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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중동학회논총 |제34권 제4호 [2014. 02]: 161~181 이슬람세계-유럽 문명의 지적 교류* |황 의 갑**김 정 하***| Hwang, Eui-Gab, Kim, Jung-Ha 1)2)3) The Intellectual exchanges among Islamic World-European Civilization Islamic civilization was born in the first half of the seventh century in Mecca. Since then the Muslims began to collect and synthesize the advanced knowledge gained from the ancient Greek, Persian, Indian and Chinese civilizations. And this led to the translation movement, which reached its zenith during the Abbasid Dynasty. Especially in the age of Al-Ma'mun of Baghdad and of the greatest Abbasid Caliph(813-833 reign) founded 'Bayt al Hikmah'(House of Wisdom), a translation center. He commissioned the translations of foreign works in Greek, Hindu and Persian, wrote down the Hadith and codified Islamic law from what had been a mostly oral tradition. The twelfth Century, for the Europeans, was the great period of translation and absorption from the muslim world. Much of the knowledge available in Europe during the 12th century was obtained by translations from foreign languages, chiefly Arabic. The nuclear of translation was in Andalusia in Spain and Sicily in Italy. During 12-13th centuries many European scholars, who felt the need for new deeper knowledge, turned their attentions to Arabic sources. * 논문은 2007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07-362-A00021) ** 부산외국어대학교 지중해지역원 HK연구교수, [email protected] *** 부산외국어대학교 지중해지역원 HK연구교수, [email protected]

이슬람세계-유럽 문명의 지적 교류* · 2014. 5. 9. · 려진 알 콰와리즈미(al-Khawarizmi, 780-850), 이븐 시나(아빈센나, Ibn Sina, Avicenna, 981-1037),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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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이슬람세계-유럽 문명의 지적 교류* · 2014. 5. 9. · 려진 알 콰와리즈미(al-Khawarizmi, 780-850), 이븐 시나(아빈센나, Ibn Sina, Avicenna, 981-1037), 알

|한국중동학회논총|제34권 제4호 [2014. 02]: 161~181

이슬람세계-유럽 문명의 지적 교류*

|황 의 갑**⋅김 정 하***|Hwang, Eui-Gab, Kim, Jung-Ha

1)2)3)

The Intellectual exchanges among Islamic World-European Civilization

Islamic civilization was born in the first half of the seventh century in Mecca. Since then the Muslims began to collect and synthesize the advanced knowledge gained from the ancient Greek, Persian, Indian and Chinese civilizations. And this led to the translation movement, which reached its zenith during the Abbasid Dynasty. Especially in the age of Al-Ma'mun of Baghdad and of the greatest Abbasid Caliph(813-833 reign) founded 'Bayt al Hikmah'(House of Wisdom), a translation center. He commissioned the translations of foreign works in Greek, Hindu and Persian, wrote down the Hadith and codified Islamic law from what had been a mostly oral tradition.

The twelfth Century, for the Europeans, was the great period of translation and absorption from the muslim world. Much of the knowledge available in Europe during the 12th century was obtained by translations from foreign languages, chiefly Arabic. The nuclear of translation was in Andalusia in Spain and Sicily in Italy. During 12-13th centuries many European scholars, who felt the need for new deeper knowledge, turned their attentions to Arabic sources.

* 논문은 2007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07-362-A00021)

** 부산외국어대학교 지중해지역원 HK연구교수, [email protected]

*** 부산외국어대학교 지중해지역원 HK연구교수,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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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 Words : Islamic world, European civilization, Bayt al Hikmah, translation, intellectual exchanges]

Ⅰ. 서론

7세기 아라비아반도의 메카에서 발흥한 이슬람은 유일신 알라를 숭배하는

종교로, 이전부터 아라비아 반도에 퍼져 있던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좀 더 단순화시키면서 주변 지역으로 그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 후 이슬람

문명은 주변 지역의 다른 문명 요인들을 하나의 용광로에 녹여 새로운 문명을

만들었다. 이슬람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그리스 문명, 로마

문명, 비잔틴 문명, 사산조 페르시아 문명, 인도 문명, 중국 문명 등을 배경으로

중세 지중해 문명의 발전을 중재하였고,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침체되어 있던

중세 유럽을 깨우는 르네상스의 원동력이었으며, 근-현대에 이르러서는 서구

문명을 중흥시키는데 동력의 한 축을 담당했다.

역사적으로 이슬람 문명의 스폰지와 같은 역할은 이들의 지식에 대한 가치

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슬림에게 배움이란 매우 중요한 숭배행위

와도 같았다. 또한 더 나아가 그것은 지극히 중요한 가치로 평가될 수 있는 행

위 중의 하나였다. 전승에 따르면 ‘한 시간의 배움’은 ‘1년 이상 예배를 드

린 것과 맞먹는 가치가 있다’고 하였다. 배움에 대한 강조는 이슬람 역사에 두

가지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첫째, 저마다의 관점은 다를지라도 무슬림들은

세계 어느 지역을 가든지 함께 나눌 수 있는 보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서로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모든 무슬림이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종교적

가르침과 의무들에서 기원하였다. 둘째, 무슬림은 그들이 속한 국가가 지식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행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들 스스로는 자신들의

세대에서 지식을 보존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이를 다음 세대로 전승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손주영역. 2002: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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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믿음 때문에 이슬람 제국이 번창하던 시기에 지식탐구에 대한 열정

도 유지, 발전될 수 있었다. 중세는 아랍 무슬림에게는 문명 중흥의 시기였지만

유럽에게는 지식과 학문의 발달이 정체 또는 퇴보되던 시기였다. 물이 높은 곳

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아랍ㆍ이슬람의 발달된 문명은 지중해

를 통해 유럽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바그다드에서 발전된 문명은 지중

해의 중심에 위치한 이탈리아 반도를 통해 그리고 서지중해 이베리아 반도의

後우마이야 왕조 당시 카탈루니아를 통해 프랑스 지역 등으로 전파되어 유럽

르네상스의 새로운 문명을 꽃피웠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아랍·이슬람 문명과 유럽의 지적 교류를 살펴보고 이를

분석하여 그 흐름과 유형이 무엇인지를 지적해 보고자 한다.

