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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툰:Textoon Vol.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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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창작지 텍스툰:Textoon 2012년 6월, 통권 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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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집단 몽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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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006 • [Special_1] 텍스툰 연혁014 • [Special_2] 필진 인터뷰032 • [Special_3] 텍스툰이 추천하는 콘텐츠041 • [Text] 작전동 김여사의 우울_전혜진

065 • [Text] 습기_루지

079 • [Text] 상자 가루_김득출

084 • [Text] 장편연재_나유타_성우창

103 • [Project] 홍대기담2012_하늘흰나비의 날갯짓_전혜진

120 • [Project] 홍대기담2012_밥줄을 지켜라_앤윈

145 • [Project] 홍대기담2012_클럽 Angel(上)_pena

162 • [Toon] 구망久望_한시훈

203 • [Image] by 발랄민트207 • [Column] 김의성의 예술 나누기_김의성

211 • [Column] 정세랑의 말랑몰랑_정세랑

214 • [Column] SF와 이어지는 세상_전홍식

221 • [Column] 토탈 리뷰_송한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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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가장 쓰기 힘든 페이지가 이곳인 것 같습니다. 이 짓을 열 번이나 해도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네요. 그런고로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편집장인 송한별입니

다. 벌써 열 번이나 이렇게 싱거운 인사를 할 수 있어 기쁘네요.

눈치 채셨나요? 유독 ‘열 번’이라고 강조하고 있단 것을요? 눈치 빠른 분들은 이

미 진작에 깨달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번 호로 텍스툰이 드디어

10호를 찍었습니다. 어디선가 업적을 인정해주거나 상패라도 주지 않을까 기대해봤

습니다만, 아무래도 그런 기색이 없어 보이므로 알아서 챙기기로 했습니다. 따라서

이번 호는 무려 텍스툰 10호 특집입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스스로 챙기지 않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것 같아서 말이에요.

중간에 한 번 휴간하기도 했고, 나름대로 굴곡이 있었습니다만 햇수로 3년을 채

운 건 스스로 생각해도 장하네요. 복간한 지 1년 만에 10호를 찍게 된 것도 꽤 마음

에 드는 우연이고요. 좌충우돌 삐꺽삐꺽 어떻게든 여기까지 왔네요.

아무튼. 특집은 세 개의 기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지금까지의 텍스툰을

돌아보고, 텍스툰 필진들을 만나 인터뷰를 나누어보았습니다. 그리고 텍스툰 필진들

이 추천하는 콘텐츠를 소개하면서 외연을 키우고자 하는 나름 야심찬 기획도 준비

되어있습니다. 원래는 조금 더 많은 것들이 하고 싶었습니다만, 그건 다음 기회로 미

루도록 하죠. 텍스툰 10주년 특집, 뭐 이런 건 어떨까요?

아, 깜빡하고 말씀 안 드렸네요. 텍스툰 10호 발간을 기념해서 텍스툰 단편선집

을 제작했습니다. 10호 종이책 구매자분들께 전자책으로, 그리고 종이책 예매자분

들께 종이책으로 판매할 예정이니 이쪽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창작집단 몽니에

서 처음 나오는 단행본이라는 의미도 있으니까요.

특집 이야기만 할 게 아니었군요. 이번 호부터 12호까지, 세 호에 걸쳐 특별 기

획을 하나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홍대기담 2012>라는 프로젝트로, 추억이 사라져

가는 홍대 앞을 기리는 의미에서 아홉 명의 작가가 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텍스툰

에서 단독 게재하니 절대 놓치지 마세요.

그리고 새로운 칼럼과 새로운 작품, 그리고 새로운 필진이 여러분의 손길을 기다

리고 있습니다. 늘 그렇듯 이쯤 말을 줄이는 게 좋겠죠. 좋은 시간이, 그리고 좋은 경

험이 되길 바랍니다. 9월에, 혹은 그보다 앞서 다시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ditor’s 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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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_0] 들어가는 말

텍스툰이 드디어 10호를 맞이했다. 나름 로 성과를 올리며 이름을 알

리고 있는 것은 좋은 징조다. 그래서 준비했다. 나중에 또 언제 이런 일을 해

보겠는가? 기회가 왔을 때 저지르는 것이 텍스툰의 신조 아니었던가. 텍스

툰 10호 특집, 지금부터 시작한다.

10호 특집은 총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먼저 텍스툰의 탄생부터 차

례 로 지난 텍스툰을 돌아보는 <텍스툰의 역사>를 통해 과거를 조명해보

고자 한다. 7호 이후로 텍스툰에 유입된 독자들이 흥미를 느끼길 바란다.

그 뒤에는 <필진 인터뷰>가 준비되어있다. 김의성, 비스타드Beastard, 한

시훈 세 명의 필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인터뷰이로 나선 이들도

텍스툰 필진으로, 지면 바깥에서 만나는 필진들의 자유로운 목소리를 접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은 <텍스툰이 추천하는 콘텐츠>이다. 이는

텍스툰 필진이 추천하는 콘텐츠를 소개하는 자리로, 필진들이 소개하는 콘

텐츠를 독자와 공유하여 소통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과거 돌아보기와 텍스툰 내부와 외부를 고루 살피는 작업을 통해 텍스툰

은 다음 작업을 이끌어가고자 한다. 독자분들도 함께 하게 되길 바란다.

10th Annivers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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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_1] 텍스툰 연혁

행보行步

0. 태초에 재가 있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몽니의 앞에는 f-Ash가 있었습니다”가 맞을 것 같

습니다. ‘f-Ash’란 창작집단 몽니의 전신에 해당하는 판타지 창작 카페입니

다. 홈페이지와 카페를 오가며 근 10여년간 생존해온, 하지만 연혁에 비해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그렇고 그런 판타지 창작 카페 중 하나 죠. 늘 스무

명 남짓의 인원이 활동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있고, 새로운 회원이 들어오면

친 한 분위기에 녹아들거나 폐쇄적인 분위기에 려 떠나거나 하는, 일종

의 성장 한계점을 맞이한 커뮤니티의 전형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f-Ash의

슬로건은 ‘판타지를 향한 열정으로 재가 될 때까지’ 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여기서 몽니가 태어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죠. 성격부터가

상당히 달랐으니까요.

f-Ash에서 몽니가 갈라지게 된 것은 2009년의 일입니다. 당시 f-Ash의

운 자이자 현 몽니의 우두머리인 송한별은 당시의 무기력한 분위기에 싫

증을 느껴 단호히 조직을 개편할 것을 결심합니다. “더 재미있는 일을 해보

자”며 유령회원을 정리하고 조직의 이름부터 바꿔버리기로 합니다. 이때 처

음 나온 이름이 <종합창작 커뮤니티 몽니>입니다. 몽니라는 이름은 마찬가

지로 f-Ash의 회원이었던 김창 이 지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동명의

유명 인디밴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걸 깨닫고 되는 건 나중이죠.

f-Ash에서 몽니로 변화함에 따라 드러난 가장 극명한 차이는 조직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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름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판타지’ 창작 카페에서 ‘종합창작’ 커뮤니티가

된 것이죠. 몽니는 예전부터 회원들 사이에서 언급되던 “다양한 창작물”을

커뮤니티 내부로 포용하기 위해 준비된 조직이었습니다. 주어진 상황은 열

악했지만, 희망적인 관측을 가지고 큰 포부를 가졌죠.

종합창작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몽니는 작품을 발표할 지면을 만들기로

합니다. 제목에서부터 종합창작의 뜻을 확인할 수 있는 <텍스툰:Textoon>

이 바로 그 결과물입니다. 어 Text와 Toon을 합쳐 이름을 붙인 텍스툰은

2012년 6월 현재까지도 건재하게 살아있습니다.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지

금 여러분이 보고 계신 이 지면이 그 증거물입니다.

처음 텍스툰은 창작활동의 결과물을 발표하는 발표의 장이자, 동시에

“본업에 지장을 주지 않을 선에서의 빡센 취미”를 현실화시키기 위한 수단

이었습니다. 텍스툰이 공식적으로 발간되면서 창작집단 몽니의 회원들은

마감의 두려움에 치를 떨게 되었죠. 일부에서 유명한 이른바 ‘폭풍마감

검’이 탄생한 순간입니다. 열 명 남짓한 인원으로 차마 월간지를 만들 수는

없고, 다소 양보해 격월간지로 확정된 텍스툰은 2010년 2월, 카페를 통해

드디어 그 첫 모습을 드러냅니다.

1. 텍스툰 형성기 — 1호에서 6호까지

웹진으로만 제작된 1호 표지에는 모닥불 사진에

필터 효과를 덧씌운 이미지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재ash에서 다시 불길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의미도 있지만, 현실적인 차원에서는 표지 디자

인을 할 인재가 없었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판형

(B5), 로고, 디자인까지 모두 베타 단계에 불과한,

상당히 무모한 시도 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이

때 무모하게 웹진을 발간했기 때문에 지금의 텍

스툰이 있게 된 것 역시 사실입니다.

부분의 작품은 f-Ash시절부터 축적해온 이른

바 ‘비축분’으로 채워졌으며, 이때 함께 한 분들 중 지금은 연락이 끊긴 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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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상당수입니다. 단편소설과 연재소설이 고루 배치되고, 각각의 소설 작품

에 전용 삽화가 들어가는 편집 방식은 아직까지도 이어져내려오고 있습니

다.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인력도 없고 요령도 없어서 글을 쓴 작가가 자기

작품에 쓸 삽화를 직접 그리는 유쾌한 일이 일어납니다.

깜찍하다 못해 끔찍하다는 평까지 있는 텍스

툰 2호 표지는 현재 「구망」을 연재하고 계신

한시훈님이 그려주셨습니다. 이때부터 텍스툰의

공식 마스코트인 심해 아귀가 나타나기 시작합니

다. 네, 텍스툰의 공식 마스코트는 고양이가 아니

라 심해 아귀입니다. 이에 맞춰 “심해에서 빡센

취미”라는 새로운 슬로건이 생기기도 했죠.

1호를 토 로 홍보가 가능해진 2호부터 조금

씩 새로운 필진들이 입되기 시작합니다.

격월간지라면 해볼만 할 줄 알았는데 어째서

인지 한 달도 쉬지 못하고 바로 작업에 들어가야 했던 편집장의 비명이 공

식적으로 기록된 첫 호이기도 합니다.

2호부터는 여러 사람이 순서를 정해 하나의 작품을 집필하는 릴레이 형

식의 연재 소설이 시작됩니다. 이때 시작된 이고은님, 최광미님, 홍련화님의

「미첼라이아의 용병들」 같은 경우는 우여곡절을 거치며 현재까지 연재되

고 있습니다. 사실상 최고참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덧붙이자면 “The End. / And... / Need Something More? // Then, See

You Next Time!”이라는 클로징 멘트가 확정된

호이기도 합니다.

3호 표지는 지난 1, 2호에서 멋진 일러스트를 수

록해주신 제닉이 담당했습니다. “멋진 표지를 가

릴 수 없다”는 이유로 편집장이 여태 사용하던 블

록 형태의 로고를 치워버릴 정도 죠.

3호부터 한동안은 웹진에 종이책적인 질감을 부

여하고자 본문 배경으로 회색 음 을 넣습니다.

훗날 이 시도는 “보기도 안 좋고 느리고 용량만

차지한다”는 것이 밝혀져 폐기처분됩니다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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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가독성을 높이기 위한 새로운 시도 중 하나 습니다.

연재소설이 펑크나고 비축분이 떨어지면서 분량이 줄어드는 사태를 막

아보기 위해 새로운 연재 소설을 초 했으나 이 시도는 불발로 끝나고 마는

사건도 있었죠. 사람 모으기가 참 쉽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4호 표지는 “여름이니까 납량특집으로”라는

편집장의 부탁을 받고 창수가 제작했습니다. 현

재는 김경은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죠.

배경에 회색 음 을 넣어 종이의 질감을 주고

자 했지만, 이 기획은 위에 언급한 로 금방 폐

기됩니다. 그래도 3호보다는 4호가 더 보기 편하

고 좋습니다.

4호에서는 순조롭게 연재 중이던 릴레이 소설

「메시아」에 설정상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는 점

이 제기되어 급하게 연재가 중단됩니다. 「메시

아」는 훗날 출판사와 계약이 맺어져 『메시아 게임』으로 재탄생됩니다.

전자책 형태로 현재까지 주요 인터넷 서점에서 판매 중이죠.

특집 코너가 처음으로 선보이는데, 4호에는 조기완결된 「메시아」의

설정을 담은 <「메시아」 특집>과 앞으로 자주 이름을 내비치게 되는 몽니

수제 TCGTrading Card Game <「Cross X Cross」 특집>이 수록되어 있습니

다. <「Cross X Cross」 특집>에는 게임의 기본 설정과 소설판 1화, 그리

고 게임 룰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글과 그림 외에 새로운 창작물이 더해

진 첫 번째 순간입니다.

5호 표지 역시 김경은이 맡았습니다. 5호 표지

는 “폭풍도 불고 하니까 폭풍 한 번 넣어보자”는

편집장의 의견을 들은 김경은이 폭풍을 변기통에

쳐넣으면서 완성되었습니다. 핫핑크는 제작자의

개인취향입니다. 해상도가 그리 높지 않은 게 안

타깝네요.

5호는 극단적으로 적은 분량이 특징이라면 특징

인 호입니다. 통상의 절반 분량 밖에 되지 않는 이

유는 기존의 연재 작품들이 거의 다 종료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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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이 단 한 편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뻔뻔하게 “다시 한 번 그럴싸하게 도전”해보겠다는 편집자의 패기가

돋보입니다.

텍스툰 최초로 이고은님의 만화가 수록되었으며, 공모전 사냥 목적으로

결성한 팀인 Team F.A.K.가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F.A.K.는 First

Aid Kit, 즉 구급함을 의미하며, ‘급한 로 어떻게든 해보자’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참고로 Team F.A.K.의 작품은 수상에 실패했습니다. 따라서 개

인의 명예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팀원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첫 번째 공모전

이후 잠정 해체 상태라는 것도 비 입니다.

6호는 예정 로라면 2010년 12월 호가 되어

야했습니다만, 5호의 처참한 분량에 좌절한 나머

지 한 달 늦은 2011년 1월 신년호로 제작되었습

니다. 표지가 토끼인 이유는 2011년이 토끼의 해

라 그렇습니다. 이번 표지 역시 김경은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왜 토끼가 알에 들어있는지는 묻지

맙시다.

위기감에 빠져 만들어진 6호도 분량이 그리

빼어나지는 않지만, 다양성에 있어서는 이전의

텍스툰과는 질이 다릅니다. 비스타드의 음반 리

뷰와 이고은, 홍련화의 공동 작업인 그래픽아트, 그리고 보드게임과 소설의

결합인 Team -ing의 연재 소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Team -ing의 -ing는

기본적으로 현재진행형이라는 의미지만, 텍스툰 내부에서는 그 로 발음해

서 ‘잉’에다가 원래 의미를 더해서 ‘잉여질 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두 호 연속으로 기 이하의 결과물을 내놓게 된 편집부는 “이 로 억지

로 계속해봤자 별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다”고 판단, 정비기간을 가지기로

결정합니다. 이때 했던 “절 조용히 사라지지는 않”겠다는 약속은 훗날 넋

을 놓고 있던 편집장을 불러들이는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이때부터 2011년 9월까지, 텍스툰은 긴 공백을 가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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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안정기 — 7호 이후

약 8개월의 공백 뒤, 텍스툰은 약속 로 돌아왔

습니다. 한층 업그레이드 된 콘텐츠와 디자인, 그

리고 두께로 말입니다. 판형이 기존의 B5에서 신

국판으로 바뀌었으며, 격월간에서 계간으로, 그리

고 전자책 형태와 함께 종이책으로도 제작되기 시

작합니다. 편집 방향이 통일성을 가지고, 실제 종

이책과 비슷한 형태를 취하게 됩니다. 하지만 표지

는 여전히 김경은이 맡았습니다. 실험정신은 김경

은의 상징이나 다름없습니다.

7호를 기점으로 닉네임보다 본명을 사용하기도 암

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6호까지가 주로 글과 그림으로만 구성

되었다면 7호부터는 글과 그림에 더해 특집기사와 칼럼이 더해지게 되었습

니다. 특집기사와 칼럼은 잡지적인 성격을 강조하죠. 특히 칼럼의 경우, “칼

럼 청탁이 전부 성공하면 내가 종교를 가진다”는 편집장의 말이 현실이 될

뻔했습니다. 예상 밖의 소득이죠.

디자인 면에서도 최적화가 이루어졌고, 최소한의 디자인으로 깔끔함을

뽑아내는 현재의 텍스툰의 기풍이 이때 정착했습니다. 7호의 레이아웃과 그

이후의 레이아웃은 미세한 차이를 제외하면 거의 같다고 봐도 좋습니다.

1~6호를 텍스툰 1기, 7호 이후를 2기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큰 변화

가 있었으며, 이 변화는 매우 긍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때 얻은 긍정적인 힘이 텍스툰이 다

시 활력을 얻게 된 동력원이 되었습니다. 텍스툰이

외부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빼놓을 수 없겠군요.

8호 표지는 국으로 유학간 김경은을 신해

한시훈이 맡았습니다. 두 번 작업한 표지가 모두

심해아귀라는 점은 흥미롭네요. 편집장의 아이디

어에 한시훈의 실력이 더해져 만들어진 8호 표지

는 특집과도 이어지는, 디자인과 콘텐츠가 직접적

으로 연결되는 첫 번째 시도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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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필진 목록이 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7호로 복간에 성

공한 뒤 8호에서는 비스타드의 작곡 원고, 김종엽, 김창 , 유상지, 허원석

의 더빙 원고, 김지나의 삽화 원고 등이 더해져 한 발 더 ‘종합 창작’에 가까

워졌습니다. 특히 ‘말하는 몸’이라는 특집 주제는 종합 창작을 추구하는 텍

스툰이 아니라면 불가능할 주제라는 평입니다.

덧붙여 8호에는 종이책 구매자를 위한 특별 부록, 「텍만지」가 포함되

어 있습니다. 몽니 내부에서 소화할 수 있는 창작의 범위가 확연히 넓어졌

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텍만지」는 2012년 연초, 몽니 신년회에서 크

게 활약합니다.

7호가 부활의 신호탄이었다면 8호는 그것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확인하

는 굳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9호는 표지에서 알 수 있다시피 정세랑 작가

특집입니다. 모델로도 직접 나서주셨죠. 표지 작업

은 송한별이 했습니다. “뭐야 이거, 진짜 잡지 같

이 나왔잖아!”라는 어처구니 없는 감탄사를 부른

표지이기도 합니다.

9호는 정세랑 작가에 초점이 맞춰져 집중력 있

는 특집과 함께 다량의 단편 소설로 구성되어 있어

여태까지의 어떤 호보다도 탄탄합니다. 내용은 물

론 두께 면에서도요. 그리고 여태 바라고 바라던

만화 연재를 한시훈이 「구망」으로 이루어낸 것

은 경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필진들이 여러 번 글을 쓰면서 안정적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점 역

시 특기해야 합니다.

9호는 기존의 전자책 형태에 더해서 스마트폰 판형, iBooks 판형 등 다

양한 판형으로 제공되어 큰 호응을 얻었고, 첫 오프라인 판매에 힘입어 매

진이라는 기록을 세웁니다. 편집장은 이 기록이 본 10호에서 깨지게 되길

원하지만,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네요.

현재 텍스툰은 환상문학웹진 <거울>, SF무크지 <미래경> 등과 힘을 합

쳐, 혹은 힘을 빌려 독자들에게 다가가고 있습니다. 인지도가 조금씩 높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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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 있다는 건 좋은 일이네요. 덕분에 전 필진이 기운 내서 작업에 임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텍스툰의 포부는 여전합니다. 종합창작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지면에

담을 수 있는 한 최 한 다양한 창작물을 품고자 합니다. 텍스툰이 창작자

들의 교류공간이 동시에 창작물을 공개할 수 있는 지면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텍스툰은 앞으로도 여러분과 함께 할

예정입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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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_2] 필진 인터뷰

비스타드_Interview 성우창

성우창 : 예그럼 인터뷰 시작하겠습니다. 편하게 해주세요 저도 지금 처음

이라 긴장 많이 해서요. 지금 소개팅하는 기분이네요. 아- 그럼 텍스

툰 10호 특집으로, 텍스툰 음악 창작계에서 유일하게 주축으로 활동

하시는 Beastard, 송민성 씨 인터뷰를 마련했습니다. 먼저, Beastard

라는 닉네임의 유래가 뭔지 알 수 있을까요?

송민성 : 일단 Beastard는 단어 beast와 bastard를 합친 말이에요, 이게

크게 의미가 있다기보단, 짐승이 굉장히 순수하잖아요, 순수한데. 요

즘 보면 주변에 순수한 것이 많이 없는거 같아요. 거기에 흔하지 않

다는 의미로 ‘기형’의 뜻을 가진 bastard를 가미해서, 요즘은 이런 순

수한 속성을 가진 것이 오히려 기형이다. 이런 뜻으로.

우창 : 정상이어야 할 순수함이 요즘은 오히려 기형에 가깝다?

민성 : 예, 요즘은 주변을 봐도 음악이든, 다른 창작물이든 순수한 것을 찾

기 힘들잖아요. 텔레비전같은 것들은 봐도 순수하다기보단 부분

상술이라고 할까. 드라마를 보나, 화를 보나 ‘아 이런 부분은 이런

기교를 이용했구나’ 이런 거는 많이 보여도, 그런 창작물에서 순수하

게 감동을 받아본 지는 되게 오래된 거 같아요. 뭐 충 이런 느낌인

데 그렇게 심각한 의미로 지은 건 아니고요.

우창 : 창작에는 여러 장르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음악을 주로 담당하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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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혹시 음악을 본격적으로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예를 들면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음악창작을 하고 싶었다거나.

민성 : 제가 음악을 처음 접한 건 고등학교 때에요. 보통 고등학교 때 공부에

많이 치우쳐 있을 때잖아요? 근데 당시 음악 선생님이 되게 특이하신

분이었어요. 보통 고등학교 음악 수업은 필기 시험과 실기 시험을 나

눠서 보잖아요? 그런데 실기시험으로 작곡을 과제로 내주셨어요.

우창 : 작곡을요?

민성 : 네, 작곡이란 걸 갑자기 틱, 던져주니까 애들이 많이 당황했어요. 뭐

작곡에 해 아는 것도 없고, 음악 이론에 해서도 문외한이니까. 사

실 중고등학교 음악수업이 재미가 없잖아요. 그런데 제가 그 과제를

계기로 어쩌다보니 가장 기본적인 미디 툴을 가지고, 아니 사실 미디

툴도 아니고 악보를 그리는 기보 프로그램이었는데 그걸 어떻게 구

하게 되었어요.

우창 : 혹시 ‘기타프로’?

민성 : 아뇨 기타프로보다 더 심한, 피아노 기보용 프로그램이었는데 어쩌

다보니까 그걸 접하게 되었고, 그때 해보니까 음악을 만드는 게 생각

보다 어렵지 않더라고요. 왜냐하면 음악이론을 전혀 몰랐을 때에도

사람이 들어서 이상한 음과 이상하지 않은 음은 구별할 수 있거든요.

서로 조화가 안맞는거?

우창 : 그렇죠, 불협화음은 들으면 바로 어색하니까.

민성 : 그때부터 ‘아 음악이 생각보다 재미있구나’ 그래서 음악을 하게 됐

고, 조금씩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학을 가서 밴드부를 들어가게 됐

어요. 이렇게 음악을 하게 된거죠.

우창 : 제가 알기로 전공이 이공계 쪽인 걸로 알고 있는데, 왜 바로 음악 쪽

으로 가지 않으셨나요?

민성 : 이게 사실, 표적으로 잘못된 케이스인데. 저도 제가 이공계 쪽 사

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공계는 아닌데 이게 사실 성적을 맞춰서

가다보니까.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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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창 : 아아~.

민성 : 제가 음악 만드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안 것도 있고, 사

람이 먹고는 살아야겠는데 음악은 전문적으로 하지 않으면 그게 어

려운 것도 있고… 일단 학교에 와서 밴드를 하게 된 건 잘했다고

생각해요. 잘했다고 생각하기 떄문에 딱히 이공계에 와서 후회한 적

은 없어요.

우창 : 밴드 활동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하셨는데, 지금도 밴드활동을 하시

나요?

민성 : 지금은 밴드활동을 안 하고 있고요. 올해 초에는 공연을 했어요. 그

이후에는 활동하고 있는게 없고요. 생업전선이 바빠가지고.

우창 : 개인작업은 어떠신지?

민성 : 개인작업은 뭐 간간히 하고 있고요.

우창 : 주로 어떤 장르를 하시는지요?

민성 : 장르는 사실 원래 국한되게 듣는 편은 아니었어요. 힙합도 좋아하고

테크노도 좋아하고, 요즘 나오는 셔플이나 뭐든 좋아하는데, 제가 주

로 만드는 건 <별 추적자>도 그렇지만 일렉트로닉의 성격이 강한데,

저는 그렇게 장르를 규정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좋은 음악이

좋은 음악이고, 곡에는 어떤 감정을 이끌어 내겠다는 컨셉이 있는데

컨셉에 충실한 음악은 다 좋은 것 같아요. 애매모호한 건 별로 안 좋아

하고. 제가 원래 락에 기반을 두고 있긴 한데 만드는 음악은 일렉트로

닉 쪽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제가 밴드에서 포지션이 건반 주자다 보니

까, 건반은 일렉트로닉을 생각 안 할 수 없잖아요. 옛날 락 건반은 무

조건 오르간이 연상됐지만 건반이라는 악기 자체가 다양한 음원을 다

룰 수 있기 떄문에 아무래도 그런 쪽으로 많이 빠지는 것 같아요.

우창 : 밴드 담당 포지션이 건반이라고 하셨는데, 처음부터 건반에 관심있

으셨나요?

민성 : 전 제가 어렸을 떄 피아노를 아주 잠깐 배운 것 말고는 피아노를 악

기로 다뤄본 적이 거의 없어요. 처음에는 보컬을 하고 싶었어요. 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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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컬이 너무 경쟁이 세서.

우창 : 역시 그렇죠.

민성 : 네, 그래서 어쩌다보니 린 건데, 결과적으로 보면 훌륭하다고 할

것 까진 될 수 없어도 옳은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보컬보다는 건반

이어서 더 많이 음악을 배웠던 것 같고, 스스로도 배우지 않고는 건

반을 할 수 없으니까.

우창 : 솔직히 건반이 드럼보단 낫지만 기타나 보컬보다는 눈에 안 띄는 포

지션이죠.

민성 : 사실 그렇고, 국내 많은 밴드들이 기타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도

맞아요. 사실 국내 많은 밴드들이 건반 주자를 두기보다는 객원 건반

주자를 둔다거나 미디 작업을 해서 MR로 깔아놓는 식으로 작업을

하고 있죠. 건반의 입지가 좁은 것은 사실입니다.

우창 : 작곡하실 때, 감을 얻는 경로라고 할 만한 게 있나요?

민성 : 딱히 그런건 없는데, 사람이 살면서 감정이 변화하잖아요. 이런 감정

이 오면 또 저런 감정이 오는데, 조금씩은 격한 감정이 오잖아요? 그

런 감정이 올 때 악상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작곡 이론

을 배우면 누구나 이런 식으로 감정을 표현 할 수 있어요. 다른 작곡

하는 사람도 그렇지만 감정에 맞춰서 이미지를 떠올리고, 그 이미지

에 빗 서 코드를 갖다 붙인다든지 하는 식으로 음악을 많이 만들어

요. 저는 감이라기보다는 감정이 더 맞는 것 같네요. 그때그떄 순간

순간 느끼는 감정으로 ‘어 이런 음악 한 번 만들면 좋겠다’처럼, 좀

‘삘’ 받는 느낌이랄까. 저는 그렇게 오래 작업하지 않아요. 략 여섯

시간 정도 내에서 뚝딱하는 식으로 끝내죠.

우창 : 저도 옛날에 작곡을 해보려고 좀 만져본 적이 있는데, 멜로디를 만들

다가 중간에 막히는 경우가 있어요. 소설 같은 경우도 그렇고. 다른

창작물도 그런데, 민성 씨는 막힐 때 어떤 방식으로 해소하시나요.

민성 : 선율이 루프에 갇히거나 그런 경우가 있죠. 그럴 때는 전 달리 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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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것 같아요. 모든 시간을 쏟아부어도 되는 건 아니고. 그럴 땐 잠

깐 쉰다거나, 발상을 달리한다거나, 아니면 그 감정선을 꼭 붙들고 있

다가 시간이 지나면 감정이 변하잖아요? 그럼 조금 달라진 감정에 따

라서 작업할 때도 있고요.

우창 : 그럼 어찌보면 시간이 해결한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민성 : 단순히 붙잡고 있는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라고 봐요.

우창 : 약력을 보니 재즈 아카데미에 계셨던데요.

민성 : 졸업은 못했고요. 그때에도 생업이 바빠가지고 잘 다니진 못했어요.

아쉬운 부분이 있죠. 끝까지 다녔으면 조금 더 낫지 않았을까하는 생

각도 있고, 음악 이론은 배우면 배울수록 좋거든요. 모르는 것 보단

아는 게 곡을 쓸 때 좋으니까. 그런데 현장에서 가르치시는 분들도

얘기하는데, 꼭 배우는게 다는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사람이 기계적

으로 기술에 능통하다고 해서 곡이 술술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어쨌든 입학하고 일 년은 다녔지만 졸업하진 못해서, 약력에 올라가

진 않는게 낫다고 봐요. (웃음) 부끄러운 일이죠 사실. 거기 출신 분

들께도 미안한 일이고.

우창 : 그래도 도움은 되었나요?

민성 : 확실히 도움은 되었죠. 몰랐던 부분도 많이 알게 되었고.

우창 : 음악을 접하면서, 자신의 음악관이나 생각에 크게 향을 끼친 사건

이 있었나요?

민성 : 화이트 스트라입스The White Stripes라는 밴드가 있어요. 전 처음에 그

밴드의 사운드를 들었을 떄 굉장히 깜짝 놀랐거든요. 멤버가 두 명밖

에 없는데 굉장히 이색적이에요. 키보디스트와 드러머가 전부인데

저는 그 전까진 빈틈 없이 꽉 찬 사운드가 좋은 건 줄 알았어요. 그런

데 그 밴드는 오히려 미니멈하달까, 단순한 멜로디가 순수하게 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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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것이 충격이었어요. 저는 그전까진 메탈 같이 화려하고 시끄러

운 그런 음악을 많이 좋아하고 있었는데. 아 꼭 악기가 많이 들어간

다고 곡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구나 생각했죠. 최근에 <탑밴드>에 나

온 톡식Toxic같은 경우도 두 명이서 재밌는 사운드를 내는게 발상이

새로웠던 것 같아요. 두 명만으로도, 최소 인원만으로도, 미니멈함으

로도 얼마든지 좋은 감동을 줄 수 있다. 그런 생각을 가졌어요.

우창 : 가장 좋아하는 가수는 누군가요?

민성 : 건즈 앤 로지스Guns N’ Roses를 가장 좋아해요. 핵심 멤버가 보컬인 엑

슬하고 기타의 슬래쉬가 있는데, 현재 밴드명은 엑슬이 가져가고 슬

래쉬를 포함한 나머지 인원은 벨벳 리볼버Velvet Revolver로 갔죠. 슬래

쉬의 기타가 단순하면서도 파괴적인 리프를 많이 사용하고 있어요.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세션으로 참가했을 때에도 단순하고 통

통튀는 선율을 보여줬고. 국내 밴드 중에서는 뭐 많지만 윤도현 밴드

YB를 본받고 싶네요.

우창 : 현재 우리나라의 음악창작환경이 어떤지 본인 생각을 듣고 싶어요.

민성 : 창작환경은 굉장히 열악하다고 하면 열악하고, 좋다고 하면 좋아요.

필요한 기술을 배우고자 하면 굉장히 경로가 많아요.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싸게 가르치는 사람도 있고.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어요. 문제는 만드는 사람은 많지만 소비가 안 되

요. 창의적인 음악도 많고, 좋은 음악도 많은데, 소비를 식사로 비유

하자면 편식이 되고 있죠. 지금 우리나라는 표적으로 아이돌 음악,

그 중에서도 일렉트로닉이나 셔플 만이 주류가 되고 있고요. 힙합은

떴다가 지금은 뒤로 려난 상태고. 힙합도 지금은 순수한 느낌이라

기 보다는 일렉트로닉이 많이 가미되어 있죠. 창작환경은 좋은데 성

공하기는 어려운, 그런 환경이라고 봐야겠죠.

우창 : 음악 창작 지망생이 가져야 창작 마인드에 해 알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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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성 : 일단 무언가를 만들 때, 보여주기 보다는 만든다는 행위 그 자체가

좋아서 만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만들어서 남

이 들어주면 좋은 동기부여가 되겠지만 굳이 누군가에게 들려준다는

생각으로 음악을 접하면 위험할 수도 있어요. 만드는 행위 자체를 즐

기지 못하면 그것도 안 되거든요. 저도 지금까지 열 여섯 개 정도

작업을 했는데, 굳이 다른 사람한테 들려준다기보다는 만드는 자체

가 재밌고, 그렇게 해서 하나둘 만들다 보면 그 중에서 많은 사람들

이 들어줄 수 있는 음악이 나올 수 있어요. 일단은 많이 만들어야 한

다고 생각해요.

우창 : 좋은 말씀이신데, 그렇다면 창작은 자기 만족에 그쳐야 하느냐는 반

박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민성 : 자기를 만족시키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을 만족시키겠어요.

우창 : 그러면 혹시 지금까지 만든 것 중에 만족하고 계신 게 있나요?

민성 : 나중에 들으면 부끄러운 것도 많아요. 내가 저런 걸 만들었나 싶은

것도 있고요. 제가 만족할 수준에 있는 건 없는 것 같아요. 제가 프로

는 아닌지만 프로도 자기 작품에 해서 만족하는 게 얼마나 있겠냐

고 반문할 수 있고. 그나마 두 곡 정도는 애착이 가는구나, 정도.

우창 : 미래계획에 해 듣고 싶은데, 평생 유통업계에 투신하신다면… 어

떠신가요?

민성 : (웃음) 그게 누구나 생활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고… 우리나라가 독

립해서 살기 좋은 곳은 아니잖아요. 저도 계속 음악을 했으면 좋겠는

데, 그게 뜻 로 안되니까. 지금 상황 같아선 계속 이렇게 아마추어로

음악을 만들고, 그렇게 해서 스스로 만족할 음악이 나온다면 좋을 것

같아요.

우창 : 지금은 현실적으로 말씀하셨는데, 마음 같아선 어때요?

민성 : 음악으로 먹고 살면 좋죠. 제 음악이 소비 된다면 좋겠는데, 음악으

로 먹고 살기는 불가능하니까. 제가 아이유IU같은 아이돌의 음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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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할 것도 아니고. 꿈만 같은 이야기지만 게임 음악이나 테마 음악

을 만들어 팔면서 살면 참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요.

우창 : 원래는 밴드 출신이신데, 밴드 활동을 더 하실 의향은 없으세요?

민성 : 아뇨 아직 밴드하고는 연계가 되고 있어요. 제가 있던 블랙테트라

Black Tetra라는 밴드가 나름 유서 깊은 밴드인데, 그 밴드가 좋은 점은

인맥이 넓다는 거죠. 현재 인디로 활동하고 있는 후배들도 많이 있거

든요. 마음만 먹으면 밴드는 얼마든지 할 수 있죠.

우창 : 이제 여쭤볼 만한 건 다 여쭤 본 것 같어요. 마지막으로 독자분들게

하실 말씀 있나요?

민성 : 뭐 다들 바쁘고 사는 게 쉽지 않겠지만 우리가 뭔가 만드는 걸 좋아

하는 사람들이잖아요. 만드는 걸 놓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창작이 즐

겁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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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훈_Interview 김승완

김승완 : 우선 텍스툰 9월호의 「구망」으로 노예살이의 세계….

한시훈 : 노예요?

승완 : (무시) 몽니에 입성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이전부터 텍스툰에 간간히

얼굴을 비춰주셨지만 아직 잘 모르는 분이 많을 것 같아요. 그런 의

미에서 자기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시훈 : 자기소개요? 음, 그림 못 그리는 그림쟁이….

승완 : 그건 너무 겸손하다. 그냥 그림쟁이로.

시훈 : 네, 그림쟁이 한시훈.

승완 : 끝?

시훈 : 더 할 게 있나요?

승완 : 더 어필하세요. 빨리. 당신 이야기 쓰는 거에요. 당신 인터뷰에요. 당

신에 해 알아가야 되는 거에요. 어 말이 뭔가 이상하다. 너에 해

알고 싶어!

시훈 : 두, 두근! (웃음) 보컬로이드에 카이토란 캐릭터가 있는데 그 오빠가

몇 년간 제 최애캐에요! 우리 오빠가 흑역사가 좀 쩔어주고 마이너지

만 뭐 어때요 제 눈엔 이렇게나 사랑스러운데! 오빠처럼 멋진 남자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보냐! 요새는 <테일즈 오브 엑실리아>의 남주인

쥬드 마티스라는 아이한테 정이 가요! 엄친아예요! 의사 지망생인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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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 좋은 레지스턴트에 교수님들께도 사랑받고 성격도 착하고 상냥하

고 좋고 귀엽고 잘생겼고 싸움도 잘하고 공부는 당연히 잘하고! 물론

그래도 최애는 카이토 오빠에요! …이런 거 해도 되는 건가요? (웃

음) 1, 2차 창작 다 좋아하는데, 2차 창작은 좋아하지만 미숙해서 1차

창작 위주로 연성하고 있어요.

승완 : 전부터 몽니랑 접점이 이것저것 있으셨죠? 텍스툰 2호 표지의 심해

아귀라든가. 처음에 몽니로 어떻게 흘러 들어오신 거죠?

시훈 : 원래 승완 씨하고 알고 지냈는데 승완 씨가 만들었던 모 커뮤니티에

서 텍스툰 편집장을 만나고 어쩌다 보니까 몽니 카페로 거처를 옮긴

다음에 거기서 좀 놀았는데, 다른 분들과 많이 친해지진 못했어요.

승완 : 카페 시절 몽니가 워낙 정적이었으니까요.

시훈 : 그렇게 지내다가, 학교생활 때문에 수능 때까지 잠수를 탔어요. 그

사이에 텍스툰 2호 표지에 참여하고. 몽니 활동에 참여는 못 했지만

삽화 같은 걸로 간간히 얼굴을 비추고 있었죠.

수능 끝나고 트위터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원고 독촉하는 마감 봇

이 있어요. 아무 생각 없이 마감 봇 팔로워 목록을 훑어보는데 익숙

한 로고가 있는 거에요. 봤더니 그분이야.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걸었는

데, 그러다가 덥썩. 그때쯤이 11월 이후에요.

승완 : 거기가 개미지옥이었어요. 재개 하신 활동이 8호 표지, 또 아귀 죠.

「꿈」 삽화와 『텍만지』 표지도 하셨고, 그렇게 몽니로 흘러 들어

와서 「구망」 연재를 시작하셨죠. 이렇게 한 명의 마감 노예가 또

탄생했습니다.

시훈 : 노예 아니에요.

승완 : 부정하려는 순간 이미 늦은 거에요.

승완 : 그림은 언제부터 그리기 시작하셨나요?

시훈 : 모든 그림쟁이가 그렇듯이 어릴 때부터 끼적끼적 낙서를 하면서 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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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죠. 본격적으로 그림 재미쪙! 하면서 그린 건 초등학교 2학년 때부

터. 제 로 이쪽 길로 가고 싶다고 생각하여 배우기 시작한 건 중학

교 2학년 때부터.

승완 : 고등학교는 그림 관련 쪽으로 가셨죠. 지금 학도 예 로 가신 건가요?

시훈 : 예 는 아니지만, 관련 학과로 갔어요. 과제 엄청 많은 과….

승완 : 시훈 씨를 몽니로 끌어들이기 위해 1년을 기다리게 한, 바로 그 그림

에 해서 얘기해볼게요.

시훈 : 아, 너무 황송해요.

승완 :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둥글둥글한 그림체인데도 표현력이 좋아요. 편

집장님도 굉장히 마음에 들어하시고. 그런데 본인은 그림에 굉장히

자신이 없으신 편이에요?

시훈 : 아직 학 교수님들께 그림에 관해서 쓴소리 들은 적은 없지만, 입

준비할 때 선생님들께 여러모로 까이다보니 그게 쌓여서 콤플렉스가

된 것 같아요.

승완 : 부정적인 면을 빼고 본인의 그림을 평가하신다면?

시훈 : 제가 생각해도 색감은 좋은 것 같아요. 좀 자뻑인가요? (웃음) 저는

잘 모르겠는데 고등학교 들어가서 색감이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

어서 그러려니 해요. 그런데 저도 좀 놀란 게, 얼마 전에 초등학생 때

부터 지금까지 그린 그림들을 쭉 봤는데 연출력은 괜찮은 것 같아요.

승완 : 확실히 컷 나누기나 기복 조절 등에 굉장히 익숙해 보여요.

시훈 : 어렸을 적 그림을 보면, 그 때에는 멋모르고 멋진 장면만 그리고 싶

어 하잖아요? 그게 지금 봐도 감탄스러운 것들이 있는 거예요. 그런

데 그동안 입시 하느라 개인적인 그림을 그릴 수가 없어서 감이 다

굳어버려서 옛날보다 못 그리는 것 같아요. 컷도 연출도 다 정해진

그림만 반 년이나 그려오다 보니까 지금은 예전의 연출력을 되찾기

힘들어요.

승완 : 그런것 치고 「구망」은 여느 웹툰에도 못지 않는 퀄리티 죠.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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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질문, 그림을 그리는 사람 중에 동경하는 사람, 작품이 있다면?

예전에 『에어기어』 작가인 오!그레이트Oh!Great를 좋아한다는 이

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요.

시훈 : 오!그레이트는 그림만 좋아해요. 연출도 굉장하고 그림도 엄청 잘 그

리는데 스토리가 좀…. 그래도 캐릭터는 확실히 귀엽죠.

만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작품은 초등학생 시절에 본 <디지몬>이 최

초 어요. 그러다가 정말로 만화를 그리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건 중

학생 때 본 『바람의 검심』 완전판이었어요. 연출이 정말 장난이 아

니었어요. 어렸을 적에 한 번 보기는 했는데 그때는 너무 잔인해 보

어요. 피 튀기는 장면이 너무 많아서 ‘아, 이런 잔인한 만화는 평생

안 보겠지’하고 있었는데 중학생 되고나서 완전판을 다시 보고 한눈

에 반해버렸어요.

승완 : 와츠키 노부히로和月伸宏 작가의 다른 작품들은요?

시훈 : 제가 와츠키 노부히로를 진짜 정말 존경하긴 하는데 『무장연금』이

랑 『엠버밍』은 내용이 좀 그렇더라구요. 일단 가지고는 있지만 (웃

음). 근데 이 작가님 연출이 정말 굉장해요. 제가 지금 쓰고 있는 연

출의 부분은 다 『바람의 검심』에서 배웠어요. 만화가로서 정말

로 존경하는 분이에요.

그 다음에 지금 웹툰 작가 분 중에서는 「별의 유언」의 후은님. 그

림이 너무 예뻐서 굉장히 좋아해요. 그리고 캐러맬님, 네온비님 콤비

의 작품들을 전부 좋아해요. 그림도 예쁘고 연출도 좋고 몰입력 있고.

『바람의 검심』의 그림체가 역시 제일 좋기는 하지만, 제일 많이

향을 받은 건 <테일즈 위버>의 일러스트 던 것 같아요.

승완 :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시훈 씨 소설도 받아서 읽어 본 적이 있어요.

꽤나 옛날 이야기지만.

시훈 : 제 글이요?

승완 : 네. 그 이후에도 혹시 글로 뭔가 남겨보신 적은 없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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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훈 : 고입 이후로는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요. 생각은 있었지만. 구망이

일단락되거든 한번 써보고 싶기도 해요. 그림을 못 그려서 글을 쓸까

한 적도 있었고…. 솔직히 그림 그리는 것보다 좋아요, 이야기 만드는

게 (웃음). 스토리텔링에 관한 책도 읽고 있기는 한데 그림 공부하면

서 읽으려니까 너무 힘들어요. 바쁘기도 하고.

승완 : 드디어 「구망」에 한 이야깁니다.

시훈 : 망했어. 망했어요. 「구망」이래. 구리고 망했어.

승완 : 네, 일단 그 제목의 의미를 물어봐야 할 것 같아요.

시훈 : 사실 제목을 못 정했었어요. 원래 제가 가지고 있던 이야기를 다 엮

어서 ‘무슨무슨 연 기’ 같은 느낌으로 생각해두고 이건 그 서막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목을 지어야 하니까…. 원고는 마감 한 달

전에 끝냈는데 제목을 못 지어서 마감 끝날 때까지 질질 끌었어요.

구망이 오랠 구久, 기다릴 망望. 오랫동안 기다린다는 뜻이에요. 스토

리랑 관련된 제목을 지었어요.

승완 : 그런 것 치곤 어감은 나쁘지 않아요. 기존에 시훈 씨가 써오던 세계

관과는 관련이 있는 건가요?

시훈 : 네. 짜 둔 스토리가 여러 개 있어요. 다 연결되어 있고. 지금 등장인물

들이 후속편에 나오고, 지금 한 행동이 후속편에 큰 의미가 있고. 그

런데 「구망」 짜는데 쓴 시간은 제일 짧아요.

승완 : 아무래도 첫 작품이다 보니까?

시훈 : 체험판? (웃음) 사실 연습작에 가까운 느낌도 있고, 일단 저질러보자

는 마음으로 지른 거라 제일 짧은 걸 골랐어요.

