, 세미나, 유통, 체험, 정보교류 등이 가능한 대규모 행사로 개최함으로

시너지 효과를 높이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관계법령에 의거하여 재단에 처

음 설치되는 한국무형문화재진흥센터를 통해 무형문화재 전승공예품 인증제 및 은

행제를 시행하고, 전승자 대상 창업 지원 컨설팅과 협업에 의한 디자인 개발을 지

원할 것입니다. 전 세계인이 드나들며 교류하는 인천국제공항의 전통문화센터를

새롭게 단장하여 많은 여행객들이 다양한 체험으로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문화를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한국의집은 고품격 전통음식과 전통의례 재현에 역점을 두고 보다 향상된

서비스로 여러분께 인사드릴 것이며, 한국문화의집에서는 전통공예건축학교 강좌

를 비롯한 생애주기별 교육 체험, 문화유산 방문교육 등의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들

로 전통문화예술의 공교육을 보완할 것입니다. 아울러 무형문화재 상설공연과 기

획공연을 확대하고 브랜드화에 앞장서겠습니다. 매장문화재 발굴조사 역량을 강화

하고 소규모 발굴 지원의 만족도를 높여나가겠습니다. 국제적으로는 문화유산 공

적 개발원조 사업에 필요한 지원과 교류협력 네트워크를 확대해나가겠습니다. 멕

시코에서 ‘한국무형문화재 주간’을 운영하고 프랑스의 문화유산박람회에 참가하는

등 무형문화재의 해외 보급을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

나를 비롯한 한국문화재재단의 모든 임직원은 문화융성의 국정기조를 바

탕으로 문화유산의 미래 가치를 창조하는 전문기관의 일원으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올 한 해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러분의 큰 관심과 열렬한 성원을 부탁드리겠습

니다.

한국문화재재단 이사장 서도식

월간 문화재 04 05한국문화재재단 소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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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민복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금속공예전공 교수

지난 12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공예 디자인문화진흥원이 주관한 2015 공예트렌드페어가 개최되었다. 한국문화재재단은 ‘결結: 손수 만들다’라는 테마로 전시에 참여하였다. 이는 오늘의 전통이 막히지 않고 흐르고 쌓여 ‘한국의 미’로 완성되길 바라는 염원으로 2013년부터 시작된 전시다. 이번 행사에는 9명의 현대 장신구 공예가와 21명의 전통공예 이수자가 참여해 서로의 발전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손수 만든 물건이 점점 귀해지는 이 시대에 전통을 현대화하고

전승공예가들이 행복하게 일할 마당을 만들었으면 하는 소망

에서 한국문화재재단은 이수자 지원 사업을 진행하였다.

21명의 이수자가 기꺼이 사업에 지원하였고, 9명의 현

대장신구 작가들이 이수자분들과 함께해주었다. 장인-디자이

너의 협업 구조로 진행된 지난 2년간의 사업을 참고하여 2015

년에는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디자이너-장인의 관계가 상명하복이 아닌 서로 배우는

관계가 될 것.

둘째, 일품공예가 아닌 양산이 가능한 디자인을 개발할 것.

셋째, 생산의 전 과정을 이수자분들이 이해하고 사업 이후 스

스로 관리할 수 있는 디자인을 개발할 것.

넷째, 디자인 등록 시 이수자분들이 사업의 사용권을 가지고

디자이너는 창작자로 머물 것.

이 원칙들은 사실 한국 공예의 과제를 담고 있다. 외국

과 달리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 현대공예와 전

승공예 사이에 깊은 상흔을 남겨두었다. 현대공예가와 전승공

예 이수자들은 이번 사업에 헌신적으로 참여하며 단지 상품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손수 만드는 일을 하는 서로의 일을 배

울 수 있었다. 전승공예가들은 전통 기법을 가지고도 당대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갈 새로운 물건을 만들 수 있다는 귀한 경

험을 하게 되었고, 현대공예가들은 재료를 대하는 전통적 자

세와 방식을 배우며 우리에게 내재해온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

를 넓힐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사업은 단순히 상품을 개발하고 전시

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전통과 현대가 서로 불화하

고 어디로 가야 할지 묻는 시대에, 이 기획은 서로에게서 길을 찾고

답을 찾아보자고 말한다. 무언가 손수 만드는 감각을 상실해가는 현

대인과 그들로부터 멀어져가는 공예품의 자리는 과거와 당대의 모든

지혜를 모아 만든 좋은 물건으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제 연

단위의 단기성 기획이 아닌 중장기 계획을 수립하고, 패키징

디자인 개발, 디자인 및 상표등록 등의 상품화 과정을 마무리

하고 인천공항 등의 유통 채널 발굴, 장인대전, 국립무형유산

원 등 전시홍보 다각화, 이수자 경영 컨설팅 등 여러 방안을 모

색하여 한국 전승공예의 결을 다듬고 빛나게 하는 사업으로 자

리매김하기를 기대해본다.

월간 문화재 06 07한국문화재재단 소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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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치

완초장 | 박순덕·김연경

무제

목조각장 | 정운복·조성호

트윌리

자수장 | 이영분·김수연

마음心

각자장 | 장승천·오세린

월석

사기장 | 이재성·김계옥

쪽빛 노리개 스카프

염색장 | 최경자·이정화

창살문으로 보이는 새

금박장 | 김기호·윤상희

자연의 숨결

완초장 | 장금숙·황희진

색동을 담은 누비 장신구

누비장 | 유선희·신혜림

각자장 | 손영학·김계옥

디렉터

민복기

서울대학교 디자인학부 금속공예전공 조교수

2014 Domain of the Material Ⅱ, CST(create space Tokyo), Japan

2014 민복기 개인전 Light echo, spaceduru, Seoul

2013 장식과 환영- 현대장신구의 세계, 국립현대미술관

이수자(21명)

김기호 중요무형문화재 제119호 금박장 이수자

김인자 중요무형문화재 제89호 침선장 이수자

박선희 중요무형문화재 제22호 매듭장 이수자

박성분 중요무형문화재 제65호 백동연죽장 이수자

박순덕 중요무형문화재 제103호 완초장 이수자

박형민 중요무형문화재 제22호 매듭장 이수자

손영학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 이수자

안용희 중요무형문화재 제78호 입사장 이수자

오영순 중요무형문화재 제118호 불화장 이수자

유선희 중요무형문화재 제107호 누비장 이수자

윤정숙 중요무형문화재 제80호 자수장 이수자

이명애 중요무형문화재 제80호 자수장 이수자

이영분 중요무형문화재 제80호 자수장 이수자

이재성 중요무형문화재 제105호 사기장 이수자

임경미 중요무형문화재 제118호 불화장 이수자

장금숙 중요무형문화재 제103호 완초장 이수자

장승천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 이수자

정운복 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 이수자

정윤숙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장도장 이수자

최경자 중요무형문화재 제115호 염색장 이수자

디자이너(9명)

김계옥 KIMKYEOK STUDIO 대표

김수연 스페이스 줄, 골든제스쳐 주얼리 대표

김연경 Ar.vuyo 대표

신혜림 국민대학교 금속공예학과 겸임교수

오세린 2015-2016 예술지구_p 입주작가

윤상희 청주대학교 공예디자인학과 조교수

이정화 SN 2015:01_10 전시 외 다수의 전시 참여

조성호 Gallery Rob Koudijs(암스테르담) 전속작가

황희진 건국대학교 강의

양산 지원

김완배 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 이수자

조기상 아우로이 대표

월간 문화재 08 09한국문화재재단 소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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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자락에 위치한 한국의집은 시내 한복판에서 한옥을 경험

할 수 있는 곳이다. 마루, 기둥, 대들보, 문살 하나하나에 진한

세월의 손때가 묻어 있다. 도심 속 살아 있는 문화유산으로서

한국 전통가옥의 참멋을 간직한 이곳은 고택의 아름다움을 감

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한국의집 입구를 지나면 장중한 지붕의 해린관이 시야

를 가득 메운다. 경복궁 자경전을 본뜬 한국의집은 양반가의

한옥에 궁중 건축을 가미하여 격조 높은 한국미를 보여준다.

행랑채 격인 해린관은 세계인이 친교하는 공간을 뜻한

다. 이곳은 소화당과 민속극장으로 연결되며, 아늑한 중정을

사이에 두고 안채 격인 가락당이 자리하고 있다. 가락당은 5칸

방인 봉래실이 있고 ‘ㄱ’자 형태의 복도를 따라 방장실과 영주

실을 배치한 구조다. 각 방의 명칭은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의

세 봉우리에서 따온 것으로, 이곳에서 식사하면 불로장생한다

는 말이 전해지기도 한다.

소화당은 사랑채 격으로 반루 형식의 환벽루와 이어져

있다. 환벽루는 아담한 연못과 경치를 감상하기에 좋은 누각으

로 하늘을 날아오를 듯한 처마의 곡선미가 일품이다. 이외에도

행랑채 북쪽에 위치한 156석 규모의 민속극장에서는 매일 전

통음악과 춤 등 다채로운 공연이 펼쳐진다.

남산의 신록을 즐길 수 있는 후원을 천천히 거닐다 보

면 자연스럽게 별당으로 발길이 향한다. 수목이 드리워진 문

향루는 팔작지붕으로 더욱 아름다운 집이다. 600여 년 전 박

한국의집은 세종대왕의 집현전 학자였던 박팽년의 사저 터로 전통과 유서가 깊다. 한국문화재재단은 1980년에 이곳 한국의집 관리 위탁을 받아 우리 고유의 문화를 내외국인에게 널리 알리고 있다. 이곳에서는 궁중음식과 전통공연, 전통혼례 등 다양한 한국 문화 체험이 가능하다.

글.

편집팀

사진.

박우진

한국의집

면적 7156m2

주요 시설 해린관 세계인이 친교하는 공간

가락당 아름다운 선율이 가득한 곳, 안채

소화당 봄의 화창한 경치가 가득한 집, 사랑채

환벽루 푸른빛 속에 둘러싸인 누각

청우정 빗소리가 들리는 고요한 정자

녹음정 녹음방초를 시로 읊는 정자

문향루 향기를 풍기는 공간

주요 사업 궁중음식, 전통무용, 민속음악, 전통체험, 전통혼례, 문화상품 판매

팽년의 가옥이 위치했던 자리로, 중앙에 마루를 사이에 두고

큰방과 작은방으로 분리되어 있다. 외관은 모두 사분합 들문

이어서 문을 들어 올리면 사계절 내내 주변 자연경관과 마주

할 수 있다.

또 다른 별채로는 청우정이 있다. 높은 초석 위에 지어

진 팔각형 집으로 방에 들어가려면 돌계단을 올라야 한다. 청

우정은 집 바깥에 툇마루와 계자 난간이 있어 더욱 멋스러운

데, 특히 비 오는 날 진가를 발휘한다. 비가 내리면 모든 소음

이 차단된 가운데 오직 후원에 떨어지는 빗소리만 들리기 때문

이다. 복도를 건너면 행각 건물인 녹음정으로 통한다. 아담한

3칸 방과 조그만 툇마루가 딸려 있는 이곳은 고요한 한옥의 운

치가 느껴지는 공간이다.

별채 중 하나인 청우정

환벽루 연못에서 바라본 안마당

월간 문화재 10 11한국문화재재단 소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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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라고 하면 우선 유물이나 유적 같은 구체적인 형상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면 사람을 통해 전해진 무형문화유산이야말로 전통문화 향유의 원천임을 깨닫게 된다.

글.

나경수

전남대학교 국어교육학과 교수

갓일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분류: 무형유산 / 공예기술 / 피모공예 / 피모공예

1964년 12월 24일 제4호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갓일은 갓을 만드는 과정을 말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 명예보유자 김인

무형문화유산은 유형문화유산의 모태

가장 쉽게 유형과 무형의 문화유산을 구별하는 방법이

라면 유형은 카메라로 촬영하고, 무형은 캠코더로 촬영한다는

것 아닐까 싶다. 유형문화유산은 그 존재 기반이 물질이기 때

문에 공간문화재인 반면, 무형문화재는 그 속성이 일정한 연속

성을 가진 시간문화재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고려청자는 카

메라로 촬영하면 그만이지만, 세계적인 성악곡으로 평가받는

판소리는 캠코더로 촬영하는 것이 옳다. 유형문화유산이 고정

된 완성형인 데 반해서, 무형문화유산은 그것을 완성시켜가는

유동적 진행형이요, 일련의 과정적 행위 일체라고도 할 수 있

겠다. 바꾸어 말하면 유형문화재는 역사를 간직한 물질적 유산

이요, 무형문화재는 현재까지 전승되어오고 있는 지적 유산인

셈이다. 무형유산을 요즈음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전통지식의

하나라 하겠다.

그러나 모든 무형문화유산이 유형문화유산을 만드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유형문화재와 상관없이 독자성을 가

지고 전승되기도 한다. 무형문화유산은 예능과 기능으로 나뉘

는데, 예능은 예술, 제의, 놀이처럼 유형문화유산과는 상관없이

무형 그 자체로 전통을 지속시키는 것이요, 기능은 의식주를 위

한 각종 생활재, 종교를 표상하는 신앙물, 그리고 각종 공예품,

건조물 등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만들어내는 것은 기능 그 자체

가 아니다. 기능을 가진 사람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인간문화재 및 전승을 위한 교육과 활동이 필요한 영역

숭례문을 복원하면서 겪어야 했던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는 국보급 건축물을 재현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기능 보유자가 극히 소수였다는 점이다. 사리에는 벗어나지만

극언을 좀 하자 치면 그나마 작은 숭례문이 불탔기에 망정이지

궁실 등 대형 국보급 건축물이 화재나 천재지변으로 소실되었

다면 어찌해야 했을지 오싹하기조차 하다.

종묘제례악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분류: 무형유산 / 전통연행 / 의식 / 국중음악

1964년 12월 7일 제1호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종묘제례악은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와

함께 2001년 5월 18일 유네스코 세계인류구전 및

무형문화유산걸작으로 선정된 후, 2008년에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 목록에 통합되었다.

2012년 종묘제례악 공연

월간 문화재 12 13기획특집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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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고의 예술품으로 간주되는 백제금동대향로나 신

라금관 등도 지금까지 그것을 만들 수 있는 기능이 고스란히

전승되고 있다면 수십, 수백 개라도 마음만 먹으면 금방 제작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기능이 사람에 의

해 전승되고 실행된다는 데 있다. 유형문화재를 지정할 때는

그와 관련하여 따로 사람을 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무형문

화재를 지정할 때는 특정 개인이든, 단체든, 또는 불특정 다수

든 전승 주체의 인정이 필요하다.