Ⅱ. 이슬람 문명의 지식 형성과 발전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에서 시작된 이슬람은 이후 급속히 주변지역으로 확산

되면서 불과 100년도 안되어 서쪽으로는 비잔틴 제국의 영토였던 북아프리카

를 지나 이베리아 반도의 피레네 산맥까지 그 영향을 미쳤고, 동쪽으로는 사산

조 페르시아의 영토였던 지금의 이라크와 이란을 지나 중앙아시아까지 그 세력

의 범위를 넓혔다(황의갑, 2011:28). 그리고 거기에 살던 페르시아인, 베르베르

인, 이집트인 등과 같은 다양한 족속과 인종들은 이슬람사회에 동화되면서 아

랍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으며, 거의 모든 사회ㆍ문화 활동에 참여

하게 되었다. 이처럼 다양한 문화권에 속하던 사람들이 이슬람 문화권에 통합

될 수 있었음은 이슬람 과학이 발전하는 근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김능우,

2001:131).

이렇듯 이슬람은 주변의 이질적인 문명의 요소들을 통섭과 접변의 과정으로

정련하여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당나라와의 전투(탈라스 전투, 751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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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사로잡은 포로들로부터 제지법을 전수받아 지식 혁명에 결정적으로 기여하

였다. 그 전까지만 해도 모든 기록은 파피루스나 양피지 등에 기록되었으나 종

이가 확산되면서 과거의 ‘기억의 문명’ 전통은 사실상 ‘기록된 문명’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종이는 사상과 지식의 빠른 전파를 가능하게 하였고, 더 수준 높은 학술 연

구, 조사, 저술에 대한 수요를 촉진했으며, 책의 문화를 조성하였다. 게다가 통

치권력도 종이의 사용을 장려했는데, 이는 종이에 한 번 쓰고 나면 양피지처럼

지우거나 고칠 수 없기 때문에 위ㆍ변조를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황의갑,

2013:106).

유일신교인 이슬람은 초기부터 모든 종류의 지적 탐구를 공개적으로 장려하

고 육성하는 지침을 주문하였다. 한때, 이슬람의 예언자인 무함마드는 ‘중국

에 가더라도 과학을 찾아라’라고 말하며 지식 추구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

었다. 그리고 예언자의 언행을 수세기 동안 정성들여 수집하고 대조하고 연구

한 <하디스>의 한 구절에서는 학자를 ‘예언자의 진정한 상속인’으로 찬양하

였다. 해마다 전 세계에서 무슬림들이 모이는 성지순례 하지는 이론, 혁신, 학

문, 문화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세계적 시장이 되었다(김한영역, 2013:148). 이처

럼 이슬람에서의 지적 활동은 초기부터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대 문명들의

지식들을 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세계 4대 문명의 흔적

들이 이슬람 문명에 녹아들어 고대 이집트인, 메소포타미아인, 인도인, 중국인

등의 지적 활동과 업적들이 고스란히 이슬람 제국에 전수되었다.

7세기 초까지만 해도 비잔틴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대결로 세계문명의

흐름은 잠시 정체되었던 시기였지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사산조 페르시

아의 군데샤푸르는 학문적 발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도시들이 아랍ㆍ이

슬람 세력에 넘어가면서 그리스와 기타 고대의 철학적, 과학적 지식을 전파하

는 중심지가 되었다. 이곳에서 활동하던 많은 기독교계 학자들은 고대 시리아

어와 그리스어 그리고 산스크리트어도 구사할 수 있었고, 아랍의 정복 후에는

아랍어까지 배우는 등 지적 호기심이 뛰어났다. 그리하여 이들은 새롭게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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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랍ㆍ이슬람 칼리파의 후원 하에 고전들에 대한 번역 작업을 맡게 되었다.

역사적 선례를 찾아 볼 수 없었던 군데샤푸르에서의 활발한 번역 활동은 처

음부터 무슬림뿐만 아니라 많은 기독교인과 유대인들까지 가담하는 국제적이

며 범종교적인 양상을 보였다. 번역 사업은 대부분 왕(칼리파)의 명령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들은 의학, 천문학과 같은 실천적 학문은 물론 비교적 추상적인

점성술과 연금술의 번역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물론 이 이국적인 두 학문은 과

거 수세기 동안 공식적 후원을 받았고, 계속해서 수 백 년 이상 동-서양에서 지

원을 받았다(정규영역, 2004:59).

이러한 학문적 흐름들은 우마이야 왕조를 거쳐 압바스 왕조에 이르러 절정

에 도달하였다. 찬란한 이슬람 문명의 금자탑을 이루는 데는, 서구에서도 잘 알

려진 알 콰와리즈미(al-Khawarizmi, 780-850), 이븐 시나(아빈센나, Ibn Sina,

Avicenna, 981-1037), 알 이드리시(al-Idrisi, 1100-1166) 이븐 루쉬드(아베로에스,

Ibn Rushid, 1126-1198)와 같은 인물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압바스 왕조의

알 마문(al-Mamun, 813~833 재위) 시대에 만들어진 ‘바이트 알 히크마(지혜의

전당)4)’에서의 번역이 활발히 이루어져 그리스의 과학과 철학서들이 대거 아

랍어로 번역되었고, 학문의 언어도 이슬람 제국의 언어인 아랍어로 대체되었

다.

