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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의 침탈에서 고려를 구한 화약의 아버지 258 왜구, 고려의 온 강토를 유린하다 진포대첩의 성과나 화약 발명의 위대성을 이해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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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의 침탈에서고려를 구한

화약의 아버지최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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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맞춰 태어나신 빼어난 님의 재주와 꾀삼십 년 왜놈 난리 하루에 평정하셨네. 바람 같은 전함은 새도 못 따르고 적진을 꺾은 화차는 우레 소리도 두려워하네.(…)허공에 넘쳐흐르던 왜적의 기세 연기를 따라 흩어지고 세상을 덮은 공명 해와 더불어 빛나는구나. 권근이 최무선의 승전을 축하하며 쓴 시에서

최무선 연보

1326(?) 최동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1377 고려 우왕 3년, 화통도감 설치

1380 우왕 6년, 진포구에서 왜구를 물리침.

1395 조선 태조 4년 세상을 떠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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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포대첩, 당당히 승리하다

고려 우왕 6년(1380) 8월, 남도의 세곡들이 조

운선에 실려 개경으로 올라가는 중간 길목인

금강 하구, 진포나루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소규모로 무리를 지어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들

이 고려와 중국의 골칫거리가 된 지는 이미 오

래전 일이다. 그런데 갈수록 규모가 커져 아예

해적군단이 되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무려 500

척의 배가 선단을 꾸려 금강 하구로 올라온 것

이다.

왜구들은 굵은 밧줄로 배를 서로 연결해 놓

고 교대로 수비를 해가며 육지로 올라와 닥치

는 대로 노략질을 시작했다. 마을을 통째로 불

사르고 약탈했다. 산과 들에는 시신이 즐비하고 빼앗은 곡식을 배로 옮기면서 흘린 쌀이 땅바

닥을 하얗게 덮고도 모자라 쌓이고 있었다. 배에서는 포로로 잡힌 백성들이 울부짖고 있었

다. 서남해안이 텅 빈 것도 모자라 이제 충청 내륙의 마을까지 다 황폐해질 판이었다.

이때 개경에서 1백여 척의 배가 황급히 도착했다. 총사령관 나세를 비롯, 최무선과 심덕부

일행을 태운 고려의 전함에서 불화살과 화포가 퍼붓기 시작했다. 서로의 배를 밧줄로 꽁꽁 묶

어 놓은 터라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왜적의 배들은 다 불타 버렸다. 불꽃과 연기가 하늘을 뒤덮

은 가운데 혼비백산한 왜구들 역시 불꽃 속으로 사라져 갔다. 불덩이가 되어 바다에 뛰어드는

자들도 있었다.

화약 냄새와 더불어 피비린내가 풍겼다. 겨우 살아남은 왜구들은 육지에 있던 잔당들과 합

세해 흩어져서 영동현으로 달아났다. 이날 구해 낸 포로만 해도 230여 명에 남은 적을 뒤쫓아

가 46명의 머리를 베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대성공이었다. 진포구 전투는 지난 십수 년간 최무선이 그토록 목청 높여 주장했던 화약을

이용한 신무기의 실험 무대였다. 이번 전투의 압승으로 충정왕 이후 온 강토를 유린해 오던 왜

구들의 전의를 완전히 꺾었고, 최무선은 한국 화약의 아버지로 우리 역사에 길이 기록되었다.

《국조오례의》에 나오는 조선 전기의 화약무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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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 고려의 온 강토를 유린하다

진포대첩의 성과나 화약 발명의 위대성을 이해하려면 당시 고려 땅을 짓밟으며 나라의 존망마

저 위태롭게 했던 왜구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 사실 왜구는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의 골칫

거리였다. 오죽하면 문무왕이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로부터 신라를 지키겠다고 했

겠는가!

왜구란 일본의 대마도, 일기도, 상송포 등 우리나라와 가까이 있는 섬 지역 왜인들을 말한

다. 척박한 지역에서 살다 보니 기근이 들 때마다 인근 해상을 떠돌며 노략질을 일삼는 도적의

무리였다. 우리 역사 속에 간간이 등장하던 이들 왜구는 고려 중엽 이후부터는 아예 떼를 이

루어 우리 연안을 수시로 침범하였다. 일본 내의 정치적 상황이 불안하다 보니 왜구들이 군사

력과 해상수송력을 갖추고 해적질을 본업으로 하는 도적떼가 된 것이다.

고려에 들어와서 왜구가 기승을 부리게 된 것은 충정왕 때인 1350년 무렵부터이다. 당시 전

국의 520개 군현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242개 군현이 피해를 입고 있었다. 왜구의 집중적인

공략 대상이 된 것은 서해와 남해의 조창이 있는 포구와 조운선이었다. 얼마나 심했던지 공민

왕 때는 녹봉 지급을 제때 못할 정도였다.

