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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의 7대 기적에 대한 풀이 책 머리 “그것을 지금까지 몰랐구나!” 중세의 느 역사가는 세계의 7대 기적들을 기록하면서 이렇게 경탄 했다. 그러나 이 경탄의 리는 겨우 두 개의 기적적인 사건들을 다루고 난 다음 생겨났다. 나 머지 다섯 개의 기적적인 사건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줄을 그는 미쳐 지 못했다. 우리들 역

세계의 7대 기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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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유럽에서 오늘날까지 7대 불가사이한 건축물에 관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러나 그 상세한 내역에 관하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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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7대 기적에 대한 풀이

책 머리에

“그것을 지금까지 몰랐구나!” 중세의 어느 역사가는 세계의 7대 기적들을 기록하면서 이렇게 경탄

했다. 그러나 이 경탄의 소리는 겨우 두 개의 기적적인 사건들을 다루고 난 다음에 생겨났다. 나

머지 다섯 개의 기적적인 사건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줄을 그는 미쳐 알지 못했다. 우리들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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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러한 경탄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세계의 7대 기적들에 대하여 얼마만

큼이나 알고 있는 것인가?

1) 이집트의 피라미트, 2) 바빌론의 성곽, 3) 바빌론의 하늘에 매달린 정원, 4)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상, 5) 에배소의 아르테미스 신전, 6) 할리카르나스의 왕릉, 7) 로도스섬의 헬리오스 거인상. 이렇

게 일곱 개의 건축물들이 세계의 7대 기적들로 불려진 바 있다. 그러나 피라미트를 제외하고는

다른 건축물들은 제대로 보존되어 오지 않고 있어 우리는 오늘날 세계의 7대 기적에 대하여 오직

전해오는 내용에 의존하여서만 미루어 생각해 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역사 속에 전해오는 세계의 7대 기적들이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 그리고 무슨 이유 때문에

기적적인 건축물들로 인정되어 왔는지 등에 대하여서 우리는 잘 알 수 없다. 또 세계의 7대 기적

들에 관하여도 서로 다른 주장들이 엇갈리곤 한 사례도 없지 않아 오늘날에 와서는 이에 대한 자

세한 연구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 작은 책자 속에는 세계의 7대 기적이라는 사건에 관한 많은 궁

금증들이 해결되어 있다.

역사는 당대에 기록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해석되어져야 하므로 고대와 중세의 역사가들, 지리학

자들, 여행자들, 정치가들, 문인들이 남겨놓은 방대한 작품세계와 접하게 되면 이른 바 세계의 7

대 기적들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려질 수 있을 것이다.

고대의 7대 기적에 관한 기록

20세기초엽에 베를린의 이집트 박물관에서는 흔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한 고고학자가 고대

이집트의 아부시르 엘 멜렉(Abusir-el-Melek)이라는 도시에서 발견된 미이라의 관을 열어서 연구

한 일이 있었다. 관 뚜껑의 내부에는 그때 당시에 만들어진 두꺼운 파피루스 종이가 부착되어 있

었다. (나일강 하구의 파피루스지역의 갈대에서 채취한 펄프를 가지고 처음으로 종이를 만들었는

데, Paper라는 단어는 Papirus에서 유래되었다). 그 파피루스의 종이에는 고대 그리스어가 기록되

어 있었다. 기록된 내용은 주전 2세기경의 유명했던 정치가, 입법자, 화가, 조각가, 건축가, 기타

기술자들의 이름들이었다. 그리고는 당대에 유명했던 산이나 강 또는 지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

졌던 섬들의 이름도 있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는 “일곱 개의 기적적인 건축물들”이라는 것이 나

열되어 있었다. 그 내용을 기록한 사람의 이름도 뚜렷하게 보여졌는데, 로마의 당시 언어였던 라

틴어로 라테르쿨리 알렉산드리니(Laterculi Alexandrini)라 불려진 사람의 이름이었다. 그 기록 자체

는 그리스어와 라틴어가 함께 통용되었던 로마의 초기시대에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의 관

심사는 “일곱개의 기적적인 건축물들”에 관한 기록인데 대략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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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기적적인 건축물들

... 에베소에 건립된 아르테미시온

... (... 파손 ...) 피라미트

... 할리카르나쓰의 왕릉

라테쿨리 알렉산드리니가 기록했다고 하는 일곱 개의 기적적인 건축물들은 네 개만이 읽어볼 수

있도록 남아 있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것이 세계 7대 기적에 대한 가장 오래된 역

사적인 기록이다. 당대의 유명했던 예술가, 건축가, 기술자들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마지막에 세계

7대 기적적인 건축물들을 이야기 한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세계 7대 기적이라고 하는 것

은 이미 알렉산더대왕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의 볼거리로 알려진 것 같다. 헬레니즘기에는 오늘날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관광객들이 지중해 연안에서 여행을 즐기곤 했었다. 올림피아의 제우

스 신전을 방문하는 것이 거의 필수적인 일이었던 그때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 보면 그것 역시

7대 기적에 하나로 곱혔을 것이다. 주전 3세기경에 유명했던 그리스의 시인 칼리마코스

(Kallimachos)의 시에는 제우스(Zeus) 신전에 대한 예찬과 함께 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신전에 대한

예찬도 들어 있다. 그리고 또 델로스 섬의 염소뿔 위에 세워진 제단도 중요했었음을 알 수 있다.

칼리마코스 역시 “세계의 기적적인 사건들”이라고 하여 당시 경탄해 마지 않았던 건축물들에 관

한 인상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에게 전해진 문헌들 중에 가장 완벽하게 남아 전해오는 것은 현재 하이델베르그의 국립도서

관에 소장되어 있는 안톨로지아 팔라티나(Anthologia Palatina)라는 파피루스이다. 여기에는 안티

파트로스(Antipatros)라는 이름으로 세계 7대 기적적인 건축물들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이 들어

있다. 안티파트로스는 주전 2세기경 팔레스타인 지방의 시돈에 살았던 문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가 기록한 세계 7대 기적들에 대한 예찬은 다음과 같다.

“내가 이 세상에서 보고 제일 처음으로 경탄한 것은 바빌론의 성곽이다. 이것은 마차를 타고 둘러

보아도 며칠 동안을 쉬지 않고 다녀야 한다. 둘째로는 제우스 신전이고, 셋째로는 하늘 위에 매달

린 정원이다. 이 정원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넷째로는 로도스 섬에 있

는 아폴로신의 거상이다. 다섯째로는 피라미트인데 나는 기하학적으로 잘 조화된 거대한 높이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섯째로는 할리카르나쓰의 왕릉이다. 그런데 일곱 번째로 나는 아르테미

스 여신상을 가장 기적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하늘의 구름위로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보이는 그

여신상은 신비하기 그지없다. 나는 순간적으로 이렇게 외쳤다. “올림피아의 제우스신상을 제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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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면 이것이 가장 으뜸가리라! 헬리오스 신이여! 그대는 구름위의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본 일이

있는가?”

이러한 안티파트로스의 기록에 의하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진 세계 7대 기적적인 건축물들이 어

떤 것이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1) 바빌론의 성곽, 2)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상(알페오스 강

가에 세워진 것), 3) 바빌론의 세미라미스 여왕이 건립했다고 하는 하늘에 매달린 정원, 4) 로도스

섬의 아폴로신의 거상, 5) 이집트의 피라미트, 6) 할리카르나쓰의 왕릉, 7) 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여

신상. 이렇게 일곱 개의 명물들 중에서 마지막의 아르테미스여신 상이 가장 신비롭고 아름다웠음

을 우리는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와같은 “세계의 7대 기적”이라 불려진 불가사이한 건축물

들은 헬레니즘기에는 코이네 그리스어가 통용되었던 지중해연안에 집중되어 있었다. (지중해지도

참조). 안티파트로스가 처음으로 세계 7대의 기적이라 하여 기록한 것은 주후 292년경으로 추산

된다. 이해에 로도스섬의 거인동상이 지진으로 인하여 완전히 파괴된 사건이 생겨났다. 바로 이

비극적인 사건이 그의 기록의 원인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사건 이후로는 알렉산드리아에 건

립된 등대 파로스(Pharos)가 로도스섬의 거인상 대신에 7대 기적중의 하나로 전해져 내려오게 되

었다. 이렇게 보면 “세계 7대 기적”이라는 이야기는 주전 3세기때부터 대두된 것임을 알 수 있다.

Pyramiden | Gärten | Zeus | Tempel | Mausoleum | Koloss | Leuchtturm

1 Die Cheops-Pyramide 2 Hängende Gärten d. Semiramis 3 Die Zeus-

Statue in Olympia 4 Der Tempel der Artemis 5 Das Mausoleum zu

Halikarnassos 6 Der Koloss von Rhodos 7 Der Leuchtturm von Alexand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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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ops-Pyramide]

[Haengende Garten der Semiramis]

6

[Zeus-Statue in Olympia]

[Tempel der Artemis]

7

[Mausoleum zu Harkanissos]

[Koloss von Rhod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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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aros zu Alexandria]

“세계의 7대 기적”이라는 이야기는 로마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로마의 유명한 문인 마르쿠스 테렌

티우스 바로(Marcus Terentius Varro 116-27 B.C.)는 그의 작품속에서 “이 세상에서 경탄해 마지 아

니하는 일곱 개의 건축물들”에 관하여 기록한 일이 있다. 고대에서는 일곱이라는 숫자가 매우 중

요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일곱명의 현인, 테에베 출신의 7인, 이 세계가 7일동안에 창조되었다는

성서적인 해석, 풍년 7년과 흉년 7년 등....

7대 기적은 과연 얼마나 유명했던가?

고대 지중해에는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한 10진법도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그런데 10대 기적이라

하지 않고 7대 기적이라 한 의미는 어디에 있었는가? 이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하여서 우리는 그

때 당시의 학자들과 시인들의 작품들을 조사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지중해의 시실리섬의 아기리

온(Agyrion) 태생으로 알려진 디오도로스(Diodoros)는 주전 1세기에 살았던 시인이다. 그는 역사

적인 기록이라 하여 많은 글들을 남겼는데 오늘날까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그는 자기의 작

품에서 빈번하게 “세계의 7대 기적”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특별히 이집트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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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트가 7대 기적중에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또 바빌론의 성곽

에 관하여도 세미라미스(Semiramis) 여왕이 건립한 것으로 기록하면서 7대 기적중의 하나라고 주

장하고 있다. 그러나 바빌론의 ‘하늘에 매달린 정원’에 대하여는 매우 소상히 기록하면서도 7대

기적중 하나로 곱지 않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이유에 대하여는 잘 알 수 없다. 불행히도 이

대목이 파손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의문을 주고 있으나 그의 글 전체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하늘의 정원’에 대하여는 특별히 다루는 한편, 7대 기적들중의 하나로 생각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천국이라고 하는 파라다이스(Paradise)라는 말의 원천이 바로 이 ‘하늘에 매어달린 정원’에서

유래되었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그 만큼 이 정원은 인류역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혹

어떤 이는 이 정원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중요하여 7대 기적의 리스트에서 빼내어 독립적으로 다

룬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기도 한다.

바로(Varo)와 같은 때의 로마의 시인으로 또 한 사람이 있다. 섹스투스 프로페르티우스(Sextus

Propertius)는 자기의 작품 속에 “세계 7대 기적”에 대한 경탄을 다음과 같은 시로 표현했다.

나의 책에서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가장 아름다운 사건들이여!

행복할 지어다! 많은 이들이 노래로 또는 기록으로 그대들을 증거하노니,

피라미트여!

그대의 위용은 하늘을 찌르는 듯하며,

엘리스의 쥬피터(Jupiter)의 집이여!

