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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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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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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노동당의현실과전망노동당의현실과전망노동당의현실과전망노동당의현실과전망노동당의현실과전망노동당의현실과전망노동당의현실과전망노동당의현실과전망노동당의현실과전망노동당의현실과전망노동당의현실과전망노동당의현실과전망노동당의현실과전망노동당의현실과전망노동당의현실과전망노동당의현실과전망노동당의현실과전망노동당의현실과전망기획 ■보수의민낯

여성정치열전 ■자체발광햇빛에너지, 손은숙기획 ■보수의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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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노동당 ■노동자정치세력화란이런것지금+여기노동당 ■노동자정치세력화란이런것지금+여기노동당 ■노동자정치세력화란이런것지금+여기노동당 ■노동자정치세력화란이런것지금+여기노동당 ■노동자정치세력화란이런것지금+여기노동당 ■노동자정치세력화란이런것지금+여기노동당 ■노동자정치세력화란이런것지금+여기노동당 ■노동자정치세력화란이런것지금+여기노동당 ■노동자정치세력화란이런것지금+여기노동당 ■노동자정치세력화란이런것지금+여기노동당 ■노동자정치세력화란이런것지금+여기노동당 ■노동자정치세력화란이런것지금+여기노동당 ■노동자정치세력화란이런것지금+여기노동당 ■노동자정치세력화란이런것지금+여기노동당 ■노동자정치세력화란이런것지금+여기노동당 ■노동자정치세력화란이런것지금+여기노동당 ■노동자정치세력화란이런것지금+여기노동당 ■노동자정치세력화란이런것

제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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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10,000 원

특집좌담특집좌담특집좌담특집좌담특집좌담특집좌담특집좌담특집좌담특집좌담특집좌담특집좌담특집좌담특집좌담특집좌담특집좌담특집좌담특집좌담특집좌담

제11호 2014.8

0723원일-제11호표지 2014.7.24 1:23 AM 페이지1

Page 2: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손은숙! 하면활짝웃는쾌활한웃음과하이톤의목소리부터연

상된다. 상큼하고발랄하다. 과거선거운동에서늘발군의율동

과춤솜씨도보여주었다. 녹색의제에관심이높아태양과바람

에너지협동조합 기획팀장,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원으로

도일하고있다. 이번지방선거에서탄탄한조직력으로당의지

방선거방침을충실히집행한서울은평당협의공동위원장이기

도하다.

“저완전후보체질인것같아요. 당선에마음을비워서그런가?

선거내내당선될거라고착각한다는그무서운‘후보병’도안

들던데요?”

늘활짝웃으며노동당을설명하고선거구구석구석적지않은

고갯길을거침없이도보로걸으며선거운동을했다고한다. 등

산으로다져진체력덕분에후보이동용차량도필요없었다고.

*자체발광햇빛에너지손은숙인터뷰전문은 54~62쪽 <여

성진보정치열전>에서볼수있습니다.

자체발광햇빛에너지, 손은숙

발행인 이용길

편집인 이장규

위원회 김건담김성현노정박권일장석준정정은정철수

조윤호최백순홍원표

교 열 노정정정은

디자인 고미숙

등록일 2013년6월 11일 (등록번호영등포, 라00407)

발행일 2014년 7월 26일

주 소 서울영등포구국회대로664 한흥빌딩 2층노동당

전 화 02) 6004-2006, 2007

팩 스 02) 6004-2001

이메일 [email protected]

홈페이지 www.laborparty.kr

인 쇄 인천시계양구계산동973-15 원일컴

미래에서온편지제11호

표지

이야기

가격 10,000원

사진 : 정정은편집부장

0723원일-제11호표지 2014.7.24 1:23 AM 페이지2

Page 3: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 미래에서 온 편지’ 는

영국의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작가, 미술가인

윌리엄 모리스가 1891년에 낸 소설 제목

『NewsfromNowhere』을 우리말로 의역한 것입니다.

nowhere는 ‘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 이라는 뜻입니다.

‘ 유토피아’ 라는 말의 원래 의미도

‘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 이라고 하지요.

이제 노동당의 기관지에 ‘ 미래에서 온 편지’ 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한국 사회의 답답한

현재에 햇살을 들이는 미래의 틈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러고 보니 nowhere는

now+here(지금 여기)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미래가 되기 위해,

이 편지를 띄웁니다.

미래에서

온 편지News

fromNowhere

Page 4: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2

1 미래에서 온 편지

4 편지를 띄우며 창간1주년, 오래 걸어가겠습니다|<미래에서 온 편지> 편집팀

5 구독자 모집

6 지금+여기 노동당 ■ 우리동네 진보정치④

거제시의회 한기수·송미량 의원노동자정치세력화란 이런 것|노 정

기획 ■ 보수의 민낯

30 감시자 아닌 ‘플레이어’로 뛴다, 조중동 이데올로그|조윤호

36 근본이의 회고록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의 본격 한국 진출기|이효성

42 월남민의 그림자 북에서 온 반공극우|김형민(산하)

49 시론 제1야당의 왼쪽 블록? 빅텐트론을 해부한다|김민하

54 여성 진보정치 열전 5|자체 발광 햇빛 에너지, 손은숙

“완전 후보 체질인 것 같아요”| 최혜영

63 정책포럼 몇 푼 된다고, 그걸 깎나?|홍원표

특집 ■ 좌담

12 노동당의 현실과 전망|노 정

Page 5: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3

·목차

68 기획서평 섬, 섬, 섬

여전히 싸우고 있는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섬과 섬을 잇다』|서분숙

75 노동르포 콜트콜텍을 읽는 열두 개의 시선⑥

나의 가장 큰 정체성은 아시안-어메리칸|이선옥

세계의 진보정당

84 먼 좌파 이웃 좌파⑪ 남아공 금속노조, 새 좌파정당 창당에 나서다|장석준

89 구라파 통신 법치국가와 법의 가치|최동민

94 왼쪽에서 본 농업이야기 당신의 밥상, GMO로부터 안전하십니까?|연승우

98 지역에서 현장에서 선거복 터진 동작당협, 7.30 재보궐 선거의 한복판에 서다|맹명숙

삶과 문화

102 우리동네 현대사 종로·남대문 밤 시장,해방공간 “야시의 추억”|전갑생

106 미디어비평‘문창극’과 장관 후보자 검증 보도, 한계 드러낸 SBS|조윤호

110 숨은 문화예술 당원찾기‘장기하와 얼굴들’을 배출한 ‘붕가붕가레코드’의 대표 고건혁

“인디레이블과 노동당의 유사관계에 대한 고찰”|나도원

116 불온한 서재‘불완전한 여성 혁명’ 완수하려는 복지국가의 도전|양솔규

120 노래의 꿈 참교육의 함성으로|민정연

124 심마니 칼럼 아플 때 찾지 말고 건강할 때 챙기시기를!|이재기

126 불온한 입맛 닭 한 마리가 품은 사연 ④ 배달민족으로 살아남기|정은정

128 편지를 접으며‘낙수효과’냐 ‘구걸효과’냐|박권일

제11호

2014년 8월

Page 6: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4

편지를띄우며

우리는 흔히 세상을 선악의 구도로 바라봅니다. 우리 편은 늘 옳고 착하지만, 상대 편은 늘

나쁘고 악한 의도를 지닌 것처럼 생각하기 일쑤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정치

적으로 극우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자기 주변의 인간관계에서는 좋은 사람일 수도 있고, 사

고는 진보적이고 평등을 외치는 사람이 실제 생활은 별로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

서 그런 모습에 실망하거나 분노하는 사례들도 흔히 봅니다. 하지만 인간은 생각보다 모순된

존재라서 어떤 사람의 모든 말과 행동이 일관성을 가지기란 쉽지 않습니다. 누구나 잘못된 부

분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으며 또 누구나 좋은 모습을 나름대로는 지니고 있습니다. 최규석 당

원의 말대로, 우리는 ‘선한 약자’를 위해 ‘악한 강자’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것이지요.

이번 호에는 우리 내부와 외부의 잘못된 모습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특집 좌담에서

는 노동당이 처한 현실과 문제점에 대해 적나라한 비판의 목소리들이 나왔습니다. 수위가 너

무 높아 편집진이 일부 수위를 조정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기획에서도 조중동 이데올로그나

반공 기독교, 일부 월남자들 등 한국의 극우파들의 뿌리를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한국의 이념

지형이 극도로 왜곡되는 데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지요. 하지만 이런 비판들이 ‘그래

서 우리 당은, 우리나라는 안 돼’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우리는 약한데,

저들은 저렇게 강해’라는 비관으로 빠지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이런저런 많은 문제점과 비판

받을 지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냉정하게 직시함으로써 오히려 그걸 극복하고 보다 나

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당도, 나라도 시시하지만 그런 시시한

사람들이 모여서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이니까요.

‘미래에서 온 편지’가 창간 1주년을 맞았습니다. ‘미래에서 온 편지’역시 그동안 부족하거

나 잘못된 부분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실망하거나 비관하지는 않을 것입니

다. 역시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다 나아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에 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보다 나은 ‘미래에서

온 편지’를 위해, 오래오래 걸어가겠습니다.

2014년 7월 26일 <미래에서 온 편지> 편집팀드림

창간 1주년, 오래 걸어가겠습니다

Page 7: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5

우리는 길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

사람과 자연이 공존 가능한 지구생태계,

차별과 소외 넘어 모두가 평등한 세상, …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밑그림을 그려나가면서

없는 길을 만들고, 스스로 길이 됩니다.

그래서 노동당의 꿈은 곧 <미래에서 온 편지>입니다.

구 독 자 모 집

구독료 : 매월 1만원, 1년 10만원(일시불), 10년 50만원(일시불)

입금 결제일 : 5일, 25일 중 선택가능

직접납부 : 신한은행 100-028-812208(예금주 : 노동당)

구독문의 : 중앙당 홍보실 정정은 / 02)6004-2007 / [email protected]

정기구독자가 되어주세요창간호부터 정기구독자에게 한정발송됩니다

오늘 우리의 한 걸음이 길을 엽니다. 미래가 됩니다.

Page 8: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6

노동자정치세력화란 이런 것

우리동네 진보정치④

거제시의회 한기수·송미량 의원 편인터뷰 노정 편집실장 / 사진 윤현식 정책위 의장

지금+여기노동당

노동가요 <해방을 향한 진군>에는 “소나기 퍼붓는 옥포의 조선소”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곳이 바로 거

제 대우조선이다. 거제 대우조선은 한국 노동운동 역사의 성지로 기억된다. 이른바 ‘골리앗 농성’의 원조

이기도 하다. 1991년 단체협상을 놓고 지상 120미터 높이의 골리앗 크레인 상공에서 파업투쟁을 한 사람

들이 대우조선 노동자들이다. 20년 뒤인 2011년에는 비정규직 노동자 강병재 씨가 15만4천 볼트 전류가

흐르는 송전탑에 올랐다.

이곳 거제 옥포에서 두 사람의 노동당 의원이 탄생했다. 3선에 성공한 한기수 의원, 그리고 23년 만에

최초로 여성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된 송미량 의원이다. 거제에서 노동당의 눈부신 활약은 노동자들이 정

Page 9: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지금+여기 노동당 7

치적으로 각성하고 노동조합이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참여할 때 지역에서 진보정치가 어떻게 꽃필 수 있

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두 명 ‘씩이나’? 제2당에서 3당으로 전락했어요”

대우조선에서 가장 강성으로 분류되는 노동현장조직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이하‘노민추’)는 조합원들

의 폭넓은 지지를 바탕으로 역대 최다 노조위원장을 배출했다. 뿐만 아니라 민주노동당에 이어 진보신당,

노동당 우위의 지역정치 구도를 형성하는 데 중점적인 역할을 했다. 그래서 거제 지역에서의 노동당의 입

지를 설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가 노민추다.

“대우조선에 노조가 생긴 게 87년이고, 88년에 노민추가 출범했어요. 좀더 체계적으로 활동을 하자고

해서. 그때 7, 8백 명 됐으니 조합원 9천 명 중에 10%에 육박했지요. 민중당, 국민승리21, 민주노동당 창

당까지 노동자진보정치의 모든 중심에 노민추가 중심이었어요, 거제에서는. 민주노동당-진보신당 분당

될 때도 노민추 세력은 진보신당으로 탈당해서 나왔고요. 거제에서의 진보정당 운동사에서는 노민추가

거의 전부 다라고 봐야 해요.”

한기수 의원은 대우조선 노조 활동 당시 조직차장으로 선봉대장을 맡아 최전선에서 싸웠다. 이후 거제

시의회에 들어가 지역진보정치에 몸담기 시작했다. 지방선거 때마다 매번 당명이 바뀌었다. 2006년에는

사진설명 : ①② 선거운동이 한창인 송미량 선본③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 서명을 받는 한기수 의원

② ③

Page 10: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8

민주노동당, 2010년에는 진보신당, 2014년에는 노동당 당명을 달고 출마했고 모두 당선되었다. 현재 거

제시의 의원단은 열 여섯 명 시의원 중에 새누리당이 아홉 명, 새정치민주연합이 세 명, 노동당이 두 명,

그리고 새누리당 성향의 무소속 두 명이다.

“두 명 ‘씩이나’당선됐냐고요? 원래 노동당은 거제에서 제2당이었어요. 민주노동당 때는 열 세 명 시

의원 중에 네 명이 들어왔었나? 그때는 부의장 한 석에 상임위원장 한 석을 차지할 수 있었죠. 다른 당이

없었으니까. 민주당도 선거에 출마를 못할 정도였어요. 그때는 상당한 위치를 갖고 있었고 시민들도 몇

번 선거하면 진보정당이 여당이 될 수 있겠다, 시장이나 국회의원까지도 넘볼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갖고

있었죠. 2010년에도 진보신당 의원이 세 석이었고 그때도 시의회 내에서는 제2당이었어요. 그런데 안철

수 신당이 출범하고 민주당과 통합하면서 유권자들이 새정연에 마음이 쏠린 것 같아요. 이번 선거에서는

새정연이 제2당이 되고 우리는 3당으로 전락했어요. 3선의원인데도 부의장 선거에서 미끄러지고. 처음

제3당 되고 보니 참… 제3당의 위상을 새삼 경험하게 되네요.”

상수도 전문의원 한기수

한기수 의원은 개인 블로그를 유

효적절하게 잘 활용한다. 공약 이행

점검표를 만들어 올리고 계속해서 자

료를 업데이트한다. 5분발언부터 시

정질문까지 차곡차곡 쌓여있다. 가장

자부심있는 분야는 상수도 사업. 한

기수 의원 이름에 ‘수’자가 물 수(水)

자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빠삭’하다.

“거제시에는 하루 2만 톤 정도 물

을 대주는 구천댐이 거의 유일한 취

수원이예요. 거제시가 사용하는 물의 양이 하루 8만 톤이구요. 나머지는 남강댐에서 가져와요. 그래서 몇

몇 지역은 열두 시간 제한급수를 했어요. 공무원들은 애써 나서서 개선하려는 의지가 없었고요. 그걸 제

가 거제시 전체의 급수 라인을 파악해서 2009년 초부터 제한급수를 완전히 해제했어요. 인구로 치면 이

만 명 정도 돼요. 지금도 상수도 사업이라고 하면 담당 공무원들보다 한기수 머릿속에 더 많이 들어있다

고 인정해줘요.”

거제시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퇴직금과 연월차 수당 등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은 것을 적발하고 처

우를 개선시킨 것도 한기수 의원이다. 지역내 각종 노동현안 보도마다 언급이 되고, 한기수를 포함해 다

Page 11: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지금+여기 노동당 9

섯 명의 시의원이 ‘거제시 비정규직 근로자 지원센터 설립 및 운영에 관한 조례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하

지만 정작 본인에게 진보정당의원으로서의 성과를 물으니 ‘의원이니까 당연히 하는 거지’하는 멋쩍은 대

답만 돌아온다.

“선거 끝나고 심리적으로 많이 침체돼있어요. 아무리 계산해봐도 10년 후에 우리의 미래가 없는 거야.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고 예전의 위세를 갖고 털어먹고 있는데, 새정연이 안 깨지고 10년만 버틴다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고 봐요, 저들이 진보정당 죽이기에 들어가버리면.”

한편으로는 노동운동 1세대들이 점점 나이를 먹어가고 있고 다음 세대가 나아갈 길을 틔워줘야 하는데

‘우리만 해먹고 마는’ 상황이 되는 것 같아서 많이 착잡하다고 토로한다. 현재 거제에서의 노동운동이 정

규직 중심의 임금투쟁에 매몰돼있는 건 아니냐는 지적에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미래를 봐야 하는데, 우리 노동당이 바로 서서 갈려면 정규직 노동자들보다 더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

들을 어떻게 끌어안을지 고민해야 해요. 정규직 노동운동의 끝물도 다 돼가요. 우리와 함께 할 파트너를

비정규직으로 바꿔야 해요. 어떤 식으로든 비정규직을 끌어안아서 그 사람들이 배신을 하더라도 그 사람

들을 끌어안고 죽을 각오로요.”

노동당 외쳐 당선됐다, 송미량

또 한 사람이 있다. 거제에서 23년

만에 처음 당선된 여성 지역구 시의

원이다. 이번에 여성 의원이 세 명 당

선됐는데 나머지 두 사람은 비례대표

시의원을 역임한 사람들이다. 출발선

에서 뒤처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

선됐다는 점에서 송미량 의원은 자부

심이 크다. 더욱이 아무런 혈연도 지

연도 학연도 없고 대우조선 노동자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선이 됐다.

“두 명을 뽑는데 다섯 명이 출마했

어요. 그중에 세 명이 대우조선 노동자였구요.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새로운 사람을 뽑아보자는 시민들의

열망에 부응한 것 같아요. 지역에서 꾸준히 시민단체 활동을 했다는 경력을 부각시키고 특히 노동당을 부

각시켜서 차별화한 게 유효하게 작용한 것 같아요. 노동당 경남도당 부위원장직을 내세워 진보정당 지지

자들의 표심을 모았죠. 노동당 열심히 외치면 당선된다고 우스갯소리로 그랬어요.”

그리하여 나온 구호가 “도의원은 백순환, 시의원은 송미량, 노동자는 노동당”이다. 그러나 유권자도,

Page 12: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10

상대 후보들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3, 4월엔 명함도 잘 받지 않는다. 상가에 들러 인사를 해도 “쟤 뭐

니?” 하는 분위기다. 선거 분위기가 무르익고, 인지도가 오른다 싶으니 딴지거는 이유도 가지각색이더란

다. 종북, 빨갱이, 데모만 하는 부류들, 나이가 어린데다 여자잖아, 복지하다가 나라 망한다 등등. 새누리

당에서는 힘 있는 여당론을 내세우고, 새정치민주연합에서는 국회의원 한 명 없는 정당에 시의원을 맡길

수 있겠느냐 했다. 그래도 후보보다 더 열심히 뛰었던 지역 동지들 덕분에 이제 7월 1일자로 송후보가 아

니라 송의원이 됐다.

“정치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여전해요. 저는 4년동안 흐지부지 앉아있다 마는 게 아니라 ‘일하는 시

의원’이 되고자 하는 생각이 있어요. 벌써부터 여러 가지 주민 민원이 많이 들어와요. 놓치지 않고 해결하

고, 성실하게 열심히 일한다는 인상을 주고 싶어요. 그런데 어떤 건 그냥 (민원인이 스스로) 알아서 하셔도

될 것 같은데 바로바로 저한테 전화를 주시곤 해요. 보훈연금 왜 우리 시는 안 주냐고 화를 내시는 분도 있

었고요. 조례 찾아보고 왜 보류되었는지 자료를 찾아보고 알려드리겠다 하고 끊었죠. 생각지 못한 다양한

민원들이 많이 들어오는데 개입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잘 구분하기도 해야 할 것 같아요.”

당의 좋은 정책들 지역에서 실현하겠다

한국의 기형적인 정치 지형 위에서 진보정당 기초의원들은 앞으로도 제법 긴 세월동안 압도적인 수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지난한 싸움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지역의 진보정치인으로서의 삶을 뒷받침해주

는 신념과 전망을 물었더니 송미량 의원은 이렇게 답한다.

“항상 마음 속에는 처음 노동당 들어올 때의 마음, 해고노동자들의 눈물을 보면서 가졌던 마음가짐과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시민단체 활동하면서도 계속 노동당 당원이라는 정체성 의식하려고

노력했고요. 노동당이 한국사회에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실현이 안 돼서 그렇지. 당의 좋

은 정책들을 지역에서 실현하는 역량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기초의원직을 줄곧 맡아온 한기수 의원은 노동당에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민주노동당 시절에는 중앙당에서 다른 지역 의원들이 만들어낸 보고서나 조례들을 내려보내줘서 유

용하게 참조하곤 했어요. 그런데 진보신당-노동당 시절에는 그런 게 거의 없어요. 당이 지원해야 할 것들

이 잘 지원돼야 해요.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다 보면 한계가 있어요. 상갓집도 가야 되고 행사도 가

야 되는데 앉아서 조례만 잘 만든다고 될 일이 아니예요. 지방의원 입장에서는 성과를 내야 다음 선거를

내다볼 수 있지 않겠어요?”

Page 13: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지방선거의 결과로 외화된 노동당의 현실에 대해 평가·토론하고 이후의 전망 및 당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고자 한다. 당내 언론으로서 당내의 다양한 의견

들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것이 그 취지다.

특집 / 좌담

노동당의 현실과 전망

Page 14: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12

사회 : 선거 치르느라 고생 많았다. 지방선거의 결

과로 외화된 노동당의 현실에 대해 평가, 토론하고 (단,

꼭 선거결과만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간의 노동당의

전반적인 당내외 상황과 연관지워 전체적으로 평가하고)이

후의 전망 및 당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고자 한다. 초청된 패널들은 당내의 다양한 의

견을 고려한 것이지만, 해당 패널들이 꼭 자신과 연관

된 그룹의 공식적인 입장을 대변할 필요는 없다. 좌담

역시 당의 공식적인 입장을 정하기 위한 것이라기보

다, 당내 언론으로서 당내의 다양한 의견들을 가감없

이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꼭이 합의가 되지 않

더라도 이러한 의견들이 존재함을 당내에 알리자는 취지다. 포괄적으로 질문을 하고 각자

자기 생각을 밝힌 뒤 서로 반론 내지 질문을 하고 재반론하는 형식으로 진행하겠다.

■ 사회 :이장규 기관지위원장

■ 패널 :강상구구로민중의집 대표

김상철서울시당 사무처장

나경채관악구의원 출마자

나도원문화예술위원장

채훈병서울 은평당협 위원장

■ 정리 :노 정 편집실장

■ 사진 :정정은 편집부장

노동당의 현실과 전망특집좌담

Page 15: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특집 좌담_노동당의 현실과 전망 13

1. 지방선거의 결과에 대한 평가 및 이런 결과를 가져 온 원인

김상철 : 평가의 대상이 되는 사건의 시점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잡느냐에 따라 평가는 다를 수 있다.

이번 지방선거의 평가는 두 가지 시계열이 있다고 본다. 당에서 방침을 확정하고 6.4 지방선거 결과가 나

온 때까지의 시점으로 보자면 당 내부의 전략 수립 과정과 집행하는 방식, 그리고 왜 원치 않는 결과가 나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겠지

만, 시계열을 좀 더 넓혀 당명을 바꾸고 임

시적인 가설정당 체계에서 정상적인 정당

체계로 가기 시작한 이후의 평가는 또 다를

수 있다.

선거전략을 수립하는 데 역할을 했고 실

제 사무처장으로서 전략을 수행하는 당사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평가의 대상이기도 하다. 매우 제한적이

나마 말씀드리면, 이런 선거 다시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 전략을 짤 때의 대안없음, 절박함에

대해서는 따로 말씀하실 분 없을 거다. 그런데 이는 우리 스스로 노동당의 역할이나 기능에 대해 제한적

으로 본 게 아닌가 싶다. 당면한 선거가 우리의 시험대가 되어야 하고 어떤 성과든 내야 한다는 조급증이

과도했다. 당의 기본적인 역량을 소진해가면서 후보를 출마시켰는데 그 전술을 유효하게 작동시키지도

못했다. 개인적으로는 서울시당에서 스물 세 명의 광역 기초의원이 출마했는데 솔직히 제대로 지원 못했

다. 각각 선거하는 과정에 대한 지원이나 모니터링 전혀 하지 못했고 실무에 빠져버려 굉장히 무능했고

결과가 나빴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좀 더 범위를 넓혀서 보면 노동당이 갖고 있는 조급증, 성급함은 분명 있다. 2011년 분당 탈당 이

후 당명 바꾸고 조직재편 부분에 있어서 노동당 플랜, 혹은 노동당 전략 자체가 사상누각 아니었나? 당명

바뀐 것 빼고는 도대체 뭐가 바뀐 걸까? 과거의 진보신당의 습성이나 가설정당으로서의 허술함에서 지금

뭐가 바뀐 건지 반성이 된다. 그런 면에서 선거 결과라는 건 사후적으로 확정하는 것뿐이다. 이미 결과는

내재돼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강상구 : 이번 선거는 대실패다. 애초에 불가능한 목표를 세웠다. ‘2% 득표를 위한 다수출마’는 전형적

인 낙하산 공천을 통한 요행수 전략이었다. 지역활동을 사전에 전혀 하지 않았음을 방증하는 전략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활동을 열심히 한 당협이나 활동가들을 절망케 만드는 전략이었다.

반면에 ‘당선가능한 후보 당선’ 전략은 제가 보기에는 악세사리였다. 이번 전략을 결정하셨던 전국위

원들이 실제로 기초·광역의원들 중 대체 몇 명이나 당선시킬 생각이었는지 의심스럽다. 또, 당 집행부가

당선 가능한 후보를 실제로 당선시키기 위해서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 당선전략과 관련한 당의 공식

적인 계획이나 지원은 정말 찾아보기 힘들었다.

“시계열을 좀 더 넓혀 당명을 바꾸고 임시적인

가설정당 체계에서 정상적인 정당체계로 가

기 시작한 이후의 평가는 또 다를 수 있다.”

Page 16: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14

특히 재정적 지원과 관련해서 할 말이 많

다. 당협별로 정치후원금을 조직해서 일부는

중앙당과 시당에 내고 나머지를 나눠 갖는 방

식이었는데 당선을 바라보고 뛰는 후보 입장

에서는 결과적으로 당으로부터 어떤 재정적

지원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돈을 낸 셈이다.

반면 2% 득표 전략에 입각해 출마하는 광역의

원들에게는 당의 재정지원이 집중됐다. 평소

에도 지역을 살리기 위해서 있는 것 없는 것 다

뽑아서 희생해가며 활동한 지역의 활동가들에

게는 ‘선거도 니들이 알아서 치러라’고 한 것

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당선을 바라보는

후보의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건 당사자가 그

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데 이 동지들을 선거 기간

동안에도 홀로 분투하게 만들었다.

좀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면, 선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집행 과정 또한 목표의 취지를

정확히 살리지 못한 채 이뤄졌다. 구도 말고는

득표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다. 그

러면 그걸 보고 전적으로 출마선거구를 정했

어야 한다. 그런데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구

도를 봐서 출마하면 득표를 많이 얻을 것 같은 지역에 출마시켰어야 했는데 실제로는 연고가 있는 지역에

출마했다. 원래의 다수출마라는 취지와 전혀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당이 그것을 컨트롤하지도 못했다.

확실히 구도를 보고 내려꽂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지역활동 한 사람들 중심으로 하지도 못하고.

게다가 2% 득표가 목표였으면서 나중에는 후보자를 70명 내는 게 목표인 것처럼 됐다. 2% 득표를 위

해서는 몇 백 명을 내보낼 수도 있고 열 명을 내보낼 수도 있다. 정세와 상황, 구도가 어느 정도 받쳐주느

냐에 따라서. 그런데 이를 민감하게 분석하면서 득표자 수를 조율하거나 하는 건 생각도 못했고 그냥 원

래 목표한 출마자 숫자 맞추기에 급급했다. 말하자면 애초에 정세와 구도를 바라보고 짠 전략이 전혀 구

도를 안 보고 고정된 채로 집행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더욱 안타까운 건 그런 방식으로 광역의원에 출마했던 사람들이 ‘앞으로는 지역에서 미리

미리 열심히 해야겠다’ 이런 식으로 평가하는 거다. 하나마나한 평가다. 2% 달성하기엔 후보 수가 부족했

“지역을 살리기 위해서 있는 것 없는 것

다 뽑아서 희생해가며 활동한 지역의 활

동가들에게는 ‘선거도 니들이 알아서 치

러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Page 17: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특집 좌담_노동당의 현실과 전망 15

다 같은 평가가 오히려 솔직하다. 당이 계속 동요하고 있다는 증거다. 김상철 동지는 ‘조급증’이라고 하셨

는데 저는 ‘무능함’을 드러낸 것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채훈병 : 실패라고 규정하는 데 이의 없다. 넓은 의미로 보면 저도 평가 대상이다. 당의 방침에 적극적

으로 호응해서 스스로 내리꽂기 방식으로 전혀 생각지도 않은 후보로서 출마한 선거였고 게다가 은평은

광역선거구 네 군데를 다 출마시켰다. 전국적으로 출마결의한 것으로는 최초였을 것이다.

이번 지방선거는 특히 재창당을 지나서 내부적으로 요구되는 진보진영의 재편, 내부 혁신 그 과정에

놓여있는 중요한 선거였다. 무모한 방침에 대해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당원들을 추동하게 된 까닭은, 조직

활동에서 재정은 큰 문제라는 인식에서다. 은평당협은 활동당원들이 수년간 노력해서 당협 후원당비를

조직했다. 은평당협이 타 지역에 비해 상당히 안정된 재정을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후원당비 없이는 정상

적인 당협사업을 하기 어렵고 그래서

당의 재정문제에 대한 절심함을 공감

했다.

구도를 보고 철저하게 내려꽂아야

되는데 그러지도 못했고 70명 간신히

채웠고 전체 선거를 컨트롤 해야 하는

중앙당 당직자들이 선거에 후보로 뛰

어드는 처참한 상황에 이르게 됐다. 이를 제대로 짚을 만한 과정이 분명히 있었다. 전국위원회에서 수차

례 과정이 있었지만 제대로 된 토론 없이 결정됐다. 그래서 이번 선거 평가는 평가할 내용이 없는 선거계

획이라 고전적인 방식의 평가는 어려울 것 같고 이전의 방식과는 다르게 평가해야 할 것 같다. 당에 대한

평가일 수밖에 없고 과제에 대한 평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나경채 : 2002년 지방선거 때 민주노동당이 8% 얻었고 2004년 총선 때 13%, 국회의원 여덟 명 당선시

켰다. 2012년도 총선 때 진보진영 전체가 얻은 게 11%였고 이번 지방선거 때 9%다. 노동당만이 아니라 전

체 진보진영을 보더라도 궤멸, 몰락이라고 볼 수 있다. 2002년, 2004년의 득표가 단일정당의 것이었다면

지금의 9%는 세 개 또는 네 개 정당이 나눠가졌기 때문에 결국 누구도 진보정치의 미래를 이야기하지 못

하는 상황이다.

물론 진보진영의 분열만이 이런 상황을 만든 건 아니다. 통합진보당이 갈라지는 과정에서 보여준 추태

도 그렇고, 전체 진보진영이 단 한 번도 유의미하게 민생진보정당으로서 평가받은 적이 없다. 이런 것들이

종합된 결과로서 각각의 진보정당이 모두 몰락했다. 노동당으로 범위 줄여서 보면 저도 현실성 없는 선거

였다고 생각한다. 최초 계획 당시에는 안철수신당이 고려되고 있었거나 통합할 수도 있다 이런 게 하나의

변수였는데 최초의 계획이 제출된 이후에 정치적 여러 변수가 있었음에도 우리 계획은 수정되지 않았다.

“구도를 보고 철저하게 내려 꽂아야 되는데 그러

지도 못했고 70명 간신히 채웠고 선거를 컨트롤

해야 하는 중앙당 당직자들이 선거에 후보로 뛰

어드는 처참한 상황에 이르게 됐다.”

Page 18: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16

활동가들 당직자들이 반성해야 할 부분은

두 가지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현실성 없는

목표라고 생각했음에도 왜 반대하고 제대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는지, 저는 그게 매우 중

요하다고 생각한다. 전국위원으로서 의원단

대표로서 할당 전국위원으로서 그런 우려를

전달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호소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 스스로 두려워하기만

했지 용기있게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던 것 반

성한다. 왜 이러한 달성불가능한, 잘못된 목표

에 ‘부역’했는가 자기반성해야 한다.

또 하나 말씀드리자면 출마 자체가 목표가

되어버린 측면도 있다. 출마자 수 70명이라는

목표는 달성했는데 2% 득표까지 당이 책임을

졌어야 하는데 내용적 재정적 정신적 지원이

없었다. 특히 중앙당 당직자들의 대거 출마는

패착 중에서도 가장 큰 패착이다.

세 개 또는 네 개의 진보정당들 간에 경쟁

구조에서 우리 당이 살아남을 방안을 찾자, 살

아남아야 한다는 전제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

하고 이 구조에서 어떻게 살아남자고 하는 자

기 복안이라고 하는 것을 아무도 말하지 못하

고 있다. 적어도 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복안이 공유되어야 의지가 실천으로 발현되는 것인데 살아남

아야 한다는 당위만 있는 그 속에서 선거를 치뤘다.

하나의 유기체로 본다면 노동당은 지독한 자기애에 빠져있다. 우리 스스로만 정당하고 우리만 진보정

당이고. 그런 자부심을 갖는 게 나쁜 것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구체적인 계획과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은 채 증오나 타자에 대한 부정으로만 간다면 자기애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가장

큰 독소로 작용한다고 본다. 이후 우리가 선거평가를 통해 장기적으로 고민하고 무엇으로부터 출발할 것

인가 할 때 자기반성이 필요한 부분이 아닌가 한다.

나도원 : 명백한 패배다. 나경채 동지가 지적한대로 전체 진보진영 지지자가 9% 남아있다고 해도 패배

다. 다만 진보정당들이 다같이 패배했다는 것과 노동당이 패배했다는 것, 이 두 가지는 분리해서 봐야 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현실성 없는 목표라

고 생각했음에도 왜 반대하고 제대로 대

안을 제시하지 못했는지, 저는 그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Page 19: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특집 좌담_노동당의 현실과 전망 17

다. 구도, 정세, 당의 현실 세 가지의 측면에서 볼 때 진보정당들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는 정세였고 구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의 현실은 생존을 목표로 2% 득표를 통해 국고보조금을 얻기 위한 전략을 채택해

야 할 정도로 매우 척박한 상황이었다. 사실상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쟁터에 나간 셈이다.

이 광역집중출마 방침이 전국위 자리에서 채택되던 날 질의응답 없었고 토론 없었고 표결 없었고 만장

일치로 통과됐다. 무기력하게 통과

되고 승인된 방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전략의 문제가 아니라

당 전체의 무기력 상태가 문제였

다. 어떤 전략이 나오더라도 이 무

기력을 극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광역의원 집중출마가 아

닌 어떤 방침 세웠어야 됐냐, 광역단체장 대거 출마 방침이냐, 그건 다들 반대하셨잖나. 그렇다면 당선 가

능한 기초의원에 집중하자? 사실상 이것은 당시 당의 현실로서는 당이 선택할 수 없는, 지방선거를 포기

하는 방침이었다. 대안을 갖고 대안전략을 얘기해야 할 것 아닌가.

또한 중앙의 기획이 부재했다. 공동선거대책위원회를 꾸려놓고도 회의 한 번 열지 못했다. 특히 지방

선거를 앞두고 한국사회를 덮친 세월호 참사에 강력히 대응해야 했지만 눈에 띄는 대응을 찾긴 힘들었다.

중앙기획의 부재, 당 전반적인 무기력 이것이 지방선거 실패의 원인이었다고 본다. 덧붙이자면 수도권과

지방은 달리 볼 필요가 있다. 전반적인 득표율 추이를 보면 수도권에서는 1% 이하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

고 지난 총선 결과와 비슷하게 나온 까닭은 지방에서 의외로 선전해 의외의 득표율이 나왔다. 이에 대해

분석할 필요가 있다. 각 당부가 어떻게 임했는가도 이번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사회 : 각론에서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것 같다. 각자 순번을 정하지는 않고 상호 질문에 들어가겠다.

김상철 : 선거전략을 입안하고 집행한 당사자 입장에서의 곤란함을 말씀드리겠다. 전략을 수립하는 과

정에서 나경채 동지가 말하는 ‘두려움’이 분명히 있었다. 입안하는 과정에서의 두려움이었다. 단적으로

표현하면 ‘선거도 못하는 정당’이라고 불리는 데 대한 두려움이다. 2008년 분당, 2011년 탈당 이후 실제

로 당의 여진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어찌됐던 선거에 과도하게 집착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는 있었고 뭐든

내놓아야 한다는 게 있었다.

