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3320129월 한국조직신학회편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Embed Size (px)

DESCRIPTION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33

Citation preview

Page 1: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제33집 2012년 9월 한국조직신학회편

Page 2: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제33집 2012년 9월 한국조직신학회편

Page 3: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차례

김옥주 니케아신조에 나타난위격들의 관계에대한

몰트만의새로운 제안 7

최인식 성령세례의 신학적의의에대한 고찰 37

황덕형 신학에서의 미학적경험의수용의 양태와그 비판적 고찰 75

허호익 슐라이어마허의‘경건’과 퇴계의‘지경’(持敬)에관한 연구 109

전철민 학문연구에 있어서한 통전적 방법론의원리: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141

권진관 사회생태적 정의론을위한존재론적모색:

알랑바디우의존재론을활용하여 177

이상은 칼 바르트와 이삭아우구스트 도르너의상관관계에대하여 211

박영범 신정론과하나님의고난 243

정지련 예수의동정녀 수태에대한신학적 반성 281

이오갑 종말론을어떻게 볼까? 317

정미현 칼 하르텐슈타인의신학적특성 349

김기석 진화론과공존 가능한창조신앙 387

이은주 캐트린테너의 자기-비판적 문화론 421

차례 5

Page 4: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니케아신조(A.D. 381)에 나타난위격들의

관계에대한몰트만의새로운제안:

사회적삼위일체론을중심으로

김옥주

(한세대학교, 강사)

I. 들어가는말

교회의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가고 있는 현대

21세기 상황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개혁주의 학자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이다. 그는 동방정통 교회

와 로마카톨릭 교회의 학문적 교류에 매우 개방적일뿐만아니라, 자신

의 삼위일체론을 통하여 동방과 서방교회의 신학적 화해를 모색하는데

노력하고있다.

몰트만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동방과 서방각자의 전형적인 접

근방식1)에 대한대조가 아니라, 교회전통에 오랜뿌리를 둔 철학적, 우

Korean Journal of Systematic Theology

Vol. 33

Kim, Ok-Joo Moltmann’s New Proposal on the Relationship

of the Persons in the Nicene Creed

Choi, In-Sik A Study on the Theological Meaning of the

Baptism with the Holy Spirit

Hwang, Duk-Hyung Various Forms of the Theological Reception of

Asthetic Experience and Its Critical Reflection

Hur, Ho-Ik A Comparative Study of the Piety of F. Schleier-

macher and “Keeping of Piety” of Toegye

Jun, Chul-Min The Principle of a Holistic Methodology in

Academic Research: in the Perspective of the

Trinity

Kwon, Jin-Kwan Ontological Approach to Socio-Eco Justice

Lee, Sang-Eun A Study on the Relationship between Karl Barth

and Isaak August Dorner

Park, Young-Bum The Theodicy and the Suffering of God

Chung, Chi-Lyun A Theological Reflection on the Virginal Con-

ception of Jesus

Lee, O-Kab How to understand the Eschatology?

Chung, Mee-Hyun Convergences and Divergences between Karl

Barth and Karl Hartenstein

Kim, Ki-Suk Belief in Creation coexisting with the Theory of

Evolution

Lee, Eun-Joo Kathryn Tanner’s Theory of Self-Critical Cul-

ture

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7-36

1) 이러한 대조는 물론 몰트만 이전의 학자들에게도나타난다. 19세기 프랑스 학자인 레

그농(Theodore de Regnon)은 두 교회의 차별적 접근방식을 언급하며, 그들의 방법

론적 차이는 교부시대에 이미 성행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어거스틴 계보를 따르는

라틴철학이 하나의 신적 본성(nature)에서 시작하여 세 위격을 향해 접근하였다면,

갑바도기아 교부에 기초한 그리스 철학은 먼저 위격을 시작으로 하여 신적 본질

(ousia)을 추구하는 방식을취하였다. 전자는 본성의 양식(a mode of nature)을 위격

Page 5: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로는 신론, 기독론, 구원론에 비해 미약했던 서방신학의 성령론에 활기

를 불어넣어, 성부와 성자와 동일한 성령의 동등성과 그의 온전한 위격

성을 부각시켰다. 몰트만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세 위격 간의 동등한

관계성과 공동체에 대해 강조함으로써 다양한 인종과 계층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실제적 정의와 평등을 세우는데 공헌할 수 있

는 패러다임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몇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

는 어떠한 위계적 질서(taxis)가 없는 평등한 위격들의 페리코레시스적

(perichoretic)“삼위일체 하나님”을 전개하기 위해 삼위일체의 구성

(constitution of the Trinity)과 삼위일체의 내적 삶(inner life) 사이를

구별하였다. 이러한 구별은 본 저자의 관점에서, 동방교회 삼위일체론

의 토대로 여겨오던 성부의 군주성(monarchy)과 위격들의 절대적 특

성을 나타내는 근원의 관계(relations of origin)에3) 대한 이해를 무효화

시키거나축소시킴으로써, 정작그가 추구하려했던에큐메니컬화합에

새로운 긴장을 추가했다고본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 논문은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적 접근 방식과 니

케아 신조의 성령 발현부분에 대한 그의 분석과 대안을 고찰한 후, 특

히 본 저자가 동의하지 않는 몰트만의 삼위일체의 구성과 삼위일체의

내적삶 사이의 구별을 비평적으로살펴보도록하겠다.

주론적, 존재론적 사상들에기초한 단일신론적 하나님 개념과의 명확한

대조를 통해 기독교의 구속사적 신앙에 토대를 둔 삼위일체적 하나님

개념을구축하여자신만의 독특한 사회적 삼위일체론을확립하였다.

몰트만의 이러한 시도는 에큐메니컬 입장에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과 연대하여 현대 동방신학자들의 공감대를 형성하였고, 서

방신학 안에서는 신학적/사회적 자기-성찰을 이끌어냈다. 즉, 동방과

서방으로 분리된 교회와 그 긴장 속에 존재하는 신학적 이슈들, 예를

들어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일명381년 니케아 신조)에 첨가된 필

리오케(filioque) 교리를2) 재평가함으로써 두 진영 사이의 신학적 공통

기반을 발견하고 그것을 균형 있게 융합하려고 노력했다. 다른 한편으

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김옥주, 니케아 신조(A.D.381)에 나타난 위격들의관계에 대한몰트만의새로운 제안 9

체(Personality)로 인식하고, 후자는 본성을 위격의 내용(the content of the Person)으

로 간주한다. 레그농의 입장은 동방의 접근방식을 한편으로 지지하면서, 오늘날 라틴

신학의 신적 단일성(Oneness)의 교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억(memory)으로만 이

해함으로써 삼위일체 교리를 흡수시켰다고 비판한다[G. L. Prestige, God in Patristic

Thought (London: SPCK, 1952), 233-241]. 20세기의 칼 라너(K. Rahner)는 세 위

격(hypostases)이 인격적이며, 더 이상 축소되어질 수 없는(irreducible) 존재로서 본

성보다 우선적으로 나타났던 전-어거스틴적(pre-Augustinian) 하나님의 개념으로 돌

아갈 것을 주장한다. 물론 현대 동방신학자들 또한 특히 필리오케(filioque) 문제를

다룰때, 세 위격의 실재가 신적본질의 단일성에 대한 모든사변에 선행한다는 갑바

도기아 교부들의 주장과 본질 안에서의 내적 관계로써만 표현하는 삼위일체를 인식

하는 어거스틴적 개념으로써의 하나님의 단일성을 대비시킨다[Karl Rahner,

Theological Investigations 1: God, Christ, Mary and Grace (Baltimore: Longman

& Todd Ltd., 1958), 183]

2)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는 성령에 대한 언급이 미흡하여, 후에 급진적 아리우스

주아들에 의하여 성령의 신성이 공격을 받게 되자, 공교회는 니케아-콘스탄틴노플

신조(the Nicene-Constantinopolitan Creed, 이하 니케아 신조)를 작성하여 성령의

아버지로부터 출생(procession)을 선포함으로써, 성부 성자 성령의 동일본질(homo-

ousios)을 확증하였다. 그러나, 니케아 신조에 서방교회가filioque(아버지와 아들로부

터)를 일방적으로 삽입함으로써시작된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의 삼위일체적 내적

삶에 있어서의 근원의 관계(relations of the origin)에 대한 논란은1054년 보편교회

를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나눠지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J.N.D. Kelly, Early

Christian Doctrines (New York: Harper&Row, Publishers, 1978), 252].

3) 근원의 관계 또는 구별의 관계(relations of distinction)란 신약성서와 특별히 요한복

음 15:26(“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proceed) 진리의 성령”)에서 드러나는 성부로부터 아들과 성령의 나옴(generation)

에 관한관계를 의미한다. 갑바도기아 교부들과 어거스틴은 성서에 기초한 근원의 관

계를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특별히 아버지로부터 나온 아들과 아버지와 아들로부

터, 즉 필리오케를 첨부하여아들과성령을 구별하였다.

Page 6: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몰트만의 견해에 따르면, 서방의 삼위일체론은 사실 전통적으로 단

일신론적이라고비판한다. 그 예로몰트만은 서방신학 안에서 존재하는

세 가지 주요 모델을 제시한다. 첫째는 하나님을 최고의 실체(Supreme

Substance)로 보는 견해이다.8) 하나의 신적인 실체가 삼위일체로서 자

신을 제시하는 것은 하나-안에서-세 위격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었

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삼위(threeness)를 신적 본질(divine essence)의

통일체(unity) 안으로 잠식시키는 위험을 낳았다. 이러한 방법론은 대부

분의 자연신학자들이취한 것으로 하나님의 통일체에서 삼위일체의 기

독교 교리로 이동하는데 난점을 초래하였다. 두 번째 모델은 하나님을

절대적 주체(Absolute Subject)로 보는 견해이다.9) 이 사상은“인식하고

있는 인간”이“실제하는 것의 통일성”을 결정하는 주체라는 전제 위에

그 토대를 성립한다.10) 하나님의 개념에 대한 접촉점과 목적은 주체로

서의인간에 대한 해석이다. 이것은 헤겔과 피이테에 의해절대적 인간

주체로부터 절대적 신적 주체로서의 하나님에게 옮겨갔다. 그러므로,

인간 주체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은 실제로“자유롭고 이성적이고 주

체적이며지배적인인간의 원형”이다.11)

절대적 실체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모델과 마찬가지로, 절대적 주체

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모델은 단일신론적 경향을 가진다.12) 두 모델은

동일하고일반적인시작, 즉 신적통일체의철학적 개념을 공유한다. 서

방신학에 있어서 삼위일체론에 대한 이와 같은 경시풍조나 축소화는

오래 전부터 교회전통에 뿌리내려왔다. 몰트만의 견해에 따르면, 어거

스틴 이후 서방교회는 신적 통일체의 철학적 개념인 한 하나님으로부

터 삼위일체사상을 발전시켜 왔다. 히포의 신학자는 하나의 신적 본질

I I. 몰트만의삼위일체론

1. 서방신학에서의단일신론적삼위일체론

클라우드 웰치(C. Welch)는 1952년 In His Name에서 삼위일체적

신학 위에 기초한 칼 바르트(Karl Barth)의 계시론은 앞으로의 삼위일

체적 사상에 풍성한 열매를 맺는 비옥한 땅이 될 것이라는 예언적 논

평을 내놓았다. 이와 동일 선상에서, 테드 피터스(T. Peters) 또한“삼위

일체론에 대한 현대 사상의 고찰에 있어서 최대의 공헌은 바르트가 제

시한 원리를 확대하거나 또는 그의『교회 교의학』과 평행한 사고의 논

리를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4) 실제로, 개혁주의 교회에서 어느

누구도 바르트 신학을 배제하고서는삼위일체론을논하지 못할것이다.

몰트만 또한예외는 아니다. 그는 성서의 의의와 그리스도 사건을 신학

적 사고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을 바르트에게서 배웠다. 나아가 몰트만

은 바르트의 삼위일체적 사상을 더욱 깊이 연구하면서 이를 발전시키

거나 또는 거부함으로써 자신만의 삼위일체론을 점진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몰트만은 서방신학이 삼위일체론의 중요성을

묵과하거나 또는 진정한 삼위일체적 하나님을 제시하는데 실패하였다

고 평가한다.5) 예를 들어, 쉴라이허마어는 삼위일체론을 경험의 명료한

자료가 아닌“기독교적 자의식(self-consciousness)에 대한 다양한 진

술들의 단순한 결합( w e b ) ”으로 치부하였다면,6 ) 칸트는 삼위일체론이

실천적 의미를 갖지않는다는이유로 경시하였다는것이다.7)

1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김옥주, 니케아 신조(A.D.381)에 나타난 위격들의관계에 대한몰트만의새로운 제안 11

4) Ted Peters, God as Trinit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3), 82.

5) Moltmann, The Trinity and the Kingdom, trans. Margaret Kohl (Augsburg: Fortress

Publishers, 1993), 144.

6) Ibid., 3.

7) Ibid., 6.

8) Ibid., 10-2.

9) Ibid., 13-6.

10) Ibid., 13.

11) Ibid., 15.

12) Ibid., 16-8.

Page 7: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논의할 만한 여유를 주지 않는데, 삼위일체가 단순히 하나의 주체에 있

어서의 삼중적 반복으로만 보여지기 때문이다. 몰트만은 삼위일체 위에

한 분 하나님의 단일적 주권을 우선적으로 두는 바르트 신학 또한 서방

삼위일체교리에 흐르는전형적인단일신론적경향이라고지적한다.

2. 사회적삼위일체

몰트만 신학의 핵심 주제는 단일신론이 아닌 기독교 사고에 입각한

삼위일체론의 강조에 있다. 하나님에 대한 단일신론적 교리에 대항하

여, 그는 또 다른접근 방식, 즉 사회적 삼위일체를 취한다.18) 사회적 삼

위일체는 몰트만의 두 가지 사상적 토대, 다시 말하면 고난 받는 사랑

으로써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창조에 영향을 줄뿐만 아니라 또한그

것에영향을 받는하나님의역사(divine history)에 대한이해의 통전적

결과이다. 이 독일 신학자에게 있어, 삼위일체적 신학을 세우는 최우선

의 길은 성서적 증언에 신실해야 한다는 것과 삼위일체론의 시작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이어야 한다는 점이다.19) 그러한 신학의 중심에는

몰트만의 삼위일체 신학에서의 새로운 관점을 구현하는 십자가가 위치

한다. 그는다음과 같이기록한다.

십자가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아들의 버림받은 상태 가운데 가장 깊이

분리되어 있으며, 이와 동시에 아들의 내어줌 속에서 가장 깊이 하나로

연합되어 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이 사건으로부터 발현하는 성령은

의 개념으로 인식된 통일체로서의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삼

위일체적 위격들의 개념으로 옮겨간다. 이러한 사상을 더욱 명확하고

정교하게 정립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조항

(article)을 한 분 하나님(De Deo uno)과 세 위격(De Deo trino)에 관

한 논제로 분리시키는 오류를 범했다.13) 몰트만은 그와 같은 방법이 삼

위-일체(tri-unity)를 한 분 하나님으로축소시켰고결과적으로 양태론

적 군주론을 낳는 원인으로 간주하여 단호히 거부한다. 실제로, 사벨리

우스적 양태론은 서방교회에 지속적으로 잠재되어 있는이단적 위협으

로, 최고의 실체(Supreme Substance) 또는 현대로 들어와서 절대적 주

체(Absolute Subject)라는하나님 개념속에깊이스며들어가있다.

몰트만의 관점에서, 바르트의 삼위일체론 또한 이러한 단일신론적 비판

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14) 리처드 바우컴(R. Bauckham)에 따르면,

몰트만은 삼위일체론과의 반대 개념으로‘단일신론’을 사용하여, 기독교

적 하나님-완전한 삼위일체론의-개념과 반대적 입장인 비기독교적이

단일신론적 하나님 개념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성서적 이해 보다

통일성에 그 우선성을 허용하는 그 외의 기독교 견해들과의 뚜렷한 대

비를 시도하였다.15) 그 예로 몰트만은 바르트의 주장을 인용한다:“하나

님은 변동할 수 없는 통일체 안에서 계시자(revealer), 계시(revelation)

그리고 계시된 자(being-revealed)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을 주(Lord)로

서 계시한다.”16) 그는 바르트가 주로서의 하나님 주권(sovereignty)을 하

나님의 본성의 개념과 일치시켰으며 후자를“하나님의 신성”및 현대적

개념의“위격성”과 동일시했다고 인식한다.17) 이러한 방식은 세 위격을

1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김옥주, 니케아 신조(A.D.381)에 나타난 위격들의관계에 대한몰트만의새로운 제안 13

13) Ibid., 17

14) Moltmann, “The Trinitarian Personhood of the Holy Spirit,” in The Advents of the

Spirit, ed. Bradford E Hinze and D. Lyle Dabney (Milwaukee: Marquette

University Press, 2001), 303-5.

15) Richard Bauckham, The Theology of Jurgen Moltmann (Edinburgh: T,&T, Clark,

1995), 173.

16) Moltmann, The Trinity and the Kingdom (1993), 63, 141.

17) Ibid., 141.

18) Ibid., 149.

19) 몰트만은 성부, 성자, 성령과 연관되는 주요한 네러티브로 시작하는 것을 주장한다.

그는“아들의 역사”로 시작하면서, 간략하게 예수의세례, 파송방식십자가, 부활, 그

리고 예수의 영광 받음 등에 관하여 진술하였다. 삼위일체론을 필연적으로 만드는

것이 기독론이다. 그런 다음 몰트만은 출애굽, 성육신, 케노시스 및 오순절 사건들이

성부, 성자, 성령과 깊이 연관 있음을 고찰하므로써 삼위일체론을 위한 거대한 상황

을 발전시켜나간다(ibid., 97).

Page 8: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세상의 구속을 위한 의의를 갖기 이전의 내적-삼위일체적 사건”26) 되는

이유이다.

여기서 십자가 사건은 기독론적일 뿐만 아니라 성령론적이기도 하

다. 몰트만에 따르면,“그리스도 역사의 전(whole) 종말론은희망되어지

는 미래가 역사 안으로의 진입을 통한 성령의 내주(indwellings)와 사

역의 결과인 성령의 역사로 묘사될 수 있다.”27)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

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는 몰트만의 삼위일체적 신학은 생각할 수 없

다. 몰트만은 창조안에서 내주하고 그것을 새롭게 하는동시에 아버지

에게 영광을 가져오는 보다 확대된 의미에서 성령의 사역을 투영하려

고 시도한다.28)

성령은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연합을 위해 활동하며 그러한 구속사

역을 통한 영화(glorification)가 바로 구원의 종말론적 목표이다. 그러

므로, 몰트만에게 있어서, 아들의 역사는 구속사를 위한 하나님과 세상

과의역사와 동일시된다.29) 그는다음과 같이서술한다.

[예수의] 역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상호작용으로부터비롯된다. 그

의 역사는 아버지, 아들, 성령 사이의 상호적이며, 변화시키는, 그래서 생

동력 있는 관계의 역사이다. 예수가‘아들’로서 나타나는 역사는 단 하

나의 주체(subject)에 의하여 완성되고 성취되지 않는다. 신약성서에 있

어서 그리스도의 역사는 이미 삼위일체론적 개념과 결합되어 있다. 그러

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신약성서는 세상을 향하

하나님 없는 자들을 의롭게 하며 버림받은 자들을 사랑으로 채워주며,

죽은자들에게생명을준다.20)

몰트만은 십자가를 신적인 내재적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완성을 향한 하나님의 개방성 안에서의 삼위일체적 사건으로 인식한

다.21) 스탠리 그렌츠(S. Granz)와 로져 올슨(R. Olson)에 의하면, 어느

신학자도 하나님의 존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종말의 의미를

몰트만이한 것과같이분석하지않았다.22)

십자가는 하나님 안에서의 그 자신과 세상 가운데 있는 하나님 사

이에 대한 관계에 대한 문제를 유일하고 결정적인 한 초점에 모이게

한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고난 받는세상을 하나님 자신의 삼위

일체적 역사안으로 취할 뿐 아니라 하나님-자신(God-Self)과 세상을

위한 새로운 미래를 열어 놓는다.23) 실제로, 역사는 미래를 향해 움직이

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자신 밖으로 활동(opera trinitatis ad

extra)하심과 동시에 세 위격이 서로와 관계를 맺고 또한 세상에 관여

(involvement) 함으로써 영향을 받는 것(opera ad intra)을 의미한다.24)

이것이 바로몰트만이 그리스도의십자가가“모든 기독교 신학의 중심”

이자“삼위일체론의 내용”25)이며,“십자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은

1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김옥주, 니케아 신조(A.D.381)에 나타난 위격들의관계에 대한몰트만의새로운 제안 15

20) Moltmann, The Crucified God, trans. R. A. Wilson and John Bowe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4), 244.

21) Ibid., 249.

22) 스탠리그렌츠, 로져올슨/신재구 옮김, 『20세기신학』(서울: IVP, 1997), 298.

23) Bauckham, The Theology of Jurgen Moltmann (1995), 4-5.

24) Motlmann, The Church in the Power of the Spirit, trans. Margaret Kohl (London:

SCM Press,1977), 57-62; Moltmann, The Crucified God (1974), 163. R. 올슨은 몰

트만에게 있어서의 십자가의 중대성을 다음과 같이 감지한다:“십자가는 삼위일체의

인식에 있어 매우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데 고통과 희생의 사건이 나타나지 않는

한 본질적인 삼위일체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이다.”나아가, 십자가는 사랑으로서의

하나님의 개념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십자가가 신적인 내적 삶을 결정하는

역할과 같다. R. Olson, “Trinity and Eschatology: The Historical Being of God in

Jürgen Moltmann and Wolfhart Pannenberg,”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3 6

(1983): 217.

25) Motlmann, The Crucified God (1974), 204, 246.

26) Moltmann, Experience in Theology: Ways and Forms of Christian Theology, trans.

Margaret Kohl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0), 305.

27) Moltmann, The Church in the Power of the Spirit (1977), 34.

28) 성령과 아들의메시아적 파송은 종말론적의미를 갖는데 하나님은그의 피조물의해

방과치유를 통해서 그가영화롭게된다는 사실에있다(ibid., 60).

29) Bauckham, The Theology of Jürgen Moltmann (1995), 15.

Page 9: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익한 개념”이다.34) 하나님은 세상을 품에 안기 위해 삼위 자신들의 사

랑의 교제를 개방하는 삼위의 공동체이다. 바우컴의 이해에 따르면, 페

리코레시스적 삼위일체로서의 세 위격의 상호-관계성( i n t e r-r e l a-

tionships)이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성을 이해하기 위한 몰트만의 근원

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다고 지적한다.35) 즉, 페리코레시스는 몰트만으로

하여금 삼위일체에 있어서의 단일신론적이며 위계적 측면을 극복하고,

보다 상호적이며 동등하고 균형적인 삼위일체론을 건설적으로 세워나

가는데 지속적인지원을 한다.36)

몰트만은 신적인 관계(relationship)에 의하여 위격의 개념을 정의하

는 페리코레시스적 방법을 취한다.37) 페리코레시스는 절묘한 방식으로

삼위성(threeness)과 통일성(unity)을 결합하지만 결코 전자가 후자를

또는 후자가 전자를 해소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위격들은 영원한 삶의

순환 안에서 그들 자신을 통하여 삼위의 통일성을 형성한다.38) 다시 말

해서, 몰트만에게 있어 위격은 다른 위격들과의 상호-관계와 분리되어

여 개방되어 있고교제의 관계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관계에 대한 이야

기를선포함으로써하나님에대하여 진술한다.30)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몰트만은 계시로부터 도출된 하나님의 삼위-

통일적인 특성을 고려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이고 철학

적인 신론을 구축하고 따라서 그러한 통일성으로 삼위일체론을 시작하

는 토마스주의적전통을 단호히 거절한다.31) 대신, 몰트만은 삼위일체와

하나님 나라에서 아들의 역사, 다시 말해서 신적인 삼위의 역사로부터

시작하여 세 위격의 통일성으로 옮겨간다. 이 과정을 통해 삼위일체의

통일성은 한 본질 또는 주체의 단일신론적 통일성이 아닌 세 위격의

교제/공동체로서이해된다.

3. 몰트만신학에서의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몰트만의사회적 삼위일체는 다마스커스의요한(John of Damascus)

이 사용하였던 단어, 즉 한 위격이 다른 두 위격들과의 관계에 있어매

우 친밀한 내주함과 완전한 상호침투를 의미하는 페리코레시스(peri-

choresis)32)에 크게의존한다.33) 몰트만에게 있어, 헬라어 용어인 페리코

레시스는“획일성(uniformity) 없는 공동체”와“개별주의 없는 위격성

(personality)”을 가리키며,“위격들 안에서의신적인 공동체, 그들의 공

동체 안에서 위격들, 즉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에 있어 가장 유

1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김옥주, 니케아 신조(A.D.381)에 나타난 위격들의관계에 대한몰트만의새로운 제안 17

30) Moltmann, The Trinity and the Kingdom (1993), 64.

31) Ibid., 177.

32) 라틴번역에는두 가지 단어가 사용하였다: i) circuminsessio: sedere (자리를 앉다)와

session (좌석을 가지고 있다)서 유래한 것으로,“한 인격이 다른인격 안에, 온 사방

을 둘러싸며(circum-) 존재하다”의 정체적 의미; i i) circumincessio: incedere (침투

하다, 함께-침입하다, 안으로-침입하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친교( c o m m u n i o n )와

koinonia의 상태를 묘사하는것으로, 능동적인상호관계성의지속적인 진행을의미

33) Moltmann, History and the Triune God, trans. John Bowden (New York: Cross-

road, 1991), 86.

34) Moltmann, “The Trinitarian Personhood of the Holy Spirit,” 311.

35) Bauckham, The Theology of Jürgen Moltmann (1995), 6.

36) 예를들어The Way of Jesus Christ에서, 몰트만은영 그리스도론(Spirit Christology)

을 발전시키는데 그것은 성령에 의해 능력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강

조한다. 이러한 강조는 피조세계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에 대한 그

의 성숙한 관점이 보여질 수 있다. 그의 관점은 신적인 세 위격들이 변화하면서 상

호적인 방식으로서로 깊이관계를 맺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몰트만에게 있어, 기독

론은전통적으로 협소한 기독론적관점으로 해석되는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기독론

은 예수가 아버지와 성령과의 관계에서 그의 전 생애를 살았던 완전한 삼위일체적

방식으로이해된다.

37) 올슨은 몰트만이‘존재의 방식’으로‘위격’을 대체하는 것은 거부한다고 지적한다.

몰트만에게 있어, 절대적 주체나 또는 실재( s u b s t a n c e )의 동종성( h o m o g e n e i t y )은

“삼위일체의 양태론적 해석”으로 이끌어, 세 위격 사이의 역사적 관계의 실체를 파

괴하고 삼위일체적 존재로써의 하나님을 고립시켜 비-소통적인 일원론(monism)으

로 가둬둔다. 역사적 관계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공동체로 보는 몰트만의 이해는 인

류를 향한 하나님의 개방성, 종말론적 미래와 전 피조물과의 신적인 결합을 뒷받침

한다(Olson, “Trinity and Eschatology,” 215).

Page 10: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다. 그는다음과 같이언급한다.

삼위일체인 하나님의 통일성은 신적 본질이라고 하는 하나의 보편적 개

념에 있다고 이해될 수 없으며, 또 그렇게 간주되어서도 안된다. 만일 그

렇게 된다면 삼위 상호간의 위격적 차이가 폐기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것과 반대라면, 즉 세 위격의 차이가 그들의 상호 관계의 과정 곧 페

리코레시스적으로이루어지는 삶의 과정에 있다면, 세 위격은 동일한 하

나의 신적 주체의 세 개의 존재 양식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또 그렇게

되어서도안된다. 위격들자신들이그들의 단일성과차이를 구성한다.42)

다시 말해서, 이러한 페리코레시스적 관계성들은 삼위일체의 내적

삶 안에서“살아 있는 변화들(changes)”43)과 함께 각 위격간의 차이

(differences)를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통일성의위치는 하나의 본

질/주체의 개념에서 세 위격들의 페리코레시스로 옮겨진다. 신적인 통

일성에 있어서의원리는 근본적으로하나의 신적인 본질에서가 아니라,

세 위격사이의 상호연합(communion)이라는 관점이 인식된다.44) 그러

므로 몰트만에게 있어 페리코레시스의 개념은 단일신론적 관점에서 사

회적 삼위일체로 옮겨가도록 돕는다. 세 위격들은 서로와의 관계에서

모두능동적 주체들이며상호적 페리코레시스안에서 하나이다.

몰트만은 신적 삼위의 관계가 그들의 통일성을 형성한다고 주장한

다. 삼위일체의영원한 삶 안에는,“성부의선재성이 아닌페리코레시스

에 기반을 둔 오직 세 위격의 동등성만 있다. 이는 곧 어느 위격이 어

느 위격보다선재하거나 초월하지 않으며, 세 위격은 숫자로 매겨질 수

서는 어떠한 의미도 갖지 못한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일치성은 공동의

신적 본체(ousia) 안에서 공유하는 세 위격으로서가 아니라, 대신 내적

삶 가운데 세 위격이 서로와 관계를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

로를실현시키는(realize) 페리코레시스적순환으로서이해된다.

여기서 몰트만은 삼위일체의 구성(constitution)과 삼위일체 자체의

내적인 삶(inner life) 사이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

르면,“성부는‘신성(Godhead)의 근원’인 존재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삼위일체는 시초(starting point)로서의 아버지에 의해 형성된다.”39) 아

들과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그들의 실재(existence)를 부여받고, 아버지

의 군주성(monarchy)은“구속사에서 모든 것이 그로부터 나오고 그에

게로 향하기 때문에 삼위일체”안에서 나타난다.40) 그러나, 삼위일체의

내적인 삶 안에서 출생(generation)이나 발현(procession)은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성부의 군주성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세 위격은 서로

가 서로에게 동등하고, 상호적으로관계하며존재하기때문이다.41)

삼위일체의 구성과 관련하여, 몰트만은 성부가 신성(Godhead)의 원

리이며 성자와 성령의 근원이라는 성부의 군주성을 유지한다. 여기서,

몰트만은 성부의 군주성과 삼위일체적 질서(taxis)를 삼위일체의 형성

에만 엄격히 제한시킨다. 삼위일체의 내적인 삶 안에서, 근원의 관계

(relations of origin)는 무효화되는데(invalid) 각 위격은 그 속에서 서

로에게 관계하며 서로를 채워줌으로써그들의 관계를 교환하기 때문이

1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김옥주, 니케아 신조(A.D.381)에 나타난위격들의관계에 대한몰트만의새로운 제안 19

38) Moltmann, The Trinity and the Kingdom (1993), 175.

39) Ibid., 176.

40) Ibid., 178.

41)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삼위일체의 구성면에 있어서 아버지는 신성의‘근

원-없는-근원’이다. 두 개의 발현의 교리에 따르면, 아들과 성령은 그들의 신적 본

질을 아버지로부터 얻는다. 그래서 신성의 구성에 있어서 아버지는 삼위일체의‘단

일 군주론적’단일성을형성한다. 그러나삼위일체의내적인 삶의면에있어서세 위

격은 그들 상호간의 관계를 통하여 그리고 사랑의 영원한 페리코레시스 안에서 그

들의 단일성을스스로 형성한다”(ibid., 177).

42) Ibid., 175.

43) Ibid., 174

44) 몰트만에 따르면,“페리코레시스는 위격들과 그들의 관계에 대한 교리를 넘어서는

삼위일체적 단일성을의미한다: 그들의 영원한사랑에의해서, 신적인 위격들은서로

와 함께, 서로를 위하여, 서로 안에서 그들이 그들의독특하고, 비교할 수 없으며 완

전한 통일성 안에서 그들 자신들을 구성하는 너무도 친밀하게 존재한다”[ M o l t-

mann, History and the Triune God (1991), 86].

Page 11: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지의세 가지패턴을 보게된다.48)

몰트만은 특히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에 주체로서 자리한 성령의

활동에 주목한다. 이 활동은 송영(doxology)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영

화롭게 하고삼위일체적 통일성의 목적, 즉 종말론적 미래에 모든 피조

물과 하나님과의 신적 연합(divine unity)을 완성케 하는 성령의 사역

이다.49) 이것이 바로 성부와 성자와 동일한 위격으로서의 성령의 완전

한 위치를추구하는몰트만의삼위일체적-성령론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몰트만은 니케아 신조에 첨부된 필리오케는“불필

요하며”배제될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50) 그의 견해에 따르면,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하는 서방신학은 성령을 삼위일체의

근원적 관계 안에서 세 번째에 위치하게 할 뿐만 아니라 성자에 종속

시켰다고 비판한다.51) 나아가 필리오케 교리는 구속사와 삼위간의 상호

관계에 대한적절한 이해에 도달하는데지장을 초래하였다. 몰트만에게

있어, 보혜사의 파송에 대한 예수의 약속은 성령의 새로운 시대를 의미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의 성육신 전에 이미 현존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성자가 성령에 의해잉태되고, 성령에 의해세례

를 받으며, 성령에 의해 주어진 능력에 힘입어 사역을 하였다면, 성자는

성령을 전제로 한다. 결과적으로 성령은 예수에 선재하며“그리스도는

성령안에서 아버지로부터왔다.”52)

만약아들과 성령의 삼위일체적 상호성(mutuality)이 인정된다면, 그

리스도는 아버지와 성령으로부터 나온다고 볼 수 있다. 몰트만은 이러

한 가능성을신중하게서술한다.

없다.”45) 몰트만은 신적인 삼위 간의 동등하며 비-위계적인 공동체를

옹호하기 위해 페리코레시스 개념을 사용한다.46) 데이비드 벡(D. Beck)

은 비록그와같은 방식이 삼신론으로기울어질 경향이 있다 하더라도,

만약 그것이 첫째로 성서에 신실하고, 둘째로 관계성과 상호성을 강조

하는 모형을 충실히 전달하는 삼위일체적 패러다임으로 기능한다면 몰

트만은 그러한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사실에 주목한

다.47)

I I I. 니케아신조(381)에 나타난위격들의관계에대한

몰트만의새로운제안

Et in Spiritum Sanctum, Dominum et vivificantem, qui ex Patre [Filio-

que] procedit. Qui cum Patre et Filio simul adoratur et con-

glorificatur: qui locutus est per prophetas.

(Symbolum Nicaenum Constantinopolitanum)

몰트만의 페리코레시스 교리에 의하면, 삼위일체 안에는 고정된 질

서(taxis)가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에 성부는 성자를 보내고 그에게 능

력을 부여하기 위해 성령을 파송한다. 오순절 날에, 성자는 교회공동체

에게 아버지로부터성령을 보낸다. 창조안에서 지금 모든것을 새롭게

하는 성령은 아들을 통해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 따라서 이러한 삼위

일체적 세 가지 패턴을 통해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아버지-성령-아들

과 아버지-아들-성령의 패턴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아들-아버

2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김옥주, 니케아 신조(A.D.381)에 나타난 위격들의관계에대한몰트만의새로운 제안 21

45) Moltmann, “The Trinitarian Personhood of the Holy Spirit,” 312.

46) Stanley Grentz, Rediscovering the Triune God, The Trinity in Contemporary

Theology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4), 81.

47) Bauckham, The Theology of Jurgen Moltmann (1995), 4. 시리즈의 네 권은 다음과

같다: The Trinity and the Kigodom of God; God in Creation; The Way of Jesus

Christ; and The Spirit of Life.

48) Moltmann, The Trinity and the Kingdom (1993), 93-4.

49) Ibid., 178.

50) Moltmann, The Spirit of Life: A Universal Affirmation. trans. by Margaret Kohl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1), 306.

51) Ibid., 70-73; 293; 306.

52) Ibid., 293.

Page 12: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독특한 존재의 양식을 의미한다. 여기서 몰트만은 아버지의 군주성을

성자와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실재를 부여받는 의미에서만 이해되어져

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아버지와 성령, 성령과 아들

과의 관계나 또는 페리코레시스적 형태(form)에 대한 어떠한 것도 지

시하지 않는다.57)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몰트만은 삼위일체의 구성과 삼위일체의

내적삶을구분하였다.‘아버지로부터’는 삼위일체적 내적 삶이아니라

오직삼위일체의 구성에서만 인지되어야 한다. 이는성부로부터의 출생

과 발현은 세 위격이 갖는 페리코레시스적삶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구

성적 구조에만 관련 있기 때문이다.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신적

실재만을부여받는다.

이런 점에서“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나온다”는 니케아 신조는 성자와

성령 간의 관계에 대한 어떠한 것도 내포하지 않는다. 이점이 바로 서

방교회가 필리오케를 삽입하게 되는 원인이며 결과적으로 교회분열을

야기시킨 문제의 모호성이라고 본다. 몰트만에게 있어, 단순히 본래의

신조로 돌아가는 것은문제에 대한 궁극적 해결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신조본문에 대한재해석과재형성이필요하며새로운 문구“성령은아

들의아버지로부터발현한다”를 제안한다.58)

“아들의 아버지로부터”는 아들의 나심(generation)과, 아들의 실재

(existence),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의 상호관계를 전제한다.59) 아들은

아버지로부터의 성령의 발현에 대한 논리적 전제와 그것에 대한 실제

만약 우리가 예수의 오심과 활동으로부터 성령의 경험을 주지하고 그것

으로부터 얻게된 삼위일체적 구조에 대한 묻는다면,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와서 성자를 규정하며, 아들 위에 머물며 아들을 통하여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아들과 성령의 역할이 바꿔진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오며 성령에 의하여 규정된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그

리고성령으로부터(a patre spirituque) 온다.53)

물론, 몰트만은 삼위 사이의 모호성을 막기 위해 그러한 공식을 인

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삼위일체적유비를 통해삼위일체의상호교환

적인질서(taxis)를 분명히 가리킨다.54)

몰트만은 아들의 부활 이후 성령이 파송되었다는 기독론적 틀에서

우리가 해방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성령은 태초부터, 성자의 성육

신에서, 그리고 현재까지 땅 위에 운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구속사에 나타난 성자와 성령의 상호협력을 적절하게 이해하려면, 이제

까지의 기독론적 관점에 입각한 성령에 대한일방통행적인개념화와그

것으로 인한니케아 신조에 첨가된 필리오케는배제될 필요가 있다.55)

이러한 관점에서 몰트만은 니케아 신조에 나타난 세 위격의 관계를

명확하게 밝히는데 노력하였다. 우선, 몰트만은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나온다(e x p o r e u e t a i)고 주장하는 동방신학자들의 의견에 동의한다.5 6 )

그것은 오직 아버지 한 분만이 근원(ex monou tou Patros)임을 밝히는

동시에 그에게서 나오는 성자(generated)와 발현(spiriated)하는 성령의

2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김옥주, 니케아 신조(A.D.381)에 나타난 위격들의관계에 대한몰트만의새로운 제안 23

53) Ibid., 71.

54) 하나님은 창조적인 말씀안에서 그의 생명의 숨을 통해 모든것을 창조하신다. 하나

님의 숨(Breath)이 있는 곳에 선포된 말씀(the Word)이 함께 있다. 하나님의 숨은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고, 말씀은 그들의 이름을 부른다. 모든 곳에서 삼위일체의 군

주론적 질서의“아버지-아들-성령”뿐만 아니라“성령-아들-아버지”의 질서도 발견

된다. 치유하고 생명을주는성령은그리스도 위에강림하며“쉰다”(ibid., 293).

55) Ibid., 294.

56) Moltmann, The Trinity and the Kingdom (1993), 183; “Theological Proposals to-

wards the Resolution of the Filioque Controversy,” Vischer, Lukas, ed. Spirit of

God, Spirit of Christ: Ecumenical Reflections on the Filioque Controversy, Faith

and Order Paper 103 (London: SPCK; Geneva: World Council of Churches,

1981),166-7.

57) Ibid., 183.

58) Ibid., 187.

59) Moltmann, “Theological proposals towards the resolutions of the filioque con-

troversy,” 168.

Page 13: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인 삶에서 필리오케나 또는 성자와 성령의 단일-원형(mon-arche)으

로서의 성부를 주장할 수 없다.65) 따라서, 몰트만은 신조의 본래적 통찰

을 회복하는 길은“성령이 아들의 아버지로부터 나오며, 아들로부터 형

식을받는다”라고해야된다고 결론짓는다.66)

I V. 평가및 결론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세우는데 있어 몰트만의 공헌은 삼위일체 교

리는 결코 구속사에 대한 후속적 사실(post factum)에 대한 사변이 아

니라 구속사 그 자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있다. 삼위일체의 경험으

로 체험되고 그 자체로 이해되어온 기독교 신앙은 군주론적 단일신론

과는다른종류의 종교, 다른종류의 예배, 다른종류의 송영(doxology)

을 의미한다.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추상적 개념이나철

학적으로 정의될 수 있는 본질과 동일시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보복하

는 심판자나 원동력자(Prime Mover)로 축소될 수도 없다. 몰트만은 자

신의 신학에서 성서에서 풍성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이미지들, 즉 상호-

인격적 관계들에대하여 뛰어난 통찰력을보여주었다.

나아가 사회적 삼위일체론에 대한 몰트만의 사고는 특히 성령론적

관점을 확대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발견한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

들이 공동으로 나눠 갖는 어떤 것도 아니며, 창조 세계를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도 아니다. 오히려, 성령은 아들보다 선재하고 그와 동행

하며 구속사의 완성을 가져오는 삼위일체 가운데의 한 위격이다. 이것

은 결과적으로 성자와 성령 사이의 관계에 대한 교리적 이해를 향상시

켰다. 몰트만의 삼위일체적 제안은“성령의 임재와 능력의 중요한 영역

적 조건으로 위치하지만, 성령의 근원은 아니다. 여전히 성령의 근원은

아버지 한 분 뿐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발현은, 아들의 출생과는 필연적

으로구별되어야하지만 이 두 발현(processions)은 관계적으로 연결되

어 있다.60)

계속해서 몰트만은 독생자 아들의 아버지로부터의 성령의 발현은

결국 성령이, 아들과 맺고 있는 아버지의 관계, 즉 아버지성( f a t h e r-

hood)으로부터 나오다는 것을 의미한다.61) 성자의 영원한 임재 안에서

아버지로부터 성령이 발현한다는 것은 성자와 성령 사이의 내적 관계

를 가리킨다. 두 발현은 공통적이며동시적이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통한 아들과 성령 사이의 관계가 여전히 간

접적이고 불만족스럽게 표현된다고 본다. 그러므로“성령은 그의 완벽

하고, 신적인 실재(hypostasis, hyparxis)를 아버지로부터 받고 그의 관

계적 양식(form, eidos, prosopon)은 아들로부터 받는다”고 주장한다.62)

존재(hypostasis)가 성령의 신적인 근원에서 그의 위격적 실재를 가리

킨다면, 양식(eidos)은 영원한 내적 삶의 페리코레시스적인 삼위일체적

과정에서의 성령의 관계적 모형,“최고의 미,”또는“영광 안에서의 교

제”를 표현한다.63)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존재를 부여받고 아버지와 아

들로부터각각양식과 관계를 부여받는다.

몰트만은 위격들의 온전성은 그들 각자가 서로에게 관계하고, 서로

안에서 내주하며, 서로를 실현시키는 페리코레시스적이며 영원히 동시

적인 상호적 관계 안에서 투영된다고 이해한다. 특히 삼위의 통일성은

그들의 페리코레시스적결합에 의해형성되며, 이것은 동시적인 위격들

사이의 위계적 위치를 제거한다. 페리코레시스적 삶 가운데 성부는“더

이상 첫 번째가 아니라, 위격들 중의 한 위격”이다.64) 삼위일체의 내적

2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김옥주, 니케아 신조(A.D.381)에 나타난 위격들의관계에대한몰트만의새로운 제안 25

60) Moltmann, The Trinity and the Kingdom (1993), 184.

61) Ibid.

62) Ibid., 186.

63) Ibid., 187.

64) Moltmann, The Spirit of Life (2001), 308.

65) Moltmann, “The Trinitarian Personhood of the Holy Spirit,” 313.

66) Moltmann, The Trinity and the Kingdom (1993), 185-7.

Page 14: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위일체의 신성(Godhead)을 존재론적으로 형성할72) 뿐만 아니라 세 위

격의 신적 통일성의 원리가 되는 데 있다. 아버지는‘비근원의 근원’으

로서‘출생한아들’과‘발현한성령’을 발생한다.‘출생’과‘발현’을 통

해 아버지의신성은 아들과 성령과 함께공유되고, 세 위격은 자신들만

의 독특한 위격적 독특성을 형성한다.73)

갑바도기안 교부 중에서 특히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어거스틴과

유사하게,74)“아버지”와“아들”이라는 명칭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성을

특징적으로 묘사하다고 주장한다.75) 아버지란 이름은 성부가 성자를 대

면하고, 성자가 성부를 대면하는데 있어서의‘관계’에 대한 명칭이다.

아들의 실재 없는 아버지는 아버지가 될 수 없다. 아버지가 그가 아닌

어떤것이되지 않는한, 아버지는항상 아들과 함께 있었고, 그렇기 때

문에아들은 영원하다.

동방신학에서 아버지의 군주성과 더불어 중시되는 것은 하나님에

(sphere) 안에 존재하는 성자”와“성자의 구속사의 중요한 영역 안에

존재하는 성령”이라는 신약성서 자료와 부합한다.67) 따라서 몰트만은

필리오케의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다.

반면에 몰트만의 제안은 논란의 소지를 담고 있다. 그는 성령이 성

자의 아버지로부터나오며, 아들로부터 자신의 양식을 받는다고 제안한

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 각각이 성령과 갖는 관계에 있어서, 성령의

존재가 오직 아버지로부터 나오지만 성령의 위격적 특성은 관계적으로

아들로부터 온다고 강조함으로써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구별을 명확하

게 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삼위일체의 구성과 삼위일체의

내적 삶 사이의 구별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아버지는‘신성의 근원’

이란 의미라는 점에서, 삼위일체는 아버지에 의해 형성된다. 아버지의

군주성이나 근원의 관계는 페리코레시스적 일체에서는 어떠한 의미도

갖지 않는다.68) 몰트만에게 있어 기원과 완성은 뚜렷이 구별되어야만

한다. 구성적인 근원의 관계들 속에는 아버지로부터 아들의 영원한‘출

생’과 아버지로부터 성령의 영원한‘발현’이 있는반면, 영화(glorifica-

tion)에 있어서 이러한‘나옴’은 어떠한 의미도갖지않는다.69)

몰트만의 이와 같은 주장이 동방과 라틴신학 양 진에 수용되기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70) 우선, 그는 동방신학에서의 성부의 군주성에

대한 중대성을 너무간과한 경향이 있다. 동방교회에 있어성부의군주

성은 삼위일체론 전체를 지탱하는 중심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갑

바도기아 교부71)를 중심으로 한 동방신학의 핵심은 성부의 위격이 삼

2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김옥주, 니케아 신조(A.D.381)에 나타난 위격들의관계에 대한몰트만의새로운 제안 27

67) Gary D. Badcock, Light of Truth & Fire of Love: A Theology of the Holy Spirit

(Grand Rapids, Michigan: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7), 202.

68) Moltmann, The Trinity and the Kingdom (1993), 175.

69) Moltmann, The Spirit of Life (2001), 308.

70) Theodore Stylianopoulos, “The Filioque: Dogma, Theologoumenon or Error?”

Greek Orthodox Theological Review, vol.31 (1986), 275-6; Badcock, Light of

Truth & Fire of Love (1997), 242.

71) 갑바도기아교부라하면가이샤라의바질, 나지안주스의그레고리및 닛사의그레고

리를지칭한다.

72) Najeeb G. Awad, “Between subordination and Koinonia: Toward a New Reading

of the Cappaodcian Theology,” Modern Theology, 23 (2007): 183.

73)‘비근원적 존재’‘출생’그리고‘발현(spirated)’의 술어들(predicates)은 위격들 사이

의 구별을 나타내는 외적 표현들이다[Saint Gregory of Nazianzen, Select Orations,

translated by Charles G. Browne and James E. Swallow, in A Select Library of the

Christian Church: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vol. 7, second series, ed.

Philip Schaff and Henry Wace (Peabody, MA: Hendricksen Publishers, Inc.,

1995), Theological Orations, 29.12].

74) 어거스틴 또한 한 본체(substance), 한 분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세 위격으로 구별되

는가에 대한 질문의 대답으로‘관계’라는 개념을 끌어들인다. 그에 따르면,“아버지

가 아버지로 불리는 것은 아들이 있기 때문이고, 아들이 그렇게불리는 것은 그에게

아버지가 있기 때문이다.”이러한 명칭들은 본체나 그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

라, 오직 상대방을 지시하는 관계적 의미를 나타낸다. 성령은 아버지-아들과의 관계

와는조금다르게 설명되지만, 사랑으로서의성령은‘주는자’(아버지와아들)와‘선

물’이라는 관계적 명칭이라고 여긴다[.Augustine, De Trinitate, translated with

introduction and notes by Edmund Hill (New York: New City Press, 1991), 5.4].

75) Saint Gregory of Nazianzen, Theological Orations (1995), 29.16.

Page 15: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라서 그들이 독특한 실재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몰트만은

실재(존재)와 형식을 분리시켰다.79) 본 저자의 입장에서 몰트만의 주장

은 설득력이 약하다. 과연 몰트만에게 있어 아버지로부터의 나옴은 아

무것도 아닌 단지 각각의 신적인 존재들(beings)이 완전한 위격(per-

sons)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단계, 즉 관계적 페리코레시스가 필요하다

는 것만을 의미하는가? 어떻게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완벽한 실재를 받

으면서 여전히 아들과의 관계로 인해위격적인 형식과 관계를 얻을필

요가 있는가? 오히려 본 저자는 신적인 관계적 형식은 신적인 실재 없

이 인식될 수도, 그것과 분리될 수도없다고 주장하는 동방신학의 견해

에 동의한다.

아버지로부터 성령의 발현은 어떠한 위격적 관계성을 의미하지 않

는다는 몰트만의주장과는 반대로, 본 저자는 오히려 성령의 발현은 아

버지뿐만아니라 동시적으로 성자와의관계를 전제한다고 본다. 왜냐하

면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와 어거스틴이 언급했듯이 아버지라는 명칭

그 자체는 관계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로부터의 성령의 발현은

그 자체로 완벽하고 인격적임을 뒷받침한다. 이런 점에서 두 위격들의

근원으로서의 아버지의 개념에 대한 유효성은 여전히 삼위의 내적인

삶 안에서도인정된다.

단일신론에 반하는 합당한 삼위일체론적 신학을 세우기 위한 몰트

만의 강한 열정은 많은 학자들의 동감을 일으키는데 충분하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데 있어서 그는 페리코레시스적-사회적 삼위일체를 지

지하기 위해 신적인 질서(divine taxis)는 배제시키려는 노력을 시도하

였다. 그러나 역으로 보면 몰트만은, 본 저자가 이해하는 점에서, 내재

적 삼위일체 안에서 세 위격 모두에게 구성적 역할( c o n s t i t u t i o n a l

role), 또는 원인적 능력(casual capacity)을 부여함으로써 오히려 삼위

대한 이해에 대한 부정의 접근방법(apophatic approach)이다. 삼위일

체 하나님은 두 가지 존재방식, 즉 인식될 수 없는 본질(unknowable

essence)과 인식할 수 있는 에너지(knowable energies)를 지닌다. 간략

하게 말해서, 인간에게 있어 하나님의 본질은 절대 인식될 수 없고, 오

직 세 위격의 공통된 내용인 하나님의 에너지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만

이 인식될 수 있다. 현대 동방신학자의 한 사람인 블라디미르 로스키

(V. Lossky)는 이런 점에서 위격들(hypostatic persons)의 실재는 동방

신학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신비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로스키는 삼

위일체 안에서의세 위격은 어떠한“구성요소”(composition)에 의해결

정되거나 또는 정의되어질 수 없음을 단호하게 주장한다.76) 왜냐하면

위격들의 다양성은 인식되어질 수 없는 본질 안에 둘러싸인 절대적이

며 원초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각 위격 자체가 다른 두 위격들과는

구별되는 관계를 결정한다. 따라서 몰트만 신학에서 절대시하는 관계들

은 동방신학의 견해에서는 단지 세 위격들의 절대적 다양성을 표현하

는데“봉사”( s e r v e )할 뿐이다.7 7 ) 관계들은 위격들의 차이를 설명( e x-

plain)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show) 부정적 의미만을 가진다. 이를

테면“그것[관계]은 결국 아버지는 아들도 성령도 아니며, 아들은 아버

지도 성령도 아니며, 성령은 아버지도 아들도 아님을 보여주는 부정

(negation)이다.”78)

동방신학에서 위격들의 다양성은 그 자체로 절대적이며 원초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관계(relations)에 의존하지 않는다. 성자와 성령의 근

원으로서의 성부, 즉 아버지의 군주성은 아버지가 관계의 원리이며 따

2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김옥주, 니케아 신조(A.D.381)에 나타난 위격들의관계에 대한몰트만의새로운제안 29

76) Vladimir Lossky, In the Image and Likeness of God (New York: St. Vladimir’s

Seminary Press, 1974), 89.

77) Ibid., 79.

78) Vladimir Lossky, The Mystical Theology of the Eastern Church, trans. members of

the Fellowship of St. Alban and St. Sergius (Cambridge: James Clarke & Co.,

1957), 54.

79) Dimitru Staniloae, “The basis of our deification and adoption,” in Vischer, Spirit of

God, Spirit of Christ (1981), 174-186

Page 16: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참고문헌

그렌츠, 스탠리. 올슨, 로져. 신재구 옮김. 『20세기신학』. 서울: IVP, 1997.

Augustine. De Trinitate. Translated with introduction and notes by Edmund

Hill. New York: New City Press, 1991.

Awad, Najeeb G. “Between subordination and Koinonia: Toward a New

Reading of the Cappaodcian Theology.” Modern Theology 23:2

April (2007): 181-204.

Bauckham, Richard. The Theology of Jürgen Moltmann. Edinburgh: T,&T,

Clark, 1995.

Badcock, Gary D. Light of Truth & Fire of Love: A Theology of the Holy

Spirit. Grand Rapids, Michigan: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7.

Gregory of Nazianzen, Select Orations. Translated by Charles G. Browne and

James E. Swallow, in A Select Library of the Christian Church:

Nicene and Peabody, MA: Hendricksen Publishers, Inc., 1995.

Grentz, Stanley J. Rediscovering the Triune God: The Trinity in Contem-

porary Theology.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4.

Kelly, J.N.D. Early Christian Doctrines. New York: Harper&Row,

Publishers, 1978.

LaCugna, Catherine M. God for Us: The Trinity and Christian Life. N e w

York: Harper-Collins, 1991.

Lossky, Vladimir. The Mystical Theology of the Eastern Church. Trans. by

members of the Fellowship of St. Alban and St. Sergius. Cambridge:

James Clarke & Co., 1957.

. In the Image and Likeness of God. New York: St. Vladimir’s

Seminary Press, 1974.

Moltmann, Jürgen. The Trinity and the Kingdom. Trans. by Margaret Kohl.

Augsburg: Fortress Publishers, 1993.

일체의 내적삶에서 모든질서(taxis)를 허락하였다.

물론 하나님의 피조물이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이 지구상에서 사회

적,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생태학적평등과 정의를 지향하는21세기현

대 신학에서는 동등하고 동시적인 세 위격의 공동체적 하나님 개념의

역할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신학적 분위

기 안에서 성부의 군주성과 근원의 관계는 몰트만과 같이 사회적 삼위

일체론을 지향하는 학자들에게 있어서는 가부장적이며 위계적 질서를

정당화시킨 원형으로 인식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견해에 본인은

반박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부로부터의 출생과 발현, 근원의 관계를 무

효화하는 것만이 신학적으로 사회적으로 직면해 있는 불평등 부조리를

없에는 유일한 길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본인은 아버지성(father-

hood)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개선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성부가 성

자를 낳았다는 사실이 진정 위계적 관계만을 의미하는가? 인간은 자신

들이 경험을 통해얻어진 유비(analogy)를 통해하나님을 투사해 왔다.

그리고 하나님의 개념, 특별히‘성부’의 개념은 많이 왜곡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현대신학은 삼위의 동등성을 획득하기 위해 아

버지의 군주성이나 근원의 관계를 무효 또는 축소화하기보다는성부의

진정한 아버지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회복하고 개선시킬 필요가 절

실하다고본다.

주제어

사회적 삼위일체, 단일신론, 필리오케, 근원의 관계, 페리코레시스

Social Trinity, Monotheism, Filioque, Relations of the Origin, Peri-

choresis

접 수 일 2012년 6월 30일

심사(수정)일 2012년 7월 31일

게 재 확정일 2012년 9월 1일

3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김옥주, 니케아 신조(A.D.381)에 나타난 위격들의관계에 대한몰트만의새로운제안 31

Page 17: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국문초록

니케아신조(A.D. 381)에 나타난위격들의관계에

대한몰트만의새로운제안

21세기 에큐메니컬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개혁주의 학

자 중의 한 사람인 위르게 몰트만은 동방정통 교회와 로마 카톨릭 교

회의 학문적 교류에 힘쓸 뿐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통하

여 신학적 화해를 모색하는데 노력하고 있다. 몰트만은 특히교회 안에

존재하여 온 단일신론적 하나님 개념에 대조되는 기독교의 구속사적

신앙에 그 토대를 둔 삼위일체적 하나님 개념을 확립했다. 또한성부와

성자와 동일한 성령의 동등성과 위격성을 부각시킴으로 서방신학의 성

령론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세 위격간의 동등한 관계성과 공동체

로서의 하나님 개념에 대해강조는 다양한 인종과 사회적, 경제적, 정치

적 계층의 사람들이살아가는 현재 삶의 자리에서 실제적 정의와 평등

을 세우는데공헌할 수 있는패러다임을제공하였다.

반면에 몰트만의 사회적 삼위일체는 몇 가지 문제점을 내포한다. 어

떠한 위계적 질서(taxis)가 없는 평등한 위격들의 공동체적(또는 페리

코레시스적)“삼위일체 하나님”을 전개하기 위해 몰트만은 삼위일체의

구성(constitution of the Trinity)과 삼위일체의 내적삶(inner life) 사이

를 구별하였다. 이러한 구별은 성령의 발현(procession)에 관한 그의

해석에서더욱명백히 들어난다. 몰트만은 성령이 성자의 아버지로부터

나오며, 아들로부터 자신의 양식을 받는다고 제안한다. 그것은 아버지

. “The Trinitarian Personhood of the Holy Spirit,” in The Advents of

the Spirit. ed. Bradford E Hinze and D. Lyle Dabney. Milwaukee:

Marquette University Press, 2001.

. The Crucified God. Trans. by R. A. Wilson and John Bowe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4.

. The Church in the Power of the Spirit. Trans. by Margaret Kohl.

London: SCM Press,1977.

. Experience in Theology: Ways and Forms of Christian Theology.

Trans. by Margaret Kohl.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0.

. The Spirit of Life: A Universal Affirmation. Trans. by Margaret Kohl.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1.

. History and the Triune God. Trans. by John Bowden. New York:

Crossroad, 1991.

Olson, R. “Trinity and Eschatology: The Historical Being of God in Jürgen

Moltmann and Wolfhart Pannenberg.”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36 (1983): 213-27.

Peters, Ted. God as Trinit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3.

Prestige, G. L. God in Patristic Thought. London: SPCK, 1952.

Rahner, Karl. Theological Investigations 1: God, Christ, Mary and Grace.

Baltimore: Longman & Todd Ltd., 1958.

Stylianopoulos, Theodore. “The Filioque: Dogma, Theologoumenon or

Error?” Greek Orthodox Theological Review. vol.31 (1986): 255-

288.

Vischer, Lukas, ed. Spirit of God, Spirit of Christ: Ecumenical Reflections

on the Filioque Controversy. Faith and Order Paper 103. London:

SPCK; Geneva: World Council of Churches. 1981.

3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김옥주, 니케아 신조(A.D.381)에 나타난 위격들의관계에 대한몰트만의새로운 제안 33

Page 18: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Moltmann’s New Proposal on the Relationshipof the Persons in the Nicene Creed(A.D.381)

Kim, Ok-Joo

Lecturer, Department of Theology

Hansei University

Gunpo, Korea

Theologians who are more concerned with ecclesial unity are

opened to ecumenical dialogue. Their attempts are to both ease

theological tensions between the east and the west and construct

alternatives to the western position of the filioque for theological

reconciliation. One example of this approach is to be found in the

work of Moltmann who seeks to balance and harmonize the two

Churches’ concerns by finding common ground. Moltmann works to

revitalize the tenuous doctrine of the Holy Spirit and, thus, regain full

personhood and genuine equality for the Spirit through developing a

social/perichoretic Trinity in the western church.

However, Moltmann’s proposal is also problematic. While

discussing on the Nicene Creed(381), especially the part of the Holy

Spirit, he proposes that the Holy Spirit proceeds from the Father of

the Son, and receives its form from the Son. It attempts to make a

clear distinction between the Father and the Son in their relations

with the Spirit in a way in which the existence of the Spirit comes

from the Father alone, but the Holy Spirit’s personal character/form is

relationally from the Son. This is based on Moltmann’s distinction

between the constitution and the inner life of the Trinity.

와 아들 각각이 성령과 갖는 관계에 있어서, 성령의 존재가 오직 아버

지로부터 나오지만 성령의 위격적 특성은 관계적으로 아들로부터 온다

고 강조함으로써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구별을 명확하게 하려고 시도

하였다. 성부는 신성의 기원’이란 의미라는 점에서, 삼위일체는 아버지

에 의해형성된다. 아버지의군주성이나 근원의 관계는 페리코레시스적

일체에서는 어떠한 의미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동방교

회 삼위일체론의 중심축으로 간주되는 성부의 군주성(monarchy)을 단

순히 삼위일체의 구성에만 한정시켰다. 또한 전자와 연관되어, 위격의

실재와 형식을 분리시킴으로위격들의 절대적 특성을 나타내는 근원의

관계(relations of origin)에 대한이해를무효화시키거나축소시켰다.

3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김옥주, 니케아 신조(A.D.381)에 나타난 위격들의관계에 대한몰트만의새로운 제안 35

Page 19: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성령세례의신학적의의에대한고찰

마틴냅(M. Knapp)과 윌리엄갓비(W. Godbey)를 중심으로

최인식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I. 들어가는말: 연구의방향과방법

오늘날 한국교회의 목회 현장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용어들 가운

데 신학적으로 해명이 되지 않고 사용되는 것들이 적지 않다. 그 중에

한 가지가“성령세례”이다. 이 성령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서

세례 요한이 언급한 말, 즉“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중략] 그[예수]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

풀 것”(마 3:11; 비교 막 1:8; 눅 3:16; 요 1:33)이라는 것과, 예수께서직

접 언급한 말, 즉“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라는 사도행전의 증언에 기초

한다. 그러나 성령세례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성서 자체에

서는발견되지 않기에, 이 용어의 개념은 목회 현장에서의 경험적 요소

들과결합됨으로써매우다양하게이해되고있다.

본 연구는 성령세례에 관한 기존의 입장들을 유형별로 나누어 고찰

한 후, 성령세례를 말한다는 그 자체가 지니는 신학적 의의를 거시적

As one notices, Moltmann repeatedly stresses that the divine unity

is constituted by perichoresis, while the processions from the Father

are only bound to the constitution of the Trinity. It consequently leads

to the view that neither “the relations of origin” (in the Cappadocians)

nor “relations of distinction” (in Augustine) have validity in the

eternal life since each person is defined by their own reciprocal

relations with the other two. It sounds unconvincing in my view since

the inner life of the Trinity would be inconceivable without the

constitution of the Trinity. I wonder whether or not Moltmann means

that the two processions from the Father point to nothing but the three

individual divine beings that need a next stage, namely, the relational

p e r i c h o r e s i s to become fully “persons.” As the eastern theologian,

Staniloae accuses Moltmann of separating “being” from “form,” it

seems to me that the distinction between the constitution of the

Trinity and the inner life of the Trinity may not be necessary for

building a Trinitarian theology

3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37-73

Page 20: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계되어 있는 성결교나 감리교뿐만 아니라 여타의 교단 역시 거의 동일

하게직면하고있는 심각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들은 교회사 안

에서사라지지 않고 늘 되풀이되고 있는문제이기 때문에, 교회갱신과

관련한 우리의 성령세례 연구는 조직신학적 방법뿐만 아니라 교회사적

접근과 성서신학적 해석을 통해서 성령세례의 신학적 의의를 교회론적

관점, 구원론적 관점, 및 교회갱신을 위한 윤리적 관점으로 밝힐 것이

다. 본 연구는 이와 같이 성령세례의 보다 확대된 신학적 의의에 대한

인식으로 인해 궁극적으로는 교회 갱신 혹은 교회개혁의 동력으로서

성령세례의중요성을드러내고자한다.

I I. 성령세례론의두 흐름

최근까지 성령세례에 대한 논의는 크게 웨슬리주의적 관점, 오순절

주의적 관점, 은사주의적 관점, 가톨릭주의적 관점, 개혁주의적 관점 등

다섯가지 방향에서전개되고 있다.2) 이들 가운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1) 성령세례는 교회의 성례전을 통해 받게

되는가?3) 2) 성령세례는 기독교인이 되는 것과 구분되는 별개의 경험

인가?4) 4) 성령세례의 첫 증거는 방언인가? 5) 성령세례에대한 바울의

신학과 누가의 신학은 동일한가?5) 6)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동일한

관점에서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추고자한다. 즉, 지금까지학계에서는성

령세례라는 신학적 전문용어(technical term) 자체의 개념을 신앙생활

의 개인적 영역에 국한하여 그 의미를 밝히는 데 집중해 왔다면, 본 연

구는 그 위에 성령세례가 지니는 교회론적, 구원론적, 윤리적(혹은 교

회 갱신적) 차원을 부각함으로써 성령세례의 신학적 의의를 심화코자

하는것이다.

성령세례는 신학적/이론적이면서도 동시에 역사적/경험적 차원을 고

려해야 하기때문에, 이를 위해서 본 연구는 성령세례론이다양한 모습

으로 나타났던 못자리인19세기 미국의 교회사적 상황, 특히 성령세례

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지닌 성결운동이 미감리교회와 실제적으로 충

돌하게 되었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역사적 고찰과 더불어 신학적 이

해를 추구할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19세기후반미국감리교에서 나와

성결교회의 창립자가 된 마틴 냅(Martin Wells Knapp)1)과 윌리엄 갓

비(William Godbey)의 성령세례관을고찰하고자한다. 그 주된이유는

18세기 존 웨슬리를 통해 시작된 성결운동이 미감리교를 통해서 전해

지다가 선교1세기가 지나면서 교권주의와 세속주의로 말미암아 그 역

동성을 잃게 되었을 때 마틴 냅을 중심으로 하는 성결그룹에 의해서

교회갱신차원에서성결운동이새롭게 시작되어오늘에 이르게되었고,

더욱이 그 운동의 핵심에는“성결은 곧 성령세례”라는 신학적 주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결을 성령세례로 이해하는 성결운동은 성령세례를

단순히 개인적 차원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교회 공동

체의본질적 회복이라는보다넓은차원에서이해했던것이다.

교권주의(ecclesiasticism)와 세속주의는 오늘날 본 연구와 직접 관

3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최인식, 성령세례의신학적 의의에대한 고찰 39

1) Aaron M. Hills, A Hero of Faith and Prayer: or, Life of Rev. Martin Wells Knapp

(Cincinnati, Ohio: Mrs. M. W. Knapp, 1902; Wesleyan Heritage Publications,

1998). 박명수,“마틴 냅(Martin W. Knapp)”(1), 「활천」518호(1997. 1), 59. “만국성

결교회는 마틴 웰스 냅과 셋 쿡 리스(Seth C. Rees)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초

기의성립단계에서 냅이좀 더 주도적인일을감당했다.”

2) 월터 카이저 외 4인,『성령세례란 무엇인가: 성령 세례에 대한 다섯 가지 관점』, Chad

Owen Brand 편, 이선숙역(서울: 부흥과개혁사, 2010).

3) 참고: L. S. Thornton, Confirmation: Its Place in the Baptismal Mystery ( L o n d o n :

A.&C. Black, 1954).

4) 참고: James D. G. Dunn, Baptism in the Holy Spirit: A Re-examination of the New

Testament Teaching on the Gift of the Spirit in Relation to Pentecostalism Today

(London: SCM Press, 1970).

5) Roger Stronstad, The Charismatic Theology of St. Luke (Peabody, MA: Hendrick-

son, 1984); William W. and Robert P. Menzies, Spirit and Power: Foundations of

Page 21: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가 있었던 점은 성령세례에 대한 견해였다. 웨슬리는 플레처가 강조하

는 성령세례를 자신의 완전성화론에 적극반영할수 없었던 반면, 플레

처에게 성령세례는성화론에 필수불가결한교리였다.

S그룹의 주요 특징들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

째, 성령세례는 중생 이후에 오는 두 번째 은총으로서 중생 시 임하는

성령의 역사와는 다르다. 대상은 오직 중생한 자이다. 둘째, 성령세례의

목적은 이미 구원 받은 자에게 더해지는‘성화’8) 또는‘능력’9)에 있기

때문에, 구원과 직접 연관이 없다. 셋째, 성령세례는 성령을 처음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필요한 경우 성령세례는 반복적으

로 일어날 수 있다.10) 이는 성령세례로 인하여 나타나게 되는 그리스도

와의 연합, 정결, 봉사의 능력, 그리스도의 전인적 통치, 성령의 나타남

등과같은 결과들이 단 한 번에 완성될 수 있는 변화의 경험들이 아니

기 때문에 성령세례의 반복성을 말할 수 있게 된다.11) 넷째, 성령세례는

중생 시의 성령의 역사와는 그 성격이 질적으로 다르지만, 시간적으로

는 중생시에 일어날 가능성도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를 중생과 동일

가?6) 이와 같은 주제들에 대한 대답은 교단마다 자신들의 전통과 교회

의 경험에 따라다양할 수밖에 없는것으로 보인다.

본 항에서는 보다 신학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성령세례론의 의

의를 밝히기 위하여 다양한 성령세례론을 특성별로 유형화하여 그 신

학적 의의를 핵심적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이와 관련하여 배본철은 한

국 신학계에서 성령세례론이 활발히 전개되었던1970년대와 80년대를

기점으로 오늘날까지 성령세례론을 크게 여섯 가지유형으로 정리함으

로써 복잡한 성령세례론을 이해하는 데 기여한 바 있다.7) 우리는 기존

의 이론들을 좀 더 큰 틀에서 경험 중심적 복음주의 전통의 성령세례

론[S형]과 교리 중심적 개혁주의 전통의 성령세례론[D형]으로 구분하

여 살펴볼 것이다.

1. 경험중심적복음주의성령세례론

경험 중심적 복음주의 전통의 성령세례론[S그룹]에서는 오순절 성

령 강림의 사건은 구속론의 차원에서 유일회적으로 끝난 사건이 아니

라 지금 여기에서도 일어나야 하고 또한 반복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경험적 사건임이 강조된다. 이에대한 선두주자는 종교개혁 이후성령

세례를 신학의 중심축으로 삼았던 최초의 인물인18세기 영국의 존 플

레처(John Fletcher)이다. 그는존 웨슬리가 후임자로 지목할 정도로 웨

슬리의 신학사상에 철저히 서 있었던 자였지만 양자 간에 중요한 거리

4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최인식, 성령세례의신학적 의의에 대한고찰 41

Pentecostal Experience (Grand Rapids: Zondervan, 2000).

6 ) John R. W. Stott, The Baptism and Fullness of the Holy Spirit (Leicester: Inter -

\Versity Press, 1964).

7) 배본철,“성령론 딜렘마: 한국교회 성령세례론 유형 분석”,『존 웨슬리의 신학과 개혁

신학』한국개혁신학회 편(서울: 한국개혁신학, 2006), 103-121. 그 유형은 다음과 같

다: (1) 봉사의 능력을 위한 성령세례, (2) 정결과 능력의 성령세례, (3) 그리스도의 전

인적 통치로서의 성령세례, (4) 중생=성령세례, 이후 성령충만, (5) 방언의 표적을 중

시하는 성령세례, (6) 중생=성령세례, 이후 은사적성령충만.

8) 성령세례를 성화와 능력 양자 모두로 이해하는 그룹은 미국의 근대 웨슬리안 성결

운동에 참여했던 자들이 주를 이룬다. 그 중에서도 우선은 성화라는 특징을 지닌다:

Phoebe Palmer, Martin W. Knapp, William Godbey, Thomas Cook, A. M. Hills,

George D. Watson 등.

9) 성령세례를 능력의 은사로 이해하는 그룹은 주로 전통 오순절주의( C l a s s i c a l

Pentecostalism)와 은사갱신운동(Charismatic Renewal)에 속한 자들이 대부분이다:

Charles F. Parham, W. J. Seymour, John L. Sherill, Dennis J. Bennett, Francis

MacNutt 등.

10) John Fletcher, Fletcher on Perfection (Louisville: Pentecostal Pub., n. d.), 19. “If

one powerful baptism of the Spirit seals you unto the day of redemption, and

cleanses you from all moral filthiness, so much better. If two or more are neces-

sary, the Lord can repeat them”(필자의 강조).

11) John R. Rice, The Power of Pentecost (Murfreesboro: Sword and the Lord Pub.,

1949), 155f. 이와유사한 입장을취하고 있는자들: 한영태,『삼위일체와성결』(서울:

성광문화사, 1992), 275, 박명수,「활천」473(1993. 3), 99; (배본철,“성령의 딜레마

…”, 112쪽 참조).

Page 22: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는, 성령세례는 성령의 최초 선물을 위해 적합한 용어(행 1:5; 11:16-

17)이며, 성령충만은 성령세례 받은 사람에게 한 번 만이 아니고(행 4:

8) 계속적으로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14) 그러므로성령세례는성도가

첫 번째경험하는 성령충만이라고말할 수 있다. 바울이 열거한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이나 열매들은 성령세례 시에만 배타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충만한 삶 가운데 나타나는것이다.15)

동일한 개혁주의 전통에서도 중생과 성령세례를 같은 사건으로 보

지 않고서로 구분하는D-2그룹이 있다. 이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마틴

로이드-존스이다. 그는 개혁주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성령세례를 중

생으로 희석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성령세례를 고린도전서12장 13절에

근거하여 성령에 의하여 베풀어지는“성령의 기본 세례”와 요한복음1

장 33절을 근거하여 예수에 의하여 베풀어지는 것으로서 신자들이 성

령 충만한 가운데 사는 자들을 통해 특별한 사명을 감당토록 하기 위

해 능력을 부어주는“성령의 능력 세례”로 나눈 후, 중생은 성령의 기

본 세례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중생 시에 성령은 신자들에게 들어가

그 안에내주한다. 이를 로이드-존스는 성령의 기본 세례라 하지만, 오

순절 초대교회가 경험한 세례, 그의 정의로는 능력세례와는 무관하기

때문에 능력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16) 그러나 중요한 것은 중생과 성령

시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다섯째, 중생시 영적으로하나님의자녀로 태

어나는 때와는 달리 성령세례는 가시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경험적 사건

이다. 여섯째, 성령충만은성령세례를경험한 이후에 따라온다.

2. 교리중심적개혁주의성령세례론

교리 중심적 개혁주의 전통의 성령세례론[D그룹]은 유럽의 개혁주

의 전통을 그 신학적 배경으로하여형성되었다. 지난세기에 이르기까

지 기독론 중심의 신학체계로 일관된 유럽신학의 상황에서 성령론 자

체가 신학적으로 주목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기에,12) 성령세례는 더욱

논의의 의제(agenda)로 취급될 수 없었다. 그리고 교리적인 차원에서

중생은 성령에 의한 사건이기 때문에 이와 별도의 또 다른 성령세례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로 여겨왔다. 개혁주의 전통

에 따른 성령세례론에는크게 두 흐름이 있다. 하나는 중생과 성령세례

를 하나로 보는 것이고[D-1그룹], 다른 하나는 구분해서 보는 흐름이

다[D-2그룹].

중생과 성령세례를 동일한 사건으로 보는 D-1그룹에서는 성령은

중생 시에 믿는자에게 내주하는 바, 이를 성령세례라 할 수 있으며, 이

는 단회적이다. 그러므로“성도가 중생 이후에 체험하는 성령의 특별한

체험을 성령세례라는 말로설명하는 것은 잘못”이다.13) 오히려 중생 이

후의 성령체험은“성령충만”이라 해야 한다. 여기에서 양자 간의 차이

4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최인식, 성령세례의신학적 의의에대한고찰 43

12) 예외가 있다면 폴 틸리히의 신학을 예로 들 수 있겠는데, 그도 자신의 조직신학의

성령론을 미국적 상황에서 완성하였다.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Chicago:

CUP, 19); 『조직신학 I-V』, 유장환역(서울: 한들출판사).

13) 박형룡,“성령세례와 성도의 구원”,『신학정론』12(1994. 5): 24-55, 39. “개인 성도가

교회의 일원이 되는순간은 언제인가. 그 순간은 개인성도가 칭의를 받는순간이요,

중생하는 순간이요, 구원을 받는 순간이요, 성령세례를 받는 순간이다. 여기서 우리

는 중생과 성령세례가 개인 성도의 구원 경험 중 같은 경험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생과 성령세례는같은경험을다른관점에서설명하고있는것이다.”

14) 박형룡, 앞의글, 41; E. F. Harrison, Acts: The Expanding Church (Chicago: Moody

Press, 1975), 51-52.

15) 이와 같은 D-1그룹에 속한 자들: Charles Hodge, B. B. Warfield, Abraham Kuiper,

Richard B. Gaffin, John R. Stott, Bill Bright, Billy Graham 등.

16) Martin Lloyd-Jones, 『성령세례』, 정원태 역(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131. “성

령세례는 우선적이고 필수적으로 능력세례입니다.”배본철에 따르면(앞의 글, 104),

성령세례를 통한 봉사의 능력을 말하는 다음과 같은 자들은 기본적으로 개혁주의

입장에 서 있는 자들이다: Asa Mahan, The Baptism of the Holy Ghost (New York:

Palmer & Hughes, 1870), 52ff. D. L. Moody, Secret Power (New York: Fleming

H. Revell, 1881), 49, 51. R. A. Torrey, The Baptism with the Holy Spirit ( N e w

York: Fleming H. Revell, 1897), 18. D. M. Lloyd-Jones, 『성령론』, 홍정식 역편(서

울: 새순출판사, 1986), 104

Page 23: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이해와 바울에 의한 성령이해가 상충하듯 보이는 것과같은이치이다.

다시 말해서, 양대 전통에서 말하는 성령세례론은 누가의 선교론적 전

개와 바울의 교회론적 접근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두 세례론은 상보적

인 이해에 도달할 필요가 있다.

지금부터는 성령세례론에 대한 기존의 경험적인 이해를24) 보다 심화

하기 위하여 경험 중심적 복음주의 전통에 서 있는19세기 말엽 성결

운동 그룹의 대표적인 사람 마틴 냅과 윌리엄 갓비의 성령세례론을 세

부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성령세례론의 교회론

적, 구원론적, 윤리적 의의를 드러내고자한다.

I I I. 19세기말 미감리교회와성결운동의성령세례론

우리는 지금부터 성령세례가 지니는 교회론적, 구원론적, 및 윤리적/

교회갱신적 의의를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19세기 성결운동의 리

더들 중의 한 명인 마틴 냅과 관련된 교회사적 상황을 대표적으로 소

개코자 한다. 이로써 성결운동이 주창한 성령세례론이 어떠한 역사적

배경에서 태어나게 되었는지 알게될 것이며, 또한 이를통해 성서학자

갓비의 성령세례론도같은시대적 맥락에서이해할 수 있을것이다.

1. 마틴냅과미감리교회

냅은25) 1853년 3월 27일 미시간의 칼훈 카운티(Calhoun Country)에

서 태어나, 24세에 미국 미시간 감리교 연회 소속 목사가 되어 8년간

일하다가, 1886년 33세에는 전임 부흥사로 활동하였다. 동시에 그는출

의 내주를동일하게본다는 점이다.17)

개혁주의 입장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사람들 가운데 또 다른 사

람은 칼 바르트이다. 그는 세례론을 다룰 때 크게성령세례론과 물세례

론으로 나누어 순서대로 설명한다.18) 그에게 세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초다. 여기에서 특히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에게로 나가게

하는 힘이다.19)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은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의한 직접적인부름으로가능한데, 이는성령세례로 시작된

다.20) 바르트에게 성령세례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증언이자 자기

계시이며, 능력과 실재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은총이다.21) 성령세례는 절

반의 은총이 아니라 온전하게 충분한 은총이며, 이는 하나의 자극

( A n r e g u n g )으로 머물지 않고 생명활동( B e l e b u n g )을 일으킨다. 또한

이는“밖으로부터주어지는 조명(Beleuchtung von außen)”만이아니라

“안으로부터 불 일듯 살아나는 깨달음(Erleuchtung)”이다.22) 그러나 성

령세례는 물세례를 받을때 경험되는 것이아니다. 양자는 서로 배제하

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를 강화한다.23)

우리는 이상에서 경험 중심적 복음주의 전통의 성령세례론과 교리

중심적 개혁주의 전통의 성령세례론의 특징을 살펴 보았다. 양대 그룹

의 이해가 서로 상충하듯 보이는 것은 누가에 의한 사도행전의 성령

4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최인식, 성령세례의신학적 의의에대한고찰 45

17) Lloyd-Jones, 『성령세례』, 32,

18) Karl Barth, Kirchliche Dogmatik. Bd. I V/4, Fragment: Die Taufe als Begrundung

des christlichen Lebens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Zürich, 1986), 3-44 (이하

KD). 물세례를다루기 전에먼저성령세례의신학적의의를 깊이있게논하고 있다.

19) K D I V/4, 33: “die Macht der gottlichen Wendung, in der es zum Ereignis der

Begrundung chrisitlichen Lebens von bestimmten Menschen kommt, ist die Macht

der ihnen widerfahrenden Taufe mit dem Heiligen Geist.”

20) KD, I V/4, 35.

21) KD, I V/4, 37.

22) KD, I V/4, 38.

23) KD, I V/4, 45.

24) 본 논문에서는 S그룹에 한정하고, D그룹의 성령세례 이해는 다른 기회에 다루어야

할 것이다.

25) Aaron M. Hills, A Hero of Faith and Prayer, 14ff.

Page 24: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면 무엇이든지 하는 목회자(hireling ministry)” 밑에서 방황하다가 신

앙을 저버리는 교회 현실이었다. 이처럼 타락한 교권주의적 교회 현실

을 극복하는 것은성결운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려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냅과 그의 동료들, 특히 윌리엄 갓비(W. Godbey), 힐즈(A. M.

Hills), 리스(Seth C. Rees) 등은“사도적인(Apostolic)” 실천과 방법과

능력을 추구하며,28) 이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신앙과

실천의규율로 삼을것을천명하였다.29)

냅에 의한이러한 성결운동의목적은“성결의 복음을 전하고 성결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을 모아서 그 은혜를 지속시키고자”하는 것이었

지 새로운 교파를 만드는 데 있지 않았다. 그러나 감리교 당국은 성결

운동을 위한특별집회를 막고자 했으며, 성결운동에가담한 교역자들을

가장 어려운 교회로 파송하는 등 인사 상의 불이익을 주었다. 그 대표

적인 예가 1898년 메리랜드의 치사피크 성결연맹(Chesapeake Holi-

ness Union)에서 냅을 강사로 초청했을 때, 집회를 방해하고, 그곳의

감리사가 냅이 속해 있던 미시건 연회에 요청하여 강사로 오지 못하도

록 한 사건이다. 냅은 다음 해에도 같은 초청을 받아 집회를 인도했는

데, 감리교 당국은‘감리교의 순회 설교자들은 그 지역의 교역자들이

집회를 인도하지 말 것을 요청할 경우 그 집회를 취소해야 하며, 이것

을 어길 경우에 징계를 받게 된다’는 감리교 장정 제223항을 어겼다

는 이유로 징계를 받게 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냅은 오히려 성서적 성

결을 전파하는 것이야말로 감리교의 주된 사명임을 적극적으로 주장하

여 1899년 법적싸움으로 나가자신의무죄를 입증하였다. 그러나 냅은

더 이상 당시 감리교의“교권주의( e c c l e s i a s t i c i s m ) ”와“교회주의

(Churchanity)” 아래에서 성결의 복음을 전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1901년 감리교회를 탈퇴하였다.30)

판사를 설립하여 문서를 통한 성결운동을 주도하였다. 냅이 활동한 중

심 무대는 오하이오주의 신시내티였다. 당시 신시내티는 인스킵( I n-

skip), 맥도날드(McDonald), 로우리( R o w r e y )와 같은 전국성결연합회

지도급 부흥사들이 와서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나 지나친 환상주의에 빠

져 성결운동의 본질이 현저히 훼손된 상황에서 성결의 열기가 식어져

버린 상태였다. 이러한 때 냅은 신시내티로 이사하자마자 자기 집에서

‘성결연합회(Holiness Association)’ 를 만들었고, ‘하나님의 성서학원

(God’s Bible School)’을 설립하고,‘캠프 집회(Camp Meeting)’를 열

었다.

냅이시작한 성결연합회는성결운동을 위하여 좀 더 확대된‘중앙성

결동지회(Central Holiness Leagues, 1893)’를 낳았고, 이는 다시그 안

에서“미국뿐만 아니라 어디에 있든지 기도로써 신약성서의 부흥의 불

길을 일으키자는”2 6 ) 목적으로‘국제부흥기도동지회( I n t e r n a t i o n a l

Revival Prayer League)’를 낳았다. 그리고 이 기도동지회가 확대발전

되어‘만국성결연맹과 기도동맹(International Holiness Union and

Prayer League)’으로다시태어났다.

미국 내의 초교파적인 성결운동이19세기 말엽에 활발히 이루어지

고 있던 상황에서 마틴 냅은1897년에 신시내티의 자택에서‘사도성결

연맹(The Apostolic Holiness Union)’을 결성한다.27) 그리고 이 연맹이

‘만국성결교회(The International Apostolic Holiness Church)’ 의 모체

가 되는데, 냅을 중심으로 새로운 교회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던 교회

설립 동기가 만국성결교회의 헌법(Manual)에 적시(摘示)되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점은 새로이 회개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자들

이“타락한 교권주의(decadent ecclesiasticism)”에 사로잡혀“돈만 주

4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최인식, 성령세례의신학적 의의에대한고찰 47

2 6 ) Lloyd Raymond Day, “A History of God’s Bible School in Cincinnati: 1900-

1949”(Th.M Thesis, University of Cincinnati, 1949), 16f(참조: 박명수, 앞의글, 64).

27) Manual of the International Apostolic Holiness Church (Cincinnati: God’s

Revivalist Press, 1914), 5f (이하 Manual로 표기).

28) Manual, 6.

29) Manual, 7.

30) Aaron M. Hills, A Hero of Faith and Prayer, 123-134.

Page 25: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에 의해 세속적인 것들과 짝을 이루면서 행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나타

나는오순절적 부흥은 반대를 받을 것이며, 그로인해분열은 불가피한

것이라 주장한 것이다.35)

냅은 자기가 속한 미시건 연회(Michigan Conference)의 조사위원

회에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 받았는데, 그는 이 일로 인하여‘하나님의

유산을 횡령하는 교권주의가 비난받게 되었다’고 연회의 판결에 의미

를 부여하였다.36) 미시건 연회 법정에서의 승리는 당시 성결운동에 참

여했던 자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들에게 냅은“우리의 마틴

루터(our Martin Luther, Knapp)”와 같은존재가 되었다.37)

2. 마틴냅의성령세례론

마틴 냅이 부흥집회 때마다 주창하였던“오순절적 부흥”에 대한 미

감리교회와 냅 간의 입장 차이는 냅이 미감리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

올 수밖에 없었던 주요 이유들 중 하나이다. 교회 당국 쪽에서 볼 때

오순절적 부흥운동은 교회 분열을 일으키는 행위였고, 냅 쪽에서는 성

결을 모토로 하는 부흥운동이야 말로 웨슬리가 추구했던 것이며 복음

적인 요청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를 반대하는 쪽이야말로 세속주의와

야합한 자들이라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주된관심

사는 냅의 오순절적 부흥운동의 중심에 놓여 있는“웨슬리안 완전”사

상이다. 즉, 회심한 자는믿음으로두 번째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되

는데, 그때 즉시로 원죄가 제거되며, 이로써 그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되

며, 참된신앙고백을하게되며, 그 신앙고백을 전함에 있어서 오순절적

이러한 일련의 대립적인 사태를 통해서 냅이 믿고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즉, 교회 내에서 순

전한 영적 필요에 의해 요구되었던 성결운동이 교회의 제도적 교권에

의해 억압당했을 때 성결운동의 저항성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다는 것

이다. 냅은 그것을“오순절적 저항(Pentecostal Aggressiveness)”이라고

표현하였다. 그 핵심은“성서의 성결(Bible holiness)”을“초교파적으로”

으로 추구하기 위한 저항이었다.31) 그는 이를 보다 적극적으로는“오순

절적 부흥(Pentecostal revival)”이라 불렀으며, 이는 모든 죄악에 대한

강렬한 비판(burning rebuke)이 될 것으로 보았다. 또한, 그것은“세상

과 타협하는 모든 교회들에게는 테러”지만“참된 교회에는 넘치는 축

복”이 될 것을 확신하였다.32) 오순절적 부흥은 오순절 사건에서 경험된

“능력과 순결(power and purity)”의 회복을 말한다. 그것은 곧“초기 감

리교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to seek a home in the mother Method-

ism)”이었다.33)

당시냅을비판하던 교권은 냅의성결운동을“분열(schism)”의 행위

라 불렀는데 그는 이에 대해서 자신의 명확한 입장을 밝혔다. 즉, 분열

에는 복음에 반대되는 것과 복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것이 있는데, 본

인이 분열을 일으켰다면 그것은 초대교회의 모범을 따른 것이며 열광

주의와는 무관한 성령의 깊은확신과 순수하고 권세 있는 회심과 성화

의 역사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34) 교회 안에 회심하지 않은 자들

4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최인식, 성령세례의신학적 의의에대한 고찰 49

31) PA, 9. 13.

32) PA, 10.

33) PA, 13.

34) PA, 19. 이에대한증거로 당시감리교회의 은퇴수석원로이며전국성결연합회원으

로서 보우웬즈(Bowens) 집회를 주도한 콜린즈(M. D. Collins) 목사가 냅에게 한 편

지가 공개되었다. “Dear Bro. Knapp: I did visit the people at Bowens and at

Germans Chapel. I found them a very earnest, hungry, sincere people. I discovered

nothing of schism among them. They seemed very hungry for the truths of full

salvation and very grateful to any one who would give them such truth as is in the

Bible. Yours in Christ, M. D. Collins”(필자의 강조).

35) PA, 17.

36) PA, 31.

37) PA, 31. “We rejoice in the decapitation of our ‘Martin Luther’ Knapp. He could do

no other, God helping him, but stand by his colors... Pastor Bryon J. Rees.”

Page 26: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와 같은 제 형식과 의식 그리고 메마른 신조와 낡은 경험들을 벗어버

리고 온전한 구원(full salvation)이라는 환하게 비추는 전동차로 몰려

들기 시작하였다고 한다.41) 이처럼 냅은 성령세례를 영적 세계에서 일

어난하나의 혁명과 같은현상으로보았다.

냅에 따르면, 성서에는 두 가지의 끈이 이어지고 있는데, 하나는 주

홍빛을 띤 예수라는 끈이고, 다른 하나는 흰 빛을 띤 오순절에 부어진

성령의 약속이라는 끈이다. 성서의 모든 약속들 가운데 하나님은 이 성

령의약속을 모든세대를 향해“그약속(THE PROMISE)”이라고 높이

선양(宣揚)하였다. 선지자들은 그 약속에 대해 쓰고 노래했고, 왕의 강

림뿐만 아니라 성령의 강림을 선포했다. 다른모든 사실들보다 예수자

신이이 약속의 성취가 이루어질 것을예고하였고, 수압에 의해지하수

가 저절로 솟아나는 샘과 같이 성령이 넘쳐흘러 죄와 형식주의(for-

mality)의 사막을 낙원으로 변화시키게 될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하

나님의 백성들에게 성령의 오심과 내주하심과 깨끗케 하심과 채우심은

최상의 경험이 될 것이라 보았다.42)

성화는 이러한 성령세례의 열매인데, 이는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 자

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심으로써 일어나는 일이다. 이처럼 예수는

성령세례자이며 동시에 성화자이기 때문에 그에게 성령세례를 받은자

는 오순절적성화를 체험하게 되고, 또한오순절적 성화를 체험한 자는

예수로부터 성령세례를 받은 자가 되는 것이다.43) 이와 같은주장은 마

틴 냅에 의해창시된 만국성결교회의헌장 제8조 22항과 제11조 26항

에서도동일하게확인이 된다.

완전성화는그리스도에의한성령세례이다.44)

저항과 능력을 드러내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냅은“웨슬

리안 성결”로 이해하였다.38) 반면에 교회 당국에서는 이와 다르게 사람

은 회심할 때부터 점진적으로 완전한 성화를 이루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므로 냅이 감리교에 의해인증된 목사로서회심 이후에 순

간적으로 경험되는“웨슬리안 완전”을 성결연맹의 집회에서 증거 하는

것에대해감리교 당국은 극렬하게 반대했던것이다.

이에 대항하여 냅은 감리교 당국을 향한 자신의 반박문『오순절적

저항』에서“웨슬리안 완전”,“웨슬리안 성결”이란 말과 함께“온전한 구

원(Full Salvation)”과“완전 성화(entire sanctification)”라는용어를 동

일한 의미에서 사용한다.39)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성화론에 대

한 미감리교의 일반적인 가르침은 냅을 중심으로 하는 당시 성결운동

권 쪽의 이해와 달랐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이제우리는 냅의 이러한

성결론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고찰해야 할 차례이다. 이를 위해서 여러

자료가 요청되지만 그 중에서도 성령세례의 오순절적 특징을 포괄적으

로 밝히고 있는 저서Lightning Bolts from Pentecostal Skies (1898)를

중심으로그의성령세례론을살펴본다.

냅은 오순절의 성령세례를“번쩍하는 번개불(lightning bolts)” 혹은

“오순절적 순결과 능력의 폭풍”으로 비유한다.4 0 ) 그 오순절적 능력

(Pentecostal dynamo)으로부터 빛과 사랑과 능력의 영적 세계가 폭발

적으로 나타났는데, 이로써 수많은 사람들은 촛불로 밝히던 옛 역마차

5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최인식, 성령세례의신학적 의의에대한고찰 51

3 8 ) PA, 20. “Wesleyan Perfection clearly embraces a second work of grace, sub-

sequent to conversion, by faith, instantaneously eradicating inbred sin and accom-

panied by separation from the world, suitable confession, Pentecostal aggres-

siveness and power in propagating it... This we understand to be Wesleyan Holi-

ness, the great object of Methodism”(필자의강조).

39) PA, 27.

40) M. W. Knapp, Lightning Bolts from Pentecostal Skies; or, Devices of the Devil

Unmasked (Cincinnati: God’s Bible School Bookroom, 1898), 7(이하LB로 표기

함).

41) LB, 7.

42) LB, 13.

43) LB, 33. “All who have this baptism have Pentecostal sanctification; all who have

Pentecostal sanctification have this baptism”(Knapp의 강조).

Page 27: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내고기쁨을 가져오는세례다.

7. 성령세례는 하나 되게 하는(unifying) 세례이다(고전12:13). 성령

세례는 신조들이나 전통들의 모든 장벽들을 태우고 거룩한 사랑의 끈

으로결합시킨다. 중생은 믿는자들을 하나님의가족이 되도록 하고, 성

령세례는하나님의가족을 분리하고파괴하는모든요인들을 제거한다.

8. 성령세례는 능력 있는 기도(prevailing prayer)를 하기 위해서 필

수적으로 받아야 할 세례이다(롬 8:26). 오직 성령세례에 의해서만 마

음의 육적 욕망이 소멸될 수 있으며, 그로써 하나님과의 힘 있는 교통

이 이루어진다.

9. 성령세례는 영적으로 묶여 벙어리가 된 자의 혀를 풀어주어 하나

님과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세례(tongue-loosening bapt-

ism)이다.49)

10. 성령세례는 회심 이후의 신자들에게만 임한다. 즉, 불신자가 예

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드리는 회심 시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회심

은 구원을 위한 구명 보트이며, 성령세례는 구원받은 자를 위한 옷과

음식과 같다.

11. 성령세례는 죄 사함을 받음으로 죽은 영혼이 다시 살아나 생명

의 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는 중생의 사건, 신자의 전 존재가 예수의 재

림 시에 영화롭게 되는 사건과 마찬가지로“순간에(instantaneous)”원

죄의 뿌리가 제거되고 성령으로 가득 채워지는 사건이다(말 3:1; 행 2:

2-4). 성령세례는 인간적인 노력이나 교육에 의하여 점진적으로 이루

어지는 것이아니고, 예수그리스도에의하여 집행되는사건이다.50)

12. 성령세례는 믿음을 갖고 하나님께 자신을 철저히 내어맡기는 자

에게 주어진다(행 5:32; 갈 3:14). 성령세례는 이를 사모하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그것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자에게 은혜의 선물로 온다.

성화는 성령과 불에 의한 세례와 동일하며(synonymous) 동시적이다

(simultaneous).45)

그렇다면 냅과 성결운동은 당시의 미감리교회와 달리 성화와 성령

세례를 동일시하며 동시적 사건으로 보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를 위

해서는 먼저 냅이 이해하고 있는 성령세례와 성화의 의미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냅은자신의Lightning Bolts from Pentecostal Skies에서 성

령세례를“오순절적(Pentecostal)” 세례라 하여 모두 마흔 항목으로 그

의미를 밝혀놓았는데, 그 중에서 주요주제들은다음과 같다.

1. 성령세례는“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눅 24:9)이다. 성령세례에

대한 약속은 갈보리에서 성취된 약속들보다 훨씬 더 많이 더 강도 높

게 제시되어 있다(요 14:16; 15:26; 16:13; 행 18장 등).46)

2. 성령세례는 신자들이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으로서 하나님의 명

령이다(엡 5:18).

3. 성령세례를 수여하는 자는예수자신이다(행 2:33).47) 그러므로 성

령세례에 대한 비판은 곧 예수를 향한것이요, 성령세례를 반대하는 것

은 곧 예수를 반대하는것이다.

4. 성령세례와 불세례는하나의 세례다(엡 4:5). 성화의 경험이후또

다시불세례를받는것이아니다. 성령세례로이미불이임하였다.

5. 성령세례는 정화, 능력, 자유의 세례이다. 중생은 생명을 부여하며,

성화는 정결(purity)과 힘(energy)을 준다.48)

6. 성령세례는 육체의 일을 죽이고(carnality-killing) 두려움을 쫓아

5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최인식, 성령세례의신학적 의의에대한고찰 53

44) Manual, 13.

45) Manual, 15.

46) LB, 13.

47) LB, 33.

48) LB, 15-17.

49) LB, 20.

50) LB, 27.

Page 28: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근본적으로부정하는성령세례의교회갱신및 윤리적 관점이다.

1. 교회론적관점: 교회의정체성은예수

예수에 의한 성령세례는 공동체의 정체성에 위기가 왔을 때 강조되

어야하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사건이다. 성령세례는 예수의 공생애

초기 세례 요한이 등장할 때 언급되고 난 후 예수의 공생애 말기에 나

타난다. 예수는 세례 요한을 통해서“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자”로 소개

되면서 그의 모든 생애는 성령과 더불어서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활

동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생애의 마지막 시간에“성령을 받으

라”(요 20:22)고, 또한“내가내 아버지의약속하신것을너희에게보내

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눅 24:

49)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 약속을 믿고기도하며기다렸던 자들에게

성령세례가 임했는데, 이는 예수께서 역사상의 모든 생애를 마감한 후

에 일어났다. 이것이 곧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이라는 곳에 모인120명

의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강림 사건이다. 누가는 이를 두고“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보고듣는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행 2:33)고 증언하였다.

이렇게 임하게 될 성령을 예수는“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

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고 말하며,“내가 아버지

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

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라고 다시 말한다.

이처럼 성령이 오셔서 할 일은 예수를 생각나게 하고 또한 예수를 증

거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승천하기 전에“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

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등의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께서 보내시는 성령은 보혜사로서 예수를 나타내는 영

이러한 냅의 성령세례론은 앞에서 살펴 본 바‘경험 중심적 복음주

의 전통’에 속한다. 냅은 어떤 감동이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인간적인 것인지를 구별하는 데 네 가지 정도의 기준이 있다고

보았다. 즉‘성서적인가, 도덕적으로 옳은가, 섭리적인가, 그리고 합리적

인가’라는 물음에 긍정적이어야한다.51) 이 중에서도 특별히‘성서적’인

지의 여부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규범이었지만, 냅은 그의사역 후반기

에 들어서면서 오순절적 토네이도와 홍수와 같은 경험이 지배적으로

된 것을 볼 수 있다.52) 그의 성령세례 이해는 누가나 바울 어느 쪽에도

편향되지 않고 주제와 관련된 성서 본문들에 충실히 뿌리내리면서도

각각의 사항들은 개인적인 혹은 공동체적인 경험을 반영하고 있는 것

으로보인다.

IV. 성령세례의신학적의의

마틴 냅의 성령세례론에서 강조되는 주요 이슈 중 하나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자는‘예수’라는 것과 그 성령은 철저히‘예수’를 증거하

는 영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명확히 나타나는

것이지만 이러한 사실이 지니는 신학적 의미에 대해서는 성서학계 안

에서 지금까지 큰 관심사가 된 적이없어 보인다. 우리는 기독론적으로

정향되어 있는 성령의 세례에 대해서 크게 세 가지 관점으로 살펴볼

것이다. 첫째는 성령으로 탄생된 교회는 예수를 증언하며 예수의 사명

을 이어가는 예수 공동체라는 교회론적 관점과, 둘째는 중생시 성령의

외부적인 작용과 달리 내적으로 임재하는“성령의 성육신”이라는 구원

론적 관점, 그리고 셋째는 교회갱신을 위하여 교권주의와 인본주의를

5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최인식, 성령세례의신학적의의에대한고찰 55

51) Martin Knapp, Impressions (Cincinnati: Revivalist Publishing Co., 1892), 52ff.

52) Leon O. Hynson, “The Wesleyan Quadrilateral in the American Holiness

Tradition,” Wesleyan Theological Journal (March 1985), 30.

Page 29: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예수를 기억나게 하고,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 수 있도록 능력을 베풀

고, 예수를 증거하는일을하게하는것이었다. 철저히기독론적으로오

리엔테이션된 영이어야했다.54)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기 전에, 즉 역사적 예수가 함께 하지 않

는,‘예수 없는예수 제자 공동체’로 출발하기 전에 예수께서 보내시는

보혜사 성령을 받아 그동안 예수와 함께 했던 모든 순간과 모든 말씀

들을확증하는시간을 가져야 했다. 그래야 앞으로 나사렛 예수없이도

예수의 삶과 가르침, 그의 정신으로 충만한 예수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이루어 갈 수 있었겠기때문이다. 그것이 약속대로 이루어진때가 바로

오순절이었다. 그러므로 철저히 기독론적으로정향된 성령이 강림한 오

순절의 성령세례는 역사적 예수가 예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에 초월

적으로-영적으로-임재하게 된‘첫 번째’55) 사건이 되었다. 즉, 오순절

전까지는 시공간에 제약을 받은 유대-그리스도인들에 의한 지역적이

고 민족적이고 시대적인 예수 공동체가 있었다면, 오순절 이후부터는

탈민족, 탈지역, 탈시대적인, 즉 이전과는 아예 차원을 달리하는 영적인

예수공동체가 나타나게된 것이다.

마틴 냅과 그 성결운동 단체들이 예수의 오순절 성령세례를 강조한

것도 이와 동일한 맥락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 말 미감리교회가 성결

운동에 의해 저항을 받았던 것은 예수 공동체 안에서 예수의 이름은

있어도 예수의 영, 곧 예수로 정향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었던

현실때문이었다. 그들은 결국교회 밖의캠프 집회를 엶으로써 성령세

으로규정되어있다.53)

이와 같이 성령에 대하여 예수께서 기독론적으로 그 성격을 규정하

고 있는이유는 무엇인가? 기독론적으로규정된 성령세례에 대한 신학

적 의의를 밝히려면 먼저 그 배경에 대해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우선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예수 공동체가 서 있었던

삶의 자리이다. 그에 입각해서 볼 때 성령세례에 대한 기독론적 정초

(定礎)는 초기 예수 공동체에게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

다. 예수공동체의정체성 문제가 걸린문제였기때문이다.

당시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낮은 신분에 속해

있었으나 여전히 유대인, 즉 유대교인들이었다. 그들에게도 여전히 율

법이 있었고, 회당과 매일 지켜야 할 할라카[halacha, 규례]가 있었다.

외면상으로 볼 때 그들은 다른 유대교의 랍비 공동체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생이신 예수께서 떠나 없게 된다면, 그때까

지 형성되었던 예수 공동체의 고유한 정체성은 계속 유지되기 어렵게

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떠나셔야 된다는 기

정사실을눈앞에 두고예수께서해야할 일은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언

제 어디서든지 예수의 영으로 토라와 할라카를 해석하고, 예수의 가르침대

로 믿고 실천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예수와 동일한 영을 부어주는 일이었

다. 그래서 그 영은“보혜사”라 불려야 했고, 그 영이 할 일은 오로지

5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최인식, 성령세례의신학적 의의에대한고찰 57

53) W. Godbey,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vol. 2: The Gospels of Matthew,

Mark, Luke, and John, Harmonized ? Part II (Cincinnati: God’s Revivalist Office,

1900), 408 (이하ComNT 2). “The Holy Ghost is the Spirit of Jesus, His great work

being to reveal, magnify, and glorify the Son of God in the salvation of the world...

The Lord’s true disciples, like the Holy Ghost, are always magnifying Jesus and

witnessing to His glory”(408); “the grand office of the Holy Ghost is to reveal to

us the things of Christ... is to reveal the wonders of the Christhood, the stupendous

latitude, longitude, and altitude of redeeming love, shining down into the deep

interior of the human spirit, irradiating the mind, interpenetrating our entire

spiritual being...”(414).

54) W. B. Godbey, Satan’s Side -Tracks for Holiness People (Nashville: Pentecostal

Mission Pub., no date), 23. “His mission on the earth is to get us all to follow

Jesus... He(Holy Ghost) always leads us right in the track, with our eye on Jesus.”

(필자의 강조).

55) 누가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선교

현장에 대해서 보도하고 있다. 즉, 사마리아인의 성령세례(행 8:14-15), 바울의 체험

(행 9:17-18), 고넬료와 이방인들의 성령세례(행 10:44-48), 에베소 제자들의 성령세

례 체험(행19:1-7) 등과같은것이다.

