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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차 -

1. 한글을 말하다. (사례 요약)

<한글의 창제 배경과 탄생과정>

2. 세종 25년 한글, 만들어지다. – 한글의 창제 배경

3. 한글, 이렇게 탄생 되었다! – 한글 탄생의 과학성

<한글의 최초 출시 시장 상황과 마케팅>

4. 한글, 나왔지만 지배계층의 반대에 부딪히다. – 한글의 내부 갈등

5. 한글 주인을 찾아서 – 한글의 최초 마케팅

1) 한글 탄생 시 시장 상황 - 5 force

2) 한글 보급을 위한 STP 전략

6. 한글의 발전

<한글의 터닝포인트 – 한글, 위기를 맞다>

7. 한글, 위기를 맞다.

8. 한글의 위기 극복

<한글의 우수성>

9. 한글의 성공 비결은?

<한글의 현재>

10. 한글의 현재 (마케팅 전략과 문제점)

11. 21세기 한글의 위게 – 중국의 한글 공정

12. 한글의 향후 마케팅 전략 방안 제안 – 우리의 한글을 지키기 위해선…

<총 요약 및 결론>

<참고문헌>

1. 한글을 말하다.(사례요약)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낮은 문맹률을 자랑하고 있다.[footnoteRef:1] 특히 오늘날 디지털 시대를 맞아 한글은 그 가치가 더욱 빛나고 있다. 휴대전화나 컴퓨터 자판 등은 모아쓰기로 인해 더 효율적으로, 더 빠르게 한글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우리나라가 세계 IT 강국으로 발 돋움 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남들보다 빨리 쓸 수 있도록 하는, 한글이 있기 때문이었다. [1: 국립국어원 2008년 9월~11월 전국 16개 시•도 19세 이상 79세 이하 성인 1만2000명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한글은 세계의 글자 중 유일하게 반포시기와 발명과정을 알 수 있는 문자이다. 언어학 연구에서 세계 최고라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언어학대학이 합리성, 과학성, 독창성, 실용성 등의 기준에 따라 점수를 매긴 결과 1등을 차지한 문자이기도 하다.

한글은 세종 25년 세종대왕에 의해서 발명되었다. 한글이 발명되기 전까지 우리나라는 제한된 문자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한자가 우리 말을 표현할 수 있는 완벽한 문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은 우리글 없이 어려운 다른 나라의 글을 빌려 쓰는 백성을 가련하게 여겨 훈민정음[footnoteRef:2]을 창제하였다. 백성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라는 창제원리에 맞게 한글은 누구라도 배우기 쉽게 만들어졌다. 훈민정음에는 한글이 배우기 쉬워서 총명한 사람은 하루 아침에, 어리석은 자라도 일주일이면 깨칠 수 있다고 하였다. 우리말을 소리 나는 그대로 적을 수 있는 우리만의 문자는 이렇게 탄생되었다. [2: 이 글에서 훈민정음은 부분적으로 한글과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

그러나 사대주의가 만연하던 그 시대에 한글은 지배계층의 외면을 받았다. 당시에는 한자에 대한 지식이 계급사회를 나누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양반들은 피 지배계층이 문자를 사용하는 것에 위협을 느꼈다. 한글이 국문으로 공식 인정을 받은 것은 바로 반포 450년 후인 갑오경장(1894년~1896년), 즉 일제시대 초기 때의 일이다. 이렇게 한글은 450년동안이나 핍박받으며 국문(國文)으로써 인정 받지 못하였다. 또한 그 후에도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수많은 소멸의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그 오랜 시간 동안이나 그 뿌리를 이어왔으며 역경을 딛고 마침내 진정한 우리의 국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자랑스러운 우리의 한글, 조상들의 가장 큰 문화유산 중 하나이자 대한민국 뿌리의 근원인 한글.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우리의 1등 브랜드, 한글의 대한 이야기이다.

아름다운 우리 한글

<한글의 창제 배경과 탄생과정>

2. 세종 25년 한글, 만들어지다. – 한글의 창제 배경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이두, 구결, 향찰 등으로 한문과 병행하여 문자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쓰는 문자로 한자를 어느 정도 습득하고 나서야 사용이 가능했다. 따라서 생활에 바쁜 농민이나 일반 서민은 배우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한자를 익히기가 벅찰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기존의 문자로는 우리의 말을 그대로 반영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통치 32년 동안 훈민(訓民)을 정책의 기조로 삼았던 세종에게 걸림돌이 되었다. 백성들과 소통하고 그들을 교화 하고자 했던 세종이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는 온 백성이 쉽게 배우고 공유할 수 있는 문자가 필요했다.

.

<훈민정음 언해본 중 어제 서문>

- 위키백과 ‘훈민정음’

< 훈민정음 해례본 >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서로 통하지 아니하니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28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데 편하게 할 뿐이다.”

결국 세종 25년, ‘백성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라는 의미를 지닌 훈민정음이 창제되었다.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 다른 문자와는 달리 전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개인에 의해서 과학적인 문자가 탄생한 것이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를 모방하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5년(1443) 12월 30일

3. 한글, 이렇게 탄생 되었다! - 한글 탄생의 과학성

이 유례없는 문자(현재까지도 과학적이라 칭송을 받는)는 그 창제원리에서 과학성이 가장 잘 나타난다. 한글의 자모는 제각각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세종은 글자 안에 자연의 이치를 표현하고자 했다. 때문에 모음자는 우주의 원리를 체계화한 역학의 영향으로 천(天)∙지(地)∙인(人) 삼재 원리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하늘( ∙ ), 땅(ㅡ), 사람(ㅣ)은 우주의 근본 섭리의 기본이고 하늘의 사상과 정신으로 땅과 사람을 계몽 한다는 뜻이 이 단순한 글자 안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자연의 글이 있게 되니, 옛날 사람이 소리로 인하여 글자를 만들어 만물의 정을 통하게 하였다.”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 中