워낙 왜구가 날뛰어 고려 조정에서 바닷길을 포기하고 육로 운송으로 정책을 변경하자 왜

구들은 내륙지역까지 침투해 왔다. 처음에는 단순히 식량만을 목표로 했는데 나중에는 닥치

는 대로 민가를 불태우고 백성을 살상했다. 양민들을 포로로 잡아 지금의 오키나와 지역인 유

구국에 팔아넘기기까지 하였다. 우리의 불교 경전과 불화, 귀중한 서책 가운데도 이때 일본에

건너간 것이 많이 있다.

왜구들이 쳐들어왔다 하면 워낙 그 피해가 커서 관리들과 주민들이 다 달아나버리니 군현

같은 행정기관이 아예 그 기능을 상실했다. 어떤 곳은 몇 년 동안 왜구들의 소굴이 되기도 했

다. 서해와 남해 연안 마을들은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로 변해 갔다. 경상도만 해도 축산

항을 통해 왜구가 안동까지 들어오자 놀란 조정에서 안동 관내 보문사에 보관하고 있던 역사

기록들을 충주 개천사로 옮기기까지 했다. 이쯤 되면 국가의 체면도 말이 아니었다고 하겠다.

이렇게 불안하고 흉흉했던 고려 말의 사회 분위기를 일신한 것이 바로 홍산, 진포, 황산 3대

대첩이었다. 최무선의 진포대첩은 최영의 홍산대첩, 이성계의 황산대첩과 더불어 고려 말 왜

구 소탕의 3대 전투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최영의 홍산대첩이 그동안 고려의 군사력을 얕잡아

보던 왜구들의 기세를 꺾고 고려군에게 자신감을 안겨 줬다면, 진포대첩으로 왜구들의 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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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완전히 눌려버렸다. 고려군의 화력에 놀란 것이다. 뒷날 이성계의 황산대첩 또한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이 아니었다면 힘들었을 것이다.

왜구들의 기세가 한풀 꺾이면서 조정에서는 왜구의 피해가 극심했던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

에 집중적으로 관리를 파견해 백성들을 위로하고 지방사회의 회복책을 강구했다. 그제야 군현

들이 행정 기능을 재정비할 여유를 갖고 위용을 갖추게 되었으니 이 또한 최무선의 덕이었다.

최무선, 화약에 빠지다

최무선이 역사에 남긴 공적에 비해 그에 대한 기록은 매우 빈약한 편이다. 〈태조실록〉에 의해

최무선의 생애를 정리해 보면 대략 이러하다.

그는 영주(지금의 경북 영천) 최씨로, 광흥창사를 지낸 최동순의 아들이다. 천성적으로 기

술에 밝고 병법에 관심이 많았다. 항상 왜구를 제압하는 데는 화약이 최고라고 하였지만 나

라 안에는 화약에 대해 아는 이가 없어 중국에서 배가 들어올 때마다 상인들을 만나 화약 제

조법에 대해 물었다. 마침 화약 제조법을 아는 중국 상인을 만나 자기 집에 데려가 극진히 대

하면서 화약 제조의 요령을 터득했는데, 시험해 보려고 해도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자 마침내 그 정성에 감동하여 화약국을 설치하고 그를

제조로 삼아 화약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여러 기록을 통해 유추해 보면 최무선은 고려 충숙왕 13년에 태어나 조선 태조 4년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할아버지 최극평이 정3품인 종부시판사에까지 오른 것으로 보아

그의 집안은 과거를 통해 영천에서 중앙정계인 개성으로 진출한 것으로 짐작된다.

최무선의 아버지인 최동순은 정5품인 광흥창사를 지냈다. 광흥창은 요즘으로 치면 공무원

들의 월급에 관한 일을 책임지는 관청이었다. 원래 개경에는 좌창과 우창, 두 개의 창고가 있어

관리들의 녹봉을 담당했는데, 충선왕 때 좌창을 광흥창으로 고쳤다고 한다.

당시 왜구의 폐해로 가장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 곳이 바로 조창과 조운이었던 것을 생각하

면 광흥창사라는 아버지의 관직이 알게 모르게 최무선의 화약 무기 제조에 영향을 미치지 않

았을까 싶다.