승완 : 저도 그 마음으로 질렀다가 험한 꼴 많이 봤죠. 「구망」은 이제 1화다

보니까 아직 많이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았었죠? 세계관도 심플했고.

시훈 : 완전 심플하죠. 신, 마족, 천사, 마물. 끝. 마물은 마족 하위 개념이라

이야기하진 않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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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완 :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 질문을 드리기가 좀…. 앞으로의 이야기라던

가? 그런데 그런 질문에 한 답은 앞으로 보세요, 가 되니까.

시훈 : 제가 제 만화 네타 할 수는 없잖아요 (웃음).

승완 : 그럼 세계관에 관한 질문. 마족은 서양 의복이었는데 신족은 한복이

었죠?

시훈 : 한복은 개인 취향이에요.

승완 : 개인 취향이라면 그 캐릭터의 취향? 시훈 씨 취향?

시훈 : ….

승완 : 시훈 씨 취향…. 세계관은 동서양이 섞여있는 건가요? 세계관에

한 기본적인 설명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은데.

시훈 : 사실 2화에 나와요.

승완 : 뒤 페이지로 가서 확인하라고 하십니다! 페이지를 넘기세요! 동양 서

양이 혼합된 이유는 결국 둘 다 그리고 싶으니까?

시훈 : 그러합니다.

승완 : 구망에 해 개인적인 질문을 좀 드려볼게요. 신이 남자에요 여자에요?

시훈 : 여자앤데? 속눈썹 그렸잖아요. 전 남캐한테 속눈썹은 잘 안 붙여요.

아, 이 신에 해서 풀고 싶은 비화가 있어요. 사실 구망 연재 끝나면

비하인드 스토리 같은 느낌으로 해볼까 했었는데 말 나온 김에 풀어

볼게요. 애가 처음엔 중성이었어요. 이 세계관에 있는 캐릭터가 아니

라 완전 초기 설정이 서양풍에 마술사 컨셉. 그러다가 한복에 관심이

생기고 취향이 변하고, …어, 이걸 그림으로 보여줄 수도 없고.

승완 : 보여주시면 됩니다.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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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완 : 그리고 1화가 끝났는데 캐릭터 이름이 아직 안 나왔죠.

시훈 : 이름이 있어요. 있는데 문제는 아마 자기소개를 안 할 거에요.

승완 : 저도 <야맹증>에서 그 타이밍 놓쳐서 자기소개가 없는데 서로 이름

을 부르고 있는 사이가 됐죠!

시훈 : 아니 그런데 「구망」에서는 아예 이름을 서로 부를 일이 없어요. 등장

인물이 거의 없어요. 몇 명 더 나오기는 하는데 그 몇 명 위주로 가니까.

승완 : 몽니 내외로 앞으로의 일에 해 서 한 마디?

시훈 : 삽화는 꾸준히 할 것 같고. 만화도…, 음. 「구망」은 원래 2, 30편으

로 기획했었는데 너무 긴 것 같아서 팍 줄여서 열몇 편으로 끝날 것

같아요. 올해 초에 시작했으니까 내년 그맘때 쯤에 끝내고 싶어요.

「구망」 끝나면 다른 스토리 짜기 전에 단편으로 몇 편 연습해보고

싶어요. 공부도 좀 하고 싶고. 그림도 스토리도. 그리고 왠지 이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저 같은 사람 거둬주신 몽니에게 감사합니다….

엉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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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성_Interview 송한별

송한별 : 안녕하세요 김의성님. 내부 필진을 조명하는 이번 특집에 해서는

이미 설명을 들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승낙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형편이 여의치 않아 이렇게 메일로 인터뷰를 하게 되는

점을 좋게 봐주시면 감사하곘습니다.

우선은 답하기 쉬운 질문부터 시작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인터

뷰의 시작으로는 이것만한 질문도 별로 없죠. 어떻게 텍스툰에 해

서 알게 되셨나요? 알게 되셨더라도 필진으로 합류하시기까지는 생각

이 많으셨을 텐데, 어떻게 필진으로 합류하게 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김의성 : 편집장의 칼럼 계획을 초기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게

칼럼을 부탁하셨는데 제가 미적 안목이 높거나 딱히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지도 않은, 그저 예술 감상이 취미인 사람인지라 좋은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다고 거절했었습니다. 하지만 편집장님의 저에

한 신뢰와 거듭된 부탁에 그 기 에 응하여 더 공부하면서 써보겠

다고 제안을 받아들 습니다. 아직까지도 제 <예술 나누기>가 정확

한 틀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향을 잡는 중이라 이런 미흡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께 죄송한 마음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별 : 미적 안목이 높거나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지 않다고 말씀하시

는 것에 비해서 칼럼 내용은 꽤 전문적인 내용으로 채워져있다고 생

각합니다. 전시회도 많이 다니시는 것 같고, 유물 하나하나에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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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것을 보니 박물관도 자주 다니시는 것

같아요. 어떤 경로를 통해 그런 지식을 얻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의성 : 정말 후한 평가이십니다. 정말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시회일정

은 언제나 눈여겨 보고 있다가 흥미가 있거나 가까운 곳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체크해두었다가 가는 편입니다. 하지만 박물관이나 미술

관, 그리고 도서관 같은 시설물들이 가지는 분위기를 매우 좋아하는

편이어서 굳이 전시회가 아니어도 가곤 합니다. 한 친구는 제게 지적

허 심이 넘친다고 하더군요. (웃음) 미학, 예술학, 역사, 문화사, 미

술사, 인류학, 민속학, 종교학 등등의 문화에 관련된 다양한 강의나

수업, 프로그램, 책, 뉴스, 정보 등을 자주 찾아보고 모으고 있습니

다. 굳이 따지자면 성인이 되고 나서 본격적으로 시작하 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 중 미술(혹은 예술)은 인간의 삶을 아름답게 해주는 둘

재가라면 서러울 일등공신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관심을 두었었습니다. 사실, 제가 미술을 바라보는 관점은 ‘얼마

나 아름다운가.’ 혹은 ‘미술-예술-은 무엇인가.’ 보다는 ‘왜 인간에게

미술이 필요한가.’ 입니다. 독자분들께 미술품을 소개하고 전시회를

추천하면서도 이런 의문은 아직도 진행중입니다.  

한별 : ‘왜 인간에게 미술이 필요한가’라는 말이 중요한 것 같아요. 저 질문

이 김의성 님이 쓰고 계신 칼럼 <예술 나누기>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왜 인간에게 미술이 필요한가’라는 질문과 ‘예술 나누

기’라는 행동 사이를 잇는 어떤 것이 있는 것 같은데, ‘예술 나누기’라

는 주제를 잡으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의성 : 물론, 제가 미술을 마주할 때와 글을 쓸 때에 가지는 문제제기의식은

‘왜 인간에게 미술이 필요한가’이지만, ‘예술 나누기’라는 것은 그 질

문 이전에 제가 생각하는 예술의 특성때문에 주제잡아진 것입니다.

예술은 작가 개인에게 있어서 극단적으로 말해 단순히 배설행위-자

신의 내부에서만 그칠 수 없는 강한 충동적인 무언가를 물질로서 실

재하게 만드는 행위이기에 이런 격한 표현을 써보았습니다.-일 수도

있겠지만은 우리가 소위 말하는 ‘명작’들은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져

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예술감상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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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겠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미술은 ‘이해’보다는 ‘느낌’이라는 더

본능적인 감각으로서 다가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글에 있는 작품에  한 다양한 정보는 작품과 감상자사이에 좀 더 긴

한 통로를 제공해주기 위해서이지 그러한 활자들 자체가 그 작품

의 정체성이라는 의도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한별 : 앞으로는 어떤 방식으로 예술을 ‘나누실’ 생각인지 궁금합니다.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앞으로 <예술 나누기> 코너

에서 어떤 형식의 글들을 볼 수 있을까요?

의성 : 사실, 제 글이 다른 예술칼럼들과 비교해서 그닥 다른 개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요즘 고민이 많습니다. 그런 고민때문에 이

번부터는 제가 작품을 보며 느꼈던 감상에 해서 더 집중하는 글을

시도해볼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개인적인 수필형식에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일단은 그러한 방향으로 글의 형식

을 잡고 매 글마다 작품이 주제이기보다는  작품을 통해 느낀 감성이

주제로 표현되도록 노력하려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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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_3] 텍스툰이 추천하는 콘텐츠

✑ 내리와 인성의 IT 이야기 한국이 IT 강국이라는 말에 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터넷 설비가

잘 되어있고, 또 빠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이폰이 국내 판매되면서 제

기되었던 한국 IT업계의 편협함이나 폐쇄성 또한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웹툰의 스토리 작가 김인성은 『한국 IT 산업의 멸망』이라는 책에서 이

미 이런 사실들을 지적한 바 있다. 웹툰 「내리와 인성의 IT 이야기」도 앞

선 저서와 맥을 같이 한다.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는 IT 이야기를 중에게

쉽게, 그리고 친 하게 다가가기 위해 웹툰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내용

은 어렵지 않으나 느끼는 바가 많다. 일독을 권한다.

이하는 김인성과의 서면 인터뷰 전문이다.

Q. 실제로 IT관련 업계에 장기간 몸을 담고 계시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관

련 직종에 종사하던 사람이 「한국 IT 산업의 멸망」이라는, 어떻게 보

자면 고발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알고 싶

습니다. 언제 '한국 IT 신화'의 허구성을 통렬하게 느끼셨는지, 그리고 어

떻게 책을 쓸 생각을 하시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A. IT 문제는 엔지니어들 사이에서는 상식인 것들만 제기한 겁니다. 다만 전

문가들이 이런 문제를  어렵게 이야기해서 들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저는 작가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최 한 이해하기 쉽게 쓰는 훈련

이 되어 있었던 덕택에 일반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책을 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주제를 잡은 것은 작가는 기본적으로 오래 가는 책을 쓰려고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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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최초에 출판사에서 "IT의 비 " 이런 책을 제

안했을 때 그런 것 보다는 한국 IT의 문제를 다루는 책을 내자고 거꾸로

제안 했습니다. 통찰을 제공하는 글이 오래 기억되는 법이니까요.

Q. 『한국 IT 산업의 멸망』과 웹툰 「IT 이야기」는 최 한 친절하고 간단

하게 현황을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국 IT 산업

의 멸망』 같은 경우에는 각주조차 최소화 되어있죠. 이런 것들은 모두

어렵게 생각하기 쉬운 IT 관련 이야기를 중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이른바 'IT 신화'에 한 글을 쓰겠다

고 생각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일반 중을 상으로 이해하기 쉽

게 글을 쓰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 깊은 생각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

합니다. 어떻게 일반 중에게 IT 산업에 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

하시게 되었나요?

A. 오픈소스 리눅스 분야도 그렇고 현업 엔지니어도 그렇고 사실 다 일반인

들과 수준은 비슷합니다. 자기 전공이 아니면 잘 모릅니다. 그리고 개

자기 전공도 제 로 이해를 하고 있지 않지요. 그래서 글쓰기는 언제나

쉬워야 합니다. 어려운 용어가 남발되는 글은 글쓴이도 그 분야를 잘 모

르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제 경우 초안은 언제나 어렵고 복잡합니

다. 글을 쓰면서 생각이 정리가 되고 레퍼런스를 찾아가며 잘못된 부분을

고치고 이해가 깊어지면 글이 쉬워지고 짧아집니다.

아무도 모르는 것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 쓰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이건 약간 강박증적인데 프로그래밍할 때 함수가 한 페

이지를 넘겨서는 안된다는 식의 제한을 스스로 세웠던 것 때문에 그런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직유나 은유와 같은 비유는 쓰지 않기, 속담을 인용하는 진부한 행위도

기피하기, 유명인의 발언을 근거로 하는 등의 권위에 기 는 짓은 절

하지 않는 등 나름의 강박증적인 원칙이 있습니다. 저는 (?) 이런 기호나

문장 속에 괄호를 치커나 “-”이런 부연 설명도 쓰지 않으려 합니다. 사진

밑의 캡션도 본문과 중복되지 않게 만듭니다.

이런 여러가지가 복합되어 일반 중도 읽기 쉬운 IT 서적이 된 것 같습니다.

Q. 「IT 이야기」, 특히 포털과 관련된 내용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신 것으

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네이버 측과의 갈등은 웹툰 내용에도 잘 드러나

있죠. 특히 이 부분 때문에 웹툰을 연재할 곳을 찾는데 어려움을 느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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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웹툰이 제작되게 된 이유이기도 하고요. 이때 어

떤 점이 가장 아쉬우셨는지, 만약 그때 딱 한 가지만 바꿀 수 있다면 어떤

것을 바꾸고 싶은지 여쭙고 싶습니다.

A. 첫번째 비판 기사는 그 로 나왔습니다. 네이버가 반박을 한 이후 제 기

사는 한줄 한 줄 문제제기를 당했습니다. 언론이 표현의 자유보다는 명예

훼손 고발에 해서 신경을 너무 씁니다. 네이버의 협조 요청에 해서도

매우 약한 모습을 보이구요.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언론뿐만 아니라 경제권력으로부터 자유로

운 언론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환경으로 바꾸고 싶네요.

Q. 『한국 IT 산업의 멸망』과 「IT 이야기」 등을 통해서 김인성님이 궁극

적으로 바라는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요? 현행 IT 산업의 문제점을 적절

하게 지적하고 계신 만큼, 생각하고 계신 이상적인 IT 생태계가 있으리

라고 생각합니다. 그 비전을 공유할 수 있을까요?

A. 저는 그냥 상식적인 세상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원본이 존중 받는 세

상, 공정한 검색이 우 받는 세상, 창의적인 벤처가 생존하기 좋은 환경,

한국에서 성공한 서비스가 그 로 세계에서 통용될 수 있는 표준적인 환

경 이런 것들이지요. 

재벌, 통신사, 포털 위주의 정책은 결국 공멸하는 길일 뿐입니다. 우리가

바꾸지 못한다면 강제로 바뀌게 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모든 경쟁력을

잃게 되겠지요. 

Q. <텀블벅>에서 진행하는 두 번째 소셜 펀딩이 이미 성공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앞으로의 일정은 어떻게 되는지, 「IT 이야

기 」시즌2는 어떻게 제작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같이 작업하실 작가분

은 구하셨는지, 혹은 연재할 곳은 찾으셨는지가 지금 많은 분들의 관심사

가 아닐까요?

A. 세상에는 아직도 천사가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분들 덕택에 세

상이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시즌2는 통신사에 한 비판을 할 예정입니다. 이에 작년부터 관한 많은

글을 쓰고 있는데 만화화될 수 있도록 콘티 작성 중입니다. 

많은 만화가분들이 지원을 해 주셨는데요. 아직 어떤 분이 할지 정하거나

그런 것은 없습니다. 5월 중에 구체적인 일정을 정하고 늦어도 6월부터

는 연재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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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료 연재 지면은 구하지 못했는데 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딴지일보

에도 연재할 예정인데 여기는 원고료를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딴지일보

고생한다고 제가 출판사 협박해서 책 광고하게 만들었습니다. 무료 연재

에 광고 수주까지… 웹툰 연재란게 이렇게 열악합니다.^^

Q. 「IT 이야기」 말고 다른 활동, 이를테면 새로 책을 쓰실 예정이 있으신

지 궁금합니다. 웹툰으로 풀어내기 용이한 내용이 있는가 하면 글로 풀어

내기 용이한 내용도 있으니까요.

A. 여러 지면에 글을 쓰고 있고 이것을 모으고 재 편집해서 후속작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곧 만나 보시게 될 겁니다.

 인터뷰한 지 시간이 오래 되어 추가 설명을 덧붙인다. 「IT 이야기」 후

속작에 참가할 만화 작가가 선정되었으며, 저자인 김인성은 5월 29일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관련 소식은 김인성의 블로그인

http://minix.tistory.com/에서 접할 수 있다. 웹툰 「IT 이야기」도 전편

감상 가능하다.

✑ 니플헤임

네이버 베스트 웹툰 코너에서 가스파르가 연재 중인 작품. 2010년 7월

15일부터 2012년 4월 3일까지, 공지를 제외한 총 29화가 연재되어 있다. 월

간 연재에 가까운 속도지만 그만큼 안정적인 질을 유지하고 있다. 29화는

작가 사정으로 흑백 연재되어 있다.

지상과 지하가 갈려 서로 반목하고 있는 세상, 지상의 지배자는 지하의

황녀에게 하나의 게임을 제안한다. 지상 측에서 마련한 탑에는 여섯 명으로

구성 된 지상 최강의 전사 열 팀이 포진하고 있다. 만약 지하 측에서 파견한

여섯 명 규모의 팀이 이 탑을 정복한다면 지상과 지하를 완전히 단절하게

해주겠다는 것이 요지. 지하의 황녀는 이 조건을 받아들이고, 암흑술사 듀

크는 팀을 모아 지상으로 진격할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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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술사 듀크, 은술사 베릴, 마검사 란세트 등 다양한 인물들이 만나 동

료를 모으는 내용이 진행되고 있다. 흔히 마족, 몬스터 등으로 부르는 종족

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이 독특하다.

독특한 색감과 안정감 있는 그림체, 향후 전개가 궁금해지는 이야기가

장점이나 5월 현재 새로운 연재는 올라오고 있지 않다. 더 늦기 전에 다음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웹툰 전체는 이쪽에서 볼 수 있다.

✑ 리버스

원작 임달 , 작화 이수현의 웹툰으로, 개작 후 현재 네이버 웹툰에서 연

재하고 있다. <코믹GT>와 일본 만화잡지 <코믹 얼라이브>를 통해 한일 동

시 연재 중이다. 일반적인 웹툰보다 전문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지는데, 그

성격이 잡지 만화와 더 비슷하다.

2011년 8월 8일부터 2012년 5월 30일까지(5월 30일 집계) 통 67화까지

연재되었다. 하나의 글에 두 개의 화가 같이 들어가 있는 경우도 있으므로

실제 업로드 된 글의 숫자는 적다.

동기가 밝혀지지 않은 의문의 자살이 이어지고 있는 서울, 사실 그 이면

에는 이능력자들이 얽혀 있다. ‘마도기’를 접한 사람은 빠른 시일 안에 죽고,

단 한 번 다른 육체를 가지고 재생한다. 이것을 ‘리버스’라 한다. 되살아난

사람을 ‘테이커’라 하는데, 테이커는 한정된 수명을 늘리기 위해서 다른 테

이커를 살해하고 수명을 연장하거나, 테이커만이 인식할 수 있는 천사를 사

냥해야만 한다. 우연히 마도기를 접하게 된 고등학생 우 민은 테이커가 되

고, 누나 우 민은 그런 동생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이 게임이 참여한다.

안타깝지만 19세 미만은 이용이 불가능하므로 미성년자 여러분은 다른

경로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자.

소위 말하는 ‘임달 사단’인 아트림미디어가 제작해서 특유의 분위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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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로 묻어나기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이곳에서 전화 찾아볼 수 있다.

✑ 유토피아Utopia

Dae3.com 시절부터 꾸준히 만화를 그려오던 정 삼이 늑 삼으로 이름

을 바꾸고 돌아왔다. 이번에는 친구 황삼준과 함께 팀을 이뤄 처음부터 같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연재처인 네이버 시스템 상 공동 작가이름은

쓸 수 없기 때문에 빠져있는데, 황삼준이라는 이름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

다. 본 작품이 두 사람의 공동 작품이기 때문이다.

2010년 8월 9일부터 2012년 3월 21일까지, 총 84화의 이야기가 연재되

어 현재 완결되었다. 이곳에서 전편 감상이 가능하다.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거부하기 위해 말을 못 하는 척 하는 고등학생 소

녀 황삼과 교통사고 때문에 다리를 잃고 뇌에 손상까지 입은 황삼의 반 친

구 늑 삼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두 사람은 모두 쉽게 말 할 수 없는 상

처를 안고 있으며, 많은 것을 포기하려 하지만 서로에게 마음을 위안 받으

며 세상을 살아간다. 살아가고자 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처지에 있는 가

장 힘든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고 희망을 가지고자 하는 이야기는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늑 삼이 아픈 사람, 혹은 장애에 한 이야기를 그리는 것은 의미심장

하다. 그만큼 많은 아픔과 고통을 느낀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끝까지 놓고자 하지 않았던 만화에서 많은 상처를 입기

까지 했다. 그런 그가 아픈 과거와 장애를 가진 주인공을 내세워 돌아왔고,

아파하고 고뇌하고 포기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 만큼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는 충분히 묵직하고 생각해볼만한 것들이다. 매 화 작가의 말

을 음미하는 것도 작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두 작가는 독자와의 소통에 지 한 관심을 기울인다. 네이버 웹툰에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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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하면서도 다음 카페를 유지하는 중요한 이유가 아닐까 한다. 두 사람의

작업 공간이자 카페인 <늑 삼&황상준 작가와 독자가 함께 만드는 만화세

상>에서 작가들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도 하다. 더불어 두 작가의

다른 만화도 볼 수 있으니 충분히 들러볼만 하다. 주소는 이쪽이다.

✑ Coffee & the Newspaper

<Coffee & the Newspaper>는 사진이 올라오는 블로그이다. 패션과 음

식 사진이 같이 올라오는데, 두 사진의 닮은 듯 닮지 않은 듯한 연관성을 찾

아보는 것은 상당히 재미있다. 상상치 못한 방법으로 허를 찌르기 때문에

감탄사를 내지르는 경우도 제법 있었다.

두 사진은 색감과 질감, 형태, 구조나 의미 등 다양한 방면에서 유사성을

갖는다. 그냥 넘기자면 넘길 수 있지만 음미할 수록 더 많은 맛을 느낄 수 있

으므로 차분히 들여다보는 것을 추천한다.

홈페이지 소개에 의하자면, 이 블로그는 옷을 입는 것과 배를 채우는 것

에 중점을 두고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자료들을 다루는 시각적 안내서의

역할을 한다고 한다. 사진들을 직접 찍은 것은 아니니 불평하지 말란 말도

참고하자. 설명과 함께 올라온 사진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사람이 운 자가

아닐까 한다.

주소는 http://coffeeandthenewspaper.tumblr.com으로, 지난 사진도

모두 찾아볼 수 있으므로 관심 있는 사람은 쭉 넘겨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이다. 주로 사용하는 소재도 알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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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el Gallagher’s High Flying Bird

노엘 갤러거다. 국 밴드 <오아시스>의 주요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이

고, 마찬가지로 <오아시스>에서 활동하던 동생 리암 갤러거를 두고 “쓰레

기 같은 놈”이라고 지칭할 정도로 독설이 심하기도 한 바로 그 노엘 갤러거

다. 노엘 갤러거가 자기 밴드를 꾸려서 동명의 앨범으로 돌아왔다.

2011년 10월에 발매된 이 앨범은 다시 한 번 노엘 갤러거의 팬들을 열광

시켰다. 그 인기에 힘입어 2012년 5월 28~29일에 내한 공연을 가지기도 했

는데, 덧붙이자면 지금 이 기사를 쓰고 있는 시점이 29일이다. 이 앨범을 추

천한 필진이 공연장에서 뛰고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지금 공연장에는 90분 동안 뛰고 있는 팬들이 노엘 갤러거를 환장하게 만들

고 있으리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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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단편소설

작전동 김여사의 우울_전혜진

“아이고, 저 나쁜놈의 자식을 그냥….”

아침 여덟 시 반.

벽을 가득 채울 듯 커다란 텔레비전에서, 아침드라마계의 장동건이라 불

리는 왕년의 미남배우가 사랑하는 여자를 배신하고 돌아서는 모습을 보며,

김여사는 혀를 끌끌 찼다. 쉰 여섯 평 짜리 널찍한 아파트에, 남자의 목소리

가 쩌렁쩌렁 울렸다. 반쯤 하다 만 설거지를 내버려 둔 채, 김여사는 넋을 잃

고 TV 앞에 앉아 있었다.

도우미 아줌마는 열 시에 온다고 했다. 부지런한 아낙이니 아홉 시 사십

분 무렵에 도착할 거다. 그 전에 씻고 준비하고 할 것은 해 둬야 했지만, 이

시각에는 웬만해선 TV 앞을 뜰 수가 없었다. 좀 먹물 좀 들었다 하는 젊은 아

이들은 저네들 취향에 맞지 않는 신파같은 것을 두고 싸잡아 아침드라마 같

다고 비웃는 모양이었지만, 그야말로 뭘 모르는 이야기지. 드라마가 끝나자

바로 다음 드라마를 찾아 채널을 돌리며 김여사는 생각했다. 젊어서는 촌스

럽네 어쩌네 하던 트로트만 봐도, 나이 들어 생각해 보면 다 인생의 쓴맛 단

삽화©희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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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을 다 우려낸 진국이지 않았느냔 말이다. 아침드라마라고 다를 것 없지. 사

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긴데. 밤 열 시에 하는, 젊은 애들 나와서 하하호호거

리는 드라마는 우아하고 고상하고, 아침에 애들 학교 보내고 남편 직장 보내

고 겨우 좀 한가해진 아줌마가 잠깐 TV 앞에 퍼져 있는 것이 오죽이나 아니

꼬우면 그런 소리들을 해 겠어. 김여사는 늘 이시각에 나오는 빨간펜 문제

집과 룰루 비데의 광고를 흘려들으며 생각했다. 잠시 시간 비는 동안 얼른 전

기포트 스위치를 눌러놓고 커피를 탔다. 프림이랑 설탕도 듬뿍 넣어서. 남들

이 보면 팔자좋은 유한 부인입네 손가락질 할 지도 모르지만, 지금밖에는 없

었다. 병원에 입원한 준상이 걱정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것도.

그렇지. 준상이가 문제 다.

준상이. 그 드라마 겨울연가의 준상이 말고 김여사의 무녀독남 외아들

말이다.

준수하고 반반하게 자라라고 이름붙인 하나밖에 둘도 없는 금쪽같이 귀

한 아들네미는, 일본까지 가서 한류스타가 되어 돌아온 그 배용준의 출세작

주인공과 같은 제 이름을 퍽이나 싫어하긴 했다. 그렇긴 해도, 그렇다고 삼

십 년 넘게 달고 다닌 제 이름을 바꿀 것이야. 드라마 같은 것은 무시하면서

고상한 척 하는 것은, 아들네미라고 다를 것 없었다.

그래도 고상한 것은 사실이지.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준상이는 치

과의사 다. 덴티스트. 그러니까 의사 선생님. 젊어서 청상이 된 김여사는

아들 하나 잘 될 것만 믿고 눈물나게 열심히 일해서 준상이를 키웠다. 뭐, 시

에서 원래 좀 물려 준 게 있어서 가게도 하나 하고 일수놀이도 했으니 남

들 생각하는 험한 일까지는 아니었는지 몰라도, 여자 혼자 몸으로 아들을

키워서 의사 선생까지 만드는 것은 여간한 공이 아니지, 암. 그러니, 에미는

이렇게 드라마나 보며 좋아하는 촌노인네가 다 되었어도, 아들이 오페라니

무슨 피아노 바이올린이니 어려운 것 보고 듣고 우아를 떨면서, 그야말로

번듯하고 집안 좋은 여자랑 결혼해서 본때나게 사는 것을 보면 좋겠다 싶었

다. 아무렴, 명색이 의사 선생님인데. 그저 아무렇게나 자란 여자하고나 덥

석 결혼해서 쓰나. 그러니까 6년인가 전에, 그 농협 아가씨인지 하는 여자애

에게 우리 아들 곁에 얼씬거리지 말라고 호통을 쳐서 내쫓았던 것도, 다 준

상이의 장래를 걱정해서 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손발이 닳도록 곱게곱게 키워놓은 아들놈이, 여자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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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앵돌아져서는 에미와 말도 안 섞으려 들 줄 누가 알았겠느냔 말이

다. 지 애비를 안 닮아 그나마 속깊고 착한 것이, 입 꾹 다물고 버팅기는 것

도 한 달쯤 지나자 누그러들긴 했지만. 준상이는 그후로 지금까지도 여자도

안 사귀고, 소개팅이니 선자리니 들어와도 그냥 나가서 상 얼굴만 보고

들어오고 말았다. 그녀석 말마따나, 혼자 가기 뻘쭘하게 좋은 식당에서 밥

이나 한끼 먹고 오자, 뭐 그런 심사 던게다. 요사스러운 것. 그 생각을 하면

복장이 뒤틀리고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다. 체 어떻게 하면, 그런 멀쩡한

얼굴을 하고 똑똑한 내 아들을 그리 홀려 놓았는지. 그런데다가, 아무리 해

도 안 떨어지길래. 벌벌 떨리는 손으로 백만원 권 수표 열 장을 세어넣어 봉

투를 척하니 내 었더니, 요년좀 보게? 봉투를 열어 금액을 세어보더니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돌려주는 거다. 겨우 돈천만원에 사람 오라가라 했느냐

고. 그러니까, 그렇게 남의 돈 무서운 줄 모르는 그런 계집아이가 며느리라

고 들어와 앉았으면 어쩔 뻔 했느냔 말이다.

그건 그렇고.

그 독한 년이, 아주 이 집안 핏줄을 끊어놓은 것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김 여사는 좋아하는 아침 드라마를 보며, 슬프지도 않은 장면에서 괜히 훌

쩍거렸다. 이십 년 조강지처가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년에게 려

이혼당하는 장면을 보며 숫제 성 통곡을 했다. 아, 그래. 체 나와 무슨

웬수를 졌길래 남의 귀한 손을 끊어, 손을 끊기는.

그러니까 그게 지난 달의 일이었다.

그 요망한 것과 헤어지고 6년동안을, 여자 한 번 안 사귀고 일이나 하고

밤에는 술을 마시거나 컴퓨터 게임이나 하며 지내던 준상이가, 갑자기 몸이

안 좋다고 병원에 입원한 것이. 한의원에 데리고 가 볼까, 몸에 좋다는 것을

고아 먹여볼까 하다가도, 그래도 지가 의사인데 자기 몸이야 자기가 잘 하

겠지 하는 생각에, 필요한 물건들 챙기는 김에 그저 저 좋아하는 음식이나

바리바리 싸들고 병원에 들어섰는데 어째 준상 아부지 세상 떠나던 날 처럼

싸아하니 오싹한 것이었다. 김여사는, 혹여 금쪽같은 준상이에게 무슨 일이

라도 있을까 싶어 신발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병실로 달려 올라갔다.

“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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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반쯤 벗겨진, 어쩐지 돌팔이같은 느낌이 드는 의사가 그렇게 말

했을 때, 김여사는 거짓부렁하지 말라고 덤벼들기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준상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만 끄덕 다.

“암이라니요. 아이고, 선생님.”

평생 아들 하나만 보고 살아온 김여사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 했다. 요새

야 뭐 그렇게 큰 병도 아니라고 그러고, 아는 사람들 중에도 자궁암이니 뭐

니 해서 들어낸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그래도 금쪽같은 내새끼가 암이라

니. 혹시 잘못되는 것은 아닌가 싶어, 김여사는 애원하듯 의사 선생만 올려

다 보았다.

“아니, 저… 죽을 병은 아닙니다. 수술도 깨끗할 것이고요.”

의사 선생은, 그저 쩔쩔 매기만 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준상이, 제 에미

가슴에 못 박는 줄도 모르고 그런 말을 하는 준상이 그 놈이었다.

“이제 속 시원하시겠어요.”

“무슨 소리냐.”

6년 전에 그때, 제가 수 이 아니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어

머니 뭐라고 하셨어요. 수 이랑 결혼하느니 마누라 자식 없이 혼자 살라고

하셨죠? 말씀 로 되었어요.”

김 여사는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만 끔뻑 다. 의사가, 한숨을 쉬었다.

“강준상 선생이… 암 자체는 어디 전이되지도 않고 깨끗하긴 한데….”

“한데요?”

“좋지 못한 곳에 암이….”

“뭘 그렇게 빙빙 돌려 말하십니까.”

준상은 돌아누운 채, 남 일 말하듯이 꾸했다.

“자식 보기는 글렀어요.”

“뭐, 뭐야?”

“고환암이라고요.”

“고, 고환암?”

“그래요, 결혼 같은 건 내 분에도 안 맞는 일이니 꿈도 안 꿀 거고, 자식

도 못 볼 겁니다. 잘 되었네요. 어머니 뜻 로 다 된 거잖아요. 그때 어머니

가 말리지만 않았어도. 수 이한테 그러지만 않았어도.”

준상은 시트를 턱까지 끌어올린 채,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고환암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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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김 여사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니까 그 사내들 씨주머니를

싹둑 잘라내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배운 것 없어도 그게 무슨 뜻인지는 바

로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금쪽같은 내 아들이, 무슨 내시들처

럼 씨주머니를 잘라내고 자식도 못 보고 살 것이라는 말이었다.

암에 걸린 것은 두 쪽 중 한 쪽 뿐이었지만, 전이가 되었을 수도 있고 방

사선 치료를 계속 받아야 하기 때문에 결혼을 하더라도 자식을 낳기는 어렵

다고 했다. 남의 일이니 저리 쉽게 말하는가 싶어서, 의사를 보는데도 천불

이 났다. 아이구, 내 새끼. 그런데다 자식은 둘째 치고, 사내 구실도 못 하는

남자를 어느 여자가 좋다고 넙죽 시집이나 오겠느냔 말이다. 이래서야, 그

농협 다니던 계집아이라도 어떻게 붙잡아 결혼시킬 것을. 그게 어디 한두

달 전의 일만 되었어도 어떻게든 다시 불러다 결혼이라도 시키자고, 자식새

끼 이 로 늙어 죽어 몽달귀신 되는 것이라도 막아 보자고 그랬겠건만. 벌

써 6년이나 지났으니 어디 가서 시집 가서 애 낳고 살고 있을 게 아니냔 말

이다. 남의 자식 이렇게 되도록 한번 들여다 보지도 않은 것이, 저만 혼자 행

복하게 잘 살겠다 그럴 것을 생각하니 가만히 있는데도 속이 뒤틀어졌다.

“여봐요, 기주. 준상이네. 그러면 못써. 마음자리를 곱게 써야지.”

“내가 지금 마음자리 곱게 쓰고 자시구가 어디 있수. 내가, 우리 준상이

를 어떻게 키웠는데.”

눈물 뚝뚝 찍어내며 당골 박보살네를 붙잡고 하소연을 해도, 이런 문제

에 답을 낼 사람은 박보살이 아니라 의사 선생이다.

“따지고 보면 그 처자, 내가 그랬잖어. 기주네 상남이랑 연분인데 기주가

막는 거라고. 내가 그랬어, 안 그랬어?”

“암만 그래도 그때는….”

말끝을 흐리다 말고 김여사는 고개를 든다.

“그럼, 저기 걔량 우리 준상이랑 천생연분이면, 지금이라도 어떻게 다

시….”

“남의 집 딸네미 인생 망칠 일 있어.”

“….”

“내 기주랑 잘 아니 하는 말이지만,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시기도 없는

사내가 장가는 무슨 장가. 요즘은 혼자서도 잘들 사는 세상이니까 그냥 살

어야지, 뭘 어쩌겠어.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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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그리고 그게 몇 년 전이야? 그만한 처자면 벌써 딴놈이랑 눈 맞아 결혼

했겠네. 버스 떠났어, 무슨 그런 되도않을 꿈을.”

“그, 그래도 혹시….”

“그래, 아직 그 처자가 결혼 안 하고 기주네 상남만 바라보고 있었다고

해도, 멀쩡한 남의 집 딸 생과부를 만들 셈이야? 저들이 결혼을 하겠다고 나

서도 말려야 할 사람이, 이렇게 철없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아이고, 내 새끼….”

“사람 연분이라는 것도 다 그려, 때를 놓치면 못 하는 거지. 뭘 이제와서

어떻게 찾아서 어쩌겠다고.”

“그때는… 나도 욕심도 있었고…. 우리 준상이가 의산데, 의사 선생님인

데, 어디 농협 다니는 애를 며느리로 삼나 싶어서.”

“그건 기주가 모르고 한 소리고, 요즘 농협 다니는 여자면…. 아니고, 됐고.

지나간 일 이야기 해봤자 소용도 없고. 그래, 그래서 그 처자 원만해서 뭘 어

쩔건데. 기주가 헤어지라고 했으면, 그건 그 처자 잘못이 아니지. 안 그래?”

“….”

“기주가 마음자리 곱게 안 쓰면, 상남 몸에 칼 댈 일이 또 생겨. 왜 그걸

모를까.”

“또 칼을 댄다고요?”

“그렇 두.”

“아니, 그럼 올해 신수 잽힐 때는 왜 그 말을 안 했소?”

“아, 내가 그때 그랬잖아. 그 처자 놓치면 연분이 따로 안 들어올거라고. 내

가 그때 자식 이기는 부모 없으니까 한 번만 물러 주라고 그랬어, 안 그랬어?”

저희들 좋다는 것 억지로 떼어 놓았으니, 그 수 인지 하는 그 아이 원망

할 필요 없다는 말은 알아 듣겠지만,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자식이 장

가도 못 가보고 씨주머니를 잘라버리게 생겼으니, 어미 된 마음이 아주 찢

어질라 한다. 김여사는 숫제 아이고 아이고 통곡을 하며 박보살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박보살이 목에 걸고 있던, 싸구려 장난감같은 시뻘건 플

라스틱 염주가 흔들렸다. 굵직굵직한 알이 걸리적거리는 서슬에 숨이 막혔

는지, 박보살은 김여사를 억지로 떼어놓고 염주를 벗어놓았다.

“아, 좀 놓아 봐…. 어디, 이렇게 된 거 신령 할아버지께 한번 물어나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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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뭘 물어봐요.”

“아니, 그래도 말이야. 뭐 그냥 그러고 만다 그건 아닐거 아냐. 수술은 깨

끗하게 잘 될지 그거라도 물어봐야지.”

칠성방울을 챙 하고 털어 손에 쥐었다. 방울을 쥔 박보살의 손도 덜덜 떨

렸다. 짤랑짤랑 흔들릴 때 마다 박보살은 신령 할아버지에 관세음보살을 번

갈아 불러 었다. 족히 광고 두세 편은 지나갈 만큼 시간이 흘러갔다. 박보

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 참 이상하네.”

“뭐가 이상하다는 거요.”

“아니, 기주네 말이야.”

“우리 집이 또 뭐.”

“식구가 하나 늘 것 같아.”

“식구?”

“그게 뭔지를 모르겠단 말야, 식구…. 여봐요, 기주. 혹시 기주네 상남,

준상이 말이야. 어디 숨겨놓은 이거 없을라나?”

박보살은 새끼손가락을 들어보 다. 김여사는 손사래를 쳤다.

“숨겨놓긴 뭘.”

“아니, 요즘은 결혼 안 하고도.”

“하이고, 그럴 주변이나 되었으면 내가 걱정을 않지.”

속 시원한 답은 하나도 듣지 못한 채, 김여사는 집으로 돌아갔다. 점사가

맹탕인 것이, 박보살도 늙기는 늙은 모양이다. 젊었을 때는 공수 주는 것

하나하나가 그렇게 신통방통하 는데. 어디서 좋다고 덤벼드는 때 꼬질꼬질

한 동네 똥강아지새끼 배때기를 툭 걷어차며 김여사는 자꾸 구시렁거렸다.

그리고 그렇게 수발을 든 것이 벌써 한 달째.

제 병원은 월급 의사를 앉혀 놓고, 준상은 여전히 병원 신세를 지고 있었

다. 그래도 결혼 안 하고 자식도 없으니 돈이 최고라고 보험에 저축에 이것

저것 잘 챙겨둔 것이 쓸모가 많았다. 자식 일이니 아까운 줄 모른다고 해도,

병원비는 징하게도 비싸긴 비쌌다. 준상은 여전히 꼭 필요한 말 외에는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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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다물고 있었지만, 그래도 처음보다는 마음 정리가 된 모양이었다. 계절

이 바뀐 탓에, 속옷부터 시작해서 필요한 것이 많았다. 도우미 아줌마에게

집안일을 맡겨놓고 병원에 들렀던 김여사는 여섯 시가 좀 넘어 집에 돌아오

는 길에 집근처 이마트에 들렀다. 아무리 그래도 보통 환자가 아니라 의사

선생님인데, 남보기 번듯하게 속옷부터 새것으로 깨끗하게 입고 있어야지

싶었다. 이마트를 빙빙 돌며 속옷이며 잠옷 같은 것을 샀다. 속옷 포장지에

인쇄된 건장한 남자의 모습에 공연히 눈물이 찔끔 솟았다. 어쩌자고 그런

흉한 병에 걸려서 이렇게 에미 속을 다 썩이는지. 암이라고 해도 죽지는 않

는다 했고, 수술도 성공적이었으니 곧 예전처럼 활동할 수 있으리라는 말도

들었지만, 이건 어째 죽는 게 사느니 만 못한 것 같다. 자식새끼 하나 없이

혼자 늙어갈 아들놈을 생각하면, 정말로 6년 전 그 때에 그 아이와 결혼을

시켰어야 하는 건가 싶은 후회마저 들었다. 그때 다.

김여사는 처음에는 눈을 그저 끔뻑거리기만 했다. 하필이면 지금 바로

이 순간에, 6년 전 그때 일을 처음으로 후회한 이 순간에, 그렇게 모질게 내

쳐 쫓아 보낸 그 아이가 눈 앞에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서른

살 남짓 한 젊은 여자가 장바구니를 들고 토마토를 고르다 이쪽을 바라보았

을 때, 그 얼굴에 비친 당혹은 김여사에게는 확신에 가까운 것이었다.

“아니, 너….”

“…안녕하셨어요.”

그렇게 내쳐 보냈는데도 공손히 인사부터 하는 것을 보니, 그때 보았던

것 만큼 싸가지가 막되어먹은 아이는 아니었던 모양이지. 하긴, 농협 다니

는 여자아이면 결혼하고서도 일할 수도 있고, 며느릿감으로 눈에 차는 것까

지는 아니라도 딱히 빠질 것도 아니었다. 굳이 흠을 잡자면 편모슬하에서

어렵게 자랐다는 것 밖에 없었지. 무릎까지 내려오는 치마에 부드러운 크림

색 니트 콤비를 입은 것이, 그때도 입성이야 나쁘진 않았지만 지금 보아도

곱긴 고왔다.

시집은 갔을까. 아직 서른 좀 넘었을 것이니, 결혼이야 아직 안 했을 수

도 있다. 그런데다 우리 준상이가, 이 아이를 아직 못 잊어서 결혼은 커녕 여

자 하나 못 만나고 여섯 해를 허송세월했는데, 이 애라고 어디서 우리 준상

이보다 나은 놈을 물어서 결혼인들 했으랴 싶기도 했다. 누가 들으면 주책

이라 할까. 그래도 세상에 이 아이가 아무리 남자 홀리는 솜씨가 좋아도,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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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가서 준상이보다 더 나은 놈을 만났을 성 싶지는 않았다.

“그래…. 아니, 여긴 웬일로.”

“저, 이 근처 살아요.”

“그랬어?”

“…올 초에 이사했어요. 이 동네로.”

예전에 사귈 때 부터 준상이야 이 동네 살았으니, 필시 아직 못 잊어서 그

랬으렸다. 딱한 것. 김 여사는 괜히 콧날이 시큰거렸다. 그래, 내 아들 잘 낳

아놓은 죄로 멀쩡한 계집아이 눈에 눈물을 다 뺐구나. 돈 천 만원 앞에 두고

했던 짓거리야 지금 생각해도 요사하기 이를데 없었지만, 그래도 육 년 넘도

록 아직 우리 준상이를 잊지 않았다니, 등이라도 한 번 쓸어주고 싶었다.

“그래, 언제 한번 놀러 와라. 일은? 아직 농협 다니고?”

“…예.”

“수 아.”

한참을 뜸들이다, 이름을 불러 보았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이, 모르긴

몰라도 그동안에 마음에 서러운 것도 퍽이나 많았으렸다. 그래, 그래도 에

미 마음이라는 게 다 그렇지. 다 내 자식 잘 되라고 한 일이었는데, 이렇게

되어서야 잘못 한 줄 알았으니 이게 얼마나 무섭고도 어리석은 마음이냐.

그래도 김여사는, 희망이 있겠다 싶었다. 중요한 부위를 아예 도려내어버린

아들을 생각하면 억장이 다 무너질 노릇이었지만, 그렇다고 멀쩡한 아들을

총각으로 혼자 늙어 죽게 할 수도 없는 일 아니냔 말이다. 자식이야 못 둔다

고 해도, 어찌 혼사라도 치러야 사람 구실을 할 것을. 그럴 요량도 조금은 얹

어서, 6년만에 다시 만난 아들의 옛 여자친구를 가만히 뜯어보는데.

“엄마!”

웬, 노랑 병아리같은 유치원 가방을 멘 사내아이가 달려와서 덥석 매달린다.

“이 할머니 누구야?”

“아….”

수 은 당황하는 빛을 채 감추지도 못하 다. 그러다가 아이의 머리를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가 예전에 신세를 많이 졌던 분이야. 인사드려.”

“안녕하세요, 할머니.”

배꼽에 손을 고 꾸벅 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 어린 것이 똘망똘망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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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하다. 아이가 고개를 드는데, 김여사는 그만 길바닥에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아니, 심봤다 하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이럴 수가 있누.

여섯 해 만에 만난 수 의, 여섯살이나 되었을 까 싶은 아들아이가, 아

무리 봐도 우리 준상이 어렸을 때를 쏙 빼놓은 것이. 애가 똘똘해 보이는 게,

우리 준상이와 손 잡고 나가면 누가 봐도 부자지간인 줄 알 것만 같다.

“저기, 얘야….”

부르려고 했지만,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수 은 시계를 보고는,

아이 학원 데려갈 시간이라고 말하고 공손히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돌아서

서 멀어져가는 수 모자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김 여사는 가슴을 쳤다. 이

름이라도 물어볼 것을. 생일이 언제냐고라도 물어볼 것을.

저가 아무리 잘난 척을 해도, 아아란 여자 혼자 만드는 게 아닐 것은 분

명하고.