Page 30: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갓비는 요한복음을 주석하면서 회심( c o n v e r s i o n )시에 성화된다는

가르침, 즉“내주하는(indwelling)” 보혜사로서의 성령을 받는다는 주장

은 진젠도르프식 사견(邪見)으로서 강력하게 배척한다. 그것은“세상은

그를 받을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기 때문

이다.59) 예수께서 보내시는 보혜사 성령은 교회에 보내진 것이지, 세상

으로 보내진 분이 아니다. 거룩하게 하는 보혜사의 사역은 그리스도인

들을 위한 것이지 죄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세상은 성령을 보지도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60) 그러므로 양자는 질적으로는 전혀 다른 사

건이다.61)

중생과 성화의 질적 차이는 중생과 성화 시에 성령이 하는 역할과

위치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즉, 성령이 죄인을 중생케 할 때 그의 역할

은 계몽자(illuminator), 선생, 안내자, 보호자인 반면, 이미 중생한 그리

스도인들에 대한 성령의 역할은 실제로 그들에게 들어가 그들 안에거

하심으로써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62) 오순절 성령세례를 경험하

기 전의상태, 곧 중생의 상태에서는 누구든지“밖에서부터외부적으로

(extrinsically, from without)” 역사하시는 성령에 대해서 알뿐이다.63)

례를 체험하게 되었고, 그로써 영적 공동체로서의 예수 공동체에 대한

믿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56) 그리고 그들은 교회의 정체성 확인에 머무

르지 않고 성령세례를 통해 온 세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해

야 한다는 소명감으로 충만하게 되어 마침내‘만국성결교회( T h e

International Apostolic Holiness Church)’를 창립하게까지 되었다. 오

순절의 성령은 예수를 증거하는 영이었기때문이다. 그리하여만국성결

교회는 세계 만방에(International) 예수의 초기 공동체에서 일어난 사

건으로서의(Apostolic) 오순절 성령세례(Holiness)의 메시지를 전하고

자 교회개혁적이며세계선교적차원에서태어난 것이다.

2. 구원론적관점: 성령의성육신(Incarnation of the Holy Spirit)

마틴 냅은 그의 동역자인 신약학자 윌리엄 갓비(William B. God-

bey, 1833-1920)가 집필한 많은 저술들을 자신이 운영하던 출판사를

통해 출간함으로써성결운동의 성서신학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성결운

동에서 오순절 성화 사상을 전개하는 데 가장 탁월한 신약성서 학자로

알려진 갓비에게57) 성령세례는“성령의 성육신(incarnation of the Holy

Ghost)”으로서“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더불어 복음 이해의 양대 축을

이루는 사건이다. 냅은“성령의 성육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

만 이 개념은 당시의 성결운동에서 중요한 성서신학적 기초역할을 하

였다.58)

5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최인식, 성령세례의신학적 의의에대한고찰 59

56) Wallace Thornton, “God’s Trustee: Martin Wells Knapp and Radical Holiness,”

From Aldersgate to Azusa Street, by Henry H. Knight I I I (Eugene, Or: Pickwick

Pubns, 2010): 148-157.

5 7 ) William Kostley (ed.),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Holiness Movement, S e c o n d

ed. (Lanham: The Scarecrow Press, 2009), 129. 갓비는 자신의 말년에 들어서서는

냅이 세운‘하나님의성서학원(God’s Bible School)’에서도 가르쳤다.

58)“성령의 성육신”이란 용어는 윌리엄 갓비가 역사상 유일하게 사용한 개념으로 보인

다. 하나님이아들나사렛예수를통해자신을 계시한것처럼, 성령하나님도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을통해 자신을 나타내신다는사실을 말하고

자 함이다. 성령세례를 경험한 자들은 성령이 그들 안에 거함으로 성령의 성육신에

참여한자들이라이해할수 있을것이다.

59) W. Godbey,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vol. 2: The Gospels of Matthew,

Mark, Luke, and John, Harmonized - Part I I (Cincinnati: God’s Revivalist Office,

1900), 397(=ComNT 2).

60) 상동.

61) W. B. Godbey, The Incarnation of the Holy Ghost (Louisville: Pentecostal Pub.,

1908), 39. 갓비는 성령에 의한 중생과 동일한 성령에 의한 성화는 시간적으로는혹

동시적일수도 있다고시간적인문제에 대해서는제한을두지않는다.

6 2 ) ComNT 2, 397. “while in the case of the sanctified, He is actually dwelling in

them, having taken up His abode in the heart, there to abide a blessed, Heavenly

Guest, filling the soul with perennial sunshine...”(필자의강조).

63) W. Godbey,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vol. 5: Acts-Romans (Cincinnati:

God’s Revivalist Office, 1900), 25 (=ComNT 5).

Page 31: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는 신학적 의의가 있다.69) 또한, 성령의 성육신으로서의 성령세례를 통

해 성령의 내주함을 경험하는 자는“다가올 세대”(히 6:5)에 재림하는

예수와 함께 오게 될 영광스러운 천년왕국을 미리 맛보는 자리에까지

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복음의 가장 커다란 최후 통첩(ultimatum)은

성령의 성육신 사건인 성령세례이다. 우리 안에서 성령의 성육신 사건

이 일어났다면 우리는 실제로 예수와 하나가 된 것이다. 성령은 예수의

영과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70) 이 지점에서 성령세례가 그리스도인의

성화를 위해지대한 구원론적의의를 가지고있음을 알게된다.

3. 윤리적·교회갱신적관점: 인본주의에대한저항

중생 이후에 성령의 세례를 통해 두 번째의 은총을 경험한 성령의

사람은 철저히 성령의 법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성령의

사람은 성령의 법에 거슬리는 모든 것과 대항한다. 예수께서당대에 교

권주의와 세속주의가 뿌리내리고 있는 인본주의에 대하여 저항하였듯

이, 예수에 의해성령세례를 받은성령의 사람도 역시 교권주의와 세속

주의를 비롯한 모든인본주의에대하여 비판하며저항한다.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임을 믿어 신앙의 영적 세계로 새롭게 태어난 중생은 전적으

로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그 가운데 인간의 공로는 설 자리가 없다. 그

러므로 중생한 자들에 의한 영적 공동체나 그들의 개인적 삶은 인본주

의와 서로 대척 관계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반(反)인본주의적 예수

영성 공동체이어야 할 교회 안에 교권주의나 세속주의가 잡초처럼 자

라서 옥토를 황폐하게 만들어버리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영의 세계

에로 거듭난 자라도 옛 본성 자체가 제거된 것은 아니어서 성령의 법

성령은 오순절 강림이전에도 이미활동하고 있었지만, 예를들면, 히브

리 선지자들‘위에’또는 삼손‘위에’임하여 일정기간 동안 그들에게

역사하였을뿐이지, 그들‘가운데’내주하지는않았다고보는것이다.64)

이러한 맥락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말미암는 성령세례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과 차원을 같이 한다.65) 하나님의 아들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남으로써 나사렛 예수라는 인간의 세계에 들어왔듯

이, 성령은 오순절 예루살렘에서제자들에게들어옴으로써 성령의 성육

신 시대를 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성령은 비로소 그가 들어온 자들

곧 성령세례를 받은 자들“안에서(intrinsically)” 역사하게 된다.66) 성령

세례를 받은 자들은 영적으로, 지성적으로, 육신적으로 신적인 뜻을 이

행하는 성령의 인격적 도구인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간다.67) 이러한 성

령의 성육신 사건으로서의 성령세례는 교회가 실제적인 힘을 발휘하여 세

상을 그리스도에게로복종하게하려할 때 이루어져야할 필수적인전제조

건이다. 성령의 내주함이 의미하는 바는 성령을 모시게 된 자들의 주권

자가 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은 그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능력있게증거할 수 있게된다.

성령의 성육신이 역사상 늦게 일어나게 된 이유는 율법을 어긴 인

류를 위한 속죄와 화해의 사역을 위한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먼저 와야

했기 때문이다.68)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루어지는 성령의 성

육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최고의 영광으로서

성서가 말하는“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사건과 맥을 같이 할 수 있

6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최인식, 성령세례의신학적 의의에대한고찰 61

64) ComNT 5, 25; Godbey, The Incarnation of the Holy Ghost, 41. “Before the incar-

nation of the Holy Ghost in human bodies, he operated extrinsically on the people”

(필자의 강조).

65) W. Godbey, The Incarnation of the Holy Ghost (Louisville: Pentecostal Pub.,

1908), 39.

66) ComNT 5, 26. 33.

67) ComNT 5, 26.

68) W. B. Godbey, The Incarnation of the Holy Ghost, 42.

69) W. B. Godbey, The Incarnation of the Holy Ghost, 43.

70) ComNT 5, 26.

Page 32: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선물로 받는일도여전히“예수의이름으로”세례를받고죄 사함을 받

을 때만 가능한 것으로 공표하였다(행 2:38).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

하는 것도“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행 3:6, 16; 4:10, 12) 가능한 일임

을 드러내었다. 유대교의 교권주의자들이 사도들을 향해“경고하여 도

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행 4:18)고 했

을 때,“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고 담대히 인본주의적교권의 탄압에

대항하여물러서지않았다.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성령세례의 사건은19세기 말엽 마틴 냅과 성

결운동 안에서도 일어났던 것을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그들에게서

성령세례는 개인의 성화로 한정되는 사건이 아니었다. 성령세례를 강조

했던“부흥운동은 이름뿐인 기독교와 전통적 교회들에 대해서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하였(다) .”7 2 ) 또한, 성령세례는 예수께서 여전히 교회의

주가 되신다는 것을 교회 안팎으로 드러내는 선교적 사건으로 이어졌

다.73) 성령은 철저히 예수의 주되심을 증거하는 보혜사로 역사하기 때

문이었다.

교회를 잠식하는 인본주의에는 세속적 인본주의뿐만 아니라 종교적

인본주의가 있다. 이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교권주의(ecclesiasticism),

교리주의(dogmatism), 교회주의(churchism)라 이름지어부를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19세기 말 성결운동이 돌파하고 나가려 했던교회 내의

장벽들이었다.74) 종교적 인본주의로 단단히 무장된 이와 같은 장벽들을

발파할 수 있는 힘은 오직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권능뿐이었다. 그러므

로 이들에 대해 저항하기 위해서는 성령세례를 경험한 개인과 공동체

과 육체의 법을‘함께’따르기 때문이다. 그 틈에 육체의 법을 따르는

인본주의가 예수 공동체 안에서 자연스럽게 세력을 확장하게 되는 것

이다.

성령의 외적인 은혜의 역사로 중생했으나 여전히 옛 본성은 남아

있기에 중생한 그리스도인은 인본주의에 의해 언제든지 장악될 수 있

다. 그러나 이들이 예수에 의한성령세례를 받는 순간부터 중생 이후에

성령의 법을 따르지 않고 육체의 법을 따르면서 살던 것들에 대해 철

저히 회개하게 되고 영적으로 다시 한번 더 새롭게 갱신하게 되는 경

험을 한다. 또한, 중생한 자로서 예수를 주(主)라 고백하고 있음에도 불

구하고 실제적인 삶에서의 주인은 예수 아닌다른 무엇이 차지하고 있

음을 회개한다. 이로써 성령세례자인예수의 영 곧 그의 보혜사 성령이

회개하는 그에게 충만히 내주한다. 성령은 예수를 증거하는 영으로 보

냄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성령의 내주를 경험한 그는 오직 예수의 영

으로 가득 찬 삶을 살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증인이 된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를 받은 자들의 삶 가운데서는 예수 외의 다른 존재

들이 주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다. 오직 예수만이 개인이나 공동체의

머리가 된다. 성령세례를 받은 자들은 이제신앙 공동체에 잠입해 예수

중심의 신앙공동체성을파괴하는 타락한 제도적 교권이나 부패한 세속

적 권력과 대적하여싸우게 된다.

이와 같은 일은 성령세례를받은 예루살렘 공동체에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예수 안에서 확고히 할 뿐만 아니라,

예수 외의 어떤 사도들이나 여타의 권위들이 예수를 대신할 수 없음을

공표할 수 있었다. 또한 유대교의 교권주의자들을 피해 다녔던 사도들

은 성령세례를 받은 이후부터 오히려 그들을 정면으로 부딪칠 만큼 담

대해졌다.“이스라엘집안은 확실히 알지니너희가 십자가에못 박은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71) 성령을

6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최인식, 성령세례의신학적 의의에 대한고찰 63

71) 행 2:36.

72) Donald Dayton, 『다시 보는복음주의유산』, 배덕만 역(서울: 요단출판사, 2003). 225.

73) Wallace Thornton, Jr., “The Revivalist Movement and the Development of a

Holiness / Pentecostal Philosophy of Missions,” Wesleyan Theological Journal

(March, 2003), 171. 175.

74) Godbey, Satan’s Side-Tracks, 27.

Page 33: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오늘날21세기 한국교회를 위해서도 동일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필연

성을갖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될 것이다.

성령세례의신학적 의의를 결론적으로요약하면다음과 같다.

첫째, 성령세례는 그 행위의 주체가 예수일 뿐만 아니라, 성령의 주

된 사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증언하는 것이므로 성령세례를

통해 신자와 신자 공동체의 정체성은 오직 예수에게 있음을 확인케 한

다. 그러므로 개인의 신앙과 교회공동체의 정체성이 도전받고 있는포

스트모던 시대에 성령세례는 기독교의 자리매김을 확고히 해주는 견인

차와파수꾼의 역할을 할 것이다.

둘째, 성령세례는 신자와 그 공동체 안에 내적으로 임재하는 성육신

적 사건으로서의 지대한 신학적 의의를 지닌다. 이는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난 사실을 성령의 내주하심과 동일하게 생각함으로써 오는신앙생

활의 많은 혼란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한다. 우리가 필요해서 성령을 부

를 때 항상 오시는 것을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착각하고 있는 한, 성령

은 우리 안에서 주인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고로 우리의 삶과 인격을

근본적으로변화시킬수 없게되는것이다.

마지막 셋째로, 성령세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높은 뜻을 굴절

시키고 거역하는 모든인본주의적 공격에 대해 힘 있게 대항하도록 윤

리적 실천의 능력을 부여한다. 이는 개인의 대사회적 윤리실천을 가능

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서 교권주의와 세속주의에 물들어가고

있는교회를 개혁하고갱신하는일에능동적으로참여하도록 한다.

이와 같이 성령세례가 지니는 신학적 의의(意義)는 우리 자신 안에

성령이 내주하는 우리가 성전인 사실(고전3:16)을 확신케 함으로써우

리의 삶을더욱 거룩한 데로 나가게 하며, 우리가 지체로 속해 있는한

국교회가 참된 예수 공동체의 본질을 지켜나가도록 하는데 기여할 것

이다. 성령세례가중생시에임하든, 중생이후에 받든지 최종적으로중

요한 사실은“성령의 성육신”으로서의 오순절적 성령세례가 신자와 교

회 공동체 안에서 경험되어야한다는 점이다.

가 나타나야 했다. 이는 회심 시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를 그리스도요

주로 고백함으로써 중생한 자들이 물세례 신자의 단계를 넘어 시온산

까지 올라가 불세례를 받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해서 중

생의 단계에서 성화로까지 나가지 못하면 결국 종교적 의식주의자, 도

덕주의자, 박애주의자, 교회주의자, 인본주의자로 떨어져 예수의 영성을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만다.75) 성결운동가들은 이들에게

“그 날에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녹아버릴 것”(벧후3:

12)이라고 경고할 뿐만 아니라, 회개할 것과 성령의 불로 세례를 받을

것을 권고하였다.76) 성령세례는 교회가 교권주의와 세속주의에 대항하

여 교회 자신을 예수 공동체로 지키는 가장 중요한 은총의 사건이 되

기 때문이다.

V. 맺는말: 성령세례와한국교회

우리는 지금까지 성령세례론이 크게 경험 중심적 복음주의 전통[S

그룹]과 교리 중심적 개혁주의 전통[D그룹]이라는 두 방향으로 논의되

고 주장되어 왔던내용들을 분석한 후, 성령세례가 어느 방향에서이해

되는 것과 관계없이 공히 성령세례 자체가 지니는 신학적 의의를 세

가지 관점에서 고찰하였다. 특히 마틴 냅과 윌리엄 갓비가 활동했던19

세기말 미국의 교회사적 상황 안에서 그들의 성령세례론을 조명함으로

써 성령세례가 지니는 신학적 의의를 부각코자 했다. 그리고 그와같은

성령세례의 신학적 의의는 당시교권주의와 세속주의의 도전으로 말미

암아교회의 본질과 정체성의위기를 경험했던 미감리교회뿐만아니라,

6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최인식, 성령세례의신학적의의에대한고찰 65

75) W. B. Godbey, Spiritual Gifts and Graces (Cincinnati: God’s Revivalist Office,

1895), 3.

76) W. B. Godbey, The Victory of Christ (Cincinnati: God’s Revivalist Office, n. d.),

39.

Page 34: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참고문헌

박명수. “마틴 냅(Martin W. Knapp)”(1). 「활천」518호(1997. 1).

박형룡. “성령세례와성도의구원”「신학정론」12 (1994. 5): 24-55.

배본철.“성령론 딜렘마: 한국교회성령세례론 유형 분석”.『존 웨슬리의 신학과

개혁신학』. 한국개혁신학회편. 서울: 한국개혁신학, 2006.

Barth, Karl. Kirchliche Dogmatik. Bd. 4, Fragment: Die Taufe als Begrün-

dung des christlichen Lebens.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Zürich,

1986.

Day, Lloyd Raymond. “A History of God’s Bible School in Cincinnati:

1900-1949”. Th. M Thesis, University of Cincinnati, 1949.

Dayton, Donald. 『다시 보는 복음주의 유산』. 배덕만 역. 서울: 요단출판사,

2003.

Dunn, James D. G. Baptism in the Holy Spirit: A Re-examination of the New

Testament Teaching on the Gift of the Spirit in Relation to Pente-

costalism Today. London: SCM Press, 1970.

Fletcher, John. Fletcher on Perfection. Louisville: Pentecostal Pub., n. d.

Godbey, W. B. Satan’s Side-Tracks for Holiness People. Nashville: Pente-

costal Mission Pub., n. d.

. Spiritual Gifts and Graces. Cincinnati: God’s Revivalist Office, 1895.

. The Victory of Christ. Cincinnati: God’s Revivalist Office, n. d.

. The Incarnation of the Holy Ghost. Louisville: Pentecostal Pub., 1908.

.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vol. 2: The Gospels of Matthew,

Mark, Luke, and John, Harmonized-Part I I. Cincinnati: God’s

Revivalist Office, 1900.

.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vol. 5: Acts-Romans. Cincinnati:

God’s Revivalist Office, 1900.

Hills, Aaron M. A Hero of Faith and Prayer: or, Life of Rev. Martin Wells

Knapp. Cincinnati, Ohio: Mrs. M. W. Knapp, 1902; Wesleyan

주제어

성령세례, 성령의 성육신, 성화, 성결운동, 마틴 냅

Baptism of the Holy Spirit, Incarnation of the Holy Spirit, Sanctifi-

cation, Holiness Movement, Martin Knapp

접 수 일 2012년 7월 1일

심사(수정)일 2012년 8월 8일

게재 확정일 2012년 9월 1일

6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최인식, 성령세례의 신학적 의의에대한고찰 67

Page 35: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Holiness / Pentecostal Philosophy of Missions,” in: Wesleyan Theo-

logical Journal (March, 2003).

. “God’s Trustee: Martin Wells Knapp and Radical Holiness,” in: From

Aldersgate to Azusa Street, by Henry H. Knight I I I. Eugene, Or:

Pickwick Pubns, 2010: 148-157.

Tillich, Paul. Systematic Theology I I I.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1; 『조직신학 I-V』. 유장환역. 서울: 한들출판사, 2001.

Torrey, R. A. The Baptism with the Holy Spirit. New York: Fleming H.

Revell, 1897.

Heritage Publications, 1998.

Hynson, Leon O. “The Wesleyan Quadrilateral in the American Holiness

Tradition,” in: Wesleyan Theological Journal (March 1985), 30.

Kaiser, Walter 외 4인.『성령세례란 무엇인가: 성령 세례에 대한 다섯 가지 관

점』. Chad Owen Brand 편. 이선숙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0.

Knapp, M. W. Lightning Bolts from Pentecostal Skies; or, Devices of the

Devil Unmasked. Cincinnati: God’s Bible School Bookroom, 1898.

. Impressions. Cincinnati: Revivalist Publishing Co., 1892.

. Pentecostal Aggressiveness; or Why I Conducted the Meetings of the

Chesapeake Holiness Union at Bowens, Marylan. C i n c i n n a t i :

Publisher of Gospel Literature, 1899.

Kostley, William(ed.).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Holiness Movement,

Second ed. Lanham: The Scarecrow Press, 2009.

Lloyd-Jones, D. M. 『성령론』. 홍정식역편. 서울: 새순출판사, 1986.

. 『성령세례』. 정원태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Mahan, Asa. The Baptism of the Holy Ghost. New York: Palmer & Hughes,

1870.

Manual of the International Apostolic Holiness Church. Cincinnati: God’s

Revivalist Press, 1914.

Menzies, William W. and Robert P. Spirit and Power: Foundations of Pente-

costal Experience. Grand Rapids: Zondervan, 2000.

Moody, D. L. Secret Power. New York: Fleming H. Revell, 1881.

Rice, John R. The Power of Pentecost. Murfreesboro: Sword and the Lord

Pub., 1949.

Stott, John R. W. The Baptism and Fullness of the Holy Spirit. L e i c e s t e r :

InterVersity Press, 1964.

Stronstad, Roger. The Charismatic Theology of St. Luke. Peabody, MA:

Hendrickson, 1984.

Thornton, L. S. Confirmation: Its Place in the Baptismal Mystery. London:

A.&C. Black, 1954.

Thornton, Wallace Jr. “The Revivalist Movement and the Development of a

6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최인식, 성령세례의신학적 의의에대한고찰 69

Page 36: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론적으로, 성령세례가 중생 시에 임하든, 중생 이후에 받든지 최종적으

로 중요한 사실은“성령의 성육신”으로서의 오순절적 성령세례가 신자

와 교회공동체안에서 경험되어야한다는 점이다.

국문초록

성령세례의신학적의의에대한고찰

본 논문은 기존의 성령세례론을크게세 분야로 나누어 다루었다.

첫째로, 기존의 다양한 성령세례론을유형론적으로 고찰하였다. 우리

는 경험 중심적 복음주의 전통의 성령세례론과 교리 중심적 개혁주의

전통의 성령세례론유형으로구분하여각각의 특징을 밝혔다.

둘째로, 성령세례론이 가장 왕성하게 논의되고 실천되었던 19세기

말 미국의 상황을 역사적으로살펴보았다. 특히미감리교회의교권주의

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성결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던 마틴 냅과 윌

리엄갓비의 성령세례론을고찰하였다.

셋째로, 성령세례가 지니는 신학적 의의를 밝히고자 했다. 우리는 성

령세례의 교회론적, 구원론적, 교회갱신적 의의를 논했다. 교회론적 성

령세례의 의의는 교회의 공동체성이 성령세례의 주체이신예수 그리스

도에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수 있다는 것이다. 구원론적 차원에서의성

령세례의 의의는 성령세례를 통해서만 성령의 내주하시는 성령의 성육

신이 이루어지고, 이로써 신자의 참된 성화와 능력의 삶이 이루어진다

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윤리적 및 교회갱신적 차원에서의 성령세례의

의의는 성령세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높은 뜻을 굴절시키고 거

역하는 모든 인본주의적 공격에 대해힘 있게 대항하도록 윤리적 실천

의 능력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는개인의 대 사회적 윤리실천을가능

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서 교권주의와 세속주의에 물들어가고

있는 교회를 개혁하고 갱신하는 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한다. 결

7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최인식, 성령세례의신학적 의의에대한고찰 71

Page 37: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subject of the Spiritual baptism is Jesus Christ and the Holy Spirit is

sent by Him for the purpose of the witnessing Jesus Christ. Its

s o t e r i o l o g i c a l meaning is revealed with the incarnation of the Holy

Spirit. That means Holy Spirit dwell in believer through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Since then the s a n c t i f i c a t i o n finally starts in

believer. In addition, we find its ethical meaning in his or her act of

resistance against all kinds of secular or ecclesiastical humanism. It

defies the true identity of Jesus-centered Spiritual community of the

church.

In its final analysis, the most important thing is that believers or

Christian communities should experience the incarnation of the Holy

Spirit through the Pentecostal baptism with the Holy Spirit, whether it

happens on the regeneration or after.

A Study on the Theological Meaning of theBaptism with the Holy Spirit

Choi, In-Sik

Professor

Seoul Theological University

Bucheon, Korea

This thesis is about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We methodo-

logically deals with it in three directions.

Firstly, we typologically approach the existing various theories of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You can find two grand types, such as

e x p e r i e n c e-oriented type of the Evangelical churches and dogma-

oriented type of the Reformed churches.

Secondly, we h i s t o r i c a l l y handle the American ecclesiastical

contexts of the late nineteenth century in which the baptism with the

Holy Spirit was most actively debated and practiced in the church

history. Especially, the ideas of Martin Knapp and William Godbey

on the baptism with the Holy Spirit are studied in detail. As leaders of

the Holiness Movement they enthusiastically founded theology of the

baptism with the Holy Spirit in spite of the oppression of the ecclesi-

asticism in terms of the Episcopal Methodist Church in America.

Finally, we theologically investigate the meanings of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They are to divide in three areas, such as ecclesi-

astical, soteriological, and ethical area in terms of the church renewal.

The ecclesiastical meaning of the baptism with the Holy Spirit is that

the essential identity lies exclusively on Jesus Christ. Because the

7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최인식, 성령세례의신학적 의의에대한고찰 73

Page 38: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신학에서의미학적경험의수용의양태와

그 비판적고찰

황덕형

(서울신학대학교, 부교수)

I. 예술의현실과신학적미학의질문들

한스 로크마커는 21세기를 맞는 오늘의 전문 예술의 상황을 매우

비관적으로 평가하고 있다.1) 그의이러한 평가는 신학의 영역에서 미학

적 작업을 적용하려는 많은 시도들에게 경보를 발한다. 왜냐하면 예술

상황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일부 신학자들이 모범으로 생각하는 근대

예술이 걸어 온 역사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로크마커에 의하면18세기에 순수 예술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 때 예

술은 실재 세계 속에서 결여되어 있던 통합된 세상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로 보였다. 당시 이성중심의 문화의 영향하에 종교적 세계

상으로부터 벗어나 있지만 기계론적 우주론 속에 속박되어 있던 인간

들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열었던 것이다. 삶의비 이성적이며통전적 현

실의 측면을 포함할 수 없는 계몽주의의 이성 개념의 한계와 초월적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75-107

1) Hans R. Rookmaaker/ 김헌수역, 『예술과 기독교』(서울: IVP, 2002), 22 이하.

Page 39: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유사 종교적 역할을 기대할 때부터 오히려 예술은 소위 고급문화와 저

급문화로양극화되기시작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예술에서기대되던신

비의 추구가 고독과 무의미의 현상으로 채워지면서 그 의미를 파악하

기 어려워 졌다는 사실,4) 더욱이 저급 예술은 맘몬의 신에게 절하면서

영혼을 파는 현상이 나타나며 그 결과 예술 자체도 그 양극화 속에서

고통을 받고있다는 사실도 지적하고 있다. 오늘예술에서 벌어지는이

현상들은 신학적 미학을 추구하는 새로운 시도들에게 심각한 한계와

문제점들을미리말하고 있지않는가?

이는 신학적 미학을 추구하는 운동이 진정으로 신학적 언어의 새로

운 가능성으로 대접받기 위해서는 무작정 일반적인 미의 체험을 신적

계시의 경험과 일치하는 것으로 주장하기보다는 그 미적 경험들이 자

신의 사태 안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와 복음을 드러낼 수 있는가를

먼저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함을 의미한다.5) 미학적 황홀경의 체험에서

경험되는 전체주의적 일체감, 무조건적 용서와 타인에 의한 전면적 수

용이 그 자체로 하나님의 계시적 존재사건과 일치하는 것인가? 아니면

가치를 상실한 세속적 사고체계의 한계로 인해 정신세계 속의 갈등과

분열, 소외를 경험하던 인간이 인간내부의“내적통일성을 밝혀내고 합

리적 긴장을 초월할 수 있는 현상”으로서 예술의 의미에 주목하기 시

작하였다는 것이다.2) 이러한 예술은 실제로는 일종의 변형-종교의 역할

을 하게 되었다고 그는 지적한다.3)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예술에

7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황덕형, 신학에서의미학적경험의 수용의양태와 그 비판적 고찰 77

2 ) 앞의 책, 15.; 참고 M. C. Beardsley, Aesthetics From Classical Greece to the

Present (Alabama: University of Alabama Press, 1966), 191 이하, 284 이하. 예술을

이해하기위해서 미, 취미, 숭고함 등의범주들이철저하게 연구하기시작하고로망주

의에 의하여 미의 절대적 의미체험도 가능해진다. 이러한 미의 현상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로망주의적미학에 근거하고있음을 알 수 있다. 미가가진초월적속성과 포

괄적인 속성, 그리고 민족적 일체감을제시하는 가족유사성의 공통적 보편성을 존중

하는 것은 그 자체로 옳은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 제시된 미학적 개념들

을 기독교적 계시와 동일시하고 복음의 의미를 형성하게 하는 표준으로 세우려 할

때 혼동과 비 기독교적 오만을 그대로 수용하게 된다. 곧 미적 체험이 내적 통일성을

밝혀내고 초월과 현실사이의 건강한 긴장을 유지할 수 있는 기준이기 때문에 이것이

기독교 계시를 받아들이는 지평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기독교의 진리를 인류 공통

의 미적체험과 같은 것이라고 여기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결과를 한국의 많

은 미학적 신학의시도들에서 발견하게 되는데 그들에게는 계시의 내용보다 미적 체

험에서 풀어지는 인간적 현상이 신학적 작업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손호현의 글은 이러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 보인다: 참고: 손호현,“춤의 신학-한국

인의미의식에드러나는 문화신학적 함의-”『한국기독교신학논총』, 한국기독교학회편,

2012, 79호, 183 이하.

3) 실제로 오늘날 일부 신학자들이 미적 경험을 주제로 한 예술적 신학이 오늘의 병든

신학적 언어의 질병을 치유하거나 세속주의의 급한 물결을 극복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하고 있다. 다양한 방식의 신학적 미학 혹은 미학적 신학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한꺼번에 모든 시도들을 규정할 수 없지만 미학적 체험의 발견이 신학의 새로운 동

력이고 모든 문제의 해결점이라는 전제가 거기 있다. 물론 비 표상적 언어의 발견과

타자적 존재의 생기적 측면, 암묵지가 작동하는 체험의 재 발견 등 인식론적이나 존

재론적으로 종교적 지평에서 상징적 언어가 재등장해야 할 필요와 이유가 있다는것

은 올바른 지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신학적 사유의 결정적 돌파구를 마련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사실 지나친 기대이다. 거기에는 이미 미와 하나님 경험 사

이에존재론적 일치가 전제되어 있기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을 보이는 신학적 시도들

중에 대표적으로, Richard Viladesau/손호현 역,『신학적 미학』(서울: 한국신학연구

소, 2001) 빌라데서는 자신의 저서 속에서 자기이외의 미학적 신학내지 신학적 미학

의 다양한 시도들과연구들을소개하고있다. 특히서문의각주 3)에서 제시된 연구

서들은 그 자체로 신학적 미학의 영역의 훌륭한 지침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가 하

면 한국의 신학자들 중에서 존재 신학적 관점에 대하여 거리를 두면서 바르트의 하

나님의 영광해명을 통해서 개신교적 신학적 인식론의 기초를 통해서 설명하려는 시

도로서, 심광섭, 『예술신학』(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4) 가장 대표적으로 프란시스 베이컨을 들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구성화가로 불

리는 그는 현대인들이 경험하는 분노와 공포 그리고 자기가 오랫동안 체험해왔던 위기

를 화폭위에“새로운 것을 향해 열려 있는 폭력”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참고: Christophe Domino/성기완 역, 『베이켄회화의 괴물』(서울: 시공사, 2011).

5) 김문환 편,『20세기기독교와예술』; 현대신서 55(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0). 여기에

는 예술적 경험이 기독교의 복음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다양한 유형들이 소

개되고 있다. 기독교가 예술의 경험을 철저하게 비판적이며 객관적으로 검토하여 좋

은(?) 예술과 나쁜 예술을 구별해야 한다는 견해(톨스토이, 리터등)와 예술의 미적

경험을 대등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쉬들러), 예술은 인간의 고유한 기능(하이

데거), 그런가 하면예술의신학적 환원과 신학의예술적 환원(폴 틸리히)이 가능하다

는 견해 등이다. 이러한 판단은 결국 복음의 신학적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

라 결정되는 것을볼 수 있다.

Page 40: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화와 예술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고 고발하고 있다.8)

그러므로 기독교는 자기 폐쇄증의 이 한계를 벗어나야 한다고 로크마

커는말한다. 동시에 사치와 향락오만과 좌절이 어울어지고섹스와 탐

욕으로 물들어 있는 현대의 예술시장을 개혁해야 한다고 고발한다. 세

속주의적 심미감9)만으로 무장한 예술이론들이 장악한 예술의 현재에

대하여 통곡하고 기도하고 사고하고 일해야 한다고 부르짖고 있는 것

이다.10)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예술이 기독교의 복음전도

의 수단쯤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호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예술을 시작할 때 그 예술은 자기로부터 소외되

고 비정직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예술은 그 자체로 훌륭한 역

할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

면서 로크마커가 찾는 기독교적 예술은 자신의 본분에 성실한 기독교

인에서 발생하는것인데 이는“삶의 위대성에대한경탄과 함께성령의

적극적인 심성으로 나타내는 것으로서 가장 심오한 깊이에서 기독교

적”11)인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단지 기독교적 예술의 원초적 경험을

해명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아니다. 실제로 이러한 일들은 모든 예술

가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그려야 할 혹은 표현해야 할 고유한 대상을

발견하는 발견술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12) 여기에 덧붙혀 기독교적

이런 경험일지라도 그 자체로는 하나님의 본질과 일치할 수는 없는 것

이며 단지 하나님의 이 세상에 대한 구원의 경륜적 행위와 연관이 있

는 것으로서 미학적 경험에서 제시되는 전체성은 단지 인간학적 의미

한계와 그 지평의 전체성만을 의미하는 것인가?6) 우리는 이런 논쟁을

통하여 이 인간학적 경험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언어로 누구의 주도

하에 변화되는지도 밝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

떻게 무엇을 통하여 일어나는가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예술적

체험이 그 예술자체로서 그리스도로부터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리스도

아래 있는 것으로 다시 변혁되면서 간접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지

칭할 수 있는 언어로 변형가능한지를검토해야 할 것이며 이는 당연히

미의 인식론적 특성과 존재론적 특성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뒤따라야

함을보여준다.

I I. 예술의상황과예술의신학적수용의단계들

1. 일차적인만남의단계: 현대예술의심미성과기독교예술인

의 세계관

로크마커는 미학이 기타 다른 학문으로부터 독립적이 됨으로써 오

히려 더 깊은 내적 갈등으로 빠지게 되었고 이러한 위기가 배태되던

18세기에 기독교는 오히려 경건주의적 자기 확신 속에 빠짐으로써 세

계에 대한 참된관심, 즉 창조계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을 상실하고 있었다고 진단한다.7) 그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문

7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황덕형, 신학에서의미학적경험의 수용의양태와 그 비판적고찰 79

6)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에 대한 G. v. Rad의 견해는 사실 미학적 체험이라는 것은 보다

더 큰 신학적 지혜의 새로운 영역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참고: G. v.

R a d /허역 역, 『구약성서신학 제3권, 이스라엘의 지혜의 신학』(서울: 분도출판사,

1980), 특히 115 이하.

7) Hans R. Rookmaaker, 『예술과기독교』, 28. 이 시대의 위기라는것은미학과 철학이

서로구별되기 시작한 것을의미한다.

8) 앞의책, 29.

9) 여기서 심미감이란 예술가 개인의 감정도 아니고 감상자의 심리적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작품 자체의 구조에 의하여 매개되어 쌍방의 예술적 전달자들의 상호

주관적 경험 속에서 찾을 수 있는 독특한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심리학적

해명으로는 모두 해소되지 못하는 미적 대상의 고유한 가치를 추구하는 활동을 의

미한다. 참고: 오병남,“현상학과 미학의 문제”,『현상학이란 무엇인가?』한국현상학

회편(서울: 심설당, 1990), 18 이하.

10) 앞의책, 33 이하.

11) 앞의책, 42.

12) M. Ponty/ 오병남 역, “세잔느의회의”, 『현상학과예술』(서울: 서광사, 1977), 특히192.

Page 41: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2. 이차적인만남의단계 : 예술의자족성의이유들과그 예술이

추구하는실재성

그렇다면 이러한 예술가를 떠나 예술 작품은 그 스스로 가치를 가

지고 있는가?17) 로크마커는 복잡한 미학 이론을 다시 반복하거나 철학

적으로 검토하지 않은 채 현대의 소외 현상을 극복하고자 한다. 즉 예

술을 미학적 경험을 심미감의 결과물로만 보고 그 존재론적 연속성을

무시하거나 약화시킴으로서나타난 진, 선, 미 사이의 단절현상을 극복

하고자 하는 것이다.18) 그는 모든 존재자들의 의미를 창조주 하나님으

로부터 찾는 것처럼 예술에 하나님께서 그 존재를 부여하셨다는 사실

에 예술 작품에 의미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 우리의 주의

를 요하는 대목이 있다. 로크마커가 예술을 정당화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이유가 근대이후 미학에서는 감추어졌던 예술의 존재론적 차원

의 언어를 발견하였기 때문이 아니다.19) 물론 예술이 갖은 보다 깊은

예술의 체험은 예술가이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작업에 최선을

다하여 헌신을 할 때 그는그리스도인으로서여타 다른 사람들과 다르

게 된다는 것이고 그렇게 다름을 정직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13) 같은 예술을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이 어떻게 다르게

된다는 것인가? 또 얼마나다를수 있다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예술가가 무엇인지 되짚어봐야 할 필요가

있다. 로크마커에 의하면 예술가는“시, 노래, 심상, 은유 형태등의 창작

을 통해 지혜 교훈 등에서 얻은 바를 표현하기도 하며 또한 (그것의)

정곡을 찔러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14)들

이다. 이 활동들은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이며 그래서 그 자체로 영적이

다. 인간이란 존재가 영적이고 그 자신이 만나고 있는 정신의 작용 결

과 형성되는 모든현실에 대하여 가치-중립적인 자로남아있을수 없

기 때문이다. 이와 상응하게 로크마커는 기독교 예술가는“사회 안에서

활동함으로써 삶을 영위할만한 가치 있는것으로, 또한 영적인 의미에

서 풍요로울뿐 아니라 심오하고 흥미있는것으로 만드는 사람”15)이라

고 규정한다. 일반인들이 예술 행위 안에서 자신의 영성을 펼쳐나가는

것 같이그리스도인은 동시대인들의 세계관에 동참하지만 그것보다 더

포괄적이며 풍성한 그리스도교적 세계를 펼쳐가는 사람이다. 그는“자

신의 재능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행위와 동료에 대한 사랑의 봉사로

서,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사용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자각하는

자”16)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고유한 심미관이 계발되고 그것으

로 세계를 새롭게 표현해 낼 수 있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교 예술인인

것이다.

8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황덕형, 신학에서의미학적 경험의 수용의양태와 그 비판적고찰 81

13) Hans R. Rookmaaker, 『예술과기독교』, 47 이하.

14) 앞의책, 38.

15) 앞의책.

16) 앞의책, 45.

17) 이는 미적 판단에서 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반성을 포함한다. 칸트는 미를

분석적으로 이해하면서 미란 객관적인 사물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그 사물이 주관

에 미친 감정에 대한 것이라고 본다. 첫째, 미라는 것은 경향성으로서 아무런 전제

없는 자유로운 만족의 감정인 것이다(disinterestesd and free satisfaction). 둘째, 이

판단대상은 단칭적이만 그 내용은 보편적이다. 미의감정이기에 객관적 개념 형성이

불가능하며 논리적 판단의 보편성을 주장할 수는 없지만 주관적으로 전체적이며 보

편적이다. 이는 공통적 타당함(Gemeingueltigkeit)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또

한 미는 사물과의 관계에서 특정 목적 없는 목적성 그 자체(Zweckmaessigkeit ohe

Zweck)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목적성은 지적이지도 감각적이지도

않은또 다른 별개의 것이다. 네 번째로 미의 판단의 양태는 필연성을 갖고있다. 즉

이 필연성은 자연스러운 인식의 판단능력에서 그것이 자유롭게 생겨날 수 있는 공

통의감각을 요구한다. 이러한 칸트의 비판은 철저하게 주관적이며 이러한 주관성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것이 현대 미학의 경향이며 로크마커도 이러한 경향에 함께 참

여하고 있다. 참고: I. Kant, Kritik der Urteilskritik, hrsg. von Gerhard Lehmann,

(Stuttgart: Philipp Reclam,1963), Teil 1, §1- §22.

18) Richard Viladesau/손호현 역, 『신학적미학』, 33 이하.

Page 42: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실재의 성격은 단순히 과거의 것을 기억하기만 하는것도 아니라 현재

이며 동시에 미래의 전망을 포괄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예술이나 미적

체험에서 경험되는 실재는“세계가 우리를 위해 열려 있고…사물들이

란 예술가들이 우리를 위해 형상화된 방식으로 알려지도”록24) 되어 있

음을알려준다. 더욱이 자신의 세계를 형성함으로써독자나 관람객들에

게 하나의 독특한 중요한 것을전달하면서 관련성을 맺는다. 이 예술의

실재는 시, 공간의 제한을 넘어서 독자나 관람객과 같은타자들에게자

기와의 독특한 관련성을 맺게하는 것이다. 그런해석학적 특성을 통하

여 예술 작품에서 논의되는 그 실재는“건설하고 개현하는, 긍정적이고

아름답고 선한 것이 될 수 있는 반면에 파괴적이고 추하고 빈약한 것

이 될 수도있는것”25)이다. 예컨대이 예술에서 지칭되는 실재곧 미의

실재는 단순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사물이나 이성적 판단에 의하여 진

위가 가려지는 대상적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창조하면서 그와 더불

어 자신이 그리는 세계를 형성하는 능동적인 창발의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것이다. 그렇기에 예술과 미적 경험이 발견하는그 세계는

진.선.미의판단이 가능한 실재라고로크마커는말하고 있다. 또한매우

구체적으로는 이 예술과 미적 판단이 제시하고 구성하는 실재는 사회

적 구속력을 갖고 있으며 사회의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

예술의 실재성은“삶의 예배의식”(liturgy of life)26) 안에 자리 잡은 형

식적요소일 뿐 아니라 메시지이기도한 것이다.

존재론적 질서에 대하여 그는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더 명료하게는이

예술의 깊이를 창조론 안에서, 신앙 안에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20) 예

술이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할 하등의 필요가 없이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술을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가능성(potential)21)

이기때문이라는것이다.

이제 예술은 그렇다면 실재적인가? 아니면 인간의 주관적 발견에

의한 그림자 같은 것인가? 로크마커는 실재를 다음과 같이 설정 한다:

예술에서 사용되는 실재란 언제나 실현된 실재이다.“우리는 그것을 발

견했고 이름을 붙였고, 접근가능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외

부 세계에 대해 우리가 알고 이해한 것을 본다”22)고 진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재의 성격은 단순하게 거기에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

을 보고하는 형식의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우리의 시각을 동일한현실

속에 실현시키기 원한다는 의미에서의 창조”23)라고 말한다. 이 새로운

8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황덕형, 신학에서의미학적 경험의 수용의양태와 그 비판적고찰 83

19) 신학적 미학의 입장에서 미의 신학적 의미를 재확인하는 작업은 보통 미의 존재론

적 의미를 재발견하는 것에서찾아진다.

20) 이는후에좀 더 자세하게 논의될 것이지만보수적인입장에서는미학의 존재유비

의 측면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연의 영역의 독립성은 곧바로 은

총의 상실을 의미하는것이기 때문이다. 보다 더 극단적인 입장에서 참고: Francis A

Schaeffer/ 문석호 역,『기독교 문화관』(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9) 특히 237

이하; 같은 저자/김진선 역, 예술과 성경,『예술과 기독교』내의 Part 1, 41 이하. 이러

한 주된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소유이지만 그

럼에도 불구하고인간이죄에빠져 있기에 인간은끊임없이이 둘 사이의한계를 넘

으려 하기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말대로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에죄되

고 악한 세상을 통해 구원을 이루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이들의 분리는

너무나 연약한 인간학적 고백일 뿐이다. 그 대신우리는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확신

에 의해서만 인간과 초월의 세계가 이어지고 있음을 말해야 한다. 존재유비가 아니

라 은총의 유비를 주장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참고: Karl Barth, “Christen-

gemeinde und Buegergemeinde,” Karl Barth, Rechtfertigung und Recht, Chris-

tengemeinde und Buegergemeinde,Evangelium und Geset (Zürich: TVZ, 1998).

21) Hans R. Rookmaaker, 『예술과기독교』, 55.

22) 앞의책, 57.

23) 앞의책.

24) 앞의 책, 60 예술의 특징은이렇게 아직 알려지지 않거나 본질상 알려질 수 없는 것

을 알려지도록 만드는 사람들의 경험과 관련이 있다. 참고: F.W. Dillistone, “신학과

예술적체험”, 『20세기기독교와예술』, 140 이하.

25) 앞의책, 57.

26) 앞의 책, 61.

Page 43: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대한평가기준을 거쳐야 한다. 일단미의수준에 다달아야한다. 일정한

미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은 그 자체가 부족한 것이다. (예술을 다루

는 자는 먼저 훌륭한 작품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두 번째로 그것

이 하나님을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는 규범에 상응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하고(예술가는 그 가치표현에서 중립적일 수 없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세 번째로

이 두 과정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결국 법률적 규칙에 얽매인 것이

아닌 때와 장소에 따라 적절한 형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

을 발견하기 위해서, 즉 고상한 취미29)를 표현할 수 있기 위해서 노력

해야 할 것이라고 권면한다.30) 여기에서 고상한 취미란 다름 아니라 소

상하게 설명되지 않았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이 내재되어 있는 미의 완

3. 삼차적만남의단계: 일반적예술의기독교적변형의가능성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예술의 실재를 기독교적으로 판단하고자

할 때 우리는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가? 기독교적인 예술가가 기

독교적 미적 감각을 가지고 자신의 삶 속에서 일정한 형식을 통하여

예술적 대상을 표현할 때,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기독교적 세계상의

도움을 받아 현재의 삶을 더 풍성한 삶의 가능성에서 제시하고 있을

때, 그는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그가 수용해야

하는 미적 기준과 예술적 규범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 그가 그저 아

름답다고 느끼는데로, 주어져 있는형식들을무너뜨리면서 자유롭게 자

신의 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가? 로크마커는 현대예술의 경향 중 하나

로서 형식적 법칙이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또한개

인적인 선호도에 따라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

다. 그러나 어떤예술작품, 어떤예술가라도 자신의 형식적 틀을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로크마커에 의하면 각 예술가들은 그 스스로 하나의

형식이기 때문이다.27) 그렇기에 로크마커에 의하면 이러한 상황 하에서

선호도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을뿐만 아니라 해당 작품의

예술적 수준의 높낮이를 말할 수 있지만 그 예술이 표현하고 있는 것

의 내용과 그 질은 규범의 문제이기를 그치지 않는다.28) 현대의 예술의

상황에서처럼 한 예술작품이 불확실성과 절망을 표현하고 세속사회의

감정을 부축이며 반 규범적이며 무법적인 것에빠져 있다면 그것을 우

리는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세 가지절차가필요하다는것을로크마커는 말하고 있다. 먼저, 예술적

수준의 차원과 심성의 차원에서 우수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예술상황에

8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황덕형, 신학에서의미학적경험의 수용의양태와 그 비판적고찰 85

27) 앞의 책, 75. “나는 그 둘을…그것을 지성의 힘을 빌어 작품 속으로 구성시켜 놓으

려 하네.”세잔느와 베르나르와의 대화, Souvenirs sur Paul Cezanne (Paris 1912);

M. Ponty/ 오병남 역, “세잔느의회의”, 192에서재인용

28) 앞의책, 65.

29) 이는 다름 아니라 칸트가 마지막으로 제시한 숭고미에 대한 논의와 깊은 연관이 있

다: 그에 의하면 숭고는 일반적 미와 마찬가지로 논리적으로는 개별적인 사물에 대

한 판단과 연관되어 있지만 그 단칭판단에서보편적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같

다. 또한그 미와숭고의 판단은 사람들에게 쾌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그것은 사

람들의 이익과 무-관계적이다. 룰론 그의 말대로 미는 형식에 관여되어 있는 반면

숭고미는 그 형식의 제한성을 뛰어넘는 것과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미는 그 사물의

목적성과 깊은 연관이 있지만 숭고는 그 대상에 의하여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넘으

면서 발생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인간이 경험하는 숭고의 감정은 인간의 상

상력의 한계와 연관되어 있으며 무한과 같이 이성의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서 한꺼

번에 표상되는 순간 드러난다. 이 무한대를 한계 안에서 받아들여야 하는 작용에서

이때 요구되는 그 작업을 이성의 한계 때문에 인간이 실행할 수 없기에 그 유명한

순수 이성의 이율배반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이율배반으로 남

아있던 것이 이제 판단력 비판에서 숭고의 감정으로 수용되면서 해명되는 것이다.

즉, 순수이성의 무한성을 알게 되면서 동시에 우리는 단지 한계 안에서만 받아들일

수 있다는그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경계의상황속에있는느낌을표현하는그 과정

이 바로숭고의 감정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인간이 모든감각을 뛰어넘는 기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동시에 이성의 위대함의 통찰을 통해서 얻게

되는쾌락의 감정으로 발전한다. 비록 칸트가 여기에서 이 전적인 숭고의 극한의 쾌

락의 감정을 심리학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선험철학적인 관점에서 보편적 진리에

대한 증거로서 주장하더라도 그 결론은 분명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I. Kant,

Kritik der Urteilskritik, Teil 1, 2 Buch, §23-§29.

30) 앞의책, 70 이하.

Page 44: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이러한 태도를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다. 첫

째 소위 개신교 신학의 전형인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분리를 철저하게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간의 내재성과

구분지으려는 성서적 전통과 일치한다. 실제로 성서의 욥기를 비롯한

성서의 창조신학은 하나님의 존재와 이 세계의 피조물의 상호관계를

연속성 속에서혼동하지않는다. 둘째,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과예술영

역의 구분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존재론적으로 영역을 구분하는

신학적 배타 원리로 작동하게 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을 이 해석은 보여

주고 있다. 실제로 이들이 받아들이는 논지에는 하나님의 것을 인간이

감히 손댈 수 없다는 철저한 배타성이 작용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

수주의자들의탐구방식은한계에 부딪친다. 이 보수주의적견해는 성서

적 통찰과 세속적인 미의 현실사이에서 일정한 지침을 주었을 뿐 그것

을 창조론적 기반 위에서-비록 죄로인하여 단절된 경험과 역설적 모

순을 품고 있더라도-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설명을 제시하지 못

한 채 그것이 구속사역에서하등의 존재가치가 없는것처럼 다루고 있

는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다스리는 이 세상에서하

나님께서 구체적으로 구원의 비젼을 성취해야 한다면 미학적 체험은

반드시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 작업이 결국 인간의 일로만

남아있는 것처럼 그리고 있을 뿐 그 인간의 배후에서 사역하는 하나님

의 사역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신학적 진술의 언어와 철학적이며 인간학적 현실 이해의 두 세계가 서

로 물리적으로 섞여있을 뿐 그 둘 사이의 진정한 이행 관계와 변혁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다 말하지 않는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타자적으로 남아 있으면서도 이 세계의 다양한 범위안에서 총체적 이

해의 역할을 하려는 이 예술의 기능을 하나님의 내적운동으로 어떻게

활용하고 있으신지를 하나님의 운동으로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

기에 우리는 미학적 경험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것의 신학적 의미를

다시진지하게 대하는 견해들을살펴보아야 한다.

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인다. 하지만 모든 미학적 탐구의 문제는 바

로 이 기독교적미를어떻게 이해하는가의문제였다.

4. 창조와타락의사이: 신학과예술의만남의한계

전문 신학자는 아니지만 예술가요 문화비평가인 로크마커는 예술이

신학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 보수적인 관점에서 잘 표

현하고 있다. 보수적인 그도인정하고있는것은 예술의 독립성과거기

에서 파생되는 미의 성격 그리고 미의 본질적 측면이다. 그는 예술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예술의 실재가 창의적이며 역동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고 전파성과 집중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있었

다. 즉 미적존재의 초월성과 우주안에서의그 독립적 의미, 그리고 또

한 그 시대를 초월하는 독립성을 발견하는 예술가와의 긍정적인 관계

의 양태도 분명하게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예술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피조물의 한 영역으로서 독립적이며 자족적인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어느 정도 예술을 통해서 추구되는 예술작품의 존재가

이 세계의 내적 통합의 의미도 포함할 뿐 아니라 어느 정도 초월성과

내재성 사이의 경계선의 역활도 하고 있다는 것을인정하고 있다. 다만

앞에서 검토할 내용, 정작전문신학자들이주장하는 바, 중대한 차이는

예술작품의 존재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매개 내지 직접적 연광성의

보루라고 인정하지않는다는점이다. 로크마커에의하면 미는하나님으

로부터 온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 이상은 아니며 이 예술은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되는 하나님 나라의 한 비유이지 하나님의 존재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그런 존재론적 일치를 거부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

서 이들은 이콘도 어떤 의미에서는 우상숭배라고 단정할 수 있었던 것

이다.31)

8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황덕형, 신학에서의미학적 경험의수용의 양태와 그 비판적 고찰 87

31) 앞의책, 72.

Page 45: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건드리지 않으면서 미학적 전통에 충실하게 남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

라 그것이 신학적 진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 발견과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전까지 미의신학적 의

미를 탐구하던 것과는 달리 미학적 경험에서 신학적 주제들을 다루려

고 한다.34) 물론 그가 신학적 전통을 따라 보다 신학적 관점에서 미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 즉 미학적 주제들이 어떤 계시적 함의를 가지고

있는가를 비평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적 미학과 미학을 통해 신학을 이

해하고 신학안의 미학적 요소들을 드러내서 그것들이 보다 포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미학적 신학을 구분하면서 이 둘을

구분하기도 하지만35) 실제로는이 둘이미학적 경험이란 공동의 장에서

상호 통할 수 있는 보다 더 상위 개념인 신학적 미학이 요청된다고 주

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학적 미학이 다루는 영역에 대한그의설명에

서 드러난다. 그가 다루고자 하는 신학적 미학의 영역은“1) 감정과 상

상력의 차원에 있어서의 인간 지식에 대한 신학적 설명2) 아름다움의

신학. 3) 예술과 개별 예술신학형식에 대한신학적 사유”36)를 포함한다

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미학적 경험의 영역은“적접적”의미에서 종교적

이며 신학적인 경험, 표현, 담론의 장소이고 둘째로 간접적으로 종교적

이거나, 성스러움과 관련지어질 수 있는 세속적 인간 경험의 장소”37)라

고 해명하면서 인간의 거의 모든 초월 경험의 장소를 신학적 사유의

장으로 삼고자 한다는 것을보여준다.

I I I. 신학적미학의확립을위한미학적체험의해명들

1. 신학적언어의가능성을찾는운동으로서의신학적미학

신학적 미학을 새롭게 시작하려는 사람들은 한결 같이 서구 신학사

에 있었던 미의 상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 르네상스 이후

신학과 교회는 확실히 미학적 문제에 대하여 무관심한 채로남아 있었

다. 이렇게 미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빌라데

서는 이를 신학의 본질적 요소인 초-합리적 역동성이 이성중심의 체

계 속에서 갇혀있는 소외현상32)으로 해석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신

학의 본래적 대상에 적합한 언어적 특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로

그저 이성중심의 언어로만 신학을 시도해 왔다는 철저한 자기 비판적

반성인 것이다.33) 신학적 미학을 구체적으로 체계화하기 원하는 빌라데

서는 신을 말할 수 있는 지평으로서 미학적 체험을 발견하고 미의 기

초 신학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미를 통한 하나님과의 소통을 찾고자

한다. 즉 그는신학적 미학의 부흥을 통하여 하나님에게 이르는 인간의

통로를 확정짓고 싶은 것이다. 그러한 빌라데서의 시도는 사실 철학적

인 수준의 미학적 전통으로부터 야기된 것이고 그는 기독교 신앙의 미

학적 영역을 발견하면서 미학을 통하여 계시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신앙의 전통과 배치되지 않을뿐 아니라 오히려 지금까지 가려져 있던

잠재적 능력을 계발하는 것이 된다고 믿고 있다. 그는 신앙의 요체를

8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황덕형, 신학에서의미학적경험의 수용의양태와 그 비판적고찰 89

32) Richard Viladesau/손호현 역, 『신학적 미학』, 44 이하; 같은 내용으로 R i c h a r d

Harries/김혜련 역, 『현대인을위한신학적미학』(파주: 살림, 2003), 11 이하.

33) 이는 신학 본래의 고유한 사태에 맞는 언어의 방식으로 신학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

장하던 이전의여타다른 신학적 운동과 일맥상통한다. 다양한 해석학적이며해방신

학적 운동들은 이미 성과 속의 이원론을 밀어내고 역사내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초

월성을 인간의 내면적 삶의 체험과 더불어 받아 들일수 있는 언어의 발견을 소망해

왔다. 빌라데서를 비롯하여 미학적 체험을 강조하는 다양한 학자들은 다만 그 순간

에도미적특성이충분하게드러나지못하였다는지적을 하고있는것이다.

34) 앞의 책, 86-89, 특히 그는 이러한 자신의 의도를“미학적신학의 차원, 혹은 신성한

시작이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신학적 담론을 효과적이고 아름답게 만드는 이러한

미학적 신학의 차원은 모든 신학적 분야들과 종류들에 적합한 것이다.”이에 대하여

손호현, 『아름다움과악, 신학적미학서설』(서울: 한들출판사, 2009), 23 이하.

35) 앞의책, 63.

36) 앞의책.

37) 앞의책, 49.

Page 46: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없는 개별적인 미학적 인식이 철학적 사유 안에 자리 잡게 되었고 동

시에 이성의 논리에 의거하여 진리를 추구하던 이성중심의 연역적 추

상적사고의 독점적 지위를 상실하게 만든 것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바움가르텐은 미의 감성적이며 주관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

측면까지도 고려하여 인간의 사유 속에 주관적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현재화된 것은 자신의 완전성 가운데 존재하는 세계라고 주장하면서

이 우주와 사유 사이의 존재론적 일치를 미학적 영역에서 추구하고 있

음을 드러내었다.40) 이 세계의 완전성은 다름 아니라 미의 영역 안에서

사유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미학적 차원에서 부분들과 여러 다양성들

이 조화에 이르게 되고 이 세계의 질서가 통일성에 이르는 완전성을

성취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 미학적 통일성과 완전성에서 인간

은 하나님의 완전성을 알 수 있게 된다고 가르친 것이다.41) 바움가르텐

의 미는analogon rationis로서 나타난 것과 같이 빌라데서는 이제 이

미의경험을 신앙의 신비가 드러나는그런자리로 만들고 싶은것이다.

빌라데서의 이러한 시도는 사실 미학이라는 철학적 전통만이 아니

라 가톨릭 교회의 오랜 존재유비의 전통과 연관된 것이어서그 의미가

더 깊어진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빌라데서는 영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한

발타자르의 신학적 미학과 반 더 레우의 미학적 신학의 시도들을 평가

하면서 그들 속에서 신학적 근거로 찾은 것이다. 발타자르가 바르트의

신앙유비에 대하여 존재유비를 대비시켜서 신학적 논리로서 주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친구 프리즈바라의존재유비를 통해서 찾을 수 있

다. 이미 은혜의 빛 아래서만 계시의 사실을 인식할 수 있으며 계시의

인식은 그 인식의 대상과 구분될 수 없다는 관점에서 철저하게 그리스

도 중심적 신학을 주장하는 발타자르는 동시에 그 기독론 중심의 인식

2. 미학적지평의보편성과존재유비의초월적내재성

이러한 그의 결단은 바움가르텐이 제기하였던 미학의 전통을 신학

적으로 발전 계승시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빌라데서의 바움가르텐에

대한 평가는 비판 일색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의 정신을 충실히 따

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움가르텐이 미학과 논리학, 미학과 철학 그

리고 미학과 신학 사이의 관계를 구분지어 놓음으로써 파생된 존재론

적 연속성의 실종38)을 지적하고 있지만 실제로 빌라데서의 작업은 바

움가르텐의 뜻을 발전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바움가르텐은1750년 그

의 기념비적 저작에서 미학은“감각을 통한 인식의 학문( s c i e n t i a

cognitionis sensitivae)”이며 또한 동시에 심미감을 형성시키는 기술

(ars formandi gustum)” 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이성의 명석 판명한

판단 능력을 더불어서 마음의 열등한 능력이라고 평가되어 왔던 상상

력과통찰력, 예술작품과 시를연구하는길을선택하였다. 이렇게함으

로써 그는 감각과 감정의 영역에서 자라난 예술과 미적 영역을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적 과제로 만들었고 그 결과 철학과 예술 사이의 막혀

있던 담을 헐게되었으며 철학적 진리와 예술의 진리가 서로 화합하게

되는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39) 그 결과 논리로 환원시킬 수

9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황덕형, 신학에서의미학적경험의 수용의양태와 그 비판적고찰 91

38) 이러한 판단은 소위 스콜라철학으로부터 존재의 초월적 특수성(proprietas trans-

cendentalis entis) 범주를 사상적으로 이어받은 모든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진, 선, 미, 단일성, 실체 등의 몇 가지 특성들은 관념적으로는 구분되

지만 실제로는 구분되지 않기에 각기 나뉘어서 논증될 수 없는 것인데 바움가르텐

이 이를 나누기 시작하였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참고: G. Vattimo/ J. R. Snyder 역,

The End of Modernity(Baltimore, 1988), 김산춘,『발타살의 신학적 미학: 감각과 초

월』(서울: 분도출판사, 2003), 71에서재인용; 또한앞의책, 215 이하.

39) J. Ritter, Aesthetik, in Historisches Woerterbuch der Philosophie, Bd 1, Basel:

Schwabe & Co, Ag. Verlag, 1971, 555. 이러한 사유의방식에 맞추어 바움가르텐은

미의 다양한 측면을 고려하였는데 미란 인간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물에 대하여

그것을 느끼면서 감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 우리의 마음에맞아서 쾌락을일으키는것(quod placet dicitur pulchrum)이며동

시에형이상학적측면을 가진것이기도 하다.

40) 앞의책, 558.

41) 앞의 책, 이러한 영향 하에서 헤겔은 예술을 종교와 철학과 더불어 절대정신을 드러

내는인간의 정신적 작업의 과정으로이해하게된다.

Page 47: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마지막으로 신학적 논의에서 사용되는 방법론적이며 후험적인 성찰을

유지하는 논리적 고찰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발타

자르의 신학적 미학은 미적 영역의 재발견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

고 그 의미를 추구하였으나결국“세속적인 철학적 미학의 비신학적범

주들을 가지고 작업하는 것이아니라고”할 수 있으며47) 오히려“십자가

와 지옥으로 내려감, 그리고 부활의 드라마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로 우리에게 인식될 수 있는지에대한성찰”48)에서완성되는 것이

었다고 빌라데서는평가하고 있다.

3. 미학적신학의존재론적, 인식론적특성

한편 빌라데서는 발타자르의 이러한 시도에서 보다 더 미학적 차원

을 새롭게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큰 전제로 등장하는 것은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을 표상하는 것은 이

미 그렇게 무엇인가를 표상할 수 없다는 것을 만나고 있는 존재의 구

조와 조건을 인정해야만 가능한 것이라는 점이다. 즉 말할 수 없는 것

이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나는 우리 존재 지평의 구조주의적 분석

이 그 기초를 이룬다. 빌라데서는 이때 표상 불가능한 것을 표상 불가

능한 것으로 그대로 표상하는 것이 바로 사유와 상상력 속에서 확인되

지 않은 무엇으로서 등장하는 하나님을 표상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위에서 전제된 것처럼 이 불가지성의 상황에는 하나의

역전의 현상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신의 불가지성이 우리에

게 신이 불가지한 대상으로 그대로 이해되고 있다는 불가지성의 현실

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불가지성이 구체

적으로 전개될 때 우리는 신의 불가지성의 교리에 도달하게 되지만 이

이 존재유비의 패러다임에서 설명되는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의 역동적

이며 쌍방적인 관계42)에서 더욱 빛난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다. 먼저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는 성자하나님의인간됨을 말하고 있으

며 그 인간됨은 이미 피조물로서의 이 세계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라

는 점에서 계시의 질서가 창조의 질서를 무시하지 않는 것은 자명한

것이라고 평가한다.43) 이 세상의 피조물들이 창조주와 관계 맺게 하는

궁극적인 깊이가 역동적인 관계로서 드러난 존재유비를 찾을 수 있다

면, 이는 오히려 피조물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고 거

기에 참여하는 주체와 자유를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44) 존재유

비가 신과 세계 사이의 정적인 관계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쌍방적 연

결의 깊이에서 나타난 동적 관계에 대한 진술이라는 것에 근거하여 이

제 발타자르는 그의 미학을 발전시켰다.45) 제1부 미학에서는 계시론,

즉 하나님의 무한한 자유가 유한한 인간의 자유 사이의 만남의 지평에

대한 탐구를 진행하고46) 제2부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행동하셨

던 것처럼 인간의 행동이 문제시 되는 윤리학적 사고를 하고 있으며

9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황덕형, 신학에서의미학적경험의 수용의양태와 그 비판적고찰 93

42) E. Przywara, Analogia Entis (Einsiedeln: Johannes-Verlag, 1962), 특히186 이하.

43) H. U. von Balthasar, Karl Barth, Darstellung und Deutung seiner Theologie

(Einsiedeln: Johannes Verlag, 1976), 117, 123 이하, 132 이하. 여기에서 발타자르

는 계시의 진술에는 그 계시가 일어나는 장소로서 하나님과 구분되게 존재하는 세

계를 전제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계시는 하나님과 세계가 이미 실재적으로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로서 신적 창조의 실재성에 대한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

이다.

44) H. U. von Balthasar, Karl Barth, 123 또한 같은 논의를 창조와 계약의 관계에서 찾

을 수 있다. 131 이하.

45) 그의 이론은 사실3부작 전체를 돌아보았을 때 의미를 알 수 있다. 제1부는 신학적

미학에 대하여 그리고I I는 신의 드라마I I I는 신학적 논리에 대한 저술이다. 이는 제I

부에서는 신학적 미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이 세상의 미가 어떻게 만나고 있는

지를 살피는 작업을 하고 I I부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우리에게 전달하고

계시는 가를 교리적으로 묻는다 마지막 제I I I부에서는신의 논리학을 밝혀서 유한한

언어가 하나님의무한하신뜻을어떻게살피는 가를알고자 한다.

46) Richard Viladesau/손호현 역, 『신학적미학』, 81 이하.

47) 앞의책, 78.

48) 앞의책, 81이하, 특히 84.

Page 48: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가 단지 그가 감각 경험적으로 파악했던 전체 세계의 한계를 못 넘어

간 반면지금 문제시 되는초월론적인식론의 토미스트적관점은“세계

내 대상들의 인식에 대한 판단과 아프리오리적 지식의 조건으로서의

초월성은 반드시 이 세계를 넘어서는 초월성이어야 하고 이 세계에 속

한 모든 종류의 지식들에서 초월성은 초월성으로 수용될 수 있으며 그

렇게 해서 형이상학의 가능성에 대한 칸트의 조건들조차 충족시킬수

있다”55)고 주장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빌라데서는 인식이 일어남에 있

어서 실재와의 만남이 첫 번째 현실이며 그렇게 그 현실과의 만남은

오로지 메타포로서만 사유될 수 있다고 확증한다. 그리고 이때 유비적

상상력의 차원은 결국 이미지의 미적 차원과 맞닿게 되었다고 설명하

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미학적 지평에서 확인된 초월론적 인식론은 어떻

게 존재론적 기초를 닦고 있는가? 하나님 체험과 연관해서 빌라데서는

하나의 질문을 먼저 제시함으로써 이 과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하나님

에게 마음을 고양시키는 미학적 경험이 신 존재에 대한 확신을 전제하

는가? 아니면 이 미학적 경험이 우리의 신념을 이성적으로 근거 짓는

일종의 증거를 제시하는가?56) 빌라데서는 미학적 감상의 경험이 우리

에게일종의 증거를 제시한다는 것을보여주고 싶어한다. 즉 미의일반

적 체험이 우리로 하여금 고양의 효과를 경험하게 하고 이를 통하여

실제적으로 인식의 상승이 일어나고 초월적 존재와의 상응이 일어날

수 있다고 증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근거 짓기

위해서 서구의 미학사를 검토하는 빌라데서는,-그도 지적한 것처럼

현대에는 더 이상 자명하지 않은 원리로서-미의 다양성은 또한 미의

계급구조를(감각적-이성적-신적) 보여주었으며 거기에는“참여에 의

한 존재”라는 독특한 존재원칙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57) 그 대신

불가지성, 인식 불가능성은 하나님의 실재가 드러나는 존재적 신비의

사태로 재해석될 수 있다는 말이다.49) 그리고 이런 상황이 연출되는 그

주변의 존재적 상태가 바로 아름다움, 미학적 지평이라는 관점에서 빌

라데서는상상력과신화적 사유를 적극적으로옹호하게되는것이다.50)

이러한 미학적 관점에서 빌라데서는 이제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인식의 문제를 해명하고자 한다. 특히 여기에서 빌라데서가 주로 취급

하는 것은“계시가 일어나는 순간 그 계시의 수용을 가능하게 하는 인

간학적 조건”에 대한 탐구이다.51) 이와 연관해서 첫 번째로 빌라데서는

인식의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그 인식의 초월론적 조건을 어떻게 선취

할 수 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형이상학적 해답을 주고자 한다. 이는계

시에 대한 인식론적 이해를 주고자 할 때 유용하다. 즉“기독교 계시의

실증성은 그것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내용을 어떤 인간 실존의 아프

로오리적 구조들로부터연역해 내는것을배제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그러한 구조들로부터 우리는 인간에 계시되는 것이 가져야만 하는

어떤 특성들을 유도적으로 예견할 수는 있을 것”52)이라고 추측하는 것

이다. 빌라데서는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확립하기 위해서 라너의 초월

론적 신학적 인식론53)이나 로너간의 신학적 인식론54)을 유도하고 있다.

이 초월적 영역의 철학적 관점은 칸트의 이해와 그 구조적 아프리오리

9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황덕형, 신학에서의미학적경험의 수용의양태와 그 비판적고찰 95

49) 앞의책, 제2장 전체; 참고이러한 사유는 메를로 퐁티가 지각과 연관해서 수행한 현

상학적 분석에서 그 철학적 명료성을 발견할 수 있다. M. Ponty/오병남 역,“현상학

이란무엇인가?”『현상학과예술』(서울: 서광사, 1983), 35, 36.

50) 앞의 책, 139 이하 특히144: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에 참여하는 인간 정신의 피조

되고 은총 받은 능력에 기초해 하나님의 계시 가능성과 인식 가능성을 설명하는 초

월적 인식론을 발전시키고자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본이 기초신학적 미학

이라고 부른것의처음과제이다: 계시에대한 초월적인식이론.”

51) 앞의책, 150 이하.

52) 앞의책, 150.

53) K. Rahner/William Dych 역, Sprit in the World (Montreal: Palm Publishers, 1968).

54) Lonergan, Verbum, World and Idea in Aquinas David B. Burrell 편 (Nortre Dame:

University of Nortre Dame Press, 1967).

55) Richard Viladesau/손호현역, 『신학적 미학』, 160.

56) 앞의책, 199.

57) 앞의책, 222.

Page 49: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나님이 알려지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위의 미학적 논리는 근본

적으로 보편적 미적 체험이 존재론적으로 초월의 지평을 형성하고 있

다는 신학적 전제로 토대로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다시

아무런 진전이 없는 해묵은 자연계시 논쟁으로우리를 빠뜨릴 수 있다.

하지만 자연계시 논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는 실제로 하나님이 주

신존재의 새로움은 주어진 일차적 자연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종말론적으로요청되는 것을 재인식하는 것임을 명확하게 하

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이 자연 계시 논쟁을 다시 인식론적 물음으로

만 묻는다면 이는“계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빠져 나올 수 없

는 미로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길이 되고야 말 것이다. 그렇다면 진

정으로 이 논쟁 속으로 빠지지 않은 채 한 걸음 앞으로 나가길 원한다

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진정으로 그 미적 체험과 보편성을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그것이 부름 앞에선 인간의 한계를 가르치는 것

임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인간이 공유하는 존재론적 숙명으로서의 미

의 체험은 단지 말 걸음의 사건 속으로 우리가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

이제“예술적 창조성이 보여주는 새로운 상응과참여의 원칙을 찾을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로베르의 견해를 통하여

“아름다움으로서의자연의 아프리오리적 구조와 그것 자체를 인식하는

마음의 아포리오리적 구조 사이의 본래적 관계를 예술적 창조성이 드

러내고 있다”58)고 천명하면서심지어 자연과 마음을 넘어서 이 둘이예

술적 아름다움의 창조 속에 함께 모아지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

삼의 실재로서 하나님을 설정했다는 것을 예증하고 있다. 이는 아름다

움의 미적 경험을 통한 새로운 초월의 형식이 제시되고 그에 의한 새

로운 존재이해가 형성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론적

으로 다음과 같이 확정하고 있다:“미학적 경험으로 우리가 의미하는

것이 단지 동물적 쾌락의 감각을 넘어서서 영적이고 물질적인 통전적

인간의 경험이라고 한다면, 미학적 경험을 그 출발점으로 삼아 하나님

을 그러한 경험의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기능 조건으로 발견하게 되는

하나님 존재에 대한초월적 접근이 가능할 것이다.”59)

이러한 빌라데서의 신학적 미학은 미의 경험으로부터 시작하여 하

나님 체험에 이르는 광범위하고 깊이 있는 철학적 탐구를 전제하고 있

다. 그의 시도는 매우 광범위하여 인간이 미학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

는 거의 모든 영역에 대한 초월적이며 포괄적인 이해를 시도한다는 점

에서 특출하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가톨릭 교회가 가진 존재유비의

긴 전통에서 자라난 초월론적 사유는 그들의 역사를 통하여 신학적 효

용성과 관련성을 입증하고 있기에 우리가 수긍할만한 신학적 탐구라고

할 수 있다.60)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탐구에서 과연 성서의 하

9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황덕형, 신학에서의미학적경험의 수용의양태와 그 비판적고찰 97

58) 앞의책, 225.

59) 앞의책, 236-237.

60) 이런 점에서 한국의 개신교 신학자들이 이러한 존재 유비적 사유방식을 여과 없이

받아들인다든지혹은 전통 한국의 재래문화를 신학적 평가없이 그대로 인용하는 것

은 사실 신학적으로 기초가 없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한국적 미학 개념이 기초 신학

적 관점에서 철저하게 분석되는 일이 시작되어야 하겠으나 그것보다 더 시급한 일

은 이러한 문화적예술의 논점들이과연실제적인 하나님 인식의조건을 구성하는지

는 비판적으로 물어야 한다. 참고 심광섭,『예술신학』, 심광섭은 예술신학이라는 개념

을 통하여 빌라데서의 미의 존재론적이며 인식론적 우위성에서 조금 다른 태도를 취

하고있다. 불분명한 것은그가 예술적 감성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언어화하자는 것인

지 아니면 미적 체험이 계시라고 하는 것인지 불명료하다. 심광섭이 십자가가 아름답

다고 외치는데 계시가 일어나지 않은 십자가의 고통이 모든 인간에게 아름다움으로

남을 수 있을가? 이때 십자가의 아름다움은 철저하게 계시적 변환으로 인해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된 것이다. 심광섭이 바르트의 신론의 한 단락을 새롭게 발견하고 미의

신학을 강조하지만 바르트는 미를 보조개념으로, 그리고 빌라데서가 지적한 바와같

이, 신학의 고유한 주제로 만들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바르트와 다르다. 특히

그의의도가 제6장 한국의 인간학적예술신학의기초개념. 인간론을 다룰때“한국에

서 기독교를 살려내는 것이 동시에 한국의 문화와 종교를 살려내는 것과 다른 사안

이 아닐때 한국의 기독교가 참다운 기독교의 멋이 된다는 말씀(227)”이라고 하면서

도“멋이 예술신학의 인간학적 기초개념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

스도론적 접목이 이루어져야 한다(244)”고 하는 것은 오히려 그가 미학적 신학이

아니라 신학적 계시에 의거한 미학적 영역으로의 확대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지도모른다.

Page 50: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나님의 존재와 활동이 우리 인간들 세계속에서 생명과 영광으로 나타

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63) 바르트에 의하면 내가 있고 타인이

있으며 이들 모두 각자가 차이를 내포한 채로 자유 가운데 공동의 인

간성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는 인생이 비밀 그 자체라는 것을

말한다.64) 더욱이 이런 비밀스러운 사태는 이론적이며 미학적 경탄을

자아내며65) 그렇기에 신학적 인식은 미학적 의미의 영광의 감탄과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또한 그에 의하면 신학은 아름다운 것이다. 신학적 지

식은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하고 이것들이 신학의 주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르트에 의하

면“아름다움을하나님의 영광의 본질로 보는것은실수”66)이다. 신학은

하나님의 영광을 그 주제로 다룰 수는 있지만 그 영광이 보여주는 아

름다움을 독립적인 주제로 다룰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경우

그것은 신학이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에 몰두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

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신학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

내는 것이 본래의 목적일 뿐, 피조물의 영광이나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독립적 주제로 삼는 것은 우상숭배적 위험에 떨어지는 것이다.67) 비록

우리 인생이 미학적 측면을 본래적으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

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구 신학적 텍스트로 바꾸지 않으려는

바르트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가? 바르트가 이토록 철저한 구분을 강조

을 보편적인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는 행동이다. 미학적 체험은 계시적

은밀성을 말 하도록 하는 활용론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을 의미

한다. 미학은 영광의 주변부만 돌 뿐, 그 영광의 본체, 모세가 하나님을

뵈었을 때 수건 속에 가려진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를 파악하지 못한

다.61) 그래서 신학의 길은 미적 체험의 보편성이 아니라 그 보편성에서

주어진 계시적 지평을 투쟁적으로 확보하는 데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한

다. 미학적 질문의 인식론적 지평의 물음은 바르트가 이미 쉴라이에르

마허의 신론에 대한 질문으로 제시한 바와 같이 미와 미의 감상에 따

른 기쁨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선물 자체를 대신할 수 없듯이 하나

님의 선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헛된 기쁨으로 그치는 것이

아닐지 물어야 하는것이다.

IV. 결론적고찰: 빌라데서와로크마커의지양으로서

바르트의신학안에서의미의수용과제3의 길

예술과 미학에 대한 보수적인 관점을 유지하면서 또한 미학적 현실

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도 동시에 찾을 수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가? 두 영역과 선택 사이에서 혼합이나 분리만을 강조하지 않고 이 두

영역의“구분되지만 나누어지지 않은 관계”를 계시의 사태62) 속으로 이

끌어 들이는 신학적 시도를 바르트에게 찾을 수 있다. 바르트는 개혁교

회의 전통에 따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구분에 철저하지만 동시에 하

9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황덕형, 신학에서의미학적경험의 수용의양태와 그 비판적 고찰 99

61) 고후3:12 이하. 바울은 그래서 모세의 얼굴을 덮은 수건이 벗겨질 때 그리스도의 영

광이나타난다고본다.

62) Graham Ward, Christ and Culture (Oxford: Blackwell Publishing, 2005) 워드는 문

화신학의 주된 근거로서 바로 양성론의 현실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양성론

을 단순히 사고의 범주로서 이해하여 신학적 사유의 모델로 삼을려는 태도이다. 이

와 구별되게 바르트처럼 이 양성론의 현실은 신학함의 실제적 동인으로 구체화되어

야 함을인식하는것이중요하다.

63) Karl Barth, Kirchliche Dogmatik (이하 K D), I I I/4.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Zürich, 1987, 386

64) Karl Barth, KD I I I/4, 386-387.

65) 앞의책, 386.

66) Karl Barth, KD I I/1.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Zürich, 1987, 735.

67) Karl Barth, KD I I/1. 736 이하.“교회적 태도는…미학적으로 사고하고 말하는 교리

학의 가능성을 제외시킨다. 물론 교리학이 그 대상이 지니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간

과하거나 즐기지 못한다면 용서받기 힘들 것이다.…하지만 교리학이 그 대상에 자

신이 붙들리게 하는 대신에 그 자신을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성찰에 잃어버리거나

항복한다면, 바로이 순간그러한아름다움은우상의 아름다움으로변한다.”

Page 51: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행을 주도하기 위한 시도라기보다는 이미 있었던 것의 완벽한 조화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 즉 그에게는 가장 완벽해진 음의세계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과 그렇기에 원음(原音)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듯한 점,

또한 그는 음악을 표현함에 있어서 언제나 표현해야 할 메시지의 사상

과 잘 상응하는 방식으로 음악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 그의 음악 속에

는 우주가 보편적인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고 우주의 양극점을 이해하

고 있지만 그것에 빠져 있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도록 하고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이러한 그의양극성은 일정한 방식

으로 움직이는 내적 동력을 갖고 있으며 이 내적 동력은 이 세계가 하

나님의 창조의 세계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언의 역할을 한다는 것 등이

다. 이러한 그의 음악적 특성 가운데도 가장 두드러진 것은 그의 음악

은 순전히 음악적이었으나 우주를 파악하고 그것을 통하여 있어야 할

그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면서 그 사태를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바

르트가 보기에 그것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세계였고 이세상의 모든

악과 어두운 그림자로도 덮어지지 않는 선량한 기쁨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순수기쁨, 순수한 아름다움 이것이 바로모차르트음악의 핵심

이었다고 바르트는 고백하고 있다.“그의 음악은 분명히 저 높은 곳으

로부터 나옵니다. 그곳에서는-사람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므로-존

재의좌우양면, 말하자면기쁨과 슬픔, 선과악, 삶과죽음이 있는그대

로 한꺼번에-그러나 서로의 경계를 유지하면서-드러나고 파악됩니

다.…그는 분열된 삶을 있는 그대로 음악으로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그

는 하나님이 지으신 좋은 세상에 대한 믿음에 터하여 그 분열성에 항

거하였으며, 때문에 당연하게도 언제나 좌에서 우를 향해 나아갔습니

다. 우에서 좌로 향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69) 그는 모짜르트 음악 속

에서 하나님을 향한 운동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르트의 말에

하고 미학에 대한 주제화를 허용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계

시에 의거해서 파생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결국 지상의 아름다움에 취

할 때 곧바로 인간이 하나님을 대치하고 스스로 모든 신학적 판단의

주어가 되려는 유혹에 쉽게 빠지게 되면서 그 미학적 지평의 신학적

근원을 상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바르트가 이해한 삶의 미학은 실

천적 특성과 연관되어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이 인생의 신비가 가져온

구체적인 결과는 이 인생이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라는 인생

의 담화적인 활용론적 요소 속에 녹아 있다. 그 대화적 관계가 발생할

때 인간이 있고 그 인간의 발생의 순간, 대화의 주체들 사이의 상호연

관과 깊이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말씀의 신비가 이미녹

아있으며 그것을 발견하고 응답하는 구체적인 실천이 바로 인생이라는

주장이 담겨 있는 것이다.68) 아름다움에 대한 존재유비적 관점을 따라

인간과 세상이 가진 초월적 성격을 존재론적관점에 따라 소여적 특성

으로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됨의 실천적 성격을 강조하여 계시적

사건 속에서 성취되어야 할 종말론적 언약사건으로 보는 것이 바르트

의 태도이다. 이는 모든자연세계 안의존재들을 이해함에 있어 그것이

가진 신학적 구분으로서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차이와 구분을 강조하

면서 기독론적이며종말론적 관점을 유지하는 바르트가 자연계시를 철

저하게 부정하고있는것과같은맥락에서이해할 수 있을것이다.

이와 연관해서 바르트가 모짜르트 음악을 논평한 것들은 예술적 현

상을 신학이 어떻게 건전하게 수용할 수 있는가를이해하는 데에 구체

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즉, 예술적 활동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

는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 중 하나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

가 있는것이다. 바르트는 모짜르트의 음악의 활동을 설명하면서 몇 가

지 특징을 말하고 있다. 모짜르트가 전혀 음악에만 몰두하고 다른철학

적 논의를 거의하지 않는점, 둘째그의 음악은 추상적이며 새로운 유

10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황덕형, 신학에서의 미학적경험의 수용의양태와 그 비판적고찰 101

68) Karl Barth, KD I I I/4, 387; KD I I I/2, 180 이하.

69) Karl Barth/ 이종한 역,『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서울: 분도출판사, 1997), 41-

42.

Page 52: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긴장을 함께 파생시키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예술적 감상은 우리에게

종교적 감흥을 일으키는 유사종교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좋은

예술은 나쁜설교보다 더 감동적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의감동은 해

명할 것이 많다: 아름다움은 영원한가? 아름다움은 우리를 구원해주는

가? 아름다움은 나를 대속해 주는가? 혹시 비극이 더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인가? 르네 지라르의 연구72)는 여기에 한 좋은 귀감이다: 십자가는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우리의 아름다움과 다른아름다움이

시다. 우리는 계시를 통하여 그렇게 말할자유를가진것 뿐이다.

주제어

유사종교, 칼 바르트, 존재유비, 미학적 체험, 하늘나라의유비

Pseudo-Religion, Karl Barth, Analogia Entis, Aesthetical Experience,

Analogia of the Kingdom of God

접 수 일 2012년 6월 30일

심사(수정)일 2012년 8월 1일

게재 확정일 2012년 9월 1일

의하면 그는 순수하게 음악적으로 세상과 하나님을 자연스럽게 노래했

을 뿐이며 그런속에서 모든것에 대한무차별이 아니라 균형과 조화의

절묘한 전복(Wendung)70)이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바르트가 보는

예술의 신학적 의미는바로 이 전복의 사건에 있다. 예술 스스로 예술적

지평에서 자기의 작업을 수행하고 있지만 그것을 통하여-전복이 일어

남으로써-타자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비유로서 하나님의 세계에 동참

하게 되는 것이다. 바르트가 보기에 이러한 작업은 해방과 기쁨이며 아

름다움을 지향한다. 그것은 결정적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차이를

보존하면서 다가오는 성령 안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실현이며

그런한에있어서동시성 안에존재하는 타자적 차이의 현실이다.71)

바르트의 묘사처럼 그는 어둠 속에서 줄을 당겼으나 거대한 종소리

가 위에서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예술은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모차르트의음악 안에서 성공적으로수행되었

고 그런 한에서 예술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비유적 진술이 확

보되고 있었던 것이다. 바르트의 이러한 길은 우리에게 하나의 표지가

되고 있다. 미학적 신학이 아름답지만 그것의 한계가 뚜렷하다는 것이

다. 그것은 하나님의 하늘나라의 유비로서 우리의 삶 속에서 종말론적

10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황덕형, 신학에서의미학적경험의 수용의양태와 그 비판적고찰 103

70) 앞의 책, 79

71) Karl Barth, “Nachwort”, Wilfred Brandt, Der Heiliger Geist und die Kirche bei

Schleiermacher (Zürich: Zwingli Verlag, 1968), 303-313, 특히 310. 바르트가 이

논의에서 쉴라이에르마허의 영의 신학을 다음4가지 논점으로 비판한다: 그의 신학

이 교회의 선포를 기초로 하는가? 아니면 철학적 논의인가? 둘째로 그가 기대하는

영이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 타자로 다가오는 감사의 대상으로서 타자인가? 아니면

많은 구분에도 불구하고 인간자아의 동일자의 영인가? 세 번째로 예수그리스도라는

특수한 현실의 자리에서 말하는가? 아니면 보편적 자리에서 말하는가? 마지막으로

쉴라이에르마허의 영이 성령인가? 아니면 보편적 세상의 영인가? 또한 Karl Barth/

Heinrich Barth, Zur Lehre vom Heiligen Geist, Beiheft 1, Zwischen den Zeiten,

München, 1930. 성령은 인간의 영과 동일하게 취급될 수 없으며 성령의 모습은 오

로지 종말론적 현존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종말론적 현존에서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 사이의 연속성이회복된다. 72) R. Girard/ 김진식. 박무호 역, 『폭력과성스러움』(서울: 민음사, 1997).

Page 53: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Rookmaaker Hans R. / 김헌수역. 『예술과기독교』. 서울: IVP, 2002.

Schaeffer F. A. / 문석호역. 『기독교문화관』. 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9.

Viladesau R, /손호현역. 『신학적미학』,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1.

Ward, G. Christ and Culture. Oxford: Blackwell Publishing, 2005.

김문환편. 『20세기 기독교와예술』. 현대신서55.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0.

손호현.“춤의 신학-한국인의 미의식에 드러나는 문화신학적 함의-”『한국 기

독교신학논총』. 한국기독교학회편. 2012, 79호

심광섭. 『예술신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참고문헌

Balthasar, H.U.v. Karl Barth. Darstellung und Deutung seiner Theologie.

Einsiedeln: Johannes Verlag, 1976.

Barth, K. “Nachwort”, Wilfred Brandt. Der Heiliger Geist und die Kirche bei

Schleiermacher. Zürich: Zwingli Verlag, 1968.

. Zur Lehre vom Heiligen Geist. Beiheft 1, Zwischen den Zeiten,

München, 1930.

. Kirchliche Dogmatik I I/1.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Zürich, 1987.

. “Christengemeinde und Buegergemeinde,” Karl Barth. Rechtfertigung

u n d Recht. Christengemeinde und Buegergemeinde, Evangelium

und Gesetz, Zuerich: TVZ, 1998.

. 이종한 역. 『볼프강아마데우스모차르트』. 서울: 분도출판사, 1977.

Beardsley, M. C. Aesthetics From Classical Greece to the Present. Alabama:

University of Alabama Press, 1966.

Domino Christope /성기완 역. 『베이켄회화의 괴물』. 서울: 시공사, 2011.

Girard R. / 김진식. 박무호역. 『폭력과성스러움』. 서울: 민음사, 1997.

Harries Richard /김혜련 역. 『현대인을위한 신학적미학』. 파주: 살림, 2003.

Kant, I. Kritik der Urteilskritik, hrsg. von Gerhard Lehmann. Stuttgart:

Philipp Reclam,1963.

Lonergan, Verbum. World and Idea in Aquinas. David B. Burrell 편. Nortre

Dame: University of Nortre Dame Press, 1967.

Przywara, E. Analogia Entis. Einsiedeln: Johannes-Verlag, 1962.

Ponty, M. / 오병남 역. “세잔느의 회의”. 『현상학과예술』. 서울: 서광사, 1977.

Rad G. v. /허역역.『구약성서신학제3권, 이스라엘의지혜의 신학』. 서울: 분도

출판사, 1980.

Rahner. K /William Dych 역. Sprit in the World. Montreal: Palm Publishers,

1968.

Ritter, J. Aesthetik. in Historisches Woerterbuch der Philosophie. Bd 1.

Basel: Schwabe & Co, Ag. Verlag, 1971.

10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황덕형, 신학에서의미학적경험의 수용의양태와 그 비판적고찰 105

Page 54: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Various Forms of the Theological Reception ofAsthetic Experience and Its Critical Reflection

Hwang, Duk-Hyung

Professor

Seoul theological University

Seoul, Korea

In recent days there are many theological suggestions that through

the aesthetical experiences a way to seek the possibility of the

knowledge of God can be attempted. These kind of aesthetical theo-

logy or theological Aesthetics has two assumptions that at first, the

so-called analogia entis tradition is regarded as the right interpreta-

tion of the revelation of God, and at second, we are surrounded by the

structure of beings the if we meet the unsayable God, then it means

that we must realize that we are confronted with the structure of

beings that we have nothing but to say this unsayableness. That

means we are surrounded by the grace of unsayableness. So the ques-

tion arise: can this fundamental aestheic experience express the

christian view of God? This question leads us to the theology of Karl

Barth. We believe that the aesthetical experience can be rightly

appreciated when we follows the theological understanding of Karl

Barth about this matters.

국문초록

신학에서의미학적경험의수용의양태와

그 비판적 고찰

현대의 다양한 신학적 시도 가운데 하나는 예술적 감흥에서 얻은

경험을 신학적 지평과 연관시켜 신학적 언어의 활력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다. 이 작업은 신학의 지나친 지성주의적 폐단을 극복하고 삶의활

력과 초월 신비를 신학적 언어가운데 가져옴으로써 기독교의 새로운

면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이 작업은 소위 존재유비의 전

통에서 찾아지는 존재의 초월적 선험적 구조를 신학적 계시의 전제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그 미적경험의 초월적 영역을 인간학적

으로 확보함으로써 신학적 언어의 가능성을 확정짓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그렇지만 치명적인 한계를 갖고 있는 바 그 미학적 경

험은 사실 유사 종교적 경험을 허락하지만 사실은 죄의 왜곡 현상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것이다. 창조된 하나님의아름다움을여기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사실 바르트의 견해처럼 하늘나라의 유비로서 계

시를통해서만가능하다는 것이다.

더불어 한국의 개신교 신학자들은 나름대로의 예술신학을 하기 위

해서는 계시신학에 근거한 보다 더 정교한 신학적 방법론이 필요한 것

으로평가된다.

10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황덕형, 신학에서의미학적 경험의 수용의양태와 그 비판적고찰 107

Page 55: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슐라이어마허의‘경건’과 퇴계의

‘지경’(持敬)에 관한연구-아는것과행하는것을넘어서

허호익

(대전신학대학교, 교수)

I. 머릿말

일찍이 플라토는 인간 정신을 총체적으로 보고 그것을 인간의 육체

에 상응하는 영혼이라고 하였다. 그는 인간의 정신(영혼)은 하나 총체

적인것이지만, 세 부분으로되어있다고 하였다.

순수한 사고와 비감각적인 직관에 나타나는 이성의 영혼 혹은 정신의

영혼(logistilovn), 노여움·명예욕·용기 및 희망과 같은 고귀한 격정

(흥분) 등이 속하는 용감한 영혼(qumoeidev")과 또 영양과 성의 충동 및

쾌락과 불쾌와 쉬겠다는 욕망이 뿌리박고 있는 충동적인 정욕의 영혼

(ejpiqumetikovn) 등을말한다.1)

용어상의 차이는 있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인간의 영혼은 인간의 로

고스(logos, 眞과 知), 이토스(ethos, 善과 義), 파토스(pathos, 美와 情)

의 세 차원으로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109-139

1) J. Hirschberger(1987), 강성위 역, 『서양철학사상권』, 이문출판사, 166.

Page 56: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이 있는 신학자’로 불린다.2) 심지어 바르트는 슐라이어마허를‘19세기

의 교회의 아버지’3)라고 하였다. 슐라이어마허(1768-1834)는 그의 스

물아홉 번째 생일(1797년 11월 21일)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로부터“오

늘날의 종교가 어떻게 새롭게 표현될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책을 써

보라는 권유를 받고 저술한 것이『종교를 경멸하는 자를 위한 종교론』

(1799)이다.4) 당시의 지식인들 사이에 종교 특히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미지가긍정과 배척, 공감과 비웃음, 존경과 멸시의 양면성을띄고있

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슐라이어마허의 동시대의 유명한 지식인들에

속하는 피이테, 셸링, 헤겔, 횔더린 등은 신학을 등지고 철학이나 문학

으로옮겨간 시기였다.5)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종교를 경

멸하는 분위기가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6)

당시의 지성인들은 대체로 종교의 초자연적인 요소들에 대해 경멸

하였다. 한스 큉이 지적한 것처럼“더 이상 종교는 중세, 또한 심지어

종교개혁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세상저 너머에 있는 초자연적인 어떤

것으로의 몰입”7)으로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 대안으로 라

이마루스와 레싱의‘이신론’(Theism) 논쟁과 더불어 피히테의‘무신론’

논쟁과 스피노자의‘범신론’논쟁에 일어났다.8) 슐라이어마허의 부친은

이 세 가지 주제를 칸트는 자신의 철학적 연구 과제로 삼았다. 진리

가 무엇이며 진리가 진리인 것을 어떻게 아는가? 선이 무엇이며 왜 선

을 행하여야 하는가? 아름다음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그리하여 저 유명한 3대 비판서인『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

비판』, 『판단력비판』을 서술하였다.

현대에 와서 서양정신사에서 종교의 본래적인 자리에 대한 논쟁이

첨예하게 제기되었다. 칸트는‘도덕적 행위’를 신앙의 본래적 자리로

여겼고 반면에, 헤겔은‘정신적 사유’를 신앙의 본래적 자리로 매김하

였다. 이에 대한 반발로 슐라이어마허는『종교론』을 저술하여 종교는

단순히 아는 것도 행하는 것도 아니면 이 양자의 동근원이 되는‘경건

한 심정’이 종교의 본래적인 자리라고 주장하였다. 공교롭게도 동양에

서도 비슷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시기적으로 훨씬 앞서지만 성리학과

양명학의 논쟁에서 아는 것과행하는 것이 선후 관계인지 아니면 합일

관계인지가 부각되었다. 퇴계는『성합십도』를 저술하여 아는 것과 행하

는 것의근원이 되는순수한 마음(道心)을 유지하는 지경(持敬)을 주장

되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슐라이어마허의『종교론』이 주장하는‘경건’과

퇴계 이황의『성합십도』에서 제시하는‘지경’(持敬)과 관련된 쟁점들을

비교하여 살펴보고, 현대신학에서 제기되는신학의 본질적 과제에 대한

쟁점, 즉 신학은 바른 이론을 세우는 것(Orthodoxism)인지, 아니면, 바

른 행동을 실천하는 것(Orthopraxism)인지, 그것도 아니면 바른 영성

과 경건에 이르는 것인지, 그리고 이 3가지는 어떤 관계가 있는것인지

에 대한신학적 해명을시도해 보려고 한다.

I I. 슐라이어마허의『종교론』에 나타난경건

슐라이어마허는‘현대신학의 아버지’로‘존 칼빈 이후 가장 영향력

11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허호익, 슐라이어마허의‘경건’과 퇴계의‘지경’(持敬)에 관한 연구 111

2) Stanley J. Granz & Roger. E. Olson/신재구 역, 『20세기신학』(서울: IVF, 1997), 57.

3) K. Barth, Protestant Theology in the Nineteenth Centur (Grand Rapids, Michigan;

Wm. B. Eerdmans Publishing, 2001), 425.

4) 김승철, 『역사적 슐라이어마허연구』(서울: 한들출판사, 2004), 212.

5) H. Kung/이양호·이명권 역, 『위대한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서울: 크리스챤헤럴드,

2006), 218-219.

6) 김승철,『역사적 슐라이어마허 연구』, 28. 슐레겔(A. W. Schlegel)은『종교론』에 대한

서평(1799)에서 비록 절대 다수의 독자들이 자신들은“모든 교양인들(alle Gebil-

deten) 중에서 가장 신앙심이 뛰어난 대중으로 자부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나양한 교

양(Bildung)과‘종교가 아닌 것을 대표한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그 교양인들은 그들

이 믿는 것보다 높은 차원의 종교가 있을 수 없음을 부인하고 그들 자신의 종교를

유일한 영광으로주장한다고하였다.

7) H. Küng/이양호·이명권역, 『위대한그리스도교사상가들』, 221-222.

Page 57: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다. 따라서 칸트에 의하면 바른 신앙인이된다는 것은 기독교가 가르치

는 윤리적 행위를 통해 세상에 선한 영향을 끼치려는 실천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여겨졌다. 칸트의 도덕신학을 따르는 이들의 입장에서 보

면 평범한 기독교인들의 삶이 도덕적이지 못하며 제도적인 교회(국가

교회)의 윤리적 수준이 현저하게 낮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종교인들을

경멸하였던것이다.

반면에 헤겔은 인간이 이성을 통해“도대체 신을 파악할 수 없다면

그 밖에 어떤 것이 파악할 가치가 있는가?”11)라고 반문하고‘이성의 한

계 내에서의 종교’가 아니라‘이성의 신학’(Vernunft Theologie)을 주

창한다. 그는 하나님은 영이시고,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는 성서의 가르

침을 일종의 종교적 상징으로 보고, 이를 이성적이고 개념적인 철학으

로 풀이하기위해『정신현상학』(1807)을 저술하였다. 하나님은영이라는

것은 하나님은‘절대정신’이라는 뜻이며,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은

모든정신활동속에활동하는절대정신의‘자기 전개’라고하였다.

절대적으로 다른 신적 이성과 인간적 이성을 있을 수 없으며, 또 절대적

으로 다른 신적 정신과 인간적 정신도 있을 수 없다. 인간적 이 성은 참

된 이성이며, 그 이성은 인간 속에 있는 신적 요소이다. 또 신적 정신은

별과 세계를 초월해 있는 정신이 아니며, 오히려 신은 현존하고 어디에

서든지 존재하고 또 모든 정신들 속에서 정신으로 실존한다. 즉 신은 활

동하고있는생동적 정신이다.12)

정신과 사유로 존재하고 활동하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인간이 사유

와 정신활동을 통해 참여하는 만큼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헤겔은 종교를 철학이나 형이상학처럼 사유를 통해 우

주의본질에 대한 바른지식을 소유하는 것으로 보았다. 헤겔의 추종자

들에게 있어서 바른 신앙인이 된다는 것이 이성적인 철학자가 되거나

아들에게 스피노자의 범신론 논쟁을 촉발시킨 야코비의『스피노자의

가르침에 대하여』의 글을 읽도록 권유하였다. 슐라이어마허는1798년

말부터 피히테와 검열관 자크사이의 무신론 논쟁이 제기된 것을 알고

있었다.9)

이신론과 범신론과 무신론에 관한 논쟁은 결과적으로 신의‘유일성

과 현존성’그리고‘초월성과 내재성’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일부 계몽

주의자들은 종교의 본래적인 자리를 당대의 최고의 철학자요 신학자들

인 헤겔처럼 사유에 두거나 칸트처럼실천에 두려고 하였다.

칸트는 종교의 본래의 자리를 실천이성, 즉 도덕적 행위로 보았다.

칸트는『순수이성비판』(1781)에서 저 유명한 인식론을 통해 인간의 감

성(감각 능력)과 오성(개념 능력)과 이를 종합하는 이성(인식 능력)의

구조적 한계를 제시하면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이성의 한계 내에서

만 시간과 공간 속에 놓여 있는 사물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하였

다. 인간의 인식능력의 인식의 이율배반을 규명하였다. 따라서‘사물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없으므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신자체’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을 배제하였다. 그러나『실천이성비판』(1788)에서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기초가 붕괴된다는 사실을

논증하고‘도덕적요청으로서의신’을 제시하였다.

최고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이것은, 순수이성의 도덕적 법칙 수립과 필

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우리 의지의 목표이다)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하나님의실존(die Existenz Gottes)을 요청해야한다.10)

결국칸트는『이성의한계내에서의 종교』(1793)를 재구성하기위해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의 주제들을 모두 도덕적 실천 원리를 환원하였

11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허호익, 슐라이어마허의‘경건’과 퇴계의‘지경’(持敬)에 관한연구 113

8) 최홍덕, “슐라이어마허의『종교론』에 나타난 기독교이해”, 『서울장신논단』, 85-86.

9) 김승철, 『역사적슐라이어마허연구』, 239-240.

10) I. Kant/최재희역, 『실천이성비판』(서울: 박영사, 1975), 136.

11) G. W. F. Hegel/J. G. Gray ed., 『예술 종교철학』(서울: 기린문화사, 1982), 163.

12) 위의책, 159.

Page 58: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그래서 슐라이어마허는 여러 이유로 종교를 경멸하는 당시의 근대

적인 의식을 갖춘 지식인들에게‘종교를 종교답게 하는 종교의 본래적

인 자리와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를 새롭게 제시하려고 하였다. 그리하

여 그가‘종교를 경멸하는 지식인’을 특정하여‘대안적 종교론’을 펼친

것이다.15)

종교는 형이상학과 같이 우주를 본성에 따라 규정하고 설명하기를 원치

않으며, 도덕과 같이 자유와 인간의 신적인 자의(恣意)가 갖는 임으로부

터 우주를 형성하고 완성하기를 원치 않는다. 종교의 본질은 사유나 행

위가 아니라 직관과 감정이다. 종교는 우주를 직관하려 하며 우주의 고

유한 거울과 행위 속에서 그것에 경건히 귀기울여 들으려고 하고 스스

로 어린아이의 수동성으로 우주의 직접적인 영향에 사로잡히고 충만하

게 채워질수 있으려고한다.16)

“종교의 본질은 사유나 행위가 아니라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이

다(Anschauung und Gefühl des Universum)”는 저 유명한 슐라이어마

허의명제는 몇 가지주요한 의미를 함축하고있다.

첫째로, 종교의 본래적인 자리는 교리적인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리와 특정한 교의적 개념은 종교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이는 이차

적인 것이며 전통적인 의미와는 다르게 사용되고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교의와 교리 중“몇몇은 종교적 직관에 대한 추상적 표

현에 불과하며 다른 몇몇은 종교적 감각의 근원적 작용에 대한 자유로

운 반성이며 종교적 견해와 통속적 견해를 비교한 결과물이다”17)라고

종교적 사유와 정신활동이 활발한 신학자가 되거나, 정신을 예술로 표

현하는 예술가가 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들의 눈에는 대부분의 신앙

인들이 지성적이지 못하고 기독교의 교리조차 시대적 제약을 지닌 것

이므로 이성적으로 완전하지 못한 것으로 비춰졌으므로 종교에 대해

경멸감을느꼈던 것이다.

이처럼 칸트를 따르는 자들은 기독교인들이 비도덕적이라고 경멸하

였고, 헤겔을 따르는 자들은 종교가 비이성적이라고 경멸하였다. 이런

상황에서슐라이어마허의 동료들은 종교를 종교답게 하는 종교의 본래

적인자리에 대한대안적 해명의 필요성을강력하게느끼게 된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목사의 아들로서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경건주

의뿐 아니라 근대적 합리주의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1783년부

터 오버라우치즈의 니이스키에 있는 공동생활형제단 학교에서 공부하

였고, 이어서1785년부터는 엘베의 바르비에 있는 공동생활형제단 신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787년부터 할레대학에서 신학 교육을 받은 후

1794년 목사고시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795년 28세의

나이로 베를린의 대형 자선병원‘샤리테’에서 가난한 병자들을 대상으

로 목회하는설교자로 부임하였다. 그의공동생활형제단과가난한 자선

병원에서의 경험은 평범한 신앙인들의 단순하고 경건한 신앙의 모습을

직접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13) 이들 경건한 신앙인들은 종교

를 통해 이성적 지식을 추구하거나, 도덕적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지않

았으며, 다만 하나님을 단순하게 느끼고, 순수하게 의식하고 절대적으

로 의존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반회중들이

설교를 들을 때에도 설교자의 교리적‘의도’나 교훈적‘의지’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감정’(Empfindung)에 의해감동을 받는것”으로이해했

다.14)

11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허호익, 슐라이어마허의‘경건’과 퇴계의‘지경’(持敬)에 관한연구 115

13) 최홍덕, “슐라이어마허의『종교론』에 나타난기독교 이해”, 91.

14) Schleiermacher, “Gedanken I”, KGA 1. 2, 11: 1797. 9. 29: 김승철,『역사적 슐라이어

마허연구』, 210 재인용. 슐라이어마허는해석학적입장에서는회중들이설교를통해

자신들의 감정이 아니라 설교자가 전하고자하는 의미와 의지를 이해해야 한다고주

장하였다. 그는여기서‘Gefuhl’이 ‘Empfindung’라는 용어를사용하였다.

15) H. Küng/이양호·이명권역, 『위대한그리스도교 사상가들』, 218.

16) F. Schleiermacher, 『종교론: 종교를 멸시하는교양인을 위한강연』(서울: 대한기독교

서회, 2002), 56.

17) 위의책, 105.