8세기 직후 지중해는 사실상 무슬림의 고속도로가 되었다. 해로와 육로의 교

통은 결국 모든 이슬람 영토를 연결시켜 인도를 거쳐 동남아시아와 중국까지

연장되었고, 북쪽으로는 볼가 강에서 스칸디나비아, 남쪽으로는 아프리카 내륙

깊숙이 침투했다. 무슬림 해적선들은 심지어 아일랜드까지 진출했다. 상업적,

문화적, 종교적 중심지들을 연결한 이 교통망은 이슬람 지역들로 상품을 실어

나르는 무역선단들과 대상들을 불러들였고, 이로 인해 당시 유럽에 알려진 것

보다 더 놀라운 생활수준으로 발전했다(정규영역, 2004:167).

4) 이 기관은 아마 네스토리우스 교도들이 설립한 그리스 과학과 의학 센터였던 페르시아의 고대

“군데샤푸르 아카데미(Gondeshapur Academy)”를 본딴 것이었다. 네스토리우스 교도들은 비

잔틴의 박해를 피해서 사산 왕종[ 피난해왔는데, 이 아카데미는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크의 고

대 그리스 학교의 전형이었다(이희수역, 1998: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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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슬람 이전의 지적 영향

무엇보다 이슬람 문명 발전에 큰 영향을 준 것은 그리스 문명이었다. 그리스

문명은 고대의 문명으로써 지니고 있었던 고전적 형태가 아니라 학자들의 의해

정교하고 세련되게 다듬어진 후에 이슬람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헬레니즘의

영향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사산조의 군데샤푸르에서 기독교인들에 의해

보존 유지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일신 사상을 주장하는 이슬람의 신학 논

쟁은 그리스의 철학과 사상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리하여 아테네와 알렉산드리

아의 헬레니즘 전통들은 압바스 왕조의 바그다드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리스어 및 시리아어로 쓰여진 작품들을 번역하려는 이븐 이스하끄의 방대

한 계획 덕택에 많은 그리스 작품들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이어서 정교

하고 믿을 만한 수준 높은 책들이 출간되었다. 11세기까지 적어도 80명에 이르

는 그리스 작가들의 작품이 번역되었는데, 여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갈레노스, 에우클레이데스 등 고대 세계의 중요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그들의 관심을 끌었던 주제는 철학, 의학, 수학, 물리학, 광학, 천문학, 지

리학, 점성학, 화학 그리고 마술 등이었다. 후기 헬레니즘 작가들과 마찬가지

로, 무슬림들은 그리스의 문학과 역사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손주

영역, 2002:273).

게다가 중국에서 시작된 제지술의 전파는 이슬람세계의 지적 활동을 더욱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구입과 운반이 쉬운 종이로 인해 많은 서적들의 필사

본이 만들어지고 이슬람 이전 문명에서 만들어진 지식의 재생산이 더욱 확대되

면서 아랍인들에게 서적문화를 계승하였다.

771년 힌두 사절단의 방문은 아랍 지식의 역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이었다. 인

도 현자들은 귀중한 산스크리트어 과학 문헌들을 가져왔는데, 그중에는 분명 7

세기 학자 브라마 굽타의 『싯단타』(Siddhanta)라는 책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세상을 두루 여행한 지리학자 알 마수디(al-Mas⁽ūdῑ, 957년 사망)의

기록에 따르면(10세기), 이 책 안에는 친구, 별, 수학, 그 밖의 여러 과학들과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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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된 모든 힌두 지식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싯단

타』는 모든 계산의 기초로 사인함수에 크게 의존했다고 한다. 힌두인들이 개

발한 사인함수를 아랍인들이 받아들여 더 깊이 발전시킴으로써 수학 발전에 지

대한 공헌을 하였다. 9세기에는 여섯 개의 삼각함수, 즉 사인과 코사인, 탄젠트

와 코탄젠트, 시컨드와 코시컨트가 모두 알려져 있었다. 첫 번째 것은 수입했지

만, 나머지 다섯은 모두 아랍인들에 의해 이룩되었다. 이로 인해 계산이 기하도

형을 대신하고 근대 수학천문학이 만개할 수 있는 기초가 형성되었다(김한영

역, 2013:132-133).

특히 그리스의 유명 학자인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

스 등의 업적들이 무슬림 학자들의 눈길을 끌었고, 지적 탐구를 부추겼다. 특히

무으타질라 학파는 그리스인들의 헬레니즘 사상에서 이성과 논리 그리고 자연

의 법칙들을 받아들여 신의 속성과 지위에 관한 논쟁에서 우상숭배자의 이론,

마니교의 이원론,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에 맞서 신의 절대적 유일성과 초월

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고대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를 건설하면서 사용

했던 수학적 기술들을 접목시켰다. 사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십진법을 비롯하여

제곱수, 계산된 순환수와 구면체의 방정식 등을 사용했었다.

2. ‘지혜의 전당’에서의 업적들

다마스커스의 우마이야 왕조 시대가 끝나고 바그다드의 압바스 왕조 시대가

융성하면서 주변국가들과의 외연은 더욱 확장 되었다. 8세기부터 13세기까지

압바스 왕조의 수도였던 바그다드는 당시 전 세계의 상업과 학문 그리고 예술

의 중심지로서,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고, 학문 발달의 기초가 되

는 종이가 대량으로 만들어지고 공급되던 도시였다.

