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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문화단 보수교육 1 경운궁/덕수궁 慶運宮/德壽宮 Ⅰ. 경운궁/덕수궁의 역사를 알아봅시다! 1. 들어가며 2. 국난 극복의 상징, 정릉동 행궁(行宮) 1) 선조와 임진왜란 2) 광해군과 '경운궁' 3) 인조반정 그리고 역사의 뒤편으로 3. 경운궁(慶運宮)의 부활과 대한제국, 그리고... 1) 아관파천과 경운궁 중건 2) 황제국의 정궁이 되다 3) 쇠퇴와 훼손 4. 오늘날, 덕수궁(德壽宮) Ⅱ. 현장 둘러보기 1. 대한문(大漢門) 1) 5대 궁궐의 유일한 동쪽 정문, 대한문 2) '대한'의 의미 3) 대한문 이동의 역사와 소맷돌 4) 수문장 교대식 5) 서울광장, 혹은 대한문 광장 2. 금천교(錦川橋) 1) 금천교 앞 하마비 2) 다리의 기능 3) 금천과 건천, 복원 4) 총알자국과 6.25 - 미군 에피소드 3. 중화전(中和殿); 정전(正殿) 일원 1) 중화문: 행각과 서수 2) 조정과 박석 3) 삼도 4) 품계석 5) 답도 6) 중화전 7) 단청 8) 잡상 9) 어좌와 닫집 그리고 일월오봉도 10) 천장의 황룡 11) 드므 12) 향로 4. 광명문(光明門) 1) 문이 이동된 역사 2) 자격루 3) 신기전 4) 흥천사지 종 5. 석조전(石造殿) 1) 이름의 의미와 건축 역사 2) 건물 구조 3) 석조전 서관 4) 오얏꽃 무늬 5) 해방 이후 용도 6) 의민태자(영친왕),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6. 준명당(俊眀堂) 1) 건립시기 및 역사 2) 덕혜옹주 7. 즉조당(卽祚堂) 1) 덕수궁의 뿌리 2) 변천사 8. 석어당(昔御堂) 1) 덕수궁의 또 다른 뿌리 2) 왜 단청이 칠해지지 않았을까? 9. 덕홍전(德弘殿) 1) 비명에 간 아내를 위한 공간 2) 접견실로서의 덕홍전 10. 함녕전(咸寧殿) 1) 황국의 마지막 침전 2) 온돌 시스템과 후원 3) 밤낮이 바뀐 일상생활 4) 대화재의 장소 5) 왕의 하루 11. 정관헌(靜觀軒) 1) 덕수궁의 후원, 정관헌 2) 건축양식 3) 정관헌 논란 4) 고종은 최초의 바리스타다? 5) 러시아와 대한제국 ※ 부록: 2011.11 덕수궁 명칭 검토 공청회

덕수궁 교육자료 REV.2015.05 · Let’s check! 경복궁 VS 경운궁 중건 흥선대원군이 1866년 경복궁을 복원한 것은 조선 초기 창건 때의 모습을 따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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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운궁/덕수궁慶運宮/德壽宮

    Ⅰ. 경운궁/덕수궁의 역사를 알아봅시다!1. 들어가며

    2. 국난 극복의 상징, 정릉동 행궁(行宮)1) 선조와 임진왜란2) 광해군과 '경운궁'3) 인조반정 그리고 역사의 뒤편으로

    3. 경운궁(慶運宮)의 부활과 대한제국, 그리고...1) 아관파천과 경운궁 중건2) 황제국의 정궁이 되다3) 쇠퇴와 훼손

    4. 오늘날, 덕수궁(德壽宮)

    Ⅱ. 현장 둘러보기1. 대한문(大漢門)

    1) 5대 궁궐의 유일한 동쪽 정문, 대한문2) '대한'의 의미3) 대한문 이동의 역사와 소맷돌4) 수문장 교대식5) 서울광장, 혹은 대한문 광장

    2. 금천교(錦川橋)1) 금천교 앞 하마비2) 다리의 기능3) 금천과 건천, 복원4) 총알자국과 6.25 - 미군 에피소드

    3. 중화전(中和殿); 정전(正殿) 일원1) 중화문: 행각과 서수2) 조정과 박석3) 삼도4) 품계석5) 답도6) 중화전7) 단청8) 잡상9) 어좌와 닫집 그리고 일월오봉도10) 천장의 황룡11) 드므12) 향로

    4. 광명문(光明門)1) 문이 이동된 역사2) 자격루3) 신기전4) 흥천사지 종

    5. 석조전(石造殿)1) 이름의 의미와 건축 역사2) 건물 구조3) 석조전 서관4) 오얏꽃 무늬5) 해방 이후 용도6) 의민태자(영친왕),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6. 준명당(俊眀堂)1) 건립시기 및 역사2) 덕혜옹주

    7. 즉조당(卽祚堂)1) 덕수궁의 뿌리2) 변천사

    8. 석어당(昔御堂)1) 덕수궁의 또 다른 뿌리2) 왜 단청이 칠해지지 않았을까?

    9. 덕홍전(德弘殿)1) 비명에 간 아내를 위한 공간2) 접견실로서의 덕홍전

    10. 함녕전(咸寧殿)1) 황국의 마지막 침전2) 온돌 시스템과 후원3) 밤낮이 바뀐 일상생활4) 대화재의 장소5) 왕의 하루

    11. 정관헌(靜觀軒)1) 덕수궁의 후원, 정관헌2) 건축양식3) 정관헌 논란4) 고종은 최초의 바리스타다?5) 러시아와 대한제국

    ※ 부록: 2011.11 덕수궁 명칭 검토 공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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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Ⅰ. 경운궁/덕수궁의 역사를 알아봅시다!

    1. 들어가며1)

    서울의 한복판,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있으나 그만큼 존재감을 주지 못하는 곳이다. 덕수궁이 조선 역사 마지막 지어진 궁궐이자, 황제국(皇帝國) 대한제국의 정궁이었단 사실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역사의 무게를 지닌다. 그럼에도 그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음은 덕수궁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준다.덕수궁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궁궐이나, 그 존재와 함께 역사도 묻혀 있었다. 근대기 우리 역사는 개항(1876)과 아관파천(1896), 을사늑약(1905)과 국권피탈(1910)이라는 굵직한 사건들로 이어졌고, 그 사건들은 덕수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으나 그곳에 덕수궁의 자리는 없었다. 따라서 이곳의 역사를 복원하고 살펴보는 것은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의 현장을 재현해내는 작업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겠다.덕수궁은 고종 황제가 강제로 황제에서 물러난 1907년부터 1919년까지 황궁 당시의 궁역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1919년 고종 황제 승하 후 궁역이 여러 가지 이유로 잘려나가고 전각이 훼손되며 그 위상이 급속히 약해졌다. 결과적으로 덕수궁은 경희궁(慶喜宮) 다음으로 가장 많이 훼손된 궁이 되었다. 동시에 도심 공원으로 사용되었기에 무늬만 궁궐이지 궁궐의 격을 찾기란 매우 힘든 모습을 갖게 되었다.이러한 위상은 광복 이후에도 이어졌다. 광복 후 전쟁, 분단 체제, 보릿고개 등 덕수궁을 챙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덕수궁이 다시 주목받은 것은, 과거 선원전 터에 위치했던 경기여고가 강남으로 옮겨간 자리에 미국이 대사관과 직원 숙소를 지을 예정이라는 발표가 파문을 일으키며 비로소 시민들이 궁역을 보호하고자 한 일에서 비롯되었다.덕수궁을 이야기하는 것은 조선왕조를 정리하는 기회이자 우리 선조들이 새로운 시대를 어찌 맞이하고자 했는지를 살펴보는 기회다. 덕수궁은 조선왕조 최후의 궁궐인 동시에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의욕적으로 건설한 황궁이기 때문이다. 근대 국가를 건설코자 했던 우리 근대사, 식민지화에 대항했던 근대 조선의 역사를 복구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1) 『궁궐의 눈물, 백년의 침묵』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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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국난 극복의 상징, 정릉동 행궁(行宮)

    1) 선조와 임진왜란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의주까지 피난을 갔던 14대 임금 선조가 이듬해(1593) 한양에 돌아왔을 때, 한양에는 임금이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었다.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선조가 거처로 정한 곳은 조선 7대 왕 세조(世祖)의 장손이었던 월산대군(月山大君)의 개인 저택이었다. 이곳이 바로 정릉동 행궁(貞陵洞 行宮)이자 경운궁의 시작이다. 당시 차츰 면적을 넓혀가며 궐문 밖에 두었던 관청들을 궁궐 안에 들게 하였다 하는데,2) 정확한 규모와 영역에 대해서는 별도의 기록이 없다. 선조는 1608년 2월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정무를 보았다.

    2) 광해군과 ‘경운궁’그를 이은 광해군은 경운궁 서청(西廳)에서 즉위3)한다(1609). 광해군 3년 왕이 창덕궁을 정궁으로 삼아 거처를 옮기며 비로소 정릉동 행궁은 ‘경운궁’이란 정식 명칭을 갖게 된다.4) 광해군은 즉위 기간 동안 경운궁 일부를 수리케 하거나 잠시 거처로 삼는 등 창덕궁의 이궁(離宮)으로서 기능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희궁(당시 경덕궁) 공사에 경운궁 전각들을 헐어서 그 자재를 사용하면서부터 점차 축소되어 간다.

    3) 인조반정 그리고 역사의 뒤편으로광해군 즉위 기간 중 경운궁엔 그의 계모인 인목대비가 유폐되어 10여 년 동안 생활한 바 있다, 그 당시에는 서궁(西宮)이라 낮춰 불리기도 했다. 이후 인조반정을 통해 광해군이 왕위에서 쫓겨나고 인조가 즉위하게 된다. 인조는 광해군을 당시 석어당에서 지내던 인목대비 앞으로 끌고 가서 죄를 물었고, 같은 날 즉조당에서 왕위에 오른다. 인조는 즉위 후 곧 창덕궁으로 이어했고, 그 해 7월 선조가 침전으로 쓰던 두 군데(석어당/즉조당)을 제외하고 경운궁에 딸린 가옥을 원주인에게 되돌려 주게 했다. 이후 고종 대에 이르기까지 경운궁은 270여 년 이상 역사 속에서 묻혀 지냈다.

    2) 선조는 계림군 사저 옆에 위치하던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의 집을 동궁(東宮)으로 삼고, 영의정 심연원(沈連源)의 집을 종묘(宗廟)로 삼았다. 이후 1597년에 담을 둘러쌓았고, 1607년 4월에는 북쪽에 별전(別殿)을 세우며 점차 궁궐로서의 모습을 갖춰나갔다 한다.

    3) 서청이 어느 곳인지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정전을 기준으로 동서남북을 나누는데, 당시 정전의 기능을 수행한 건물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 즉조당 서편의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4)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3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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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경운궁(慶運宮)의 부활과 대한제국, 그리고...