저는 그래서 그런 면에서 보면 식견을 좀더 넓힐 것을 제안한다. 선거의 결과로만 평가할 수 없는 부분

이 분명히 있는 거다. 구조적으로 보면 선거도 못하는 정당이라는 것을 탈피하기 위해서 선거전략을 세우

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구도에 면밀하게 과학적인 선거전략을 세웠어야 했는데 실지로 광역후보 선출한

걸 보면 선출방식은 또 당협 선출방식이었다. 광역에서 전략선거 방침으로 하게 되면 후보 공천도 중앙당

“무기력하게 통과되고 승인된 방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전략의 문제가 아니라 당 전체의 무기

력 상태가 문제였다. 중앙기획의 부재, 당 전반적인

무기력 이것이 원인이었다고 본다.”

Page 20: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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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든 광역시도당이 전권을 갖고 구도를 두고 마음대로 후보선출을 집행할 수 있어야 하는데 서울만 봐도

광역선출이었다. 그런 구조에서 봤을 때에는 구도선거라는 것도 잘 집행이 못되는 구조가 있었던 거다.

그렇다면 선거 집행과정이 잘못됐다기보다는 2011년 이후 당명 개정 이후 이 정당이 정상정당으로서의

집행구조 갖고 있었느냐, 봐야 한다. 당직자로서 그 부분에 가장 주목한다. 단순히 선거전략, 그리고 6. 4

선거결과에 대한 수미일관적인 판단에는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강상구 동지에게 질문을 드린다. 진보정당에서 지역정치나 지역활동에 대한 지원이 중요하긴 하다. 그

래서 서울시당에서는 지역거점 네트워크나 당 역량강화기금 등 지역역량강화 사업들을 한 바 있다. 선거

결과를 갖고 취약한 노동당의 지역정치를 바로 치환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평가일까. 일상적 차원에서 우

리가 왜 지역정치를 강화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닐까?

강상구 : 당 역량강화기금 지원에 대해 저는 굉장히 잘한 거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게 지역당협에 대

한 지원, 광역까지를 포함한 당의 체계를 수립하는 게 아니고 니들이 먹고 살 걸 마련해서 우리가 지원 중

단하더라도 살아봐라 이런 일시적인 지원이었다는 거다. 지역조직을 제대로 키우기 위한 제대로 된 장기

전략을 중앙에서 내놓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광역시도당 교부금 줄여서 상근자들을 결과적으로 축소시

킨 적은 있었어도 그 반대경향은 없었다. 지역정치활동의 부재나 이런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당이 기초

조직을 당의 핵심역량으로 인식하고

그걸 키울 전략이 없었기 때문 아닌가.

지역의제에 대해 중앙이 관심이 있

나 하는 의구심이 끊임없이 있었다. 그

렇게 관심 없었으면서 그러면서 왜 지

방선거를 잘 하려고 하시죠? 이렇게

질문하고 싶다. 낙하산 공천해서 본선

거 십삼 일만 뛰는 거면 모르겠지만 예비선거운동까지 합치면 삼개월 풀로 하루 열 시간씩 뛴다. 그런 사

람들에게 손에 쥘 무기가 하나도 없었다. 이런 게 종합적으로 작용해서 선거결과가 이렇게 나온 거다.

김상철 : 나경채 동지가 쓴 표현 중에 ‘부역’이라 하는 건 나찌 대원이 홀로코스트에 가는 것 즉 잘못되

었음을 앎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결정이니 따르는 경우에 쓰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제 입장에서는 다시

는 안할 선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도덕적으로 진보운동의 활동가로서 (‘부역’이라 할)그만큼의 선거는 아니

었다. 현실성 없었던 선거전략, 혹은 불합리한 목표의 부역이라는 것이 지나치게 사후적 평가 아닌가?

나경채 : 어쨌든 당이 결정했기 때문에 스스로 후보 출마하겠다고 하고 말도 안 되는 무리수를 두는 것

에 우리 스스로 자괴감이 있었다. 모두 활동가들 사이에서 나온 얘기다. 여기 살면서 저기 꽂고. 왜 이런

“지역의제에 대해 중앙이 관심이 있나 의구심이

끊임없이 있었다. 그렇게 관심 없었으면서 그러

면서 왜 지방선거를 잘 할려고 하시죠? 이렇게

질문하고 싶다.”

Page 21: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특집 좌담_노동당의 현실과 전망 19

무리수를 막 두지. 이런 걸 부역이라고 하는 거다. 3기 6차 전국위 때 최종 결정을 했는데 저는 개인적으

로 반대 발언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갔는데 솔직히 현장에서 좌절했다. 저 사람들 앞에서 이런 얘

기를 하는 게 굉장히 무의미하거나 나만 바보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치만 여기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거다. 자괴감에 빠진 이유는 이게 예상된 패배였다는 것이다. 대체로 우리는 목표 달성 곤란할

거다 하는 것을 예상했다는 거다.

나도원 : 나경채 동지에게 묻겠다. 이번 선거와 같은 구도에서 진보3당이 통합을 하든 연합을 하든 했

으면 넘을 수 있었겠나? 야권연대가 진보정당에게 독이 된 부분도 있다. 몇몇 지역의 경우에 과거 야권연

대의 영향으로 점차 새민련의 영지가 되어버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진보정당들의 통합 연합과 야권연대

가 진보정당 발전경로에 긍정적일 수 있겠는가? 또 하나, 선거기간 중에 노동당이 진보혁신회의 테이블을

통해서 정의당과 노정연 후보와 야권공조 발표를 했다. 후보단일화를 위해 노력하고 진보단일후보 명칭

을 쓴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떤 영향력과 구속력이 있었으며, 어떤 절차를 통해서 당이 당 외의

조직과 공조를 발표할 수 있었나?

나경채 : 노동정치연대의 제안과 진보혁

신회의 테이블 문제는 제가 답변할 일이 아

니다. 진보정당이 연합을 해서 선거를 치렀

으면 더 안 좋지는 않았을 거라 본다. 이런

가정은 무의미한데 그렇다 하더라도 더 안

좋지는 않았을 거라 본다. 훨씬 더 좋은 결과

가 있었을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다. 단순하게 단일화를 했느냐 안했느냐, 서로 손을 잡는 제스쳐를

했느냐 안했느냐가 아니라 몇 년째 걸쳐온 지속적인 무능과 혁신의 대상으로 취급되는 것의 문제다. 지금

은 그 단계를 이미 넘어섰다. 선거에서 어설프게 연대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박수쳐주지 않는다. 더 엄혹

한 수준의 재편과 혁신의 노력 있어야 한다.

2. 그간 노동당의 전반적인 당내 현실에 대한 검토 및 평가

사회 : 당명개정 이후를 원칙으로 하되 재창당 추진까지 감안하면 이용길 대표단 체제 이후부터 현재

당내 상황을 검토해보자. 전반적으로 여기도 좋은 얘기는 나올 것 같지 않지만 기탄없이 말씀해주셨으면

한다.

나도원 : 공약을 대부분 이행한 몇 안 되는 대표단이었고 당직자들도 헌신적으로 일했다. 아쉬운 점은

“진보정당이 연합을 해서 선거를 치렀으면

더 안 좋지는 않았을 거라 본다. 훨씬 더 좋

은 결과가 있었을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다. 지금은 그 단계를 이미 넘어섰다.”

Page 22: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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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평가에서 말씀드렸듯 장기적인 중앙계획, 기획이 없었다는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죄송스러운 말이

지만 장기간 당직자 생활을 하거나 여러 가지 정치적 환경 속에서 암중모색도 해야 하고 계파간 대립도 신

경 많이 써야 되고 이런 환경 때문에 관료화된 부분이 없잖아 있다. 발 빠른 기획이 불가능한 구조다. 그리

고 투쟁하는 정당으로서의 이미지는 많이 약해진 것 같다. 고리 하나가 빠지면 당이 외부와 단절될 정도

로 약한 고리 몇 개만 있을 뿐이다.

나경채 : 진보정당으로서 노동당의 자기정체성을 요구받고 있는 시점이다. 이용길 대표단은 진보혁신

회의 등 테이블에 함께하면서 동시에 당의 독자적 생존력을 높이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결단이 필요

하다. 전체 진보정당의 지형 판세 이런 것들을 감안해서 진보재편의 문제 진보진영 혁신의 문제를 아주

중요한 지침으로 내걸고 나설 것인지 결단이 필요하고 정치적 선택이 필요하다. 흔쾌하게 우리가 중심에

나서는 능동성을 보이지 못하면서 뚜렷한 장기적인 자기성장 전망을 갖고 활동가들이나 당원들을 구심력

있게 묶어세우지도 못하는 과정에서 어정쩡하게 자기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 같다.

결단의 시기가 왔다. 진보진영이라고 뭉뚱그려져 있으니까 덜 아픈 것 같지만 하나하나 따져보면 그렇

지 않다. 버림받을 것으로 예상됐던 통합진보당은 진보정당이 하나였을 때도 해내지 못했던 규모로 대거

출마시켰고 일정한 소기의 성과를 얻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정의당의 경우도 6.4 지방선거 직후부터 지

금까지 신입당원이 대거 늘었다. 독자생존 가능성을 늘리고 있다. 녹색당은 과천에서 두 명의 무소속 친

녹색당 의원 당선시켰다.

우리가 가장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도 결단할 때가 되었다. 우리당의 스탠스

가 다른 진보정당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고 우리 스스로의 발목을 잡고 있기도 하다. 정말 독자생존

의 길을 가보자 할 거면 당내의 분란구조 철저히 손대서 뜯어고쳐야 한다. 정치전망의 차이가 하나도 느

껴지지도 않는 논쟁에서도 표가 갈리고 전망을 공유하지 않는 이런 상태에서는 당의 진로와 관련한 결단

이 필요하다. 물론 결정은 토론하고 함께 고민해야겠지만 리더의 결단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그런 측면

에서 이용길 체제는 아쉬움이 있다.

채훈병 : 몰락, 위기라는 말은 세뇌

된 단어다. 위기는 당연히 기회를 동반

하기 때문에 저는 위기라고 보지 않는

다. 지금의 위기는 상상임신 같은 착각

이기도 하다. 진보정당이 융성기 이후

에 동력이 시효가 다한 생물학적인 자

연스런 현상이라고 본다. 그 맥락에서 이번 지방선거 방침은 소멸기에 대한 전략이 아니라 위기로 규정해

서 잔여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대증요법이었다. 노동당이라는 당명도 마찬가지다. 우리 당은 대안사회 경

“몰락, 위기라는 말은 세뇌된 단어다. 위기는

당연히 기회를 동반하기 때문이고 저는 위기

라고 보지 않는다. 지금의 위기는 상상임신 같

은 착각이기도 하다.”

Page 23: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특집 좌담_노동당의 현실과 전망 21

로 모델을 제시하는 당인데 스스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설명을 못한다. 통합진보당을 끌어대지 않고

정의당을 끌어대지 않고 독립적으로 우리당을 설명할 수가 없는 상태다. 임시정당으로 출발했던 한계가

분명하고 재창당 이후 극복하기로 했으나 계속 유보되고 있다. 재창당에 있어서 당명과 강령과 작동방식

이 불일치한다. 우리 스스로 진보정당 최대 집단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모여있는 자체가 전체 진보정

치 판에 있어서 장애물이 아닌가 하는 고민도 있다.

제도정당과 사회운동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위치하고 있고 과거의 자산을 계속 소모하고 있고 재생산

은 안되고 있다. 생로병사의 자연적인 섭리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활동가들이 나이를 먹어가며 체력과 열

정이 떨어지는 건 당연하다. 생계 부담도 점점 커진다. 헌신과 열정만으로 안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

정하고 앞으로 대안을 모색해봐야 한다.

재창당을 하면서 소멸기를 다시 되살리거나 새로운 융성기를 만드는 전망이 없으면 강을 건넜다고 생

각하고 버려야 될 수 있다고, 그 또한 선택지에 넣어야 한다고 본다.

강상구 : 전반적으로 진보정당의 수준이 굉장히 낮아졌다. 투쟁결합 잘하면 정당활동 잘하는 걸로 평가

받는 문화가 더 심해졌다. 자기 정치활동이 없다. 우익적 관계망 속에 들어있는 노동자대중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되는데 투쟁하는 데만 쫓아다닌다. 지역활동도 수준이 굉장히 낮아졌다. 민주노동당의 흔한 당

협 수준의 지역활동에도 못 미친다. 손에서 모래 빠져나가듯 빠져나가는 활동가들이 계속 생겨나고 거의

완전히 당 구조가 무너지고 있는데 근본적 고민이 없다. 그냥 버티기만 하는 것이다. 10년이란 단어 정말

싫다. 2008년에 10년 얘기했는데 지금 4년 남았다. 2011년 독자통합 논쟁 이후로 쳐도 3년이 지났는데, 3

년을 이렇게 보냈으면 나머지 7년도 이렇게 보내는 거다. 그런데 지금 와서 또 10년이라니, 정말 안타깝다.

김상철 : 당직, 서울시당이라는 광역당부에서 당직 맡은지 10년이 된다. 10년의 진보정당 역사가 일종

의 성장경로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내가 갖고 있는 진보정당의 정치의 전망이 무엇이었는지 스스로 질문

던지곤 한다. 우리는 어떤 자산을 갖고

노동당에 남아있는 활동가들에게 뭔가

얘기를 해주고 활동의 전망을 줘야 되

는데 스스로 확신을 못 갖는 이 상황이

지금의 당 상황과 그대로 일치하는 것

같다. 우리 체질, 우리의 조건, 우리의

역량에 대해 정말 냉정하게 봐야 한다.

평가의 지점은 2004년, 2008년, 2012

년 어느 지점이 아니라 2014년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제한적인 선택지를 제대로 냉정하게 봐야 한다. 나

는 깃발정당화되는 경향성에 대해 가장 우려하는 당직자들 중 하나다. 제한돼 있는 중앙당이나 광역당부

“우리는 어떤 자산을 갖고 노동당에 남아있는

활동가들에게 뭔가 얘기를 해주고 활동의 전

망을 줘야 되는데 스스로 확신을 못 갖는 이

상황이 지금의 당 상황과 그대로 일치하는 것

같다.”

Page 24: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22

의 역량상 꺼떡하면 월화수목금토 오후마다 잡히는 연대활동, 1박2일 희망버스 식 사업에 사실 당원들의

일상적인 감시(시당깃발 안 보이네)에 의해서 강하게 견인이 된다. 다른 정치활동 즉 당장은 티가 안나도 장

기적으로 조사해서, 이를테면 공공부문 비정규직을 광역별로 분석해서 당원들 교육 들어가고 이걸 해야

된다. 진보구감 이런 형식으로.

어느 순간에 당장 가시화되지 않는 일상활동은 잃어버린, 이게 지금 노동당의 위기에 가장 큰 단면이

라고 여긴다. 무능 혹은 무기력으로 표현되는 지금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가 딛고 있는 지점, 우리

가 갖고 있는 자산에 대해 냉정히 판단을 못하는 데 있다.

사회 : 일치되는 지점들이 좀 있는 것 같다. 현재 상태가 문제가 있다는 데 다 동의하고 있고 어떻게 갈

것인가 방향성은 다를 수 있어도 장기적 성장전망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동의하는 듯 하다. 저도 97년

국민승리21부터 시작했지만 민주노동당 시절의 경험은 잊어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그때를 아는 사

람들은 지금이 참 답답할 것이다. 2004년 이후로 너무 사람 위주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

오히려 당의 기초조직은 와해된 게 아닌지. 현실은 냉정하게 인정하고 장기적인 전망을 모색하든 하는 것

이 필요하지 싶다. 예전 상태를 복구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나 싶다. 각자 질의 답변을 하겠다.

김상철 : 나도원 동지에게 묻겠다. 당내에서 다양한 정파들이 있을 수 있는데 정파간 경쟁은 정상적인

당내에서의 논쟁구조 이를테면 당협의 활동, 당직자로서의 활동전망, 이런 걸 가지고 관철될 것 같은데

당내 반편향을 만드는 요인 중 소위 당의 골간질서나 의사결정구조 외연에 있는 외부적인 의사결정과정

이 굉장히 반편향을 나타내는 구조가 있다. 이 구조가 계속되면 노동당은 고사될 수밖에 없다는 심각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나도원 위원장께서 하나의 정파를 대표하고 계시기에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한다.

지금 있는 정파의 구조가 과연 이 당을 정상적으로 만드는 구조인가?

나도원 : 제가 속한 조직인 신좌파당원회의는 당의 공적인 절차와 당의 결정을 이행하는 데 가장 충실

했다. 불협화음이 있긴 했는데 따지고 보면 어떤 시점에 대한 시각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당내 의사결정

과정을 무시했다고 일방적으로 보기는 어렵다. 여당의 경우는 요직을 맡고 있는 당직자들이 많으니 공적

인 논의가 되는 거다. 야당의 경우는 주요 당직자가 아닌 사람들이 비공식적인 논의를 하는 것처럼 보이

는 것이다. 그리고 (신좌파당원회의) 구성원들이 중앙정치에만 신경쓴다고 하시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지

역에서 당부들을 열심히 꾸려가고 있으며 부문활동을 주도하고 당 바깥의 조직에서도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다.

김상철 : 이 부분이 당내에서 합리적으로 조정이 될 수 없으면 당이 정상적인 조직이 될 수 없다고 본

다. 한 예로, 최저임금 1만원이나 기본소득과 같이 당내에서 쟁점이 된 사안들이 있다. 마치 이 당의 공약

Page 25: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특집 좌담_노동당의 현실과 전망 23

처럼 얘기되곤 한다. 문제의식을 안으로 녹여내어 공식화시키는 과정은 지난하고 짜증이 날 수 있다. 이

과정을 인내하고 납득할 가능성이 없다면, 노동당이 한줌밖에 안되지만 굉장히 연약한 연합정당으로 비

춰지는 거다. 중앙당이나 광역시도당이 갖고 있는 구조적 한계 때문에 당론으로 확정되지 못한 것인지 솔

직히 그런 풍토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이후의 조직개선이 필요하다고 보시는 건지 여쭙는다.

나도원 : 사례로 드신 부분들이 제가 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그 정파 조직이 아니다. 그 활동을

하는 분들 중에는 노동당 당원이 아닌 분도 많다. 그리고 당의 의사결정과정에서 당에 헌신하는 당직자들

입장에서는 특정 정파가 수로 밀어붙일 때에 허탈할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충

분히 공감한다.

채훈병 : 강상구 동지에게 묻겠다. 투쟁결

합 잘하면 칭찬받는데 그게 당의 역할이냐 하

셨는데 사실 당원이 당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

게 다가 아니라고 생각할 거다. 근데 그거 외

에 당원으로서 자기 존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게 없다. 장기적이고 구체적인 지역활동을 하

려면 하루 아침에 끝날 일도 아니고 1년 동안

해도 동력 안 모아지면 계획 자체가 흐지부지

되는 게 많다. 그런 기획을 우리가 당원들에게

제시를 못한 측면도 있다.

또 2008년 촛불 때 들어온 당원들이 많아

서 자기이미지화된 게 있다. 이분들을 활동가

로, 당의 동력으로 끌어안으려고 환영해주고

박수쳐주고 했는데 이후 기획이 전혀 없었다.

당이 이미지정치화된 거다.

강상구 : 당활동가들이 집회에만 집중하니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데모만 한다고 하더

라도, 맨날 똑같은 사람이 깃발 달고 나가는

게 아니라 1년에 단 한 번이라도 우리 동네 우

리 지역에서 데모 한 번도 안하던 사람을 깃발

달고 나가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데모만 한다고 하더라도, 1년에 단 한 번

이라도 우리 동네 우리 지역에서 데모 한

번도 안하던 사람을 깃발 달고 나가게 하

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Page 26: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24

3. 이후의 전망 및 앞으로 당이 나아가야 할 방향

사회 : 이 상태로 유지되기는 어렵다고 했을 때 이후의 방향은? 어떤 전망을 갖고 나아가야 할까? 오늘

이야기의 핵심일 수 있겠다.

김상철 : 노동당다운 새로운 대중노선을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한정된 당 활동가 그룹들이 데모를 많

이 나가면 당연히 일상사업 못하는 거다. 일상사업에 주목하다 보면 대외적인 연대사업들은 놓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보면 이미지정치든 대중사업이든 즉각적으로 효과가 나는 사업,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

는 사업에 치중해왔다. 나경채 동지나 강상구 동지 같은 고민을 할 시간도 없었다. 이 정당이 가진 대중노

선이 깃발 들고 데모 나가는 거 외에 뭐가 있냐는 거다. 노동당의 독자적 성장노선은 사회구조적 변화, 사

회주의적 사회개혁이라고 불리는 테제가 있는 거고 그 전술로서는 지역 내에 주민화된 노동자들, 생활권

에 있는 노동자들을 타겟삼은 전술인 셈이다. 전략은 세웠는데 구체적 전술은 없다. 한번도 일상적 사업

으로서 시도해본 적이 없다. 이 상황에서 멈춰야 된다. 기계적으로, 달력식으로 쫓아다니던 일정들 다 중

단시키고 우리의 전략들, 다시 5년이 됐던 10년이 됐던 전망을 새로이 구축한다면 지금 다 멈추고 재편성

하는 시간을 내년 1월 대표단선거까지 세워나가야 한다고 본다. 이게 구체화되지 않으면 관행적으로 당이

굴러갈 것이고 관행적으로 당이 유지되면서 문제가 반복된다. 일반적인 유권자 시각에서 우리가 버려질

까봐 두려워할 시점은 아닌 듯하다. 다 멈추고 셋팅 한 번 해보자.

강상구 : 재편성의 시간은 지났다고 본다. 왜냐면 방금 말씀하셨던 그런 시도, 그런 고민이 없었던 게

아닌데 다 실패했다. 지금부터 시작하더라도 노동당만의 대중노선이 현실적으로 힘을 갖고 당원들의 사

기를 진작시키고 대중들의 지지도 얻고 그 속에서 당이 힘을 획득하는데 시간이 꽤 많이 필요하다. 우리

는 아무리 장기적인 목표가 있다고 하더라도 선거 결과에 영향을 받는다. 활동가들, 당협, 중앙당이 영향

을 받는다. 계속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2016년, 17년, 18년, 계속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노동당만의 독

자적 생존전략을 세우는 것은 할 수는 있는데 이것을 현실화하기엔 시간이 지났다고 본다.

주민이면서 동시에 노동자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주체로 하는 지역노동운동정치 해보자고 제안했었

다. 예를 들면 구로에서 작년에 요양보호사 100명 동네 실태조사하고 노동조합 만들고 다 했다. 희망연대

노조와 같이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 비정규직 조직사업하고 있다. 그 사람들하고 당을 같이 안 할 이

유가 없다. 그런데 노동당에 가입하란 얘기가 지금 별로 설득력이 없다. 요즘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정치

적인 조직이 생협이다. 정당이나 노동조합 조직보다 세월호국면에서 서명운동도 많이 한다. 이 사람들에

게도 당 가입하란 얘기를 못한다. 쌍용차 사람들, 삼성서비스지회 사람들과 당 같이 하고 싶다. 그런데 그

사람들한테 가서 당 가입하라고 얘기할 수 있나? 없잖나. 그 사람들과 당을 같이 안 하는 걸 이상하게 생

각해야 한다. 당을 같이 할 구조를 만들어야 할 것 아닌가. 완전히 새로운 틀을 만들어야 한다. 정의당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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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좌담_노동당의 현실과 전망 25

동당 통합합시다, 이런 게 아니라 전혀 새로운 틀이 있어야 한다.

채훈병 : 무엇을 할 건지보다 어떻게 할 건지 얘기가 부족했다. 우리가 우리의 진정성이나 열의만 갖고

안되는 부분, 시스템을 바꿔야 할 부분 있다. 당의 생존이 절실하다면 당이 필요없다는 고민 속에서부터

강한 반박논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저수지가 어디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외부적으로는

유권자, 내부적으로는 당의 동력이 어디서 나

와야 되느냐 하는 건데 당원의 분포상 직장

인, 생활인들이 동력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당의 당직자가 전문성 갖고 활동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활동가들은 생계유지

힘들다. 자원 끌어내야 할 곳은 당원이다. 당

비 만원을 이만원으로. 그걸 끌어내는 방법이

문제이고 찾아야 될 것인데, 저수지를 확인해야 한다. 수질을 어떻게 만드느냐가 중요할 것이다. 세대교

체가 일어나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당직자들보고 집회 나가라고 무작정 요구할 것이 아니라 당원들이 자

발적으로 깃발 만들어서 나가면 된다. 당의 체질과 성격과 규모에 맞는 구조를 위해 예컨대 진성 당원의

당비로만 운영 가능한 당, 40대 이상 당직 피선거권 제한 등의 구상도 해볼 수 있다.

나경채 : 지속적으로 우리 사회에서도 40% 이상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

들이 됐다. 예전엔 비정규직처럼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을 주목했지만 이제는 안하는 사람들에 주목해

야 한다. 이들을 대표하고자 자임하는 정치세력의 존재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아무리 개별적 수준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다시 진보정치가 시작돼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여기서부터 존재이

유를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만원에서 이만원으로 당비 올리자거나 즐거운 당을 만들자는 얘기는 지나치게 한가한

소리가 아닌가 싶다. 40%의 사람들에게 우리를 선택해달라고 할 근거, 그것이 해명되지 않으면 정말 솔

직하게 내려놓아야 한다. 나는 통합파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했다. 이제 이 사태는 통합으로 해결되지 않는

다.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과연 우리는 위기를 절감하고 있는지, 솔직하게 꺼내놓고 얘기해보아야 한

다. 위기라고 평가받는 세력에 걸맞는 태도와 자세를 보이고 있는지에 대해서.

나도원 : 많이들 지치신 것 같다. 우리 당의 현실에서 미래를 논하기는 힘든 게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자산을 갖고 미래를 논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그렇게 토론했으면 한다. 지방선거 끝

나고 나서 패배 청산 이런 정서가 드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실패한 선거전략이라 할지라도 긍정적으로

볼 부분들이 있다. 재생산이 안 된다고 하는데, 젊은 동지들이 상당히 많다. 또한 그들이 결과적으로 선거

“우리의 저수지가 어디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자원 끌어내야 할 곳은 당원이다. 진

성 당원의 당비로만 운영 가능한 당, 40대

이상 당직 피선거권 제한을 제안한다.”

Page 28: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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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경험하게 되었다. 공적인 체계 내에서 자기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체계가 된다면 당의 자

산이 될 것이다. 당의 냉엄한 현실 뿐만 아니

라 미약한 가능성도 인정해야 한다. 특히 내부

역량이 분명히 있다. 노동당이라는 당이 갖고

있는 성격 자체가 활동가들의 노쇠화 탓이기

도 하지만 아직도 옛날의 생각에 갇혀있기 때

문에 오늘날 결과라고 본다. 보수정당들은 스

로를 갱신하며 광범위한 지지층을 확보해왔는

데, 우리는 ‘상대가 원하는 전략’에 갇혀 있었

다. 그래서 노동당의 기반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른 프로그램이 필요하고 세대교

체가 필요하고. 당의 시스템을 개편하는 데 있

어 다섯 가지 키워드를 제안한다. 청년, 녹색,

문화, 비정규노동, 기본소득. 다섯 가지 키워

드를 당의 정책을 통해서 구현할 방안을 당장

실행해야 한다.

사회 : 각자 중요하다고 보는 부분들을 다

들 이야기해주셨다. 고민의 기준점도 다른 것

같고 준거가 다른 것 같다. 어쨌든 2번에 동의했다면 그 방향에 대해서 나도원 김상철 채훈병은 약간 다른

측면이 있지만 어느 정도 모아진다. 채훈병 동지의 경우 단기적으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구체적인 것들,

나도원은 당 시스템, 김상철은 당장은 아니라도 사회변혁전략을 갖고 장기적 전략을 갖자는 얘기다. 강상

구, 나경채 동지의 경우 통합이라는 차원이 아니더라도 전반적으로 현재의 당보다는 전체 진보정치의 위

기를 이야기해주셨다. 단순히 당내에서 뭔가를 하는 차원의 문제는 아니다.

김상철 : 결국 50프로 이상은 노가다다. 전망이나 프로그램의 문제가 아니라, 50프로 이상에 달하는

기본적인 노가다를 할 수 있는 자기전망이 필요한 거다. 새로운 대중노선을 만들자는 건 눈에 보이지 않

는 그 노가다에 주목하자는 거고 그게 당도 그게 기반이 되야 비로소 프로그램을 제시할 수 있고 깃발을

날릴 수 있다는 거다.

노동당은 물이 새고 있고 누구나 한 손에 구명보트를 쥐고 있으면서 두리번거리는 상황이라는 게 안에

있는 당직자로서 눈에 보인다. 난 언제쯤 구명보트를 챙겨야 될지. 근데 그걸 정말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청년, 녹색, 문화, 비정규노동, 기본소득.

다섯 가지 키워드를 당의 정책을 통해서

구현할 방안을 당장 실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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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좌담_노동당의 현실과 전망 27

다 까놓고 한 번 논의해 봤으면 좋겠다. 나경채 동지가 지적하셨듯이 진보정당끼리 통합해봐라, 라는 게

지금은 무의미해진 게 맞다. 그러면 외부 핑계 대면서 이제껏 잘 못했던 당 내부적인 과제를 진짜 제대로

못해내면 안된다. 그런 의미에서 절박감 가져야 된다는 거다.

나경채 : 저는 김상철 동지 이야기도 굉장히 의지적으로 들린다. 물론 어렵지만 해보자라는 거 그것까

지 뭐라는 건 아니지만 아직도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 게 많은 것 같다. 제가 반복해서 통합파로서의 정체

성을 버렸다고 얘기하는 건 두려워 말고 얘기를 하자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편하자고 주장할 거

다. 예전엔 그것이 혁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것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그 중요성이 현저히 낮아졌

다는 거고. 인정할 때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다. 통합은 더 이상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는 강시같은

존재다. 살아있는데 살아있지 않은 취급을

받는 거다. 죽었는데 죽지 않은 몸이다. 두

번 선거에서 1%대 지지율을 받았다. 이걸

인정해야 한다는 거다.

진보정치 저변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어떻게 과

거와 단절하고 무엇을 혁신하고 무엇을 다

르게 할 것인지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청년정치 옛날에도 필요하고 지금도 필요한 것이고 문화정치도

마찬가지다. 그런 것 말고 무엇을 단절하고 무엇을 반성할 것인지 무엇으로부터 새롭게 고민해서 대중들

에게 보여줄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단절이 필요하고 고민해야 한다. 연장선상이 아니라

단절적으로. 이것이 아니면 사람들에게 우리의 존재를, 존재 이유를 말할 근거가 없어진다.

나도원 :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 시대와 상황이 변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되지만 다른 길을 모색하되 당

에 있는 사람들 가장 먼저 중시돼야 되고 당의 유능한 인재들, 당에 이제까지 헌신해오신 분들, 젊은 세대

모아나가는 것이 지금 현실에서 매우 중요하다. 노동당 안에도 역량과 가능성이 존재한다. 당 안의 힘조

차 모아내지 못하면서 외부와 협력을 논할 수 있는가? 당 내의 협력과 융합이 최우선 과제이다.

채훈병 : 독자, 통합, 철지난 얘기라 생각한다. 사실 2011년 당대회 결정 이후 소위 독자파가 당 운영을

했는데 별 전망을 보여주지 못했잖나. 내부적 문제뿐만 아니라 외부의 환경 요인도 굉장히 강하긴 했지

만. 상황을 심각하게 보든 아니든 뭘 할려고 해서 모여있는 것이고 고민은 고민대로 충분히 하더라도 이

제는 좀 구체적으로 뭘 할 것인지 결단이 필요하다. 포기하는 것도 뭔가 하는 거다.

강상구 : 최대한 크게 그림을 그리고 더 밑으로 내려갈 계획을 세워서 철저하게 집행을 해야 하는데 어

“우리는 강시같은 존재다. 살아있는데 살아

있지 않은 취급을 받는 거다. 죽었는데 죽지

않은 몸이다. 두 번 선거에서 1%대 지지율을

받았다. 이걸 인정해야 한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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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면 지금부터 당을 다시 강화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역사에 걸림돌이라면 당을 해산할 수도 있어야

한다. 다 열어놓고 고민할 때가 왔다. 진보정치를 다시 살릴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고 있는데 우리가 살아

보겠다고 뭉쳐서 이것저것 하고 있다면 우리가 걸림돌이 되는 거다. 그러면 해산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

다고 하더라도 진보정치 부활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죽어라 하고 길게 보고 하고 그렇게 해도 10년이

걸려도 예전 수준 회복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김상철 : 혹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론이

아닐까. 굉장히 역설적이지만. 미래를, 대안을

고민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이걸 분석해왔다.

물론 분석만 해서 분석 자체가 버려진 것 같

다. 보수화되어 있는 정치적 양극화의 구조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지, 정치적으로 대변되

지 못하는 사람들의 구조적 봉착점이 어디인

지 우리의 활동을 근거로 할 만한 과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이론이 있는 걸까.

두 번째로는 결국은 새로운 운동인데 자기

운동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자 민중을

위한 것도 아니고 대신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이해관계와 나의 이해관계를 맞춰가는. 활동

가 개인의 탐구열도 좋고 자기혁신도 좋다. 어

떤 의미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건 운동의 개념

을 재정립하는 것일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이 시점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안락사’다. 나름 모순되고 좌충우돌 고민을

계속 하게 되는 것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하

나의 공포스러운 이미지가 안락사다. 지금 당

의 조건이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무능력을 반

복해도 반드시 사멸로 나아가지는 않을 것이

다. 지리멸렬한 안락사의 모습으로 1년이건 2년이건 남게 되는 것이 두렵다. 지방선거의 결과를 패배적으

로 비관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나온 얘기들을 다 갈무리해서 안락사는 좀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하나의 공포스러

운 이미지가 안락사다. 지리멸렬한 안락

사의 모습으로 1년이건 2년이건 남게 되

는 것이 두렵다.”

Page 31: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기획

보수의 민낯한국 사회에는 수많은 보수 이데올로그들이 있다.

종편이나 지상파 방송에 나와 특정세력의 이해관

계를 위해 복무하는 논리를 반복하는 언론인들, 그

리고 “일본의 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엉뚱한

총리 후보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 보수의 민낯을

들여다 보자.

Page 32: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30

“‘하나님은 왜 이 나라를 일본에게 당하게 식민지로 만들었습니까’

라고 우리가 항의할 수 있겠지. 속으로. 하나님의 뜻이 있는 거야. 너

희들은 이조 오백 년을 허송세월로 보낸 민족이다. 너희들은 시련이

필요하다”

일제 때 조선총독부 관리가 한 말도, 친일파가 한 말도 아니다. 대

한민국 총리 후보자가 남긴 말이다. 문창극 총리 후보자는 이 발언으

로 인해 총리가 될 수 없었고, 박근혜 대통령의 철옹성 같던 지지율은

30%대로 주저앉았다. 문창극, 그는 총리 후보자이기 전에 대한민국

대표 보수언론인 중앙일보의 주필이자 대기자였다. 그를 낙마하게 만

든 건 ‘식민지배는 하나님의 뜻’등 편향된 역사관이었지만, 편향된 언

론인, 아니 이데올로그로서의 그의 모습이 드러나는 다른 발언들도 즐

비하다. 문창극의 중앙일보 대기자 시절 칼럼들은 감시자가 아니라 플

레이어로 뛰는 ‘보수 이데올로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문창극, 언론인인가 한나라당-새누리당 싱크탱크인가

문창극은 지난 대선 직후인 2012년 12월 25일 <하늘의 평화>라는

칼럼을 썼다. 그는 50대가 90%에 가까운 투표 참여율로 박 대통령을

찍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하며 “민주주의에서 한 표는 똑같은 효력을

갖고 있으나 표의 값이 같다고 표의 무게도 같을까. 이 나라 현대사를

몸으로 체험하고, 인생 50년 역정을 견뎌온 사람의 한 표와 지금 겨우

감시자 아닌‘플레이어’로 뛴다,조중동 이데올로그

조윤호 <미디어스> 기자

문창극 총리 후보자가 검증 앞

에서 무너진 과정은 곧 조중동

이데올로그들의 모습일지도 모

른다. 이들이 문창극 낙마에

‘발끈’한 이유도 본인들도 언

젠가 저렇게 될지 모른다는 두

려움 때문은 아닐까.

기획/보수의 민낯

Page 33: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기획 보수의 민낯 31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한 사람의 한 표 무게가 같을 수 있을까”라고 말한다. 특정 세대, 아니 특정 후보를

찍은 특정 세대의 표의 가치가 다른 세대의 그것보다 더 높다는 주장을 펼치던 그는 이어 “역사의 신이 존

재하는 것은 아닐까. 베일 뒤에서 지켜보고 있으나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그(신)는 베일을 뚫고 나타나

는 것 같다”고 말한다. “박근혜 당선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하지만 그는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박근혜 대통령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2011년 5월 31일 칼럼에서

“그녀는 자기 주장을 논리적으로 자세히 설명하지도,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하지도 않는다”며 “자유인인

지금도 이럴진대 만약 실제 권력의 자리에 들어서면 어떻게 될까. 국민의 대표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녀 스스로가 휘장 속에서 걸어 나와야 한다”고 조언한다. 2009년 11월 11일 세종시 문제로 친이와 친박의

갈등이 벌어지자 “원칙이니 신뢰니 하는 말은 수사학처럼 들린다. 선거에 나설 사람과 선거에 다시 나서

지 않을 사람 중 누구 말이 더 믿을 만한 것일까”라고 비판한다. 그러던 문창극이 왜 대통령이 된 이후의

박 대통령은 ‘역사의 신’ 운운하며 반긴 것일까.