그러면서 예전의 제국을 이루었던 민족들의 제도나 정책들 중 다수가 압바

스 왕조에 차용됨에 따라 특히 페르시아어, 산스크리트어, 그리스어 문서들의

번역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게다가 압바스 왕조의 칼리파들은 그리스 과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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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그리스어 서적들의 번역 작업을 명하기도 하였다.

칼리파 알-마문 시대에 이르러 고대 서적들을 번역하기 위한 전문 번역기관으

로 ‘지혜의 전당(Bayt al-Hikhmah)’이 바그다드에 설립되었다. 그리하여 그리

스의 과학과 철학 그리고 의학 서적들이 아랍어로 번역되었으며, 바그다드의

문화적 르네상스 시대가 시작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혜의 전당은 번역 관리청, 자료 및 서적 저장소, 제국

의 전 지역에서 모여든 학자들과 지식인들을 위한 학술원으로 발전하였다. 이

기관의 가장 큰 역할은 귀중한 지식을 보호하는 것이었다(김한영역, 2013:121).

번역작업은 9세기를 거쳐 10세기에도 지속되었고,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 페

르시아, 인도의 고전문헌들이 속속 수집되었다. 오랜 동안 잊어졌던 그리스의

과학과 의학에 관한 다양한 저서들도 고대 시리아어를 거쳐 아랍어로, 또는 그

리스어에서 아랍어로 직접 번역되었는데, 이는 아랍인들의 독창성과 사고력,

실험정신을 촉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통치자들이 의학 분야에 있어서는 자신의 건강에 대해 가지는 있던 높은 관

심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수학과 과학은 농사와 관개, 토지 측

량 같은 생업활동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지적 관심은

800~850년간에 본격화 되었으며, 당시의 이러한 추진력은 다가올 3~4세기 동안

이슬람 문명을 준비하였다(김능우, 2001:132). 이렇듯 지혜의 전당을 통한 번역

가의 양성과 번역 활동에 대한 막대한 지원의 배경에는 선진문화에 대한 수용

과 새로운 창조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아랍 번역가들은 아랍의 종교적, 문화적, 윤리적 가치를 고려하여 외국 작품

을 원문 그대로 번역하기보다는 이슬람 사회와 조화될 수 있는 소재와 가치로

적절히 각색하였다. 이는 비록 왜래 문화를 수용하더라도 자신들의 틀 속에서

재탄생시키려는 아랍인들의 노력의 결과였으며, 외부 문화에 대해 개방적인 아

랍인들의 기질이 긍정적으로 적용된 사례였다(윤용수, 2005:218).

한편 번역을 통해 다시 빛을 보게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무슬림학자

들에게 일대 변혁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는 실제 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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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경험에 대한 이성적 관찰과 분석 방법론에 관한 것으로 무슬림학자들의 과

학적인 사고를 자극했다(노명환, 2000:159). 이러한 다양한 사고를 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이슬람의 교리와 무슬림학자들의 학문적 호기심에 힘입은 바 크

다. 제국이 확대되면서 이슬람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하는 욕망과 새로운 세계

를 접하고자 하는 것이 학문 연구에 영향을 주었다.

학문을 비롯한 지적 노력들은 사회 발전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고. 나아가 아

랍 사회에 잔존해 있던 전통적인 계급구조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아랍과 페르

시아를 주축으로 한 다양한 전통의 학자들이 후원을 받기 위해 경쟁을 벌이는

현상이 일어나 이후 수세기 동안 지속될 수준 높은 과학 및 문학 저술을 부추

겼다. 최고의 능력을 가진 번역자들은 작업의 대가로 큰돈을 벌거나(일설에 의

하면 한 번역자는 탈고한 원고와 같은 무게의 금을 지급받았다고 한다), 지적

능력을 기반으로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이런 제도적 뒷받침이 없었다면,

다양한 학자들의 많은 재능들이 압바스 왕조의 통치하에서 하나의 강력한 지적

운동으로 합류하지 못했을 것이다(김한영역, 2013:123).

학문연구와 활성화에 기여한 것은 무엇보다 지혜의 전당과 같은 역할을 하

는 도서관들이 이슬람 세계의 여러 지역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니자미야 도서

관을 비롯하여 다마스쿠스, 카이로, 부하라, 사마르칸트, 페즈, 코르도바 등의

대규모 도서관들이 시대를 달리하며 학문과 예술을 장려한 무슬림 통치자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그 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에 대한 열정과 사회적 요구는 마

드라사라는 교육기관의 출현으로 결실을 맺었으며 마침내 이슬람 학문연구의

최고 고등교육기관인 대학들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학문 연구의 체계화된 기

관으로 설립된 대학의 역사는 많은 이들이 서구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하

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이슬람 세계에서 시작되었다.

9~11세기의 황금기 동안 무슬림세계의 전례없는 지적 팽창을 자극한 또 다

른 결정적인 요인은 단순한 인간의 호기심이었다. 새로운 문명의 신앙, 세상에

대한 꾸란의 가르침, 그리고 지적 자원으로 점점 풍부해진 언어와 함께 이 지적

호기심은 무슬림들이 그들 주변의 모든 것을 탐구하도록 재촉하였다. 무슬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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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그들 세계를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이 정열적으로 이룩한 업적은

초기의 업적에 견줄만한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의 문화적 결실은 곧 분명해졌

고, 그것은 예술과 과학 두 분야에서 중요하고 독특한 성취로 이어졌다(정규영

역, 2004:42)

중세 아랍인들의 천재성은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특별한 수용성, 페르시

아와 힌두문화에서 시작하여 그리스 문화에 이르는 외국문화들에서 필요한 것

을 알아보고 채택하는 능력, 그리고 실용적이고 지적이며, 특히 종교적인 요구

에 부응하여 그 개념들을 수정하고 발전시키는 능력에 있었다(김한영역,

2013:238). 그들의 이러한 능력은 신앙심과 호기심에 힘입은 바가 크며 고대 헬

레니즘의 유산보다 더 발전된 문명 창조에 기여하게 되었다.