    1) 아관파천과 경운궁 중건경운궁이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한 것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통해서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자마자 곧바로 경운궁의 수리를 명령했고, 왕태후(王太后)와 태자비(太子妃)5)는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겨 생활하게끔 한다. 1896년 9월 1차 수리가 완료되자 경복궁에 모셨던 황후의 빈전과 혼전, 그리고 진전(眞殿)6)을 경운궁으로 옮겼다. 뒤이어 명성황후의 국장을 치렀다. 이는 경운궁이 과거의 행궁(行宮)에서 새로운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 동안 수시로 경운궁의 수리 공역을 직접 챙기고 경운궁에서 신하를 만나 정사를 의논했다고 한다.

    ◎ Let’s check! 경복궁 VS 경운궁 중건

    흥선대원군이 1866년 경복궁을 복원한 것은 조선 초기 창건 때의 모습을 따랐다 알려져 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복원을 통해 왕조 창건 당시의 건국 정신을 회복하며 절대군주로서의 위상을 과시하고자 했다.(역사적 상징) 이는 국내외적 위기에서 탈출하는 모델을 조선 개국에서 찾고나 했던 대원군이 뜻이 담긴 사업이기도 했다. 복원된 전각은 총 7200칸에 달했는데, 터의 넓이가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친 면적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건축 밀도가 매우 높음을 알 수 있다.(창덕궁과 창경궁의 칸수는 4000칸)반면 경운궁은 조선 독립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한 차원의 건설 행위였다. 특히 경운궁이라는 장소의 상징성에 주목했다. 개국 이래 큰 위기였던 임란을 극복해낸 장소로서의 상징성을 이어받고자 한 것이다. 고종이 경복궁 대신 경운궁을 택해 경운궁을 정궁으로 삼아 대한제국을 선포한 데에는 복합적 요인이 작용했지만, 국난 극복의 장소라는 역사성 또한 의식했으리라 판단된다. 또한 1880년대 이래 경운궁 터 일부는 이미 서구 열강의 공사관 부지로 이용되고 있었다. 경운궁이 중건될 때는 각국 공사관 사이에 들어선 형국이었고, 서구 열강 사이에서 새로운 정치적 거점을 가다듬고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을 피하고자 하지 않았을까 역시 추측할 수 있다.

    5) 조선 왕조는 1895년 1월 7일 강령을 발표하며 국왕의 칭호를 ‘대군주(大君主) 폐하’로 격상시켰다. 이에 따라 기존의 왕실 호칭 역시 ‘왕태후 폐하, 왕후 폐하, 왕태자 전하’ 등으로 변했고, 모든 격식 용어 또한 ‘황제’칭호를 제외하고는 황제에 준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는 중국과의 종속관계를 끝내고 완전한 자주국임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지라 할 수 있겠다. 다만 서양의 언어로 번역할 때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KING’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고종이 황제가 되면서 위의 칭호는 폐지되었다.

    6) 왕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봉안, 향사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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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황제국의 정궁(正宮)이 되다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어한 고종은 그 해 10월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아관파천을 통해 러시아의 힘을 끌어올 수 있었던 고종은 이를 통해 청나라와 일본의 압박을 벗어나려 애썼다. 황제 즉위는 이러한 노력의 결과였다.고종은 “청나라와 일본 모두 황제, 천황을 칭하는데 우리만 왕을 칭하여 스스로 비하할 이유가 없다. 황제가 없으면 독립도 없다는 일반인의 의식을 고려할 때 황제 즉위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논리를 펼쳤다. ‘황제=독립’이란 인식은 전근대사회의 의식으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중국과의 오랜 관계 속에서 형성된 의식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제후국에 붙여지는 왕이라는 칭호를 벗어남이 중국과 대등한 관계이며 즉 독립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종의 황제 즉위는 단순히 자신의 권력을 회복하는 차원이 아니라 국민의 결속을 통해 국가의 면모를 일신하려는 의지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경운궁의 공사는 대한제국 출범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마침내 1900년 1월 마무리되었다. 이로써 경운궁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최초의 황제국인 대한제국의 첫 황궁이 되었다. 전성기 당시 경운궁은 현재 넓이의 3배에 달하는 큰 궁궐이었다.

    3) 쇠퇴와 훼손러일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절대적 힘의 우위를 확보한 일본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1907년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대하제국의 대표를 파견한 일이 빌미가 되어, 고종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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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황제의 위에서 강제로 물러나게 되었다. 경운궁의 궁궐로서 권위와 신성성은 물론, 근대 국가로 발돋움하려는 고종의 의지를 상실케 한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고종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순종은 같은 해 11월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겼고, 자연스럽게 경운궁의 위상은 황궁에서 선황제가 거처하는 궁으로 내려갔다. 이때부터 경운궁은 고종의 장수를 바란다는 의미로 ‘덕수궁(德壽宮)’이라 불리게 된다. 고종 생존 시까지 덕수궁의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았으나, 1912년 태평로 도로개수를 위해 덕수궁 동측 부지 1621평, 경성궁 택지 331평이 잘려나간 것을 시작으로 덕수궁 궁역은 빠르게 해체되었다. 덕수궁 변화는 고종 서거와 함께 본격화되었다. 빈 궁궐로 남았던 덕수궁은 1920년 2월 선원전을 창덕궁 선원전으로 옮긴 후 철거되기 시작해 조선은행, 경성일보사 등 여러 기업체에 매각된다. 1922년 의효전(懿孝殿) 터에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 흥덕전(興德殿)과 흥복전(興福殿) 터에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가 세워지는 등 훼손이 계속되었다. 1931년에는 덕수궁의 ‘중앙공원’화 계획이 발표되었고, 전각 철거 및 석조전 미술관으로 개조 등을 거쳐 덕수궁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1938년에는 석조전 서관이 이왕가미술관으로 개관되며 전면에 분수대를 포함한 서양식 공원이 조성되었다.

    4. 오늘날, 덕수궁(德壽宮)

    해방 뒤의 혼란, 6.25전쟁을 겪으며 덕수궁의 궁역과 건물들은 훼손과 퇴락을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렀고, 현재 1만 8,600여 평에 그치고 있으며, 원래의 70퍼센트 정도가 사라질 만큼 훼손되어 있다. 급격히 심화되는 서울 도심의 교통난을 해소하고자 도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덕수궁 궁역은 더욱 축소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오늘날 덕수궁은 옛 궐내각사 터 위에 조성된 서울광장과 함께 많은 시민이 찾는 도심 궁궐이 되었다. 대한제국 출범과 함께 하며 한국 현대사의 목격자가 된 덕수궁은, 임진왜란과 대한제국기의 역사적 격변을 겪은 궁궐로 국난 극복의 상징적 공간이자 그 중심지다. 또 전통 규범 속에서 서양 건축을 수용한 궁궐이자 주변 환경에 맞춰 건축된 도시적 건축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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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Ⅱ. 현장 둘러보기: 시나리오를 구성해봅시다!

    ① 대한문(大漢門)

    ② 금천교(錦川橋)

    ③ 중화전(中和殿)

    ④ 광명문(光明門)

    ⑤ 석조전(石造殿)

    ⑥ 준명당(浚眀堂)

    ⑦ 즉조당(卽阼堂)⑧ 석어당(昔御堂)

    ⑨ 덕홍전(德弘殿)

    ⑩ 함녕전(咸寧殿)

    ⑪ 정관헌(靜觀軒)

    ※ 잠깐!경운궁(덕수궁)의 건물들은 1904년 함녕전에서 비롯된 대화재로 인해 대부분이 불타버렸다. 이후 2년여에 걸쳐 새로이 중건되었다. 오늘날 덕수궁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1901년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7) ‘정관헌’이다.

    7) 명확한 기록은 없으며, 1901년 2월 5일 “태조의 영저을 정관헌에 모시기로 했다”는 기록에 근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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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한문(大漢門)

    1) 5대 궁궐의 유일한 동(東)쪽 정문, 대한문조선의 모든 궁궐은 정전(Throne Hall)을 기준으로 남문(南門)을 정문으로 삼는다. 반면 덕수궁은 유일하게 동문(東門)인 대한문을 정문으로 삼고 있다. 궁궐 정문으로는 유일하게 단층 건물이다. 원래 정문은 남쪽에 위치한 ‘인화문(仁化門)’이었다. 인화문은 대한제국 출범 이후에도 궁의 정문 역할을 수행했지만, 그러기엔 앞길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일단 길 자체가 좁았고, 인화문 앞으로 물길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또한 전통적인 중심가인 광화문 앞 육조거리와 경운궁을 잇는 오늘날의 태평로 거리가 조성되며 경운궁 동쪽이 도시의 새로운 중심이 되었고, 경운궁의 원활한 기능 수행이 필요했다. 이러한 사정은 1898년 최초의 ‘대안문(大安門)’ 건설로 이어진 것이다.이후 기존의 인화문은 사실상 정문의 기능을 상실해갔고 대안문이 그 위치를 대신했다. 1900년 대안문에 월대와 용두석을 두었는데, 궁궐의 정문만이 갖출 수 있는 장치라는 점을 고려하면 대안문의 지위가 몹시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인화문은 1902년 중화전 건설 이전에 적정 공간 확보를 목적으로 철거되었으며, 대안문이 정식으로 정문으로 거듭났다. 1904년 대화재 이후 1906년 중건되며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대안문/대한문 인화문

    2) ‘대한(大漢)’의 의미1907년 1월 편찬된 『경운궁중건도감의궤』에는 대한문의 상량문(上樑文)8)이 수록되어 있는데, 직접적으로 풀이하면 ‘큰 하늘이란 뜻을 담아 서울이 창대해진다(세력이 크고 왕성해진다)’라는 의미다. 다시금 풀이를 해보면 ‘대한제국이 강성해진다’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광화문, 돈화문 등 다른 4대 궁궐의 정문 이름과는 확연히 다르다.9)원래 대한문의 이름이었던 대안문(大安門)은 국태민안(國泰民安), 즉 나라를 태평하고 백성을 편안히 한다는 문장에서 비롯되었다.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꾸고 중건되었던 당시는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국가적 위기에 봉착했던 시기다. 이를 감안했을 때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당시 왕(고종)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8) 새로 짓거나 고친(중수 또는 중건) 집의 내력, 공역(工役) 일시 등을 적어둔 글9) 4대 궁궐의 정문은 각기 광화문(경복궁), 돈화문(창덕궁), 홍화문(창경궁), 흥화문(경희궁)이다. 모두 화

    (化)가 들어가 있다. ‘화’는 기본적으로 교화(敎化)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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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대한문 이동의 역사와 소맷돌현재 대한문은 1906년 중건된 모습 그대로나 그 위치는 많이 달라져 있다. 1912년 공사를 통해 덕수궁 권역이 한차례 좁아졌을 때에도 덕수궁 위치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1914년 도로를 건설한다는 이유로 문 오른쪽에 있던 건물 및 담장이 모두 일제에 의하여 크게 파괴되었고, 이때 대한문도 궁 안쪽으로 옮겨졌다. 1968년 태평로 확장 공사로 인해 섬처럼 남아 방치되었던 대한문은 2년 후인 1970년 오늘의 자리로 다시 뒤로 물러났다. 이 때 대한문을 오르내리던 월대와 계단은 지하에 묻혔고, 소맷돌과 서수만이 지상에 별도로 노출되어 있다. 현재 대한문은 오늘날보다 33미터 앞에 위치해 있었다.