그는 한나라당과 새누리당, 즉 한국의 보수세력의 집권을 위해 힘쓴 ‘이데올로그’이자 전략가였다. 노

무현 정부 말기 그의 관심사는 ‘정권교체’다. 문창극은 2007년 7월 10일 <권력의 비늘을 떼라>는 칼럼에

서 이명박-박근혜의 싸움을 비판하며 “또다시 좌파에게 정권을 맡겨서는 나라에 미래가 없다. 두 사람도

그것이 목표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같은 글에서 “외국의 예를 많이 들지만,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어머니의 정치’”라며 “자녀를 키우고 집안 살림을 꾸려본 여자들이, 나라살림도 남자보다 더 섬세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박 후보는 이런 경험이 있는가”라며 박근혜 당시 후보의 약점까지 끄집

어낸다.

6월 24일자 YTN뉴스 갈무리

Page 34: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32

문창극은 2006년 5월 30일 지방선거 직후 쓴 글에서 “뜻밖의 인기는 그 당을 망치게 만든다”며 “한나

라당이 믿을 만하고 좋아서가 아니라 이(노무현) 정권에 너무 실망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지방선거

승리로 고취된 한나라당에게 자만하지 말

라는 충고까지 던진 것이다.

문창극은 한나라당이 외치던 ‘잃어버

린 10년’의 전도사이기도 했다. 2007년 5

월 29일자 문창극 칼럼의 제목은 <잃어버

린 10년>이다. 그는 “한국도 지난 10년은

잃어버린 시절이었다. YS말기의 국가 부

도 사태를 시작으로 북한에 퍼주기와 권력부패가 심했던 DJ시대, 성장에는 눈을 감고 균형과 평등으로 4

년을 허송한 노무현 시대를 거치면서 모든 분야가 제자리걸음이었다. 그 피해는 힘없는 서민, 갓 졸업한

젊은이 등 사회적 약자에게 돌아갔다”고 주장했다. 문창극의 글을 읽다보면 그가 언론사 기자인지 한나라

당 싱크탱크인지 헷갈린다.

문창극 옹호한 ‘동료’ 이데올로그들

문창극은 총리 후보자가 되어 난타 당했지만 그는 외롭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를 방어한 동료 이데

올로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의 김순덕 논설실장은 6월 23일 <‘광우병 선동’ 뺨치는 KBS문창

극 보도>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당시 PD수첩의 보도와 KBS의 문창극 발언을 비교한다. “불공정한 보

도로 국기를 흔들고 멀쩡한 사람도 친일파로 만드는 방송사라면 정상일 수 없다”며 이번 사태를 ‘문창극

사태’가 아니라 ‘KBS사태’로 규정한다.

김대중 조선일보 주필은 6월 24일 <文총리 지명, 正道로 풀어야>라는 칼럼에서 문 후보자가 사퇴해야

한다는 요구를 ‘좌파 매카시즘’과 ‘내용 모르는 일반인들의 포퓰리즘’으로 규정한다. 송평인 동아일보 논

설위원은 함석헌 전쟁도 ‘악마의 편집’만 있으면 친일파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며 “악마의 편집도 무섭지

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런 악마의 편집이 먹혀 들어가는 현실”이라고 개탄한다.

문창극이 몸 담았던 중앙일보의 김진 논

설위원은 문창극의 발언 대신 문창극 청문회

의 위원장인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뇌물비리 전과자’라는 점을 강조했다. 김 위

원은 6월 18일 쓴 칼럼 <뇌물 전과자가 청문

회 주재하나>에서 “국민은 중대 뇌물비리 전

력자가 총리 후보를 호통 치는 모습을 보고

문창극이 몸 담았던 중앙일보의 김진 논설

위원은 문창극의 발언 대신 문창극 청문회

의 위원장인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이 ‘뇌물비리 전과자’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한나라당과 새누리당, 즉 한국의 보수

세력의 집권을 위해 힘쓴 ‘이데올로그’이자

전략가였다. 한나라당이 외치던 ‘잃어버린

10년’의 전도사이기도 했다.

Page 35: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기획 보수의 민낯 33

있어야 한다”며 “문창극 후보자의 의식과 과거를 철저히 검증하라는 것은 국민의 신성한 명령”이라고 말

한다. 김진 위원은 왜 ‘식민지배 하나님의 뜻’ 같은 발언을 한 총리 후보자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

는 걸까? 그런 말을 한 총리 후보자가 청문회에 나오는 걸 국민들이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걸

까?

중앙일보 김진 ‘박정희, 천상에서 인혁당 8인과 막걸리 마실 것’

조선일보 김대중, ‘종북 설치니 이념 투표 하라’

문창극을 옹호한 이들이 어떤 생각을 지녔는지 살펴보자. 중앙일보의 김진 논설위원은 지난 대선 국면

에서 박근혜 캠프의 책사 역할을 자처했다. 그는 2011년 6월 13일자 칼럼 <천상의 박정희, 지상의 박지만>

에서 “영화 ‘사랑과 영혼’처럼 박정희는 천상(天上)에서 아들을 지켰다”며 “그 아들은 지금 53세가 되었

고 그의 누나는 차기 대통령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 있다. 남매는 다시 세상의 중심에 선 것이다. 그러니 이

제부터는 아들이 아버지를 지켜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무슨 뜻일까?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니 박지만과 서향희

가 몸조심해야 한다는 의미다.

김진 위원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

가가 대두되던 2012년 9월에는 <박정희

독재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글을 쓴다.

이 글에서 김 위원은 “박정희는 천상(天

上)에서 인혁당 8인에게 사죄했을 것이

다. 그리고 그들은 막걸리를 마시며 조국

을 얘기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신

내림이라도 받은 모양이다. 김 위원은 김

재규가 ‘발기부전’ 때문에 박정희를 쐈

다는 황당한 주장을 한 적도 있다.

김진 위원의 농담인지 진심인지 모를

주장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김 위원은

“전쟁을 결심해야 전쟁이 없다”며 “국민

이 3일만 버티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

는 전쟁 선동을 하기도 했고, 일본이 미

국에게 원자폭탄 투하를 당한 것을 ‘신의 2012년 9월 17일자 중앙일보 38면

Page 36: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34

징벌’이라고 말했다가 비난을 받자 사과하

기도 했다. 김진 위원은 각종 방송 프로그

램의 ‘대표 논객’으로 등장하며 보수의 이

데올로그를 자처한다. 조선일보 논설위원

들은 더 노골적이다. 조선일보의 논설과 사

설은 한나라당-새누리당 정권에게는 일종

의 ‘지침’과 같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김대중 주필이 있다. 실제로 그의 칼럼 중 많은 내용을 ‘대통령에게

드리는 말’ 등이 차지하고 있다. 김대중 주필이 1999년 7월 31일자에 쓴 <이회창론>은 이회창 당시 한나

라당 총재에 행동지침을 제시한 것이고, 이 총재는 그대로 실행했다. 그는 2007년 대선을 앞두고도 CEO

리더십을 지닌 리더를 뽑아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냥 대놓고 이명박을 뽑으라고 하는 것이 나을 뻔했다.

김 주필은 2012년 총선을 앞두고는 “유권자는 이념을 보고 투표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을 지키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다. 친북(親北)·종북(從北)이 공공연하게 활동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나라’의 존재”라며 노골적으로 새누리당을 뽑으라고 주장했다.

동아일보 김순덕 “천치 대학생들이 트위터나 날리며 청춘 보낸다”

김대중 주필과 김진 위원이 ‘잃어버린 10년’ ‘김대중·노무현 비판’ ‘보수정권 옹호’ 등 거대담론의

이데올로그라면, 동아일보의 김순덕 논설실장은 ‘각론’에 대해 고민하는 이데올로그다. 김순덕 논설실장

의 활약이 돋보인 국면은 2008년 광

우병 사태 때였다. 김 실장은 “정권교

체를 원하는 세력에게 미국에서 발생

한 광우병은 고 노무현 대통령이 때맞

춰 보내준 선물일지 모른다”고 밥상

을 지키기 위한 국민들의 싸움을 노무

현과 이명박 간의 대결로 만들어버린다. PD수첩이 국민들을 속였다며 엄기영 MBC사장을 일컬어 “기자

이길 포기한 연명술이 역겹다”는 독설을 날리기도 한다.

김 실장은 반값등록금 반대에도 앞장섰다. 김 실장은 반값등록금 시위에 나선 대학생들을 향해 “‘천치

대학생’들은 지금의 ‘반값 등록금’이 미래 자신들의 연금을 당겨쓰는 건 줄도 모르고 트위터나 날리면서

청춘을 보내고 있다” “나랏돈을 쓰는 유럽 대학생들과는 연애하지 말라더라” “미국의 개입으로 적화통일

에 실패했다고 통탄하는 세력이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 참여하고 있다” “반값 반값 하다간 국민소득도 반

값될까 우려된다” 등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퍼부었다.

동아일보의 김순덕 논설실장은 ‘각론’에 대해 고

민하는 이데올로그다. 김순덕 논설실장의 활약이

돋보인 국면은 2008년 광우병 사태 때였다.

조선일보 논설위원들은 더 노골적이다. 조선

일보의 논설과 사설은 한나라당-새누리당

정권에게는 일종의 ‘지침’과 같다.

Page 37: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기획 보수의 민낯 35

보수 세력 ‘플레이어’들이 '정치중립‘ 운운하는 이중성

이들 외에도 보수진영에는 수많은 이데올로그들이 있다. 언론인과 교수, 지식인 등의 탈을 썼지만 사

실 특정세력의 이해관계를 위해 복무하며 종편이나 지상파 방송에 나와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이들.

이들은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며 그 방송의 시청자들에게 나름의 ‘논리’를 제공한다.

이들이 하는 행동을 일컬어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라고 말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런 대부분의 보

수 이데올로그들이 교사와 공무원들에 대해서는, 시민단체에 대해서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며

눈을 부라리고, 시민과 노동자들이 집회를 할 때면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고 열변을 토한다는 것

이다. 본인들이 쓰는 글들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는 것일까?

언론사 주필에서 총리 후보자가 된 문창극의 행보, 그리고 그가 검증 앞에서 무너진 과정은 곧 조중동

이데올로그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조중동 이데올로그들이 문창극 낙마에 ‘발끈’한 이유도 본인들도 언

젠가 저렇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은 아닐까.

2011년 10월 24일자 동아일보 김순덕 칼럼

Page 38: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36

안녕? 난 근본이라고 해. 태어난 곳은 미국, 종교는 당연히 개신교

야. 사람들은 나를 보며 개신교 근본주의, 반공주의, 우익세력이라고

하지. 요즘 뭣도 모르고 떠드는 애들은 나를 개독이라고도 부르더라.

하지만 상관없어. 천하의 근본이가 근본도 없는 빨갱이들에게 흔들린

다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되겠어? 너희 이라크 전쟁 유발자 부시 알지?

걔 전쟁 한 것도, 그러고서 재선에 성공한 것도 다 내가 도와줘서 가능

했던 거야. 무서운 줄 모르고 나대는 빨갱이들, 예~쑤 이름으로 싹 쓸

어버릴까 보다!

아시다시피 난 국제적인 사람이야. 세계 이곳저곳의 우파세력들,

군부독재 세력들은 나와 손잡으려고 안달이지. 왜냐하면 내가 그들의

권력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 해 주거든. 내 유행어가 하나 있는데, 너

희도 많이 들어봤을 거야. 전쟁하기 전에 쓰면 딱 좋아. “신의 이름으

로!”

근본주의의 태동

지금부터 너희들에게 내 살아온 얘기를 해줄게. 내가 얼마나 근본

있는 사람인지, 코리아에 얼마나 혁혁한 공을 세웠는지 알게 되면 너

희들도 곧 나와 함께하리라 확신한다. 난 19세기 말에 미국에서 태어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의 본격 한국 진출기

이효성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생용산 당원

내 힘은 막강해. 대선에서 우리

소망교회 이명박 장로를 탄생

시킨 거 다들 알지? 반공의 추

억 박정희를 떠올리며 박근혜를

당선시킨 것도 나라고!

기획/보수의 민낯

근본이의 회고록

Page 39: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기획 보수의 민낯 37

났어. 너희 ‘미국의 꿈(American Dream)’

이라고 알지? 우리 땅 미국은 18세기부터

100년간 잘 나갔어. 그러나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남북전쟁 나고 계급갈등 생기

고 범죄도 늘고, 유럽 이민자들이 들어와

자유분방하게 행동해서 나를 만든 정통 미

국 백인 보수 개신교 윤리주의자들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지. 그리고 신학적으로는 독일에서 성서비평

학을 공부해 들어온 신학자들이 미국 대학 강단을 차지하면서 위기의식은 더욱 커졌어. 아니 어디 감히

성서를 비평해? 말이 되냐고. 게다가 1859년에는 찰스다윈이 마귀책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

을 출간했잖아?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안팎에서 위협하니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어? 조상님들은 재빨리

프린스턴신학교를 통해 ‘성서무오설’ 교리를 완성했어. 성서무오설은 성경의 한 글자 한 글자가 절대 오

류 없는 문자라는 거야. 비평할 것도, 해석할 것도 없지. 쓰인 게 진리니까 쓰인 대로 믿어야 해. 남녀차별

도 전쟁 정당화도, 성소수자 차별도 정당화되지. 너 혹시 개신교인이니? 아니라면 얼른 믿고, 믿고 있다면

해석 같은 거 하지 말고 무작정 믿기를! 한 글자라도 해석하면 너도 빨갱이야!

얘기를 계속하지. 성서무오설과 더불어 영국의 존 달비(John N. Darbi)를 통해 세대주의적 종말론이 미

너 혹시 개신교인이니? 아니라면 얼른 믿고,

믿고 있다면 해석 같은 거 하지 말고 무작정 믿

기를!한 글자라도 해석하면 너도 빨갱이야!

한국교계 동성애·동성혼 입법저지 비상대책위의 기자회견 모습 (사진 : 참세상)

Page 40: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국에 퍼졌어. 세대주의적 종말론은 이 세대가 너무 악해서 다 끝났다고 보는 거야. 비관적 역사관이지. 이

게 심해지면 예수님이 어느 날 어느 때에 재림한다는 휴거로도 나타나. 암튼 미국 개신교 보수주의자들은

이런 위기의식 속에서 나를 탄생시켰어. 나는 존 달비의 제자인 스타 목사 무디(D.L.Moody)를 통해 미국

에 본격적으로 진출했어. 이후 1815년 성서예언대회, 1910~1915년까지 발행된 학술잡지 《근본적인 것

들》(Fundamentals), ‘무디성서학원’, ‘달라스신학교’ 등 50여개의 신학교들과 대중매체를 통해서도 확산

되었지. 교단도 세워졌어. ‘미국 북장로교회’, 프린스턴에서 근본주의자들이 나와 세운 웨스트민스터 신

학교와 ‘정통장로교회’, ‘침례교성서연합’, ‘근본주의침례교단’, ‘미국침례교협회’, ‘그레이스형제단’

등등….

아, 그런데 말이지. 이렇게 잘나가던 나에게도 아픔이 하나 있어. 1925년에 벌어진 ‘스코프스 재판’이

야. 창조론만 가르쳐야 하는 테네시 주에서 존 스코프스(John Scopes)라는 선생이 감히 진화론을 가르쳤

지 뭐야? 당장 법정에 세웠지. 그런데 오히려 개망신을 당했지 뭐야. 당분간 조용히 지냈어. 물론 얼마 안

갔지만….

한국, 한국으로

한국 사람들 앞에 두고 미국생활만 얘기하니까 시간이 좀 아깝네. 한국에서도 난 할 얘기 많은데 말이

야. 뭐 너희들도 알겠지만 난 한국을 꽉 잡고 있어. 내로라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내 손길을 거쳤다고 볼

수 있지. 지금부터는 나 근본이의 본격 한국 진출기, 성공신화를 공개하지. 요즘 나처럼 잘나가기가 쉽지

않으니 성공하고 싶은 애들은 하나하나 수첩에 적으면서 듣기를.

19세기 말 조선 항구에 외국 배들이 슬금슬금 들어왔어. 1875년 운요호 사건을 의도적으로 일으킨 일

본인들은 강화도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계속 침입하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어. 미

국도 1866년 군함 제너럴셔먼호로 통상을 요구하고, 1871년 신미양요를 일으키면서 조선에 개입하다가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게끔 적극 도왔지. 외세의 발바닥이 조선땅

을 밟을 때 미국 선교사들도 그 흐름을 타고

함께 들어왔어. 대표적인 선교사는 1885년

들어온 장로교인 언더우드, 감리교인 아펜젤

러야. 그런데 이들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선교

사들은 아까 말했던 목사 무디의 영향, 또한

나의 영향을 받았지. 그래서 한국의 신학은

대부분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으로 출발했

어. 그렇다고 내가 문제라고만 생각하면 오산이야. 근본주의자들 중에서도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일본

에 저항한 사람들이 있어. 물론 그게 민족적 저항정신에 입각해서 한 행동인가 아니면 단지 우상숭배 거

38

외세의 발바닥이 조선땅을 밟을 때 미국

선교사들도 그 흐름을 타고 함께 들어왔

어. 한국의 신학은 대부분 보수적이고 근

본주의적으로 출발했어.

Page 41: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기획 보수의 민낯 39

부 때문인가에 대한 판단은 남겨져 있겠지만. 오히려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잘 통제하기 위해 정부와 민

중 사이에 있던 선교사들을 잘 구슬린 것, 그리고 좀 배웠다 하는 조선 개신교인들이 자기 기득권을 보전

하기 위해 친일적인 행동을 하고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나를 이용한 것이 한몫 톡톡히 했지. 내가 신학

적으로 개혁, 혁명 같은 걸 싫어하니까 자리보전하는데 얼마나 유용하게 쓰이겠어? 뭐? 박근혜처럼 삼자

화법 쓰면서 발 빼지 말라고? 나한테 딴지 걸면 빨갱이로 찍힌다는 거 알고 있을 텐데~.

나는 193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 교회의 주류신앙으로 확실히 자리매김 하였지. 한국 교회는 나를 무비

판적으로 엄청나게 번역해댔어. 이 시기에 장로교와 성결교는 성경무오류를 천명했지. 한편으로는 진보

적 신학의 입장을 탄압했어. 하나만 예로 들면, 1934년 ‘여권문제사건’이 있어. 장로교 함경남도노회 22

명의 여성이 장로가 되게 해달라고 장로교단에 청원하고, 장로교 김춘배 목사가 이를 도왔어. 그런데 장

로교단은 김 목사가 성경에 반하는 얘기를 한다고 제명하려고 했지. 결국 김 목사가 한발 물러나서 제명

은 안 되었지만 말이야. 여자는 조용히 하라는 문자가 성경에 써 있는데 어디 감히 여자가 장로가 된다는

거야! 이게 바로 성경무오설의 힘이지. 어, 잠깐 해, 해석하지 마! 토 달면 알지?

반공주의와의 만남

승승장구하던 내게 좋은 친구가 찾아왔어. 바로 ‘반공’이야. 사실 한국 개신교는 1920년대부터 공산주

의와 갈등이 있었지. 1925년에 창설된 조선공산당과 공산주의자들은 나를 공격했어. 예수도 모르는 유물

론자들! 곧이어 소련은 북한을 점령하고 김

일성을 앞세워 북에 있는 개신교인들을 못

살게 굴었어. 당시 개신교인들 중에는 지주

들이 많았지. 그런데 토지 무상몰수 무상분

배를 한다지 뭐야? 독한 빨갱이들. 일단 후

퇴다! 한국 개신교인 중 70~80%가 서북(평

안도와 황해도)에 살았는데, 남한으로 다 내

려왔어. 선민의식, 그러니까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라는 생각을 가진 내 신분 상 공산당 놈들은 성스러운

전쟁으로 없애버려야 할 마귀세력이 된 거지. 제주 4·3사건에 투입된 서북청년회 알지? 땅 뺏기고 고향

에서 쫓겨나면 이렇게 무서워지는 거야!

내 여기서 한마디만 하지. 하나님 안 믿으면 지옥 가는데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공산주의 유물론자들

을 가만두었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 가면 어쩌려고? 게다가 내 돈 내 땅 빼앗아간 놈들인데 말이야. 자

본주의 경제질서를 존중하라고! 또 남녀차별, 가부장제, 다 성경에 써있는데 그거 아니라고? 그거 거부하

면 하나님이 틀린 거라는 건데, 해석 어쩌구 들먹이면서 하나님을 부정하겠다는 거야? 천하의 대한민국이

하나님이 내려주신 형님국가 미국의 도움으로 경제발전해서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는데, 미국을 부정하는

승승장구하던 내게 좋은 친구가 찾아왔어.

바로‘반공’이야. 당시 개신교인들 중에는

지주들이 많았지. 그런데 토지 무상몰수 무

상분배를 한다지 뭐야? 독한 빨갱이들.

Page 42: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놈들은 또 뭐고! 미국의 원조는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했을 때 하나님이 내려주셨던 양식 만나와 메추라기

임을 정녕 모른단 말이오! 공산당은 마귀니께 반공은 퇴마여. 마귀를 없애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이여. 정신 똑바로들 차리라고!

내가 잠시 흥분했군. 다시 얘기를 이어가도록 하지. 공산주의에 극도의 반감을 갖게 된 근본주의자들

은 반공을 외쳐야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정치권력과 손을 잡았어. 군부독재를 묵인하고, 오히려 조장했지.

빨갱이를 소탕하는 북진통일의 위업을 누가 이룰 수 있겠어?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재산 잘 지켜주고 30

배, 60배, 100배로 불려준다는데 누가 거부하겠냐고.

군부세력에 협력한 이들이 많지만 한명만 예를 들지. 국가 조찬기도회 알지? 돈 많고 유명한 개신교 목

사들과 정치권 주요 인사들이 참여하는 그 기도회. 그 기도회를 있게 한 사람이 한국대학생선교회(CCC)

김준곤 목사야. 김 목사는 미국 풀러신학교 수학 중 국제 CCC 총재 빌 브라이트의 영향을 받아 한국에

CCC를 전파하고 총재가 되지. 한국전쟁 당시 아내가 북한 공산군에게 살해당하고 자신은 스물 세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김 목사는 대표적인 반공 기독교인이야. 김 목사가 잘나가자 박정희가 그를 찾아와

서는 대학생들의 관심을 북한 공산군에게 돌리게 해달라고 요구하지. 이때 김준곤은 협력의 대가로 서울

중심부에 CCC를 지을 수 있는 부지를 달라고 하고, 박정희는 전(前) 러시아대사관 부지를 주어 거기에

CCC전국본부가 자리 잡게 돼. 후에 김준곤은 박정희가 삼선개헌을 고려할 때, ‘삼선개헌은 하나님의 뜻’

이라고 말했어. 이 일 뿐이겠어?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교회 등 한국사회 대부분의 개신

교단과 종교지도자들이 군부독재에 협력했어.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지금까지 그 교세들을 유지해 나가

겠어? 나를 좋아하는 교인은 반공을 만나 친정부, 친자본적인 성격까지 신앙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었지.

교회 보수화와 한국 보수정치

뜬금없는 얘기지만 원래 나는 성격상 정치에 무관심해. 상당히 비관적인 미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40

제7회 연례 대통령 조찬기도회. 이날 기도회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당이 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전략의 하나로 종교계에 침투하려 획책하고 있다’고 경고하고 종교계 지도자들에게 유의해 주기를 당부했다. (사진 : 대한뉴스 제981호 갈무리)

Page 43: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기획 보수의 민낯 41

정치에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걸 무의

미하다고 생각하지. 그러나 미국에서

도, 그리고 한국에서도 나는 반공을 해

야 하기에 사명감을 가지고 정치세력화

를 시도했어. 뭐? 나조차도 반공을 핑계

삼아 기득권 유지하려는 것 같다고? 아

니, 이미 더한 기득권이라고? 나한테는 기득권도, 무기도 다 하나님이 주신 거야!

1989년 12월 28일, 나를 좋아하는 먹사, 아 아니 목사들이 모여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를 창립했

어. 이후 지금까지 교회 보수화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지. 여당 애들을 자꾸 밀어주다 보니 나도 이제는

좀 직접 정치를 하고 싶어서 2004년 한국기독당, 2007년 기독민주당, 이후 기독사랑실천당으로 총선에

참여하기도 했어(결과는 묻지 마라). 아, 2004년 총선 이후에는 열린우리당에 반대하며 ‘뉴라이트운동’을

벌이고도 있지. 내 힘은 막강해. 대선에서 우리 소망교회 이명박 장로를 탄생시킨 거 다들 알지? 반공의

추억 박정희를 떠올리며 박근혜를 당선시킨 것도 나라고!

한국사회는 근본적으로 우익의 땅이야. 한국 전체 인구 중 개신교인이 2012년 기준 22.5%이고, 19대

국회의원 중 개신교인이 94명, 38%라는 말이지. 물론 모든 교인이 다 나 같진 않겠지만 말이야. 나는 지

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쭉 오른쪽으로 갈 것이며, 할 수 있는 한 우회로를 선택할 거야. 난 하나

님이 택하신 자랑스런 우익이니까. 노동당 너희들은 당도 조그맣고 돈도 별로 없으면서 왜 자꾸 험난한

왼쪽길로 가려고 하니? 너희들 자꾸 깃발 펄럭이고 촛불 켜고 공산당 같은 공약 내걸면서 선거 나오려고

하는데, 조심하길! 그러다 나한테 빨갱이 취급당하는 수가 있어!

[참고자료]

배덕만. “한국 개신교회와 근본주의.” 『韓國宗敎硏究』 제 10호 (2008) : 1-23.

김성건. “한국개신교회의 정치참여 : 사회학적 비판.” 『敎會와 神學』 제 58호 (2004) : 26-32.

최택진. “한국 개신교회의 정치이데올로기와 보수주의적 성격 연구.” 서강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서울 : 2002.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쭉 오른쪽으로 갈 것이며, 할 수 있는 한 우

회로를 선택할 거야. 난 하나님이 택하신 자

랑스런 우익이니까.

Page 44: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42

북에서 온 반공극우

김형민(산하) 《그들이 살았던 오늘》저자

공산당의 횡포에 대한 체질적인

혐오를 보유하게 된 이들이 대

거 남한으로 유입된 사실은 분

단과 전쟁의 파국, 그리고 그 이

후의 대한민국 현대사에 이 깊

고도 넓은 족적을 남겼다.

기획/보수의 민낯

‘원적’의 추억

새 사장님이 오시고 업무 전반과 직원들의 인적 사항 등에 대한 보

고들로 부산하던 때의 일이다. 어쩌다가 직원들의 출신지와 대학, 전

공과 연차 등이 간략히 적힌 표를 보는데 갑자기 눈이 크게 떠졌다. 내

이름 옆의 출신지란에 ‘咸北(함북)’이라고 떡하니 한자로 써 있는 게 아

닌가. 함경북도라니. “어이 어이. 내가 탈북자야? 왜 함북이야” 그때

여직원은 난처해하면서 대답했다. “사장님이 원적을 알기를 원하셔서

…” 그제야 90년대 중반만 해도 이력서란에 간간히 쓰게 해 놨던 ‘원

적’의 추억이 떠올랐다. 그래 내 원적은 함경북도 학성군이었지.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남쪽을 버리고 북

쪽을 택했고 못지않은 수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해방 직후에는 서울에서 찾기 어려웠다는 평양냉면이 여름 별미로 자

리잡게 된 것도, 함경도 말투의 아주머니들이 부산 자갈치 시장의 상

권을 주름잡았던 것도 분단과 전쟁의 폭풍이 떨궈 놓은 파편들일 것이

다.

북에서 남으로 온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다. 내 친가부터

말씀드릴 것 같으면 조부님이 목사셨고 아버지는 공산 정권 치하에서

월요일만 되면 불려나가 “인민의 아편인 교회에 갔던” 사실을 자아비

판해야 했던 기독교인 가정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말씀을 하셨다. “차

라리 미국이 북으로 오고 소련이 남으로 왔으면 좋았을 게다. 그만큼

월남민의 그림자

Page 45: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기획 보수의 민낯 43

북쪽은 기독교세가 강했거든.” 함경도가 그럴진대 ‘동방의 예루살렘’ 평양을 위시한 평안도는 더했을 것

이다. 그들 중 상당수가 빨갛게 물들어가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마귀’들을 피해 내려왔다.

빨갱이 ‘마귀’들을 피해 내려온 사람들

또한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 광산이든 공장이든 산업화의 기반이 닦여 있던 이북 지역에는 행세깨나 하

는 부자들도 많았다. 오늘날 유명한 경상북도 풍기의 ‘풍기 인견’은 평안도 영변 지역의 직물업자들이 남

하하여 그 터를 잡은 것이며 오늘날 을지로, 필동 주변에 유명하고 오래 된 냉면집이 많은 이유는 바로 남

산 아래에 많았던 일본인들의 적산 가옥을 차지하고 떵떵거린 평안도 부자들의 입맛을 만족시키기 위해

서였다.

그 부자들이 서울로 온 이유는? 당연히 날강도처럼 토지를 빼앗고 별안간 소작인과 자신이 균등하다고

우기는 불한당 같은 빨갱이들에게 쫓겨나거나 스스로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이었다. 더하여 그들은 대개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인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던 사람들이었다. 즉 친일파라는 딱지로부터 자유

롭지 않은 사람들이었으니 항일 빨치산을 했다는 나이 마흔도 안 된 ‘김일성 장군’의 정권과는 뜨악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북한의 ‘친일파 청산’이 완벽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남한보다는 그 강도가 강했고 친

일은 주요한 정치적 죄목으로 패가망신당하기에 알맞은 구실이었기에 한때 방귀깨나 뀌었던 이북 사람들

은 뭔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물론 수백만 북한 출신 피난민들이 다 위와 같은 특징을 보유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소수일

지도 모른다. 그저 폭격이 두려워서, 또는

전쟁터에서 벗어나려고 남하한 사람의 수

는 더 많았으리라. 그러나 “기독교인에

지주나 자본가 또는 공산당이 싫어하는

먹물들을 한켠으로 하고 친일파라는 공격

에 매우 취약한 과거를 지닌 이들, 그래서

무엇보다 공산당의 횡포에 대한 체질적인 혐오를 보유하게 된 이들”이 대거 남한으로 유입된 사실은 분단

과 전쟁의 파국, 그리고 그 이후의 대한민국 현대사에 이 깊고도 넓은 족적을 남기게 된다.

철저한 극우, 서북청년단의 피비린내

피상적으로나마 과거에서 오늘에 이르는 세월의 강물 위를 한번 거슬러보자. 그리고 그 강물 위에 뜬

작은 바위섬같이 남은 사람들의 흔적도 되짚어보자. 우선적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단어는 서북청년단이

다. 그들을 통해 남한 사람들은 생경한 이북 말씨를 생생하게 경험했고, 해방 공간에서 몇 년 활동한 이 단

‘이들’이 대거 남한으로 유입된 사실은 분단과

전쟁의 파국, 그리고 그 이후의 대한민국 현대

사에 이 깊고도 넓은 족적을 남기게 된다.

Page 46: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44

체의 이름은 지금도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에 역한 피비린내로 남아 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을 숭상하는 붉은 군대가 들이닥친 후 이를 갈며 38선을 넘어왔던 이북

사람들은 자신들의 터전을 빨갱이들에게 빼앗겼다는 분노가 턱밑까지 차 있었고 이 분노는 구약성서 속

의 신이 보여주는 ‘진멸’(盡滅)의 의지로 승화된다. 서북청년단은 1946년 11월 30일 지금도 남아 있는 종

로 YMCA회관 강당에서 그 깃발을 처음으로 올렸다. 처음으로 그들의 실력을 선보였던 것은 1947년 3월

1일 전국 각지의 3·1절 기념식장에서였다.

이들은 좌익 계열의 기념식을 습격하여 잔인한 테러를 가하면서 그 악명을 천하에 떨치기 시작했다.

“다 쓸어버리라우” 그들이 부르는 서북청년단가는 우리도 아는 독립군가를 개사한 것이었다. “동지는 기

다린다 어서 가자 서북에” 그들에게 서북은 이민족에게 폐허가 된, 돌아가야 할 예루살렘이었다. 자신들

은 바빌론 유폐 중인 셈이었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은 진멸해야 할 아말렉이고 블레셋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신앙은 ‘반공’이었다. 그 2대 단장이었던 문봉제의 솔직한 회고를 들어 보자.

“서청은 철저한 극우였다. 우익의 최선봉에 서서 닥치는 대로 좌익세력을 쳐부수는 거친 전위행동부대

였다. 피비린내 나는 살상, 바로 그 연속이 서청의 역사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서청의 제주도 파병은

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 국회 개원식 날 국회의사당 앞에서 소련군 철수 집회를 벌이는 서북청년회원들 (사진 : 위키피디아)

Page 47: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기획 보수의 민낯 45

바로 서청 활동의 하이라이트였다고 생각한

다 … 서청 회원들은 투우사처럼 용감했다”

그들은 투우사처럼 남한 농민과 노동자의 몸

에 칼을 꽂았고 그 피 냄새를 맡으며 흥분하

고 환호했다.

그들의 평안도 사투리는 가히 공포의 대

상이었으나 그들의 증오는 반도의 남쪽에서 키워지고 배양되고 전염돼 갔다. 우선 우익의 거두라 할 이승

만과 김구 모두가 이 “소중한 청년들”을 격려하고 고무했고 미군정의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충청도 출

신 조병옥은 “이들이 없으면 치안이 안 된다”면서 들은 체 만 체 했다. 남한의 지주 정당, 즉 한민당은 자

신들의 근거지에서 좌익이 득세할 기미가 보이거나 완력이 필요할 경우 지체 없이 서북청년단을 호출했

다. 전북 부안에서 서청원 한 명이 죽음을 당한 이후 수백 명의 서북청년단이 부안 전체를 쑥밭으로 만들

었던 ‘부안 사건’은 그 악명이 높지만 그조차도 서북청년단의 역사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었다.

사람 몸에 칼을 꽂으며 “하나님!”

‘반공’으로 뭉친 동향 사람들의 지원도 막대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 실업계를 주름잡던 북한 출신의 기

업가들이 그들의 물주였다. “같은 평북 출신인 당시 삼흥실업 전무 최태섭(현 한국유리 대표)을 비롯해서

서선하(강계), 박창일(정주), 이영(박천), 승상배(정주), 이환원(강서), 유윤화(박천) 등이 기부금을 아끼지 않

았어요. 황해도 출신으로는 지금의 신동아·대한생명 그룹 창업주인 최성모와 주동익·김원모(은율)등이

큰 성의를 표했습니다.”(문봉제의 증언)

여기에 기독교가 빠질 수 없다. 당시 서북청년단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제주 4·3 항쟁을 진압하

는 과정에서 사람 몸에 칼을 꽂으며 “하나님!”을 부르짖었다는 얘기가 끔찍하기로 유명하거니와 한국 기

독교계의 원로와 거목으로 추앙받는 한경직 목사 역시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

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

이 사게 됐지요.”(김병희 편저, 『한경직 목사』, 규장문화사, 1982. 55-56쪽)일요일마다 을지로 입구를 메우는

고급 차량과 사람들의 홍수로 붐비는 영락교회의 ‘청년들’의 주축은 바로 ‘서북청년단’이었던 것이다.

‘반공’의 기치 하에 가없는 폭력을 휘두르고 그걸 자본이 뒷받침하고 종교가 밀어주며 그 와중에 친일파

같은 구린 과거까지 슬쩍 뒤덮어 버렸던 것이 서북청년단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명을 더 기억해 보자. 문봉제의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서북청년단 부위원장 김성주

가 그다. 그의 생애는 조금 더 드라마틱하다. 평안북도가 고향으로 꽤 유복하게 살았다는 그는 돈 나오는

구멍을 아는 사람이었다. 김성주는 “미군 장교와도 개별적인 선을 대어 소위 보급작전에서 많은 수확을

“서청은 철저한 극우였다. 우익의 최선봉에

서서 닥치는 대로 좌익세력을 쳐부수는 거

친 전위행동부대였다.” 그들의 평안도 사투

리는 가히 공포의 대상이었다.

Page 48: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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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어냈다.”(임대식 “제주 4-3항쟁과 우익 청년단” <제주 4-3 연구>)는 기록을 비롯하여 수완 하나는 서북청년

단에서 따라올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서북청년단 부위원장까지 올라갔지만 청년단의 분화와 이합집산 과정에서 얼마 못 가 팽을 당하

고 만다. 팽 당한 이후 얼마 안 가 벌어진 전쟁판에서 그는 마침내 “어서 가자 서북에”에 동참한다. 진격하

는 UN군에게 편승하여 평양으로 들어간 것이

다. 거기서 그는 이승만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미군에 군사 작전권을 헌납하기는 했으나 이승

만의 기조는 줄곧 “한반도는 내가 다스린다”였

다. 새로이 수복된 북한 지역도 당연히 자신이

지명한 이가 다스려야 한다고 봤고 실제로 평

남 지사를 임명하여 파견한다. 그러나 UN군,

측 미군의 반응은 “누구 맘대로”였다. 북한 지역에 UN군의 군정(軍政)을 편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 UN군

측에 의해 임명된 평남 지사가 바로 김성주였다.

