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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남연구 제10집 2014 목차 Ⅰ. 머리말 Ⅱ. 농경사회로의 전환 Ⅲ. 고고학적 증거 Ⅳ. 농경형태와 저장시설 Ⅴ. 농경 집약화 및 사회분화 Ⅵ. 맺음말 * * * 요약 청동기시대 농경 집약화에 대한 연구는 사회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흥미있는 연구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기존연구에서는 대개 다른 주제에 부수적으로 거론되거나 구체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청동기시대 전기에서 후기로 이행하면서 취락 구조의 변화와 함께 사회조직, 경제 등 다른 생활양식의 근본적 변화가 나타난다. 주거지의 구조 및 생활 식, 환경의 변 화, 입지, 생산기술 등은 농경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의 주요 요인으로 설명된다. 도작농경을 포함한 청동기시대의 다작물 농경체계는 풍부한 생산물을 제공함으로써 인구증가를 초래하고 사회 규모가 확 대되어, 잉여생산물을 통한 사회분화가 발생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도작농경은 탄화미, 토기압흔, 농기구, 논 등 의 고고학적 정황으로 보아 늦어도 청동기시대 전기 후반에는 개시된 것으로 이해된다. 논과 수리시설은 도작농경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로서 몇몇 유적에서 농경과 관련된 수로나 집수지, 보시설 등이 확인되었지만, 청동기시대에는 아직 완전한 관개체제를 갖추지는 못하였고, 각 취락 내에서 엘리트가 집약 농경을 직접 통제하고 계획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부족하 다. 유구와 더불어 이러한 정황들은 청동기시대 후기에 집약 농경의 형태가 다수의 개별 가계들의 공동 결정에 기인한 결과라는 하나의 모델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고고학적 정황으로 볼 때, 한국 청동기시대 후기 농경사회는 집 단 지향적인 사회 전통에 기반을 둔 사회였다. 하지만 저장수혈·고상건물·대형 호형토기 등을 이용한 잉여 곡물의 저장 과 마제석검·적색마연토기·옥장신구 등 위세품의 생산과 분 등을 살펴 볼 때, 청동기시대 엘리트 집단은 도작농경을 바탕으로 하여 사회분화, 수장묘 출현, 청동기와 같은 특정물품 및 정보의 교환을 통해 취락간의 어떤 초보적인 네트워크 전략을 구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주제어 청동기시대, 농경 집약화, 사회분화, 도작 농경, 다작물 농경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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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남연구 제10집 2014

▫ 목차

Ⅰ. 머리말

Ⅱ. 농경사회로의 전환

Ⅲ. 고고학적 증거

Ⅳ. 농경형태와 저장시설

Ⅴ. 농경 집약화 및 사회분화

Ⅵ. 맺음말

* * *

▫ 요약

청동기시대 농경 집약화에 대한 연구는 사회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흥미있는 연구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기존연구에서는

대개 다른 주제에 부수적으로 거론되거나 구체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청동기시대 전기에서 후기로 이행하면서 취락

구조의 변화와 함께 사회조직, 경제 등 다른 생활양식의 근본적 변화가 나타난다. 주거지의 구조 및 생활방식, 환경의 변

화, 입지, 생산기술 등은 농경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의 주요 요인으로 설명된다.

도작농경을 포함한 청동기시대의 다작물 농경체계는 풍부한 생산물을 제공함으로써 인구증가를 초래하고 사회 규모가 확

대되어, 잉여생산물을 통한 사회분화가 발생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도작농경은 탄화미, 토기압흔, 농기구, 논 등

의 고고학적 정황으로 보아 늦어도 청동기시대 전기 후반에는 개시된 것으로 이해된다. 논과 수리시설은 도작농경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로서 몇몇 유적에서 농경과 관련된 수로나 집수지, 보시설 등이 확인되었지만, 청동기시대에는 아직 완전한

관개체제를 갖추지는 못하였고, 각 취락 내에서 엘리트가 집약 농경을 직접 통제하고 계획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부족하

다. 밭유구와 더불어 이러한 정황들은 청동기시대 후기에 집약 농경의 형태가 다수의 개별 가계들의 공동 결정에 기인한

결과라는 하나의 모델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고고학적 정황으로 볼 때, 한국 청동기시대 후기 농경사회는 집

단 지향적인 사회 전통에 기반을 둔 사회였다. 하지만 저장수혈·고상건물·대형 호형토기 등을 이용한 잉여 곡물의 저장

과 마제석검·적색마연토기·옥장신구 등 위세품의 생산과 분배 등을 살펴 볼 때, 청동기시대 엘리트 집단은 도작농경을

바탕으로 하여 사회분화, 수장묘 출현, 청동기와 같은 특정물품 및 정보의 교환을 통해 취락간의 어떤 초보적인 네트워크

전략을 구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 주제어 청동기시대, 농경 집약화, 사회분화, 도작 농경, 다작물 농경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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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농경 집약화와 사회분화에 대한 검토 3

청동기시대 농경 집약화와 사회분화에 대한 검토

고민정* 1)

Ⅰ. 머리말

농경사회로의 전환과정은 인구 증가에 따른 다양한 집단 형성으로 인해 옥토가 고갈되고, 사

냥과 채집에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을 소요하게 됨으로써 농경이 시작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식

료에서의 탄수화물의 양과 출산율 사이에는 직접적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여성들은 어느 정도의

칼로리를 지방으로 저장하기 전까지는 임신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농경이 이루

어지면서 탄수화물이 많은 곡물 위주의 식료를 할 기회가 많아지고 정주생활로 이동성이 줄어들

면서 출산율이 급격히 상승한 것으로 본다. 사냥이 전문화된 사회에서는 여성과 어린이는 직접

적인 경제적 수확이 적은데 비해, 곡물을 채집하는 사회에서는 식량 공급에 직접 공헌을 할 수

있다(로버트 웬키 저·안승모 역 2003: 329·343).

청동기시대 조기의 농경문화는 신석기문화와의 교체기에 해당하며, 새로운 농경문화는 중국

동북지방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전기는 조기의 문화에서 한반도화된 농경문화

로 이해할 수 있으며, 후기에는 취락 구조와 사회, 경제적으로 대변혁이 일어난 시기이다(安在晧

2006: 3). 청동기시대 전기에서 후기로의 이행은 주거지 구조의 변화와 함께 환호, 무덤, 농경지

를 수반한 대규모의 취락이 각지에서 나타나고, 후기 후반에는 대규모의 묘역을 가진 무덤, 중심

취락, 집약농경으로 사회적 위계가 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농경 집약화에 대한 연구는 사회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흥미있는 연구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기존연구에서는 대개 다른 주제에 부수적으로 거론되거나 구체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본

고에서는 기존 연구성과를 정리하는 수준에서 먼저 도작의 개시와 농경사회로의 전환과정에 대

해서 이해하고, 고고학적 증거인 탄화미와 화분자료, 논과 수리시설의 형태와 특징을 살펴보고

자 한다. 다음은 어떻게 논과 밭이 조성되고 사용되었는지, 수확형태와 곡물의 종류는 어떠한지

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한다. 또한 각 취락에서 집약농경에 관련된 잉여곡물의 저장유형에 대해

서 검토하고, 이를 바탕으로 농경형태와 사회조직에 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본고는 2011년 9월 한국청동기학회 생업분과 워크숍에서 발표한 내용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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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남연구 제10집 2014

Ⅱ. 농경사회로의 전환

한반도의 농경사회로의 전환과정에 대한 연구에서 김장석(2009: 58-60)은 기존의 환경 변화

나 인구압이 개입된 것이 아니며, 농업기술 또한 외부에서 도입된 결과(adoption)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농경사회로의 전환은 다른 지역으로부터 농경이 확

산된 결과라고 하였다.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고식물학적 연구 결과에 의하면 집약 농경의 개시는 BC 1500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Crawford and Lee 2003: 94). 한국 선사시대 초

기의 집약 농경은 도작 농경과 같은 새로운 농경기술의 채택과 확산, 밭이나 논과 같은 경작

지와 관련시설들의 구축과 유지, 다작물 농경체계(多作物 農耕體系), 새로운 지역으로의 농경

지 확장 등 장기간의 여러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Crawford and Lee 2003; Kim 2005; Lee

2003). 또한 다작물 농경체계와 같은 집약농경 형태는 청동기시대 전기에 이미 이루어진 것이며

(Crawford and Lee 2003), 집약농경의 특징은 재배종·야생종의 관리와 농경시설의 유지가 주

된 생계경제 활동이고, 자원의 관리와 자연환경에 대한 이해 등이 집단의 정체성과 상징체계까

지 본질적으로 변화시킨다고 하였다(이경아 2005).

한반도는 지역별 연평균 기온차가 존재하고 전체 면적의 70% 정도의 산지가 주로 북부와 동부

에 분포한다는 점으로 보아, 한반도의 초기 벼농사가 지역적으로 상이한 전개과정을 거쳤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金民玖·朴正宰 2011: 68). 안승모는 한반도에서 도작농경의 개시는 신석기시

대 중기 이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안승모 2005), 청동기시대의 도작은 요동에서 다른 청동

기문화 요소와 함께 새롭게 전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로 신석기시대 중기 이후에 조, 기

장, 벼의 재배가 시작되지만, 말기에는 정주취락이 해체되고 수렵채집의 유동식 생활방식으로

전환하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안승모 2006a; 임상택 2006: 78). 이를 통해 농경을

기반으로 한 청동기시대 문화가 남한에 빠른 속도로 확산된 것이다.

청동기시대 전기의 문화유형의 기원은 요동-압록강-청천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서북한 지방

과 일부 동북한 지방의 요소도 함께 나타난다. 이와 함께 남한 청동기시대 전기의 도작은 상기한

지역에서부터 원산만 일대의 동해안을 거쳐 남한으로 확산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는

데(안승모 2000), 강릉 교동과 고성 사천리 유적에서 탄화미가 다량 출토된 점을 통해서 입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안승모 2008: 11).

