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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연혁 3. 구술자 연보 4. 참고 문헌 목록 5. 원문 자료 210-280 140p-180p 0723_1 14. 07. 23 오후 8:23 페이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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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연혁

3 구술자 연보

4 참고 문헌 목록

5 원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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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가회동에서 농수공 이달용의 장남으로 출생

경성종로공립심상고등소학교 졸업

경성중학교 졸업

춘곡 고희동 선생에게 1년여 동안 사사(1923년 경)

일본의 가와바타미술학교( )에서 1년 수학(1924년 경)

동경미술학교( ) 서양화과(西洋畵科) 특별학생(特別學生)으로 입학

조선총독부 주최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花〉 입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 졸업 졸업작품은 〈나부〉 〈자화상〉

《제10회 서화협회전》 〈선인장〉 출품 휘문고등보통학교 대강당

일본에서 귀국 후 서화협회(書畵協會) 회원 가입 (《서화협회전》 3~4회 출품했다고 전해진다)

동경미술교조선동창회 주최 동아일보사 학예부 후원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 동창회전 《제2회 동미전》 〈자화상〉 〈침묵〉

〈추상〉 〈나부〉 출품 동아일보사 3층 강당

《제11회 서화협회전》 〈수밀도〉 출품 휘문고등보통학교 대강당

《삼화백 소묘전람회》 구본웅 도상봉 이해선 참여 종로 사롱멕시코

이왕가박물관(창덕궁 소재) 한국 고미술품 관리위원

이왕가덕수궁미술관(덕수궁 석조전에 신설) 운영위원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 창립 회원 지도위원

백양사우회 창립 회원 지도위원

『아사히사진연감』에 lt아이 보는 아이gt 수록

조선사진예술연구회(현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창립 및 지도위원

조선사진예술연구회 회장

예술사진동인회 창립 (김정래 김광배 이해선 임응식 박필호 최계복 박영진 현일영으로 구성된 전국적 지도급 사진가 모임)

《제2회 전국사진공모입선작품전》 심사위원 (이해선 박필호 안철영)

《제1회 한국향토문화사진전》 심사위원

《제1회 전국종합사진대현상모집》 심사위원

예술사진동인회 주최 《예술사진동인전》 〈수선(水仙)〉 〈옥외정물(屋外情物)〉 〈잔광(殘光)〉 〈만추점경(晩秋點景)〉 〈경연(競娟)〉

출품(8인 30점 전시) 서울충정로1가 대원화랑

예술사진동인회 재부양화가일동(在釜洋畵家一同) 주최 《예술사진과 양화 합동전》 〈수선〉 〈옥외정물〉 〈잔광〉 〈만추점경〉

〈경연〉 출품(예술사진부middot양화부 총 15인 참여) 부산 미국공보원

동방사진문화사(『사진주보』 발간) 고문

대한사진예술연구회 주최 취미사진청강회 강의 아카데미 다방

동방사진문화사 동방사진뉴~스사 주최 공보부 대한 행신문협회 후원 《제1회 전국예술사진전람회》 심사위원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

《제8회 대한사진예술연구회전》 lt풍창(風窓)gt lt귀면(鬼面)gt lt춘일(春日)gt 출품 미국공보관 화랑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고문

《8인사진전람회》 (김제권 남상준 방대훈 서순삼 성두경 이훈 이해선 지부원) 동화백화점 4층 화랑

『사진문화』 주최 인간가족사진전 사진집 좌담회 참가

《제9회 대한사진예술연구회전》 lt춘설gt lt국밥집gt 찬조출품 동화백화점화랑

《제10회 대한사협전》 lt강변모색(澗邊暮色)gt lt석가성탄(釋迦聖誕)gt 찬조출품 공보실공보관

이 해 선 연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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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불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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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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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대한사협전》 lt설청(雪晴)gt lt묵상gt 찬조출품 중앙공보관

《제12회 대한사협전》 lt어촌풍물gt lt강변즉흥gt 찬조출품 중앙공보관

《제13회 대한사협전》 lt고목회춘gt lt추양(秋陽)gt 찬조출품 중앙공보관

516군사정권의 lsquo포고령 제6호rsquo에 의해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비롯한 모든 사진단체들이 해산됨

사단법인 한국사진협회(현 한국사진작가협회) 창립 당시 고문 역임

《한국사진협회 전국회원전》 〈한정〉 출품

문화공보부 주최 《신인예술상》 사진부 심사위원

《제13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사진부 심사위원 사퇴

동아일보사 주최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위원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

동아일보사middot사진동우회 공동주최 《한국국제사진살롱》 심사위원

《제14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사진부 심사위원 및 lt한정(閒靜)gt 출품 국립현대미술관

석우회(1965년 창립) 회원으로 활동

《제14회 대한사협전》 lt봄볕gt lt취주(吹奏)gt lt무아경gt 출품 중앙공보관

《제15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불참

동아일보사 주최 《제4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위원

신문협회 주최 《보도사진전》 심사위원

《제4회 사진동우회전》 찬조출품 신문회관

《조흥은행 본점 신축 이전 기념 사진전middot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제15회 대한사협전(초대) 직원작품전》

lt노변아취(路邊雅趣)gt lt고흥(高興)gt lt영상gt 출품 조흥은행 본점 2층 전시장

동아일보사 주최 《동아국제사진살롱》 심사위원

《창포수석전》 서울 아랍문화회관

《제16회 대한사협전》 lt유적gt lt벽gt lt명암gt 출품 중앙공보관

《제16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동아일보사 주최 《제2회 동아국제사진살롱》 심사위원

《종합미술전》 〈도선역( )〉 출품 중앙공보관

《제17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사진부 분과위원장 및 lt추모(追慕)gt 출품

《제17회 대한사협전》 lt장날gt lt나드리gt lt곡성(曲城)gt 출품 국립공보관

《제1회 새한칼라 사진콘테스트》 심사위원

《제18회 대한사협전》 lt돌풍gt lt관등일gt 출품 국립공보관

《제1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사진부 심사분과 위원장 및 초대작가 lt산성gt 출품 국립현대미술관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미술 부문 심사위원

《제2회 아사히펜탁스월드포토콘테스트》 심사위원

《석우회 돌전람회》 국립공보관

《제9회 한국사진문화상》 (사진발전 및 인재양성) 공로상 수상

《제1회 건축 및 사진전람회》 심사위원 부위원장 사진분과위원 및 초대작가 국립공보관

《제19회 대한사협전》 lt정물gt lt가게gt 출품 국립공보관

《대한사진예술가협회상》 공로상 수상

예총창립 10주년 기념 및 문화예술인대회 문화예술인 표창 국민포장( ) 수상

연도 일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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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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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2006

그 외

문화공보부 주최 《한국근대미술 60년》 국립현대미술관

《제2회 건축 및 사진전람회》 심사위원장 및 초대작가 국립공보관

《제20회 대한사협전》 〈잉어잡이〉 〈장날〉 출품 신문화랑

《제3회 건축 및 사진전람회》 초대작가

《제21회 대한사협전》 lt풍창(風窓)gt 출품 국립공보관

대한사진예술가협회 명예회장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제23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및 초대작가

한국사진작가협회 주최 사진 강좌 충청지구 이해선 lt국전과 사진gt 강좌

《한국현역원로작가 초대전》 사진부문 초대작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분관

《제22회 대한사협전》 lt추수gt lt고흥(高興)gt 출품 국립공보관

《고희기념 이해선 작품전 향토풍물》 신문회관 화랑

《제1회 국제사진교류전》 참여 국립공보관

《제24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제4부 심사위원장 사진분과위원 및 초대작가 국립현대미술관

《제23회 대한사협전》 lt조춘(早春)gt lt어촌풍경gt 출품 국립공보관

《서울특별시문화상》 심사위원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운영위원(제4부 분과위원장) 2회 연임

현대칼라 주최 《제1회 현대사진문화상》 수상

한국사진작가협회 전동경사진연맹 공동 주최 문화공보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주한일본대사관 월간사진 후원

미화사진필름주식회사 협찬 《제1회 한일친선대회》 참가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 편 『한국현대미술사(사진)』 추진위원 (이해선 외 5명)

《제29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제30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별세

『이해선 사진작품집 주제 향토풍물』 평화당

『한국의 고궁』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사진으로 남은 1950~60년대』 눈빛

『이해선 사진집 1950~1960년대 이야기』 동강사진박물관

『사진문화』 『카메라 예술』 『포토그라피(현 월간사진)』 『영상』 등 사진잡지에 작품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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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일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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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한 사 진 예 술 가 협 회 연 혁 1 9 4 5 ~ 2 0 1 4참고자료 일간지 『경향신문』 『동아일보』 『매일경제』 『조선일보』 월간지 『포토그라피』 『영상』 단행본 『내가 걸어온 한국사단』(임응식 눈빛 1999)

『한국사협사 I』(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01) 『한국예술총감 자료편』(예술원사무국 1965) 및 실물자료

일러두기 본 자료는 대한사진예술가협회로부터 제공받은 연혁을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 수정 및 보완된 내용의 경우 출처를 표시하였다

또한 정확한 날짜나 시기를 확인하지 못한 경우 lsquorsquo 표시로 대신했다

각 저술마다 조선사진예술연구회의 창립 시기는 1~2년 차이를 보이나 1957년 『동아일보』에 실린 창립12주년 촬영대회 개최 기사 및 대한사진예술가협회의 연혁을 참고해 1945년으로 보았다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출처)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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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진예술연구회(朝鮮寫眞藝術硏究會) 창립- 815 해방과 더불어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1937)와 백양사우회 (白羊寫友會 1939)의 중견회원 및 기타 지방 사진인들을 규합하여 전국적인 단체로 발족

≪창립기념사진전≫ 동화백화점 화랑 (『동아일보』)

≪제2회 작품전람회≫ 동화백화점 화랑 (『조선일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계기로 회 명칭을 대한사진예술연구회(大韓寫眞藝術硏究會)로 개칭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全國文化團體總聯合會) 가입 (『동아일보』)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람회≫ 동화백화점 화랑 (『경향신문』)

- 심사위원 이해선 박필호 안철영- 입선자 고종일 이동호 안성호 등≪제3회 대한사연회원전≫ 50여 점 동화백화점 화랑 (『동아일보』)

『대한사협회보(大韓寫硏會報)』 제1호 제2호 발행

≪제2회 조선예술사진전람회≫ 동화백화점 화랑 (『동아일보』)

- 입선자 안월산 이경모 임윤창 등

≪제3회 전국예술사진전≫ 동화백화점 화랑 (『경향신문』 및 『한국사협사 I』)

- 심사위원 현일영 이해선 박필호 이규완- 입선자 정희섭 최창희 강윤형 등

부산사진예술연구회와 ≪합동예술사진전≫ 부산 미화당 화랑 (『내가 걸어온 한국

사단』 및 『한국사협사 I』)

- 출품자 김용진 송미구 임응식 이병삼 조상규 정인성(이상 부산사연)김조현 김한용 박영진 신상우 임석제 오인창 이최형 지부원 조명원허승균(이상 대한사연)

≪제4회 작품발표전≫ 부산 루네싼스 다방 (실물자료)

취미사진청강회 대한사연 주최 강사 이해선 아카데미 다방(소공동) (『경향신문』)

아마추어사진현상촬영대회 창경원 (『경향신문』)

≪현상인화전시회≫ 대한사연 주최 미원 다방 (『경향신문』)

≪제5회 작품발표전≫ 부산 국제구락부 (실물자료)

≪제6회 작품발표전≫ 은령(銀鈴)다방 (실물자료)

10월 창립8주년 기념 촬영대회 개최

≪제7회 작품발표전≫ 미국공보원 (『경향신문』 및 실물자료)

지도위원 이해선초대회장 박영진창립회원 김정래 박필호 현일영 이규완 오인창 이태웅

회장 이해선

기획간사 김조현

회장 이규완부회장 김조현

사무실 명동 문진양행

사무실 부산 광복동사진재료상(박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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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9주년 기념 촬영대회 경복궁 (『경향신문』)

창립9주년 기념 촬영대회 ≪당선작품 발표 사진전≫ 미국공보원 (실물자료)

『대한사협회보』 제3호 제4호 발행

정기총회 개최 한창양행 (『동아일보』)

『대한사협회보』 제5호 발행≪제8회 작품발표전≫ 미국공보원 (실물자료)

창립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봉은사 및 뚝섬 일대 (『동아일보』)

창립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당선작품 발표 사진전≫

정기총회 개최 한창양행창립 11주년 기념 촬영대회 개최 덕수궁창립 11주년 기념 촬영대회 ≪입선작품전≫ 미국공보원 화랑

회 명칭을 대한사진예술가협회(大韓寫眞藝術家協會)로 개칭≪제9회 대한사연전≫ 동화백화점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창립 12주년 기념 신록촬영대회 창경원 (『동아일보』)

정기총회 개최≪제10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창립 13주년 기념 추계촬영대회 덕수궁

≪제11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창립 14주년 기념 추계촬영대회창립 13주년 및 창립14주년 기념촬영대회 ≪당선사진전≫ 중앙공보관 화랑 (실물자료)

창립 15주년 기념촬영대회 ≪당선작품전≫ 중앙공보관 화랑 (실물자료)

≪제12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제13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실물자료)

한국사협 창립(61~63년 이해선 고문 김조현 부이사장)정부 시책에 따라 일시 해산

대전지회 설립

대한사협 출신들이 모여 ≪사진예술동인전≫ 김조현 외 17명 49점 중앙공보관 (『한국예술총람 자료편』)

문화예술단체 해금령에 따라 대한사협 재건 정기총회 개최

대한사협 수요회 개최 연지동 동해루

정기총회 개최 (『동아일보』)

≪제14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제15회 대한사협전≫ 조흥은행 본점 2층 전시장 (실물자료)

제주지회 설립≪제16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실물자료)

고문박필호김광배서순삼박영진회장 이해선 부회장 조명원 최창희총무 방대훈 남상준간사 조준영 이훈 지부원 이석준 김조현

고문 이해선 회장 김조현부회장 지부원 총무 방대훈간사 이훈 남상준

회장 김조현부회장 방대훈총무 지부원

회장 김조현

고문 김조현 회장 이해선부회장 안준천 총무 김석현

회장 이해선부회장 김조현

문교부에 국전 사진부 신설을 진정

제13회 국전에 사진부 설치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출처)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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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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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차 정기총회 개최 북창동 한양관『제16회 대한사협전 작품집』 발간 (실물자료)

≪제17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제17회 대한사협전 작품집』 발간 (실물자료)

제24차 정기총회 개최 및 ≪백오사진상(白烏寫眞賞)≫ 제정≪제18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실물자료)

『제18회 대한사협전 작품집』 발간 (실물자료)

제25차 정기총회 개최≪제1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김석현 공로상 이순흥)

제26차 정기총회 개최 및 제2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9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경향신문』 및 실물자료)

제27차 정기총회 개최이해선 회장에 공로상패 증정 및 제3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이순흥 김석현) (『포토그라피』)

≪제20회 대한사협전≫ 신문회관 화랑 (『경향신문』 및 실물자료)

제28차 정기총회 개최≪제4회 백오사진상≫ 시상 (『포토그라피』)

≪제21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매일경제』 및 실물자료)

≪제5회 백오사진상≫ 시상≪제22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실물자료)

≪이해선 사진작품전≫ 신문회관 화랑 (『동아일보』)

정기총회 개최 및 ≪제6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이정훈 공로상 박필호) (『포토그라피』)

≪제23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제30차 정기총회 개최 반도아케이드 4층 카페테리아≪제7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 이완섭 작품상 김형승 양승호 김기현)유자격 정회원 한국사협에 단체로 입회

제31차 정기총회 개최 및 ≪제8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안장헌)≪제24회 대한사협전≫ 신문회관 화랑 (『동아일보』)

제32차 정기총회 개최 대동관 (『매일경제』)

≪제9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 정헌태)추계촬영대회부산지회 설립

고문 김조현 회장 이해선부회장 김조현 총무 김석현이사 성두경 안준천 오인창 박병호 감사 윤상운

고문 김조현 김종양 회장 이해선 부회장 안준천 이순흥 총무 성두경이사 김석현 손석현 이완섭 서윤석감사 윤상운

총무 김용필이사 성두경 서윤석

고문 김조현 명예회장 이해선회장안준천 부회장성두경 이순흥총무 김용필이사 서윤석 안장헌박훈서양승호감사이완섭

고문 박필호rarr김종양이사 양승호(면)

고문 박필호 김조현 김종양명예회장 이해선 회장 안준천부회장 성두경 이순흥총무이사 김용필 이사 서윤석 박훈서 안장헌 양승호 감사 이완섭

고문추대 장남수

고문 박필호 김조현 김종양 장남수안준천 명예회장이해선 회장성두경부회장 이순흥 총무이사 안장헌 이사 서윤석 이정훈 이완섭 김형승 김완기 감사 김용필

≪제1회 대한민국건축 및 사진 전람회≫(91~20 국립공보관)

봄 국전 4부에 사진middot건축middot공예 신설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출처)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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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영상』)

제33차 정기총회 개최 대동관 제9대 성두경 회장 연임≪제10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본회 주관-양수리)춘계 촬영대회(양수리)제2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태종대)제3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동학사)≪제1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대전지회 주최)≪제26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영상』)

제34차 정기총회 개최≪제11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김완기 공로상대전 윤필수)≪제27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영상』)

제주지회 폐쇄

『백오이해선사진집』 출판기념회 예총화랑 (『매일경제』 및 『영상』)

제35차 정기총회 개최 제10대 성두경 회장 연임≪제12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 조임환)≪제28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제2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 대전시민회관 (『영상』)

제36차 정기총회 개최 및 ≪제13회 백오사진상≫ 시상제4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통도사 범어사)제5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갑사 마곡사)≪제3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및 ≪제12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대전시민회관 (『영상』)

≪제29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제37차 정기총회 개최 제11대 이순흥 회장 취임≪제14회 백오사진상≫ 시상≪제30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제4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13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대전시민회관 (『영상』)

백오 이해선 선생 작고

제38차 정기총회 개최 미성옥≪제15회 백오사진상≫ 시상제6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해운대)제7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관촉사 쌍계사)≪제5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1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39차 정기총회 개최 한일장 제12대 이순흥 회장 연임≪제16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최진연)충주지회 설립제8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지회 주관-수옥정)제9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속리산)≪제6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2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고문 박필호(면) 김종양(면)

고문 김조현 장남수 안준천 성두경명예회장 이해선 회장 이순흥 부회장 이완섭 김용필 총무 이정훈 이사 안장헌 김완기 박동운 송정웅송주헌 심재욱 송정회감사 서윤석 윤필수

이사 최진연 박명식

81~83년 성두경 한국사진작가협회 부이사장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출처)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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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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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차 정기총회 개최≪제17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0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미륵사지)≪제7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11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 대둔산 도산계곡)≪제33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1차 정기총회 개최제13대 이순흥 회장 연임≪제18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2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하회마을)≪제8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13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지회 주관-탄금대)≪제34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2차 정기총회 개최 파인 힐≪제19회 백오사진상≫ 시상고창지회 설립제14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을숙도)

『대한사협회보』 복간호(제6호) 발간고 백오 이해선 선생 추모비 건립≪제9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5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3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20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5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고창지회 주관-선운사)

『대한사협회보』 제7호 발간제16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본회주관-용인민속촌)구미지회 설립≪제10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6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4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21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7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신원사)대천지회 설립문화부에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문화가족으로 등록제18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지회 주관-탄금대)≪제11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7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5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22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9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경주일원)≪제38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제12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

제46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23회 백오사진상≫ 시상제20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천-대천해수욕장)≪제39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감사 서윤석(면) 박노택

고문 김조현 이순흥회장 안준천부회장 김용필 안장헌총무 최진연이사 김완기 송주헌 송정회 심재욱 박노택 조창만감사 이정훈 고승웅

이사 송주헌 황응천 원종철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회장 김용필 부회장 이정훈 박노택총무 최진연 이사 안장헌 김완기 정완철 송주헌 심재욱 원종철 박부공황순조 황응천 김태영 감사 송정회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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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 모란룸≪제24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최진연)고 백오 이해선 선생의 한국사단 발전에 기여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白烏李海善寫眞文化賞)≫ 제정≪제40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한국의 풍물 사진공모전≫ 대한사협 호영출판사 공동주최

제48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1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유동호)원주지회 설립이천지회 설립청주지회 설립≪제41회 대한사협전≫ 코닥포토살롱제21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속리산)

제49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2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황규태)제22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엑스포장)고창지회 폐쇄≪제3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윤주영)≪제42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대한사진술가협회 창립50주년 작품집』 발간

제50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전주지회 설립≪제4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최민식)≪제43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1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대한사협회보』 제8호 발간제23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원주지회 주관-치악산)남원지회 설립≪제44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2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5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강상규)

『대한사협회보』 제9호 발간제24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대청호)대구지회 설립김제지회 설립≪제45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3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6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이순흥)

『대한사협회보』 제10호 발간제25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구지회주관 - 경주OK그린청소년 수련원)≪통일염원 전국사진공모대전 작품전시회≫ 개최(대구지회 주최-대구 동아쇼핑 전시관)≪제7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송기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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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회장 안장헌 부회장 이정훈 김완기총무 송정회 이사 원종철 송주헌 한창동 황순조 박부공 허현 감사 박노택 최진연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자문위원 안장헌 회장 이정훈부회장 김완기 박노택 총무한창동이사 원종철 김완선 이순재 박부공 이광호 이재옥 김광범 양호용감사 황순조 최진연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자문위원 안장헌 이정훈 회장 박노택 부회장 김완기 최진연 총무 이광호이사 박부공 이재옥 윤중일감사 한창동 조창만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 박노택자문위원 안장헌 이정훈회장 김완기부회장 황순조 박부공총무 윤중일이사 김광범 김준영 강승규 김이경감사 한창동 이재옥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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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1

≪제46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원주지회 폐쇄

제54차 정기총회 개최 대림정대한사협사진강좌 개최(연8회) 월례촬영회 개최(연8회)제26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 서울대청호

『대한사협회보』 제11호 발간대한사협 대구지회-중국 연길시 촬영가협회와 자매결연(연길시 청년호텔)원주지회 재설립≪제8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최흥만)≪제47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창립 55주년 기념 『2000대한사협사진집』 발간

제55차 정기총회 개최 대림정대한사협 사진강좌 개최(연8회) 월례촬영회 개최(연5회)정읍지회 창립제27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정읍 내장산)≪제48회 대한사협전≫ 및 CD작품집 제작 예총화랑 제1전시실

제56차 정기총회 개최 사랑채월례촬영회 개최(연4회)제28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서울 남한산성)≪한중 국제교류전≫ 대한사협 대구지회 대구 대덕문화회관≪제49회 대한사협전≫ 및 CD작품집 제작 예총화랑 제1전시실

제57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월례촬영회 개최(연6회)제29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 중앙탑공원)≪제9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김한용)≪제50회 대한사협전≫ 및 2003대한사협작품집(CD작품집) 발간예총화랑1-2전시실

『대한사협회보』 제12호 발간

제58-60차 정기총회 개최제51-53회 ≪대한사협전≫제30-32회 전국회원촬영대회대한사협 인터넷홈페이지 개설(wwwpaakoreacom)제1회 대한사협 사진공모전

『대한사협회보』 제13호 발간『창립60주년 전국회원전 작품집』 발간(2005)이해선 선생 탄신 100년기념 유작전(대구middot충주middot원주middot대전middot전주순회전) 개최 및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보는 1950-60년대』 (눈빛) 발간(문화관광부middot조선일보 후원)남원지회 청주지회 구미지회 폐쇄(2006년)전주지회 설립(2006년)

제61-63차 정기총회 개최≪제54-56회 대한사협전≫제33-34회 전국회원촬영대회이천지회 폐쇄(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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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위원rarr고문 안장헌 이정훈고문추대 방대훈이사 강승규(면) 김이경(면) 원종철 김광석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 박노택안장헌 이정훈 방대훈 회장 김완기 부회장 황순조 유병주(대전) 총무이사 윤중일이사 김준영 원종철 김광석 심재욱감사 강승규 이재옥

총무이사 윤중일(면) 최인호

회장 최진연

회장 최진연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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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지회 김제지회 원주지회 폐쇄(2008년)한밭지회 설립(2008년)≪제10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안장헌 2007)≪제11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조세현 2009)

제64차 정기총회 개최 PJ호텔 4층 카라디움≪제57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제35회 전국촬영회

제65차 정기총회 개최 충무로 아스토리아호텔제36회 전국촬영회 및 대천지회 전국 사진인리더 초청세미나(한화콘도 세미나실 대천해수욕장)김제지회 재설립(지회장 이성수 총무 구반반) ≪제58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

제66차 정기총회 개최 충무로 아스토리아호텔≪제12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안희탁) 제37회 전국촬영회 및 대천지회 전국사진인 리더 초청 세미나(대천해수욕장내 청주대 수련원 및 머드축제광장)울산지회 설립(지회장 이헌배 총무 심화실) ≪제59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

2013년 제1차 이사회 개최 충무로 통로이미지(주) 회의실 참석 이정훈 외8명제67차 정기총회 개최 캐피탈호텔 뷔페식당 스카이(그릴 룸)≪제60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회원 자질 향상을 위한 사진학 강좌 개설(강사 진동선 2013~2014)

≪제13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마이클 케나(MichaelK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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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정건영

회장 이철집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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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3

김 완 기(金莞祁 1944~ )

1962 충주고등학교 졸업

1964 청주교육대학교 졸업

1969 《제1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입선

1977~1991 KBSEBS방송 출연 15년

1989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교육학 석사)

1990~1999 《대한민국사진전림회》 8회 입선

1993~1999 청영회 회장 역임

1997 《제16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 특선

1998 교육부 초등교육정책과장 역임

1999~2013 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 3회 역임

1999~2014 《전국사진공모전》 심사위원 70회 역임

2002 강남구사진작가회 창립회원 및 회장 역임

2003 서울성북교육청 교육장 역임

2004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초대작가

《서울특별시사진대전》 초대작가

《제1회 김완기사진전》 세종문화회관별관 광화문갤러리

2004~2008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 역임

2005 2013 제24회 제31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심사위원 역임

2005~2007 서울특별시사진작가협의회 초대 회장 역임

2006 『김완기사진집』 출판 창조집단 시빌구

《제2회 김완기사진전》 세종문화회관별관 광화문갤러리

2008~2014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조정위원

2011 《서울특별시사진대전》 운영위원 역임

2011~2014 APC뉴스(한국예술사진인연합회) 회장

2013 김완기 자서전 『분필과 셔터로 그린 자화상』 출판 하얀나무

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고문

강남구사진작가회 자문위원

서울특별시사진작가협의회 고문

청영회 고문

한국사진작가협회 자문위원

구 술 자 연 보

안장헌(安章憲 1947~ )

1969 2 고려대학교 농업경제학과 졸업

1966~2014 고려대학교 호영회 창립회원 호영동우회 회장역임 및 회원

1968~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원 이사(1973~1992) 회장(1993~1995) 현 자문

1973~1975 동화출판공사 『한국미술전집』 사진담당

1976~1977 월간 『영상』 편집장

1977~1979 현암사 『한국미술오천년』 기획 및 편집책임

1979~1995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 3회 역임 현 자문위원

1980~2005 호영문화사 편집인

1981~1992 신구대 사진과 강사

1984~1987 서울교육대학 미술교육과 객원교수(사진학)

1990~1994 롯데문화센터 사진교실 강사

1994~1998 삼성사진문화교실 전임강사

1995~2014 한국불교사진협회 고문

1995~2014 (사)신라문화원 이사 현 자문위원

2000~2014 경주 계림사우회 지도교수

2004~2009 동강사진마을 운영위원

2005~2014 문화유산사진연구소 소장

2009 봉은사진교실(봉은사) 강사

2010~2014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 안장헌디지털사진교실 지도교수

그룹전

1966~2014 고려대학교 호영회 호영동우회 회원전 80여점 출품

1968~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전(17~60회전) 70여점 출품

1990 《사진가 8인전》 후지포토살롱

1994 《한국현대사진의 흐름전》 〈산사일기〉 출품

1996 《Image ofKoreanCultual Heritage》 UNESCO본부 파리

1997 《Buddist Images ofKorea》 독일 함부르그

1997~1998 《서울사진대전》 〈낙선재 일곽〉 〈금원에서〉 출품

1997~2014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전 19점 출품

1998~1999 《경기도사진작가초대전》 출품

1999 《한일사진교류전~자연과 인간을 향하여》 출품

2001 《아름다운 우리 문화재 4인전》 국립진주박물관

2004 《한국다큐멘터리사진 33인전》 동강사진축전

개인전

1996 《서라벌 빛 그리고 향기》 서라벌문화회관

2002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신라문화원 화랑

2003 《세계문화유산과 경북》 경주문화EXPO솔거방

2007 《왕릉의 호랑이》 동강사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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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창호》 인사동 갤러리 북스

2010 《돌 호랑이 그림 호랑이》 인사동 갤러리 북스

2012 《선비의 고향 서원》 인제대 도서관 김학수기념박물관

주요 사진저작

1982 『석불』 호영

1989 『석굴암』 예경

1991 『경주 남산의 탑골』 열화당

1992 『선의 세계』 호영

1993 『영겁의 미소』 불광

1994 『신라의 동해구』 열화당

1996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삼성문화재단

1998 『서원』 열화당

2002 『신라의 마음 경주』 한길아트

『남산』 한길아트

2003 『돌에 새긴 정토의 꿈~석불』 한길아트

『석조미술의 꽃~석가탑과 다보탑』 한길아트

『사진으로 보는 한국미~무늬』 호영

2005 『BUDDHA~Bildnisse ausStein inKorea』 ErnstWasmuthVerlog

Tubingen 독일 베를린

2006 『범종~생명의 소리를 담은 장엄』 한길아트

저서

1987 『국립공원』 김성옥 문순화 송기엽 안장헌 공저 호영)

1995 『사진으로 배우는 사진촬영교실』 호영

2001 『아름다운 우리문화재』 관조 김대벽 한석홍 안장헌 공저 국립진주박물관

2003 『문화유산 일기』 진선출판사

수상

1977 《백오사진상》 작품상 수상(대한사진예술가협회)

1999 『서원』으로 《간행물윤리상》 저작상 수상(간행물윤리위원회)

2006 《한국사진문화상》 공로상 수상(한국사진작가협회)

2007 《이해선사진문화상》 수상(대한사진예술가협회)

2011 《대한민국문화유산상(대통령상)》 봉사활용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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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5

참 고 문 헌 목 록

「봄 국전심사에 물의 사진 심사위원에 시비」 『동아일보』 1977421

「봄 국전 심사 낙수(落穗)」 『경향신문』 1977425

「현대사진문화상 이해선 씨 뽑아」 『동아일보』 19781128

「사진문화-사협고문 이해선 씨 작품집 발간」 『매일경제』 19801129

「사진 50년 역사를 한 눈에」 『매일경제』 1981120

「사진작가 이해선 작품집 두 권 내놔」 『동아일보』 1981629

「부고-원로 사진작가 이해선 씨」 『동아일보』 1983111

「일화로 엮는 명암 100년 화단이면사( ) (27) 화가와 문인과 신식 여성」

『경향신문』 198554

「이해선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사진전」 『연합뉴스』 20051026

「lt단신gt 백오 선생 탄신 100돌 사진전」 『문화일보』 20051031

「사진예술가협회 창립 60주년 기념전」 『매일신문』 20051117

「문화의 향기-전시」 『부산일보』 200615

「백오 이해선 선생 미발표유작 사진전」 『부산일보』 200617

「[전북][광주전남][제주][대전충남]문화가」 『동아일보』 2006120

「영월 동강사진박물관-이해선 특별기획전 2007년 3월 첫 주까지」 『뉴시스』

20061227

「사진과 친해지려면 옛 서울역사로 가보세요」 『헤럴드경제』 201041

월간지 계간지

김용준 「서화협전의 의미」 『삼천리』 1931년 11월호

「lt부감(俯瞰)gt(이해선 작)gt」 『사진문화』 1956년 6월호

「아마츄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호

연성숙 「일제 한인귀족의 근황」 『진상(眞相)』 1960년 3월호

「창간사 이해선 씨」 『포토그라피』 1966년 8월호

「나의 발언」 『포토그라피』 1966년 8월호

「작가 지상초빙작가-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달의 작품사진 제주풍물-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해선 「해외 예술사진 감상실 (1회)」 『포토그라피』 1968년 4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6) 석가탄일」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7)」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제1회 새한사진콘테스트」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8) 동해진미」 『포토그라피』 1969년 9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9) 야채밭」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0) 건제(乾梯)」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제18회 국전 소식」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1) 초설(初雪)」 『포토그라피』 1969년 12월호

이해선 「돌과의 대화 30년」 『월간 중앙』 1969년 12월호

「초대작가 사진」 『포토그라피』 1970년 9월호

이해선 「고궁풍물(1)」 『포토그라피』 1971년 1월호

_______ 「고궁풍물(2)」 『포토그라피』 1971년 2월호

이해선 관련

일간지

「입선자의 방명록」 『매일신보』 1926512

이태준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1029

「금조개장한 동미전 제2회」 『동아일보』 1931412

홍득순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417

「인사(人事)」 『매일신보』 193886

이해선 「예술사진의 연혁과 개념」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동인전」 『경향신문』 19491115

「인사(人事)」 『경향신문』 1953110

이해선 「등하수상(燈下隨想)」 『동아일보』 19551112

_______ 「사진예술의 독자성」 『동아일보』 1956126

_______ 「사진 8인전 소감」 『경향신문』 195647

_______ 「백오(白烏)의 변(辯)」 『동아일보』 195749

「김포공항에 내린 덕혜옹주-이해선 씨가 부축하고 있다」 『경향신문』 1962126

「5월 예술상에 붙이는 제언」 『경향신문』 196231

「2명이 사퇴 사진부문심위원」 『경향신문』 1964109

「영예의 산실 안팎」 『동아일보』 19641013

「횡설수설-국전 사진부 이해선 심사위원 사퇴」 『동아일보』 19641014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중요한 내용middot형식 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1020

「열띤 감정으로 충만-창협 창립 사진전」 『동아일보』 1965119

「한국국제사진살롱 위원 명단」 『동아일보』 1965116

「동아국제사진살롱 심사평-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28

「제4회 사진동우회전」 『동아일보』 1966121

「동아사진살롱 심사평-총 801 응모」 『동아일보』 196729

「위원장에 이종우 씨 국전심사위원 위촉」 『동아일보』 1967920

「국전심사위원장 도상봉 씨 선출」 『경향신문』 1968919

「석우회(石友會)서 돌 전람회」 『동아일보』 1970428

「예술인에 훈장 이해랑 씨 등 9명」 『경향신문』 1972118

「외길 한평생 lt11gt 사진middot예술 이해선」 『선데이서울』 1973318

「현역 원로 작가 초대전 일제하의 침울이긴 예술자세 생생하게」 『경향신문』

1974831

「이해선 씨 작품전 향토풍물 50점 전시」 『동아일보』 19741118

「이해선 사진전」 『경향신문』 19741119

「이해선 사진 작품전 24일까지 신문회관」 『매일경제』 19741121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423

「국전운영위원 위촉」 『동아일보』 1976317

「국전사진부문 사단중진들 반발」 『동아일보』 1976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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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_______ 「고궁풍물(3)」 『포토그라피』 1971년 3월호

_______ 「고궁풍물(4)」 『포토그라피』 1971년 4월호

_______ 「고궁풍물(5)」 『포토그라피』 1971년 5월호

_______ 「고궁풍물(6)」 『포토그라피』 1971년 6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7)」 『포토그라피』 1971년 7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8)」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포토그라피 창간5주년에 붙여서」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9)」 『포토그라피』 1971년 9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0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1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2)」 『포토그라피』 1971년 12월호

「제2회 사진국전마감 심사위원결정」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이해선 「이해선 떡에 얽힌 시속(時俗)의 금석(今昔) 옛떡이 사라져 간다는데」

『월간 중앙』 1973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1)」 『포토그라피』 1973년 8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2)」 『포토그라피』 1973년 9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0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6)」 『포토그라피』 1974년 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7)」 『포토그라피』 1974년 3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8)」 『포토그라피』 1974년 4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9)」 『포토그라피』 1974년 5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끝)」 『포토그라피』 1974년 6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 『포토그라피』 1974년 7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2)」 『포토그라피』 1974년 8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3)」 『포토그라피』 1974년 9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4)」 『포토그라피』 1974년 10월호

_______ 「작가와 작품-풍물백태 중에서」 『포토그라피』 1974년 1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6)」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7)」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8)」 『포토그라피』 1975년 3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9)」 『포토그라피』 1975년 4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0)」 『포토그라피』 1975년 5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1)」 『포토그라피』 1975년 6월호

_______ 「곡필무사(曲筆誣事)를 밝힌다」 『월간 중앙』 1975년 11월호

「영상 창간 1주년 기념 좌담회 한국 사진 산업의 의 오늘과 내일」 『영상』 1976년 6월호

「국전 초대작가 8인선 김조현 이건중 이경모 이해선 임응식 이형록 정인선

조현두」 『영상』 1977년 1월호

「남기고 싶은 작품 3 이해선」 『영상』 1977년 5월호

「예술사진에 대한 견고한 확신 이해선 사진의 예술성」 『영상』 1978년 5월호

「한국현대미술대전」 『영상』 1978년 10월호

이명동 「처음 제정된 사진문화상에의 기대」 『영상』 1979년 2월호

「행사 백오 이해선 선생의 사진작품집 출판기념회」 『영상』 1981년 2월호

「작품집 소개 이해선 작품집 중에서」 『영상』 1981년 4월호

박재능 「다양한 자기 세계의 길」 『영상』 1981년 12월호

「영상방담-사단의 이 얘기 저 얘기 김정래 임석제」 『영상』 1982년 1월호

「이미지의 합창-봄의 첫 장」 『영상』 1982년 4월호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 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호

岩宮武二 「너 어디 있느냐」 『영상』 1983년 1월호

최인진 「1930년대의 아마츄어 사진활동」 『사진사연구』 통권 제5호 1983년 9월호

박재능 「월평-원로 이해선 선생을 추모한다」 『영상』 1983년 12월호

「한국 근대미술의 발자취」 『계간미술』 중앙일보사 1985년 봄호

「다시 보는 명작 정도선 정인선 신현국 강대환 김일창 이해선」 『영상』 1986년 10월호

「고 백오 이해선 선생 추모비 건립」 『영상』 1989년 1월호

「동경 유학생들의 한국 근대미술」 『월간미술』 1989년 9월호

「화보로 보는 한국 동경 유학생들의 자화상」 『미술세계』 1993년 5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조선총독부 관보』 제4087호(192647) 한국학문헌연구소 서울 아세아문화사 1926

이태현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1집 서

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2

_______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 자화상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3집 서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4

신명호 「일제하 이왕직과 이왕가 족보」 『한국학대학원논문집』 제11집 한국정신문화

연구소 1996

최인진 「한국사진 역사의 증인(4) - 사단의 단체 활동과 이해선」 『한국사진』 2002

이가라시 코이치 이중희 역 「조선미술전람회의 창설과 서화」 『한국근대미술사학』

제12집 한국근대미술사학회 2004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의 입학제도와 조선인 유학생」 『동악미술사』 제6호 2005

허보윤 「미술로서의 디자인 이순석의 1946-1959년 응용미술교육」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단행본

조우석 『한국사진가론』 눈빛 1998

작품집 도록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1926

이해선 『이해선 사진작품집』 평화당 1980

_______ 『한국의 고궁』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0

Tucker Anne Iizawa Kotaro Kinoshita Naoyuki The History of

Japanese Photography London YaleUniversityPress 2003

이해선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남은 1950-60년대』 눈빛 2005

_______ 『이해선 사진집 1950~1960년대 이야기』 동강사진박물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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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7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일간지

「부산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24531

「성공을 기대 조선사진연구회 현일영 씨 담」 『조선중앙일보』 1936826

「경성아마사진구락부 제1회전」 『조선일보』 1938417

「사진작품전」 『동아일보』 19381014

「경성사진동호회 작품전람회개최」 『조선일보』 19381027

「사진동호회작품전」 『동아일보』 1938112

「경성아마추어 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39527

「아마추어 사진인화전」 『매일신보』 19391115

「동서남북-lsquo아마추어rsquo 제4회 인화전람회」 『동아일보』 19391115

「동서남북-합동인화전」 『동아일보』 1940126

「아마추어 사진의 인화전」 『매일신보』 194074

「경성아마츄어 제5회 인화전」 『조선일보』 194075

「경성백양사우회 제1회 인화전람회 개최」 『매일신보』 19401113

「제2회 사진전 명일부터 화신에서-백양사우회」 『매일신보』 19411124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55

「사진작품전」 『조선일보』 1946119

「전국문화총연발족」 『동아일보』 194729

「제1회 조선사진예술전」 『경향신문』 19475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7510

「사진전람회개최」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전응모작 답지」 『경향신문』 1947615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 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629

「제1회예술사진전람회 15일부터 동화백화점」 『경향신문』 1947713

「예술사진 입선 수상식을 거행」 『경향신문』 1947720

「예술사진전 19일부터」 『동아일보』 1947121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8224

「사예(寫藝) 2회전 작품을 현상모집」 『경향신문』 19481013

「예술사진전 심사 오는 8일로 연기」 『동아일보』 1948127

「지방출품우수-제2회 예사전」 『동아일보』 19481212

「사진예술전 22일부터 동화화랑서」 『동아일보』 19481221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964

「전국종합사진전 심사결과-특선1석 최인집 씨」 『동아일보』 194977

「사진예술의 정화-제3회 전국예술사진전」 『경향신문』 19491010

「예술사진전 30일로 마감박도」 『경향신문』 19491128

「예술사진전 입선자 발표」 『경향신문』 19491213

「예술사진전시회」 『동아일보』 195316

「춘계사진섭영회 26일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3

「본사후원 춘계촬영대회 오늘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6

「사진현상모집」 『경향신문』 1953517

「특선에 lt만춘gt」 『경향신문』 1953527

「인화 당선자 수여식」 『경향신문』 1953529

「사진작품발표전」 『경향신문』 1954413

「예술사진전시회 US-S화랑서」 『동아일보』 1954415

「집회」 『동아일보』 1954916

「경복궁서 촬영대회」 『경향신문』 1954919

「내 26일 촬영대회 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4922

「사연 촬영대회 여감(餘感) 아마추어 사진도(寫眞道)」 『동아일보』 1954103

「문화집합」 『동아일보』 1955122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77

「사연(寫硏) 창립 10주년 기념 어제 촬영대회 성황」 『동아일보』 1955711

「촬영대회 입선작 결정」 『동아일보』 1955819

「8인 사진전 개최」 『동아일보』 1956329

「9회 사연(寫硏)전」 『동아일보』 1957414

「신록촬영대회 개최 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62

「대한사진예술가협회서 사진전시회 개최」 『동아일보』 1958711

「10년 후의 우리 문화 건국 20주년을 장식하고 싶은 것」 『동아일보』 1958821

「사진예술가협회 11회 회원작품전」 『동아일보』 195979

「문화 소식」 『동아일보』 1960119

「국전에 사진부문도」 『동아일보』 1963410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결정 특선 조천용 작」 『동아일보』 19641020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653

「렌즈의 향연 영예의 초점-제4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동아일보』 196667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61217

「사진예술가협회전」 『동아일보』 19681022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9830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996

「국립공보관 12월 전시회 스케쥴」 『경향신문』 1971126

「문화단신」 『경향신문』 19721128

「사진예술협 작품전 7일까지 공보관서」 『매일경제』 1973111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에 안준천 씨」 『경향신문』 197526

「동아포우스트」 『동아일보』 19751117

「사진예술가협회 창립30돌 기념전」 『경향신문』 19751118

「추계 친목 촬영대회」 『매일경제』 197610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7830

「사진예술가협 정총(定總) 31일 하오 대동관서」 『매일경제』 19781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81031

「문화광장」 『동아일보』 1993121

「한국사진예술 50년을 펼친다」 『한겨례』 1994111

「사진예술가협 사라진 풍물전」 『서울신문』 20051025

월간지 계간지

「사진클럽 지상소개 대한사협의 발자취」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박필호 「논단 대한사협16회전을 보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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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대한사협 16회전」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사협 16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8년 7월호

「대한사협 충남지부 회원전」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경축 창간 3주년 사진과 관광 포토그라피-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대한사협 18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제18회 대한사협전」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 작품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70년 3월호

「축 창간4주년 서울 선데이 카메라 클럽」 『포토그라피』 1970년 8월호

「축 포토그라피 창간 5주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김종양 씨 대한사협 고문 추대」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3년 3월호

「lt파도gt 김도현 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신춘초대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근하신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75년도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창작선」 『영상』 1977년 1월호

「전시장 순례 대한사진협회 회원전」 『영상』 1977년 11월호

「지상소개-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대한사협 제27회 정기총회 개최」 『영상』 1979년 7월호

박필호 「대한사협 27돐에 대한 축사」 『영상』 1979년 7월호

「제26회 대한사협전」 『영상』 1980년 1월호

「제27회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사진전시회」 『영상』 1980년 12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요강」 『영상』 1981년 5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영상』 1981년 10월호

「탐방-뜻이 있으면 길이 있게 마련 세 번째 전국대학사진 공모전을 연 대한사협충

남지회의 단합된 모습」 『영상』 1983년 1월호

「제3회 전국대학생사진 공모 제12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월호

「제13회 대한사협 충남 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2월호

최인진 「경성아마츄어카메라구락부를 말한다」 『사진사연구』 1984년 7월호

「대한사협본부 주최 제9회 한국국제사진전 입상자」 『영상』 1989년 1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대한민국예술원 편 『한국예술총감 자료편』 대한민국예술원 1965

한국사진협회 「사진계소식 1969년도」 『한국사진연감』 1970

_____________「한국사진협회의 연혁 1976년 10월 30일」 『한국사진연감』 1976

임범택 「사진」 『1977년도 문예연감』 1978

______ 「사진」 『1978년도 문예연감』 1979

한국사진협회 「역대역원명단(歷代役員名單) 1962년~1987년」 『한국사진연감』

1988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제1장 한국사진협회 창립 이전의 사진계 동향」 『한국사협

사 I 1945-1970』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01

최인진 「해방 초기의 사진잡지 연구-『국제보도』와 『사진문화』를 중심으로」 『한국

사진학회지 AURA』 제10호 2003

박혜성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사진문화』 목록 및 해제」 『한국 사진 잡지

『사진문화』 연구』 명지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한국사협 50년사』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13

단행본

임응식 『내가 걸어온 한국사단 임응식 회고록』 눈빛 1999

작품집 도록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제16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7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8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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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9

원 문 자 료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년 10월 29일 4면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년 4월 17일 4면

1 이해선 양화기(洋畵期) 관련 참고 자료

「입선자의 방명록」『매일신보』 1926년 5월 12일 3면

「금조 개장한 동미전 제2회」『동아일보』 1931년 4월 12일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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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참고 자료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년 5월 5일 2면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년 6월 29일 3면

「신록촬영대회개최-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년 6월 2일 4면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년 7월 7일 4면

예술사진전 조선사진예술연구회에서는 5월 6일부터 동11일까지의 6일간에 걸쳐 동화백화점(舊三越) 갸라리--에서 창립기념사진전을 개최하기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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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해선 관련 원문 자료

원문은 당시의 표기를 그대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현재의 띄어쓰기와 맞춤법에 맞지 않는 부분들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수정하였고 일부 [ ] 안에 병기했다 원문의 한자는 모두 한글 독음으로 고쳤으며 의미 전달을 위해 필요한 경우 ( )안에 병기했다

「대담 아마추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 pp 48~52

작가가 사태(沙汰)났어

본지 공사간에 바쁘실 텐데helliphellip 사진문화의 발전을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

해 주십사 하는 것은helliphellip 요즘 각 직장이나 학생들 간에 사진열이 굉장히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 비

추어서 이 아마추어 카메라맨의 지도 문제를 비롯하여 초보자의 진로랄까helliphellip 이런 문제에 대한 말

씀을 좀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해선6middot25 동란 후에 개인적으로 사진을 연구해 보겠다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직장이나 학교 단위로

사진동호자의 클럽이 많아 지고 작품 발표라던가 전시회 같은 것이 무척 많아졌는데helliphellip 어쨌든

일반 사회인이나 학생 간에 사진열이 높아졌다는 건 기쁜 일이야

임응식그런데 아직도 이 카메라를 사치품으로 취급하는 층이 많아서 곤란해요

이 나라(정부)에서부터 사치품 취급을 하더군helliphellip 여자들이 다이아몬드를 사려는 것과 사진을 연구하

려는 사람이 카메라 장만하는 것을 똑같이 취급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곤란

하지

임 헌데 우리 사단(寫壇)에선 우선 lsquo사진작가rsquo라는 용어를 쓰는 데에 신중을 기해야 하겠어요 웬 놈의

lsquo사진작가rsquo가 그리도 많은지helliphellip 이건 카메라만 메고 다니면 모두 작가 행세를 하니helliphellip

이 카메라 멘 것이 모두 lsquo작가rsquo라면 대한민국에 lsquo사진작가rsquo가 수 십만도 될 걸helliphellip 작가라는 친구들을

체에 넣어서 걸러 놓으면 엄격한 의미에서 진짜 lsquo작가rsquo는 몇 사람 밖에 없을 텐데helliphellip

임 호주머니에 만년필을 꽂았다고 해서 문학가 혹은 소설가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겠는데hellip

hellip 어쨌든 요즘 성행하는 사진작가의 사태를 우선 잡지에서 만이라도 용어 사용에 엄격한 규정을

지어서 질서를 잡아 주어야겠어요

이 그것도 과도기적 현상이겠으니까 차차 지양되겠지helliphellip 오늘 해달라는 얘기는 그런 넋두리가 아닐

테니까 어디 이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본지 한마디로 얘기하자면helliphellip 카메라는 어떻게 해서 장만을 했는데 mdash 자 그 다음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겐지 몰라서 어쩔 줄 모르는helliphellip 이런 아마추어와 초보자들의 진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얘기를

좀helliphellip 현재 직장 단위로 사진 동호자들이 모여서 클럽을 이룩한 것이 십 여 개 있고 학교 단위로는

이십 여 개나 되는데요helliphellip

관련 자료 소개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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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인식이 안이해서 탈이야

이 극히 초보적인 입장에서 사진을 해보고 싶다helliphellip 다년간 연구를 한 다음엔 작가가 돼 보겠다 mdash 하

는 사람들을 회원으로 해서 수 십 년 동안 연구를 해 왔는데helliphellip 오늘날 하고 있는 일도 그것이지만

helliphellip 여러 부문에 걸쳐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서적인 면에서 사진과 친해보고 싶다던가

또는 카메라를 장만했는데 어떻게 하면 앞으로 향상 발전할 수 있는가 mdash 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신인이라고 하겠지 특히 학생들의 교내 활동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helliphellip 헌데 막상 다다

르고 보면helliphellip 어떠한 길이 올바른 길인지 막연해 하는 모양이더군요

임 초보자들은 무엇보다도 사진 자체에 대한 정의를 뚜렷이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아마추어 mdash

하면 취미적 입장에서 사진을 다루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조각이나 회화와 같이 사진도 어엿한 예술이니

까 취미 도락(道樂)적인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예술을 추구하는 진지한 마음의 준비가 우선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물론이죠 대개 클럽 조직이 되어 있으니까 선생들의 지도를 받고 있겠지만 내가 알기에는 전문가

가 아닌 다시 말하면 취미 정도에서 관심이 있는 선생들이 지도를 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역시 전문으

로 사진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지도를 가끔씩이라도 받는 게 좋겠지요

임 지도를 한다는 사람들의 태도부터가 성실성이 없는 것 같아요 만년필을 샀으니까 나도 한 번 써 보

자 mdash 해서 작가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취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남의 lsquo지도rsquo를 담당

할 수는 없을 텐데 mdash 우리가 사진을 전공한대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억지로 지도해 주겠다고 밀고

들어 가겠다는 건 아니지만 mdash (웃음) mdash 어쨌든 전문가의 지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학생 클럽이나 직장 클럽 같은 동호자의 모임을 사단의 일부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취미

에서 시작했더라도 일정한 과정을 밟고 다년 연구를 거듭하면 자연히 작가를 지향하게 되겠지만hellip

hellip 그런 면에서도 처음 싹트기 시작하는 신인의 지도가 퍽 중요한 것이지요

취미middot도락이란 관념을 버려야 해

임 지금 형성되어 있다는 직장이나 학교 단체의 거의 전부가 전문적인 입장에 서 있지 않은 것 같더군

요helliphellip 사진에 대한 근본 의식이 너무도 안이한 것 같아요 카메라를 통한 표현의식에 절실한 감정

이 없어요helliphellip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비판을 받지 않는다helliphellip 하는 따위의 도피를 해서는 곤란

하죠helliphellip 창작의식이 확고하게 수립되지 않아서는 향상이 없는 것인데helliphellip 소문에 듣자면helliphellip 너

무 기술 면에만 치중하고 정신적인 면이 소홀히 취급된다는 거에요 helliphellip 나는 직장을 갖고 있으니

까 사진이란 것은 취미 정도로 한다 mdash 하는 태도를 버려야죠 특히 이 점은 지도자들에게 권하고 싶

은데helliphellip 예술의식helliphellip 이것이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절대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까

이 그렇구 말구요helliphellip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새로 사진을 공부하겠다는 신인들에게 네 가지 의식을 주

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휴머니즘 mdash 우선 사람이 돼야 하거든요 교양이라던가 인격 덕망helliphellip 이런 면에서 인간이

돼 있어야 하고 둘째는 사진예술을 한다고 해서 사진예술이 무엇이냐helliphellip 이것만을 추궁해서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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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요 좀 더 시야를 넓혀서 예술이라는 게 뭐냐 mdash 하는 걸 먼저 알아야지 셋째에 가서 사진예술이

라는 게 뭐냐 mdash 를 연구하고 넷째에 가서야 비로소 작품이라던가 창작의식 기교 기술에 대한 검

토를 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기본조건을 머리 속에 언제나 간직하도록 나는 주장해 왔어요

임 기술면을 등한히 할 수는 없겠지요 기술 없이는 표현이 안되니까helliphellip 그러나 이선생 말씀처럼 인

간본연의 문제도 크긴 큽니다 다른 예술부문의 사람보다 교양면에서 뒤떨어지지나 않는가 mdash 하는

것이 항상 염려되는데helliphellip 만일 뒤떨어진다면 큰일이지요 기술도 중요한 문제겠지만 교양인격 같

은 것도 예술가가로서의 긍지를 위해선 떨어질 수 없는 문제고helliphellip 더욱이 좋은 기술을 가졌으면서

도 기초교양이 모자라서 좋은 작품을 낼 수 없다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으니까helliphellip 교양인으로서의

자격도 다른 예술부문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사진을 해야할겝니다

이 기교나 기술을 어떻게 우물쭈물 배웠다고 해서 작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helliphellip 예술이란 그 자체

에 대한 조예부터 깊어야 합니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조리개가 얼마다 타임이 어

떻다helliphellip 암실작업은 어떻게 하는 거다helliphellip 이것만을 알았다고 해서 작가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에

요helliphellip 인간면 예술면 기술면에 똑 같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마 사진을 연구하겠다는 신

인들의 기본이념이 돼야 할겝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지도한다는 면에서

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거든요 mdash

임 어쨌든 기술을 위주로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난 옛날 얘기입니다

지도자 시비

이 지났다기 보다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는 장래에나 변할 수 없는 기본이념이겠지요 사진이라는 것

은 더욱이나 고도의 대중성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인격과 교양이 필요해요 기계라는 거야 찍으면

사진이 되도록 마련된 것이니까 예술까지는 못 가도 사진은 되거든 mdash 그러니까 그것을 예술로 이

끌려면 찍는 사람의 성분이 문제되는 것이지요helliphellip

임 그런 의미에서도 사단의 규정이 필요하고 작가라는 규정이 필요해요 사단이라는 것에 너무 엄격한

규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helliphellip 만년필을 가졌다고 해서 전부 문학가가 아니라면helliphellip 카메라를 메었

으니 작가다 mdash 하는 엉터리도 용납될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우선 필요한 것은 취미 도락이라는 관념

을 지양해야 할 텐데helliphellip

이 취미가 차차 심각해지면 창작의식도 생기는게니까helliphellip 그런 사람들을 지도 계몽해서 한 사람이라

도 작가로 이끌어야 하겠지요helliphellip 카메라를 살 때부터 나는 사진작가가 되겠다 mdash 하는 사람은 있

을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임 lsquo싼데이rsquo 카메라맨은 논의의 대상이 안되구요helliphellip (웃음)

이 그러니까 지도자들이 작가적인 태도에 확고한 이념을 앞세우고 지도에 임해야 하는 건데helliphellip

본지 각 단체 지도층의 지도방침에 대한 구체적인 태도를 어떻게 규정하겠습니까 helliphellip

임 우선 사진에 대한 인식부터 고쳐야 해요 말이 중복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친구 좋고 사진 좋아서 우리

끼리 하면 그만이다 mdash 하는 생각들이 많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만이라도 그렇지 않다

관련 자료 소개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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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싶어요 학생들이 카메라를 사 가지고 몇 사람 모였으니까 책임자 격

인 선생이 필요하다 mdash 해서 책임 맡았다는 사람으로는 지도가 안 될 게 아닙니까 그렇다고 청해 오

지도 않는데 내정 격으로 뛰어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구helliphellip (웃음)

본지 또 한 가지 요즘 일대 성황을 이루는 것이 소위 현상사진(懸賞寫眞)이라는 건데요helliphellip 이 현상사진

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진에 대한 모욕도 있지helliphellip

임 거 참 꼴사나운 일이 많아요 현상이란 걸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helliphellip 그 하나는 어느 연구

단체에서 순수한 의미에서 발표 바탕이 없는 아마추어를 위해 마련하는 경우가 있을게고 또 하나는

선전용으로 포스터 mdash 같은 데에 써먹기 위한 상업 정책적인 의식에서 모집하는 현상이 있을 테지요

이 어느 경우이건 간에 좌우간 현상 모집을 하는 목적이 있는데helliphellip 응모자는 우선 현상의 목적부터 확

실히 알고 응모를 해야 하겠지helliphellip

임 그렇죠 그런데 이 상업 정책적인 현상의 경우에는 사진문화에 대한 모욕적인 행동이 퍽 많습니다

이거 참 불유쾌한 일이지만helliphellip 가령 예를 들자면 응모자는 원판을 제공하라던가 또 낙선자의 작

품은 일체 반환치 않는다는 따위helliphellip이게 얼마나 사진예술에 대한 모욕적 행위입니까 helliphellip

이 그래요helliphellip 확실히 모순된 일입니다

임 필요에 의해서 현상모집을 했으니까 당선된 작품은 물론 필요하겠지만helliphellip 낙선작품을 반환치 않는

다는 것은 언어도단 입니다 낙선이 됐다 해도 작가의 입장으론 대단히 귀중한 하나의 작품일 텐데

그걸 안 돌려 준대서야 말이 되나요 주최측은 낙선작품의 원화를 돌려 줄만한 성의를 가져야 도리

에 맞을 텐데helliphellip 요즘 현실은 lsquo낙선rsquo이란 푸대접 밑에 원판까지 몰수당하는 판국이니helliphellip 원 참

이 그러니까 응모자는 무엇보다도 현상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지helliphellip 여러 번 겪은 일이지만 심사를

하다 보면 전혀 현상 취지를 도외시한 작품들이 있는데helliphellip

임 그거야 보나마나 낙선이죠 (웃음)

이 그러믄요 현상 응모자로서는 출품 규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 아니겠어요

임 그럼요

이 그런데 어떤 것은 작품에 제목도 없는 것이 있거든요 그런가 하면 제목과 작품내용이 전혀 특이한

엉터리도 있구helliphellip

임 저도 여러 번 겪은 일입니다

이 제목이란 것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벌써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찍는다는 의식이 있는 이상

제목도 정해져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아주 작품과 제목이 동떨어진 것들이 응모해 오니까

낙선의 자격이 충분할 수밖에helliphellip 하하하 (웃음)

임 그게 모두 사진에 대한 성의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이 그래요 성의가 없어요 자기 작품에 대해선 최선의 성의를 다 해야 할 텐데 그런 태도가 없거든helliphellip

제목을 안 썼는지 못 썼는지는 모르지만helliphel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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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그저 무턱대고 발표의식만 왕성한 까닭이 아닐까요

이 그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된 작가가 아닌 이상 발표기회가 좀처럼 없을 테니까

자기 실력의 평가를 받는다던가 남들과 경쟁해 본다는 의미에서 현상에 자주 응모하는 것은 좋은데

helliphellip 아 어떤 친구는 자기 실력 생각은 하지도 않고 상품이 적다 많다 시비를 하는 친구도 있으니 참

기가 막힐 일이지

주최자의 무성의도 고쳐져야 하고

임 그건 lsquo현상rsquo이라고 내거는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순수한 사진연구단체에서 모집할 때는

lsquo공모전rsquo이라던가 하는 문구가 좋지 않을까요 lsquo현상rsquo이라니까 lsquo상rsquo을 바라게도 되겠지만 어쨌든

lsquo현상rsquo이란 말 자체가 순수하지 못해요

이 그건 확실히 생각해 볼 문제이겠군요helliphellip 순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helliphellip 응모자들이 심

사원이 누구냐mdash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도 순수하지 못하고helliphellip 또 주최자가 모집광고를 낼 때

lsquo심사원은 추후발표rsquo라mdash하는 것도 순수하지 못해요 이것도 참 불쾌한 일인데 lsquo추후발표rsquo라는 걸

다시 생각하면 lsquo준비가 안됐다rsquo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심사원의 준비도 안 해 놓고 현상을 모

집하는 그런 무성의가 또 어디 있어helliphellip 이건 일종의 사기가 아니면 거만일 겝니다

임 그나 그뿐인가요 lsquo심사원은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함rsquohelliphellip 하는 모호한 광고도 있지요 응모자의 입

장에서 생각하면helliphellip 심사원에 불만이 있으면 응모를 아니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 심사원 문제만

은 정정당당히 명시해야만 나중에 가서 심사에 대한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출품을 한 다음에 심사

원이 발표된다는 것은 심사에 대한 불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helliphellip

이 그리고 응모자의 동태를 가만히 보면 아까 얘기가 나왔던 소위 lsquo취미정도rsquo라는 층의 발표 의욕이 굉

장해서 대부분의 응모자가 이 부류인 것 같은데helliphellip 여기 한 가지 탈이 있어요 현상응모 작품의 심

사라는 것은 무제한의 심사 레벨을 놓고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응모 작품 중에서의 우수 작품을 가

려낸다는 것은 이거 상식 문제가 아닙니다

임 그렇죠

이 아 그런데 어떻게 해서 현상에 당선이 되거나 특히 특선이라도 하면 그만 자기가 갑자기 위대한

작가라도 된 것처럼 대가연(大家然) 하고 으쓱대는 친구들이 많아서 걱정이야helliphellip (웃음)

이 lsquo특선rsquo이라는 것은 응모해 온 작품들 중에서 특선이지 결코 한국 사단 전체의 수준에서 특선이라

는 것은 아닌데helliphellip 그만 한 번만 당선되면 코가 높아지고 대뜸 대가 행세를 하려고 드니helliphellip 참

신인들은 특히 조심해야 할 일이지

남의 것보고hellip 우리 것도 보내고hellip

본지 이제 화제를 좀 바꾸어서 세계사단의 동향을 좀 말씀해 주실까요

임 세계사단의 얘기라면 직접 보아야만 얘기가 될 텐데helliphellip

이 서울 바닥에서 썩으면서 세계사단의 얘기를 어떻게 본 듯이 할 수가 있겠나 카메라를 메고 세계일

관련 자료 소개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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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도 했어야 얘기가 되지

임 그것보다도 사진을 통한 국제 교류 얘기나 합시다

이 그게 좋겠군helliphellip 얼마 전에 덕수궁에서 자유중국의 소개사진전시가 있었죠 미국공보원의 활동도

이를 테면 국제교류의 한 형식일게고helliphellip

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자유중국과 월남의 사진전시가 있었는데helliphellip 우리도 수출을 한다면 그 보

다 훨씬 좋은 작품들이 나갈걸요helliphellip

이 한미합동전이던가 한중합동전 같은 것도 하면 역시 국제교류가 되겠지요helliphellip

임 한미합동전은 불원한 장래에 개최될 것입니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lsquo인간일가(人間一家)rsquo의 사진

이 아마 이월쯤 한국에 올 겝니다 미국대사관이 주동이 돼서 작품 503점 전부의 전시회 계획이 추

진되고 있으니까요

이 남이 보내줘서 본 것은 있지만 우리가 남에게 보여준 것은 없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야 우리도 남에

게 보여줘야 교류가 될 텐데helliphellip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두 사람의 작품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임 개인적인 활동은 있었지요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사진살롱에 사진을 보내고 있으니까 개인

적으로는 더러 나간 셈이죠 개인들의 수출이라도 좀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지만

이 우리의 것을 내보내고 외국 것을 들여와서 서로 감상하고 연구하는 게 이를 테면 국제교류인데

아마 명년쯤엔 될까 몰라

임 작품교환전 같은 것을 위해서 대대적인 계몽운동이 필요 하겠죠

이 그렇죠 운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어요

임 그런데 근본적인 얘기를 하자면 한국 작가의 역량이 아직도 부족한 것 같아요 언젠가 외국 작가에

게서 들은 말인데mdash한국 사람은 한국을 보지 않았다mdash하는 얘길 해요 사진 작가에게 대한 말이지

만helliphellip 나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이 퍽 중요한 얘기다mdash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를 직시하는 것만이

사진은 아니겠지만 실용사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것이 사실 아닐까요 회화적인 쌀롱 픽처라던

가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리얼리즘 사진이라는 것에 너무들 치우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 국제 교류의 시발은 역시 소개적(紹介的)인 것 다시 말해서 르포르타주적인 것이겠으니까helliphellip

임 외국 작품의 모방 같은 것은 이제 집어치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mdash예술적인 것 이것만을 너무 추

구했기 때문에 사실이 한국적인 것과 국민성의 묘사 같은 것이 잘 되지 않았지요 정서적인 것에만

너무 골몰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일이고 helliphellip 예술을 위한 예술에 정신들이 팔려 있었지나 않은

지helliphellip 예술을 하기 위한 사진이라는 관념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이 예술을 염두에 안 둔다면 실용사진이 돼 버리게

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너무 치우친 것 같단 말입니다

이 특히 국제 교류를 생각한다면 아닌 게 아니라 외국처럼 르포르타주적인 사진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할거에요

임 그래요 거기에 예술성을 띄워서 소화할 만한 역량 있는 작가가 필요해요

이 또 하나의 가장 큰 문제는 위정자의 관심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 큰 난관입니다 국제 교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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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가족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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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말이고 역시 정부당국자의 적극적인 주

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어디 그래요

임 우선 사단 자체의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작가들의 작업도 촉구되어야 하구helliphellip 아까도 말이 나왔지

만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 출품을 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점 같은데서 작가들의 반성도 필

요하고helliphellip

이 개별적으로 미국 등지에 보낸 것은 아마 상당한 수가 되겠지요

임 그럼요 그랬는데 왜 성과가 없느냐mdash하는 반성이 있어야죠

이 오늘의 현실을 예술적인 면에서 기록하고 작품화 해야겠는데helliphellip 막연하게 예술을 위한 작품을 보

내니까 기교적으론 훌륭할지 몰라도 작품 자체에 내용이 없어서helliphellip 그래서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닐

임 그런 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빨리 우리의 수준을 높여서 국제 조류와 호흡을 맞추어 나가

야 할 것입니다

이 이거 아마추어를 위한 얘기라는 것이 잠깐 탈선을 한 것 같군 그러나 이런 문제도 참고가 되긴 하니

까helliphellip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합시다

본지 수고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helliphellip

(기록 O기자)

이해선 「lsquo백오(白烏)rsquo의 변(辯)」 『동아일보』 1957년 4월 9일 4면

30여년 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입학

이 되었을 당시 자축기념하는 의미에서 호(號)를

하나 지어본 것이 백오(白烏)라는 두 글자였다 처

음 듣는 사람들 중에서는 거문[검은] 까마귀는 있

지만 흰 까마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서로 웃어버리고 그 뜻을

설명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자의

(字意)를 해명해볼까 한다 백(白)은 흰 빛이요 오

(烏)는 흑색으로 통하므로 우선 흑백을 대조시켜

놓고 흰 종이 위에다 검은 먹으로 휘호(揮毫)할 것

이니 그 뜻이 내 생활과 부합될 것 같으며 둘째로

백 자(字)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첫 자를 떼어놓

고 오는 반포오(反哺烏)로 그 이름이 높은 새이므

로 평소에 효자 노릇을 못하여 온 나의 좌우명으로도 적당할 듯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새 중에서는

혹간(或間) 백변종(白變種)이 생겨나는 수가 있는데 그 흰새를 서조(瑞鳥)라고 떠들던 옛 시절도 있었으므

관련 자료 소개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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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내가 우연히 호를 지어 본 것이 검은 까마귀떼 속에서 서조 백오를 발견하였으니 나의 전도(前途)에는

반드시 서광(瑞光)이 비칠 것 같으므로 이상 여러 가지 의미를 차례로 생각해 볼 때에 나에게는 이 외에 더

좋은 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자의였었고 궁금한채로 불려온 백오

였었다 만담궁변(漫談窮辯)을 물소물책(勿笑勿責) 하소서 (사진가)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

이해선 「중요한 내용middot형식-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년 10월 20일 5면

사진작품에는 사진 특유의 형식이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러한 특유의 형식에 알맞은 표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의 특수성은 형식이 가지는 특수성 보다는

기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주관적이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작품심사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동일하게 중요시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작

품 속에서 그야말로 형식과 내용이 알맞게 부합된 특출한 작

품을 볼 수는 없었다 형식이 좋으면 내용이 빈약하고 좀 내

용이 있으면 형식이 미숙하고helliphellip 모두 결점이 있다 그러나

입상작으로 뽑은 8 점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

다 그리고 금년에는 lsquo칼러rsquo사진의 응모 점수가 30점이나 되

고 그중에서도 3점이 입상되었고 또 9점이 입선되었다는 것

은 lsquo칼러rsquo 사진의 앞날을 위해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lt전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장gt

[제1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년 2월 8일 5면

외국작품의 세련되고 빈틈없는 lsquo테크닉rsquo은 국내작품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서 우선 국내

작품을 형식에서부터 누르고 말았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이루게 된 것은 국내작가들

의 역량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lsquo국산인화지rsquo가 얼마나 엉터리고 조악한 것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대체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더욱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은 이와 반대적인 경향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예술이든 먼저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볼 때 국내작품의 후진성은

두말할 것 없이 형식의 경시에 있다고 하겠다 심사결과 흑백부에서나 lsquo칼라rsquo부에서 겨우 동상으로 한 점

씩 밖에 국내작품이 입상되지 못했다는 것은 다소 섭섭한 느낌이나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경종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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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더욱 우리 심사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독에서 응모한 lsquo칼라rsquo

작품이었다 물체의 외관 색감을 초월한 내면의 lsquo이미지rsquo가 발

산하는 짙은 감정의 색감으로 작가의 개성과 사상을 인상 깊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내 lsquo칼라라보rsquo의 후진

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상작으로 뽑힌 외국작품들은 오

늘의 세계 사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는 큰 자극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

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제2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총 818점 응모-사진예술에 도움」

『동아일보』 1967년 2월 9일 4면

지난해와 같이 흑백부문에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들은 모두가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산인화지의 조악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작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올해는 흑백

부문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기꺼운 일이라고

하겠다

특히 칼라작품에 있어서는 독일의 작품들이 특출했고 이들 작품들의 색감은 현대 과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 최고상으로 뽑힌 lt잊은 친구gt와 몇 점의 입상작품들은 칼라릴리프와 소라리

세이숀[솔라리제이션] 등의 수법으로써 모티

브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를 초객체적이고 추

상적으로 표현하고 작가의 짙은 개성과 사상

과 철학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입상작으로 뽑은 16점의 작품들은 오늘의

세계사단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

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심사위원 이해선 (위원장) 임응식 서순삼

박필호 안월산 정인성 최경덕 (이상 7명)

관련 자료 소개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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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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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관련 자료 소개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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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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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관련 자료 소개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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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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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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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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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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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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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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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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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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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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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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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가회동에서 농수공 이달용의 장남으로 출생

경성종로공립심상고등소학교 졸업

경성중학교 졸업

춘곡 고희동 선생에게 1년여 동안 사사(1923년 경)

일본의 가와바타미술학교( )에서 1년 수학(1924년 경)

동경미술학교( ) 서양화과(西洋畵科) 특별학생(特別學生)으로 입학

조선총독부 주최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花〉 입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 졸업 졸업작품은 〈나부〉 〈자화상〉

《제10회 서화협회전》 〈선인장〉 출품 휘문고등보통학교 대강당

일본에서 귀국 후 서화협회(書畵協會) 회원 가입 (《서화협회전》 3~4회 출품했다고 전해진다)

동경미술교조선동창회 주최 동아일보사 학예부 후원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 동창회전 《제2회 동미전》 〈자화상〉 〈침묵〉

〈추상〉 〈나부〉 출품 동아일보사 3층 강당

《제11회 서화협회전》 〈수밀도〉 출품 휘문고등보통학교 대강당

《삼화백 소묘전람회》 구본웅 도상봉 이해선 참여 종로 사롱멕시코

이왕가박물관(창덕궁 소재) 한국 고미술품 관리위원

이왕가덕수궁미술관(덕수궁 석조전에 신설) 운영위원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 창립 회원 지도위원

백양사우회 창립 회원 지도위원

『아사히사진연감』에 lt아이 보는 아이gt 수록

조선사진예술연구회(현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창립 및 지도위원

조선사진예술연구회 회장

예술사진동인회 창립 (김정래 김광배 이해선 임응식 박필호 최계복 박영진 현일영으로 구성된 전국적 지도급 사진가 모임)

《제2회 전국사진공모입선작품전》 심사위원 (이해선 박필호 안철영)

《제1회 한국향토문화사진전》 심사위원

《제1회 전국종합사진대현상모집》 심사위원

예술사진동인회 주최 《예술사진동인전》 〈수선(水仙)〉 〈옥외정물(屋外情物)〉 〈잔광(殘光)〉 〈만추점경(晩秋點景)〉 〈경연(競娟)〉

출품(8인 30점 전시) 서울충정로1가 대원화랑

예술사진동인회 재부양화가일동(在釜洋畵家一同) 주최 《예술사진과 양화 합동전》 〈수선〉 〈옥외정물〉 〈잔광〉 〈만추점경〉

〈경연〉 출품(예술사진부middot양화부 총 15인 참여) 부산 미국공보원

동방사진문화사(『사진주보』 발간) 고문

대한사진예술연구회 주최 취미사진청강회 강의 아카데미 다방

동방사진문화사 동방사진뉴~스사 주최 공보부 대한 행신문협회 후원 《제1회 전국예술사진전람회》 심사위원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

《제8회 대한사진예술연구회전》 lt풍창(風窓)gt lt귀면(鬼面)gt lt춘일(春日)gt 출품 미국공보관 화랑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고문

《8인사진전람회》 (김제권 남상준 방대훈 서순삼 성두경 이훈 이해선 지부원) 동화백화점 4층 화랑

『사진문화』 주최 인간가족사진전 사진집 좌담회 참가

《제9회 대한사진예술연구회전》 lt춘설gt lt국밥집gt 찬조출품 동화백화점화랑

《제10회 대한사협전》 lt강변모색(澗邊暮色)gt lt석가성탄(釋迦聖誕)gt 찬조출품 공보실공보관

이 해 선 연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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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불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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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대한사협전》 lt설청(雪晴)gt lt묵상gt 찬조출품 중앙공보관

《제12회 대한사협전》 lt어촌풍물gt lt강변즉흥gt 찬조출품 중앙공보관

《제13회 대한사협전》 lt고목회춘gt lt추양(秋陽)gt 찬조출품 중앙공보관

516군사정권의 lsquo포고령 제6호rsquo에 의해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비롯한 모든 사진단체들이 해산됨

사단법인 한국사진협회(현 한국사진작가협회) 창립 당시 고문 역임

《한국사진협회 전국회원전》 〈한정〉 출품

문화공보부 주최 《신인예술상》 사진부 심사위원

《제13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사진부 심사위원 사퇴

동아일보사 주최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위원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

동아일보사middot사진동우회 공동주최 《한국국제사진살롱》 심사위원

《제14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사진부 심사위원 및 lt한정(閒靜)gt 출품 국립현대미술관

