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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공공성과 연대의 회복 - 1 발제 ┃이승훈 (숙명여대 리더십교양학부 교수) 오늘은 녹색에 대한 이야기가 없고 일반 시민에 대한 논의로 치중된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 기엔 공공성의 내용이 녹색가치라고 생각하고 녹색가치 확산이 연대, 실천의 문제로 생각해 보 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포럼에 쭉 참석 했는데, 토론 중 나온 질문을 요약하면, 녹색시민 은 어떤 존재인가, 녹색시민됨의 내용은 개인의 행복, 개인의 이익 같은 것과 대립되는 것인가, 그럼 시민이 되려면 슈퍼맨이 되어야 하는가. 녹색시민이 현실에서 가능한지, 현실에서 어떻게 키워질지. 이런 식의 질문이 제가 이해한 주된 토론이었습니다. 현대 사회의 시민 과제, ‘공공성’과 ‘연대성’ 저는 두 가지 질문으로 요약해 보았는데, ‘어떤 시민을 어떻게 키워야’ 할 것인가 관한 문제로 줄여보고 이 질문에 대해 평소 생각을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은 현대 사회가 굉장히 가치가 다원화되었다, 다원주의 사회라는 특징으로 배경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겁니다. 글에 쓰지는 않았지만 또 하나는 자기 이해관계라는 것이 점점 중요한 행위의 동기가 되는 시 대인데 이걸 다원주의 안에 포함할지 분리해야 할지입니다. 이해관계도 중요하고 차이를 인정하 는 다원주의도 추구해야할 가치이지만 시민사회운동에서는 위협이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다루려고 하는 연대성, 공공성의 문제에서도 다양한 이해관계와 가치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공공 성이 가능할까, 또 이해관계와 다양한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협력해서 공동의 목표를 위해 서로 연대할 수 있을까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다원주의가 갖고 있는 시민사회와 관련 된 문제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공공성 개념과 딜레마 다원주의 시대에 시민사회의 과제를 공공성과 연대성 두 가지로 큰 틀로 규정을 하고 이 개념 을 통해 제기하고 있는 문제를 짚어보고 해법의 하나로 동감 능력을 살펴보려 합니다. 이어 어 떻게 동감능력이 향상될 수 있는지, 기존 이론에선 뭐라 하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먼저 현대시민 과제로서 공공성과 연대성 중 공공성을 먼저 살펴보려 합니다. 녹색시민에서도 『녹색시민포럼 - 녹색시민의 시민됨을 위하여』 제5회 공공성과 연대의 회복 ○ 일시 : 2015년 7월 14일 5시 ○ 사회 : 박영신 (녹색교육센터 이사장, 연세대 명예교수) ○ 발제 : 이승훈 (숙명여대 리더십교양학부 교수) ○ 토론 : 유현상 (상지대 강사) ○ 토론 : 윤기돈 (녹색연합 활동가)

녹색시민포럼 5차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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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공공성과 연대의 회복 ○ 일시 : 2015년 7월 14일 5시 ○ 사회 : 박영신 (녹색교육센터 이사장, 연세대 명예교수) ○ 발제 : 이승훈(숙명여대 리더십교양학부 교수) ○ 토론 : 유현상 (상지대 강사) ○ 토론 : 윤기돈 (녹색연합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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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공공성과 연대의 회복 - 1

발제 ┃이승훈 (숙명여대 리더십교양학부 교수)

오늘은 녹색에 대한 이야기가 없고 일반 시민에 대한 논의로 치중된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

기엔 공공성의 내용이 녹색가치라고 생각하고 녹색가치 확산이 연대, 실천의 문제로 생각해 보

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포럼에 쭉 참석 했는데, 토론 중 나온 질문을 요약하면, 녹색시민

은 어떤 존재인가, 녹색시민됨의 내용은 개인의 행복, 개인의 이익 같은 것과 대립되는 것인가,

그럼 시민이 되려면 슈퍼맨이 되어야 하는가. 녹색시민이 현실에서 가능한지, 현실에서 어떻게

키워질지. 이런 식의 질문이 제가 이해한 주된 토론이었습니다.

현대 사회의 시민 과제, ‘공공성’과 ‘연대성’

저는 두 가지 질문으로 요약해 보았는데, ‘어떤 시민을 어떻게 키워야’ 할 것인가 관한 문제로

줄여보고 이 질문에 대해 평소 생각을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은 현대 사회가

굉장히 가치가 다원화되었다, 다원주의 사회라는 특징으로 배경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겁니다.

글에 쓰지는 않았지만 또 하나는 자기 이해관계라는 것이 점점 중요한 행위의 동기가 되는 시

대인데 이걸 다원주의 안에 포함할지 분리해야 할지입니다. 이해관계도 중요하고 차이를 인정하

는 다원주의도 추구해야할 가치이지만 시민사회운동에서는 위협이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다루려고 하는 연대성, 공공성의 문제에서도 다양한 이해관계와 가치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공공

성이 가능할까, 또 이해관계와 다양한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협력해서 공동의 목표를 위해 서로

연대할 수 있을까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다원주의가 갖고 있는 시민사회와 관련

된 문제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공공성 개념과 딜레마

다원주의 시대에 시민사회의 과제를 공공성과 연대성 두 가지로 큰 틀로 규정을 하고 이 개념

을 통해 제기하고 있는 문제를 짚어보고 해법의 하나로 동감 능력을 살펴보려 합니다. 이어 어

떻게 동감능력이 향상될 수 있는지, 기존 이론에선 뭐라 하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먼저 현대시민 과제로서 공공성과 연대성 중 공공성을 먼저 살펴보려 합니다. 녹색시민에서도

『녹색시민포럼 - 녹색시민의 시민됨을 위하여』

제5회 공공성과 연대의 회복

○ 일시 : 2015년 7월 14일 5시

○ 사회 : 박영신 (녹색교육센터 이사장, 연세대 명예교수)

○ 발제 : 이승훈 (숙명여대 리더십교양학부 교수)

○ 토론 : 유현상 (상지대 강사)

○ 토론 : 윤기돈 (녹색연합 활동가)

녹색시민포럼

마찬가지 일텐테, 시민됨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공공성이라 생각합니니다. 자신의 이해

관계에 갇혀 있는 사람을 시민이라 하지 않습니다. 시민은 타자에 대한 관심과 공공의 문제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전제로 합니다. 공공성의 관점에 자신의 가치나 이해를 상량할 수 있는 태

도, 이것이 시민됨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무엇이 공공성인가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공공성에 대

한 개념을 따져봐야 합니다. 공공성이 입장에 따라 다양하게 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용하

는 공과 사의 용법, 개념을 따져보면 크게 세 가지로 차원으로 사용됩니다.

하나는 절차적 공공성입니다. 보통 공이라고 했을 때 가시성, 또 접근성과 관련해서 공이라는

말을 씁니다. 예를 들면 프라이빗, 사적, 사사롭다의 말의 어원은 뭔가 박탈당했다는 말과 같다

고 합니다. 무엇으로부터 박탈되었냐 하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박탈되어 있는 것을 사라고 합

니다. 당연히 가시성, 눈에 드러나는 것은 공이라 합니다. 접근성에 과해선 우리도 많이 쓰는 말

인데 사유지와 공유지의 같은 말을 쓸 때입니다. 사유지는 접근이 금지되어있고 공유지는 접근

가능한,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고 투명하게 공개되어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들이 절차 차원의

공공성입니다. 모든 사람이 참여해서 투명하게 논의하는 과정을 공공성이라 보는 거죠. 요즘 말

하는 자유주의자는 이것만을 공공성이라고 합니다. 결과가 어떻든 절차만 지켜지면 그것만으로

공공성이라 할 수 있는 거죠.

