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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대학문학상 | 2019년 12월 9일 월요일 단편소설 부문 우수작 광어는 누워있고 우럭은 서 있다 박현서 1 2017년 10월 13일 강준혁과 최수연은 제 22회 부산 국제영화제에 있었다. 그 날은 1995년 개봉한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인 러브레터의 출연배우인 나카야마 미호가 비프빌리지 야외무대 오픈토크에 참석한 날이었다. 영화는 잘 몰랐지만, 거 기서 그녀의 모습을 처음 본 수연이 러브 레터를 찾아 본 뒤 준혁에게 눈 내린 오 타루에 함께 가자 말했다. 2019년 1월 말 이 되어서야 준혁으로서도 영화제 출품 마감일까지 더 바빠질 것 같고, 돈도 없어 질 테니 얼른 가야겠다는 생각에 2박 3일 간의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인천국제 공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전 공 항에서 준혁은 동기들에게 줄 기념품으 로 홋카이도 명물 과자인 시로이 코이비 토를 샀고, 한국에 도착한 저녁에 두 사람 은 명동역에서 밥을 먹은 뒤 거리를 걷다 롯데백화점에 들어갔다. 3층에서 수연은 츄리닝만 입고 다니는 준혁에게 청바지 에 흰 티라도 입고 다니라며 바지를 선물 해줬다. 프랑스 브랜드인 아페쎄에서 만 든, 밑위가 짧고 종아리 부분이 상대적으 로 넓은 스트레이트 핏이 특징인 쁘띠 스 탠다드 모델이었다. 버튼플라이방식이라 지퍼보다 불편하고 허리가 조금 작았지 만 수연은 입다보면 늘어날 거라며 잘 어 울린다고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는 2월에 숙명여자 대학교 의류학과를 졸업하고 데님 디자 이너로서의 진로를 계획하고 있었던 수 연이었다. 근처 스타벅스에 들어가서 그 녀는 생지 데님은 빨지 않고 오래 입어야 사람 체형에 맞는 워싱이 진행된다며 냅 킨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준혁에게 청바 지 페이딩이 진행되는 원리를 설명해줬 다. 이해는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준혁 은 고작해야 청바지 물 빠지는 걸로 그렇 게 길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수연이 신 기할 뿐이었다. 언제 세탁하는 게 좋은지 준혁이 묻자 수연은 입고 싶을 때 입으면 서 6개월쯤 후 세탁을 하는 게 좋으며, 그 때까지 바지를 냉동실에 넣거나 햇빛에 서 말리면서 냄새를 없애주면 된다고 말 했다. 두 사람은 함께 아이폰의 캘린더 어 플리케이션을 켜서 8월 25일에 같이 청 바지 세탁 하는 날이라 설정했다. 예정대 로라면 매일 똑같은 바지만 입을 일은 없 을테니까 그 쯤이면 적당해보였다. 명동 역에서 4호선 지하철을 타고 돌곶 이 역의 자취방으로 가던 준혁은 그녀에 게 비슷한 가격대의 선물을 해줘야겠다 는 생각에 바지 가격을 확인했다. 한국 공 식 홈페이지에서는 바지를 20만원 중반 의 가격에 팔고 있었지만 컬티즘 같은 해 외 사이트에서 직구를 하면 10만원 중반 의 가격으로 사는 방법이 있었다. 준혁은 청바지 원단이, 워싱이 어떻다는 걸 잘 알 아도 싸게 사는 방법도 모르는 수연이 바 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였지만 고 마운 마음 대신에 그런 마음이 드는 스스 로가 놀라울 정도였다. 그 후로도 준혁에 게 14.5온스의 청바지 원단은 너무 두껍 고 답답해서 바지에 손이 잘 가지 않았다. 가방에 바지를 계속 넣어두고 꺼내지 않 은 것도, 자신보다 어려도 키는 더 크고 어른스럽던 수연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 한 것도 그쯤이었다. 4월 초부터 청파로의 벚꽃이 모두 지 는 말일까지 준혁은 수연의 방에서 지내 면서 영화제 상영작 발표만, 정확히는 작 품상 상금만 기다렸다. 오백만원이면 영 화를 만드느라 쓴 자취방 보증금을 조금 은 메꿀 수 있을테니까. 