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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8일 토요일 교단·교계 제489호 2. 보수적, 성 실하고 실천적 인 격 신앙 고봉은 그 다 음 해인 1931년 영재형 선교사 의 주선으로 미 국 필라델피아 에 있는 웨스터 민스터신학교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1929년 메이천 등 프린스턴 구학파 학자들이 세움) Th. M. 과정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생활을 하며 오직 학업 에만 매진한 끝에 1933년 Th. M.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정통개 혁신학을 배웠다. 고봉은 다시 텍사스 주 달라스에 있는 달라스신학교(Dallas Theological Seminary)의 박사과정에 입학하였으며, 여기서 구약학을 전공하 여 1935년에 신학박사 학위(Th. D.)를 취득하였다. 이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으로 정식 구약학 신학박사 학위를 받 은 것이었다. 고봉은 달라스신학교 유학시에도 외 부와 단절하여 오로지 학교 기숙사, 강 의실, 도서관, 식당에만 오가면서 학업 에 매진하였다. 자신의 신학공부를 민 족 복음화를 위한 일환으로 생각하고 외로움을 참고 인내하면서 형설의 공을 이룬 것이다. 그리고 당시 모세오경 저 작설을 부인하는 역사비평학이 지배하 는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의 풍토에서 모세5경의 모세저작설을 학위논문을 쓸 만큼 보수적인 신앙과 신학을 유학 생활에서 실천하였다. 그가 달라스에서 공부했을 때 달라스는 세대주의자와 복 음주의자 학자들이 함께 가르쳤다. 그 러나 고봉은 이미 고향교회에서부터 신 앙생활에서부터 목사안수와 신학석사 까지 장로교회와 장로교신학교(평양신 학교, 고배신학교,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에서 획득하였기 때문 그는 세대주의나 자유주의에 타협하지 않고 역사적 개혁 신학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3. 초지일관한 청교도적 회개 부흥 신앙 사상 고봉은 당시 캐나다에서 함흥으로 처 음으로 파송된 영재형 선교사의 청교도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함경도 지 역에 파송된 캐나다 선교사들은 자유주 의적이었다. 영재형 선교사는 뒤늦게 파송된 진보적 선교사 윌리엄 스코트 (William Scott, 1886-1979)와 심각한 신앙적 갈등을 겪었고, 이에 대해 선교 부에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그런데 선 교부는 영재형 선교사를 신앙의 불모지 인 일본으로 좌천 파송하기에 이르렀 다. 고봉은 일본으로 건너간 영재형 선 교사를 따라서 온 가족이 일본으로 떠 났다. 고봉은 일본 고베신학교에 입학 하였고 이 때부터 영재형 선교사와 선 교활동을 함께 시작하였다.(김동화, 『한 국의 예레미아 김치선 박사를 추모하 며- 나에게 있어 영원한 것』 , 서울: 기 독교 연합신문사, 1998, 45-46.) 그는 보수적 신앙을 가진 양아버지 선교사를 평생 섬기면서 그로부터 복음 사역자로 서의 인격과 영성을 성실하게 닦았다. 고봉의 신앙의 열정은 10살 때 마을 서당 훈장 김응보 옹의 영향 아래 신앙 으로 입문 후 흔들림없이 초지 일관하 였다. 16세 때 영재영 선교사를 만나 하 나님의 주권을 믿고 실천하는 정통개혁 신앙의 훈련을 받으면서 20세에 3.1운 동에 참여하여 1년간 옥고를 치르면서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출옥 후 영생중학교에서 학업을 끝낸 후 연희전문을 거쳐 평양신학교에 입학 하였다. 엄재형 선교사의 권유에 따라 일본 고배신학교로 진학하게 되었고, 목사 안수 후에는 미국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와 달라스에서 신학공부를 마치 고 다시 고베와 동경 신주구에서 성공 적인 목회를 하였다. 그리고 해방전 귀 국하여 남대문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대 한 신학교를 설립운영하고 창동교회 개 척, 한양교회 목회, 송파 중앙교회 개척 과 300만 부흥전도단 창립으로 초지일 관하였다. 고봉의 독특성은 최초의 미 국 구약학 신학박사를 한 그의 학문적 인 논리보다는 눈물로 청중의 영혼과 마음에 호소하고 감동을 주는 초지일관 하는 청교도적인 신앙의 열정이었다. 