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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냉전과 38선 획정의 재조명:

    동주(東洲) 이용희(李用熙)의 「38線 劃定 新稿」를 중심으로

    김 영 호(성신여자대학교)

    I. 서론

    냉전이 종식되고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공산권의 문서들이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냉전 연

    구는 국내외에서 또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냉전 종식 이전에는 양극체제의 한 축을 이루

    었던 미국의 공식 문서들을 중심으로 냉전 연구가 진행됨으로써 냉전 연구는 많은 제약을

    받았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안보이데올로기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된 한국의 경

    우 미국의 연구 성과들이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유입되어 들어왔다.

    미국에서 냉전에 관한 전통주의적 해석이 주류를 이룰 때에는 전통주의가 그대로 유입되

    었다. 베트남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미국에서 수정주의가 등장했을 때에는 그 이론들이 무비

    판적으로 수용되어 지적 혼란을 가중시켰다. 냉전 시기 등장한 미국의 이론들에 대한 비판

    적 논의가 한국에서 제대로 이루어지기도 전에 냉전의 종식과 함께 새롭게 공개된 소련과

    중국의 1차 자료에 기초한 미국의 새로운 연구 성과들이 또 다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

    다.1) 탈냉전기 한국에서 냉전 연구는 자료와 시각의 문제를 동시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

    를 안게 되었다.2) 38선 획정을 비롯한 한반도 분단 과정이 냉전의 지대한 영향 하에서 이루

    어졌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이것은 하루 빨리 극복되어야 할 과제이다.

    이러한 지적 혼돈상태는 한국의 입장에서 국제정치현실을 바라보려는 나름대로의 국제정

    치이론적 시각을 갖지 못한 데에서도 그 원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동주(東洲) 이용희

    (李用熙)가『일반국제정치학(상)』에서 권역과 전파 이론이라는 독창적 이론을 발전시킨 것

    은 독자적 이론 부재의 우리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학문적 작업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은 널

    리 알려져 있다.3) 물론『일반국제정치학(하)』가 출판되지 못함으로써 그의 이론적 작업은

    미완의 상태로 남겨졌지만, 그 이후 발표된 그의 논문과 글들을 통해서『일반국제정치학(

    상)』의 출간 이후 그가 지향한 이론적, 경험적 연구의 지향점과 윤곽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고 판단된다.4) 그 중에서도 그가 방대한 외교문서에 기초하여 쓴 「38線 劃定 新稿: 蘇聯

    對日參戰史에 沿하여」는 38선 획정에 관한 국내 최초의 기념비적 연구일 뿐만 아니라 그의

    그러한 학문적 노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논문 중 하나이다.

    1) 그 대표적 저서로는 John Lewis Gaddis, We Now Know (Oxford: Clarendon Press,1997).

    2) 하영선, 김영호, “한국외교사와 국제정치학: 한국국제정치학 바로 세우기,” 『한국외교사

    와 국제정치학』 (서울: 성신여대출판부, 2006), p. 18.3) 이 점에 관해서는 박상섭, “동주 국제정치학의 성격과 현재적 의의,” 제1회 동주기념 학술회의

    발표문, 1998년 12월 4일, p. 2를 참조.

    4) 하영선, “동주국제정치학과 21세기,” 제1회 동주기념 학술회의 발표문, 1998년 12월 4일, p. 7.

  • 2

    이 논문은 그가『일반국제정치학(상)』을 집필하기 훨씬 이전에 발표한 두 편의 짧은 글

    들을 확대, 심화시킨 것이다.5) 이 글들이 발표되고 난지 꼭 10년이 지나고 38선 획정과 관

    련된 미국측의 외교문서들이 공개되고 난 후 그는 같은 주제를 다루는 「38線 劃定 新稿」

    라는 대단히 긴 논문을 발표한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볼 때 그가 이 문제에 지대한 학문

    적 관심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 논문을 통하여 강대국 중심의 국제정치학적 경향을

    비판하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논문에서 그는 38선 획정과 관

    련하여 제시된 강대국의 공식적 입장이 무비판적으로 우리 학계에 유입되고 있는 현실을 비

    판하고 있다.6) 그의 비판은 독자적인 국제정치이론적 근거없이 국제정치사를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논문은 그의 이론적

    작업과 맥락을 같이 하는 중요한 경험적 연구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비문해제된 방대한 미국 외교문서들을 바탕으로 쓰여진「38線 劃定 新稿」는 1차 자료와

    독창적 시각이 잘 조화를 이룬 뛰어난 한국현대사와 냉전 연구 성과로 평가될 수 있다. 이

    글은 냉전 종식 이후에 공개된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문서들에 기초하여 그의 논문이 갖고

    있는 학문적 의의를 살펴보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 글은 그의 논문이 갖고 있는 문제

    의식과 핵심적 주장들을 최근 공개된 새로운 문서들과 연구 성과들에 기초하여 재조명해 보

    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그의 논문이 미국이라는 강대국 정치의 입장을 대변한 군사편의주

    의설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이후 등장한 수정주의적 편향성을 극복할 수 있는 독

    창적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다음으로 이 논문에서 제시된 그의 주장

    이 냉전 종식 이후 새롭게 공개된 자료들에 비추어볼 때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지 평가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그의 논문이 그의 전체 학문세계에서 차지하는 의의를 평가하고