언제 시집을 가서 애를 낳았을까 생각을 해도, 저만한 애가 있으려면. 그

렇지, 다섯 살. 다섯 살만 되어도, 그리 돈을 주어 쫓아버리려 했을 때 이미

태중에 있었다는 말이다. 김 여사는 가슴이 먹먹했다. 아니, 그러면 그렇다

고 말을 해야지 저 답답한 아이는 어쩌자고 말을 안했을꼬. 모르긴 몰라도,

그렇게 이 집안 핏줄을 훔쳐들고 나가는 게 저 나름 로는 복수라면 복수라

고 생각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슨, 우리 준상이에 한 추

억으로라도 여겼거나. 그렇지 않고서야, 그리 내침을 당하고도 어찌 여자

혼자 몸으로 아이를 낳아서 키웠을까. 억지로 아들과 떼어놓았는데, 바로

전화번호를 달라고 하기도 머쓱하고. 그래도 아이는 참 예쁘기도 하다. 제

어미 손 붙잡고 아장아장 걸어가는 것이 어쩌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리 준

상이 같을꼬. 안타깝고 애틋한 것이, 품에 안고 둥기둥기 그동안 서러운 일

다 잊고 이제 우리 같이 행복하게 살자꾸나 하고 싶었다.

이 근처에 산다고 했으니, 필시 또 올 터.

다음 번에는 전화번호라도 꼭 받아두어야 할 일이다. 김 여사는 장바구

니를 들고, 공연히 신이 나서 궁둥이를 씰룩이며 마트를 누비고 다녔다. 당

치않은 콧노래까지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렸다. 준상이가 암에 걸렸다는 소

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는데, 손주 볼 희망일랑 접어야 할

줄 알았는데. 세상에, 천지신명도 무심치 않으시지. 이런 좋은 일이 있을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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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이게 다, 그 감 앞세우고 평생 고생하며 살면서도 그저 아들 잘 되라

고 여기저기 적덕하는 것만은 잊지 않았는데, 하늘이 굽어보신 덕이다.

“그러고 보니 박보살이 늙었어도 여전하고! 검도 하지!”

김여사는 요 며칠 사이 얼굴이 피었다. 집안 끊긴 것은 둘째치고 손주

아이 한 번 못 안아 볼 줄 알았는데, 아니, 잘나디 잘난 우리 아들 그냥 혼자

쓸쓸히 늙어야 하는 줄 알고 그게 그리 서러웠는데, 아니, 세상에 이런 천복

이 다 있을꼬. 김여사는 그 좋아하는 테레비도 끊었다. 아들 보러 병원 가는

것 외에는 남는 게 시간이라고, 곱게 꽃단장을 하고 이마트에 나가보았다.

며칠을 그러자 준상이가 직접 고용한 간병인 아줌마가 저 노인네는 아들이

아픈데 저러고 다닌다고 뒤에서 구시렁거렸지만, 김여사의 귀에는 그런 소

리 따위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손주가 생긴다는데.

없는 줄 알았던 보물같은 손주를 찾아야 하는데. 준상이에게는 미안하지

만, 어차피 죽을 병은 아니라 했으니 준상이도 제 새끼가 어디서 잘 살고 있

더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필시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왕 이리 된

거, 수 이 그 아이도 혼자서 어린아이 키우느라 고생하지 말고, 그냥 준상이

랑 살림을 합쳐도 될 노릇이겠지만. 그런 일이야 그 다음에 생각할 문제고.

일단은 우리 손주를 데려오는 게 먼저다. 제 어미 호적에 올라 있으면 차

라리 간단한데, 그래도 처녀가 애를 낳았다고 자기 오빠나 친정 식구 호적

에라도 넣었으면 또 복잡하지 않나. 아침 드라마에서 보았던 그러저러한 법

률관계를 얼치기로 따져 보며 김여사는 그렇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듯 산망스레 굴었다.

그건 그렇고, 수 이 이 아이는 체 장을 며칠에 한 번을 보는지. 애한

테 과일이며 채소며 싱싱하고 옳은 것 먹이려면, 그래도 이삼 일에 한 번은

장을 봐야 할 게 아니냔 말이다.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나자, 김 여사는 슬

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주말이라고 하루종일 마트에 붙어 있으려니 짜증

도 났다. 그러고 보니 이눔의 이마트는 밤 열두 시 넘어서도 장사를 한다고

그랬다. 체 신새벽에 장을 보러 오나. 김 여사는 툴툴거렸다. 그때 다.

“엄마, 나 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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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파워레인저? 얼마 전에 샀잖아.”

수 이 다.

“그치만 이번에 또 변신한단 말야. 엄마 제발, 이렇게 소원이야.”

매정한 것, 어린 것이 저렇게 조르는 데 어떻게 안 사줄 수 있다는 것인

지. 김 여사는 괜히 눈물이 다 찔끔 났다. 여자 혼자서 어린애 키우느라 모질

고 독해졌다고는 해도. 어떻게 저렇게 눈에 넣어도 안 아프게 사랑스러운

게 졸라 는데 돌아설 수 있을꼬. 하긴, 그러니 애를 갖고도 그렇게, 헤어지

라고 절 안된다고 했더니 그렇게 머리 한 번 숙이지 않고 횅 돌아설 수 있

었지. 그때 며느리로 들 다고 해도, 저 독한 것에게 시어미 접 제 로 받

았을 성 싶진 않았다.

“엄마하고 약속했잖아.”

“그럼, 그럼 아빠한테 사달라고 해도 돼?”

잠깐, 지금 저 애가 뭐라고 하는 거야. 아빠? 그 뻔한 단어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기도 전에, 아이는 샛노란 유치원 가방을 옆에 끼고, 전동 공구 같은

것을 파는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아빠! 나 파워레인저!”

아이고 세상에.

아이의 부름에 반응한 것은 큼직한 전동공구 상자를 손에 든 듬직해보이

는 남자 다. 아이는 파워레인저를, 남자는 전동공구를 손에 들고 있는 것

을 보고 수 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어, 이거 필요할 것 같아서요.”

“얼마 전에도 전동드릴 샀잖아요. 또 필요해요?”

“신제품이래. 봐요, 더 가볍고, 당신도 쓸 수 있고.”

“듬직한 남편 있지, 아들 있지. 내가 드릴 쓸 일이 뭐가 있다고.”

“그런가?”

“그러니까 나두 파워레인저!”

“어허.”

“그치만 엄마, 이거 신제품이란 말야. 아빠는 사주고 나는 안 사줘?”

“…거 봐요, 애가 아빠 하는 건 다 따라하잖아. 당신이 사 줘요.”

“어? 너무하잖아,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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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는 무슨.”

“엄마 짠순이!”

“엄마가 짠순이니까 우리 웅이 유치원도 가고 파워레인저도 살 수 있

는 거지. 하여간 아빠랑 아들이랑 똑같아, 똑.”

남자는 아이를 덥석 들어올리고, 아이는 좋아서 깔깔거렸다. 그 모습을

보는 수 도 웃고 있었다. 젊은 부부와 건강한 아이, 누가 보아도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는 풍경이었지만, 김 여사의 속은 바짝 탔다.

“차 웅씨, 이번 달에는 장난감 더 안 사는 거야. 엄마랑 약속!”

“약속!”

“며칠이나 가려고 약속 씩이나.”

“당신이나 잘 해요.”

차 웅, 차 웅이라니.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어딜 보아도 우리 준상이 핏줄이 틀림없는데, 강

씨 집안 자손이 강 웅이 아니라 차 웅이라니. 아니지. 이건 아니다. 이건

아무래도 잘못된거다. 김여사는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수 이라는 아

이도 그렇지, 또 혼자 살기 뭣해서 결혼이라도 하려고 했으면, 아이는 제 원

래 핏줄 찾아주고 시집을 갔어야 사람의 도리가 아니냔 말이다. 어쩌자고

그 아이를, 제 어미 성도 아니고 새아빠 성을 따라가게 만들어, 만들기는. 세

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다고.

“몇 년 전에 법이 바뀌었어.”

“무슨 놈의 법이 바뀌었다고.”

“엄마가 어린애 데리고 재혼하면, 애가 새아빠 성 따라갈 수 있다고.”

“아니, 누가 그런 짐승같은 놈의 법을 만든것이요.”

“어린애한테 늬 아빠 친아빠 아니라고 놀리고 그러는거 생각하면 아들

안 불쌍하게 만들자고 만든 법이긴 한데…. 근데 준상이네, 욕심내지 말어.

왜 자꾸 떠난 버스에 손을 흔들어.”

“떠난 버스에… 우리 아들 게 실려 있으니 그렇잖소.‘

김 여사는 이를 갈았다.

“그게 어디, 차씨네 자손이요. 그게 어떻게 그 요망한 년도 아니고 웬 생

면부지 낯모르는 놈의 자손 노릇을 하고 있는데. 그 애는 우리 준상이 애요.

박 보살도 말을 어찌 그리 냉랭하게 해, 우리 준상이가 불쌍도 않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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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어미는 불쌍도 않고?”

박 보살은 염주를 굴리며 쯧쯧거렸다.

“젊어 결혼할 만치 좋아한 남자는 시어미가 모질어서 결혼도 못 했지, 겨

우 좋은 남자 만나서 살고 있는데, 그때 그 시어미 될 뻔 한 할마씨가 득달같

이 나타나 애 내놓으라고 생떼를 쓰면, 애 어미가 안 불쌍해? 기주, 내가 뭐

랬어? 욕심 부리지 말라고 했지? 기주가 욕심을 자꾸 부리면, 상남네 몸에

칼 댈 일만 생기고, 기주에게도 망신살이 뻗쳐. 왜 자꾸 그럴꼬.”

“내 다른 건 몰라도, 내 새끼 핏줄 데려오는 일 만큼은 박보살 말 안 들을

것이요.”

“그게 진짜로 준상이 핏줄이기는 하고?”

박 보살은 눈을 치어떴다.

“확실한거야?”

“아, 확실하잖고서야.”

“기주, 기주가 지금 생각을 잘 해야 해. 그래, 그 아아가 준상이 자손이래

도 이건 사람 할 짓이 아냐. 지금 어미한테서 자식 빼앗아 오겠다는 말밖에

더 돼?”

“애비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지 핏줄 찾아 오는 게 뭐가 말이 안 된다

고 그러시우.”

“그건 그렇다 쳐도, 만에 하나 그 아기가 준상이 핏줄이 아니면.”

박 보살은 염주를 돌리던 손을 멈추고, 손으로 탁자를 쳤다.

“기주 때문에 좋아하는 남자랑 헤어지고도 겨우 제 가정 꾸리고 사는데,

그렇게 해서 집안 파탄내면 그 업보를 어찌 받으려고 그럴까! 전생에 업장

낀 것도 없는데 어찌 그래 남의 발목을 잡어, 잡기는. 그러다가 정말로 상남

한테 큰 일이라도 생겨야 정신을 차릴 것이여!”

발목을 잡기는 무슨 발목을 잡는다고. 김 여사는, 계속 트집만 잡아 는

박 보살이 마뜩치 않았다. 예전에도 그러더니, 이런 일 까지도 욕심을 부린

다고만 무어라 한다.

“욕심은 보살이나 놓으시오. 나는 이리 살 것이니.”

“사람 말 아니 들어 그 화를 보고도 아직도 그러시나. 아니, 그래. 그 아

아가 준상이 핏줄이라고 쳐, 그런다고 해도 기주가 나타나봤자 그 처자 팔

자 꼬이기밖에 더 해? 그 남편 생각을 해 봐. 애 딸린 여자인 것 알고 결혼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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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큼 좋아 죽었어도, 그런 이야기 집 밖에서 나와 봐, 환장해. 그런데다 전에

좋아했던 남자가 암에 걸렸다는 소리까지 하면서 애 빼앗아 가 봐. 집안 꼴

이 남아나겠어?”

“…젊으니까 애야 또 보면.”

“그리고, 이건 정말 만에 하나. 그 남자가, 애가 자기 자식인 줄 알고 결

혼한 거면 어쩔 것이야?”

“아니, 세상 어느 사내가 지가 뻐꾸기 서방 된 거 좋다고 하겠소? 알면

나한테 고맙다고나 하지.”

“준상이네는 어째 그 나이를 먹고도 사람 사는 이치를 몰라!”

박 보살이 무슨 말을 하는 지는 안다. 청맹과니도 아닌데 그게 무슨 소리

인지 모를까. 잘못 건드리면 그 수 이라는 아이 인생 작살낼 일인 것도 알

기는 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아이가 탐이 나는 것을 어쩌란 말인지.

이불을 깔고 누워, 김 여사는 어두운 천정 그늘께에 흐릿하게 비치는 꽃무

늬를 세었다.

애가 참 똘망똘망해 보이던데.

우리 준상이 어렸을 때랑 똑같았지. 준상이도, 그 없는 살림에 장난감 갖

고 싶다고 한참 문방구점 유리창을 들여다보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 생각하

면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었다. 해주고 싶은 것도 정말 많았는데.

그 애를 데려오면, 정말 잘 해줄 수 있는데. 준상이가 의사 노릇하며 번

것에, 김 여사가 젊어 고생하며 번 것 까지, 남부럽지 않게 왕자님처럼 키울

수도 있을 텐데. 그런 금쪽같은 아이를 웬 낯선 놈에게 맡겨 놓고, 할미가 되

어 잠이 올 리가 없는 일인데. 김 여사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 이리저리 뒤

척거렸다. 날이 밝아 올 무렵에야, 김 여사는 맷돌을 가는 듯한 소리로 코를

골아 며 깊은 잠에 빠졌다.

아이의 가방에서 본 해바라기 유치원 앞에 찾아간 것은, 그 다음 날의 일

이었다.

손주가 걱정되어 온 할머니답게, 김 여사는 꽃이 핀 담장 너머로 목을 빼

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유치원 안마당의 작은 놀이터에서는 여섯 살 난

어린아이들이 하늘색 놀이옷을 위에 덧입고 흙장난을 치거나 그네를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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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얘야.”

똑같이 하늘색 옷을 덧입은 아이들 사이에서, 한참만에야 웅이를 찾아

내고 김 여사는 스스로 생각해도 퍽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

어 눈도 침침해졌는데도 바로 찾아내는 것을 보면 핏줄이 당기기는 하는 모

양이지. 김 여사는 목청을 다시 가다듬어 웅이를 불렀다.

“얘야, 웅아.”

저 부르는 소리에, 웅이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할머니는 누구세요?”

“왜, 지난 번에 마트에서 엄마랑 인사했잖니.”

김 여사는 팔을 뻗어 웅이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은 보드라

웠다. 바람이 불자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김 여사의 늙은 손을 간지럽혔다.

김 여사는 얼른 가방에서 군것질 거리를 꺼내고, 파워레인저 장난감도 꺼내

웅이에게 내 었다.

“파워레인저!”

아이의 얼굴이 천진한 기쁨으로 물들었다. 그때 다.

“차 웅!”

유치원 선생이, 이건 무슨 적 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매서운 눈을

하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무슨.

“ 웅이 이리 와.”

애 훔쳐 달아나는 유괴범이라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실례합니다만 웅이랑 무슨 관계 되시죠?”

나 이 아이 친할미요, 그렇게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 분, 웅이 할머니 아니잖아?”

“우리 할머니 아니에요. 엄마랑 아는 할머니.”

“어른이 주시는 과자나 장난감 받아도 되나요, 안 되나요.”

“선생님이랑 엄마 아빠랑 우리 할머니가 주시는 것만 받아야 해요.”

“다른 어른이 주시는 것은?”

“엄마가 받아도 된다고 할때만….”

아이의 눈길은 여전히, 김 여사의 손에 들려 있는 파워레인저 장난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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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러 있었다. 김 여사는 그것이 못내 애처로웠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잘 했어요, 웅이 가서 친구들하고 놀아.”

“예….”

“파워레인저는 안에도 있으니까 친구들이랑 파워레인저 놀이 해. 할머

니한테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하고.”

“안녕히 가세요.”

손을 배꾭에 모으고 꾸벅 머리를 숙 다 들었다. 귀엽기도 하지. 한번 꼭

안아보고 싶었다. 저쪽에서 마구 달리고 뛰던 어린애 하나가 달려와 웅이

의 손을 잡고 끌었다. 저러다 다치면 어쩌누. 김 여사는 속이 탔다.

“요즘 아이들 상으로 한 사고가 많아서, 가족 외에는 장난감이나 간식

같은 것 받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

“이웃 분이신가요?”

“나는, 저기 그러니까….”

김 여사는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체, 요즘 젊은 여자들은 어쩌자고 이

렇게 인정머리가 없는지. 노인네가 이렇게 죄송스런 얼굴을 하고 있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는 법이 없다.

“마음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만 이해해 주세요.”

“아이구… 원, 참.”

“이웃 아이가 귀여워서 간식이나 장난감을 주실 수는 있겠습니다만,

웅이 어머님이나 할머님을 통해서 전해주세요. 요즘은 세상이 너무 험해져

서요.”

정말 별 꼴을 다 볼 일이다.

손주 찾을 일만 아니었으면 이런 꼴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리 없었지만,

여기서 큰 소리 내 봤자 좋을 일이라고는 없다.

이럴 게 아니라 그 웅이 할머니라는 사람을 한 번 만나 봐?

수 이 남편이라는 사람이야 그렇다고 쳐도, 망령이 나지 않은 이상 제

친 손주도 아닌 것을 끼고 키울 이유가 없다. 하지만 김 여사는, 그랬다가는

정말로 수 이 팔자를 깨진 뒤웅박만도 못 하게 만들겠거니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아무래도 박 보살 말에 마음이 약해진 모양이다.

“준상이 몸에 칼 댈 일이 더 생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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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수 이와 그 수 이 남편에게 직접 말하는 수 밖에는 없겠다. 그래

도 젊은 사람들이니 오히려 이야기는 통할 것이고. 그래도 의사 아들 두고

본때나게 살고 있는 김 여사가, 어디의 우악스런 할마씨에게 자칫 머리끄댕

이 잡아뜯고 싸우는 꼴이라도 나면 그것도 한심한 일이다. 김 여사는 유치

원이 바라보이는 동네 근린공원 나무그늘에 앉아, 시간이 가기만을 계속 기

다렸다.

꾸벅꾸벅 졸았는가 싶었는데 벌써 초저녁이다.

부모들이 와서 아이들을 데려가느라, 골목으로 소형차들이 고 들어왔

다가 한 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김 여사는 눈을 부비고 어슬렁거리며 유

치원 앞으로 가 보았다. 건물 안에서, 웅이가 까치발을 서며 밖을 내다보

고 있었다. 유치원 문 앞에서 어른거리며 김 여사는, 자기가 웅이 아빠라

고 생각하고 있을 그 한심한 젊은 놈을 목 빼고 기다렸다.

남자가 도착한 것은 30분은 더 지나서 다.

“아빠아!”

웅이는 발을 구르며 달려와 아빠에게 안겼다. 신발을 신고, 아빠 목에

매달리듯 하여 유치원 문을 나섰다. 저렇게 아빠를 좋아하는데, 왜 엉뚱한 데

가서 아빠를 찾고 있누. 김 여사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아무리 그래도, 머리

검은 짐승에게는 천륜이라는 게 있는 것이다. 짐승 새끼도 아니고 사람 자손

이, 이렇게 사는 것은 아무래도 아니다 싶었다. 김 여사는 몸을 일으켰다.

“저기.”

“어, 파워레인저 할머니!”

웅이가 먼저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파워레인저라니 무슨 말인가 싶

었는지, 수 의 남편도 뒤를 돌아보았다.

“나 좀 봅시다.”

“무슨 일이신지….”

마침 잘 되었다. 차를 주차시키고 오는 것인지, 수 이가 손에 열쇠를 들

고 이리 오고 있었다. 그래, 이리 다 모 으니 할 말은 해 보아야지. 김 여사

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 그 애는 내 손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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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애, 웅이 말이요!”

남자는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김 여사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 웅이는 차씨네 집안 아이가 아니라, 우리 강씨네 핏줄이란 말이요!

그, 그 말을….”

“….”

“수 이가… 6년 전에 우리 준상이와 결혼하려는 것을, 내가 뜯어말렸는

데….”

“….”

“그 죄를 받아서… 내가 그 죄를 받아서 우리 준상이가… 몹쓸 병에 걸

렸는데… 결혼도 못 해보고, 마누라도 자식새끼도 없이 그냥 그렇게… 쓸쓸

히 그러게 생겼는데….”

“그러니까 지금.”

“수 아, 아이고, 수 아!”

김 여사는, 말을 잇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가, 내가 잘못했다…!”

김 여사는, 통곡하며 수 에게, 무릎으로 기어가 그 다리에 매달리려 했다.

수 은 기가 막히다는 듯 얼른 뒤로 물러났다가, 아이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우리 준상이가… 암에 걸렸다. 목숨은 구했는데, 평생 자식은 낳을 수

없다고 그런다…. 우리 준상이, 우리 금쪽같은 내 새끼가 결혼도 못 하고 그

리 늙게 생겼는데, 가엾지도 않니. 수 아, 내가 잘못했다. 내가 다 잘못했

다…. 그러니 제발… 이 아이만이라도 돌려 다오. 응?”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우리 준상이 애잖니. 보면 안다. 그렇지 않고서야, 6년 전에 내가 내친

네가 어떻게 유치원 다니는 아이를….”

“이보세요, 아주머니.”

수 의 남편이, 김 여사와 수 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 도, 아직 젊으니까 아이는 또 낳아도 되잖아요. 남의 자식 기르는 거

보통 공이 아닌 것은 알아요. 어떻게든, 내가 내 몸을 팔아서라도 다 갚아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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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까, 그 은공 저승에 가서도 다 보답할 테니까, 우리 손주, 우리 웅이만

은….”

“ 웅이는 내 아들입니다.”

남자는 단호했다. 하지만 김 여사는, 이런 아침드라마에서 뻔히 보던 패

턴에 속을 만큼 순진한 사람은 아니었다. 김 여사는 눈을 비비며 고개를 들

었다. 울던 서슬 뒤 끝에, 눈은 동화 속 마귀할멈처럼 시뻘개진 채 다.

“지금 어디서 그런 말로 사람을….”

“지금 어디서 그런 말은 제가 아주머니께 할 말이죠.”

남자는 휴 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아이들을 배웅하던 유치

원 선생님들도 이쪽을 기웃거렸다. 웅이네 선생님이, 아까 그 할머니라고

이야기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남자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아이

를 안아 올리고, 수 을 김 여사에게서 보호하려는 듯 등 뒤에 세웠다.

“이 애는 내 앱니다.”

남자는 이를 악물었다. 그야말로 어머니 뻘 되는 노인만 아니었으면 한

칠 기세 다.

“그리고 아주머니 생각이 틀렸어요, 수 이가 낳은 애가 아닙니다.”

“저 애가 낳지 않았음,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했단 말이요, 뭐요!”

김 여사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왜 멀쩡한 사람이, 남의 자손을 제 새끼라고 그렇게 감싸고…!”

“어머니.”

수 이 끼어들었다. 정말 민망하고 한심하고 소름끼쳐서 견딜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지금 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알기는 아시는 거예요?”

“너도 그렇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모질어! 혼사 말 있었던 사람이 병

에 걸렸다는데! 한번 얼굴 보고 싶은 마음도 안 드는 거냐!”

“갑자기 오셔서 그러시는 이유야 제가 아니라 웅이 때문이겠죠. 그런

데 어머니, 어떡하죠?”

수 은 울 듯이 웃었다. 그러다가 수 은 앞으로 나가 웅이를 받아 안

고, 귀를 꼭 막았다.

“ 웅이는 준상씨 애 아니에요. 웅이는 제가 낳은 애가 아니라고요.

체, 어머니 지금 여기서 무슨 말씀 하시는 지 알기는 아시는 거예요? 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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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사람 전처 아이예요. 웅이 친엄마는 웅이 낳다가 죽었다고요!”

결국 김 여사는, 수 의 남편이 부른 경찰들 손에 경찰서에 끌려가고 말았다.

현장에 나온 경찰에게 유치원 교사가, 아까도 유치원을 기웃거리며 과자

와 장난감을 주려 했다는 증언을 보태었고, 손자도 없는 김 여사의 가방 속

에서 초콜릿과 사탕과 파워레인저 장난감이 나오자 수 의 히스테리는 극

에 달했다. 자기가 낳은 자식도 아니라면서, 수 은 길길이 날뛰었다. 유괴

미수라며, 경찰들은 무엇하고 있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사람이, 한번 남의 인생을 망쳤으면 그것만으로도 제게 미안하셔야죠,

면목 없으셔야 하잖아요!”

듣고 있던 남편이 품에 안고 토닥거리며 달랠 때 까지, 수 은 김 여사를

천하의 몹쓸 여자, 아들과 결혼하지 못하게 막은 것도 모자라서, 이제야 겨

우 찾은 행복까지 산산조각내러 온 악마같은 할망구, 남편의 아이를 유괴하

려 한 유괴미수범 취급을 하며, 최소 100미터 이내 접근금지를 요구했다.

“어머니도 자식을 키우셨던 분이 어쩌면 이러세요? 고생해서 준상씨 키

우셨다고 그 유세 하셨는데, 저희 어머니도 혼자서 저 키우시느라 갖은 고

생 다 하셨어요. 세상에 잘난 게 준상씨 하나 뿐이고, 세상에 고생해서 한 맺

히신 분이 어머니 혼자 뿐이세요? 세상에, 어쩌면 남의 신세를 망치고도 미

안한게 없으세요? 어떻게 이제와서, 준상씨가 병에 걸려 결혼도 못 하고 자

식도 못 낳겠다 그런 이야기 듣고서야 제 생각이 나셨나요? 그래, 마트에서

마주쳤을 때 어째 전같지 않게 살갑게 그러신다 했어요. 제가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없었으면, 그래, 데려다 결혼이라도 시키려고 하셨어요? 암, 그

러셨겠죠! 어머니야 그 준상씨, 마마보이에 어머니 치마폭에 폭 싸인 그 준

상씨밖에는 모르시니까. 남의 인생 같은 거야 안중에도 없는 분이니 그러고

도 남았겠죠!”

“….”

“그만하자, 수 아.”

“그만은 무슨 그만이에요, 지금 이런 웃기는 꼴을 당하고도 그래요? 경

찰 아저씨, 보호자도 없는데 이 분, 그냥 유치장에 넣든지 말든지 마음 로

하세요. 기소할 거예요. 접근금지 신청할 거고, 다시 우리 애 앞에 나타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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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 감방에 보내서라도 그냥 안 둘 거라고요!”

나중에는 그, 웅이 할머니라는. 사실은 웅이 친 외할머니 되는 곱게

늙은 할머니까지 찾아와서는, 상종 못 할 여편네라는 듯 혀를 끌끌 찼다. 김

여사는 죽고만 싶었다. 그저 늙으면 죽어야지.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웅

이 저것이 저리 똘망한 게 우리 준상이 어릴 적이랑 꼭 같은데. 아무리 그래

도 풀 것은 풀어야 쓸 것 같았다.

“근데… 저기 그 뭣이냐… 친자검사라고 하나 그건….”

“봐요, 이 분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요. 경찰들은 뭐 하시는 거예요. 이

분, 당장 잡아넣어 주세요.”

웅이 할머니, 그러니까 죽었다는 웅이 엄마의 친정어머니 되는 양반

이 기가 막혀도 이렇게 기막힌 일이 없다고 몇 번을 중얼거리다 가늘게 흐

느꼈다. 수 의 남편은 수 을 안심시키려는 듯 그 앞에서 검사가 된 친구

에게 전화를 걸었다. 6년 전과 달리, 피해자의 입장에서 법을 등에 끼고 그

야말로 기세등등해진 수 이 온갖 유세를 부리는 사이, 경찰은 보호자에게

연락할 것을 권했다. 김 여사는, 차마 병원에 있는 아들을 이런 자리에, 그것

도 전에 결혼까지 생각했고 아직도 못 잊고 있는 수 이 보는 자리에 불러

낼 수 없어 입을 다물다가, 겨우 박 보살의 전화번호를 었다.

할 말이 없고, 부끄럽기만 했다.

경찰서에 있다는 말에 허둥지둥 뛰어오느라 몸빼 바지에 알록달록 선녀

옷에 알알이 탁구공만한 것들이 줄줄이 이어진 굵고 새빨간 염주를 목에 감

고 뛰어온 박 보살은, 그러게 왜 하지 말라는 일을 그리 하느냐며 김 여사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몇 번씩 쳤다. 그리고는 입도 못 떼고 있는 김 여사를

신하여, 수 과 수 의 남편, 그리고 웅이 할머니에게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수 은 남편의 만류로 겨우, 고소는 하지 않겠다고 말

했지만.

“저는 이마트랑 작전역 홈플러스로 장을 보러 다녀요.”

“….”

“죄송하지만 앞으로는 임학동에 있는 마트로 다니세요.”

“아니, 원….”

“다시 뵙고 싶지도 않아요.”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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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보살의 채근에, 겨우 답을 하면서도, 김 여사는 아연할 뿐이었다.

이 와중에도 그런 약속을 받아내다니, 얌통머리 없는 것. 그러니 내가 너를

며느리로 안 들 지. 그래도, 이제 결혼도 못 하고 자식도 못 볼 불쌍한 내

아들, 어디서 핏줄이라도 하나 찾아냈다고 그리 기뻐했는데. 김 여사는 몇

시간 사이에 수십 년은 늙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게 왜 그랬어.”

박 보살은 혀를 찼다. 수 은 남편 전처의 친정어머니를 마치 친어머니

하듯 살갑게 모시며 돌아섰고, 수 의 남편은 그 소란에도 쿨쿨 잠든 어

린애를 안고 뒤를 따랐다. 할머니와 엄마와 아빠와 어린아이. 그렇게 한 세

트처럼 잘 갖추어진 가족이 작지만 반짝거리는 경차에 올랐다. 차 뒷자리에

놓인 뽀로로 인형을 보며, 김 여사는 훌쩍거렸다.

“뭘 잘했다고 울어.”

“우리 준상이 불쌍해서 어째….”

“기주야 그저 준상이만 불쌍하지.”

박 보살은 혀를 찼다. 아파트 단지까지는 택시를 타기에는 가까웠다. 집

에 가는 길에 장이라도 보지. 김 여사는 박 보살과 함께, 상가 쪽 골목을 따

라 걸었다.

단지 앞 수퍼마켓 앞에, 주인이 막 라면박스를 내놓던 참이었다.

“게 뭐요?”

“동네 강아지 새끼가, 아 우리 집 앞에 새끼를 낳았지 뭡니까.”

주인은 허허 웃으며 라면박스를 보여주었다. 주먹만한 강아지 새끼들이

꼬물거리며 낡은 담요로 파고들었다.

“한 마리 데려가시렵니까? 단골이시니 그냥 드리죠.”

“이봐요, 기주.”

“왜요.”

“강아지 새끼라도 하나 키우지 그래.”

“왜.”

“왜긴 왜야, 쓸쓸하니까 그러지.”

“쓸쓸하긴 뭐를.”

“되도 않을 손주 타령 그만 하고, 이놈으로 데려갑시다. 어때?”

박 보살이, 발이 하얀 강아지 한 놈을 번쩍 들어올렸다. 김 여사 눈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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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이 제일 똘망하니 귀엽긴 했다. 생각해 보니, 아들이 의사가 되고 김 여

사도 돈을 모아 이 아파트 단지로 이사오기 전 까지만 해도, 마당에서 바둑

이며 점박이며 개도 두어 마리 키우곤 했었다. 김 여사는 강아지의 털을 쓰

다듬어 보았다. 보드라운 털뭉치같은 강아지가, 김 여사의 체온에 손바닥으

로 파고들었다.

“정말로, 개라도 키울까.”

김 여사는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김 여사는 문득 생각난 듯.

“이봐요, 아저씨.”

“예?”

“애가 초등학교 다니죠.”

“아, 예. 그렇죠.”

가방을 열어, 웅이에게 주려고 샀던 파워레인저 장난감을 꺼냈다.

“이거, 이거 남 쓰던 거 아니고 그냥 새건데, 애 오면 줘요.”

“어이쿠, 고맙습니다.”

수퍼 주인은 껄껄 웃었다. 김 여사는, 손바닥으로 파고드는 그 발이 하얀

강아지를, 몇 번이나 쓰다듬다가 가만히 품에 안았다. 강아지가 낑낑거리며

김 여사의, 이제는 늙고 축 늘어진 가슴에 안겼다. 그러고 보니 식구가 늘 거

라더니. 늙은 줄 알았는데 박 보살이 아직도 용하긴 용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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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중편소설

습기(上)_루지

1.

뚜루루루~뚜루루루~

통화 연결음을 수십 번 들은 것 같은 착각이 들 때쯤 전화기 너머의 여자

는 오늘도 어김없이 나에게 같은 말을 반복한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종료 버튼을 누르고 깜빡깜빡 죽어가는 통화화면을 확인해보니 1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익숙한 여자의 의례적인 멘트 시간 4초를 제외하고 40

초’. 그녀가 전화를 받을 거란, 아니 적어도 전화기를 켜뒀을 거란 희망을 품

은 길지만 결코 길지 않았던 시간이다.

그녀의 전화기는 아직도 죽어있다.

삽화©희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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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콜록콜록”

목과 입안에 있는 모든 수분들이 증발해버린 느낌이다. 입 안에 있는 수

분들을 모두 모아서 있는 힘껏 목구멍 안으로 삼켜보려 했지만 목구멍을 더

욱 메마르게 하는 텁텁한 공기만이 넘어갈 뿐이었다. 오랜 시간 입 안의 수

분을 모아 있는 힘껏 삼켜보지만 이 마른침은 그나마 미세하게 남아있던 입

안의 수분마저도 쓸어가 버려 나를 더욱 메마르게 만들었다.

갈증을 해소하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감각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기분 나쁜 곰팡이 냄새가 난다. 이곳은 지하일까? 아니, 햇빛이

들어오는 정도를 보니 지하는 아닌 것 같다. 몸을 돌려 방 안을 둘러보려고

힘을 내봤지만 나오는 건 고통에 찬 소리뿐이었다. 울음소리와도 같은. 다시

시도해봤지만 역시 역부족이었다. 옆으로 누워 웅크린 자세에서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열심히 눈알을 굴렸다. 벽에 붙어 있는 이젤만한

크기의 창 하나에 낡은 원목 서랍장과 그 위에 있는 이불 두 채과 베개 하나

가 이 방의 전부 다. 아니 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의 전부 다.

잠깐 동안 눈의 미세한 근육을 움직인 것만으로도 전신이 뻐근해지는 것

같았다. 여기는 어디고, 나는 도 체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 것일까? 분명

히 집 근처 골목길을 걷고 있었는데. 몸 어디 하나 내말을 듣는 곳이 없다.

내 의지 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단지 뇌뿐이다.

교통사고가 난 걸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구타를 당한 걸까? 무엇보다도,

나는 왜 알몸인 걸까? 그것도 곳곳이 피와 멍으로 물든.

만신창이가 된 내 몸을 보고 있자니 잠시 망각하고 있었던 고통이 다시

금 차오르는 것 같다. 태어나서 처음 견뎌보는, 온 몸이 통제 불가능할 정도

의 고통이다. 이 무지막지한 고통이 현실임을 믿고 싶지 않아 나는 다시 눈

을 감아 정신을 놓아버린다.

3.

“우리 침 는 여기에 두고 여기 벽은 라일락 포인트 스티커로 꾸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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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아! 예쁘겠다.”

친한 친구끼리는 함께 자취하면 사이가 틀어진다고 다들 말렸지만 서로

에게 정신적으로 많이 의지하고 있었던 우리는 서로 이외의 누군가와 같이

산다는 것은 생각도 안 해봤다. 그렇게 당연하게 우리는 서로를 룸메이트로

정했다.

“공별아 이 집 어때? 난 지금까지 보러 다닌 집들 중에서 여기 구조가 제

일 마음에 드는데.”

“여긴 안 돼. 방범창이 너무 부실해. 그리고 난 투룸은 싫어. 내가 한 눈

에 볼 수 있는 원룸에서 살고 싶어.”

함께 살 집을 알아보러 다닐 때 공별이는 집의 위치와 보안상태에 해

서 꼼꼼하게 따졌다. 집의 구조와 수압, 난방과 같은 기본적인 것들보다도

더 말이다.

나는 같이 살되 독립적인 공간을 원했다. 공별의 의지 로 원룸에 살게

된 이상 가구배치를 통해서라도 나는 개인적인 공간을 가지고 싶었다. 그러

나 그녀는 그것마저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녀는 집의 모든 곳이 한 눈에 들

어오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고 나에게 단호하게 부탁했다.

“와! 방이 한 눈에 딱 보이는 게 탁 트여서 좋다. 그치 유지야?”

자신이 원하는 방을 갖게 된 공별이는 들떠있었다. 같이 살게 된 집이지

만 나는 우리 둘의 공간이 아닌 공별이의 공간에 내가 들어와 사는 것만 같

은 느낌이 들었다.

“이거 어때? 이 커튼 완전 화사하지 않니?”

“그러게, 이거 우리 집에 걸면 딱이겠다. 이것도 사자 공별아. 꺄! 저기

러그 봐봐!”

찝찝한 기분만큼 금방 증발해버리는 것도 없을 것이다. 좋지 않았던 감

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친한 친구와 같이 산다는 기 감에 들떠서 나는 우리

가 마치 신혼부부가 된 것 마냥 이리저리 생활용품들을 사러 다녔다. 우리

는 그렇게 우리만의 새로운 보금자리에 애정을 쏟아 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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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학교 다녀왔습니다. 아 춥다.”

익숙하게 코에 스며드는 눅눅한 곰팡이 냄새. 이 무겁고 습한 기운은 나

에게 깊게 스며들어 내가 집을 벗어날 때에도 나를 따라온다. 축축하게 붙

어있는 이 기운을 없애기 위해 나는 밖에선 항상 햇빛이 많은 곳을 찾아다

닌다. 따가운 햇빛 안에 있으면 질척하게 달라붙어 있던 습한 기운이 증발

해 날아가 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우리 집의 습기는 배가 된다.

“우리 딸 왔어? 아빠가 우리 딸 추울까봐 이불 따뜻하게 데워놨어. 어여

몸 좀 녹여.”

울 아빠다. 항상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나를 맞아주는 우리 아빠. 나는

너무 추워서 가방만 벗어던지고 아빠가 데워놓은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가서

몸을 녹인다. 내가 추울까봐 아빠는 얼어있는 나의 몸을 꼭 안아준다.

“아빠, 엄마는 오늘도 늦는데?”

“응, 엄마 회사가 요즘에 너무 바쁘 . 우리 딸이 이해 좀 해줘.”

“치~ 알았어. 아 따뜻하다.”

아빠의 체온이 나에게로 옮겨져 오는 것이 느껴진다. 얼어있던 몸이 풀

리면서 눈꺼풀이 점점 내려앉는다. 안개 속 같은 집안 공기의 무게가 내 눈

을 더욱더 무겁게 누른다. 몸과 함께 나의 정신도 녹아내린다. 나는 그 로

눈을 감아버렸다.

5.

‘사청동 학생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빌라촌 일 에서 20

여성을 상 로 한 ’묻지마 살인사건‘이 연이어 일어나 국민들에게 큰 충격

을 주고 있습니다. 범인은 혼자 거주하는 20 여성을 상 로 성폭행을 한

뒤 살인을 저지르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경찰은….’

“공별아 뭐 봐?”

“유지야 우리 동네 근처에서 살인사건 일어났 . 그것도 연쇄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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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너무 끔찍하다.”

무서운 일이다. 그것도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러나 공별의 얘기를 듣

고 있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TV에 나오는 뉴스를 보는 것 같았다.

“응. 앞으론 더 조심해야겠어.”

공별이는 그 일을 마치 자신이 당한 것 마냥 두려워했다. 그녀는 집에 있

는 문이란 문은 다 잠그면서 자신의 불안을 달랬다.

살인사건과 관련하여 우리 동네가 뉴스에 나간 뒤 더욱 삭막해진 이곳에

서 그렇게 우리는 단절된 밤을 보냈다. 그날 밤은 사청동의 모든 여성들의

집에 있는 문이란 문들이 모두 굳게 잠겨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니 실제로도 그랬을 것이다.

그 사건에 관한 뉴스를 보고 난 후부터 공별이는 예민해졌다. 그녀가 집

에 들어오자마자 하는 일은 집안을 모두 수색하는 것이다. 현관문을 들어서

자마자 부엌에 있는 식칼을 빼서 가슴부근까지 치켜들어 두 손으로 칼자루

를 꽉 쥔 채로 화장실부터 시작해서 옷장 안, 베란다, 창고, 침 밑 등 집안

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란 곳은 샅샅이 수색한 뒤에야 안심하고 칼

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그렇게 매일 밤 술래가 되어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혼자 숨바꼭질을 했다.

방안의 모든 것이 한 눈에 들어오는 우리 집에 사람이 숨을 곳이 그렇게

나 많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에겐 보이지 않는 비 스러운 공간들이 공

별의 눈에는 너무나도 잘 들어왔다. 우리들의 보금자리 던 집이 어느 순간

예비 범행 장소로 변해 버렸다. 이 병적인 수색이 끝나기 전까진 나도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공별이 때문에, 아니 공별이를 짓누르고 있는 커다란 두

려움 때문에 만난 적도 없는 범인과 범죄에 한 두려움이 일어났다.

6.

“네 사청경찰서입니다.”

“아저씨 여기 사청동 사청초등학교 옆에 있는 집인데요. 제가 지금 성폭

행 당하고 있거든요. 빨리 좀 와주세요.”

“네? 뭐라고요?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어요? 거기가 어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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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사청초등학교 옆집이요. 아저씨 빨리요. 그 아저씨 잠깐 화장실 간

사이에 몰래 전화하는 거란 말이에요.”

“지금 성폭행당하고 계신다고요? 누구한테요?”

“몰라요. 모르는 아저씨에요. 아저씨 제발 빨리요. 무서워요.”

“네. 그러니까 그 집이 정확히 어디라고요?”

“사청초등학교 옆집이요. 놀이터 지나면 바로 보이는 집이에요. 빨리요.

제발…… 꺄악!”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가씨!”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잘못했어요. 제발......”

“찍~찍~악, 악, 아파요. 아저씨 아파...”

“아는 사람 같은데요. 남자 목소리가 들려요.”

“부부싸움이겠지. 김 순경 그냥 전화 끊어.”

“그래도 가봐야 하지 않을까요? 다급해 보이는데요.”

“부부싸움까지 우리가 말려줄 순 없잖아. 끊어.”

“예, 알겠습니다.”

뚜뚜뚜뚜뚜

7.

“아빠. 엄마 어디 갔어?”

“공별아. 이제 엄마 안와.”

눈물이 났다. 나는 알고 있었다. 매일 밤 엄마가 울고 있었다는 것을. 엄마

는 아빠에게서 도망친 것이란 걸. 엄마는 매일 밖에 있었고, 아빠는 매일 집

에 있었다. 아빠는 밖에 나가도 갈 곳이 없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어

느 순간부터 아빠가 갈 곳이 없어져 버렸다. 그것은 아빠의 잘못도 엄마의 잘

못도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아빠는 습하고 어두운 집에 있으면서 점

점 집을 닮아갔다. 어느 순간 아빠는 집이 되었고, 집은 아빠가 되었다.

아빠는 밖으로 나가는 엄마를 보고 자신을 이렇게 축축하고 곰팡내 나는

집으로 만들어버린 것이 자신의 아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나는 매일 밤

들리는 엄마의 울음소리를 못들은 척했다. 나에게는 좋은 아빠이던 우리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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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가 우중충한 집으로 변해가는 것이 무서웠다. 인정하기 싫었다. 나는 빨

리 아빠를 이 집에서 데리고 나와 햇빛 안에서 바짝 말려주고 싶었다. 그러

나 이미 집이 되어버린 아빠는 이제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공별아… 공별아….”

엄마가 집을 나가기 전날, 울면서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지만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감은 눈에선 조용히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절 눈을

뜨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엄마는 이미 없었다. 그리고 다신 오

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엄마가 내 이름을 불렀을 때부터 엄마가 떠날 거라

는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엄마는 자신을 짓눌러오는 아빠에게

서 벗어나기 위해 아빠를 닮은 이 집을 떠났다. 나만 혼자 남겨둔 채로.

8.

“공별아. 인사해. 여긴 내 남자친구 경훈 오빠. 너도 본 적 있지? 우리랑

같은 과 선배잖아. 오빠 여긴 내 단짝친구이자 룸메이트 공별이.”

“안녕. 유지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우리 지나가다가 몇 번 본 적 있지?

이렇게 보니까 반갑네. 반가워.”

“공별아. 뭐해? 인사 안 할 거야?”

“아… 안녕하세요.”

경훈이 내민 손을 무안하게 만들고 공별은 집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아! 공별아. 방금 경훈 오빠가 집 봐줬으니까 오늘은 편하게 들어가도 돼.”

공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으로 곧장 들어가 버렸다.

“유지야. 너 공별이랑 싸웠어?”

“아니~ 오늘 안 좋은 일 있었나봐. 가자 오빠.”

공별은 집에 오자마자 어김없이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 집 안엔 공별과

유지가 널어둔 속옷이 그 로 빨래걸이에 걸려있고, 공별이 사서 일부러 밖

에 널어둔 남자 속옷이 휴지통에 버려져 있었다. 침 한 귀퉁이에는 누군

가 앉아서 생긴 작은 구김이 잡혀있었다. 무엇보다도 집안에는 온통 남자

스킨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집 안을 살펴보는 그녀의 얼굴이 살짝 일그

러졌다. 그녀는 문부터 활짝 열어젖혀 공기를 환기시킨 뒤 자신들의 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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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낯선 남자의 흔적을 하나씩 지워나갔다. 그리고 휴지통에 버려진 남

자 속옷을 다시 꺼내서 밖에서 잘 보이도록 널었다. 기분 나쁜 냄새가 다 사

라진 뒤 그녀는 다시 집안의 모든 문을 잠갔다. 마지막으로 현관문 번호 키

의 번호를 바꿨다.