석우회(1965년 창립) 회원으로 활동

《제14회 대한사협전》 lt봄볕gt lt취주(吹奏)gt lt무아경gt 출품 중앙공보관

《제15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불참

동아일보사 주최 《제4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위원

신문협회 주최 《보도사진전》 심사위원

《제4회 사진동우회전》 찬조출품 신문회관

《조흥은행 본점 신축 이전 기념 사진전middot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제15회 대한사협전(초대) 직원작품전》

lt노변아취(路邊雅趣)gt lt고흥(高興)gt lt영상gt 출품 조흥은행 본점 2층 전시장

동아일보사 주최 《동아국제사진살롱》 심사위원

《창포수석전》 서울 아랍문화회관

《제16회 대한사협전》 lt유적gt lt벽gt lt명암gt 출품 중앙공보관

《제16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동아일보사 주최 《제2회 동아국제사진살롱》 심사위원

《종합미술전》 〈도선역( )〉 출품 중앙공보관

《제17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사진부 분과위원장 및 lt추모(追慕)gt 출품

《제17회 대한사협전》 lt장날gt lt나드리gt lt곡성(曲城)gt 출품 국립공보관

《제1회 새한칼라 사진콘테스트》 심사위원

《제18회 대한사협전》 lt돌풍gt lt관등일gt 출품 국립공보관

《제1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사진부 심사분과 위원장 및 초대작가 lt산성gt 출품 국립현대미술관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미술 부문 심사위원

《제2회 아사히펜탁스월드포토콘테스트》 심사위원

《석우회 돌전람회》 국립공보관

《제9회 한국사진문화상》 (사진발전 및 인재양성) 공로상 수상

《제1회 건축 및 사진전람회》 심사위원 부위원장 사진분과위원 및 초대작가 국립공보관

《제19회 대한사협전》 lt정물gt lt가게gt 출품 국립공보관

《대한사진예술가협회상》 공로상 수상

예총창립 10주년 기념 및 문화예술인대회 문화예술인 표창 국민포장( ) 수상

연도 일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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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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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문화공보부 주최 《한국근대미술 60년》 국립현대미술관

《제2회 건축 및 사진전람회》 심사위원장 및 초대작가 국립공보관

《제20회 대한사협전》 〈잉어잡이〉 〈장날〉 출품 신문화랑

《제3회 건축 및 사진전람회》 초대작가

《제21회 대한사협전》 lt풍창(風窓)gt 출품 국립공보관

대한사진예술가협회 명예회장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제23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및 초대작가

한국사진작가협회 주최 사진 강좌 충청지구 이해선 lt국전과 사진gt 강좌

《한국현역원로작가 초대전》 사진부문 초대작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분관

《제22회 대한사협전》 lt추수gt lt고흥(高興)gt 출품 국립공보관

《고희기념 이해선 작품전 향토풍물》 신문회관 화랑

《제1회 국제사진교류전》 참여 국립공보관

《제24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제4부 심사위원장 사진분과위원 및 초대작가 국립현대미술관

《제23회 대한사협전》 lt조춘(早春)gt lt어촌풍경gt 출품 국립공보관

《서울특별시문화상》 심사위원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운영위원(제4부 분과위원장) 2회 연임

현대칼라 주최 《제1회 현대사진문화상》 수상

한국사진작가협회 전동경사진연맹 공동 주최 문화공보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주한일본대사관 월간사진 후원

미화사진필름주식회사 협찬 《제1회 한일친선대회》 참가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 편 『한국현대미술사(사진)』 추진위원 (이해선 외 5명)

《제29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제30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별세

『이해선 사진작품집 주제 향토풍물』 평화당

『한국의 고궁』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사진으로 남은 1950~60년대』 눈빛

『이해선 사진집 1950~1960년대 이야기』 동강사진박물관

『사진문화』 『카메라 예술』 『포토그라피(현 월간사진)』 『영상』 등 사진잡지에 작품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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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일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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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한 사 진 예 술 가 협 회 연 혁 1 9 4 5 ~ 2 0 1 4참고자료 일간지 『경향신문』 『동아일보』 『매일경제』 『조선일보』 월간지 『포토그라피』 『영상』 단행본 『내가 걸어온 한국사단』(임응식 눈빛 1999)

『한국사협사 I』(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01) 『한국예술총감 자료편』(예술원사무국 1965) 및 실물자료

일러두기 본 자료는 대한사진예술가협회로부터 제공받은 연혁을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 수정 및 보완된 내용의 경우 출처를 표시하였다

또한 정확한 날짜나 시기를 확인하지 못한 경우 lsquorsquo 표시로 대신했다

각 저술마다 조선사진예술연구회의 창립 시기는 1~2년 차이를 보이나 1957년 『동아일보』에 실린 창립12주년 촬영대회 개최 기사 및 대한사진예술가협회의 연혁을 참고해 1945년으로 보았다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출처)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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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진예술연구회(朝鮮寫眞藝術硏究會) 창립- 815 해방과 더불어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1937)와 백양사우회 (白羊寫友會 1939)의 중견회원 및 기타 지방 사진인들을 규합하여 전국적인 단체로 발족

≪창립기념사진전≫ 동화백화점 화랑 (『동아일보』)

≪제2회 작품전람회≫ 동화백화점 화랑 (『조선일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계기로 회 명칭을 대한사진예술연구회(大韓寫眞藝術硏究會)로 개칭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全國文化團體總聯合會) 가입 (『동아일보』)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람회≫ 동화백화점 화랑 (『경향신문』)

- 심사위원 이해선 박필호 안철영- 입선자 고종일 이동호 안성호 등≪제3회 대한사연회원전≫ 50여 점 동화백화점 화랑 (『동아일보』)

『대한사협회보(大韓寫硏會報)』 제1호 제2호 발행

≪제2회 조선예술사진전람회≫ 동화백화점 화랑 (『동아일보』)

- 입선자 안월산 이경모 임윤창 등

≪제3회 전국예술사진전≫ 동화백화점 화랑 (『경향신문』 및 『한국사협사 I』)

- 심사위원 현일영 이해선 박필호 이규완- 입선자 정희섭 최창희 강윤형 등

부산사진예술연구회와 ≪합동예술사진전≫ 부산 미화당 화랑 (『내가 걸어온 한국

사단』 및 『한국사협사 I』)

- 출품자 김용진 송미구 임응식 이병삼 조상규 정인성(이상 부산사연)김조현 김한용 박영진 신상우 임석제 오인창 이최형 지부원 조명원허승균(이상 대한사연)

≪제4회 작품발표전≫ 부산 루네싼스 다방 (실물자료)

취미사진청강회 대한사연 주최 강사 이해선 아카데미 다방(소공동) (『경향신문』)

아마추어사진현상촬영대회 창경원 (『경향신문』)

≪현상인화전시회≫ 대한사연 주최 미원 다방 (『경향신문』)

≪제5회 작품발표전≫ 부산 국제구락부 (실물자료)

≪제6회 작품발표전≫ 은령(銀鈴)다방 (실물자료)

10월 창립8주년 기념 촬영대회 개최

≪제7회 작품발표전≫ 미국공보원 (『경향신문』 및 실물자료)

지도위원 이해선초대회장 박영진창립회원 김정래 박필호 현일영 이규완 오인창 이태웅

회장 이해선

기획간사 김조현

회장 이규완부회장 김조현

사무실 명동 문진양행

사무실 부산 광복동사진재료상(박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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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9주년 기념 촬영대회 경복궁 (『경향신문』)

창립9주년 기념 촬영대회 ≪당선작품 발표 사진전≫ 미국공보원 (실물자료)

『대한사협회보』 제3호 제4호 발행

정기총회 개최 한창양행 (『동아일보』)

『대한사협회보』 제5호 발행≪제8회 작품발표전≫ 미국공보원 (실물자료)

창립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봉은사 및 뚝섬 일대 (『동아일보』)

창립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당선작품 발표 사진전≫

정기총회 개최 한창양행창립 11주년 기념 촬영대회 개최 덕수궁창립 11주년 기념 촬영대회 ≪입선작품전≫ 미국공보원 화랑

회 명칭을 대한사진예술가협회(大韓寫眞藝術家協會)로 개칭≪제9회 대한사연전≫ 동화백화점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창립 12주년 기념 신록촬영대회 창경원 (『동아일보』)

정기총회 개최≪제10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창립 13주년 기념 추계촬영대회 덕수궁

≪제11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창립 14주년 기념 추계촬영대회창립 13주년 및 창립14주년 기념촬영대회 ≪당선사진전≫ 중앙공보관 화랑 (실물자료)

창립 15주년 기념촬영대회 ≪당선작품전≫ 중앙공보관 화랑 (실물자료)

≪제12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제13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실물자료)

한국사협 창립(61~63년 이해선 고문 김조현 부이사장)정부 시책에 따라 일시 해산

대전지회 설립

대한사협 출신들이 모여 ≪사진예술동인전≫ 김조현 외 17명 49점 중앙공보관 (『한국예술총람 자료편』)

문화예술단체 해금령에 따라 대한사협 재건 정기총회 개최

대한사협 수요회 개최 연지동 동해루

정기총회 개최 (『동아일보』)

≪제14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제15회 대한사협전≫ 조흥은행 본점 2층 전시장 (실물자료)

제주지회 설립≪제16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실물자료)

고문박필호김광배서순삼박영진회장 이해선 부회장 조명원 최창희총무 방대훈 남상준간사 조준영 이훈 지부원 이석준 김조현

고문 이해선 회장 김조현부회장 지부원 총무 방대훈간사 이훈 남상준

회장 김조현부회장 방대훈총무 지부원

회장 김조현

고문 김조현 회장 이해선부회장 안준천 총무 김석현

회장 이해선부회장 김조현

문교부에 국전 사진부 신설을 진정

제13회 국전에 사진부 설치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출처)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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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차 정기총회 개최 북창동 한양관『제16회 대한사협전 작품집』 발간 (실물자료)

≪제17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제17회 대한사협전 작품집』 발간 (실물자료)

제24차 정기총회 개최 및 ≪백오사진상(白烏寫眞賞)≫ 제정≪제18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실물자료)

『제18회 대한사협전 작품집』 발간 (실물자료)

제25차 정기총회 개최≪제1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김석현 공로상 이순흥)

제26차 정기총회 개최 및 제2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9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경향신문』 및 실물자료)

제27차 정기총회 개최이해선 회장에 공로상패 증정 및 제3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이순흥 김석현) (『포토그라피』)

≪제20회 대한사협전≫ 신문회관 화랑 (『경향신문』 및 실물자료)

제28차 정기총회 개최≪제4회 백오사진상≫ 시상 (『포토그라피』)

≪제21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매일경제』 및 실물자료)

≪제5회 백오사진상≫ 시상≪제22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실물자료)

≪이해선 사진작품전≫ 신문회관 화랑 (『동아일보』)

정기총회 개최 및 ≪제6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이정훈 공로상 박필호) (『포토그라피』)

≪제23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제30차 정기총회 개최 반도아케이드 4층 카페테리아≪제7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 이완섭 작품상 김형승 양승호 김기현)유자격 정회원 한국사협에 단체로 입회

제31차 정기총회 개최 및 ≪제8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안장헌)≪제24회 대한사협전≫ 신문회관 화랑 (『동아일보』)

제32차 정기총회 개최 대동관 (『매일경제』)

≪제9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 정헌태)추계촬영대회부산지회 설립

고문 김조현 회장 이해선부회장 김조현 총무 김석현이사 성두경 안준천 오인창 박병호 감사 윤상운

고문 김조현 김종양 회장 이해선 부회장 안준천 이순흥 총무 성두경이사 김석현 손석현 이완섭 서윤석감사 윤상운

총무 김용필이사 성두경 서윤석

고문 김조현 명예회장 이해선회장안준천 부회장성두경 이순흥총무 김용필이사 서윤석 안장헌박훈서양승호감사이완섭

고문 박필호rarr김종양이사 양승호(면)

고문 박필호 김조현 김종양명예회장 이해선 회장 안준천부회장 성두경 이순흥총무이사 김용필 이사 서윤석 박훈서 안장헌 양승호 감사 이완섭

고문추대 장남수

고문 박필호 김조현 김종양 장남수안준천 명예회장이해선 회장성두경부회장 이순흥 총무이사 안장헌 이사 서윤석 이정훈 이완섭 김형승 김완기 감사 김용필

≪제1회 대한민국건축 및 사진 전람회≫(91~20 국립공보관)

봄 국전 4부에 사진middot건축middot공예 신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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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영상』)

제33차 정기총회 개최 대동관 제9대 성두경 회장 연임≪제10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본회 주관-양수리)춘계 촬영대회(양수리)제2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태종대)제3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동학사)≪제1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대전지회 주최)≪제26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영상』)

제34차 정기총회 개최≪제11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김완기 공로상대전 윤필수)≪제27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영상』)

제주지회 폐쇄

『백오이해선사진집』 출판기념회 예총화랑 (『매일경제』 및 『영상』)

제35차 정기총회 개최 제10대 성두경 회장 연임≪제12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 조임환)≪제28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제2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 대전시민회관 (『영상』)

제36차 정기총회 개최 및 ≪제13회 백오사진상≫ 시상제4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통도사 범어사)제5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갑사 마곡사)≪제3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및 ≪제12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대전시민회관 (『영상』)

≪제29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제37차 정기총회 개최 제11대 이순흥 회장 취임≪제14회 백오사진상≫ 시상≪제30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제4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13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대전시민회관 (『영상』)

백오 이해선 선생 작고

제38차 정기총회 개최 미성옥≪제15회 백오사진상≫ 시상제6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해운대)제7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관촉사 쌍계사)≪제5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1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39차 정기총회 개최 한일장 제12대 이순흥 회장 연임≪제16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최진연)충주지회 설립제8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지회 주관-수옥정)제9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속리산)≪제6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2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고문 박필호(면) 김종양(면)

고문 김조현 장남수 안준천 성두경명예회장 이해선 회장 이순흥 부회장 이완섭 김용필 총무 이정훈 이사 안장헌 김완기 박동운 송정웅송주헌 심재욱 송정회감사 서윤석 윤필수

이사 최진연 박명식

81~83년 성두경 한국사진작가협회 부이사장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출처)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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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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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차 정기총회 개최≪제17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0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미륵사지)≪제7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11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 대둔산 도산계곡)≪제33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1차 정기총회 개최제13대 이순흥 회장 연임≪제18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2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하회마을)≪제8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13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지회 주관-탄금대)≪제34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2차 정기총회 개최 파인 힐≪제19회 백오사진상≫ 시상고창지회 설립제14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을숙도)

『대한사협회보』 복간호(제6호) 발간고 백오 이해선 선생 추모비 건립≪제9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5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3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20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5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고창지회 주관-선운사)

『대한사협회보』 제7호 발간제16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본회주관-용인민속촌)구미지회 설립≪제10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6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4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21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7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신원사)대천지회 설립문화부에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문화가족으로 등록제18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지회 주관-탄금대)≪제11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7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5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22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9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경주일원)≪제38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제12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

제46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23회 백오사진상≫ 시상제20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천-대천해수욕장)≪제39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감사 서윤석(면) 박노택

고문 김조현 이순흥회장 안준천부회장 김용필 안장헌총무 최진연이사 김완기 송주헌 송정회 심재욱 박노택 조창만감사 이정훈 고승웅

이사 송주헌 황응천 원종철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회장 김용필 부회장 이정훈 박노택총무 최진연 이사 안장헌 김완기 정완철 송주헌 심재욱 원종철 박부공황순조 황응천 김태영 감사 송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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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 모란룸≪제24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최진연)고 백오 이해선 선생의 한국사단 발전에 기여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白烏李海善寫眞文化賞)≫ 제정≪제40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한국의 풍물 사진공모전≫ 대한사협 호영출판사 공동주최

제48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1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유동호)원주지회 설립이천지회 설립청주지회 설립≪제41회 대한사협전≫ 코닥포토살롱제21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속리산)

제49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2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황규태)제22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엑스포장)고창지회 폐쇄≪제3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윤주영)≪제42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대한사진술가협회 창립50주년 작품집』 발간

제50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전주지회 설립≪제4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최민식)≪제43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1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대한사협회보』 제8호 발간제23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원주지회 주관-치악산)남원지회 설립≪제44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2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5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강상규)

『대한사협회보』 제9호 발간제24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대청호)대구지회 설립김제지회 설립≪제45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3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6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이순흥)

『대한사협회보』 제10호 발간제25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구지회주관 - 경주OK그린청소년 수련원)≪통일염원 전국사진공모대전 작품전시회≫ 개최(대구지회 주최-대구 동아쇼핑 전시관)≪제7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송기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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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회장 안장헌 부회장 이정훈 김완기총무 송정회 이사 원종철 송주헌 한창동 황순조 박부공 허현 감사 박노택 최진연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자문위원 안장헌 회장 이정훈부회장 김완기 박노택 총무한창동이사 원종철 김완선 이순재 박부공 이광호 이재옥 김광범 양호용감사 황순조 최진연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자문위원 안장헌 이정훈 회장 박노택 부회장 김완기 최진연 총무 이광호이사 박부공 이재옥 윤중일감사 한창동 조창만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 박노택자문위원 안장헌 이정훈회장 김완기부회장 황순조 박부공총무 윤중일이사 김광범 김준영 강승규 김이경감사 한창동 이재옥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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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1

≪제46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원주지회 폐쇄

제54차 정기총회 개최 대림정대한사협사진강좌 개최(연8회) 월례촬영회 개최(연8회)제26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 서울대청호

『대한사협회보』 제11호 발간대한사협 대구지회-중국 연길시 촬영가협회와 자매결연(연길시 청년호텔)원주지회 재설립≪제8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최흥만)≪제47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창립 55주년 기념 『2000대한사협사진집』 발간

제55차 정기총회 개최 대림정대한사협 사진강좌 개최(연8회) 월례촬영회 개최(연5회)정읍지회 창립제27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정읍 내장산)≪제48회 대한사협전≫ 및 CD작품집 제작 예총화랑 제1전시실

제56차 정기총회 개최 사랑채월례촬영회 개최(연4회)제28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서울 남한산성)≪한중 국제교류전≫ 대한사협 대구지회 대구 대덕문화회관≪제49회 대한사협전≫ 및 CD작품집 제작 예총화랑 제1전시실

제57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월례촬영회 개최(연6회)제29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 중앙탑공원)≪제9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김한용)≪제50회 대한사협전≫ 및 2003대한사협작품집(CD작품집) 발간예총화랑1-2전시실

『대한사협회보』 제12호 발간

제58-60차 정기총회 개최제51-53회 ≪대한사협전≫제30-32회 전국회원촬영대회대한사협 인터넷홈페이지 개설(wwwpaakoreacom)제1회 대한사협 사진공모전

『대한사협회보』 제13호 발간『창립60주년 전국회원전 작품집』 발간(2005)이해선 선생 탄신 100년기념 유작전(대구middot충주middot원주middot대전middot전주순회전) 개최 및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보는 1950-60년대』 (눈빛) 발간(문화관광부middot조선일보 후원)남원지회 청주지회 구미지회 폐쇄(2006년)전주지회 설립(2006년)

제61-63차 정기총회 개최≪제54-56회 대한사협전≫제33-34회 전국회원촬영대회이천지회 폐쇄(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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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위원rarr고문 안장헌 이정훈고문추대 방대훈이사 강승규(면) 김이경(면) 원종철 김광석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 박노택안장헌 이정훈 방대훈 회장 김완기 부회장 황순조 유병주(대전) 총무이사 윤중일이사 김준영 원종철 김광석 심재욱감사 강승규 이재옥

총무이사 윤중일(면) 최인호

회장 최진연

회장 최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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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지회 김제지회 원주지회 폐쇄(2008년)한밭지회 설립(2008년)≪제10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안장헌 2007)≪제11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조세현 2009)

제64차 정기총회 개최 PJ호텔 4층 카라디움≪제57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제35회 전국촬영회

제65차 정기총회 개최 충무로 아스토리아호텔제36회 전국촬영회 및 대천지회 전국 사진인리더 초청세미나(한화콘도 세미나실 대천해수욕장)김제지회 재설립(지회장 이성수 총무 구반반) ≪제58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

제66차 정기총회 개최 충무로 아스토리아호텔≪제12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안희탁) 제37회 전국촬영회 및 대천지회 전국사진인 리더 초청 세미나(대천해수욕장내 청주대 수련원 및 머드축제광장)울산지회 설립(지회장 이헌배 총무 심화실) ≪제59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

2013년 제1차 이사회 개최 충무로 통로이미지(주) 회의실 참석 이정훈 외8명제67차 정기총회 개최 캐피탈호텔 뷔페식당 스카이(그릴 룸)≪제60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회원 자질 향상을 위한 사진학 강좌 개설(강사 진동선 2013~2014)

≪제13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마이클 케나(MichaelK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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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정건영

회장 이철집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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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3

김 완 기(金莞祁 1944~ )

1962 충주고등학교 졸업

1964 청주교육대학교 졸업

1969 《제1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입선

1977~1991 KBSEBS방송 출연 15년

1989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교육학 석사)

1990~1999 《대한민국사진전림회》 8회 입선

1993~1999 청영회 회장 역임

1997 《제16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 특선

1998 교육부 초등교육정책과장 역임

1999~2013 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 3회 역임

1999~2014 《전국사진공모전》 심사위원 70회 역임

2002 강남구사진작가회 창립회원 및 회장 역임

2003 서울성북교육청 교육장 역임

2004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초대작가

《서울특별시사진대전》 초대작가

《제1회 김완기사진전》 세종문화회관별관 광화문갤러리

2004~2008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 역임

2005 2013 제24회 제31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심사위원 역임

2005~2007 서울특별시사진작가협의회 초대 회장 역임

2006 『김완기사진집』 출판 창조집단 시빌구

《제2회 김완기사진전》 세종문화회관별관 광화문갤러리

2008~2014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조정위원

2011 《서울특별시사진대전》 운영위원 역임

2011~2014 APC뉴스(한국예술사진인연합회) 회장

2013 김완기 자서전 『분필과 셔터로 그린 자화상』 출판 하얀나무

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고문

강남구사진작가회 자문위원

서울특별시사진작가협의회 고문

청영회 고문

한국사진작가협회 자문위원

구 술 자 연 보

안장헌(安章憲 1947~ )

1969 2 고려대학교 농업경제학과 졸업

1966~2014 고려대학교 호영회 창립회원 호영동우회 회장역임 및 회원

1968~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원 이사(1973~1992) 회장(1993~1995) 현 자문

1973~1975 동화출판공사 『한국미술전집』 사진담당

1976~1977 월간 『영상』 편집장

1977~1979 현암사 『한국미술오천년』 기획 및 편집책임

1979~1995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 3회 역임 현 자문위원

1980~2005 호영문화사 편집인

1981~1992 신구대 사진과 강사

1984~1987 서울교육대학 미술교육과 객원교수(사진학)

1990~1994 롯데문화센터 사진교실 강사

1994~1998 삼성사진문화교실 전임강사

1995~2014 한국불교사진협회 고문

1995~2014 (사)신라문화원 이사 현 자문위원

2000~2014 경주 계림사우회 지도교수

2004~2009 동강사진마을 운영위원

2005~2014 문화유산사진연구소 소장

2009 봉은사진교실(봉은사) 강사

2010~2014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 안장헌디지털사진교실 지도교수

그룹전

1966~2014 고려대학교 호영회 호영동우회 회원전 80여점 출품

1968~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전(17~60회전) 70여점 출품

1990 《사진가 8인전》 후지포토살롱

1994 《한국현대사진의 흐름전》 〈산사일기〉 출품

1996 《Image ofKoreanCultual Heritage》 UNESCO본부 파리

1997 《Buddist Images ofKorea》 독일 함부르그

1997~1998 《서울사진대전》 〈낙선재 일곽〉 〈금원에서〉 출품

1997~2014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전 19점 출품

1998~1999 《경기도사진작가초대전》 출품

1999 《한일사진교류전~자연과 인간을 향하여》 출품

2001 《아름다운 우리 문화재 4인전》 국립진주박물관

2004 《한국다큐멘터리사진 33인전》 동강사진축전

개인전

1996 《서라벌 빛 그리고 향기》 서라벌문화회관

2002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신라문화원 화랑

2003 《세계문화유산과 경북》 경주문화EXPO솔거방

2007 《왕릉의 호랑이》 동강사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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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창호》 인사동 갤러리 북스

2010 《돌 호랑이 그림 호랑이》 인사동 갤러리 북스

2012 《선비의 고향 서원》 인제대 도서관 김학수기념박물관

주요 사진저작

1982 『석불』 호영

1989 『석굴암』 예경

1991 『경주 남산의 탑골』 열화당

1992 『선의 세계』 호영

1993 『영겁의 미소』 불광

1994 『신라의 동해구』 열화당

1996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삼성문화재단

1998 『서원』 열화당

2002 『신라의 마음 경주』 한길아트

『남산』 한길아트

2003 『돌에 새긴 정토의 꿈~석불』 한길아트

『석조미술의 꽃~석가탑과 다보탑』 한길아트

『사진으로 보는 한국미~무늬』 호영

2005 『BUDDHA~Bildnisse ausStein inKorea』 ErnstWasmuthVerlog

Tubingen 독일 베를린

2006 『범종~생명의 소리를 담은 장엄』 한길아트

저서

1987 『국립공원』 김성옥 문순화 송기엽 안장헌 공저 호영)

1995 『사진으로 배우는 사진촬영교실』 호영

2001 『아름다운 우리문화재』 관조 김대벽 한석홍 안장헌 공저 국립진주박물관

2003 『문화유산 일기』 진선출판사

수상

1977 《백오사진상》 작품상 수상(대한사진예술가협회)

1999 『서원』으로 《간행물윤리상》 저작상 수상(간행물윤리위원회)

2006 《한국사진문화상》 공로상 수상(한국사진작가협회)

2007 《이해선사진문화상》 수상(대한사진예술가협회)

2011 《대한민국문화유산상(대통령상)》 봉사활용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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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5

참 고 문 헌 목 록

「봄 국전심사에 물의 사진 심사위원에 시비」 『동아일보』 1977421

「봄 국전 심사 낙수(落穗)」 『경향신문』 1977425

「현대사진문화상 이해선 씨 뽑아」 『동아일보』 19781128

「사진문화-사협고문 이해선 씨 작품집 발간」 『매일경제』 19801129

「사진 50년 역사를 한 눈에」 『매일경제』 1981120

「사진작가 이해선 작품집 두 권 내놔」 『동아일보』 1981629

「부고-원로 사진작가 이해선 씨」 『동아일보』 1983111

「일화로 엮는 명암 100년 화단이면사( ) (27) 화가와 문인과 신식 여성」

『경향신문』 198554

「이해선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사진전」 『연합뉴스』 20051026

「lt단신gt 백오 선생 탄신 100돌 사진전」 『문화일보』 20051031

「사진예술가협회 창립 60주년 기념전」 『매일신문』 20051117

「문화의 향기-전시」 『부산일보』 200615

「백오 이해선 선생 미발표유작 사진전」 『부산일보』 200617

「[전북][광주전남][제주][대전충남]문화가」 『동아일보』 2006120

「영월 동강사진박물관-이해선 특별기획전 2007년 3월 첫 주까지」 『뉴시스』

20061227

「사진과 친해지려면 옛 서울역사로 가보세요」 『헤럴드경제』 201041

월간지 계간지

김용준 「서화협전의 의미」 『삼천리』 1931년 11월호

「lt부감(俯瞰)gt(이해선 작)gt」 『사진문화』 1956년 6월호

「아마츄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호

연성숙 「일제 한인귀족의 근황」 『진상(眞相)』 1960년 3월호

「창간사 이해선 씨」 『포토그라피』 1966년 8월호

「나의 발언」 『포토그라피』 1966년 8월호

「작가 지상초빙작가-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달의 작품사진 제주풍물-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해선 「해외 예술사진 감상실 (1회)」 『포토그라피』 1968년 4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6) 석가탄일」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7)」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제1회 새한사진콘테스트」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8) 동해진미」 『포토그라피』 1969년 9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9) 야채밭」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0) 건제(乾梯)」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제18회 국전 소식」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1) 초설(初雪)」 『포토그라피』 1969년 12월호

이해선 「돌과의 대화 30년」 『월간 중앙』 1969년 12월호

「초대작가 사진」 『포토그라피』 1970년 9월호

이해선 「고궁풍물(1)」 『포토그라피』 1971년 1월호

_______ 「고궁풍물(2)」 『포토그라피』 1971년 2월호

이해선 관련

일간지

「입선자의 방명록」 『매일신보』 1926512

이태준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1029

「금조개장한 동미전 제2회」 『동아일보』 1931412

홍득순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417

「인사(人事)」 『매일신보』 193886

이해선 「예술사진의 연혁과 개념」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동인전」 『경향신문』 19491115

「인사(人事)」 『경향신문』 1953110

이해선 「등하수상(燈下隨想)」 『동아일보』 19551112

_______ 「사진예술의 독자성」 『동아일보』 1956126

_______ 「사진 8인전 소감」 『경향신문』 195647

_______ 「백오(白烏)의 변(辯)」 『동아일보』 195749

「김포공항에 내린 덕혜옹주-이해선 씨가 부축하고 있다」 『경향신문』 1962126

「5월 예술상에 붙이는 제언」 『경향신문』 196231

「2명이 사퇴 사진부문심위원」 『경향신문』 1964109

「영예의 산실 안팎」 『동아일보』 19641013

「횡설수설-국전 사진부 이해선 심사위원 사퇴」 『동아일보』 19641014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중요한 내용middot형식 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1020

「열띤 감정으로 충만-창협 창립 사진전」 『동아일보』 1965119

「한국국제사진살롱 위원 명단」 『동아일보』 1965116

「동아국제사진살롱 심사평-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28

「제4회 사진동우회전」 『동아일보』 1966121

「동아사진살롱 심사평-총 801 응모」 『동아일보』 196729

「위원장에 이종우 씨 국전심사위원 위촉」 『동아일보』 1967920

「국전심사위원장 도상봉 씨 선출」 『경향신문』 1968919

「석우회(石友會)서 돌 전람회」 『동아일보』 1970428

「예술인에 훈장 이해랑 씨 등 9명」 『경향신문』 1972118

「외길 한평생 lt11gt 사진middot예술 이해선」 『선데이서울』 1973318

「현역 원로 작가 초대전 일제하의 침울이긴 예술자세 생생하게」 『경향신문』

1974831

「이해선 씨 작품전 향토풍물 50점 전시」 『동아일보』 19741118

「이해선 사진전」 『경향신문』 19741119

「이해선 사진 작품전 24일까지 신문회관」 『매일경제』 19741121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423

「국전운영위원 위촉」 『동아일보』 1976317

「국전사진부문 사단중진들 반발」 『동아일보』 1976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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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_______ 「고궁풍물(3)」 『포토그라피』 1971년 3월호

_______ 「고궁풍물(4)」 『포토그라피』 1971년 4월호

_______ 「고궁풍물(5)」 『포토그라피』 1971년 5월호

_______ 「고궁풍물(6)」 『포토그라피』 1971년 6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7)」 『포토그라피』 1971년 7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8)」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포토그라피 창간5주년에 붙여서」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9)」 『포토그라피』 1971년 9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0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1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2)」 『포토그라피』 1971년 12월호

「제2회 사진국전마감 심사위원결정」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이해선 「이해선 떡에 얽힌 시속(時俗)의 금석(今昔) 옛떡이 사라져 간다는데」

『월간 중앙』 1973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1)」 『포토그라피』 1973년 8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2)」 『포토그라피』 1973년 9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0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6)」 『포토그라피』 1974년 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7)」 『포토그라피』 1974년 3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8)」 『포토그라피』 1974년 4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9)」 『포토그라피』 1974년 5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끝)」 『포토그라피』 1974년 6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 『포토그라피』 1974년 7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2)」 『포토그라피』 1974년 8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3)」 『포토그라피』 1974년 9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4)」 『포토그라피』 1974년 10월호

_______ 「작가와 작품-풍물백태 중에서」 『포토그라피』 1974년 1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6)」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7)」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8)」 『포토그라피』 1975년 3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9)」 『포토그라피』 1975년 4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0)」 『포토그라피』 1975년 5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1)」 『포토그라피』 1975년 6월호

_______ 「곡필무사(曲筆誣事)를 밝힌다」 『월간 중앙』 1975년 11월호

「영상 창간 1주년 기념 좌담회 한국 사진 산업의 의 오늘과 내일」 『영상』 1976년 6월호

「국전 초대작가 8인선 김조현 이건중 이경모 이해선 임응식 이형록 정인선

조현두」 『영상』 1977년 1월호

「남기고 싶은 작품 3 이해선」 『영상』 1977년 5월호

「예술사진에 대한 견고한 확신 이해선 사진의 예술성」 『영상』 1978년 5월호

「한국현대미술대전」 『영상』 1978년 10월호

이명동 「처음 제정된 사진문화상에의 기대」 『영상』 1979년 2월호

「행사 백오 이해선 선생의 사진작품집 출판기념회」 『영상』 1981년 2월호

「작품집 소개 이해선 작품집 중에서」 『영상』 1981년 4월호

박재능 「다양한 자기 세계의 길」 『영상』 1981년 12월호

「영상방담-사단의 이 얘기 저 얘기 김정래 임석제」 『영상』 1982년 1월호

「이미지의 합창-봄의 첫 장」 『영상』 1982년 4월호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 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호

岩宮武二 「너 어디 있느냐」 『영상』 1983년 1월호

최인진 「1930년대의 아마츄어 사진활동」 『사진사연구』 통권 제5호 1983년 9월호

박재능 「월평-원로 이해선 선생을 추모한다」 『영상』 1983년 12월호

「한국 근대미술의 발자취」 『계간미술』 중앙일보사 1985년 봄호

「다시 보는 명작 정도선 정인선 신현국 강대환 김일창 이해선」 『영상』 1986년 10월호

「고 백오 이해선 선생 추모비 건립」 『영상』 1989년 1월호

「동경 유학생들의 한국 근대미술」 『월간미술』 1989년 9월호

「화보로 보는 한국 동경 유학생들의 자화상」 『미술세계』 1993년 5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조선총독부 관보』 제4087호(192647) 한국학문헌연구소 서울 아세아문화사 1926

이태현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1집 서

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2

_______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 자화상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3집 서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4

신명호 「일제하 이왕직과 이왕가 족보」 『한국학대학원논문집』 제11집 한국정신문화

연구소 1996

최인진 「한국사진 역사의 증인(4) - 사단의 단체 활동과 이해선」 『한국사진』 2002

이가라시 코이치 이중희 역 「조선미술전람회의 창설과 서화」 『한국근대미술사학』

제12집 한국근대미술사학회 2004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의 입학제도와 조선인 유학생」 『동악미술사』 제6호 2005

허보윤 「미술로서의 디자인 이순석의 1946-1959년 응용미술교육」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단행본

조우석 『한국사진가론』 눈빛 1998

작품집 도록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1926

이해선 『이해선 사진작품집』 평화당 1980

_______ 『한국의 고궁』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0

Tucker Anne Iizawa Kotaro Kinoshita Naoyuki The History of

Japanese Photography London YaleUniversityPress 2003

이해선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남은 1950-60년대』 눈빛 2005

_______ 『이해선 사진집 1950~1960년대 이야기』 동강사진박물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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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7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일간지

「부산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24531

「성공을 기대 조선사진연구회 현일영 씨 담」 『조선중앙일보』 1936826

「경성아마사진구락부 제1회전」 『조선일보』 1938417

「사진작품전」 『동아일보』 19381014

「경성사진동호회 작품전람회개최」 『조선일보』 19381027

「사진동호회작품전」 『동아일보』 1938112

「경성아마추어 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39527

「아마추어 사진인화전」 『매일신보』 19391115

「동서남북-lsquo아마추어rsquo 제4회 인화전람회」 『동아일보』 19391115

「동서남북-합동인화전」 『동아일보』 1940126

「아마추어 사진의 인화전」 『매일신보』 194074

「경성아마츄어 제5회 인화전」 『조선일보』 194075

「경성백양사우회 제1회 인화전람회 개최」 『매일신보』 19401113

「제2회 사진전 명일부터 화신에서-백양사우회」 『매일신보』 19411124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55

「사진작품전」 『조선일보』 1946119

「전국문화총연발족」 『동아일보』 194729

「제1회 조선사진예술전」 『경향신문』 19475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7510

「사진전람회개최」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전응모작 답지」 『경향신문』 1947615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 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629

「제1회예술사진전람회 15일부터 동화백화점」 『경향신문』 1947713

「예술사진 입선 수상식을 거행」 『경향신문』 1947720

「예술사진전 19일부터」 『동아일보』 1947121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8224

「사예(寫藝) 2회전 작품을 현상모집」 『경향신문』 19481013

「예술사진전 심사 오는 8일로 연기」 『동아일보』 1948127

「지방출품우수-제2회 예사전」 『동아일보』 19481212

「사진예술전 22일부터 동화화랑서」 『동아일보』 19481221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964

「전국종합사진전 심사결과-특선1석 최인집 씨」 『동아일보』 194977

「사진예술의 정화-제3회 전국예술사진전」 『경향신문』 19491010

「예술사진전 30일로 마감박도」 『경향신문』 19491128

「예술사진전 입선자 발표」 『경향신문』 19491213

「예술사진전시회」 『동아일보』 195316

「춘계사진섭영회 26일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3

「본사후원 춘계촬영대회 오늘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6

「사진현상모집」 『경향신문』 1953517

「특선에 lt만춘gt」 『경향신문』 1953527

「인화 당선자 수여식」 『경향신문』 1953529

「사진작품발표전」 『경향신문』 1954413

「예술사진전시회 US-S화랑서」 『동아일보』 1954415

「집회」 『동아일보』 1954916

「경복궁서 촬영대회」 『경향신문』 1954919

「내 26일 촬영대회 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4922

「사연 촬영대회 여감(餘感) 아마추어 사진도(寫眞道)」 『동아일보』 1954103

「문화집합」 『동아일보』 1955122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77

「사연(寫硏) 창립 10주년 기념 어제 촬영대회 성황」 『동아일보』 1955711

「촬영대회 입선작 결정」 『동아일보』 1955819

「8인 사진전 개최」 『동아일보』 1956329

「9회 사연(寫硏)전」 『동아일보』 1957414

「신록촬영대회 개최 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62

「대한사진예술가협회서 사진전시회 개최」 『동아일보』 1958711

「10년 후의 우리 문화 건국 20주년을 장식하고 싶은 것」 『동아일보』 1958821

「사진예술가협회 11회 회원작품전」 『동아일보』 195979

「문화 소식」 『동아일보』 1960119

「국전에 사진부문도」 『동아일보』 1963410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결정 특선 조천용 작」 『동아일보』 19641020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653

「렌즈의 향연 영예의 초점-제4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동아일보』 196667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61217

「사진예술가협회전」 『동아일보』 19681022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9830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996

「국립공보관 12월 전시회 스케쥴」 『경향신문』 1971126

「문화단신」 『경향신문』 19721128

「사진예술협 작품전 7일까지 공보관서」 『매일경제』 1973111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에 안준천 씨」 『경향신문』 197526

「동아포우스트」 『동아일보』 19751117

「사진예술가협회 창립30돌 기념전」 『경향신문』 19751118

「추계 친목 촬영대회」 『매일경제』 197610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7830

「사진예술가협 정총(定總) 31일 하오 대동관서」 『매일경제』 19781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81031

「문화광장」 『동아일보』 1993121

「한국사진예술 50년을 펼친다」 『한겨례』 1994111

「사진예술가협 사라진 풍물전」 『서울신문』 20051025

월간지 계간지

「사진클럽 지상소개 대한사협의 발자취」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박필호 「논단 대한사협16회전을 보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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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대한사협 16회전」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사협 16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8년 7월호

「대한사협 충남지부 회원전」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경축 창간 3주년 사진과 관광 포토그라피-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대한사협 18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제18회 대한사협전」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 작품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70년 3월호

「축 창간4주년 서울 선데이 카메라 클럽」 『포토그라피』 1970년 8월호

「축 포토그라피 창간 5주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김종양 씨 대한사협 고문 추대」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3년 3월호

「lt파도gt 김도현 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신춘초대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근하신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75년도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창작선」 『영상』 1977년 1월호

「전시장 순례 대한사진협회 회원전」 『영상』 1977년 11월호

「지상소개-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대한사협 제27회 정기총회 개최」 『영상』 1979년 7월호

박필호 「대한사협 27돐에 대한 축사」 『영상』 1979년 7월호

「제26회 대한사협전」 『영상』 1980년 1월호

「제27회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사진전시회」 『영상』 1980년 12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요강」 『영상』 1981년 5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영상』 1981년 10월호

「탐방-뜻이 있으면 길이 있게 마련 세 번째 전국대학사진 공모전을 연 대한사협충

남지회의 단합된 모습」 『영상』 1983년 1월호

「제3회 전국대학생사진 공모 제12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월호

「제13회 대한사협 충남 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2월호

최인진 「경성아마츄어카메라구락부를 말한다」 『사진사연구』 1984년 7월호

「대한사협본부 주최 제9회 한국국제사진전 입상자」 『영상』 1989년 1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대한민국예술원 편 『한국예술총감 자료편』 대한민국예술원 1965

한국사진협회 「사진계소식 1969년도」 『한국사진연감』 1970

_____________「한국사진협회의 연혁 1976년 10월 30일」 『한국사진연감』 1976

임범택 「사진」 『1977년도 문예연감』 1978

______ 「사진」 『1978년도 문예연감』 1979

한국사진협회 「역대역원명단(歷代役員名單) 1962년~1987년」 『한국사진연감』

1988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제1장 한국사진협회 창립 이전의 사진계 동향」 『한국사협

사 I 1945-1970』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01

최인진 「해방 초기의 사진잡지 연구-『국제보도』와 『사진문화』를 중심으로」 『한국

사진학회지 AURA』 제10호 2003

박혜성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사진문화』 목록 및 해제」 『한국 사진 잡지

『사진문화』 연구』 명지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한국사협 50년사』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13

단행본

임응식 『내가 걸어온 한국사단 임응식 회고록』 눈빛 1999

작품집 도록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제16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7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8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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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9

원 문 자 료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년 10월 29일 4면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년 4월 17일 4면

1 이해선 양화기(洋畵期) 관련 참고 자료

「입선자의 방명록」『매일신보』 1926년 5월 12일 3면

「금조 개장한 동미전 제2회」『동아일보』 1931년 4월 12일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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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참고 자료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년 5월 5일 2면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년 6월 29일 3면

「신록촬영대회개최-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년 6월 2일 4면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년 7월 7일 4면

예술사진전 조선사진예술연구회에서는 5월 6일부터 동11일까지의 6일간에 걸쳐 동화백화점(舊三越) 갸라리--에서 창립기념사진전을 개최하기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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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해선 관련 원문 자료

원문은 당시의 표기를 그대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현재의 띄어쓰기와 맞춤법에 맞지 않는 부분들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수정하였고 일부 [ ] 안에 병기했다 원문의 한자는 모두 한글 독음으로 고쳤으며 의미 전달을 위해 필요한 경우 ( )안에 병기했다

「대담 아마추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 pp 48~52

작가가 사태(沙汰)났어

본지 공사간에 바쁘실 텐데helliphellip 사진문화의 발전을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

해 주십사 하는 것은helliphellip 요즘 각 직장이나 학생들 간에 사진열이 굉장히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 비

추어서 이 아마추어 카메라맨의 지도 문제를 비롯하여 초보자의 진로랄까helliphellip 이런 문제에 대한 말

씀을 좀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해선6middot25 동란 후에 개인적으로 사진을 연구해 보겠다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직장이나 학교 단위로

사진동호자의 클럽이 많아 지고 작품 발표라던가 전시회 같은 것이 무척 많아졌는데helliphellip 어쨌든

일반 사회인이나 학생 간에 사진열이 높아졌다는 건 기쁜 일이야

임응식그런데 아직도 이 카메라를 사치품으로 취급하는 층이 많아서 곤란해요

이 나라(정부)에서부터 사치품 취급을 하더군helliphellip 여자들이 다이아몬드를 사려는 것과 사진을 연구하

려는 사람이 카메라 장만하는 것을 똑같이 취급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곤란

하지

임 헌데 우리 사단(寫壇)에선 우선 lsquo사진작가rsquo라는 용어를 쓰는 데에 신중을 기해야 하겠어요 웬 놈의

lsquo사진작가rsquo가 그리도 많은지helliphellip 이건 카메라만 메고 다니면 모두 작가 행세를 하니helliphellip

이 카메라 멘 것이 모두 lsquo작가rsquo라면 대한민국에 lsquo사진작가rsquo가 수 십만도 될 걸helliphellip 작가라는 친구들을

체에 넣어서 걸러 놓으면 엄격한 의미에서 진짜 lsquo작가rsquo는 몇 사람 밖에 없을 텐데helliphellip

임 호주머니에 만년필을 꽂았다고 해서 문학가 혹은 소설가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겠는데hellip

hellip 어쨌든 요즘 성행하는 사진작가의 사태를 우선 잡지에서 만이라도 용어 사용에 엄격한 규정을

지어서 질서를 잡아 주어야겠어요

이 그것도 과도기적 현상이겠으니까 차차 지양되겠지helliphellip 오늘 해달라는 얘기는 그런 넋두리가 아닐

테니까 어디 이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본지 한마디로 얘기하자면helliphellip 카메라는 어떻게 해서 장만을 했는데 mdash 자 그 다음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겐지 몰라서 어쩔 줄 모르는helliphellip 이런 아마추어와 초보자들의 진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얘기를

좀helliphellip 현재 직장 단위로 사진 동호자들이 모여서 클럽을 이룩한 것이 십 여 개 있고 학교 단위로는

이십 여 개나 되는데요helliphellip

관련 자료 소개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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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인식이 안이해서 탈이야

이 극히 초보적인 입장에서 사진을 해보고 싶다helliphellip 다년간 연구를 한 다음엔 작가가 돼 보겠다 mdash 하

는 사람들을 회원으로 해서 수 십 년 동안 연구를 해 왔는데helliphellip 오늘날 하고 있는 일도 그것이지만

helliphellip 여러 부문에 걸쳐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서적인 면에서 사진과 친해보고 싶다던가

또는 카메라를 장만했는데 어떻게 하면 앞으로 향상 발전할 수 있는가 mdash 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신인이라고 하겠지 특히 학생들의 교내 활동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helliphellip 헌데 막상 다다

르고 보면helliphellip 어떠한 길이 올바른 길인지 막연해 하는 모양이더군요

임 초보자들은 무엇보다도 사진 자체에 대한 정의를 뚜렷이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아마추어 mdash

하면 취미적 입장에서 사진을 다루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조각이나 회화와 같이 사진도 어엿한 예술이니

까 취미 도락(道樂)적인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예술을 추구하는 진지한 마음의 준비가 우선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물론이죠 대개 클럽 조직이 되어 있으니까 선생들의 지도를 받고 있겠지만 내가 알기에는 전문가

가 아닌 다시 말하면 취미 정도에서 관심이 있는 선생들이 지도를 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역시 전문으

로 사진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지도를 가끔씩이라도 받는 게 좋겠지요

임 지도를 한다는 사람들의 태도부터가 성실성이 없는 것 같아요 만년필을 샀으니까 나도 한 번 써 보

자 mdash 해서 작가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취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남의 lsquo지도rsquo를 담당

할 수는 없을 텐데 mdash 우리가 사진을 전공한대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억지로 지도해 주겠다고 밀고

들어 가겠다는 건 아니지만 mdash (웃음) mdash 어쨌든 전문가의 지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학생 클럽이나 직장 클럽 같은 동호자의 모임을 사단의 일부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취미

에서 시작했더라도 일정한 과정을 밟고 다년 연구를 거듭하면 자연히 작가를 지향하게 되겠지만hellip

hellip 그런 면에서도 처음 싹트기 시작하는 신인의 지도가 퍽 중요한 것이지요

취미middot도락이란 관념을 버려야 해

임 지금 형성되어 있다는 직장이나 학교 단체의 거의 전부가 전문적인 입장에 서 있지 않은 것 같더군

요helliphellip 사진에 대한 근본 의식이 너무도 안이한 것 같아요 카메라를 통한 표현의식에 절실한 감정

이 없어요helliphellip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비판을 받지 않는다helliphellip 하는 따위의 도피를 해서는 곤란

하죠helliphellip 창작의식이 확고하게 수립되지 않아서는 향상이 없는 것인데helliphellip 소문에 듣자면helliphellip 너

무 기술 면에만 치중하고 정신적인 면이 소홀히 취급된다는 거에요 helliphellip 나는 직장을 갖고 있으니

까 사진이란 것은 취미 정도로 한다 mdash 하는 태도를 버려야죠 특히 이 점은 지도자들에게 권하고 싶

은데helliphellip 예술의식helliphellip 이것이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절대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까

이 그렇구 말구요helliphellip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새로 사진을 공부하겠다는 신인들에게 네 가지 의식을 주

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휴머니즘 mdash 우선 사람이 돼야 하거든요 교양이라던가 인격 덕망helliphellip 이런 면에서 인간이

돼 있어야 하고 둘째는 사진예술을 한다고 해서 사진예술이 무엇이냐helliphellip 이것만을 추궁해서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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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요 좀 더 시야를 넓혀서 예술이라는 게 뭐냐 mdash 하는 걸 먼저 알아야지 셋째에 가서 사진예술이

라는 게 뭐냐 mdash 를 연구하고 넷째에 가서야 비로소 작품이라던가 창작의식 기교 기술에 대한 검

토를 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기본조건을 머리 속에 언제나 간직하도록 나는 주장해 왔어요

임 기술면을 등한히 할 수는 없겠지요 기술 없이는 표현이 안되니까helliphellip 그러나 이선생 말씀처럼 인

간본연의 문제도 크긴 큽니다 다른 예술부문의 사람보다 교양면에서 뒤떨어지지나 않는가 mdash 하는

것이 항상 염려되는데helliphellip 만일 뒤떨어진다면 큰일이지요 기술도 중요한 문제겠지만 교양인격 같

은 것도 예술가가로서의 긍지를 위해선 떨어질 수 없는 문제고helliphellip 더욱이 좋은 기술을 가졌으면서

도 기초교양이 모자라서 좋은 작품을 낼 수 없다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으니까helliphellip 교양인으로서의

자격도 다른 예술부문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사진을 해야할겝니다

이 기교나 기술을 어떻게 우물쭈물 배웠다고 해서 작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helliphellip 예술이란 그 자체

에 대한 조예부터 깊어야 합니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조리개가 얼마다 타임이 어

떻다helliphellip 암실작업은 어떻게 하는 거다helliphellip 이것만을 알았다고 해서 작가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에

요helliphellip 인간면 예술면 기술면에 똑 같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마 사진을 연구하겠다는 신

인들의 기본이념이 돼야 할겝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지도한다는 면에서

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거든요 mdash

임 어쨌든 기술을 위주로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난 옛날 얘기입니다

지도자 시비

이 지났다기 보다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는 장래에나 변할 수 없는 기본이념이겠지요 사진이라는 것

은 더욱이나 고도의 대중성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인격과 교양이 필요해요 기계라는 거야 찍으면

사진이 되도록 마련된 것이니까 예술까지는 못 가도 사진은 되거든 mdash 그러니까 그것을 예술로 이

끌려면 찍는 사람의 성분이 문제되는 것이지요helliphellip

임 그런 의미에서도 사단의 규정이 필요하고 작가라는 규정이 필요해요 사단이라는 것에 너무 엄격한

규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helliphellip 만년필을 가졌다고 해서 전부 문학가가 아니라면helliphellip 카메라를 메었

으니 작가다 mdash 하는 엉터리도 용납될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우선 필요한 것은 취미 도락이라는 관념

을 지양해야 할 텐데helliphellip

이 취미가 차차 심각해지면 창작의식도 생기는게니까helliphellip 그런 사람들을 지도 계몽해서 한 사람이라

도 작가로 이끌어야 하겠지요helliphellip 카메라를 살 때부터 나는 사진작가가 되겠다 mdash 하는 사람은 있

을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임 lsquo싼데이rsquo 카메라맨은 논의의 대상이 안되구요helliphellip (웃음)

이 그러니까 지도자들이 작가적인 태도에 확고한 이념을 앞세우고 지도에 임해야 하는 건데helliphellip

본지 각 단체 지도층의 지도방침에 대한 구체적인 태도를 어떻게 규정하겠습니까 helliphellip

임 우선 사진에 대한 인식부터 고쳐야 해요 말이 중복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친구 좋고 사진 좋아서 우리

끼리 하면 그만이다 mdash 하는 생각들이 많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만이라도 그렇지 않다

관련 자료 소개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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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싶어요 학생들이 카메라를 사 가지고 몇 사람 모였으니까 책임자 격

인 선생이 필요하다 mdash 해서 책임 맡았다는 사람으로는 지도가 안 될 게 아닙니까 그렇다고 청해 오

지도 않는데 내정 격으로 뛰어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구helliphellip (웃음)

본지 또 한 가지 요즘 일대 성황을 이루는 것이 소위 현상사진(懸賞寫眞)이라는 건데요helliphellip 이 현상사진

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진에 대한 모욕도 있지helliphellip

임 거 참 꼴사나운 일이 많아요 현상이란 걸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helliphellip 그 하나는 어느 연구

단체에서 순수한 의미에서 발표 바탕이 없는 아마추어를 위해 마련하는 경우가 있을게고 또 하나는

선전용으로 포스터 mdash 같은 데에 써먹기 위한 상업 정책적인 의식에서 모집하는 현상이 있을 테지요

이 어느 경우이건 간에 좌우간 현상 모집을 하는 목적이 있는데helliphellip 응모자는 우선 현상의 목적부터 확

실히 알고 응모를 해야 하겠지helliphellip

임 그렇죠 그런데 이 상업 정책적인 현상의 경우에는 사진문화에 대한 모욕적인 행동이 퍽 많습니다

이거 참 불유쾌한 일이지만helliphellip 가령 예를 들자면 응모자는 원판을 제공하라던가 또 낙선자의 작

품은 일체 반환치 않는다는 따위helliphellip이게 얼마나 사진예술에 대한 모욕적 행위입니까 helliphellip

이 그래요helliphellip 확실히 모순된 일입니다

임 필요에 의해서 현상모집을 했으니까 당선된 작품은 물론 필요하겠지만helliphellip 낙선작품을 반환치 않는

다는 것은 언어도단 입니다 낙선이 됐다 해도 작가의 입장으론 대단히 귀중한 하나의 작품일 텐데

그걸 안 돌려 준대서야 말이 되나요 주최측은 낙선작품의 원화를 돌려 줄만한 성의를 가져야 도리

에 맞을 텐데helliphellip 요즘 현실은 lsquo낙선rsquo이란 푸대접 밑에 원판까지 몰수당하는 판국이니helliphellip 원 참

이 그러니까 응모자는 무엇보다도 현상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지helliphellip 여러 번 겪은 일이지만 심사를

하다 보면 전혀 현상 취지를 도외시한 작품들이 있는데helliphellip

임 그거야 보나마나 낙선이죠 (웃음)

이 그러믄요 현상 응모자로서는 출품 규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 아니겠어요

임 그럼요

이 그런데 어떤 것은 작품에 제목도 없는 것이 있거든요 그런가 하면 제목과 작품내용이 전혀 특이한

엉터리도 있구helliphellip

임 저도 여러 번 겪은 일입니다

이 제목이란 것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벌써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찍는다는 의식이 있는 이상

제목도 정해져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아주 작품과 제목이 동떨어진 것들이 응모해 오니까

낙선의 자격이 충분할 수밖에helliphellip 하하하 (웃음)

임 그게 모두 사진에 대한 성의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이 그래요 성의가 없어요 자기 작품에 대해선 최선의 성의를 다 해야 할 텐데 그런 태도가 없거든helliphellip

제목을 안 썼는지 못 썼는지는 모르지만helliphel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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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그저 무턱대고 발표의식만 왕성한 까닭이 아닐까요

이 그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된 작가가 아닌 이상 발표기회가 좀처럼 없을 테니까

자기 실력의 평가를 받는다던가 남들과 경쟁해 본다는 의미에서 현상에 자주 응모하는 것은 좋은데

helliphellip 아 어떤 친구는 자기 실력 생각은 하지도 않고 상품이 적다 많다 시비를 하는 친구도 있으니 참

기가 막힐 일이지

주최자의 무성의도 고쳐져야 하고

임 그건 lsquo현상rsquo이라고 내거는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순수한 사진연구단체에서 모집할 때는

lsquo공모전rsquo이라던가 하는 문구가 좋지 않을까요 lsquo현상rsquo이라니까 lsquo상rsquo을 바라게도 되겠지만 어쨌든

lsquo현상rsquo이란 말 자체가 순수하지 못해요

이 그건 확실히 생각해 볼 문제이겠군요helliphellip 순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helliphellip 응모자들이 심

사원이 누구냐mdash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도 순수하지 못하고helliphellip 또 주최자가 모집광고를 낼 때

lsquo심사원은 추후발표rsquo라mdash하는 것도 순수하지 못해요 이것도 참 불쾌한 일인데 lsquo추후발표rsquo라는 걸

다시 생각하면 lsquo준비가 안됐다rsquo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심사원의 준비도 안 해 놓고 현상을 모

집하는 그런 무성의가 또 어디 있어helliphellip 이건 일종의 사기가 아니면 거만일 겝니다

임 그나 그뿐인가요 lsquo심사원은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함rsquohelliphellip 하는 모호한 광고도 있지요 응모자의 입

장에서 생각하면helliphellip 심사원에 불만이 있으면 응모를 아니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 심사원 문제만

은 정정당당히 명시해야만 나중에 가서 심사에 대한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출품을 한 다음에 심사

원이 발표된다는 것은 심사에 대한 불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helliphellip

이 그리고 응모자의 동태를 가만히 보면 아까 얘기가 나왔던 소위 lsquo취미정도rsquo라는 층의 발표 의욕이 굉

장해서 대부분의 응모자가 이 부류인 것 같은데helliphellip 여기 한 가지 탈이 있어요 현상응모 작품의 심

사라는 것은 무제한의 심사 레벨을 놓고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응모 작품 중에서의 우수 작품을 가

려낸다는 것은 이거 상식 문제가 아닙니다

임 그렇죠

이 아 그런데 어떻게 해서 현상에 당선이 되거나 특히 특선이라도 하면 그만 자기가 갑자기 위대한

작가라도 된 것처럼 대가연(大家然) 하고 으쓱대는 친구들이 많아서 걱정이야helliphellip (웃음)

이 lsquo특선rsquo이라는 것은 응모해 온 작품들 중에서 특선이지 결코 한국 사단 전체의 수준에서 특선이라

는 것은 아닌데helliphellip 그만 한 번만 당선되면 코가 높아지고 대뜸 대가 행세를 하려고 드니helliphellip 참

신인들은 특히 조심해야 할 일이지

남의 것보고hellip 우리 것도 보내고hellip

본지 이제 화제를 좀 바꾸어서 세계사단의 동향을 좀 말씀해 주실까요

임 세계사단의 얘기라면 직접 보아야만 얘기가 될 텐데helliphellip

이 서울 바닥에서 썩으면서 세계사단의 얘기를 어떻게 본 듯이 할 수가 있겠나 카메라를 메고 세계일

관련 자료 소개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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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도 했어야 얘기가 되지

임 그것보다도 사진을 통한 국제 교류 얘기나 합시다

이 그게 좋겠군helliphellip 얼마 전에 덕수궁에서 자유중국의 소개사진전시가 있었죠 미국공보원의 활동도

이를 테면 국제교류의 한 형식일게고helliphellip

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자유중국과 월남의 사진전시가 있었는데helliphellip 우리도 수출을 한다면 그 보

다 훨씬 좋은 작품들이 나갈걸요helliphellip

이 한미합동전이던가 한중합동전 같은 것도 하면 역시 국제교류가 되겠지요helliphellip

임 한미합동전은 불원한 장래에 개최될 것입니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lsquo인간일가(人間一家)rsquo의 사진

이 아마 이월쯤 한국에 올 겝니다 미국대사관이 주동이 돼서 작품 503점 전부의 전시회 계획이 추

진되고 있으니까요

이 남이 보내줘서 본 것은 있지만 우리가 남에게 보여준 것은 없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야 우리도 남에

게 보여줘야 교류가 될 텐데helliphellip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두 사람의 작품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임 개인적인 활동은 있었지요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사진살롱에 사진을 보내고 있으니까 개인

적으로는 더러 나간 셈이죠 개인들의 수출이라도 좀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지만

이 우리의 것을 내보내고 외국 것을 들여와서 서로 감상하고 연구하는 게 이를 테면 국제교류인데

아마 명년쯤엔 될까 몰라

임 작품교환전 같은 것을 위해서 대대적인 계몽운동이 필요 하겠죠

이 그렇죠 운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어요

임 그런데 근본적인 얘기를 하자면 한국 작가의 역량이 아직도 부족한 것 같아요 언젠가 외국 작가에

게서 들은 말인데mdash한국 사람은 한국을 보지 않았다mdash하는 얘길 해요 사진 작가에게 대한 말이지

만helliphellip 나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이 퍽 중요한 얘기다mdash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를 직시하는 것만이

사진은 아니겠지만 실용사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것이 사실 아닐까요 회화적인 쌀롱 픽처라던

가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리얼리즘 사진이라는 것에 너무들 치우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 국제 교류의 시발은 역시 소개적(紹介的)인 것 다시 말해서 르포르타주적인 것이겠으니까helliphellip

임 외국 작품의 모방 같은 것은 이제 집어치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mdash예술적인 것 이것만을 너무 추

구했기 때문에 사실이 한국적인 것과 국민성의 묘사 같은 것이 잘 되지 않았지요 정서적인 것에만

너무 골몰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일이고 helliphellip 예술을 위한 예술에 정신들이 팔려 있었지나 않은

지helliphellip 예술을 하기 위한 사진이라는 관념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이 예술을 염두에 안 둔다면 실용사진이 돼 버리게

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너무 치우친 것 같단 말입니다

이 특히 국제 교류를 생각한다면 아닌 게 아니라 외국처럼 르포르타주적인 사진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할거에요

임 그래요 거기에 예술성을 띄워서 소화할 만한 역량 있는 작가가 필요해요

이 또 하나의 가장 큰 문제는 위정자의 관심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 큰 난관입니다 국제 교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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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가족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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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말이고 역시 정부당국자의 적극적인 주

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어디 그래요

임 우선 사단 자체의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작가들의 작업도 촉구되어야 하구helliphellip 아까도 말이 나왔지

만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 출품을 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점 같은데서 작가들의 반성도 필

요하고helliphellip

이 개별적으로 미국 등지에 보낸 것은 아마 상당한 수가 되겠지요

임 그럼요 그랬는데 왜 성과가 없느냐mdash하는 반성이 있어야죠

이 오늘의 현실을 예술적인 면에서 기록하고 작품화 해야겠는데helliphellip 막연하게 예술을 위한 작품을 보

내니까 기교적으론 훌륭할지 몰라도 작품 자체에 내용이 없어서helliphellip 그래서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닐

임 그런 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빨리 우리의 수준을 높여서 국제 조류와 호흡을 맞추어 나가

야 할 것입니다

이 이거 아마추어를 위한 얘기라는 것이 잠깐 탈선을 한 것 같군 그러나 이런 문제도 참고가 되긴 하니

까helliphellip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합시다

본지 수고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helliphellip

(기록 O기자)

이해선 「lsquo백오(白烏)rsquo의 변(辯)」 『동아일보』 1957년 4월 9일 4면

30여년 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입학

이 되었을 당시 자축기념하는 의미에서 호(號)를

하나 지어본 것이 백오(白烏)라는 두 글자였다 처

음 듣는 사람들 중에서는 거문[검은] 까마귀는 있

지만 흰 까마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서로 웃어버리고 그 뜻을

설명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자의

(字意)를 해명해볼까 한다 백(白)은 흰 빛이요 오

(烏)는 흑색으로 통하므로 우선 흑백을 대조시켜

놓고 흰 종이 위에다 검은 먹으로 휘호(揮毫)할 것

이니 그 뜻이 내 생활과 부합될 것 같으며 둘째로

백 자(字)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첫 자를 떼어놓

고 오는 반포오(反哺烏)로 그 이름이 높은 새이므

로 평소에 효자 노릇을 못하여 온 나의 좌우명으로도 적당할 듯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새 중에서는

혹간(或間) 백변종(白變種)이 생겨나는 수가 있는데 그 흰새를 서조(瑞鳥)라고 떠들던 옛 시절도 있었으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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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내가 우연히 호를 지어 본 것이 검은 까마귀떼 속에서 서조 백오를 발견하였으니 나의 전도(前途)에는

반드시 서광(瑞光)이 비칠 것 같으므로 이상 여러 가지 의미를 차례로 생각해 볼 때에 나에게는 이 외에 더

좋은 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자의였었고 궁금한채로 불려온 백오

였었다 만담궁변(漫談窮辯)을 물소물책(勿笑勿責) 하소서 (사진가)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

이해선 「중요한 내용middot형식-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년 10월 20일 5면

사진작품에는 사진 특유의 형식이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러한 특유의 형식에 알맞은 표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의 특수성은 형식이 가지는 특수성 보다는

기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주관적이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작품심사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동일하게 중요시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작

품 속에서 그야말로 형식과 내용이 알맞게 부합된 특출한 작

품을 볼 수는 없었다 형식이 좋으면 내용이 빈약하고 좀 내

용이 있으면 형식이 미숙하고helliphellip 모두 결점이 있다 그러나

입상작으로 뽑은 8 점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

다 그리고 금년에는 lsquo칼러rsquo사진의 응모 점수가 30점이나 되

고 그중에서도 3점이 입상되었고 또 9점이 입선되었다는 것

은 lsquo칼러rsquo 사진의 앞날을 위해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lt전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장gt

[제1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년 2월 8일 5면

외국작품의 세련되고 빈틈없는 lsquo테크닉rsquo은 국내작품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서 우선 국내

작품을 형식에서부터 누르고 말았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이루게 된 것은 국내작가들

의 역량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lsquo국산인화지rsquo가 얼마나 엉터리고 조악한 것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대체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더욱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은 이와 반대적인 경향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예술이든 먼저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볼 때 국내작품의 후진성은

두말할 것 없이 형식의 경시에 있다고 하겠다 심사결과 흑백부에서나 lsquo칼라rsquo부에서 겨우 동상으로 한 점

씩 밖에 국내작품이 입상되지 못했다는 것은 다소 섭섭한 느낌이나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경종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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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더욱 우리 심사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독에서 응모한 lsquo칼라rsquo

작품이었다 물체의 외관 색감을 초월한 내면의 lsquo이미지rsquo가 발

산하는 짙은 감정의 색감으로 작가의 개성과 사상을 인상 깊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내 lsquo칼라라보rsquo의 후진

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상작으로 뽑힌 외국작품들은 오

늘의 세계 사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는 큰 자극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

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제2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총 818점 응모-사진예술에 도움」

『동아일보』 1967년 2월 9일 4면

지난해와 같이 흑백부문에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들은 모두가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산인화지의 조악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작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올해는 흑백

부문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기꺼운 일이라고

하겠다

특히 칼라작품에 있어서는 독일의 작품들이 특출했고 이들 작품들의 색감은 현대 과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 최고상으로 뽑힌 lt잊은 친구gt와 몇 점의 입상작품들은 칼라릴리프와 소라리

세이숀[솔라리제이션] 등의 수법으로써 모티

브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를 초객체적이고 추

상적으로 표현하고 작가의 짙은 개성과 사상

과 철학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입상작으로 뽑은 16점의 작품들은 오늘의

세계사단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

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심사위원 이해선 (위원장) 임응식 서순삼

박필호 안월산 정인성 최경덕 (이상 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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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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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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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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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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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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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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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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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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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관련 자료 소개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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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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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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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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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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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3: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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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대한사협전》 lt설청(雪晴)gt lt묵상gt 찬조출품 중앙공보관

《제12회 대한사협전》 lt어촌풍물gt lt강변즉흥gt 찬조출품 중앙공보관

《제13회 대한사협전》 lt고목회춘gt lt추양(秋陽)gt 찬조출품 중앙공보관

516군사정권의 lsquo포고령 제6호rsquo에 의해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비롯한 모든 사진단체들이 해산됨

사단법인 한국사진협회(현 한국사진작가협회) 창립 당시 고문 역임

《한국사진협회 전국회원전》 〈한정〉 출품

문화공보부 주최 《신인예술상》 사진부 심사위원

《제13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사진부 심사위원 사퇴

동아일보사 주최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위원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

동아일보사middot사진동우회 공동주최 《한국국제사진살롱》 심사위원

《제14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사진부 심사위원 및 lt한정(閒靜)gt 출품 국립현대미술관

석우회(1965년 창립) 회원으로 활동

《제14회 대한사협전》 lt봄볕gt lt취주(吹奏)gt lt무아경gt 출품 중앙공보관

《제15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불참

동아일보사 주최 《제4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위원

신문협회 주최 《보도사진전》 심사위원

《제4회 사진동우회전》 찬조출품 신문회관

《조흥은행 본점 신축 이전 기념 사진전middot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제15회 대한사협전(초대) 직원작품전》

lt노변아취(路邊雅趣)gt lt고흥(高興)gt lt영상gt 출품 조흥은행 본점 2층 전시장

동아일보사 주최 《동아국제사진살롱》 심사위원

《창포수석전》 서울 아랍문화회관

《제16회 대한사협전》 lt유적gt lt벽gt lt명암gt 출품 중앙공보관

《제16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동아일보사 주최 《제2회 동아국제사진살롱》 심사위원

《종합미술전》 〈도선역( )〉 출품 중앙공보관

《제17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사진부 분과위원장 및 lt추모(追慕)gt 출품

《제17회 대한사협전》 lt장날gt lt나드리gt lt곡성(曲城)gt 출품 국립공보관

《제1회 새한칼라 사진콘테스트》 심사위원

《제18회 대한사협전》 lt돌풍gt lt관등일gt 출품 국립공보관

《제1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사진부 심사분과 위원장 및 초대작가 lt산성gt 출품 국립현대미술관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미술 부문 심사위원

《제2회 아사히펜탁스월드포토콘테스트》 심사위원

《석우회 돌전람회》 국립공보관

《제9회 한국사진문화상》 (사진발전 및 인재양성) 공로상 수상

《제1회 건축 및 사진전람회》 심사위원 부위원장 사진분과위원 및 초대작가 국립공보관

《제19회 대한사협전》 lt정물gt lt가게gt 출품 국립공보관

《대한사진예술가협회상》 공로상 수상

예총창립 10주년 기념 및 문화예술인대회 문화예술인 표창 국민포장( ) 수상

연도 일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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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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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2006

그 외

문화공보부 주최 《한국근대미술 60년》 국립현대미술관

《제2회 건축 및 사진전람회》 심사위원장 및 초대작가 국립공보관

《제20회 대한사협전》 〈잉어잡이〉 〈장날〉 출품 신문화랑

《제3회 건축 및 사진전람회》 초대작가

《제21회 대한사협전》 lt풍창(風窓)gt 출품 국립공보관

대한사진예술가협회 명예회장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제23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및 초대작가

한국사진작가협회 주최 사진 강좌 충청지구 이해선 lt국전과 사진gt 강좌

《한국현역원로작가 초대전》 사진부문 초대작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분관

《제22회 대한사협전》 lt추수gt lt고흥(高興)gt 출품 국립공보관

《고희기념 이해선 작품전 향토풍물》 신문회관 화랑

《제1회 국제사진교류전》 참여 국립공보관

《제24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제4부 심사위원장 사진분과위원 및 초대작가 국립현대미술관

《제23회 대한사협전》 lt조춘(早春)gt lt어촌풍경gt 출품 국립공보관

《서울특별시문화상》 심사위원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운영위원(제4부 분과위원장) 2회 연임

현대칼라 주최 《제1회 현대사진문화상》 수상

한국사진작가협회 전동경사진연맹 공동 주최 문화공보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주한일본대사관 월간사진 후원

미화사진필름주식회사 협찬 《제1회 한일친선대회》 참가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 편 『한국현대미술사(사진)』 추진위원 (이해선 외 5명)

《제29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제30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별세

『이해선 사진작품집 주제 향토풍물』 평화당

『한국의 고궁』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사진으로 남은 1950~60년대』 눈빛

『이해선 사진집 1950~1960년대 이야기』 동강사진박물관

『사진문화』 『카메라 예술』 『포토그라피(현 월간사진)』 『영상』 등 사진잡지에 작품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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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일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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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한 사 진 예 술 가 협 회 연 혁 1 9 4 5 ~ 2 0 1 4참고자료 일간지 『경향신문』 『동아일보』 『매일경제』 『조선일보』 월간지 『포토그라피』 『영상』 단행본 『내가 걸어온 한국사단』(임응식 눈빛 1999)

『한국사협사 I』(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01) 『한국예술총감 자료편』(예술원사무국 1965) 및 실물자료

일러두기 본 자료는 대한사진예술가협회로부터 제공받은 연혁을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 수정 및 보완된 내용의 경우 출처를 표시하였다

또한 정확한 날짜나 시기를 확인하지 못한 경우 lsquorsquo 표시로 대신했다

각 저술마다 조선사진예술연구회의 창립 시기는 1~2년 차이를 보이나 1957년 『동아일보』에 실린 창립12주년 촬영대회 개최 기사 및 대한사진예술가협회의 연혁을 참고해 1945년으로 보았다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출처)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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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진예술연구회(朝鮮寫眞藝術硏究會) 창립- 815 해방과 더불어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1937)와 백양사우회 (白羊寫友會 1939)의 중견회원 및 기타 지방 사진인들을 규합하여 전국적인 단체로 발족

≪창립기념사진전≫ 동화백화점 화랑 (『동아일보』)

≪제2회 작품전람회≫ 동화백화점 화랑 (『조선일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계기로 회 명칭을 대한사진예술연구회(大韓寫眞藝術硏究會)로 개칭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全國文化團體總聯合會) 가입 (『동아일보』)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람회≫ 동화백화점 화랑 (『경향신문』)

- 심사위원 이해선 박필호 안철영- 입선자 고종일 이동호 안성호 등≪제3회 대한사연회원전≫ 50여 점 동화백화점 화랑 (『동아일보』)

『대한사협회보(大韓寫硏會報)』 제1호 제2호 발행

≪제2회 조선예술사진전람회≫ 동화백화점 화랑 (『동아일보』)

- 입선자 안월산 이경모 임윤창 등

≪제3회 전국예술사진전≫ 동화백화점 화랑 (『경향신문』 및 『한국사협사 I』)

- 심사위원 현일영 이해선 박필호 이규완- 입선자 정희섭 최창희 강윤형 등

부산사진예술연구회와 ≪합동예술사진전≫ 부산 미화당 화랑 (『내가 걸어온 한국

사단』 및 『한국사협사 I』)

- 출품자 김용진 송미구 임응식 이병삼 조상규 정인성(이상 부산사연)김조현 김한용 박영진 신상우 임석제 오인창 이최형 지부원 조명원허승균(이상 대한사연)

≪제4회 작품발표전≫ 부산 루네싼스 다방 (실물자료)

취미사진청강회 대한사연 주최 강사 이해선 아카데미 다방(소공동) (『경향신문』)

아마추어사진현상촬영대회 창경원 (『경향신문』)

≪현상인화전시회≫ 대한사연 주최 미원 다방 (『경향신문』)

≪제5회 작품발표전≫ 부산 국제구락부 (실물자료)

≪제6회 작품발표전≫ 은령(銀鈴)다방 (실물자료)

10월 창립8주년 기념 촬영대회 개최

≪제7회 작품발표전≫ 미국공보원 (『경향신문』 및 실물자료)

지도위원 이해선초대회장 박영진창립회원 김정래 박필호 현일영 이규완 오인창 이태웅

회장 이해선

기획간사 김조현

회장 이규완부회장 김조현

사무실 명동 문진양행

사무실 부산 광복동사진재료상(박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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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9주년 기념 촬영대회 경복궁 (『경향신문』)

창립9주년 기념 촬영대회 ≪당선작품 발표 사진전≫ 미국공보원 (실물자료)

『대한사협회보』 제3호 제4호 발행

정기총회 개최 한창양행 (『동아일보』)

『대한사협회보』 제5호 발행≪제8회 작품발표전≫ 미국공보원 (실물자료)

창립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봉은사 및 뚝섬 일대 (『동아일보』)

창립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당선작품 발표 사진전≫

정기총회 개최 한창양행창립 11주년 기념 촬영대회 개최 덕수궁창립 11주년 기념 촬영대회 ≪입선작품전≫ 미국공보원 화랑

회 명칭을 대한사진예술가협회(大韓寫眞藝術家協會)로 개칭≪제9회 대한사연전≫ 동화백화점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창립 12주년 기념 신록촬영대회 창경원 (『동아일보』)

정기총회 개최≪제10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창립 13주년 기념 추계촬영대회 덕수궁

≪제11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창립 14주년 기념 추계촬영대회창립 13주년 및 창립14주년 기념촬영대회 ≪당선사진전≫ 중앙공보관 화랑 (실물자료)