이제는 법적 개념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인간문화재로

불리는 보유자는 전수교육과 전승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전수

교육의 보조를 위해 전수교육조교를 둘 수 있으며, 이수생 중

에서 우수한 사람을 선발한다. 전수교육조교는 해당 무형유산

에 대해 일정한 전수 과정을 거친 이수자로서 이수증을 소지한

사람에 한한다. 또한 전수장학생 제도를 두어 장학금 등을 지

급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2012년에 아리랑과 2013년에 김

장문화를 유네스코에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하면서 보유자나

보유단체를 따로 두지 않았다. 불특정 다수 또는 민족 단위의

보유집단을 인정하게 된 사례다. 이에 따라 새로 마련된 무형

문화재법에서는 “해당 국가무형문화재의 특성상 보유자, 보유

단체를 인정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고 하여

따로 전승자를 지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러한 변화는 두 가지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첫째는 무형문화재의 지정 대상이 보다 확대되고 용이해졌다는 것

이며, 다른 하나는 소멸 위기에 있는 긴급보호 종목만 아니라 예의

아리랑이나 김장문화처럼 현재 활발히 전승되고 있는 무형유산에

대해서도 지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유네스코의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과 진행

유네스코는 1972년 세계문화유산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 등 문화유산 보호를 위한 국제규범을 제정한 바 있다.

그러나 무형문화유산 보호에 대해서는 구속력 있는 국가 간 규

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여, 1989년 ‘전통문화 및 민

속 보호에 관한 유네스코 권고’와 1997년 총회에서는 소멸 위기

에 처한 무형유산 중 그 보존과 재생을 위하여 ‘인류 구전 및 무

형유산 걸작’을 선정하여 보호하자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유네스코에서는 무형유산이 더 이상 소멸되는 것을 막

고 무형유산을 확인하고 보호하며 증진할 목적으로 2001년 5

월부터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 등재 사업을 시작했으

며, 선정 첫해인 2001년에는 19개 종목, 2003년에는 28개 종

목, 2005년 에는 43개 종목으로 확대해갔다. 그러나 문화적 다

아리랑

중요무형문화재 제129호

분류: 무형유산 / 전통연행 / 음악 / 민속음악

가장 최근에(2015년 9월 22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아리랑은 2012년 <아리랑, 한국의

서정민요>로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되었다.

한국의집 아리랑 공연에서 시연중인 김광숙

명창(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보유자)과

이춘목 명창(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보유자)

아리랑

2012년 제7차 무형유산보호 정부간위원회,

아리랑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 등재심사

양성의 원동력이자 지속가능한 발전의 보장 수단인 무형유산

의 보호에 관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2003년 9월 29

일부터 10월 17일까지 파리에서 개최된 제32차 유네스코 총회

마지막 날 ‘무형유산보호협약’을 채택했다. 한편 이 협약에 의

거하여 유네스코에서 2001년부터 시행되어오던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 제도는 2008년 제2차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세계 무형유산 대표목록 및 긴급보호목록’

제도로 변경하기로 결의했다. 우리나라는 2005년 2월 9일, 11

번째로 협약 당사국으로 가입하여 지금까지 협약 이행에 적극

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에 명시된 무형유산의 영역은

크게 5가지다. 1) 무형문화유산의 전달 수단인 언어를 포함한

구전 전통과 표현물, 2) 공연 예술, 3) 사회적 관습, 의례, 축제

행사, 4) 자연과 우주에 대한 지식과 관습, 5) 전통공예 기술 등

이 그것이다. 유네스코의 이러한 영역은 올해부터 시행되는 우

리나라 무형문화재법의 제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2001년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 제도가 마련되

면서 우리나라는 가장 먼저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을 등재

한 것을 시작으로, 판소리(2003), 강릉단오제(2005), 강강술래

(2009), 남사당놀이(2009), 영산재(2009), 제주칠머리당영등굿

(2009), 처용무(2009), 가곡(2010), 대목장(2010), 매사냥(2010,

13개국 공동), 택견(2011), 줄타기(2011), 한산모시짜기(2011),

아리랑(2012), 김치와 김장문화(2013), 농악(2014), 줄다리기

(2015, 4개국 공동) 등을 지속적으로 등재시키고 있다.

무형유산의 가치에 대한 재인식과 문화재 정책의 재고

무형문화재는 유형문화재를 낳은 모태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민족공동체의 어려운 삶의 여건을 극복하고 대내외

적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해주었던 지혜의 소산이기도 하다.

그러한 기능, 그러한 예능이 없었다고 가정해본다면 오늘날 우

리의 삶은 물론, 민족의 삶 역시 온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무형유산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

는 심각하다. 시골보다는 도시를, 지방보다는 중앙을, 동양보다

는 서양을 경도하는 세태는 물론이요, 과거는 열등하고 현대는

우수하다는 프레임으로 무장한 장갑차보다 강한 집단적 인식이

우리 사회 속에 편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관심과 충실

한 배려가 전제되지 않으면 곧 사라져버리는 것이 무형유산이

다. 무형유산은 한번 사라지면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더

욱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문화재 정책은 유

형문화재 중심이다. 이러한 사실을 방증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

는 예산이다. 2010년 기준으로 유형문화재가 94.9%, 무형문화

재가 5.1%였으니, 몇 년 지난 지금은 더 벌어져 있을 것이다.

무형문화유산은 일정한 지리적·역사적·사회적 환경에

적응해온 우리 민족의 집단적인 삶의 지혜요, 소중한 자산이

며, 더구나 재창조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무형문화

유산의 보호를 위한 지정과 기예능 보유자의 인정과 지원에 다

소 미흡했던 지금까지의 문화재 정책은 재고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실제 무형문화재의 지정 건수와 전승 인력이 적은 편이

지만, 더구나 전승교육과 전승활동에 충분한 지원이 이루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지정된 문화재라고 해

도 전승자가 없어 지정이 취소된 예도 있다. 관심과 보호가 부

실했던 까닭이다. 활발한 전승교육과 전승활동을 통해 지속가

능한 문화유산으로 가꾸어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지원이 부족했던 까닭에 자연도태의 길을 걷게 된 사례들이다.

민족공동체의 전통문화는 한 개인의 기억과 같이 소중

하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이 온전한 인격체라고 할 수 없

듯이, 전통문화를 괄시하거나 망실하면 정체성 역시 와해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예능과 기능적 무형유산 역시 우

리가 소중히 지켜가야 할 가치 있는 전통문화임에 틀림없다.

상대적 우위까지는 아닐지라도, 유형유산과의 형평성 논란에

서 무형유산이 좀 자유로울 수 있도록 문화재 정책의 재고가

요망되는 실정이다.

월간 문화재 14 15기획특집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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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하여 사라질 위기에 처한 기·예

능 122종을 종목으로 지정하고 보호한 지 50여년의 세월이 지

났다. 이 기간에 문화재청의 정책기조 또한 ‘원형 보존’에서

‘전승 활용’으로 바뀌고, 2012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보호

협약’에 따라 기존 제도를 정비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국내외 문화재 환경의 변화에 따라 문화재청은 2013년

국립무형유산원을 신설하여 무형문화재의 조사와 연구 및 기

록의 아카이브 기능을 강화하였고, 2015년 3월 27일 <무형문

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이하 ‘신법’으로 약칭함)을 제

정하였으며, 지난 1년간 무형문화재 관리 제도의 효율성을 확

보하고 진흥정책을 통해 전승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시행령

과 시행규칙 등을 다듬어 왔다.

이처럼 올해 3월 28일부터 시행될 신법에서는 무형문

화유산의 ‘전승 활용’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무형

문화유산의 전수교육과 활용방안 등을 제안해보기로 하겠다.

도제식 전수교육의 제도적 개선

문화재보호법이 시행된 50여 년간 우리의 무형문화재

는 인간문화재라 불리는 보유자를 인정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

는 기예능을 1:1 맞춤형 도제식 교육으로 전승시켜왔다. 전수

장학생을 선발하고 그들에게 3~5년간 교육을 시켜 이수자가

된 후 5년이 지나 전수교육조교를 선발하는 전승 시스템을 갖

추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보유자, 전수교육조교, 이수자, 전수장

학생으로 이어지는 전수체계는 유네스코에 의해 전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무형문화재 제도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올해부터 무형문화유산만을 대상으로 한 법률이 시행됨에 따라 폭넓은 전수교육과 활용 방안 마련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글.

장경희

한서대학교 문화재보존학과 교수, 충남·서울 문화재위원

그러나 보유자의 도제식 전승은 종목의 사유화, 가족 중심의

폐쇄적 전승구조로 인한 세습화, 제도권 교육과 유리된 채 보

유자의 권력화 등을 야기했다는 곱지 않은 시각도 있다. 또한

도제식 교육은 젊은 인재들이 선호하는 방식이 아니어서 신법

이 제안한 전수교육대학을 단계별, 수준별로 접근해 보자.

첫째, 4년제 전수교육대학은 코어대학, 거점대학, 특성

화대학 등을 제안한다. 문화재청 산하의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가 중핵으로 위치하되, 특정한 한 곳만으로 독점적으로 운영하

는 방식은 지양해야 한다. 이것은 기존에 보유자가 전권을 행

사하던 도제식 교육의 폐해를 고스란히 대학으로 옮기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코어대학과 함께 지역거점대학 및 특성

화대학 등을 동시에 운영하여 상호 경쟁하도록 해야 한다. 한

국전통문화대학교는 소규모 전공 학과 설치, 교육편제 재편,

보유자[전수교육조교]의 교수요원으로의 재배치 등 탄력있게

운영하는 것이다. 거점대학은 무형문화재 종목이 많이 소재

한 지역을 권역별로 나누어 호남권역, 영남권역, 충청권역, 경

기권역, 서울권 등에서 2~3곳을 선정하는 것이다. 특히 사라질

위기에 처한 긴급한 1~2종목만 집중해서 가르치되, 기운영되

는 학점인증제를 특성화 대학과 연계시켜 지속적으로 확장되

게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신법 통과와 함께 급하게 성과를 내기 위해 전수

교육대학을 급하게 선정하기보다 교육환경이나 수요자의 변

화를 읽어내고 타당성 조사를 거쳐 시간을 갖고 문제점을 충분

히 고민해 중장기 로드맵을 마련하고 연차적으로 접근하되, 무

형유산이 위치한 지역 연고를 융합하는 방안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 예산은 기존 예산에서 편성된 보유자의 전승교육금을 교

수인건비로 전용 가능하고, 실습시설은 전수교육관이나 전수

교육 관련 항목으로 편성되며, 미래인재의 장학금은 전수장학

금을 우선 배정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도 있다. 전수교육대학을

선정하는 기준을 실질적이고 효율적으로 마련하여 보유자나

전수교육조교 등의 교수요원 확보율, 무형문화유산 교육과정

의 운영방안, 기예능 관련 실습시설과 기자재의 확보 등을 다

각적으로 평가하여 선정하되, 선정 이후 매년 교육성과 보고서

를 받고 3년 내에 성과에 미달되면 탈락이나 교체 등을 엄격하

게 적용해야 할 것이다.

둘째, 무형문화재의 학점인증제를 적극 활용하여 2년

제 전수교육전문대학으로 제도화하길 제안한다. 무형문화재

교육을 학점으로 인정하고 2년제 전수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문화재청 산하 전통문화교육원의 문화재수리기능자 과정을

연계하거나 재편하는 방안이다. 교육원은 수리기능자 과정 7

종목과 현장위탁과정 7종목은 기초과정 1년과 심화과정 1년,

총2년에 연간 48시수로 실기 위주의 교육이 진행되고 있어 무

형문화재 전수교육 전문대학으로서 자격요건이 충분하다. 이

곳의 시설이나 설비를 구비하고 있으며, 국가무형문화재 이수

자나 시도무형문화재 보유자 및 문화재수리기술자 등이 교수

요원으로 참여하고, 교육과정이나 교수요목도 갖춰져 있다. 따

라서 현재 대학을 졸업한 일반인의 문화재수리기능자 과정에

더하여, 사라질 위기에 처한 긴급 국가무형문화재 등 전수교육

프로그램을 2년간 집중적으로 교육한다면 전문대학의 기능을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더불어 한국문화재재단에서는 1995년부터 전통

공예건축학교를 개설하여 침선, 자수, 매듭, 누비, 소목, 전통창

호, 각자, 장석, 입사, 옻칠, 나전칠기, 단청, 대목 등 15개 종목

을 32주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이 종목을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나 시도무형문화재 보유자 및 전수교육조교 등이 실기

교육을 하고 있어, 이것을 학점으로 인정하고 교육 수료 후 거

점대학이나 특성화대학 등에 연계하면 제도권 교육에서 전수

교육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중학생의 자유학기제를 통해 무형문화재와 연계

시키는 ‘미래 인재교육’을 제안한다. 올해부터 중학생들은 1학

기동안 자유학기제를 실시하는데, 무형문화재에 관심 있는 차

세대 인재를 발탁하고 그들이 유산원에서 무형문화유산을 직

접 체험하게 하거나, 특정 지역에 다수의 인재에게는 젊은 이

수자들이 찾아가는 서비스를 해주도록 하는 것이다. 기능이든

예능이든 어린 시절에 익히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기 때문이

다. 예컨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2012년부터 문화예술교육사

제도를 실시하여 초중등학교 방과 후 학습 등에 미술, 공예, 연

극, 사진, 애니메이션 등을 국가예산으로 학교 현장에서 가르

치도록 하고 있는데 이를 반면교사 삼을 만하다.

전승자의 체계적 관리와 전시 개선

국가무형문화재의 전승체제는 신법에서도 전수장학

생, 이수자, 전수교육조교, 보유자를 유지하게 되면, 이들을 국

가는 철저하게 관리하고 창조적 전승을 유도해야 한다. 국가

예산으로 전수장학금을 받는 학생들이 3~5년간 언제 어디서

명작명무전 2012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제97호 살풀이춤 명예보유자

이매방(좌)과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제97호 살풀이춤

전수교육조교인 김명자(우)

월간 문화재 16 17기획특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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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내용을 교육받는지 여부를 일지에 꼼꼼하게 기록하고 사

진으로도 남겨 분기별이나 연간 제출하고 문화재청은 이를 확

인하고 정리해야 한다. 이들이 전과정을 이수하면 이수자의 해

당 기예능 습득 여부를 문화재청의 주도하에 전문가 3인을 선

정하여 이수 여부를 심의하여야 한다. 이수하고 5년 이후 2인

의 이수자를 대상으로 전수교육조교를 선정할 때에도 전통 기

능의 전과정을 면밀하게 심의하고 관리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

이다.

우선, 전수장학생의 재료나 도구를 국가에서 마련해주

는 방안이다. 현재 도제식 교육환경에서는 보유자의 개인 공

방에서 교육받는 날에는 작업이 가능하지만, 공방에 가지 않

는 날에는 자기만의 도구와 재료가 없어서 집에서 스스로 연습

해볼 수 없다. 예전에 제자가 모든 것을 다 배우고 나서 자립할

때 스승이 제자에게 작업에 필요한 모든 도구를 내어줘 독립하

도록 해준 경험을 오늘에 되살리는 것이다. 전수장학생이 되었

을 때 ‘장학증’과 함께 ‘도구사용증’을 주고, 재료는 매년 제공

해주며 중간에 해지되면 도구를 회수하되, 기예능을 이수했을

때 ‘이수증’과 함께 ‘도구영구사용증’을 전달하는 세리머니를

거행해주는 것이다.