고봉은 기도의 사람으로 3백만 부흥 운동을 전개하여 민족 복음화운동에 앞 장 섰다. 그는 6.25 한국전쟁 이후에 나 타난 민족의 위기를 직접 체험하면서, 한국의 예레미아로서 하나님 나라를 바 라보는 민족의 파수꾼이 되어 한(韓)민 족과 한국교회가 범한 우상숭배의 죄를 철저히 회개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였 다. 그의 부흥설교의 주제는 회개, 부흥, 성령이었다. 그는 눈물로 기도하고 전 국을 돌면서 전도했다. 해방 후 혼란한 정국 속에서 이 민족이 살길은 오직 기 도, 회개 그리고 기도뿐이라고 천명하 였다. 그는 단지 교회의 양적 성장을 위 한 부흥운동이 아니라 민족을 살리기 위한 한국교회의 내면적 성장을 위하여 부흥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그의 교회 부흥운동도 말씀에 입각한 회개 운동이 었기 때문에 개혁신앙에 입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호에 계속> 정통 복음주의 신학을 강조한 김치선 박사 김영한 교수 (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 대학원 설립원장)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청주지방회 임원 회(지방회장 정정회 목사, 이하 청주지방 회)는 지난 7월 24일 정의당, 더불어민주 당, 미래통합당 충북도당 사무실을 방문 해‘포괄적 차별금지법’을 강력히 반대 한다는 입장문을 전달하고 그 내용을 설 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청주지방회는 지난 7월 14일에도 청 주시 소속 4명의 국회의원 사무실을 방 문해 입장문을 전달한 바 있다. 하지만 청주시에 속한 국회의원 4명이 모두 더 불어민주당인 관계로“정작 포괄적 차별 금지법을 발의한 정의당과 미래통합당 에는 의견이 전달되지 못했다”는 판단하 에 일주일이 지난 7월 24일 3당 충북도 당 사무실을 방문하게 된 것. 청주지방회는 이번 법을 발의한 정의 당 충북도당 사무실을 방문했다. 처음 사 무실에 들어가기 전 법을 발의한 당을 방문하는 관계로‘어떻게 해야 효과적으 로 의견을 전달할 수 있을까?’에 대한 걱 정이 있었지만 막상 정의당 충북도당에 서는 정충환 사무총장이 성의있게 청주 지방회의 이야기를 듣고 질문하며 임원 들을 대해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만남 을 가질 수 있었다. 특히 정 사무총장은 입장문을 전달받 고 내용을 잠시 살펴본 후“포괄적 차별 금지법 전체를 반대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법안 중 일부 조항을 반대하는 것”인 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물었다. 이에 정 지방회장은“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차별 하는 것을 막는 것은 찬성하는 바이지만 동성애 문제가 대두될 수 있는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서는 찬성 할 수 없다”고 분 명한 입장을 밝혔다. 정 사무총장은“충 분히 청주지방회의 입장을 이해했고 의 원들과 중앙당에 의견을 정확히 전달하 겠다”고했다. 이어진 다음 방문지는 더불어민주당 충북도당 사무실이었다. 현재 여당이고 국회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고 있 는 입장이다 보니 아무래도 이 법이 표 결에 붙여졌을 때 힘을 발휘하 수 있는 당이어서 청주지방회도 마음을 다잡고 사무실에 입장했다. 특히 지난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방 문시 다선 의원의 사무실 직원이 매우 귀찮다는 반응을 보여 이날 더불어민주 당 충북도당 사무실을 방문하기전 임원 회에서는“좀 더 강하게 의견을 어필해 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도당 사무실에서 만난 김신응 정책실장은 매 우 성의있게 임원회를 맞이해 입장문을 전달 받고 의견을 듣는 모습을 보여 줬 다. 이곳에서 정 지방회장은“포괄적 차별 금지법의 내용 중 성소수자 문제가 오히 려 역차별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을 강 조하며 청주지방회의 의견을 전했고 김 정책실장은“이 법에 대해서 당에서도 매우 신중하게 논의하는 중이고 이런 강 력한 항의가 있음을 중앙당에도 잘 전달 하겠다”고했다. 이후 마지막으로 미래통합당 충북도 당 사무실을 방문했다. 청주지방회는 미 래통합당 충북도당 김영애 여성팀장을 만나 입장문을 전달하고 설명했다. 