    향후 과제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II.「38線 劃定 新稿」의 문제 의식

    이용희가 그의 논문에서 제기하는 질문은 일본의 항복을 받기 위해 1945년 8월 미소 사

    이에 돌발적으로 그어진 단순한 항복접수선으로 38선 획정을 설명하는 군사편의주의설(軍事

    便宜主義說)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 군사편의주의설이 설득

    력이 없다고 한다면 38선 획정은 1945년 8월 이전의 어느 시점에 미소에 의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일까 하는 것이 그가 제기하는 또 다른 질문이다. 두 번째의 질문은 첫 번째 의문

    에 대한 검증과정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두 번째 질문에 그 논문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방대한 외교문서들을 동원하여 검증하고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그

    는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게 되는 배경과 그것이 아시아 전후 질서에 끼치는 영향에 관하

    여 소상하게 다루고 있다. 끝으로 그는 38선 획정이 갖고 있는 성격을 국제정치이론적 차원

    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그의 논문은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기 전에 기존 입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대안적 이

    론을 제시하는 전형적 연구 방법론을 채택하고 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이론에서 도출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설들을 일관성있게 제시하고 이것들을 방대한 1차 자료를 동원하여 검증

    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경험적 연구에 기초하여 38선 획정이 한반도 뿐만 아니라 동북아,

    5) 이 논문 발표 10년 전에 東洲가 발표한 글들은 “38선 획정의 시비”(『조선일보』, 1955년 1월

    26일)과 “(속) 38선 획정 시비”(『서울신문』, 1955년 2월 17-19일)가 있다.

    6) 李用熙, 「38線 劃定 新稿」, 『李用熙著作集1: 韓國과 世界政治』(서울: 민음사, 1987), p.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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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세계 전략에 미친 영향을 동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연합국은 전후 문제를 다루기 위해 여러 번에 걸쳐 수뇌회담을 개최했다. 그렇지만 이

    회담들에서 전후 한반도의 구체적 처리 방식 뿐만 아니라 38선과 같은 분할점령선에 대해서

    도 합의하지 못했다. 식민지 조선의 해방과 강대국에 의한 신탁통치와 같은 일반적 원칙에

    대해서 합의했지만 그 구체적 실행 방안은 종전을 기다려야만 했다. 전후 국제정치질서 형

    성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미국이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Franklin Roosevelt)대통령의 전후 질서 구상이 한반도의 미래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1941년 8월 루스벨트는 윈스턴 처칠과 회담에서 ‘대서양헌장’(Atlantic Charter)을 채택하고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여 승리할 경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추구할 구체적 청사진을 제시하

    게 된다.

    이 헌장은 전후 새로운 국제정치경제질서의 성격 뿐만 아니라 전후 식민지 조선의 미래

    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 헌장의 핵심적 내용은 미국과 영국은 영토 확장을 추구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로써 19세기형 제국주의는 종언을 고하게 되고 우리 민족이 일

    제 식민지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또한 이 선언은 식민지의 해방과 그

    주민들이 민주적 절차를 거쳐 정치체제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했다.

    이용희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전후 조선의 처리 문제를 한반도 차원에서만 보려는 시

    각을 극복하지 못할 경우 ‘대서양헌장’의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수 없을 것이다. 이

    헌장을 통해서 전후 질서 전반에 대한 청사진이 제시된 후 한반도와 같은 지역 문제 방안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이 점에서 한국의 독립을 최초로 승인한 1943년의 카이로선언은 대

    서양헌장의 틀 내에서 나왔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헌장의 원칙이 식민지 조선에 구체적

    으로 적용된 것이 카이로선언이었던 것이다. 이 헌장의 정신에 따라서 38선 획정 이후 대한

    민국은 건국의 과정을 밟게 되었다. 해방 후 모스크바3상회의 결과에 따라서 신탁통치가 이

    루지지 않았을 때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했다. 소련이 북한에서 자유선거 실

    시를 거부했을 때 이 헌장의 정신에 따라서 유엔감시 하에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민주적 절

    차에 따라 실시되었다. 이처럼 세계, 동북아, 한반도 차원으로 어떻게 강대국의 전략이 구체

    화되는지를 추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카이로선언은 적절한 시기에 한국의 독립을 약속했을 뿐 어떤 구체적 절차를 거칠 것인

    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38선 획정이 얄타협정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는 ‘얄타밀약설’이 유포되었다. 이승만은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하는 대가로 미소가

    얄타회담에서 한반도를 소련의 지배 하에 두기로 합의했다고 주장했다.7) 그러나 이 주장은

    사실과 달랐다. 얄타회담 기간 중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 실시 의

    사를 밝혔다. 스탈린은 이에 동의했을 뿐 38선 획정에 관한 어떠한 합의도 이 회담에서 이

    루어지지 않았다.8) 얄타회담 1년뒤 비밀회담 전문이 공개되었을 때 38선 획정 내용은 들어

    있지 않았다. 38선 획정은 일본의 항복과 함께 전쟁이 예상보다 빨리 끝나게 되자 미국과

    소련은 일본군의 항복을 위한 한반도상의 분할선에 합의하게 된다. 미국은 태평양사령관 맥

    아더로 하여금 ‘일반명령 제1호’를 발표하게 하여 38선 분할을 공식화했다.

    이용희는 38선이 미국에 의해 ‘일반명령 제1호’(General Order No. 1)를 통하여 소련에

    제시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군사적 편의주의설을 비판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하다.9) 1945년

    7) Robert T. Oliver, Syngman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Seoul: Panmun Book, 1978), p. 14.

    8) US State Department,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The Conferences ofMalta and Yalta, 1945 (Washington, D.C.: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55), p. 184.