Page 59: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서 종교는 형이상학이나 도덕을 통일하는 보다 고차원적인 것이라고

하였다.25)

여러분은 종교가 철학 속에서 최고의 것이며 형이상학과 도덕은 다만

종교에 종속되는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상이하지만 서로 다른 두 개념이 그 가운데서 통일되는 것은 보다 고차

적인 것임에 다름 아니며, 이 대립되는 개념들은 바로 이 고차적인 것에

속한다.26)

넷째로, 종교의 본래의 자리는 참된 사유와 참된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이라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에 의하면

이러한“우주에 대한 직관, 이것은 나의 전체 강의의 핵심이며 종교의

가장 보편적 형식이고 그 최상의 형식이다.”27) 여기서 그가 말하는 우

주는 무한자를 의미한다. 계몽주의자들이 종교의 초자연성을 배제시켰

으므로 그 대안으로 이신론이나 범신론이나무신론을 제기되었다. 그러

나 슐라이어마허는 종교의 초자연적인 영역을 새로운 개념, 즉‘무한자

로서의 우주’라는 개념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우주라는 무한자

에 대한“직관과 내적으로 결합되는 있는 감정”을 종교의 본래적 자리

로 본 것이다.28) 그가말하는 감정은‘희노애락애오욕’의 정서적 감정이

아니다. 종교는 인간을 우주에 대립시키며 인간을 우주의 한 부분으로

서가 아니라“인간성과 우주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게 하는데,“이곳

이 곧 종교의 종착점이다”라고하였다.29) 따라서“종교는무한자에 대한

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의 견해와 교리를 다른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으나 그것은 우리가 갖는 직관과 감정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18)

둘째로, 종교의 본래적인 자리는 실천적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슐

라이어마허는 심지어“종교는곧 행동해야 한다는 이 모든오해는 동시

에 다름아닌 무서운 오용일 수 있으며, 또 이 활동성이 어떤방향으로

향한다는 것은 파멸과 혼란으로 종결하게 된다”19)고 하였다. 따라서 경

건한 감정이 우리 행위를 강탈해 가기 전에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의 경견한 감정을 길들여야 한다.20) 그래서 아주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행위를 위한다는 다른 동인이 결여되어 있으며, 자신을 무위적 직관에

내 맡겼다는 것이다.21)

셋째로, 그러나 종교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나는 도덕도 철학도 배제하지 않는다”고 하였

다.22)“종교 없이 사변과 실천을 소유하려고 하는 것은 무모한 오만이

며 신에대한불손한 적대행위이다”이며“프로메테우스의부정한 욕망

이다”라고 하였다.23) 그렇다고 해서 종교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단

순한 혼합으로 지행합일이나 덕행일치가 아니다. 종교에 관한 모든 문

서와 기록에서‘형이상학과 도덕의 혼합’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그것이 항상‘참된 것과 최고의 것’이 아니다.“종교는 여러분에게 이

들 사변과 실천에 더해서 필연적이고 필수불가결한 제3의 것”24)이다.

다시 말하면 종교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을 단순히 통합하는 것이 아

니라 이 양자 선행하는 것이 양자의 근원이 되는 그 무엇이라는 점에

11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허호익, 슐라이어마허의‘경건’과 퇴계의‘지경’(持敬)에 관한연구 117

18) 위의책, 124.

19) 위의책, 72.

20) 위의책, 71.

21) 위의책.

22) 위의 책, 67

23) 위의책, 58.

24) 위의책, 57

25) 경건으로부터 지식이나 행위가 경건의 표현이나 작용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은

경건 자체라는 말 가운데 이미 들어 있다. 경건은 지식이나 행위에서 인식될 수 있

지만, 경건자체는그 시원본래적인본질에서 지식과 행위가운데하나가 아니다.

26) F. Schleiermacher, 『종교론: 종교를멸시하는교양인을위한강연』, 51.

27) 위의책, 60.

28) 위의책, 100.

29) 위의책, 97.

Page 60: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나님이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유한한 자기의식과 무한자에대한의식이

진관적으로 결합하는것을신인합일의경지라고 보았다. 따라서 경건은

좀더 기독교적 의미에서‘순수한 하나님 의식’이요‘하나님에 대한 절

대의존의 감정’으로 해석된다. 결국“경건의 본질은 우리가 우리 자신

을 절대의존적으로느끼는 것,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신에게 의존하고있

음을 의식하는 것이다.”고 하였다.37)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순수하게 의

식할 때 바른 판단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할 때 바른 행

동을할 수 있다는 의미로해석된다.

여섯째로, 슐라이어마허는『종교론』에서 제시한‘무한자(우주)에 대

한 직관과 감정’이 범신론적 성격을 지닌다는비판을 받으면서『기독교

신앙론』에서는 종교적 경건의 공통성과 기독교적 경건의 특유성을 동

시에 제시하였다.“종교는 경건한 심정을 가진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

거룩하고 가치 있게 한다”38)는 점에서 종교적 경건의 공통성을 지닌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적 경건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

기 위해 우리는 기독교를 넘어가야 하며 이를 다른 신앙양식과 비교하

기 위해 우리의 관점을 기독교 위에 두어야 한다39)고 하였다. 따라서

기독교적경건의 특유성을 기독론적으로 재정립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

한다.

경건의 자기동일적 본질은 기독교는 신학적 방향을 잡고 있는 경건의

특유한 형태로서 그 가운데 속한 모든 개인이 나사렛 예수를 통해 구원

의 의식에관련되는사실로써다른모든 경건의형태와 구별된다.40)

슐라이어마허는 역사적‘예수 그리스도’를 순수한 하나님의 의식의

‘원형(Urbild)과 이상(Ideal)’이라고주장한 것이다.

느낌과 취향이다.”30) 그리고 무한자에 대한개별적 직관은“영원자와 비

가시적인 존재에 대한 내적 경외에 사로잡힘”31)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종교적 감정이 바로 종교적 경건으로 일컬어져 왔으며, 이러한‘감정의

강도가 경건의 등급’을 결정한다고 하였다.

옛 사람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 모든 감정이라고 경건이

라 불렀으며, 이 감정을 곧 바로 종교에 연관지었다. 그들에게 감정은 종

교의가장 고결한부분이었다.32)

우주가 여러분의 직관 속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특별한 방식이 여러분

의 개인적 종교의 특유함을 형성하는 것처럼, 이러한 감정의 강도가 경

건의등급을 규정한다.33)

다섯째로, 무한자나우주에 대한직관적 감정이 바로 종교적 감정인

데 이러한 종교적 감정을 경건(Frömmigkeit)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경건은‘인간적 감정의 최고 단계’34)이며 동시에‘자기의식의 이런 최

고 단계’로 규정된다.35) 그 이유는 경건의 상태에서만 인간은‘우주라

는 무한자’와 접촉할 수 있는 반면, 그 밖의 상태에서는 유한한 존재

와 관계할 뿐이기 때문이다. 경건한 심정을 통해 인간은 유한성에 대

한 자기의식과 더불어무한자에대한의식을 경험한다. 따라서“경건한

자극은 자기의식 가운데 놓여 있는 유한자와 무한자의 결합에 대한

의식이다.”36) 슐라이어마허는『기독교신앙』을 통해서는 이 무한자를 하

11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허호익, 슐라이어마허의‘경건’과 퇴계의‘지경’(持敬)에 관한연구 119

30) 위의책, 58.

31) 위의책, 100.

32) 위의책, 102.

33) 위의책, 69.

34) F. Schleiermacher, 『기독교신앙』(서울: 한길사, 2006), 69.

35) 위의책, 71.

36) 위의책, §11. 1항, 75.

37) F. Schleiermacher, 『기독교신앙』, §9, 65.

38) F. Schleiermacher, 『종교론: 종교를멸시하는교양인을위한강연』, 68.

39) F. Schleiermacher, 『기독교신앙』, §6, 53.

40) 위의책, §18, 103.

Page 61: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제시한 성학(聖學)의 목표 역시 제왕의 학으로서 플라토가『공화국』에

서 주장한 것처럼 통치자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어야 한다는 철인(哲

人)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는것이었다.

배우고 익히는 것(學而時習知)을 중요하게 여긴 공자(孔子: BC

551~479)와 그의 제자 증자(曾子)가 지은 것으로 여겨지는『대학(大

學)』은 학문의 목적을‘수신(修身)을 통해 제가치국평천하(齊家治國平

天下)’를 이루는 것, 즉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규정하였다. 수기(修己)

를 위해 구체적인 방법으로‘격물지지(格物知止)와 의성심정(意誠心

正)’이 요청되었다.

신유학에 와서 성리학의 이학(理學)과 양명학의 심학(心學)의 논쟁

으로 이론과 실천의 문제가 새롭게 제기되었다. 정호(程顥)·정이(程�)

형제가 창시하고 남송의 주희(朱熹, 1130~1200)가 집대성했다고 알려

진, 정주학 또는 성리학(性理學)은 이(理)를 우주만물의 본원이라고 인

식하였다. 그리고 본성의 이치를 알기 위해서는 배우고 익혀는 강조하

였는데는, 주로성현들의 경서를 통해학습하는 것을공부의 목표로 삼

고 치지(致知)와 궁리(窮理)를 강조했기 때문에 이학(理學) 또는 경학

(經學)이라고 불리웠다.

한편 명대의 육구연(陸九淵)과 왕양명(王陽明, 1472~1528)은 이학

과 경학에 반대하였다. 양명왕수인(王守仁)은“육경은 내 마음의 기록”

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경서(經書)를 따로 배우지 않아도, 마음에 집중

하기만 하면 바로 알 수 있고 잘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양지(良

知)와 양능(良能)이라하였다. 양명학은심(心)이 우주의 본체이고, 일신

(一身)의 주재이고, 모든 이치와 덕의 실천은 심에 귀착된다는 심즉리

론(心卽理論)의 심학(心學)을 주장하였다.46) 이학과 심학의 방법론의 차

이는, 불교의 방법론적 논쟁인 경전의 절대적 진리성을 주장하는 교판

I I I. 퇴계의『성학십도』와 지경(持敬)

퇴계 이황(李滉)은 50세 이후 고향인 도산(陶山)으로 퇴거하여 연구

와 저술및 강학에만전념하던중 68세 때에그의평생추구한 성학(聖

學)의 핵심을 1 0폭의 도(圖)와 설(說)로 요약한『성학십도(聖學十圖)』

(1568)를 당시 17세의 어린 나이로 막 임금에 즉위한 선조(宣祖)에게

올렸다.41) 임금에게 이 책을 올린 취지가“성학(聖學)을 권도(權導)하고

왕의 덕(德)을 보양(保養)하여 요순(堯舜)처럼 융성하도록 하기 위함”42)

에 있다고 하였다. 유학의 전통에는『소학』과『대학』이 있지만 최종 목

표는 성학이다. 성학이란 성인(聖人) 또는성덕군자(成德君子)를 추구하

고“내성외왕(內聖外王)”43)의 학문을 가리킨다. 수신위정(修身爲政) 또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최고이상으로써안으로 성인(聖人)의 지극한 덕

을 갖추어 밖으로 왕도(王道)의 정치를 시행하는 제왕학(帝王學)의 성

격이 강한 학문을 가리켰다. 그래서 퇴계는 서문에서『성학십도』의 열

폭의그림과 설명을 깊이생각하고익힌다면“道를 이루어 성인이 되는

요령과 근본을 잡아 정치를 경륜하는 근원이 모두 여기에 갖추어져 있

다”고 하였다.44)

조선 유학의 쌍벽을 이루는 퇴계에 이어 율곡 이이(李珥)도 8년 후

『성학잡요』(1575)를 저술하여 선조 임금에게 올렸다.45) 퇴계와 율곡이

12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허호익, 슐라이어마허의‘경건’과 퇴계의‘지경’(持敬)에 관한연구 121

41) 『성학십도』는 聖學의 개요를 서론격인「進聖學十圖箚」, 그리고「第一太極圖」,「第二西

銘圖」, 「第三小學圖」, 「第四大學圖」, 「第五白鹿洞規圖」, 「第六心統性情圖」, 「第七仁說

圖」, 「第八心學圖」, 「第九敬齋箴圖」, 「第十夙興夜寐箴圖」의 1 0개의 그림으로 설명한

책이다.

42) 조남국·조남욱,『聖學과 敬』(서울: 양영각, 1982), 12. 퇴계의『성학십도』와 율곡의

『성학집요』의 번역문과원문을편집한 것을주로참고하였다.

43) 莊子,「天下」, 是故內聖外王之道, 闇而不明, 鬱而不發, 天下之人, 各爲其所欲焉, 以自爲

方.

44) 「進聖學十圖箚」, 而凝道作聖之要 端本出治之源悉具於是 .

45) 황금중,“율곡의 공부론과『성학집요』,”「한국교육시학」제24권 1호(2002. 8), 297-

350. 이율곡이1575년(선조8) 홍문관부교리로 있으면서 저술한 책이다. 통설(統說)·

수기(修己)·정가(正家)·위정(爲政)·성학도통(聖學道統)의 5편으로 구성하고 편마

다 장(章)을 나누었다.

46) 최재목, 『퇴계심학과왕양명』(서울: 새문사, 2009), 31-32.

Page 62: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둘째로, 퇴계는“경전을숙독하고깊이생각하여사리를 잘 분별하여

야 할 것”과 동시에“진실로사리의 당연함을알아서 기필코 몸소실천

하려고 각오해야 한다”고 하였다.50) 이학과 심학의 논쟁은 언행일치론

에 의해 더욱 촉발되었다. 왕양명은『傳習錄(전습록)』에서“앎은 행함의

시작이고 행함은 앎의 완성이다”(知是行之始 行是知之成)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지(知)와 행(行)은 절대 나눌 수 없는 것”이며,“지(知) 하

나를 말하면 행(行)은 이미 그 속에 들어 있고, 행(行) 하나를 말하면

지(知)는 이미그 속에 자연히 들어있다”고 하였다.51) 그는명시적으로

‘지행합일’을 주장한 것이다.52)

이와달리 주희는“지와 행을 항상 서로를 필요로 한다. 눈(目)은 발

(足) 없으면 나아갈 수 없고 발은 눈이 없으면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선후(先後)를 논한다면 지(知)가 먼저이고 경중(輕重)을 논한다면 행

(行)이 무거운 것이다”고 하였다.53) 주희는 지(知)와 행(行)을 이분적으

로 나누는‘지행이분설’(知行二分說)의 입장을 취하였고, 먼저 알아야

나중에 행할 수 있다는 뜻에서‘선지후행설’(先知後行說)을 주장한 것

으로평가된다.54)

퇴계는 이러한 성리학과 양명학의 논쟁을 염두에 두고 학문의 목적

은 미묘한 이치를 생각하고 배워서 그것을 실상대로 실행하는 것이라

론(敎判論)의 교종(敎宗)과 마음의 깨달을 강조하는 심삼매(心三昧)를

정진하는선종(禪宗)의 방법론에대응한다는평을받고있다.

이러한 배경에서퇴계가 성리학과 양명학의 논쟁에서제3의 대안을

제시한 지경(持敬)을 골자로 하는‘경의 철학’을 살펴보려고한다.

첫째로, 퇴계는 경전을 배우는 경학과 생각을 살피는 심학이 지닌

각각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양자의 조화를 주장한다.47) 퇴계는 성리

학이 경학(經學)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는 성현들의 경전을 배움에

있어 성현이 경전을 통해 밝힌 이치를 형식적으로 받아들여서는 그 이

치가 죽은 것이 되므로, 경전을 읽을 때에는 대월성현(對越聖賢), 즉

“책을 펴서 성현을 대하듯이 하여 공자께서 자리에 계시고 안회와 증

자가 앞뒤에 있는것”48)같이하여생생하게살아 움직이는 이치를배워

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양명학이 심학(心學)만을 강조하는 것에 대

해서는“지극히 허령한 마음을 가지고 분명하고 진실된 이치를 구한다

면, 얻지 못 할 것이 없음이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나“마음에 주재하

는 바가없으면, 어떤 일이 눈앞에 닥아 와도생각이 떠오르지 않게 된

다.”고 하였다. 따라서 퇴계는“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두워지고, 생

각만하고 배우지 아니하면 위태해진다”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면서“배

우고 생각하는 이 두 가지 공부에 분발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 양

자를 가능하게 하는 것을 퇴계는 지경(持敬)의 도(道)라고 하였다.“경

을 계속지키는 것(持敬)은 또한생각하는 것과배우는 것을같이하는것

이요, 동과정은일관된 것이며, 마음과 행동을 합일하고드러남과숨은

것을한결같이하는도”라는것이다.49)

12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허호익, 슐라이어마허의‘경건’과 퇴계의‘지경’(持敬)에 관한연구 123

47) 위의 책, 27-28, 88-89. 퇴계는 23세 때에 명대의 정민정(程敏政)이 주를 붙인“심경

주부(心經注簿)”를 읽은 후“심경(心經)을 신명(神明)과 같이 믿고 엄부(嚴父)와 같이

존경하였다”고 말한 정도로 심학을 새롭게 이해하였다. 그런데 정민정이 과거시험을

누설하여 부당이익을 취한 것이알려져 양명학의 심학에 크게실망했다고 한다.

48)「第十夙興夜寐箴圖」, 乃啓方冊, 對越聖賢. 夫子在坐, 顔曾後先 .

49)「進聖學十圖箚」. 而持敬者, 又所以兼思學, 貫動靜, 合內外, 一顯微之道也.

50)「第五白鹿洞規圖」, 大學, 中庸之章句或問是也. 今從事於此二書, 而爲眞知實踐之學,

51) 王守仁,『傳習錄』상권(王陽明 全集 上卷 4쪽); 최재목,『퇴계심학과 왕양명』, 100. 재

인용.

52) 최재목,『퇴계심학과왕양명』, 100. “지금 사람들의 학문은 단지지행(知行)을 나누어

두 가지로하기때문에 일념이발동할 그것이비록불선(不善)이라고 하더라도, 아직

행하지 않았다면 제거하여 금지하지 아니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지금 지행합일을

설하는 것은사람들에게일념의발동이 곧 행함이 됨을깨닫고(마음의) 발동에불선

이 있으면 곧 이것을 극복해 버려 반듯이 철저하게 그것이 가슴 속에 잠복해 있지

않도록하는것이다.”

53)『朱子語類』권9, 李㉸祖錄, 知行常相須 如目不足不行, 足無目不見, 論先後知爲先, 論輕

重行爲中.

54) 최재목, 『퇴계심학과왕양명』, 99.

Page 63: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계층화시키지도 않았고知行合一說로 혼융시키지도 않았으며, 인식과

실천이 상호 작용하는知行互進說 속에 인간의 향상과 성숙이 추구되

고 있음을 볼 수 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60)

셋째로, 퇴계는 바르게 알고 동시에 힘차게 행하기 위한 지행병진

(知行竝進)의 방법으로서 마음을 다스리는심법(心法)의 중요성을 놓치

지 않았다.『성학십도』는 성학(聖學)의 실마리가 되는‘심법의 요령’을

밝힌 것이라고 하였다.61) 바르게 알아 부지런히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

엇보다 먼저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퇴계의

철학을 심학이라고불리게 된 것이다.

오직 옛 현인과 군자들이 성학을 밝히고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아

내어 그림을 그리고 설명을 붙이어 사람들에게‘도에 들어가는 문’(入道

之門)과‘덕을쌓는 기초’(積德之基)을 보여주기위한것입니다.62)

무엇보다도 나라의 흥망성쇠에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는 임금은

그 누구보다도‘마음을 잘 다스려’,‘욕심과 간사함’을 버리고‘태만과

소홀과 방종’을 없애기 위해날마다‘조심하고 두려워하고삼가하는생

활’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63) 마음에‘욕심과 간사함’이 없어야 바른 생

각과 바른 지식에 이르고,‘태만과 소홀과 방종’이 없어야 바르게 힘차

게 실천할 수 있으며, 그래야 지행병진(知行竝進)에 이를 수 있기 때문

이다.

주자는“거경과 궁리가 실제로는 一事”64)라고 보았고 따라서 궁리가

고 하였다. 그는 제왕의 학문(帝王之學) 역시 인륜의 기본을 두어야 하

는데“窮理와 力行이 모두五倫에 기본”이라고 하였다.55)

學이란 그 일을 습득하여 참되게 실천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다. 무릇 聖

門의 학이란 마음에서 구하지 않으면 어두워져서 얻지 못하는 까닭에

반드시 생각하여 그 미묘한 이치를 통해야 하고, 그 일을 습득하지 못하

면 위태로워져서 불안한 까닭에 반드시 배워서 그 실상대로 실행해야

한다. 이리하여 생각하는 것과 배우는 것이 서로 분명히 해 주고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56)

퇴계가 보기에 대학·중용은‘致知하는 방법’과‘힘써 행하는[力行]’

공부의 시초이다. 퇴계는 경을 인식과 행위를 관통하는 것으로 파악하

고 있다.57) 이동건은 퇴계의 성학을3단계를 나눠‘생각하고 익히고(思

之習之), ‘참되게 실천이행하고’(眞踐履之), 이를‘시종반복하는 것’(反

覆終始)이라고 하였다.58) 이처럼 지행의 관계를 주자처럼‘눈(目)은 발

(足)의 선후관계’나 양명처럼‘지와 행의 一事’로 보지 않고, 지와행은

‘수레의 두 바퀴나 새의 두 날개’처럼 대립이나 선후가 없는 것으로

양자가 호진(互進) 또는 병진(竝進)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59) 따라서 아

는 것과 행하는 것, 즉 지와 행의 문제에 대해 퇴계는“先知後行說로

12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허호익, 슐라이어마허의‘경건’과 퇴계의‘지경’(持敬)에 관한연구 125

55)「第五白鹿洞規圖·後說」, 故規之窮理力行, 皆本於五倫, 且帝王之學,…而窮理力行, 以

求得夫心法切要處, 未嘗不同也.

56)「進聖學十圖箚」. 抑又聞之, 孔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學也者, 習其事而眞踐

履之謂也. 蓋聖門之學, 不求諸心, 則昏而無得, 故必思以通其微, 不習其事, 則危而不安,

故必學以踐其實. 思與學, 交相發而互相益也.

57) 윤사순,“퇴계의『성학십도』에 대한 연구,”「퇴계학보」제106집(2000), 71. “퇴계의

표현으로는‘知와 行을竝進’시키려는것이그의성리학의대표적인경향이다.”

5 8 ) 이동건“퇴계『성학십도』의 성학과 자기혁신의 방법,”『동북아문화연구』, 제20집

(2009), 37-43.

59) 금장태,“敬齋箴圖와 퇴계의 居敬修養論,”「퇴계학보」, 제68집(1990), 89. 금장태는

‘수레의 두 바퀴나 새의두 날개’를 선후의개념으로 해석하였으나병진의 개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60) 김수일,“退溪의 聖人論 硏究:「聖學十圖」를 중심으로,”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1. 243.

61) 「進聖學十圖箚」, 聖學有大端心法有至要.

62) 「進聖學十圖箚」, 聖學有大端, 心法有至要, 揭之以爲圖, 指之以爲說, 以示人入道之門, 積

德之基.

63) 「進聖學十圖箚」, 而況人主一心, 萬幾所由, 百責所萃, 衆欲互攻, 群邪迭鑽, 一有怠忽, 而

放縱繼之, 則如山之崩, 如海之蕩, 誰得而禦之. 古之聖帝明王, 有憂於此.

Page 64: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별’할 수 있고, 진실된 도리를 바르게 알고또한 그것을 바르게 실천할

수 있다고 하였다.

배우는 사람은 진실로 지경(持敬)에 전념하여야 이치와 욕망의 분별을

확실할 것이며, …이러한 의미를 참되게 쌓아 올리고 오래도록 계속 노

력하기를 거듭하게 되면, 진실된 길로 오로지 가고 가장 알맞은 도리를

잘 지킬 수 있는 성학(聖學)의 본체를 잘 보존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또

한 그 본체를 현실에 충분히 응용할 수 있는 심법(心法)이 모두 여기에

있는것을납득하게될 것입니다.70)

퇴계는“敬이라는 한 글자는 성학(聖學)을 이루는 근원으로 처음이

면서 마지막을 이루는 것”71)이라는 주자의 말에 추가하여『소학』을 공

부하는 사람도 경으로써 본원을 삼고그리고『대학』을 공부하는사람도

경으로써 본원을 삼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퇴계는『소학』과『대

학』의 본원인 경이야 말로‘한 마음의 주재요 만사의 근본’이며,‘성학

의 시종이 되는 요긴한 것’이라고 하였다.72) 그리고“털끝만큼도 경(敬)

에 벗어나게 되면, 하늘과 땅이 서로 바뀌는 궤변이 일어나게 되어 삼

강(三綱)73)의 인간관계가 혼란하여지고 구법(九法)74)이 또한 혼란을 가

져와 무의미하게 된다고 하였다. 아! 아! 이러한 이치를 모르는 사람들

이여! 깊이 생각하여 조심하여야 할 일이다”라고 역설하였다.75) 그리고

역행에 우선한다는 입장이었다. 정이천은“경을 세우면內가 바르게 되

고 形狀을 의롭게 하면 외에 법도가 있게 된다”(敬立而內直, 義形而外

方)고 하였다.65) 거경궁리와 의형역행(義形力行)을 내외관계로 본 것이

다. 반면에 왕양명은‘바른 지식이 곧 바른실천’이라고 보았으므로‘알

고도 행치 못하는 모순’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퇴계는“窮理는 實

踐에서 體驗되어야 비로서 眞知가 된다”66)고 하였다. 천명을 두려워하

고, 인욕을 버리고, 천리를 따르는 거경(持敬)을 통해 바른 지식과 바른

실천에 이르게 된다는 지행병진(知行竝進)의 독특한 경의 철학을 제시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퇴계는“경을 위주로 하여 근본을 세우고, 이를

궁구하여 지식을 이루고, 자기 몸을 돌이켜 실천하여 이 세 가지 공부

가 서로병행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67)

넷째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지경이라고 하였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날마다‘조심하고 두려워하고 삼가하는’성

인(聖人)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몸을 주재하는 것은 마음

이고,‘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삼가고 엄격하게’마음을 주재하는 것이

경(敬)이라고 하였다.

대체로 마음이라 하는것은하나의 몸을 주재하는것이며, 敬은다시

하나의 마음을 주재하는것입니다.68)

퇴계는 경을‘실천하면 욕심이 적어지고 이치가 밝아져서 성스러움

(聖)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69) 또한 경을 지녀야‘이치와 욕망을 분

12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허호익, 슐라이어마허의‘경건’과 퇴계의‘지경’(持敬)에 관한연구 127

64) 오석원,“退溪의聖學에 關한考察- 聖學十圖를 中心으로,”「大同文化硏」24집(1990),

194.

65) 김태영, “한국유학에서의誠敬사상(I I)-이퇴계의敬과誠敬사상,”44.

66) 『퇴계집』答 李淑獻, 窮理而驗於賤履始爲眞知

67) 『퇴계전집』(二) 권36, 「書李宏中間目」主敬以立基本 窮理以致其知 反窮理實其踐 三者

之功互進積久.

68) 「第八心學圖」心者一身之主宰而敬又一心之主宰.

69) 「第一太極圖」敬則欲寡而理明, 寡之又寡以至於無, 則靜虛動直而聖可學矣.

70) 「第六心統性情圖」, 學者誠能一於持敬, 不味理欲而尤致謹於此,…眞積力久而不已焉, 則

所謂精一執中之聖學, 存體應用之心法, 皆可不待外求而得之於此矣.

71) 「第三小學圖」, 吾聞敬之一字, 聖學之所以成始而成終.

72) 「第四大學圖說」, 敬者, 一心之主宰, 而萬事之本根也. …則所謂先立其大者, 而小者不能

奪, 由是齊家治國, 以及乎天下, 則所謂修己以安百姓, 篤恭而天下平. 是皆未始一日而離

乎敬也, 然則敬之一字, 豈非聖學始終之要也哉.

73) 삼강은군위신강(君爲臣綱)·부위자강(父爲子綱)·부위부강(夫爲婦綱)을 말한다.

74) 구법은홍범구주(洪範九疇)를 말한다.

75) 「第九敬齋箴圖」, 三綱旣論九法亦」, 於乎小子念哉敬哉, 墨卿司戒敢告靈臺.

Page 65: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였다. 따라서 매사에 하느님 대하듯, 제사를 행하듯 하는 것을 지경(持

敬)의 자세이며, 이러한“경이 성학의 처음이요 끝이된다고 한 말을믿

을 수 있게된다”(則敬爲聖學之始終豈不信哉)고 하였다.

퇴계가 인용한 것처럼 거경(居敬)의 구체적인방법에 있어서도 신유

학자들은 단지‘마음을 다스리는 태도’만을 강조하였다. 정이(程�)는

“마음을모아흩어짐이없게하는것”(主一無適)이라했고, 윤화정(尹和

靖)은“그 마음을 잘 단속하여 한 가지 바깥의 것으로 인해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음”(其心收斂不容一物)이라 했으며, 사상채(謝上蔡)는“항상

또렷이 정신이 깨어있는것”(常惺惺法)이라하였다.80) 퇴계는 성리학자

들이주장한 이러한 마음의 태도로서의거경을부정하지않았다.

그러나 퇴계는 참된 경건은‘하늘을 섬기는 것’이요, 모든 일에‘하

느님을 대하듯 하는 것’(對越上帝)이며, ‘신인합일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경건의 보다 근원적인 요체는 단순한 마음의 외적

태도로서 거경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존재인 하늘을 경건

한 마음으로 대하는 마음의 내적 지향을 유지하는 지경(持敬)이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율곡과 주자가 사용한 거경이라는 용어를 무비판적

으로 수용하였지만 퇴계는 거경이라는 용어 대신 지경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양자의 차이에 대해일본 양명학의시조인 나

카에 토주(中江藤樹)는 앞서 인용한 성리학의 거경 방법론은“지경의

氣象을 형용하는것일뿐”, “공부의골자는 아니다”고 평가하였다.81)

퇴계의 경우 경(敬)이라는 개념은, 성(誠)과는 달리,‘대월상제’가 지

칭하듯이 우선 상제(上帝)와 같은 나의 바깥의 존재하는 인격적 주재

자(타자)에 대해서 외경하는 마음가짐을 말한다.82) 성리학의 천리(天卽

理)나 양명학의 인심(心卽理)이 아니라 영명한 주재자인 상제천(上帝

“경은 위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통하는 것”이므로“『성

학십도』는 모두 경을 주로 삼았다”(主敬)고 하였다.76) 그리하여 퇴계를

주리론(主理論)이나 주기론(主氣論)이 아닌‘주경론’(主敬論)을 주장한

학자로 평가되기도한다.77)

다섯째로, 퇴계는 지경(持敬)은 주자가 말한 것처럼 단순히 거경궁

리(居敬窮理))하는 것이 아니라,‘하늘을 섬기는 것’이요 모든 일에‘하

느님을 대하듯 하는 것’(對越上帝)이요 마침내‘신인합일’의 경지에 이

르는것이라고하였다.

퇴계는 그리고“하늘을 섬기는 것이 곧 경”(君子事天 不動而敬)이라

고 하였다.『성학십도』의 마지막 부분인‘경제잠도(敬齋箴圖)’에서“잠

잠한 마음으로 거하는 것이 마치 하느님(上帝)을 대하듯 조심스럽게

하는 것”(潛心以居對越上帝)이며,“일을 할 때에는 제사를 지내는 것과

같이 하는 것”(承事如祭)처럼“매사를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지경”(從

事於斯是曰持敬)이라고 하였다. 그리고“두려워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일상생활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중화(中和)와 위육(位育)의 공(功)을 이

룰 수 있으며, 덕행(德行)이 떳떳한 인륜을 벗어나지 않는다면천(天)과

인(人)이 합일(合一)하는 묘한 이치를 얻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78) 퇴

계는『中庸自箴』에서“하늘의 영명함은 인간의 마음과 바로 통한다”(天

之靈明 直通人心)고 하였다.79) 따라서“사람이 진실로 이것을 안다면 비

록 대담한 사람이라고 삼가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

12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허호익, 슐라이어마허의‘경건’과 퇴계의‘지경’(持敬)에 관한 연구 129

76)「第四大學圖」, 而敬者, 又徹上徹下, 著工收效, 皆當從事而勿失者也. 故朱子之說如彼, 而

今玆十圖, 皆以敬爲主焉.

77) 천병준,“퇴계(退溪)의「성학십도(聖學十圖)」에 나타난 주경(主敬)의 진의(眞意),”『퇴

계학과 유교문화』, 제38집(2006), 316. “퇴계는 聖學十圖에서 天理를 本心에 守持하

고 學文과 言行에서主敬을修養함을要諦로 삼고있다”고 하였다.

78)「進聖學十圖箚」, 畏敬不離乎日用, 而中和位育之功可致, 德行不外乎훙倫, 而天人合一之

妙斯得矣.

79)『심경』에는 이를‘상제임녀(上帝臨汝)’를 지칭하는 것으로‘상제가 사람에게 道心으

로 임한것’이라는 뜻에서상당히 종교적의미를 내포하고있다고평가된다.

80) 최재목, 『퇴계심학과왕양명』, 57.

81) 위의책, 124. 주 31참조.

82)「第八 心學圖」, 저人欲而存天理之工夫也,; 이명주,“退溪 李滉의 心學에 있어‘敬’과

욕망의문제,”「유교사상연구」, 제28집(2007. 4), 5-28.

Page 66: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하든지 하나님의 늘 의식하고 하나님을늘 의존하는 경건한 사람이 만

이 바른 행동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다높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절

대의존하는 경건한 신앙을 통해 인간의 도덕적 한계가 극복될 수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두려울 줄 아는 경건한 사람이 보다

도덕적일수 있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에 의하면‘늘 하나님의 의식하고 항상 하나님을 절대

의존하는 경건의 심정’을 가져야 바른 지식과 바른 행위에 이르게 된

다는 것이다. 지식과 행위가 사람을 경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

대로참으로 바른‘경건한 심정’을 가진사람만이 바른지식과 바른행

위에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종교론』에서 종교인들은 누구보다도 바르고 진실하

게 판단하고 바르고 힘차게 실천해야 하는 데, 이를 위해서는 먼저 경

건한감정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이 경건한 감정은 일상적인 감정이

아니라 무한자와 하나가 되는‘하나님에대한 순수한 의식과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의 감정’이라 하였다. 이러한 경건한 감정의 신학의 칸

트와헤겔의 종교이해에대한대안으로제시되었다.

이와 상응하게 퇴계도『성학십도』에서 통치자는 누구보다도 사특함

과 게으름이 없어야 하며 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병진(竝進)해야 한다

고 하였다. 이를 위해서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르러야 하며, 그러기 위

해서는 경건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경건을 유지하는 것(持敬)은

모든 일을 하늘을 두려워하고 대월상제(對越上帝)하는 것, 즉 하느님

대하듯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역시 이 역시 주자학과 양명학의 대

안이었다.

따라서 슐라이어마허의 경건과 퇴계의 지경을 비교해 보면 시대와

문화적 종교적 배경을 달리하였지만,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라는 근원

적인쟁점이 제기된 상황에서 앎과 행위에 선행하며 동근원이 되는경

건이라는 제3의 페러다임을 강조하였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리고 이

러한 경건은 슐라이어마허에게서는‘무한자에 대한 직접적인 의식’에

天)에 대한 경외를 의미한다. 최재목은“어쩌면 경의 철학은 조선 유교

가 천(天)에 대한신앙혹은그 종교적 성향을바탕으로하여종교화되

는 큰 흐름 속에서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었다고 볼 수 있다”고 하였

다.83)

I V. 결론

슐라이어마허가“경건 자체는 지식이나 행위가 아니라 감정의 경향

과 규정성이다”84)라는 명제와 함께 헤겔의 사변철학이나 칸트의 도덕

철학을 비판하고 종교적 경건을 아는 것과행하는 것의 동근원이 되는

제3의 것으로서 인간의 자기 의식의 최고 단계라고 주장한 것은 다음

과 같은배경에서이해되어야한다.

무엇보다도 헤겔 류의 형이상학이나 철학이 바른 지식을 추구한다

고 하지만 지식의 가장 단순한 형태는 진실이다. 순수한 자기의식이나

무한자에 대한 직관적 의식, 즉‘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의식’이 없으면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자기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게 되며 거짓된 지

식으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게 된다. 따라서‘하나님을 경외하

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씀처럼 바른 지식은 바른 경건에서 비

롯된다는 것이다. 종교적 경건은 지식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근본’이 되는진실을 지향하게하는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칸트 류의 도덕철학이 보편타당한 행위 법칙을 제시하였고,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알게 되면 그것을 행할 수 있다는 도덕적

낙관론을 펼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선을알고도

행치 못하는’인간의도덕적 실존적 한계 상황에 놓여 있다. 따라서 누

가 바른 행동을 가장 잘 할 수 있는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어떻게

13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허호익, 슐라이어마허의‘경건’과 퇴계의‘지경’(持敬)에 관한연구 131

83) 최재목, 『퇴계심학과왕양명』, 124. 주31참조.

84) 위의책, §6, 59.

Page 67: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하는 사회 구원의 인간화를 통전하기 위해서도 영성화가 요구된다. 최

근에는 해방신학자들에 의해 개인적 영성과 사회적 해방을 통전하는

사회적 영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87) 캅(J. Cobb)은

기독교의 이상은 전적인 복음화나 전적인 인간화가 아니라, 전적인 영

성화(full spiritualization)라고 하였다.88) 참다운 영성은 복음화와 인간

화를통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통주의(Orthodoxism)와 정행주의

(Orthopraxism)를 보완하고 통전하는 영성신학은 정경주의(正敬主義,

Orthopietism)라고칭할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타종교와의 대화와 협력을 모색하는 경우 종교적 경건에 대

한 슐라이어마허와 퇴계의 견해가 새로운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것

으로사료된다.

주제어

슐라이어마흐, 퇴계, 경건, 종교, 성학십도

F. Schleiermacher, Toegye(退溪), Piety, Religion, Seonghaksipdo(聖

學十圖)

접 수 일 2012년 6월 30일

심사(수정)일 2012년 7월 31일

게재 확정일 2012년 9월 1일

서 비롯되는 것이며, 퇴계에게서는 매사에 하나님을 대하듯 하는 대월

상제로서‘하늘을섬기는 것’에서비롯된다고하였다.

『종교론』에서 경건을 우주 또는 무한자에 대한 직관과 감정이요 직

접적 의식이라고 설명한 것이 범신론에 흐른다는 비판에 직면한 슐라

이어마허는『기독교신앙론』에서 기독교의 경건이‘예수 그리스도를 통

한 구원 의식’을 매개로 한다는 특이성 때문에 종교일반의 경건과의

차별성이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슐라이어마허의 전기의 경건 개념은

퇴계의 지경과 상응하는점이훨씬많은것으로 보여진다.

현대신학은 크게 두 줄기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정통주의(正統主

義, Orthodoxism)를 지향하는 신학 노선으로 신학의 과제를 신앙에 관

한 바른 교리의 수립이라고 주장하며 그 목표를 복음화에 두고 있다.

다른 하나는 정행주의(正行主義, Orthopraxism)를 지향하는 정치 신학

이나 해방신학과 같은 제3세계의 신학으로, 신학의 과제가 바른 신앙

실천임을강조하며그 목표를 인간화에두고있다.85)

그러나 바른 신학은 정통주의와 정행주의의 대립과 양극을 극복하

여야 한다. 이론은 있고 행함이 없다면 그것은 공허한 것이 되고, 실천

만을 강조하여 이론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맹목적인 것이되고만다. 바

른 이론과 바른실천의 통전을 위해서는 바른영성이 요청되는것이다.

왜냐하면 바른이치를 깨달으려면 진실하여야 하며, 바르게 실천하려면

성실하여야 한다. 그리고 진실하고 성실하려면 경건하여야 한다. 바른

경건은 바른 이론뿐 아니라 바른 실천의 동일한 근원이며, 이 양자의

동일한 목표이기 때문이다. 몰트만은 영성이란 신학적 용어의 전통을

경건에서 찾는다.86) 이러한 경건이 오늘날 영성신학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또한 정통주의가 지향하는 개인 구원의 복음화와 정행주의가 지향

13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허호익, 슐라이어마허의‘경건’과 퇴계의‘지경’(持敬)에 관한연구 133

85) 허호익, 『현대조직신학의이해』(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3), 제7장 참조.

86) J. Moltmann, 『생명의영』, 김균진 역(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2), 117.

87) J. B. Fuliga, “The Activist Spirituality of Liberation”, AJT, 7:2(1993), 254-264; J.

Sobrino, Spirituality of Liberation-Toward Political Holiness, tr. R. R. Barr(New

York: Orbis, 1985).

88) J. Cobb/이기춘 역, 『과정신학과목회신학』(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24. 1984).

Page 68: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2009). 83-105.

최신한.『독백의 철학에서 대화의 철학으로;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적-변증법

적 사유탐구』. 서울: 문예출판사, 2001.

. 『슐라이어마허-감동과대화의 사상가』. 서울: 살림, 2003.

. 『슐라이어마허』. 서울: 살림, 2003.

.『지평 확대의 철학: 슐라이어마허, 점진적 자기발견의 정신탐구』. 서울:

한길사, 2009.

최홍덕. “슐라이어마허의『종교론』에 나타난 기독교이해”. 「장신논단」1 4

(1998). 74-128.

.“슐라이어마허에게있어서 종교개념과 기독교 이해-『종교론』및『신앙

론』을 중심으로.”「組織神學論叢」제16집(2006). 71-100.

한숭홍. “슐라이어마허의 宗敎哲學과 神學構造.”「신학논단」제1 4집(1980. 7).

123-141.

2. 퇴계관련문헌

Michael Kalton. “퇴계『성학십도』의 현대적 의의”.「퇴계학보」제126집(2009).

1-70.

高橋進/안병주·이기동역. 『이퇴계와敬의철학』. 서울: 신구문화사, 1986.

금장태. 『聖學十圖와퇴계철학의 구조』.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5.

. “敬齋箴圖와퇴계의居敬修養論.”「퇴계학보」제68집(1990). 84-99.

김경호. “誠敬에 근거한 栗谷의 修養工夫論.”「韓國思想史學」제1 8집( 2 0 0 2 ) .

369-404.

김수일.“退溪의聖人論硏究:『聖學十圖』를 중심으로.”동국대학교 대학원박사

학위논문, 2011.

김태영.“한국유학에서의 誠敬사상(II) -이퇴계의 敬과 誠敬사상.”「호서문화연

구」제3집(1983). 29-53.

신귀현.“퇴계의 居敬窮理의 성리학과 후설의 본질직관의 현상학에 관한 비교

고찰.”「현상학연구」제9집(1996.9). 11-84.

안병주. “儒敎의憂患意識과退溪의 敬”. 「退溪學報」제25집(1980). 43-55.

엄연석. “성리학의 수양론에서 敬과 靜의 상관적 의미,”「한국문화」제43집

(2008. 9), 3-22.

참고문헌

1. 슐라이어마허관련문헌

Behrens, G. “Feeling of absolute dependence or absolute feeling of

dependence?- What Schleiermacher really said and why it matters.”

Religious studies. Vol. 34 No.4(1998). 471-482.

Borgman, E. “A Triptych on Schleiermacher’s On Religion.” LITERATURE

AND THEOLOG., Vol. 21 No.4(2007). 381-416.

Dole, A. “Schleiermacher on Religion.” RELIGION COMPASS . Vol.4

No.2(2010). 75-85.

Jensen, K. E. “The Principle of Protestantism: On Hegel’s (Mis)Reading of

Schleiermacher’s Speeches.” 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Religion. Vol. 71 No.2(2003). 405-422.

Nassar, D. T. “Immediacy and Mediacy in Schleiermacher’s Reden uber die

Religion.” The Review of Metaphysics. Vol. 59 No.4(2006). 807-

840.

Schleiermacher, Friedrich/최신한 역.『종교론: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을 위한

강연』.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 『기독교신앙』. 서울: 한길사, 2006.

강돈구. 『슐라이어마허의해석학』. 서울: 이학사, 2000.

김승철. 『역사적슐라이어마허연구』. 서울: 한들출판사, 2004.

.“『종교론』과 슐라이어마허의종교이해.”「宗敎硏究」제47집(2007). 151-

182.

.“슐라이어마허의『종교론』과‘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들’.”「宗敎硏究」

제56집(2009). 343-371.

. “종교철학-슐라이어마허의 종교론 집필과정.”「세계의신학」제5 5호

(2002. 6). 75-96.

전 철. “슐라이어마허의 직관에 관한 연구.”『한국기독교신학논총』제6 5집

13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허호익, 슐라이어마허의‘경건’과 퇴계의‘지경’(持敬)에 관한연구 135

Page 69: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국문초록

슐라이어마허의‘경건’과 퇴계의

‘지경’(持敬)에 관한 연구

슐라이어마허는『종교론』에서 종교인들은 누구보다도 바르고 진실

하게 판단하고 바르고 힘차게 실천해야 하는 데, 이를 위해서는 먼저

경건한 감정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이 경건한 감정은 일상적인 감정

이 아니라 무한자(우주)에 대한 직관으로서‘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의

식과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의 감정’이라 하였다. 이러한 경건한 감

정의신학의 칸트와 헤겔의 종교이해에대한대안으로제시되었다.

이와 상응하게 퇴계도『성학십도』에서 통치자는 누구보다도 사특함

과 게으름이 없어야 하며 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병진(竝進)하여야 한

다고 하였다. 이를 위해서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르러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경건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경건을 유지하는 것(持敬)

은 모든 일을 하늘을 두려워하고대월상제(對越上帝)하는것, 즉 하느님

대하듯 하는것이라고하였다. 이 역시주자학과 양명학의대안이었다.

슐라이어마허와 퇴계는 시대와 문회적 종교적 배경을 달리하였지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라는 근원적인 쟁점이 제

기된 상황에서 앎과 행위에 선행하며 동근원이 되는 경건이라는 제3

의 페러다임을 강조하였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리고 이러한 경건은

슐라이어마허에게서는‘무한자에 대한 직접적인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퇴계에게서는 대월상제로서 하늘을 섬기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오석원.“退溪 李滉의 聖學과 의리사상.”「유교사상연구」제21집(2004. 8). 5-

36.

.“退溪의 聖學에 關한 考察- 聖學十圖를 中心으로.”「大同文化硏」24집

(1990), 185-200.

유성렬.“퇴계의 聖君論에 관한 연구: 聖學十圖를 중심으로.”단국대학교 대학

원 박사학위논문, 1995.

윤사순. “퇴계의『성학십도』에 대한연구.”「퇴계학보」제106집(2000). 36-85.

이동건.“퇴계『성학십도』의 성학과 자기혁신의 방법.”「동북아문화연구」제20

집(2009). 31-48.

이명주.“退溪 李滉의 心學에 있어‘敬’과 욕망의 문제.”「유교사상연구」제28

집(2007. 4). 5-28.

이상익.“誠·敬論의 존재론적 기초-퇴계 율곡의 경우를 중심으로.”「동양철학

연구」제10집(1989년). 271-296.

이해영.“이황의 수양론-성학십도와 敬을 중심으로.”「퇴계학」제7집(1995년).

49-65.

조남국·조남욱. 『聖學과 敬』. 서울: 양영각, 1982.

천병준. “퇴계(退溪)의「성학십도(聖學十圖)」에 나타난 주경(主敬)의 진의(眞

意).”「퇴계학과유교문화」제38집(2006). 315-347.

최재묵. 『퇴계의심학과 양명학』. 서울: 새문사, 2010.

한형조. “퇴계의『聖學十圖』퇴계의『聖學十圖』.”「南冥學硏究」제1 6집( 2 0 0 3 ) .

335-380.

『퇴계선생문집』. 한국고전번역원(http://www.itkc.or.kr/).

『退溪集』. 한국고전종합DB(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13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허호익, 슐라이어마허의‘경건’과 퇴계의‘지경’(持敬)에 관한연구 137

Page 70: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A Comparative Study of the Piety of F. Schleier-macher and “Keeping of Piety”(持敬) of Toegye(退溪)

- Beyond Knowing and Doing

Hur, Ho-Ik

Professor

Deageon Theological University

Daejeon, Korea

F. Schleiermacher insist in his famous book On Religion:

Speeches to its Cultured Despisers(1879) that true religion is pious

feeling, neither knowing nor doing. This pious feeling is not

emotional but religious one which is related to “the sense and taste of

the infinite”. The synonyms for “feeling” which Schleiermacher uses

are “pure consciousness of God” and “absolute dependence on God”.

Therefore those who have this religious piety be able to think truly

and do right way than anyone else. Because this pious feeling not

only preceded but also the source of knowing and doing.

A similar structure can be seen from Seonghaksipdo(聖學十圖,

1568) of Toegye(退溪). Toegye also insist that “Keeping of Piety”(持

敬) as “Bewaring just as God face to face”(潛心以居對越上帝) not only

preceded but also the source of knowing and doing.

In modern theology, there are polarization between the orthodox-

ism which focus on true thinking and orthopraxism focus on true

doing. Therefore orthopietism which Schleiermacher proposed will

be new alternative to overcome this polarization.

현대신학은 바른교리를 정립하는 정통주의(Orthodoxism)와 바른실

천을 지향하는 정행주의(Orthopraxism)로 양극화되어 있다. 따라서 바

른 경건을 견지하는 정경주의(正敬主義, Orthopietism)는 이러한 양극

화에대한새로운 대안이라고할 수 있을것이다.

13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허호익, 슐라이어마허의‘경건’과 퇴계의‘지경’(持敬)에 관한연구 139

Page 71: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학문연구에있어서한 통전적방법론의원리

-삼위일체의관점에서*

전철민

(강남대학교, 조교수)

I. 들어가는말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한마디로 복잡한 시대이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급격한 발달과 함께 첨단 미디어를 통한 정보교류가 급속

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각 학문의 영역들이 전문화되면서 세분화되어

학제간만이 아니라 동일 학제 내에서도 소통의 단절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다원화현상이 심화되면서 우리의 지식과 삶이 파편화되어가면

서 통합또는통섭, 간학제 연구, 융복합 등에대한관심과 연구가 새로

운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아직 미미한 단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전체를 아우르는 그림을 그리기에는 근본적인 한계

가 있다.

이러한 와중에 신학계에서는‘통전적’인 안목으로 신학을 수행하면

서 전체학문영역을 통전적으로 보려는 시도를 해오고 있다. 그러나이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141-175

* 이 논문은 강남대학교연구비 지원으로작성되었습니다.

Page 72: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2. 통합적방법(Integrating method)

통합적 방법은 부분 또는 개체에서 출발하여 부분과 개체들을 어떤

기준에 의하여 합치는 것이라면, 통전적 방법은 전체적인 안목에서 출

발하여 어떤 부분이나 개체가 본래 그 전체의 어느 부분에 속하여 위

치하고 관계하느냐를 밝혀서 부분과 개체들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규명

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통합적인 방법은 우리의 몸에 대하여 말할

때 눈, 코, 입, 귀 등 지체들을 서로통합하여그것들이얼굴에 연결시켜

나가는 작업이라면, 통전적 방법은 몸 전체를 보고 각 부분이 이미 전

부에 붙어있음을 파악하고 그 몸의 머리 부분에 얼굴이 있으며 그 얼

굴에눈, 코, 입, 귀 등이전체몸에서 서로어떻게관계하며기능하는가

를 밝혀나가는 방법이다.

켄 윌버(Ken Wilber)는『통합 비전』(the integral vision)에서 삶, 우

주, 모든 것에 관한 통합적 접근 방법을 말하면서 모든 것을 아우르는

통합적인 또는 포괄적인 지도를 제시했다.3) 그는 그 통합지도가 모든

것을 포괄한다고 말하지만 거기에 무한과 영원,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역은 상정하고 있지 못하다.4) 윌버의『통합 비전』은 삶, 종교, 우주와

모든것을‘나’라는존재속에서 자기중심으로혼합시키고있기에 우리

는 그의 글을 통하여 통합적 방법의 극단적인 혼합주의를 보게 된다.

그의 통합적인 방법이란 전체적인 조망에서 부분을 보지 못하기 때문

에 원천적으로 발생하게되는폐단이라고하겠다.

러한 통전적 시각이 참으로 통전적인가 하는 검토와 통전과 통합이 어

떤 차이가 있느냐 하는 고찰이 요청된다. 본고는 모든 것의 근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새로운 통전적 성찰을 통하여 학문 연구, 특히

조직신학 연구에 있어서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하나의 통전적 방법론의

원리에 대한새로운 시각을 여는것으로 제한하고자한다.

I I. 학문의방법론

1. 신학의방법론들

이종성은 신학하는 방법으로 종래의 연역적 방법, 귀납적 방법, 계시

적 방법, 상관적 방법 등을 말한후 그 방법들의 장단점을 지적하고 자

기의 통전적 방법을 제시한다. 그의통전적 방법은 연역적 방법과 귀납

적 방법을 통합하는 것이고, 계시의 단일성과 다양성을 포괄하는 방법

이며 또한 계시와 연역적 방법을 아우르는 것이라고 한다.1) 김명용은

통전적 신학을 방법론적으로 모든 것을 통합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신학이라고 한다. 통전적 신학에서 통(統)이란 말은 모든 것을 통합한

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면서도 통전적 신학은 모든 것을 통합하

는 것(integrity)에 머무는 신학이 아니며 모든 것을 통합한다는 것은

자칫 잘못되면 혼합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통

전적’신학의 영어표기인‘홀리스틱’(holistic)이란말이온전함과관계

가 깊은 단어로서 통전적 신학은 모든 것을 통합해서 온전함(Whole-

ness)에 이르고자 하는 신학이기에 가능한 한 모든 진리를 통합해서

온전한 신학을 형성하고자 하는신학이라고한다.2)

14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전철민, 학문연구에있어서한 통전적방법론의원리 143

1 ) 이종성, 김명용, 윤철호, 현요한, 『통전적 신학』(서울: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2004),

83-84.

2) 앞의책, 53-54.

3) 켄 윌버,『통합 비전』, 정창영옮김(서울: 물병자리, 2008), 17.

4) 켄 윌버는 최고도의의식 수준(울트라바이올렛물결)까지끌어올리면신의 존재를 맛

보고, 만져보고, 느껴보고, 들이 마셔볼 수 있을것처럼 말하나(157) ‘영 모듈 훈련’에

서“여러분은 어느 순간에라도 신을 3인칭‘그것’으로, 2인칭‘당신’으로, 1인칭‘나’

로 체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앞의책, 201.

Page 73: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고이 holism은 그리스어o{lo"(holos)에서 유래한 말이다.6) 이 o{lo"는

신약성서에 마태복음13:33절을 비롯하여110차례 쓰이고 있는데 그

용례를 분석하면1) 일어난 전체적인 일 또는 사건,7) 2) 몸, 집, 민족, 나

라, 세계, 교회, 지구등 어떤영역이나공간, 기관, 집단, 세계의‘전체’,8)

3) 인간의 내면 전체,9 ) 4) 율법 전체(갈 5:3, o { l o n t o ; n n o v m o n, the

whole law), 5) 시간의 처음부터 끝까지,10) 6)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전

체로부분의 결합이 아닌‘온전한하나’11)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12)

3. 통전적방법(Holistic method)

통전적 방법은 통합적 방법과는 그 시작점에서 전혀 다르다. 통전적

인 관점은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시작하는

것이다. 무한한 지혜와 능력을 지니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성경에 계

시하신대로 모든 것을 시작하셨다고 보고 그로부터 출발할 때만이 하

나님의 총체적인 삼위일체 하나님, 우주, 인간, 역사 등을 바로 파악할

길이 열릴 것이다. 박경수는 여러 학자들의 칼뱅의 신학방법론을 검토

하면서 칼뱅의 말씀론, 성만찬론, 국가론 등의 주제를 다루면서 칼뱅의

신학방법론은 양 극단을 배제하는 통전적인 중도의 길(Via Media), 즉

균형감을 지닌 통합적이며 중도적 방법을 택하였다고 결론 내린다. 그

러면서 칼뱅은“이것이냐 저것이냐”중에서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 사이에”있는 진리를 붙드는 것이었는데 그의 창조성은

루터, 츠빙글리, 부처, 심지어 가톨릭주의자들과 재세례파 진영 사람들

의 사상까지 모두 흡수하고 그것들을 자신만의 틀 안에서 통합적으로

융합시키는데 있었다고 한다.5) 그런데 문제는 부분이나 개체에서 출발

하는 통합적 방법과 전체적 그림에서 시작하는 통전적 방법이 현재까

지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은 채 실제적으로 서로 혼동되거나 혼용되고

있다는 데 있다. 위에서 살펴본 이종성과 김명용의 통전적 신학방법에

서 우리는 통전적이라는 말과 통합적이라는 말이 서로 교차적으로 쓰

이고 있음을 본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통전적이란 말의유래를 찾되

신약성서의 쓰임에서 찾아서 그 용례를 분석종합하여야 할 필요를 느

끼게된다.

4. 신약성서에쓰인 o{lo"(holistic)의 용례와pa'"(every)

통전(統全)으로번역해서 쓰고있는우리말은영어holism에서나왔

14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전철민, 학문연구에있어서한 통전적방법론의원리 145

5) 박경수, “칼뱅의통전적신학방법론, Via Media”, 「장신논단」(34호, 2009), 61.

6) 우리말 큰 사전들(우리말 큰사전, 한글학회, 어문각, 1996, 5판; 최태경, 국립국어연구

소 표준국어대사전, 두산동아, 1999)에도통전(統全)이라는 단어는수록되어 있지않

다. 通典이나 通電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신학계에서 주로 쓰고 있는 Holistic의 번

역어로서 통전적(統全的)이란 용어 선택은 통합(integration)이라는 말과는 다른 의

미로 잘 선택하였다고 여겨진다. 통전을 通全으로 사용하는 사례도 많이 있는데 필

자의 소견으로는 한자의 의미로 볼 때, 通全은 統全과 統合의 중간에 위치하는 표현

인 듯하다.

7) “이모든일이일어난것은”(마1:22, tou'to de; o{lon gecgonen).

8) ‘온 몸’(마 5:29), ‘온 천하’(마 16:26), ‘온 민족’(요 11:50), ‘온 집’(행 2:2), ‘온 교

회’(행 15:22, o{lh th' ejkklhsiva/, the whole church), ‘온 땅’(계 13:3, o{lh hJ gh',

the whole earth).

9) “네 마음(heart)을 다하고 목숨(soul)을 다하고 뜻(mind)을 다하여(ejn o{lh kardiva

soukai; e jno{lhth'yuch'soukai;e jn o{lhth'dianoija/) 주 너희하나님을 사랑하

라”(마 22:37).

10) ‘일년 내내’(행 11:26, 우리말 성경; a whole year, NIV, KJV; ejniauto;no{lon'), ‘밤

이 새도록’(눅 5:5, all night; di jo{lh" nukto;").

11)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그리스도께서 입으셨던‘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

터 통으로 짠 것’(요 19:23, o J c i t w ; n a [ r a f o " e j k t w ' n a [ n w q e n u J f a n t o ; " di j

o{lou, the body-coat was seamless, woven through the whole from the top, Darby

Bible Translaion)이었다. 여기서 통전적이란 뜻은 이런 저런 이질적인 천 조각들을

짜깁기 한 옷이 아니라 처음부터 한 천으로 만든 통으로 짠 것을 시사한다. 이는 통

전이란결코부분들의짜깁기가아니란 점을보여준다.

12) o{lo"(초기의 형용사이며 영어“whole”이란 용어의 어원)는 전체로서 모든 부분들

이 제대로(properly), 전반적으로(wholly), 현존하고 일하는, 즉 부분들의 단순한 합

보다 더 큰 총체(total)를 말한다. 이 요인은 특히 은유적인 상황들이나 영적인 국면

(spiritual plane)에 초점을 맞추는 것들에서 의미심장하다. http://concordances. org/

greek/3650.htm

Page 74: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주변에 관하여 온전한 전체를 다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지성이

상정할 수 있는 공간은 무한(infinite)하다. 빅뱅설에 의하면 우주는 지

금도엄청난 속도로 팽창하고 있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

이라면 우주바깥에 이 우주가 팽창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니

우주는100억 광년 이상의 공간 규모를 지니고 있으면서 빛의 속도로

팽창하고 있어서 그 광대함이 상상을 초월하여도 결국 유한하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우리는 광대한 우주 가운데 지극히 미세한 지구

에서 극히 짧은 순간에 살다가 사라질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결

코 시공간의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점을 겸허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과 공간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의 온전한 그림

을 총체적이면서 하나하나가 전체 속에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

을 보여주실 수 있는존재자 곧 우주와 그 가운데 우리를 창조하신 하

나님께서만 그 계시하신 말씀을 통해서 진정한 의미에서 통전적 시각

을 열 수 있음에 눈을돌려야 할 것이라고생각한다.

J. J. 뮐러는 자신의『신학방법론』(What are they say about theologi-

cal method?)에서 칼 라너(Karl Rahner)와 버나드 로너간( B e r n a r d

L o n e r g a n )의 초절주의적 방법론(transcendental method), 존 매커리

(John Macquarrie)와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실존주의적 방법론, 데

이빗 트레이시(David Tracy)와 버나드 E. 메란드(Bernard E. Meland)

의 경험론적 방법론, 그리고 에드워드 쉴레벡크(Edward Schille-

beeckx)와 존 소브리노(Jon Sobrino)의 사회현상학적 방법론 등의 독

특성과 다양성 등을 분석하여 소개한 후, 결론 부분에서 그 방법들의

공통점을 일곱 가지로 정리한다. 그는 그 첫 번째로 매우 중요한 공통

점이“하나님”이라고 한다. 여러 신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목표의 문제

에서 물질적, 과학적, 혹은 이상주의적 환원주의에 의해 고갈되지 않는

삶에 대한 헌신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들은 각자 실재에 대한 신성한

관점을 가지고 있어서, 이 세계는 실재의 완전한 설명이 아니라는 것이

이를 정리하면 신약성서에서 쓰인 형용사o{lo"(통전적)란 말은 어

느 시간의 처음부터 끝까지와 어느 공간 전체와 어느 영역 전반, 그리

고 짜깁기하지 않은통일된 하나를 나타내고 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

자신과 피조세계 전반에 걸쳐서 시공과 그 사이 모든 것과 그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들 모두를 총체적으로일컫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통전적

이란 용어는 통합적이란 말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o{lo"(holos)가 영어 ‘all’과 같이 전체를 하나로 보고 말하는데 비

하여pa'"(pas)는 전체를 말하되 영어의every처럼 개체(each)에 강조

점을 두는‘모두’라고 한다.13) o{lo"와pa'", 이 두 단어가 한 문장안에

서 함께 쓰인 중요구절로 마가복음12:33이 있다.“또 마음을 다하고

(o{lo") 지혜를 다하고(o{lo") 힘을다하여(o{lo")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pantwn, every) 번제물과기타제물보다나으니이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o{lo"는 통전적이라고 보고pa'"는 통합적이

라고 볼 것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할 수 있겠다. 관점에 따라 그렇게 볼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필자는 후자도 역시 통전적 관점에서 쓰여 졌다

고 생각한다. 그 까닭은pa'"가 전체를 이루는 개체(each)를 강조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전체적인 안목에서 개체를 보고 그 개체를 전체의

필연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p a ' "(each, every)가 없는 o { l o "( a l l ,

whole)나 그 반대도 상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인류는 과학기술과 인문

학과 종교및 영(spirit)의 영역에서 엄청난 발전을 해왔으나 여전히 유

한한 공간과 한정된 시간속에서 불완전한 지각을 가지고 우리 자신과

14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전철민, 학문연구에있어서 한 통전적방법론의원리 147

13) pa'"는 각각(each), 하나하나 모두(every); “전체의 부분(들)”의 각각을 나타내는 말

이다. pa'"(“각각, 하나하나 모두”)는“적용하는 각각(모두, every)의 부분”이란 의미

에서“모두”(all)를 뜻한다. 그래서 총체적 그림의 강조가“한 때에 한 개”(one piece

at a time)에 있다. 이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무려 1248회나 사용되고 있다. http://

concordances.org/greek/3956.htm

Page 75: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I I I. 삼위일체에대한통전적이해

1. 삼위일체에대한통전적고찰

역사적으로 삼위일체에 대해 여러 가지 많은 사고들이 있어왔으나

다음 세 주요한 경향으로 정리할 수 있다.17) 1) 성부 중심: 삼위일체가

성부의 본질의 일치로부터 시작하여 위격의 삼위일체로 이루어진다는

이해이다. 이 이해는 유대인의유일신 사상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하나 되심에 초점을 맞춘 신학을 먼저 발전시킨 것으로 자연

스러웠으나 성자와 성령이 성부에 종속되는 종속주의(subordination-

ism)라는비판에서서구신학자들에게외면받아왔다. 2) 본성중심: 삼

위의 본성이 같다는 점에서 출발하여 세 위격이 구별된다는 이해이다.

서구신학자들이 선호하는 이 해석은 양태론(modalism)의 그늘에서 온

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3) 교류 중심: 삼위 하나님

의 세 위격들로부터 본성과 교류의 일치로 삼위일체가 진행한다는 이

해이다. 위르겐 몰트만과 레오나르도 보프를 비롯한 실존주의적해석이

다. 보프는 이 관점이 기독교 신앙의 특별한 경험으로부터 유래하는가

장 바른 해석이라고 주장한다.18) 그러나 이 관점은 보프 자신이 시인하

듯이 삼신론(tritheism)의 위험을 초래한다. 그래서 그는 이 위험을 피

다. 이 세계를 관통하고, 투과하고, 둘러싸고 있는 전혀 다른 차원이 있

는데 그것은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한 인격이며 곧“하나님”이다.14) 그

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 공통점은 그들 각 신학자들이 현대 세계에서

하나님을 찾기 위해 애썼고 하나님 자신이 발견될 수 있는 곳을 지시

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15) 그들 모두는 각자의 신학방법을 하나님이

나 성서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인간성, 인간의 경험, 인간실존, 현대세계,

종교적 경험, 문화, 사회현상 등으로부터 그들의 신학방법을 시작하였

지만모두하나님과그 하나님과의 만남으로귀결한다.

이제 우리는 그 귀결점을 출발점으로 삼되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

터 시작하는 것을통전적 신학방법이라고말할수 있겠다. 그런데 삼위

일체에 대한종래의 이해는 형이상학적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삼위일체

에 대한 이해의 시작은, 데이빗S. 커닝엄(David S. Cunningham)이 말

한 대로, 매우 실제적인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성서의 기사

들은“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유일하신하나님 야웨, 성육신하여 우리 가

운데 내주하시는 그리스도, 그리고 성육신하지않으셨으나 우리와 함께

여전히 임재하고 계시는 성령으로 경험하는 세 역사적 만남들”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한다.16) 삼위일체라는 표현 자체가 성경에 있지 않고, 삼위

일체에 대한교리가 교부들에의하여 형이상학적으로표현되었지만, 삼

위일체에 대한 이해의 출발은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그리스도

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야웨 하나님과 동일하신 하나님으로

체험한 구체적 역사적 경험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삼위일체적 방법

론은 결코 연역적 방법과 동일한 방법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우

리는삼위일체로시작하는 통전적 신학방법에대하여 논하려 한다.

14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전철민, 학문연구에있어서한 통전적방법론의원리 149

14) J. J. 뮐러,『신학방법론』(What are they say about theological method?) 윤홍식 역(서

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0), 116.

15) 앞의책, 121.

16) David S. Cunningham, These Three Are One: The Practice of Trinitarian Theology

(London: Blackwell Publishers, 1998), 21.

17) Chul-Min Jun, “The Triune God and The Triunity of Theology, Morality and

Spirituality”(University of Birmingham, Ph.D Thesis, 2007), 16; Leonardo Boff,

Trinity and Society (Maryknoll, New York: Orbis Books, 1988), 77; 보프는 그의

상게서248 각주에서 이러한 분류는Th. De. Regnon의 Etudes de theologie positive

sur la Sainte Trinite, vol. 1 (Paris, 1982), 335-40, 428-35에서 처음으로 제시되었

다고 한다. Alister E. McGrath는 삼위일체적 접근에서 6개 모델들-Cappadocians,

Augustine, Karl Barth, Karl Rahner, Robert Jenson, 그리고John Macquarrie의 모

델들을 제시하나이 모든 접근들은위에서말하는 세 관점들에서 벗어나 있지않다;

Alister E. McGrath, Christian Theology: An Introduction, Second Edition

(London: Blackwell Publishers, 1998), 302-313.

18) 이 해석은비교적 최근의경향으로몰트만을비롯한 실존주의자들의이해이다.

Page 76: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재적 삼위일체에서 종속적인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성부중심이라고해서사실상 종속주의가 아니다. 성부에서시작하는해

석은 종속주의이며 이는곧 군주론(monarchism)으로이어진다고 보는

것은 한편으로는 절대 군주들과 그에게 붙은 세력들이 그것을 이용하

려는 데서,21)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저지하려는 사람들의 오해에서

빚어진 것이지 결코성경의 관점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 어디를 보더

라도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나 성령을 자기에게 종속시키려는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오히려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과 성령께 자신

과 동일한 권위와 동등한 자유, 그리고 대등한 주권을 부여하고 계신다

(마 28:18). 성부께서는 성자와 성령을 포함하여 천사나 인간이나 자기

가 창조하신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시킬 권한이 있으시나, 그 본성이 사

랑이시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강제로 굴복시키려는 마음이 없으시다. 이

는 성부를 그대로 닮으신 아들의 마음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오히려 아버지와 동일한 권세로 모든 사람을 섬기려 왔다고 말씀하신

다(마 20:25-28). 우리는 우리의 권위주의적 의식과 그러한 경험에서

성부하나님을 근본적으로오해하여온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서로모순되게 보이는 두 마디 말씀을 하신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아버지는나보다 크심이라”(요

14:28). 후자만 보고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무리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성을 부인한다. 그러나 이는 아버지의 권

위가 아들의 권위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말하시는것이지 아들이 아버

지보다 어느 면에서도 못하다는 것을 암시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

은 그 본질이나 영광에 있어서 동등하다(요 10:30절의‘하나’는 homo

ousia; 요 17:5절은대등한 영광을 나타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이

러한 이해는 우리 인류에게 특히 한국 사회와 교회에 근원적인 메시지

하기 위하여 카파도기아 신학자들과 성 요한 다마신(St. John Dama-

scene)에 의해표현된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를 제시한다.

필자는 위의 세 해석들이 각각 삼위일체에 대하여 한편으로 바른

견해를 피력하고 있으나 다른한편으로는 각각종속론에 대한오해, 양

태론과 삼신론적 경향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원인을 분석하여 통

전적 이해에 이르는 길을 모색하였다. 먼저, 본성 중심과 삼위의 교류

중심 이해의 공통된 한계는 삼위일체 논의를 본성이나 위격에서 시작

하려는 데 있다. 그래서 한 본성을 강조하여 그로부터 출발하면 불가피

하게 양태론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세 위격에서 시작하면 비록

본성의 교류로 페리코레시스를 강조하더라도 삼신론적 경향성에서 결

코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본성과 위격을 동시에 지니

고 계시지 먼저 본성을 지니고 계시다가 뒤에 위격이 형성되거나 그

반대도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본성과 위격이 동시에 말해지면서 함께

논의되어야마땅할 것이다. 그렇다면삼위일체의형성은 어떻게 시작되

었다고 이해해야 타당할 것인가? 사실 그 온전한 이해는 이미 가장 먼

저 나와 있었다. 초대교회에서 가장 먼저 논의가 된 삼위일체 이해는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성자와 성령, 또는 성령과 성자로 삼위

일체가 시작되었다고보는것이가장원만한 이해이다.19)

문제는 서구 신학자들의 성부 중심 교리는 성자와 성령께서 성부에

게 종속된다는 종속주의에 대한 오해 때문에 거부된 점이다.20) 성경에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 내부, 즉 경륜적 삼위일체를 통하여 계시된 내

15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전철민, 학문연구에있어서한 통전적방법론의원리 151

19) Chul-Min Jun, “The Triune God and The Triunity of Theology, Morality and

Spirituality”(2007), 70ff; 필자는 상기 Ph.D. 논문에서 무시간 속에서 성부로부터

성령이 발출하시고 성자가 나시되 성령의 발출 이전에 성자는 이미 성부의 중심에

내재해 계셨다고이해한다.

20) 삼위일체 논의에서 종속주의에 대한 오해를 푼 것은 필자의 Ph.D. 논문의 성과이나

삼위일체 논의가 본성과 위격을 동시에 지니신 성부중심에서 이해되어야 타당하다

는 관점은 그 후에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그 다음 논의들은 그에근거하여 필

자가새롭게전개하는 것이다.

21) J. 몰트만,『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김균진 역(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96),

229.

Page 77: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의가 종속주의라는 것은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전적

인 오해에서 빚어진 것이라는 것을 바로 인식하고본성과 인격 모두에

서 시작하는 이해가 보다 원만한 통전적 삼위일체 이해임을 제시한다.

그리고 원만한 삼위일체 이해가 우리의 공동체적 삶(가정, 단체, 국가,

국제사회, 교회)의 바른 기초로서 자리매김하여 우리의 관계성을 온전

케 하려면 위격(지위)과 인격에 대한 통전적 이해가 요청될 것이다. 이

는 학문상호간의 관계성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에 대해

서는뒤에다시언급될 것이다.

2. 전체적하나됨(Holistic Oneness)과 개체적전체(Every Whole)

인류 역사는 정치사회적으로 집단주의( c o l l e c t i v i s m )와 개인주의

(individualism) 사이에서변동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집단주의는 개인

을 희생시키고개인주의는집단을 내부로부터 와해시킨다. 분명집단주

의와 개인주의는 그릇되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떠난 인류나 삼위일체

하나님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 아름다운

관계를 말씀과 성령으로 깨닫고 삼위일체적 삶을 살지 않으면 개인이

기주의나 집단이기주의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삼위일체 하나님, 달리

표현하면 삼위일체 하나님 가족과 나라는 어떻게 집단 이기주의와 개

인이기주의에서 벗어나서 권위와 질서를 사랑과 자유 가운데 지키며

각자의 개성과 전체적인 공동체가 동시에 역동적으로 아름답고 영광스

럽게 살 수 있을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온전하시

지 못할것이다. 사람으로는할 수 없으되 하나님께는할 수 있다.

우리가 앞에서 고찰한o{lo"와 pa'"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에관

하여 상고하는 것이 그 실마리는 푸는 길이 될 수 있다. o{lo"는 전체

적인 하나(all, whole)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체적으로 표현한다면,

pa'"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각 인격이 개별적 전체(every)로서 전체

적인 하나와 동등하고 대등한 무게로 강조된다.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

를 던져주고 있다. 한국인들과 같이 인격과 지위를 일치시키는 계급주

의적 사회의 풍토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본관계 설정을 정면으로 역

행하고 있다. 지위와 인격은 구분되어 있다. 높은 지위가 높은 인격을

말하지 않으며 낮은지위가 낮은 인격을 뜻하지 않는다. 성부는 지위에

서는 아들보다 높으시나 아버지와 아들은 동등한 본성과 대등한 인격

이시다.22) 이런 점에서 우리 한국 신학계에서 삼위일체 논의 가운데 인

격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주저하고 위격(位格)이란 말만 쓴다면 위격

(status) 속에인격(personality)이 함몰되어 삼위일체 하나님 상호간에

권위와 질서를 소중히 여기시면서도 동등한 본성과 대등한 인격적 교

제를 하시는 아름다운 관계를 외면해버려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에

게 이상한 형식적인 이론만으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병폐 중 하나인 계급과 인격을 일치시키고 있는

현실에서신학계와교계가 벗어날 시도조차못하고 있는것이아닐까?

삼위일체를 보다 원만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논의를 반드시 본성

과 인격을 함께 지니신 성부로부터 시작되어야 동일본성에서 시작하는

서구의 양태론에서 자유롭고, 다른 세 인격의 교제로부터 시작하는 삼

신론적 경향을 극복할 수 있을것이다. 성부에서 시작하는 삼위일체 논

15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전철민, 학문연구에있어서한 통전적방법론의원리 153

22) 하나님은 신(神)이시니 신격이라고 해야지 사람처럼 인격이란 말을 쓰는 것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성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

님(personal God)이라고 할 때 인격은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지닌 존재를 뜻한다.

사람의 인격, 즉 지정의는 하나님의 형상에서 나왔다. 사람 인(人)자를 쓴 인격이나

persona에서 파생된 person을 삼위일체 하나님께 사용하는 것이 난처한 점이 있으

나, 바르트가 말했듯이 우리가 사용하는‘아버지’라는 말은사람의 아버지가 먼저요

그 말을 하나님께 적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먼저요 그것을 사람 아버

지에게 사용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받아들인다면(Karl Barth, Church Dogmatics, I,

1, tr. by G. W. Bromiley, Edinburgh: T. & T. Lark, 1936, 389) 인격이란 말도 하나

님께서 우리에게 적응하시는 용어 곧 성육화된 표현(incarnated expression)으로 수

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

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이시니라”(마 23:9)고 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참다

운 인격자는사람이 아니라하나님이시다고할 수 있지않을까?

Page 78: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가 고찰한 성서의 언어 o{lo"와 pa'"의 절묘한 결합에 대한 이해로서

삼위일체에 대하여 한 실마리를 푸는 데서 시작하여 삼위일체 하나님

은 전체적으로 하나 되심(Holistic Oneness)과 동시에 개별적 전체

(Every Whole)가 되시는 신비(musterion)이심을 이해하게 된다.“이

비밀(mystery)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

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

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6-27).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이 신비는 바로 삼위일체의 신비로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신비로 하나 되심과 셋 되심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에서 극명하게 나타났고,24) 부활(롬 1:4)과 성령의 강림(행 2:1 이하)과

내주(고전 6:19; 고후 3:16-18)와 충만하심(엡 5:18)과 인도하심(갈 5:

16)으로 나타났다. 이제 그리스도의 신비-‘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상호내재(perichoresis) 안에서 전체적 하나됨과개별적 전체가 신비롭

게 동시에 하나 안에서 다양함을 이룬’-는 성령 안에서 그를 모신영

적인 그리스도인들 개개인과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가 공동체적

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가족(The Family of the Triune God)인 동시

에 삼위일체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the Triune God)의 백성으

로서, 전체적 하나와 개별적 전체에 참여한다.25)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직전에 두고 그 동산에서 기도하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

스도의 다음의 기도에 대한응답일 것이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과 성령 각 인격은 삼위일체 전체를 전혀 감소시키지 않고 동일한 존

귀와 영광을 드러낸다. 칼 라너(Karl Rahner)에 의하면 성부는 전능하

시고 성자도 전능하시며 성령 또한 전능하시다.23) 역(逆)으로, 성부 성

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은 총체적으로 각 인격의 전능하심에 의하여

그 전능하심이 손상되지 않는다. 이를 달리표현하면 성부하나님 홀로

전능하심이 삼위일체모두의 전능하심과 그 영광스러움이 동등하고 성

자와 성령도 그러하시다는 말이며, 그 반대도 그러하다는 말이다. 우리

가 삼위일체하나님을세 인격의 관계성에 방점(傍點)을 둘 때 자칫성

부와 성자와 성령을 삼분의 일 신(神)으로 간주해버리는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반대로 각 인격의 전능하심

과 무한하심에 방점을 둔다고 해서삼신론에 떨어질 염려는 없다. 그것

은 o{lo"와pa'"를 동시적으로취하는 이해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를

필자는 수학적으로 표현할 때 더 명확해진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하나가 셋이고 셋이 하나이며 또 위에서 고찰한 대로 하나와 셋, 셋과

하나가 동등한 본질과 대등한 인격을 지닌 삼위일체는 산술적으로 모

순된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는 데서

온 이해부족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완전하며 각 인격도

무한하시고완전하다. 그러므로무한하고 완전한 존재 사이에는 더하기

(+)나 빼기(+)가 무의미하다. 그리고 전체로서 하나이며 하나로서 전체

인 완전하신 존재 간의 밀접한 관계는‘+’관계가 아니라‘×’관계가

성립되어야 한다. 따라서 삼위일체 관계를 수학적으로 표현하면<1+

1 + 1 >이 아니라 < 1×1×1 >의 관계이다. <1+1+1≠1 >이지만 < 1×1×

1=1>이다. 이는 이 1이 불완전한 피조물의 개체로서 1이 아니라 완전

하고 스스로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것이다. 또한 삼위

일체 하나님께는<1÷1÷1=1>의 관계식도 해당된다. 이것이 곧 우리

15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전철민, 학문연구에있어서한 통전적 방법론의원리 155

23) Karl Rahner, The Trinity, translated by Joseph Donceel (Tunbridge Wells, Kent:

Burns & Oates, 1986), 78.

24) Jürgen Moltmann, The Crucified God (London: SCM Press, 1974), 241.

2 5 ) 참조; J.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김균진 역(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7), 237-239.

Page 79: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도 성령을 받지 않고 성령에 대하여 무지하여 성령께서 어떤 분이시며

어떤 역할을 하시는지 모르고 또 성령의 임재 아래 있지 아니하면 모

든 진리의 지식은 개념만 남게 된다. 삼위일체의 세 인격 가운데 성령

이 가장 독특하시다. 성령을 모르고 성령과 함께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화석화 되고 만다. 여기서는 지금까지 논의

한 것과 관계하여 성령께서 하시는 주요한 사역 두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성령께서는 일치시키는 일을 수행하신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지식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성령 안에서

내가그 일치를 경험하느냐는 다른 문제다. 성서에 계시된 성령은 하나

님의 영이신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아버지와 아들의 독특성( d i s t i n c t i v e n e s s )을 한 초점으로 일치시키신

다.28) 또한 성령은 그리스도와 우리, 우리와 성부, 우리 서로 사이, 교회

와 세상, 우리와 자연 등 모든 다른 영역들 간을 연결하거나 일치시키

는 일을 수행하신다(엡 4:3-4). 깔뱅은 과학을 성령론적으로 이해하여

하나님께서 기독교 신앙여부와 관계없이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

심으로써 과학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고 한다.29) 성령께서 서로 다른

존재나 영역을 일치시킬 수 있는 것은 성령은 경계들을 넘나들 수 있

기 때문이다.30) 위에서 살펴 본 o{lo"와pa'"의 실재적인 결합도 성령께

서 임재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신 성령의 임재

아래 있지 아니하면 실재적으로 아버지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고, 하나님 아들의 영이신 성령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예수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

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사랑하신 것을세상으로 알게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1-23).

3. 일치와다양화를이루시는성령

내재적 삼위일체는성부로부터 시작하여 성자, 성령으로완성되었다.

경륜적 삼위일체에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나와 아버지는 하나

이니라”(요 10:30)는 선언에서 드러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승

천 후에 아버지께서 약속하시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성령께서 오순절에 임하심으로써 확증되었다. 성부-성자-성령은 삼위

일체적으로(triadically),26)‘초월적 실재’(transcendental Reality)-‘성육

한 내재적 현실체’(incarnate and immanent Actuality)-‘실재화’또는

‘현실화’(Realization or Actualization)-로 말할 수 있다.27) 이것은 곧,

성령께서 삼위일체의 완성자 및 종결자이심을 뜻하는 동시에 성령의

임재 없이는 삼위일체를 실재적으로 현실적으로 경험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체험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이해하게 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에 대하여 아무리 많은 진리를 말한다 하더라

15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전철민, 학문연구에있어서한 통전적방법론의원리 157

26) triad의 형용사형 triadic은 사전에 있지만 부사형은 없으나, triadically로 만들어 쓰

는 것에 무리함은 없을 것으로 사료된다. 왜냐하면, 필자가 상기 Ph.D. 논문 “The

Triune God and The Triunity of Theology, Morality and Spirituality”(2007)에서

‘ t r a n s c e n d e n c y ’ ( 초월성), ‘immanency’(내재성)과 짝을 이루는 영어 단어로

‘presency’(임재성)란 사전에 없는 단어(presence는 있으나)를 새로 만들어 썼는데,

영국인 심사위원들에게서 통과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상기 논문, 92-93 각주

255).

2 7 ) C h u l-Min Jun, “The Triune God and The Triunity of Theology, Morality and

Spirituality”(2007), 47.

28) Colin E. Gunton, The One, The Three and The Man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190.

29) 최윤배, “깔뱅의 과학 이해,”「조직신학논총」26(2010), 21; W. Standford Reid,

“Natural Science in Sixteenth-Century Calvinistic Thought”, G. C. Gamble(ed.),

Calvin and Science, 186-187.

30) Colin E. Gunton, The One, The Three and The Many (1997), 181.

Page 80: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온 집”(the whole house, o{lo" to;n oi\kon)에 충만히 임하셨는데, 그 집

안에있던“하나하나모든사람”(every, o{lo" pavnte'")에게“불의 혀처

럼 나누어져”(tongues of fire that separated) “그들 각자 위에 머물렀

다”(rested on each of them)33) 여기서 우리는 성령께서 온 집 안의 모

든 사람에게 통전적으로(holistically) 임하시는 동시에 각 개인(each,

e[kaston) 위에 개별적으로(individually), 다양하게(diversely) 머무시

는 것을 알게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와 체험없

이는 교회공동체도 극단적 개인주의로 변질되고 있는 민주자본주의와

집단사회주의에서온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공산집단체제와 같은

패러다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신학을 비롯한 여러학문도 삼

위일체 하나님 내부에서부터 시작하여 성령의 일치하는 동시에 다양화

하는 원리와 능력을 배워야 삶과 학문의 파편주의나 획일주의에서 벗

어날수 있을것이다.

이제 삼위일체적인 관점에서 학문연구의 한 통전적 방법론의 원리

를 살펴보고자 한다.

I V. 삼위일체적인한 통전적방법론의원리

이제 지금까지의 논의를 다른 차원에서 삼위일체의 일치(unity)와

다양성(diversity)에 대하여 고찰하고 본고의 주제인 학문연구에 있어

서 한 통전적 방법론의원리를 삼위일체의관점에서말하고자한다.

1. 삼위일체와단일권위(Single Authority)

이전의 서구중심 삼위일체 논의에서 일치에 관한한 동일본질(homo

ousia)과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상호침투, 상호내재 또는 상호교

그리스도 안에 실제로 살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롬

8:9). 성령은 성부의 초월성과 성자의 내재성과 자기의 임재성에서 비

롯한 무한한 다양성(infinite diversity)을 그 본연의 화합성(unanimous

personality)으로일치시키신다. 이러한의미에서그리스도안에서 성령

의 임재 아래 있지 아니하는 어떠한 일치하려는 시도도 삼위일체 하나

님을 벗어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임재(the

presence of Holy Spirit)를 벗어난 통전적 시도는 성부를 떠난 비실재

적인 것(non-reality)인 동시에 성자 밖에서 이루어지는 비현실(non-

actuality)에 불과할것이다.

다음으로, 성령은 개별화의 역할(the role of individualization)을 수

행하신다.31) 개별화는 곧 다양화(diversification)이다. 성령이 다른 존재

나 요소들을 일치시키는 일과 개별화시키는 일은 서로 상반되는 현상

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동일한 성령의 양면적(dual) 또는 다면적

(multiple) 사역이다.32) 고린도전서12장은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을 말

하고 있는데 이는 한 성령의 역사다. 같음과 다름, 곧 일치와 다양성은

서로 상반된 것 같으나 한 몸의 지체처럼 다양한 여럿이면서 전체로

하나인 것이다. 서로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하나하나에게 임하여 수많은 개체를 꽃피워서 다양한 열매를 맺게 하

는 것은 성령의 독특한 역할인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연구에서 일치와

다양성을 통전적으로 동시에 이루려 한다면 성령의 임재 아래서만 가

능한 것이다.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의 모습을 보면, 한 성령께서“그

15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전철민, 학문연구에있어서한 통전적방법론의원리 159

31) ibid, 182, 190.

32) 현요한은 몰트만의『생명의 영』은“…해방의 영으로서 하나의 우주적이고 총체적인

성령론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 반면에, Michael Welker의『하나님의 영: 성

령의 신학』은“‘총체적 성령론’이 아니라“영의 다원주의”를 주장하였다”고 한다. 현

요한,『성령, 그 다양한 얼굴』(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9), 25-26. 이는 필

자가 성령의 일치케 하는 사역과 다양케 하는 역할이 서로 배타적이 아니라는 것을

함께 말해주는 것인 동시에 이 양면성은 매우 중요한 성령이해라는 것을 뒷받침해

준다고 여겨진다. 33) 행2:2-3.

Page 81: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위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우리는 모든 권세는 다 성부 하나님께

로부터 나온다는것을분명히 인식하지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 아버지는 삼위일체의 창시자(auctor, Author)이시다. 이 창시

자가 모든 권위(auctoritas, Authority)의 원천이다. 성부의 권위는 초월

적 권위(transcendental authority)이다. 성부는 단순히 권위만 지니시지

않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다. 이 아버지로부터 나오신(proceed-

ed) 성령과 나신(begotten) 아들은 모두 그 권위아래에서 단일(單一) 권

위를 지니고 있다. 성부께서 초월의 자리에, 성자께서 내재(內在)의 자

리에, 성령께서 임재(臨在)의 자리에 계시다면,36) 아버지의 권위는 초월

적 권위이고 아들의 권위는 내재적 권위(immanent authority)이며 성

령의 권위는 임재적 권위(present authority)이다. 초월적 권위와 내재

적 권위와 임재적 권위는 서로 다른 세 권위들이 아니라 세 인격들의

삼위일체적 단일 권위이다.37) 우리는 삼위일체에서 세 인격이 일치를

이루는 것으로 동일본질과 페리코레시스만 생각해왔는데, 만일 동일본

질과 상호내재하며 교류하는 면이 있다 하더라도 그 권위를 거역하면

그 순간 일치는 깨뜨려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권위의 일치, 즉 일치

된 권위 아래에서만 실제적 공동체적 하나가 이루어진다. 다른 측면을

고려하여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하더라도 온전한

신성 곧 하나님과 동일본질을 지니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여 그 권위 아래 있으면 하나님과 한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갈등 없이 살 수 있다. 사람 외의 피조물들은 사람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의 법칙에 순응

함으로써 하나님의 권위의 능력 아래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첫 사람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

으면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거역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금

류) 두 면에만 집중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를

신약성서와 그리스도를 중심해서 탐구해 보면 동일본질과 페리코레시

스와 함께 반드시 동시에 논의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권위’이다. 빌라도는 자기 앞에 죄인으로 고발당하여 십자가형에 처해

질 위기에 있는 예수가 아무 죄도 없는 것을 알고 석방하려고 애썼다

(요 19:4 등). 빌라도가 예수께 무죄 변론의 기회를 주고자 질문했으나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

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요 19:

10)고 대답을 재촉했다. 이에 예수께서“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다”(요 19:11)고 하시면서자기는 빌라도의 권세를 빌어석방되기

를 바라지 않고 위에 계신 아버지의 권위 아래 있는 빌라도의 판결에

따라 십자가 형벌을 지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이 두 구절에서 권

한과 권세로 번역된 원어는ejxousiva(exousia)인데 이 용어의 독특한

점은 권위(authority)와 능력(power)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34)

칼 헨리(Karl Henry)는“신약성서가 권위와 힘을 함께 의미하는 이중

적 감각(a dual-sense)의 단어ejxousiva라는 용어를 충격적으로 사용

한다. 이들 두 개념들(ideas)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어떤 행

동을 수행하려는 한 지배자, 즉 그렇게 하려고 하는 그의 권위는 만일

그가 그것을 행할힘이나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면 쓸모없을 것이다. 힘

이 없는권위는 절름발이(hobbled)가 되고, 권위가 없는힘은불법적이

된다”35)고 강조한다. 빌라도가 죄 없는 줄 알면서도 나사렛 예수를 십

자가형에 처한 권세는 성부께서 허락한 권위에 잇대어 있다고 그리스

도께서는 알고 계셨다.“권세(exousia)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이 말씀과

16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전철민, 학문연구에있어서한 통전적방법론의원리 161

34) Karl Henry, God, Revelation And Authority, Volume IV, God Who Speaks And

Shows, Fifteen Thesis, Part Three(Wheaton, Illinois: Crossway Books, 1999), 24.

35) ibid.

36) Chul-Min Jun, “The Triune God and The Triunity of Theology, Morality and

Spirituality”(2007), 48; 61ff.

37) ibid., 86.

Page 82: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온유하고겸손한 분이시다. 권위없는자유, 권위없는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40) 예수께서 아들로서 아버지를 그대로 닮으셨는데(요 14:7-10),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마 11:29)고 하셨으니 하나님 아버지께서온

유하고 겸손하신 것이 사실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는 아버지와주로서41) 아들과 성령을 마음대로 지배할 권세를 지니셨지

만 오히려 온유와 겸손으로 섬기시면서 자신의 모든것과 함께 자신이

지니신 권세를 아들과 성령께 위임하신다(마 28:18; 창 1:2; 눅 1:35; 요

16:8-10).

그리고 성부께서는 아들과 성령께 무한한 자유를 주신다. 아들은 아

버지로부터 무한한 자유를 받으셨기 때문에“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고 하실수 있다. 성

령께서도 무한한 자유를 수여하셨기에“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고 선언하는 것이며 성령은“자유

를 주시는 영”(freedom-giving Spirit)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원천적

으로 성부께서 무한한 자유를 지니신 분이시기에 가능한 것이다. 유한

한 자유를 지닌 존재는 타자에게 자유를 주는 만큼 자기의 자유가 제

한될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존재자체가 자유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는 그 존재 자체 안에 임재하시고 내재하셨던 성령과 함께 무한한 자

유 가운데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사랑은 자유가 없으면 원천적으로 불

하신 바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은 동일본질과 하나님

과 대등한 위치(위격?)에 다다를 것이라고 오해하였다. 사단의 거짓말

에 속은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그리스도는 피조물의 형

상, 곧 성육신에 대한성부의 파송과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의권위

에 순종하심으로써“하나님이그를지극히 높여모든이름위에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

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

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빌 2:9-

11). 현대는 그 어느때보다도거역이 다반사가 된 시대이다. 수많은 권

위들이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 다른 권위들이

심각한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권위다원화(post-authority)38) 시대가 가

속화되고 있다. 권위다원화시대에서신학의 영역에서도 학문의 권위가

상대화되어서 서로 충돌하며 갈등을 일으키고 있을 뿐 아니라 삼위일

체 하나님의 권위로부터 기록된 성경의 권위까지 상대화 시키고 있다.

모든 권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다.39) 그리고 이 하나님

의 권위는 삼중적 단일 권위(a threefold single authority)이다. 따라서

자연이나 정치사회적 삶의 모든 영역과 함께신학을 비롯한 모든 영역

의 학문분야의 권위도 이 삼위일체적 단일 권위 아래 있을 때 진정 통

전성을 지닐것이다.

2. 권위와자유

권위를 거슬리면 자유할 것이란 기대는 권위 아래에서만 참 자유가

있다는 진리를 간과한 처사다. 삼위일체의 창시자는 모든 것의 권위로

서 그 안에 본래적으로 무한한 자유와 사랑과 생명을 지니고 계시면서

16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전철민, 학문연구에있어서한 통전적방법론의원리 163

38) 혹 이 용어가 필자가 처음사용하는것은아닌지 모르겠다.

3 9 ) “All authority derives ultimately from God...”; Leonard W. Doob, P e r s o n a l i t y ,

Power, and Authority (Westport, Connecticut: Greenwood Press, 1983), 102;

40) A. E. J. Rawlingson, Authority and Freedom (London: Longmans, Green and Co.,

1924). “참된 권위는 자유와 양립하는 것이 틀림없다”, 25; 자유 없는 권위나 권위

없는 자유는 현대 세계의 영적 질병을 치유할 수 없다. 105; J. 몰트만은 그의『삼위

일체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우리를 그 각각의 나라에서 하

나님의 종의자유, 하나님의자녀들의 자유, 하나님의 친구들의자유를 주시고 그 자

유는 마침내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서 완전한 열락의 자유를 지향한다고

결론 내린다(242-263).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와 해방과 영광의 사역(253)을

수행하시는주로서의 권위속에내재된 무한한자유를 전제할때만가능할것이다.

41)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I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1), 287.

Page 83: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계 속에 있는 한 실체의 구체적인 인물이란 의미로 사용하였는데 카파

도키아 교부들은 삼위일체 공식에“mia ousia, treis hypostases”를 사

용할 때, ousia는 그 셋이 공유하는 것을 말하고, hypostasis는 그들을

구별하게 만드는 것을 말하였다.45) Colin E. Gunton은 Basil의 성령이

해와 관련하여h y p o s t a s i s의 개념을 특유한 존재(particular being)를

함축하는것으로 수용한다.46)

지금까지 우리의 논의에서 삼위일체의 통전성은 균형을 이룬 삼위

일체의 같음과 다름의‘전체의 개체성’과‘개체의 전체성’또는 개체성

과 전체성의“일치와 다양성”에서 시작됨을 고찰하였는데 일치성은 성

부의 초월적이며 절대적 권위에서 시작되며 다양성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자유에서솟구쳐 나옴을 보았다.

3. 자유와순종

자유가 없는권위는 억압과 획일(uniformity)에 빠져 무미건조한 상

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면, 권위를 무시한 자유는 다원주의와 상대주의

와 무정부 상태가 되어 갈등과 다툼과 혼란 상태를 야기할 수밖에 없

다. 이는 학문과 삶의 영역 모두에 해당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획일

주의(집단주의)나 다원주의(개별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앞에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 안에서 일치와 다양성을 이루시는 성령의 임재

아래에 있을때에만 그것이 가능함을 고찰했다. 성령의 임재아래 있다

는 것은다르게 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 인류

의 가장 뿌리 깊은 무지에서 오는 오해는 이 순종에 관한 것일 수 있

다.47) 순종은 내가 누구(또는 어떤 존재)에게 순종하면 그 존재의 종이

가능하기에“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8, 16)는 말씀은 자유를 전제

할 수밖에 없다. 권위는 일치를 이루는 토대라면 자유는 개별화하고 다

양케 하는 근저일 것이다. 위에서 말한 권위의 위임은 달리 말하면 자

유의 부여이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께 자신의

권위와 사역을 위임하는데서 무수한 다름(differences)이 가능하게 되

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때 일치를 말하기보다 다름을 말하

는 것이 극히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다른 것은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고 아들은 어버

지가 아니며 성령은 아들이 아니다라는 정도 이상은 말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다른 서구신학자들과 같이 신적 본질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세 인격의 다름을 말하기가 당연히 어려웠을 것이다.42) 민주주의, 자유,

존엄, 그리고 인권 등의 영향 아래 18세기로부터 근대의 인격에 대한

이해는‘자기 주도적’이고‘자기 결단적인’주체로서 특유한 개인이어

야 한다. 따라서 각 인격은 다른인격들과 사물들로부터 독립된 주체로

여겨졌다. 한 인격성은한 자율성을나타낸다. 이러한 인격개념을 삼위

일체 공식인“세인격들 안의한 본질”에 대입시킬 경우희미하나마 삼

신론적인 베일을 쓰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인격이란

말 대신에 신적 존재의 양식들(modes) 또는 방식들(ways, Seinsweise)

이란 용어로 대체하였다.43) 그리고J. D. Zizioulas를 비롯하여Eberhart

Jüngel, Jürgen Moltmann, Leonardo Boff, Catherine Mowry La-

Cugna, Wolfhart Pannenberg 등 많은 현대 신학자들은 상호관계적인

인격 개념을 선호하게 된다.44) 그리스인들은hypostasis를 타자와의 관

16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전철민, 학문연구에있어서한 통전적방법론의원리 165

42) William G. Rausch, “The Trinitarian Controversy” in Sources of Early Christian

Thought, Translated and Edited by William G. Rausch,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6), 26.

43) Ted Peters, God as Trinity ( Louisville, Kentucky: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89), 35.

44) 앞의책, 36.

45) Ted Peters, God as Trinity (1989), 195; 각주19.

46) Colin E. Gunton, The One, The Three and The Man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190.

Page 84: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는 가능할 수 없는 일이다. 아들은 성육신 속에 자기의 신성을 숨기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자기부인을 확증하며, 성령은 철저히 자기 얼굴

을 숨기심으로 영원히 자기부인을 실행하신다.48) 성부는 항상 초월의

자리에 머무시면서 스스로 겸허의 위치에 거하신다.49) 절대적 초월의

자리는 완전한 소외의 자리일 것이다. 그러나 성부는 무궁한 사랑의 인

내로 이 외로운 자리를 지키심으로써 모든 것의 구심점으로서 무수한

존재를 내재하시는 아들과 임재하시는 성령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시는

동시에 무한한 다양화를 허락하신다. 성자와 성령은 자기에게 주어진

절대적 권한과 무한한 자유를 결코 자기들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성

부의 권위에 순종하며 시작하신 분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부인의 길에

들어가신다. 삼위일체는 말 그대로 셋이 하나이고 하나가 셋이다. 이것

은 원리적으로 하나가 자기를 부정할 때 셋이 긍정되고, 동시에 셋이

각자를 부정할 때 하나를 이룰 수 있기에 삼위일체란 말 자체에 이미

자기부인과 타자긍정의 원리가 담겨있다고 본다. 자기부인과 타자긍정

은 나를 부인함으로써 너의 존재와 자유를 드러내며 내가 죽음으로써

너와 우리를 살리는 것이다. 이는 곧 holos와 pas가 상호부정을 통하여

함께 사는 것으로서 십자가와 부활의 원리이다. 권위와 자유와 순종은

삼위일체적이다. 권위가 권위주의로 변질될 때 자유가 억압되고, 자유

가 권위를 거역하면 방종이 되며무정부적 공동체가 된다. 자유하는가

운데 자발적으로 권위속에 진정한 자유와 사랑이 있음을 믿고 순종할

때 온전한 공동체를 이룰 것이다. 그리고 지위(위격) 속에 인격을 함몰

되게되어있다(롬 6:16). 그러므로자유를 원하는 자는누구나 남의종

이 되기를 싫어한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과같이 되기를 바

랐지만 하나님의 종이 되기는 싫어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였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오해는 하나님을 우리와 같은차원에서 생각한 것

에서 비롯된다. 유한한 존재인 동시에 교만한 존재에게 순종하면 그의

종이 되어당연히 나의 주체성과 자유를 상실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무

한하시면서겸손하신 하나님, 우리의아버지이신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은 하나님의 무한한 자유 가운데로 들어가는 첩경이다. 순종의 신비는

일치에 있다. 우리 몸이 우리의 머리의 명령에 순종하면 몸은 머리와

일치를 이루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의 무한한 자

유 가운데 들어가서 하나님과 일치를 이룰 뿐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인격의 다름가운데 인격적 다양성을이룬다.

4. 자기부인과타자긍정의원리(The Principle of Selfnegation

and Others-affirmation)

지금까지 논의를 통하여 우리는 통전적 삼위일체와 삼위일체의 통

전성에서 우리의 삶과 관련된 학문연구를 위한 한 통전적 방법론의 원

리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시작하였

기에 성부께서 아들과 성령을 비롯한 모든것의 권위자이시다. 그 절대

성과 권능으로 당연히 모든존재를 자기에게 종속시킬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와 왕이신 성부는 오히려 자기의 모든권세를 아들과 성령께 위

임하실 뿐 아니라 자신의 무한한 자유까지 부여하신다. 그뿐 아니라 그

아들 안에서 피조물인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리스도 안에

서 우리와 하나 되기를 기뻐하신다. 아들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우

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것이 그 증거이다. 이는 자기를 부인하지않고

16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전철민, 학문연구에있어서 한 통전적 방법론의 원리 167

47)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은 자신들을 진정 사랑하여 선한 뜻으로 하신 금지명령을 오

해한것으로볼 수 있다(창3:5).

48) 현요한은 그의『성령, 그 다양한 얼굴』(1999)에서성령의 본체론적 이해를 비롯한 여

러 다양한 성령의 요소들을 고찰하고 성령을 통전적 패러다임으로 보면서‘새생명

을 살리는 영’으로 결론맺는다. 필자는 성령의 다양한 모습은 성령의 얼굴없음(the

facelessness of the Spirit)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Chul-Min Jun, The Triune

God and The Triunity of Theology, Morality and Spirituality (2007), 90.

49) 아들의 겸허(kenosis, 빌 2:7) 이전에 아버지의 원겸허(Ur-kenosis)가 있었을 것이다;

C h u l-Min Jun, The Triune God and The Triunity of Theology, Morality and

Spirituality (2007), 263.

Page 85: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아니다. 학문의 본질과 인격은 어디에 근거해야 할까? 그것은 그 학문

하는 이의 인격에 달린 것이며 그 본질은 그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어

떠한관계에 있는가에좌우될 것이라고여겨진다.

주제어

통전적 방법론, 삼위일체, 권위, 일치, 다양성.

Holistic Methodology, Trinity, Authority, Unity, Diversity.

접 수 일 2012년 6월 30일

심사(수정)일 2012년 8일 4일

게재 확정일 2012년 9일 1일

시키는 것은 집단 속에 개인을 말살시키는 행위인 반면, 개인이 지위

곧 권위를 무시하는 것은 공동체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로서‘All’과

‘Every’를 분리시켜서삼위일체의통전성을 역행하는 것이다.

V. 마감하는말

경륜적 삼위일체를 통해 계시된 내부적 삼위일체 안에 감추어진 자

기부인과 타자긍정의 원리를 학문연구의 기본적 방법론적 원리로 삼는

다는것은실재적으로무엇을 말한다고할 수 있을까?

먼저, 신학은 그 궁극에서 삼위일체 신학에 바탕을 두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출발하여 그 통전성에서 모든 논의를 고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삼위일체 신학은 다른 신학분야의 궁극적 권위임을 인식하고

사랑과 인내로써 그 고독한 자리를 지키되 삼위일체 하나님처럼 타자

를 자기의 종속적 존재로 생각하여 그 위에 군림하는 자세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중세시대의 신학이 철학을 비롯한 타 학문들을 시녀로

삼아서는 결코 안 된다. 성부가 성자와 성령에 그 권위를 위임하고 자

신의 자유를 부여하듯이 조직신학은 타 신학 및 타 학문과 더불어 단

일 권위를 나누도록해야 하고, 동등한 자유와 대등한 동반자로 대하여

야 할 것이다. 모든 학문은 삼위일체의 통전적 관점에서 항상 전체

(holos) 안에 개체(pas)가 부품이 아니라 전체의 필연적 개별자로서 인

식하여 그 학문자체 안의 개별자들을 대하고, 타 학문 영역과 자기영

역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또 하나의 개별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학

문해야 할 것이라고 사료된다. 각 학문 분야는 자기부인과 타자긍정에

서 역설적으로자기 존재가 타자 안에서 빛을 발하는 원리를 삼위일체

안에서 터득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각 학문은 타 학문을 존중해야

하는데 이것이 다름 아닌학문의 인격이라 할 수 있다. 여러 학문의 지

위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는 질서의 문제이지 본질과 인격의 차이가

16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전철민, 학문연구에있어서 한 통전적 방법론의 원리 169

Page 86: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Rahner, Karl. The Trinity, translated by Joseph Donceel. Tunbridge Wells,

Kent: Burns & Oates, 1986.

Rausch, William G. “The Trinitarian Controversy” in Sources of Early

Christian Thought. Trans. and Ed. by Rausch, William G.

Philadephia: Fortress Press, 1986.

Rawlingson, A. E. J. Authority and Freedom. London: Longmans, Green and

Co., 1924.

Tillich, Paul. Systematic Theology I.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1.

참고문헌

몰트만, J. 『삼위일체와하나님의나라』. 김균진 역. 서울: 대한기독교, 1997.

뮐러, J. J. 『신학방법론』. 윤홍식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0.

박경수. “칼뱅의통전적 신학방법론Via Media”. 「장신논단」. 34호. 2009.

윌버, 켄. 『통합비전』. 정창영 옮김. 서울: 물병자리, 2008.

이종성/김명용/ 윤철호/ 현요한. 『통전적신학』.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2004.

최윤배.“깔뱅의 과학 이해”.「조직신학논총」. 제26집 (2010년 6월). 한국조직신

학회편.

현요한. 『성령, 그 다양한 얼굴』.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9.

Barth, Karl. Church Dogmatics, I. 1. tr. by G. W. Bromiley. Edinburgh: T. &

T. Lark, 1936.

Boff, Leonardo. Trinity and Society. Maryknoll, New York: Orbis Books,

1988.