그러는 동안 떨어 진 벚꽃 잎처럼 수연도 디자이너의 꿈을 접었다. 그리고 용산 역 근처의 증권사에 서 파견 계약직원 신분으로 사무보조 아 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복숭아 뼈까지 기 장이 떨어지는 통넓은 청바지에 컨버스 척 테일러를 신던 그녀의 뒷모습은 '청바 지, 반바지, 레깅스, 타이즈는 모두 금지, 정장용 힐 높이 4~7cm 권장, 로퍼 단화 도 금지' 라는 암묵적인 회사 여직원 정장 드레스 코드 준수사항에 따라 무릎까지 내려오는 검은 치마에 힐을 신은 모습으 로 바뀌었다. 성큼성큼 걷던 걸음걸이의 보폭도 전보다 줄어들었다. 준혁에게 그 모습은 4월 내내 하얀 벚꽃이 피어있던 나무에 5월부터 7월까지 빨간 버찌 열매 가 맺히는 걸 보는 것 같았다. 흰 꽃잎들 은 다 어디 갔느냐고 벚꽃나무에게 물어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준혁 역 시 그녀에게 할 수 있는 말 같은 건 없다 고 생각했다. 퇴근길에 방까지 걸어갈 때 마다 수연은 선물 해준 바지를 입지 않는 준혁에게 안 입을 거면 다시 달라고, 자기 가 대신 입을 거라는 농담만 했다. 이후로 도 그녀는 방으로 돌아오면 전신거울 앞 에 서서 평일엔 입을 일 없는 청바지들을 하나씩 입어보고 다시 벗다가 잠드는 날 들을 보냈다. 준혁도 그녀를 보며 안 입어 봐도 예쁘다는 등의 말을 했지만 점차 말 이 줄었다. 그러던 5월 첫째 주, 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작 리스트가 공지됐는데 거기 준혁 의 이름은 없었다. 대신 6월 27일부터 7 월 3일까지 진행 된 상영회에서 그의 동 기와 후배들은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희극지왕’, ‘절대악몽’의 3개 부문에서 최 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상영작 리스트가 발표된 날부터 이틀에 한번 꼴로 준혁은 편의점에서 수입맥주 네 캔을 만원에 사 서 마시며 잠든 수연의 발뒤꿈치에 붙은 밴드만 쳐다봤다. 준혁이 출품을 한 ‘사랑 에 관한 짧은 필름’ 부문에서 상을 받은 동기는 개인 톡을 보내줬다. 준혁아 그래 도 시간 지나고 보면 좋은 기억으로 남을 거야. 시간이 지나야만 좋게 기억되는 것. 그런 건 붙잡고 싶은 마음을 참고 헤어진 전 여자친구에게 ‘그래도 그 새낀 양반이 었어’ 정도로 기억되는 것만큼 무의미하 다고 그는 생각했다. 준혁이 일본에서 사 온 기념품을 가방에서 꺼내 동기들에게 줄 기회는 단 한번도 없었다. 영화제 마지막 날인 7월 3일 저녁, 수연 의 퇴근을 기다리며 준혁은 역 앞 광장을 빙빙 돌았다. 그래도 하루는 가봐야 하는 것 아닌가 싶으면서도 영화제가 열리는 CGV 용산 아이 파크 몰 쪽은 쳐다보지도 못한 채였다. 해산물은 냄새도 맡기 싫어 하는 수연이기에 언젠가 가보고 싶었던 광동수산은 못가고 용산 대로변에 위치 한 펍에 들어갔다. 거기선 과일과 치즈 조 각들을 이만 오천원이라는 합리적인 가 격에 판매하고 있었다. 준혁은 메뉴판의 금액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수연이 인스타 스토리에 사진을 올려야 한다고, 브이로 그 영상을 찍겠다고 치즈에 손을 못 대게 하는 것은 더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러다 같이 방에 돌아왔는데 그날은 수요일, 즉 수연이 방청소를 하기로 되어있는 날이 었다. 바닥에는 어제 밤 그녀가 벗어둔 청 바지 서너벌이 있었다. 수연은 방을 치울 생각이 없어보였다. 다시 준혁은 그걸 이 해 할 수 없었다. 대화는 청소 좀 하자는 준혁의 말로 시 작했다. 그 후에 몇 마디가 오가다가 마지 막은 수연이 준혁을 내려다보며 이런 거 이젠 지쳤다고, 오빠가 영화를 계속 하든 말든 다 좋은데 여기는 내 집이니까 정신 못 차릴 것 같으면 나가라고 말하는 것으 로 끝났다. 준혁은 그 말을 받아 칠 수 없 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충고 해줄 때마다 그는 그 말들과는 반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행동했다. 