  • 4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8월 8일 소련이 정식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함으로

    써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한반도를 둘러싼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3성조정위

    원회(SWNCC)는 8월 10일과 11일 밤에 38선을 한반도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기 위한 미

    소 사이의 군사분계선으로 황급하게 결정했다. 8월 13일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이 이를 승인

    했고, 그 내용은 38선 이북에서는 소련이 일본의 항복을 받고, 38선 이남에서는 미국이 일본

    을 무장해제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본군 항복의 구체적 절차를 명시한 ‘일반명령 제1호’

    가 맥아더 사령관에게 보내짐으로써 38선 획정은 구체화되었다.

    8월 14일 미국은 ‘일반명령 제1호’의 내용을 소련에게 통보했다. 스탈린은 쿠릴열도 전체

    와 일본 홋가이도의 북부를 소련이 점령할 수 있도록 그 내용을 수정해 줄 것을 제의했다.

    미국은 소련이 쿠릴열도 전체를 점령하는 것은 동의했지만 소련의 홋가이도 점령은 반대했

    다. 이처럼 스탈린의 요구에 의해 일본과 관련해서 일부 수정이 있었다. 그렇지만 스탈린은

    한반도 38선 분할에 관한 한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미국의 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38선은 일본군의 항복을 받기 위한 기술적인 군사분계선으로 그어졌다는 것이 군사

    편의주의설의 핵심적 내용이다. 이 주장은 트루먼의 회고록에 의해 제시됨으로써 미국 정부

    의 공식 입장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용희는 군사편의주의설이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트

    루만 회고록, 웹(James E. Webb)의 증언 등을 인용하고 있다.10) 또한 그는 이 학설이 서구

    의 학자들에 의해서도 널리 주장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학계의 학자들에 의해서도 수

    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11) 한반도의 분단은 그 후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적 결

    과를 낳았기 때문에 이 학설은 38선 획정의 우연성과 돌발성을 강조함으로써 강대국의 한반

    도 분단의 영구화와 한국전쟁에 대한 책임을 극소화시키고, 회피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이용희는 비판한다. 나아가 그는 설령 38선 획정을 통하여 일본군의 항복을 접

    수하는 절차가 순조롭게 끝났다고 하더라도 제2차 대전 중 강대국들 사이에 진행된 일련의

    회담에서 한반도가 단일의 강대국의 영향 하에 완전히 편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논의된 신

    탁통치안이라든지 대일전과 관련하여 미소 사이에 논의된 한반도 상의 작전구획지역 논의

    등을 통해서 볼 때 38선 획정은 단순히 군사적 편의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그는 주장

    한다.12)

    이용희는 군사편의주의설을 비판하고 38선은 한반도 군사작전을 위한 군사구획선으로서

    포츠담회담에서 미국에 의해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는 가설을 제기한다.13) 또한 그는 포츠

    담회담에서 미국에 의해 한반도의 군사적 분할 작전에 관한 논의가 처음으로 이루어졌지만

    38선 획정은 그 연원이 소련의 대일전 참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또 다른 가설을 제

    기한다. 미국이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촉구했었다

    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볼 때 두 번째 가설은 이용희의 38선 획정의 국제정치적 연원과 성

    격을 설명하는 데 대단히 중요할 뿐만 아니라 그의 논문의 핵심적 주장의 일부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상호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는 이상의 두가지 가설들을 제기함으로써 이용희

    는 38선 획정의 국제정치적 배경과 구체적 시기를 동시에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9) 李用熙, 「38線 劃定 新稿」, pp. 47-50.

    10) 앞의 글, pp. 12-14.

    11) 앞의 글, p. 11.

    12) 앞의 글, p. 56.

    13) 앞의 글, p. 14.

  • 5

    III. 미국과 소련 문서를 통해 본 평가

    우선 이용희는 38선이 군사편의주의설에서 주장하는 1945년 8월 11일보다 훨씬 이전인 포

    츠담회담에서 당시 미육군 작전국장 헐(John E. Hull)중장에 의해 검토되었고, 이 “헐 계획”

    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미국이 소련에게 제시한 한반도 분할선의 근거가 되었다고 주

    장한다.14) 포츠담회담에서 헐중장은 미육군 마셜 참모총장으로부터 미소 양국군의 한반도

    이동 계획을 수립하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참모들과 미소 양국 간의 지상분할선을 결정하

    기 위해 한반도 지도를 연구했다. 그 결과 헐중장은 부산과 인천항이 미국의 작전지역에 포

    함되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서울의 북방 어느 지점에 선을 긋기로 결정했는데, 이 선은 38선

    그대로는 아니었지만 그것에 근접한 것이었다. 이용희는 이 “헐 계획선”이 상륙작전을 위한

    작전구획선이었지만, 한반도 지역이 소련에 의해 완전히 점령되는 것을 방지하고 소련과 신

    탁통치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잠정적인 조치로 취해진 것으로 결론짓고 있다.15)

    이용희의 주장은 이완범교수가 최근 미국국립문서처에서 미육군 전사자료실 소속의 해리

    스(E. M. Harris) 대령이 1949년 6월 17일 헐중장과 인터뷰한 문서가 발굴됨으로써 더욱 설

    득력을 얻고 있다.16) 이 인터뷰에서 헐중장은 포츠담회담에서 고려된 미소 사이의 지상작전

    을 위한 분할선이 한반도 점령시 지상군 사이의 협조를 위한 점령 분할선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자료들은 38선이 1945년 8월 11일 갑자기 획정되었다는 기존의 정설을 뒤

    엎는 결정적인 증거들로 판단되고, 이용희의 주장은 새로운 자료의 발굴에 힘입어 더욱 설

    득력을 얻고 있다.