한편, 한반도에서 논 경작의 시작을 신석기시대 후·말기 무렵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곽종

철 2001), 청동기시대 전기 후반의 늦은 시기 또는 말경에 출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안재호

2010). 도작의 출현배경으로는 요녕식동검과 구획묘, 수장의 등장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다.

청동기시대 전기 말에는 대형주거지를 정점으로 하는 계층화·집촌화된 취락, 구획묘, 무문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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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농경 집약화와 사회분화에 대한 검토 5

와 적색마연토기의 지역화, 비파형동검, 환호, 가족분화 등의 특징을 가진 수장사회에 이르렀고,

이후 후기 후반에 묘역지석묘가 등장하는 계층화된 수장사회로 발전하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안재호 2010: 119-120). 한편, 청동기시대 전기의 논 경작은 취락의 입지환경과 저지대의 환경

변화를 고려할 때, 일상적 식량자원이라기보다는 특수한 목적의 재배식물로서 기능하였을 가능

성이 높다는 의견도 제시되었다(이홍종 2010: 209).

다음, 청동기시대 도작의 유입 루트에 대해서는 안승모는 요동-서북지방-동해안-남한 루트

와 요동-대동강-남한 루트를 상정하고 있다(안승모 2008: 12). 한편, 조현종은 한반도를 비롯

한 동북아시아의 도작문화는 중국의 양자강유역에 기원을 두고 있다(조현종 2010: 194). 양자강

유역 초기도작의 한반도 유입경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조현종은 최근 한국과

중국의 도작자료의 출현 및 전개과정에 대한 연구성과를 근거로 ‘淮河渡海設’과 ‘廟島群島經由設’

로 압축하고 있다(조현종 2010: 198). ‘淮河渡海設’은 산동반도 동남부 회하일대에서 황해를 직

접 건너 한반도 중서부지역으로 연결된다는 설이다. ‘廟島群島經由設’은 산동반도에 도달한 벼농

사가 북부에서 발해만을 건너 묘도군도-요동반도-한반도 북서부지역으로 유입되는 경로이다.

회하일대는 도작 중심지인데 반해, 용산문화단계의 산동지역은 지역에 따라 곡물생산 유형에서

차이가 있는 밭작물 중심형과 논작물인 벼를 재배하는 혼작형태라고 하였다. 이 혼작유형은 바

로 한반도에서의 초기 도작형태와도 유사한 양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조현종 2010: 194).

위와 같이, 도작 농경의 개시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고고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신석기시

대 중기 이후, 신석기시대 후·말기, 청동기시대 전기 말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고, 한반도

농경사회로의 전환과정은 주거지의 구조 및 생활방식, 환경의 변화, 입지, 생산기술 등 다양한

요인의 확산 결과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Ⅲ. 고고학적 증거

농경을 말해주는 고고학적 증거로는 탄화곡물, 화분자료, 토기압흔, 농기구 등이 있으며, 특

히, 논과 밭유구는 농경의 직접적인 증거자료라고 할 수 있다. 아래에서는 특히 도작농경을 말해

주는 탄화미와 화분자료, 토기 볍씨흔, 논과 수리시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탄화미와 화분자료

탄화미는 형태적 특징이 뚜렷하고 아종(亞種) 단위까지 동정이 가능하며, 절대연대 정보를 제

공하는 직접적인 증거가 된다. 또한 재배된 벼의 종류와 벼농사의 존재를 말해주는 직접적인 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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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경남연구 제10집 2014

거인 반면, 이에 비해 화분은 속(屬)이나 과(科) 수준의 동정만 가능할 때가 대부분이지만, 벼농

사의 집약화 및 식생변화에 관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金民玖·朴正宰 2011).

논을 만들기 위해서는 저지대의 개간이 필수적이며, 화분 조성상 관찰되는 변화는 개간과 벌

채 같은 인간 활동의 증가를 보여준다(김민구 2010: 60). 탄화미는 중국의 이리두유적이나 이리

강유적을 보더라도 주로 규모가 큰 취락에서 확인되며, 쌀은 출토된 양도 중요하지만 쌀이 출토

되었다는 그 맥락이 더 중요한 것이다.

탄화미와 함께 청동기시대의 작물조성은 안승모(2008)의 논문에 자세하게 집성되어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대부분의 청동기시대 유적에서는 탄화미만 단독으로 출토되는 유적

은 소수에 불과하고, 대개 다른 곡물과 함께 출토되는 양상을 보인다. 북한지역은 대동강유역에

서는 청동기시대 전기에 조, 기장에 새롭게 쌀과 콩이 추가되고, 후기에는 팥이 재배되었으며,

두만강유역에서는 기장, 콩, 팥이 재배된 것을 알 수 있다.

중부지방은 강릉 교동, 고성 사천리, 여주 흔암리, 화성 고금산유적 등에서 탄화미가 다수 검

출되는 상황으로 보아 도작이 중심인 가운데, 두류와 잡곡의 재배도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곡물조성은 대동강유역과 유사한 면이 있다.

강릉 교동 및 고성 사천리에서 발견된 탄화미의 연대는 청동기시대 전기로 탄소연대가 측정되

었지만, 영동 일대의 화분자료는 청동기시대 이후의 연대(삼국시대)가 검출되어 차이가 있다. 이

처럼 연대차가 나는 이유는 영동지역에서 이미 벼농사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정도

로 집약화되기 전에는 수목 화분이 벼속(Oryza) 화분을 양적으로 압도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

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강원 영동지역에서 벼농사는 이미 청동기시대 전기부터 시작되었지만 이

때의 벼농사는 아직 충분히 집약화되지 못했고, 집약화된 벼농사가 실시된 시점은 벼농사 개시

시점보다 훨씬 늦은 청동기시대 이후이고 지역별 편차도 심하다고 논의되고 있다(金民玖·朴正

宰 2011: 80-81).

충남지방은 백석동유적을 중심으로 쌀, 조, 기장, 보리, 밀, 콩, 팥 등의 쌀+잡곡+맥류+두류

의 작물조성이 전기부터 확립되면서 점차 도작의 비중이 증가하였다. 후기에는 송국리유적을 비

롯한 당진 자개리, 아산 시전리에서 쌀, 보리, 밀, 콩, 팥 등이 검출되었고 특히 시전리와 평라리

에서 보리가 다수 확인되었다. 후기에도 전기와 마찬가지로 쌀, 잡곡, 맥류, 두류가 재배되면서

지역 조건에 따라 선호한 작물의 종류가 달랐을 가능성이 있으며, 후기까지 밀보다 보리의 비중

이 높다. 충북지방의 남한강 상류에서는 맥류, 특히 밀의 비중이 높다.

초기 농경의 흔적이 남아 있는 진주 대평리 어은 1지구 유적의 미사리식주거지 내에서 쌀, 보

리, 팥, 조 등의 곡물이 출토되었는데, 이후 시기의 유구에서도 일반적으로 출토되는 양상으로

보아 재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입지상 충적지를 이용한 전작 중심으로 추정되므로 쌀의

경우도 수도(水稻)라기 보다는 육도(陸稻)였다고 보기도 한다(안재호 2000: 52). 진주 대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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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농경 집약화와 사회분화에 대한 검토 7

어은1지구 104호 주거지에서는 쌀, 조, 밀, 보리, 콩, 들깨가 검출되었는데, 특히 조가 다수 출토

되었다. 104호 주거지의 연대는 2850±60BP(쌀), 2830±60BP(조), 2840±60BP(조)로 연대가

다소 늦게 산출되었지만, 이는 청동기시대 전기부터 맥류가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다(李相吉·

李炅娥 2002: 40).

남강유역에서는 후기 유적 역시 전기와 작물조성은 비슷하지만 팥이 새롭게 추가되면서 두류

의 비중이 높아진다. 옥방 1지구 658호 방형주거지의 저장혈(경남고고학연구소 조사)에서는 콩

36립이 한꺼번에 출토되어 확실한 콩 재배의 흔적을 보여준다(이경아 2001: 448). 특히, 이처럼

저장혈에서 콩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확실한 농경 흔적 뿐만 아니라 주거지와의 관계를 통해 사

회구조를 논할 수 있는 양호한 자료이다.1)

울산지역의 형산강, 태화강유역에서는 청동기시대 전기 말부터 논이 여러 유적에서 발견되어

도작농경이 이루어졌음을 말해주고 있으나, 팥, 콩, 기장 등의 밭작물이 차지하는 역할도 높았음

을 알 수 있다.

김민구는 영산강유역의 초기 벼농사의 전개과정에 대한 논의에서, 순천 요곡리 오원마을 291

번지 유적의 도랑 내 퇴적물에서 토기 볍씨흔이 있는 공열토기가 출토된 예가 있는 것으로 보아,

호남지역에서도 청동기시대 전기부터 도작농경이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 이는 영

산강 유역 퇴적층에서 재배벼 타입의 화분이 출현하는 사실로도 입증된다. 영산강유역의 도작농

경의 발달은 경작면적 확보를 위한 저지대 개간이 선행하고 이에 후속하여 단위 면적당 생산성

제고를 위한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청동기시대 도작농경 발달의 유일한 내용은

경지면적 확대 뿐이며, 신창동유적 출토 탄화미를 통해 초기철기시대에 이르러서야 확대와 집약

이라는 발전방향이 모두 확인되고 있다고 강조하였다(김민구 2010: 46-71).