3. 이슬람의 지식 전달자들

압바스 왕조가 시작되고 고전에 대한 번역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9세기

부터는 이슬람의 과학자들이 아랍어로 번역된 그리스, 인도, 페르시아, 바빌로

니아의 철학과 과학 사상의 보고들을 자신들의 지식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수학, 광학, 의학, 천문학 분야에서 습득한 지식을 자신들만의 혁신을

통해 더욱 수준 높은 지적 유산으로 승화시켰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사람은 바로 8세기 페르시아에서 태어난 알 콰와리즈

미이다. 그는 바빌로니아와 인도 숫자를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쓸 수 있는 체

계로 전환하는데 힘썼고, 이면의 개념에 따라 대수학(algebra)과 알고리즘

(algorithm)이라는 두 용어를 만들어 냈다. 대수학, 즉 아랍어로 알 자브르

(al-jabr)는 방정식의 양쪽 변에서 똑같은 수를 감하거나 더함을 통한 이항 -균형

이나 평형의 복원됨- 을 나타낸다(정규영역, 2004:84). 알 콰와리즈미가 개발한

두 용어는 오늘날 전 세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이고, 특히 알고리즘의 연산

작용은 현대 과학 문명 발달에 큰 기여를 하였다.

알 콰와리즈미는 대수학을 이용해 이차방정식을 풀어내는 힌두 및 초기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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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로니아의 방식에 결과를 검증하는 그리스 전통의 기하학적 증명법을 결합시

켰다. 이는 서로 다른 전통을 접목하는 아랍의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그런 문제

들에 접근하는 분석적 해법과 기하학적 해법의 관계를 강조하고 십진 소수 체

계를 도입함으로써, 알 콰와리즈미는 수학 역사상 처음으로 분석의 기술을 가

치 있는 학파로 독립시키고 기하학과 동등한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김한영역,

2013:137-138).

역사학자 필립 K. 히티는 아랍의 역사에 대한 자신의 글에서 알 콰와리즈미

의 업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2세기 무렵 크레모나의 헤랄드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된 알 콰와리즈미의 업적

은 16세기까지 유럽의 대학에서 주요 수학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그는 유

럽에 대수학을 소개하는데 공헌했다. 알 콰와리즈미의 이름은 후대에 알고리즘이

라고 불리는 대수학을 유럽에 소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알 콰와리즈미의

수학적 업적은 수학자인 오마르 카이얌, 피사의 레오나르도 피보나치, 플로렌스의

야곱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김중관, 2012:477)

또 다른 인물로 서구에서 주목을 받았던 인물은 11세기 페르시아 출신의 철

학자이자 의사인 이븐시나(980-1037)였다. 그는 서구에서는 라틴 이름인 아비센

나(Avicenna)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의학 분야뿐만 아니라 철학분야에서도

그 명성이 높았다. 그가 저술한 『의학정전』은 아랍어 주석과 더불어 모든 그

리스 의학 지식을 총 망라한 것으로 해부학, 질병, 위생학, 관장, 단순한 치료

물질들, 팔과 다리의 이상 증세와 같은 주제들과 열, 종창, 골절, 심지어 미용

문제와 같은 주제까지도 함께 다룬 중세 유럽의 대표적인 의학 교본이었다. 또

한, 그는 철학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그의 플라톤적 사고와 아리스토텔

레스적인 사고의 결합은 중세 스콜라 철학의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13세기 영국의 철학자이며 과학자인 로저 베이컨은 이븐 시나를 아리스토텔

레스 이후 최고의 철학자로 평가했다. 또한 많은 역사학자들은 중세 유럽이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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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기를 거치는 동안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그리스 고전 학문의 상당부분이 이

븐 시나의 노력을 통해 보존되었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중세 이슬

람 세계의 최고 의학자로서 ‘의사들의 왕자’라는 별칭을 부여 받았던 그는

고대 그리스 의학자 히포크라테스나 갈레노스와 더불어 인류 문명사의 큰 기둥

으로 남았다(이동은, 2012:534).

12세기까지 무슬림 의사들은 백과사전, 의학 자서전, 인체 과학과 같은 전문

분야의 개업 의사를 위한 안내서뿐만 아니라, 의학 실습에 대한 안내서 등 방대

한 분량의 저서를 남겼다. 천연두, 콜레라, 페스트가 가져온 참상에 대한 충분

히 관찰을 배경으로, 14세기 안달루시아와 그라나다에서 활동한 저명한 의학

선구자인 이븐 알 카팁(Ibn al-Khatib)은 중세 유럽의 의학 서적에서 거의 다루

지 않던 일종의 유행성 전염병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였다(정규영역, 2004:191).

철학분야의 걸출한 인물로는 서양에서 아베로에스의 이름으로 알려진 이븐

루쉬드(1126-1198)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서들에 주석을 붙인 학자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로써 합리적 근거에 의거한 철학적 논거만을 사용하였다.

그가 서구에서 유명해진 것은 그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서들이 히브리어와 라

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에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아베로에스의 주석서들 덕분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하는 ‘아베로

에스’의 관행은 유럽의 대학교에서 중요한 학문으로 정착되었다. 토마스 아퀴

나스가 이븐 루쉬드를 자주 비판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그의 저술 역시

이븐 루쉬드의 주석에 상당부분 의존한 것도 사실이다. 철학자들이 이슬람 신

학자들의 공격을 자주 받았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븐 루쉬드의 저술과 아

리스토텔레스의 작품들도 종교 기관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사희만, 2012:541).