두 번째는 내용 차원의 공공성입니다. 우리가 공사를 구분해야지 할 때 나와 관련된 것은 사,

전체와 관련된 것은 공이라 합니다. ‘공’과 ‘사’의 용법 가운데, 개인을 사사로운 것으로, 전체를

공공의 것으로 구분하고 이때 공공성은 부분이나 개인이 아닌 전체와 관련된 속성을 일컫는 말

이 됩니다. 곧 공공성이란 개인이 아닌 전체의 이익, 곧 공공선이나 공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공선, 공익선, 공익 같은 말은 단순히 개인의 이해관계 합 이상의 실체가 있다 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절차차원의 공공성으로 합의했다고 해서, 다수가 참여한다고 해서 공공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다수가 참여했더라도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한다면 공공성에 해당하지 않

는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이런 차원의 공공성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다수의 참여가

항상 결과로서 공공성을 보장하지 않는 것은 님비같은 걸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공공성을 실현하는 주체로서 공공성인데 보통 국가입니다. 국가가 모든 사람들을 대

표하여 공익을 실현하는 주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가와 관련된 활동을 공공성이라

합니다. 노동조합이 공기업의 민영화를 공공성 투쟁이라고 부르는 것이 거기에 해당합니다. 하

지만 현대에는 공공성 실현의 주체로 인식되는 대상들이 다양해졌습니다. 국가 뿐 아니라 NGO

나 UN 등 초국가기구들이 공공성의 주체로서 거론되고 있습니다.

제가 왜 이 세가지 차원으로 나눴냐면 공공성은 이 세 가지 차원이 다 포함되어야 진정한 의미

의 공공성이라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가지라도 배제되면 공공성이라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니다. 모두가 참여해서 자율적인인 합의를 통해 공익을 이끌어 냈을 때에 공공성이

라는 겁니다. 문제는 각각이 긴장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절차적 차원이 내용의 공공성을 보장

해 주지 않고 공익이나 전체의 공공성을 강조하면 개인의 자율성이나 평등을 침해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서로 긴장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공공성의 딜레마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제4회 공공성과 연대의 회복 - 3

래서 공공성을 실현하는 과제로서 이후 동감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연대성 개념과 딜레마

두 번째 문제라고 생각하는 과제는 연대입니다. 연대 또한 시민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혼자 고

립되어 고고한 사람을 시민이라 하지 않습니다. 타인과 연대하는 실천의 차원으로 나온 사람을

시민이라 하는데. 이 때 다뤄지는 것이 연대성입니다 여기서 연대는 단순히 시간을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함께 하는 것이고, 나아가 감정이나 의지를 함께 하는 것이며, 때때로 수고

와 희생까지 함께 하는 것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입니다. 강수택 교수 같은 분은 연대를 연

대지향, 연대근거, 연대성격 등 여러 유형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연대유형을 다차원으로 나누는

것도 이 안에 긴장과 모순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크게 두가지를 나눠보았는데 하나는 앞의 공공성과 관련 있습니다. 개인의 자율성과 연대

가 서로 긴장 관계, 딜레마에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통합과 연대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어느 정

도 희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위하여 안정과 연대를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가치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멜루치는 인간 관계가 개인의 선택에 의해서

지배되면 연대의 기초는 침식되고 사회 결속도 약해질 것이라고 했으며, 오페 역시 개인화는 연

대의 씨앗을 말릴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왜 긴장관계라 했냐면 현대 사회에서 이런 조건

들, 연대를 형성할 수 있는 조건들이 위태로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선택이나 자율성이

증가할수록 연대기반이 위협 받는 측면이 있습니다. 제가 예로 들고 싶은 것은 이론적인 것이

아닌데요, 현대사회의 속도와 관련된 건데 현대사회는 굉장히 빨라지는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

에서 연대가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밀란 쿤데라의 느림이라는 소설입

니다. 그 소설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정도에 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정도에 반비례한다.”

속도와 기록이 반비례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예를 들면서 조금 전에 끔찍한 일을 당하면 자

기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고 걸음이 빨라진다는 겁니다. 망각하려고, 그런데 뭔가 기억하려고 하

면 걸음이 느려지고 어느 순간 멈추고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기억과 속도

가 반비례한다는 겁니다. 왜 이 이야기를 하냐면 현대사회는 점점 속도의 사회라는 겁니다. 이

주노동자가 한국에 와서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 빨리빨리이고 신호등에 조금만 기다려도 빵빵거

리죠. 이런 사회일수록 기억하지 않고 망각합니다. 밀란 쿤데라가 소설에서 현대인들은 속도에

탐닉하니까 망각하는 걸까, 아니면 망각하기 위해 속도를 탐닉하는 것일 까 질문을 던집니다.

기억이라는 것이 연대를 형성하는 중요한 매개라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기억을 통해

연대하는데 이런 것을 속도가 위태롭게 합니다.

두번째는 연대에 관한 딜레마는 연대를 강조하기 됐을 때 연대의 범위와 관련된 겁니다. 연대라

는 것이 집단구성원의 내부 결속력에 제한 될 수 있는 가능성과 외부로의 확장까지 사이의 긴

장. 세네시라는 학자는 우리 WE라는 대명사를 위험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를 강조한 순간 외

부 세력에 대항해 타자와 우리를 구분하는 대명사라 위험하다 했습니다. 연대가 집단 내부로 제

녹색시민포럼

한 되고 외부로 확장이 안

되고 그것이 야기하는 폭력

성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시민됨의 조건 중 하나지만

연대라는 차원에서 긴장하는

관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시민들과 관련된 연대 증

이 두 가지 모두 포기할 수

없다. 차이와 자율성을 존중

하고 서로 연대하는 것. 자유

의 문제와 안전의 문제 모두

필요합니다. 어떤 분이 “다원

주의, 다문화주의의 ‘원심력’

이 공동체 의식이라는 ‘구심력’에 의해 적절한 긴장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했는데 저도 이문

제 의식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시민됨’의 바탕으로서 ‘동감’

그래서 공공성과 연대성의 딜레마가 현대 다원주의 시대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이 문제를 이론적으로 어떻게 접근 해결할까. 저는 동감이라는 것, 공공성과 연대성 형성에 동

감이 어떤 역할을 하나는 차원에서 이 문제를 접근해 보았습니다.

동감과 공감의 차이

동감의 개념을 명확히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 개념도 혼돈스럽게 사용되고 있는데 공감과 동감

이 혼용되어 사용하고 요즘은 공감이 훨씬 보편화되어 쓰입니다. 번역을 하면 서 더 헷갈리는데

저는 sympathy를 동감으로, empathy를 공감으로 사용합니다. 왜 이렇게 구분하냐면 ‘공감

empathy’은 “타인의 감정 pathos를 알아차리고 그 감정의 내면으로 들어가(em) 이해하는 것”인

데 ‘동감’은 “타인의 감정과 동일한(sym) 감정(pathos)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합리적인 감

정 전염, 예를 들면 슬픈 데 가면 나도 슬퍼지는 것 이런 것도 동감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습니

다. 그리고 동감은 비합리적이고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과 구분하기 위해 공

감을 써야 한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 ‘동감’을 쓰는 사람들은 공감은 타자의 상황에 대한 인지적

이해에 국한된, 타자에 대한 정서적 이해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내면으로 들어가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 상대방을 괴롭히기 위해서도 악용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쓰는 동감은 타자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후자 쪽 동

감을 사용 합니다

저는 동감을 세 가지 차원으로 구분했는데요, 첫째 요소는 나와 타자 사이의 차이를 전제해야

합니다. 그걸 전제하지 않으면 감정전염이랄지, 사이비 종교지도자에게 자기도 모르게 빠지는

제4회 공공성과 연대의 회복 - 5

것도 동감과 혼돈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상상력을 통해 타자 입장에서 설 수 있는 인지능력

입니다. 세 번째는 타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동감이라 합니다. 이제 공공성이나 연대 형성에

어떻게 동감이 기여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동감은 어떻게 공공성 형성에 긍정의 기여를 할 수 있는가?

허버트 미드의 자아 형성 과정에 대한 이론이 있는데 미드는 인간의 자아는 자신이 스스로한테

대상이 된다는 특징을 갖는다고 했습니다. 자아는 소외된다는 한에서, 외부의 시각에서 나를 볼

수 있을 때 생성되는 것, 나에 대한 타자의 반응이라는 겁니다. 타자가 나를 이렇게 보고 있구

나에 대한 자신의 반응, 순응이든 그것이 자아입니다. 이 말은 내 자아가 뭔지 생각해보면 간단

한데 남들이 생각하는 것에 대해 내가 동의하는지 거부하는지, 이것이 모여있는게 자아라는 겁

니다. 다시 말해 자아는 타자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럼 자아는 어떻게 형성되나, 타자의 관점을 수용하는 관점이 자아의 형성 과정입니다. 이 과

정은 놀이(play)와 게임단계로 나눠진다 했습니다. 플레이 단계는 소꿉놀이하며, 엄마 아빠로 역

할을 나누고 배우는 것들입니다. 이 놀이에서 아이들은 개별의 역할은 이해하지만 다른 역할과

의 관계는 이해하지 못함. 내가 하는 아빠 역할이 엄마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이해 못하는 것입

니다. 이게 발전하면 게임 단계로 가는데 게임에선 관계된 사람들의 역할과 태도를 취하는 단계

입니다. 내가 엄마역할을 하는데 엄마와 선생님의 관계는 학부모와 선생님의 관계가 되는구나

같은 규칙을 인지하면서 타자의 입장을 형성한는 것입니다. 이렇게 형성된 자아는 목격적 나

(Me)와 주격 나(I)로 나눠집니다. 타자의 행동을 수용해서 만들어지는 게 목적격 나이고, 거기에

대해서 반응하는 자아가 주격 나입니다.