삑삑삑삑. 삐용삐용.

“어?”

삑삑삑삑. 삐용삐용.

“이상하네.”

찰칵.

“왔어?”

“어, 공별아 이거 이상해. 분명히 2673 맞는데 왜 안 열리지?”

“내가 번호 바꿨어. 9830이야.”

“갑자기 번호를 왜 바꿔?”

“바꿀 때가 돼서.”

공별은 아무렇지 않게 컴퓨터 앞으로 갔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집으로 들

어갔다. 집 안은 말끔하게 청소 되어 있었다.

“어? 저 팬티 아까 내가 버렸는데. 저거 보고 경훈 오빠가 오해했단 말이야.”

공별이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아니 그보단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종종 남성 용품들을 사왔다. 면도기나 쉐이빙 폼 같은 남성 용품을 사와서

일부러 쓰레기봉투에 같이 넣어서 버리곤 했다. 남자 속옷을 일부러 밖에

보이게 널어두는 것도 그녀의 불안감 해소 방법 중 하나 다.

“유지야, 내가 저거 그냥 저기에 둔 거 아니잖아. 앞으론 함부로 건드리

지 말아줘.”

그녀의 말투는 평소와는 달리 날카롭고 딱딱했다.

“네가 불안해서 그런 거라면 이제 괜찮을 거야. 내가 경훈 오빠한테 부탁

했거든. 앞으로 우리 집에 잠깐씩 들려서 봐준다고 했으니까 이젠 걱정 안

해도 돼.”

그녀는 내말을 듣고 더욱 냉기가 뚝뚝 묻어나는 말투로 말했다.

“그 사람이 항상 우리 지켜줄 수 있 ? 그리고 왜 그 남자가 우리 집을

봐주는데? 우리 집에 어떤 남자가 들어오는 거, 난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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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이 어디 있어! 경훈 오빠는 내 남자친구잖아.”

“그래서? 네 남자친구면 다 믿어도 돼? 이 세상에 믿을 수 있는 남자는

아무도 없어. 그게 설령 유지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지금 화하고 있는 사람이 내가 알던 공별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너 설마 현관문 번호 바꾼 것도!”

“그래, 앞으론 어떤 남자도 우리 집엔 데리고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 내가 네 동의 없이 남자친구 데려온 건 미안해. 그건 내가 잘못했

어. 근데 지금 네 행동은 너무 과한 거 아냐? 넌 지금 이 세상 모든 남자가

다 예비범죄자인 것처럼 말하고 있잖아.”

딱딱하게 얼어있던 그녀의 얼굴이 뜨겁게 녹아내려 어그러졌다.

“난 그렇게 생각해. 남자는 믿을 것이 못 돼. 그러니까 너도 정신 차리고

네 몸은 네 스스로 지켜!”

목구멍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치 어 올라왔다. 그것을 다시 집어 삼

키려했지만 나의 입은 이미 내 통제 밖이었다.

“그럼 넌 너희 아빠도 못 믿겠네. 아빠도 네가 그렇게 믿지 말라고 하는

남자잖아. 안 그래?”

공별이의 아버지 얘기를 꺼내고 말았다. 가슴 한 켠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맞아. 난 아빠도 못 믿어. 아니 믿고 싶어도 이제 믿지도 못해. 알

잖아, 너도.”

공별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나를 짓눌렀

다. 우리는 서로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고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이때부터 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 틀어지기 시작한 것이.

9.

“너희들은 뭐 한 거야? 신고 전화도 들어왔었다면서. 전화라도 제 로

끊었어야 할 거 아니야!”

“죄송합니다.”

“이게 무슨 망신이야! 이번 사건 때문에 경찰 전체가 욕먹고 있잖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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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우리한테 불리한 음성자료 원본은 모두 삭제하고, 기자들한텐 절 사실

로 말하지 말라고. 우린 정확한 범행 발생 장소는 듣지 못했고, 신고 전화

를 받고나서 즉시 출동한 거야. 범행 장소를 신속하게 찾지 못한 게 우리 측

잘못이라고. 알아들었어?”

“네. 서장님.”

무섭다. 두렵다. 시키는 로만 하면 이번 사건이 덮어질까? 이번만 잘

넘기면 국민들은 금방 이번 사건을 기억 속에서 잊어줄까?

“예, 제가 신고 전화를 받은 김상경 순경입니다. 그날 피해자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통화 음질 상태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사건 발생 장

소에 해서는 정확하게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 아닙니다. 전 똑똑히 들었습니다. 피해자가 세 번이나 사건 발생 장소

를 떨리는 목소리 지만 또박또박 말해주었습니다.

“저희는 신고를 접수하자마자 바로 출동했습니다. 그러나 피해자와의

통화만으로는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된 추적 끝에 다

음날 아침에서야 사건 발생 장소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 저희는 신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출동하지 않았습니다. 저희

경찰서에는 하루에도 수십 통씩 신고 전화가 들어옵니다. 그 전화의 절반

이상은 장난전화이거나 부부싸움으로 인한 가정 문제와 관련된 신고 전화

입니다. 그날의 전화도 그런 장난 전화 중의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출동하지 않았습니다.

“피해자와의 통화 음성 자료는 저희가 공개한 것이 전부입니다.”

- 죄송합니다.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습니다. 무섭고 두려워서 숨

겼습니다. 죄송합니다.

다 사실 로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윗선

에선 절 사실을 공개해선 안 된다고 하지만 나는 모두 사실 로 말하고

싶었다. 그날 수화기 너머의 그 여자의 목소리가 계속 나의 귓가를 떠나질

않았다. 마지막 그 비명소리까지도….

매일 밤 그날 사건에 해서 꿈을 꾼다. 꿈속에선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사건 현장의 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모습도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항상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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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 속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서 그 여자의 다급하고 두려워하는 목소리를 듣

고 있어야만했다.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주저앉았다. 그래도 소용없다. 그 여

자의 다급한 숨소리와 울음에 가까운 목소리는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

와 귓속을 날카롭게 찔러댄다. 그리고 항상 마지막엔 암흑 속에서 갈기갈기

토막 난 그 여자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 토막들은 그것이 한때 인간이었다

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훼손되어 있다. 그 토막들 속

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형체는 손뿐이다. 112가 찍혀있는 깜빡깜빡 죽어

가는 핸드폰이 쥐어져 있는 오른손만이 온전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10.

“유지야 밥 먹어.”

공별이는 그날의 일은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나도 덩달아 그날의 일

을 망각해 버린 것처럼 행동했다. 서로의 마음속에 작은 균열이 생기고 있

다는 것을 우리는 철저하게 숨겼다. 우리는 여전히 단짝친구이고 룸메이트

다. 이 여전함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공별이와 싸우면 끝

까지 싸워서 응어리가 생기지 않게 하거나 술로 서로의 서운함을 털어내면

서 응어리를 풀곤 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더욱 갑갑했다. 이 작은 균열이

우리가 알아채지 못한 채 서로의 가슴 전체로 퍼질까봐서. 그렇게 며칠이

흘러갔다.

“여기까지만 데려다 줘도 돼, 오빠.”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나는 집 앞까지 오빠와 함께 오는 것도 조심스러

워졌다. 공별이에게 괜한 오해를 사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두운데 집 앞까지 안 데려다 줘도 괜찮겠어?”

“응, 괜찮아. 공별이도 별로 안 좋아하고, 나도 이제 더 이상 공별이랑 싸

우기 싫어.”

“휴… 알았어. 그럼 조심히 들어가고, 들어가자마자 전화해. 알았지?”

“응, 걱정하지마세요~”

오빠는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하게 묻지 않았다. 그냥

지금의 내 행동을 이해해줬다. 그래서 더욱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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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골목길을 돌아서 내가 사는 빌라 앞에 왔다. 창문을 통해 복도의

자동인식조명이 켜졌다 꺼지는 것이 보 다. 우리가 사는 1층 복도 다. 나

는 빌라 출입문에 있는 번호판을 누르려고 작동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관

리인 아저씨가 건전지 가는 것을 잊으셨는지 번호판은 작동하지 않았다. 나

는 별 생각 없이 출입문을 열고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사는 113호로

가는 동안 내가 지나간 자리의 조명이 하나둘씩 켜졌다가 꺼졌다. 복도 맨

끝 구석에 덩그러니 혼자 있는 113호를 향해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113호

앞에 있는 등이 켜졌다. 나는 아직 모퉁이를 돌지 않았다. 순간 나는 온몸의

잔털들이 모두 서는 것을 느끼며 자동적으로 몸을 돌려 출입문을 향해 달렸

다. 누군가가 뒤따라오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그저 달렸다. 뒤에선 빠른 발

자국 소리가 나를 쫒아오는 듯 했다. 복도의 조명이 앞길을 비춰주기 전에 1

층 복도를 단숨에 통과했다.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등이 제멋 로 들쭉날쭉

켜졌다가 꺼졌다. 그리 길지 않은 복도 지만 나에겐 출입문까지의 거리가

굉장히 멀게 느껴졌다. 숨 한번 제 로 내쉬지 못하고 무작정 달려 나와 보

니 경훈 오빠가 집 앞에 서있었다.

“유지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어깨를 감싸는 경훈 오빠의 온기를 느끼자마자 나는 주저앉아버렸다. 앞

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계속 눈물만 흘렀다. 오빠가 앞에서 뭐라고 하는지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머릿속의 공포감이 잦아들 때까지 울

기만 했다. 정신차려보니 나는 집에 와있었고, 경훈 오빠는 가만히 나의 손

을 잡아주고 있었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

안정감이 느껴지는 낮은 목소리로 경훈 오빠가 말했다. 긴장감으로 수축

된 몸을 오빠는 조심스럽게 안아주었다. 안정감 있는 속도로 나를 다독여주는

오빠의 손에 따라 빠르게 곤두박질치던 가슴도 안정적인 속도를 되찾아갔다.

삑삑삑삑, 찰칵.

공별이다. 그녀가 이 일을 겪지 않아서 다행이다. 나는 그녀를 향해 미소

를 지었다. 그러나 그녀는 슬픈 눈으로 나를 보았고 몸을 돌려 집을 나가버

렸다. 한참 뒤에야 나는 지금의 상황을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 는지를 짐작

할 수 있었다. 그리곤 이내 슬퍼졌다.

‘공별이에게 가야하는데, 붙잡아서 오해하지 말라고 말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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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럴만한 힘과 의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나중에… 지금 당장 하지 않아도 괜찮겠지.’

나는 그날 그렇게 공별이를 보냈다.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다. 오늘을 후

회하게 되리라고는.

11.

“아빠 나 왔어.”

아빠는 여느 때처럼 내가 집에 왔을 때 몸을 녹이라고 이불 안을 데워놓

고 계셨다. 그 안에서 나는 어김없이 스르르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나 그날

은 다른 날과는 달리 전혀 포근하고 따듯한 느낌이 나질 않았다. 뭔가 평소

와는 다른 이질감을 느낀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걷어 올려 진 윗옷 아래에

서 작게 망울져 갓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나의 가슴이 훤히 드러나 있었고,

그것은 아빠의 손 안에서 그 손길을 피하려는 듯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

다. 정신은 이미 깼지만 눈은 뜰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로도 나는 이제는 전

혀 따뜻하지 않은 이불 속에서 잠자는 척을 해야만 했다.

“공별아 왔어? 어여 이리로 들어와서 몸 좀 녹여.”

“아니야 아빠. 나 오늘은 그냥 내 방에서 잘게요.”

그렇게 나는 아빠의 이불로부터 조심스럽게 멀어져갔다.

“여보, 공별이 엄마.”

희미하게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이 뜨겁다. 뜨겁다가도 이내

차가워진다. 눈앞에선 아빠가 나를 붙들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물이

흘러내리는 아빠의 눈은 이미 초점이 없었다. 건전지가 다 닳아버린 기계화

면 같은 아빠의 잿빛 눈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의 에너지까지 소진되는 기분

이었다. 아빠는 나를 자신의 아내라고 여기면서 자신의 이불을 떠나버린 딸

의 이불 안으로 매일 밤 찾아왔다. 낮에는 아빠의 딸이지만 밤만 되면 나는

엄마를 신해 아빠의 아내가 될 수밖에 없었다.

매일 밤마다 나는 안개 같은 집에 빨려들어 가는 기분이다. 아빠에게서,

이 집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혼자 이 집에 남겨질 아빠에 한 연민이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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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에 가까스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나는 매일 위태위태하게 집으로 돌아

왔고 그런 나의 마음을 느꼈는지 나에 한 아빠의 집착은 더욱 커져만 갔다.

계속

✥ 본 작품은 실제 있었던 사건을 토대로 재구성한 픽션입니다. 실제 사건과 다른 점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Page 79: 텍스툰:Textoon Vol.10

[Text] 엽편 연작

상자 가루_김득출

삽화©곽현진

Page 80: 텍스툰:Textoon Vol.10

5. 광대 놀음

광 가 말한다.

"나는 언제나 웃고 다녀야하지, 벙쪄 보이는 눈에는 언제나 눈물을 흘리

고, 얼굴은 언제나 하얗게 질려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두 다리만이 아닌 온

몸을 이용해서 옆으로 굴러다녀야 한다네. 시끄러워도 언제나 방울을 주렁

주렁 달고 다니고, 곱슬곱슬한 머리는 빨갛게 칠하고 다니지. 두 손은 끊임

없이 재주를 부리며 다녀야하고, 뱃속에는 방귀가 가득 차 있어. 히히, 나는

누굴까?"

왕이 명했다.

"꺼져."

광 는 도망가면서 외쳤다.

"그럴 순 없어! 난 언제나 네 머리 위에 있거든!"

삽화©곽현진

Page 81: 텍스툰:Textoon Vol.10

6. 미인

옛날 일본에 ‘톤토샤락사이’라는 화가가 있었다. 주로 미인도를 그리는

이 는데, 어느 날 그가 간단한 볼 일을 보러 고향으로 내려가다가 불현듯

엄청난 미인상이 떠올랐다. 머리에 떠오른 미인이 어디가기 전에 얼른 밑그

림이라도 그리려고 했으나, 마침 그림 도구가 없어 다시 집으로 뛰어간 톤

토샤락사이가 다시 그 자리로 왔을 때에는 이미 머릿속의 미인은 사라져버

렸다.

톤토샤락사이는 한참을 그곳에서 못 박힌 듯 서있다가 땅 바닥에 글 한

줄을 쓰고 그 자리를 떠났다.

‘여기, 미인이 있었다.’

삽화©곽현진

Page 82: 텍스툰:Textoon Vol.10

7. 니체에 대하여

니체가 말했다.

"신은 죽었다."

그런 니체도 늙고 병들어 죽었다.

이에 신은 말했다.

"니체는 죽었다."

그러나 승천한 니체는 신의 작은 배때기에 칼빵을 놓았다.

"신은 죽었다."

누구든, 작은 니체를 얕보면 좆되는 것이다.

설령 니체가 아닌 인간일지라도.

삽화©곽현진

Page 83: 텍스툰:Textoon Vol.10

8. Jack’s Jounal

저는 마음은 착하지만 돈도 없고 생김새도 추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때

문에 사랑을 얻고자하여도 여인들은 절 상 도 안하고 침을 뱉기 일쑤지요.

하지만 저는 세상에 사랑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그녀에게 모든

진심을 보일겁니다.

- 칠월 초하루날

지금 얼굴에 묻은 그녀의 침을 닦고 망막에 새겨진 그녀의 경멸을 되풀

이하여 보며 마지막 수기를 쓴다. 이 세상에는 나에게 허락된 사랑은 없나

니, 내가 누리지 못한다면 응당 다른 자 또한 누리지 못하리라.

-칠월 칠석

이 수기는 런던 뒷골목 연쇄살인 건으로 조사차 어느 버려진 폐가를 조

사하다 나온 것이다. 부디 이 수기가 도시에 버려진 분노를 잡는데 도움이

되기를.

삽화©곽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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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장편 연재소설_2

나유타_성우창

羅夢

꿈을 꿨다.

그 날도 한바탕 링 위에서의 사선을 넘나든 뒤 방으로 돌아와 몸에 난 상

처에 약을 바르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있던 세척장에서 충 물을 뒤집

어쓰고 몸을 제 로 말리지도 않은 채 들어온 탓에 앉아있는 바닥이 젖어

새카맣게 변했다. 침 밑 약상자에 상비되어 있던 어느 약통을 집어 뚜껑

을 열고 두 손가락으로 연고를 묻혀 옆구리에 난 상처에 천천히 얇게 펴바

르기 시작했다. 오늘의 상 는 두 명이었는데, 시합 전에 서로 모종의 합의

가 있었던 모양인지 종이 울리자마자 그들이 한 일은 나에게 달려들어 그

중 조금이나마 우람한 자가 나를 꼼짝 못하게 어깨를 걸어 잡고, 나머지 한

사람이 준비하고 있던 칼을 꺼내어 달려들어 찌르는 것이었다. 나는 재빨리

억지로 몸을 틀어 간발의 차로 칼을 피했다. 억지로 비트는 바람에 왼쪽 어

삽화©송한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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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가 빠득, 하며 탈구되는 소리와 함께 고통이 엄습했으나 어쨌든 칼을 피

하는 것은 성공해 안심하고 달려든 칼날은 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가 날

잡고 있던 자의 명치에 꽂혔다. 칼에 꽂힌 사람은 바로 바닥으로 쓰러져 버

르적거리다가 이내 얌전히 축 늘어졌다.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급소를 찔렸

으니 아마 죽었을 것이다. 칼잡이는 계획이 틀어지자 당황한 표정으로 시체

에게 꽂힌 칼을 빼어들고 나를 향해 급하게 재돌격했다. 제 딴에는 쉴 틈 없

이 속전속결로 끝내고 싶은 마음이었을 테지만, 비록 어깨가 박살나는 바람

에 한쪽 팔은 못쓰게 되었어도 허술한 상 의 무장을 무력화시키고 옆차기

로 목울 를 뭉개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약을 바르는 중에도 왼쪽 어깨는 쓰지 않고 있었지만 욱신거리는 통각이

어깨를 자극했다. 교관이 감아준 붕 밑으로 새파란 멍이 보 다. 예상보

다 부상 정도가 심한 모양이었다.

“으음….”

작은 신음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비교적 경미했던 고통은 점점 커져 옆

구리의 상처와 같이 전신을 울리기 시작했다. 부상에 한 교관의 처우는

관 한 편이어서 오늘처럼 부상이 있을 때면 으레 훈련 같은 것은 쉬게 해

주곤 했다. 훈련 신에 나는 언제나 그렇게 한바탕 싸움 뒤에도 육면체의

차가운 시멘트 방에서 고통과 또 다른 결투를 해야 했다. 링에서나 방에서

나, 어느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샤워한 몸은 어느새 물기가 다 말랐지만 동시에 고통으로 인해 흘린 식

은땀으로 젖기 시작했다. 나는 고통을 잊을 요량으로 침 로 기어 올라가

몸을 늘어뜨렸다. 통증은 여전했지만 몹시 지친 몸은 슬며시 찾아온 고통보

다 진한 몽마를 저항 없이 받아들 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도란도란 들려오는 소리에 잠이

살짝 깨었다. 귀를 간질이는 소리는 문 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잠결인데

다 문이 두꺼워 소리가 잘 분간이 되지 않았으나 교관을 포함한 두 사람 이

상이 화를 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아챘다.

이윽고 화 소리가 멈추고 문이 열려, 한 사람이 들어왔다.

열린 문을 통해 갑작스레 쏟아진 복도의 빛에 나는 눈은 가늘게 뜰 수밖

에 없었다. 방문자는 빛을 등지고 있어서 실루엣 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나

는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언제나 내게 실루엣 밖에 보여주지 않았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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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에, 매우 익숙한 실루엣의 그는 바로 내 예전 동거인이었다.

반가움 때문이었는지 뭐 는지, 나는 어서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몸이

늘어진 채 말을 듣지 않았다. 목이 잠겨 목소리도 제 로 내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보다 멀쩡한 오른팔만 그를 향해 애타게 뻗었다. 그 또한 이에 화답

하듯 다가와 오른손을 내 어 손을 포개고 다른 손으로는 살며시 땀에 젖은

이마서부터 빡빡 깎은 정수리까지 쓸어내렸다. 나와 같은 굳은 살과 상처

투성이의 투박한 손이었지만, 얼마만인지 모를 따스함이 싸늘하게 식은 머

리를 감쌌다. 서로 주고받은 화는 없었다. 머리를 틀어 그의 얼굴에 시선

을 고정했다. 여전히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우리는 서로 시선을 교

환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교관의 재촉이 들려오자

그는 손을 거두고 물러나 그 로 돌아보지 않은 채 뒤돌아서 방을 나갔다.

교관의 강경한 손에 의해 문이 닫히는 순간, 그의 실루엣이 살짝 떨리는 것

처럼 보 다. 두꺼운 강철 문이 날카롭게 삐걱거리며 닫힌 뒤에도 나는 뻗

은 손을 거두지 못했다. 머리를 감싸던 따스함은 오래지않아 다시 차갑게

식고 말았다. 그러나 손길이 닿은 적 없던 두 눈만은 어째서인지 그 날 밤 내

내 뜨겁게 흘러내렸다. 어서 잠들어야 할 것 같은 밤.

나유타가 룸메이트로 배정 되고 반 년 간, 도스 하사관은 그간 아침에 늦

게 일어나 상사에게 꾸지람 받을 일을 걱정해 본 일이 없었다. 아무리 잠에

곯아 떨어져도 철썩 같이 제 때 일어나는 나유타가 매일 아침 그를 깨워 주

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유타가 한 번도 6시 정각 넘어서 자고 있는 일을 본

적이 없고, 일어나 잠에 지쳐 매우 피곤한 기색을 보인 것도 본 적 없으며,

또한 나유타가 지금처럼 악몽을 꾸는 사람이 그렇듯 평범하게 몸을 뒤척거

리고 신음을 흘리는 것을 보이는 것을 본 적도 없었다. 마침 새벽 불침번이

었기에 늦잠을 자지 않고 먼저 일어나 있었던 도스는 그의 룸메이트가 전에

없이 불편한 기색을 보이자 나름 걱정이 되어 그의 침 를 격렬히 흔들며

소리쳤다.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평범한 사람처럼 깨우면 될 것을 마치 성악가처럼 복식호흡으로 고막을

울려재끼는 이유는 하사 본인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잘 깨지 않기 때문에 다

른 사람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서 기인한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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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유타는 그와 같은 부류가 아니기에 처음 ‘일어나’에서 반사적으

로 튕겨져 올라가듯 침 에서 일어났다. 온 몸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고 양

눈은 새빨갛다.

“나유타, 너 우는거냐?”

방금 전의 고음은 온데간데없이 톤을 낮춘 도스가 걱정스레 물었다. 나

유타는 뭐가 뭔지 사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방금 전 무슨 옛날 꿈을 꾼

것 같긴 한데, 도스가 어지간히 요란하게 깨우는 바람에 잘 기억이 나질 않

았다. 땀 때문에 입고 자던 활동복이 달라붙어 싸늘했다. 정신 없는 가운데

도스의 말을 듣고 멍하니 눈가를 매만져보니 물기가 축축했다. 하지만 좀

혼란스럽고 맥이 없긴 해도 그렇게 슬픈 기분은 들지 않았다.

“아닙니다. 하사님. 악몽을 꿨나 봅니다.”

‘악몽’이라는 것을 꿔 본 적은 없어도 그간 보통 사람의 삶을 살며 조금

이나마 습득한 짧은 상식으로 충 둘러댔다. 정확하게 전달하고 싶어도 딱

히 뭐라 표현 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뭔가 꿈을 꾼 것 같긴 한데 갑작스레

놀라서 깨어난 것 때문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런 그의 변에도 불구하

고 도스는 걱정스런 기색을 거두지 않았다. 평소 안 그러던 룸메이트가 오

늘따라 늦게 일어나는 둥 우는 둥 별의 별 이상 증세를 보이니, 도스의 걱정

도 무리는 아니었다. 혹시나 열이 나진 않는지 이마에 손을 갖다댔다. 살짝

미열이 느껴지는 듯 하나 정확히 판단할 수 없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지 말고 너 오늘 좀 쉬는 게 낫겠다. 챠이퐁하고 일과표 바꿔 놓을

테니까 말이야. 오늘은 그렇게 바쁜 일도 없고.”

나유타는 고개를 들어 시계를 봤다. 6시 3분, 하루 일과를 시작해야 할 시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정복으로 갈아입겠습니…”

거부의사를 보이며 옷을 갈아입기 위해 일어난 나유타는 미처 말을 끝맺

기도 전에 곧바로 다리가 풀려 바닥으로 우당탕 굴렀다. 때마침 마리아가

알렉스를 동하고 문을 박차고 나타난 것도 그 때 다. 제 때에 일어났는

지 이미 군복으로 환복하고 난 차림이었다.

“아침부터 시끄러워 도스, 몇 달간 잠잠하더니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어?”

기세 좋게 도스의 정강이를 걷어차려던 마리아는 발치에 넘어져 기진맥

진하고 있는 나유타를 보고 당황했다.

“뭐하는 거야 나유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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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일으켜 봐. 나유타가 이상해.”

도스와 마리아가 나유타를 일으켜 앉힐 동안 알렉스가 수건을 가져와 그

를 닦았다. 나유타는 정신은 말짱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조금 당황했다.

그 또한 이러한 일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마리아가 도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이마를 짚고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열이 엄청나잖아. 너 좀 쉬는 게 낫겠어.”

“어? 아까 내가 짚었을 땐 미열밖에 안 났다고. 내 손이 뜨거운가?”

마리아는 얼빠진 표정으로 얼빠진 소리를 해 는 도스의 정강이를 번개

같이 찍어찼다. 알렉스가 그의 일반화의 오류를 지적했다.

“하사님은 한겨울에도 반팔입고 진지 공사를 하는 부류니까요. 다른 사

람을 자기 자신처럼 판단하시면 안 됩니다. 나유타는 다른 사람과 일과를

바꾸는 것이 낫겠네요.”

소 내에서도 손꼽히는 스트라이커로 유명한 마리아의 군화 앞굽에 정

통으로 정강이를 맞았지만 과연 도스는 ‘다른 부류’의 인간답게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네가 하는 말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그나저나 타는 챠이퐁이 어때?”

“돼지 어제 일로 창 갔잖아. 분 다른 사람 비번 없어?”

“없어요. 원래라면 챠이퐁 하사님이 비번일 텐데, 장기 훈련 일정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서 외박이나 휴가 받은 인원도 많고, 우선 소 장님께 보고하죠.”

고맙게도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 해서 걱정하는 동안, 정신없는 와중에

서 나유타는 어느새 다시 정신 차린 다리로 일어서서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

다. 이마는 고열이 나고 몸은 으슬으슬했지만 어찌됐건 정신은 맑았다. 태

어나서 거의 자신의 일상적인 패턴을 흐트려 본 적 없는 그로써는 하루 쉰

다는 것이 미지의 역처럼 낯설었다. 마리아가 나서서 그를 만류했다.

“야, 야, 그냥 누워있어. 적어도 앉아있기만 하라고, 알렉스. 소 장님 불

러와.”

“아 예, 다녀오겠습니다.”

“근데 말이야 마리아, 내 손이 뜨거운건가?”

“넌 닥치고 있어.”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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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페이스’백커 가로드 중위는 특이하게 성이 이름 앞에 붙는 자기 고

향 일족 특유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15년 전 임관 초기 그의 별명은

성만 이름 뒤로 돌렸을 뿐인 ‘가로드 백커’라는 재미없이 평범한 별명이었지

만 - 사실 국법상 호적에는 이 별명이 실명으로 등록되어 있다 - 마찬가지로

임관 초기 참전한 전쟁에서 얻은 오른쪽 눈썹 위에서부터 입술 왼쪽 아래까

지 이어지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입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개성이 드러

나는 스카페이스라는 별명다운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 후로 그는 무언가 생

각할 때 왼손으로 상처를 따라 위에서 아래로 죽 훑는 버릇이 생겼는데, 그가

어떠한 물음에 해답을 내놓기 까지는 개 그의 손길이 상처 끝까지 닿는 경

우는 거의 없을 정도로 신중하면서 결단력 있는 위관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

답게 나유타의 병세를 파악하는 데에는 콧잔등까지로 충분했다.

“몸살이군.”

“당연하죠, 장님, 척보면 모르십니까.”

옆에서 마리아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받아쳤다. 알렉스는 모시고 오는

내내 입이 아프도록 환자의 증세와 교 인원에 해 보고한 것이 이 독단

적인 소 장에겐 아무런 향을 끼치지 않은 것을 알았다.

“다들 알다시피 병장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잖나. 나도 눈으

로 봐야 믿지. 추울 때도 아니고 여름 감기라니, 어제 뭐 했나? 뭐 잘못 먹기

라도 했나?”

알렉스가 뭔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어제 두 사람 ‘로자리오’에 갔잖습니까. 거기서 뭐 먹으셨습니까?”

“아니 별 거 없었어, 아메리카노에 점심은 충 카페에서 파는 허니 브레

드로 때웠다고.”

“요즘 얘네 수상합니다. 남자 둘이서 카페도 가고, 커피곰탱이 너 나유타

한테 남자로써 차마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한 것 아냐?”

‘수상한 사이’라는 단어를 남자여자 한 방 쓰는 마리아가 함부로 남한테

쓸 말이 아닐텐데 그녀는 반 정색하고 그를 추궁했고, 이성애자인 도스는

어이가 없었다.

“뭐라는 거야, 새디즘 여왕과 그 노예개인 주제에.”

마리아는 아까 찬 곳과 반 쪽 정강이를 걷어찼고 도스는 피하면 더 귀

찮아질 것을 알고 있기에 그냥 귀찮다는 투로 맞아버렸다. 알렉스가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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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을 제시했다.

“그러고 보니 나유타는 어제 저녁을 안 먹었습니다. 끼니 제 때 안 챙겨

서 그런 걸지도.”

“쯧, 병사가 식사를 안 하면 어쩌란 거야. 어제 무슨 일 있었나?”

생각해보면 나유타는 그저 별로 시장기가 들지 않았을 뿐이다. 그 뒤로

도 별로 배는 안 고팠고, 끼니 한 번 거른 것으로 멀쩡하던 사람이 몸살이 날

리도 만무하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부 장은 음 하는 잇소리를 냈다.

“어쨌든 꽤 심한 것 같으니 병장은 오늘 의무 로 가서 쉬게.”

“ 장님, 저는…”

15년간 군 에서 수없이 생사를 넘나들며 현재까지 이른 노련한 중위는

부하의 성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그만, 아파보기 전엔 모르는 거야. 나라 지키는 군인이 아픈 것도 큰일

이니. 내 말을 들어라. 명령이다.”

상사의 ‘명령이다’라는 말에, 나유타는 자신도 모르게 예전 자신을 다뤘

던 교관 생각이 스치고 지났다.

“…예, 알겠습니다.”

“잠깐만요. 소 장님. 전 그 동안 계속 아프다고 말해도 의무 로 보낸

일이 없잖습니까!”

정작 항의를 하는 것은 본인이 아니라 룸메이트 도스다. 그는 중위의 소

에 배치 받은 뒤로 의무 침 에서 농땡이 피워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성실하고 부지런하다기보다는 사실 휘하의 다른 소 원들과 마찬가지로 씨

도 안 먹힐 꾀병을 간파당한 덕분이지만.

“그래서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하라고 립 밤 던져줬잖아. 넌 얘 데리

고 거기로 갔다가 복귀하고, 병장의 일과는 일단 2분 중 남아 있는 사람이

나눠서 하는 수밖에 없겠다. 마리아 분 장. 알아서 처리하게.”

그들이 있는 1소 는 1분 와 2분 , 두 분 로 나뉘어져 있는데, 나유

타가 속한 2분 의 장은 마리아가 맡고 있었다.

“예, 그럼.”

“좋아, 너희 분 의 조례는 이것으로 체하고 1분 는 따로 하기로 하

지. 각자 일과에 복귀하게. 바쁠테니 오늘은 자네들 먼저 식사하는 것이 낫

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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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만을 남기고 소 장은 방에서 퇴장했다.

마리아는 퇴장하는 소 장을 경례로 배웅하고 휘하 분 원에게 돌아섰

다. 그녀에 어깨에 있는 분 장 견장이 유난히 밝게 돋보 고, 도스는 불안

함을 느꼈다.

“좋아…”

“공평하게 하자고 공평하게, 가위바위보 같은 걸로.”

“그건 공평한 게 아니야, 공평한 것은 내 결정이지. 난 분 장이니까. 넌

일단 네 마누라나 의무 에 데려다 주고 식당으로 와. 우린 일과 담당표 바

꿔 놓고 갈테니까. 특별히 네 할당량도 미리 결정해 놓도록 하지.”

마리아는 그 말을 끝으로 알렉스를 끌고 식당으로 떠났다. 알렉스는 나

유타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의 인사를 한 뒤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갔다.

롤 도스는 불안한 눈길로 마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 때까지 침 에

오도카니 앉아있던 나유타를 조심스레 일으켰다.

“입원할 정도는 아닌 것 같으니 옷은 아마 안 가져가도 되겠지.”

나유타는 무엇이라도 말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안함’이라는

감정은 그에게 매우 낯설고 어색한 것이라 조금 망설여졌다.

“…죄송합니다. 하사님.”

“엉? 괜찮아. 오늘은 할 일도 많지 않고, 기껏해야 걸레질만 네 몫까지

좀 더 해야겠지. 나는… 그래,”

도스는 나유타의 어깨를 두르고 허리를 받치며 적당한 말을 골랐다.

“그래도 네가 아픈 걸 보니 한편으론 좀 더 인간적으로 보여서 안심이다.”

그 말에 나유타의 무표정에 알 듯 말 듯 살짝 쓴웃음이 번진다.

이에 헤헤, 마주 웃으며 도스는 나유타를 옆에 끼고 문을 나섰다.

마리아 브륜힐데 하사는 아덴마네의 평범한 가정집의 소녀 다. 그녀의

아버진 평범하게 성실한 회사원, 어머니는 평범하게 가정에 헌신적인 주부

로, 두 평범한 부모의 무엇을 물려받았는지 ‘특별히’활달한 여자아이 던

그녀는 개 그런 성격의 꼬맹이가 그렇듯 어려서부터 골목 장 노릇을 하

며 작은 동네의 왕으로 군림했다. 그 성격은 초등학교에도 유감없이 발휘되

어 반에 여자 아이를 괴롭히는 남자 아이가 있을라치면 유감없이 그녀가 나

타나 발차기를 날리는 것이 주된 패턴이었다. 이 악명은 겁에 질린 남자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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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사이에서부터 시작하여 선생님들이 모여 있는 교무실에까지 퍼져 학

급 남자아이와 싸움이 붙어 교무실로 불려오는 날이면 수시로 훈계를 들어

야했다.

“넌 여자 아이잖아, 약한 아이를 돕는 건 좋지만 조금 얌전히 지내는 게

어떻겠니.”

하지만 전 얌전한 게 싫은걸요. 라고 항변해도 소용없었다. 그녀는 여전

히 여자애를 울리는 남자아이를 패닦아놨고, 매번 선생님에게 혼이 났다.

그런 그녀가 세월을 따라 중학교로 진학하고, 철이 들기 시작했다. 남녀

공학인 중학교에 다녔던 그녀는 여자 야구부의 에이스 다.

“좋아해요… 선배.”

“으, 마리아? 내가 뭘 잘못했어?”

그 날 마리아는 국내 미성년 여자 야구 리그의 홈런 비거리 최고 기록을

경신했지만 날아간 공이 우연히 어떤 선배의 뒤통수를 맞추는 바람에 공식

기록은 되지 못했다.

“야, 너 나 어떻게 생각해?”

“무슨… 누가 숨어있는거냐! 나와라!”

고교 여자 야구부 던 그녀는 2학년부터 출장 정지를 당했다. 리그 홈런

왕인 그녀의 배트가 우연히도 동급생 남학우의 엉덩이를 피떡으로 만들어

놨기 때문이다.

“선배 좋아해요! 저랑 사귀어주세요!”

“…미안.”

학교 시절, 딱히 성 소수자를 차별하는 성격은 아닌 그녀는 의도치 않

게 친한 여자 후배를 울리고 난 뒤로 결심했다. 군 에 가자.

“왠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는데…”

“부디 건강하렴, 네가 잘 할 줄 알고 있단다.”

그녀의 부모님은 걱정은 하실지언정 놀라지는 않으셨다. 마치 그녀가 언

젠가 군인이 되겠노라 할 날이 올 것을 예상하고 있던 것처럼. 그 탓에 마리

아는 입 하는 날 밝게 웃는 부모님의 전송을 받으면서도 왠지 뒷맛이 개운

치 않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게 아닌데….

전투 병과에 지원한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조교들의 훈련을 다른 남자

보다 월등히 순조롭게 마치고 현 소속 부 에 부사관으로 입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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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번엔 부 내 생활이 문제 다.

마리아는 원래 부 내 여군 전용 막사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장의 허

락 하에 막사의 방 하나를 혼자 쓸 수도 있었지만 ‘다른 전우들과 동등한 취

급을 받고 싶다.’라고 소 장을 졸라 어 일반 병사를 룸메이트로 같이 쓸 수

있게 되었지만, 그로 인해 문제가 생겼다. 두 세 달새에 마리아와 룸메이트가

되었다가 그녀의 엉덩이를 더듬은 손이 작살나서 쫓겨난 멍청이들이 여섯

명 정도로 그녀는 소 의 골칫거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마리아에게 전적으로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도 이상으로 두들겨 패는 것과 굳이 남자와 룸

메이트를 하려는 것이 문제 다. 애초에 운동으로 몸매도 탄탄한 다 얼굴

도 그리 못 봐줄 정도도 아닌 여자와 건장한 남자 병사가 한 방에서 지내는데

사고가 안 나길 바라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최 한 길게 버텨야 한 달 정도.

마리아가 가장 최근 얼간이가 자신의 가슴을 만질 때 사용한 오른손을 군화

굽으로 내리찍는 순간 초등학교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넌 여자 아이잖아, 약한 아이를 돕는 건 좋지만 조금 얌전히 지내는 게

어떻겠니.”

그럴 수 없어요. 선생님, 전 이게 좋은걸요. 발치에서 우드득, 하는 소리

가 났다.

그 녀석을 마지막으로 소 내에서 더 이상 그녀에게 응큼한 생각으로 접

근하려는 남자가 사라진 것과 동시에 그녀와 룸메이트가 되려는 남자도 없

어졌다. 그녀는 평범하게 다른 병사들과 전우애를 나누며 지내고 싶었지만,

그녀가 지명하는 족족 당사자들은 사색이 되어 울고불고 매달리며 거절했다.

“별 수 없잖아, 마리아. 우리도 남자라서 여자랑 한 방을 쓰면 참고싶어

도 머리가 돌아버린다고.”

소 축구시합이 끝나 수돗가에서 머리를 적실 때 도스가 얄밉게 말했

다. 마리아가 곧바로 맞받아쳤다.

“그래, 넌 머리가 어디까지 돌아서 나한테 가랑이를 걷어차인 첫 번째 남

자가 됐냐?”

“에이, 그건 진짜 오해라니까? 정말로 발을 헛디뎌서 넘어질 때 너한테

안긴거라고. 난 결백한데 그런걸로 사람을 무식하게 패는 너한테 질려서 나

간거야. 난 잘 참고 있었어.”

이런 와중에 마침 상병이었던 알렉산더 프란시스가 타 부 에서 전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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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다. 마리아는 ‘이 녀석은 왠지 무해해 보이는게 지내는데 별 지장이 없을

것 같다.’라는 이유로 그를 지명했고, 알렉스 병장은 허허 웃으며 뭣도 모르

고 흔쾌히 받아들 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한 번 더 불상사가 생길 시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

이 여군 막사에 합숙시키겠다. 네게 잘못이 있는 건 아니지만 좀 얌전히 있

으란 말이야.”

다른 부 로 마리아를 보내버리고 싶지만 왠 만한 남자장병들 보다 유능

한 전투원인 마리아를 잃고 싶지 않은 가로드 소 장의 마지막 경고로 알렉

스가 그녀의 룸메이트가 되었고, 벌써 그 뒤로 아무 일 없이 1년이 지났다.

이 일은 부 내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며, 개중에는 ‘알렉스 게이설’, ‘알

렉스 고자설’까지 나돌고 있었고, 이런 말이 들릴 때마다 마리아는 그저 무

시, 알렉스는 맹탕같이 웃어 넘겼다. 알렉스는 정상적인 건장한 남성이었지

만 그에게 있어서 마리아는 그저 좀 털털한 여자 선임일 뿐이고, 마리아도

이렇게 자신을 보는 알렉스를 좀 거칠게 막 굴릴지라도 꽤 인정하는 편이었

다.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그들은 아주 친한 선후배 사이 정도일까. 이리하

여 그녀의 내무 생활은 안정 되었지만 그녀의 왈가닥은 여전했다.

“넌 여자 아이잖아, 약한 아이를 돕는 건 좋지만 조금 얌전히 지내는 게

어떻겠니.”

초등학생 시절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 말씀이 마지막으로 떠오른

건 어느 날 부 외출 때 주점에서 주정뱅이 아저씨들과 난투극이 벌어졌을

때 다. 새파랗게 질린 알렉스의 제지를 뿌리치고 자신의 가슴에 해 진한

음담패설을 날린 아저씨의 강냉이를 털었을 때,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름과

동시에 그간 인지하지 못했던 속 시원한 쾌감을 새삼 깨달았다. 그녀는 일

반인 폭행으로 창에 간 내내 그 때 느낀 시원한 쾌감을 떠올리고 호쾌하

게 웃었다.

그래, 이게 나한테 딱 맞는 것 같아.

그녀는 갇혀있던 내내 그녀의 웃음에 질려버린 헌병 에 의해 부 내

유명한 공포의 마녀가 되었다.

하나 둘!

삑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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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삑삑

1소 와 급식장은 부 주연병장을 끼고 서로 맞은편에 있어 빨리 가려

면 연병장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침을 시작하

는 장병들이 웃통을 벗어재끼고 아침 바람을 맞으며 구보를 하고 있기 때문

에 마리아와 알렉스는 좀 시간이 걸리긴 해도 연병장을 돌아서 갈 수밖에

없었다. 마침 둘이 걸어가고 있는 사이에 그들을 제외한 1소 원들이 저만

치 뒤쪽에서 뒤쫓아 오듯 단체로 신호에 맞춰 달려오고 있었다. 이미 2분

의 사정을 소 장에게 들어 알고 있던 그들은 이 짝이 눈에 띄자마자 차례

로 지분댔다.

“알렉스, 그림 좋네.”

“아침부터 염장질이냐.”

“어젯밤에도 별 일 없었나보다, 아침 일찍 멀쩡해 보이는 걸 보니.”

“아냐, 얼굴을 보니 좀 정기가 빨려있는 것 같아. 거무죽죽하잖아?”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스치듯 지나가면서 놀려 는 것도 마리아들에

겐 익숙한 일이었다. 소 원들은 발끈한 마리아가 쫓아오지 못하게 속력을

더 높이면서 더욱 짙은 음담패설을 내뱉고 낄낄 거리며 지나쳤다. 부분

마리아와 동계급 이상인 부사관들이 놀리는 관계로 병장인 알렉스는 딱히

뭐라 받아치지도 못한 채 특유의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좋은 아침입니

다.’요딴 말밖에 못하고 마리아가 가까스로 마지막 줄에서 뛰며 아무 말도

없이 웃기만 한 애꿎은 소 신입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뭐, 이 로도 괜찮은 거겠지 말입니다….”

“뭘 신경 써 멍청아, 저 새끼들 오늘 우리가 일찍 밥 먹는다고 부러워서

저러는 거야.”

마리아와 알렉스가 부 내 급식장에 들어섰을 때엔 아직 조례를 할 시

간이라 그런지 꽤 한산했다. 단지 배식창 너머로 보이는 조리장에 요리 냄

새와 함께 취사병들이 막바지 준비로 분주히 움직이는 것이 보 다.

“배식 시간 아직 멀었습니까?”

알렉스가 배식창에 고 외치자 무언가를 굽는 듯한 지글지글하는 소리

와 함께 낯익은 얼굴의 병장 계급장을 단 모자를 쓴 중년 사내가 불쑥 머리

를 디 었다. 마리아나 알렉스보다 나이가 훨씬 많이 든 그는 취사병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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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위치만큼 부 내 장병들과 서로 얼굴 정도는 알고 지내는 관계로, 그

는 알렉스와 동계급이지만 그들 보다 한참 더 고참으로 마리아가 이 부 에

병장으로 배속되었을 때에도 병장으로써 취사의 의무를 다하고 있었다.

“보면 모르냐? 그렇잖아도 거의 끝나가니까 거기 좀만 기다리라고. 너흰

왜 이렇게 빨리 온 거야?”

“임마, 여기 하사님도 있다. 너희가 뭐냐 너희가?”

“시끄러워 1중 마녀, 취사병한테 개기면 무사히 밥 못 먹을 줄 알아.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계급의 상하를 떠나 취사병의 분노를 사면 만족스러운 식사를 기 할 수

없는 법.

둘은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급식장은 넓고 제식훈련 받는 병사들처럼

도열해 있는 텅텅 식탁들, 원래라면 식사 전 일과 때문에 두 사람을 제외한

사병들은 식당에 있을 리 없지만 식당 한 가운데 식당에 앉아 있는 신문을

읽고 있는 두 군복 입은 남자가 보 다.

의아한 마리아가 그 들에게 다가갔다. 충분히 가까워지자 신문의 헤드라

인이 보 다.

‘텝스턴 주 연합국과의 첸-텝 정상회담에서의 공왕 발언 파문, 연합 내

반첸 감정 확산.’