한편, 식생과 관련한 논의에서는 진주 평거 3-1지구 유적의 주거지 출토 목탄을 분석한 결과,

신석기·청동기시대 유적 인근의 식생은 참나무를 위주로 한 활엽수림이며 초기 농경 단계에서

이차림의 확산은 제한적이었던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 굴피나무가 상대

적으로 많아지는 것은 농경과 인간활동에 의한 식생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김

민구 2011: 339). 진주 평거 3-1지구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1층 밭에서 밀이 출토되었는데, 연

대가 BC 810-760년(98.6% 보정연대, UCI67222 비보정연대 2585±20BP)으로 청동기시대 후

기의 유체임이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어은 1지구 유적과 옥방 1·4·9지구 유적의 청동기시대

전기 및 후기의 다양한 유구에서 밀, 보리가 출토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동아시아 원산의 밭작

물인 조와 기장, 콩, 팥과 더불어 근동에서 기원된 밀과 보리의 재배가 청동기시대 시작 무렵부

터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이경아 2011: 305).

1) 콩과 같은 두류의 재배흔적은 단백질과 지질을 대신 보충해주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멧돼지와 사슴 사냥을 할 수

도 있으므로, 이는 경작지의 지력을 유지하는 기능이 보다 중요시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안승모 200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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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경남연구 제10집 2014

이외에 농경을 암시하는 고고학적 증거로는 농기구와 토기압흔이 있다. 일반적으로 경작지나

탄화곡물이 출토되지 않더라도, 반월형석도, 굴지구, 돌낫 등이 출토되는 상황은 취락 주변에서

농경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유적에서 탄화미를 비롯한 곡물이 출토된 맥락에 대해서 직접적

인 증거인 경작지가 확인되지 않았을 경우, 이를 외부에서 유입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반

월형석도나 굴지구 등이 출토된 상황으로 볼 때, 이 유적에서 경작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토기 볍씨흔은 다른 식물유체에 비해서 시료 오염 가능성이 전혀 없고 유물의 형식에 의

해서 대략적인 연대 추정이 가능하다. 따라서 압흔 분석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축적된 자

료는 벼농사의 개시시기를 추정하는 데에 유용한 자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김민구 2010: 52).

다양한 곡물종류가 출토된 남강유역과 백석동 가재미골 유적에서도 토기 저부에서 확인된 곡물

흔은 대부분 볍씨자국으로, 토기를 제작하는 장소가 벼의 탈곡 장소와 가까운 데 반해 다른 곡

물의 탈곡 장소와는 멀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또한 벼의 수확이 끝난 늦가을에 볍씨가 떨어져

있는 공간에서 토기 제작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반면 당시 보리와 밀은 추맥으로 초여름에 수

확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벼의 가을 수확 이후에 토기 제작이 이루어져 혼입된 기회가 없

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안승모 2006b: 94).

2) 논과 수리시설

도작농경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자료는 청동기시대 논유구로, 논은 하천 주변의 충적지나 구

릉 말단부의 저지대에 선택적으로 조성되었다. 청동기시대 논은 울산 야음동 Ⅱ지구, 울산 옥현,

울주 서부리 남천, 밀양 금천리, 진주 평거동, 논산 마전리, 부여 구봉리·노화리 유적 등에서 확

인되었다(곽종철 2001, 2010; 김도헌 2010). 취락 내에서 논의 입지와 규모, 수리시설의 유무는

당시 사회구조를 논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된다.

청동기시대 논의 발전형태는 수로(水路)와 보(洑), 그리고 용수(用水)의 유입과 배수를 위한 시

설이 완비된 관개수전(濩漑水田)의 형태를 보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나(조현종 2004), 일부

유적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자연지형을 이용한 천수답 형태의 초기도작 형태를 보이고 있다. 송

국리 단계에 들어서 저지대와 접한 구릉 혹은 평지의 자연제방으로 취락이 확대되는데, 이는 송

국리유형 취락이 저지대 이용에 매우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도작농경의 정착이 본격화

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취락의 입지가 변화하는 것은 생업환경, 즉 기

후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바로 도작농경이 전개되기에 적합한 환경이 송국리단계에 비로

소 형성된 것으로 보았다(이홍종 2010: 207-210).

논의 입지에 대해서 김도헌(2010)은 곡저형과 하천형으로 크게 구분하고 있다. 곡저형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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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농경 집약화와 사회분화에 대한 검토 9

차수 이하의 하천이 흐르는 완만한 지형 경사를 가진 골짜기를 선택하여 경작지를 개간한 유형

이다. 규모보다는 경사가 더 중요한 요소로 폭이 좁아도 지형 경사가 완만한 곳에서 경작유구가

종종 확인된다. 또한 이러한 골짜기에 경작지를 조성한 이유는 개간과 치수(治水)가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곽종철 2001: 24-25). 울산 옥현유적은 저위면(곡저 A), 울산 발리유적은 고위면

(곡저 B)에 입지하는 차이점이 있다. 하천형은 자연제방과 배후사면에 있는 경작유구는 하천 A

형, 배후저지에 있는 경작유구는 하천 B형으로 분류하였다. 하천 A형은 밀양 금천리유적, 하천

B형은 진주 평거3-1지구·4-1지구 유적이 해당된다.

농업 수리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용수원의 종류이며, 현재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거

나 추정되는 것은 계류 및 하천, 용천, 수혈, 둠벙, 저수지, 저습지 등이 있고, 조선시대 문헌기

록에서는 이외에 우수, 융설수, 논 저장수, 조석이용담수 등이 나와 있다(곽종철 2001: 33-34).

청동기시대 수리시설은 논산 마전리유적 C지구에서 제1-14 수로, 저수장, 저목장, 시설 1-8, 우

물 2기 등이 확인되었고, 춘천 천전리유적의 B지역에서 수로, 목책시설, 보(집수시설?), 안동 저

전리유적에서 저수지와 수로시설이 확인되었다. 그 외 대부분 유적에서는 용수로 혹은 수로로

추정되는 유구와 집수시설 등이 일부 확인되었다.

청동기시대의 논과 수리시설에 관한 내용은 곽종철(2001, 2010)의 논고를 참고하여, 청동기시

대 관련 수리시설 부분이 확인된 유적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정리하였다.

<도면 1> 논산 마전리유적과 보령 관창리유적의 관개형태(곽종철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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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경남연구 제10집 2014

<도면 2> 밀양 금천리유적 청동기시대 논 (→ 취수구)

<도면 3> 대구 동천동유적 3-1구역 집수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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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농경 집약화와 사회분화에 대한 검토 11

논산 마전리유적의 수리시설은 용천지점이 곡두에 있으면서 산, 구릉 사면 말단부에 설치된

수로를 따라 용천수가 흘러 내리면서 경사가 낮은 곡저평야면 쪽의 논에 공급하는 형태로 파악

하였다. 또한 용천지점에서 여러 수로를 통해 들어온 물을 저장, 분배하는 역할은 저수장 및 저

목장에서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저수장 및 저목장은 수량조절, 유속조절 및 수온상승시설 역할

도 함께 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관창리유적에서는 곡 중앙부의 자연유로를 따라 용천수가 흘

러내리다가 어느 지점에서(보를 거쳐) 논으로 공급되는 것으로 보고, 이들 유적의 수리시설은 비

교적 한정된 방식의 관개형태를 띠는 것으로 보았다.

중소 규모의 하천 범람원에서 용천수가 확인된 대구 동천동유적 3-1구역의 집수지 2호는 구

의 합류지점으로 일부에 석제 호안시설도 갖추고 있다. 청동기시대부터 계류나 소하천을 이용하

여 용수원으로 하는 사례는 관창리유적이 대표적이며, 하천 본류는 아니지만 범람원의 배후습지

를 용수원으로 하는 예는 밀양 금천리유적, 춘천 천전리유적 등에서 확인된다.

집수시설은 대구 동천동 3-1구역 집수지 2호가 대표적으로 이는 용천지점에 약간의 시설을

해서 일정량의 물저장도 가능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용천 지점은 아니나, 동천동 유적에서 석조

우물 4기, 마전리유적에서 목조우물과 우물이 확인되었다. 자연유로나 인공 굴삭수로 등을 통

해 물을 모으는 집수지, 저수지, 웅덩이, 수혈 등도 있다. 동천동 3-1구역 집수지 1·2호, 마전

리 저수장 및 저목장, 춘천 천전리 B

지역 1호 수로 이후 설치된 보(집수

시설?)와 웅덩이 등이 있다. 용수원

이자 집수시설의 기능도 겸비하는 하

천의 배후습지 혹은 구유로적의 예로

는 춘천 천전리 B지역 저습지, 밀양

금천리유적의 습지, 진주 창촌유적의

습지 등이 있다.

수로는 부여 구봉리유적의 제6수로

의 길이가 87.6m, 노화리유적의 2호

수로가 15m, 울산 옥현 유적의 수로

는 45m, 마산 망곡리유적의 수로는

120m 정도이다. 수로의 길이는 폭,

깊이 등과 함께 굴삭토량, 투입 노동

력의 문제, 더 나아가서 굴삭도구, 기

술, 집단의 문제를 점검해 가는 단서

를 제공할 수도 있다고 제시하였다. <도면 4> 울산 옥현유적 청동기시대 논과 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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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경남연구 제10집 2014

보는 인위적으로 물길을 차단하

고 수위상승, 물의 일부 혹은 상

당 부분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

는 시설로 청동기시대 보 시설이

확인된 곳은 보령 관창리, 부여

구봉리·노화리, 안동 저전리,

밀양 금천리유적이 있다.

