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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학문학상 | 2019년 12월 9일 월요일
단편소설 부문 우수작
광어는 누워있고 우럭은 서 있다박현서
1
2017년 10월 13일 강준혁과 최수연은
제 22회 부산 국제영화제에 있었다. 그
날은 1995년 개봉한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인 러브레터의 출연배우인 나카야마
미호가 비프빌리지 야외무대 오픈토크에
참석한 날이었다. 영화는 잘 몰랐지만, 거
기서 그녀의 모습을 처음 본 수연이 러브
레터를 찾아 본 뒤 준혁에게 눈 내린 오
타루에 함께 가자 말했다. 2019년 1월 말
이 되어서야 준혁으로서도 영화제 출품
마감일까지 더 바빠질 것 같고, 돈도 없어
질 테니 얼른 가야겠다는 생각에 2박 3일
간의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인천국제
공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전 공
항에서 준혁은 동기들에게 줄 기념품으
로 홋카이도 명물 과자인 시로이 코이비
토를 샀고, 한국에 도착한 저녁에 두 사람
은 명동역에서 밥을 먹은 뒤 거리를 걷다
롯데백화점에 들어갔다. 3층에서 수연은
츄리닝만 입고 다니는 준혁에게 청바지
에 흰 티라도 입고 다니라며 바지를 선물
해줬다. 프랑스 브랜드인 아페쎄에서 만
든, 밑위가 짧고 종아리 부분이 상대적으
로 넓은 스트레이트 핏이 특징인 쁘띠 스
탠다드 모델이었다. 버튼플라이방식이라
지퍼보다 불편하고 허리가 조금 작았지
만 수연은 입다보면 늘어날 거라며 잘 어
울린다고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는 2월에 숙명여자
대학교 의류학과를 졸업하고 데님 디자
이너로서의 진로를 계획하고 있었던 수
연이었다. 근처 스타벅스에 들어가서 그
녀는 생지 데님은 빨지 않고 오래 입어야
사람 체형에 맞는 워싱이 진행된다며 냅
킨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준혁에게 청바
지 페이딩이 진행되는 원리를 설명해줬
다. 이해는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준혁
은 고작해야 청바지 물 빠지는 걸로 그렇
게 길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수연이 신
기할 뿐이었다. 언제 세탁하는 게 좋은지
준혁이 묻자 수연은 입고 싶을 때 입으면
서 6개월쯤 후 세탁을 하는 게 좋으며, 그
때까지 바지를 냉동실에 넣거나 햇빛에
서 말리면서 냄새를 없애주면 된다고 말
했다. 두 사람은 함께 아이폰의 캘린더 어
플리케이션을 켜서 8월 25일에 같이 청
바지 세탁 하는 날이라 설정했다. 예정대
로라면 매일 똑같은 바지만 입을 일은 없
을테니까 그 쯤이면 적당해보였다.
명동 역에서 4호선 지하철을 타고 돌곶
이 역의 자취방으로 가던 준혁은 그녀에
게 비슷한 가격대의 선물을 해줘야겠다
는 생각에 바지 가격을 확인했다. 한국 공
식 홈페이지에서는 바지를 20만원 중반
의 가격에 팔고 있었지만 컬티즘 같은 해
외 사이트에서 직구를 하면 10만원 중반
의 가격으로 사는 방법이 있었다. 준혁은
청바지 원단이, 워싱이 어떻다는 걸 잘 알
아도 싸게 사는 방법도 모르는 수연이 바
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였지만 고
마운 마음 대신에 그런 마음이 드는 스스
로가 놀라울 정도였다. 그 후로도 준혁에
게 14.5온스의 청바지 원단은 너무 두껍
고 답답해서 바지에 손이 잘 가지 않았다.
가방에 바지를 계속 넣어두고 꺼내지 않
은 것도, 자신보다 어려도 키는 더 크고
어른스럽던 수연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
한 것도 그쯤이었다.