Cunningham, David S. These Three Are One: The Practice of rinitarian

Theology. London: Blackwell Publishers, 1998.

Doob, Leonard W. Personality, Power, and Authority. Westport, Connec-

ticut: Greenwood Press, 1983.

Gunton, Colin E. The One, The Three and The Man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Henry, Karl. God, Revelation And Authority, Volume I V, Wheaton, Illinois:

Crossway Books, 1999.

Jun, Chul -Min. “The Triune God and The Triunity of Theology, Morality

and Spirituality”. University of Birmingham, PhD. Thesis, 2007.

McGrath, Alister E. Christian Theology: An Introduction, Second Edition.

London: Blackwell Publishers, 1998.

Moltmann, Jürgen. The Crucified God. London: SCM Press, 1974.

Peters, Ted. God as Trinity. Louisville, Kentucky: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89.

17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전철민, 학문연구에있어서 한 통전적 방법론의 원리 171

Page 87: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다음으로, 성부의 권위로부터 삼위일체와 피조세계가 유래하여 그

권위 아래에서 하나가 될 수 있듯이 진정한 자유와 순종이 본래적으로

단일권위 아래있다는 것을알게됩니다. 그리고 삼위일체의일치와 다

양성사이의 균형도 보게될 것입니다.

끝으로, 삼위일체의 통전적 관점을 고찰한 후에 학문연구에 있어서

한 통전적 방법론의원리가 결론적으로제시될 것입니다.

국문초록

학문연구에있어서한 통전적방법론의원리

삼위일체의관점에서

이 논문은 학문연구의 한 통전적 방법론의 원리에 관한 것인데, 이

는 삼위일체의 새로운 관점에서 필자가 작성한 것입니다. 여기서‘학

문’이라고 할 때 기본적으로 조직신학을 말하며 일반 학문에 얼마나

기여할지에대해서는명확히 말할수 없습니다.

필자는 먼저 여러 방법들 중에서 통합적 방법과 통전적 방법을 비

교하면서 그 둘은전혀 다른방법임을 주장합니다. 통합적 방법은 부분

에서 출발하여 전체로 나아가는 시도라면 통전적 연구는 먼저 전체를

보고 그 전체에서 출발하여 그 구성요소나 부분들이 서로 및 전체와

어떤관계를 형성하고있는가를밝히는 것입니다.

이 연구는 먼저‘통전적’이란말의영어 ‘holistic’의 어원인 o{lo"의

용례를 신약성서에서 고찰하여 p a ' "의 의미와 용례를 비교합니다.

o { l o "는 영어의 ‘ a l l ’에 해당하는데 전체로서 하나를 말하는 반면에

pa'"는 ‘every’와 같이 전체의 개체를 가리킵니다. 우리말로는 둘 다

‘모두’라고 말하는데 전자는 하나로서 모두, 후자는 개체적 전체를 말

합니다. 이 둘은 함께 역동적 관계를 지닙니다. 이 두 용어들의 관계의

빛에서 보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전체로서 하나인 동시에 성부와 성자

와 성령으로 각 인격이 전체와 대등하게 본래적으로 전체적 하나입니

다. 이 관계성으로부터인류에게집단주의와개인주의를 극복할 가능성

이 열릴수 있습니다.

17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전철민, 학문연구에있어서 한 통전적 방법론의 원리 173

Page 88: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indicates, as ‘all’ in English does, that the whole forms one; pa'", like

‘every’, indicates the entity for the whole, and was found to be able to

form a dynamic relations when they are together. In light of the

relations between these two terms, the Triune God is the Oneness on

the whole, and at the same time the Three-ness, where each Person,

that is the Holy Father, the Holy Son, and the Holy Spirit, is

increately one with the whole as every Person, and where each Person

(Personality) is in equal relations with the whole. From this relation-

ship, the possibility that the humanity can overcome both collectivism

and individualism may be seen.

It also was viewed that true freedom and obedience are intrinsi-

cally within a single authority, whilst stating that the Trinity and the

created world, both of which came forth from the authority of the

Holy father, may only become one under the authority. The balance

between the Unity of the Trinity, and Diversity was also looked at.

The principle of a holistic methodology in academic research is

put forward in conclusion after holistically arranging perspectives of

the Trinity.

The Principle of a Holistic Methodology in Academic

Research-in the perspective of the Trinity

Jun, Chul-Min

Assistant Professor

Kangnam University

Yongin, Korea

This thesis puts forward the principle of a holistic methodology

that was done as academic research and was arranged in a new

perspective by the writer, in the perspective of the Trinity. By

‘academic’, whilst it is not clear to what extent this will contribute to

general academy, it is basically limited to the systematic theology.

The writer first insists that the integrative method and the holistic

method, amongst several methods, come forth in totally different

directions, whilst consider upon them by comparing them. Whilst the

integrative method would be a method that starts from an entity or a

part, and aims at the whole by putting them together; the holistic

method studies, starting with seeing the whole and then starting from

it, how entities and parts are connected to the whole, and also what

relations are formed between the parts and the whole.

What could be said to have been gained considerably through this

study is that the meaning and the usage of pa'"(each, every) that is

used alongside and in comparison with o{lo"(all, whole), which is the

origin of the English word ‘holistic’, whilst considering the range of

its usage in the examples in the New Testament. When o { l o "

17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전철민, 학문연구에있어서 한 통전적 방법론의 원리 175

Page 89: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사회생태적정의론을위한 존재론적모색:

알랑바디우의존재론을활용하여

권진관

(성공회대학교, 교수)

I. 서론: 논문의목표와문제의식에대한진술

정의는 경제, 정치, 생태의 영역에서 공정한 것을 의미한다. 즉, 정의

는 분배적이어야 하고, 인권적인 면에서 평등해야 하며, 생태환경친화

적이어야 한다. 즉 정의는 배분적 정의, 정치적 정의, 생태적 정의 모두

를 포함한다. 지금까지 이 세 가지의 영역을 모두 아우르지 않고 일면

적인정의를다루는 경향이 학계에서 있었다. 예를들어, 생태정의를외

치는 학자들 특히 심층생태학자들은1) 배분적 정의나 정치적 평등에 대

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배분적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생태정의

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 그 예로 예전 동구라파 사회주의권에서의

생태환경의 파괴를 들 수 있다. 또한, 배분적 정의는 정치적 정의와 모

순되기도 했다. 예를 들면, 배분적 정의를 중시하는 사회주의적 통제주

의와 정치적 자유를 중시하는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와의갈등을 들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177-210

1) 예를들어, David Landis Barnhill & Roger S. Gottlieb, ed. Deep Ecology and World

Religions: New Essays on Sacred Ground (Albany, N.Y.: SUNY Press, 2001).

Page 90: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존재론은 세계 안의 존재자들이 어떤 원리 속에서 구조적으로 연결

되어 있거나 혹은 파열되어 있는가를 분석하는 것이므로, 존재론은 윤

리를 위한 메타적 근거가 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윤리를 존재론적인

근거속에서 사고하지 않는다면, 그 윤리적 사고는 내적인 일관성을잃

거나이데올로기로 전락할 수 있다. 존재론은 세계 속의사물들의 존재

원리, 특히 사물들간의 근원적 관계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목표

로 하기때문에 윤리학적사고를 준비해 준다. 윤리가 구체적인 상황에

서 가장 적합한 행동을 찾는 것이라면, 그 구체적인 상황을 통찰력 있

게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그 상황 속에 있는 존재와 수없이 많은 존

재자들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것이어야 한다. 이 연구자

는 존재론은 존재의 구조 자체를 연구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는 존재자들의 관계가 존재 자체의 구조를 어떻게 바꾸어

놓는가를연구하는학문으로 본다.

이 논문에서이 연구자는 종합적이고 통전적인 정의(justice)를 위한

이해를 위하여 정의에 대해 존재론적인 분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여기

에서 이 연구자는 정의에 대한 존재론적 분석은 정의의 대한 폭넓은

이해를 보증해 준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 연구자는 정의를 분석

하는 방법으로서 존재론적인접근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학

자 폴 틸리히의 말을 존중한다.2) 틸리히도 그렇게 말하고 생각했지만,

존재(being)는 모든 존재자(beings)들 안에 공통으로 있는 것이고, 각

존재자들이 이 존재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는 존재자들을 이해

하기 위한 지평을 제공해준다. 그런 면에서 존재는 무한 지평이다. 이

무한지평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현실을 이해한다. 완전한 이해

(진리)는 무한 지평 속에서 경험된다. 정의라는 개념도 이러한 진리의

무한지평에서 예기적으로(proleptically) 접근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렇

수 있다. 이러한 불일치는 정의 개념 자체 안에 분열과 상호모순을 가

져와정의를 통전적으로이해하는것을방해했다.

정의로운 배분을 위한재화를 살펴보면, 경제적 재화와 사회적 재화

(지위, 계급, 기회)가 있고 이것이 공평하게 배분되어야 정의를 이룰수

있다. 그리고 정치적 정의를 위해서는 시민적 자유, 정치적 평등, 회복

적 정의, 그리고 보편적 인권등이 공정하게 모든인간들에게 부여되어

야 한다. 생태적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과 자연환경 사이에 존중

의 관계와 생명적인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생태적 정의는 종종배분

적 정의와 정치적 정의와 충돌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후자들은 인간들

과 인간 제도들 속에서의 정의에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이 연구자는

이렇게 정의간의 상호충돌 문제를 존재론적으로해결하고, 오늘날우리

에게 필요한 통전적 정의개념으로서 사회생태적 정의( s o c i o-e c o

justice)를 정립해 보고자 한다.

오늘날의 정의에 대한 관심은 지구화의 현상 속에서 더욱 고조되고

있다. 시장의 지구화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소외되고 박탈당하고 있

을 뿐만 아니라, 자연생태계가 남용되고 파괴되며, 자원은 고갈되고 있

다. 최근의 지구 온난화와 기후변화는 이러한 지구화의가속화에 그 원

인이 있다. 이것은 다시 모든 인류의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우리 사회

속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승자 독식의 실태, 약자들의 실업, 그로 인한

고통과 죽음을 목도하면서 정의에 대한 국민적인 의식을 제고할 필요

가 더 커지고 있다. 정의 없이는 사회가 유지되고 지탱해 나갈수 없게

될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산천이 좁고자원이 빈약한 나라인데 생

태환경은 빠르게 파괴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사회정의(배분

적 정의와정치적 정의)와 생태정의가모두위기에 빠져있다.

정의의 부재와 위기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정의와 생태

정의를 아우를 수 있는 정치윤리적 이론이 형성되어야한다고 본다. 이

러한 이론은 존재론적인 근거 위에서 마련되어야 하기때문에, 이 연구

자는정의론을존재론적으로접근하여구성해 보는것을목표로 한다.

17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권진관, 사회생태적정의론을 위한존재론적 모색: 알랑바디우의 존재론을활용하여 179

2) Paul Tillich, Love, Power and Justice (New York, N.Y.: Oxford University Press,

1954).

Page 91: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보이고 있고, 하이데거 등의 해석학적 존재론은 들뢰즈 등의 탈현대주

의적 존재론으로 발전되어 다름, 타자, 불연속을 강조하는 해체주의로

나아갔다. 일부의 급진적 진보주의자들은 바디우, 지젝 등의 급진적 꼼

뮨주의에 기우는 경향을 보인다. 이 연구자는 이러한 다양한 존재론 중

에서바디우의유명한『존재와 사건』에 나오는 존재론을활용하여사회

정치적 변혁주의와 생태환경주의를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하나의 정의

론으로 묶어보고자한다.3)

앞으로 이 연구자가 행할 정의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가 타당성( a d e-

quacy)을 갖는 것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있는가? 폴 틸리히는 일찍

이, 존재론의 논지가 지성적인 청자들에게 타당하고 설득력을 가지는

만큼타당성을 갖는다고말하였다.4)

틸리히의 존재론적 정의론에서는 사랑과 힘을 정의의 상관적인 개

념으로 삼고있다. 그리고 정의란 바로 사랑을 하는정당한 형식이라고

하였다. 틸리히는 사랑은 아무런 제한이 없는, 한쪽에 무비판적으로 치

우친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일정한 제한이 있는 사랑, 어떤 형식을

가진 사랑이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이 정의에 합당한 사랑이고 좋은 것

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생명, 정의, 평화의 세 주제에 연결시켜 본다면,

생명과 평화는 모두 존재론적인 개념이며, 이것은 그 깊이에서 정의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정의란 생명과 평화의 정당한 형식이 된다. 어떤

형식의 생명과 평화가 정의인가? 정의는 충만한 생명을 보장하는 것이

고, 진정한 평화를 낳는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논의하다가보면동어반

복이 될 수 있고,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정의의 정체성(identity)과 독

특성(uniqueness)을 부각시킬 수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더 나가야 한

다. 틸리히의 존재론은 현실의 역동적, 변혁적인 존재론이 되기에 미흡

게 예기되는 정의 개념은 닫혀져서 완결된 개념이 될 수 없다. 현실의

변화에 따라서 그 변화에 응답하면서 미래적으로 예기해 나가기 위해

항상스스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개념이다. 존재론적(ontological)이라는

말은 존재의 지평안에서 사물과 개념과 관계를 이해하며, 이러한 각각

의 존재적(ontic) 이해에 기반하여다시존재자체(존재지평)를 예기해

나가는 사유방식이라고말할수 있다.

이 연구는 사회정의와 생태정의를 포괄하여 각각의 정의론을 보다

확대해 나갈수 있는포괄적 정의론을 존재론적으로 모색하려한다. 사

회정의론은 서양의 고대사회로부터 지금까지 특히 최근에는 존 롤스나

위르겐 하버마스를비롯한 사회철학자들의노력으로발전해 왔다. 그런

데 21세기 들어서서 보다환경정의론이 더욱 거세게 거론되고 있다. 심

층생태주의자들은 환경정의를 급진적으로 부르짖고 있다. 생태주의자

들의 문제제기와 요구는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목소리이며 이것을

지나칠 수 없는것이현실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사회정의론자들은

이러한 목소리를 자기의 존재론적 틀 안에 어떻게 수용할 수 있는가?

이러한 수용의 과정 속에서 기존의 사회정의론은 스스로를 변화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새로운 정의론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이

러한것들이 이 연구의 주된관심이될 것이다.

철학 사상사를 들여다보면 다양한 존재론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에서는 크게 보아 플라톤적 존재론과 아리스토텔레스적 존재론이

있다. 동양에서는 도교적, 불교적, 유교적 존재론이 있다. 이밖에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존재론적 담론들이 발전되어 왔다. 현대의 역사 속

에서는 헤겔, 하이데거, 화이트헤드, 스피노자 등이 유명하고, 최근 회자

하고 있는 들뢰즈, 알랑바디우 등은21세기의 대표적인 존재론적 철학

자들이다. 신학계에서는 개신교측에서폴 틸리히가존재론적신학을 전

개했고, 가톨릭 측에서는 칼 라너가 대표적인데, 그는 토마스주의적 존

재론을 전개했다.

환경주의자들은 스피노자, 화이트헤드의 존재론에 기반하는 경향을

18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권진관, 사회생태적정의론을 위한존재론적 모색: 알랑바디우의 존재론을활용하여 181

3) Alain Badiou, Being and Event, Oliver Feltham, trans. (London, UK: Continuum,

2006). 원래 불어로 1988년에 출판되었다. L’etre et l’evenement (Edtions du Seuil,

1988).

4) Tillich, 57.

Page 92: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I I I. 정의담론을위한존재론적-형이상학적요소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존재론은 크게 보아 두 가지의 유형이 있다.

첫째는 현실을 묘사하고 기술하며 설명해 주는 일에중점을 두는 존재

론이있다. 폴 틸리히의존재론이나 토마스 아퀴나스의존재론이 이 범

주에 속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현실을 비판하고 새로운 현실을 구축

하도록 주체적 결단을 촉구하는 존재론이 있다. 필자는 이 두 가지 존

재론중에서 후자, 즉 주체의 급진적 결단을 촉구하는 존재론을 선택한

다. 알랑 바디우의 집합이론을 통한 존재론적인 담론이 이에 가깝다고

본다.

1. 하나로구조화된상황

알랑 바디우의 존재론적 철학에서 몇 가지의 중요한 개념들을 소개

하면 다음과 같다. 그것들은 획일화된/비획일화된 다수( c o n s i s t e n t /

inconsistent multiples), 없음(void), 사건, 진리, 주체 등이다.5 ) 이것을

이 글의 흐름에 맞게 바꾸어 본다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비일

체적다수와 공허는 오늘의 상황을 말해준다. 우리가 처해있는상황은

항상 다양한 다수 요소들이 모여 있는 다수의 결합체(the multiple of

multiples)이다. 그런데 이러한 다수의 요소들이한 관점과 힘(신자유주

의적자본주의와 국가)에 의해서 구조화되어 일정한 일체적 다수가 엮

어진 상황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화된 상황은 위로부터의

힘에 의해서 하나로 간주된 것(counted-as-one)이며, 이 상황 속에놓

여 있는 요소들 중에는 이 규정적인 힘에 대항하여 저항하는“비획일

화된 다수”의 요소들도 있다. 오늘날 자본과 국가에 의해서 규정된 상

하지 않는가 본다. 여기에 이 연구자는 알랑 바디우의 부정의 존재론,

즉 지금까지의 존재적 상황을 부정하고 넘어서는 새로운 존재적 상황

으로 나아가는 존재론의 구상의 도움을 받아 정의론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I I. 오늘의우리현실속에서의정의

오늘날 우리에게 직면한 문제들의 대부분은 정의와 관련된 문제이

다. 예를 들어, 4대강 사업은 정당한가? 그것을 추진했던 것이 정의로

운 것이었나, 아니면 그 반대였는가? 4대강사업은 생명생태의 문제일

뿐 아니라, 정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생태적 정의, 사회적 정의가4대강

사업에 얽혀 있다. 또 다른 예로, 최근까지22명이 죽어간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문제도 정의의 문제이다. 제주도 강정마을의 해군 군

사기지 반대운동도 정의의 문제이다. 이 때문에 최근 평통사 사무실 등

을 압수 수색한 것도 정의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정의의 문제는 우리

사회의가장중심으로떠오르고있고앞으로도그럴것이다.

정의의 문제는 생명과 평화의 문제이지만, 또한 힘의 문제이다. 모든

것은 힘의 문제이며, 어떤 힘이 정의로운 것인가를 밝혀야 한다. 힘은

정신적 설득력을 갖는 정신적인 힘과 강제력을 발휘하는 물리적인 힘

을 포함한다. 지배 권력은 상황을 자기의 지배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구

축하며, 그것을 뒷받침하여 담론과 물리력을 동원한다. 이에 저항하는

세력은 지배권력의 이데올로기적 담론을 해체하고 그 대응 담론을 개

발하며 저항적 몸짓(물리력까지는 되지 못하는)을 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목하벌어지고있는우리의 현실이다.

18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권진관, 사회생태적정의론을 위한존재론적 모색: 알랑바디우의 존재론을활용하여 183

5) Alain Badiou, Being and Event (London, UK: Continuum, 2007) 전반부, 특히81쪽

이후에바디우가집합이론을상황에적용하여논의하고있다.

Page 93: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탱하는 주체를 가져야 한다. 누구를 위한정의이고 누가그 정의실현을

담당할 것인가 등의 질문이 주체와 관련되어 있다. 진리는 사건으로일

어난다. 정의도 역사속에서 사건으로일어나야한다. 그렇지않으면 정

의 이론은 추상적이고 공허해 질 수밖에 없다. 약자들이 주체적으로일

어나서 결단하여 사건화하는 만큼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 이것은 기독

교 성서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성서의 말씀대로 골방에서‘주여, 주여’

만 외칠 것이 아니라, 신의 정의를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정의는 사회와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하므로 정치적

인 개념이며, 주체(누가, 누구를 위한)를 요구하는 개념이다. 정의는 정

치에 의해서 결정되며, 정의는 정치가 추구해야 할 목표이며 진리이

다.7) 진리는 주체의 결단에 의해서 밀고 나가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

는다. 결단에 의한 개입 없이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냥

현재의 상태(status quo)가 연속되어질뿐이다.

정치를 어떻게 정의(define)할 수 있나? 정치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의해서 정치가 정의된다. 정치의 목적이 정의인가, 아니면 하나로 통합

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회의 여러 집단들간의 균형인가? 정치의 목적

을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의 목적은 정의이며, 정치

가 추구해야 할 진리는 정의라고 할 경우, 평형적 균형, 통합을 지향하

는 정치와는 다른 정치, 즉 소외되거나 억압받는 집단에 대해 우선적

관심을 갖는정치를 생각하게된다.

정의를 위한 정치는 무엇보다도 인간들이, 그리고 다중이 모두 평등

하고, 사상의 능력, 진리를 이룰 초월의 능력을 갖고 있음을 중요한 전

제로 받아들인다.8) 다수의 개인들이 철학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능력

황에 대항하여저항함으로써 구조화된 상황을 해체하려는 다수들이 있

다. 예를 들어, 쌍용 해고 노동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이들은 상황 속에서 자본에 의해 획일화되지 않은 비순응적인 다수

(inconsistent multiple)들이다.

이러한 비순응적 다수들은 상황을 변혁할 수 있는 주체들이다. 비순

응적 주체들은 자본의 힘에 의해서 규정된 현실, 즉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집단이다. 이들은 상황을 타파하기 위한 논리적 근거와 힘(정의의

힘)을 구조의 외부로부터 얻는다. 정의의 정치의 주체들은 이러한 구조

를 형성시켜 주고있는 고리들과 담론을 깨부수는 일에 전념한다. 이를

위해 다양한 주체들이하나로 전열을가다듬는 것이중요하다.6) 거대한

구조적 힘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연대를 넘어서 단일한 전열을 갖추는

것이필요한데, 이렇게 전열을 갖추는 것이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상황

을 규정하는 자본과 국가를 넘어서기 위해서 다양한 주체들은 다양한

이슈로 흩어져서는 안 되고공통적인 것을 찾아서 합일되어야 하기 때

문이다.

인간이 살고 있는 상황이 자본에 의해서 획일적으로 구조화되면, 사

회적 정의뿐만 아니라, 생태환경적 정의도 무시된다. 자본의 이익을 위

해 약자와 생태계는 남용되고 착취되어 파괴된다. 재앙을 일으키는 기

후의 변화도 같은 원인으로 발생했다. 기독교 성서는 사회정의와 생태

정의를 함께이루는 하느님을증거하고있다.

2. 정의와주체

정의는 정치적인 진리이며, 그것이 진리인 이상 그것의 진리성을 지

18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권진관, 사회생태적정의론을 위한존재론적 모색: 알랑바디우의 존재론을활용하여 185

6) 주체 담론은 민중신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유럽의 비판철학자들인쟈크 라깡, 알

랑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등이 이러한 주체성에 관한 담론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민중신학을 하는 본 필자의 입장에서 이들의 철학적, 심리학적 논의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Peter Hallward, Badiou: a Subject to Truth (Minnea-

polis, Minn: University of Minneapolis Press, 2003) 참조.

7) 알랑 바디우는“정의란 정치의 가능한 진리(the possible truth of a politics)” 라고 하

였다. Alain Badiou, Metapolitics, Jason Barker, trans. (London & New York:

Verso, 2005), 97.

8) Ibid., 97-98.

Page 94: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이 아니라 그 질서를 무너뜨리며,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상태(state)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것은 불평등을 기반으로 서 있는

상태를 무너뜨리고 평등을 실현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것

은 그러한 과정이며, 끝없는 부름이며, 신의부르심이라고도말할수 있

겠다. 위르겐 몰트만이 한국에 와서 발표했던 논문의 제목은“나의 이

름은 정의”였다. 하느님의 이름은 정의이다. 정의는 모든 신학과 철학,

그리고 사상속에 가장중심된 범주이다. 정의의 궁극적인 목적은 평등

이며, 평등은 삶(살림)과 평화를 모든 사람들에게 보증한다. 하느님의

나라는정의와 평등과 평화의 나라이다.

3. 자유, 주체그리고사건

주체를 중시하는 신학과 철학에서 정의와 함께 중요한 존재론적 개

념(범주)으로서 자유(freedom)란 것이있다. 여기에서의 자유는 주어진

것들 사이에서의 선택의 자유(자본이 제공하는 선택의 범위 내에서의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주어진 제약을 넘어서, 초월을 향한

자유를 말한다. 자유는 결단하게 하고, 사건 속에 참여하게 한다. 이것

을 통해역사에 새로움과변혁을 가져온다.

정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주체들은 용기를 가지고 역사에 개입한

다. 이러한 개입은 자유의 행위이며, 자유는 용기를 요구한다. 그런 면

에서자유와 용기는 존재에 참여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예수의 말씀중

에서 자유와 용기와 관련된 것이많이있다.“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실

까 걱정하지 말라.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내일 일은 내일에

맡겨라.”

주체의 자유의 행동이 그 주체가 자신의 존재(신이 주신 주체의 형

태form 혹은본질)를 그만큼 소유하고 실현하게 해준다. 주체의 관점에

서 본다면 아리스토텔레스-토마스의 존재론에서의 형태와 질료의 관

계가여기에 적용될 수 있다. 질료는 형태를 입을때 존재자가 된다. 형

이 있으며, 정의와 선을 분간하며, 이를 추구할 수 있는 존재이며 집단

적 초월의 능력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는 정치가 진정한 정치이다. 정의

는 평등에 기초하고 평등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여기에서의 평등은 차

별적 평등, 즉 강자보다 약자들에게 더 많은 보호와 기회를 제공(affir-

mative action)해야만이평등에 이를수 있으므로 정의의 과정에서 일

시적“차별”이 요구된다.

국가(the State)와 정의의 정치는 긴장관계 속에 놓이게 되어 있다.

국가(그리고 자본)은 상황을 일률적인 것으로 만드는 힘이기 때문에,

이것을 흔드는 진리의 정치를 멀리한다. 정의란 이러한 현재의 상태

(status quo)를 전복한다. 정치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할 수 있다. 정의의

정치는 특히체제로부터 소외당하고있는 다수들이 참여할 수 있다. 이

들은 국가적 정치에 소외되어 있다. 그러나 정의의 정치야말로 가장다

중적이고 민중적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접근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약

자인예수의 메시아 정치과 유사하다.

정의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어떤 주체와 정의가 잘 어울리는가? 국

가에 의해서 통합되지 않는 다수들(inconsistent multiples)이 통합된

다수들(consistent multiples)로 구성된 구조화된 상황을 타파할 수 있

는 위치을 갖는다. 전자는 스스로 국가와 구조에 의해 편입되지 않는

비판적 거리를 둘 수 있는 집단이다. 이들은 획일화된 상황 밖에 존재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바디우의 말대로, 정의란 어떤 정치적, 사회

적 질서를 가리키는 범주가 아니라, 현재의 질서의 붕괴와 무질서를 가

져오는 원리를가리키는 이름이라고 하겠다.9) 그리고 그 붕괴와 무질서

속에서 평등을 회복하는 원리가 바로 정의의 이름이다. 진리의 정치의

정치는 상황속에있는모든사람들에게평등을 가져오는과정이다.

그렇다면 정의란 역동적인 개념으로서, 고정된 질서를 가져오는 것

18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권진관, 사회생태적정의론을 위한존재론적 모색: 알랑바디우의 존재론을활용하여 187

9 ) M e t a p o l i t i c s , 100. “It follows that justice, far from being a possible category of

statist and social order, is the name for those principles at work in rupture and

disorder.”

Page 95: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든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만, 국가(정부와 거의 동의어)는 그 중에서 대

표들이 하는 것이다.11) 정치의 기본과제는 제도적으로 안정된 국가에

관한 일이 아니라, 이러한 국가를 정의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바꾸려고

하는 혁신적인 세력을 조직화하는 일이다. 정치는 정책이나 행정을 말

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적인 민중을 조직화하고 형성하는 일이며, 새로

운 인간들을각 현장에서 만드는 일을말한다. 이러한 투쟁적인 민중은

집단으로 안정적으로 남기보다 흩어지기 쉽기 때문에, 정의의 정치는

이러한 집단들을 꾸준히 조직, 유지, 창조하는 일을가장중요한 과제로

삼는다.12)

주체가 주어이고 정의가 술어라고 할 때, 주어와 술어 사이의 통일

이 존재의 상태를 말해준다. 존재자인 주체가 얼마나 정의와 평등을 위

한 자유의 행동을 하느냐로 그의존재가 가늠된다. 가진 자/못 가진 자,

힘 있는자/없는 자, 남자/여자, 인간/자연, 내국인/외국인 등으로 중첩되

어 위계화된 오늘의 상황 속에서 주체들은 정의를 위한 행동을 하고

담론을 펼쳐야 한다. 오늘의 우리의 상황에서 생명, 평화, 정의는 우리

사회 전체가 추구해야 할 존재론적, 근본적인 가치들이며, 우리의 삶을

이끄는 역동적인 지향이요, 사물을 바라보게 하는 궁극적인 지평이다.

이 지평 속에서 우리는 현실을 살피고 논의해야 한다. 이러한 지평과

지향속에서 행동할 때 우리는현실의 실재(reality)(나쁜점, 좋은점을

모두포함한 실재)와 맞부딪친다(encountering).

생명과 평화, 그리고 평등을 일으켜 세우는 정의의 주체는 기존의

상황의 상태(state)를 둘러싼 벽들을 끊임없이 허무는 (넘어서는) 행동

태는질료가 나아갈 목표요, 자신을 돌아보게하는무한지평이다. 그런

데 형태를 향한여정은 질료적이면서 역사적인 인간이 역사속에서 어

떤 사고와 행동을 하느냐에 의해서 결정된다.10) 이것은 잠재태(duna-

mis)에서 현실태(energia)로 나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존재자의 현실

태를 실현하는 것은자유한 사유와 그에 기반한 자유한 행동이다. 이러

한 자유의 행위없이는 자신의 존재를 실현해 낼 수 없다. 이것은 동시

에 정치적인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자유는 상황을 통일시키는 구조를

넘어서는 초월의 행위이며, 새로운 상황과 그 조건을 창조하는 행동이

다. 이처럼 자유는 창조적인 행동으로 표현된다.

오늘 우리의 상황 안을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은 모습이 보인다. 즉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각인이 투표권 하나씩을

갖고 있다고 해서평등한 주체자는 아닌 것이다. 자본주의는 재산의 양

으로 인간의 가치를 잰다. 국가와 자본(재벌 및 대기업의 연합)이 상황

을 주재하고 있다. 보수정권의 지배 하에서 더욱 강한 배제와 지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지배와 관리만 있을 뿐, 자유의 정치, 즉 기

존의 상황의 배열들을 새로운 배열로 뒤집는 정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한 행동이 정치적인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다. 기성의 구조적 배

열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폭력당하고 격리수용되고 있

다. 용산철거민들의 경우가 한 예이며, 쌍용자동차에서쫓겨난 많은해

고노동자들도 현재의 질서로부터 배제되어 사회 속에서 현대판 유랑자

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다른 예이다. 이들은 기성질서로부터 배제되고

있지만, 이 획일화하는힘에저항하는 세력이다.

정의의 정치의 소명은 이러한 저항세력들(편입되지 않거나 배제된

다수들)의 여망을 하나로 묶어내어 국가를 변혁하고, 감시하는 일일 것

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가 국가를 이끌 수 있어야 한다. 정치는 모

18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권진관, 사회생태적정의론을 위한존재론적 모색: 알랑바디우의 존재론을활용하여 189

10) 이러한 존재론적 토의는 새로운 토마스주의자인Karl Rahner에 의해서 논의되고 있

다. 그의 책 참조. Karl Rahner, The Hearer of the Word (N.Y.L Continuum, 1994),

우리말 번역, 칼 라너,『말씀의청자』, 김진태 역(서울: 가톨릭대학교출판사, 2004).

11) 영어에서 국가를 State라고 하는데 이것은 고정화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에 반해서

정치, 즉 politics는 역동적인 사상을 의미한다. 정치는 모든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

고 행동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의 소유물로서 특정 개인들이나 집단들의 전유물일

수 없다. 신학이 정치신학이 된다는 것은 이러한 모든 이들의 소유물을 모든 이들에

게 돌려준다는 의미를갖는다.

12) Hallward, 112.

Page 96: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들이 사건의 자리가 되는 것은 역사의 이치이며 그들 속에서 새로운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고있고, 일어나야만한다. 이 사건으로상황은 반

전되고 이전의 구조는 변화되며새로운 관계가 자리잡는다.

I V. 사회정의와생태정의를함께생각하는존재론

1. 생태환경: 역사와자연의접점

여기에서의 질문은 역사에서의 정의를 사회정의로 볼 때, 생태계의

회복을 위한 생태정의도 역사적인 정의, 즉 사회정의로 볼 수 있는가.

지금까지 변혁적 존재론의 관점에서 오늘의 상황을 보았다. 상황은 인

간 역사속에위치하고있기때문에 이것을 자연과는구별하여야한다.

자연은 한결같고 안정되어 있다. 물론 지진 등 지각변동과 같은 것이

있지만, 그것은 다시금 평형으로 돌아간다. 자연(physis)은 항상 정돈되

고 평형된 상태로 돌아간다. 그런면에서 자연은 다양한 주체들에 의해

서 변화되는역사나 사회와 다르다.

그러나 자연이라는 언어 대신 생태환경이라는 언어를 쓰게 되면, 후

자는곧바로역사적, 사회적인문제가 되며, 자연과 역사사이의 연결고

리가된다. 생태환경이라는개념은 인간 사회속에 들어와서인간의 삶

에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고있는자연을 가리킨다.

성서는, 자연과 역사는 한 분이신 하느님의 지배 아래 있어, 인간이

하느님의 정의를 지키지 않을 때 자연과 역사(사회)가 모두 파괴된다

고 말한다(이사24:4-5, “땅이 사람 때문에 더럽혀진다.”). 많은 교회지

도자들과 신학자들이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즉,“생태환경 정의는 곧

사회정의이며, 지구를 살리는 길은 가난한 자들과 지구의 신음을 들음

에서 시작된다.”인간 사회의 정의가 무너질 때 생태정의도 무너진다.

강한자들이 재물을 독식할 때 가난한 사람들은 신음하고, 지구는 남용

과 담론을 펼쳐야 한다. 이러한 담벼락들을 부수는 과정에서 진리를 경

험한다. 진리는 하나의 과정이지 어떤 순간적인 깨달음만이 아니다. 깨

달음 다음에는 여기에 대한 강한 믿음(주체의 믿음, fidelity)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리로서의 기능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을 진리라고 믿는

주체가 없다면 그 진리는 진리일 수 없다.13) 그리고 어떤 사건이 진리

를 품고 있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도 주체들이 하는 일이다. 충실자 즉

주체가 없으면, 사건도 진리도 없다.

사건은 기존의 반복이 아니라,“존재 안에새로움”(novelty in being)

을 가져온다.14) 이러한 사건은 기존의 상황의 상태와 구조(the state of

the situation)가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준다. 이 사건들에의해서 기존의

구조가 무너지고, 일률적으로 구조화된 상황은 한낱 지나가 버릴 것으

로 간주된다. 이 사건은 새로운 시작의 전주곡이다. 새로운 시작이 지속

적으로 일어나려면 이 사건을 지원하고 그 정신을 굳건히 지키는 충실

자들이 필요하다. 바울에게 있어서 부활의 사건이 있었고, 바울의 뒤를

이은 충실한 크리스천들이 이 사건을 끝까지 진리의 사건으로 지켰기

때문에 로마제국을넘어서는기독교적변화가 가능했다.15)

사건은 아무것도아닌존재(nothing)들에의해서 일어난다. 기존질

서를 굳건히 유지하려고 하는 조중동과 보수정권과 자본이 지배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진보적 시민운동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nothing,

void)였다. 이러한 무의 존재들로부터 사건이 일어나고, 새로운 시작이

일어난다. 사건속의진리에 의해서 새로운 상황이 전개된다. 그동안 상

황을 지배하고 있던 집단들은 이러한 공허한 존재들이 주체로 일어나

는 사건 앞에서 당혹해 한다. 무의 존재자들은 상황 속에 포함되어 있

는 존재자들이지만,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존재자들이다. 이런 존재자

19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권진관, 사회생태적정의론을 위한존재론적 모색: 알랑바디우의 존재론을활용하여 191

13) Hallward, 110.

14) Ibid., 114.

15) Alain Badiou, St Paul: The Foundation of Universalism, Ray Brassier, t r a n s .

(Stanford, C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3), 15-20.

Page 97: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태학을 주장하고 있는 선진국, 백인들 일부의 입장과 같을 수 없다. 서

벌턴이 주장하는 입장은“하위주체의 지구윤리”이며 이것은 사회적 생

태학(social ecology)에 기반한다.16)

그런데 문제는 사회적 생태학이 주장하듯이, 인간사회에 있는 지배

와 위계가 생태를 파괴하고 있다면, 그리고 이러한 파괴세력을 비판하

고 무너뜨린다면 생태정의는 자연스럽게 확보되는 것인가? 심층생태학

적 생태정의 담론은 결국 불필요한 것인가? 다른 말로 말하면, 급진적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과 노력이 약자들의 정의를 확보하는 것을 넘어

서 자연의 복원을 가져올 수 있는가? 사회적 불평등이 클수록 생태환

경은 더욱 파괴되어 가는 것인가? 그래서 이 불평등을 없애면 생태환

경은 저절로 회복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열심히 사회정의운동

에 참여하면되는것인가?

이러한 자동적 발전 논리(즉 사회정의가 이루어지면 저절로 생태정

의도 함께 이루어진다)에 모순이 있다. 그리고 이 자동적 발전의 논리

를 반대하는 사람이 택할 수 있는 다른 극의 선택은 사회 특히 도시적

삶을 등지고, 시골로 들어가 자연 속에서 생태적인 삶을 사는 것일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도 문제를 해결하는방식이 아니다. 이 양쪽

의 극단을 넘어설 수 있는정의론은 무엇인가?

2. 사회생태적정의론

위에서 우리는 사회 정의론과 생태 정의론의 극단의 형태가 문제의

실재를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것들을 넘어설 수 있는

정의론이 존재론적인 근거를 가져야 한다면, 우리가 선택할 존재론은

되고 땅과 공기는 오염되고 생명은 죽어간다. 오늘날 지구화된 시장과

자본은 사회정의만 아니라 생태정의를 파괴하는 주범이 되고 있다. 그

리고 생태환경이 파괴될 때 가장 먼저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약

자들이다. 주범이 하나이며, 고통당하는 측이 자연과 사회적 약자들이

다. 오늘날의 우리의 절박한 기도가“인간과 자연을 포함하여 신음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을 위한”기도여야 한다면, 생태정의는 곧 사회정의이

며, 사회정의는 곧 생태정의여야한다.

레위기19:9-10절에 있는 말씀은 자연으로부터 얻은 소출을 가지고

약자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자연의 산물을 혼자 독차지하

는 것은사회정의가 아니다. 사회정의란자연으로부터오는소출, 즉 공

적인 것, 하느님의 것을 바르게 나누는 것을 말한다. 불의란 이것을 홀

로 독식하는 것이다. 사회정의는 하느님의 정의이며, 이것은 다시 생태

정의를 이룬다.

위에서 보았듯이 자연과 역사는 생태환경이라는 것을 매개로 하여

하나로 수렴되지만, 동시에 분리된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 역사와 사회

는 인간 집단의 주체적인 혁명이나 변혁에 의해서 건강해지지만 자연

은 원래의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야만 그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그렇

다면 인간의 사회적 정의를 위한 모든 노력은 소외된 사람들의 역사

주체됨을 회복하는 일과 이들이 평등한 참여를 하는 역사를 만들어 나

가는 것이면서 동시에 자연을 자기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심층 생태학이 주장하는 것과 사회적 생태학이 주장하는 내

용이갈등관계에있을수 있다. 예를들어, 생태환경을 보호한다는명목

으로, 그린벨트나 울타리치기, 입산금지, 국립공원 정책 등으로 가난한

서버턴(subaltern, 하위주체)들을자기의 땅에서 쫓아내는 일이벌어지

고 있다. 자연과 일체된 삶을 살고 있는 아메리칸 인디안들은 미국 정

부의 산림정책과 국립공원 형성으로 삶의터전을 잃고 보호구역이라고

하는좁은지역에 갇혀 살고있다. 서벌턴(subaltern)의 입장은 심층생

19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권진관, 사회생태적정의론을 위한존재론적 모색: 알랑바디우의 존재론을활용하여 193

16) George Zachariah, “Toward a Subaltern Earth Ethics: Perspectives from India,”

Herbert M. Watson, ed. Eco Justice: Implication for Faith and Theology (Man-

galore, India: Indian Theological Alumni of the Universitat Regesburg and Board of

Theological Education of the Senate of Serampore College, 2011), 154-155.

Page 98: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리적 조건들 사이에서 조정해야 하는 복잡한 계산이나 사고가 개입될

필요가 없다. 도덕적인 고려가 상대적으로 단순해 진다. 생태정의는 곧

인간을 위한정의가 되기때문이다. 네이스와 동료 심층생태학자 조지

세션스(George Sessions)의 주장중 대표적인것은다음과 같다:“모든

생명은 인간을 위한 유용성과 달리 고유한 가치가 있다. 따라서 모든

생명은자신의 진화적 발전을 지속할 수 있도록 허락되어야 한다.”18)

안 네이스, 토마스 베리를 비롯한 심층생태주의자들에게자연의 나

무, 물 이런 모든 것들은 살아있는 주체이고,19) 생명의 춤을 추는 것들

이다.“잎사귀가 눈인사를 한다. 전나무가 운다”라고한다면, 이것을 증

명할수 있는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일 수 있다.20) 인간주의적이

성으로 볼 때 잎사귀가 눈인사를 한다는 것은 주관적인 착각일 뿐이

다. 그러나 지구의 중요성에서볼 때 이것은 가능한 일이다. 사회적 정

의론자들은 이러한 감수성을 회복해야 한다. 인간적인 감정을 자연세

계에 투영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하는 질문은 오히려 잘못된 것이

라고 본다. 우리는 자연에 대한 경외감 속에서 자연의 웃음, 울음을 들

을 수 있다.

그런데, 서벌턴(subaltern)의 관점은 심층 생태학의 관점과 많은 점

에 공통점이 있지만 중요한 부분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이들에게

자기가 속해 있는 지역이나 땅은 자기의 삶의 터전이다. 자연은 그냥

그대로 놔두어 멀리서 보며 그 아름다움이 존속하도록 놓아두는 그러

한 것이 아니라, 생활과 삶의 터전이다. 심층생태학자들도 이러한 측면

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기본 메시지는 자연을 그대로 놓아둘수록좋

무엇인가? 우선 우리는 몇 가지의 존재론적인 체계들을비교해서 생각

해 볼 수 있다.

먼저, 과정철학적존재론이다. 과정철학은 유기체적세계관을 가지고

세계와 그것을 구성하는 객체들이 각자 자기의 주체성을 가지고 주변

세계와 그 속의 객체들과 유기적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생명을 보다

풍부하게 변화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을 중시한다. 이것은 오늘날의 생

태파괴의 현실 속에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과정 철학의 한계는 그것이 사회정의를 위한존재론적 기

반을 제공하는 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과정철학은 객체들 사이의

소외 현상이나 위계적 현상, 객체들의 집단들의 전개과정 등 사회정치

적 과정과 그것의 변혁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부족하다. 그러나 사물

의 존재적 형태를 진전하는 과정(process)으로 본다는 점에서 사물을

정체되고 고정된 실체로 보지않고 유기적인 상호관계 속에서 모든 객

체들이 스스로 자기 자신의 생명을 풍부하게 만든다고 보는점은 앞으

로 모색해야 할 새로운 존재론을위해깊은통찰력을준다.

그 다음으로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심층 생태학적 존재론이다. 심층

생태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노르웨이인 안 네이스(Arne Naess)는

인간들이 자기의 발견과정에서 어린 시기에는 자기 중심적이고 가족

중심적이지만, 성숙해 가면서 주변 이웃과 관계를 맺으며, 가장 성숙한

단계에 이르게 되면 자기 자신과 주변의 환경을 일치시킨다고 보았다.

성숙한 자아일수록 자연과 동화한다. 그러므로 자연의 유익은 나의 유

익이고, 나는 자연의 일부가 된다.17) 인간이 자연과 불가분리한 관계 속

에 있다고 하는 네이스의 존재론은 자연을 보호하고 살리는 것은 곧

나를 살리는 것이된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복잡한 윤

19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권진관, 사회생태적정의론을 위한존재론적 모색: 알랑바디우의 존재론을활용하여 195

1 7 ) Matthew Humphrey, “Ontological Determinism and Deep Ecology: Evading

Moral Questions?” Beneath the Surface: Critical Essays in the Philosophy of Deep

Ecology, Eric Katz, Andrew Light, and David Rothenberg, ed. (Cambridge, Mass.:

The MIT Press, 2000): 92.

18) Bron Taylor, “Deep Ecology and Its Social Philosophy: A Critique,” Ibid: 270.

19) Thomas Berry는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Indeed we must say that the

universe is a communion of subjects rather than a collection of objects,” P a u l

Walden and Kimberley Patton, eds. A Communion of Subjects(New York:

Columbia Univ. Press, 2006)의 표지글에서인용.

20) David Rothenberg, “No World but in Things: The Poetry of Naess’s Concrete

Contents,” Beneath the Surface: 155.

Page 99: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삼고, 이 터전을 생태적으로 건강하게 만드는 소농업을 추구하는 것도

인간주의적인관점이며 충분히 생태중심적이지않다고 본다. 절제된 행

동이란 극단론 혹은 단순주의를 피하면서 삶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찾는, 사회생태적 정의를 향한행동일 것이다.22)

V. 바디우의존재론에의거한사회생태적정의론의모색

바디우의 존재론은 인간 사회의 정치적 상황을 염두에 둔 존재론이

다. 그런 면에서 그의 존재론은“정치적”이다. 그의 일반적 전제는 모든

객체는 하나(one)가 아니라 다수(the multiple)라는 것이다. 즉, 존재의

근원은 하나(One)가 아니라 다수(multiple)이다. 모든 존재들은 각각

다수성으로 존재하며, 이 다수성은 하나로 간주되는데, 여기에서의 하

나는 존재적 하나가 아니라 간주된 하나(counted as one)이며, 집합으

로서의 하나이며 사후적인 하나일 뿐, 존재론적으로 하나가 아니다. 그

러므로 이 간주된 하나는 항상다수로 돌아가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나를 이루고 있는 다수들 속에 이 하나에 속하지 않은 무(공집합,

void)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집합의 부분(subsets) 속에 공(空)집합이

있다. 모든객체가 다수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하나로 이해되지만 그러

나 그 하나에 속하지 않고 통합되지 않은 공집합(이것을 획일화 되지

않은다수들, inconsistent multiples라고한다)이 있어서 항상획일성을

초월한다는 점에서 모든 객체(entity)는 변화될 수 있고 불안정한 상태

에 있다. 이와 연관된 핵심된 개념으로서 사건, 주체, 그리고 강제력

(forcing, 진리의 사건을 경험한 주체들이 상황을 재구성하는 능력)이

있다.

바디우에 의하면, 일상적이고 자연적인 상황, 즉 정돈되고 질서잡힌

상황을 자연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상황은 진실된 것이

다는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인간의 손을 떼어 놓으라는 메시지가 강하

다. 이것은 그 땅에서 살아왔던 가난한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라는말이

된다. 그렇다면여기에 풀어야 할 엉킴(crux)이 있다. 이 논리에서는 생

태적 정의와 사회적 정의의 갈등이 생긴다. 이것을 풀기위해서 새로운

존재론적인틀이요구된다.

심층 생태학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

해 우선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 즉 이 관계 속에서 인간은 주체성이

약화된다. 심층 생태학자 안 네이스는 인간의“자기 초월적”주체성은

해체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주체성이 물러나고 자연과의관계

성이부각된다. 인간은 자기의 의지적 주체성을 발휘하려 하지말고, 만

물에순응하고 적응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자연이 주체가 되

고 인간은 주체성이없는존재가 된다.

심층 생태학은 주체를 말했지만, 그것은 자연과 동일화된 주체이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 중 영장이며最靈者(최령자, 해월최시형)

인 인간의 윤리적 책임을 묻지않게된다. 심층생태론자의존재론은 정

치윤리적 사고를 촉발시키지 못하고, 단순논리의 나이브한 약점이 있

다.21) 인간이 자연 안에거하고, 무위하는 것도중요하지만, 그것에 머무

를 수 없는것이“최령자”의 운명이다. 전통적인 주체론, 즉 데카르트적

인 사물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정신의 무한 지배의 주체론은 허

구일 뿐이며, 그 자체로 불의하다. 무제한적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통제

하는 주체가 아니라, 생태적 정의를 향한, 그리고 사회정의를 위한“절

제된행동”(restrained action, 바디우)을 하는주체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절제된 행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고려할 사항을 고려하

며 바른판단을 내포하는행동을의미한다. 이것은 단순주의적 행동, 나

아가서 극단론을 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심층 생태주의자

들은 제3세계의 민중들이생태적 지역(bio-region)을 생활의 터전으로

19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권진관, 사회생태적정의론을 위한존재론적 모색: 알랑바디우의 존재론을활용하여 197

21) 위의 Taylor의 논문에서이 점이강조되고 있다. Ibid., 276 이하. 22) Ibid., 278.

Page 100: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것으로 보인다. 다만자연의 상태는 굳이자연의 현상만이아니라, 인간

사회의 안정화되고 질서잡혀 구조화된상태를 가리킨다. 바디우에게있

어서, 자연은 자연적 상황이나자연적 상태, 즉 일치된 질서잡힌정상적

인 다수들의집합이다. 자연적 상황은 그 상황의 근본적 안정과 지속을

위협하는 요소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을 바디우는 비존재론적 자

연적 상황이라고 보았다.25) 이처럼 바디우는 자연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논의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연적 상황을 거의자연과 일치한 것으로 보

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이 연구자는 바디우의 존재론적 범주들을 활용하여 사회정

의뿐만 아니라 생태정의를 포함한 포괄적인 정의론을 펼칠 수 있다고

보고, 그의 생각을 응용해 보고자 한다. 즉, 위에서 이 연구자는 자연과

생태환경을 구별하였고, 생태환경은 자연과 인간사회(역사)를 연결시켜

주는개념이라고 정리했다. 그렇다면 생태환경이라는범주적 개념을 가

지고자연을 사회적, 정치적 상황의 일원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즉 인

간의 상황 속에 자연은 생태환경을 매개로 상황의 일원으로 참여한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이렇게 들어와 있는 자연을 일원(member)으로대

우하지 않고 무(nothing, void)로 대우하였다. 그러나 이 무(void)의 존

재로부터 사건이 터져 나온다. 후쿠시마 원전사태가 하나의 예이며, 우

리나라 고리1호 원전사건도 같은것이다. 기후변화, 생물멸종위기, 물

난리, 쓰나미, 지진, 체르노빌 원전폭발 등 자연재해의 사건들은 우리의

상황 인식을 새롭게 변화시키는“사건들”이다. 자연은 생태환경이라는

형태로 인간 사회에 사건으로 엄습해 온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실재와 직면한다.

개발주의 시대에 자연, 즉 생태환경은 우리의 상황 속에서 아무 것

도 아닌존재였다. 이제는 이 생태환경을 존재론적 일원으로우리의 상

황 안으로 복원시켜야 한다. 이것이 바디우의“無의 존재론”이 가지고

아니다. 그에 의하면, 원래의 상황은 다수의 불일치한(inconsistent) 것

이 섞여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 상황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이해되어,

하나로 이해된다. 상황이 하나(One)로 이해됨으로써 요소들을 하나를

형성하는 일치된 다수로 보게되는데 여기에서 빠진 것은 이 획일적으

로 일치되지 않은 더 많은 요소들(이것을 바디우는 공집합 f로 표시)

이 있다. 일체화된 다수 속에서는 결코 새로운 사건이 벌어질 수 없으

며 그 안에서는 반복만 있을뿐이다. 획일적 일체화된 요소들도 획일화

하는 힘으로부터 빠져나올 잠재력이나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런 면에

서 모든 존재자들은 모두 순수한 다수성이지 획일화된 하나의 일부가

아니다. 모든존재자의존재성은공집합, 혹은무(nothing, void)라고할

수 있다.23) 획일성으로부터 빠져 나오는(subtracted) 부분은 항상 새로

운 것을 창출할 수 있는 자리가 된다.24) 이것을 바디우는 사건적 자리

(evental site)라고불렀다. 이 사건적 자리에서 새로운 사건들이일어난

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 획일화되고 일치되어 있던상황의 구조를 뒤집

고 여기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온다. 그러나 이 사건들은 일시적으로 지

나가는 사건이기 때문에 붇박이로 남아있지는 않는다. 다만 주체에 의

해서 그 사건이 가져온 진리가 기억되고 되살려지고 이어질 뿐이다. 진

리적 사건은 지금까지의 일치된 다수들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는 현재

상황의 구조(status quo)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구조를 형성하는 동인을

제공하며, 이것을 실제로 수행하는 것은 주체들이다. 이렇게 새로운 상

황의구조를 재편하게해주는 힘을강제력(forcing)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바디우의 존재론에서 자연에 관한 논의는 거의 전무한

19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권진관, 사회생태적정의론을 위한존재론적 모색: 알랑바디우의 존재론을활용하여 199

23) 존재는 원래 무, 공집합이라는 바디우의 정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존재가

무의미하고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되지 않는 성격을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 즉 성장, 발전, 변화할 수 있다는 역동성을 갖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암시한

다. 바디우는“무(공허)가 존재의 바른 이름(proper name)”(The void: proper name

of being)이라고했다. Badiou, Being and Event, 52 이하.

24) 바디우의존재론을가감적존재론, subtractive ontology라고도 부른다. 25) Hallward, 119.

Page 101: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5. 그럼에도, 정의는 사회정의이면서 동시에생태정의여야한다. 그

리고 이 양자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며, 서로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정의의 내연을 확장해 주는방향으로이해되어야한다.

6. 그동안 사회정의론자들은 강자/약자, 남/여, 가진 자/못 가진 자,

내국인/외국인 등 인간집단 사이의 차별을 고려해왔다. 그리고 소외된

후자들(서벌턴들)의 정의의 회복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서벌턴과 자

연이 현대의 강자(즉, 개발주의적 국가와 세계화된 자본)에 의해서 상

품화되어착취당하고생명이 파괴되고있다. 사람들과 자연을 상품화의

세계로 내몰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자본과 국가를 통제할 수 있을 때

사람과 자연을 구할수 있다.

7. 바디우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와 자본은 자연과 서벌턴들을 상황

에 참여하는 멤버에서 배제한다. 오늘의 상황을 보면, 자연과 서벌턴은

상황에 속해 있지만(presented, belonging), 대표되지 않고 있다( n o t

represented, not included). 그러므로 자연과 서벌턴은 개발과 착취의

대상이었지, 참여적 주체로서 대우받지 못한다. 국가와 자본은 생명의

관점에서, 자연과 민중(서벌턴)의“소리”를 듣지 않는다. 오늘날“자본적

의회주의( c a p i t a l o p a r l i a m e n t a r i s m )”혹은 시장과 의회주의의 결합이

이루어진 상황에서,27) 자연과 서벌턴들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 즉 무의

존재로 취급되고있다.

8. 그러므로 정의론자는 이른바 자연이 우리들 속에 참여하는 일부이

므로, 자연의 소리를 듣고 대변해 주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오늘날의 새

로운 민주주의는자연의 목소리를 듣는, 자연(자연보호주의자들이대신

할 수 있다)이 참여하는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직접 참여

(presentation)와 대리적 참여(representation)의 변증법적인 종합이 요

구된다. 이것은4대강사업에 대한반대운동속에서 확인되었다. 정의론

자들이 사회정의뿐 아니라, 생태정의를필수불가결한 주요요소로 삼아

있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결론으로, 이 연구자는 바디우의 존재론은 우

리의 생태적이며 사회적인상황을 이해하는데에 도움을 주며, 특히이

상황 속에 생태환경의 요인을 주요 요소로 생각하는 존재론적 분석을

할 수 있게 해 준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 모든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

리할수 있다.

1. 그동안 자연이 상황이라고 하는 무한 집합26) 속에 속해 있었음

(belonging, presentation)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인간 사회에서 대변되

지 못하거나 아예 없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즉 자연은 인간 상황에서

무(nothing, void)였다.

2. 역사적 상황 속에서 무의 존재는 자연만이 아니다. 그 상황 안에

존재하고 있지만, 비존재처럼 취급받고 소외당하는 사회적 약자층, 서

벌턴(subaltern)들이있다.

3. 한편으로 무의 존재였던 자연이 심층 생태학에 의해서 발언권을

획득하기 시작하였고, 사회적 무의 존재였던 서벌턴들이 기존의 상황

적 질서에 대항하여 대안을 내세우면서 권익운동의 움직임을 일으키

고 있다.

4. 정의는 우선 관계와 참여의 문제이다. 그동안 관계 속에있으면서

도 관계없는 존재처럼 취급받았던 존재들이 진정한 평등한 관계자로

참여할 수 있도록 열어주는 것이 정의이다. 자연과 서벌턴 모두 이런

관계 속에서 배제되어 왔던주체들이다. 그 관계가 평등한 관계로 회복

되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약자와 강자 사이의 평등이 어떻게 회복될

수 있는가는 양식있는 사람들이면 어느정도 알고있다. 그런데 인간과

자연의 평등한 관계가 무엇인지는 양식 있는 사람들마다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다. 특히 서벌턴의관점에서의 사회정의와 심층생태학의 관

점에서의생태정의는합치되지않는부분이 있다.

20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권진관, 사회생태적정의론을 위한존재론적 모색: 알랑바디우의 존재론을활용하여 201

26) 참고로, 모든상황은 무한집합이다. 그 참여하는 요소들이 무한히 많이있기때문이다. 27) Badiou, Being and Event, x i i.

Page 102: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의는 역사 속에서 배제되어 왔던 주체들과 이에 동조하는 자들이 끈질

기게추구해야 할 진리이다. 그 진리는 주체들의 끈질긴 믿음과 노력으

로 생명, 사랑, 평화, 평등을 이루는 과정 속에서 조금씩, 가끔은 갑작스

럽게 구현된다. 역사 속에서 정의가 완전히 구현된 상태는 없다. 다만

정의는 그것을 향해 주체들이 묵묵히 그리고 끈질기게 걸어가게 하는

동력이요원인이며, 영원한 목표요 이상이다.

V I. 마무리하는글

지금까지 이 연구자는 프랑스 철학자 알랑 바디우의 집합이론을 이

용한 존재론에서 몇 가지 중요한 개념들을 활용하여 오늘 우리에게 직

면한 사회정의와 생태정의의 통합적 이해의 가능성을 논의해 보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오늘날의물질문명에서 자연이 우리 상황의일부로

참여하고 있음에도 무시되었고, 주체적 참여자로 간주되지 않고, 대상

으로만 간주되어 왔었다는점을 문제시하였다. 그리고 정의를 극대화하

기 위해서는사회적 약자인 서벌턴들의 평등을 회복시킬뿐 아니라, 인

간과의 평등적 상호적인 관계 속에 있어야 할 자연의 위치를 회복시켜

야 한다는 점을강조하였다.

그리고 우리 상황에 참여하는 자연(생태환경)은 인간구성원들의 삶

의 터전으로서의 존재적 위치를 갖는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자연은 인

간의 삶의 터전이므로 잘 가꾸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러한 점

은 자연을 인간문명과 떼어 놓는 이분법적인 관점을 가진 심층 생태학

의 관점과 거리를 둔다. 생태적 정의와 사회정의를 함께이루기 위해서

는 다양한 생태적 삶의지혜와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원자력이나 화석

연료대신 생태적 에너지를 개발하고 찾는 것도중요하며, 친환경적농

업을 발전시키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사회정의

와 맞물려서진행될 수 있다.

야 한다. 정의의 관점에서 자연도 가난한 자들(서벌턴)과 마찬가지로

대상이 아니라, 참여하는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이 연구의 핵심적

테제이다.

9. 여기에서 이 연구자는 사회정의론에서 출발하여생태정의로 나아

가, 그 귀결로 사회생태적 정의를 제시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자연의 일

부일뿐만아니라, 자연도 우리의상황속에참여하는일부가 된다는관점

을 유지한다. 이것은 우리가 자연의 일부이며, 내 자아는 자연과 동일한

것이라고 보는 심층생태학을 포용하지만, 그것의 단순론을 넘어선다. 이

러한 입장과 가장 가까운 사상은 동학의 해월의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이 한 주체로서 우리의 상황에 참여하는 이상, 우리 인간은 자연과

정의로운 관계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자연이 우리로부터 따로 분리되

어 있는존재가 아니라, 우리인간과 유기적인관계속에 있는존재라는

것을 확인해 준다. 즉 자연 속에서 인간은 자기의 삶의 터전을 찾을 수

있는것이며, 자연은 인간에게생태적정의를 요구하는것이다.

10. 마지막으로, 정의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인 정의를 내려 보고자

한다. 이 연구자는 위에서 오늘날에 필요한 정의는 사회 생태적 정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위에서 정의란 생명과 평화와 평등

과 사랑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며, 생명과 평화, 평등, 그리고 사랑을

구현하는 가장 정당한 형식이라고 하였다. 이제,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

탕으로 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정의를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정의

란 사건적이고, 과정적이며, 참여적이라는 것이다. 정의란 어떤 구체적

인 구조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배제되었던 주체들과 그에동

조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루어야 할 역사의 진리의 과정이다. 정의

는 그것을 구현해야 할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말해야만 한다. 왜냐

하면, 정의는 누군가에 의해서 구현되어야 할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사

안이기 때문이다. 신앙적으로 말하면, 정의를 이루는 주체는 하느님이

다. 그러한 면에서 하느님의 이름은 정의라는 정식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정의를 이루는 하느님의 일에 동참하는 인간 주체들이 요구된다. 정

20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권진관, 사회생태적정의론을 위한존재론적 모색: 알랑바디우의 존재론을활용하여 203

Page 103: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참고문헌

Badiou, Alain. Being and Event. London, UK: Continuum, 2007.

Badiou, Alain. M e t a p o l i t i c s . Jason Barker, Trans. London & New York:

Verso, 2005.

Badiou, Alain. St Paul: The Foundation of Universalism. Ray Brassier,

Trans. Stanford, C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3.

Barnhill, David Landis & Gottlieb, Roger S. Ed. Deep Ecology and World

Religions: New Essays on Sacred Ground. Albany, N.Y.: SUNY

Press, 2001.

Depoortere, Frederiek. Badiou and Theology. London, UK: T&T Clark,

2009.

Katz, Eric, & Light, Andrew & Rothenberg, David. Ed. Beneath the Surface:

Critica Essays in the Philosophy of Deep Ecology. C a m b r i d g e ,

Mass, The MIT Press, 2000.

Hallward, Peter. Badiou: a Subject to Truth. Minneapolis, Minn: University

of Minneapolis Press, 2003.

Hoy, Terry. Toward a Naturalistic Political Theory: Aristotle, Hume, Dewey,

Evolutionary Biology, and Deep Ecology. Westport, Conn: Praeger.

2000.

de Jonge, Eccy. Spinoza and Deep Ecology: Challenging Traditional

Approaches to Environmentalism. Aldershot, UK: Ashgate, 2004.

Kohak, Erazim. The Gree Halo: A Bird’s-Eye View of Ecological Ethics.

Chicago, Ill: Open Court, 2000.

Tillich, Paul. Love, Power and Justice. New York, N.Y.: Oxford University

Press, 1954.

Walden, Paul & Patton, Kimberley, Eds. New York: Columbia Univ. Press,

2006.

Watson, Hubert M. Ed. Eco Justice: Implication for Faith and Theology.

Mangalore, India: Indian Theological Alumni of the Universität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자기의 삶의 터전을 갖는 것이 오늘날 사

회생태적 정의라고 본다(미가4:4). 삶의 터전이 독점되지 않고 균등하

게 나뉘어질 때 사회정의뿐만 아니라, 생태적 정의가 확보된다. 사회정

의와생태정의가분리되지않는다. 정의가 둘이있는것은아니다. 정의

는 하나이며, 그것은 우리의 상황 속에서 사랑, 평등, 생명, 평화를 이루

는 하나의 신적인 힘이다. 정의는 신의 또 다른 이름이며, 우리를 항상

새로운 역사로 이끌어 내는 신의 부름이다. 그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가서의 말씀처럼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평화롭게살 수 있게하는역동적인정치적 과정이다.

나라마다칼을쳐서보습을 만들고

창을쳐서 낫을만들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들고 서로를치지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하지 않을것이다.

사람마다

자기포도나무와무화과나무아래앉아서,

평화롭게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받지않으면서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주께서약속하신것이다(미가4:3-4).

주제어

사회생태적정의, 심층생태학, 알랑바디우, 존재론, 서벌턴.

S o c i o-Eco Justice, Deep Ecology, Alain Badiou, Ontology, the

Subaltern.

접 수 일 2012년 6월 30일

심사(수정)일 2012년 8월 10일

게재 확정일 2012년 9월 1일

20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권진관, 사회생태적정의론을 위한존재론적 모색: 알랑바디우의 존재론을활용하여 205

Page 104: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국문초록

사회생태적정의론을 위한 존재론적모색:

알랑바디우의존재론을활용하여

이 연구자는 사회정의와 생태정의 사이에 차이와 갈등이 있다는 것

에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보다 바른 개념으로서의 정의는 이 둘 사이의

차이와 갈등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하며, 그것을 사회생태적 정의라고

이름 붙인다. 이러한 사회생태적 정의에 도달하기 위해서 연구자는 프

랑스 철학자 알랑 바디우(Alain Badiou)의 무의 존재론(ontology of

the void and nothing)을 활용하였다. 이 논문에서 연구자는 자연을 생

태환경으로 대체하여 보면, 심층생태론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자연은

인간사회의 생태환경이기도 하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와 사회로부터 떨

어져 있어야 할 존재자가 아니라, 우리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 속에 필

수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주요한 존재자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보았

다. 그런데 오늘날 자연은 사회적 약자인 서벌턴(subaltern)과 마찬가지

로 상황에 참여하고 있지만 대표되지(represented) 못함으로써 무

(void)적인 존재로 간주되어 착취와 억압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대의제의 상황 하에서는 하위주체들(subalterns)

과 자연은 무(無)적인 존재로서 인간 사회의 이익을 위한 착취와 개발

의 대상일 뿐이다. 사회생태적 정의는 사회적 약자와 생태환경을 공히

사회적-정치적 상황에 참여하고 있는 기본적 요소(elements)로서 대우

를 받도록 한다는 것을밝히는 담론임을 밝히고 있다. 바디우의 가감적

Regesburg and Board of Theological Education of the Senate of

Serampore College, 2011.

Rahner, Karl. The Hearer of the Word, 『말씀의 청자』. 김진태 역. 가톨릭 대학

교 출판사, 2004.

Zimmerman, Michael E. Contesting Earth’s Future: Radical Ecology and

Postmodernity. Berkeley, LA: CA: 1994.

20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권진관, 사회생태적정의론을 위한존재론적 모색: 알랑바디우의 존재론을활용하여 207

Page 105: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Ontological Approach to Socio-Eco Justice

Kwon, Jin-Kwan

Professor

Sungkonghoe University

Seoul, Korea

This study attempts at constructing a wholistic concept of justice

that integrates both social justice and eco-justice into one: socio-eco

justice. There has been some diversion of concern in the advocators

of social justice and those of eco justice. The former is concerned

about the problem of justice within human society, while the latter,

especially deep ecologists, is about the problem of justice in the

natural environment. The author employs the “ontology of the void or

nothing” of Alain Badiou, a contemporary French philosopher, in

order to substantiate the author’s idea of socio-eco justice. First, he

formulates the idea of ecological environment as a concept bridging

between the human society and the nature. Ecological environment

points to the nature involved in the human society. The nature in the

form of ecological environment participates in the human society and

its political situation. Second, the author, employing the ideas of

presentation and representation by Alain Badiou, argues that the

subaltern (the nothing in the human society) and the ecological

environment are presented, but not represented, in today’s capitalist-

parliamentary society. The un-representation of these elements in the

situation causes incessant instability in the society. Justice in a

wholistic conception is the inclusion of the two un-r e p r e s e n t e d

존재론(subtractive ontology, 무의 존재론)은 사회정의와 생태정의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통전적 정의론을 형성하는 데에유용하며, 이러한

정의론은미래의 정의로운 문명을 여는이정표가 될 것으로 본다.

20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권진관, 사회생태적정의론을 위한존재론적 모색: 알랑바디우의 존재론을활용하여 209

Page 106: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칼바르트와이삭아우구스트도르너의상관관계에

대하여중재신학자도르너의신학은바르트와신개

신교주의를잇는가교로주장될수있는가1)

이상은

(장로회신학대학교, 강사)

I. 들어가는말

우리에게는 그렇게 잘 알려지지 않은 슐라이에르마허 전통에 서 있

던 독일어권의 중재신학자(Vermittlungstheologe) 이삭 아우구스트 도

르너의 신학과“말씀의 신학자”칼 바르트의 연관관계에 대한 질문은

elements, the subalterns and the ecological environment, who have

been treated as the objects of exploitation and as nothing and the

void, into our political situation as participatory subjects. Socio-eco

justice based on the “subtractive ontology” (or, ontology of the void)

of Alain Badiou can give us some direction toward a new civilization

of justice.

21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211-242

1) 본 논문은 지난 1월 14일 한국조직신학회 신년모임에서 발표한 원고에 수정을 거친

글이다. 중재신학자 이삭 아우구스트 도르너(Isaak August Dorner, 1804-1884)는 튀

빙엔등지에서역사학, 관념철학, 신학의 수학을 거쳤고, 바우르(F.C.Baur)의 영향하에

기독론을 전개했던 학자였다. 그는 슐라이에르마허와헤겔, 철학과 신학, 이성과 계시,

교회와 현장의 대화를 위해 활동했다. 그의 신학에 대해서는 J. Rothermundt,

“Dorner, Isaak August,”TRE 9 (Berllin, New York: de Gruyter, 1982), 155-158. 이

른바“중재신학”(Vermittlungstheologie)에 대해서는 독일어권 이외의 신학에서는 그

렇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틸리히는 이 신학에 대해 종종 언급하는데, 기본적으로

1830년대를 전후로 독일의 신앙부흥운동 혹은“각성운동”(Erweckungstheologie)의

영향으로 제기된 전통적 신학의 부흥운동이라고 판단한다. 폴 틸리히/송기득 옮김,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사상사』(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0), 194. 그에 따르면, 이

운동을 이끌어간 자들은 주로 슐라이에르마허, 헤겔, 셸링의 제자들이었는데, 높은 지

성과학문과 경건을겸비한 신학자들의집단이라고 평가하며, 전통과 현대정신을 조

Page 107: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레고메나에 위치시키고 전개하기 시작했던27년 교의학에서 보여주고

있는 주체-객체 도식에서 나타나는 신학적 구도가 바르트가 신개신교

신학에 연결되어 있는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 연결위치에 도르너

가 있다고 주장하곤하였다.4)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적 신학에서 나타나는

교의학적 구도를 주체-객체 도식에 입각해서 관찰하면서 도르너를19

세기사변신학과의“잃어버린연결고리”처럼보는시각은 바르트의신

학에 대해서 뿐 아니라 도르너의 신학에 대해서도 정당한 것이 아니

다.5) 19세기 신학전통의 많은 신학자들 중에서 바르트가 도르너의 교

의학적 체계에 대해서 주목을 했던 이유는, 그의 신학이 슐라이에르마

허와 헤겔의 사변신학의 전통에 서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사변

적 신학의 극복 가능성이 도르너의 삼위일체론적 시도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6) 더 나아가서 바르트는 도르너의 신학적 가능성을“주

체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교의학의 프롤레고메나에서만이 아니라,

주로 바르트와 신개신교 신학사이의 관계에 대한 맥락 속에서 제기되

곤 하였다.2) 이와같은 질문은 주로 바르트를 헤겔의 영향하에 있던19

세기의 사변신학과 연결시키기를 시도했던 판넨베르크나 자신의 사회

적 삼위일체론적 프로그램에 대해 대치되는 사변적 신학 전통에 바르

트가 서 있음을 주장하였던 몰트만과 같은 신학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3) 특별히 이들은 바르트가 본격적으로 삼위일체론을 신학의 프롤

21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이상은, 칼 바르트와이삭아우구스트 도르너의 상관관계에대하여 … 213

정하고자 했던 자들, 한편으로는 슐라이에르마허와헤겔의 보다 많은 것을 건져 종교

적 전통에 더 알맞게 만드는 것을 지향했던 자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앞의 책, 256.

틸리히가 이들의 범위를 에어랑엔학파나 하르낙까지 잡고 있는데 반해, 유럽에서의

“중재신학”이라는 용어는 주로 슐라이에르마허의 영향하에 있었던 슈바이처

(Schweizer), 트베스텐(Twesten), 니취(Nitzsch) 도르너(Dorner), 헤겔쪽에 보다 가까

이 있었던 로테(Rothe) 등의 신학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이들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다음의 책을 보라. R. Holte, Die Vermittlungstheologie: Ihre

theologischen Grundbegriffe kritisch untersucht (Upssala: Almqvist & Wiksells,

1965).

2) W. Pannenberg, Problemgeschichte der neueren evangelischen Theologie in

Deutschland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97), 248-9. 258. W.

Pannenberg, “Die Subjektivitat Gottes und die Trinitatslehre,” G r u n d f r a g e n

systematischer Theologie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80), 109f. J.

Moltmann, Trinitatslehre und Reich Gottes (München: Chr. Kaiser, 1980), 158. 이

른바“신개신교 신학”(Neuprotestantismus)이라는 용어는 트뢸치에 의해서“구개신

교”와 구별된 용어로 제안된 것으로, 특히 계몽주의 이후 근대까지의 신학을 지칭하

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F. W. Graf, “Neuprotestantismus,” RGG4 6 (Tübingen: J. C.

B. Mohr Siebeck, 2003), 239-241. 또한 다음을 참조할 것. J. Mehlhausen,

“Neuzeit,” TRE 24 (Berlin, New York, 1994), 399. 바르트는 주로 신개신교라는이

름하에 슐라이에르마허와 그에 속한 근대의 신학자들을 비판적으로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곤 했는데, 그리스도교 교의학에서는 근대신학(neuzeitliche Theologie)이라는

명칭과 병행해서 사용하곤 하였다. 참조: K. Barth, Die christliche Dogmatik im

Entwurf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1982), 4-6, 74, 109, 113, 125.

3) 바르트는 그의 19세기 신학강의를 통해서“사변신학”(spekulative Theologie)라는 개

념에 대해 자주 비판을 제기한다. K. Barth, Die Geschichte der protestantischen

Theologie im 19. Jahrhundert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1946), 375. 이 개념을

바르트는 주로 헤겔 철학과 결부해서 비판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헤겔의 관념철학

에서볼 수 있는절대정신의자기발현은사실은은폐된 형태의인간“주체”의 사유의

전개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사변”이라는말은 근대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바르트의 비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바르트의 이 개념에

대한 비판을 판넨베르크는 주목하여 다루고 있다. 다음 책을 보라. W. Pannenberg,

Problemgeschichte der neueren evangelischen Theologie in Deutschland ( 1 9 8 0 ) ,

248-250.

4) 앞의 책, 258. 지금까지 바르트의 신학에 대한 많은 논문들이 그의 신학을“주”-“객”

도식의 시각에서 다루면서 바르트 신학의 근대와의 연속성 문제를 다루고자 하였다.

본 논문에서필자는 바르트의신학의 본질적특성이 근대적패러다임이라할 수 있는

“주”-“객”도식을넘어서있는신학적 기반을가진다는 점을강조하고자한다.

5) 영미권에서나온논문들도 바르트 신학에대한도르너 신학의 의미를 이와같은“잃어

버린 끈”이라고 하는 연속성의 시각에서 파악하고 있다. R. Sherman, “Isaak August

Dorner on Divine Immutability: A Missing Link between Schleiermacher and

Barth,”Scottisch Journal of Theology 53 (2000): 490-510.

6) 바르트의 도르너 신학의 관찰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는 J. Rothermundt, Personale

Synthese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68), 45. 여기에서 로터문트는20

세기 초에 이미“잊혀진”학자 도르너를 재발굴해서 교의학적 작업으로 이끌어간 것

은 전적으로바르트의공헌이라고판단한다.

Page 108: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주체적 신학은 근대의“주체”개념을 제외하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이었다. 이들에 의하면,“주체”라는 개념은 이미 인간의 자율성을 중심

으로 하는근대 이후의 논의를 바탕으로 이해될 수 있는개념이다.8) 바

르트의 신학을 신개신교와 연결시키기를 시도했던 판넨베르크 역시그

근거로서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에서 나타나는“주체성”의 원칙이 바르

트와 신개신교 사이의 감추어진 연속성을 설명하는 증거가 된다는 점

을 들고있다.9) 즉 판넨베르크는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의특징을 이루는

“세 존재 양태 안에 있는 하나의 인격성”이라는 개념이 바르트가 도르

너의 신학에 소리를 내지 않고 접목하여, 신적 주체가 그의 계시 가운

자신의 중요한 신학적 기반을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 중심성의 신학에

서도 동반하였음을 주목해야 한다. 바르트나 도르너 양자가 자신들의

시대에 변증하고자 시도했던 그리스도 중심성의 신학적 시도를 무시한

다면, 그들의 신학적 연관성을제대로 이해할수 없다.

이와같은 입장에서 볼 때, 바르트 신학에 있어서의 도르너 신학의 의

미가 단순히 그와 신개신교 신학을 연결시켜 주는 가교로서 주장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공통적인 기반으로 서 있는 그리스도 중심 신학

의 기반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더불어 고찰되어야 한다. 아래에서는 우

선 지금까지의 주체-객체 도식에서 살펴보아왔던 바르트와 도르너의

신학적 관계는 어떠한 것이었는지그것에 대한일별로부터시작한다.

I I. 바르트의하나님의주권성의신학에대해 제기되는비판들:

바르트의 신-주체성의 신학은 신개신교 신학의 연속성 하에서 이해될

수 있는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바르트의 신학과 신개신교 신학 간의 연관성

을 주장하는 많은 주장들이 있어왔다.7) 그 주된 논의는 바르트의 신-

21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이상은, 칼 바르트와이삭아우구스트도르너의 상관관계에대하여 … 215

7) 바르트와 근대의 관계를 다룬 학자들을 연구한 최근의 논문을 참조하려면 다음을 보

라. S. G. Holtmann, Karl Barth als Theologe der Neuzeit (Go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07).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바르트는 괴팅엔 대학에서의 강의 시대를

통해 신개신교주의가갖고 있던 인간중심성의 신학에 대해 강한 비판을 제기했다. 바

르트에 따르면 슐라이에르마허의“감정의신학”은 신학의 중심무게를 계시하시는 하

나님에게서찾는것이아니라 계시인식의 주체인 인간에게서 찾도록중심이동을 보

여준 인간중심주의에 다름 아니다. K. Barth, Die Theologie Schleiermachers, e d .

Dietrich Ritschl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1978), 375. 바르트와 슐라이에르마

허에 대한 관계를 분석한 논문으로는, L. Matosevic, Lieber katholisch als neupro-

testantisch ( N e u k i r c h e n-Vluyn: Neukirchener 2005). T. F. Torrance, Karl Barth

(London: SCM Press, 1962). 바르트와 슐라이에르마허사이의 역동적인 연속성과 불

연속의 관계를분석한 논문으로S. H. Oh, Karl Barth und Friedrich Schleiermacher

1909-1930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2005).

8) 이 논쟁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제기되어 왔다. 한 가지입장은 렌토르프(Rendtroff)

와 그의제자들이 이끌어가던이른바 뮌헨학파의 논의이다. 렌토르프의바르트 이해

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글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Tr. Rendtroff, “R a d i k a l e

Autonomie Gottes: Zum Verstandnis der Theologie Karl Barths und ihrer Folgen,”

Theorie des Christentums, Historisch-Theologische Studien zu seiner neuzeitlichen

Verfassung (Gütersloh: Gütersloher Verlagshaus Gerd Mohn, 1972), 161-181. 이들

은 바르트의 신-주체적 신학이라고 하는것은 사실상 근대가 가지고 있던 인간의 중

요성을 다른 차원에서 부각시켜 보여주는 것이라고 파악한다. 이들은 근대란“주체

성”의 절대적인 자기규정을 표방하는 시대적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으로부터 출

발한다. 근대의 실제적 주체는“자율적 인간”이며, 이 인간이 사실상 중심에 서게 된

다. 또한신학의 중요한 과제는이“주체”에 대한과제로 집약된다. 바르트의신-주체

성의 신학이란 사실상 인간-주체성의 기반 하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주체성”의 절대적자기규정의 자리에 인간 대신 신을 세워놓은 것이라는 점에

서 그러하며, 혹은 인간“주체”를 위해서 신을 요청한다는 면에서 그러하다. 여기에서

신학의 과제는 사실상 인간의 자율적 책임과 결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윤리적 문제

로 집약되며,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은인간의 윤리적 자율성 혹은윤리적 합명제를 드

러내는“종교적 윤리”에 다름아니라고 판단한다. 결국 이들에게 있어서『교회교의학』

은 인간의 자립성을 위한“당위의 교리”에 불과하며, 신은 윤리적 명령법(Imperativ)

으로 이해된다. 위의 글 이외에 바그너(Falk Wagner), 그라프(Friedrich Wilhelm

Graf) 등 렌토르프 학파의 글들을 참조하려면 다음의 책을 볼 것. Tr. Rendtorff, ed.,

Die Realisierung der Freiheit (Gütersloh: Gütersloher Verlagshaus Gerd Mohn,

1975).

9) W. Pannenberg, Problemgeschichte der neueren evangelischen Theologie in Deutsch-

Page 109: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간-주체성의 신학의 연장선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으로 집약될

수 있다. 즉 이들을 따르면 바르트의 신-주체성의 신학은 결국 인간-

주체성의 신학으로부터 그 중심축을 신에게로 이동시킨 주체-객체도식

안에 머무르는 신학에 불과하게 된다.11) 또한 이러한 강조점의 이동에

있어서도 인간-주체의 중요성은 동일하게 부각된다. 그리고 그들의 주

장은이제교의학적차원에서는삼위일체론의관찰이 주가되고있다.

이제, 위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도르너와 바르트의 삼위일

체론에서연속성이 발견되는지, 그리고 이것이 바르트의 신학을 도르너

를 거쳐 신개신교 신학으로 연결시켜주는 가교가 되는지에 대해서 살

펴보자.12) 우선 바르트의 도르너 신학에 대한 주목은 그 맥락을 살펴볼

때, 신개신교의 인간중심 신학에 대한도르너의 극복가능성에 대한바

르트의 평가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바르

트는 도르너 신학이 신개신교의“인간중심성”의 신학 축을“신의 주체

성”으로 이동시킬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13)

데 자기객관화를 이루는 사변성의 신학적 전통에 발을 내리고 있는 것

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하나의 독자적인 방식으로 사유

하고 의지하는‘나’의 통일성”(Die Einheit eines einzigen denkenden

und wollenden Ich)이 중심이 되고 있는 사변신학적 전통은 헤겔로부

터 도르너를 거쳐 바르트로 이어진다는 것이 판넨베르크의 주장이다.

판넨베르크는 바르트가 자신의 신-주체적 계시신학을 전개하는 가운

데 이러한“나”의 통일성의 개념을 수용함을 통해서 스스로는 헤겔의

절대정신 개념으로부터 삼위일체론을 도출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하면

서도, 사실상은 누구보다도 그 가까이에 서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언

급한다. 이와 비슷한 입장에서 몰트만 역시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이 가

지고 있는 신중심성의 신학, 혹은 신-주체성의 신학이 근대신학이 갖

고 있는 절대적 주체로서의 신의“반추의 논리학”(Reflexionslogik)의

한 모습이라는 비판을 제기한다. 이것은 헤겔철학적 의미에서전개되는

절대정신의자기발현, 혹은신의주체성의 자기외화의 신학으로서근대

의 시민적 종교로서의 삼위일체론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시각을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몰트만은 바르트가 제안한 신-주체성의

삼위일체론의 신학은 슐라이에르마허가 제기했던,“절대적 의존성”의

교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인간중심성의 신학에 대한 보충적 신학이라

는 비판도 함께 제기한다.10) 즉, 하나님의 주체성을 강조하는신의 절대

성의 논리를 표방하는 것은, 몰트만의 시각에서 볼 때는“인간”이라고

하는 인식 주체의 요소를 배제하고 설명될 수 없다. 곧 신은, 바르트가

그의 주권성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인간이라는 인식

주체를 보충해주기위한대상으로평가될 수 있다.

이들의 비판을 종합해 본다면, 바르트의 신학은 결정적으로 근대가

갖고 있던“주체성”의 문제에 기반을 두고 전개되고 있는 한 근대의 인

21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이상은, 칼 바르트와이삭아우구스트도르너의 상관관계에대하여 … 217

land (1997), 251.

10) J. Moltmann, Trinitat und Reich Gottes (1980), 161.

11) 바르트가 자신의 교의학을 전개하면서 특정 단계에 보여주고 있는 주체-객체 도식,

혹은“나”-“너”의 구조의 한계점에 대해서는“대화형식적 인격주의”라는 이름으로

벨커 역시 지적하고 있다. 벨커 역시 대화형식적 신학의 근본형태는 성령론에 의해

상대화 내지 적절한 형태로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는데, 이러한 변화를 그는 바르

트의 화해론에서 보고 있다. M. Welker, Gottes Geist (Neukirchen-Vluyn: Neu-

kirchener, 1992), 51-52.

12) 우선 살펴볼 것은 바르트의 도르너 신학에 대한 주목은 뮌스터 시대에 이루어진 근

대 신학자들 중의 일부의 신학자들에 대한 긍정적 재평가 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K. Barth, Die christliche Dogmatik im Entwurf (1982), 4. 이러한 긍정적 평

가는 한편으로는“신학적근대”에 머무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신학을 극복

할 가능성을보여주었던신학자들에게주어졌다.

1 3 ) K. Barth, Die Geschichte der protestantischen Theologie im 19. Jahrhundert

(1946), 525. 이와같은 평가는 우선 도르너가 저술한 논문“독일신학그리고 오늘날

에 있어서의 그 교의학적 그리고 윤리적 과제”(1856)을 중심으로 내려졌다. I. A.

Dorner, “Die deutsche Theologie und ihrer dogamtischen Aufgaben in der

Gegenwart,” Gesammelte Schriften aus dem Gebiet der systematischen Theologie

Exegese und Geschichte (Berlin: Wilhelm Hertz, 1883), 1-47.

Page 110: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에서 언급한 연구가들이 주목했던 그들의 유사한 용어, 즉“세 존재 양

태 안에있는하나의 인격성”의 관찰이 필요하다.16)

자신의 저술『그리스도교적 신앙론의 체계』(System der christlichen

Glaubenslehre)에서 도르너는 자신의 사변적 방법론의 결과물로서“절

대적 인격성 그리고 세 존재양태”라는 용어를 도출해 낸다.17) 우선 그

는 신적 주체의“절대성”을 확인하고자 시도한다. 그는 다양한 신존재

증명을 고찰하면서, 신의 속성들은 그 다양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속

성(Zusammengehörigkeit)과 합일성(Einheit)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

장한다. 즉 모든 신적 속성들은 궁극적으로 하나의“주체”(Subjekt)로

귀결되어야 한다. 그것은 곧 하나의“절대성, 혹은 존재의 필연성(Not-

wendigkeit)”에로 향하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의 필연성으로서의 절대

적 신적 주체는 인간의 신앙의 근거(Grund des Glaubens)로 자리매김

한다. 이러한 설명을 통해 도르너는 궁극적으로 윤리적 선(Ethisch-

Gute)의 근거로서의 신에 대한 설명으로 이끌어가고자 한다. 즉“절대

적인 존재”(das absolute Sein)로서의 신은 윤리적인 존재이며,“윤리

적”인 것이곧 완전한“실재”이다.18)

다른 한편, 이 윤리적인 것으로서의“절대성”(Absolutheit)은“인격

성”( P e r s ö n l i c h k e i t )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여기에서“인격성”이란

신의 자기규정을 의미한다. 그에게 있어서“인격성”이란 신을 하나의

개별자로 이해시키는 개념이 아니다. 신은 오히려“모든것을 포괄하는

이러한 신학적 중심축의 이동은 객관적 교의로서의“삼위일체론”의 재

발견에 대한강조를 통해구체화되었다.

도르너는 자신의 시대의 신학적 과제를 진단하면서, 슐라이에르마허

에 의해 각인되었던 신학적 한계를 객관적 교의로서의 삼위일체론의

재발견을 통해극복해야한다고 밝혔다. 신개신교신학의 인간중심주의

에 대한 반제로서의 도르너의 삼위일체론 강조는 바르트의 주목을 끌

었다.14) 이 발견에 대해서 바르트는 수 차례에 걸쳐서 도르너의 강조에

대한 찬사를 남겼다. 바르트에 따르면 도르너는 슐라이에르마허신학의

결정적인“근간”이었던“신앙”(Glaube)이 단순한“중개 지점”에 불과하

고, 인식의 주체적 원리(principium cognoscendi subjectum)라는 것을

아는 학자였다. 그리고 인식의 객체적 원리(principium cognoscendi

objectum)는“경험과 독립해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 진

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15) 이와 같은 신학적 평가로부터 우리는 도

르너의 삼위일체 신학이 뮌스터 시대 이후 바르트의 신중심신학의 교

의학적 전개에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추정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도르너의 삼위일체론과 바르트의 신-주체적 삼위일체론은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가? 이들의 삼위일체론의 연관성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위

21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이상은, 칼 바르트와이삭아우구스트도르너의 상관관계에대하여 … 219

14) 이 시기바르트는인간중심성의 반제로서의신-주체적신학의 핵심교의로서의삼위

일체론적 주제에 대해질문을제기해 놓고 그 해답을 모색하는 중이었다. 괴팅엔 시

절 후반기에 투르나이젠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르트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

었다.“본질의 삼위일체, 단지 경륜적인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전적으로 삼위일

체론! 내가 거기에 올바른 해결점을 얻을 수 있다면 한마디로 모든 것이 다 좋을텐

데…”이 말과 더불어 바르트는 또한 삼위일체론의 출발점이 다음의 초점에서 시작

되어야 함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었다.“그의 계시 가운데 있는지양될 수 없는 하나

님의 주체성”K. Barth, Briefwechsel mit Thurneysen 1921-1930 (Zürich: Theo-

logischer Verlag, 1974), 254.

1 5 ) K. Barth, “Das Wort in der Theologie von Schleiermacher bis Ritschl,”ed, H.

Schmidt, Vortrage und kleinere Arbeiten 1925-1930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1994), 212. K. Barth, Die Geschichte der protestantischen Theologie im

19. Jahrhundert (1946), 526.

16) 몰트만역시이 용어에대해주목한다. Moltmann, Trinität und Reich Gottes (1980),

154-5, 172-3.

17) 바르트는 이 명칭이 슐라이에르마허의 전통에 서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설명

한다. Barth, 앞의 책, 525. 체계(System)이라는 말이 중요하다는 것은 그의 신학이

방법론적 체계성 위에 서 있는것을 보여준다. 그의 사변적 방법론의 엄밀성은 주목

할만 하다. 바르트의 시각에는 이와같은 사변적 방법론의 엄밀성은 한계를 가진 것

으로보일수밖에 없었다.

18) I. A. Dorner, System der christlichen Glaubenslehre I (Berlin: Wilhelm Hertz,

1886), 303.

Page 111: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고 세계의 근거로서의 이러한 삼위일체적 하나님은 세계와 분리되어

있는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혼동될 수도 없다. 하나님의 내적인 전달

의 원칙이 삼위일체이며, 동시에“절대적 인격성”으로서의 삼위일체 안

“세존재양태”가 존재한다.22)

여기에서 살펴 본 사변 신학적 개념전개를 통해 도르너는“주체”로

서의 절대적 인격성 개념을 핵심에 놓는 삼위일체론을 도출하였다. 몰

트만이 암시하는 것처럼 이와같은 사변적 개념과 바르트 사이에 연관

성이 있을까? 두 신학자 사이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두 가

지 측면에 비추어서 양자의 삼위일체론에 연관관계가 성립한다고 파악

한다. 첫째로, 바르트가27년 교의학에서 전개하였던, 말씀하시는 하나

님의 교리로서의 삼위일체론이 가지고 있는 바르트 교의학의 신-주체

적 삼위일체 신학의 기본 정초는 하나님의“주체”에 절대적 인격성을

돌리고자 했던 도르너의 신학과 같은 지반 위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인

다는 점이었다. 둘째로, 바르트와 도르너의 삼위일체론에서 많은 부분

에서 발견되는 개념적 유사성이 둘 사이의 상관관계를 추정케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주장을 살펴본다면, 한편으로 우선 뮌스터 시대(1925-1930)

의 바르트의 교의학의 구성이“주체”의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

에서그 주장이 뒷받침되는 것처럼 보이는 면도있다. 바르트는 교의학

적 체계를 구성함에 있어서, 이를“하나님의 주권”그리고“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Deus dixit)를 중심으로 하는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교리로

일반자”(das allumfassende Allgemeine)여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절대성”과“인격성”이 합일에 이를 수 있는가? 그 해답을 얻기 위해

도르너는“사랑”으로서의 신개념으로부터 설명한다. 즉 신은“근원 사

랑”(Urliebe)이며, 스스로가 사랑의 존재로서“근원선”(Urliebe)이다. 즉

“절대성”이란 이와같이 신이 스스로를 사랑으로서 의식하는 힘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19) 그러한 한에서 그는 곧“인격성”(Persönlichkeit)을

갖는다.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신은 초월 가운데 있으면서 전달성

(Mitteilsamkeit)을 갖는존재로서 이해된다. 다시말해서 신은“내적인

초월성”을 갖는 것으로서, 전달하는 사랑으로서의 자기규정을 갖는다.

신은 한편으로는 세계로부터구별되고 있으면서, 동시에 세계에 대해서

자기상실없이 자기를 전달할 수 있다. 이러한“주체”( S u b j e k t )로서의

“절대적 인격성”의 자기규정과 자기전달을 합일하는 개념이 그의 삼위

일체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서 삼위일체의 경륜적 측면은 내

재적 측면에 기반을 두고 이해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즉 객관적

인, 영원한 구분이 하나님 스스로 안에있음을전제함을통해서이다.20)

이러한 절대적 인격성으로서의 신적 주체를 중심으로 그는 이제 세

“존재양태”(Seinsweise)라는 개념으로 세 위격을 설명해 낸다. 이들, 곧

존재양태들은영원한 과정속에서, 서로를 요구하는 원칙으로서 공속해

있으며 구분 가운데 합일을 이루고 있다.21) 이러한 구분 속의 일치성에

대한 설명을 위해 도르너가 고대의 신학 개념을 재발견해 도입한 것이

“페리코레시스”이다. 페리코레시스로세 존재 양태의 일치를 이루고 있

는 삼위일체는 한편으로는 신적인 자기규정으로서의 절대적 인격성의

결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면서, 동시에 이 인격성을 근거짓는다. 그리

22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이상은, 칼 바르트와이삭아우구스트도르너의 상관관계에대하여 … 221

19) 앞의책. 425.

20) 앞의 책, 347. 도르너에게있어서 예수그리스도를통해 나타난 계시는 이러한“절대

적 인격성”의 자기전달(Selbstmitteilung)을 나타내 주는 것이며, 신의 초월성과 내

재성이 합일되는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21) 앞의책, 372.

22) 이것을 도르너는 다시한번 근원선(das Urgute)로서의 신의“윤리적 필수성”이 자유

의 의지를 갖는“윤리적자유”로서, 동시에 이 양자를 절대적으로 일치시키는 필수성

의 일치로서 설명되는 삼위일체론으로정리한다. 즉“절대적인격성”이라는 말로, 즉

“절대적인 자기의식 그리고 절대적인 자기규정의 일치성”이라는 말로 도르너는 신

을 정의한다. 앞의책, 420. 특별히그는“인격성”이라는 말이가질수 있는자기제한

성의 문제에 주목하면서, 자신이 가리키는 인격성은“자기제한”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자기의식”이라는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밝힌다. 앞의 책,

424.

Page 112: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인다. 그리고 그 위격들 서로의 관계는 페리코레시스개념을 통해 합일

에 이르는 것으로 정의된다. 이렇게 해서 바르트는 삼위일체를“세 존

재양태”(drei Seinsweise) 안에계신“한분, 하나의 인격적 하나님”(Der

eine persönliche Gott)으로 정의하고 있다.24) 그리고 이와같은 내재적

삼위일체의 정식으로부터 경륜적 삼위일체의 정식을 설명해내고 있

다.25) 즉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일치의 근거가 기본적

으로 내재적 삼위일체로부터 도출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앞

에서말했듯 이와같은유사성은바르트와신개신교의“주체”의 신학을

도르너를통해연결시키고자할 때 증거처럼인용되곤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과연 바르트의 프

롤레고메나에 나타나는 신-주체적 삼위일체론은 바르트와 사변신학의

연속성을 설명하는 도구로 볼 수 있는가? 즉, 신적주체성의 핵심적 개

념으로서의 삼위일체론이라고 하는 이론적 뒷받침을 인간“너”에 대해

대칭해 말씀하시는“나”로서의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주체성과 결부해

서 보는 주-객 도식에 기반을 둔 신학적 입장은 바르트와 사변신학을

연결시키는 반증이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우선 바르트가 도르너

의 신학이 가진 사변성을 애당초 대단히 회의적인 시각으로 관찰했다

는 점에비추어볼때, 긍정적인 답을줄 수 없다. 바르트에게 있어서도

르너의 신개신교 신학은 영원한 비판의 대상으로 남아있었다. 즉 도르

너의신학은 바르트의 시각으로 볼 때,“끝내 극복되지 못한 인간 중심

의 신학”이었다. 그 근거로 바르트는 도르너의 신학적 시도, 즉 신-주

체적 계시신학으로의 전환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 계시의 인식이 궁극

정초하고자하였다. 신학의 중심을 인식주체로서의 인간으로부터계시

하시는 하나님으로 옮겨놓음으로써그는슐라이에르마허적인의미에서

의 인간중심 신학에 대해 비판적 선을 분명히 긋고자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계시의 근거가

되시며, 유일한“삼위일체의 흔적”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여기에서 주

님으로서의 하나님은 인간 너(Du)에게 말씀하시는 나(Ich)로서대칭해

서신다. 그런데 위의 학자들은 여기에서 바르트가 하나님을 일치성을

가진 주체성(Subjektivität)으로 세우는 것은 이미 그가“주체”를 중심

개념으로 하는 신개신교신학의 반열에 서 있다고 주장한다. 즉 바르트

가 하나님을“인격성”으로 정의하면서, 이 인격성을“하나의 인격적인,

스스로 사유하며 의지하는 신이자 주이시며, 스스로를 근거짓는 신이자

주님이신 인격적 하나님”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이미 근대의“주체”의

신학적 전통에서 전개되는 것이라고 그들은 보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

교 교의학에서 정초된 이러한 신-주체적 측면이 강조되는 삼위일체론

의 정식은 후에 교회교의학을 전개함에 있어서도 원칙적으로 유지되었

다고 보고 있다.23) 실제로 바르트는 교회교의학의 프롤레고메나에서 말

씀하시는 하나님의 교리에 삼위일체론을 위치시키면서, 한편으로는 신

개신교 시대에 사용되었던“절대적 인격성”이라는 용어 자체에 대해서

는 거부감을 보이고 있지만, 개념적으로는 도르너의 절대적 인격성과

유사한 개념을 전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즉 하나님은스스

로 안에서 그리고 스스로에 대해서 존재하는 나(Ich)로서 그에게 고유

한 사유(Denken)와 의지(Wollen)를 가지고 존재하는 분으로 정의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한 바르트가 이 스스로 사유하며 의지하는

인격적 신의 세 위격은 세“존재양태”로 이해된다. 이러한“존재양태”

(Seinsweise)라는 개념 역시 둘 사이의 유사성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

22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이상은, 칼 바르트와이삭아우구스트도르너의 상관관계에대하여 … 223

23) 몰트만에 따르면, 물론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한데, 그러나 신의 주체성에 기반을 둔

신학적 논제들, 인격성의 개념과 세 존재양태라고 하는 개념의 사용에 있어서는 큰

변화가 없다고본다. J. Moltmann, Trinitat und Reich Gottes (1980), 155.

24) 참조 K. Barth, Die christliche Dogmatik im Entwurf (1982), 222. K. Barth,

Kirchliche Dogmatik I/1 (Zürich, Zollikon-Zürich, 1955), 379.

25) 판넨베르크는 바르트의 삼위일체의 전개가 주로서의 하나님의“나”를“뿌리”로 가지

면서전개되어 나간다는면에서헤겔의“주체”의 전개와 유사하다는 논지를자주주

장한다. W. Pannenberg, Problemgeschichte der neueren evangelischen Theologie

in Deutschland (1997), 250.

Page 113: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과 인간의 절대적인 질적 차이에 기반을 둔 신의 주권성에 기반을 둔

삼위일체론의 정초를 두고 있는 한, 설령 바르트의 교의학의 삼위일체

론적신학의 전개단계에서“주체성”의 신학적 정초가 나타난다고하더

라도 일부의 개념적 유사성의 관찰을 통해 바르트와 사변신학을 연결

시키려는 시도는 그 설득력을 상실한다. 또한 이러한 연속성의 논의에

서 주된 근거로 제시되는“주체성”신학의 구조는 바르트의 교의학 전

개에있어서 특정단계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며, 이에기반을 두고 바르

트와 도르너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 역시 두 신학자들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단지일부만을관찰한 결과라는것이지적되어야한다.

I I I. 바르트와도르너의그리스도중심성의연관성의고찰:

신-주체적 신학적 기반에 대한고찰로부터그리스도중심성의

공통점에대한관심으로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바르트와 도르너의 관계를 위에서 살펴본

주-객 도식 이외의 다른 구조로 살펴볼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이와

관련해서, 바르트의 화해론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중심성의 신학은 프

롤레고메나에서 나타나고 있는 주-객 도식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는

시각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예컨대, 여기에서 위의 연구가들과 비

슷한 맥락에서 바르트 삼위일체론의“주체성”의 구조를 비판적으로 언

급했던 크뢰트케의 주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크뢰트케 역시 바르트

의 교회교의학에 있어서 삼위일체론이“주체”로서의 신에 대한 관심으

적으로 인간이라고 하는 인식주체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설명

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르

트는 도르너의 신학이 헤겔과 슐라이에르마허의 사변(Spekulation)의

신학을 따라가는 신의 사변성에 머물고 말았다고 파악하며, 여기에 머

물러 있는 한, 계시를 지향했던 그의신학은“성공하지못한 돌파의 시

도”로 머물 수 밖에 없다라고 주장했다.26) 즉 바르트는 뮌스터 시대 이

후 교회교의학에 이르기까지 한편으로는 신중심적 신학의 전개에 기반

을 둔 객관적 교의학(objektive Dogmen)의 길로서의 삼위일체론을 주

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인식론적 차원에서의 비판을 통해 신

개신교 신학이 가지고 있는 인간중심성의 한계에 대한 비판과 거리두

기를유지하고있었다.

또한,“주체”라고 하는 개념적 기반에 있어서도 바르트의“주체”는

도르너의 사변적“주체”와 그 출발단초와 전개에 있어 차이를 가진다.

도르너의 신학이 사변신학의 구조적인 기반 위에서“절대적 인격성과

세 존재양태”를 객관적 교의로 설정하고, 그 인식적 정초역시 인간 내

부에서 찾고있는데 반해서, 이와 같은삼위일체의 전개에 있어서 바르

트는 특별히 삼중적인 인격적 하나님으로서의 삼위일체의 개념에 있어

서 하나의 중립적 존재양태가 아닌, 각자의 주체의 형식 안에서 주님으

로 계시되시는 하나님의“주권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이러한“주권성”

의 강조는 바르트에게 있어서 그“주체”의 형식을 어떠한 경우에도 주

체-객체도식바깥에놓도록 한다.27) 바르트가 자신의출발점을하나님

22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이상은, 칼 바르트와이삭아우구스트도르너의 상관관계에대하여 … 225

2 6 ) K. Barth, Die Geschichte der protestantischen Theologie im 19. Jahrhundert

(1946), 524. 이러한 비판은 특히 바르트가 도르너의“합명제”(Synthese)라고 불렀

던, 도르너의 인식론적 한계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른바“객체와 주체에 대한 도르

너의변증법”(Dornersche Dialektik zwischen Subjekt und Objekt)의 문제는그것이

인간적 합명제(Synthese) 안에서, 즉 궁극적으로“우리 안에서”일어난다는 점에 있

다. 앞의 책, 528, 532.

27) 후에 바르트 스스로가 이 그리스도교 교의학의 신학적 단초는 결정적인 부분에서 슐

라이에르마허를극복하지못했다는 자기반성을 하였는데, 이것은곧 신-인간이라고

하는양자의 대립구조를따라가고 있다는 것에대한 반성으로부터주어진 것이었다.

K. Barth, Kirchliche Dogmatik I/1 (1955), 145. 신의 자유로운 주권을 강조하는 바

르트의 신학과 헤겔을 대표로하는 근대의“주체”중심신학 사이에 나타나는 기본

적 차이에 대해서 김균진은 핵심적인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김균진,『헤겔과 바르

트』(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3), 178, 369-371. 논자는 두 신학 간의 차이에 대

한 김균진의입장을수용하고자한다.

Page 114: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만일 그가 관찰하는 것처럼 바르트의 신학적 강조점의 변화를 세밀

하게 관찰하면서, 주-객 도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 삼위일체론적 구조

로부터 그리스도중심적 신학의 전환과정을 주목한다면 바르트의 신학

은 그의 그리스도 중심성에 있어서 신개신교 신학과 차별성을 보인다

고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바르트 신학에 대한 도르너 신학의 연관관

계를 고찰할 때, 우리는 도르너의 신학이 바르트의 이러한 전환과정에

서도강하게 동반되고 있는것을보게된다. 그것은 바르트가 주목했던

도르너의신의“불변성”(Unveränderliche) 개념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발견된다.29)

우선 도르너의“불변성”개념을 살펴본다면, 이 개념은 역사적으로

1850년대를 중심으로 토마지우스(Thomasius)를 중심으로 하는 이른

바 케노시스 학파와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에서 도출된 개념이다.30) 도

로부터 출발단초를 찾고 있으며, 이러한 신-주체성의 정초가 도르너

신학의 수용을 통해 하나의 주체 안에 있는 세 존재양태라는 개념 안

에서 더욱 강하게 부각되었다고 비판적으로 언급한다. 이러한 신-주체

적 삼위일체론에 대해서 크뢰트케는 그것이 한편으로는 계시신학적이

기는 하지만, 그러나“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론적이지 않게”정초되어

있다고 언급한다. 이러한 면에서 자신의 삼위일체론적 사고를 프롤레고

메나에서 보여주었던 신-주체적 정초로 후퇴하여 머무르고자 하지 않

았던 바르트가 교의학적 전개 가운데에서“다른 차원으로”승화시키고

자 했다고 파악한다. 즉 그는 바르트의 신-주체적 신학에 기반을 둔

주-객 도식의 교의학적 체계가 그리스도 중심성의 신학으로 전개되어

가는 추이를 관찰한다. 그에 따르면 바르트가『교회교의학』I I/2에서 본

격적으로 전개시키기 시작한 화해론의 신학은 따라서“새로운 정신을

담고있는것은아니라 할지라도”무엇인가다르게 윤색된 신학적 분위

기가교회교의학에들어섰다는것을보여주는것이라고판단한다.28)

22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이상은, 칼 바르트와 이삭아우구스트도르너의 상관관계에대하여 … 227

28) W. Krotke, “Die Summe des Evangeliums, Karl Barths Erwahlungslehre im

Kontext der Kirchlichen Dogmatik,” ed. M. Beintker/Chr. Link/M. Trowitzsch,

Karl Barth im europaischen Zeitgeschehen ( 1 9 3 5-1950)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2010), 77. 크뢰트케와더불어 폰 발타자르 역시이러한 전환에 대해서 관심

을 가지고 주목하고 있는데, 그는 특별히 프롤레고메나의 신중심신학이 화해론의 그

리스도 중심적인 신학으로 바뀌는 전조가 그의 선택론에서 비로소 독창적인 형태로

떠오르는데, 이것은『교회교의학』I I/1의 신론에서 서서히나타나기 시작한다고 밝히고

있다. H. U. von Balthasar, Karl Barth (Köln: Hegner, 1962), 186. 이와 더불어서 그

는 예정에 대한 교리에서 비로소 바르트의 궁극적인 신학적 사안이 드러나고 있다고

파악하며, 이것이 바르트 신학 전체를 위한 열쇠와 같은 지점이 된다고 파악한다. 그

리고 이것은 화해론 안에서 새로이 질문을 제기하도록 하는 중요지점이 된다고 파악

한다. 그의 주장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존재할 수 있다. 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적 기반이 사실상“사회 속의 그리스도인”(Der Christ in der Gesellschaft)이라는

제목하에 행해졌던“탐바흐 강연”(1919)에서분명하게 천명된 이후로 그의중요한 신

학적 기반으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조. K. Barth, “Der Christ in der

Gesellschaft,” ed. J. Moltmann, Anfänge der dialektischen Theologie Teil 1 .