최무선의 청년 시절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 그가 기술에 밝고 병법을 좋아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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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보아 문과보다는 이과 취향이었던 것 같다. 중국의 화약 기술에 대한 관심에서 그는 중국

어를 배웠고, 화약에 관련된 각종 기술과 정보를 수집했다. 조선 초에 정이오가 쓴 《화약고기》

에 최무선이 성품이 통달, 민첩하고 각 분야의 책을 깊이 연구했다고 하는 내용들이 그의 적

극성과 열의를 증명해 준다.

비법을 입수하고 신무기를 개발하다

한마디로 최무선은 화약 마니아였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화약과 화약을 이용한 무기였다.

그래서 화약에 관한 기술 서적과 정보 수집을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화약은 본디 고려

의 발명품이 아니라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었다. 그 원류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중국의 기술이

필요했다.

그가 살던 개경의 예성강 벽란포는 중국 상인은 물론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드나들던

국제 무역항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배가 들어올 때마다 예성강 나루터를 오가며 중국 상인을

붙들고 염초 제조법을 물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최무선은 원나라의 염초장 이원을 만나 자기 집에 묵게 하였다. 그를

극진히 대접하며 여러 달에 걸쳐 염초 제조법을 배웠다. 그야말로 획기적인 신기술을 손에 넣

은 것이다. (고려 조정에서 화약 제조 기술 입수를 위해 최무선을 원나라에 보냈다는 이야기

도 전한다.)

생각해 보라. 화포류에 관한 기술이나 비법은 그냥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남의

나라 사람에게 그걸 선뜻 가르쳐 줄 리가 없다. 아마도 최무선의 집념과 열의는 이원을 감복시

키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화약 제조법을 얻기 위해 중국어를 배웠다. 또 원천기술을 가진 사람을 찾기 위해 백방

으로 노력하였다. 그를 통해 비법을 알아내기까지 그야말로 최무선의 집요하고 치밀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까지 고려에 화약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연등회나 팔관회 같은 대규모 축제의식 때

종종 화산이라 하여 불꽃놀이가 행해졌다. 이때 쓰이는 화약 역시 전량 중국 수입품이었다.

그만큼 귀하고 귀한 물건이었다. 축제뿐 아니라 전시에도 쓰려면 국내 수요가 턱없이 모자라

매번 원에 요청을 해도 제대로 공급이 되지 않았다.

당시 화약은 황과 염초, 숯가루를 섞어서 만들었는데 문제는 염초였다. 화약에서 숯은 연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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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황은 촉매이며 염초가 산화제 역할을 한

다. 이 염초를 어디서 얻어야 하는지도 몰랐고,

또 세 가지 재료를 어떻게 배합해야 가장 폭발

력이 좋은 화약을 만들 수 있는지도 고려인들은

알 수가 없었다. 최무선은 이원을 통해 그 비법

을 알아낸 것이다.

화학에서 부르는 염초의 현대식 이름은 질산

칼륨이다. 이것은 특수한 토양에서만 채취가 가

능했다. 조선시대의 기록에 나온 염초 제조법을

보면 정말 재미있다. 오래된 집의 부뚜막이나 온

돌 바닥, 마루나 담 아래 흙을 긁어모아 그것을

재와 오줌, 말똥 같은 걸 섞어서 반년 이상 말리

고 쪄 가며 묵혔다가 끓이면 초석의 결정을 얻

는다고 했다. 질박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법한

제조법이다.

최무선이 알아낸 최적의 비율은 염초 75:황

10:숯 15의 근접치였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아마 최무선 이전에도 어설프긴 하나

화약류의 무기가 들어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투에서 실제 사용할 정도의 수준은 아

니었다. 최무선은 이후로 화약을 이용한 폭탄과 발사 장치들을 꾸준히 개량하고 만들어 냈다.

그것이 어찌 단번에 성공할 수 있었으랴? 실패와 개량을 거듭하면서 고려의 무기 수준은 그야

말로 업그레이드되었다.

대장군, 이장군, 삼장군, 육화, 석포, 화포, 화통, 화전, 철령전, 피전, 철탄자, 질려포, 신포 등

그가 사용했던 무기류의 목록은 꽤 화려하다. 철탄자는 쇠로 만든 탄환이며, 질려포란 쑥과 화

약, 쇠 파편을 섞어서 넣고 발사하면 폭발과 함께 인명 살상용으로 쓰이는 무기이다. 주화, 촉천

화는 일종의 로켓포이다. 화살 끝에 화약통을 달고 거기에 불을 붙여 발사함으로써 적진을 불

바다로 만든다. 또 밤에 쓰면 적들이 보고 놀라 달아나게 만드는 위협 효과도 큰 무기였다.