4월 초부터 청파로의 벚꽃이 모두 지
는 말일까지 준혁은 수연의 방에서 지내
면서 영화제 상영작 발표만, 정확히는 작
품상 상금만 기다렸다. 오백만원이면 영
화를 만드느라 쓴 자취방 보증금을 조금
은 메꿀 수 있을테니까. 그러는 동안 떨어
진 벚꽃 잎처럼 수연도 디자이너의 꿈을
접었다. 그리고 용산 역 근처의 증권사에
서 파견 계약직원 신분으로 사무보조 아
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복숭아 뼈까지 기
장이 떨어지는 통넓은 청바지에 컨버스
척 테일러를 신던 그녀의 뒷모습은 '청바
지, 반바지, 레깅스, 타이즈는 모두 금지,
정장용 힐 높이 4~7cm 권장, 로퍼 단화
도 금지' 라는 암묵적인 회사 여직원 정장
드레스 코드 준수사항에 따라 무릎까지
내려오는 검은 치마에 힐을 신은 모습으
로 바뀌었다. 성큼성큼 걷던 걸음걸이의
보폭도 전보다 줄어들었다. 준혁에게 그
모습은 4월 내내 하얀 벚꽃이 피어있던
나무에 5월부터 7월까지 빨간 버찌 열매
가 맺히는 걸 보는 것 같았다. 흰 꽃잎들
은 다 어디 갔느냐고 벚꽃나무에게 물어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준혁 역
시 그녀에게 할 수 있는 말 같은 건 없다
고 생각했다. 퇴근길에 방까지 걸어갈 때
마다 수연은 선물 해준 바지를 입지 않는
준혁에게 안 입을 거면 다시 달라고, 자기
가 대신 입을 거라는 농담만 했다. 이후로
도 그녀는 방으로 돌아오면 전신거울 앞
에 서서 평일엔 입을 일 없는 청바지들을
하나씩 입어보고 다시 벗다가 잠드는 날
들을 보냈다. 준혁도 그녀를 보며 안 입어
봐도 예쁘다는 등의 말을 했지만 점차 말
이 줄었다.
그러던 5월 첫째 주, 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작 리스트가 공지됐는데 거기 준혁
의 이름은 없었다. 대신 6월 27일부터 7
월 3일까지 진행 된 상영회에서 그의 동
기와 후배들은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희극지왕’, ‘절대악몽’의 3개 부문에서 최
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상영작 리스트가
발표된 날부터 이틀에 한번 꼴로 준혁은
편의점에서 수입맥주 네 캔을 만원에 사
서 마시며 잠든 수연의 발뒤꿈치에 붙은
밴드만 쳐다봤다. 준혁이 출품을 한 ‘사랑
에 관한 짧은 필름’ 부문에서 상을 받은
동기는 개인 톡을 보내줬다. 준혁아 그래
도 시간 지나고 보면 좋은 기억으로 남을
거야. 시간이 지나야만 좋게 기억되는 것.
그런 건 붙잡고 싶은 마음을 참고 헤어진
전 여자친구에게 ‘그래도 그 새낀 양반이
었어’ 정도로 기억되는 것만큼 무의미하
다고 그는 생각했다. 준혁이 일본에서 사
온 기념품을 가방에서 꺼내 동기들에게
줄 기회는 단 한번도 없었다.
영화제 마지막 날인 7월 3일 저녁, 수연
의 퇴근을 기다리며 준혁은 역 앞 광장을
빙빙 돌았다. 그래도 하루는 가봐야 하는
것 아닌가 싶으면서도 영화제가 열리는
CGV 용산 아이 파크 몰 쪽은 쳐다보지도
못한 채였다. 해산물은 냄새도 맡기 싫어
하는 수연이기에 언젠가 가보고 싶었던
광동수산은 못가고 용산 대로변에 위치
한 펍에 들어갔다. 거기선 과일과 치즈 조
각들을 이만 오천원이라는 합리적인 가
격에 판매하고 있었다. 준혁은 메뉴판의
금액을 이해 할 수 없었다. 수연이 인스타
스토리에 사진을 올려야 한다고, 브이로
그 영상을 찍겠다고 치즈에 손을 못 대게
하는 것은 더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러다
같이 방에 돌아왔는데 그날은 수요일, 즉
수연이 방청소를 하기로 되어있는 날이
었다. 바닥에는 어제 밤 그녀가 벗어둔 청
바지 서너벌이 있었다. 수연은 방을 치울
생각이 없어보였다. 다시 준혁은 그걸 이
해 할 수 없었다.