준혁은 성격의 이런 부 분이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라 고 생각했다. 대개 두 가지는 같은 것인데 바뀌는 건 상황뿐이니까. 그건 영화감독 의 꿈을 품고 부모로부터 어떤 지원도 받 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삼수 끝에 한국 예 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에 입학 한 그 가, 그리고 선배들의 ‘네 시나리오는 아직 도 수십 년 전 영화들의 감성에만 머무르 고 있다’ 는 등의 조언과는 상관없이 자신 만의 영화를 만들겠다며 그 꿈과 함께 넘 어진 그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준혁은 지난 여행에 들고 갔던 가방에 옷 가지를 챙겨 수연의 방을 나갔다. 준혁은 숙대입구역에서 삼각지역, 그 리고 신용산역으로 이어지는 지하철 4호 선을 따라서 걸으면서 그런 자기 모습이 1976년 개봉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 화 택시드라이버에서 퇴역 군인 트래비 스 비클이 뉴욕 맨해튼의 뒷골목을 돌아 다니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수연 으로부터 연락이 오면 그때 돌아가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주일 정도를 찜질 방에서 보내고, 친구들의 자취방에서 지 내다보니 그런 생각은 금방 사라졌다. 7 월 16일 아침, 돈이 떨어진 준혁은 다시 수연의 방으로 돌아가 봤다. 하지만 그녀 는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바꾼 뒤였다. 수 연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빈다면 거기서 다시 살 수는 있을 것 같았지만 전보다 더 굽히고 지내야 할 것이 뻔했다. 후속편 은 모두 실망만을 남기는 법이라고 생각 하며 그는 갈월동 지하차도를 지나서 한 강대로로 나왔다. 어차피 준혁이 생각하기에도 자기 처지 에 전망없는 연애를 계속 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돈을 모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 지 계획하며 지낼 곳이 필요했으므로 준혁은 알바몬과 알바천국에 잠자리, 식 사라는 단어를 검색했다. 숙식 제공은 물 론 당일 입사가 가능한 숙식 노가다가 유 일한 방안으로 보였다. 팀장이 직접 구인 하는 팀들을 몇 군데 알아보니 양중 업무 를 하는 곳이 있었다. 구글에 검색해보니 양중이라는 단어는 일본어 ようじゅう에서 비롯한 말로 크레인 등 자재와 중장비를 원하는 위치로 끌어 올리는 것을 뜻했다. 준혁은 사당역에 위치한 건설기초안전교 육장에서 5만원을 내고 오후 두시부터 4 시간동안 안전보건교육을 받고 이수증을 발급 받은 뒤에 강의실 뒤에 놓인 보리 건빵과 믹스커피를 주머니에 챙겨 나왔 다. 지하철을 타며 팀장 번호로 연락을 하 니 고행록 팀장이 숙소 주소를 문자로 보 내주었다. 사당 역에서 출발하면 2시간이 걸리는 경로를 확인하고 지하철을 타고 가던 중 용산 역에서 평택 역으로 1시간 만에 내려가는 기차가 있다는 사실을 알 고 준혁은 웃었다. 허허허. 갑자기 수연이 그렇게 웃지 좀 말라고 말했던 게 생각났 다. 지하철 1호선을 계속 타고 내려가는 풍경에 익숙해질 쯤 평택 역에서 내리고 다시 20번 버스를 타서 통복시장과 평궁 리와 대원아파트를 지나 안정6번리 정류 장에서 내렸다. 팀장이 알려준 방으로 비 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니 창문 밖으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부엌 맞은 편 방에는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지 아저씨라고 불러야 할 지 애매한 외모의 남자가 웃옷 을 벗은 채 옷걸이에 팬티를 널고 있었다. 방바닥에 놓인 하이바에 써진 이름은 최