개인이 취하게 되는, 개인이 만나게 되는 타인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개인의 자아는 자신의 관점

을 좀 더 보편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고 확장됩니다. 계속 확장되는 단계를 미드는 일반화

된 타자로 확장된다고 설명하는데 이것은 조직화된 공동체나 사회집단으로까지 타인의 범위가

확장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 과정을 왜 이렇게 길게 이야기 하냐면 미드의 자아 형성 과정이나

목적격 주격 나에 대한 설명은 결국 동감 능력입니다. 타자의 입장에서 사유할 수 있는 능력.

그런 것이 전제되었을 때 성숙한다는 겁니다. 동감 능력이 곧 자아 형성에 굉징히 중요한 역할

을 하는 것입니다. 이 능력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확장되는 것, 자아가 성숙하는 것

은 공감 능력을 바탕으로 성숙하는 것입니다. 니드가 말하는 일반화된 타자로 확장되는 것은 기

본적으로 공공성의 단계로 자아가 성숙하는 것이고 자아의 성숙은 공공성을 갖고 있는 것이라

해석됩니다. 한나 아렌트가 칸트에서 따온 개념으로 공론장이나 공공영역에 시민이 참여하며 배

우는 것이 ‘확장된 심성이다’고 말하며 이것이 판단력, 정치판다의의 핵심이라고 보았습니다. 정

치 판단의 핵심이 확장된 심성, 상상력을 통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우리를 넣을 수 있는, 저는

이것도 결국 동감 능력의 다른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동감은 어떻게 연대성 형성에 긍정의 기여를 할 수 있는가?

- 차이를 바라보는 세가지 관점 ; 폭력, 관용, 무관심

녹색시민포럼

그럼 동감은 연대성과 어떻게 관계있는가? 연대성의 과제는 서로 다름과 차이라는 조건에서 어

떻게 공동의 목표를 구성하는 협력과 실천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이는 곧 차이와

다름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도 동감이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것은 차이를 대하는 태도를 비교해 보면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폭력입니다. 타

자를 자기 방식으로 이해하고 나처럼 만드는 것입니다. 집단 동일시 압력, 이것을 거부하면 사

회적 무시를 당하고 이것이 보편화되는 것입니다. 다름에 대한 손쉬운 대응입니다. 두번째는 관

용. 웬디 브라운은 관용을 개인 차원 윤리로서는 중요한데 정치 차원에서는 위험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보통 관용 좋은 거 아니야 하는데 왜 정치 담론으로 관용이 위험하다고 하냐면 예를 들

어 여성은 수동적이고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배려되어야 할 관용의 대상이 되는데 만약 여성이

수동적이고 약한 위치를 벗어나 남성의 적극적으로 남성과 동일한 지위와 권리를 요구하면 관용

의 범위를 넘어섰다는 이유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확 바뀐다는 것입니다. 웬디 브라운은

중동전쟁때 부시의 담론 ‘우리는 이슬람을 관용합니다’라는 표현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폭력적인

지를 보면서 화가 나서 글을 썼다고 합니다.

차이에 대한 세번째 태도는 ‘무관심한 공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포스트모던 철학에선

너무나도 유명한 말로 “이 시대 우리의 과제는 차이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세련시키며 불가공

약성, 같은 기준으로 나눠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우리의 인내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선언 같은

글이 있습니다. 이 차이의 철학은 아마도 우리 사회에서 보면 나는 나, 너는 너 라는 대중의 구

호를 이런 식의 내용에서 쉽게 차용된 거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차이의 철학은 어떤 문제가

있냐면 요아스라는 학자가 비판했는데 차이가 긴장 없이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차이는 항상 긴

장을 야기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요아스는 차이에 대한 이런 주장은 합의나 결속의 가능성 자

체를 차단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차이에 대한 인정이 자칫 차이에 대한 무관

심을 정당화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차이가 낳을 수 있는 이러한 긴장 자체를

포기하는 것은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 또는 사회적 연대의 가능성 자체를 미리 차단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대안으로서 동감의 역할과 한계

그럼 연대성에서 동감은 어떻게 방안이 될 수 있는가를 보면 동감은 차이를 획일화하는 차별과

도 다르며, 차이에 대한 무관심과도 구별됩니다. 차이를 그 자체로 존중하면서 상호간의 관심과

협력을 모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타자의 입장에서 서서 그에게 동감하기 위해서, 반드시 그

타자와 동일한 이해관계나 가치를 가져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동감에 대한 중요한 비판

도 하나 있습니다. 단순히 동감이 윤리의 차이이지 정치 차원으로 들어서지 못했다는 것인데요.

우리는 피해자나 낯선 타인에 대한 동감은 연민이나 측은지심, 일종의 속죄 의식을 가질 수는

있지만, 실제적인 행동으로까지 발전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동감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

찰자에 머물 뿐이며, 설사 타인과 같은 감정을 느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순간적일 뿐이라고 비

판합니다. 수잔 손탁은 ‘타인의 고통’에서 전쟁 사진의 예를 통해 이러한 동감의 한계를 잘 지적

하고 있는데요. 수잔 손탁은 동감이 그들이 받고 있는 고통의 원인이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그

제4회 공공성과 연대의 회복 - 7

들의 고통에 대해 우리가 죄 없고 무력함을 전제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감은 우리

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럽고 부적절한 반응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다. 이런

한계가 있습니다.

동감이 연대로 발전하려면 이해의 연대가 되어야

그러나 동감이 위험하다는 것이 연민에서 끝나버린다는 것인데 그래서 동감이 연대로 발전하려

면 이해의 연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나의 사회적 이해와 타자들의 이해가 일치하는 지

점에 진정한 연대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해경제적 이해관계가 아니

라, 저는 공공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혀 다른 거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 이것이 매개

되어야 연대 방향이 실천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건데 다시 말하면 공공성을 매개로 연결되어야

연대가 실천으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저희가 지난번 식사하다가 나온 이야기

중에 경복궁역에 유모차를 끌고 갔는데 엘레베이터가 없어서 지하철 직원에게 도와 달라했더니

자기 일이 아니라고 했는데 알고 보니 인원 감축돼서 일손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

국 유모차를 끌고 다닐 때의 불편함이 지하철 인원 감축 문제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서로 연관된 문제라는 걸 알았을 때 지하철 인원 감축 문제에 대해 유모차 엄마들이 반대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동감능력을 어떻게 향상시킬까?

마지막으로 동감 능력을 어떻게 향상시킬 수 있을까 인데요. 공공성과 연대성이라는 과제가 있

었고 이것은 동감 능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이는 녹색시민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형성될 수 있을까 해서 기존의 이야기를 따와 봤는데요, 먼저 동감능력 향

상이라고 하든 시민됨의 형성이든 사람이 바뀐다는 것은 종교적인 회심 차원의 문제입니다. 사

람이 갑자기 바뀌면 죽는다고도 했습니다. 그만큼 바뀌기 어렵습니다. 달라진다는 것은 개종 수

준의 근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생각하면 굉장히 어렵지만 듀이의 행위 이론을 보

면 실제로 변화는 아주 일상의 습관의 균열로부터 시작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보통 익숙한 습관

에 따라 행동하는데 이 습관에 균열이 생겼을 때, 균열이 생기는 이유는 여러 가지 인데 새로운

상황이 생겼다거나 기존 요구를 습관이 해결을 못 했을 때 균열이 일어나는데 이 균열부터 새

로운 습관, 문화 등 개인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아까 인용한 요하스라고 하는 사

람은 가치의 창출이라는 걸 이야기하는데 인간의 트라우마 경험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겁니다. 트라우마라는 것이 내게 익숙한 습관을 깨버리는 것입니다. 예로 들기엔