이외 진주 평거 3-1지구 유

적 논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

자. 유적은 남강의 주하도의 만

곡부 내측에 위치하고 있어 우각

사주(point bar)에 해당된다. 이

중 상부 우각사주의 산지 쪽 배

후에는 저지대가 발달해 있는데,

논 경작이 이루어지고 있어 이

질 퇴적물이 분포하는 배후습지

로 추정된다(한국고환경연구센터

2011). 평거동유적의 논은 배후

습지 내부에 형성된 미고지를 중

심으로 남쪽(가부분)과 북쪽(나

부분)으로 구분된다. 가부분은 미지형의 경사를 따라 계단식으로 일정부분 단을 이루면서 다시

소구획되어 있고, 나부분은 평탄면에 가까운 지형으로 소구획되어 있으며, 수구도 확인된다. 논

의 가장자리에서는 구가 조성되어 있는데, 1호 구는 길이 38m, 너비 20~70cm, 깊이 15cm 내

외로 단면은 완만한 ‘U’자상을 이룬다. 논면과 논면 사이에서 확인되는 구(2호)와 논의 가장자리

를 따라 폭이 좁고 깊게 확인되는 구(3호, 4호)도 있다. 1호와 2호 구의 중간부분에는 경사면 아

래의 논면 쪽으로 돌출된 부분이 확인된다. 5호 구는 북쪽 미고지와 경계되는 지점에 등고선과

나란하게 3열로 조성되어 있다. 규모는 길이 33.2m, 너비 20~45cm, 깊이 10~25cm 정도이

며, 서쪽과 동쪽, 중간 부분에 논면으로 향해 돌출된 부분이 확인된다. 동쪽의 돌출부에는 여러

매의 할석이 세워진 채로 출토되었는데, 이는 논으로 들어가는 물을 조절하는 물막이용 돌로 생

각된다. 또한 길이 70~80cm 크기의 할석 2매가 확인되었는데, 마찬가지로 물을 조절하는 기능

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2011).

<도면 5> 진주 평거 3-1지구 유적 청동기시대 지형분석 모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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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농경 집약화와 사회분화에 대한 검토 13

아래의 표는 곽종철(2010: 494-501)의 시대별·지역별 각종 수리시설에 관한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표 1> 청동기시대 각종 수리시설(곽종철 2010에서 수정)

유적명 입지 수리관련시설 경작유구

보령 관창리유적 G구역 곡저평야 수로(폭 400m?), 보 논?

부여 송학리 ‘가’유적 곡저평야 중심수로(평면 부채꼴모양)

부여 구봉리(A지구)·노화리(B지구)유적

금강, 구룡천의 범람원?(배후습지?)

구봉리: 제1-제8 수로, 보노화리: 1호, 2호 수로

논산 마전리유적 C지구 곡저평야제1-14 수로, 저수장, 저목장, 시설 1-8, 우물 2기 등

논, 밭

춘천 천전리유적 B지역 소양강의 자연제방 및 배후습지 수로, 목책시설, 보(집수시설?)

안동 저전리유적 곡저평야 수로, 저수지, 입수구, 출수구, 보

대구 동호동유적 충적평지 3열의 열상구, 웅덩이(저수시설)

대구 동천동유적 (3-1구역) 팔계천의 구유로적, 자연제방 1호, 2호 집수지 밭

밀양 금천리유적 자연제방에서 배후습지 수로 2기, 보 논

울산 옥현유적 곡저평야 수로 논

울산 야음동유적 곡저평야 자연유로(배수로?) 논

울산 서부리 남천유적 선상지성 곡저평야? 수로-논보다 높은 곳에 위치 논

마산 망곡리유적 선상지성 곡저평야 수로, 암거 2기 논

마산 진동유적구릉 사면 말단부와 선상지성 곡저평야의 경계부

용수로, 용수지선, 구상유구

진성 창촌유적 반성천의 범람원 습지, 자연유로 논

진주 평거 3-1지구 유적 범람원의 배후습지 수로?, 구 논

Ⅳ. 농경형태와 수리시설

농경사회는 상당한 정도로 순화된 식물의 경작에 기반(based largely or exclusively on the

cultivation of domesticated plants)한 사회라고 본다(김민구 2009: 347). 인간에게 농경은

안정된 식량의 공급과 자연생태적 역할, 사회문화적 역할 등 다양한 기능을 가진다. 또한, 농경

사회집단에 의해 형성된 풍습, 민속, 축제, 신앙 등은 생활의 총체로서의 문화의 토대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기후 조건을 기반으로 한 노동력과 풍요

를 위한 다산(多産)과 다작(多作)이었을 것이다.

특히, 도작농경은 풍부한 생산물을 제공함으로써 인구증가를 초래하고 사회 규모가 확대되어,

결국 잉여생산물을 통한 사회분화가 발생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청동기시대는 쌀, 보

리, 밀, 조, 기장, 콩, 들깨 등의 다작물 농경(multi-cropping)이 이루어졌다(Crawford and

Lee 2003: 87-95). 중부지역에서는 쌀만 단독으로 출토되는 유적이 많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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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경남연구 제10집 2014

다른 작물과 공반되는 경우가 보다 일반적이다. 중부, 호서, 호남에서는 도작이 우세하지만 남한

강 상류의 산간지대는 맥류가, 남강유역은 잡곡이 벼보다 우세하다. 최근까지도 이들 지역은 벼

보다 밭작물이 중심이었다는 것이다(안승모 2008: 11).

시비법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전통사회에서는 지력보완을 위해 휴경이 필수적인 요소였을

것이다. 하지만 청동기시대를 거치면서 휴경기간이 단계적으로 축소되었는지, 그리고 이것이 농

경집약화를 이루는 방법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김민구 2010: 50).

먼저 경작지와 관련된 수로나 배수시설 등의 부수적인 농경 관련시설에 투자된 노동력에 대해

서 살펴보자. 논 유구와 밭 유구의 조성과 유지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저장관련 유구와 유물을

검토함으로써 엘리트 집단이 농경 잉여물의 관리와 통제에 있어 어떤 역할을 담당하였는가? 논

과 밭 경작은 농경 집약화에 관한 기술적·사회적 상황이 많이 다르지만,2) 청동기시대 집약 식

량 생산의 중요한 요소이므로 함께 논의하고자 한다.

1) 농경형태

곽종철은 청동기시대의 논과 수로가 확인된 유적의 지형조건, 용수원, 용수로, 논의 관계 등

을 기초로 5개 유형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러한 유형들의 존재를 통해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각

지역의 지형조건, 수문조건에 적합한 형태의 논농사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이외로 다양성, 발달된 단계의 모습으로 볼 때, 이 보다 선행 단계의 논농사가 보다 이전 시대나

시기에 존재했을 가능성을 상정하였다(곽종철 2010: 254-256).

김도헌은 논의 형태를 둑구획형 논과 단구획형 논으로 구분하고, 둑구획형 논은 관개시설(대

부분 용수로)과 공반된 사례가 많지만, 단구획형 논에서는 아직 관개시설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금천리유적, 관창리유적, 옥현유적 등에서 청동기시대 논과 함께 용수로가 확인되었고,

용수로와 보는 세트를 이룬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청동기시대부터 완비된 관개시설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이해하였다(김도헌 2010: 85). 이에 대해 곽종철은 옥현유적의 경우 간선수로는 있지만

보는 확인되지 않았고, 또한 단구획형 논(=계단식 논)도 논둑을 가진 계단식 논의 형태와 수로·

보가 결합된 형태가 장차 확인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서, 둑, 계단식 논, 보의 문제는 별개 차원

의 것이라고 언급하였다(곽종철 2010: 261-262).

논산 마전리유적과 울산 무거동 옥현유적의 논에 대해서, 이홍종은 저구릉의 말단부로부터 저

습지에 걸쳐 완만한 경사지를 이용한 것으로 논구획이 작은 편이고, 경사도에 따라 결정된 것으

2) 도작농경의 집약화 진행과정에 대해서 김민구는 첫째, 이전 시기에 벼농사에 사용하지 않던 대지를 새롭게 경작

지로 일구어 활용하는 이른바 농경지의 확장, 둘째, 기존의 토지에 노동과 자본을 집중적으로 투자하여 단위면적

당 생산성을 늘리는 것이라고 하였다(김민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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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농경 집약화와 사회분화에 대한 검토 15

로 보았다. 형태는 등고선에 좌우되어 부정형, 호상(弧狀)인 것이 많고, 경사지를 이용할 경우 많

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또한 약간 높은 곳 또는 경사지 위쪽에 관개용 수로나 웅덩이를 설치해서

취수하고, 수구를 이용해야 한다고 하였다(이홍종 2010: 210).

곽종철은 곡저평야에 입지한 논산 마전리와 보령 관창리유적의 수리시설에 대해 비교적 한정

된 방식의 관개형태를 띠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곡저평야의 곡두의 용천수와 함께 지표수가

일단 지하에 침투했다가 다시 용천하는 소위 자유면지하수는 간단한 공사로 획득할 수 있고, 계

절적 수량 변화가 적고 지표수가 없어지는 가뭄에도 일정 수량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고 한다. 따라서 청동기시대 이래로 많이 이용되어져 왔음을 언급하고 있다(곽종철 2010: 232-

233). 또한 용천수는 안정적이긴 하지만 그 양이 적어서 넓은 범위에 관개할 수 없다는 단점

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용천지점과 수로가 확인되지 않은 울산 야음동유적 Ⅱ지구의 계

단식 논을 천수답 내지는 건답직파답으로 보는 견해가 이러한 정황 때문이라는 것이다(곽종철

2010: 234-235). 천수답 농경에 필요한 노동은 밭갈이, 경지정리, 재배, 잡초제거, 수확 등으로

물 공급과 관련해서는 노동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범람지에서도 물 공급

과 관련해서는 천수답과 마찬가지로 노동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 청동기시대에는 이러한 천

수답이나 범람지에서의 농경형태가 많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곡저평야에 입지한 논의 경우에, 넓은 범위에 관개할 수 없으므로 그만큼 논의 범위도 제한적

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농경은 소규모로 이루어졌을 것이며, 이와 관련

된 관개시설의 구축 및 농경 관련 노동력의 투입도 집단의 협업에 의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관창리 취락의 전체 범위는 C지구를 제외한 B구릉의 동쪽과 서쪽에 있는 두 개의 곡부를 포함

해서 폭 600m, 길이 800m에 이른다. 논은 G지구에서 확인이 되었고, 그 외 주거지, 무덤, 토기

요지, 저장공, 지상건물 등 다양한 취락구성요소가 확인되어 취락의 경관 및 사회구조를 파악하

는 데에 중요한 자료이다. 지형상 상당히 넓은 규모의 논농사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고, B지구

에서 다수 확인된 고상건물지는 곡물창고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하였다(이형

원 2009: 69-72).