단편소설 부문 우수작 광어는 누워있고 우럭은 서 있다pdf.snunews.com/2000/200009.pdf · 2019-12-10 · cgv 용산 아이 파크 몰 쪽은 쳐다보지도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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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학문학상 | 2019년 12월 9일 월요일

단편소설 부문 우수작

광어는 누워있고 우럭은 서 있다박현서

1

2017년 10월 13일 강준혁과 최수연은

제 22회 부산 국제영화제에 있었다. 그

날은 1995년 개봉한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인 러브레터의 출연배우인 나카야마

미호가 비프빌리지 야외무대 오픈토크에

참석한 날이었다. 영화는 잘 몰랐지만, 거

기서 그녀의 모습을 처음 본 수연이 러브

레터를 찾아 본 뒤 준혁에게 눈 내린 오

타루에 함께 가자 말했다. 2019년 1월 말

이 되어서야 준혁으로서도 영화제 출품

마감일까지 더 바빠질 것 같고, 돈도 없어

질 테니 얼른 가야겠다는 생각에 2박 3일

간의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인천국제

공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전 공

항에서 준혁은 동기들에게 줄 기념품으

로 홋카이도 명물 과자인 시로이 코이비

토를 샀고, 한국에 도착한 저녁에 두 사람

은 명동역에서 밥을 먹은 뒤 거리를 걷다

롯데백화점에 들어갔다. 3층에서 수연은

츄리닝만 입고 다니는 준혁에게 청바지

에 흰 티라도 입고 다니라며 바지를 선물

해줬다. 프랑스 브랜드인 아페쎄에서 만

든, 밑위가 짧고 종아리 부분이 상대적으

로 넓은 스트레이트 핏이 특징인 쁘띠 스

탠다드 모델이었다. 버튼플라이방식이라

지퍼보다 불편하고 허리가 조금 작았지

만 수연은 입다보면 늘어날 거라며 잘 어

울린다고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는 2월에 숙명여자

대학교 의류학과를 졸업하고 데님 디자

이너로서의 진로를 계획하고 있었던 수

연이었다. 근처 스타벅스에 들어가서 그

녀는 생지 데님은 빨지 않고 오래 입어야

사람 체형에 맞는 워싱이 진행된다며 냅

킨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준혁에게 청바

지 페이딩이 진행되는 원리를 설명해줬

다. 이해는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준혁

은 고작해야 청바지 물 빠지는 걸로 그렇

게 길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수연이 신

기할 뿐이었다. 언제 세탁하는 게 좋은지

준혁이 묻자 수연은 입고 싶을 때 입으면

서 6개월쯤 후 세탁을 하는 게 좋으며, 그

때까지 바지를 냉동실에 넣거나 햇빛에

서 말리면서 냄새를 없애주면 된다고 말

했다. 두 사람은 함께 아이폰의 캘린더 어

플리케이션을 켜서 8월 25일에 같이 청

바지 세탁 하는 날이라 설정했다. 예정대

로라면 매일 똑같은 바지만 입을 일은 없

을테니까 그 쯤이면 적당해보였다.

명동 역에서 4호선 지하철을 타고 돌곶

이 역의 자취방으로 가던 준혁은 그녀에

게 비슷한 가격대의 선물을 해줘야겠다

는 생각에 바지 가격을 확인했다. 한국 공

식 홈페이지에서는 바지를 20만원 중반

의 가격에 팔고 있었지만 컬티즘 같은 해

외 사이트에서 직구를 하면 10만원 중반

의 가격으로 사는 방법이 있었다. 준혁은

청바지 원단이, 워싱이 어떻다는 걸 잘 알

아도 싸게 사는 방법도 모르는 수연이 바

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였지만 고

마운 마음 대신에 그런 마음이 드는 스스

로가 놀라울 정도였다. 그 후로도 준혁에

게 14.5온스의 청바지 원단은 너무 두껍

고 답답해서 바지에 손이 잘 가지 않았다.

가방에 바지를 계속 넣어두고 꺼내지 않

은 것도, 자신보다 어려도 키는 더 크고

어른스럽던 수연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

한 것도 그쯤이었다.