    나아가 3성조정위원회의 심야 회의 중 38선을 직접 그은 러스크(Dean Rusk)와 본스틸

    (Charles H. Bonsteel) 두 대령은 헐 국장의 바로 직속 부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포츠담회담

    에서 제시된 헐의 계획안을 이들이 이미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

    들이 구한말 과거 열강들이 한반도를 유사한 방식으로 분할하려고 시도했다는 역사적 사실

    을 보여주는 구체적 증거는 없다. 이들은 이런 사실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군사적 차원에서

    한반도 분할 점령의 필요성을 제기한 헐의 주장이 일본 항복이 임박한 시점의 심야 회의에

    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냉전 종식 이후 공개된 포츠담회담 준비를 위해 작성된 소련의 문서들은 해방 후 한반도

    가 주변 열강 중 어느 한 나라의 지배 하에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정책 목표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17) 이 문서들을 찾아내고 분석한 웨더스비에 따르면 소련 문서들의 특징은 여러

    가지 대안들에 대한 정책적 협의가 없다는 것이다. 이미 스탈린 혹은 정치국의 결정에 따라

    서 사태의 진전을 분석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소련 문서는 카이로선언의 ‘적절한 시기’(in

    due course)라는 의미를 일정한 기간 동안 주변 강대국들의 공동 관리 하에 조선이 두어진

    다는 것으로 정확하게 해석하고 있다. 그 국가들로는 미국, 소련, 중국, 영국을 꼽고 있다.

    이 문서들은 구한말 열강들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충돌했는지 그 과정을 매우 상세하고 정확

    하게 파악하고 있다.

    소련 문서에 따르면 구한말 러시아는 일본의 조선 팽창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힘이 부족

    14) 앞의 글, p. 50.

    15) 앞의 글, p. 51.

    16) 이완범, 『38선 획정의 진실』(서울: 지식산업사, 2001), pp. 130-133.

    17) Kathryn Weathersby, "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45-1950: New Evidence from Russian Archives,"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Working Paper, No. 8 (1993), p. 11.

  • 6

    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력을 회복한 소련의 입장에서 볼 때 일

    본을 한반도로부터 영원히 추방하는 것이 소련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보고 있다. 소련은

    대만을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시킬 경우 미국과 중국이 그 대가로 한반도 상에 일본의

    경제적 이익을 보장해주는 조치를 취할 가능성을 매우 우려하고 있다. 소련 보고서는 전후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를 완전히 정리하는 것이 소련의 국익에 부합

    된다고 적고 있다. 그렇지만 소련은 한반도 전체를 소비에트화할 경우 미국의 반발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반도에 들어서는 통일 정부는 적어도 소련의 국익에 위

    협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소련은 보았다. 이런 소련의 입장에 비추어볼 때 소련이 포츠담 회

    담에서 대일본 군사작전을 위해 38선 근처에서 군사작전을 위한 선을 획정하자는 헐중장의

    제안에 반대할 이유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38선이 포츠담회담에서 미국에 의해 처음으로 구상되었지만, 미국이 “헐 계획”을 회담 당

    시 소련에게 제시하여 양국이 합의를 이루었다는 38선 획정에 관한 “미소의 포츠담 밀약설”

    에 관해서는 그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고 이용희는 주장하고 있다.18) 포츠담밀약설은 38선

    획정에 관한 얄타 밀약설과 함께 그동안 꾸준히 주장되어 온 이론이지만 이 주장과 관련된

    결정적 증거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19) 최근에 공개된 1945년 6월부터 9월 사이에

    작성된 일련의 소련문서들에서는 소련이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일부 드러나 있을 뿐 38선 획정과 관련된 내용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20) 따라

    서 포츠담회담에서 소련이 38선 분할 점령에 합의했는지의 여부를 밝혀 줄 증거는 발견되고

    있지 않지만, 이 회담에서 미국이 38선를 미소 분할선으로 구체적으로 고려했다는 그의 주

    장은 새로운 자료들의 발굴과 함께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의 논문에서 제기된 두가지 가설 중 포츠담 회담에서 38선 획정이 미국에 의해 구체적

    으로 고려된 후 일본의 항복 직전인 1945년 8월 11일 맥아더에게 보내는 일반명령 제1호에

    의해 표면화되었다는 첫 번째 가설은 38선 획정의 구체적 시점을 검증하는 것이다. 반면에

    그의 논문에서 제기되고 있는 두 번째 가설은 38선 획정의 국제정치적 연원과 성격을 밝히

    기 위한 것으로서 첫 번째 가설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다고 판단된다. 두 번째 가설을 검증

    하기 위해 그는 논문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2차 대전 중 진행된 연합

    국 수뇌들 사이의 정상회담과 관련된 방대한 문서를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이용희의 연구 초점은 미국이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촉구해 나가는 과정을 정밀하게 검

    토하고 그러한 미국의 정책이 전후 세계질서와 동아시아에 미칠 국제정치적 영향을 분석하

    는 데 맞추어져 있다. 미국의 거듭된 대일 참전 요구에 대해서 1943년 10월 소련은 모스크

    바 외상회담에서 몰로토프 외상을 통하여 비공식적으로 참전 의사를 표명하게 된다.21) 그리

    고 1943년 11월 28일의 테헤란 회담에서 스탈린에 의해 소련의 대일 참전 의사가 공식적으

    로 표명된다.22)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에서의 독립 국가 건설이 선언됨과 동시에 한반도의

    분단을 가져오게 될 대일 참전이 미소에 의해 합의된다는 것은 역설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소련이 대일 참전 의사를 공식적으로 표명한 이후 미소 사이에 남아 있던 문제는 소

    18) 李用熙, 「38線 劃定 新稿」, p. 52.