이렇게 이승만과 틀어진 김성주는 계속 이승만의 눈의 가시가 된다. 심지어 이승만의 숙적이라 할 조

봉암에게까지 접근하여 선거운동을 돕겠다고 나섰을 때는 신창균 등 조봉암 측 관계자들까지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아니 저 사람이 어떻게…” 죽산 조봉암을 끝내 죽여 버린 이승만이 이런 사람을 그

냥 놔 둘 리 없었다. 1954년 김성주는 “정부시책에 불만을 품고 사회민주당추진위원회를 결성하는 한편

이승만 대통령 살해음모를 꾸민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된다. 7년 징역을 구형받지만 이승만은 그 정도

에 만족할 사람이 아니었다. 선고공판 3일을 남기고 면회 간 가족들은 선고가 무기 연기됐다는 소식을 들

었고 며칠 뒤엔 사형이 선고됐다는 기사가 떴다. 변호사도 모르고 가족도 모르는 사형 선고. 그의 죽음이

밝혀진 것은 한참 뒤였다. 감옥에서 나와 원용덕 헌병 사령관의 집으로 끌려온 후 원용덕의 운전병의 권

총에 총살됐던 것이다.

반공을 위해 선지피 뒤집어쓰며 싸운 사람들의 말로

이 김성주의 굴곡진 생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기실 죽도록 공산당이 싫었고 반공

을 위해 목숨을 걸고 선지피를 뒤집어쓰며 싸웠던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이북 인맥은 대한민국이 굳어

져 가면서 오히려 그 힘을 잃게 된다. 위에서 문봉제

를 도왔던 북한 출신의 기업들은 이승만 정권이 정

책적으로 키운 경상도 출신 재벌들에게 밀려 쇠약

평양에서 김성주는 이승만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북한 지역에서 군정(軍政)을

편다고 선언한 UN군측에 의해 임명된

평남 지사가 바로 김성주였다.

북한 출신의 기업들은 이승만 정권이

정책적으로 키운 경상도 출신 재벌

들에게 밀려 쇠약해져 갔고 더욱이 5

·16 쿠데타 이후에는 몰락에 가까운

길을 걸었다.

Page 49: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기획 보수의 민낯 47

해져 갔고 더욱이 5·16 쿠데타 이후에는 몰락에 가까운 길을 걸었다. 북한 출신의 한 재벌이 쿠데타 세력

에게 부정축재자로 몰린 후 토로하는 말은 쓸쓸하기까지 하다.

“나는 해방 이전에 천만원대 (요즘 화폐로는 1조) 거부였소. 그런데 영남 재벌 아무개는 구리 동전 하나

없는 빈털터리였소. 그런데 왜 나만 부정축재자요”

군(軍)도 마찬가지였다. 전쟁 당시 한국군을 이끈 장군과 장교들 가운데에는 북한 출신들의 활약이 눈

부셨다. 평양이 고향으로 대동강의 얕은 여울을 알았기에 미군보다 먼저 평양에 입성해 미군의 약을 올렸

던 백선엽을 필두로 전쟁 초기의 참패의 총책임자 참모총장 채병덕도 평양이었고 6사단을 지휘하며 중공

군을 대파하는 파로호 대첩의 주인공이었던 장도영은 기독교 지역으로 유명한 평안도 선천이었으며 정일

권 참모총장은 함경북도 경흥이었다. 중공군에게 한 번 패한 이후 6사단 장병들에게 장도영이 했다는 훈

화는 무척이나 생생하게 전한다.

“디금부터 나가 죽으라우. 이 깍대기(껍데기)만 사람 깍대기 뒤집어 쓴 새끼들 나가 둑으라우. 너희 때

문에 사단이 망하고 유엔군이 후퇴했어. 저기 뒤에 츄럭 두 대 보이디? 그거이 우리 사단 던 대산(전 재산)

이야. 개지고 싶은 대로 다 개지구 가라우. 재보충은 없어. 있는 대로 개지고 가서 죽으라우” 이 평안도 물

뚝뚝 떨어지는 격한 선동을 한 장도영이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에게 어떻게 이용당하고 어떻게 버려졌

는지를 우리는 안다. 이후 한국 군부에서는 ‘알래스카 토벌작전’(함경도 군맥 숙청), ‘텍사스 토벌 작전’(평

안도 군맥 숙청)같은 영화 같은 일들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김성주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가 선거가 무기 연기되고 며칠 뒤에 사형이 선고됐다는 기사가 떴다. (사진 : 산하의 썸데이서울)

Page 50: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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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를 호출하는 시대는 그만

월남한 북한 출신들은 그 투철한 반공의 의지와 증오의 힘으로 한국 현대사에서 인상 깊은 활약을 했

고 또 한때 남한 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지니기도 했지만 점차 그 세력은 희미해져 갔고 남한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월남하면서 지니고 왔던 사고 체계와 행동 방식, 그리

고 그들이 추앙했던 모토는 그대로 남한 사회에 이식되고 뿌리 내리고 열매를 맺었다. 곧 죽어도 북한 얘

기만 나오면 파블로프의 개가 되는, 이미 종교화된 ‘반공’과, ‘하나님!’을 부르짖으며 사람을 죽인 서북청

년단과 맞먹는 신앙으로 무장하고 단군상의 목을 자르고 인도의 불교성지에서 땅 밟기 하는 배타성의 갑

주로 거듭난 기독교, 그리고 부에 대한 숭상과 사익을 침해하는 이들에 대한 격렬한 반발과 “일본의 지배

는 하느님의 뜻”이라는 엉뚱한 총리 후보의 발언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누구도 나에게 ‘원적’을 묻지 않는다. 이미 원적이라는 단어를 아는 사람조차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원적’은 한국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는 의미를 지닐 것이다. 원적이건 본적이건 휴전선

이북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이들에게도 분단

과 전쟁 과정에서 스스로에게나 밖으로나 파

괴적이었던 일부 월남민들이 남녘 사람들에게

남겨 준 그림자는 꾸준히 유전되고 계승돼 왔

기 때문이다. “아무개는 북으로 가 버려라”고

부르짖었던 장관 후보자부터 광주항쟁의 희생

자에게 홍어 운운하는 저주를 서슴지 않는 일

베에 이르기까지 그 예를 어찌 일일이 헤아릴 수 있으랴. 나 자신 월남민의 후예로서 다시는 그 광기가 출

몰하지 않기를 바라며 광기를 호출하는 시대가 오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아울러 그 광기가 결코 서먹

하지 않은 이들이 대한민국의 자칭 우익이자 주류로 자임하고 있음이 소름이 돋을 만큼 무섭다. 부디 우

리 삶에 평화 임하시기를.

분단과 전쟁 과정에서 스스로에게나 밖

으로나 파괴적이었던 일부 월남민들이

남녘 사람들에게 남겨 준 그림자는 꾸준

히 유전되고 계승돼 왔다.

Page 51: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시론 49

제1야당의 왼쪽 블록?빅텐트론을 해부한다김민하 <미디어스> 기자

시론

진보정치는 절멸의 위기다. 제 때에 혁신의 기회를 잡지 못해 정체하게 된 진보정치는

이제 두 갈래, 세 갈래로 찢어진 상태에서 최악의 위기에 몰렸다. 과거 진보정당을 지지했

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통합진보당, 정의당, 노동당 등의 이름을 들이대면 손사래를 친다.

현장의 노동조합들도 과거 민주노동당 등 진보정당에 정치자금을 몰아주던 관행을 버리고

실제로 힘을 갖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제1야당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존경받던 노

동운동의 원로 활동가들은 이미 2012년 대통령 선거 때 누구는 문재인 캠프로, 누구는 안

철수 캠프로 제각기 살 길을 찾아 떠났다. ‘친환경무상급식’의 기반을 만들어 낸 지역의 시

민운동도 이제는 ‘박원순’으로 대표되는 제1야당에 사실상 흡수돼버렸다.

그래서 차라리 양당제적 질서

하의 진보정치를 고민해보라는

건 어찌보면 이 시점에서 제기될

수 있는 당연한 주장일 수 있다.

진보정당운동이 제1야당 내에 들

어가서 ‘진보블록’을 형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 정당활동을 펼

치며 선거에 대응하는 것이 차라

리 진보정치를 제대로 구현하는 지름길일 수 있다는 지적이 실제로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

다. 존립마저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독립된 진보정치보다는 웬만한 지역에서라면 안정적

으로 30% 이상의 득표를 보장받을 수 있는 제1야당의 일원이 되는 게 훨씬 위력적인 정치

를 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진보정당운동이 제1야당 내에 들어가서

‘진보블록’을 형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선거에 대응하는 것이 차라리 진보정치

를 제대로 구현하는 지름길일 수 있다는

지적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Page 52: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50

일단은 해결하긴 한다

진보정치가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실제로 제1야당의 정치가 해결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예를 들

어보자면 새정치민주연합의 을지로위원회 활동 같은 것이 그렇다. 일전에 새누리당은 을지로위원회의 행

패에 대해 논평을 낸 일이 있다. 사실상 기업을 협박하여 오너의 국정조사 출석 등을 종용해 민원이 끊이

질 않는다는 것이다. 새누리당의 관점으로 보면 이것은 협박이며 횡포이지만 사실 우리의 관점으로 보면

이런 행위야말로 진보정치가 국회에 진출해서 해보고 싶었던 일 중 하나가 아니었는가?

이외에도 을지로위원회는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나 티브로드 등 케이블기사들의 파업 투쟁 등

에 적극적으로 결합하기도 했고 청소노동자의 직접고용 등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에 대한 토론회를 주최

하기도 했다. 토론회에 참여한 패널들의 면면을 보면 다 알 만한 사람들이다. 과거 민주노동당이 주최하

는 토론회에 단골로 얼굴을 내비치던 인사들

이니 그들끼리의 토론을 보고 있자면 새삼스

런 향수에 젖기도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들이 실제로 표면적이고 단기적이라는 한계를

드러내더라도 문제를 일단은 해결하긴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제1

야당이기 때문이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이전에도 제1야당이 핍박받는 민중의 편에 서겠다는 액션을 취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들의 이런 전력 덕분에 새로운 정치를 잠시나마 고민했던 인사들이 대거 제1야당의 품에

안기는 경우가 주기적으로 있었다. 제1야당이 ‘총재’를 모시던 시절에는 이를 ‘젊은 피 수혈’이라고 부르

기도 했다. 중세의 마녀를 소재로 한 기담에나 나올 것 같은 그로테스크한 느낌의 수사다. 이제는 486으

로 지칭되는 일군의 학생운동권 출신 인사들 역시 이 과정을 거쳐 제1야당의 정치에 합류했다. 과거 남더

러 변절이니 반동이니 하는 수사를 남발했던 이들이 제1야당의 품에 안긴 지 멀게는 15년이 흘렀는데 그

제1야당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오른쪽으로 갔으면 갔지 더 왼쪽으로 자리를 옮겨오진 않았다.

‘진보블록’의 허와 실

마찬가지의 예로 제1야당의 내부에 그놈의 ‘진보블록’이 형성된 예가 종종 있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

는 이 못난 486 정치인들이 손학규, 정동영, 정세균으로 대표되는 빅3 계파에서 독립하겠다며 ‘진보행동’

이란 이름의 모임을 만들어 발족식을 열기도 했다. 이 자리에는 위 빅3 계파의 수장 및 천정배, 김부겸 등

당시 거물급 인사들이 축사를 하기 위해 총출동해 자리를 빛냈다. 그 중에는 훗날 통합진보당을 건설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는 심상정이라는 이도 있었다.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당시 이들은 제1야당 내의

이들이 실제로 표면적이고 단기적이라는

한계를 드러내더라도 문제를 일단은 해결

하긴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제1야당이기 때문이다.

Page 53: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시론 51

진보블록을 자처했지만 지금은 어디서 무슨 진보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어느 날 갑자기 무슨 세례라도 받은 것인양 ‘보편적 복지’의 깃발을 높이 들어올렸던 정동영 그룹 역시

그런 행세를 한 바 있다. 이들은 제1야당의 당 강령 1조에 복지국가를 넣자는 내용의 노선투쟁을 벌였는데

당시에는 보편적 복지가 유행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이런 과감한 제안이 별 이의없이 관철될 수 있었다.

하지만 2012년 대통령 선거 이후

몇 차례의 ‘좌클릭’ 논란을 겪고 난

지금 제1야당의 강령에는 “보편적

복지를 통한 정의로운 복지국가를

지향하되 선별적 복지와의 전략적

조합으로 복지사각지대를 해소하

고, 사회적 합의와 재정건전성을

바탕으로 책임 있고 지속가능한 복지정책을 추진한다”고 서술돼있다. 복지국가를 적당히 만들다 말겠다

는 건지 만드는 척만 하겠다는 건지 통 알 수 없는 표현이다.

누구도 그 정확한 내용을 알지 못하는 ‘새정치’의 전도사로 안철수라는 걸출한 이공계인이 나타나고

나서는 이런 ‘진보블록’의 유행도 한 물 간 취급을 받게 됐다. 안철수라는 정치인이 유행시킨 말 중에는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라는 게 있다. 꼭 이와 같지는

2012년 대통령 선거 이후 몇 차례의 ‘좌클릭’ 논란

을 겪고 난 지금 제1야당의 강령에는 복지국가를

적당히 만들다 말겠다는 건지 만드는 척만 하겠다

는 건지 통 알 수 없도록 서술돼 있다.

새정치연합 을지로위원회의 300일 행보 을(乙)살리기 대회 (사진 : 참세상)

Page 54: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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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더라도 유사한 어법을 반복해서 사용한 탓이다. 정치인 안철수가 제1야당과 분리된 제3지대 정당 창당

을 추구할 당시 그는 이러한 어법을 절묘하게 사용해 제1야당과의 변별력을 확보하려 했다. 복지에 대해

물으면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를 적절히 조합하겠다”고 하고, 민주화세력에 대해 물으면 “민주화와

산업화를 둘 다 계승하겠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이 애매모호로 점철된 말들이야말로 ‘진보’의 유행이 끝

났으며 ‘중도’가 유행인 시대가 열렸다는 신호탄의 탄성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빵!

그 안에서 진보정치 할 정신 없다

물론 제1야당 내에서의 진보블록이 번번히 힘을 못 쓰는 신세로 전락하는 것에 대해 그런 반론을 펼 수

도 있을 것이다. 제1야당 내의 진보주의자들이 그만큼 어려운 처지라는 것 아니냐, 그러니 들어가서 이들

과 연합해 힘을 키우면 더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지금이라도 어서 제1야당의 대문을 노크해보아

라…. 그런데 이것은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가?

제1야당의 비극은 이들의 구성원들이 모두 실제적인 영향력을 갖는 권력과 맞닿아있다는 것이다. 만일

사람의 이념을 두뇌에서 끄집어내어 얼마나 좌익적인지를 평가해 점수를 매기고 가장 새빨간 사람의 것

을 맨 좌측에, 가장 파란 사람의 것을 맨 우측에, 나머지를 그 사이에 순서대로 일렬로 늘어놓는다면 아마

제1야당 내에서 좌측을 기준으로 10위 안에 드는 사람 중에는 박용진 홍보위원장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는 좌익을 전면에 내세우는 학생운동권 출신이며 민주노동당에서 대변인을 역임했고 우리의 전신인 진

보신당의 지도부로 활동했으며 제1야당의 품에 안겨서도 지속적으로 진보정치의 필요성을 강조한 인사이

다. 이 분은 불행하게도 요즘 언론 등에 의해 ‘신주류’로 분류된다. 신주류란 무엇이냐 하면 구주류의 치

하로부터 제1야당의 당권을 탈환해온 정의의 사도들로서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 체제의 당권파를 일컫

는 말이다. 무려 그 당에서도 당권파에 속한다니 다행이기는 한데, 김한길-안철수 체제가 일관되게 내세

우는 것 중의 하나가 당 노선의 중도화라는 점을 되새겨 보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물론 본인들(김한길, 안철수, 박용진)은 자기 자신을 진정한 진보의 화신으로 주장할 지 모르겠으나 언론 등

이 밖에서 평가해보니 그렇다는데 무엇을 어쩔 것인가?

이것은 한낱 어떤 기회주의자의 처신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진보블록을 만들든 좌파블록을 만들든 제

1야당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당권까지 잡기 위해서는 실제 권력을 가진 유력인사들과의 합종연횡을

각오해야만 한다. 작은 정당인 노동당

에서 통용되는 조직, 자금과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도구들이 살벌하게 오가는

현장이다. 이 권력들은 실제로 세상 만

사를 주무를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중앙

부처 관료들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을

이런 판국에 그 무슨 한가한 진보정치를 얘기

하는가? 국회의원 공천을 받거나, 아니면 기초

지자체장 공천이라도 쟁취하거나, 그도 아니면

초라한 당직 하나라도 붙들고 있어야 하는데.

Page 55: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시론 53

뿐만 아니라 경찰, 검찰 심지어 국정원과 같은 기관에까지 그 마수가 뻗쳐있다. 이런 판국에 그 무슨 한가

한 진보정치를 얘기하는가? 국회의원 공천을 받거나, 아니면 기초지자체장 공천이라도 쟁취하거나, 그도

아니면 한가한 신세가 되더라도 초라한 당직 하나라도 붙들고 있어야 하는데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리고 이 어려움은 박용진 홍보위원장 뿐만 아니라 제1야당의 품에 안긴 모든 초보 정치인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일이다. 정신을 차렸을 땐 무슨 계파의 핵심 측근 정도로 분류되는 입장이 돼서 그 질서로부터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다. 매일 매일이 그런 계파들끼리협잡의 연속이다. 진보정치 할 정신없다.

진보정당운동이 없었다면 제1야당의 진보 흉내도 불가능

제1야당이 정국의 요동에 따라 진보정치를 하는 척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진보정당운

동이 이미 그 길을 닦아 놓았기 때문이다. ‘무상급식’의 구호를 빌려 2010년 지방선거를 싹쓸이 한 것도

진보정당운동이 이러한 정책의제를 미리 발굴해놓았기에 가능했고, 을지로위원회의 종횡무진도 진보정

당운동이 노동운동 등과 정치의 접점을 만들

어 놓았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으며, 박원

순 서울시장과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탄생

도 진보정당운동이‘시민운동’들의 성장에

일정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진

보정당운동이 없었다면 제1야당의 진보 흉내

도 있을 수 없었다. 제1야당 내부에 진보블록

의 구성이 가능하기 때문에 진보정당운동 역시 지속이 가능한 게 아니다. 현실은 정확히 이의 반대다.

이런 얘길 하면 누군가는 이런 반론을 내놓을 것이다. “시대를 앞서가며 의제를 선도하는 것도 좋지만

너무 권력의지가 없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이 역시 제1야당의 프레임에 갇힌 반론이다. 진보정치는 세

상이 진보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세상이 진보한다는 것은 진보정당이 집권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집권하는 날이 오면 우리 왼쪽에는 또 다른 진보정당이 있을 것이다. 우

리는 아마도 나라를 다스리는 그 잘난 일을 하기 위하여 타락하고 변절할 것이며, 이 시기에는 우리 왼쪽

에 있는 진보정당이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싸움을 걸어올 것이다. 진보정당운동에 필요한 희생과 헌신

이란 내 돈과 시간을 조직을 위해 마구 쏟아붓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나

자신이 퇴물이 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이런 역사의 정당하고 바람직한 흐름에 복무하는 것을 의미하

기도 한다. 그러니 이런 숭고한 결의를 가슴에 담고 사는 우리를 더 이상 모욕하지 마시라. 레닌은 혁명을

앞두고 10년 간 비참한 망명 생활을 했다.

제1야당이 정국의 요동에 따라 진보정치를

하는 척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은 뒤집어 말

하면 진보정당운동이 이미 그 길을 닦아

놓았기 때문이다.

Page 56: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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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57: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여성 진보정치 열전 55여성 진보정치 열전 55

6.4 지방선거가 끝났다. 노동당에서 출마한 후보들 중 기초의원 후보

는 총 25명, 그중 여성후보는 다섯 명. 여성정치열전도 씨즌2로 접어

든다. 인터뷰 대상도 연령부터 확 낮추기로 했던 차. 젊고 활기찬 여성

정치인으로 누가 좋을까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수도권에서 기초의원으

로 출마한 손은숙 당원을 모두 추천한다. 손바느질과 재봉틀로 만든

선거 홍보물, 어깨띠와 플랭카드도 특색 있었고 낙선인사 유세도 인상

깊었다. 은평으로 향했다.

인터뷰 : 심재옥·최혜영여성위원회정리 : 최혜영서울 구로 당원

사진 : 정정은 편집실 부장

완전 후보 체질인 것같아요

여성 진보정치 열전 5

자체 발광 햇빛 에너지, 손은숙

Page 58: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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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은숙! 하면 활짝 웃는 쾌활한 웃음과 하이톤의 목소리부터 연상된다. 상큼하고 발랄하다. 과거 선거

운동에서 늘 발군의 율동과 춤솜씨도 보여주었다. 녹색의제에 관심이 높아 태양과바람에너지협동조합 기

획팀장,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원으로도 일하고 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탄탄한 조직력으로 당의

지방선거 방침을 충실히 집행한 서울 은평당협의 공동위원장이기도 하다. 인터뷰는 은평 민중의집 ‘랄랄

라’에서 최혜영, 심재옥이 함께 진행했다.

선거 되게 재밌어요, 전 후보가 체질인 것 같아요

점심때 만나서 간단히 근처에서 밥을 먹고 인터뷰를 시작해 볼까 하고 약속을 12시로 잡았다. 그런데

이런, 미안해서 어쩌나 손은숙 위원장이 손수 곤드레 나물밥과 감자국, 반찬까지 만들어 점심상을 차려

주었다. 야무진 음식솜씨에 모두 감동! 맛있는 밥을 먹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앉자마자 다짜고짜 지방선거 끝나고 어떤지 선거평가와 근황을 섞어 물었다. 지역에 자리잡고 출마를

결심하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을까?

“은평에서 1년 반 정도 본격적으로 지역활동을 하고 치룬 선거, 첫 출마죠. 한 번 출마하면 책임지고 10

년을 활동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고민이 많았어요. 작년 연말부터 출마를 본격화해야 하는 시기에 해야 하

나 말아야 하나? 기초를 해야 하나 광역을 해야 하나? 지방선거 끝나고 이 당이 안정적으로 유지될까?

2010년부터 있었던 혼란스런 상황이 또다시 반복되지 않을까? 당명 결정과정에서 서로 상처주고 받은 것

도 그렇고. 그래서 선거준비도 늦게 했어요. 올 3월 은평구의회 해외시찰 보고서 표절 건으로 기자회견도

하고 4월 주민감사청구도 준비했어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는 바람에 지역에서 캠페인은 조용히 진행했

죠. 주민감사청구 조건인 200명 이상은 채웠지만 은평구 지방선거 이슈를 해외시찰로 만들진 못했어요.

또 3월 말 예비후보등록을 했지만 선거운동은 못하고 한 달 동안 아파트경비노동자 실태조사를 하며 지역

사업을 병행했어요.”

선거 끝나고 당 밖의 행사와 일정에 더 열심히 다니게 된다며 지역의 협동조합 등에서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과도 지속적으로 만나고 있단다. 은평당협으로서는 기초의원 말고도 광역의원을 네 명씩이나 내보

낸 선거였다. 만만치 않았을 텐데. 선거준비는 어땠는지 힘들지는 않았는지 물었다.

“선거라는 과정이 지역에 당을 알리고 이제까지의 활동을 선거를 통해 평가받거나 앞으로 더 잘하겠다

고 지역주민들에게 약속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득표 목표는 12.3%로 잡았어요. 4년 전 출마한 이수현 선

배 득표율이었어요. 그걸 넘기는 게 목표였죠. 같은 후보가 나온 게 아니고 그때보다 당 조건이 나빠졌으

니. 은평 을 쪽에는 시민사회가 되게 많은데 은평 갑 쪽은 노동당 밖에 없어요. 기초 가 나 다 라 선거구가

은평 갑인데 그중 제가 출마한 라선거구 빼고 모두 무투표 당선이었어요.(모두 허탈한 웃음)이번 선거는 지

역에 이런 애가 있구나 하는 걸 알리는 게 컸어요.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선거를 임해서 되게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당원들이 생각보다 많이 자발적으로 함께 해줬고요. 그래서 나는 정말 후보체질이구나 하는

Page 59: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여성 진보정치 열전 57

생각이 들었죠.”

뭐가 그렇게 재미있었을까? 정말 힘들지는 않았을까? 여성후보들에겐 남모르는 어려움이 있기 마련

이다. 그런 속깊은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일단 저는 스스로 페이스 조절을 잘하는 스타일이라 별로 힘든 것 없었어요. 저 완전 후보체질인 것

같아요. 당선에 마음을 비워서 그런가? 선거 내내 당선될 거라고 착각한다는 그 무서운 ‘후보병’도 안 들

던데요?(모두 웃음)”

오랜 당직활동과 당협 사무국장으로 실무를 해온 손은숙 위원장은 후보가 5명이나 되는 조건과 선거

이후 재정 상황이 걱정되어 유급사무원 쓰는 것도 내키지 않았고 공보물도 축소했다고 한다. 전략적으로

집중하기로 한 기초의원 선거비용도 1천만 원 정도밖에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여성 후보들은

당이 어려우면 늘 그렇게 스스로를 조절해 가며 당선 욕심도 없이 알뜰하게 선거운동을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짠하게 밀려온다.

그런데 실제 선거운동 과정을 들어보니 만만치는 않았다. 손은숙 위원장 선거구는 호남출신이 무척 많

아 부산말씨를 쓰는 여성 후보에 대해 그리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선거운동 하러 다니면 당연히 ‘통진

당 아니냐? 이석기, 이정희 당 아니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런 질문조차 말을 걸어 주는 것

자체가 너무나 반가웠다고 하니 유권자들의 무관심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된다. 늘 활짝 웃으며 노동

당을 설명하고 선거구 구석구석 적지 않은 고갯길을 거침없이 도보로 걸으며 선거운동을 했다고 한다. 등

한창 선거운동 중인 손은숙 선본 (사진 : 민들레울)

Page 60: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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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다져진 체력 덕분에 후보 이동용 차량도 필요 없었다고.

한편 선거 직전에 있었던 스토킹 문제는 지금까지 골머리다. 지면으로 상세히 밝히진 못하지만 ‘랄랄

라’라는 공간, 또 대중 앞에 그대로 드러나는 여성후보로서 감내해야 하는 진상 남자 유권자 또는 당원들

때문에 무척이나 속앓이가 심해 보였다. 또한 선거운동 경험이 별로 없는 선본에서 실무경험 많은 여성후

보는 모든 선거 전체 정책부터 홍보까지 일일이 신경써야 했다. 선거 끝나고 각 후보들 회계보고까지 이

것저것 도맡아서 일을 처리했다는 이야기를 듣다보니 ‘어딜 가나 여성후보들은 후보역할만 충실히 할 수

있는 행복한 사람과 달리 선거에서조차

많은 돌봄노동을 해야 하는구나’하는 생

각에 또 짠했다.

그런데도 별로 지치지 않았고 힘들지

않았다고 환하게 웃는데 그 웃음이 햇빛

같다. 남들 다 처져있어도 스스로 빛나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어서 일을 굴리는 능력이 있는 여성정치인이다. 그 에너

지는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궁금했다.

저는 트러블 메이커였어요

부모님 고향이 합천, 딸 넷 중에 첫째 딸. 종손인 아버지는 아들을 낳을려구 계속 딸을 낳았다고 한다.

굉장히 보수적인 동네에서 ‘가시나들이 무슨 공부? 애비 등골이나 빼묵지’라고 집안 어르신들이 호통치

는 와중에 아들이 없는 하늘이 주신(?) 가정환경 덕분에 오히려 아이러니하게 딸들이 모두 자유롭게 크고

대학도 다니며 공부도 할 수 있었단다. 그래서 집안에서는 상대적으로 차별을 별로 받지 않고 살았단다.

그런 기질이 이후 차별에 당당하게 대응할 수 있는 힘을 주기도 했던 것 같다고 한다.

“제가 대학 때는 엔엘 학생운동을 했어요. 부학생회장 하면서 총학생회 회의 가면 한총련의 전민항쟁

노선 등에 대해 이런저런 문제제기를 많이 했는데, 후보 학습조에서 배제 당하는 등 이런저런 제지를 많

이 당했죠. 대학 졸업 뒤에는 식품회사 실험실 연구원으로 일하며 소시민으로 살았어요. 그러다 인터넷에

서 민주노동당을 보고 내발로 가입하고 여기까지 온 거죠.”

재밌는 일화가 하나 있다. 회사생활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돌아가니 선후배 동기들(엔엘)이 무척 반기던

것도 잠시. 현재 통진당 주요 간부인 당시 부산시당 부위원장이 집회에서 북한 핵무기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며 사과를 요구하고 시당 운영위에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자, 그때부터 모든 선후배 관계에서 소

위 ‘찍혔다.’ “제 동기, 선후배들은 통일여성단체나 지금 통진당 주요 활동가들이예요 (모두 웃음)제가 계

속 트러블 메이커였죠.”

손은숙은 남들 다 처져 있어도 스스로 빛나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어 일을 굴리는 여성정치인이다.

Page 61: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여성 진보정치 열전 59

지금 진보정당 정말 ‘no답’ 아니예요?

그녀에게 이번 선거는 첫 출마다. 향후 지역에서 진보정당 여성정치인으로 성장하려면 차기 선거만큼

은 좀 더 준비된 선거, 당선권을 넘보는 선거를 해야 할 텐데 당의 여건이 어렵다 해도 이것은 피할 수 없

는 과제다. 선거 이후 앞으로 어떻게 다음 선거를 준비할 계획인지 물었다.

“아, 이런 거 해야겠다는 욕심이 두 가지 생겼어요. 낙선 인사 때 호응해주신 이 분들과 선거 끝나고 만

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해봤더니 하나는 《은평시민신문》이더라구요. 2주에 한 번 신문을 갖다주는 거죠.

세탁소며 미용실이며 제가 시민기자라고 인사하며 갖다드려요. 지금 스무 군데 정도 돌리는데 이걸 다음

선거 때까지 400군데로 늘리면 당선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들어요. 또 저희가 선거준비로 ‘우리동네 녹

색대안 만들기’라는 걸 은평녹색당하고 같이 해요. 그것을 계속해서 의회 모니터링을 하고 주민들을 <랄

랄라> 이름으로 모아서 우리동네 구의원 감시하고 정보공개, 예산공개 등을 주민들과 같이 해보고 싶어

요.”

다섯 명이 출마한 은평구 라선거구(신사1,2)에서 새정치의 장창익 후보가 48.02%, 새누리당의 조수학

후보가 30.24%를 얻어 각각 1, 2위로 당선됐다. 손은숙 후보는 1,622표, 6.97%를 득표했다. 진보정당의

타 후보들과 비교해서 적지 않은 득표였다. 그러나 애초 목표였던 10%를 넘기지는 못했다. 어떤 한계가

있었을까?

‘랄랄라’에 비치된 <은평시민신문>과 은평당협의 소식지 <꿈틀>

Page 62: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60

“일단은 당의 목표가 광역 출마이니까

당협 역량이 분산된 그런 부분도 있고요.

시민사회나 지역기반이 부족했어요. 녹색

당 후보가 출마한 쪽은 생협이나 도서관 등

시민사회 기반들이 있어 그 활동가들이 선

거운동기간 동네에 입이 되어줬던 것 같아

요. 녹색당이 부담스럽지 않은 것도 있고

요. 우리는 그렇지 못했죠. 노동당은 지역

에서 까칠한 이야기를 해 와서 시민사회랑

은 불편한 관계도 있고 노동당이라는 당명

을 부담스러워했어요. 제게 은평에 와서 출

마하라고 꼬신 도서관 관장을 하는 언니가

그러더라구요. ‘신사동 아줌마들도 도서관

에 많이 오는데 노동당 찍으라고 말이 안

떨어진다’고. 선거 끝나고 나니까 열심히

뛴 당원들일수록 실망을 많이 한 것 같아

요. 조금 이완되었다가 선거평가를 6월말

부터 시작하기로 했어요.”

당협은 그렇다 쳐도 당으로선 이후 어떤

전망을 가져야 할까? 진보진영 재편에 대해

서도 이러 저런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손은

숙위원장 본인 생각은 어떤지 질문을 했더

니 솔직하게 심경을 털어놓는다.

“우리요? 답이 없는 것 같아요. 희망이

없다기보다는 그림이 안 그려져요. 그래서

제게 묻는다면 ‘노답’이에요.(웃음) 진보진

영 그 누구도 재편할 수 있는 역량이 어느

단위에도 없는 거 아냐? 그래서 저는 그냥

흐름에 맡겨야지 그러구 있어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제안을 한다고 해서 그렇게 될 것 같지도 않고. 사

실 이번 선거, 저는 당의 방침대로 하면 목표가 달성될 줄 알았어요.(웃음)저도 그런 점에서 순진했죠. 선

거는 초등학교 산수가 아니라 사회과학인데 저는 산수를 한 거죠. 그런데 앞으로 당이 없으면 출마할지

안 할지 모르죠. 정당운동의 일환으로 출마하는 건데…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열심히 자전거 패달을 밟

손은숙 하면 활짝 웃는 쾌활한 웃음부터 떠오른다. 그 웃음이 햇빛 같다.

Page 63: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여성 진보정치 열전 61

고 있는 느낌도 들어요. 근데 그것도 현재로선 필요한 거라고 봐요. 시간이 지나면 정리되겠지 그러고 있

어요.”

다소 대책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낙관적인 사람이다. 진보정당 재편에 대해서는 녹색당까

지 같이 재편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강조한다. 당의 정체성에 대한 답답함도 숨기지 않았다.

“노동당은 또 제일 애매한 정당이에요. 지역에서 에너지협동조합을 만들고 지역단체들 엮어 밀양송전

탑 반대대책위 활동을 열심히 하니, 저더러 왜 노동당에 있냐고 물어요. 노동에 대한 기반은 사실 통진당

이 제일 많이 갖고 있어요. 정치적 메리트는 대중적 스타가 있는 정의당에 있구요. 그 세 당 사이에서 노동

당은 우리만의 메시지가 없잖아요? 탈핵희망버스도 처음에 우리가 기획해서 집행 과정에서도 상당한 실

무를 했지만 언론엔 녹색당이 한 것처럼 나오고.”

아이고 난 진즉에 녹색당 갈려구 한 사람인데

녹색당 이야기가 나오다 보니 지난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2011년인가? 통합 독자 논쟁 끝나고 비상대

책위원회 시절 중앙당에서 손은숙 위원장을 사정사정해서 불러들이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녀는 녹색당 상

근자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2011년 통합-독자 논쟁 한창이던 때가 녹색당이 막 동을 뜨던 시기였어요. 녹색사회당을 만들 수 있

는 조건이 되지 않을까 생각 하던 차에 이런저런 고민을 많이 나누던 녹색당 쪽 사람들이 계속 같이 하자

고 제안했어요. 9.4 당대회를 앞두고 두 달 동안 필리핀으로 도망가 있었는데 그때도 계속 메일이 왔죠.

녹색당에 초기 상근자로 들어가 진보신당과 같이 할 수 있도록, 그래서 녹색사회당으로 갈 수 있도록 역

할을 하면 되지 않겠냐고 꼬시는데 그대로 넘어갔어요. 녹색당에 상근하려고 부산에서 짐 싸갖고 올라오

는데 홍세화 선생이 진보신당 대표를 맡는다는 얘기가 들리는 거예요. 올라오는 무궁화 기차 안에서 마음

이 요동쳤어요. 2002년, 충남공주에서 회사에 다닐 때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는데 당원이 아홉 명밖에 없

었어요. 그 때 대선을 앞두고 홍세화 선생님께 강연회를 요청했는데 흔쾌히 공주까지 오셔서 지역 주민들

100여 명이 모였고 그 이후 농민회며 공주대 학생들이 많이 입당했어요. 홍세화 선생님껜 너무 고마운 마

음과 존경심 이런 게 있었죠. 그런 홍세화 선생이 명망가들 다 떠난 자리에서 당대표를 하겠다는데 도저

히 녹색당으로 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녹색당 분들께 ‘너무 죄송한데 도저히 못하겠다’고 얘기하고 부

산으로 내려갔죠. 그런데 최혜영 선배가 전화해가지고 중앙당 회계 비상이라고 제발 와서 도와 달라 해서

12월 말에 정당회계가 어떨지 뻔히 아니까 외면할 수 없어 올라와 중앙당에서 일했죠. 그 때는 ‘그래 이

당 망할 것 같으니까 설거지나 하러 올라가자’ 그런 심경이었는데 그 이후 총선 때도 안 망하고… 허 참

인생이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모르는 거죠. 이 당에서 내가 출마도 하고, 호호호”

그러게, 과거를 이야기하며 우린 모두 무릎을 쳤다. 사람 인생 어디로 튈지 모른다. 순간의 선택이 많

은 걸 좌우하기도 한다. 그럼 그녀가 생각하는 녹색정치는 무엇일까? 노동당도 적녹정치를 이야기하는데

Page 64: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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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은숙의 녹색정치, 지역정치는 무엇일까?