천( ∙ )

하늘이 둥근 모양

지(ㅡ)

땅의 평평한 모양

인(ㅣ)

사람이 서 있는 모습

한글 자음자는 소리의 변화에 따라 발성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어졌다. 어금닛 소리 ㄱ은 혀 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혓소리 ㄴ은 혀가 윗잇몸에 붙는 모양을, 입술 소리 ㅁ은 입 모양을, 잇소리 ㅅ은 이의 모양을 목소리 ㅇ은 목구멍의 모양을 본떳다. 발음기관의 모양을 상형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글자의 모양만 보고서도 그 모양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기본자에 획을 더하여 다른 글자를 파생시켜 나갔다. ㅋ의 경우 ㄱ에서 한 획을 그어 ㄱ 보다 센소리, 즉 ㅎ 만큼이 합해진 소리를 의미한다. 모음의 경우도 기본자인 천지인을 조합하여 ‘ㅜ, ㅏ, ㅓ, ㅗ’를 만들고 여기에 ‘ ∙ ‘를 추가하여 ‘ㅠ, ㅑ, ㅕ, ㅛ’를 만들어 나갔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1933)

*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ㅌ, ㅋ, ㅍ, ㅎ

*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그러나 한글의 탄생이 독창적이라 평가 받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세종은 누구보다도 음운, 음절에 대한 연구의 대가였다. 세종은 음절은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최초로 초성과 종성이 비슷해 같은 글자를 써도 무방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때문에 우리는 현재 간단한 24자 만으로(훈민정음 창제 당시 28자) 무한한 문자 생활을 하고 있다. 한글의 창제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한글’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문자이다. 그러나 한글은 슬프게도 오랫동안 그 빛을 보기 힘들었다.

<한글의 최초 출시 시장 상황과 마케팅>

4. 한글, 나왔지만 지배계층의 반대에 부딪히다. – 한글의 내부 갈등

앞서 언급한 과정에 걸쳐 우리의 위대한 한글이 탄생했다. 하지만 한글이 나오던 시기, 한글의 사용은 지배계층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당시 조선은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조종 때부터 중국을 섬기며 중국과 같은 한자를 사용한 조선은 한자를 사용해야만이 중화의 질서와 문화가 조선에 물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1443년 12월 세종이 훈민정음을 반포하자, 다음해 2월 당시 총애를 받던 집현전 학자 최만리를 중심으로 사대부 양반들이 언문반대 상소문을 올렸다. 최만리의 상소문에는 한글을 사용할 필요가 없고, 한글을 사용한다면 한자를 사용함에 소홀해져 중국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장애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 전반에 걸쳐 상세히 나와있다.

우리나라가 덕을 쌓고 어진 정치를 베풀어 문을 숭상해 온 교화가 점점 깨끗이 없어져 버릴지 두렵삽나이다. 이보다 앞서 쓰이어 온 이두가 비록 한자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데도, 유식자들은 아직도 이를 천한 것으로 쳐서 이문(吏文)으로써 이를 바꾸려 하고 있는데, 하물며 언문은 한자와 조금도 연관이 없는 것이며 오로지 시장거리의 속된 말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일에 언문이 전조부터 있어온 것이라고 하더라도, 오늘날 문명의 정치와 노를 변해 도에 이르러 일신하는 때에, 아직도 언문 같은 좋지 않은 습관을 이어 받아야 하나이까, 하고 반드시 이를 바로잡겠다고 논의할 사람이 있을 것이니 이는 뚜렷이 알 수 있는 이치이옵나이다. 옛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함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폐단이니, 이제 이 언문이 다만 하나의 신기할 재주일 뿐이오며, 학문을 위해서도 손해가 되고, 정치에 있어서도 이로움이 없으니, 되풀이해서 생각해 보아도 그 이로움을 알 수 없사옵니다.

- 최만리 반대 상소문 요약 중 일부-

더군다나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새로운 문자는 양반 자신들의 위치를 직간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문자는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인 동시에 정보의 독점을 통해 그들 자신을 일반백성들과 구분 지을 수 있게 하는 수단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배울 수 있는 한글이 완성된다면 양반들은 그 동안 자신들이 누렸던 특권에 위협을 받을 수 있었다. 결국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자 사용을 고수하고, 한글을 거부해야 했다.

5. 한글, 주인을 찾아서 – 한글의 최초 마케팅

훈민정음 만들어진 당시에는 훈민정음이라는 고유 명칭보다는 여자들이나 쓰는 글이라는 뜻의 암클, 또는 상말을 적는 문자라는 뜻의 언문 등으로 낮추어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사대주의가 만연하던 시기에 한글은 편리하고 과학적인 문자라는 것이 강조되기 보다는 한문의 음을 적는 언어라는 의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한글의 사용계층을 일반 백성들, 우민에만 한정하지 않았다. 1443년, 훈민정음이 완성되자 세종대왕은 가장 먼저 궁내에 머무는 서리들 10여 명을 모아 한글을 가르쳤다. 이것은 한글을 처음 보는 사람도 쉽게 배울 수 있는지를 실험하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한글을 관용문자로 사용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1) 한글 탄생 시 시장 상황 - 5 force

한글이 진입하려는 시장의 5가지 경쟁요인들을 분석해 산업의 구조를 파악해보면 다음과 같다.