그대가 올림피아의 제우스가 아닌가?

마우솔로스(Mausolos)의 무덤이여!

그대야말로 너무나도 찬연하니

그대들이여!

영원히 이 세상에서는 없어져서는 안되리라!

불길이 그대들을 태우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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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이 그대들을 씻겨 내려가게 하랴?

폭풍에도 그대들은 무너지지 말라!

영혼의 작품이라는 이름으로

세세토록 남아야 하리니

시간의 톱니가 그대들을 쏠지 못할 것이다.

영혼이 영원한 것처럼 그렇게

그대들도 영원한 명예를 얻으리니....

프로페르티우스는 이집트의 피라미트, 올림피아의 제우스신상, 할리카르나쓰의 마우솔로스의 무덤

등을 보고 즉흥적으로 이런 시를 지어 읊었던 것이다. 동시대에 살았던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

우스(Vitruvius)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바친 그의 책 속에서 “일곱개의 기적(septem

spectacula)”에 관하여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또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

에게 작품을 헌정한 또 다른 시인 발레리우스 막시무스(Valerius Maximus)도 “일곱개의 기적”에

대하여 언급한 바 있다. 이렇듯 로마시대에는 황제들에게까지 고대 그리스인들의 손으로 만들어

진 불가사이한 건축물들이 부러운 사건이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 스트라본(Strabon,

63-15 B.C.)은 소아시아 지방의 아마세이아(Amaseia) 태생으로 전해오는데 그는 처음으로 “세계 7

대기적에 대한 기행문”이라는 글을 남겼다. 여기에는 7대기적들에 대한 보다 상세하고 본격적인

탐사내용이 실려 있다. 주후 1세기경에는 로마의 지리학자 폼포니우스 멜라(Pomponius Mela) 역

시 스트라본과 마찬가지로 <7대 기적에 관하여 (De septem miracula)>라는 책을 엮어내기도 했

다. 또 너무나도 유명했던 로마의 철인 세네카(Seneca) 역시 “세계 7대 기적”에 대하여 경탄해 마

지 않는다고 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7대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학자들과 시인들에게서만이 아니라 로마 시민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보

편적으로 알려졌음이 폼페이의 발굴에서도 보여졌다. 평범한 한 군인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한 조촐한 집의 벽에는 7대 기적에 관한 예찬이 라틴어 모자이크로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전쟁에서 승리한 그대여!

이것 역시 7대 기적 중에 하나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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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7대 기적중에는 과연 어떠한 것들이 가장 많이 논란 되었던가?

일곱이라는 숫자가 고대 지중해연안에서는 초월적인 힘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알렉산드리아

의 파루스 등대는 초창기에는 7대 기적으로 언급이 되지 아니했고,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바빌론

의 하늘의 정원과 델로스섬의 염소뿔 위에 세운 제단이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일곱

개 보다 더 많은 기적적인 건축물들이 생겨났을때에 7대 기적의 리스트를 위한 취사선택의 여지

가 있었음도 상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베스부스(Vesvus) 화산의 폭발과 함께 생을 마친 로마시대의 한 시인의 기록에서 매우 흥

미로운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Gaius Plinius Secundus)라고 전해오

는 이 폼페이의 시민은 <자연에 관한 고찰(Naturalis historia)>이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특히 제36

장에서는 석상( )에 관하여 고찰한 내용을 소상하게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이집트의 피라미트,

알렉산드리아의 파루스 등대, 바빌론의 하늘의 정원, 이집트 테에베 도시의 백개의 문이 있는 성

곽, 에베소의 다이아나(아르테미스)의 여신상, 퀴지코스(올림푸스)의 쥬피터(제우스) 신전 그리고

로마의 원형경기장 등에 관한 과학적인, 건축학적인 주도면밀한 고찰이 기록되어 있다.

로마시대에는 알렉산드리아의 파루스 등대가 이미 밤과 낮의 선박운행을 위하여 중요했었음을 우

리는 플리니우스 세쿤두스의 기록에서 엿볼 수 있다. 그래서 그의 기록에는 이에 대한 내용이 매

우 상세하다. 그 다음으로는 이집트의 피라미트에 대한 고찰인데 특별히 그는 피라미트 내부의

미로에 관한 구조에 관하여 본격적인 연구결과를 기록하고 있다. 한편 테에베 도시의 백개의 문

이 세워진 대규모의 성곽을 논하는가 하면 바빌론의 성곽에 관하여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있

다. 그러나 바빌론의 하늘에 매달린 정원에 대하여는 비교적 자세한 정보를 기록하고 있다. 퀴지

코스의 쥬피터신상은 곧 올림피아의 제우스신상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공기의 통풍관계를 고려한

오묘한 건축에 관하여 경탄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러나 그의 기록에는 로도스섬의 거인상에

대한 기록이 들어 있지 않는데 이것은 건축된지 66년만에 지진으로 인해 완전히 파손되었기 때문

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할리카르나쓰의 마우솔로스의 무덤에 대한 기록도 보여지지 않고 있

다. 그 대신에 그는 로마의 원형경기장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다.

동시대의 시인인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마르티알리스(Marcus Valerius Martialis)는 주후 80년에 세

워진 로마의 원형경기장을 콜로세움(Colosseum)이라 불렀다. 콜로스(Coloss)라는 그리스어는 거인

이라는 뜻으로 로도스섬에 세워진 헬리오스 거인상을 뜻했다. 로마시대에도 콜로스라고 하면 거

인상을 의미했는데 원형경기장을 로도스섬의 거인상과 동일시 하여 명명한 것으로 여겨진다. 네

로 황제가 자신의 모습을 로도스섬의 거인처럼 만들어 원형경기장에 세워 달라고 명령한 이후로

그의 석상과 함께 원형경기장을 콜로세움이라고 명명하게 되었다고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주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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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우리는 마르티알리스의 기록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을 수 있다.

“비록 멤피스가 야만스럽다고 해도 그곳의 피라미트로 인해 야만이라 할 수 없다. 앗씨리아의 자

만은 바빌론 도시의 건립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오니아 사람들은 자기네들의 트리비아 건축물

들을 예찬하지 않는가? (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뜻함). 델로스는 외딴섬이긴 하지만 그곳

의 화려한 제단으로 인해 결코 숨겨진 곳이라 말 할 수 없다. 특별히 카르인(Karer)들은 마우솔로

스의 무덤과 함께 별들이 떠있는 창공에까지 숨길이 도달할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커다란 자만심

을 가지고 산다. 그러나 이 모든 건축물들이 로마의 황제를 위한 원형경기장과는 같지 못하리라.

후세에도 로마는 이 건축물로 인해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마르티알리스는 바빌론의 도시건립이 앗씨리아인들의 자랑이라고 이야기 하면서 바빌론의 성곽과

하늘의 정원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이오니아인들의 트리비아 건축물들이라고 하는 것중에는 에베

소의 아르테미스여신상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한때에 칼리마코스에게

서 언급되고는 잊혀져 버린 델로스의 염소뿔 위의 제단이 그에게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당대의

로마의 문인 풀르타르크(Plutarch)에게서도 이와 유사한 7대 기적에 대한 언급을 우리는 찾아 볼

수 있다.

주후 2세기경의 역사가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Quintus Curtius Rufus)는 그의 라틴어로 기록한

<알렉산더 대왕의 역사> 속에서 여러번 7대 기적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는 바빌론의 유프

라테스강 위에 세운 교량도 “동양의 기적(Miracula orientalis)”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 바빌론의

하늘의 정원 대신에 페르샤의 왕 퀴로스(Kyros) II세가 바빌론을 함락하고 난 후에 세운 궁전을 거

론하기도 한다. 바빌론 도시의 중앙에다가 퀴로스는 천연색 돌을 가지고 일곱가지의 색을 만들어

담을 두르고는 금으로 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한마디로 이 세상에서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

운 궁전을 짓도록 명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묘비에다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그리스어로 새겨놓

게 했다. “이곳을 지나치는 그리스의 젊은 통치자여! 그대의 발 아래에는 메데아의 왕이 누어 있

노라! 내가 세운 바빌론의 궁전을 결코 파괴하지 말라!” 어느 누구도 그 궁전만큼은 불태워서는

안된다고 그는 생각했기에 그렇게 묘비에 기록했다. 그러나 알렉산더대왕은 바빌론을 함락한 이

후에 바로 이 궁전을 불질러 버렸다. 그 바빌론의 궁전은 당대에는 한낮 페르샤왕들이 여름 한나

절을 지나기 위한 별장으로 사용되었을 뿐이었다.

퀴로스왕의 별장 이외에 여섯 개의 명소가 로마시대에는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이 여섯 개의 명

소는 모두가 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세워놓은 세계적인 명물들이었다. 에베소의 다이아나(아르테미

스) 여신상, 할리카르나쓰의 마우솔로스의 무덤, 로도스섬의 헬리오스의 거인상, 올림피아의 제우

스신전, 바빌론의 성곽, 이집트의 피라미트. 그런데 7대 기적의 건축물들에 관하여 이야기 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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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거대한 모습만이 경탄의 이유가 아니라 섬세하게 다듬어진 조형예술과 기하학적으로 잘 조화

된 건축예술등이 경탄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주후 2세기경에 기록된 가이우스 율리우스 히기누스(Gaius Julius Hyginus)의 “신화적인 카타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7대 기적에 대한 예찬이 들어있다.

7대 기적이라 할 작품들은 대략 이러하다.

에베소의 다이아나 여신상. 이것은 인간이 세운 것이 아니라 전쟁의 수호신 아레스(Ares)의 부인

인 아마조네 오트레레(Amazone Otrere)에 의하여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마우솔로스(Mausolos)왕의 무덤은 빛을 발하는 귀석으로 건립되었는데 80피트의 높이에 1,340피

트의 둘레로 지어진 실로 거대한 건축물이다. (로마시대의 1피트는 약 30센티미터에 해당된다)

로도스섬의 헬리오스(Sol 이라고도 함)의 동상은 높이가 90피트로서 가히 거인상이라 일컬어져 마

땅하다.

올림피아에 건립된 쥬피터(제우스) 신상은 좌상의 모습인데 그 높이가 60피트나 된다. 피티아스

(Phidias)에 의해 세워졌다고 하는 이 신전은 상아와 금으로 장식되어 있다.

바빌론의 에크바타나(Ekbatana)에 세워진 퀴로스왕의 궁전은 벽들이 찬란한 색갈을 내는 돌들과

흰색의 돌들로 섞여 있는데 중간에는 금으로 장식되어 있다.

바빌론의 데르케토(Derketo)왕의 딸이라는 세미라미스(Semiramis)여왕에 의해 세워진 바빌론의 성

곽은 불에 구워낸 벽돌과 산화시킨 철분이 포함된 타일로 되어 있는데 성곽의 두께가 25피트, 높

이가 60피트, 둘레가 300스타디온이다. (1 스타디온은 600피트이다).

이집트의 피라미트는 그 높이가 60피트여서 인간의 눈으로는 피라미트의 그림자를 감지할 도리가

없는 정도이다.