    19) 포츠담밀약설에 관해서는 신용하, “한국 남북분단의 원인과 포츠담 밀약설,” 『해방 직후의

    민족문제와 사회운동』, 한국사회사연구회 논문집, 제13집 (서울: 문학과 지성사, 1988), pp.

    32-33을 참조.

    20) 소련문서들과 이것에 관한 해석에 관해서는 Weathersby, “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45-1950,” pp. 11-13 참조.

    21) 李用熙, 「38線 劃定 新稿」, p. 16.

    22) 앞의 글, p. 19.

  • 7

    련의 참전에 대해 어떠한 정치적 대가를 지불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1944년 12월 14일 스탈린은 소련주재 미국대사 해리만을 통하여 소련의 정치적 요구를

    구체적으로 밝힌 후 곧 이어 열리게 되는 얄타회담에서 미국과 그 문제와 관련하여 합의에

    도달하게 된다. 1945년 2월 8일 개최된 스탈린과 루스벨트의 회담에서 소련의 대일전 참전

    과 관련된 정치적 요구들은 소련의 희망대로 그대로 관철되었다. 대일전 참전의 대가로 소

    련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빼앗긴 남부 사할린을 되찾고, 쿠릴열도를 합병할 수 있게 되

    었다. 또한 소련은 중국의 여순항에 해군기지 건설권을 확보하고, 남만주철도와 동청(東淸)

    철도 사용권 및 대련항 사용권을 포함한 만주에서의 우월한 지위를 보장받았다. 그대신 소

    련은 만주에 대한 국민당의 주권을 인정하고 국민당과 우호동맹조약을 체결하기로 하고, 장

    개석과 사전 합의없이 소련과 일방적으로 중국문제를 합의한 데 대해서는 루스벨트가 책임

    지고 장개석을 설득하기로 합의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루스벨트는 전후 장개석의 중

    국을 중심으로 동북아 질서를 관리해 나가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계획은 중국의 공산화로

    인하여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얄타회담에서 아시아 문제를 논의하기 이전에 이미 미국과 소련은 유럽의 문제에 관해서

    도 합의를 도출했다. 그야말로 얄타회담은 아시아와 유럽의 문제를 동시에 다룸으로써 전후

    국제정치질서를 미소 중심으로 재편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처칠은 전중 회담에

    서 영국의 주장을 반영하려고 했지만 국제정치의 대세는 이미 토크빌의 예언처럼 미소가 세

    계를 양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얄타회담에서 독일을 연합국 4대국이 분

    할하여 점령하자는 소련의 안이 미국에 의해 받아들여져서 소련은 자신의 세력을 방역지대

    넘어로 확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소련과 폴란드의 국경은 쿠존선(Cuzon Line)으로

    정하고, 친서방적인 폴란드 런던 망명정부(London Poles)가 아니라 소련이 내세운 루블린정

    부(Lublin Government)를 중심으로 여타의 정파들이 연합하여 폴란드 독립정부를 수립한다

    는 것이 결정되었고, 그 구체적인 절차는 미국, 영국, 소련의 3국외상회담에서 결정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얄타회담은 “해방유럽에 관한 선언”을 루스벨트의 제안에 의해 채택했는데, 이 선언

    은 3국이 새로 해방된 유럽의 국가들에서 민주적 선거절차를 거쳐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데

    협력하기로 한 합의문이었다. 이 선언을 앞서 살펴본 봐와 같이 대서양헌장의 정신을 그대

    로 이어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선언은 루스벨트가 미국 내의 여론을 만족시키

    기 위해 제시한 것이었고, 군사적으로 동구를 점령한 소련이 이 선언을 벗어난 정책을 펼

    경우 이것을 규제할 어떠한 조치에는 미소가 합의하지 못했다. 그 결과 스탈린은 이 선언을

    미국이 사실상 소련에 의한 동구의 지배를 용인한 것으로 이해했고, 얄타회담 2주 뒤에 루

    마니아에는 소련의 강압에 의해 공산정부가 들어섰다.23)

    결국 독일이 항복하기 이전에 마지막 전시회담에서 스탈린은 볼셰비키혁명 이후 베르사

    이유체제가 만들어낸 방역지대에 의한 고립상태를 탈피하여 서방국가들에 의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계기를 마련했다. 미국이 소련에 사회주의체제가 들어선 지 16년만인 1933년 11월

    소련을 외교적으로 승인했지만, 미국의 고립주의정책, 스탈린의 히틀러와의 불가침조약체결,

    소련의 핀란드 침공과 발틱 3국 합병, 일본과의 불가침조약 체결 등이 복합적인 요인이 되

    어 미소관계는 정상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24) 그러나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고,

    그해 12월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한지 4일만에 독일이 미국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한

    23) Walter LaFeber, American, Russia, and the Cold War, 1945-1990, 6th ed. (New York:McGrow-Hill, 1991), pp. 14-15.

    24) Karl W. Ryavec, United States-Soviet Relations (New York: Longman, 1989), pp. 34-37.

