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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재 정인승 선생의 생애와 학문 · 2012. 6. 20. · 건재(建齊, 자는 경범‘景範’) 선생님은 1897년 음력 5월 19일 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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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口 특집/건재 정인승 선생의 학문과 인간

    건재 정인승 선생의 생애와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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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 口

    (건국대학교 대우교수)

    1. 선생님의 한글 사랑의 일생

    (1) 출생과 성장

    건재(建齊, 자는 경범‘景範’) 선생님은 1897년 음력 5월 19일 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129번지에서 한학자 정상조(鄭相朝) 님과 송성녀(宋姓女) 님의 3

    남 2녀 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다.5세 되던 1901년 가을부터 고모부인 한학

    자 한응수(韓應洙) 님께 한문을 배웠고, 11세 되던 1907년부터는 7세 위인 사촌

    형이 책을 가져 와서 신학문을 함께 공부하자고 하여, 역사, 지리, 산술, 천문학,

    일본어 등을 혼자 익히기 시작하였다. 14세가 되던 1910년 3월 8일(음)에 그 지

    방 부호의 따님이었던 황양례(黃良禮) 님과 혼인하였다. 그후 어떻게 하더라도

    신학문을 배워서 미국으로 유학하여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어른들의 반대를 무릅

    쓰고 서울로 도망치기를 세 차례, 결국 세 번째의 무단 상경 끝에 어른들의 허락

    을 얻고 17세가 되던 해에 서울 홍화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시다가 중도에 그만

    두고 귀향하셨다. 그리고, 19세가 되던 1915년 9월에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공립

    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학하여 수학하고 1917년 3월 25일에 졸업하시니, 그때 최

    우수상을 받았다.

    졸업 후 다시 상경하시어 일 년간 취직한 후에, 당시 한학의 대가였던 친척 정

  • 4 새국어생활 제6권 제3호(’96년 가을)

    만조 님 댁에서 기거하면서 1918년 4월부터 1919년 3월까지 서울 연정(冊精)학

    원과 중동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19년 9월부터는 일본 와세다대학 강좌를 이수

    하면서 1920년 11월에는 서울 내자동에 있었던 종교(宗橋) 예배당의 영내 강습

    소에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그 까닭은 전문학교 진학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 서울에는 전문학교가 네 군데 있었는데, 일인들이 다니는 학교가 싫어서 연

    회전문학교에 가기로 결심하고. 1921년 3월에 와세다대학의 교외생이 수료되는

    대로 1921년 4월부터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하여 1925년 3월까지 문과의 전과정을

    마치고 졸업하시었다. 선생님은 연희전문학교에서 영어를 전공하시었는데, 국어

    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바 그 까닭은 이러하다.

    선생님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여 가장 존경하며 친하였던 분은 김윤경 선생

    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선생님이 ‘건대학보’ 36호에 쓰신 글을 통하여 알게 되

    었는데, 그 글을 그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 . .. . 그(김윤경 선생)는 나보다

    3년 먼저 입학하여 졸업반의 수석이 된 분으로, 우리 글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분이다. 김윤경 님은 그의 옛 스승 주시경 선생의 창의적인 국어문법 학설을 체

    계적으로 습득하여 나에게 우리말을 연구하게 영향을 준 바가 적지 않아, 영문법

    교수인 백남석 선생의 영어 구문론 해설을 체계적으로 습득한 것과 함께, 나름대

    로의 국어 문법에 대한 이치를 전개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아울러 정인

    보 선생의 수사학 강의와 피시어 (Fisher) 교수의 셰익스피어 강의, 원한경 교수

    의 아동심리학 등은 나에게 학문적,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김윤경

    선배와 정인보 선생 두 분은 잊을 수가 없다 .. 고 하였는데, 더구나 정인보 선

    생은 수사학 강의 시간에 ‘새벽 서리 찬 바람에 .. .... ’라는 구절을 예로 들면서, 한

    문으로 된 글보다 한글로 된 글이 더 우수하다고 하면서 한글의 뛰어남을 가르

    쳤던 데서도 자극을 받아 선생님의 우리말과 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선생님의 국어에 대한 사랑은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선생

    님이 연희전문학교에서 1년을 마치고 고향엘 갔는데 친구들로부터 전검시험을

    준비하자는 편지와 전보를 받게 되었다. 당시에 연희전문학교는 잡종학교였으므

    로 정식 자격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전검이 필요했다고 한다. 제의를 받은 선생

    님은 취업에 뭇이 없었고 미국 유학을 생각하였으므로 거절하였다. 그러자 친구

    들이 시골까지 찾아와서 권유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준비하여 응시하였던 바

    17명 가운데, 오직 선생님만 합격하게 되었다. 당시의 전검은 30과목을 일주일

    동안에 보게 되어 있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고 한다. 낙방한 16명은 모두 다

    음 해에 합격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언어’에 대하여 뛰어

  • 건재 정인숭 선생의 생애와 학문 5

    난 재능을 보였으므로 ‘언어’라는 별명으로 불혔다 한다.

    1925년 4년간의 전 과정을 마치고 졸업을 앞둔 선생님은 미국 유학을 결심하

    고 피시어 교수로부터 고학하는 방법을 배웠는데, 그는 유리창을 닦으면서 공부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유학을 떠나려고 하니까 여비가 없어 계획대

    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게 되자. 1년간만 취직하여 여비를 마련하기로 결심을 하

    게 되었다. 때마침 송도고보의 교장이었던 윤치호 님이 선생님을 찾아 와서 자기

    학교 영어 교사로 와 줄 것을 부탁하게 되어 선생님은 쾌히 승락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고창고보 교장 양태순 님이 만나자고 하여 전통여관으로 찾아갔더니

    자기 학교로 오라고 권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송도고보 교장과의 선약도 있고

    하여 선생님은 별 생각 없이 만나는 데만 뜻을 두고 첫날은 교육에 대한 토론만

    하였으나, 내일 또 만나자고 하여, 어제 만났던 그 여관으로 갔더니, 양 교장이

    말하되 “송도고보는 체제가 다 잡힌 학교라 당신이 가도 빛을 보지 못할 것이나,

    고창고보는 신설인데다가 당신이 오게 되면 최대한의 활동을 보장할 것이니, 신

    설 학교를 좋은 학교로 만들면, 당신이 더욱 빛날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즉