(München: Chr. Kaiser, 1977), 3-36. 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구조에 대해서

는 다음을 참조. 김재진, 『칼바르트신학해부』(서울: 한들출판사, 1998). 다만『교회

교의학』의 시작 단계에서 주체-객체 도식이 부각되는 것은 사실이다. 김명용 역시

1942년『교회교의학』이전에는아직 바르트의 신학이 확실한 기독론적 집중에 이르

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김명용,『칼 바르트의 신학』(서울: 이레서원, 2007), 163.

폰 발타자르는 이러한 선택론에 있어서 중심점의 전환에 관해서, 특별히“선택의 역

동성”(Erwahlungsdynamik)이라고 표현하며, 여기에서프롤레고메나의『기독론』(KD

I/2, 134-221)이 거의잊혀질정도라고표현한다. H. U. von Balthasar, 앞의책, 78.

29) 우선도르너의“불변성”개념은 그 원칙에 있어서 위에서 살펴보았던, 삼위일체 신학

의 강조와 같은 기반에서 이루어진 신학적 개념이다. 즉 이 개념은근본정신에 있어

서 삼위일체 신학이 보여주었던, 신학의 중점을 신에게로 옮기고자 했던 도르너의

초점과 그 기반을 공유한다. 그러나 후에 그리스도교 신앙론의 체계를 위한 중요한

기반을 제공해주었던 이 신학에서 도르너는 자신의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적 전개를

보다분명하게보여주고있다. 바르트가이 논문을발견하고고찰한 것은“신앙론”에

대한 연구보다 훨씬 뒤의 일로 추정된다. 비슷한 의견을 Sheman도 개진하고 있다.

R. Sherman, “Isaak August Dorner on Divine Immutability: A Missing Link

between Schleiermacher and Barth,” 393.

30) 이른바 케노시스 학파는 토마지우스(Thomasius), 게스(Geß) 등 신루터교를 중심으

로 형성된 19세기 신학자들의 일부를 가리킨다. 이들에 대해서는 다음의 항목을 참

조하라. J. Webster, “kenotische Christologie,” R G G4 4(Tübingen: Mohr Siebeck,

2001), 929-931. 토마지우스와 도르너의 기독론 논쟁을 다룬 글로는 독어권에서는

Th. Koppehl, Der wissenschaftliche Standpunkt der Theologie Isaak August

Dorners (Berlin: de Gruyter 1990). 영어권에서는C. Welch, ed, God and Incarna-

Page 115: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의지위에서 세계는 가능하다. 도르너에따르면 신은시간과 공간에 대

한 관계에 있어서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신은 자신의“윤리적 본질”,

즉 사랑을 통해 세계에 대한 초월성을 유지하면서 세계에 대한“생동

성”으로의 개입을 실현한다. 여기에서 세계는 신의“자기목적”으로, 즉

“하나의 선한 신의 사랑에 상응하는 목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신은

자기 상실 없이 세계의 역사(Geschichte)로 개입해 들어가며, 이것을

통해 도르너는 성육신의 개념을 설명한다. 도르너에 따르면“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육신 그리고 화해”는 생동성과 불변성의 해소될 수 없는

합일을 가능케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현현은“세계 안에서, 신의 작

용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새로운 것”이다. 그리고“신의 지(Wissen)

를 위한하나의 새로운 현실성”이다. 그러한 면에서 그리스도의 현현은

역사의“중심점”(Mittelpunkt)이다.34) 이와같이, 신이 시간성 속으로 참

여하는 것의의미를 그는화해와칭의에서발견한다.

한편으로는 신개신교 신학의 사변철학적 방법론에 바탕을 두고, 다

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시간성 속으로 들어온 성육신의 현현에 강조를

둔 신학을 전개한 도르너의“불변성”개념에서 도르너는 궁극적으로

“중심점”으로서의 그리스도, 그리고 화해와 칭의의 의미를 도출해낸다.

이와같은 도르너의“불변성”개념을 바르트는『교회교의학』I I/1에서 자

유와 사랑의 존재로서의 신개념을,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을 통해 정립

하도록 구체화하는 시도 가운데 주목하며 받아들인다. 이것은 신의“항

존성”(Beständigkeit)을 다루는 장(KD I I/1 §31.2)에서 보다 분명하게

확인된다.

바르트는『교회교의학』I I/1의 신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자신의“항존

성”개념의 전개에 있어서 도르너의“불변성”개념이 지대한 영향을 끼

쳤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밝힌다.35)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신은 바르트에

르너에 따르면 이들은 불변하는 신의 초월성을 지키기를 시도하면서

이를 건드리지 않기를 원한다. 그러나 어떻게 불변하는신의 본성이 성

육신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적절한 대답을 주질 못했

다.31) 이에대해 도르너의 질문은 변할 수 없는 신의 본성과 변함의 속

성을 갖는세계와의 상치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로 집약된다. 즉

어떻게“불변성”(das Unveränderliche), 그리고“생동성”(das Leben-

dige) 양자가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신이 초월적 본성을 유지하

면서“되어감”(Werden) 혹은“변화”(Wechsel)라는 계기를 스스로 안에

담고있을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도르너는 신의 본성은“실체”(Substanz), “단

순성”(Einfachheit), 혹은“불변성”( U n v e ä n d e r l i c h e )과 같은 전통적인

개념으로부터 모색되어서는안 된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개념에서는 모

든 변화들, 시간과 공간 개념이 배제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신의 초

월, 다른 한편으로신과세계와의 연관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도르

너는 우선 신이 세계의 창조의 근원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부터

답을 찾기 시작한다. 신은 모든 존재의 일반적 근원이다.32) 이러한 신에

모든 시간과 공간은 가능태로서 영원히 신 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될

수 밖에 없다. 즉 하나님에게 있어서 세계의 변화성은“신의 생동적인

자기확인 안에서의 변화”로 이해된다.33) 세계는 신으로부터 배제되는

것이아니고, 그렇다고신과세계가 뒤섞이는것이아니고, 사실상신의

22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이상은, 칼 바르트와이삭아우구스트도르너의 상관관계에대하여 … 229

tion in Mid-Nineteenth century German Theology, G. Thomasius, I. A. Dorner, A.

E. Biederman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65). 바르트 역시 도르너와

비슷한 견지에서KD IV/1에서 이들에 대한 비판을 제기한다. K Barth, Kirchliche

Dogmatik IV/1 (Zürich: Zollikon-Zürich, 1953), 98f.

31) 불변성과성육신을 합치시키는데실패한 그들은초월적 로고스와성육신한 로고스가

다르다고 설명하는“이중 로고스”혹은“성부수난설”의 양자 중 하나로 빠져버리고

말았다고 도르너는 관찰한다. I. A. Dorner, Gesammelte Schriften aus dem Gebiet

der systematischen Theologie Exegese und Geschichte (1883) 223. 232.

32) 앞의책, 309.

33) 앞의 책, 313.

34) 앞의책, 364.

35) K. Barth, Kirchliche Dogmatik II/1 (1958), 552. 바르트는 명시적으로 도르너의 불

변성개념을 내용적으로받아들이면서, “불변성”이라는어감이 주는부정적인의미를

Page 116: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서 그리고 그 안에서 살며, 그로부터 나와 그에게로 향하게 된다. 여기

에서는 신과세계 사이의 그릇된 일치성의 주장도, 또한 그릇된 분리의

주장도 이루어질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과 그분으로부터 창조된 세계

사이에는 하나의 실재적 역사( G e s c h i c h t e )가 성립하는데, 이 역사는

“그로부터 성취된 화해와 계시”의 역사이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역

사를 하나의 미래적“구속”으로 이끌어가신다. 이러한 역사에서 하나님

은 영원으로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안에서 스스로로 있으며, 그러나“실

재적 역사의 실재적 주체”로 있다.40) 이와같은 개입을 통해 첫 번째 창

조와는 다른 사건으로 일어나는 두 번째 창조의 의미가 강조된다. 첫

번째 창조와는 다른 훨씬 거대한 두 번째 창조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

에게“파트너 관계”(Partnerschaft)로 들어서게 되며, 이러한 관계는 무

엇보다도예수그리스도의계시에서 보다 분명히 구체화된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하나님의 불변적인 생명성의 확인으

로 설명하며, 그분의“자유와 사랑”을 보여주는“자신을 비우심”

(Selbstentäußerung)이라고 밝힌다. 특별히 예수의 계시를 통해 확인이

되는 것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 스스로가 피조물과“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이다.41) 그리스도의 현현은 하나님과피조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

해 공동체(Gemeinschaft)를 이루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 공동체

는 하나님의 항존성과 생동성의 합일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설명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불변성”이 설명되며, 그 안에서

신은 그분의“자기겸비”(Selbstherablassung) 가운데 있고,“높은 곳에”

계시면서, 동시에“완전하게우리에게로 내려오시는”, 자유하는사랑안

에서 완전한 하나님 그 자체이신 분으로 계시된다.42) 그리고 이러한 하

나님의 성육신에서 보여지는 것은 그분의“자유”를 통해 우리를 위해

따르면“자유”와“사랑”에 대항해 서지 않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스스

로 안에서 항존적인 분으로서, 그것의 자유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36)

또한 신의 항존성은“신의 생동”과 함께 생각될 수 있는데, 한 분의 선

재성으로서의 그분은 살아 계신 분이며, 그러한 분으로서 하나님은 항

속적이다. 이러한 하나님은스스로이기를 멈추지 않으면서도변화를 받

아들인다. 즉“생동”과“항존”의 일치로서의 하나님은 모든피조물적 변

화의 근원이며, 모든“되어감”의 충일이다. 또한 신은그 자신의 영원한

반복과 항존안에서 생동하는 분이다. 이제생동하는 분으로서 신은그

의 사랑을 위한 자유로서 생동하는 분이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무엇이 불변적인 것인가?”그에 대한 대답으로“이러

한 그의자기주장안에살아있는신은불변적인 것이다”라고밝힌다.37)

이러한“항존”과“생동”의 결합으로서의 신에 대한 정의와 더불어

바르트는 도르너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를“항존성”의 규정하에서 설명

해낸다.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은 그로부터 분리되는 현실성을 설정하며,

그분의 의지를 통해그것을 유지하는데, 이는 그의생동성을지키는 가

운데 그러한 것이다.38) 그리고 이것은 그의 사랑을 통해이루어진다. 이

러한 신론을 바르트는“역사”속으로 현현하는 그리스도 중심성의 신학

으로 재확인한다. 여기에서는 신의 불변성의 강조도 혹은 피조물의 변

화성의 일방적인 강조도 중요하지 않다. 만일 일방적인 강조가 이루어

진다면, 창조주와 피조물의 분리가 중요하게 부각되는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생동성이 정당하게 유지되지 않는다.39) 그에 대해서 하나님

스스로가 항존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세계의 모든 생명들은 그를 통해

23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이상은, 칼 바르트와이삭 아우구스트도르너의 상관관계에대하여 … 231

를 불식시키기 위해“항존성”(Bestandigkeit)이라고 이름을 붙인다는 설명을 제공한

다. 앞의책, 557.

36) 앞의책, 553.

37) 앞의책, 556.

38) 앞의책, 561.

39) 앞의책, 563.

40) 앞의책, 565.

41) “이 피조물, 인간 예수가 거기 있음을 통해서, 하나님 스스로가 거기에 있다.”앞의

책, 578.

42) 앞의책, 582.

Page 117: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이러한 주-객 도식으로부터그리스도 중심성의 관계중심축으로의

서술 방식의 변화과정, 그리고 화해론에 있어서의 그리스도 중심성의

주-객 도식을 넘어선 차원으로의 설명에 있어서 도르너와 바르트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물론 한 가지 언급할 사실로, 바르트

가『교회교의학』의 프롤레고메나에서보여주고있는 신-주체적 신학적

정초로부터 선택론과 화해론의 그리스도 중심성으로 강조점이 전환되

는 과정에서 도르너의 신학이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을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하나님의 주체성”이라고 하는

괴팅엔 시대의 관심사를 중심으로 뮌스터 교의학에서 도르너의 신-주

체적 삼위일체론적 특성을 주목했던 것처럼,『교회교의학』에 있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과 인간의“계약”(Bund)을 중심으로 한 사상을

화해론으로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도르너의 신학적 개념으로부터 도움

을 얻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KD I I/1의“불변성”개념의 수용에서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

의 신학적 정초가KD I I/2의 선택론, 그리고 KD I V의 화해론에서 전개

되는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에서 중요한 동반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에 동반되는 도르너의 그리스도

중심 신학의 의의는 무시할 수 없다. 즉 도르너의 신학은 바르트에게

있어서 신-주체적 삼위일체 신학적 전개에서 뿐 아니라, 그리스도 중

심성에 기반을 둔 선택과 화해의 교리에 있어서도 중요한 동반자로 자

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몰트만, 판넨베르크를 비롯

한 여러 학자가 주장한 것과 같이, 바르트의 신학이 그의 교의학의 전

“필연성”이 정초되었다는점이라고 바르트는밝힌다.43)

이와같은 도르너의“불변성”개념을 바르트가 주목하며 자신의 신학

전개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어떤설명을 제공하는가?44)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한 가지사실은 바

르트가 프롤레고메나에서 전개하고 있는 신-주체적인 신학에 비해 여

기에서는 중심점(Mittelpunkt)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강조점의 전

환이 인지된다는 사실이다. 이 중심점으로서의그리스도라고하는개념

의 신학적 영향은 신론에 이어지는KD I I/2의 선택론에서 보다 분명히

나타난다.45)

23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이상은, 칼 바르트와이삭아우구스트도르너의 상관관계에대하여 … 233

43) 앞의책, 583.

44) 우선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적 개념의 도르너에 대

한 연관의예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하나님의“불변성”개념의 수용에 있어서도, 그

는 도르너의“사랑의 형이상학”이 가지고 있던사변적 신학방법론에대해 차별을 유

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도르너가 사변신학적 방법론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계

시를 설명해내고, 그를 중심으로“화해”에 대한설명으로 이끌어가고자했던데 반해,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적 기반을 보다 분명하게 그리스도론적인 계시신학으로부터

찾고자 한다.

45) 예컨대 그는 선택의 근거로서의“예정”을 그의“항존성(그의 불변성)을 통해 특징지

워지는 시간과 모든 그의 내용에 대한 규정으로부터 이해한다”고 밝힌다. 앞의 책,

198. 이에 덧붙여 그는 밝히고 있다.“예정(Praedestination)은 이러한 신의 의지의

행위 그 자체이며,…예정 그 스스로가…불변화된 것(Unveranderte), 그리고 불변적

인 것(Unveranderliche)이다.”위의 책. 이와같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적 강조점

으로의 전환은 신의“불변성”의 설명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바르트는『교회교의학』I/2에서“계약”(Bund)의 개념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중

심성이라는 주제를 서서히 전개시키고 있었다. 이것으로부터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의 중심이며, 예수그리스도의계시는“시간의성취’(Erfullung der Zeit),

혹은”계약의 성취“(Erfullung des Bundes)이라는개념으로 설명되어왔다. 이와같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계시신학은 이제KD I I/1에서 파트너 관계라는 개념을 통해

보다분명히 드러나고, 특별히파트너 개념에 입각해 볼 때, 위에서아래로, 아래에서

위로의 관계는 더 이상 큰 의미를 갖지 않으며 중심으로서의 그리스도의 개념이 부

각된다. 이 파트너의 개념은 선택론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의 계약의 파트너로 선택했고, 이 파트너 없이 홀로 하나님

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점이주목된다. 파트너 개념에 대한특별한 주목을보여

주는 글로는, W. Krotke, “Gott und Mensch als ‘Partner’: Zur Bedeutung einer

zentralen Kategorie in Karl Barths Kirchlicher Dogmatik,” B a r m e n-B a r t h-

Bonhoeffer (Bielefeld: Luther Verlag, 2009), 109-130. 몰트만 역시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에서 초기에 하나님의 자유에 입각한“주권”사상이 부각되었던데 반해, 후기

에 이르러서 계약사상의 강한 부각이 나타나며 하나님과 자유로운 인간 사이의“파

트너”관계, 친구관계가 말해진다고 밝힌다. J. Moltmann, Trinitat und Reich Gottes

(1980), 161.

Page 118: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변성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비판을 제기하면서 하나님의“주권성”에 대

해 강조하고자 하였다. 즉 이 두 신학자들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관찰되는데, 특히 바르트가 체계에 얽매이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하나

님의 주권과 계시중심성을 고수하고자 했던데 반해, 도르너의 신학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변신학적“시스템”에 기반을 둔 방법론적 틀 속

의 신학이었다는점에서 그러하다. 바르트는 이러한 사변신학적시스템

을 철저히 비판하면서거리를 두었다.

더 나아가서 바르트에 대한도르너의 신학적 의의를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주-객 도식의 신학적 구도에서 이루어진 교의학적 체계에서만

모색될 것이아니라, 그들모두가 자신들의 시대에 변증하고자 했던그

리스도 중심성의 신학적 기반에서 찾아져야 한다. 이러한 신학적 정초

가 그들에게 있어서는 사실상 중요한 공통분모였다. 그들이 자신들의

시대에 변증하고자 시도했던 그리스도 중심성의 신학적 시도를 무시하

고는바르트도 도르너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두 신학자

의 관계는 각자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하나님의 주체성의 신학을 관철

시키고자시도했던 점, 그리고 그리스도중심성의 신학을 회복시키고자

노력했던그들의 공통적 신학적 시도로부터관찰되어야한다.

주제어

칼 바르트, 이삭도르너, 삼위일체론, 절대적 인격성, 존재양태, 불변성

K. Barth, I. A. Dorner, Trinitätslehre, Die Absolute Persönlichkeit,

Seinsweise, Unveränderlichkeit

접 수 일 2012년 6월 29일

심사(수정)일 2012년 8월 9일

게재 확정일 2012년 9월 1일

개의 특정 단계에서 부각되는 주체성 개념의 강조 차원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몇가지 개념적 유사성 때문에 신개신교 신학과 연결선을 갖는다

든지, 또는 도르너의 신-주체성의 신학이 바르트와 신개신교의 사변신

학을 연결시켜주는 단적인 고리를 입증해 준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상

실한다. 따라서 주-객 도식에 기반을 둔 관찰에 따라 도르너의 신학이

바르트와 신개신교를 이어주는“보이지 않는 끈”이라고 주장하는 자세

는 철회되는 것이정당하다.

V. 나가는말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바르트와 도르너의 관계를 언급했던 주장들

은 주로 바르트가 교의학을 막 전개하기 시작했던 뮌스터 대학에서의

강의 시기로부터『교회교의학』의 전 단계까지 이어지던“말씀하시는 하

나님”의 계시신학에서 나타나는“주체성”의 신학의 관찰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바르트의 신-주체성의 신학적 정초는 신개신교 시대의

“주체성”의 신학적 구조와 연관성을 가진다는 면에서 그가 명시적으로

비판했던 사변신학에 대한 연관성을 입증한다는 식으로 거론되곤 하였

다. 그리고 그 연결선상에“주체”성 개념에 기반을 둔 도르너의 삼위일

체론이 바르트와신개신교사이의 관계에 있어서“잃어버린끈”으로볼

수 있다고 주장되었다.

그러나 바르트가 도르너의 삼위일체론을 중요하게 보았던 것은 그

맥락에서 볼 때, 도르너의 신학이 신개신교 신학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

이 아니라, 그의 신학에서 신개신교 신학의 인간-주체성의 신학을 극

복할 수 있는 신학적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서는“차별

성”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따라서 도르너의 신학이 바르트와 신개신교

사이의“가교”혹은“잃어버린 끈”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또한

바르트는 도르너 신학 자체를 관찰함에 있어서도, 그가가지고 있는사

23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이상은, 칼 바르트와이삭아우구스트도르너의 상관관계에대하여 … 235

Page 119: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August Dorners. Berlin: de Gruyter, 1990.

Krötke, Wolf. “Die Summe des Evangeliums, Karl Barths Erwählungslehre

im Kontext der Kirchlichen Dogmatik,” ed. M. Beintker, Chr. Link,

M. Trowitzsch, Karl Barth im europäischen Zeitgeschehen (1935-

1950), Widerstand-B e w ä h r u n g-Orientierung. Zürich: Theologi-

scher Verlag, 2010.

. Bermen-Barth-Bonhoeffer. Bielefeld: Luther Verlag, 2009.

Mehlhausen, Joachim. “Neuzeit.” T R E 24. Berlin, New York: de Gruyter,

1994.

Moltmann, Jürgen. Trinität und Reich Gottes: Zur Gotteslehre. M ü n c h e n :

Chr. Kaiser, 1980.

Matosevic, Lidija. Lieber Katholisch als neuprotestantisch, Karl Barths

Rezeption der katholischen Theologie 1921-1930. N e u k i r c h e n-

Vluyn: Neukirchener, 2005.

Oh, Sung Hyun. Karl Barth und Friedrich Schleiermacher 1909-1 9 3 0 .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2005.

Pannenberg, Wolfhart. Problemgeschichte der neueren evangelischen

Theologie in Deutschland.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79.

. “Die Subjektivität Gottes und die Trinitätslehre.” G r u n d f r a g e n

systematischer Theologie.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80. 96-111.

Rendtorff, Trutz ed. Die Realisierung der Freiheit: Beiträge zur Kritik der

Theologie Karl Barths. Gütersloh: Gütersloher Verlaghaus, 1975.

Rothermundt, Jörg. Personale Synthese: Isaak August Dorners dogmatische

Methode.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68.

. “Dorner, Isaak August.” TRE 9. Berllin, New York: de Gruyter, 1982.

155-158.

Sherman, Robert. “Isaak August Dorner on Divine Immutability: A Missing

Link between Schleiermacher and Barth.” Scottisch Journal of

Theology 53(2000). 380-401.

이상은, 칼 바르트와이삭아우구스트도르너의 상관관계에대하여 … 237

참고문헌

Barth, Karl. Die christliche Dogmatik im Entwurf.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1980.

. Die Theologie Schleiermachers, Vorlesung Göttingen WiSe 1923/4.

ed. D. Ritschl, Gesamtausgabe I I.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1978.

. Die protestantische Theologie im 19. Jahrhundert Ihre Vor-geschichte

und ihre Geschichte. Zürich: Evangelischer Verlag, 1946.

. Briefwechsel mit Thurneysen 1921-1 9 3 0 . ed. E. Thurneysen,

Gesamtausgabe V. Z?rich: Theologischer Verlag, 1975.

. “Das Wort Gottes in der Theologie von Schleiermacher bis Ritschl.”

ed. H. Schmidt, Vorträge und kleinere Arbeiten 1925-1 9 3 0 ,

Gesamtausgabe I I I.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1994. 144-157.

. Kirchliche Dogmatik I/1. Zürich: Zollikon-Zürich, 1955.

. Kirchliche Dogmatik I/2. Zürich: Zollikon-Zürich, 1960.

. Kirchliche Dogmatik I I/1. Zürich: Zollikon-Zürich, 1958.

. Kirchliche Dogmatik I I/2. Zürich: Zollikon-Zürich, 1948.

. Kirchliche Dogmatik I V/1. Zürich: Zollikon-Zürich, 1953.

Balthasar, Hans Urs von. Karl Barth, Darstellung und Deutung seiner

Theologie. Köln: Heg ner, 1962.

Dorner, Isaak August. Gesammelten Schriften aus dem Gebiet der

systematischen Theologie Exegese und Geschichte. Berlin: Wilhelm

Hertz, 1883.

. System der christlichen Glaubenslehre I. Berlin: Wilhelm Hertz, 1886.

Graf, Friedrich Wilhelm. “Neuprotestantismus.” RGG4 6. Tübingen: J. C. B.

Mohr Siebeck, 2003. 239-241.

Holte, Karl. Die Vermittlungstheologie: Ihre theologischen Grundbegriffe

kritisch untersucht. Upssala: Almqvist & Wiksells, 1965.

Koppehl, Thomas. Der wissenschaftliche Standpunkt der Theologie Isaak

23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120: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국문초록

칼 바르트와이삭아우구스트도르너의

상관관계에대하여

슐라이에르마허 전통에 서 있는 중재신학자 이삭 아우구스트 도르

너(1804-1884)의 신학과 말씀의 신학자 칼 바르트의 신학의 연관관계

는 바르트와 신개신교 신학의 연관성을 주장하려는 신학자들에 의해

주목되곤 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특히 헤겔적 사변신학과 바르트를 연

결시키고자 했던 판넨베르크, 혹은 바르트를“주체”를 중요시하는 근대

의 신학정신에 머무르는 것으로 주장하며 사회적 삼위일체론을전개하

고자하였던 몰트만에게서 대표적으로찾아볼 수 있다. 이들과 같이근

대의“주체”를 중심으로 하는신학적 기반에 바르트를위치시키고관찰

할 때, 그가 주장했던“하나의인격성과 세 존재양태”라는개념은“주체

성”이라고 하는 정초를 공유한다는 점에 있어서나 그 개념적 전개에서

나타나는 유사성으로 인해 도르너의 삼위일체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바르트의 도르너 신학에 대한 연관성은

그 맥락에 대한 관찰과 차별성에 대한정밀한 관찰로부터 시작해야 한

다. 바르트가 도르너의 삼위일체론에서 발견한 것은, 우선 그의 삼위일

체론적 단초가 신개신교의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바르트는도르너의 사변적 신학이

여전히19세기의 신학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을 비판하였다.

또한 바르트는“주체”를 중시하는 삼위일체론을 전개함에 있어서도, 바

르트는 도르너가 자신의 신학체계에 따라 구축한 사변신학적“시스템”

이상은, 칼 바르트와이삭아우구스트도르너의 상관관계에대하여… 239

Tillich, Paul / 송기득 역.『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 서울: 한국신학연

구소, 1980.

Torrance, Thomas F. Karl Barth. An Introduction to His Early Theology

1910-1931. London: SCM Press, 1962.

Welch, Claude ed. God and Incarnation in Mid-Nineteenth century German

Theology, G. Thomasius, I. A. Dorner, A. E. Biedermann. N e 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65.

Webster, John. “kenotische Christologie.” RGG4 4. Tübingen: Mohr Siebeck,

2001. 929-931.

Welker, Michael. Gottes Geist, Theologie des heiligen Geistes. Neukirchen-

Vluyn: Neukirchener, 1992.

김균진. 『헤겔과바르트』.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3.

김명용. 『칼바르트의 신학』. 서울: 이레서원, 2007.

김재진. 『칼바르트신학해부』. 서울: 한들출판사, 1998.

23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121: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A Study on the Relationship between Karl Barth and Isaak August Dorner

Lee, Sang-Eun

Lecturer

Presbyterian College & Theological Seminary

Seoul, Korea

The theological relationship between mediating theologian I. A.

Dorner, standing in the tradition of Schleiermacher, and dialectical

theologian Karl Barth has been attracting the attention of the

theologians who tried to argue that there is a connection between Karl

Barth and Neo-Protestantism. Among such theologians, the repre-

sentative ones are W. Panneberg, who tried to link Barth’s theology

to G. W. F. Hegel’s speculative theology, and J. Moltmann, who

attempted to develop social Trinitarian theology criticizing that

Barth’s Trinitarian theology was confined in the modern theological

trend which emphasized the subject. As these theologians did, when

Barth is examined on the basis of modern theology which is centered

on the concept of subject, it seems Barth had influence of Dorner’s

Trinitarian theory because Barth’s concept of “one personal God and

three mode of being” shares the concept of subject with Dorner’s,

and, also, similarities are observed in their conceptual development.

However, the examination of Barth’s linkage to Dorner’s theology

should begin with a careful examination of the context in which Barth

evaluates Dorner, along with consideration of the differences between

them. Barth took note of Dorner’s trintarian doctrine because he saw

이상은, 칼 바르트와이삭아우구스트도르너의 상관관계에대하여 … 241

을 중시했던 것과 달리, 하나님의“주권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이러

한“주권성”의 강조는 바르트와 도르너를 경유해 사변신학과 연결시키

고자 하는시도가 정당치 않다는 것을보여준다. 이와더불어 바르트와

도르너를 바르트의 교의학들에서 나타나는“주체성”을 중심으로 하는

주-객 도식의 틀에서 관찰하고자 하는 시도는 그들의 신학적 접점에

서 일부만을 관찰한 결과이다. 즉 두 신학자들이 딛고있는 실제적으로

중요한 기반, 즉 그리스도 중심성의 기반에서 비추어볼 때 합당하다고

볼 수 없으며, 이러한 기반을 중요하게 관찰해야 한다. 자신이 가진 신

학적 사변적 체계에도 불구하고 도르너는“중심”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중요하게 부각시키고자 했고, 이 시도는 신의“불변성”에 대한 그의 논

문들에서 중요하게 나타났다. 이 논문을 바르트는 자신의 교의학적 체

계를“주체성”의 기반에서“그리스도 중심성”의 기반으로 발전시킴에

있어서 중요하게 보면서 동반하였다. 그것은 신의“항존성”을 중심으로

전개하는 선택론으로의 길목에서 발견된다. 즉 양자의 신학적 접점은

주-객 도식에서 설명될 수 있는 주체성의 신학에서만이 아니라, 그리

스도 중심성의 신학적 접점에서 관찰되어야 한다. 따라서 바르트에게

미친 도르너의 관계를“주체”개념에 기반을 두고 바르트와 신개신교

사이를 연결하는“잃어버린끈”과 같이보는시각은 바르트에게있어서

나 도르너에게 있어서나 적절치 않다. 도르너의 그리스도 중심신학이

안고 있는 신학적 가능성을 자신의 교의학적 작업에서 동반했던 바르

트의 신학적 접점,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성을 자신의 신학에 적

용시키고자 시도했던 양자의 신학적 시도에 대해서 우리는 평가해야

한다.

24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122: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신정론과하나님의고난

신정론 문제의응답으로써하나님 고난이주는의미

박영범

(서울신학대학교/중앙신학교, 강사)

I. 들어가는말

하나님은 어디 있는가? 그 분은 어디 있는가?”한 남자가 내 뒤에서

물었다. 수용소 관리자의 사형 신호가 떨어졌다. 의자가 옆으로 넘어

졌다. 무거운 침묵이 수용소를 가득 에워쌌다. 태양은 이제 지평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 두 성인 남자는 더 이상 발버둥치지 않았다.

(...) 그러나 세 번째 목줄은 여전히 요동치고 있었다. 소년은 아직 살

아있었다. (...) 소년은 삼 십분 이상을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눈앞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죽음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

다. (...) 같은 남자가 내 뒤에서 묻는 소리를 들었다.“하나님은 어디

에 계시는가?”내 속에서 한 목소리가 대답했다.“하나님은 어디 계

시는가? 저곳, 바로사형대에그는 달려계신다.1)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 1788-1860)는 세상(Welt)이라는 말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243-279

1) E. Wiesel, “Die Nacht zu begraben, Elischa”, F. Hermanni, Das Böse und die

Theodizee (Chr. Kaiser, 2002), 247에서재인용.

in it a possibility of overcoming Neo-Protestanistic Anthropocentic-

ism. On the other hand, Barth criticized Dorner’s theology in that it

still failed to overcome the limits of the 19-century theology. When it

comes to Trinitarian doctrine which is established on the basis of the

concept of subject, Barth emphasized the sovereignty of God, while

Dorner placed importance on the system created according to the

structure of his theology. Barth’s emphasis on God’s sovereignty

makes it unjustifiable to claim that there is a hidden connection be-

tween Barth and speculative theology. It must also be pointed out that

examining the relation between the two theologians within subject-

object frame, which is based on subjectivity in Barth’s dogmatics, is

only a partial way of understanding their relationship. When exam-

ined against the basis on which these two theologians are standing,

that is, Christocentrism, it cannot be viewed proper. Thus, examina-

tion of such basis is essential in the analysis. Despite his own theo-

logically speculative system, Dorner tried to emphasize Christ as the

center. Such Christocentrism is visible in his theses on Immutability

of God. Barth paid special attention to the contents of these theses, as

he developed the structure of church dogmatics, from the structure of

subject to the structure of Christocentrism. Hence-forth, the relation

between the two is based not only on subject-object structure but also

on the common ground of their Christocentric theology. Thus, it is

improper, in analysis, to regard Dorner’s theology as a “missing link”

between Barth and Neo-Protestantism. Instead, Barth’s relation to

Dorner must be examined in the context that Barth saw a potential of

overcoming the problem of Neo-Protestantism, and he carried

Dorner’s Christocentric theology for his own dogmatic work.

24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123: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과 우리가 믿는하나님을모순됨 없이이야기할수 있는가?

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러나

만족할만한 대답을 주지 못한것도 사실이다. 이런선상에서20세기특

히 독일 신학계에는 과거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하나님의 고난에 관해

서 말하는 학자들이 대거등장하였다. 이들은 과거 정통신학에서 당연

시 되어왔던고난 받을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재해석하고, 고난

가운데 있는하나님을이야기 한다.6)

이 글은 신정론 물음에 대한 새로운 해답을 찾고자 시도하지 않는

다. 이 글의 주된 관심사는 오늘날 신정론 문제의 한 대안으로 제시되

고 있는 하나님의 고난이라는 개념과 신정론 물음이 갖는 관계를 고찰

하여 과연 하나님의 고난이 신정론 물음의 응답으로 적합한 지를 일차

적으로 고찰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신정론 물음과 신정론 물음이 갖

는 문제를 볼 것이다(I I). 그 다음에 오늘날 많은 학자들 가운데, 특히

요나스(H. Jonas)와 몰트만(J. Moltmann)을 중심으로 하나님 고난의

주제를 살펴 볼 것이다(I I I). 이를 통해 과연 하나님의 고난이 신정론

물음과 어떤연결고리를 갖고있고, 신정론이 지닌문제의 해결방법인

지를결론적으로고찰하도록 하겠다(I V).

박영범, 신정론과하나님의고난 245

6) 서로 다른 방식이지만 바르트(K. Barth), 본회퍼(D. Bonhoeffer), 죌레(D. Sölle), 융엘

(E. Jüngel), 몰트만(J. Moltmann) 등에 의해서 하나님의 고난이 언급되었다. 또한 가

톨릭 신학자로서는 발타자르(H. Urs von Balthasar) 등이 있으며, 영미권에서는 과정

신학을 전개하는 학자들이 있다. 특히 종교철학자 가운데서는 요나스(H. Jonas)를 들

수 있다. A. Kreiner, “Gott im Leid? Zur Theodizee-Relevanz der Rede von

leidenden Gott”, Hrg. v. P. Koslowski. u. F. Hermanni, Der leidende Gott (Wilhelm

FInk Verlag, 2001). 213을 보라.

의 철자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W(Weh: 아픔), E(Elend: 궁

핍), L(Leid: 고난), T(Tod: 죽음).2) 세상은 아픔, 궁핍, 고난과 죽음으로

점철된 곳이라는 것이다. 비관론적 염세주의 철학을 펼친 학자답다. 그

는 비이성적인 세계의지가 세상을 이끌고 구성하는 원동력이라 생각한

다. 그래서 세상은 계속해서 나빠지고, 결국“더 나쁜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3)는 주장에 이르게 된다. 불교의‘인생즉고’(人生卽苦), 즉 사바

세계는 온통 고통으로 가득하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물론 세상이 오

직 고통으로만 넘쳐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은세상에 존재하는

고난과 악의심각성을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여지를 준다. 왜냐하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찌할 수 없는악을 실제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하

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매우 좋다”(창 1:31)고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고난이 없는 행복한 곳이 아님은 분명하다.

자연재해는 예나지금이나 여전히 우리세상에 일어난다.4) 또한 인간이

행하는 악에 의해서 많은 사람이 고통 가운데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리고 수많은 질병과 죽음이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한계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래서 고난과 악의체험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동기를 제공

하기도 했다.5)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고난과 악이라는 부정적인경험

24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2) G. Streminger, “Gottes Guete und die Uebel der Welt”, Wege der Vernunft.

Festschrift zum 70. Geburtstag von Hans Albert (Tübingen, 1991), 192을 참고하라.

3) “세상이 아직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이미 오래전부터 가능하지 않는

말인 듯하다.”A. Schopenhauer,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Saemtliche

Werke, Ergaenzungen zum 4 Buch (Stuttgart, 1900), 144. “삶은 마치 추와 같아서

고통과 무료함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Ders,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in: Saemtliche Werke, Band I, Hrg. v. Luetgehaus (Haffmans, 1988), 407을 보라.

4) 2004년 겨울 서남아시아에서 발생했던 지진 해일은 약 22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또한작년 일본후쿠시마에서발생한 지진해일은 약 2만 여명의 사상자와 함께원자

력 발전소의붕괴로 여전히 위험가운데 놓여 있다. 2012년 올해초 유럽에서있었던

한파는 약 500여 명의사상자를내고있다.

5) 유신론에서 강하게 주장하는 하나님의전능함과완전히 선하심은고난과 악이라는현실

경험과 부조화를 이루면서 유신론을 부정하는 결과를 도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내용

은 다음의 책을보라: F. Hermanni, Das Boese und die Theodizee(2002), 243-244.

Page 124: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런 전제 아래 다음과 같은 결과가 따라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즉, 4) 완

전히선한 하나님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악을 제거하신다. 5)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전지전능한 그는 모든 악을 없애신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악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래서3)의 전제를 부

정하거나, 1) 또는2)의 전제를 포기하거나 수정해야 하는 논리적 모순

에 접하게 된다. 신정론 물음은 서로 모순을 갖고 충돌하는 전제와 결

과를 논리적이고 신학적으로 풀려는 시도이다.11) 즉, 신앙의 눈으로 바

라본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완전히 선하심이 어떻게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문제를 책임있게설명할 수 있는가에대한대답을 시도한다.

2. 신정론물음의문제

신정론 물음은 악의 문제와 구체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

님의 속성과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인 통일성이 요구

된다. 프랑스 개신교 철학자인 리꾀르(P. Ricoeur)는 논리적인 통일성

이‘일관성과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체계’의 법칙을 통해서 주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12) 역사적으로 볼 때, 논리적인 일관성이 신정론 물음의

해답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시기는 아우구스티누스부터 라이

프니츠까지라 할 수 있다. 이 후에 헤겔은‘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체

계’를 구상했다. 이는 바르트가‘깨어진 신학’을 주장하는 시기까지 주

요한설명체계였다. 이 둘을간략하게 살펴보자.

박영범, 신정론과하나님의고난 247

11) J. L. Mackie, “Evil and Omnipotence”, ed. M.M Adams & R.M. Adams, The Pro-

blem of Evil(Oxford, 1990), 25-37을 참고하라. 또한 N. Hoerster, “Zur Unlös-

barkeit des Theodizee-Problems”, Theologie und Philosophie, 60 (1985), 400-409

를 참고하라.

12) P. Ricoeur, Das Böse (TVZ, 2006), 13.

I I. 신정론물음과신정론문제

1. 신정론물음

신정론 물음은 현실에 존재하는 고난과 악의 문제를 유신론의 입장

에서 설명하는 시도다.7) 특히 철학과 이성 신학의 사고 안에서 신정론

물음을 규명한다. 그래서“철학적 신정론”이라 불리기도한다.8) 이런 경

향은 바탕은 바로 철학자 에피쿠로스(Epikur, 341-272 BC)의 문제제

기에놓여있다. 그는다음과같이묻고있다.

하나님은 악을 없애기를 원하는데 할 수 없으시던가, 또는 하나님은 할

수 있으나 원하지 않으시든지, 또는 하나님은 할 수 없고 원하지도 않으

시든지, 또는 할 수 있고 그리고 원하시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지금

원하나 할 수 없으시다면, 그는 하나님이라 생각하기에 너무 약하시다.

만일 그가 할 수 있으나 원하지 않으신다면, 그는 하나님이란 존재에 걸

맞지 않게 너그럽지 않으신 분이다. 만일 하나님이 원하지 않거나 또한

할 수 없다면, 그는 너그럽지 않거나 약한 분이시다. 그래서 동시에 하나

님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라는 것에 걸맞게, 원하고 또

하실 수 있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악이 오며 또한 왜 하나님은 악을 제

거하지 않으시는가(unde ergo sund mala aut cur illa non tollit)?9)

에피쿠로스의 물음에는 다음과 같은 기본 전제가 깔려 있다.10) 1) 하

나님은 존재하며, 전지전능(全知全能) 하시다. 2) 하나님은 존재하며, 완

전히 선하시다. 그러나 3) 이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며 경험되어진다. 이

24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7) K. v. Stosch, Einfuehrung in die Systematische Theologie, UTB, 2006, 104을 보라.

8) 김용성, 『하나님이성의법정에 서다』(한들출판사, 2010), 256 이하를참고하라.

9) Epikur, Von der Ueberwindung der Furcht: Katechismus, Lehrbriefe, Spruchsam-

mlung, Fragmente, Eingeleitet und uebertragen v. Olof Gigon (München: DTV,

1991), 136.

10) F. Hermanni, Das Böse und die Theodizee (2002), 239-242을 보라.

Page 125: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적 하나님, 즉 창조주 하나님이 또한악의원천이라는 사상을 극복하게

했다.

“선의 결핍”사상은17세기에 이르기까지 가장 설득력 있는 이론으

로 간주되어왔다. 그 이후에 획을 근 사상가는 바로 라이프니츠(Gott-

fried Wihelm Leibniz, 1646-1716)다. 악과 관련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논의는 라이프니츠 이래로“신정론”(Theodizee)15)이라 불리게 되

었다.1 6 ) 라이프니츠의 가장 큰 공헌은‘자연악’(malum physicum)과

‘윤리악’(malum morale)의 근본적인 원인으로‘형이상학적 악’

(malum metaphysicum)을 제시했다는 것에 있다. 형이상학적 악은 하

나님께서 하나의 세상을 선택하시고 가져 오실 때에도 피할 수 없는

구조적인 악이다. 이를 위해 라이프니츠는 셀 수 없이 많은 세상이 존

재한다고 해명한다. 즉, 1) 먼저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는 모든 가능한

세계들 가운데 최고의 세상을 찾게 한다. 2) 하나님의 영원한 선하심은

가장 선한 세상을 선택하게 한다. 3) 그리고 하나님의 전능함은 최고의

세상을 가져 오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선택하고 가져오신 세상은

실제로 지금 현실에 존재하는 세상인데, 이 세상은“가능한 세상들 가

운데 최고의 세상”(Die beste aller moeglichen Welten)이어야만 한다.

최고의 세상은 악이 가득한 가장나쁜세상과 반대되는 곳이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존재하는 세상들 가운데 최고의 세상이

박영범, 신정론과하나님의고난 249

15) H. Rosenau, “Theodizee I V”, Hrg. v. Gerhard Muller, Theologische Realenzy-

klopadie, Bd.X X X I I I (Walter de Gruyter: Berlin; New York, 2002), 222-228.

16) 그는 에피쿠로스의 물음을 자신의 1 7 1 0년에 출간된 Essais de Theodicee sur la

Bonte de Dieu, la Liberte de l’Homme et l’Origine du Mal (“하나님의선하심, 인간

의 자유와 악의 근원에 대한 신정론적 시도”)에서 더 깊이 발전시킨다. 후에 라이프

니츠는 한 편지에서 신정론을“하나님의정의로우심에 관한 가르침”이라 표현한 바

있다.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의 태동과 그 상황은 다음을 참고하라: R. A. Quinn, Von

Lissabon bis Auschwitz. Zum Paradigmawechsel in der Theodizee-frage (Freiburg

i.Br. 1992), 51 이하.; S. Lorenz, De mundo optimo: Studien zu Leibniz, Theodizee

und ihrer Rezeption in Deutschland (1710-1791) (Stuttgart, 1997).

1) 아우구스티누스에서라이프니츠까지: 일관성을 향하여

아우구스티누스( 3 5 4-430), 안셀름( 1 0 3 3-1109), 그리고 아퀴나스

(1225-1274)는 존재신학을 바탕으로“선의 결핍”(privatio boni)이라는

개념을 갖고악의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가장핵심적인 사상가인아우

구스티누스는마니교의이원론에서영향을 받았다. 마니교는선과악의

대결이라는 구도에서 악(惡), 즉 물질은 무력한 것이라 주장했다. 아우

구스티누스는 이런논리가 선하신 하나님을손상시키지않음을 보았다.

이를 갖고 그는 하나님은 악을 창조하신 분이 아님을 주장할 수 있었

다. 그러나 동시에 마니교적인 이분법은 선과 악은 두 개의 원천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긍정하고 있었다. 이는 유일신을 믿음의 기초에

두고 있는 그리스도교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우구스

티누스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 그는 다음과 같은 논

리를 전개한다. 1) 먼저,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2) 모든

형상화된 것은선하다. 왜냐하면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나왔기 때문이

다. 그래서 형상(species)을 갖는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기인한다. 3)

마찬가지로 모든몸은 자신이 몸이기 위해특정한 형상을 소유한다. 그

러므로 모든 몸 또한 하나님에게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악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위의전제아래 악은“형상의 결핍”(privatio

speciei)13)이라 정의한다. 악은바로결핍이며부패다. 그래서 악은항상

존재하는 것을손상시키거나부패시키는것이다. 손상시킨다는것은존

재하는 것에서 무엇인가 선한 것을 빼앗는 것이다. 오직 선한 것만이

무엇인가 선한 것을 빼앗길 수 있다. 그래서 무엇인가 선한 것을 빼앗

길 수 있는 존재는 바로 선한 존재여야만 한다.14) 그러므로 몸 또는 물

질이 하나님의 창조물이기에 선하다는 논리는 동시에 마니교의 이분법

24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13) Augustinus, “De diversis quaetionibus octoginta tribus”, F. Hermanni, Das Böse

und die Theodizee (2002), 48.

14) “omne autem quod est, in quantum est, bonum est.”(Ibid, 46).

Page 126: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그러나 이 안에서 주어진 개인의 고난과 악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역사 안에 발생하는 악은 변증법의 반(Anti-These) 또는 부

정성의 역할을 하여 결국은 더 나은 세상(Syn-These)으로 이끄는 동

력이기 때문이다. 헤겔에게있어서 이런악은필연적인 악, 필수악인것

이다.

헤겔의 변증법이라는 전체를 관통하는 체계는 후에 바르트( K .

Barth)에 의해서 다시 부정된다. 바르트는 자신의『교회교의학』, I I I/3권

에서“하나님과 무, 또는 아무 것도 아닌 것”(Das Nichtige)20)이라는 제

목으로 헤겔의 변증법적 설명을 비판한다. 그리고 오직“깨어진”신학

만이 악의 문제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21) 악의 문제는 시스템에

의존하여 전체를 설명하려는 신학, 예를 들면 헤겔의 변증법으로는 전

혀 설명될 수 없다. 그래서 바르트는 헤겔의 변증법적 시스템은 안이한

낙관주의의 산물이며, 이곳에는“그리스도교적 구속이나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화해”22)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고 비판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경험과 현실을 설명하기 위하여 바르트는“아무것도 아닌 것(Das

Nichtige)”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아무것도 아닌 것”은 하나님과 대

적하여 존재하는 무엇이다. 이것은 단지 약함이나 결핍을 의미하지 않

는다. 오히려 부패(Verderben), 또는파괴(Vernichtung)을 의미한다. 이

런 의미에서 바르트는 이를 죄, 악, 죽음, 지옥과 악마의 상징이라 표현

하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화해와 영원한 계약 안에 있는 낯선 형상

이다. 이들은 하나님과의 화해를 방해하는 것이며, 창조주나 창조물과

는 구별되는 적대자이며, 동시에 부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박영범, 신정론과하나님의고난 251

20) “Das Nichtige”를 최종호는‘무”라고 번역했다. 무는 단지‘없음’을 의미할 수 있기

에, 필자는 조심스럽게“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번역했다. 왜냐하면 “ D a s

Nichtige”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하나님과 창조물 사이에존재하는 역사의

요소”(Element)이기때문이다. K. Barth, KD I I I/3 (EVZ, 1950), 404를 보라.

21) “깨어진”신학이란, 악을 하나님의 선하심이나 창조의 선함과 전혀 연결될 수 없는

현실로보는것이다. P. Ricoeur, Das Böse (2006), 46을 참고하라.

22) 최종호, “악의 문제와그 극복”, 『한국조직신학논총』제28집, 292 이하를 보라.

라 할지라도, 이 세상은 하나님처럼완벽하지는 않다. 우리의 세상안에

는 형이상학적인불완전함, 악이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설명

으로 라이프니츠는 모든 악의형태는 결국 필요한 것이고 설명 가능한

것이라는결론에 도달한다.17)

2) 헤겔에서바르트까지: 전체를관통하는체계(System)와 깨어진체계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라이프니츠에 이르는 신정론을 새로운 논의로

이끈 것은 바로 헤겔(G.W.F. Hegel, 1770-1881)이었다. 헤겔은 변증법

적 방법을 통해 세상을 설명하려 시도했다. 변증법적 방법은‘선의 결

여’를 넘어서‘부정성’(Negativitaet)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하였다. 즉, 헤겔은‘부정성’을 발전을 위한 동력으로 보았다. 부정성은

세계정신(Weltgeist)이 더 나은 세계를 위해 사용한 도구다. 헤겔의 기

여는 바로 부정성, 악에 대한 논의를 역사 안에 다시 살려놓은 것이다.

“더큰 새로운 것을탄생시키기위해서는, 무엇인가가죽어야만 한다.”18)

그러나 부정성, 악한것은 어느곳에나 존재하지만또한 동시에 어디서

는 극복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정신이 더 나은곳으로 이끌기 때문

이다. 라이프니츠가제시한 신정론 물음을 헤겔은 변증법이라는 시스템

을 통하여 다시새롭게 묻는것이다.19)

헤겔의 철학은 진보적 낙관주의라 불린다. 이런 사상에서 개인의 고

난은 역사발전을 위해 간과되곤 했다. 왜냐하면 개인의 이성과 운명은

세계정신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역사는 세계정신에 의해 주도

된다. 세계정신은 모든 것을 가장 완전한 곳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25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17) G. W. Leibniz, “Die beste aller moeglichen Welt”, Norbert Hoerster, Glaube und

Vernunft. Texte zur Religionsphilosophie (München, DTV 4338, 1979), 93 이하를

보라.

18) Ibid, 39을 보라.

19) Ibid, 39을 보라.

Page 127: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무너지게 된다. 그 사건이 바로 1755년에 발생했던 리스본(Lissabon)

지진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선의 결핍”이론과 라이프니츠의 세

계관, 즉“우리의 세계는 모든 가능한 세계들 가운데 최선의 곳”이라는

생각은 약 사 만명의 죽음을 가져온 리스본 대지진에 의해서 좌절되었

다. 특히 볼테르( V o l t a i r e )는 라이프니츠를 강하게 비판했다.2 7 ) 리스본

대지진은 우리의 세계가 아름답고 선한 세상이 전혀 아님을 보여주는

듯 했다. 그리고 가장 최선의 세계는 더욱 아닌 듯 보였다. 선함은 악을

이긴다는 주장은 동시에 악함에 의해무너지는 선함이라는현실경험을

통해서 마찬가지로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28) 헤겔은

악의 부정성을 다시 체계(System)를 통해 살려 놓았다. 악은 더 나은

세계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존재인 것이다. 바르트는 신정론 물음이 갖

는 딜레마를 받아들이는 듯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신정론 물음의 해답

이라 생각해 왔던 논리적인 통일성, 즉 일관성과 헤겔이 시도한 체계를

통한 총체적 설명을 거부한다. 대신에 바르트는 하나님의 오른손 또는

왼손이라는 은유를 사용한다. 바르트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선하신 하나

님을받아들이면서동시에 악의문제를 해결하고자시도한 것이다.29)

박영범, 신정론과하나님의고난 253

27) 특히볼테르(Voltaire)는 라이프니츠를강하게 비판한다.“라이프니츠는매듭을 찾는

것을우리에게 가르치지않았다. 그 매듭은 세상의 질서, 최선의 질서가 영원한 혼돈

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영원한 혼돈은 바로 현실적인 고난이다. 그리고 불행은

공허한기쁨과 뒤엉켜있다; 또한라이프니츠는어떤것이책임을 져야하는지, 그리

고 이 둘 모두가 고난 안에서 소멸되는 이유를 가르쳐주지 않았다.‘모든 것이선하

다’는 것을나는 이해할 수 없다”(Voltaire, “Poeme sur le desastre de Lisabonne ou

Examen de cet axiome , Tout et bien (1758)”, W. Breidert, Die Erschutterung der

vollkommenen Welt. Die Wirkung des Erdbebens von Lissabon im Spiegel

europaischer Zeitgenossen (Darmstadt 1994), 61-73, 여기서는 특히 70쪽. 1759년

에 발표한 소설『캉디드』(Candide)에서 볼테르는 라이프니츠가 갖고 있는 하나님의

역할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한다. Voltaire, Candide (Reinbek bei Hamburg 1957),

106을 보라.

28) P. Ricoeur, Das Böse (2006), 34을 보라.

29) 그래서 리꾀르(Ricoeur)는 바르트가 전개하는 깨어진 변증법(gebrochene Dialektik)

은“나약한절충”(ein schwacher Komprimiss)”이라비판하며, 더 나아가바르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복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승리로 인해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로 인해 인간을 지

배하는 힘을잃게된 무엇이다.

그렇다면 바르트는 하나님과“아무 것도 아닌 것”사이의 관계를 어

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먼저“아무 것도 아닌 것”은 하나님의 권능 안

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창조물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존재 한다.23) 그래서“아무 것도 아닌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

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24)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악은 오직 하나님 진노의 대상으로만 존재한다.

악은 하나님의“고유한 행위”(opus proprium)가 아닌 하나님의“낯선

행위”(opus alienum)의 관점에서 볼 때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

트는“하나님이 왼쪽의 주님이 되시며, 또한‘아무것도 아닌것’의 주님

이 되신다”25)라고말한다.

3) 신정론 물음의문제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라이프니츠에 이르는 시기는 신정론 물음과

관련하여 악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일관된 노력의 시기였다.26) 그러나

이런 논증은 인간에게 다가오는 감당할 수 없는 악의 경험으로 인해

25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23) “아무것도 아닌 것(Das nichtige)은 하나님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의 창조물도 아니

다. 그래서 이것은 마치하나님처럼존재하지도않고, 하나님의창조물처럼 존재하는

것도아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아닌것을염두에두고계시며, 일하시며그리고

반대하여 싸우신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참으시나 또한 이를 투쟁하여 제

거하신다”(K. Barth, KD I I I/3 (1950), 402).

24) Ibid, 406.

25) Ibid. 405.

26) “라이프니츠는악을 선의 결핍(privatio boni)으로 보았던 어거스틴의 입장을 수용했

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더 나아가 악을 단순한‘부정’(Negation)으로 극단화시킨

다.”김용성, 『하나님이성의법정에 서다』(2010), 40-41.

Page 128: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규“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는 관념적

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물음이 아니다. 고난의 상황에서 외치는 실존의

절규인 것이다. 그러나 신정론 물음은 원래 의미를 잃어버린채 사변적

이고관념적인논쟁으로 빠져들었다. 형이상학적 하나님 개념과 고난의

문제를 현실을 무시한 채 관념의 세계에 놓고 해결하려 하였다. 현실을

벗어난 논쟁은 어찌할 수 없는거대한 악의체험, 예를 들면리스본 대

지진, 아우슈비츠경험에의해한계에 도달하게된다. 거대한 악의경험

은 각기시도된 신정론 물음의대답을 좌절시켰다. 그리고 신정론 물음

이 갖고있는한계와 문제를 정확히 보게하였다.

I I I. 신정론과하나님의고난

하나님께서는 변하시지 않으며 특히 고난 받을 수 없는 분이라는 지

난 세기의 교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더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성부수난설을 주장하는 오래된 이단이 이제 새로운 정통이

되었다.32)

하나님과 고난의 연관성은 그리스도교에서 한편으로 자연스럽게 보

인다. 우리는 인간이 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에 관해서

말한다. 십자가는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에 자리잡고있다. 누가십자

가에서 죽으셨는가? 바로 하나님이시다.33)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고난

받는 하나님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이단으로 정죄되곤 했다.34) 우리가

박영범, 신정론과하나님의고난 255

32) R. Goetz, “The Suffering God. The Rise of a New Orthodoxy”, The Christian

Century 103 (1986), 385.

33) 이에 대한 대표적인 학자가 몰트만이다. 그는“십자가에 달린 하나님”( D e r

gekreuzigte Gott)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J. Moltmann, Der gekreuzigte Gott. Das

Kreuz Christi als Grund und Kritik christlicher Theologie (München, 1972)를 참

고하라.

그렇다면 신정론 물음이 갖고있는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먼저,

과거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악의 경험에 대립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

과 완전히 선하심을 긍정하고 증명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특히 이

둘 모두를 긍정하기 위해서만 그 힘을 집중했다.30) 그러나 신정론 물음

이 단지 논리성과 사변성을 기반으로 다뤄진다면, 결국 다음과 같은 결

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안다. 즉, 1) 먼저 악의 존재를 부정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시도는 악에대한현실적인 경험에 의해서도

전받게 된다. 또는2) 전능하시고 완전히 선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제한

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거나, 하나님이 두 개의 다른 모습을 지닌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런 결론은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하는

무신론이라는 극단적 형태로 종결되기도 했다. 이는 다른 말로 라이프

니츠식의 신정론이간직한부정적측면의 종착역이라할 수 있다.31)

두 번째, 신정론 물음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악의 문제를 진지하

게 바라보지 않았다. 사실 신정론 물음 자체는 현실에서 겪는 고난에

대한경험에서 발생했다. 예를들면, 십자가 위에서의고독한 예수의 절

25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자신이 신학의 중심으로 놓고 있는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을 넘어선 것은 아닌지 묻

고 있다. Ibid, 50 을 보라.

30) 특히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신학이 다루었던 가장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완전성이다. 안셀름(Anselm von Cantabury)은 하나님을“더이상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분”(quo nihil maius cogitari potest)”이라표현하였다(안셀름/공성철

옮김,『프로슬로기온』(한들출판사, 2005), 66-67). 그래서 그분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는 하나님의 완전성이 자명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런 하나님은 고난 받을 수 없는

분이다. 왜냐하면그분자체가 완전한분이기때문이다.

31) F. Hermanni, Das Böse und die Theodizee (2002), 243 이하를 참고하라. 니체는“하

나님은 죽었다.(...) 하나님은 죽은 채로 머물러 있다. (...) 우리가 그를 죽였다”선언

한다(F. Nietzsche, Die frohliche Wissenschaft, Hrg. v. Colli/Montinari, Nachlass

Bd. 12: in: Samtliche Werke, Kritische Studienausgabe in 15 Banden, (1980), 351

이하를 참고). 이 선언은 형이상학의 하나님에 대한 죽음의 선언이었다. 형이상학의

하나님은 현실의 상황에서 전혀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과거 형이상학의 신학

에 대한강력한 비판이었다.

Page 129: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36) 1) 먼저 하나님은 육적인 분이 아니시

다. 육적이지 않은 존재는 고난을 겪을 수 없다. 왜냐하면 고난은 오직

육체라는 인간의 것을 통해서 체험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난 받는

하나님이라는 서술어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다른 서술어와 어울리지 않

는다. 2)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다. 전능한 존재는 고난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고난은 전능하신 분이 겪을수 없는 약함의 상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는 전능하신 분이 원하지 않는 것이고 또한 피할 수 있는

것이다. 3)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다. 고난은 불완전한 상

태를나타낸다. 그러므로 완전한 하나님은불완전한 고난을 겪을 수 없

는 분이다.

이외에도 다양한 주장들이 있을수 있다. 그러나 위의 세 가지 주장

들이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또한 다음

과 같이반박될 수 있다. 1-1) 인간에게 고난은 육체를 전제로 한다. 그

러나 고난은 육체적인 고난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인 고난

또한존재한다. 만일 누군가 하나님은 육체를 지니지 않기에 고난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인간의 정신적 고난을 부정해야만한다. 2-2)

전능성과 관련해서 사람들은 또한반대로 말할 수 있다. 만일 하나님께

서 고난당할 수 없다면, 그 하나님 또한 전능하신 분이 아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난을

겪으시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당신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고난을 겪으

시는것은그분의 전능함을제한하지않고, 다시드러내는것이다. 3-3)

만일하나님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고난을 겪으신다면, 이것또한완

전한 하나님이라 말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숨어 있다. 완전한 존재는 무오하기에 전혀 근접할 수 없는 존재다. 어

떠한 사람도, 어떠한 것도 그분을 만질 수 없다. 이런 생각은 아리스토

텔레스가 말한 모든 개념들의 종합인‘관념들의 관념’(noesis noeseos)

박영범, 신정론과하나님의고난 257

36) A. Kreiner, Gott im Leid? (2001), 217-218을 참고하라.

당하는 고난을 하나님은본질적으로 당할수 없기때문이다.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철학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

간 역사, 종교와 문화 역사 안에서 그분과 맺는 실존적인 관계와 체험

에서 등장한 말임을 성서는 보여준다.35) 성서는 철학적인 개념으로서의

하나님보다 오히려 인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35)

성서는 하나님 경험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서의

전통에서 바라볼 때, 하나님은 고난 받으실 수 있는분인가? 이런질문

은 사실 문제를 더 심화시킬 뿐이다. 왜냐하면 성서에는 다양한‘하나

님 서술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욥기서는 매우 다른 하나님 경험이

등장한다. 욥의 다른 친구들은 인과응보( T u n-E r g e h e n s-Z u s a m-

menhang)의 하나님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욥은 인과응보를 넘어서

는 하나님 경험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가? 더 나아가 사람들은 하나님의 고난에 대해서

언급할 수 있는가? 또는 하나님의 고난이 다른 하나님 서술어인 전능

하신하나님 또는선하신 하나님과 조화를이룰수 있는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고난 받으실 수 없다는 주장을 다음

25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34) 성부수난설(Patripassianismus)은 테르툴리안(Tertullian)이 사용한 용어다. 성부수난설

은 아버지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아들이 되었음을 주장하며, 또한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가르친다. 예를 들면, 프락세아스(Praxeas)는 아버지인그리스도

와 완전한 인간인 예수를 구분한다. 그리스도인 아버지는 완전한 인간인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셨다 주장한다. 3세기의 사벨리우스는 창조를 통해 아버지인 하

나님의 위격이 계시되었고, 바로 그 분이 구속을 위해아들로 계시되었으며, 구원의 역

사를 위해서 성령으로 드러나셨다고 주장한다. 이는 같은 신적인 위격이 세 가지 양태

(Modus)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라 주장했다. 양태론에서는 아버지인 하나님께서 아

들의 위격 안에서 고난받았음을 자연스럽게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교황

칼릭스트(Kalixt. 217-222) 1세에 의해서 교회에서 배척되었다. 또한 로마의 주교인

디오니시우스(Dionysius. 259-268)에 의해서 이단이라정죄되었다.

35) 구약에서는 의인화된 하나님의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내가 맹세한다”,“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 “하나님께서후회하셨다”. 출애굽기13:11; 창세기6:6-7 등을참고하라.

Page 130: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이다. 그는 어머니를 아우슈비츠에서 잃은 철학자다. 이런 경험은 그에

게 고난에 대한새로운 해석을 추구하게 했다. 무엇보다 요나스는 고난

에 대한 해답을 전통적인 유대교의 설명에서 찾지 못했다.41) 요나스의

어머니를 비롯한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에서 고난당했던 것은 그들의

불신앙이나 또는 과거 죄에 대한 인과응보( T u n-E r g e h e n-Z u s a m-

menhang)의 법칙에 의해주어지는형벌과도전혀연관되지않았다. 고

난은 하나님의 시험도 아니었으며, 구원에 대한 희망의 증거도 아니었

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있었던 고난의 현장을 보면서,“도대체 어떤

하나님이 이를 발생하도록 두시는가?”42)를“두려움과 떨림”43)으로 묻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인 질문과 대답은 더 이상 존립할 수 없다

고 요나스는 생각한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세상의 보호자였으며,

역사의 주인이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는 경건한 유대인들에게“전승으

로 물려받은하나님 표상”에 중대한 질문으로다가왔다.44)

요나스에게 아우슈비츠 이후의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동시에

창조주 하나님을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의미한다. 그래서 요나

스는다음과 같은전제에서 출발한다. 즉, 실제로경험되는악의실재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완전히 선하심은 동시에 긍정될 수 없

다. 만일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면, 전능하심과선하심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하는상황에 도달한다. 만

박영범, 신정론과하나님의고난 259

40) H. Jonas, Der Gottesbegriff nach Auschwitz, Eine juedische Stimme (Frankfurt am

Main 1987).

41) 유대인들 또한 그리스도인들 못지 않게 신정론의 문제에서 많은 어려움을 토로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 저편에서 주어지는 구원을 기대했으며, 세상은 믿지 못할 것

들의집합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그들에게 있어서 역사의 주인이었다. 이는그러

나 아우슈비츠에서 커다란 난제로 다가왔다. 아우슈비츠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낡

은 전통적역사관 그리고하나님 모습에 중대한 전환점이되었다.

42) Ibid, 7.

43) Ibid,

44) Ibid, 14.

를 떠올리게 한다. 성서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이나 현실에서

체험되는하나님과는전혀관계가 없는형이상학적사유다.

이런 반론은 하나님이 고난 받으실 수 없다는 주장에 모순이 있음

을 드러낸다. 그러나 아직 부족하다. 왜냐하면 이런 반론이 하나님께서

고난 받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것은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우리는 하나님의 고난에 대해 주장하는 신학자들의 사상을 다시 되

돌아 볼 것이다.37) 무엇보다 신론을 중심으로 이를 풀어내는 신학자들

이 있다(과정신학자,38) 요나스 등).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시간에 자신의 전능함을 내어주셨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 십

자가 고난을 중심으로 풀어내는 학자들이다(융엘,39) 몰트만 등). 특히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하나님의고난을 보며, 삼위일체론을중

심으로 이를더 깊이전개하고 있다. 여기서는 요나스와 몰트만을중심

으로살펴보도록하겠다.

1. 아우슈비츠이후의하나님: 한스요나스

한스요나스가 발표한『아우슈비츠이후의하나님 개념. 한 유대인의

소리』40)는 아우슈비츠라는 어둠의 시간에 고난 받는 한 유대인의 외침

25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37) 오늘날 신정론의 대한대답은 현실에 존재하는 악의경험을 진지하게바라보는 것에

서 시작한다. 그래서 왜 하나님이 인간에게서 멀어졌는가에 대해 묻는다. 악의 존재

유무를 떠나서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Gottes Nahe)과 하나님의 멀리 계심(Gottes

Ferne)의 문제로 신정론의 대답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 이유는

“인간이 그를 거부했기 때문”(본회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조건 없는 신뢰”(큉),

“하나님의이해할 수 없음”(바르트), 그리고“하나님개념의 약화”(죌레) 등으로 설명

된다.

38) 과정신학에서 펼치는‘과정신정론’은 그리핀(D. R. Griffin)의 책, 데이빗 그리핀/이

세형 옮김,『과정신정론』(이문출판사, 2007), 347-393”을 참고하라. 이 책에서 그리

핀은 화이트헤드(Whitehead)와 하르트숀(Hartshorn)의 과정철학을 기초로 한 과정

신정론을펼치고 있다(347).

39) E. Jüngel, Gott als Geheimnis der Welt (Tübingen, 1978), 278 이하를 참고하라.

Page 131: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으로 스스로를 내맡기셨다.”48) 이 신화는 하나님을“세상 안에 있는 존

재(In-der-Welt-Sein)”로 묘사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님 됨을 스

스로 포기하였고, 스스로 자신을 세상 안에 던지는 위험을 감수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스스로 되어져가는 하나님”,“고난 받는 하나님”,

그리고“스스로 염려하시는하나님”이시다.49)

그래서 요나스의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해서 스스로 자신의 전능성

을 포기하고 인간을 위해 자신의 공간을 내어 놓은 분이다. 이는 유대

교 신비주의(Kabala) 개념인 침춤(Zimzum)50) 사상과 연결된다. 그러나

요나스는 침춤 사상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침춤 사상 안에서 하나

님의전능성이 부분적으로 보존될 수 있는 반면에, 요나스는그 공간에

서 하나님이 전적으로 무력해지셨다고말한다.51) 하나님의 사랑이 절대

적으로 크기에 그의 무력함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무력함

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악과 고난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악과

고난앞에인간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으로 무력해지셨다. 하나님은 세상

의 창조과정안에서 자신의전능하심을완전히 포기하셨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이 발생한다. 왜 하나님은 창조의 순간에 자신의

무능력함을 숨겨놓으셨을까? 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세상 안에 자신

을 가두셨는가?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전능함을 근본적으로 제

한하셨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전제다.52) 그러나 전적으로 이해할 수

박영범, 신정론과하나님의고난 261

48) Ibid, 15.

49) Ibid, 26.

50) “침춤이 의미하는 바는 수축(Kontraktion), 물러남(Rueckzug), 자기제한( S e l b-

steinschraenkung)이다. 세계를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태초의 존재자이며 무한

자는자기 자신으로 물러나야만 했으며, 자기 밖에 빈 곳, 즉 무(Das Nichts)가 일어

나도록 해야만 했다. 이 무 안에서, 이 무로부터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다.

이처럼자기자신안으로의물러남 없이는하나님 밖에어떤것도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김용성, 『하나님이성의 법정에서다』(2010), 73.

51) H. Jonas, Der Gottesbegriff nach Auschwitz (1987), 46.

52) Ibid, 43-45을 보라.

일 우리가 아우슈비츠 사건에 비추어 전능하신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그 하나님은 선하지 않으시거나 또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 된다.

그러나 요나스는 전통적인 세 가지 하나님 속성, 즉 전능하심, 선하심

그리고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 가운데 마지막 두 가지를 포기할 수 없

었다. 대신 전능하신 하나님 개념을 내려놓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전

능하심은 그 자체로 논리적 모순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

하면, 모든 능력은 다른 존재라는 대상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다른 존

재라는 것은 능력을 행사하는 존재와 대립해서 서 있어야 한다. 문제는

대립되는 존재에 따라서 능력을 행사하는존재의 능력이 제한받게 된다

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능력은 유한적이며 제한적인 능력 행사가 된다.

능력이 대상으로 인해 제한된다면, 무제한적인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

은 그 자체로 모순을 지니게 되며의미를 잃게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라는 말은 인간이라는 유한하고 제한된 존재를 대상으로 하

기에, 전능하신 능력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논리적인 모순에 빠지게 된

다.45) 그 결과그는하나님의 전능하심을계속간직할수 없었다.46)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1) 하나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대립하며 이와 동일

한 능력과 원천을 가진 두 번째 신성, 예를 들면 선하신 하나님과 같

은 존재를통해서 전능하심이 부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또 다른 하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스스로가 자신의 전능하심을 부정할 때 가능하

다. 첫 번째 경우는 형이상학적인 이원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와는 반

대로 요나스는 하나님을 자신의 전능함을 근본적으로 제한한 분으로

묘사한다. 이를 위해 그는“스스로 꾸며낸 신화(ein selbsterdachter

Mythos)”47)라는 개념을 발전시킨다.“존재의 신적 근원은 태초에 알

수 없는선택을 통해 우연 안으로, 즉 위험과 되어짐의 끝없는 참여 안

26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45) Ibid, 33-36을 보라.

46) F. Hermanni, Das Böse und die Theodizee (2002), 253.

47) H. Jonas, Der Gottesbegriff nach Auschwitz (1987), 15.

Page 132: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운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즉, 하나님은 모든 악의 책임에서 자유로와지

셨다. 그렇다면도대체 우리가 겪는고난은 무엇이며, 이를어떻게 극복

해야하는가?

김용성은 요나스에게 중요한 것이“신정론보다는 인정론(人正論,

A n t h r o p o d i z e e ) ”5 4 )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무제약적인 자기 제한을

통해악에 대한책임으로부터 자신을 풀어 놓으신 분이기에, 책임을 져

야 할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도덕

악’과 무관한 자연 재해 등과 같은‘자연악’에 대한 질문에는 대답을

제공할 수 없다.“악에 대한 문제를 인간의 윤리적인 책임 영역에 국한

시켜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악은 대체 어떻게 해명될 수 있다는 말인

가?”55)

요나스는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고난과 다른 관점

에서 아우슈비츠를 설명한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마찬가

지로인간의 고난을 짊어지신 하나님이다. 그러나 그 분은 자신의 고난

을 통해서 고난과 구원이 함께 있음을 알게 해주신 분이다. 그래서 하

나님의 고난은 무엇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함께생각되어야

한다.56) 그리스도의 고난은 지금 경험하는 고난의 극복과 다가올 구원

에 대한 기대를 품을 수 있게 한다. 고난의 극복과 구원의 기대는 신정

론 문제를 구원론적인대답으로이끌게된다.

2. 십자가에달린하나님: 위르겐몰트만(J. Moltmann, 1926-)

20세기 초 사람들은 두 번의 세계 전쟁을 경험하였다. 특히 아우슈

비츠는 신정론에 대한새로운 질문을 던져 주었다. 낙관적 역사진보사

상은 사람들에게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흐름에서‘신 죽

박영범, 신정론과하나님의고난 263

54) 김용성, 『하나님 이성의법정에 서다』(2010), 85.

55) Ibid, 85.

56) Jan Rohls, Der Leidende Gott in der Theologie des 20. Jahrhunderts (2001), 47.

없는 하나님이 그럼에도 무능력한 하나님으로서 이해되었다는 난제를

포함하고 있다. 전능한 창조자인 하나님이 스스로 그의창조물 안에들

어오셔서, 창조물의 고난에 참여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을 내어주시고

인간의 운명공동체 안에 스스로를 던지셨다. 이런 하나님은 단지 마술

처럼 자신을 던진 하나님이 아니라, 진정으로 인간의 고통에 참여하신

분이다.

이런 요나스의 시도는 과거 신학자들의 세계관과 다른 것이다. 세상

의 밖에서 계신 절대자로서의 하나님과 고난당하고 있는 인간의 현실

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세상 안에서 인간과 함

께 고난을 받기로 작정한 하나님은 이미 세상과 시간과 공간적으로 하

나가 되어 있는 상태다. 하나님은 스스로 인간이 되심으로 이 공간과

시간 안으로 자신을 근본적으로 제한하셨다. 이 지점에서 요나스는 신

정론 문제와 만난다. 하나님은 무능력한 하나님이며, 무저항의 하나님

이다. 이 하나님은 오히려 창조물로 인해 고난 받는 분이다. 하나님은

창조의순간이래로 고난안에계신분이다.53)

그러므로 하나님의 고난과 관련된 요나스의 주장은 하나님 되심의

포기(Entaeusserung)와 자기 비우심(Kenose)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하

나님은 더 이상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아니다. 하나님은 오

히려 모든 존재의 처음을 말하는 창조 신화를 바탕으로 전적으로 세상

에 들어오심이라는 위험을 감수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이 세상 되게 하

기 위해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포기했고, 스스로 자신의 신성을 버리셨

다. 그리고 사람들을 위해서 공간을 내어주셨고, 스스로가다시그 세상

으로 들어오셨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세상 안에 자신을 무력하게 가

두신분이다. 이것이 요나스의신화다.

요나스의 주장은 하나님이 세상 안에서 겪는 고난과 자연스럽게 연

결된다. 그러나 동시에 요나스의 신화는 신정론 문제와 관련해서 새로

26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53) Ibid, 52.

Page 133: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기초로 하나님의 전능성을 재해석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초이며 비판”60)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몰트만이

전개하는 하나님은 철저하게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중심에놓여있다.

이를 위해 몰트만이 펼치는 하나님 고난의 신학은 무엇보다 정통

유신론자들이 간직하고 믿고 있던 과거 하나님 모습을 비판하는 것으

로 시작한다.“한 명이라도 죄 없는 아이가 당하는 고난은 전능하고 완

전히 선한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논쟁의 여지가 없이 충돌한다.”61) 그

러나몰트만은무신론자들이거부하는하나님 모습도 강하게비판한다.

왜냐하면“완전히 다른 존재(호크하이머)에 대한 갈망 없는 고난과 정

의로운 하나님을 바라는 희망 없는 고난은 단지 불의에 대한 침묵”을

의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62) 그래서 몰트만이 펼치는‘십자가에 달

린 하나님’신학은 동시에 사람들이포기할 수 없는희망의 싸움이기도

하다.

몰트만은 신정론 물음에 대한 대답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신정론

문제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아우슈비츠 이전의 신정론 물음

은 악은어디에서 오며, 어떻게 하나님의 속성이 손상되지 않고지켜질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을 요구했다. 즉“고통 앞에서 하나님을 정당화

하기 위한 형이상학적 물음”63)이 바로 신정론 물음이다. 그러나 몰트만

을 비롯한 아우슈비츠이후의 신학은 더 이상 과거형이상학의 하나님,

모든 것의 원인으로서의 하나님(causa sui)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 몰트만은 전혀 다른 하나님, 고난과 아픔 안에 계

신 하나님에 대해서 묻는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이 자신의 고통 안

박영범, 신정론과하나님의고난 265

6 0 ) J. Moltmann, Der gekreuzigte Gott, Das Kreuz Christi als Grund und Kritik

christlicher Theologie (München, 1973), 193 이하를 보라.

61) J. Moltmann, Trinität und Reich Gottes. Zur Gotteslehre (München, 1980), 63.

62) J. Moltmann, Der gekreuzigte Gott (1973), 205-214를 참고하라.

63) 위르겐 몰트만/이신건 옮김, 『삼위일체와하나님의 역사』(대한기독교서회, 1998), 72.

음의 신학’이 등장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듯 보이는 세상 삶의체험

에서 나온 결과물이며 무신론의 또 다른외침이었다.57) 이는 악의(惡意)

와 불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침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형이상학적 반

란”58)이었다. 당시 신학은 이런 도전에 다음과 같은 대답의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1) 먼저 하나님의 전능성을포기하든지 또는2) 완전히 선

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수정해야만 한다. 아우슈비츠 경험 이후에 많은

신학자들은 선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포기할 수 없었다. 대신에 하나님

의 전능하심을포기하거나 새롭게 해석했다.

이들 가운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신학자가 몰트만이다. 특별하게도

몰트만은 요나스와는 구별되게 성서를 기초로, 특히 삼위일체 사유를

통해서 하나님 고난에 관한문제를 풀고 있다.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과

의 결별을 자연신학에 반대하는 전통적인 신학 인식론을 기초로 전개

한다.59) 사람들은 세상을 관찰함으로 얻어지는 추론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이런 추론을 통해 어떤 이는 하나님의 지혜와 위대하심을

깨닫는 반면, 다른이들은 하나님을떠나무신론자가 되기때문이다. 그

래서 몰트만은 삼위일체의 역사가운데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26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57) 몰트만이펼치는‘십자가에달린 하나님’사상은일부미국신학자들이주장한‘하나

님 죽음의 신학’과의 논쟁을 한 배경으로 갖고 있다. 몰트만은 무엇보다 하나님 죽

음의 신학은 그리스도론에기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그리스

도의 죽음이 하나님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었다. 그들과 비슷한 점은 형

이상학적 신개념을 반대한 것이다(융엘과 일치하는 점). 그래서 몰트만은 알트하우

스(P. Althaus)가 펼쳤던 하나님의자기비하(Konosis) 사상을 발전시킨다. 그러나 융

엘과는 다르게‘하나님의 죽음’(Tod Gottes)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하나님

안에 있는 죽음’(Tod in Gott)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 아들

의 죽음으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난과 죽음에 대한 설명은 오직 삼위일체

적으로만 가능하다. Jan Rohls, “Der Leidende Gott in der Theologie des 20.

Jahrhunderts”, Hrg. v. P. Koslowski, F. Hermanni, Der leidende Gott ( W i l h e l m

Fink Verlag, 2001), 47-48을 참고하라.

58) A. Camus, Der Mensch in der Revolte (Rowohlt TB, 1969), 17, 21을 참고하라.

59) F. Hermanni, Das Böse und die Theodizee (2002), 244을 참고하라.

Page 134: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난 받는하나님이드러난다.

이런 논리는 신정론의 관점을 십자가 신학으로 되돌려 놓았다. 이는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서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

교 신학의 기초이며 비판이다.“신학자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본질을

창조물에서 인식하고 보는 것이 아니다(롬 1:20). 오히려 고난과 십자

가를 통해 드러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보는 사람이 신학자다.”66) 이

는 몰트만이 주장하는“하나님의 신성은 하나님이 아들의 고난과 죽음

의 사건을 통해이해되어져야만한다”67)는 것과일맥상통한다.

몰트만의 십자가 신학은 삼위일체적 사유와 결합하여 더 깊은 울림

을 주게 된다. 만일 하나님의 본질이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에 의해서

인식되어진다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거나 고통을 모르는 분이 아니

라, 고난당하시며 무력하신 하나님으로 다가오는 분이시다. 여기서 몰

트만은 그리스 사상의 이른바‘고난당할 수 없음’(Apathieaxiom)이나,

19세기 이전 신학사에서 주류로 인식된‘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기에

고난당할 수 없다’라는 명제에 반기를 든다. 아들로서 겪는 예수의 고

난은 단지 인성의 고난이 아니다. 인성만의 고난이었다면, 이는 진정한

고난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몰트만은 더 나아가 십자가상에서 아

버지하나님 또한고난받으셨다주장하는것이다.

아들은 죽기까지 고난 받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이라는 고통

을 받으셨다. 아버지의 아픔은 마치 아들의 죽음과 같은 동일한 아픔이

다. 아버지의 부재라는 아들의 고통은 아버지가 겪으신 아들의 죽음이라

는 고난과 같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이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로 함께 계셨다면, 그는 아들의 죽음에서 또한 동일하게 아버지 존재의

죽음이라는고난을 받으신것이다.68)

박영범, 신정론과하나님의고난 267

66) M. Luther, Die Heidelberger Disputation, 14장과 20장을참고하라.

67) J. Moltmann, Der gekreuzigte Gott (1973), 201.

68) Ibid, 230.

에서 하나님의 고통에 참여하는지를 묻는다. 이는“하나님과 사귐을 나

누기 위한 신비적 물음”64)이다. 이를 통해 몰트만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결별하며, 이를 자신의 신학을 통해 증명한다. 특히 몰트만은 철저하게

성서적인근거를 통해하나님을바라본다.

몰트만은 철학자들이 묻던 하나님과 매우 다른 하나님을 성서의 전

통, 특히 시편, 욥, 그리고 공관복음서 안에 있는 수난 사화에서 발견했

다.65) 그렇기에 몰트만은 다양한 측면에서 성서적 전통을 기반으로 자

신의 신학을 펼치고 있다. 먼저1) 인간스스로가자기에게 전가한 악이

있다. 악한 것을 행하는 인간은 악한 것의 결과로 발생하는 형벌 또한

자신 안에 지니고 있다. 이런 인과응보의 관계로 주어지는 형벌은 그

자체로 또한 하나님 정의로움을 드러내는 한 부분이다. 그래서 하나님

은 결코인간의 악한 행위에 책임이 있는것이아니다. 인간의 악한 행

위는 인간의 책임인 것이다. 그러나2) 고난이라는것은단지악한행위

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욥과 같은 의로운 사람들의 고난도

있다. 이런 고난은 인과응보라는 관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하나님의 행

위는 인간이 예측할 수 없다(롬 9:20). 그러므로3) 결국 인간에게는 인

과응보의 관계에 의해서 주어지는 고난뿐 아니라, 인간이 예측할 수 없

는 고난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고난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내주(Schechina)를 통해 그의 백성의 고난

에 참여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약속

을 주셨다. 운명을 당신의 백성과 함께하신다는약속이다. 그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를 구원함으로 또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신다. 당신 스

스로를 해방함으로당신의 백성을 해방하신다. 이런의미에서그리스도

의 수난과 십자가 사건은 인간을 구원하고 해방하시기 위해하나님 자

신이 참여하시는 고난의 장이 된다. 이를 통해 사랑의 하나님, 함께 고

26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64) Ibid, 72.

65) Ibid, 73-75를 참고하라.

Page 135: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이다. 하나님은 고난을 멀리서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의 고난에

직접 참여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몰트만은 요나스의 하나님과 다르다.

하나님께서는창조의 순간에 자신의 창조물 안으로 들어와 스스로 무력

해져서 고난 받을 수밖에 없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아들인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 받으신 분이다. 십자

가 사건은“우리의 고난의 심연과 죄악의 지옥 안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영원한 영의 사귐을 가져옴으로써, 우리가 고통 중에도 침몰하지 않고

여기서든저기서든 고난을 생명으로바꾸어놓는”75) 위로를 준다.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몰트만은 하나님의 고난을 설명한다. 그는

먼저그리스도론 안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삼위일체의 역사안으로 시

야를넓히고 있다. 이런의미에서 아들의 죽음은 새롭게 발생한 하나님

사건의 출발점이 된다. 아들의 죽음과 아버지의 고통으로부터 사랑의

영이 나타났다. 사랑의 영 안에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삼위

일체의 역사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몰트만

의 하나님과 요나스가 주장하는 창조물과 함께하는 고난 받는 하나님

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의 삼위일체 역사는 하나님의 고난을 가능하게

한다. 성령은 이스라엘의고난에 함께참여하는사랑의 띠다. 그리고 하

나님이 약속하신 함께 있음과 고난의 극복을 드러내는 역사다. 하나님

은 당신을 구원하심으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

의 부활이다. 고난에 참여하신 하나님을 통해 몰트만은 마침내 하나님

의 고난을 통해서 극복되는 고난과 악을 바라본다. 그래서 사람은 악이

끝나게 될 종말론적희망을 품게된다.

IV. 결론

하나님어찌하여나를버리셨나이까!(시 22:1; 마 27:46; 막 15:34).

박영범, 신정론과하나님의고난 269

75) Ibid, 78.

몰트만은 이를 삼위일체론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낸다. 삼위일체적

십자가 신학의 핵심은 하나님이 골고다에서 발생한 예수의 고난 사건

에서 아들에 대한 사랑의 사건이며 또한 아버지의 아픔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건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사랑으로 묶어주시며, 또한 미

래를열고생명을 허락하시는거룩한 영, 성령이 등장한다.69)

아들은 사랑 때문에 아버지의 떠나심을 죽음을 통해 감수하였다. 아버지

는 사랑 때문에 아들의 죽음이라는 고통을 견디셨다. 아버지와 아들 사

이에서 드러난 분은 성령이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내어줌을 통해

서 이해되어야만한다.70)

이런 몰트만의 신학은 하나님은 고난 받으실 수 없는 분이라는 전

통적인 유신론자들의 생각과 다르다. 동시에‘하나님이 죽으셨다’고 주

장하는‘하나님 죽음의 신학’의 명제를 뛰어 넘는 것이다. 그래서 아우

슈비츠 경험에 대해서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하나님

은 아우슈비츠에 계셨고 아우슈비츠는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 안에 놓

여 있다.”71) 만일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고난당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마찬가지로 그분은 또한사랑도 주실 수 없는분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 자체로 고난당할수 있음을포함하고있기때문이다.72)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신정론과 관련한 몰트만의 생각은 어떠한가?

몰트만은 신정론 물음은 이론적, 형이상학적으로 대답할 수 없음을 분

명히 한다.73) 대신에“하나님이 고통 중에서 우리와 함께 연결되어 있다

는 신비적인 대답”74)을 내어 놓는다. 우리의 고난이 바로 하나님의 고난

26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69) Ibid, 234.

70) Ibid, 230.

71) Ibid, 267.

72) Ibid, 217.

73) 위르겐 몰트만/이신건 옮김, 『삼위일체와하나님의 역사』(1998), 77.

74) Ibid, 77.

Page 136: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다. 하나님의 고난은 신정론이 제기되는 현장을 다시 돌아보게 했다.

‘악은 어디에서 오는가’는 논리적 질문이 아니다. 또한 형이상학적인

질문도 아니다. 이는 실존적인 외침이었다. 그래서 하나님 고난이라는

개념은 지금까지 유효했던 과거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하나님 상을 바

꾸어 놓았다.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에 현실에서 경험되는 인간의 고난

에 전적으로 참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또한 고난 안에서 주어지는 그

분과의 사귐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위로를 기대하게

했다. 이렇게 고난의 자리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신비의 사

귐이주어질 때, 사람들은그 자리에서 겸손해진다. 그 자리에서하나님

께서고난에 참여하심을느낀다. 그 자리에서 위로를받고, 타인의 고난

에 대해 눈을 돌리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희망의 빛을 보

며,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새 힘을얻게되는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고난의 신학 또한 과제를 갖는다. 하나님 고난을 말

하는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전능성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더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은 분명 그 분이 간직

하고있는 놀라운 은총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랑을 강조하면할수록 세

상에서 겪게되는 고난은 더 심화된다는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께서어

떻게 이런 고난을 두고 보시는가? 왜 아우슈비츠, 그리고 세상에서 발

생하는 자연재해에 침묵하시는가? 이와 동시에 무력한 하나님은 스스

로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자기의 무력함을 극복해야만 한다는 과제를

지닌다. 어떻게 무력하여 고난에 참여한 하나님이 결국 고난을 이기고

악을 제거하실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여전히 이런 대답에는 과제로 남

아있는 것이다.

신학은 고난 받는 자들이 당하는 괴로움이라는 약점을 하나님과 협

상하는 학문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대립하는 세상 고난의 역사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며,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희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과 연결된 하나님에 대한 말은 동시에 죄

없이고난 받는다른 이들의 구원을 갈망하는 외침이며, 우리 역사에서

박영범, 신정론과하나님의고난 271

신정론 물음 자체가 던지는 난제를 우리 인간은 풀 수 없다. 신정론

물음에 대한 이성적인 답변들은 우리를 결국논리적 모순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한다. 이런 상황에서 신정론에 대한진지한 문제가 제기

되었다. 신정론 문제는 바로신정론 물음이 잃어버린 현실의 고난을 보

게 했다. 이런 이유로 현대 신학자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상대적으로 포기하거나, 덜 강조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대신에 그들은

선한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개념에 더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

이런 연장선에서, 하나님 고난이라는 개념은 신정론 물음이 잃어버린

현실의 악과 하나님의 선함에 무게중심을 두고 발생했다. 무력한 하나

님께서 고난에 참여하셨다는 주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을 좁

혀 놓았으며, 인격적인 하나님을 강조함으로 더 친밀한 하나님의 모습

을 제시하였다. 현실의 고난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십자가에 집중하게

했으며, 고난안에서 맛보는 하나님과의신비로운사귐을 가능케 했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하여 신정론 물음이 갖는 한계와 그 문제점을 되

짚어 보았다. 그리고 오늘날 주요한 신학의 흐름 가운데 하나인 고난

받는 하나님 신학을 살펴보았다. 이 모든 것은 과연 하나님 고난과 신

정론의 물음이 어떤 연관이 있으며, 또한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전해

주는가를규명하기위함이었다.

신정론 물음(Theodizeefrage)에 대한 대답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

미 자명하다. 마찬가지로 요나스와 몰트만도 신정론 물음에 대한 하나

의 대답을 제공하기위해“하나님의고난”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않는

다. 반면에 신정론 문제(Theodizeeproblem)는 신정론 물음이 잃어버린

현실의 고난을 진지하게 바라보게 했다. 하나님 고난이라는 개념은 신

정론이 포함하고 있는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임으로 재조명을 받은

개념이다. 이는구체적인악, 예를들면아우슈비츠라는주어진 현실고

난에 대한 인간 실존의 응답이다. 그래서 동시에 전통 신학에 대한 강

력한 비판이기도 하다. 과거형이상학적 하나님 상을갖고사람들은 신

정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신정론 물음은 철저한 연대성을 요구한

27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137: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참고문헌

김용성. 『하나님이성의법정에 서다』. 한들출판사, 2010.

데이빗그리핀/이세형옮김. 『과정신정론』. 이문출판사, 2007.

위르겐 몰트만/이신건 옮김.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 대한기독교서회,

1998.

안셀름/공성철 옮김. 『프로슬로기온』. 한들출판사, 2005.

최종호. “악의 문제와그 극복”. 『한국조직신학논총』. 제28집(2010). 281-309.

Augustinus. “De diversis quaetionibus octoginta tribus”. F. Hermanni. D a s

Böse und die Theodize. Chr. Kaiser, 2002. 48.

Barth, Karl. KD. I I I/3. EVZ, 1950.

Camus, Albert. Der Mensch in der Revolte. Rowohlt TB, 1969.

Epikur. Von der Überwindung der Furcht: Katechismus, Lehrbriefe,

Spruchsammlung, Fragmente. Eingeleitet und uebertragen v. Olof

Gigon. München: DTV, 1991.

Goetz, Ronald. “The Suffering God. The Rise of a New Orthodoxy”. T h e

Christian Century. 103. (1986). 385-389.

Groß, Walter / Kuschel, Karl-Josef. “Ich schaffe Finsternis und Unheil!” Ist

Gott verantwortlich für das Übel. Mainz, 1992.

Hermanni, Friedrich. Das Boese und die Theodizee. Chr. Kaiser, 2002.

Hoerster, Nobert. “Zur Unloesbarkeit des Theodizee-Problems”. T h e o l o g i e

und Philosophie 60. 1985.

Jonas, Hans. Der Gottesbegriff nach Auschwitz, Eine jüdische Stimme.

Frankfurt am Main, 1987.

. Philosophie Untersuchungen und metaphysische Untersuchungen.

Frankfurt a.M., 1992.

Jüngel, Eberhard. Gott als Geheimnis der Welt. Tübingen, 1978.

Kreiner, Armin. “Gott im Leid? Zur Theodizee-Relevanz der Rede von

leidenden Gott”, in Hrg. v. P. Koslowski. u. F. Hermanni. D e r

leidende Gott. Wilhelm FInk Verlag, 2001.

박영범, 신정론과하나님의고난 273

이를 제거해 주시기를 희망하는 외침이다.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성서의 빛으로 바라보아야하며, 그 안에서 희망을 발견해야한다. 하나

님은 전능하신 분인 동시에 또한 고난의 상황에 자신을 내어주신 분이

다. 그 사건이 바로그리스도의 사건이다. 그렇기에신정론의문제는 신

론에서 제기되지만, 그 해답은 그리스도론에서 찾게 된다. 육이 되신

(kenosis) 하나님, 낮아지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이다. 또

한 욥기에서 알 수 있듯, 하나님은 고난의 원인과 목적을 우리에게 일

깨워주시는분이아니다. 그 분은고난이라불리는 악을제한하시고, 싸

우시며 결국 승리하는 분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고난의 상황에서 여전

히 그 분과사귐을 갖게되며, 결국이런 악의 상황에 종지부를 찍으실

분이라는 희망을 갖게 된다. 희망을 갖는 사람은 또한 악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다. 현실에서 경험되는 악은 여전히 우리의 결정을 요구한

다. 라이프니츠인가또는성서인가. Tertium non datur.

주제어

신정론, 몰트만, 요나스, 하나님의 고난, 희망

Theodicy, Moltmann, Jonas, The Sufferung of God, Hope

접 수 일 2012년 6월 28일

심사(수정)일 2012년 8월 7일

게재 확정일 2012년 9월 1일

27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138: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Tout et bien(1758)”. in Wolfgang Breidert. Die Erschutterung der

vollkommenen Welt. Die Wirkung des Erdbebens von Lissabon im

Spiegel europaischer Zeitgenosse n. Darmstadt 1994

. Candide. Reinbek bei Hamburg 1957.

Wiesel, Elie. “Die Nacht zu begraben, Elischa”, in F. Hermanni. Das Boese

und die Theodizee. Chr. Kaiser, 2002.

박영범, 신정론과하나님의고난 275

Leibniz, Gottfried Wilhelm. “Die beste aller moeglichen Welt”, in Norbert

Hoerster. Glaube und Vernunft, Texte zur Religionsphilosophie.

München, DTV 4338, 1979.

Lorenz, Stefan. De mundo optimo: Studien zu Leibniz Theodizee und ihrer

Rezeption in Deutschland (1710-1791). Stuttgart, 1997.

Mackie, John Leslie. “Evil and Omnipotence”. ed. M.M Adams & R.M.

Adams. The Problem of Evil. Oxford, 1990.

Moltmann, Jürgen. Der gekreuzigte Gott. Das Kreuz Christi als Grund und

Kritik christlicher Theologie. München, 1972.

. In der G|eschichte des dreieinigen Gottes, München, 1985.

. Trinität und Reich Gottes. Zur Gotteslehre. München, 1980.

Nietzsche, Friedrich. “Die froehliche Wissenschaft”, in Hrg. v. Colli/

Montinari. Nachlass Bd. 12 . in Sämtliche Werke. Kritische

Studienausgabe in 15 Bünden, de Gruyter, 1980.

Quinn, Regina Ammicht. Von Lissabon bis Auschwitz. Zum Paradigma-

wechsel in der Theodizeefrage. Freiburg i.Br. 1992.

Ricoeur, Paul. Das Boese. TVZ, 2006.

Rohls, Jah. “Der Leidende Gott in der Theologie des 20. Jahrhunderts”, in

Hrg. v. P. Koslowski, F. Hermanni. Der leidende Gott. W i l h e l m

Fink Verlag, 2001.

Rosenau, Hartmut. “TheodizeeIV”, in Hrg. v. Gerhard Müller Theologische

Realenzyklopädie, Bd.X X X I I I. Walter de Gruyter: Berlin; New York,

2002.

Streminger, Gerhard. “Gottes Guete und die Uebel der Welt”, Wege der

Vernunft. Festschrift zum 70. Geburtstag von Hans Albert. Tübin-

gen, 1991.

Schopenhauer, Arthur.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in Saemtliche

Werke, Band I, Hrg. v. Luetgehaus, Haffmans, 1988.

Soelle, Dorthee. Das Leiden. Kreuz-Verlag, 2003.

Stosch. von Klaus. Einfuehrung in die Systematische Theologie. UTB, 2006.

Voltaire. “Poeme sur le desastre de Lisabonne ou Examen de cet axiome,

27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139: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라는 개념은 지금까지 유효했던 과거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하나님 상

을 바꾸어 놓았다.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에, 현실에서 경험되는 인간의

고난에 전적으로 참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또한고난안에서 주어지는

그 분과의 사귐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위로를 기대하

게 했다. 이렇게 고난의 자리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신비의

사귐이 주어질때,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겸손해진다. 그 자리에서 하나

님께서 고난에 참여하심을 느낀다. 그 자리에서위로를 받고, 타인의 고

난에 대해 눈을 돌리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희망의 빛을

보며,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새 힘을얻게되는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고난의 신학 또한 과제를 갖는다. 하나님 고난을 말

하는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전능성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더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은 분명 그분이 간직

하고있는 놀라운 은총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랑을 강조하면할수록 세

상에서 겪게되는 고난은 더 심화된다는것이다. 사랑의 하나님께서어

떻게 이런 고난을 두고 보시는가? 왜 아우슈비츠, 그리고 세상에서 발

생하는 자연재해에 침묵하시는가? 이와 동시에 무력한 하나님은 스스

로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자기의 무력함을 극복해야만 한다는 과제를

지닌다. 어떻게 무력하여 고난에 참여한 하나님이 결국 고난을 이기고

악을 제거하실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여전히 이런 대답의 과제로 남아

있다.

박영범, 신정론과하나님의고난 277

국문초록

신정론과하나님의고난

우리는 어떻게 고난과 악이라는 부정적인 경험과 우리가 믿는 하나

님을 모순됨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가? 이 글은 신정론 물음에 대한

새로운 해답을 찾고자 시도하지 않는다. 이 글의 주된관심사는 오늘날

신정론의문제의 한 대안으로제시되고있는“하나님의고난”과 신정론

물음이 갖는 관계를 고찰하여, 과연‘하나님의 고난’이 신정론 물음의

응답으로 적합한지를 일차적으로 고찰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신정론

물음( T h e o d i z e e f r a g e )과 신정론 물음이 갖는 문제( T h e o d i z e e-

problem)를 구분하여 볼 것이다(2). 그 다음에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

가운데, 특히 몰트만(J. Moltmann)과 요나스(H. Jonas)를 중심으로‘하

나님 고난’의 주제를 살펴 볼 것이다(3). 이를 통해, 과연‘하나님의 고

난’이 신정론 물음과 어떤 연결고리를 갖고 있고, 신정론 물음의 해결

방법인지를결론적으로고찰하는것(4)을 목적으로한다.

이런 연구의 결과는 먼저 신정론 물음(Theodizeefrage)에 대한 대

답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요나스와 몰트만 또한신정론 물음에 대한하

나의 대답으로서 하나님의 고난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음을 보여준

다. 그러나 신정론 문제(Theodizeeproblem)에 대한 진지한 시선은 신

정론 물음이 잃어버린 현실의 고난을 진지하게 바라보게 했음을 드러

내려 한다. 하나님 고난이라는 개념은 신정론이 포함하고 있는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임으로 재조명을 받은 개념이다. 둘째, 하나님 고난이

27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140: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Jonas and Moltmann also do not consider the concept of the “Suffer-

ing of God” as an answer to the Theodicy question. However, it will

be revealed that a passionate inquiry on the fundamental meaning of

the Theodicy (Theodizeeproblem) make us through the Theodicy

question to look earnestly at the suffering in reality which has been

lost.

The concept of the Suffering of God is the one that has been

revisited by identifying the critical questions implied in the funda-

mental meaning of the Theodicy. Second, the concept of the

Suffering of God has changed the traditional metaphysical image of

God which was effective in the past. God now participates in the

human suffering experience in reality, instead of being Almighty. In

addition, the consolation of Christ who is crucified on the cross is

now expected along with the fellowship which is given in the suffer-

ing. When the secretive fellowship in crucified Christ is given in the

place of suffering, they become humble at the same place. In this

place, they feel that God participates in the suffering. In this place,

they get relief and concern about the suffering of others. And they see

the light of hope from God and get the new power to overcome the

suffering.

The theology of the Suffering of God, however, has also chal-

lenges. Theologians who speak of the Suffering of God tend to

emphasize God’s love and goodness more than God’s almighty.

Without a doubt, God’s love and goodness are his amazing grace. But

the problem is that the more we emphasize his love, the more severe

the suffering gets in reality. How can God of love tolerate this suffer-

ing? Why is God in silence for Auschwitz and natural disasters? At

the same time, this helpless God should be able to explain his help-

lessness from the Eschatological perspective. The question of how

this helpless and suffering God is going to overcome the suffering

and to get rid of the evil still remains unanswered.

박영범, 신정론과하나님의고난 279

The Theodicy and the Suffering of GodThe Concept of the Suffering of God as the

Answer for a Theodicy

Park, Young-Bum

Lecturer

Seoul Theological University/Jung Ang Theological Seminary

Seoul, Korea

How do we say both the negative experiences of suffering and evil

and our Almighty God altogether without contradiction? This paper

does not attempt to present answers which have not provided so far to

the Theodicy question. The main concern of this paper is to primarily

discuss the appropriateness of the “Suffering of God” as response to

the Theodicy question by investigating its relation to the “Suffering

of God” which has been presented as an alternative explanation to the

fundamental meaning of the Theodicy.

To this end, the Theodicy question(Theodizeefrage) will be

distinguished from the fundamental meaning of the Theodicy (Theo-

dizeeproblem). Then, focusing on J. Moltmann and H. Jonas, in par-

ticular, among modern theologians, the concept of the “Suffering of

God” will be reviewed. The review is intended to identify what con-

nection the “Suffering of God” has with the Theodicy question and to

investigate whether it is a way of answering the Theodicy question

conclusively.

The result of the discussion will show that, first of all, the answer

to the Theodicy question(Theodizeefrage) is impossible and that

27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141: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예수의동정녀수태에대한신학적반성

정지련

(감리교인천성서신학원, 교수)

I. 서론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성탄절은 주후 3 5 0년 교황 율리우스 1세

(Julius I)가 예수께서 탄생하신 날짜를12월 25일로 제정한 데서 비롯

되었다. 이러한 제정에는 물론 역사적 고증(考證)보다는 예수가 한 겨

울에 태어났다는 복음서의 보도와 당시의 동지(冬至) 축제가 참조되었

을 것이다.

사실 예수의 출생 연도를 새로운 기원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도6세

기에야 나타났다. A.D. 525년 수도사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우스

(Dionysius Exiguus)가 교황 요한 1세의 요청으로A.U.C.(Ab urbe

condita 로마 설립 연도) 대신에 예수의 출생 연도를 새로운 기원의 시

작으로 제시하는 표준 달력을 만들면서부터 예수의 탄생일이 새로운

기원의 시작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 달력은 예수의 출생 일자를A.

U.C. 753년 12월 25일로정하고A.U.C 754년을A.D.(Anno Domini) 1

년으로 계산했지만, 현대 성서신학은 디오니시우스의 계산에서 착오를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281-316

Page 142: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1600년(200~1800년) 동안 동정녀 수태는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생물학적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이 기간 중에는 이 교리에 그 어떤 이의

도 제기되지않았다.2)

그러나19세기 이후 이 교리에 다시 이의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계

몽주의의 영향을 받은19세기에는 특히 신화설(神話說)이 대두되었다.

동정녀 탄생은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특정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고대의 신화였다는 것이다. 그리고20세기에는 신학적 관

점에서도 비판이 제기되었다. 특히 동정녀 탄생 교리에 예수의 온전한

인간성을 희생시킬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비판이 주목을 받았다.

인간적인 아버지 없이태어난 예수가 어떻게 우리와 똑같은 인간일 수

있겠느냐는것이다.3)

본 소고는 이러한 상황에 직면해 동정녀 수태 전승의 역사적 근거

와 메시지를 해명해 보려 한다. 이를 위해 본 소고는 먼저 성서신학적

인 관점에서 동정녀 수태 전승을 포괄하고 있는 예수 탄생 이야기의

문학적 성격과 동정녀 수태 전승의 역사성 문제를 살펴보겠다. 그리고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이 교리의 의미를 논구한 후 이 교리에 대한 해

석 전망을 순차적으로제시해 보겠다.

정지련, 예수의 동정녀수태에 대한신학적반성 283

2) 앞의책, 37.

3) 참조. Emil Brunner, Dogmatik I I: Die Christliche Lehre von Schopfung und

Erlosung (Zürich: TVZ, 1972), 377. 본회퍼(D. Bonhoeffer)도 비슷한 어조로 말한

다.“동정녀 탄생 교리는 하나님의 성육신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성육

신의 중요한 점, 즉 예수가 우리 같이 되었다는 사실이 간과될 수 있지 않을까?”참

조. 본회퍼/유석성 옮김, 『그리스도론』(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90. 틸리히( P .