참으로 어렵지만 세월호 유가족들이 그 전까진 어떤 사고가 나면 그냥 단순한 공감 차원에서

끝났는데 자기 아이가 그런 일을 겪고 나니 주변 아이가 보이고 위험성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

래서 서명운동을 한다는 겁니다. 이건 너무나도 큰 충격적인 트라우마라 예로 들기엔 그렇지만

이런 습관이 깨지는 계기가 새로운 인식을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동감 능력을 향상 시

키는 시민을 키울까 질문을 던진다면 익숙한 습관을 깨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겁니다. 익숙

함에 균열을 일으킬까? 그 하나로 작은 성공이야기라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대안의 삶을 작은

것부터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죠. 기존의 습관을 깨는 중요한 운동일 수 있겠다는 겁니다. 또 하

녹색시민포럼

나는 인문학도 실은 이런 맥락에서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 습니다. 인문학은 인간다움이 무엇이

고 바르게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을 담은 것인라 그 사회 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이것도 균열을 깨는, 나와 다른 식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중요한 기회, 도

구가 될 수 있습니다. 철학자 누스바움은 소설의 형식이 독자들을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가지고, 그러한 일이 본인에게도 있을 수 있다는 식으로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도

록 이끎으로써 동정심을 형성한다고 말했는데 이때의 동정심이 곧 동감능력이라 말할 수 있습니

다. 공공활동의 참여도 중요한데 시민됨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거꾸로 공공의식을 갖고 참여하지

않을지라도 참여함으로서 생기는 것이 있습니다. 예전에 논문을 쓰면서 인터뷰 했던 이들을 보

면 공공성에 대한 의식을 갖고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웡봉사 해보라고 해서 왔는데 하다보면

생각이 달라진다는 겁니다. 새롭고 낯선 것을 만날 기회를 만들어주고, 이것이 균열을 일으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것, 공공활동 참여가 수단의 의미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배우는 중요한 기

회가 되어 참여 자체가 충분히 의미라는 겁니다. 물론 집단의 참여가 오히려 자기의 고집을 강

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집단극단화라는 것에 빠질 수 있습니다. 비슷한 사람들로만 구성된 집단

에 있게 되면요. 그래서 자원결사체에 대한 기존 연구를 보면 다양한 가치와 관점을 가진 사람

들과 상호 교섭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야 낯선 것에 부딪히며 습관에 균열이 일어납니다.

또 한나 아렌트가 말한 ‘공공의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하면 우정, 사랑만 생각하는데 공

공영역에 참여했을 때 느끼는 행복이 있습니다. 근대인은 이것을 상실했다고 합니다. 논문을 쓸

때 광명 YMCA에서 활동하는 분들을 인터뷰 했는데 자신은 가족 안에 있다 보니 존재감이 없

었는데 지역 지킴이, 먹거리, 반딧불이 지키기 운동 등 처음에는 쑥스러웠으나 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느낌도 들고 그래서 행복감, 자기 인정에 대한 확인이 들더라는 이야기

를 많이 들었습니다. 공공활동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동감능력을 어떻게 향상

할까,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써놓고 보니 추상적이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마지

막으로 김승희씨의 시를 첨부했습니다. 시민들이 시민됨을 위하여 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수복 선생이 쓴 ‘한국인의 문화적문법’ 인용된 시입니다. 당연과 물론의 세계와 싸우는 것이

습관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고 그것이 시민의 태도라고 생각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Ⅱ (김승희)

아침에 눈뜨면 세계가 있다.

아침에 눈뜨면 당연의 세계가 있다.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있다.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거기에 있다.

당연의 세계는 왜, 거기에,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처럼,

왜, 맨날, 당연히, 거기에 있는 것일까.

당연의 세계는 거기에 너무도 당연히 있어서

그 두꺼운 껍질을 벗겨보지도 못하고

당연히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

제4회 공공성과 연대의 회복 - 9

당연의 세계는 누가 만들었을까,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당연한 사람이 만들었겠지,

당연히 그것을 만들 만한 사람,

그것을 만들어도 당연한 사람,

그러므로, 당연의 세계는 물론 옳다.

당연은 언제나 물론 옳기 때문에

당연의 세계의 껍질을 벗기려다가는

물론의 손에 맞고 쫓겨난다.

당연한 손은 보이지 않는 손이면서

왜 그렇게 당연한 물론의 손일까,

당연한 세계에서 나만 당연하지 못하여

당연의 세계가 항상 낯선 나는

물론의 세계의 말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

물론의 세계 또한

정녕 나를 좋아하진 않겠지

당연의 세계는 물론의 세계를 길들이고

물론의 세계는 우리의 세계를 길들이고 있다.

당연의 세계에 소송을 걸어라

물론의 세계에 소송을 걸어라

나날이 다가오는 모래의 점령군,

하루 종일 발이 푹푹, 빠지는 당연의 세계를

생시불명, 힘들여 걸어오면서,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은

그와의 싸움임을 알았다.

물론의 모래가 콘크리트로 굳기 전에

당연의 감옥이 온 세상 끝까지 먹어치우기 전에

당연과 물론을 양손에 들고

아삭아삭 내가 먼저 뜯어먹었으면

지정토론 : 유현상 (상지대 강사)

이승훈 선생님의 발제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는 국민학교를 다닌 세대인데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못하면 아침부터 맞고 주말에는 아침 일곱시 즘 새마을 청소를 했던 세대입니다. 고등학

교 때까지, 대학에 와서도 국민윤리을 배우던 세대입니다. 그러다보니 공동체 교육은 어떤 세대

보다 튼실하게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데 난 왜 공동체적으로 살지 못했나. 대학에서, 또 그

이후 경험을 통해 공동체로 산다는 것이 어떤 교육을 받았던 간에 손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교육은 말짱 도루묵이 된 것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배운 우리나라 평균 강수량이 지금 전혀

도움이 되지 않듯이요. 그럼에도 지금 다시 우리는 공동체나 공공성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괴리가 생길까 고민이 늘 있었습니다다. 공동체가 중요하고 공공선이 중요하다는 걸 알면

서도 온전히 따르면 어느 순간 나는 낙오자가 되어있거나 맹목적인, 순진한 협조자가 되어 버린

녹색시민포럼

다는 우려 때문에 공공성을 실현하는 데 함부로 뛰어들기도 어려운 괴리를 갖게 됩니다. 왜 그

런가를 이승훈 선생님의 공성의 세가지 차원에서 해결이 됩니다. 권위주의 정권 시대에, 우리가

산업화 과정에서 강요된 공공성은 주체로서 공공성이 왜곡된 것입니다. 정권이 곧 국가라는 것

을 구분없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나중에 혼란을 주는 것이지요. 권위주의적 정권은 당연

히 비민주적 정권이고, 그것에서 시행한 공공성의 실현은 결과는 고사하고 절차적 공공성마저

무시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승훈 선생님의 공공성 세가지 차원에서 공공성에 민주주의를 붙여도

똑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공공성이 80년대 들어서도 왜곡되는데 결과의 공공성은 여전히 요원합니다. 이런 시대 변화에

따라서 우리가 시민됨, 녹색시민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가 과제라면, 80년

대까지 절차적 민주주의가 법적으로 체계화되긴 까지는 시민 앞에 무엇이 붙든 우리가 시민이긴

했었나. 우리가 주체가 된 적이 있었나.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의도적으로 근대화라는 말을 잘

안 씁니다. 여기서도 산업화라는 말을 쓰는데 박정희 평가할 때 근대화는 인정해야 한지 않나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근대화가 아니라 산업화라고 생각합니다. 근대화는 단순히 물적 성취로

정의될 수 없습니다. 근대화가 서구적 개념이라면 그때는 주체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시민이

바로 서는 시기가 근대인데 주체로서 시민으로 서 있는가라면 아직도 부분적으로 일시적으로 있

다 해도 아직도 시민이 주체가 되는 사회에 우리가 도달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연대 문제 관련해서 실질적으로 고민해 보면 기원, 성격 등 여러 가지 있지만 뒤르켕은 연대를

제4회 공공성과 연대의 회복 - 11

로마시대에 그 기원이 있다 했고 책임을 나누는 것, 연대보증 같은 것, 경제적 책임을 나눈다는

것입니다. 로마군에서는 형제애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생명을 나누는 것입니다. 제 대학 친구 중

에 암벽 등반하는 친구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은 와이프가 아니라 자일 파트너라고 이야기 합니

다. 생명을 나누는 거니까요. 연대에는 이런 무거운 책임의 의미가 분명히 있는데 이 자체가 연

대를 방해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는 삶을 무겁게 사는 것을 싫어해서. 가벼운 책임을 나누는

것도 연대로 격려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연대가 권리가 되어야 한다 생각해보았습니다. 시민의 의무나 도덕적 계율이 아니라

자기 삶을 지키기 위한 실천적 수단으로서 연대가 정치적 기본권으로 보장되어야 합니다. 대의

적 민주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제삼자개입

금지 조항은 연대를 못하게 하는 대표적인 조항입니다. 3자개입금지조항은 약자들이 취할 수 있

는 방법을 법적으로 차단하는 것입니다. 아담 스미스는 노동자들은 항상 연대를 이야기하지만

늘 실패한다. 자본가는 거의 연대를 이야기하지만 연대의 효과를 늘 달성한다고 하는데 이 때

연대는 이익집단화된 연대, 참다운 의미는 아니고 집단 연대이지만. 경찰과 국가의 편이기 때

문에 노동자의 연대를 싫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대항하기 위해 연대가 권리로서 보장되

어야 하고 3자개입금지 조항은 사라져야 한다.