    4) 수문장 교대식10)교대를 앞둔 두 무리의 수문군이 대한문 앞에서 마주한다. 수문군을 빙 둘러 포위한 형세다. 엄고수(북을 치는 이)의 힘찬 손동작이 허공을 가른다. 둥! 둥! 둥! 세 번의 북소리. 수문장 교대의식을 알리는 개식 타고다. 수문장의 인솔 아래 궁 주변을 순찰하던 교대군이 궁성문에 도착한다. 의식을 위한 모든 준비를 완료한다. 엄고의 북소리가 울린다. 두 수문군의 가운데로 감독관에 해당하는 녹색 단령 차림의 승정원 주서와 궁성의 기물과 열쇠를 관장하는 액정서 소속의 사약이 나온다. ‘군호 응대!’ 하는 힘찬 울림이 퍼지면 양군의 참사가 군호를 확인한다. 군호는 서로의 신원을 확인하는 일종의 암호다. 병조에서 세 글자 이내로 국왕께 보고하면 승정원을 통해 내려온다. 승

    10) 출처: 서울시 공식 관광정보 사이트 http://visitseou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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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 주서가 동참하는 이유다. 승정원 주서가 수문장과 수문군에게 군호를 알려준다.이어 ‘초엄’ 하는 참하의 외침에 따라 수문군들이 ‘초엄’을 복창하고 다음 의식이 이뤄진다. 교대의식의 첫 번째 절차를 알리는 신호로 나각과 나발 소리가 여섯 번 울린다. 군악을 담당하는 취라척과 관람객은 최소한의 걸음만을 유지한 채 자리한다. 궁성문의 열쇠가 들어 있는 약시함의 인계가 이뤄지며 본격적인 수문장 교대의식에 들어간다. 수문군의 참하가 수문장에게 약시함을 전달하는데, 약시함에는 궁성문의 열쇠가 들어 있다. 열쇠가 가지는 상징성은 의식에도 고스란히 스며든다. 이 과정을 승정원 주서와 액정서 사약이 지켜본다.참하의 ‘중엄’ 하는 외침과 수문군들의 복창, 드디어 교대 의식의 두 번째 절차가 시작된다. 이를 알리는 나각과 나발 소리가 세 번 엄고를 울리면 양 수문장들이 인사 후 부신을 맞추고 순장패를 인수인계한다. 부신은 두 조각으로 나뉜 나뭇조각인데 둘이 이빨을 맞춰 한 짝을 이룬다. 일종의 신분 확인서다. 마지막 절차는 ‘삼엄’이다. ‘향전’이라는 외침에 따라 수문군들이 자리를 이동해 얼굴을 마주하는 ‘면간’ 교대의식을 치른다. 수문장들에 이은 수문군간의 교대의식이다. 마지막으로 참하가 한 번 더 ‘향전’이라고 외치면 모든 절차가 끝난다. 교대를 마친 수문군은 숭례문까지 순라를 한다. 교대의식은 총 20분 정도 소요된다. * 일시: 오전11시, 오후2시, 오후3시30분 (월요일 휴무)

    5) 서울광장, 혹은 대한문 광장오늘날 전 세계 대도시엔 각 도시를 상징하는 대형 광장이 있다. 사람들은 광장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대중에 알려주곤 하는데, 역사적으로 모두 중요한 사건은 이러한 광장에서 일어나곤 했다. 런던의 트라팔카 광장을 비롯해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 로마의 포폴로 광장,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 등이 그러하다. 한국에도 이러한 광장이 있는데, 바로 태평로 길을 사이에 두고 대한문 앞에 펼쳐 있는 ‘서울 광장’(Seoul Square)이다. 보통 2002년 월드컵 때 수백만 명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응원한 모습이 기억되곤 하지만, 사실 서울 광장은 각종 정치 이슈와 관련된 집회나 행사, 페스티벌 등이 열린다. 특히 1980년대 한국 민주화 시위의 상징이기도 하다. 사실 이러한 대한문 앞 서울 광장 역사는 덕수궁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원래 광장 부분은 덕수궁 권역 특히 궐내각사에 속해 있었다. 궁 앞으로 곧게 뻗은 하나의 길만을 가졌던 경복궁과 달리, 대한문 앞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육조거리와 연결되는 새로운 길을 개설하고 동쪽으론 을지로로 연결되며, 남쪽으론 남대문 그리고 동남으로는 환구단을 지나 남대문로와 연결되는 사통팔달 도로 체계의 중심에 있었다. 또한 덕수궁 대한문 앞은 백성들이 여러 정치적 이슈에 대해 시위를 벌인 장소이기도 하다. 1905년 을사늑약이 대표적 사례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백성들이 이곳 광장에 모여 대한독립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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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를 외치기도 했다.하지만 도로 확장 과정에서 덕수궁 동측이 잘려나가며 궁역의 일부가 광장이 되었고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칙임총대 홍종영·이범창 등, 제7차 상소 위해 대한문전에 집회·일본 헌병에게 이범창 등 피체” 1904.9.7.

    “이십사일 밤, 미국 의원단을 맞이한 후, 경성의 만세소요 진상. 정거장에서 비롯하여 남문 안 태평동, 구리개, 대한문 앞, 송로통 등 각처에서 수천의 군중 “독립만세”를 부르고 경관과 크게 격투하여 육혈포를 쏘아…” 1920.8.26.

    2. 금천교(錦川橋)

    1) 금천교 앞 하마비(下馬碑)대한문을 통과하면 좌측에 글자가 새겨진 제법 큰 비석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하마비(下馬碑)라고 한다. 비석에 새겨진 문장은 “대소인원(大小人員皆下馬)- 모든 이는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이 비석 앞에 다다르면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서 궁궐로 걸어서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원래 하마비가 이곳에 있었던 건 아니다. 당연히 정문 앞에 있었을 것이라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는 대한문 뒤에 위치해 있는데, 대한문이 옮겨질 때 하마비도 이곳으로 함께 옮겨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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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다리의 기능조선의 5대궁 모두 정문을 지나면 물이 흐르고 그 위로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의 이름을 금천교라고 한다. 금천은 비단 같은 물줄기라는 의미다. 신하들이 왕을 만나고자 입궁할 때 이 다리를 건너는데, 삿된 마음을 다리 밑 흐르는 물에 모두 버린다고 여겼다. 또한 이 다리를 기준으로 왕의 신성한 구역과 일반인들의 구역을 구분하기도 했다.

    3) 금천과 건천(乾川), 복원지금의 금천교는 1986년 땅 속에 묻혀있던 걸 다시 복원한 것이다. 하지만 흐르는 물(금천)이 없이 물길의 흔적만 남아있어 반쪽자리 금천교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대한문이 뒤로 옮겨지며 금천교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지는 바람에 금천교의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4) 총알자국과 6.25 – 미군 에피소드원래 금천교는 대한문과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대한문이 위치를 옮김에 따라 지금처럼 바로 뒤에 위치하게 되었다. 지난 1986년 공사 중 발굴되어 복원되었다. 오늘날 금천교를 보면 많은 구멍들을 볼 수 있는데, 6.25동란 중 생긴 총알 자국이다. 덕수궁은 한 때 북한군의 임시 기지로 사용되었다 한다. 당시 덕수궁은 미군에 의한 폭격의 위험이 있었으나, 제임스 해밀턴 딜(James Hamilton Dill) 중위의 결단으로 보존될 수 있었다. 딜 중위는 미 포병 장교로서 6.25 전쟁 당시 155미리 곡사포의 포격지점을 지시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 때 북한군 수백이 덕수궁을 임시 기지로 사용한단 보고를 듣고 이에 대한 포격을 고민하게 된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당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이 사령부로 사용했다 파괴당한 이탈리아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사례를 떠올리고는 북한군이 덕수궁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포격을 미루기로 결심한다. 실제 북한군이 덕수궁을 벗어난 후에야 포격 명령을 내렸고 북한군을 패퇴시킬 수 있었다. 딜 중위는 이 때 결심에 대해 ‘즉흥적 판단이 아니라 심사숙고하여 최선의 판단을 내리고 그대로 실천하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언급하며, ‘옛 왕궁을 살려 보존하는 것은 옛날의 생각이나 구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닌, 옛날의 모습을 보면서 그때의 사상과 체제에서 벗어나 오늘에 맞는 새로운 것을 항상 구성하고 만들어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지난 1996년 대한민국 정부는 딜 중위에게 감사패를 전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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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수궁 돌담길금천교를 통과하고 나면 중명전에 이르기까지 긴 대로가 놓여있다. 덕수궁의 역사를 비롯한 다양한 이야기를 이 지점에서 풀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돌담 건너편에 있는 ‘덕수궁 돌담길’에 대한 이야기는 어떨까?덕수궁 돌담길은 한국을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산책길 중 하나이며, 한국의 유명한 대중가요인 이문세의 ‘광화문연가’에 가사로 실리기도 했다. 전통 양식의 돌담 사이로 나 있는 길이 몹시 로맨틱하며, 특히 가을 시즌에 많은 연인들이 이 길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과거엔 ‘이 길을 걷는 연인들은 반드시 헤어진다.’라는 속설이 있었다. 과거 왕에게 사랑받지 못한 여인들이 덕수궁의 후원에 살았는데, 이들의 저주가 연인들에게 간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설득력 있는 근거는 과거 이 길 끝에 ‘서울가정법원’이 있었기에 이혼을 하러 가는 부부가 항상 이 길을 이용했다는 사실이다.

    3. 중화전(中和殿); 정전(正殿) 일원

    1) 중화문(中和門): 행각(行閣)과 서수(瑞獸)중화문은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의 정문이다. 중화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행각이 길게 늘어서 있었으나, 현재는 중화문만 덩그렇게 남아 있고 오른쪽에만 행각의 흔적만이 일부 남아있다. 현재 행각 일부는 덕수궁을 찾는 관람객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정문은 총 세 칸인데, 가운데를 어칸(御間)이라 하여 왕이 드나드는 문으로 삼고 양쪽은 문관과 무관들이 출입하였다. 일반적으로 정문 앞에는 돌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그 중앙에 마련된 어칸의 양쪽 경계선은 신수(神獸, 혹은 서수(瑞獸)라고도 함)가 배치되어 있다. 원통형의 몸을 가지고 있으며, 목 주변의 갈기와 정수리에 난 뿔을 찾아볼 수 있다. 정전 정문 계단의 신수상이 지닌 특징은, 정전을 등진 채 앞을 주시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경호(왕)와 경계(사악한 기운)의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 천원지방(天圓地方)전통적으로 우리 조상들은 땅은 네모지며 하늘은 둥글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은 특히 궁궐 곳곳에도 반영되었는데, 중화문 기둥을 받치고 있는 2단의 초석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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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전을 둘러싼 행각은 고종 승하(1919) 후 대부분 없어졌는데, 행각은 원래 정전의 역할을 한정해주는 동시에 창고나 관련 관리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행각이 언제 없어졌는지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1910년 석조전 1938년 석조전 서관이 완공되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두 건물의 준공과 행각의 소멸이 연계되었으리라 판단된다. 중화전 행각 영역이 석조전과 석조전 서관 그리고 정원 영역과 중복되며 행각이 철거되었다고 판단된다.