지금까지의 전해오는 기록에는 7대 기적이라고 하는 건축물들의 크기가 칫수로 표시되지 않았는

데, 히기누스의 “신화적인 카타록”에는 당대의 칫수인 피트, 스타디온등으로 그 크기들이 소상히

표시되어 있다. 우리는 이러한 기록에서 헬레니즘 당시의 건축물들의 규모와 양태에 대하여 대략

적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다. 1 피트는 오늘날 30센티미터에 해당된다. 1 스타디온이 600피트라고

하면 이것은 환산하면 180미터가 된다. 바빌론의 성곽이 300스타디온의 둘레로 이루어졌다고 하

면 180 x 300 = 54,000미터 곧 54킬로미터였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바빌론의 성곽은 실로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이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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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후 2세기경의 지중해 연안에는 교과서안에 7대 기적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어 청소년교육을 위

하여서도 지대한 의미를 지닌 바 있다. 루치우스 암펠리우스(Lucius Ampelius)가 집필한 교과서

안에 “세계의 기적”이란 대목이 들어 있는데 여기에는 인간의 힘으로 초인간적인 업적을 가능케

한 경우라 하여 7대 기적에 대한 소상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주후 6세기경의 로마의 집정관을

지냈던 플라비우스 마그누스 아우렐리우스 카씨오도루스(Flavius Magnus Aurelius Cassiodorus)는

플리니우스와 마찬가지로 “세계의 7대기적”에 대해 서술하면서 로마시 전체가 역시 하나의 커다

란 기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로마시대에는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에게는 세계 7대 기적

에 대한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참고로 카씨오도루스의 기록을 소개한다.

옛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한 바에 의하면 인간이 이룩한 기적적인 건축물로는 일곱 개가 있다고 한

다. 에베소의 다이아나 신전, 마우솔로스 왕의 찬연하고 우람한 무덤 (지금도 그의 이름을 따서

왕의 릉을 마우솔레움이라고 한다), 로도스의 헬리오스의 거인상, 피티아스가 상아와 금으로 세웠

다고 하는 올림피아의 쥬피터(제우스)신전, 페르샤의 퀴로스왕이 모든 영화와 사치를 동원하여 귀

석과 금으로 세운 궁전, 세미라미스 여왕이 세운 바빌론의 성곽, 그림자를 감지할 수 없는 이집트

의 피라미트.... 이러한 것들은 인간의 건축기술의 경지를 넘어섰기 때문에 신적인 영역 또는 기적

적인 사건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엄청난 건축물들과 예술품들이 한 도시안에 즐비하게 놓여져 있다고 하면 이를 믿

을 자가 있겠는가? 소위 기적적인 사건이라고 하여 인간들의 입으로 전해오는 것들은 오랜 시간

을 두고 하나씩 여러곳에 생겨난 경우이다. 진실로 의심치 않고 말하고 싶은 것은 로마시 전체가

또 하나의 기적이라고 하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히기누스, 암펠리우스, 카씨오도루스 등에 의한 세계 7대 기적에 대한 기록을 조사해 보

았다. 적이 흥미로운 것은 이들에게서는 바빌론의 하늘의 정원은 이야기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

이다. 그 대신에 퀴로스왕의 궁전이 7대 기적에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하여 주후 6세기경부터 세

계 7대 기적(Septem Mira)으로 정해져 내려온 것을 다시 나열하면 아래와 같다.

<7대 기적>

1) 여신 아마조네가 세웠다는 에베소의 다이아나(아르테미스)여신상.

2) 높이 180피트, 둘레 400피트의 할리카르나쓰의 마우솔레움. 이것은 밤에 빛을 발하는 돌 로

지어진 마우솔로스왕의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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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05피트의 높이를 가진 로도스섬의 거인상.

4) 피티아스가 상아와 금으로 만들었다는 높이 100피트의 올림피아의 쥬피터(제우스)신상.

5) 찬란한 일곱가지의 색갈과 흰색의 돌을 섞어서 벽을 만들고 중간에는 금으로 연결을 지은 가

장 아름답다고 하는 에크바나의 퀴로스왕의 궁전.

6) 불에 구운 벽돌과 산화시킨 철이 함유된 타일로 장식된 바빌론의 성곽. 이것은 두께가 32 피

트, 높이가 75피트, 둘레가 300 스타디온이다. 이 성곽은 세미라미스 여왕이 세웠다고 한다. 그리

고 하늘에 매달린 정원도 세미라미스 여왕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바빌론의 성곽 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며 이것 역시 세계의 기적적인 작품으로 인정되고 있다.

7) 600피트의 높이와 넓이를 가진 이집트의 피라미트.

주후 300년경 교부 루치우스 락탄시우스(Lucius Lactantius)는 오래도록 잊혀졌던 바빌론의 하늘의

정원을 일곱 개의 기적(Septem Mira)중에 하나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주후 4세기에 들어와서는

이집트의 피라미트가 가장 중요한 기적적인 건축물로 인정되었다. 특히 이렇게 주장한 사람은 당

대의 역사학자였던 아미아누스 마르첼리누스(Amianus Marcellinus)였다. 비잔틴 출신의 필론

(Philon von Byzanz)은 당대로는 흔하지 않은 <7대 기적에 대한 여행기>라는 책자를 펴냈는데 이

기록이 오늘날에 와서는 세계의 7대 기적의 수수께끼를 푸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된다.

필론의 세계 7대 기적에 대한 여행기

세계 7대 기적 (또는 명물)에 대하여는 익히 많이 들어서 아는 바이다. 그러나 그 내막에 대하여

자세히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7대 기적에 해당하는 건축물들을 보려면 우선은 페르샤로 여행

하여서는 유프라테스강을 거슬러서 바빌론 지역을 지나 육로로 이집트로 가야 한다. 그리고는 그

리스의 엘라이아인들이 사는 곳에 가 본 다음 카르인들이 자랑하는 할리카르나쓰로 간다. 거기에

서 또다시 로도스섬으로 가서는 이오니아인들의 에베소를 방문한다. 이처럼 지중해의 여러지방을

여행하고나면 무척도 피곤한 인생을 영위했다는 느낌이 들게 된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어느 누

구보다도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경이로운 것을 체험해 터득하기 위해 인생에서의 모든 욕구충족으로부터 탈피하는 일은 어느 무

엇과 비교할 수 없는 보다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값진 것을 탐구하는 길에 나선 사람이

다시 집에 돌아오게 되면 그는 무엇인가 아름다운 것을 지니고 돌아왔음에 대한 흔쾌함과 함께

영혼의 눈이 띄어진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스러운 것은 어떤 이는 그 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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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장소들을 방문하고서도 돌아서면 즉시로 그 아름다움을 다 잊어버리는가 하면, 또 어떤 이

는 매우 자세한 부분들을 마음속에 담아가지고 와서는 평생토록 이를 기억하면서 사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차이점은 아름다운 것을 보고 얼마만큼 깊이 경탄했는가 하는 것과 모든 예술적인 작

품들을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아름다운 영상들을 영혼의 눈으로 보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 또한 우리의 내면적인 세계에 생겨난 하나의 기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지금 이야기 하는 것은 세계의 7대 기적들을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차례로 대충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 같은 것을 보고서도 서로 다르게 인식하고 또 서로 다르게 경

탄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이긴 하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은 태양의 작열한 빛과도 같아

서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너무나 강하게 작용하여 이에 대한 인식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오직

마음의 눈 곧 영혼의 눈만이 아름다운 것을 제대로 감지할 수 있다.

이렇게 서두를 시작한 필론은 그의 서문에서 세계의 7대 기적들을 돌아보는 여행이 결코 수월한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준다. 1) 바빌론의 하늘에 매달린 정원, 2) 이집트의 피라미트, 3) 올림피아

의 제우스신상, 4) 로도스섬의 거인상, 5) 바빌론의 성곽, 6)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여신상등의 순서

로 여행기는 기록되어 있는데 불행하게도 7) 할리카르나쓰의 마우솔레움에 대한 기록은 손실 되

었다.

그러면 이러한 중요한 기록을 남긴 저자는 과연 누구인가? 비잔틴 출신의 필론으로 전해오는 그

는 <세계 7대 기적들에 대한 여행기>라는 책자를 남겼다. 그런데 그는 문인이었다기 보다는 학

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주전 200년경의 그리스의 기술자였다. 그의 여행기는 코이네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는데 많은 부분들이 훼손되어 있다. 그런데 전해진 내용을 가지고서 우리는 충분히 그가

의도한 것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은 알아낼 수 있다. 그가 남긴 또 다른 책자에는 당대에 새로

개발된 신형무기에 대한 테크닉도 들어있다. 오늘날 그 책자에 기록된 내용대로 무기를 제작해볼

수 있는 정도로 그만큼 전문적인 수준의 작품이기 때문에 우리는 필론을 당대의 과학자요 기술자

였다고 믿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기술자의 손으로 <세계 7대 기적에 대한 여행기>라고 하는 아주 부드럽고 인상적인 작품

이 가능했다고 하는 것은 그의 문학적인 소질도 매우 높은 수준에 달해 있었음은 부인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특히 로도스섬의 거인상에 대한 기술자적인 안목이 기록된 대목은 적히 흥미롭

다. 그의 여행기는 자신의 출신 지역인 비잔틴에서부터 출발하는 여행의 과정이 서술된 것이다.

문체의 장르는 매우 부드러운 수필에 해당되며, 문장은 몇가지의 전문용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해하기 쉬운 일상용어의 어휘로 구성되어 있다. 전문적인 학술논문과 같은 매마른 문체가 아니

라 매우 아름답고 인상적인 산문의 형식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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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문학적으로 산뜻하게 다듬어진 언어와 때로는 사변적인 깊은 내용등

으로 미루어 보아 어느 기술자의 단순한 여행기록이라기 보다는 로마시대의 탁월한 웅변가나 문

인의 기록처럼 느껴진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로마시대에는 고대 그리스의 문학과 예술이 재흥되

어 높은 수준에 달해 있었다. “위대한 헬레니즘 문화”라는 칭송은 로마전역에 유포되어 있었다.

특히 필론이 올림피아의 제우스신상을 기록하는 대목에서는 로마인들의 쥬피터신상에 대한 서술

을 방불케 하는 대목도 있다. 고대 그리스때의 기록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아마도 로

마시대에 와서 문체와 내용이 다소 로마인들의 것으로 재해석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이

소책자는 로마인들에게도 베스트셀러로 인정되지 않았던가 하는 주장도 무리는 아니다.

우리는 필론의 <세계 7대 기적에 대한 여행기>의 기록을 참조하면서 이제부터 7대 기적들에 관

하여 한가지씩 보다 상세하게 다루어 보기로 한다. 필론이 서문에서 이야기 한 바대로 단순히 거

울에 비친 영상으로서만 바라다 보지말고 영혼의 깊은 안목을 가지고 마음속에 경탄을 아로새겨

가면서 다음 장을 읽어 주기를 독자들에게 부탁하는 바이다.

제1장: 이집트의 피라미트

여덟 번째의 세계적인 기적이 알렉산더 대왕에 의하여 가능할 뻔 했다. 주전 323년 6월 10일 저

녁 알렉산더 대왕은 약관 33세의 젊은 나이에 바빌론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그는 마케도니

아의 왕이었던 자기 아버지 필립 II세를 기념하기 위하여 바빌론에다가 엄청난 규모의 왕릉인 마

우솔레움을 건립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추진하고 있었다. 주전 1세기 그리스의 역사학자였던 아

기리온 출신의 디오도로스(Diodoros von Agyrion)는 알렉산더 대왕에 대한 일대기를 기록했다. 우

리는 그의 기록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을 수 있다

. “.... 이것은 피라미트와 유사한 것으로서 이집트에서 가장 크다고 하는 이른 바 세계 7대 기적중

의 하나라는 것보다 더 큰 규모를 계획했다.”