지난 번에 김호기 선생님 발제 시간에 정치보다는 시민 영역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는 취지의

언급을 하신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점에 저도 거의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정치여야 한

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치는 엘리트 정치가 아니라 하버마스가 말하는 생활 세계에서 이뤄지는,

체제의 억압을 무너뜨릴 수 있는 정치입니다. 아렌트가 이야기하는 정치적 행위같은 이런 것들

을 시민 운동 차원에서 하는 것도 사실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정치가 희화화 되는

데, 정치인들도 스스로 정치공세하지 말라는 표현을 합니다. 정치인의 직업은 정치공세하고 정

치투쟁하는 것인데, 정치라는 말이 어떻게 쓰이는 것인지 혼돈됩니다다. 삶이 정치, 인간이 살아

가는 메카니즘의 가장 복합적인 영역이 정치라고 생각하는데 그걸 오랫동안 시장이 뺏어왔습니

다. 시장이 뺏은 정치는 근대 이전 정치이고 근대 이후의 정치는 시장에 잠식돼 출현조차 제대

로 못했습니다. 시장을 견제할 수 있는 정치의 복원, 그것은 엘리트 정치가 아니라 시민정치이

고 그것을 실현하는 행위로서 연대가 필요합니다. 연대 자체가 목적은 아닌 연대는 공공성을 실

현하기 위한 전술입니다.

공감과 동감의 구분에 대해서 연대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 왜 연대하느냐고 물을 때 공감 혹은

동감이라고 했을 때, 공감이 아니라 동감이라고, 동감이 아니라 공감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

니다. 연구자 입장에서는 냉철하고 엄밀하게 따져볼 필요 있지만 실천 영역에서는 연구자가 고

민한 것이 필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상깊은 것은 관용이라는 덕목이 윤리적으로는 의미 있

지만 정치적 차원에서는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똘레랑스라는 말이 중요한 덕목으로 소

개 되었는데 그럼 왜 프랑스에서는 알제리계 프랑스인들, 이주 청년들이 차별을 받는가 생각하

면 몇몇 선량한 자신을 만들고 싶어하는 도덕적 알리바이는 제공하지만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는

근원적인 정치적 모티브로 작용하기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 관용이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요.

녹색시민포럼

다원주의 사회에서 강조되는 흐름 중에 하나인 ‘차이의 정치’는 보편화의 함정, 혹은 균질화의

의도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차이의 정치’는 현대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성립됩니다. 다

인종, 다문화 사회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해결하고, 집단 간의 차별을 없애기 위한 취지로 ‘차이

의 정치’는 정치적 제도 등등의 역차별적 시행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역차별은 다문화

집단들의 정체성을 훼손할 가능성이 있으며 문화 다양성을 소멸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

다. 차이를 이야기하면서 차이를 균질화 해버리는 거죠. 차이를 보정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정체성을 고스란히 살리면서 다원화된 사회, 이걸 찰스 테일러는 인정의 정치라고 이야기를 합

니다. 이승훈 선생께서 동감의 위력이라 하는데 찰스 테일러가 말하는 인정이라는 것과 유사한

지위를 갖는 것 같습니다. 인정은 헤겔이후 오랫동안 사용되어 보편화되었는데 동감과 본질적으

로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긴 한데 처음으로 돌아가서 아무리 좋은 가치를 이야기해

도 그렇게 살지 않을거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참여시킬 것인가가 늘 남는 고

민입니다.

지정토론 ┃윤기돈 (녹색연합 활동가)

사회 변화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의도를 갖고 변화를 추구합니다. 그런데 저는 의도를 지우는 것

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체코의 대통령이었던 하벨의 실천도덕의 정치라는 책

을 읽고 있는데, 도덕의 정치라는 말이 나옵니다. 체코의 어디에서 돌이 떨어졌는데, 돌이 떨어

진 것, 사람이 다친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사회주의국가의 위계 등 장황한 이야기를 하면

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현재의 정치이다 말합ㄴ다. 우리가 고치려는 것, 우리가

바꾸려는 것을 드러나게 해야 하는데 어떤 의도성을 갖고 있으면 의도성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겐

들리지 않습니다. 올곧이 드러내야 하는 현실을 드러내야 못합니다. 결과가 아니라,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는 말이 곧 의도를 지워야 한다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전제로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과학을 통해 자연을 지배하려는 만큼이나 자연의 권리를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신의

영역입니다.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오히려 완전함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은 인간이 불완전하다고 인정하지만, 집단으로 가면 인정하지 못합니다. 인간으

로서 완전체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다 라는 것과 불완전하다면 이것을 극복하고 채워가려는

속성도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불완전한 존재로서 인간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가?의 부분인데 대단히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민교육이 불완전한 인간

을 스스로 불완전하다고 어떻게 깨닫게 할 것인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연대하고 더불어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야 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말하고 싶습니다.

공공성과 연대성, 동감능력, 동감이 상상력을 통해 확장된다, 관용이나 우리나라에서 쓰이는 배

려라는 말 등은 상대방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것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제4회 공공성과 연대의 회복 - 13

그런데 이것이 개인 차원에서 머물지 않기 위해 동감이나 공공성, 연대성 같은 부분이 사회 운

영의 차원에서 어떻게 논의되고 있는가, 개인과 사회가 관계 맺는 방식에 조금 더 주목해야 한

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운동하는 우리도 사회운영방식, 관계 맺는 방식의 변화에 취약합니다. 사실 별반 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비판하는 자본주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

회의 운영방식은 승자독식, 각자도생의 사회입니다. 그럼 나는 어떻게 사는가? 나는 더불어 살

려는가, 관계 맺기에서 어떻게 외화 되고 있는가? 정확하게 우리가 잘 못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론에는 있지만 실제 관계에선 확장하거나, 내가 속한 그룹에서 확장성을 열어가지 못하고 있

습니다. 어떻게 승자독식, 각자도생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예전 이천 년대 초반 무렵만

하더라도 기자회견을 할 때 사진 찍는 위치까지도 중요하게 따졌습니다. 단체를 더 드러내려 했

지요.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 그런 부분 역시 각자도생의 시대인 거죠. 단체들조

차 각자도생을 꿈꿔왔던 거지요. 그럼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해야 합니다.

불평등한 교환관계가 지금까지의 관계라면 선물의 관계, 증여의 관계로 확장할 수 있을까? 불가

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대단히 어렵습니다. 자본주의는 파생상품이라는 걸 갖고 현존하지 않

는 가치를 만들고 증폭시켜 실물경제에서 거래되게 만드는데, 리먼브라더스 사태를 통해 문제를

알았는데도 아직도 그 체제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그림자 노동, 열정페이 등과 관

계맺는 방식, 그 노동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고 어떻게 이 사회에서 소통되게 할 것인가 좀더 많

은 실험이 필요합니다. 이런 시도가 공공성과 연대성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

다.