    “닭의 머리는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지 말라”는 격언을 말하면서 “수석으로

    모시겠다”는 약속을 하였으므로 드디어 송도고보를 포기하고 고창고보로 가기

    로 결정하게 되었다. 고창고보는 민립학교일 뿐 아니라, 양 교장의 매력적인 약

    속 때문이었다. 1925년 4월 1일부터 1935년 8월 31일까지 만 10년 반 동안 고창

    고보에서 국어와 영어를 가르치시었다. 1928년부터 일제는 우리말을 교과과정에

    서 삭제해 버려 국어 교육이 금지되어 있었는데도 고창고보에서는 학교 내규로

    국어를 계속 가르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고창고보는 정주의 오산학교와 더불어

    애국 정신을 심어 주는 교육을 하고 있었으므로 당국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특히 광주 학생 사건 후, 소위 사상 불온으로 퇴학 당한 학생의 전입학을 금지시

    켰던 당국의 지시에도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고창고보는 이들 학생을 받아틀여

    우수한 인재를 기르고 있었다. 따라서 전북 학무국에서는 민립인 고창고보를 공

    립으로 만들기 위하여 획책하게 되었다. 이에 선생님을 위시하여 이병학(동경

    물리학교 출신) • 서상천(체육 교사) 님들이 앞장서서 반대하게 되었는데 , 드디어

    는 요시찰 인물로 간주되어 가히 쫓겨나오다시피 하여 10여 년의 고창고보 교단

    생활을 청산하게 되었다. 그후 선생님은 곧 상경하여 돈암동에서 염소 목장을 경

    영하면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 6 새국어생활 제6권 제3호(’96년 가을)

    (2) 조선어학회와 선생님

    36년 이른 봄, 최현배 선생이 목장으로 선생님을 찾아와서 조선어학회에서 추

    진 중에 있는 ‘조선말 큰사전’ 편찬의 일을 맡아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선생

    님은 승락하고 그해 4월 1일부터 사전 편찬의 일을 맡아보게 되었다. 최현배 선

    생이 건재 선생님에게 사전 편찬의 일을 맡아보도록 추천한 까닭은 이러하다 당

    시 김병제 님이 조선어학회에서 ‘한글’의 ‘물음과 대답’란의 ‘대답’을 책임 맡고

    있었는데, 고창고보의 정인숭 님의 물음을 답할 때는 여간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니었다. 이에 정인숭이란 이름이 학회 안에 알려지게 된 데 있었던 것이다. 즉

    사전 편찬의 적격자로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그후 얼마 있다가, 최현배 선생은

    홍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연금되다시피 되어 사회활동을 할 수 없게 되고 이

    윤재 선생은 1937년 6월 7일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붙잡혀 가게 되며, 다

    른 분은 직장 일로 사전 편찬에 전념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사전 편찬의

    일은 선생님과 이극로 박사 두 분이 학회를 대표하여 맡아보게 되었다. 선생님은

    이때부터 사전 편찬은 물론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수정 및 기초위원(1936. 11.

    28. - 1940. 6. 15.) ,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49-93호, 1937. 10. - 1942. 4. 5. ) 의

    편집 및 발행을 맡았고, ‘한글’의 ‘물음과 대답’란의 ‘대답’을 l차는 1937년 10월부

    터 1949년 7월 (49- 108호)까지 집필하였고, 2차는 1959년 10월 9일부터 1963년

    9월 30일 ( 125- 12호)까지 집필하셨다. 선생님이 학회에 들어간 지 만 3년이 지

    나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애썼던 가운데 1939년 말에 완성된 원고의 3

    분의 1 가량을 총독부 도서과에 내어 본문 중 많은 삭제와 정정을 조건으로

    1940년 3월 13일 겨우 출판 허가를 받았으나 출판 자금이 없어 애태우던 중, 이

    우식 선생이 원고 작성이 끝날 때까지 매달 250원씩 학회 운영비를 내놓기로 하

    였다. 그리하여 , 출판 허가를 받은 원고를 대통출판사 노성석 사장의 특별한 호

    의로 1942년 봄부터 조판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3) 조선어학회의 수난

    1942년 여름, 홍원에는 함홍으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함홍 영생여고는

    사립학교로 꽤 알려져 홍원에서 통학들을 많이 하였다. 통학생들은 홍원 전진역

    까지 기차 속에서 잡담과 밀담을 즐겼다. 그 당시 통학차에는 고퉁계 형사가 몰

    래 요시찰 인물을 조사하러 타고 다니곤 하였다. 어느 날, 통학생들은 저희들끼

  • 건재 정인숭 선생의 생애와 학문 7

    리 무엇인가를 종이에 그리며 작은 소리로 소근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몰래 그린

    그림은 태극기라고 소근거렀다. 무궁화, 태극기란 말도 오고 갔다. 이들의 주고

    받은 껏속말과 그들이 그린 그림이 태극기였다는 사실을 안 고등계는 ‘불량 학

    생’ 검거에 손을 대었던 것이다. 일제의 철저한 앞잡이었던 야쓰다(고퉁계 형사

    부장)에게 제일 먼저 잡혀 간 사람은 명치대학을 졸업한 박병엽이었다. 별 혐의

    를 잡지 못했던 경찰은 박병협의 집을 뒤지다가 그의 질녀 박영옥이 쓴 일기책

    몇 권을 발견했다. 박영옥은 함홍 영생여고 4학년에 재학중이었다. 야쓰다는 여

    고생의 일기책이라 흥미를 가지고 샅샅이 원어 가던 중, 박영옥이 2학년 때 쓴

    일기에서 “국어를 사용하는 자를 처벌하였다”라는 글귀를 발견하고, 이것을 트

    집잡기 시작하여 박영욱은 구속되고 통급생 이성희 , 이순자, 채순남, 정인자 퉁

    이 경찰에 불려가 일 주일 이상이나 고문으로 시달린 끝에 정태진과 김학준 두

    선생이 민족주의 사상을 학생들에게 불어넣었다는 사실을 자백 받고 말았다. 홍

    원 경찰서에서는 정태진 선생을 부르기로 하고 증인 소환장을 발부하였다. 서울

    종로구 화동 129번지 조선어학회에서 사전 편찬에 여념이 없었던 정태진 선생이

    소환장을 받은 것은 1942년 9월 5일이었다. 소환장을 받고 별일 있겠느냐 하며

    흘흘이 떠난 정태진 선생을 홍원 경찰서에서는 가두어 놓고, 갖은 고문을 다하여

    조선어학회가 독립을 목적으로 암암리에 일을 도모하고 있다는 허위 자백을 받

    고 말았다. 그리하여, 조선어학회 수난은 시작되기에 이른 것이다.