실제로 옛날 이집트의 파라오들의 무덤인 피라미트들 중에서 카이로 근교인 기자(Giza: 옛날에는

멤피스였음)에 세워져 있는 것은 그때 당시나 오늘이나 기적적인 건축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

다. 건립 당시에는 외장이 흰색이었는데 오랜 시간동안에 풍화작용에 의하여서 다소 변질되었을

뿐 그 형체는 무려 4천년동안이나 변함없이 유지되어 오고 있다. 이런 거대한 건축물을 그때 당

시에 어떤 방법으로 건립했었는지에 대하여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아니했다. 아주 길고 견고한 플

랫폼을 바닥에 먼저 닦아 놓은 다음 그 위에 라선형의 높은 탑을 쌓아 올려서는 거대한 돌들을

높이 운반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아니면 아주 단순한 방법인데 거대하게 생긴 엘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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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타 같은 기계를 만들어서 건축자재인 무거운 돌들을 높이 올렸을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다.

그 이외에 또 어떤 다른 방법과 기계들을 동원했을까?

멤피스의 피라미트들 중에서 가장 큰 것은 파라오 케옵스(Cheops 2551-2528 B.C.)의 것이다.

230.5미터나 되는 길이의 사면체에다가 높이가 146.5미터이다. 그 옆에는 케옵스의 동생인 파라오

케프렌(Chepren 2520-2494 B.C.)의 피라미트가 위치해 있다. 이것은 조금 작은 크기이다. 그래도

215.25미터 길이의 사면체에다가 143.5미터의 높이로 육안으로는 거의 같은 크기로 보인다. 또 그

옆에는 세 번째의 미케리노스(Mykerinos 2490-2471 B.C.)의 피라미트가 있는데 이것은 육안으로도

작게 보인다. 108.5미터 길이의 사면체에다가 높이가 66.5미터 정도이다. 그러면 당대의 사람들은

멤피스의 세 개의 피라미트가 세계 7대 기적중에 하나라고 하는 사실을 어떻게 인정을 했던가?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의 서술>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려지는 헤로도토스는 7대 기적중의 하나인 마우솔레움이 있는 할리카르나

쓰 출신이다. 피라미트에 관한 기록들 중에 그가 기록한 내용이 우리에게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주전 5세기때에 기록된 그의 역사책 속에는 당대 페르샤의 지배하에 있었던 이집트에 관한 정황

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자신이 본 피라미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이집트는 법질서가 뛰어난 나라라고 하는 평판이 널리 알려져 있다. 내가 보기에도 그것은 사실

이다. 그런데 케옵스(Cheops)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법에 어긋나는 많은 사건들이 생겨났다. 예

컨데 신전을 짖는 일을 위하여서 많은 사람들에게 세금을 과할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국민들을

혹독하게 부린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왕명에 의해 아라비아에까지 가서 그곳에만 있는 특유한

돌들을 가져와야 했고, 어떤 사람들은 리비아의 산속에 들어가 나무들을 짤라서 뗏목을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위하여서는 수십만명의 인원이 동원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일강이 범

람하는 중에도 그들은 삼개월 이상씩 중노동을 계속해야만 했다. 멤피스의 산속에다 길을 만드는

일 하나만 해도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엄청나게 큰 돌들을 그 위로운반하기 위해서

였다. 이러한 모든 피눈물나는 수고와 노력은 오직 하나의 목적을 위한 것이었으니 이것은 바로

엄청나게 큰 피라미트를 짖는 일이었다.

길 하나를 닦는데에만 10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그러면 굴곡이 심한 산속에다가 피라미트를 수

평으로 세우려면 그만한 평면을 닦는 일에는 과연 얼마나 오랜 세월이 소요 되었겠는가? 그것도

단순한 평면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그와 같은 면적을 지하로 파내려갔으니 바로 거기에다 케옵스

는 자신의 무덤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피라미트를 건립한 그 한가지의 일만해도 20년이 걸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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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한다. 한면의 길이가 무려 8 플레트렌 (800피트)이었으니 이것의 사면체의 크기는 또 얼마나

되겠는가? 거기에 높이가 또한 그만큼이나 되었다. 건축자재로 사용된 돌들은 모두가 반듯하게

갈고 닦은 것이었다. 어느 하나도 그 크기가 30피트 이하짜리는 없었다.

이 피라미트는 계단식으로 지어졌다. 한층을 완료하고 나면 그 다음층을 위하여서 돌들을 올려놓

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 개의 층이 완료될 때마다 돌들을 올려놓음과 동시에 돌을 올

리는 기계를 새로 만들어 올려놓았다. 층 수가 증가하는 그만큼 돌을 올리는 기계도 늘어난 것이

다. 그리고 또 어떤 기계는 단 한 개뿐이어서 한층에서 다른층으로 옮겨지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이러한 방법으로 피라미트는 층층이 새로운 건축방식으로 거듭되곤 했다. 돌들의 크기

를 결정해 다듬을때에는 가장 높이 올려놓을 것을 제일 먼저 만들었고 제일 마지막에 바닥에 놓

을 돌들을 만들었다고 한다.

피라미트의 제일 하단부에는 이집트문자로 건축기간동안에 사람들이 필요로 했던 생활필수품의

수량들이 기록되어 있다. 예컨데 무우, 양파, 마늘등의 수량들인데 아마도 일꾼들이 일하면서 수

십년동안 먹었던 분량으로 여겨진다. 또 내가 통역사에게 물어서 알아낸 바에 의하면 피라미트를

건립한데 소요된 비용 전체는 은화로 1,600 탈렌트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러면 기록되지 아니한

돌들과 철의 량, 일꾼들의 의식주에 해당한 비용등을 합하면 피라미트 건립에 들어간 비용에 대

한 산출은 인간의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게 된다. 또 여기에 소요된 시간을 한번 계산해 보면 어

떠하겠는가? 돌들을 찾아내고 운반하고 다듬었던 시간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거기에 지하에

엄청난 공간을 마련하기에 들어간 시간과 노력도 이야기 되지 않고 있다. 피라미트를 짖는데에

필요한 시간은 우리에게 알려진 것 말고도 더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나에게 이집트의 한 관원이 설명해 주었는데 케옵스 왕은 피라미트를 짖는 일을 시작하고나서 금

액이 모자라게 되자 자기의 딸을 창기로 일을 하게 했는데 이렇게하여 벌어들인 금액을 피라미트

를 건립하는데에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금액이 얼마였는지 그는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공주와 하룻밤을 지낸 남자들은 모두가 돌 하나씩을 다듬어서 바쳐야 했고, 이것을 올려놓는 일

에 참여해야만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가 다 귀족의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케옵

스는 자기 딸의 이와같은 헌신적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피라미트의 거의 중앙부분에 삼렬로

그 돌들을 따로 배치토록 명했는데, 그 돌들은 1.5 플레트렌의 길이로 규격화하여 현저하게 눈에

들어나도록 했다.

케옵스는 왕위에 50년간 머물렀다. 그가 서거하자 동생인 케프렌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 역시 자

기 형과 같은 방법으로 피라미트를 세웠는데 크기를 다소 줄여서 형의 것과 차등을 두었다. 케프

렌의 뒤에는 케옵스의 아들인 미케리노스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 역시 피라미트를 건립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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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자기의 것은 아버지의 것보다 아주 작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면이 3 플레트렌 정도

이고 높이는 20피트 정도이다. 이 피라미트는 에티오피아에서 가져온 검은색의 돌들을 하단부에

사용한 것이 특색인데 그 모양은 세 개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

바로 이 작고 아름다운 피라미트를 많은 그리스의 학자들은 왕의 것이 아니라 왕후인 로도피스

(Rhodopis)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로도피스는 미케리노스의

왕후가 아니라 후대의 아마시스(Amasis)왕의 부인이었다. 로도피스는 미케리노스왕 보다 오랜 세

월 뒤에 살았던 인물이었으므로 그를 위해 지은 피라미트라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헤로도토스는 이집트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케옵스의 피라미트에 관하여 매우 자세한 정보를 이야

기 해 주고 있다. 우선 그 크기를 그는 한면이 8 플레트렌이고 높이 역시 8 플레트렌이라고 한다.

1 플레트렌은 100피트이다. 오늘날의 칫수로는 약 30미터에 해당한다. 한면이 240미터라고 하면

실체의 크기와 거의 들어맞는데 높이는 과장된 것 같다. 만일에 정점에 이르는 빗변의 길이를 의

미한다고 해도 240미터까지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놀라운 일은 피라미트를 구성하고 있는 돌의

크기를 재어본 것이다. 또 피라미트를 건립한데 소요된 비용전체를 알아낸 것도 놀라운 관심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 나아가서 왕이 자기의 딸을 창기로 내어놓아서 모자라는 금액을 충당했다

고 하는 내용을 기록한 사실도 놀라운 일이다. 아마도 이 세 개의 피라미트 말고도 더 많은 피라

미트가 존재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여기에도 많은 에피소드들이 있었을 것을 암시해 주는 내용

들도 헤로도토스는 기록하고 있다.

두 번째의 피라미트는 케옵스의 동생이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형님의 것보다 조금 작게 지었다고

했는데, 케프렌은 케옵스의 동생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미케리노스는 케옵스의 아들이 아니라 역

사가들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케옵스의 손자였다. 헤로도토스가 재어보았다고 하는 피라미트의

둘레가 280피트라고 한 것도 정확하다. 고고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하반부가 “에티오피아

산의 검은돌”이 아니라 삼분의 일 정도만이 검은색 돌로 되어 있으며 나머지 부분은 모두 흰색

돌로 되어 있다. 그는 또 로도피스라는 한 여인의 피라미트라고 전해오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고

했는데 오늘날의 역사가들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로도피스는 미케리노스 보다 약 2천년 뒤에 이

집트의 왕을 지낸 아마시스(Amasis, 570-526 B.C.)의 왕후였다.

<헬레니즘기의 이집트에 관한 역사기록>

헤로도토스 당시 이집트는 페르샤의 점령하에 있었다. 그런데 알렉산더 대왕이 주전 332년 페르

샤군을 격퇴하게 되면서 이집트는 페르샤로부터 해방되게 된다. 역사가들은 대부분 헬레니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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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의 시작을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 이후부터라고 주장한다. 알렉산더 대왕의 휘하장군들 중에는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라는 빼어난 정치가가 있었다. 그에 의하여 이집트 전역이 통치되면서

다시금 파라오의 절대권이 이룩되기에 이른다. 프톨레마이오스라는 새로운 왕조에는 그리스 출신

의 철학자가 왕의 고문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압데라 출신의 헤카타이오스

(Hekataios von Abdera)였다. 그는 매우 방대한 <이집트의 역사(Aigyptiaka)>를 집필했는데, 이것

은 이른바 2,400년간의 이집트의 역사를 개관할 수 있는 실로 방대한 저작이다. 이 문제의 저작

이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전해오지 않고 있는데 주전 1세기의 그리스의 역사가 디오

도로스(Diodoros)가 쓴 역사책에 그 내용이 많이 인용되어 있다. 이집트의 피라미트와 관련된 부

분의 헤카타이오스의 글을 간접적이나마 디오도로스의 저작의 인용된 문구를 통하여 소개해 보면

아래와 같다.

케옵스는 50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세계의 7대 기적중에 하나로 곱게 되는 피라미트를 지었다. 이

피라미트는 나일강의 서부지역인 리비아 계곡속에 위치해 있다. 멤피스로부터는 120스타디온 (약

21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나일강으로부터는 45스타디온 (약 8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다. 케옵

스의 피라미트는 그 웅장한 규모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면에서도 뛰어나 보는 이들마다 경탄을 금

치 못한다. 사면중 한면이 7플레트렌이며 높이가 6플레트렌이나 된다. 피라미트의 꼭대기로 올라

가면서 점점 좁아지는데 가장 높은 곳에는 6엘렌 정도의 넓이를 가지고 있다. 이 건축물은 강도

가 매우 높은 돌로 지어졌기 때문에 작업하기에는 힘이 들었지만 영구히 보존될 수 있다고 한다.