4월 초부터 청파로의 벚꽃이 모두 지

는 말일까지 준혁은 수연의 방에서 지내

면서 영화제 상영작 발표만, 정확히는 작

품상 상금만 기다렸다. 오백만원이면 영

화를 만드느라 쓴 자취방 보증금을 조금

은 메꿀 수 있을테니까. 그러는 동안 떨어

진 벚꽃 잎처럼 수연도 디자이너의 꿈을

접었다. 그리고 용산 역 근처의 증권사에

서 파견 계약직원 신분으로 사무보조 아

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복숭아 뼈까지 기

장이 떨어지는 통넓은 청바지에 컨버스

척 테일러를 신던 그녀의 뒷모습은 '청바

지, 반바지, 레깅스, 타이즈는 모두 금지,

정장용 힐 높이 4~7cm 권장, 로퍼 단화

도 금지' 라는 암묵적인 회사 여직원 정장

드레스 코드 준수사항에 따라 무릎까지

내려오는 검은 치마에 힐을 신은 모습으

로 바뀌었다. 성큼성큼 걷던 걸음걸이의

보폭도 전보다 줄어들었다. 준혁에게 그

모습은 4월 내내 하얀 벚꽃이 피어있던

나무에 5월부터 7월까지 빨간 버찌 열매

가 맺히는 걸 보는 것 같았다. 흰 꽃잎들

은 다 어디 갔느냐고 벚꽃나무에게 물어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준혁 역

시 그녀에게 할 수 있는 말 같은 건 없다

고 생각했다. 퇴근길에 방까지 걸어갈 때

마다 수연은 선물 해준 바지를 입지 않는

준혁에게 안 입을 거면 다시 달라고, 자기

가 대신 입을 거라는 농담만 했다. 이후로

도 그녀는 방으로 돌아오면 전신거울 앞

에 서서 평일엔 입을 일 없는 청바지들을

하나씩 입어보고 다시 벗다가 잠드는 날

들을 보냈다. 준혁도 그녀를 보며 안 입어

봐도 예쁘다는 등의 말을 했지만 점차 말

이 줄었다.

그러던 5월 첫째 주, 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작 리스트가 공지됐는데 거기 준혁

의 이름은 없었다. 대신 6월 27일부터 7

월 3일까지 진행 된 상영회에서 그의 동

기와 후배들은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희극지왕’, ‘절대악몽’의 3개 부문에서 최

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상영작 리스트가

발표된 날부터 이틀에 한번 꼴로 준혁은

편의점에서 수입맥주 네 캔을 만원에 사

서 마시며 잠든 수연의 발뒤꿈치에 붙은

밴드만 쳐다봤다. 준혁이 출품을 한 ‘사랑

에 관한 짧은 필름’ 부문에서 상을 받은

동기는 개인 톡을 보내줬다. 준혁아 그래

도 시간 지나고 보면 좋은 기억으로 남을

거야. 시간이 지나야만 좋게 기억되는 것.

그런 건 붙잡고 싶은 마음을 참고 헤어진

전 여자친구에게 ‘그래도 그 새낀 양반이

었어’ 정도로 기억되는 것만큼 무의미하

다고 그는 생각했다. 준혁이 일본에서 사

온 기념품을 가방에서 꺼내 동기들에게

줄 기회는 단 한번도 없었다.

영화제 마지막 날인 7월 3일 저녁, 수연

의 퇴근을 기다리며 준혁은 역 앞 광장을

빙빙 돌았다. 그래도 하루는 가봐야 하는

것 아닌가 싶으면서도 영화제가 열리는

CGV 용산 아이 파크 몰 쪽은 쳐다보지도

못한 채였다. 해산물은 냄새도 맡기 싫어

하는 수연이기에 언젠가 가보고 싶었던

광동수산은 못가고 용산 대로변에 위치

한 펍에 들어갔다. 거기선 과일과 치즈 조

각들을 이만 오천원이라는 합리적인 가

격에 판매하고 있었다. 준혁은 메뉴판의

금액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수연이 인스타

스토리에 사진을 올려야 한다고, 브이로

그 영상을 찍겠다고 치즈에 손을 못 대게

하는 것은 더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러다

같이 방에 돌아왔는데 그날은 수요일, 즉

수연이 방청소를 하기로 되어있는 날이

었다. 바닥에는 어제 밤 그녀가 벗어둔 청

바지 서너벌이 있었다. 수연은 방을 치울

생각이 없어보였다. 다시 준혁은 그걸 이

해 할 수 없었다.