  • 8

    후 미국과 소련은 비로소 파시스트국가들에 맞서 싸우는 동맹국이 되었다. 독일이 항복하기

    3개월 전에 열린 얄타회담에서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는 전쟁 중의 미소 대연합

    정신의 연장선상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치질서를 재편하려고 시도했다. 이 계기를

    이용하여 스탈린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소련의 국가이익을 실현함으로써 이 얄타회담의 성과

    를 소련 외교의 빛나는 금자탑으로 여겼다.25)

    당시 미국은 소련의 대일전 참여 지연으로 만주의 관동군이 일본 본토로 이동하여 결사

    항전을 벌일 경우 미국은 일본 본토 공격에서 약 100만 이상의 사상자를 낼 것으로 추정했

    고, 이러한 미군의 희생을 줄이기 위하여 미국이 일본을 공격하기 3개월 전에 소련이 대일

    전에 참전하여 만주에서 관동군을 봉쇄하여 패배시키기를 원했다.26) 소련은 당시 24개 사단

    과 42개 여단을 갖고 있던 일본의 관동군과 싸우기 위하여 최소한 30개 사단을 극동으로 이

    동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 소련 병력을 이동시키는 데에는 1천대의 열차가 필요했고, 그

    이동 기간은 약 3개월이 소요될 예정이었다.27) 따라서 소련은 독일 항복 후 3개월 후에 대

    일전에 참전할 예정이었다. 대규모 소련군 부대의 이동은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서 이루어졌

    다. 유라시아 대륙의 심장토에 위치한 소련이 징기스칸의 말 대신 철도를 이용하여 동아시

    아로 이동하는 장면은 전후 국제정치질서가 소련 중심의 대륙세력과 미국 중심의 해양세력

    으로 양분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얄타협정의 아시아 부분은 미소 양국이 회담 1년 뒤인 1946년 2월 동시에 극비의 합의문

    서를 공개하기 전까지는 그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얄타회담 문서에 따르면 스탈

    린이 아시아에서 확보한 이권들은 쿠릴열도를 제외하면 모든 것들이 1905년 러일전쟁 패배

    이전 제정 러시아가 상실했던 것을 되찾은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러일전쟁 패배 이후 아

    시아에서 영향력을 상실했던 소련이 다시 아시아 무대에 초강대국으로 재등장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비록 내전이 진행되고 있던 중국의 상황이 유동적이긴 했지만, 소련의 재등장은

    미국의 일본 점령과 함께 유럽과 마찬가지로 아시아도 미소의 세력권으로 양분되었다는 것

    을 의미했다. 대서양헌장과 카이로선언의 정신에 따라서 전후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되자

    마자 한반도는 또 다시 미소 냉전 대결의 국제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빠지게 되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질서를 재편하게 될 얄타회담에 관한 이용희

    의 분석 중 그의 첫 번째 가설과 관련하여 중요한 부분은 조선에 외국 군대를 주둔시키기

    않겠다고 하는 루스벨트의 발언이다. 이 발언은 한반도에 미군을 상륙시키지 않겠다는 얄타

    회담 당시의 미국의 입장이 독일의 패망과 소련의 대일 참전의 기정사실화와 더불어 포츠담

    회담에서 바뀌게 되었고, 그 결과 포츠담 회담에서 미국이 주도적으로 한반도 상에 지상군

    의 작전 구획선을 구체적으로 구상했다는 이용희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나아가 이용희는 전후 질서가 미소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라는 것을 미국은 분명하게 인

    식하고 그것에 대응하기 위해 신탁통치와 38선 획정 등의 정책을 제시했다고 주장한다. 우

    선 미국의 신탁통치 구상은 미국의 입장에서는 과거부터 열강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지역

    인 한반도가 단일의 세력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는 것을 막기 위한 국제정치적 판단에서 비

    롯된 것이라고 그는 지적한다. 또한 미국이 38선이라는 작전구획선을 설정한 것도 일본의

    항복 이후 한반도의 접수를 일국에게 맡길 수 없고, 미소가 동등하게 한반도를 분할하자고

    25) Vladislav Zubok, ""To Hell with Yalta" - Stalin Opts for a New Status Quo," Cold WarInternational H istory Project Bulletin, Vols. 6-7 (1995/1996), p. 24.

    26) Louis Morton, "Soviet Intervention in the War with Japan," Foreign Affairs, XL (July1962), p. 657.

    27) 앞의 글, p. 656.

  • 9

    하는 전략적 발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그는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전후 한반도는 식민지

    화되기 이전 뿐만 아니라 해방되는 그 순간에도 국제정치의 압도적 영향으로부터 결코 벗어

    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그는 논문에서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를 38선으로 분할 점령한 이후 전중 회담에서 이루어진 신탁통치에 관한 미소의

    합의 사항을 이행시키기 위해 미소는 모스크바 3상회의를 개최하고 2차에 걸친 미소공동위

    원회를 개최하게 되지만 통일정부 수립에 합의하지 못하고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최근

    공개된 소련문서에 기초한 냉전 연구들은 1947년 6월 5일 마샬 국무장관의 하바드 연설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추진된 유럽경제부흥계획안(European Recovery Program)인 마샬

    플랜(Marshall Plan)이 미소 냉전 대결의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었다는 사실에 거의 일치된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28) 이러한 마샬 플랜에 대응하기 위해 1947년 9월 스탈린은 즈다노프

    (Andrei A. Zhdanov)로 하여금 양진영 이론을 제시하게 하고 코민포름을 결성하여 동구권

    국가들을 소비에트화시켜 소련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유럽에서의 냉전 격화 시기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교착상태에 빠진 때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그 영향은 이미 한반도에도

    미치게 되어 미국은 소련과의 합의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이양하여 유엔 결의에 따라 남한에서만 민주선거를 실시하게 된다. 이와 달리 해방 직후부

    터 소련에게 유리한 정권 수립을 도모해오던 소련은 북한에 소비에트 체제를 주입하게 된

    다. 결국 38선을 중심으로 미소에 의해 분할 점령된 한반도는 분단의 고착화와 함께 미소의

    세력권으로 양분됨으로써 38선은 양극 체제의 분할선이 되었고, 구체적으로 미국에게는 소

    련의 팽창을 저지해야 하는 봉쇄선이 되었다.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 이후 아시아에서는 1949년 초부터 중국 내전에서의 중국공산당의

    승리가 뚜렷해지기 시작하면서 대단히 유동적인 상황이 전개되었다. 공산중국은 미국 행정

    부에게 새로운 동북아 국제정치질서 구상에 커다란 딜레마를 제공했다. 마셜플랜 실시 결정

    이후 유럽이 동서 양진영으로 양분되었지만 그 양상은 아시아와 비교해볼 때 안정정이었다.