“녹색이라는 게 환경만 의미하진 않죠. 풀뿌리 자치와 평등, 다양성 이런 운동을 다 포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녹색당이 따로 있는 상황에서는 우리가 이야기하는 녹색은 계속 장식일 거라는 고민도 있어

요. 녹색당도 누구와 함께 하는 어떤 녹색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근데 현실적으로 녹색정치를

고민하고 활동해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녹색당에 있고. 제가 녹색정치에 관심을 가진 건 진보신당 초

기에요. 지속가능한 당활동, 지역에

서 뭘 하려면 무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나의 무기를 뭘로 삼을

건가 고민하며 친구들과 학습하다가

에너지 문제에 혹했죠. 사회의 에너

지 시스템이 바뀌면 사회도 달라질

수밖에 없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지

역의 에너지 전환을 무기로 삼아야겠다 싶어서 2008년 총선 끝내고 사람도 안 뽑는데 에너지정치센터(현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인턴으로 들어가 공부하고 활동하면서 녹색정치에 관심 가지게 되었어요.”

누군가는 당 활동가를 ‘1인 정치 자영업자’로 부르기도 한다. 대다수 당의 활동가들의 공통된 어려움은

생계다. 대놓고 물어봤다. 작년까지는 당협과 협동조합에서 나오는 약간의 활동비로 생활을 유지해 왔는

데 이번에 선거도 있어 전세를 줄여 그 돈으로 생활비를 메꾸며 활동했다고 한다. 다음 선거에 누가 나오

더라도 재정이 가장 큰 고민이고 대책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한다.

당에서도 <랄랄라>에서도 알뜰한 살림꾼인 그녀, 어떤 정치인이 되고 싶은지 물었다. 그동안 선배들이

지역에 가면 당성이 흐려지는 걸 보고 약간의 오기 같은 게 생겨서 지역활동의 뿌리를 내려보자는 생각이

컸다고 한다. 과거 조승수 의원 보좌관 시절에 울산북구를 보면서도 진보정당의 지역 기반이 취약한 것을

보고 무척이나 허탈했다고 한다.

“어쨌든 한 번의 선거로 일희일비 하지 않으면서 지역 당협의 모델, 정치인의 모델 그런걸 만들고 싶어

요. 시도해보고 또 실패하더라도 계속 해보고 싶어요. 지역에서 사람들 만나고 소소하게나마 변화되는 게

보이니 지역은 중앙보다 훨씬 재밌어요. 선거 끝나고 상태가 좋은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구박하던데요?

하하하” 라며 답을 대신한다.

노동당의 칙칙함을 걷어내 주는 손은숙, 늘 실천하는 열정을 갖고 있는 햇빛같은 에너지를 갖고 있는

여성 정치인, 앞으로 그녀는 햇빛이 비추는 길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지역에서 사람들 만나고 소소하게나마 변화되는

게 보이니 지역은 중앙보다 훨씬 재밌어요. 선거

끝나고 상태가 좋은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구박

하던데요?”

Page 65: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정책포럼 63

자초지종 1 - 최고보다 높은 최저?

지난 6월 20일 고용노동부는 실업급여(정식명칭 구직급여) 1일 상한액을 10,000원 인상하

고, 하한액을 최저임금 대비 90%에서 80%로 인하하는 ‘고용보험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

다.

현행 고용보험의 실업급여액 원칙은 평균급여의 50%다. 하지만 누구나 월급 반절을 고

스란히 받는 건 아니다. 기금 안정과 실업자 지원 취지를 이유로 상한액과 하한액을 설정하

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상한액은 1일 4만 원, 하한액은 최저임금의 90%다.

실업급여의 하한액은 최저임금과 연동되어 있어 해마다 최저임금 인상률만큼 오른다.

올해 하한액은 1일 37,512원(5,210원×8시간×0.9)이고 하한액 규정에 관한 변동이 없다면

내년에는 40,176원(5580원×8시간×0.9)이다.

반면, 상한액은 하한액 규정과 달리 고정되어 있다. 2006년에 4만 원으로 인상된 `이후

8년간 계속 동결 되어 있었다. 하한액은 매년 인상되지만 상한액이 동결되어 있다 보니 하

한액이 상한액보다 커지는 비정상적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2014년 현재 하한액은 상한

액의 93.8%에 달하며, 이대로라면 2015년에는 하한액이 상한액보다 176원 더 많게 된다.

자초지종 2 - 임금보다 높은 실업급여?

하한액이 상한액에 육박한 상황은 상한액을 올리면 깔끔하게 해결된다. 그런데 이번 개

정안은 하한액도 깎는다. 고용노동부는 하한액이 상한액에 육박했다는 것 외에 다른 이유

를 하나 더 든다. 실업급여 하한액이 최저임금 노동자의 월 급여보다 많다는 것이다.

몇 푼 된다고, 그걸 깎나?

홍원표정책실장

정책포럼

Page 66: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64

2014년 기준 최저임금의 월 급여 환산액은 108만 8,890원이다. 그런데 실업급여 하한액의 월 소득 환

산액은 112만 5,360원이다. 실업급여가 36,470원 더 많다. 분명 실업급여 하한액이 최저임금의 90%인데

도, 월 환산액은 최저임금보다 많다.

이런 난해한(?) 상황이 발생하는 이유는 급여 지급 일 수가 다르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을 월 급여로 환

산할 때에는 토요일을 무급 휴일로, 그러니까 임금 안 주는 날로 가정한다. 따라서 임금이 지급되는 주당

소정근로시간은 40시간에 유급휴일 1일(8시간)을 더한 48시간이고, 한달로 환산하면 209시간이다.1) 반면

실업급여는 휴일과 상관없이 매일 지급된다. 1주일에 56시간이고, 월 240시간이다. 정리하면 아래와 같

다.

•최저임금 월급여 : 5,210원 × 209시간 = 108만 8,890원

•실업급여 하한액 월급여 : 5,210원 × 0.9 × 240시간 = 112만 5,360원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주 40시간 도입 과정에서 정부가 재계의 요구를 수용해, 노동시간 단

축으로 줄어든 하루를 무급휴일화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실업급여 하한액이 애초부터 높았던 것이 아

니라 노동조건이 변화하면서 발생한 일이다.

일하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고?

어쨌거나 실업자가 취업한 사람보다 돈을 많이 받는 경우가 있다는 고용노동부의 주장은 사실이다. 그

리고 주류 경제학자들은 실업급여가 지나치게 관대할 경우 실업자들이 일자리를 구하기보다는 실업급여

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강화해 장기실업을 유도하고, 장기실업은 역으로 실업자의 직업능력을 약화시켜

노동시장 진입을 더욱 어렵게 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고용노동부는 ‘최저임금을 받고 일하는 근로자의 근로소득보다 실업기간 중 받는 실업급여가

더 커지는 모순이 발생, 일하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는 지적이 현장에서 문제점으로 제기’되어 하한액을

깎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국의 현실에서 실업급여가 최저임금보다 높아 ‘일하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는 현장의 지적을

핑계 삼)’는 고용노동부의 주장은 상당히 터무니없다. 우선 한국의 실업급여는 그 지급 기간이 매우 짧다.

실업급여 수급기간은 연령과 고용보험 가입기간에 따라 최소 90일에서 최고 240일이며, 2012년 평균 수

급기간은 114.6일이다. 기껏 4개월 정도 받는 실업급여가 최저임금보다 월 36,470원 더 많다고 ‘일하지

1) 임금이 지급되는 월 평균 소정노동시간 계산은{(40+8)÷7}× 365 ÷ 12 ≒ 208.57 이다. 유급휴일 하루를 포함한 주당 노동시간48시간을 7일로 나눠 1일 소정노동시간을 구한 후, 여기에 다시 365일을 곱하고 12개월로 나눈다.

Page 67: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정책포럼 65

않는 것이 유리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짧은 수급기간 문제뿐 아니라 실업급여 하한액 대상자들의 취업 시 임금 수준이 최저임금이라는 가정

자체도 잘못 되었다.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실업급여는 실직 전 임금의 50%이고, 이 ‘임금의 50%’가 하한

액보다 낮을 경우 하한액을 적용한다. 2014년 기준 하한액은 1일 37,512원으로, 실직 전 임금이 일당

75,024원 이하인 경우는 모두 하한액 기준을 적용받는다. 이를 월급여로 환산하면 약 196만 원이다. 196

만 원 월급 받던 노동자가 최저임금 108만 원보다 3만 6천 원 더 많은 112만 원의 실업급여 때문에 ‘일하

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하는 고용노동부는 굉장히 용감한 것이다.

+10,000원 vs. -4,464원, 누가 손해고 누가 이득인가?

이번 고용보험 개정안은 2015년부터 적용될 예정이다. 얼마 전 결정된 2015년 최저임금 시급 5,580원

을 적용하면, 2015년 실업급여 1일 하한액은 원래 40,176원이 되어야 하지만 개정안대로 인하하면

35,712원이 된다. 최대 1일 4,464원이 깎이고, 월급여로 환산하면 13만 3,920원이 깎인다.

1일 임금 80,352원 이하, 월 급여 환산 209만 9,196원 이하 임금을 받는 노동자 모두가 하한액 적용을

받는다. 단순히 최저임금 노동자만 실업급여가 깎이는 게 아니다. 반면 상한액이 4만 원에서 5만 원으로

오르면 209만 원 이상 임금을 받다 실직한 노동자들은 최대 30만 원까지 실업급여가 늘어난다. 사회안전

망인 실업급여가 저임금 노동자 몫은 깎고 상대적 고임금 노동자 몫은 올리는 형국이다.

실업급여 하한액을 최저임금의 80%로 하향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MBC뉴스

Page 68: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66

공교롭게도 209만 원은 중위임금에 근접한 임금 수준이다. 대략 절반은 인상되고 절반은 깎이는 셈이

고, 인상 폭은 만 원인데 깎이는 폭은 그 절반이 안 되니, 노동자에게 득이 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일반적인 노동시장의 특성 상 임금이 높은 경우(대기업/정규직/남성) 실업의 확률이 낮고, 반대

로 저임금의 경우(영세사업장/비정규직/여성) 실업의 확률이 높다. 한국의 경우 높은 비정규직 비율로 이러

한 경향은 더욱 강하다.

실제로 고용보험통계연보에 따르면 2012년 실업급여 수급자격이 인정된 89만 8천명 중 5인 미만 사업

장이 22.8%로 가장 많았고, 300인 이상 사업장은 15%에 불과했다. 이처럼 저임금 노동자가 실업에 처할

가능성이 더 큰 만큼, ‘절반은 깎이고 절반은 오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대다수가 깎이는 것이다.

깎지 않아도 된다

한발 양보해서 실업급여 하한액이 최저임금보다 높은 게 문제라 인정한다 하더라도, 굳이 하한액을 깎

지 않아도 충분히 다른 해법이 가능하다. 문제의 원인이 노동시간 단축 과정에서 발생한 휴일을 무급화하

면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무급휴일을 유급으로 전환해서 최저임금 노동자의 월 급여 수준을 높이면 된다.

물론 이는 고용보험법의 영역이 아니라 근로기준법의 영역이며 노사를 비롯한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당장 시행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임금과 노동시간의 격차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가능한 것은 실업급여 총 수급일은 유지(또는 확대)하되 주당 1일씩 수급일을 줄이는 방법이

다. 이렇게 되면 최저임금의 월 급여 산정과 실업급여 산정 방식이 같아져 법 제정 취지에 따라 실업급여

하한액이 최저임금의 90%로 유지된다. 한편 주당 수급일을 줄이는 만큼 (또는 그 이상) 전체 수급기간을

늘림으로서 더 안정적인 구직 기간을 확보할 수 있다.

만약 최저임금 하한액 인하가 정말 불가피하다고 판단이 된다면, 대신 급여대체율을 높여야 한다. 앞

서 살펴본 것처럼 최저임금 하한액을 낮출 경우 최저임금 수준의 노동자만 실업급여가 줄어드는 것이 아

니라, 209만 원 이하 임금을 받던 노동자까지 실업급여가 줄어든다. 이 경우 최저임금보다 높은 실업급여

로 인한 취업 기피 현상을 해결하겠다는 제도 개선이 이와 상관없는 노동자에게도 피해를 주는 문제가 발

생한다.

이러한 문제를 조금이라도 완화하기 위해서는 반대급부로 급여대체율을 높여야 한다. 물론 일반적으

로 급여대체율을 높이면 재정부담이 커진다

는 문제가 있지만, 우리처럼 급여 상한액이

인색한 상황에서는 추가 재원에 대한 부담은

크게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문제를 조금이라도 완화하기 위해서는

반대급부로 급여대체율을 높여야 한다.

Page 69: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정책포럼 67

고용보험법, 차라리 그냥 놔둬라

고용노동부 보도자료에 따르면 이번 실업급여 개정안은 총 11차례에 걸친 노사정·전문가TF 회의 끝

에 의견일치를 도출했으며, 노사정 대표로 구성된 고용보험위원회에서 의결을 거친 사항이다. 노사정·

전문가TF회의 및 고용보험위원회에는 한국노총은 물론 민주노총도 포함되어 있다. 자세한 내막을 알 순

없지만, 양대 노총이 ‘상한액 인상, 하한액 인하’라는 실업급여 개정안에 동의를 해 준 이유는 무엇보다

하한액이 상한액보다 높아지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개선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고용노동부가 입법예고한 내용은 상한액 조정은 없고, 하한액 인하만을 담고 있다. 이

는 상한액 규정과 하한액 규정이 각각 상이한 곳에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한액 규정은 법률에 정해져 있

어 국회 내 법 개정 절차를 밟아야 하는 반면, 상한액 규정은 시행령에 정해져 있기 때문에 고용노동부가

언제든지 단독으로 개정할 수 있다. 우선 법부터 고치고 이 후 시행령을 고치자는 의도일 것이다.

하지만 노동계 입장에서는 차라리 법 개정을 안 하는 것이 유리하다. 상한액 규정과 하한액 규정이 별

도로 돼 있는 상황에서, 법률에 명시된 하한액 규정과 시행령에 명시된 상한액 규정이 충돌하게 되면, 당

연히 하위법을 상위법 취지에 맞춰 개정해야 한다.

하한액을 깎는 이번 고용보험법 개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고용노동부는 하한액과 상한액이 충돌해

반드시 시행령을 개정해야만 한다. 다만 얼마라도 상한액을 인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반면, 하한액

을 낮추는 고용보험법이 통과되면 당장 하한액과 상한액의 충돌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고용노동부는

노동계와의 ‘약속’ 외에는 시행령 개정 압박을 덜 받게 된다.

현행 고용보험법을 놔두면 굳이 하한액을 깎지 않아도 상한액 인상으로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노동계

로서는 차라리 이번 실업급여 개정안은 그냥 국회에서 썩히라고 압박하는 것이 합리적 선택이고, 야당은

진정 국민을 위한다면 법안을 폐기시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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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여름, 《섬과 섬을 잇다》에 참여하고 있던 만화가들과 르포 작가들은 전라남도 보

성군 정길상 선생의 고택에 머물렀다. 정길상 선생은 보성 가족 간첩단 사건으로 긴 세월을

감옥에 갇혀 지냈다.

다 무너져 가던 집을 살린 건 형(정춘상, 전두환 정권에서 사형 당함)의 유언 때문이었다. 일

가족이 줄줄이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감옥 안에서 어렵게 만난 형님은 동생인 정길상 선생

에게 ‘너만은 꼭 살아 나가서 집을 다시 살려라’라고 말했다.

전국의 장기 투쟁 사업장이나 현장

사람들의 삶을 써보겠다고 작가들이 모

인 곳이 왜 하필 전라도 보성의 그 집이

었을까. 막연한 우연이었을까? 그 집을

떠난 후에도 나는 종종 그곳을 떠올리며

무슨 우연이 우리를 그곳으로 불러 들였

을지를 자주 되묻곤 했다. 다음날 아침,

더위를 식히러 나온 마을 계곡에서 선생

은 별 말이 없었지만 깊은 회상에 잠겨

있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천진하

게 놀고 있는 작가들을 바라보고만 있던

선생에게 나는 ‘이곳이 돌아가신 형님

과의 추억이 많은 곳이냐’고 물어보았

다. 선생은 말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일

서분숙기록 노동자

섬, 섬, 섬여전히 싸우고 있는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섬과 섬을 잇다』

기획서평

섬과 섬을 잇다 이경석, 이창근 외 / 한겨레출판사 / 2014년 5월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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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서평 69

뿐이었다.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돌아온 집. 선생이 돌아온 곳이 왜 하필 고향의 집이었을까. 《섬과 섬을 잇다》

작업을 하면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도 자신이 일했던 공장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했다. 밀양과 강정의 사람

들은 자신들의 삶이 배인 땅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고, 고향 산천이 망가지는 모습을 눈앞에 둔 밀양의 어

르신들은 스스로 먼저 세상을 등져 버리기도 했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그 집으로 불러들인 걸까. 선생의 집에서부터 시작된 물음은 글을 쓰는 내내, 내

게 답을 돌려주다 다시 물음을 던지곤 했다.

책이 나온 지금, 나는 그 대답을 아주 조금은 알 듯도 하다.

섬과 섬을 잇다 - 그 섬은 어디에서 온 걸까

《섬과 섬을 잇다》라는 제목을 단 책에 대해서 말을 해야겠다.

2007년, 비정규직 보호법이 도입되던 그해에 거리에는 파란 섬들이 자주 떠오르기 시작했다. 비정규

직 보호법의 보호를 받기는커녕, 법이 실행되기 이전에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내쫓겼다. 비정규직 노동자

들이 그나마 있던 일자리에서마저 쫓겨나게 만든 법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비정규직 보호법이

었다.

온 거리에 파란 섬들이 떠다녔다. 홈에버 노동자들의 싸움 현장에도, 현대 자동차 사내 하청 노동자들

의 공장 주변에도 섬이 떠올랐다. 비가 오고 눈이 와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사라지지 않는 파란 섬들이 거

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뜯겨져도 파란 섬들은 다시 떠올랐다. 그러나 섬의 뿌리들을 들여다보면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에 섬들은 조금씩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2000년, 2002년, 2004년, 2005년…. 어쩌면 그

보다 더 오래 전에 섬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고단한 싸움을 쌓아오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셀 수없이 많

은 섬들보다 더 놀라웠던 건 그 섬들이 견딘 세월이었다. 7년, 8년, 9년, 10년…. 10년을 훌쩍 넘는 세월을

견딘 섬들도 있었다. 섬들이 견딘 세월보다도 놀라운 일들은 또 있었다. 예전에는 단 하루를 싸워도 세상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고, 일주일을 파업하면

온 나라가 들끓었다. 그러나 지금은 십년을 싸

우는 노동자들이 있어도 더 이상 그 사연을 궁

금해 하는 일들이 드물어졌다. 공장이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사람들은 늘어났지만 그 삶

에 연민을 가지는 시선은 옅어졌다. 늘어난 섬

의 숫자만큼 땅으로부터의 거리도 멀어졌다.

어느 순간 모든 땅이 갈라져 작은 섬들이 된다 하여도 아무도 이웃 섬에서 일어난 일을 궁금해 하지 않는

날들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쩔 것인가. 아니다. 어쩌면 오랫동안 솟아오른 저 섬들조차도 처음에는

공장이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사람

들은 늘어났지만 그 삶에 연민을 가지는

시선은 옅어졌다. 늘어난 섬의 숫자만

큼 땅으로부터의 거리도 멀어졌다.

Page 72: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모두 땅과 맞닿아 있는 곳들이 아니었던가. 다시 섬들을 둘러보는 순간, 섬들은 애초 섬이 아니었다. 내 몸

이 존재하고 내 삶을 누리는 땅이었다. 저 긴 세월을 섬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애초 내 이웃이었고

가족이었고 나였다. 섬은 애초 내가 살던 땅이었다. 섬사람들은 나의 몸과 마음에서 갈라져 나간 내 모습

이었다. 섬과 섬을 잇는 작업을 시작한 것은 나 자신을 온전하게 복원하고 싶어서였다.

섬과 섬을 잇다 - 섬과 섬이 만나면

가을과 겨울을, 그리고 이듬해 봄과 여름을 철탑 위에서 지낸 사람들이 있다. 철탑 위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곳은 기다리는 곳이다. 밥을 기다리고 편지를 기다리고 휴대폰

배터리를 기다리고, 무엇보다 지상에 두고 온 요구에 대한 응답을 기다리는 곳이다.

현대 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이 있는 곳. 그곳은 내가 만난 섬이었다. 지난해 여름, 섬은 현대

자동차 공장이 내려다보이는 철탑 위로 떠올랐다. 사실 이 섬은 십 년보다 더 이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

했다. 공장안에서 정리해고가 받아들여지던 그 순간부터였는지도 모른다. 맨 먼저 정규직 노동자들이 해

고를 당하고 그 자리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채웠다. 현대 자동차 정규직들과 같은 공장에서 똑같은, 오

히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니 마땅히 현대 자동차의 정규직 노동자로 전환하라는 대법원의 판결조차 현대

자동차는 듣지 않았다. 이십 년 전만 해도 세상이 뒤집히고 난리가 날 일이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월차

한번 맘 편하게 쓰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을 매었다. 한창 나이인 젊은 노동자는 ‘‘비’자 하나

더 붙었을 뿐인데 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이렇게 차별을 받느냐’며 몸에 불을 질렀다. 비정규직 노동자

들을 현대자동차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고 공장에 다니던 노동자들이 목숨을 끊어도

공장 사장은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았다.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조차도 애써 마음을 쓰지 않으려 외

면하는 일이 잦아졌다. 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을 해도 오히려 공장 밖으로 쫓겨나는 노동자들의 숫자만 늘

어났다.

망망한 바다에서 떠도는 배 같았다. 나침반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지만 가도 가도 길은 보이지 않았다.

공장 앞에서, 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서명을 받고 호소를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철탑 위

로 올라갔다. 섬이 솟아올랐다.

현대 자동차에서 일하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대법원의 판결을 지킬

것을 요구하며 철탑 위로 올라갔다. 철탑 아래 마당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모였

고 정규직 노동자들이 모였다. 종교인들이 모였고 마음을 잇대고픈 사람들이 모였다. 그리고 또 다른 섬

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철탑 위로 섬이 솟아 있었던 296일 동안 밀양의 섬이 왔고 평택의 섬이 울산으

로 왔다. 서울 시청 앞에 머물던 재능 학습지 노조의 섬이 다가왔고 제주도 강정의 섬이 다가왔다. 콜트콜

택의 해고노동자들의 섬이 그들이 만들던 기타의 선율을 싣고 철탑으로 왔다. 코롱의 해고자들이 머물던

섬은 자주 산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노동자들을 해고한 코롱 공장에서 만드는 등산복을 입지 말기를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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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73: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기획서평 71

소했다. 등산복에 새겨진 코롱의 상표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했지만, 지금 당장 해군기지 공사를 중단시키고 밀양의 송전탑을 빼내

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절망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섬들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섬과 섬을 잇다 - 가라앉지 않는 섬

2014년 6월 11일 새벽. ‘국가가 나를 죽이러 왔다’는 밀양 할머니의 증언은 과장이 아니었다. 송전탑

건설을 막기 위해 쳐놓은 움막을 날카로운 커터로 북북 찢으며 저항하는 사람들의 몸을 끌고 팔을 비틀었

다. 할머니의 등뼈가 부러지고 수녀님의 팔뼈가 부러지는 와중에도 철거는 멈추지 않았다. 2014년,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9년간의 긴 싸움이었다. 마을에 송전탑을 세우지 말라는 요구가 뭉개지는 건 한 순간이었다.

7월에 다시 찾은 밀양은 무더웠다. 농사철이라 더 큰 비가 오기 전에 새로운 작물을 심기에 모두들 바

빴다. 움막이 있던 자리엔 더 이상 사람들이 모여 있진 않지만 송전탑이 세워지는 땅으로 가는 곳곳에는

새로운 움막이 세워져 있었다. 밀양 사람들의 모습과 대추나무가 그려져 있는 화사한 컨테이너 집이었다.

밀양시 부북면 화악산 중턱에 세워진 움막에서 만난 한옥순 선생은 콘테이너 안에서 막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이야길 하려면 하룻밤은 새야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작가들이 함께 함께 만든 섬섬투쟁여지도 (사진 : 서분숙)

Page 74: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없어서 딱 하고픈 말만 하겠다는 그는 무엇보다 핵발전소를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비록 마을에 송전탑이

세워지기 시작했지만 이번 밀양 투쟁으로 전국민에게 핵발전소, 핵폐기물 처리장의 위험을 알렸으니 이

제는 그것을 없애는 싸움을 이어 가야 한다고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이만큼 싸웠으니 이제 젊은 사

람들이 그 싸움을 이어서 했으면 좋겠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계속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땅이니까 밀양

의 싸움을 멈출 수 없다고 한다.

올 여름, 밀양에는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농촌활동을 왔다. 밀양의 농산물을 사먹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섬이었던 밀양. 밀양과 사람들 사이에 다리가 이어졌다. 이미 밀양은 섬이 아니었다.

154번째 촛불 집회. 이상하다. 움막이 철거된 자리에 송전탑이 세워지기 시작했지만 집회에 모인 사람

들의 목소리가 무겁지 않다. 표정이 슬프지 않다. 예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어 영남루로 오르는

계단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이곳에는 패배의 정서가 없다.

집회 중 평택 쌍용 자동차 노동자들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본다. 쌍용 자동차의 노동자와 밀양의 할머

니들이 무슨 상관이냐고, 얼핏 봐선 그렇게 여길 수도 있지만 알고 나면 누구도 그런 말을 못한다. 다 안

다. 섬과 섬. 절박한 사람들은 너무나 선명해서 서로를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섬과 섬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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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는 송전탑이 세워지기 시작했지만, 밀양의 촛불집회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했다.(사진 : 서분숙)

Page 75: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기획서평 73

섬과 섬을 기록하는 사람들

섬과 섬을 기록한 열 네 명의 작가들, 그들도 노동자들이다. 그들 또한 그들이 기록하는 현장의 사람들

만큼이나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지친 사람들이다. 예술가는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 아니냐 하지만, 생계

와 연결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때 예술가의 작업은 노동이 되고 작업하는 예술가는 노동자가 된다.

《섬과 섬을 잇다》는 이 작업에 참여하는 만화가들과 르포작가들이 스스로 노동자로서 당당하게 일하

고 정당한 처우를 받겠다고 작심하고 나섰다. 계약서도 썼고 아직은 낯선 취재비라는 것도 받아봤다. 익

숙하지 않은 탓에 취재하느라 쓴 비용을 영수증으로 남기는 일에는 잦은 실수가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

런 서투름이 불편하지 않았다. 장기 투쟁 현장의 사람들을 응시하는 일은 곧 기록 노동자인 자신을 대하

는 일이었다.

2014년 6월 23일, 서울 홍대 앞 카톨릭 회관에서는 《섬과 섬을 잇다》 책 발간을 축하하는 북 콘서트가

열렸다. 상상은 늘 현실의 광경보다 뒤쳐진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일곱 개의 섬, 그 현장의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책에 실릴 글을 쓰는 시간 내내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만남이 그날 눈앞에서 펼쳐졌다. 강정마을

주민들은 제주도 바다의 고래를 본뜬 목걸이를 가져왔다. 콜트콜택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동으로 만

들었던 기타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코롱 노동자들은 등산객들에게 나눠주던 계란을 삶아 공연장

에 온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한 노동자들이 무대 위로 올랐다. 오랜 시간 파도에 시

달린 섬들이 나란히 어깨를 맞대었다.

《섬과 섬을 잇다》 책에도 등장하는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 밴드, 콜밴이 북 콘서트 무대에 올랐다.(사진 : 서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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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그 집

사랑하던 가족들이 모두 떠나버린 빈 집을 지키던 정길상 선생. 지난 해 여름, 《섬과 섬을 잇다》에 참여

한 작가들은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를 의논하기 위해 선생의 집에 머물렀다. 사람들이 모두 떠나간 빈집이

지만 선생은 그 집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여전히 사랑했다. 집을 지키고 보살피는 일을 하는 것은 그 집이

담은 역사와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섬과 섬을 잇다》 이 책에 실을 글을 쓰기 위해 이곳저곳의 현장에 다가가고 그곳의 사람들을 들여다보

는 내내 나는 자주 정길상 선생이 머물던 집이 떠올랐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집을 지키던 선생의 마

음을 품고 있었다. 땅을 지키던 밀양과 강정의 사람들이나, 공장으로 돌아가겠다던 노동자들이나 모두 그

땅과 공장에 배인 사람들의 정신과 흔적을 사랑했다. 그들이 온전히 복원하고 싶어 했던 것 또한 그 공간

과 시간에 담긴 사람들의 삶이었다. 정리해고가 진행되면서 죽어간 동료들의 영정을 대한문 앞에 세워둔

쌍용자동차의 노동자들이나 마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땅을 다치게 할 순 없다는 강정과 밀양의 사람

들의 마음은 모두 시간과 공간의 역사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들이다.

이 작업을 하는 내내 나는 사람들은 스스로 온전한 삶을 완성하기 위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섬과 섬의 인연도 그 간절함이 만든 것이다.

우리가 정길상 선생 댁에서 이 작업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결코 막연한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정길상 선생댁에 함께 모인 《섬과 섬을 잇다》에 참여한 만화가들과 르포 작가들. 이들의 만남은 결코 막연한 우연이 아니다.(사진 : 서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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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르포 75

노동르포

콜트콜텍을 읽는 열두 개의 시선⑥

나의 가장 큰 정체성은 아시안-어메리칸

Page 78: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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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일본의 후지락페스티벌 원정투쟁에 함께 가면서 처음으로 국제연대라는 걸 경

험했다. 콜트콜텍은 아마도 한국에서 해외 원정투쟁을 가장 많이 한 노동조합일 것이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이들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뮤직메쎄, 일본 요코하마의 악기쇼,

미국 LA와 애너하임의 NAMM쇼, 일본 니가타현의 후지락페스티벌 등 여섯 차례나 해외

원정투쟁을 다녀왔다.

원정투쟁에는 으레 현지의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이 함께 하는데, 2010년 일본에 갔을 때

는 노조에 소속되지 않은 활동가들이 노동조합과 단체에 우리를 안내했다. 이들은 ‘콜트콜

텍 쟁의를 응원하는 일본모임’의 회원들로, 노동운동보다는 사회운동을 하는 분들이었다.

그 전 해인 2009년 요코하마 악기박람회 원정투쟁에서 만난 일본의 단체들과 노조 등에서

뜻 있는 사람들이 모여 콜트콜텍 투쟁을 더 알리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9박 10일 일정 중 4박 5일 동안 후지락페스티벌에 갔을 때 일본 활동가가 했던 말이 지

금도 생생하다. 열심히 뛰어다니는 그들에게 나는 “우리를 도와주셔서 고맙다”고 했다. 생

업을 잠시 중단하고 원정단을 돕는 활동가도 있다고 들은 터였다. 그런데 통역과 안내를 담

당한 야스다 씨는 고맙다는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손사래를 쳤다.

“도와준다는 표현은 옳지 않아요. 우리는 한국 노동자들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우리 일

을 하는 겁니다. 이 일은 곧 우리 문제이기도 해요.”

순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말을 멈췄다. 폼 내느라고 일부러 멋진 말을 골라

콜트콜텍을 읽는 열두 개의 시선⑥

나의 가장 큰 정체성은 아시안-어메리칸콜트콜텍 해외 원정투쟁의 친구 홍석종씨를 만나다

이선옥기록 노동자

노동르포

Page 79: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노동르포 77

쓸 만큼 한국어가 능숙한 사람도 아니었다.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도 아니고, 미디어 쪽 활동가로 일한다

는 그가 어째서, 그리고 어떻게 이 원정투쟁을 자신의 문제로 여기는지 궁금했다.

“저는 아시아의 미디어 활동가들과 연대하는 네트워크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어요. 용산(참사)에도 갔

었는데 한국에서 일어나는 투쟁에 참여하면서 그걸 한국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가지는 않았어요. 저는 아

시아미디어활동가 네트워크 ‘짬뽕’에서 활동하는데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는 다르지만 서로 자기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계속 알리고, 연대를 요청하고 가능하면 함께 머물면서 투쟁하는데 그건 내 일이

고 활동이지 남을 돕는 게 아닌 것이죠.”

다른 나라로 원정투쟁을 가면 해당 국가의 노동자들의 일방적인 도움을 받게 되고, 이런 비대칭이 당

연히 국제연대의 구조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 말이 신선하게 들렸다. 언젠가 그들의 싸움을 도와주는 걸로

이번 빚을 갚으면 되고, 그게 바로 국제연대라고 생각해왔지만 야스다 씨는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했

다. 서로 다른 국가의 노동자들이 ‘기브 앤드 테이크’를 하는 게 아니라, 원래 하나인 노동자들이 단지 지

역을 이동해 투쟁하는 것이라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에노에 짐을 풀고, 멀리 락페스티벌이 열리는 니가타현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 도쿄 일대를 다닌

고된 일정 동안 이들은 번갈아가며 원정단을 도왔다. 락페스티벌이 열리기 몇 달 전부터 이렇게 준비한

2009년 원정투쟁에서 일본 현지 활동을 지원한 야스다 유키히로 씨(왼쪽) (사진 : 콜트콜텍 공동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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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에 원정단은 후지락페스티벌 무대에 설 수 있었다. 10년이 넘는 역사에 수십만 명이 다녀간다는 세계

최대 규모의 락페스티벌 무대에 기타 만드는 해고 노동자들이 오른 건 처음이라고 했다.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성사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 뿐 아니라 미국에 있는 국제연대 활동가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고,

그 중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이 미국의 홍석종 씨라는 사실을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그 해 1월 노동자들이 LA에서 열리는 NAMM 악기쇼 원정투쟁을 갔을 때 유명한 뮤지션인 탐 모렐로

(Thomas Baptist Morello)와 잭 데라 로차(Zack de la Rocha), 그룹 오조매틀리(Ozomatli) 등이 콜트콜텍

의 사연을 듣고 함께 싸워줬다. 잭 데라 로차와 그룹 오조매틀리는 후지락페스티벌 출연이 예정되어 있었

고, 이들은 그곳에서 연대할 것을 약속했다. 그 소식을 듣고 일본의 활동가들이 나섰다. 후지락페스티벌

주최 측, NGO빌리지(후지락페스티벌에서 공식 운영하는 부스 중 하나) 운영진, 뮤지션들의 미국 현지 회사,

매니저, 일본 현지 매니저 등 한국, 미국, 일본 세 나라의 네트워크를 동원해 이 초대를 성사시켜주었다.

홍석종 씨는 뮤지션들의 미국 현지 회사와 매니저를 통해 상황을 듣고 일본 활동가들과 협의하는 일을

맡았다. 그녀는 교포 2세 출신으로 요코하마 원정 때부터 함께 하기 시작해 미국원정투쟁 때는 현지 코디

네이터를 맡아 일했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국제연대 투쟁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노동운

동가도 아닌 사람이 어떤 인연으로 이들과 맺어졌는지 궁금했는데 우연히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왔

다. 지난 달 뉴욕에 오게 된 나는 수소문 끝에 인터뷰를 청했고 석종 씨는 흔쾌히 응해주었다. 소호의 조용

한 카페에서 만난 우리는 몇 시간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눴다. 한국말이 서툴다보니 자기 마

음을 설명할 가장 정확한 단어를 찾느라 애를 먹었지만 나는 그녀의 진심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인터뷰

를 하면서 그동안 내가 국제연대 활동과 원정투쟁을 보면서 느꼈던 문제의식에 대해서도 많이 물었는데,

그녀 역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석종 씨와의 인터뷰를 문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노근리 사건으로 깨진 아메리칸 드림

나 : 본인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 달라.

홍석종 : 시카고에서 태어나 자란 교포 2세다. 부모님은 7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 오셨다. 두 분 다 공

화당을 지지하고 외가가 강원도인데 외할아버지가 이승만을 제일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실 정도로 집안

분위기가 보수적이다. 한국말도 많이 쓰지 않고 자랐다.

나 : 그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사회운동을 하게 되었나?

홍석종 : 2002년 한국나이로 스물네 살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대학교 때 학교 식당 옆에 놓인 신문 1면

에서 우연히 노근리 학살 사건에 대해 알게 됐다. AP기사였는데 퓰리처상을 받은 글이었다. 노근리에서

많은 분들이 학살을 당하고 생존자들이 지금까지 입을 못 열고 말 못하게 한다는 걸 듣고 큰 충격을 받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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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르포 79

다. 50년 동안 이런 중요한 일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내가 생각하는 아메리칸 드림이 많이 깨

졌다. 그때부터 한국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유학생 중에 박사과정에 있는 사람이 가르치는 한국현대

사 수업을 들었다.

나 : 부모님이 많이 반대 하셨겠다.

홍석종 : 부모님과 친척들이 모두 심하게 반대하셨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으로 혼자 독립했

다. 건축을 전공했지만 늘 그림 그리고 글 쓰는 아티스트로 살고 싶었다. 그리고 2세들이 참여하는 한인공

동체에서도 활동하고 싶었다. 시카고는 조금 보수적이지만 뉴욕은 단체도 많고 이민자 활동이 많다. 거기

에서 ‘노둣돌’이라는 한인운동단체를 만났고 내 인생에 중요한 일들이 시작됐다.

나 : 부모님이 미국인으로 키우려고 하셨다면 한국어는 어떻게 배웠나?