[마이클 포터(Michael E. Porter)의 Five Forces Model]]

① 기존 경쟁기업

한글의 첫 번째 경쟁요인은 기존의 경쟁문자인 한자였다. 훈민정음 반포 이전에 고유문자를 보유하지 못했던 조선은 한자를 사용한 문자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자생활 시장은 한자에 완전히 장악 당해 있었다. 따라서 시장의 신규 진입업자라고 할 수 있는 한글은 한자와의 적대 관계가 매우 강할 수 밖에 없었다.

② 신규 진입업자

한글이 시장진입을 준비할 시기에는 기존 문자를 위협할 만한 새로운 경쟁자가 될 것이라고 예측되는 문자가 없었다. 새로운 문자가 탄생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내는 한자 문화권이었고, 당시 팽배했던 중화사상과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등, 조선에 영향을 미치는 중국의 세력이 워낙 강력했으므로 한자를 위협할만한 다른 문자가 나타나 세력을 펼치기에는 무리였다.

오히려 한자가 이미 고유의 문화권을 가질 정도로 높은 진입장벽을 가지고 있음에도 새로운 문자인 한글을 만들었기 때문에, 한글의 탄생은 당시 중화사상과 사대주의에 비추어 보면 상당히 혁신적이고 도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③ 대체품

최만리를 비롯한 여러 양반들이 훈민정음의 사용을 반대했던 상소들의 내용을 비추어볼 때, 당시 양반들은 우리말을 표현하는데 있어 기존에 있던 이두나 향찰이라는 표기법이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두나 향찰은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우리말을 표현하는 표기법이었다. 한자에 대한 기본 지식만 있으면 우리말을 나타내기 위해 따로 문자를 배우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비교우위에 있어서 이두나 향찰은 한글에 우위에 서고 있었다.

따라서 한자를 사용한 문자생활에 어려움이 없었던 양반계층에게는 이두가 가격대비 성능이 좋은 대체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④ 판매자(공급업자)와의 교섭력

당시 한글의 판매자 역할을 했던 기관은 조정이었다. 조정의 CEO라고 할 수 있는 세종은 집현전 내에 정음청을 두고 온 백성이 한글을 사용하도록 적극 독려했다.

이조에 전지하기를, "금후로는 이과(吏科)와 이전(吏典)의 취재(取才)때에는 훈민정음도 아울러 시험에 뽑게 하되, 비록 의리(義理)는 통하지 못하더라도 능히 합자(合字)하는 사람을 뽑게 하라"하였다.

<조선왕조실록>세종28년(1446) 12월 26일

“이과와 이전의 취재에 훈민정음을 시험하게 하되 뜻은 모르더라도 쓸 줄 알면 뽑게 하라.”

<세종 28년(1446) 12월 16일>

위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세종은 과거시험에도 훈민정음 과목을 추가시켜 양반들이 훈민정음의 뜻은 알지 못해도 조합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대간의 죄를 훈민정음으로 써서 의금부와 승정원에 전달하는 등, 공문서에 훈민정음을 사용하기 시작하여 조정의 대신들의 동기부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렇게 판매자인 세종은 훈민정음을 사용하게하려는 전략을 적극적으로 펼침으로써, 양반들의 교육을 시작으로 온 백성들이 훈민정음을 사용할 수 있도록 확실히 전방 통합에 나설 의향을 보인다. 이와 같은 사실들로 미루어볼 때, 최초마케팅 시 세종은 훈민정음의 판매자로서 그 교섭력이 매우 강했다고 할 수 있다.

⑤ 구매자의 교섭력

구매자는 판매자에게 가격 인하와 품질 및 서비스 개선을 요구하고, 때로는 판매자들을 경쟁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구매자의 힘이 강해질 수록 판매자의 힘은 약해지기 마련인데, 여기서 구매자인 양반은 적극적으로 훈민정음을 도입하려는 판매자 세종의 힘이 막강하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힘이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2) 한글보급을 위한 STP 전략

당시 조선은 계급이라는 명확한 하나의 변수로 인해 지배계층인 양반과 피지배계층인 일반 백성으로 구분 되었으며, 이미 한자를 사용하는 지배계층과 제한적인 언문 생활을 하는 피지배 계층은 한글을 받아들임에 있어 큰 차이가 있었다.

훈민정음 창제 후 세종은 새로운 문자를 널리 반포하기 위해 힘썼다. 그러나 어리석은 백성을 위해 탄생된 훈민정음의 최초 마케팅은 지배계층인 양반에 집중되어 있었다.

<조선의 언어사용 계층 세분화>

계층

언어

사대부 남성

대다수가 한문, 이두, 언문 사용 가능.

한문을 주로 씀

중인 남성

대다수가 한문, 이두, 언문 사용 가능

이두와 언문을 주로 씀

평민 남성

일부가 한문, 이두 사용 가능

언문을 주로 씀

천민 남성

일부만 언문 사용 가능

지배층 여성

한문 사용 가능

언문을 주로 씀

피지배층 여성

일부만 언문 사용 가능

서정곤(2007) 훈민정음 보급과 교육에 대하여. 우리어문연구 28집. p.53

일반 서민들에게 문자를 전달하고 가르쳤던 주체는 결국 문자를 사용할 줄 아는 양반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반은 이미 한자를 사용하고 있어 새로운 문자의 탄생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양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글은 왕실과 일반 사대부 가문에서 서찰 등으로 여성들의 의사소통에 사용됨은 물론 상소문에도 사용된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세종의 어떤 노력이 그들로 하여금 한글을 사용하도록 했을까?