마지막으로 공포정치인데요. 공포정치는 기득권뿐만 아니라 우리도 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방사

능비가 내릴 때, 위험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그 위험을 어떻게 극복할까, 줄일까 이야기해야 하

는데 과도하게 공포만 조장한다면, 오히려 우리 스스로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생각합니다. 그

래서 우리가 원하는 사회운영방식에 좀 더 주목해야 합니다. 앞으로 이것이 시민교육의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삶의 중단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인 큰 사건, 거대

한 것이 아니라도 개개인의 경험 속에서 대단히 많은 변화의 가능성이 있을텐데 그것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다면, 작은 변화의 충격을 그 사람의 삶 속에서 인식시키도록 하는가, 어떻게 중

단시킬 것인가, 일상의 경험에서 중단의 경험을 고민하고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단의 과정은 불편한 과정입니다. 내 삶을 중단시키려는 것은 불편한 일인데 불편함을 개인의

불편함으로 놔둡니다. 그런데 그걸 끄집어내야, 감정의 불편함을 공공의 것, 집단의 것으로 드러

낼 때에만 변화의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부분이 녹색시민에서 던져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

다.

전체토론

녹색시민포럼

양세진 (소셜이노베이션 대표) 제가 20대에 테니스코치를 했는데 이틀이면 자세를 배웁니다. 그

런데 그 자세대로 공을 치기 위해선 최소 3개월에서 6개월까지 필요합니다. 그것을 자기화하고

내면화하는 시간입니다. 테니스 배울 때 자세를 알려주는 것처럼 녹색시민다운 삶을 사는 것에

대한 이론을 알려주는 것은 충분히 되었는데, 왜 그렇게 살지 못하는가 하는 답답함이 있습니

다. 3~6개월 동안 연습하는 그 시간은 코치가 해 줄 수 있는 건가, 개인의 문제인가, 오랫동안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자기화하는 그 요인은 뭘까 하는 고민이 듭니다. 그 자세를 안다고 테

니스를 칠 줄 아는 건 아닌데 6개월의 시간을 성실히 보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타박할 수도 없

습니다. 유 선생의 말처럼 나는 테니스 배우고 싶지 않는데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학점으로

따야 하는 사람은 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의 하는 고민이 계속 남습니다.

유현상 : 공공성의 문제에서 누구나 말은 좋은데 그건 나와 상관없어 하는 문제는 전도의 과정

과 유사하다 생각합니다. 이담에 죽고 나면 너는 천국 가 이런 말에 그럼 이대로 살다가 죽기

직전에 할래, 그전엔 내 맘대로 살래 이러는 것처럼. 환경문제에서 공포를 조장하지 않나 하는

데, 공포가 되지 않습니다. 공포는 눈에 보여야 하고 불안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느끼

는 감정입니다. 정권은 공포이죠, 눈에 보이니까요. 연대의 문제와 연관해 보면 불안 앞에선 연

대가 잘 안 됩니다. 핸드폰 없어도 80년대에 지금보다 더 연대가 잘 되었습니다. 공포 앞에선

연대가 되는데 불안 앞에선 안 됩니다. 지금은 막연한 생각이지만 불안입니다다. 불안은 보이지

않고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은 문제, 거대한 통계는 내 삶과 무관해 보이니까. 지금 시급해 보

이지 않으니까. 나중에 생각해 볼께가 됩니다.

박영신 헌법에 보장된 권리라는 뜻에서 우리 모두는 시민이다, 국민이다 그런 뜻에서 우리가 시

민운동을 하는 것인지, 5천만 동포를 다 끌고 시청 앞에 나가려고 시민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국민 5천만을 시민 이라 하면 수동의 시민인데, 우리는 적극의 시민, 나는 테니스를 배우고 싶

다고 찾아오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건 아닐까요?

양세진 테니스를 꼭 배우겠다는 사람들이라면 고민하지 않을 텐데, 적극적이지 않은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요즘 지행합일이라는 단어를 계속 생각하는데요. 아는데 잘 안된다고 하면,

제대로 아는 건가 하는 물음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폭력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제대로 알면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고민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지

만, 저는 녹색시민다운 삶이 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이 논의의 본질이 아니라, 그 지는 형성되

어 있는데 행으로 가서 합일되지 않는 지와 행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 합일화 할지가 실천적인

고민이라 생각됩니다.

박영신 유종반 선생이 몇 차례 우리가 다 아는데 행동을 못한다고 말하니 최선생은 우리가 모른

다고 말했습니다. 좋은 문제꺼리 입니다. 안다는 것이, 우리가 무엇을 아는 것일까 물을 수도 있

습니다.

제4회 공공성과 연대의 회복 - 15

정명희 (녹색연합 활동가) 이승훈 선생님의 발제를 들으며 떠오르는 대상은 시민단체들이 아니라

조직이 없는 예를 들면 인터넷 커뮤니티 같은 곳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가장 연대활동을 잘 하

는 분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광우병 촛불 이후 꾸준히 움직이고 있는 다양한 커뮤니티들. 잘 공

감하고 사회적 논의에 잘 움직이고 다양한 층위가 있는. 그런데 그분들은 그게 되는데 우리는

왜 이리 무거울까, 활동가이기 때문에 무겁게 느껴지는 걸까? 싶습니다. 우리는 어떤 곳이다 라

는 규정 때문에 다양한 연대를 가로막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구요. 이 포럼을 진행하면서

과거에 공동체라는 말을 종교적이다, 너희들끼리 움직인다 등등의 의미로 폄하하던 경향이 있는

데 포럼 속에서 공동체의 의미가 개인이 살아갈 기반이 되어주는 것으로 회복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동감이라는 말도 이를테면 나약한 말로 표현되곤 해서 그런 말은 활동

가로서 자제해야 한다 생각하곤 있는데 이론과 상황을 넘어 마음으로 동감해주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새롭게 알고 의미를 복원했다는 생각입니다.

유경희 (녹색연합 상임대표) 발제문에 대해 동의합니다. 저희가 운동이라는 것이 이미 다 알고

있고 필요하다 생각하는데 실제로 이끄는, 함께하려는 것이 쉽지 않다 하셨는데 저도 똑같이 느

낍니다.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차이가 균질화 되는 것은 다른 맥락입니다. 차

이를 인정하고 가는 것이 필요하고, 다양성에 대한 부분은 끊임없이 가져가야 합니다. 녹색시민,

시민됨이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피로감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내가 그것까지 해야 해? 좋은 거

아는데 하기는 싫어. 피로감. 제 지인들조차 뭔가를 요청하면 너무 많아. 필요한 게 너무 많아.

일일이 하기엔 나도 힘들고, 그러면서 배제당하는 느낌, 산뜻하지 않다는 느낌, 우리의 요청이

그들의 일상에 산뜻하게 오지 않는 것, 저들끼리도 잘 가는 운동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나?

녹색운동의 가치를 안다 해도 자신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

다. 그건 저희가 알려내는 역할을 소홀히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가능성 있는 층이 있고 관심

없어 하는 층도 있는데 적극적인 지지층에라도 얼마나 다가갔는지, 공감을 하지 못했을 수 있는

지, 너무나 본질적이고 당연한 이야기만 하고, 삶에 대한 충족감이라든가 일상에 다가올 수 있

는 부분들이 있으면 조금 더 나을텐데, 지금은 그 다가감이 느슨하거나 당사자도 피로할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는 자기 힘든 것을 내놓은 것부터 시작합니다. 신세한탄 하는 곳, 일상에서, 엄마로서 힘

든 곳, 여성이라서 힘든 것들을 모여 있는 구성원이 그것을 지지, 공감해 주는 곳으로 공동체가

꾸려졌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녹색공동체이지만 일상이 접합된 곳을 밑바닥부터 끌고 가야 합

니다. 녹색시민들의 일상을 풍요롭게 하는 것에 관심과 소스를 찾아내야 합니다.