    2) 조정(朝廷)과 박석(薄石)정문을 들어서면 눈앞에 펼쳐진 넓은 마당을 조정(朝廷)이라고 하며, 그 조정에 깔린 거친 돌들을 박석(薄石)이라 한다. 박석은 햇빛을 산란시켜 반사시키지 않음으로서 정전에서 치르는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눈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비가 왔을 때 걷는 이들이 미끄러지지 않고 조심히 걷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조정’은 북쪽이 남쪽보다 약 1m 차이를 두고 높게 만들어졌는데, 여기엔 두 가지 의도가 있다. 첫째로 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며 빠지도록 하는 것이며, 또한 자연스럽게 정전 건물이 높게 보이게 하려는 시각적 효과를 주고자 함이다.

    3) 삼도(三道)정문으로부터 정전으로 향하는 곧은길을 의미한다. 오로지 왕만이 가운뎃길을 사용할 수 있었다. 문관은 정문을 기준으로 동쪽의 길을, 무관은 서쪽 길을 이용했다. 임금이 정전에 앉아 신하들을 맞이할 때, 임금의 시선을 기준으로 왼쪽이 문관이 출입하여 서는 곳이고, 반대쪽이 무관들이 서는 곳이다. 이는 전통적으로 동쪽(임금의 왼쪽)을 서쪽보다 더 높게 여겼기 때문이다.원래 삼도는 정문에서부터 정전에 이르기까지 죽 이어져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덕수궁의 경우 삼도가 중화문에서 중화전까지 짧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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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품계석관리들의 서열을 보여주는 돌로, 문관과 무관은 행사 때 이 품계석에 맞추어 줄을 섰다. 각 품계석에는 정1품부터 종9품까지 18개가 새겨져 있으며, 좌측에는 무반(武班)이, 우측에는 문반(文班)이 각 지위와 계급에 따라 시립했다.

    5) 답도(踏道)답도는 어가를 탄 임금이 지나다니는 길이다. 일명 단폐석(丹陛石)이라 불리는데, 원래 신령에게 존경심을 표시하는 뜻으로 설치하는 계단석으로 궁궐에 설치된 답도 역시 여기서 비롯되었다. 국왕이 중화전에 오르는 계단 가운데 설치되어 있다. 중화문과 마찬가지로 서수가 배치되어 있는데, 상하 월대를 오르는 돌계단에 서수가 각각 4마리가 배치되어 있으며, 그 중 국왕이 오르는 가운데 ‘어계’에 답도를 설치하였다. 덕수궁의 답도에는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희롱하는 용 두 마리가 새겨져 있는데, 오대 궁궐 정전의 답도 가운데에 용을 새긴 곳은 오직 덕수궁 중화전뿐이다. 덕수궁 답도에 용이 새겨지게 된 것은 중화전이 대한제국 출범 이후에 지어진 건물이기 때문이다. 태평성대와 성군을 의미하는 봉황과 달리, 직접적으로 왕(황제)을 표현하는 상징(용)을 새겼다는 것은 대한제국이 세계 질서 속에서 당당하게 주권 국가로서 한 축으로 자리 잡겠다는 의지를 유추할 수 있다. 또한 덕수궁이 황제의 궁전임을 잘 보여준다.

    (좌)중화문 (우)중화전

    ※ 다른 궁궐의 답도에 새겨진 봉황은 무엇이 다를까?답도에 새겨진 봉황은 상상 속의 동물로,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한편 왕의 덕성과 지위를 인정하는 하늘의 징표다. 조사들은 훌륭한 임금이 있어 백성들을 잘 다스려 태평성대가 실현된다면, 하늘에서 어떠한 징조나 표상을 내리는데, 그 최고가 바로 봉황이다. 즉 봉황의 출현은 태평성대이자 성군(聖君)을 의미하기 때문에, 용과 함께 궁궐 장식의 최고 지위를 가지게 된 것이다.그래서 봉황은 각종 무늬나 조각 등으로 형상화되어 임금과 왕실을 상징했다. 왕이 사는 궁궐을 ‘봉궐(鳳闕)’이라고도 불렀고, 궐문을 봉문(鳳門)이라 부른 사례 등은 봉황이 매우 중요한 상징을 뜻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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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중화전덕수궁의 정전(Throne Hall)이다. 정전은 궁궐의 얼굴이자 가장 대표되는 으뜸 건물(Main building)이라 하겠다. 정전에선 매월․매년 정기적인 조회가 열렸으며, 왕과 왕비의 탄신일을 비롯하여 결혼식 등 나라에 큰 경사나 행사가 있을 때 사용되었다. 덕수궁의 경우 처음부터 중화전이 정전은 아니었다. 덕수궁 정전의 변천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02년 처음 중건된 중화전(좌)과 1906년 대화재 이후 재건된 단층의 중화전(우)

    ① 즉조당: 태극전(太極殿)이란 이름으로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 1902년까지 사용 ② 중화전: 1902년 중층 건물로 중건 ③ 중화전: 1904년 대화재로 소실된 이후 1906년에 단층 건물로 재건 (현재)

    급박한 국내외 정세 속에서 출범한 대한제국은 여느 궁궐과 같이 정전 및 넉넉한 권역을 확보하지 못한 채 출범했다. 그래서 기존의 즉조당 건물을 정전으로 사용하다가 1902년에 이르러서야 중화전을 비롯해 궁궐 권역을 확보하는 공사를 진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층의 중화전을 비롯해 중화문 등을 건립하며 정전의 틀을 잡았고11), 그 과정에서 남쪽으로 부지를 넓히며 기존의 정문이었던 인화문을 철거하게 된 것이다.12) 창건 당시의 중화전은 경복궁의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에 견줄 만한 규모였다고 한다. (중화전 행각 128칸)

    11) 경복궁의 경우 정전에 이르기까지 광화문-흥례문-근정문 삼문체제를 갖추고 있다. 창덕궁 역시 돈화문-진선문-인정문의 삼문체제다. 덕수궁의 경우 1902년 중화전 중건과 함께 중화문-조원문(朝元門)-대안문의 삼문체제를 갖추었다고 한다. 조원문은 금천교를 지나 뒤편에 위치해 있었으나 오늘날 남아있지 않다.

    12) 오늘날 서울시청 별관이 자리한 경운궁 남쪽 부지엔 당시 독일 공사관이 위치해 있었다. 정부에서는 공사관 무지 및 민가 부지를 매입하여 궁역을 확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독일 공사관과 경운궁 사이에 자리하던 길 때문에 정부에서는 운교(구름다리)를 만들어 기존의 부지와 연결하여 사용했다. 현재 이곳의 당시 용도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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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2년경 촬영한 중화전 전경

    하지만 당시 완성된 중층의 중화전은 1904년 대화재와 함께 소실되고, 2년 후인 1906년 1월에 이르러서야 중화전을 다시 중건하게 된다. 이 때 다시 지어진 중화전은 이전의 것과는 다른 단층짜리 건물이며,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중화전이다. 당시 단층으로 재건된 데에는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반영되었으리라 추측된다. 현재 중화전은 조선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작은 규모다.

    오늘날의 중화전

    중화전의 창호는 경복궁 근정전과는 달리 황색으로 칠해져 있다. 이는 중화전을 정전으로 사용한 대한제국이 왕이 아닌 황제국이었기 때문에 황제의 색깔인 황색을 사용한 것이다. 정전 건물 중 황색을 창호로 한 곳은 창덕궁이 있다.(창덕궁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거처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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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일고리기둥에 박은 고리는 차일 등을 칠 때 사용하는 것이며, 그 아래 갈고랑쇠는 창호를 열었을 때 걸어서 고정시키는 용도다. ‘차일’은 볕을 가리기 위해 머리 위에 치는 포장으로 광목이나 베로 만들었다. 차일 밑에서 햇볕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정2품까지였다 한다.

    ※ 왜 정전 명칭에 ‘정(政)’을 사용하지 않았을까?다른 4대 궁궐의 정전 명칭을 보면 모두 정(政)을 사용하고 있다. 근정전, 인정전, 명정전, 숭정전이 그러하다. 대체로 정전의 이름에는 임금과 정전에서 업무를 보든 이들에게 기대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할 수 있다.하지만 중화전은 유일하게 ‘정’이 사용되지 않았다. ‘중화’라는 단어는 『중용』에서 온 말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聖情)을 의미한다. 이러한 중화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에 있고 만물이 잘 길러진다.’라고 하는데, 이는 당시 복잡한 세계정세 속에서 출범한 대한제국이 독립국가로서 당당히 자리 잡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할 수 있겠다. 기존에 나라를 잘 다스린다는 의미에서 벗어나 보다 세계적 정세를 바라보는 안목을 담고 있는 것이다.

    7) 단청‘단청(丹靑)’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색을 의미하기도 한다. 양의 대표색인 붉은 “단(丹)”과 음의 대표색인 푸를 “청(靑)”에서 이름을 따서 단청이라고 한다. 현판이 건물의 명찰이라면 단청은 옷에 해당된다 할 수이고, 조선시대에는 임금님이 계시는 궁궐과 부처님을 모시는 사찰 등 한정된 장소에서만 단청이라는 옷을 입을 수가 있었다. 일반 사가에서의 단청 사용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단청의 기본색은 자연의 원리인 오행설과 관계되어 있는데, 우주 만물은 음양과 오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요소들이 서로 작용하여 균형과 통합을 이루어야 세상 만물이 질서를 유지하게 된다는 우리나라의 전통 사상이다. 이 오행에는 다섯 색깔이 따르는데, 양(陽)을 의미하며 오방 정색(正色)이라 한다. 양이 있다면 음(陰) 또한 존재하기 마련이다. 양으로 인해 발생하는 음에 해당하는, 오방 정색 사이에서 나타나는 색을 오방(五方) 간색(間色)이라고 한다. 오방색은 이 오방 정색과 오방 음색을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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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한 말이다.단청의 원료인 안료는 원래 진채(眞彩) 또는 암채(岩彩)라 하여 광물질(무기염류) 색감을 사용하였다. 이 안료(顔料)는 중국에서 생산되는 것이었다. 가격도 매우 비싸서 쉽게 사용할 수 없었다. 단청은 건물을 화려하게 보이기도 하면서 벌레, 습기로부터 목재를 지키는 역할과 나무의 거친 결을 감춰주는 역할도 했다.