세종은 훈민정음이 반포된 후 첫째로 과거시험에 언문 종목을 추가하였다. 과거를 보려는 양반 자제들은 한글을 익힐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불경이나 경서를 훈민정음으로 간행하였다. 때문에 서당에 훈민정음 교육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조정의 대신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세종이 한글로 죄상을 적었다는 기록도 있다(세종 31년 6월20일 조에도 신하들에게 보이는 글을 언문으로 쓴 것이 거의 20장이 넘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footnoteRef:3]). 한글을 가벼이 생각하는 조정의 대신들도 자신의 죄상을 알기 위해서는 한글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3: 백두현(2001) “조선시대 한글 보급과 실용에 관한 연구” 「진단학회, 진단학보」 p.1]

이로 인해 한글은 양반들의 반대에도 많은 향유 계층을 누리고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다. 일단 50년안에 한글로 된 소설이 보급되었다. 남아있는 기록들 중 최초로 한글로 보급된 설공찬전은 1511년(중종 11) 무렵 채수(蔡壽)가 지은 고전소설이다. 설공찬전은 불교의 윤회설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그 내용이 일반백성들에게 유익하지 않다고 생각한 양반들은 왕에게 고하여 책을 모두 불태우게 하였다. 이 기록으로 볼 때, 그 전에도 다른 한글 소설들이 있었고, 일반백성들이 한글을 능히 읽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 할 수 있다.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또한, 설공찬전 이후로 한글 소설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게 되어, 한글 소설을 찍어내는 출판소와 책방이 생겼다. 이렇게 한글 소설시장이 생성되어 한글보급도 자연스럽게 진행될 수 있었다. 이 소설시장 덕분에 중간중간의 탄압과 위기에도 한글이 지속적으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6. 한글의 발전

세종 이후 한글 마케팅 전략은 지역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우선 지역적 측면에서 조선의 수도였던 서울에서는 지배층의 한글 사용으로 인해 빠른 속도로 알려졌지만 지방이나 시골의 경우에는 한글 보급이 늦게 이뤄졌다.

한글이라는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1472년 성종 3년에 임금이 내린 한글 포고문에서 찾을 수 있다. 성종은 백성들 스스로 근검절약하는 뜻을 알리기 위해 서울을 비롯하여 각 지역에 한글 포고문을 반포하였다. 한글이 반포되고 25년이 지나 전국에 붙은 한글 포고문으로 인해 지방의 백성들에게 새로운 문자를 알리는 데 크게 기여를 했다.

한글 포고문외에도 중앙정부의 노력으로 지방에서 여러 종류의 한글 문헌이 작성된 사실은 한글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사용되었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일반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약이나 곡식에 대한 서적을 국가에서 한글로 번역하여 적극적으로 반포하였다. 백성들의 실생활에 필요한 내용들을 한글로 번역했다는 것은 한글학습을 권장하고 이를 통해 지속적인 교화작업이 이뤄졌음을 의미한다.

16세기에 간행된 한글 문헌은 그 성격상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학문을 처음으로 배우기 시작한 사람에게 한자를 학습하는데 한글이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둘째는 농사와 풍속교화 및 질병치료를 위한 한글 서적의 간행하여 민생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셋째는 불교의 가르침을 널리 펴기 위한 것이다. 이 세 부류의 한글 문헌들은 지방에 거주하는 백성들에게 한글을 보급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 사실은 16세기 초에 지방 사회에 한글 보급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여 16세기 중엽 이후에는 한글을 쓰고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음을 뜻한다.

지역적 확대와 더불어 한글 사용의 사회적 확대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당시 지배층에서 한글로 작성된 고문과 편지를 통해 이를 증명할 수 있다.

채 민 아기네 형뎨손

나 몯 가만뎡 됴히 인노라아기네 오나 안부 드니 깃게라 두 지 말 신슈니복기리 슌이리 훠 보내노라 뉴워 몯 가니 섯래나 갈가 고기 라노라 예 뎨 다 무 니 그여서 더으랴 슈 어마 니 조판셔 긔 죠 봉 가니 분경 저니 셔방님려 닐어 뎐호 오셰뎡이 블러 뎐면 의심 업니 섯 져  뎐예라 〃 十月 十七日 父 (수결)

 -순천김씨 편지 내용 중에서 -

위의 편지는 순천김씨의 아버지 김훈이 시집간 두 딸에게 보낸 편지이다. 순천김씨언간의 한글 편지는 임진왜란 전에 작성된 것이 분명하므로 이는 곧 사대부의 남성과 여성들이 자유롭게 한글을 사용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일반 백성이나 하층민이 직접 한글로 쓴 기록물이 드물기는 하지만 이들이 한글 사용에 배재된 것은 아니었다. 1485년에 서울의 백성들이 불만을 품고 당시 지배층을 헐뜯는 글을 양반 집에 몰래 던진 사건이 있었다. 한글로 작성된 이 투서를 통해 당시 서울에서 평민들이 한글을 사용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양반이 하층민에게 준 한글 문서를 통해 간접적이지만 하층민의 한글 해독 능력을 알 수 있다. 해남 윤씨가에 소장된 한글 문건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한글로 작성된 문서를 노비에게 준 사실을 근거로 그 노비의 한글 해독 능력을 말하기는 힘들지만, 전답 매매문서의 중요성과 한글 습득의 용이함으로 볼 때 그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1511년 당대 유학자인 채수는 <설공찬전>이라는 소설을 지었다고 해서 파직을 당하게 된다. 작품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주인공 공찬의 혼령이 전하는 저승 소식인데,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반역으로 정권을 잡은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다고 한 대목이다. 당시 사회상과 정권교체에 대한 비판의 내용을 담고 있어 이 작품은 조선 최초의 금서로 규정되어 탄압받았을 만큼, 다양한 계층의 독자에게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쳐 조정에서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 소설로서는 유일하게 조선왕조실록에도 올랐으니, 소설의 대중화를 이룬 첫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채수가 <설공찬전>이 한자에서 한글로 번역된 소설이라는 점이다. 한글로 번역되었다는 한글창제이후 50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에 일반 백성들이 한글 소설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한글이 널리 보급되고 빠르게 유포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7세기 중후반에 많은 한글 소설이 탄생하게 되고 독자들이 증가하자 기존의 유통 방식의 한계에 다다르게 된다. 즉, 한글소설의 상업화로 인해 세책과 방각이라는 새로운 유통방식이 등장하게 되었다. 세책이란 전문적으로 책을 베껴 쓴 다음에 이를 대여해주고 돈을 받는 방법이며, 방각은 손으로 베끼는 것이 아니라 판매할 목적으로 서방 등에서 목판으로 판본을 만들어 대량으로 찍어내던 방식을 말한다.