비법을 알아내고 신무기를 만들어 냈지만 최무선이 고려 조정으로부터 크게 환대를 받은

것 같지는 않다. 몇 년을 거듭해 건의한 끝에 우왕 3년 드디어 염원대로 화통도감이 설치되면

《국조오례의》에 나오는 최무선이 개발한 로켓형 화약 병기인 신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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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이제 최무선은 고려 조정의 지원하에 마음 놓고 화약 제조와 화포류 개발에 전념할 수 있

었다. 그가 새로 개발한 화포류의 실험이 성공하면서 많은 이들이 놀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마

침내 그 실험 무대이자 꿈의 데뷔전인 진포구 전투에서 빛나는 공을 세우게 된 것이다.

진포대첩에서의 전공에도 불구하고 최무선이 그토록 열렬히 주창해 만들어진 화통도감은

결국 창왕 때 폐지되어 군기사에 흡수되고 만다. 왜구의 기세도 웬만큼 수그러들었지만 한편

으로 이성계의 반대편에 섰던 그의 정치적 성향이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가 벼

슬에서 물러나면서 그의 발명 성과 또한 역사 속으로 묻혀 버렸다. 최무선은 결국 화약의 비법

을 정리한 비책을 겨우 열 살 된 아들 해산에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 최무선이 죽은 뒤 문인 권근의 적극적인 추천에 의해 조선 태종 때 최해산은 특채될

수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유훈을 이어 화약 병기 연구에 몰두해 새로운 화포와 화차를 개발

해 냈고, 군기고에는 화약보유고가 놀랄 만큼 늘어났다. 이 덕에 세종 때 북쪽 야인을 정벌하

고 남으로는 왜구들을 회유할 수 있었으니 최무선의 공로는 조선조에까지 뻗쳐 나라의 안위

를 돌보았던 것이다.

엄명숙

생각거리

최무선의 화약 개발에 대한 노력이 가져 온 결과를 생각해 보자.최무선은 전쟁에 사용할 수 있는 화약을 만들기 위해 화약에 관한 기술서적과 정보 수집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심지어는 화약의 원료인 염초의 비법을 얻기 위해 원나라 염초장 이원을 자기 집에서 극진히 대접하기도 하였

다. 그의 집요한 노력은 진포대첩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은 조선에 특채되어 화약을 개량하여 자주 국

방의 기틀을 튼튼하게 했다. 강력한 군사력은 북쪽으로 국토를 넓히고, 남쪽의 왜구들이 침입하지 못하게 하여 나라를 부

강하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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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과학관

화학 발전사와 제조 과정을 엿볼 수 있으며, 최무선의 호국 정신을 되새겨볼 수 있는 좋은 학

습의 장이다. 화포 체험을 비롯한 다양한 전통과학체험실이 마련되어 있고, 왜선 500여 척을

격침했던 진포대첩 애니메이션도 감상할 수 있다.

과학관 외부에서는 군 퇴역장비인 M-48전차, LPT 수륙장갑차, F-4전투기, 현대의 화약병기

등이 전시돼 이를 관람할 수 있다.

최무선의 고향 영천의 체험학습 추천 코스

시안미술관

최무선과학관에서 30분 거리

에 있는 시안미술관은 폐교를

고쳐 만든 미술관으로 대구・

경북 통틀어 두 개밖에 없는

등록 미술관 중 하나이다. 딱딱

한 미술관이 아니라 자연과 함

께 하는 미술관으로 아이들의

손을 잡고 소풍 가듯 가볍게 문

화를 접해 볼 수 있다.

별별미술마을

시안미술관이 있는 별별미술

마을은 마을 전체에 45개의 미

술작품이 설치된 지붕 없는 미

술관이다. 마을을 돌며 숨어 있

는 작품들을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한, 마을에는 20여

채의 고택이 있어 예술작품과

옛 사람들의 풍류를 함께 즐길

수 있다.

임고서원

임고서원은 충신 정몽주 선생

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입구에 정몽주의 ‘단

심가’와 ‘백로가’ 시비가 있고,

전시각에서 포은 선생의 영정

모사본을 볼 수 있다. 나라의

국운을 바로 세우고자 목숨을

내건 정몽주 선생의 절의와 충

심을 배울 수 있는 곳이다.

보현산천문대

해발 1,124m 보현산 정상에 자

리한 보현산천문대는 국내에서

가장 큰 1.8m 광학망원경을 보

유하고 있다. 눈으로 보는 것보

다 백만 배 이상 자세하게 관측

할 수 있다고 한다. 4월~10월

매월 넷째 토요일 14:00~16:00

에는 천문학 강연과 천문대 시

설 견학이 있어 아이들과 함께

가면 더욱 좋다.

시안미술관

별별미술마을

보현산천문대

임고서원

최무선의 자취를 찾아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