Tillich)도 동정녀 탄생 교리에 가현설로 오인될 소지가 있다고 보며 다음과 같이 말

한다.“이교리에는 인간적 아버지를 배제함으로써인간의 곤궁에 전적으로 참여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곤란에 빠질 위험성이 존재한다.” 참조,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 2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160.

발견하고예수가B.C. 4~6 년 경 탄생했을것으로 추정한다.

예수의 탄생지에 관해서도 마태와 누가복음은 예수의 탄생 장소를

베들레헴으로기술하고있지만, 베들레헴 탄생전승이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메시아가다윗의 도성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

이라는-구약성서 미가의 예언을 예수에게 투사한 것인지는 오늘까지

도 해결되지 않은문제로 남아있다.

그러나 성탄절(聖誕節)의 여러주제들 가운데 그리스도교 전통이 가

장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출생지나 출생 연도가 아니라 예수의 정

체성에 관한문제였다. 따라서 예수의 동정녀탄생, 보다정확하게말하

자면예수의 동정녀 수태전승이 다른전승들보다전면에부각되었다.1)

이 전승은 비록 성서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지만, 그리스

도교 교리 전통 내에서 일찍부터 확고한 지위를 차지해 왔다. 고대 로

마 교회의 세례문답과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신조뿐 아니라 사

도신경도 예수의 동정녀 수태를 교리에 포함시켰다. 물론이 교리가 순

탄한 길을 걸어온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교회 안팎으로부터 수많은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예수를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출

생과정을 거쳤던 분임을 전제하는 양자론(養子論)과 예수의 인간성 자

체를 부정하는 가현설(假現說)이 동정녀 수태 교리를 위협했으며, 교회

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유대교 랍비들은 사생아설(私生兒說)을 동정녀

탄생 교리의 진실로 제시했다. 그러나3세기 이후 그리스도교의 세계적

인 성장과 더불어 이러한 비판들은 수면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미국의

저명한 가톨릭 성서학자 브라운(Raymond E. Brown)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다음과 같이말한다.

28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1) 가톨릭의 저명한 신약성서학자 브라운은 동정녀 탄생과 수태를 구분하면서, 전자는

성서의 메시지를 넘어서서 예수의 기적적인 출산과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암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참조, Raymond E. Brown, The Virginal Conception and Bodily

Resurrection of Jesus (New York·Paramus·Toronto: Paulist Press, 1973), 27.

Page 143: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니다. 이 전승들은 십자가에 달리셨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신 예수에 대

한 신앙이 확고해졌을 때, 즉 교회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 후

형성된 전승이다.…따라서 복음서의 예수 탄생 전승에서는 역사적인 사

실이아니라, 선포하고고백하는성격이 중시되어야한다.”6)

단적으로 말하자면,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부활절 신앙의 관점하에

서 예수의 정체성을 직관적인 형식으로 고백한 것이며, 따라서 순수한

역사적 보도로 보기는 어렵다는것이다.

대부분의 현대 신학자들은 이러한 사실 정황에 근거해 마태와 누가

복음에 수록되어 있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들이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는데동의한다. 물론복음주의(Evangelism) 신학자들은예수탄생전승

의 역사성을주장한다. 그러나 그들도 탄생 전승전체를 역사적 보도로

보지는 않는다. 단지 전승의 뿌리에 역사적 사실이 있다고 주장할 뿐이

다. 복음주의 신학자들도 예수 탄생 전승이 신학적으로 해석된 전승임

을 인정한다.7)

그렇다면 예수 탄생 이야기는 그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상상

력에 호소하는 창작이나 신화(神話)란 말인가? 역사적 예수 연구의 개

척자였던19세기의 슈트라우스(D. F. Strauss)와 신약성서의 비신화화

를 주장했던20세기의 불트만(R. Bultmann)은 이 전승을 신화로 간주

한다.8) 그리고 예수세미나(Jesus Seminar) 회원인 보그(M. Borg)도 비

정지련, 예수의동정녀수태에 대한신학적반성 285

6) Walter Grundmann, Die Geschichte Jesu Christi (Berlin: Evangelische Verlag-

sanstalt GmbH, 1959), 379.

7) 참조. 벤 위더링턴/요단출판사 번역위원회 옮김,『예수의 탄생』,「예수복음서사전」(서

울: 요단출판사, 2003), 61.

8) 현대의 저명한 신화학자 캠벨(J. Campbell)은 히브리 전통에는 처녀수태 관념 자체가

없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면서 예수의 탄생 이야기가 그리스 전통에서 그리스도교로 흘

러 들어왔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참조. 조셉 캠벨·빌 모이어스/이윤기 옮김,『신화의

힘』(서울: 고려원. 1999), 326. 그는 신화의 기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만

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열어주는 기능, 둘째, 신비의 샘으로서의 우주를 보여

주는기능, 셋째, 질서를 세우는 사회적 기능, 넷째, 교육적 기능. 참조. 앞의책, 81-82.

I I. 동정녀수태전승의역사성문제

1. 예수탄생이야기의문학적성격

1) 전승의장르문제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마태복음1~2장과 누가복음1~2장에만 나타

난다. 바울은 예수의 탄생 이야기를 알지 못했던 것처럼 보이며,4) 요한

복음도 예수를 단지 요셉의 아들로만 부르고 있다.5) 그리고 예수의 탄

생 이야기를 전하는 마태와 누가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

해 나간다. 마태복음에서는천사가 마리아의수태를 전제하면서 요셉에

게 수태의 비밀을 전해준 후 동방박사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누가에서

는 천사가요셉이 아닌 마리아에게 성령에 의한 수태를 예고하고, 동방

박사 대신에 천사로 하여금 목자에게 기쁜소식을 전하도록 만든다. 또

한 마태가 이집트 피난 이야기와 영아 학살 이야기를 덧붙임으로써 독

자로 하여금 예수를 모세와 비교하도록 만든다면, 누가는 예수의 탄생

을 요한의 탄생과 비교하면서 예수 탄생의 특징을 은유적으로 서술해

나간다.

현대 성서신학은 마태와 누가의 예수 탄생 전승이 비교적 후대의

전승이라고 주장한다. 즉 마태와 누가의 예수 탄생 전승은-초기의 전

승이 나타났던 상황과는 다른 상황 속에서-특정한 전제와 목적을 가

지고 생성된 전승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의미에 대해 독일의 개

신교성서학자그룬트만(W. Grundmann)은 다음과 같이말한다.

“이 이야기는 후대의 전승이며, 따라서 논란의 여지가 없는 전승들이 아

28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4) 참조. 갈 4,4. “때가 차매하나님이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나게하시고 율법 아

래 나게하신것은”

5) 참조. 요 1,45; 6,42.

Page 144: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것이다. 사실 구약 성서적 배경을 가진 사람은 이 전승이 말하고자 하

는 바를 그리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예수를 구약성서의 정점으

로 바라보는 신앙의 빛에서 구약 성서적 사건과 인물들을 예수에 대한

모형(模型)들로 받아들인 흔적들이 전승 도처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마

태는 예수의 족보를 다윗에게까지 소급시킬 뿐 아니라, 모세와의 연관

성도 암시하고 있다. 모세가 이집트 파라오의 손에서 구해졌듯이 아기

예수도 헤롯의 손에서 벗어났고, 모세가 이집트에 있었듯이 예수도 부

모와 함께 이집트로 피난길을 떠난다. 이러한 이야기에서는 분명 예수

가 이스라엘이 고대했던 다윗의 자손이며, 새로운 모세임이 암시된다.

누가도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 앞서세례요한의 출생이야기를 전한다.

그리고 요한을 이스라엘의 위대한 예언자로 표상하면서도 예수를 요한

보다위대한 분으로 소개한다.

예수 탄생 전승의 많은 부분들이-물론 전체가 다 그런 것은 아니

지만-예수를 구약의 성취로 제시하는 모형론(模型論, typology)에 의

해 전개된다는것은 분명한사실이다. 그리고 모형론이-문자의숨겨진

의미, 곧 영적의미를 추구하는-알레고리를시간적 차원으로 펼쳐나가

는 해석임을 감안한다면 탄생 전승의 장르를 역사적 보도로도 볼 수

없지만 일반적인의미의 신화로 간주할 수도없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2) 전승의 형성과정

최근에는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하면서 탄생 전승의 장르를-부분적

으로는 주위 종교의 신화나 전설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

자면-유대 문학, 특히 성서의 숨겨진 영적 의미를 찾기 위해 성서를

묵상하면서 창조적으로 풀어나가는 랍비적 미드라쉬(Midrash)11)로 보

정지련, 예수의 동정녀수태에 대한신학적반성 287

11) 미드라쉬(Midrash)란 랍비 유대교의 구약성서 해석을 가리키는 말이다. 미드라쉬는

‘찾다’,‘묻다’라는 뜻을 가진 랍비 유대교의 포괄적인 개념으로서 해석학적으로는

문자적인의미뿐아니라 그 이면에숨겨진 깊은의미들을찾아내는해석을가리킨

슷한견해를 피력한다.

“이 이야기들은 역사적 보도가 아니라 문학적 창작이다. 문학적 창작으

로서 이 이야기들은 기억된 역사가 아니라 예수의 의미와 관련된 핵심

적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고대의 종교적 이미지를 사용한 은유적 이야

기이다.”9)

물론 예수 탄생 전승을 신화나 전설로 말하는 것이 이 전승들이 무

가치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예수 세미나의 설립자 크로산(J. D.

Crossan)은 다음과 같이말한다.

“예수의 탄생 이야기들은 종교적인 창작, 혹은 비유입니다. 이것은 예수

의 출생 이야기들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적

의미에서 역사적인 사실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

다.”10)

이 전승에 신화적 표상들이 나타나는것은 분명하다. 누가에는 천사,

목자, 구유가 등장하며, 마태는 동방박사로하여금 별을따라예수가 태

어나신 곳을 찾아가도록 만든다. 또한 마태와 누가가 공통적으로 전하

고 있는 동정녀 수태 이야기도 이집트에서 인도까지 널리 퍼져 있었던

당시 고대사회의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신

들이 인간의 딸들과 결혼해 영웅들을 낳았으며, 알렉산더, 아우구스투

스 등의역사적인물들도 신의아들로 소개된다.

그러나 복음서의 탄생 전승에는 이 전승의 유래를 이방 신화로 볼

수 없도록 만드는 측면들도 존재한다. 구약성서와의 연관성이 바로 그

28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9) 마커스 보그·N. 톰 라이트/김준우 옮김, 『예수의 의미』(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1), 275.

10) 존 도미닉 크로산/한인철 옮김,『예수는 누구인가』(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1998),

39.

Page 145: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럼 다음 세대에게 성서 텍스트의 의미를 풀어주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브라운은 예수탄생 이야기의 주석내지는 전개스타일

을 미드라쉬로 제시한다.16) 달리 말하자면 미드라쉬를 탄생 이야기의

문학적 장르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전승의 해석학적 기술이나 방법은

분명미드라쉬적이라는것이다. 복음주의 신학자들도 탄생전승에 미드

라쉬적 전개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17)

예수 탄생 이야기의 장르는 아닐지라도 이 이야기의 전개 방식만큼

은 미드라쉬로 볼 수 있다는데신학자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그렇

다면 예수 탄생 이야기의 전개 방식을 미드라쉬로 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복음서 기자들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그들 앞에는 분명 묵상의 자료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들에게 주어진 자료는 토라(Tora)가 아니었

다. 그러면 그들에게 전해졌던 자료는 무엇이었을까? 현대 성서학자들

은 서로 상이한 탄생 이야기를 전하는 마태와 누가에게 공통적으로 주

어져 있는 내용이 양자에게 전해진 전승이라고 주장한다. 달리 말하자

면, 예수께서 성령에 의해잉태되었다는 이른바 동정녀 수태전승이 바

로 복음서 기자들의 묵상자료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서 현대성

서학자들은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넘어서서 일치를 보인다. 이러한 사

실은우선동정녀 수태전승이 이사야7장 14절(“처녀가 잉태하여 아들

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의 빛에서 예수의 탄

생을상상해낸 창작이라는주장을 논의에서배제하도록만든다.18)

정지련, 예수의 동정녀수태에 대한신학적반성 289

15) Raymond E. Brown, The Birth of Messiah: A Commentary on the Infancy

Narratives in the Gospels of Matthew & Luk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9), 561.

16) 앞의책, 561.

17) 참조. 벤 위더링턴/요단출판사 번역위원회 옮김,“예수의 탄생”,「예수복음서 사전」

(2003), 61.

18) 참조. 마커스 보그·N. 톰 라이트/김준우 옮김,『예수의 의미』(2001), 267. 복음주의

신학자마샬(I. H. Marshall)뿐 아니라슈바이처와큄멜(W. G. Kümmel)도 마태의

려는 시도들이 부각되었다. 예들 들자면, 유대 해석학 전문가 스템베르

거(G. Stemberger)는 예수의 탄생 전승을 미드라쉬로 이해하며 다음과

같이말한다.

“예수의 유년 사화 전체가 구약 구절을 인용해서 발전되었음을 수긍한

다면, 하이네만이‘창조적 역사 기록’이라고 정의한 대로, 라삐들이 성경

을 해석하는근본원칙에서 시행되었다고볼 수 있다.”12)

물론 반대의 목소리도 있다. 예를 들자면, 복음주의 신학자 위더링턴

3세(B. Witherington I I I)는 미드라쉬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

소 형성된다는 점을 들어-예수께서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등장했던

-복음서의장르를 미드라쉬로보는것에이의를 제기한다.13)

브라운(R. E. Brown)도 라이트(A. Wright)의 미드라쉬 정의14)를 제

시하면서 미드라쉬가 엄밀한 의미에서는 탄생 이야기의 문학적 장르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15) 즉 예수의 탄생 이야기가 유대교 미드라쉬 처

28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다. 미드라쉬에는 할라카(Halakha) 미드라쉬와 학가다(Haggadah) 미드라쉬가 있다.

할라카 미드라쉬가 토라의 의미를 찾아 현 상황에 적용시키는 법률적 성격을 가졌

다면, 학가다 미드라쉬는 토라의 영적 의미를 찾아내 이것을 비유나 이야기 형태로

풀어낸다. 랍비 유대교의 미드라쉬와 헬레니즘 유대교의 알레고리는 텍스트의 숨겨

진 의미를 찾는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에

있어서 대화적이며 들으려는 태도를 강조하는 미드라쉬는 상상력과 체험에 의존하

는 알레고리와 구분된다. 참조. Julio C. Trebolle Barrera, The Jewish Bible and the

Christian Bible: an 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the Bible, trans. Wilfred G. E.

Watson (Leiden·New York·Koln: Brill, 1997), 473-475, 479.

12) 귄터스템베르거/이수민 옮김, 『미드라쉬 입문』(서울: 바오로딸, 2008), 31.

13) 벤 위더링턴/요단출판사 번역위원회 옮김,“예수의 탄생”,「예수복음서 사전」(2003),

61.

14) “랍비적 미드라쉬는 성서와 관련된 문학이다. 미드라쉬는 다음 세대를 위해 성서 텍

스트를 보다 잘 이해시키고 유용하게 만들려는 시도다. 출발점은 성서 텍스트다. 그

리고 전체적으로 보자면 성서 자료를 다루는데 창조적이다.”참조. Addison Wright,

The Literary Genre Midrash (Staten Island: Alba, 1967), 74.

Page 146: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동정녀

수태,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수를 성령의 새로운 창조로 제시하는

구약성서적 메시지와 결합된 동정녀 수태 개념이다. 이 개념을 둘러싼

신학적 논쟁은 동정녀 수태 개념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냐, 아니

면 주변 종교의 신화나 전설에서 비롯된 것이냐는 물음에 초점을 맞추

고 있다. 이러한 논쟁과 이러한 논쟁을 촉발시킨 동정녀 수태 전승의

구조에 직면해 먼저동정녀수태전승의역사성 문제를 반성해 본 후-

예수를 성령의 새로운 창조로 제시하는 구약성서적 메시지와 동정녀

수태 개념을 결합시킨-전승의메시지를 해명해 보는것이 방법적으로

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1) 논쟁의초점

가톨릭은 전통적으로 동정녀 수태 전승을 마리아의 증언에 기초한

역사적 전승으로 이해해왔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 이전에

는 동정녀 수태 전승의 역사성을 긍정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현

대의 보수적인 가톨릭 신학자들(R. Laurentin, A. Feuillet, J. McHugh)

도 이러한 견해를 지지한다. 그러나 공의회 이후 동정녀 수태 교리에

자유로운 비판의 목소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동정녀 수태 교

리가 성육신 교리뿐 아니라 성서적 증언에도 상응하지 않는다는 것이

다.20)

개신교에서는 계몽주의 시대 이후 동정녀 수태 전승의 역사성에 지

속적으로 이의가 제기되었다. 이에 맞서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동정녀 수태 전승의 역사성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신앙의 기준으로

제시했다. 후자가 예수의 정체성을 그분의 독특한 출생 방식에서 찾는

다면, 전자는 예수께서 다른 인간과 다르게 수태되어야 한다는 논제를

정지련, 예수의 동정녀수태에 대한신학적반성 291

20) 이러한 주장을 펼치는 신학자로는 스위스 출신의 튀빙엔 신학자 큉(H. Küng)과 네

덜란드의예수회신부반 킬스동크(J. van Kilsdonk)를 들 수 있다.

그렇다면 복음서의 예수 탄생 전승이 형성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할 수 있을것이다. 먼저복음서 기자들은 공동체에 전해져 내려

온 동정녀 수태 전승을 묵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묵상을 통해

깨닫게 된 예수의 의미를 구약성서의 맥락에서 모형론의 도움을 받아

서술하는 가운데 예수 탄생전승이 생성되었다고 말할수 있다. 이로써

한 편으로는 초대교회가 유대교로부터 성서뿐 아니라 성서해석학도 받

아들였다는 사실이, 다른한 편으로는 예수탄생 이야기의 토대가 동정

녀 수태전승이라는사실이 드러난다.

2. 동정녀수태전승의역사성문제

그러면 마태와 누가에게 공통적으로 전해졌던 이야기, 즉 천사의 입

을 통해 예수를 성령에 의해 수태되신 분으로 말하는 동정녀 수태 전

승은 어떤 전승이었을까? 브라운은 이 전승의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첫째, 이 전승은 천사의 예고 형태를 취한다. 둘째, 예수께서

다윗의 후손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신학적

메시지를 제시한다. 셋째, 성령으로 수태하신 분이라는 천사의 예고를

동정녀 수태와 연결시키는 구조를 갖는다.19)

브라운의 이러한 분석은 현대 성서학자들 사이에서 공감을 얻고 있

다. 사실 이 전승이 문학적으로나 내용적으로 구약성서의 맥락에서 예

수 탄생의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신학자는 오늘날 거

29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창작설을 비판한다. 슈트라우스(F. Strauss 1808-1874)는 마태가 이사야7:14를 히

브리어 성서가 아니라 희랍어 번역본인70인역(Septuaginta)에서 인용했기 때문에

젊은 여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알마( a l m a h )를 처녀를 뜻하는 희랍어 파르테노스

(parthenos)로 오역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하르낙(A. von Harnack)

과 바르트(K. Barth)는 반박한다. 문맥상 오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신학자들은이사야7:14를 동정녀수태로해석하지않는다.

19) Raymond E. Brown, The Birth of Messiah: A Commentary on the Infancy

Narratives in the Gospels of Matthew & Luke (1999), 522.

Page 147: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복음주의 소장 신학자 위더링턴3세도-역사 비평 연구로는 동정녀

수태 전승이 마리아와 요셉의 증언에 기초한 전승이라는 주장을 지지

할 수도 없지만 동시에 반박할 수도 없다는 학문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도-해석의 정황상 마리아 증언설이 더 개연적임을 암시한다.22) 역사적

으로 동정녀 탄생을 부정했던 이론 가운데 하나였던 마리아 착각설도

역으로 동정녀 수태 전승이 마리아의 증언에 근거하고 있다는 이론을

지지해준다고말할수 있다.23)

그러나 성서 전체를 살펴보면 동정녀 수태 전승이 마리아의 증언에

서 비롯되지않았을 개연성이 더 많다. 마리아 증언설의 역사적 개연성

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만드는 전승들, 예를 들자면 예수의 사역을 가족

들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전승들은 분명 역사적 사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의마리아는 순례중에잃어버렸던 아들을 성전에서

다시 발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

게 하였느냐 보라네 아버지와 내가근심하여 너를찾았노라”(2:48) 마

가복음 또한 예수의 친척들이 예수께서 미쳤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를

붙잡아가려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24) 요한복음도 형제들이 예수를

믿지않았다고 전한다.25)

동정녀 수태 전승의 역사성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마리아의 증언

외에도 고대교회의 역사를 제시한다. 굳건한 사실적 토대가 없었다면

예수가 사생아로 태어났다는 비방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동정녀 수

태 교리를 어떻게 지속적으로 주장했겠느냐는 것이다. 사생아에 대한

당시의 시선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예수를 사생아로 묘사했던2세기유

정지련, 예수의 동정녀수태에대한신학적반성 293

22) 벤 위더링턴/요단출판사 번역위원회 옮김,“예수의 탄생”,『예수복음서 사전』(2003),

61.

23) 파울루스(H. G. G. Paulus 1761-1851)는 동정녀 수태 전승을 마리아의 증언에 근거

한 사실적 전승으로 이해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마리아의 증언을 마리아의 경건한

착각으로간주했다.

24) 참조. 마가복음3:21.

25) 참조. 요한복음7:5.

비판한다.

이러한 논쟁은 성서 비평을 수용하는 현대신학에서도 계속되었다.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역사성이 아니라 신학적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동정녀 수태 전승의 성격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복음주

의 신학자들은 성서 비평을 통해 오히려 동정녀 수태 전승의 역사성이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동정녀 수태 전승이 역사적 근거가 있는 전승이

라는것이다. 물론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이 전승을 부활절 이후의 전승

으로 간주하는 진보적 신학자들의 주장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

나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이 전승이 부활절 이후의 전승이라 할지라도

부활절 이전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간략하게 말

하자면, 부활절 이전에 발생했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부활절 이후의 신

학적해석이라는것이다.

전승사 비평의 빛에서 보더라도 동정녀 수태 전승의 기원을 부활절

이전으로 주장하는 것을반박할 수는 없다. 부활절 이전에도 역사적 개

연성을 가진예수전승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정녀 수태전

승을 부활절 이전 전승으로 간주하는 경우에도 부활절 이전에 형성된

다른 전승들과의 차이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동정녀 수태 전승의 역

사적 개연성을 입증해 줄 수 있는 증인은 제자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

이다.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이 전승이 가족의 증언에서 비롯되었을 가능

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이 전승이 부활절 이전에 생성되었다 할지라도

그들의 증언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면 역사적 개연성을 인정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마샬(I. H. Marshall)은 다음과 같이말한다.

이야기 자체의 성격은 마리아 자신이 제공한 정보이거나 아니면 신학적

구성, 또는 그 둘의병합으로 보인다.”21)

29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21) 하워드 I 마샬/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 옮김,『국제성서주석·루가복음I』(천안: 한국

신학연구소, 1989), 66.

Page 148: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것이라고추정하는가운데 생성되었다고말할수 있다.

진보적 신학자들이 예수 탄생의 신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

실이 여기서 다시 한 번 입증된다. 진보적 신학이 거부하는 것은 단지

예수 탄생의 신비를 해소하는-동정녀 수태 전승에 대한-문자적이며

사실적인 이해뿐이다.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동정녀 탄생을

‘실사적’이거나‘생물학적인’것이라 말하는 것은 이 이야기의 의도를

벗어난다. 동정녀 탄생을 이와 같이 현대적으로, 실증주의적으로 규정

하는 것은 그것의 의도와 진리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파괴한다.”29) 동정녀 수태를 생물학적 기적으로 입증하려는 것은 과학

적 불가능성이란 이유를 들어 동정녀 수태를 거부하는 것만큼이나 신

앙의신비를 해소할수 있다는 것이다.

2) 논쟁에 대한평가

앞에서 기술한 동정녀 수태 전승에 대한 논쟁을 요약해 보면, 양자

의 신학적 동기와 차이가 명백하게 드러난다. 즉 진보적인 신학자들이

이 전승을 성령 충만했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체험 속에서 예수의 생

애 처음을 추정하는 은유로 보면서 전승의 상징적 성격을 강조한다면,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이 전승을 동정녀 수태를 직접적으로 입증해줄

수 있는증거들에의해세워진 역사적 전승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균형 잡힌 시각과 전문성으로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브

라운의 견해에 비평적인 물음을 제기해 보는 것이 문제의 핵심을 파악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브라운은 자신의 연구결과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학문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성서적 증거만으로는동정녀 수

태의 역사성에 대한 물음을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역사성을 위한 증

정지련, 예수의동정녀수태에 대한신학적반성 295

29) 위르겐 몰트만/김균진·김명용 옮김, 『예수 그리스도의 길』(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0), 127.

대인들의 비난을 감안한다면, 동정녀 수태전승은 결코근거 없이가볍

게 지어낼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복음서의 예수탄생 이야기

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복음서 기자들이 동정녀 수태를 의심한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고대교회의 역사가 암시하듯이 이 전승을

복음서 기자들이사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을가능성이더 높다.

그러나 성공회 신학자 라이트(N. T. Wright)는 이러한 견해를 받아

들이면서도 동정녀 수태 전승이 본래는 역사적 은유(historized meta-

phor)였다고 주장한다.26) 즉 복음서 기자들이 사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였

던 동정녀 수태 전승은 본래 예수의 신성을 확신했던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은유였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라이트는 예수 세미나의 신학자들과

견해를 같이 한다. 크로산은“경이로운 생애와 죽음은, 거꾸로 회고하여

(in retrospect), 경이로운 수태와 출생 이야기를 갖게 되는 것”27)이라고

말하며, 보그도 동정녀 수태 전승을“예수의 중요성에 관한 초기 기독

교인들의핵심적인 확신을 표현한”은유적 이야기로본다.28) 요약하자면

라이트와 예수 세미나의 신학자들은 동정녀 수태 전승을 은유적 이야

기로 제시하는데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동정녀 수태 전승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체험을-그것이 부활절 신앙이든, 부활절 이전의 예수에

대한 체험이든 간에-예수 생애의 처음으로 투사하는 가운데 생성된

은유였다는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투사는 신을인간소망의 투사체(投射體)로 이해하는

포이에르바흐(L. Feuerbach)의 이론과는 다른 것이다. 포이에르바흐에

게는 투사가 신을 인간의 창작으로 간주하도록 만드는 부정적인 기능

을 수행하지만, 진보적 신학자들에게는 투사가 강한 추정(推定)의 성격

을 갖는다. 구체적으로말하자면, 동정녀 수태전승은 예수안에서 경험

했던‘하나님의 영의 창조적 활동’이 예수의 생애 처음에도 작용했을

29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26) 참조. 마커스 보그·N. 톰 라이트/김준우 옮김, 『예수의의미』(2001), 272.

27) 존 도미닉 크로산/한인철옮김, 『예수는누구인가』(1998), 43-44.

28) 마커스 보그·N. 톰 라이트/김준우옮김, 『예수의의미』(2001), 280.

Page 149: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그가 여기서 말하는 역사성을 위한 결정적 증거란 마리아의 조기 출산

이다. 그러나 마리아의 조기 출산이 당시인근 주민들에게 공공연한사

실이었다면, 이러한 사실을 상식적인 차원에서해석한 사생아설이 예수

의 생애당시이미떠돌아 다녔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2세기에 유대인들 사이에서 실체를 드러냈던

사생아설은 간접적으로 마리아의 조기 출산설을 지지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가설의 정당성은 브라운이 지적했듯이 역사적으로 확인된2

세기의 사생아설이 복음서의 동정녀 수태 전승에 대한 반작용(反作用)

인지, 아니면 이 전승과는 무관한 독립적인 전승인지의 여부에 달려있

다. 후자가 옳다면, 즉 복음서 이전에도 사생아설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입증될 수 있다면 마리아의 조기출산은 더 큰 개연성을 갖게 될 것이

다. 그러나 전자가 사실이라면, 조기출산설의 설득력은 반감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브라운도인정했듯이현재의 역사적 연구로는사생아설의

역사적 근원을 확인할 수 없다는데이 가설의 문제가 있다.

둘째, 브라운은 복음서의 동정녀 수태 전승과 이방의 유사한 전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부각시키면서 동정녀 수태 전승의 상징적 성

격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을 비판한다. 물론 브라운이 상징설을 비판한

최초의 신학자는 아니다. 복음주의 신학자들도 일찍부터 같은 이유로

상징설을비판해 왔다.36)

사실 현대신학은 신을 성적 존재로 생각하는 타문화권 탄생 신화와

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현대

신학의 이러한 이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675년에 제11차

톨레도 공의회(Councils of Toledo)는 성령을 예수의 아버지로 보는 견

해를 정죄한 바 있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복음서의 동정녀 수태 전승

과-풍요와 다산을 신들의 성적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보는-성(性)의

신화와 성적제의를 말하는 이방신화와의 차이를 항상인식해왔다. 성

정지련, 예수의 동정녀 수태에 대한신학적반성 297

36) 참조. 벤 위더링턴, “예수의 탄생”, 『예수 복음서사전』(2003), 61.

거가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우세하다.”30)

브라운은 동정녀 수태 전승의 역사성을 반대하는 증거들로 마태와

누가를 제외한 나머지 성서의 침묵과 동정녀 수태 전승이 후대의 신학

적 진술이라는 사실을 든다.31) 그러나 브라운은 이 전승의 역사성을 지

지해주는중요한 증거들도있다고 주장한다. 즉 이 전승은-1세기그리

스도인들이 받아들였던 이방과 유대의 자료들 가운데 유사한 자료가

없는-이른바 전례가 없는 전승이며32) 유대교가 지속적으로 주장했던

사생아설 또한 거꾸로 살펴보면 동정녀 수태가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근거한 것임을 암시하지않느냐는것이다.33)

그는 역사적 연구를 통해 요셉과 동거하기 전에 이미 임신 중이었

던 마리아가 조기출산했다(早期出産, Early Birth)는 소문이 동정녀 수

태 전승을 탄생시켰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34) 물론 마리아의 조

기 출산에 관한 소문 하나만으로 동정녀 수태 전승이 형성된 것은 아

니며, 이러한 사실을 유대인들처럼 사생아설로 해석할 수도 있음을 브

라운도 인정한다. 즉 공동체는 이러한 사실을 신앙의 빛에서 유대인들

과는달리동정녀 수태로 해석했다는것이다.35)

여기서 본 소고는 그의 논제에 두 가지물음을 제기하려 한다. 첫째,

29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30) Raymond E. Brown, The Birth of Messiah: A Commentary on the Infancy Nar-

ratives in the Gospels of Matthew & Luke (1999), 698.

31) 물론 브라운은 이러한 침묵이 전승의 역사성을 박탈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자면, 동정녀 수태 전승을 후대의 신학적 진술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 말한다. 참조. Raymond E. Brown, The Virginal Conception and Bodily

Resurrection of Jesus (1973), 61

32) 참조. Raymond E. Brown, The Virginal Conception and Bodily Resurrection of

Jesus (1973), 62.

33) 참조. 앞의 책, 65-66. 2세기의 희랍 철학자 켈수스(Celsus)는 예수가 마리아와 로마

군인판테라(Phantera)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고주장했다.

34) 참조. Raymond E. Brown, The Birth of Messiah: A Commentary on the Infancy

Narratives in the Gospels of Matthew & Luke (1999), 526-527.

35) 앞의 책, 527.

Page 150: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를 뿐이다. 또한 현대의 복음주의 신학자들과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동

정녀 수태 전승을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신학적 해석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도일치한다. 달리말하자면양자는

동정녀 수태 전승을 역사적 사실에 토대를 둔 신앙고백, 즉-다르게도

해석될 수 있는-역사적 사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고백한 것으

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I I I. 동정녀수태교리의의미

본 소고는 앞에서 다룬 동정녀 수태의 역사성 문제에서“학문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성서적 증거만으로는 동정녀 수태의 역사성에 대한물

음을해결할 수 없다”는 브라운의견해에 동의하면서도“역사성을위한

증거가 그 반대의 경우 보다 더 우세하다”는 그의 견해에는 물음을 제

기했다.

그러나 본 소고는 현대의-극단적인 보수주의 신학자들과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제외한 나머지-대부분의 신학자들과 함께 동정녀 수태 전

승을 역사적 사실에 토대를 둔 신앙고백으로 이해한다. 동정녀 수태 전

승을 신앙고백으로 이해하는 것은-현대신학이 동정녀 수태의 역사성

문제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이지는 못하지만-동정녀 수태 교리의 의

미를해명하는 차원에서는 충분히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암시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동정녀 수태교리의 본래적 메시지는무엇인가?

앞에서 암시했듯이 동정녀 수태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힘든이

유는 이 신앙고백에 상이한 근원을 갖고 있는 두 가지 개념들이 결합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령에 의한 잉태와 동정녀 수태 개념이 바로 그

것들이다. 신앙고백에서 양자는 논리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처

럼 보이지만 사상사적 맥락에서는 상충할 수밖에 없다. 전자는 구약성

서의 맥락에서 생성된 것이지만 후자는 구약성서에는 낯선 개념이기

정지련, 예수의 동정녀수태에 대한신학적반성 299

령은 마리아의 배우자가 아니라 생명의 창조적 능력으로, 마리아 또한

성령의 배우자가가아니라성령의도구로 이해되어야한다는것이다.

브라운은 이러한 차이를 부각시키면서 동정녀 수태 전승의 역사성

에 무게를 실어준다. 그러나 이방 신화와의 차별성이 동정녀 수태전승

의 역사성을 보증해주는 직접적인 단서가 될 수 있을까? 물론 브라운

의 가설에 개연성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단지 내용적으로 다르다고

이방 신화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한

종교의 신화나 상징이 타 문화권에서는 변형의 과정을 거쳐 수용된다

는 종교사적 사실이 브라운에게 간과된 것은 아닌가? 그리스 문화권의

로고스 개념도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받아들여지면서 내용상의 변화를

겪지 않았는가? 성서 전승 도처에 이웃 종교의 상징들을 변형시켜 받

아들인 흔적들을 감안한다면, 내용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은 오히려 수용

의 과정에서 생겨난 의미의 변화를 지시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

면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이방의 신화를 구약성서의 맥락에서-내용상

의 의미를 변경시켜-수용했다는견해도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하지 않

을까?

그러나 이러한 물음은 상징설이 더 개연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

니며, 단지 앞으로의 과제를 제시하려는 것 뿐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본 소고는 동정녀 수태를 단지 상징으로만 보는 견해에 대한 브라운의

비판을 받아들이면서도, 브라운이 말하는 동정녀 수태의 역사성 가설에

도 문제가전혀없는것은아니라는점을밝힐뿐이다.

그러나 동정녀 수태 전승의 역사성을 주장하는 신학자들과 이 전승

을 상징으로 보는신학자들 사이에 대립각만 세워진 것은아니다. 양자

사이에는 구조적인공통점도발견된다. 무엇보다도 양자모두는 동정녀

수태 전승이 역사적 체험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달리

말하자면, 양자는 이 전승이 신학적 창작이 아님을 인정한다. 단지전자

가 이 전승의근원을 예수의 부모나 주변인물들의증언에서 찾는다면,

후자는 예수에 대한제자 공동체의 역사적 체험에서 찾는다는 점이 다

29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151: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그러나 성서비평을 통해 부활하신 분에 대한 체험뿐 아니라 부활

이전의 예수로부터 받은 감동도 전승형성에 작지 않은 영향력을 주었

다는 사실도 입증되었다. 그렇다면 공동체가 부활절 이전의 예수에게

받은 인상은 무엇이었는가? 다양한 대답이 나올 법 하지만 현대 신학

자들은 오히려 한 목소리를 낸다. 예수는 성령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성령을 그리스도론의중심에 위치시키는 몰트만은물론이고, 예수세미

나의 보그도 카리스마적 권세를 예수의 인격적 특징으로 제시한다.38)

그리고 가톨릭 신학자카스퍼도다음과 같이말한다.

“성서가 증언하는 바와 같이 육화는 물론이요 예수의 전역사와 운명은

‘성령안에서’이루어진다. 성서는 예수의 생애의 각 단계마다성령이 작

용하는것으로보고 있다.”39)

초대교회가 성령의 현존에서 부활절 이전 예수와 이후의 예수가 통

일을이루고 있음을 확신했다는 것은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속

에서 예수의 정체성을 표현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이러한 정체성

을 당시 고대의 관습을 따라 탄생 이야기를 통해 드러내려 했을 것이

다. 그렇다면 동정녀 수태 교리의 동기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이 교

리는 예수 탄생의 비밀보다는 예수의 정체성을 제시하는데 그 목적을

갖고있다고 말할수 있다.

이로써 성령에 의한 잉태란 신앙고백 속에 내포된 의미가 해명될

수 있다. 예수의 삶은처음부터성령의 삶이었다는것이다. 몰트만도동

정녀 수태 전승의 신학적 의도를 하나님의 영과 아들 신분을 결합시킨

데서 찾는다.“유대교의 기다림에 의하면 하나님의 메시아적인 아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인간이다. 거꾸로 메시아적 인간은 메시아 시

대에 성령을 모든 육 위에 부어주신다. 그는 주의 영 가운데서 오시며

정지련, 예수의동정녀수태에 대한신학적반성 301

38) 마커스보그·N. 톰 라이트/김준우 옮김, 『예수의의미』(2001), 75.

39) 발터카스퍼/박상래 옮김, 『예수 그리스도』(왜관: 분도출판사, 1996), 453.

때문이다.

물론 예수께서 성령에 의해 수태되셨다는 고백이 교리의 중심 메시

지를 형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가 왜 동정녀 수태라는 개념

을 받아들였는지가 해명될 때 이 교리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더 잘 이

해될 수 있을 것이다. 본 소고는 먼저 이 교리의 중심 사상인 성령에

의한 잉태가 지시하는 의미를 살펴본 후, 동정녀 개념의 의미를 조명해

보겠다.

1. 성령에의한잉태

성령에 의한 잉태란 구약성서적 배경을 가진 신앙고백이다. 이러한

사실은 성령에 의한 잉태가 구약성서의 대망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

음을 지시하는 신앙고백임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고백의

본래적인 메시지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앙고백의 형성에 영향력

을 행사한 체험이 무엇이었는지가해명되어야한다.

부활하신 분에 대한 체험이 성령의 잉태라는 신앙고백에 지대한 영

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주지(周知)의 사실이다. 부활하신 분에 대한

체험이야말로 예수의 정체성을 성령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기때문이다. 몰트만은다음과 같이말한다.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부활절의 증인들이 부활하셨고 성령 안에 현존

하신 그리스도에게서 경험한 것을 이차적으로 역 소급하여 투사시킨 것

이다. …이리하여 예수의 탄생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예수의 미래와 그의

유래가 서로 상응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따른다. 다시 말하여 그리스

도가 하늘로 올라가셨다면 그는 하늘로부터 내려왔을 수밖에 없을 것이

다. 그가 하나님의 살리는 영 안에 현존한다면 그는 이미 이 영으로 말

미암아 태어났을수밖에없을 것이다.”37)

30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37) 위르겐 몰트만/김균진·김명용옮김, 『예수그리스도의길』(1990), 126.

Page 152: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로 부르심을받았다는양자론이거부된다.

2. 동정녀마리아

그러나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창조가 시작되었다거나 예

수가 메시아라는 메시지는 다른 전승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메시지다.

그러면 동정녀 수태 교리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의미는 무엇일까? 이

러한물음은“동정녀 마리아에게나시고”의 의미에 대해물음을제기하

도록만든다.

동정녀 수태를 상징으로이해하는슈바이처는다음과 같이말한다.

“당시의 세계관에 의하면, 동정녀 탄생은 특별한 일이긴 하나 유일한 것

은 아니었다. 따라서 동정녀 탄생에 대한 설화는 예수를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단지 한 위대한 인간으로 묘사하는 것이

다.”45)

이렇게만 이해한다면, 동정녀 수태의 의미는 성령 잉태가 지시하는

의미와 많은 부분에서 겹쳐진다. 따라서 동정녀 수태가 전체 전승에서

차지하는의미는미미하다고 밖에말할수 없다.

그러나 교회의역사를 살펴보면, 고대교회에서 이미 동정녀수태의

독자적인 의미가 부각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동정녀 수태가 성

령에 의한 잉태와 구분되면서 각각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지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즉 성령에 의한 잉태는 양자론에 맞설 무기로 사용

되었으며, 동정녀 수태는 영지주의의 가현설에 맞서 예수의 인성을 보

증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46) 달리 말하자면, 고대교회의 해석은 동정

정지련, 예수의 동정녀수태에 대한신학적반성 303

45) 에두아르트 슈바이처/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 옮김, 『국제성서주석·마태오복음』

(1992), 91.

46) 동정녀 수태 전승에서 하나님의 새 창조를 읽어낸 몰트만도 초대교회 신학에서 그

리스도의동정녀탄생은 그의신성을 가리키는표식이라기보다는그의참된인간성

주의 영을 가져와서 온 땅을 채운다. 예수는 처음부터, 그의 모든 현존

에 있어서 하나님의 메시아적 아기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

의 영으로 충만하였고 그의 모든 현존은 영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다는

것이다.”40) 슈바이처도 동정녀 수태 전승의 의미를 영과 예수의 하나

됨에서 찾는다.41) 예수와 영은 결코분리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슈바이처의 존재론적인 표현보다는 예수를 요한과 비교하며“성령의

도구나 그릇이 아닌 성령의 창조”42)로 묘사한 그룬트만의 표현이 성서

적 사고에 에 더 상응하는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예수를 성령의 창조로 선포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가? 성령을 새 창조의 영으로 소개하는 예언자 전통의 빛에서 볼 때

이러한 선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창조가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슈바이처가지적했듯이“성령은창세기1, 2장에이미언급되어

있으며 이제 새 창조를 시작하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적 힘이다.”43) 이

러한맥락에서몰트만도다음과같이말한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메시아적 아기의 탄생은…인간과 우주가 거듭나게

되는사건의 시작이요희망의 표식이다.”44)

하나님의 새 창조의 약속이 예수의 탄생에서 이미 결정적으로 성취

되었다는 것이다. 달리말하자면, 예수는 생애중간에 하나님의영의현

존 속에서 부름을 받은 예언자가 아니라 생애 처음부터 성령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던 분, 즉 성령을 받으시는 분일뿐 아니라 성령을 부어주

시는 메시아라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께서 생애 중간에 하나님의 아들

30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40) 위르겐 몰트만/김균진·김명용옮김, 『예수그리스도의길』(1990), 131-132.

41) 에두아르트슈바이처/김균진 옮김, 『성령』(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2), 96.

42) Walter Grundmann, Die Geschichte Jesu Christi (1959), 384.

43) 에두아르트슈바이처/김균진 옮김, 『성령』(1982), 92.

44) 위르겐 몰트만/김균진·김명용옮김, 『예수그리스도의길』(1990), 132.

Page 153: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한 지는 의문이다. 예수를 중보자(仲保者)로 고백하는 그리스도교 전통

은“우리와 동일하면서도 다른 인간”예수를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

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브리서4:15).

그리스도교 전통은-예수를 초인(超人)이 아니라,‘우리와 같으면서

도 다른 인간’예수를 선포하는-예수의 무죄성(無罪性) 교리의 근원을

동정녀 수태 교리에서 찾았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

430) 이후 중세교회는 예수께서 남녀 간의 성적 결합을 통해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죄 없이 태어날 수 있었다고 주장해왔다.48) 그러나 이러

한 견해의 전제, 즉 인간의 원죄가 성적 교제를 통해 유전된다는 사상

은 현대인뿐 아니라-성 그 자체를 죄악시하지 않는-성서의 사상에도

맞지 않는다. 브라운이 지적했듯이, 성서적인 관점에서는 예수께서 요

셉과 마리아의 성적 결합을 통해 태어났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는것이아니기 때문이다.49)

그러나 문제가 된 것은 동정녀 수태에 대한 생물학적 해석이지 예

수의동정녀 수태와 무죄성 교리자체가 아니다. 그리스도교전통이 강

조해왔던‘우리와 같으면서도 다른 인간’이신 예수의 정체성은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

don 451년)도 예수를 실제적인 인간이 아니라 참(truly) 인간, 즉 우리

와 동일하면서도-인간 본질의 완전한 실현에서-구별되는 인간으로

선포하고있다.50)

정지련, 예수의 동정녀수태에 대한신학적반성 305

48) 동정녀를 생물학적 순결로 이해하고 동정녀 수태를 예수의 무죄성의 근거로 간주했

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으로 가톨릭교회는마리아의 영원한 처녀성이라는 교리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해에는 성을 죄악시하는 그리스 금욕주의전통이 전제되

어 있다.

49) Raymond E. Brown, The Virginal Conception and Bodily Resurrection of Jesus

(1973), 42.

50) 라너는 칼케돈공의회의참 인간을 인간본질이유일하게 최고조로실현된사건으로

녀 수태 전승을 성육신 사상과 연결시키는 고리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할수 있다.

동정녀 수태에서-우리와마찬가지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 피와 살

을 가진-실제 인간 예수를 읽어냈던 고대 교회의 해석은 물론 이단에

맞서기 위한 시대상황적인 해석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고대 교회의 이러

한 해석은 결코 임의적인 해석이 아니다. 모성(母性)은 동정(童貞)과 대

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후자를포괄하는 개념이기때문이다.

그러나 이로써 동정녀 마리아의 의미가 모두 소진된 것인가? 동정

녀를 그저 여인으로만 해석해도 되는 것인가? 실제로 몰트만은 동정녀

의 동정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몰트만은 심지어 다음과 같

이 말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탄생의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이 의도를 오늘 우리가 실

현하고자한다면, 루터가 말한바와 같이 그리스도를‘가능한한 깊이 육

안으로 이끌어 들이기’위하여 그리스도의비동정녀 탄생을 강조하는 것

이 나을 것이다.”47)

앞에서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브루너와 본회퍼, 그리고 틸리히

도 몰트만의 견해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동정녀의 동정을 강조하

면, 따라서 우리와는 다른 예수를 강조하다 보면 자칫 성육신 사상이

주장하는 우리와 동일한 본질을 공유한 예수상이 파괴될 수 있다는 것

이다. 이러한 비판은 현대 신학자들이 새로운 것을주장하는 것이아니

라-동정녀 수태에서 예수의 인성을 강조했던-고대교회의 해석을 증

인으로 내세우고있음을시사해준다.

그러나 앞에서 거론했던 신학자들이 과연 고대교회의 전통에 충실

30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을 가리키는 표식이었다고 말한다. 참조. 몰트만/김균진·김명용 옮김,『예수 그리스

도의길』(1990), 130.

47) 몰트만/김균진·김명용옮김, 『예수그리스도의길』(1990), 130.

Page 154: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마리아의 동정은 한마디로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과 신뢰 가운데 경청

하고 조건 없이 받아들여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

세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런 내적 자세의 상징적 표현이 바로 동정성이

다.”52)

마리아의 순종을 강조하는 누가복음(1:26-38)뿐 아니라 마태복음의

탄생 이야기(1:28-25)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누가복음에서

마리아에게 주어졌던 수태고지(受胎告知)와 순종의 이미지가 마태복음

에서는 요셉에게 주어진다.“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

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더라”(1:24-25) 이와 같이 등장시키는

인물은 다르지만 순종하는 자를 통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

진다는 메시지에서는누가와 마태가 일치한다.

그렇다면 생애 모든 순간에 하나님을 신뢰하셨던 예수의 순종도 후

천적인 것이 아니라 모태의 순종을 통해 주어진 예수의 인격적 정체성

으로제시하려는데동정녀 수태교리의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달

리 말하자면, 순종이란 이미지를 통해 우리와의 동일성뿐 아니라 우리

와의차이를 동시에 말하려는데이 교리의의도가 있었던 것은아닌가?

물론 이러한 시도는 예수의 무죄성 교리를 긍정적인 용어로 바꾸어

놓은 것에 불과하며, 아직 완결된 해석도 아니다. 단지 동정녀 수태 개

념을 통해 전해져 내려오는-예수께서 우리와 같으면서도 다른 인간이

시라는-초대교회의 확신이 잊혀지지 않는데 기여하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I I I. 전망

본 소고는 논문 전반부에서 동정녀 수태 전승의 역사성 문제를 다

정지련, 예수의 동정녀수태에 대한 신학적반성 307

52) 이영헌, 『신약성서에따른예수의어머니 마리아』(서울: 바오로딸, 2000), 41.

이러한 정황들은동정녀 수태의 의미가‘우리와 같으면서도 다른인

간’예수를 선포하는데 있음을 입증해 준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보면

생물학적 해석뿐 아니라 브룬너나 몰트만의 해석도 어느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희생시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사실 그리

스도교 전통의 빛에서 보면, 동정녀 수태에 대한 생물학적 해석뿐 아니

라 상징적 해석 또한 문제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현대의 진보적신학자들과복음주의 신학자들의 차이는 본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강조점의 차이, 즉 진보적 신학자들이 예수와 우리의 동

일성을 강조하는 반면,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예수와 우리의 차이를 강

조하는 것이 다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따라서 동일성과 차이를

동시에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 동정녀 수태의 해석학적

과제로 제시된다.

그렇다면 동정녀 수태는 양자를 포괄하는 방식으로 새롭게 해석되

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러한 시도들은 끊임없이 감행되어 왔다. 예

수의 정체성을 참 인간으로 제시한 칼케돈공의회의 철학적 해석뿐 아

니라, 생물학적 해석도 이러한 시도들의일환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러

나 성서는 동시대인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성서에도

적합한 해석 범주를 요청한다. 그룬트만은 여기서 실마리를 제공해 주

는 것처럼 보인다.“동정녀란 말은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의미만을 갖

는 것이아니다. 이 말은또한 신학적 의미를 갖는다. 호세아 예언자 이

후 이스라엘은 신실하지 못한 신부로 간주되었다. 다른 신들을 따랐기

때문이다.…마리아는 믿는 자였기에 예수의 어머니가 된 것이지, 예수

의 어머니였기에 믿는 자가 된 것은 아니다.”51) 하나님의 선택의 이유

가 신앙의 순종에 있다는 것이다. 가톨릭 성서학자 이영헌 신부도 마리

아론을 전개하면서다음과 같이말한다.

30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이해한다. 참조. Karl Rahner, Schriften zur Theologie, Bd. IV(Einsiedeln·Z ü r i c h

·Koln: Benziger Verlag, 1962), 142.

51) Walter Grundmann, Die Geschichte Jesu Christi (1959), 383.

Page 155: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언급했듯이 브라운은 마리아의 조기 출산을 가장 개연성 있는 가설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마리아의 조기 출산을 공동체는 믿음의 빛에

서 동정녀 수태로 해석했지만, 반대자들은 사생아설로 해석했을것이라

고 추정한다.

이러한 정황은 사생아설을, 그리고 예수의 자연적인 출생을 전제하

는 양자론도열린 대화의 장소로 초대할 것을 요청한다. 물론 예수께서

정상적인 성적 결합이나 불법적 관계로 태어나셨다 할지라도‘성령에

의한잉태’가 부정되는것은아니다. 달리말하자면, 성서적인 관점에서

는 양자론이나 사생아설이 역사적인 실체로 받아들여져도 하나님의 아

들이라는예수의 정체성이부정되지는않는다. 왜냐하면 성서가 말하는

성령에 의한 수태란 성령을 마리아의 성적 배우자로 표상하는 것이아

니기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 이해가 역사적 연구 자체를 무시해도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연구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신앙을 잘못된 전제로부터 해방시켜 줄뿐 아니라 신앙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눈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브라운이 주장했듯이 그

리스도교 신앙은 비록 고통이 심할지라도 결코 진리 외의 그 어떤 것

에서도피처를 찾지않기때문이다.53)

둘째, 전통적인 가톨릭은 마리아를 예수의 어머니요, 교회의 어머니

로 표상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가톨릭 내에서도 독립된 주제로서의

마리아론을경계하고비판하는 목소리가 드높다. 마리아론이 신학적 연

구나 교회일치 운동에서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마리아의

신적 모성(母性)을 전제하는 마리아론이나 평생 동정론(a j e i p a v r-

qeno")은 개신교인으로서는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54) 그러나‘교회의

마리아 숭배와 마리아론의 뿌리를 우리는 유대 베들레헴 대신 에베소

정지련, 예수의 동정녀수태에 대한신학적반성 309

53) Raymond E. Brown, The Virginal Conception and Bodily Resurrection of Jesus

(1973), 68.

54) 마리아의평생 동정론은553년 콘스탄티노플공의회에서교리로제정되었다.

루면서 이 전승을 역사적 전승으로 보는 견해뿐 아니라 비(非)역사적

인 전승으로 보는 견해에도 문제가 있음을 밝히려 했다. 그리고 후반

부에서는 동정녀 수태 전승을-예수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새로운 창

조로 선포하는-신앙고백으로 제시하며 이 신앙고백의 의미를 논구해

보았다.

그리고‘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를‘우리와 동일한 인간이면서도

우리와 전적으로 다른 인간’예수를 선포하는 신앙고백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양자를 포괄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본 소고는 동정녀

의 동정을 순종으로해석하는방안을 제시했다.

총괄하자면, 본 소고는‘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

고’의 의미를‘성령의 창조이면서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신 예수’, 그리

고‘여느 인간과동일하면서도전적으로다른인간예수’를 제시하려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해석은 또한 부활하신 분의 몸인 신령한 몸

이, 그리고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내어주시는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이 부활 후에 비로소 생겨난 것이아니라 처

음부터 존재했던예수의 정체성이었다는사실을 암시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본 소고는 본 소고의 주장이 도상(途上)에 있는미완성의 가

설임을 자백한다. 오히려 신앙고백의 깊이로 들어가면 갈수록 무지의

지(無知의 知)를 깨닫게 된다. 따라서 앞으로의 연구에 다음의 두 가지

과제가 동반되기를 바라면서 끝을맺으려 한다. 첫째, 동정녀 수태전승

이 부활절 신앙을 전제한 것임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신앙을 전제하지

않는 역사적 연구에도 귀를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신앙의 빛에서 본

예수와 역사의 빛에서 바라본 예수 사이의 긴장이야말로 더 깊은 해석

으로나아가기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하는과정이기때문이다.

역사적 연구는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부터 시작한다. 부활절 신앙을

배제하더라도 남는 것, 즉 역사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여러 가지 가설들이 제시되었지만 브라운의

연구 결과를 능가하는 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30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156: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참고문헌

그린, 조엘 B·맥나이트, 스콧·마샬, I. 하워드 편/요단출판사 번역위원회 옮김.

『예수복음서 사전』. 서울: 요단출판사, 2003.

마샬, I. 하워드/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 옮김.『국제성서주석·루가복음I』.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89.

몰트만, 위르겐/김균진·김명용옮김.『예수 그리스도의 길』. 서울: 대한기독교서

회, 1990.

보그, 마커스·라이트, N. 톰/김준우 옮김.『예수의 의미』. 서울: 한국기독교연구

소, 2001.

본회퍼, 디트리히/유석성옮김. 『그리스도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슈바이처, 에두아르트/김균진옮김. 『성령』.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2.

.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 옮김.『국제성서주석·마태오복음』. 천안: 한국

신학연구소, 1992.

스템베르거, 귄터/이수민옮김. 『미드라쉬입문』. 서울: 바오로딸, 2008.

이영헌. 『신약성서에따른예수의 어머니마리아』. 서울: 바오로딸, 2000.

카스퍼, 발터/박상래옮김. 『예수그리스도』. 왜관: 분도출판사, 1996.

캠벨, 조셉·모이어스, 빌/이윤기옮김. 『신화의힘』. 서울: 고려원, 1999.

크로산, 존 도미닉/한인철 옮김. 『예수는 누구인가』. 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1998.

Brown, Raymond E. The Birth of Messiah: A Commentary on the Infancy

Narratives in the Gospels of Matthew & Luk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9.

. The Virginal Conception and Bodily Resurrection of Jesus. N e w

York·Paramus·Toronto: Paulist Press, 1973.

Brunner, Emil. Dogmatik II: Die Christliche Lehre von Schöpfung und

Erlösung. Zürich: TVZ, 1972.

Grundmann, Walter. Die Geschichte Jesu Christi. Berlin: Evangelische

Verlagsanstalt GmbH, 1959.

Rahner, Karl. Schriften zur Theologie, Bd. IV. E i n s i e d e l n·Z ü r i c h·K ö l n :

정지련, 예수의 동정녀수태에 대한신학적반성 311

의 다이아나 여신의 숭배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55)라는 몰트만의

비판은 너무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물론 마리아 공경이 마리아 숭배

로 변질되는 것은 경계해야 되겠지만, 모든 마리아론과 마리아 공경을

비성서적으로 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마리아를 순종과 모성의 상징

으로제시하는 마리아론, 즉 예수를 낳은 어머니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

는 마리아론은 개신교인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것이다. 사실 복음서

에서도 마리아는 단지 도구적인 존재가 아니라-부름을 받고 물음을

던지며 순종을 요청받는-인격적 존재로 묘사되고 있지 않은가? 무엇

보다도 순종과 모성의 상징인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드러내야만 하는

교회에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모범이요 상징이라는 사실은 영성의 빈

곤에시달리는 개신교에 암시하는 바가크다. 그리고 마리아에 대한이

해가 깊어질 때 예수에 대한 이해도 더욱 깊어진다는 것은 결코 부정

할 수 없는사실이기때문이다.

주제어

동정녀 수태, 역사성, 조기출산, 사생아설, 상징

The Virginal Conception, Historicity, Earlier Birth, Charge of

Illegitimacy, Symbol

접 수 일 2012년 6월 25일

심사(수정)일 2012년 8월 12일

게재 확정일 2012년 9월 1일

31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55) 위르겐 몰트만/김균진·김명용옮김, 『예수 그리스도의길』(1990), 122.

Page 157: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국문초록

예수의동정녀수태에대한신학적반성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적으로 동정녀 수태 전승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읽어냈다. 기적이 신앙을 입증해주던 시대에는 이러한 기적이 예수의

정체성에상응하는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적에 대한이

야기를 경외심이 아니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계몽주의 이후의

현대인들에게는 동정녀 수태 전승이 기껏해야 고대의 신화로 밖에 보

이지않을수도있다.

본 소고는 다양한 해석들과 논쟁을 촉발시켰던 동정녀 수태 전승을

신학적으로 반성해 보았다. 무엇보다도 논란의 쟁점이 되었던 동정녀

수태 전승의 역사성 문제를 살펴본 후 이 교리의 본래적 메시지를 해

명해보았다.

그 결과 본 소고는 학문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증거만으로는 동정

녀 수태의 역사성을 단정지울 수 없다는 브라운(Raymond E. Brown)

의 견해에 동의하게 되었다. 즉 이 전승을 역사적 전승으로 보는 견해

뿐 아니라 이 전승을 비(非)역사적 전승으로 보는 견해에도 문제가 있

음을밝히려 했다.

본 소고는 또한 대부분의 현대 신학자들과 함께 동정녀 수태 전승

을-달리 해석될 수도 있는-역사적 체험이나 사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선포하는 신앙 고백으로 이해하고, 그 의미를 해명해 보았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본 소고는 동정녀 수태 교리의 의미를 다음과 같

이 제시해 보았다. 첫째, 동정녀 수태는 예수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새

정지련, 예수의동정녀수태에 대한신학적반성 313

Benziger Verlag, 1962.

Tillich, Paul. Systematic Theology, vol. 2.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Trebolle Barrera, Julio C. The Jewish Bible and the Christian Bible: an

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the Bible. trans. Wilfred G. E. Watson.

Leiden·New York·Köln: Brill, 1997.

Wright, Addison. The Literary Genre Midrash. Staten Island: Alba, 1967.

31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158: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A Theological Reflection on the Virginal Conception of Jesus

Chung, Chi-Lyun

Professor

Methodist Incheon Bible Theological Seminary

Incheon, Korea

The traditional Christianity has understood the virginal conception

of Jesus-the idea that through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Jesus was

conceived of Mary a virgin - as miracle of God. This understanding

reinforces the faith in Jesus as the son of God. So the virginal con-

ception of Jesus has been understood as the historical event that

reveals the identity of Jesus, that is, the uniqueness and humanity of

Jesus. But the modern rationalists who see the miracle not with the

eyes of respect but with the eyes of the suspect, regards the virginal

conception of Jesus as embarrassing problem.

In this paper, I have attempted to make clear the theological

thinking of the virginal conception of Jesus, so that we could find the

way to make an approach to the historicity and the message of the

virginal conception of Jesus.

The result is as follows. With regard to the problem of historicity, I

agree with R. E. Brown who maintains that the totality of the

scientifically controllable evidence leaves an unresolved problem.

Even if the modern theology failed to reach an agreement on the

problem of historicity. the great part of modern theologians are of the

same opinion that the tradition of the virginal conception has the

정지련, 예수의 동정녀수태에 대한신학적반성 315

창조로 선포한다. 둘째, 동정녀 수태는 예수의 온전한 인성, 즉 우리와

의 동일성을지시해 준다. 셋째, 동정녀 수태는 예수와 우리와의 동일성

뿐 아니라 차이도 제시해 준다. 예수의 동정녀 수태는 또한 부활하신

분의 몸인 신령한 몸이 부활 후에 비로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처음부

터 존재했던 예수의 정체성이었다는사실을 암시해 주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본 소고는 더 깊은 이해를 위해 한 편으로는 유대인들

이 주장했던 사생아설 이나 양자론과도 열린마음으로 대화할 것을 촉

구했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가톨릭의 마리아론과의 대화를 미래의 연

구 과제로 제시했다. 왜냐하면 브라운이 말했듯이 그리스도교 신앙은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진리외의것으로 도피할 수 없기때문이다.

31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159: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종말론을어떻게볼까?

이오갑

(그리스도대학교, 교수)

I. 들어가는말

최근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종말의 도래를 예고하며 사람들

을 불안하고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의 해롤드

캠핑이라는 목사는2011년 5월 21일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고 세상은

불로심판을 당한다고예언했다. 그는미국뿐만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일간지 전면광고 등을통해 대대적으로 선전했으나 결국 맞지 않아망

신만사고말았다.

그런 식의 예수 재림 소동은 사실“데자 뷔(déjà vu)” 말 그대로 많

이 보아왔던 바다. 역사적으로 이미 오래 전인2세기 후반 소아시아 프

리지아에서 일어난 몬타니우스주의자들이 새 예루살렘이 페푸자라는

곳에 내려온다며, 금식하고 기도하며 그 도래를 열망했다.1) 16세기의

재세례파들, 특히 멜시오르 호프만 같은 사람도 환상과 계시를 보았다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317-347

1) 미셸 끌레브노/이오갑 옮김,『그리스도인과 국가 권력-2세기 그리스도교의 역사』(서

울: 한국신학연구소, 1993), 94.

character of confession of faith. In this context I tried to explicate the

meaning of the virginal conception as confession of faith, and

reached the conclusion that this confession of faith asks us to accept

Jesus as the new creation of Holy Spirit and as the truly human.

Finally I proposed the dialogue on the one hand with the Jewish

adoptionism and charge of illegitimacy, and on the another with the

catholic Mariology. Because Christianity can never seek refuge in

anything except the truth, painful as it may be.

31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160: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쉬운 예들이지만 종말론도 가치가 있고,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하

는 것들이다. 그런데 기독교에 들어오면 종말론은 그런 정도가 아니라

훨씬 더 중요하고 거의 본질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칼 바르트는“하나

의 종말론이 아닌 그리스도교는전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그리스도와

아무 관계가 없다”4)고 했으며, 몰트만도“기독교는 전적으로 종말론이

며 희망이고 앞을 향한 전망과 성취”라고 했다.5) 그런 지적들은 모두

기독교 자체가 종말론으로서신앙과 신학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그 본

질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이다. 예수의 첫 메시지가 바로“하나님의 나

라가가까웠다. 회개하고복음을 믿으라”는 종말의선포였다.

그런 식으로 종말론이 기독교의 중심이고 본질을 이루는데, 사실 종

말론이 무엇인지, 어떤것인지를잘 모르고 있는것이현실이다. 종말론

을 모르는 것이나 일부만 아는것, 오해하는것, 종말론이없는것, 모두

기독교에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 기독교의 핵심과 본질이 종말론이라

면, 그것을 모른다는것은기독교를모른다는 얘기가 되고, 거기에 문제

가 있다는 건 기독교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이다. 한국 교회가 현재 영

적인 위기를 겪으며 내외로부터 많은 비판과 질책을 받고 있는 것도

그런문제와 무관하지않다.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필자는 이 글에서 과연 기독교의 종말론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

히 종말론과 관계된 많은 문제점들이 있고, 심지어는 사회적인 물의까

지 발생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서, 그런 폐해를 방지하면서 동시에

건강하고 올바른 종말론을 세우기 위해서는 어떤 점들을 유의하며 살

려야하는지를 중점적으로본다.

그를 위해 필자가 전제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기독교 종말론

이 가지는 몇 가지대립적 또는 변증법적 긴장(tension)을 유지해야한

이오갑, 종말을 어떻게볼까? 319

4) 칼 바르트/조남홍역, 『로마서강해』(서울: 한들출판사, 1997), 471,

5) 위르겐몰트만/전경연, 박봉랑 역, 『희망의신학』(서울; 현대사상사, 1979), 14.

고 주장하면서 종말의 도래를 설교했다. 그는1533년 새 예루살렘이6

개월 후에스트라스부르로내려온다고예언하고 최후의 전쟁을 위해무

장할 것을 선동하다가 투옥되었다. 이듬해인1534년 일단의 재세례파들

이 같은 사상을 가지고 이번에는 뮌스터가 새 예루살렘임을 주장하며

신정을 세웠으나 비극적으로 진압당한 일도 유명하다.2) 1818년 미국의

윌리암 밀러(William Miller)는 그리스도가 1843년 3월 21일과1844년

3월 21일 사이의 언젠가 재림한다고공포했다가실패한적도있다.3)

우리나라에서도 재림과 휴거를 주장하며 사람들을 미혹시켰던 운동

들이많다. 특히다미선교회의이장림은종말이1992년 10월 28일 자정

에 온다며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종말이 온다는 당일에는 텔

레비전9시 주요 뉴스들도 생중계를 하는 가운데 전국에서 흰옷을 입

고 모여든 추종자들이 밤새 울부짖고 기도하며 매달렸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현재도 그 분파들이 남아서2000년이 종말이라는 등

계속시일을 변경해가면서신도들을 미혹하고있다.

종말론은 그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파괴시킬뿐더러 사회적

으로도 큰 분란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위험하고 피해야 하는 교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종말론은 부정적인 면만을 갖지는 않는다. 종말론

에는 순기능이 있어서, 그것을 믿는 개인에게 그리고 사회에도 긍정적

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예를 들어 끝이 있다는 것을 알면 현재의

시간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잘 사용할 수 있다. 로마의 오랜 된 경구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왜 죽음을 기억해야

할까?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삶을 값지고 풍요롭게 하기 때문이다. 환

경론자들의 종말론은 생태계의 파괴로 동식물들이 멸종하는 것뿐만 아

니라 결국은 인류도 멸망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런 식으로 인류에게

경각심을갖게해줘서 환경친화적인삶과문명으로의전환을 가져온다.

31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2) R. H. Bainton, The Reformation of the Sixteenth Century (Boston: Beacon Press,

1956), 105.

3) 안토니 A. 후크마/유호준역, 『개혁주의종말론』(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183.

Page 161: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기독교의 종말론은 시간의 미래나 종말을 넘어선 새로운 시작, 새로

움, 혹은 새로워짐의 문제이다.7) 기독교는 하나님이 온 우주와 역사를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섭리하고 인도해서 완성하며, 그의 백성들은 그

가 성취하는 새 세상, 새 시간속에서 영원한 생명과 평화와 안식을 누

린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래서 종말론은 항상 새로움, 또는 새로운

시작을 관심하고 대망한다. 아모스나 미가, 제1 이사야 같은 예언자들

이 하나님의 심판으로서의종말을 선포하면서도, 정도의 차이는있지만

항상 구원에 대해 문을 열어두고 있었던 것이나, 묵시문학에서“이 세

대(cet aíon-ci)”에 대해 새로운“저 세대(cet aíon-là)”를 대립적으로

마주세우면서 종말론을특성화했던것이모두그런예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종말론은 이 세대와 저 세대, 이 세상과 저 세상,

세상나라와 하나님의나라, 사망과 생명, 죽음과 부활, 옛 것과새 것의

대조성 또는 대립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그 둘을 항상 함께 고려

하고 규명한다.8) 단지 종말만 다룬다든지, 단지 새 세상만 그리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기독교적인 종말론이라고할 수 없다는것이다.

기독교의 종말론으로서 필수적인 조건 또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현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는 메시아가올 것을기대했으나신약에서는“메시야가왔다”고 선포했

다. 물론 예수가 역사적으로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논

란이있고, 특히공관복음서에서볼 때 예수가 스스로 메시야임을 천명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부활절 이후의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 사이의 불일치를 예수가 메시야임을 숨겼기 때문이라는 이른바

“메시야의 비밀”(Wrede)을 통해 해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교회는 예수가 그리

이오갑, 종말을 어떻게 볼까? 321

7) Cf. 위르겐 몰트만/김균진옮김,『오시는 하나님-기독교적종말론』(서울: 대한기독교서

회, 1997), 15,

8) R. 스멘트/편집부역,“구약성서의종말론”, 기독교사상편집부 엮음,『종말론의 올바른

이해』(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63.

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종말론을 구체적인 현실 상황과의 연관성 속에

서 받아들이거나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다.6) 그 두 가지가 충족된다면

어떤 종말론을 주장해도 문제가 없고, 오히려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과

영성, 삶을건강하고아름답게인도하는좋은교리가 되리라고 본다. 그

런 조건들은 무엇을 의미하며 왜 필요한 것일까? 그런 점들을 구체적

으로 보는 일은 그 자체로서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종말론을 비판적

으로 되돌아보면서 동시에 그것의 올바른 방향과 내용을 제시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I I. 종말론, 무엇인가?

주지하듯이 종말론eschatology는“끝”이나“마지막”을 의미하는 희

랍어eschaton과“이론”을 의미하는logos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어원적

의미에서종말론은끝이나 마지막에 관한이론이다.

그러나 종말론이 단순히 시간적 미래의 종말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라고 할 수는 없다. 물론 초기 예언서들이 말하는“야훼의 날”같은 주

제도 종말론의 하나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히 발전하지

않은 종말론의 기원 혹은 초기 형태이다. 종말론은 거기로부터 출발하

기는 하지만 포로기 전후를 거치면서, 묵시문학의 대두로써 대폭 확장,

발전된다. 특히 신약에 들어오면 거의 혁명적인 관점의 전환이 일어나

면서 아주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고 할 수 있다. 그런점들은 논의를 진

행하면서 보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그런 과정을 통해기독교 종말

론이 어떻게 형성되었느냐는점이다. 즉 기독교적으로 종말론이란어떤

것이며, 어떤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것이다.

32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6) 종말론과 상황에 대해, 졸고“종말론과 한국교회”,「한국조직신학논총」제31집(2011.

12)에서 한국교회의 구체적인 상황들과 연관시켜 본 적이 있으나, 여기서는 종말론

해석의원리적인관점에서 다룬다.

Page 162: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로, 때로 자기파괴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며, 이단으로 정죄되고, 교계

와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키기도한다.

그렇다면 종말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교회들을 유익하게 하고 동

시에잘못될 위험성도 피할 수 있을까? 즉 종말론을 어떻게 봐야하고,

어떤종말론을 택해야 하며, 종말론에서 어떤점을 강조해야하는가 하

는 문제이다.

필자가 볼 때, 이런 저런 종말론들은 각각의 장점과 중요성, 가치를

가지고 있어서 교회마다 학자마다 무엇이나 택할수 있고, 어떤점이든

강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다음의 두 가지 조건을 충

족시킨다는전제가 있다.

하나는, 종말론들은 대개 대립적인 극을 가지고 짝을 이루는 데, 그

대립성이 만들어내는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실현

된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은 짝을 이룬다. 그런데 두 종말론은 서로

대립적이어서항상긴장을 유발한다. 그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어느한

쪽으로 치우치면서 다른 한 쪽을배제하면 잘못되고 만다. 그래서 기독

교의 종말론은 그 대립적 또는 변증법적 긴장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9)

또 하나는, 종말론이 선포되는 교회의 현실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자신이 속한 교회와 사회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 하는 것이

다. 그 점을 고려해서 그 상황에 필요한 종말론을 선포해야 최대의 정

당성과 장점을 가지면서, 폐해는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 그 두 가지

점을차례로 살펴보자.

이오갑, 종말을 어떻게볼까? 323

9) 그 대립성은‘서로 반대되는 것의 공존’이라는 점에서 역설(paradox)이며, 키엘케고

르적인 의미에서 변증법이기도 하다. J.-D. Kraege, “La Dialetique kierkega-

ardienne”, Revue de theologie et de philosophie, vol. 118 (1986), 47-66. “Theo-

logie analo-gique et theologie dialectique” vol. 111 (1979), 13-34. 그리고 편집부

엮음, 『변증법 입문』(서울: 이삭, 1985).

스도(메시야)이며, 백성들을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구원한 분으로 고

백하고 선포했다.

그러므로 종말론이란 마지막 때에 관한 이론 혹은 교리이지만, 그것

이 기독교적이기 위해서는 단지‘마지막’만이 아니라‘새로움’이나‘새

로운 출발’의 지평 혹은 전망을 가져야 하며, 동시에 그것이 예수그리

스도의 사건과 함께 이미 실현되었고 시작되었다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그런 관점에서 이 세상의 종말, 하나님의 나

라,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와 최후의 심판, 천년왕국, 죽음과 부활, 영생

등의 여러 주제들을, 우주적인 차원에서 혹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아주

다양하게다룬다.

그런 점에서 세부적으로 보면 종말론은 단수로 표현되기 어려울 정

도로 다양하고 복잡하게 나타난다. 성경에서도 종말론은 이미 여러 종

류로, 여러 형태로 나타났고, 교회에서 해석되고 부연되는 과정에서 다

양한 종말론들이 등장했다. 그 이유는 물론 종말론이 한 번에 다 완성

되어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구약성서와 중간시대 신약성

서 시대, 그리고 이후 오랜 교회의 역사를 거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각각의 상황 속에서 받은 예언자들과 성서 기자들이 계속적으로 만들

어왔으며, 또 교회의 신학자들이 각 시대의 관점과 요청에서 그것들을

해석하면서, 다양하게확장혹은발전시켜왔기때문이다.

그런 종말론들을 종류별로 보면 묵시문학적 종말론, 미래적 종말론,

실현된 종말론, 현재적 종말론, 집단적 종말론, 개인적 종말론, 실존적

종말론, 정치적 종말론, 영적 종말론, 저 세상적 종말론, 이 세상적 종말

론 등을들 수 있다. 그런것들은 구약 예언자들로부터내려오는 신, 구

약성서들 속에서, 그리고 역사적으로여러 신학자들을 통해서 정리되고

표현되었던 것들로서 모두 나름대로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정당성과 근

거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또한 그런 종말론들은 모두위험성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앞의예들에서도보았듯이, 교회와 기독교인들을잘못된 방향으

32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163: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약성서가“하나님의 나라”와 관계해서 가지고 있는 근본 메시지이기도

하다.12) 앞에서도 본대로, 신약성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 특히 십

자가와 부활사건 이후 예수를 구약에서 기대하던 메시아로 고백하기

시작했다. 즉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세상 속에 들어왔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평화와 영원한 생명이 사람들에

게 주어졌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신자들은 세상과 죄의 권세

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다. 구원은 미래에 이루어

질 것이아니라 믿음가운데서이미이루어졌다. 가령바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서

새 생명을 얻는다(롬 6장). 또한 요한에게서도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낸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함인데, 그 구

원이나 심판은 이미이루어졌다(요 3:18).13)

그러나 신약성서는 구약 예언서들로부터 다니엘서 등의 묵시문학을

거쳐 내려오는 미래적인 종말론도 여전히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

의 미래성은 구약과 중간시대 묵시문학의 연장인 요한계시록이나 이른

바 예수의 소묵시록인 마가복음13장 등, 바울의 소묵시록인 데살로니

가전서4:16-17, 고린도전서15:50-52 같은 데서 나타난다. 뿐만 아니

라 주의 기도가 가르쳐주는“나라가 임하옵시며”(마 6:10)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가져야 하는 태도나 덕목, 자세들을 가르쳐주

는 예수의 말씀들에서도잘 나타난다.

그런 식으로 성서에는 실현된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이 공존하고

있다. 서로 대립된 그 두 종류의 종말론은 항상 어디서나 공존하면서

하나의 긴장을 유발하고 있다. 심지어는 가장 대표적이고 철저한 실현

된 종말론을 간직하고 있는 요한복음에서조차도 그 두 종말론이 만들

이오갑, 종말을 어떻게볼까? 325

11) C. H. Dodd, The Parables of the Kingdom (New York: Charles Scriber’s Son’s,

1961).

12) 이하실현된(현재적) 종말론의설명은이오갑, “종말론과한국교회”, 166-168 참조.

13) Cf. 루돌프불트만/허혁역, 『신약성서신학』(서울: 성광문화사, 2004), 398.

I I I. 변증법적긴장을유지해야한다!

틸리히는 자신의 조직신학에서‘하나님의 나라’라는 상징이 가지는

이중성을 강조했다. 그에게도 역시 하나님의 나라는 대립적 이중성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데, 그것이 무시되면 하나님나라는 역사에 대해어

떤 의미나 능력도 가지지 못한다.“‘하나님 나라’의 상징은 역사의 의

미에 대한 물음에 긍정적이고 적합한 대답이기 위해서 내재적이면서

동시에 초월적이어야한다. 어떤일방적인 해석은 그 상징의 힘을박탈

해버린다.”10) 틸리히의 그런 인식 역시 기독교 종말론의 변증법적 성격

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종말론이 가지는 그 대립적 이중성, 즉 서로 대립적 성격으로써 짝

을 이루는 종말론은 시간적인 관점에서 실현된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

론, 공간적 관점에서 이 세상적 종말론과 저 세상적 종말론, 그리고 범

위적 관점에서 개인적 종말론과보편적 종말론 등으로구분될 수 있다.

물론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적할 수 있고, 대칭을 이루지 않는개별

적인 종말론들도 있다. 그런 종말론들은 어느 것 하나도 다 버릴 수 없

는 기독교의 영적 자산으로서 오늘날에도 필요하고 적용될 수 있는 현

재성(actualité)을 갖는다. 그러나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극단으로 치우

치지않고, 균형과 긴장을 유지해야한다는 전제는 있다. 그렇다면그런

종말론들은 왜 대칭을 이루고 있는지, 그리고 또 왜 그 대립적인 긴장

을 유지해야 하는지등을주요한 그 세 가지대칭들을중심으로본다.

1. 실현된종말론과미래적종말론사이의긴장

“실현된 종말론”은 C. H. 다드가 밝혀낸 것이기도 하지만,11) 사실 신

32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1 0 ) P. Tillich, Systematic Theology, I I I(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3), 359. 이 책은국역되어 있으나여기서는 원저를 보았다. 폴 틸리히/유장환 역,

『조직신학』(서울: 한들출판사, 2001-2008).

Page 164: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재가하나님께인정되고 받아들여졌다는점을인식하지못하고, 멀거나

혹은 가까운 미래만을 바라보며 살 위험이 있다. 혹은 현재는 단지 미

래만을 위해 존재하는, 미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거쳐야 하는 것 이

상이되지못함으로써, 현재를 무의미하거나무가치하게만들수 있다.

실현된 종말론은 예수와 함께 도래하고, 그의 은총으로 경험하는 하

나님의 나라를 지금 이곳에서 살게 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받고 구원받은 기쁨, 자

유, 평화, 사랑을 현재의 삶 속에서-그삶이비록열악하고고통스러워

도-누리게 한다. 그들은 삶을 사랑하고, 중요하게 여기며, 아름답게 가

꾸어나간다. 왜냐하면 그가 살고 있는 현재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

시간이기때문이다.

그러나 실현된 종말론도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즉 거기에 경도되면

미래를 상실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곧 희망을 잃는 것이기도 하고,

현재의 난관을 헤쳐 미래를 향해가는 의지나 동력도 약화된다. 그저 현

재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 현재 이루어진 자신의 구원에 만족하고 감

사하며 거기 안주할 위험이 있다. 또한 현재의 불완전, 불의, 부조리, 불

신, 부자유 같은죄의현실을 보지못하거나너무가볍게볼 수도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루어졌으면서 동시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

았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이미(déjà)”와“아직 아니(pas encore)” 사이

의 현재를 사는 실존이다.16) 즉 그들의 현재 속에는 실현된 종말과 미

래의 종말이 함께 들어와 있다. 이 점을 간과하고 어느 한쪽으로만 달

려가면, 현재를 무시하고 미래만을 전부로 여기거나, 아니면 현재에 몰

입되어 미래 없이 희망도 없이 살아갈 수 있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미

래나 또는 현재에 대한 환상을 갖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재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기뻐하고 향유하면서 동시에 미래의 나라에

이오갑, 종말을 어떻게볼까? 327

16) O. Cullman, Le salut dans l’histoire; l’existence chretienne selon Nouveau Testa-

ment (Neuchâtel: Delachaux & Niestle S. A., 1966), 167-186.

어내는 긴장은 사라지지않는다.

그런 예는 요한복음 곳곳에서 찾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요한이 즐

겨 썼던표현“~할 때가오나니 곧 이때라!”만을본다.“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

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5:24, 또한4:23, 16:32).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올 것이다(미래). 그런데 그 때가

곧 이때다(현재). 미래가 있으나 그 미래가 현재 예수와 함께 돌입했다

는 이 묘한 표현에서 보는 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즉 미래적인 사건으

로서의 종말이 살아있지만, 강조되는 것은 현재이고 예수 안에서 실현

된 생명이다. 그처럼 현재와 미래적 종말의 역설 또는변증법적 긴장은

완전히 해소되지않고계속유지되고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실현된 종말론이 옳으냐, 미래적 종말론이 옳

으냐는 것은 의미가 없다. 어떤 종말론이든지간에 그런 긴장을 유지하

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긴장을 유지하지 못하고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치우치게되면기독교의종말론이아니거나잘못된 종말론이된다.

미래적 종말론은 불완전하거나 고난당하는 현실 속에서 미래에 대

한 희망을 가지게 한다.14) 사람들은 그 희망으로써 현실이 아무리 어려

워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는다. 신앙의 자유가 위협받는 시

대에도 미래의 구원과 승리에 대한 희망이 있다면 현실과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다. 자우터가 종말론의 초점을“소망”에 놓

고 그 과제를“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 대한 대답”으로 한 것은15)

그런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종말론이 미래적이기만 하다면 유대교 묵시문학적 종말론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또 예수와 함께 세상에 도래한 하나님의나라

의 현실도 보지 못한다. 그래서 미래적 종말론에 경도되면 자신들의 현

32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14) 이하미래적종말론의설명은 이오갑, “종말론과 한국교회”, 162-164 참조.

15) G. 자우터/최성수 옮김,『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을 위하여-종말론 입문』(서울: 한

들출판사, 1999), 8.

Page 165: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에게서20) 잘 드러났다. 중세기의 교회주의(ecclesiasticism) 특히 샤를마

뉴대제 이후의 기독교제국은 가장 대표적인 이 세상적 종말론이라 할

수 있고,21) 인간성이나 역사의 무한한 진보를 낙관했던19세기 자유주

의 신학과 사회복음운동, 그리고1970년대 이후 교회성장론자들이 보

여주었던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하려는 경향같은 데서도22) 찾

아볼수 있다.

그러나 성서와 신학 속에는 그런 이 세상적 종말론과는 반대되는

저 세상적 종말론 역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23) 가장 대표적인 것은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 같은 묵시문학에서이다. 그것은 묵시문학 자체

가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이 열망했던 역사와 이 세상에 대한 실망과

환멸에서 시작되었고,24) 또한 세상의 적대자들에게 박해당하고 순교당

한 이들에 대한 보상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쉽게 이해된다. 즉 하

나님의 나라는 죄와 악한세력이 지배하는, 그래서 실망과 좌절만이계

속되는 이 세상이 아니라, 전혀 새롭고 초월적인 피안의 세상에서 이루

어진다는것이다.

그러나 묵시문학 외에도 제2 이사야 같은 경우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적이 아니라는 점을 흥미 있게 보여준다. 그의 예언을 보면 누가

참 하나님인지, 신의진정성을 재판을 통해 결정하는 양식이 많이 나온

다. 거기 보면, 여호와와 이방 민족의 신들은 법정에서 서로 대결한다.

이 재판을 통해누가 진짜하나님인지결정된다. 과거에는 신들의 진정

성과 우월성은 전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스라엘은 패망한 민족이고,

포로로 잡혀왔으므로, 이스라엘의여호와는 전쟁과 무관하게참 하나님

이오갑, 종말을어떻게볼까? 329

20) 위의논문, 358.

21) 이형기, 『역사 속의종말론』(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4), 115-116

22) 백상열,“교회성장론과 하나님의 나라”, 황성규박사 정년은퇴 논문집 편찬위원회 편,

『하나님 나라그 해석과 실천』, 578.

23) 이하저 세상적종말론의설명은 이오갑, “종말론과한국교회, 171-173 참조.

24) Cf. 왕대일, “묵시문학운동의 역사이해”, 편집부엮음, 『종말론의 올바른이해』, 79.

대한 희망을 가지고 여전히 극성하고 있는 죄의 현실을 이겨나가도록

격려한다.

2. 이 세상적종말론과저 세상적종말론

이 세상적 종말론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이루

어진다는의미이다.17) 이 세상은 가정, 교회, 국가, 제도나 이데올로기또

는 영적이거나 도덕적인 상태 같은것들을 망라한다. 매우현실적 성격

을 가지는 이 종말론은 구약성서에서, 특히 예언서들 속에서 두드러지

게 나타났다. 가령 제1 이사야(11장)에 나오는 다윗의 후손에서 나올

메시야는 철저하게 이 세상적 임금이다. 그런 지상적 메시야는 미가나

예레미야 같은 다른 예언자들에게도 공통적이다. 또한 이사야나 미가

등 대부분의 예언자들이 꿈꾸었던 이스라엘의 최종적인 구원은 지상의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는것이었다(사 11장, 미 4장등).

이 세상적 종말론은 신약에서는 많이 나타나지 않지만, 누가복음17

장 21절“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는 예수의 말씀 같은 데서

발견할 수 있다. 거기서“너희 안에”의 전치사 entos는“안에(in)” “내부

에(within)” “가운데(midst of)”로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것이든, 누가복음을주석한 하워드 마샬의 말대로, 예수가 말한하

나님의 나라는 인간들 가운데 있는, 그래서 사람들이 잡으려고만 하면

잡을 수 있는 그 무엇임은 분명하다.18)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적

인 것, 이 세계내적이라는 의미이다. 역사 속에서 이 세상적 종말론은

콘스탄틴 황제 이후의 로마 제국을 지상의 하나님의 나라로 선포한 유

세비우스나19) 천년왕국을현재의 교회의 시대로 보았던 아우구스티누스

32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17) 이하이 세상적 종말론의 설명은이오갑, “종말론과 한국교회”, 175-177 참고.

18) I. 하워드 마샬/번역실 역, 『루가복음』(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6), 381-382.

19) 정용석,“초대 교부들의 하나님의 나라 이해”, 황성규박사 정년은퇴 논문집 편찬위원

회 편, 『하나님나라그 해석과실천』(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0), 353.

Page 166: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휴거를 주장하며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바로 그런 위험을

극복하지못한예라고 하겠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서 그리고 또한 저 세상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곳으로 오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그리로 가는 곳이

기도하다. 그래서 종말론은 이 세상적이면서동시에 저 세상적이다. 그

두 종말론의긴장을 잘 유지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이루어진

하나님의나라를 감사하며살아나가면서도, 피안의 하나님 나라에 자신

을 여는개방성과, 낯선미지의 세계에 투신하는 용기와 진취성을 가질

수 있다. 또한 저 세상의 하나님의 나라를 희망하면서도 이 세상을 유

기하지 않을뿐더러세상을 사랑하고세상에 대한책임을 떠맡는다.

3. 개인적종말론과집단적종말론사이의긴장

집단적 종말론은 민족과 같은 어떤 집단이나 사회 전체에 함께 도

래하는 종말을 예고한다. 그 종말론은 구약의 초기 예언자들에게서 나

타나는데, 그들은 계약 백성인 이스라엘 전체의 운명과 관계된 종말을

선포했다. 가령 아모스는“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2:6)를 고발하며

국가에 대한 심판을 예고했다. 그에게서 종말은 국가 전체에게 닥치는

운명이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자신이 속한 집단과 공동의 운명

으로 묶여 있다. 집단이 망하면 개인도 망하고, 집단이 흥하면 개인도

흥한다. 그래서 예언자들의 종말론적 관심은 국가와 민족 전체에 집중

되었고, 그 속에서 개인의자리는 찾아보기어려웠다.

그러나 역사가 지나면서 점차 개인적 종말론이 대두된다. 그 출발이

에스겔이라고 할 수 있다.“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가 시

다는 속담이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다”(겔 18장)는 선언이 보여주듯, 에

스겔은 종교나 율법의 준수를 더 이상 집단적 민족의 일로 보지 않았

다. 그는하나님 앞에서 개인의 올바른 태도와 행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상호관계를 주목하고 강조했다. 구원이나 심판, 생명이나 사망도 민족

이오갑, 종말을 어떻게볼까? 331

이어야했다. 그래서 제2 이사야는 종교를 정치와 무력으로부터 떼어놓

고, 오직 변론으로써, 말로써만 여호와의 정당성을 밝혔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실패해도 계속 여호와를 믿고 희망할 수 있는 근

거를얻었다.25)

제2 이사야의 일종의 그 탈정치화는 종말론에 새로운 관점을 부여

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을 초월하는저 세상적인 것이다. 그래서하

나님의 백성 역시 세상의 조건에 얽매이거나 구애받지 않는다. 그것은

불트만이“탈세상화”로 명명한 신약에서의 종말론과 일치한다.26)“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

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물건 쓰는자들은 다 쓰지못하는 자 같이하라”(고전7:29-

31)는 바울의 권면은 하나님의 나라가 저 세상적이기 때문에 가능한

얘기이다.

저 세상적 종말론은 가장 많은지지를 얻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명칭 자체가“하나님의 나라”,“하늘나라”라는 것은 이미 그 나라가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표상

하는 것도 그렇지만, 개인이 죽어서 가는“천국”과 그곳에서의 영원한

삶은현재까지도그리스도인들의기본적인신앙을 이루었다.

이 세상적 종말론은 실현된 종말론과 같이 이 세상의 가치와 중요

성을 고무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세상을 절대화한다든지, 초월적

인 세상에 닫혀있게 된다든지하는 위험도 있다. 반면에 저 세상적 종

말론은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하며, 세상을 넘어선 곳의 하나님 나라를

믿고 소망하는 근거가 된다. 반면에 현실도피적인 신앙을 가지게 하거

나 신비주의, 열광주의에 빠지게 할 위험도 있다. 흔히 예수의 재림과

33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25) C. 베스터만/번역실역, 『이사야 I I I』(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6), 25.

26) R. Bultmann, Glauben und Verstehen, tr. par A. Malet, Foi et Comprehension I-

L’Historicite de l’homme et la revelation (Paris: Seuil, 1968), 455, 그리고 루돌프

불트만/허혁역, 『신약성서신학』, 439 이하.

Page 167: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그렇다면 신약성서에는 개인적 종말론만 존재할까? 그렇지는 않다.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의 신앙이나 삶에 따라 들어가지만, 그럼에도 불

구하고 여전히 집단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의나라는 하

나님이 새롭게 부르고 선택한 백성들의 나라이다. 그런 점에서 새 계약

백성인 교회의 나라이고,“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각 지

체들이 연합한“몸”으로서의 나라이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은총으

로 구속받은 공동체가 함께 나누고 체험하는 새로운 형태의 집단적 종

말론이 나타난다.

역사적으로 집단적 종말론은 앞에서 이 세상적 종말론의 예로 제시

했던, 유세비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 특히 중세교회의 경우가 이에 해

당되며, 세속적이긴 하지만 마르크스의프롤레타리아혁명을 통한유토

피아적 공산사회역시같은종류라고 할 수 있다.30)

집단적 종말론은 사회적인 관계와 참여, 연대성을 강조하며, 개인에

함몰되지 않고 사회나 타자를 공동운명체로 받아들이게 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집단을 너무강조하면개인의 자유와 인격, 주체성을 말살

하는권위적이고획일적인전체주의로 귀착될 수 있다.

반면에 개인적 종말론은 개인의 인격과 자유를 중시하며, 하나님과

타자 앞에서 주체적이고 책임적인 자아로 세워나가는 강점이 있다. 그

러나 그것은 사회나 공동체를 소홀이 여기게 한다. 자칫 인류의 뿌리

깊은죄라고 할 수 있는 자기중심주의나이기주의에 빠져들게 되고, 교

회 내에서도 개인주의적 신앙이나 삶에 젖어 공동체의 일치를 저해할

수 있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집단적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선 개인의 위중함을 강조하면서도, 그가사랑으로 맺는사회적 관

계를 중요하게 여긴다. 기독교에서는 자신만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구원을 받으며, 그 공동체 속에서 자신이 제외되지 않는다. 즉 개인적

이오갑, 종말을 어떻게볼까? 333

30) 이형기, 『역사속의종말론』, 214.

단위로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책임에 따라, 그의

삶이 결정한다는 것이다.27) 그런 개인적 종말론이 대두된 이유는 에스

겔의 역사적 경험때문이다. 포로로 잡혀간 유대민족은좁은 영토와 성

전을 중심으로 한 집단적 삶의 양식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그리

고 바벨론과 주변 여러 나라로 흩어져서 각자 알아서 살아 남아야 했

다. 그러면서그들은 언제어디서, 어떤조건에서든지하나님 앞에서 스

스로 순종하고 그의법을 따라야 하는책임적인 존재임을 자각했다. 에

스겔은 그런 상황에서“개인”을 부각시키고 개인의식을 앙양했던 것이

다.28)

그러나 개인적 종말론이 화려하게 꽃피는 것은 묵시문학 다니엘서

라고할 수 있다. 다니엘서는구원이 철저하게 선별적임을 보여준다. 그

책은 시리아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의 가혹한 유대교 탄압과 유다-

마카비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지키

기 위해서 목숨을 바쳐 싸웠다. 반대로 이방문화 유입에 호의적이고 안

티오커스에가담했던,“배반자”라고불렸던 유대인들도많이있었다. 그

런 때에 다니엘은 더 이상 선민 이스라엘의 구원, 민족의 전체의 구원

을 얘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니엘서에 따르면, 재판장의“책”에 낱낱

이 기록된 대로최후까지 믿고충성한 자들만이 구원을 받는다. 이방의

적국에 대항해 신앙의 순수성을 지킨 개인들과 순교자들만 구원을 받

고, 그렇지 않은자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12:1-3).29)

개인적 종말론은 신약성서에 들어와서 완전히 정착된다. 가령 공관

복음서에서도 하나님의나라는 개인들의나라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그 도래를 선포하는 말씀을 듣는 개인들이 회개하고 결단함으로써 응

답하는 나라이다. 바울 서신에서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얘기하지만

그것역시믿는개인의 사건이고구원이라는점에서 차이가 없다.

33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27) G. 포오러/방석종 역, 『구약성서개론하』(서울: 성광문화사, 1994), 295.

28) 위의책, 295.

29) Cf. N. 포르퇴우스/박철우 역, 『다니엘』(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6), 180.

Page 168: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해야 한다. 왜 현재적이 아니고 미래적 종말론인가? 반대로 왜 미래적

이 아니고 현재적인가? 거기에 대한 답변 역시상황과 관련된다. 즉 종

말론은 항상당시의 시대적, 공동체적상황을 고려하고, 그 상황에서교

회와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적절한 것을 택해서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논의했지만, 종말론은 당시상황에서 생겨난 것이다. 가령묵

시문학적 미래적 종말론은 강대국들에 의해 탄압받던 시대의 것으로,

하나님이 곧 불의한 역사에 개입해서 악한 무리들을 심판하고, 자신들

을 구원한다는 내용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고난과 시련의 시기에 굴

복하지 않고신앙의 순수성과정체성을잘 지켜나갈수 있었다.

실현된 종말론 역시 상황과 관련된다.32) 그것은 유대교의 묵시문학

적 미래적 종말론의 문제점과 폐해가 심각했던 때의 종말론이다. 그리

스나 로마의 지배에 시달리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또는 메

시아의 통치를 열망하며 순수한 이스라엘을 회복하려고 했다 그런 운

동은 여러차례 폭동으로 이어졌으며 그 때마다 무자비한 유혈 진압으

로 끝나고 말았다. 특히66년 로마 총독이 성전 금고를 강탈한 것을계

기로 일어난 폭동은 유대전쟁으로 확대되어70년 예루살렘 함락과 대

학살, 성과성전의 완전한 파괴를 가져왔다. 당시어린예루살렘교회는

68년경 성을 빠져나와 요단강 동편의 펠라(Pella)로 이주함으로써 참

사를 피할 수 있었다.33) 어쨌든 그런 과격한 종말론은 민족과 국가 자

체의 파멸을 대가로 지불해야 할 위험을 가졌다.34) 뿐만 아니라 당시에

이오갑, 종말을 어떻게볼까? 335

32) 이하실현된 종말론의역사적 배경설명은 이오갑,“종말론과 한국교회”, 168-169 참

조.

33) E. 트로크메/유상현 옮김,『초기 기독교의 형성』(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3), 59. 그

리고 E. 로제/박창건 옮김, 『신약성서 배경사』(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42.

34) 틸리히가 지적했듯이 실제 역사도 그렇게 진행되었다.“하나님의 나라는 역사내적인

발전만으로는이루어지지않는다. 로마시대에 유대교의 정치적 동란속에서는 예언

자적인 예기의 그 이중적인 성격이 거의 잊혀졌는데, 그것이 이스라엘의 국가적 존

재의완전한 파괴를초래했다.”틸리히역시유대인들의종말론적기대의 역사적-초

주체들을배제하는공동체의구원이 아니다.

IV. 상황을고려해야한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떤 특정한 종말론을 주장할 수 없을까? 항상

대칭되는 두 가지를 함께 말하거나, 그 둘 사이의 중간 쯤 되는 어떤

입장만을 전해야 할까? 그렇게 되면 자칫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항상 상대적일뿐더러 애매하기까지 한

종말론이될 수 있다.

변증법적 긴장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항상 중립을

유지하거나, 상대주의에 빠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어느 한 쪽이면서

동시에 다른 쪽인 그“동시성”(simul)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칼케톤 신조가“예수는 참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참 인간”이라고 했던

것이나, 루터가 그리스도인을“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라고 했던 것과

같다. 그런 역설 또는 변증법을 가진다는 것인데, 그것은 또한 상대적

가능성에 열려 있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 주장이 틀릴 수 있다는 점을

긍정한다는의미도 내포한다.

그런 개방성과 겸손함을 전제로 어떤 특정한 종말론을 강조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하나를 택해서 선포할 수도있다. 실제로요한복음은변

증법적 긴장을 유지하지만, 펠만의 표현대로“압도적으로 현재적인 종

말론”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요한계시록이나 묵시문학도 그렇지만, 누

가는“압도적으로 미래적인 종말론을 대표한다.”31) 그렇게 철저하고 분

명한 입장을 가진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없다. 성서가 이미 그것

을 보여주고 있지않은가?!

그렇게 압도적인 종말론이 정당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상황에 부합

33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31) H. G. 펠만/이신건옮김, 『교의학』(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5), 413-414.

Page 169: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가져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선포되어야 하는 종말론

은“땅에 있는 우리 장막 집”이 아니라“보이지 않는”“하늘에 있는 영

원한 집”을“주목”하고“사모”한다는(고후 4:18-5:2) 저 세상적 종말론

이다.37)

둘째, 사람들이 현 세상의 고통이나 암울한 상황을 외면하면서, 세상

저편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만을 믿고 소망하는 경우이다. 세상에 대

한 무기력이나 부적응, 두려움, 혐오, 세상에서의 실패나 좌절, 같은 것

들도세상을 도피하거나 유기하게 한다. 그런경우도 이 세상을 버리고

저 세상만을기대하며 그 속에빠져서 살아가게 한다. 세대주의적인시

한부 종말론 같은 데 지나치게 몰입해서 예수 재림이나 휴거, 마지막

환난이나 마지막 때의 사명 같은 걸 입에 달고사는 사람들은 그런 유

형의극단적 예라고 할 수 있다. 또는교회와 세상, 영적인 것과육적인

것을별개로 보면서, 오직거룩하고 영원한 영적이고 초월적인 데만가

치를 두며살아가는 이원론적이고 분리주의적인 형태의 교회들도 같은

경우이다.

역사적으로 그런 특징을 가진 교회들은 지배 이데올로기와 결합하

여, 가난하고 헐벗은 민중에게 저 세상에서의 위로와 보상을 약속하면

서 현실에 대한 불만을 무마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럼으로써 빈민대중

의 혁명성을 잠재우는 방식으로 불의하고 약탈적인 지배 체제를 보조

했다고 할 수 있는데, 제정 러시아의 정교회,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나

제3 세계군부정권하의교회들을그런예로들 수 있다.

그런 상황이라면 내재적이고 이 세상적인 종말론이 정당성을 가진

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서 시작되고, 경험되고, 이루어지며, 최소

한 이 세상과 무관하게, 별개로 이루어지는일은없다는 것이다. 구티에

레즈는 종말론적인 실재인“해방의 유토피아”를 논하면서“잠시적인 사

이오갑, 종말을 어떻게볼까? 337

37) 더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한국교회의 상황에 적용해 본 종말론의 문제로서 이오갑,

“종말론과한국교회”참조.

는 세계를 하나님과 사탄, 선과 악, 빛과 어둠의 대결장으로 보고, 임박

한 마지막 때의 전쟁을 위해 항상 준비해야 하거나 또 싸워야 하는 어

려움이나 긴장, 피로가 임계점을 넘은상태였다고할 수 있다. 유대교는

그런 묵시문학적 종말론을 바르 코흐바 전쟁(132-135년)에서 비참하

게 패배한 뒤에 비로소 포기하게 되지만,35) 기독교는 이미 예수의 십자

가와부활사건을 경험함으로써 일찍이 떠날 수 있었고, 예수그리스도

를 통해 실현된 종말론, 그리고 그의 은총을 통해 지금 이곳에서 죄사

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며 그의 자녀가 되는 현재적 종말론

을 선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가 어떤종말론을 선택해서 강조하고 선포해야

하는 지는 현재의 시대적이고 공동체적인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

서 이 시대, 이 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하나님 앞에서 또 이웃들과의 관

계에서 신앙적으로 바로 세우고, 아름다운 삶을 이뤄나가도록 도와야

하는것이다. 그럴때 종말론은 교회와 역사에 기여하는가치를 가진다.

그처럼 상황을 고려한다면, 종말론이 그때마다 어떻게 달라질 수 있

는지, 어떻게달라져야하는지 몇 가지가능한 경우들을통해서 보자.

첫째, 사람들이 대부분 이 세계내적인 데 관심을 두고, 거기에 함몰

되어 있는경우이다. 그 때는초월적이고 저 세상적인 종말론을 강조해

야 한다. 계몽주의 이후 종말론이 내면화되거나 윤리화되고, 자유주의

신학이 인간과 세계에 대한 낙관주의를 기초로 세계내적인 미래 역사

의 완성을 꿈꾸었을 때, 초기바르트가 초월적이고 또 현재적인 종말론

을 선포하며 등장했던 것이 그런 예라고 할 수 있다.36) 현재 한국 교회

나 사회에는 부나 권력, 세속적인 명예에 집착함으로써, 공동체에 손실

을 입히고 평화와 일치를 저해한다든지, 심지어는자기파괴적인 결과를

33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역사적 이라는 이중성이 사라지고 오직 역사내적 종말론만이 지배함으로써 유대 국

가가멸망했다고평가한것이다. P. Tillich, Systematic Theology, III, 360.

35) Cf. E. 로제/박창건역, 『신약성서 배경사』, 45.

36) Cf. H. G. 펠만/이신건역, 『교의학』, 418-420.

Page 170: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학개, 스가랴에서도 예언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그들의 종말

론이백성들의물질적 욕망에 편승하기위해서라거나, 그들의 기복주의

신앙을 부추기려는 의도에서가 전혀 아니었다. 그런 점을 전제로, 물질

과 가난의 문제가 너무나 절박해서 사람들이 좌절하고 절망하고 체념

한 나머지 현실의 끈을 놓으려는 상황이라면, 물질적인 복으로 집중되

는 현실적인 종말론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들 여유가

있고 형편이 괜찮은데도 계속 현세적 부와 성공만을 구하는 데 있다.

그 경우는 오히려 첫 번째 경우같이 저 세상적 종말론으로써 사람들을

이 세상의 물질과 부에대한집착으로부터떼어놓아야할 것이다.

V. 결론에대신해서

이상의 논의들을 요약하거나재정리할 필요는 없을것이다. 단지“종

말론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중심으로 전개한 내용들과 관련해서, 단

지 몇 가지 중요한 점만을 지적하고 환기하는 것으로써 결론을 대신하

고자한다.

첫째, 종말론은 어원적으로 세상이나 개인의 마지막을 다루는 교리

이긴 하지만, 그에 대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실재를 연구하고 설명하

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천국이나 지옥이 어디에 있으

며, 어떻게 생겼는지, 예수의 파루시아는 언제 어떻게 일어날 것인지,

죽음이란 무엇이며 죽음 이후의 상태는 무엇인지 등과 같은 종말이나

종말 이후의 실재를 묘사하고, 청사진을 뽑아내며, 그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성서에는 그런 사실적인 설명이나 묘사들이 나오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또 현재도 많은사람들이 그런데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며, 그런 그림들을 여기저기서 그려내고 있다. 예수의 도래나 휴

거나 천국이나 지옥이 언제, 어떻게, 어디서 이뤄지는지에 대한 객관적

사실, 다시말해서 과학을 구성하려고하는것이다. 그러나 종말론의본

이오갑, 종말을 어떻게볼까? 339

물 위에 결정적인 실재가 건립된다”고 했다.38) 이 세상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다는 뜻이다. 이 세상적 종말론은그처럼 세상에 대한강

한 집중성과 구체성을 갖게한다. 교회와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에 대해

눈을 뜨고, 세상의 불의나 모순, 고통의 문제를 자신의 것으로 안게 한

다. 그럼으로써 세상에 대해 책임적이 되고, 세상의 변화에 참여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 속에서 이웃들과 함께보고 경험하는 기쁨을 누

리게한다.

셋째, 가난하고 궁핍한 시대에 빵이나 물질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

황이라면, 제한적으로 교회는 물질적이라 할 수 있는 종말론을 선포할

수도 있다. 주의 기도에서“일용할 양식을”달라는 것이 허락되었듯이,

이 세상의 물질이나 부를 중심으로 한 이 세상적 종말론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구약에서는 제3 이사야나 학개, 스가랴 같은 예언자들의

종말론이 매우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성격을 가졌다(가령사 60:5-7).39)

그들의 종말론에는유다와 예루살렘의 영광과 안녕, 백성들의물질적인

부와번영, 전쟁에서의승리등이적극적으로반영되어있다. 그 배경에

는 포로에서귀환한 유다의 심각한 혼란과 가난, 황폐함이 놓여있다. 그

런 상황에서예언자들은 화려하고 빛나는 성과성전, 번영하는 국가, 넘

쳐나는 부를약속했다. 그것이 바로가난과 혼란을 딛고 국가와 성전과

종교의 재건을 이뤄내야 하는 동족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길이었기때문이다.