    8) 잡상잡상은 ‘잡다한 물상’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추녀마루 위에 일렬로 도열해 있는 짐승 무리를 가리킨다. 잡상의 이름은 대부분 중국 고전 소설인 『서유기』의 주인공 및 땅의 신들과 관련된 이름이다. 언제부터 장식 기와로 제작되고 활용됐는지에 관해선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잡상과 유사한 장식이 고려 불화 속의 궁전 건물에 그려져 있는 거로 봐서 고려시대 즈음부터라고 추측할 뿐이다.조선시대에는 기와 제조 관서인 와서(瓦署)에 특별히 잡상장(雜象匠)을 두어 훌륭한 잡상 제작에 힘을 쏟았다 하는데, 이를 통해 잡상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음을 추측할 수 있다. 잡상은 총 아홉 종류가 있는데, 모든 잡상이 항상 지붕 위에 있는 건 아니다. 특히 삼살보살이나 천산갑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 부류에 속한다.조선시대에는 신분 차이에 따라 건물 규모와 배치를 규제하는 제도가 있었고, 그러한 규제는 건물 장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잡상 역시 건축 장식 부재의 일종으로, 이러한 규제를 받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경회루의 잡상이 정전인 근정전(勤政殿)보다 많고, 창경궁 정전인 명정전 잡상 수가 편전인 문정전의 잡상 수와 같은 점 등을 보면 잡상 수에 대한 규제가 그렇게 엄격하게 적용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13)

    13) 우리나라 궁궐 중에는 경회루에 가장 많은 잡상이 있다. 모두 11개며, 종류는 9개다. 저팔계가 세 번째와 맨 끝에 두 개, 천산갑이 끝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에 두 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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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대당사부: 갑옷에 벙거지를 쓴 무인상. 굵은 눈썹과 치켜 올라간 왕방울 눈, 크고 두꺼운 입술이 특징이다. 갑옷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리고 두 손을 무릎에 올려놓은 모습.

    ② 손행자: 손오공. 끝이 뾰족한 벙거지를 쓰고 있으며 손행자를 나타내는 증표③ 저팔계: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는 모습이 특징. 얼굴이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음④ 사화상: 삼장법사의 셋째 제자. 머리를 앞쪽으로 굽히고 있다⑤ 이귀박: 머리에 뿔처럼 생긴 돌기가 세 개⑥ 이구룡: 머리에 뿔처럼 생긴 돌기가 두 개⑦ 마화상: 말과 비슷한 모습⑧ 삼살보살: 사람을 닮은 형상, 두 손을 가슴높이에 올려 합장 자세를 취함⑨ 천산갑: 등에 톱날 같은 돌기가 나 있으며, 입을 쳐들고 있다

    9) 어좌(御座)와 닫집 그리고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정전에 있는 왕의 어좌(御座)는 ‘당가(唐家)’ 혹은 닫집이 설치되어 있다. 당가는 어좌 위에 씌운 지붕 또는 집 모형을 의미한다. 이 자리는 궁궐 안에서 가장 높고 권위적인 공간이다. 덕수궁 중화전의 어좌와 당가는 오대 궁궐 중에서도 가장 높은 품격을 자랑하고 있다. 사방에 설치된 계단 문로주14)에는 신비롭고 매력적인 조각상이 있다. 그 중에는 연꽃봉오리를 조각한 것도 있고 신수를 조각한 것도 있는데, 신수는 파도 위에 올라앉은 것과 연꽃 위에 올라앉은 것 두 종류가 있다.파도 위에 앉은 것은 온몸이 비늘로 덮인 네발 달린 짐승 모양이다. 머리 양족에 풍성한 갈기가 있고 정수리에 뿔 하나가 나 있는 점으로 봐서 해치 혹은 천록

    14) 계단 양쪽 난간을 지탱하는 계단 입구의 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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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로 추정된다. 연꽃 위에 앉은 것은 머리에 연주(聯珠) 장식이 있고, 몸은 물방울무늬로 덮여 있으며 턱 밑에 수염이 나 있다. 목 아래쪽에 방울이 달린 점으로 보아 벽사 기능을 가진 당사자가 아니면 사자개일 것으로 추측된다. 계단 측면에는 연꽃과 갈대, 새 그림이 그려져 있다. 유교에서 연꽃은 청렴함의 상징으로, 군주가 나라를 다스릴 때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중화전 내 어좌 뒤에 있는 일월오봉도는 임금의 자리 뒤에 놓였던 그림으로, 조선에만 존재하던 독특한 문화다. 해와 달, 다섯 개 봉우리가 그려져 있는데 오늘날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해석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해는 왕을 상징하며, 달 왕비, 다섯 봉우리는 왕이 다스리는 국토 즉 조선을 의미한다, 또한 양쪽에 서 있는 소나무는 왕을 떠받드는 충성스런 신하들을 뜻하며, 산 아래 흐르고 있는 물줄기는 이 땅에 사는 백성들을 가리킨다.”

    10) 천장의 황룡(黃龍)일반적으로 과거 황룡은 왕을 상징한다. 또 정전의 가장 중심부이면서도 정전 실내 공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속해 있다. 따라서 천장에 장식된 황룡은 사방의 중심이며 가장 높은 자리에 있다는 상징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중화전 천장 중앙을 보면 황룡이 장식되어 있다. 또한 천장의 장식된 문양이 모두 용이라는 점 역시 다른 궁궐과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황제의 권위와 존엄을 과시하기 위한 노력이 천장에 온통 집중되어 있다.

    11) 드므드므는 순 우리말로, 넓적하게 생긴 큰 항아리를 뜻한다. 드므 안에 물을 담아 급할 때 불을 끄는 방화수로 사용하기도 했으나 사실 불을 막기엔 너무 적다. 오히려 드므는 화재를 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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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한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 하겠다.과거 조상들은 화마(火魔)가 드므 안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도망쳤다 믿었다고 한다. 그런데 중화전 월대에 놓여 있는 드므 중 제일 상단에 월대에 놓인 드므 두 개에는 각기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오른편에 위치한 드므에는 ‘국태평만년(國太平萬年)’이라 새겨져 있고, 왼편에는 ‘희성수만세(囍聖壽萬歲)’가 있다.

    좌측 드므에 새겨진 ‘희성수만세’

    ‘국태평만년’은 ‘나라가 태평스럽게 만년토록 오래 지속’되라는 의미가 있고, ‘희성수만세’는 ‘성스러운 임금의 수명이 만년토록 오래 지속됨을 기뻐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여기서 ‘만세’라는 단어는 동양에서 오로지 황제를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었던 말이다. 이 글자는 고종이 황제에 등극한 이후 대한제국이 황제의 나라임을 드러내는 징포의 하나라 할 수 있겠다.

    12) 향로국가적 행사와 제사는 향 피우는 일에서 시작해 향을 끄는 일로 끝난다. 항상 의식의 한가운데에는 향로가 있었다. 그만큼 유교 사회에서 분향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향로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구 중 하나였다. 모든 절차에 앞서 분향을 하는 것은 신성(神聖)으로써 의식의 내실을 기하려는데 기본 뜻이 있다. 특히 하늘을 대신해 백성을 다스리는 임금의 입장에서 향을 피우는 행위는 하늘과 교감한다는 뜻도 있기 때문에 분향이 가진 상징적 의미는 매우 막중했다.기단 좌우 양 끝에 사각형의 기단 위에 팔각형으로 다듬은 돌을 올리고 그 위에 둥근 원형의 돌을 올려 향로를 받쳤으며 둥근 원은 하늘을, 팔각형은 사람을, 방형은 땅을 상징한다.

    4. 광명문(光明門)

    1) 문이 이동된 역사원래 이 문은 덕수궁 내 다른 건물인 ‘함녕전’의 정문이었다. 1904년 화재가 나서 다시 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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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졌는데, 1938년 덕수궁 석조전 서관을 증축,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15)을 개관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현재 광명문에는 흥천사 종을 비롯하여 자격루의 일부, 신기전(神機箭) 등이 진열되어 있다.

    2) 자격루자동으로 시간을 알리는 시보장치(時報裝置)가 울리는 물시계로 1434년(세종16년)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당시 만들어진 건 사라졌고 덕수궁에 있는 것은 중종 31년(1536)에 만든 것이다. 그 일부인 파수호 3개와 수수호 2개가 남아있다.자격루는 4개의 파수호(播水壺, 항아리처럼 생긴그릇), 2개의 수수호(受水壺, 원통 모양), 12개의 살대(箭), 동력전달장치와 시간을 알리는 시보장치(時報裝置)로 구성되어 있다. 파수호에서 흘러나온 물이 수수호로 들어가서 수수호의 물이 불어나 살대가 떠오르고 이 부력이 지렛대와 쇠구슬에 전달되어 구슬이 떨어지면서 시각을 알리는 장치를 움직이게 했다.

    3) 신기전1448년(세종30) 제작된 병기로, 고려 말 최무선이 화약국에서 제조한 로켓형 화기(火器)인 주화(走火)를 개량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초기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의 여진족으로부터 우리 땅을 되찾기 위한 전쟁에서 새로운 화약 무기인 신기전이 큰 역할을 했다고 기록돼 있다. 15세기 최고 첨단과학 무기이자 당대 최고 수준의 로켓 무기였던 셈이다.신기전은 발사 후 목표지점에서 폭발하는 대신기전(大神機箭)과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 폭발장치가 없는 중·소신기전(中·小神機箭)이 있다. 중·소신기전은 대나무화살대 앞에 쇠촉을 달고 그 다음 원통형 종이통인 약통(藥筒)을 부착하고 끝 부분에는 똑바로 날아갈 수 있도록 날개를 붙였다. 중신기전의 길이는 1,446cm 사정거리(射程距離)는 150m, 소신기전의 길이는 1,060cm 사정거리는 100m 이다. 중·소신기전 100발을 신기전기에 꽃아 점화선을 함께 모아 불을 붙이면 동시에 위층에서 아래층까지 발사되었다고 한다. 특히 임진왜란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행주대첩에서 신기전기 화차의 가공할 위력이 발휘되기도 했다.

    4) 흥천사지 종1396년 태조의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당시 한양 인근에 능을 만들고 정릉(貞陵)이라 했다. 정릉의 위치는 현 미국대사관 저 일대로 추정된다. 오늘날 덕수궁 일대를 정동(貞洞)이라 부르는 것도 바로 정릉동(貞陵洞)에서 유래했다. 능을 조성하고 이듬해 8월 그 능 동쪽에 원찰(願刹)인 흥천사를 세웠다. 당시 흥천사는 170여 간의 대사찰로 조계종의 본산이었다. 그 뒤 태종 9년(1409) 정릉을 현재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겼지만, 흥천사만큼은 계속 도성에 남아 있게 된다. 흥천사 동종은 세조 7년(1461) 주조된 후 동대문을 거쳐, 종루(종각)에 걸려 시각을 알려주다가 다시 광화문에 걸리기도 한다. 그러나 광화문이 일제에 의해 이전되면서 창경궁으로 다시 옮겨진 뒤 해방이후 이곳 덕수궁 광명문의 지붕 밑으로 오게 되었다. 흥천사는 불교를 억제하던 조선의 정책에 따라 수난을 겪었으나 태조의 유언대로 유지될 수

    15) 오늘날 국립고궁박물관의 전신(前身)이라 할 수 있다. 1908년 9월 창경궁 내에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으로 개관하였으며, 1909년 11월 일반에 공개했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이왕가박물관’으로 격하되었으며, 1938년 4월 덕수궁 서관으로 이전하며 이왕가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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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었다. 하지만 차츰 쇠락의 길을 걷다가 연산군 10년(1504) 화재와 중종 5년(1510)년 유생들의 방화로 문을 닫게 된다.