대화는 청소 좀 하자는 준혁의 말로 시
작했다. 그 후에 몇 마디가 오가다가 마지
막은 수연이 준혁을 내려다보며 이런 거
이젠 지쳤다고, 오빠가 영화를 계속 하든
말든 다 좋은데 여기는 내 집이니까 정신
못 차릴 것 같으면 나가라고 말하는 것으
로 끝났다. 준혁은 그 말을 받아 칠 수 없
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충고 해줄 때마다
그는 그 말들과는 반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행동했다. 준혁은 성격의 이런 부
분이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라
고 생각했다. 대개 두 가지는 같은 것인데
바뀌는 건 상황뿐이니까. 그건 영화감독
의 꿈을 품고 부모로부터 어떤 지원도 받
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삼수 끝에 한국 예
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에 입학 한 그
가, 그리고 선배들의 ‘네 시나리오는 아직
도 수십 년 전 영화들의 감성에만 머무르
고 있다’ 는 등의 조언과는 상관없이 자신
만의 영화를 만들겠다며 그 꿈과 함께 넘
어진 그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준혁은 지난 여행에 들고 갔던 가방에 옷
가지를 챙겨 수연의 방을 나갔다.
준혁은 숙대입구역에서 삼각지역, 그
리고 신용산역으로 이어지는 지하철 4호
선을 따라서 걸으면서 그런 자기 모습이
1976년 개봉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
화 택시드라이버에서 퇴역 군인 트래비
스 비클이 뉴욕 맨해튼의 뒷골목을 돌아
다니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수연
으로부터 연락이 오면 그때 돌아가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주일 정도를 찜질
방에서 보내고, 친구들의 자취방에서 지
내다보니 그런 생각은 금방 사라졌다. 7
월 16일 아침, 돈이 떨어진 준혁은 다시
수연의 방으로 돌아가 봤다. 하지만 그녀
는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바꾼 뒤였다. 수
연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빈다면 거기서
다시 살 수는 있을 것 같았지만 전보다
더 굽히고 지내야 할 것이 뻔했다. 후속편
은 모두 실망만을 남기는 법이라고 생각
하며 그는 갈월동 지하차도를 지나서 한
강대로로 나왔다.
어차피 준혁이 생각하기에도 자기 처지
에 전망없는 연애를 계속 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돈을 모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 지 계획하며 지낼 곳이 필요했으므로
준혁은 알바몬과 알바천국에 잠자리, 식
사라는 단어를 검색했다. 숙식 제공은 물
론 당일 입사가 가능한 숙식 노가다가 유
일한 방안으로 보였다. 팀장이 직접 구인
하는 팀들을 몇 군데 알아보니 양중 업무
를 하는 곳이 있었다. 구글에 검색해보니
양중이라는 단어는 일본어 ようじゅう에서
비롯한 말로 크레인 등 자재와 중장비를
원하는 위치로 끌어 올리는 것을 뜻했다.
준혁은 사당역에 위치한 건설기초안전교
육장에서 5만원을 내고 오후 두시부터 4
시간동안 안전보건교육을 받고 이수증을
발급 받은 뒤에 강의실 뒤에 놓인 보리
건빵과 믹스커피를 주머니에 챙겨 나왔
다. 지하철을 타며 팀장 번호로 연락을 하
니 고행록 팀장이 숙소 주소를 문자로 보
내주었다. 사당 역에서 출발하면 2시간이
걸리는 경로를 확인하고 지하철을 타고
가던 중 용산 역에서 평택 역으로 1시간
만에 내려가는 기차가 있다는 사실을 알
고 준혁은 웃었다. 허허허. 갑자기 수연이
그렇게 웃지 좀 말라고 말했던 게 생각났
다. 지하철 1호선을 계속 타고 내려가는
풍경에 익숙해질 쯤 평택 역에서 내리고
다시 20번 버스를 타서 통복시장과 평궁
리와 대원아파트를 지나 안정6번리 정류
장에서 내렸다. 팀장이 알려준 방으로 비
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니 창문 밖으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부엌 맞은 편 방에는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지 아저씨라고
불러야 할 지 애매한 외모의 남자가 웃옷
을 벗은 채 옷걸이에 팬티를 널고 있었다.
방바닥에 놓인 하이바에 써진 이름은 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