다음 자기 작업공간이 없는 이수자나 전수교육조교에

게 작업공간을 국가가 지원하는 ‘무형유산 레지던시’나 ‘미래

보유자 디딤돌 사업’을 제안한다. 차세대 미래 보유자들에게 1

년 혹은 2-3년간의 작업 계획서를 받은 후 국립무형문화유산

원이나 전통문화교육원 등의 작업공간을 일정 기간 지원하고

교육사업까지 지원하는 방안이다. 작업공간을 매일 8시간씩

개방하면서 전과정을 작업하고, 그곳을 방문하는 초중학생을

가르치며, 나머지 시간에는 자신의 작업을 하도록 지원하는 것

이다. 이때 재료와 도구 및 시설 운영비를 지원하고, 매년 연말

에 1년간 제작한 전승공예품으로 전시를 하게 도와주는 것이

다. 국가의 지원을 받아 1년간 전승자들이 작업한 작품 중 1~2

작품은 국가에 기증하도록 한다.

이수자를 중심으로 ‘전승자 워크숍’을 항례적으로 진

행하는 사업도 지속한다. 이수자들이 기예능과 함께 전수교육

조교나 보유자로 성장하기 위해 교육기법이나 전시기획 및 행

정적 능력을 증진시킬 프로그램을 강구해야 한다. 젊고 참신한

전승자들이 자신의 작업세계를 구축하고 전승교육에도 기여

하게 하며, 그들이 국가에 기증한 작품으로 아카이브를 구축하

면 보유자 위주로 기증받는 작품으로 아카이브를 구축하던 기

존 방향성도 새롭게 모색할 있을 것이다.

한편, 모든 전승자들의 전승공예품의 제작 출품 및 전

시를 의무화해야 한다. 재료와 도구 및 공방의 지원을 받은 전

승체계 내의 모든 전승자가 해당된다. 보유자들은 인간문화재

전에, 전수장학생부터 전수교육조교는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등에 매년 작품을 출품하도록 한다. 특히 후자의 경우 전승공

예품과 창작공예품으로 이원화하여 전자는 비경쟁으로, 후자

는 경쟁으로 평가를 받게 하는 등 다변화된 운영방안을 고안해

야 한다. 보유자보다 전수교육조교나 이수자 등 보다 젊고 활

동력 강한 신진들에게 문호를 개방 확대하고 그들을 활용한 전

시 방안을 강화해야 한다.

더욱이 전승자들이 자존감을 가지고 활동할 프로그램

을 늘리거나 ‘상박하후上薄下厚’ 지원체제로 확대되어야 한다.

비경쟁 부문의 출품은 전통 재료와 수공기술로 전통적인 공예

품을 제작하도록 하되, 경쟁 부문은 첨단 재료를 도입하거나

새로운 IT 기술과 접목하거나 현대 창작공예나 디자인과 협업

하는 등 전통과 현대를 아우른 다양한 통섭과 융합에 인센티브

를 주는 방안이다. 전승공예가 지금처럼 과거에 안주하는 복고

주의를 경계하고, 21세기의 새로운 문화 창조를 선도하도록 해

야 한다.

전승공예품의 활성화 방안

오늘날 무형문화재는 원형 보존보다 전승 활용에 방

점을 두고 있다. 이를 위해 이미 2014년에 문화재청은 조달청

과 MOU를 체결하였고, 전승공예품을 나라장터를 통해 국가

의 선물이나 상품으로 판매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온

라인 홍보를 위한 관리시스템을 구축하고 운영하도록 하고 있

다. 그러나 나라장터나 온라인 장터에서 전승공예품을 판매하

거나 홍보하는 사업은 보유자처럼 나이가 많고 소량의 고가 공

예품을 제작하는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어렵다. 따라

서 젊은 전승자들에 문호를 넓히고 창의적 도전이 가능하도록

‘씨앗 자금’을 지원하고, 고가의 첨단장비를 공동으로 사용하

게 하며, 포장이나 인증을 위한 법적 지원을 해주는 것이다.

신법에서는 무형문화재의 보급 선양과 국민들의 전통

문화예술 향유기회를 전담할 기구로 ‘한국무형문화재진흥센

터’를 신설하는데, 조직과 예산을 확충하여 무형유산 진흥정책

이 실질적으로 운영되고 실효성 있는 성과를 내도록 해야 한

다. 우선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를 비롯한 전승자가 제작한 전

승공예품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증대되는 추세이므로 그들이

제작한 ‘전승공예품 인증제’를 실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제작

자와 재료 그리고 전승 기술과 형태와 문양 등 제작과정을 QR

코드로 증명하여 명료하게 구축하고 소비자가 믿고 구입할 수

있도록 제도화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대장금 등으로 촉발

된 K-드라마를 통해 위상이 높아진 우리의 전승공예품을 체계

적으로 구입하여 해외 문화원 등에 대여하고 현지의 전시를 할

수 있도록 ‘전승공예품 은행제’ 또한 마찬가지이다.

또 차세대 미래 전승자들이 자생력을 확보하고 관광

자원화를 도모하는 것도 활성화의 하나의 방편이다. 이를 위

해 무형문화유산 전승자들의 창업을 지원하고, 그들의 작품을

브랜드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동안 문화재청은 보유자들에

게 매달 전승지원금을 지원하는 데 집중해왔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모든 것이 부족하고 가난한 시기에는 작은 지원

금이 필요했다. 하지만 2015년 현재 보유자나 전수자를 비롯

한 우리의 무형문화재 관련자들의 의식은 이전과 달라졌다. 작

은 돈보다는 국가는 차세대 미래 보유자들에게 어떤 보유자상

을 원하는지 큰 그림을 그려주어야 하고, 그들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가 브랜드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관심과 배려가

더 필요한 시점인 듯하다.

이와 더불어 전승공예품의 국제교류전에 적극 참여하

도록 지원하고, 전승공예품의 해외 판로개척 및 지원 또한 마

찬가지이다. 국가는 젊은 차세대 전승 인재들이 해외의 선진

흐름을 읽고 창작의 원동력이 될 수 있도록 소규모의 해외 기

술 연수를 정례화하고 장기 해외 연수 등도 시도하여 무형유산

이 창조산업으로 발전하고 활용되도록 지원해야 할 것이다.

살아있는 인간에 의해 전승되는 무형문화유산 또한 살

아있는 생명체여서 끊임없이 주위 환경이나 여건에 의해 변화

하고 발전되어 왔다. 50년 전 무형문화재를 조사할 당시 이미

전통시대의 재료나 도구 및 기술과 달라지고 현대식으로 변했

음에도, 그동안 문화재보호법은 마치 인디언보호법처럼 ‘원형

보호’라는 도그마에 갇혀 시대흐름을 외면하고 보유자나 전승

자들을 지정 당시의 원형에서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제 2016년 신법이 제정 반포되면서 기존의 원형

유지에서 벗어나 전통의 토대 위에 21세기 아이디어와 창작까

지도 모두 통섭하는 방향으로 무형문화유산가 보다 발전적으

로 전승되고 활성화되길 기대해본다.

명작명무전 2012

한국 무용의 살아있는

전설 김백봉(우)과

평안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 김백봉 부채춤

보유자 안병주(좌)

2015 무형문화재보유자

작품전

월간 문화재 18 19기획특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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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유산법이라고 약칭) 제정을 통해 무형문화유산 보호 제도의

발전을 위한 제도적 기반이 한층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

히 무형문화유산의 범위와 계승 방식은 유네스코 협약의 기준

에 근접한 수준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무형문화유산법은 10장 58개조로 편제되어 있다. 법률

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장 총칙에서는 목적, 정의, 기본원칙 등을 규정하

였다. 무형문화유산의 범위를 확대하기 위하여 문화재보호법

이 함께 개정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무형문화재’란 여러 세대

에 걸쳐 전승되어온 무형의 문화적 유산으로 (1) 전통적 공연·

예술 (2) 공예, 미술 등에 관한 전통기술 (3) 한의약, 농경·어

로 등에 관한 전통지식 (4) 구전 전통 및 표현 (5) 의식주 등

전통적 생활관습 (6) 민간신앙 등 사회적 의식儀式 (7) 전통적

놀이·축제 및 기예·무예 중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과거 중요무형문화재의 유형이 일본 문화재보호법의 영

향을 받은 것에서 탈피하고,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

에서 규정한 무형문화유산의 유형에 접근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무형문화유산법에서는 보유자, 보유단체, 전수교육조교,

이수자를 포괄하여 전승자로 정의하였고, 명예보유자, 인간문

화재, 전승공예품 등에 대해 정의하였다.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의 기본원칙은 민족정체성 함양, 전통문화의 계승·발전,

무형문화재 가치 구현과 향상으로 하였다(제3조).

1962년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은 무형문화유산을 포함한 문화

재 전반을 산업화와 개발 시대로부터 보호하는 데 일정한 기여

를 하였다. 그러나 유형문화재와 무형문화유산을 단일법 아래

규율함에 따라 무형문화유산의 보호 범위가 대단히 협소하고

원형 보호의 원칙에 따라 무형문화유산이 박제화되었다는 비

판도 있었다. 특히 집중보호주의에 따른 보호 범위의 한계, 보

유자에 대한 지원의 한계, 무형문화유산의 원형에 대한 다툼,

무형문화유산의 활용 미흡, 이수증 발급 남발 등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곤 하였다. 공예 분야의 경우 현대적 기술 발전에 따라

전승 단절의 위기에 처해 있거나 현대적 지식재산권과의 충돌

문제도 발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 무형문화유산 보호가 글로벌화됨에 따라 무형문화유

산의 보호는 전 지구적 책임으로 변하고 있다. 이와 같은 패러다임

의 전환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나라 문화재보호법도 세계적 수준으

로 발전하기를 요청받아왔다. 특히 2003년 10월 17일 유네스코 무

형문화유산보호협약Convention for the Safeguarding of the Intangible

Cultural Heritage이 체결되고 우리나라가 이 협약에 가입함에 따

라 무형문화유산 보호의 새로운 체계가 마련될 필요성이 대두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중국 역시 무형문화유산 보호법을 새

롭게 제정하고 자국의 무형문화유산을 대대적으로 지정하면

서 우리나라 무형문화유산 보호에 위기와 자극을 동시에 주고

있었다.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이하 무형문

제2장 무형문화재 정책의 수립 및 추진에서는 문화재

청장이 무형문화재의 보전 및 진흥에 관한 기본계획을 5년마

다 수립하고 그 시행계획을 매년 수립하도록 하였다(제7조 및

제8조). 또한 무형문화재의 보전 및 진흥에 관한 사항을 조사·

심의하기 위하여 문화재청에 무형문화재위원회를 두도록 하

였다(제9조).

제3장 국가무형문화재의 지정 등에서는 문화재청장이

무형문화재 중에서 중요한 것을 무형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제12조). 문

화재청장은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특히 소멸할 위험에 처한 무

형문화재를 긴급히 보전하기 위하여 긴급 국가무형문화재를

지정할 수 있다(제13조). 한편 지정 또는 인정에 대하여는 거짓

또는 부정한 방법에 대한 취소 제도와 가치 또는 능력 소멸에

대한 해제 제도를 별도로 두었다(제15조, 제16조, 제21조 등).

제4장 보유자 및 보유단체 등에서는 문화재청장이 국

가무형문화재의 전승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도록 하기 위

하여 해당 국가무형문화재의 보유자, 보유단체를 인정하도록

하였다(제17조). 보유단체는 비영리법인으로 하였는데, 보유단

체가 공정하고 민주적으로 투명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하기 위

한 규정으로 풀이된다. 명예보유자 인정 제도를 계속 두되 인

정 기준과 방법을 구체화하였다(제18조). 전수교육조교 제도

는 유지하되 인정 기준 및 절차는 대통령령에 위임하였다(제

가곡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1969년)

분류: 무형유산 / 전통연행 / 음악 / 민속음악

<가곡(歌曲), 국악 관현반주로 부르는 서정적 노래>로

201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가곡은

한국의 정체성을 담은 중요한 민속 음악이다.

2013년 소리와 가얏고 공연

한산모시짜기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1967년)

분류: 무형유산 / 공예기술 /

섬유공예 / 직물공예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 지역에서

만드는 한산모시는 201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한산모시짜기

보유자 방연옥

2016년 3월 28일부터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다. 이는 문화재 유형 중 무형문화유산만을 대상으로 하는 최초의 법률로서 문화재보호법 체계 전반에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1962년 제정한 문화재보호법에서 무형문화재의 유형을 세분화하였지만, 올해 독립 입법된 이상 무형문화유산의 특징에 어울리는 정책 수립과 집행이 가능해졌다는 점에서 기대가 크다.

글.

정상우

인하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19조). 전승자 등의 인정 해제 사유를 명확하게 하였다(제21

조). 문화재청장은 국가무형문화재의 보전 및 진흥을 위한 정

책 수립에 활용하기 위하여 국가무형문화재의 전수교육 및 전

승활동 등 전승의 실태와 그 밖의 사항 등에 관하여 5년마다

정기적으로 조사하여야 한다(제22조).

제5장 전수교육 및 공개에서는 국가무형문화재의 보전

및 진흥을 위하여 인정된 국가무형문화재의 보유자, 보유단체

가 전수교육을 실시하도록 하였다(제25조). 전수교육 이수증은

문화재청장이 발급하는 것으로 하였다(제26조). 또한 문화재청

장은 국가무형문화재의 전수교육을 받는 사람 중에서 국가무

형문화재의 보유자, 보유단체의 추천을 받아 전수장학생을 선

정하여 장학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하였다(제27조). 문화재청

장은 국가무형문화재의 전수교육을 실시하려는 대학 등으로부

터 신청을 받아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전수교육대학을 선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제30조). 이는 사회환경 변화로 인한 도제식

전수교육의 효용성 부족을 대학교육을 통해 보완하고자 한 것

이다.

제6장 시·도무형문화재에서는 시·도지사의 관할구역에

있는 무형문화재의 보전 및 진흥에 관한 사항을 심의하기 위하

여 시·도에 시·도무형문화재위원회를 두도록 하였다(제31조).

시·도지사는 그 관할구역 안에 있는 무형문화재로서 국가무형문

화재로 지정되지 아니한 것 중에서 보존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월간 문화재 20 21기획특집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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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시·도무형문화재로 지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제32조). 시·

도지사는 무형문화재에 관한 전문인력을 해당 지방자치단체에

배치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는 규정을 새롭게 두었다(제34조).

제7장 무형문화재의 진흥에서는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

는 전승공예품 원재료 구입, 전승자의 공연 또는 전시 등에 필

요한 시설 및 장비 지원, 전승자의 교육활동에 대한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제37조). 학교 및 사회의 문화예술 교육에 무

형문화재 교육이 포함되도록 노력 의무를 부과하고(제38조),

국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의 각종 행사 및 축제에 무형문

화재 전승자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제39조). 문화재청장

은 인증심사를 거쳐 전승공예품에 대하여 무형문화재 전승공

예품 인증을 할 수 있도록 하고(제41조), 전통기술의 전승 활성

화 및 전통공예의 우수성 홍보 등을 위하여 전승공예품 은행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하였다(제43조). 국가는 국제기구 및 다른

국가와의 협력을 통하여 전통공연·예술 분야 무형문화재의 해

외 공연 및 전승공예품의 해외 전시·판매 등 무형문화재의 국

제교류를 적극 추진하도록 하였다(제45조). 문화재청장은 무형

문화재의 진흥에 관한 사업과 활동을 효율적으로 지원하기 위

하여 한국문화재재단에 한국무형문화재진흥센터를 두도록 하

였다(제46조). 법률 제정안에는 별도의 진흥원으로 의도하였

으나 상임위원회에서 예산 등의 문제로 한국문화재재단에 센

터를 두는 방식으로 수정한 것이다.