金範哲(2006: 59)은 사회·정치적 맥락 그 자체에서 한반도 중서부지역의 도작 농경과 지도

권 형성의 관계에 대해 수자원 관리의 측면과 논토양의 분포를 통해서 분석을 시도하였다. 금강

중류역의 두 정치체(B정치체와 C정치체)는 유사한 환경적 배경과 조직상의 통합에도 불구하고

도작 농경의 측면에서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였다. 즉, B정치체의 상위중심지는 잉여수집에 유

리한 위치에 입지하고, C정치체의 중심지들은 도작 농경에 유리한 지점에 입지한다. 이는 관리

자적 지도권과 착취적 지도권이 혼합된 양상을 나타내는 것이기는 하지만, 많은 측면에서 중서

부지역의 청동기시대 엘리트 계층은 관리자적 역할 보다는 잉여의 수집에 더욱 주목했던 착취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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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경남연구 제10집 2014

지도권을 행사했을 가능성에 좀 더 무게를 싣고 있다.

중서부지역의 경우 후기에 들어서면 송국리유적이나 관창리유적 등과 같이 비고가 낮은 구릉

에 취락이 입지하는 반면, 영남지역의 경우 대구 동천동, 진주 대평리, 진주 평거동유적과 같이

강변 충적지에 입지한 평지 취락이 환호를 수반하는 등 중심취락을 형성하는 예가 많다. 이는 산

지나 구릉에 비해서 취락규모의 확대에 용이한 점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이

형원 2009: 78).

<표 2> 중서부지역 청동기시대 시기별 취락입지와 생계방식(이형원 2009: 78)

시 기 조기 전기 후기

입 지 평지형 산지형>구릉형>평지형 구릉형>산지형>평지형

생계방식전작 전작(화전포함), 수도작(?) 수도작, 전작(화전포함)

수렵, 채집, 어로

부여 노화리유적은 구릉과 접하면서 거의 경사가 없는 저평지에 만들어진 소구획(5~10㎡ 전

후) 논으로, 구릉과 저평지가 접하는 곳을 따라 설치된 인공수로에 의해 논에서 논으로 자연스럽

게 급수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파악하였다(이홍종 2010: 210). 청동기시대 논에서 공반된 수로의

길이는 부여 구봉리유적의 제6수로는 87.6m, 울산 옥현 유적의 수로는 45m, 마산 망곡리유적

의 수로는 120m 정도로 많은 노동력과 시간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수로의 규모로 보아, 아마

도 취락 주변의 환호나 지석묘 축조 등과 같은 공동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대규모의 공사였을

것이다.

하천 본류는 아니지만 범람원의 배후습지를 용수원으로 하는 예는 밀양 금천리유적, 춘천 천

전리유적 등에서 확인되어, 청동기시대부터 하천 이용의 관개형태도 반드시 단조로운 것만은 아

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곽종철 2010: 235).

진주 평거 3-1지구 유적은 범람원의 자연제방에는 밭, 배후습지에는 논이 확인되었다. 논과

밭의 출토유물로 보아 청동기시대 후기에 해당하며, 이들 경작지와 관련된 주거지는 20기 정도

로 대규모의 경작지에 비해 주거지의 수는 적은 편이다. 유적은 자연지형에 따라 주거공간, 의례

공간, 생산공간의 구분이 명확하게 되어있는 특징이 있다(고민정 2010: 12). 논의 가장자리에서

수로로 추정되는 구가 확인되었으나, 정형화된 관개형태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논은 조사범위

외곽으로 더 이어져 나가므로 북서쪽 구릉 사면 말단부에 수로가 있을 가능성도 있으며, 혹은 원

래 논이 입지한 하부는 배후습지이면서 자연구가 형성되어 있어 앞서 지표수가 일단 지하에 침

투했다가 다시 용천하는 소위 자유면지하수(곽종철 2010: 232-233)와 같은 형태로 이용한 것은

아닐까. 진주 평거 3-1지구 유적의 삼국시대 논에 관해 수로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간선수로

가 있었다면 아마도 그 위치는 조사지역 바깥인 구릉 사면 말단부쪽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

되며, 그렇다면 이는 부여 구봉리, 노화리유적 유형에 해당되는 것이며, 수로 내에 반드시 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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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농경 집약화와 사회분화에 대한 검토 17

설치하지 않아도 관개가 가능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곽종철 2010: 253).

다음 대평리유적을 중심으로 밭유구에 대해서 살펴보자. 대평리유적은 하천변의 범람원에 입

지해 있다. 지형적 특징에 따라 다양한 취락구성요소가 입지해 있고, 자연제방대에는 취락과 무

덤, 배후저지에는 경작지가 이루어져 있는데, 이러한 자연제방들이 반복적으로 연속해 있다. 또

한 당시 조사에서는 논이 확인되지 않았지만, 현재 논으로 이용되고 있는 배후습지에는 선사시

대에 논으로 경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이상길 2002: 43-72). 이는 평거동유적에서도 지형에

따라 다양한 취락 구성요소가 입지해 있고, 자연제방의 저지대에는 밭, 배후습지에는 논이 분포

해 있는 등 같은 양상이다(윤호필 2011).

대평리유적의 밭은 모두 15개소에서 확인되었고 면적은 총 40,000㎡로, 형태는 다양한 편이

다. 청동기시대 밭은 상층 밭, 중층 밭, 하층 밭이 중복되어 있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경작하였

음을 알 수 있다(國立晉州博物館 2002: 57). 미저지의 경사면에 형성된 밭 이랑의 방향은 대부

분 남강의 흐름과 직교되는 방향이지만, 평탄면에서는 구획에 따라 다양한 방향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옥방지역과 어은지역에서 확인된 대규모의 밭은 ‘집단농장(集團農場)’과 같은 것으로, 노

동이나 수확의 분배, 나아가 소유권의 문제가 집단 공동에게 귀속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

으로 본다(李相吉 1997: 187). 이는 옥방1·7지구와 옥방4지구에서 확인된 2단위의 환호취락을

중심으로 경영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고민정 2010). 대평리유적의 밭은 이랑의 길이가 다양하

며 경계가 동일하지 않고 불규칙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지형적 특징에 따라 밭 이랑의 형태가 결

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외 옥방3·6·8지구에서 경계구에 의해 소규모로 구획한 밭의 면적

은 35~625㎡ 정도이다. 한편, 삼국시대 밭은 대체로 밭 이랑의 형태가 다소 직선적이고 더욱 정

연하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은 밭의 입지와 형태는 진주 평거동유적에서도 같은 상황으로, 삼국시

대 밭은 더욱 정연하고 대규모로 조성되어 있어 차이가 있다.

따라서 대평리유적 밭의 용수 공급은 밭의 형태와 지형양상으로 볼 때, 비교적 최소한의 노동

력이 투자된 것으로 보인다. 대평리유적의 밭은 당시 지형과 밭 토양을 그대로 이용하여 고랑과

두둑을 만든 형태로, 이러한 밭의 경작은 강수와 주기적인 하천 범람에 의해 좌우되기도 한다.

이러한 밭 유구와 그 외 취락 구성요소들은 유동적인 흐름의 특성이 있는 물의 이점을 이용하여

조성된 것이다. 옥방2지구의 밭유구는 배후저지의 평탄면과 경사면에 위치하는데, 배후저지에

위치한 밭의 이랑방향은 하천이 흐르는 방향과 직교되게 되어 있어, 이러한 밭 이랑의 조성방향

은 배수와 관련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대평리유적에서 출토된 작물은 쌀, 밀, 기장, 조, 보리, 콩, 팥, 들깨 등으로 주로 주거지나 밭

에서 탄화된 상태로 발견되었다(國立晉州博物館 2002: 58). 이는 야외노지와 주거지 내의 저장

공, 수혈, 밭 등에서 주로 출토되었는데, 특히 작물 중에서는 조와 기장이 기타 작물에 비해 높

은 출토량을 나타내지만, 각 유구별로 다른 특정종류의 작물이 더 많이 출토되기도 한다(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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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경남연구 제10집 2014

아·Crawford 2002: 446-447).3)

근대 한국 농촌에서의 작물재배 형태를 보면, 조, 보리와 같은 곡물들은 다른 계절에 재배가

되고, 한편 쌀이 재배되는 논의 고랑 사이에서 콩이 재배되기도 한다. 선사시대에 조와 기장이

많이 출토되는 것은 조와 기장은 생육기간이 짧고 물의 공급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으며 거의 모

든 토양에 적응이 가능하므로 초기 농경기에 부담이 적은 작물이다. 하지만, 쌀이나 밀, 콩류는

발달된 기술과 노동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청동기시대 후기에 쌀이나 밀과 같은 생육주기가 다

른 다양한 작물들이 출토되는 것은 농경기술의 발달을 시사하고, 농경민은 일년 내내 농경에 종

사했던4) 것으로 볼 수 있다(이경아·Crawford 2002: 448).