창립 15주년 기념촬영대회 ≪당선작품전≫ 중앙공보관 화랑 (실물자료)

≪제12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제13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실물자료)

한국사협 창립(61~63년 이해선 고문 김조현 부이사장)정부 시책에 따라 일시 해산

대전지회 설립

대한사협 출신들이 모여 ≪사진예술동인전≫ 김조현 외 17명 49점 중앙공보관 (『한국예술총람 자료편』)

문화예술단체 해금령에 따라 대한사협 재건 정기총회 개최

대한사협 수요회 개최 연지동 동해루

정기총회 개최 (『동아일보』)

≪제14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제15회 대한사협전≫ 조흥은행 본점 2층 전시장 (실물자료)

제주지회 설립≪제16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실물자료)

고문박필호김광배서순삼박영진회장 이해선 부회장 조명원 최창희총무 방대훈 남상준간사 조준영 이훈 지부원 이석준 김조현

고문 이해선 회장 김조현부회장 지부원 총무 방대훈간사 이훈 남상준

회장 김조현부회장 방대훈총무 지부원

회장 김조현

고문 김조현 회장 이해선부회장 안준천 총무 김석현

회장 이해선부회장 김조현

문교부에 국전 사진부 신설을 진정

제13회 국전에 사진부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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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차 정기총회 개최 북창동 한양관『제16회 대한사협전 작품집』 발간 (실물자료)

≪제17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제17회 대한사협전 작품집』 발간 (실물자료)

제24차 정기총회 개최 및 ≪백오사진상(白烏寫眞賞)≫ 제정≪제18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실물자료)

『제18회 대한사협전 작품집』 발간 (실물자료)

제25차 정기총회 개최≪제1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김석현 공로상 이순흥)

제26차 정기총회 개최 및 제2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9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경향신문』 및 실물자료)

제27차 정기총회 개최이해선 회장에 공로상패 증정 및 제3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이순흥 김석현) (『포토그라피』)

≪제20회 대한사협전≫ 신문회관 화랑 (『경향신문』 및 실물자료)

제28차 정기총회 개최≪제4회 백오사진상≫ 시상 (『포토그라피』)

≪제21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매일경제』 및 실물자료)

≪제5회 백오사진상≫ 시상≪제22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실물자료)

≪이해선 사진작품전≫ 신문회관 화랑 (『동아일보』)

정기총회 개최 및 ≪제6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이정훈 공로상 박필호) (『포토그라피』)

≪제23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제30차 정기총회 개최 반도아케이드 4층 카페테리아≪제7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 이완섭 작품상 김형승 양승호 김기현)유자격 정회원 한국사협에 단체로 입회

제31차 정기총회 개최 및 ≪제8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안장헌)≪제24회 대한사협전≫ 신문회관 화랑 (『동아일보』)

제32차 정기총회 개최 대동관 (『매일경제』)

≪제9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 정헌태)추계촬영대회부산지회 설립

고문 김조현 회장 이해선부회장 김조현 총무 김석현이사 성두경 안준천 오인창 박병호 감사 윤상운

고문 김조현 김종양 회장 이해선 부회장 안준천 이순흥 총무 성두경이사 김석현 손석현 이완섭 서윤석감사 윤상운

총무 김용필이사 성두경 서윤석

고문 김조현 명예회장 이해선회장안준천 부회장성두경 이순흥총무 김용필이사 서윤석 안장헌박훈서양승호감사이완섭

고문 박필호rarr김종양이사 양승호(면)

고문 박필호 김조현 김종양명예회장 이해선 회장 안준천부회장 성두경 이순흥총무이사 김용필 이사 서윤석 박훈서 안장헌 양승호 감사 이완섭

고문추대 장남수

고문 박필호 김조현 김종양 장남수안준천 명예회장이해선 회장성두경부회장 이순흥 총무이사 안장헌 이사 서윤석 이정훈 이완섭 김형승 김완기 감사 김용필

≪제1회 대한민국건축 및 사진 전람회≫(91~20 국립공보관)

봄 국전 4부에 사진middot건축middot공예 신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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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영상』)

제33차 정기총회 개최 대동관 제9대 성두경 회장 연임≪제10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본회 주관-양수리)춘계 촬영대회(양수리)제2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태종대)제3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동학사)≪제1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대전지회 주최)≪제26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영상』)

제34차 정기총회 개최≪제11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김완기 공로상대전 윤필수)≪제27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영상』)

제주지회 폐쇄

『백오이해선사진집』 출판기념회 예총화랑 (『매일경제』 및 『영상』)

제35차 정기총회 개최 제10대 성두경 회장 연임≪제12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 조임환)≪제28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제2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 대전시민회관 (『영상』)

제36차 정기총회 개최 및 ≪제13회 백오사진상≫ 시상제4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통도사 범어사)제5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갑사 마곡사)≪제3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및 ≪제12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대전시민회관 (『영상』)

≪제29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제37차 정기총회 개최 제11대 이순흥 회장 취임≪제14회 백오사진상≫ 시상≪제30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제4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13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대전시민회관 (『영상』)

백오 이해선 선생 작고

제38차 정기총회 개최 미성옥≪제15회 백오사진상≫ 시상제6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해운대)제7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관촉사 쌍계사)≪제5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1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39차 정기총회 개최 한일장 제12대 이순흥 회장 연임≪제16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최진연)충주지회 설립제8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지회 주관-수옥정)제9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속리산)≪제6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2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고문 박필호(면) 김종양(면)

고문 김조현 장남수 안준천 성두경명예회장 이해선 회장 이순흥 부회장 이완섭 김용필 총무 이정훈 이사 안장헌 김완기 박동운 송정웅송주헌 심재욱 송정회감사 서윤석 윤필수

이사 최진연 박명식

81~83년 성두경 한국사진작가협회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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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차 정기총회 개최≪제17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0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미륵사지)≪제7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11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 대둔산 도산계곡)≪제33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1차 정기총회 개최제13대 이순흥 회장 연임≪제18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2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하회마을)≪제8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13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지회 주관-탄금대)≪제34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2차 정기총회 개최 파인 힐≪제19회 백오사진상≫ 시상고창지회 설립제14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을숙도)

『대한사협회보』 복간호(제6호) 발간고 백오 이해선 선생 추모비 건립≪제9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5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3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20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5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고창지회 주관-선운사)

『대한사협회보』 제7호 발간제16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본회주관-용인민속촌)구미지회 설립≪제10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6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4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21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7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신원사)대천지회 설립문화부에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문화가족으로 등록제18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지회 주관-탄금대)≪제11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7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5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22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9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경주일원)≪제38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제12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

제46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23회 백오사진상≫ 시상제20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천-대천해수욕장)≪제39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감사 서윤석(면) 박노택

고문 김조현 이순흥회장 안준천부회장 김용필 안장헌총무 최진연이사 김완기 송주헌 송정회 심재욱 박노택 조창만감사 이정훈 고승웅

이사 송주헌 황응천 원종철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회장 김용필 부회장 이정훈 박노택총무 최진연 이사 안장헌 김완기 정완철 송주헌 심재욱 원종철 박부공황순조 황응천 김태영 감사 송정회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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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 모란룸≪제24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최진연)고 백오 이해선 선생의 한국사단 발전에 기여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白烏李海善寫眞文化賞)≫ 제정≪제40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한국의 풍물 사진공모전≫ 대한사협 호영출판사 공동주최

제48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1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유동호)원주지회 설립이천지회 설립청주지회 설립≪제41회 대한사협전≫ 코닥포토살롱제21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속리산)

제49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2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황규태)제22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엑스포장)고창지회 폐쇄≪제3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윤주영)≪제42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대한사진술가협회 창립50주년 작품집』 발간

제50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전주지회 설립≪제4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최민식)≪제43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1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대한사협회보』 제8호 발간제23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원주지회 주관-치악산)남원지회 설립≪제44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2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5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강상규)

『대한사협회보』 제9호 발간제24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대청호)대구지회 설립김제지회 설립≪제45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3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6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이순흥)

『대한사협회보』 제10호 발간제25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구지회주관 - 경주OK그린청소년 수련원)≪통일염원 전국사진공모대전 작품전시회≫ 개최(대구지회 주최-대구 동아쇼핑 전시관)≪제7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송기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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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회장 안장헌 부회장 이정훈 김완기총무 송정회 이사 원종철 송주헌 한창동 황순조 박부공 허현 감사 박노택 최진연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자문위원 안장헌 회장 이정훈부회장 김완기 박노택 총무한창동이사 원종철 김완선 이순재 박부공 이광호 이재옥 김광범 양호용감사 황순조 최진연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자문위원 안장헌 이정훈 회장 박노택 부회장 김완기 최진연 총무 이광호이사 박부공 이재옥 윤중일감사 한창동 조창만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 박노택자문위원 안장헌 이정훈회장 김완기부회장 황순조 박부공총무 윤중일이사 김광범 김준영 강승규 김이경감사 한창동 이재옥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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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1

≪제46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원주지회 폐쇄

제54차 정기총회 개최 대림정대한사협사진강좌 개최(연8회) 월례촬영회 개최(연8회)제26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 서울대청호

『대한사협회보』 제11호 발간대한사협 대구지회-중국 연길시 촬영가협회와 자매결연(연길시 청년호텔)원주지회 재설립≪제8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최흥만)≪제47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창립 55주년 기념 『2000대한사협사진집』 발간

제55차 정기총회 개최 대림정대한사협 사진강좌 개최(연8회) 월례촬영회 개최(연5회)정읍지회 창립제27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정읍 내장산)≪제48회 대한사협전≫ 및 CD작품집 제작 예총화랑 제1전시실

제56차 정기총회 개최 사랑채월례촬영회 개최(연4회)제28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서울 남한산성)≪한중 국제교류전≫ 대한사협 대구지회 대구 대덕문화회관≪제49회 대한사협전≫ 및 CD작품집 제작 예총화랑 제1전시실

제57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월례촬영회 개최(연6회)제29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 중앙탑공원)≪제9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김한용)≪제50회 대한사협전≫ 및 2003대한사협작품집(CD작품집) 발간예총화랑1-2전시실

『대한사협회보』 제12호 발간

제58-60차 정기총회 개최제51-53회 ≪대한사협전≫제30-32회 전국회원촬영대회대한사협 인터넷홈페이지 개설(wwwpaakoreacom)제1회 대한사협 사진공모전

『대한사협회보』 제13호 발간『창립60주년 전국회원전 작품집』 발간(2005)이해선 선생 탄신 100년기념 유작전(대구middot충주middot원주middot대전middot전주순회전) 개최 및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보는 1950-60년대』 (눈빛) 발간(문화관광부middot조선일보 후원)남원지회 청주지회 구미지회 폐쇄(2006년)전주지회 설립(2006년)

제61-63차 정기총회 개최≪제54-56회 대한사협전≫제33-34회 전국회원촬영대회이천지회 폐쇄(2007년)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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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위원rarr고문 안장헌 이정훈고문추대 방대훈이사 강승규(면) 김이경(면) 원종철 김광석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 박노택안장헌 이정훈 방대훈 회장 김완기 부회장 황순조 유병주(대전) 총무이사 윤중일이사 김준영 원종철 김광석 심재욱감사 강승규 이재옥

총무이사 윤중일(면) 최인호

회장 최진연

회장 최진연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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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지회 김제지회 원주지회 폐쇄(2008년)한밭지회 설립(2008년)≪제10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안장헌 2007)≪제11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조세현 2009)

제64차 정기총회 개최 PJ호텔 4층 카라디움≪제57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제35회 전국촬영회

제65차 정기총회 개최 충무로 아스토리아호텔제36회 전국촬영회 및 대천지회 전국 사진인리더 초청세미나(한화콘도 세미나실 대천해수욕장)김제지회 재설립(지회장 이성수 총무 구반반) ≪제58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

제66차 정기총회 개최 충무로 아스토리아호텔≪제12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안희탁) 제37회 전국촬영회 및 대천지회 전국사진인 리더 초청 세미나(대천해수욕장내 청주대 수련원 및 머드축제광장)울산지회 설립(지회장 이헌배 총무 심화실) ≪제59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

2013년 제1차 이사회 개최 충무로 통로이미지(주) 회의실 참석 이정훈 외8명제67차 정기총회 개최 캐피탈호텔 뷔페식당 스카이(그릴 룸)≪제60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회원 자질 향상을 위한 사진학 강좌 개설(강사 진동선 2013~2014)

≪제13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마이클 케나(MichaelK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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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정건영

회장 이철집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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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3

김 완 기(金莞祁 1944~ )

1962 충주고등학교 졸업

1964 청주교육대학교 졸업

1969 《제1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입선

1977~1991 KBSEBS방송 출연 15년

1989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교육학 석사)

1990~1999 《대한민국사진전림회》 8회 입선

1993~1999 청영회 회장 역임

1997 《제16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 특선

1998 교육부 초등교육정책과장 역임

1999~2013 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 3회 역임

1999~2014 《전국사진공모전》 심사위원 70회 역임

2002 강남구사진작가회 창립회원 및 회장 역임

2003 서울성북교육청 교육장 역임

2004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초대작가

《서울특별시사진대전》 초대작가

《제1회 김완기사진전》 세종문화회관별관 광화문갤러리

2004~2008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 역임

2005 2013 제24회 제31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심사위원 역임

2005~2007 서울특별시사진작가협의회 초대 회장 역임

2006 『김완기사진집』 출판 창조집단 시빌구

《제2회 김완기사진전》 세종문화회관별관 광화문갤러리

2008~2014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조정위원

2011 《서울특별시사진대전》 운영위원 역임

2011~2014 APC뉴스(한국예술사진인연합회) 회장

2013 김완기 자서전 『분필과 셔터로 그린 자화상』 출판 하얀나무

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고문

강남구사진작가회 자문위원

서울특별시사진작가협의회 고문

청영회 고문

한국사진작가협회 자문위원

구 술 자 연 보

안장헌(安章憲 1947~ )

1969 2 고려대학교 농업경제학과 졸업

1966~2014 고려대학교 호영회 창립회원 호영동우회 회장역임 및 회원

1968~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원 이사(1973~1992) 회장(1993~1995) 현 자문

1973~1975 동화출판공사 『한국미술전집』 사진담당

1976~1977 월간 『영상』 편집장

1977~1979 현암사 『한국미술오천년』 기획 및 편집책임

1979~1995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 3회 역임 현 자문위원

1980~2005 호영문화사 편집인

1981~1992 신구대 사진과 강사

1984~1987 서울교육대학 미술교육과 객원교수(사진학)

1990~1994 롯데문화센터 사진교실 강사

1994~1998 삼성사진문화교실 전임강사

1995~2014 한국불교사진협회 고문

1995~2014 (사)신라문화원 이사 현 자문위원

2000~2014 경주 계림사우회 지도교수

2004~2009 동강사진마을 운영위원

2005~2014 문화유산사진연구소 소장

2009 봉은사진교실(봉은사) 강사

2010~2014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 안장헌디지털사진교실 지도교수

그룹전

1966~2014 고려대학교 호영회 호영동우회 회원전 80여점 출품

1968~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전(17~60회전) 70여점 출품

1990 《사진가 8인전》 후지포토살롱

1994 《한국현대사진의 흐름전》 〈산사일기〉 출품

1996 《Image ofKoreanCultual Heritage》 UNESCO본부 파리

1997 《Buddist Images ofKorea》 독일 함부르그

1997~1998 《서울사진대전》 〈낙선재 일곽〉 〈금원에서〉 출품

1997~2014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전 19점 출품

1998~1999 《경기도사진작가초대전》 출품

1999 《한일사진교류전~자연과 인간을 향하여》 출품

2001 《아름다운 우리 문화재 4인전》 국립진주박물관

2004 《한국다큐멘터리사진 33인전》 동강사진축전

개인전

1996 《서라벌 빛 그리고 향기》 서라벌문화회관

2002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신라문화원 화랑

2003 《세계문화유산과 경북》 경주문화EXPO솔거방

2007 《왕릉의 호랑이》 동강사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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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창호》 인사동 갤러리 북스

2010 《돌 호랑이 그림 호랑이》 인사동 갤러리 북스

2012 《선비의 고향 서원》 인제대 도서관 김학수기념박물관

주요 사진저작

1982 『석불』 호영

1989 『석굴암』 예경

1991 『경주 남산의 탑골』 열화당

1992 『선의 세계』 호영

1993 『영겁의 미소』 불광

1994 『신라의 동해구』 열화당

1996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삼성문화재단

1998 『서원』 열화당

2002 『신라의 마음 경주』 한길아트

『남산』 한길아트

2003 『돌에 새긴 정토의 꿈~석불』 한길아트

『석조미술의 꽃~석가탑과 다보탑』 한길아트

『사진으로 보는 한국미~무늬』 호영

2005 『BUDDHA~Bildnisse ausStein inKorea』 ErnstWasmuthVerlog

Tubingen 독일 베를린

2006 『범종~생명의 소리를 담은 장엄』 한길아트

저서

1987 『국립공원』 김성옥 문순화 송기엽 안장헌 공저 호영)

1995 『사진으로 배우는 사진촬영교실』 호영

2001 『아름다운 우리문화재』 관조 김대벽 한석홍 안장헌 공저 국립진주박물관

2003 『문화유산 일기』 진선출판사

수상

1977 《백오사진상》 작품상 수상(대한사진예술가협회)

1999 『서원』으로 《간행물윤리상》 저작상 수상(간행물윤리위원회)

2006 《한국사진문화상》 공로상 수상(한국사진작가협회)

2007 《이해선사진문화상》 수상(대한사진예술가협회)

2011 《대한민국문화유산상(대통령상)》 봉사활용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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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5

참 고 문 헌 목 록

「봄 국전심사에 물의 사진 심사위원에 시비」 『동아일보』 1977421

「봄 국전 심사 낙수(落穗)」 『경향신문』 1977425

「현대사진문화상 이해선 씨 뽑아」 『동아일보』 19781128

「사진문화-사협고문 이해선 씨 작품집 발간」 『매일경제』 19801129

「사진 50년 역사를 한 눈에」 『매일경제』 1981120

「사진작가 이해선 작품집 두 권 내놔」 『동아일보』 1981629

「부고-원로 사진작가 이해선 씨」 『동아일보』 1983111

「일화로 엮는 명암 100년 화단이면사( ) (27) 화가와 문인과 신식 여성」

『경향신문』 198554

「이해선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사진전」 『연합뉴스』 20051026

「lt단신gt 백오 선생 탄신 100돌 사진전」 『문화일보』 20051031

「사진예술가협회 창립 60주년 기념전」 『매일신문』 20051117

「문화의 향기-전시」 『부산일보』 200615

「백오 이해선 선생 미발표유작 사진전」 『부산일보』 200617

「[전북][광주전남][제주][대전충남]문화가」 『동아일보』 2006120

「영월 동강사진박물관-이해선 특별기획전 2007년 3월 첫 주까지」 『뉴시스』

20061227

「사진과 친해지려면 옛 서울역사로 가보세요」 『헤럴드경제』 201041

월간지 계간지

김용준 「서화협전의 의미」 『삼천리』 1931년 11월호

「lt부감(俯瞰)gt(이해선 작)gt」 『사진문화』 1956년 6월호

「아마츄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호

연성숙 「일제 한인귀족의 근황」 『진상(眞相)』 1960년 3월호

「창간사 이해선 씨」 『포토그라피』 1966년 8월호

「나의 발언」 『포토그라피』 1966년 8월호

「작가 지상초빙작가-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달의 작품사진 제주풍물-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해선 「해외 예술사진 감상실 (1회)」 『포토그라피』 1968년 4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6) 석가탄일」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7)」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제1회 새한사진콘테스트」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8) 동해진미」 『포토그라피』 1969년 9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9) 야채밭」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0) 건제(乾梯)」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제18회 국전 소식」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1) 초설(初雪)」 『포토그라피』 1969년 12월호

이해선 「돌과의 대화 30년」 『월간 중앙』 1969년 12월호

「초대작가 사진」 『포토그라피』 1970년 9월호

이해선 「고궁풍물(1)」 『포토그라피』 1971년 1월호

_______ 「고궁풍물(2)」 『포토그라피』 1971년 2월호

이해선 관련

일간지

「입선자의 방명록」 『매일신보』 1926512

이태준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1029

「금조개장한 동미전 제2회」 『동아일보』 1931412

홍득순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417

「인사(人事)」 『매일신보』 193886

이해선 「예술사진의 연혁과 개념」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동인전」 『경향신문』 19491115

「인사(人事)」 『경향신문』 1953110

이해선 「등하수상(燈下隨想)」 『동아일보』 19551112

_______ 「사진예술의 독자성」 『동아일보』 1956126

_______ 「사진 8인전 소감」 『경향신문』 195647

_______ 「백오(白烏)의 변(辯)」 『동아일보』 195749

「김포공항에 내린 덕혜옹주-이해선 씨가 부축하고 있다」 『경향신문』 1962126

「5월 예술상에 붙이는 제언」 『경향신문』 196231

「2명이 사퇴 사진부문심위원」 『경향신문』 1964109

「영예의 산실 안팎」 『동아일보』 19641013

「횡설수설-국전 사진부 이해선 심사위원 사퇴」 『동아일보』 19641014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중요한 내용middot형식 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1020

「열띤 감정으로 충만-창협 창립 사진전」 『동아일보』 1965119

「한국국제사진살롱 위원 명단」 『동아일보』 1965116

「동아국제사진살롱 심사평-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28

「제4회 사진동우회전」 『동아일보』 1966121

「동아사진살롱 심사평-총 801 응모」 『동아일보』 196729

「위원장에 이종우 씨 국전심사위원 위촉」 『동아일보』 1967920

「국전심사위원장 도상봉 씨 선출」 『경향신문』 1968919

「석우회(石友會)서 돌 전람회」 『동아일보』 1970428

「예술인에 훈장 이해랑 씨 등 9명」 『경향신문』 1972118

「외길 한평생 lt11gt 사진middot예술 이해선」 『선데이서울』 1973318

「현역 원로 작가 초대전 일제하의 침울이긴 예술자세 생생하게」 『경향신문』

1974831

「이해선 씨 작품전 향토풍물 50점 전시」 『동아일보』 19741118

「이해선 사진전」 『경향신문』 19741119

「이해선 사진 작품전 24일까지 신문회관」 『매일경제』 19741121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423

「국전운영위원 위촉」 『동아일보』 1976317

「국전사진부문 사단중진들 반발」 『동아일보』 1976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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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_______ 「고궁풍물(3)」 『포토그라피』 1971년 3월호

_______ 「고궁풍물(4)」 『포토그라피』 1971년 4월호

_______ 「고궁풍물(5)」 『포토그라피』 1971년 5월호

_______ 「고궁풍물(6)」 『포토그라피』 1971년 6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7)」 『포토그라피』 1971년 7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8)」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포토그라피 창간5주년에 붙여서」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9)」 『포토그라피』 1971년 9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0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1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2)」 『포토그라피』 1971년 12월호

「제2회 사진국전마감 심사위원결정」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이해선 「이해선 떡에 얽힌 시속(時俗)의 금석(今昔) 옛떡이 사라져 간다는데」

『월간 중앙』 1973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1)」 『포토그라피』 1973년 8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2)」 『포토그라피』 1973년 9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0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6)」 『포토그라피』 1974년 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7)」 『포토그라피』 1974년 3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8)」 『포토그라피』 1974년 4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9)」 『포토그라피』 1974년 5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끝)」 『포토그라피』 1974년 6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 『포토그라피』 1974년 7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2)」 『포토그라피』 1974년 8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3)」 『포토그라피』 1974년 9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4)」 『포토그라피』 1974년 10월호

_______ 「작가와 작품-풍물백태 중에서」 『포토그라피』 1974년 1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6)」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7)」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8)」 『포토그라피』 1975년 3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9)」 『포토그라피』 1975년 4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0)」 『포토그라피』 1975년 5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1)」 『포토그라피』 1975년 6월호

_______ 「곡필무사(曲筆誣事)를 밝힌다」 『월간 중앙』 1975년 11월호

「영상 창간 1주년 기념 좌담회 한국 사진 산업의 의 오늘과 내일」 『영상』 1976년 6월호

「국전 초대작가 8인선 김조현 이건중 이경모 이해선 임응식 이형록 정인선

조현두」 『영상』 1977년 1월호

「남기고 싶은 작품 3 이해선」 『영상』 1977년 5월호

「예술사진에 대한 견고한 확신 이해선 사진의 예술성」 『영상』 1978년 5월호

「한국현대미술대전」 『영상』 1978년 10월호

이명동 「처음 제정된 사진문화상에의 기대」 『영상』 1979년 2월호

「행사 백오 이해선 선생의 사진작품집 출판기념회」 『영상』 1981년 2월호

「작품집 소개 이해선 작품집 중에서」 『영상』 1981년 4월호

박재능 「다양한 자기 세계의 길」 『영상』 1981년 12월호

「영상방담-사단의 이 얘기 저 얘기 김정래 임석제」 『영상』 1982년 1월호

「이미지의 합창-봄의 첫 장」 『영상』 1982년 4월호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 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호

岩宮武二 「너 어디 있느냐」 『영상』 1983년 1월호

최인진 「1930년대의 아마츄어 사진활동」 『사진사연구』 통권 제5호 1983년 9월호

박재능 「월평-원로 이해선 선생을 추모한다」 『영상』 1983년 12월호

「한국 근대미술의 발자취」 『계간미술』 중앙일보사 1985년 봄호

「다시 보는 명작 정도선 정인선 신현국 강대환 김일창 이해선」 『영상』 1986년 10월호

「고 백오 이해선 선생 추모비 건립」 『영상』 1989년 1월호

「동경 유학생들의 한국 근대미술」 『월간미술』 1989년 9월호

「화보로 보는 한국 동경 유학생들의 자화상」 『미술세계』 1993년 5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조선총독부 관보』 제4087호(192647) 한국학문헌연구소 서울 아세아문화사 1926

이태현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1집 서

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2

_______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 자화상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3집 서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4

신명호 「일제하 이왕직과 이왕가 족보」 『한국학대학원논문집』 제11집 한국정신문화

연구소 1996

최인진 「한국사진 역사의 증인(4) - 사단의 단체 활동과 이해선」 『한국사진』 2002

이가라시 코이치 이중희 역 「조선미술전람회의 창설과 서화」 『한국근대미술사학』

제12집 한국근대미술사학회 2004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의 입학제도와 조선인 유학생」 『동악미술사』 제6호 2005

허보윤 「미술로서의 디자인 이순석의 1946-1959년 응용미술교육」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단행본

조우석 『한국사진가론』 눈빛 1998

작품집 도록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1926

이해선 『이해선 사진작품집』 평화당 1980

_______ 『한국의 고궁』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0

Tucker Anne Iizawa Kotaro Kinoshita Naoyuki The History of

Japanese Photography London YaleUniversityPress 2003

이해선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남은 1950-60년대』 눈빛 2005

_______ 『이해선 사진집 1950~1960년대 이야기』 동강사진박물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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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7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일간지

「부산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24531

「성공을 기대 조선사진연구회 현일영 씨 담」 『조선중앙일보』 1936826

「경성아마사진구락부 제1회전」 『조선일보』 1938417

「사진작품전」 『동아일보』 19381014

「경성사진동호회 작품전람회개최」 『조선일보』 19381027

「사진동호회작품전」 『동아일보』 1938112

「경성아마추어 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39527

「아마추어 사진인화전」 『매일신보』 19391115

「동서남북-lsquo아마추어rsquo 제4회 인화전람회」 『동아일보』 19391115

「동서남북-합동인화전」 『동아일보』 1940126

「아마추어 사진의 인화전」 『매일신보』 194074

「경성아마츄어 제5회 인화전」 『조선일보』 194075

「경성백양사우회 제1회 인화전람회 개최」 『매일신보』 19401113

「제2회 사진전 명일부터 화신에서-백양사우회」 『매일신보』 19411124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55

「사진작품전」 『조선일보』 1946119

「전국문화총연발족」 『동아일보』 194729

「제1회 조선사진예술전」 『경향신문』 19475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7510

「사진전람회개최」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전응모작 답지」 『경향신문』 1947615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 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629

「제1회예술사진전람회 15일부터 동화백화점」 『경향신문』 1947713

「예술사진 입선 수상식을 거행」 『경향신문』 1947720

「예술사진전 19일부터」 『동아일보』 1947121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8224

「사예(寫藝) 2회전 작품을 현상모집」 『경향신문』 19481013

「예술사진전 심사 오는 8일로 연기」 『동아일보』 1948127

「지방출품우수-제2회 예사전」 『동아일보』 19481212

「사진예술전 22일부터 동화화랑서」 『동아일보』 19481221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964

「전국종합사진전 심사결과-특선1석 최인집 씨」 『동아일보』 194977

「사진예술의 정화-제3회 전국예술사진전」 『경향신문』 19491010

「예술사진전 30일로 마감박도」 『경향신문』 19491128

「예술사진전 입선자 발표」 『경향신문』 19491213

「예술사진전시회」 『동아일보』 195316

「춘계사진섭영회 26일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3

「본사후원 춘계촬영대회 오늘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6

「사진현상모집」 『경향신문』 1953517

「특선에 lt만춘gt」 『경향신문』 1953527

「인화 당선자 수여식」 『경향신문』 1953529

「사진작품발표전」 『경향신문』 1954413

「예술사진전시회 US-S화랑서」 『동아일보』 1954415

「집회」 『동아일보』 1954916

「경복궁서 촬영대회」 『경향신문』 1954919

「내 26일 촬영대회 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4922

「사연 촬영대회 여감(餘感) 아마추어 사진도(寫眞道)」 『동아일보』 1954103

「문화집합」 『동아일보』 1955122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77

「사연(寫硏) 창립 10주년 기념 어제 촬영대회 성황」 『동아일보』 1955711

「촬영대회 입선작 결정」 『동아일보』 1955819

「8인 사진전 개최」 『동아일보』 1956329

「9회 사연(寫硏)전」 『동아일보』 1957414

「신록촬영대회 개최 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62

「대한사진예술가협회서 사진전시회 개최」 『동아일보』 1958711

「10년 후의 우리 문화 건국 20주년을 장식하고 싶은 것」 『동아일보』 1958821

「사진예술가협회 11회 회원작품전」 『동아일보』 195979

「문화 소식」 『동아일보』 1960119

「국전에 사진부문도」 『동아일보』 1963410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결정 특선 조천용 작」 『동아일보』 19641020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653

「렌즈의 향연 영예의 초점-제4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동아일보』 196667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61217

「사진예술가협회전」 『동아일보』 19681022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9830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996

「국립공보관 12월 전시회 스케쥴」 『경향신문』 1971126

「문화단신」 『경향신문』 19721128

「사진예술협 작품전 7일까지 공보관서」 『매일경제』 1973111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에 안준천 씨」 『경향신문』 197526

「동아포우스트」 『동아일보』 19751117

「사진예술가협회 창립30돌 기념전」 『경향신문』 19751118

「추계 친목 촬영대회」 『매일경제』 197610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7830

「사진예술가협 정총(定總) 31일 하오 대동관서」 『매일경제』 19781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81031

「문화광장」 『동아일보』 1993121

「한국사진예술 50년을 펼친다」 『한겨례』 1994111

「사진예술가협 사라진 풍물전」 『서울신문』 20051025

월간지 계간지

「사진클럽 지상소개 대한사협의 발자취」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박필호 「논단 대한사협16회전을 보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210-280 140p-180p 0723_1 14 07 23 오후 823 페이지 157

158

「대한사협 16회전」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사협 16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8년 7월호

「대한사협 충남지부 회원전」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경축 창간 3주년 사진과 관광 포토그라피-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대한사협 18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제18회 대한사협전」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 작품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70년 3월호

「축 창간4주년 서울 선데이 카메라 클럽」 『포토그라피』 1970년 8월호

「축 포토그라피 창간 5주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김종양 씨 대한사협 고문 추대」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3년 3월호

「lt파도gt 김도현 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신춘초대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근하신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75년도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창작선」 『영상』 1977년 1월호

「전시장 순례 대한사진협회 회원전」 『영상』 1977년 11월호

「지상소개-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대한사협 제27회 정기총회 개최」 『영상』 1979년 7월호

박필호 「대한사협 27돐에 대한 축사」 『영상』 1979년 7월호

「제26회 대한사협전」 『영상』 1980년 1월호

「제27회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사진전시회」 『영상』 1980년 12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요강」 『영상』 1981년 5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영상』 1981년 10월호

「탐방-뜻이 있으면 길이 있게 마련 세 번째 전국대학사진 공모전을 연 대한사협충

남지회의 단합된 모습」 『영상』 1983년 1월호

「제3회 전국대학생사진 공모 제12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월호

「제13회 대한사협 충남 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2월호

최인진 「경성아마츄어카메라구락부를 말한다」 『사진사연구』 1984년 7월호

「대한사협본부 주최 제9회 한국국제사진전 입상자」 『영상』 1989년 1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대한민국예술원 편 『한국예술총감 자료편』 대한민국예술원 1965

한국사진협회 「사진계소식 1969년도」 『한국사진연감』 1970

_____________「한국사진협회의 연혁 1976년 10월 30일」 『한국사진연감』 1976

임범택 「사진」 『1977년도 문예연감』 1978

______ 「사진」 『1978년도 문예연감』 1979

한국사진협회 「역대역원명단(歷代役員名單) 1962년~1987년」 『한국사진연감』

1988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제1장 한국사진협회 창립 이전의 사진계 동향」 『한국사협

사 I 1945-1970』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01

최인진 「해방 초기의 사진잡지 연구-『국제보도』와 『사진문화』를 중심으로」 『한국

사진학회지 AURA』 제10호 2003

박혜성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사진문화』 목록 및 해제」 『한국 사진 잡지

『사진문화』 연구』 명지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한국사협 50년사』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13

단행본

임응식 『내가 걸어온 한국사단 임응식 회고록』 눈빛 1999

작품집 도록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제16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7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8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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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9

원 문 자 료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년 10월 29일 4면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년 4월 17일 4면

1 이해선 양화기(洋畵期) 관련 참고 자료

「입선자의 방명록」『매일신보』 1926년 5월 12일 3면

「금조 개장한 동미전 제2회」『동아일보』 1931년 4월 12일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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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참고 자료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년 5월 5일 2면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년 6월 29일 3면

「신록촬영대회개최-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년 6월 2일 4면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년 7월 7일 4면

예술사진전 조선사진예술연구회에서는 5월 6일부터 동11일까지의 6일간에 걸쳐 동화백화점(舊三越) 갸라리--에서 창립기념사진전을 개최하기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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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해선 관련 원문 자료

원문은 당시의 표기를 그대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현재의 띄어쓰기와 맞춤법에 맞지 않는 부분들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수정하였고 일부 [ ] 안에 병기했다 원문의 한자는 모두 한글 독음으로 고쳤으며 의미 전달을 위해 필요한 경우 ( )안에 병기했다

「대담 아마추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 pp 48~52

작가가 사태(沙汰)났어

본지 공사간에 바쁘실 텐데helliphellip 사진문화의 발전을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

해 주십사 하는 것은helliphellip 요즘 각 직장이나 학생들 간에 사진열이 굉장히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 비

추어서 이 아마추어 카메라맨의 지도 문제를 비롯하여 초보자의 진로랄까helliphellip 이런 문제에 대한 말

씀을 좀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해선6middot25 동란 후에 개인적으로 사진을 연구해 보겠다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직장이나 학교 단위로

사진동호자의 클럽이 많아 지고 작품 발표라던가 전시회 같은 것이 무척 많아졌는데helliphellip 어쨌든

일반 사회인이나 학생 간에 사진열이 높아졌다는 건 기쁜 일이야

임응식그런데 아직도 이 카메라를 사치품으로 취급하는 층이 많아서 곤란해요

이 나라(정부)에서부터 사치품 취급을 하더군helliphellip 여자들이 다이아몬드를 사려는 것과 사진을 연구하

려는 사람이 카메라 장만하는 것을 똑같이 취급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곤란

하지

임 헌데 우리 사단(寫壇)에선 우선 lsquo사진작가rsquo라는 용어를 쓰는 데에 신중을 기해야 하겠어요 웬 놈의

lsquo사진작가rsquo가 그리도 많은지helliphellip 이건 카메라만 메고 다니면 모두 작가 행세를 하니helliphellip

이 카메라 멘 것이 모두 lsquo작가rsquo라면 대한민국에 lsquo사진작가rsquo가 수 십만도 될 걸helliphellip 작가라는 친구들을

체에 넣어서 걸러 놓으면 엄격한 의미에서 진짜 lsquo작가rsquo는 몇 사람 밖에 없을 텐데helliphellip

임 호주머니에 만년필을 꽂았다고 해서 문학가 혹은 소설가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겠는데hellip

hellip 어쨌든 요즘 성행하는 사진작가의 사태를 우선 잡지에서 만이라도 용어 사용에 엄격한 규정을

지어서 질서를 잡아 주어야겠어요

이 그것도 과도기적 현상이겠으니까 차차 지양되겠지helliphellip 오늘 해달라는 얘기는 그런 넋두리가 아닐

테니까 어디 이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본지 한마디로 얘기하자면helliphellip 카메라는 어떻게 해서 장만을 했는데 mdash 자 그 다음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겐지 몰라서 어쩔 줄 모르는helliphellip 이런 아마추어와 초보자들의 진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얘기를

좀helliphellip 현재 직장 단위로 사진 동호자들이 모여서 클럽을 이룩한 것이 십 여 개 있고 학교 단위로는

이십 여 개나 되는데요helliphellip

관련 자료 소개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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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인식이 안이해서 탈이야

이 극히 초보적인 입장에서 사진을 해보고 싶다helliphellip 다년간 연구를 한 다음엔 작가가 돼 보겠다 mdash 하

는 사람들을 회원으로 해서 수 십 년 동안 연구를 해 왔는데helliphellip 오늘날 하고 있는 일도 그것이지만

helliphellip 여러 부문에 걸쳐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서적인 면에서 사진과 친해보고 싶다던가

또는 카메라를 장만했는데 어떻게 하면 앞으로 향상 발전할 수 있는가 mdash 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신인이라고 하겠지 특히 학생들의 교내 활동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helliphellip 헌데 막상 다다

르고 보면helliphellip 어떠한 길이 올바른 길인지 막연해 하는 모양이더군요

임 초보자들은 무엇보다도 사진 자체에 대한 정의를 뚜렷이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아마추어 mdash

하면 취미적 입장에서 사진을 다루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조각이나 회화와 같이 사진도 어엿한 예술이니

까 취미 도락(道樂)적인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예술을 추구하는 진지한 마음의 준비가 우선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물론이죠 대개 클럽 조직이 되어 있으니까 선생들의 지도를 받고 있겠지만 내가 알기에는 전문가

가 아닌 다시 말하면 취미 정도에서 관심이 있는 선생들이 지도를 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역시 전문으

로 사진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지도를 가끔씩이라도 받는 게 좋겠지요

임 지도를 한다는 사람들의 태도부터가 성실성이 없는 것 같아요 만년필을 샀으니까 나도 한 번 써 보

자 mdash 해서 작가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취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남의 lsquo지도rsquo를 담당

할 수는 없을 텐데 mdash 우리가 사진을 전공한대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억지로 지도해 주겠다고 밀고

들어 가겠다는 건 아니지만 mdash (웃음) mdash 어쨌든 전문가의 지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학생 클럽이나 직장 클럽 같은 동호자의 모임을 사단의 일부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취미

에서 시작했더라도 일정한 과정을 밟고 다년 연구를 거듭하면 자연히 작가를 지향하게 되겠지만hellip

hellip 그런 면에서도 처음 싹트기 시작하는 신인의 지도가 퍽 중요한 것이지요

취미middot도락이란 관념을 버려야 해

임 지금 형성되어 있다는 직장이나 학교 단체의 거의 전부가 전문적인 입장에 서 있지 않은 것 같더군

요helliphellip 사진에 대한 근본 의식이 너무도 안이한 것 같아요 카메라를 통한 표현의식에 절실한 감정

이 없어요helliphellip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비판을 받지 않는다helliphellip 하는 따위의 도피를 해서는 곤란

하죠helliphellip 창작의식이 확고하게 수립되지 않아서는 향상이 없는 것인데helliphellip 소문에 듣자면helliphellip 너

무 기술 면에만 치중하고 정신적인 면이 소홀히 취급된다는 거에요 helliphellip 나는 직장을 갖고 있으니

까 사진이란 것은 취미 정도로 한다 mdash 하는 태도를 버려야죠 특히 이 점은 지도자들에게 권하고 싶

은데helliphellip 예술의식helliphellip 이것이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절대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까

이 그렇구 말구요helliphellip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새로 사진을 공부하겠다는 신인들에게 네 가지 의식을 주

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휴머니즘 mdash 우선 사람이 돼야 하거든요 교양이라던가 인격 덕망helliphellip 이런 면에서 인간이

돼 있어야 하고 둘째는 사진예술을 한다고 해서 사진예술이 무엇이냐helliphellip 이것만을 추궁해서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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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요 좀 더 시야를 넓혀서 예술이라는 게 뭐냐 mdash 하는 걸 먼저 알아야지 셋째에 가서 사진예술이

라는 게 뭐냐 mdash 를 연구하고 넷째에 가서야 비로소 작품이라던가 창작의식 기교 기술에 대한 검

토를 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기본조건을 머리 속에 언제나 간직하도록 나는 주장해 왔어요

임 기술면을 등한히 할 수는 없겠지요 기술 없이는 표현이 안되니까helliphellip 그러나 이선생 말씀처럼 인

간본연의 문제도 크긴 큽니다 다른 예술부문의 사람보다 교양면에서 뒤떨어지지나 않는가 mdash 하는

것이 항상 염려되는데helliphellip 만일 뒤떨어진다면 큰일이지요 기술도 중요한 문제겠지만 교양인격 같

은 것도 예술가가로서의 긍지를 위해선 떨어질 수 없는 문제고helliphellip 더욱이 좋은 기술을 가졌으면서

도 기초교양이 모자라서 좋은 작품을 낼 수 없다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으니까helliphellip 교양인으로서의

자격도 다른 예술부문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사진을 해야할겝니다

이 기교나 기술을 어떻게 우물쭈물 배웠다고 해서 작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helliphellip 예술이란 그 자체

에 대한 조예부터 깊어야 합니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조리개가 얼마다 타임이 어

떻다helliphellip 암실작업은 어떻게 하는 거다helliphellip 이것만을 알았다고 해서 작가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에

요helliphellip 인간면 예술면 기술면에 똑 같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마 사진을 연구하겠다는 신

인들의 기본이념이 돼야 할겝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지도한다는 면에서

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거든요 mdash

임 어쨌든 기술을 위주로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난 옛날 얘기입니다

지도자 시비

이 지났다기 보다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는 장래에나 변할 수 없는 기본이념이겠지요 사진이라는 것

은 더욱이나 고도의 대중성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인격과 교양이 필요해요 기계라는 거야 찍으면

사진이 되도록 마련된 것이니까 예술까지는 못 가도 사진은 되거든 mdash 그러니까 그것을 예술로 이

끌려면 찍는 사람의 성분이 문제되는 것이지요helliphellip

임 그런 의미에서도 사단의 규정이 필요하고 작가라는 규정이 필요해요 사단이라는 것에 너무 엄격한

규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helliphellip 만년필을 가졌다고 해서 전부 문학가가 아니라면helliphellip 카메라를 메었

으니 작가다 mdash 하는 엉터리도 용납될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우선 필요한 것은 취미 도락이라는 관념

을 지양해야 할 텐데helliphellip

이 취미가 차차 심각해지면 창작의식도 생기는게니까helliphellip 그런 사람들을 지도 계몽해서 한 사람이라

도 작가로 이끌어야 하겠지요helliphellip 카메라를 살 때부터 나는 사진작가가 되겠다 mdash 하는 사람은 있

을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임 lsquo싼데이rsquo 카메라맨은 논의의 대상이 안되구요helliphellip (웃음)

이 그러니까 지도자들이 작가적인 태도에 확고한 이념을 앞세우고 지도에 임해야 하는 건데helliphellip

본지 각 단체 지도층의 지도방침에 대한 구체적인 태도를 어떻게 규정하겠습니까 helliphellip

임 우선 사진에 대한 인식부터 고쳐야 해요 말이 중복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친구 좋고 사진 좋아서 우리

끼리 하면 그만이다 mdash 하는 생각들이 많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만이라도 그렇지 않다

관련 자료 소개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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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싶어요 학생들이 카메라를 사 가지고 몇 사람 모였으니까 책임자 격

인 선생이 필요하다 mdash 해서 책임 맡았다는 사람으로는 지도가 안 될 게 아닙니까 그렇다고 청해 오

지도 않는데 내정 격으로 뛰어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구helliphellip (웃음)

본지 또 한 가지 요즘 일대 성황을 이루는 것이 소위 현상사진(懸賞寫眞)이라는 건데요helliphellip 이 현상사진

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진에 대한 모욕도 있지helliphellip

임 거 참 꼴사나운 일이 많아요 현상이란 걸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helliphellip 그 하나는 어느 연구

단체에서 순수한 의미에서 발표 바탕이 없는 아마추어를 위해 마련하는 경우가 있을게고 또 하나는

선전용으로 포스터 mdash 같은 데에 써먹기 위한 상업 정책적인 의식에서 모집하는 현상이 있을 테지요

이 어느 경우이건 간에 좌우간 현상 모집을 하는 목적이 있는데helliphellip 응모자는 우선 현상의 목적부터 확

실히 알고 응모를 해야 하겠지helliphellip

임 그렇죠 그런데 이 상업 정책적인 현상의 경우에는 사진문화에 대한 모욕적인 행동이 퍽 많습니다

이거 참 불유쾌한 일이지만helliphellip 가령 예를 들자면 응모자는 원판을 제공하라던가 또 낙선자의 작

품은 일체 반환치 않는다는 따위helliphellip이게 얼마나 사진예술에 대한 모욕적 행위입니까 helliphellip

이 그래요helliphellip 확실히 모순된 일입니다

임 필요에 의해서 현상모집을 했으니까 당선된 작품은 물론 필요하겠지만helliphellip 낙선작품을 반환치 않는

다는 것은 언어도단 입니다 낙선이 됐다 해도 작가의 입장으론 대단히 귀중한 하나의 작품일 텐데

그걸 안 돌려 준대서야 말이 되나요 주최측은 낙선작품의 원화를 돌려 줄만한 성의를 가져야 도리

에 맞을 텐데helliphellip 요즘 현실은 lsquo낙선rsquo이란 푸대접 밑에 원판까지 몰수당하는 판국이니helliphellip 원 참

이 그러니까 응모자는 무엇보다도 현상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지helliphellip 여러 번 겪은 일이지만 심사를

하다 보면 전혀 현상 취지를 도외시한 작품들이 있는데helliphellip

임 그거야 보나마나 낙선이죠 (웃음)

이 그러믄요 현상 응모자로서는 출품 규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 아니겠어요

임 그럼요

이 그런데 어떤 것은 작품에 제목도 없는 것이 있거든요 그런가 하면 제목과 작품내용이 전혀 특이한

엉터리도 있구helliphellip

임 저도 여러 번 겪은 일입니다

이 제목이란 것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벌써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찍는다는 의식이 있는 이상

제목도 정해져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아주 작품과 제목이 동떨어진 것들이 응모해 오니까

낙선의 자격이 충분할 수밖에helliphellip 하하하 (웃음)

임 그게 모두 사진에 대한 성의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이 그래요 성의가 없어요 자기 작품에 대해선 최선의 성의를 다 해야 할 텐데 그런 태도가 없거든helliphellip

제목을 안 썼는지 못 썼는지는 모르지만helliphel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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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그저 무턱대고 발표의식만 왕성한 까닭이 아닐까요

이 그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된 작가가 아닌 이상 발표기회가 좀처럼 없을 테니까

자기 실력의 평가를 받는다던가 남들과 경쟁해 본다는 의미에서 현상에 자주 응모하는 것은 좋은데

helliphellip 아 어떤 친구는 자기 실력 생각은 하지도 않고 상품이 적다 많다 시비를 하는 친구도 있으니 참

기가 막힐 일이지

주최자의 무성의도 고쳐져야 하고

임 그건 lsquo현상rsquo이라고 내거는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순수한 사진연구단체에서 모집할 때는

lsquo공모전rsquo이라던가 하는 문구가 좋지 않을까요 lsquo현상rsquo이라니까 lsquo상rsquo을 바라게도 되겠지만 어쨌든

lsquo현상rsquo이란 말 자체가 순수하지 못해요

이 그건 확실히 생각해 볼 문제이겠군요helliphellip 순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helliphellip 응모자들이 심

사원이 누구냐mdash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도 순수하지 못하고helliphellip 또 주최자가 모집광고를 낼 때

lsquo심사원은 추후발표rsquo라mdash하는 것도 순수하지 못해요 이것도 참 불쾌한 일인데 lsquo추후발표rsquo라는 걸

다시 생각하면 lsquo준비가 안됐다rsquo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심사원의 준비도 안 해 놓고 현상을 모

집하는 그런 무성의가 또 어디 있어helliphellip 이건 일종의 사기가 아니면 거만일 겝니다

임 그나 그뿐인가요 lsquo심사원은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함rsquohelliphellip 하는 모호한 광고도 있지요 응모자의 입

장에서 생각하면helliphellip 심사원에 불만이 있으면 응모를 아니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 심사원 문제만

은 정정당당히 명시해야만 나중에 가서 심사에 대한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출품을 한 다음에 심사

원이 발표된다는 것은 심사에 대한 불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helliphellip

이 그리고 응모자의 동태를 가만히 보면 아까 얘기가 나왔던 소위 lsquo취미정도rsquo라는 층의 발표 의욕이 굉

장해서 대부분의 응모자가 이 부류인 것 같은데helliphellip 여기 한 가지 탈이 있어요 현상응모 작품의 심

사라는 것은 무제한의 심사 레벨을 놓고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응모 작품 중에서의 우수 작품을 가

려낸다는 것은 이거 상식 문제가 아닙니다

임 그렇죠

이 아 그런데 어떻게 해서 현상에 당선이 되거나 특히 특선이라도 하면 그만 자기가 갑자기 위대한

작가라도 된 것처럼 대가연(大家然) 하고 으쓱대는 친구들이 많아서 걱정이야helliphellip (웃음)

이 lsquo특선rsquo이라는 것은 응모해 온 작품들 중에서 특선이지 결코 한국 사단 전체의 수준에서 특선이라

는 것은 아닌데helliphellip 그만 한 번만 당선되면 코가 높아지고 대뜸 대가 행세를 하려고 드니helliphellip 참

신인들은 특히 조심해야 할 일이지

남의 것보고hellip 우리 것도 보내고hellip

본지 이제 화제를 좀 바꾸어서 세계사단의 동향을 좀 말씀해 주실까요

임 세계사단의 얘기라면 직접 보아야만 얘기가 될 텐데helliphellip

이 서울 바닥에서 썩으면서 세계사단의 얘기를 어떻게 본 듯이 할 수가 있겠나 카메라를 메고 세계일

관련 자료 소개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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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도 했어야 얘기가 되지

임 그것보다도 사진을 통한 국제 교류 얘기나 합시다

이 그게 좋겠군helliphellip 얼마 전에 덕수궁에서 자유중국의 소개사진전시가 있었죠 미국공보원의 활동도

이를 테면 국제교류의 한 형식일게고helliphellip

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자유중국과 월남의 사진전시가 있었는데helliphellip 우리도 수출을 한다면 그 보

다 훨씬 좋은 작품들이 나갈걸요helliphellip

이 한미합동전이던가 한중합동전 같은 것도 하면 역시 국제교류가 되겠지요helliphellip

임 한미합동전은 불원한 장래에 개최될 것입니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lsquo인간일가(人間一家)rsquo의 사진

이 아마 이월쯤 한국에 올 겝니다 미국대사관이 주동이 돼서 작품 503점 전부의 전시회 계획이 추

진되고 있으니까요

이 남이 보내줘서 본 것은 있지만 우리가 남에게 보여준 것은 없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야 우리도 남에

게 보여줘야 교류가 될 텐데helliphellip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두 사람의 작품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임 개인적인 활동은 있었지요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사진살롱에 사진을 보내고 있으니까 개인

적으로는 더러 나간 셈이죠 개인들의 수출이라도 좀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지만

이 우리의 것을 내보내고 외국 것을 들여와서 서로 감상하고 연구하는 게 이를 테면 국제교류인데

아마 명년쯤엔 될까 몰라

임 작품교환전 같은 것을 위해서 대대적인 계몽운동이 필요 하겠죠

이 그렇죠 운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어요

임 그런데 근본적인 얘기를 하자면 한국 작가의 역량이 아직도 부족한 것 같아요 언젠가 외국 작가에

게서 들은 말인데mdash한국 사람은 한국을 보지 않았다mdash하는 얘길 해요 사진 작가에게 대한 말이지

만helliphellip 나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이 퍽 중요한 얘기다mdash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를 직시하는 것만이

사진은 아니겠지만 실용사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것이 사실 아닐까요 회화적인 쌀롱 픽처라던

가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리얼리즘 사진이라는 것에 너무들 치우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 국제 교류의 시발은 역시 소개적(紹介的)인 것 다시 말해서 르포르타주적인 것이겠으니까helliphellip

임 외국 작품의 모방 같은 것은 이제 집어치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mdash예술적인 것 이것만을 너무 추

구했기 때문에 사실이 한국적인 것과 국민성의 묘사 같은 것이 잘 되지 않았지요 정서적인 것에만

너무 골몰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일이고 helliphellip 예술을 위한 예술에 정신들이 팔려 있었지나 않은

지helliphellip 예술을 하기 위한 사진이라는 관념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이 예술을 염두에 안 둔다면 실용사진이 돼 버리게

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너무 치우친 것 같단 말입니다

이 특히 국제 교류를 생각한다면 아닌 게 아니라 외국처럼 르포르타주적인 사진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할거에요

임 그래요 거기에 예술성을 띄워서 소화할 만한 역량 있는 작가가 필요해요

이 또 하나의 가장 큰 문제는 위정자의 관심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 큰 난관입니다 국제 교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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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가족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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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말이고 역시 정부당국자의 적극적인 주

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어디 그래요

임 우선 사단 자체의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작가들의 작업도 촉구되어야 하구helliphellip 아까도 말이 나왔지

만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 출품을 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점 같은데서 작가들의 반성도 필

요하고helliphellip

이 개별적으로 미국 등지에 보낸 것은 아마 상당한 수가 되겠지요

임 그럼요 그랬는데 왜 성과가 없느냐mdash하는 반성이 있어야죠

이 오늘의 현실을 예술적인 면에서 기록하고 작품화 해야겠는데helliphellip 막연하게 예술을 위한 작품을 보

내니까 기교적으론 훌륭할지 몰라도 작품 자체에 내용이 없어서helliphellip 그래서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닐

임 그런 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빨리 우리의 수준을 높여서 국제 조류와 호흡을 맞추어 나가

야 할 것입니다

이 이거 아마추어를 위한 얘기라는 것이 잠깐 탈선을 한 것 같군 그러나 이런 문제도 참고가 되긴 하니

까helliphellip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합시다

본지 수고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helliphellip

(기록 O기자)

이해선 「lsquo백오(白烏)rsquo의 변(辯)」 『동아일보』 1957년 4월 9일 4면

30여년 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입학

이 되었을 당시 자축기념하는 의미에서 호(號)를

하나 지어본 것이 백오(白烏)라는 두 글자였다 처

음 듣는 사람들 중에서는 거문[검은] 까마귀는 있

지만 흰 까마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서로 웃어버리고 그 뜻을

설명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자의

(字意)를 해명해볼까 한다 백(白)은 흰 빛이요 오

(烏)는 흑색으로 통하므로 우선 흑백을 대조시켜

놓고 흰 종이 위에다 검은 먹으로 휘호(揮毫)할 것

이니 그 뜻이 내 생활과 부합될 것 같으며 둘째로

백 자(字)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첫 자를 떼어놓

고 오는 반포오(反哺烏)로 그 이름이 높은 새이므

로 평소에 효자 노릇을 못하여 온 나의 좌우명으로도 적당할 듯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새 중에서는

혹간(或間) 백변종(白變種)이 생겨나는 수가 있는데 그 흰새를 서조(瑞鳥)라고 떠들던 옛 시절도 있었으므

관련 자료 소개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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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내가 우연히 호를 지어 본 것이 검은 까마귀떼 속에서 서조 백오를 발견하였으니 나의 전도(前途)에는

반드시 서광(瑞光)이 비칠 것 같으므로 이상 여러 가지 의미를 차례로 생각해 볼 때에 나에게는 이 외에 더

좋은 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자의였었고 궁금한채로 불려온 백오

였었다 만담궁변(漫談窮辯)을 물소물책(勿笑勿責) 하소서 (사진가)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

이해선 「중요한 내용middot형식-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년 10월 20일 5면

사진작품에는 사진 특유의 형식이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러한 특유의 형식에 알맞은 표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의 특수성은 형식이 가지는 특수성 보다는

기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주관적이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작품심사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동일하게 중요시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작

품 속에서 그야말로 형식과 내용이 알맞게 부합된 특출한 작

품을 볼 수는 없었다 형식이 좋으면 내용이 빈약하고 좀 내

용이 있으면 형식이 미숙하고helliphellip 모두 결점이 있다 그러나

입상작으로 뽑은 8 점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

다 그리고 금년에는 lsquo칼러rsquo사진의 응모 점수가 30점이나 되

고 그중에서도 3점이 입상되었고 또 9점이 입선되었다는 것

은 lsquo칼러rsquo 사진의 앞날을 위해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lt전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장gt

[제1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년 2월 8일 5면

외국작품의 세련되고 빈틈없는 lsquo테크닉rsquo은 국내작품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서 우선 국내

작품을 형식에서부터 누르고 말았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이루게 된 것은 국내작가들

의 역량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lsquo국산인화지rsquo가 얼마나 엉터리고 조악한 것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대체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더욱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은 이와 반대적인 경향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예술이든 먼저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볼 때 국내작품의 후진성은

두말할 것 없이 형식의 경시에 있다고 하겠다 심사결과 흑백부에서나 lsquo칼라rsquo부에서 겨우 동상으로 한 점

씩 밖에 국내작품이 입상되지 못했다는 것은 다소 섭섭한 느낌이나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경종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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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더욱 우리 심사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독에서 응모한 lsquo칼라rsquo

작품이었다 물체의 외관 색감을 초월한 내면의 lsquo이미지rsquo가 발

산하는 짙은 감정의 색감으로 작가의 개성과 사상을 인상 깊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내 lsquo칼라라보rsquo의 후진

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상작으로 뽑힌 외국작품들은 오

늘의 세계 사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는 큰 자극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

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제2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총 818점 응모-사진예술에 도움」

『동아일보』 1967년 2월 9일 4면

지난해와 같이 흑백부문에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들은 모두가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산인화지의 조악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작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올해는 흑백

부문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기꺼운 일이라고

하겠다

특히 칼라작품에 있어서는 독일의 작품들이 특출했고 이들 작품들의 색감은 현대 과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 최고상으로 뽑힌 lt잊은 친구gt와 몇 점의 입상작품들은 칼라릴리프와 소라리

세이숀[솔라리제이션] 등의 수법으로써 모티

브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를 초객체적이고 추

상적으로 표현하고 작가의 짙은 개성과 사상

과 철학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입상작으로 뽑은 16점의 작품들은 오늘의

세계사단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

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심사위원 이해선 (위원장) 임응식 서순삼

박필호 안월산 정인성 최경덕 (이상 7명)

관련 자료 소개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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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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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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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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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관련 자료 소개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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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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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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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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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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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관련 자료 소개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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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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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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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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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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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4: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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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1980

1980

2006

2006

그 외

문화공보부 주최 《한국근대미술 60년》 국립현대미술관

《제2회 건축 및 사진전람회》 심사위원장 및 초대작가 국립공보관

《제20회 대한사협전》 〈잉어잡이〉 〈장날〉 출품 신문화랑

《제3회 건축 및 사진전람회》 초대작가

《제21회 대한사협전》 lt풍창(風窓)gt 출품 국립공보관

대한사진예술가협회 명예회장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제23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및 초대작가

한국사진작가협회 주최 사진 강좌 충청지구 이해선 lt국전과 사진gt 강좌

《한국현역원로작가 초대전》 사진부문 초대작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분관

《제22회 대한사협전》 lt추수gt lt고흥(高興)gt 출품 국립공보관

《고희기념 이해선 작품전 향토풍물》 신문회관 화랑

《제1회 국제사진교류전》 참여 국립공보관

《제24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제4부 심사위원장 사진분과위원 및 초대작가 국립현대미술관

《제23회 대한사협전》 lt조춘(早春)gt lt어촌풍경gt 출품 국립공보관

《서울특별시문화상》 심사위원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운영위원(제4부 분과위원장) 2회 연임

현대칼라 주최 《제1회 현대사진문화상》 수상

한국사진작가협회 전동경사진연맹 공동 주최 문화공보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주한일본대사관 월간사진 후원

미화사진필름주식회사 협찬 《제1회 한일친선대회》 참가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 편 『한국현대미술사(사진)』 추진위원 (이해선 외 5명)

《제29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제30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별세

『이해선 사진작품집 주제 향토풍물』 평화당

『한국의 고궁』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사진으로 남은 1950~60년대』 눈빛

『이해선 사진집 1950~1960년대 이야기』 동강사진박물관

『사진문화』 『카메라 예술』 『포토그라피(현 월간사진)』 『영상』 등 사진잡지에 작품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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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일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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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한 사 진 예 술 가 협 회 연 혁 1 9 4 5 ~ 2 0 1 4참고자료 일간지 『경향신문』 『동아일보』 『매일경제』 『조선일보』 월간지 『포토그라피』 『영상』 단행본 『내가 걸어온 한국사단』(임응식 눈빛 1999)

『한국사협사 I』(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01) 『한국예술총감 자료편』(예술원사무국 1965) 및 실물자료

일러두기 본 자료는 대한사진예술가협회로부터 제공받은 연혁을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 수정 및 보완된 내용의 경우 출처를 표시하였다

또한 정확한 날짜나 시기를 확인하지 못한 경우 lsquorsquo 표시로 대신했다

각 저술마다 조선사진예술연구회의 창립 시기는 1~2년 차이를 보이나 1957년 『동아일보』에 실린 창립12주년 촬영대회 개최 기사 및 대한사진예술가협회의 연혁을 참고해 1945년으로 보았다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출처)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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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진예술연구회(朝鮮寫眞藝術硏究會) 창립- 815 해방과 더불어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1937)와 백양사우회 (白羊寫友會 1939)의 중견회원 및 기타 지방 사진인들을 규합하여 전국적인 단체로 발족

≪창립기념사진전≫ 동화백화점 화랑 (『동아일보』)

≪제2회 작품전람회≫ 동화백화점 화랑 (『조선일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계기로 회 명칭을 대한사진예술연구회(大韓寫眞藝術硏究會)로 개칭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全國文化團體總聯合會) 가입 (『동아일보』)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람회≫ 동화백화점 화랑 (『경향신문』)

- 심사위원 이해선 박필호 안철영- 입선자 고종일 이동호 안성호 등≪제3회 대한사연회원전≫ 50여 점 동화백화점 화랑 (『동아일보』)

『대한사협회보(大韓寫硏會報)』 제1호 제2호 발행

≪제2회 조선예술사진전람회≫ 동화백화점 화랑 (『동아일보』)

- 입선자 안월산 이경모 임윤창 등

≪제3회 전국예술사진전≫ 동화백화점 화랑 (『경향신문』 및 『한국사협사 I』)

- 심사위원 현일영 이해선 박필호 이규완- 입선자 정희섭 최창희 강윤형 등

부산사진예술연구회와 ≪합동예술사진전≫ 부산 미화당 화랑 (『내가 걸어온 한국

사단』 및 『한국사협사 I』)

- 출품자 김용진 송미구 임응식 이병삼 조상규 정인성(이상 부산사연)김조현 김한용 박영진 신상우 임석제 오인창 이최형 지부원 조명원허승균(이상 대한사연)

≪제4회 작품발표전≫ 부산 루네싼스 다방 (실물자료)

취미사진청강회 대한사연 주최 강사 이해선 아카데미 다방(소공동) (『경향신문』)

아마추어사진현상촬영대회 창경원 (『경향신문』)

≪현상인화전시회≫ 대한사연 주최 미원 다방 (『경향신문』)

≪제5회 작품발표전≫ 부산 국제구락부 (실물자료)

≪제6회 작품발표전≫ 은령(銀鈴)다방 (실물자료)

10월 창립8주년 기념 촬영대회 개최

≪제7회 작품발표전≫ 미국공보원 (『경향신문』 및 실물자료)

지도위원 이해선초대회장 박영진창립회원 김정래 박필호 현일영 이규완 오인창 이태웅

회장 이해선

기획간사 김조현

회장 이규완부회장 김조현

사무실 명동 문진양행

사무실 부산 광복동사진재료상(박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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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9주년 기념 촬영대회 경복궁 (『경향신문』)

창립9주년 기념 촬영대회 ≪당선작품 발표 사진전≫ 미국공보원 (실물자료)

『대한사협회보』 제3호 제4호 발행

정기총회 개최 한창양행 (『동아일보』)

『대한사협회보』 제5호 발행≪제8회 작품발표전≫ 미국공보원 (실물자료)

창립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봉은사 및 뚝섬 일대 (『동아일보』)

창립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당선작품 발표 사진전≫

정기총회 개최 한창양행창립 11주년 기념 촬영대회 개최 덕수궁창립 11주년 기념 촬영대회 ≪입선작품전≫ 미국공보원 화랑

회 명칭을 대한사진예술가협회(大韓寫眞藝術家協會)로 개칭≪제9회 대한사연전≫ 동화백화점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창립 12주년 기념 신록촬영대회 창경원 (『동아일보』)

정기총회 개최≪제10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창립 13주년 기념 추계촬영대회 덕수궁

≪제11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창립 14주년 기념 추계촬영대회창립 13주년 및 창립14주년 기념촬영대회 ≪당선사진전≫ 중앙공보관 화랑 (실물자료)

창립 15주년 기념촬영대회 ≪당선작품전≫ 중앙공보관 화랑 (실물자료)

≪제12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제13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실물자료)

한국사협 창립(61~63년 이해선 고문 김조현 부이사장)정부 시책에 따라 일시 해산

대전지회 설립

대한사협 출신들이 모여 ≪사진예술동인전≫ 김조현 외 17명 49점 중앙공보관 (『한국예술총람 자료편』)

문화예술단체 해금령에 따라 대한사협 재건 정기총회 개최

대한사협 수요회 개최 연지동 동해루

정기총회 개최 (『동아일보』)

≪제14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제15회 대한사협전≫ 조흥은행 본점 2층 전시장 (실물자료)

제주지회 설립≪제16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실물자료)

고문박필호김광배서순삼박영진회장 이해선 부회장 조명원 최창희총무 방대훈 남상준간사 조준영 이훈 지부원 이석준 김조현

고문 이해선 회장 김조현부회장 지부원 총무 방대훈간사 이훈 남상준

회장 김조현부회장 방대훈총무 지부원

회장 김조현

고문 김조현 회장 이해선부회장 안준천 총무 김석현

회장 이해선부회장 김조현

문교부에 국전 사진부 신설을 진정

제13회 국전에 사진부 설치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출처)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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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차 정기총회 개최 북창동 한양관『제16회 대한사협전 작품집』 발간 (실물자료)

≪제17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제17회 대한사협전 작품집』 발간 (실물자료)

제24차 정기총회 개최 및 ≪백오사진상(白烏寫眞賞)≫ 제정≪제18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실물자료)

『제18회 대한사협전 작품집』 발간 (실물자료)

제25차 정기총회 개최≪제1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김석현 공로상 이순흥)

제26차 정기총회 개최 및 제2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9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경향신문』 및 실물자료)

제27차 정기총회 개최이해선 회장에 공로상패 증정 및 제3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이순흥 김석현) (『포토그라피』)

≪제20회 대한사협전≫ 신문회관 화랑 (『경향신문』 및 실물자료)

제28차 정기총회 개최≪제4회 백오사진상≫ 시상 (『포토그라피』)

≪제21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매일경제』 및 실물자료)

≪제5회 백오사진상≫ 시상≪제22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실물자료)

≪이해선 사진작품전≫ 신문회관 화랑 (『동아일보』)

정기총회 개최 및 ≪제6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이정훈 공로상 박필호) (『포토그라피』)

≪제23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제30차 정기총회 개최 반도아케이드 4층 카페테리아≪제7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 이완섭 작품상 김형승 양승호 김기현)유자격 정회원 한국사협에 단체로 입회

제31차 정기총회 개최 및 ≪제8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안장헌)≪제24회 대한사협전≫ 신문회관 화랑 (『동아일보』)

제32차 정기총회 개최 대동관 (『매일경제』)

≪제9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 정헌태)추계촬영대회부산지회 설립

고문 김조현 회장 이해선부회장 김조현 총무 김석현이사 성두경 안준천 오인창 박병호 감사 윤상운

고문 김조현 김종양 회장 이해선 부회장 안준천 이순흥 총무 성두경이사 김석현 손석현 이완섭 서윤석감사 윤상운

총무 김용필이사 성두경 서윤석

고문 김조현 명예회장 이해선회장안준천 부회장성두경 이순흥총무 김용필이사 서윤석 안장헌박훈서양승호감사이완섭

고문 박필호rarr김종양이사 양승호(면)

고문 박필호 김조현 김종양명예회장 이해선 회장 안준천부회장 성두경 이순흥총무이사 김용필 이사 서윤석 박훈서 안장헌 양승호 감사 이완섭

고문추대 장남수

고문 박필호 김조현 김종양 장남수안준천 명예회장이해선 회장성두경부회장 이순흥 총무이사 안장헌 이사 서윤석 이정훈 이완섭 김형승 김완기 감사 김용필

≪제1회 대한민국건축 및 사진 전람회≫(91~20 국립공보관)

봄 국전 4부에 사진middot건축middot공예 신설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출처)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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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영상』)

제33차 정기총회 개최 대동관 제9대 성두경 회장 연임≪제10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본회 주관-양수리)춘계 촬영대회(양수리)제2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태종대)제3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동학사)≪제1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대전지회 주최)≪제26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영상』)

제34차 정기총회 개최≪제11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김완기 공로상대전 윤필수)≪제27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영상』)

제주지회 폐쇄

『백오이해선사진집』 출판기념회 예총화랑 (『매일경제』 및 『영상』)

제35차 정기총회 개최 제10대 성두경 회장 연임≪제12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 조임환)≪제28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제2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 대전시민회관 (『영상』)

제36차 정기총회 개최 및 ≪제13회 백오사진상≫ 시상제4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통도사 범어사)제5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갑사 마곡사)≪제3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및 ≪제12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대전시민회관 (『영상』)

≪제29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제37차 정기총회 개최 제11대 이순흥 회장 취임≪제14회 백오사진상≫ 시상≪제30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제4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13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대전시민회관 (『영상』)

백오 이해선 선생 작고

제38차 정기총회 개최 미성옥≪제15회 백오사진상≫ 시상제6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해운대)제7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관촉사 쌍계사)≪제5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1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39차 정기총회 개최 한일장 제12대 이순흥 회장 연임≪제16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최진연)충주지회 설립제8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지회 주관-수옥정)제9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속리산)≪제6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2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고문 박필호(면) 김종양(면)

고문 김조현 장남수 안준천 성두경명예회장 이해선 회장 이순흥 부회장 이완섭 김용필 총무 이정훈 이사 안장헌 김완기 박동운 송정웅송주헌 심재욱 송정회감사 서윤석 윤필수

이사 최진연 박명식

81~83년 성두경 한국사진작가협회 부이사장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출처)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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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차 정기총회 개최≪제17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0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미륵사지)≪제7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11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 대둔산 도산계곡)≪제33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1차 정기총회 개최제13대 이순흥 회장 연임≪제18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2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하회마을)≪제8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13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지회 주관-탄금대)≪제34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2차 정기총회 개최 파인 힐≪제19회 백오사진상≫ 시상고창지회 설립제14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을숙도)

『대한사협회보』 복간호(제6호) 발간고 백오 이해선 선생 추모비 건립≪제9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5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3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20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5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고창지회 주관-선운사)

『대한사협회보』 제7호 발간제16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본회주관-용인민속촌)구미지회 설립≪제10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6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4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21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7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신원사)대천지회 설립문화부에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문화가족으로 등록제18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지회 주관-탄금대)≪제11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7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5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22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9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경주일원)≪제38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제12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

제46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23회 백오사진상≫ 시상제20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천-대천해수욕장)≪제39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감사 서윤석(면) 박노택

고문 김조현 이순흥회장 안준천부회장 김용필 안장헌총무 최진연이사 김완기 송주헌 송정회 심재욱 박노택 조창만감사 이정훈 고승웅

이사 송주헌 황응천 원종철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회장 김용필 부회장 이정훈 박노택총무 최진연 이사 안장헌 김완기 정완철 송주헌 심재욱 원종철 박부공황순조 황응천 김태영 감사 송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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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 모란룸≪제24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최진연)고 백오 이해선 선생의 한국사단 발전에 기여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白烏李海善寫眞文化賞)≫ 제정≪제40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한국의 풍물 사진공모전≫ 대한사협 호영출판사 공동주최

제48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1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유동호)원주지회 설립이천지회 설립청주지회 설립≪제41회 대한사협전≫ 코닥포토살롱제21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속리산)

제49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2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황규태)제22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엑스포장)고창지회 폐쇄≪제3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윤주영)≪제42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대한사진술가협회 창립50주년 작품집』 발간

제50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전주지회 설립≪제4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최민식)≪제43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1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대한사협회보』 제8호 발간제23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원주지회 주관-치악산)남원지회 설립≪제44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2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5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강상규)

『대한사협회보』 제9호 발간제24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대청호)대구지회 설립김제지회 설립≪제45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3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6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이순흥)

『대한사협회보』 제10호 발간제25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구지회주관 - 경주OK그린청소년 수련원)≪통일염원 전국사진공모대전 작품전시회≫ 개최(대구지회 주최-대구 동아쇼핑 전시관)≪제7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송기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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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회장 안장헌 부회장 이정훈 김완기총무 송정회 이사 원종철 송주헌 한창동 황순조 박부공 허현 감사 박노택 최진연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자문위원 안장헌 회장 이정훈부회장 김완기 박노택 총무한창동이사 원종철 김완선 이순재 박부공 이광호 이재옥 김광범 양호용감사 황순조 최진연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자문위원 안장헌 이정훈 회장 박노택 부회장 김완기 최진연 총무 이광호이사 박부공 이재옥 윤중일감사 한창동 조창만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 박노택자문위원 안장헌 이정훈회장 김완기부회장 황순조 박부공총무 윤중일이사 김광범 김준영 강승규 김이경감사 한창동 이재옥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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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1

≪제46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원주지회 폐쇄

제54차 정기총회 개최 대림정대한사협사진강좌 개최(연8회) 월례촬영회 개최(연8회)제26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 서울대청호

『대한사협회보』 제11호 발간대한사협 대구지회-중국 연길시 촬영가협회와 자매결연(연길시 청년호텔)원주지회 재설립≪제8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최흥만)≪제47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창립 55주년 기념 『2000대한사협사진집』 발간

제55차 정기총회 개최 대림정대한사협 사진강좌 개최(연8회) 월례촬영회 개최(연5회)정읍지회 창립제27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정읍 내장산)≪제48회 대한사협전≫ 및 CD작품집 제작 예총화랑 제1전시실

제56차 정기총회 개최 사랑채월례촬영회 개최(연4회)제28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서울 남한산성)≪한중 국제교류전≫ 대한사협 대구지회 대구 대덕문화회관≪제49회 대한사협전≫ 및 CD작품집 제작 예총화랑 제1전시실

제57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월례촬영회 개최(연6회)제29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 중앙탑공원)≪제9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김한용)≪제50회 대한사협전≫ 및 2003대한사협작품집(CD작품집) 발간예총화랑1-2전시실

『대한사협회보』 제12호 발간

제58-60차 정기총회 개최제51-53회 ≪대한사협전≫제30-32회 전국회원촬영대회대한사협 인터넷홈페이지 개설(wwwpaakoreacom)제1회 대한사협 사진공모전

『대한사협회보』 제13호 발간『창립60주년 전국회원전 작품집』 발간(2005)이해선 선생 탄신 100년기념 유작전(대구middot충주middot원주middot대전middot전주순회전) 개최 및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보는 1950-60년대』 (눈빛) 발간(문화관광부middot조선일보 후원)남원지회 청주지회 구미지회 폐쇄(2006년)전주지회 설립(2006년)

제61-63차 정기총회 개최≪제54-56회 대한사협전≫제33-34회 전국회원촬영대회이천지회 폐쇄(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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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위원rarr고문 안장헌 이정훈고문추대 방대훈이사 강승규(면) 김이경(면) 원종철 김광석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 박노택안장헌 이정훈 방대훈 회장 김완기 부회장 황순조 유병주(대전) 총무이사 윤중일이사 김준영 원종철 김광석 심재욱감사 강승규 이재옥