제8장 유네스코 협약 이행에서는 개정 전 문화재보호

매사냥

대전광역시 시도무형문화재 제8호(2000년)

전라북도 시도무형문화재 제20호(2007년)

분류: 무형유산 / 전통연행 / 무예 / 맨손무예

2010년 한국, 아랍에미레이트, 벨기에, 체코 프랑스

등 11개국이 참여하여 <매사냥, 살아있는 인류

유산>으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공동 등재 후

2012년 2개국이 추가된 13개국이 참여하여 확대 공동

등재되었다.

매사냥 모습

사진: 한국사진사연구소(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

줄타기

중요무형문화재 제58호(1976년)

분류: 무형유산 / 전통연행 / 연희 / 광대굿놀이

주로 음력 4월 15일이나 단오날, 추석 등 명절날에

공연한 줄타기는 201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사진: 김경렬(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

강강술래

중요무형문화재 제8호(1966년)

분류: 무형유산 / 전통연행 / 놀이 / 세시놀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세기절기인 설,

대보름, 단오, 백중, 추석, 9월 중구 밤에

연행된 강강술래는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강강술래 전남진도군

사진: 이응준(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

법에서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의 ‘무형문화유

산의 보호를 위한 협약’ 이행을 장려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

의 무형문화유산 보호 활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문화재청 산하

에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무형문화유산 국제정보네트워킹

센터를 두도록 한 것을 이 법으로 옮겨왔다(제47조).

제9장 보칙에서는 문화재청장은 무형문화재에 관한 전

승 내역과 구성 요소 등을 디지털 자료로 구축하여 국제특허협

약에 따른 효력을 가진 홈페이지에 게재하는 등 국내외 특허로

부터 무형문화재를 보호하도록 하였다(제49조). 이는 무형문화

재가 국내외 특허로부터 그 가치를 침해받는 것을 예방하기 위

한 조치다. 그 밖에 청문, 관계 전문가 등의 조사, 권한의 위임

및 위탁에 관한 규정 등을 두었다.

무형문화유산법의 제정을 통해 무형문화유산의 보호

범위를 확대하고 보호 정책을 체계화한 것은 다행스럽고 환영

할 만한 일이다. 이 법률의 제정에 따라 무형문화유산의 보호

범위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 수준으로 확대되고,

우리나라 무형문화유산 보호 정책이 국제적 경쟁력을 가질 것

으로 기대된다. 아울러 무형문화유산 전승자가 확대되고 이들

에 대한 안정적 지원이 가능해 질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무형문

화유산의 국제 교류 확대에도 긍정적으로 기여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무형문화유산은 세계적 차원에서 문화 다

양성의 요소가 된다. 무형문화유산의 국제교류 확대는 유네스

코 무형문화유산보호협약의 기본적인 입장이기도 한다.

이 법률의 시행에 따라 세밀하게 보완되어야 할 점도

물론 남아 있다. 무엇보다 이 법의 효과가 실질적으로 발생할

수 있도록 기본계획과 실행계획, 무형문화재위원회 운영, 전수

대학 운영, 전승자 확대, 관련 예산 확보 등이 체계적으로 이루

어져야 한다. 전승자 확대는 무형문화유산의 가치 제고 이외에

도 전승자 인정 제도의 공정성과 객관성, 투명성 제고 및 전승

자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이 법률은 무형

문화유산의 생활문화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앞으로 무형문화

유산이 전통의 가치를 유지하면서도 생활문화를 통해 활용되

고 사회에서 자발적으로 전승되는 환경이 조성되도록 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전승공예품 제도나 전승공예품 은행이 제

대로 정착될 필요가 있다. 전수교육이 대학에서 이루어지게 되

었다는 점에서 대학교육의 질적 변화도 유도해내야 할 것이다.

정부는 전통공예품 인증·은행제, 전승자의 창업·제작·

유통 지원, 해외 전시·공연 등 국제교류 지원, 지식재산권의 적

극적 보호 등 무형문화재의 사회적 수요를 진작시킬 수 있는

각종 진흥 정책을 마련함으로써 무형문화재 전승자의 전승 의

욕을 고취시키고, 전통문화의 자생력을 높이는 한편 유네스

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Representative List of the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의 등재 확대를 통해 우리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세계 속에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이러한 발전을

통해 일반 국민들의 무형문화유산 향유 기회가 확대되고 자발

적인 무형문화유산 보호 노력이 확산되기를 기대한다.

월간 문화재 22 23기획특집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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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승수 중앙대학교 민속학과 교수

한 해 모든 일의 시작은 음력 1월 15일부터

옛날에는 달의 형태에 따라, 즉 태음력으로 날짜의 흐

름을 계산했기 때문에 음력 1월 15일을 1년의 시작으로 삼았

다. 그래서 태양력에 따라 양력 1월 1일 새해가 시작되고 난 후

에도 중요한 정월 행사는 음력 1월 15일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전통적인 세시풍속으로서 오늘날에도 비교적 널리 전해

지고 있는 명절로는 음력을 기준으로 정월의 설과 정월대보름,

이월의 한식, 오월의 단오 등이 있다. 이러한 명절은 대부분 보

름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절기와는 구분되는 것으로, 계절에

따라 의미 있는 날을 택하여 정한 것이다.

명절은 살고 있는 나라나 지역의 자연환경과 역사, 그

리고 그들이 이룩한 사회와 생업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

이다. 한반도를 생활터전으로 하는 한국은 오랫동안 독특한 문

화를 이루며 살아왔다. 그것은 일본, 중국과도 다른, 우리 민족

만의 문화를 발전시켜왔음을 말한다.

한편 가까이 있는 중국, 일본은 공히 한자문화권이자

유교 및 불교문화권에 속한다. 한국인의 사고방식이나 생활방

식 역시 주변국인 중국, 일본과 서로 교류하면서 많은 부분 닮

은 점이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면 고유의 전통문화에 많은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닮음과 다

름이 만들어내는 수만 가지 천태만상과 흥미로운 볼거리가 가

득한 한중일 세 나라의 신년 축제를 비교의 시점에서 들여다보

고자 한다. 그 까닭은 한 해의 모든 일을 음력 1월 15일을 전후

하여 펼쳐지는 신년 축제를 기점으로 시작해왔다는 오랜 역사

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문화적으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은 한국, 중국, 일본은 음력 1월 15일 무렵에 공통적으로 신년 축제를 연다. 비슷한 시기에 새해를 여는 모습이 서로

닮았으면서도 그 방식과 의미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점이 재미있다.

한국의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와 줄다리기

정월은 한 해를 처음 시작하는 달로, 한 해를 계획하고

일 년의 운을 미리 점치는 달이다. 그중에서 새해 들어 처음으

로 보름달을 보는 날, 곧 음력으로 1월 15일을 정월대보름이라

고 한다. 정월대보름은 한 해 농사의 풍년과 흉년, 좋고 나쁨을

알 수 있는 날이고, 한 해의 세시풍속 중 4분의 1이 정월대보름

에 집중되어 있을 만큼 중요한 명절이자 축제 기간이다.

한국에서는 만월의 날을 축하하는 보름날 중에서도 1

년의 첫 만월일을 대보름이라 부르고 이날을 음력 1월 15일로

정하여 대보름 행사를 펼친다. 이날은 액막이를 하고 일 년의

풍년을 기원하는 신성한 날이다.

정월대보름은 ‘상원上元’이라고도 한다. 대보름 전날인

14일에 오곡밥과 아홉 가지 나물 등을 먹고 15일 아침에는 잣, 호

두, 땅콩 등 딱딱한 견과류를 깨무는 부름 깨기를 한다. 이를 통

해 일 년 동안 부스럼이 없고 피부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정월대보름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달집태우기와 줄

다리기, 지신밟기, 놋다리밟기, 사자춤 등 다양한 축제를 벌였

는데, 이는 그해의 ‘무병장수’, ‘제액초복’, ‘풍년’ 등을 기원하

는 농경의례의 일종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정월대보름날 밤, 달집태우기를 위해 언

덕이나 산 위에 생솔가지나 나뭇가지 등을 쌓아 작은 달집을

만들어놓고 보름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린다. 달이 떠오르면 달

집에 불을 질러 태운다. 그러면 그해에는 가정의 안녕과 농작

물의 풍년 등이 보장된다고 믿었다. 대보름달은 풍요의 상징이

고 불은 모든 부정과 사악한 기운을 살라버리는 주술적 능력을

가지고 있어 정화·재활성화를 상징한다. 따라서 달집태우기에

는 대보름달이 떠오를 때 거대한 달집을 불태움으로써 마을에

깃든 모든 부정한 기운이 소멸되길 바라는 염원이 잘 나타나

있다. 이처럼 달집태우기는 새봄을 예축하는 역동적 의례로서

달과 맺어진 대표적 신년 축제이다.

줄다리기는 볏짚을 이용하여 암줄과 수줄을 만든 후에

두 줄을 연결하는 비녀장을 꽂아 마을 또는 읍면 단위로 양편

을 나누어 서로 당기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한 해의 풍년을 예

축하는 농경의례이다. 그래서 암줄이 승리해야 그해에 풍년이

든다고 믿어왔다. 이는 암줄, 즉 생산을 관장하는 여성의 다산

이 풍년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2 달집

국립민속박물관

소장품 번호 석남000385

3 달집

국립민속박물관

소장품 번호 석남000386

1 송천달집태우기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24호

사진: 김충군(문화유산 사진작가)

1

2 3

월간 문화재 24 25무형문화재 삼국지·예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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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을 붉게 물들이는 중국의 원소절(元宵節)

중국에서는 연초에 정월을 두 번 축하한다. 양력 1월 1

일인 신정과 음력 정월인 춘절春節을 쇤다. 전자는 1월 1일 하

루만 휴일로 정해놓고 간단하게 보내는 반면 후자에는 다양한

행사가 성대하게 펼쳐진다. 전국 각지에서 불꽃축제를 하고 폭

죽을 터트리며 축하한다.

우리나라의 정월대보름 풍습처럼 오래전부터 전해 내

려오는 세시풍속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원소절元宵節이다. 원元

은 시작이라는 뜻이고, 소宵는 밤夜이라는 뜻이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첫 번째 밤이라는 의미로, 대지에 봄이 되살아나는

날 밤이어서 사람들이 축하를 했다는 것이다. 원소절의 밤은

음력 새해 첫 달月의 달이 둥근 밤이다. 이날을 축하하는 대표

적 방식에는 연등을 만들어보며 즐기는 관등觀燈, 타등미打燈謎,

주교走橋, 원소元宵 등이 있다.

관등은 원래 궁궐과 사찰에 달게 하였는데 이후 민간

으로 내려와 큰 축제가 되었다. 민간에서는 처마 밑이나 거리

에 내거는 방식이 일반적이었으며 이 풍습을 등절燈節, 등석燈

夕이라고도 불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연등의 종류도 다양해

졌고 벽에 거는 경등, 벽에 거는 벽등, 봉황 모양의 봉등, 유리

등 등 호칭도 다양하다.

타등미는 등에 쓰인 수수깨끼를 푸는 것으로 정월대보

름에 진행하는 대표적 놀이인데 오늘날 대규모 축제로 변화하

고 있다.

원소절은 기본적으로 오락을 즐기는 명절이지만 종교

적 색채를 띤 활동도 있다. 예를 들어 원소절 밤에 휘황찬란한

연등을 관람하며 거니는데 이를 주교라 한다. 또한 주교의 변

형된 형태에 주백병走百病, 산백병散百病, 제백병除百病 등

이 있다. 여기서 주走, 산散, 제除는 소멸의 뜻으로 쓰이

며 백병을 없애려는 염원이 내포되어 있다. 이 밖에 역

동적인 퍼포먼스를 펼치는 용춤龍舞, 사자춤獅子舞 등으

로 봄이 왔음을 축하한다.

한편 소수민족인 이족彛族의 경우 정월대보름에

제화절祭火節이라는 축제를 개최한다. 불을 숭상하는 이

족의 문화를 잘 나타내는 제의적 성격의 축제이다. 축

제는 전날의 산신제, 당일의 화신火神에게 드리는 제사,

불을 얻는 과정의 재현, 새롭게 얻은 불로 마을의 액운

을 물리치는 과정의 순으로 이어진다. 불을 얻게 된 것

에 대한 기쁨을 춤과 노래로 표현하는 축제이다. 이는

한국의 정월대보름과 일본의 소정월 축제가 기본적으

로 제액초복의 의미를 지니는 점과 유사하다.

국민적 행사로서의 일본 소정월(小正月) 돈도야키

일본에서는 음력 1월 1일부터 7일까지를 대정월大正月

이라 하고, 15일을 전후로 한 3~4일을 소정월小正月이라 한다.

대정월을 남자의 도시토리年取り(나이를 먹는다는 뜻)라 하는

데 비해, 소정월은 여자의 도시토리年取り라고 한다. 태음력은

농경의 생산력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소정월의 행사는 농업

(특히 벼농사)과 관련된 내용이 많으며, 지역적인 특성을 가진

다. 소정월에는 농작물의 예축과 그와 관련된 행사, 농사에 피

해를 주는 새나 동물의 추방, 그해의 운수 보기, 내방신의 접

대, 불 축제, 액막이, 불교 행사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진다.

이러한 행사들도 지방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소정월에는 아이들과 관련된 행사가 매우 많았는

데, 최근에는 중지되거나 형태가 변한 것이 많다. 이처럼 다양

한 행사가 펼쳐지는 가운데 대표적인 축제는 역시 불을 소재로

한 돈도야키どんどき이다. 돈도야키 축제는 지역 주민이 청죽靑

竹, 짚, 회나무 가지 등으로 만든 움막 혹은 망루를 태우는 것을

말한다. 또 그 불을 이용하여 가도마쓰門松(새해에 문 앞에 세우

는 장식 소나무)나 금줄 등 대정월 때의 장식품 등을 태우면서

풍요의 신을 영접하여 대접하고 다시 돌려보내는 순으로 이어

진다. 축제 참가자는 타오르는 불을 화신火神으로 여기며 그해

‘농사의 풍년, 어업의 풍어, 상업번창, 가내안녕’ 등을 염원한다.

또한 그해의 ‘예축, 액막이, 자손번영’ 등을 염원하는 제의적 축

제로서 전국적으로 실시된다. 즉 돈도야키는 지금 현재 살고 있

는 사람들이 화신 또는 조상신을 정중하게 모시고 정성스레 준

비한 음식으로 대접하여 즐겁게 함으로써 한 해의 ‘풍년, 가내

안녕, 자손번창’ 등을 보장받기를 염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한중일 신년 축제의 유사성과 상이성

한국과 일본의 정월 행사는 중국의 춘절春節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정월 행사와 한·일의 정월 행사에는

상당 부분 유사성과 상이성이 존재한다.