얼마 전 있었던 회담에서의 공왕의 발언, ‘연합국은 할라마의 계보를 잇

는 만큼 과거 제국이 공국을 침략하여 빼앗은 토 일부를 반환하여야 한

다.’. 의회는 공왕이 형편없는 외교력을 보여줬다며 길길이 날뛰었고 연합은

여기에 화답하듯이 공국으로부터 수입되는 물품의 관세를 올려버렸다. 연합

은 이번 일로 인해 일치단결하여 공국을 향한 적 심을 불태우고 있는데 비

해 공국은 이번 실언을 패기와 소신 있는 명 발언으로 포장하려는 공왕 측과

필요 이상의 실언으로 깎아 내리려는 의회 측으로 나뉘어 다투고 있었다.

“나라는 무능한 우두머리 때문에 외적으로 위기에 처해있는데 내적으

로도 둘로 나뉘어 나라가 위태롭기 짝이 없지. 이럴 때에 우리 군은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할까 제군들?”

신문을 탁, 접으면서 그 너머로 전투 장 이치카 중령의 얼굴이 등장

했다. 눈꼬리와 언제나 빙글빙글 웃고 있어 장난꾸러기 여우처럼 보이는 얼

굴이 무색하도록 부 내를 휘젓는 중령의 기행은 유명한 것이었으므로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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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는 별로 놀라지 않고 자연스럽게 경례했다. 중령이 경례를 받는 신

손을 저으며 답을 재촉하자 ‘이 녀석은 귀찮은데.’라는 듯 잔뜩 떫은 표정

을 짓고 있는 마리아 신 알렉스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오로지 국방의 의무에 집중하여 외적 불안 요

소를 경계하는데 주력해야 합니다. 이 곳은 장교 식당이 아닙니다만, 중

장님.”

“훌륭한 국군의 자세일세 병장. 오늘은 보급 의 콘웰 중령과 여기서

아침을 먹기로 했지. 우리가 좋아하는 햄버거가 나오는 날이라서 말이야.

장교 식당이 음식은 좋은데 맨날 점잖 빼는 메뉴만 나온다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번엔 맞은 편에서 신문을 걷으며 콘웰 중령의 얼

굴이 나타났다.

“오늘은 저녁은 괜찮은데 아침이 아니라고, 계란 푼 콩나물 북어국이

라니, 난 금주중이란 말이야.”

콘웰은 입가의 팔자 주름이 더욱 짙어지도록 혀를 쯧 하고 차고선 신문

을 접고 옆으로 치웠다. 아무래도 자리를 권할 셈인 듯 한데 일찍 식사를 할

기 에 부풀어 있던 마리아는 이런 바라지 않은 상황을 맞이하여 침울해졌

다. 이치카는 과장된 행동으로 옆의 의자를 뒤로 당기며 권했다.

“자리에 앉게 제군, 얼굴을 보니 자랑스러운 우리 의 원이군, 유명

한 전투 의 미녀 마리아 하사도 잘 알고 있고, 설마 조회 땡땡이 치고 온

것 같지는 않고, 무슨 일로 이렇게 빨리 왔는지 말해 주겠나?”

어차피 자신이 속한 의 일이기에 마리아가 아침에 있었던 나유타의

일을 보고했다.

“저런, 아마 콘웰에게 수업을 받고 있었지, 의무 로 갔나?”

“예, 그렇습니다.”

이치카 또한 나유타에 해서는 어느 정도 잘 알고 있었다. 반년 하고 조

금 더 전, 갑자기 친우 콘웰이 처음 보는 병사 한 명을 데려와서 막무가내로

자기 에 전입시켜 달라고 한 일을 기억하고 있다.

콘웰이 적잖이 충격인 듯 중얼거렸다.

“오늘 한 번 직접 가봐야겠는데, 그 녀석이 아프단 말이지, 허.”

“운이 좋네, 오늘은 외래 지원 진료일이거든. 민간 의사가 지원해서 의무

일을 하는거지. 하여간 군의관이라는 것들은 파스, 파스, 파스 밖에 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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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안심하고 보여줄 수가 없단 말이지.”

이치카가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저었다. 악명 높은 의무 의 능력은 전시

상황에서의 응급처치에 국한되어 있었다. 때문에 평시에서의 그들은 아픈

병사가 찾아오면 파스 좀 뿌려주고 침 에서 쉬다가라고 말해주는 것이 일

의 전부 다.

“뭐 전쟁터에서 약처방하고 수술할거 아니니까 그 정도면 상관 없지만,

그나마 외래 진료 같은게 있으니 망정이지.”

“이치카, 전쟁 몇 번이나 나가봤다고 그래? 그러고보니 자넨 전투 병과

인데도 나보다 실전 경험이 없지.”

“그래서 뭐 내가 틀렸냐?”

두 높은 양반들의 투닥거림에 끼지 못하던 사병들, 이치카가 신문을 말

아 콘웰에게 자비없는 물리적 공격을 퍼붓던 와중에 알렉스는 문득 무언가

가 떠올랐다.

“병장 알렉산더, 궁금한게 있습니다. 콘웰 장님.”

이치카에게 맞 응하여 똑같이 만 신문지로 역습을 가하려던 다 큰 어른

콘웰은 포기하고 총애하는 부하의 질문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저흰 나유타와 같은 부 , 같은 소 에 속한 가장 가까운 전우이면서도

그의 과거에 해선 한 가지도 들은 바가 없습니다. 가족이 있는지, 어디 출

신인지, 심지어 정확한 나이가 몇인지 조차도요. 본인에게 물어봐 봤자

답을 피하더군요.”

“그럴 만하지, 그는 충분히 그런 사정이 있네.”

“예, 하지만 콘웰 중령님은 그가 입 하기 전부터 알고 있는 사이라고 들

었습니다. 저희 부 에 오게 된 것도 중령님 향이 컸다고요.”

“음, 그렇지.”

갑자기 달라진 공기에 당황한 마리아는 콘웰의 심상치 않은 표정에 혹시

나 알렉스가 괜한 화제를 꺼낸 것은 아닌가 하여 불안해졌다.

“그래, 그렇다면 병장은 그의 얘기를 듣고 싶은 모양인데.”

“그렇습니다. 중령님.”

그 말에 콘웰은 빙긋, 웃었다.

“훌륭한 전우애지만, 병장. 나 또한 그를 그렇게 잘 아는 편은 아니네. 내

가 나유타를 안 건 그가 군에 입 할 시점과 크게 다르지 않지. 그의 인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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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에 해선 현재로썬 누구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맞겠군.”

“그 말씀은 나유타 본인도 모른다는 겁니까?”

“그렇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에게는 충분히 그럴만한 사정이 있지.”

“알려주실 수 없겠습니까?”

알렉스는 다시 요청했다. 콘웰은 하하 웃었다.

“아직 시기상조야 제군, 자네는 전우애라는 그럴싸한 말로 포장했지만

어디까지나 본인의 호기심 때문에 그의 과거를 묻는거지.”

질문자는 뜨끔하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그의 과거에 해 물을

생각도 콘웰의 얼굴을 보자 떠오른 것이기 때문이다.

콘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젠가는 본인이 직접 말할 날이 있겠지. 어쨌거나 지금은 자네가 들을

준비가 안되있을거라 생각하네.”

콘웰이 일어나고, 때맞춰 배식 시작을 알리는 취사병의 외침소리가 들렸다.

의무 건물 진찰실, 매우 한적했다. 하기사 평범한 군부 의무실에 평

일 아침부터 진찰받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마는. 기실은 벽을 따라 주루

룩 서 있는 기자를 위한 의자와 진료실입구를 가리는 칸막이, 그 옆에 접

수 받는 의무병이 두 명 앉아 있다. 그 중 한 명은 자세에 힘이 들어가 있는

채 책을 읽고 있지만 다른 한 명은 어느 정도 계급이 있는지 의자 위에 한껏

늘어져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여기까지 부축해 온 도스가 진찰 받을 때까

지 기다려 주겠노라 하며 나유타를 앉히고 그의 옆 자리에 앉았다. 식사도

해야 하고 자신의 일도 바쁠텐데 고마운 일이다. 업무보는 담당 의무병이

체온을 재기 위해 체온계를 들고 왔다.

“여기서 기다려 주십쇼. 아침 일찍 오셔서 의사 선생님이 아직 준비가 안

된 거 같습니다. 먼저 체온 재겠습니다.”

38도, 보통 사람 기준으로도 상당한 고열이다. 의무병은 고개를 갸웃하

고 미리 침 하나를 치워놓겠다고 한 뒤, 졸고 있던 고참병에게 보고하고

둘이 같이 입원실로 갔다.

도스도 잠깐 화장실에 간다고 하고 나간 뒤, 기실에는 나유타 혼자 남

게 되었다. 다행히 날씨는 좋아 기실 한 켠에 있는 창문으로 햇빛이 쏟아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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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왔다. 몸살 기운과 고열 때문에 매우 한기가 느껴지던 나유타는 몸을 잔뜩

웅크린채 멍하니 창문을 바라봤다. 늦여름 아침의 햇빛치고는 왠지 봄햇살

마냥 따스해, 보는 것만으로 조금은 안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예 창가쪽

에 서서 햇빛을 쪼이는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던 차에 창문 구석에 느닷없이

고양이가 불쑥, 얼굴을 내 고 나유타와 시선을 마주쳤다. 갈색 얼룩 무늬를

가진 그 고양이는 한창 나유타의 동정을 살피다 꽤 안전하다고 생각 됐는지

창틀에 올라가 길게 엎드려 눕고 여보라는 듯 느긋하게 햇빛을 쬐기 시작했

다. 고양이는 병사들이 남긴 잔반을 먹고 사는 여느 다른 고양이들과 마찬가

지로 토실토실하고 털에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그런 고양이의 등을 보자니

나유타는 문득 창문을 열고 쓰다듬고 싶다는 충동이 느껴졌다.

아픈 몸 때문인지, 분명 평상시에도 쓸데 없는 일은 자제하는 편인 나유

타는 몸이 자기의지와 상관 없이 움직여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오한 때

문에 덜덜 떨리는 다리로 몸을 일으켜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창문으로 움

직 다. 고양이는 그런 나유타를 아는지 모르는지 얌전히 눈을 감고 입을

짝 벌리며 하품을 하면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이제 손만 뻗으면 창문 손

잡이에 손이 닿을 거리, 이제 손만 뻗으면….

“환자분? 진찰 받으세요… 어머.”

문득 진료실에서 목소리가 들리고 나유타는 고개를 돌렸다.

여인이 서있었다.

틀어 올린 갈색 머리에 갈색 눈은 나유타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다. 스물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인의 얼굴은 그저 희고 맑다는 막연한 느낌, 살짝 내

려간 눈꼬리와 빙긋 웃느라 올라간 입꼬리가 보기 좋은 칭을 이뤘다. 고

개를 고양이에게 돌리며 진료실 밖으로 한 걸음 내딛는다. 귀에 걸린 초록

빛 귀걸이가 짤랑하고 흔들렸다. 살짝 걷힌 소매 밖으로 잡으면 꺾일 듯 가

느다랗고 하얀 팔이 카르테를 들고 있었다. 의사의 복장인 흰 가운 아래에

연두색 블라우스와 무릎을 살짝 드러내 보이는 검은 치마, 플랫 슈즈를 신

고 있는 다리는 멍자국 하나 없다. 전체적으로 꽤나 키가 작고 가늘어 보이

는 여의사는 그저 평범해 보이는 여자일 뿐이었다. 그런데….

“고양이네, 귀여워라.”

여의사도 고양이가 있는 창문가로 다가왔다. 나유타는 여전히 몸을 웅크

린 상태에서 손을 뻗은 채 굳어있어 꽤나 웃긴 자세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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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양이 좋아하세요? 여기는 군 인데도 고양이가 많네.”

여의사가 창문에 다가오자 고양이가 문득 고개를 탁 쳐들고 창문 안의

두 남녀를 본다. 빤하게 뜬 고양이의 눈은 똑같이 커다랗게 눈을 뜬 채 움직

이지 않는 나유타를 주시한다. 의사는 고양이의 시선을 따라가다 웃기는 자

세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나유타를 봤다.

그런데 왜….

“음? 환자분? 제 말 들려요?”

세상이 기울어지는데도, 왜 이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는걸까.

“정신차려요! 의무병! 의무병!”

아, 눈을 감으면 되겠구나 ….

계속

✥ <미첼라이아의 용병들>은 작가님의 컴퓨터 하드가 날아가버린 관계로 이번 호는 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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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박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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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흰나비의 날갯짓전혜진

그 가게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볼 것도 없이 문을 열자마자 단숨에

눈 안에 그 모습이 다 그려질 만큼 작았다. 동그란 안경에 제 로 빗질하지

않은 것 같은 머리카락, 충 깎다 만 턱수염이 마치 히피족처럼 보이는 이

곳의 사장은, 들어오는 손님 하나하나와 눈을 맞추고는, 여기서 지하철역까

지 한 번 뛰어갔다가 돌아올 만큼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다가가 나직한 목

소리로 주문을 받았다. 낮이 되면 벽면에 붙어있는 만화 판넬이며 사인에

햇살이 어른거리고 밤이 깊어지면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를 셀 수 있는 이곳

은, 사방에 자리잡은 책꽂이들마다 낡은 만화책이 가득했고, 창가 쪽 자리

에는 책상과 라이트박스가 준비되어 있었다. 지금 당장, 무엇이라도 해 보

라는 듯이.

봄이라고는 해도 아직 여름이 오려면 먼 날이었다. 이런 달밤에, 번화가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공원이라고 하면 으레 불량한 젊은애들이 모여서 담

배를 피우거나 뭔가 소란스런 일이 일어날 법 한데도, 밖에서 들려오는 소

리는 평화로웠다. 취객들의 목소리, 바로 옆 상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

창 밖에 내려다보이는 공원 바로 옆, 단단하게 자리잡은 홍익지구 동교치

안센터 때문일까. 나는 며칠째 이곳의 창가 쪽 자리에서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 뼘쯤 열린 창 밖에서 희미한 유행가가 새어 들어왔지만, 이곳에

는 아이돌 가수의 춤과 노래와는 어쩐지 유리된 듯한, 묘한 탈속적인 분위

기가 있었다. 사장도 사장이었지만 이곳의 손님들도 묘한 이들이 적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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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아까 낮에는, 구석 쪽 자리에서는 폭파를 앞두고 있다는 제주도의 커다

란 바위를 구할 방법을 목소리 높여 의논하던 젊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배경

삼아, 이쪽 창가 쪽 자리에서 웬 인터넷 웹진을 만든다는 젊은 남자가 번역

가와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그때도 이곳은 여전히 탈속적이었지만,

이곳이 정말로 활기를 띠고 살아나는 시각은 바로 지금처럼 달이 어두운 하

늘 위로 모습을 드러낼 때다. 저쪽 구석에 앉아 있는 젊은이들은 이삼 일 전

과 마찬가지로 만화와 웹툰의 미래에 해 이야기를 했고, 가운데 쪽, 큼직

한 곰 인형을 앉혀놓은 테이블에 마주 앉은 세 사람은 아무래도 편집자나

뭐 그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인 듯 보 다. 주말이면 카페 문을 열자마자 노

트북이나 종이 뭉치를 끼고 들어와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글을 쓰다가 밤

이 깊어지면 맥주 한두 병을 비우고 돌아가는 작가들도 자주 보 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들을 보는 신, 유리창에 흐릿하게 비친 그들의 모습을 마

치 만화경을 들여다보듯 바라보았다.

“사장님!”

문이 열렸다. 뿔테 안경을 쓴, 머리카락이 짧아서인지 어쩐지 개구쟁이

사내아이 같은 키 작은 여자가 뛰어 들어오더니 까치발을 하고 카운터에 매

달렸다.

“홍 앞을 배경으로 짧은 걸 쓰려고 하는데… 아직 내용은 정하지 않았

지만, 여길 배경으로 써도 될까요?”

“조용히 말해도 알아들어요.”

“앗, 예.”

“그리고 써 주면 우리야 좋지요.”

“감사합니다. 아, 사장님. 사장님 안경에서 레이저 빔 같은 것 나가는 이

야기 써도 될까요?”

그 어처구니없는 말에 사장은 웃었다. 작가인가, 아직 신출내기인지, 데

뷔 전인지. 그냥 봐서는 알 수 없는 그 젊은 여자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용

수철이 튀어오르듯 고개를 들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친구들이랑 술 마시러 올게요!”

들어왔을 때처럼 뛰어나간 그녀는 계단을 한 번에 두 단씩 뛰어 순식간

에 밖으로 달려나가, 어지간히 신이 난 모양인지, 공원을 가로질러 달려가

는 그녀의 구두는 땅을 차고 날아올랐다가 다시 내려앉아 땅을 차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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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했다. 구두에 날개가 달린다면 그 로 날아오르고도 남았겠는걸. 골목

골목, 메아리치는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나는 문득, 그 발소리를 따라 귀를

기울이다 몸을 일으켰다. 창가에는 나비 고치가 매달려 있었다. 이미 나비

가 찢고 날아간 듯한 빈 껍데기들 사이로 아직 나비가 숨어있는 듯한 여문

고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봄이라고는 해도, 이제 겨우 놀이터의 벚꽃들

이 하나 둘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는 3월 말인데, 벌써 이렇게 나비들이

날아다닐 때가 되었나. 신기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고치를 만져

보려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건드렸다.

“테이블이 만석이라서요,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예?”

“다른 손님들이 자리 없다고 돌아가면 미안하니까요.”

남자는 빙긋 웃어보이고는, 내 답을 구하지 않고 눈사람 모양의 찻잔

과 포트를 들고 내 곁으로 왔다. 나는 나비 고치에 잠시 눈길을 주다 말고 자

리에 앉았다.

“좋은 곳이죠, 여긴.”

그도 여기의 단골일까. 이런 곳에서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게 쉬운 일

만은 아닐텐데, 그게 뭘 걱정하여 내게 말을 붙 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그, 작가나 편집자 같은 이들이 와서 저들끼리 무리지어 노는 외

에는 한가하여 쓸쓸하게까지 느껴지는 가게지만, 홍 의 어느 한 구석 사람

없는 곳이 없다는 금요일 밤부터 주말 사이에는 그래도 사람이 제법 든다.

목이라 부르기엔 부족해도 제법 사람이 드는 이때에, 테이블 하나가 아쉬

울 사장을 배려하는 마음이겠지. 그도 이 가게의 단골이었던 모양이다. 나

는 창가에 매달린 동글동글한, 마치 크리스마스 장식품 같은 전등들을 바라

보며 내 짐을 옆으로 치웠다. 몸에 꼭 맞는 수트 소매 끝으로 눈처럼 새하얀

셔츠 소매가 엿보이는 남자는 내 옆자리에 앉아 내가 쓰던 것을 흘끔 들여

다보았다.

“김독각이라고 합니다. 마포구청에서 일하고 있지요.”

“아, 예.”

“글을 쓰고 계셨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 다. 그러다가, 쓰던 것을, 오늘 들어 한 줄도 미처 쓰

지 못한 빈 노트를 얼른 가방에 쑤셔넣었다. 김독각이라는 남자는 더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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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쪽을 돌아보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자연발생설이라고 있잖습니까.”

“예?”

“진화론 말고 자연발생설요. 중세에 사람들이 아직 그걸 진리라 받아들

을 때에는, 애벌레와 나비 사이의 관계조차 알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

시절, 사람들은 셔츠에 땀이 묻은 것을 창고에 두면 땀에 담긴 생명의 정기

때문에 쥐가 생겨났다고 했답니다.”

“정말요?”

“예, 그래서 셔츠와 알을 창고에 방치하고 얼마 뒤 쥐가 나오는 실험

같은 것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예. 사실, 쥐가 생겨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지요. 하지만 아주 틀린 말

은 아닙니다. 게서 아무 것도 생겨나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럼 뭐가 생겨나는데요. 곰팡이?”

“도깨비.”

“무슨 그런 농담을….”

웃어넘기려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독각이 서늘한 표정으로 나를 바

라보고 있었다. 그의 그림 같이 단아한 얼굴에는 어쩐지 인간 같지 않은 구

석이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완벽한, 보수적이고 단

정한 수트 차림을 한 젊은 직장인일 뿐인데도.

“…어떻게 알았습니까.”

확인하듯 묻다가, 깨달았다. 사람이 아니다. 남자의 눈을 똑바로 보고서

야, 알 수 있었다. 그는 사람이 아니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머리카락이 날리

듯 살랑거리는, 그의 머리께에 흐르는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할 파르스름한

기운을 읽고서야, 나는 그가 누구인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나는 당신과 같은 부류입니다.”

“도깨비라고요?”

“예.”

“잠깐, 잠깐. 아까 분명히 구청에서….”

“도깨비도 먹고는 살아야지요.”

“그게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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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봬도 시험 제 로 보고 들어간 것 맞습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나는 혀를 찼다. 독각은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완벽한 옷차림과 신분증

이 아니었다면 그야말로 미친놈의 헛소리라 일축해도 할 말이 없었겠지만,

아무리 숨기려 애를 써도 희미하게 느껴지는 그의, 달빛처럼 파르스름하게

빛나는 존재감은 그가 결코 인간이 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주민등록증과 같았다.

“세상에, 정말이지… 도깨비가 공무원 시험을 보는 이 맛이 간 세상에,

나 같은 존재는 이제 나밖에 남지 않은 줄 알고 살았으니.”

“생각보다 많습니다. 점점 사라지고는 있지만.”

“아직 남아있다고요?”

독각은 고개를 끄덕 다.

“이 근처는 예전에 도깨비들이 놀던 터 어요. 음기가 강한 곳입니다. 여

기서 강 쪽으로 조금만 나가면, 예전에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하던 터도 있

었지요. 그들의 고혼이 아직 돌아다니고, 이 땅을 처형의 땅으로 만들었던

음기가 다른 터의 귓것들을 끌어당기며, 와우산 자락에서 놀던 도깨비들의

흔적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는.”

독각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지구 앞의 환한 불빛

아래 사람들이 지나다닐 때, 그 불빛을 한 걸음 옆으로 피하여 지나가는 이

들이 있었다. 늘 보고 있었지만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새삼스레 눈에 들어

왔다. 독각은 차분한 목소리로 부연했다.

“홍 앞은 그렇게 산 자와 죽은 자와 죽지 못한 자들이 함께 섞인 채 살

아가는 곳입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씨 없는 수박이 어쩌고 하며 목소리를 긁어 올리는 노래에, 구석 테이블

에서 맥주를 마시던 몇몇이 키득거리며 노래를 따라 부른다. 만화책을 보며

술을 마시는 젊은 사람들, 노트북 한 를 들고 와, 담배 한 갑을 다 태우도

록 글을 쓰는 사람, 큼직한 곰 인형 옆에 앉아 곰 인형과 술잔을 주거니 받거

니 하는 사람. 이곳의 사람들도 그럴까. 이곳에는 나와 지금 이 남자 말고 또

누가 있는 걸까. 나와 다른 존재가 어딘가 있으리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한

번도 만나지는 못했다고 생각하던 내 눈에, 창 밖을 지나가는 사람들 중 섞

여있는 인간 아닌 이들의 모습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믿기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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렵지만 믿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듯, 눈을 깜빡이며 그들을 바라

보았다.

“언제부터 그랬던 겁니까?”

“이곳이 도깨비 터 던 거야, 당신이나 내가 세상에 생겨나기 한참 전부

터의 일이었지요.”

“아니, 그게….”

독각은 긴 손가락을 서로 겹쳤다 풀며 나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홍 가 예술가들의 거리로 알려지게 된 것은, 집세가 싸서 가난

한 예술가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었지만, 집세가 싼 곳은 여기 말고도 많이

있었어요. 하고많은 집세가 싼 동네 중에 이곳에 예술가가 모여든 것은, 이

곳이 도깨비 터 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집세가 올랐다고요?”

“아니, 더 이상 도깨비 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당신이 살던 곳에서 내

쫓겼듯이.”

그는 내 내력을 모두 꿰뚫어보는 듯한 표정을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나

는, 가슴이 욱신거렸다. 인간 아닌 존재에게도 심장이 있다면 말이지만, 가

슴이 아팠다. 그 말 한 마디에 눈물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얼굴이 되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독각이 내 손목을 잡았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군요. 술이라도 한 잔?”

“이런 이야기는 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에게만 일어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독각은 내 손을 꽉 잡아 누르며 힘주어 말했다.

“신명난다는 말 압니까? 그건 그 사람에게 신명이 씌인 것 같은 상태를

말하는 거죠. 평소답지 않은, 고양된 상태. 평소 이상의 무언가를 만들어내

는 그런 상태. 유독 사람들이 신명이 나서, 글이건 시건 노래건 춤이건 쏟아

내는 그런 곳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명동이 그러했지요. 예전의 명동이 어

떤 곳이었는지, 아십니까?”

“아, 손은 좀 놓고 말해요.”

“해방 이후 그곳의 골목골목에는 시인이며 음악가, 화가들이 가득했습

니다. 명동의 신사 던 박인환이 어느날 그곳의 한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말고 시를 쓰고, 기자이자 아마추어 음악가 던 이진섭이 앉은 자리에서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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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붙여, 마침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던 가수 나애심이 즉석에서 노래를 불

렀지요. 화의 한 장면 같지 않습니까. 그게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입니다.

오십 년 전 그 곳에서 있었고, 바로 몇 년 전까지 이곳, 홍 의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던 바로 그런 일들 말입니다. 당신도 모르지 않을 텐데요. 반지하 구

석방에서 자작곡을 기타로 연주하며 웃고 떠들고 놀거나, 치열하게 글을 쓰

고 만화를 그리던 젊은 사람들을. 지금도 그런 이들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무엇에 려났는지 당신도 모르지는 않겠지요.”

“…이봐요.”

“지금의 명동은, 그저 관광객들의 쇼핑 명소일 뿐입니다. 가난한 시인과

음악가들을 끌어들이던 그곳의 작은 가게들이 개발이라는 명분 하에 헐려나

가며, 그곳에 깃들어 있던 터주들도 사라졌습니다. 이 세상에 터주며 가신 없

는 집이야 어디 있겠으나, 그곳의 터주들은 조금 달랐지요. 지니어스 로사이,

하나같이, 깊은 우물처럼 억눌린 한을 안은 인간의 희노애락을 우물처럼 길

어올려, 사람들에게 감을 불러 일으키는 존재들이었어요. 그곳의 젊은 예

술가들을 끌어안은 그 신명들은, 그들의 붓질 하나, 쓰는 단어, 부르는 노래

하나하나를, 그야말로 신들린 듯 한 무언가로 만들어 놓았으니까요.”

손을 빼려 했지만, 그의 손바닥은 내 손등을 더욱 꽉 눌렀다. 아니, 손을

뺄 수 없었던 것은 오히려 나 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가 나직하지만

힘주어 말하는 그 모든 말들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 숨을 죽 다. 아니, 처음

부터 숨을 쉬고 있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의, 인간인 양 하던 모든

사소한 행동들이 낯설어졌다. 그가 나를, 인간 흉내를 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게 된 집 잃은 가신이자 떠돌이 도깨비 던 나를, 다시 예전의 모습으

로 되돌려 놓기라도 하는 것만 같았다.

“산업화가 진행되며 명동의 터주들은 부분 사라졌지만, 그들 중 일부

는 이곳, 예전에 도깨비 터 던 이곳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본래 놀기

좋아하던 도깨비 터 던 이곳에는, 당신과 같은 새로운 존재들이 태어났지

요. 반쯤은 신명난 도깨비인 동시에 이곳의 터주인 이들, 신명난 사람들의

혼이 담긴 물건들에서 만들어져 그 공간을 가득 채우고, 다시 그 공간에 들

어서는 이들에게 감을 불러 일으키는 존재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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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박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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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완벽하게 이해했다.

나는 창가에 어른거리는 불빛을 바라보며 내가 처음 눈을 떴을 때 보았던

그 가없는 어둠을 떠올렸다. 태초와도 같던 깊은 어둠, 그리고 그 어둠을 반

으로 가르듯 천정 위에서부터 바닥으로 흘러내리듯 매달린 흰 천. 숨막히는

어둠 사이에서 달이 뜨듯, 머리카락을 삭발한 한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희

고 검게 얼굴에 분을 발랐던 그 남자를 보았을 때에도, 나는 내 존재를 깨닫

지 못했다. 그 이전에는 없었던 나라는 존재가, 그 남자가 자신의 온 기백을

실어 첫 사를 내뱉던 그 순간, 그 어둠 속에서 생겨났다는 것도.

- 이제는 결혼식에 가도 좋아, 창녀.

조롱하듯, 흐느끼듯, 절망하듯 내뱉은 그 사를 듣는 순간, 나는 내게

귀가 있음을 알았다. 내게 그 어둠을 응시할 눈이 있음을 알았다. 내가, 그

무 위에 늘어진 흰 천에 깃들어 있음을 알았다. 어둠을 가르고 이승과 저

승을 잇는 도처럼 내리걸린 그 천 위에, 죽지도 살지도 않은, 애초에 생명

을 얻은 적도 없었던 나는, 생겨났다. 온통 새카맣던 벽, 바닥에 쪼그려 앉아

공연을 보던 젊은 학생들, 춤을 추듯, 바닥을 구르며 이해할 수 없는 사

의 파편을 중얼거리고 때로는 소리치던 남자의 모습. 사람들이 사라진 한밤

중이면 포장마차의 쓸쓸한 불빛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그곳을, 나는

아직도 어제처럼 선명히 기억한다. 불어오는 강바람에 흙먼지가 날리고, 때

로는 제 격정을 못 이긴 젊은 학생들이 주먹다짐을 하던, 변두리 중에서도

변두리 던 그곳을. 그곳을 사람들이 부르던 이름을, 그 시커먼 건물에 걸

려 있던 간판을, 나는 기억한다.

“씨어터 제로….”

그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나는 내가 이제 다시는 인간 흉내를 낼 수 없

을 것을 알았다. 내가 얼마나 멀리 와 버렸는지를 문득 깨달았다. 이제는 돌

아갈 수 없는 곳.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그 곳이었다. 독각의 손길이, 내 어깨

를 스쳤다.

“…어딘지 압니다. 예전에, 주차장길 쪽에 있었던.”

“어느 순간, 다들 가 버렸어요.”

북소리, 종소리, 찢어지는 듯한 전자음과 함께 통곡하고 울부짖으며 부

르던 애국가.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적힌 만장. 웃옷을 벗고, 알몸에 검은

천만을 두른 남자들이 눈처럼 새하얀 상여를 들었다. 일렉기타의 전자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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꽹과리 소리가 뒤섞 다. 경찰차의 사이렌은, 그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소리,

소리에 뒤섞여 제 로 들리지도 않았다. 그건 장례식이었다. 죽지 않았어.

난 죽지 않았어. 아무리 울부짖어도 사람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곳

에, 그 터에 매인 존재가 지르는 비명은, 슬퍼하는 이들의 귀에도, 부수려 하

는 이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침통한 얼굴의 남자만이, 그 목소리를 들은 듯 잠시 걸음을 멈추어 뒤 돌

아보았지만.

그게 끝이었다. 마지막이었다. 아무리 애원해도, 돌아오지 않았다. 건물

이 부서지고, 강바람에 날리던 흙먼지는 건물을 올리는 시멘트 가루가 되었

다. 한때 비가 오면 발이 빠지던 흙바닥이었던 그곳은 말끔하게 포장이 되

어 주차장과 상수역에서 홍 앞 상권을 있는 길로 변모했다. 그리고 예술

가들이 떠난 그 자리에는 예쁜 케이크를 파는 카페와 일본식 술집과 옷가게

가 들어왔다. 흘러내린 눈물이 파란 도깨비불이 되어 떠돌다가, 그마저도

메말라 사라져버리는 동안에.

“이곳,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는 일이죠.”

“….”

“울지 마십시오. 당신이 울면.”

“알아요.”

“도깨비불은 안 돼요. 우리 같은 존재를, 사람들은 모르니까.”

“알고 있어요….”

“얼마 전에는 리치몬드 제과점이 문을 닫았습니다. 그 자리에는 기업

에서 운 하는 커피 전문점이 들어온다고 하더군요. 당신이 사랑하던 씨어

터 제로를 어낸 작은 카페들 중에도, 기업 프랜차이즈와는 다른 저마다

의 개성과 독자적인 로스팅으로 사랑받던 곳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카페

하나하나가 홍 의 명소가 되었습니다만, 이제는….”

독각은 서글프게 중얼거렸다.

“결국은 이곳도 명동처럼 될 겁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사라진다면

머지않아 외국인 관광객들의 관광지로나 알려지겠지요.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홍 앞은, 더 이상 관광명소 비슷한 것도 될 수 없을 텐데, 황금

알에 눈이 멀어 닭의 배를 가르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고 있지요. 처

음에는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그 다음에는 자본을 앞세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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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그런 일을 내버려두는 거예요. 구청에서 일한다면서.”

“공무원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을 것 같습니까.”

독각은 시계를 보았다. 이미 자정이 넘은 지 오래 다. 사장은 구석에서

술을 마시다 노트북을 끌어안고 잠이 든 젊은 작가를 두들겨 깨웠다. 마침

내 마지막 손님이 나가고, 사장은 가게의 문을 잠갔다. 그리고 문을 등지고

선 채, 나와 독각을 바라보았다. 독각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내려다보았

다. 사장은 냉장고에서 맥주 세 병과 마른안주, 그리고 아마도 나와 독각의

몫인 듯 한 메 묵을 꺼내 가운데 테이블에 차려놓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입니다.”

“무슨….”

“왜 당신이 이곳에 온 것 같습니까.”

나는 답하지 못했다. 그저 발길이 이끌렸으니까. 그저 무언가가, 나를

이곳으로 불러들 으니까. 몸서리치는 추위가 몰아닥치던 그날 새벽, 나는

홀리듯 이곳에 들어와 앉았다. 결코 결론을 맺지 못할 이야기를 빈 연습장

위에 보이지 않는 글자로 적어나가며, 나는 교통사고를 당한 지박령이 결코

그 지역을 떠나지 못하듯이 이곳에서 맴을 돌았다. 해가 지면 창가에서 글

을 쓰기 시작하여, 손님들이 모두 사라진 뒤에도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

고,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나흘,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날을 보냈다. 때

로는 통기타를 들고 온 가수가 노래를 불렀고, 때로는 우쿨렐레라 불리는

작은 악기들을 들고 구석에 모인 사람들이 서투르게 코드를 짚으며 웃음을

지었다. 평일 낮에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하루를 버티며 글을 쓰는 사람이

있었고, 주말이면 저마다 만화책을 보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며 서로

다른 일을 즐기는 일행들이 가운데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무언가 서로 맥

락이 맞지 않는, 그러나 결국은 하나로 귀결되는 이야기를 몇 시간씩 떠들

어 며 맥주를 마시다 갔다. 그저 그런 것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언제까

지나 이곳에 있고 싶었다. 씨어터 제로가 내 눈 앞에서 부서져버린 뒤, 처음

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내가 처음 눈을 떴던 그 가없는 어둠 속에서 느껴

졌던 열정의 편린이,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 있었다. 이, 어둡지

만 빛을 품고 있는, 하늘 끝에 걸린 희미한 아침 노을 같은 작은 카페 안에.

그래서 떠날 수 없었다. 이곳이, 내가 머물 곳이 아님을 알면서도. 사장

은 맥주를 따서 내게 건네며, 그런 내 속내를 다 짚었다는 듯 한 마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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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마흔 아홉 날 쨉니다.”

“…예?”

“우리 가게에서 먹고 자고 하신 기간이.”

“….”

“돈 낸 기억은 없죠?”

“그런 것 같긴 한데….”

“뭐, 안심하세요. 이 친구가 낼 거니까.”

사장이 장부를 뒤적거리자 독각이 어깨를 으쓱해 보 다.

“그래도 됩니까, 저기….”

“덕분에 손님들이 많이 오셨으니까요.”

사장은 내 앞으로 메 묵을 어 놓아주었다.

“신이 지나는 길이다 보니 손님 같은 분이 많이 오시죠. 짧게는 사흘, 길

게는 손님처럼 49일. 그 동안에는 유난히 우리 가게에도 손님들이 많이 오

십니다. 마치, 그 신명을 나누어 받아가겠다는 것처럼 말이지요.”

“일종의, 사람으로 치면 중음 같은 곳이지요, 이곳은.”

독각이 덧붙이자 사장이 손사래를 쳤다.

“중음이라니, 무슨.”

“저 말고 다른… 그러니까 저 같은 사람도 왔다고요?”

“거, 말은 똑바로 합시다. 사람이 아니라 도깨비나 자리 잃은 터주들이

오신거죠.”

“아, 예.”

“그럼 이제 전 어떻게 되나요.”

“돌아가야죠.”

사장은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이가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의 눈은 살아온 세월의 두 배를 본 듯 깊었다. 나는 이 카페의

곳곳에 묻어있는 옛날의 그림자를 온몸으로 더듬듯 둘러보았다. 그는 무엇

을 보았을까, 무엇이 우리 같은 존재들을 이 가게로 끌어당겼을까. 이 남자

을까.

“난 그냥 보고 듣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예전부터,

책을 만들던 시절부터 계속 이곳을 보아 왔는데, 홍 앞이 부서져가는 것

을 알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더라고요.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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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감들을 붙잡기 위해 이런 가게를 만들고, 갈 곳을 잃어버린

젊은 친구들을 불러들이는 것 뿐.”

“그럼, 돌아가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으면 되잖아요.”

“아뇨.”

사장과 독각은 잠시 서로 마주보다가, 약속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안 됩니다. 머무를 곳을 잃은 신은 머지 않아 사라져버려요.”

“그런….”

“언제까지나 떠돌 수는 없어요. 그렇다고 이곳의 그 많은, 갈 곳을 잃은

신들을 감당하기에는 이곳은 힘이 약합니다. 인간의 세계와 다른 세계를 가

로막는 벽이 부서지고, 틈이 생겨 버리겠지요. 그건 이곳의 인간들에게도

좋지 못합니다.”

“가고 싶지 않아요!”

나는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짚으며 일어났다. 독각이 따라 일어났지만,

사장은 나와 독각의 손을 붙잡았다.

“아주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가서 이곳의 기억들을 씻어내고 다시 돌아

올 겁니다. 꽃이 져도 다음 해에 다시 피어나듯이, 인간도, 신도.”

“가고 싶지 않아요….”

“이 로 소멸되어 버리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니까요.”

“잊고 싶지 않다고요.”

울지 말아야 하는데, 울지 않아야만 하는데, 방울방울 흐르는 눈물이 바

닥에 닿기 전에 도깨비불이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참지 못한 눈물이 끝

내 뺨을 타고 흘렀다. 독각은 손을 펼쳐 그 눈물을 손바닥 안에 받아 가두었

다. 사장의 손이 내 어깨를 감쌌다. 잊고 싶지 않았다. 그 어둠을, 이승과 저

승을 가르는 듯 천으로 내었던 그 새하얀 길을,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며 일

어나던 남자의 어깨를, 공연이 끝나고 텅 빈 바닥에 드러누워 숨을 고르던

남자의 표정을. 그의 목소리를, 하이너 뮐러라고 적혀 있던 너덜너덜한 연

극 본을, 무 를 청소하고 고치던 손길을, 건물의 1층 가득 매달려 있던

포스터를, 그리고 지루해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숨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그

모든 것을 보고 있던 관객들을.

그래서 떠날 수 없었다. 잊을 수 없었다. 그건 내 기억의 모든 것이었으

니까. 처음부터 이곳에 머물렀던 터주들이 하나하나 이곳을 떠나고, 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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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뒤에도 나는 홍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비가 내리고, 차가운 바람

이 불고, 눈이 내리고 다시 봄이 와도, 나는 도망칠 수도 사라질 수도 없었

다. 여전히 나를 숨 막히게 하는 그 기억들을, 나는 버릴 수 없었다. 건물이

부서지고 사람들이 그곳을 떠난 뒤에도, 나는 여전히, 원히, 언제까지나.

“남기고 싶은 기억들을, 사람들은 이야기로 전하거나 글로 써서 남기곤

해요.”

사장은 나를 바라보았다.

“달리 남길 곳이 없다면, 말해요. 내가 이곳에서 모든 것을 듣고, 기억할

테니까.”

“….”

“하지만 당신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만은 틀림없어요. 지금 이 로 사라지

지 않도록, 언젠가 조금 다른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려면 이제 가야 합니다.”

“달리 남길 곳이라는 건…?”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당신의 감을 남기는 거죠.”

사장은 차분히 답했다.

“당신의 기억을 조금이라도 공유하는,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글이건 그림이건, 어떤 형태로든 당

신의 이야기를 이 세상에 남기는 겁니다.”

“남길 곳이….”

“그러고 보니 당신이라면 아직 그 극장에서 공연하던 배우들이 있으니

까….”

잊고 있었다. 건물은 무너졌어도, 그곳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걸음을 멈

추며 사를 중얼거리던 그들이 남아있다는 것을. 하지만 무언가 남길 수

있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갈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전할 수 없었다. 그들의,

우리같은 존재보다 격렬한 감정과 기억이 내 기억을 그 로 먹어치우고 말

테니까. 나는,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이 이야기를 남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잊혀지지 않도록. 언제까지나, 돌에 새긴 듯이, 사라지지 않도록. 어떤 형태

로든 이 이야기가 남겨질 수 있도록. 나는 눈을 깜빡 다. 필름을 되감듯 넘

어가는 기억 속에서, 나는 그 무 위에 매달린 채 관객들을 바라보았다. 아

직은 젊고 어렸던 그때의 관객들이, 조금 다른 모습으로 다시 이 거리를 걷

고 있었다. 그렇게, 나이 들어서도 예전의 홍 를 잊지 않은 채, 외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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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나는 그들의 추억을 찾아 점점 더 먼 궤적을 그리며 골목골목을 돌아다니

는 사람들의 그림자 속에서, 나는 낯선, 그러나 조금은 낯익은 얼굴 하나를

찾아내었다.

여전히 짧은 머리카락에 뿔테 안경을 쓰고 있던, 어린 얼굴을.

“…있어요.”

“있어요?”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어떻게 기억을 남기죠? 난 얼굴밖에 모르는데.

두 번 밖에 보지 못했는데.”

“그거야 이제부터 해 볼 일이죠.”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독각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 카운터에서 흰

천을 꺼내어 테이블에서 벽까지 길게 늘어뜨렸다. 마치 예전에 내가 깃들어

있었던 그 천과 같은, 새하얀 천이었다.

“사장님은 능력이 부족해서, 바로 도를 열어드리진 못합니다.”

“도와주는 사람에게 말이 지나쳐, 독각.”

“사실이잖습니까, 늘 감사하지만요.”

말은 그렇게 해도, 독각도 사장도 웃고 있었다. 사장이 그 늘어진 천 앞

에 서자, 그의 안경이 새하얀 빛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독각이 내 손을 잡아,

그 천 위로 인도했다.

“자, 이 천을 따라 걷다가, 빛을 타고 올라가세요.”

“그, 남기는 건 어떻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나의 눈에, 그 하얀 천이 닿아 있는 창가가, 창가에

매달린 나비의 고치들이 시리게 담겼다. 그렇구나. 눈을 깜빡 다. 잠들어

있던 나비의 고치 하나가, 막 깨어나려는 듯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아직 새

벽이 오지 않았는데, 날이 밝으려면 멀었는데, 젖은 날개로는 차마 날아오

를 수도 없을 것 같은 어린 나비가, 고치를 열고 있었다.

“저 나비를 따라가세요.”

“….”

“이 빛의 길을 따라 끝까지 걸어가면, 혼은 하늘로 돌아갈 겁니다. 그리

고 당신의 기억이 담긴 백은, 저 나비와 함께 이 땅에 잠시 더 머무르겠지요.

저 나비가, 당신을 인도할 겁니다. 이 하늘흰나비는 당신이 이곳에 온 날부

터 죽, 매달려 있던 녀석이니 말입니다. 믿고 맡기세요. 당신은, 나비를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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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가 그 남기고 싶은 사람의 귀에 당신의 이야기를 속삭이는 것으로 충분

해요. 어쩌면 손을 뻗어 그 손을 잡아주어도 괜찮겠지요. 그렇게 잠시, 누군

가의 음악이 되고 누군가의 펜 끝에 실려 무언가를 남길 수도 있을 테니.”

“내 말을, 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나는 천을 밟고 서서 독각을, 그리고 사장을 바라보았다.

“괜찮을 겁니다.”

사장은 미소지었다.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누구나 신의 목소리를 듣는 법이니까.”

한잔의 룰루랄라, 그 작은 가게의 바닥에서 시작된 빛은, 창문을 타고 밖

으로 뻗어올라 소가 누운 듯한 이곳의 언덕배기를, 누에가 머리를 들고 있

는 듯한 천주교의 순교성지를 지나, 다시 홍 앞을 감싸 돌았다. 그 길을 따

라, 작은 날개를 팔랑거리며 내 한두 걸음을 앞서 날던 흰 나비가 맴을 돌았

다. 나비의 가냘픈 날개에 실린 채, 나는 내가 사랑했던, 씨어터 제로가 자리

했던 그 주차장을, 그곳이 사라지고 울며 걸었던 골목길을, 누군가의 즉석

라이브가 있었고 손재주 좋은 이들이 좌판을 벌이고 앉았던 놀이터를 내려

다보았다. 술집들이 문을 닫고, 새벽이 다가오는 시각,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들고 나와 그 거리를 따라 걷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는 한 사람의 얼

굴이 눈에 들어왔다. 뿔테 안경을 쓴 그녀는, 마치 그 나비를 잡으려는 듯,

어쩌면 하늘을 향해 안테나를 뻗어 올리듯 하늘을 향해 손을 내 었다. 나

비의 날갯짓이 바람을 일으키고, 내 기억은 그 바람에 실려 그녀의 작은 손

을 향해 손을 내 었다. 알아본 것처럼 내 보이지 않는 손을 움켜쥔 그 젊은

작가가, 다시 골목을 달리기 시작했다. 바닥을 박찬 그녀의 구두굽이 잠시

나마 허공에 머물렀다 내려앉았다. 마치, 그녀가 붙잡은 내 기억이 그녀에

게 날개를 달아준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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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박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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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줄을 지켜라앤윈

몹시 배가 고팠다. ‘더는 참을 수 없다’고 느끼는 단계를 지나치고 있었

다. 사람들은 ‘참을 수 없’는 상태를 많은 경우 동물적인 본능의 상태라고 생

각하던데, 동물로서 장담하건 전혀 그렇지 않다. ‘참을 수 없다’는 것은 매

우 의지적인, 다시 말해 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단계다. 이 정도로 배가 고프

면 이미 참거나 참지 않는다는 건 전혀 의미가 없다. 어떤 의지도, 심지어는

살아야 한다는 의지도 생기지 않는다. 갑자기 눈앞에 연어 머리가 떨어진다

고 해도 먹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연어 머리.