    ※ 왜 건물을 ‘옮긴다’고 표현할까?한국인들은 자연에서 나온 재료로 가옥을 만들었는데, 흙이나 나무, 밀짚 등이 대표적 재료입니다. 바닥과 문과 기둥은 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벽은 흙과 짚의 혼합물로 만들어졌는데, 못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옮겨서 다시 짓기가 쉬었습니다.

    5. 석조전(石造殿)

    1) 이름의 의미와 건축 역사오늘날 ‘정관헌’과 더불어 궁궐 범위 내에 남아있는 서구식 건물 중 하나다. 1900년에 공사를 시작해 1910년에 완성되었다. 설계에 약 2년여가 걸렸다고 하며, 영국인 하딩(J.R.Harding)에 의해 설계되었다. 착공 시점이 1900년이란 점은 대한제국을 선포한 직후에 이미 설계가 의뢰되었다 할 수 있다. 이는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의 정궁으로 경운궁을 선택한 후, 근대국가의 상징으로 서양의 건축 양식 전각을 세운 의도를 짐작케 한다. 즉 석조전은 근대국가로 나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건물이 완공되는 시점에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합병되며 황궁의 전각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완공 후 석조전은 고종이 귀빈들을 접대하고 만찬을 행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고종 사후에는 일본으로 유학 갔던 의민태자(영친왕)의 임시 숙소로 사용되거나 연회장, 일본 회화미술관 등으로 사용되었다.석조전은 ‘돌로 지은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나무와 흙으로 집을 지어 왔다. 돌로 집을 짓는 전통이 없었기 때문에 돌로 지었다는 사실 자체가 건물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었고, 곧 집의 이름이 될 수 있었다. 동시에 돌로 집을 짓는 전통이 우리나라에서 돌집을 짓는다는 것은 곧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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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조전은 서양의 ‘신고전주의’(Neo-Classicism) 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다. 신고전주의는 서양 건축 문화의 기본인 그리스와 로마 건축 양식16)을 따르는 형태로,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유행했다. 석조전은 그러한 시대적 흐름을 따른 것이다. 다만 원래 신고전주의 건축에는 베란다가 존재하지 않는데 반해, 1층과 2층에 베란다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차이점이다. 이를 ‘콜로니얼(Colonial) 건축 양식’17)이라고 한다.

    2) 건물 구조석조전은 지하 1층 지상 2층의 건물이며, 침전과 편전의 기능을 복합적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지었다. 1층은 접견실 및 홀이 있고, 2층에 황제 황후의 각 침실, 서재 등이 있다. 지하는 시종들이 거처하는 방을 두었는데, 현재 무료로 입장이 가능한 역사전시관으로 운영 중이다. 석조전 앞 정원과 분수는 완공 당시에는 없었다가 1938년 석조전 서관과 함께 조성된 것이다.

    ※ 석조전 내 가구석조전 내 가구는 영국 메이플 사(Maple&Co.)의 가구로서, 그 중 41구는 준공 당시 제작되어 사용된 것들이다.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던 것들을 과거 사진과 자료를 기반으로 하여 원래 자리에 복원하였다. 부족한 가구는 메이플 사 카탈로그를 참조해 유사한 가구를 구매하거나 복제해 배치했다.

    3) 석조전 서관1910년 일제 강점기 이후 석조전은 왕실의 전각이 아니라, 일본의 근대미술품들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전락되었다. 이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며 ‘이왕직18)’에서 1936년 오늘날의 서관을

    16) 건물이 기단 위에 올라가 있고 전면에 기둥이 줄지어 서 있으며, 지붕에는 삼각형 박공이 설치된 것17) 영국이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고온다습한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개척하며, 자신들의 건

    축 양식을 그대로 유지하며 현지 기후에 적응키 위해 지역 기후에 맞게 변형시키는 과정에서 추가한 것이 베란다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온다습하지 않았음에도 이러한 양식이 채택된 것은 설계를 의뢰받은 건축가가 한국의 기후와 풍토에 대한 이해가 적은 상태에서 아시아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건축 양식으로 설계했기 때문이다.

    18) 일제강점기에 조선 왕족을 관리하던 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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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짓고 당시 창경궁에 있던 박물관 소장품을 옮겨오기로 했다. 2년여 공사 끝에 완성되어 그 해 6월 창경궁 박물관 소장품 중 신라, 고려, 조선 도자기나 그림 등 11,000여 점을 석조관 서관으로 이전하고 기존의 석조전 박물관과 합쳐 ‘이왕가(李王家) 미술관’으로 새로 개관했다. 이왕가 미술관은 오늘날 국립고궁박물관의 전신(前身)이라고도 할 수 있다.19) 석조전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별관으로 쓰이고 있다.

    4) 오얓꽃 무늬자두나무의 꽃(오얏꽃)이 우리 황실의 문장으로 쓰게 된 시기와 유래는 분명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국기(國旗)와 함께 조선 왕조(전주 이씨)를 상징하는 꽃인 이화(李花, 오얏꽃)를 도안화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제국의 나라 상징 중 하나로 원래는 황실의 문장이나 사실상 국장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일본 왕실이 국화를 문장으로 쓰고 유

    럽의 서양 왕실이나 귀족가문들도 각각 꽃을 문장으로 쓰는 데 대해 대한제국 황실에서도 문장을 사용할 필요를 느껴 이화를 쓰게 된 것이다. 1910년 한일합병으로 대한제국이 망한 후에, 한 국가의 문장으로서 자격이 아닌 일본 천황 밑의 일개 제후국 귀족가문의 문장을 뜻하는 망한 나라 왕실의 상징으로 격하, 왜곡되었다.

    5) 해방 이후 용도

    연도 사용 목적

    1948~1950 UN 한국임시위원단 사무실1955~1972 국립박물관1973~1986 국립현대미술관1987~1992 문화재관리국1992~2004 궁중유물전시관2005~2009 덕수궁사무소2009~2014 석조전 복원공사 기간

    6) 의민태자(영친왕),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1910년 나라를 빼앗긴 후 대한제국 황실의 운명은 초라했다. 일제는 황실 자손들을 자신들이 지정한 인물들(주로 일본 귀족/왕족)과 결혼하게 했는데, 후손을 탄생시키지 못하도록 하고자 사전 진단을 통해 임신이 불가능한 이들을 골라 결혼시켰다는 설도 있다.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태자’(영친왕) 이은은 열 살 때 강제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 생활했으며,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거쳐 일본 장교로 복무하며 사실상 볼모로 평생을 살았다. 석조전은 의민태자가 일본에서 잠시 서울에 와 머물 때 임시 거처로 사용되기도 하였

    19) 광복 이후인 1946년 3월 덕수궁미술관으로 개칭했으며, 1969년 5월 국립박물관으로 통합되었다가 1992년 10월 대통령령에 의해 궁중유물전시관으로 확대·개편되었다. 2004년 11월 ‘조선왕실 역사박물관 추진단’이 발족되었고, 이듬해 3월 ‘국립고궁박물관’으로 명칭이 확정되어 개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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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한다.의민태자는 일본 황족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방자 여사)와 결혼했는데,20) 해방 후에도 한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미국과 일본 등을 전전하다가 1963년에 위중한 병세 속에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여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1970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사망했다.

    ※ 한국 궁궐과 서양 궁궐의 차이점을 어떻게 설명할까?

    1. 한국 및 동양 궁궐

    2. 서양 궁궐

    6. 준명당(俊眀堂)

    1) 건립시기 및 역사1897년 건립되었다가 1904년 화재로 소실된 후 다시 지어졌다. 고종이 함녕전으로 침소를 옮기기 전까지 황제의 사무실(편전) 겸 신하들을 접견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또 침전으로도 사용

    20) 애초에 일본 측에서 이방자 여사가 불임이란 사실을 염두에 두고 결혼을 시켰다고 전해지는데, 의사의 진단과 달리 그녀는 정상적으로 임신해 두 아들을 낳는다. 황세손 이진과 이구가 그들이다. 이진은 생후 8개월에 사망했지만, 황세손 이구는 지난 2005년 사망했다. 당시 그녀를 진단했던 일본인 의사는 책임을 묻고 할복자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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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었다. 1916년에는 고종의 총애를 받던 막내 덕혜옹주를 위해 최초의 왕실유치원이 개설되어 사용되었는데, 귀족의 딸들과 함께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21)준명당의 ‘명(眀)’은 밝다[明]라는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 일반적으로 명(明)이 ‘해’와 ‘달’이 합쳐진 글씨로서 ‘밝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건물에 사용된 글씨 ‘명(眀)’은 눈[目]과 달[月]이 합쳐져 있다. 이는 ‘밝게 본다.’ ‘다스리는 이치가 맑고 밝다’라는 의미로, 나라를 밝게 다스리고자 하는 왕의 생각을 알 수 있다.

    2) 덕혜옹주1912년 일제강점기 덕수궁에서 태어났으며, 고종의 자손 중 유일하게 성년까지 생존했던 딸이기도 하다. 1925년 열네 살에 일본으로 강제로 유학을 가 도쿄에서 생활하였다. 순종의 장례 때 잠시 귀국하기도 했으나 대부분 일본에서 생활하였다. 1931년 정략결혼의 일환으로 백작 ‘소 다케유키’와 결혼해 1932년 딸을 낳았다. 1930년부터 정신분열증 증세가 있었는데 결혼 이후 악화되어 1946년 정신병원에 입원키도 했다. 1955년 이혼 후 1962년 귀국하여 창덕궁 낙선재에서 살다가 1989년 사망했다.

    (좌)준명당 (우)즉조당, 두 건물을 잇는 복도각(雲閣, 다락집 복도)

    7. 즉조당(卽祚堂)

    1) 덕수궁의 뿌리석어당을 비롯해 즉조당은 임진왜란 당시 의주까지 피난을 갔던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와 시어소(時御所, 임금이 임시로 거처하는 곳)로 사용한 곳이다.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가 이 건물에서 등극22)한 이후 즉조당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즉조’는 ‘왕위의 오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인조는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후 즉조당과 석어당을 제외한 나머지 대지와 건물을 모두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주었으며, 1904년 화재로 소실되기 전까지 서까래 하나 바꾸지 않고 소중히 보존해왔다고

    21) 우리나라 최초의 유치원은 1897년 3월 일본인 고급 관료 및 부잣집 자제들을 교육키 위해 부산에 세워진 ‘사립부산유치원’이다.