홍석종 : 집에서는 거의 한국말을 안 썼다. 한국말은 노둣돌에서 많이 배웠다. 노둣돌은 뉴욕에서 활동

하는 반전통일운동단체인데 1999년 한인 1.5세와 2세들이 만들었다. 뉴욕에 와서 여러 단체들을 접촉해

봤는데 가부장적인 곳도 있었다. 어떤 한국어학교의 교재는 백인남자와 한국여자가 결혼하는 예가 주로

있을 정도로 가부장과 사대주의가 섞여 있다. 노둣돌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사회학자

교수님이 선생님이었는데 꼭 한국 사람처럼 얘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고 그런 게 마음에 들었다. 노둣돌

회원 중에는 언어, 성별, 차별 등에 대해 싸우는 문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 : 뉴욕에서는 어떤 일로 생계를 유지했나?

홍석종 : 2000년에 뉴욕에 와서 5년 동안 한국으로 치면 방과 후 교실 같은 곳에서 아이들에게 아트를

가르쳤다. 9·11이후 그 근처 중국타운에 사는 학교의 아이들이 트라우마를 입어서 아티스트들이 애프터

스쿨 프로그램으로 많이 가르쳤다. 미국은 전공과 무관하게 포트폴리오를 제출해서 뽑히면 강사로 일하

는 게 가능하다. 정규교육 과정에 예술교육이 없고, 외부 재단에서 지원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가난한 학

생들이 예술을 배울 기회가 없다.

콜트콜텍과의 인연

나 : 노둣돌에서는 어떤 활동을 했나?

홍석종 : 청소년 프로그램으로 KEEP(Korean Exposure and Education Program)이라는 게 있었는데 3

년 동안 그걸 담당했다. KEEP은 반전, 동성애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 FTA등 미국에서 할 수도 있으면

서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요한 활동에 대해 방문해서 교류하는 프로그램이다. 사회운동을 하거나 하

고 싶은 코리안-아메리칸들을 한국에 보낸다. 한국말이 서툴렀는데 그걸 하면서 많이 배웠다. 2002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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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방문해서 여러 활동가들을 만나고 농활도 했다. 한국의 여러 단체들과 접촉해서 프로그램을 짠다.

나 : 내가 홍석종 씨를 알게 된 건 콜트콜텍 원정 투쟁 때문이다. 어떤 인연으로 이들과 연대하게 되었

나?

홍석종 : 2008년에 KEEP담당자로 일할 때 문화연대를 방문해서 알게 됐다. 사회운동을 예술 쪽으로

하는 게 너무 좋아서 맘에 들었다. 2009년 여름에 개인적으로 한국에 방문했을 때 콜텍악기 대전 공장에

가서 노동자들을 몇 분 만났었다. 그리고 겨울에 다른 일로 일본에 갔는데 마침 콜트콜텍이 요코하마 악

기 페어 원정투쟁 중이었다. 그래서 요코하마로 가서 이들과 함께 투쟁을 했다. 나는 바이올린 연주를 하

고(웃음)일본 작가들과 노동자들이 퍼포먼스도 했는데 문화적인 활동이어서 되게 재밌었다.

나 : 미국 원정 투쟁 때 많이 애썼다고 들었다. 현지에서 유명한 뮤지션들이 콜트콜텍을 위해 공연도

하고, 펜더 회사도 만나 해고 사건에 대해 조사하겠다는 약속도 받아내고 그런 성과들이 있었는데.

홍석종 : 일본에서는 악기회사 앞에서 집회하는 정도였는데 미국에서는 펜더(콜트악기의 주 납품처인 악

기회사)회사와 직접 만나니까 그게 되게 좋았다. 탐 모렐로나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음악가한테 후원을 받

으니까 이슈가 되고 한국에서도 이 문제를 알게 돼서 좋았다. 요코하마 페어 이후 노동자들이 LANAMM

쇼에 온다는 말을 듣고 친구들에게 연락했다. ‘키와(KIWA, Koreatown Immigrant Workers Aliance / 한인

타운노동연대)’라고, LA한인타운에 있는 노동운동단체의 상근자가 WTO반대 홍콩 투쟁에서 같이 체포됐

던(웃음) 친구다. 노조, 이민자단체 등에 다 연락했는데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인걸 알고 친구들이 뮤지션

들 정보를 주기 시작했다. 탐 모렐로는 노동자들을 위한 퍼포먼스를 많이 하다 보니 노조와 연결이 되어

있었다. 그는 “나는 기타 치는 사람인데 전혀 몰랐다. 이 얘기를 더 알고 싶다”고 했다. LA는 음악가들이

많이 있는 곳이라 여러 유·무명 뮤지션들이 참여해 키와 사무실에서 원정 투쟁 기간에 콘서트를 했다.

나 : 보통은 노조를 통해 활동가를 모으는데 콜텍은 문화 활동가가 중심이 돼서 조직한 특이한 경우다.

홍석종 : 노조연합에도 연락을 했다. 내셔널 유니온에 연락을 해서 한국의 금속노조에서 준비한 편지

를 전달했다. LA 첫 원정 투쟁 때 노동자들의 영상과 투쟁 연혁도 보내주고 그걸 다 뿌렸다. LA 투쟁은

키와가 많이 도움을 줬다. 노조도 관심은 있었는데 주 담당은 아니었다. 노조원들은 같이 홍보하고 악기

쇼에 가고 그랬다. 미국노조들은 민주노총 노조들처럼 투쟁하지 않는다.

국제연대가 남긴 물음들

나 : 한국의 여러 단체에서 연락이 올 때마다 돕는 것은 같은 한국인으로서 온정 같은 것인가? 각각 다

른 이슈에 다 연대하는 것은 당신의 지향보다 기능적으로 코디네이터 일을 하는 면이 더 큰 것 같다.

Page 83: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노동르포 81

홍석종 : 국제연대 투쟁을 지원하다 보니 한국 단체들 여러 곳에서 연락이 많이 온다. 한-미 FTA반대

투쟁 후 우리 단체(노둣돌)의 미션에 따라 정체성에 맞게 행동하자는 얘기들을 한다. 여러 단체에서 연대

요청이 많이 오지만 미션 따라서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계속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게 사람들이 돌아가면 에너지가 줄어드니까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필요하다.

나 : 그 문제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콜트콜텍 투쟁도 엄밀히 말하면 원정 투쟁 하고 돌아가면 끝 아

닌가? 여기서 당신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문제도 아니고. 일회성 방문 행사에 그치고 피로할 거 같다. 어

찌 보면 시혜를 베푸는 식의 행동이 될 수도 있고.

홍석종 : 그런 게 고민이 된다. 원정단은 돌아갔어도 여기에 콜텍과 관련된 미국 회사들이 있기 때문에

지속 활동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한 일은 없다. 강정 해군기지 문제도 사람들이 오면 움직이지만

그렇게 잘 되지 않는다. 원정투쟁을 두 번 하고 나서 배운 게 있다. 노동자랑 예술가랑 연계가 되지 않으면

기타 노동자 뿐 아니라 다른 노동자들의 문제도 싸

우기 어렵다. 음악가는 음악가 노조를 만들고 혼자

서는 힘드니까 한국의 문화연대 같은 단체를 창립

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젠 뮤지션에게 연대를 요청

하면서 이런 질문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음악

가인 당신의 삶에 노동자로서 권리는 있는가?”

2009년 요코하마 뮤직박람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홍석종 씨(오른쪽) (사진 : 콜트콜텍 공동행동)

이젠 뮤지션에게 연대를 요청하면서

이런 질문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음악가인 당신의 삶에 노동자로서

권리는 있는가?”

Page 84: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82

나 : 자기가 살고 있는 땅에서 기반이 된 활동이 기본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평소에 어떤 활

동을 하면서 미국에서 살아가는가? 아까 말했던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노조를 직접 만들 생각은?

홍석종 : (노조를 만드는) 과정으로 가는 운동을 하고 싶다. 예를 들어 미국은 건축가가 노조에 참여하는

게 불법이다. 파트너가 비정규직 건축가인데 노조 조직 활동을 하려고 하고 있다. 어떻게 창립할지 길을

잘 모르겠다. 찾는 중이다. 기타 만드는 노동자와 기타를 치는 노동자를 어떻게 연결할 수 있는지가 정말

중요한 거 같다. 미국은 자동차 노조에 민변 같은 변호사들이 가입했다. 교수도 자동차노조에 가입한다.

자기 노조가 없으니까. 이런 구조 속에 내 고민이 있다.

인터뷰 내내 우리는 서로의 고민을 나눴다. 그녀는 활기가 넘쳤다. 인터뷰 전날에도 한국에서 온 성소

수자활동가들과 게이페스티벌에 참여했다. 그녀가 가진 약간의 피로감은 연대투쟁에 대한 회의가 아니라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의 성장통 같은 것이었다. 한국 문제에 관심이 많지만 그것에 갇히지 않기 위해 경

계하고 노력하는 이유는 그녀의 가장 큰 정체성은 코리안-아메리칸이 아닌 아시안-아메리칸이기 때문이

라고 했다. 미국에서 소수자로 살아간다는 것, 미국에서 비정규직이라는 약자로 살아간다는 것, 그녀의

사회적 행동은 그 존재의식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원정투쟁은 그녀의 고민을 깊어지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미래에서 온 편지> 2호에는 유럽의 경호 당원이 국제연대 투쟁에 대해 고민한 대목이 있다. “… 한국

에서는 외부인이 왔다가 가고 당사자들이 남아서 싸웁니다. 유럽에서는 당사자들이 떠납니다. 그냥 좋은

사람들끼리 모였다가 흩어지고 ‘좋은 추억’만 남길 것이 아니라면 남은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뭘까요.

우리가 그저 운동권에 한해 저렴하게 혹은 무료로 봉사하는 가이드나 통역·코디네이터가 아니라면 현지

의 교민사회나 연대단위, 그리고 한국의 투쟁에 관심을 가지게 된 현지인들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할지,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원정투쟁에 어떤 조직적 성과를 남겨야 할지…. 고민거리가 많습니다.”

석종 씨의 고민도 비슷하다. 싸움에는 당사자이지만 원정투쟁 현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외부인이다. 원

정단은 떠나고 그들은 남는다. 우리는 떠나오면서 남아 있는 그들이 이 투쟁에서 어떤 보람을 찾고, 어떤

고민을 하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고민을 일상의 교류로 나누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지락페스티벌에서 야스다 씨가 했던 말처럼, 국제연대는 일방의 지원이 아닌 투쟁 현장을 이동

한 내 싸움이고 그게 바로 인터내셔널이니까.

Page 85: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시론 83

세계의 진보정당

Page 86: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84

한국이 한창 세월호 참사의 충격에 휩싸여 있던 지난 5월 7일, 지구 반대편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총선이 있었다. 남아공은 대통령제이지만, 그 선출 방식이 독특하다. 마치

의원내각제처럼 의회가 대통령을 선출한다. 그래서 총선은 곧 대통령 선거의 성격도 띤다.

한편 의원은 완전 정당명부비례대표제로 선출된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흑백 인종 분리제)가 무너지고 보통선거가 처음 실시된 1994년 이

후 선거 때마다 항상 압도적인 의석을 차지한 것은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의 역사적 구심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해 있다)였다. 그래서 아프리카민족회

의가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면 이 후보

가 곧바로 대통령이 됐다. 이번 선거에

서도 늘 그랬듯이 ANC가 과반수를 점

해 ANC 소속인 전임 제이콥 주마 대

통령이 재집권했다.

이렇게만 말하면 별다를 게 없는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ANC가 여전히 60% 이상을 득표했지

만, 득표율은 계속 줄어드는 추세다.

2004년 총선에서는 69.7%였던 것이

2009년에는 65.9%가 됐고, 이번에는

62.2%가 나왔다.

ANC의 득표율이 낮아지는 만큼 그

남아공 금속노조, 새 좌파정당 창당에 나서다장석준부대표

먼 좌파이웃 좌파 ⑪

제이콥 주마 현 대통령. 뒤로 보이는 것이 ANC깃발이다.

Page 87: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먼 좌파 이웃 좌파 85

표는 ANC 이탈 세력이 만든 새로운 흑인 중심 정당으로 향했다. 2009년 선거에서는 그 대상이 ANC 우

파가 탈당해 창당한 ‘민중회의’(COPE)였다면, 올해 선거에서는 그 좌파가 떨어져 나와 건설한 ‘경제자유

전사들’(EFF)이었다. EFF는 이번에 6.35%를 득표했다. 선거 이전 여론조사에서 10% 대 지지율을 보였던

데 비하면 좀 낮은 수치이지만, 처음 선거에 뛰어든 정치세력으로서는 분명 놀라운 결과였다.

한데 변화의 조짐은 이것만이 아니다. ‘남아공노동조합회의’(COSATU, 이하 코사투) 소속인 ‘전국금속

노동조합’(NUMSA)은 선거가 끝나자마자 오히려 더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다음 선거에서는 새로운 노동

자정당을 창당해 대응하겠다며 준비에 착수한 것이다. 남아공의 민주노총 격인 코사투는 그간 ANC를 적

극 지지해왔었다. 그런데 그 핵심 노조가 ANC와의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도대체 지금 남아공에서는 무

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삼각 동맹 내 좌파인 ‘주마 동맹’의 등장과 와해

민주화 이후 남아공의 집권 세력을 흔히 ‘삼각 동맹’이라고 한다. ANC-COSATU-SACP의 동맹이

다. 이 중 마지막의 SACP는 ‘남아공 공산당’을 뜻한다. 공산당은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에서 ANC의 중

요한 동반자였다. 그래서 당 조직을 따로 하면서도 선거에는 공산당 후보가 ANC의 공천을 받아 출마한

다. 우리에게는 아주 낯선 관행이다. 아무튼 이 삼각 동맹이 남아공의 ‘정통 민주 진보’ 세력이다.

민주화 직후만 하더라도 삼각 동맹은 ‘민족민주혁명(NDR)’이라는 이름 아래 대안적인 발전을 추진하

고 이를 기반으로 다음 단계, 즉 사회주의로 나아가겠다고 기염을 토했었다. 그러나 막상 집권하고 나서

는 당시의 전 세계적 대세였던 신자유주의를 그대로 따랐다. 단지 기득권 집단 안에 백인뿐만 아니라 신

흥 흑인 부르주아가 참여하기 시작한 게 변화라면 변화였다. 이 점에서 ANC의 첫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

라의 행보는 한국의 김대중과 아주 유사했다.

흑백 간의 불평등은 조금 완화된 듯 보였지만, 사회 전체를 가로지른 불평등은 오히려 민주화 이전보

다 더 심각해졌다. 상위 10%가 국부의 절반 이상을 쥐고 있는 데 반해 하위 10%는 불과 1.2%를 벌어들일

뿐이다. 당연히 유색인·노동자 대중의 분노가 끓어오를 수밖에 없다. 만델라의 뒤를 이어 보다 강력하게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친 타보 음베키 대통령이 이 분노의 첫 번째 타깃이 됐다.

2007년 12월 ANC당대회는 예년과 달리 격렬한 정치 투쟁의 장이 됐다. ANC청년동맹(ANCYL)과 코

사투, 공산당이 음베키 정부의 경제 사회 정책을 비판하며 반대 연합을 구축했다. 이들의 구심 역할을 한

것은 ANC안에서 음베키 대통령의 최대 정적이었던 제이콥 주마였다.

‘주마 연합’의 위력은 막강했다. 이들은 당대표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 음베키를 물리치고 주마를 대표

에 앉혔다. 당이 대통령을 버린 것이다. 음베키는 결국 차기 총선을 9개월 앞둔 2008년 9월에 대통령직에

서 스스로 물러난다. 이후 음베키 지지 세력은 ANC에서 집단 탈당해 위에 소개한 COPE(이념은 일종의

‘제3의 길’ 지향)를 창당하게 된다.

Page 88: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86

이때만 해도 삼각 동맹의 새 흐름

에 대해 상당한 기대가 있었다. 주마

연합의 지도자들은 삼각 동맹이 애초

의 민족민주혁명 강령을 되살려 탈신

자유주의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호언했다. 마침 남아공 밖의 세계는

미국 발 금융 위기로 휘청대고 있었

다. 2009년 선거로 드디어 주마가 대통령이 되자 남아공은 다시 세계인의 눈길을 모았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치달았다. 2012년 8월, 전 세계는 남아공에서 들려온 끔찍한 소식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초국적 기업 론민이 소유한 마리카나 광산에서 경찰이 파업 노동자들에게 발포해 38명이

살해당했다. 아파르트헤이트도 끝났고 혁명 투사들이 집권했다는데, 노동자 학살이 벌어졌다. 이 사건과

함께 민주화 이후 남아공의 실상, 또한 뭔가 전환을 추진하는 듯 보였던 주마 연합의 실상이 만천하에 드

러났다.

주마 연합 쪽의 ANC 지도자들도 실은 신흥 흑인 엘리트층의 일원이었다. 누구보다 주마 자신이 그런

인물이었다. 일단 경쟁 분파(음베키 세력)를 몰아내고 나자 이들 역시 만델라-음베키 정부의 정책 기조에

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대해 주마 연합의 다른 구성원들은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우선 공산당은 주마 정부를 끼고 돌았다. 공산당은 주마의 집권과 함께 주요 장관 자리를 차지했다. 과

거에는 삼각 동맹 내 하위 파트너에 불과했다면 이제는 삼각 동맹의 주도 세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산당은 모처럼의 권력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은 듯 보인다. 그래서 마리카나 광산 사태에 대해서도 경

찰과 파업 노동자들을 놓고 양비론적 태도를 보였다.

이와 상반되는 대응은 ANCYL 쪽에서 나왔다. 이 조직의 카리스마적 지도자 줄리어스 말레마(1981년

생)사 주마 대통령으로부터 돌아

섰다. 주마 연합 그리고 더 나아

가서는 ANC 전체가 집권 전의

대의를 저버렸다고 공공연히 비

판하고 나섰다. 마리카나 사태

때는 주요 정치가 중 유일하게

현장을 방문해 ‘광산 국유화’ 구

호를 외쳤다. 결국 그는 ANC를

뛰쳐나와 EFF를 창당했고, 이

당이 이번 선거에서 유력한 신진

정치 세력으로 부상한 것이다.

삼각 동맹을 이루는 세 조직의 로고. 왼쪽부터 코사투, 공산당, ANC

EFF를 새로 창당한 줄리어스 말레마. 차베스를 연상시키는 베레모를 썼다.

Page 89: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먼 좌파 이웃 좌파 87

금속노조,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향해 나서다

그럼 이제 남아공의 희망은 말레마와 EEF에 있는가?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미심쩍은 대목이 많다. 말

레마는 젊은 시절의 주마를 연상시키는 선동 정치인이다. 그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맞지만, 그

출발점은 흑인 민족주의다. 그것도 모든 인종의 공존을 추구하던 ANC의 민족주의보다 오히려 후퇴한

‘배타적’ 흑인 민족주의다. 말레마의 이런 면모는 그가 장기 독재를 위해 백인 반대 선동을 이용하는 짐바

브웨의 무가베 정권을 지지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주마 연합의 또 다른 한 축, 즉 코사투다. 주마 정권 출마 이후에 코사투는

공산당과 달리 정권을 비판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비판에 앞장선 것이 사무총장 즈웰린지마 바비

(광산노조 출신)다. ANC, 공산당에게는 이런 바비가 눈엣가시였다. 이런 갈등이 마침내 2013년 대의원대

회에서 폭발했다. 반바비파가 바비의 성폭행 혐의를 폭로하며 사무총장 자격을 정지시켰다.

바비의 혐의는 현재 재판 중이다. 유무죄는 아직 결론 나지 않았다. 하지만 코사투 내의 9개 노조는 이

논란이 애당초 주마 정권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불거진 것이라며 처음부터 반발하고 나섰다. 그 중에서도

선봉에 선 것이 바로 NUMSA, 즉 금속노조였다. NUMSA는 내친 김에 주마 정권에 맞선 총공세에 나섰

다. 2013년 12월의 NUMSA 대의원대회는 ANC와 공산당에 대한 정치자금 기부 중단을 결의했다. 삼각

동맹에서 탈퇴한 것이다. 그리고 2014년 3월에는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벌였다.

코사투 대의원대회 모습.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바비 사무총장이다.

Page 90: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88

비록 직접 발단은 코사투 상층 활동가들 사이의 알력이었지만, 일단 풀어헤쳐진 실타래는 그런 제한된

수준을 넘어선다. NUMSA가 차지하는 위상 자체가 만만치 않다. NUMSA(현 사무총장 짐 어빈)는 조합원

34만 명으로, 코사투 내 최대 노조다. 또한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 때부터 코사투 내에서도 가장 전투적

이고 좌파적인 노조로 유명했다. 그래서 공산당으로부터 ‘노동자주의 편향’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삼각 동맹 비판과 탈퇴가 결코 돌발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NUMSA는 이미 선거 전부터 ANC, 공산당을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세력화를 추진하겠다는 결의를 분

명히 했다. 다만 준비가 부족해 이번 선거에 직접 뛰어들지는 않았고, 당장은 당이 아니라 연합전선 형태

로 세력을 모으겠다는 입장이다. NUMSA는 이를 위해 조만간 ‘사회주의 대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이 자리에서 새 노동자정당 창당의 방향과 일정을 잡겠다는 것이다. NUMSA는 이미 민주화 시기(1994년)

에도 ‘사회주의 대회’를 열어 조합원들의 참여 아래 민주화 이후의 사회 변혁 전망을 토론한 경험이 있다.

NUMSA가 새 노동자정당 창당의 참고 사례로 언급하는 것은 ‘브라질,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그리스’

다. 이 목록을 보면 이들의 지향이 어떠한 것인지 대략 감을 잡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삼각 동맹의 역사적

과오 및 한계와 단절해 남아공 좌파 정치의 제2기를 새로 열려는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지금 남아공에서

는 만델라의 죽음과 함께 한 시대가 저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새 시대의 미명이 서서히 모습을 드

러내고 있다.

금속노조 조합원들의 파업 시위. EFF지지 피켓도 보인다.

Page 91: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구라파통신 89

법 앞에서

카프카의 에세이 <법 앞에서>는 시골에서 올라온 한 사람이 법률이라는 불가해한 체계

앞에서 맞이하게 되는 하릴없는 죽음을 다룬다. 이 에세이에서 법률은 그 문이 활짝 열려있

지만 실제로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수 명의 문지기를 거치고 지나가야 하는 접근 불

가능한 건축물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때문에

법에 다가가려는 시골사람의 노력은 이미 첫

번째 문 앞에서 수포로 돌아간다. 그는 첫 번

째 문 앞에 자리를 깔고 입장이 허락될 때까

지 기다리지만, 끝내 입장이 허락되지 않은

채 ‘법 앞에서’ 허무한 죽음을 맞이한다. 물

론 법학박사였던 카프카에게 법이 실제로 이

처럼 불가해한 부조리로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스트리아제국 산재보험기구에서

법무담당으로 일했던 카프카는 직업적으로

수많은 산재피해자를 만나 조사하고 이들에

대한 법무상담을 해야만 했다. 법에 무지한

산재피해자들. 아마도 카프카는 저 텍스트를

자본주의적 산업경제의 필연적 ‘부산물’인

이 산재피해자들의 시각에서 썼을 것이다.

구라파 통신

최동민 유럽 당원, 독일 거주

법치국가와 법의 가치독일에 대한 인상비평

카프카의 <법 앞에서>의 삽화

Page 92: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90

카프카는 이 짧은 우화에서 시골사람의 시선을 통해, 모두에게 열려 있는 법의 지배와 보호가 이론적으로

는 보편적이지만, 실제로는 법에 대한 접근이 허락된 자들에 대한 독점적 지배와 보호를 위한 장치임을

폭로하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법치국가 독일

법은 명백히 양면성을 지닌다. 법은 사인 간 또는 사인과 국가 간에 충돌이 발생했을 때, 이를 폭력과

같은 ‘직접적’ 방식이 아닌 법률의 매개를 통한 ‘간접적’ 방식으로 해결한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며, 강자

에 대한 약자의 보호를 실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법의 지배

란 모든 문제 해결에 대한 법의 독점, 즉 법을 통하지 않고는 어떠한 사적, 공적 문제도 해결 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규정하는 법이 강자의 언어로 씌어져 있을 경우, 그리고

법에 대한 접근권 자체가 시골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약자에게 실질적으로 보장되어 있지 않을 때, 법

의 지배는 카프카의 에세이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저 법을 지배하는 자의 지배와 다름 아니게 된다. 독일

의 문학비평가 발터 벤야민이 <폭력 비판>에서 법의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두 가지 폭력, 즉 ‘법을 정립하

는 폭력’과 ‘법을 보존하는 폭력’ 모두를 부정하는 ‘신적 폭력’을 주장했을 때, 그는 분명히 법의 지배의

어두운 그늘에 주목했던 것이다.

법치국가 또는 법의 나라로 알려진 독일에 살다보면, 법이 얼마나 철저하게 개인들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예컨대 독일인들은 교통사고가 나도 싸우는 법이 거의 없다. 사고가 나면 운전자

들은 별 표정의 변화 없이 차에서 내려 서로 다치지는 않았는지를 묻고는 경찰과 각자의 보험회사에 전화

를 한다. 놀라울 정도로 침착한 이들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높은 시민의식에 나는 처음엔 깊은 감명을 받

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모습이 사실은 법의 지배가 오래 지속된 데에서 나타난 사회적 관습임을

알게 되었다. 이 사회에선 사고를 개인적, 직접적으로 풀려 하면 아무 소득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피

해를 입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도로교통법에 따르면 운전을 할 때나 교통사고 시에 운전자가 고성

을 지르거나 욕을 하면 벌금형에 처해진다. 때로는 말로 잘 풀어서 해결될 것 같은 일도 법을 통하지 않으

면 안 되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된다. 구두로 잘 상호합의하더라도 법적 효력이 있는 문서로 남겨놓지 않으

면 뒤통수를 맞기 십상이고, 아무리 상식적이고 정당한 요구를 하더라도 적법한 법적 절차를 밟지 않으면

영 소용이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특히 언어적 한계와 부족한 법적 지식, 그리고 인간관계망의 결여로 인

해 법의 보호를 받기 어려운 외국인에게는 이런 일이 빈번히 발생한다. 때문에 법치주의가 나 같은 외국

인 유학생에게는 카프카의 우화 속 시골사람에게와 마찬가지로 사건 해결을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거대한 부조리로, 법을 향한 입구를 가로막고 선 문지기와 같이 접근 불가능한 대상으로 다가올 때가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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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파통신 91

법 앞에서 - 사기를 당하다!

얼마 전 내가 겪은 일이 그랬다. 독일사회를 이상하게도 대단히 신뢰하는 데다 원래 통장의 입출금내

역을 제대로 확인하는 버릇이 없는 나는-돈을 저금하고 잔고를 관리하는 것은 소부르주아적인 하비투스

이다!- O2라는 독일 통신사에서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2년이 지난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핸드폰 판매

원이 얘기한 금액 외에 한 달에 무려 10유로나 하는 무료 문자서비스가 신청되어 있었고(확인 결과 지난달

에 문자를 총 2건 보냈다), 핸드폰과 인터넷을 동시에 가입하면 매달 10유로를 깎아준다고 계약서에 명시해

놓고도 2년 간 240유로, 우리 돈으로 약 40만 원의 거액을 추가로 인출해간 것이다. 결국 계약서를 허술

히 본 대가를 톡톡히 치룬 셈이었다. 10유로짜리 무료 문자서비스는 쓰라린 가슴 안고 즉시 인터넷을 통

해 해약했지만, 2년 간 더 지불한 인터넷 사용료 240유로가 문제였다. 이를 확인한 날부터 울화통이 터져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우리나라 같으면 영업지점에 가서 “사기꾼 놈들!”이라고 한바탕 소리를 지르면

“고객님 죄송합니다. 곧장 처리해드리겠습니다”라며 해결될 상황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외국인들을 등쳐먹기로 유명한 통신사 O2이기에 더욱 울화통이 터졌다. 상담원과 통화

하는 번호는 가입용 전화를 제외하면 모두 유료전화로, 일 분당 통화료가 엄청나게 비싼데다가 상담원의

수가 적어서 한 번 통화하려면 10분을 기다리기 일쑤라 인간의 인내심의 한계를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의 지인은 실수로 인터넷 설정을 잘못하여 전문기술자 상담원과 20여분 통화를 했다가 거의 한 달치 인

터넷 사용료 30유로(45,000원)를 통화비로 지불한 경우도 있었다. 통신사가 이메일을 통한 고객문의도

폐지한 지라 항의가 여의치 않은 터였다. 막막한 마음이 들었다.

법으로의 길라잡이 - 무료 법률서비스

그래도 독일엔 무료 법률서비스가 많다고 들은 기억이 떠올라 학생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일주일

에 3시간 무료 법률상담 시간이 있었다. 학생회가 고용한 변호사가 대학생들에게만 무료 법률상담을 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예정된 시간에 가보니 몇몇 대기 중인 학생들이 모였다. 삼분의 이 이상이 외국인인

것을 보니 의지할 곳 없는 외국인들이 마지막으로 가는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의 차례가 되어 학생

증을 보여주고 내 억울함을 열심히 호소했다. 변호사는 듣는 둥 마는 둥 계약서만 열심히 보더니 중요한

법률적 자문을 해주었다. 참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독일사회가 적어도 카프카가 살던 1920년대보다 발전

한 점이 있다면, 이는 나 같은 소수자도 법률의 보호망 속으로, 문지기가 지키는 관문을 지나 법이라는 미

로의 공간 속으로 들어갈 기회를 부분적으로라도 마련했다는 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장 집으로 와 심

기일전하여 책상에 앉아 장문의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2주 내에 답장이 없으면 고소하겠다’는 통 큰 협

박의 말과 함께 날짜와 서명을 적어 넣고 편지를 발송했다. 그러나 큰소리 친 2주가 다 되어 가는데도 답

장이 없자 마음이 조금 초조해졌다. 마침 요청한 2주가 되기 하루 전날 통신사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고

Page 94: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92

객님의 분노에 대해 깊이 공감합니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편지엔 240유로 전액을 보상하겠다는 말이 쓰

여 있었다. 이처럼 정말 사소한 일상적 승리에 도취되어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데, 작게 쓰여진 문구가 눈

에 띄었다. “법적 의무가 없는 보상임”. 법적 의무가 있는 보상이면, 내게 밀린 이자를 별도로 보상하고 복

잡한 법적 과정을 거쳐야 하는 모양이라 정나미 떨어지게 굳이 꼼꼼히 적어 놓은 것이었다. 모든 일이 법

으로 시작해서 법으로 끝나는 과정이 합리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여전히 내게는 낯설고 부자연스럽고, 웬

만한 사인 간의 문제는 말로 해결되는 한국사회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법치국가의 가치

법이 사회구성원 간의 약속이고 법치국가의 가치가 이 약속이 잘 지켜지는 데 있다면, 독일은 비교적

건강한 법치국가이며 한국사회에 비추어보면 이 점이 부러울 때가 많다. 나는 독일에 막 도착하여 뉴스를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던 경험이 있

다. 바로 야간비행금지에 대한 독일 헌

법재판소의 판결 때문이었다. 프랑크푸

르트 공항은 도심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

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지난 수 십 년간

◀야간비행금지를 선전하는 독일사민당(SPD)의 홍보물▼야간비행금지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

Page 95: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구라파통신 93

지역주민들에게 소음공해로 인한 많은 피해를 주었고, 이에 관한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때문에

주민들은 편안히 수면을 취할 기본권이 침해되었다고 헌법재판소에 소를 제기하였는데, 오랜 법적 공방

끝에 헌법재판소는 2012년 초 결국 주민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판결이 확정되자 독일의 허브공항인 프랑

크푸르트 공항에서 23시부터 5시까지 모든 비행기의 이착륙이 즉시 금지되었고, 독일의 국적기인 루프트

한자 항공은 직격타를 맞게 되었다. 주로 새벽시간에 이착륙하는 화물기 운항에 차질을 빚음으로써 적지

않은 금전적 타격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루프트한자 직원이나 사장도 아닌데 내면화된 노예의

식이 발동했는지, 문득 ‘혹시 저 회사는 타격이 없을까? 가만히 판결을 받아들일까?’하는 생각이 먼저 들

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떠오른 내 스스로가 한심하기도 했지만, 기업의 이윤이 인권보다 훨씬 더 존중받

는 한국사회에서 온 나에게 이러한 판결은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란 생각도 들

었다. 그리고 이어진 뉴스 보도에서 루프트한자 항공 대변인의 공식입장 발표에 난 또 한 번 놀랐다. ‘반

기업 정서에서 나온 판결이다!’와 같은 남조선 기업가들의 판에 박힌 헛소리가 아닌, ‘헌법재판소의 판결

을 존중한다. 타격이 적지 않지만 빠른 시일 내에 해결책을 마련하겠다’는 ‘상식적’인 내용을 발표했기 때

문이었다.

이처럼 법은 사인 간의 관계뿐 아니라 사인과 국가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약속이고, 이 약속은 어떠한

경제적 이해관계에도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 법치국가의 가치이다. 때문에 비록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세계

가 인간 간의 관계를 법적 강제를 통해 규정할 필요가 없는 ‘신적 폭력’으로 정화된 해방된 세계라 할지라

도, 만약 강자로부터 약자를 보호할 수 있게 하는 법의 보호가 실현될 수 있다면 법치국가를 만들어가는

노력을 결코 헛되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지난 몇 년간 ‘법치국가’ 독일에서 느낀 법에 대한

짤막한 인상비평이다.

Page 96: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94

GMO와 LMO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는 ‘유전자변형생명체’이며 LMO(Living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는 ‘유전자변형생물체’로 표현할 수 있다. LMO는 “현대 생

물공학을 이용해 얻어진 새로운 유전물질의 조합을 포함하고 있는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

로서, 형광물고기처럼 생신과 번식을 할 수 있는(Living) 것을 지칭하고 있으며, GMO보다

는 LMO가 좀 더 상위의 개념으로 GMO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반면, GMO는 non-living(통조림 상태의 GM 옥수수처럼 가공된 식품)도 포함되며, 유전

자의 인위적인 조작으로 창출된 생물로써 LMO보다 협의적인 의미이나, 바이오안전성의정

서상에서는 동일개념으로 간주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생산량 증대, 유통과 가공상의 편의를 위해 유전공학기술을 이용하여 기존

의 육종방법으로는 나타날 수 없는 형질이나 유전자를 지니도록 개발된 유기물을 의미하

며, 보통은 유전자변형 농산물 및 식품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식품영역에서

는 LMO보다는 GMO를 사용하고 있다.

콩 종주국의 역설 GMO

콩의 원산지는 만주로 추정되고 있고 가장 다양한 콩 종자를 갖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

다. 미국에서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수많은 콩 종자를 강탈해 가기는 했지만 한국은 콩 소

비에 있어 독보적이다.

연승우농업 전문 기자

왼쪽에서 본 농업 이야기 당신의 밥상,

GMO로부터 안전하십니까?

Page 97: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왼쪽에서 본 농업이야기 9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콩은 1690년경에 독일에 처음으로 전파돼 유럽에서 재배되기 시작했으

며 미국에는 1804년경에 처음으로 알려져 1900년경부터 널리 재배되었으며, 현재 세계 총생산량 중 약

70%를 차지하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콩을 재배해 먹기 시작한 한민족에게 콩은 다양한 장류의 음식으로 진화했다. 추운 겨울

과 더운 여름을 나기 위해서는 음식을 오래 보관해야 하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된장, 고추장, 간장 등의 발

효식품을 발전시켰다. 이로 인해 지금도 한국에서는 세계 최대 콩 수입 국가이며 콩 소비를 하고 있다. 외

국에서는 콩이 식용으로도 쓰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사료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은 2010년 기준으로 대두와 옥수수의 곡물자급률(사료용 포함)이 10.1%와 0.9%에 불과하며, 카놀

라는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2013년 국내에 수입 승인된 식용·농업용 유전자변형생물체는 3,131

건, 약 887.7만 톤, 28.6억 달러 규모로 「유전자변형생물체의 국가간 이동 등에 관한 법률」(LMO법)이 시

행되기 시작한 2008년 이후 가장 많은

양의 유전자변형생물체가 수입 승인됐

다.

2013년 식용으로 수입 승인된 유전

자변형생물체는 전체의 19%인 약 168

만 톤(99건)이었으며, 작물별로는 옥수

수가 전체 수입량의 89.7%를 차지하며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대두(8.2%)와 면실류(1.7%), 카놀라(0.4%) 등이 소폭 수입됐다. 콩으로 만든

장류를 즐겨먹는 한국인들이 GMO에도 노출이 되기 쉬운, 콩 종주국의 역설이 시작됐다.

수입 콩으로 만든 장류는 GMO

경실련, 아이쿱생협 등의 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MOP7 한국시민네트워크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시판

되는 장류(된장, 청국장, 간장, 고추장)중 조사된 111개 제품(CJ 해찬들, 대상 청정원, 신송식품, 대형마트 PB 제

품 등)에는 수입산 대두, 물엿 또는 액상과당이라는 표기만 있을 뿐 GMO 포함 여부에 대한 표기는 전무

하고 원산지를 표기하는 경우도 극히 드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간장에 사용된 수입산 대두의 경우 현행법 상 GMODNA가 발견되지 않을 경우 GMO표기를 하

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GMO 콩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내가 먹고 있는 장류에

GMO재료가 포함되었는지 여부에 대한 알 권리, 안전한 식품을 선택할 권리를 전면 차단당하고 있는 것

이다.