단 한 번 먹은 적이 있었다. 가게에서 연어 머리를 버릴 때 운 좋게 그 앞

을 지나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가게 주변을 장악하고 있던 건 노란색

과 까만색이 섞인 험상궂은 놈이었다. 뭐, 나도 사람들 기준에서야 험상궂

은 놈이겠지만. 나는 그 놈이 나타나기 전에 재빠르게 연어 머리 하나를 입

에 물고 정신없이 도망쳤다. 연어 냄새는 그때 겁을 먹고 연어를 물지 않았

더라면 지금까지도 종종 후회할 정도 기 때문이다. 맛있는 냄새는 거짓말

을 하지 않았다. 연어의 머리통에 이빨이 박히던 감촉을 아직까지 기억했

다. 연어는, 다시 먹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맛있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임신을 하기도 하고 발정이 나기도 하던 암컷

이었다. 양복을 입은 남자 둘과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 하나가 날 붙들던 그

날 전까지는. 봄이었고, 바람이 천천히 불어왔고, 나는 요행히 사료를 내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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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인간을 다른 놈보다 먼저 만나서 배도 부른 참이었다. 전날엔 비가 내려

서 바닥 여기저기의 웅덩이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나는 물을 홀짝이고 나

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이곳에 사는 놈들은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지

않는다. 인간들 역시 웬만해선 내 역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졸다가 번

쩍 눈을 떴다. 누군가 역 안에 들어와 있었다. 몸을 일으켜 도망치려고 하

자마자 무언가 끈적한 것이 발바닥을 붙들었다. 발이 움직이지 않아서 엉덩

이를 들썩이는데, 인간의 손이 꼬리를 붙들었다. 나는 좁은 철망에 갇혀서

울었고, 할퀴었고, 몸부림쳤지만, 인간은 나를 어딘가에 눕히고 꼬리 아래

쪽, 그 조심스러운 비 의 구멍에 차갑고 날카로운 것들을 들이 었다. 갈

색 털을 머리 부분에 길게 늘어뜨린 여자는 나를 잡힌 자리에 내려놓고 머

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아무 힘도 없이 한참을 그 자리에 널브러져 있었다.

모든 불행은 그날부터 다.

생식능력을 잃었다고 해서 다른 놈들이 나를 괴롭히는 건 아니었다. 다

만 무언가 아주 뜨거운 것이 마음에서 사라져 버렸다. 날카롭게 냄새를 맡

고 자동적으로 몸이 움직이거나 눈앞에 무엇이든 꿈틀거릴 때 절로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들이 이제 다시는 내게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다른 놈들은 내 기척조차 잘 느끼지 못하게 되었

다. 날 배척하는 것도 아니지만, 더 이상 그들의 일부로 생각지도 않는다. 그

렇다고 해서 인간들처럼 돈을 주고 먹을 것을 살 수도 없다. 당연히 나는 끊

임없이 배가 고프게 되었다. 내가 과연 나일지, 나는 매일 눈을 뜰 때마다 생

각한다. 나는 이제 민첩하지도 생기 넘치지도, 심지어 살아가고 있지도 않

은, 고양이다.

익숙한 생각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인간이 나를 떠올리는 모양이었

다. 하루에도 수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지만 수많은 생각들 중에

서 밥 준다는 생각은 더욱 또렷하게 잡힌다. 코코 브루니를 지나쳐, 몇 개의

노점들과 북새통문고를 지나쳐, 농협 앞, 8번 출구 옆, 이제 인간은 오늘 장

사를 접을 준비를 하고 있다. 여자는 남편을 보며 입을 열었다.

“요 녀석이 또 왔네, 또 왔어. 어쩜 이렇게 문 닫을 시간만 되면 딱 맞춰

서 와?”

신기하기도 하지, 일할 때 오면 챙겨주기도 어려울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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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박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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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할 때 여자는 정신없이 바쁘고, 여자의 생각들은 체로 금방 사라진

다. 당연하지만 여자는 내가 그녀의 생각을 읽어내고 온다는 걸 알지 못한

다. 여자는 남은 핫바를 일회용 그릇에 담아 내 발치에 내려놓았다. 여자의

검은 손과 단단한 손톱이 시야에 훅 들어왔다가 멀어졌다. 여자는 많이 말

랐지만, 인간 세계에서 평범한 아줌마로 불릴 수 있는 인상이다. 그래도 여

자의 저 마르고 단단한 손은 여자가 그렇게 물렁한 성격은 아니라고 강변하

는 것처럼 보 다. 물론 나는 다 알고 있다. 여자는 실제로도 물렁한 성격이

아니었다. 나는 핫바를 깨물었다. 냄새를 맡는 감각이 둔해진 이후로, 음식

맛은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연어 머리가 다시 떨어진다고 해도 예전처럼

맛있게 먹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내가 잃어버린 걸 인간의 언어로 굳이 말한다면 ‘야성’에 가까울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지만,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걸 깨닫자 인간의 마음들

이 내 속으로 정신없이 려 들어왔다. 인간의 생각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

다. 생각해보면 생식 기능을 마비시키는 수술이라니, 그런 걸 인간 말고

체 어떤 존재가 떠올릴 수 있을까. 인간의 마음이 들리게 된 것도 자연스러

운 일일 거라고, 나는 쉽게 그 상황을 받아들 다. 덕분에 삶을 유지할 수 있

었고, 때문에 나는 점점 내가 고양이인지 알 수가 없다. 인간처럼 사고하지

않기 위해 나는 매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다.

머리를 쓰다듬어도 될까?

여자의 손이 머리 위로 내려온다. 나는 앙칼지게 인간을 향해 성 를 울

린다. 하악 소리를 듣고, 여자는 손을 치운다. 자칫하면 가만히 머리를 내맡

기고 있을 뻔했다. 예전 같았으면 인간의 마음 따위 들리지 않아도, 거침없

이 기척을 느끼고 몸을 피했을 터 다. 나는 이제 최선을 다해야만 고양이

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더 비참해지기 전에, 얼른 밥을 다 먹고 자리를 피

했다. 쓸쓸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곳에 더 남아서 여자의 손에 머리를 내

맡기고 싶었다. 안 될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마음에 들었다는 사실을 부

정할 수는 없었다. 나는 분명히 점점 고양이로서의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

그녀를 등지고 공터 쪽을 향했다. 벤치 위는 체로 돌바닥보다는 따뜻

했다. 예전에 곧 무너질 것 같은 고기집들이 잔뜩 있었을 때는 조금 더 따뜻

했었다. 몇몇 마음 좋은 인간들은 나를 위해 양념하지 않은 고깃덩어리를

남겨주기도 했었다. 거리는 털이 다 벗겨져 나간 것처럼 추웠다. 벤치에 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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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은 뒷모습이 보 다. 그 소녀, 괴물이었다.

괴물이라고 지칭하는 건 미안하지만, 그렇게 말고는 다른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괴물은 탁자에 턱을 괴고 있다가 날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

났다. 짧은 치마가 팔랑 다. 괴물의 생각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밥은 먹었나보네.

괴물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서운해 하고 있다. 나는 괴물을 실망시

키지 않기 위해, 입을 열었다.

“많이 못 먹었어, 배고파.”

그럴 줄 알았어.

괴물이 가방 안에서 캔을 꺼냈다. 캔을 자주 사지도 못하는 형편에 더 배

고픈 고양이를 주는 쪽이 낫지 않을까, 생각은 했지만 괴물이 주는 캔을 얻

어먹을 고양이가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괴물인 건 조금만 있어도 금

방 알 수 있다. 소녀는 괴물이기 때문에 내 고양이 말을 알아듣고 나는 말하

지 않아도 소녀의 말을 알아듣는다. 괴물이 언제까지 내 말들을 알아들을

수 있을지에 해서는 확신할 수가 없다. 괴물을 처음 만난 건 바로 저쪽 놀

이터 근처 다. 홍익 학교 쪽으로 타고 올라가야 하는 놀이터에는 언제나

사람이 미어터질 듯 많았기 때문에 나는 늘 지구 앞 작은 놀이터 근처에

서 쉬곤 했었다. 그날도 여전히 배가 고팠기에, 별 생각 없이 말했다.

“배고파.”

그 말에 반응한 게 사람이라는 것에 한 번 놀랐고, 가만 보니 그게 사람

이 아니라 괴물이라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래도 인간의 외형을 가지고

있으니, 인간이랍시고 생각이 읽혔다.

많이 굶었나보다.

“너, 몸을 버렸어?”

괴물은 쓸쓸하게 웃으면서 내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이 고양이는 고양이 던 날 경멸하겠지.

“왜 그랬는지 이해한다면 경멸하지 않을게. 왜 그랬어?”

마음을 읽혀버린 괴물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내 눈을 바라

보다가,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작은 캔을 하나 꺼냈다. 캔을 보자마자 괴물

의 생각이 읽혀졌다. 괴물은 지금도 돈이 없지만 혹시라도 배고픈 고양이를

발견할까봐 늘 가방에 작은 캔을 들고 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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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배가 고팠어.

나는 고개를 파묻고 캔 속의 고깃덩어리를 집어삼켰다. 예전 고기가게에

서 얻어먹던 고기맛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몸을 버리고 인간이 된 고양이

는 고양이의 혼을 잃어버린다. 꿈을 꿀 수도 없고, 다시 태어날 수도 없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웬만한 고양이는 혼을 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누가

이 괴물을 탓하겠는가. 나는 꼬리를 쳐들고 열심히, 아주 열심히 고기를 먹

었다. 괴물 자신은 아마 전혀 기억을 못 할 것이고, 그래서 굳이 말한 적도

없지만, 나는 이 괴물을 낳았었다. 짝짓기를 할 나이가 되어서도 내 곁을 떠

나지 않던 녀석을, 나는 소리를 지르며 매섭게 떼어냈다. 짝짓기도 하고 새

끼도 낳으며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더니, 언젠가부터 모습이 보이질 않

았다. 마지막으로 본 건 쓰레기봉투를 뜯어놓고 닭고기를 물고 도망가던 모

습이었다. 그 다음에 만났을 때는 이렇게 괴물이 되어 있었다. 괴물도 날 기

억하지 못할 것이고, 나 역시 이 괴물이 내가 낳은 괴물이라고 별달리 애틋

한 감정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아직 인간이기보다는 고양이니

까. 이렇게 넉넉하게 먹을 수 있는 날, 음식을 따로 저장해 놓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나는 괴물의 따뜻한 무릎 위로 기어 올라갔다. 괴물은 주머니에서 담배

를 꺼내 입에 물었다.

따뜻하다.

“나도 그래.”

괴물이 날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고, 나는 눈을 감고 천천히 잠이 들었다.

괴물의 담배연기가 바람을 타고 머리 위로 흩어졌다. 괴물은 인간이 아니지

만, 인간이다. 나는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니다. 나는 괴물을 내 뱃속에 품고

있었던 때보다 지금이 더 괴물과 가까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상한 일

이었다.

여자에게 찾아가는 건, 언제나 여자의 일이 모두 끝난 다음이다. 나는 여

전히 고양이 고, 사람을 쫓아다니며 밥을 구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

저 그들이 내게 밥을 줄 뿐이다. 즉, 해가 떨어지지 않았을 때부터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은 밥과는 별로 상관이 없고 그저 지나는 길이었다는 말이다. 아

직 첫 손님도 들기 전인 듯했고, 여자는 이제 막 판을 깔아놓고서 소리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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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고 있었다. 몇 사람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고, 지나는 사람들이 그 앞에

서 잠깐 발을 멈추었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양복을 입은 남자가 소리

지르는 그녀에게 천천히 말을 꺼냈다.

“아니, 장사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니고, 저쪽 옆으로 자리를 옮겨주겠다고요.”

“전에도 자리 옮기라고 말해놓고 밤에 와서 때려 부쉈잖아요. 칼로 막 찢

고 그랬잖아!”

그녀가 날카롭게 소리를 높 다. 평소에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하던 그

녀가 이렇게까지 높은 톤의 새된 소리를 낼 수 있었다니.

“그냥 저쪽으로 자리만 옮기시면 된다니까요.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나는 이 자리에 허가 안 받고 하는 거예요? 허가 다 줬잖아. 허가 받고

하는 거잖아!”

나는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웠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그녀가 이 자리

에 허가를 받기까지 거쳐 왔던 온갖 삶들이 머릿속에 차올랐다. 머리 꼭

기가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부산에 사는 그녀의 아들이 분

명한 이미지로 내 뇌를 스쳐 지나고 나서,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잠

깐 몸의 중심이 흔들려서, 비틀거리다 풀썩 옆으로 넘어졌다. 지나던 연인

이 날 바라보았고, 그 연인은 동시에 내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아마 날 지나

치고 그들은 화제에 나를 올릴 터 다.

“여기 위치도 말이죠. 인도 위에다가, 사람들 지나가는 데에 통행 방해도

되고.”

“통행 방해는 무슨,”

소리치던 여자가 눈을 돌려 지나는 사람들을 빠르게 훑었다. 잠깐, 화단

위에 웅크리고 앉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야옹이구나.

“사람들 멀쩡하게 다 잘 지나다니는데, 무슨 통행방해에요. 이 길에서 이

가게 때문에 못 지나다니는 사람 어디 하나라도 있어요?”

“우리가 구청에서, 전에도 얘기했잖아요. ‘깨끗한 거리 만들기’사업을 하

고 있는데…….”

여자가 다시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더럽다는 거야, 뭐야!”

“아니, 아주머니가 더럽다는 게 아니라. 이게, 그림이 깨끗해보이지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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잖아요. 사람들이 여기에서 먹고 소스 떨어뜨리고 그럴 텐데…….”

“사람이 살다보면 다 더러워지기도 하고 그런 거지, 그쪽 집은 그렇게 깨

끗할 줄 알아요?”

양복을 입은 남자의 머릿속에 아침을 먹고 그릇을 쌓아놓은 개수 가 스

쳐 지났다.

그거야 그렇지. 다 더럽히면서 사는 거지.

“아무튼, 저희는 경고했습니다. 강제 집행하기 전에 얼른 차 옮기세요.”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자리를 뜰 때, 나는 반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오

늘은 여자에게 밥을 얻어먹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자의 힘든 마

음을 걱정해서라기보다는, 힘든 마음을 온전히 듣지 않을 수 없는 나를 걱

정해서다. 여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어김없이 해가 졌고, 나는 천천히 동교동 교회 쪽으로 가는 언덕길을 올

라갔다. 여기저기 주차되어 있는 차 밑에 한두 마리씩 꼭꼭 숨어 있었다. 예

전이면 굳이 고개를 돌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몇 마리가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도무지 몇 마리가 있는지, 눈을 마주치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내 감이 없어진 걸 어찌하겠는가. 오늘은 나도 차 밑으로 기어들어가

기로 마음먹었다. 인간만 조심하면, 차 밑은 안온해서 배가 고파도 잠이 쉽

게 왔다. 인간의 마음이 들리게 된 이후에는 조심할 것도 별로 없어졌다. 다

른 고양이들의 구역만 과도하게 침범하지 않으면, 누구보다 편하게 쉴 수

있었다. 앞뒤로 눌러놓은 것 같이 생긴 하얀 차가 보 다. 나는 그 아래로 걸

음을 옮겼다.

차 아래를 들여다보았더니, 미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고양이가 있었

다. 노란 놈인 거 같은데, 어두워서 무늬가 있는지 없는지는 잘 구분되지 않

았다. 고양이가 밤눈이 어둡다니, 나는 또 한 번 자조했다. 엉금엉금 자리를

잡았다. 곁눈질을 다시 한 번 하고서야, 그가 누군지 깨달았다. 딸, 괴물의

짝이었던 검은 수컷이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지, 잘생긴 얼굴에

한 줄, 심하게 상처가 나 있었다. 가만히 자고 있는 얼굴을 들여다보는데, 머

릿속으로 짧은 생각이 끼어들었다.

집에 가야지.

이 차 주인인 인간이 분명했다. 나는 몸을 급하게 일으켰다. 그 사이에

차에서 삑, 소리가 났다. 급하게 그에게 달려들었다. 인간의 생각은 끊임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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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흘러갔다. 집에 가서 씻고 나서 다운받아놓은 화를 봐야겠다. 천천히

얼굴을 핥아 잠을 깨울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잠을 깨울 정도로 친 한 사

이도 아니긴 했지만. 언제나 나는 그가 딸과 함께 서로 털을 골라주거나 잠

들어 있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그냥 지나치기만 했다. 그와 단 한 번 말도 섞

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그에게 달려들어 몸통을 붙들고 차 밖으로 몸을 빼

내자, 급하게 잠이 깬 그는 정신없이 내 발톱에 휩쓸려 화단 쪽으로 려났

다. 장갑? 아, 그때 윤미 씨 태워줬었지. 나는 다시 한 번 그의 목덜미를 깨

물고 그를 화단 깊숙한 곳으로 어냈다. 다른 고양이의 거죽을 물어본 게

언제 던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는 몸부림을 치면서 내 이빨을 떨쳐냈

다. 나는 떨려나가면서 화단에 푹 쓰러졌다. 내가 그리 세게 물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는 잠깐 당황하는 것처럼 보 지만, 곧 몸을 곧추세우고 내게 적

감을 표현했다. 곧이라도 내 목을 물어버릴 것 같았다. 이거 돌려준다고

연락 한 번 해볼까. 만약에 나온다고 하면…… 차에 시동이 걸리고, 바퀴가

굴러갔다. 곧 차는 화단에서 멀어져갔다.

그는 차가 멀어지는 소리를 듣고 하악거리던 걸 멈추고 멍하니 나를 보

았다. 푹 쓰러진 나도 천천히 몸을 일으켜서 그 눈을 응시했다.

“어떻게 알았어?”

“들려서.”

“발소리?”

“아니,”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서 잠깐 말을 멈추었다.

“아무튼 고마워. 덕분에, 겨우 살았네.”

그는 살았지만 잠자리는 사라졌고 나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나는 꼬리

를 천천히 흔들었다. 그는 가만히 내 꼬리를 지켜보더니 입을 열었다.

“배고파? 먹을 거 냄새, 지금도 나는데.”

“냄새, 잘 못 맡아.”

그는 코를 찡그리며 날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휑하니 그곳을 떠났다. 나

는 아무래도 화단에서 자야 할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흙 위에 몸을 웅크렸

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기척에 눈을 떴다. 그가 입에 튀긴 닭 한 조각을 물

고 있었다. 닭을 물어뜯으면서 생각했다. 왜 나는 매일 무언가를 먹어야만

하는 걸까. 지금껏 해 본적 없는 낯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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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를 못 맡으면 어떻게 살아?”

“사람 따라서.”

그는 정말, 정말로 내가 가엾다는 표정을 지었다. 혼을 잃어버리는 가

장 빠른 길은 사람을 따라 다니는 것이었다. 나도 안다는 의미로 꼬리를 쳤

다. 귀를 젖히고 동그랗게 눈을 뜨고 사람에게 앞발을 내미는 게 어떤 의미

인지, 모를 리가 없다. 우리의 혼은 한때 신이었고, 우리의 큰 동료들은 인

간을 먹고 살았다. 내 혼은 지금 어디쯤에 가 있을까. 나는 또다시 쓸쓸해

졌다. 그날, 그와 나는 화단에서 함께 꼬리를 얽고 잠이 들었다. 다른 고양이

의 온기 역시 오랜만이었다.

그가 일어나기 전에 나는 자리를 떴다.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어제보다 바람이 덜 불었고, 사람들은 활기차게 걸어 다녔다. 나는 여자가

어제 소리를 치던 자리에 가 보았다. 여자의 가게가 있던 자리에는 못 보던

커다란 화분이 놓여있었고, 어쩔 수 없이 화분 옆에 자리한 여자의 가게는

조금 움츠러든 것처럼 보 다. 나는 여자의 가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여

자는 오늘도 물기 없이 까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아직 일을 시작

조차 하지 않은 상태 다. 내가 여자에게 밥을 얻어먹는 시간은 여자의 일

이 끝난 다음이었다. 지금 배도 고프지 않은데, 나는 왜 여자를 향해 걸어가

고 있는가. 설마, 여자를 위로해주고 싶은 것인가.

왔구나. 어제도 날 봤었지.

여자는 어제 내가 화단에 앉아 있던 모습을 자기 시선으로 떠올렸다. 여

자는 주섬주섬 소시지를 하나 꺼냈다.

아직 장사를 시작하지 않아서 이거밖에 없구나. 네가 계속 와 주는 걸 보

니, 다른 사람들도 계속 와 주겠지.

나는 소시지를 물었다. 그 자리에서 물어뜯으려고 하는데, 다른 인간 하

나가 가까이 다가섰다. 농협 옆쪽에서 떡볶이를 파는 키 큰 여자 다. 나는

소시지를 물고 여자의 뒤로 뒷걸음질했다.

이렇게 고양이한테 밥을 주니까, 도둑고양이들이 늘어나지.

“고양이 키워?”

“아니, 얘가 늘 찾아와.”

“고양이는 정 줘봤자 소용없어. 은혜도 모르고.”

“사람을 소용되려고 만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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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도 참, 고양이가 사람이야? ……좀 괜찮아?”

여자의 쓸쓸한 감정이 갑작스럽게 떠안겨졌다.

“뭐라더라. 난 통행 방해라서 안 된다더니, 화분은 통행에 지장 없나 봐.”

여자를 찾아 온 떡볶이 쪽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녀가 떠올리는 이미지

가 보이기 시작했다. 여자가 양복을 입은 남자들과 목청 높여서 싸울 때, 한

쪽에서 어떤 사람들이 뭉쳐있었다. 여자를 훔쳐보는 시선들, 오고가는 말들,

저 핫바만 어내면 여기까지는 괜찮다고 했어, 일단은 지켜보자고, 또 천

막치는 거 지겹잖아, 솔직히 인도 위에 있는 건 쟤네밖에 없잖아, 내버려 둬,

같은 말들이 오고갔고, 기억이 끊겼다. 이번에는 아주 뜨거운 분노와 배신

감이 휘몰아쳤다. 나는 여자의 감정변화를 더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차도

뒤쪽으로 걸어내려갔다. 소세지 덕분에 오늘은 밤이 되어도 곧 죽을 것처럼

배가 고프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한참을 걸어가자 아주 희미하게 여자의 생

각이 읽히다가 멀어져갔다.

어, 얘가 어디갔지. 방금 전까지 있었는데.

여자의 가게 맞은편에 괴물이 일하는 가게가 있다. 괴물은 비어 있는 장

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체로 밝은 색깔의 돌로 만들어졌고 어딘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 사람들은 그 장소들을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지만 고양

이들은 어디에 그 장소가 존재하든 누구라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 장소에

는 고양이들이 맡는 독특한 냄새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때때로 예언하는

고양이들이 그곳에 있어야 할 '귀신'이 없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처음에

는 귀신들이 려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귀신들이 떠나는 건지 려나

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는 세상 어디에 가도 비어 있는 장소가 있었고,

언제나 비어 있는 장소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그다지 너그럽지 않았다.

그 장소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우리들은 점점 있던 장소에서

려나곤 했다. 예언하는 고양이들이 말하길 그 장소에는 우리뿐만 아니라 아

무 것도 깃들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인간들이 그 장소들을 생각하는 걸 읽

어내었다. 인간들 말로는 ‘텅 비어 있다’가 ‘프랜차이즈’인 모양이었다. 우리

들은 그 장소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언제나 그 장소는 이 깃들 수 없기에

고양이들의 숨통을 죄었다. 괴물은 이제 더 이상 고양이가 아니기에 그곳에

있을 수 있었다.

괴물은 앞치마를 두르고 유리를 닦고 있다. 괴물이 일하는 가게는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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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가 통유리로 되어 있다. 나는 통유리 앞에 붙어서 괴물을 지켜보았다.

괴물은 입을 작게 오물거리며 유리를 닦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 눈만 살짝

웃어 보인다.

나는 괴물이 입을 오물거리는 이유에 해 알고 있다. 아까부터 머릿속

이 온통 괴물의 노랫소리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괴물은 바깥쪽 유리를 닦기

위해 문을 열고 나왔다. 이번에는 귀로 명확하게 그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언젠가 괴물은, 인간이 되면 무엇이 좋으냐는 내 질문에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안 굶는 거랑, 담배?

그리고 가만히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내 머릿속으로 단순한 멜로디가 흘

러들어왔다. 괴물의 입가에 웃음기가 어렸다. 멜로디 사이로 괴물의 생각이

스며들었다.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거.

나는 괴물의 노래가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노래가 듣기 좋다니, 이건 또

새로운 감각이었다. 유리를 닦던 걸레를 들고 괴물이 다시 가게로 들어갔

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는 투명하게 반들거렸다. 괴물의 상관이 괴물을 불

러 세웠다. 상관 앞에 선 괴물의 표정은 읽히지 않지만, 괴물의 생각은 들려

왔다. 노래를 부르지 말라는 주의를 들은 괴물은 다시 이쪽으로 몸을 돌렸

다. 그녀는 입을 오물거리는 신 머릿속으로 노래를 부른다. 나는 여전히

괴물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의 혼은 한때 신이었고, 우리의 큰 동료들은 인간을 먹고 살았다.

이제 괴물은 서서히 자신의 기억들을 버릴 것이다. 어느 순간 자신이 고양

이었던 시절의 모든 기억을 잊게 될 수도 있다. 인간을 따라다니고 인간에

게 먹을 걸 구걸하는 걸 넘어서서, 인간이 된 놈들은 가장 끔찍한 타락에 있

다. 그들은 이제 인간에게 구속당하는 신 인간에게 뜯긴다. 무언가 일을

해서 인간에게 가져다바치며, 원히 인간의 종이 되는 길을 택한다. 인간

의 종이 된 동족은 혐오의 상이 될 수밖에 없다.

등 뒤에서 누군가 가볍게 기척을 냈다. 그때 그 검은 수컷이었다. 털이

곧추섰다. 그는 짝이었던 괴물을 틀림없이 알아볼 것이었다. 검은 수컷과

눈이 마주쳤을 때 새로운 생각이 내리꽂혔다. 누군가 나와 검은 수컷을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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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불쾌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동네에 이렇게 고양이가 많아? 둘 다 진짜 못생겼네.

검은 수컷은 내게 반가운 몸짓을 보 다. 나는 어설프게 검은 수컷을 반

가워하면서도, 계속 가게 안쪽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나와 검은 수

컷을 불쾌하게 바라보던 가게 주인은 결국 괴물에게 우리를 쫓으라고 명령

했다. 괴물은 우울하게 내 쪽을 바라보다 바로 검은 수컷을 알아보았다. 괴

물은 주눅이 들어서 천천히 우리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안돼, 날 알아볼 거야, 틀림없이 알아볼 거야. 못 가, 저기로는, 못 가.

쟤는 왜 저렇게 늘 행동이 굼떠?

결국 가게 문이 열렸다. 겁에 질린 괴물은 덜덜 떨면서 이쪽으로 다가왔

다. 나는 괴물에게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다. 검은 수컷은 내 상태를 보고

의아해하다가, 뒤에서 다가오는 괴물을 발견했다. 곧바로 검은 수컷은 으르

렁 기 시작했다. 검은 수컷은 괴물이 짝이라는 것은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그것이 괴물이라는 것만은 알아보았다. 어느 쪽이 더 슬픈 상황인지 잘 모르

겠으나, 짝에게 보일 자괴와 연민 신, 그는 단호한 적 감만을 표출했다.

“긍지도 모르는 녀석.”

괴물은 검은 수컷의 말을 알아듣고 풀썩 주저앉았다. 괴물은 내게 가볍

게 꼬리를 얽었다.

“나중에 보자.”

괴물은 심하게 손을 떨면서 내 몸통을 붙잡았다. 나는 저항없이 괴물의

손에 들렸다. 가게 안에서 여전히 가게 주인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괴물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외양을 하고 있으면, 굶지 않을 수 있지

만 굶지 않기 위한 돈을 얻으려면 인간의 종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쫓겨난 인

간 종처럼 비참한 것은 없다. 나는 괴물을 더 비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괴물은 날 들고 백 걸음 가량 걷고 내려놓았다.

이쪽 말고, 저쪽으로 가.

나는 괴물을 향해 다정한 몸짓을 해 보 지만, 괴물은 겁에 질려 보지 못했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아.

나는 놀랐다. 괴물은 이제 울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인간 다 됐네.

어김없이 해가 졌고, 땅 밑에서 사람들이 꾸역꾸역 끝도 없이 쏟아져 나

왔다. 나는 화단 속에 웅크려서 인간들의 시선을 피했다. 인간들의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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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 별다를 게 없었다. 이를테면 오늘 화장이 제 로 먹었나, 아까 밥 먹으면

서 이에 고춧가루가 끼진 않았겠지, 졸리다, 배고픈데 왜 이렇게 돌아다니

는 거야, 춥다, 짜증나, 기분 좋아, 저 여자 예쁘다, 체로는 지루하기 그지

없는 생각들뿐이었다. 숨어있다 보니 쟤한테 밥 줄까, 같은 기분 좋은 생각

은 들려오지도 않았다. 내가 숨어 있는 화단 앞에 웬 인간들이 책상 따위를

펴고 무언가 팔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인간들과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나는 화단을 빠져나왔다.

가만히 보니 여자의 남편이었다. 여자의 가게에서 전기를 끌어다가 화단

앞 나무에 전등을 설치해주고 있었다. 한 무리의 인간들이 여자와 눈인사를

나누고 신문 같은 걸 팔기 시작했다. 나는 여자의 남편이 달고 있는 불빛을

피해 어슬렁거리며 여자를 훔쳐보았다. 평소에 물건을 팔 때는 아주 단순하

던 여자의 머릿속이 매우 복잡했다.

반죽. 이러다가 혹시 쫓겨나게 될까. 고추. 아이도 학에 가게 되겠지.

반죽.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면 좋나. 튀김. 통장에 모아놓은 돈도 하나도 없

는데. 반죽, 아, 아, 튀김.

여자는 결국 손을 데었다. 여자는 입술을 물고, 참았다. 여자가 고통스러

워했고, 덩달아서 나까지 고통스러워졌다. 자리를 뜨려고 할 때, 여자의 손

님 하나가 명랑하게 떠들어댔다.

“자기야, 여기 핫바 진짜 맛있지?”

괴물은 퇴근하자마자 나를 찾아와 내 옆에 바투 앉았다.

아까 그 고양이, 아는 고양이야?

“그래.”

괴물은 날 들어서 품에 안고 걸어갔다. 괴물의 몸에서 달큰한 냄새가 났

다. 나는 괴물과 검은 수컷의 오랜 관계에 해서도 알고 있다고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괴물 역시 나를 기억하지 못하지 않았던가. 괴물은 머릿속으

로 계속해서 노래를 반복했다. 괴물이 생각으로 부르는 노래와 목으로 부르

는 노래는 분명히 차이가 났다. 목으로 부르는 노래 쪽이 역시 훨씬 듣기 좋

았다. 거리를 가득히 메웠던 사람들은 새벽이 되자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택시를 타기도 했고, 길바닥에 쓰러지기도 했고, 아까보다 사람들의 생각은

훨씬 더 단순해져 있었다. 졸려, 배고파, 집에 갈래, 추워. 사람들의 생각 위

로 괴물의 노래는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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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비집들이 있던 그 공터까지 걸어가서, 괴물은 벤치에 나를 내려놓았

다. 나는 벤치에 웅크리고 앉아 괴물을 보았다. 괴물은 탁자 위로 올라가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새벽공기는 차가웠고, 괴물은 귀까지 새빨개진 채, 하늘

을 보았다. 별이 몇 개 반짝 다. 괴물은 노래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목소리

로 부르는 노래 다.

괴물의 노랫소리는 듣기 좋았다.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조금

먼 곳에선 누군가가 뱉어놓은 토사물이 가로등 아래에서 조금 반짝거렸다.

괴물은 점점 더 큰 소리로 노래했다. 나는 괴물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

다. 괴물의 울음이 격렬해질수록 노랫소리도 커졌다. 괴물의 슬픔이 머리로

전해지는 게 아니라 노래로 전해졌다.

이 소리는 고양이의 울음이 아니었다. 이것은 틀림없이 인간의 울음이었

다. 고양이는 이런 방식으로 슬퍼하지 않았고, 이렇게 눈물을 토해내지 않

았다. 괴물은 아직 인간의 말로 어떻게 슬픔을 전달해야 할지는 알지 못했

지만, 인간의 감정으로 노래했다. 그녀의 손과 발이 그렇듯이, 털이 나지 않

은 나약한 낯짝이 그렇듯이, 당연하게도 괴물은 점점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

다. 문제는 나 다. 나는 괴물과 같은 방식으로 슬픔을 전달받고 있었다. 괴

물은 혼과 허기를 맞바꾼 가로 다정했던 짝을 잃었다. 그저 배가 고팠

기 때문에 모든 걸 다 잃어버린 괴물의 절망이, 인간처럼 내 가슴을 때렸다.

수염과 높이 솟은 귀를 잃어버린 괴물은 노래부르는 자신의 그림자 속에

짝이 숨어 있다는 건 알지 못했다. 물론 감각을 잃어버린 나 역시 시야에 그

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검은 수컷이 묵묵히 괴물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인간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괴물의 노래는 낭랑하게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밤중에 웬 공연이야?

목소리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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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박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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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생각들 사이로 홀연히 춤을 추던 괴물의 노래는, 천천히 허공

에 내려앉았다. 괴물은 멜로디를 타고 공중을 날듯이, 어딘가 어둠 속을 걸

어갔다. 멀리서 괴물의 노래를 듣던 인간들도 제각기 흩어졌고, 내가 벤치

에 웅크리고 앉자 숨어 있던 검은 수컷이 튀어나왔다. 화단에서, 골목에서,

벤치 아래에서, 고양이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들 괴물의 노래를

훔쳐 듣고 있었다. 검은 수컷은 고양이들을 둘러보고는 내게 꼬리를 들어보

다. 그들은 검은 수컷의 동료인 모양이었다. 나 역시 그들에게 꼬리를 들

어보 다. 회색 털에 흰 털이 고르지 않게 섞인 고양이가 가까이 다가왔다.

암고양이 다.

“나는 여기서 십 년 살았어.”

이 고양이가 이 구역을 책임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여기에 모

여 있는 고양이들은 그녀를 제외하면 체로 내 자식뻘이거나 그보다 어려

보 다. 아주 젊은 고양이들이었다. 그녀의 후계자들일 터 다.

“나는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그쯤 살았어.”

떠돌이는 나약한 고양이라는 증거 다. 그럼에도 그녀는 관용 있는 자세

로 날 받아들이겠다는 제스처를 보 다.

“이 동네에도 최근엔 ‘비어 있는 장소’들이 많이 생겨서 살기가 편치는

않아. 그래도 이곳에서 살아가겠다면 환 하지. 하지만 저 놈을 구해주었다

는 얘기를 들었어. 냄새를 잘 맡는 모양인데 왜 떠돌이로 살아가지?”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거의 전혀 맡지 못해.”

회색 털의 고양이는 의아하다는 듯 몸을 움츠리며 내게 물었다.

“저 괴물이랑 친해?”

괴물의 노래를 듣고는 있었으나, 이들 모두 그녀가 괴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친하다고 말하면 공격받을 것인가. 나는 찬찬히 고양이들의 태도를

살펴보다가 무슨 일이 있다면 검은 수컷이 날 지켜줄 거라고 근거도 없이

믿어버렸다.

“내 딸이야.”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갸릉 는 목소

리가 여기저기 튀어 다녔다. 나는 한 마디 덧붙 다.

“나는 인간의 생각이 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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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수컷이 털을 쭈뼛이 세웠다.

“그게 무슨 말이야?”

“냄새를 못 맡아도 인간의 생각을 읽을 수 있어서 지금껏 살 수 있었다

는 거지.”

털이 많이 빠진 암컷 하나가 고개를 끄덕 다.

“내가 인간이랑 살 때도 그러던 녀석이 있었어. 인간이 뭘 원하는지 다

알고 있던 그 녀석이 인간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간식을 얻어먹곤 했었지.

그가 능력에 해 말해줬을 때 나는 그 능력이 너무 부러웠어.”

털이 많이 빠진 암컷은 검은 수컷의 새 짝인 것처럼 보 다. 나는 괴물의

정체를 말해줄까 하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부러워 할 것 없어.”

나는 수술을 받던 순간에 해 그들에게 이야기 했다. 아이를 싣던 작은

주머니가 내 몸에서 빠져나가면서, 함께 빠져나가버린 민첩하던 몸놀림과 날

카롭던 후각에 해서. 내게 남은 둔한 귓바퀴와 쓸모없는 수염에 해서. 그

리고 고양이로 살아갈 수 없게 만든 끊임없이 들려오는 인간의 생각들에

해서. 괴물이 느낀 인간적 절망에 해서 아무리 설명해도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그들이 유일하게 알아들은 것은, 내가 끔찍하게도 인간처럼 사

고하는 고양이라는 것이었다. 검은 수컷이 송곳니를 핥으며 말했다.

“스스로 혼을 버리진 않았잖아. 그걸로 됐어.”

“하지만 난 이미 고양이가 아닐지도 몰라.”

“그렇다고 괴물이 되려는 건 아니잖아.”

“인간의 마음이 들린다는 건 이미 괴물이라는 신호일 수도 있지.”

회색 털의 고양이가 내게로 다가와 엉덩이를 들이 더니 꼬리를 들어 올

렸다. 나는 내 눈 앞에 갑자기 펼쳐진 은 한 광경에 당황했다. 나는 그가 당

연히 암컷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암컷이 아니었다. 음낭이 제거 된 수

컷이었다. 나는 그의 꼬리 밑동을 핥으며 중얼거렸다.

“우리는 한 때 신이었고,”

“우리의 큰 동족들은,”

“인간을 먹고 살았지.”

고양이들은 조금씩 다른 눈과 다른 냄새와 다른 털빛깔을 가지고 있지

만, 나는 내일 아침이면 벌써 이들을 다 잊을 수도 있었다. 내 눈은 서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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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 광채를 구분할 만큼 밝지 못했고, 내 코는 이들 모두가 같은 냄새를 가진

것만 같았다. 나는 이 반 괴물, 반 고양이인 고양이들을 열심히 들여다보았

다. 우리는 사는 게 구차하다고 죽을 수는 없는 고양이들이었지만, 그렇다

고 혼까지 팔아 살아남을 만큼 타락하지는 않은 비참한 존재들이었다. 노

란 눈들은 아홉 개의 목숨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아홉 번 다시 태어

나도 고양이로 태어나고 싶었다. 누군가 허공을 향해 울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서 울음소리가 맴돌았다. 괴물은 노래만 부르고 떠났지만 괴

물이 떠난 자리에 모여든 고양이들은 내가 경고하기 직전까지 절박하게 울

부짖었다.

아, 씨발, 이 동네 고양이들이 다 정신이 나갔나.

“조용히 해!”

고양이들이 울음을 그치자마자 공터 옆 건물에서 작은 돌덩이가 하나 날

아들었다. 돌덩이는 우리 중 누구도 맞추지 못하고 바닥으로 내리 꽂혔다.

우리는 비참하게도 어떻게든 살아남아야만 했다.

그것은 여자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내가 여자를 다시 찾아갔을 때,

여자는 하얀 티셔츠 위로 근육이 불거져 나온 건장한 남자들 앞에 혼자 서

있었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고양이로 살아갈 무렵, 나는 결코 개와는 싸우

지 않았다. 아무리 큰 개라도 개는 나를 앞에 두면 커다랗게 겁먹은 눈을 하

고 어찌할 바를 몰라 네 다리를 휘저으면서 큰 소리로 짖어 곤 했다. 내가

어느 쪽으로 몸을 움직여도 겁을 먹은 개의 반응 속도는 느렸다. 나는 당장

이라도 개의 목을 물어 숨을 끊어놓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개

는 겁을 먹고 있었고, 겁을 먹은 생물은 너무 약했다. 아무리 큰 소리로 짖어

도 그 바보 같은 것은 위협조차 되지 못했다. 여자는 꼭 개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겁먹은 개처럼 짖고 있었다.

“쳐 봐, 어디 한 번 쳐 봐!”

왼쪽에 서 있던 남자가 웃었다.

미친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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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박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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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성큼성큼 여자 쪽으로 다가섰다. 악다구니를 쓰던 여자는 계속 소

리를 지르며 어깨를 움츠렸다. 남자는 그 커다란 팔을 들어, 여자를 치는

신 여자의 노점 한 쪽을 쳤다. 한 쪽 다리가 무너졌고, 여자의 마음이 같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커다란 소리에 나도 모르게 적의를 내뿜

었다. 노점 한 쪽을 완전히 무너뜨린 남자는 짐승처럼 적의를 느끼고 고개

를 돌렸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꼼짝도 않고 날 똑바로 응시했다.

기름, 기름.

여자는 쟁여두었던 경유통을 번쩍 들어 머리 위에 부었다.

아이고, 저걸 어떡해.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다른 노점상들이 나와서 여자의 가게가 부서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여자는 가스라이터를 휘두르면서 무슨 말인지도 모를

말을 고래고래 소리쳤다.

저거 저 로 둬도 되나?

설마 진짜로 죽지는 않겠지.

죽든지 말든지 알 게 뭐야.

솔직히 저기만 인도 위에 있는 건 사실이잖아.

미친년, 춤을 춰라, 춤을 춰.

저 가게만 나가면 다 보장해 준다고 했잖아. 어쩔 수 없지.

안됐긴 하지만 하나 죽고 우리 다 살면 그렇게 하는 게 맞지.

저 용역 놈들이 옛날에 우리 가게도 다 엎어버리려고 했었는데, 다시 봐

도 아주 소름이 돋네.

저걸 어떻게 해, 저걸, 아이고, 저러다 사람 죽겠네.

근육질에 똑같은 머리 모양을 한 남자들은 하나같이 터벅터벅, 기름을

뒤집어쓰고 가스라이터를 든 여자를 지나쳐서 여자의 가게를 향했다. 소리

를 지르던 여자는 목청을 닫은 채 멍하니 부서지는 가게를 지켜보았다. 여

자가 집에서 해 온 반죽들이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고, 잘 정리해 온 꼬치들

이 아스팔트를 뒤덮었다. 나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여서 몸서리를 쳤다. 갑

자기 몸이 하늘로 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여자는 새파란 물속을 떠올리

고 있었다. 나는 여자와 함께 푸른 물속에 잠겼다. 그 와중에도 처음 여자의

가게를 부수었던 그 남자는 나를 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용역들이 여자의 가게를 다 망가뜨리고 새벽에 다시 올 때까지 깨끗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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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워 놓으라며 여자에게 으름장을 놓을 때까지 여자는 그 자리에 그 로 주

저앉아 계속 새파란 물속을 떠올렸다. 서울로 올라오기 전, 부산에 살 때 여

자는 스킨스쿠버 강사 다. 여자는 빠르게 물속을 헤엄쳤고, 걱정 없이 깊

은 곳까지 내려갔다. 나는 여자와 함께 물고기처럼 발을 유연하게 흔들었

다.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울었다. 눈에서 흐르는 게 진물

이 아니었다. 붉은 색도 아니었고, 눈 아래에서 뭉치지도 않았다. 맑은 눈물

이 똑똑, 앞발에 떨어졌다. 분명하게 깨달았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고양이가

아니었다.

용역들이 모두 가버리고, 여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부서진 가게를

챙겼다. 완전히 우그러지지 않은 것들은 모두 다 야무지게 모았고, 버려야

할 것들은 버렸다. 모든 노점상들이 기겁하는 가운데, 여자는 기름과 눈물

을 키친타월로 닦았다.

절 로 이 로는 못 가.

여자의 파란 물이 새하얀 햇빛으로 바뀌었다. 나는 갑자기 눈이 부셨다.

충 가게를 수리한 여자가 엎어진 반죽을 내려다보았다.

반죽 버린 건 주워 담을 수도 없고 어쩌나.

나는 반죽 앞으로 다가섰다. 여자는 나를 알아보았고, 나는 반죽에 혀를

가져다 댔다. 여자에게는 내 마음이 전달되지 않을 것이지만 나는 며칠이

걸리더라도 이 반죽을 다 먹어버릴 기세 다. 여자는 기름이 묻은 손을

충 닦아낸 후 내 머리 위에 얹었고, 나는 도망가지 않았다. 여자는 내 털이

부드럽다고 생각했다. 아무 것도 쓰다듬지 않은 나는, 내 털의 부드러움을

여자 손에 남은 기름의 끈적함과 함께 느꼈다. 내 혼도 반죽처럼 녹아내

리기 시작했다.

열두 시가 지나자 하나둘 씩 고양이들이 여기저기에 몸을 숨기고 모이기

시작했다. 나는 노점 바로 옆 화단에 앉아 있었다. 수염에 남은 힘을 모두 모

아서 어디에 고양이들이 있는지 짐작해보았다. 몇 군데에서 기척이 느껴졌

다. 회색털 고양이와 검은 수컷 짝꿍이 내 곁에 바투 앉았다.

“고마워. 내 밥줄일 뿐인데.”

“거기 기가 많다는 이야기는 전부터 있었어. 그러니까 네게 밥을 줬겠지.”