처음 지어졌을때에 전문가들은 약 천년간은 지탱될 수 있으리라고 내다보았다. 그런데 이 피라미

트는 지금까지 모진 비바람에도 불구하고 2,400년동안 넘어지지 않고 그냥 서있다. 앞으로도 천

년간은 그대로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 피라미트는 3,400년을 지탱하게 되는 셈이다.

사람들이 말하기로는 피라미트에 씌여진 돌들은 멀리 아라비아로부터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신

비스러운 것은 돌을 올리는 기계가 발명되지 아니한 때에 무슨 방법으로 그렇게도 높이 돌들을

쌓아 올렸는가 하는 것이다. 더 더욱 신비스러운 것은 엄청나게 큰 건축물들이 세워져 있는데 그

주변은 오직모래로 둘려싸여 있을 뿐이다. 주변에는 일을 한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마치도

자연적으로 솟아 올라와 그런 형태를 이룬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이 건축물은 인간의 손에

의해 한단계 한단계씩 세워졌다고 하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다. 이것은 초인간적인 힘이

작용하여 한순간에 모래를 돌로 만들어서는 단 한번에 쌓아올린 것이라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방

법이 없다. 만일 그렇다면 이러한 작업은 신의 영역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이집트사람들은 누구나 이 케옵스 피라미트의 기적적인 사건을 신화로 설명하려고 한다. 초자연

적인 힘이 작용하여서 인간이 만들어 놓은 부분만 남겨놓고는 모두 모래로 만들어 버린 일대 불

가사이한 사건이 함께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도 실지로는 있을 수 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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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피라미트를 완성하고난 후 그 주변에 널려 있는 잡다한 것들을 다 없애고 자연의 원모습을

재현하는 것이 피라미트를 짖는 일에 못지 않게 어렵고 시간을 요하는 일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

이다. 이 일만을 위하여서도 약 360,000명의 힘이 센 남자들이 동원되었을 것이며 피라미트를 짖

는 기간과 거의 마찬가지인 2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을 것이다.

케옵스가 죽은 이후에 그의 동생인 케프렌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56년간 왕위에 있었다. 그 역

시 자기의 형과 마찬가지로 피라미트를 건설했는데 거의 같은 기술과 규모로 지었으나 사면과 높

이가 1 스타디온씩 작게 설계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서 케옵스의 아들인 미케리노스가 왕이 되었

다. 그는 세 번째의 피라미트를 건설했다. 그러나 미케리노스는 자기의 피라미트가 완성되기 전에

죽었다. 바닥 사면의 둘레를 3 플레트렌으로 하고 15층까지는 검은색 돌로 쌓아 올렸고 그 다음

부터는 다른 피라미트와 마찬가지로 흰색의 돌로 쌓아 올렸다. 크기로는 다른 두 피라미트에 미

치지 못하나 예술성이나 건축자재에 있어서는 오히려 훨씬 더 상위의 수준이라고 해야할 만큼 아

름다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피라미트는 로도피스왕후를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로도피스

는 여러명의 왕과 귀족들에게 총애를 받았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가진 재산을 총동원해 값

진 석재를 이용하여 그 여인을 위해 아름다운 피라미트를 지어주었다고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헤카타이오스의 기록을 읽게 되면 우리는 피라미트의 주인 입장에 더 가까이 나아간 느낌

을 가지게 된다. 그는 케옵스의 피라미트가 바닥 사면의 한면이 7플레트렌이라고 했는데 실제보

다는 조금 작은 칫수이다. 그런데 위로 올라가면서 가파르게 좁아졌다고 하는 인상과 맨 꼭대기

의 넓이는 사면이 6엘렌(9피트)이었다고 했다. 그러면 이 피라미트의 모양은 거의 탑과 같은 형상

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헤로도토스의 기록과는 서로 상반되는데 헤카타이오스는 케옵스 당시에는

돌을 올리는 기계가 발명되어 있지 않았다고 했다. 그 역시 헤로도토스와 같이 로도피스왕후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그는 세 번째의 피라미트와 로도피스와의 관련설을 거의 그대로 인

정하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피라미트를 건립하는 방식을 서술하는데 있어서는 거의 인간적인 기

술 보다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더 의존하는 느낌을 준다. 그러면서도 그는 신적인 차원의 기적적

인 현상이 작용했음은 믿기 어려운 일이라고 주장한다.

두 번째 피라미트의 크기를 바닥 사면의 둘레를 1 스타디온으로 계산했는데 다소 실체보다는 작

은 칫수이다. 또 세 번째의 피라미트는 바닥 사면의 둘레를 3 플레트렌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헤

로도토스의 칫수보다는 더 실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검은 돌로 된 것이 15층이라고

한 것도 실체와 일치한다. 가능하면 냉정하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멤피스의 피라미트들에 관하여

서술하려고 한 것은 훌륭한데 로도피스에 관하여는 확인되지 아니한 에피소드를 그대로 기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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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으로 보아 역사가로서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었다고 말 할 수 있다.

<세계의 7대 기적으로서의 피라미트>

로마시대의 정치가이며 저술가였던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Sextus Julius Frontinus)는 그의

저작속에서 피라미트 건립에 대한 무모함에 대하여 서술한 바 있다. “가장 필요가 없는 일이며 가

장 의미없는 일에 재산과 능력을 소모하는 것이 곧 피라미트를 짖는 일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동시대의 역사가 플리니우스(Plinius)는 <자연에 관한 고찰(Naturalis historia)>이라는 저작의 제36

장에서 ‘제반 석상( )에 관한 고찰’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거기에는 주로 이집트의 피라미트

건립에 대한 정보가 서술되어 있다. 그러면 한 부분을 여기에 소개해 본다.

이집트의 피라미트를 혹 어떤이는 무모한 짓이며 왕들의 쓸데없는 재력낭비와 사치의 소행이라고

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가지고 있는 재산 전부를 들여서 사후의 세계를 예비하고 또 외적에게

막대한 재산을 넘겨주지 않기 위하여서 그런 일을 감행했다고 하는 것이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만일에 피라미트를 짖지 않았다면 그 막대한 재산과 보물들이 모두 다 침입자들의 손에 넘

겨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집트에는 이렇게 생각한 왕들이 적지 않았다.

처음에 짖기 시작하다가 완성을 보지 못한채 미완성으로 내버려둔 피라미트의 수효도 또한 적지

않다. 그러나 멤피스의 세 개의 피라미트는 완성된 것으로서 전 세계를 통털어 가장 자랑스러운

것들이다.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다 잘 보이는 그런 장소에다가 그 웅장한 모습으로 지은 피라미

트는 수차례나 7대 기적중의 하나로 곱혀왔다. 나일강의 아프리카쪽에는 비교적 넓다란 황야가

전개된다. 나일강의 델타지역과 멤피스와는 약 4마일 정도 떨어져 있다. 거기로부터 멤피스쪽으로

약 7.5마일 떨어진 곳에는 바윗돌로 이룩된 계곡이 있다. 그곳에는 자그마한 동네가 있는데 부시

리스(Busiris)라고 불려지는 곳이다. 그 동네사람들은 매일같이 피라미트의 꼭대기까지 올라가 볼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산다. 헤로도토스와 또 다른 역사가들이 모두 다 이 동네에 관하여 잘 알

고 있었다.

피라미트에 대한 기적이 파생된 바로 그 장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세상의 가장 큰 기적의 현장

에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가장 작다고 하는 피라미트는 다른 두 개의 큰 것보다도 더 많은

공과 노력을 들여서 지은 것이다. 아름답기로는 세 개의 피라미트중에서 이것이 으뜸간다. 전해오

는 바로는 이 피라미트는 로도피스라는 여인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로도피스는 많은 우화를 지

어낸 이솝(Äsop)의 노예였다가 그의 애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시 말하면 세계에서 가장

으뜸가는 기적이 한 여인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여인과 관련된 또 하나의 이야기는 피라미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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짖는데 드는 비용의 일부가 창녀를 통해 조달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한

나라의 공주가 창기노릇을 하여서 파라오인 아버지의 피라미트를 건립하는데 나섰다는 이야기이

다. 그러면 멤피스의 세 개의 피라미트는 어떻게하여 ‘세계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되었는가?

과연 로도피스라는 여인 때문이었는가? 비잔틴 출신의 필론이 쓴 <7대 기적에 대한 여행기>에는

또 아래와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멤피스에 피라미트들이 건설되었다고 하는 것은 실로 불가사이한 일이다. 그러나 세워진 피라미

트를 연구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산들이 첩첩 둘려있고 불규칙한 협곡과 구릉이 있

는 곳에다가 네모 반듯한 지형을 닦는다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생각은 어느누구도 해낼

수 없다. 도데체 어떤 방법과 힘으로 그곳에다가 그 어마어마한 규모의 피라미트를 세 개나 지을

생각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이것은 초자연적인 힘에 의하여 생겨났다고 하는 생각을 하

기에까지 이르른 것이다. 네모 반듯한 그러면서도 수평을 유지하는 지반은 깊이 파내려간 지하에

있는 반석이 떠 바치고 있다. 그 위에 여러층의 구조물들이 올려 세워진 것이다. 그러면서도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져서 완벽한 기하학적인 구조물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불가사이 하다. 높이

는 300엘렌에 달하며 사면으로 생긴 바닥의 둘레는 6스타디온이다. 이러한 피라미트의 거대한 구

조물은 마치도 한 개의 바윗돌을 깍아서 만든 것처럼 그렇게 돌들의 이음새들이 정교하다. 그러

나 자세히 보면 모두가 다 다르게 생긴 돌들의 집합체임을 알 수 있다. 검은색의 돌들은 에티오

피아에서 가져온 것이며, 흰색의 대리석들은 아라비아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거기에 여러 색을 띄고 있는 돌들이 있으며, 또 밤에는 초록색의 빛을 내는 야광석들도 있다. 이

런 희귀한 돌들은 거의 모두가 다 아라비아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또 어떤 돌들은 사과색을 내는

것도 있고 보라색 빛을 띈 돌들도 있다. 돌들중에는 바다의 물결을 보는 듯 착각을 하게 하는 묘

한 색을 내는 것도 있다. 피라미트를 보면 놀라운 것들이 너무나도 많은데 예술적인 것과 함께

그 거대한 규모가 가장 큰 경탄의 원인이다. 피라미트를 보기 위하여 험산준령을 넘는 것이 여행

에서 가장 피곤한 경로이긴 하다. 그러나 피라미트의 꼭대기에까지 올라가 보면 시야가 갑자기

어두워지고 밑을 내려다 보면 아련해 진다. 피라미트가 지닌 찬란한 색갈들은 그대로 왕실의 화

려함을 상징하며 모든 행복의 근원임을 누구나 느껴보게 된다. 이런 일 자체는 인류에게 유익되

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는가? 지상에서의 찬란함과 행복함이 은하계의 별들에게까지 도달하게

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었던가 생각될 정도로 멤피스의 피라미트들은 신비롭다. 인간이 이러한 업

적을 통하여 신의 세계 곧 절대의 세계로 올라가기 위하여서였는가? 아니면 이러한 업적을 통하

여 신들이 인간의 세계로 내려오게 하기 위하여서였는가? 사실 어느 편을 위하여서든 다 좋은 일

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적적인 업적을 통하여서 인간과 신이 서로 닮은 형상이라고 하는 것이 입

증되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피라미트의 둘레가 6스타디온 곧 3,600피트라고 필론은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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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있다. 그러면 한면의 길이는 900피트가 된다. 헤로도토스보다 100피트가 더 많은 칫수이다.