총무이사 윤중일(면) 최인호

회장 최진연

회장 최진연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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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지회 김제지회 원주지회 폐쇄(2008년)한밭지회 설립(2008년)≪제10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안장헌 2007)≪제11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조세현 2009)

제64차 정기총회 개최 PJ호텔 4층 카라디움≪제57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제35회 전국촬영회

제65차 정기총회 개최 충무로 아스토리아호텔제36회 전국촬영회 및 대천지회 전국 사진인리더 초청세미나(한화콘도 세미나실 대천해수욕장)김제지회 재설립(지회장 이성수 총무 구반반) ≪제58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

제66차 정기총회 개최 충무로 아스토리아호텔≪제12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안희탁) 제37회 전국촬영회 및 대천지회 전국사진인 리더 초청 세미나(대천해수욕장내 청주대 수련원 및 머드축제광장)울산지회 설립(지회장 이헌배 총무 심화실) ≪제59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

2013년 제1차 이사회 개최 충무로 통로이미지(주) 회의실 참석 이정훈 외8명제67차 정기총회 개최 캐피탈호텔 뷔페식당 스카이(그릴 룸)≪제60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회원 자질 향상을 위한 사진학 강좌 개설(강사 진동선 2013~2014)

≪제13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마이클 케나(MichaelK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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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정건영

회장 이철집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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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3

김 완 기(金莞祁 1944~ )

1962 충주고등학교 졸업

1964 청주교육대학교 졸업

1969 《제1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입선

1977~1991 KBSEBS방송 출연 15년

1989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교육학 석사)

1990~1999 《대한민국사진전림회》 8회 입선

1993~1999 청영회 회장 역임

1997 《제16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 특선

1998 교육부 초등교육정책과장 역임

1999~2013 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 3회 역임

1999~2014 《전국사진공모전》 심사위원 70회 역임

2002 강남구사진작가회 창립회원 및 회장 역임

2003 서울성북교육청 교육장 역임

2004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초대작가

《서울특별시사진대전》 초대작가

《제1회 김완기사진전》 세종문화회관별관 광화문갤러리

2004~2008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 역임

2005 2013 제24회 제31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심사위원 역임

2005~2007 서울특별시사진작가협의회 초대 회장 역임

2006 『김완기사진집』 출판 창조집단 시빌구

《제2회 김완기사진전》 세종문화회관별관 광화문갤러리

2008~2014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조정위원

2011 《서울특별시사진대전》 운영위원 역임

2011~2014 APC뉴스(한국예술사진인연합회) 회장

2013 김완기 자서전 『분필과 셔터로 그린 자화상』 출판 하얀나무

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고문

강남구사진작가회 자문위원

서울특별시사진작가협의회 고문

청영회 고문

한국사진작가협회 자문위원

구 술 자 연 보

안장헌(安章憲 1947~ )

1969 2 고려대학교 농업경제학과 졸업

1966~2014 고려대학교 호영회 창립회원 호영동우회 회장역임 및 회원

1968~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원 이사(1973~1992) 회장(1993~1995) 현 자문

1973~1975 동화출판공사 『한국미술전집』 사진담당

1976~1977 월간 『영상』 편집장

1977~1979 현암사 『한국미술오천년』 기획 및 편집책임

1979~1995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 3회 역임 현 자문위원

1980~2005 호영문화사 편집인

1981~1992 신구대 사진과 강사

1984~1987 서울교육대학 미술교육과 객원교수(사진학)

1990~1994 롯데문화센터 사진교실 강사

1994~1998 삼성사진문화교실 전임강사

1995~2014 한국불교사진협회 고문

1995~2014 (사)신라문화원 이사 현 자문위원

2000~2014 경주 계림사우회 지도교수

2004~2009 동강사진마을 운영위원

2005~2014 문화유산사진연구소 소장

2009 봉은사진교실(봉은사) 강사

2010~2014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 안장헌디지털사진교실 지도교수

그룹전

1966~2014 고려대학교 호영회 호영동우회 회원전 80여점 출품

1968~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전(17~60회전) 70여점 출품

1990 《사진가 8인전》 후지포토살롱

1994 《한국현대사진의 흐름전》 〈산사일기〉 출품

1996 《Image ofKoreanCultual Heritage》 UNESCO본부 파리

1997 《Buddist Images ofKorea》 독일 함부르그

1997~1998 《서울사진대전》 〈낙선재 일곽〉 〈금원에서〉 출품

1997~2014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전 19점 출품

1998~1999 《경기도사진작가초대전》 출품

1999 《한일사진교류전~자연과 인간을 향하여》 출품

2001 《아름다운 우리 문화재 4인전》 국립진주박물관

2004 《한국다큐멘터리사진 33인전》 동강사진축전

개인전

1996 《서라벌 빛 그리고 향기》 서라벌문화회관

2002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신라문화원 화랑

2003 《세계문화유산과 경북》 경주문화EXPO솔거방

2007 《왕릉의 호랑이》 동강사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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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창호》 인사동 갤러리 북스

2010 《돌 호랑이 그림 호랑이》 인사동 갤러리 북스

2012 《선비의 고향 서원》 인제대 도서관 김학수기념박물관

주요 사진저작

1982 『석불』 호영

1989 『석굴암』 예경

1991 『경주 남산의 탑골』 열화당

1992 『선의 세계』 호영

1993 『영겁의 미소』 불광

1994 『신라의 동해구』 열화당

1996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삼성문화재단

1998 『서원』 열화당

2002 『신라의 마음 경주』 한길아트

『남산』 한길아트

2003 『돌에 새긴 정토의 꿈~석불』 한길아트

『석조미술의 꽃~석가탑과 다보탑』 한길아트

『사진으로 보는 한국미~무늬』 호영

2005 『BUDDHA~Bildnisse ausStein inKorea』 ErnstWasmuthVerlog

Tubingen 독일 베를린

2006 『범종~생명의 소리를 담은 장엄』 한길아트

저서

1987 『국립공원』 김성옥 문순화 송기엽 안장헌 공저 호영)

1995 『사진으로 배우는 사진촬영교실』 호영

2001 『아름다운 우리문화재』 관조 김대벽 한석홍 안장헌 공저 국립진주박물관

2003 『문화유산 일기』 진선출판사

수상

1977 《백오사진상》 작품상 수상(대한사진예술가협회)

1999 『서원』으로 《간행물윤리상》 저작상 수상(간행물윤리위원회)

2006 《한국사진문화상》 공로상 수상(한국사진작가협회)

2007 《이해선사진문화상》 수상(대한사진예술가협회)

2011 《대한민국문화유산상(대통령상)》 봉사활용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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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5

참 고 문 헌 목 록

「봄 국전심사에 물의 사진 심사위원에 시비」 『동아일보』 1977421

「봄 국전 심사 낙수(落穗)」 『경향신문』 1977425

「현대사진문화상 이해선 씨 뽑아」 『동아일보』 19781128

「사진문화-사협고문 이해선 씨 작품집 발간」 『매일경제』 19801129

「사진 50년 역사를 한 눈에」 『매일경제』 1981120

「사진작가 이해선 작품집 두 권 내놔」 『동아일보』 1981629

「부고-원로 사진작가 이해선 씨」 『동아일보』 1983111

「일화로 엮는 명암 100년 화단이면사( ) (27) 화가와 문인과 신식 여성」

『경향신문』 198554

「이해선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사진전」 『연합뉴스』 20051026

「lt단신gt 백오 선생 탄신 100돌 사진전」 『문화일보』 20051031

「사진예술가협회 창립 60주년 기념전」 『매일신문』 20051117

「문화의 향기-전시」 『부산일보』 200615

「백오 이해선 선생 미발표유작 사진전」 『부산일보』 200617

「[전북][광주전남][제주][대전충남]문화가」 『동아일보』 2006120

「영월 동강사진박물관-이해선 특별기획전 2007년 3월 첫 주까지」 『뉴시스』

20061227

「사진과 친해지려면 옛 서울역사로 가보세요」 『헤럴드경제』 201041

월간지 계간지

김용준 「서화협전의 의미」 『삼천리』 1931년 11월호

「lt부감(俯瞰)gt(이해선 작)gt」 『사진문화』 1956년 6월호

「아마츄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호

연성숙 「일제 한인귀족의 근황」 『진상(眞相)』 1960년 3월호

「창간사 이해선 씨」 『포토그라피』 1966년 8월호

「나의 발언」 『포토그라피』 1966년 8월호

「작가 지상초빙작가-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달의 작품사진 제주풍물-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해선 「해외 예술사진 감상실 (1회)」 『포토그라피』 1968년 4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6) 석가탄일」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7)」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제1회 새한사진콘테스트」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8) 동해진미」 『포토그라피』 1969년 9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9) 야채밭」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0) 건제(乾梯)」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제18회 국전 소식」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1) 초설(初雪)」 『포토그라피』 1969년 12월호

이해선 「돌과의 대화 30년」 『월간 중앙』 1969년 12월호

「초대작가 사진」 『포토그라피』 1970년 9월호

이해선 「고궁풍물(1)」 『포토그라피』 1971년 1월호

_______ 「고궁풍물(2)」 『포토그라피』 1971년 2월호

이해선 관련

일간지

「입선자의 방명록」 『매일신보』 1926512

이태준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1029

「금조개장한 동미전 제2회」 『동아일보』 1931412

홍득순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417

「인사(人事)」 『매일신보』 193886

이해선 「예술사진의 연혁과 개념」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동인전」 『경향신문』 19491115

「인사(人事)」 『경향신문』 1953110

이해선 「등하수상(燈下隨想)」 『동아일보』 19551112

_______ 「사진예술의 독자성」 『동아일보』 1956126

_______ 「사진 8인전 소감」 『경향신문』 195647

_______ 「백오(白烏)의 변(辯)」 『동아일보』 195749

「김포공항에 내린 덕혜옹주-이해선 씨가 부축하고 있다」 『경향신문』 1962126

「5월 예술상에 붙이는 제언」 『경향신문』 196231

「2명이 사퇴 사진부문심위원」 『경향신문』 1964109

「영예의 산실 안팎」 『동아일보』 19641013

「횡설수설-국전 사진부 이해선 심사위원 사퇴」 『동아일보』 19641014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중요한 내용middot형식 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1020

「열띤 감정으로 충만-창협 창립 사진전」 『동아일보』 1965119

「한국국제사진살롱 위원 명단」 『동아일보』 1965116

「동아국제사진살롱 심사평-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28

「제4회 사진동우회전」 『동아일보』 1966121

「동아사진살롱 심사평-총 801 응모」 『동아일보』 196729

「위원장에 이종우 씨 국전심사위원 위촉」 『동아일보』 1967920

「국전심사위원장 도상봉 씨 선출」 『경향신문』 1968919

「석우회(石友會)서 돌 전람회」 『동아일보』 1970428

「예술인에 훈장 이해랑 씨 등 9명」 『경향신문』 1972118

「외길 한평생 lt11gt 사진middot예술 이해선」 『선데이서울』 1973318

「현역 원로 작가 초대전 일제하의 침울이긴 예술자세 생생하게」 『경향신문』

1974831

「이해선 씨 작품전 향토풍물 50점 전시」 『동아일보』 19741118

「이해선 사진전」 『경향신문』 19741119

「이해선 사진 작품전 24일까지 신문회관」 『매일경제』 19741121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423

「국전운영위원 위촉」 『동아일보』 1976317

「국전사진부문 사단중진들 반발」 『동아일보』 1976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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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_______ 「고궁풍물(3)」 『포토그라피』 1971년 3월호

_______ 「고궁풍물(4)」 『포토그라피』 1971년 4월호

_______ 「고궁풍물(5)」 『포토그라피』 1971년 5월호

_______ 「고궁풍물(6)」 『포토그라피』 1971년 6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7)」 『포토그라피』 1971년 7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8)」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포토그라피 창간5주년에 붙여서」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9)」 『포토그라피』 1971년 9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0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1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2)」 『포토그라피』 1971년 12월호

「제2회 사진국전마감 심사위원결정」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이해선 「이해선 떡에 얽힌 시속(時俗)의 금석(今昔) 옛떡이 사라져 간다는데」

『월간 중앙』 1973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1)」 『포토그라피』 1973년 8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2)」 『포토그라피』 1973년 9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0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6)」 『포토그라피』 1974년 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7)」 『포토그라피』 1974년 3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8)」 『포토그라피』 1974년 4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9)」 『포토그라피』 1974년 5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끝)」 『포토그라피』 1974년 6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 『포토그라피』 1974년 7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2)」 『포토그라피』 1974년 8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3)」 『포토그라피』 1974년 9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4)」 『포토그라피』 1974년 10월호

_______ 「작가와 작품-풍물백태 중에서」 『포토그라피』 1974년 1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6)」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7)」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8)」 『포토그라피』 1975년 3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9)」 『포토그라피』 1975년 4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0)」 『포토그라피』 1975년 5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1)」 『포토그라피』 1975년 6월호

_______ 「곡필무사(曲筆誣事)를 밝힌다」 『월간 중앙』 1975년 11월호

「영상 창간 1주년 기념 좌담회 한국 사진 산업의 의 오늘과 내일」 『영상』 1976년 6월호

「국전 초대작가 8인선 김조현 이건중 이경모 이해선 임응식 이형록 정인선

조현두」 『영상』 1977년 1월호

「남기고 싶은 작품 3 이해선」 『영상』 1977년 5월호

「예술사진에 대한 견고한 확신 이해선 사진의 예술성」 『영상』 1978년 5월호

「한국현대미술대전」 『영상』 1978년 10월호

이명동 「처음 제정된 사진문화상에의 기대」 『영상』 1979년 2월호

「행사 백오 이해선 선생의 사진작품집 출판기념회」 『영상』 1981년 2월호

「작품집 소개 이해선 작품집 중에서」 『영상』 1981년 4월호

박재능 「다양한 자기 세계의 길」 『영상』 1981년 12월호

「영상방담-사단의 이 얘기 저 얘기 김정래 임석제」 『영상』 1982년 1월호

「이미지의 합창-봄의 첫 장」 『영상』 1982년 4월호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 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호

岩宮武二 「너 어디 있느냐」 『영상』 1983년 1월호

최인진 「1930년대의 아마츄어 사진활동」 『사진사연구』 통권 제5호 1983년 9월호

박재능 「월평-원로 이해선 선생을 추모한다」 『영상』 1983년 12월호

「한국 근대미술의 발자취」 『계간미술』 중앙일보사 1985년 봄호

「다시 보는 명작 정도선 정인선 신현국 강대환 김일창 이해선」 『영상』 1986년 10월호

「고 백오 이해선 선생 추모비 건립」 『영상』 1989년 1월호

「동경 유학생들의 한국 근대미술」 『월간미술』 1989년 9월호

「화보로 보는 한국 동경 유학생들의 자화상」 『미술세계』 1993년 5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조선총독부 관보』 제4087호(192647) 한국학문헌연구소 서울 아세아문화사 1926

이태현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1집 서

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2

_______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 자화상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3집 서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4

신명호 「일제하 이왕직과 이왕가 족보」 『한국학대학원논문집』 제11집 한국정신문화

연구소 1996

최인진 「한국사진 역사의 증인(4) - 사단의 단체 활동과 이해선」 『한국사진』 2002

이가라시 코이치 이중희 역 「조선미술전람회의 창설과 서화」 『한국근대미술사학』

제12집 한국근대미술사학회 2004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의 입학제도와 조선인 유학생」 『동악미술사』 제6호 2005

허보윤 「미술로서의 디자인 이순석의 1946-1959년 응용미술교육」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단행본

조우석 『한국사진가론』 눈빛 1998

작품집 도록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1926

이해선 『이해선 사진작품집』 평화당 1980

_______ 『한국의 고궁』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0

Tucker Anne Iizawa Kotaro Kinoshita Naoyuki The History of

Japanese Photography London YaleUniversityPress 2003

이해선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남은 1950-60년대』 눈빛 2005

_______ 『이해선 사진집 1950~1960년대 이야기』 동강사진박물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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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7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일간지

「부산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24531

「성공을 기대 조선사진연구회 현일영 씨 담」 『조선중앙일보』 1936826

「경성아마사진구락부 제1회전」 『조선일보』 1938417

「사진작품전」 『동아일보』 19381014

「경성사진동호회 작품전람회개최」 『조선일보』 19381027

「사진동호회작품전」 『동아일보』 1938112

「경성아마추어 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39527

「아마추어 사진인화전」 『매일신보』 19391115

「동서남북-lsquo아마추어rsquo 제4회 인화전람회」 『동아일보』 19391115

「동서남북-합동인화전」 『동아일보』 1940126

「아마추어 사진의 인화전」 『매일신보』 194074

「경성아마츄어 제5회 인화전」 『조선일보』 194075

「경성백양사우회 제1회 인화전람회 개최」 『매일신보』 19401113

「제2회 사진전 명일부터 화신에서-백양사우회」 『매일신보』 19411124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55

「사진작품전」 『조선일보』 1946119

「전국문화총연발족」 『동아일보』 194729

「제1회 조선사진예술전」 『경향신문』 19475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7510

「사진전람회개최」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전응모작 답지」 『경향신문』 1947615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 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629

「제1회예술사진전람회 15일부터 동화백화점」 『경향신문』 1947713

「예술사진 입선 수상식을 거행」 『경향신문』 1947720

「예술사진전 19일부터」 『동아일보』 1947121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8224

「사예(寫藝) 2회전 작품을 현상모집」 『경향신문』 19481013

「예술사진전 심사 오는 8일로 연기」 『동아일보』 1948127

「지방출품우수-제2회 예사전」 『동아일보』 19481212

「사진예술전 22일부터 동화화랑서」 『동아일보』 19481221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964

「전국종합사진전 심사결과-특선1석 최인집 씨」 『동아일보』 194977

「사진예술의 정화-제3회 전국예술사진전」 『경향신문』 19491010

「예술사진전 30일로 마감박도」 『경향신문』 19491128

「예술사진전 입선자 발표」 『경향신문』 19491213

「예술사진전시회」 『동아일보』 195316

「춘계사진섭영회 26일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3

「본사후원 춘계촬영대회 오늘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6

「사진현상모집」 『경향신문』 1953517

「특선에 lt만춘gt」 『경향신문』 1953527

「인화 당선자 수여식」 『경향신문』 1953529

「사진작품발표전」 『경향신문』 1954413

「예술사진전시회 US-S화랑서」 『동아일보』 1954415

「집회」 『동아일보』 1954916

「경복궁서 촬영대회」 『경향신문』 1954919

「내 26일 촬영대회 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4922

「사연 촬영대회 여감(餘感) 아마추어 사진도(寫眞道)」 『동아일보』 1954103

「문화집합」 『동아일보』 1955122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77

「사연(寫硏) 창립 10주년 기념 어제 촬영대회 성황」 『동아일보』 1955711

「촬영대회 입선작 결정」 『동아일보』 1955819

「8인 사진전 개최」 『동아일보』 1956329

「9회 사연(寫硏)전」 『동아일보』 1957414

「신록촬영대회 개최 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62

「대한사진예술가협회서 사진전시회 개최」 『동아일보』 1958711

「10년 후의 우리 문화 건국 20주년을 장식하고 싶은 것」 『동아일보』 1958821

「사진예술가협회 11회 회원작품전」 『동아일보』 195979

「문화 소식」 『동아일보』 1960119

「국전에 사진부문도」 『동아일보』 1963410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결정 특선 조천용 작」 『동아일보』 19641020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653

「렌즈의 향연 영예의 초점-제4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동아일보』 196667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61217

「사진예술가협회전」 『동아일보』 19681022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9830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996

「국립공보관 12월 전시회 스케쥴」 『경향신문』 1971126

「문화단신」 『경향신문』 19721128

「사진예술협 작품전 7일까지 공보관서」 『매일경제』 1973111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에 안준천 씨」 『경향신문』 197526

「동아포우스트」 『동아일보』 19751117

「사진예술가협회 창립30돌 기념전」 『경향신문』 19751118

「추계 친목 촬영대회」 『매일경제』 197610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7830

「사진예술가협 정총(定總) 31일 하오 대동관서」 『매일경제』 19781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81031

「문화광장」 『동아일보』 1993121

「한국사진예술 50년을 펼친다」 『한겨례』 1994111

「사진예술가협 사라진 풍물전」 『서울신문』 20051025

월간지 계간지

「사진클럽 지상소개 대한사협의 발자취」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박필호 「논단 대한사협16회전을 보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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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대한사협 16회전」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사협 16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8년 7월호

「대한사협 충남지부 회원전」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경축 창간 3주년 사진과 관광 포토그라피-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대한사협 18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제18회 대한사협전」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 작품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70년 3월호

「축 창간4주년 서울 선데이 카메라 클럽」 『포토그라피』 1970년 8월호

「축 포토그라피 창간 5주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김종양 씨 대한사협 고문 추대」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3년 3월호

「lt파도gt 김도현 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신춘초대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근하신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75년도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창작선」 『영상』 1977년 1월호

「전시장 순례 대한사진협회 회원전」 『영상』 1977년 11월호

「지상소개-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대한사협 제27회 정기총회 개최」 『영상』 1979년 7월호

박필호 「대한사협 27돐에 대한 축사」 『영상』 1979년 7월호

「제26회 대한사협전」 『영상』 1980년 1월호

「제27회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사진전시회」 『영상』 1980년 12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요강」 『영상』 1981년 5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영상』 1981년 10월호

「탐방-뜻이 있으면 길이 있게 마련 세 번째 전국대학사진 공모전을 연 대한사협충

남지회의 단합된 모습」 『영상』 1983년 1월호

「제3회 전국대학생사진 공모 제12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월호

「제13회 대한사협 충남 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2월호

최인진 「경성아마츄어카메라구락부를 말한다」 『사진사연구』 1984년 7월호

「대한사협본부 주최 제9회 한국국제사진전 입상자」 『영상』 1989년 1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대한민국예술원 편 『한국예술총감 자료편』 대한민국예술원 1965

한국사진협회 「사진계소식 1969년도」 『한국사진연감』 1970

_____________「한국사진협회의 연혁 1976년 10월 30일」 『한국사진연감』 1976

임범택 「사진」 『1977년도 문예연감』 1978

______ 「사진」 『1978년도 문예연감』 1979

한국사진협회 「역대역원명단(歷代役員名單) 1962년~1987년」 『한국사진연감』

1988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제1장 한국사진협회 창립 이전의 사진계 동향」 『한국사협

사 I 1945-1970』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01

최인진 「해방 초기의 사진잡지 연구-『국제보도』와 『사진문화』를 중심으로」 『한국

사진학회지 AURA』 제10호 2003

박혜성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사진문화』 목록 및 해제」 『한국 사진 잡지

『사진문화』 연구』 명지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한국사협 50년사』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13

단행본

임응식 『내가 걸어온 한국사단 임응식 회고록』 눈빛 1999

작품집 도록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제16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7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8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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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9

원 문 자 료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년 10월 29일 4면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년 4월 17일 4면

1 이해선 양화기(洋畵期) 관련 참고 자료

「입선자의 방명록」『매일신보』 1926년 5월 12일 3면

「금조 개장한 동미전 제2회」『동아일보』 1931년 4월 12일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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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참고 자료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년 5월 5일 2면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년 6월 29일 3면

「신록촬영대회개최-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년 6월 2일 4면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년 7월 7일 4면

예술사진전 조선사진예술연구회에서는 5월 6일부터 동11일까지의 6일간에 걸쳐 동화백화점(舊三越) 갸라리--에서 창립기념사진전을 개최하기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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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해선 관련 원문 자료

원문은 당시의 표기를 그대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현재의 띄어쓰기와 맞춤법에 맞지 않는 부분들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수정하였고 일부 [ ] 안에 병기했다 원문의 한자는 모두 한글 독음으로 고쳤으며 의미 전달을 위해 필요한 경우 ( )안에 병기했다

「대담 아마추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 pp 48~52

작가가 사태(沙汰)났어

본지 공사간에 바쁘실 텐데helliphellip 사진문화의 발전을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

해 주십사 하는 것은helliphellip 요즘 각 직장이나 학생들 간에 사진열이 굉장히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 비

추어서 이 아마추어 카메라맨의 지도 문제를 비롯하여 초보자의 진로랄까helliphellip 이런 문제에 대한 말

씀을 좀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해선6middot25 동란 후에 개인적으로 사진을 연구해 보겠다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직장이나 학교 단위로

사진동호자의 클럽이 많아 지고 작품 발표라던가 전시회 같은 것이 무척 많아졌는데helliphellip 어쨌든

일반 사회인이나 학생 간에 사진열이 높아졌다는 건 기쁜 일이야

임응식그런데 아직도 이 카메라를 사치품으로 취급하는 층이 많아서 곤란해요

이 나라(정부)에서부터 사치품 취급을 하더군helliphellip 여자들이 다이아몬드를 사려는 것과 사진을 연구하

려는 사람이 카메라 장만하는 것을 똑같이 취급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곤란

하지

임 헌데 우리 사단(寫壇)에선 우선 lsquo사진작가rsquo라는 용어를 쓰는 데에 신중을 기해야 하겠어요 웬 놈의

lsquo사진작가rsquo가 그리도 많은지helliphellip 이건 카메라만 메고 다니면 모두 작가 행세를 하니helliphellip

이 카메라 멘 것이 모두 lsquo작가rsquo라면 대한민국에 lsquo사진작가rsquo가 수 십만도 될 걸helliphellip 작가라는 친구들을

체에 넣어서 걸러 놓으면 엄격한 의미에서 진짜 lsquo작가rsquo는 몇 사람 밖에 없을 텐데helliphellip

임 호주머니에 만년필을 꽂았다고 해서 문학가 혹은 소설가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겠는데hellip

hellip 어쨌든 요즘 성행하는 사진작가의 사태를 우선 잡지에서 만이라도 용어 사용에 엄격한 규정을

지어서 질서를 잡아 주어야겠어요

이 그것도 과도기적 현상이겠으니까 차차 지양되겠지helliphellip 오늘 해달라는 얘기는 그런 넋두리가 아닐

테니까 어디 이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본지 한마디로 얘기하자면helliphellip 카메라는 어떻게 해서 장만을 했는데 mdash 자 그 다음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겐지 몰라서 어쩔 줄 모르는helliphellip 이런 아마추어와 초보자들의 진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얘기를

좀helliphellip 현재 직장 단위로 사진 동호자들이 모여서 클럽을 이룩한 것이 십 여 개 있고 학교 단위로는

이십 여 개나 되는데요helliphellip

관련 자료 소개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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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인식이 안이해서 탈이야

이 극히 초보적인 입장에서 사진을 해보고 싶다helliphellip 다년간 연구를 한 다음엔 작가가 돼 보겠다 mdash 하

는 사람들을 회원으로 해서 수 십 년 동안 연구를 해 왔는데helliphellip 오늘날 하고 있는 일도 그것이지만

helliphellip 여러 부문에 걸쳐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서적인 면에서 사진과 친해보고 싶다던가

또는 카메라를 장만했는데 어떻게 하면 앞으로 향상 발전할 수 있는가 mdash 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신인이라고 하겠지 특히 학생들의 교내 활동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helliphellip 헌데 막상 다다

르고 보면helliphellip 어떠한 길이 올바른 길인지 막연해 하는 모양이더군요

임 초보자들은 무엇보다도 사진 자체에 대한 정의를 뚜렷이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아마추어 mdash

하면 취미적 입장에서 사진을 다루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조각이나 회화와 같이 사진도 어엿한 예술이니

까 취미 도락(道樂)적인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예술을 추구하는 진지한 마음의 준비가 우선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물론이죠 대개 클럽 조직이 되어 있으니까 선생들의 지도를 받고 있겠지만 내가 알기에는 전문가

가 아닌 다시 말하면 취미 정도에서 관심이 있는 선생들이 지도를 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역시 전문으

로 사진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지도를 가끔씩이라도 받는 게 좋겠지요

임 지도를 한다는 사람들의 태도부터가 성실성이 없는 것 같아요 만년필을 샀으니까 나도 한 번 써 보

자 mdash 해서 작가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취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남의 lsquo지도rsquo를 담당

할 수는 없을 텐데 mdash 우리가 사진을 전공한대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억지로 지도해 주겠다고 밀고

들어 가겠다는 건 아니지만 mdash (웃음) mdash 어쨌든 전문가의 지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학생 클럽이나 직장 클럽 같은 동호자의 모임을 사단의 일부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취미

에서 시작했더라도 일정한 과정을 밟고 다년 연구를 거듭하면 자연히 작가를 지향하게 되겠지만hellip

hellip 그런 면에서도 처음 싹트기 시작하는 신인의 지도가 퍽 중요한 것이지요

취미middot도락이란 관념을 버려야 해

임 지금 형성되어 있다는 직장이나 학교 단체의 거의 전부가 전문적인 입장에 서 있지 않은 것 같더군

요helliphellip 사진에 대한 근본 의식이 너무도 안이한 것 같아요 카메라를 통한 표현의식에 절실한 감정

이 없어요helliphellip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비판을 받지 않는다helliphellip 하는 따위의 도피를 해서는 곤란

하죠helliphellip 창작의식이 확고하게 수립되지 않아서는 향상이 없는 것인데helliphellip 소문에 듣자면helliphellip 너

무 기술 면에만 치중하고 정신적인 면이 소홀히 취급된다는 거에요 helliphellip 나는 직장을 갖고 있으니

까 사진이란 것은 취미 정도로 한다 mdash 하는 태도를 버려야죠 특히 이 점은 지도자들에게 권하고 싶

은데helliphellip 예술의식helliphellip 이것이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절대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까

이 그렇구 말구요helliphellip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새로 사진을 공부하겠다는 신인들에게 네 가지 의식을 주

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휴머니즘 mdash 우선 사람이 돼야 하거든요 교양이라던가 인격 덕망helliphellip 이런 면에서 인간이

돼 있어야 하고 둘째는 사진예술을 한다고 해서 사진예술이 무엇이냐helliphellip 이것만을 추궁해서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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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요 좀 더 시야를 넓혀서 예술이라는 게 뭐냐 mdash 하는 걸 먼저 알아야지 셋째에 가서 사진예술이

라는 게 뭐냐 mdash 를 연구하고 넷째에 가서야 비로소 작품이라던가 창작의식 기교 기술에 대한 검

토를 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기본조건을 머리 속에 언제나 간직하도록 나는 주장해 왔어요

임 기술면을 등한히 할 수는 없겠지요 기술 없이는 표현이 안되니까helliphellip 그러나 이선생 말씀처럼 인

간본연의 문제도 크긴 큽니다 다른 예술부문의 사람보다 교양면에서 뒤떨어지지나 않는가 mdash 하는

것이 항상 염려되는데helliphellip 만일 뒤떨어진다면 큰일이지요 기술도 중요한 문제겠지만 교양인격 같

은 것도 예술가가로서의 긍지를 위해선 떨어질 수 없는 문제고helliphellip 더욱이 좋은 기술을 가졌으면서

도 기초교양이 모자라서 좋은 작품을 낼 수 없다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으니까helliphellip 교양인으로서의

자격도 다른 예술부문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사진을 해야할겝니다

이 기교나 기술을 어떻게 우물쭈물 배웠다고 해서 작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helliphellip 예술이란 그 자체

에 대한 조예부터 깊어야 합니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조리개가 얼마다 타임이 어

떻다helliphellip 암실작업은 어떻게 하는 거다helliphellip 이것만을 알았다고 해서 작가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에

요helliphellip 인간면 예술면 기술면에 똑 같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마 사진을 연구하겠다는 신

인들의 기본이념이 돼야 할겝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지도한다는 면에서

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거든요 mdash

임 어쨌든 기술을 위주로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난 옛날 얘기입니다

지도자 시비

이 지났다기 보다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는 장래에나 변할 수 없는 기본이념이겠지요 사진이라는 것

은 더욱이나 고도의 대중성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인격과 교양이 필요해요 기계라는 거야 찍으면

사진이 되도록 마련된 것이니까 예술까지는 못 가도 사진은 되거든 mdash 그러니까 그것을 예술로 이

끌려면 찍는 사람의 성분이 문제되는 것이지요helliphellip

임 그런 의미에서도 사단의 규정이 필요하고 작가라는 규정이 필요해요 사단이라는 것에 너무 엄격한

규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helliphellip 만년필을 가졌다고 해서 전부 문학가가 아니라면helliphellip 카메라를 메었

으니 작가다 mdash 하는 엉터리도 용납될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우선 필요한 것은 취미 도락이라는 관념

을 지양해야 할 텐데helliphellip

이 취미가 차차 심각해지면 창작의식도 생기는게니까helliphellip 그런 사람들을 지도 계몽해서 한 사람이라

도 작가로 이끌어야 하겠지요helliphellip 카메라를 살 때부터 나는 사진작가가 되겠다 mdash 하는 사람은 있

을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임 lsquo싼데이rsquo 카메라맨은 논의의 대상이 안되구요helliphellip (웃음)

이 그러니까 지도자들이 작가적인 태도에 확고한 이념을 앞세우고 지도에 임해야 하는 건데helliphellip

본지 각 단체 지도층의 지도방침에 대한 구체적인 태도를 어떻게 규정하겠습니까 helliphellip

임 우선 사진에 대한 인식부터 고쳐야 해요 말이 중복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친구 좋고 사진 좋아서 우리

끼리 하면 그만이다 mdash 하는 생각들이 많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만이라도 그렇지 않다

관련 자료 소개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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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싶어요 학생들이 카메라를 사 가지고 몇 사람 모였으니까 책임자 격

인 선생이 필요하다 mdash 해서 책임 맡았다는 사람으로는 지도가 안 될 게 아닙니까 그렇다고 청해 오

지도 않는데 내정 격으로 뛰어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구helliphellip (웃음)

본지 또 한 가지 요즘 일대 성황을 이루는 것이 소위 현상사진(懸賞寫眞)이라는 건데요helliphellip 이 현상사진

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진에 대한 모욕도 있지helliphellip

임 거 참 꼴사나운 일이 많아요 현상이란 걸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helliphellip 그 하나는 어느 연구

단체에서 순수한 의미에서 발표 바탕이 없는 아마추어를 위해 마련하는 경우가 있을게고 또 하나는

선전용으로 포스터 mdash 같은 데에 써먹기 위한 상업 정책적인 의식에서 모집하는 현상이 있을 테지요

이 어느 경우이건 간에 좌우간 현상 모집을 하는 목적이 있는데helliphellip 응모자는 우선 현상의 목적부터 확

실히 알고 응모를 해야 하겠지helliphellip

임 그렇죠 그런데 이 상업 정책적인 현상의 경우에는 사진문화에 대한 모욕적인 행동이 퍽 많습니다

이거 참 불유쾌한 일이지만helliphellip 가령 예를 들자면 응모자는 원판을 제공하라던가 또 낙선자의 작

품은 일체 반환치 않는다는 따위helliphellip이게 얼마나 사진예술에 대한 모욕적 행위입니까 helliphellip

이 그래요helliphellip 확실히 모순된 일입니다

임 필요에 의해서 현상모집을 했으니까 당선된 작품은 물론 필요하겠지만helliphellip 낙선작품을 반환치 않는

다는 것은 언어도단 입니다 낙선이 됐다 해도 작가의 입장으론 대단히 귀중한 하나의 작품일 텐데

그걸 안 돌려 준대서야 말이 되나요 주최측은 낙선작품의 원화를 돌려 줄만한 성의를 가져야 도리

에 맞을 텐데helliphellip 요즘 현실은 lsquo낙선rsquo이란 푸대접 밑에 원판까지 몰수당하는 판국이니helliphellip 원 참

이 그러니까 응모자는 무엇보다도 현상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지helliphellip 여러 번 겪은 일이지만 심사를

하다 보면 전혀 현상 취지를 도외시한 작품들이 있는데helliphellip

임 그거야 보나마나 낙선이죠 (웃음)

이 그러믄요 현상 응모자로서는 출품 규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 아니겠어요

임 그럼요

이 그런데 어떤 것은 작품에 제목도 없는 것이 있거든요 그런가 하면 제목과 작품내용이 전혀 특이한

엉터리도 있구helliphellip

임 저도 여러 번 겪은 일입니다

이 제목이란 것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벌써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찍는다는 의식이 있는 이상

제목도 정해져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아주 작품과 제목이 동떨어진 것들이 응모해 오니까

낙선의 자격이 충분할 수밖에helliphellip 하하하 (웃음)

임 그게 모두 사진에 대한 성의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이 그래요 성의가 없어요 자기 작품에 대해선 최선의 성의를 다 해야 할 텐데 그런 태도가 없거든helliphellip

제목을 안 썼는지 못 썼는지는 모르지만helliphel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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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그저 무턱대고 발표의식만 왕성한 까닭이 아닐까요

이 그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된 작가가 아닌 이상 발표기회가 좀처럼 없을 테니까

자기 실력의 평가를 받는다던가 남들과 경쟁해 본다는 의미에서 현상에 자주 응모하는 것은 좋은데

helliphellip 아 어떤 친구는 자기 실력 생각은 하지도 않고 상품이 적다 많다 시비를 하는 친구도 있으니 참

기가 막힐 일이지

주최자의 무성의도 고쳐져야 하고

임 그건 lsquo현상rsquo이라고 내거는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순수한 사진연구단체에서 모집할 때는

lsquo공모전rsquo이라던가 하는 문구가 좋지 않을까요 lsquo현상rsquo이라니까 lsquo상rsquo을 바라게도 되겠지만 어쨌든

lsquo현상rsquo이란 말 자체가 순수하지 못해요

이 그건 확실히 생각해 볼 문제이겠군요helliphellip 순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helliphellip 응모자들이 심

사원이 누구냐mdash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도 순수하지 못하고helliphellip 또 주최자가 모집광고를 낼 때

lsquo심사원은 추후발표rsquo라mdash하는 것도 순수하지 못해요 이것도 참 불쾌한 일인데 lsquo추후발표rsquo라는 걸

다시 생각하면 lsquo준비가 안됐다rsquo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심사원의 준비도 안 해 놓고 현상을 모

집하는 그런 무성의가 또 어디 있어helliphellip 이건 일종의 사기가 아니면 거만일 겝니다

임 그나 그뿐인가요 lsquo심사원은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함rsquohelliphellip 하는 모호한 광고도 있지요 응모자의 입

장에서 생각하면helliphellip 심사원에 불만이 있으면 응모를 아니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 심사원 문제만

은 정정당당히 명시해야만 나중에 가서 심사에 대한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출품을 한 다음에 심사

원이 발표된다는 것은 심사에 대한 불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helliphellip

이 그리고 응모자의 동태를 가만히 보면 아까 얘기가 나왔던 소위 lsquo취미정도rsquo라는 층의 발표 의욕이 굉

장해서 대부분의 응모자가 이 부류인 것 같은데helliphellip 여기 한 가지 탈이 있어요 현상응모 작품의 심

사라는 것은 무제한의 심사 레벨을 놓고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응모 작품 중에서의 우수 작품을 가

려낸다는 것은 이거 상식 문제가 아닙니다

임 그렇죠

이 아 그런데 어떻게 해서 현상에 당선이 되거나 특히 특선이라도 하면 그만 자기가 갑자기 위대한

작가라도 된 것처럼 대가연(大家然) 하고 으쓱대는 친구들이 많아서 걱정이야helliphellip (웃음)

이 lsquo특선rsquo이라는 것은 응모해 온 작품들 중에서 특선이지 결코 한국 사단 전체의 수준에서 특선이라

는 것은 아닌데helliphellip 그만 한 번만 당선되면 코가 높아지고 대뜸 대가 행세를 하려고 드니helliphellip 참

신인들은 특히 조심해야 할 일이지

남의 것보고hellip 우리 것도 보내고hellip

본지 이제 화제를 좀 바꾸어서 세계사단의 동향을 좀 말씀해 주실까요

임 세계사단의 얘기라면 직접 보아야만 얘기가 될 텐데helliphellip

이 서울 바닥에서 썩으면서 세계사단의 얘기를 어떻게 본 듯이 할 수가 있겠나 카메라를 메고 세계일

관련 자료 소개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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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도 했어야 얘기가 되지

임 그것보다도 사진을 통한 국제 교류 얘기나 합시다

이 그게 좋겠군helliphellip 얼마 전에 덕수궁에서 자유중국의 소개사진전시가 있었죠 미국공보원의 활동도

이를 테면 국제교류의 한 형식일게고helliphellip

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자유중국과 월남의 사진전시가 있었는데helliphellip 우리도 수출을 한다면 그 보

다 훨씬 좋은 작품들이 나갈걸요helliphellip

이 한미합동전이던가 한중합동전 같은 것도 하면 역시 국제교류가 되겠지요helliphellip

임 한미합동전은 불원한 장래에 개최될 것입니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lsquo인간일가(人間一家)rsquo의 사진

이 아마 이월쯤 한국에 올 겝니다 미국대사관이 주동이 돼서 작품 503점 전부의 전시회 계획이 추

진되고 있으니까요

이 남이 보내줘서 본 것은 있지만 우리가 남에게 보여준 것은 없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야 우리도 남에

게 보여줘야 교류가 될 텐데helliphellip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두 사람의 작품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임 개인적인 활동은 있었지요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사진살롱에 사진을 보내고 있으니까 개인

적으로는 더러 나간 셈이죠 개인들의 수출이라도 좀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지만

이 우리의 것을 내보내고 외국 것을 들여와서 서로 감상하고 연구하는 게 이를 테면 국제교류인데

아마 명년쯤엔 될까 몰라

임 작품교환전 같은 것을 위해서 대대적인 계몽운동이 필요 하겠죠

이 그렇죠 운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어요

임 그런데 근본적인 얘기를 하자면 한국 작가의 역량이 아직도 부족한 것 같아요 언젠가 외국 작가에

게서 들은 말인데mdash한국 사람은 한국을 보지 않았다mdash하는 얘길 해요 사진 작가에게 대한 말이지

만helliphellip 나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이 퍽 중요한 얘기다mdash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를 직시하는 것만이

사진은 아니겠지만 실용사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것이 사실 아닐까요 회화적인 쌀롱 픽처라던

가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리얼리즘 사진이라는 것에 너무들 치우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 국제 교류의 시발은 역시 소개적(紹介的)인 것 다시 말해서 르포르타주적인 것이겠으니까helliphellip

임 외국 작품의 모방 같은 것은 이제 집어치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mdash예술적인 것 이것만을 너무 추

구했기 때문에 사실이 한국적인 것과 국민성의 묘사 같은 것이 잘 되지 않았지요 정서적인 것에만

너무 골몰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일이고 helliphellip 예술을 위한 예술에 정신들이 팔려 있었지나 않은

지helliphellip 예술을 하기 위한 사진이라는 관념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이 예술을 염두에 안 둔다면 실용사진이 돼 버리게

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너무 치우친 것 같단 말입니다

이 특히 국제 교류를 생각한다면 아닌 게 아니라 외국처럼 르포르타주적인 사진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할거에요

임 그래요 거기에 예술성을 띄워서 소화할 만한 역량 있는 작가가 필요해요

이 또 하나의 가장 큰 문제는 위정자의 관심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 큰 난관입니다 국제 교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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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가족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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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말이고 역시 정부당국자의 적극적인 주

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어디 그래요

임 우선 사단 자체의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작가들의 작업도 촉구되어야 하구helliphellip 아까도 말이 나왔지

만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 출품을 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점 같은데서 작가들의 반성도 필

요하고helliphellip

이 개별적으로 미국 등지에 보낸 것은 아마 상당한 수가 되겠지요

임 그럼요 그랬는데 왜 성과가 없느냐mdash하는 반성이 있어야죠

이 오늘의 현실을 예술적인 면에서 기록하고 작품화 해야겠는데helliphellip 막연하게 예술을 위한 작품을 보

내니까 기교적으론 훌륭할지 몰라도 작품 자체에 내용이 없어서helliphellip 그래서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닐

임 그런 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빨리 우리의 수준을 높여서 국제 조류와 호흡을 맞추어 나가

야 할 것입니다

이 이거 아마추어를 위한 얘기라는 것이 잠깐 탈선을 한 것 같군 그러나 이런 문제도 참고가 되긴 하니

까helliphellip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합시다

본지 수고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helliphellip

(기록 O기자)

이해선 「lsquo백오(白烏)rsquo의 변(辯)」 『동아일보』 1957년 4월 9일 4면

30여년 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입학

이 되었을 당시 자축기념하는 의미에서 호(號)를

하나 지어본 것이 백오(白烏)라는 두 글자였다 처

음 듣는 사람들 중에서는 거문[검은] 까마귀는 있

지만 흰 까마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서로 웃어버리고 그 뜻을

설명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자의

(字意)를 해명해볼까 한다 백(白)은 흰 빛이요 오

(烏)는 흑색으로 통하므로 우선 흑백을 대조시켜

놓고 흰 종이 위에다 검은 먹으로 휘호(揮毫)할 것

이니 그 뜻이 내 생활과 부합될 것 같으며 둘째로

백 자(字)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첫 자를 떼어놓

고 오는 반포오(反哺烏)로 그 이름이 높은 새이므

로 평소에 효자 노릇을 못하여 온 나의 좌우명으로도 적당할 듯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새 중에서는

혹간(或間) 백변종(白變種)이 생겨나는 수가 있는데 그 흰새를 서조(瑞鳥)라고 떠들던 옛 시절도 있었으므

관련 자료 소개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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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내가 우연히 호를 지어 본 것이 검은 까마귀떼 속에서 서조 백오를 발견하였으니 나의 전도(前途)에는

반드시 서광(瑞光)이 비칠 것 같으므로 이상 여러 가지 의미를 차례로 생각해 볼 때에 나에게는 이 외에 더

좋은 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자의였었고 궁금한채로 불려온 백오

였었다 만담궁변(漫談窮辯)을 물소물책(勿笑勿責) 하소서 (사진가)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

이해선 「중요한 내용middot형식-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년 10월 20일 5면

사진작품에는 사진 특유의 형식이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러한 특유의 형식에 알맞은 표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의 특수성은 형식이 가지는 특수성 보다는

기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주관적이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작품심사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동일하게 중요시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작

품 속에서 그야말로 형식과 내용이 알맞게 부합된 특출한 작

품을 볼 수는 없었다 형식이 좋으면 내용이 빈약하고 좀 내

용이 있으면 형식이 미숙하고helliphellip 모두 결점이 있다 그러나

입상작으로 뽑은 8 점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

다 그리고 금년에는 lsquo칼러rsquo사진의 응모 점수가 30점이나 되

고 그중에서도 3점이 입상되었고 또 9점이 입선되었다는 것

은 lsquo칼러rsquo 사진의 앞날을 위해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lt전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장gt

[제1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년 2월 8일 5면

외국작품의 세련되고 빈틈없는 lsquo테크닉rsquo은 국내작품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서 우선 국내

작품을 형식에서부터 누르고 말았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이루게 된 것은 국내작가들

의 역량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lsquo국산인화지rsquo가 얼마나 엉터리고 조악한 것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대체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더욱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은 이와 반대적인 경향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예술이든 먼저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볼 때 국내작품의 후진성은

두말할 것 없이 형식의 경시에 있다고 하겠다 심사결과 흑백부에서나 lsquo칼라rsquo부에서 겨우 동상으로 한 점

씩 밖에 국내작품이 입상되지 못했다는 것은 다소 섭섭한 느낌이나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경종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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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더욱 우리 심사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독에서 응모한 lsquo칼라rsquo

작품이었다 물체의 외관 색감을 초월한 내면의 lsquo이미지rsquo가 발

산하는 짙은 감정의 색감으로 작가의 개성과 사상을 인상 깊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내 lsquo칼라라보rsquo의 후진

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상작으로 뽑힌 외국작품들은 오

늘의 세계 사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는 큰 자극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

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제2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총 818점 응모-사진예술에 도움」

『동아일보』 1967년 2월 9일 4면

지난해와 같이 흑백부문에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들은 모두가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산인화지의 조악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작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올해는 흑백

부문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기꺼운 일이라고

하겠다

특히 칼라작품에 있어서는 독일의 작품들이 특출했고 이들 작품들의 색감은 현대 과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 최고상으로 뽑힌 lt잊은 친구gt와 몇 점의 입상작품들은 칼라릴리프와 소라리

세이숀[솔라리제이션] 등의 수법으로써 모티

브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를 초객체적이고 추

상적으로 표현하고 작가의 짙은 개성과 사상

과 철학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입상작으로 뽑은 16점의 작품들은 오늘의

세계사단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

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심사위원 이해선 (위원장) 임응식 서순삼

박필호 안월산 정인성 최경덕 (이상 7명)

관련 자료 소개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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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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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관련 자료 소개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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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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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관련 자료 소개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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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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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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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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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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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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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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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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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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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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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5: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대 한 사 진 예 술 가 협 회 연 혁 1 9 4 5 ~ 2 0 1 4참고자료 일간지 『경향신문』 『동아일보』 『매일경제』 『조선일보』 월간지 『포토그라피』 『영상』 단행본 『내가 걸어온 한국사단』(임응식 눈빛 1999)

『한국사협사 I』(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01) 『한국예술총감 자료편』(예술원사무국 1965) 및 실물자료

일러두기 본 자료는 대한사진예술가협회로부터 제공받은 연혁을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 수정 및 보완된 내용의 경우 출처를 표시하였다

또한 정확한 날짜나 시기를 확인하지 못한 경우 lsquorsquo 표시로 대신했다

각 저술마다 조선사진예술연구회의 창립 시기는 1~2년 차이를 보이나 1957년 『동아일보』에 실린 창립12주년 촬영대회 개최 기사 및 대한사진예술가협회의 연혁을 참고해 1945년으로 보았다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출처)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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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진예술연구회(朝鮮寫眞藝術硏究會) 창립- 815 해방과 더불어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1937)와 백양사우회 (白羊寫友會 1939)의 중견회원 및 기타 지방 사진인들을 규합하여 전국적인 단체로 발족

≪창립기념사진전≫ 동화백화점 화랑 (『동아일보』)

≪제2회 작품전람회≫ 동화백화점 화랑 (『조선일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계기로 회 명칭을 대한사진예술연구회(大韓寫眞藝術硏究會)로 개칭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全國文化團體總聯合會) 가입 (『동아일보』)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람회≫ 동화백화점 화랑 (『경향신문』)

- 심사위원 이해선 박필호 안철영- 입선자 고종일 이동호 안성호 등≪제3회 대한사연회원전≫ 50여 점 동화백화점 화랑 (『동아일보』)

『대한사협회보(大韓寫硏會報)』 제1호 제2호 발행

≪제2회 조선예술사진전람회≫ 동화백화점 화랑 (『동아일보』)

- 입선자 안월산 이경모 임윤창 등

≪제3회 전국예술사진전≫ 동화백화점 화랑 (『경향신문』 및 『한국사협사 I』)

- 심사위원 현일영 이해선 박필호 이규완- 입선자 정희섭 최창희 강윤형 등

부산사진예술연구회와 ≪합동예술사진전≫ 부산 미화당 화랑 (『내가 걸어온 한국

사단』 및 『한국사협사 I』)

- 출품자 김용진 송미구 임응식 이병삼 조상규 정인성(이상 부산사연)김조현 김한용 박영진 신상우 임석제 오인창 이최형 지부원 조명원허승균(이상 대한사연)

≪제4회 작품발표전≫ 부산 루네싼스 다방 (실물자료)

취미사진청강회 대한사연 주최 강사 이해선 아카데미 다방(소공동) (『경향신문』)

아마추어사진현상촬영대회 창경원 (『경향신문』)

≪현상인화전시회≫ 대한사연 주최 미원 다방 (『경향신문』)

≪제5회 작품발표전≫ 부산 국제구락부 (실물자료)

≪제6회 작품발표전≫ 은령(銀鈴)다방 (실물자료)

10월 창립8주년 기념 촬영대회 개최

≪제7회 작품발표전≫ 미국공보원 (『경향신문』 및 실물자료)

지도위원 이해선초대회장 박영진창립회원 김정래 박필호 현일영 이규완 오인창 이태웅

회장 이해선

기획간사 김조현

회장 이규완부회장 김조현

사무실 명동 문진양행

사무실 부산 광복동사진재료상(박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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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9주년 기념 촬영대회 경복궁 (『경향신문』)

창립9주년 기념 촬영대회 ≪당선작품 발표 사진전≫ 미국공보원 (실물자료)

『대한사협회보』 제3호 제4호 발행

정기총회 개최 한창양행 (『동아일보』)

『대한사협회보』 제5호 발행≪제8회 작품발표전≫ 미국공보원 (실물자료)

창립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봉은사 및 뚝섬 일대 (『동아일보』)

창립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당선작품 발표 사진전≫

정기총회 개최 한창양행창립 11주년 기념 촬영대회 개최 덕수궁창립 11주년 기념 촬영대회 ≪입선작품전≫ 미국공보원 화랑

회 명칭을 대한사진예술가협회(大韓寫眞藝術家協會)로 개칭≪제9회 대한사연전≫ 동화백화점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창립 12주년 기념 신록촬영대회 창경원 (『동아일보』)

정기총회 개최≪제10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창립 13주년 기념 추계촬영대회 덕수궁

≪제11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창립 14주년 기념 추계촬영대회창립 13주년 및 창립14주년 기념촬영대회 ≪당선사진전≫ 중앙공보관 화랑 (실물자료)

창립 15주년 기념촬영대회 ≪당선작품전≫ 중앙공보관 화랑 (실물자료)

≪제12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제13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실물자료)

한국사협 창립(61~63년 이해선 고문 김조현 부이사장)정부 시책에 따라 일시 해산

대전지회 설립

대한사협 출신들이 모여 ≪사진예술동인전≫ 김조현 외 17명 49점 중앙공보관 (『한국예술총람 자료편』)

문화예술단체 해금령에 따라 대한사협 재건 정기총회 개최

대한사협 수요회 개최 연지동 동해루

정기총회 개최 (『동아일보』)

≪제14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제15회 대한사협전≫ 조흥은행 본점 2층 전시장 (실물자료)

제주지회 설립≪제16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실물자료)

고문박필호김광배서순삼박영진회장 이해선 부회장 조명원 최창희총무 방대훈 남상준간사 조준영 이훈 지부원 이석준 김조현

고문 이해선 회장 김조현부회장 지부원 총무 방대훈간사 이훈 남상준

회장 김조현부회장 방대훈총무 지부원

회장 김조현

고문 김조현 회장 이해선부회장 안준천 총무 김석현

회장 이해선부회장 김조현

문교부에 국전 사진부 신설을 진정

제13회 국전에 사진부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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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차 정기총회 개최 북창동 한양관『제16회 대한사협전 작품집』 발간 (실물자료)

≪제17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제17회 대한사협전 작품집』 발간 (실물자료)

제24차 정기총회 개최 및 ≪백오사진상(白烏寫眞賞)≫ 제정≪제18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실물자료)

『제18회 대한사협전 작품집』 발간 (실물자료)

제25차 정기총회 개최≪제1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김석현 공로상 이순흥)

제26차 정기총회 개최 및 제2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9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경향신문』 및 실물자료)

제27차 정기총회 개최이해선 회장에 공로상패 증정 및 제3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이순흥 김석현) (『포토그라피』)

≪제20회 대한사협전≫ 신문회관 화랑 (『경향신문』 및 실물자료)

제28차 정기총회 개최≪제4회 백오사진상≫ 시상 (『포토그라피』)

≪제21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매일경제』 및 실물자료)

≪제5회 백오사진상≫ 시상≪제22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실물자료)

≪이해선 사진작품전≫ 신문회관 화랑 (『동아일보』)

정기총회 개최 및 ≪제6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이정훈 공로상 박필호) (『포토그라피』)

≪제23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제30차 정기총회 개최 반도아케이드 4층 카페테리아≪제7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 이완섭 작품상 김형승 양승호 김기현)유자격 정회원 한국사협에 단체로 입회

제31차 정기총회 개최 및 ≪제8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안장헌)≪제24회 대한사협전≫ 신문회관 화랑 (『동아일보』)

제32차 정기총회 개최 대동관 (『매일경제』)

≪제9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 정헌태)추계촬영대회부산지회 설립

고문 김조현 회장 이해선부회장 김조현 총무 김석현이사 성두경 안준천 오인창 박병호 감사 윤상운

고문 김조현 김종양 회장 이해선 부회장 안준천 이순흥 총무 성두경이사 김석현 손석현 이완섭 서윤석감사 윤상운

총무 김용필이사 성두경 서윤석

고문 김조현 명예회장 이해선회장안준천 부회장성두경 이순흥총무 김용필이사 서윤석 안장헌박훈서양승호감사이완섭

고문 박필호rarr김종양이사 양승호(면)

고문 박필호 김조현 김종양명예회장 이해선 회장 안준천부회장 성두경 이순흥총무이사 김용필 이사 서윤석 박훈서 안장헌 양승호 감사 이완섭

고문추대 장남수

고문 박필호 김조현 김종양 장남수안준천 명예회장이해선 회장성두경부회장 이순흥 총무이사 안장헌 이사 서윤석 이정훈 이완섭 김형승 김완기 감사 김용필

≪제1회 대한민국건축 및 사진 전람회≫(91~20 국립공보관)

봄 국전 4부에 사진middot건축middot공예 신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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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영상』)

제33차 정기총회 개최 대동관 제9대 성두경 회장 연임≪제10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본회 주관-양수리)춘계 촬영대회(양수리)제2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태종대)제3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동학사)≪제1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대전지회 주최)≪제26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영상』)

제34차 정기총회 개최≪제11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김완기 공로상대전 윤필수)≪제27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영상』)

제주지회 폐쇄

『백오이해선사진집』 출판기념회 예총화랑 (『매일경제』 및 『영상』)

제35차 정기총회 개최 제10대 성두경 회장 연임≪제12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 조임환)≪제28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제2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 대전시민회관 (『영상』)

제36차 정기총회 개최 및 ≪제13회 백오사진상≫ 시상제4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통도사 범어사)제5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갑사 마곡사)≪제3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및 ≪제12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대전시민회관 (『영상』)

≪제29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제37차 정기총회 개최 제11대 이순흥 회장 취임≪제14회 백오사진상≫ 시상≪제30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제4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13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대전시민회관 (『영상』)

백오 이해선 선생 작고

제38차 정기총회 개최 미성옥≪제15회 백오사진상≫ 시상제6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해운대)제7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관촉사 쌍계사)≪제5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1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39차 정기총회 개최 한일장 제12대 이순흥 회장 연임≪제16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최진연)충주지회 설립제8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지회 주관-수옥정)제9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속리산)≪제6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2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고문 박필호(면) 김종양(면)

고문 김조현 장남수 안준천 성두경명예회장 이해선 회장 이순흥 부회장 이완섭 김용필 총무 이정훈 이사 안장헌 김완기 박동운 송정웅송주헌 심재욱 송정회감사 서윤석 윤필수

이사 최진연 박명식

81~83년 성두경 한국사진작가협회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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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차 정기총회 개최≪제17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0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미륵사지)≪제7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11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 대둔산 도산계곡)≪제33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1차 정기총회 개최제13대 이순흥 회장 연임≪제18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2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하회마을)≪제8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13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지회 주관-탄금대)≪제34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2차 정기총회 개최 파인 힐≪제19회 백오사진상≫ 시상고창지회 설립제14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을숙도)

『대한사협회보』 복간호(제6호) 발간고 백오 이해선 선생 추모비 건립≪제9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5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3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20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5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고창지회 주관-선운사)

『대한사협회보』 제7호 발간제16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본회주관-용인민속촌)구미지회 설립≪제10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6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4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21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7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신원사)대천지회 설립문화부에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문화가족으로 등록제18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지회 주관-탄금대)≪제11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7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5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22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9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경주일원)≪제38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제12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

제46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23회 백오사진상≫ 시상제20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천-대천해수욕장)≪제39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감사 서윤석(면) 박노택

고문 김조현 이순흥회장 안준천부회장 김용필 안장헌총무 최진연이사 김완기 송주헌 송정회 심재욱 박노택 조창만감사 이정훈 고승웅

이사 송주헌 황응천 원종철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회장 김용필 부회장 이정훈 박노택총무 최진연 이사 안장헌 김완기 정완철 송주헌 심재욱 원종철 박부공황순조 황응천 김태영 감사 송정회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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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 모란룸≪제24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최진연)고 백오 이해선 선생의 한국사단 발전에 기여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白烏李海善寫眞文化賞)≫ 제정≪제40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한국의 풍물 사진공모전≫ 대한사협 호영출판사 공동주최

제48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1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유동호)원주지회 설립이천지회 설립청주지회 설립≪제41회 대한사협전≫ 코닥포토살롱제21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속리산)

제49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2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황규태)제22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엑스포장)고창지회 폐쇄≪제3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윤주영)≪제42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대한사진술가협회 창립50주년 작품집』 발간

제50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전주지회 설립≪제4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최민식)≪제43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1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대한사협회보』 제8호 발간제23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원주지회 주관-치악산)남원지회 설립≪제44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2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5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강상규)

『대한사협회보』 제9호 발간제24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대청호)대구지회 설립김제지회 설립≪제45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3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6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이순흥)

『대한사협회보』 제10호 발간제25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구지회주관 - 경주OK그린청소년 수련원)≪통일염원 전국사진공모대전 작품전시회≫ 개최(대구지회 주최-대구 동아쇼핑 전시관)≪제7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송기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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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회장 안장헌 부회장 이정훈 김완기총무 송정회 이사 원종철 송주헌 한창동 황순조 박부공 허현 감사 박노택 최진연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자문위원 안장헌 회장 이정훈부회장 김완기 박노택 총무한창동이사 원종철 김완선 이순재 박부공 이광호 이재옥 김광범 양호용감사 황순조 최진연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자문위원 안장헌 이정훈 회장 박노택 부회장 김완기 최진연 총무 이광호이사 박부공 이재옥 윤중일감사 한창동 조창만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 박노택자문위원 안장헌 이정훈회장 김완기부회장 황순조 박부공총무 윤중일이사 김광범 김준영 강승규 김이경감사 한창동 이재옥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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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1

≪제46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원주지회 폐쇄

제54차 정기총회 개최 대림정대한사협사진강좌 개최(연8회) 월례촬영회 개최(연8회)제26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 서울대청호

『대한사협회보』 제11호 발간대한사협 대구지회-중국 연길시 촬영가협회와 자매결연(연길시 청년호텔)원주지회 재설립≪제8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최흥만)≪제47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창립 55주년 기념 『2000대한사협사진집』 발간

제55차 정기총회 개최 대림정대한사협 사진강좌 개최(연8회) 월례촬영회 개최(연5회)정읍지회 창립제27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정읍 내장산)≪제48회 대한사협전≫ 및 CD작품집 제작 예총화랑 제1전시실

제56차 정기총회 개최 사랑채월례촬영회 개최(연4회)제28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서울 남한산성)≪한중 국제교류전≫ 대한사협 대구지회 대구 대덕문화회관≪제49회 대한사협전≫ 및 CD작품집 제작 예총화랑 제1전시실

제57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월례촬영회 개최(연6회)제29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 중앙탑공원)≪제9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김한용)≪제50회 대한사협전≫ 및 2003대한사협작품집(CD작품집) 발간예총화랑1-2전시실

『대한사협회보』 제12호 발간

제58-60차 정기총회 개최제51-53회 ≪대한사협전≫제30-32회 전국회원촬영대회대한사협 인터넷홈페이지 개설(wwwpaakoreacom)제1회 대한사협 사진공모전

『대한사협회보』 제13호 발간『창립60주년 전국회원전 작품집』 발간(2005)이해선 선생 탄신 100년기념 유작전(대구middot충주middot원주middot대전middot전주순회전) 개최 및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보는 1950-60년대』 (눈빛) 발간(문화관광부middot조선일보 후원)남원지회 청주지회 구미지회 폐쇄(2006년)전주지회 설립(2006년)

제61-63차 정기총회 개최≪제54-56회 대한사협전≫제33-34회 전국회원촬영대회이천지회 폐쇄(2007년)

2000

2001

2002

2003

2004~2006

2007~2009

113~7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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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3~9월69127~2211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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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위원rarr고문 안장헌 이정훈고문추대 방대훈이사 강승규(면) 김이경(면) 원종철 김광석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 박노택안장헌 이정훈 방대훈 회장 김완기 부회장 황순조 유병주(대전) 총무이사 윤중일이사 김준영 원종철 김광석 심재욱감사 강승규 이재옥

총무이사 윤중일(면) 최인호

회장 최진연

회장 최진연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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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지회 김제지회 원주지회 폐쇄(2008년)한밭지회 설립(2008년)≪제10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안장헌 2007)≪제11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조세현 2009)

제64차 정기총회 개최 PJ호텔 4층 카라디움≪제57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제35회 전국촬영회

제65차 정기총회 개최 충무로 아스토리아호텔제36회 전국촬영회 및 대천지회 전국 사진인리더 초청세미나(한화콘도 세미나실 대천해수욕장)김제지회 재설립(지회장 이성수 총무 구반반) ≪제58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

제66차 정기총회 개최 충무로 아스토리아호텔≪제12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안희탁) 제37회 전국촬영회 및 대천지회 전국사진인 리더 초청 세미나(대천해수욕장내 청주대 수련원 및 머드축제광장)울산지회 설립(지회장 이헌배 총무 심화실) ≪제59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

2013년 제1차 이사회 개최 충무로 통로이미지(주) 회의실 참석 이정훈 외8명제67차 정기총회 개최 캐피탈호텔 뷔페식당 스카이(그릴 룸)≪제60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회원 자질 향상을 위한 사진학 강좌 개설(강사 진동선 2013~2014)

≪제13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마이클 케나(MichaelKenna))

2010

2011

2012

2013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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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723

9월1110~16

128

723

8월118~14

19126117~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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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정건영

회장 이철집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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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3

김 완 기(金莞祁 1944~ )

1962 충주고등학교 졸업

1964 청주교육대학교 졸업

1969 《제1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입선

1977~1991 KBSEBS방송 출연 15년

1989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교육학 석사)

1990~1999 《대한민국사진전림회》 8회 입선

1993~1999 청영회 회장 역임

1997 《제16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 특선

1998 교육부 초등교육정책과장 역임

1999~2013 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 3회 역임

1999~2014 《전국사진공모전》 심사위원 70회 역임

2002 강남구사진작가회 창립회원 및 회장 역임

2003 서울성북교육청 교육장 역임

2004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초대작가

《서울특별시사진대전》 초대작가

《제1회 김완기사진전》 세종문화회관별관 광화문갤러리

2004~2008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 역임

2005 2013 제24회 제31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심사위원 역임

2005~2007 서울특별시사진작가협의회 초대 회장 역임

2006 『김완기사진집』 출판 창조집단 시빌구

《제2회 김완기사진전》 세종문화회관별관 광화문갤러리

2008~2014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조정위원

2011 《서울특별시사진대전》 운영위원 역임

2011~2014 APC뉴스(한국예술사진인연합회) 회장

2013 김완기 자서전 『분필과 셔터로 그린 자화상』 출판 하얀나무

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고문

강남구사진작가회 자문위원

서울특별시사진작가협의회 고문

청영회 고문

한국사진작가협회 자문위원

구 술 자 연 보

안장헌(安章憲 1947~ )

1969 2 고려대학교 농업경제학과 졸업

1966~2014 고려대학교 호영회 창립회원 호영동우회 회장역임 및 회원

1968~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원 이사(1973~1992) 회장(1993~1995) 현 자문

1973~1975 동화출판공사 『한국미술전집』 사진담당

1976~1977 월간 『영상』 편집장

1977~1979 현암사 『한국미술오천년』 기획 및 편집책임

1979~1995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 3회 역임 현 자문위원

1980~2005 호영문화사 편집인

1981~1992 신구대 사진과 강사

1984~1987 서울교육대학 미술교육과 객원교수(사진학)

1990~1994 롯데문화센터 사진교실 강사

1994~1998 삼성사진문화교실 전임강사

1995~2014 한국불교사진협회 고문

1995~2014 (사)신라문화원 이사 현 자문위원

2000~2014 경주 계림사우회 지도교수

2004~2009 동강사진마을 운영위원

2005~2014 문화유산사진연구소 소장

2009 봉은사진교실(봉은사) 강사

2010~2014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 안장헌디지털사진교실 지도교수

그룹전

1966~2014 고려대학교 호영회 호영동우회 회원전 80여점 출품

1968~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전(17~60회전) 70여점 출품

1990 《사진가 8인전》 후지포토살롱

1994 《한국현대사진의 흐름전》 〈산사일기〉 출품

1996 《Image ofKoreanCultual Heritage》 UNESCO본부 파리

1997 《Buddist Images ofKorea》 독일 함부르그

1997~1998 《서울사진대전》 〈낙선재 일곽〉 〈금원에서〉 출품

1997~2014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전 19점 출품

1998~1999 《경기도사진작가초대전》 출품

1999 《한일사진교류전~자연과 인간을 향하여》 출품

2001 《아름다운 우리 문화재 4인전》 국립진주박물관

2004 《한국다큐멘터리사진 33인전》 동강사진축전

개인전

1996 《서라벌 빛 그리고 향기》 서라벌문화회관

2002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신라문화원 화랑

2003 《세계문화유산과 경북》 경주문화EXPO솔거방

2007 《왕릉의 호랑이》 동강사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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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창호》 인사동 갤러리 북스

2010 《돌 호랑이 그림 호랑이》 인사동 갤러리 북스

2012 《선비의 고향 서원》 인제대 도서관 김학수기념박물관

주요 사진저작

1982 『석불』 호영

1989 『석굴암』 예경

1991 『경주 남산의 탑골』 열화당

1992 『선의 세계』 호영

1993 『영겁의 미소』 불광

1994 『신라의 동해구』 열화당

1996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삼성문화재단

1998 『서원』 열화당

2002 『신라의 마음 경주』 한길아트

『남산』 한길아트

2003 『돌에 새긴 정토의 꿈~석불』 한길아트

『석조미술의 꽃~석가탑과 다보탑』 한길아트

『사진으로 보는 한국미~무늬』 호영

2005 『BUDDHA~Bildnisse ausStein inKorea』 ErnstWasmuthVerlog

Tubingen 독일 베를린

2006 『범종~생명의 소리를 담은 장엄』 한길아트

저서

1987 『국립공원』 김성옥 문순화 송기엽 안장헌 공저 호영)

1995 『사진으로 배우는 사진촬영교실』 호영

2001 『아름다운 우리문화재』 관조 김대벽 한석홍 안장헌 공저 국립진주박물관

2003 『문화유산 일기』 진선출판사

수상

1977 《백오사진상》 작품상 수상(대한사진예술가협회)

1999 『서원』으로 《간행물윤리상》 저작상 수상(간행물윤리위원회)

2006 《한국사진문화상》 공로상 수상(한국사진작가협회)

2007 《이해선사진문화상》 수상(대한사진예술가협회)

2011 《대한민국문화유산상(대통령상)》 봉사활용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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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5

참 고 문 헌 목 록

「봄 국전심사에 물의 사진 심사위원에 시비」 『동아일보』 1977421

「봄 국전 심사 낙수(落穗)」 『경향신문』 1977425

「현대사진문화상 이해선 씨 뽑아」 『동아일보』 19781128

「사진문화-사협고문 이해선 씨 작품집 발간」 『매일경제』 19801129

「사진 50년 역사를 한 눈에」 『매일경제』 1981120

「사진작가 이해선 작품집 두 권 내놔」 『동아일보』 1981629

「부고-원로 사진작가 이해선 씨」 『동아일보』 1983111

「일화로 엮는 명암 100년 화단이면사( ) (27) 화가와 문인과 신식 여성」

『경향신문』 198554

「이해선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사진전」 『연합뉴스』 20051026

「lt단신gt 백오 선생 탄신 100돌 사진전」 『문화일보』 20051031

「사진예술가협회 창립 60주년 기념전」 『매일신문』 20051117

「문화의 향기-전시」 『부산일보』 200615

「백오 이해선 선생 미발표유작 사진전」 『부산일보』 200617

「[전북][광주전남][제주][대전충남]문화가」 『동아일보』 2006120

「영월 동강사진박물관-이해선 특별기획전 2007년 3월 첫 주까지」 『뉴시스』

20061227

「사진과 친해지려면 옛 서울역사로 가보세요」 『헤럴드경제』 201041

월간지 계간지

김용준 「서화협전의 의미」 『삼천리』 1931년 11월호

「lt부감(俯瞰)gt(이해선 작)gt」 『사진문화』 1956년 6월호

「아마츄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호

연성숙 「일제 한인귀족의 근황」 『진상(眞相)』 1960년 3월호

「창간사 이해선 씨」 『포토그라피』 1966년 8월호

「나의 발언」 『포토그라피』 1966년 8월호

「작가 지상초빙작가-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달의 작품사진 제주풍물-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해선 「해외 예술사진 감상실 (1회)」 『포토그라피』 1968년 4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6) 석가탄일」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7)」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제1회 새한사진콘테스트」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8) 동해진미」 『포토그라피』 1969년 9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9) 야채밭」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0) 건제(乾梯)」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제18회 국전 소식」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1) 초설(初雪)」 『포토그라피』 1969년 12월호

이해선 「돌과의 대화 30년」 『월간 중앙』 1969년 12월호

「초대작가 사진」 『포토그라피』 1970년 9월호

이해선 「고궁풍물(1)」 『포토그라피』 1971년 1월호

_______ 「고궁풍물(2)」 『포토그라피』 1971년 2월호

이해선 관련

일간지

「입선자의 방명록」 『매일신보』 1926512

이태준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1029

「금조개장한 동미전 제2회」 『동아일보』 1931412

홍득순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417

「인사(人事)」 『매일신보』 193886

이해선 「예술사진의 연혁과 개념」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동인전」 『경향신문』 19491115

「인사(人事)」 『경향신문』 1953110

이해선 「등하수상(燈下隨想)」 『동아일보』 19551112

_______ 「사진예술의 독자성」 『동아일보』 1956126

_______ 「사진 8인전 소감」 『경향신문』 195647

_______ 「백오(白烏)의 변(辯)」 『동아일보』 195749

「김포공항에 내린 덕혜옹주-이해선 씨가 부축하고 있다」 『경향신문』 1962126

「5월 예술상에 붙이는 제언」 『경향신문』 196231

「2명이 사퇴 사진부문심위원」 『경향신문』 1964109

「영예의 산실 안팎」 『동아일보』 19641013

「횡설수설-국전 사진부 이해선 심사위원 사퇴」 『동아일보』 19641014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중요한 내용middot형식 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1020

「열띤 감정으로 충만-창협 창립 사진전」 『동아일보』 1965119

「한국국제사진살롱 위원 명단」 『동아일보』 1965116

「동아국제사진살롱 심사평-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28

「제4회 사진동우회전」 『동아일보』 1966121

「동아사진살롱 심사평-총 801 응모」 『동아일보』 196729

「위원장에 이종우 씨 국전심사위원 위촉」 『동아일보』 1967920

「국전심사위원장 도상봉 씨 선출」 『경향신문』 1968919

「석우회(石友會)서 돌 전람회」 『동아일보』 1970428

「예술인에 훈장 이해랑 씨 등 9명」 『경향신문』 1972118

「외길 한평생 lt11gt 사진middot예술 이해선」 『선데이서울』 1973318

「현역 원로 작가 초대전 일제하의 침울이긴 예술자세 생생하게」 『경향신문』

1974831

「이해선 씨 작품전 향토풍물 50점 전시」 『동아일보』 19741118

「이해선 사진전」 『경향신문』 19741119

「이해선 사진 작품전 24일까지 신문회관」 『매일경제』 19741121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423

「국전운영위원 위촉」 『동아일보』 1976317

「국전사진부문 사단중진들 반발」 『동아일보』 1976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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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_______ 「고궁풍물(3)」 『포토그라피』 1971년 3월호

_______ 「고궁풍물(4)」 『포토그라피』 1971년 4월호

_______ 「고궁풍물(5)」 『포토그라피』 1971년 5월호

_______ 「고궁풍물(6)」 『포토그라피』 1971년 6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7)」 『포토그라피』 1971년 7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8)」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포토그라피 창간5주년에 붙여서」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9)」 『포토그라피』 1971년 9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0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1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2)」 『포토그라피』 1971년 12월호

「제2회 사진국전마감 심사위원결정」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이해선 「이해선 떡에 얽힌 시속(時俗)의 금석(今昔) 옛떡이 사라져 간다는데」

『월간 중앙』 1973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1)」 『포토그라피』 1973년 8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2)」 『포토그라피』 1973년 9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0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6)」 『포토그라피』 1974년 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7)」 『포토그라피』 1974년 3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8)」 『포토그라피』 1974년 4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9)」 『포토그라피』 1974년 5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끝)」 『포토그라피』 1974년 6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 『포토그라피』 1974년 7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2)」 『포토그라피』 1974년 8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3)」 『포토그라피』 1974년 9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4)」 『포토그라피』 1974년 10월호