    유럽과 달리 아시아 지역 공산주의자들은 현상타파적이고 혁명적 성향을 강하게 갖고 있었

    다. 중국 공산화 이후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시키기 위해 1949년 3월부터 김일성은 스탈린에

    게 남침을 승인해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그렇지만 스탈린은 38선은 미소 합의에 의

    해 그어진 국제적 분할선이라는 인식을 갖고 북한의 남침을 승인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

    1949년 6월 30일 모택동이 대소일변도정책을 선언하고 새로운 중소동맹조약 협상을 위해 모

    스크바를 방문하고 있던 기간 중인 1950년 1월 22일 스탈린은 얄타협정을 완전히 폐기처분

    하기로 결정했다고 모택동에게 통보하고, 그 직후인 1월 30일 북한의 남침을 승인하고 지원

    하겠다는 의사를 김일성에게 표시하게 된다.29) 이미 중국혁명의 통하여 동북아 지역의 세려

    28) 이 점에 관해서는 John L. Gaddis, We Now Know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1997), pp. 31-36; Vladislav Zubok and Constantine Pleshakov, Inside the Kremlin'sCold War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96), pp. 50-51; Vojtech Mastny,The Cold War and Soviet Insecurity: the Stalin Years (New York: Oxford UniversityPress, 1996), pp. 27-28; Melvyn Leffler, "Inside Enemy Archives: The Cold War

    Reopended," Foreign Affairs, Vol. 75, No. 4 (July/August 1996), p. 133; Scott D.Parrish and Mikhail M Narinsky, "New Evidence on the Soviet Rejection of the

    Marshall Plan, 1947: Two Reports,"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Working

    Paper No. 9, Woodrow Wilson Center, 1994; Geoffrey Roberts, "Moscow and the

    Marshall Plan: Politics, Ideology and the Onset of the Cold War, 1947," Europe-AsiaStudies, Vol. 46 (1994), pp. 1371-1386 등을 참조.

    29) “Conversation between Stalin and Mao, January 22, 1950," CWIHP Bulletin, Vols,6-7, pp. 7-9.

  • 10

    균형은 이미 공산세력에게로 기울고 있었다고 스탈린은 판단했다. 패전의 늪에서 아직 헤어

    나지 못하고 있던 일본의 재부흥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일본이 미국의 동맹권으로

    흡수된다고 하더라도 공산 중국이 소련의 영향권 하에 있는 것과는 세력균형의 차원에서 비

    교될 수 없는 것이었다. 스탈린이 김일성에서 남침을 지원하기로 결정하면서 국제정세가 공

    산세력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은 이러한 그의 전략적 판단을 보여주는 것

    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중국 혁명의 성공 이후 김일성의 무력통일의 성공은 아시아 지역에서 세력균형을 소련에

    게 급격하게 유리한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전략적 판단에서 스탈린은

    모택동의 사전 동의 받도록 한 후 김일성의 남침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용희의

    논문에서 보는 것처럼 38선 획정 자체가 강력정치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 선을 없애려는 공

    산세력의 시도는 미국의 강력한 저항을 불러올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

    다. 그렇기 때문에 스탈린은 더욱 한국전쟁 직전에 유사시 중국의 개입을 확보해 두려고 노

    력했을 것이다. 결국 스탈린의 남침 지원 결정은 미국이 신탁통치안과 38선 획정을 통하여

    한반도가 단일 세력의 영향 하로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하는 미국의 전략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으로 해석되었다. 그 때문에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과 중국의 참전 이후 한반도는 3년동

    안 자유세계와 공산세계 사이의 전장터가 되었던 것이다. 냉전 당시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

    에서 열전을 경험함으로써 더 이상 제3세계의 분쟁이 양국 사이의 전면적으로 비화되지 않

    도록 신중한 접근을 취하게 된다.

    IV. 결론: 「38線 劃定 新稿」의 의의와 향후 연구과제

    이용희의 논문은 일차자료인 방대한 외교문서를 직접 검토하면서 자신의 가설들을 검증

    해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외교사 연구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38선

    획정이라는 특정의 사건을 단순히 그것이 표면적으로 그어진 시점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새

    롭게 형성되고 있는 국제정치질서의 커다란 틀 내에서 조망하고 그 의미를 밝히려고 노력하

    고 있다는 점에서 국제정치이론과 국제정치사 연구를 동시에 결합시키려는 진지한 학문적

    노력의 전형적 모습을 그는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논문을 통하여 그는 한반도

    문제를 우리의 들창을 통해서 보려는 편협한 인식을 극복하고 한반도가 그 부분을 이루는

    세계 질서의 성격에서 분단과 한국전쟁의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경험적 근거를 제

    시하고 있다.