    (4) 선생님과 여러 학자들의 체포

    1942년 9월 30일, 이극로, 권승욱, 선생님 세 분이 밤새도록 사전 편찬의 일을

    하고 선생님이 10월 1일 첫 새벽에 퇴근하여 혜화동 성벽 밑 막바지에 있는 자

    택으로 발길을 옮겼다. 원고 일부가 인쇄에 붙여졌고 남은 원고 정리가 바쨌기

    때문에 거의 매일 밤을 새다시피 일을 하였다. 사전 편찬에 관하여 이런 생각 저

    런 생각을 하면서 집의 대문에 다달았는데 대문이 열려 있었다. 서재 겸 살림방

    으로 쓰고 있는 안방문도 열려 있었다. 문을 열어 놓은 안방 안에는 낯모르는 양

    복쟁이 두 사람이 반듯이 앉아 있었다. 한 명은 종로서에서 용 형사였고 한 명은

    홍원 경찰서에서 온 형사였다. 그 길로 선생님은 체포되어 종로서 감방에 수감되

    었다.

    10월 2일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 형사에게 끌리어 널찍한 대기실 같은 데로

    가 보니 이중화, 장지영, 이극로, 최현배, 한징, 이윤재, 이회숭, 김윤경, 권승욱,

  • 8 새국어생활 제6권 제3호(’96년 가을)

    이석린 여러분이 잡혀 와 있었다. 체포된 열한 분은 종로 전차 정거장까지 걸어

    가서 밤 9시경 전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 함홍행 열차를 탔다.10월 3일 새벽에

    기차는 함홍역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이극로 권승욱 선생님 세 분만을 내리게

    하고 다른 분들은 함홍 경찰서로 데려가 수감하였다.

    10월 18일에는 이우식이 경남 의령 자택에서 붙잡히었고, 19일에는 김법린이

    통래에서 붙잡혀 왔다. 20일에는 정열모가 김천에서 붙잡혔으며 21일에는 이병

    기, 이만규, 이강래, 김선기 네 분이 서울에서 붙잡혔다. 1943년 3월 5일에는 김도

    연, 6일에는 서민호가 서울에서 검거되고, 3월 말부터 4월 1일에 걸쳐 신융국, 김

    종철이 불구속으로 법정까지 끌려가서 문초를 받았다. 이밖에 권덕규와 안호상은

    몸이 아파 누워 있어 두 번이나 구속을 겨우 면할 수 있었다. 이렇게 1942년 10월

    1일부터 1943년 4월까지 일본 경찰에 잡힌 사람은 모두 설흔세 분이었다.

    (5) 일본 앞잡이들의 고문

    10월 3일 권송욱이 불려 나가더니 3일 동안 계속 권숭욱만이 불려 나가, 얼마

    나 고문을 당했던지 말할 수 없이 초훼해 보였다.3일이 지난 날 아침 식사 후

    선생님이 불려 나갔다. 형사 세 명이 심문을 하는데 “왜 사전을 만드느냐?"고 물

    었다. 이에 대해 “호구지책으로 한다 .. 고 답하니까, 갖은 욕설로 한 자 가량 되는

    네모난 고무 몽둥이로 어깨와 등어리를 마구 때려 온몸이 문신을 그려 놓은 듯

    하였다. 이런 고문이 일 주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아파서 식사도 못하고 어쩔 줄을 모르는 선생님에게 같은 감방 선배가 “매를

    맞지 않으려면 대충 저네들이 하는 대로 했다고 말하라”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일 주일만에 저네들이 위협하는 대로 승복하고 말았다 .. 소위 자백서에 지

    장을 찍은 후 남의 부축을 받다시피 하여 감방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에는

    이극로 선생이 붙들려 나갔다. 일제 주구들의 고문이 얼마나 혹독하던지 이극로

    선생의 고함소리는, 취조실이 감방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감방까

    지 들려 왔는데, 날이 갈수록 그 고함소리는 비명으로 변했다. 이와 같은 일은 10

    일 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

    함홍 경찰서에 갇힌 지 3주일이 되던 날, 선생님은 다시 불려 나갔다. 온몸이

    죄고 다리가 흐들거려 걸음을 옮겨 놓을 수가 없어 기다시피 하여 나갔다. 이극

    로 선생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끌려 나왔다. 이극로, 권승욱, 선생님 세

    분은 그 길로 홍원 경찰서로 이감되어 제3 감방에 수감되었다.

  • 건재 정인승 선생의 생애와 학문 9

    흥원 경찰서에서도 고문은 계속되었는데 그 고문의 종류는 네모난 몽퉁이로 때리기, 고춧가루를 탄 물을 코에 붓기, 비행기 태우기, 동지끼리 몽둥이로 서로 때리기 둥 갖은 악형을 다 당하였다. 비행기 태우기란, 두 팔을 등뒤로 젖혀서 두 손을 한데 묶고 허리와 함께 동여 놓은 두 팔과 동어리 사이로 목총을 가로질 러 꿰어 놓은 다음, 목총의 양끝에 맛줄을 묶어 연무장 대들보에 매달아 놓고 빙글빙글 돌려서 맛줄을 몬 다음, 탁 놓으면 빙글빙글 빨리 돌아 정신을 잃게 하 는 고문이었다. 거기서 십자가 모양 매어 달린 팔이 비틀려 그 아픔은 형언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 고문을 그들은 ‘공중전’, 물 먹이기를 ‘해전’, 죽도나 목총으 로 마구 때라는 것을 ‘육전’이라 했다.

    이윤재 선생은 시바다(본명 김건치)라는 제자에게 갖은 모용을 받아 가면서 취조를 당했는데, 처음에는 시바다가 “이 선생 웬일이십니까?"하고 인사까지 했 으나 며질이 지나자 자기 담당이 아닌데도, 이윤재 선생이 취조 받고 있는 곳까 지 쫓아가 “윤재야! 네까짓 놈이 선생이냐? 개 X 같은 놈 같으니, 맛 좀 봐야 바 른 대로 대겠느냐?"고 마구 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치가 떨리며 천인공노할 일이던가? 나라를 파는 데는 윤리 도덕도 모르는 친일파들의 한 단연을 보인 것 이었다.