_______ 「작가와 작품-풍물백태 중에서」 『포토그라피』 1974년 1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6)」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7)」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8)」 『포토그라피』 1975년 3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9)」 『포토그라피』 1975년 4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0)」 『포토그라피』 1975년 5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1)」 『포토그라피』 1975년 6월호

_______ 「곡필무사(曲筆誣事)를 밝힌다」 『월간 중앙』 1975년 11월호

「영상 창간 1주년 기념 좌담회 한국 사진 산업의 의 오늘과 내일」 『영상』 1976년 6월호

「국전 초대작가 8인선 김조현 이건중 이경모 이해선 임응식 이형록 정인선

조현두」 『영상』 1977년 1월호

「남기고 싶은 작품 3 이해선」 『영상』 1977년 5월호

「예술사진에 대한 견고한 확신 이해선 사진의 예술성」 『영상』 1978년 5월호

「한국현대미술대전」 『영상』 1978년 10월호

이명동 「처음 제정된 사진문화상에의 기대」 『영상』 1979년 2월호

「행사 백오 이해선 선생의 사진작품집 출판기념회」 『영상』 1981년 2월호

「작품집 소개 이해선 작품집 중에서」 『영상』 1981년 4월호

박재능 「다양한 자기 세계의 길」 『영상』 1981년 12월호

「영상방담-사단의 이 얘기 저 얘기 김정래 임석제」 『영상』 1982년 1월호

「이미지의 합창-봄의 첫 장」 『영상』 1982년 4월호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 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호

岩宮武二 「너 어디 있느냐」 『영상』 1983년 1월호

최인진 「1930년대의 아마츄어 사진활동」 『사진사연구』 통권 제5호 1983년 9월호

박재능 「월평-원로 이해선 선생을 추모한다」 『영상』 1983년 12월호

「한국 근대미술의 발자취」 『계간미술』 중앙일보사 1985년 봄호

「다시 보는 명작 정도선 정인선 신현국 강대환 김일창 이해선」 『영상』 1986년 10월호

「고 백오 이해선 선생 추모비 건립」 『영상』 1989년 1월호

「동경 유학생들의 한국 근대미술」 『월간미술』 1989년 9월호

「화보로 보는 한국 동경 유학생들의 자화상」 『미술세계』 1993년 5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조선총독부 관보』 제4087호(192647) 한국학문헌연구소 서울 아세아문화사 1926

이태현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1집 서

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2

_______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 자화상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3집 서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4

신명호 「일제하 이왕직과 이왕가 족보」 『한국학대학원논문집』 제11집 한국정신문화

연구소 1996

최인진 「한국사진 역사의 증인(4) - 사단의 단체 활동과 이해선」 『한국사진』 2002

이가라시 코이치 이중희 역 「조선미술전람회의 창설과 서화」 『한국근대미술사학』

제12집 한국근대미술사학회 2004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의 입학제도와 조선인 유학생」 『동악미술사』 제6호 2005

허보윤 「미술로서의 디자인 이순석의 1946-1959년 응용미술교육」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단행본

조우석 『한국사진가론』 눈빛 1998

작품집 도록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1926

이해선 『이해선 사진작품집』 평화당 1980

_______ 『한국의 고궁』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0

Tucker Anne Iizawa Kotaro Kinoshita Naoyuki The History of

Japanese Photography London YaleUniversityPress 2003

이해선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남은 1950-60년대』 눈빛 2005

_______ 『이해선 사진집 1950~1960년대 이야기』 동강사진박물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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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7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일간지

「부산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24531

「성공을 기대 조선사진연구회 현일영 씨 담」 『조선중앙일보』 1936826

「경성아마사진구락부 제1회전」 『조선일보』 1938417

「사진작품전」 『동아일보』 19381014

「경성사진동호회 작품전람회개최」 『조선일보』 19381027

「사진동호회작품전」 『동아일보』 1938112

「경성아마추어 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39527

「아마추어 사진인화전」 『매일신보』 19391115

「동서남북-lsquo아마추어rsquo 제4회 인화전람회」 『동아일보』 19391115

「동서남북-합동인화전」 『동아일보』 1940126

「아마추어 사진의 인화전」 『매일신보』 194074

「경성아마츄어 제5회 인화전」 『조선일보』 194075

「경성백양사우회 제1회 인화전람회 개최」 『매일신보』 19401113

「제2회 사진전 명일부터 화신에서-백양사우회」 『매일신보』 19411124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55

「사진작품전」 『조선일보』 1946119

「전국문화총연발족」 『동아일보』 194729

「제1회 조선사진예술전」 『경향신문』 19475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7510

「사진전람회개최」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전응모작 답지」 『경향신문』 1947615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 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629

「제1회예술사진전람회 15일부터 동화백화점」 『경향신문』 1947713

「예술사진 입선 수상식을 거행」 『경향신문』 1947720

「예술사진전 19일부터」 『동아일보』 1947121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8224

「사예(寫藝) 2회전 작품을 현상모집」 『경향신문』 19481013

「예술사진전 심사 오는 8일로 연기」 『동아일보』 1948127

「지방출품우수-제2회 예사전」 『동아일보』 19481212

「사진예술전 22일부터 동화화랑서」 『동아일보』 19481221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964

「전국종합사진전 심사결과-특선1석 최인집 씨」 『동아일보』 194977

「사진예술의 정화-제3회 전국예술사진전」 『경향신문』 19491010

「예술사진전 30일로 마감박도」 『경향신문』 19491128

「예술사진전 입선자 발표」 『경향신문』 19491213

「예술사진전시회」 『동아일보』 195316

「춘계사진섭영회 26일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3

「본사후원 춘계촬영대회 오늘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6

「사진현상모집」 『경향신문』 1953517

「특선에 lt만춘gt」 『경향신문』 1953527

「인화 당선자 수여식」 『경향신문』 1953529

「사진작품발표전」 『경향신문』 1954413

「예술사진전시회 US-S화랑서」 『동아일보』 1954415

「집회」 『동아일보』 1954916

「경복궁서 촬영대회」 『경향신문』 1954919

「내 26일 촬영대회 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4922

「사연 촬영대회 여감(餘感) 아마추어 사진도(寫眞道)」 『동아일보』 1954103

「문화집합」 『동아일보』 1955122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77

「사연(寫硏) 창립 10주년 기념 어제 촬영대회 성황」 『동아일보』 1955711

「촬영대회 입선작 결정」 『동아일보』 1955819

「8인 사진전 개최」 『동아일보』 1956329

「9회 사연(寫硏)전」 『동아일보』 1957414

「신록촬영대회 개최 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62

「대한사진예술가협회서 사진전시회 개최」 『동아일보』 1958711

「10년 후의 우리 문화 건국 20주년을 장식하고 싶은 것」 『동아일보』 1958821

「사진예술가협회 11회 회원작품전」 『동아일보』 195979

「문화 소식」 『동아일보』 1960119

「국전에 사진부문도」 『동아일보』 1963410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결정 특선 조천용 작」 『동아일보』 19641020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653

「렌즈의 향연 영예의 초점-제4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동아일보』 196667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61217

「사진예술가협회전」 『동아일보』 19681022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9830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996

「국립공보관 12월 전시회 스케쥴」 『경향신문』 1971126

「문화단신」 『경향신문』 19721128

「사진예술협 작품전 7일까지 공보관서」 『매일경제』 1973111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에 안준천 씨」 『경향신문』 197526

「동아포우스트」 『동아일보』 19751117

「사진예술가협회 창립30돌 기념전」 『경향신문』 19751118

「추계 친목 촬영대회」 『매일경제』 197610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7830

「사진예술가협 정총(定總) 31일 하오 대동관서」 『매일경제』 19781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81031

「문화광장」 『동아일보』 1993121

「한국사진예술 50년을 펼친다」 『한겨례』 1994111

「사진예술가협 사라진 풍물전」 『서울신문』 20051025

월간지 계간지

「사진클럽 지상소개 대한사협의 발자취」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박필호 「논단 대한사협16회전을 보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210-280 140p-180p 0723_1 14 07 23 오후 823 페이지 157

158

「대한사협 16회전」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사협 16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8년 7월호

「대한사협 충남지부 회원전」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경축 창간 3주년 사진과 관광 포토그라피-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대한사협 18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제18회 대한사협전」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 작품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70년 3월호

「축 창간4주년 서울 선데이 카메라 클럽」 『포토그라피』 1970년 8월호

「축 포토그라피 창간 5주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김종양 씨 대한사협 고문 추대」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3년 3월호

「lt파도gt 김도현 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신춘초대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근하신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75년도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창작선」 『영상』 1977년 1월호

「전시장 순례 대한사진협회 회원전」 『영상』 1977년 11월호

「지상소개-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대한사협 제27회 정기총회 개최」 『영상』 1979년 7월호

박필호 「대한사협 27돐에 대한 축사」 『영상』 1979년 7월호

「제26회 대한사협전」 『영상』 1980년 1월호

「제27회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사진전시회」 『영상』 1980년 12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요강」 『영상』 1981년 5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영상』 1981년 10월호

「탐방-뜻이 있으면 길이 있게 마련 세 번째 전국대학사진 공모전을 연 대한사협충

남지회의 단합된 모습」 『영상』 1983년 1월호

「제3회 전국대학생사진 공모 제12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월호

「제13회 대한사협 충남 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2월호

최인진 「경성아마츄어카메라구락부를 말한다」 『사진사연구』 1984년 7월호

「대한사협본부 주최 제9회 한국국제사진전 입상자」 『영상』 1989년 1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대한민국예술원 편 『한국예술총감 자료편』 대한민국예술원 1965

한국사진협회 「사진계소식 1969년도」 『한국사진연감』 1970

_____________「한국사진협회의 연혁 1976년 10월 30일」 『한국사진연감』 1976

임범택 「사진」 『1977년도 문예연감』 1978

______ 「사진」 『1978년도 문예연감』 1979

한국사진협회 「역대역원명단(歷代役員名單) 1962년~1987년」 『한국사진연감』

1988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제1장 한국사진협회 창립 이전의 사진계 동향」 『한국사협

사 I 1945-1970』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01

최인진 「해방 초기의 사진잡지 연구-『국제보도』와 『사진문화』를 중심으로」 『한국

사진학회지 AURA』 제10호 2003

박혜성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사진문화』 목록 및 해제」 『한국 사진 잡지

『사진문화』 연구』 명지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한국사협 50년사』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13

단행본

임응식 『내가 걸어온 한국사단 임응식 회고록』 눈빛 1999

작품집 도록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제16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7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8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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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9

원 문 자 료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년 10월 29일 4면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년 4월 17일 4면

1 이해선 양화기(洋畵期) 관련 참고 자료

「입선자의 방명록」『매일신보』 1926년 5월 12일 3면

「금조 개장한 동미전 제2회」『동아일보』 1931년 4월 12일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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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참고 자료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년 5월 5일 2면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년 6월 29일 3면

「신록촬영대회개최-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년 6월 2일 4면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년 7월 7일 4면

예술사진전 조선사진예술연구회에서는 5월 6일부터 동11일까지의 6일간에 걸쳐 동화백화점(舊三越) 갸라리--에서 창립기념사진전을 개최하기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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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해선 관련 원문 자료

원문은 당시의 표기를 그대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현재의 띄어쓰기와 맞춤법에 맞지 않는 부분들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수정하였고 일부 [ ] 안에 병기했다 원문의 한자는 모두 한글 독음으로 고쳤으며 의미 전달을 위해 필요한 경우 ( )안에 병기했다

「대담 아마추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 pp 48~52

작가가 사태(沙汰)났어

본지 공사간에 바쁘실 텐데helliphellip 사진문화의 발전을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

해 주십사 하는 것은helliphellip 요즘 각 직장이나 학생들 간에 사진열이 굉장히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 비

추어서 이 아마추어 카메라맨의 지도 문제를 비롯하여 초보자의 진로랄까helliphellip 이런 문제에 대한 말

씀을 좀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해선6middot25 동란 후에 개인적으로 사진을 연구해 보겠다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직장이나 학교 단위로

사진동호자의 클럽이 많아 지고 작품 발표라던가 전시회 같은 것이 무척 많아졌는데helliphellip 어쨌든

일반 사회인이나 학생 간에 사진열이 높아졌다는 건 기쁜 일이야

임응식그런데 아직도 이 카메라를 사치품으로 취급하는 층이 많아서 곤란해요

이 나라(정부)에서부터 사치품 취급을 하더군helliphellip 여자들이 다이아몬드를 사려는 것과 사진을 연구하

려는 사람이 카메라 장만하는 것을 똑같이 취급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곤란

하지

임 헌데 우리 사단(寫壇)에선 우선 lsquo사진작가rsquo라는 용어를 쓰는 데에 신중을 기해야 하겠어요 웬 놈의

lsquo사진작가rsquo가 그리도 많은지helliphellip 이건 카메라만 메고 다니면 모두 작가 행세를 하니helliphellip

이 카메라 멘 것이 모두 lsquo작가rsquo라면 대한민국에 lsquo사진작가rsquo가 수 십만도 될 걸helliphellip 작가라는 친구들을

체에 넣어서 걸러 놓으면 엄격한 의미에서 진짜 lsquo작가rsquo는 몇 사람 밖에 없을 텐데helliphellip

임 호주머니에 만년필을 꽂았다고 해서 문학가 혹은 소설가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겠는데hellip

hellip 어쨌든 요즘 성행하는 사진작가의 사태를 우선 잡지에서 만이라도 용어 사용에 엄격한 규정을

지어서 질서를 잡아 주어야겠어요

이 그것도 과도기적 현상이겠으니까 차차 지양되겠지helliphellip 오늘 해달라는 얘기는 그런 넋두리가 아닐

테니까 어디 이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본지 한마디로 얘기하자면helliphellip 카메라는 어떻게 해서 장만을 했는데 mdash 자 그 다음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겐지 몰라서 어쩔 줄 모르는helliphellip 이런 아마추어와 초보자들의 진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얘기를

좀helliphellip 현재 직장 단위로 사진 동호자들이 모여서 클럽을 이룩한 것이 십 여 개 있고 학교 단위로는

이십 여 개나 되는데요helliphellip

관련 자료 소개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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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인식이 안이해서 탈이야

이 극히 초보적인 입장에서 사진을 해보고 싶다helliphellip 다년간 연구를 한 다음엔 작가가 돼 보겠다 mdash 하

는 사람들을 회원으로 해서 수 십 년 동안 연구를 해 왔는데helliphellip 오늘날 하고 있는 일도 그것이지만

helliphellip 여러 부문에 걸쳐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서적인 면에서 사진과 친해보고 싶다던가

또는 카메라를 장만했는데 어떻게 하면 앞으로 향상 발전할 수 있는가 mdash 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신인이라고 하겠지 특히 학생들의 교내 활동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helliphellip 헌데 막상 다다

르고 보면helliphellip 어떠한 길이 올바른 길인지 막연해 하는 모양이더군요

임 초보자들은 무엇보다도 사진 자체에 대한 정의를 뚜렷이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아마추어 mdash

하면 취미적 입장에서 사진을 다루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조각이나 회화와 같이 사진도 어엿한 예술이니

까 취미 도락(道樂)적인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예술을 추구하는 진지한 마음의 준비가 우선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물론이죠 대개 클럽 조직이 되어 있으니까 선생들의 지도를 받고 있겠지만 내가 알기에는 전문가

가 아닌 다시 말하면 취미 정도에서 관심이 있는 선생들이 지도를 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역시 전문으

로 사진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지도를 가끔씩이라도 받는 게 좋겠지요

임 지도를 한다는 사람들의 태도부터가 성실성이 없는 것 같아요 만년필을 샀으니까 나도 한 번 써 보

자 mdash 해서 작가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취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남의 lsquo지도rsquo를 담당

할 수는 없을 텐데 mdash 우리가 사진을 전공한대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억지로 지도해 주겠다고 밀고

들어 가겠다는 건 아니지만 mdash (웃음) mdash 어쨌든 전문가의 지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학생 클럽이나 직장 클럽 같은 동호자의 모임을 사단의 일부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취미

에서 시작했더라도 일정한 과정을 밟고 다년 연구를 거듭하면 자연히 작가를 지향하게 되겠지만hellip

hellip 그런 면에서도 처음 싹트기 시작하는 신인의 지도가 퍽 중요한 것이지요

취미middot도락이란 관념을 버려야 해

임 지금 형성되어 있다는 직장이나 학교 단체의 거의 전부가 전문적인 입장에 서 있지 않은 것 같더군

요helliphellip 사진에 대한 근본 의식이 너무도 안이한 것 같아요 카메라를 통한 표현의식에 절실한 감정

이 없어요helliphellip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비판을 받지 않는다helliphellip 하는 따위의 도피를 해서는 곤란

하죠helliphellip 창작의식이 확고하게 수립되지 않아서는 향상이 없는 것인데helliphellip 소문에 듣자면helliphellip 너

무 기술 면에만 치중하고 정신적인 면이 소홀히 취급된다는 거에요 helliphellip 나는 직장을 갖고 있으니

까 사진이란 것은 취미 정도로 한다 mdash 하는 태도를 버려야죠 특히 이 점은 지도자들에게 권하고 싶

은데helliphellip 예술의식helliphellip 이것이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절대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까

이 그렇구 말구요helliphellip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새로 사진을 공부하겠다는 신인들에게 네 가지 의식을 주

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휴머니즘 mdash 우선 사람이 돼야 하거든요 교양이라던가 인격 덕망helliphellip 이런 면에서 인간이

돼 있어야 하고 둘째는 사진예술을 한다고 해서 사진예술이 무엇이냐helliphellip 이것만을 추궁해서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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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요 좀 더 시야를 넓혀서 예술이라는 게 뭐냐 mdash 하는 걸 먼저 알아야지 셋째에 가서 사진예술이

라는 게 뭐냐 mdash 를 연구하고 넷째에 가서야 비로소 작품이라던가 창작의식 기교 기술에 대한 검

토를 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기본조건을 머리 속에 언제나 간직하도록 나는 주장해 왔어요

임 기술면을 등한히 할 수는 없겠지요 기술 없이는 표현이 안되니까helliphellip 그러나 이선생 말씀처럼 인

간본연의 문제도 크긴 큽니다 다른 예술부문의 사람보다 교양면에서 뒤떨어지지나 않는가 mdash 하는

것이 항상 염려되는데helliphellip 만일 뒤떨어진다면 큰일이지요 기술도 중요한 문제겠지만 교양인격 같

은 것도 예술가가로서의 긍지를 위해선 떨어질 수 없는 문제고helliphellip 더욱이 좋은 기술을 가졌으면서

도 기초교양이 모자라서 좋은 작품을 낼 수 없다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으니까helliphellip 교양인으로서의

자격도 다른 예술부문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사진을 해야할겝니다

이 기교나 기술을 어떻게 우물쭈물 배웠다고 해서 작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helliphellip 예술이란 그 자체

에 대한 조예부터 깊어야 합니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조리개가 얼마다 타임이 어

떻다helliphellip 암실작업은 어떻게 하는 거다helliphellip 이것만을 알았다고 해서 작가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에

요helliphellip 인간면 예술면 기술면에 똑 같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마 사진을 연구하겠다는 신

인들의 기본이념이 돼야 할겝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지도한다는 면에서

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거든요 mdash

임 어쨌든 기술을 위주로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난 옛날 얘기입니다

지도자 시비

이 지났다기 보다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는 장래에나 변할 수 없는 기본이념이겠지요 사진이라는 것

은 더욱이나 고도의 대중성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인격과 교양이 필요해요 기계라는 거야 찍으면

사진이 되도록 마련된 것이니까 예술까지는 못 가도 사진은 되거든 mdash 그러니까 그것을 예술로 이

끌려면 찍는 사람의 성분이 문제되는 것이지요helliphellip

임 그런 의미에서도 사단의 규정이 필요하고 작가라는 규정이 필요해요 사단이라는 것에 너무 엄격한

규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helliphellip 만년필을 가졌다고 해서 전부 문학가가 아니라면helliphellip 카메라를 메었

으니 작가다 mdash 하는 엉터리도 용납될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우선 필요한 것은 취미 도락이라는 관념

을 지양해야 할 텐데helliphellip

이 취미가 차차 심각해지면 창작의식도 생기는게니까helliphellip 그런 사람들을 지도 계몽해서 한 사람이라

도 작가로 이끌어야 하겠지요helliphellip 카메라를 살 때부터 나는 사진작가가 되겠다 mdash 하는 사람은 있

을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임 lsquo싼데이rsquo 카메라맨은 논의의 대상이 안되구요helliphellip (웃음)

이 그러니까 지도자들이 작가적인 태도에 확고한 이념을 앞세우고 지도에 임해야 하는 건데helliphellip

본지 각 단체 지도층의 지도방침에 대한 구체적인 태도를 어떻게 규정하겠습니까 helliphellip

임 우선 사진에 대한 인식부터 고쳐야 해요 말이 중복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친구 좋고 사진 좋아서 우리

끼리 하면 그만이다 mdash 하는 생각들이 많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만이라도 그렇지 않다

관련 자료 소개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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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싶어요 학생들이 카메라를 사 가지고 몇 사람 모였으니까 책임자 격

인 선생이 필요하다 mdash 해서 책임 맡았다는 사람으로는 지도가 안 될 게 아닙니까 그렇다고 청해 오

지도 않는데 내정 격으로 뛰어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구helliphellip (웃음)

본지 또 한 가지 요즘 일대 성황을 이루는 것이 소위 현상사진(懸賞寫眞)이라는 건데요helliphellip 이 현상사진

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진에 대한 모욕도 있지helliphellip

임 거 참 꼴사나운 일이 많아요 현상이란 걸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helliphellip 그 하나는 어느 연구

단체에서 순수한 의미에서 발표 바탕이 없는 아마추어를 위해 마련하는 경우가 있을게고 또 하나는

선전용으로 포스터 mdash 같은 데에 써먹기 위한 상업 정책적인 의식에서 모집하는 현상이 있을 테지요

이 어느 경우이건 간에 좌우간 현상 모집을 하는 목적이 있는데helliphellip 응모자는 우선 현상의 목적부터 확

실히 알고 응모를 해야 하겠지helliphellip

임 그렇죠 그런데 이 상업 정책적인 현상의 경우에는 사진문화에 대한 모욕적인 행동이 퍽 많습니다

이거 참 불유쾌한 일이지만helliphellip 가령 예를 들자면 응모자는 원판을 제공하라던가 또 낙선자의 작

품은 일체 반환치 않는다는 따위helliphellip이게 얼마나 사진예술에 대한 모욕적 행위입니까 helliphellip

이 그래요helliphellip 확실히 모순된 일입니다

임 필요에 의해서 현상모집을 했으니까 당선된 작품은 물론 필요하겠지만helliphellip 낙선작품을 반환치 않는

다는 것은 언어도단 입니다 낙선이 됐다 해도 작가의 입장으론 대단히 귀중한 하나의 작품일 텐데

그걸 안 돌려 준대서야 말이 되나요 주최측은 낙선작품의 원화를 돌려 줄만한 성의를 가져야 도리

에 맞을 텐데helliphellip 요즘 현실은 lsquo낙선rsquo이란 푸대접 밑에 원판까지 몰수당하는 판국이니helliphellip 원 참

이 그러니까 응모자는 무엇보다도 현상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지helliphellip 여러 번 겪은 일이지만 심사를

하다 보면 전혀 현상 취지를 도외시한 작품들이 있는데helliphellip

임 그거야 보나마나 낙선이죠 (웃음)

이 그러믄요 현상 응모자로서는 출품 규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 아니겠어요

임 그럼요

이 그런데 어떤 것은 작품에 제목도 없는 것이 있거든요 그런가 하면 제목과 작품내용이 전혀 특이한

엉터리도 있구helliphellip

임 저도 여러 번 겪은 일입니다

이 제목이란 것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벌써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찍는다는 의식이 있는 이상

제목도 정해져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아주 작품과 제목이 동떨어진 것들이 응모해 오니까

낙선의 자격이 충분할 수밖에helliphellip 하하하 (웃음)

임 그게 모두 사진에 대한 성의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이 그래요 성의가 없어요 자기 작품에 대해선 최선의 성의를 다 해야 할 텐데 그런 태도가 없거든helliphellip

제목을 안 썼는지 못 썼는지는 모르지만helliphel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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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그저 무턱대고 발표의식만 왕성한 까닭이 아닐까요

이 그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된 작가가 아닌 이상 발표기회가 좀처럼 없을 테니까

자기 실력의 평가를 받는다던가 남들과 경쟁해 본다는 의미에서 현상에 자주 응모하는 것은 좋은데

helliphellip 아 어떤 친구는 자기 실력 생각은 하지도 않고 상품이 적다 많다 시비를 하는 친구도 있으니 참

기가 막힐 일이지

주최자의 무성의도 고쳐져야 하고

임 그건 lsquo현상rsquo이라고 내거는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순수한 사진연구단체에서 모집할 때는

lsquo공모전rsquo이라던가 하는 문구가 좋지 않을까요 lsquo현상rsquo이라니까 lsquo상rsquo을 바라게도 되겠지만 어쨌든

lsquo현상rsquo이란 말 자체가 순수하지 못해요

이 그건 확실히 생각해 볼 문제이겠군요helliphellip 순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helliphellip 응모자들이 심

사원이 누구냐mdash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도 순수하지 못하고helliphellip 또 주최자가 모집광고를 낼 때

lsquo심사원은 추후발표rsquo라mdash하는 것도 순수하지 못해요 이것도 참 불쾌한 일인데 lsquo추후발표rsquo라는 걸

다시 생각하면 lsquo준비가 안됐다rsquo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심사원의 준비도 안 해 놓고 현상을 모

집하는 그런 무성의가 또 어디 있어helliphellip 이건 일종의 사기가 아니면 거만일 겝니다

임 그나 그뿐인가요 lsquo심사원은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함rsquohelliphellip 하는 모호한 광고도 있지요 응모자의 입

장에서 생각하면helliphellip 심사원에 불만이 있으면 응모를 아니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 심사원 문제만

은 정정당당히 명시해야만 나중에 가서 심사에 대한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출품을 한 다음에 심사

원이 발표된다는 것은 심사에 대한 불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helliphellip

이 그리고 응모자의 동태를 가만히 보면 아까 얘기가 나왔던 소위 lsquo취미정도rsquo라는 층의 발표 의욕이 굉

장해서 대부분의 응모자가 이 부류인 것 같은데helliphellip 여기 한 가지 탈이 있어요 현상응모 작품의 심

사라는 것은 무제한의 심사 레벨을 놓고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응모 작품 중에서의 우수 작품을 가

려낸다는 것은 이거 상식 문제가 아닙니다

임 그렇죠

이 아 그런데 어떻게 해서 현상에 당선이 되거나 특히 특선이라도 하면 그만 자기가 갑자기 위대한

작가라도 된 것처럼 대가연(大家然) 하고 으쓱대는 친구들이 많아서 걱정이야helliphellip (웃음)

이 lsquo특선rsquo이라는 것은 응모해 온 작품들 중에서 특선이지 결코 한국 사단 전체의 수준에서 특선이라

는 것은 아닌데helliphellip 그만 한 번만 당선되면 코가 높아지고 대뜸 대가 행세를 하려고 드니helliphellip 참

신인들은 특히 조심해야 할 일이지

남의 것보고hellip 우리 것도 보내고hellip

본지 이제 화제를 좀 바꾸어서 세계사단의 동향을 좀 말씀해 주실까요

임 세계사단의 얘기라면 직접 보아야만 얘기가 될 텐데helliphellip

이 서울 바닥에서 썩으면서 세계사단의 얘기를 어떻게 본 듯이 할 수가 있겠나 카메라를 메고 세계일

관련 자료 소개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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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도 했어야 얘기가 되지

임 그것보다도 사진을 통한 국제 교류 얘기나 합시다

이 그게 좋겠군helliphellip 얼마 전에 덕수궁에서 자유중국의 소개사진전시가 있었죠 미국공보원의 활동도

이를 테면 국제교류의 한 형식일게고helliphellip

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자유중국과 월남의 사진전시가 있었는데helliphellip 우리도 수출을 한다면 그 보

다 훨씬 좋은 작품들이 나갈걸요helliphellip

이 한미합동전이던가 한중합동전 같은 것도 하면 역시 국제교류가 되겠지요helliphellip

임 한미합동전은 불원한 장래에 개최될 것입니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lsquo인간일가(人間一家)rsquo의 사진

이 아마 이월쯤 한국에 올 겝니다 미국대사관이 주동이 돼서 작품 503점 전부의 전시회 계획이 추

진되고 있으니까요

이 남이 보내줘서 본 것은 있지만 우리가 남에게 보여준 것은 없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야 우리도 남에

게 보여줘야 교류가 될 텐데helliphellip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두 사람의 작품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임 개인적인 활동은 있었지요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사진살롱에 사진을 보내고 있으니까 개인

적으로는 더러 나간 셈이죠 개인들의 수출이라도 좀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지만

이 우리의 것을 내보내고 외국 것을 들여와서 서로 감상하고 연구하는 게 이를 테면 국제교류인데

아마 명년쯤엔 될까 몰라

임 작품교환전 같은 것을 위해서 대대적인 계몽운동이 필요 하겠죠

이 그렇죠 운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어요

임 그런데 근본적인 얘기를 하자면 한국 작가의 역량이 아직도 부족한 것 같아요 언젠가 외국 작가에

게서 들은 말인데mdash한국 사람은 한국을 보지 않았다mdash하는 얘길 해요 사진 작가에게 대한 말이지

만helliphellip 나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이 퍽 중요한 얘기다mdash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를 직시하는 것만이

사진은 아니겠지만 실용사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것이 사실 아닐까요 회화적인 쌀롱 픽처라던

가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리얼리즘 사진이라는 것에 너무들 치우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 국제 교류의 시발은 역시 소개적(紹介的)인 것 다시 말해서 르포르타주적인 것이겠으니까helliphellip

임 외국 작품의 모방 같은 것은 이제 집어치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mdash예술적인 것 이것만을 너무 추

구했기 때문에 사실이 한국적인 것과 국민성의 묘사 같은 것이 잘 되지 않았지요 정서적인 것에만

너무 골몰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일이고 helliphellip 예술을 위한 예술에 정신들이 팔려 있었지나 않은

지helliphellip 예술을 하기 위한 사진이라는 관념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이 예술을 염두에 안 둔다면 실용사진이 돼 버리게

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너무 치우친 것 같단 말입니다

이 특히 국제 교류를 생각한다면 아닌 게 아니라 외국처럼 르포르타주적인 사진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할거에요

임 그래요 거기에 예술성을 띄워서 소화할 만한 역량 있는 작가가 필요해요

이 또 하나의 가장 큰 문제는 위정자의 관심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 큰 난관입니다 국제 교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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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가족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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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말이고 역시 정부당국자의 적극적인 주

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어디 그래요

임 우선 사단 자체의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작가들의 작업도 촉구되어야 하구helliphellip 아까도 말이 나왔지

만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 출품을 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점 같은데서 작가들의 반성도 필

요하고helliphellip

이 개별적으로 미국 등지에 보낸 것은 아마 상당한 수가 되겠지요

임 그럼요 그랬는데 왜 성과가 없느냐mdash하는 반성이 있어야죠

이 오늘의 현실을 예술적인 면에서 기록하고 작품화 해야겠는데helliphellip 막연하게 예술을 위한 작품을 보

내니까 기교적으론 훌륭할지 몰라도 작품 자체에 내용이 없어서helliphellip 그래서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닐

임 그런 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빨리 우리의 수준을 높여서 국제 조류와 호흡을 맞추어 나가

야 할 것입니다

이 이거 아마추어를 위한 얘기라는 것이 잠깐 탈선을 한 것 같군 그러나 이런 문제도 참고가 되긴 하니

까helliphellip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합시다

본지 수고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helliphellip

(기록 O기자)

이해선 「lsquo백오(白烏)rsquo의 변(辯)」 『동아일보』 1957년 4월 9일 4면

30여년 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입학

이 되었을 당시 자축기념하는 의미에서 호(號)를

하나 지어본 것이 백오(白烏)라는 두 글자였다 처

음 듣는 사람들 중에서는 거문[검은] 까마귀는 있

지만 흰 까마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서로 웃어버리고 그 뜻을

설명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자의

(字意)를 해명해볼까 한다 백(白)은 흰 빛이요 오

(烏)는 흑색으로 통하므로 우선 흑백을 대조시켜

놓고 흰 종이 위에다 검은 먹으로 휘호(揮毫)할 것

이니 그 뜻이 내 생활과 부합될 것 같으며 둘째로

백 자(字)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첫 자를 떼어놓

고 오는 반포오(反哺烏)로 그 이름이 높은 새이므

로 평소에 효자 노릇을 못하여 온 나의 좌우명으로도 적당할 듯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새 중에서는

혹간(或間) 백변종(白變種)이 생겨나는 수가 있는데 그 흰새를 서조(瑞鳥)라고 떠들던 옛 시절도 있었으므

관련 자료 소개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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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내가 우연히 호를 지어 본 것이 검은 까마귀떼 속에서 서조 백오를 발견하였으니 나의 전도(前途)에는

반드시 서광(瑞光)이 비칠 것 같으므로 이상 여러 가지 의미를 차례로 생각해 볼 때에 나에게는 이 외에 더

좋은 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자의였었고 궁금한채로 불려온 백오

였었다 만담궁변(漫談窮辯)을 물소물책(勿笑勿責) 하소서 (사진가)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

이해선 「중요한 내용middot형식-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년 10월 20일 5면

사진작품에는 사진 특유의 형식이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러한 특유의 형식에 알맞은 표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의 특수성은 형식이 가지는 특수성 보다는

기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주관적이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작품심사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동일하게 중요시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작

품 속에서 그야말로 형식과 내용이 알맞게 부합된 특출한 작

품을 볼 수는 없었다 형식이 좋으면 내용이 빈약하고 좀 내

용이 있으면 형식이 미숙하고helliphellip 모두 결점이 있다 그러나

입상작으로 뽑은 8 점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

다 그리고 금년에는 lsquo칼러rsquo사진의 응모 점수가 30점이나 되

고 그중에서도 3점이 입상되었고 또 9점이 입선되었다는 것

은 lsquo칼러rsquo 사진의 앞날을 위해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lt전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장gt

[제1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년 2월 8일 5면

외국작품의 세련되고 빈틈없는 lsquo테크닉rsquo은 국내작품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서 우선 국내

작품을 형식에서부터 누르고 말았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이루게 된 것은 국내작가들

의 역량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lsquo국산인화지rsquo가 얼마나 엉터리고 조악한 것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대체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더욱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은 이와 반대적인 경향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예술이든 먼저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볼 때 국내작품의 후진성은

두말할 것 없이 형식의 경시에 있다고 하겠다 심사결과 흑백부에서나 lsquo칼라rsquo부에서 겨우 동상으로 한 점

씩 밖에 국내작품이 입상되지 못했다는 것은 다소 섭섭한 느낌이나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경종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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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더욱 우리 심사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독에서 응모한 lsquo칼라rsquo

작품이었다 물체의 외관 색감을 초월한 내면의 lsquo이미지rsquo가 발

산하는 짙은 감정의 색감으로 작가의 개성과 사상을 인상 깊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내 lsquo칼라라보rsquo의 후진

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상작으로 뽑힌 외국작품들은 오

늘의 세계 사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는 큰 자극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

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제2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총 818점 응모-사진예술에 도움」

『동아일보』 1967년 2월 9일 4면

지난해와 같이 흑백부문에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들은 모두가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산인화지의 조악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작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올해는 흑백

부문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기꺼운 일이라고

하겠다

특히 칼라작품에 있어서는 독일의 작품들이 특출했고 이들 작품들의 색감은 현대 과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 최고상으로 뽑힌 lt잊은 친구gt와 몇 점의 입상작품들은 칼라릴리프와 소라리

세이숀[솔라리제이션] 등의 수법으로써 모티

브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를 초객체적이고 추

상적으로 표현하고 작가의 짙은 개성과 사상

과 철학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입상작으로 뽑은 16점의 작품들은 오늘의

세계사단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

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심사위원 이해선 (위원장) 임응식 서순삼

박필호 안월산 정인성 최경덕 (이상 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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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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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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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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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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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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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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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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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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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관련 자료 소개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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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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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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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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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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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6: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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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9주년 기념 촬영대회 경복궁 (『경향신문』)

창립9주년 기념 촬영대회 ≪당선작품 발표 사진전≫ 미국공보원 (실물자료)

『대한사협회보』 제3호 제4호 발행

정기총회 개최 한창양행 (『동아일보』)

『대한사협회보』 제5호 발행≪제8회 작품발표전≫ 미국공보원 (실물자료)

창립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봉은사 및 뚝섬 일대 (『동아일보』)

창립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당선작품 발표 사진전≫

정기총회 개최 한창양행창립 11주년 기념 촬영대회 개최 덕수궁창립 11주년 기념 촬영대회 ≪입선작품전≫ 미국공보원 화랑

회 명칭을 대한사진예술가협회(大韓寫眞藝術家協會)로 개칭≪제9회 대한사연전≫ 동화백화점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창립 12주년 기념 신록촬영대회 창경원 (『동아일보』)

정기총회 개최≪제10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창립 13주년 기념 추계촬영대회 덕수궁

≪제11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창립 14주년 기념 추계촬영대회창립 13주년 및 창립14주년 기념촬영대회 ≪당선사진전≫ 중앙공보관 화랑 (실물자료)

창립 15주년 기념촬영대회 ≪당선작품전≫ 중앙공보관 화랑 (실물자료)

≪제12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제13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실물자료)

한국사협 창립(61~63년 이해선 고문 김조현 부이사장)정부 시책에 따라 일시 해산

대전지회 설립

대한사협 출신들이 모여 ≪사진예술동인전≫ 김조현 외 17명 49점 중앙공보관 (『한국예술총람 자료편』)

문화예술단체 해금령에 따라 대한사협 재건 정기총회 개최

대한사협 수요회 개최 연지동 동해루

정기총회 개최 (『동아일보』)

≪제14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제15회 대한사협전≫ 조흥은행 본점 2층 전시장 (실물자료)

제주지회 설립≪제16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실물자료)

고문박필호김광배서순삼박영진회장 이해선 부회장 조명원 최창희총무 방대훈 남상준간사 조준영 이훈 지부원 이석준 김조현

고문 이해선 회장 김조현부회장 지부원 총무 방대훈간사 이훈 남상준

회장 김조현부회장 방대훈총무 지부원

회장 김조현

고문 김조현 회장 이해선부회장 안준천 총무 김석현

회장 이해선부회장 김조현

문교부에 국전 사진부 신설을 진정

제13회 국전에 사진부 설치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출처)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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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차 정기총회 개최 북창동 한양관『제16회 대한사협전 작품집』 발간 (실물자료)

≪제17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제17회 대한사협전 작품집』 발간 (실물자료)

제24차 정기총회 개최 및 ≪백오사진상(白烏寫眞賞)≫ 제정≪제18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실물자료)

『제18회 대한사협전 작품집』 발간 (실물자료)

제25차 정기총회 개최≪제1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김석현 공로상 이순흥)

제26차 정기총회 개최 및 제2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9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경향신문』 및 실물자료)

제27차 정기총회 개최이해선 회장에 공로상패 증정 및 제3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이순흥 김석현) (『포토그라피』)

≪제20회 대한사협전≫ 신문회관 화랑 (『경향신문』 및 실물자료)

제28차 정기총회 개최≪제4회 백오사진상≫ 시상 (『포토그라피』)

≪제21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매일경제』 및 실물자료)

≪제5회 백오사진상≫ 시상≪제22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실물자료)

≪이해선 사진작품전≫ 신문회관 화랑 (『동아일보』)

정기총회 개최 및 ≪제6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이정훈 공로상 박필호) (『포토그라피』)

≪제23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제30차 정기총회 개최 반도아케이드 4층 카페테리아≪제7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 이완섭 작품상 김형승 양승호 김기현)유자격 정회원 한국사협에 단체로 입회

제31차 정기총회 개최 및 ≪제8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안장헌)≪제24회 대한사협전≫ 신문회관 화랑 (『동아일보』)

제32차 정기총회 개최 대동관 (『매일경제』)

≪제9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 정헌태)추계촬영대회부산지회 설립

고문 김조현 회장 이해선부회장 김조현 총무 김석현이사 성두경 안준천 오인창 박병호 감사 윤상운

고문 김조현 김종양 회장 이해선 부회장 안준천 이순흥 총무 성두경이사 김석현 손석현 이완섭 서윤석감사 윤상운

총무 김용필이사 성두경 서윤석

고문 김조현 명예회장 이해선회장안준천 부회장성두경 이순흥총무 김용필이사 서윤석 안장헌박훈서양승호감사이완섭

고문 박필호rarr김종양이사 양승호(면)

고문 박필호 김조현 김종양명예회장 이해선 회장 안준천부회장 성두경 이순흥총무이사 김용필 이사 서윤석 박훈서 안장헌 양승호 감사 이완섭

고문추대 장남수

고문 박필호 김조현 김종양 장남수안준천 명예회장이해선 회장성두경부회장 이순흥 총무이사 안장헌 이사 서윤석 이정훈 이완섭 김형승 김완기 감사 김용필

≪제1회 대한민국건축 및 사진 전람회≫(91~20 국립공보관)

봄 국전 4부에 사진middot건축middot공예 신설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출처)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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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영상』)

제33차 정기총회 개최 대동관 제9대 성두경 회장 연임≪제10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본회 주관-양수리)춘계 촬영대회(양수리)제2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태종대)제3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동학사)≪제1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대전지회 주최)≪제26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영상』)

제34차 정기총회 개최≪제11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김완기 공로상대전 윤필수)≪제27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영상』)

제주지회 폐쇄

『백오이해선사진집』 출판기념회 예총화랑 (『매일경제』 및 『영상』)

제35차 정기총회 개최 제10대 성두경 회장 연임≪제12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 조임환)≪제28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제2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 대전시민회관 (『영상』)

제36차 정기총회 개최 및 ≪제13회 백오사진상≫ 시상제4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통도사 범어사)제5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갑사 마곡사)≪제3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및 ≪제12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대전시민회관 (『영상』)

≪제29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제37차 정기총회 개최 제11대 이순흥 회장 취임≪제14회 백오사진상≫ 시상≪제30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제4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13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대전시민회관 (『영상』)

백오 이해선 선생 작고

제38차 정기총회 개최 미성옥≪제15회 백오사진상≫ 시상제6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해운대)제7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관촉사 쌍계사)≪제5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1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39차 정기총회 개최 한일장 제12대 이순흥 회장 연임≪제16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최진연)충주지회 설립제8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지회 주관-수옥정)제9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속리산)≪제6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2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고문 박필호(면) 김종양(면)

고문 김조현 장남수 안준천 성두경명예회장 이해선 회장 이순흥 부회장 이완섭 김용필 총무 이정훈 이사 안장헌 김완기 박동운 송정웅송주헌 심재욱 송정회감사 서윤석 윤필수

이사 최진연 박명식

81~83년 성두경 한국사진작가협회 부이사장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출처)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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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차 정기총회 개최≪제17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0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미륵사지)≪제7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11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 대둔산 도산계곡)≪제33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1차 정기총회 개최제13대 이순흥 회장 연임≪제18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2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하회마을)≪제8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13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지회 주관-탄금대)≪제34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2차 정기총회 개최 파인 힐≪제19회 백오사진상≫ 시상고창지회 설립제14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을숙도)

『대한사협회보』 복간호(제6호) 발간고 백오 이해선 선생 추모비 건립≪제9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5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3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20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5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고창지회 주관-선운사)

『대한사협회보』 제7호 발간제16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본회주관-용인민속촌)구미지회 설립≪제10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6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4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21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7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신원사)대천지회 설립문화부에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문화가족으로 등록제18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지회 주관-탄금대)≪제11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7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5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22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9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경주일원)≪제38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제12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

제46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23회 백오사진상≫ 시상제20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천-대천해수욕장)≪제39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감사 서윤석(면) 박노택

고문 김조현 이순흥회장 안준천부회장 김용필 안장헌총무 최진연이사 김완기 송주헌 송정회 심재욱 박노택 조창만감사 이정훈 고승웅

이사 송주헌 황응천 원종철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회장 김용필 부회장 이정훈 박노택총무 최진연 이사 안장헌 김완기 정완철 송주헌 심재욱 원종철 박부공황순조 황응천 김태영 감사 송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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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 모란룸≪제24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최진연)고 백오 이해선 선생의 한국사단 발전에 기여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白烏李海善寫眞文化賞)≫ 제정≪제40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한국의 풍물 사진공모전≫ 대한사협 호영출판사 공동주최

제48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1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유동호)원주지회 설립이천지회 설립청주지회 설립≪제41회 대한사협전≫ 코닥포토살롱제21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속리산)

제49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2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황규태)제22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엑스포장)고창지회 폐쇄≪제3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윤주영)≪제42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대한사진술가협회 창립50주년 작품집』 발간

제50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전주지회 설립≪제4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최민식)≪제43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1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대한사협회보』 제8호 발간제23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원주지회 주관-치악산)남원지회 설립≪제44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2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5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강상규)

『대한사협회보』 제9호 발간제24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대청호)대구지회 설립김제지회 설립≪제45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3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6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이순흥)

『대한사협회보』 제10호 발간제25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구지회주관 - 경주OK그린청소년 수련원)≪통일염원 전국사진공모대전 작품전시회≫ 개최(대구지회 주최-대구 동아쇼핑 전시관)≪제7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송기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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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회장 안장헌 부회장 이정훈 김완기총무 송정회 이사 원종철 송주헌 한창동 황순조 박부공 허현 감사 박노택 최진연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자문위원 안장헌 회장 이정훈부회장 김완기 박노택 총무한창동이사 원종철 김완선 이순재 박부공 이광호 이재옥 김광범 양호용감사 황순조 최진연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자문위원 안장헌 이정훈 회장 박노택 부회장 김완기 최진연 총무 이광호이사 박부공 이재옥 윤중일감사 한창동 조창만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 박노택자문위원 안장헌 이정훈회장 김완기부회장 황순조 박부공총무 윤중일이사 김광범 김준영 강승규 김이경감사 한창동 이재옥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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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1

≪제46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원주지회 폐쇄

제54차 정기총회 개최 대림정대한사협사진강좌 개최(연8회) 월례촬영회 개최(연8회)제26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 서울대청호

『대한사협회보』 제11호 발간대한사협 대구지회-중국 연길시 촬영가협회와 자매결연(연길시 청년호텔)원주지회 재설립≪제8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최흥만)≪제47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창립 55주년 기념 『2000대한사협사진집』 발간

제55차 정기총회 개최 대림정대한사협 사진강좌 개최(연8회) 월례촬영회 개최(연5회)정읍지회 창립제27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정읍 내장산)≪제48회 대한사협전≫ 및 CD작품집 제작 예총화랑 제1전시실

제56차 정기총회 개최 사랑채월례촬영회 개최(연4회)제28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서울 남한산성)≪한중 국제교류전≫ 대한사협 대구지회 대구 대덕문화회관≪제49회 대한사협전≫ 및 CD작품집 제작 예총화랑 제1전시실

제57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월례촬영회 개최(연6회)제29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 중앙탑공원)≪제9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김한용)≪제50회 대한사협전≫ 및 2003대한사협작품집(CD작품집) 발간예총화랑1-2전시실

『대한사협회보』 제12호 발간

제58-60차 정기총회 개최제51-53회 ≪대한사협전≫제30-32회 전국회원촬영대회대한사협 인터넷홈페이지 개설(wwwpaakoreacom)제1회 대한사협 사진공모전

『대한사협회보』 제13호 발간『창립60주년 전국회원전 작품집』 발간(2005)이해선 선생 탄신 100년기념 유작전(대구middot충주middot원주middot대전middot전주순회전) 개최 및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보는 1950-60년대』 (눈빛) 발간(문화관광부middot조선일보 후원)남원지회 청주지회 구미지회 폐쇄(2006년)전주지회 설립(2006년)

제61-63차 정기총회 개최≪제54-56회 대한사협전≫제33-34회 전국회원촬영대회이천지회 폐쇄(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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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위원rarr고문 안장헌 이정훈고문추대 방대훈이사 강승규(면) 김이경(면) 원종철 김광석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 박노택안장헌 이정훈 방대훈 회장 김완기 부회장 황순조 유병주(대전) 총무이사 윤중일이사 김준영 원종철 김광석 심재욱감사 강승규 이재옥

총무이사 윤중일(면) 최인호

회장 최진연

회장 최진연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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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지회 김제지회 원주지회 폐쇄(2008년)한밭지회 설립(2008년)≪제10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안장헌 2007)≪제11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조세현 2009)

제64차 정기총회 개최 PJ호텔 4층 카라디움≪제57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제35회 전국촬영회

제65차 정기총회 개최 충무로 아스토리아호텔제36회 전국촬영회 및 대천지회 전국 사진인리더 초청세미나(한화콘도 세미나실 대천해수욕장)김제지회 재설립(지회장 이성수 총무 구반반) ≪제58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

제66차 정기총회 개최 충무로 아스토리아호텔≪제12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안희탁) 제37회 전국촬영회 및 대천지회 전국사진인 리더 초청 세미나(대천해수욕장내 청주대 수련원 및 머드축제광장)울산지회 설립(지회장 이헌배 총무 심화실) ≪제59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

2013년 제1차 이사회 개최 충무로 통로이미지(주) 회의실 참석 이정훈 외8명제67차 정기총회 개최 캐피탈호텔 뷔페식당 스카이(그릴 룸)≪제60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회원 자질 향상을 위한 사진학 강좌 개설(강사 진동선 2013~2014)

≪제13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마이클 케나(MichaelK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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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정건영

회장 이철집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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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3

김 완 기(金莞祁 1944~ )

1962 충주고등학교 졸업

1964 청주교육대학교 졸업

1969 《제1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입선

1977~1991 KBSEBS방송 출연 15년

1989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교육학 석사)

1990~1999 《대한민국사진전림회》 8회 입선

1993~1999 청영회 회장 역임

1997 《제16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 특선

1998 교육부 초등교육정책과장 역임

1999~2013 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 3회 역임

1999~2014 《전국사진공모전》 심사위원 70회 역임

2002 강남구사진작가회 창립회원 및 회장 역임

2003 서울성북교육청 교육장 역임

2004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초대작가

《서울특별시사진대전》 초대작가

《제1회 김완기사진전》 세종문화회관별관 광화문갤러리

2004~2008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 역임

2005 2013 제24회 제31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심사위원 역임

2005~2007 서울특별시사진작가협의회 초대 회장 역임

2006 『김완기사진집』 출판 창조집단 시빌구

《제2회 김완기사진전》 세종문화회관별관 광화문갤러리

2008~2014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조정위원

2011 《서울특별시사진대전》 운영위원 역임

2011~2014 APC뉴스(한국예술사진인연합회) 회장

2013 김완기 자서전 『분필과 셔터로 그린 자화상』 출판 하얀나무

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고문

강남구사진작가회 자문위원

서울특별시사진작가협의회 고문

청영회 고문

한국사진작가협회 자문위원

구 술 자 연 보

안장헌(安章憲 1947~ )

1969 2 고려대학교 농업경제학과 졸업

1966~2014 고려대학교 호영회 창립회원 호영동우회 회장역임 및 회원

1968~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원 이사(1973~1992) 회장(1993~1995) 현 자문

1973~1975 동화출판공사 『한국미술전집』 사진담당

1976~1977 월간 『영상』 편집장

1977~1979 현암사 『한국미술오천년』 기획 및 편집책임

1979~1995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 3회 역임 현 자문위원

1980~2005 호영문화사 편집인

1981~1992 신구대 사진과 강사

1984~1987 서울교육대학 미술교육과 객원교수(사진학)

1990~1994 롯데문화센터 사진교실 강사

1994~1998 삼성사진문화교실 전임강사

1995~2014 한국불교사진협회 고문

1995~2014 (사)신라문화원 이사 현 자문위원

2000~2014 경주 계림사우회 지도교수

2004~2009 동강사진마을 운영위원

2005~2014 문화유산사진연구소 소장

2009 봉은사진교실(봉은사) 강사

2010~2014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 안장헌디지털사진교실 지도교수

그룹전

1966~2014 고려대학교 호영회 호영동우회 회원전 80여점 출품

1968~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전(17~60회전) 70여점 출품

1990 《사진가 8인전》 후지포토살롱

1994 《한국현대사진의 흐름전》 〈산사일기〉 출품

1996 《Image ofKoreanCultual Heritage》 UNESCO본부 파리

1997 《Buddist Images ofKorea》 독일 함부르그

1997~1998 《서울사진대전》 〈낙선재 일곽〉 〈금원에서〉 출품

1997~2014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전 19점 출품

1998~1999 《경기도사진작가초대전》 출품

1999 《한일사진교류전~자연과 인간을 향하여》 출품

2001 《아름다운 우리 문화재 4인전》 국립진주박물관

2004 《한국다큐멘터리사진 33인전》 동강사진축전

개인전

1996 《서라벌 빛 그리고 향기》 서라벌문화회관

2002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신라문화원 화랑

2003 《세계문화유산과 경북》 경주문화EXPO솔거방

2007 《왕릉의 호랑이》 동강사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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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2009 《창호》 인사동 갤러리 북스

2010 《돌 호랑이 그림 호랑이》 인사동 갤러리 북스

2012 《선비의 고향 서원》 인제대 도서관 김학수기념박물관

주요 사진저작

1982 『석불』 호영

1989 『석굴암』 예경

1991 『경주 남산의 탑골』 열화당

1992 『선의 세계』 호영

1993 『영겁의 미소』 불광

1994 『신라의 동해구』 열화당

1996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삼성문화재단

1998 『서원』 열화당

2002 『신라의 마음 경주』 한길아트

『남산』 한길아트

2003 『돌에 새긴 정토의 꿈~석불』 한길아트

『석조미술의 꽃~석가탑과 다보탑』 한길아트

『사진으로 보는 한국미~무늬』 호영

2005 『BUDDHA~Bildnisse ausStein inKorea』 ErnstWasmuthVerlog

Tubingen 독일 베를린

2006 『범종~생명의 소리를 담은 장엄』 한길아트

저서

1987 『국립공원』 김성옥 문순화 송기엽 안장헌 공저 호영)

1995 『사진으로 배우는 사진촬영교실』 호영

2001 『아름다운 우리문화재』 관조 김대벽 한석홍 안장헌 공저 국립진주박물관

2003 『문화유산 일기』 진선출판사

수상

1977 《백오사진상》 작품상 수상(대한사진예술가협회)

1999 『서원』으로 《간행물윤리상》 저작상 수상(간행물윤리위원회)

2006 《한국사진문화상》 공로상 수상(한국사진작가협회)

2007 《이해선사진문화상》 수상(대한사진예술가협회)

2011 《대한민국문화유산상(대통령상)》 봉사활용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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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5

참 고 문 헌 목 록

「봄 국전심사에 물의 사진 심사위원에 시비」 『동아일보』 1977421

「봄 국전 심사 낙수(落穗)」 『경향신문』 1977425

「현대사진문화상 이해선 씨 뽑아」 『동아일보』 19781128

「사진문화-사협고문 이해선 씨 작품집 발간」 『매일경제』 19801129

「사진 50년 역사를 한 눈에」 『매일경제』 1981120

「사진작가 이해선 작품집 두 권 내놔」 『동아일보』 1981629

「부고-원로 사진작가 이해선 씨」 『동아일보』 1983111

「일화로 엮는 명암 100년 화단이면사( ) (27) 화가와 문인과 신식 여성」

『경향신문』 198554

「이해선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사진전」 『연합뉴스』 20051026

「lt단신gt 백오 선생 탄신 100돌 사진전」 『문화일보』 20051031

「사진예술가협회 창립 60주년 기념전」 『매일신문』 20051117

「문화의 향기-전시」 『부산일보』 200615

「백오 이해선 선생 미발표유작 사진전」 『부산일보』 200617

「[전북][광주전남][제주][대전충남]문화가」 『동아일보』 2006120

「영월 동강사진박물관-이해선 특별기획전 2007년 3월 첫 주까지」 『뉴시스』

20061227

「사진과 친해지려면 옛 서울역사로 가보세요」 『헤럴드경제』 201041

월간지 계간지

김용준 「서화협전의 의미」 『삼천리』 1931년 11월호

「lt부감(俯瞰)gt(이해선 작)gt」 『사진문화』 1956년 6월호

「아마츄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호

연성숙 「일제 한인귀족의 근황」 『진상(眞相)』 1960년 3월호

「창간사 이해선 씨」 『포토그라피』 1966년 8월호

「나의 발언」 『포토그라피』 1966년 8월호

「작가 지상초빙작가-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달의 작품사진 제주풍물-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해선 「해외 예술사진 감상실 (1회)」 『포토그라피』 1968년 4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6) 석가탄일」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7)」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제1회 새한사진콘테스트」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8) 동해진미」 『포토그라피』 1969년 9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9) 야채밭」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0) 건제(乾梯)」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제18회 국전 소식」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1) 초설(初雪)」 『포토그라피』 1969년 12월호

이해선 「돌과의 대화 30년」 『월간 중앙』 1969년 12월호

「초대작가 사진」 『포토그라피』 1970년 9월호

이해선 「고궁풍물(1)」 『포토그라피』 1971년 1월호

_______ 「고궁풍물(2)」 『포토그라피』 1971년 2월호

이해선 관련

일간지

「입선자의 방명록」 『매일신보』 1926512

이태준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1029

「금조개장한 동미전 제2회」 『동아일보』 1931412

홍득순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417

「인사(人事)」 『매일신보』 193886

이해선 「예술사진의 연혁과 개념」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동인전」 『경향신문』 19491115

「인사(人事)」 『경향신문』 1953110

이해선 「등하수상(燈下隨想)」 『동아일보』 19551112

_______ 「사진예술의 독자성」 『동아일보』 1956126

_______ 「사진 8인전 소감」 『경향신문』 195647

_______ 「백오(白烏)의 변(辯)」 『동아일보』 195749

「김포공항에 내린 덕혜옹주-이해선 씨가 부축하고 있다」 『경향신문』 1962126

「5월 예술상에 붙이는 제언」 『경향신문』 196231

「2명이 사퇴 사진부문심위원」 『경향신문』 1964109

「영예의 산실 안팎」 『동아일보』 19641013

「횡설수설-국전 사진부 이해선 심사위원 사퇴」 『동아일보』 19641014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중요한 내용middot형식 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1020

「열띤 감정으로 충만-창협 창립 사진전」 『동아일보』 1965119

「한국국제사진살롱 위원 명단」 『동아일보』 1965116

「동아국제사진살롱 심사평-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28

「제4회 사진동우회전」 『동아일보』 1966121

「동아사진살롱 심사평-총 801 응모」 『동아일보』 196729

「위원장에 이종우 씨 국전심사위원 위촉」 『동아일보』 1967920

「국전심사위원장 도상봉 씨 선출」 『경향신문』 1968919

「석우회(石友會)서 돌 전람회」 『동아일보』 1970428

「예술인에 훈장 이해랑 씨 등 9명」 『경향신문』 1972118

「외길 한평생 lt11gt 사진middot예술 이해선」 『선데이서울』 1973318

「현역 원로 작가 초대전 일제하의 침울이긴 예술자세 생생하게」 『경향신문』

1974831

「이해선 씨 작품전 향토풍물 50점 전시」 『동아일보』 19741118

「이해선 사진전」 『경향신문』 19741119

「이해선 사진 작품전 24일까지 신문회관」 『매일경제』 19741121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423

「국전운영위원 위촉」 『동아일보』 1976317

「국전사진부문 사단중진들 반발」 『동아일보』 1976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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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_______ 「고궁풍물(3)」 『포토그라피』 1971년 3월호

_______ 「고궁풍물(4)」 『포토그라피』 1971년 4월호

_______ 「고궁풍물(5)」 『포토그라피』 1971년 5월호

_______ 「고궁풍물(6)」 『포토그라피』 1971년 6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7)」 『포토그라피』 1971년 7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8)」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포토그라피 창간5주년에 붙여서」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9)」 『포토그라피』 1971년 9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0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1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2)」 『포토그라피』 1971년 12월호

「제2회 사진국전마감 심사위원결정」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이해선 「이해선 떡에 얽힌 시속(時俗)의 금석(今昔) 옛떡이 사라져 간다는데」

『월간 중앙』 1973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1)」 『포토그라피』 1973년 8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2)」 『포토그라피』 1973년 9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0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6)」 『포토그라피』 1974년 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7)」 『포토그라피』 1974년 3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8)」 『포토그라피』 1974년 4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9)」 『포토그라피』 1974년 5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끝)」 『포토그라피』 1974년 6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 『포토그라피』 1974년 7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2)」 『포토그라피』 1974년 8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3)」 『포토그라피』 1974년 9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4)」 『포토그라피』 1974년 10월호

_______ 「작가와 작품-풍물백태 중에서」 『포토그라피』 1974년 1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6)」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7)」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8)」 『포토그라피』 1975년 3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9)」 『포토그라피』 1975년 4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0)」 『포토그라피』 1975년 5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1)」 『포토그라피』 1975년 6월호

_______ 「곡필무사(曲筆誣事)를 밝힌다」 『월간 중앙』 1975년 11월호

「영상 창간 1주년 기념 좌담회 한국 사진 산업의 의 오늘과 내일」 『영상』 1976년 6월호

「국전 초대작가 8인선 김조현 이건중 이경모 이해선 임응식 이형록 정인선

조현두」 『영상』 1977년 1월호

「남기고 싶은 작품 3 이해선」 『영상』 1977년 5월호

「예술사진에 대한 견고한 확신 이해선 사진의 예술성」 『영상』 1978년 5월호

「한국현대미술대전」 『영상』 1978년 10월호

이명동 「처음 제정된 사진문화상에의 기대」 『영상』 1979년 2월호

「행사 백오 이해선 선생의 사진작품집 출판기념회」 『영상』 1981년 2월호

「작품집 소개 이해선 작품집 중에서」 『영상』 1981년 4월호

박재능 「다양한 자기 세계의 길」 『영상』 1981년 12월호

「영상방담-사단의 이 얘기 저 얘기 김정래 임석제」 『영상』 1982년 1월호

「이미지의 합창-봄의 첫 장」 『영상』 1982년 4월호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 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호

岩宮武二 「너 어디 있느냐」 『영상』 1983년 1월호

최인진 「1930년대의 아마츄어 사진활동」 『사진사연구』 통권 제5호 1983년 9월호

박재능 「월평-원로 이해선 선생을 추모한다」 『영상』 1983년 12월호

「한국 근대미술의 발자취」 『계간미술』 중앙일보사 1985년 봄호

「다시 보는 명작 정도선 정인선 신현국 강대환 김일창 이해선」 『영상』 1986년 10월호

「고 백오 이해선 선생 추모비 건립」 『영상』 1989년 1월호

「동경 유학생들의 한국 근대미술」 『월간미술』 1989년 9월호

「화보로 보는 한국 동경 유학생들의 자화상」 『미술세계』 1993년 5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조선총독부 관보』 제4087호(192647) 한국학문헌연구소 서울 아세아문화사 1926

이태현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1집 서

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2

_______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 자화상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3집 서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4

신명호 「일제하 이왕직과 이왕가 족보」 『한국학대학원논문집』 제11집 한국정신문화

연구소 1996

최인진 「한국사진 역사의 증인(4) - 사단의 단체 활동과 이해선」 『한국사진』 2002

이가라시 코이치 이중희 역 「조선미술전람회의 창설과 서화」 『한국근대미술사학』

제12집 한국근대미술사학회 2004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의 입학제도와 조선인 유학생」 『동악미술사』 제6호 2005

허보윤 「미술로서의 디자인 이순석의 1946-1959년 응용미술교육」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단행본

조우석 『한국사진가론』 눈빛 1998

작품집 도록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1926

이해선 『이해선 사진작품집』 평화당 1980

_______ 『한국의 고궁』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0

Tucker Anne Iizawa Kotaro Kinoshita Naoyuki The History of

Japanese Photography London YaleUniversityPress 2003

이해선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남은 1950-60년대』 눈빛 2005

_______ 『이해선 사진집 1950~1960년대 이야기』 동강사진박물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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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7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일간지

「부산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24531

「성공을 기대 조선사진연구회 현일영 씨 담」 『조선중앙일보』 1936826

「경성아마사진구락부 제1회전」 『조선일보』 1938417

「사진작품전」 『동아일보』 19381014

「경성사진동호회 작품전람회개최」 『조선일보』 19381027

「사진동호회작품전」 『동아일보』 1938112

「경성아마추어 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39527

「아마추어 사진인화전」 『매일신보』 19391115

「동서남북-lsquo아마추어rsquo 제4회 인화전람회」 『동아일보』 19391115

「동서남북-합동인화전」 『동아일보』 1940126

「아마추어 사진의 인화전」 『매일신보』 194074

「경성아마츄어 제5회 인화전」 『조선일보』 194075

「경성백양사우회 제1회 인화전람회 개최」 『매일신보』 19401113

「제2회 사진전 명일부터 화신에서-백양사우회」 『매일신보』 19411124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55

「사진작품전」 『조선일보』 1946119

「전국문화총연발족」 『동아일보』 194729

「제1회 조선사진예술전」 『경향신문』 19475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7510

「사진전람회개최」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전응모작 답지」 『경향신문』 1947615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 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629

「제1회예술사진전람회 15일부터 동화백화점」 『경향신문』 1947713

「예술사진 입선 수상식을 거행」 『경향신문』 1947720

「예술사진전 19일부터」 『동아일보』 1947121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8224

「사예(寫藝) 2회전 작품을 현상모집」 『경향신문』 19481013

「예술사진전 심사 오는 8일로 연기」 『동아일보』 1948127

「지방출품우수-제2회 예사전」 『동아일보』 19481212

「사진예술전 22일부터 동화화랑서」 『동아일보』 19481221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964

「전국종합사진전 심사결과-특선1석 최인집 씨」 『동아일보』 194977

「사진예술의 정화-제3회 전국예술사진전」 『경향신문』 19491010

「예술사진전 30일로 마감박도」 『경향신문』 19491128

「예술사진전 입선자 발표」 『경향신문』 19491213

「예술사진전시회」 『동아일보』 195316

「춘계사진섭영회 26일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3

「본사후원 춘계촬영대회 오늘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6

「사진현상모집」 『경향신문』 1953517

「특선에 lt만춘gt」 『경향신문』 1953527

「인화 당선자 수여식」 『경향신문』 1953529

「사진작품발표전」 『경향신문』 1954413

「예술사진전시회 US-S화랑서」 『동아일보』 1954415

「집회」 『동아일보』 1954916

「경복궁서 촬영대회」 『경향신문』 1954919

「내 26일 촬영대회 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4922

「사연 촬영대회 여감(餘感) 아마추어 사진도(寫眞道)」 『동아일보』 1954103

「문화집합」 『동아일보』 1955122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77

「사연(寫硏) 창립 10주년 기념 어제 촬영대회 성황」 『동아일보』 1955711

「촬영대회 입선작 결정」 『동아일보』 1955819

「8인 사진전 개최」 『동아일보』 1956329

「9회 사연(寫硏)전」 『동아일보』 1957414

「신록촬영대회 개최 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62

「대한사진예술가협회서 사진전시회 개최」 『동아일보』 1958711

「10년 후의 우리 문화 건국 20주년을 장식하고 싶은 것」 『동아일보』 1958821

「사진예술가협회 11회 회원작품전」 『동아일보』 195979

「문화 소식」 『동아일보』 1960119

「국전에 사진부문도」 『동아일보』 1963410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결정 특선 조천용 작」 『동아일보』 19641020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653

「렌즈의 향연 영예의 초점-제4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동아일보』 196667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61217

「사진예술가협회전」 『동아일보』 19681022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9830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996

「국립공보관 12월 전시회 스케쥴」 『경향신문』 1971126

「문화단신」 『경향신문』 19721128

「사진예술협 작품전 7일까지 공보관서」 『매일경제』 1973111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에 안준천 씨」 『경향신문』 197526

「동아포우스트」 『동아일보』 19751117

「사진예술가협회 창립30돌 기념전」 『경향신문』 19751118

「추계 친목 촬영대회」 『매일경제』 197610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7830

「사진예술가협 정총(定總) 31일 하오 대동관서」 『매일경제』 19781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81031

「문화광장」 『동아일보』 1993121

「한국사진예술 50년을 펼친다」 『한겨례』 1994111

「사진예술가협 사라진 풍물전」 『서울신문』 20051025

월간지 계간지

「사진클럽 지상소개 대한사협의 발자취」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박필호 「논단 대한사협16회전을 보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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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대한사협 16회전」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사협 16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8년 7월호

「대한사협 충남지부 회원전」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경축 창간 3주년 사진과 관광 포토그라피-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대한사협 18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제18회 대한사협전」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 작품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70년 3월호

「축 창간4주년 서울 선데이 카메라 클럽」 『포토그라피』 1970년 8월호

「축 포토그라피 창간 5주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김종양 씨 대한사협 고문 추대」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3년 3월호

「lt파도gt 김도현 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신춘초대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근하신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75년도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창작선」 『영상』 1977년 1월호

「전시장 순례 대한사진협회 회원전」 『영상』 1977년 11월호

「지상소개-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대한사협 제27회 정기총회 개최」 『영상』 1979년 7월호

박필호 「대한사협 27돐에 대한 축사」 『영상』 1979년 7월호

「제26회 대한사협전」 『영상』 1980년 1월호

「제27회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사진전시회」 『영상』 1980년 12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요강」 『영상』 1981년 5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영상』 1981년 10월호

「탐방-뜻이 있으면 길이 있게 마련 세 번째 전국대학사진 공모전을 연 대한사협충

남지회의 단합된 모습」 『영상』 1983년 1월호

「제3회 전국대학생사진 공모 제12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월호

「제13회 대한사협 충남 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2월호

최인진 「경성아마츄어카메라구락부를 말한다」 『사진사연구』 1984년 7월호

「대한사협본부 주최 제9회 한국국제사진전 입상자」 『영상』 1989년 1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대한민국예술원 편 『한국예술총감 자료편』 대한민국예술원 1965

한국사진협회 「사진계소식 1969년도」 『한국사진연감』 1970

_____________「한국사진협회의 연혁 1976년 10월 30일」 『한국사진연감』 1976

임범택 「사진」 『1977년도 문예연감』 1978

______ 「사진」 『1978년도 문예연감』 1979

한국사진협회 「역대역원명단(歷代役員名單) 1962년~1987년」 『한국사진연감』

1988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제1장 한국사진협회 창립 이전의 사진계 동향」 『한국사협

사 I 1945-1970』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01

최인진 「해방 초기의 사진잡지 연구-『국제보도』와 『사진문화』를 중심으로」 『한국

사진학회지 AURA』 제10호 2003

박혜성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사진문화』 목록 및 해제」 『한국 사진 잡지

『사진문화』 연구』 명지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한국사협 50년사』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13

단행본

임응식 『내가 걸어온 한국사단 임응식 회고록』 눈빛 1999

작품집 도록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제16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7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8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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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9

원 문 자 료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년 10월 29일 4면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년 4월 17일 4면

1 이해선 양화기(洋畵期) 관련 참고 자료

「입선자의 방명록」『매일신보』 1926년 5월 12일 3면

「금조 개장한 동미전 제2회」『동아일보』 1931년 4월 12일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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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참고 자료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년 5월 5일 2면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년 6월 29일 3면

「신록촬영대회개최-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년 6월 2일 4면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년 7월 7일 4면

예술사진전 조선사진예술연구회에서는 5월 6일부터 동11일까지의 6일간에 걸쳐 동화백화점(舊三越) 갸라리--에서 창립기념사진전을 개최하기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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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해선 관련 원문 자료

원문은 당시의 표기를 그대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현재의 띄어쓰기와 맞춤법에 맞지 않는 부분들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수정하였고 일부 [ ] 안에 병기했다 원문의 한자는 모두 한글 독음으로 고쳤으며 의미 전달을 위해 필요한 경우 ( )안에 병기했다

「대담 아마추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 pp 48~52

작가가 사태(沙汰)났어

본지 공사간에 바쁘실 텐데helliphellip 사진문화의 발전을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

해 주십사 하는 것은helliphellip 요즘 각 직장이나 학생들 간에 사진열이 굉장히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 비

추어서 이 아마추어 카메라맨의 지도 문제를 비롯하여 초보자의 진로랄까helliphellip 이런 문제에 대한 말

씀을 좀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해선6middot25 동란 후에 개인적으로 사진을 연구해 보겠다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직장이나 학교 단위로

사진동호자의 클럽이 많아 지고 작품 발표라던가 전시회 같은 것이 무척 많아졌는데helliphellip 어쨌든

일반 사회인이나 학생 간에 사진열이 높아졌다는 건 기쁜 일이야

임응식그런데 아직도 이 카메라를 사치품으로 취급하는 층이 많아서 곤란해요

이 나라(정부)에서부터 사치품 취급을 하더군helliphellip 여자들이 다이아몬드를 사려는 것과 사진을 연구하

려는 사람이 카메라 장만하는 것을 똑같이 취급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곤란

하지

임 헌데 우리 사단(寫壇)에선 우선 lsquo사진작가rsquo라는 용어를 쓰는 데에 신중을 기해야 하겠어요 웬 놈의

lsquo사진작가rsquo가 그리도 많은지helliphellip 이건 카메라만 메고 다니면 모두 작가 행세를 하니helliphellip

이 카메라 멘 것이 모두 lsquo작가rsquo라면 대한민국에 lsquo사진작가rsquo가 수 십만도 될 걸helliphellip 작가라는 친구들을

체에 넣어서 걸러 놓으면 엄격한 의미에서 진짜 lsquo작가rsquo는 몇 사람 밖에 없을 텐데helliphellip

임 호주머니에 만년필을 꽂았다고 해서 문학가 혹은 소설가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겠는데hellip

hellip 어쨌든 요즘 성행하는 사진작가의 사태를 우선 잡지에서 만이라도 용어 사용에 엄격한 규정을

지어서 질서를 잡아 주어야겠어요

이 그것도 과도기적 현상이겠으니까 차차 지양되겠지helliphellip 오늘 해달라는 얘기는 그런 넋두리가 아닐

테니까 어디 이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본지 한마디로 얘기하자면helliphellip 카메라는 어떻게 해서 장만을 했는데 mdash 자 그 다음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겐지 몰라서 어쩔 줄 모르는helliphellip 이런 아마추어와 초보자들의 진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얘기를

좀helliphellip 현재 직장 단위로 사진 동호자들이 모여서 클럽을 이룩한 것이 십 여 개 있고 학교 단위로는

이십 여 개나 되는데요helliphel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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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인식이 안이해서 탈이야

이 극히 초보적인 입장에서 사진을 해보고 싶다helliphellip 다년간 연구를 한 다음엔 작가가 돼 보겠다 mdash 하

는 사람들을 회원으로 해서 수 십 년 동안 연구를 해 왔는데helliphellip 오늘날 하고 있는 일도 그것이지만

helliphellip 여러 부문에 걸쳐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서적인 면에서 사진과 친해보고 싶다던가

또는 카메라를 장만했는데 어떻게 하면 앞으로 향상 발전할 수 있는가 mdash 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신인이라고 하겠지 특히 학생들의 교내 활동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helliphellip 헌데 막상 다다

르고 보면helliphellip 어떠한 길이 올바른 길인지 막연해 하는 모양이더군요

임 초보자들은 무엇보다도 사진 자체에 대한 정의를 뚜렷이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아마추어 mdash

하면 취미적 입장에서 사진을 다루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조각이나 회화와 같이 사진도 어엿한 예술이니

까 취미 도락(道樂)적인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예술을 추구하는 진지한 마음의 준비가 우선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물론이죠 대개 클럽 조직이 되어 있으니까 선생들의 지도를 받고 있겠지만 내가 알기에는 전문가

가 아닌 다시 말하면 취미 정도에서 관심이 있는 선생들이 지도를 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역시 전문으

로 사진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지도를 가끔씩이라도 받는 게 좋겠지요

임 지도를 한다는 사람들의 태도부터가 성실성이 없는 것 같아요 만년필을 샀으니까 나도 한 번 써 보

자 mdash 해서 작가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취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남의 lsquo지도rsquo를 담당

할 수는 없을 텐데 mdash 우리가 사진을 전공한대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억지로 지도해 주겠다고 밀고

들어 가겠다는 건 아니지만 mdash (웃음) mdash 어쨌든 전문가의 지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학생 클럽이나 직장 클럽 같은 동호자의 모임을 사단의 일부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취미

에서 시작했더라도 일정한 과정을 밟고 다년 연구를 거듭하면 자연히 작가를 지향하게 되겠지만hellip

hellip 그런 면에서도 처음 싹트기 시작하는 신인의 지도가 퍽 중요한 것이지요

취미middot도락이란 관념을 버려야 해

임 지금 형성되어 있다는 직장이나 학교 단체의 거의 전부가 전문적인 입장에 서 있지 않은 것 같더군

요helliphellip 사진에 대한 근본 의식이 너무도 안이한 것 같아요 카메라를 통한 표현의식에 절실한 감정

이 없어요helliphellip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비판을 받지 않는다helliphellip 하는 따위의 도피를 해서는 곤란