알 이드리시의 세계지도는 서양의 지도제작술과 항해술의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서양의 지도제작술과 항해술은 칼리프 알 마문과 지혜의 집 학

자들의 과학적 전통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아랍 지도를 모방한 서양 지도는 13

세기 말부터 출현했으며, 그 대표적인 작품은 이탈리아 철학자 브루네토 라티

니(Brunetto Latini)의 우주 지도였다. 독일의 위대한 스콜라 철학자 알베르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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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누스(Albertus Magnus)도 이 무렵에 기초적인 세계지도를 제작했는데, 바그

다드와 이라크 남부 도시 바스라를 묘사한 반면 파리를 제외한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때 단지 이슬람 자료에만 기초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김한영역,

2013:168).

Ⅲ. 유럽의 지적 전통

그리스에 이어 문명의 황금기를 구사하던 로마제국은 이민족인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혼돈과 무질서의 세계로 빠져 들었다. 예로부터 전해오던 고전 학문

의 보존도 거의 다 파괴되었고, 교육도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

렀다. 그나마 비잔티움을 중심으로 한 비잔틴 제국이 존재했지만 아라비아에서

발흥한 이슬람에 의해 그 세력이 축소되면서 서양은 완전하게 고립된 형태로

남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지적 전통은 멀리 콘스탄티노플에 그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비잔티움의 기독교인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은 차단되어 있었다. 경이로운

고전 학문은 거의 사라지거나 기껏해야 의식의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었다.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소중한 원본들이 부주의로 인해 사라지거나, 전쟁으로

파괴되거나, 무식하고 그리스어 해독능력이 떨어지는 학자 지망생들로 인해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난해한 문서들로 전락했다. 로마 제국의 귀족들은

그리스 대가들의 글을 원본으로 읽었고, 그래서 당시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

레스의 철학, 아르키메데스의 경이로운 공학,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라틴어로

번역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스어라는 학문 언어가 통째로 사라진 것은, 라틴어

를 사용하는 유럽의 ‘집단정신’에서 수백 년에 걸친 지식이 사실상 증발했음

을 의미했다(김한영역, 2013:74-75).

이렇게 유럽에서의 지식생태계는 급속히 붕괴된 반면, 아랍ㆍ이슬람 세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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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때 유럽인들에 대한 아랍인들의 인식은 아부 하

산(Abu Hassan al-Mas'udi, 956년 사망)의 아래와 같은 언급을 통해서도 짐작 할

수 있다.

“북쪽의 사람들은 춥고 습기 찬 곳에 살고 있다. 얼음과 눈이 끝없이 계속되어

있다. 그들 사이에는 따뜻한 유머가 부족하고, 몸은 크고, 성격은 거칠며 예의는

세련되지 못하다. 그들은 이해력이 부족하고 언어도 발달하지 못했다. 그들의 종

교적 믿음은 견고하지 못하다. 그들 중 가장 북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리석

고, 야만적이다”(Bernard Lewis, 1993:180).

이단에 대한 심한 박해와 학문과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고 또 다른 이러

저러한 이유들로 인해 중세 유럽은 암흑시대로 정의되었는데, 이러한 암흑시대

를 벗어나게 해 준 것이 바로 르네상스였다.

7세기와 8세기의 무슬림 정복 활동이 있은 뒤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진행된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 분야의 작품들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작업은 그 절정에

도달하였고 곧 커다란 전승의 물결로 전환되었다. 12세기경 일단의 학자들은

아랍어로 쓰여진 중요한 이슬람 학문의 성과들을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이 번역 작업은 중세 이슬람과 유럽을 연결하는 중요한 문화적 교차로의 상징

으로서 그 대부분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루어졌다. 번역작업은 처음으로 서구

유럽의 학자와 과학자들이 그리스-아랍 지식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었고, 기독

교 세력이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 톨레도, 세비야를 재정복한 뒤에는 더욱 가

속화되었다 (정규영역, 2004:281).

이슬람 세계가 번창하면서 이태리 남부, 특히 시칠리아에 근거지를 둔 상인

들의 교역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서유럽과의 교역으로 인해 막대한 부가 이슬

람세계로 흘러가기 시작하였다. 이탈리아 반도의 해상공화국들인 제노바와 베

니스 역시 각각 북아프리카 및 흑해 지역 그리고 이집트 및 시리아와의 교역으

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온갖 필수품과 귀중품 그리고 사치품들이 교역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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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었고, 더불어 이슬람세계에서 그동안 고대 학문을 계승 발전시킨 새로운

사상과 과학기술들도 더불어 전해지게 되었다.

게다가 오늘날 쓰이는 아라비아 숫자가 서양에 보급된 것도 대체로 무슬림

상인들이 작성한 교역문서와 계약서 덕분이었다. 유럽 언어들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무역용어들에도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영향을 반영하는데 수표

(check), 관세(tariff), 운수업(traffic), 병기창(arsenal)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김한영역, 2013:70).

당시 유럽에는 이슬람 세계의 발전된 학문과 과학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아일랜드, 잉글랜드 북부, 카탈루냐, 이탈리아 남부에 흩어져 있는 몇몇

수도원들에서 수사들이 고전의 전통과 생명력을 지키기 위해 힘겹게 노력하면

서 전초기지의 역할을 했지만, 그들의 성과는 이슬람 세계의 아랍인들이 이룬

성과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서기 6세기경에 있었던 고대 문명의 진

정한 계승자는 로마 귀족 보이티우스였다. 비록 그는 반역죄로 인해 필생의 사

업을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작업 결과물 중에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부스러기들, 음악에 관한 몇 편의 논문, 실용적 기하학의 몇몇 기본 원리가 담

겨 있었다.