    이제 친일 앞잡이들의 이름을 보면 다음과 같다.

    - 흥원 경찰서 쪽

    나차지마(中島種藏, 왜인, 고퉁계 주임) 이토오(伊藏輝元, 한국인, 본명 윤。 0 , 형사) 야스다(安田穩, 본명 안정묵, 고둥계 형사부장) 쓰네가와(빨川議二, 왜 인, 형사)

    니이하라(新原東哲, 본명 박동철, 고등계 형사) 가리야(假屋 0 , 왜인, 형사)

    -함경남도 경찰부 쪽

    오하라(大原炳薰, 본명 주병훈, 수사계 주임) 시바다(뽕田健治, 본명 김건치, 형사부장) 마쓰야마(松山옳, 본명 이。 0 , 형사)

    이들 왜놈의 주구틀은 반 년 동안 날마다 공중전, 해전, 육전이란 고문을 계속

  • 10 새국어 생활 제6권 제3호(’96년 가을)

    하던 끝에 1943년 l월 하순에 조서를 꾸미기 시작하여 3월까지도 끝이 나지 않 았다. 3월 말일에서 4월 l일에 걸쳐 신윤국, 김종철이 불구속으로 흥원까지 끌려 와 문초를 받았다. 선생님과 동지들이 고문을 받는 동안 까닭 없이 소환당한 증 인은 무려 마흔여넓 분이나 되는데, 이들은 서울을 비롯하여 각 곳에서 보조 심 문을 받았다. 특히 백낙준, 정세권, 곽상훈, 김두백, 방종현, 민영욱, 임혁규 님들 은 증인으로 홍원 유치장까지 끌려와서 심문을 받았다. 흥원 경찰은 1943년 4월 중순에 한글 학자에 대한 고문과 학대로 꾸며진 조서 를 겨우 끝냈다. 조서 결과 이극로,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김윤경, 김양 수, 김도연, 이우식, 이중화, 김법린, 이인, 한징, 정열모, 장지영, 장현식, 이만규, 이강래, 김선기, 정인섭, 이병기, 이은상, 서민호 등 스물네 분을 기소하기로 결정 했다. 설흔세 분 가운데 신윤국, 김종철, 권덕규, 안호상 등은 불구속으로 있었기 때문에 안재홍만 석방되었다.

    (6) 검사의 심문과 결심 공판

    기소된 28명은 이제 검사국으로 넘어가면서 거기서 지금까지 취조 당한 내용 이 거짓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겠다는 한 가닥의 희망이 싹터 안도의 숨을 내쉬 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해 9월 7일, 아오야나기 고로(좁柳五郞)가 홍원 경찰 서로 나와 심문을 하게 되었다. 검사의 심문에는 취조 형사들이 늘어앉은 가운데 진행되었으므로 변명하려던 한 가닥의 희망은 사라지고, 조서 그대로 모두 시인 하여 9월 11일 검사의 심문도 형식적으로 끝나고 말았다. 심문 결과 기소 열여섯 분, 기소 유예 열두 분으로 결정되어 12일 , 1 3일 이틀

    간에 걸쳐 함홍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거기에서 기소 유예된 이강래 , 김윤경 , 김 선기, 정인섭, 이병기 , 윤병 호, 서승효, 이은상, 서민호, 이만규, 권승욱, 이석린 등

    은 9월 18일에 석방되었다. 10월에 접어들면서 혹심한 추위가 몰려왔다. 거기에다 극심한 식량난으로 수

    감자에게 주는 식 량의 양도 2분의 1, 3분의 l로 줄어들었다. 이 야기로는 10월과 11월 두 달 사이에 함홍 형무소에서 약 350명이 죽어 나갔다고 했다. 그해 12월 8일에 이윤재 선생이 병고와 추위와 영양 부족으로 세상을 떠나셨고, 1943년 2월

    22일에는 한정 선생도 세상을 떠났다. 기소된 열여섯 분은 예심에 회부되었는데, 1944년 4월이 되어서야 예심판사

    나차노(中野虎雄)가 나타나 매섭게 음박지르변서 9월 30일에 예심이 끝났다. 열

  • 건재 정인숭 선생의 생애와 학문 11

    여섯 분 중 이윤재, 한징은 돌아가심으로써 기소 자체가 소멸되고, 장지영, 정열 모 두 분은 면소로 석방되고, 열두 분은 정식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들은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김법린, 이중화, 이우식, 김양수, 김도연, 이인, 정현식 등이었다. 선고 공판은 11월이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그 때 전신이 쇠약하여 이윤재, 한정 다음으로 세상을 떠날 사람으로 지목받았다고 하였다. 병 보석으로 함흥 고려병원에 약 4개월 동안 입원을 하였 는데, 병원장 고종성은 함홍 형무소 촉탁으로 선생님을 잘 보살폈다 고 원장은 선생님이 고창고보에 계실 때 양 교장 선생의 사위였기 때문에 더 신경을 써서 보살폈다고 하였다. 이 때, 따님 순모가 소의초등학교의 교사직을 그만두고 고려 병원까지 가서 선생님의 병 구완과 수바라지를 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선생님 은 10월에 고려병원에서 퇴원하여 11월에는 서울에 계셨는데 , 11월 말에 재판을 받으러 오라는 통고를 받고 다시 함홍으로 가서 수감되었다.

    1944년 12월 21일부터 1945년 1월 16일까지 9회에 걸친 공판 끝에 드디어 니

    시다(西田勝폼) 주심 판사는 문초와 사건의 심리 끝에 최종 판결 선고를 내렸다.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징역 4년, 이희승 징역 2년 6개월, 정인숭 징역 2년, 정 태진 징역 2년이었다. 실형이 선고된 다섯 분 이외의 7분은 징역 2년에 집행 유 예 3년이 선고되었다.