    22)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608년 2월 선조가 갑작스레 승하한 다음날 광해군이 ‘서청에서 즉위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서청(西廳)을 즉조당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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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다. 그만큼 이 공간이 역대 임금들에게 있어 중요히 여겨졌다 할 수 있겠는데, 이는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해쳐나갔던 공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2) 변천사즉조당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이름을 ‘태극전(太極殿)’, ‘중화전’으로 바꾸고 덕수궁의 정전(正殿)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1902년 중화전이 건립되며 다시 원래 이름을 찾았다. 1904년 화재 이후 다시 지어졌고, 명성황후 사후 맞이한 아내 귀비(Secondary Wife) 엄씨가 1907년부터 1911년 임종할 때까지 중궁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8. 석어당(昔御堂)

    1) 덕수궁의 또 다른 뿌리‘석어’는 ‘옛 임금이 머물다’라는 뜻인데, 말 그대로 임진왜란 중 임금인 선조가 거처했던 곳이다. 당시 궁핍한 사정 때문에 선조는 이곳에서 16년을 거처했고, 창덕궁이 중건되기 전 이곳에서 사망했다.23) 즉조당과 마찬가지로 이 건물은 조선 후기 임금들에게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숙종, 영조 등 조선 후기 대표적인 임금들이 국가적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 두 곳을 찾아 마음을 가다듬었다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1904년 대화재로 경운궁 건물 대부분이 불탔을 때에도 즉조당과 더불어 그 해 가장 먼저 복구되기도 했다. 현재 모습은 옛 모습대로 중건한 것이다.

    2) 왜 단청이 칠해지지 않았을까?2층 목조 건물로, 1층에는 방과 대청을 2층에는 마루를 깐 공간을 형성했다. 덕수궁 내에서 유일하게 단청이 없기 때문에 ‘백골(白骨)집’이라고도 불린다.24) 용두나 잡상 역시 배열되지 않았으며, 전체적으로 소박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느낌이다.단청이 입혀지지 않은 것에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선조가 임진왜란 이후의 어려운 시기를 보냈기 때문에 그 어려웠던 때를 기억하기 위해서 칠해지지 않았다고도 하고, 유교 사회의 검

    23) 의 기록을 보면 '정침(正寢)에서 승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정침은 바로 이곳 석어당을 의미할 가능성이 크다.

    24) 단청이 입혀지지 않은 것에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선조가 임진왜란 이후의 어려운 시기를 보냈기 때문에 그 어려웠던 때를 기억하기 위해서 칠해지지 않았다고도 하고, 유교 사회의 검약을 강조하는 분위기 때문에 단청이 칠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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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을 강조하는 분위기 때문에 단청이 칠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3) 인조반정(仁祖反正)의 현장석어당은 선조의 두 번째 비(妃)인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가 광해군에 의해 1618년 유폐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그녀는 광해군을 석어당 앞마당에 꿇어앉히고 36가지 죄를 열거한 뒤 인조에게 옥새를 전했다고 한다.

    ※ 석어당에서 침전 구역으로 넘어가면서 - 유현문(惟賢門)함녕전 및 덕홍전 권역에 속해 있는 문이다. 정관헌 서쪽 담장 네 개 문 가운데 남쪽에서 첫 번째 문이다. 출입구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아치형)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홍예문이다. 좌우 담장의 기와를 보면, 수막새에는 봉황을 새기고 암막새에는 여의주를 희롱하는 용을 새겼다. 다른 궁궐에 비해 덕수궁에서는 용을 상대적으로 흔하게 볼 수 있다.

    9. 덕홍전(德弘殿)

    1) 비명에 간 아내를 위한 공간덕홍전은 원래 명성황후의 혼전(魂殿)25)으로 사용되었던 경효전(景孝殿)이 있던 곳이다. 1896년 빈전(殯殿)26)으로 사용하고자 ‘경소전’이란 이름으로 처음 지어졌다가 이듬해 바뀌었다. 고종이 황제에 오르던 날 명성왕후를 명성황후로 책봉되는 의식이 행해지기도 했다. 고종은 명성황후의 국장(國葬)이 끝난 후에도 경효전을 혼전으로서 계속 사용했다. 일반적으로 왕비가 왕보다 먼저 죽으면 왕이 죽어 종묘에 모셔질 때까지 궐내 혼전에 계속 모셔지게 된다. 하지만 고종의 경우처럼 왕의 공간 내 가까이에 마련해 두진 않는다는 점에서 경효전을 고종의 침전 바로 옆에 건립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2) 접견실로서의 덕홍전1904년 대화재로 인해 소실된 경효전이 중건(重建)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화재 가운데에 경효전의 신주는 무사히 챙겨 나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06

    25) 조선시대 임금이나 왕비의 국장 뒤 삼 년 동안 신주와 위패를 모시는 전각26) 인산(因山, 상여가 나가는 것) 때까지 임금 또는 왕비의 관을 두는 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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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년 경효전 터에 지금의 덕홍전을 세웠으며, 1911년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고쳐지었다. 이는 오늘날 덕수궁 안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건립된 건물이라는 의미다. ‘덕홍’은 덕이 넓고 크다는 뜻이다.

    덕홍전은 당시 외국 사신이나 조정 대신들의 접견실로 쓰였다고 한다. 오늘날 내부 모습에서 별다른 점은 찾아볼 수 없지만, 기록에 따르면 창문에 커튼을 설치하고 서양식 실내등을 달았으며, 바닥은 마루로 바꾸었다고 한다. 과거 덕홍전의 내부 모습은 당시 창덕궁 인정전을 상당 부분 모방했다고 알려져 있다.또한 덕홍전 전면 서쪽에 양식과 일식(日式)이 결합된 귀빈실이 건립되어 복도(행랑)로 연결되었으며, 동편으로도 함녕전과 연결된 복도가 건립되었으나 오늘날엔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연결부에 있는 여닫이식 판문이 그것이다.

    ※ 덕홍전 관련 기사창덕궁 이왕 전하의 알현실인 인정전을 모방하여 덕수궁에 건축 중인 덕홍전은 이미 준공되어 6일 밤에 불을 밝혔는데, 자세히 알아본즉 공사비로 6만원이 들어고, 실내 장식도 똑같이 화려한데, 대벽화는 화백 아마쿠사신라이의 것으로 필치가 용건하여 근래의 걸작이라고 한다.

    《매일신보》 1912년 9월 10일

    1910년대 중반의 창덕궁 인정전 옥좌 모습. 함녕전 역시 이와 비슷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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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함녕전(咸寧殿)

    1) 황국의 마지막 침전함녕전은 왕의 침전이자 사무실로, 1897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환궁할 당시 왕의 침전으로 건립되었다. 또한 조선 왕조 침전 건물로는 마지막으로 건립된 건물이다. 평면 가운데 대청을 두고 좌우로 온돌방을 배치했다. 앞면과 뒷면에 툇마루를 두었으며 정면은 개방했다. 우물 정(井) 구조로 방을 형성하였으며, 큰방 둘레에 있는 작은 방들은 상궁들이 당직을 서던 곳이다.함녕전을 둘러싼 행각에는 옮겨간 광명문을 비롯해 여러 개의 문이 있었으나 오늘날 그 일부만 남아 있다. 함녕전 측면과 뒷면의 네모뿔대 초석에 파여진 홈을 보면, 행각 등으로 이어진 복도각 따위의 시설물을 짐작할 수 있다.전통적으로 왕과 왕비의 침전(寢殿)은 별도로 마련되었으며, 왕과 왕비의 합방은 왕비의 침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덕수궁의 경우 중궁전이 따로 없다. 귀비 엄씨가 즉조당을 처소로 사용하긴 했으나 정식 황후가 아닌 이상 정식 중궁전이라 말하긴 어려운 점이 있다. 고종은 동쪽 온돌방을 자신의 정식 침실로 이용하고 서쪽 온돌방은 후궁의 침실로 사용했으나, 신변에 불안을 이유로 여러 방을 옮겨가며 잠을 청했다 전해진다.

    ※ 왕과 왕비의 합방왕과 왕비의 합방은 개인사를 벗어나 왕자를 생산해야 하는 중요한 국가적 업무였다. 그렇기에 합방 날짜부터 의원 및 상궁들이 논의를 거쳐 결정했으며, 왕과 왕비의 사전 건강 상태를 엄밀히 점검하곤 했다.왕비의 처소에서 합방이 이루어지면, 그 방을 내시와 상궁들이 둘러쌌다. 경우에 따라서는 방 안에 들어가서 합궁을 지키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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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전통 한옥의 온돌 시스템덕홍전과 함녕전 권역에서 정관헌으로 넘어가는 작은 언덕 사이에는 함녕전과 연결된 굴뚝이 있다. 이 굴뚝은 바로 함녕전 온돌 시스템과 연결된 굴뚝이다. 덕수궁의 굴뚝은 경복궁이나 창덕궁 등 다른 궁궐의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간결한 양식을 취하고 있다.

    3) 밤낮이 바뀐 일상생활고종은 평생에 걸쳐 암살에 대한 위험에 시달렸다 하는데, 특히 독살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고 전해진다. 을미사변 이후에는 불면증에 시달리며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고, 신변의 불안을 느껴 큰 방 외에도 갓방 이곳저곳을 옮겨가며 잠을 청했다 한다. 고종은 주로 늦은 밤에 업무를 보았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신하들이 늦은 밤에 함녕전에 들어 함께 업무를 수행했다고도 알려져 있다.고종은 이곳에서 거처하다가 1919년 1월 68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평소 좋아하던 동치미 국물로 만든 냉면과 함께 들어온 식혜를 마시고 숨을 거둔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 식혜에 독이 들어 있었다는 의혹도 있다. 그 전까지 몹시 건강했다 알려졌기 때문이다. 태황제(太皇帝)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일제에 의한 독살이라는 의혹을 불러 일으켰고, 오늘날 사실상 정설에 가깝게 여겨지고 있다. 고종의 죽음과 그의 장례식은 그 해 3월 삼일운동의 촉발제가 되기도 한다. 고종의 죽음 후 함녕전은 고종의 빈전 및 혼전으로 사용되었다.

    4) 대화재의 장소1904년 덕수궁의 대화재는 바로 함녕전에서 비롯되었다. 이 해 4월 14일 함녕전 수리 공사를 하던 중 수리한 온돌에 불을 지피다가 실화(失火)함으로서 경운궁 대부분의 전각들이 소실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전각들이 행각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바람이 거세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그 피해 범위가 엄청 넓었다는 점에서 일제의 방화가 아니었나 하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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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의 하루

    왕은 국가질서의 중심이었다. 조선시대의 왕은 신하들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이전 시대에 비해 왕의 권력은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하지만 왕으로서의 상징성은 그대로였고, 그 만큼 해야 할 일이 더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왕의 하루 일과는 아침·낮·저녁·밤의 네 단계로 구분하여 왕의 4시(四時)라 했다. 또 왕이 처리하는 업무는 만 가지나 될 정도로 많다 하여 ‘만기(萬機)’라고도 불렀다. 왕은 아침에는 신료들로부터 정치를 듣고, 낮에는 왕을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만나며, 저녁에는 조정의 법령을 검토하며 보낸다. 밤에는 밀린 업무를 보고 개인 공부를 하거나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왕비를 포함한 후궁 등)들을 달래주는 일까지 해야 했다.