하죠helliphellip 창작의식이 확고하게 수립되지 않아서는 향상이 없는 것인데helliphellip 소문에 듣자면helliphellip 너

무 기술 면에만 치중하고 정신적인 면이 소홀히 취급된다는 거에요 helliphellip 나는 직장을 갖고 있으니

까 사진이란 것은 취미 정도로 한다 mdash 하는 태도를 버려야죠 특히 이 점은 지도자들에게 권하고 싶

은데helliphellip 예술의식helliphellip 이것이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절대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까

이 그렇구 말구요helliphellip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새로 사진을 공부하겠다는 신인들에게 네 가지 의식을 주

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휴머니즘 mdash 우선 사람이 돼야 하거든요 교양이라던가 인격 덕망helliphellip 이런 면에서 인간이

돼 있어야 하고 둘째는 사진예술을 한다고 해서 사진예술이 무엇이냐helliphellip 이것만을 추궁해서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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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요 좀 더 시야를 넓혀서 예술이라는 게 뭐냐 mdash 하는 걸 먼저 알아야지 셋째에 가서 사진예술이

라는 게 뭐냐 mdash 를 연구하고 넷째에 가서야 비로소 작품이라던가 창작의식 기교 기술에 대한 검

토를 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기본조건을 머리 속에 언제나 간직하도록 나는 주장해 왔어요

임 기술면을 등한히 할 수는 없겠지요 기술 없이는 표현이 안되니까helliphellip 그러나 이선생 말씀처럼 인

간본연의 문제도 크긴 큽니다 다른 예술부문의 사람보다 교양면에서 뒤떨어지지나 않는가 mdash 하는

것이 항상 염려되는데helliphellip 만일 뒤떨어진다면 큰일이지요 기술도 중요한 문제겠지만 교양인격 같

은 것도 예술가가로서의 긍지를 위해선 떨어질 수 없는 문제고helliphellip 더욱이 좋은 기술을 가졌으면서

도 기초교양이 모자라서 좋은 작품을 낼 수 없다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으니까helliphellip 교양인으로서의

자격도 다른 예술부문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사진을 해야할겝니다

이 기교나 기술을 어떻게 우물쭈물 배웠다고 해서 작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helliphellip 예술이란 그 자체

에 대한 조예부터 깊어야 합니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조리개가 얼마다 타임이 어

떻다helliphellip 암실작업은 어떻게 하는 거다helliphellip 이것만을 알았다고 해서 작가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에

요helliphellip 인간면 예술면 기술면에 똑 같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마 사진을 연구하겠다는 신

인들의 기본이념이 돼야 할겝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지도한다는 면에서

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거든요 mdash

임 어쨌든 기술을 위주로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난 옛날 얘기입니다

지도자 시비

이 지났다기 보다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는 장래에나 변할 수 없는 기본이념이겠지요 사진이라는 것

은 더욱이나 고도의 대중성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인격과 교양이 필요해요 기계라는 거야 찍으면

사진이 되도록 마련된 것이니까 예술까지는 못 가도 사진은 되거든 mdash 그러니까 그것을 예술로 이

끌려면 찍는 사람의 성분이 문제되는 것이지요helliphellip

임 그런 의미에서도 사단의 규정이 필요하고 작가라는 규정이 필요해요 사단이라는 것에 너무 엄격한

규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helliphellip 만년필을 가졌다고 해서 전부 문학가가 아니라면helliphellip 카메라를 메었

으니 작가다 mdash 하는 엉터리도 용납될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우선 필요한 것은 취미 도락이라는 관념

을 지양해야 할 텐데helliphellip

이 취미가 차차 심각해지면 창작의식도 생기는게니까helliphellip 그런 사람들을 지도 계몽해서 한 사람이라

도 작가로 이끌어야 하겠지요helliphellip 카메라를 살 때부터 나는 사진작가가 되겠다 mdash 하는 사람은 있

을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임 lsquo싼데이rsquo 카메라맨은 논의의 대상이 안되구요helliphellip (웃음)

이 그러니까 지도자들이 작가적인 태도에 확고한 이념을 앞세우고 지도에 임해야 하는 건데helliphellip

본지 각 단체 지도층의 지도방침에 대한 구체적인 태도를 어떻게 규정하겠습니까 helliphellip

임 우선 사진에 대한 인식부터 고쳐야 해요 말이 중복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친구 좋고 사진 좋아서 우리

끼리 하면 그만이다 mdash 하는 생각들이 많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만이라도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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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싶어요 학생들이 카메라를 사 가지고 몇 사람 모였으니까 책임자 격

인 선생이 필요하다 mdash 해서 책임 맡았다는 사람으로는 지도가 안 될 게 아닙니까 그렇다고 청해 오

지도 않는데 내정 격으로 뛰어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구helliphellip (웃음)

본지 또 한 가지 요즘 일대 성황을 이루는 것이 소위 현상사진(懸賞寫眞)이라는 건데요helliphellip 이 현상사진

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진에 대한 모욕도 있지helliphellip

임 거 참 꼴사나운 일이 많아요 현상이란 걸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helliphellip 그 하나는 어느 연구

단체에서 순수한 의미에서 발표 바탕이 없는 아마추어를 위해 마련하는 경우가 있을게고 또 하나는

선전용으로 포스터 mdash 같은 데에 써먹기 위한 상업 정책적인 의식에서 모집하는 현상이 있을 테지요

이 어느 경우이건 간에 좌우간 현상 모집을 하는 목적이 있는데helliphellip 응모자는 우선 현상의 목적부터 확

실히 알고 응모를 해야 하겠지helliphellip

임 그렇죠 그런데 이 상업 정책적인 현상의 경우에는 사진문화에 대한 모욕적인 행동이 퍽 많습니다

이거 참 불유쾌한 일이지만helliphellip 가령 예를 들자면 응모자는 원판을 제공하라던가 또 낙선자의 작

품은 일체 반환치 않는다는 따위helliphellip이게 얼마나 사진예술에 대한 모욕적 행위입니까 helliphellip

이 그래요helliphellip 확실히 모순된 일입니다

임 필요에 의해서 현상모집을 했으니까 당선된 작품은 물론 필요하겠지만helliphellip 낙선작품을 반환치 않는

다는 것은 언어도단 입니다 낙선이 됐다 해도 작가의 입장으론 대단히 귀중한 하나의 작품일 텐데

그걸 안 돌려 준대서야 말이 되나요 주최측은 낙선작품의 원화를 돌려 줄만한 성의를 가져야 도리

에 맞을 텐데helliphellip 요즘 현실은 lsquo낙선rsquo이란 푸대접 밑에 원판까지 몰수당하는 판국이니helliphellip 원 참

이 그러니까 응모자는 무엇보다도 현상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지helliphellip 여러 번 겪은 일이지만 심사를

하다 보면 전혀 현상 취지를 도외시한 작품들이 있는데helliphellip

임 그거야 보나마나 낙선이죠 (웃음)

이 그러믄요 현상 응모자로서는 출품 규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 아니겠어요

임 그럼요

이 그런데 어떤 것은 작품에 제목도 없는 것이 있거든요 그런가 하면 제목과 작품내용이 전혀 특이한

엉터리도 있구helliphellip

임 저도 여러 번 겪은 일입니다

이 제목이란 것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벌써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찍는다는 의식이 있는 이상

제목도 정해져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아주 작품과 제목이 동떨어진 것들이 응모해 오니까

낙선의 자격이 충분할 수밖에helliphellip 하하하 (웃음)

임 그게 모두 사진에 대한 성의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이 그래요 성의가 없어요 자기 작품에 대해선 최선의 성의를 다 해야 할 텐데 그런 태도가 없거든helliphellip

제목을 안 썼는지 못 썼는지는 모르지만helliphel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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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그저 무턱대고 발표의식만 왕성한 까닭이 아닐까요

이 그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된 작가가 아닌 이상 발표기회가 좀처럼 없을 테니까

자기 실력의 평가를 받는다던가 남들과 경쟁해 본다는 의미에서 현상에 자주 응모하는 것은 좋은데

helliphellip 아 어떤 친구는 자기 실력 생각은 하지도 않고 상품이 적다 많다 시비를 하는 친구도 있으니 참

기가 막힐 일이지

주최자의 무성의도 고쳐져야 하고

임 그건 lsquo현상rsquo이라고 내거는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순수한 사진연구단체에서 모집할 때는

lsquo공모전rsquo이라던가 하는 문구가 좋지 않을까요 lsquo현상rsquo이라니까 lsquo상rsquo을 바라게도 되겠지만 어쨌든

lsquo현상rsquo이란 말 자체가 순수하지 못해요

이 그건 확실히 생각해 볼 문제이겠군요helliphellip 순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helliphellip 응모자들이 심

사원이 누구냐mdash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도 순수하지 못하고helliphellip 또 주최자가 모집광고를 낼 때

lsquo심사원은 추후발표rsquo라mdash하는 것도 순수하지 못해요 이것도 참 불쾌한 일인데 lsquo추후발표rsquo라는 걸

다시 생각하면 lsquo준비가 안됐다rsquo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심사원의 준비도 안 해 놓고 현상을 모

집하는 그런 무성의가 또 어디 있어helliphellip 이건 일종의 사기가 아니면 거만일 겝니다

임 그나 그뿐인가요 lsquo심사원은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함rsquohelliphellip 하는 모호한 광고도 있지요 응모자의 입

장에서 생각하면helliphellip 심사원에 불만이 있으면 응모를 아니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 심사원 문제만

은 정정당당히 명시해야만 나중에 가서 심사에 대한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출품을 한 다음에 심사

원이 발표된다는 것은 심사에 대한 불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helliphellip

이 그리고 응모자의 동태를 가만히 보면 아까 얘기가 나왔던 소위 lsquo취미정도rsquo라는 층의 발표 의욕이 굉

장해서 대부분의 응모자가 이 부류인 것 같은데helliphellip 여기 한 가지 탈이 있어요 현상응모 작품의 심

사라는 것은 무제한의 심사 레벨을 놓고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응모 작품 중에서의 우수 작품을 가

려낸다는 것은 이거 상식 문제가 아닙니다

임 그렇죠

이 아 그런데 어떻게 해서 현상에 당선이 되거나 특히 특선이라도 하면 그만 자기가 갑자기 위대한

작가라도 된 것처럼 대가연(大家然) 하고 으쓱대는 친구들이 많아서 걱정이야helliphellip (웃음)

이 lsquo특선rsquo이라는 것은 응모해 온 작품들 중에서 특선이지 결코 한국 사단 전체의 수준에서 특선이라

는 것은 아닌데helliphellip 그만 한 번만 당선되면 코가 높아지고 대뜸 대가 행세를 하려고 드니helliphellip 참

신인들은 특히 조심해야 할 일이지

남의 것보고hellip 우리 것도 보내고hellip

본지 이제 화제를 좀 바꾸어서 세계사단의 동향을 좀 말씀해 주실까요

임 세계사단의 얘기라면 직접 보아야만 얘기가 될 텐데helliphellip

이 서울 바닥에서 썩으면서 세계사단의 얘기를 어떻게 본 듯이 할 수가 있겠나 카메라를 메고 세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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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도 했어야 얘기가 되지

임 그것보다도 사진을 통한 국제 교류 얘기나 합시다

이 그게 좋겠군helliphellip 얼마 전에 덕수궁에서 자유중국의 소개사진전시가 있었죠 미국공보원의 활동도

이를 테면 국제교류의 한 형식일게고helliphellip

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자유중국과 월남의 사진전시가 있었는데helliphellip 우리도 수출을 한다면 그 보

다 훨씬 좋은 작품들이 나갈걸요helliphellip

이 한미합동전이던가 한중합동전 같은 것도 하면 역시 국제교류가 되겠지요helliphellip

임 한미합동전은 불원한 장래에 개최될 것입니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lsquo인간일가(人間一家)rsquo의 사진

이 아마 이월쯤 한국에 올 겝니다 미국대사관이 주동이 돼서 작품 503점 전부의 전시회 계획이 추

진되고 있으니까요

이 남이 보내줘서 본 것은 있지만 우리가 남에게 보여준 것은 없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야 우리도 남에

게 보여줘야 교류가 될 텐데helliphellip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두 사람의 작품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임 개인적인 활동은 있었지요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사진살롱에 사진을 보내고 있으니까 개인

적으로는 더러 나간 셈이죠 개인들의 수출이라도 좀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지만

이 우리의 것을 내보내고 외국 것을 들여와서 서로 감상하고 연구하는 게 이를 테면 국제교류인데

아마 명년쯤엔 될까 몰라

임 작품교환전 같은 것을 위해서 대대적인 계몽운동이 필요 하겠죠

이 그렇죠 운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어요

임 그런데 근본적인 얘기를 하자면 한국 작가의 역량이 아직도 부족한 것 같아요 언젠가 외국 작가에

게서 들은 말인데mdash한국 사람은 한국을 보지 않았다mdash하는 얘길 해요 사진 작가에게 대한 말이지

만helliphellip 나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이 퍽 중요한 얘기다mdash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를 직시하는 것만이

사진은 아니겠지만 실용사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것이 사실 아닐까요 회화적인 쌀롱 픽처라던

가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리얼리즘 사진이라는 것에 너무들 치우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 국제 교류의 시발은 역시 소개적(紹介的)인 것 다시 말해서 르포르타주적인 것이겠으니까helliphellip

임 외국 작품의 모방 같은 것은 이제 집어치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mdash예술적인 것 이것만을 너무 추

구했기 때문에 사실이 한국적인 것과 국민성의 묘사 같은 것이 잘 되지 않았지요 정서적인 것에만

너무 골몰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일이고 helliphellip 예술을 위한 예술에 정신들이 팔려 있었지나 않은

지helliphellip 예술을 하기 위한 사진이라는 관념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이 예술을 염두에 안 둔다면 실용사진이 돼 버리게

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너무 치우친 것 같단 말입니다

이 특히 국제 교류를 생각한다면 아닌 게 아니라 외국처럼 르포르타주적인 사진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할거에요

임 그래요 거기에 예술성을 띄워서 소화할 만한 역량 있는 작가가 필요해요

이 또 하나의 가장 큰 문제는 위정자의 관심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 큰 난관입니다 국제 교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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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가족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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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말이고 역시 정부당국자의 적극적인 주

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어디 그래요

임 우선 사단 자체의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작가들의 작업도 촉구되어야 하구helliphellip 아까도 말이 나왔지

만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 출품을 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점 같은데서 작가들의 반성도 필

요하고helliphellip

이 개별적으로 미국 등지에 보낸 것은 아마 상당한 수가 되겠지요

임 그럼요 그랬는데 왜 성과가 없느냐mdash하는 반성이 있어야죠

이 오늘의 현실을 예술적인 면에서 기록하고 작품화 해야겠는데helliphellip 막연하게 예술을 위한 작품을 보

내니까 기교적으론 훌륭할지 몰라도 작품 자체에 내용이 없어서helliphellip 그래서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닐

임 그런 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빨리 우리의 수준을 높여서 국제 조류와 호흡을 맞추어 나가

야 할 것입니다

이 이거 아마추어를 위한 얘기라는 것이 잠깐 탈선을 한 것 같군 그러나 이런 문제도 참고가 되긴 하니

까helliphellip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합시다

본지 수고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helliphellip

(기록 O기자)

이해선 「lsquo백오(白烏)rsquo의 변(辯)」 『동아일보』 1957년 4월 9일 4면

30여년 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입학

이 되었을 당시 자축기념하는 의미에서 호(號)를

하나 지어본 것이 백오(白烏)라는 두 글자였다 처

음 듣는 사람들 중에서는 거문[검은] 까마귀는 있

지만 흰 까마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서로 웃어버리고 그 뜻을

설명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자의

(字意)를 해명해볼까 한다 백(白)은 흰 빛이요 오

(烏)는 흑색으로 통하므로 우선 흑백을 대조시켜

놓고 흰 종이 위에다 검은 먹으로 휘호(揮毫)할 것

이니 그 뜻이 내 생활과 부합될 것 같으며 둘째로

백 자(字)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첫 자를 떼어놓

고 오는 반포오(反哺烏)로 그 이름이 높은 새이므

로 평소에 효자 노릇을 못하여 온 나의 좌우명으로도 적당할 듯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새 중에서는

혹간(或間) 백변종(白變種)이 생겨나는 수가 있는데 그 흰새를 서조(瑞鳥)라고 떠들던 옛 시절도 있었으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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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내가 우연히 호를 지어 본 것이 검은 까마귀떼 속에서 서조 백오를 발견하였으니 나의 전도(前途)에는

반드시 서광(瑞光)이 비칠 것 같으므로 이상 여러 가지 의미를 차례로 생각해 볼 때에 나에게는 이 외에 더

좋은 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자의였었고 궁금한채로 불려온 백오

였었다 만담궁변(漫談窮辯)을 물소물책(勿笑勿責) 하소서 (사진가)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

이해선 「중요한 내용middot형식-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년 10월 20일 5면

사진작품에는 사진 특유의 형식이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러한 특유의 형식에 알맞은 표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의 특수성은 형식이 가지는 특수성 보다는

기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주관적이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작품심사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동일하게 중요시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작

품 속에서 그야말로 형식과 내용이 알맞게 부합된 특출한 작

품을 볼 수는 없었다 형식이 좋으면 내용이 빈약하고 좀 내

용이 있으면 형식이 미숙하고helliphellip 모두 결점이 있다 그러나

입상작으로 뽑은 8 점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

다 그리고 금년에는 lsquo칼러rsquo사진의 응모 점수가 30점이나 되

고 그중에서도 3점이 입상되었고 또 9점이 입선되었다는 것

은 lsquo칼러rsquo 사진의 앞날을 위해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lt전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장gt

[제1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년 2월 8일 5면

외국작품의 세련되고 빈틈없는 lsquo테크닉rsquo은 국내작품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서 우선 국내

작품을 형식에서부터 누르고 말았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이루게 된 것은 국내작가들

의 역량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lsquo국산인화지rsquo가 얼마나 엉터리고 조악한 것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대체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더욱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은 이와 반대적인 경향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예술이든 먼저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볼 때 국내작품의 후진성은

두말할 것 없이 형식의 경시에 있다고 하겠다 심사결과 흑백부에서나 lsquo칼라rsquo부에서 겨우 동상으로 한 점

씩 밖에 국내작품이 입상되지 못했다는 것은 다소 섭섭한 느낌이나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경종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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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더욱 우리 심사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독에서 응모한 lsquo칼라rsquo

작품이었다 물체의 외관 색감을 초월한 내면의 lsquo이미지rsquo가 발

산하는 짙은 감정의 색감으로 작가의 개성과 사상을 인상 깊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내 lsquo칼라라보rsquo의 후진

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상작으로 뽑힌 외국작품들은 오

늘의 세계 사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는 큰 자극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

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제2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총 818점 응모-사진예술에 도움」

『동아일보』 1967년 2월 9일 4면

지난해와 같이 흑백부문에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들은 모두가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산인화지의 조악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작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올해는 흑백

부문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기꺼운 일이라고

하겠다

특히 칼라작품에 있어서는 독일의 작품들이 특출했고 이들 작품들의 색감은 현대 과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 최고상으로 뽑힌 lt잊은 친구gt와 몇 점의 입상작품들은 칼라릴리프와 소라리

세이숀[솔라리제이션] 등의 수법으로써 모티

브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를 초객체적이고 추

상적으로 표현하고 작가의 짙은 개성과 사상

과 철학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입상작으로 뽑은 16점의 작품들은 오늘의

세계사단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

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심사위원 이해선 (위원장) 임응식 서순삼

박필호 안월산 정인성 최경덕 (이상 7명)

관련 자료 소개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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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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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관련 자료 소개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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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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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관련 자료 소개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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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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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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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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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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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관련 자료 소개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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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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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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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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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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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7: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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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차 정기총회 개최 북창동 한양관『제16회 대한사협전 작품집』 발간 (실물자료)

≪제17회 대한사협전≫ 중앙공보관 화랑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제17회 대한사협전 작품집』 발간 (실물자료)

제24차 정기총회 개최 및 ≪백오사진상(白烏寫眞賞)≫ 제정≪제18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실물자료)

『제18회 대한사협전 작품집』 발간 (실물자료)

제25차 정기총회 개최≪제1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김석현 공로상 이순흥)

제26차 정기총회 개최 및 제2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9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경향신문』 및 실물자료)

제27차 정기총회 개최이해선 회장에 공로상패 증정 및 제3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이순흥 김석현) (『포토그라피』)

≪제20회 대한사협전≫ 신문회관 화랑 (『경향신문』 및 실물자료)

제28차 정기총회 개최≪제4회 백오사진상≫ 시상 (『포토그라피』)

≪제21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매일경제』 및 실물자료)

≪제5회 백오사진상≫ 시상≪제22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실물자료)

≪이해선 사진작품전≫ 신문회관 화랑 (『동아일보』)

정기총회 개최 및 ≪제6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이정훈 공로상 박필호) (『포토그라피』)

≪제23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동아일보』 및 실물자료)

제30차 정기총회 개최 반도아케이드 4층 카페테리아≪제7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 이완섭 작품상 김형승 양승호 김기현)유자격 정회원 한국사협에 단체로 입회

제31차 정기총회 개최 및 ≪제8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안장헌)≪제24회 대한사협전≫ 신문회관 화랑 (『동아일보』)

제32차 정기총회 개최 대동관 (『매일경제』)

≪제9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 정헌태)추계촬영대회부산지회 설립

고문 김조현 회장 이해선부회장 김조현 총무 김석현이사 성두경 안준천 오인창 박병호 감사 윤상운

고문 김조현 김종양 회장 이해선 부회장 안준천 이순흥 총무 성두경이사 김석현 손석현 이완섭 서윤석감사 윤상운

총무 김용필이사 성두경 서윤석

고문 김조현 명예회장 이해선회장안준천 부회장성두경 이순흥총무 김용필이사 서윤석 안장헌박훈서양승호감사이완섭

고문 박필호rarr김종양이사 양승호(면)

고문 박필호 김조현 김종양명예회장 이해선 회장 안준천부회장 성두경 이순흥총무이사 김용필 이사 서윤석 박훈서 안장헌 양승호 감사 이완섭

고문추대 장남수

고문 박필호 김조현 김종양 장남수안준천 명예회장이해선 회장성두경부회장 이순흥 총무이사 안장헌 이사 서윤석 이정훈 이완섭 김형승 김완기 감사 김용필

≪제1회 대한민국건축 및 사진 전람회≫(91~20 국립공보관)

봄 국전 4부에 사진middot건축middot공예 신설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출처)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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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영상』)

제33차 정기총회 개최 대동관 제9대 성두경 회장 연임≪제10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본회 주관-양수리)춘계 촬영대회(양수리)제2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태종대)제3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동학사)≪제1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대전지회 주최)≪제26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영상』)

제34차 정기총회 개최≪제11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김완기 공로상대전 윤필수)≪제27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영상』)

제주지회 폐쇄

『백오이해선사진집』 출판기념회 예총화랑 (『매일경제』 및 『영상』)

제35차 정기총회 개최 제10대 성두경 회장 연임≪제12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 조임환)≪제28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제2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 대전시민회관 (『영상』)

제36차 정기총회 개최 및 ≪제13회 백오사진상≫ 시상제4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통도사 범어사)제5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갑사 마곡사)≪제3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및 ≪제12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대전시민회관 (『영상』)

≪제29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제37차 정기총회 개최 제11대 이순흥 회장 취임≪제14회 백오사진상≫ 시상≪제30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제4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13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대전시민회관 (『영상』)

백오 이해선 선생 작고

제38차 정기총회 개최 미성옥≪제15회 백오사진상≫ 시상제6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해운대)제7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관촉사 쌍계사)≪제5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1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39차 정기총회 개최 한일장 제12대 이순흥 회장 연임≪제16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최진연)충주지회 설립제8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지회 주관-수옥정)제9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속리산)≪제6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2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고문 박필호(면) 김종양(면)

고문 김조현 장남수 안준천 성두경명예회장 이해선 회장 이순흥 부회장 이완섭 김용필 총무 이정훈 이사 안장헌 김완기 박동운 송정웅송주헌 심재욱 송정회감사 서윤석 윤필수

이사 최진연 박명식

81~83년 성두경 한국사진작가협회 부이사장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출처)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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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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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차 정기총회 개최≪제17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0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미륵사지)≪제7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11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 대둔산 도산계곡)≪제33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1차 정기총회 개최제13대 이순흥 회장 연임≪제18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2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하회마을)≪제8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13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지회 주관-탄금대)≪제34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2차 정기총회 개최 파인 힐≪제19회 백오사진상≫ 시상고창지회 설립제14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을숙도)

『대한사협회보』 복간호(제6호) 발간고 백오 이해선 선생 추모비 건립≪제9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5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3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20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5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고창지회 주관-선운사)

『대한사협회보』 제7호 발간제16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본회주관-용인민속촌)구미지회 설립≪제10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6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4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21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7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신원사)대천지회 설립문화부에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문화가족으로 등록제18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지회 주관-탄금대)≪제11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7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5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22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9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경주일원)≪제38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제12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

제46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23회 백오사진상≫ 시상제20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천-대천해수욕장)≪제39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감사 서윤석(면) 박노택

고문 김조현 이순흥회장 안준천부회장 김용필 안장헌총무 최진연이사 김완기 송주헌 송정회 심재욱 박노택 조창만감사 이정훈 고승웅

이사 송주헌 황응천 원종철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회장 김용필 부회장 이정훈 박노택총무 최진연 이사 안장헌 김완기 정완철 송주헌 심재욱 원종철 박부공황순조 황응천 김태영 감사 송정회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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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 모란룸≪제24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최진연)고 백오 이해선 선생의 한국사단 발전에 기여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白烏李海善寫眞文化賞)≫ 제정≪제40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한국의 풍물 사진공모전≫ 대한사협 호영출판사 공동주최

제48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1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유동호)원주지회 설립이천지회 설립청주지회 설립≪제41회 대한사협전≫ 코닥포토살롱제21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속리산)

제49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2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황규태)제22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엑스포장)고창지회 폐쇄≪제3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윤주영)≪제42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대한사진술가협회 창립50주년 작품집』 발간

제50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전주지회 설립≪제4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최민식)≪제43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1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대한사협회보』 제8호 발간제23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원주지회 주관-치악산)남원지회 설립≪제44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2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5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강상규)

『대한사협회보』 제9호 발간제24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대청호)대구지회 설립김제지회 설립≪제45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3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6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이순흥)

『대한사협회보』 제10호 발간제25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구지회주관 - 경주OK그린청소년 수련원)≪통일염원 전국사진공모대전 작품전시회≫ 개최(대구지회 주최-대구 동아쇼핑 전시관)≪제7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송기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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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회장 안장헌 부회장 이정훈 김완기총무 송정회 이사 원종철 송주헌 한창동 황순조 박부공 허현 감사 박노택 최진연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자문위원 안장헌 회장 이정훈부회장 김완기 박노택 총무한창동이사 원종철 김완선 이순재 박부공 이광호 이재옥 김광범 양호용감사 황순조 최진연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자문위원 안장헌 이정훈 회장 박노택 부회장 김완기 최진연 총무 이광호이사 박부공 이재옥 윤중일감사 한창동 조창만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 박노택자문위원 안장헌 이정훈회장 김완기부회장 황순조 박부공총무 윤중일이사 김광범 김준영 강승규 김이경감사 한창동 이재옥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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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1

≪제46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원주지회 폐쇄

제54차 정기총회 개최 대림정대한사협사진강좌 개최(연8회) 월례촬영회 개최(연8회)제26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 서울대청호

『대한사협회보』 제11호 발간대한사협 대구지회-중국 연길시 촬영가협회와 자매결연(연길시 청년호텔)원주지회 재설립≪제8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최흥만)≪제47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창립 55주년 기념 『2000대한사협사진집』 발간

제55차 정기총회 개최 대림정대한사협 사진강좌 개최(연8회) 월례촬영회 개최(연5회)정읍지회 창립제27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정읍 내장산)≪제48회 대한사협전≫ 및 CD작품집 제작 예총화랑 제1전시실

제56차 정기총회 개최 사랑채월례촬영회 개최(연4회)제28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서울 남한산성)≪한중 국제교류전≫ 대한사협 대구지회 대구 대덕문화회관≪제49회 대한사협전≫ 및 CD작품집 제작 예총화랑 제1전시실

제57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월례촬영회 개최(연6회)제29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 중앙탑공원)≪제9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김한용)≪제50회 대한사협전≫ 및 2003대한사협작품집(CD작품집) 발간예총화랑1-2전시실

『대한사협회보』 제12호 발간

제58-60차 정기총회 개최제51-53회 ≪대한사협전≫제30-32회 전국회원촬영대회대한사협 인터넷홈페이지 개설(wwwpaakoreacom)제1회 대한사협 사진공모전

『대한사협회보』 제13호 발간『창립60주년 전국회원전 작품집』 발간(2005)이해선 선생 탄신 100년기념 유작전(대구middot충주middot원주middot대전middot전주순회전) 개최 및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보는 1950-60년대』 (눈빛) 발간(문화관광부middot조선일보 후원)남원지회 청주지회 구미지회 폐쇄(2006년)전주지회 설립(2006년)

제61-63차 정기총회 개최≪제54-56회 대한사협전≫제33-34회 전국회원촬영대회이천지회 폐쇄(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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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위원rarr고문 안장헌 이정훈고문추대 방대훈이사 강승규(면) 김이경(면) 원종철 김광석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 박노택안장헌 이정훈 방대훈 회장 김완기 부회장 황순조 유병주(대전) 총무이사 윤중일이사 김준영 원종철 김광석 심재욱감사 강승규 이재옥

총무이사 윤중일(면) 최인호

회장 최진연

회장 최진연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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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지회 김제지회 원주지회 폐쇄(2008년)한밭지회 설립(2008년)≪제10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안장헌 2007)≪제11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조세현 2009)

제64차 정기총회 개최 PJ호텔 4층 카라디움≪제57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제35회 전국촬영회

제65차 정기총회 개최 충무로 아스토리아호텔제36회 전국촬영회 및 대천지회 전국 사진인리더 초청세미나(한화콘도 세미나실 대천해수욕장)김제지회 재설립(지회장 이성수 총무 구반반) ≪제58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

제66차 정기총회 개최 충무로 아스토리아호텔≪제12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안희탁) 제37회 전국촬영회 및 대천지회 전국사진인 리더 초청 세미나(대천해수욕장내 청주대 수련원 및 머드축제광장)울산지회 설립(지회장 이헌배 총무 심화실) ≪제59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

2013년 제1차 이사회 개최 충무로 통로이미지(주) 회의실 참석 이정훈 외8명제67차 정기총회 개최 캐피탈호텔 뷔페식당 스카이(그릴 룸)≪제60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회원 자질 향상을 위한 사진학 강좌 개설(강사 진동선 2013~2014)

≪제13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마이클 케나(MichaelK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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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정건영

회장 이철집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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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3

김 완 기(金莞祁 1944~ )

1962 충주고등학교 졸업

1964 청주교육대학교 졸업

1969 《제1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입선

1977~1991 KBSEBS방송 출연 15년

1989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교육학 석사)

1990~1999 《대한민국사진전림회》 8회 입선

1993~1999 청영회 회장 역임

1997 《제16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 특선

1998 교육부 초등교육정책과장 역임

1999~2013 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 3회 역임

1999~2014 《전국사진공모전》 심사위원 70회 역임

2002 강남구사진작가회 창립회원 및 회장 역임

2003 서울성북교육청 교육장 역임

2004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초대작가

《서울특별시사진대전》 초대작가

《제1회 김완기사진전》 세종문화회관별관 광화문갤러리

2004~2008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 역임

2005 2013 제24회 제31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심사위원 역임

2005~2007 서울특별시사진작가협의회 초대 회장 역임

2006 『김완기사진집』 출판 창조집단 시빌구

《제2회 김완기사진전》 세종문화회관별관 광화문갤러리

2008~2014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조정위원

2011 《서울특별시사진대전》 운영위원 역임

2011~2014 APC뉴스(한국예술사진인연합회) 회장

2013 김완기 자서전 『분필과 셔터로 그린 자화상』 출판 하얀나무

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고문

강남구사진작가회 자문위원

서울특별시사진작가협의회 고문

청영회 고문

한국사진작가협회 자문위원

구 술 자 연 보

안장헌(安章憲 1947~ )

1969 2 고려대학교 농업경제학과 졸업

1966~2014 고려대학교 호영회 창립회원 호영동우회 회장역임 및 회원

1968~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원 이사(1973~1992) 회장(1993~1995) 현 자문

1973~1975 동화출판공사 『한국미술전집』 사진담당

1976~1977 월간 『영상』 편집장

1977~1979 현암사 『한국미술오천년』 기획 및 편집책임

1979~1995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 3회 역임 현 자문위원

1980~2005 호영문화사 편집인

1981~1992 신구대 사진과 강사

1984~1987 서울교육대학 미술교육과 객원교수(사진학)

1990~1994 롯데문화센터 사진교실 강사

1994~1998 삼성사진문화교실 전임강사

1995~2014 한국불교사진협회 고문

1995~2014 (사)신라문화원 이사 현 자문위원

2000~2014 경주 계림사우회 지도교수

2004~2009 동강사진마을 운영위원

2005~2014 문화유산사진연구소 소장

2009 봉은사진교실(봉은사) 강사

2010~2014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 안장헌디지털사진교실 지도교수

그룹전

1966~2014 고려대학교 호영회 호영동우회 회원전 80여점 출품

1968~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전(17~60회전) 70여점 출품

1990 《사진가 8인전》 후지포토살롱

1994 《한국현대사진의 흐름전》 〈산사일기〉 출품

1996 《Image ofKoreanCultual Heritage》 UNESCO본부 파리

1997 《Buddist Images ofKorea》 독일 함부르그

1997~1998 《서울사진대전》 〈낙선재 일곽〉 〈금원에서〉 출품

1997~2014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전 19점 출품

1998~1999 《경기도사진작가초대전》 출품

1999 《한일사진교류전~자연과 인간을 향하여》 출품

2001 《아름다운 우리 문화재 4인전》 국립진주박물관

2004 《한국다큐멘터리사진 33인전》 동강사진축전

개인전

1996 《서라벌 빛 그리고 향기》 서라벌문화회관

2002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신라문화원 화랑

2003 《세계문화유산과 경북》 경주문화EXPO솔거방

2007 《왕릉의 호랑이》 동강사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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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창호》 인사동 갤러리 북스

2010 《돌 호랑이 그림 호랑이》 인사동 갤러리 북스

2012 《선비의 고향 서원》 인제대 도서관 김학수기념박물관

주요 사진저작

1982 『석불』 호영

1989 『석굴암』 예경

1991 『경주 남산의 탑골』 열화당

1992 『선의 세계』 호영

1993 『영겁의 미소』 불광

1994 『신라의 동해구』 열화당

1996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삼성문화재단

1998 『서원』 열화당

2002 『신라의 마음 경주』 한길아트

『남산』 한길아트

2003 『돌에 새긴 정토의 꿈~석불』 한길아트

『석조미술의 꽃~석가탑과 다보탑』 한길아트

『사진으로 보는 한국미~무늬』 호영

2005 『BUDDHA~Bildnisse ausStein inKorea』 ErnstWasmuthVerlog

Tubingen 독일 베를린

2006 『범종~생명의 소리를 담은 장엄』 한길아트

저서

1987 『국립공원』 김성옥 문순화 송기엽 안장헌 공저 호영)

1995 『사진으로 배우는 사진촬영교실』 호영

2001 『아름다운 우리문화재』 관조 김대벽 한석홍 안장헌 공저 국립진주박물관

2003 『문화유산 일기』 진선출판사

수상

1977 《백오사진상》 작품상 수상(대한사진예술가협회)

1999 『서원』으로 《간행물윤리상》 저작상 수상(간행물윤리위원회)

2006 《한국사진문화상》 공로상 수상(한국사진작가협회)

2007 《이해선사진문화상》 수상(대한사진예술가협회)

2011 《대한민국문화유산상(대통령상)》 봉사활용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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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5

참 고 문 헌 목 록

「봄 국전심사에 물의 사진 심사위원에 시비」 『동아일보』 1977421

「봄 국전 심사 낙수(落穗)」 『경향신문』 1977425

「현대사진문화상 이해선 씨 뽑아」 『동아일보』 19781128

「사진문화-사협고문 이해선 씨 작품집 발간」 『매일경제』 19801129

「사진 50년 역사를 한 눈에」 『매일경제』 1981120

「사진작가 이해선 작품집 두 권 내놔」 『동아일보』 1981629

「부고-원로 사진작가 이해선 씨」 『동아일보』 1983111

「일화로 엮는 명암 100년 화단이면사( ) (27) 화가와 문인과 신식 여성」

『경향신문』 198554

「이해선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사진전」 『연합뉴스』 20051026

「lt단신gt 백오 선생 탄신 100돌 사진전」 『문화일보』 20051031

「사진예술가협회 창립 60주년 기념전」 『매일신문』 20051117

「문화의 향기-전시」 『부산일보』 200615

「백오 이해선 선생 미발표유작 사진전」 『부산일보』 200617

「[전북][광주전남][제주][대전충남]문화가」 『동아일보』 2006120

「영월 동강사진박물관-이해선 특별기획전 2007년 3월 첫 주까지」 『뉴시스』

20061227

「사진과 친해지려면 옛 서울역사로 가보세요」 『헤럴드경제』 201041

월간지 계간지

김용준 「서화협전의 의미」 『삼천리』 1931년 11월호

「lt부감(俯瞰)gt(이해선 작)gt」 『사진문화』 1956년 6월호

「아마츄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호

연성숙 「일제 한인귀족의 근황」 『진상(眞相)』 1960년 3월호

「창간사 이해선 씨」 『포토그라피』 1966년 8월호

「나의 발언」 『포토그라피』 1966년 8월호

「작가 지상초빙작가-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달의 작품사진 제주풍물-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해선 「해외 예술사진 감상실 (1회)」 『포토그라피』 1968년 4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6) 석가탄일」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7)」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제1회 새한사진콘테스트」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8) 동해진미」 『포토그라피』 1969년 9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9) 야채밭」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0) 건제(乾梯)」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제18회 국전 소식」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1) 초설(初雪)」 『포토그라피』 1969년 12월호

이해선 「돌과의 대화 30년」 『월간 중앙』 1969년 12월호

「초대작가 사진」 『포토그라피』 1970년 9월호

이해선 「고궁풍물(1)」 『포토그라피』 1971년 1월호

_______ 「고궁풍물(2)」 『포토그라피』 1971년 2월호

이해선 관련

일간지

「입선자의 방명록」 『매일신보』 1926512

이태준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1029

「금조개장한 동미전 제2회」 『동아일보』 1931412

홍득순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417

「인사(人事)」 『매일신보』 193886

이해선 「예술사진의 연혁과 개념」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동인전」 『경향신문』 19491115

「인사(人事)」 『경향신문』 1953110

이해선 「등하수상(燈下隨想)」 『동아일보』 19551112

_______ 「사진예술의 독자성」 『동아일보』 1956126

_______ 「사진 8인전 소감」 『경향신문』 195647

_______ 「백오(白烏)의 변(辯)」 『동아일보』 195749

「김포공항에 내린 덕혜옹주-이해선 씨가 부축하고 있다」 『경향신문』 1962126

「5월 예술상에 붙이는 제언」 『경향신문』 196231

「2명이 사퇴 사진부문심위원」 『경향신문』 1964109

「영예의 산실 안팎」 『동아일보』 19641013

「횡설수설-국전 사진부 이해선 심사위원 사퇴」 『동아일보』 19641014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중요한 내용middot형식 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1020

「열띤 감정으로 충만-창협 창립 사진전」 『동아일보』 1965119

「한국국제사진살롱 위원 명단」 『동아일보』 1965116

「동아국제사진살롱 심사평-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28

「제4회 사진동우회전」 『동아일보』 1966121

「동아사진살롱 심사평-총 801 응모」 『동아일보』 196729

「위원장에 이종우 씨 국전심사위원 위촉」 『동아일보』 1967920

「국전심사위원장 도상봉 씨 선출」 『경향신문』 1968919

「석우회(石友會)서 돌 전람회」 『동아일보』 1970428

「예술인에 훈장 이해랑 씨 등 9명」 『경향신문』 1972118

「외길 한평생 lt11gt 사진middot예술 이해선」 『선데이서울』 1973318

「현역 원로 작가 초대전 일제하의 침울이긴 예술자세 생생하게」 『경향신문』

1974831

「이해선 씨 작품전 향토풍물 50점 전시」 『동아일보』 19741118

「이해선 사진전」 『경향신문』 19741119

「이해선 사진 작품전 24일까지 신문회관」 『매일경제』 19741121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423

「국전운영위원 위촉」 『동아일보』 1976317

「국전사진부문 사단중진들 반발」 『동아일보』 1976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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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_______ 「고궁풍물(3)」 『포토그라피』 1971년 3월호

_______ 「고궁풍물(4)」 『포토그라피』 1971년 4월호

_______ 「고궁풍물(5)」 『포토그라피』 1971년 5월호

_______ 「고궁풍물(6)」 『포토그라피』 1971년 6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7)」 『포토그라피』 1971년 7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8)」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포토그라피 창간5주년에 붙여서」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9)」 『포토그라피』 1971년 9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0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1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2)」 『포토그라피』 1971년 12월호

「제2회 사진국전마감 심사위원결정」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이해선 「이해선 떡에 얽힌 시속(時俗)의 금석(今昔) 옛떡이 사라져 간다는데」

『월간 중앙』 1973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1)」 『포토그라피』 1973년 8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2)」 『포토그라피』 1973년 9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0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6)」 『포토그라피』 1974년 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7)」 『포토그라피』 1974년 3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8)」 『포토그라피』 1974년 4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9)」 『포토그라피』 1974년 5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끝)」 『포토그라피』 1974년 6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 『포토그라피』 1974년 7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2)」 『포토그라피』 1974년 8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3)」 『포토그라피』 1974년 9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4)」 『포토그라피』 1974년 10월호

_______ 「작가와 작품-풍물백태 중에서」 『포토그라피』 1974년 1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6)」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7)」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8)」 『포토그라피』 1975년 3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9)」 『포토그라피』 1975년 4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0)」 『포토그라피』 1975년 5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1)」 『포토그라피』 1975년 6월호

_______ 「곡필무사(曲筆誣事)를 밝힌다」 『월간 중앙』 1975년 11월호

「영상 창간 1주년 기념 좌담회 한국 사진 산업의 의 오늘과 내일」 『영상』 1976년 6월호

「국전 초대작가 8인선 김조현 이건중 이경모 이해선 임응식 이형록 정인선

조현두」 『영상』 1977년 1월호

「남기고 싶은 작품 3 이해선」 『영상』 1977년 5월호

「예술사진에 대한 견고한 확신 이해선 사진의 예술성」 『영상』 1978년 5월호

「한국현대미술대전」 『영상』 1978년 10월호

이명동 「처음 제정된 사진문화상에의 기대」 『영상』 1979년 2월호

「행사 백오 이해선 선생의 사진작품집 출판기념회」 『영상』 1981년 2월호

「작품집 소개 이해선 작품집 중에서」 『영상』 1981년 4월호

박재능 「다양한 자기 세계의 길」 『영상』 1981년 12월호

「영상방담-사단의 이 얘기 저 얘기 김정래 임석제」 『영상』 1982년 1월호

「이미지의 합창-봄의 첫 장」 『영상』 1982년 4월호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 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호

岩宮武二 「너 어디 있느냐」 『영상』 1983년 1월호

최인진 「1930년대의 아마츄어 사진활동」 『사진사연구』 통권 제5호 1983년 9월호

박재능 「월평-원로 이해선 선생을 추모한다」 『영상』 1983년 12월호

「한국 근대미술의 발자취」 『계간미술』 중앙일보사 1985년 봄호

「다시 보는 명작 정도선 정인선 신현국 강대환 김일창 이해선」 『영상』 1986년 10월호

「고 백오 이해선 선생 추모비 건립」 『영상』 1989년 1월호

「동경 유학생들의 한국 근대미술」 『월간미술』 1989년 9월호

「화보로 보는 한국 동경 유학생들의 자화상」 『미술세계』 1993년 5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조선총독부 관보』 제4087호(192647) 한국학문헌연구소 서울 아세아문화사 1926

이태현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1집 서

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2

_______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 자화상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3집 서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4

신명호 「일제하 이왕직과 이왕가 족보」 『한국학대학원논문집』 제11집 한국정신문화

연구소 1996

최인진 「한국사진 역사의 증인(4) - 사단의 단체 활동과 이해선」 『한국사진』 2002

이가라시 코이치 이중희 역 「조선미술전람회의 창설과 서화」 『한국근대미술사학』

제12집 한국근대미술사학회 2004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의 입학제도와 조선인 유학생」 『동악미술사』 제6호 2005

허보윤 「미술로서의 디자인 이순석의 1946-1959년 응용미술교육」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단행본

조우석 『한국사진가론』 눈빛 1998

작품집 도록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1926

이해선 『이해선 사진작품집』 평화당 1980

_______ 『한국의 고궁』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0

Tucker Anne Iizawa Kotaro Kinoshita Naoyuki The History of

Japanese Photography London YaleUniversityPress 2003

이해선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남은 1950-60년대』 눈빛 2005

_______ 『이해선 사진집 1950~1960년대 이야기』 동강사진박물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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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7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일간지

「부산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24531

「성공을 기대 조선사진연구회 현일영 씨 담」 『조선중앙일보』 1936826

「경성아마사진구락부 제1회전」 『조선일보』 1938417

「사진작품전」 『동아일보』 19381014

「경성사진동호회 작품전람회개최」 『조선일보』 19381027

「사진동호회작품전」 『동아일보』 1938112

「경성아마추어 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39527

「아마추어 사진인화전」 『매일신보』 19391115

「동서남북-lsquo아마추어rsquo 제4회 인화전람회」 『동아일보』 19391115

「동서남북-합동인화전」 『동아일보』 1940126

「아마추어 사진의 인화전」 『매일신보』 194074

「경성아마츄어 제5회 인화전」 『조선일보』 194075

「경성백양사우회 제1회 인화전람회 개최」 『매일신보』 19401113

「제2회 사진전 명일부터 화신에서-백양사우회」 『매일신보』 19411124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55

「사진작품전」 『조선일보』 1946119

「전국문화총연발족」 『동아일보』 194729

「제1회 조선사진예술전」 『경향신문』 19475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7510

「사진전람회개최」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전응모작 답지」 『경향신문』 1947615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 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629

「제1회예술사진전람회 15일부터 동화백화점」 『경향신문』 1947713

「예술사진 입선 수상식을 거행」 『경향신문』 1947720

「예술사진전 19일부터」 『동아일보』 1947121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8224

「사예(寫藝) 2회전 작품을 현상모집」 『경향신문』 19481013

「예술사진전 심사 오는 8일로 연기」 『동아일보』 1948127

「지방출품우수-제2회 예사전」 『동아일보』 19481212

「사진예술전 22일부터 동화화랑서」 『동아일보』 19481221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964

「전국종합사진전 심사결과-특선1석 최인집 씨」 『동아일보』 194977

「사진예술의 정화-제3회 전국예술사진전」 『경향신문』 19491010

「예술사진전 30일로 마감박도」 『경향신문』 19491128

「예술사진전 입선자 발표」 『경향신문』 19491213

「예술사진전시회」 『동아일보』 195316

「춘계사진섭영회 26일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3

「본사후원 춘계촬영대회 오늘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6

「사진현상모집」 『경향신문』 1953517

「특선에 lt만춘gt」 『경향신문』 1953527

「인화 당선자 수여식」 『경향신문』 1953529

「사진작품발표전」 『경향신문』 1954413

「예술사진전시회 US-S화랑서」 『동아일보』 1954415

「집회」 『동아일보』 1954916

「경복궁서 촬영대회」 『경향신문』 1954919

「내 26일 촬영대회 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4922

「사연 촬영대회 여감(餘感) 아마추어 사진도(寫眞道)」 『동아일보』 1954103

「문화집합」 『동아일보』 1955122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77

「사연(寫硏) 창립 10주년 기념 어제 촬영대회 성황」 『동아일보』 1955711

「촬영대회 입선작 결정」 『동아일보』 1955819

「8인 사진전 개최」 『동아일보』 1956329

「9회 사연(寫硏)전」 『동아일보』 1957414

「신록촬영대회 개최 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62

「대한사진예술가협회서 사진전시회 개최」 『동아일보』 1958711

「10년 후의 우리 문화 건국 20주년을 장식하고 싶은 것」 『동아일보』 1958821

「사진예술가협회 11회 회원작품전」 『동아일보』 195979

「문화 소식」 『동아일보』 1960119

「국전에 사진부문도」 『동아일보』 1963410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결정 특선 조천용 작」 『동아일보』 19641020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653

「렌즈의 향연 영예의 초점-제4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동아일보』 196667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61217

「사진예술가협회전」 『동아일보』 19681022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9830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996

「국립공보관 12월 전시회 스케쥴」 『경향신문』 1971126

「문화단신」 『경향신문』 19721128

「사진예술협 작품전 7일까지 공보관서」 『매일경제』 1973111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에 안준천 씨」 『경향신문』 197526

「동아포우스트」 『동아일보』 19751117

「사진예술가협회 창립30돌 기념전」 『경향신문』 19751118

「추계 친목 촬영대회」 『매일경제』 197610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7830

「사진예술가협 정총(定總) 31일 하오 대동관서」 『매일경제』 19781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81031

「문화광장」 『동아일보』 1993121

「한국사진예술 50년을 펼친다」 『한겨례』 1994111

「사진예술가협 사라진 풍물전」 『서울신문』 20051025

월간지 계간지

「사진클럽 지상소개 대한사협의 발자취」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박필호 「논단 대한사협16회전을 보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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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대한사협 16회전」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사협 16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8년 7월호

「대한사협 충남지부 회원전」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경축 창간 3주년 사진과 관광 포토그라피-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대한사협 18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제18회 대한사협전」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 작품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70년 3월호

「축 창간4주년 서울 선데이 카메라 클럽」 『포토그라피』 1970년 8월호

「축 포토그라피 창간 5주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김종양 씨 대한사협 고문 추대」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3년 3월호

「lt파도gt 김도현 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신춘초대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근하신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75년도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창작선」 『영상』 1977년 1월호

「전시장 순례 대한사진협회 회원전」 『영상』 1977년 11월호

「지상소개-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대한사협 제27회 정기총회 개최」 『영상』 1979년 7월호

박필호 「대한사협 27돐에 대한 축사」 『영상』 1979년 7월호

「제26회 대한사협전」 『영상』 1980년 1월호

「제27회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사진전시회」 『영상』 1980년 12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요강」 『영상』 1981년 5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영상』 1981년 10월호

「탐방-뜻이 있으면 길이 있게 마련 세 번째 전국대학사진 공모전을 연 대한사협충

남지회의 단합된 모습」 『영상』 1983년 1월호

「제3회 전국대학생사진 공모 제12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월호

「제13회 대한사협 충남 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2월호

최인진 「경성아마츄어카메라구락부를 말한다」 『사진사연구』 1984년 7월호

「대한사협본부 주최 제9회 한국국제사진전 입상자」 『영상』 1989년 1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대한민국예술원 편 『한국예술총감 자료편』 대한민국예술원 1965

한국사진협회 「사진계소식 1969년도」 『한국사진연감』 1970

_____________「한국사진협회의 연혁 1976년 10월 30일」 『한국사진연감』 1976

임범택 「사진」 『1977년도 문예연감』 1978

______ 「사진」 『1978년도 문예연감』 1979

한국사진협회 「역대역원명단(歷代役員名單) 1962년~1987년」 『한국사진연감』

1988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제1장 한국사진협회 창립 이전의 사진계 동향」 『한국사협

사 I 1945-1970』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01

최인진 「해방 초기의 사진잡지 연구-『국제보도』와 『사진문화』를 중심으로」 『한국

사진학회지 AURA』 제10호 2003

박혜성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사진문화』 목록 및 해제」 『한국 사진 잡지

『사진문화』 연구』 명지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한국사협 50년사』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13

단행본

임응식 『내가 걸어온 한국사단 임응식 회고록』 눈빛 1999

작품집 도록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제16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7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8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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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9

원 문 자 료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년 10월 29일 4면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년 4월 17일 4면

1 이해선 양화기(洋畵期) 관련 참고 자료

「입선자의 방명록」『매일신보』 1926년 5월 12일 3면

「금조 개장한 동미전 제2회」『동아일보』 1931년 4월 12일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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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참고 자료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년 5월 5일 2면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년 6월 29일 3면

「신록촬영대회개최-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년 6월 2일 4면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년 7월 7일 4면

예술사진전 조선사진예술연구회에서는 5월 6일부터 동11일까지의 6일간에 걸쳐 동화백화점(舊三越) 갸라리--에서 창립기념사진전을 개최하기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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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해선 관련 원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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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하였고 일부 [ ] 안에 병기했다 원문의 한자는 모두 한글 독음으로 고쳤으며 의미 전달을 위해 필요한 경우 ( )안에 병기했다

「대담 아마추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 pp 48~52

작가가 사태(沙汰)났어

본지 공사간에 바쁘실 텐데helliphellip 사진문화의 발전을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

해 주십사 하는 것은helliphellip 요즘 각 직장이나 학생들 간에 사진열이 굉장히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 비

추어서 이 아마추어 카메라맨의 지도 문제를 비롯하여 초보자의 진로랄까helliphellip 이런 문제에 대한 말

씀을 좀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해선6middot25 동란 후에 개인적으로 사진을 연구해 보겠다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직장이나 학교 단위로

사진동호자의 클럽이 많아 지고 작품 발표라던가 전시회 같은 것이 무척 많아졌는데helliphellip 어쨌든

일반 사회인이나 학생 간에 사진열이 높아졌다는 건 기쁜 일이야

임응식그런데 아직도 이 카메라를 사치품으로 취급하는 층이 많아서 곤란해요

이 나라(정부)에서부터 사치품 취급을 하더군helliphellip 여자들이 다이아몬드를 사려는 것과 사진을 연구하

려는 사람이 카메라 장만하는 것을 똑같이 취급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곤란

하지

임 헌데 우리 사단(寫壇)에선 우선 lsquo사진작가rsquo라는 용어를 쓰는 데에 신중을 기해야 하겠어요 웬 놈의

lsquo사진작가rsquo가 그리도 많은지helliphellip 이건 카메라만 메고 다니면 모두 작가 행세를 하니helliphellip

이 카메라 멘 것이 모두 lsquo작가rsquo라면 대한민국에 lsquo사진작가rsquo가 수 십만도 될 걸helliphellip 작가라는 친구들을

체에 넣어서 걸러 놓으면 엄격한 의미에서 진짜 lsquo작가rsquo는 몇 사람 밖에 없을 텐데helliphellip

임 호주머니에 만년필을 꽂았다고 해서 문학가 혹은 소설가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겠는데hellip

hellip 어쨌든 요즘 성행하는 사진작가의 사태를 우선 잡지에서 만이라도 용어 사용에 엄격한 규정을

지어서 질서를 잡아 주어야겠어요

이 그것도 과도기적 현상이겠으니까 차차 지양되겠지helliphellip 오늘 해달라는 얘기는 그런 넋두리가 아닐

테니까 어디 이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본지 한마디로 얘기하자면helliphellip 카메라는 어떻게 해서 장만을 했는데 mdash 자 그 다음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겐지 몰라서 어쩔 줄 모르는helliphellip 이런 아마추어와 초보자들의 진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얘기를

좀helliphellip 현재 직장 단위로 사진 동호자들이 모여서 클럽을 이룩한 것이 십 여 개 있고 학교 단위로는

이십 여 개나 되는데요helliphellip

관련 자료 소개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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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인식이 안이해서 탈이야

이 극히 초보적인 입장에서 사진을 해보고 싶다helliphellip 다년간 연구를 한 다음엔 작가가 돼 보겠다 mdash 하

는 사람들을 회원으로 해서 수 십 년 동안 연구를 해 왔는데helliphellip 오늘날 하고 있는 일도 그것이지만

helliphellip 여러 부문에 걸쳐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서적인 면에서 사진과 친해보고 싶다던가

또는 카메라를 장만했는데 어떻게 하면 앞으로 향상 발전할 수 있는가 mdash 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신인이라고 하겠지 특히 학생들의 교내 활동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helliphellip 헌데 막상 다다

르고 보면helliphellip 어떠한 길이 올바른 길인지 막연해 하는 모양이더군요

임 초보자들은 무엇보다도 사진 자체에 대한 정의를 뚜렷이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아마추어 mdash

하면 취미적 입장에서 사진을 다루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조각이나 회화와 같이 사진도 어엿한 예술이니

까 취미 도락(道樂)적인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예술을 추구하는 진지한 마음의 준비가 우선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물론이죠 대개 클럽 조직이 되어 있으니까 선생들의 지도를 받고 있겠지만 내가 알기에는 전문가

가 아닌 다시 말하면 취미 정도에서 관심이 있는 선생들이 지도를 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역시 전문으

로 사진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지도를 가끔씩이라도 받는 게 좋겠지요

임 지도를 한다는 사람들의 태도부터가 성실성이 없는 것 같아요 만년필을 샀으니까 나도 한 번 써 보

자 mdash 해서 작가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취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남의 lsquo지도rsquo를 담당

할 수는 없을 텐데 mdash 우리가 사진을 전공한대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억지로 지도해 주겠다고 밀고

들어 가겠다는 건 아니지만 mdash (웃음) mdash 어쨌든 전문가의 지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학생 클럽이나 직장 클럽 같은 동호자의 모임을 사단의 일부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취미

에서 시작했더라도 일정한 과정을 밟고 다년 연구를 거듭하면 자연히 작가를 지향하게 되겠지만hellip

hellip 그런 면에서도 처음 싹트기 시작하는 신인의 지도가 퍽 중요한 것이지요

취미middot도락이란 관념을 버려야 해

임 지금 형성되어 있다는 직장이나 학교 단체의 거의 전부가 전문적인 입장에 서 있지 않은 것 같더군

요helliphellip 사진에 대한 근본 의식이 너무도 안이한 것 같아요 카메라를 통한 표현의식에 절실한 감정

이 없어요helliphellip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비판을 받지 않는다helliphellip 하는 따위의 도피를 해서는 곤란

하죠helliphellip 창작의식이 확고하게 수립되지 않아서는 향상이 없는 것인데helliphellip 소문에 듣자면helliphellip 너

무 기술 면에만 치중하고 정신적인 면이 소홀히 취급된다는 거에요 helliphellip 나는 직장을 갖고 있으니

까 사진이란 것은 취미 정도로 한다 mdash 하는 태도를 버려야죠 특히 이 점은 지도자들에게 권하고 싶

은데helliphellip 예술의식helliphellip 이것이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절대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까

이 그렇구 말구요helliphellip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새로 사진을 공부하겠다는 신인들에게 네 가지 의식을 주

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휴머니즘 mdash 우선 사람이 돼야 하거든요 교양이라던가 인격 덕망helliphellip 이런 면에서 인간이

돼 있어야 하고 둘째는 사진예술을 한다고 해서 사진예술이 무엇이냐helliphellip 이것만을 추궁해서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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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요 좀 더 시야를 넓혀서 예술이라는 게 뭐냐 mdash 하는 걸 먼저 알아야지 셋째에 가서 사진예술이

라는 게 뭐냐 mdash 를 연구하고 넷째에 가서야 비로소 작품이라던가 창작의식 기교 기술에 대한 검

토를 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기본조건을 머리 속에 언제나 간직하도록 나는 주장해 왔어요

임 기술면을 등한히 할 수는 없겠지요 기술 없이는 표현이 안되니까helliphellip 그러나 이선생 말씀처럼 인

간본연의 문제도 크긴 큽니다 다른 예술부문의 사람보다 교양면에서 뒤떨어지지나 않는가 mdash 하는

것이 항상 염려되는데helliphellip 만일 뒤떨어진다면 큰일이지요 기술도 중요한 문제겠지만 교양인격 같

은 것도 예술가가로서의 긍지를 위해선 떨어질 수 없는 문제고helliphellip 더욱이 좋은 기술을 가졌으면서

도 기초교양이 모자라서 좋은 작품을 낼 수 없다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으니까helliphellip 교양인으로서의

자격도 다른 예술부문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사진을 해야할겝니다

이 기교나 기술을 어떻게 우물쭈물 배웠다고 해서 작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helliphellip 예술이란 그 자체

에 대한 조예부터 깊어야 합니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조리개가 얼마다 타임이 어

떻다helliphellip 암실작업은 어떻게 하는 거다helliphellip 이것만을 알았다고 해서 작가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에

요helliphellip 인간면 예술면 기술면에 똑 같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마 사진을 연구하겠다는 신

인들의 기본이념이 돼야 할겝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지도한다는 면에서

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거든요 mdash

임 어쨌든 기술을 위주로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난 옛날 얘기입니다

지도자 시비

이 지났다기 보다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는 장래에나 변할 수 없는 기본이념이겠지요 사진이라는 것

은 더욱이나 고도의 대중성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인격과 교양이 필요해요 기계라는 거야 찍으면

사진이 되도록 마련된 것이니까 예술까지는 못 가도 사진은 되거든 mdash 그러니까 그것을 예술로 이

끌려면 찍는 사람의 성분이 문제되는 것이지요helliphellip

임 그런 의미에서도 사단의 규정이 필요하고 작가라는 규정이 필요해요 사단이라는 것에 너무 엄격한

규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helliphellip 만년필을 가졌다고 해서 전부 문학가가 아니라면helliphellip 카메라를 메었

으니 작가다 mdash 하는 엉터리도 용납될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우선 필요한 것은 취미 도락이라는 관념

을 지양해야 할 텐데helliphellip

이 취미가 차차 심각해지면 창작의식도 생기는게니까helliphellip 그런 사람들을 지도 계몽해서 한 사람이라

도 작가로 이끌어야 하겠지요helliphellip 카메라를 살 때부터 나는 사진작가가 되겠다 mdash 하는 사람은 있

을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임 lsquo싼데이rsquo 카메라맨은 논의의 대상이 안되구요helliphellip (웃음)

이 그러니까 지도자들이 작가적인 태도에 확고한 이념을 앞세우고 지도에 임해야 하는 건데helliphellip

본지 각 단체 지도층의 지도방침에 대한 구체적인 태도를 어떻게 규정하겠습니까 helliphellip

임 우선 사진에 대한 인식부터 고쳐야 해요 말이 중복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친구 좋고 사진 좋아서 우리

끼리 하면 그만이다 mdash 하는 생각들이 많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만이라도 그렇지 않다

관련 자료 소개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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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싶어요 학생들이 카메라를 사 가지고 몇 사람 모였으니까 책임자 격

인 선생이 필요하다 mdash 해서 책임 맡았다는 사람으로는 지도가 안 될 게 아닙니까 그렇다고 청해 오

지도 않는데 내정 격으로 뛰어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구helliphellip (웃음)

본지 또 한 가지 요즘 일대 성황을 이루는 것이 소위 현상사진(懸賞寫眞)이라는 건데요helliphellip 이 현상사진

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진에 대한 모욕도 있지helliphellip

임 거 참 꼴사나운 일이 많아요 현상이란 걸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helliphellip 그 하나는 어느 연구

단체에서 순수한 의미에서 발표 바탕이 없는 아마추어를 위해 마련하는 경우가 있을게고 또 하나는

선전용으로 포스터 mdash 같은 데에 써먹기 위한 상업 정책적인 의식에서 모집하는 현상이 있을 테지요

이 어느 경우이건 간에 좌우간 현상 모집을 하는 목적이 있는데helliphellip 응모자는 우선 현상의 목적부터 확

실히 알고 응모를 해야 하겠지helliphellip

임 그렇죠 그런데 이 상업 정책적인 현상의 경우에는 사진문화에 대한 모욕적인 행동이 퍽 많습니다

이거 참 불유쾌한 일이지만helliphellip 가령 예를 들자면 응모자는 원판을 제공하라던가 또 낙선자의 작

품은 일체 반환치 않는다는 따위helliphellip이게 얼마나 사진예술에 대한 모욕적 행위입니까 helliphellip

이 그래요helliphellip 확실히 모순된 일입니다

임 필요에 의해서 현상모집을 했으니까 당선된 작품은 물론 필요하겠지만helliphellip 낙선작품을 반환치 않는

다는 것은 언어도단 입니다 낙선이 됐다 해도 작가의 입장으론 대단히 귀중한 하나의 작품일 텐데

그걸 안 돌려 준대서야 말이 되나요 주최측은 낙선작품의 원화를 돌려 줄만한 성의를 가져야 도리

에 맞을 텐데helliphellip 요즘 현실은 lsquo낙선rsquo이란 푸대접 밑에 원판까지 몰수당하는 판국이니helliphellip 원 참

이 그러니까 응모자는 무엇보다도 현상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지helliphellip 여러 번 겪은 일이지만 심사를

하다 보면 전혀 현상 취지를 도외시한 작품들이 있는데helliphellip

임 그거야 보나마나 낙선이죠 (웃음)

이 그러믄요 현상 응모자로서는 출품 규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 아니겠어요

임 그럼요

이 그런데 어떤 것은 작품에 제목도 없는 것이 있거든요 그런가 하면 제목과 작품내용이 전혀 특이한

엉터리도 있구helliphellip

임 저도 여러 번 겪은 일입니다

이 제목이란 것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벌써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찍는다는 의식이 있는 이상

제목도 정해져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아주 작품과 제목이 동떨어진 것들이 응모해 오니까

낙선의 자격이 충분할 수밖에helliphellip 하하하 (웃음)

임 그게 모두 사진에 대한 성의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이 그래요 성의가 없어요 자기 작품에 대해선 최선의 성의를 다 해야 할 텐데 그런 태도가 없거든helliphellip

제목을 안 썼는지 못 썼는지는 모르지만helliphel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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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그저 무턱대고 발표의식만 왕성한 까닭이 아닐까요

이 그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된 작가가 아닌 이상 발표기회가 좀처럼 없을 테니까

자기 실력의 평가를 받는다던가 남들과 경쟁해 본다는 의미에서 현상에 자주 응모하는 것은 좋은데

helliphellip 아 어떤 친구는 자기 실력 생각은 하지도 않고 상품이 적다 많다 시비를 하는 친구도 있으니 참

기가 막힐 일이지

주최자의 무성의도 고쳐져야 하고

임 그건 lsquo현상rsquo이라고 내거는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순수한 사진연구단체에서 모집할 때는

lsquo공모전rsquo이라던가 하는 문구가 좋지 않을까요 lsquo현상rsquo이라니까 lsquo상rsquo을 바라게도 되겠지만 어쨌든

lsquo현상rsquo이란 말 자체가 순수하지 못해요

이 그건 확실히 생각해 볼 문제이겠군요helliphellip 순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helliphellip 응모자들이 심

사원이 누구냐mdash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도 순수하지 못하고helliphellip 또 주최자가 모집광고를 낼 때

lsquo심사원은 추후발표rsquo라mdash하는 것도 순수하지 못해요 이것도 참 불쾌한 일인데 lsquo추후발표rsquo라는 걸

다시 생각하면 lsquo준비가 안됐다rsquo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심사원의 준비도 안 해 놓고 현상을 모

집하는 그런 무성의가 또 어디 있어helliphellip 이건 일종의 사기가 아니면 거만일 겝니다

임 그나 그뿐인가요 lsquo심사원은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함rsquohelliphellip 하는 모호한 광고도 있지요 응모자의 입

장에서 생각하면helliphellip 심사원에 불만이 있으면 응모를 아니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 심사원 문제만

은 정정당당히 명시해야만 나중에 가서 심사에 대한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출품을 한 다음에 심사

원이 발표된다는 것은 심사에 대한 불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helliphellip

이 그리고 응모자의 동태를 가만히 보면 아까 얘기가 나왔던 소위 lsquo취미정도rsquo라는 층의 발표 의욕이 굉

장해서 대부분의 응모자가 이 부류인 것 같은데helliphellip 여기 한 가지 탈이 있어요 현상응모 작품의 심

사라는 것은 무제한의 심사 레벨을 놓고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응모 작품 중에서의 우수 작품을 가

려낸다는 것은 이거 상식 문제가 아닙니다

임 그렇죠

이 아 그런데 어떻게 해서 현상에 당선이 되거나 특히 특선이라도 하면 그만 자기가 갑자기 위대한

작가라도 된 것처럼 대가연(大家然) 하고 으쓱대는 친구들이 많아서 걱정이야helliphellip (웃음)

이 lsquo특선rsquo이라는 것은 응모해 온 작품들 중에서 특선이지 결코 한국 사단 전체의 수준에서 특선이라

는 것은 아닌데helliphellip 그만 한 번만 당선되면 코가 높아지고 대뜸 대가 행세를 하려고 드니helliphellip 참

신인들은 특히 조심해야 할 일이지

남의 것보고hellip 우리 것도 보내고hellip

본지 이제 화제를 좀 바꾸어서 세계사단의 동향을 좀 말씀해 주실까요

임 세계사단의 얘기라면 직접 보아야만 얘기가 될 텐데helliphellip

이 서울 바닥에서 썩으면서 세계사단의 얘기를 어떻게 본 듯이 할 수가 있겠나 카메라를 메고 세계일

관련 자료 소개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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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도 했어야 얘기가 되지

임 그것보다도 사진을 통한 국제 교류 얘기나 합시다

이 그게 좋겠군helliphellip 얼마 전에 덕수궁에서 자유중국의 소개사진전시가 있었죠 미국공보원의 활동도

이를 테면 국제교류의 한 형식일게고helliphellip

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자유중국과 월남의 사진전시가 있었는데helliphellip 우리도 수출을 한다면 그 보

다 훨씬 좋은 작품들이 나갈걸요helliphellip

이 한미합동전이던가 한중합동전 같은 것도 하면 역시 국제교류가 되겠지요helliphellip

임 한미합동전은 불원한 장래에 개최될 것입니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lsquo인간일가(人間一家)rsquo의 사진

이 아마 이월쯤 한국에 올 겝니다 미국대사관이 주동이 돼서 작품 503점 전부의 전시회 계획이 추

진되고 있으니까요

이 남이 보내줘서 본 것은 있지만 우리가 남에게 보여준 것은 없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야 우리도 남에

게 보여줘야 교류가 될 텐데helliphellip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두 사람의 작품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임 개인적인 활동은 있었지요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사진살롱에 사진을 보내고 있으니까 개인

적으로는 더러 나간 셈이죠 개인들의 수출이라도 좀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지만

이 우리의 것을 내보내고 외국 것을 들여와서 서로 감상하고 연구하는 게 이를 테면 국제교류인데

아마 명년쯤엔 될까 몰라

임 작품교환전 같은 것을 위해서 대대적인 계몽운동이 필요 하겠죠

이 그렇죠 운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어요

임 그런데 근본적인 얘기를 하자면 한국 작가의 역량이 아직도 부족한 것 같아요 언젠가 외국 작가에

게서 들은 말인데mdash한국 사람은 한국을 보지 않았다mdash하는 얘길 해요 사진 작가에게 대한 말이지

만helliphellip 나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이 퍽 중요한 얘기다mdash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를 직시하는 것만이

사진은 아니겠지만 실용사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것이 사실 아닐까요 회화적인 쌀롱 픽처라던

가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리얼리즘 사진이라는 것에 너무들 치우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 국제 교류의 시발은 역시 소개적(紹介的)인 것 다시 말해서 르포르타주적인 것이겠으니까helliphellip

임 외국 작품의 모방 같은 것은 이제 집어치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mdash예술적인 것 이것만을 너무 추

구했기 때문에 사실이 한국적인 것과 국민성의 묘사 같은 것이 잘 되지 않았지요 정서적인 것에만

너무 골몰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일이고 helliphellip 예술을 위한 예술에 정신들이 팔려 있었지나 않은

지helliphellip 예술을 하기 위한 사진이라는 관념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이 예술을 염두에 안 둔다면 실용사진이 돼 버리게

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너무 치우친 것 같단 말입니다

이 특히 국제 교류를 생각한다면 아닌 게 아니라 외국처럼 르포르타주적인 사진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할거에요

임 그래요 거기에 예술성을 띄워서 소화할 만한 역량 있는 작가가 필요해요

이 또 하나의 가장 큰 문제는 위정자의 관심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 큰 난관입니다 국제 교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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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가족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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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말이고 역시 정부당국자의 적극적인 주

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어디 그래요

임 우선 사단 자체의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작가들의 작업도 촉구되어야 하구helliphellip 아까도 말이 나왔지

만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 출품을 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점 같은데서 작가들의 반성도 필

요하고helliphellip

이 개별적으로 미국 등지에 보낸 것은 아마 상당한 수가 되겠지요

임 그럼요 그랬는데 왜 성과가 없느냐mdash하는 반성이 있어야죠

이 오늘의 현실을 예술적인 면에서 기록하고 작품화 해야겠는데helliphellip 막연하게 예술을 위한 작품을 보

내니까 기교적으론 훌륭할지 몰라도 작품 자체에 내용이 없어서helliphellip 그래서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닐

임 그런 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빨리 우리의 수준을 높여서 국제 조류와 호흡을 맞추어 나가

야 할 것입니다

이 이거 아마추어를 위한 얘기라는 것이 잠깐 탈선을 한 것 같군 그러나 이런 문제도 참고가 되긴 하니

까helliphellip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합시다

본지 수고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helliphellip

(기록 O기자)

이해선 「lsquo백오(白烏)rsquo의 변(辯)」 『동아일보』 1957년 4월 9일 4면

30여년 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입학

이 되었을 당시 자축기념하는 의미에서 호(號)를

하나 지어본 것이 백오(白烏)라는 두 글자였다 처

음 듣는 사람들 중에서는 거문[검은] 까마귀는 있

지만 흰 까마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서로 웃어버리고 그 뜻을

설명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자의

(字意)를 해명해볼까 한다 백(白)은 흰 빛이요 오

(烏)는 흑색으로 통하므로 우선 흑백을 대조시켜

놓고 흰 종이 위에다 검은 먹으로 휘호(揮毫)할 것

이니 그 뜻이 내 생활과 부합될 것 같으며 둘째로

백 자(字)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첫 자를 떼어놓

고 오는 반포오(反哺烏)로 그 이름이 높은 새이므

로 평소에 효자 노릇을 못하여 온 나의 좌우명으로도 적당할 듯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새 중에서는

혹간(或間) 백변종(白變種)이 생겨나는 수가 있는데 그 흰새를 서조(瑞鳥)라고 떠들던 옛 시절도 있었으므

관련 자료 소개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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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내가 우연히 호를 지어 본 것이 검은 까마귀떼 속에서 서조 백오를 발견하였으니 나의 전도(前途)에는

반드시 서광(瑞光)이 비칠 것 같으므로 이상 여러 가지 의미를 차례로 생각해 볼 때에 나에게는 이 외에 더

좋은 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자의였었고 궁금한채로 불려온 백오

였었다 만담궁변(漫談窮辯)을 물소물책(勿笑勿責) 하소서 (사진가)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

이해선 「중요한 내용middot형식-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년 10월 20일 5면

사진작품에는 사진 특유의 형식이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러한 특유의 형식에 알맞은 표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의 특수성은 형식이 가지는 특수성 보다는

기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주관적이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작품심사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동일하게 중요시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작

품 속에서 그야말로 형식과 내용이 알맞게 부합된 특출한 작

품을 볼 수는 없었다 형식이 좋으면 내용이 빈약하고 좀 내

용이 있으면 형식이 미숙하고helliphellip 모두 결점이 있다 그러나

입상작으로 뽑은 8 점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

다 그리고 금년에는 lsquo칼러rsquo사진의 응모 점수가 30점이나 되

고 그중에서도 3점이 입상되었고 또 9점이 입선되었다는 것

은 lsquo칼러rsquo 사진의 앞날을 위해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lt전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장gt

[제1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년 2월 8일 5면

외국작품의 세련되고 빈틈없는 lsquo테크닉rsquo은 국내작품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서 우선 국내

작품을 형식에서부터 누르고 말았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이루게 된 것은 국내작가들

의 역량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lsquo국산인화지rsquo가 얼마나 엉터리고 조악한 것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대체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더욱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은 이와 반대적인 경향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예술이든 먼저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볼 때 국내작품의 후진성은

두말할 것 없이 형식의 경시에 있다고 하겠다 심사결과 흑백부에서나 lsquo칼라rsquo부에서 겨우 동상으로 한 점

씩 밖에 국내작품이 입상되지 못했다는 것은 다소 섭섭한 느낌이나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경종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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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더욱 우리 심사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독에서 응모한 lsquo칼라rsquo

작품이었다 물체의 외관 색감을 초월한 내면의 lsquo이미지rsquo가 발

산하는 짙은 감정의 색감으로 작가의 개성과 사상을 인상 깊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내 lsquo칼라라보rsquo의 후진