    실형을 선고 받은 다섯 분 가운데 정태진 선생을 제외하고 네 분은 1945년 1 월 18일 즉시 고등법원에 공소를 제기했다. 그랬더니, 하루는 주심판사 니시다가 공소를 한 네 분을 자기 방에 불러 놓고 대접을 융숭히 하고 나더니, 공소를 취 하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선생님과 동지들은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랬더니 검사 사카모도(板本-郞)는 1월 21일 이극로, 최현배, 이회승, 그리고 선생님과 장현식 다섯 분을 맞고소하였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더니, 5월 하순이 되어서야 겨우 고등법원으로부터 조선어학회 수난의 공소 서류를 접수하였다는 소식이 왔다.

    (7) 광복과 출옥

    8월 15일 밤이었다. 무더운 여름밤에 늦게 잠이 들어 자고 있는데, 누군가가 발을 건드렸다. 그래도 자고 있는데 또 발을 건드렸다. 깜짝 놀라 일어나니 “독 립 축하주 잡수시오"하며 국그릇을 불쑥 내미는데 보니 경비원이었다. 일본이 항복했다는 것이다.

  • 12 새국어생활 제6권 제3호(’96년 가을)

    16일 아침 고 원장이 와서 선생님과 세 분을 나오시라고 했다. 감방 문을 나선

    네 분은 복도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 그런 후, 고 원장은 선생님과 세

    분을 다시 감방으로 들어가시라 했다.

    17일 하루 종일 석방을 기다렸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더니, 그날 밤 간수장이

    와서 문을 열고는 네 분을 자기 방으로 데려 갔다. “선생님들, 왜인은 다 없어지

    고 제가 지금 책임자인데 네 분은 고법에 항고 중에 계시므로 서울에서 무슨 통

    고가 올까 기다렸으나 하는 수 없이 모든 책임은 제가 지고 나가시도록 했습니 다 .. 라고 말했다. 감옥을 나선 네 분은 고 원장의 안내로 대기해 놓았던 자동차

    를 타고 고 원장의 처가인 검 장로 집으로 갔다. 그날 밤은 거기서 융숭한 대접

    을받았다.

    18일 함홍 유지 집을 차로 다니며 대접을 받고 정거장으로 갔다. 함홍역에서는

    미리 몇 앞의 역장에게 여기서 애국 지사들이 기차를 타야 하니, 네 분과 그 가

    족들이 탈 수 있는 자리를 남겨 놓도록 전화 통지를 해 놓았다. 그러나 기차가 오지 않아 배웅 나온 많은 함홍 유지들과 역에서 꼬박 밤을 새웠다. 새벽에 지붕

    에까지 사람들이 꽉 찬 기차가 함홍역에 닿았다. 문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어 뒤에서 떠받치고 하여 창문으로 간신히 들어가서 기차를 타고, 온종일 걸려 밤 10시 쯤에야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이 열차가 함홍에서 서울 오는 마지막 기

    차가 될 줄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선생님이 출옥하시어 서울로 오실 때, 선생님을 모시고 온 분은 큰조카 정학모 와 외솔 선생의 장남 최영해 님이 수고를 했으며, 마침 정학모 님이 철도국 용산 본국에 있었던 관계로 기차가 초만원으로 좌석이 있을 수 없었으나, 그의 도움으 로 애국 지사님들만은 조금은 편하게 좌석을 얻어 귀경할 수 있었다는 정손모

    님의 이야기도 있다.

    2. 선생님의 학문

    여기서는 선생님이 학자로서 어떠한 분야의 대가였으며, 그럽으로써 어떠한

    학문적 업적을 남기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첫째로, 선생님은 우리말본의 연구에 있어서 큰 학자의 한 분이었다. 특히 형 태론의 일인자였다. 그것은 한글 큰사전의 말본소 풀이와 선생님의 말본책들에 서 알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이다’를 풀이자리토씨로 다룬 점이다. 선생님은 우리말 소리의 연음법칙과 절음법칙 및 체언에 ‘-이’를 붙이면

  • 건재 정인숭 선생의 생애와 학문 13

    용언이 되고, 용언에 ‘-기’를 붙이면 체언이 된다는 우리말의 2대 법칙을 따랐을

    것으로 짐작되며, 또 일본말의 단정 조동사 ‘da, desu(다, 입니다)’의 체계를 깊 이 연구한 데서 기인한 것은 아닌가 하는 짐작이 가나, 선생님이 평소에 강조하 신 바에 따르면 이름씨가 월의 감이 되려면 토씨의 도움 없이는 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시면서, 이름씨가 풀이말이 되기 위해서는 ‘이다’의 도움 없이는 되

    지 않는데, ‘이다’가 끝바꿈을 하는 것은 이름씨가 풀이말로서의 구실을 다하게 하기 위한 데 있다 하셨다. 즉 선생님의 씨(품사) 가름은 언제나 월갈을 바탕으 로 한 기능주의적 입장에서 이루어졌다. 보기를 들면, ‘이름씨’는 “‘무엇’이냐고

    물음에 대답되는 낱말로서, 그 아래에 @ ‘이’(혹은 ‘가’) @ ‘을’(혹은 ‘를’)@ ‘에’를 붙일 수 있으면 이름씨라 한다”고 하였고, ‘움직씨’는 “‘무엇 하느냐’ 하는 물음에 대답되는 낱말로서, 그 끝이 @ ‘는다’(혹은 ‘L 다’) @ ‘느냐’ @ ‘네’로 될 수 있으면 움직씨다”라고 하였으며, ‘그림씨’는 “‘어떠하다’ 하는 물음에 대답되

    는 낱말로서 그 꼴이 @ ‘ L다’로 안 되고 거저 ‘다’로, @ ‘느냐’로 안 되고 ‘(으) 냐’로 @ ‘네’로 안 되고 ‘으이(의) ’로 될 수 있으면 그림씨다”라고 하였다. ‘매김 씨’는 “‘어떤’이라는 물음에 대답되는 낱말로서, 그 아래에는 토도 붙지 않고 끝 도 이리저리 갈리지 아니하고, 그대로만 이름씨 앞에 놓일 수 있는 낱말이 매김

    씨다”라고 하였고, ‘어찌씨’는 “‘어떻게’라는 물음에 대답되는 낱말로서, 끝이 이 리저리 갈리지 아니하고, 그냥 그 뒤의 관계는 말의 내용을 더 똑똑히 드러나도

    록 꾸미는 것이 어찌씨다”라고 하였으며, ‘느낌씨’는 “다른 어떤 말과도 반드시 붙어야 할 관계를 가지지 않고 혼자 아무데나 쓰일 수 있는 낱말이 느낌씨다”라 고 하였다. 그리고 ‘토씨’는 “실질적인 내용은 없으면서, 어떤 이름씨 밑에든지

    두루 붙을 수 있는 따로 서지 못하는 낱말이 토씨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따라 서, 이름씨도 제이름씨, 대이름씨, 셈씨의 셋을 묶어서 씨가름에서 이름씨로 한 것도 월에서의 구실이 같기 때문이다. 즉 임자씨로서의 구실이 같기 때문이다.