    ◇ 기상새벽 4시경에 33천의 온 세상에 알린다는 의미에서 33번의 파루를 울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왕은 헛기침을 하면 잠이 깨었음을 알리고 평소 업무복장인 곤룡포를 입고 익선관을 쓰는 등 차림새를 단정히 하였다.

    ◇ 문안인사(5시경)왕은 파루(평균 아침 4시경)에 일어나 기본적으로 웃어른에게 문안인사를 올려야 했다. 바빠서 직접 인사를 할 수 없을 때에는 내시를 대신 보냈다.

    ◇ 경연해가 뜰 무렵 왕은 신료들과 학문토론 겸 정치토론인 경연(經筵)에 참석한다. 아침공부인 조강은 보통 아침 식사 이전에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경연을 하면서 왕과 신하들은 유교의 경전인 사서오경, 역사, 성리학을 공부하고 나랏일을 함께 의논하였다.

    ◇ 아침 수라아침수라상에는 왕을 위한 특별한 음식들을 차린다. 왕의 식사는 왕의 건강과도 관련되기에 식단을 짤 때는 요리사와 의사가 함께 논의하기도 한다. 왕을 위한 정식상차림은 아침과 저녁 수라이다. 두 끼 식사 외에 왕은 새벽에 일어나 죽이나 미음으로 자릿조반을 먹고, 오후에는 국수나 죽으로 낮것, 늦은 밤에는 약식이나 식혜로 밤참을 먹었다. 왕은 은수저로 수라를 먹었는데 은은 독이 묻으면 색이 변하기 때문에 음식에 독이 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왕들의 아침저녁 수라는 평균 3~5첩 반상이었다. 왕에 따라서는 수라상 이외에 간식에 해당하는 자릿조반이나 낮것 등을 먹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 조회 - 조참/상참/조계나랏일은 왕과 신하가 함께 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때문에 하루 업무는 왕과 신하의 인사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이렇게 왕과 신하가 만나는 행사를 조회(朝會)라고 불렀다. 그 중 근정전처럼 넓은 조정에 모여서 하는 정식 인사를 조참(朝參)이라고 했다. 사정전과 같은 편전에 이루어지는 약식 인사를 상참(常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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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후 업무왕은 간단한 점심을 먹고 주강(晝講)에 참여해 학문을 닦았다. 주강 이후에는 외국에서 온 손님을 만나거나 지방을 다스리는 신하를 만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나라 밖 소식과 도성 밖 사정도 알아보는 것이다.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에는 야간에 궁궐의 호위를 맡을 장교 및 군사들과 숙직관료들의 명단을 확인하고, 야간의 암호를 정해주었다. 암호는 매일매일 다르게 하였다. 또한 왕은 상소를 검토하는 등의 일상 업무를 보았다. 한가한 날은 이 시간을 이용하여 사냥, 활쏘기, 격구 등의 체력 단련을 하기도 하였다.

    ◇ 저녁왕은 해지기전인 18시경에는 저녁 경연인 석강(夕講)에 참석해야 했다. 석강이 끝나면 저녁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저녁 후에도 낮 동안의 업무가 밀려 있으면 야간에도 일을 해야 했다. 나랏일로 바쁜 왕은 짬을 내어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시간이 나면 투호, 격구 등의 놀이를 즐기거나 책 읽기, 그림 그리기, 글쓰기를 했다.

    ◇ 저녁문안인사저녁수라를 마치고 20시경 웃전에 저녁 문안인사를 드린다. 이때 하룻 동안 있었던 일이나 가족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 침소문안인사를 마치고 22시경 침전으로 돌아가 황극을 닦다가 취침하였다. 왕은 밤이 늦어서야 하루 일을 마치고 강녕전이나 교태전 혹은 후궁들이 사는 곳에서 잠을 잤다. 강녕전이나 대조전을 보면 왕의 침실 공간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하여 중앙의 방(구궁도의 5의 자리)하나를 8개의 방이 둘러싸도록 하였다. 중앙의 방이 황극이며, 주변 8개의 방은 8괘를 상징한다. 임금은 중앙의 방에 홀로 거처하며 황극(왕으로서의 기준과 법도)을 닦아야 했으며, 중앙의 방을 둘러싼 8개의 방에서는 왕의 유모인 봉보부인이나 나이 든 지밀나인 등이 야간 숙직을 하였다. 왕은 중궁전을 비롯하여 주위의 많은 여인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 기타 업무왕은 공적인 집무 외에 무수한 비공식행사에 참여해야 했다. 종묘대제나 사직대제 같은 국가제례가 대표적이다. 또 대소신료들과 전국의 양반, 일반 농민이나 노비들이 올리는 상소문과 탄원서도 챙겨야 한다. 세시풍속 상의 명절에는 휴무였다. 또한 너무 추운 혹한기, 즉 절기상 대한부터 소한 사이에도 업무는 중지되었다. 왕의 몸이 좋지 않아 요양이 필요할 때도 일정기간 왕의 업무는 일시 중지되었다.

    11. 정관헌(靜觀軒)

    1) 덕수궁의 후원, 정관헌정관헌은 함녕전과 덕홍전 권역 뒤편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경복궁이나 창덕궁 등을 살펴보면 전통적으로 궁궐의 편전 및 침전 뒤에는 후원(後苑)이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정관헌이 위치한 공간이 이러한 후원 영역에 해당한다. ‘고요하게(靜) 내다보다(觀)’라는 의미를 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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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관헌은 전통 궁궐로 치면 내전 후원의 정자 기능을 대신한 건물이라 하겠다.

    2) 건축양식1900년 러시아 건축기사인 사바틴(sabatine)27)이 설계․건립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전통적 건축 양식과 서구적 건축 양식이 절충된 특이한 형태의 단층 건물이다. 정관헌을 통해 근대적 서양 건축 양식이 유입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기단 위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인조석 기둥을 둘러서 내부 공간을 만들었고, 바깥에는 동남서 세 방향에 기둥을 세운 베란다가 둘러쳐져 있다. 석재를 기본으로 하는 서양식 기둥이 나무로 만들어졌고, 기둥 상부에 청룡과 황룡, 박쥐, 꽃병 등 한국 전통 문양이 새겨져 흥미롭다. 난간에는 소나무, 당초, 사슴, 박쥐 등의 다양한 전통 문양들이 장식되어 있다.

    27) 사바틴은 1895년 당시 경복궁에 머물며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을 목격하여 이를 국제 사회에 널리 알린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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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양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1. 소나무: 지조와 절개, 풍류, 장수(長壽)를 의미함

    2. 박쥐: 한자로 복(福)과 발음이 같아 복을 가져온다 여겼다. 오복[五福]을 상징 ① 장수 ② 재산 ③ 강녕(康寧): 몸이 편안함 ④ 유호덕(攸好德): 덕을 좋아하여 즐겨 행하는 일 ⑤ 고종명(考終命): 천수를 누리고 생을 마감함

    3. 사슴 ① 우애: 무리를 지어 살며 뒤에 낙오자가 없는지 살피는 속성을 지님 ② 장수(長壽) ③ 뿔을 통해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존재. 땅의 기운을 하늘에 전달함 ④ 관리들의 벼슬을 상징 ⑤ 불행과 질병을 막아줌

    4. 당초(唐草): 식물 덩굴이나 줄기를 일정 모양으로 도안화한 장식 무늬

    3) 정관헌 논란확인된 기록으로 보면 정관헌은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시고 제례를 지낸 신성한 곳이었다. 1901년 고종은 태조의 어진을 정관헌에 모셔 친히 참배하고 잔을 올리는 작헌례(酌獻禮)를 올리기도 했다 전해진다. 1930년 이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인 ‘오카다 미츠구’의 사진에 의하면 정관헌은 현재의 개방형 기둥구조가 아니라 사방이 벽돌 벽으로 둘러싸인 구조였다. 지금과 같이 세 방향이 열린 구조에서는 어진을 모셔두고 예를 올리는 것이 불가능 했을 것이다. (벽이 허물어진 것은 30년대 이후로 추정된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어느 문헌에도 정관헌에서 고종이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구전(口傳)에 따르면 정관헌은 고종이 커피를 마시고 연회를 베풀며 음악도 감상하던, 휴식을 취한 공간이라 전해지고 있다. 실제 덕수궁 관리소 및 여러 공식 소개글에 따르면 정관헌은 휴식을 위한 공간이라 소개되고 있기도 하다.

    4) 고종은 최초의 바리스타다?일반적으로 고종이 커피를 처음 접한 것은 아관파천을 단행하고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 동안이며, 그 곳에서 커피 마니아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한편으론 고종이 한국인 최초로 커피를 즐겼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고종이 아관파천 때 처음 커피를 접했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아관파천 이전에 이미 궁중에서 커피가 음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담은 문헌 기록이 존재한다. 1884년부터 3년간 어의로 지낸 알렌은 당시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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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중에서 오랜 시간 대기하는 동안 궁중의 시종들은 거절하는 데도 불구하고 잎담배와 샴페인, 사탕과 과자를 끝까지 후하게 권했다.(중략) 후에 그들은 자기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그 품목에 홍차와 커피를 추가했다.”28)

    이처럼 1880년대 중반에 이미 궁중 및 고위 관리들 사이에서 커피가 음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고종이 아관파천 때 처음 커피를 접했다고 보는 것은 설득력이 전혀 없다. 다만 아관파천 당시 고종의 수발을 챙기던 손탁 여사를 통해 커피의 매력에 빠졌으리라는 추측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5) 러시아와 대한제국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을미사변(1895) 이래 일본은 거침없이 조선 왕실으 압박해 들어왔고, 고종은 늘 암살의 위협에 시달리며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결국 1896년 2월, 세자였던 순종과 함께 경복궁을 몰래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겨 1년간 머물게 되니, 이 사건이 바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아관(俄館)은 러시아 공사관의 한자식 표기다.일본의 조선에 대한 야욕은 청일전쟁(1894) 등을 통해 서서히 표면화되고 있었다. 조선 왕실에서는 이러한 일본의 야욕을 견제코자 러시아와의 관계를 가까이하기 시작되었다. 실제 친러파가 점차 영향력을 강화하려 하자 그 과정에서 일본이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명성황후를 살해한 것이다.아관파천 직후 고종은 김홍집으로 대표되던 친일파 내각을 숙청하고, 을미사변 직후 단행되었던 단발령 등 일련의 급진 정책들을 중지하였다. 친러 인사 위주로 내각을 재구성하는 한편, 조선의 보호국을 자처한 러시아는 삼림 채굴권, 철도 부설권 등 각종 경제적 이권을 확보하였다. 러시아는 1904년 러일전쟁까지 조선-대한제국 내에서 영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