그러나 필론의 주장이 더 실체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높이가 300엘렌이었다고 하면 450피트

라는 이야기이다. 바닥면의 절반밖에 안된다고 하면 그 높이는 너무나 낮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필

론이 여행에서의 피곤함을 누누히 이야기 하지만 피라미트를 보고 경탄할때에는 모든 피곤을 다

잊게된다고 하는 구절은 기록되지 않았으나 그의 여행기는 독자로 하여금 바로 이점을 스스로 깨

우치게 하고 있다! 또 다른 이가 이집트의 피라미트에 대하여 경탄한 내용을 소개한다. 주후 4세

기경 로마의 역사학자 암미아누스 마르첼리누스(Ammianus Marcellinus)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피라미트는 세계 7대 기적들 중에 하나로 포함된다. 피라미트 한 개를 짖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드는지를 역사가인 헤로도토스가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한 바 있다. 피라미트는 탑

과 유사한 형태이다. 인간이 만들어 세운 탑들은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피라미트는 밑바닥이

보통의 탑보다는 넓다. 그러면서 위로 올라갈수록 가파롭게 좁아진다. 엄청나게 큰 규모가 또한

까마득한 높이로 올라가면서 좁아지기 때문에 기계적인 원리와 마찬가지로 이 건축물은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게 된다. 피라미트의 특색은 아래서는 그림자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이야기 된 ‘기계적인 원리’라고 하는 것은 특별히 한 여름에는 더욱 뚜렸해진다. 7대 기적

이라고 논해질때마다 피라미트의 신비로움은 여름의 강렬한 태양빛 아래에서도 전혀 그림자를 드

리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독교신자들은 이집트의 피라미트의 신비로움과 의미를 그들이 숭상하는 성서속에서 찾아 보려

고 한다. 케옵스왕이나 그의 딸의 노력으로 피라미트가 건립된 것이 아니라 요셉의 제안에 의해

피라미트가 처음으로 건립되었다는 것이다. 요셉은 파라오에게 꿈에 대한 해석을 말하면서 7년동

안 풍년이 들때에 다음에 닥칠 7년동안의 흉년을 대비하기 위한 곡창을 대규모의 건축물로 지어

야 한다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피라미트는 그래서 무덤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전 국민의 식량

을 저장하기 위한 곡식창고로 지어진 것이라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해석이다. 그러면 피라미트는

요셉이 구상한 곡식을 넣어두기 위한 창고에 지나지 않는가?

<로도피스(Rhodopis)는 누구였는가?>

찬란한 색돌들을 입힌 건축물, 절대로 그림자를 발하지 않는 신비로운 구조물, 엄청난 량의 곡식

을 저장하기 위한 창고.... 이렇게만 피라미트를 이해하려고 하면 무슨 이유로 이런 건축물이 세계

7대 기적으로 곱히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점은 풀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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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번 옛날 사람들의 피라미트에 대한 이해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20세

기에 사는 우리들에게까지 세계의 7대 기적이라는 관심거리가 되고 있는 것은 어느 의미로는 인

간중심의 그 무엇인가 중요한 요소들이 기적속에는 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로도피스에

관한 여러 가지의 이야기들을 알고 있다. 스트라본과 동시대 사람으로 디오도로스라는 역사가가

있었다. 그는 또하나의 새로운 로도피스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했다. 이 이야기가 피라미트의 건립

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어 여기에 소개하는 바이다.

멤피스로부터 약 40스타디온 떨어져 있는 산속에는 피라미트들이 있다. 모두가 다 왕의 무덤들이

다. 어느 하나도 곡식을 넣어두는 창고로 사용된 일은 없다. 그런데 그곳에 세워진 세 개의 피라

미트가 가장 의미있는 건축물들이다. 그중에 두 개가 옛부터 세계 7대 기적중의 하나라고 전해지

고 있다. 정사각형의 각추형인 이 건축물은 높이가 1 스타디온이다. 이러한 각추형은 그 높이가

밑바닥의 한면의 길이에 비하면 다소 높다. 두 개의 피라미트중에서 큰 것은 한쪽면에 입구를 막

은 돌을 떼어낼 수가 있다. 그러면 아치형으로 된 문이 나타난다. 이 두 개의 피라미트들은 같은

평면위에 나란히 서 있다. 조금 멀리 떨어진 그리고 다소 높이 위치한 장소에는 또 하나의 보다

작게 생긴 피라미트가 서 있다. 이 피라미트는 크기는 작지만 더 우아하고 아름다워 특별히 많은

노력과 비용이 들었음이 겉으로도 나타나 보인다. 이 작은 피라미트의 밑부분은 검은 돌로 되어

있는데 절구나 맷돌을 만들때에 사용되는 아주 견고하고 고급스런 돌이다. 이러한 돌들은 멀리

에티오피아에서 가져온 것인데 강도가 높아서 다듬는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여러사람들이 주장하기로는 이 아름다운 작은 피라미트는 한 여인의 것인데 그를 사랑했던 왕족

남자들이 재산을 모아 세워 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의 여류시인 사포(Sappho)는 그 여인을

도리카(Doricha)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여인은 로도피스(Rhodopis)였다. 그에 관한 또 하나의 에

피소드가 전해온다. 로도피스가 산속의 시냇가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는데 독수리가 내려와서는

그녀의 신발 한짝을 물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독수리는 멤피스로 날아갔는데 때마침 궁밖

으로 산보를 나온 파라오의 머리위에다가 그 신발을 떨어뜨렸다. 그 구두가 특별히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독수리가 어디에선가 가져다 준 사실이 이상스럽게 여겨져서 파라오는 그 구두의 주

인을 찾아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집트의 전역을 휩쓸고 다녔는지는 모르겠으

나 나우크라티스(Naukratis)라는 한 작은 마을에서 그 구두의 임자를 찾아냈는데 그 여인이 바로

로도피스였다고 한다. 파라오는 로도피스와는 특별한 인연이라 생각되어 결혼하여 심히 사랑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연으로 인해 파라오는 특별하게 생긴 피라미트를 로도피스를 위해 짖기로 결심

했다는 것이다.

스트라본이나 헤카타이오스나 또 여기에서 언급된 디오도로스의 기록에 의하면 피라미트의 높이

가 1 스타디온이었는데 이것은 6 프레트렌 또는 600피트에 해당된다. 그리고 바닥 한면의 길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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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보다 조금 짧다고 하면, 피라미트의 원형은 오늘날 보는 것보다 더 높아서 탑처럼 생겼었음

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오늘날의 피라미트는 거의 4,000년을 지나오면서 높이가 다소 내려앉은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디오도로스만이 케옵스의 피라미트에 아치형의 입

구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로도피스라는 여인에 대한 에피소드는 무엇인가

피라미트 건립과 관련하여 새로운 국면을 생각하게 한다. 스트라본이나 헤로도토스나 헤카타이오

스등이 피라미트가 7대 기적중에 하나로 곱히는 이유를 나름대로 잘 설명하고 있다. 피라미트에

관한 모든 전설들을 다 종합해보면 1572년 네델란드의 화가 마아르텐 반 헤엠스케르크(Maarten

van Heemskerck)가 그린 그림이 멤피스의 피라미트 원형에 가까웠을 것이라 생각되어 여기에 소

개하는 바이다. 이 화가는 당시 로마에 소장된 체스티우스(Cestius)가 만든 피라미트의 모형을 확

인했다고 한다. 이 모형은 우리가 보는 피라미트의 모습보다는 더 가파르게 위로 치솟아 흡사 탑

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케옵스의 피라미트에는 아치형의 입구가 있다고 하여 이것도 참고하여 그

림을 그렸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것은 파라오가 7대 기적이라고 하는 피라미트를 쳐다보지 않고

공중의 독수리가 로도피스의 구두를 물고 있는 것을 올려다보고 있다.

제2장: 바빌론의 성곽

<고대의 왕들이 거한 도시>

바빌론은 유프라테스강가에 위치한 왕들이 거한 옛도시이다. 성서에는 바벨이라고 불려졌는데 이

곳에서 아득한 옛날 그 유명한 바벨탑의 사건이 생겨났다. 이러한 옛도시는 하무라비(Hammurapi

1728-1686 B.C.)에 의해 바빌론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바빌론은 그 이후로는 역사의 물결을 타고

내려오면서 기구한 운명을 겪어야 했는데 헷타이트(Hethite), 카씨트(Kassit), 엘라미트(Elamit) 그리

고 나중에는 거의 한 세기동안 앗씨리아(Assyria)에게 점령되어 통치되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격동

기로 인해 이 옛도시는 여러번 불에 타고 파괴되곤 했는데 주전 7세기경에는 나보폴라싸르

(Nabopolassar 625-606 B.C.)에 의해 재건되면서 이른바 갈대아(Chaldäa)라고 하는 새로운 왕조의

요람이 되기도 했다. 그의 아들인 느부카드네자르(Nebukadnezar 605-562 B.C.) II세는 바빌론을 가

장 아름다운 도시로 가꾸어 놓았다. 그는 갈대아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닦아놓은 다음 하무라비

가 한때에 바빌론 제국이라 한 것을 재현하여 신바빌론 제국이라 국호를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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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 바뀔때마다 바빌론은 여지없이 파괴되곤 했는데 주전 539년 페르샤의 퀴로스 II세에 의해

정복될때에는 느부카드네자르가 이룩해놓은 찬란한 모습이 전혀 파괴되지 않았다. 또 주전 331년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했을때에도 바빌론은 퀴로스의 궁전만이 불에 탔을 뿐 도시 전체는 그대로

무사했다. 그런데 알렉산더 대왕은 바빌론을 정복한지 8년만에 거기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후 헬레니즘 문화가 융성하게 되면서 바빌론은 역사의 무대에서 점차 무관심의 세계로 돌아가

고 말았다.

<느부카드네자르 II세가 세운 바빌론의 성곽>

바빌론은 오래전부터 도시 전체를 둘러싼 성곽으로 인해 보호되고 있었다. 느부카드네자르 II세는

이 성곽을 증축하고 보다 아름답게 다듬고자 했다. 독일의 고고학자인 로베르트 콜데바이(Robert

Koldewey)가 1899년에서 1917년까지 바빌론을 발굴해냈는데, 지금은 바빌론 성곽의 이쉬타르

(Ischtar) 성문이 원형 그대로 베를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미 2,500여년전에 세워진 건축물

의 그 아름다움에는 누구나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서 느부카드네자르 II세는 기존의 성곽의 외각에다가 두겹의 성곽을 더

둘렀다. 외적의 투석이나 화살을 막아내기 위한 것이 그 목적이었는데 이렇게하여 바빌론의 성곽

은 세겹의 거대한 건축물이 되었다. 외각의 담벽 하단부의 머릿돌에는 당시의 설형문자( )

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역대의 왕들이 시도해보지 못한 것을 명했다. 바빌론의 안전수호를 위하여 무려 4,000엘렌

의 토지를 더 부가하여 바빌론의 동쪽으로부터 새로 두겹의 성곽을 쌓았다. 이렇게하여 임구르-엔

릴(Imgur-Enlil: 바빌론의 안쪽의 성곽)에는 적이 절대로 접근할 수 없도록 했다. 땅을 깊이 파내기

도 하고 또 높다란 기슭을 만들었기 때문에 멀리에서도 바빌론으로의 접근은 불가능 하다. 삼중

으로 에워싸인 바빌론 안으로 들어오는 문을 나는 아주 크게 만들었으며 문짝은 레바논산 삼목

( )재에다가 구리를 입혀놓았다. 외각을 둘른 성곽과 내부의 성곽으로 인해 거의 완벽하게 봉

인된 바빌론을 그때 당시에는 “틴티르 이스트 바빌론(Tintir ist Babylon)”이라 불렀다. “튼튼하게 둘

려싸인 바빌론”이라는 뜻이다. 설형문자로 된 문헌과 또 그 당시에 그리스어로 번역된 문헌에는

바빌론의 성곽이 두가지로 표현되어 있다.