검은 수컷이 목 안쪽을 울려서 조금 큰 소리로 울었다. 젊고 싱싱한 목소

리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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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리를 지나치던 사람들이 모두 흩어져갈 때쯤 그 남자들은 다시 찾

아왔다. 이번에는 단단한 쇠몽둥이까지 몇 개씩 든 채로 찾아왔다. 여자와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여자의 남편은 남자들이 찾아오자마자 딱딱하게

굳었다. 나는 완고하게 머리를 닫으려고 노력했다. 너무 많은 생각들이 들

리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되는 걸, 몇 번의 경험으로 이젠 잘 알고 있었

다. 그럼에도 그의 생각은 뇌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이걸 어쩌지.

“이보십시오, 구청 직원들한테 낮에 직접 와서 말하라고 하십시오.”

말을 마치자마자 여자의 남편은 보도블록 위로 나동그라졌다. 그들은 아

까보다 훨씬 거칠게 여자의 작은 가게를 부숴 나갔다. 검은 수컷의 엉덩이

가 흔들거렸다. 회색 털이 검은 수컷에게 눈짓을 했다. 검은 수컷은 낮은 소

리로 웅웅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있는 힘껏 그들의 생각을 막으려고 노력했지만 불가능했다. 용역들

의 짧은 생각들, 노점상 부부의 짧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치고 다니는데,

그 가운데 불쑥 괴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괴물, 나는 고개를 들었다.

괴물은 저도 모르게 검은 수컷을 느끼고 있었다. 괴물에게 지금 나는 중

요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 존재를 잊어가는 중이었다. 괴물에게는 검

은 수컷에 한 간절한 감정이야말로 지금까지 완전히 인간의 길로 내닫지

못한 하나의 끈이었다. 나는 괴물의 마음을 읽어내면서도 이걸 이제야 이해

했다. 수염을 잃어버린 괴물은 단지 간절한 마음 하나로 검은 수컷의 자리

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웅웅거리는 수많은 동족들의 외침을, 아직 괴물은

읽어낼 수 있었다.

괴물은 바스러지는 노점상을 지나쳐 옆 도로에 주르륵 줄을 서 있는 노

점상 쪽으로 달려갔다. 그들 부분은 묵묵히 자신의 가게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냥 구경만 하고 있어.

그만. 저것들은 인간이지 고양이가 아니야. 같은 종이라거나 같은 위치

에 있다고 서로 돕지 않아. 괴물은 끝내 입으로 뱉어내고야 말았다.

“어떻게, 그냥 구경만 하고 있을 수가 있어요!”

조그맣게, 저걸 어떻게 해, 만 반복하고 있던 떡볶이 아주머니의 마음에

서 꽝 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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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 나쁜 놈들아!”

“냅두라니까 그러네, 이 아주머니가. 저쪽만 없어지면 우리 다 괜찮다니까.”

아주머니는 발을 굴렀다.

“언제 그런 적이 있었어, 언제! 재작년에도 저쪽 하나만 없앤다고 했지

만, 결국엔 천막 쳤잖아. 천막 치고서도 몇 번씩 저 놈들한테 뜯겼잖아. 언제

그랬어!”

“아, 글쎄, 그 때는 우리 다 비슷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 그냥 둬요.”

떡볶이 아주머니의 마음에선 계속 포알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떡볶

이 아주머니는 그 포알이 터지는 리듬에 맞춰서 자신을 말리는 사람의 머

리카락을 쥐어버렸다. 비명소리가 들렸다. 어디까지가 생각이고 어디까지

가 말소리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여자는 내게 튀긴 반죽을 잘라내 주던

검은 손으로 부서지는 가게를 꼭 붙들고 있었다. 아까 날 바라보던 그 놈이

쇠몽둥이를 여자의 손을 향해 치켜들었다. 나는 그놈의 허벅지를 향해 뛰어

들었다. 여기저기에서 고양이들이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수많은 고양이들

이 싸움판에 뛰어들자 비명이 더 높아졌다.

“뭐야, 이건!”

어떤 놈들은 굴하지 않고 가게를 부수기도 하고 어떤 놈들은 몽둥이를

휘휘 돌리며 고양이를 내리찍으려 들기도 했다. 나는 다시 한 번 그 놈과 눈

이 마주쳤다. 그놈이 몽둥이를 내리찍는 순간, 나는 놈의 손목을 거칠게 할

퀴었다. 놈은 몽둥이를 떨어뜨리고 손을 붙들었다. 손톱에 놈의 살점이 조

금 묻어나 있었다. 놈은 내 몸을 붙들어 내 갈비뼈를 부술 생각이었다. 나는

놈의 생각을 읽고 기분이 좋아졌다. 어쨌든 나는 아직 고양이었고, 놈보다

는 몸이 빨랐다. 나는 오히려 놈의 손을 피해서 몸통으로 파고들었다. 놈은

옆구리를 깨문 내 몸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아까 할퀸 놈의 손목에서 피

가 흘러서 내 배로 흘러내렸다. 놈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치켜뜨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넘어지거나 도망가는

용역들의 뒷모습이 보 다. 여자는 핫바 꼬치들을 집어들고 무슨 창이라도

되는 것마냥 휘두르고 있었다. 괴물 소녀는 떡볶이 아주머니와 함께 다른

노점상들에게 계속 항의하고 있었다. 뚝, 온몸의 뼈들이 몸 안으로 오그라

붙었다. 나는 있는 힘껏, 놈의 옆구리를 물어뜯었다. 놈이 비명을 지르며 날

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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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도블럭에 뺨을 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감았다 떴다.

괴물의 운동화는 빨간색이었고, 끈이 더러웠다. 괴물은 다시 태어나지

못하는 신 노래를 할 수 있었다. 나는 노래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가물가

물하게 빛이 멀어져갔다. 아직 여덟 개의 목숨이 남아 있었다. 아직 내 혼

이 허락한다면, 다음 생에도 고양이로 태어나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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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Angel (上)pena

“웬 책이야?”

아저씨가 베개를 끌어당겨 허리를 좀 세우더니 내가 읽던 책 표지를 들

여다본다.

“저주회사 효연 철학원? 소설이니?”

“네, 판타지 소설. 저쪽에 있던 출판사 나간 다음에 들어온 카페 아저씨

가 준 거예요.”

“입수 경로가 꽤 복잡하구나.”

“출판사 나간 자리에 카페가 들어온 게 뭐가 복잡해요.”

“아니, 책은 체로 서점 가서 사거나 그런 거 아닌가?”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어이.”

“이 소설에서 저주란 걸 학문처럼 가르치는 학교가 나오거든요. 저주의

강함을 재는 단위로 저주력도 나오고. 정말로 이렇게 저주가 걸려요?”

“네가 읽고 있는 건 소설이잖아. 허구. 정말로 그럴 리가 없잖니.”

“저주란 건 존재하잖아요. 그리고 이거 꽤 세세하고 그럴듯해요. 볼래요?”

책을 떠넘기자 아저씨는 기세에 눌린 듯이 받아들더니 빠른 속도로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내 말 로 저주에 관한 부분만 보는가 싶더니 슬쩍 앞쪽

으로 넘어가서 읽기 시작하려고 해서 뺏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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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재밌어지려는 참인데……!”

“저 다 안 봤어요. 어쨌든 어때요?”

“뭐가?”

“저주!”

“아, 재밌더라.”

“끝이에요?”

“그럼? 저주란 게 그렇게 돈이나 소원의 강함으로 계산되는 단위가 있으

면 내가 더 편하겠다. 저주는 굉장히 미묘하게 작용하는 거야. 걸 수는 있지

만 건 상 도 그 여파를 계산하거나 예측할 수 없어. 축복도 마찬가지지. 신

이 아닌 이상, 의도는 있어도 정확한 결과는 없는 게 저주와 축복이야.”

목이 턱 막히는 것 같아서 책을 덮었다. 정색한 내 얼굴에 아저씨가 놀란

것 같았다. 난 참지 못하고 울음과 함께 책을 던졌다.

“그럼 아저씨 저주는 어떻게 푸는데요!!”

* * *

생각해보면, 아저씨와 만나서 확실히 인연을 맺은 건 세 번이나 만나고

난 다음이었다. 첫 만남은 나중에야 알았지만.

음악을 하지 않으면 숨을 못 쉴 것 같다, 음악이 운명이다, 음악을 못하

게 하니 병이 났다, 이런 말을 하는 뮤지션은 많다. 그들에게 약간 미안하게

도 내게 음악은 도구일 뿐이다. 하지만 중요한 도구다. 내가 살게 해주니까.

음악을 사랑해서, 음악이 좋아서 음악에 살고 음악에 죽는 게 아니다. 단지

음악이 없으면 공포로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뿐이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어둠 속에 존재하는 것들을 보았다. 처음에는 창문

사이로 스쳐지나가는 얼굴, 내가 벽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리에서 손

끝으로 느껴지는 기다란 털, 팔과 어깨를 스쳐지나가는 차가운 손길, 모든

것이 멈춘 가운데 들리는 발소리 다. 단편적인 공포 속에서 비명을 지르면

어른들이 달려왔고, 친구들이 달려왔고, 무슨 일이냐고 묻다가, 우는 나를

달래주다가, 보이지 않는 것이나마 쫓는 시늉을 하다가, 하나씩 내게 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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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를 냈고 내게서 떠나갔고 나를 거짓말쟁이라 했다.

그 나이에 내가 살던 곳이 홍 근처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무 방법도 찾

지 못한 채 점점 더 선명해지는 헛것들 속에 빠져 죽었을 것이다. 짙어져가

는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집 밖을 쏘다니지 않았다면, 하필이면 그 클럽 앞

을 지나지 않았다면, 바닥만 보던 눈을 들어 그곳을 보지 않았다면.

그곳에서 나오는 음악소리에 어둠이 느릿느릿 물러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나는 어둠과 교차해서 그 안으로 들어갔다. 제일 먼저 나를 맞은 것은 가

슴을 치고 들어오는 드럼의 울림. 그리고 귀를 진동시키는 베이스. 쨍하니

날카로운 기타 선율과, 그 모두와 함께 놀던 목소리들. 거칠게 질러 는 금

속성 목소리가 더없이 따뜻했다. 뛰어오르며 너울치는 팔들이 다정했다. 그

안에 끼어서 함께 요동쳐보았다. 내가 움직이든 움직이지 않든, 좁은 클럽

안은 드럼 진동으로, 사람들의 발구름으로, 베이스 울림으로 물결쳤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황홀감 속에서 나는 커다란 날개를 보았다. 무 한

켠 스피커 위에 나를 등지고 앉은 사람에게서 날갯잇이 떨어져내렸다. 사람

키를 넘길 정도로 커다랗고 하얀 날개 다. 모든 조명이 무 로 집중되고

어둡게 남아있는 부분을 그 날개가 밝게 비추고 있었다. 눈이 부셨다.

환각인가? 아니면 내가 보던 어둠 속 잡것들과 반 되는, 무언가 고귀한

것인가? 시끄럽고 울리고 아득한 가운데 얼핏 그런 의문이 스치고 지나갔

다. 그날은 수 년 만에 기분 좋은 밤이었다. 밤이 끝나고 아침이 왔을 때에는

날개는 보이지 않았다. 조금 아쉬웠지만, 기쁨과 환호가 더 압도적이었다.

만세, 난 살 수 있어.

그 길로, 아무 짝에도 쓸 데가 없어서 쌓아놓기만 하던 용돈을 털어 기타

와 교습서를 샀다. 혼자서 띵띵거리기만 해도 약간 어둠이 물러갔지만, 제

로 된 음악이 나오지 않아서인지 효과가 적었고, 혼자서 제 로 된 음악

을 연주하기엔 난 꽤 재능 없는 음악도 다. 정말로 오랜만에 부모님에게

부탁을 했다. 부모님은 학교 가지 않겠다, 밤에 자지 않겠다, 집안 불을 끄지

않겠다 외에 다른 부탁을 너무 오랜만에 들어서인지 왜냐고 묻지도 않고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기타 학원 등록.

원래 나를 알던 사람들은, 특히 날 싫어하던 아이들은 귀신 본다고 설치

던 아이가 이젠 귀신 부르는 곡을 한다며 웃어 거나 시끄럽다고 뭘 던지거

나 했다. 하지만 기타 실력이 늘수록, 음악을 하는 사람 중에서는 친구가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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겼다. 나는 살기 위해서 정말 한시도 기타를 몸에서 떼놓지 않았기 때문에

원래 없던 재능으로 천재처럼 진도를 나갔고, 흥얼거리던 노래에 자신감이

붙자 제법 구색을 갖춘 음악인이 된 기분에 잠시 으쓱했다. 이상한 것들이

다가오지 않으니 마음이 편해져서 모든 것이 나아졌다. 만세, 난 살고 있어.

* * *

어쩌다 보니 버스킹이란 걸 하게 됐다. 무 가 필요했다거나 끓어오르는

열정을 주체하지 못했다거나 한 건 아니고, 어차피 기타 치면서 노래 부르

는 걸 쉬지 않는데 방음장치가 된 연습실이나 녹음실이나 제 로 된 클럽

무 도 없는 바에야 그냥 거리에서 노래 부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느냐……

고 나를 설득한 자식이 있었다. 뭐 듣기 좋은 소리라고 그렇게 길게 설득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자기들 노는 데 같이 놀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

같기도 하고.

성격 로 논다고, 또는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많이 정상

인이 되긴 했지만 몸에 밴 왕따의 자세는 다 고치질 못해서, 버스킹을 하면

서도 나는 관객을 제 로 보지 않았다. 눈을 맞추긴커녕 허공을 보면서 부

르거나 바닥 어딘가를 보고 있거나, 여러 바퀴 도는 발레리나나 피겨스케이

팅 선수나 되는 것처럼 어느 한 점에 눈을 고정한 채로 멍하니 노래 부르고

기타를 쳤다. 적어도 기타 목을 내려다보지 않아도 자동으로 칠 수 있을 만

큼은 잘 친다는 점은 어필이 되었을까…?

소리에도 무관심한 편이었다. 오랫동안 욕이나 조롱을 듣고 살면 사람이

말하는 소리가 정말 한 귀로 들어가서 다른 귀로 나오는 게 아니라 한 귀 안

에도 안 들어가게 할 수 있다. 다들 버스킹을 많이 하는 자리인 홍 걷고 싶

은 거리 자리에서 발길을 멈추는 사람들은 관 한 편이라, 딱히 욕을 들은

일은 없는 것 같다. 반 로 열렬한 박수나 환호를 받은 일도 없다. 가끔 내

무심한 딴청 피우기를 시크하다고 여겨서 멋있다고 소리 질러주는 언니들

도 있는데, 그땐 꽤나 부끄럽지만 필사적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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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박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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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정말 우렁찬 박수 소리가 들렸다. 신기해서 나도 모르게 그쪽을

보았더니, 나이 꽤 들어 보이는 아저씨 한 명이 혼자서 일당백 박수를 치고

있었다. 솔직히 약간 실망했다. 이 아저씨, 털이 부숭숭하게 난 얼굴에 그래

도 잘 보이는 반짝이는 눈 때문에 부조화스러운 곰돌이 같은 인상이었고,

모자를 쓰고 점퍼를 두 겹쯤 입은 맵시는 후줄근해서 전체적으로도 후줄근

했다. 그래도 그렇게 열광적인 박수를 치는 관객을 어찌 후줄근하다고 저어

하랴. 고맙다고 평소에 잘 움직이지도 않는 입꼬리 올려 웃어주는데, 갑자

기 시야에 깃털이 날렸다.

그때와 똑같았다.

나는 놀라서 연주도 멈추고 그 후줄근한 아저씨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때 보았던 그 커다랗고 하얗고 눈부신 날개가 아저씨 등에 솟아나 있었

다. 그리고 희미하게 털보 아저씨의 외모가 원래 그렇지 않다는, 굉장히 키

가 크고 피부부터 머리까지 온통 하얀, 인간 같지 않은 외모라는 게 보 다.

키도 그러니까, 그다지 크지 않은 키지만 털보 아저씨의 1.5배는 되는 키로

보 으니 2미터는 넘는 키라는 거 고, 날개는 그 몸을 다 가리고도 위 아래

로 한참은 남을 법하게 컸다. 크기에 한 관념도 나중에 내가 본 광경을 곱

씹어보면서 떠올린 거지 그 당시 든 생각은 ‘진짜 천산가?’정도 던 듯하다.

내가 갑자기 연주를 멈추고 아랫입술이 목에 닿게 떨어져서는 한쪽만 보

고 있으니 구경하던 몇몇 사람들도 나를 따라 고개를 움직여 털보 아저씨를

보았다. 털보 아저씨는 그 시선들에는 반응하지 않았고, 오직 나를 보고 흠

칫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내가 보았다는 걸 아저씨가 알았다는 게 보

다. 한참을 굳어 있다가 기타를 등뒤로 돌리고 한 걸음 내디뎠을 때, 털보

아저씨가 뒤돌아 빠른 걸음으로 가버렸다. “아, 저...!”아저씨의 걸음이 빨라

졌다. 주위에서 ‘빚’‘애아빠’‘스토커’등의 단어가 흘러나왔다가 내가 뛰는 걸

음에 멀어졌다.

이 추격전의 결말은 싱겁고도 흔했다. 막다른 곳까지 쫓아갔는데 땅으로

꺼진 듯, 하늘로 날아간 듯 보이지 않는 결말. 그동안 본 게 있으니 쓰레기통

도 뒤져보고 면한 건물의 창문이나 벽감이나 비상계단도 다 살펴보았다. 하

지만 냄새와 녹만 얻었을 뿐, 성과가 없었다. 아니, 딱 하나 있었다. 지난번

에 봤던 날개도 환각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희망.

그래, 보통 사람이 못 보는 것 중 나쁜 것만 보란 법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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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원래 나와 같은 상황을 상정하고 만든 말은 아니겠지만, 그 만남 이후로

정말 ‘빛과 그림자’란 말이 어울리는 나날이 펼쳐졌다.

처음엔 그저 어둠이 짙어졌다고 느꼈다. 너무 농 하고 끈적한 어둠이라

웬만큼 노래를 부르고 기타를 쳐도 시원하게 물러나질 않았다. 내 실력이

나아지면서 이랬던 적이 없는데, 그저 내 주위 근처만 섬처럼 밝힐 수 있을

뿐, 사방의 어둠이 내 눈에 보이는 곳에 있는 듯했다.

조금 더 지났을 땐 그 끈적한 어둠이 뱀과 비슷한, 또는 오징어 다리나

문어와 비슷한, 소위 촉수 같은 형태가 되었다고 느꼈다. 나름 어둠을 본 지

10년차인데, 이런 식으로 형태를 이루는 어둠을 본 건 처음이었다.

그 다음에는 촉수와 같은 형태가 된 어둠이 내 주위를 일사분란하게 따

라다닌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명령을 받고 한 사람을 포위한 채 움직이

는 개나 늑 무리처럼. 그 어둠의 촉수들은 한 가지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

는 것처럼 보 고, 그 의도란 나를 감시하거나 따라다니다가 여차하면 습격

하려는 것처럼 보 다.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그것들의 정체를 알 수 없으니 그것들의 약점

이나 생리나 쫓을 방법도 알 수 없었고, 이제까지 잘 통했던 내 음악은 아주

잠깐 그들을 멈출 수 있을 뿐, 그래서 약간의 거리만 벌릴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그 거리를 벌려놓는 것이 여차하면 도망칠 때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그들이 나를 붙잡기로 마음먹었을 때에는 예고도 없이 들이닥칠 거라는

걸, 그 몇 걸음의 간격도 벌릴 틈을 주지 않을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 했다.

그러나, 예상했다고 해서 뭘 어쩔 수 있었을까? 갑자기 뻗어와 발목부터 허

벅지까지 한꺼번에 감기는 어둠을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사람이 드문 건물

과 건물 사이에서 그렇게 한쪽 몸이 순식간에 붙잡혔을 때, 마치 시간이 느

리게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그제야 사람이 드문 곳으로 다니지도 말았

어야 했다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것을 조심했어야 했다는 생

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 느린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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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내 정신보다도 빠르게 한 마디 비명을 질렀고, 다음 순간 어둠이 입 속

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물컹하고 커다란 것이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데 실체감은 없었다. 오히려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먹히는 듯 내 속이 뒤집히는 듯

한 고통도 없었다. 그저 텅 비어가는 느낌. 나를 이루는 것들이 그 꽉 잡은

손을 놓고 흩어지려고 하는 듯한 느낌. 처음 붙잡혔던 다리 쪽에 아무것도

없는 느낌이 들고, 문득 슬퍼졌을 때에는 눈물을 흘릴 눈도 남지 않았다.

고 들어오는 어둠을 잡아 빼려고 손을 들어도 손이 없었다. 허리를 굽히려

해도 움직일 수 없었다. 완벽하게 무감하고 무심하게 어둠 속으로, 무無 속

으로…….

그때 빛과 함께 세상이 다시 태어났다. 처음으로 내게 돌아온 것은 끔찍

하게도 고통이었고, 그 다음으로는 공포 다. 온몸이 화끈거리고 아프고 간

지럽고 가렵고 춥고 더웠다. 사라졌던 모든 감각이 함께 돌아오면서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통곡하듯 울음을 토해냈다. 그 모든 감각

과 고통의 파도가 한풀 꺾 을 때에야, 내게 얼굴이 있고 턱이 있고 그것이

움직여 울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로 사라져버릴

뻔했다는 위기감이 그렇게 조금 감각을 되찾은 다음에야 다가왔다. 당연하

다면 당연했다. 무엇을 느낄 수조차 없었던 상태 으니까. 나는 처음에는

아파서, 그리고 얼마 지난 후에는 기뻐서 통곡했고, 온몸의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고 나서야 누군가가 그 원처럼 느껴지던 시간 동안 나를 토닥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흐릿한 눈을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자 온통 빛으로 이루

어진 것 같은 조각 같은 얼굴이 시야로 쏟아져 내렸다. 그가 말했다.

“이제 괜찮아.”

그렇게 나는 운 나쁘게도 어둠에 말려들었다가 정말 운 좋게 빛의 구원

을 받았다. 그리고 천사의 제자가 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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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답게 무척 예의가 바른 아저씨는 이름부터 해서 자기소개를 했다.

아저씨는 사람들이 천사라고 부르는 존재처럼 생겼지만 신의 사자라거나

천국에서 사는 존재는 아니고, 보통 사람이 볼 수 없는 가시적 차원 뒤에 걸

쳐서 살아가는 초월적인 생물(?)이라는 면에서는 천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고 했다. 이름은 히브리어로 신께서 함께하신다는 뜻이라는 ‘임마누엘’이었

지만, 워낙 정체를 아는 존재들이, 고로 이름을 아는 존재들이 적은고로 이

름 불릴 일 자체가 얼마 없는 데다가 얼마 안 되는 그 지인(?)들은 길다며

줄여 부르는 통에 자기도 이름이 생각 안 날 때가 있다고 해서, 초월적인 생

물이라고 하기엔 너무 인간적이지 않은가 하고 속으로 감탄했다.

물론 내가 겪은 일은 인간적이진 않았다. 아저씨는 내게 이제까지 일어났

던 일들은 모두,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차원을 넘어서 어느 정도 정신적이고

불가시적인 차원을 볼 수 있는 능력 때문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이 차원에

머무는 존재들은 보통 사람들 주위에서도 항상 함께 있지만, 사람들은 알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사실 이 차원의 모든 것들은 보통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

이므로 따로 떨어져서 살아갈 수도 없다. 이 차원은 사람들이 꿈꾸고 바라고

강력히 떠올리는 것들로 이루어진 차원이다. 아저씨는 ‘소망의 차원’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사람이 소망하는 것은 이 차원에

먼저 모습을 드러내고, 여러 사람이 소망하거나 한 사람이라도 아주 강력히

소망하면 현실에까지 향을 미친다. 사실 이 차원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

중에는 형태와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찌끄래기 같은 감정과 염원도 있는데,

내가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어둠은 그런 것들이라고 했다.

아저씨가 운 하던,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아저씨의 날개를 보았던 클럽

에서, 방금 사고현장에서 구출되어 구급차에 실린 환자처럼 어깨에 담요를

덮고, 아저씨가 타준 따끈한 코코아를 마시면서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까 그건, 목적이 있어 보 는데요.”

그 어둠을 떠올리자 저절로 몸이 떨려왔지만, 아저씨가 내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인 것만으로 공포와 한기가 물러갔다. 지금은 아저씨의 얼굴이 아

까 정신이 들었을 때처럼 본 모습이 아니라 털보에 후줄근한 보통 사람 얼

굴이지만, 날개는 여전히 눈부시게 빛났다. 나는 손 안에 쥔 코코아보다 더

따뜻한 그 빛에 잠시 몸을 녹이고 기운을 차려, 궁금하다는 얼굴로 다시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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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씨를 보았다.

“그건 네가 나를 만나서 그래.”

“에?”

“그것들은 나처럼 빛 쪽으로 쏠린 에너지체를 쫓아다니고 융합하려고

하는 성질이 있어. 양분을 얻어 실체가 되거나 최소한 중화되어 사라질 수

있거든. 형태와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어둠이라고 해도 일단 살아야 한다는

관념만은 투철, 아니 어쩌면 보통 사람보다도 더 강해. 어쨌든 그런 놈들에

게 2순위는 빛과 접촉했던 사람이야.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물론 마지막

순위고. 없는 것보다 나으니 죽어갈 때에나 야금야금 갉아먹지.”

“접촉한다고 해서 왜 더 좋아하는 거예요?”

“빛이란 건 쬐는 사람에게 나누어지기 마련이거든. 그게 내가 이곳에 있

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고 아저씨는 웃었다. 뒷말의 의미를 나는 아저씨를 따라다니

면서 나중에야 알아챘다.

아저씨가 가진 클럽은 홍 정문에서 극동방송국과 상수역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 골목에 있었다. 근처에는 고만고만한 클럽들이 많았는데, 클럽

FF라든가, 클럽 打라든가, 프리버드라든가, 어쨌든 금요일이 되면 홍 인

디신에서 한다하는 밴드나 뮤지션이 무 에 오르는 작지만 강한 애들이었

다. 그에 비해 아저씨의 클럽 ‘앤젤’은 일반적인 팬층보다는 홍 인디신을

잘 아는 마니악한 사람들, 클럽 관계자, 그리고 뮤지션들에게 더 유명했다.

오디션이나 검증을 거치지 않아도 무 에 오를 기회를 주기 때문이었다. 그

러므로 좋은 음악을 즐기려고 온 일반적인 팬에게는 복불복인 무 지만, 새

로운 피를 갈구하는 마니아나 클럽 관계자는 물론 처음으로 무 에 올라보

고자 하는 뮤지션들에게는 꿈의 무 인 것이다. 무 반 쪽에는 작은 바도

있는데, 무 에 오르는 뮤지션들에게는 바의 음료들이 무료 또는 할인가로

준다. 개인적으로는 가뜩이나 일반 관객도 없으면서 뭘 팔아서 먹고사는지

심히 궁금한 체제 지만, 아저씨가 알아서 하겠거니 할 뿐이었다.

아니다. 잠깐만. 이제 나도 아저씨한테 기 서 살아야 하는 몸인데, 알아

서 하겠거니 놔둬도 되는 건가?

나는 아저씨의 제자 겸 조수가 되었다. 아저씨는 처음에 내가 아저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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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를 알아보았을 때에는 바로 접촉을 끊으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사냥당

하는 것을 보고 아니란 걸 알았다고, 안전을 위해서 차라리 함께 계속 있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빛의 세례를 받아서 한층 더 맛있는 먹이가 되란

소리냐”고 반 농담으로 투덜 자, 아저씨는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겸사겸사 널 가르쳐볼 생각이다.”

“뭘요?”

“혼자서도 음악으로 어둠을 물리쳐왔었지? 내가 보기엔 넌 타고났어. 그

러니까 조금만 더 배우면 오래 묵어서 포악해진 것들도 다가오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거야.”

“배워요? 이런 것도 배울 수 있는 거예요?”

“그럼! 가르쳐본 적은 없지만.”

아저씨는 심히 인간적이다 못해 허당인 천사 다…….

* * *

가르쳐본 적은 없지만 가르칠 수는 있을 거라는 허당 천사에게 어울리게

도 아저씨는 무엇부터 해야 할지를 몰랐다. 일단은 자기가 하는 일을 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해서, 그러자고 했다. 남들 하는 거 보는 것도 공부라고 했

으니까, 이것도 그다지 다르진 않겠지 싶었다.

둘째날까지는 후회스러웠다. 아저씨가 아침부터 밤까지 어찌나 바쁘게

돌아다니는지, 따라다니는 것만 해도 일이었다.

아침에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전철 첫 차가 다니는 5시 넘어서까지 동

교동 삼거리부터 상수역과 합정역에 이르는 홍 입구 일 를 한 바퀴 돌았

다. 특히 밤새 놀고 첫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서 있다가 쓸려나간 클럽 앞

같은 곳은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 주위를 또 뱅뱅 몇 바퀴 돌고 갔다. 가끔

인사불성인 사람이 있으면 깨워서 부축하고 경찰서나 지하철 역으로 보내

기도 했다. 그럴 때 아저씨는 인사불성인 사람 어깨를 툭툭 쳐서 조그만 벌

레처럼 붙어 있던 어둠을 떨어내주었다. 아저씨는 이 과정을 아침 산책이라

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새벽 청소 다. 길거리의 쓰레기가 아니라 길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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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그 사이 쌓인 어둠의 조각들을 쓸고 닦는 것. 그래서 ‘소망의 차원’에서

어둠이 실체를 띠고 현실로 뚫고 들어오는 사태의 싹을 자르는 것.

아저씨가 홍 에서 하는 일을 한 줄로 정리하면 똑같이 말해야 할 것 같

다. ‘소망의 차원’에서 어둠이 자라나는 것을 막고, 빛과 희망은 더 널리 퍼

지도록 돕는 것. 아저씨 말고도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다들 이용

하는 도구는 다르다고 했다. 아저씨의 경우 홍 앞 뮤지션들의 에너지에 감

동을 받고 이 길로 결정한 것이다. 아저씨가 음악이라는 도구를 써서 어둠

을 물러나게 한 광경을 보고 내가 이 길로 들어선 것이고. 아저씨가 그림을

택했다면 내 등에는 지금 기타가 아니라 화통이 메여 있었을 것이다.

한 바퀴 돌고 나서 아침식사를 간단하게 한 후, 이번엔 홍 입구 일 의

상인들을 만나러 간다. 며칠 두고 본 바로는 하루에 두세 군데씩 가서 고루

고루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개중에는 완벽히 위장해서 내 눈으로

도 볼 수 없지만, 소망의 차원을 드나들 수 있는 상인도 있었다. 그들과는 마

치 보통 사람들이 주식이나 부동산 시세 이야기하듯이 어둠의 조각이 퍼진

곳이나 최근 강해진 곳에 해서, 어둠의 최근 동향에 해서 이야기한다.

사실 주식이나 부동산 시세보다는 『반지의 제왕』이나 『끝없는 이야기』

에서 요정들이 비상사태에 어떻게 처해야 할지 의논하는 회의와 더 비슷

해 보이기는 했다. 저쪽 레코드사도 리치몬드처럼 어둠에 먹힐지 모른다네.

지금 헬이 작업에 들어갔다더군. 청기와 주유소 자리 공사장은 누가 지키고

있지? 이쪽으로는 다른 데에서 들어온다는 소문이 있어.

점심을 먹고 나서는 다시 한 번 홍 일 를 돈다. 앤젤이 있는 곳이 클럽

이 가장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골목이긴 한데, 산울림 소극장 근처에도, 상상

마당에도, 합정역과 상수역 사이에도, 심지어 서교호텔 별관에도 클럽이 흩

어져 있다. 아저씨는 그곳들을 돌아다니면서 그날 공연이 있는지, 어떤 팀

이 올라가는지를 점검한다. 왜 그것들을 다 알아야 하느냐고 묻자, 홍 일

의 음을 맞추기 위해서라는 알쏭달쏭한 답을 했다. 다른 곳들이 높은 음

을 많이 내면 앤젤은 조용하게 낮추고, 다른 곳들이 얌전한 음악이 많으면

앤젤은 떠들썩하게 논다. 앤젤에서는 오디션을 보지는 않지만 그날그날의

공연팀과 공연순서는 이런 식으로 아저씨 혼자서 결정하는 편이다. 그 모습

이 꼭,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그날의 신선한 재료를 뽑아서 그것들로 코스를

구성하는 고급 요리사 같은 느낌이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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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늦게부터는 공연 준비로 클럽에 처박힌다. 나야 다른 클럽에서 무

에 올라본 적이 없지만, 앤젤의 무 에서 데뷔해서 다른 곳도 가고 유명

해진 밴드들이 가끔 와서 말하길, 아저씨처럼 세심하게 음향을 조절해주는

사람이 흔치 않다고 했다. 매일매일 온갖 정성을 다 들이긴 한다. 아저씨는

이 소리가 깨끗하게 잘 뽑혀야 의식이 잘 된다고 했다. 의식, 의례, 그런 거.

앤젤에서 이루어지는 공연들은 모두가 연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담아낸

만찬이고, 이 음악들을 아저씨가 증폭하고 다듬어서 근방의 어둠을 몰아내

는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어떨 때에는 어떻게 맞춰야 하는지도 아저씨는 말로 하지

못했다. 그냥 자신이 느끼는 로 하던 것이라 내게 가르쳐주려면 자신이

느끼는 방식부터 돌아보고 정리해야 할 판이었다. 나는 아저씨가 정리를 마

칠 때까지는 그저 볼 수밖에 없었는데, 아저씨는 심지어 자기 자신도 모르

는 버릇이 어쩌면 내게는 보일지 모른다며 이전보다 더 열심히 볼 것을 주

문했다.

그런데 솔직히 하루 일정이 원래 빡빡한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요 근래

들어 아저씨는 더 바빴다. 첫날에 내가 본 의논은 리븐델에서 반지 원정

가 출범하기 전, 여기저기 멀리에서 소식을 들고 처음으로 사람들이 왔을

때와 비슷한 분위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며칠 사이에 급속히 분위기가

바뀌었다. 전쟁처럼 표현하자면, 아니 진짜 전쟁 같긴 했지만, 거점 하나가

함락되기 직전인 것이었다. 함락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곳에는 적의 최신

요새가 들어온다나.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내가 산산이 부서질 뻔했던 것

처럼 어둠은 빛이나 빛과 접촉했던 존재를 무로 돌리고, 그 자리는 현실 차

원에서만 존재하는 곳이 된다. 인간으로 치면 혼을 잃은 공간이 되는 것

이다. 그곳을 수놓던 주인의 향기는 프랜차이즈 간판과 어디서나 같은 인테

리어에 묻혀 사라지고, 그곳에 드나들고 지나다녔던 사람들의 시간은 기록

속에만 남는다. 그리고 새로이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을 맞는 것은 다른 번

화가와 다를 곳 없는 거리이다. 아저씨는 그 속도가 점점 빨라져간다고 하

며 점점 바빠진다.

그렇게 사라져 폐점하게 된 레코드가게로 갔을 때, 어떤 남자가 아저씨

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남자’라고만 하기에는 너무 할 말이 많은 남자가.

미남이었다. 보통 미남이 아니고 신화적인 미남이었다. 성형외과 의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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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가 보면 얼굴의 칭성에 관한 표본으로 삼을 법한 완벽한 균형이 얼

굴과 몸에 깃들어있었고, 반듯한 이마를 수놓은 눈썹은 말로 표현할 수 없

는 수많은 것들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 다. 몸에 걸친 옷은 그 몸을 가리는

것이 죄악으로 보일 정도로 초라했지만, 동시에 그 몸에 걸치면 걸레도 그

리스 토가처럼 보일 것 같았다. 여러 각도로 빛나는 눈동자와 흰 피부, 장밋

빛 입술은 어떤 여자보다도 아름답고 순수하면서도 도발적이었다. 그의 입

꼬리가 요만큼 올라가는 모습에 무릎이 풀리며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와

동시에, 그의 뒤로 내가 이제껏 보았던 어둠은 해변의 파도에 지나지 않을

깊이의 어둠이 일렁이고 그가 디딘 공간이 소망의 차원에서 하얗게 새고 있

고 그토록 달콤한 그의 미소가 먹이를 눈앞에 둔 맹수의 흥분에서 비롯했다

는 것이 말할 수 없이 무서웠다. 또한 그토록 절 적인 미를 가지고 절 적

인 파괴와 공허를 거느린다는 것에 분노와 증오가 끓어올랐다. 어떤 추한

괴물이 갖고 있더라도 지탄받을 만한 끔찍한 허무를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

다운 존재가 품고 있었다. 그래서 분노와 증오의 뒷자락에 슬픔이 붙어나왔

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어째서 이렇게 되어야만 했는가, 누가 당

신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당신이 선택한 거라면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는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정말 아름다울 수 있었는데, 당신과 나의 거리가 이

렇게 멀지 않을 수 있었는데, 그 어둠만 걷을 수 있다면……

그때 아저씨가 내 눈을 가리고 말했다.

“보지 마, 이 녀석 인큐버스야.”

그래서 나? 눈이 가려서 그를 못 보게 되자 또다시 모순된 감정이 한꺼

번에 려들어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말했다.

“좀 빨리 하지, 이 손 치워요!”

좀 빨리 알려줬으면 이렇게 몸이 뜨거워지는 민망한 얼굴을 안 보 어도

됐잖아, 하는 마음과 어서 이 손 치우고 그를 계속해서 보고 싶은 마음이 머

릿속에서 미처 정리되지 못한 채 튀어나갔다.

그의 목소리임이 분명한, 바람처럼 간질거리면서 심장으로 바로 스며드

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우리 클럽 알바야. 여긴 웬일로 왔냐? 아! 설마, 여기 인수하는 게 너

야? 이야기는 들었는데, 여기 프랜차이즈 외식업체 들어온다고 말이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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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번엔 건설업체 쪽에 있었는데, 언제 바꾼 거야? 어쨌든 반갑다, 갑자기 만

나니 더 반갑네. 시간 있어?”

아저씨가 평소와 달리 말을 쏟아붓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생전 느낄

수 없던, 아저씨가 상황을 모면하고 싶어하고 있고 뭔가를 많이많이 두려워

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러면서도 말투와 내용은 무척 친근하고, 서

로에 해서 많이 알고 있으며 꽤 자주 연락하는 사이란 걸 내비치고 있었

다. 혼란스러웠다. 아저씨는 천사인데 어째서 인큐버스라고 할 만한 존재와

친근하게 구는 걸까? 물론 종교적인 의미에서 신의 사자인 천사가 아니라지

만, 저 남자는 어떻게 봐도 어둠의 족속이고, 아저씨가 그렇게나 몰아내려

고 하는 어둠을 퍼뜨리러 이곳에 온 게 분명한데 말이다.

이상하게도, 아직 내 눈을 손으로 가리고 있는데 말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그래도 인사 정도는 하게 해주지?”

“에이, 어린애한테 뭘 관심을 가지고 그래. 무슨 일로 온 건지 이야기나

하자고. 만난 것도 오랜만이잖아? 내가 한잔 사지.”

뭐, 한잔 산다고? 나를 빼놓고?

어이가 없어서 눈을 가린 손을 치우고 아저씨를 째려보려고 했는데, 아

저씨와 그 남자의 모습은 길을 따라 내게서 멀어져가고 있었다. 이제 보니

말소리가 멀어져간 게 이상한 게 아니라, 저렇게 멀리 있는데도 소리가 들

린다는 게 이상할 만큼 멀리 있었다. 아저씨는 이제 그 남자의 어깨에 팔까

지 두르고 끌고 가다시피 하고 있었다.

“자, 내가 한잔 사는 게 흔한 일인 줄 알아? 다시 없을 기회다!”

“흐흠.”

코웃음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얌전히 가던 그가 고개를 약간

돌려 내 쪽을 힐끗 보는 것이 느껴졌다. 본 것이 아니라 느꼈다. 그의 뒤에

일렁이는 어둠에 한기가 일면서 또한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기운

에 몸이 간지러웠다.

그가 눈길을 다시 앞으로 돌리더니 내게도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

했다.

“그렇게나 지키고 싶다면야.”

“에이, 그게 아니지. 아니, 설마 내 말을 못 믿는 거냐! 갑자기 만나서 반

갑다니까! 생각해보니 너한테 술을 접한다 한다 해놓고 못했던 것도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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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 말이야!”

그를 끌고 가는 아저씨가 원망스러운 동시에, 그가 멀어져간다는 게 너무

너무 안심이 되고 이제야 숨을 제 로 쉴 수 있을 것 같은, 천국과 지옥 왕복

번지점프를 몇 번이나 거듭하며 별 김칫국을 다 마시고 별 자괴감을 섭취한

끝에야 그의 기운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거리로도 시간으로도 상당히

떨어진 후 다. 그때에야 아저씨가 또다시 날 구했음을 알았다. 나 혼자서 그

남자와 마주쳤다면, 눈동자를 마주친 순간 바로 그의 품에 몸을 던졌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내 몸만이 아니라 혼까지 빨아마셨을 수도 있었

고, 껍질을 어둠 속에 던져두고 갖고 놀 수도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조종을 받으며 꼭두각시로 살 수도 있었다. 인큐버스라는 것은 꿈에 나

오는 색정 악마라고 하지만, 그 사람은 그냥 그런 몽마가 아니었다.

갑자기, 그 사람을 내게서 떼어놓겠다고 술까지 접하러 가버린 아저씨

가 무척이나 걱정스러웠다. 다행히도 저녁 공연을 준비할 시간이 되자 아저

씨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돌아왔다. 내가 잔뜩 긴장하고 기다리고 있었

던 걸 알았는지,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멀쩡해, 멀쩡해”라고 웃어주기도 했

다. 그 다음에 “확 품에 뛰어들 줄 알았는데, 그래도 자제심 좀 있더라?”라

고 말해서 걱정은 갑자기 날아가고 얄미움이 솟구쳐서 등을 짝 때려버리고

말았다. 사실 얄미워서가 아니라 창피해서 지만. 걱정했단 게, 그리고 그때

그렇게 넋을 놓았던 게 부끄럽고 민망해서 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

는 것도 티내기 싫어서 지만.

다음 날, 아저씨의 심장이 멈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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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일러스트레이션

by 발랄민트

Lost Desti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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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X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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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정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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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김의성의 예술 나누기_4

매너리즘, ‘일탈’에 빠지다

종종 삶이 무료해지기 시작했다는 친구들로 부터 ‘나 매너리즘에 빠졌

어.’를 듣는다. 그런 친구들과 노래방에 오랜만에 들르면 꼭 그들은 자우림

의 「일탈」을 부르곤 한다. 힘없는 목소리로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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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해 난 하품이나해’를 나지막히 뱉고나면 나오는 파트, ‘뭐 화끈한 일 뭐

신나는 일 없을까.’에서 그들은 갑자기 두눈에 빛이 서린다. 뱃속에서부터

무언가가 터져나올 때를 기다리는 맹수의 눈빛을 하고 있는 그들. 나는 ‘신

도림에서 스트립쇼를’하기 직전인 그 때에 이미「일탈」은 시작하 다고

본다. 미적지근한 일상에서 ‘뭐 화끈한 일 없을까?’를 고민하는 그 때에 터

져나오는 “일탈”. 나는 그것이 진정한 ‘매너리즘’의 의미가 아닐까한다.

매너리즘은 1520년경부터 17세기 초에 걸쳐 주로 회화를 중심으로 유럽

전체를 풍미한 미술 양식. 매너리즘이라는 용어는 17세기 이후부터 미술에

관한 문헌에서 쓰이기 시작했으며, 역사적, 비평적 의미가 함축된 복합적인

의미로 문학 비평 및 신학에도 통용되었다. 보통 미술사의 시 구분에서는

르네상스 미술에서 바로크 미술로 이행하는 사이(1530~1600)에 이탈리아

에서 나타났던 과도기적인 미술 양식을 말한다. 매너리즘이란 종종 성숙기

르네상스 고전주의의 쇠퇴를 뜻하거나 고전주의에 한 반동을 일컫는다.

또 성숙기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이어주는 교량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

지기도 했다. 명칭 자체는 ‘스타일, 양식’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마니에라

maniera’에서 유래했으며, 개성적인 양식이 아닌 모방이나 아류 등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매너리즘이라는 용어는 ‘퇴보에 도달한 전통

주의’혹은 ‘정신적인 위기의 시 에 두각을 나타낸 죽어가는 양식의 마지막

표현’등으로 매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20세기 초 매너리즘 시 의 예술가들

에 한 관심이 부활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기 시작하 다. 서양미술의

꽃이라고 불리는 하이르네상스와 동시 에 존재하 으며 이전의 미술양식

과는 다른 독특함과 탈 르네상스적, 불균형적이고 왜곡되고 비틀린 몸의 표

현과 벽장 안에 갇혀있는 듯한 공간감 등은 매우 이색적이다. 사실 그렇게

넓게 나타났던 양상은 아니고 이탈리아 플로랜스지방의 지역적 특생으로도

보인다. 일종의 고급문화로서 소수를 위한 장르화가 아니었나 추측해본다.

매너리즘시기의 유명한 작품들 중 개인적으로 가장 선호하는 작품을 고

르자면 브론치노의 <비너스와 큐피트가 있는 알레고리>이다. 이 작품을 처

음 보았을 때에 나는 마치 장롱 문을 열었더니 그 안에서 투닥거리고 있던

정령들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새하얀 나신들과 그에 비되는 선명한 푸

른색 장막, 그리고 가지각색의 표정들과 포즈, 각종 물건들이 어지러이 한

곳에 그려진 이 작품은 수수께끼와도 같다. 맨 뒤의 손톱을 세운 망각의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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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고리인 여성이 시간의 알레고리인 남자와 푸른 장막을 서로 쥐고 서로를

덮으려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제일 크게 그려져 있는 전라의 성숙한 여

인과 엉덩이를 내 고 있는 소년은 금색사과와 황금화살을 들고 있음으로

서 큐피트와 비너스임을 알 수가 있다. 맹목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는 황금

화살을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몸에 찔러 넣는 비너스의 표정은 쾌락에 빠져

그 어떤 이성적 상태가 불가능해 보인다. 바닥에 놓인 가면들은 위선과 가

식을 뜻하며 새의 몸을 가진 속임수의 알레고리가 달콤함을 상징하는 벌집

과 아픔을 상징하는 발톱을 들고있다. 꽃을 들고 있는 쾌락은 히죽거리는

웃음을 보여주고 있고 저 깊숙한 곳에는 비명하는 질투, 혹은 성병의 알레

고리가 그려져 있다. 그 외에도 모래시계와 장미, 각각의 표정들 등 다양한

것이 그려져 있다.