다음 경작지의 소유형태에 대해서 살펴보면, 대평리유적에서의 밭은 규모와 면적, 구획 상태

등으로 볼 때, 취락에서 공동으로 경작하였다고 추정하고 있다(이상길 2002: 337-338). 옥방 1

지구(국립진주박물관 조사)에서 확인된 소위 ‘텃밭’으로 얘기되는 소규모의 밭에 대해 김도헌은

개별 가구에서 소유하였다고 파악하는 것은 무리이고, 다른 가구보다 공동체에서 위계가 높은

가구라면 굳이 토지를 소유하기 보다는 생산한 수확물의 소유권을 행사하였을 가능성이 클 것이

라는 점을 강조하였다(김도헌 2010: 126-127). 또한 그는 경작지 면적이 넓은 충적지 취락의 생

산력이 더 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관개시설을 갖춘 논은 천수답의 형태로 운영하는 논보다

같은 면적에서 얻을 수 있는 생산량이 많았을 것인데, 이는 벼의 생육에서 물의 조절이 가장 중

요하기 때문이다. 한편, 같은 면적의 밭보다 논의 수확량이 많고, 논 확대가 가져온 경작지 면

적 확대 효과는 밭보다 컸다고 추정하였다. 따라서 청동기시대 후기에도 경작지 면적을 확대하

여 농경생산력을 향상시켰고, 밭 보다 논 개간에 많은 노동력이 투입되었다고 설명하였다(김도

헌 2010: 143-145). 이러한 경작지 면적의 확대를 통한 작물생산량 증가, 특히 벼 생산량 증가

는 청동기시대 사회의 전개, 위계적 사회 질서의 확립, 고대국가의 성립 등 과거의 사회 변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김민구 2010: 48).

2) 저장시설

전기 말이 되면 장방형주거지와 방형주거지로 이루어진 핵가족단위의 거주형태로 바뀌는 것으

로 이해된다(안재호 2010: 125). 이는 전기의 대형 세장방형 혹은 장방형주거지에서 중소형 주

거지로 규모가 축소되는데 전기 후반부터 이러한 현상이 각 지역마다 나타난다.

3) 구릉지에 입지한 유적에서는 충적지에 입지한 유적에 비해 작물의 종류가 다양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안승모(2008)의 작물집성에 따르면 입지에 따른 작물 종류의 차이는 없다고 하였다.  

4) 다량의 곡물을 이동하는 데에도 비용이 들기 때문에, 또한 수확을 성공적으로 하려면 수확하는 사람이 적시에 근

처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곡물을 재배하는 전업(full-time) 농부가 마을이나 읍락에서 일년 내내 사는 것이 최선

의 방책이라고 하였다(로버트 웬키 저·안승모 역 2003: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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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농경 집약화와 사회분화에 대한 검토 19

이러한 주거 구조물의 시간적 변화는 사회조직, 경제, 그리고 많은 다른 생활양식의 근본적 변

화를 반영하는 것이다(로버트 웬키 저·안승모 역 2003: 354). 송국리형 주거지는 내부에 기둥

과 작업공 외에 별다른 실내 구조물이 없는 소형 주거지이다. 주거지 내부에서 출토상황으로 보

아 취침, 도구제작, 음식 준비와 식사 등의 많은 일상 활동들이 같은 실내공간에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저장구덩이가 특정 가옥과 결부되지 않는 이상 저장은 공용으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청동기시대 후기에는 저장시설이 주거지 외부에 위치하게 되는데, 이는 농경 잉여물이 사적

소유물에서 공공재로 전환된 것으로 보고, 저장시설의 변화와 함께 정치경제적 위계 형성간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김장석 2008). 엘리트의 거주지로 추정할 수 있는 고고학적 증

거들의 상관관계는 일반 공동체 구성원과 비교할 때, 규모가 크거나 출토유물이 많은 주거지를

비롯하여 거대한 무덤이나 위세품의 존재 등으로 정의할 수 있다. 동시에, 엘리트가 집약농경 생

산을 관리한다고 가정하였을 때, 다량의 잉여곡물 저장 또한 엘리트의 관리 체계 하에 있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다량의 잉여 곡물을 저장하는 수혈유구나 고상창고와 같은 유구들은 엘리트

가 거주하는 곳과 가까운 곳에 인접해서 위치할 것으로 추정된다.

엘리트들은 그들의 지위를 과시하거나 지지자들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써 위세품의 전문화

된 생산과 같은 방법으로 농경 잉여물을 이용하게 된다(Earle 1997). 청동기시대 후기의 중심

취락에서는 적색마연토기, 마제석검, 옥 장신구와 같은 특정유물(威勢品)은 반전업적인 전문 공

인집단에 의해 제작되고, 분업화가 진전되는 양상을 보인다고 하였다. 진주 대평리유적의 예

를 들어 생산지(=어은1지구의 밭 주변에 위치한 수혈 주거지)와 소비지(=옥방1지구의 환호 내

의 주거지와 무덤 등)가 구분이 되며, 이는 엘리트에 의해 소비된 정황을 말해주는 것이다(고민

정·Martin T. Bale 2008).

저장시설은 홍수나 가뭄 등의 자연 재해로 인한 생계의 불균형이 초래될 경우에 대비해서 갖

추게 되는데, 청동기시대 후기 후반에 이르러 엘리트들은 저장된 잉여곡물의 관리 및 통제에 집

중하게 된다. 한편, 집중화된 관리조직이 없는 공동체에서도, 자급자족할 수 있는 가계들은 그들

이 독점적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비밀스런’ 저장용 시설에 잉여곡물을 저장하기도 한다(DeBoer

1988: 9-10; Wesson 1999: 153). 청동기시대에 곡물류, 물, 그 외 다른 식료품의 저장은 저

장용 수혈, 대형토기, 고상창고 등을 포함한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裵德煥 2000,

2005; 國立晉州博物館 2002: 70; 金度憲 2005).

먼저 대형토기는 태토에서 볼 때 적색마연토기 제작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선된 점

토가 사용된 것들이 많이 확인되어(慶尙大學校博物館 1999, 2001; 國立晉州博物館 2001), 특별

히 제작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 전기에는 주거지의 한쪽 모서리 부근에 대형의 호

형토기를 바닥에 반쯤 묻은 형태로 그 안에 곡물을 저장하였다. 토기 내부에서는 조와 쌀 등의

곡물이 출토되어 저장용 토기임을 더욱 분명하게 하였다(國立晉州博物館 2002: 79). 후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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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경남연구 제10집 2014

주거지 내부나 주변 수혈에서 출토되기도 하지만, 환호 내부에 수혈을 파고 내부에 목탄이나 소

토를 채워 습기를 막는 시설을 마련하여 저장한 형태도 있다(國立晉州博物館 2002: 70). 대평리

유적 옥방지역의 예를 볼 때, 청동기시대 후기 전반에는 다수의 대형 호형토기가 환호 바깥쪽에

서 출토되는 양상(52%)을 보이다가, 후기 후반에 이르러 대부분의 대형 호형토기가 옥방지역의

환호 안쪽에서 출토되는 양상(46%)을 보인다.

다음, 저장용 수혈은 청동기시대 후기의 몇몇 취락유적에서 확인된다. 저장용 수혈은 용적은

극대화하고 표면적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깊고 더 크게 만들어졌다. 이러한 수혈은 단면형태가

원통형과 플라스크형을 띠는 구덩이들로써, 식료품을 저장하는 구덩이로 기능하였던 것으로 보

인다. 중국 신석기시대의 유적 중에도 이처럼 종단면형태가 플라스크형이거나 둥근 형태의 벽을

가진 원통형의 수혈들이 조사된 예가 있다. 특히 중서부지역의 대전 복룡동과 천안 대흥리, 논

산 마전리유적 등 여러 유적에서 확인되었는데, 천안 대흥리유적에서는 수혈 내부토양을 식물규

산체(plant-opal) 분석한 결과 벼를 저장했던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이형원 2009). 대평리유적

옥방 1지구 658호 방형주거지의 저장혈에서는 콩 36립이 한꺼번에 출토되어 확실한 콩 재배의

흔적을 보여줌과 동시에(이경아 2001: 448), 주거지 내부에서도 대형 토기나 저장혈을 이용하여

저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도면 6> 대평리유적 출토 대형토기(1~3), 옥방1지구 16호 수혈(4), 고상건물지(5~8)(고민정·Bale 2009: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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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농경 집약화와 사회분화에 대한 검토 21

대평리유적에서 대부분의 수혈유구들은 특히, 옥방2·9지구의 밭 주변에서 확인된다. 옥방1지

구 16호 플라스크형 수혈(慶南考古學硏究所 2002)은 환호 안쪽의 특별한 장소에 위치하는데, 이

러한 저장시설은 접근의 용이성, 도난의 방지 등을 위해 소비주체가 머무는 곳이나 다른 소비주

체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위치하는 것이 당연하다(김장석 2008: 7). 이러한 패턴은 엘리

트가 농경 잉여물의 저장과 같은 집약 농경의 어떠한 측면을 통제하고 관리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민정·Bale 2009).

취락 내에서 잉여물의 분배는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의 문제는 정치적 수장의 등장

과정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하다. 금천리유적에서 창고추정건물과 수리시설의 축조와 관리, 논유

구를 통해 볼 때, 지역에 따라서는 집약적인 논농사를 하는 농경정착마을이 존재하였고, 그러한

마을을 수개 거느린 중심마을의 수장에 의해 창고에 보관된 잉여물이 분배되어졌을 가능성이 높

다(김권구 2005: 180-181).