주의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물질적인 복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경

우는 극히 제한적이고, 일시적인 경우라는 점이다. 주의 기도에서도“일

용할 양식”으로 제한된다. 이는 일용할 양식만 있어도 물질에 대한 기

원은 불필요하고 불가능하다는의미를 갖는다. 또한물질적이고 현실적

인 종말론이 예언서 전체의 종말론도 아니고, 심지어는 제3 이사야나

33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38) G. 구티에레즈/성염역, 『해방신학』(왜관: 분도출판사, 1977), 305.

39) C. 베스터만/번역실 역,『이사야 I I I』, 341-342. W. 바이저, K. 엘리거/번역실 역,『소

예언서』(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6), 281, 284 등.

Page 171: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들에게도다가가서,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말씀이 되어야 한다. 그런점

에서 종말론은 어떤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든지 다가가서 구원할

수 있도록 여러 종류여야 하고, 특히 어떤 것 하나를 주장하더라도 대

립되는 성격의 종말론과의변증법적긴장을 유지해야한다.

주제어

종말론, 종말론 안에서의 변증법적 긴장, 종말론과 상황, 하나님 나라, 신앙

Eschatology, Dialectic Tension in Eschatology. Eschatology and

Situation, the Kingdom of God, Faith

접 수 일 2012년 6월 12일

심사(수정)일 2012년 8월 20일

게재 확정일 2012년 9월 1일

이오갑, 종말을 어떻게볼까? 341

질은 그런 객관적 실재의 묘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현재 교회

에 어떤메시지를던져주고있는지, 무엇을 요청하며, 어떻게 되기를 원

하는지를밝혀내고선포하는데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둘째, 그래서 종말론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나라로써 현재의 이 세상

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겨냥한다. 즉 종말론은 저 세상보다는 이 세상

의, 시간의 끝 보다는 현재의 사람들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현재 이곳의 사람들을 새롭게 하고 구원하는 교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 함몰돼서 세상적인 것을 전부로 여기며 거기에 취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세상으로부터자유롭게 하고, 동시에 영원하고 궁극적인하나

님의 나라에 개방적이 되게 한다. 또는 세상을 혐오하거나 두려워하는

사람들, 세상에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 속의 하나

님 나라를 발견하게 함으로써 세상을 다시보고 사랑하고, 거기에 참여

하게한다. 그런식으로 종말론은사람들을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세상

에 대해서 바로세우고 구원하는교리이다. 사람을 향하고, 사람을 변화

시키고 구원하는 그 역동성, 그 힘이 없다면 종말론은 의미가 없다.“하

나님의 나라는 말에있지 않고오직 능력에 있다”(고전4:20)는 말씀은

종말론의그런핵심을 짚어준다.

셋째, 그렇기 때문에 종말론들의 변증법적 긴장을 유지해야 하고, 상

황을 항상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잘못되게하는 것은여러

가지가 있고, 죄도 교만이나 욕심이 있는가 하면무기력이나 태만같은

것도 있다.‘자기’가 너무 강한 사람도 있고,‘자기’가 없는 사람도 있

다. 돈밖에 모르는 사람도 있고 돈을 모르는 사람도 있다.-한 사람 속

에 그 상반된 두 가지가 모두 있을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마찬가지

이다.-인간의 그런 여러 가지, 흔히 반대되기까지 한 그런 상황은, 그

들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주어야 하는 종말론으로 하여금 항상 다른 쪽

의 가능성을 열어두게 한다. 한 가지 종말론은 한 쪽 사람들에게만 효

력이있고, 나머지 사람들에대해서는 대책이없다. 복음은 모든사람들

에게복음이고, 모든사람들을구원한다. 그래서 어떤상황에 있는사람

34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172: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포르퇴우스, N./박철우역. 『다니엘』.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6.

포오러, 게오르그/방석종역. 『구약성서개론하』. 서울: 성광문화사, 1994.

펠만, G. H./이신건 옮김. 『교의학』.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5.

후크마, 안토니 A. /유호준 역. 『개혁주의 종말론』.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6.

Bainton, H. Roland. The Reformation of the Sixteenth Century. B o s t o n :

Beacon Press, 1956.

Bultmann, Rudolf. Glauben und Verstehen, tr. par Malet, A. Foi et Compré-

hension I-L’Historicité de l’homme et la révélation. Paris: Seuil,

1968,

Cullman, Oscar. Christ et le temps. Neuchâtel: Delachaux & Niestlé S. A.,

1947.

. Le salut dans l’histoire; l’existence chrétienne selon Nouveau

Testament. Neuchâtel: Delachaux & Niestlé S. A., 1966.

Dodd, C. H. The Parables of the Kingdom. New York: Charles Scriber’s

Son’s, 1961.

Tillich, Paul. Systematic Theology I I I.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3.

이오갑, 종말을 어떻게볼까? 343

참고문헌

김균진. 『기독교조직신학V』.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9.

목창균. 『종말론논쟁』. 서울: 두란노, 1998.

왕대일.“묵시문학운동의 역사 이해.”기독교사상 편집부 엮음.『종말론의 올바

른 이해』.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이오갑.“루돌프 불트만의실존적 종말론.”황성규박사정년은퇴논문집 편찬위

원회편. 『하나님나라 그 해석과실천』.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0.

_____. “종말론과한국교회.”「한국조직신학논총」. 제31집. 2011. 12.

이형기. 『역사속의종말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4.

정용석.“초대 교부들의 하나님의나라 이해.”위원회편,『하나님 나라그 해석

과 실천』.

구티에레즈, G./성염역. 『해방신학』. 왜관: 분도출판사, 1977.

끌레브노, 미셸/이오갑 옮김.『그리스도인과 국가 권력-2세기 그리스도교의 역

사』.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3.

로제, E./박창건옮김. 『신약성서배경사』.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마샬, I. H./번역실역. 『루가복음』.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6.

몰트만, 위르겐/김균진 옮김.『오시는 하나님-기독교적 종말론』. 서울: 대한기독

교서회, 1997.

_____. / 전경연, 박봉랑역. 『희망의신학』. 서울; 현대사상사, 1979.

바르트, 칼/조남홍역. 『로마서강해』. 서울: 한들출판사, 1997.

바이저, W., 엘리거, K./번역실 역. 『소예언서』.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6.

베스터만, C./번역실역. 『이사야 I I I』.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66.

불트만, 루돌프/허혁역. 『신약성서신학』. 서울: 성광문화사, 2004.

스멘트, R./편집부 역.“구약성서의 종말론.”편집부 엮음,『종말론의 올바른 이

해』.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자우터, G./최성수 옮김.『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을 위하여-종말론 입문』. 서

울: 한들출판사, 1999.

트로크메, E./유상현옮김. 『초기 기독교의형성』.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3.

틸리히, 폴/유장환역. 『조직신학』. 서울: 한들출판사, 2001-2008.

34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173: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본다. 그를 위해 필자는 두 가지를 주장한다. 하나는 기독교 종말론이

가지는 몇 가지 대립적 또는 변증법적 긴장(tension)을 유지해야 한다

는 것이고, 또 하나는 종말론을 구체적인 현실 상황과의 연관성 속에서

받아들이거나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된다면

어떤 종말론을 선포하고 가르치든지 문제가 없고, 오히려 교회와 성도

들의 신앙과 영성, 삶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인도하는 좋은 교리가 될

것이다.

이오갑, 종말을 어떻게볼까? 345

국문초록

종말론을어떻게볼까?

기독교의 종말론은 단순히 시간적 미래의 종말의 문제를 다루는 것

은 아니다. 종말론은 종말과 함께 항상 새로움, 또는 새로운 시작을 관

심하고 대망한다. 기독교의종말론으로서 필요조건 또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현실이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이미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구

약에서는 메시아가 올 것을기대했으나 신약에서는 메시야를 기다리지

않고“왔다”고 선포했다.

그런데 종말론은 기독교 교리들 중에서 매우 중요하고 거의 본질적

인 지위를 차지한다. 예수의 첫 메시지가 바로“하나님의 나라가 가까

웠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종말의 선포였다. 그러나 한국교회에

서 많은 경우 종말론이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를 잘 모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독교의 핵심과 본질이 종말론이라면, 그것을 모른다는 것

은 기독교를 모른다는 얘기가 되고,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건 기독교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이다. 한국 교회가 현재 영적이고 정신적인 위기를

겪으며 내외로부터 많은 비판과 질책을 받고 있는 것도 그런 문제와

무관하지않다.

그런 점들을 전제로, 이 글은 과연 기독교의 종말론이 무엇인지, 그

리고 어떤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특히 종말론과 관계된

많은 문제점들이 있고, 심지어는 사회적인 물의까지 발생하고 현실을

고려하면서, 그런폐해를 방지하면서동시에 건강하고 올바른 종말론을

세우기 위해서는 어떤 점들을 유의하며 살려야 하는지를 중점적으로

34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174: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eschatology.

So I insist on two points, the one is we must keep the oppositive or

dialectical tensions of the christian eschatology, the another is we

have to accept or say it in regard to the present particular situations

and to its historical and cultural contexts. If such two conditions are

satisfied, apart from having any problems, the christian eschatology

becomes a good doctrine to make sane and beautiful christian faith,

spirituality and life.

이오갑, 종말을 어떻게볼까? 347

How to understand the Eschatology?

Lee, O-Kab

Professor

Korea Christian University

Seoul, Korea

The eschatology treats not simply the problem of future. It is al-

ways interested in the new beginning or the new itself. And another

necessary condition of christian eschatology is that the Kingdom of

God and its reality are already accomplished by the event of Jesus

Christ. The Messiah was waited in the Old Testament, but proclaimed

that He came in the New Testament.

The Eschatology occupies a very important position in the chris-

tian doctrines. The first message of Jesus was the eschatological pro-

clamation that “The Kingdom of God is near. Repent and believe the

good news.” Each word in his proclamation, ‘Kingdom of God’,

‘repentance’, ‘faith’, ‘good news’ have a relation with the eschato-

logy at the same time that they are connected directly to the christian

being and life. So nothing is possible without the eschatology in the

Christianity.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look around what is the christian

eschatology, which characters does it have and must have, and

especially to which points we have to pay attention so that we prevent

many harmful effects, at the same time establish a sane and right

eschatology, in the reality of korean churches that have many pro-

blems even cause public disturbance and criticism about the

34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175: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칼 하르텐슈타인의신학적특성

칼 바르트의신학과관련하여

정미현(스위스미션 21,

여성과 젠더데스크의장)

I. 들어가는말

선교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며, 하나님 자신이 선교를 이루시고 선교

의 주체가 된다는“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개념으로 심화된

칼 바르트(Karl Barth)의 신학적 내용과 방향은 칼 하르텐슈타인(Karl

Hartenstein)에 의하여 의미 깊게 포착되었다.1) 즉 하르텐슈타인의 신

학적 기초에는 바르트의 변증법 신학과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기독론

적 화해론이 연관되어있다. 하르텐슈타인은바르트와 마찬가지로 그리

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사실성이 모든 신앙고백의 근거이며, 내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349-386

1) 이 분야에 대한 선행 연구는 아래의 책과 글을 참조: 정미현,“하나님의 선교? 칼 바

르트에게 그 의미를 묻다”,『한국조직신학논총29집』, 한국 기독교 조직신학회, 2011,

67-98; 최형근,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통전적 고찰,『선교신학10집』한국선교신학회,

2005년; 김은수,「현대선교의 흐름과 주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김은수,“칼

바르트와 선교학”『신학사상106집』, 1999년 3월호; 채수일, 하느님의 선교: 한국에서

의 전개와 과제, 『선교신학6집』2002년.

Page 176: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부에 많이 모이기 시작했다. 1926년 그는32세의 젊은 나이에 바젤 선

교회관장으로 청빙받았다.3) 직접선교지에 나가활동했던 경험은 없었

지만 그는 관장직을 맡고 나서 인도, 중국, 아프리카 등지에 나가 구체

적인 현지 체험을 했고, 1938년 인도 탐바람에서 열린 세계 선교협의

회에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에큐메니칼 무대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바젤

선교부 관장을 지내며 바젤에 머무는 동안에는 바젤대학 신학부에서는

종교학과선교학을가르치기도했다.

그러나 하르텐슈타인은 독일인이었기 때문에2차 대전이 일어나자

1939년 그 자리를 떠나야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고, 개신교

최초의 선교 교육 전문기관인 바젤 선교 본부의 명성에 손해가 가지

않도록 본인이 스스로 그 자리에서 물러났던 것이다. 바젤을 떠난 후

정미현, 칼 하르텐슈타인의신학적 특성-칼 바르트의신학과관련하여 351

3 ) Vgl. Helmuth Egelkraut, “Hartensteins Bemuhungen um eine missionarische

Ethik”, Kar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age zu seinem 100.

G e b u r t s t a g ,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

schaft, 1995), 78. 그가 관장으로 청빙받을 당시의 상황은 이러했다. 당시 이사장이었

던 빌헬름 부르카르트(Wilhelm Burkhardt)는 하르텐슈타인을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하르텐슈타인은젊은 세대 신학자들 가운데 의심할 바 없이 가장 촉망 받는 신학자

이다. 그는 전쟁을 경험하고 일찌감치 성숙했으며 튀빙겐 대학 시절 많은 학생들의

신임을 받았고, 벵겔의 신학에 기초하며, 키에르케고르와 바르트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학문적으로도 최고의 수준을 겸비하고 있다. 또한 그는 설교단에서는 말씀

의 증언자이며, 신실한 영적 조언자이고, 교회 공동체에서 환영받고, 신학적으로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신망받는 인물이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나는 하르

텐슈타인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고 바젤 선교부를 위해 그가 이 직무를 맡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한다.”Karl Hartenstein: Ein Leben für Kirche und Mission,

hrsg. von W. Metzger (Stuttgart: Evangelischer Missionsverlag, 1953), 100, zit.

Nach Helmuth Egelkraut, “Hartensteins Bemuhungen um eine missionarische

Ethik”, Kar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a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

schaft, 1995), 79. 그 당시에 하르텐슈타인에 대한 전반적 평가가 좋았기 때문에 그

를 청빙하기 위한모든절차는 아주순조롭고빨리진행되었다. 1926년 8월 30일에는

이사장인 부르카르트와 하르텐슈타인 사이에 면접이 있었고, 9월 1일 이사회는 그를

청빙하기로 결의했으며, 9월 4일 하르텐슈타인은 이 청빙에 응할 뜻을 전했고, 11월

8일 바젤에서의관장의 업무를시작하였다.

용이고, 규범이 됨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또한 인간에게 진정한

회개를 촉구함으로써,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교만을

경계하며, 이것을 선교에 적용하는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한국에 보편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하르텐슈타인

의 생애와 사상을 소개하며, 그가 어떻게 신학적으로 바르트를 수용하

고, 또 어느 점에서 바르트의 신학과 경계를 긋게 되는지에 대해서 검

토하고,“하나님의 선교”개념을21세기에 보완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방향성을제시하면서마무리 짓고자 한다.

I I. 칼 하르텐슈타인은누구인가?2)

1894년 1월 25일 칼 하르텐슈타인은 독일의 바드 칸스타트에서 독

일 은행 지점장의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신학수업을 시작했던 초기에

일차 대전이 일어나서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4년간 군 복무를 해야만

했었다. 전쟁 후 그는 1919년 부터 다시 튀빙엔에서 신학수업을 재기

했는데, 아돌프 슐라터, 테오도르 헤링, 칼 하임, 알브레히트 벵겔 등의

신학을 주로공부했다. 그는1920년대초기목사후보생 시절에 특별히

칼 바르트의『로마서주석』2판을읽고바르트 신학에 심취하기 시작하

였다. 그는 1933년 튀빙엔 신학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르텐슈타

인은 결혼 후에 신부측 친척들로 인하여 종교 사회주의와 관련을 맺기

시작하였다. 이미 이때부터 독일교회에는 교인 수 감소 추세가 시작되

고 독일 민족주의가 새로 등장했는데, 이즈음 하르텐슈타인의 설교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고, 특히 젊은이들이 그의 설교와 성경공

35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2) Vgl. D. Theo Sorg, “Vom Wachen und Warten. Karl Hartenstein als Prediger und

Ausleger der Heiligen Schrift”, Kar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a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schaft, 1995), 19ff; 39.

Page 177: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수용되었다.

칼 하르텐슈타인은 변증법적 신학의 영양분을 섭취하고 성숙한 신

학자이며, 특별히 문화, 시대의식, 종교문제에 대한 바르트의 신학적 민

감성을 흡수하였다.4) 바르트는 신학과 교회에서 인간 중심주의적 성향

의 문제성을 신랄하게 지적하였다. 그 가운데에서 인간의 이념이나 종

교경험에서 비롯된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과 아울러 종교개혁적 성서

주해, 신학주해의 내용을 하르텐슈타인이이어받았다. 그는또한특별

히 오스카 쿨만에게서 구속사(Heilsgeschichte) 개념을 수용하고 쿨만

의『그리스도와 시간』에서 이미와 아직 아닌 사이의 중간기 개념, 시간

의 긴장성을그의 신학의 특성으로수용했다.5)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에

게 주어졌기 때문에“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의 길과 미래가 우리에게

보여졌으며, 우리는투쟁의 한가운데있으나, 영원한 승리가운데 머물

수 있게되었다.”6) 교회공동체는 하나님의나라를 향하여 있으며, 주님

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공동체라는 의식이 하르텐슈타인에게강하게

작용하였고 이것이 그의 신학에 기본선율을 이룬다.7) 그는요한계시록

과 구약성서의 예언서를 특히 중시했는데, 그 외에 요한복음서가 그의

신학의 중심에 있었다.8) 그는 교회와 선교 공동체가 끊임없이 상아탑

뒤에 안주하는 이론적 신학과 생명력 없는 개념성에 사로 잡혀 있지

정미현, 칼 하르텐슈타인의신학적 특성-칼 바르트의신학과 관련하여 353

4) D. Theoo Sorg, in: Kar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age zu

seinem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schaft, 1995), 22.

5) D. Theo Sorg, ebd.

6) Karl Hartenstein, Der wiederkommende Herr. Eine Auslegung der Offenbarung des

Johannes fur die Gemeinde (Stuttgart: Evangelischer Missionsverlag,1954), 5.

7) Rolf Scheffbuch, “Mission in der Erwartung des wiederkommenden Herrn”, K a r 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age zu seinem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Verlag für Kultur und Wissenschaft), 1995, 35.

8) D. Theo Sorg, a.a.O., in: Kar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a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schaft), 1995, 28.

1941년부터 그는 스투트가르트 교회 전체의 교구장을 맡도록 청빙되

었다. 교회 현장에서 선교로, 선교의 장에서 다시 교회의 자리로 옮겨

사역하게 된 것이다. 전쟁 말기의 극심한 폭격과 포화속에서 하르텐슈

타인은 피난 가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켰으며 그의 교구를 돌본 일

화로 유명하다. 전쟁의 피폐함, 고난과 불신의 현장에서 사람들은 그가

주관한 새벽기도회나 주일 예배 설교를 통해 위로를 받고, 그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나갔던 것으로 전해진다.

2차 대전 이후 그의 국제적 에큐메니칼 활동은 다시 활기를 띄고

전개되었다. 그는 1947년 캐나다 휘트비에서 열린 세계선교협의회와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1차 총회에 참석하였고1952년 빌링엔에서 열

린 세계선교협의회에서 그의 활약은 더욱 돋보였다. 이후 그는 뷔르텐

베르그 주교회의 개신교 디아코니아 사역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게도

되었다. 1952년 스투트가르트에서열린 독일 교회의 날에 그는 성서공

부를 인도했고, 이후 하이델베르크 신학부에서 수여하는 명예박사학위

를 받기도했다. 그 해 10월 1일 그는58세를 일기로 갑자기 세상을 떠

나게된다.

I I I. 칼 하르텐슈타인의신학적내용과특성

먼저 하르텐슈타인의 신학적 특성에 영향을 끼친 신학 사상을 전반

적으로 간추리고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독일 서남부 뷔르템베

르크적 경건주의의 영향이다. 그래서 다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대망

과 종말론적 희망이 그의 신학의 중추적 역할을 한다. 둘째로 오스카

쿨만의 구속사적 신학의 내용이다. 이것은 그의신학적 시간 개념이해

에 도움을 주었고, 선교, 에큐메니칼 사역에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세번

째는 변증법적 신학의 내용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칼 바르트 신학의 자

유주의 신학에 대한 변증법적 비판의 내용이 칼 하르텐슈타인에게 재

35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178: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설명되고, 하나님의 계시를 분명히 제시하는 것이다.”11)“선교의 사역은

말씀에 대한봉사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전하고 감당하는 것은보

내심의 핵심적 내용이다.”12)“선교를 위한 결정적 문제는 내용이지 재

정이 아니다. 선교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실재성과 진리, 그 분의 말

씀, 그분의 선교와 함께 서든지 너머지든지 하는 것이다. 그분이 거기

계시면, 선교도 그 자리에 있다.13) ”하르텐슈타인은하나님의 선교(Mis-

sion)와 인간의 선교(mission)를 구분한다. 바로 이 점이 계시신학적인

하르텐슈타인의 선교학 방법론이다. 즉“하나님의 선교로부터 교회의

선교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구속사와 하나님의 구원 계획

의 거대한 틀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것이다.”14)“선교는 하나님앞에서

다각적 차원으로 선교가 본질적으로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를 늘 새롭

게 점검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선교, 즉 하나님의 보내심

은 주님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사도들에게 부여된 사명이다.”15) 즉“아

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 21장). 이

때 주께서 먼저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의 평화를 빌어 준다. 하나님과

정미현, 칼 하르텐슈타인의신학적 특성-칼 바르트의신학과 관련하여 355

11) Karl Hartenstein, “Botschafter an Christi Statt”, Festschrift für Martin Schlunk,

Gütersloh, 1932, 5, zit. nach Herwig Wagner, “Hartensteins Beitrag zum Aufbruch

in der Missionstheologie 1945-1960”, Kar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a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schaft, 1995), 129.

12) Vgl. Helmuth Egelkraut, a.a.O., 95.

13) Karl Hartenstein, “Wozu notigt die Finanzlage der Mission”, Evangelisches Mis-

sionsmagazin 79 (1934), 217.

14) Karl Hartenstein, “Theologische Besinnung”, Mission zwischen Gestern und

Morgen, hrsg. von Walter Freytag (Stuttgart: Evangelischer Missionsverlag,1952),

62.

15) Karl Hartenstein, “Wozu notigt die Finanzlage der Mission?”, E v a n g e l i s c h e s

Missionsmagazin 78 (1934), 217, zit. nach Herwig Wagner, Hartensteins Beitrag

zum Aufbruch in der Missionstheologie 1945-1960, Kar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a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schaft, 1995), 129.

말아야 하며,9) 새로운 정치, 이념, 사회적 상황에 맞서서 복음의 내용을

늘 새롭고 이해가능하게 만들수 있도록 촉구했다.

기독교인은 부활, 성령의 임재, 궁극적 재림의 삼중적 형태 가운데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 중간기는 그래서 비어있

는 허공의 상태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이며,

이 시간이 선교를 위하여 열려져 있는 시간인 것이다. 그런데 선교는

역사적 사건의 단순한 반복이나 지속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선교 사역을 인간에게 위임한 것이다. 창조의 보존과 온전한 궁극적 회

복을 위하여 선교적 방법이 적용되는 것이며, 선교적 사역과 세상사이

에서의 필요한 연관성이여기서드러나게되는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배경 가운데 형성된 하르텐슈타인의 신학적 특성과

한계를 다음과 같이정리하고자한다.

1. 선교사역에주체가되시는하나님

하나님이 선교 사역에 주체가 된다는 것은1927년 하르텐슈타인의

강연에서부터 부각된 내용이었다. 하르텐슈타인은 우선 사도행전에 주

목한다. 선교는 기독교인의 연속적 행위이며, 그 근간은 주님의 사역에

있다. 곧 주님이 선교 사역에 주체가 되는 것이다.“선교는 각 개인의

개종이나 주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나 교회 공동체에 대한 의무만은

아니다. 선교는 온 피조물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통치를 목표로 하

는 아들의 보내심에 참여하는 것이다.”10)“하나님 자신이 다른 기독교

적 선포와 마찬가지로 순수한 선교의 주체가 되신다…선교는 그러므

로써 단순한 인간적 행위로부터 벗어나게 되며 하나님의 뜻과 행위로

35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9) Rolf Scheffbuch, a.a.O., 33.

10) Karl Hartenstein, “Theologische Besinnung”, Mission zwischen Gestern und

Morgen, hrsg. von Walter Freytag (Stuttgart: Evangelischer Missionsverlag,

1952), 54.

Page 179: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Sauer)에 따라 그의 고난의 신학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간추려 볼 수

있다. 가) 교회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선교에 필수

불가결하다. 나) 기독교인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연장이며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 특징을 유지할 수 있다. 다) 그리스도의 고난

은 대리적이며 구원의 중재적 의미를 지닌다. 라) 교회에 맞선 적대감

이 역사 안에드러나기도 한다. 이 때 고난은 절정에 이르며 이에 따른

증언을 야기한다. 마) 고난과 순교는 그 자체의 목표를 지니는 것이 아

니라, 여러 형태로 연결되어 종말까지 선교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바)

순교의 선교적 열매는 율법에 따라 자동적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

혜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사) 기독교인은 홀로가 아니라, 그리스도

가 힘을 실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서 고난을 당하는 것

이다. 아) 교회 공동체와 선교는 고난을 견디어 내기 위하여 그리스도

에 뿌리내린영적삶을필요로 한다.19)

3. 종교간의대화

하르텐슈타인은 타종교에 대한 극단적 배타주의나, 종교다원주의적

두 성향의 중간적 입장에 서 있었다고 볼 수 있다.20) 선교의 현장에서

다른 종교를 만나는 방법에 대해서 하르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즉 다른 종교를 폄하하거나 비판하는 등의 태도를 삼가해야 될

것을 강조한다. 자기의 종교를 내세우고 상대 종교를 경시하는 태도에

서 비롯된 자기우월적 태도를 경계하는 것이다. 복음에 대한 확신에서

정미현, 칼 하르텐슈타인의신학적 특성-칼 바르트의신학과 관련하여 357

19) Vgl. Helmuth Egelkraut, a.a.O., 111; Christof Sauer, Mission und Martyrium.

Studien zu Karl Hartenstein und zur Lausanner Bewegung (Bonn: VKW,1994),

140.

20) Peter Beyerhaus, “Karl Hartensteins Sicht der nichtchristlichen Religionen”, Karl

H a r t e n s t e i n .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a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schaft, 1995), 70.

사람과의 화해와 평화의 영이 전제되어야 진정한 보내심의 사명을 완

수할수 있기때문이다.

2. 고난과순교의강조

하르텐슈타인의 신학을 특징짓는 세 가지 개념은 선교(missio), 연

합(unio), 고난(passio)이다.16)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다시 오심 사이

의 시간 속에서 교회가 감당할 중요한 사역은 선교와 연합 이외에 수

난의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하르텐슈타인이 말하

는 교회의 수난은 순교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개념자체로는 순교보

다 수난을 그가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전통적 의미에서

순교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난의 상황과 영적투쟁에서 가

장 귀중한 터전을 마련해 주는 것이 기도이다.17) 일반적으로“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는 터툴리안의 구호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면

이 내용은 기독교인들이 순교하면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으로

단순히 직설적이며, 일차원적으로 이해해야 되는 것인가? 하르텐슈타인

은 이에 대해 밀알의 비유(요 12, 24장)로 답할 것이다.18) 그러나 이것

은 교회 공동체의가시적 양적성장의 차원보다, 비가시적 질적 성숙을

위하여 순교할각오도 요청하는것으로 풀이하는 것이적합할 것이다.

칼 하르텐슈타인과 로잔운동을 비교한 크리스토프 사우어(Christof

35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16) Vgl. Christof Sauer, “Die Bedeutung von Leiden und Martyrium für die Mission

nach Karl Hartenstein”, Kar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a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schaft, 1995), 96. Gerold Schwarz, Mission, Gemeinde und Okumene

in der Theologie Karl Hartensteins (Stuttgart: Calwer Verlag), 1980.

17) Vgl. Helmuth Egelkraut, “Hartensteins Bemuhungen um eine missionarische

Ethik”, Kar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a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

schaft, 1995), 104.

18) Vgl. Helmuth Egelkraut, a.a.O., 108.

Page 180: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다. 그것은 종교적, 이념적 망상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복음이 주는 관철력이 그 능력의 근원이 되는것이다. 하르텐슈타

인은 예언자적 사도적 전통에서 진리를 선포하는 것과 목회적-사도적

사랑의 섬김을 조화시켰다.

하르텐슈타인은 세상을 신성화하고 하나님을 세속화해 버리는 시대

적 현상을 문제시하고 그의 신학과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23) 하르텐

슈타인은 한편으로 선교 현장에서 타종교와 다른 문화와 대면하면서

새로운 신학적 문제의식을 갖게되었고, 다른한편으로나치주의, 볼세

비즘, 유물론 주의의 문제성을새롭게 자각하게된 것이다. 그 문제성의

공통된 근거는 인간, 인간의 이성, 인간의 성취를 신성화하려는 것이라

고 본 것이다.24) 또한 하르텐슈타인이 비젼을 갖고 전개하려고 한 것은

선교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가 이러한 생각을 실행하

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공동체성에 비중을 두고 그가 관장직을 수행한

것은사실이다. 각 개인의 개별적 기도가 중요하지만, 같은비젼을 갖은

사람들이 서로 모여 함께 기도하고 생각을 나누는 것의 중요성을 그가

깨달았기때문이다.25)

4. 신학적개념표현의한계성

하르텐슈타인이 사용하는 신학적 개념을 오늘날의 척도로 볼 때 문

제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교도라는 표현과 그리스도의 군대라는

표현이다. 하르텐슈타인은“이교도(Heide)”라는 용어를 그의 신학에서

의식적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이 용어를 다른 민족에 대한 유럽기독교

문화 우월주의적 의식에서 그가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서적

의미에서 이 개념을 사용한다. 성서에서 이 개념은 이스라엘민족에 상

정미현, 칼 하르텐슈타인의신학적 특성-칼 바르트의신학과 관련하여 359

23) Vgl. Helmuth Egelkraut, a.a.O., 81.

24) Vgl. Helmuth Egelkraut, a.a.O., 82.

25) Vgl. Helmuth Egelkraut, a.a.O., 90.

우러나오는 힘이 충만하다면 선교의 현장에서 미전도 종족에게 설교할

때 겸허함을 갖고임해야 됨을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사의

겸허함은 모든종교가 기계적으로 동일하며, 성급한 타협으로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뜻함이 아님을 하르텐슈타인은 분명히 한다.21) 종교간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복음의 능력을 증언하는데 필요한 그가 강조하

는 세단계의 태도는 다음과 같다. 즉 참된 번역의 능력, 순수한 인간성,

대담한 용기가 그것이다. 첫째로 선교는 번역의 작업이다. 단순한 언어

의 번역뿐 아니라, 그 내용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하여 화자의 입

장이 아니라 청중인 비전달자의 언어로 복음이 바뀌어 질 수 있어야

한다. 혼합주의라는 것은 실패한 토착화의 결과물이며, 다른 말로 환언

하면 성서적 신앙이 이교적 종교를 통해 반대 방향으로 강화된 것이라

본다. 그런데 하르텐슈타인이문제시 한 내용은 이것이다. 즉 서구기독

교적 문화적 우월주의 의식이 각 토착 문화와 만날 때 반작용으로 이

에 맞서는 민족주의적, 토착문화적의식이 강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복

음이 각 문화적 특성에 맞게 해석되고 이해되며 변혁적 힘을 가져오지

못하면, 그것은 오히려“토착문화와 복음이 혼합주의적 이단으로 변질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22) 둘째로 선교사는 복음의 번역자, 해석자로

서 단순한 언어학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을 가능케 하는

순수한 인간성을 전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겸

손한 태도가 필요하고, 구원의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각 사람들이

갖고 있는 내면적 욕구를 충족해 줄 수 있으며, 청중과 호흡할 수 있는

진실성을 필요로 한다. 셋째로 이러한 선교의 번역, 해석작업에 필요한

것은 대담한 용기이다. 이것은 성급한 타협을 경계하고, 복음의 빛으로

옛 에온을 넘어서게 할 수 있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부활의 동력이 기존의 세계 질서에 맞서는 힘을 실어 주게 되는 것이

35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21) Peter Beyerhaus, a.a.O., 73.

22) Peter Beyerhaus, a.a.O., 74.

Page 181: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때문이다. 바젤선교부는 독일어권과 유럽대륙 안에서 성 평등과 여성

사역자의 권익 신장을 위하여 선구자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것

으로도 유명하다. 특별히 여성이 배우자의 신분으로서만이 아니라, 미

혼 여성으로서 혹은기혼 여성이라해도 독립적으로 선교현장에서 역할

을 감당할 수 있는 길을 일찌감치 열어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

성이 보조적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 현장에서 주체적 과제를

맡아야 한다는 것을 세속적 여성운동의 영향으로 보고 거부하려는 경

향도 여전히 있었다. 그 대표적인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칼 하르

텐슈타인이었다.“여성들의 선교활동은 성 평등 운동과 여성운동과 연

결되어서는 안 된다. 여성들이 지니고 있는 독자성이나 능력을 발휘하

는 것은 봉사적 차원에서의 활동과 연결되어야지, 비종교적 근거를 두

고 있는 여성운동과 관련지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28) 이 점에 있어

서 하르텐슈타인은 시대적 제한성에 철저히 사로 잡혀 있던 전형적 인

물이었다. 여성과 남성의 활동영역에 경계와 한계를 넘어설 수 있던시

각을전혀갖지못했기 때문이었다.

다음 장에서는 바르트와 하르텐슈타인의 신학 사이의 연속성과 비

연속성에대해집중해서다루고자한다.

I V. 칼 바르트신학과의연속성과비연속성

바젤 선교부 역사에 있어서 인간적, 신학적으로 가장 존경 받았던

관장가운데 한 명인자크로쎌(Jacques Rossel)은 20세기신학에 있어

서 변증법 신학자들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 바 있다.“서부 유

럽신학은 칼 바르트, 에밀부른너 그리고 칼 하르텐슈타인의전격적 영

정미현, 칼 하르텐슈타인의신학적 특성-칼 바르트의신학과 관련하여 361

28) Christine Keim, Frauenmission und Frauenemanzipation. Eine Diskussion in der

Basler Mission im Kontext der frühen Ökumenischen Bewegung( 1 9 0 1-1 9 2 8 )

(Münster: Lit, 2005), 100.

대되는 다른 민족(Goyim)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성서에서의

이 개념은 이스라엘 이외의 민족들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구조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신앙의 내용과 대비되는 종교적, 윤리적 실생활에

관련된 개념이다.26) 하르텐슈타인이 사용한 신학적 용어 가운데 또 다

른 문제적 표현은,“밀리티아 크리스티(militia Christi)”이다. 선교적 사

역의 행위를“그리스도의 군대”로써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일차 대전

에 참전한 군인으로서의 그의 경험이 반영된 표현이기도 하다. 영적투

쟁 가운데 대적자를 맞서서 고난을 참고,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그 요

지이다.27) 이처럼 하르텐슈타인은 이 개념을 비록 다른 의미로 사용한

다 할지라도, 다른 민족에 대한 신제국주의적, 군사주의적, 정복적 방법

의 선교 방법에서 철저히 탈피해야 되는21세기의 시각에서 볼 때 이

러한 신학적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평화를

지향해야 하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신학과 교회에서는 군사주의적 용어

를 사용해야 하는것을자제하고지양해야할 것이다.

5. 성 평등주의에대한한계

하르텐슈타인의 바젤 선교부 관장으로서의 업적은 전반적으로 아주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한 가지 비판적으로 지적할 것은 성 평등 문제

애 대한 그의 시각이다. 그가 구시대적 한계를 전혀 벗어나지 못했기

36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26) Peter Beyerhaus, “Karl Hartensteins Sicht der nichtchristlichen Religionen”, Kar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a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schaft, 1995),

67.

27) 그의 이러한 태도는 관장직을 수행하는 경영 방식에도 작용해서 지나칠 정도로 경영

진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요구하는 등의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Vgl. Helmuth

Egelkraut, “Hartensteins Bemuhungen um eine missionarische Ethik”, Kar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a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ur Kultur und Wissenschaft, 1995), 94.

Page 182: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이해와 선교행위의 장애물에 대해서는여기서 다룰필요가 없다. 그러

나 개신교 세계 선교의 형태로써 계획되고 받아들여지게 된 것 모두가

경건주의에 자극제가 된 것임에 틀림없다.…개신교적 선교의식은 본래

적 창조성을 더 면밀히 검토해 볼 때 프랑케나 경건주의에서가아니라,

진첸도르프 백작과 헤른후터 동포단(모라비안)에 의하여 그 의식이 깨

어난 것이었다. 진첸도르프가 삶을 마감할 때까지 이룬 그들의 선교적

업적은 개신교 전체가 그 때까지 복음 선포를 위하여 행하였던 그 모

든 것을 능가하였다. 그 구성원의 수에 비교해 볼 때 현재에 이르기까

지 그 어떤개신교 공동체도 이들의 업적을 너머서지 못하였다. 그것은

진첸도르프의 개인적 기독교 신앙이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동일화되어 나타났는데) 본래부터 그 자체로 거역할 수 없는

경향과 맞물리게된다. 그것은 모든 사람, 즉 그 누구나전 세계에서구

세주의 증언자가 된다는 것이다. 진첸도르프는 수라비아, 벨츠, 프랑케

가 말하였던 그 근본적인 것을 몸소 체험하였다. 한 사람의 수난과 함

께 그의 행동, 복음의 길은 멀리 혹은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직접

적으로 규정되어있었다. 진첸도르프는 그 자신 및 모든인간들을 위하

여 죽으신 그분에게 속하려 했기 때문에, 그 어떤 사람에게도 그분에

대한 소식을 빚진 자로서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의 중심적인

선교동기였을뿐만아니라, 또한유일한 동기이기도했다. 그리고 그는

복음을 다른사람에게 전파해야 한다는 것을알았기 때문에, 그의공동

체 (그는 자신의 공동체가 어떤 특수한 독립 공동체로써가 아니라, 오

히려총체적으로 일치된 교회그 자체이기를 원했고, 또 그렇게 공동체

를 키워나갔다)는 그 근원과 본질 안에서 선교이며, 교회였다. 또한 이

러한 근본적인 관점에서도 헤른후터 공동체는 그 어떤 개신교 교회의

모습도 능가한다.”32) 이와 같은 진첸도르프에 대한 바르트의 긍정적 평

가는그대로 하르텐슈타인에게로이어졌다.

정미현, 칼 하르텐슈타인의신학적 특성-칼 바르트의신학과 관련하여 363

32) Vgl. Karl Barth, ebd.

향을 받았다. 하르텐슈타인은바르트의계시신학을 선교에 적용하는 결

실을 맺었다.”29) 1920-30년대 독일 선교학의 이론과 실제에서 중요한

화두가 된 내용은 문화, 민속적 내용, 기독교화 등이었다. 하르텐슈타인

은 선교학적 흐름에서 사회학적, 현상적 접근보다는 성서주석에 더 관

심을 두고 접근한 바 있다.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실

제적 사역으로 등장한 것이그의 선교학의 기본화두이다. 선교사의 사

역의 내용도 다름 아니라 바로 이 내용을 전하는 것이다. 즉 기독교 문

화를전파하는 것이아니라, 복음의 내용을 말해야 하는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는 단순히 인간적 말들, 목표, 이상을 확산시키는것이되어

서는 않된다. 그 어떤종교로써의 기독교가 아니라 살아 계신하나님의

계시가 바로선교의핵심이 되어야 하는까닭이다.30)

칼 하르텐슈타인에게 끼친 칼 바르트 신학의 영향 가운데 가장 중

요한 것 가운데 한 가지는 개신교 선교에 대한 방향성을 정립한 것이

다. 먼저 개신교 선교의 정체성에 대한바르트의 비판의 내용은 이러하

다. 바르트는 그의 교회교의학에서화해론을 전개하는가운데 근대개

신교 주의에서의 선교 사상의 치명적 정체성과 개신교 선교의 전반적

취약성과 문제성을 지적하고 있다.31) 이에 대한 대안으로써 그는 특별

히 진첸도르프와 헤른후터 공동체(모라비안 교회)의 선교의 방법과 내

용에 대해서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소개한다.“경건주의적 선교

36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29) Jacques Rossel, “From a Theology of Crisis to a Theology of Revolution? Karl

Barth, Mission and Missions”, Ecumenical Review 21, no. 2 (1969): 204, quoted

by John G. Flett, The Witness of God. The Trinity, Missio Dei, Karl Barth, and the

Nature of Christian Community (Grand Rapids: William B.Eeradmans Publishing

Company,2010),124; Jacques Rossel, Geleitwort zu Hermann Witschi, in: H e r-

mann Witschi, Geschichte der Basler Mission 1920-1940, Bd.5 (Basel: Basileia,

1970), 7.

30) Vgl. Karl Hartenstein, Was hat die Theologie Karl Barths der Mission zu sagen?

(Müchen: Kaiser,1928), 26.

31) Vgl. Karl Barth, Die Kirchliche Dogmatik I V/3, Zürich, 1989, 25.

Page 183: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또한 하르텐슈타인은바르트와 마찬가지로 혹은 바르트에 의해서 불룸

하르트 부자의 영향을 받았다.37) 예수가 승리한다는 불룸하르트의 구호

가 하르텐슈타인의 구호이기도 했다.38) 궁극적으로 선교의 행위는 하나

님의나라를 기다리는가운데 이루어져야하는것이기 때문이다.39)

바르트는1932년 4월 11일 베를린의 선교협의회에서열린“오늘날의

신학과 선교”40)라는 강연에서 선교를 교회의 행위로…또한 예수 그리

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고백의 형태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인 인간의 특정한 행위로 정의하

였다. 바르트는 이 선교의 행위를 외국으로 나가는 행위로만 보지 않

고, 교회내적으로 중요한 과제라고보았다. 왜냐하면선교의 대상이 교

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부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점에서 교회의 모든 행위는 굳이그러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선교이다.41) 신학은 선교에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 주며신앙의 사역으로써 신학과 선교는 양립할 수 있는것이다.

선교는 결정적으로인간의 선교적 행위, 의지와 힘을지니고 있지만, 그

것은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만은혜로 받을 수 있는사건이며, 그 자체

를 우리가 결코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이다. 바르트는 이미이

강연에서“보내심”이라는 선교의 근원적 개념을 삼위일체적으로 정의

하고 있다. 즉 하나님 자신을 보내심과 아들과 영을 보내심이 이 사건

정미현, 칼 하르텐슈타인의신학적 특성-칼 바르트의신학과 관련하여 365

37) Vgl. Karl Rennstich, “Karl Hartenstein als Direktor der Basler Mission (1926-

1939)”, Kar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a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ur Kultur und Wissen-

schaft, 1995), 43.

38) Vgl. Karl Rennstich, a.a.O. 44. Karl Hartenstein, Was hat die Theologie Karl

Barths der Mission zu sagen? (München: Kaiser,1928).

39) Vgl. Karl Hartenstein, a.a.O., 27.

40) Karl Barth, “Die Theologie und die Mission der Gegenwart”, Theologische Fragen

und Antworten I I I (Zürich: Evangelischer Verlag, 1957),100-126.

41) Vgl. Karl Barth, a.a.O., 111.

1931년 하르텐슈타인은 바르트의 신학적 입장을 받아들이면서“선

교의 위기”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선교의 총체적 배

경이 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즉 진첸도르프가

이미 밝힌 바와 같이 교회 공동체나 공동체의 일원이 여기에서 주체가

되는것이아니라, 주님이 여기서 보내심의주체가 되는것이며, 선교는

“하나님의 행위(Aktion Gottes)”가 된다.“신학적 과제로써의 선교”라

는 주제로 쓴 그의 튀빙겐 대학 박사 학위논문에서하르텐슈타인은 선

교의 보내심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 바르트를

통해서 하르텐슈타인은진첸도르프가 근대선교학의 선구자가됨을 인

정하고 이를 따르고 있다.33) 하르텐슈타인은 진첸도르프에 의거하여 선

교가“하나님의 행위”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그가1929년 겨울1930년

봄 학기 바젤 선교부 강의에서 구체적으로 다룬 내용이기도 하였다.34)

진첸도르프가이미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선교는 하나님의 사역임

을 밝힌 바 있기때문이다. 그는1인칭 주어로써의 하나님이 모든 진정

한 기독교적 선포에서와 마찬가지로 온전한 선교의 주체가 됨을 말한

것이다.35)“하나님의 행위”에 대하여 우리는 선교를 통해 끊임없이 증

언할 수 있을 뿐이며, 우리가 그 인식의 주체가 되거나, 그 증언의 내용

의 주어가 될 수는 없다. 아울러 하르텐슈타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유일회성과 독특성을 강조하는 것은필수 불가결하다.36)

36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33) Vgl. Karl Rennstich, “Karl Hartenstein als Direktor der Basler Mission (1926-

1939)”, Kar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a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

schaft, 1995), 42.

34) Vgl. Dorothea R. Killus, “Mission und Heilsgeschichte nach Karl Hartenstein”,

Kar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a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Verlag für Kultur und Wissen-

schaft, 1995), 113.

35) Vgl. Dorothea R. Killus, a.a.O., 118.

36) Vgl. Dorothea R. Killus, a.a.O., 119.

Page 184: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교회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수동적 고난을 감수해야 되는공

동체로 파악하며 고난에 더욱 무게를 두었다.45) 바젤 선교부 이사진은

하르텐슈타인의 동의 하에 1938년 바젤 선교부와“이스라엘과의 연대

공동체”공동 주관으로 열린 선교축제 행사에 바르트를 초대했다가 다

시 그 초대를 취소한 사건이 있었다. 바르트가 강연을 하게 되면 독일

대표들이 오지 않을까봐 하르텐슈타인이미리 지나치게 염려해서 그런

조처를 취한것이었다. 이에 대한반발로 이스라엘과의연대공동체 대

표 빌헬름 피셔(Wilhelm Vischer)는“구약성서에서의 말씀 선포의 의

미”라는 제목으로 예정되었던 자신의 강연을 취소하게 된다. 에두아르

드 투르나이젠(Eduard Thurneysen)은 하르텐슈타인의 이러한 태도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게 되는데 이에 대하여1938년 9월 6일 투르나

이젠에게보낸편지에서 하르텐슈타인은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바르트

와의 변함없는 연대감을 드러낸다.46) 그러나 2차대전으로 인해 스위스

인들과 독일인들간의괴리감은이후더 가시화되었다.47)

바르트는 개신교 선교의 수동성, 소극성에 대한 성찰과 아울러 방법

론에 대하여 비판하고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신학적으로 정립하

게 해 주었다. 이 내용을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직분을 강조하며 화해론

의 최절정인“빛의 이론”을 다루는 대목에서 그가 강조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48) 이를 바탕으로 선교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며, 인간의 업적

정미현, 칼 하르텐슈타인의신학적 특성-칼 바르트의신학과 관련하여 367

45) Vgl. Karl Rennstich, a.a.O., 53.

46)Vgl. Hermann Witschi, Geschichte der Basler Mission (Basel: Basileia,1970),77,

zit. nach Karl Rennstich, “Karl Hartenstein als Direktor der Basler Mission (1926-

1939)”, Kar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a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

schaft, 1995), 54.

47) Vgl. Karl Rennstich, “Karl Hartenstein als Direktor der Basler Mission (1926-

1939)”, Kar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a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

schaft, 1995), 56.

48) 참조: 정미현, “하나님의선교? 칼 바르트에게그 의미를묻다”, 『한국조직신학논총29

의 주된 내용이 되는 것이다.“신실한 선교사와 또한 확신에 찬 선교

동역자들은‘보내심’이란 개념이 고대교회에서 삼위일체적으로, 즉 하

나님 자신의 보내심과 아들과 성령을 이 세계로 보내심을표현하는 것

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42) 바르트가 문자적으로“하나님의 선

교(missio dei)” 개념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이

미 그는이 개념을 선취한 것이다. 즉 선교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전

적으로 하나님인것이다.

또한 하르텐슈타인은 바르트의 종교비판의 내용을 수용하며 복음의

빛에 비추어 기독교 자체가 거듭나야 됨을 강조하였다.“지난 세기의

신학은 우리를 아주 겸허하게 만들었고, 자기 성찰과 교회의 회개의 기

회로 인도하였다…그 신학은 이러한 자기 겸허감을 역시 하나의 종교

인 기독교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교회 공동체 사이에 그리고 종교

와 계시의 구분을 분명히 하였다.”43)

고백교회 운동을 통하여 바르트는 더욱 교회를 위한 신학을 강조하

는데, 독일에서 교수 생활을 하던 그는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선서 거

부 때문에 결국 독일을 떠나야 했고, 바젤로 돌아오게 된다.44) 이후 하

르텐슈타인과 바르트는 바젤에 살면서 신학적 교류를 갖게 된다. 그러

나 하르텐슈타인은1933년 이후지리적으로는바르트와가까이 있었지

만, 내용적으로는 점차 바르트와 거리감을 두고경건주의 신학에 더 몰

두하게 되는데, 특별히 칼 하임의 신학과 가까이 하게 된다. 또한 그는

36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42) Karl Barth, a.a.O., 115; Peter Samuel Jost, “Karl Hartenstein und die missio Dei”,

in: Interkulturelle Theologie. Zeitschrift für Missionswissenschaft, 36Jg. 2010,

316.

43) Vgl. Karl Hartenstein, “Die Kirche und die Religionen”, Evangelische Missions-

z e i t s c h r i f t 1 (1940), 6-21. zit. nach Peter Beyerhaus, Karl Hartensteins Sicht der

nichtchristlichen Religionen, Kar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ä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schaft, 1995), 59.

44) Vgl. Karl Rennstich, a.a.O, 52.

Page 185: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교회와 세계의 관계성, 또한종말론에대한빈약한 성서적, 신학적 접근

이었다.51) 십자가와 실재적 구원은 죄의 문제에 대한 답변을 줄 뿐 아

니라, 권력의 문제에 대한 답변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 때 거기에서

뿐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도 말이다.52) 역사에서는 감추어진 하나님 나

라와 인간을 회의적으로 만들거나 잘못된 희망으로 이끄는 가시적인

나라, 권세, 영들 사이에서의 투쟁이 문제이다. 이러한 투쟁에서 감추어

진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이미 승리를 드러내

신 나라와 이 세계의 나라들 사이에서는 어떠한 중립성이 차지할 자리

가 없다.53)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은혜와 힘의 두 차원을 지닌다. 즉 그 십자가

는 죄를용서하는 하나님의 사역이며, 권세와 영들을 극복하는 힘을지

닌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이 승리자이시다. 교회 공동체는 이 승리

안으로 인도되었으며, 이 승리를 선포할 사명을 부여 받았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통치가 가리워짐의 표징이며 동시에 오실 하나님의 승리의

표징이고, 그 자체로 이러한 세상의 시간의 의미를 드러내는유일한 열

쇠이다.54)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이 승리자이시다. 교회 공동체는 이

승리안으로 인도되었으며, 이 승리를 선포할 사명을 부여받았다. 십자

가는 하나님의 통치가 가리워짐의 표징이며 동시에 오실 하나님의 승

리의표징이고, 그 자체로 이러한 세상의 시간의 의미를 드러내는 유일

한 열쇠이다.

하나님이 말씀의 주체이며, 선교를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라면 그것

은 우리가 선교의 주체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선교는 우리 없이

가능한 행위는 또한 아닌 것이다. 선교의 과제는 증언인데, 그 궁극적

정미현, 칼 하르텐슈타인의신학적 특성-칼 바르트의신학과 관련하여 369

51) Vgl. Karl Hartenstein, “Theologische Besinnung”, Mission zwischen Gestern und

Morgen, hrsg. von Walter Freytag (Stuttgart: Evangelischer Missionsverlag), 1952.

52) Vgl. Karl Hartenstein, a.a.O., 60.

53) Vgl. Karl Hartenstein, a.a.O., 61.

54) Vgl. Karl Hartenstein, a.a.O., 61f.

과 성취를 위주로 하는 선교의 인간중심적 성향을 벗어나야 함을 역설

한 것이바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선교이다. 이 개념은1952년 빌링엔

국제선교협의회에 독일 스투트가르트 교회 감독으로 참가했던 하르텐

슈타인이49) 빌링엔 대회에 관한보고서를 쓰는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도

입되었다. 이 개념이 당시에 사용된 배경은 세계 선교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회개를 촉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는하나님 선교의 가치와 그 중

요성을 역설하면서, 특별히 비유럽 지역의 교회들이 생동감 있게 성장

하고 유럽 교회의 문제성을 지적하는 것에 대해 주목하기도 한다. 이

논문에서 그는“하나님의 선교”개념을 강조했으며, 아울러서“교회의

선교(Missio ecclesiae)”와 그 개념을 접목해서 발전시켰다. 이 내용은

교회의 핵심적 과제가 선교이며, 선교의 최종목적은 교회가 아니고, 삼

위일체 하나님의 역동적 상호 교류와 우주적 그리스도의 우주적 구원

활동에우리가 동참하는것이다. 하르텐슈타인의언어로 표현하여보자

면“이교도와만나는 선교운동에서중요한 것은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삶 가운데에서 사람들과 함께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만남이

중요한 것이다.”50)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가이 회의에서 나온 신학적

토론가운데문제점으로 지적하는 내용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성,

36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집』, 한국기독교 조직신학회, 2011, 67-98.

4 9 ) Vgl. Karl Hartenstein, Ein Leben für Kirche und Mission, hrsg. von Wolfgang

Metzger (Stuttgart: Evangelischer Missionsverlag,1953). Kar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a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ur Kultur und Wissenschaft), 1995. Christof Sauer,

Mission und Martyrium: Die Bedeutung Karl Hartensteins für die evangelikale

Suche nach einer Theologie des Martyriums (Tübingen:Ch.Sauer,1991).

5 0 ) Karl Hartenstein, Evangelischer Missionsmagazin 91 (1939), 309ff, zit. nach

Herwig Wagner, “Hartensteins Beitrag zum Aufbruch in der Missionstheologie

1 9 4 5-1960,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a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schaft), 1995,

138.

Page 186: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슈바르츠는『하르텐슈타인 신학에서의 선교, 공동체 그리고 오이쿠

메네』에서 바르트와 하르텐슈타인의 신학적 연관관계에 대해서는23쪽

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반면에, 차이점에 대해서는11쪽을 할애하여

다루고 있다. 그것은, 즉 두 사람간에 신학적 공통점이 훨씬 많다는 것

을 뜻한다. 바르트와 하르텐슈타인이 차이를 보이는 것은 주관적 신앙

체험을 어느정도인정하느냐하는것과, 종말론에대한이해이다. 그것

도 전적으로 두 사람이 다른 신학적 견해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르

텐슈타인은 바르트에대한감사함을 충분히 인정하고 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한 비연속성을 드러내기 힘든 상태에서 몇가지 견해 차이

를 보이는 것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58)

하르텐슈타인은 하나님이 그 말씀을 자연과 민족, 문화적 형태 안에

서 어떻게 드러내며, 선교를 위해서 어떻게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특별히 관심하였다.59) 영미 선교의 제국주의적 성향에 맞서서 그

는 복음이 이교적인것을극복하되민속, 언어, 문화적 특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전달되어야 함을강조하였다.60) 1933년 6월 9일 비서트후프트에

게 쓴 한 편지에서 하르텐슈타인은 이렇게 적고 있다.“몇 달 전부터

나는 변증법적 신학에서 창조의 제1항의 문제가 너무 결여된 것은 아

닌가 생각하고 있다네. 내 생각으로는 몸의 문제, 민속적인 것, 결혼 등

등의 전반적 문제에 대하여 바르트가 우리에게 지금까지 답변을 준 것

보다더 긍정적인답을찾아가야할 줄로믿네.”61)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둘러싼 바르트와 하르텐슈타인의 신학적 연

관성을 구체적으로 연구한 존 플렛에 따르면 하르텐슈타인은“하나님

정미현, 칼 하르텐슈타인의신학적특성-칼 바르트의신학과 관련하여 371

58) Gerold Schwarz, a.a.O., 58.

59) Vgl. Karl Hartenstein, “Mission und die kulturelle Frage: Anpassung oder Um-

bruch”, Evangelisches Missions-Magazin 79 (1935): 350-67.

60) Vgl. Karl Hartenstein, “Warum Mission? Eine Antwort an die deutsche evan-

gelische Jugend”, vol. 4, Mission und Gemeinde: Das Zeugnis der Mission in der

Kirche der Gegenwart (Stuttgart: Evangelischer Missionsverlag,1935), 15.

61) Gerold Schwarz, a.a.O., 59.

방향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림인 것이다. 이러한 기본 선율을 전제로 하

르텐슈타인은 빌링엔에서 바르트 신학의 내용을 전적으로 수용하면서

선교 신학을 수립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하르텐슈타인에게

는 에밀 부른너, 칼 하임, 오스카 쿨만의 신학적 내용이 우세하게 작용

하기도 하는양면성을보인다.55)

하르텐슈타인 연구가 중 한 명인 선교학자 게롤드 슈바르츠는 바르

트, 하르텐슈타인과 부른너와의 관계성을 이렇게 평가한다.“하르텐슈

타인의 선교적 노력은 하나님의 계시의 수직적 차원과 연관된다. 그 수

직적 차원이 지닌 역동적이며 변혁적 힘을 인간적 삶의 다양한 복합성

에 대한 수평적 차원과 연관짓는 점에서 하르텐슈타인은 부른너에 더

접근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관계는 개인적 우정의 차원으로 이어졌다.

부른너와 하르텐슈타인의 신학적 사고의 핵심은 그들의 사상이 지닌

선교적 특성이었다.”56) 하르텐슈타인은“모순 가운데 인간”이라는 부른

너의 책에 서평을 써 주었다. 이후“나의 사랑하는 친구”라고 시작되는

편지에서 부른너는 하르텐슈타인에게 이렇게 고백한다.“그대는 내가

말하려는 뜻을 전적으로 이해하였고, 또 그것을 표현하도록 감히 시도

했소. 요사이 바젤에서는 그러한 것이 거의당연하지 않는데도 말이요.

그러나 그대가 내 책의 내용을 그렇게 잘 이해한 것이이상한 일은 아

니요. 왜냐면 내 사고는 그대의 사고와 마찬가지로 점점 선교신학적으

로 발전되기 때문이요. 우리의 출발점이 각각 다를지언정 이 점에서 우

리는항상서로를 다시금 찾아야 할 줄로믿소.”57)

37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55) Vgl. Karl Hartenstein, “Der Beitrag der Theologie zu den missionarischen Pro-

blemen der Gegenwart”, Evangelische Missions-Magazin 82,(1938): 69-83.

56) Gerold Schwarz, Mission, Gemeinde und Okumene in der Theologie Karl Hartens-

teins (Stuttgart: Calwer Verlag, 1980), 63.

57) Der Brief von Email Brunner an Hartenstein vom 15. Marz 1938, zit. nach, Gerold

Schwarz, Mission, Gemeinde und Ökumeneinder Theologie Karl Hartensteins

(Stuttgart: CalwerVerlag,1980), 63.

Page 187: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적이라는 것이었다.68) 반면에 바르트는 경건주의나19세기 자유주의 신

학, 문화개신교주의전반의 문제성을짚어냈다. 여기에 공통된 것은교

회나기독교인, 기독교적이상과 노력,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고, 오

로지하나님 자신이 최종적 목적이 되어야 함을강조한 것이다.

요약하면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이 주는 긴장성은 하르텐슈타인에

게 남아 있지만 그는 선교와 교회의 관계에서 구속사적 측면에서 독일

서남부 경건주의의 전통에 더 기울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선교

의 주체로 남아있지만, 인간의 그리스도의 도구로써 승천과 재림의 중

간기에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책임을 지닌다.69)“선교는 예수 그리스도

의 승천과 재림사이에…가장 중요한 구원사적 의미를 지닌다.”70) 따라

서 인간의 역할이 다른 차원으로 재부각됨으로써 선교행위의 주체와

객체의 문제, 문화간의 주체와 객체의 문제가 자연신학적 방법론으로

기울어졌다는 사실이다. 즉 바르트가 후기에 삼위일체 신학의 바탕 위

에서 자연신학을 재정립하고자 시도했다면, 하르텐슈타인은“접촉점”

개념에 입각하여 자연신학을선교신학에서 더 적극적으로 평가하며 방

법론적 기초를 찾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하르텐슈타인이독일

선교의 문제성과 독일 나치주의를 직, 간접적으로 지탱한 독일 신학의

문제성에 대하여 얼마나 예리한 시각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논

란의여지가 있을수 있다.71)

정미현, 칼 하르텐슈타인의신학적 특성-칼 바르트의신학과 관련하여 373

68) John G. Flett, ibid, 172.

69) Karl Hartenstein, “Botschafter an Christi Statt”, Botschafter an Christi Statt: von

Wesen und Werk deutscher Missionsarbeit, hrsg.von Martin Schlunk (Gütersloh:

Bertelsmann,1932), 5.

70) Karl Hartenstein, “Zur Neubesinnung über das Wesen der Mission”, D e u t s c h e

Evangelische Weltmission. Jahrbuch 1959, 19.

71) 1945년 스튜트가르트고백 선언문을 작성하는데에 하르텐슈타인이 얼마나 직접적 영

향을 끼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가 다른 선교 협

의단체장들로 하여금 이 고백 선언문을 받아들이게 하고 지난날의 독일 선교의 문제

에 대한 죄책 고백에 아울러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는 사실이다. Herwig Wagner,

“Hartensteins Beitrag zum Aufbruch in der Missionstheologie 1945-1960”, Karl

의 선교”개념을 빌링엔 회의에서 부각시켰지만, 이를 삼위일체 신학적

으로 구체적으로 정립하려 하지는 않았으며,62) 또한 바르트를 빌링엔에

연결시킨 것도 선교를 위한 삼위일체적 신학의 정립과 관련되지 않았

다.63)“하나님의 선교”신학의 근거는 삼위일체에 두어야지 자연신학에

둘 수 없다는 것이 바르트의 입장이었다면, 하르텐슈타인은 부른너의

신학을“하나님의선교”와 연결하고, 선교는 자연신학과 연결되는 것으

로 이해하였다.64) 부른너가 주장하는 접촉점은 일반적으로 볼 때 선교

의 방법에 접근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에 비해서 바르트에게

는 자연신학을 토대로 한 선교신학과 선교는 불가능하였다.65) 이 점에

서 하르텐슈타인은부른너의입장을 선호한 것이다. 바르트와부른너의

결정적 차이를 부른너 자신이 이렇게 표현한다.“바르트는 교회의 사람

으로 사고하는 반면에 나 자신은 선교사적으로 생각한다.”66) 부른너에

의하면 사람들에게 이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와 관심을 끌게 하기

위해서는 접촉점이필요하다. 접촉점이 없다면 말씀의 선포가불가능하

기 때문이다.67) 이런 차원에서 볼 때 바르트의 입장은 반 선교적인 것

으로, 자연신학에 관련된 내용만 선교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독

일선교학자들의 바르트에 대한 비판의 내용은 바르트의 방법이 비선교

37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62) John G. Flett, The Witness of God. The Trinity, Missio Dei, Karl Barth, and the

Nature of Christian Community (Grand Rapids: William B. Eeradmans Publishing

Company, 2010), 136.

63) John G. Flett, ibid, 152. Cf. Philip L Wicked, “The End of Missio Dei-Seculari-

zation, Religions and the Theology of Mission” Volker Kuster (ed.), M i s s i o n

revisited: between mission history and intercultural theology (Berlin: Lit, 2010).

41.

64) John G. Flett, ibid, 164. 부른너와 하르텐슈타인 신학의 더 구체적 비교 연구는 또

다른차원의주제이므로이후의 과제로 남겨둔다.

65) John G. Flett, ibid, 166.

66) Emil Brunner, “Toward a Missionary Theology”, Christian Century 66, no. 27

(1949): 817. Quoted by John G. Flett, ibid, 170.

67) John G. Flett, ibid, 171.

Page 188: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계성을 밝히는데 우선적으로 주안점을두었다. 결론은 두 신학자에게는

비연속성보다 연속성을 더 많이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결정적 차

이는자연신학을 선교에 접목하는방법과 내용이다. 자연신학과접촉점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능동성만이부각되기때문에, 하나님의 능동성이

들어설 자리가 좁아진다. 그 반면에“하나님의 선교”를 우선적으로 말

한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교만을 제지하고 인

간의수동성을 인정하는것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서구 기독교 문화, 경제 우월 의식을 수정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체이고, 인간은 이러한 선교

의 객체가 되기 때문이다. 선교의 행위를 이어나가는데 기독교인은 하

나님의 도구로 동참하는 것 뿐이고,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로 인

간에게 주어진 복음의 수여 대상자가 되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물론

시간적 격차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복음의 전달자가 경제적, 문화적

우위에 있는 다른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면, 인간관계 안에서

의 주체와 객체 문제는 전적으로 교정되어야 할 것이다. 즉 인간은 하

나님 자신의 보내심의 사건을 모두 동등하게 받는 대상으로 창조되었

다. 바로 이 점에 착안해서 바르트는19세기 문화 개신교주의에 대한

비판과더불어“하나님의선교”신학의기초를 정립했던것이다.

이렇게 바르트가 토대를 놓고, 하르텐슈타인이 심화했던“하나님의

선교”개념은21세기 더 한층 성숙된 모습으로 발전될 필요가 있다.72)

정미현, 칼 하르텐슈타인의신학적 특성-칼 바르트의신학과 관련하여 375

72) Vgl. Wolfgang Schmidt, “Das Verstandnis der Mission im Wandel”, Karl Hartens-

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a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schaft, 1995), 152f. 받는

다는 것의 가치를 재정립하고자 하는 것은 지구 북반구와 남반구의 불공정한 경제

체제와 빈부간의 격차가 전 세계적으로 극심한 양극화 현상을 보이는 현시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경제적 이유로 인한 이주 노동의 확산으로 다문화, 다종교간의 갈등

양상도 첨예화 되기 때문에 가능한한 갈등을 해소하고, 격차를 줄여가며 화해의 마

당을 넓혀가야 하며, 다름의 가치를 경청하고 타인을 경계가 아니라 환대하는 문화

를 장려해야되는점에서더욱그러하다.

V. 나가는말

19세기 신학과 선교의 방법론을 단순히 정리하면 선교의 주체는 기

독교이고 객체는 이교도라는사실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교정하는데 가

장 핵심적 신학 사상을 제시한 것이“하나님의 선교”사상이다. 곧 하나

님이 선교의 주체가 되며, 이에 부르심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모두 이

소명을“받은(empfangen/receiving)” 사람들이 된다. 즉 초점은“받는

다”는 사실이며, 받는 주체는 인간이 된다. 흔히 받는다는 사실은 수동

적이고, 부정적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다. 16세기 가톨릭의 선교는 물론

19세기 이후비롯된 개신교의선교도모두 이러한 기본적 원칙을 갖고

시작되었다. 선교사를 보내고(sending church), 물질적 도움을 주는 주

체는 유럽기독교인들이고, 선교사를 받고(receiving church) 물질적 도

움을 받는 객체는 비유럽 국가들의 비기독교인들이었다. 주고 받음의

관계는 동등한 교환과 서로를 위한질적 성숙의 계기로써가 아니라, 주

종적 위계적 상하 질서 속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것이 경

제적 종속관계와 물질적 가치로 환원되어 연결될 때 그러하다. 때문에

이 결과로 유럽적 기독교 문화는 상위성을갖은 것이며, 비유럽적타문

화는 원시성을 갖은 것으로 이해되어 버리기도 했다. 데카르트식 기계

론적이원론의문제가 여기에도적용되는것이다.

흔히 한국교회는 이제 우리가 더 이상 받는 교회가 아니라, 선교사

를 보내는 교회임을 자랑하면서19세기적 미국교회의 근본주의 신학의

내용과 방법을 세계여러 곳에서 재현한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신학

의 한계성을 지적하고 선교를 위한 새로운 신학적 토대를 놓아 준“하

나님의 선교”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칼 하르텐슈타인의 생애와 신

학과 그러한 사상이 형성된 배경 가운데 특별히 바르트의 신학과의 관

37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a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schaft, 1995),

135.

Page 189: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위일체 하나님과 인간과의 역동적 관계성이 여기서 생동감 있게 전개

된다.

또한 특별히 개혁교회 신앙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선물

로 받게 된 것이다. 여기서 받는다는 것은 오히려 굉장히 긍정적인 의

미이며, 소극적 수동성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우리가 기쁜

것은오직 은혜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때문이다. 인간에게구

원은인간의 업적이나 상태에 의한 것이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

한다. 우리가 성취한것이나 업적이 우리를 구원하는것이아니라, 우리

가 선물로 거저 받도록 허락받은 은혜가 우리에게 약속을 선사하신 말

씀이다. 이에 대하여 우리가 감사할 수 있다. 우리가 선물받은 것은 우

리가 노력의 결과나 벌어 들인것이 아니며, 우리가 이 선물받음을 미

리 앞서 내다본 것도 아니라는 것이 감사의 뜻이다. 또한 우리가 그럴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감사한다는 것은 순수히 선물받은

것을인정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선물준 사람의 선한 마음의 실재성만

을 받아들이는 것이다….”74) 즉 어떠한 인간의 노력이나 선한 행위의

축적의 결과로써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체적 행위의 결과인

십자가와 부활사건에 의하여 우리가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핵

심이다. 이 때 인간에게 요청되는 것은 감사이다. 그런데 이 감사의 행

위는공동체를 위한 다각적인 윤리적 행동과 연결된다. 바로이러한 점

이 21세기하나님의선교의 의미를 되새길 때 새롭게 부각될 내용이다.

인간의 업적이나 성취, 개교회의 성과물로써의 선교가 아니라, 거시적

안목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겸허히 동참하는 인간의 몫을 담당하

도록우리가 부르심 받았기 때문이다.

정미현, 칼 하르텐슈타인의신학적 특성-칼 바르트의신학과 관련하여 377

74) Karl Barth, Die kirchliche Dogmatik, II/1 (Zürich: TVZ, 1987), 222.

이러한 점에서 필자는 개혁신학적 여성신학과 젠더의 차원에서“받음”

이 지니는 긍정적 측면을 짧게 언급하며 이 논문을마무리짓고자 한다.

이 개념의 긍정적 가치는 하나님의 능동성과 그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

의 수동성의 의미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인간의 이러한 수동성은

부정적 의미에서의수동성이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우선적인 겸허함

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동성을 받아 인간의 수동성은 능동성으로 전

환되는 길항작용을할 수 있는것이다.

2013년 부산에서 열릴세계교회협의회 총회를 위한 준비작업의 일

환으로 준비된“선교와 전도위원회”의 문서에서는“하나님의 선교”의

성령론적 의미를 보완하였다.73) 성서에 증언된 성령은 하나님의 삼위일

체성 가운데 속성적으로 하나님의여성성을가장 잘 드러낸다. 흔히생

물학적 차원에서여성적 이미지와연결되는“받음”의 가치는 이 맥락에

서 21세기 새롭게 재해석 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능동성과 인간의 수동성, 하나님의 주심과 인간의 받음이 지

니는 긍정적 의미를 부각시키는 점이 중요하다. 즉 받는다는 속성은 삼

위일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또한 하나님의사역에서 볼 때 인간의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아들과 영을 인간에게

보내신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 축복, 영, 그리스도의

몸은 성서에서 받으라는 술어와 항상 연관되어 사용된다(사 45:22; 렘

31:23; 요 20:22; 막 14:22). 즉 성령을 주고 보내시는 주체는 하나님이

며, 건넴의 주체도 바로 영이신 하나님이고, 받는 객체는 인간이다. 삼

37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73) 2012년 3월 “Together Towards Life: Mission and Evangelism in Changing

Landscapes”라는 제목으로 마닐라에서 마련된 이 문서는 현재 수정, 보완 작업 중

이므로 직접 인용이 불가능하다. 필자는 이 토론회에서 경청위원회의 위원으로서 보

완되어야 할 내용을 정리하는 작업에 참여하였다. 이 문서의 주안점은 지구 북반구

와 남반구 전체에서 기독인의 분포 형태가 인구학적으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 내용

적으로도 많이 변화되었음을 토대로“주변으로부터의 선교에”(Mission from the

Margins) 초점을 두고 있다. 이 문서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http://www. oikou-

mene.org/2/ 2012년 4월 1일 방문

Page 190: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참고문헌

김은수. 『현대선교의흐름과주제』.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년.

. “칼바르트와 선교학”. 「신학사상106집」. 1999년.

정미현.“하나님의 선교? 칼 바르트에게 그 의미를 묻다”.『한국조직신학논총

29집』. 한국기독교 조직신학회, 2011년.

채수일. “하느님의선교: 한국에서의전개와과제”. 『선교신학6집』. 2002년.

최형근. “하나님의선교에대한 통전적고찰”. 『선교신학10집』. 2005년.

Barth, Karl. Die Kirchliche Dogmatik IV/3. Zürich : 1989, 25.

. Die Kirchliche Dogmatik II/1. Zürich : 1987, 222.

. “Die Theologie und die Mission der Gegenwart”. in T h e o l o g i s c h e

Fragen und Antworten I I I. Zürich: Evangelischer Verlag, 1957.

100-126.

Beyerhaus, Peter. “Karl Hartensteins Sicht der nichtchristlichen Religionen”.

in Kar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ä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schaft, 1995.

Brunner, Emil. “Toward a Missionary Theology”. in Christian Century 6 6 .

no. 27 (1949): 817.

Hartenstein, Karl. “Botschafter an Christi Statt”. in Botschafter an Christi

Statt:von Wesen und Werk deutscher Missionsarbeit. hrsg. von

Martin Schlunk. Gütersloh: Bertelsmann, 1932.

Egelkraut, Helmuth. “Hartensteins Bemühungen um eine missionarische

Ethik”. in Kar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

trä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schaft, 19958.

Hartenstein, Karl. Der wiederkommende Herr. Eine Auslegung der Offen-

barung des Johannes für die Gemeinde. Stuttgart: Evangelischer

Missionsverlag, 1954.

. “Theologische Besinnung”. in Mission zwischen Gestern und Morgen.

정미현, 칼 하르텐슈타인의신학적 특성-칼 바르트의신학과 관련하여 379

주제어

칼 하르텐슈타인, 칼 바르트, 하나님의선교, 자연신학, 계시신학

Karl Hartenstein, Karl Barth, Missio Dei, Natural Theology, Theology

of Revelation

접 수 일 2012년 7월 3일

심사(수정)일 2012년 7월 31일

게재 확정일 2012년 9월 1일

37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191: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1935.

. “Zur Neubesinnung über das Wesen der Mission”. in D e u t s c h e

Evangelische Weltmission. Jahrbuch 1959.

Keim, Christine. Frauenmission und Frauenemanzipation. Eine Diskussion

in der Basler Mission im Kontext der frühen ökumenischen

Bewegung (1901-1928). Münster: Lit, 2005.

Killus, Dorothea R. “Mission und Heilsgeschichte nach Karl Hartenstein”. in

Karl Hartenstein. Leben weltweitem Horizont. Beiträ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schaft, 199513.

Jost, Peter Samuel. “Karl Hartenstein und die missio Dei”. in Interkulturelle

Theologie. Zeitschrift für Missionswissenschaft. 36 Jg. 2010.

Flett, John G. The Witness of God. The Trinity, Missio Dei, Karl Barth, and

the Nature of Christian Community. Grand Rapids: William B.

Eeradmans Publishing Company, 2010.

Rennstich, Karl. “Karl Hartenstein als Direktor der Basler Mission (1926-

1939)”. in Kar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ä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schaft, 1995.

Rossel, Jacques. “From a Theology of Crisis to a Theology of Revolution?

Karl Barth, Mission and Missions”. Ecumenical Review 21. no. 2

(1969): 204, quoted by John G. Flett. The Witness of God. T h e

Trinity, Missio Dei, Karl Barth, and the Nature of Christian

Community. Grand Rapids: William B. Eeradmans Publishing

Company, 2010.

. Geleitwort zu Hermann Witschi. in Hermann Witschi. Geschichte der Basler

Mission 1920-1940. Bd. 5. Basel: Basileia,1970.

Sauer, Christof. “Die Bedeutung von Leiden und Martyrium für die Mission

nach Karl Hartenstein”. in Kar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ä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schaft, 1995.

정미현, 칼 하르텐슈타인의신학적 특성-칼 바르트의신학과 관련하여 381

hrsg. von Walter Freytag. Stuttgart: Evangelischer Mis-sionsverlag,

1952.

. “Botschafter an Christi Statt”. in Festschrift für Martin Schlunk.

Gütersloh,1932, 5. zit. nach Herwig Wagner, Hartensteins Beitrag

zum Aufbruch in der Missionstheologie 1945-1960. in Kar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ä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schaft, 1995.

. “Wozu nötigt die Finanzlage der Mission”. Evangelisches Missions-

magazin 79 (1934), 217.

. Was hat die Theologie Karl Barths der Mission zu sagen?. München:

Kaiser, 1928.

. “Die Kirche und die Religionen”. in Evangelische Missionszeitschrift

1 (1940). 6-21. zit. nach Peter Beyerhaus. Karl Hartensteins Sicht

der nichtchristlichen Religionen. in Kar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ä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schaft,

1995.

. Ein Leben für Kirche und Mission. hrsg. von Wolfgang Metzger.

Stuttgart: Evangelischer Missionsverlag, 1953.

. Evangelischer Missionsmagazin 91 (1939), zit. nach Herwig Wagner. “Harten-

steins Beitrag zum Aufbruch in der Missionstheologie 1945-1960. 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ä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schaft, 1995.

. “Der Beitrag der Theologie zu den missionarischen Problemen der

Gegenwart”. in Evangelische Missions-Magazin 82 (1938):69-83.

. “Mission und die kulturelle Frage: Anpassung oder Umbruch”. in

Evangelisches Missions-Magazin 79 (1935): 350-67.

. “Warum Mission? Eine Antwort an die deutsche evangelische Jugend”.

vol. 4. in Mission und Gemeinde: Das Zeugnis der Mission in der

Kirche der Gegenwar. Stuttgart: Evangelischer Missionsverlag,

38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192: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국문초록

칼 하르텐슈타인의신학적특성

칼 바르트의신학과관련하여

선교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다. 하나님 자신이 선교를 이루시며 선교

의 주체가 된다는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으로 심화된 칼 바르트의 신

학적 내용과 방향은 하르텐슈타인에 의하여 의미 깊게 포착되었다. 즉

하르텐슈타인의신학적 기초에는 바르트의 변증법 신학과 하나님의 계

시에대한기독론적 화해론이 연관되어있다. 하르텐슈타인은바르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사실성이 모든 신앙고백

의 근거이며, 내용이고, 규범이 됨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잡는다. 또한

인간에게진정한 회개를 촉구함으로써,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

려고하는교만을 경계하며, 이것을 선교에 적용하는것이다. 본 논문에

서는 하르텐슈타인이 어떻게 신학적으로 바르트를 수용하며, 또 어느

점에서 그의 신학과 경계를 긋게 되는지에 대해서 검토하고,“하나님의

선교”개념에 입각해서21세기 선교에 적합한 신학적 방향성을 제시한

다. 개혁신학적 의미에서 받음의 가치를 새롭게 재평가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16세기 가톨릭의 선교는 물론19세기 이후 비롯된 개신교의 선교는

선교사를 보내고(sending church), 물질적 도움을 주는 주체는 유럽 기

독교인들이고, 선교사를 받고(receiving church) 물질적 도움을 받는객

체는비유럽 국가들의비기독교인들이라는원칙을 갖고비롯되었다. 주

고 받음의 관계는 동등한 교환과 서로를 위한 질적 성숙의 계기가 아

정미현, 칼 하르텐슈타인의신학적 특성-칼 바르트의신학과 관련하여 383

. Mission und Martyrium. Studien zu Karl Hartenstein und zur

Lausanner Bewegung. Bonn: VKW, 1994.

Scheffbuch, Rolf. “Mission in der Erwartung des wiederkommenden Herrn”

in Kar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ä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schaft.

Sorg, D. Theo. “Vom Wachen und Warten. Karl Hartenstein als Prediger und

Ausleger der Heiligen Schrift.” in Karl Hartenstein. Leben in welt-

weitem Horizont. Beiträ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schaft,

1995.

Wagner, Herwig. “Hartensteins Beitrag zum Aufbruch in der Missions-

theologie 1945-1960”. in Kar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ä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schaft, 1995.

Wickeri, Philip L. “The End of Missio Dei-Secularization, Religions and the

Theology of Mission”. in Volker Küster. ed. Mission revisited:

between mission history and intercultural theology. Berlin: Lit,

2010.

Witschi, Hermann. Geschichte der Basler Mission. Basel:Basileia,1970. zit.

nach Karl Rennstich. “Karl Hartenstein als Direktor der Basler

Mission (1926-1939)”. in Kar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ä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für Kultur und Wissenschaft, 1995.

Schmidt, Wolfgang. “Das Verständnis der Mission im Wandel”. in K a r l

Hartenstein. Leben in weltweitem Horizont. Beiträge zu seinem 100.

Geburtstag. hrsg. von Fritz H. Lamparter. Bonn: Verlag für Kultur

und Wissenschaft, 1995.

Schwarz, Gerold. Mission, Gemeinde und Ökumene in der Theologie Karl

Hartensteins. Stuttgart: Calwer Verlag, 1980.

38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193: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Convergences and Divergences between Karl Barth and Karl Hartenstein

Chung, Mee-Hyun

The Head of Women and Gender Desk

Mission 21

Basel, Switzerland

Christian mission is not initiated through the agency of human

beings, but through God. This concept, Missio Dei, was introduced

by Karl Barth and further developed by Karl Hartenstein. Hartenstein,

inparticular, rooted his reflections in the dialectic of God’s revelation

to Christ’s reconciliation. This became the basis for both his con-

fession and theology. He called for repentance and correction as a

c o u n t e r-measure to human-centred arrogance in the missionary

movement. The author tries to express the convergences and diver-

gences between Karl Barth and Karl Hartenstein, as well as to suggest

new directions for Missio Dei in the 21st Century. It is important, and

necessary, for those sharing the reformed Protestant perspective to re-

evaluate mission, and inparticular the value of ‘receiving’.

Both the Catholic mission since the 16th century and the Protestant

mission since the 19th have proceeded with the same mentality:

North American and European Christian churches send material help

to non-European people whose role it is to thankfully receive. This is

not a conversation among equals, but a hierarchical relationship

rooted independency, most obviously so within the economic sphere.

Thus, Euro-American Christian culture represents itself as high value

정미현, 칼 하르텐슈타인의신학적 특성-칼 바르트의신학과 관련하여 385

니라, 주종적 위계적 상하질서속에서 이해될 수 밖에 없었다. 특히이

것이 경제적종속 관계와 물질적 가치로 환원되어연결될 때 그러하다.

때문에 이 결과로 유럽적 기독교 문화는 상위성을 갖은 것이며, 비유럽

적 타문화는 원시성을 갖은 것으로 이해되어 버리기도 했다. 데카르트

식 기계론적 이원론의 문제가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

교는 서구 기독교 문화, 경제 우월 의식을 수정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체이고, 인간은 이러한 선교의 객체가 되기

때문이다. 선교의 행위를 이어 나가는데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도구로

동참하는 것이며,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로 인간에게 주어진 복

음의수여대상자가 되는것이다. 복음의 전달자가경제적, 문화적 우위

에 있는다른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면, 인간관계 안에서의주

체와객체문제는 교정되어야할 것이다.

38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194: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진화론과공존가능한창조신앙

김기석

(성공회대학교, 부교수)

I. 서론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이 1859년『종의 기

원』의 출간을 통하여 진화론을 발표한 이래 기독교의 창조신앙은 심각

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다윈은 생물이 세대를 거듭하면서 발생하

는 개체 혹은 집단 내에 발생하는 변이와, 그것이 적자생존의 원리에

따라서 환경에 의해 걸러지는 자연선택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새로운

종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진화론의 이론적 체계를 수립하였다. 나아가

그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인간을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는하

나의조상으로부터 진화했을 것이라고주장하였다. 이러한 생명과 인간

의 기원에 관한 진화론적 관점은“모든생명은 하느님께서 각각 그 종

류대로 창조하셨다”는 구약성서의 증언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진화론과 창조론의 논쟁을 불러왔다.1) 이때부터 진화론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387-420

1) 김용준,『과학과 종교 사이에서』(파주: 돌베개, 2005), 133-135. 다윈이 신앙에 회의를

품게된 사연은이러하다. 나나니벌 암컷은 나방의애벌레를 잡아다가그 신경 마디마

while non-Euro-American culture is systematically devalued. Instead

of true exchange we have a mechanical dualism of greater and lesser.

The theology within Missio Dei helps to correct this attitude, as God

is both the cause and the subject of the mission, helping to minimize

the arrogance and pride inherent within a hierarchical paradigm of

mission. All Christians are called to contribute as instruments of God

to God’s mission, and all humans equally receive God’s grace. Before

any missionary ever thought of mission God was present, sending out

the good news. Recognizing this allows one to overcome the systemic

injustice which flows from subject-object relationships among

people.

38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195: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적 입장이 있다.4)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과학의 진화론과 기독교의 창조론의 논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논쟁은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회(이하교

진추)가 2011년 12월 교육과학기술부에 과학 교과서에서 시조새에 관

한 기술 내용을 삭제해 달라는1차 청원을 내면서 시작되었다. 현행 고

등학교 과학 교과서에는“시조새는 파충류에서 조류로 진화해가는 중

간 단계의 생물(중간종)”로 기록하고 있다. 이어 2012년 6월 국내다수

의 언론들이 일제히 교진추의 2차 청원에 의하여 고등학교 과학교과서

에서 진화론을 설명하는 일부내용이 삭제되거나 수정된다고 보도하였

다.5) 소위‘과학적 창조론’에 입각하여 진화론을 과학교육과정에서 폐

기하고자 하는 창조과학회 및 교진추는 과학 교과과정에서 진화론을

폐기하거나 창조론을 교과과정에 포함하는 것을 목표로 계속적으로 반

진화론 캠페인을 전개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6)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현재의 진화론-창조론 논쟁은 일시적인 현상에 그치기보다는 앞으로

김기석, 진화론과 공존가능한 창조신앙 389

4) 신재식, 김윤성, 장대익 공저,『종교전쟁』(서울: 사이언스북스, 2009), 434. 신재식은 여

기서 창조론에서 진화론까지의 스펙트럼을 1) 젊은 지구 창조론, 2) 오랜 지구 창조

론, 3) 지적설계창조론, 4) 진화론적유신론, 5) 유물론적진화론으로나열하고있다.

5) 국내 유력한 포털 사이트에‘교진추 진화론 삭제’등의 단어를 입력하면 수십 건의

기사가 검색된다. 각 기사마다 많게는 수백 건의 댓글이 달려 있어 진화론-창조론

논쟁이 얼마나 뜨거운지 실감할 수 있다.「시사 IN」6월 13일자,“교과서 속 진화론

삭제, 무엇을 노리나?”「동아일보」6월 16일자,“교과서에 실린 진화론 삭제 논란을

보며”어떤 신문기사는“진화론과학교과서에서사라진다”라는 제목을 달아논란을

부추겼다. 하지만 그 기사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와 같은 제목은 그야말로 지나

치게 과장된 제목임을 금세알아차릴 수 있다. 왜냐하면 삭제혹은 보완하기로 한 내

용인 시조새 화석과말의진화의 문제는 그동안의 국제 고생물학계에서논란이 제기

되어왔기 때문에“확증되지않은불확실한 내용을진리로 가르치지않아야한다”는 과

학적 입장에 따라 수정하는 것이지 진화론 자체를 수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

이다. 물론 이와 같은 개정을 추진한 교진추가 궁극적으로 과학교과서에서 진화론을

폐기하는것을목표로 하는것은사실이다.

6)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회, 교과서진화론개정연구소엮음,『진화론 바로잡기』(서울: 생명

의 말씀사, 2011), 162-163. 교진추 홈페이지에는“교과서 진화론 폐지되어야 한다”

는 배너를 걸고반진화론캠페인을벌이고있다. http://www.str.or.kr/index.htm

은 과학과 기독교 신학 사이의 끊임없는 논쟁 혹은 대화의 주제가 되

었다. 그 극적인 장면때문에 과학과 종교의 역사에 전설처럼 전해지는

저 유명한 1860년 옥스퍼드대에서 열린 영국과학진흥협회에서 벌어진

토마스 헉슬리와 사무엘 윌버포스 사이의 논쟁으로부터,2) 가장 최근의

논쟁으로는 금년 2월 23일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와 로완

윌리엄스(Rowan Williams) 캔터베리 대주교 사이의 논쟁에 이르기까

지 지난150여 년 동안지속되었다.3) 이러한 역사적인논쟁을 거치면서

기독교의 반응은 진화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반진화적 창조론으로

부터 최대한 긍정하는 유신론적 진화론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신학

38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다 침을 놓아 마비시킨 후 그 속에다 자신의 알을 낳고 유충이 나방 애벌레의 생살

을 파먹는 자연계의 생존 방식을 보면서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이런방식으로 자연을

설계했다는 것에대해회의를 품게되었다고 한다.

2 ) John Hedley Brooke, Science and Religion: Some Historical Perspectives ( C a m-

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41. 과학과 종교의 역사학자인 헤들리

브룩은 전해져 오는 헉슬리-윌버포스의 논쟁 이야기에는 다소 과장되었거나 각색되

었을 가능성이농후하다고말한다. 아무튼 전설적 논쟁의장면은 이러하다. 다윈의 진

화론을 지지하는 헉슬리의 발표가 끝나자 윌버포스 주교는 헉슬리에게 조롱하는 말

투로이렇게질문을 던졌다.“당신의 주장대로사람이원숭이 선조로부터 진화했다면,

당신의 경우는 부계 쪽인가, 아니면 모계 쪽인가?”좌중의 폭소가 터져 나왔음은 물

론이다. 헉슬리는 이에 대해“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한 위대한 선물인 지성을 이

런 식으로 진실을 호도하는데 잘못 사용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나는 인간 대

신 원숭이 조상을 가진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겠노라”고 응수했다. 그 뒤로1

년 동안 영국 타임지에서 지면으로 전개된 두 사람 간의 진화-창조 논쟁 역시 과학

자 그룹의 대표인 헉슬리의 승리로 끝났다. 브룩은 또한 이 논쟁의 이면에는 과학계

의 주도권을 놓고 기존의 성직자 그룹과 신흥 시민계급 출신의 지식인 그룹 간의 헤

게모니다툼이 있었다고분석한다.

3) 이번 토론 역시150여 년 전과 같은 장소인 옥스퍼드대에서 열렸고, 이 시대의 대표

적인 다윈주의자와 세계 성공회를 대표하는 캔터베리 대주교가 벌인 토론회라는 성

격 때문에BBC를 비롯한 영국의 여러 대중매체들이‘세기의 논쟁’이라고 소개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로이터 통신은‘무신론과 유신론의 헤비급 타이틀전’

이라고 표현하기도 한 이번 토론회의 전체 영상은 영국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누구나 아무런 제약 없이 볼 수 있다(http://www. arch-

bishopof canterbury.org).

Page 196: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리킨다. 그러므로창조론은 필연적으로과학과 대립하고 갈등을 초래한

다. 이와 달리‘창조신앙’이란 용어는 좀 더 신학적인 입장에 충실한

개념이다. 창조신앙이란 창세기에 나오는“하나님께서 온 세상과 동식

물과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기록을 문자주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성서비평 방법론을 따라 창조 기사가 기록된 역사적 배경과 맥락을 고

려하여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신앙고백의 메세지를 오늘날의 현실 속

에서재해석하는데관심을 기울인다. 따라서 창조신앙은 진화론과 반드

시 대립할 필요는 없으며 독립적이거나 대화, 혹은 포용의 가능성을열

어두고 있다.

이와 같은 연구 목적에 따라서 본고의 내용은 우선 현재 진행형인

교진추의 진화론 삭제 청원을 둘러싼 논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

다음에는 진화론의 요지와 신학적 함의, 과학적 창조론의 태동과 입장,

지적 설계론과 신학적 의미,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진화론적 유신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우주론 및 진화론 등 현대과학

과 대화가 가능하며, 마지막으로 생태계 파괴로 문명사적 위기를 맞고

있는 21세기에 적절한 창조신앙의신학적 방향을 제시하고자한다.

I I. 한국사회에서과학교과서의진화론을둘러싼논쟁

여기서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진행 중인 진화론과 창조론의 논쟁

을 과학과 종교의 대화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1981년 한국창조과학회가 미국창조과학회의 지부로 설립된 이래 창조

론자들은 이 단체를 중심으로 반진화론 서적을 보급하고 창조론을 교

과과정에 포함해 달라고 교육 당국에 요구하는 등의활동을 꾸준히 전

개해왔다.9) 이들은 또한진화론의 허구성과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실증

김기석, 진화론과 공존가능한 창조신앙 391

도 계속 격화되어 결과적으로한국 사회에서 과학과 기독교 사이의 갈

등을 부추기고 나아가 일반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고조시킬 가

능성이 예견되고있다.

본 논문의 연구 목적은 진화론과 창조론의 논쟁이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과 관련하여 한국사회에서 과학과 기독교 사이의 갈등을

완화하고 양자의 상호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한 진화론과 신학의 대화를

시도하고, 이를 통하여 생명에 대하여 보다 깊고‘통섭’7)적인 이해가

가능한 신학적 방향을 제시하고 나아가 오늘날의 생태위기의 시대에

적합한 창조신앙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데 있다. 이러한 연구 목적을 위

하여 본고는 과학과 종교의 간학문적 대화에서의 비판적 실재주의를

기본적인 연구방법론을사용한다. 과학과 종교의대화를 가능하게하는

인식론적 전략으로서 비판적 실재주의에 따르면 과학과 종교가 서로

실재를 파악하고 묘사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양자가 공히 진리를 향한

진지한 탐구라는 것을 인정한다.8) 본고에서는 특히 지난 수 십년간 과

학과 종교의 대화 담론을 주도해 학자중에 한 명인 이얀 바버의 과학

과 종교의 관계 모델을 빌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전개되는 반진화론

운동을 분석하고, 보다 갈등을 해소할 수 있도록 창조신앙에 관한신학

적 재해석을 제시하고자한다.

용어에 관하여 정의를 내리자면 본고에서‘창조론’이란 용어는20세

기 중반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 신앙을 배경으로 전개된 반진화론 캠

페인의 맥락에서 형성된‘과학적 창조론(Scientific Creationism)’을 가

39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7)‘통섭’이란단어는 하버드대학교의세계적인 사회생물학자인에드워드윌슨의 책 제목

인 Consilience를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찾아낸 개념이다. 이는“사물에 널리 통함”이

라는 뜻으로 우리나라의 종교철학 전통에서 사용되었다. 에드워드 윌슨, 최재천, 장대

익 옮김,『통섭』(서울: 사이언스북스, 2005), 10-13. Edward O. Wilson,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New York: Vintage Books, 1998), 최재천,『통섭의 식탁』

(서울: 명진출판, 2012), 12.

8) John Polikinghorne, Belief in God in Am Age of Science (New York: Yale Uni-

versity, 1998), 124.

9) 이 단체가 결성되던 해에 의욕적으로 책이 출판하였다. 한국창조과학회 편,『진화는

과학적 사실인가』(서울: 태양문화사, 1981).

Page 197: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조론자들에게 항복했다”는 다소 선정적인 제목 하에 이번 사건을 우려

깊은 시각으로 다루었다.12)「네이처」외에도 미국의 과학 잡지「사이언

티픽아메리카」와 시사주간지「타임」도 한국의 교과서의시조새 논란을

다뤘다. 체질적으로 해외 언론과 국제적 시선에 민감한 국내의 여론은

또다시 들끓게 되었다. 여러 국내 생물학자들은 외국의 저명한 과학자

동료들로부터“한국의 과학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되냐”는 투의 조롱

섞인전자메일을받았노라고 푸념하였다.

이제 논란은 보다 전문적인 과학자 집단으로 번지고 있다. 황우석

줄기세포 논란 때 사건 전모를 파헤치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워 널리

알려진 국내 생명과학자들의 인터넷 모임인 생물학연구정보센타

(BRIC)에서는 이번교과서 사태에 대한생물학 전공자1474명을대상

으로 한 설문조사를 통해86%가 교진추의 청원과 절차에 문제가 있다

는 비판적 견해를 밝혔다. 시조새 내용을 삭제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은

73%로 나타났다.13) 교진추의 청원에 대응하여 학계도 본격적인 대응에

나섰다. 6월 20일 한국고생물학회를비롯한6개 학회 과학자 모임인 한

국진화학회추진위원회에서는교진추의 시조새 삭제 요구에 대해“대응

할 가치조차 없는 주장”이라고 반박했으며, 7월 6일에는 한국생물과학

협회는 교진추의 주장대로“만일 창조론으로 교과서를 수정한다면 세

계적인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며 교진추의 개정 청원에 대한 기각 청

원서를 교과부에 제출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14) 한편 그동안 국제 생

김기석, 진화론과 공존가능한 창조신앙 393

1 2 ) Soo Bin Park, N a t u r e, Volume: 486, “South Korea surrenders to creationist

demands”, http://www.nature.com/news/south-k o r e a-s u r r e n d e r s-t o-c r e a t i o n i s t-

demands-1.10773

13) 생물학연구정보센터홈페이지: [긴급설문]과학 교과서시조새 관련논란설문조사

http://bric.postech.ac.kr/scion/survey/result.php?STA=1&PID=227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진화론이 과학 교과서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그렇다라는 대답이 88%로 절대 다수이긴 하지만 삭제되어야 한다는

대답도 11%라는 점이다. 이 설문조사는 브릭(BRIC) 회원들만 참여할 수 있으며 이

들은생물학 석사학위이상전공자들이다.

자료로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2005년 경기도 시흥시 연성동에 창조

사 박물관을 준공하여 교회 청소년과 어린이들에게 창조론 견학 프로

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2009년에는 한국창조과학회 교과서위원회와 한

국진화론실상연구회를 통합하여 교진추를 발족시키고 진화론 폐지 활

동을의욕적으로전개해왔다.10)

현재진행형인 논쟁의 시작은 지난 해 12월 교육과학기술부에“시조

새는 파충류와 조류의 중간 종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청원을

교과부에 제출하였고, 이에 대하여 현재 사용되고 있는 고등학교 융합

과학교과서7종 중 6종의출판사나저자로부터시조새 관련내용을 삭

제하거나 수정하겠다는 답변을 이끌어 낸 것이다.11) 이에 기세를 올린

교진추는 지난3월“그동안 진화의 강력한 증거로 예시되어온 말 발굽

형태의 차이를 통해 주장된 말의 진화는 상상의 산물”이라는2차 청원

을 제출하여3개 출판사로부터관련내용의 삭제를 약속받았다.

이러한 사태가 언론에 보도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몇몇 권위 있는

해외학술지와 잡지들이 이 사건을 다루면서 이 문제가 국제 과학계로

부터 주목을 받는 사건이 되기에 이르렀다.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

는 영국의 과학 저널지「네이처」는 지난 6월 7일자 판에서“한국이 창

39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10) 교진추는 2009년 10월 서울 영등포구 도림동에 위치한 도림교회(담임목사 정명철)

에서 발족하였으며현재 사무실은 경기도 수원시에 있다. 교진추 웹사이트에 올려진

자료에 따르면, 교진추는 2 0 1 3년까지 진화론 개정을 사회적 이슈로 부각시키고

2014년부터는 진화론이 삭제된 과학 교과서 집필을 시작하겠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가장 최근의 보도에 따르면1, 2차 청원으로 인한 사회적 반발을 고려하여 교

과과정에 진화론을 삭제하는 대신 창조론을 병행하여 포함시키는 전략으로 수정하

겠다는 입장을 표명하기도 하였다.「서울신문」2012년 7월 3일자,“교진추, 진화론

삭제주장서 일보후퇴”: 사회적논란의식‘논란내용병기’로 목표수정.

출처: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0703025003

11) 과거에는 중고등학교 교과서로 채택되려면 교육 당국(교육과학기술부)의 검정을 받

아야 했으나 현재는 인정 체계로 바뀌면서 교과서 수정의 일차적 권한이 출판사와

저자에게 속하게 되었다. 현행 제도를 핑계로 교진추의 청원에 대한 교과부가 소극

적으로 대응한점도이번결과를초래하는데일조하였다는지적도 있다.

Page 198: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명 현상의 본질을 단지 맹목적인 자기복제자의 번식 현상으로 파악하

는 유전자 환원주의와17) 종교의 신 개념조차도 다윈주의적 분석에 입각

해 그저‘하나의망상’으로 규정하는 인식론적 과학제국주의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18) 이러한 자기 우월적 관점은 상대 진영(종교)의 체

험과지혜의 신빙성을전혀인정하지 않으므로갈등을 초래한다.

다른 한편 성서적 문자주의는 기독교 신앙에 투철한 나머지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일점 일획도 틀림이 없는 진리로서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즉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이6일 동안 천지창

조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과학적 설명

과 동일하게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오래 전 아일랜드의 제임스 어셔

(James Ussher) 대주교는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의 나이를 더하여 계산

하여 천지창조가 기원전4004년에 일어났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

러한 주장이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가지고 전해져 오는 이유는 지적인

설득력 때문이 아니라 가장 단순한 믿음을 가장 이상적인 신앙이라고

도그마에빠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단순하고맹목적인 창조론은

과학과도 충돌을 일으키지만, 성서속에서 이 시대와 상황에 적합한 메

시지를 읽어낼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신학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본고의 뒷 부분에서보다자세히 다룰것이다.

I I I. 진화론

다윈 이전에도 생물이 대를 이어감에 따라 발전하고 진화한다는 생

각은있었다. 18세기말 찰스다윈의 조부인 이래즈머다윈은 생물계의

발전 법칙으로 생물의 욕구가 작용을 일으켜 진화하게 이끈다고 주장

김기석, 진화론과 공존가능한 창조신앙 395

17) Richard Dawkins, The Selfish Gen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18) Richard Dawkins, The God Delusion (New York: Bantam Press, 2006).

물학계에서 새롭게 제기된 내용들을 교과서에 오랫동안 반영하지 않은

국내 학계의 안이한 태도를 지적하는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15) 이제

사태는 기독교의 창조론과 과학계의 진화론이 본격적으로 충돌하는 양

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오래전 다윈의 불독이라 불리며 열렬히 진화론

을 옹호했던 토마스 헉슬리와 어떻게 원숭이에게서 사람이 나올 수 있

냐면서 진화론을 비웃던 사무엘 윌버포스의 대결 이래150여 년간 전

개된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결이 새삼스럽게 오늘날 한국 땅에서 벌어

지고있는것이다.

이와같은모습을 이얀바버의 과학과 종교사이의 갈등, 독립, 대화,

통합이라는 네 가지관계 모델로 살펴보면 첫 번째에 해당된다. 바버는

갈등을 일으키는 입장으로 과학 진영에는 과학적 유물론( S c i e n t i f i c

Materialism)을, 종교진영에서는 성서적 문자주의(Biblical Literalism)

을 예시하였다.16) 이러한 두 입장은 과학과 종교의 극단에 서서 서로

대결하고 있으나 자신의 고유한 방법을 통해획득한 지식과 믿음이 근

본적으로 모든 영역에 통용되는 보편적 진리로서 전혀 오류가 없다고

확신하는점에서 서로닮았다고볼 수 있다.

과학적 유물론이나 유물론적 환원론은 물질만이 유일한 존재의 근

원이며 과학을 통해서만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다. 리처드 도킨

스도 이러한 과학적 우월감에 도취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모든생

39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14) 한국생물과학협회는 생물학과 관련된 여섯 개 학회가 참여하는 공동학술단체로서,

한국통합생물학회, 한국유전학회, 한국생태학회, 한국동물분류학회, 한국하천호수학

회, 한국생물교육학회로 구성된다.「연합뉴스」2012년 7월 6일자,“창조론으로 교과

서 수정하면 세계적 웃음거리”http://www.yonhapnews.co.kr/economy/ 2012/07/

05/0303000000AKR20120705191700017. HTML?template=2087

15)“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는 시조새나 말의 진화 등은 학계에서 실제 논란

이 있는만큼‘확인된사실만 가르친다’는 교과서집필진 입장에서는청원을받아들

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면서도, 문제는 교과서 집필진이 지난 수 십년간 많은 변화

가 있었던 진화론의 실체를 외면하고 아무런 수정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지적

했다.”「서울신문」5월 17일자 10면.

16) Barbour, op. cit., 4-10.

Page 199: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오랫동안 되풀이 되면결국 원래의 종으로부터 새로운 생물 종이 발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화론의 핵심적 주장은『종의 기원』이라는 제목이 시사하듯이 생명

체의 종이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명이 하

나의 기원으로부터 진화되었다는 주장은,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적 전

환에 이어 기독교 신앙에 두 번째로 가장 큰 도전이 되었다. 진화론이

내포하는 신학적 함의는 일견 기독교 신앙과 정면으로 상충되는 것처

럼 보이기도 한다.19) 성서는 하느님께서 모든 생물을 창조했다고 기록

하고 있으며, 모든 생명의 근원은 하느님이라는 신조는 가장 기본적인

교리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편 다윈의 자연선택설은 영국의 경쟁

적 산업자본주의가 투영된 것이며, 자유경쟁에 의한 번영의 이념을 생

물계에 도입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다윈에게 진화론의 발표를 서

두르게 한 월리스는 맬더스(Malthus, Thomas Robert)의『인구론』을 읽

다가자연선택적 진화론의개념을 떠올렸다고 고백하였다. 그는인간의

김기석, 진화론과 공존가능한 창조신앙 397

19) 다윈 자신도 진화론이 함축하고 있는 기독교 창조신앙과 관련된 문제의 심각성 때

문에 진화론에 관한 발표를 미루어왔다. 일찍이 이십대 중반에 영국 해군의 측량선

인 비글호에 박물학자로 승선하여 갈라파고스 제도를 여행하면서 관찰한 다양한 생

명현상과채집한많은표본자료를 통해진화론에 관한확신을 가졌으나그가『종의

기원』을 출간한 것은 50세가 되던 해이다. 그가출간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1858년

다윈보다 열네 살 젊은 무명의 박물학자인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 1823-

1913)의 편지와논문을 받고나서였다. 월리스가다윈에게 보낸짧은논문에는비록

‘자연선택’의 용어는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다윈이 오랫동안 구상한 진화론의 이론

체계와 정확히 일치하였으며, 이를 단숨에 읽어 내려간 다윈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

았노라고 고백하였다. 다윈은 양심적으로 이 논문을 자신의 논문과 동시에 영국 린

네학회에서 발표함으로써 무명 박물학자 월리스가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으

로 다윈은 오랫동안 미뤄온 진화론을 담은 저서의 출간에 박차를 가해 이듬해인

1859년 과학사에 기념비적인 저서인『종의 기원』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발간 당일

초판1250부가 모두 매진될 정도로 당시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왔으며 단일한 저서

로써 인류의 지적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으로 인정되고 있다. 재닛 브라운,

임종기 역,『찰스 다윈 평전: 종의 수수께끼를 찾아 위대한 항해를 시작하다』(파주:

김영사, 2010), 974-985. 에이드리언 데스먼드, 제임스 무어 공저, 김명주 역,『다윈

평전: 고뇌하는진화론자의초상』(뿌리와이파리, 2009), 781-795.