중국에서는 음력 첫 달을 ‘원월元月’, 15일 대보름을 ‘원

소절’ 이라 부르고 봄의 도래를 경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원

소절에 탕원湯圓을 먹고, 집집마다 장식용 관등을 처마 밑이나

길거리에 걸어 즐기며, 용춤, 사자춤 등으로 봄이 왔음을 축하

하는 것은 한나라 때부터의 전통이라 한다. 최근에는 종이로

만든 열기구 천등天燈을 하늘 높이 올리며 즐기는 관광축제가

유행하고 있다.

한·중·일 세 나라가 같은 시기에 불을 소재로 한 축제

를 펼치고 협동이 필요한 놀이를 하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특

별한 음식을 만들어 나누며 함께 즐긴다는 점에서는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한·일 두 나라와 중국의 정월 대보름

행사를 비교해보면 전혀 별개의 신년 축제라 할 수 있을 정도

로 그 형식이 다르다. 근본적인 차이는 중국의 원소절에는 농

경의례로서의 불을 소재로 한 축제가 없다는 점이다. 또한 불

축제와 더불어 청죽靑竹이나 나무 기둥을 세우는 것도 없다. 게

다가 중국의 정월대보름 축제의 주된 내용은 도시생활형 오락

의 성격이 강하고, 한국·일본처럼 ‘풍년, 조상숭배, 자손번창’

과 같은 절실한 염원을 담은 제의적 축제로서의 성격이 나타나

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월대보름 신년 축제 가운데 중국에는 없는 것이 또

있다. 즉 농경의례로서 한국과 일본에는 ‘줄다리기’를 하는 곳

이 있다. 줄다리기는 마을 또는 지역 주민이 총출동하여 커다

란 줄을 만들고 당겨 그 승패 결과에 따라 한 해의 풍흉을 예측

하거나 지역 대항전을 펼쳐 이긴 쪽이 풍년이 든다고 믿는 풍

습이다.

예를 들어 일본 동북지방 아키타현秋田県에서 전승되는

‘가리와노 큰줄당기기刈和野の大綱引き’는 음양사상에 근거하여

마을을 둘로 나누고, 남성을 상징하는 수줄과 여성을 상징하는

암줄을 결합시켜 승패를 겨룬다. 수줄이 이기면 그해 농사가

풍년이 들고 암줄이 이기면 쌀값이 올라간다고 마을 주민들은

믿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줄다리기 축제는 정월대보름에 전국

각지에서 실시된다.

한편 한국에서도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가 끝나면 지역을

동서로 나누거나 남성, 여성 팀으로 나누어 줄다리기를 하는 풍속

이 있다. 서쪽 혹은 여성 팀이 이기면 한 해 농사의 풍년 또는 풍어가

보장된다고 믿으며, 무병장수한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경남 창녕의

‘영산줄다리기’, 전라도 광주 ‘고싸움놀이’ 등이 있다. 이러한 형식은

일본의 정월대보름 줄다리기 축제와 유사하고 그 종교적 의미를 공

유하는 농경의례라고 봐도 좋다.

이와 같이 정월대보름이라는 특별한 날, 특별한 시공간

에서 펼쳐지는 한중일 세 나라의 신년 축제는 서로 닮은 듯 다

르게 나타난다. 이는 세 나라가 상호 영향 관계 속에서 신년 축

제를 독자적으로 전승해온 역사적·문화적 맥락이 다르기 때문

이다.

4 중국 용춤과 폭죽 행사

5 가도마쓰

6 송천달집태우기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24호

사진: 김충군(문화유산 사진작가)

4

5 6

월간 문화재 26 27무형문화재 삼국지·예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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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의도

재단법인 한국문물연구원장

수저는 중국에서 가장 먼저 사용되었지만, 한·중·일 삼국이 식탁에서 수저를 사용하는 방법은 다르게 정착되었다. 수저 사용은 섭취하는 음식물의 변화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구체적으로 왜,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을까 하는 답을 얻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중국

중국에서는 한국이나 일본과 달리 젓가락을 ‘저箸’보다

는 ‘쾌자筷子’로 표현한다. 상아, 옥, 금, 은, 청동, 나무 등으로

제작하고 단면은 방형, 원형, 다각형 등으로 다양하다. <예기

>에 의하면 “함께 밥을 먹을 때 땀 난 손으로 먹지 않는다” 또

“기장밥을 젓가락으로 먹지 않는다” 라고 하여 밥을 먹을 때

는 손을 사용하였고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국에 나물이 있는 것은 젓가락을 쓰고 나물이 없는 것은

젓가락을 쓰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국에 건더기가 있을 때

젓가락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기록에는 상나라 주왕이 상아로 만든 젓가락을 사용하

였다고 하는데 젓가락은 처음에는 나무, 상주시대에는 청동,

한나라 때 대나무로 만들었다. 수·당대에는 청동이나 은젓가락

에 금도금을 하기도 하였으며 이후 명·청대까지 사용되었다.

화려한 장식은 한대에 나타나며, 명청시대에는 시나 그림을 새

겨 하나의 예술품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산동성과 산서성, 하남성과 하북성을 중심으로 국자나

숟가락이 출토된 유적에서는 신석기시대에 도제로 만든 국자

가 출토되다가 은대에 이르러 국자와 숟가락이 출토되기 시작

한다. 유물들은 주로 주거지와 분묘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이

러한 전통은 전국시대까지 이어진다. 전국시대에 이르면 도제

로 만든 국자가 출토되는 예도 있지만 주된 경향은 청동제 국

자와 숟가락을 무덤에 부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대에 이르면 이러한 전통은 일변하여 도제로 제작된

국자와 숟가락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칠기로 제작한 예도 있

고 청동으로 제작한 예도 가끔씩 출현한다. 낙랑에서 칠기로

제작한 국자와 숟가락이 출토된 예를 보아도 한대에는 칠기로

제작한 숟가락과 국자를 애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장사 마왕퇴 1호 한묘가 있다.

한나라를 지나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기까지 분묘에

서 출토되는 청동숟가락과 젓가락은 그 출토 예가 드물다. 도

제 숟가락 또는 국자의 부장 빈도가 획기적으로 증가하는 것으

로 보아 빠르면 5세기, 늦어도 6세기경에 좀 더 넓은 계층에서

숟가락을 개별적으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수당에 이르러 은제로 제작한 국자나 숟가락이

분묘에서 출토되고 젓가락도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이

러한 장례습속은 중국 북방의 거란과 여진의 요·금, 몽골의 원

나라를 거치면서 더욱 성행하여 숟가락의 사용은 중국 전 지역

으로 확대된다. 아울러 당대까지 말각장방형의 술에 자루 끝을

능형으로 마감하는 전통적인 형식에 머물렀지만, 요금대에는

숟가락의 자루가 길어지거나 자루 끝에 쌍어를 새기는 쌍어형

이 등장한다. 또한 숟가락이 식탁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으면서

장릉형이라는 새로운 형식이 탄생한다.

명은 남경을 중심으로 일어난 한족의 나라로 북방의

여진, 거란, 몽골 등과는 식음문화의 전통을 달리하고 있었다.

명대에 이르면 젓가락만으로 식사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러한 커다란 변화는 명 왕조의 성립, 특히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긴 것이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궁정과 문무백관과 함께 많

은 남방 사람이 북방으로 이주하면서 남송 때 북방 음식과 남

방 음식이 결합되어 성립된 음식문화가 다시 북쪽으로 옮겨가

남북이 새롭게 통합되는 중국요리가 탄생하였고, ‘쾌자’라는

새로운 이름의 젓가락만으로 밥을 먹는 풍습이 중국 전역으로

퍼진 것은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China

In China chopsticks are made of various materials such

as ivory, jade, gold, silver, bronze and wood in round, square

or multi-angled form. The ancient Chinese text Book of Rites

states that “When eating with others, one does not eat with a

sweaty hand” and “Millet rice is not eaten with chopsticks.”

From this we can tell that rice was eaten with the hands, and

chopsticks were not originally used. They were used, however,

when eating soup containing solid ingredients.

Historical records state that King Zhou of the ancient

Shang Dynasty used ivory chopsticks, but generally chopsticks

were made of wood at first, then bronze in the Shang and Zhou

dynasties, and bamboo in the Han Dynasty. Then in the Sui

and Tang dynasties silver chopsticks were gilded, a trend that

continued in the Ming and Qing dynasties. Some Han Dynasty

chopsticks were lavishly decorated while those of the Ming and

Qing periods were engraved with poems and pictures, which

turned them into works of art.

Spoon-type relics from the prehistoric period are

mostly pottery ladles, while spoons and ladles are found

together from the Yin Dynasty. In the tombs of the Warring

States period, pottery ladles were occasionally found, but the

main trend was the burial of bronze spoons and ladles together

in tombs. But relics from the Han Dynasty show a complete

change, as pottery ladles and spoons form the mainstream,

with occasional discoveries of lacquered or bronze examples.

In the Wie, Jin and Southern and Northern dynasties period

came a radical increase in the number of such pottery eating

utensils buried with the dead, indicating the widespread use

of spoons around the 5th and 6th centuries. Silver spoons or

ladles are found in tombs from the Sui and Tang dynasties,

and chopsticks are also found in significant numbers from

this time. The custom of burial with such items became more

strongly established through the Khitans in northern China

and the Liao and Jin dynasties founded by the Khitans and

Jurchens, and the Yuan Dynasty founded by the Mongols.

Indeed, this custom spread throughout China, indicating that

the spoon had become indispensable on the dining table. Then

in the Ming Dynasty, the habit of eating with chopsticks only

became the norm.

1 금잔과 금비

전국시대, BCE 5세기

동경국립박물관(중국국보전, 2000)

2 대나무젓가락

마왕퇴 한묘 출토

호남성박물관,

중국과학원고고학연구소(장사 마왕퇴 1호 한묘, 1973)

3 쌍어형 숟가락

요진국 공주부마 합장묘 출토

길이 28.0cm

내몽고문물고고연구소 소장

구주국립박물관(契丹, 2011)

1

2

3

월간 문화재 28 29무형문화재 삼국지·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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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

수저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이다.

무령왕릉에서는 수저 2벌이 왕과 왕

비의 관 앞에서 수습되었고, 또 하나

의 청동숟가락이 왕비의 두침 부근에

있던 청동광구발 내부에서 은장도자

와 함께 출토되었다. 이외에도 청동 숟가락은 논산 표정리유적

이나 청주 신봉동유적 등에서 발견되어 백제 귀족문화의 단면

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저습지유적에서 다양한 목기가 출토

되었으나 숟가락으로 단정 지을 만한 것은 없고 오히려 나무

주걱이나 국자 등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부산 고촌유적에서 출

토된 대나무로 제작된 한 쌍의 젓가락은 길이 28cm 내외로 제

사용으로 보인다. 그리고 왕흥사 목탑지 심초석 남쪽 모서리를

중심으로 다량의 사리 장엄구가 출토되었는데 이때 젓가락도

함께 나왔다.

통일신라시대 숟가락으로는 안압지에서 출토된 것

이 대표적인데 술잎의 끝이 뾰족하고 자루를 세장한 것

이 특징이다. 이 숟가락과 같은 형태가 일본 정창원에 소

장되어 있어 당시 일본과의 교류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

한 왕경유적의 가옥에서 청동숟가락이 출토되고 분황사

지에서는 숟가락 거푸집이 출토되었다. 이는 숟가락의 사

용 계층이 확대되고 숟가락의 형태와 제작 과정을 보여

주는 자료이다. 이외에도 부소산, 이천 설성산성, 호암산

성 우물지에서도 숟가락이 출토되어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

고 있다. 일본 정창원에 소장된 신라의 청동숟가락이 모두

2점을 1세트로 보관되고 있는데 아마도 음식을 떠오는 것과 입

으로 직접 넣는 역할을 따로 하였을 것으로 생각되고, 아울러

안압지에서는 한 점의 젓가락도 출토되지 않은 점과 정창원에

소장된 젓가락은 한 쌍뿐인 것도 이와 같은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면 요·금의 영향으로 수저

사용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다. 11세기경에는 분묘에서 숟가

락이 출토되기 시작하고, 12세기 왕의 무덤과 귀족들의 화장묘

에는 숟가락을 부장했다. 이러한 경향은 원의 지배를 받는 13

세기 후반에 더욱 확산되었고 16세기 말까지 지속된다.

11세기부터 16세기 말까지 약 500년간 숟가락은 통일

신라시대와는 다른 형태로 변화한다. 술은 유엽형에 자루는 술

목에서 휘어지면서 곡선을 이루고 끝은 호형으로 마감되는 것

(기본형), 기본형에서 자루의 끝이 둘로 나누어지는 것(쌍어

형), 자루 끝에 소형의 술이 부가되는 것(약시형), 자루 끝에 연

봉이 달린 것(연봉형), 술의 형태가 말각장방형에 자루가 술목

에서 세장하게 이어지는 것(장릉형) 등으로 분류된다.

고려시대 분묘에서는 젓가락도 출토되지만 대부분의

식탁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예

를 들면 단양 현곡리에서는 고려분묘 33기가 발굴조사되어 이

분묘의 주인공들은 남한강 상류지역에 토착하였던 지방세력

이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이 가운데 청동숟가락은 9점(9/33

으로 33%), 젓가락은 모두 청동제로 4벌(4/33이니 12%)이 출

토되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까지도 젓가락은 일반적으로 사

용되었다고 보기 어렵고 일부 집안에서 젓가락을 사용하는 정

도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출수된 태안

마도선에서 다수의 나무젓가락이 출토되고 고려가요 <동동>

에 분지나무로 깎은 젓가락이 언급되어 고려 사람들은 나무젓

가락을 많이 사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러나 청동젓가락이 청동숟가락과 같이 사용된 것이라면 그

렇게 많은 나무젓가락과 함께 나무숟가락도 한 점쯤 출수되어

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니겠는가. 또한 <고려도경>에 고려에서

는 국수가 비싸고 구하기 어려운 음식이라고 하였는데 조운선

의 선군들이 그 귀한 국수를 먹기 위해 젓가락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아닐까 한다.

숟가락과 젓가락의 변화는 당시 섭취하는 음식물의

변화와 관련지어 보아야 한다는 의견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

다. 원의 지배를 겪으면서 고려의 식탁에는 국이 빠질 수 없었

다. 이로 인해 숟가락의 사용은 더욱 증가하게 되었고, 이는 조

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

지만 조선시대 전기에는 기본형이나 쌍어형을 사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젓가락의 출토비는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10%대를 유지할 정도지만, 수저가 출토되지 않은 분묘의 경우

청동숟가락 형식 분류(참고도서 <한국 고대 숟가락 연구>)

술잎

유엽형

기본형

쌍어형

약시형

연봉형

술잎

말각장방형

장릉형

장릉보주형

4 대나무젓가락

기장 고촌유적 출토

5 숟가락 거푸집

분황사지 출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특별전 분황사 출토 유물, 2006)

6 청동수저

무녕왕릉 출토

7 수저

김해 구산동 963호 출토

경남고고학연구소(진주 무촌-고려·조선묘군, 2004)

4

5

6

월간 문화재 30 31무형문화재 삼국지·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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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포함한다면 젓가락의 출토비는 10%를 유지하기 어렵고 이

것이 조선시대 전기의 젓가락 사용 경향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후기에 들면 이상하게도 16세기까지 유행하던

여러 형식의 숟가락이 거의 한꺼번에 사라지고 지금 우리가 사용하

는 둥근 술에 일자형 자루가 술목에 부가되는 형식의 숟가락으로 정

착된다. 이러한 갑작스런 변화의 원인은 구체적인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추정하기 쉽지 않다. 그 배경은 <주자가례>에 의거한 상례가

일반화되면서 숟가락도 하나의 형식으로 통일되지 않았을까

추정해보지만 뚜렷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숟가락의

자루각이 10。도 이하로 떨어지면서 직선화된 것은 16세 말에

나타난 현상이며, 임진왜란을 계기로 전래된 새로운 농작물과

18세기 들어 많은 요리서들이 등장한 것은 숟가락의 변화와

더불어 같이 생각해보아야 할 점이다.