윤기돈 사실 내가 결여되어야 뭔가를 찾는데, 결핍과 결여를 돈으로 지불합니다. 돈이 지불되는

순간 미안함이 없어진다고 지적합니다. 지금의 사회구조는 나의 결핍을 돈으로 메꾸고 있어서,

돈이 없으면 결핍되고 결여되어 다시 돈에 매몰되고, 돈으로 지불하고 나서의 결핍은 느끼기 어

려운 구조입니다. 나는 불안전해서 어디 가서든 다른 사람의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인데, 그런

결핍과 결여를 돈으로 사오는 사회라서 결핍과 결여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결핍과 결여가 어

디에서 기인한 건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돈이 많으면 인생의 허전한 점을 알지만 그게 공

녹색시민포럼

공성과 연대로 확장되지 않습니다. 내 삶의 결핍과 결여를 어떻게 드러낼까? 드러내려면 나가야

합니다. 돈으로 지불되는 사회에서 결핍과 결여를 드러낼 때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가 서

로를 채워주며 가는데 이걸 돈으로, 능력으로 채울 수 있다고 여기는 사회. 이런 사회에 균열을

내는 작은 실험들, 다른 가능성을 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박영신 돈 중심의 습관을 깨고 새로운 본보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건 오천만 동포가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작은 본보기를 만드는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양세진 자연과의 삶, 생태적인 삶 이런 것 알지만 나의 일상과 관계 맺는 것 부족하다 했는데,

아까 발표에서 유모차 갖고 나왔지만 지하철 인력감축으로 피해를 당하는 것은, 일상의 문제입

니다. 일상과 무슨 관계냐 하는 물음을 하는 것이 과연 맞는가, 녹색의 삶과 일상이 간극이 있

는가?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일상적이어도 그걸 선택하지 못하는 또 다른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유현상 상상력을 다른 방향으로 보면 칸트의 판단비평을 보면 취미에 대한 판단이 있습니다. 취

미는 미를 취득하는 판단을 말합니다. 그 구조와 정치 판단의 구조가 매우 유사하고 그 기제에

상상력이 있습니다. 어떤 미적대상을 보고 취미하는 과정에 상상력이 개입되지 않으면 미적 공

감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상상력이 없으면 정치적 판단을 같이 하지 못합니

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가 판단비평을 하는 미학 책을 정치 책이라고 하게 된 배경입니다. 다른

사람의 삶에 공감, 동감만 되는가? 인간이 이기적이다 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답을 구하는 것도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건들어야 이리로 가게 하자는 될 수 있지

않을까?

박영신 이기심을 건든다는 것은 인간의 결핍과 통하는 것인가요?

유현상 결핍을 자극한다는 것은 이기심을 자극한다는 것과도 통합니다. 요즘 시골에서 자가발전,

패시브하우스, 에너지절약형 주택 이런 거에 관심 갖는데 이 사람들이 다 환경문제에 다 관심

있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들은 난방비 절감이 우선, 그러다 환경문제에 관심 갖게 되고 연대

적 삶에 관심 갖게 됩니다. 그것이 일반화되지 않겠지만, 녹색의 삶이 나의 이기적 욕구와 배치

되지 않는다는 논리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윤용(녹색법률센터) 그동안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은 소시민으로 크게 사회에 관심을 표명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고백하자면, 제 개인적인 가치관으로 모두가 하나로 이어져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와도 관계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뿔뿔히 흩어져 있는 게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있고 그에 관한 실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선뜻 나서서 뭘 해야 할지도

모른 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생활하면서 무게감도 느껴지고 골치도 아프고, 관심을

끊고 살면 너무나 평화롭게 즐겁게 살기 좋은 세상이기도 한데, 물질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선 더

제4회 공공성과 연대의 회복 - 17

재미나게 살 수도 있으니까요. 가치의 우위는 여기에 있지만 오른 쪽의 가치도 배제할 수는 없

는 상황입니다. 하루 중에도 모순된 삶의 여러 면을 봅니다. 저 같은 사람은 어떻게 끌어가야

할지도 생각해야 하고 저 스스로 목마름을 느낄 때 흔들리는 가치관을 어떻게 확고하게 할 수

있을까? 그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연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분명히 연대라는 것이 개인의 이

익과 연결되어 있으면 연대가 더 잘 되고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시민의 연대가 되기 위해선

가치가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가치관이 들어가야 시민의 연대가 될 수 있을

까요?

육경숙 (녹색교육센터 소장)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건들면 하나의 시민이 될 수도 있다고 했는데

제 경험에 의하면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단기적일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은 시민성을

가진, 시민으로 지속적으로 살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환경가치 어려우니까 보통 경제적 가치

를 이야기합니다. 빗물시설 많이 설치하면 부자 된다고 이야기하는 교수님이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 그 말에 솔깃하여 지원이 되니까, 이득이 되니까 설치하고 이용하지만 처음엔 잘 사용하지

만, 문제가 생기면 그 이후에 사용 안합니다. 서울시 등에서 비용에 대해 말하면서 홍보하는 데

물질적 지원 이전에 가치 지원이 필요합니다. 가치관의 혼란은 늘 고민스럽다. 공공의 장이 행

복의 장으로 느껴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많이 합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자원봉사가 점수

가 아니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는 자원봉사 하러 올 때 발걸음이 참 가볍고 자발성으로 왔

으니 의미도 많이 가지고 돌아갑니다. 저희가 장을 만들지만, 그곳에 오는 사람들이 스스로 오

는 게 아니라 점수 때문에 오는 사람들은 차이가 있다. 이런 조건, 물질적 가치가 많아진 사람

들 속에서 자발성이 담보된 행복의 공공의 장을 작게라도 많이 만들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언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똑같은 상을 다른 언어로 다른 각계의 사람들이 표현한다

고 생각했습니다. 동감, 공감이라는 말을 우리는 감수성, 생태감수성이라고 말합니다. 서로 연결

되고 연민을 느끼고 하는 감정을 감수성이라고 하고 그 속에서 어떻게 하면 생태적 상상력을

갖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하는가를 이야기하는데 언어가 참 다양 하구나 다시 느낍니

다. 포럼 동안 행복에 대한 이야기 많이 나눴는데 그 고민을 하다가 이 선생님의 말씀 ‘어떤’ 시

민을 ‘어떻게’ 세울까를 저에겐 내가 어떻게 시민이 될 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일상의 이야

기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상상력을 이야기하는데, 일상에서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

며 상상력 발휘할 수 있을까 그런 장을 많이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요즘 마실이 없

어졌습니다. 미리 연락하지 않아도 되고 그냥 갈 수 있는 곳, 일상에서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곳,

일상에서 그런 장들이 많으면 행복의 연장성이 커지겠지요. 시민을 이야기할 때 너무 생각이 없

는 사람들이라고 치부하기도 하는데 기본 소양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보고 그것을 어떻게 일상에

서 나눌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배보람 (녹색연합 정책팀) 저는 세상을 최악으로 치닿지 않게 운동하다고 말하곤 했는데요. 세상

이 더 나아지지 않으리라 생각하곤 했습니다. 이승훈 선생님의 공공성 개념에서 윤리적 존재,

도덕적 존재로서만 시민을 이야기해왔던 것에 대한 답답합이 해소가 되었습니다. 저희가 하는

운동, 우리가 상대하는 것은 그냥 국가도 아닌 자본화된 국가인데, 국가가 얼마나 더 자본화 될

녹색시민포럼

수 있는가, 공공성을 확대하는 것, 더 자본화 는 것을 막거나 특히 시민운동의 영역이 비자본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 공공성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에 우리의 운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운동도 절차된 민주주의에서 시민임을 박탈되는 사람들을 위한 운동. 그들과 어떻게 만날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용산참사를 보며 제 기준에선 용산역세권에서 횟집을 하는 그들은 잘 사는 사

람인데, 그들도 저런 참사를 겪는데 나의 부모는 어떻게 될까, 한순간에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

겠구나 하는 박탈감, 중산층도 어느 순간 시민의 권리를 박탈당하는데, 그들과 녹색의 운동은

어떻게 만나야 하는 걸까 하는 고민을 줍니다. 용산참사를 겪은 분들의 인터뷰를 보면서 우리는

모두 참사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우리를 시민으로 만들어주지 않을까? 역설적으로

우리도 해고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우리를 시민으로 연대하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지선 (녹색연합 기후에너지팀) 녹색시민이라는 말은 여전히 무겁습니다. 요즘엔 사람들이 프로

젝트별로 자기의 이익이나 관점에 따라 뭉친다고 봅니다. 제가 보는 녹색시민의 길은 하나하나

있는 프로젝트를 통해서 경험을 쌓아간다면, 결국 녹색시민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그 프로젝

트를 촘촘히 짠다면, 교집합을 디자인할 수 있다면 하는 이상적인 생각을 해봤습니다. 제가 운

동을 하나 하고 있는데, 브라질 무술 카포에라를 배웁니다. 저는 클래식 카포에라를 하고 있는

데 보통의 컨템포리 카포에라는 빠르고 화려해서 사람들이 그만두지 않는데, 제가 지금 클래식

은 뿌리와 정신을 강조하는 것이고 브라질에 가면 공동체가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흥

미를 느껴 오지만 한 달만 배우다 보면 떠납니다. 무겁기 때문이죠. 제가 선생님께 요즘 사람들

이 좋아하는 것에 구미를 맞춰라 하니까 그건 우리와 맞지 않다고 말하면서, 그런데 왜 우리는

사람은 오지 않을까 계속 말합니다. 그게 마치 우리 시민단체와 같습니다. 운동의 정신, 가치 등

에 대해만 고민하는 거죠. 컨템포리 카포에라라고 철학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요즘 사람

들이 좋아하는 걸 넣어주는 것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거죠.