19세기 말에는 전 계층에서 한글 소설과 세책 문화가 퍼지게 되었다. 세책본 소설의 이면지에 남아 있는 세책 장부를 통해 당시 상황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세책 장부란 책을 빌려간 사람과 거주지, 대출한 해당 권수, 전당 잡힌 품목, 대출한 날짜, 그리고 외상 여부와 총 외상 액수 등이 상세히 적힌 장부를 말한다.

조선 후기 세책 문화와 세책 장부의 기록들을 통해 19세기에는 위로는 양반으로부터, 여성, 그리고 아래로는 노비에 이르기까지 각 계층에 널리 퍼졌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한글 소설의 확대가 한글 보급을 더욱 증폭시켰음을 알 수 있다.

<한글의 터닝포인트 – 한글, 위기를 맞다>

7. 한글, 위기를 맞다(터닝포인트 – 일제강점기)

일제 강점기, 일본의 국어 상용화 정책으로 인해 한글은 최대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일본이 식민 지배를 시작하자마자 한글로 쓰고 말하는 것을 금지했던 것은 아니다. 전과는 달리 한글의 위상이 달라졌지만 일제 강점기에도 한글은 사용되고 교육되었다. 식민 지배가 시작되던 때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을 대상으로 일본어 교육을 실시하면서 동시에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들에게도 한글을 배울 것을 권장했다. 그리고 식민지배가 정착화 되었을 때 일본어 교육을 강화하면서 한글 사용을 축소시켰다. 한일병합 이전 일본통감부는 대한제국의 초등학교 교과서 편찬에 관여하여 모든 교과서를 일본어로 제작하도록 방침을 세웠다.

“한국 유년에서 일문 교과서를 익히게 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뇌수를 뚫고 저 소위 일본 혼이라 하는 것을 주사하고자 함이라”<대한매일신보 1906.6.6>

당시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일본통감부의 언어정책 내용은 일본의 언어 침탈행위의 저의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일본어로 교과서를 편찬하는데 반대 여론이 일어나자 통감부는 여론을 진정시키기 위해 이과교과서만 일본어로 발간하고 나머지 교과서는 국한혼용으로 발행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한글을 제외한 모든 과목의 교과서가 일본어로 발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행정과 법률 관련 문서는 일본어로 된 문서를 표준으로 삼게 되었다. 일본은 1911년 식민지 교육 방침이 담긴 조선교육령을 발표하는데 조선교육령에는 ‘보통교육은 보통의 지식 기능을 주고, 특히 국민된 성격을 함양하며 국어를 보급함을 목적으로 한다’(제1장 강력 제5조)라는 강령이 있다. 이 강령은 일본어 상용화 정책이 조선의 식민지화에 중요한 목표였음을 말해준다.

이 교육령은 이후 식민 정책의 변화에 따라 1922년 2차 개정교육령, 1938년 3차 개정교육령, 1943년 4차 개정교육령이 발표되면서 몇 차례 개정되는데 일제의 언어 교육 정책은 일관되게 일본어 상용화를 지향했다.

특히, 1930년대 일제는 우민화 교육과 동화 정책을 통하여 이른바 한국인의 황국 신민화를 꾀하였고,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말살시키려는 민족 말살 정책을 강행하면서 우리말과 우리 역사 교육을 일체 금지하였다.

8. 한글의 위기 극복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대항하여 애국지사들은 민족 문화 수호 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3.1 운동 이후에 이윤재, 최현배 등의 국어 학자들은 조선어 연구회를 조직하여 국어 연구와 한글의 보급에 힘썼다. 그들은 한글이라는 잡지를 간행하고 가갸날을 정하고, 조선어 편찬사업을 시작하여 민족어와 한글을 발전시키려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0년대에 조선어 연구회가 개편되어 성립된 조선어 학회는 한글 강습 활동과 같은 대중사업을 진행하고, 문맹퇴치운동에 참여하여 한글교재편집과 교정을 맡아 한글 보급을 위해 노력하였다.

1940년에는 조선어사전의 원고를 완성하여 조판을 시작한다. 열악한 식민지 교육 현실 때문에 조선인 대다수가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조선어학회가 주도한 한글 보급 운동은 문맹자들이 문자를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총독부의 일본어 보급 정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조선어학회의 문맹퇴치운동이 활성화되었던 것은 조선어학회의 열성적 활동에 힘입은 결과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선어학회의 활동도 일본의 전시 동원 정책이 진행되면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전시 동원 체제와 함께 민족운동에 대한 탄압이 심해졌고, 결국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1942년 조선인 학생들이 기차 안에서 우리말로 대화하다가 일본 경찰관에 발각되어 취조를 받게 된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 경찰은 취조 결과 학생들에게 민족주의 감화를 준 사람이 서울에서 사전 편찬을 하고 있는 조선어학회 일원임을 파악하고,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단체로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억지 자백을 받아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어학회의 주요 인사들이 검거되어 조선어학회는 완전히 와해된다.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10, 한국학중앙연구원

1945년 8월 15일,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군에 패하여 항복하게 되어 한반도가 일제의 강점기에서 독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과 북의 이념 대립으로 인해 이를 계기로 우리말 사전 편찬 사업에도 차질을 입게 된다.