이 시기에 제작된 김홍도와 김득신의 풍속화에 젓가락

을 사용하는 장면이 남은 것은 젓가락의 사용도 아울러 증가하

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라고 하겠다.

Korea

The oldest spoon and chopsticks found in Korea is the

bronze set discovered in the Tomb of King Muryeong of the

Baekje Kingdom. Up till that time, various wooden utensils

had been discovered in low-lying wetland areas, but most

resembled soup ladles and none could be positively identified

as a spoon.

The major spoon relics from the Unified Silla period

are those consisting of a pointed bowl and thin handle found

at the Anapji pond site in Gyeongju. Spoons of similar shape

are preserved at the Shosoin treasure house in Nara, Japan,

ref lecting exchange between Korea and Japan at the time.

The discovery of bronze spoons at dwelling sites among the

archaeological remains of Gyeongju, the ancient capital of

Silla, indicates that the use of spoons had spread beyond the

upper class. Spoons have also been excavated from mountain

fortresses such as Buso-sanseong, Seolseong-sanseong in

Icheon, and the well site at Hoam-sanseong, indicating

their dispersion around the nation, though no chopsticks

were found with them. New developments came in the use

of the spoon during the Goryeo Dynasty (918-1392), under

the influence of the Liao and Jin dynasties of China. Tomb

excavations show that from the 11th century spoons were

buried with the dead, and that from the 12th century they

were placed in the tombs of royalty and also buried with

the cremated remains of the aristocracy. This trend grew

stronger in the latter half of the 13th century when Goryeo

was under the control of the Yuan Dynasty and continued till

the late 16th century. Over those years, the spoon changed in

shape from that of the Unified Silla period. Chopsticks were

occasionally discovered with the spoons. A large number

of wooden chopsticks were recovered from the Madoseon

shipwreck off the coast of Taean, and chopsticks made of

prickly ash wood are mentioned in the Goryeo song “Dong

Dong.” From these circumstances it can be surmised that

wooden chopsticks were widely used by the Goryeo people.

Scholars have continually argued that changes in

chopsticks must be studied in association with changes in

food. After Yuan control in the Goryeo Dynasty, soup became

a firmly established part of the typical Korean meal and

the use of spoons would have increased even further. Such

ways continued in the subsequent Joseon Dynasty, when no

noticeable change in the use of the spoon occurred. But the

varied types of spoons used from the latter half of Joseon

almost disappeared at once in the 16th century, leaving only

the kind of spoon that we still use today in the form of round

bowl attached to a straight handle. Little material remains

to shed light on this sudden change, which makes it hard

to draw any conclusions. The genre paintings of this time

by Kim Hong-do and Kim Deuk-sin which show the use of

chopsticks can be taken as evidence that the use of chopsticks

had increased with the use of spoons.

일본

선사시대에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음식을 뜨는 국자를

나무나 흙으로 구워 제작한 것이며, 본격적인 숟가락은 福本

70호분에서 출토된 청동숟가락일 것이다. 7세기 전반경으로

편년되는 이 고분에서는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거의

동일한 형태의 숟가락이 출토되었다.

8세기를 지나면서 정창원에는 음식과 관련된 보물이

다수 전해 내려온다. 용기류와 함께 많이 전래되는 것 중 하나

가 숟가락으로 이 숟가락 외에도 佐波理 숟가락 1개, 동숟가락

345개(훗날 조사에서 佐波理制로 판명)가 대표적이다. 또한

당에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금도금은제 숟가락과 젓가락이

한 벌 전하고 있다.

九州의 大宰府에서는 길이가 32cm에 달하고 끝에는

고리가 달린 청동젓가락이, 福岡市의 三宅廢寺에서는 신라

계의 청동숟가락 2점이 출토되었다. 佐賀縣 下中杖遺跡에서는 젓가락만 출토되었는데 시기는 9세기 전반경이며 길이는

26cm 정도이다. 또한 飛鳥板蓋宮이나 藤原京内에서는 노송

나무제 젓가락 한 쌍이 출토되었고, 平城京에서는 더욱 많은

노송나무제 젓가락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귀족을 중심으로 목

제 젓가락을 사용한 식사법이 보급된 듯하다. 그리고 동북지방

의 秋田城에서 생활용구와 함께 17.2~17.7cm 길이의 젓가락이

다수 출토되기도 하였다.

한편 天平 19년(747) 大安寺의 재산 목록인 <大安寺伽藍縁起并流記資財帳>에는 숟가락 31개가 젓가락 12세트와

함께 기록되어 있고, 養老 6년(722) 元正天皇으로부터 하사받

은 공양구 세트 기록에는 백동제 수저가 포함되어 있다. 天平

19년(747) <法隆寺伽藍縁起并流記資財帳>에도 대안사와 거

의 같은 시기에 元正天皇이 하사한 공양구 세트 중에 백동제

숟가락과 折箸가, 天平 5년(761)의 <法隆寺東院縁起資財帳>에는 은제 수저 세트가 한 벌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안사의

젓가락은 모두 공양구라고 명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나라 시

대의 각 사원에서 백동이나 은과 같은 금속제 수저가 공양구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식탁에서 숟가락이 탈락하고 일본적인 젓가락 문화가

확립되어간 시기는 9세기를 지나면서일 것이다. 9세기 초의 유

적인 秋田縣 五城目町 中谷地遺跡에서는 숟가락은 보이지

않고 젓가락만 채식용 그릇과 함께 출토되었다.

그리고 鎌倉時代에 성립된 것으로 보이는 <廚事類記>의 ‘調備部’를 보면 식사에는 은제와 목제 젓가락과 숟가락이

각각 한 벌로 제공되었는데 은제 젓가락은 식전에 밥을 바칠

때 사용되고 나무젓가락으로는 밥과 진미를, 은제 숟가락으로

는 국을 뜨고, 나무젓가락으로는 반찬 이것저것을 집는 데 사

용하여 재질로서 용도를 구분하는 귀족적인 수저의 사용이 나

타나 있다. 또한 1136년에 제작된 <類聚雜要抄> ‘尊者牛飼前’의 상차림에는 箸匙를 표기하고 있으나 젓가락을 먼저 쓰고

숟가락을 뒤로 하였다.

그러나 12세기 후반에 제작된 <信貴山緣起繪卷>에는

나그네의 방문에 어린아이가 한 손에 칠완을 들고 한손에는 젓

가락만 들고 서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고, 같은 시기에 제작된

<一遍上人繪傳>에는 걸식을 하는 자에게 젓가락이 필수라고

하였다. 當麻寺 曼茶羅堂 앞에는 걸인이 젓가락으로 밥을 먹

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일본에서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 습속이 12세기 후반에는 확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8

9

8 <단원풍속화첩> 주막

김홍도

국립중앙박물관

9 <단원풍속화첩> 점심

김홍도

국립중앙박물관

월간 문화재 32 33무형문화재 삼국지·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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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마치며

한국은 숟가락을 밥 먹는 내내 사용하지만 중국은 숟

가락을 국湯을 먹을 때만 사용하고 일본에서는 거의 젓가락만

사용하여 식사한다. 한식에서 숟가락이 식탁을 대표하는 도

구가 된 것은 국이 빠지지 않기 때문이고, 그러한 전통은 고려

말 이후 확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중국에서 쾌자를

이용하여 식사하는 전통은 명대 이후 확립된 것이며, 일본에

서 숟가락이 식탁에서 사라진 것은 12세기를 지나면서부터로

보인다.

결국 숟가락은 중국 상대 이후 제사에서 사용되던 도

구가 개인용으로 사용되게 되었고, 그것이 한국과 일본에 전파

되었으나 각국의 문화적 환경에 따라 식탁에서 수저의 사용은

다른 결과를 보이고 있다. 하나의 식도구가 각각 다른 문화 반

응을 보인 것으로, 이것은 동양 삼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보여

주는 또 다른 현상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10 숟가락

日本 福本 70호분 출토

岡山大學 龜田修一

11 日本 正倉院 南倉 收藏 佐波理匙 奈良國立博物館(正倉院展 圖錄, 2015)

12 日本 正倉院 南倉 收藏 金銀匙 金銀箸 奈良國立博物館(正倉院展 圖錄, 2015)

13 <類聚雜要抄>의 ‘尊者牛飼前’

向井由紀子橋本慶子(箸, 法政大學出版局,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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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Japan

The spoons excavated in Japan show no great differ-

ences to Korean spoons. Those from prehistoric times are

mostly wooden or pottery utensils used to ladle soup or other

foods. The earliest bronze spoons date to the first half of the

7th century made of bronze. They are of almost exactly the

same shape as the spoon found in the tomb of King Muryeong

of Baekje in Korea. Shosoin in Japan has many food related

relics from after the 8th century, and one of the most common

items handed down with food vessels is the spoon. Along

with hundreds of bronze spoons in the collection is a pair of

chopsticks and spoon made of silver plated with gold, known

to be a product of the Tang Dynasty of China.

It was after the 9th century that the spoon started to

disappear from the table and the Japanese began to establish

dining customs based on chopsticks. In archaeological remains

of the 9th century, spoons are not found while chopsticks are

found with dishes largely designed for vegetable-based foods.

Also, according to records from the Kamakura period a pair of

silver chopsticks and spoon was provided along with a wooden

set with meals. The silver chopsticks were used for serving out

rice, while the wooden chopsticks were used to eat the rice and

side dishes and the silver spoon to put soup into a bowl. That

is, utensils of different materials were used according to the

food eaten, pointing to aristocratic dining practices.

A catalogue dating to the latter half of the 12th century

contains a painting featuring a child carrying a bowl in one

hand and a pair of chopsticks in the other. Another record

states that a pair of chopsticks is a necessary items for a person

who begs for his food. These materials suggest that the custom

of eating meals with chopsticks alone was established in Japan

around this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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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clusion

While the spoon is used throughout the whole meal in

Korea, in China it is used only when eating soup and in Japan

chopsticks are mainly used throughout the meal. The spoon

came to be the main eating utensil of Korean cuisine because

soup is always part of the meal, a tradition established in the

late Goryeo Dynasty. The current Chinese custom of eating

with chopsticks only appeared in the Ming Dynasty, and in

Japan the spoon all but disappeared from the table after the

12th century.

Therefore, the spoon, a utensil used in rites from the

ancient Shang Dynasty in China, developed into a personal

dining utensil and then spread to Korea and Japan, where it

came to be used in different ways according to the cultural

environment of each country. The different cultural responses

to the same item can be seen as the manifestation of the

cultural identity of each of the three countries.

월간 문화재 34 35무형문화재 삼국지·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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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편집팀

제주도는 중앙에 위치한 해발 1950m 한라산을 중심으로 완만하게 경사진 타원형의 화산섬이다. 2007년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이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되었고, 그에 앞서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선정되는 등 보호해야 할 자연유산이 가득한 곳이다.

일출봉 여명

이미지 출처: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한라산연구원

월간 문화재 36 37사진으로 보는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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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주 중문·대포해안 주상절리대

제주 중문과 대포동 해안에 분포하며 현무암에 발달하는

절리의 생성 원인과 발달 과정, 해식 모양을 관찰할

수 있다. 학술가치는 물론, 경관이 수려한 곳이다.

천연기념물 제443호

이미지 출처: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한라산연구원

2 제주마와 일출봉

제주도에서 말을 기른 것은 몽고마 160필을 들여온

고려 충렬왕 2년(1276년)으로 알려져 있다. 조랑말로도

불리며 제주도 농경문화에 크게 기여했으나, 그 수가

급격히 감소해 보호 중이다. 천연기념물 제347호

이미지 출처: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한라산연구원

3 제주도 용두암

제주도 서쪽에 위치한 용연과 그 주변 해안가에 있는

용암이다. 용의 모습처럼 보이는 해안절벽과 파도가

어우러진 절경을 만날 수 있다. 사진가 김중만이

‘뱃사람의 메아리’라는 주제로 아름다운 장면을 카메라에

담은 곳이기도 하다. 천연기념물 제526호

사진: 김중만(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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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문화재 38 39사진으로 보는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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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의 경계에서 출산과 탄생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출산은 산모와 영아가

생사의 갈림에 놓인 위급한 상황으로 인식되었다. 삼신은 산모

의 안전한 출산과 영아의 건강을 지켜주는 신으로 신앙의 대

상이 되어왔다. 삼신상은 아이를 낳을 때 산모와 영아의 안전

을 위해 차리는데 밥과 미역국을 꼭 올렸다. 오늘날 생일에 미

역국을 먹는 것도 삼신 신앙과 관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삼신과 미역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도 민속학적으로 명쾌한

해석을 못 하고 있다. 미역은 산모의 피를 맑게 하여 건강 회복

에 도움이 된다는 과학적 지식을 일반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어촌은 물론 산촌이나 농촌에서도 출산과 관련된 어떤 신앙에

의해 미역이 제물로 사용되었는지 계속 의문이 남는다.

아이가 태어나서 7일째인 첫이레에는 배내옷을 입힌

다. 배내옷은 시어머니가 준비한 아기의 옷으로 입힌다기보다

는 영아를 감싸준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배내옷은 깃이나 섶

이 없고 단추를 달지 않는다.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며 아이의

성별에 따른 형태의 차이가 거의 없다. 배내옷은 아기의 수명

이 길고 장수하라는 뜻으로 긴 무명실을 꼬아 옷고름을 단다.

첫이레에 할아버지와 첫 대면을 하기도 하며, 매 이레마다 수

수떡이나 백설기를 만들어 삼신께 올리기도 한다. 3주째인 세

이레에는 금줄을 걷고 산실을 개방하며 산모도 일상으로 돌아

온다. 이후 사당에 아이가 태어났음을 고하고, 이웃들은 산모와

영아의 건강을 축하해준다. 해산한 집은 이웃들에게 수수떡과

백설기를 돌린다. 첫이레에서 세이레까지는 영아의 건강을 위

해 영혼을 안착시키는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출산이라는 불안

한 상태에서 벗어나 안정되기를 기원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백일은 영아가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위태로운 고비를

넘긴 것으로 여겨 친척과 이웃과 함께 축하하는 잔치를 한다.