신수연(녹색연합 평화생태팀) 최근 시민단체에서 자주 사용하는 것이 온라인탄원서인데, 제 페친

이 이 시대 새로운 문학 장르는 탄원서다 라는 댓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요즘은 스펙트럼이 좋

지 않은 의미로 굉장히 넓어졌는데, 어떤 사건을 바라볼 때 비정규직이나 정규직이냐, 기간제냐

아니냐 전문직이냐 아니냐 등등 여러 층위에서, 그런데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안 좋은 일을 당

하면 공감하지 않습니다. 이런 점들이 사회문제를 충분히 공감하고 푸는 걸 막고 있는 것 같습

니다. 인간이 이기적인 면을 인정할 수도 있고 다양한 접속통로를 만들어 보면 좋겠다 싶습니

다. 테니스를 배울 때 좋은 운동이라 배우고 싶은 사람도 있지만 라켓 들고 있는 사람이 잘 생

겨서 배우는 사람도 있을 테고 다양한 접촉을 하면 먼저 가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다양한 컨

텐츠와 사고를 갖고 공유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박정운 (녹색사회연구소 사무국장) 녹색시민을 다루다보니, 개인적인 차원과 사회적 차원을 같이

이야기하게 됩니다. 개인적인 모습의 한 사례를 이야기하자면 에너지자립마을을 처음 할 때 어

떤 마을에 풍력발전을 했고 에너지가 생산되고 그래서 마을의 개별가정에 전기를 충족해 전기요

제4회 공공성과 연대의 회복 - 19

금을 내지 않게 되었는데 그 다음에 가정에 전자제품이 늘어나고 대형화 되면서 그 이후 소비

를 다시 부추기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에너지자립 자체는 성공했지만 먼저 나눴어야 할 철학 같

은 것을 놓치지 않았나, 어떤 걸 먼저 고민하고 공유되어야 에너지자립 이상으로 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는 것과 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이승훈 여전히 많이 나온 것 중의 하나가 운동의 무거움입니다. 다양한 접촉면을 가져야 하는

것에 굉장히 동의합니다. 두 가지 예를 들고 싶은데 제가 이런 주제에 관한 박사논문을 준비하

면서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광명YMCA에 활동을 하시는 아주머니들과도 인터뷰했고 참여연대에

서 활동하시는 분들과도 했습니다. 개인의 이해관계와 녹색을 연결시켜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고도 이야기했고 그것의 한계도 이야기했는데, 거기에서 빠진 건 연결 이후 성숙의 과정인 것

같습니다. 당시 광명 YMCA의 사무처장의 활동을 보면 처음엔 아기스포츠단 어머니들에게 아

이들 유기농음식에 관한 모임을 갖게 하고 모임이 되면 반딧불이 보호운동, 촌지거부운동 이런

걸로 나거고 선거 때 토론자로도 나가고 아주머니들 이야기가 아파트가 정말 문제 있으니 부녀

회에 한명씩 들어가 아파트를 바꿔나가게 합니다. 처음엔 아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기스포

츠단을 하다가 유기농도 접하고 사회활동도 하면서 달라집니다. 중요한 지점은 사무처장의 리더

쉽, 헌신하고 사람을 키우는 것이 탁월했다 봅니다. 이렇게 연결되어 공공의 시민으로 자라는게

있습니다. 한편으론 열심히 일하는 참여연대 자원활동가들을 제가 만날 때마다 느낀 건 탈진,

소진되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참여 자체가 공공의 문제에서 출발했는데, 나중엔 동원된다는

느낌이 드는 거죠. 제가 볼 때 중요한 차이는 일상과 연결된 것이 아닌가 였습니다. 광명 분들

은 일상과 연결된 문제, 그것이 곧 운동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죠. 그런데 참여연대 활동은 자기

삶의 공간과는 떨어진 의무감으로 하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지역운동, 직장운동 같은 삶의 터전

의 운동이 중요하지 않을까 했던 생각이 다시 났습니다.

두 번째는 일상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이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 중요한 지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의 정치사회학자 리나엘리아소프라는 사람이 ‘정치 피하기’라는 책을 썼는데 미국의

시민사회의 사람들을 보며 미국인들이 일상에서 어떻게 정치를 피하는지에 대해 말합니다. 미국

인들의 대화를 분석하면 미국인들도 핵폐기물처분장 건설을 반대하는데, 이들에게 카메라 들이

대면 처음엔 우리 집 앞에, 우리 애가 다니는 학교 앞엔 안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이

학자가 수년 동안 같이 활동하면서 그들과 다시 이야기해보면 무대 뒷면에서는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 집 앞을 피하면 남의 집 앞에도 안 된다고 이야기 하는데 앞에만

나가면 우리 집앞은 안된다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미국에는 공공의 장에서 논의되는 걸 방해하

는 언어가 있는데 그게 미국에는 개인주의적 언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선 그 반대가

작동합니다. 의사총파업 때 의사들은 공익, 국민의 건강권을 위협한다며 의약분업 결사반대하지

만 뒤로는 자기 월급을 이야기합니다. 서초동의 화장터 문제도 왜 반대하는지 우리 모두가 알

듯이 집값때문인데, 플래카드엔 서울의 허파 청계산에 웬 화장터냐 하는, 노 녹색가치와 그린벨

트를 말하는 플래카드를 겁니다. 백화점 셔틀버스 때문에 마을버스가 재정위기라는 게 있었는

데, 마을버스 뒤에 붙은 포스터에 백화점 셔틀버스가 과소비 부추긴다는 내용이 붙어 있습니다.

마을버스 재정이 위태롭다는 이야길 해야 하는데 왜 과소비를 말하는 거냐는 거죠. 이런 식의

녹색시민포럼

명분을 내세우는 것, 자기를 숨기고, 갈등을 회피하는 것이죠. 이 공공의 장에서 ‘명분’을 갖고

말하기로 우리의 정치는 방해받습니다. 하벨은 이런 걸 상투어의 정치라고 말했는데요. 아마도

한나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히만에서 거기에서 나온 여러 이슈 중 하나가 아히만이 재판받

고 죽기 직전까지에도 상투어를 남발했다는 겁니다. 그것을 아렌트는 상투어는 인간이 사유하지

않는 것의 표상 같은 것이라 말했습니다. 자기 죽음마저도 상투어로 표현하는 것, 하벨의 상투

어의 정치도 비슷합니다. 이것은 습관과도 연결된 것입니다. 상투어를 쓰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상투어를 쓰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 이 습관을 깨는 것이 상투어를 쓰지 않는 것

입니다.

트라우마를 이야기했지만 트라우마가 항상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닙니다. 이게 계기가 되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 되어야 하는 건데, 제가 다른 분과 이야기하다 우리 사회를 바

꾸기 위해 국민들에게 어떤 트라우마를 줘야 하냐는 말을 했었습니다. 그 분의 이야기가 불행인

지 다행인지 한국 사회는 이미 고통 속에 있다는 겁니다. 슬픈 일인데 가만히 보면 그렇습니다.

저도 소속된 공동체가 있는데 거기에서 저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봅니

다. 정말 어떻게 이런 일이 같은, 성경의 욥기 같은 일들, 사람들이 고통속에서 살고 있구나 하

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변화의 토대가 될 수 있을까도 잠시 생각합니다.

마지막 이야기를 하자면 동감을 이야기 했던 것은 왜 아는 것과 사는 것, 행함과 지식의 일치,

일치 이런 걸 이야기하는데, 왜 동감에 더 관심을 가지냐면 철학자 흄이 하버마스 의사소통 대

화이론을 비판했는데요.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하자 하는데, 그 자리에 끼지 않겠다는

사람은 어떻게 할까? 관심도 없어, 대화도 하기 싫어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할 건인가 하는 비판

을 했습니다. 정확히 이 지점인데요. 동감은 감정에 조금 더 가까울 수 있는 건데 인간은 이성

에 의해 설득 당할지라도 니 말은 맞는데 나는 싫어 할 수 있습니다. 이성은 행동을 일으키진

못하지만, 감성은 행동을 일으킨다는 겁니다. 동감은 아무래도 감정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행위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동감을 더 강조하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