민족이 분단되고 탄생한 <조선말 큰 사전> 첫째 권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발간된 중요한 문화자산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말 큰 사전> 둘째 권은 좌우 합작 노력이 좌절된 후인 1949년 5월 5일 남한 사전의 하나로 발행되었다. 이후 많은 언문학자들이 북쪽 정부를 선택했고 그곳에서 새로운 편찬사업을 시작하였다. 결국 1949년 조선어학회가 한글학회로 이름이 바뀌게 되어 셋째 권부터 “조선어학회 지은 조선말 큰 사전”이 “한글학회 지은 큰 사전”이 되었다.

<조선말 큰 사전>은 록펠러 재단의 지원으로 셋째 권까지 완성할 수 있었지만 1950년 6월 25lf 한국전쟁으로 인해 사전출판을 기약할 수 없었다. 다행히 전쟁이 끝나고 록펠러 재단이 계속적인 지원을 결정함으로써 출판은 가능해졌지만, 당시 정부의 방해로 한동안 출판이 지체되기도 하였다. 이 일은 정부와 한글학회 사이에 있었던 철자법에 대한 의견 충돌에서 비롯되었다.

1953년 당시 정부는 현행 철자법을 폐지하는 철자법 개정 방침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형태 중심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는 대립되는 ‘소리 위주의 표기법’으로 개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교육계와 문화계의 저항이 심했지만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은 담화를 발표해 이를 강행할 것을 분명히 했다.

이승만은 근대 초기 개화파 운동가로 국문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는데, 그는 소리 위주의 표기법이 대중을 위한 언어 정책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정부가 철자법 개정안을 한글의 간소화 방안이라고 했던 것도 형태주의 표기법의 어려움을 극복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1954년 7월 정부는 철자법 개정 방침을 골자로 한 ‘한글 간소화 방안’으로 발표하였다. 다라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근거해 사전을 편찬하고 있던 한글학회와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사실, 문화계 인사들과 국어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절대 다수가 한글학회의 지지자였기 때문에 한글학회의 승리는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한글파동’이라 불리는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1954년 9월 정부가 철자법 개정 방침을 철회하면서 일단락되었다.

1957년에 나머지 4, 5, 6권의 사전이 출판됨으로써 총 6권의 사전이 탄생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출판을 위한 작업이 시작된 지 12년 만의 일이었다.

<한글의 우수성>

9. 한글의 성공 비결은?(우수성 과학성…)

한글만큼 많은 위기를 격은 문자도 사실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로이 한글을 사용한다. 그 위기와 역경의 역사 속에서 한글이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우리는 한글의 우수성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흔히 한글은 과학적이고 우수한 문자라고 한다. 이는 한글이 다른 주요 문자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몇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 몇 가지 특성은 다음과 같다.

① 배우기 쉬운 한글

세종대왕은 우리글 없이 어려운 다른 나라의 글을 빌려 쓰는 백성을 가련하게 여겨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백성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라는 창제원리에 맞게 한글은 누구라도 배우기 쉽게 만들어졌다. 훈민정음에는 한글이 배우기 쉬워서 총명한 사람은 하루 아침에, 어리석은 자라도 일주일이면 깨칠 수 있다고 하였다.

한글은 원래 28 자모로 만들어 졌으나 현재는 자음 14자, 모음 10자로 24 자모만을 사용하고 있다. 현존하는 언어 중 가장 단순한 자모 체계를 가졌고, 음소문자이면서도 모아쓰기를 할 수 있는 음절형 문자이다. 이 단순한 문자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11,172자의 조합형 문자를 생성해낸다. 이처럼 배우기 쉬운 한글로 말미암아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1%대[footnoteRef:4]에 불과하다. [4: 국립국어원 2008년 9월~11월 전국 16개 시•도 19세 이상 79세 이하 성인 1만2000명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② 한글의 과학성

한글은 제작 원리가 매우 과학적이 체계적이다. 한글 자모 28자는 제 각각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몇 개의 기본자를 먼저 만든 다음, 나머지는 이것들로부터 파생시켜나가는 이원적인 체계로 만들어 졌다. 자음 17자는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ㄱ,ㄴ,ㅁ,ㅅ,ㅇ’의 기본자 다섯 자를 만들고, 이 기본자에 획을 더해 나머지 자음을 만들었다. 모음 11자 역시 천(天), 지(地), 인(人)을 본 떠 ‘∙,ㅡ,ㅣ’의 기본자 세자를 만든 다음, 나머지는 그것을 조합하여 만들었다. 이는 한글이 치밀한 관찰과 분석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다.

③ 음소문자

음소문자란 음소를 나타내는 문자를 가리킨다. 소리는 한정되어 있지만 뜻이란 끝이 없을 만큼 많다. 따라서 뜻 글자(표의 글자)는 글자의 수가 많아질 수 밖에 없다. 한글은 음소문자로써 24자의 자모음으로 수많은 단어를 파생시켜 나간다. 우리는 복잡한 공부를 할 필요 없이 간편하게 문자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④ 모아쓰기

한글의 문자 운용상의 우수성으로 모아쓰기를 들 수 있다. 한글은 음소문자 중에서도 음소들 사이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나태낸 문자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음소문자이면서도 음절문자처럼 음절 단위로 모아쓰는 특징을 지닌다.

특히 오늘날 디지털 시대를 맞아 한글은 그 가치가 더욱 빛나고 있다. 휴대전화나 컴퓨터 자판 등은 모아쓰기로 인해 더 효율적으로, 더 빠르게 한글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기 있다. 우리나라가 세계 IT 강국으로 발 돋움 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남들보다 빨리 쓸 수 있도록 하는, 한글이 있기 때문이었다(실제로 한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휴대폰을 가장 짧은 기간에 거의 모든 국민에게 보급 됨).