이 복잡하고 흥미로운 그림은 고 그리스, 로마 문화에 한 이해와 당

시의 문화적 지식을 기반으로 상상력을 자극한다. 각 인물과 물건들의 정체

에 한 해석, 각 알레고리마다 연결되는 지식, 알레고리와 알레고리 사이

의 관련성, 전체적인 구조와 흐름은 계속해서 머릿속을 자극한다. 그러면

나는 이러한 상상에 빠지게 된다. 완성된 그림 앞에 소파에 앉아 자신과 소

수의 사람들만이 즐기는 지적유흥거리. 이것은 따분한 파티에 질린 상류층

귀족이 뜻에 맞는 친구와 실험적이고 실력있는 지식인이자 예술가인 브론

치노를 불러 그들의 지적유흥을 위해 이런 기괴하고 묘한 작품을 주문제작

하게 되었다는 상상말이다. 딱히 나의 이런 상상과 다를 바 없이 진짜 이 작

품의 비하인드 스토리도 이와 엇비슷하다. 메디치가의 코시모1세를 섬기며

궁정화가로 활동하던 브론치노는 코시모1세의 개인적인 주문으로 그려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매너리즘을 표하는 매우 유명한 그림이지만

매우 외설적이던 관계로 수 백년간 몇몇 소장자들에게만 보여지고 공유되

어 일반에게는 그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었다. 또한 매우 비싼 작품이기도

하 고 그래서 이 그림을 본다는 것은 상류층 중에서도 소수의 특권층만이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의 포르노들과 비교해서는 정숙해보이

기까지 하지만 이것이 제작된 당시에는 감상자로 하여금 엄청난 충격을 주

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그림은 아직까지도 완전히 해석되지 않았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의 매너리즘시기의 작품을 주제로 한 이유

는, ‘매너리즘에 빠진’사람들을 위해서이다. 사실은 매너리즘이 ‘뭐 화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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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없을까.’라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는 것만큼 재밌는 이야기가 어디있을

까! 불투명한 미래를 준비하기위해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반복적인 일상에서 고민하는 청춘들에게 말하고 싶다. ‘매너리

즘’은 고민의 시간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되는 시간,

즉 ‘일탈’이 시작되는 그 순간이다.

✥ <목소리가 목솔목솔>은 필진 사정으로 인해 이번 호는 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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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정세랑의 말랑몰랑_4

미신이라니, 귀신이라니

아마도 재작년 생일이었다고 기억합니다. 파주에서 구일산으로 논길을

헤치고 가는 아슬아슬 퇴근 버스를 타고 있었어요. 차에는 사람이 별로 없

었고, 탑승구 쪽 바닥 판이 낡다 못해 뚫려 지나는 도로가 다 보 지요. 한

시간에 한 오는 버스를 늦지 않게 탔다는 것 외에, 생일이라고 특별히 좋

은 일은 없었습니다.

그때 엄마한테 전화가 왔어요.

“팥밥 해먹었니?”

“내가 그런 거 해먹을 정신이 있으면 이러고 안 살지.”

“어머, 안 돼. 팥은 꼭 먹어야 돼! 비비빅이라도 사 먹어!”

“왜?”

“귀신 붙는단 말야. 1년 내내 붙는단 말야!”

버스의 리듬에 몸을 맡기고 반쯤 넋이 나가있다가, 충격에 깨어났습니다.

귀신이라니. 공부도 오래하고 직장도 오래 다닌 현 여성의 모델 같은 엄

마 입에서 귀신이라니. 미신이라니, 말입니다. 귀엽긴 했지만요. 하도 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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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종용하기에 결국 재래시장에서 팥시루떡을 샀습니다. 어두운 책상에

앉아 혼자 시루떡을 먹다가 소화가 매우 안 되었던 게 기억납니다.

사라졌다고 여겼던 세계가 갑자기 여기로 불려나올 때, 세 에서 세 로

전달된 불안이 문득 수면으로 상승할 때, 그때마다 느껴지는 이질감에는 쉽

게 익숙해질 수가 없네요. 아마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더 자주

겪지 싶습니다. 마치, 버스 바닥 틈새로 어지럽게 흘러가는 도로를 힐끔힐

끔 보게 되는 것과 같지 않은가 해요.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부엌신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학 때 말도 안 되게 작은 원룸에서 자취를 할 때 습니다. 새벽에 싱크

에서 큰 소리가 나서 깼는데, 찬장에서 하얀 족제비가 떨어져 있었습니

다. 잠결이기도 했지만 매우 자연스럽게 ‘신축 원룸이라 부엌신이 아직 미

숙하구나, 쯔쯔’ 하며 족제비를 얼른 부뚜막…… 아니, 환기 팬 위에 올려줬

던 게 생생합니다.

아침에 깨고 나서야, 족제비라니, 눈이 세 개라니, 부엌신이라니! 뒤늦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촉감까지 생생한 꿈을 자주 꾸긴 하지만 그중에도 지나

치게 실감났지요. 그래서 가끔 크래커 같은 것을 환기팬 위에 올려두며 공

양하게 되었습니다. 여행지에서 사온 부적들도 다 그 근처에 보관했지요.

이사 올 때, 과연 따라와주려나 궁금했지만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어

쩌면 이제 꽤 성장해서 싱크 에 떨어지지 않는 것일지도 몰라요. 그 작은

원룸에서 살 때, 다른 곳에서보다 시험이라든지 면접이라든지 척척 잘 붙었

던 걸로 보아 제 공양물들에 족제비가 흡족했던 건 틀림없습니다. 최근에는

무려 일러스트레이터 후배에게 부탁해서 그 족제비 그림을 주문 제작했습

니다. 좋은 운이 돌아오길 바라면서요. 여기까지 말하고 보니, 엄마한테 미

신쟁이라 할 건 아니었군요.

작가들은 이런 경험담을 나누길 아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토지문

학관이라든지, 연희 문학창작촌 같은 작가 레지던스에 다녀오신 분들은 꼭

뭔가를 목격하셨더라고요. 서로의 뻥쟁이 기질을 증폭시켜서인지, 아니면 정

말 귀신들이 작가들을 따라다니는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출판단지에도 한국

전쟁 때 죽은 어린 군인들이 기웃거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격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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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도 했고, 아직도 철모나 신발 같은 것이 발견된다고 하긴 합니다.

어쨌든 역시 중요한 건 거리감인 것 같습니다. 그런, 부스러지는 세계의

가장자리를 보았다고 해서 휘말려버리면 무속인이 되어버리지요. 가끔 거

의 방언 같은 소설을 쓰는 작가들을 보는데, 아무래도 중심을 잃어버린 경

우지 싶습니다. 부엌에서 뭐가 소리를 내며 떨어지건, 유머러스하게 받아들

일 일이지 지나치게 심각해지면 곤란합니다. 뛰어난 작가일수록 극적이면

서 흥미진진한 귀신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만, 귀신에게 소설을 신 쓰게

하면 곤란합니다. 헛소리가 되어버릴 거예요. 호러 작가라 해도, 불안만으로

소설을 써서는 한계에 곧 부닥치고 맙니다.

결국 팥밥에서 팥시루떡 사이, 팥시루떡에서 비비빅 사이, 미세한 거리감

들이 글과 삶을 가늠하게 합니다. 지척咫尺이란 말에 들어간 척, 그 짧은 자

길이를 떠올립니다. 가까워도 그 가까움의 등급을 세세히 따져보는 것.

여기는 뉴욕이에요. 회사를 그만두고 낯선 도시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제 가방에는 무려 달마 사 부적과 터키에서 온 이블 아이 팔찌가 들어있지

요. 뉴욕에서, 미신에 해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돌아가면 팥이 들어간 음식을 먹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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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SF와 이어지는 세상_4

우주 여행의 시대, SF 속의 우주 여행 이야기_전홍식

2006년 미국의 마이클 폴리쉬 감독이 만든 화 <애스트로넛 파머>는

우주여행을 꿈꾸는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일찍부터 우주로 사람을 보냈고

이제껏 수많은 우주 탐사를 성공한 미국에서 우주여행을 꿈꾸는 사람의 이

야기는 별로 특이한 것이 아니지만, <애스트로넛 파머>는 굉장히 특이하고

드문 내용을 담고 있다. 바로 ‘자택에서 직접 로켓을 만들어 우주로 나가려

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찰리 파머라는 평범한 농부이다. 그에게는 우주 비행을 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고, 그래서 일찍이 미항공우주국NASA에 들어가기도 했다.

불운한 사정으로 NASA에서 나오면서 그 같은 꿈에서 멀어졌던 파머 지

만, 그는 다른 이의 도움 없이 오직 그 자신과 가족의 힘으로 우주로 나가겠

다는 꿈을 꾸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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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택에서 직접 로켓을 만들면서 파머의 꿈은 실현에 가까워지지만, 정부

에서 그의 시도를 가로막고 나오면서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다. 온갖 법적

근거로 그의 꿈을 방해하는 정부에 맞서 파머가 언론과 중을 끌어들이면

서 이야기는 고조된다….

평범한 개인이 우주여행의 꿈을 이루고자 로켓을 만든다는 이야기는 과

학적 사실보다는 가족의 격려와 사랑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 작품이지만, 이

이야기는 한가지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바로 우주개발이라는 것이 정부

의 필요성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개인의 꿈이 모여서 이루어

진 것이며, 정부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애스트로넛 파머 (copyright ⓒ Warner Bros. Alright Reserved)]

우주의 한 발짝 앞이라 할 수 있는(그러나 그 한 발짝은 너무도 먼) 하늘

로의 여정은 정부가 아닌 평범한 개인에 의해 시작되었고 현재는 수많은 민

간 기업이나 개발자가 만든 항공기가 하늘을 수놓고 있지만, 개인에 의해

시작되었던 로켓을 이용한 우주로의 여정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정부 기관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고 있다.

인공위성이나 탐사 장비는 민간 업체에서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을 쏘아

올리는 로켓은 정부 기관이 주도하는 계획으로 만들어져 천공을 향해 날아

오른다. 그것은 로켓이라는 기술이 그만큼 만들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기로서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사람이나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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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우주까지 옮길 수 있는 우주 로켓은 그 로 륙 간 탄도 미사일로 바뀔

수도 있다는 점에서 더욱 위험하다. 일찍이 소련이 스푸트니크를 먼저 쏘아

올렸을 때 미국이 겁에 질렸던 것이나 북한의 로켓 발사 소식에 주변국이

긴장하는 것도 그들 로켓이 갑자기 치명적인 무기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와 북한의 여러 실패 사례에서 보듯 우주 로켓의 개발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지금은 우주 개발을 주도하는 미국조차 스푸트니크 성공

에 당황하여 서둘렀던 뱅가드 로켓 발사가 멋지게 실패하여 “웁스니크”,

“플롭니크”같은 오명을 뒤집어썼으니 말이다.

[“Flopnik(털썩니크)”뱅가드의 실패는 당시 신문을 이런 문구로 가득 채웠다.]

하지만 기술이 발달할수록 우주여행은 점차 쉬워질 것이다. 미래의 이야

기를 다룬 여러 SF 작품에서는 우주여행이 너무도 편안하게 바뀐 나머지 택

시나 버스처럼 손쉽게 우주선을 타는가 하면 달 정도는 주말여행이나 수학

여행으로 다녀오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승용차에 이어 개인 소유의 항공기가 탄생하듯, SF

속에서는 개인이 우주선을 소장하고 무역이나 관광 여행 등에 나서는 것

이 쉽게 등장한다. 화 <스타워즈> 속의 한 솔로는 도박으로 우주선을 땄

다고 당당하게 말할 정도.

이런 상황이라면 복권의 상품으로 우주선을 받고 백화점 경품으로 화성

여행이 당첨되는 정도는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같은 SF 작품이라고 해도 우주 개발의 초기 과정에는 많은 역경

과 어려움이 존재한다. 때문에 이들 작품에서는 다수의 우주 개발이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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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로 이루어지며 그 탓에 일어나는 수많은 갈등을 목격할 수 있다.

가이낙스의 애니메이션 <왕립우주군>은 냉전 시 와 비슷한 국가 주도

의 경쟁적인 우주 개발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왕립 우주군이라는 말 그

로 국가의 위신을 건 우주 로켓 발사는 적국에게 과시하듯 국경 바로 앞

에서 진행되며, 이를 위협이라 느낀 적국이 침공해오면서 로켓을 둘러싼 두

나라의 전투가 전개된다.

한편 만화 <문 라이트 마일>에서는 달의 자원을 둘러싸고 미국 중심의

세력과 중국 중심의 세력이 편을 나누어 립하는 상황을 보여주는데, 심지

어는 우주 전투기를 동원한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지상의 립이 우주로

이어지는 것은 만화 <플라네테스>에서도 벌어진다.

[왕립우주군. 우주조종사가 국가의 웅이 되는 시 의 이야기이다. (copyright ⓒ Gainax Alright Reserved)]

<플라네테스>에서는 우주 진출에 반 하는 테러 조직과의 싸움이 두드

러지지만, 지상에서의 정치가 우주에 향을 미치고 심지어는 전쟁까지 벌

이는 장면도 볼 수 있다. 민간 업체에 등록되어 우주 쓰레기(스페이스 데브

리)를 치우는 것을 일로 삼는 그들 앞에서 우주 전쟁으로 거 한 우주정거

장이 고철 덩어리가 되는 장면은 우주 개발이 오직 ‘꿈’만으로 가득한 것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애스트로넛 파머>처럼 같은 상황은 어디까지나 ‘꿈의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들 작품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은 이들이 단순히 우주

개발의 삭막한 현실, 정치적인 립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애스트로넛 파머>에서 정치적인 이유를 내세운 정부의 방해를 가족의

지지와 수많은 중의 꿈을 통해서 극복하듯, 이들 작품에서도 사람들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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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여서 우주로 나아가는 여정을 완성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매우 사실적인 연출로 가득하고, 우주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플라네테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사람의 꿈이 모여 우주여행이 이루어짐을 느끼게 한다.

(copyright ⓒ 삼양 출판사, Kodansha, Yukimura Makoto Alright Reserved)]

만화 <트윈 스피카>는 이 같은 사람들의 꿈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여

기서도 물론 우주 개발은 정부주도로 이루어지지만, 로켓 사고로 가족을 잃

고도 우주로 나아가고 싶다며 열심히 노력하는 소녀의 모습에서는 그 같은

어두운 부분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게 꿈이 모여 우주 개발이 진행되고 발전하면 우주는 국가 간의 정

치 싸움만이 아니라 기업 간 립도 전개되기 시작한다. 심지어 달에 수많

은 사람이 살아가는 <플라네테스> 정도 되면 보험회사마저도 우주에 진출

해서 엄청난 판촉 공세가 진행되게 마련이다.

이 같은 회사 간의 경쟁은 단순히 우주에서의 보험 외판 같은 것에서만

드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플라네테스> 속의 주인공 하치마키가 ‘자신의 우

주선을 갖고 싶다.’라고 생각하듯, 우주선의 개발 경쟁 역시 치열하게 전개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 개발의 초기에 우주선 회사 간의 경쟁은 어떻게 이루어질

까? 일본의 SF 작가인 노지리 호스케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애니메이션 <로

켓 걸>에서는 바로 이 같은 상황을 그려낸 희귀한 작품이다. 이 작품 속의

‘로켓 걸’은 –어쩌다 보니- 로켓 조종사가 되어 버린 고등학생 소녀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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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녀들이 로켓 조종자가 된 것은 바로 ‘몸이 작고 몸무게가 가볍다.’라는

점.(승마의 기수와 마찬가지이다.) 우주로 무언가를 보내려면 중량이 가벼

울수록 좋다는 상식에 바탕을 둔 이 이야기에서는 미국의 스페이스 셔틀과

는 달리 작고 가벼운 우주선을 이용해 수송이나 위성 수리 같은 일을 맡아

활약한다. 주인공조차 아르바이트생이라는 점에서 그야말로 ‘민간 우주 사

업’의 전형을 보여줄까?

여고생 아르바이트생이 일본인 최초의 유인 로켓 조종사가 된다는 점에

서 황당한 듯하면서도 설득력이 있는 이 이야기는 한편으로 현재의 우주 개

발 계획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 속의 개발자들은 ‘우주로의 꿈’보다는 효율과 이

익을 더 중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이면엔 ‘꿈’이 있을지라도 이들은

어디까지나 한정된 예산 내에서 최 한의 효율로 로켓을 완성하고 계약으

로 돈을 버는 것이 고민 중이다. 우주 개발에서의 상업성을 잘 보여준 작품

이랄까?

[로켓 걸. 꽤 독특한 작품이다. (copyright ⓒ Fujimi Shobo, Mook DLE, Nojiri Hosuke, Alright Reserved)]

지난 5월 22일. 미국 플로리다주의 케이프 커내버럴 공군기지에서 한

의 로켓이 발사되었다. 일찍부터 무수한 로켓을 쏘아 올린 미국에서 새로운

로켓이 떠오르는 것은 그다지 특이한 일이 아니지만, 이날의 로켓 발사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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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바로 ‘역사상 최초로’ 민간 회사의 로켓이

국제 우주정거장ISS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간 회사가 만든 더 작고도 가벼운 로켓을 이용한 우주 수송의 시작은

앞으로의 우주 개발 계획이 스푸트니크나 아폴로 시 와는 다른 것이며, 국

가의 위신이나 체면이 아닌(그리고 사람들의 꿈도 아닌) ‘실익’을 중심으로

전개되리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효율을 중시하고 가능한

저렴하게 우주로 가는 경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오랜 옛날 자동차가 처음 나왔을 때 자동차는 사치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포드사가 새로운 제작 시스템을 도입하고 량 생산에 나서면서 자

동차는 누구나 살 수 있는 물건이 되었고 자동차는 중적인 물건으로서 퍼

져 나갔다.

이와 마찬가지로 언젠가 우주선도 회사들로부터 싸게 나와 개인이 살 수

있는 시 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로켓걸>에서처럼 이런 시 엔 상업적인

효율성이 중요해질 것임은 분명한 일이다.

하지만 자동차가 중화를 이룬 이 시 에도 자동차에 한 다채로운 꿈

이 존재하듯, 언젠가 우주선이 상업화, 중화를 이룬 시 에도 우주선에

한 낭만과 꿈은 존재할 것이다. 한 사람의 농부가 자신 만의 방법으로 우

주로 가려는 꿈을 준비했던 <애스트로넛 파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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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토탈 리뷰_1

무력감의 늪에서 세 작가를 보다: 사쿠라바 카즈키, 윤이형, 김사과의 절망론_송한별

0. 벽을 느끼다

언젠가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마감에 쫓겨 잠도 제 로 못 자고 일

하고 있었을 때 다. 손가락에 힘이 안 들어가 오타가 속출하는데, 문득 깨

달음을 얻었다.

아니,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 누가 본다고?

이 일을 해내도 별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반 로, 이 일을 하지 않

는다면… 마찬가지다. 별 일 없을 것이다. 지청구야 좀 먹겠지만 누가 진심

으로 뭐라 그럴까. 돈 되는 일도 아니고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닌데.

바로 그 지점에서 엄청난 탈력감이 찾아왔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라면 어쩌는 게 나을까? 당시의 나는 확답할 수 없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

지다. 뭐라도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 나을 것 같긴 하지만, 정말 그럴까? 해

보지 않고서는 확답할 수 없다. 일단 일을 안 하면 내 한 몸은 안녕해지지 않

겠는가.

그래서 어떻게 됐느냐면, 결국 하던 일을 끝냈다.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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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일을 80% 이상 해치웠기 때문이다. 마무리만 남았는데 갑자기 그만두는

게 더 이상하니까. 하지만 그 뒤로도 그 느낌이 때때로 고개를 든다. “포기

해, 포기하면 편해”라는 유명한 만화 사와 “우린 아마 안 될 거야”라는 철

지난 유행어, 그리고 ‘잉여’라는 자조적인 호칭을 들으며 진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나는 이 불편한 기분에 ‘무력감’이라는 이름을 붙 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나보다 잘 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사회는 꿈을

가지라 하지만 꿈을 이루려는데 가장 큰 방해가 되는 건 이 사회 같고, 뭣보

다 현실에는 꿈도 희망도 없다. 안 되는 건 왜 또 그리 많은지, 음악도 만화

도 게임도 안 된단다. 게다가 그 “안 돼”를 떠받들고 있는 건 사회, 경제, 정

치적인 압력이다. 그에 반해 나는 돈도 지위도 없고, 하다못해 동원할 수 있

는 머릿수까지 딸린다. 그런데 불만이 있으면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변화를

이끌어내란다. 솔직한 감상은 이렇다.

아 그래?

하도 답답해서 집 나간 어처구니를 잡으러 가고 싶은 심정이다.

이렇게나 무력감을 느끼기 좋은 세상이라니. 내가 잘못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 사실 내가 문제 아닐까? 그런데, 우연히 나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

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것도 세 명이나.

무력감에 해 말하는 세 명의 논자란 사쿠라바 카즈키, 윤이형, 김사과,

이상 세 명의 작가다.

그러니까, 이제부터의 이야기는 무력감과 무력감을 하는 태도에 한

이야기이다.

1. 사쿠라바 카즈키 ― ‘확고’하고 ‘혼란’한 자들의 ‘자리 잡기’

사쿠라바 카즈키가 그리는 무력감은 주로 10 청소년들에게 나타난다.

10 특유의 방황과 뒤섞인 무력감은 추억이라는 외면을 가장하고 있다. 이

면에 숨은 맹독은 글을 남김없이 읽은 다음에야 정체를 드러낸다. 그런 글

을 쓰는 사쿠라바 카즈키에게 몰입력 있는 문체는 굉장히 효과적인 무기다.

사쿠라바 카즈키의 작품에 등장하는 10 는 크게 두 분류로 나눌 수 있

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의심이 없는 단호하고 확고한 ‘확고’ 유형과,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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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고 있는 자기 모습조차 확신할 수 없는 무력한

‘혼란’ 유형으로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자기자신

에 한 확고한 자신이 있는 ‘확고’ 유형은 과거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주로 발견되는 반면, 그 반

의 유형은 현 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주로 발

견된다는 것이다.

가장 ‘확고’한 인물은 제철업으로 장성한 아카

쿠치바 가문의 여인 3 에 관한 소설인 『아카쿠

치바 전설』에서 찾을 수 있다. 천리안을 가지고

아카쿠치바 3 의 반석을 닦은 1 아카쿠치바 만요와 그 딸인 전설적인 여

고생 폭주족 아카쿠치바 게마리는 고민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응당 해야

할 일이 있고,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전력으로 수행

하고 그에 합당한 우를 받는다. 게마리는 친구를 잃고 폭주족을 졸업하면

서 흔들리지만, 곧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 안정을 되찾는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확고’하다.

반면 ‘혼란’ 유형은 조금 더 많은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사탕과자 탄

환은 꿰뚫지 못해』의 야마다 나기사는 현실에 작용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

을 원하지만, 현실보다는 환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 같은 기묘하고 아슬아

슬한 친구 우미노 모쿠즈를 버리지 못하고 흔들린다. 『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의 아오이와 시즈카의 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오이는 계부

에게 살해위협을 받고 있다는 시즈카에게 깊이 관여하게 된다. 이들은 ‘확

고’해지려고 하지만 그것은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모쿠즈와 시즈카가 처한

상황은 만요나 게마리가 처한 상황보다 조금 더 각박하고, 고려해야 할 문제

도 많기 때문이다. 모쿠즈의 아버지는 유명인이지만 “바다의 쓰레기”라는 이

름을 딸에게 지어줄 정도의 인물이다. 반면 게마리는 가업을 잇기 위해 데릴

사위와 결혼하기로 결정할 때조차 반발하지 않을 정도로 아버지와 갈등이

없다. 이를 무관심이라 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딸을 죽이려고 드는 시즈카의

계부보다야 낫지 않은가. ‘확고’ 유형은 태생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확고’할 수 있었던 반면, ‘혼란’ 유형은 같은 이유로 혼란할 수밖에 없다. 굳

이 이유를 붙이자면, 그들이 ‘혼란’한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아카쿠치바의 3 이자 게마리의 딸린 아카쿠치바 도코는 게마리와 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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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이야기를 전하며 이렇게 말한다.

“겨우 당도한 현 . / 나에게는 말해야 할 별다른 새로운 이야기가 아무

것도 없다. / 정말이지, 무엇 하나 없다.”

‘확고’한 만요와 게마리의 후손인 도코의 이 사는 더 이상 ‘확고’할 수

없는 시 가 되었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도코가 살아가는 2000년 가

모쿠즈와 시즈카가 살아가고 있는 시기와 비슷하다는 것은 반드시 지적하

고 싶다. 더 이상 ‘확고’할 수 없는 시 에 도코, 모쿠즈, 시즈카 세 인물이

맞이한 것은 더 이상 어떤 것도 확신하고 맹목적으로 믿을 수 없게 되어버

린, 무력감의 늪이다.

무력감의 늪을 맞이한 도코는 아카쿠치바 가문의 이야기 중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해결한다. 만요나 게마리에 비해 아무런 능력도 없는 도코는 이

수수께끼를 해결함으로서 비로소 심적으로 아카쿠치바 가문을 잇고 “마을

에서는 아카쿠치바 본가의 딸(도코를 말한다―인용자)도 약간은 천리안이

라는” 소문이 돌면서 외적인 인정을 받는다.

모쿠즈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정할 수 없었던 나머지 환상세계를 만들

어 그 안으로 도피한다. 그곳에서 모쿠즈는 인어의 공주이고, 10년에 한 번

오는 큰 폭풍이 오면 바다로 돌아가야한다.

시즈카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계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오히려 계부

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시즈카의 농담 같아 보이는 계획들은 사실 진지

한 시도 으며, 그 계획들을 농담으로 웃어 넘길 때마다 그녀의 위기는 점

점 고조되어간다.

무력감의 벽을 맞이해 세 소녀가 택한 행동은 각기 다르지만, 그 목적은

동일하다. 그들이 취한 전략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만드는, 이른바 ‘자

리 잡기’이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필요하다는, 혹은 자신의 가치가 인정 받

고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이 행동에는 인정욕구 뿐만 아니라 생존을 위

한 처절한 노력이 들어있다. 물론 이 전략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세

소녀는 각기 다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사쿠라바 카즈키는 우리가 무력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무력감을

하는 방법으로 ‘자리 잡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 방법 또한 완벽하지 않

다는 점에서 그녀 또한 무력하다. 책장을 덮었을 때 마음 한 켠이 불편하다

면 책 어디선가 그런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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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윤이형 ― 확대된 절망에서 ‘바라기’

윤이형의 작풍은 장르 픽션적인 서사를 제외하면 논할 수 없다. 윤이형

은 필요하다면 SF, 판타지, 혹은 그 이외의 것이라도 자신의 글에 녹여낸다.

작가는 그런 방법을 통해 소설 내적인 상황을 보다 적극적이고 극적으로 통

제할 수 있다. 이렇게 통제된 배경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맞이하는 건 절

망이 확 된 세상이다. 즉, 인물들은 그곳에서 자신을 위해 준비된 절망과

맞닥뜨린다.

「스카이워커」에는 종교의례화되어 엄숙함을 요구하는 트램펄린 경기

에 해 자세히 모르고 그저 트램펄린의 순수한 기능에 반해 프로 선수가

된 주인공 지현이 나온다. 「완전한 항해」에는 일주일 안에 죽을 거라는

사실상의 사망선고를 받는 소인족 창과, 그런 창을 흡수해 새로운 가능성을

얻으려는 창연이, 「결투」에는 자아가 분열되어 다른 몸으로 갈라지는 세

상에서 몇 번이나 분열된 자신을 제거하려 ‘결투’하는 최은효가 나온다. 이

들의 공통점은 명백하다. 바라는 바는 뚜렷하나 그것을 이루지 못한다.

원하는 바를 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자신 때문이기도 하고 환경 때문

이기도 하다. 인물에 따라 이런 절망을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윤이형의 소설에서 이런 차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주인공

들은 모두 그들을 위해 맞춤제작 된, 완벽해 보이는 절망을 맞는다. 절망까

지 이르는 길이 어떤지는 크게 상관 없다. 등장인물이 중요한 선택을 하는

것은 절망을 목격한 다음이기 때문이다. 절망의 앞에서, 비로소 진짜 이야

기가 시작된다.

트램펄린의 가능성에 매료된 지현 앞에 중력장

을 자유자재로 조절해 평범한 사람은 할 수 없는 기

술을 사용하는 유리 알렉세예비치 보긴스키가 나

타난다. 유리에게 트램펄린은 종교의례가 아니라

‘탕탕’, 그러니까 순수한 의미에서의 트램펄린 기예

다. 지현은 유리에게서 가능성을 보지만 평범한 인

간인 지현은 유리의 기예를 따라할 수 없다. ‘탕

탕’에서 느낀 바를 새로운 기술로 이끌어내어 트램

펄린 경기에서 선보이지만, 선수 자격을 박탈당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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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다. 지현에게 유리와 유리의 기예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그림의 떡이다.

창과 은효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죽음을 선고 받은 창은 끝내 창연

과 합쳐지지 않고 죽음을 받아들인다. 첫 번째 분열 때 결투 진행요원에게

본체와 친구가 되어달라고 말한 은효의 분열체는 본체에게 살해당한다. 결

투 진행요원을 기억하는 두 번째 분열체도 마찬가지로 본체에게 살해당하

고, 그 뒤에도 은효의 분열은 멈추지 않는다.

「로즈 가든 라이팅 머신」에 이르르면 절망의 농도는 훨씬 짙어진다.

문장을 넣으면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듬어주는 기계인 ‘로즈 가

든 라이팅 머신 RG 001’ 앞에서 습작가 이비와 몽식은 혼란에 빠진다. 기계

는 창작을 할 수 없다지만 아무렇게나 쓴 글을 기계에 넣어 내가 원하는

로 바꿀 수 있다면 어떨까? 그것을 내가 쓴 글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기계에

서 나온 글이 훨씬 좋고, 원문장을 넣은 사람마저 뒷내용이 궁금해질 정도

라면? 이비와 몽식이 처한 상황은 그들의 존재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것이

다. 기계는 더 이상 창의적인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누구라도 좋

으니 문장을 입력할 입력자가 필요한 것이다.

윤이형의 작품에 나오는 절망은 무력감으로 바꿔 쓸 수 있다. 그토록 꿈

꿔왔던 ‘탕탕’을 눈 앞에 뒀지만 지현은 트램펄린밖에 할 수 없다. 능력의 한

계 앞에서 지현은 무력하다. 창은 결국 죽고, 은효는 이유도 모른 채 계속 분

열한다. 위기상황 앞에서 이들은 모두 무력하다. ‘로즈 가든 라이팅 머신’ 앞

에 선 이비와 몽식은 무력할 뿐만 아니라 무능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져든다.

절망이 한껏 고조된 시점이야말로 윤이형이 절망을 어떻게 다루는지, 무

력감을 어떻게 하는지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윤이형은, 그리고 윤

이형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벼랑 끝까지 몰린 상황에서도 마지막 희망

의 끈을 놓지 않는다. 아니, 희망이라고 부르기도 거창하다. 나는 그것을 ‘바

라기’라고 부른다. 막연하고 근거 없는, 하지만 어쨌든 힘이 되는 ‘바라기’가

윤이형이 내놓은 답이다.

지현은 유리를 위해 ‘탕탕’을 할 수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탕탕’ 경기

를 조직화하기 위해 분주한 친구 혜민과 함께한다. ‘탕탕’을 할 수 없는 지현

은 다시 트램펄린의 세계로 돌아가고, 15m가 한계 던 기존의 고도제한선

이 2.5m 상향되는 현실에서 의미를 찾는다. 창은 끝까지 자기 자신으로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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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루족(창이 속해있는 소인족―인용자) 역사상 달에 가장 가까이 간 사람,

그리고 가장 멀리, 가장 빠르게 난 사람”이 된다. 몇 번이고 분열해 갈라져

가던 은효는 처음 갈라진 분열체가 희망한 것처럼 결투 진행자에게 “잘은

모르겠지만 이렇게 된 거, 친구로 지내”자고 말하게 된다. 이비는 고민 끝에

몽식에게서 ‘로즈 가든 라이팅 머신’을 받지 않고, 몽식은 공모전에 당선되

작가로 등단한다.

이들이 절망, 혹은 무력감에서 벗어나는데 극적인 사건은 나타나지 않는

다. 다이나믹한 변화도 없고, 또한 필요치도 않다. 이들의 내면에는 처음부

터 필요한 만큼의 ‘바라기’가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필요한 때가 되면 이

들은 ‘바란’다. 더 나은 내일, 더 나은 자신, 혹은 그저 오늘 같기만 한 내일

일 지도 모른다.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평범한 이 기원이야말로 등장인물들

을 무력감으로부터 구원하는 손이다.

윤이형이 그리는 인물들 속에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열쇠가 들어있

다. 슈팅 액션 게임에 주어지는 폭탄처럼, 난관을 통과할 수 있는 비장의 무

기는 처음부터 있었던 셈이다. 그것이 별 쓸모가 없어 보이고 일면 무력해

보이는 ‘바라기’라는 점은 흥미롭다.

3. 김사과 ― ‘응축’, ‘점화’, ‘폭발’의 3단 공정

김사과의 소설은 친절하지 않다. 정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生이고, 필

요한 뼈 만 간신히 남겨놓았기 때문에 거칠다. 구성, 문장, 내용까지 단 하

나도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김사과의 소설은 진솔하고 꾸밈이 없기 때문에 그만큼 다루기 어렵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다루는 것은 어렵다. 가벼운 마음으로 다루다가

는 죽기 십상이다. 김사과의 소설은 이런 맥락으로 다루어야 한다. 김사과

의 글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 같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점

에서 더더욱.

김사과가 절망을 그리는 방법은 독특하다. 작품 근저에 이미 절망적인

상황인식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은 『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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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에 수록된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

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이하

「신기한 날」)」이다. 주인공인 회사원은 어린 시

절 “열심히 살지 않으면 뒤처지고 뒤처지면 끝

장”이라는 아버지의 믿고 그에 따라 열심히 살아왔

다. 하지만 그는 “단 한번도 어떤 성취감도 느껴본

적이 없”다. 선 의 지식과 조언도 무의미하다. 믿

을 수 있는 것은 없고, 어떤 성취감도 느끼지 못했

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인식 끝에서 그가 느낀 것은

“분노”뿐이다. 이처럼 김사과가 그리는 절망은 분노로 확장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분노의 씨앗이 되는 셈이다. 그리하여 「신기한

날」의 주인공은 나이가 먹어도 “여전히 화가 날 뿐”이다.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하고, 바꿀 수 없다는 인식은 사람을 옥죄

어 움츠러들게 한다. 작가는 단단히 움츠러들어 잔뜩 긴장했지만 어떻게든

사회 규격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물을 보여준 뒤, 그들을 자극한다. 더 이

상 평범함의 가면을 유지할 수 없게 되어버린 인물은 그동안 억눌려왔던 분

만큼의 분노를 한꺼번에 분출한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이 폭주는 훨씬 격렬하다. 움츠러들고, 자극하고, 폭주하는 일련의

과정은 엔진 구동과정을 연상시키는 ‘응축’, ‘점화’, ‘폭발’의 세 단계를 연상

시킨다.

「신기한 날」의 주인공은 어떻게든 현실을 유지하기 위해 회의를 버티

고,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점심을 먹는다. 그것이 그가 지탱해 온 삶의 무게

다. 그 무게는 그를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응축’시켰다. 그가 ‘폭발’하

게 된 계기, 즉 ‘점화’는 별 게 아니다. 잔뜩 응축된 물체는 때가 되면 어떤

식으로든 부서지게 되어 있다. 오히려 계기는 사소할 수록 좋다. 곧이어 터

질 ‘폭발’과 극명하게 비될 것이므로. 그는 국밥집 주인 여자와의 별것 없

는 화에서 ‘점화’한다. 그는 주인 여자를 향해 “땅을 파듯이 칼을 휘둘

렀”다. 하지만 “다시 여자를 보자 더이상 여자는 없었”고, 그는 “여전히 화

가 나 있었”기 때문에 당황했다.

그가 당황한 이유는 간단하다. 완전히 연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

오래 억눌리는 동안 그의 분노는 상을 잃었다. 그는 누구에게 ‘폭발’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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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지도 모르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는 중학생을 향해 “맥주병을 휘

둘렀”고, 집에 와서는 아버지를 “텔레비전에 박아넣었”으며, 어머니를 향해

“꽃병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 최 한의 파괴를 일구

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노는 여전히 내 몸을 꽉 채우고 있”다는 것을 깨

닫는다.

감정의 변화가 정상적인 순환고리를 그리려면 폭발 뒤에 ‘배기’ 과정이

추가되어야 한다. 그래야 공정을 마친 뒤 다시 응축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김사과의 소설에는 이 배기 과정이 없다. 김사과는 감정이 폭발해

주변을, 혹은 그 자신까지 다 날려버린 뒤 황폐한 정경을 그리고는 이야기

를 멈춘다. 마치 다음 공정을 위한 준비는 자신이 할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김사과의 이런 태도는 현명하다. 책을 덮은 뒤 폭발을 견뎌낸 독자의 내면

에서 ‘배기’ 과정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폭발할 것을 각오하고 다음 글을 찾아 읽을지의 여부는 독자

가 직접 결정한다. 김사과는 우리를 위해 폭발하지 않는다. 그저 터질 때가

되었고, 또한 터져야 하기 때문에 터질 뿐이다. 그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할

지는 독자 각자가 판단할 몫이다. 이 지점에서 김사과는 다시 한 번 현명하

다. 누적된 작품으로 독자를 걸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김사과에게 절망과 분노, 혹은 ‘폭발’까지 이르는 세 단계는 다르지 않다.

그들은 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절망이 없다면 다른 것들은 성립하지 않는

다. 절망은 김사과의 작품 전반을 꿰뚫는 분노라는 주제의 근간이 된다.

4. 입지선정

세 작가가 무력감을 하는 태도는 상이하게 다르다. 이 태도야말로 무

력감과 절망을, 그리고 인생을 하는 각 작가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사쿠라바 카즈키는 ‘혼란’스러운 와중에 정신 차리고 ‘자리 잡기’를 권한

다. 작가도 독자도 모두 무력하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는 무력감을 겸허히

수용하고 그에 따라 있어야 할 자리를 고르는 모습은 겨울을 나기 위해 준비

하는 산사람과도 같다. 사쿠라바 카즈키에게 무력감은 언젠가 지나야 하는

통과의례에 가깝지 않을까? 버티지 못할 수도 있지만 모두가 견뎌야하는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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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한 시련, 혹은 자연재해를 바라보는 것 같은 작가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무력감을 하는 윤이형의 태도는 보다 덜 필사적이다. 내일을 해쳐나갈

수 있는 힘은 이미 내면에 준비되어 있으므로 각자는 그 힘을 믿고 더 나은

내일을 그리고 노력하면 된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은 진

취적이지는 않지만 최소한 마음에 안정을 심어준다.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바라기’는 강력한 힘이다.

김사과의 앞에서 무력감을 논하는 것은 생각해 볼 일이다. 김사과는 무

력감과 절망을 이미 작품 근간에 심어버렸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그것은 부

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결코 그것을 긍정하지는 않는다. 김사과가

다른 두 작가에 비해 훨씬 강경한 수단인 분노를 활용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무력감과 절망이 만연한 현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작중 인물들이 보이는 ‘폭발’ 또한 부정할 수 없다.

당신이 마주친 무력감에 해 어떻게 반응할지는 당신의 선택에 달렸다.

그 결정을 신 내려줄 사람은 없다. 따라서 그것은 온전히 당신의 몫이다. 이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결정에 한 책임을 응당 져야 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언젠가 기운이 쭉 빠지는 무력감을 경험해 본 적이 있다면,

무력감에 관한 생각은 피해갈 수 없다. 언젠가 한 번은 사라지지 않는 무력

감과 마주치고 말 것이다. 이 글은 그때를 비한 내 책 중 하나이며, 나

나름의 답을 찾기 위한 탐색 과정이다. 당신은 어쩌겠는가? 판단은 전적으

로, 당신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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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 곽현진 | <상자 가루> 삽화곽현진 (만 22세, 샤이니월드). 여러분 푸석푸석 날리는 머리는 동백기름을 먹인 나무빗으로 빗어주면 차분해집니다. 효과 만점이에요. 강추. 그러니까 결론은 편집장님 밥 사주세요.

❖ 김득출 | <상자 가루>

극단적으로 적은 분량 내에서 시점도 요리조리 바꿔보고, 스케일도 한없이 넓혔다가 좁혔다가 여러가지 시도를 해볼 계획입니다. 앞으로도 기대해주세요.

❖ 김승완 | <필진 인터뷰>

군입대를 3개월 앞둔 공대생. 남은 3개월을 태그 콤보 연습으로 날려먹을 생각으로 행복해하는 욕정의 철구너.

❖ 김의성 | <김의성의 예술 나누기>

김의성입니다. 비오는 것이 예전엔 그리도 싫더니 요즘은 빗소리가 차 한 잔 할 때 가장 좋은 벗처럼 느껴집니다. 날이 개면 참한 당신과 나란히 걷고 싶습니다. ps. 저는 웃을 때 베시시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 루지 | <습기>

다른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하는 관점에서 글을 쓰고싶고 또 그렇게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최대한 중립적이거나 약자에 치우쳐진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것이 최종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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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 박애진 | <홍대기담 2012> 전체 삽화

소설가. 『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에 「문신」을,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에 「학교」를, <해토> 『앱솔루트 바디』에 「집사」등을 수록했으며 2011년에 장편 『지우전 ; 모두 나를 칼이라 했다』를 출간했다. 환상문학웹진 거울을 통해 몇몇 일러스트를 발표했으며, 텍스툰에서 처음으로 다른 작가의 작품에 삽화를 그렸다. 부디 예쁘게 봐주시길… ^^

❖ 발랄민트 | 일러스트레이션

마감, 시험, 마감, 시험 무한루프… ㅠㅠ크헝

❖ 성우창 | <나유타>, <필진 인터뷰>

이번 호는 개인 사정상 매우 부실하게 되었습니다. 혹여 주의 깊에 봐주시는 독자 분들께 죄송합니다.

❖ 송한별 | 편집장, 표지, <필진 인터뷰>, <토탈 리뷰>

나를 자유롭게 하라.

❖ 앤윈 | <밥줄을 지켜라>

소설 쓰는 사회주의자. 거울 80호에 {김연실변신전}, 91호에 {성문 너머 코끼리}, 93호에 {종의 기원}이 독자우수단편으로 선정되었다. 거울 102호에 {악어의 맛}을 발표하며 시간의 잔상 필진으로 합류했다. 2011년 거울 중단편선 [그림자 용]에 {성문 너머 코끼리}와 {종의 기원}을 수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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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 전혜진 | <작전동 김여사의 우울>, <하늘흰나비의 날갯짓>

언젠가 “인천 연작”을 쓰고 싶다고 늘 생각해왔어요. 작전동 김여사가 그 인천 연작의 아마도 첫 번째가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홍대 앞에 환상성을 덧입히는 흥미로운 프로젝트에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

❖ 전홍식 | <SF와 이어지는 세상>

SF&판타지 도서관(www.sflib.com) 관장. 콘텐츠 아카데미 교사.

❖ 정세랑 | <정세랑의 말랑몰랑>

문학과 역사를 전공했다. 2010년 <판타스틱> 1월호에 <드림, 드림, 드림>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로 『덧니가 보고 싶어』가 있다.

❖ 정세랑 | 기획

슴넷. 매일이 빨간 날이었으면 하는 인턴! 그거고 뭐고 여러분!!!! 짱구는 못말려 온라인 같이 해용 ^.^ 악마 말고 하이레그 대마왕 잡으러 가영 헤헷.

❖ 한시훈 | <구망>

지금 이걸 쓰는 중에도 원고를 하고 있습니다. 분명 3월부터 시작했는데 왜 안 끝나죠? 왜 학교 행사는 전부 이렇게 몰려있죠? 다들 학교에서 과제 할 때 전 방에서 원고 하고 있네요! 저도 과제 해야 하는데 !!(˚∀˚)!! -그리고 원고가 끝났슨엏ㄷㄹ

❖ 희령 | <습기> 삽화, <작전동 김여사의 우울> 삽화

삽화를 맡은 희령입니다^^ 개인적인 그림은 많이 그려봤는데 삽화를 그려본건 처음이라 매우 떨리고 어렵네요ㅎㅎ 그래도 여러 작품을 보고 즐겁게 그릴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잘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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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 pena | <클럽 Angel>아마추어 작가, 프로 편집자. 편집자인 주제에 편집장 제일 괴롭혔다고 자부함. 밥으로 때워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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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nd

And...

Need Something More?

ThenSee You Next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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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툰:Textoon 2012.6 Vol.10

2012년 5월 30일 초판 제작2012년 6월 1일 배포2012년 6월 1일 수정2012년 6월 1일 재배포

제작 | 창작집단 몽니편집장 | 송한별편집 | 송한별기획 | 정정숙집필 | 김승완, 김의성, 루지, 박애진, 발랄민트, 성우창, 송한별,

앤윈, 전홍식, 전혜진, 정세랑, 한시훈, 희령, pena표지 | 송한별홈페이지 | 곽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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