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상작으로 뽑힌 외국작품들은 오

늘의 세계 사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는 큰 자극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

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제2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총 818점 응모-사진예술에 도움」

『동아일보』 1967년 2월 9일 4면

지난해와 같이 흑백부문에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들은 모두가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산인화지의 조악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작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올해는 흑백

부문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기꺼운 일이라고

하겠다

특히 칼라작품에 있어서는 독일의 작품들이 특출했고 이들 작품들의 색감은 현대 과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 최고상으로 뽑힌 lt잊은 친구gt와 몇 점의 입상작품들은 칼라릴리프와 소라리

세이숀[솔라리제이션] 등의 수법으로써 모티

브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를 초객체적이고 추

상적으로 표현하고 작가의 짙은 개성과 사상

과 철학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입상작으로 뽑은 16점의 작품들은 오늘의

세계사단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

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심사위원 이해선 (위원장) 임응식 서순삼

박필호 안월산 정인성 최경덕 (이상 7명)

관련 자료 소개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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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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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관련 자료 소개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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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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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관련 자료 소개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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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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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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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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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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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관련 자료 소개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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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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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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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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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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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8: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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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영상』)

제33차 정기총회 개최 대동관 제9대 성두경 회장 연임≪제10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본회 주관-양수리)춘계 촬영대회(양수리)제2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태종대)제3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동학사)≪제1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대전지회 주최)≪제26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영상』)

제34차 정기총회 개최≪제11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 김완기 공로상대전 윤필수)≪제27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영상』)

제주지회 폐쇄

『백오이해선사진집』 출판기념회 예총화랑 (『매일경제』 및 『영상』)

제35차 정기총회 개최 제10대 성두경 회장 연임≪제12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 조임환)≪제28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제2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 대전시민회관 (『영상』)

제36차 정기총회 개최 및 ≪제13회 백오사진상≫ 시상제4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통도사 범어사)제5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갑사 마곡사)≪제3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및 ≪제12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대전시민회관 (『영상』)

≪제29회 대한사협전≫ 국립공보관

제37차 정기총회 개최 제11대 이순흥 회장 취임≪제14회 백오사진상≫ 시상≪제30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제4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13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대전시민회관 (『영상』)

백오 이해선 선생 작고

제38차 정기총회 개최 미성옥≪제15회 백오사진상≫ 시상제6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해운대)제7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관촉사 쌍계사)≪제5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1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39차 정기총회 개최 한일장 제12대 이순흥 회장 연임≪제16회 백오사진상≫ 시상(작품상최진연)충주지회 설립제8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지회 주관-수옥정)제9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속리산)≪제6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2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고문 박필호(면) 김종양(면)

고문 김조현 장남수 안준천 성두경명예회장 이해선 회장 이순흥 부회장 이완섭 김용필 총무 이정훈 이사 안장헌 김완기 박동운 송정웅송주헌 심재욱 송정회감사 서윤석 윤필수

이사 최진연 박명식

81~83년 성두경 한국사진작가협회 부이사장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출처)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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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차 정기총회 개최≪제17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0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미륵사지)≪제7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11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 대둔산 도산계곡)≪제33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1차 정기총회 개최제13대 이순흥 회장 연임≪제18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2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하회마을)≪제8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13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지회 주관-탄금대)≪제34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2차 정기총회 개최 파인 힐≪제19회 백오사진상≫ 시상고창지회 설립제14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을숙도)

『대한사협회보』 복간호(제6호) 발간고 백오 이해선 선생 추모비 건립≪제9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5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3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20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5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고창지회 주관-선운사)

『대한사협회보』 제7호 발간제16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본회주관-용인민속촌)구미지회 설립≪제10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6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4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21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7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신원사)대천지회 설립문화부에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문화가족으로 등록제18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지회 주관-탄금대)≪제11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7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5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22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9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경주일원)≪제38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제12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

제46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23회 백오사진상≫ 시상제20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천-대천해수욕장)≪제39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감사 서윤석(면) 박노택

고문 김조현 이순흥회장 안준천부회장 김용필 안장헌총무 최진연이사 김완기 송주헌 송정회 심재욱 박노택 조창만감사 이정훈 고승웅

이사 송주헌 황응천 원종철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회장 김용필 부회장 이정훈 박노택총무 최진연 이사 안장헌 김완기 정완철 송주헌 심재욱 원종철 박부공황순조 황응천 김태영 감사 송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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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 모란룸≪제24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최진연)고 백오 이해선 선생의 한국사단 발전에 기여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白烏李海善寫眞文化賞)≫ 제정≪제40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한국의 풍물 사진공모전≫ 대한사협 호영출판사 공동주최

제48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1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유동호)원주지회 설립이천지회 설립청주지회 설립≪제41회 대한사협전≫ 코닥포토살롱제21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속리산)

제49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2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황규태)제22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엑스포장)고창지회 폐쇄≪제3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윤주영)≪제42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대한사진술가협회 창립50주년 작품집』 발간

제50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전주지회 설립≪제4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최민식)≪제43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1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대한사협회보』 제8호 발간제23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원주지회 주관-치악산)남원지회 설립≪제44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2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5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강상규)

『대한사협회보』 제9호 발간제24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대청호)대구지회 설립김제지회 설립≪제45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3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6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이순흥)

『대한사협회보』 제10호 발간제25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구지회주관 - 경주OK그린청소년 수련원)≪통일염원 전국사진공모대전 작품전시회≫ 개최(대구지회 주최-대구 동아쇼핑 전시관)≪제7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송기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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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회장 안장헌 부회장 이정훈 김완기총무 송정회 이사 원종철 송주헌 한창동 황순조 박부공 허현 감사 박노택 최진연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자문위원 안장헌 회장 이정훈부회장 김완기 박노택 총무한창동이사 원종철 김완선 이순재 박부공 이광호 이재옥 김광범 양호용감사 황순조 최진연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자문위원 안장헌 이정훈 회장 박노택 부회장 김완기 최진연 총무 이광호이사 박부공 이재옥 윤중일감사 한창동 조창만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 박노택자문위원 안장헌 이정훈회장 김완기부회장 황순조 박부공총무 윤중일이사 김광범 김준영 강승규 김이경감사 한창동 이재옥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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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1

≪제46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원주지회 폐쇄

제54차 정기총회 개최 대림정대한사협사진강좌 개최(연8회) 월례촬영회 개최(연8회)제26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 서울대청호

『대한사협회보』 제11호 발간대한사협 대구지회-중국 연길시 촬영가협회와 자매결연(연길시 청년호텔)원주지회 재설립≪제8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최흥만)≪제47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창립 55주년 기념 『2000대한사협사진집』 발간

제55차 정기총회 개최 대림정대한사협 사진강좌 개최(연8회) 월례촬영회 개최(연5회)정읍지회 창립제27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정읍 내장산)≪제48회 대한사협전≫ 및 CD작품집 제작 예총화랑 제1전시실

제56차 정기총회 개최 사랑채월례촬영회 개최(연4회)제28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서울 남한산성)≪한중 국제교류전≫ 대한사협 대구지회 대구 대덕문화회관≪제49회 대한사협전≫ 및 CD작품집 제작 예총화랑 제1전시실

제57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월례촬영회 개최(연6회)제29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 중앙탑공원)≪제9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김한용)≪제50회 대한사협전≫ 및 2003대한사협작품집(CD작품집) 발간예총화랑1-2전시실

『대한사협회보』 제12호 발간

제58-60차 정기총회 개최제51-53회 ≪대한사협전≫제30-32회 전국회원촬영대회대한사협 인터넷홈페이지 개설(wwwpaakoreacom)제1회 대한사협 사진공모전

『대한사협회보』 제13호 발간『창립60주년 전국회원전 작품집』 발간(2005)이해선 선생 탄신 100년기념 유작전(대구middot충주middot원주middot대전middot전주순회전) 개최 및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보는 1950-60년대』 (눈빛) 발간(문화관광부middot조선일보 후원)남원지회 청주지회 구미지회 폐쇄(2006년)전주지회 설립(2006년)

제61-63차 정기총회 개최≪제54-56회 대한사협전≫제33-34회 전국회원촬영대회이천지회 폐쇄(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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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위원rarr고문 안장헌 이정훈고문추대 방대훈이사 강승규(면) 김이경(면) 원종철 김광석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 박노택안장헌 이정훈 방대훈 회장 김완기 부회장 황순조 유병주(대전) 총무이사 윤중일이사 김준영 원종철 김광석 심재욱감사 강승규 이재옥

총무이사 윤중일(면) 최인호

회장 최진연

회장 최진연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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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지회 김제지회 원주지회 폐쇄(2008년)한밭지회 설립(2008년)≪제10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안장헌 2007)≪제11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조세현 2009)

제64차 정기총회 개최 PJ호텔 4층 카라디움≪제57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제35회 전국촬영회

제65차 정기총회 개최 충무로 아스토리아호텔제36회 전국촬영회 및 대천지회 전국 사진인리더 초청세미나(한화콘도 세미나실 대천해수욕장)김제지회 재설립(지회장 이성수 총무 구반반) ≪제58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

제66차 정기총회 개최 충무로 아스토리아호텔≪제12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안희탁) 제37회 전국촬영회 및 대천지회 전국사진인 리더 초청 세미나(대천해수욕장내 청주대 수련원 및 머드축제광장)울산지회 설립(지회장 이헌배 총무 심화실) ≪제59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

2013년 제1차 이사회 개최 충무로 통로이미지(주) 회의실 참석 이정훈 외8명제67차 정기총회 개최 캐피탈호텔 뷔페식당 스카이(그릴 룸)≪제60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회원 자질 향상을 위한 사진학 강좌 개설(강사 진동선 2013~2014)

≪제13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마이클 케나(MichaelK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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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정건영

회장 이철집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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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3

김 완 기(金莞祁 1944~ )

1962 충주고등학교 졸업

1964 청주교육대학교 졸업

1969 《제1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입선

1977~1991 KBSEBS방송 출연 15년

1989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교육학 석사)

1990~1999 《대한민국사진전림회》 8회 입선

1993~1999 청영회 회장 역임

1997 《제16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 특선

1998 교육부 초등교육정책과장 역임

1999~2013 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 3회 역임

1999~2014 《전국사진공모전》 심사위원 70회 역임

2002 강남구사진작가회 창립회원 및 회장 역임

2003 서울성북교육청 교육장 역임

2004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초대작가

《서울특별시사진대전》 초대작가

《제1회 김완기사진전》 세종문화회관별관 광화문갤러리

2004~2008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 역임

2005 2013 제24회 제31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심사위원 역임

2005~2007 서울특별시사진작가협의회 초대 회장 역임

2006 『김완기사진집』 출판 창조집단 시빌구

《제2회 김완기사진전》 세종문화회관별관 광화문갤러리

2008~2014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조정위원

2011 《서울특별시사진대전》 운영위원 역임

2011~2014 APC뉴스(한국예술사진인연합회) 회장

2013 김완기 자서전 『분필과 셔터로 그린 자화상』 출판 하얀나무

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고문

강남구사진작가회 자문위원

서울특별시사진작가협의회 고문

청영회 고문

한국사진작가협회 자문위원

구 술 자 연 보

안장헌(安章憲 1947~ )

1969 2 고려대학교 농업경제학과 졸업

1966~2014 고려대학교 호영회 창립회원 호영동우회 회장역임 및 회원

1968~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원 이사(1973~1992) 회장(1993~1995) 현 자문

1973~1975 동화출판공사 『한국미술전집』 사진담당

1976~1977 월간 『영상』 편집장

1977~1979 현암사 『한국미술오천년』 기획 및 편집책임

1979~1995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 3회 역임 현 자문위원

1980~2005 호영문화사 편집인

1981~1992 신구대 사진과 강사

1984~1987 서울교육대학 미술교육과 객원교수(사진학)

1990~1994 롯데문화센터 사진교실 강사

1994~1998 삼성사진문화교실 전임강사

1995~2014 한국불교사진협회 고문

1995~2014 (사)신라문화원 이사 현 자문위원

2000~2014 경주 계림사우회 지도교수

2004~2009 동강사진마을 운영위원

2005~2014 문화유산사진연구소 소장

2009 봉은사진교실(봉은사) 강사

2010~2014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 안장헌디지털사진교실 지도교수

그룹전

1966~2014 고려대학교 호영회 호영동우회 회원전 80여점 출품

1968~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전(17~60회전) 70여점 출품

1990 《사진가 8인전》 후지포토살롱

1994 《한국현대사진의 흐름전》 〈산사일기〉 출품

1996 《Image ofKoreanCultual Heritage》 UNESCO본부 파리

1997 《Buddist Images ofKorea》 독일 함부르그

1997~1998 《서울사진대전》 〈낙선재 일곽〉 〈금원에서〉 출품

1997~2014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전 19점 출품

1998~1999 《경기도사진작가초대전》 출품

1999 《한일사진교류전~자연과 인간을 향하여》 출품

2001 《아름다운 우리 문화재 4인전》 국립진주박물관

2004 《한국다큐멘터리사진 33인전》 동강사진축전

개인전

1996 《서라벌 빛 그리고 향기》 서라벌문화회관

2002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신라문화원 화랑

2003 《세계문화유산과 경북》 경주문화EXPO솔거방

2007 《왕릉의 호랑이》 동강사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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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2009 《창호》 인사동 갤러리 북스

2010 《돌 호랑이 그림 호랑이》 인사동 갤러리 북스

2012 《선비의 고향 서원》 인제대 도서관 김학수기념박물관

주요 사진저작

1982 『석불』 호영

1989 『석굴암』 예경

1991 『경주 남산의 탑골』 열화당

1992 『선의 세계』 호영

1993 『영겁의 미소』 불광

1994 『신라의 동해구』 열화당

1996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삼성문화재단

1998 『서원』 열화당

2002 『신라의 마음 경주』 한길아트

『남산』 한길아트

2003 『돌에 새긴 정토의 꿈~석불』 한길아트

『석조미술의 꽃~석가탑과 다보탑』 한길아트

『사진으로 보는 한국미~무늬』 호영

2005 『BUDDHA~Bildnisse ausStein inKorea』 ErnstWasmuthVerlog

Tubingen 독일 베를린

2006 『범종~생명의 소리를 담은 장엄』 한길아트

저서

1987 『국립공원』 김성옥 문순화 송기엽 안장헌 공저 호영)

1995 『사진으로 배우는 사진촬영교실』 호영

2001 『아름다운 우리문화재』 관조 김대벽 한석홍 안장헌 공저 국립진주박물관

2003 『문화유산 일기』 진선출판사

수상

1977 《백오사진상》 작품상 수상(대한사진예술가협회)

1999 『서원』으로 《간행물윤리상》 저작상 수상(간행물윤리위원회)

2006 《한국사진문화상》 공로상 수상(한국사진작가협회)

2007 《이해선사진문화상》 수상(대한사진예술가협회)

2011 《대한민국문화유산상(대통령상)》 봉사활용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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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5

참 고 문 헌 목 록

「봄 국전심사에 물의 사진 심사위원에 시비」 『동아일보』 1977421

「봄 국전 심사 낙수(落穗)」 『경향신문』 1977425

「현대사진문화상 이해선 씨 뽑아」 『동아일보』 19781128

「사진문화-사협고문 이해선 씨 작품집 발간」 『매일경제』 19801129

「사진 50년 역사를 한 눈에」 『매일경제』 1981120

「사진작가 이해선 작품집 두 권 내놔」 『동아일보』 1981629

「부고-원로 사진작가 이해선 씨」 『동아일보』 1983111

「일화로 엮는 명암 100년 화단이면사( ) (27) 화가와 문인과 신식 여성」

『경향신문』 198554

「이해선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사진전」 『연합뉴스』 20051026

「lt단신gt 백오 선생 탄신 100돌 사진전」 『문화일보』 20051031

「사진예술가협회 창립 60주년 기념전」 『매일신문』 20051117

「문화의 향기-전시」 『부산일보』 200615

「백오 이해선 선생 미발표유작 사진전」 『부산일보』 200617

「[전북][광주전남][제주][대전충남]문화가」 『동아일보』 2006120

「영월 동강사진박물관-이해선 특별기획전 2007년 3월 첫 주까지」 『뉴시스』

20061227

「사진과 친해지려면 옛 서울역사로 가보세요」 『헤럴드경제』 201041

월간지 계간지

김용준 「서화협전의 의미」 『삼천리』 1931년 11월호

「lt부감(俯瞰)gt(이해선 작)gt」 『사진문화』 1956년 6월호

「아마츄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호

연성숙 「일제 한인귀족의 근황」 『진상(眞相)』 1960년 3월호

「창간사 이해선 씨」 『포토그라피』 1966년 8월호

「나의 발언」 『포토그라피』 1966년 8월호

「작가 지상초빙작가-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달의 작품사진 제주풍물-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해선 「해외 예술사진 감상실 (1회)」 『포토그라피』 1968년 4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6) 석가탄일」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7)」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제1회 새한사진콘테스트」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8) 동해진미」 『포토그라피』 1969년 9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9) 야채밭」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0) 건제(乾梯)」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제18회 국전 소식」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1) 초설(初雪)」 『포토그라피』 1969년 12월호

이해선 「돌과의 대화 30년」 『월간 중앙』 1969년 12월호

「초대작가 사진」 『포토그라피』 1970년 9월호

이해선 「고궁풍물(1)」 『포토그라피』 1971년 1월호

_______ 「고궁풍물(2)」 『포토그라피』 1971년 2월호

이해선 관련

일간지

「입선자의 방명록」 『매일신보』 1926512

이태준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1029

「금조개장한 동미전 제2회」 『동아일보』 1931412

홍득순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417

「인사(人事)」 『매일신보』 193886

이해선 「예술사진의 연혁과 개념」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동인전」 『경향신문』 19491115

「인사(人事)」 『경향신문』 1953110

이해선 「등하수상(燈下隨想)」 『동아일보』 19551112

_______ 「사진예술의 독자성」 『동아일보』 1956126

_______ 「사진 8인전 소감」 『경향신문』 195647

_______ 「백오(白烏)의 변(辯)」 『동아일보』 195749

「김포공항에 내린 덕혜옹주-이해선 씨가 부축하고 있다」 『경향신문』 1962126

「5월 예술상에 붙이는 제언」 『경향신문』 196231

「2명이 사퇴 사진부문심위원」 『경향신문』 1964109

「영예의 산실 안팎」 『동아일보』 19641013

「횡설수설-국전 사진부 이해선 심사위원 사퇴」 『동아일보』 19641014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중요한 내용middot형식 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1020

「열띤 감정으로 충만-창협 창립 사진전」 『동아일보』 1965119

「한국국제사진살롱 위원 명단」 『동아일보』 1965116

「동아국제사진살롱 심사평-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28

「제4회 사진동우회전」 『동아일보』 1966121

「동아사진살롱 심사평-총 801 응모」 『동아일보』 196729

「위원장에 이종우 씨 국전심사위원 위촉」 『동아일보』 1967920

「국전심사위원장 도상봉 씨 선출」 『경향신문』 1968919

「석우회(石友會)서 돌 전람회」 『동아일보』 1970428

「예술인에 훈장 이해랑 씨 등 9명」 『경향신문』 1972118

「외길 한평생 lt11gt 사진middot예술 이해선」 『선데이서울』 1973318

「현역 원로 작가 초대전 일제하의 침울이긴 예술자세 생생하게」 『경향신문』

1974831

「이해선 씨 작품전 향토풍물 50점 전시」 『동아일보』 19741118

「이해선 사진전」 『경향신문』 19741119

「이해선 사진 작품전 24일까지 신문회관」 『매일경제』 19741121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423

「국전운영위원 위촉」 『동아일보』 1976317

「국전사진부문 사단중진들 반발」 『동아일보』 1976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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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_______ 「고궁풍물(3)」 『포토그라피』 1971년 3월호

_______ 「고궁풍물(4)」 『포토그라피』 1971년 4월호

_______ 「고궁풍물(5)」 『포토그라피』 1971년 5월호

_______ 「고궁풍물(6)」 『포토그라피』 1971년 6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7)」 『포토그라피』 1971년 7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8)」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포토그라피 창간5주년에 붙여서」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9)」 『포토그라피』 1971년 9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0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1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2)」 『포토그라피』 1971년 12월호

「제2회 사진국전마감 심사위원결정」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이해선 「이해선 떡에 얽힌 시속(時俗)의 금석(今昔) 옛떡이 사라져 간다는데」

『월간 중앙』 1973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1)」 『포토그라피』 1973년 8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2)」 『포토그라피』 1973년 9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0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6)」 『포토그라피』 1974년 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7)」 『포토그라피』 1974년 3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8)」 『포토그라피』 1974년 4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9)」 『포토그라피』 1974년 5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끝)」 『포토그라피』 1974년 6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 『포토그라피』 1974년 7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2)」 『포토그라피』 1974년 8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3)」 『포토그라피』 1974년 9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4)」 『포토그라피』 1974년 10월호

_______ 「작가와 작품-풍물백태 중에서」 『포토그라피』 1974년 1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6)」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7)」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8)」 『포토그라피』 1975년 3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9)」 『포토그라피』 1975년 4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0)」 『포토그라피』 1975년 5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1)」 『포토그라피』 1975년 6월호

_______ 「곡필무사(曲筆誣事)를 밝힌다」 『월간 중앙』 1975년 11월호

「영상 창간 1주년 기념 좌담회 한국 사진 산업의 의 오늘과 내일」 『영상』 1976년 6월호

「국전 초대작가 8인선 김조현 이건중 이경모 이해선 임응식 이형록 정인선

조현두」 『영상』 1977년 1월호

「남기고 싶은 작품 3 이해선」 『영상』 1977년 5월호

「예술사진에 대한 견고한 확신 이해선 사진의 예술성」 『영상』 1978년 5월호

「한국현대미술대전」 『영상』 1978년 10월호

이명동 「처음 제정된 사진문화상에의 기대」 『영상』 1979년 2월호

「행사 백오 이해선 선생의 사진작품집 출판기념회」 『영상』 1981년 2월호

「작품집 소개 이해선 작품집 중에서」 『영상』 1981년 4월호

박재능 「다양한 자기 세계의 길」 『영상』 1981년 12월호

「영상방담-사단의 이 얘기 저 얘기 김정래 임석제」 『영상』 1982년 1월호

「이미지의 합창-봄의 첫 장」 『영상』 1982년 4월호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 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호

岩宮武二 「너 어디 있느냐」 『영상』 1983년 1월호

최인진 「1930년대의 아마츄어 사진활동」 『사진사연구』 통권 제5호 1983년 9월호

박재능 「월평-원로 이해선 선생을 추모한다」 『영상』 1983년 12월호

「한국 근대미술의 발자취」 『계간미술』 중앙일보사 1985년 봄호

「다시 보는 명작 정도선 정인선 신현국 강대환 김일창 이해선」 『영상』 1986년 10월호

「고 백오 이해선 선생 추모비 건립」 『영상』 1989년 1월호

「동경 유학생들의 한국 근대미술」 『월간미술』 1989년 9월호

「화보로 보는 한국 동경 유학생들의 자화상」 『미술세계』 1993년 5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조선총독부 관보』 제4087호(192647) 한국학문헌연구소 서울 아세아문화사 1926

이태현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1집 서

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2

_______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 자화상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3집 서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4

신명호 「일제하 이왕직과 이왕가 족보」 『한국학대학원논문집』 제11집 한국정신문화

연구소 1996

최인진 「한국사진 역사의 증인(4) - 사단의 단체 활동과 이해선」 『한국사진』 2002

이가라시 코이치 이중희 역 「조선미술전람회의 창설과 서화」 『한국근대미술사학』

제12집 한국근대미술사학회 2004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의 입학제도와 조선인 유학생」 『동악미술사』 제6호 2005

허보윤 「미술로서의 디자인 이순석의 1946-1959년 응용미술교육」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단행본

조우석 『한국사진가론』 눈빛 1998

작품집 도록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1926

이해선 『이해선 사진작품집』 평화당 1980

_______ 『한국의 고궁』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0

Tucker Anne Iizawa Kotaro Kinoshita Naoyuki The History of

Japanese Photography London YaleUniversityPress 2003

이해선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남은 1950-60년대』 눈빛 2005

_______ 『이해선 사진집 1950~1960년대 이야기』 동강사진박물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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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7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일간지

「부산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24531

「성공을 기대 조선사진연구회 현일영 씨 담」 『조선중앙일보』 1936826

「경성아마사진구락부 제1회전」 『조선일보』 1938417

「사진작품전」 『동아일보』 19381014

「경성사진동호회 작품전람회개최」 『조선일보』 19381027

「사진동호회작품전」 『동아일보』 1938112

「경성아마추어 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39527

「아마추어 사진인화전」 『매일신보』 19391115

「동서남북-lsquo아마추어rsquo 제4회 인화전람회」 『동아일보』 19391115

「동서남북-합동인화전」 『동아일보』 1940126

「아마추어 사진의 인화전」 『매일신보』 194074

「경성아마츄어 제5회 인화전」 『조선일보』 194075

「경성백양사우회 제1회 인화전람회 개최」 『매일신보』 19401113

「제2회 사진전 명일부터 화신에서-백양사우회」 『매일신보』 19411124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55

「사진작품전」 『조선일보』 1946119

「전국문화총연발족」 『동아일보』 194729

「제1회 조선사진예술전」 『경향신문』 19475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7510

「사진전람회개최」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전응모작 답지」 『경향신문』 1947615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 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629

「제1회예술사진전람회 15일부터 동화백화점」 『경향신문』 1947713

「예술사진 입선 수상식을 거행」 『경향신문』 1947720

「예술사진전 19일부터」 『동아일보』 1947121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8224

「사예(寫藝) 2회전 작품을 현상모집」 『경향신문』 19481013

「예술사진전 심사 오는 8일로 연기」 『동아일보』 1948127

「지방출품우수-제2회 예사전」 『동아일보』 19481212

「사진예술전 22일부터 동화화랑서」 『동아일보』 19481221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964

「전국종합사진전 심사결과-특선1석 최인집 씨」 『동아일보』 194977

「사진예술의 정화-제3회 전국예술사진전」 『경향신문』 19491010

「예술사진전 30일로 마감박도」 『경향신문』 19491128

「예술사진전 입선자 발표」 『경향신문』 19491213

「예술사진전시회」 『동아일보』 195316

「춘계사진섭영회 26일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3

「본사후원 춘계촬영대회 오늘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6

「사진현상모집」 『경향신문』 1953517

「특선에 lt만춘gt」 『경향신문』 1953527

「인화 당선자 수여식」 『경향신문』 1953529

「사진작품발표전」 『경향신문』 1954413

「예술사진전시회 US-S화랑서」 『동아일보』 1954415

「집회」 『동아일보』 1954916

「경복궁서 촬영대회」 『경향신문』 1954919

「내 26일 촬영대회 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4922

「사연 촬영대회 여감(餘感) 아마추어 사진도(寫眞道)」 『동아일보』 1954103

「문화집합」 『동아일보』 1955122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77

「사연(寫硏) 창립 10주년 기념 어제 촬영대회 성황」 『동아일보』 1955711

「촬영대회 입선작 결정」 『동아일보』 1955819

「8인 사진전 개최」 『동아일보』 1956329

「9회 사연(寫硏)전」 『동아일보』 1957414

「신록촬영대회 개최 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62

「대한사진예술가협회서 사진전시회 개최」 『동아일보』 1958711

「10년 후의 우리 문화 건국 20주년을 장식하고 싶은 것」 『동아일보』 1958821

「사진예술가협회 11회 회원작품전」 『동아일보』 195979

「문화 소식」 『동아일보』 1960119

「국전에 사진부문도」 『동아일보』 1963410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결정 특선 조천용 작」 『동아일보』 19641020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653

「렌즈의 향연 영예의 초점-제4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동아일보』 196667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61217

「사진예술가협회전」 『동아일보』 19681022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9830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996

「국립공보관 12월 전시회 스케쥴」 『경향신문』 1971126

「문화단신」 『경향신문』 19721128

「사진예술협 작품전 7일까지 공보관서」 『매일경제』 1973111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에 안준천 씨」 『경향신문』 197526

「동아포우스트」 『동아일보』 19751117

「사진예술가협회 창립30돌 기념전」 『경향신문』 19751118

「추계 친목 촬영대회」 『매일경제』 197610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7830

「사진예술가협 정총(定總) 31일 하오 대동관서」 『매일경제』 19781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81031

「문화광장」 『동아일보』 1993121

「한국사진예술 50년을 펼친다」 『한겨례』 1994111

「사진예술가협 사라진 풍물전」 『서울신문』 20051025

월간지 계간지

「사진클럽 지상소개 대한사협의 발자취」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박필호 「논단 대한사협16회전을 보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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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대한사협 16회전」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사협 16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8년 7월호

「대한사협 충남지부 회원전」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경축 창간 3주년 사진과 관광 포토그라피-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대한사협 18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제18회 대한사협전」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 작품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70년 3월호

「축 창간4주년 서울 선데이 카메라 클럽」 『포토그라피』 1970년 8월호

「축 포토그라피 창간 5주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김종양 씨 대한사협 고문 추대」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3년 3월호

「lt파도gt 김도현 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신춘초대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근하신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75년도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창작선」 『영상』 1977년 1월호

「전시장 순례 대한사진협회 회원전」 『영상』 1977년 11월호

「지상소개-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대한사협 제27회 정기총회 개최」 『영상』 1979년 7월호

박필호 「대한사협 27돐에 대한 축사」 『영상』 1979년 7월호

「제26회 대한사협전」 『영상』 1980년 1월호

「제27회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사진전시회」 『영상』 1980년 12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요강」 『영상』 1981년 5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영상』 1981년 10월호

「탐방-뜻이 있으면 길이 있게 마련 세 번째 전국대학사진 공모전을 연 대한사협충

남지회의 단합된 모습」 『영상』 1983년 1월호

「제3회 전국대학생사진 공모 제12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월호

「제13회 대한사협 충남 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2월호

최인진 「경성아마츄어카메라구락부를 말한다」 『사진사연구』 1984년 7월호

「대한사협본부 주최 제9회 한국국제사진전 입상자」 『영상』 1989년 1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대한민국예술원 편 『한국예술총감 자료편』 대한민국예술원 1965

한국사진협회 「사진계소식 1969년도」 『한국사진연감』 1970

_____________「한국사진협회의 연혁 1976년 10월 30일」 『한국사진연감』 1976

임범택 「사진」 『1977년도 문예연감』 1978

______ 「사진」 『1978년도 문예연감』 1979

한국사진협회 「역대역원명단(歷代役員名單) 1962년~1987년」 『한국사진연감』

1988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제1장 한국사진협회 창립 이전의 사진계 동향」 『한국사협

사 I 1945-1970』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01

최인진 「해방 초기의 사진잡지 연구-『국제보도』와 『사진문화』를 중심으로」 『한국

사진학회지 AURA』 제10호 2003

박혜성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사진문화』 목록 및 해제」 『한국 사진 잡지

『사진문화』 연구』 명지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한국사협 50년사』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13

단행본

임응식 『내가 걸어온 한국사단 임응식 회고록』 눈빛 1999

작품집 도록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제16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7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8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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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9

원 문 자 료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년 10월 29일 4면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년 4월 17일 4면

1 이해선 양화기(洋畵期) 관련 참고 자료

「입선자의 방명록」『매일신보』 1926년 5월 12일 3면

「금조 개장한 동미전 제2회」『동아일보』 1931년 4월 12일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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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참고 자료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년 5월 5일 2면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년 6월 29일 3면

「신록촬영대회개최-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년 6월 2일 4면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년 7월 7일 4면

예술사진전 조선사진예술연구회에서는 5월 6일부터 동11일까지의 6일간에 걸쳐 동화백화점(舊三越) 갸라리--에서 창립기념사진전을 개최하기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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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해선 관련 원문 자료

원문은 당시의 표기를 그대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현재의 띄어쓰기와 맞춤법에 맞지 않는 부분들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수정하였고 일부 [ ] 안에 병기했다 원문의 한자는 모두 한글 독음으로 고쳤으며 의미 전달을 위해 필요한 경우 ( )안에 병기했다

「대담 아마추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 pp 48~52

작가가 사태(沙汰)났어

본지 공사간에 바쁘실 텐데helliphellip 사진문화의 발전을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

해 주십사 하는 것은helliphellip 요즘 각 직장이나 학생들 간에 사진열이 굉장히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 비

추어서 이 아마추어 카메라맨의 지도 문제를 비롯하여 초보자의 진로랄까helliphellip 이런 문제에 대한 말

씀을 좀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해선6middot25 동란 후에 개인적으로 사진을 연구해 보겠다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직장이나 학교 단위로

사진동호자의 클럽이 많아 지고 작품 발표라던가 전시회 같은 것이 무척 많아졌는데helliphellip 어쨌든

일반 사회인이나 학생 간에 사진열이 높아졌다는 건 기쁜 일이야

임응식그런데 아직도 이 카메라를 사치품으로 취급하는 층이 많아서 곤란해요

이 나라(정부)에서부터 사치품 취급을 하더군helliphellip 여자들이 다이아몬드를 사려는 것과 사진을 연구하

려는 사람이 카메라 장만하는 것을 똑같이 취급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곤란

하지

임 헌데 우리 사단(寫壇)에선 우선 lsquo사진작가rsquo라는 용어를 쓰는 데에 신중을 기해야 하겠어요 웬 놈의

lsquo사진작가rsquo가 그리도 많은지helliphellip 이건 카메라만 메고 다니면 모두 작가 행세를 하니helliphellip

이 카메라 멘 것이 모두 lsquo작가rsquo라면 대한민국에 lsquo사진작가rsquo가 수 십만도 될 걸helliphellip 작가라는 친구들을

체에 넣어서 걸러 놓으면 엄격한 의미에서 진짜 lsquo작가rsquo는 몇 사람 밖에 없을 텐데helliphellip

임 호주머니에 만년필을 꽂았다고 해서 문학가 혹은 소설가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겠는데hellip

hellip 어쨌든 요즘 성행하는 사진작가의 사태를 우선 잡지에서 만이라도 용어 사용에 엄격한 규정을

지어서 질서를 잡아 주어야겠어요

이 그것도 과도기적 현상이겠으니까 차차 지양되겠지helliphellip 오늘 해달라는 얘기는 그런 넋두리가 아닐

테니까 어디 이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본지 한마디로 얘기하자면helliphellip 카메라는 어떻게 해서 장만을 했는데 mdash 자 그 다음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겐지 몰라서 어쩔 줄 모르는helliphellip 이런 아마추어와 초보자들의 진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얘기를

좀helliphellip 현재 직장 단위로 사진 동호자들이 모여서 클럽을 이룩한 것이 십 여 개 있고 학교 단위로는

이십 여 개나 되는데요helliphellip

관련 자료 소개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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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인식이 안이해서 탈이야

이 극히 초보적인 입장에서 사진을 해보고 싶다helliphellip 다년간 연구를 한 다음엔 작가가 돼 보겠다 mdash 하

는 사람들을 회원으로 해서 수 십 년 동안 연구를 해 왔는데helliphellip 오늘날 하고 있는 일도 그것이지만

helliphellip 여러 부문에 걸쳐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서적인 면에서 사진과 친해보고 싶다던가

또는 카메라를 장만했는데 어떻게 하면 앞으로 향상 발전할 수 있는가 mdash 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신인이라고 하겠지 특히 학생들의 교내 활동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helliphellip 헌데 막상 다다

르고 보면helliphellip 어떠한 길이 올바른 길인지 막연해 하는 모양이더군요

임 초보자들은 무엇보다도 사진 자체에 대한 정의를 뚜렷이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아마추어 mdash

하면 취미적 입장에서 사진을 다루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조각이나 회화와 같이 사진도 어엿한 예술이니

까 취미 도락(道樂)적인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예술을 추구하는 진지한 마음의 준비가 우선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물론이죠 대개 클럽 조직이 되어 있으니까 선생들의 지도를 받고 있겠지만 내가 알기에는 전문가

가 아닌 다시 말하면 취미 정도에서 관심이 있는 선생들이 지도를 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역시 전문으

로 사진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지도를 가끔씩이라도 받는 게 좋겠지요

임 지도를 한다는 사람들의 태도부터가 성실성이 없는 것 같아요 만년필을 샀으니까 나도 한 번 써 보

자 mdash 해서 작가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취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남의 lsquo지도rsquo를 담당

할 수는 없을 텐데 mdash 우리가 사진을 전공한대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억지로 지도해 주겠다고 밀고

들어 가겠다는 건 아니지만 mdash (웃음) mdash 어쨌든 전문가의 지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학생 클럽이나 직장 클럽 같은 동호자의 모임을 사단의 일부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취미

에서 시작했더라도 일정한 과정을 밟고 다년 연구를 거듭하면 자연히 작가를 지향하게 되겠지만hellip

hellip 그런 면에서도 처음 싹트기 시작하는 신인의 지도가 퍽 중요한 것이지요

취미middot도락이란 관념을 버려야 해

임 지금 형성되어 있다는 직장이나 학교 단체의 거의 전부가 전문적인 입장에 서 있지 않은 것 같더군

요helliphellip 사진에 대한 근본 의식이 너무도 안이한 것 같아요 카메라를 통한 표현의식에 절실한 감정

이 없어요helliphellip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비판을 받지 않는다helliphellip 하는 따위의 도피를 해서는 곤란

하죠helliphellip 창작의식이 확고하게 수립되지 않아서는 향상이 없는 것인데helliphellip 소문에 듣자면helliphellip 너

무 기술 면에만 치중하고 정신적인 면이 소홀히 취급된다는 거에요 helliphellip 나는 직장을 갖고 있으니

까 사진이란 것은 취미 정도로 한다 mdash 하는 태도를 버려야죠 특히 이 점은 지도자들에게 권하고 싶

은데helliphellip 예술의식helliphellip 이것이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절대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까

이 그렇구 말구요helliphellip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새로 사진을 공부하겠다는 신인들에게 네 가지 의식을 주

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휴머니즘 mdash 우선 사람이 돼야 하거든요 교양이라던가 인격 덕망helliphellip 이런 면에서 인간이

돼 있어야 하고 둘째는 사진예술을 한다고 해서 사진예술이 무엇이냐helliphellip 이것만을 추궁해서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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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요 좀 더 시야를 넓혀서 예술이라는 게 뭐냐 mdash 하는 걸 먼저 알아야지 셋째에 가서 사진예술이

라는 게 뭐냐 mdash 를 연구하고 넷째에 가서야 비로소 작품이라던가 창작의식 기교 기술에 대한 검

토를 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기본조건을 머리 속에 언제나 간직하도록 나는 주장해 왔어요

임 기술면을 등한히 할 수는 없겠지요 기술 없이는 표현이 안되니까helliphellip 그러나 이선생 말씀처럼 인

간본연의 문제도 크긴 큽니다 다른 예술부문의 사람보다 교양면에서 뒤떨어지지나 않는가 mdash 하는

것이 항상 염려되는데helliphellip 만일 뒤떨어진다면 큰일이지요 기술도 중요한 문제겠지만 교양인격 같

은 것도 예술가가로서의 긍지를 위해선 떨어질 수 없는 문제고helliphellip 더욱이 좋은 기술을 가졌으면서

도 기초교양이 모자라서 좋은 작품을 낼 수 없다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으니까helliphellip 교양인으로서의

자격도 다른 예술부문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사진을 해야할겝니다

이 기교나 기술을 어떻게 우물쭈물 배웠다고 해서 작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helliphellip 예술이란 그 자체

에 대한 조예부터 깊어야 합니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조리개가 얼마다 타임이 어

떻다helliphellip 암실작업은 어떻게 하는 거다helliphellip 이것만을 알았다고 해서 작가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에

요helliphellip 인간면 예술면 기술면에 똑 같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마 사진을 연구하겠다는 신

인들의 기본이념이 돼야 할겝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지도한다는 면에서

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거든요 mdash

임 어쨌든 기술을 위주로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난 옛날 얘기입니다

지도자 시비

이 지났다기 보다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는 장래에나 변할 수 없는 기본이념이겠지요 사진이라는 것

은 더욱이나 고도의 대중성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인격과 교양이 필요해요 기계라는 거야 찍으면

사진이 되도록 마련된 것이니까 예술까지는 못 가도 사진은 되거든 mdash 그러니까 그것을 예술로 이

끌려면 찍는 사람의 성분이 문제되는 것이지요helliphellip

임 그런 의미에서도 사단의 규정이 필요하고 작가라는 규정이 필요해요 사단이라는 것에 너무 엄격한

규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helliphellip 만년필을 가졌다고 해서 전부 문학가가 아니라면helliphellip 카메라를 메었

으니 작가다 mdash 하는 엉터리도 용납될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우선 필요한 것은 취미 도락이라는 관념

을 지양해야 할 텐데helliphellip

이 취미가 차차 심각해지면 창작의식도 생기는게니까helliphellip 그런 사람들을 지도 계몽해서 한 사람이라

도 작가로 이끌어야 하겠지요helliphellip 카메라를 살 때부터 나는 사진작가가 되겠다 mdash 하는 사람은 있

을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임 lsquo싼데이rsquo 카메라맨은 논의의 대상이 안되구요helliphellip (웃음)

이 그러니까 지도자들이 작가적인 태도에 확고한 이념을 앞세우고 지도에 임해야 하는 건데helliphellip

본지 각 단체 지도층의 지도방침에 대한 구체적인 태도를 어떻게 규정하겠습니까 helliphellip

임 우선 사진에 대한 인식부터 고쳐야 해요 말이 중복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친구 좋고 사진 좋아서 우리

끼리 하면 그만이다 mdash 하는 생각들이 많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만이라도 그렇지 않다

관련 자료 소개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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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싶어요 학생들이 카메라를 사 가지고 몇 사람 모였으니까 책임자 격

인 선생이 필요하다 mdash 해서 책임 맡았다는 사람으로는 지도가 안 될 게 아닙니까 그렇다고 청해 오

지도 않는데 내정 격으로 뛰어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구helliphellip (웃음)

본지 또 한 가지 요즘 일대 성황을 이루는 것이 소위 현상사진(懸賞寫眞)이라는 건데요helliphellip 이 현상사진

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진에 대한 모욕도 있지helliphellip

임 거 참 꼴사나운 일이 많아요 현상이란 걸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helliphellip 그 하나는 어느 연구

단체에서 순수한 의미에서 발표 바탕이 없는 아마추어를 위해 마련하는 경우가 있을게고 또 하나는

선전용으로 포스터 mdash 같은 데에 써먹기 위한 상업 정책적인 의식에서 모집하는 현상이 있을 테지요

이 어느 경우이건 간에 좌우간 현상 모집을 하는 목적이 있는데helliphellip 응모자는 우선 현상의 목적부터 확

실히 알고 응모를 해야 하겠지helliphellip

임 그렇죠 그런데 이 상업 정책적인 현상의 경우에는 사진문화에 대한 모욕적인 행동이 퍽 많습니다

이거 참 불유쾌한 일이지만helliphellip 가령 예를 들자면 응모자는 원판을 제공하라던가 또 낙선자의 작

품은 일체 반환치 않는다는 따위helliphellip이게 얼마나 사진예술에 대한 모욕적 행위입니까 helliphellip

이 그래요helliphellip 확실히 모순된 일입니다

임 필요에 의해서 현상모집을 했으니까 당선된 작품은 물론 필요하겠지만helliphellip 낙선작품을 반환치 않는

다는 것은 언어도단 입니다 낙선이 됐다 해도 작가의 입장으론 대단히 귀중한 하나의 작품일 텐데

그걸 안 돌려 준대서야 말이 되나요 주최측은 낙선작품의 원화를 돌려 줄만한 성의를 가져야 도리

에 맞을 텐데helliphellip 요즘 현실은 lsquo낙선rsquo이란 푸대접 밑에 원판까지 몰수당하는 판국이니helliphellip 원 참

이 그러니까 응모자는 무엇보다도 현상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지helliphellip 여러 번 겪은 일이지만 심사를

하다 보면 전혀 현상 취지를 도외시한 작품들이 있는데helliphellip

임 그거야 보나마나 낙선이죠 (웃음)

이 그러믄요 현상 응모자로서는 출품 규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 아니겠어요

임 그럼요

이 그런데 어떤 것은 작품에 제목도 없는 것이 있거든요 그런가 하면 제목과 작품내용이 전혀 특이한

엉터리도 있구helliphellip

임 저도 여러 번 겪은 일입니다

이 제목이란 것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벌써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찍는다는 의식이 있는 이상

제목도 정해져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아주 작품과 제목이 동떨어진 것들이 응모해 오니까

낙선의 자격이 충분할 수밖에helliphellip 하하하 (웃음)

임 그게 모두 사진에 대한 성의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이 그래요 성의가 없어요 자기 작품에 대해선 최선의 성의를 다 해야 할 텐데 그런 태도가 없거든helliphellip

제목을 안 썼는지 못 썼는지는 모르지만helliphel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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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그저 무턱대고 발표의식만 왕성한 까닭이 아닐까요

이 그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된 작가가 아닌 이상 발표기회가 좀처럼 없을 테니까

자기 실력의 평가를 받는다던가 남들과 경쟁해 본다는 의미에서 현상에 자주 응모하는 것은 좋은데

helliphellip 아 어떤 친구는 자기 실력 생각은 하지도 않고 상품이 적다 많다 시비를 하는 친구도 있으니 참

기가 막힐 일이지

주최자의 무성의도 고쳐져야 하고

임 그건 lsquo현상rsquo이라고 내거는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순수한 사진연구단체에서 모집할 때는

lsquo공모전rsquo이라던가 하는 문구가 좋지 않을까요 lsquo현상rsquo이라니까 lsquo상rsquo을 바라게도 되겠지만 어쨌든

lsquo현상rsquo이란 말 자체가 순수하지 못해요

이 그건 확실히 생각해 볼 문제이겠군요helliphellip 순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helliphellip 응모자들이 심

사원이 누구냐mdash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도 순수하지 못하고helliphellip 또 주최자가 모집광고를 낼 때

lsquo심사원은 추후발표rsquo라mdash하는 것도 순수하지 못해요 이것도 참 불쾌한 일인데 lsquo추후발표rsquo라는 걸

다시 생각하면 lsquo준비가 안됐다rsquo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심사원의 준비도 안 해 놓고 현상을 모

집하는 그런 무성의가 또 어디 있어helliphellip 이건 일종의 사기가 아니면 거만일 겝니다

임 그나 그뿐인가요 lsquo심사원은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함rsquohelliphellip 하는 모호한 광고도 있지요 응모자의 입

장에서 생각하면helliphellip 심사원에 불만이 있으면 응모를 아니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 심사원 문제만

은 정정당당히 명시해야만 나중에 가서 심사에 대한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출품을 한 다음에 심사

원이 발표된다는 것은 심사에 대한 불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helliphellip

이 그리고 응모자의 동태를 가만히 보면 아까 얘기가 나왔던 소위 lsquo취미정도rsquo라는 층의 발표 의욕이 굉

장해서 대부분의 응모자가 이 부류인 것 같은데helliphellip 여기 한 가지 탈이 있어요 현상응모 작품의 심

사라는 것은 무제한의 심사 레벨을 놓고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응모 작품 중에서의 우수 작품을 가

려낸다는 것은 이거 상식 문제가 아닙니다

임 그렇죠

이 아 그런데 어떻게 해서 현상에 당선이 되거나 특히 특선이라도 하면 그만 자기가 갑자기 위대한

작가라도 된 것처럼 대가연(大家然) 하고 으쓱대는 친구들이 많아서 걱정이야helliphellip (웃음)

이 lsquo특선rsquo이라는 것은 응모해 온 작품들 중에서 특선이지 결코 한국 사단 전체의 수준에서 특선이라

는 것은 아닌데helliphellip 그만 한 번만 당선되면 코가 높아지고 대뜸 대가 행세를 하려고 드니helliphellip 참

신인들은 특히 조심해야 할 일이지

남의 것보고hellip 우리 것도 보내고hellip

본지 이제 화제를 좀 바꾸어서 세계사단의 동향을 좀 말씀해 주실까요

임 세계사단의 얘기라면 직접 보아야만 얘기가 될 텐데helliphellip

이 서울 바닥에서 썩으면서 세계사단의 얘기를 어떻게 본 듯이 할 수가 있겠나 카메라를 메고 세계일

관련 자료 소개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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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도 했어야 얘기가 되지

임 그것보다도 사진을 통한 국제 교류 얘기나 합시다

이 그게 좋겠군helliphellip 얼마 전에 덕수궁에서 자유중국의 소개사진전시가 있었죠 미국공보원의 활동도

이를 테면 국제교류의 한 형식일게고helliphellip

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자유중국과 월남의 사진전시가 있었는데helliphellip 우리도 수출을 한다면 그 보

다 훨씬 좋은 작품들이 나갈걸요helliphellip

이 한미합동전이던가 한중합동전 같은 것도 하면 역시 국제교류가 되겠지요helliphellip

임 한미합동전은 불원한 장래에 개최될 것입니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lsquo인간일가(人間一家)rsquo의 사진

이 아마 이월쯤 한국에 올 겝니다 미국대사관이 주동이 돼서 작품 503점 전부의 전시회 계획이 추

진되고 있으니까요

이 남이 보내줘서 본 것은 있지만 우리가 남에게 보여준 것은 없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야 우리도 남에

게 보여줘야 교류가 될 텐데helliphellip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두 사람의 작품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임 개인적인 활동은 있었지요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사진살롱에 사진을 보내고 있으니까 개인

적으로는 더러 나간 셈이죠 개인들의 수출이라도 좀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지만

이 우리의 것을 내보내고 외국 것을 들여와서 서로 감상하고 연구하는 게 이를 테면 국제교류인데

아마 명년쯤엔 될까 몰라

임 작품교환전 같은 것을 위해서 대대적인 계몽운동이 필요 하겠죠

이 그렇죠 운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어요

임 그런데 근본적인 얘기를 하자면 한국 작가의 역량이 아직도 부족한 것 같아요 언젠가 외국 작가에

게서 들은 말인데mdash한국 사람은 한국을 보지 않았다mdash하는 얘길 해요 사진 작가에게 대한 말이지

만helliphellip 나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이 퍽 중요한 얘기다mdash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를 직시하는 것만이

사진은 아니겠지만 실용사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것이 사실 아닐까요 회화적인 쌀롱 픽처라던

가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리얼리즘 사진이라는 것에 너무들 치우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 국제 교류의 시발은 역시 소개적(紹介的)인 것 다시 말해서 르포르타주적인 것이겠으니까helliphellip

임 외국 작품의 모방 같은 것은 이제 집어치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mdash예술적인 것 이것만을 너무 추

구했기 때문에 사실이 한국적인 것과 국민성의 묘사 같은 것이 잘 되지 않았지요 정서적인 것에만

너무 골몰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일이고 helliphellip 예술을 위한 예술에 정신들이 팔려 있었지나 않은

지helliphellip 예술을 하기 위한 사진이라는 관념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이 예술을 염두에 안 둔다면 실용사진이 돼 버리게

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너무 치우친 것 같단 말입니다

이 특히 국제 교류를 생각한다면 아닌 게 아니라 외국처럼 르포르타주적인 사진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할거에요

임 그래요 거기에 예술성을 띄워서 소화할 만한 역량 있는 작가가 필요해요

이 또 하나의 가장 큰 문제는 위정자의 관심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 큰 난관입니다 국제 교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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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가족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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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말이고 역시 정부당국자의 적극적인 주

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어디 그래요

임 우선 사단 자체의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작가들의 작업도 촉구되어야 하구helliphellip 아까도 말이 나왔지

만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 출품을 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점 같은데서 작가들의 반성도 필

요하고helliphellip

이 개별적으로 미국 등지에 보낸 것은 아마 상당한 수가 되겠지요

임 그럼요 그랬는데 왜 성과가 없느냐mdash하는 반성이 있어야죠

이 오늘의 현실을 예술적인 면에서 기록하고 작품화 해야겠는데helliphellip 막연하게 예술을 위한 작품을 보

내니까 기교적으론 훌륭할지 몰라도 작품 자체에 내용이 없어서helliphellip 그래서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닐

임 그런 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빨리 우리의 수준을 높여서 국제 조류와 호흡을 맞추어 나가

야 할 것입니다

이 이거 아마추어를 위한 얘기라는 것이 잠깐 탈선을 한 것 같군 그러나 이런 문제도 참고가 되긴 하니

까helliphellip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합시다

본지 수고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helliphellip

(기록 O기자)

이해선 「lsquo백오(白烏)rsquo의 변(辯)」 『동아일보』 1957년 4월 9일 4면

30여년 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입학

이 되었을 당시 자축기념하는 의미에서 호(號)를

하나 지어본 것이 백오(白烏)라는 두 글자였다 처

음 듣는 사람들 중에서는 거문[검은] 까마귀는 있

지만 흰 까마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서로 웃어버리고 그 뜻을

설명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자의

(字意)를 해명해볼까 한다 백(白)은 흰 빛이요 오

(烏)는 흑색으로 통하므로 우선 흑백을 대조시켜

놓고 흰 종이 위에다 검은 먹으로 휘호(揮毫)할 것

이니 그 뜻이 내 생활과 부합될 것 같으며 둘째로

백 자(字)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첫 자를 떼어놓

고 오는 반포오(反哺烏)로 그 이름이 높은 새이므

로 평소에 효자 노릇을 못하여 온 나의 좌우명으로도 적당할 듯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새 중에서는

혹간(或間) 백변종(白變種)이 생겨나는 수가 있는데 그 흰새를 서조(瑞鳥)라고 떠들던 옛 시절도 있었으므

관련 자료 소개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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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내가 우연히 호를 지어 본 것이 검은 까마귀떼 속에서 서조 백오를 발견하였으니 나의 전도(前途)에는

반드시 서광(瑞光)이 비칠 것 같으므로 이상 여러 가지 의미를 차례로 생각해 볼 때에 나에게는 이 외에 더

좋은 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자의였었고 궁금한채로 불려온 백오

였었다 만담궁변(漫談窮辯)을 물소물책(勿笑勿責) 하소서 (사진가)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

이해선 「중요한 내용middot형식-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년 10월 20일 5면

사진작품에는 사진 특유의 형식이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러한 특유의 형식에 알맞은 표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의 특수성은 형식이 가지는 특수성 보다는

기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주관적이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작품심사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동일하게 중요시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작

품 속에서 그야말로 형식과 내용이 알맞게 부합된 특출한 작

품을 볼 수는 없었다 형식이 좋으면 내용이 빈약하고 좀 내

용이 있으면 형식이 미숙하고helliphellip 모두 결점이 있다 그러나

입상작으로 뽑은 8 점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

다 그리고 금년에는 lsquo칼러rsquo사진의 응모 점수가 30점이나 되

고 그중에서도 3점이 입상되었고 또 9점이 입선되었다는 것

은 lsquo칼러rsquo 사진의 앞날을 위해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lt전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장gt

[제1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년 2월 8일 5면

외국작품의 세련되고 빈틈없는 lsquo테크닉rsquo은 국내작품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서 우선 국내

작품을 형식에서부터 누르고 말았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이루게 된 것은 국내작가들

의 역량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lsquo국산인화지rsquo가 얼마나 엉터리고 조악한 것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대체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더욱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은 이와 반대적인 경향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예술이든 먼저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볼 때 국내작품의 후진성은

두말할 것 없이 형식의 경시에 있다고 하겠다 심사결과 흑백부에서나 lsquo칼라rsquo부에서 겨우 동상으로 한 점

씩 밖에 국내작품이 입상되지 못했다는 것은 다소 섭섭한 느낌이나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경종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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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더욱 우리 심사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독에서 응모한 lsquo칼라rsquo

작품이었다 물체의 외관 색감을 초월한 내면의 lsquo이미지rsquo가 발

산하는 짙은 감정의 색감으로 작가의 개성과 사상을 인상 깊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내 lsquo칼라라보rsquo의 후진

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상작으로 뽑힌 외국작품들은 오

늘의 세계 사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는 큰 자극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

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제2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총 818점 응모-사진예술에 도움」

『동아일보』 1967년 2월 9일 4면

지난해와 같이 흑백부문에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들은 모두가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산인화지의 조악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작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올해는 흑백

부문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기꺼운 일이라고

하겠다

특히 칼라작품에 있어서는 독일의 작품들이 특출했고 이들 작품들의 색감은 현대 과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 최고상으로 뽑힌 lt잊은 친구gt와 몇 점의 입상작품들은 칼라릴리프와 소라리

세이숀[솔라리제이션] 등의 수법으로써 모티

브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를 초객체적이고 추

상적으로 표현하고 작가의 짙은 개성과 사상

과 철학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입상작으로 뽑은 16점의 작품들은 오늘의

세계사단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

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심사위원 이해선 (위원장) 임응식 서순삼

박필호 안월산 정인성 최경덕 (이상 7명)

관련 자료 소개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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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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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관련 자료 소개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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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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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관련 자료 소개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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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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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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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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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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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관련 자료 소개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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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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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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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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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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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9: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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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차 정기총회 개최≪제17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0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미륵사지)≪제7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11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 대둔산 도산계곡)≪제33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1차 정기총회 개최제13대 이순흥 회장 연임≪제18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2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하회마을)≪제8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13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지회 주관-탄금대)≪제34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2차 정기총회 개최 파인 힐≪제19회 백오사진상≫ 시상고창지회 설립제14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을숙도)

『대한사협회보』 복간호(제6호) 발간고 백오 이해선 선생 추모비 건립≪제9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5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3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20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5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고창지회 주관-선운사)

『대한사협회보』 제7호 발간제16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본회주관-용인민속촌)구미지회 설립≪제10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6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4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21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7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신원사)대천지회 설립문화부에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문화가족으로 등록제18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지회 주관-탄금대)≪제11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제37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45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22회 백오사진상≫ 시상제19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부산지회 주관-경주일원)≪제38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제12회 전국대학생사진공모전≫ 대전지회 주최

제46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23회 백오사진상≫ 시상제20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천-대천해수욕장)≪제39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감사 서윤석(면) 박노택

고문 김조현 이순흥회장 안준천부회장 김용필 안장헌총무 최진연이사 김완기 송주헌 송정회 심재욱 박노택 조창만감사 이정훈 고승웅

이사 송주헌 황응천 원종철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회장 김용필 부회장 이정훈 박노택총무 최진연 이사 안장헌 김완기 정완철 송주헌 심재욱 원종철 박부공황순조 황응천 김태영 감사 송정회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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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 모란룸≪제24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최진연)고 백오 이해선 선생의 한국사단 발전에 기여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白烏李海善寫眞文化賞)≫ 제정≪제40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한국의 풍물 사진공모전≫ 대한사협 호영출판사 공동주최

제48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1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유동호)원주지회 설립이천지회 설립청주지회 설립≪제41회 대한사협전≫ 코닥포토살롱제21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속리산)

제49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2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황규태)제22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엑스포장)고창지회 폐쇄≪제3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윤주영)≪제42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대한사진술가협회 창립50주년 작품집』 발간

제50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전주지회 설립≪제4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최민식)≪제43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1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대한사협회보』 제8호 발간제23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원주지회 주관-치악산)남원지회 설립≪제44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2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5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강상규)

『대한사협회보』 제9호 발간제24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대청호)대구지회 설립김제지회 설립≪제45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3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6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이순흥)

『대한사협회보』 제10호 발간제25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구지회주관 - 경주OK그린청소년 수련원)≪통일염원 전국사진공모대전 작품전시회≫ 개최(대구지회 주최-대구 동아쇼핑 전시관)≪제7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송기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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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회장 안장헌 부회장 이정훈 김완기총무 송정회 이사 원종철 송주헌 한창동 황순조 박부공 허현 감사 박노택 최진연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자문위원 안장헌 회장 이정훈부회장 김완기 박노택 총무한창동이사 원종철 김완선 이순재 박부공 이광호 이재옥 김광범 양호용감사 황순조 최진연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자문위원 안장헌 이정훈 회장 박노택 부회장 김완기 최진연 총무 이광호이사 박부공 이재옥 윤중일감사 한창동 조창만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 박노택자문위원 안장헌 이정훈회장 김완기부회장 황순조 박부공총무 윤중일이사 김광범 김준영 강승규 김이경감사 한창동 이재옥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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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1

≪제46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원주지회 폐쇄

제54차 정기총회 개최 대림정대한사협사진강좌 개최(연8회) 월례촬영회 개최(연8회)제26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 서울대청호

『대한사협회보』 제11호 발간대한사협 대구지회-중국 연길시 촬영가협회와 자매결연(연길시 청년호텔)원주지회 재설립≪제8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최흥만)≪제47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창립 55주년 기념 『2000대한사협사진집』 발간

제55차 정기총회 개최 대림정대한사협 사진강좌 개최(연8회) 월례촬영회 개최(연5회)정읍지회 창립제27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정읍 내장산)≪제48회 대한사협전≫ 및 CD작품집 제작 예총화랑 제1전시실

제56차 정기총회 개최 사랑채월례촬영회 개최(연4회)제28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서울 남한산성)≪한중 국제교류전≫ 대한사협 대구지회 대구 대덕문화회관≪제49회 대한사협전≫ 및 CD작품집 제작 예총화랑 제1전시실

제57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월례촬영회 개최(연6회)제29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 중앙탑공원)≪제9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김한용)≪제50회 대한사협전≫ 및 2003대한사협작품집(CD작품집) 발간예총화랑1-2전시실

『대한사협회보』 제12호 발간

제58-60차 정기총회 개최제51-53회 ≪대한사협전≫제30-32회 전국회원촬영대회대한사협 인터넷홈페이지 개설(wwwpaakoreacom)제1회 대한사협 사진공모전

『대한사협회보』 제13호 발간『창립60주년 전국회원전 작품집』 발간(2005)이해선 선생 탄신 100년기념 유작전(대구middot충주middot원주middot대전middot전주순회전) 개최 및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보는 1950-60년대』 (눈빛) 발간(문화관광부middot조선일보 후원)남원지회 청주지회 구미지회 폐쇄(2006년)전주지회 설립(2006년)

제61-63차 정기총회 개최≪제54-56회 대한사협전≫제33-34회 전국회원촬영대회이천지회 폐쇄(2007년)

2000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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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위원rarr고문 안장헌 이정훈고문추대 방대훈이사 강승규(면) 김이경(면) 원종철 김광석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 박노택안장헌 이정훈 방대훈 회장 김완기 부회장 황순조 유병주(대전) 총무이사 윤중일이사 김준영 원종철 김광석 심재욱감사 강승규 이재옥

총무이사 윤중일(면) 최인호

회장 최진연

회장 최진연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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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지회 김제지회 원주지회 폐쇄(2008년)한밭지회 설립(2008년)≪제10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안장헌 2007)≪제11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조세현 2009)

제64차 정기총회 개최 PJ호텔 4층 카라디움≪제57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제35회 전국촬영회

제65차 정기총회 개최 충무로 아스토리아호텔제36회 전국촬영회 및 대천지회 전국 사진인리더 초청세미나(한화콘도 세미나실 대천해수욕장)김제지회 재설립(지회장 이성수 총무 구반반) ≪제58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

제66차 정기총회 개최 충무로 아스토리아호텔≪제12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안희탁) 제37회 전국촬영회 및 대천지회 전국사진인 리더 초청 세미나(대천해수욕장내 청주대 수련원 및 머드축제광장)울산지회 설립(지회장 이헌배 총무 심화실) ≪제59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

2013년 제1차 이사회 개최 충무로 통로이미지(주) 회의실 참석 이정훈 외8명제67차 정기총회 개최 캐피탈호텔 뷔페식당 스카이(그릴 룸)≪제60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회원 자질 향상을 위한 사진학 강좌 개설(강사 진동선 2013~2014)

≪제13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마이클 케나(MichaelKenna))

2010

2011

2012

2013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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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1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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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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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회장 정건영

회장 이철집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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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3

김 완 기(金莞祁 1944~ )

1962 충주고등학교 졸업

1964 청주교육대학교 졸업

1969 《제1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입선

1977~1991 KBSEBS방송 출연 15년

1989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교육학 석사)

1990~1999 《대한민국사진전림회》 8회 입선

1993~1999 청영회 회장 역임

1997 《제16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 특선

1998 교육부 초등교육정책과장 역임

1999~2013 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 3회 역임

1999~2014 《전국사진공모전》 심사위원 70회 역임

2002 강남구사진작가회 창립회원 및 회장 역임

2003 서울성북교육청 교육장 역임

2004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초대작가

《서울특별시사진대전》 초대작가

《제1회 김완기사진전》 세종문화회관별관 광화문갤러리

2004~2008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 역임

2005 2013 제24회 제31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심사위원 역임

2005~2007 서울특별시사진작가협의회 초대 회장 역임

2006 『김완기사진집』 출판 창조집단 시빌구

《제2회 김완기사진전》 세종문화회관별관 광화문갤러리

2008~2014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조정위원

2011 《서울특별시사진대전》 운영위원 역임

2011~2014 APC뉴스(한국예술사진인연합회) 회장

2013 김완기 자서전 『분필과 셔터로 그린 자화상』 출판 하얀나무

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고문

강남구사진작가회 자문위원

서울특별시사진작가협의회 고문

청영회 고문

한국사진작가협회 자문위원

구 술 자 연 보

안장헌(安章憲 1947~ )

1969 2 고려대학교 농업경제학과 졸업

1966~2014 고려대학교 호영회 창립회원 호영동우회 회장역임 및 회원

1968~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원 이사(1973~1992) 회장(1993~1995) 현 자문

1973~1975 동화출판공사 『한국미술전집』 사진담당

1976~1977 월간 『영상』 편집장

1977~1979 현암사 『한국미술오천년』 기획 및 편집책임

1979~1995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 3회 역임 현 자문위원

1980~2005 호영문화사 편집인

1981~1992 신구대 사진과 강사

1984~1987 서울교육대학 미술교육과 객원교수(사진학)

1990~1994 롯데문화센터 사진교실 강사

1994~1998 삼성사진문화교실 전임강사

1995~2014 한국불교사진협회 고문

1995~2014 (사)신라문화원 이사 현 자문위원

2000~2014 경주 계림사우회 지도교수

2004~2009 동강사진마을 운영위원

2005~2014 문화유산사진연구소 소장

2009 봉은사진교실(봉은사) 강사

2010~2014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 안장헌디지털사진교실 지도교수

그룹전

1966~2014 고려대학교 호영회 호영동우회 회원전 80여점 출품

1968~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전(17~60회전) 70여점 출품

1990 《사진가 8인전》 후지포토살롱

1994 《한국현대사진의 흐름전》 〈산사일기〉 출품

1996 《Image ofKoreanCultual Heritage》 UNESCO본부 파리

1997 《Buddist Images ofKorea》 독일 함부르그

1997~1998 《서울사진대전》 〈낙선재 일곽〉 〈금원에서〉 출품

1997~2014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전 19점 출품

1998~1999 《경기도사진작가초대전》 출품

1999 《한일사진교류전~자연과 인간을 향하여》 출품

2001 《아름다운 우리 문화재 4인전》 국립진주박물관

2004 《한국다큐멘터리사진 33인전》 동강사진축전

개인전

1996 《서라벌 빛 그리고 향기》 서라벌문화회관

2002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신라문화원 화랑

2003 《세계문화유산과 경북》 경주문화EXPO솔거방

2007 《왕릉의 호랑이》 동강사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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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창호》 인사동 갤러리 북스

2010 《돌 호랑이 그림 호랑이》 인사동 갤러리 북스

2012 《선비의 고향 서원》 인제대 도서관 김학수기념박물관

주요 사진저작

1982 『석불』 호영

1989 『석굴암』 예경

1991 『경주 남산의 탑골』 열화당

1992 『선의 세계』 호영

1993 『영겁의 미소』 불광

1994 『신라의 동해구』 열화당

1996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삼성문화재단

1998 『서원』 열화당

2002 『신라의 마음 경주』 한길아트

『남산』 한길아트

2003 『돌에 새긴 정토의 꿈~석불』 한길아트

『석조미술의 꽃~석가탑과 다보탑』 한길아트

『사진으로 보는 한국미~무늬』 호영

2005 『BUDDHA~Bildnisse ausStein inKorea』 ErnstWasmuthVerlog

Tubingen 독일 베를린

2006 『범종~생명의 소리를 담은 장엄』 한길아트

저서

1987 『국립공원』 김성옥 문순화 송기엽 안장헌 공저 호영)

1995 『사진으로 배우는 사진촬영교실』 호영

2001 『아름다운 우리문화재』 관조 김대벽 한석홍 안장헌 공저 국립진주박물관

2003 『문화유산 일기』 진선출판사

수상

1977 《백오사진상》 작품상 수상(대한사진예술가협회)

1999 『서원』으로 《간행물윤리상》 저작상 수상(간행물윤리위원회)

2006 《한국사진문화상》 공로상 수상(한국사진작가협회)

2007 《이해선사진문화상》 수상(대한사진예술가협회)

2011 《대한민국문화유산상(대통령상)》 봉사활용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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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5

참 고 문 헌 목 록

「봄 국전심사에 물의 사진 심사위원에 시비」 『동아일보』 1977421

「봄 국전 심사 낙수(落穗)」 『경향신문』 1977425

「현대사진문화상 이해선 씨 뽑아」 『동아일보』 19781128

「사진문화-사협고문 이해선 씨 작품집 발간」 『매일경제』 19801129

「사진 50년 역사를 한 눈에」 『매일경제』 1981120

「사진작가 이해선 작품집 두 권 내놔」 『동아일보』 1981629

「부고-원로 사진작가 이해선 씨」 『동아일보』 1983111

「일화로 엮는 명암 100년 화단이면사( ) (27) 화가와 문인과 신식 여성」

『경향신문』 198554

「이해선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사진전」 『연합뉴스』 20051026

「lt단신gt 백오 선생 탄신 100돌 사진전」 『문화일보』 20051031

「사진예술가협회 창립 60주년 기념전」 『매일신문』 20051117

「문화의 향기-전시」 『부산일보』 200615

「백오 이해선 선생 미발표유작 사진전」 『부산일보』 200617

「[전북][광주전남][제주][대전충남]문화가」 『동아일보』 2006120

「영월 동강사진박물관-이해선 특별기획전 2007년 3월 첫 주까지」 『뉴시스』

20061227

「사진과 친해지려면 옛 서울역사로 가보세요」 『헤럴드경제』 201041

월간지 계간지

김용준 「서화협전의 의미」 『삼천리』 1931년 11월호

「lt부감(俯瞰)gt(이해선 작)gt」 『사진문화』 1956년 6월호

「아마츄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호

연성숙 「일제 한인귀족의 근황」 『진상(眞相)』 1960년 3월호

「창간사 이해선 씨」 『포토그라피』 1966년 8월호

「나의 발언」 『포토그라피』 1966년 8월호

「작가 지상초빙작가-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달의 작품사진 제주풍물-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해선 「해외 예술사진 감상실 (1회)」 『포토그라피』 1968년 4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6) 석가탄일」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7)」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제1회 새한사진콘테스트」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8) 동해진미」 『포토그라피』 1969년 9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9) 야채밭」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0) 건제(乾梯)」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제18회 국전 소식」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1) 초설(初雪)」 『포토그라피』 1969년 12월호

이해선 「돌과의 대화 30년」 『월간 중앙』 1969년 12월호

「초대작가 사진」 『포토그라피』 1970년 9월호

이해선 「고궁풍물(1)」 『포토그라피』 1971년 1월호

_______ 「고궁풍물(2)」 『포토그라피』 1971년 2월호

이해선 관련

일간지

「입선자의 방명록」 『매일신보』 1926512

이태준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1029

「금조개장한 동미전 제2회」 『동아일보』 1931412

홍득순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417

「인사(人事)」 『매일신보』 193886

이해선 「예술사진의 연혁과 개념」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동인전」 『경향신문』 19491115

「인사(人事)」 『경향신문』 1953110

이해선 「등하수상(燈下隨想)」 『동아일보』 19551112

_______ 「사진예술의 독자성」 『동아일보』 1956126

_______ 「사진 8인전 소감」 『경향신문』 195647

_______ 「백오(白烏)의 변(辯)」 『동아일보』 195749

「김포공항에 내린 덕혜옹주-이해선 씨가 부축하고 있다」 『경향신문』 1962126

「5월 예술상에 붙이는 제언」 『경향신문』 196231

「2명이 사퇴 사진부문심위원」 『경향신문』 1964109

「영예의 산실 안팎」 『동아일보』 19641013

「횡설수설-국전 사진부 이해선 심사위원 사퇴」 『동아일보』 19641014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중요한 내용middot형식 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1020

「열띤 감정으로 충만-창협 창립 사진전」 『동아일보』 1965119

「한국국제사진살롱 위원 명단」 『동아일보』 1965116

「동아국제사진살롱 심사평-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28

「제4회 사진동우회전」 『동아일보』 1966121

「동아사진살롱 심사평-총 801 응모」 『동아일보』 196729

「위원장에 이종우 씨 국전심사위원 위촉」 『동아일보』 1967920

「국전심사위원장 도상봉 씨 선출」 『경향신문』 1968919

「석우회(石友會)서 돌 전람회」 『동아일보』 1970428

「예술인에 훈장 이해랑 씨 등 9명」 『경향신문』 1972118

「외길 한평생 lt11gt 사진middot예술 이해선」 『선데이서울』 1973318

「현역 원로 작가 초대전 일제하의 침울이긴 예술자세 생생하게」 『경향신문』

1974831

「이해선 씨 작품전 향토풍물 50점 전시」 『동아일보』 19741118

「이해선 사진전」 『경향신문』 19741119

「이해선 사진 작품전 24일까지 신문회관」 『매일경제』 19741121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423

「국전운영위원 위촉」 『동아일보』 1976317

「국전사진부문 사단중진들 반발」 『동아일보』 1976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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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_______ 「고궁풍물(3)」 『포토그라피』 1971년 3월호

_______ 「고궁풍물(4)」 『포토그라피』 1971년 4월호

_______ 「고궁풍물(5)」 『포토그라피』 1971년 5월호

_______ 「고궁풍물(6)」 『포토그라피』 1971년 6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7)」 『포토그라피』 1971년 7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8)」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포토그라피 창간5주년에 붙여서」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9)」 『포토그라피』 1971년 9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0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1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2)」 『포토그라피』 1971년 12월호

「제2회 사진국전마감 심사위원결정」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이해선 「이해선 떡에 얽힌 시속(時俗)의 금석(今昔) 옛떡이 사라져 간다는데」

『월간 중앙』 1973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1)」 『포토그라피』 1973년 8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2)」 『포토그라피』 1973년 9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0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6)」 『포토그라피』 1974년 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7)」 『포토그라피』 1974년 3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8)」 『포토그라피』 1974년 4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9)」 『포토그라피』 1974년 5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끝)」 『포토그라피』 1974년 6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 『포토그라피』 1974년 7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2)」 『포토그라피』 1974년 8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3)」 『포토그라피』 1974년 9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4)」 『포토그라피』 1974년 10월호

_______ 「작가와 작품-풍물백태 중에서」 『포토그라피』 1974년 1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6)」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7)」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8)」 『포토그라피』 1975년 3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9)」 『포토그라피』 1975년 4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0)」 『포토그라피』 1975년 5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1)」 『포토그라피』 1975년 6월호

_______ 「곡필무사(曲筆誣事)를 밝힌다」 『월간 중앙』 1975년 11월호

「영상 창간 1주년 기념 좌담회 한국 사진 산업의 의 오늘과 내일」 『영상』 1976년 6월호

「국전 초대작가 8인선 김조현 이건중 이경모 이해선 임응식 이형록 정인선

조현두」 『영상』 1977년 1월호

「남기고 싶은 작품 3 이해선」 『영상』 1977년 5월호

「예술사진에 대한 견고한 확신 이해선 사진의 예술성」 『영상』 1978년 5월호

「한국현대미술대전」 『영상』 1978년 10월호

이명동 「처음 제정된 사진문화상에의 기대」 『영상』 1979년 2월호

「행사 백오 이해선 선생의 사진작품집 출판기념회」 『영상』 1981년 2월호

「작품집 소개 이해선 작품집 중에서」 『영상』 1981년 4월호

박재능 「다양한 자기 세계의 길」 『영상』 1981년 12월호

「영상방담-사단의 이 얘기 저 얘기 김정래 임석제」 『영상』 1982년 1월호

「이미지의 합창-봄의 첫 장」 『영상』 1982년 4월호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 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호

岩宮武二 「너 어디 있느냐」 『영상』 1983년 1월호

최인진 「1930년대의 아마츄어 사진활동」 『사진사연구』 통권 제5호 1983년 9월호

박재능 「월평-원로 이해선 선생을 추모한다」 『영상』 1983년 12월호

「한국 근대미술의 발자취」 『계간미술』 중앙일보사 1985년 봄호

「다시 보는 명작 정도선 정인선 신현국 강대환 김일창 이해선」 『영상』 1986년 10월호

「고 백오 이해선 선생 추모비 건립」 『영상』 1989년 1월호

「동경 유학생들의 한국 근대미술」 『월간미술』 1989년 9월호

「화보로 보는 한국 동경 유학생들의 자화상」 『미술세계』 1993년 5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조선총독부 관보』 제4087호(192647) 한국학문헌연구소 서울 아세아문화사 1926