정 지 방회장은“이 법이 통과되면 동성애가 합법화되고 가정파괴와 성윤리가 무너 지는 일이 일어나 수 있다”며 포괄적 차 별금지법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에 김 팀장은“차별이 있는 평등이 진짜 평등 이라고 생각한다”며“목사님들이 사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회윤리를 잘 잡아 주심을감사한다”고했다. 한편, 모든 일정을 마친 후 정 지방회 장은“각 도당을 방문할 때 마다 직접 찾 아와서 차별금지법 반대 의견을 말한 기 독교단체나 교회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며“지금까지 차별금지법 반대를 위해 기도했다면 이제는 우리가 행동으로 우 리의 의지를 보여줄 때”라고 전국 신앙 인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부탁했다. 서광호 기자 기성 청주지방회, 충북도당 항의 방문 ‘포괄적차별금지법’반대 입장문 전달 고봉(高峯) 김치선의 개혁신학 사상의 특징(4) ㈜영광기업 대표 정학영 장로와 부인 김수경 권사가‘행복한 가정’7월호에 소 개됐다. 행복한 가정에 게재된 정 장로 부 부의 믿음의 스토리를 소개한다. 이들 부부는 대방동 양문교회 고등부 시절에 만나 믿음 안에서 결혼하여 가정 을 꾸렸다. 결혼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에 대해 정 장로는“대학 졸업 후 얼마동안 직장 생활을 하다가 20대 중반에 사업을 시작 해 돈을 정말 많이 벌었다”면서“하지만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경제적으로 힘들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돈을 많이 벌수있었다”고한다. 그는“결혼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돈이 없어 배고프고 추위에 떨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집도 사고 아내에게 해 주고 싶은 것도 마음껏 해 줄 수 있었던 그 런 시절이었던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정 장로는 아내를 무척이나 사랑한다. “아내에 대해서는 고마운 마음이 많아 요.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었을 때도 있 었지만 사업이 망해서 있는 집 다 날리고 월셋집을 살게 되었을 때도, 자식이 큰 화 상을 입기도 하고, 세무조사를 받기도 하 는 등 생각지도 못했던 온갖 어려움이 있 었으나 변함없이 내 곁에서 위로해 주는 아내에 대해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가 정을 지켜주는 아내가 든든하고 고맙습 니다.” 그는 자녀들에 대해서도“이 시대 신앙 과 인격과 지식이 겸비된 크리스찬 리더 로 키우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한다. 그 런데 아이들이 대학진학에 어려움을 겪 는 것을 보고는 세 명을 호주로 보냈다. 첫째는 맥카이 법대를 나왔는데 의대 동 갑내기를 만나 결혼하게 되어 국제변호 사 꿈을 갖고 있지만, 가정을 책 임져야 하기 때문에 현재는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고 며느리는 양육 때 문에 공부는 잠시 쉬고있는 상태 이다. 둘째 아들은 호주 맬버른 한의대 대학원을 다니다 코로나 등으로 한국에 와 있고, 막내아 들은 한국에 다시 돌아와 하나님 의 은혜로 촬영 등 전문적인 분 야들을 거쳐오면서 꿈을 가지고 직장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다. 정 장로는 앞으로 한국교회를 살리는 일에 물질적, 영적으로 쓰임을 받고 싶어 한다. 한국교회가 정말 어렵다. 월세 내기 도 힘든 교회도 엄청 많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 재벌이 된다면 한국교회를 살 리는 일에 힘쓰고 싶다는 소박한 비전을 갖고 있다. <출처: 행복한 가정 7월호> 믿음 안에서 결혼, 한가정을 이루기까지 ㈜영광기업 대표 정학영 장로‘성공스토리’ 정학영 장로 가족 청주지방회 임원회가 정의당 충북도당 사무실을 방문해‘포괄적차별금지법’반대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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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8일 토요일 교단·교계 제489호