한국은 원재료 5순위 이내, GMO DNA가 잔존할 경우로 표시 의무를 한정해 놓은 허술한 GMO표시

제에 몇 년째 머무르고 있다. 불완전한 표시제가 유지되는 동안 미승인 미국산 GMO 밀 수입 가능성 논

된장, 고추장, 간장 등의 발효식품을 발전시킨

한국은 콩 소비에 있어 독보적이다. 콩으로 만

든 장류를 즐겨먹는 한국인들이 GMO에도 노

출이 되기 쉬운, 콩 종주국의 역설이 시작됐다.

Page 98: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96

란, 한국 내 GMO 작물 자생지 증가, 프랑스 Caen 대학 세릴리니 박사팀의 GMO 위험성 경고 논문 등

GMO의 안전성, 관리에 의문을 갖게 하는 큰 파문들이 발생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소비자의 GMO

에 대한 불안이 높은 수준임에도 있으나마나한 표시제 아래 GMO 수입량은 날로 늘고 있다. 결국 한국

GMO 전체 수입량은 8백만 톤을 넘어 세계 2위의 GMO 수입국이 되었고 승인된 GMO 작물도 식품용

110건, 사료용 95건으로 2014년 5월 기준 승인 결과(한국바이오안전성정보센터 자료)을 넘었다.

그리고 2013년 168만 톤 2013년 12월 기준 발표 결과(한국바이오안전성정보센터 자료)의 GMO 작물이

식용으로 수입되었음에도 수입 콩을 원료로 한 장류, 식용유에서 GMO사용 표시를 찾을 수 없다.

장류뿐만 아니라 시중에서 판매되는 대두유, 옥수수유, 카놀라유의 원재료도 GMO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 해당 기업 역시 대부분의 대두유, 옥수수유, 카놀라유의 원재료가 GMO임을 인정하고 있다. 국제슬

로푸드한국협회(회장 김종덕)가 소비자의 알고 선택해서 먹을 권리를 위해, 지난 6월 시판되고 있는 대두

유 14종, 옥수수유 11종, 카놀라유 15종, 혼합식용유 3종 등 총 43개 제품에 대한 GMO표시 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조사 제품 모두가 수입산 대두(콩), 옥수수, 카놀라를 원재료로 사용하고 있지만 GMO표시

제품은 없었다.

현행 GMO 표시제도 상에는 표시 면제 사항이 있어 소비자로서는 GMO 원료 사용에 따른 선택을 할

수 없고, GMO원료 사용 여부를 모르고 구입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행 GMO 표시제도를 확대하여,

GMO 사용 여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소비자에게 제공하고, 소비자가 알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

다.

‘수입산’이라고만 표기된 제품 성분표시. GMO사용여부를 확인할 길은 사실상 막혀있다. (사진: KBS보도 캡쳐)

Page 99: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왼쪽에서 본 농업이야기 97

GMO는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을까

GMO(유전자조작농산물)은 식량증산을 목적으로 개발되지 않았다. 현재 재배되고 있는 GMO은 콩, 옥

수수, 감자, 면화, 유채 등으로 이중 콩과 옥수수가 가장 많이 재배되고 있다. 콩과 옥수수는 서양에서 축

산 사료용 작물이지 식용작물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GMO의 개발의도가 보이고 있다.

식량증산이 목적이라면 GM기술이 밀과 쌀

을 중심으로 개발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GMO

은 식량증산이 아닌 종자의 상품화를 통한 종

자회사(몬산토)의 이윤증대가 목적이다.

GMO은 다수확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

다. GMO의 기능은 제초제 내성, 해충 저항성,

과숙억제 등이다. GM의 기능 어디에도 다수

확의 기능은 없다. 이러한 기능은 생산성의 향상에는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생산량에 직

결되는 것은 아니다.

생산성이 증대하더라도 그것은 곡물의 가격과는 하등 상관없다. GM작물 중 제초제 내성 콩인 몬산토

의 라운드업레디콩은 몬산토의 제초제인 라운드업에만 내성을 갖도록 조작된 콩이다. 즉 라운드업레디

콩을 재배하려면 라운드업 제초제를 구입하여 뿌려야만 한다. 또 자사의 농약을 뒤집어써야만 싹이 트도

록 유전자를 조작하는 트레이터 기술 등을 보면 생산성 증대를 통한 생산단가 절감이 농약과 종자를 동시

에 구입해야 하는 비용과 비교해 보면 결코 생산단가를 절감한다고는 할 수 없다. 또한 절감된 생산단가

로 인한 이익은 소비자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닌 종자회사들에게 돌아간다.

세계 식량의 위기는 생산량의 문제가 아닌 왜곡된 생산구조와 분배의 문제이다. 농산물을 수출하는 국

가들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 이는 토지의 이용에 있어 필요한 식량을 생산하는 것이 아닌 환금작물, 수

출용 작물을 재배하는 생산구조의 문제가 식량을 부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무리 식량생산을 늘려도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왜곡된 분배구조 때문이다. 세계 인구의 상위

20%가 부를 독점하는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 빈곤이 굶주림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생산과 분배구조

의 해결이 기아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녹색혁명, GMO가 결코 기아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GMO는 초

국적 종자회사들의 이익을 위한 상품이지 민중을 위해, 식량부족을 해결할 수 있는 슈퍼맨이 아니다.

GMO(유전자조작농산물)은 식량증산을

목적으로 개발되지 않았다. GMO은 식량

증산이 아닌 종자의 상품화를 통한 종자

회사(몬산토)의 이윤증대가 목적이다.

Page 100: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98

현재 치열하게 진행중인 7.30 재보

궐 선거, 그 중에서도 동작을! 하필 전

국의 관심이 집중되는 동작을 지역(흑

석동)에 사는 죄로, 그것도 진보정당에

몸담고 있고, 하필 또 중앙당 당직자로

일하고 있는 까닭에 그 치열한 격전의

한복판에 나는 실무자로 뛰어들어야

했다. 아니 떠밀렸다는 표현이 맞을 것

이다.

동작을 지역이 전국적 관심을 받고

있다고 하지만 스포트라이트는 새누리

당 나경원, 전략공천 파동의 주인공인

새정치민주연합의 기동민, 지역구인

노원을 버리고 멀리 남쪽으로 온 노회

찬에게 집중이 되었다. 언론에서는 3파

전이네 뭐네 하고 떠들 뿐 2008년 이후

동작에서 꾸준히 활동한 동작주민 김종

철, 2006년 촉망받는 젊은 정치인으로

민주노동당 서울시장 후보로 나온 김종

철에게는 아주 약간의 관심을 줄 뿐이

맹명숙서울 동작당협 부위원장

선거복 터진 동작당협, 7.30 재보궐 선거의 한복판에 서다

지역에서현장에서

사진으로 보는 김종철 선본 일기

7월 14일, 동작선관위에서 열린 매니페스토정책협약식이 있었고 이 자리에서 기동민, 유선희, 노회찬 후보와의 조우가 있었습니다.

선거운동 와중에도 세월호 유가족분들의 광화문단식농성장에 들렀습니다.지난번 동작당원들이랑 같이 안산분향소에 가서 펑펑 눈물을 쏟던 후보 부부의 모습이 생각나네요.

Page 101: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지역에서 현장에서 99

▲◀19일은 김종철 후보의 선거사무실 개소식이었습니다. 사무실이 소박하고 아담한 곳이라 손님들이 전부 안으로 들어올 수없어 죄송합니다.

7월 15일 아침 선거운동은 은평과 양천에서 오신 당원들의 도움으로 숭실대 입구 부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오전에 한겨레21기자가 와서 동행취재차 함께 여의도 세월호 유가족 서명전달행진에 함께 했습니다.

Page 102: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100

17일은 본격적인 선거운동 첫날! 후보를 비롯한 많은 분들 고생하셨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동작으로 오신 당원님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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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현장에서 101

었다. 정말 이 땅 언론의 가벼움과 천박함을 절감할 수 있었다. 차라리 지역언론이 더 공평한 것 같다.

눈앞의 이슈만 찾는 언론의 이런 속성 때문에 우리나라 정치는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

다. 새로운 인물이 없다고 난리를 치지만 정작 새로운 인물을 발굴하고 조명하고 키우는 일에는 인색한

게 우리 정치 현실과 언론의 행태라고 본다.

지역에서의 여론은 언론이 조장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그사이에 김종철 후보가 부지런히 지역을

돌아다녔고, 여러 활동을 했었음을 이번 기회에 실감할 수 있었다. 철새, 낙하산 대 지역일꾼, 동작사람이

라는 구도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선거에 출마해서 당선돼도 떠나고, 낙선돼도 떠나는 철새정치인들

이 이번에는 보수건 진보건 구분하지 않고 총망라되었다. 가장 기대를 모았던 노회찬 후보의 행보에 대해

서 실망을 금치 못하는 주민들이 내가 아는 사람들만 해도 꽤 된다.

어쨌든 6.4 지방선거가 끝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피로가 채 가시기도 전에 동작 당협은 선거준비를

해야 했다. 나는 정식으로 동작으로의 파견근무를 요청했고, 7.30 보궐 선거 기호 5번 김종철 선거사무소

에서 상황실장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동작 파견은 7월 8일부터였다. 사무실도 확정되지 못하였고, 선거

때면 쏟아내야 하는 홍보물 준비도 이제 막 시작했으며, 선거운동원 모집도 해야 했다. 6.4 지방선거가 끝

난 후 동작당협은 지역주민단체와 방사능안전급식조례 제정을 위한 주민 서명을 받아야 했기에 너무나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모든 게 초스피드로 돌아가야 했다.

다행히 당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줘서 사무장, 수행, 회계책임자, 후원회 회계책임자 등 역할을 나누

고, 예비후보 등록도 마칠 수 있었고, 몇 차례의 당원토론을 통해 지역정책 공약도 마련할 수 있었다. 19

일에는 검소하게나마 개소식도 치를 수 있었다. 비록 예비공보물은 시간이 없어서 포기해야 했지만 6.4

지방선거 때 두 곳 선거를 치러서 기진맥진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김종철 위원장을 위해 아낌없

이 시간과 비용을 투자한 당원들이 자랑스럽다. 게다가 은평, 대전시당, 인천시당, 양천, 강남서초, 구로

등 다른 당협에서 적극적으로 선거운동을 같이 해주시고 있어서 후보를 대신해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

린다. 선거가 열흘 정도 남았고, 7월 한여름 날씨에다가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동작당협은 이번이 마지막이

라는 각오로 선거에 임하고자 한다. 아마 선거가 끝난 후 몸살로 앓아눕는 동작당원들이 속출할 것이다.

개소식 이후엔 당원님들과 함께흑석동 중대병원 앞에서 집중유세를 했습니다. 몇 시간 동안이나 함께 해주신 당원님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정말 죽을힘을다하겠습니다.

Page 104: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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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통행금지 해제 직후 1982년 10월 청계3가와 종로 3가 사이 보도블록에 수레바퀴를 단 간이 노점

술집들이 밤이면 밤마다 문전성시를 이뤘다. 가스등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은 학생들은 소라, 해삼, 멍게

와 가락국수로 끼니를 해결했다. 최루탄이 사라지고 하나둘씩 둘러 앉아 무용담이 새벽까지 이어졌다. 이

밤 시장에는 사람들의 희노애락뿐만 아니라 각종 사건·사고와 값싼 상품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별천지

였다. 물론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시대마다 달라진 밤 시장이 민중들에게 어떤 의미였는

지, 아직도 지나간 밤 시장을 추억하려는지 그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밤 시장, 인민들의 해방공간

야간통행금지는 밤 시장뿐만 아니라 민중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조선시대 국경이나 도성 사

람들은 특정한 날을 제외하고 밤 8시부터 그 다음날 오전4시까지 야간에 통행할 수 없었다. 청일전쟁 직

후 1895년 9월 29일 야간통행금지 시간제가 폐지되었으나 나라 안 밖은 암흑으로 빠져들었다. 일제강점

직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야시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2년 뒤 1912년 다시 조선상업의 발전

을 운운하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강조한다. 조선총독부는 밤 시장에서 이익 창출과 눈요기도 하면서

식민지 밤을 잊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밤 시장은 조선총독부의 의도에 적중했다.

한국의 첫 밤 시장은 1914년 9월 세종대로(옛 태평통, 중구 서울역 로터리에서 종로구 광화문 로터리)에서

270여 명의 노점 상인들이 과일, 고물, 장난감 등을 판매하고 구경꾼을 위한 씨름판까지 열렸다. 남대문

밤 시장은 9월 15일 밤부터 남대문광장 좌우 도로변(지금의 남대문 시장)에서 전등과 가스등을 밝혀 놓고

첫 문을 열었다. 종로 밤 시장은 1916년 7월 12일 조중응 자작, 백완역·예종석 자본가가 도쿄의 야타이

(포장마차)문화를 그대로 받아 와 “시가지의 발전과 일본·조선인의 합심협동”이라는 목적으로 탄생했다.

지금의 종로·중구 밤 시장은 여전히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고 있으며 한국의 밤거리 1번지로 변모했다.

최대 인파가 몰린 종로 밤 시장에는 1917년 5월 1일 저녁 7시 반부터 보신각에서 탑골공원까지 ‘사람 물

우리동네 현대사

전갑생서울 중구 당원

종로·남대문 밤 시장,해방공간“야시의 추억”

Page 105: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삶과 문화 103

결’로 굽이쳤다. 밤마다 시장에는 진

한 분을 바르고 나온 18세 처녀, 이름

난 경성의 판교·한남·신창 기생들의

화려한 옷맵시, 청춘 남녀들, 부모의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까지 가득했다.

경성의 명물로 알져진 종로·남대

문 밤 시장은 좋은 시위공간으로 바

뀌고 있었다. 일제의 폭력·폭압에

억눌린 인민들은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났

다. 이때 종로 밤 시장은 ‘조선독립만

세’ 소리로 가득한 인민의 해방공간

으로 바뀌었다. 이 해방공간은 남대

문 시장에서 종로통(종각 모퉁이〜종

로3가) 거리까지이며 단성사(1907〜),

우미관(1912〜1950) 등의 극장가, 카

페, 댄스홀, 카바래, 선술집으로 밀집

한 곳이었다. 결국 조선총독부는

1921년 5월 말까지 종로·남대문 외

에 전국 각지의 밤 시장을 폐장하고

말았다.

언론, 밤 시장의 문제점 부각

다시 개장한 종로 일대 밤 시장은 냉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시장에는 예전보다 늘어난 경

찰과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려는 고등형사까지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성의 대부분

조선인들은 종로 바닥에서 늦은 밤까지 해방된 공간을 지켰다. 1920〜1930년대 종로 밤 시장은 봄·여름

에만 한정하다가 겨울까지 이어졌다. 또 시장은 종로4가 한성은행 동대문지점(지금의 신한은행 광교영업부

자리)에서 종로5가 권상장(권상장, 1층 상업공간, 2층 전시·공연공간, 지금의 종로5가 보령약국 인근)까지 확장

하고 있었다. 이 밤 시장 거리는 조선 최대의 인파가 몰려드는 요지에 있었다.

그야말로 폭풍적인 성장을 가져 온 종로 밤 시장은 총독부에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되지 않

아 그들의 기관지 매일신보는 조선인들이 점령한 종로 밤 시장을 ‘탈락의 공간’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신

▲목 좋은 장소가 어디요? 밤 시장은 종각에서 종로5가까지 대로 변에 퍼져있었다. 특히 극장가 주변은 아주 좋은 목이요 경쟁마저 치열했다. 사진은

“야시터 추첨하는데 모인 군중”(동아일보, 1927. 3. 26) 이라는 신문기사 ▼“여름하루 경제선”(동아일보, 1935. 8. 15). ‘조선의 명물, 경성의 명물, 상업계의 최고 극치’라고 불린 종로 밤 시장은 ‘싸구려’ 물품 속에서 도시 노동자의 삶과 체취가 그대로 묻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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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문은 매일 밤마다 시장에서 일어난 소매치기단 검거, 행인과 점포 주인간의 폭행사건, 가출한 아이와 어

머니 이야기, 부녀자들의 ‘탈선’, 노점상들의 악질행위, ‘자동차 오입장이(성희롱)’, 매매춘 등 여러 문제

들을 부각시켰다. 이들의 공격 화살은 조선인 영세한 상인과 노점상들이었다. 노점상인들은 일본인들의

종로 시장에 입점하지 못하게 막았다.

욕망 혹은 통제의 공간, 밤 시장

분바른 여학생이 물건은 안보고 사람만 쳐다보고 지나간다

종각에선 보름달이 고요히 흐르는데

이곳은 종로싸구려 판이랍니다.

밤마다 저녁마다 열리는 종로 야시장이랍니다.

이 글은 동아일보(1925. 4. 30)에 실린 파인 김동환의 「야시장」라는 시의 일부다. 경성의 명물이자 조선

의 명물이 된 종로 밤 시장은 경복궁과 대한문을 거쳐 종로통 거리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데이트 코스이자

볼거리를 제공했다. ‘종로의 불바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청춘 남녀들과 화려한 양장차림의 부인, 한복

과 기모노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기생들까지 다양한 계급들이 함께 즐기는 공간이었다. 상품은 손수레

과일 상인에서 철물점, 부녀자들의 장신구 및 보석점, 헌책방, 시계방까지 등장했다.

경성방송국은 1935년 7월 26일 사상 처음으로 ‘찬란한 네온의 밤거리’ 종로통 일대 밤 시장 풍경을

녹화 방송에 나섰다. 관철동 우미관 입구에 마련된 마이크 주변에는 엿장사, 참외장사, 삿스장사, 빙수장

사, 수건장사, 고무신장사, 복숭아장사 등이 싸구려 하고 외치는 소리와 순님과의 흥정하는 소리로 가득

◀1962년 12월 겨울 종로 밤 시장. 성탄절을 맞은 밤 시장은 장난감과 일용품만 잘 팔렸다. 헌책방은 하루에 4, 5권정도 팔고있었다(동아일보, 1962. 12. 26).

▶1982년 10월 종로 밤 시장. 이 밤 시장은 청계3가와 종로 3가 사이의 보도에 간이노점 술집으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새벽늦도록 가스등 밑에서 강탈당한 민주주의와 다시 찾아야 할 봄을 이야기했다.

Page 107: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삶과 문화 105

했다. 전파를 타고 퍼져간 밤 시장 풍경은 그야말로 인기 폭발이었다.

이 시기 친일자본가 집단 경성상공연합회와 중앙번영회 등은 종로 밤 시장에 대형 점포들을 개설하고

막대한 이윤을 노렸다. 그러나 노점상들은 거센 반발에 나섰고 입점 가입비 무료 투쟁을 벌여 쟁취한다.

일본경찰은 노점 상인들을 끊임없이 호출해 위협했다. 전시체제기에 접어든 1940년 종로 밤 시장은 영업

시간 단축에 위축 받았다. 같은 해 밤 시장 상인 단체 종로상공협회는 경성부 시국총동원과 지시에 따라

밤 12시 영업시간을 11시까지 조정하고 공정가격 정찰에 협조한다는 약속했다. 더 나아가 종로경찰서는

통제경제 체제에서 밤 시장의 활동을 감시하고 공정가격 단속에 나섰다.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밤 시장

은 점차 손님마저 줄어들어 옛 영광조차 찾을 수 없었다.

통금해제와 다시 찾은 해방공간

해방을 찾은 한국은 1945년 9월 7일 미군정에 의해 야간통행금지가 서울과 인천에 실시되었으나 1948

년 종로 밤 시장 개장이 다시 대두된다. 시장 개장은 얼마 가지 못해 한국전쟁 전쟁을 거치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야시장조합연합회는 1957년 4월 중앙야시장 개장을 요구했다. 이때 연합회장 이정재

(동대문 시장 회장, 화랑동지회 회장, 폭력배 두목)는 밤 시장 노점 상인들에게 4만 여 환의 자릿세를 요구하고

영세 상인들을 괴롭혔다. 5.16쿠데타 이후 종로 밤 시장은 1962년 3월 13일 청계천 4가〜5가에서 저녁 5

시부터 밤 10시까지 다시 시작되었고 화신백화점 건너편에서 영화관 유미관 앞까지 잠깐 개장했다.

그 이후 1982년 1월 5일 야간통행금지가 폐지되자 청계 3가와 종로 3가 사이에서 노점술집들이 들어

서면서 다시 밤 시장이 열렸다. 전두환 정권의 3S정책(스크린, 섹스, 스포츠)과 맞물려 1983년 5월 28일부

터 서울극장을 비롯한 개봉관은 심야영화 「애마부인」(1982)를 상영하면서 밤 시장의 효과를 제대로 맛보

았다. 극장 주변의 포장마차와 음식점이 철야영업에 들어갔다.

1986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종로 밤 시장은 야간 시위 장소로 바뀌었다. 대학생과 시민들은 오

후5시부터 밤 10시까지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종로 3가까지 골목골목마다 경찰들과 숨바꼭질하듯

야간시위를 이어갔다. 시위가 끝난 11시부터 최루탄 냄새에도 불구하고 밤 시장은 그날의 무용담을 안주

삼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주로 대학생들은 세종문화회관 뒤편 골목이나 종각, 무교동, 종로3가 인근 골목

에서 기다렸다가 산발적인 야간시위를 벌였다.

87년 노동자 대투쟁과 민주화운동 시기 종로 밤 시장은 최대 600명의 박물 장수와 ‘호헌철폐’와 직선

제를 요구하는 시민들과 뒤엉켜 있었다. 최루탄 가스가 자욱한 밤 시장은 여기저기에서 나타난 포장마차

에서 술을 마시는 청춘남녀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또 하나의 해방구가 된 셈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종로와 남대문 일대 밤 시장은 옛 영광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젊은이의 해방공간

또는 민주화를 바라는 시민들의 함성이 살아 숨 쉬는 해방구가 되었는가. 우리가 쉽게 잊고 있었던 그 과

거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밤 시장에서 무엇을 기억하고 찾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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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비평 ‘문창극’과 장관 후보자 검증

보도, 한계 드러낸 SBS조윤호 <미디어오늘> 기자

한국 보수 세력의 진면목을 보여준 문창극 총리후보자가 사퇴했다. 문창극씨가

총리 후보자가 되고, 이어 사퇴까지 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한 동안 제 역할을 못했던 공영방송 KBS였다.

KBS는 6월 11일 문창극씨의 2011년 교회 특강 내용을 전했고, 발언 내용 중에

는 충격적인 내용이 여럿 포함돼 있었다. 그는 “하나님은 왜 이 나라를 일본한테 식

민지로 만들었습니까, 라고 우리가 항의할 수 있겠지. 아까 말했듯이 하나님의 뜻

이 있는 거야”라며 “너희들은 이조 5백년 허송세월 보낸 민족이다. 너희들은 시련

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식민 지배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문 후보자는 또한 남북분단, 민족해방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했고, “조선 민

족의 상징은 아까 말씀드렸지만 게으른 거야.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하고 남한테

신세지는 거 이게 우리 민족의 DNA로 남아 있었던 거야”라며 민족을 비하하는 발

언까지 했다. 문제적 발언들이 추가적으로 폭로되면서 문 후보자는 결국 자진사퇴

해야만 했다.

공영방송의 진가 발휘한 KBS, 한계 드러낸 SBS

KBS는 문창극을 날려버림으로써 공영방송의 진가를 제대로 보여줬다. 뉴스 시

청률 20%를 자랑하는 KBS가 제대로 보도를 하니 제 아무리 ‘불통’인 박근혜 정권

이라도 버텨낼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106

Page 109: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문창극 사태는 KBS의 진가를 보여준

동시에 SBS의 한계를 드러냈다. SBS가

KBS보다 문창극 발언 동영상을 먼저 확보

하고도 이를 보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SBS 정치부 기자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문창극을 지명한 10일부터 검증 보도에 착

수했고, ‘식민지배는 하나님 뜻’ 등 발언이 포함된 동영상을 입수해 10일 저녁 7시 경 데스크에 보고

했다. 정치부 기자들은 정치부 데스크에 보고하고, 부장을 통해 국장한테까지 보고했으나 받아들여지

지 않았다. 보도국 간부들은 교회 연설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야 하며, 시간을 두고 보완취재

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이후 SBS 기자들은 문창극 후보자가 강연을 했던 대학교 학생들을 만나 문제가 될 만한 발언들을

수집하고, 칼럼 내용 등을 모아 다시 보고했다. 해당 기자가 기사 초안까지 작성했으나 결국 6월 11일

SBS뉴스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한 시간 뒤인 KBS9시뉴스가 이를 단독 보도했다. SBS기자들 입장

에는 눈앞에서 특종을 놓친 셈이다. SBS는 KBS가 9시 뉴스 이후 12시 40분에 방송된 나이트라인에

서 문창극 동영상을 보도했다. ‘추가취재’ 핑계를 댔지만 결국 ‘단독 보도’라는 부담을 지고 싶지 않

았던 것은 아닐까?

6월 11일자 KBS뉴스9 갈무리

삶과 문화 107

문창극 사태는 KBS의 진가를 보여준 동시

에 SBS의 한계를 드러냈다. SBS가 KBS

보다 문창극 발언 동영상을 먼저 확보하고

도 이를 보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Page 110: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SBS 기자들이 문창극 동영상을 입수해 보고했던 6월 10일은 세월호 참사 보도 관련한 SBS 내부

토론회가 있었던 날이다. SBS 기자들이 모여 세월호 참사 보도를 돌아보면서 재난보도를 제대로 하

고, 민감한 사안도 똑바로 보도하자는 의지를 다지는 자리였다. 하지만 토론회를 했던 바로 그 날 문

창극 관련 기사가 누락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문창극에 이어 최경환…단독 보도 두 번 놓친 SBS

문창극 단독보도를 놓친 이후 기자들의 항의로 보도국 차원의 재발방지책이 논의됐다. 하지만 이

사태가 채 봉합되기도 전에 SBS는 또 한 번의 단독을 놓쳤다. 최경환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 의혹을

미리 파악하고도 보도하지 못한 것이다. 경향신문은 6월 27일 최경환 후보자의 아들과 딸 취업 특혜

의혹을 보도했는데, 이는 SBS가 먼저 파악한 내용이었다.SBS기자들은 경향신문 보도 이틀 전인 6월

25일 오후 관련 내용을 발제했고, 부장단 회의에서 최경환 관련 보도에 대해 논의했다. 부장단 회의에

서는 보도 여부에 대한 의견이 엇갈렸고, 의혹 수준이기에 보도하지 말자는 의견이 더 많았다. SBS기

자들은 경향신문에 없는 최경환 후보자 아들의 녹취록까지 확보한 상태였지만 보도는 결국 불발됐다.

부장들은 ‘추가 취재’를 요구했고 기자들은 ‘이 정도면 충분히 보도할 수 있다’고 대립했다. 문창극

‘보도 누락 사태’를 겪은 이후 재발방지 차원에서 만든 ‘인사검증TF’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6월 11일자 SBS나이트라인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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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11: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KBSㆍMBC는 정권교체 되면 기대할 수라도 있지”

MBC와 KBS가 망가진 이후 SBS는 상대적으로 더 많은 신뢰를 받았다. SBS는 계속 제자리에 있

지만 MBC와 KBS가 우향우하면서 SBS가 왼쪽에 서게 된 탓이다. SBS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중요한

사안에 대해 술에 물탄듯 물에 술탄듯 양 쪽 입장을 나란히 전하는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것이

아예 한쪽의 입장만 반영하는 MBC와 KBS의 한계에 비해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번 문창극과 장관 후보자 검증보도에 있어 SBS는 그 한계를 명확히 보여줬다. 장관 후보

자 인사청문회를 앞둔 7월 5일 지상파3사의 장관 및 국정원장 후보자 관련 보도에는 차이가 없었다.

하나같이 검증보도가 ‘전혀’ 없었다. 7월 5일부터 7일까지 지상파 3사가 내보낸 청문회 소식은 8건에

불과했고, 이 가운데 새로운 검증 보도는 KBS

1건 뿐이었다. 같은 기간 JTBC 혼자 청문회

소식을 6건, 단독 보도를 2건 내보냈다.

SBS는 이제 망가진 KBS, MBC와 별 차이

가 없다. 단순히 보도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보도가 누락되는 사태가 똑같이 벌어지고 있

기 때문이다. 같은 상업방송인 JTBC에도 밀

리고 있다. KBS가 투쟁을 통해 보도 기능을 회복한다면, MBC마저 그렇게 된다면 SBS는 어떤 경쟁

력으로 승부할 수 있을까. SBS 내부에서 “KBS·MBC는 정권교체 되면 기대할 수라도 있지”라는 자

조 섞인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SBS는 이제 망가진 KBS, MBC와 별

차이가 없다. 단순히 보도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보도가 누락되는 사태가

똑같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삶과 문화 109

Page 112: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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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서로에게 명함을 건넸다. 그런데 공통점이 있었다. ‘붕가붕가레코드’의 고건혁 대표와 노동

당 문화팟캐스트 ‘컬처쇼크’의 진행자 황종섭 서울시당 조직부장이 주고받은 명함들은 ‘남은’ 것들이었

다. 고건혁 대표는 해외출장을 위해 준비했다가 남은 영문명함을, 황종섭 부장은 지방선거출마용으로 제

작했다가 남은 후보자 명함을 꺼낸 것이다.

‘붕가붕가레코드’는 ‘장기하와 얼굴들’, ‘브로콜리 너마저’, ‘술탄 오브 더 디스코’, ‘김간지X하헌진’,

‘씨 없는 수박 김대중’, ‘아마도 이자람 밴드’, ‘생각의 여름’, ‘눈 뜨고 코베인’ 등 한국 인디음악의 대표

선수들을 배출해낸 레이블(음반기획사)이다. 2004년에 신림-봉천동에서 월세 10만 원 이하로 구할 수 있

는 근거지에 모인 ‘쑥고개 청년회’를 모태로 2005년에 세워졌고,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이라는 모토로도

“인디레이블과노동당의

유사관계에 대한 고찰”

인터뷰·정리 : 나도원 문화예술위원장사진 : 박성훈 홍보실장

숨은 문화예술 당원 찾기

‘장기하와 얼굴들’을 배출한 ‘붕가붕가레코드’의 대표 고건혁

Page 113: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삶과 문화 111

유명하다. 스스로 내린 정의에 의하면 “음악

인이 자신의 음악을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

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생계적인 필

요를 충족시키는 음악 작업”이다. 이들의 움

직임은 음악마니아와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

다가, 2008년에는 ‘장기하와 얼굴들’이 폭

발시킨 <싸구려 커피> 열풍이 대중에게도

전해졌다. 이 중심에 있는 사람이 고건혁 대

표이다.

제주소년, 음악의 꿈을 품다

3000년 동안 제주도를 지켜온 ‘고’씨 집

안의 후손인 고건혁 대표는 고등학교를 마

칠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아버지는 사진

촬영 등을 담당하는 기술직 공무원이었다.

사진작가의 꿈을 품고 살아오다가 사진과

생계를 접목할 수 있는 방법으로 택한 직업

이었다. 소년 고건혁은 아버지를 보면서 재

능도 있고 열심히 작업하지만 작가와 작품

으로 인정받지 못하면서 생계도 해결할 수

없는 아티스트들의 처지를 이해하게 된다.

아버지는 아티스트를 대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술을 마시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아버지의 주정을 받아주었던 경험이 훗날 개성이 강한 아티스트

들과 함께 일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니 말이다.

1995년은 한국에서 인디음악이 막 태동하던 때였다. 그 기운은 바다 건너 제주에도 전해졌다. 지금은

유명한 펑크 록 밴드가 된 ‘크라잉 넛’과 ‘노브레인’이 제주에 있는 ‘레드 제플린’이라는 공연장으로 찾아

왔다. 그들의 공연을 보고나니 고건혁이 갈 길이 정해졌다. 고등학생 무렵에 스쿨밴드를 조직하여 활동하

면서 여느 학생밴드들처럼 ‘메탈리카(Metallica)’와 ‘스키드 로(Skid Row)’처럼 외국의 헤비메탈 밴드들의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특이점은 이때부터 한국 인디밴드들의 곡들도 함께 연주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매만지는 것보다 공연을 기획하고 관련 행정을 맡아 처리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워낙 음치여서 노래를 못 했고, 악기를 연주하는 데에도 그다지 흥미를 갖지

붕가붕가레코드가 내놓은 청춘 시리즈 제 2탄, 청년실업 1집(위)컴필레이션 음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아래)

Page 114: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112

못했던 터이기도 했으나, 직접 표현하는 음

악인이 아니라 기획자가 적성에 맞았던 것이

다. (훗날 ‘술탄 오브 더 디스코’의 구성원으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지만, 이때에도 고건혁의 역

할은 ‘춤꾼’이었다.)

물론 음악에만 몰두하진 않았다. 학업성

적이 꽤 좋았던 고건혁은 서울의 명문대학교

로 진학했다(최근까지도 공부를 계속했다). 그

리고 학교 내에서는 언론활동에 참여했으며,

학내에서 문화와 음악인들의 연대를 꾀했다.

‘관악청년포크협의회’의 이름으로 <꽃무늬

일회용 휴지/유통기한>이라는 수상한 이름

을 달고 있는 소규모 음반 등을 발표했다. 이

러한 과정에서 만난 이들이 장기하, ‘그림자

궁전’과 ‘9와 숫자들’을 이끌게 될 송재경,

‘브로콜리 너마저’의 덕원 등이다. ‘붕가붕가

레코드’가 사실상 출발선에서 나온 것이다.

‘붕가붕가레코드’와 10년의 전망

그 이후로 다양한 음악인들을 소개하게

된다. 특이한 팀도 있었고, 진지한 팀도 있었

다. 역시나 어려운 상황을 버텨오던 2008년,

‘장기하와 얼굴들’의 성공 이후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체기가 왔고, 가능성 있는 음악인을

어느 선까지 밀어 올릴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한계에 직면했다. 한국에선 대표적인 인디레이블들 중 하나

로 성장했으나 여전히 깊은 고민들을 가지고 있다. 첫째가 앞서 말한 지속가능성이다. 둘째가 소속 음악

인들이 어느 정도 성공하면 더 나은 조건을 보장하는 쪽으로 떠나는 이탈이다. 셋째는 처음과 달리 회사

의 구성원들의 연령대가 높아지고 있다는 현실이다. 그래서 늘 ‘10년의 전망’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고건혁 대표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기시감이 들어찼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인디문화의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정당운동과 결합한 나는 익히 함께 생각해온 바이다. 노동당 역시 지속가능성을 고민하고 있

으며, 어느 정도 성장했거나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한 정치인들이 이탈했고, 구성원들의 연령

대 역시 높아졌다. 공통점은 또 있다. 거대자본의 지원을 받지 않는 인디레이블처럼 노동당은 국고보조금

‘술탄 오브 더 디스코’의 <요술왕자>(위), 관악청년포크협의회 음반(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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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113

을 받지 않고(못 하고), 전국적인 대형스타를 보유하기 힘든 인디레이블처럼 노동당에는 국회의원이 없으

며, 음반판매만으로는 유지가 힘들기 때문에 공연과 머천다이즈(옷과 악세사리 등 음악 관련 상품)를 판

매하는 인디레이블처럼 노동당도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간혹 ‘김’과 같은 물품을 팔아야 했다. 결국

보수정당 체제 속에서 생존 중인 ‘인디파티

(Inide Party)’ 노동당과 한국 대중음악산업

의 불균형 속에서 자립을 모색하는 인디레이

블들의 진로모색은 상통한다.

고건혁 대표에게 자신과 ‘붕가붕가레코드’

의 역할은 음악인들의 안전망 제공이다. 활동

의 여건을 마련해주고, 자신과 뜻이 맞는 사람

들이 모여 때로는 서로에게 ‘비판’을 가하며 성장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또한 레이블은 조력자이며, 음

악인이 주체로서 자율과 책임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받아 적으면 적을수록 다른 이야기

가 점점 더 많이 겹쳐지고 있었다.

다시 명함 이야기로 돌아오면, 그 물건은 제44회 영국 글래스톤베리(Glastonbury) 페스티벌 등에 참

여하기 위해 만들었다. 실험적인 밴드 ‘잠비나이’와 싱어송라이터 최고은과 함께 ‘붕가붕가레코드’의

‘술탄 오브 더 디스코’가 공식 초청받았기 때문이다.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우여곡절과 고난이 있었지만,

그들의 공연은 성공이었다. 고건혁 대표는 지금 그 다음 단계를 고민하고 있다.

보수정당 체제 속에서 생존 중인 ‘인디파

티(Inide Party)’ 노동당과 한국 대중음악

산업의 불균형 속에서 자립을 모색하는 인

디레이블들의 진로모색은 상통한다.

캡션

Page 116: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114

붕가붕가레코드가 변혁수단이자

대안모델?