    그의 연구는 한국외교사와 국제정치이론 연구가 한반도, 동북아, 세계라는 세 차원을 동

    시적으로 고려하는 폭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38선 획정 과정은

    단순히 한반도 차원 뿐만 아니라 미소의 동북아 정책과 전세계적 차원의 냉전 전략이 서로

    맞물리면서 매우 복합적 요인들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것을 그는 보여주고 있다. 38선 획정

    과 분단 과정이 국제정치적 요인들에 의해 압도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분단을 극복

    하는 통일은 역시 국제정치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

    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일반국제정치학(상)』의 마지막 부분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소련이 이

    념적으로는 계급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대외정책을 결정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엄연히 강

    대국들이 행하는 강력정치(power politics)의 틀 내에서 자국의 국가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논문에서 경험적으로 보여주고 있다.30) 이러한 그의 주장은 소

  • 11

    련의 등장으로 인하여 국제정치질서가 이중 구조화되는 듯이 보이지만 여전히 국제정치현실

    은 민족국가라고 하는 단위체를 중심으로 포착될 수 있다는 그의 인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얄타회담과 포츠담회담 등에서 보여주는 스탈린의 강력정치적 발상은 그의 주장을 경

    험적으로 뒷받침해 주고 있다.

    소련 외교정책에 대한 이용희의 주장은 모겐소(Hans J. Morgenthau)의 ‘국가적 보편주

    의’(nationalistic universalism)라는 개념을 연상케 한다.31) 모겐소는 특정 국가가 자신의 이

    념과 가치를 여타 국가들에게 강제로 주입시키려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이 개념을 발전시

    켰다. 공산주의의 세계적 전파라는 명분 하에 소련의 국익을 도모하는 소련의 외교적 행태

    는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 냉전 시기 이념적 대결이 두드러지지만 소련은 여전히 근대국가

    들처럼 국익의 관점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 점에서 냉전 시기 국제정치현실은 전통적 현

    실주의의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물론 이용희는『미래의 세계정치』라는 저서에서 국제

    정치현실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은 소련이 아니라 유럽연합이라는 광역적 단위체

    의 등장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논문은 이용희의 학문적 관심을

    예감케 해주는 중요한 업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논문 결론 부분에서 미국이 한반도에 대해서 갖고 있는 정책적 딜레마를 지적하고

    있다. 구한말부터 미국은 한반도를 전략적으로 중요시하지 않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입장은 태평양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노정되었다. 미국은 대일전의 마

    지막 시기에 미군의 인명 피해를 우려하여 한반도 상륙 작전을 적극적으로 군사전략적 차원

    에서 고려하지 못했고, 결국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유도하여 미군의 희생을 줄이려고 노력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은 한반도 전체가 소련이라는 단일 세력 하에 완

    전히 편입되어서는 안된다는 판단 하에서 한국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한국전쟁

    의 결과 한미관계는 양국 관계사에서 그 전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것이 되었지

    만,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 이전에 미국이 더욱 사려깊은 대한반도 정책을 추구했다고 한다

    면 그러한 희생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미국은 자신의 국력의 한계를 고려한 대한

    반도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미소 양극적 질서 하에서 소련의 도전에 직면해서는 어떠한 희생

    을 감수하고서라도 소련의 의도를 저지하려는 저돌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이용희는 지적하고

    있다.32) 이처럼 미국이 처한 딜레마를 인식하고 우리의 국가이익을 관철시킬 수 있는 대외

    정책의 전략적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위해 우리가 많은 학문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교

    훈을 그의 논문은 후학들에게 던져 주고 있다.

    냉전의 종식과 소련의 몰락으로 동북아 지역 질서와 관련된 딜레마가 완전히 해결된 것

    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국의 부상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가 21세기 지역 질서의 평화적 관리

    를 위해 커다란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장개석의 중국을 중심으로 동북아 지역을 관리하겠

    다는 루스벨트의 구상은 중국의 공산화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중국 공산혁명 이후 한

    국전쟁과 중국의 개입은 미중 관계 개선을 20년 넘게 지연시켰다. 미중 관계 개선 이후 대

    중국 포용정책이 지역 안정과 번영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무조

    건, 일방적 포용정책은 중국을 미국과 주변국가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할 수 없을 것이

    다.33) 미국은 기존 동맹관계에 바탕을 두면서 지역 균형자로서 역할을 해 나갈 때 동북아

    30) 이용희, 『일반국제정치학(상)』(서울: 박영사, 1962), p. 298.

    31) Hans J. Morgenthau, Politics Among Nations, 6th ed. (New York: Knopf, 1985), p.351.

    32) 李用熙, 「38線 劃定 新稿」, p. 54.

    33) Michael J. Green, "Asia in the Debate on American Grand Strategy," Naval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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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서는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동북아 지역에 새로운 세력균형질서가 싹트고 있는

    시점에서 38선 획정 때처럼 주변 강대국들의 일방적 결정에 우리 민족의 운명이 좌우되지

    않도록 국제정세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용희는 이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통일문제에 관해서 언급하면서 38선의 획정은 미국

    의 대한반도 통일정책의 한계점을 명백하게 보여준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 한계점은 바로

    한반도의 남부가 미국이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동맹국가로 설정한 일본을 엄호하기 위한

    일종의 외곽지역, 즉 완충지대라는 점에서 비롯된다.34) 따라서 미국의 대한반도 통일정책은

    미국의 대일본 정책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한 38선 획정 당시의 전략적 발상을 뛰어넘기

    는 어려울 것으로 그는 판단하고 있다. 소련이 몰락한 탈냉전의 시점에서 한반도에 대해 미

    국이 설정한 기존의 전략 구도가 어떻게 바뀔 것이며 그것이 한반도의 통일에 어떠한 영향

    을 미치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탈냉전 시기에 그의 논문을 다시 읽는 우리가 연구해 보

    아야 할 과제라고 판단된다.

    College Review, Vol. 62, No. 1 (Winter 2009), p. 21.34) 앞의 글, p. 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