고상건물은 중서부지역과 남부지역의 대규모 취락들에서 종종 확인된다. 출현시점은 관산리

형주거지 출현 시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논 경작과 함께 고상건물이 한반도에 출현한 것으

로 본다(안재호 2010: 122). 보령 관창리유적과 공주 신영리유적, 진주 대평리 옥방1지구 유적에

서는 동지주건물지(棟持柱建物址)가 확인되었다. 이는 일본에서도 다수 확인되었는데 상징성을

부여하여 제사적 성격이 강한 신전(神殿)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한국에서는 분명한 성격을 파악

하기는 어렵지만, 고상창고 또는 의례공간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이형원 2009:

120~123). 대구 동천동 유적과 서변동 유적에서도 다수의 고상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이는 주

거지별 저장구덩이 수준이 아닌 마을 차원의 창고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청동기

시대의 소비와 분배의 단위는 마을 내 석기 생산의 최소 단위가 2~5개의 주거지로 뭉쳐지는 세

대공동체 또는 가구(household)인 점을 감안하면, 식량 등의 소비 단위도 세대공동체 또는 가구

였을 것으로 보인다(김권구 2005: 180-181).

Ⅴ. 농경 집약화 및 사회분화

농경을 통한 사회분화에 대해서 살펴보기 전에, 농경 집약화 및 사회분화와 관련된 이론에 대

해서 알아보자. 농경 집약화를 설명하는 ‘top-down’ 과 ‘bottom-up’ 모델은 생산과 관련된 관

점으로서 누가, 그리고 어떠한 자본을 가지고 경작지를 비롯한 농경 관련 諸시설을 구축하고 조

직하였는지를 설명하는 데에 주로 사용되어 왔다. top-down 관점은 농업기반의 창출과 관리에

있어서 집약 농경을 포함한 농경에 대한 모든 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권위적인 엘리트가

있었다는 것이다(Earle 1997). 즉, 집약 농경을 포함한 농경에 대한 모든 계획에서 중요한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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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경남연구 제10집 2014

을 하는 권위적인 엘리트가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관점이다. 강력한 엘리트 계층은 단지 농업

기반을 조직, 구축하고 유지하는 직접 관리자적 역할보다는 농경과 식료품의 잉여물 수집과 통

제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bottom-up 관점은 관리자적 수장층의 역할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관리자적 수장층의

계획과 가계의 경제자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집약 농경을 위한 대규모의 농업 기반을 구축하

고 유지하는 데에 있어서 지역적으로 조직된 노동력과 개별 가계에 의한 정책결정 만으로도 충

분하다는 것이다(Erickson 2006; Miller 2006).

하지만, 위의 두가지 관점은 집약 농경을 극단적으로 너무 단순화한 것으로써 비판을 받게 된

다(Janusek and Kolata 2004). 서로 배타적인 개념의 top-down과 bottom-up 관점 대신에,

몇몇 고고학자들은 실제에서는 양자가 혼합되어 있을 가능성이 많다고 제시하고, 비교학적인 관

점을 통하여 고고학적 증거를 해석하고 있다(Janusek and Kolata 2004; Kim 2005).

이 모델과 관련하여 김범철은 농경 집약화를 순수하게 개별 가계의 자치적인 정책결정의 결과

로 보는 것은 다소 의심스러운 부분들이 있으며, 지역적 수준에서의 복합성의 출현과 농경 집약

화는 단순히 개별 가계의 자발적이고 동시적인 참여만으로는 충분히 이해될 수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개별 가계들은 실질적으로 생산에 있어서 중요한 구성요소이고, 생산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자율적·독립적으로 정책을 결정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고 제시하였다(Kim

2005: 14-15). 또한 충남지역 송국리문화의 생계경제와 정치경제에 대한 연구에서, ‘bottom-

up’ 과 ‘top-down’을 각각 자발형과 하달형으로 번역하고, 당시 집약 농경과 사회조직의 관계가

‘bottom-up’ 과 ‘top-down’ 과정이 혼재되어 있었다고 논의하였다(김범철 2006c). 한편, 尹昊

弼(2008: 8)은 ‘top-down’ 과 ‘bottom-up’ 모델을 각각 ‘하향식 관점’과 ‘상향식 관점’으로 해

석하여 논의하였는데, 사회 조직의 변화와 관련하여 잉여물의 생산, 관리, 통제를 중요한 요소로

파악하고 있다. ‘top-down’과 ‘bottom-up’ 관점은 한국 청동기시대 보다 사회발전 정도가 다

소 높은 단계에 주로 적용된 생산관련 이론이다. 따라서 청동기시대의 경작지와 사회구조 등을

직접 대입시키는 데에는 다소 문제가 있지만, 고고학적 정황들을 이러한 관점에 적용하여 전반

적인 양상을 살펴보는 데에 있어서는 큰 무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본고에서는 ‘top-down’과

‘bottom-up’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자 한다.

이하에서는 청동기시대 취락에서 top-down과 bottom-up 관점의 고고학적 증거를 추출해

내고, 집약 농경과 사회조직에 대한 접근은 개별 가계(비엘리트계층)와 엘리트계층 모두의 입장

을 고려하여 내용을 전개하고자 한다.

위에서 살펴 본 도작 농경과 관련한 논 및 수리시설에서는 대부분의 고고학적 정황들이

bottom-up의 결과라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초기 집약 농경에서 top-down 과정의 증거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김범철(2005)은 논산 마전리유적과 부여 구봉리유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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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농경 집약화와 사회분화에 대한 검토 23

서 조사된 단위 논 면적의 크기가 작고 민족지적으로도 단일 구획논의 규모가 0.1ha를 넘지 않

았다는 점(Bray 1986)을 근거로, 송국리단계 농업생산에 대해서 대규모의 노동력 동원이 필요하

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에 대해 김장석은 인용문의 오독과 그의 논리가 적합하지 않음

을 주장하였는데, Bray의 논의는 논 건설에서 수평을 맞춰야 하는 기술상의 문제는 항상 발생하

기 때문에 논은 소규모로 구획될 수 밖에 없고, 또한 논의 건설에 많은 노동력이 투입되어야 함

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김장석 2008: 31-32).

하지만, 청동기시대 논유구를 통해 볼 때, 각 취락 내에서 엘리트가 집약 농경을 직접 통제하

고 계획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부족하다. 예를 들면, 논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고, 수리시설

의 형태에 있어서도 정형화된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일부 수리시설을 갖추

고 있지만 대부분은 천수답과 같은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논을 조성하고 곡물을 수확

하는 데에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반월형석도, 보습, 돌낫 등과 같은 농구들이 개별 주거지

내에서 비교적으로 고르게 출토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증거들로 볼 때, 청동기시대 후기의 농경

활동은 특정 집단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하지만, 규모가 큰 수로가 조성된

부여 구봉리유적, 울산 옥현유적, 마산 망곡리유적 등에서 볼 때, 이는 환호나 묘역지석묘의 축

조와 같은 맥락으로 다수의 노동력을 투입해야 하는 문제이므로 이러한 정황은 top-down 관점

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 대규모의 밭이 조사된 대평리유적과 평거동유적에서는 밭의 규모와 종류가 매우 다양하

다. 대평리유적의 대규모 밭이 집중화된 권력에 의한 조직과 계획을 통해 조성된 것이라면, 밭의

형태나 구획 등에서 어떤 정연한 형태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청동기시대의 밭은 형태

와 규모가 비교적 다양하게 나타나고 밭이 정형화되거나 획일화되지 못한 점은 청동기시대 후기

에 이 지역의 집약농경의 형태가 다수의 개별 가계들의 공동 결정에 기인한 결과라는 하나의 모

델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재배작물 종류의 다양성을 통해 볼 때, 밭에서는 1년에 두번의 작물 재배를 했을 가능성

이 있고 장기간 휴경상태로 두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밭에 물을 공급해주는 수로나

배수시설, 그 밖의 다른 관련 유구들이 없고, 또한 자연적으로 배수가 잘되는 입지에 밭이 조성

된 맥락은 개별 가계가 농경활동을 충분히 할 수 있었다는 생각에 더욱 무게감을 실어준다. 이는

청동기시대 도작 농경과 비교할 때, 민족지적 농경 예에서 볼 때, 청동기시대의 밭 조성과 관련

된 시설은 상대적으로 더욱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Crawford and Lee 2003; 郭鐘喆 2001).

김장석의 논의대로 도작농경은 생산단계에서부터 집단적 노동력을 동원하였고, 그 결과물로서

의 농업생산물은 개별 가구의 소유에서 벗어나 노동력 투입단위의 공동재산으로 환원될 수 있었

을 것으로 보았다(김장석 2008: 31-32). 이상의 논과 밭의 조성에 관한 고고학적 정황들에서는

대체로 bottom-up 경향을 띠지만, 일부 top-down 경향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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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경남연구 제10집 2014

서남아시아에서 초기 농업공동체에서는 농민

들이 전업 농사가 생업의 토대가 된 이후에도

수세기 또는 아마도 수천년 동안 평등사회로 머

물렀다고 보는 관점들이 있다. 하지만, 서남아

시아의 초기 농업공동체를 살펴보면, 의외로 사

회상이 일찍부터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기원전 7천년 이후 예리코에서는 주민들이 원

시농업을 보충하기 위해 여전히 수렵과 채집을

하면서도 두께 1.5m, 높이 3.5m의 돌성벽을

쌓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러한 성벽의 구축

은 단순한 수렵채집민과는 다른 형태로 사회조

직이 전환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로

버트 웬키 저·안승모 역 2003: 355-356).

송국리 취락에서 야외노지는 대부분 1~2기에

불과하고, 이는 야외에 모여서 함께 농경 및 사

회활동에 대해 대화하면서 식사하기 위한 것으

로, “공동노동”의 개념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

된다. 각 주거지들이 공동의 창고를 가지고 공

동관리를 하는 등의 긴밀한 관계로 공동생산을

인정할 수 있지만, 취사와 같은 소비활동에서

는 공동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주

거지 출토의 취사도구(토기)의 구성과 용량 등에서 볼 때, 소비생활에서의 독립성이 보인다는 것

인데(都出比呂志 1989), 이는 주거지 내에서 노지도 함께 확인되는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다. 따

라서 야외노지의 공동사용은 청동기시대 후기 후반으로 가면서 농경잉여물을 통한 사회불평등이

생기기 시작하므로 공동식사를 통해 그러한 불화를 줄이기 위한 것은 아닐까?