    더구나, 외솔과의 사이에서 말썽이 되었던 ‘다그다’의 문제이다. 외솔은 ‘닥다’ 를 으뜸꼴로 보고 이를 안갖은움직씨라 하였으나 선생님은 그것이 끝바꿈을 하

    는 모습과 월에서의 구실을 중심으로 ‘다그다’가 으뜸꼴이며 갖은움직씨로서 남 움직씨임을 밝히었다. 그리고 ‘닥치다’는 ‘닥다’의 힘줌말이 아니며 ‘다그다’의 힘 줌말은 ‘다그치다’임은 물론 ‘가져다가’의 ‘다가’는 토씨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었 다. 특히 ‘ l 의 역행동화 문제 - 그 원리와 처리 방법 -’이란 논문을 발표함으로 써, ‘ l 역행동화가 심한 것은 그것을 그대로 기본 어휘로 다루어야 하며, 어법에 일치되는 발음으로 회복하기 어려운 것은 그 현실 발음을 쫓되 가능한 한 어법

  • 14 새국어생활 제6권 제3호(’96년 가을)

    조직을 돌아보는 정도로 그철 것 등의 어휘 처리 방법을 제시하여 맞춤법의 정

    리나 표준말의 사정에 올바른 길잡이가 되게 하여 주었다. 그리고 ‘모음상대법칙

    과 자음가세법칙’의 모음상대법칙으로써는 우리말의 디표·광협의 어의와 어감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게 하였는데, 이로써 우리말 중에는 작은말:큰말, 좁은말:넓

    은말의 짝을 이루는 것이 있음을 밝혀 내고, 작은말과 좁은말을 그 짝이 되는 말

    의 기본 어휘로 잡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자음가세법칙으로서

    는 우리말에 예사말과 센말 및 거센말이 있음을 밝히고, 이들 계열어의 기본어휘

    는 예사말이라는 사실도 밝히어 우리말의 상징어들이 가지고 었던 많은 문제들

    을 해결할 수 있게 하였다. 선생님은 말본의 대가임에는 틀림없었으나 ‘표준 고

    퉁 말본’에서 말대접법(소위 높임법)을 다루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선생님이 말

    대접법을 몰라서가 아니다. 본래 우리의 말대접법에는 집안말법과 남남말법이

    있는데, 집안말법에는 공경말, 삼가말, 선근말, 친근말이 있어서, 삼가말은 씨끝

    바꿈법이 공경말의 경우와 같으나, 다만 임자말이 ‘나’가 됨이 다르다. 따라서 우

    리말의 말대접법은 형태 위주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남남말에서도

    공경말과 친근말 즉, 공경말(합쇼체), 해요체, 하오체 사이의 구분이 쉬운 것이

    아니다. 원래 예기 곡례편에서 규정하기는 나이가 배가 되면 부모로 섬기고, 열

    살이 위면 형 대접을 하고 다섯 살아 위면 벗으로 대접한다 하였으나, 이 규정은

    현대에 있어서는 맞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복잡한 말대접법을 굳이 고등학교

    말본책에서 다룰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더구나 선생님은

    1937년 이후부터는 한글 학회를 대표하여 ‘한글’의 편집 및 발행을 맡았고 ‘한글’

    의 ‘물음과 대답’란의 대답을 집필하였는데, 그 대답한 학문적 내용을 분석하여

    보면, 소리갈, 씨끝바꿈법, 자리매김법, 말대접법, 맞춤법, 표준말 등의 지식을 망

    라하고 있다. 보기를 요약해서 몇 개 들면, 송도인(松都A)이라고 밝힌 어떤 분

    이 ‘엇그저께’의 ‘엇’과 ‘온갓’의 ‘갓’의 철자법의 정오 여부를 물어 온 데 대한 답

    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즉 ‘ ... ‘엇그저께’는 ‘어제 그저께’의 준말이요, ‘온갓’은

    ‘온가지’의 준말이므로 맞춤법 제52항에 의하여 각각, ‘헛그저께’와 ‘온갖’으로 적

    어야 옳다’고 답하였고, 또 ‘북도 촌나기’라고 밝힌 어떤분이 ‘말’과 ‘말씀’의 뜻의

    통일 여부 및 자세한 용법을 질문한 답으로 “말씀’은 ‘말’의 옛말이나 지금도 ‘말’

    은 범칭으로 ‘말씀’은 ‘말’의 높임말이라 하고 또 ‘말씀’은 겸칭으로도 쓰이어 어

    른들 앞에서 자기 말을 겸양하여 쓴다 하고 ‘제 말씀이 옳습니까?’ .. . ’ 등과 같은

    예를 들어서 대답하고 있다. 이처럼 선생님은 별의별 물음에 대답을 하였던 것이

    다.

  • 건재 정인승 선생의 생애와 학문 15

    다음으로 선생님은 옛글과 이두에도 일가를 이루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일

    찍이 서울현대사(출판사)에서 일제 강점기의 ‘한글’ 발훼본을 내고자 하여, 사장 정재표 님이 선생님을 찾았을 때, 선생님이 강점기 말에 ‘한글’에 연재한, 전몽수

    ‘고어 연구초’를 싣기를 즉석에서 권한 사실이라든가 ‘고본 훈민정음의 연구

    (1940) ’, ‘훈민정음의 연혁(1946) ’, ‘용비어천가 해제(1952) ’, ‘정음제정의 정신 (1953) ’, ‘고대 사이된소리 표기법의 새 고찰(1954) ’, ‘표준 옛글(1955) ’, 외에 콤 사전의 옛말 풀이 등으로 알 수 있고, 이두에 대하여는 ‘한글’에 실은 이두에 관

    한 글들을 비롯하여, 일석 선생의 송수 기념 논총에 실은 ‘이두 기원의 재고찰

    (1957)’에서 이두의 설총 창작설을 강력히 주장하신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선생