임구르-엔릴(Imgur-Enlil): 바빌론의 내부를 둘른 성곽

니미트-엔릴(Nimit-Enlil): 바빌론의 외각을 둘른 성곽

고고학자들은 최근 바빌론의 외각을 둘른 성곽 즉 니미트-엔릴을 연구했다. 철근을 사용한 콩크리

트로 된 탑들이 점토로 만든 벽돌로 쌓은 담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담의 두께는 무려 7미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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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 약 12미터마다 담은 7,8미터의 두께로 더 두터워지는데 여기에는 불에 구어낸 타이루를 사

용했고, 3,3미터 두께의 점토로 된 벽돌로 또 한번 담이 둘려싸여 있다. 이렇게 철저한 보호벽으로

둘러싸인 동 바빌론의 외부성곽은 9킬로미터나 된다. 이 부분을 통털어서 니미트-엔릴이라 부른

다. 2,500여년의 세월동안에 불에 굽지않은 점토벽돌들은 무너졌고, 불에구운 타이루는 또 다른

건축물에 사용되어서 니미트-엔릴의 건립당시의 정확한 높이는 현재로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

러나 고고학적인 연구결과를 토대로 하여 상고해보면 니미트-엔릴은 대략 8미터의 높이였을 것으

로 추정된다. 주후 2세기경의 그리스의 여행자 파우자니아스(Pausanias)는 “바빌론은 폐허되어서

오직 성곽만이 남아있을 뿐이다”라고 기록했다. 한때 찬란했던 바빌론은 그 흔적이 간 곳 없고 오

늘날에는 니미트-엔릴이 수십킬로미터의 댐을 방불케하는 규모로 바빌론의 폐허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면 당대의 바빌론의 성곽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헤로도토스의 서술>

주전 5세기 중반에 기록된 헤로도토스의 역사책(Historia)에는 이집트(제1장 참조)와 페르샤에 대

한 기록만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바빌론에 관한 상세한 기록도 들어 있다. 아마도 헤로도토스

는 자신이 바빌론을 방문해 보고 느낀 바를 그대로 기록했을 것이다. 그가 기록한 바빌론에 대한

인상은 대략 아래와 같다.

바빌론은 평지에 위치해 있는데 거대한 정사각형의 도시이다. 이 도시는 한면이 120 스타디온이

다. 그래서 이 도시의 둘레는 480 스타디온이나 된다. 이러한 크기는 오랜 세월동안에 점차로 증

가된 것이다. 이 도시는 특유하게 설계되어 있다. 도시의 둘레는 깊이 판 운하처럼 되어 있어 물

이 흐르고 높은 산기슭처럼 뚝을 쌓아서는 그 위에 우람한 성곽이 세워져 있다. 이 성곽은 50궁

전엘렌의 두께에 200궁전엘렌의 높이이다. 궁전엘렌은 통상적인 엘렌보다 손가락 세 개를 합친

것만큼 더 길다. (오늘날의 칫수로는 약 35센티미터).

그러면 바빌론을 둘러싼 운하와 성곽과는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운하를 파서 얻어진 점토로

다량의 벽돌들을 빚어 구어낼 수가 있었다. 이것으로 운하의 내부벽 뿐만 아니라 성곽까지 쌓아

올린 것이다. 이와같은 관계를 생각해보면 운하의 깊이는 거의 성곽의 높이만 할 것이다. 성곽의

제일 가장자리와 제일 안쪽에는 한층 정도 높게 보이는 난간이 쌓아 올려졌는데 그 중앙에는 말

네필이 끄는 마차가 서로 지나칠 수 있을만큼 넓은 면적이 있다. 그러면 성곽의 두께가 얼마나

큰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백개의 성문들이 이런 규모의 성곽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문짝들은 모두가 구리로 입혀져 있으며 문설주와 대들보들도 모두 구리로 입혀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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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이라는 도시는 둘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중앙에는 강이 가로질러 흐른다. 이 강이 바로 그

유명한 유프라테스이다. 유프라테스는 아르메니아로부터 흘러내려 홍해로 나아가는데 매우 깊고

물살이 빠른 강이다. 바빌론의 성곽은 양쪽면이 강물에 면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살이 강하고

급류이기 때문에 운하와 성곽의 굴곡진 부분은 대부분 불에 구운 타이루를 제방표면에 부착하여

물의 압력으로 인한 파손을 막게 했다. 시내에는 3층 또는 4층의 건물들이 잇달아 즐비하게 늘어

서 있다. 모든 길들은 직선으로 되어 있으며 강을 건너는 장소에는 교량들이 놓여있고 강변의 길

들은 조경이 아름답게 잘 정돈되어 있다. 바빌론의 성곽은 도시를 요새처럼 보호하자는데 의미가

있다. 이 성곽안에는 또 하나의 성곽이 있다. 내부의 성곽은 외부의 것처럼 그렇게 두껍고 우람하

지는 않지만 견고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헤로도토스 당대의 그리스 사람들이 살았던 도시는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도시의 한면이 120 스

타디온 (600피트) 이라고 하면 오늘날의 개념으로는 약 20킬로미터 정도이다. 사방둘레가 80킬로

미터라고 하면 그때 당시로서는 아주 규모가 큰 도시임에는 틀림없다.

이런 대도시의 주위를 완벽하게 에워싸고 있는 성곽의 두께는 말 네필이 끄는 마차가 서로 교차

할 수 있는 정도라고 했다. 헤로도토스는 성곽두께의 칫수를 밝히고 있다. 200 궁전엘렌의 높이에

50 궁전엘렌의 넓이라고 한다. 이러한 헤로도토스의 서술에 의하면 성곽의 높이는 거의 100미터

에 성곽의 두께는 25미터나 된다. (뮌헨의 교회탑의 높이만큼 하늘에 치솟았고 넓이는 독일내의

아우토반만 하다는 결론이다.) 헤로도토스의 이러한 서술에는 다소 과장되었다는 느낌이 없지는

않다. 그런데 이 정도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헤로도토스는 이런 성곽의 안에는 또 하나의 성곽이

있다고 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헤로도토스는 자신이 직접 본 바를 그대로 서술하고 있다고 하

는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늘날의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헤로도토스의 이와같은 서술

의 근거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하는데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누가 과연 이와같은 엄청난 규

모의 성곽을 건립할 생각을 했는가? 그리고 그와같은 생각의 배후에는 어떤 사정이 숨어 있었는

가? 헤로도토스는 바빌론에 관한 서술을 마감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바빌론은 여러 왕들에 의하여 다스려졌다. 왕들마다 담을 쌓고 건축물들을 세웠다. 그러한 왕들

중에는 두명의 여왕도 있었다. 첫 번째의 여왕은 세미라미스였는데 그에게서 처음으로 바빌론의

성곽은 완벽하게 세워졌다. 이 우람한 성곽은 많은 사람들의 볼거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빌

론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다시없이 큰 자랑거리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곽을 쌓게 된 데에는 외적

의 침략을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유프라테스의 범람을 막는 방파제라는 의미가 더 컸다. 그

이후 약 다섯세대 이후에 또 하나의 여왕이 바빌론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 여왕의 이름은 니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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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Nitokris)였는데, 그 여왕은 먼저의 여왕보다 더 규모가 큰 성곽을 도시의 외각에 건립하려

했다. 헤로도토스는 세미라미스여왕이 많은 왕들 중에서 바빌론 성곽을 세운 장본인이었다고 서

술하고 있다.

<크테시아스(Ktesias)의 환상>

주전 약 400년경 크니도스(Knidos) 출신의 크테시아스(Ktesias)는 페르샤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II

세(Artaxerxes II 404-359 B.C.)의 주치의였다. 그는 자기 당대에 생긴 일들을 ‘페르샤의 역사

(Persika)'라는 책으로 엮어냈다. 그 책안에 바빌론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크테시아스 자

신이 바빌론을 방문했었는지에 대하여는 잘 알 수가 없다. 이 책은 거의 전체가 훼손되어 부분적

으로 남아 전해오고 있어 후세에 사는 우리들을 무척도 궁금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

스의 역사가 디오도로스(Diodoros)가 이 책을 인용하고 있어서 그 내용에 대하여 어느 정도는 정

확히 알 수가 있다. 크테시아스가 기록한 바빌론에 관한 인상이 담긴 부분이 디오도로스의 기록

에 인용되어 있는데 대략 아래와 같다.

세미라미스 여왕은 역대의 어느 왕들보다도 더 큰 야심을 품고 바빌론이라는 도시를 환상적으로

건립할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서 그는 도처에서 기술자들과 건축가들 그

리고 일꾼들을 불러 모으고 또 건축자재들도 여러나라로부터 구해왔는데 바빌론 건축을 위해 동

원된 인원은 일백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도시의 한 복판으로는 유프라테스강이 흐르고 바빌론은

무려 360 스타디온이나 되는 담으로 둘러쌓여졌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는 높다란 탑들이 들어서

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크니도스 출신의 크테시아스는 그의 역사책에 바빌론 건축에 대하여 매우

자세히 서술했다. 그에 의하면 세미라미스여왕은 1년이 365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바빌론의 성곽

을 365 스타디온으로 정했다는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과 함께 바빌론을 정복하는 일에 나섰던 클

라이타르코스(Kleitarchos)를 비롯한 많은 장군들도 바빌론 성곽 앞에 서서 모두 세미라미스여왕에

게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불에 구워낸 벽돌들로 성곽은 세워졌는데 그 높이는 50클라프트나 되

었다고 크테시아스는 기록하고 있다. 또 어떤이는 50엘렌이라고도 한다. 그 성곽위로는 마차가 서

로 지나칠 수 있는 정도로 성곽의 두께는 넓었다고 크테시아스는 기록 했다. 또 그에 의하면 바

빌론의 성곽은 무려 250개의 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런 탑들은 높이와 넓이가 성곽의

크기를 능가했다고 그는 서술했다. 크테시아스의 이와 같은 환상적인 기록은 아마도 로마시대의

역사가 루푸스(Rufus)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기록한 <알렉산더 대왕의 역사>에는 바빌

론 함락에 관한 대목이 다루어져 있는데 크테시아스와 유사한 서술이 보여졌다.

그러면 크테시아스가 전해주는 내용 속에는 어떠한 의미가 들어 있는가? 우선 앗씨리아의 여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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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던 세미라미스가 바빌론의 담을 쌓았다는 것과 1년 365일을 생각하여 성곽의 길이를 360 스타

디온으로 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하면 한면의 길이가 120 스타디온이라

고 했는데 성곽의 둘레는 480 스타디온이 된다. 크테시아스의 기록에 의하면 헤로도토스의 기록

보다 1/4이나 적게 서술되었지만 오늘날의 칫수로 환산해보면 360스타디온은 60킬로미터이다. 이

것도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엄청난 규모라 말할 수 있다. 1 클라프트는 4엘렌인데 크테시아스의

서술한대로 성곽의 높이가 50클라프트라고 한다면 이것도 오늘날의 칫수로는 100미터가 넘는다.

헤로도토스와 크테시아스의 기록이 서로 일치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높이로 60킬로미터나 되는 둘

레로 성곽을 쌓았다는 것 자체가 역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또 더 환상적인 이야기는

성곽의 넓이인데 그 위로 마차가 서로 엇갈려 다닐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수행원들이 기록한 내용>

바빌론 성곽의 그 장대한 규모에 대하여 그리고 그런 건축물이 그 당시의 기술로 과연 어떻게 가

능했었겠는가에 대하여 의문점을 가지게 되는 것은 비록 오늘날 처음 제기되는 문제만은 아니다.