지배엘리트 지석묘의 존재나 청동기와 옥에 대한 차별적인 접근성은 청동기시대의 사회계층화

를 보여주는 증거이지만, 농경활동은 청동기시대에 사회계층화가 일어나게 한 주요 요인이 아니

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Nelson 2000: 145). 하지만, 집약 농경과 관련하여 취락 내에서

잉여 곡물의 저장은 사회 계층화의 요소인 것은 분명하며, 이와 더불어 위세품의 생산과 분배 등

을 살펴볼 때, top-down 과정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확인된다.

청동시대 후기의 취락은 주거지 규모의 소형화와 규격화의 방향으로 변화되어 왔고 마을 내에

서 확인되는 단 1동의 대형주거는 특정 개인 혹은 특정 집단의 출현을 시사하는 것이다(안재호

<도면 7> 어은1지구 유적-야외노지의 공동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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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농경 집약화와 사회분화에 대한 검토 25

2001). 전기에서 후기로 오면서 주거지 평면형태의 변화는 가족공동체의 개별가족수가 2단위로

축약되는 사회구조적인 변화와 관련된 것으로 보고, 이처럼 한 세대 내의 구성원 수가 줄어들고

반면에 분동한 독립세대가 많아지는 것은 혈연 중심적인 사회체제가 마을 공동체 또는 지역 공

동체화하는 현상과 깊은 관련이 있고, 그 이면에는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특정 신분의 개인 또는

특정 계층의 등장을 예상할 수 있다(안재호 1996).

청동기시대 후기에 들어서면 저장시설은 물론 주거지 내부에 대형 저장토기가 출토되기도 하

지만, 주로 외부에 배치되어 취락의 한쪽 공간에 집중되거나 주거공간에서 다소 멀리 떨어진 지

점에 설치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손준호 2004; 김장석 2008). 김장석은 사회 경제적으로 이러

한 맥락은 가구별 잉여저장체계가 소멸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잉여의 저장 및 사

용이 개별 소비단위, 즉 개별가구의 경제적 계획과 그에 따른 의사 결정에서 벗어나, 일종의 공

공재(public property)적 성격을 갖게 된 것이다. 또한 이러한 잉여의 양적 증가 및 공공재로의

성격변화가 위계의 발생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잉여의 독점적 관리 및

전용은 송국리문화 단계 권력의 경제적 기반이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김장석 2008: 8-9).

이는 진주 대평리유적에서 저장용 수혈이나 대형의 호형토기, 고상건물지 등이 옥방1지구의 환

호 안쪽에서 주로 확인된다는 점으로도 알 수 있다. 대평리유적 옥방1지구 16호 수혈이 환호 안

쪽의 특별한 장소에 위치하는 맥락은 엘리트가 농경 잉여물의 저장과 같은 집약 농경의 어떠한

측면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으로, 엘리트들이 저장시설을 사용함으로써 잉여물을 따로 비축해

두려고 한 행위의 결과로 볼 수 있다(고민정·Bale 2009: 95).

특히, 주거공간에서 다소 멀리 떨어져서 저장공간이 집중된 유적으로는 공주 산의리유적이 대

표적이다. 또한 이 저장공간에는 송국리형 원형주거지 2동이 함께 배치되어 있어 이를 관리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5) 저장공이 밀집된 공간은 필연적으로 집단의 안위가 달린 가장 중요한

시설 중의 하나이므로 이에 따라 창고관리에 더 많은 정성을 기울이며, 보다 효율적인 보관 전략

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이형원 2009: 137).

한편, 김장석은 주거유적과 저장전문유적의 기능 분화를 들고 있다. 송국리유적은 비파형동검

과 목책시설 등 최상위 권력층이 거주하고 있었을 가능성과 대규모 인구가 거주하였음에도 불구

하고 잉여 저장시설이 확인되지 않는 상황으로 보아 송국리유적 일대의 저장전문유적이 식량의

공급을 담당하였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는 저장전문시설을 중심지 외부에 두고 마을 외적으로

위계를 형성하였다는 것인데(김장석 2008), 취락 내에 잉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취락은

과연 어떠한 맥락을 가지고 취락 외에 저장전문기지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일까?

송국리문화 단계에는 집약적 도작농경을 바탕으로 하여 사회분화, 수장묘 출현, 청동기와 같

5) 2동의 주거지는 저장공과 중복되어 있어 앞선 시기의 것인지, 혹은 일정기간 공존하면서 저장공을 관리한 것인지

다소 분명하지 않은 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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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경남연구 제10집 2014

은 특정물품 및 정보의 교환이 몇몇 마을을 통합한 마을집합체의 엘리트 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또한 지석묘의 축조는 이미 위계화된 사회의 매장의례와 기타 공동체의례를 수행하기 위

해 축조된 것이다(이성주 1998, 1999).

청동기시대 영남지역 사회는 집단의 공동체적 이익을 강조하는 공공성을 지닌 60호 건물지와

같은 대형건물 축조집단-사천 이금동유적-과 같은 ‘집단중심적 chiefdom’과 유력 개인에게 많

은 사회적 에너지를 소비하는 창원 덕천리 지석묘 축조집단과 같은 ‘개인중심적 chiefdom’ 등,

지역별로 각 집단의 권력 독점과 공유방식, 사회적 에너지의 사용방식에서 다양한 유형의 집단

이 있었던 것을 암시한다고 하였는데(김권구 2005: 245-246), 이는 지역마다 다소 차이는 있겠

지만, 청동기시대 사회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는 양상으로 파악된다.

청동기시대 후기 사회는 위의 여러 가지 고고학적 정황으로 볼 때, 집단 지향적인 사회 전통

에 기반을 둔 사회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청동기시대 후기에 수공업 생산과 농경생산활동의

집중화가 이루어지면서, 의례와 축제활동과 같은 공동의례가 권력과 특권을 모색하려고 했던

엘리트들에 의해 이용된 공동 전략의 한 부분이었다는 것이다(고민정·Martin T. Bale 2008).

또한 엘리트들은 저장시설을 사용함으로써 엘리트가 그들 자신을 위한 잉여물을 따로 비축해두

려고 했던 증거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도면 8> 공주 산의리 취락(좌)과 논산 마전리 취락(우)의 공간구성(이형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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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농경 집약화와 사회분화에 대한 검토 27

Ⅵ. 맺음말

한반도에서 도작농경은 탄화미와 화분 자료, 토기압흔, 농기구, 논 등의 고고학적 정황으로 보

아 늦어도 청동기시대 전기 후반에는 개시된 것으로 이해된다. 논과 수리시설은 도작농경에 대

한 직접적인 증거로서 몇몇 유적에서 농경과 관련된 수로나 집수지, 보시설 등이 확인되었지만,

청동기시대에는 아직 완전한 관개체제를 갖추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밭유구와 더불어 이러한

정황들은 청동기시대 후기에 집약 농경의 형태가 다수의 개별 가계들의 공동 결정에 기인한 결

과라는 하나의 모델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재배작물 종류의 다양성을 통해 볼 때, 밭에

서는 1년에 두 번 이상의 작물 재배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러 가지 고고학적 정황으로 볼 때,

한국 청동기시대 후기 농경사회는 집단 지향적인 사회 전통에 기반을 둔 사회였다. 하지만 잉여

곡물의 저장, 위세품의 생산과 분배 측면에서는 청동기시대 엘리트 집단은 집약적 도작농경을

바탕으로 하여 사회분화, 수장묘 출현, 청동기와 같은 특정물품 및 정보의 교환을 통해 취락간의

어떤 초보적인 네트워크 전략을 구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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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경남연구 제10집 2014

<Abstract>

A Study on Agricultural Integration and Social Differentiation in the Bronze Age

Ko Min-jung

(Gyeongnam Development Institute)

Although agricultural integration in the Bronze Age is an interesting research

subject to offer an understanding of social structure, it was mentioned as a ancillary

matter to a different subject or not dealt with in detail in the existing researches. A

transition from the early period of the Bronze Age to the latter brought changes in

the structure of houses along with fundamental changes in other life styles including

social structure and economy. Structures of houses, life styles, environmental

changes, location and production technologies are described to be major factors in the

transition to the agricultural society.

General consensus is that the multi-cropping agricultural system of the Bronze

Age including rice farming provided abundant produce resulting in the increase of

population and expansion of society to lead to the division of society due to surplus

produce. Rice farming is understood to have begun no later than the latter part

of early Bronze Age based on the archeological contexts such as carbonized rice,

earthenware impression, farming equipment and wet-field. Wet-field and irrigation

facilities are direct evidence of rice farming, and waterways, collecting reservoirs

and weirs related to farming were found in a few relics. However, they have not

established a complete irrigation system during the Bronze Age lacking direct evidence

to suggest that the elites in each house controlled and planned integrated farming

firsthand. Such circumstances along with field sites suggest a model where a number

of separate families made joint decisions in term of the type of integrated farming

in the latter part of the Bronze Age. Various archeological evidences indicate the

agricultural society in the latter part of Korean Bronze Age was based on the social

tradition with group orientation. However, a storage of surplus grains using stor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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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농경 집약화와 사회분화에 대한 검토 33

pits, elevated buildings and large-scale arc earthenware and the production and

distribution of elite grave goods such as polished groundstone daggers, red burnished

potteries and jade ornaments reveal that the elite group in the Bronze Age began with

rice farming to result in the social differentiation, emergence of megalithic tombs,

prestige goods such as bronze artifacts, and exchanged information employing an

elementary networking strategy between settlements.

□ Key words Bronze Age, agricultural integration, social differentiation, rice farming, multi-

cropping agricultural syst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