2. 보수적, 성실하고실천적인격신앙고봉은 그 다

음해인1931년재형 선교사

의 주선으로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터민스터신학교(WestminsterTheologicalSeminary, 1929년 메이천 등 프린스턴구학파 학자들이 세움) Th. M. 과정에입학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외부와완전히 단절된 생활을 하며 오직 학업에만매진한끝에 1933년 Th. M.학위를취득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정통개혁신학을 배웠다. 고봉은 다시 텍사스주 달라스에 있는 달라스신학교(DallasTheological Seminary)의 박사과정에입학하 으며, 여기서 구약학을 전공하여 1935년에 신학박사 학위(Th. D.)를취득하 다. 이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정식 구약학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것이었다.고봉은 달라스신학교 유학시에도 외

부와 단절하여 오로지 학교 기숙사, 강의실, 도서관, 식당에만 오가면서 학업에 매진하 다. 자신의 신학공부를 민족 복음화를 위한 일환으로 생각하고외로움을 참고 인내하면서 형설의 공을이룬 것이다. 그리고 당시 모세오경 저작설을 부인하는 역사비평학이 지배하는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의 풍토에서모세5경의 모세저작설을 학위논문을쓸 만큼 보수적인 신앙과 신학을 유학생활에서 실천하 다. 그가 달라스에서공부했을 때 달라스는 세대주의자와 복음주의자 학자들이 함께 가르쳤다. 그러나 고봉은 이미 고향교회에서부터 신앙생활에서부터 목사안수와 신학석사까지 장로교회와 장로교신학교(평양신학교, 고배신학교,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획득하 기 때문 그는 세대주의나자유주의에 타협하지 않고 역사적 개혁신학의입장을견지하 다.3. 초지일관한 청교도적 회개 부흥 신앙

사상고봉은 당시 캐나다에서 함흥으로 처

음으로 파송된 재형 선교사의 청교도신앙의 향을 받았다. 당시 함경도 지역에 파송된 캐나다 선교사들은 자유주의적이었다. 재형 선교사는 뒤늦게파송된 진보적 선교사 윌리엄 스코트(William Scott, 1886-1979)와 심각한신앙적 갈등을 겪었고, 이에 대해 선교부에 강력하게 항의하 다. 그런데 선

교부는 재형 선교사를 신앙의 불모지인 일본으로 좌천 파송하기에 이르다. 고봉은 일본으로 건너간 재형 선교사를 따라서 온 가족이 일본으로 떠났다. 고봉은 일본 고베신학교에 입학하 고 이 때부터 재형 선교사와 선교활동을 함께 시작하 다.(김동화, 『한국의 예레미아 김치선 박사를 추모하며- 나에게 있어 원한 것』, 서울: 기독교 연합신문사, 1998, 45-46.) 그는보수적 신앙을 가진 양아버지 선교사를평생 섬기면서 그로부터 복음 사역자로서의인격과 성을성실하게닦았다. 고봉의 신앙의 열정은 10살 때 마을

서당 훈장 김응보 옹의 향 아래 신앙으로 입문 후 흔들림없이 초지 일관하다. 16세 때 재 선교사를 만나 하

나님의 주권을 믿고 실천하는 정통개혁신앙의 훈련을 받으면서 20세에 3.1운동에 참여하여 1년간 옥고를 치르면서하나님의 종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출옥 후 생중학교에서 학업을 끝낸후 연희전문을 거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 다. 엄재형 선교사의 권유에 따라일본 고배신학교로 진학하게 되었고,목사 안수 후에는 미국 웨스터민스터신학교와 달라스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다시 고베와 동경 신주구에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 다. 그리고 해방전 귀국하여 남대문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대한 신학교를 설립운 하고 창동교회 개척, 한양교회 목회, 송파 중앙교회 개척과 300만 부흥전도단 창립으로 초지일관하 다. 고봉의 독특성은 최초의 미국 구약학 신학박사를 한 그의 학문적인 논리보다는 눈물로 청중의 혼과마음에 호소하고 감동을 주는 초지일관하는청교도적인신앙의열정이었다.고봉은 기도의 사람으로 3백만 부흥