보이티우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작을 라틴어로 번역할 계

획이었지만, 때 이른 죽음으로 이러한 자연과학, 형이상학 그리고 우주론의 위

대한 유산은 6백년 이상 망각의 늪에 묻혀 버렸다. 그 결과 플라톤이 남긴 연구

의 흔적은 부분적인 라틴어 번역본 한 권과 그에 딸린 주석서가 전부였다. 그

외에 12세기까지 중세 유럽에서 자연철학을 엿볼 수 있는 기회는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김한영역, 201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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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지적 교류의 유형

중세 이슬람문명의 과학발전은 그리스 학문의 번역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10세기 이후 유럽은 에스파냐와 시칠리아를 중심으로 이슬람 세계의 선진 학문

과 과학에 접하였다.

중세 기독교 유럽에서는 그리스어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비슷한 작업이 진행

되었다. 몬테카시노와 같은 수도원, 샤를마뉴 대제와 같은 지도자들이 후원한

번역 사업의 목적은 이슬람 세계에서 행해진 노력과 대동소이한 것이었는데,

그리스 고전을 번역하기 위한 것이 그 목적이었다. 그러나 중세유럽의 노력은

이슬람 제국이 정치적, 문화적 패권을 상실하기 시작한 12세기까지 무슬림이

이룩한 번역의 규모와 범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2세기 동안에 이루어진 무슬림 번역 덕분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리

드, 아르키메데스, 히포크라테스, 갈레노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업적들, 그리고

페르시아에서부터 에스파냐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들에 정착한 무슬림 학자들

은 자신들의 학문적 연구를 비교적 자유롭게 수행하면서 많은 저서들을 남겼

다. 모든 번역서들이 높은 수준과 신뢰성을 담보한 것은 아니었으나 학문적 분

위기가 성숙함에 따라 개정판도 빈번해졌다. 번역 과정에서 철학은 물론 과학

의 새로운 개념, 방법, 세부 내용을 수용하는데 융통성과 가능성을 보인 아랍어

는 자원이 풍부한 언어매체라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번역 사업의 초기에는 후

나인 이븐 이스하크와 같은 걸출한 번역가가 배출되기도 했다. 그는 9세기 네

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으로 4개 언어에 능통했고 많은 번역서를 남겼는데, 그

대부분은 그리스 철학과 의학 분야에 집중되었다(정규영역, 2004:60-61).

이슬람 과학의 영향력은 12세기 유럽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는데, 시기는 그

발상지의 일부 지역에서 이슬람 연구의 활력이 쇠퇴하기 직전과 일치하였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의 과학적 성과에 대한 유럽의 찬양은 무슬림들의 군사적,

정치적 우월성에 대한 유럽인들의 질투와 두려움, 그리고 거짓되고 공격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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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멋대로인 기독교의 적대감에 의해 묻혀버렸다(정규영역, 2004:293).

9세기 초부터 지혜의 전당의 학자들은 본격적으로 그리스 철학과 과학의 고

전들을 깊이 연구하기 시작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창적인 업적들을 만들

어냈다. 이슬람 세계의 아랍 주석서, 혁신적인 과학, 진보한 철학을 번역한 책

들은 두 문명 간 상업 활동의 물결을 타고 서구 기독교 세계에 밀려들기 시작

했다.

1. 번역

동지중해에 위치한 안티오크는 이슬람세계의 아랍어 문서들이 중세 라틴어

로 번역되는 중심지로 급부상했으며, 특히 의학 분야의 번역작업이 활발히 이

루어졌는데, 이곳은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국가였던 피사(Pisa)의 상인들이 상당

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곳이기도 하였다. 지중해 동부에 걸친 경제, 정치적 영향

력 덕분에 피사는 아랍 학문을 퍼뜨리는 심장 역할을 겸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중해 동부에서 기독교 군대가 탈취한 아랍 문서들이 서적 시장에 흘러 넘쳤

고, 그 와중에 안티오크는 이슬람 과학의 집산지로 등장하였다. 이탈리아의 번

역자 겸 학자인 피사의 스테판(Stefano, 철학자 스테판으로도 알려져 있다)도 곧

이슬람 학문을 배우기 위해 안티오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스테판은 할리 아

바스라고 알려진 알리 이븐 알 아바스 알마주시의 유명한 중세 백과사전 『왕

의 서』(The Royal Book)를 번역했다. 10세기에 간행되었고 의학 이론과 의료에

관한 내용으로 각각 열 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이미 이슬람 세계 전역에

서 널리 읽히고 있었다. 스테판의 라틴어 판본 역시 곧 유럽의 표준이 되었다.

스테판은 의료에 관한 제 8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시작한다: “[...] 철학의

제자 스테판이 아랍어를 라틴어로 옮긴 번역서. 그는 직접 원고를 썼으며 1127

년 우리 주 그리스도의 수난일인 11월 3일에 원고를 완성했다. 만물의 시작과

끝인 하느님께 감사를 올리며 [...]”(김한영역, 2013:181).

또 다른 인물로는 영국인 애덜라드(Adelard)가 있었다. 그도 안티오크에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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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인들이 번역한 귀중한 도서들을 구입한 후에 이를 서양의 지식인들에 전달

했다.

그가 서양에 전달한 서적들에는 이미 3 백 년 전에 아랍어로 번역되었던 유

클리드의 『원론』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교과서 『알마게스트』가 포함

되어 있었으며, 그 밖에도 라틴어로 번역된 아랍어판 그리스 문헌들도 있었다.