⑤ 한글의 디자인

한글은 태생적으로 현대적이고 조형미를 갖추고 있어 세계 문화상품 시장과 디자인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 반 립 이렌은 ‘한글은 현대적이면서도 기하학적인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며 세계 디자인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전망했다. 파리 패션 전시 기획자 르하는 ‘섬세하고 낭만적이다’, ‘일본 최고 서체 디자이너 고미야마는 한국의 정신 그 자체다’,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은 ‘최고의 문화적 사치이자 상품이다’라고 평가한다.[footnoteRef:5] [5: 문화산업으로서의 한글 디자인, 전망과 과제(논문) – 신승일]

최근 한글은 디자이너 손에 의해 재 탄생하고 있다. 이상봉 디자이너의 한글을 모태로 한 의상 뿐만 아니라 도자기, 넥타이, 각종 생활용품, 가방, 지갑 등 엑세서리에 광범위하게 활용되어 또 다른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1,4 – 디자이너 이상봉 / 2 – 디자이너 이건만 / 3,7 – 캘리그라피 희사의 한글 디자인 작품 / 5 – 디자이너 김경섭 / 6 – 티움몰)

이와 같은 특징은 한글이 과학성과 합리성, 독창성에 있어 세계에 내놓을 만한 브랜드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1997년에는 유네스코가 훈민정음의 사회적 미적 가치와 희귀성을 인정, 최초의 기록 유산으로 선정[footnoteRef:6]되는 기염을 토하기도 한다. [6: 1997. 07. 25 동아일보 1면 사회 –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세계기록문화유산」 지정]

<한글의 현재>

10. 한글의 현재 상황 마케팅 전략 그리고 문제점

2010년 6월 8일, KBI(Korea Brand Image)는 외국인들에게 생소한 한국의 문화에 대한 이미지 제고와 인지도를 높이고자 워싱턴 스퀘어 공원에서 ‘월드컵 한글 티셔츠 이벤트’를 진행하였다. 5명의 자원 봉사자들은 사이지가 다른 한글 티셔츠를 뉴요커들에게 나눠주면서 한국 문화를 알리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의 참여로 준비해간 1000개의 티셔츠가 순식간에 사라지게 되었다. 티셔츠를 배포하면서 이번 이벤트가 단순히 무료로 나눠 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외국인들을 한국의 문화 상품이 판매하고 있는 코리아타운으로 유입시켜 연쇄적 소비가 일어나도록 시도했다. 이를 위해 코리아타운의 매장을 이용하면 상품에 할인을 받을 수 있는 ‘The Ultimate Koreatown World Cup Passcard' 프로모션 카드를 배포하여 외국인의 코리아타운 방문을 유도했다.

실제로 많은 외국인들이 코리안타운의 위치와 한국 음식이 어떤 것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SNS와 블로그를 통해 빠르게 확산되어 단순한 한글 티셔츠 나눔 행사가 아닌 대한민국의 문화를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한글 마케팅과 관련된 다른 사례로는 자비를 털어 뉴욕타임스에 독도 광고를 기재한 것으로 시작으로 한국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홍보활동을 하고 있는 서경덕 교수의 활동을 들 수 있다. 서경덕 교수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한국어 팔플렛과 브로셔가 없는 것을 알고 직접 팜플렛 배치를 위해 동분서주 뛰어다녔다. 그 결과 최초로 한글 팜플렛 배치가 성공하였고 이후, 뉴욕현대미술관과 기타 기관 등의 한국어 서비스 지원, 한국어 보로셔 팜플렛 배치를 진행하였다.

한국어로 적힌 팜플렛과 브로셔가 유명 공공기관에 배치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바로 자국의 브로셔 배치 유무는 그 나라의 국가브랜드를 알려주는 하나의 지표이며, 해외 유명 박물관에 배치되어 있는 ‘한국어’ 팜플렛을 보면 외국인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게 되고, 그 나라의 브랜드 파워를 인식하기 때문이다.

세계 속의 한글의 위상은 디자인 영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미 국내에서는 이상봉 디자이너가 한글을 소재로 만든 다양한 작품활동을 통해 한글의 미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한글의 미적 아름다움은 해외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미국의 유명 가수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입고 나온 ‘신흥 호남 향후회’티의 디자인은 세계적인 디자이너 D&G에서 맡에 제작되었다. 헐리우드의 유명 배우 린제이 로한도 한글 티셔츠를 입고 화보 촬영을 해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알려진 기존의 한글 마케팅 전략은 대부분 한 개인의 ‘애국심’에 의해 진행되어 온 경우가 많았다. 이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홍보 전략이 대외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현재 정부는 ‘한스타일’프로젝트를 통해 우리문화의 대표성과 상징성을 띄며, 생활화, 산업화, 세계화가 한글, 한식, 한복, 한지, 한옥, 한국음악 등의 전통문화를 대한민국 브랜드화 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국가이미지를 꾀하고 전통문화 관련 상품화를 통해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 해외 한류의 지속 확산에 기여 등의 기대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한스타일 사이트의 추진현황을 보면 이 거창한 기대효과와 목표에 맞게 실행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사진 – 한스타일 http://www.han-style.com/index.jsp)

 벌써 2011년이 되고 8개월이 넘었지만, 추진현황은 2007년 2월에 멈춰있다. 사이트 관리의 문제점과 정부의 한스타일 프로젝트 운영의 한계점을 보여주고 있다.