    님이 이두에 밝으셨던 까닭은 사전 편찬을 위하여 평소에 이두 연구를 많이 하

    였기 때문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선생님은 한문의 대가였기 때문에 주역과 성운학에 관하여도 깊이 알고 있었

    다.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근거는 해방 직후에 유열 교수가 낸 ‘풀이한 훈민정

    음’의 교열을 선생님이 하셨고, 글쓴이가 대학원에서 ‘훈민정음’ 강의를 들었는

    데, ‘제자해’를 강의하실 때에, 패를 풀이하시는데 그저 척척 그려내면서 자유자

    재로 설명하시었다. 그때 강의하신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즉 태극에서 음( -- )

    과 양(-)이 갈리고 여기에서 사상이 생기고 사상이 팔패를 낳았는데 이를 차례

    로 보이면 첫째는 건(乾)으로 뜻은 ‘하늘’이오, 패는 =(乾三連) , 둘째는 태(兌)

    로 뭇은 ‘못’이요, 패는 프(兌上總) , 셋째는 이(離)로 뜻은 ‘불’이오, 패는 :::(離中

    虛) , 넷째는 진(震)으로 뜻은 ‘우뢰’요, 패는 프(震下連), 다섯째는 손(앓)으로

    뭇은 ‘바람’이며 패는 프(앓下總) , 여섯째는 감(야)으로 뜻은 ‘물’이며 패는 프

    (J;X中連), 일곱째는 간(良)으로 뜻은 ‘산’이며 패는 뜨(良上連) , 여닮째는 곤(坤)

    으로 뭇은 ‘땅’이며 패는 뜨(坤三總) 등이라고 하시면서 그저 설명을 유창하게

    하시는 것이었다.64패는 이 팔패를 거듭하여 만든 것인데 제자해의 ‘坤復之間鳥

    太極’이란 구절을 설명하기 위하여 64패 중의 건(乾)=르, 곤(坤) == ==, 구(빨)三 프, 복(復)뜯프, 돈(遊)=프, 엄(臨)EE 프, 부(否)三-- 태(泰)뜯三, 관(觀) , 대장

    (大빠)프- 박(刺)프--, 패(快)=三 퉁 12개의 패를 그려서 ‘곤(坤)과 복(復)의

    사이가 태극이 되고’로 풀이하였는데 이것은 ‘곤→태극(0)→복’이 된다는 뜻이라

    는 것이었다. 건은 음이오, 곤은 양이라 하여 음과 양은 일정불변의 것이 아니오,

    양이 음을 낳기도 하고 음이 양을 낳기도 한다고 설명하시었다. 과거 부산대학교 박지홍 선생이 이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 선생님께 문의하였더니, 선생님은 ‘곤패

    ( =응 E틀)는 음( --)뿐이니 완전히 깜깜하여 아무것도 없는 형태요, 복패(뜯뜯)는

  • 16 새국어생활 제6권 제3호(’96년 가을)

    곤패에서 양(-)이 간신히 하나 생겨난 상태이니, 아무것도 없는 속에서 사물이

    비로소 생겨난 형태이다. 천지창조의 순간이라 하겠다. 이는 곧 ‘곤’이 ‘복’이 되

    려면 ‘곤→태극(이→복’의 경로를 밟아야 함을 뜻하며, 태극이 움직여서 복이 생

    겨났음을 일러 준 것이라’고 설명을 하시었다고 하였다. 이는 주역의 이론을 모

    르고 한문을 직역해서는 도저히 풀어낼 수 없는 일이다.

    앞에서 이미 말하였지마는 선생님은 훈민정음에 정통하였으므로 성운학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1973년에 건국대학교 재직시에 동국정운 원본을 교주하였는

    데, 동국정운의 성모(닿소리)는 훈민정음의 초성체계를 그대로 이식하여 놓았다

    는 것과 동국정운 원본과 고금운회거요와의 대조에서는 항목별로 ‘혹작(感作)으

    로 빠진 것’을 비롯하여 빠진 것 8항목 ‘큰글자를 빠뜨린 것’이 l항목 ‘금작(今

    作)으로 빼어야 할 것’을 비롯하여 빼어야 할 것 9항목 ‘고금운회거요에 없는 것

    을 더 써넣은 것’ 1항목 ‘차례가 바뀐 것’ 1항목 둥 모두 20개 항목으로 자세히

    나누어 일일이 그 운자를 밝히었다. 이처럼 운학에도 밝았을 뿐 아니라, 말년에

    서울의 어떤 출판사에서 한문 문법의 집필을 부탁하였던 데서도 과연 한문의 대

    가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겠다.

    또 선생님은 음성, 음운론에도 깊은 학문적 업적을 남기었다. 앞에서 형태론을

    말할 때 언급하였지마는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학문적 생명을 유지하고 있

    는 소리갈 논문에는 “ l ’의 역행동화문제 - 그 원리와 처리 방법-’과 ‘모음상대법 칙과 자음가세법칙’의 두 편이 있다. 전자의 내용을 분석하여 보면 “ l ’역행동화 의 근본 원리’는 ‘원래 어떤 소리를 물론하고 실제 연음으로 말할 때에는 웃음절

    소리를 낸 입모양은 그 소리의 끝을 막기 전에 다음 음절 소리를 낼 준비 자세를

    취함으로 자연 소리에 이변이 생기는 일이 많은데, 이른바 흘소리조화라든지 닿

    소리접변이라든지 또는 여러 가지 음편 같은 것들도 대체로 이런 이유에 인함이

    니, ‘ l ’역행동화도 그 근본 원인은 여기에 있다’ 하고 ‘ 1 ’는 혀높은 앞흘소리로 서 ‘ }, ~,...l-,'-,-’ 들에 반하여 ‘ l ’만이 헛몸이 높으면서 앞을 얄게 열어 나 는 소리이므로 ‘}, i , -1.-, ,,-’ 퉁 혀낮은 소리를 내고 잇달아 ‘ 1 ’를 내고자 할 때는 헛몸이 갑자기 먼 거리인 입천장 가까운 자리로 옮겨 가기 위하여 웃음