하였다. 체계적인 진화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은 프랑스 생물학자

쟝 라마르크이다. 그는 동물의 지속적인 습성에 의해획득된 형질이 유

전되어 진화가 이루어진다고설명하였다. 그러나 라마르크의주장은 유

전학에서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져 잘못된 가설로

판명되었다. 찰스 다윈은『종의 기원』을 통하여 진화론을 체계적인 이

론으로 정립하였다. 그는 생명체들이 엄청나게 많은 후손을 낳고 세대

를 거듭하면서 생기는‘변이’와 대다수가 환경에 의해 도태되고 그중

일부만이 살아 남는‘자연선택’의 기제를 통해서, 종이 고유하고 영구

불변한 것이아니라 새로운 종이생겨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진화론

에서핵심적인개념은“자연선택의수단에 의한종의기원”이라는 원래

의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다윈의 진화론은‘자연선택’이라는 하나의

원리가 생명현상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

서 지구상의 수많은 다양한 생명체들이 단일한 생명으로부터진화되었

으며, 인간역시 동물의 후손이라는 점을 가리킴으로써다윈 자신의 의

도와는 무관하게 종교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다윈은 스물다섯 살이던

해 해군 측량선인 비글호에 박물학자로 승선하여 갈라파고스 제도에

분포한 진귀한 동식물들을 관찰한 결과, 같은 종류의 동식물이면서도

바다로 인해 고립된 이웃한 섬마다 생김새가 서로 조금씩 다른 동식물

들이 분포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차이는 생물이 번식할

때에 아주 미세하지만 꾸준히 발생하는‘변이’에 의해서, 그리고 각 섬

마다 조금씩 다른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보다 유리한 생물학적 특

성을 지닌 것들이 우세한 종으로 살아 남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다윈은

깨달았다. 일반적으로 생물들은 엄청난 수의 후손을 남긴다. 부모 세대

로부터 태어난 많은 수의 후손들은 약간씩 다른 생물학적 특성을 지니

는 다양한 변이가 발생하는데, 이러한 특성 가운데 어떤 것은 특정한

환경에 유리하기 때문에 살아남고 다른 것은그렇지 않기 때문에 살아

남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변이에 의해 얻은 특정한 형질을 지닌 개체

나 집단이 환경에 의해 자연선택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39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200: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전히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한다는 주장을 펴면서‘겹치지 않는 교도권’

(NOMA; Non Overlapping Magisteria)이란개념을 고안하였다.24)

다윈의 후예라 할 수 있는 현대 진화론자들이 서로 일치하지는 않

지만, 그렇다고 현대 다윈주의자들간의 이러한 불일치가 창조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진화론은 한낱 잘못된 가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입증

하지는 않는다. 창조론자들은굴드의 단속평형설을인용하면서종의분

화가 일어날 수 없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전거로 삼고 있

다.25) 그러나 굴드의 단속평형설의 요지는 생명체들이 오랜 기간 동안

종의 분화가 일어나지 않았던 안정된 기간이 있는 반면 상대적으로 아

주 짧은 기간에 폭발적인 진화가 진행된 현상의 역사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굴드의 단속평형설을 인용하면서 진화론을 부정하는

전거로 삼는 것은 창조론자들의 심각한 전거의 오용이다. 굴드는 명백

히 진화론자이며, 그의 단속평형설은 보다 근래에 발견된 화석증거에

진화론을 부합시키기 위한‘진화된’진화론이라 볼 수 있다. 굴드는 진

화를 진보로 보아온 그동안의 통념을 비판하면서 진화에서 점진적 진

보가 아닌 우발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이 전통적인

다윈주의에 도전이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창조론에

서 인용하는것처럼 진화론을부정한 것은아니다.

I V. 창조론운동

역사적으로 과학적 창조론(Scientific Creationism)의 19세기 후반

보수적인 미국 기독교를 배경으로 시작되었다.26) 다윈의 진화론이 가져

김기석, 진화론과 공존가능한 창조신앙 399

24) ibid., 206.

25) 교진추, 앞의책, 144-151.

26) 창조론이란 용어는 서론에서 정의 내린 것처럼 과학적 창조론(Scientific Creation-

ism)을 뜻한다. 국내에서는흔히‘창조과학(Creation Research)’이란말로사용한다.

생존에 요구되는 음식물의 생산은 산술급수적으로증가하는데 비해 인

구 증가율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인류는 생필품의 결핍

등의 어려움에 근본적으로 부딪힐 것이며 이에따라 빈곤과 전쟁, 강탈

등 갖가지 문제가 결코 근절되지 않을 것이므로 이상사회는 다만 신기

루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보다 격렬한 경쟁과 투쟁이 생존에 필연적

이라는 맬더스의 어두운 전망과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는 다윈의 진

화론은 사회사상에도지대한 영향을 끼쳐생존경쟁설에 따라 인종차별

이나 약육강식을 합리화하여 강대국의 식민정책을 합리화하는 사회다

윈주의에도이용되었다.

오늘날 진화론의 계보는 크게 리처드 도킨스를 중심으로 유전자를

중시하는 극단적 다윈주의자들과, 단속평형설20)을 제창한 스티븐 제이

굴드를 축으로 하는 자연주의자로 나눌 수 있다.21) 장대익은 탁월한 상

상력을 발휘하여 다윈 이후 가장 중요한 진화생물학자로 일컬어지는

윌리엄 해밀턴 박사의 장례식에 모인 현대의 유력한 진화론자들이 여

러 가지 흥미로운 주제에 대한 진화론의 현대적 해석을 둘러싸고 벌이

는 가상 토론을 전개함으로써 두 갈래로 나눠진 현대 다윈주의의 차이

를 보여주고 있다.22) 이 가상의 세기적 토론에서 도킨스 팀은 도킨스를

필두로 해서 에드워드 윌슨, 핑커, 코스미디스로, 상대편인 굴드 팀은

굴드와 르원틴, 촘스키, 코인으로 구성하여 적응, 유전자, 진화의 본질,

진화론과 종교의 문제 등에관해서 토론을 벌인다. 도킨스와 굴드는 종

교에 대한 입장도 큰 차이를 보이는데 도킨스는 종교적 지식도 과학에

의해 진위 여부를 가릴 수 있다는 과학 만능주의 내지는 과학 제국주

의 입장을 표방한다. 그는 종교는 정신적 바이러스라며 철저한 무신론

적 진화론을 주장한다.23) 반면 스티븐 제이굴드는 진화론과 종교는 완

39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20) 스티븐제이굴드, 김동광 옮김, 『생명, 그 경이로움에대하여』(서울: 경문사, 2004).

21) 김용준, 앞의책, 129-136.

22) 장대익, 『다윈의 식탁』(파주: 김영사, 2008).

23) ibid., 196-197.

Page 201: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교라는 같은 종교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창조교리에 대한 해석은 상

당히다르다는 것을여실히 보여준다.

미국 기독교의 창조론 운동의 역사에서 진화교육법을 위반한 교사

존 토머스 스콥스(John Thomas Scopes) 재판은 당시 미국사회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25년 봄 미국의 테네시 주

데이턴이라는마을의 고등학교 교사였던 스콥스는 스스로 당시통과된

공립학교에서의진화교육금지법을 위반했노라고자인했다. 이 유명한

재판에서 앞서 언급한 반진화론 운동을 이끌었던 브라이언은 검찰 측

참고인 자격으로 참석했으며, 반진화론운동을 종교가 과학을 억압하는

부당한 것이라고생각하는지식인들은피고인을변호하는입장에 섰다.

법정은 스콥스를 기소한 검찰에 따라 유죄라면서 벌금으로100 달러를

내도록 판결했다.30) 형식적으로는 창조론자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내용

적으로는 진화론의 승리였다. 언론은 창조론자들에 대해 비판적이었으

며, 브라이언은 과도한 시련을 겪은 탓인지 재판이 끝난 지 며칠 후에

사망하였다. 이 재판을 통해 창조론자들 가운데 전문적인 증언이 가능

한 최고 수준의 과학적 자질을 지닌 사람이 없다는 것과반진화론자들

이 창조론에관한 의견의 일치를 보지못한다는 점이 드러났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그들은 반진화론 운동을 계속했고1926년 미시시피에서,

1928년 아칸소에서 부분적인 승리를 쟁취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교과

서의 진화론 교육의 무력화, 도서관 정화운동, 진화론 교사를 강단에서

쫓아내기에 집중했다. 지역에 따라 지방 교육위원회와 출판업자들, 그

리고상당수의교사들이 그들의 압력에 굴복했다. 고등학교교과서에서

불경스러운 진화론은퇴출되었고, 교사들은 진화론자로 낙인찍힐까 두

려워했다.31)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창조론이 부흥하게 된 것은 탁월한 논쟁가이

김기석, 진화론과 공존가능한 창조신앙 401

30) 강건일, op. cit., 90.

31) 넘버스, op. cit., 545.

다 준 충격에 대한 기독교 진영의 대응 방식에 있어서 영국을 비롯한

유럽과 미국대륙간에 온도차이가 상당히 달랐다. 유럽에서는 대체로

지성적인 분위기 속에서 진지한 논쟁을 통해진화론 논쟁이 전개된 것

에 비해, 미국에서는 보다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창조과학회는바로이러한 미국적인분위기 속에서 결성되었다. 최초의

반진화론 운동을 이끈 사람은 윌리엄 브라이언(William Bryan, 1860-

1925)이었다.27) 미국의 국무장관을 역임하고 세 번이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명성과 특권을 누렸던 그는 충성스러운 추종자들을 거느린 반

진화론의대변자였다.

1920년대 미국에서 기독교 근본주의 운동을 이끌던 침례교도들과

장로교도들은 반진화론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들은 공개

적으로“진화론은기독교의적”으로간주하였는다. 1926년 남침례교총

회는“본 총회는 인간이 하나님의 특수한 피조물이라고 가르치는 창세

기를 받아들이며, 진화론이건 혹은 다른 이론이건 간에 인간이 열등한

동물들을 기원으로 혹은 그 단계를 거쳐 유래되었다고 하는모든 이론

들을 거부한다”는 선언을 만장일치로 가결시켰다.28) 한편1929년 미국

에서700명의 개신교 목사들을 대상으로“당신은 이 세상의 창조가 창

세기에 기록된 바로 그 방식과 시간에 따라 발생했다고 믿습니까?”라

는 질문에 대해 긍적적으로 답변한 비율은 교파에 따라 서로 큰 차이

를 보인다. 이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의 비율은 루터교(Lutheran) 89%,

침례교(Baptist) 63%, 복음교회(Evangelical) 62%, 장로교( P r e s b y-

terian) 35%, 감리교(Methodist) 24%, 회중교회(Congregational) 12%,

성공회(Episcopalian) 11%로 상당한 편차가 있었다.29) 이는 비록 기독

40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강건일, 『진화론창조론 논쟁의이해』(서울: 참과학, 2009), 94-100.

27) 데이비드 C. 린드버그, 로널드 L. 넘버스 편, 이정배, 박우석 번역,『신과 자연: 기독교

와 과학, 그 만남의역사』(서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98), 527.

28) ibid., 533.

29) 넘버스, op. cit., 532.

Page 202: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장애물인 진화론의 과학적 허구성을 밝히고 창조의 과학적 증거들을

드러내는데 노력을 기울이고자 한다. 이들은 현재 진화론만 가르치고

있는 공교육기관에서도과학적 증거를 통해창조론을 가르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으며, 창조과학 전시관, 창조과학 연구소, 창조과학 교육원

으로구성된 창조과학관의 건립에 또한 목적이 있다. 한편 교진추는교

과서에 창조론을 도입하기 위해 설립했던 창조과학회 산하단체와 통합

하여 새로 결성한 단체다. 교진추는‘진화론의 오류와 과학 발전에 따

른 최신 이론 등을 학계와 교육계에 알림으로써 건전한 과학 발전 및

학술 진흥에 이바지한다’고 설립 취지를 정하고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과학 교과서에서 진화론을 폐기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홈페이지

에서 밝히고 있다. 이번 청원에 이어 진화론이 철폐될 때까지 앞으로

더 많은교과서 개정청원을 낼 것으로 보인다.

V. 지적설계론

19세기 초에 영국의 윌리엄 페일리는 지적설계론의 시조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자연신학』에서 자연 속에서 드러나는 목적

에 대한 적합성은 그것이 지성의 산물이며 단순히 방향성이 없는 자연

적 과정의 결과가 아님을 보증한다. 생명있는 유기체에서 발견되는 목

적에대한 놀라운 적합성은, 전체유기체의 수준에서든 여러기관의 수

준에서든유기체가 지성의산물임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페일리의 논증

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풀밭을 걸어가다가 돌 하나가 발에 채

였다고 상상해 보자. 그것이 어떻게 거기에 있게 되었는지 질문한다면

쉽게 그것은 항상 거기에 놓여 있었다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돌이아니라 시계를 발견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그

장소에 있게 되었는지 답해야 한다면, 앞에서 했던 것 같은 대답은 설

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시계는 제작자가 있어야 한다. 제작자는 의도적

김기석, 진화론과 공존가능한 창조신앙 403

자 투철한 신앙인이었던 헨리 모리스(Henry Morris, 1918-2006)에 의

해서였다.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한 모리스는 어느 날 자신의 서재에서

창문 틈으로 날아 들어온 말벌을 관찰하다가 공학적으로 이렇게 정교

한 피조물이 진화를 통해서 우연히 발전되어 생겼을리는 만무하다고

결론을 내렸다.32) 남침례교도로 성장한 그는 창조가 문자 그대로6일간

에 걸쳐 일어난 것이라고 결론지었고, 그 이유는 성서가 명백하게말하

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쓴『당신이믿을지도 모르는 것』은

스콥스 재판 이후 일반 대학의 과학자가 특수 창조와 대홍수를 옹호한

최초의 출판물이었다. 1953년 모리스가 미국과학연맹에 제출한 대홍수

에 대한 견해를 본 젊은 신학자 존 휘트콤2세가 이에 경의를 보냈고

두 사람은 친구가 되어 홍수를 옹호하는 합동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1961년『창세기 홍수』라는 책에서 성서 구절의 무오류성에 대해 주장

했으며, 열역학 제2법칙의 발단이 된 인류의 타락, 노아의 홍수를 통해

일 년 안에 대부분의 지질학적 지층들이 형성되었다는 논증을 펴고 있

는데, 이는 창조연구회의 설립을 야기함으로써 프라이스의『신지질학』

이래 엄격한 창조론에 가장 인상적인 공헌을 한 책이 되었다. 이 책에

감명을 받은열 명의엄격한 창조론자들이‘십인조’라는별명이 주어진

서신교환망을 구축하며창조과학회가 구성되었다. 이 단체는 회원들에

게 성서의무오성과 모든 생명체의 개별적 창조, 세계적인 대홍수를 인

정한다는 진술서에서명하도록 요구했다. 한편과학적 단체라는 주장에

걸맞게 학술지를 발간했고정회원은 과학분야 학사 학위 이상 받은 사

람으로 제한했다.

이렇게 설립된 미국창조과학회의 한국지부로 설립된 것이 바로‘한

국창조과학회’를 들 수 있다. 1981년에 시작된 이 단체는 복음주의적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창조신앙을 내세우고 있다. 홈페이지에서

소개하고 있듯이 한국창조과학회는선교를 위하여 복음전파의 커다란

40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32) ibid., 552.

Page 203: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데 구성성분을 살펴볼 때 섬유질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단백질과 상이

하다. 그 구조와 작동원리는 공학적인 시스템인 모터와 상당히 유사하

다. 비록크기는 수 나노미터에 불과하지만 고정된 링인고정자 속에서

회전자를 가진다. 더욱놀라운 것은이 구조의 효율인데 분당15,000번

회전할 정도로 고에너지 효율을 가진다. 즉, 이 모터와 같은 기관은 다

른 부분에 비해비정상적으로발전하였다고결론내릴수 있다.

20세기 이후의 지적설계운동의 효시는 미국의 법학자인 필립 존슨

이 1991년에출판한『심판대 위의다윈』이라고 볼 수 있다.33) 이 책에서

존슨은 진화론이 과학적인 근거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자연주의 철학

에 근거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저명한 법학자인 존슨은 다윈 이후

150년 이상 지속되어 온‘창조론 대 진화론’논쟁의 본질이 과학적인

증거로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무신론 대 유신론이라는 두

개의 상충되는 세계관 사이의 대결이라고 주장하였다. 1996년에는 지

적설계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전기가 된 큰 사건들이 두 가지가 일어난

다. 첫 번째 사건은 순수 창조라는 학술대회이다. 두 번째 중요한 사건

은 미국의 리하이 대학교의생화학 교수인 마이클 베히박사가『다윈의

블랙 박스』를 출판한 것이다. 그 후 1998년에는 미국의 전산학자인 윌

리엄 뎀스키는 지적 원인이 경험적으로 탐지가 가능하며 관찰한 데이

터에 기반하여 지적 원인과 방향성이 없는자연적 원인을 믿을 만하게

구분할 수 있는방법이 존재한다는주장을 폈다.

창조론은“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들었다”라는 것인데, 지적 설계론은

이 진술에서‘하나님’을‘지적 존재’로 대치한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창조론도 지적설계론이라고할 수 있다. 그러나 역으로 지적 설계론이

창조론은아니다. 창조론은하나님이 창조의 주체이며 창조주의의도와

인격이 중요한데, 엄밀한 의미에서 지적 설계론은‘지적 존재’를 가정

김기석, 진화론과 공존가능한 창조신앙 405

33) 필립 E. 존슨, 이승엽, 이수현 옮김, 『심판대 위의 다윈: 지적설계논쟁』(서울: 까치,

2009).

으로 그것을 만들었다. 그는시계의 제작법을 알고있으며 그것의 용도

를 설계했다. 시계 속에존재하는 설계의 증거는 자연의 작품에도존재

한다. 그런데 자연의 작품 쪽, 즉 생명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시계

보다 훨씬더 복잡하다는 것이다. 당시복잡한 기계의 대표격인 시계를

가지고 그 복잡성을 생명의 복잡성과 비교하면서 생명이 설계되었음을

역설한 페일리의논증은 대표적인설계논증이라고할 수 있겠다.

오늘날 지적 설계론에서는‘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란중요한 개념

이 등장한다. 그것은 몇 가지 부분들이 합쳐져 기초적인 기능을 하는

시스템으로서 그중 어떤 한 부분만 없어도 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특성이다. 이 개념은 마이클 비히의 저서인『다윈의 블랙 박스』에서 자

세히 소개되었다. 마이클 비히는 이 개념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쥐덫을

예로 들었다. 쥐덫은 바닥, 스프링, 망치, 막대, 집게로 구성되어있는데

이 중 하나를 없애거나 위치를 잘못시키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환

원 불가능한 복잡성은 그 정의로써 진화론을 반박한다. 진화론에 의하

면 어떤 기관은 갑자기 창조된 것이 아니라 원시 기관이 꾸준히 변화

된 결과로서 존재한다. 또한변화의 과정속에서 기관은 같은메커니즘

을 통해 작동한다. 따라서 현존하는 기관은 불완전하지만 기능을 하는

선구적 기관이 있어야 한다.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을 가진시스템에 대

해 이 논리를 적용시켜보자. 진화론이 맞는다면이 시스템은 과거엔 지

금보다 불완전한 시스템이었을것이다. 하지만 환원불가능한복잡성의

정의에 불완전한 시스템은 제 기능을 하지못한다. 이는 변화의 과정에

서 기관은 같은 메커니즘을 통해 작동한다는 진화론의 주장에 모순이

된다. 이 모순을 피하려면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은 선구체로부터 변화

된 것이아닌어떤지적인 존재에 의해창조되어야만한다.

지적설계론에서 자주 거론되는 또 하나의 강력한 예는 박테리아 편

모의 구조에서 발견되는환원불가능한 복잡성이다. 편모는 박테리아의

운동기관으로 가는 채찍모양의 섬유질이 회전하면서 추진운동을 도와

준다. 편모를 회전시키기 위한 기관은 박테리아세포벽 안에 묻혀있는

40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204: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원한 것이지만 그러한 원리를 표현하는 방식은 과학의 새로운 빛에비

추어 계속적인 수정을 통해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교훈의 전형적인 사

례일 것이다.3 4 ) 어거스틴에 의해 확립된‘무로부터 창조’(creatio ex

nihilo) 교리와 더불어 신학자들은‘계속된 창조’(creatio continua) 교

리를 인정해왔기 때문에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은 하느님의 계속된 창

조와 상응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이다. 1889년 찰스 고어는

“자연의 진화과정이 인류의 출현에서 절정에 이르렀다면, 인류의 역사

는 성육신에서 절정에 이르렀다”고 주장하였다.35)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신적 로고스의 성육신을 생명과 인류의 진화론적 맥

락에서 파악하였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로이드 모건은 진화에 나타나

는 창발적이고 유기적인 특성에 주목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끌어가는

창조력으로 보고자 하였다. 그는 진화과정의 각 단계에서 새로운 무언

가가 생성되어 작용함으로써 진화가 가능하다고 보고이러한 창발성이

기존의 이신론의 틀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무기력한 모습을 제거

한다고 기뻐하였다.36) 이신론에서의 신 이해는 하나님이 세계에 최초의

법칙은 부여하지만 그 이후 전개되는 사태는 그야말로 부여된 자연법

칙에 따라 인과율적으로 발생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역사의 전개 과정

에서신의역할은 최소한으로이해될 수밖에없었다.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가톨릭 사제이자신학자였고,또한고생물학자

로서 북경원인 발굴 탐사에도 참여하였는데 그는 인류가 유인원에서

진화해 왔으며,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 나선형으로 발전해 나가는 역사

의 전개과정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할

최종적으로 완성된 인간의 모습이라고 주장하였다.37) 이러한 급진적인

김기석, 진화론과 공존가능한 창조신앙 407

34)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김준섭 역,『과학과 근대세계』(서울: 을유문화사, 1993),

249.

35)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인간의 생명: 창조인가 진화인가?”, 테드 피터스 엮음, 김흡

영 외 옮김, 『과학과종교』(서울: 동연, 2002), 242.

36) ibid.

할 뿐이지 그 존재가 누구인지, 어떤 인격을 지녔는지에 대해서는관심

밖이다. 페일리의 설계 논증에 대해데이비드 흄은만일 기계라고는 본

적이 없는 어떤 사람이 처음으로 군함과 같은 거대한 배를 본다면“도

대체 이런 어마어마한 기계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하고 신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군함은 최초의 인류가 타던 통나무 카누에서부터 시

작하여 뗏목, 나룻배, 범선, 기선 등으로 차츰 차츰 발전된 것으로서 반

드시 초월적인 설계자를 도입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였다. 지구

의 오랜 역사와 환경 속에서 변이와 자연선택은 특정한 목적없이 생명

의 복잡성을 설계한‘눈먼 시계공’이라는 것이다윈주의가생명의 목적

성을인정하지않는논거이다.

이러한 논증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현대 생물학이 생명체의 미

시적 차원에서 발견되는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에 대하여 만족할만한

충분한 설명을 제공해 주지는 못하는 듯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어쩌

면 일리야 프리고진이 제시한 카오스 속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물질의

‘자기 조직’의 경향성 속에서 앞으로 설명 가능한 답을 찾을지도 모른

다. 만일 이것이 정답이라면 우리는 물리적 우주 안에 내포된 목적성

내지는 방향성을일정정도읽어낼 수 있지않을까 생각한다.

V I. 유신론적진화론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은 생명의 진화를 과학적 사실

로 인정하면서 진화론의 관점에 비추어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하는 입

장이다. 다윈이『종의 기원』을 출간했을 때 기독교 진영이 모두 적대적

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은 마침내 다윈이

베일에 쌓여 있던 생명의 역사에 작용한 하느님의 섭리를 밝혀냈다고

환영하였다. 그들은 진화론의관점에서 기독교 교리를 재해석하려고했

는데 이러한 시도는 후대에 알프레드 화이트헤드가“종교의 원리는 영

40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205: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에 관한논쟁이 아니다. 그러므로 진화론을두고, 신앙적 입장에서 과학

에 뛰어들어 성서에 어긋나는 과학은 잘못된 과학이라며 싸움을 벌이

는 성서적 문자주의의 입장이나, 반대로 그 형이상학적 의미를 추려서

신학에 뛰어들어 너희가 말하는 신의창조 따위는 폐기해야 한다고 조

롱하는 입장 모두 무리한 시도인 것이다. 대개 형이상학적 논쟁은 그

성격상 끝장을 볼 수 있는 논쟁이 아니다. 이는 신념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에 관한 문제, 즉 과학 이론은 그 내용을 공부해

서 배우는 자세가 필요하고, 의미와 신념에 관한 문제, 즉 철학과 신학

은 진지하게상대방의이야기를듣고대화하는자세가 필요하다.

비록 진화론이 생명의 모든 것에 대해 완벽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

한다 하더라도 신학적으로 그것이 진화론 자체를 거부할 명분이 될 수

는 없다. 왜냐하면 인류는 아직 우주와 생명과 인간정신의 기원과 발전

과정에 대해 완벽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물학자들의

사명은 기독교의 창조신앙을 박멸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기원과 신

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내는 것이고 신학은 이들의 지적 성취에

대해 경청할 필요가 있다. 진화론을 수용해야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과학공동체에 대한 신뢰때문이다. 물론과학사를 살펴볼 때에

토마스 쿤이 제시한 대로기존의 정상과학이 패러다임이라는 방법론적

특성때문에 새로운 이론에 대해억압적인 요소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항상 비판과 검증에 열려 있으므로 진리가 기

존의 권위에 의해 정당한 대접을 못 받는다면 그것은 단지 일시적으로

만 가능한 현상이다.38) 새로운 과학의 개척도 과학자들의 몫이지 신학

자나 철학자들의 몫은 아니다. 진화론이 설득력이 약간 부족하다고 해

서 창조론으로 대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했다는 성서의 구절이 신의 솜씨, 혹은신의절대성과 초월성을뜻

김기석, 진화론과 공존가능한 창조신앙 409

38) 창조론자들은잘못된 과학인 진화론이 창조론을 부당하게 억압하고 있다며, 마치 과

학계를 장악하고 있는 다수의 진화론자들의 횡포로 묘사하고 있다. 교진추 엮음, 앞

op. cit., 162.

주장 때문에 초기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비판을 받았으나 차츰

20세기유신론적진화론의기틀을 놓았다. 그의사상은 가톨릭 뿐만아

니라 개신교 신학에까지 영향을 끼쳐 과학과 기독교 신학의 대화에 큰

공헌을 세웠다. 이외에도 저명한 유신론적 진화론자를 열거하자면옥스

퍼드대와 캠브리지대의 영문학자이자 성공회 평신도로서 현대에 설득

력 있는기독교 변증을 펼친C. S. 루이스, 도킨스와 같은 옥스퍼드대의

분자생물학 박사 출신으로 신학으로 전향하여 도킨스의 유전자 환원주

의에 맞서 유신론을 변증한 알리스터 맥그라스, 러시아 정교회 배경을

갖고 있으며 하버드대학교의 생물학자로 현대 진화생물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테어도시어스 도브잔스키, 존 호트조지타운대학교의 철학자이

자 신학자인 존 호트, 인간 게놈프로젝트를 주도한 프랜시스 콜린스도

유신론적 진화론을주장하였다. 이외에 아서피코크를 비롯하여 과학과

종교의 대화에 참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진화론적 입장을 견지하면

서도동시에 종교적 성찰을 존중한다.

진화론이 창조론에 도전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기독교 신

앙과 진화론이 조화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의창조

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진화론은 하나의 과학 이론이지만,

창조론은 엄밀한 의미로 과학이론이 아니라 창조에 관한 신앙의 고백

이다. 물론 진화론이 함축하는 내용이 아무런 도전이 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진화론은 생명의 기원과 진화의 방향이 우연한 것이며

목적이 없다는 함의를 지니고 있기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함의는 진

화론 자체의 내용이라기보다는함의라는 단어 그대로 진화론에 포함된

철학적, 형이상학적 질문이다. 다윈의『종의 기원』의 주된 내용은 어떻

게 생명이 변이를 낳고 환경 속에서 선택되고 새로운 종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기제에 관해 설명하는 것이지, 그것에 담겨진 형이상학적 의미

40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37) Pierre Teilhard de Chardin, The Phenomenon of Man (New York: Harper & Row,

1959), 302.

Page 206: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설명을 제공하는 책으로 간주한다면, 창조 이야기에담겨있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인간적 경험과 신학적 깨달음을 모두 간과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고 바버는 강조한다. 이 세계와 모든생명체가 하나님의창조 사역

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이라는 고백에 담겨있는 인간적 경험이란1)

세계의 의존성, 유한성과 우연성의 지각, 2)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과 신

뢰, 그리고 감사와 물리적 세계에 대한 긍정의 표현, 3) 이 세계에 깃든

상호의존성, 질서,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 등이다.41) 고대 자연종교의 세

계관과 구분되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독특한 고백 속에 창조신앙의 핵

심이담겨져 있다. 이러한 고백은20세기의 우주비행사들이 우주 공간

에서 지구를 바라보면서 느꼈던 경이로움과 전혀 다르지 않다. 다치바

나 다카시는 우주 비행사들을 수십 명 만나 그들이 우주여행 중에 느

낀 체험들을생생하게기록하였는데제임스 어윈의 고백을 들어보자.

지구가 암흑 속에서 보였다. 아름답고 온기를 가진 듯 살아 있는 물체로

보였다.(중략) 처음에는 그 아름다움, 생명감에 눈을 빼앗기고 있었지만,

나중에는 연약함을 느끼게 되었다. 감동했다. 우주의 암흑에서 빛나는 푸

른 보석, 그것이 지구였다. 지구의 아름다움은 그곳, 그곳에만 생명이 있

다는 사실에서 오는 것이리라. 내가 바로 그곳에서 살아왔다. 저 멀리 지

구가 우두카니 존재하고 있다. 다른 곳에는 어디에도 생명이 없다. 자신

의 생명과 지구의 생명이 가느다란 한 가닥 실로 연결되어 있고, 그것은

언제 끊어져버릴지 모른다. 둘 다 약하디 약한 존재이다. 이처럼 무력하

고 약한 존재가 우주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의 은

총이라는사실을 아무런설명없이도 느낄수 있었다.42)

그야말로 지구는 우주라는 광대한 사막 가운에 홀로 떠 있는 생명

의 오아시스라는 것을 우주 비행사들은 실감한다. 아폴로13호의 선장

김기석, 진화론과 공존가능한 창조신앙 411

41) Ibid.

42) 다치바나 다카시, 전현희 옮김,『우주로부터의귀환』(서울: 청어람미디어, 1983), 127.

김기석, 『종의 기원vs. 신의기원』(서울: 동연, 2009), 244. 재인용.

하는 것이지 반드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만들었다는 의미는 아니

지 않은가? 진화의 과정조차도 포용하여 역사를 섭리하시는 신을 믿는

다면진화론이신앙을 흔들이유가 없는것이다.

V I I. 결론: 창조신앙의현대적해석

현대과학은 우주와 생명의 기원 및 역사에 대해 비록 완벽한 진리

는 아니지만‘진리에 근사한’(verisimilitude) 신빙성 있는 설명을 제공

하고 있다.39) 21세기는 또한 지구온난화로인한 기후변화 및 생태계 파

괴, 자원고갈, 핵 위기등으로 인류문명의존속이 근본적으로위협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러한 맥락에서오늘날의 신학자들은 기독교공동체가

창조신앙을 현대과학과 충돌없이 이해할 수 있고, 생태계 파괴로 인한

위기와 관련하여 유의미한 해석을 제시해야할 임무를 부여 받고 있다.

만일 우리가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문자주의적 해석( l i t e r a l

interpretation)으로읽는다면필연적으로현대과학의 여러분야와 충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문자주의적 해석에 집착하는 것은과학

과의 전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생태계 파괴의 시대에

요구되는 생태영성적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신학적 책무도 놓치기 쉽

다. 이런 점에서“창세기에서 과학적 지식을 발견하려는 시도는 신학적

으로나 과학적으로나 모두 성공적이지 못할 것”40)이라는 이얀 바버의

지적은 타당하다. 그는 우리가 만일 창세기를 시대를 초월하는 과학적

41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39) ‘사실성’, 혹은‘신빙성’으로 번역할 수 있는이 단어(verisimilitude)는 과학철학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이 단어는‘진리근사성(truthlikeness)’라는 개념과 더불어“과학

이 누적적 발전을 통하여 실체적 진리에 점점 더 근사한 설명을 제공한다”는‘비판

적 실재주의(critical realism)’의 인식론을 요약적으로 잘 표현한다. John Poliking-

horne, Belief in God in Am Age of Science (New York: Yale University, 1998),

101-102.

40) Ian Barbour, Religion in An Age of Science (London: SCM Press, 1990), 133.

Page 207: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창조 신앙은 이스라엘의 히브리 성서에 창조 이야기가 기록될 당시

의 종교 문화적, 사회 경제적 상황을 반영한다. 히브리 성서의 창조 이

야기가 문학적 형식과 소재가 당시 고대근동 지방에 지배적인 바빌론

창조설화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세계

와 생명과 인류가 신들의 전쟁 혹은 우발적 사건들로 인해 생겨났다고

말하는 바빌론 창조 설화와 근본적인 차이는 창조주가 선한 본성과 의

지로 세계와 생명과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 신앙의

핵심은 이 세계가 인간에 대해 호의적이고 질서정연한 장소로서, 결코

물리적 세계가 스스로 신성이나 마성(魔性)을 지닌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는것이다. 이는인류의 고대종교문화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뿌리 깊은 자연숭배나 동물숭배로 인한 인신희생 제사 등과 같은 인간

을 억압해온악습과의 단절내지는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히브리

성서에 기록된 창조 신앙의 본뜻은 한 마디로 자연 세계로부터 인간의

해방에 있는것이다. 하느님의 창조가 과학적 시간으로 따져언제 일어

났는지, 며칠에 걸쳐 어떤순서대로 무엇무엇을 만들었는지는전혀중

요한문제가 아니라는것이다. 그런데 창조론자들은이것이 창조신앙의

중심인양 성서구절을 붙잡고 과학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창조

론자들은 가치와 신념 체계인 신앙으로 과학을 판단하는 무모한 시도

를 하고 있는반면 도킨스와 같은 다윈주의 무신론자들은 사실 규명과

설명이 주된 목적인 과학을 가지고 신학을 심판하는 과학 제국주의적

인 교만을 보여주고 있다. 종교적 교리를 가지고 과학에 적용하려는시

도나, 반대로 과학적 설명을 가지고 종교적 진리를 판단하려는 시도모

두 성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무리한 시도 대신에 인간의 무분

별한 욕심과 개발로 수많은 생명이 멸종되고 있는 오늘날 창조신앙의

가치는 하나님의 피조세계로서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것이며, 과학

의 공헌은 생명의 세계가 얼마나 경이롭고 소중한 것인지를 밝혀냄으

로써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함께 대화하고 협력하는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류와 지구생태계의 지속적인 발전과 미래를 위

김기석, 진화론과 공존가능한 창조신앙 413

이었던 제임스 라벨은 지구로 돌아온 후 첫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지

구를 떠나 보지 않으면, 우리가 지구에서 가지고 있는 것이 진정 무엇

인지 깨닫지 못한다.”43) 그들은 우주 비행사가 우주에서 얻은 새로운

비전, 새로운 세계 인식을 전 인류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고 생각한다. 자신들이우주에서 본 지구의 이미지, 전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우주선인 지구호의 진정한 모습을 전하고, 인간 정신을 보다높은

차원으로 인도하지 않으면 지구호를 조종하는데 실패하여 인류는 멸망

해 갈 것이라고 어윈은 강조하였다.44)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본 체험에

기반한 이러한 지구와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의 고백은 창세기가 전하

는 창조신앙의요지와 일맥상통한다.

천지창조 이야기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세 가지 요점으로 정리하자

면 첫째, 세계가 본질적으로 선하고 질서정연하며 일관되고 지성으로

이해가능한 대상이라는 것, 둘째세계는 하느님께의존적이라는것, 셋

째,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자유로우시며 초월적인 분이고, 당신의 목적

과 의지를 가지고 세계를 이끌어 가신다는 것이다.45) 이러한 하나님과

세계의 특성에 관한 신학적 주장은 그저 지난 과거의 한 순간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역사 전체를 꿰뚫어 유효한 진술이 되어

야 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이러한 신학적 주장들은 한시적

인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것이라고 바버는 강조한다. 창조신앙은 우

주와 생명의 기원과 그 의미,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관한 하나의 종교적

신념이다. 이런 점에서 창조신앙은 생명의 기원과 발전에 관한 과학이

론인 진화론과 전혀 무관할 수는 없지만 반드시 적대적이거나 상충되

어야할 필연성은 없다고전제한다. 또한창조신앙은 구약성서가 기록된

오래 전 과거에 고정된 내용이 아니라 과학의 발전 및 생태계 파괴와

같은자연세계의의미성의 변화에 따라그 재해석되어야한다.

41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43) ibid., 61.

44) ibid., 139.

45) Ian Barbour, op. cit., 133.

Page 208: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참고문헌

강건일. 『진화론창조론논쟁의 이해』.서울: 참과학, 2009.

김기석. 『종의 기원 vs. 신의기원』. 서울: 동연, 2009.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회. 교과서진화론개정연구소 엮음.『진화론 바로잡기』. 서

울: 생명의 말씀사, 2011.

김용준. 『과학과종교사이에서』. 파주: 돌베개, 2005.

다치바나다카시. 전현희옮김. 『우주로부터의귀환』. 서울: 청어람미디어, 1983.

데이비드 C. 린드버그, 로널드 L. 넘버스 편, 이정배, 박우석 번역,『신과 자연:

기독교와 과학, 그 만남의역사』(서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98)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인간의 생명: 창조인가 진화인가?”. 테드 피터스 엮음.

김흡영외 옮김. 『과학과종교』. 서울: 동연, 2002.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김준섭 역. 『과학과 근대세계』. 서울: 을유문화사,

1993.

에드워드윌슨. 최재천/장대익옮김. 『통섭』. 서울: 사이언스북스, 2005.

에이드리언 데스먼드. 제임스 무어 공저. 김명주 역.『다윈 평전』. 서울: 뿌리와

이파리, 2009.

신재식, 김윤성, 장대익공저. 『종교전쟁』. 서울: 사이언스북스, 2009.

스티븐 제이 굴드. 김동광 옮김.『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서울: 경문사,

2004.

장대익. 『다윈의식탁』. 파주: 김영사, 2008.

재닛브라운/임종기역. 『찰스다윈 평전』. 파주: 김영사, 2010.

필립 E. 존슨. 이승엽/이수현. 『심판대 위의다윈』. 서울: 까치, 2009.

최재천.『통섭의식탁』. 서울: 명진출판, 2012.

한국창조과학회편.『진화는과학적 사실인가』. 서울: 태양문화사, 1981.

「서울신문」. 2012년 7월 3일자. “교진추, 진화론 삭제주장서일보 후퇴”.

「시사IN」. 6월 13일자. “교과서속 진화론 삭제, 무엇을노리나?”.

「연합뉴스」. 2012년7월 6일자. “창조론으로교과서 수정하면 세계적 웃음거리”.

Barbour, Ian. Religion in An Age of Science. London: SCM Press, 1990.

Brooke, John Hedley. Science and Religion: Some Historical Perspectives.

김기석, 진화론과 공존가능한창조신앙 415

해 열린과학과손잡을 수 있는창조신앙의재해석이필요한 이유이다.

주제어

진화론, 창조론, 창조신앙, 유신론적진화론, 과학과 종교의 대화

Theory of Evolution, Creationism, Belief in Creation, Theistic

Evolution, Dialogue between Science and Religion

접 수 일 2012년 7월 6일

심사(수정)일 2012년 8월 13일

게재 확정일 2012년 9월 1일

41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209: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국문초록

진화론과공존가능한창조신앙을위한고찰

1859년 찰스 다윈이『종의 기원』을 출간한 이래 기독교의 창조신앙

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생명과 인간의 기원에 관한다윈주

의적 관점은 창세기의 기록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진화론

은 과학과 기독교 신학 사이의 끊임없는 논쟁 혹은 대화의 주제가 되

었다. 진화론에 대한 기독교의 반응은 창조론, 지적설계 창조론, 진화론

적 유신론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과학의 진화론과 기독교의 창조

론의논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고있다. 이 논쟁은 교과서진화론개정추

진회(이하 교진추)가 창조과학회와 더불어 과학 교과서에서 진화론을

폐기하거나 창조론을 병행하여 가르치는 것을 목표로 지속적인 반진화

론 캠페인을 전개함으로써 초래되었다.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진화론-창

조론 논쟁은 일시적인 현상에 그치기보다는 앞으로도 계속 격화되어

결과적으로 과학과 기독교 사이의 갈등을 부추기고 일반인들의 기독교

에 대한반감을 더욱고조시킬가능성이높다.

본 논문의 연구 목적은 이러한 상황과 관련하여 앞으로 점점 더 심

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한국사회에서 과학과 종교 사이의 갈등을 완화

하고, 상호이해와 대화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진화론과 대화를 통하여

생명에 대하여 보다 통섭적인 이해가 가능한 신학적 방향을 제시하며,

나아가 오늘날의 생태위기의 시대에 적합한 창조신앙의 의미를 재해석

하는데 있다.

이러한 연구 목적을 위하여 본고는 과학과 종교의 간학문적 대화에

서의비판적 실재주의를 기본적인연구방법론을사용한다. 과학과 종교

김기석, 진화론과 공존가능한 창조신앙 417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Polikinghorne, John. Belief in God in Am Age of Science. New York: Yale

University, 1998.

Dawkins, Richard. The Selfish Gen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 The God Delusion. New York: Bantam Press, 2006.

Chardin, Pierre Teilhard de. The Phenomenon of Man. New York: Harper &

Row, 1959.

Park, Soo Bin. Nature. Volume: 486. “South Korea surrenders to creationist

demands”.

41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210: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Belief in Creation coexisting with the Theory of Evolution

Kim, Ki-Suk

Associate Professor

Sungkonghoe University

Seoul, Korea

Since Charles Darwin had published his famous book, The Origin

of Species in 1859, Christian belief in God’s creation has been

challenged seriously. The explanation of theory of evolution about

the origin and evolutionary development of life and human was

seemed to conflict with the view of Genesis. Nowadays the conflict

between theory of evolution and creationism is getting more and

more serious. This conflict was raised by anti-evolutionary

campaigns led by the Society for Textbook Revision (STR), the

Institute for Revision of Evolutional Textbook (RET) and Korea

Association for Creation Research (KACR). The goal of these

organizations is to remove the contents of the theory of evolution, or

at least to include the creationism in the science textbook. Therefore,

the conflict between theory of evolution and Creationism could be

worse in the future, and it must result out many problems in the rela-

tionship between science and religion as well as certain hostility from

non-Christian people against Christianity in society of Korea.

In considering this situation, this paper aims to suggest a

theological interpretation on belief in creation which is able to release

the conflict in one hand, promote some useful dialogue in the other

김기석, 진화론과 공존가능한 창조신앙 419

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인식론적 전략으로서 비판적 실재주의에 따

르면 과학과 종교가 서로 실재를 파악하고 묘사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양자가 공히 진리를 향한 진지한 탐구라는 것을 인정한다. 본고에서는

특히 지난 수 십년간 과학과 종교의 대화 담론을 주도해 온 학자 중에

한 명인 이얀 바버의 과학과 종교의 관계 모델을 빌려 오늘날 한국사

회에서 전개되는 반진화론 운동을 분석하고, 보다갈등을 해소할 수 있

도록 창조신앙에 관한신학적 재해석을 제시하고자 한다. 창조신앙이란

창세기에 나오는“하나님께서온 세상과 동식물과 인간을 창조하셨다”

는 기록을 문자주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성서비평 방법론을 따라

창조기사가 기록된 역사적 배경과 맥락을 고려하여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신앙고백의 메세지를 오늘날의 현실속에서 재해석하는데 관심을

기울인다. 따라서 창조신앙은 진화론과 반드시 대립할 필요는 없으며

독립적이거나 대화, 혹은포용의 가능성을열어두고 있다.

이러한 연구 목적에 따라서 본고의 내용은 우선 현재 진행형인 교

진추의 진화론 삭제청원을 둘러싼 논쟁을 비판적으로검토하고, 그 다

음에는 진화론의 요지와 신학적 도전의 내용, 과학적 창조론의 태동과

입장, 지적설계론과 그 신학적 의미, 그리고 마지막으로는진화론적유

신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우주론 및 진화론 등

현대과학과대화가 가능하며, 마지막으로 생태계파괴로 문명사적위기

를 맞고 있는 21세기에 적절한 창조신앙의 신학적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41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211: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캐트린테너(Kathryn Tanner)의

자기-비판적문화론탈근대주의문화이론과신학의 대화

이은주

(장로회신학대학교, 강사)

I. 글을시작하며

개신교 인사들이 참여한‘기독당(현재 기독자유민주당)’이 작년 9월

에 창당되었다. 이들은 친북 좌경을 옹호했던 지난10년 정부가 남긴

부정적 유산들을 척결하고 국민에게 새로운 가치를 심어주기위해서라

는 명분하에 사회주의적 복지주의 배격, 동성연애법, 불교 자연공원법

저지등의 정책을 내세웠다. 하지만 창당당시 기독당의 필요를 찬성하

는 여론은6.5%에 그쳤고 참여를 전망했던몇몇유명인사들의불참과

함께 이 사건은 더 이상 대중들의 관심을 끌고있지 못하다. 기독당 창

당에반대하는일부 언론과 지식인들은창당 주도인물들의 함량미달,

특정 이념에 치우쳐 있는 것, 종교간 갈등의 가능성, 명분 미달, 권력을

지향하는 목사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기독당 설립을 비판했다. 이 사

건에 관하여 필자가 주목하는 부분은 기독당의 창당 취지 안에 녹아

있는종교와 문화와의 관계에 대한 이들의 신학적 해석이다. 이들의 주

장에 따르면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는 기독교에 의해만들어진 제도이

고 이를 위협하는 정치 세력들에 맞서 싸우는 것이 기독교인의 책무이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421-453

hand between science in Korea, and present an interpretation appro-

priate in an age of ecological crisis.

In order to fulfil these aims, this paper employs critical realism in

science and religion as a research methodology. Critical realism is

considered to many leading scholars in science and theology as an

epistemological strategy enabling build a bridge between two

domains because it recognizes both as reliable pursuit to seek truth.

According to the aim and methodology of the research, firstly this

paper critically examines the arguments raised by scientific

creationism, secondly the core explanation in theory of evolution and

its challenges to theology, thirdly the argument of intelligent design

and its implications, and lastly the assertion of evolutionary theism.

42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212: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체제와 질서를 선호하고 있으며 이를 마치 하나님의 것으로 선전하고

있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이 글은 위와같은 문제점들을 극복할 신

학적대안을 논의하고자 하는의도로 시도되었다. 이를 위해미국의 포

스트모던 여성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캐트린 테너(Kathryn Tanner)

의‘그리스도교의 자기-비판적 문화론’을 소개하고자 한다.2) 그리스도

교의 자기-비판적 문화론이란 특정 체제와 질서를 하나님의 것으로

숭배하는 태도가‘하나님의 급진적 초월성’이란 그리스도교 신념과 양

립할 수 없음을 말하는 이론이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특정의 정치적

체제로 받아들일 때 이 믿음은 체제유지(status quo)의 정치관으로 기

울게되고, 이로부터 사회적 억압이란 구조적 악에 종교신념이 연루되

게 됨을 비판하는 것이다. 테너의 자기-비판적 문화론에 대한 분석적

논의를 통해 기독당으로 표출된 한국교회의 신학적 정치관의 문제점

및 신학과 문화의 관계성을 되짚어보는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글의 순서는 먼저 이어지는 장에서 테너가 탈근대주의 문화이론과

의 대화를 통해 신학의 본질과 신학방법론의 탈근대적 변화를 어떻게

꾀하고 있는지를볼 것이다. 80년대이후북미에서성행했던문화와신

학간의 대화라는 흐름을 따라 테너는 탈근대주의 문화 이론을 적극적

으로 수용하며 대중문화론에 입각한 신학방법론을 수립해 왔다. 이 장

에서 필자는 문화적 활동으로 신학의 기능을 이해하며 신학적 다양성

과 창조성을 바탕으로 구성된 테너의 자기-성찰적 신학방법론을 고찰

해 보고자 한다. 다음 장에서는 정치·사회질서영역에서의 그리스도교

의 자기-비판적 문화론에 대한 테너의 입장을 살펴볼 것이다. 인간 사

이은주, 캐트린테너(Kathryn Tanner)의 자기-비판적문화론 423

2) Kathryn Tanner는 예일대 교수로서 프로테스탄트 신학 전통에서 출발하여 탈근대주

의 이론과의 간학문적 대화를 통한 구성신학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여성신학자이다. G od and Creation in Christian Theology: Tyranny or Empower-

ment (1988), Politics of God: Christian Theologies and Social Justice ( 1 9 9 2 ) ,

Theories of Culture: A New Agenda for Theology (1997), Jesus, Humanity and

Trinity (2001), Economy of Grace (2005), Christ the Key (2010) 등의 저술들이 있

으며한국어 번역서는아직출판되지 않았다.

기에 반공 이데올로기를 수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한다.1) 기독당의

이와 같은 정치적 견해에 내포되어 있는 신학적 정치론에 대해 필자는

두 가지의질문을 먼저제기하고자 한다. 첫째, 기독교에의해만들어진

민주주의라는 제도(한국적 대의민주주의)는 신성불가침한 제도로 하나

님의 질서와 동일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인가? 둘째, 기독당은 그리스

도인이라면 모두 동일한 정치문화적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 필자의 견해로는 기독당은 이 질문에 대해 긍정의 답변을 줄 것

같다. 현재 남한의 정치체제는 신성불가침한 하나님의 질서라는 것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질서에 참여하기에 동일한 정치문화적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입장이라고필자는 해석한다. 그런데 기독당이

주장하는 것처럼 특정한 질서나 체제를 하나님의 것으로 여길 수 있는

신학적 근거는 무엇인가? 그리스도교 역사가 보여주듯이 역사적이며

다양한 문화적 변동의 과정을 거쳐 그리스도교의 정치적 신념도 만들

어져 온 것이아닌가, 또한 자신들의 정치적 정체성을 신성불가침의 것

으로정당화 하는것은우상숭배가 아닌지 질문하게된다.

필자는 기독당 창당으로 드러난 한국교회의 신학적 정치관이 다소

우상숭배의경향으로 노정되어 있음에 우려를 느낀다. 정치제도와문화

적 질서들은 사회구성원들의 문화적 활동과 다양한 논의과정을 거쳐

건설되는 것이다. 종교인들도정치활동에참여한다. 하지만 자신들이 선

호하는 특정 체제와 하나님의 질서를 직접적으로 동일시하면 문화가

갖고 있는자연스러운 논쟁과 대화의 과정을 무시하게된다. 더 나아가

특정 체제가 현재 옳은 것으로 판단되고 실천된다 할지라도 이것은 미

래에 형성될 더 나은 질서를 향해 열려 있음도 인정해야 한다. 지난몇

년간 한국사회에 반기독교 정서는 급격히 자라났다. 사학법 개정문제,

한기총 사태, 목회자 세습 문제 등의 사건들을 보면 한국교회가 특정

42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1) [좌파 적출 내건 기독당 창당대회 가보니], <프레시안>, 2011-09-20 3:32:46, http://

member.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10920145513&section=0.

Page 213: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이론들: 신학을 위한 새로운 의제』에서‘문화와 신학의 관계’를 탈근대

주의문화이론을 통해새롭게 제시하고 있다.5) 테너에게 신학은 문화로

부터 독립된 활동이라기보다 문화적 상호작용의 과정을 통해 계속 변

화하고 다양화되는 문화적 활동의 하나로 이해된다. 그리스도인의 사회

문화적 실천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 신학이기에 문화적 변동에 따라

다변화와 다양화로 나가게 되며, 그렇기에 신학활동은 그 자체로 문화

적 현상의 하나라는 것이다. 먼저이 장에서는 문화이론의 변화가 신학

방법론에미친영향에 대한테너의 분석을 함께살펴보고자 한다.

『문화 이론들: 신학을 위한 새로운 의제』에서 테너는 문화를 이해한

이론들의 변천 과정을 보여주며 탈근대 문화이론의 수용을 통하여 문

화와 신학의 관계에 관한 신학방법론을 재정립할 것을 주장한다. 그렇

다면 근대 문화이론과 탈근대 문화이론의 차이는 무엇인가? 근대적 문

화이론의기본패턴을 보면먼저문화는 인간일반의보편성을 담는것,

또는 그 자체 안에‘본질’을 하나의 토대(structure)처럼 갖추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6) 그리고 근대 문화 이론은 사회의 특정 집단이 공

동으로 갖는 속성으로 문화를 이해했고, 이 때 문화적 차이는 집단의

‘지리적 거리’때문에 발생하는 차이로 해석되었다. 아프리카 부족과

유럽 민족들이 차이 나며 독특한 문화를 가질 수밖에 없듯이 특수한

지리적 경계는 특정 문화의 경계로 여겨졌다. 따라서 하나의 지리적 단

위에 속할 때 구성원들의 삶의 전체는 그 문화에 종속되는 것으로 여

겨졌다.7) 세 번째 근대적 이론의 특징은 이렇게 문화를 집단-특정의

성격으로 이해했기에 문화는 그 자체 안에‘사회적 합의’라는 속성을

이은주, 캐트린테너(Kathryn Tanner)의 자기-비판적문화론 425

by Delwin Brown, Sheila G. Davaney, Kathryn Tanner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3-6 참조.

5) Kathryn Tanner, Theories of Culture: A New Agenda for Theology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7).

6) Ibid., 24-26.

7) Ibid., 27.

회에서 설립된 체제와 하나님과의 거리, 곧 하나님의 급진적 초월성을

중심으로‘자기-비판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있는 테너의 신학적 정치

론의 주된내용들이 여기서 논의될 것이다. 같은 장의후반부에서는그

리스도교의자기-비판적 문화의 준거로 테너가 제시하는‘타자 존중의

원리’와 위계적 문화(사회적 억압)를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난 체

제라고 보는테너의 비판이 논의될 것이다.

I I. 자기-성찰적신학의기능

1. 탈근대문화이론의영향

신학과 문화이론과의 만남이 신학방법론에 미친 영향은 여타 학문

간 대화가 낳았던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크다. 신학자의사회

문화적 정체성과 경험이 자신의 신학방법론을 일차적으로 규정하는

‘경험-구체적-성찰적 패턴’이란 신학방법론의 유행 안에서 우리는 그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3) 다양한 소수인종 신학, 2·3세대 여성신학,

탈식민주의 신학자들에게자신들의 문화적 환경에 대한분석은 이들의

신학방법론을 결정하는 일차적 요소가 되고 있다. 세대와 민족적 차이

를 넘어 보편성을 지닌 것으로 이해되던 신학은 점차 경험 중심의 방

법론을 채택함으로써 개체성과 특수성이 더 강조되게 되었다. 문화와

신학의 관계에 대한 논쟁의 중심엔 신학이 문화의 영향 하에 있는지

아니면 문화적 변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자기함유적 내용을 지닌 것인지

의 논쟁이있다.4) 캐트린 테너(Kathryn Tanner)는 1997년 출간된『문화

42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3 ) Serene Jones, Feminist Theory and Christian Theology: Cartographies of Grace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0), 11.

4) Sheila Greeve Davaney, “Theology and the Turn to Cultural Analysis,” Converging

on Culture: Theologians in Dialogue with Cultural Analysis and Criticism, edited

Page 214: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탈리즘에 대한 비판은 이렇게 문화를‘전체’라는 틀로 보는 것을 지적

하는것이다. 이와같이일반화하는 태도나 통일되어 있고 일관된 것으

로 문화를 해석했던 것이 근대 문화이론의 학문적 오류라고 테너는 분

석하고 있다.10)

또한 문화현상을 합의라는 관점으로 보는 태도를 테너는 문제시하

며, 합의라기보다 사실은 파편적(fragmented)인 특성을 드러낸다고 한

다. 하지만 근대적 문화이론들은 문화 표면에 드러난 신념이나 국가권

력의 주장을 마치 문화 구성원들의 합의인 것처럼 여김으로써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의견들을 다루지 못한 오류를 범했다. 테너에 따르면

이런 방식의 문화연구는 한 사회 내의 권력 투쟁과 내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릇된 보편성(a false universality)이나 이데올로기적 담론으로

문화이론들이 표명되면 이것이 일종의 권력이 되어 타자들의 목소리를

차단하는 기능을 하게되고 문화에 실재하는차이를 보지 못하게 만드

는 것이다.11)

테너는 마지막으로 문화를‘사회질서의 원리’로 이해했던 문화이론

자체가 사회의 체제유지(status quo)의 도구가 되었다는 분석을 제공한

다. 사회의 기초가 되는원리들을 문화가 본질적으로 내포하고있는것

으로 여기게 되면, 이러한 사회질서의 원리는 체제유지를 옹호해주는

이론으로 귀결되게 된다. 물론 한 사회를 뒷받침할 표준적 원리(법칙,

관습 등)를 문화는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원리들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며 정치적 상황의 변화나 여타 문화 요소들의 변화를 따라

영향을 받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는 보수적으로 이해된

원리가 다른 상황에서는 전복적인 의미로 나타나기도 하며, 사회 구성

원들에 의해 새롭게 재해석되고 변화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테너

의 분석에 따르면 사회질서 원리란 다양한 해석, 느슨한 연결, 합의로

이은주, 캐트린테너(Kathryn Tanner)의 자기-비판적 문화론 427

10) Ibid., 44.

11) Ibid., 45-47.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문화를 공유하는 합의

(consensus)를 구성원들이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화적 차이

란 집단들 간의 차이로 받아들여졌지 한 집단 구성원 간의 차이로는

이해되지 않았다. 또한 근대적 패러다임은 인간의 정체성을 형성시켜

주는 장으로 문화를 이해했다. 사람들은 문화가 주는 가치와 관습등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육을 통한 사회화의

기회를 공급하며 개별 구성원들의 정체성 구성에 결정적 토대가 되는

것이문화의 특성으로여겨졌다.8)

그렇다면 이러한 근대적 문화이해와 차이나는 탈근대 문화이론의

몇 가지 전환점을 살펴보자. 먼저 이들은 근대이론이 문화가 갖는‘역

사성’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음을 비판한다. 근대적 접근에서는

문화를 이미 형성되어 있거나 완료된 실체로 이해했다. 따라서 근대이

론가들은 문화적 특성을 단순히‘묘사하는 것’에 더 치중하게 되었다.

반하여 테너에 따르면 탈근대 이론은 문화가 역사적 구성물임을 강조

하며 인간이 역사적 과정을 통해문화를 구성해내는 과정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다.9) 두 번째로 차이나는 입장은 근대이론이 문화를 하나의

‘전체’로 보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테너는 말하기를 문화 현상은 하나

의‘전체’로 구성될 수도 이해될 수도 없는 것이라고 한다. 문화는 언

제나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비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상황에

따라 유동하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근대 이론가들이 문화를 하나의

전체로 파악하고자한 이유는 이것이일종의‘스크린’처럼각기다양한

현상들을 투사하는 역할을 하고 전체로 이해될 때만 문화는 해석 가능

한 것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입장은 탈식민주의(postcolonial-

ism) 문화 비판에서도 동일하게 제기되었다. 마치 아시아인들은 모두

가난하다거나 고요함이라는 문화를 공유한다고 본 서구인들의 오리엔

42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8) Ibid., 27-28.

9) Ibid., 40-41.

Page 215: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의 관계에 관한입장들과 대화하고 있는데,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이들

과 구별되는테너의 신학방법론이다.

칸트주의적 방법론을 채택하여 신학의 기능을 철저히 문화적 활동

으로 설정한 카우프만은 한 사회에서 구성원들의 삶의 의미와 방향을

정위하려는 필요로부터 형성되는 학문이기에 신학은 구성원들의 역사

적 상황에 적절한 의미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한다.14) 트레이시 또한 신

학의 공적 성격과 사회문화적 측면의 적절성(appropriateness)을 주장

하며, 신학이 전통의 보존을 넘은문화와의 대화를 통한수정주의적태

도(revisionist model)를 취할것을주장한 바 있다.15) 테너는 이들의 신

학방법론을 일면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지만 탈근대 문화이론의 관점

으로평가할 때, 이들이 이해하는 신학의 기능은 여전히 근대적인 방식

에 머무르고 있음을 지적한다. 테너의 신학방법론상의 차이는 신학의

기능 자체를 탈근대적 문화이론을 통해 규명하는 그의 방법론에서 나

타난다. 카우프만의 경우에는 신학은 문화의 한 부분으로‘무엇이 인간

인지’의 의미를 밝히는 활동이다. 즉‘삶의 의미’를 밝히는 문화 유형

이 신학인 것이다. 신학은‘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특수한 언어활동이

며 카우프만에게 신학의 적합성이란 이러한 문화적 과제를 제대로 수

행하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16) 그러나 테너는 이와 같은 카우프만의

방법론을 따르지 않는데, 그 주된 이유는 신학이‘인간 보편성’의 질문

에 답하는 활동이 될 수 없다는 입장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보편성을

추구하는 활동은 신학에 적합하지도 않으며 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이

테너의 입장이다. 그렇다면 테너에게 신학의 기능은 무엇인가? 테너에

게 신학의 기능은 인간 일반이 아닌 특수한 그리스도교라는 사회 공동

이은주, 캐트린테너(Kathryn Tanner)의 자기-비판적 문화론 429

14) Gordon Kaufman, In Face of Mystery: A Constructive Theology (Cambridge &

London: Harvard University Pressm 1993), 132-133 참조.

15) David Tracy, The Analogical Imagination: Christian Theology and the Culture of

Pluralism (New York: Crossroad, 1981), 54-82 참조.

16) Kathryn Tanner, Theories of Culture: A New Agenda for Theology, 64.

모아질 수 없는 유동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문화는 한마디로 변화하고

갈등하는 장인 것이다. 탈근대적 문화이론들은 문화가 닫힌-시스템

(closed- system)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갈등과 조정을 통해 형성되는

것임을 더 강조하고있다.12)

2. 문화의한 부분으로서의신학

문화와의 대화가 신학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신학이 문화의 한 부

분이며 문화적 활동이라는 시각을 낳은 것이다.13) 문화는 구성원들의

미적, 윤리적 및 종교적가치들의생성과 갈등의 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문화는 종교적 신념체계와 분리될 수 없고 이 때문에 테너는 신학을

문화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교

역사를 보아도 신학(종교)은 언제나 문화의 영향을 받아왔으며 문화적

변동이 신학적 진술의 변화를 이끌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의

일부로서 종교는 해체되며 재건되는 것이기에 신학 또한 문화적 활동

의 산물이라는 견해는 테너를 포함한 많은 현대 신학자들이 주장한다.

앞서 살펴 본 탈근대주의 문화이론을 테너는 신학방법론 논의에 직접

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이 논의에서 테너는 카우프만(G. Kaufman), 트

레이시(D. Tracy), 린드벡(G. Lindbeck) 등의 신학자들의 문화와 신학

42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12) Ibid., 48-57 참조; 테너의 이런 전제는 한동안 유행했던‘교차-문화적 분석(cross-

cultural approach)’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게 한다. 문화의 경계가 유동

적이며 하나의 전체로 파악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문화들 간의 차이를 교차적

으로 비교할 수 있느냐는 문제제기이다. 덧붙여 테너의 문화이론은 궁극적으로‘문화

적 차이’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한다. 근대이론에서는지리적 경계로 말미암은 문화

차이만 보았지 구성원들 간의 차이는 배제되었다. 한 문화의 특수함은 ’우리’와‘그

들’의 지리적 차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탈근대이론에 따르면‘혼종 (hybridity)’

과 같은모습을 띄고있다고 테너는말한다.

1 3 ) Kathryn Tanner, “Cultural Theory,” The Oxford Handbook of Systematic

Theology, edited by John Bainbridge et al.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535-538 참조.

Page 216: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서 포괄할 수 없기에, 실천의 토대가 되는 의미의 전체를 파악하려는

신학의 목표는 불가능한 과제가 된다.19) 실천의 내재적 의미는 파편적

이다. 모든실천의 토대가 될 만한‘의미의 질서,’‘규칙’과‘유형’을 파

악하려 했던 전통의 방법론은 불가능한 목표였다. 물론 테너가 그리스

도인의 신념과 가치들이 존립한다는 것과 적절함을 평가할 특정의 표

준을거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테너가 말하고자 하는바는문

화적실천의 과거, 현재, 미래의 지평들을 모두일관된 방식으로포괄할

수 있는 신학적 전체화(totalized view)는 문화 현상과 근본적으로 맞

지 않으며 불가능하다는것이다.

인간 보편성(human universal)이란 목표로부터 자유로워진 신학은

이제 일상적 삶의 문제들을 성찰하는 작업으로 이해된다. 일상적 삶의

연관이란 그리스도교의 상징들을 인간의 구체적 삶의 정황과의 만남

안에서 성찰하며 재구성하는 작업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의일상적 실천

의 자리에서믿음, 가치들, 상징들이 주는의미를 성찰하고이들이 적합

성을 상실했을 때 이를 이론적으로 수정하는 것이 신학의 일차적 기능

이 된다. 때로는 신학자로서 추상적인 사고의 연마를 닦을 필요가 있으

며 일상이 주는 급박함과 다소 거리가 있는 주제들을 연구할 수도 있

다. 하지만 이런기초신학적 작업도 특수한 공동체의 실천과 반드시 유

기적으로연결되어야함을강조하고있다.20) 또한‘신학함’을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의 생산이라고도 표현한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문화실천

의 하나의 방법인 것이다. 출판 활동과 강연들은 그 자체로 문화 활동

이면서 동시에 특수한 문화적 생산-의미생산-이 된다. 이처럼 테너에

게‘신학함’이란문화로부터유리된 채 의미의 보편성을밝히는 작업이

아니라 문화 자체가 이끌어내는 그리스도교의 실천과 유기적으로 연결

된 특수한 가치생산을위한작업으로정의내려진다.

이은주, 캐트린테너(Kathryn Tanner)의 자기-비판적문화론 431

19) Ibid., 75-76.

20) Ibid., 71.

체가 수행하는 문화적 실천에 연관되어 있으며 이 실천에 대한 반성적

성찰로 제한되어 설명된다.17) 신학은 특수한 공동체의 문화적 실천에 의

해 형성되는 것이기에 특수한 공동체적 실천에 대한 자기-비판적 성찰

로 제한되어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이 문화 일반에 대

한 보편적인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견해대신에 신학 활동의 파편적이며

개체적인 특성임을 테너는 더 강조하고 있다. 특수한 공동체의 문화적

맥락에서 나온 특수한 해석과 관점으로 만들어지는 활동이 신학이며,

이로인해신학은언제나 파편적인특성을 갖는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테너는 후기 자유주의 신학이 신앙 행위에 대한 이차적인 묘

사(논증)로 신학의 기능을 정의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한다.

후기자유주의 방법론은 신학을 그리스도교 실천으로 외화된 것의‘내적

논리들’을 묘사하며 불명료한 것을 이론적으로 명료하게 만드는 작업

이라고 본다.18) 하지만 명료하지 못한 부분들을 이론화한다는 것이 다

양한 실천 안에 있는 차이들(the different)을 제거하게 되는 오류를 낳

을 수 있고, 때로는 어떤 입장이 다른 입장보다 더 좋은지를 밝히는 작

업에 집중될수 있다는 측면에서테너는 이 입장을 받아들이지않는다.

무언가‘표준화 하는 작업’으로 신학을 이해하면 마치 다양한 실천 안

에 오직 하나의 논리만 있다거나 표준적 가치를 벗어난 실천을 제거하

는 방향으로 신학이 기능할 수 있기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문화적 실

천을 낳는 신념, 가치, 의미들이 보편적으로 명확하며 이론적으로 일관

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테너의 기본 입장이다. 다양한 문화적 정황

하에서 신념은 만들어지고 상황의 변화를 따라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

는데어떻게 보편적인 것으로 이론화할 수 있는지를 묻는것이다. 신념

과 가치는 가변적인 상황에 따라 새로운 비판과 재해석에 언제나 열려

있게 된다. 어떤 신념이나 가치도 삶의방식과 실천을 전체적인 차원에

43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17) Ibid., 67.

18) Ibid., 73-74.

Page 217: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교 제자직의 정체성을 정하는 경계(boundary)가 유동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23) 앞서 탈근대 문화이론이 설명하는 바와 같이 동일한

종교에 속해 있는 교인들도 결코 동일한 정체성, 즉 동일한 제자직의

경계를 소유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다양성과 파편화가 일으키

는 해석을 둘러싼 갈등과 분파주의의 문제는 어떠한 시각으로 이해해

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테너의 답변은 다소 역설적으로 들린다. 신학적 다

양성이 진정 신학의 위기인지를 테너는 우리에게 되묻고 있다.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그런 부정적인 문제인지 재고해 보자는 것이다. 다양성

은 오류와 분파를 낳을 수 있다. 그래서 우려스러운 측면이 있지만 상

황을 정직하게 보면 다양성 그 자체는 결코 제거할 수 있는 대상이 아

닌 것이다. 더 나아가 테너는 신학 논쟁의 목표를 다양성의 극복인 합

의라고 두었던 태도도 과연 옳은지 되돌아 보자고 한다. 우리는 다양성

이 야기하는 논쟁적 상황이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전제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합의를 통해 다양성을 억제하고자 하는 시도는 불가능할

것이며 문화의 특성에 비춰볼 때 옳은 태도일 수도 없다고 테너는 주

장한다. 근대적 사유방식은 구성원들이(전체주의적) 사회화에 실패한

결과로 다양성을 이해하거나 지리적 경계인 문화 단위에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차이로 여겼다. 그렇기에 근대적 사유에서는 차이

와 다양성은 극복의 대상이 되었고 합의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두게

된 것이다. 그러나 테너는 다양성을 사회화의 실패로 볼 수 없으며 일

종의 문화현상이기 때문에 합의라는 목표를 추구할 필요도 없다고 말

한다. 합의라는 목표보다 건강한‘논쟁성’을 통해 창조적 진보를 추구

하는 것이 오히려 더 바람직한 방향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자체가

실천의 획일성을 요구하는 문화 또한 아니라고 한다. 다양성은 지리적

이은주, 캐트린테너(Kathryn Tanner)의 자기-비판적문화론 433

23) Kathryn Tanner, “Cultural Theory,” The Oxford Handbook of Systematic Theology,

edited by John Bainbridge et al.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537.

테너를 포함한 탈근대주의 문화이론이 말하는‘문화적 탈중심화’는

‘신학적 탈중심화’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신학적 탈중심화는 어떠한

신학적 패턴도 그 자체로 항구적이거나고착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신

학은 수정(revision)과 변혁(evolution)의 과제를 늘 직면하게 되는데,

이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문화적 변동의 한 부분으로 신학이 위치하

고 있기 때문이다.21) 그렇기에 특정 그리스도인의 신념과 가치를 모든

실천의 절대적 표준으로 삼거나 미래에 발생할 실천을 미리 판단하고

자 하는 것은 문화적 활동인 신학의 기능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테너의 주된입장이다. 신학적 실천은 보편적인것 또는 토대를 발견하

는 작업이 아니라, 언제나 사회문화적 맥락에서기존 해석에 대한재해

석을 수행하며 미래의 변화에 열려 있는 구성 신학적( c o n s t r u c t i v e

theology) 활동으로규정된다.22)

3. 신학적다원성과창조성

테너에게 있어 신학적 다양성은 그리스도교가 사회 내에서 펼치는

실천의 다양성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스도교의 사회적 실천이 단일하

게 형성될 수 없듯이 이 실천에 대한 성찰 작업인 신학 또한 근본적으

로 다양성(파편성)을 띄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런 다양성은 그리스도

43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21) Kathryn Tanner, “Theology and Popular Culture,” Changing Conversations:

religious reflection and cultural analysis, edited by Sheila G. Davaney al et. (New

York: Routledge, 1996), 115-116 참조; 테너는 엘리트신학(elite theology)과 구별

되는대중신학(popular theology)이라는 이름으로신학이 문화의 생산적이며관계적

인 과정(productive and relational cultural process)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되고수정되고있다고 말한다.

22) Kathryn Tanner, “Theology and Cultural Contest in the University,” R e l i g i o u s

Studies, Theology, and the University: Conflicting Maps and Changing Terrain,

edited by Linell Elizabeth Cady and Delwin Brown (New York: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2002), 203-207 참조.

Page 218: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무엇이 참 그리스도교인의 길인지를 신학자들은 판단해야 한다. 문

제는 지금까지 테너의 입장을 통해 본 것처럼 제자직의 본질이 하나의

단일한 틀에 제한되어 있을 수 없다는 데에 있다. 필자는 테너의 견해

를 따라 제자직의 다양성이 부정적인 측면보다는 더 긍정적일 수 있음

을 받아들인다. 만약 오직 하나의 신학적 판단만 있어야 한다면 이는

더한 분파주의의 원인이 될 것이며 절대화란 우상숭배에 빠지게 될 것

이다. 합의보다 더욱 가치 있는 태도가 차이에 대한 존중일 것이다. 그

리고 차이에 대한 존중은 오히려 분열의 파괴성으로부터 신학을 보호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문화적 다양성의 영향 아래서 급격한

변화들을 체험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테너의 이런

분석들은 큰 도움이 된다고 본다. 교회와 교인들의 다양성과차이 남을

분열(불일치)이라고 할 수 없으며 모두에게 동일한 방식의 실천과 해

석을강요할 수 없다. 차이와 다양성으로 비롯된 갈등을 부정적인 것으

로 여기며 이를 극복하자는 명분으로 특정 신념을 강요할 수 없다. 단

일한 정체성을 추구했던 역사는 불행하게도 언제나 차이에 대한 폭력

과 분열로 귀결되었다. 테너의 이런 문화적 탈중심론 그리고 신학적 탈

중심론은‘다중심화의 운동’( m u l t i-centering movement)으로 나아갈

수 있다. 다중심적이란 다양한 실천들을 일원화 시키고자 하는 정치성

으로 인해 교란되지 않으며, 개체적 실천들이 존중받고 격려 받을 수

있는구조를 말한다. 다중심성은논쟁을 더욱 활발하게 촉발시키면서도

동시에 모든구성원들이 열린자세로 다른의견에 참여하게 한다. 오직

차이남을 인정할 때 소통을 위한 의지는 더 고양될 것이며 이로부터

다양한 연대활동은 추구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업을 특정집단

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음을 모두가 인정할 때 제자직의 다양성은

자기-비판을 위한 자극제가 되며 자기 만족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동력이 될 것이다.

이은주, 캐트린테너(Kathryn Tanner)의 자기-비판적문화론 435

경계에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실천의 문화적 특징으

로부터 본래적으로기인하는것으로 설명된다.

이런 측면에서 테너는 린드벡(G. Lindbeck)의 견해인 지리적 경계

로 인해 발생한 문화적 차이를 합법적 차이로 존중하자는 입장과 의견

을 달리한다. 린드벡의 제안은 일면 타당해 보이지만 다양성을 지리적

경계로만 편협하게 설정한 결과 문화적 현상 자체가 다양성을 생산하

고 있음을 간과하게 되었다. 그래서 만약 동일한 문화적 맥락에 속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해석이 일어날 경우 린드벡의 입장은 적절한 해답

을 주지못한다. 갈등, 다양한 해석, 논쟁성은피할수 없는것이기에이

런 특성이 줄 수 있는 긍정적 가능성을 성찰하는 것이 더 옳은 태도일

수 있다. 그리고 테너는 이 가능성을‘신학적 창조성’(theological cre-

ativity)을 낳는전제조건이라규정한다.24)

하나의 해석 전통이 다른 다양한 해석과 실천의 절대적 표준이 될

수 없다. 하나의 해석 전통을 중심에 두고 모든 그리스도교 실천들을

정식화할 수 없으며, 하나의 실천 방식을 선택했을 경우에도 그 내면에

는 언제나 잠재적인 저항과 이견(counter-interpretations)이 존재한다.

테너는 이 같은 이견과 저항이 곧 창조성의 동력이 된다고 한다.25) 이

견과 저항은 더 나은 해석학적 기회를 열어주는 창조적 역동을 품고

있다. 다양한 해석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완결된 텍스트’는 없으며

하나의 해석이 기준이 되어 창조적 미래까지도 제한해야 할 어떤 이유

도 없는 것이다. 모든 신학적 판단과 해석 안에는 내적 균열과 부분적

오류, 또한갈등과 논쟁이 있으며 어떤해석도 전체로서의 신학 활동을

다 포괄할 수 없다. 따라서 다양성과 갈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논

쟁에 임할 때 신학은 오히려 더욱 창조적인 진보로 나아가게 되는 것

이다.26)

43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24) Kathryn Tanner, Theories of Culture: A New Agenda for Theology, 156.

25) Ibid., 160-161.

26) Ibid., 164-165.

Page 219: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가 하나님에 의해 직접적으로 창조된 것으로 여기지 않을 때에-곧 하

나님의 급진적 초월성을 수용할 때에-세계의 질서는 언제나 변화와

수정 가능한 대상으로 열려 있게 된다.28) 먼저 그리스도교의 자기-비판

적 문화와 양립할 수 없는 견해들에 대한 테너의 분석적 비판을 잠시

살펴보자.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정치관은 세계내적관계의 다양한 형태

들을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창조했다고 이해했다. 즉 제도와 질서가 하

나님의 직접적 창조 방식에 의해 형성되었기에 항구적으로 변하지 않

으며 그 합법성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믿는 것이다.29)‘창조질

서 조망’이라 칭하며 테너는 이에 대해 세 가지 측면에서 비판하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뜻과 세계질서 간에 놓인 거리(죄성)를 이들이 간과

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둘째, 사회제도와 질서가 역사성을 지니며 문화

적 과정을 통해형성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있다고 지적한다. 셋째, 하

나님이 피조세계와 상호적으로 연합하여 끊임없는 재창조로 인도하신

다는사실을 인정하지않는태도를 지적하고있다.30)

또한 사회질서와 하나님과의 관계를‘위임(commission)’의 구조로

이해하는 방법이 있다. 권력과 사회제도가 하나님에 의해 합법적으로

형성되었기에 시민들은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신학적 정치관

이다. 또한하나님의 위탁이기에 권력이나 제도는 문화적이며 역사과정

을 거친 산물로 여겨지지 않는다. 테너는 이런 정치관을 가진 자들은

권력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이차적으로 유도된(derivative authority)

것이며 더 높은 권위인 하나님의 절대성과 심판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다는 점과 이들이 불법을 행했을 경우 결코 정당화될 수

이은주, 캐트린테너(Kathryn Tanner)의 자기-비판적문화론 437

28) Kathryn Tanner, The Politics of God: Christian Theologies and Social Justice, 75-

80; Kathryn Tanner, God and Creation in Christian Theology ( M i n n e a p o l i s :

Fortress Press, 1988).

29) Kathryn Tanner, The Politics of God: Christian Theologies and Social Justice, 82-

83.

30) Ibid., 83-85.

I I I. 정치제도·사회질서에관한자기-비판적문화

1. 자기-비판적문화론의신학적배경: 하나님의급진적초월성

1992년 발표된『신의 정치』는 신앙의 내용과 신앙인의 사회적 실천

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테너는 자신이 이러한 연구에 임하게 된 이

유가 그리스도교적 사회 실천이 다소 체제유지(lapse into de facto

support for the status quo)의 방향으로 이끌리는 원인이 무엇인지 알

고자 하는데 있다고 한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사회적 변혁의 요청

에 대해 냉담하게 반응하거나 체제유지를 더 선호하는가? 가장 일반적

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정치권위가 하나님에 의해 직접적으로 주

어진 것으로 믿는다면 이렇게 체제유지의 태도를 보이게 될 것이다. 비

록 이 권력이 잘못된 것이어도 하나님이 세우신 권력이기 때문에 이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

님이 직접적이며 위계적인 것으로 세계질서를 창조했다고 믿는다면 이

것이 불의한 질서라고 해도 저항하거나 비판하는 일을 꺼리게 될 것이

다. 이런 신앙 패턴에 대한 대안으로 테너는 그리스도교의 자기-비판

적 문화(self-critical culture)의 신학적 가능성을 이야기한다.27) 그리고

‘자기-비판적 문화’를 가능하게하는하나님 초월성에대한 신학적 이

해의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자기 비판적 문화를 생

산할 수 있는가? 그리고 자기-비판적 문화 구축을 위한 하나님의 초

월성이해는 무엇인가라는두 개의질문이 테너의 논의를 이끌고 있다.

테너의 관점에 의하면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

방식이 사회적 실천의 양태를 내적으로 결정하고 있으며, 세계의 질서

43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27) Kathryn Tanner, The Politics of God: Christian Theologies and Social Justice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2); Kathryn Tanner, “Self-Critical Cultures and

Divine Transcendence,” Theology after Liberalism: a Reader, edited by John

Webster, et al. (Malden: Blackwell, 2000), 223-256.

Page 220: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적극적으로 관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고 있다. 강조되는부분은

소수 권력 집단에게만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에

게 주어지는 확장된 대리자 개념에 있다. 끊임없이 사회권력 관계들의

문제들을 감시하며 수정할 수 있는 권능을 확장된 대리자들에게 부여

함으로써특권적 권력남용을 막을수 있도록 하는것이다.

하나님 섭리를 급진적 초월성이란 관점에서 이해함으로써 테너는

특정 체제가 자기만족적 우상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하는 신학적 장치

를 마련하고있다. 이런사유는 한편으로는어떤체제가 궁극적으로옳

은지에 대해 우상에 빠지지 않게 하는 일종의 불가지론적인열린 태도

를 갖게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과 세계질서 간에 있는 차

이를 성찰하는 자기-비판적 문화를 건설하게 한다.33) 정리해보면 테너

는 보다나은 사회질서를 건설하기위해요청되는‘자기-비판적 문화’

의 전제조건으로 다음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하나님의 급진적 초

월성에 대한 신념을 갖는 것과 둘째, 자유로운 하나님 섭리와 함께 하

는 확장된 대리자 개념을 세우는 것, 마지막으로 세계와 하나님 간의

거리-인간의 죄성-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함을 주장하고 있다. 이

런 전제들을 가지고 사회질서를 보게된다면 그 어떤 체제도 스스로를

절대시(우상화)할 수 없으며 비판적 수정과 변화를 가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대리자에게 주어진 자기-비판의 기준(criteria)은 무엇

인가?

2. 자기-비판적문화론의기준: 타자존중

테너의 전체 신학 작업에서 일관되게 강조되고 있는 죄성의 본질,

즉 자기-비판의 기준은 피조된 개체들의 차이 및 다양성을 억압하는

폭력적인 질서와 체제이다. 사회정치적 질서의 준거가‘관계’곧 타자

이은주, 캐트린테너(Kathryn Tanner)의 자기-비판적문화론 439

33) Kathryn Tanner, The Politics of God: Christian Theologies and Social Justice, 123.

없음을 강조한다.31)

이러한 유형들과 구별되는 입장으로 테너는‘하나님 섭리의 대리자’

(agency) 개념을 제시하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자기-비판적 문화

의 가능성을 추구하고 있다.32) 여기서 하나님은 세계질서와 권력관계로

부터 자유로우며 거리(distance)를 두고 계신분으로 이해되며 이를 하

나님의 급진적 초월성이라고 할 수 있다. 테너에게 하나님의 초월성의

함의는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신념을 계속해서 수정해

주는 시각을 제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계와 대조적 방식(contrast

view)으로존재한다는 사유를 허용하지 않는것이 하나님의 급진적 초

월성의 의미이다. 하나님과 세계의 급진적 차이-비대조적인 차이

(non-contrast view)-를 사유할 때 어떤 특정 체제도 하나님의 것과

동일시되지 않으며, 모든 존재자들이 자신이 속한 체제와 질서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공간을 갖게 된다. 세계가 스스로 설립한

체제와 하나님과의 거리사이에 있는‘자기-비판적 공간’을 보게하는

것이다. 또한 이는 인간사회의 죄성(신적 의지와 인간 문화적 차이)을

구조적으로 인식하도록 한다. 이렇게 이해할 때 그리스도교 신앙은 자

기-비판적 구조가 될 수 있고, 어떠한 힘, 부과 특권도 스스로를 신성불

가침한 영역으로주장할 수 없게된다.

한편 테너의 모델에서 하나님 섭리의 대리자에게 보증해 주시며 권

능을 주시는(confirmation and empowerment) 하나님 은총도 제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거리와 급진적 초월성이 방관자적인 자세로 계시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테너는 세계의 정치질서에

43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31) Ibid., 93; 테너는 하나님과 세계질서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신학적 정치론으로 다섯

가지의 모델을 제시하고있다. 창조질서 전망자, 자연법 사상가, 규범적질서의 하나

님 명령, 제도권에 두신 하나님의 위탁, 하나님 섭리론의 대리자 개념들이다. 지면의

제약이 있기에이 글은세 가지대표적인견해만 소개하고있다.

32) Kathryn Tanner, God and Creation in Christian Theology, 77-80; Kathryn Tanner,

“Creation and Providence,” The Cambridge Companion to Karl Barth, Edited by

John Webst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111-126 참조.

Page 221: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하고있다. 모든개체들이 차이나게 창조되었다는것을 타자존중의 첫

번째원리로 이해할 수 있다. 위계적으로 창조된 것이아니라 차이나게

창조되었으며 이 차이로 말미암아 각기 다른 사회적 역할들이 수행되

며 상호적이며 다양한 사회관계가 형성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리스

도교 전통은 이‘차이’를 위계적인 것으로 보았고 이로부터 구조적 죄

악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테너는 창조질서를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차이남의 창조로 보는 것, 곧 다양성의 창조를 받아들일 때 사회관계

안에위계성으로부터기인한 폭력이 억제될 것이라고본다.37)

위계적으로 창조질서를 이해한 모델은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성 또

한 지배적(domination)인 것으로 이해했다. 하나님의 관계방식을 세상

의 틀에 맞추어 투사하여 세계의 억압적 구조의 최상위에 하나님을 세

워놓은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지배적인 것으로 이해

함으로써 세계의 불평등한 억압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쉽게 정당화되었

다. 하나님의 급진적 초월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테너의 신학적 정치론

은 이렇게 사회적 억압의 문제에 대한관심으로 집중되고 있다. 억압적

관계성은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초월성을 침

해하는 태도라고 테너는 주장한다. 그 이유는 억압적 관계를 낳는 위계

론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테너가 설명하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다양하며 차이 나게 창조된 피조물 모두에게 하

나님섭리의 대리자로서의 권한이 부여되어 있으며, 이 권한을 통해상

호돌봄의 관계성을 구현하는 것이라고정의내릴 수 있다. 즉 모든 피조

물에게 부여된 대리자의 기능을 강조함을 통해 테너는 위계적이며 지

배적인 질서맺기를 극복하고자 하는것이다. 위계성과 지배성을억제하

기 위한 테너의 설명을 더 구체적으로 보면 첫째, 피조물의 위치로 창

조되었다는 것의 의미를 테너는 그 어떤 권위와 지위도 하나님과 동일

시될 수 없는 것으로 해석한다. 즉 어떤 지위(우월함의 조건들)에 있는

이은주, 캐트린 테너(Kathryn Tanner)의 자기-비판적문화론 441

37) Ibid., 149-152.

와 개체에 대한 존중여부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벗어난

제도를 테너는 다음네 가지로 설명한다. a. 자신의 권력과 특권을 신성

불가침한것으로 여기는 독재와 같은태도, b. 위계적질서안에서 특권

과 종속이 고착되어 버린 사회문화, c. 지배와 착취의 관계들, d. 타자의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비관용적 태도이다.34) 우리는 이런 테

너의 견해에 어렵지 않게 동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역사

는 테너가 열거한 이런 폭력적인 모습들로부터 그리 자유롭지 않았다.

하나님의창조질서를위계적(hierd.chy)이라고 보며존재론적위계성을

통해‘위계-명령’의 정당화와 타자화된 존재들의 차이를 존중하지 않

았던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우린 경험해왔다.35) 인간들 간의 관계적 위

계구조, 남성과 여성간의차별구조, 가장과 가족구성원들 간의위계적

관계가 곧바로 하나님이 제정하신 질서로 여겨지곤 했다. 이러한 존재

론적 위계질서와 함께 당연시 되어진 전통은 명령의 위계질서였다. 하

나님으로부터 시작된 명령은 일종의 사슬의 연결처럼 아래로 하달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졌고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는 수직적인 명령과 복종의

구조로 이해되었다. 존재의 위계구조는 힘의 위계구조로 이어지며, 결

국 이것은 사회질서의 종속구조로 이어지게된다. 테너는 이 같은위계

구조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로부터 벗어난 것으로 보며세계

의 위계적 질서와 질적인 차이를 갖는 분으로 하나님이 이해되어져야

함을 강조한다.36) 즉 세계의 위계적 질서 안에 내재해 계신 분이 아니

라 이러한 방식자체를 초월해 계신분이시다.

앞서 열거한 사회구조적 악을 막기 위한 대안으로 테너는 모든 존

재자들의 개체적‘차이’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 볼 것을 제안

44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34) Ibid., 132.

35) Ibid., 133; H. Greenleaf, Order, Empiricism and Politics (Oxford: Oxford Univer-

sity Univ. Press, 1964), chapter 4; Michael Walzer, Revolution of the Saints

(Cambridge: Harvard Univ. Press, 1965), 151-71 참조.

36) Ibid., 134-135.

Page 222: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현재상태(post-lapsarian)는 죄로 타락했기에‘타자존중의 윤리’와‘억

압으로부터의해방’은 현재가 아닌 미래에 완전히 복구될 것으로 보았

다. 테너는‘타락설’로 인해 효력을 잃은 타자존중의 윤리, 곧 창조질서

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그리스도교 사회정치 활동의 중심이 되어야 함

을 강조한다. 그래서 피조물에대한 존중은 미래에 실현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피조물의 삶의 영역에서 지금 구체적으

로 실현되어야 할 과제가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모든 피조물의 자기

발전의 권리와 개체로서 존중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타자존중의

세 번째 원리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원리는 피조물의 자기-확신

(self-affirmation)과 자기-결정권(self-determination)을 보장하는 것

으로 확장된다. 이러한 권리들을 존중받으며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창

조의 대리자의 자격으로 맡겨진 각자의 고유한 일들을 존중받으며 행

할 수 있게하는전제조건이 된다.40)

구성원들이 단일한 문화와 사유를 공유해야 한다는 공동체는 존중

이라는 정신을 갖기 어려울 것이다. 테너와의 대화에서 우리가 얻을수

있는사유의 진보는 바로이점에 있다. 차이를 창조의 결과물로 이해함

으로써 공동체 문화의 개혁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차이를 배제하

거나 감소시키려는 공동체성이 아닌 차이를 근원적 축복으로 존중할

수 있는 공동체성의 회복이 테너가 꿈꾸는 창조질서의 회복이다. 하지

만 이 정신은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그리 반겨지지 않았다. 그리고

탈근대적 사유가 확장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종교는 다양

성에대한존중보다는동일화의 길을더 추구하고 있는것이현실이다.

탈식민주의비평에서 지적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교는 제국주의적 문

화를 소유하고 있으며 신의 섭리론은 제국의 지배 도구로 이용되어지

이은주, 캐트린테너(Kathryn Tanner)의 자기-비판적 문화론 443

40) Ibid., 177, 191-192 참조.

41) R. S. Sugirtharajah, “Complacencies and Cul-de-sacs,” Postcolonial Theologies:

Divinity and Empire, edited by Catherine Keller, et al. (St. Louis: Chalice Pree,

2004), 23-27 참조.

자라도 자신을 하나님의 절대적인 위치(우상)로 세울 수 없으며 한계

를 지닌 존재로 자신을 받아들여야 할 것을 말한다. 둘째, 피조물의 자

기이해에 있어서 자기-숭배의 폐해와 마찬가지로‘자기-경멸’또한 하

나님의 초월성과 창조의 주권성을 부정하는 태도로 여겨진다.38) 자기

숭배는 타자의 타자됨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고 사회적 약자들

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하게 될 것이다. 마치 여성들은 지적으로 열등하

다거나 가난한 이들은 게으르다는 식의 판단을 통해 지배를 정당화하

는 것을 말한다. 위계적 문화안에서 억압당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경

멸하게 되고 반대로 억압자들은 자신의 이미지를 마치 신적인 것으로

까지 숭배하게 된다. 테너가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란 한마

디로 모든 피조물에게 동등한 가치와 대리자로서의 힘(efficacy)이 주

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타자 존중의 두 번째 원리는 차이와 함께 창

조된 모든 이들에게 동등한 대리자로서의 권한이 부여되어 있다는 것

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초월성과 섭리론적 대리자론으로 구성된 테너의

신정치론(Theo-politics)은 그리스도교의 타자존중의 윤리관으로 귀결

되고 있다. 즉 타자존중의 윤리가 그리스도교의 자기-비판적 문화의 기

준으로, 그리고그리스도인들의사회정치적활동의 준거로 제시되고 있

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테너의 타자존중의 윤리를 접하며 이 이론이

그리 새로울 것이없다는 느낌을 갖게된다. 지금까지 그리스도교는 그

어떤 종교보다 앞서 모든 존재에 부여된 피조물로서의 가치와 존귀함

을 선포해왔다. 타자존중의윤리는 분명그리스도교의오래된 가르침에

속하지만 테너는 주장하기를 지금껏 이 가르침은 타락설( l a p s a r i a n

state)이란 늪에 빠져 그 의미가 무기력해져 버렸다.39) 타락 이전(pre-

lapsarian)에는에덴동산에서 모든존재가평등했을 것으로 상상하지만

44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38) Ibid., 160-165.

39) Ibid., 170-171.

Page 223: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V. 글을마치며

지금까지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자기-비판적 문화의 가능성을 논하

는 테너의 신학 작업을 함께 보았다. 탈근대주의 논의는 서구문명사를

이끌었던 지난 역사에 대한 자기-해체적 성격의 담론들을 발전시켜왔

다. 테너는 이러한 탈근대주의 문화이론과의 대화를 통해 신학적 탈중

심화의 방법론을 체계적으로 마련했다고 평할 수 있다. 그리고 위계성

과 동일성의 원리로 하나님의 정치를 이해하며 사회와 교회에 위계적

인 문화와 다양성을 억압하는 문화적 실천을 낳았던 지난 그리스도교

의 신학적 오류에 대한 테너의 신학적 논의는 한국교회와신학에도 생

산적논의의 자극제가될 것이라고필자는 평가한다.

이 글에서 필자는 테너의 자기-비판적 문화론을 크게 두 방향으로

나누어 논하였다. 하나는 탈근대주의 문화 이론을 수용하여 신학적 탈

중심화를 이끌어 내고 있는 신학적 자기-성찰론에 대한 논의였고, 또

다른 하나는 정치·사회 질서 영역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기-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이론적 근거인 하나님의 급진적 초월성에 대한 논의였

다. 신학적 자기-성찰의 길인 신학적 탈중심화는 모든 신학적 진술의

근본적 한계와 파편화를 인정하고 언제나 수정과 대화에 열린 자세를

갖도록 하는 것이다. 중심과 주변으로 나뉠 수 없는 것으로 신학적 다

양성을 이해함으로 강제적 합의와 배타가 아닌 창조성과 책임있는 상

호연대를 이룰 수 있는 길로 제시되고 있다. 또한 문화의 일부분으로

신학의 기능을 설정함으로써 강단신학이 가질 수 있는 비역사적인 폐

해를 막고 대중문화와의 상호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신학적 창조성의

긍정적 기능에 대해서도함께보았다.

두 번째로 다룬 정치·사회질서 영역에 있어서의 탈중심화론은 테

너의 그리스도교의 자기-비판적 문화론의 핵심을 이루는 내용이다. 이

를 통해 테너는 체제유지(status quo)로 경도되기 쉬운 그리스도교의

신정치론을 하나님의 급진적 초월성과 대리자 개념에 대한 재해석을

이은주, 캐트린 테너(Kathryn Tanner)의 자기-비판적문화론 445

곤 했다.41) 동일한 신념과 문화적 관습을 모든 이들이 따르도록 교리를

통해 강제하곤 했으며, 그리스도교의 이런 정신적 속성을 통해 정치집

단들은 제국의 권력을 유지하기도 했다. 또는 교회집단은 연합을 통해

다른 종교집단이나 신념공동체를 파괴하고, 교리적 차이들과 다양성을

죄성으로 단죄하는 경우들이 계속 있어 왔다. 이질적인 문화요소들을

배척하는 배제의 정치가 오랫동안 그리스도교 문화를 움직여 왔음을

우린부인하기어렵다.

테너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 곧 급진적 초월로 존재하시는 하

나님 정치의 참된 대리자에게 요청되는 타자존중의 마지막 원리로 상

호 돌봄과 상호 성장을 위한 관용의 정신을 제안하고 있다.42) 타자를

관용한다는 것은 우월한 자가 타자에게 베푸는 선의의 차원이 아니다.

테너에게 관용은 개체간의 적극적이며 평등한 상호 작용을 의미한다.

타자의 자기-발전과 자기-결정의 권리를 존중하며 상호간의 양육

(mutual nurture)을 위해배려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말한다. 어떤인

간의 판단도 오류로부터 자유롭지 않기에 타자와의 대화는 요청되고

이를통해상호적인발전과 성장을 이루게 된다.43)

그리스도교의 자기-비판적 문화론의 기준으로 테너가 제시한 타자

존중의 원리는 네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먼저 모든 개체들이 차이나

게 창조되었음을 승인하는 것이 첫 번째 원리가 된다. 그리고 차이와

함께 창조된 모든이들에게 동등한 대리자로서의 권한이 하나님으로부

터 부여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두 번째 원리일 수 있다. 이처럼 모든

피조물의 권리곧 자기발전의 권리와 자기-결정및 자기-확신의 권리

를 존중하는 것을 타자 존중의 세 번째 원리라고 볼 수 있으며 마지막

으로 하나님 정치의 참된 대리자에게 요청되는 타자 존중의 마지막 원

리는상호돌봄과 상호성장을위한관용의 정신으로이해된다.

444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42) Kathryn Tanner, The Politics of God: Christian Theologies and Social Justice,

193-194.

43) Ibid., 200.

Page 224: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주제어

캐트린 테너, 포스트모던 문화 이론, 자기-비판적 문화, 급진적 초월

성, 타자존중의원칙

Kathryn Tanner, Postmodern Cultural Theories, Self-c r i t i c a l

Culture, Radical Transcendence, Respect for Others

접 수 일 2012년 6월 30일

심사(수정)일 2012년 8월 17일

게재 확정일 2012년 9월 1일

이은주, 캐트린테너(Kathryn Tanner)의 자기-비판적문화론 447

통해 사회적 억압에 맞설 수 있는 신정치론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세계

내적 질서에 편입되지 않는 하나님의 급진적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위

계적인 정치문화와 특정 정치 질서를 하나님의 것과 동일시하는 우상

숭배적 태도를 비판하며 다양한 정치적 견해들이 자유롭게 논의될 수

있는타자존중및 다양성의정치론이제시되었다.

필자에게 테너의 다양성의 존중과 자기-비판적 문화론은 한국교회

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위계구조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론에서 제기했던 한국의‘기독당’창당에 관한필자의 문제제기에 테

너의 이런신학적 견해는 적절한 비판의 지점을 제공하고 있다고 본다.

기독당이 자신들의 정치적 신념을 밝힐 수는 있지만 이것을 하나님께

서 직접적으로 제공하는 질서와 체제라고 말하는 신학적 발언은 우상

숭배이며, 하나님의급진적 초월성을받아들이지않은 신학적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모든그리스도인들이기독당이 제시한 정치적 견해에 동의

해야 할 어떤 당위도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인의 정치

적 정체성은 종교적 정체성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얻어지는 것이라기보

다 자신들이 속한문화와의 상호영향 하에있는 것이다. 정치적 정체성

과 문화적 선택의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교회의 발언은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반기독교 정서를 더 자극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한국

의 그리스도인들은 다변화하는 문화적 상황과 정치적 격동의 과정을

겪으며 자신의 정체성을교회에만 의존할 수 없는상황으로 가고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앙과 사회 제반 문제에 대한해석의 갈

등을 겪으며 대안을 찾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테너의 신학방법론과

그리스도교의 자기-비판적 문화론은 한국교회의 대안을 마련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제공하고 있다고 평할수 있다.

446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225: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Press, 1964.

Jones, Serene. Feminist Theory and Christian Theology: Cartographies of

Grace.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0.

Kaufman, Gordon. In Face of Mystery: A Constructive Theology. Cambridge

& London: Harvard University Pressm 1993.

Sugirtharajah, R. S. “Complacencies and Cul-d e-sacs.” P o s t c o l o n i a l

Theologies: Divinity and Empire. Edited by Catherine Keller, et al.

St. Louis: Chalice Pree, 2004.

Tracy, David. The Analogical Imagination: Christian Theology and the

Culture of Pluralism. New York: Crossroad, 1981.

Walzer, Michael. Revolution of the Saint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65.

이은주, 캐트린테너(Kathryn Tanner)의 자기-비판적문화론 449

참고문헌

Tanner, Kathryn. Theories of Culture: A New Agenda for Theology.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7.

. Politics of God: Christian Theologies and Social Justice.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2.

. God and Creation in Christian Theology: Tyranny or Empowerment.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88.

. “Cultural Theory.” The Oxford Handbook of Sytematic Theology.

Edited by John Bainbridge, et al.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 “Creation and Providence.” The Cambridge Companion to Karl Barth.

E d i t e d by John Webst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 “Self-Critical Cultures and Divine Transcendence.” Theology after

Liberalism: a Reader. Edited by John Webster, et al. Malden:

Blackwell, 2000.

. “Theology and Cultural Contest in the University.” Religious Studies,

T h e o l o g y, and the University: Conflicting Maps and Changing

Terrain. Edited by Linell Elizabeth Cady and Delwin Brown. New

York: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2002.

. “Theology and Popular Culture.” Changing Conversations: religious

reflection and cultural analysis. Edited by Sheila G. Davaney al et.

New York: Routledge, 1996.

Davaney, Sheila Greeve. “Theology and the Turn to Cultural Analysis.”

Converging on Culture: Theologians in Dialogue with Cultural

Analysis and Criticism. Edited by Delwin Brown, Sheila G.

Davaney, Kathryn Tanner.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Greenleaf, H. Order. Empiricism and Politics. Oxford: Oxford University

448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226: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이러한 다양성은 궁극적으로는 신학의 창조성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요

소로 작용하게 된다. 그래서 신학적 자기-성찰의 길이란 개별 신학의

한계와 파편화를 인정하며 수정과 타자와의 대화에 열린 자세를 갖게

하는 입장을 말한다. 둘째로는 정치·사회 질서 영역에 대한 그리스도

교의 자기-비판적 문화론이다. 테너는 이 논의를 통해 체제유지로 경

도되기 쉬웠던 전통적인 신학적 정치론, 곧 특정체제를 하나님의 직접

적 창조의 대상으로 여기는 태도를 비판하며, 어떠한 체제로부터도 자

유로우신 하나님의 급진적 초월성과 확장된 대리자 개념을 통해 사회

개혁적 정치론을 모색하고 있다. 테너의 이러한 관점은 바르트의‘하나

님의 초월성’을 탈근대적 문화이론과 접목시킴으로 탈근대적 관점 하

에서 새롭게 재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논문에서 필자는 자기-

비판적 문화론이 세계내적 질서에 편입될 수 없는 하나님의 급진적 차

이를 강조함으로써위계적인 정치문화와 특정 정치질서에 대한우상숭

배적 태도를 지양할 수 있는 비판적 시각을 제공하고 있음을 긍정적으

로 평가한다. 그리고 이러한 테너의 입장은 한국교회와 신학계에도탈

근대주의적 신학방법론의 논의를 자극하는 생산적인 대안이 됨을 강조

하고있다.

이은주, 캐트린테너(Kathryn Tanner)의 자기-비판적문화론 451

국문초록

캐트린테너(Kathryn Tanner)의 자기-비판적문화론

탈근대주의문화이론과신학의 대화

본 논문은 미국의 탈근대주의 여성 신학자 캐트린 테너의 신학방법

론을‘자기-비판적 문화론’의 틀 안에서 분석적으로 다루고 있는글이

다. 테너가 제시하는‘자기-비판적 문화론’이란 특정 사회체제와 질서

를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제정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가‘하나님의급진

적 초월성’이란 신앙과 대립되며, 사회체제와 질서를 문화적이며 역사

적인 산물로 이해할 때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정치론은 우상의 덫으로

부터 자유로움을 주장하는 이론이다. 이러한 관점을 가질때 인간사회

에서 설립된 체제와 질서가 지속적인 자기비판과 개혁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테너는 강조한다. 또한 자기비판의 준거로 테너는‘타자존중의

원칙’을 제시하며 이를 통해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탈근대주의 문화

적 상황에 상응하는 신학적 정치론의 길을조명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

필자는 테너의 자기-비판적 문화론을 두 방향으로 접근하여 논의한다.

첫째는 신학적 자기-성찰론이다. 포스트모던 문화이론과 신학간의대

화를 통해 테너는 신학을 그리스도교의 문화적 활동에 대한 자기-비

판적 작업으로 정의내리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문화적 실천이 다양할

수밖에 없듯이 신학또한 파편화와 다양성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고, 이

때 신학적 경계는 문화적 변동의 흐름에 따라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신학과 문화 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자연스럽게 신학의 다양

성, 파편성 및 국지성을 옹호하는 입장으로 귀결되는데, 테너에 따르면

450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

Page 227: korea systematic theologica journal

task as human universal. Instead, Tanner’s method displays that

theology functions not for human universal, but remains only in terms

of self-critical reflection upon particular Christian practices. This

method, hence, legitimates the diversity and creativity of theology,

insofar as theology belongs to multi-cultural Christian practices.

The second point this essay mainly concerned is Tanner’s creative

interpretation of the doctrine of radical transcendence of God. Central

to this doctrine is her question if there is a way to avoid idolatrous

identification of any political and secular orders with the divine.

Giving a sociopolitical critique upon theological traditions such as

natural law, God’s mandate of a normative order, or God’s ordination

of human institutions, Tanner explicates that the doctrines of radical

transcendence of God and God’s universal providential agency can

lead us to the potentially self-critical cultures, since along with two

doctrines, none of social orders can promulgate its position to be

sacrosanct. thirdly, this essays asks what criteria of Christian belief

might be in facilitating self-critical culture. Tanner gives an answer

to this question in terms of “respect for others and respect for

difference.” As a whole, this essay, along with three points, gives a

light on a path toward postmodern theological methods upholding the

values of diversity and creativity on the basis of the radical transcen-

dence of God and self-critical cultures.

이은주, 캐트린테너(Kathryn Tanner)의 자기-비판적문화론 453

Kathryn Tanner’s Theory of Self-Critical Culture:A Dialogue between Postmodern Cultural Theories and Theology

Lee, Eun-Joo

Lecturer

Presbyterian College and Theological Seminary

Seoul, Korea

A question whether theology has self-contained and permanent

principles independently from cultural changes haunts contemporary

theologians. Kathryn Tanner, one of the leading postmodern feminist

theologians, insists in her comprehensive works that theology is part

of culture and remains in itself a cultural activity. It is because

Christian social activities are created out of diverse and controversial

social contexts and they become a seedbed for theological diversity

and creativity. Thus according to Tanner, theology should be

regarded as an activity to critically reflect upon itself in order to make

an appropriate systematic understanding in accord to its own social

practices. This essay deals with Tanner’s theological views on poli-

tics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ology and culture, particularly

focusing on her theory of Christianity’s self-critical cultures. The

essay gives an analysis of Tanner’s three methodological issues in a

dialogue with the postmodern cultural theories: the first point is to

define theology to be part of culture in which theology takes its

position as self-critical reflection on what Christian practices demand

along with cultural contexts. What interests here is her distinction

from Tracy, Kaufman, and Lindbeck’s methods to affirm theological

452 한국조직신학논총제33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