백일에는 새로 옷을 만들어 입히며 섶과 긴 옷고름을 단다. 백

일 즈음부터 영아의 배냇머리를 자르는데 정수리 부위의 머리

카락 일부를 남겨놓고 깎는다. 고모가 머리를 깎으면 명이 길

다고 하며 산에 가서 소나무에 자른 머리카락을 걸어두거나 산

에 묻기도 한다. 백일에는 아이에게 처음으로 밥알을 먹이기도

하는데 쌀의 영력이 아이의 영혼을 강화시킨다는 주술적 의미

1 돌상 앞의 아이

국립민속박물관

2 원반

돌잔치상

국립중앙박물관

3 <평생도> 돌잔치

조선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3

2

누구나 돌 사진이 있다. 부모가 돌잔치를 하고 사진을 찍어 아이에게 남겨주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그만큼 첫 생일은 가족이 행복하고 단란했던 소중한 기억이다. 돌은 한자어로 초도일初度日, 수일晬日, 주년周年이라고도 한다.

돌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아이가 태어나서 7일째인 첫이레를 시작으로 두이레, 세이레와 백일을 거쳐 돌에 이르기까지 치르는 모든 의례적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돌잔치의 새로운 풍속은 현대사회의

가족관, 생명관, 직업관의 변화를 보여주므로 전통사회와의 비교를 통해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글.

임장혁 중앙대학교 민속학과 교수

1

월간 문화재 40 41민속의 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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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키를 쓰고 화살을 쏘면 살풀이 즉 액을 풀어준다고 하는데

수수떡 역시 살풀이의 의미를 지닌다. 돌떡은 함께 나누어 먹

는 의미도 있지만 액을 막고 아이가 무사히 성장하기를 기원한

다는 의미가 크다. 떡을 이웃과 나누어 먹으며, 음식을 받은 집

에서는 접시를 씻지 않은 채로 실이나 돈, 또는 콩, 조, 팥 등의

곡물을 담아 답례로 보낸다. 실은 아이가 장수하라는 의미가

있으며, 곡물은 이듬해에 파종하면 잘 자란다고 한다.

영아가 베는 베갯속에는 조나 녹두를 넣어 사용한다.

베갯속에 넣었던 조는 돌에 떡을 해먹으면 좋다고 한다. 베갯

속의 녹두는 숙주나물로 키우는데 잘 자라면 아이가 크게 된다

고 하여 정성스럽게 키우기도 한다. 이러한 것에서 곡물에 잠

재한 영력이 아이의 성장에도 관련된 것으로 여기는 농경민족

의 곡령사상을 엿볼 수 있다.

아이의 미래를 알아보는 돌잡이 풍속

돌잔치에서 가족이나 이웃의 관심사는 아이의 미래를

점치는 돌잡이이다. 돌잡이는 돌상에 떡과 과일, 돈 등을 놓고

마음대로 골라잡게 하여 아이의 미래를 알아보는 것이다. 남자

아이는 활, 붓, 종이, 연필 등 문관과 무관을 상징하는 물건을,

여자아이는 가위, 자, 종이 등을 돌상에 놓는다. 성별 구별 없

이 돈이나 실, 쌀 등도 돌상에 올린다. 남자아이가 활을 잡으면

훌륭한 장수가 될 것이며 필기 도구를 잡으면 문인으로서 명성

을 날릴 것을 기대한다. 여자아이가 바느질 도구를 잡으면 여

성의 덕목인 바느질 솜씨가 좋을 것을 기대한다. 쌀이나 떡 같

은 음식을 집으면 식복이 있을 것으로 여기며 돈이나 쌀을 집으

면 부귀하게 살 것으로 믿는다. 전통사회에서 남자는 성장하여

문관이나 무관으로 관직에 등용되기를, 여자는 여성의 덕목을

갖춘 현모양처로 살기를 바라던 부모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현대 가정에서 돌잔치의 사회적 의미

대가족으로 생활하던 농경사회와 달리 현대인은 고향

을 떠나 도시에서 직장을 얻고 결혼하여 정착하고 있다. 핵가

족으로 생활하는 대다수 도시인은 자녀의 돌잔치를 이웃사람

들보다는 친구 그리고 직장동료와 함께 치르기 마련이다. 한

보고서에 의하면 현대인의 돌잔치는 뷔페식당이나 호텔 연회

장에서 하는 경우가 80%를 차지하며 집에서 하는 경우는 8%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돌잔치 장소가 가정에서 레스토랑이나 전문 연회장으

로 바뀌면서 돌잔치나 어린이 생일잔치를 대행하여 주관하는

가 있다.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지만 별칭인 아명을 지어준다. 아

명은 돌쇠, 개똥이, 바위, 길동이 등과 같은 흔하거나 보잘것없

는 호칭으로 부르는데, 악령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여 수명이

길 것을 염원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귀한 이름을 부르면 악령이

시샘하여 목숨을 잃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아명을

사용하는 것은 세계 어느 민족에서도 흔히 있는 주술적인 방법

이라 할 수 있다. 갓 태어난 아이와 관련된 금기나 의례는 의학

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기에 불안정한 영아가 인간으로서 무사

히 성장하기를 바라는 기원이 잘 나타나 있다.

영아에서 아이로 첫 인정받는 돌잔치

젖먹이 영아에서 성장한 아이는 첫 생일잔치를 하면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다. <조선왕조실록>의 영조 12년(1736

년)에 ‘돌이 지났으니 기쁜 마음이 갑절이나 간절하며, 시기로

일찍이 책봉하는 것이 적합하다’는 기록이 있다. 궁중에서 왕

손이 태어나 돌이 지나면 세자로 책봉될 수 있는 자격을 얻었

다. 돌이 지나면서 무사히 성장할 수 있으리라는 안심과 기대

가 있었고, 따라서 궁중에서 세자로 책봉되어 인정을 받았다.

돌날은 삼신상을 차리는 지방도 있지만 아이의 생일을 축하해

주는 의례를 중심으로 지낸다.

아이가 돌에 입는 옷차림을 ‘돌빔’이라 하는데 성별에

따라 차이가 있다. 남자아이는 저고리와 바지에 조끼·마고자·

두루마기를 입고 그 위에 전복戰服을 입는다. 머리에는 호건을

씌우고 타래버선을 신긴다. 가슴에는 돌띠를 두르고 돌 주머니

를 찬다. 여자아이는 색동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힌다. 머리에

는 조바위나 굴레를 쓰고 발에 타래버선을 신긴다. 가슴에는

돌띠를 매주고 돌 주머니를 채워준다. 돌띠는 장수를 의미하

는 붉은 실띠가 많고, 돌 주머니에는 은으로 만든 도끼, 장도,

나비, 물고기 등의 모양을 한 장식물을 달아주기도 한다. 이러

한 장식물은 액을 막고 건강하며 장수와 다복을 상징하는 것들

이다. 성별에 따른 옷차림의 차이에는 남자답게 또는 여자답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염원이 담겨 있다.

돌잔치에 떡은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다. 돌떡으로는

송편, 수수팥떡, 백설기, 인절미, 무지개떡 등을 준비한다. 떡

은 홀수로 세 종류 또는 다섯 종류를 마련한다. 백설기는 백 사

람과 나누어 먹으면 아이에게 좋다고 하며, 수수떡은 콩고물을

묻히지 않고 홀수로 강에 띄우면 액운이 없어진다고 한다. 황

해도에서는 메밀로 떡을 만들어 화살 끝에 끼우고 아이 엄마

이벤트 업체도 등장하였다. 이벤트 업체는 아이가 입을 돌옷뿐

만 아니라 부모가 입을 한복이나 드레스 등을 대여해주고 연회

장을 돌잔치 이벤트 장소로 화려하게 꾸며준다. 돌잔치는 돌을

맞이한 아이뿐만 아니라 부모와 함께 공동으로 주인공이 되어

축하를 받는 자리로 진화하였다. 요즘 돌잔치는 전문 사회자가

등장하여 재치로 흥을 돋우고 참석자와의 유대를 강화하는 장

이 되고 있다. 돌잔치의 이벤트는 식사와 돌잡이, 비디오 촬영,

축하 메시지와 선물 증정, 참석자에 대한 답례, 특별 이벤트

등으로 진행된다. 전통적인 돌잔치와 비교하면 돌잡이가 현대

에도 지속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돌잔치에서 부모는 친지와 직장동료로부터 선물과 메시

지를 받으면 이에 대한 답례품으로 떡을 비롯하여 컵, 비누, 수건

등 실용적인 물품을 제공하기도 한다. 돌잔치라는 이벤트를 통해

부모는 친지를 비롯한 직장동료들과의 교류와 유대를 강화하고

있다. 전통사회의 돌이 친지와 이웃으로부터 아이의 건강과 다복

을 축복받던 의례였다면, 현대의 돌잔치는 아이의 축복과 더불어

부모의 사회적 유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직업관이 반영된 현대의 돌잡이

예나 지금이나 돌잔치에서 가장 큰 관심사는 돌잡이를 통

해 아이가 장래에 어떠한 직업을 갖고 살아갈 것인지를 점쳐보는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입신양명하는 길은 무관이나 문관으로 등용

되어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현대사

회는 다양한 직종에 진출하여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열린 사회이다.

오늘날의 돌잡이 상에는 청진기, 마이크, 봉 등의 장난감을

놓고 아이의 미래를 점쳐보기도 한다. 이러한 장난감은 현대사회에

서 선망의 대상인 의사, 방송인, 판사 등과 같은 직업을 상징하는 물

건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부모는 모두가 선망하는 직종에 아이

가 진출하여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다.

현대 가정은 핵가족 중심이며 자녀 한두 명으로 만족

하는 사회이기에 자식에 대한 사랑과 기대가 크기 마련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도시에 살고 있으며, 농촌에 거주한다 하더라

도 도시민과 거의 동일한 핵가족으로 생활하고 있다. 또한 대

다수 도시민은 자신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고 자녀의 교육을 위

해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여 생활하고 있다. 그러기에 현대인

은 자녀의 미래 직업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크다. 그런 연유로

돌날의 풍속은 변하였지만 돌잡이 전통이 오늘날에도 전승되

고 있는 것이다.

4 굴레

조선 19세기 말, 비단에 자수

국립중앙박물관

돌을 맞은 어린아이가 쓰는 모자로 4~5살까지

여자아이가 사용함

5 돌띠

조선 19세기 말, 비단에 자수

국립중앙박물관

허리에 두르는 띠로서 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한 바퀴 둘러 맬 수 있도록 길게 제작함

6 돌잔치풍속화

국립민속박물관

소장품 번호 민속029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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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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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문화재 42 43민속의 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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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낙선재 봄전경과 누마루 아래의 빙렬문양

사진: 서헌강

3 숙신옹주 가옥 상속문서

국립중앙박물관

4 폭풍 속의 덕혜옹주

그림: 이소영(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

3

4

왕의 서녀이자 후궁의 딸, 옹주

옹주는 공주와 마찬가지로 국왕의 딸이다. 다만 어머

니가 왕비가 아닌 후궁이다. <경국대전>에는 왕의 정실이 낳

은 딸을 공주라 하고, 측실이 낳은 딸을 옹주라 하여 구별하였

지만, 공주와 함께 품계를 초월한 외명부의 최상위에 올려놓았

다. 그리고 공주와 마찬가지로 궁중에서 자란 뒤 양반가로 시

집을 가기 때문에 외명부에 속했다. 옹주라는 명칭은 고려 충

선왕 때부터 사용되었으며, 왕의 후궁을 칭하기도 했다. 공양

왕 때는 중국의 옛 제도를 참작해 왕의 딸을 궁주라 하고, 왕자

의 정실부인, 왕의 동성자매·질녀, 종친들의 정실부인, 왕녀까

지도 옹주라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해 대군의 부인, 왕

의 후궁, 왕의 서녀, 개국공신의 어머니와 처, 왕세자빈의 어머

니, 종친의 딸 등을 옹주라 칭하였으나, 세종대 이후 왕의 서녀

만 옹주라 칭했다.

옹주의 혼례와 상례

옹주는 공주와 마찬가지로 대체로 부마와 동갑이거나

한두 살 차이가 났다. 부마를 맞이하는 의식도 공주의 혼인 의

식과 비슷하였다. 한 예로 영조의 딸인 화순옹주 부마 간택 과

정을 보면 1732년(영조 8년) 8월 초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각 지방으로부터 부마 간택단자를 받도록 했다. 8월 28일 초간

택 때 총 84명이 참가했는데 이를 9월 4일 재간택에서 11명으

로, 9월 11일 삼간택에서 최종 3명으로 추렸다. 삼간택을 마친

당일 영조는 화순옹주 부마를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으로 정했

다는 비망기를 내렸다. 이어 본격적으로 가례 준비가 시작되었

다. 가례청을 설치하고 가례일인 친영은 가장 길한 11월 29일로

정하고, 나머지 납채-납폐-명복내출 등은 친영일 전에 길일을

택해 정하도록 했다. 가례청 배설 이후 가례를 마치기까지 두

달 반 정도 걸렸다.

한편 옹주가 죽으면 국가에서는 왕녀의 상례 장례제도

에 의거해 공주보다 하등의 예로 장례를 지냈다. 또한 2~3일간

조회를 중단하고 왕 이하 고기반찬을 피하고 애도를 표하였다.

옹주의 생활

옹주는 공주보다 한 등급 낮은 대우를 받았는데, 후궁

인 어머니의 신분이 왕비와 차이가 나다 보니 여러 가지 면에

서 차별이 있었다. 어머니 신분이 양반 출신인지 천인 출신 궁

녀였는지에 따라서도 대우가 달랐다. 그러나 왕의 딸로서 존귀

한 지위를 가지고 사회적·경제적으로 많은 혜택과 특권을 누

렸으며, 공주와 마찬가지로 내명부·외명부 등과 함께 여러 궁

500년 동안 조선 왕실에는 67명의 옹주가 살았다. 연산군과 광해군의 딸까지 포함하면 73명이 되고, 여기에 일찍 죽은 아이들까지 포함하면 실제 옹주 수는 더 늘어난다.

궁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혼례 후 양반가의 아내와 며느리로 살아간 옹주들은 많은 권세를 누리는 한편 정쟁에 휘말려 불운한 삶을 살기도 했다.

글.