    절 흘소리의 끝을 다 거두기 전에 혀가 벌써 ‘ 1 ’를 낼 자리로 옮겨 갈 자세를 먼 저 취함으로 인하여 자연히 웃음절 흘소리의 끝이 혹은 강하게 약하게 ‘ l ’소리 로 화해지는 것이다’라고 덧붙여 설명하였다. 그리고, ‘ l ’역행동화를 제1부류(중 간에 다른 닿소리가 끼이지 아니하고 웃음절 흘소리와 아래 음절 ‘ l ’가 직접 연 발하는 부류), 제2부류(중간에 .." 견, 0 승 , 디 , 님, 쿄 들이 끼인 부류) , 제3부

  • 건재 정인숭 선생의 생애와 학문 17

    류(중간에 λt ^, *-, L , C , E , è.이 끼인 부류)의 셋으로 나누고, ‘ l ’역행동화 문제는 제l부류와 제2부류에 한정되는데 그 어휘의 처리 방법을 다음 두 가지로

    말하였다. 첫째, 실제의 어음으로 보아 그 동화의 정도가 심하여 도저히 어법에

    일치되는 발음으로 회복하기 어려운 것은 그 현실음을 쫓되, 가능한 한 어법 조

    직을 돌아보는 정도로 그칠 것(예, 깨다-까이다, 내다-나이다, 내이다) , 둘째, 현

    실 언어의 조직체계에 상치 혹은 불편한 점이 없는 한에서는 동화된 그대로를

    잡는 것(예, 새끼-사끼, 새기다-사기다), 둥과 같이 낱말의 처리 방법을 제시하

    였다. ‘모음상대법칙과 자음가세법칙’에서 먼저 ‘모음상대법칙’을 보면, 모음은 대

    소상대와 광대상대가 있는데 전자는 저모음과 고모읍의 대립에 의하고 후자는

    전설모음과 후셜모음과의 대립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하고 모음상대 예를 13가지

    로 구분, 설명하였다. 즉 개 대 꺼’, ‘ t 대 1’, ‘놔 대 궈’, ‘내 대 궤’, ‘...L 대 .,’, ‘뇌 대 귀’, ‘μ 대 TT’, ‘ } 대 -’, ‘ R 대 」’, ‘ t 대 l ’, ‘ } 대 l ’, ‘ H 대 1 ’ 퉁이 있음을 설명하였다. 모음특수상대법칙에는 (1) 복합상대법(예, 괄괄-궐궐, 와글

    와글-워글워글 ... ), (2) 병합상대법(예, 볼끈-불끈, 아스스-으스스, 아싹-어썩…) , (3) 교차상대법(예, 만만하다-문문하다, 바스스하다-부스스하다 〈넓은작은모음 대 좁은큰모음〉 고-그, 요것-이것, .. .

  • 18 새국어생활 제6권 제3호(’96년 가을)

    사전의 풀이 하나하나를 보면 설명을 덧볼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밖에, 선생님은 해방 후에 읽을 거리가 없었던 과도기에 ‘한글 독본’을 만들

    어 읽기 교육에 이바지하신 것도 선생님의 학문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보아지며,

    그후 계속하여 표준 중둥 말본, 표준 옛글, 표준 문예 독본, 표준 고등 알본 등

    교과서를 저술하였으니 이 모두가 선생님의 학문의 결정체가 아닐 수 없다.

    끝으로 덧붙이고 싶은 것은 선생님은 한글 운동가이면서 도덕군자였다. ‘한글

    운동개략(1949) ’, ‘가로쓰기 문제(1949) ’, ‘해방 한글의 10년 (1955) ’, ‘농촌계몽에

    대한 나의 기대 (1956 ) ’, ‘외국어 남용에 따른 우리말의 혼란(1973) ’, ‘한글 운동과

    이융재 선생 (1973) ’, ‘국어 운동 50년 (1977) ’, ‘나의 국어 생활을 돌아봄(1983) ’

    등 한글 운동에 관계되는 글을 많이 썼을 뿐 아니라 실제 강연 등을 통하여 한

    글 전용 운동에 크게 애쓰시기도 하였다. 언젠가 건국대학교 개교기념 특별 강연

    회에서 우리 나라가 해방된 것은 첫째로 애국지사들이 해외에서 독립투쟁을 한

    때문이요, 두 번째로는 나라 안에서의 애국지사들이 투쟁한 때문이며, 세 번째로

    는 한글 학회에서 한글을 연구하여 이로써 무지했던 국민들을 일깨운 계몽 운동

    을 펼침으로써 국민들의 마음속에 애국심이 싹터서 해방 운동을 한 때문이라고

    하였다. 미국이나 연합군의 힘에 의하여 광복을 되찾았다는 말씀은 절대로 하지 -

    않았다. 그만큼 선생님은 애국자요, 한글의 힘이 얼마나 큰 가를 가르쳐 오신 위

    대한 한글 학자였다

    또 선생님은 학자요 애국자이기 이전에, 현대 사회가 스숭으로 모셔야 할 도덕

    군자였다. 평소 남의 장점을 말하여 칭찬하시되, 단점은 절대로 말씀하지 않으셨

    고 특히 선생님과 사이가 좋지 않은 분에 대하여는 절대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아무리 생활이 어려워도 남의 길흉사에는 빠지는 법이 없었고 집안과 당신에 관

    한 자랑이 될 만한 말씀은 더더욱 하지 않으셨다. 평소 도리에 벗어난 말씀은 하

    지 않으셨고 꼭 필요한 말씀만 하시니 자연히 과묵하실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

    이 점잖게 살다 가신 애국자요, 선각자이며 학자였던 선생님의 일생은 길이 이

    강산을 밝게 하여 주는 빛이 되리라 믿으면서 끝을 맺는다.

    참고문헌

    박지홍(1987) • 풀이한 훈민정음, 서울, 과학사.

    조오현(1995) • “정인승 .. 주시경 학보 17집.

    정인숭(1972) • “남기고 싶은 이야기 조선어학회 사건” -, 중앙일보 제 2223호

  • 건재 정인승 선생의 생애와 학문 19

    -2247호.

    정인승(1937) , “ l 의 역행동화 문제”, 한글 제41호, 한글 학회. 정인승(1938) , “모음상대법칙과 자음가세 법칙”, 한글 제60호, 한글 학회.

    한글 학회 (1986) , “건재 정인숭 선생 구순 기념 특집”, 한글 제 191호.

    한글 학회 편(1993) , 얼음장 밑에서도 물은 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