운동을 전개하여 민족 복음화운동에 앞장 섰다. 그는 6.25 한국전쟁 이후에 나타난 민족의 위기를 직접 체험하면서,한국의 예레미아로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민족의 파수꾼이 되어 한(韓)민족과 한국교회가 범한 우상숭배의 죄를철저히 회개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다. 그의부흥설교의주제는회개, 부흥,성령이었다. 그는 눈물로 기도하고 전국을 돌면서 전도했다. 해방 후 혼란한정국 속에서 이 민족이 살길은 오직 기도, 회개 그리고 기도뿐이라고 천명하다. 그는 단지 교회의 양적 성장을 위

한 부흥운동이 아니라 민족을 살리기위한 한국교회의 내면적 성장을 위하여부흥을 촉구하 다. 이러한 그의 교회부흥운동도 말 에 입각한 회개 운동이었기 때문에 개혁신앙에 입각한 것이라할수있다. <다음호에 계속>

정통복음주의신학을강조한김치선박사

김 한 교수(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

대학원 설립원장)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청주지방회 임원회(지방회장 정정회 목사, 이하 청주지방회)는 지난 7월 24일 정의당, 더불어민주당, 미래통합당 충북도당 사무실을 방문해‘포괄적 차별금지법’을 강력히 반대한다는 입장문을 전달하고 그 내용을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청주지방회는 지난 7월 14일에도 청

주시 소속 4명의 국회의원 사무실을 방문해 입장문을 전달한 바 있다. 하지만청주시에 속한 국회의원 4명이 모두 더불어민주당인 관계로“정작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발의한 정의당과 미래통합당에는 의견이 전달되지 못했다”는 판단하에 일주일이 지난 7월 24일 3당 충북도당 사무실을 방문하게 된 것.청주지방회는 이번 법을 발의한 정의

당 충북도당 사무실을 방문했다. 처음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 법을 발의한 당을방문하는 관계로‘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의견을 전달할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이 있었지만 막상 정의당 충북도당에서는 정충환 사무총장이 성의있게 청주지방회의 이야기를 듣고 질문하며 임원들을 대해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특히 정 사무총장은 입장문을 전달받

고 내용을 잠시 살펴본 후“포괄적 차별금지법 전체를 반대하는 것인지 아니면그 법안 중 일부 조항을 반대하는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물었다. 이에 정지방회장은“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차별하는 것을 막는 것은 찬성하는 바이지만동성애 문제가 대두될 수 있는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서는 찬성 할 수 없다”고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정 사무총장은“충분히 청주지방회의 입장을 이해했고 의원들과 중앙당에 의견을 정확히 전달하겠다”고 했다. 이어진 다음 방문지는 더불어민주당

충북도당 사무실이었다. 현재 여당이고국회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고 있는 입장이다 보니 아무래도 이 법이 표

결에 붙여졌을 때 힘을 발휘하 수 있는당이어서 청주지방회도 마음을 다잡고사무실에 입장했다. 특히 지난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방

문시 다선 의원의 사무실 직원이 매우귀찮다는 반응을 보여 이날 더불어민주당 충북도당 사무실을 방문하기전 임원회에서는“좀 더 강하게 의견을 어필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도당

사무실에서 만난 김신응 정책실장은 매우 성의있게 임원회를 맞이해 입장문을전달 받고 의견을 듣는 모습을 보여 줬다. 이곳에서 정 지방회장은“포괄적 차별