그런데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따지고 보면 고건혁 대표도 (영세하지만) 기

업주이고 자본가이다. 그런데 회사를 변혁

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기업주이고 자본가이

다. 다시 말하여 소규모 기업을 통하여 대안

의 시스템을 도모하고 있다. 레이블의 지분

을 회사구성원들과 공동소유하고 있다. 지

분배분과 주식배당을 통한 공동소유 구조이

다. 급료는 노동의 성과나 직급이 아니라 노

동시간에 따라 지급하고 있다. 이렇게 대안

의 시스템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초기

부터 결합하여 합의한 구성원들과 새로이

합류한 구성원들 사이에는 이해의 격차가

있지만, 그가 ‘붕가붕가레코드’를 통하여

구현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아티스트의 성공 이상으로 회사조직이

대안모델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건혁 대표는 2000년에 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학생위원회에도 가입한 사람이

다. 생리가 맞지 않아 당 활동에 적극 결합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쭉 진보신당까지

당적을 이어오고 있다. 이른바 ‘통합-독자’ 논란 이후 아노미 상태에 빠졌으나, 2012년 총선 당시 ‘비례

대표후보1번 김순자’를 바라보면서 희망을 얻고 지인 100명을 설득하여 투표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결

과는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고건혁 당원은 문화팟캐스트 출연과 <미래에서 온 편지> 인터뷰를 통하여 사실상 처음으로 당 활동을

시작한 셈이다. 대전에서 서울 구로구로 거처를 옮긴 그는 당원들을 많이 만나고 싶다고 했다. 당에게 바

라는 것이 무어냐고 묻자 돌아온 답은 “내가 당에 무엇을 바라기보다는 내가 당에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

‘GET’라는 음악+여행 프로그램을 통하여

음악인들과 여행자들을 이끌고 곳곳을 누비

고 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 길을 내고

있다.

Page 117: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삶과 문화 115

중”이라는 참으로 링컨스러운 답이었다. 문화예술위원회의 역할에 대해서도 위원회 구성원들과 같은 생

각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예술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유

능한 기획자로서 충고했다. 그는 객관적인 지표로는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재미, 그냥 재미가

아닌 의미 있는 재미를 강조한다.

“당이 흥미로웠으면, 재기발랄이 보편의 정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리적 기반이 부족한 상황에서

는 PR이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의 ‘지속가능한 ○○○○’처럼 공란을 채울 무엇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다시 길을 내며

고건혁 대표가 열 살 무렵이 될 때까지 도로가 아니라 오솔길만 나있던 제주의 동네길에는 2년 전 ‘맥

도날드 드라이브인’이 생겼다. 제주의 풍광은 전과 많이 달라졌다. 근래 증가하는 제주도 문화이민자들에

대해선 그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염려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다. 산업규모가 작아 지속가능한 경제활

동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200인 이상 기업이 두어 곳에 불과할 정도로 일자리가 적고 문화

환경도 척박하다. 그래도 근성이 있다면, 제주와 동화되고자 한다면 생존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

건혁 당원이 보기에 제주 역시 자본의 문제가 위협적이지만, 다른 움직임도 있어서 ‘리조트 vs올레길’의

구도가 되어가고 있다. 어렸을 때에는 벗어나고만 싶었던 제주도를 최근에 다시 발견하고 있다는 그는

‘GET’라는 음악+여행 프로그램을 통하여 음악인들과 여행자들을 이끌고 곳곳을 누비고 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 길을 내고 있다.

이 사람 역시 그 여행에 동참한 바 있다. 지금처럼 한여름이었다. 습한 기운으로 가득한 제주 곳곳을 걷

다가 습기와 숨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를 경험했고, 가파른 오르막과 싸우다보니 몸이 다리 위

에 실린 이삿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간혹 머리 위에 말풍선들이 환영처럼 보였다. 그때에 세상에서 가

장 느린 걸음과 동작을 몸소 시현했다. 다른 이들의 느릿한 움직임을 보니 저러다 정지해버리는 것은 아

닐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만 빼면 모두 좋은 경험이었고, 삶의 자산이 되었다. 지금 우리의

길이 그렇지 않은가?

Page 118: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불완전한 여성 혁명’ 완수하려는복지국가의 도전

116

7월3일, 다른 당 또는 당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다양

한 결사들에 이어 노동당 내에도 드디어 사회민주주의 그룹이 공식적으로 출범했

다. 이 출범 선언문에는 “우리는 단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사회로부

터 기본적인 삶을 보장 받는 보편적인 복지국가의 미래를 꿈꾼다 … 복지국가의

이상이 구현되는 날까지 노동당 사회민주주의 당원모임은 힘찬 전진을 계속할 것

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 선언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노동당 사회민주주의당원모임>의 출범 선언문에

는 ‘복지국가’를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종목표로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복지

국가’는 매우 특수한 세계사적 조건(예컨대 냉전)하에서 형성된 체제이지만,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지금까지 현실성 있는 모델로 강력하게 제시되고 있다. 물론,

불온한 서재

양솔규기획조정실 국장

끝나지 않은 혁명 요스타 에스핑-안데르센 / 나눔의집 / 2014년3월 / 14,000원

<노동당 사회민주

주의당원모임>의

출범 선언문에는

‘복지국가’를 우리

가 추구해야 할 최

종목표로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Page 119: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삶과 문화 117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작정하고 따지고 들어가면 ‘복지국가’에 대한 논의도 복

잡하고 다양하며 명징하지 않은 혼돈 자체이기도 하다. 노동당 강령은 이와 관련

해 “복지국가라는 빛나는 성취에도 불구하고 이를 훼손하는 자본의 힘을 제압하

는 데 실패한 사회민주주의의 한계 또한 극복 대상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언급은 한편으로는 복지국가를 긍정적인 성과로 인정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렇다

면 지금 현실에 맞게 복지국가를 뜯어 고쳐 개선된 복지국가를 만드는 게 우리의

목표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또는 복지국가라는 역사적 성과와는 별개로 결과

적으로 실패한 책임을 ‘사회민주주의’에게 묻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역

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만만치 않은 반론이 계속되어 왔다.

세계는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구적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를 종식시

키지 못하고 있다. 또한, 선진국들과 동아시아 국가들은 고령화의 급속한 진전,

출산율 저하, 이혼율 상승, 노동력 부족이라는 인구학적 과제들에 직면해 있다.

자본의 힘을 제압하는 것과 함께 이러한 중차대한 과제들을 함께 해결하지 않고

서는 장밋빛 미래는 없다.

덴마크 출신의 사회학자 요스타 에스핑-안데르센(Gøsta Esping-Andersen)은

1990년 《복지자본주의의 세 가지 세계》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복지국가의 유형을 ‘탈상품화’의 기준과 복지국가 정책에 따라 자유주의 유

형(미국 등), 보수주의-조합주의 유형(독일,프랑스 등), 사회민주주의 유형(북유럽

스칸디나비아)으로 분류한 바 있다. 탈상품화는 시장에 의존하지 않고도 기본적인

복지를 충족할 수 있는 정도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

서 복지국가에도 상당한 균열과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를 분석하는 과정에

서 에스핑 안데르센은 이른바 영미형 수렴론을 경험적으로 반박한다.

이 책 『끝나지 않은 혁명』은 에스핑 안데르센의 최신작으로서 여성의 역할과 가

족의 변화, 이에 대한 복지국가의 대응을 다룬다. 그는 이 책의 초점을 ‘여성의 변

화하는 지위’이며 이러한 변화가 ‘혁명적인 격동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증가하

는 여성 노동시장 참여, 가정 내 노동 분담, 자녀에 대한 투자 등 ‘성 평등적 균형’

이 형성 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 평등적 균형’은 충분하지 않고 혁명

은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미완의 혁명이다. ‘미완’은 극심한 저출산, 가구소득의

선진국들은 고령화

의 급속한 진전, 출

산율 저하, 이혼율

상승, 노동력 부족

이라는 인구학적

과제들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중차

대한 과제들을 함

께 해결하지 않고

서는 장밋빛 미래

는 없다.

Page 120: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118

양극화, 부모의 자녀투자에서의 양극화, 성별분업 및 젠더 평등의 양극화와 같은

부정적 결과를 만들어 낸다. 따라서 시민들 대다수는 매우 ‘불안정한 균형 상태’

에 놓여 있고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들(최적 이하의 결과)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바

람직한 것은 바로 ‘성 평등적 균형’이 지배적인 규범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서는 특히 저소득, 저학력자들 사이에서의 성 평등화가 필요하다. 또한 복지국가

의 혁신, 즉 ‘성 평등적인 복지국가’의 적극적인 개입과 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다. “(복지국가의) 가족정책이 여성혁명의 성숙을 가속화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

다. 특히 아동 돌봄과 교육에 대한 적극적인 사회적 개입은 노년기 불평등을 완화

시키고, 결국 노후보장을 강화하는 효과를 가진다는 것이다. 에스핑-안데르센은

이를 ‘연금 개혁은 아이들로부터 시작된다.’라는 정치 슬로건으로 집약한다. 양질

의 돌봄과 교육 평등을 위한 복지국가의 개입이 세대 간 공평성과 세대 내 평등을

동시에 증진시킨다는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의 연구 내공이 집약되어 있는 잘 짜인 퍼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쟁적인 구석이 없지 않다. 그가 주장하듯이 가족과 여성 역할의 변화가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거나 심화시킨다는(그는 그렇기에 미완의 여성혁명을 복지국가의

조력 속에서 더욱 밀어 붙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다소 도발적인 주장에 대해 페미니

스트들의 반론이 없지 않을 듯하다. 그가 전제로 받아들이는 다니엘 벨 류의 ‘탈

산업사회’론도 검토가 필요하다. 또한, 그가 최종적으로 제시하는 아동 돌봄과 교

육에 대한 적극적 개입은 물론 정당하게 강조되어야 하지만 이것이 마치 해결의

유일한 키워드인 것처럼 강조되는 것이 적합한 것인지 검토가 필요하다.

물론, 그가 얘기하듯 지체된 국가 대한민국의 복지 수준을 상기해보면 이들의 이

론적 검토와 정책적 실천이 부럽기만 하다. 예컨대 그는 대규모의 이민이 발생했

을 때, 이민 자녀들에게 집중적인 교육지원을 하는 스웨덴에서조차도, “이민 자녀

의 학업 실패 가능성은 자국민의 5배에 달한다.”고 한다. 우리의 경우 이민 가족

또는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의 학업 실패 가능성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지 않을까?

요스타 에스핑 안데르센은 다른 북유럽의 저명한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복지국가론이든, 자본주의 국가론이든, 사회사상이든 영미의

학자들에 의존하는 지적 풍토 속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평가받지 못했다.

그의 역작인 《복지자본주의의 세 가지 세계》 역시 16~17년이 지나서야 번역이 되

이 책 『끝나지 않은

혁명』은 에스핑 안

데르센의 최신작으

로서 여성의 역할

과 가족의 변화, 이

에 대한 복지국가

의 대응을 다룬다.

Page 121: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진보진영 내에서

사회민주주의 복지

국가론자들의 공세

(?)가 약간 주춤한

듯도 한데, 에스핑

안데르센의 저서를

통해 보다 더 실천

적인 논의가 진행

되었으면 좋겠다.

노동당은 자극이

필요하다.

었다. 그나마 번역이라도 된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첨언하자면 이 책을 번역한 주은선, 김영미 교수는 북유럽의 복지국가를 다룬 《노

르딕 모델》(삼천리)과, 가이 스탠딩, E.O.라이트, 빠레이스 등의 ‘기본소득’ 논쟁

을 다룬 《분배의 재구성》 등 중요한 저작들을 공동 번역했다. 정말 판매가 가능한

지 모를 정도로 척박한 사회복지 분야의 최근의 논의들을 꾸준히 소개하고 있는

역자들의 노고 역시 정당하게 평가받았으면 좋겠다. 진보진영 내에서 사회민주주

의 복지국가론자들의 공세(?)가 약간 주춤한 듯도 한데, 에스핑 안데르센의 저서

를 통해 보다 더 실천적인 논의가 진행되었으면 좋겠다. 노동당은 자극이 필요하

다.

<함께 읽을 만한 책>

•『변화하는 복지국가』 고스타 에스핑 앤더슨 / 인간과복지 / 1999년8월 / 12,000원

•『복지자본주의의 세 가지 세계』 요스타 에스핑 안데르센 / 일신사 / 2006년7월 /

20,000원

•『복지체제의 위기와 대응』 G. 에스핑앤더슨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7년1월 /

20,000원

•『복지국가론 개정2판』 성경륭, 김태성 / 나남출판 / 2014년3월 / 28,000원 (복지국가

론을 공부할 때 가장 기초적으로 봐야 할 개론서이다.)

•『어떤 복지국가에서 살고 싶은가?- 대한민국 복지국가 논쟁』 이창곤 / 밈 / 2010년11

월 / 15,000원 (《한국 복지국가 성격논쟁 1, 2》(인간과복지) 이후 최근의 논의를 담고

있다.)

삶과 문화 119

Page 122: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또 다시 밖으로 내몰린 전교조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가 법외노조가 되었다.

1989년 창립 이래 끈질긴 투쟁으로 1999년 7월에 합법화를 쟁취한 전교조는 해직자를

조합원으로 인정하는 규약을 시정하라는 고용노동부의 권고를 거부하여 2013년에 고용노

동부로부터 법외노조 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2014년 6월 19일, 법외노조처분 취소 소송에

서 패했다. 다시 법외노조가 된 것이다. 정부는 노동조합으로서 가질 수 있었던 알량한 권

리를 다 내려놓으라고 전교조를 압박하고 있다.

부당해고 된 아홉 명의 동료를 지키기 위해 고용노동부의 권고를 뿌리친 전교조의 결정

은 당연하지만 꽤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이었다. 누군가는 아홉 명의 조합원을 지키기 위해

너무 큰 출혈을 감당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은 판단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부당해고 당한

조합원을 지키지 못하는 노조가 과연 노조 자격이 있겠는가? 조합원의 보호는 노동조합의

최우선 의무이다.

누군가는 법외노조이지 불법노조는 아니라고 하지만 교육부가 전교조 전임자 학교 복

귀 지침을 내리고 그에 불복하는 조퇴투쟁과 시국선언에 형사고발로 맞서는 것을 보면, 전

교조는 불법노조이고 교육노동자를 노동자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진의를 확인할 수밖에

없다. 돌이켜보면 합법노조일 때도 교육노동자들은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행사할 수 있는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했던 듯하다.

현재 전교조는 “법외노조란 노동조합의 실질적 요건은 갖췄으나 설립신고라는 형식적

요건을 구비하지 못한 근로자단체”라며 “(노조법에 명시된) 주체성, 자주성, 목적성, 단체

성을 갖추고 있다면 헌법상 단결체로서의 법외노조 지위를 부정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

면서 노조와 조합원을 지키는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노 래 의 꿈

참교육의 함성으로민정연 문화기획자

120

Page 123: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삶과 문화 121

‘선생님들이 뭐가 아쉬워서 노동자라고 하나?’

교육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역사는 19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교수들과 중등학교 교사들을 중

심으로 3·15 부정선거 규탄 집회를 하면서 자연스레 교직원의 이해를 대변할 집단의 필요성이 제기되었

고, 그해 대구의 중등학교 교사들이 중등교원노조를 결성한 것이 한국 땅에서의 최초의 교직원 노조이다.

이것이 점점 전국적으로 확산하여 전국의 교원 대표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교원노조연맹’이 조

직되었지만, 어용노조인 대한교련을 해체하고 연맹을 유일한 전국교원조직으로 공식적으로 승인해 달라

고 정부에 요구하던 중,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강제해산 당하고 말았다. 이후 노동자가 산업역군이라

호명되며 일하는 기계로 착취당하던 70년대를 지나, 노동자의 권리 요구가 요원의 들불처럼 퍼져나가던

1987년 9월에 교육노동자도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를 창립하며 다시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그

리고 1989년 5월에 전교조가 정식 출범했지만 그해 7월, 만 오천여 명의 교사가 해직되고 말았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에서도 해직된 선생님이 계셔서 졸업생들이 선생님을 후원하는 일일주점을 열었

던 기억이 선하다. ‘선생님들이 스승으로 대접받는 것을 박차고 뭐가 아쉬워서 노동자라고 하나? 일부 못

된 선생들이 아이들을 의식화하려 한다’면서 전교조를 부인하는 언론보도가 하루가 멀다고 나왔다. 통일

을 얘기하던 교사를 빨갱이로, 연필을 손으로 직접 깎자고 한 교사를 학생들을 위험한 상황으로 내모는

무책임한 교사로 비난하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참교육의 함성으로> : 집체극의 주제곡에서 전교조의 노조가로

4월에 <내 사랑 민주노조>가 민주노조 건설을 독려하는 집체극을 위해 탄생한 노래라고 소개했는데,

그 시절에는 명확한 주제를 선전 선동하기 위한 노래극이나 집체극이 꽤 많았다. 전교조 출범 준비위도 출

범을 앞두고 전교조 건설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해 <참교육의 함성으로>라는 집체극을 준비했다. 이 집체

극의 주제곡이 우리가 전교조 노조가로 알고 있는 <참교육의 함성으로>이다. 당시 선생님들이 전교조를

만들고자 했던 의지를 잘 표현한 노래여서인지 정식 출범 후에도 널리 불리며 전교조 노조가가 되었다.

전교조를 부인하는 언론보도가 하루가 멀다고 나왔다.

통일을 얘기하던 교사를 빨갱이로, 연필을 손으로 직접

깎자고 한 교사를 학생들을 위험한 상황으로 내모는

무책임한교사로 비난했다.

Page 124: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122

<참교육의 함성으로>는 집체극 준비팀의 일원이었던 두 선생님이 만든 노래이다. 윤리교사였던 주현

신이 작곡을, 국어교사였던 차봉숙이 작사를 했다. 두 선생님은 이 노래를 만드는 과정에서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했다고 하니, 투쟁 속에 맺어진 사랑이 노래 가사에만 있는 게 아닌가 보다.

<참교육의 함성으로>의 앞부분은 동독의 한스 아이슬러가 브레히트의 시에 곡을 붙여 만든 <통일전선

의 노래>를 차용했다. 당시에 이를 밝히지 못한 이유는 한스 아이슬러의 정치성향 때문에 당국에 전교조

탄압의 빌미를 줄까 염려해서였다고 한다. 별걸 다 걱정하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작금에 벌어지는 전교조에 대한 탄압을 보면 그 시절에는 오죽했을까 싶다.

<참교육의 함성으로>와 더불어 전교조 건설하면 떠오르는 공연이 하나 더 있다.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가 바로 그것이다. 1989년에 전국 18개 대학총학생회가 주최한 전교조 지지 노래극 <송아지 송아

지 누렁 송아지>의 주역은 정태춘이다. 아마도 이 노래극이 그에게는 노동현장과의 본격적인 첫 만남이었

을 것이다. 전국순회공연의 반응은 대단했다고 한다. 마지막 순회 일정이었던 전남대에서 공연을 마친

후, 2만여 관중 앞에서 정태춘이 ‘이 모든 열기를 전교조에 바친다’는 헌사를 했을 정도로 뜨거웠다고 전

해진다.

이 당시의 문화운동은 매우 다양하고 풍성했다. 조직운동과의 유기적 결합 속에 생산된 문화는 내용면

에서나 형식면에서나 매우 다양하고 깊이 있었고 예술적 완성도도 꽤 높았다. 몇 권의 책으로 엮어도 모

자랄 만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그 시절의 문화운동을 이 지면에서 모두 입에 올리는 것은 벅차니, 오

늘은 전교조 건설 과정, 이후 합법화 쟁취 과정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문화적 접근이 이루어졌고 서로 통

하였다는 사실만 기억하기로 하자.

<참교육의 함성으로>는 다른 노조가와 뚜렷한 차이가 있다. 다른 노조가 대부분은 노동자로서의 자각

과 권리 쟁취, 힘찬 다짐을 담고 있는데, 이 노래에는 교육노동자 자신의 권리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다.

참교육을 향한 갈망과 다짐만이 담겨있다. 전교조 건설 당시의 목적이 노동자로서의 자각보다는 참스승

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더 앞선 것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다시 말하자면, 전교조는 자기 권

리보다는 학생들이 제대로 교육받을 권리를 더 중시했던 것은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2014년 전교조의 싸

움은 교육자의 양심을 지키기 위함과 더불어 노동자의 권리를 천명하는 싸움이기를 바란다. 교육노동자

들의 용기 있는 옳은 선택에 지지를 보내며, 오랜만에 벅찬 가슴으로 불러본다. 참교육의 함성으로.

2014년 전교조의 싸움은 교육자의 양심을

지키기 위함과 더불어 노동자의 권리를 천명

하는 싸움이기를 바란다. 교육노동자들의 용

기 있는 옳은 선택에 지지를 보낸다.

Page 125: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삶과 문화 123

참교육의 함성으로차봉숙 작사 / 주현신 작곡

1. 굴종의 삶을 떨쳐 반교육의 벽 부수고

침묵의 교단을 딛고서 참교육 외치니

굴종의 삶을 떨쳐 기만의 산을 옮기고

너와 나의 눈물 뜻 모아 진실을 외친다

보이는가 강물 참 교육 피땀 흐르는

들리는가 함성 벅찬 가슴 솟구치는

아 우리의 깃발 교직원 노조 세워

민족민주 인간화 교육 만만세

2. 굴종의 삶을 떨쳐 반교육의 벽 부수고

침묵의 교단을 딛고서 참-교육 외치니

굴종의 삶을 떨쳐 반역의 어둠 사르고

이제 교육 동지 굳세게 단결 전진한다.

함께 가세 이 길 아이들의 넋이 춤추는

함께 가세 이 길 사람 사는 통일 세상

아 우리의 깃발 교직원 노조 세워

민족민주 인간화 교육 만만세

Page 126: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124

아플 때 찾지 말고 건강할 때 챙기시기를!

“뭐 좋은 것 없냐”

나한테 산삼, 하수오, 도라지 등 약초를 찾는 사

람들의 대부분은 “어디가 아픈데 뭐 좋은 것 없

냐?”는 말로 시작한다. 한 마디로 치료제를 찾는 것인데 그러려면 의사의 처방에 따라 약국

을 찾는 것이 정답이라 할 것이다.

“어디가 아픈데 뭐 좋은 것 없냐?”는 말은 한편으로는 “약을 먹긴 하는데 별 차도가 없

다”거나 “수술하지 않고 생약재로 고치고 싶다”는 말이다.

치료제로서의 조제약은 생약재의 유효한 성분을 추출해서 농축시킨 것으로 보면 된다.

일례로 가래·기침·해소·천식의 치료제인 ‘용각산’은 도라지를 말려서 가루로 낸 것이

며, ‘아스피린’이 버드나무 껍질과 잎에서 ‘살리실산’을 추출해서 만든 조제약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상식이다.

먼 옛날부터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은 먹어도 되는 것, 먹으면 약이 되는 것, 먹으면 독이

되는 것, 그냥 먹으면 독이 되지만 법제(독성 제거)해서 먹으면 약이 되는 것, 극소 미량을

쓰면 약이 되는 것 등을 임상을 통해 정립해 놓았다. 용각산이 그렇고 아스피린이 그렇듯

어느 날 불쑥 실험실에서 튀어나오는 약은 하나도 없다.

생약재를 혼합해 보완 억제하도록 처방하는 것이 한약

그런데 생약재를 날 것 그대로 치료제로 쓰기에는 위험한 요소가 있다. 생약재에는 유효

한 성분도 있지만, 쓸 데 없는 성분도 있고 유해한 성분도 있기 때문이다. 정제약인 아스피

심마니칼럼

이재기충남도당·약초꾼·목공공방 일꾼

Page 127: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삶과 문화 125

린도 해열·진통을 다스리는 유효한 성분이 있는 반면,

혈전의 생성을 방지하기 때문에 상처가 나거나 수술을 하

게 될 때 지혈이 되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 그래서 한약은

여러 생약재를 혼합해서 서로 보완하고 억제하는 작용이

일어나도록 처방하는 것이다.

다시 처음에 던진 “어디가 아픈데 뭐 좋은 것 없냐?”는

말로 돌아가면, “약초가 만병통치약이거나 직효가 있는

치료제는 아니다”는 말로 답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약재로서의 약초는 꾸준히 오랜 기간

복용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가족력이 있는 사

람에게는 해당 병증에 맞는 약초를 구해서 보리차와 같은

음용수로 먹을 것을 강조한다. 예를 들면, 기관지에는 도

라지·더덕·잔대 등을, 당뇨병에는 꾸지뽕나무 잎과 뿌

리껍질·줄풀·돼지감자 등을, 신장(콩팥)에는 하수오·

삼지구엽초·옥수수수염 등을, 혈압에는 칡·당귀·엉겅

퀴 등을 꾸준히 먹으라고 권한다.

한편, 아프기 전에 아프지 않도록 면역력을 증강시켜

주는 약초를 권하는 편인데, 산삼·상황버섯·차가버섯

등이 그것인데 좀 비싸다는 것이 흠이다.

연재를 접으며

어쨌든 아프기 전에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제일 쉽고

도 유력한 제1책일 것이요, 아프기 시작할 때 초기에 다스

리는 것이 제2책일 것이요, 심하게 아플 때 고통만이라도

줄여주는 것이 제3책일 것이다.

자! 이제 운동도 할 겸, 세상사도 잊을 겸 약초산행을

시작하기를 권하면서, 지난 1년간의 연재를 여기서 접고

자 합니다!

꾸지뽕나무

삼지구엽초

잔대

하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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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천송이 씨, 정말 눈 오는 날엔 치맥이 제격일까요?

중국요리와 더불어 치킨은 시켜 먹는 대표적인 음식이다. 한국의 치킨집들이 글로벌 프렌차이즈인

KFC를 밀쳐내고 패스트푸드 1위의 위엄을 고수하고 있는 데는 배달의 힘이 크다. 배달은 점주들에게

‘업장 확대’의 차원이기 때문에 배달을 병행하지 않으면 그만큼 수입이 줄어든다. ‘배달’은 치킨의 경쟁

력이다. 치킨집 영업의 관건이 얼마나 착실한 배달 알바를 데리고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할 정도다.

점주를 무엇보다도 힘들게 하는 상황은 오토바이 사고다. 배달 중에 인사 사고라도 나면 배상 문제부

터 보험처리 문제까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거기다 오토바이까지 망가지는 날에는 그

야말로 치킨집을 때려치우고 싶게 만든다. 게다가 몇 년 전부터 맥도날드와 롯데리아가 배달 시장에 뛰어

들면서 ‘배달민족’의 전쟁이 한창이다. 패스트푸드의 대표

선수들인 치킨, 피자, 햄버거는 서로 대체성이 강한 음식이

다. 그동안 치킨이 햄버거를 견제할 수 있었던 것은 방문을

해야만 먹을 수 있는 ‘귀찮음’때문이었는데, 이제 알량한 경

쟁무기마저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는 천송이가 “눈 오는 날에는,

치킨에 맥주인데…” 라며 실제로 ‘치맥’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한 컷 때문에 중국에 치맥 광풍이 일었다 한다. 그런데 정

말 눈 오는 날엔 치맥이 제격일까? 맞는 말이긴 하다. 눈이나

비가 오면 치킨집의 배달 주문은 평소보다 치솟기 마련이다.

궂은 날 튀김음식이 당기는 이유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일

단 나가기 귀찮을 때 시켜 먹기 가장 좋은 음식이 치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이나 비가 내리면 영업에 대한 기대감도 생기지

만, 한편으로 두렵기도 하다. 배달 대행을 쓰고 있는 가게면

할증료를 줘야 하고, 그나마 배달이 자꾸 밀려서 왜 치킨이

정은정삶과 먹을거리 협동조합 <끼니> 조합원

배달민족으로 살아남기불온한입맛

닭 한 마리가 품은 사연 ④*

*<미래에서 온 편지〉 2014년 4월호부터 연재하고 있는 ‘닭 한 마리가 품은 사연’이 일부 수록된 《대한민국 치킨展-백숙에서 치킨으로, 한국을 지배한 닭 이야기》가 출간되었습니다. 어느덧 한국인의 소울푸드로 자리매김한 치킨을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책입니다.

대한민국 치킨전 백숙에서 치킨으로, 한국을 지배한 닭 이야기 정은정 / 따비 / 2014년 7월

백숙은 어떻게 치킨이 되었나?치킨을 먹고, 튀기고, 키우는 사람들이 그려내는 대한민국의 풍경

Page 129: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삶과 문화 127

안 오냐는 항의전화도 많이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전 문제가 걱정이다. 그래서 아예 이렇게

궂은 날씨에는 승용차로 배달에 나서기도 한다. 치킨 한 마리 배달하자고 비싼 휘발유 쓰는 것이 남는 장

사인가 계산기를 두드려보기도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한 번 떠난 손님은 돌아오지 않는다! 현관에 빗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카드 리더기를 긁는 배달맨의 곱은 손, 이 손 또한 우리를 먹여 살리는 귀한 손이다.

사시사철 천지사방 불철주야! 죽어나는 건 치킨집

한국의 배달음식업에 종사하는 인원은 16만 명으로 추산되고 그 매출 규모는 연간 10조 원을 내다보고

있다. 1인 가구가 늘면서 ‘혼자 먹기’ 애매한 사람들이 배달음식업의 주요 고객이 되었고, 따라서 배달 시

장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소비자들은 전단 광고지를 보고 전화로 주문을 하기도 하고, 인터넷으로 검색

을 해서 프렌차이즈 본사 홈페이지에서 직접 주문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스마트폰으로 검색해서 아예 주

문·결제까지 처리하는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이 대세다. 대표적인 배달 앱으로 ‘배달의 민족’과 ‘요기요’,

‘배달통’이 있다. 최근에 이 배달 앱 업체는 지상파 광고까지 하면서 앱 1위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

을 벌이고 있다. 2010년 가장 먼저 배달앱 서비스를 시작한 ‘배달의 민족’은 아직까지는 배달 앱 점유율 1

위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후발주자인 ‘요기요’는 독일계 벤처회사로 ‘배달의 민족’의 1위 자리를 노리

며 최근 그 상승세가 무서운 배달 앱이다. 서로 지상파 광고로 맞불을 놓는 중이다. 그런데 이 배달 앱의

수수료가 13%에서 16%에 이른다.

수수료의 차이가 있는 이유는 수수료를 좀 더 내면 업체를 앱 상단에 노출해주기 때문이다. 요즘엔 앱

을 통한 음식 주문이 늘어나면서 음식 프랜차이즈 입장에서는 싫어도 이용을 안 할 수도 없다. 그런데 그

수수료가 점주들을 압박하는 요인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과한 수수료로 비판을 받자, 어차피 광고 전단

지 작업에도 이만큼의 돈이 드는데다 홍보 효과가 뛰어나기 때문에 결코 비싼 가격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

친다. 어느 주장이 옳든, 죽어나는 것은 치킨집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스마트폰을 쓰지 않거나 앱 이용

이 능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광고 전단지를 보고 반응한다. 그래서 이래저래 떼이는 돈만 많은 것

이 치킨 장사인 것이다.

자, 그렇다면 치맥족이 지켜야 할 예의 하나만 지키자. 적어도 단골 치킨집 전화번호 하나는 저장해 두

자. 굳이 앱으로 주문할 필요가 있을까. 그게 다 치킨집 주인들의 눈물과 땀을 더 짜내는 일일 뿐이다. 그

리고 배달맨들의 투혼에 감사하며 너무 늦는다고 재촉말자. 없고, 못난 것들이 서로 재촉해봤자 ‘쟤네들’

만 신나할 뿐이다.

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가 매달 삶과 먹을거리 협동조합 <끼니> 소식을 전합니다. 먹을거리의 생산과 가공, 유통, 소비 등 각 분야의 전문가와 언론인, 인문학 연구자 등이 필진으로 참여합니다. 한국인의 끼니가 그 실체를 선명히 드러낼 수 있도록 왜곡된 정보와 조작된 전통을 고발하고,궁극적으로는 한국의 노동자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끼니를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모색합니다. 이 글은 <끼니> 공식 블로그에 동시게재 됩니다. (http://blog.naver.com/gginico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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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새정치민주연합 일각과 <한겨레> 등의 매체는 최근 심각한 소득불평등 문제와 낙수효과의 허구성을

지적하면서 기업의 수익이 가계로 흘러들어야 경제가 선순환한다고 주장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후보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서 소위 ‘소득주도 성장론’이 급속히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거, 전혀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고용 없는 성장과 양극화 이슈는 노무현 정권 당시에도 최대의 고민거리였다. 어떤 정권

보다 많은 보고서가 생산됐다. 지금 회자되는 ‘소득주도 성장론’ 역시 내수활성화론의 형태로 이미 다 나

왔던 논의였다. 노무현 정권은 내로라하는 재벌 총수들을 청와대에 초청해 제발 돈을 쌓아두지 말고 투자

를 해달라고, 중소기업과 상생해야 장기적으로 대기업도 생존할 수 있다고 읍소했다. 면전에서야 고개를

끄덕였지만 ‘좌파정권’의 읍소에 제대로 응한 기업은 하나도 없었다. 노무현 정권은 엄청난 노동계의 반

발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 법안을 통과시켰다. 불안정 노동은 더욱 확대됐다. 인수위 시절 관철하겠다 호

언했던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은 집권 반년도 되지 않아 폐기처분됐다. 노사정위도 스스로 판을

엎어버렸다. 한미 FTA를 불도저처럼 밀어붙여 ‘우익정권보다 낫다’는 재벌과 극우언론의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 기업은 돈을 풀지 않았다.

이명박 정권은 화끈하게 재벌 밀어주기에 나섰다. 법인세 등 각종 세제를 어마어마하게 감면해줬다.

애당초 친기업 정권이었지만 그래도 저성장·내수둔화 기조에 대한 우려는 노무현 정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제 감면은 “이래도 투자 안할래”라는 ‘당근’이었다. 실제로 기업들 투자를 압박하는 발언을 꽤

강도 높게 보여줬다. 이명박 정권 시절 삼성을 위시한 재벌의 수익률은 그야말로 사상최대치를 연일 갱신

하는 중이었다. 기업에 돈이 넘쳐나는데 가계부채는 갈수록 악화됐다. 이 와중에 미국발 위기를 핑계로

청년세대 전체의 임금을 삭감해버리는 ‘청년대학살’이 벌어졌다. 세계 자본주의 역사에도 유례가 없는

‘대졸초임삭감’ 사태였다.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한국의 재벌들은 뼈조차 남기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빨아먹고 긁어 먹었다. 그리고 끝내 기업은 돈을 풀지 않았다.

두 정권의 경험이 주는 교훈은 명백하다. 한국의 재벌은 동반성장이니 경제민주화 따위에 한 톨의 관

심도 없다는 것. 아무리 애걸하고 아무리 깎아줘도 그들은 투자하지 않는다. “기업이 어렵다. 세금을 더

깎아야한다”고 아우성칠 뿐이다. 재벌을 직접 압박할 사회적 역학과 정치력이 없는 상태에서의 소득주도

성장론은 결국 기업에 투자를 구걸하는 것에 불과하다. 지금 한국사회의 담론은 단지 낙수효과론에서 구

걸효과론으로 옮겨왔을 따름이다. 국책연구기관조차 법인세 재인상을 언급할 정도로 한국경제는 심각한

상황이다(박종규, ‘한국경제의 구조적 과제: 임금 없는 성장과 기업저축의 역설’, 한국금융연구원, 2013. 12.). 진

보정당의 빈 자리들이 너무나 아쉽다.

박권일『88만원 세대』 공동저자

‘낙수효과’냐 ‘구걸효과’냐편지를접으며

Page 131: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손은숙! 하면활짝웃는쾌활한웃음과하이톤의목소리부터연

상된다. 상큼하고발랄하다. 과거선거운동에서늘발군의율동

과춤솜씨도보여주었다. 녹색의제에관심이높아태양과바람

에너지협동조합 기획팀장,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원으로

도일하고있다. 이번지방선거에서탄탄한조직력으로당의지

방선거방침을충실히집행한서울은평당협의공동위원장이기

도하다.

“저완전후보체질인것같아요. 당선에마음을비워서그런가?

선거내내당선될거라고착각한다는그무서운‘후보병’도안

들던데요?”

늘활짝웃으며노동당을설명하고선거구구석구석적지않은

고갯길을거침없이도보로걸으며선거운동을했다고한다. 등

산으로다져진체력덕분에후보이동용차량도필요없었다고.

*자체발광햇빛에너지손은숙인터뷰전문은 54~62쪽 <여

성진보정치열전>에서볼수있습니다.

자체발광햇빛에너지, 손은숙

발행인 이용길

편집인 이장규

위원회 김건담김성현노정박권일장석준정정은정철수

조윤호최백순홍원표

교 열 노정정정은

디자인 고미숙

등록일 2013년6월 11일 (등록번호영등포, 라00407)

발행일 2014년 7월 26일

주 소 서울영등포구국회대로664 한흥빌딩 2층노동당

전 화 02) 6004-2006, 2007

팩 스 02) 6004-2001

이메일 [email protected]

홈페이지 www.laborparty.kr

인 쇄 인천시계양구계산동973-15 원일컴

미래에서온편지제11호

표지

이야기

가격 10,000원

사진 : 정정은편집부장

0723원일-제11호표지 2014.7.24 1:23 AM 페이지2

Page 132: 미래에서 온 편지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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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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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호 2014.8

0723원일-제11호표지 2014.7.24 1:23 AM 페이지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