대화는 청소 좀 하자는 준혁의 말로 시

작했다. 그 후에 몇 마디가 오가다가 마지

막은 수연이 준혁을 내려다보며 이런 거

이젠 지쳤다고, 오빠가 영화를 계속 하든

말든 다 좋은데 여기는 내 집이니까 정신

못 차릴 것 같으면 나가라고 말하는 것으

로 끝났다. 준혁은 그 말을 받아 칠 수 없

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충고 해줄 때마다

그는 그 말들과는 반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행동했다. 준혁은 성격의 이런 부

분이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라

고 생각했다. 대개 두 가지는 같은 것인데

바뀌는 건 상황뿐이니까. 그건 영화감독

의 꿈을 품고 부모로부터 어떤 지원도 받

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삼수 끝에 한국 예

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에 입학 한 그

가, 그리고 선배들의 ‘네 시나리오는 아직

도 수십 년 전 영화들의 감성에만 머무르

고 있다’ 는 등의 조언과는 상관없이 자신

만의 영화를 만들겠다며 그 꿈과 함께 넘

어진 그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준혁은 지난 여행에 들고 갔던 가방에 옷

가지를 챙겨 수연의 방을 나갔다.

준혁은 숙대입구역에서 삼각지역, 그

리고 신용산역으로 이어지는 지하철 4호

선을 따라서 걸으면서 그런 자기 모습이

1976년 개봉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

화 택시드라이버에서 퇴역 군인 트래비

스 비클이 뉴욕 맨해튼의 뒷골목을 돌아

다니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수연

으로부터 연락이 오면 그때 돌아가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주일 정도를 찜질

방에서 보내고, 친구들의 자취방에서 지

내다보니 그런 생각은 금방 사라졌다. 7

월 16일 아침, 돈이 떨어진 준혁은 다시

수연의 방으로 돌아가 봤다. 하지만 그녀

는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바꾼 뒤였다. 수

연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빈다면 거기서

다시 살 수는 있을 것 같았지만 전보다

더 굽히고 지내야 할 것이 뻔했다. 후속편

은 모두 실망만을 남기는 법이라고 생각

하며 그는 갈월동 지하차도를 지나서 한

강대로로 나왔다.

어차피 준혁이 생각하기에도 자기 처지

에 전망없는 연애를 계속 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돈을 모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 지 계획하며 지낼 곳이 필요했으므로

준혁은 알바몬과 알바천국에 잠자리, 식

사라는 단어를 검색했다. 숙식 제공은 물

론 당일 입사가 가능한 숙식 노가다가 유

일한 방안으로 보였다. 팀장이 직접 구인

하는 팀들을 몇 군데 알아보니 양중 업무

를 하는 곳이 있었다. 구글에 검색해보니

양중이라는 단어는 일본어 ようじゅう에서

비롯한 말로 크레인 등 자재와 중장비를

원하는 위치로 끌어 올리는 것을 뜻했다.

준혁은 사당역에 위치한 건설기초안전교

육장에서 5만원을 내고 오후 두시부터 4

시간동안 안전보건교육을 받고 이수증을

발급 받은 뒤에 강의실 뒤에 놓인 보리

건빵과 믹스커피를 주머니에 챙겨 나왔

다. 지하철을 타며 팀장 번호로 연락을 하

니 고행록 팀장이 숙소 주소를 문자로 보

내주었다. 사당 역에서 출발하면 2시간이

걸리는 경로를 확인하고 지하철을 타고

가던 중 용산 역에서 평택 역으로 1시간

만에 내려가는 기차가 있다는 사실을 알

고 준혁은 웃었다. 허허허. 갑자기 수연이

그렇게 웃지 좀 말라고 말했던 게 생각났

다. 지하철 1호선을 계속 타고 내려가는

풍경에 익숙해질 쯤 평택 역에서 내리고

다시 20번 버스를 타서 통복시장과 평궁

리와 대원아파트를 지나 안정6번리 정류

장에서 내렸다. 팀장이 알려준 방으로 비

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니 창문 밖으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부엌 맞은 편 방에는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지 아저씨라고

불러야 할 지 애매한 외모의 남자가 웃옷

을 벗은 채 옷걸이에 팬티를 널고 있었다.

방바닥에 놓인 하이바에 써진 이름은 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