금지법의 내용 중 성소수자 문제가 오히려 역차별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청주지방회의 의견을 전했고 김정책실장은“이 법에 대해서 당에서도매우 신중하게 논의하는 중이고 이런 강력한 항의가 있음을 중앙당에도 잘 전달하겠다”고 했다.이후 마지막으로 미래통합당 충북도

당 사무실을 방문했다. 청주지방회는 미래통합당 충북도당 김 애 여성팀장을만나 입장문을 전달하고 설명했다. 정 지방회장은“이 법이 통과되면 동성애가합법화되고 가정파괴와 성윤리가 무너지는 일이 일어나 수 있다”며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에 김팀장은“차별이 있는 평등이 진짜 평등이라고 생각한다”며“목사님들이 사회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회윤리를 잘 잡아주심을 감사한다”고 했다.한편, 모든 일정을 마친 후 정 지방회

장은“각 도당을 방문할 때 마다 직접 찾아와서 차별금지법 반대 의견을 말한 기독교단체나 교회가 없었다는 이야기를듣고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다”며“지금까지 차별금지법 반대를 위해기도했다면 이제는 우리가 행동으로 우리의 의지를 보여줄 때”라고 전국 신앙인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부탁했다.

서광호 기자

기성 청주지방회, 충북도당 항의 방문‘포괄적차별금지법’반대입장문전달

고봉(高峯) 김치선의 개혁신학 사상의 특징(4)

㈜ 광기업 대표 정학 장로와 부인김수경권사가‘행복한가정’7월호에소개됐다. 행복한가정에게재된정장로부부의믿음의스토리를소개한다.이들 부부는 대방동 양문교회 고등부

시절에 만나 믿음 안에서 결혼하여 가정을꾸렸다. 결혼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에 대해

정 장로는“대학 졸업 후 얼마동안 직장생활을 하다가 20대 중반에 사업을 시작해 돈을 정말 많이 벌었다”면서“하지만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경제적으로힘들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돈을 많이벌수있었다”고한다. 그는“결혼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돈이 없어 배고프고 추위에 떨던 사람이하나님의 은혜로 집도 사고 아내에게 해주고싶은것도마음껏해줄수있었던그런 시절이었던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정장로는아내를무척이나사랑한다. “아내에 대해서는 고마운 마음이 많아요.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었을 때도 있었지만 사업이 망해서 있는 집 다 날리고월셋집을살게되었을때도, 자식이큰화상을 입기도 하고, 세무조사를 받기도 하는 등 생각지도 못했던 온갖 어려움이 있었으나 변함없이 내 곁에서 위로해 주는아내에 대해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가정을 지켜주는 아내가 든든하고 고맙습니다.”

그는 자녀들에 대해서도“이 시대 신앙과 인격과 지식이 겸비된 크리스찬 리더로 키우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들이 대학진학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는 세 명을 호주로 보냈다.첫째는 맥카이 법대를 나왔는데 의대 동갑내기를 만나 결혼하게 되어 국제변호

사 꿈을 갖고 있지만, 가정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현재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아들, 딸 낳고잘 살고 있고 며느리는 양육 때문에 공부는 잠시 쉬고있는 상태이다. 둘째 아들은 호주 맬버른한의대 대학원을 다니다 코로나등으로 한국에 와 있고, 막내아들은 한국에 다시 돌아와 하나님의 은혜로 촬 등 전문적인 분야들을 거쳐오면서 꿈을 가지고직장생활을열심히하고있다.

정 장로는 앞으로 한국교회를 살리는일에 물질적, 적으로 쓰임을 받고 싶어한다. 한국교회가정말어렵다. 월세내기도 힘든 교회도 엄청 많다. 그래서 돈을많이 벌어 재벌이 된다면 한국교회를 살리는 일에 힘쓰고 싶다는 소박한 비전을갖고있다.

<출처: 행복한 가정 7월호>

믿음 안에서 결혼, 한가정을 이루기까지㈜ 광기업 대표 정학 장로‘성공스토리’

정학 장로 가족

청주지방회 임원회가 정의당 충북도당 사무실을 방문해‘포괄적차별금지법’반대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