앗씨리아의 여왕 세미라미스가 과연 그러한 대과업을 생각해내고 실천에 옮긴 인물이었는가? 그

는 또 어떠한 방법으로 그러한 대과업을 이룩해낼 수가 있었던가? 이에 대한 의문은 이미 그 당

시의 역사를 기록했던 사람들에게도 의심스런 일이었다. 헤로도토스는 그의 역사책에서 많은 의

문점들을 가지고 바빌론의 성곽에 대하여 기록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과 함께 아시아정복의 장도에 오른 젊은이들” 중에는 바빌론이라는 도시의 모습과

그 성곽의 웅대함을 눈으로 본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디오도로스 역시 크테시아스의 기록을 인

용하면서 성곽의 높이가 50클라프트라는데 대한 의심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부언하기를 어떤 이

는 50엘렌이라고 하기도 한다고 했다. 50엘렌인 경우라면 22미터이다. 이것 역시 대단히 높은 담

이다. 중세의 수도원의 담 중에 뉘른베르그에 있는 것이 그래도 제일 높이 쌓은 것이라고 하는데

10미터가 되지 못한다.

디오도로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수행원중에 클라이타르코스(Kleitarchos)라는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

고 있다. 그는 주전 4세기경에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을 토대로 하여 알렉산더 대왕의 전기를 썼

다. 그 뿐 아니라 또 한사람이 있었다. 그 역시 알렉산더 대왕의 전기를 썼다고 하는데 그의 이름

은 아스튀팔라이아(Astypalaia) 출신의 오네시크리토스(Onesikritos)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글들

이 모두가 다 전해오지 않고 있다. 주전 1 세기경의 그리스의 역사지리학자였던 스트라본

(Strabon)의 기록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전기를 남겼다고 하는 두 사람의 기록이 인용되어 있다.

특히 바빌론의 성곽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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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은 평지에 위치해 있다. 성곽의 둘레는 385 스타디온이며 두께는 32피트이다. 탑과 탑 사

이의 높이는 50엘렌이며 탑 자체의 높이는 60엘렌이다. 성곽의 위로는 말 네필이 끄는 마차가 서

로 엇갈려 지나칠 수 있는 정도로 넓다. 이와같은 크기로 인해 바빌론의 성곽은 ‘하늘에 매달린

정원’과 함께 세계 7대 기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스트라본은 여러 가지의 역사책들을 참고하여 위

와 같이 바빌론 성곽에 관해 기록하고 있는데 엄청나게 큰 둘레로 인하여 세계의 7대 기적중에

하나로 곱힌다고 말하고 있다. 높이를 50엘렌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여겨지며 성곽의

두께 내지는 넓이가 32피트라고 한다면 이것은 10미터인데 오늘날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하면 사

실과 근접하는 수치이다. 헤로도토스와 크테시아스의 기록에는 과장된 점이 없지 않다고 본다.

<헬레니즘기의 바빌론에 관한 기록>

우리는 바빌론 출신으로부터 바빌론에 관한 이야기를 알아낼 수 있는 기록을 찾았다. 베로쏘스

(Berossos)라는 사람은 주전 3세기경 바빌론에 살았던 성직자였는데 그는 <바빌론의 역사

(Babyloniaka)>라는 책을 저술했다. 이것은 바빌론의 태고때부터 알렉산더 대왕 당시까지를 기록

한 매우 방대한 바빌론에 관한 역사책이다. 알렉산더의 서거 이후 바빌론의 통치자가 된 셀로이

키드(Seleukid) 왕조의 안티오코스(Antiochos) I세에게 바친 이 의미깊은 역사책도 역시 당대의 다

른 중요한 기록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주후 1세기의 유대

인 역사학자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는 자신의 그리스어로 기록한 저작속에서 베로

쏘스의 <바빌론의 역사>를 인용하고 있다.

나보폴라싸르(Nabopolassar)가 이집트와 시리아, 페니키아등지로 보낸 총독 싸트라프(Satrap)가 죽

었다는 소식에 접하자마자 그곳에서는 극심한 반란이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통치능력의 제한을

느끼고 아들인 느부카드네자르(Nebukadnezar)에게 군대를 통솔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그 지역을

다스리도록 명했다. 느부카드네자르는 이집트, 시리아, 페니키아등지의 반란을 진압하고나서 다시

금 그 지역들을 바빌론의 통치하에 굴복시켰다.

바로 그때에 나보폴라싸르는 신병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21년동안 바빌론을 통치하

고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집트, 시리아, 페니키아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어 많은 포로들을 이끌

고 느부카드네자르는 바빌론으로 돌아갔다. 아버지의 서거이후에 그는 바빌론으로부터 이집트, 시

리아, 페니키아등지를 통치하면서 새로운 갈대아(Chaldäa)왕조를 시작하여 신바빌론 제국을 건설

했다. 그는 또한 이집트, 시리아, 페니키아등지로부터 데려온 포로들을 위하여 대대적인 주거지역

을 바빌론의 도심에 건설하기도 했다. 전쟁에서 얻은 금, 은, 청동등의 노획물을 가지고 그는 옛

바빌론과 함께 신 바빌론을 건설했다. 유프라테스강이 한 가운데로 흘러들어가는 바빌론의 옛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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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세겹의 성곽으로 쌓아서 소중히 보호하고 가꾸는 한편, 동편에다가는 신도시를 건설하여 그

외각지대에 옛도시와 신도시를 다 포함한 바빌론 전역을 둘러싼 성곽을 또한 세겹으로 세우고는

그 안에 아주 화려한 궁전을 지었다.

요세푸스의 역사책에 기록된 베로쏘스의 이와같은 서술은 바빌론의 발전이 어떠했으며, 갈대아왕

조가 어떻게하여 생겨났는가를 잘 말해준다. 그러나 베로쏘스는 느부카드네자르가 바빌론의 내부

와 외부에 세겹으로 성곽을 둘러쌓았다는 사실을 기록하면서도 성곽의 높이나 크기등에 관하여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헤로도토스나 크테시아스나 또는 클라이타르코스등과는 달리 그는

바빌론의 성곽은 세미라미스여왕이 지은 것이 아니라 느부카드네자르가 세웠다고 했다.

<세계의 7대기적으로서의 바빌론 성곽>

우리는 바빌론의 융성기에 그곳의 시민이었던 베로쏘스의 기록에서 바빌론의 성곽의 크기나 위용

에 놀란 인상을 거의 찾을 수 없다. 그러나 헤로도토스나 크테시아스 그리고 나중에 역사책을 기

록한 디오도로스등에 의하여 바빌론의 성곽의 크기가 서술된 점을 조사해 보았다. 그런데 또 하

나의 인상깊은 기록은 비잔틴출신의 필론(Philon von Byzanz)이 저술한 <세계 7대기적에 대한 여

행기>이다. 여기에는 바빌론의 성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세미라미스 여왕은 최고통치자로서의 영광뿐만 아니라 자신이 소유했던 재산이 또한 엄청났다.

그의 서거이후에 자신의 재산목록이라고 하여 기록된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세미라

미스 여왕은 바빌론을 성곽으로 둘러쌓았다. 360스타디온이나 되는 이 성곽을 따라 한 바퀴를 돌

자면 여러날이 소요되는 정도이다. 이 성곽은 단순히 그 크기나 위용에만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 건축기술과 건축자재등의 특유한 경지 그리고 또한 그 내부를 둘러싼 또 하나의 성곽등을

보면 불에 구어낸 타이루를 아스팔트로 연결시킨 묘한 방법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성곽의 높이

는 50엘렌이 넘는다. 성곽의 넓이는 동시에 말 네필이 이끄는 마차가 서로 엇갈릴 수 있는 정도

로 넓다. 성곽은 또한 조밀하게 밀집된 탑들로 연결되어 있다. 그 탑안에는 바빌론을 지키는 군대

들이 상주한다고 한다. 그래서 바빌론은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요새라고 부른다. 수 십만명의 바

빌론 시민들은 철통처럼 보호된 완벽한 요새에서 마음놓고 자기네들의 인생을 영위할 수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호되지 아니한 들판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외

적들의 침략을 두려워 하면서 살고 있는가? 바빌론 도시 안에서 인간은 지극히 평화롭게 살 수

있다. 그리고 또 바빌론을 나와서는 넓은 세상으로 여행을 하게 되면 바빌론 도시에 살고 있음에

대한 자만심을 더욱 크게 들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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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론은 바빌론 성곽의 둘레와 높이등에 관하여 헤로도토스나 크테시아스와 거의 동일한 규모를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곽을 지은 사람은 세미라미스 여왕이 분명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성곽에 인접한 탑들 안에는 군대들이 상주한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사실도 놀라운

것은 아니다...

<세미라미스 여왕에 관하여>

옛 역사가들에 의하면 바빌론 성곽의 그 우람한 규모와 크기는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음에

는 틀림없다. 그래서 이 성곽이 세계 7대 기적중에 하나라고 불려졌다. 많은 역사책들 속에는 바

빌론의 성곽이 기적적인 건축물이라고 여러번 언급되었다. 그때마다 그 성곽은 세미라미스여왕에

의하여 건립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면 과연 세미라미스여왕은 누구였는가? 16세기에 세계

7대기적을 그림으로 그린 화가 헴스케르크(Heemskerck)는 이러한 역사기록들을 기틀로하여 바빌

론의 성곽을 그리면서 세미라미스여왕의 석상을 그려놓았다. 바빌론어로 “사무라마트

(Sammuramat)”라 불려진 세미라미스는 앗씨리아왕조의 왕인 샴시 아다트(Schamschi Adat) 5세

(823-810 B.C.)의 부인이었고 그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아다트 니라리(Adat Nirari) III세의 어머니

였다. 샴시 아다트 5세가 일찍 서거하자 세미라미스는 아들 아다트 니라리를 왕위에 오르게하여

섭정을 시작했다. 이러한 왕실의 분위기로 보아 바빌론의 성곽이 세미라미스여왕에 의해 건립되

었으리라 생각되기는 하지만 그 당시에는 바빌론은 여러차례 파괴되어 있었다. 폐허로부터 그런

엄청난 성곽을 쌓는다는 것은 그것도 한 여왕에 의한 것으로 보기에는 많은 의구심이 대두된다.

오히려 느부카드네자르때에 와서 바빌론은 태평성대를 맞이한 것은 역사의 기록으로 보아 확실하

다. 그래서 베로쏘스 같은 사람은 바빌론의 성곽은 느부카드네자르에 의해 세워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면 바빌론의 성곽을 건립한 사람이 세미라미스여왕이었다고 주장하게 된 데에는 어

떤 이유가 있었는가? 바빌론의 성곽은 그 규모가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엄청난 것이

어서 한 여인의 작품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오늘날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의 견해이다.

그러나 고대와 중세의 역사기록에는 세미라미스여왕의 치적이 매우 높이 평가되었는데 이 점으로

미루어 보면 바빌론의 성곽과 하늘에 매달린 정원이 세미라미스여왕의 많은 치적들중에 지나쳐버

릴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이해된다. 고대와 중세의 역사기록을 중요하게 생각해 본다면

바빌론을 폐허로부터 일으켜 복구하고 거기에다 성곽을 쌓았다는 것이 전혀 무근한 일은 아닐 것

이다. 아마도 세계의 7대 기적으로 인정될만큼의 완성된 규모는 느부카드네자르에 의해 이룩되었

으며 초창기 다소 왜소하나마 바빌론 시내의 내부에 둘러쌓은 성곽은 세미라미스여왕에 의한 것

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