아랍인들의 수준 높은 학문을 열심히 받아들인 초기의 서양인들 중에서는 시칠

리아의 루지에르 2세를 빼놓을 수 없다. 루지에르 2세는 1068년부터 1091년 사

이 노르만족이 무슬림을 몰아내고 시칠리아를 정복 할 때 건너온 용병의 아들

로 일찍부터 아랍인들의 업적을 높이 인정하고 아랍 학자들을 시칠리아 궁정으

로 불러들여 학문을 발전시켰다. 또한 동시대에 12세기 톨레도에서 크레모나의

제라르드는 무려 70여권에 달하는 아랍어 문헌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유럽 전역

에 퍼뜨렸다. 13세기 초 프리데릭 2세도 할아버지인 루지에르 2세 못지않게 아

랍 학문을 인정하고 후원한 기독교 왕이었다. 그의 지원 하에서 영국인 마이클

스콧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아랍 사상가 아비센나와 아

베로에스의 주요 저작들을 번역했고, 그가 소개한 자연철학은 후에 중세 서양

의 신학과 형이상학에 대변혁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다(김한영역, 2013:327).

번역자들 중에는 무슬림뿐만 아니라 에스파냐와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도 포한되어 있었다. 다양한 국적의 번역자들은 15세기

말 유대인과 무슬림이 에스파냐에서 추방될 때까지 활동했으며 모자랍, 무데자

르. 모리코스 역시 이 번역 작업의 일역을 담당했다. 번역 활동은 사실상 ‘12

세기의 르네상스’라 할 만한 부흥을 낳았는데, 이는 과거 서구에서는 결코 구

할 수 없었지만 무슬림에 의해 부활된 고전 지식을 유럽의 수도원과 다른 학문

중심지의 도서관에 제공하는 결과를 동반하였다.

그 외에도 번역가들 중에는 멀리까지 명성이 자자했던 크레모마의 이탈리아

인 게라르드, 시칠리아에서 활동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마이클 스코투스, 북아

프리카 카르타고 출신의 콘스탄틴 등이 있었다(정규영역, 2004: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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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석

이들의 동료, 후배들은 유클리드와 히포크라테스로부터 프톨레마이오스, 갈

레노스 등에 이르는 유명한 그리스 학자들의 저서들을 번역했다. 물론 이 번역

은 알 라지, 이븐시나, 알 콰와리즈미 등과 같은 무슬림 사상가들이 수정하고

주석을 붙인 저서들이었다. 특히 다작의 게라르드는 100편 이상의 번역물을 남

겼다. 번역자들의 관심 범위는 다양하여 의학, 자연 세계, 기상학, 지리학, 수학,

물리학 등을 망라했다. 무슬림들의 풍부한 유산에 영감을 받은 유럽의 학자들

은 자신들의 주변 세계에 대한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했고 당대의 지적

이고 기술적이며 사회적인 목적을 다시 설정해야 했다(정규영역, 2004:282).

중세 유럽 말기의 사상가와 학자들은 이슬람 세계에서 유입된 과학적 사고

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 사고에는 확장된 그리스-이슬람의 지적 유산에 담긴

자연철학의 개념도 포함되었다. 흔히 무슬림들의 해석과 수정에 의해 여과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사상은 기독교 사상과 결합하여 철학적이고 과학

적인 연구를 자극하였다. 이 연구에는 신학, 형이상학, 수학, 의학 등 다양한 학

문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지적 활동은 상당 부분 중세 말기 유럽에 설립된 대

학과 학파들의 후원을 받았으며, 여기에는 전에 없는 규모로 성장하고 변화된

제도적 지원이 있었다(정규영역, 2004:294).

Ⅴ. 결론

중세에 서유럽 대부분의 지역은 무지와 문맹과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었지만

같은 시기에 이슬람 세계는 제국의 수도 바그다드에 설립된 왕립 도서관 ‘지

혜의 전당’을 통해 인류가 축적한 위대한 사상과 과학의 성취를 보존하고 발

전시켰다. 지혜의 전당은 압바스 왕조 칼리파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학문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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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와 고전 번역의 중심지로서 아비센나의 의학과 알 콰와리즈미의 천문학과 수

학, 자비르의 화학, 알 이드리시의 지리학과 지도제작술, 그리고 아베로에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연구 등 다양한 분야를 발전시켰다.

11세기 이후 십자군 전쟁과 예루살렘을 둘러싼 동-서양의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소수의 용감한 기독교 학자들이 지식을 찾아 이슬람 세계에 발을 디뎠

다. 영국인 애덜라드는 소아시아로 건너가 새로운 천문학과 수학 개념들을 배

워 유럽에 전달하였고, 마이클 스콧은 아랍어를 배운 뒤 아베로에스의 책들을

번역해 기독교 세계를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는 역할을 하였다. 아랍인들이 그

리스어를 익혀 서구의 고대 유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듯이, 서구인들은 아

랍어를 익혀 이슬람으로부터 자신들의 문명을 역수입한 것이다. 유럽에 소개된

과학과 철학의 새로운 지식과 사상은 자유롭게 그리고 이성적 흐름을 타고 전

통적인 기독교 교리뿐만 아니라 철학, 과학, 의학 그리고 다른 주제들과 접변되

면서 그 폭을 더욱 확대하였다. 그 결과 세상에 대한 유럽인들의 인식과 그 방

법에 있어 혁명적인 변화가 나타났는데, 이것이 구체적으로 문명화된 것이 서

유럽의 르네상스라고 할 것이다.

[주제어 : 이슬람 세계, 유럽 문명, 지혜의 전당, 번역, 지적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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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접수일: 2013년 12월 30일

심사완료일: 2014년 02월 02일

게재확정일: 2014년 02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