한희숙 숙명여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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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문화재 44 45궁중여인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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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옹주와 남편

왕 옹주

태조 의령옹주(이등), 숙신옹주(홍해)

정종 함양옹주(박갱), 숙신옹주(김세민), 덕천옹주(변상복), 고성옹주(김한),

상원옹주(조효산), 전산옹주(이희종), 인천옹주(이관식), 함안옹주(이항신)

태종 정혜옹주(박종우), 정신옹주(윤계동), 정정옹주(조준), 숙정옹주(정효전),

소신옹주(변효순), 숙혜옹주(이정녕), 숙녕옹주(윤우일), 소숙옹주(윤사명),

숙경옹주(윤암), 경신옹주(이완), 숙안옹주(황유), 숙근옹주(권공), 숙순옹주(윤평)

세종 정현옹주(윤사로), 정안옹주(심안의)

문종 경숙옹주(강자순)

단종

세조

덕종

예종

성종 혜숙옹주(신항), 휘숙옹주(임숭재), 공신옹주(한경침), 경순옹주(남치원),

경숙옹주(민자방), 정순옹주(정원준), 숙혜옹주(조무강), 경휘옹주(윤정),

휘정옹주(남섭원), 정혜옹주(한기), 정숙옹주(윤섭)

연산군 이영수, 이함금, 이복합, 이정수, 옹주 이씨

중종 혜순옹주(김인경), 혜정옹주(홍려), 정순옹주(송인), 효정옹주(조의정),

숙정옹주(구한), 정신옹주(한경우)

인종

명종

선조 정신옹주(서경주), 정혜옹주(윤신지), 정숙옹주(신익성), 정인옹주(홍우경),

정안옹주(박미), 정휘옹주(유정량), 정선옹주(권대임), 정정옹주(유적),

정근옹주(김극빈), 정화옹주(권대항)

광해군 숙의 윤씨 소생(박징원)

인조 효명옹주(김세룡)

효종 숙녕옹주(박필성)

현종

숙종

경종

영조 화순옹주(김한신), 화평옹주(박명원), 화협옹주(신광수), 화완옹주(정치달),

화유옹주(황인점), 화령옹주(심능건), 화길옹주(구민화)

장조 청근옹주

정조 숙선옹주(홍현주)

순조 영온옹주

헌종

철종 영혜옹주(박영효)

고종 덕혜옹주(소 다케유키)

순종

경순옹주 묘지편

국립중앙박물관

낙선재 내부

사진: 서헌강

중 행사에 참석하는 등 왕실 가족으로서의 권리를 가졌다.

옹주 역시 결혼을 하면 양반가의 며느리, 처가 되어 사

가에서 생활하였다. 아들을 낳아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하고, 아

들을 과거에 급제시켜 가문의 영광을 높여야 했으며, 첩 때문

에 마음고생도 했다. 남편이 일찍 죽어 젊은 나이에 자식도 없

이 평생 수절하기도 했다. 또한 왕실의 정치적 사건에 큰 영향

을 받았으며, 남편 집안의 정치적 입지가 그들의 행복과 불행

을 결정짓기도 했다.

어머니 죄에 연좌된 불행한 옹주들

옹주도 친정의 정치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성종의 딸

공신옹주는 귀인 엄씨의 소생으로, 14세에 한명회의 손자인 한

경침과 혼인하였으나 18세에 과부가 되어 슬하에 자식 없이

수절하였다. 이복오빠인 연산군이 생모 폐비 윤씨 사사의 배후

로 귀인 엄씨를 지목하여 죽일 때 이에 연좌돼 폐서인이 되어

아산으로 귀양 갔다. 옹주는 남편의 신위를 유배지에 가져가서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지내고 무엇이든 신위에 먼저 올린 뒤에

먹었다. 중종반정 이후 사면되었는데,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중종은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곡식을 내려주고, 옹주의 절행을

<삼강행실속록>에 싣도록 하였다.

정혜옹주는 어머니 귀인 정씨가 폐비 윤씨 사사사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여 연산군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하

고, 오빠 안양군이 제천에, 봉안군이 이천으로 유배 갈 때 폐서

인되어 배천으로 유배를 갔다. 이후 중종이 즉위하면서 작위가

회복되었으나, 이듬해 어린 나이로 죽었다.

중종의 딸인 혜순옹주는 1527년(중종 22년)에 어머

니 경빈 박씨가 김안로와 그 아들 김희 등이 조작한 ‘작서灼鼠

의 변’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오빠 복성군과 함께 죽임을 당하

자 서인으로 폐출되어 경상도 상주로 유배되고, 남편인 김인겸

도 같은 사건에 연좌되어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신원되어

1541년(중종 36년) 남편과 함께 직첩을 돌려받았다. 동생 혜정

옹주도 이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남편 홍여는 동궁을 모함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추국 중에 매를 맞아 죽었다. 혜정옹주는 작

호를 박탈당하고 폐서인이 되었다가 이후 김안로가 축출되면

서 억울함이 밝혀져 도성 안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인조의 딸 효명옹주는 1651년(효종 2년)에 시아버지 김

자점이 역모사건의 주범으로 처형되고 일가가 적몰되자, 어머

니 귀인 조씨의 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악독한 일을 저지른

것이 탄로 나서 폐서인되어 진도에 유배되었다. 후에 효종의

특명으로 풀려났으나 복호되지는 못하였다.

조선 왕실 유일의 열녀, 영조의 딸 화순옹주

화순옹주는 영조가 딸 7명 중 특히 예뻐했다 한다. 1732

년(영조 8년) 12세에 김흥경의 아들이자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

인 김한신과 혼인해 남다른 부부애를 과시했다. 하지만 둘 사이

엔 자식이 없었다. 그런데 1758년(영조 34년) 남편이 병으로 세

상을 떠나자 그 죽음을 애도하며 곡기를 끊었다. 영조가 화순옹

주의 집에 찾아와 미음을 먹으라고 권했지만 듣지 않고 14일 만

에 38세의 나이로 죽었다. 영조는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면서

도 자신의 뜻을 저버렸다 하여 정려를 내리지 않았지만, 조카인

정조가 1783년(정조 7년)에 그녀를 열녀로 봉하고, 부부의 무덤

이 있는 충남 예산에 열녀문(화순옹주 홍문)을 세웠다. 수많은

조선의 왕녀들 중 유일하게 열녀로 지정된 사례이다.

마지막 황녀, 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

소설과 연극 등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덕혜옹주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 덕수궁에서 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복녕당 양씨는 덕수궁의 소주방 나인이었는데 서른

이 넘은 나이에 옹주를 낳았다. 고종은 총 9남 4녀를 두었지만

장성할 때까지 생존한 사람은 순종 이척, 의친왕 이강, 영친왕

이은, 덕혜옹주까지 3남 1녀뿐이었다. 덕혜옹주는 사실상 유일

한 딸로 고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컸다.

덕혜옹주는 1919년 고종이 승하한 후 깊은 슬픔에 빠졌

고, 일제에 의해 1925년 정월에 일본 유학이 결정되어 여자학

습원에 입학하는 등 어린 나이에 타국에서 외로운 생활을 해야

했다. 1929년 모친 귀인 양씨가 사망한 이후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여 심한 불면증을 겪다가 결국 정신장애인 진단

을 받게 되었다.

덕혜옹주는 1930년에 옛 대마도 번주 소 요시아키라의

양자인 소 다케유키와 결혼하였다. 옹주는 결혼 초부터 거의 완

전한 실어증 증상을 보였다. 1932년에 딸 소 마사에를 낳았으나

출산 이후 병이 악화되어 1946년부터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1947년 신적강하 즉 '왕족의 특권을 포기하고 평민이 된다는 결

정’에 따라 연금을 비롯한 각종 특권을 박탈당해 생계가 어려워

졌고, 입원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1955년에 이혼당하였다. 덕혜

옹주는 1962년 1월, 38년간의 일본 생활을 끝내고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같은 해 2월 ‘이덕혜’로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

였다. 1967년 5월 병세가 안정되어 퇴원 후 창덕궁 낙선재 내의

수강재에서 기거하다 1989년에 사망하였다. 조선왕조의 몰락과

아픔, 불행한 가족사를 온몸으로 겪었던 슬픈 왕녀였다.

옹주의 남편, 부마들

공주든 옹주든 왕녀에게 장가든 왕의 사위는 모두 부마, 또

는 위라고 칭했다. 공주에게 장가든 자는 첫 벼슬로 종 1품을, 옹주와

결혼한 부마에게는 첫 벼슬로 종 2품을 내려주었다. 부마가 죽을 경

우 옹주는 그대로 남편의 품계에 따른 대우를 받았다.

옹주의 남편도 공주의 남편과 마찬가지로 왕실의 부침

에 따라 생사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공신옹주의 남편 한

경침은 장모인 귀인 엄씨가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사사사

건에 연좌되어 죽임을 당할 때 작위와 재산을 모두 뺏기고 유

배지에서 처참하게 죽었다. 이외에도 왕실의 권력 구도에 따라

죽거나 유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부마는 외교 사신 임무를 수행하며

문물을 들여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국왕의 혼례를 비

롯해 왕실의 크고 작은 행사를 주관하고 이에 참여했다. 부마

중에는 특히 시와 글씨, 그림 등에 능한 인물이 많았다. 또한 부

마를 배출한 가문은 왕실의 측근으로 많은 권세를 누렸다.

월간 문화재 46 47궁중여인열전

Page 25: 전통문화와 아름다운 만남궁중여인열전 옹주의 삶 44 알림마당 문화유산 소식+재단행사 알림 K-HERITAGE 문화상품 전통문화달력 48 한국문화재재단

•교육기간

2016년 3월 2일(수) ~ 12월 31일(토)

(32주, 1주당 3시간 / 소목, 대목 38주)

•모집기간

1월 11일(월) ~ 각 강좌 개강일까지

•수강료

기초·연구반: 86만 원

전문반: 93만 원

소목·대목반: 110만 원

전통목가구반(기초, 연구 통합과정): 220만 원

※2과목 이상 수강 시 5% 할인 적용

•모집인원

반별 20명 내외

※7명 이상 개강

•모집강좌

금속공예: 입사, 장석, 칠보

직물공예: 색실누비, 자수보자기, 전통자수,

매듭, 침선

목공예: 각자, 소목, 전통창호

칠공예: 옻칠, 나전칠기

전통화법: 단청

전통건축: 대목

•신청방법

온라인 신청: 한국문화의집 홈페이지

www.kous.or.kr

방문 신청: 한국문화의집 1층 사무실

※ 반드시 담당자와 사전에 통화 후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문의전화

02-3011-1702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창덕궁 달빛기행

•일시

2016년 3월 21일(월) ~ 3월 27일(일)

•장소

창덕궁 일원

•대상

내국인, 방한 외국인

•인원

회당 100명 내외

•주요 내용

창덕궁 야간기행, 공연 관람 및 전통다과 시식

•문의전화

02-2270-1233 / 1238

조각장 김철주 아카이브전

•일시

2016년 3월 30일(수) ~ 5월 11일(수)

•장소

중요무형문화재전수회관 2층 전시관 결

•기획 의도

조각장 김철주(1933-2015) 작고 1주기를 맞이하여

한국 금속조각의 명맥을 이어온 유일한 조각장으로서

작가의 예술적 업적을 재평가하고 한국 근현대

공예사에서 그의 위치와 한국 금속공예에 끼친 영향을

조명한다

•전시 작품

조각, 스케치, 기록물, 영상물 등

•문의전화

02-3011-2161

수문장 교대의식

•사업기간

2016년 1월 1일(금) ~ 12월 31일(토) / 일 4회

(교대의식: 10시, 14시 / 파수의식: 11시, 13시)

•장소

경복궁 광화문 및 흥례문 일원

•주요 내용

수문장 교대의식, 광화문 파수의식, 기획행사,

복식 체험 등

•문의전화

02-3210-1645

수문장 임명의식

‘국왕께서 친히 수문장을 낙점하다’

•일시

2016. 3. 27(일) 14:00

•장소

경복궁 광화문 및 흥례문 일원

•행사 내용

수문장 낙점의식 / 수문장 교대의식 / 식후행사

(축하공연) / 포토타임

•문의전화

02-3210-1645

2016년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 정규강좌 프로그램

요일 시간 한국문화의집 전수회관

2층 A 2층 B 2층 C 3층 4층 4층 대기실 B105 B103

월 오전10시~13시

오후14시~17시

야간19시~22시

화 오전10시~13시

오후14시~17시

수 오전10시~13시

오후14시~17시

목 오전10시~13시

오후14시~17시

야간19시~22시

금 오전10시~13시

오후14시~17시

야간19시~22시

토 오전10시~13시

오후14시~17시

야간19시~22시

일 오전10~13시

오후14~17시

색실누비연구

자수보자기 전문

침선 연구

색실누비기초

자수보자기전문

침선 전문

전통창호 기초/연구13시~16시

색실누비기초/연구

자수보자기기초/연구

침선 기초

옻칠 전문

소목 기초(조화신)

매듭 전문(김혜순)

자수보자기연구

침선 전문

옻칠 기초

전통목가구기초

매듭 연구(김혜순)

자수보자기연구

침선 연구

옻칠 연구

매듭 기초(노미자)10시~13시

자수보자기기초

침선 기초

나전칠기 전문

입사 기초/연구

매듭 연구(노미자)13시~16시

매듭 전문(노미자)16시~19시

자수보자기기초

침선 기초

매듭 기초(김혜순)

전통자수 연구

칠보 기초

소목 기초(조화신)

매듭 전문(노미자)

매듭 전문(노미자)

전통자수 기초

칠보 연구

옻칠 기초

소목 연구(조화신)

매듭 연구/전문(김혜순)

전통자수 기초/전문

옻칠 연구

소목 연구(조화신)

매듭 전문(김혜순)

침선 전문

나전칠기 연구

침선 전문

나전칠기 기초

소목 기초15시~18시

각자 연구

단청 기초

침선 연구

소목 연구

각자 전문

단청 전문

소목 기초9시~12시

각자 기초

단청 기초

소목 연구12시30분~ 15시30분

각자 연구

단청 연구/전문

대목 기초14시~17시

대목 연구 18시~21시

장석 기초

장석연구

※강좌 운영에 따라 합반이 될 수 있습니다.

연구 합반기초 전문

촛대

윤주현作

사진: 주병수

월간 문화재 48 49알림마당

Page 26: 전통문화와 아름다운 만남궁중여인열전 옹주의 삶 44 알림마당 문화유산 소식+재단행사 알림 K-HERITAGE 문화상품 전통문화달력 48 한국문화재재단

벽돌 하나하나를 형상과 문양별로 따로 구워낸 궁궐의 꽃담은 미묘한 색의 조화로 왕실의 격조와 담박하고 편안한 미감을 드러낸다. 그중에서도 경복궁 자경전의 꽃담은 여러 가지

문양으로 단장되어 있는데, 특히 주황색 벽돌로 축조한 서쪽 외벽은 다양한 식물을 정교하게 새겨 넣어 한 폭의 그림 같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한국문화재재단에서는 이러한 꽃담을 활용한 문화상품을

개발하여 일상에서 향유할 수 있도록 다양한 제품을 선보인다.

1.꽃담 디자인 테이프 꽃담을 재해석한 패턴으로 이루어진 디자인 테이프. 1만 원 2.꽃담 문양 안경 꽃담의 문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다리에 적

용한 안경. 4만 8,000원 3.꽃담 나전 명함함 꽃담의 모습을 나전으로 표현한 명함함. 2만 7,000원 4.경복궁 꽃담 나전함 자경전 서쪽 꽃담을 나전

에 특수 인쇄한 명함함. 3만 5,000원 5.꽃담 일러스트레이션 카드 자경전 서쪽 꽃담을 그린 카드. 2,000원 6.엽서 아름다운 경복궁 꽃담 사진을 활

용한 엽서. 5,000원(세트) 7.노트 표지를 꽃담 패턴으로 모던하게 디자인한 작은 사이즈 노트. 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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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ERITAGE 문화상품

www.k-heritage.tv

정은표의 세계유산 순례

농악, 신명나는 공동체의 화합

천연기념물 동물 이야기

흑두루미, 그 아름다운 비행을 위하여

문화재 속 과학 이야기

전설의 소리, 성덕대왕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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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칼, 낙죽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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