11. 21세기 한글의 위게 – 중국의 한글 공정

2010년 10월, 중국이 조선족이 사용하는 ‘조선어’를 자국 언어라고 주장하며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등 첨단 정보기기에 대한 한글 입력방식의 국제 표준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국내 휴대폰 제조사들이 각자의 모바일 자판 입력방식을 놓고 다툼을 벌이고 있는 사이 중국이 한글 자판 입력방식 표준 선점에 나섰다는 내용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중국조선어정보학회는 중국 정부가 최근 ‘조선어국가표준워킹그룹’을 구성하고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등 휴대형 기기와 PC 키보드용 조선어 입력 표준과 소스코드, 지역식별자 등 네 가지 표준 마련에 착수했다. 현재 한국은 이 분야의 한글 입력에 대한 국제 표준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중국이 이를 선점할 경우 태블릿PC 등에서 한글을 입력할 때 중국이 제정한 표준에 따라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한글공정’에 속도를 내는 사이 우리 정부의 표준화 작업은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 지식경제부와 방송통신위원회가 중심으로 일반 휴대폰은 ‘천지인’방식으로 단일표준화되고 스마트폰은 ‘천지인’ ‘나랏글’ ‘SKY' 등 3가지 방식을 복수표준으로 사용할 수 있는 내용을 골자로 한 1단계 표준화에 대해 합의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며 2012년부터 표준화 작업을 시행할 예정이다.

12. 한글의 향후 마케팅 전략 방안

중국의 한글공정에 맞서 한글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우선 정부차원의 지속적인 한글 홍보가 우선적으로 진행될 필요가 있다. 비록 세계기록유산으로 한글이 등재되어 있지만 이또한 끊임없는 홍보를 진행해야지만 우리 기록유산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스타일’을 국내적으로 적극 홍보하여 우리나라 국민부터 이와 관련된 문화 행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만들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사람이 모르는 대외 홍보 전략은 전파력이 낮기 때문에 큰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한스타일’과 관련된 문화 사업에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이를 통해 국민들 개개인이 한글 홍보대사가 된다면 SNS를 활용한 온라인 마케팅을 통해 기대 이상의 문화마케팅 효과를 볼 수 있다.

또한 디자인적으로도 인정받은 한글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고급화 전략을 꾀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 도시를 중심으로 한글과 관련된 예술 상품을 만들어 홍보하면 어려운 언어학적 측면이 아니더라도 예술 작품으로 심리적 부담감을 줄이면서 외국인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 예술성을 인정받은 한글은 분명 전 세계의 많은 예술가와 패션관계자들에게 매력적인 소재로 어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한글은 고급스럽고 예술적인 문자’라는 인식을 확립해 나가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재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한류열풍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특히 K-POP을 중심으로 한 한류열풍은 대단하다. 일본, 중국을 넘어 이젠 유럽에서도 K-POP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이 인기는 지난 6월10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SM Town LIVE in Paris' 공연으로 이어지고 했다. 7월 초 MBC에서는 공연실황을 방송을 통해 공개하기도 했는데 유럽의 K-POP 팬들이 한국가요를 ‘한국어’로 따라 부르며 공연을 즐기는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물론 세계적인 스타들의 인기만큼 압도적이거나 대다수의 유럽인이 한류에 열광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정식 활동을 활발하게 벌이지 않았음에도 상당히 많은 유럽인이 한국 문화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통해 한류의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한국어’라는 언어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K-POP이라는 한국문화에 애정을 갖기 시작한 것일 뿐인데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접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몇몇 외국인들은 한국 가수들에게 SNS로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구글 번역기 등을 활용하여 서투른 한국어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이는 K-POP이라는 존재가 ‘한국어’의 관심도를 높여주고 있다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최근 언론보도에 의하면 ‘한국어 교사’인력이 부족하여 어쩔 수 없이 한국어 교육을 이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한글과 한국어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겠다는 외국인들이 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교사 인력이 부족해서 이러한 흐름이 끊긴다은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에 대해 정부는 한류열풍을 계기로 삼아 해외에 적극적으로 한국어 교사 인재를 파견하여 이들에게 한국어 교육 서비스를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할 필요가 있다.

(사진 자료 – SM 페이스북)

12. 총 요약 및 결론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지 약 500년. 우리 생활 속에서 많은 부분은 차지하고 있는 한글은 세계가 극찬을 아끼지 않는 발명된 사람이 누군지 아는 유일한 글자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한글은 존속의 위기에 처하게 되지만 민족학자들의 도움으로 그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념의 대립과 분단 상황에서도 한글에 대한 사랑과 노력은 지속되어 왔다. 그 결과 언어적, 과학적 면에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으며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도 등재되게 된다.

하지만 세계가 인정한 한글에 대해 우리는 아직 잘 모르고 있다. 한글 운동이 꾸준히 전개되고 있지만, 무엇을, 어떻게, 왜 사랑하고, 왜 자랑하고, 왜 세계화해야 하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정보화, 세계화 시대 속에서 한국에서 한글의 입지는 좁아지고 영어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 과거 한자가 기득권을 위한 문자였듯이 지금은 영어가 기득권 계층으로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코스가 되었다. 자연히 한글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고 한글 맞춤법보다는 영어 맞춤법에 더 신경을 쓰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글 연구나 사업에 대한 새로운 태도와 시각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우선 정책의 중심에 한글이 놓여 있어야 할 것이다.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하여 연구와 사업이 체계적으로 전개되도록 해야 한다. 글자의 최우선 가치가 기록과 소통이라는 점을 생각하고 한글 창제 철학의 핵심가치 중 하나가 소통의 불편을 겪는 백성에 대한 배려심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글에 대한 언어학적 연구가 활성화 되어야 한다. 언어적 입장과 시각적 차원의 문제를 통합적으로 바라보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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