이태현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1집 서

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2

_______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 자화상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3집 서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4

신명호 「일제하 이왕직과 이왕가 족보」 『한국학대학원논문집』 제11집 한국정신문화

연구소 1996

최인진 「한국사진 역사의 증인(4) - 사단의 단체 활동과 이해선」 『한국사진』 2002

이가라시 코이치 이중희 역 「조선미술전람회의 창설과 서화」 『한국근대미술사학』

제12집 한국근대미술사학회 2004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의 입학제도와 조선인 유학생」 『동악미술사』 제6호 2005

허보윤 「미술로서의 디자인 이순석의 1946-1959년 응용미술교육」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단행본

조우석 『한국사진가론』 눈빛 1998

작품집 도록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1926

이해선 『이해선 사진작품집』 평화당 1980

_______ 『한국의 고궁』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0

Tucker Anne Iizawa Kotaro Kinoshita Naoyuki The History of

Japanese Photography London YaleUniversityPress 2003

이해선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남은 1950-60년대』 눈빛 2005

_______ 『이해선 사진집 1950~1960년대 이야기』 동강사진박물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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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7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일간지

「부산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24531

「성공을 기대 조선사진연구회 현일영 씨 담」 『조선중앙일보』 1936826

「경성아마사진구락부 제1회전」 『조선일보』 1938417

「사진작품전」 『동아일보』 19381014

「경성사진동호회 작품전람회개최」 『조선일보』 19381027

「사진동호회작품전」 『동아일보』 1938112

「경성아마추어 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39527

「아마추어 사진인화전」 『매일신보』 19391115

「동서남북-lsquo아마추어rsquo 제4회 인화전람회」 『동아일보』 19391115

「동서남북-합동인화전」 『동아일보』 1940126

「아마추어 사진의 인화전」 『매일신보』 194074

「경성아마츄어 제5회 인화전」 『조선일보』 194075

「경성백양사우회 제1회 인화전람회 개최」 『매일신보』 19401113

「제2회 사진전 명일부터 화신에서-백양사우회」 『매일신보』 19411124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55

「사진작품전」 『조선일보』 1946119

「전국문화총연발족」 『동아일보』 194729

「제1회 조선사진예술전」 『경향신문』 19475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7510

「사진전람회개최」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전응모작 답지」 『경향신문』 1947615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 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629

「제1회예술사진전람회 15일부터 동화백화점」 『경향신문』 1947713

「예술사진 입선 수상식을 거행」 『경향신문』 1947720

「예술사진전 19일부터」 『동아일보』 1947121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8224

「사예(寫藝) 2회전 작품을 현상모집」 『경향신문』 19481013

「예술사진전 심사 오는 8일로 연기」 『동아일보』 1948127

「지방출품우수-제2회 예사전」 『동아일보』 19481212

「사진예술전 22일부터 동화화랑서」 『동아일보』 19481221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964

「전국종합사진전 심사결과-특선1석 최인집 씨」 『동아일보』 194977

「사진예술의 정화-제3회 전국예술사진전」 『경향신문』 19491010

「예술사진전 30일로 마감박도」 『경향신문』 19491128

「예술사진전 입선자 발표」 『경향신문』 19491213

「예술사진전시회」 『동아일보』 195316

「춘계사진섭영회 26일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3

「본사후원 춘계촬영대회 오늘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6

「사진현상모집」 『경향신문』 1953517

「특선에 lt만춘gt」 『경향신문』 1953527

「인화 당선자 수여식」 『경향신문』 1953529

「사진작품발표전」 『경향신문』 1954413

「예술사진전시회 US-S화랑서」 『동아일보』 1954415

「집회」 『동아일보』 1954916

「경복궁서 촬영대회」 『경향신문』 1954919

「내 26일 촬영대회 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4922

「사연 촬영대회 여감(餘感) 아마추어 사진도(寫眞道)」 『동아일보』 1954103

「문화집합」 『동아일보』 1955122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77

「사연(寫硏) 창립 10주년 기념 어제 촬영대회 성황」 『동아일보』 1955711

「촬영대회 입선작 결정」 『동아일보』 1955819

「8인 사진전 개최」 『동아일보』 1956329

「9회 사연(寫硏)전」 『동아일보』 1957414

「신록촬영대회 개최 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62

「대한사진예술가협회서 사진전시회 개최」 『동아일보』 1958711

「10년 후의 우리 문화 건국 20주년을 장식하고 싶은 것」 『동아일보』 1958821

「사진예술가협회 11회 회원작품전」 『동아일보』 195979

「문화 소식」 『동아일보』 1960119

「국전에 사진부문도」 『동아일보』 1963410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결정 특선 조천용 작」 『동아일보』 19641020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653

「렌즈의 향연 영예의 초점-제4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동아일보』 196667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61217

「사진예술가협회전」 『동아일보』 19681022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9830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996

「국립공보관 12월 전시회 스케쥴」 『경향신문』 1971126

「문화단신」 『경향신문』 19721128

「사진예술협 작품전 7일까지 공보관서」 『매일경제』 1973111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에 안준천 씨」 『경향신문』 197526

「동아포우스트」 『동아일보』 19751117

「사진예술가협회 창립30돌 기념전」 『경향신문』 19751118

「추계 친목 촬영대회」 『매일경제』 197610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7830

「사진예술가협 정총(定總) 31일 하오 대동관서」 『매일경제』 19781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81031

「문화광장」 『동아일보』 1993121

「한국사진예술 50년을 펼친다」 『한겨례』 1994111

「사진예술가협 사라진 풍물전」 『서울신문』 20051025

월간지 계간지

「사진클럽 지상소개 대한사협의 발자취」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박필호 「논단 대한사협16회전을 보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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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대한사협 16회전」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사협 16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8년 7월호

「대한사협 충남지부 회원전」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경축 창간 3주년 사진과 관광 포토그라피-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대한사협 18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제18회 대한사협전」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 작품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70년 3월호

「축 창간4주년 서울 선데이 카메라 클럽」 『포토그라피』 1970년 8월호

「축 포토그라피 창간 5주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김종양 씨 대한사협 고문 추대」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3년 3월호

「lt파도gt 김도현 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신춘초대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근하신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75년도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창작선」 『영상』 1977년 1월호

「전시장 순례 대한사진협회 회원전」 『영상』 1977년 11월호

「지상소개-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대한사협 제27회 정기총회 개최」 『영상』 1979년 7월호

박필호 「대한사협 27돐에 대한 축사」 『영상』 1979년 7월호

「제26회 대한사협전」 『영상』 1980년 1월호

「제27회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사진전시회」 『영상』 1980년 12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요강」 『영상』 1981년 5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영상』 1981년 10월호

「탐방-뜻이 있으면 길이 있게 마련 세 번째 전국대학사진 공모전을 연 대한사협충

남지회의 단합된 모습」 『영상』 1983년 1월호

「제3회 전국대학생사진 공모 제12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월호

「제13회 대한사협 충남 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2월호

최인진 「경성아마츄어카메라구락부를 말한다」 『사진사연구』 1984년 7월호

「대한사협본부 주최 제9회 한국국제사진전 입상자」 『영상』 1989년 1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대한민국예술원 편 『한국예술총감 자료편』 대한민국예술원 1965

한국사진협회 「사진계소식 1969년도」 『한국사진연감』 1970

_____________「한국사진협회의 연혁 1976년 10월 30일」 『한국사진연감』 1976

임범택 「사진」 『1977년도 문예연감』 1978

______ 「사진」 『1978년도 문예연감』 1979

한국사진협회 「역대역원명단(歷代役員名單) 1962년~1987년」 『한국사진연감』

1988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제1장 한국사진협회 창립 이전의 사진계 동향」 『한국사협

사 I 1945-1970』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01

최인진 「해방 초기의 사진잡지 연구-『국제보도』와 『사진문화』를 중심으로」 『한국

사진학회지 AURA』 제10호 2003

박혜성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사진문화』 목록 및 해제」 『한국 사진 잡지

『사진문화』 연구』 명지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한국사협 50년사』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13

단행본

임응식 『내가 걸어온 한국사단 임응식 회고록』 눈빛 1999

작품집 도록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제16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7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8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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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9

원 문 자 료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년 10월 29일 4면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년 4월 17일 4면

1 이해선 양화기(洋畵期) 관련 참고 자료

「입선자의 방명록」『매일신보』 1926년 5월 12일 3면

「금조 개장한 동미전 제2회」『동아일보』 1931년 4월 12일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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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참고 자료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년 5월 5일 2면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년 6월 29일 3면

「신록촬영대회개최-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년 6월 2일 4면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년 7월 7일 4면

예술사진전 조선사진예술연구회에서는 5월 6일부터 동11일까지의 6일간에 걸쳐 동화백화점(舊三越) 갸라리--에서 창립기념사진전을 개최하기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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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해선 관련 원문 자료

원문은 당시의 표기를 그대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현재의 띄어쓰기와 맞춤법에 맞지 않는 부분들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수정하였고 일부 [ ] 안에 병기했다 원문의 한자는 모두 한글 독음으로 고쳤으며 의미 전달을 위해 필요한 경우 ( )안에 병기했다

「대담 아마추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 pp 48~52

작가가 사태(沙汰)났어

본지 공사간에 바쁘실 텐데helliphellip 사진문화의 발전을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

해 주십사 하는 것은helliphellip 요즘 각 직장이나 학생들 간에 사진열이 굉장히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 비

추어서 이 아마추어 카메라맨의 지도 문제를 비롯하여 초보자의 진로랄까helliphellip 이런 문제에 대한 말

씀을 좀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해선6middot25 동란 후에 개인적으로 사진을 연구해 보겠다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직장이나 학교 단위로

사진동호자의 클럽이 많아 지고 작품 발표라던가 전시회 같은 것이 무척 많아졌는데helliphellip 어쨌든

일반 사회인이나 학생 간에 사진열이 높아졌다는 건 기쁜 일이야

임응식그런데 아직도 이 카메라를 사치품으로 취급하는 층이 많아서 곤란해요

이 나라(정부)에서부터 사치품 취급을 하더군helliphellip 여자들이 다이아몬드를 사려는 것과 사진을 연구하

려는 사람이 카메라 장만하는 것을 똑같이 취급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곤란

하지

임 헌데 우리 사단(寫壇)에선 우선 lsquo사진작가rsquo라는 용어를 쓰는 데에 신중을 기해야 하겠어요 웬 놈의

lsquo사진작가rsquo가 그리도 많은지helliphellip 이건 카메라만 메고 다니면 모두 작가 행세를 하니helliphellip

이 카메라 멘 것이 모두 lsquo작가rsquo라면 대한민국에 lsquo사진작가rsquo가 수 십만도 될 걸helliphellip 작가라는 친구들을

체에 넣어서 걸러 놓으면 엄격한 의미에서 진짜 lsquo작가rsquo는 몇 사람 밖에 없을 텐데helliphellip

임 호주머니에 만년필을 꽂았다고 해서 문학가 혹은 소설가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겠는데hellip

hellip 어쨌든 요즘 성행하는 사진작가의 사태를 우선 잡지에서 만이라도 용어 사용에 엄격한 규정을

지어서 질서를 잡아 주어야겠어요

이 그것도 과도기적 현상이겠으니까 차차 지양되겠지helliphellip 오늘 해달라는 얘기는 그런 넋두리가 아닐

테니까 어디 이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본지 한마디로 얘기하자면helliphellip 카메라는 어떻게 해서 장만을 했는데 mdash 자 그 다음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겐지 몰라서 어쩔 줄 모르는helliphellip 이런 아마추어와 초보자들의 진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얘기를

좀helliphellip 현재 직장 단위로 사진 동호자들이 모여서 클럽을 이룩한 것이 십 여 개 있고 학교 단위로는

이십 여 개나 되는데요helliphellip

관련 자료 소개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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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인식이 안이해서 탈이야

이 극히 초보적인 입장에서 사진을 해보고 싶다helliphellip 다년간 연구를 한 다음엔 작가가 돼 보겠다 mdash 하

는 사람들을 회원으로 해서 수 십 년 동안 연구를 해 왔는데helliphellip 오늘날 하고 있는 일도 그것이지만

helliphellip 여러 부문에 걸쳐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서적인 면에서 사진과 친해보고 싶다던가

또는 카메라를 장만했는데 어떻게 하면 앞으로 향상 발전할 수 있는가 mdash 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신인이라고 하겠지 특히 학생들의 교내 활동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helliphellip 헌데 막상 다다

르고 보면helliphellip 어떠한 길이 올바른 길인지 막연해 하는 모양이더군요

임 초보자들은 무엇보다도 사진 자체에 대한 정의를 뚜렷이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아마추어 mdash

하면 취미적 입장에서 사진을 다루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조각이나 회화와 같이 사진도 어엿한 예술이니

까 취미 도락(道樂)적인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예술을 추구하는 진지한 마음의 준비가 우선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물론이죠 대개 클럽 조직이 되어 있으니까 선생들의 지도를 받고 있겠지만 내가 알기에는 전문가

가 아닌 다시 말하면 취미 정도에서 관심이 있는 선생들이 지도를 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역시 전문으

로 사진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지도를 가끔씩이라도 받는 게 좋겠지요

임 지도를 한다는 사람들의 태도부터가 성실성이 없는 것 같아요 만년필을 샀으니까 나도 한 번 써 보

자 mdash 해서 작가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취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남의 lsquo지도rsquo를 담당

할 수는 없을 텐데 mdash 우리가 사진을 전공한대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억지로 지도해 주겠다고 밀고

들어 가겠다는 건 아니지만 mdash (웃음) mdash 어쨌든 전문가의 지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학생 클럽이나 직장 클럽 같은 동호자의 모임을 사단의 일부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취미

에서 시작했더라도 일정한 과정을 밟고 다년 연구를 거듭하면 자연히 작가를 지향하게 되겠지만hellip

hellip 그런 면에서도 처음 싹트기 시작하는 신인의 지도가 퍽 중요한 것이지요

취미middot도락이란 관념을 버려야 해

임 지금 형성되어 있다는 직장이나 학교 단체의 거의 전부가 전문적인 입장에 서 있지 않은 것 같더군

요helliphellip 사진에 대한 근본 의식이 너무도 안이한 것 같아요 카메라를 통한 표현의식에 절실한 감정

이 없어요helliphellip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비판을 받지 않는다helliphellip 하는 따위의 도피를 해서는 곤란

하죠helliphellip 창작의식이 확고하게 수립되지 않아서는 향상이 없는 것인데helliphellip 소문에 듣자면helliphellip 너

무 기술 면에만 치중하고 정신적인 면이 소홀히 취급된다는 거에요 helliphellip 나는 직장을 갖고 있으니

까 사진이란 것은 취미 정도로 한다 mdash 하는 태도를 버려야죠 특히 이 점은 지도자들에게 권하고 싶

은데helliphellip 예술의식helliphellip 이것이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절대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까

이 그렇구 말구요helliphellip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새로 사진을 공부하겠다는 신인들에게 네 가지 의식을 주

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휴머니즘 mdash 우선 사람이 돼야 하거든요 교양이라던가 인격 덕망helliphellip 이런 면에서 인간이

돼 있어야 하고 둘째는 사진예술을 한다고 해서 사진예술이 무엇이냐helliphellip 이것만을 추궁해서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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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요 좀 더 시야를 넓혀서 예술이라는 게 뭐냐 mdash 하는 걸 먼저 알아야지 셋째에 가서 사진예술이

라는 게 뭐냐 mdash 를 연구하고 넷째에 가서야 비로소 작품이라던가 창작의식 기교 기술에 대한 검

토를 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기본조건을 머리 속에 언제나 간직하도록 나는 주장해 왔어요

임 기술면을 등한히 할 수는 없겠지요 기술 없이는 표현이 안되니까helliphellip 그러나 이선생 말씀처럼 인

간본연의 문제도 크긴 큽니다 다른 예술부문의 사람보다 교양면에서 뒤떨어지지나 않는가 mdash 하는

것이 항상 염려되는데helliphellip 만일 뒤떨어진다면 큰일이지요 기술도 중요한 문제겠지만 교양인격 같

은 것도 예술가가로서의 긍지를 위해선 떨어질 수 없는 문제고helliphellip 더욱이 좋은 기술을 가졌으면서

도 기초교양이 모자라서 좋은 작품을 낼 수 없다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으니까helliphellip 교양인으로서의

자격도 다른 예술부문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사진을 해야할겝니다

이 기교나 기술을 어떻게 우물쭈물 배웠다고 해서 작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helliphellip 예술이란 그 자체

에 대한 조예부터 깊어야 합니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조리개가 얼마다 타임이 어

떻다helliphellip 암실작업은 어떻게 하는 거다helliphellip 이것만을 알았다고 해서 작가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에

요helliphellip 인간면 예술면 기술면에 똑 같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마 사진을 연구하겠다는 신

인들의 기본이념이 돼야 할겝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지도한다는 면에서

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거든요 mdash

임 어쨌든 기술을 위주로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난 옛날 얘기입니다

지도자 시비

이 지났다기 보다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는 장래에나 변할 수 없는 기본이념이겠지요 사진이라는 것

은 더욱이나 고도의 대중성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인격과 교양이 필요해요 기계라는 거야 찍으면

사진이 되도록 마련된 것이니까 예술까지는 못 가도 사진은 되거든 mdash 그러니까 그것을 예술로 이

끌려면 찍는 사람의 성분이 문제되는 것이지요helliphellip

임 그런 의미에서도 사단의 규정이 필요하고 작가라는 규정이 필요해요 사단이라는 것에 너무 엄격한

규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helliphellip 만년필을 가졌다고 해서 전부 문학가가 아니라면helliphellip 카메라를 메었

으니 작가다 mdash 하는 엉터리도 용납될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우선 필요한 것은 취미 도락이라는 관념

을 지양해야 할 텐데helliphellip

이 취미가 차차 심각해지면 창작의식도 생기는게니까helliphellip 그런 사람들을 지도 계몽해서 한 사람이라

도 작가로 이끌어야 하겠지요helliphellip 카메라를 살 때부터 나는 사진작가가 되겠다 mdash 하는 사람은 있

을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임 lsquo싼데이rsquo 카메라맨은 논의의 대상이 안되구요helliphellip (웃음)

이 그러니까 지도자들이 작가적인 태도에 확고한 이념을 앞세우고 지도에 임해야 하는 건데helliphellip

본지 각 단체 지도층의 지도방침에 대한 구체적인 태도를 어떻게 규정하겠습니까 helliphellip

임 우선 사진에 대한 인식부터 고쳐야 해요 말이 중복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친구 좋고 사진 좋아서 우리

끼리 하면 그만이다 mdash 하는 생각들이 많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만이라도 그렇지 않다

관련 자료 소개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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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싶어요 학생들이 카메라를 사 가지고 몇 사람 모였으니까 책임자 격

인 선생이 필요하다 mdash 해서 책임 맡았다는 사람으로는 지도가 안 될 게 아닙니까 그렇다고 청해 오

지도 않는데 내정 격으로 뛰어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구helliphellip (웃음)

본지 또 한 가지 요즘 일대 성황을 이루는 것이 소위 현상사진(懸賞寫眞)이라는 건데요helliphellip 이 현상사진

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진에 대한 모욕도 있지helliphellip

임 거 참 꼴사나운 일이 많아요 현상이란 걸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helliphellip 그 하나는 어느 연구

단체에서 순수한 의미에서 발표 바탕이 없는 아마추어를 위해 마련하는 경우가 있을게고 또 하나는

선전용으로 포스터 mdash 같은 데에 써먹기 위한 상업 정책적인 의식에서 모집하는 현상이 있을 테지요

이 어느 경우이건 간에 좌우간 현상 모집을 하는 목적이 있는데helliphellip 응모자는 우선 현상의 목적부터 확

실히 알고 응모를 해야 하겠지helliphellip

임 그렇죠 그런데 이 상업 정책적인 현상의 경우에는 사진문화에 대한 모욕적인 행동이 퍽 많습니다

이거 참 불유쾌한 일이지만helliphellip 가령 예를 들자면 응모자는 원판을 제공하라던가 또 낙선자의 작

품은 일체 반환치 않는다는 따위helliphellip이게 얼마나 사진예술에 대한 모욕적 행위입니까 helliphellip

이 그래요helliphellip 확실히 모순된 일입니다

임 필요에 의해서 현상모집을 했으니까 당선된 작품은 물론 필요하겠지만helliphellip 낙선작품을 반환치 않는

다는 것은 언어도단 입니다 낙선이 됐다 해도 작가의 입장으론 대단히 귀중한 하나의 작품일 텐데

그걸 안 돌려 준대서야 말이 되나요 주최측은 낙선작품의 원화를 돌려 줄만한 성의를 가져야 도리

에 맞을 텐데helliphellip 요즘 현실은 lsquo낙선rsquo이란 푸대접 밑에 원판까지 몰수당하는 판국이니helliphellip 원 참

이 그러니까 응모자는 무엇보다도 현상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지helliphellip 여러 번 겪은 일이지만 심사를

하다 보면 전혀 현상 취지를 도외시한 작품들이 있는데helliphellip

임 그거야 보나마나 낙선이죠 (웃음)

이 그러믄요 현상 응모자로서는 출품 규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 아니겠어요

임 그럼요

이 그런데 어떤 것은 작품에 제목도 없는 것이 있거든요 그런가 하면 제목과 작품내용이 전혀 특이한

엉터리도 있구helliphellip

임 저도 여러 번 겪은 일입니다

이 제목이란 것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벌써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찍는다는 의식이 있는 이상

제목도 정해져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아주 작품과 제목이 동떨어진 것들이 응모해 오니까

낙선의 자격이 충분할 수밖에helliphellip 하하하 (웃음)

임 그게 모두 사진에 대한 성의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이 그래요 성의가 없어요 자기 작품에 대해선 최선의 성의를 다 해야 할 텐데 그런 태도가 없거든helliphellip

제목을 안 썼는지 못 썼는지는 모르지만helliphel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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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그저 무턱대고 발표의식만 왕성한 까닭이 아닐까요

이 그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된 작가가 아닌 이상 발표기회가 좀처럼 없을 테니까

자기 실력의 평가를 받는다던가 남들과 경쟁해 본다는 의미에서 현상에 자주 응모하는 것은 좋은데

helliphellip 아 어떤 친구는 자기 실력 생각은 하지도 않고 상품이 적다 많다 시비를 하는 친구도 있으니 참

기가 막힐 일이지

주최자의 무성의도 고쳐져야 하고

임 그건 lsquo현상rsquo이라고 내거는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순수한 사진연구단체에서 모집할 때는

lsquo공모전rsquo이라던가 하는 문구가 좋지 않을까요 lsquo현상rsquo이라니까 lsquo상rsquo을 바라게도 되겠지만 어쨌든

lsquo현상rsquo이란 말 자체가 순수하지 못해요

이 그건 확실히 생각해 볼 문제이겠군요helliphellip 순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helliphellip 응모자들이 심

사원이 누구냐mdash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도 순수하지 못하고helliphellip 또 주최자가 모집광고를 낼 때

lsquo심사원은 추후발표rsquo라mdash하는 것도 순수하지 못해요 이것도 참 불쾌한 일인데 lsquo추후발표rsquo라는 걸

다시 생각하면 lsquo준비가 안됐다rsquo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심사원의 준비도 안 해 놓고 현상을 모

집하는 그런 무성의가 또 어디 있어helliphellip 이건 일종의 사기가 아니면 거만일 겝니다

임 그나 그뿐인가요 lsquo심사원은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함rsquohelliphellip 하는 모호한 광고도 있지요 응모자의 입

장에서 생각하면helliphellip 심사원에 불만이 있으면 응모를 아니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 심사원 문제만

은 정정당당히 명시해야만 나중에 가서 심사에 대한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출품을 한 다음에 심사

원이 발표된다는 것은 심사에 대한 불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helliphellip

이 그리고 응모자의 동태를 가만히 보면 아까 얘기가 나왔던 소위 lsquo취미정도rsquo라는 층의 발표 의욕이 굉

장해서 대부분의 응모자가 이 부류인 것 같은데helliphellip 여기 한 가지 탈이 있어요 현상응모 작품의 심

사라는 것은 무제한의 심사 레벨을 놓고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응모 작품 중에서의 우수 작품을 가

려낸다는 것은 이거 상식 문제가 아닙니다

임 그렇죠

이 아 그런데 어떻게 해서 현상에 당선이 되거나 특히 특선이라도 하면 그만 자기가 갑자기 위대한

작가라도 된 것처럼 대가연(大家然) 하고 으쓱대는 친구들이 많아서 걱정이야helliphellip (웃음)

이 lsquo특선rsquo이라는 것은 응모해 온 작품들 중에서 특선이지 결코 한국 사단 전체의 수준에서 특선이라

는 것은 아닌데helliphellip 그만 한 번만 당선되면 코가 높아지고 대뜸 대가 행세를 하려고 드니helliphellip 참

신인들은 특히 조심해야 할 일이지

남의 것보고hellip 우리 것도 보내고hellip

본지 이제 화제를 좀 바꾸어서 세계사단의 동향을 좀 말씀해 주실까요

임 세계사단의 얘기라면 직접 보아야만 얘기가 될 텐데helliphellip

이 서울 바닥에서 썩으면서 세계사단의 얘기를 어떻게 본 듯이 할 수가 있겠나 카메라를 메고 세계일

관련 자료 소개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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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도 했어야 얘기가 되지

임 그것보다도 사진을 통한 국제 교류 얘기나 합시다

이 그게 좋겠군helliphellip 얼마 전에 덕수궁에서 자유중국의 소개사진전시가 있었죠 미국공보원의 활동도

이를 테면 국제교류의 한 형식일게고helliphellip

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자유중국과 월남의 사진전시가 있었는데helliphellip 우리도 수출을 한다면 그 보

다 훨씬 좋은 작품들이 나갈걸요helliphellip

이 한미합동전이던가 한중합동전 같은 것도 하면 역시 국제교류가 되겠지요helliphellip

임 한미합동전은 불원한 장래에 개최될 것입니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lsquo인간일가(人間一家)rsquo의 사진

이 아마 이월쯤 한국에 올 겝니다 미국대사관이 주동이 돼서 작품 503점 전부의 전시회 계획이 추

진되고 있으니까요

이 남이 보내줘서 본 것은 있지만 우리가 남에게 보여준 것은 없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야 우리도 남에

게 보여줘야 교류가 될 텐데helliphellip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두 사람의 작품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임 개인적인 활동은 있었지요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사진살롱에 사진을 보내고 있으니까 개인

적으로는 더러 나간 셈이죠 개인들의 수출이라도 좀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지만

이 우리의 것을 내보내고 외국 것을 들여와서 서로 감상하고 연구하는 게 이를 테면 국제교류인데

아마 명년쯤엔 될까 몰라

임 작품교환전 같은 것을 위해서 대대적인 계몽운동이 필요 하겠죠

이 그렇죠 운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어요

임 그런데 근본적인 얘기를 하자면 한국 작가의 역량이 아직도 부족한 것 같아요 언젠가 외국 작가에

게서 들은 말인데mdash한국 사람은 한국을 보지 않았다mdash하는 얘길 해요 사진 작가에게 대한 말이지

만helliphellip 나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이 퍽 중요한 얘기다mdash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를 직시하는 것만이

사진은 아니겠지만 실용사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것이 사실 아닐까요 회화적인 쌀롱 픽처라던

가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리얼리즘 사진이라는 것에 너무들 치우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 국제 교류의 시발은 역시 소개적(紹介的)인 것 다시 말해서 르포르타주적인 것이겠으니까helliphellip

임 외국 작품의 모방 같은 것은 이제 집어치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mdash예술적인 것 이것만을 너무 추

구했기 때문에 사실이 한국적인 것과 국민성의 묘사 같은 것이 잘 되지 않았지요 정서적인 것에만

너무 골몰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일이고 helliphellip 예술을 위한 예술에 정신들이 팔려 있었지나 않은

지helliphellip 예술을 하기 위한 사진이라는 관념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이 예술을 염두에 안 둔다면 실용사진이 돼 버리게

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너무 치우친 것 같단 말입니다

이 특히 국제 교류를 생각한다면 아닌 게 아니라 외국처럼 르포르타주적인 사진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할거에요

임 그래요 거기에 예술성을 띄워서 소화할 만한 역량 있는 작가가 필요해요

이 또 하나의 가장 큰 문제는 위정자의 관심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 큰 난관입니다 국제 교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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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가족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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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말이고 역시 정부당국자의 적극적인 주

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어디 그래요

임 우선 사단 자체의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작가들의 작업도 촉구되어야 하구helliphellip 아까도 말이 나왔지

만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 출품을 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점 같은데서 작가들의 반성도 필

요하고helliphellip

이 개별적으로 미국 등지에 보낸 것은 아마 상당한 수가 되겠지요

임 그럼요 그랬는데 왜 성과가 없느냐mdash하는 반성이 있어야죠

이 오늘의 현실을 예술적인 면에서 기록하고 작품화 해야겠는데helliphellip 막연하게 예술을 위한 작품을 보

내니까 기교적으론 훌륭할지 몰라도 작품 자체에 내용이 없어서helliphellip 그래서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닐

임 그런 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빨리 우리의 수준을 높여서 국제 조류와 호흡을 맞추어 나가

야 할 것입니다

이 이거 아마추어를 위한 얘기라는 것이 잠깐 탈선을 한 것 같군 그러나 이런 문제도 참고가 되긴 하니

까helliphellip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합시다

본지 수고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helliphellip

(기록 O기자)

이해선 「lsquo백오(白烏)rsquo의 변(辯)」 『동아일보』 1957년 4월 9일 4면

30여년 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입학

이 되었을 당시 자축기념하는 의미에서 호(號)를

하나 지어본 것이 백오(白烏)라는 두 글자였다 처

음 듣는 사람들 중에서는 거문[검은] 까마귀는 있

지만 흰 까마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서로 웃어버리고 그 뜻을

설명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자의

(字意)를 해명해볼까 한다 백(白)은 흰 빛이요 오

(烏)는 흑색으로 통하므로 우선 흑백을 대조시켜

놓고 흰 종이 위에다 검은 먹으로 휘호(揮毫)할 것

이니 그 뜻이 내 생활과 부합될 것 같으며 둘째로

백 자(字)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첫 자를 떼어놓

고 오는 반포오(反哺烏)로 그 이름이 높은 새이므

로 평소에 효자 노릇을 못하여 온 나의 좌우명으로도 적당할 듯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새 중에서는

혹간(或間) 백변종(白變種)이 생겨나는 수가 있는데 그 흰새를 서조(瑞鳥)라고 떠들던 옛 시절도 있었으므

관련 자료 소개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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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내가 우연히 호를 지어 본 것이 검은 까마귀떼 속에서 서조 백오를 발견하였으니 나의 전도(前途)에는

반드시 서광(瑞光)이 비칠 것 같으므로 이상 여러 가지 의미를 차례로 생각해 볼 때에 나에게는 이 외에 더

좋은 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자의였었고 궁금한채로 불려온 백오

였었다 만담궁변(漫談窮辯)을 물소물책(勿笑勿責) 하소서 (사진가)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

이해선 「중요한 내용middot형식-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년 10월 20일 5면

사진작품에는 사진 특유의 형식이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러한 특유의 형식에 알맞은 표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의 특수성은 형식이 가지는 특수성 보다는

기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주관적이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작품심사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동일하게 중요시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작

품 속에서 그야말로 형식과 내용이 알맞게 부합된 특출한 작

품을 볼 수는 없었다 형식이 좋으면 내용이 빈약하고 좀 내

용이 있으면 형식이 미숙하고helliphellip 모두 결점이 있다 그러나

입상작으로 뽑은 8 점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

다 그리고 금년에는 lsquo칼러rsquo사진의 응모 점수가 30점이나 되

고 그중에서도 3점이 입상되었고 또 9점이 입선되었다는 것

은 lsquo칼러rsquo 사진의 앞날을 위해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lt전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장gt

[제1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년 2월 8일 5면

외국작품의 세련되고 빈틈없는 lsquo테크닉rsquo은 국내작품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서 우선 국내

작품을 형식에서부터 누르고 말았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이루게 된 것은 국내작가들

의 역량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lsquo국산인화지rsquo가 얼마나 엉터리고 조악한 것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대체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더욱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은 이와 반대적인 경향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예술이든 먼저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볼 때 국내작품의 후진성은

두말할 것 없이 형식의 경시에 있다고 하겠다 심사결과 흑백부에서나 lsquo칼라rsquo부에서 겨우 동상으로 한 점

씩 밖에 국내작품이 입상되지 못했다는 것은 다소 섭섭한 느낌이나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경종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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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더욱 우리 심사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독에서 응모한 lsquo칼라rsquo

작품이었다 물체의 외관 색감을 초월한 내면의 lsquo이미지rsquo가 발

산하는 짙은 감정의 색감으로 작가의 개성과 사상을 인상 깊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내 lsquo칼라라보rsquo의 후진

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상작으로 뽑힌 외국작품들은 오

늘의 세계 사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는 큰 자극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

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제2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총 818점 응모-사진예술에 도움」

『동아일보』 1967년 2월 9일 4면

지난해와 같이 흑백부문에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들은 모두가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산인화지의 조악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작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올해는 흑백

부문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기꺼운 일이라고

하겠다

특히 칼라작품에 있어서는 독일의 작품들이 특출했고 이들 작품들의 색감은 현대 과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 최고상으로 뽑힌 lt잊은 친구gt와 몇 점의 입상작품들은 칼라릴리프와 소라리

세이숀[솔라리제이션] 등의 수법으로써 모티

브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를 초객체적이고 추

상적으로 표현하고 작가의 짙은 개성과 사상

과 철학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입상작으로 뽑은 16점의 작품들은 오늘의

세계사단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

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심사위원 이해선 (위원장) 임응식 서순삼

박필호 안월산 정인성 최경덕 (이상 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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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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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관련 자료 소개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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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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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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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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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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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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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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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관련 자료 소개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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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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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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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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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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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0: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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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 모란룸≪제24회 백오사진상≫ 시상(공로상최진연)고 백오 이해선 선생의 한국사단 발전에 기여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白烏李海善寫眞文化賞)≫ 제정≪제40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한국의 풍물 사진공모전≫ 대한사협 호영출판사 공동주최

제48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1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유동호)원주지회 설립이천지회 설립청주지회 설립≪제41회 대한사협전≫ 코닥포토살롱제21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속리산)

제49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제2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황규태)제22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지회 주관-엑스포장)고창지회 폐쇄≪제3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윤주영)≪제42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대한사진술가협회 창립50주년 작품집』 발간

제50차 정기총회 개최 풍전호텔전주지회 설립≪제4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최민식)≪제43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1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대한사협회보』 제8호 발간제23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원주지회 주관-치악산)남원지회 설립≪제44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2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5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강상규)

『대한사협회보』 제9호 발간제24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전-대청호)대구지회 설립김제지회 설립≪제45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

제53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제6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이순흥)

『대한사협회보』 제10호 발간제25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대구지회주관 - 경주OK그린청소년 수련원)≪통일염원 전국사진공모대전 작품전시회≫ 개최(대구지회 주최-대구 동아쇼핑 전시관)≪제7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송기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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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회장 안장헌 부회장 이정훈 김완기총무 송정회 이사 원종철 송주헌 한창동 황순조 박부공 허현 감사 박노택 최진연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자문위원 안장헌 회장 이정훈부회장 김완기 박노택 총무한창동이사 원종철 김완선 이순재 박부공 이광호 이재옥 김광범 양호용감사 황순조 최진연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자문위원 안장헌 이정훈 회장 박노택 부회장 김완기 최진연 총무 이광호이사 박부공 이재옥 윤중일감사 한창동 조창만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 박노택자문위원 안장헌 이정훈회장 김완기부회장 황순조 박부공총무 윤중일이사 김광범 김준영 강승규 김이경감사 한창동 이재옥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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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1

≪제46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원주지회 폐쇄

제54차 정기총회 개최 대림정대한사협사진강좌 개최(연8회) 월례촬영회 개최(연8회)제26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 서울대청호

『대한사협회보』 제11호 발간대한사협 대구지회-중국 연길시 촬영가협회와 자매결연(연길시 청년호텔)원주지회 재설립≪제8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최흥만)≪제47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창립 55주년 기념 『2000대한사협사진집』 발간

제55차 정기총회 개최 대림정대한사협 사진강좌 개최(연8회) 월례촬영회 개최(연5회)정읍지회 창립제27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정읍 내장산)≪제48회 대한사협전≫ 및 CD작품집 제작 예총화랑 제1전시실

제56차 정기총회 개최 사랑채월례촬영회 개최(연4회)제28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서울 남한산성)≪한중 국제교류전≫ 대한사협 대구지회 대구 대덕문화회관≪제49회 대한사협전≫ 및 CD작품집 제작 예총화랑 제1전시실

제57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월례촬영회 개최(연6회)제29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 중앙탑공원)≪제9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김한용)≪제50회 대한사협전≫ 및 2003대한사협작품집(CD작품집) 발간예총화랑1-2전시실

『대한사협회보』 제12호 발간

제58-60차 정기총회 개최제51-53회 ≪대한사협전≫제30-32회 전국회원촬영대회대한사협 인터넷홈페이지 개설(wwwpaakoreacom)제1회 대한사협 사진공모전

『대한사협회보』 제13호 발간『창립60주년 전국회원전 작품집』 발간(2005)이해선 선생 탄신 100년기념 유작전(대구middot충주middot원주middot대전middot전주순회전) 개최 및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보는 1950-60년대』 (눈빛) 발간(문화관광부middot조선일보 후원)남원지회 청주지회 구미지회 폐쇄(2006년)전주지회 설립(2006년)

제61-63차 정기총회 개최≪제54-56회 대한사협전≫제33-34회 전국회원촬영대회이천지회 폐쇄(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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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위원rarr고문 안장헌 이정훈고문추대 방대훈이사 강승규(면) 김이경(면) 원종철 김광석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 박노택안장헌 이정훈 방대훈 회장 김완기 부회장 황순조 유병주(대전) 총무이사 윤중일이사 김준영 원종철 김광석 심재욱감사 강승규 이재옥

총무이사 윤중일(면) 최인호

회장 최진연

회장 최진연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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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지회 김제지회 원주지회 폐쇄(2008년)한밭지회 설립(2008년)≪제10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안장헌 2007)≪제11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조세현 2009)

제64차 정기총회 개최 PJ호텔 4층 카라디움≪제57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제35회 전국촬영회

제65차 정기총회 개최 충무로 아스토리아호텔제36회 전국촬영회 및 대천지회 전국 사진인리더 초청세미나(한화콘도 세미나실 대천해수욕장)김제지회 재설립(지회장 이성수 총무 구반반) ≪제58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

제66차 정기총회 개최 충무로 아스토리아호텔≪제12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안희탁) 제37회 전국촬영회 및 대천지회 전국사진인 리더 초청 세미나(대천해수욕장내 청주대 수련원 및 머드축제광장)울산지회 설립(지회장 이헌배 총무 심화실) ≪제59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

2013년 제1차 이사회 개최 충무로 통로이미지(주) 회의실 참석 이정훈 외8명제67차 정기총회 개최 캐피탈호텔 뷔페식당 스카이(그릴 룸)≪제60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회원 자질 향상을 위한 사진학 강좌 개설(강사 진동선 2013~2014)

≪제13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마이클 케나(MichaelK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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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정건영

회장 이철집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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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3

김 완 기(金莞祁 1944~ )

1962 충주고등학교 졸업

1964 청주교육대학교 졸업

1969 《제1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입선

1977~1991 KBSEBS방송 출연 15년

1989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교육학 석사)

1990~1999 《대한민국사진전림회》 8회 입선

1993~1999 청영회 회장 역임

1997 《제16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 특선

1998 교육부 초등교육정책과장 역임

1999~2013 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 3회 역임

1999~2014 《전국사진공모전》 심사위원 70회 역임

2002 강남구사진작가회 창립회원 및 회장 역임

2003 서울성북교육청 교육장 역임

2004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초대작가

《서울특별시사진대전》 초대작가

《제1회 김완기사진전》 세종문화회관별관 광화문갤러리

2004~2008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 역임

2005 2013 제24회 제31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심사위원 역임

2005~2007 서울특별시사진작가협의회 초대 회장 역임

2006 『김완기사진집』 출판 창조집단 시빌구

《제2회 김완기사진전》 세종문화회관별관 광화문갤러리

2008~2014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조정위원

2011 《서울특별시사진대전》 운영위원 역임

2011~2014 APC뉴스(한국예술사진인연합회) 회장

2013 김완기 자서전 『분필과 셔터로 그린 자화상』 출판 하얀나무

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고문

강남구사진작가회 자문위원

서울특별시사진작가협의회 고문

청영회 고문

한국사진작가협회 자문위원

구 술 자 연 보

안장헌(安章憲 1947~ )

1969 2 고려대학교 농업경제학과 졸업

1966~2014 고려대학교 호영회 창립회원 호영동우회 회장역임 및 회원

1968~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원 이사(1973~1992) 회장(1993~1995) 현 자문

1973~1975 동화출판공사 『한국미술전집』 사진담당

1976~1977 월간 『영상』 편집장

1977~1979 현암사 『한국미술오천년』 기획 및 편집책임

1979~1995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 3회 역임 현 자문위원

1980~2005 호영문화사 편집인

1981~1992 신구대 사진과 강사

1984~1987 서울교육대학 미술교육과 객원교수(사진학)

1990~1994 롯데문화센터 사진교실 강사

1994~1998 삼성사진문화교실 전임강사

1995~2014 한국불교사진협회 고문

1995~2014 (사)신라문화원 이사 현 자문위원

2000~2014 경주 계림사우회 지도교수

2004~2009 동강사진마을 운영위원

2005~2014 문화유산사진연구소 소장

2009 봉은사진교실(봉은사) 강사

2010~2014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 안장헌디지털사진교실 지도교수

그룹전

1966~2014 고려대학교 호영회 호영동우회 회원전 80여점 출품

1968~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전(17~60회전) 70여점 출품

1990 《사진가 8인전》 후지포토살롱

1994 《한국현대사진의 흐름전》 〈산사일기〉 출품

1996 《Image ofKoreanCultual Heritage》 UNESCO본부 파리

1997 《Buddist Images ofKorea》 독일 함부르그

1997~1998 《서울사진대전》 〈낙선재 일곽〉 〈금원에서〉 출품

1997~2014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전 19점 출품

1998~1999 《경기도사진작가초대전》 출품

1999 《한일사진교류전~자연과 인간을 향하여》 출품

2001 《아름다운 우리 문화재 4인전》 국립진주박물관

2004 《한국다큐멘터리사진 33인전》 동강사진축전

개인전

1996 《서라벌 빛 그리고 향기》 서라벌문화회관

2002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신라문화원 화랑

2003 《세계문화유산과 경북》 경주문화EXPO솔거방

2007 《왕릉의 호랑이》 동강사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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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창호》 인사동 갤러리 북스

2010 《돌 호랑이 그림 호랑이》 인사동 갤러리 북스

2012 《선비의 고향 서원》 인제대 도서관 김학수기념박물관

주요 사진저작

1982 『석불』 호영

1989 『석굴암』 예경

1991 『경주 남산의 탑골』 열화당

1992 『선의 세계』 호영

1993 『영겁의 미소』 불광

1994 『신라의 동해구』 열화당

1996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삼성문화재단

1998 『서원』 열화당

2002 『신라의 마음 경주』 한길아트

『남산』 한길아트

2003 『돌에 새긴 정토의 꿈~석불』 한길아트

『석조미술의 꽃~석가탑과 다보탑』 한길아트

『사진으로 보는 한국미~무늬』 호영

2005 『BUDDHA~Bildnisse ausStein inKorea』 ErnstWasmuthVerlog

Tubingen 독일 베를린

2006 『범종~생명의 소리를 담은 장엄』 한길아트

저서

1987 『국립공원』 김성옥 문순화 송기엽 안장헌 공저 호영)

1995 『사진으로 배우는 사진촬영교실』 호영

2001 『아름다운 우리문화재』 관조 김대벽 한석홍 안장헌 공저 국립진주박물관

2003 『문화유산 일기』 진선출판사

수상

1977 《백오사진상》 작품상 수상(대한사진예술가협회)

1999 『서원』으로 《간행물윤리상》 저작상 수상(간행물윤리위원회)

2006 《한국사진문화상》 공로상 수상(한국사진작가협회)

2007 《이해선사진문화상》 수상(대한사진예술가협회)

2011 《대한민국문화유산상(대통령상)》 봉사활용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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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5

참 고 문 헌 목 록

「봄 국전심사에 물의 사진 심사위원에 시비」 『동아일보』 1977421

「봄 국전 심사 낙수(落穗)」 『경향신문』 1977425

「현대사진문화상 이해선 씨 뽑아」 『동아일보』 19781128

「사진문화-사협고문 이해선 씨 작품집 발간」 『매일경제』 19801129

「사진 50년 역사를 한 눈에」 『매일경제』 1981120

「사진작가 이해선 작품집 두 권 내놔」 『동아일보』 1981629

「부고-원로 사진작가 이해선 씨」 『동아일보』 1983111

「일화로 엮는 명암 100년 화단이면사( ) (27) 화가와 문인과 신식 여성」

『경향신문』 198554

「이해선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사진전」 『연합뉴스』 20051026

「lt단신gt 백오 선생 탄신 100돌 사진전」 『문화일보』 20051031

「사진예술가협회 창립 60주년 기념전」 『매일신문』 20051117

「문화의 향기-전시」 『부산일보』 200615

「백오 이해선 선생 미발표유작 사진전」 『부산일보』 200617

「[전북][광주전남][제주][대전충남]문화가」 『동아일보』 2006120

「영월 동강사진박물관-이해선 특별기획전 2007년 3월 첫 주까지」 『뉴시스』

20061227

「사진과 친해지려면 옛 서울역사로 가보세요」 『헤럴드경제』 201041

월간지 계간지

김용준 「서화협전의 의미」 『삼천리』 1931년 11월호

「lt부감(俯瞰)gt(이해선 작)gt」 『사진문화』 1956년 6월호

「아마츄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호

연성숙 「일제 한인귀족의 근황」 『진상(眞相)』 1960년 3월호

「창간사 이해선 씨」 『포토그라피』 1966년 8월호

「나의 발언」 『포토그라피』 1966년 8월호

「작가 지상초빙작가-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달의 작품사진 제주풍물-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해선 「해외 예술사진 감상실 (1회)」 『포토그라피』 1968년 4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6) 석가탄일」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7)」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제1회 새한사진콘테스트」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8) 동해진미」 『포토그라피』 1969년 9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9) 야채밭」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0) 건제(乾梯)」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제18회 국전 소식」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1) 초설(初雪)」 『포토그라피』 1969년 12월호

이해선 「돌과의 대화 30년」 『월간 중앙』 1969년 12월호

「초대작가 사진」 『포토그라피』 1970년 9월호

이해선 「고궁풍물(1)」 『포토그라피』 1971년 1월호

_______ 「고궁풍물(2)」 『포토그라피』 1971년 2월호

이해선 관련

일간지

「입선자의 방명록」 『매일신보』 1926512

이태준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1029

「금조개장한 동미전 제2회」 『동아일보』 1931412

홍득순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417

「인사(人事)」 『매일신보』 193886

이해선 「예술사진의 연혁과 개념」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동인전」 『경향신문』 19491115

「인사(人事)」 『경향신문』 1953110

이해선 「등하수상(燈下隨想)」 『동아일보』 19551112

_______ 「사진예술의 독자성」 『동아일보』 1956126

_______ 「사진 8인전 소감」 『경향신문』 195647

_______ 「백오(白烏)의 변(辯)」 『동아일보』 195749

「김포공항에 내린 덕혜옹주-이해선 씨가 부축하고 있다」 『경향신문』 1962126

「5월 예술상에 붙이는 제언」 『경향신문』 196231

「2명이 사퇴 사진부문심위원」 『경향신문』 1964109

「영예의 산실 안팎」 『동아일보』 19641013

「횡설수설-국전 사진부 이해선 심사위원 사퇴」 『동아일보』 19641014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중요한 내용middot형식 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1020

「열띤 감정으로 충만-창협 창립 사진전」 『동아일보』 1965119

「한국국제사진살롱 위원 명단」 『동아일보』 1965116

「동아국제사진살롱 심사평-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28

「제4회 사진동우회전」 『동아일보』 1966121

「동아사진살롱 심사평-총 801 응모」 『동아일보』 196729

「위원장에 이종우 씨 국전심사위원 위촉」 『동아일보』 1967920

「국전심사위원장 도상봉 씨 선출」 『경향신문』 1968919

「석우회(石友會)서 돌 전람회」 『동아일보』 1970428

「예술인에 훈장 이해랑 씨 등 9명」 『경향신문』 1972118

「외길 한평생 lt11gt 사진middot예술 이해선」 『선데이서울』 1973318

「현역 원로 작가 초대전 일제하의 침울이긴 예술자세 생생하게」 『경향신문』

1974831

「이해선 씨 작품전 향토풍물 50점 전시」 『동아일보』 19741118

「이해선 사진전」 『경향신문』 19741119

「이해선 사진 작품전 24일까지 신문회관」 『매일경제』 19741121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423

「국전운영위원 위촉」 『동아일보』 1976317

「국전사진부문 사단중진들 반발」 『동아일보』 1976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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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 「고궁풍물(3)」 『포토그라피』 1971년 3월호

_______ 「고궁풍물(4)」 『포토그라피』 1971년 4월호

_______ 「고궁풍물(5)」 『포토그라피』 1971년 5월호

_______ 「고궁풍물(6)」 『포토그라피』 1971년 6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7)」 『포토그라피』 1971년 7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8)」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포토그라피 창간5주년에 붙여서」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9)」 『포토그라피』 1971년 9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0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1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2)」 『포토그라피』 1971년 12월호

「제2회 사진국전마감 심사위원결정」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이해선 「이해선 떡에 얽힌 시속(時俗)의 금석(今昔) 옛떡이 사라져 간다는데」

『월간 중앙』 1973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1)」 『포토그라피』 1973년 8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2)」 『포토그라피』 1973년 9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0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6)」 『포토그라피』 1974년 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7)」 『포토그라피』 1974년 3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8)」 『포토그라피』 1974년 4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9)」 『포토그라피』 1974년 5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끝)」 『포토그라피』 1974년 6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 『포토그라피』 1974년 7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2)」 『포토그라피』 1974년 8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3)」 『포토그라피』 1974년 9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4)」 『포토그라피』 1974년 10월호

_______ 「작가와 작품-풍물백태 중에서」 『포토그라피』 1974년 1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6)」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7)」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8)」 『포토그라피』 1975년 3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9)」 『포토그라피』 1975년 4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0)」 『포토그라피』 1975년 5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1)」 『포토그라피』 1975년 6월호

_______ 「곡필무사(曲筆誣事)를 밝힌다」 『월간 중앙』 1975년 11월호

「영상 창간 1주년 기념 좌담회 한국 사진 산업의 의 오늘과 내일」 『영상』 1976년 6월호

「국전 초대작가 8인선 김조현 이건중 이경모 이해선 임응식 이형록 정인선

조현두」 『영상』 1977년 1월호

「남기고 싶은 작품 3 이해선」 『영상』 1977년 5월호

「예술사진에 대한 견고한 확신 이해선 사진의 예술성」 『영상』 1978년 5월호

「한국현대미술대전」 『영상』 1978년 10월호

이명동 「처음 제정된 사진문화상에의 기대」 『영상』 1979년 2월호

「행사 백오 이해선 선생의 사진작품집 출판기념회」 『영상』 1981년 2월호

「작품집 소개 이해선 작품집 중에서」 『영상』 1981년 4월호

박재능 「다양한 자기 세계의 길」 『영상』 1981년 12월호

「영상방담-사단의 이 얘기 저 얘기 김정래 임석제」 『영상』 1982년 1월호

「이미지의 합창-봄의 첫 장」 『영상』 1982년 4월호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 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호

岩宮武二 「너 어디 있느냐」 『영상』 1983년 1월호

최인진 「1930년대의 아마츄어 사진활동」 『사진사연구』 통권 제5호 1983년 9월호

박재능 「월평-원로 이해선 선생을 추모한다」 『영상』 1983년 12월호

「한국 근대미술의 발자취」 『계간미술』 중앙일보사 1985년 봄호

「다시 보는 명작 정도선 정인선 신현국 강대환 김일창 이해선」 『영상』 1986년 10월호

「고 백오 이해선 선생 추모비 건립」 『영상』 1989년 1월호

「동경 유학생들의 한국 근대미술」 『월간미술』 1989년 9월호

「화보로 보는 한국 동경 유학생들의 자화상」 『미술세계』 1993년 5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조선총독부 관보』 제4087호(192647) 한국학문헌연구소 서울 아세아문화사 1926

이태현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1집 서

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2

_______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 자화상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3집 서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4

신명호 「일제하 이왕직과 이왕가 족보」 『한국학대학원논문집』 제11집 한국정신문화

연구소 1996

최인진 「한국사진 역사의 증인(4) - 사단의 단체 활동과 이해선」 『한국사진』 2002

이가라시 코이치 이중희 역 「조선미술전람회의 창설과 서화」 『한국근대미술사학』

제12집 한국근대미술사학회 2004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의 입학제도와 조선인 유학생」 『동악미술사』 제6호 2005

허보윤 「미술로서의 디자인 이순석의 1946-1959년 응용미술교육」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단행본

조우석 『한국사진가론』 눈빛 1998

작품집 도록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1926

이해선 『이해선 사진작품집』 평화당 1980

_______ 『한국의 고궁』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0

Tucker Anne Iizawa Kotaro Kinoshita Naoyuki The History of

Japanese Photography London YaleUniversityPress 2003

이해선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남은 1950-60년대』 눈빛 2005

_______ 『이해선 사진집 1950~1960년대 이야기』 동강사진박물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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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7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일간지

「부산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24531

「성공을 기대 조선사진연구회 현일영 씨 담」 『조선중앙일보』 1936826

「경성아마사진구락부 제1회전」 『조선일보』 1938417

「사진작품전」 『동아일보』 19381014

「경성사진동호회 작품전람회개최」 『조선일보』 19381027

「사진동호회작품전」 『동아일보』 1938112

「경성아마추어 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39527

「아마추어 사진인화전」 『매일신보』 19391115

「동서남북-lsquo아마추어rsquo 제4회 인화전람회」 『동아일보』 19391115

「동서남북-합동인화전」 『동아일보』 1940126

「아마추어 사진의 인화전」 『매일신보』 194074

「경성아마츄어 제5회 인화전」 『조선일보』 194075

「경성백양사우회 제1회 인화전람회 개최」 『매일신보』 19401113

「제2회 사진전 명일부터 화신에서-백양사우회」 『매일신보』 19411124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55

「사진작품전」 『조선일보』 1946119

「전국문화총연발족」 『동아일보』 194729

「제1회 조선사진예술전」 『경향신문』 19475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7510

「사진전람회개최」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전응모작 답지」 『경향신문』 1947615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 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629

「제1회예술사진전람회 15일부터 동화백화점」 『경향신문』 1947713

「예술사진 입선 수상식을 거행」 『경향신문』 1947720

「예술사진전 19일부터」 『동아일보』 1947121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8224

「사예(寫藝) 2회전 작품을 현상모집」 『경향신문』 19481013

「예술사진전 심사 오는 8일로 연기」 『동아일보』 1948127

「지방출품우수-제2회 예사전」 『동아일보』 19481212

「사진예술전 22일부터 동화화랑서」 『동아일보』 19481221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964

「전국종합사진전 심사결과-특선1석 최인집 씨」 『동아일보』 194977

「사진예술의 정화-제3회 전국예술사진전」 『경향신문』 19491010

「예술사진전 30일로 마감박도」 『경향신문』 19491128

「예술사진전 입선자 발표」 『경향신문』 19491213

「예술사진전시회」 『동아일보』 195316

「춘계사진섭영회 26일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3

「본사후원 춘계촬영대회 오늘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6

「사진현상모집」 『경향신문』 1953517

「특선에 lt만춘gt」 『경향신문』 1953527

「인화 당선자 수여식」 『경향신문』 1953529

「사진작품발표전」 『경향신문』 1954413

「예술사진전시회 US-S화랑서」 『동아일보』 1954415

「집회」 『동아일보』 1954916

「경복궁서 촬영대회」 『경향신문』 1954919

「내 26일 촬영대회 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4922

「사연 촬영대회 여감(餘感) 아마추어 사진도(寫眞道)」 『동아일보』 1954103

「문화집합」 『동아일보』 1955122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77

「사연(寫硏) 창립 10주년 기념 어제 촬영대회 성황」 『동아일보』 1955711

「촬영대회 입선작 결정」 『동아일보』 1955819

「8인 사진전 개최」 『동아일보』 1956329

「9회 사연(寫硏)전」 『동아일보』 1957414

「신록촬영대회 개최 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62

「대한사진예술가협회서 사진전시회 개최」 『동아일보』 1958711

「10년 후의 우리 문화 건국 20주년을 장식하고 싶은 것」 『동아일보』 1958821

「사진예술가협회 11회 회원작품전」 『동아일보』 195979

「문화 소식」 『동아일보』 1960119

「국전에 사진부문도」 『동아일보』 1963410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결정 특선 조천용 작」 『동아일보』 19641020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653

「렌즈의 향연 영예의 초점-제4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동아일보』 196667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61217

「사진예술가협회전」 『동아일보』 19681022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9830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996

「국립공보관 12월 전시회 스케쥴」 『경향신문』 1971126

「문화단신」 『경향신문』 19721128

「사진예술협 작품전 7일까지 공보관서」 『매일경제』 1973111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에 안준천 씨」 『경향신문』 197526

「동아포우스트」 『동아일보』 19751117

「사진예술가협회 창립30돌 기념전」 『경향신문』 19751118

「추계 친목 촬영대회」 『매일경제』 197610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7830

「사진예술가협 정총(定總) 31일 하오 대동관서」 『매일경제』 19781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81031

「문화광장」 『동아일보』 1993121

「한국사진예술 50년을 펼친다」 『한겨례』 1994111

「사진예술가협 사라진 풍물전」 『서울신문』 20051025

월간지 계간지

「사진클럽 지상소개 대한사협의 발자취」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박필호 「논단 대한사협16회전을 보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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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사협 16회전」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사협 16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8년 7월호

「대한사협 충남지부 회원전」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경축 창간 3주년 사진과 관광 포토그라피-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대한사협 18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제18회 대한사협전」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 작품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70년 3월호

「축 창간4주년 서울 선데이 카메라 클럽」 『포토그라피』 1970년 8월호

「축 포토그라피 창간 5주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김종양 씨 대한사협 고문 추대」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3년 3월호

「lt파도gt 김도현 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신춘초대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근하신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75년도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창작선」 『영상』 1977년 1월호

「전시장 순례 대한사진협회 회원전」 『영상』 1977년 11월호

「지상소개-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대한사협 제27회 정기총회 개최」 『영상』 1979년 7월호

박필호 「대한사협 27돐에 대한 축사」 『영상』 1979년 7월호

「제26회 대한사협전」 『영상』 1980년 1월호

「제27회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사진전시회」 『영상』 1980년 12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요강」 『영상』 1981년 5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영상』 1981년 10월호

「탐방-뜻이 있으면 길이 있게 마련 세 번째 전국대학사진 공모전을 연 대한사협충

남지회의 단합된 모습」 『영상』 1983년 1월호

「제3회 전국대학생사진 공모 제12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월호

「제13회 대한사협 충남 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2월호

최인진 「경성아마츄어카메라구락부를 말한다」 『사진사연구』 1984년 7월호

「대한사협본부 주최 제9회 한국국제사진전 입상자」 『영상』 1989년 1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대한민국예술원 편 『한국예술총감 자료편』 대한민국예술원 1965

한국사진협회 「사진계소식 1969년도」 『한국사진연감』 1970

_____________「한국사진협회의 연혁 1976년 10월 30일」 『한국사진연감』 1976

임범택 「사진」 『1977년도 문예연감』 1978

______ 「사진」 『1978년도 문예연감』 1979

한국사진협회 「역대역원명단(歷代役員名單) 1962년~1987년」 『한국사진연감』

1988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제1장 한국사진협회 창립 이전의 사진계 동향」 『한국사협

사 I 1945-1970』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01

최인진 「해방 초기의 사진잡지 연구-『국제보도』와 『사진문화』를 중심으로」 『한국

사진학회지 AURA』 제10호 2003

박혜성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사진문화』 목록 및 해제」 『한국 사진 잡지

『사진문화』 연구』 명지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한국사협 50년사』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13

단행본

임응식 『내가 걸어온 한국사단 임응식 회고록』 눈빛 1999

작품집 도록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제16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7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8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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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9

원 문 자 료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년 10월 29일 4면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년 4월 17일 4면

1 이해선 양화기(洋畵期) 관련 참고 자료

「입선자의 방명록」『매일신보』 1926년 5월 12일 3면

「금조 개장한 동미전 제2회」『동아일보』 1931년 4월 12일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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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참고 자료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년 5월 5일 2면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년 6월 29일 3면

「신록촬영대회개최-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년 6월 2일 4면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년 7월 7일 4면

예술사진전 조선사진예술연구회에서는 5월 6일부터 동11일까지의 6일간에 걸쳐 동화백화점(舊三越) 갸라리--에서 창립기념사진전을 개최하기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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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해선 관련 원문 자료

원문은 당시의 표기를 그대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현재의 띄어쓰기와 맞춤법에 맞지 않는 부분들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수정하였고 일부 [ ] 안에 병기했다 원문의 한자는 모두 한글 독음으로 고쳤으며 의미 전달을 위해 필요한 경우 ( )안에 병기했다

「대담 아마추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 pp 48~52

작가가 사태(沙汰)났어

본지 공사간에 바쁘실 텐데helliphellip 사진문화의 발전을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

해 주십사 하는 것은helliphellip 요즘 각 직장이나 학생들 간에 사진열이 굉장히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 비

추어서 이 아마추어 카메라맨의 지도 문제를 비롯하여 초보자의 진로랄까helliphellip 이런 문제에 대한 말

씀을 좀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해선6middot25 동란 후에 개인적으로 사진을 연구해 보겠다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직장이나 학교 단위로

사진동호자의 클럽이 많아 지고 작품 발표라던가 전시회 같은 것이 무척 많아졌는데helliphellip 어쨌든

일반 사회인이나 학생 간에 사진열이 높아졌다는 건 기쁜 일이야

임응식그런데 아직도 이 카메라를 사치품으로 취급하는 층이 많아서 곤란해요

이 나라(정부)에서부터 사치품 취급을 하더군helliphellip 여자들이 다이아몬드를 사려는 것과 사진을 연구하

려는 사람이 카메라 장만하는 것을 똑같이 취급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곤란

하지

임 헌데 우리 사단(寫壇)에선 우선 lsquo사진작가rsquo라는 용어를 쓰는 데에 신중을 기해야 하겠어요 웬 놈의

lsquo사진작가rsquo가 그리도 많은지helliphellip 이건 카메라만 메고 다니면 모두 작가 행세를 하니helliphellip

이 카메라 멘 것이 모두 lsquo작가rsquo라면 대한민국에 lsquo사진작가rsquo가 수 십만도 될 걸helliphellip 작가라는 친구들을

체에 넣어서 걸러 놓으면 엄격한 의미에서 진짜 lsquo작가rsquo는 몇 사람 밖에 없을 텐데helliphellip

임 호주머니에 만년필을 꽂았다고 해서 문학가 혹은 소설가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겠는데hellip

hellip 어쨌든 요즘 성행하는 사진작가의 사태를 우선 잡지에서 만이라도 용어 사용에 엄격한 규정을

지어서 질서를 잡아 주어야겠어요

이 그것도 과도기적 현상이겠으니까 차차 지양되겠지helliphellip 오늘 해달라는 얘기는 그런 넋두리가 아닐

테니까 어디 이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본지 한마디로 얘기하자면helliphellip 카메라는 어떻게 해서 장만을 했는데 mdash 자 그 다음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겐지 몰라서 어쩔 줄 모르는helliphellip 이런 아마추어와 초보자들의 진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얘기를

좀helliphellip 현재 직장 단위로 사진 동호자들이 모여서 클럽을 이룩한 것이 십 여 개 있고 학교 단위로는

이십 여 개나 되는데요helliphellip

관련 자료 소개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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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인식이 안이해서 탈이야

이 극히 초보적인 입장에서 사진을 해보고 싶다helliphellip 다년간 연구를 한 다음엔 작가가 돼 보겠다 mdash 하

는 사람들을 회원으로 해서 수 십 년 동안 연구를 해 왔는데helliphellip 오늘날 하고 있는 일도 그것이지만

helliphellip 여러 부문에 걸쳐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서적인 면에서 사진과 친해보고 싶다던가

또는 카메라를 장만했는데 어떻게 하면 앞으로 향상 발전할 수 있는가 mdash 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신인이라고 하겠지 특히 학생들의 교내 활동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helliphellip 헌데 막상 다다

르고 보면helliphellip 어떠한 길이 올바른 길인지 막연해 하는 모양이더군요

임 초보자들은 무엇보다도 사진 자체에 대한 정의를 뚜렷이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아마추어 mdash

하면 취미적 입장에서 사진을 다루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조각이나 회화와 같이 사진도 어엿한 예술이니

까 취미 도락(道樂)적인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예술을 추구하는 진지한 마음의 준비가 우선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물론이죠 대개 클럽 조직이 되어 있으니까 선생들의 지도를 받고 있겠지만 내가 알기에는 전문가

가 아닌 다시 말하면 취미 정도에서 관심이 있는 선생들이 지도를 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역시 전문으

로 사진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지도를 가끔씩이라도 받는 게 좋겠지요

임 지도를 한다는 사람들의 태도부터가 성실성이 없는 것 같아요 만년필을 샀으니까 나도 한 번 써 보

자 mdash 해서 작가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취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남의 lsquo지도rsquo를 담당

할 수는 없을 텐데 mdash 우리가 사진을 전공한대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억지로 지도해 주겠다고 밀고

들어 가겠다는 건 아니지만 mdash (웃음) mdash 어쨌든 전문가의 지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학생 클럽이나 직장 클럽 같은 동호자의 모임을 사단의 일부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취미

에서 시작했더라도 일정한 과정을 밟고 다년 연구를 거듭하면 자연히 작가를 지향하게 되겠지만hellip

hellip 그런 면에서도 처음 싹트기 시작하는 신인의 지도가 퍽 중요한 것이지요

취미middot도락이란 관념을 버려야 해

임 지금 형성되어 있다는 직장이나 학교 단체의 거의 전부가 전문적인 입장에 서 있지 않은 것 같더군

요helliphellip 사진에 대한 근본 의식이 너무도 안이한 것 같아요 카메라를 통한 표현의식에 절실한 감정

이 없어요helliphellip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비판을 받지 않는다helliphellip 하는 따위의 도피를 해서는 곤란

하죠helliphellip 창작의식이 확고하게 수립되지 않아서는 향상이 없는 것인데helliphellip 소문에 듣자면helliphellip 너

무 기술 면에만 치중하고 정신적인 면이 소홀히 취급된다는 거에요 helliphellip 나는 직장을 갖고 있으니

까 사진이란 것은 취미 정도로 한다 mdash 하는 태도를 버려야죠 특히 이 점은 지도자들에게 권하고 싶

은데helliphellip 예술의식helliphellip 이것이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절대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까

이 그렇구 말구요helliphellip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새로 사진을 공부하겠다는 신인들에게 네 가지 의식을 주

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휴머니즘 mdash 우선 사람이 돼야 하거든요 교양이라던가 인격 덕망helliphellip 이런 면에서 인간이

돼 있어야 하고 둘째는 사진예술을 한다고 해서 사진예술이 무엇이냐helliphellip 이것만을 추궁해서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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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요 좀 더 시야를 넓혀서 예술이라는 게 뭐냐 mdash 하는 걸 먼저 알아야지 셋째에 가서 사진예술이

라는 게 뭐냐 mdash 를 연구하고 넷째에 가서야 비로소 작품이라던가 창작의식 기교 기술에 대한 검

토를 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기본조건을 머리 속에 언제나 간직하도록 나는 주장해 왔어요

임 기술면을 등한히 할 수는 없겠지요 기술 없이는 표현이 안되니까helliphellip 그러나 이선생 말씀처럼 인

간본연의 문제도 크긴 큽니다 다른 예술부문의 사람보다 교양면에서 뒤떨어지지나 않는가 mdash 하는

것이 항상 염려되는데helliphellip 만일 뒤떨어진다면 큰일이지요 기술도 중요한 문제겠지만 교양인격 같

은 것도 예술가가로서의 긍지를 위해선 떨어질 수 없는 문제고helliphellip 더욱이 좋은 기술을 가졌으면서

도 기초교양이 모자라서 좋은 작품을 낼 수 없다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으니까helliphellip 교양인으로서의

자격도 다른 예술부문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사진을 해야할겝니다

이 기교나 기술을 어떻게 우물쭈물 배웠다고 해서 작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helliphellip 예술이란 그 자체

에 대한 조예부터 깊어야 합니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조리개가 얼마다 타임이 어

떻다helliphellip 암실작업은 어떻게 하는 거다helliphellip 이것만을 알았다고 해서 작가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에

요helliphellip 인간면 예술면 기술면에 똑 같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마 사진을 연구하겠다는 신

인들의 기본이념이 돼야 할겝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지도한다는 면에서

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거든요 mdash

임 어쨌든 기술을 위주로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난 옛날 얘기입니다

지도자 시비

이 지났다기 보다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는 장래에나 변할 수 없는 기본이념이겠지요 사진이라는 것

은 더욱이나 고도의 대중성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인격과 교양이 필요해요 기계라는 거야 찍으면

사진이 되도록 마련된 것이니까 예술까지는 못 가도 사진은 되거든 mdash 그러니까 그것을 예술로 이

끌려면 찍는 사람의 성분이 문제되는 것이지요helliphellip

임 그런 의미에서도 사단의 규정이 필요하고 작가라는 규정이 필요해요 사단이라는 것에 너무 엄격한

규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helliphellip 만년필을 가졌다고 해서 전부 문학가가 아니라면helliphellip 카메라를 메었

으니 작가다 mdash 하는 엉터리도 용납될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우선 필요한 것은 취미 도락이라는 관념

을 지양해야 할 텐데helliphellip

이 취미가 차차 심각해지면 창작의식도 생기는게니까helliphellip 그런 사람들을 지도 계몽해서 한 사람이라

도 작가로 이끌어야 하겠지요helliphellip 카메라를 살 때부터 나는 사진작가가 되겠다 mdash 하는 사람은 있

을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임 lsquo싼데이rsquo 카메라맨은 논의의 대상이 안되구요helliphellip (웃음)

이 그러니까 지도자들이 작가적인 태도에 확고한 이념을 앞세우고 지도에 임해야 하는 건데helliphellip

본지 각 단체 지도층의 지도방침에 대한 구체적인 태도를 어떻게 규정하겠습니까 helliphellip

임 우선 사진에 대한 인식부터 고쳐야 해요 말이 중복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친구 좋고 사진 좋아서 우리

끼리 하면 그만이다 mdash 하는 생각들이 많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만이라도 그렇지 않다

관련 자료 소개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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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싶어요 학생들이 카메라를 사 가지고 몇 사람 모였으니까 책임자 격

인 선생이 필요하다 mdash 해서 책임 맡았다는 사람으로는 지도가 안 될 게 아닙니까 그렇다고 청해 오

지도 않는데 내정 격으로 뛰어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구helliphellip (웃음)

본지 또 한 가지 요즘 일대 성황을 이루는 것이 소위 현상사진(懸賞寫眞)이라는 건데요helliphellip 이 현상사진

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진에 대한 모욕도 있지helliphellip

임 거 참 꼴사나운 일이 많아요 현상이란 걸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helliphellip 그 하나는 어느 연구

단체에서 순수한 의미에서 발표 바탕이 없는 아마추어를 위해 마련하는 경우가 있을게고 또 하나는

선전용으로 포스터 mdash 같은 데에 써먹기 위한 상업 정책적인 의식에서 모집하는 현상이 있을 테지요

이 어느 경우이건 간에 좌우간 현상 모집을 하는 목적이 있는데helliphellip 응모자는 우선 현상의 목적부터 확

실히 알고 응모를 해야 하겠지helliphellip

임 그렇죠 그런데 이 상업 정책적인 현상의 경우에는 사진문화에 대한 모욕적인 행동이 퍽 많습니다

이거 참 불유쾌한 일이지만helliphellip 가령 예를 들자면 응모자는 원판을 제공하라던가 또 낙선자의 작

품은 일체 반환치 않는다는 따위helliphellip이게 얼마나 사진예술에 대한 모욕적 행위입니까 helliphellip

이 그래요helliphellip 확실히 모순된 일입니다

임 필요에 의해서 현상모집을 했으니까 당선된 작품은 물론 필요하겠지만helliphellip 낙선작품을 반환치 않는

다는 것은 언어도단 입니다 낙선이 됐다 해도 작가의 입장으론 대단히 귀중한 하나의 작품일 텐데

그걸 안 돌려 준대서야 말이 되나요 주최측은 낙선작품의 원화를 돌려 줄만한 성의를 가져야 도리

에 맞을 텐데helliphellip 요즘 현실은 lsquo낙선rsquo이란 푸대접 밑에 원판까지 몰수당하는 판국이니helliphellip 원 참

이 그러니까 응모자는 무엇보다도 현상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지helliphellip 여러 번 겪은 일이지만 심사를

하다 보면 전혀 현상 취지를 도외시한 작품들이 있는데helliphellip

임 그거야 보나마나 낙선이죠 (웃음)

이 그러믄요 현상 응모자로서는 출품 규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 아니겠어요

임 그럼요

이 그런데 어떤 것은 작품에 제목도 없는 것이 있거든요 그런가 하면 제목과 작품내용이 전혀 특이한

엉터리도 있구helliphellip

임 저도 여러 번 겪은 일입니다

이 제목이란 것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벌써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찍는다는 의식이 있는 이상

제목도 정해져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아주 작품과 제목이 동떨어진 것들이 응모해 오니까

낙선의 자격이 충분할 수밖에helliphellip 하하하 (웃음)

임 그게 모두 사진에 대한 성의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이 그래요 성의가 없어요 자기 작품에 대해선 최선의 성의를 다 해야 할 텐데 그런 태도가 없거든helliphellip

제목을 안 썼는지 못 썼는지는 모르지만helliphel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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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그저 무턱대고 발표의식만 왕성한 까닭이 아닐까요

이 그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된 작가가 아닌 이상 발표기회가 좀처럼 없을 테니까

자기 실력의 평가를 받는다던가 남들과 경쟁해 본다는 의미에서 현상에 자주 응모하는 것은 좋은데

helliphellip 아 어떤 친구는 자기 실력 생각은 하지도 않고 상품이 적다 많다 시비를 하는 친구도 있으니 참

기가 막힐 일이지

주최자의 무성의도 고쳐져야 하고

임 그건 lsquo현상rsquo이라고 내거는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순수한 사진연구단체에서 모집할 때는

lsquo공모전rsquo이라던가 하는 문구가 좋지 않을까요 lsquo현상rsquo이라니까 lsquo상rsquo을 바라게도 되겠지만 어쨌든

lsquo현상rsquo이란 말 자체가 순수하지 못해요

이 그건 확실히 생각해 볼 문제이겠군요helliphellip 순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helliphellip 응모자들이 심

사원이 누구냐mdash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도 순수하지 못하고helliphellip 또 주최자가 모집광고를 낼 때

lsquo심사원은 추후발표rsquo라mdash하는 것도 순수하지 못해요 이것도 참 불쾌한 일인데 lsquo추후발표rsquo라는 걸

다시 생각하면 lsquo준비가 안됐다rsquo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심사원의 준비도 안 해 놓고 현상을 모

집하는 그런 무성의가 또 어디 있어helliphellip 이건 일종의 사기가 아니면 거만일 겝니다

임 그나 그뿐인가요 lsquo심사원은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함rsquohelliphellip 하는 모호한 광고도 있지요 응모자의 입

장에서 생각하면helliphellip 심사원에 불만이 있으면 응모를 아니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 심사원 문제만

은 정정당당히 명시해야만 나중에 가서 심사에 대한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출품을 한 다음에 심사

원이 발표된다는 것은 심사에 대한 불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helliphellip

이 그리고 응모자의 동태를 가만히 보면 아까 얘기가 나왔던 소위 lsquo취미정도rsquo라는 층의 발표 의욕이 굉

장해서 대부분의 응모자가 이 부류인 것 같은데helliphellip 여기 한 가지 탈이 있어요 현상응모 작품의 심

사라는 것은 무제한의 심사 레벨을 놓고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응모 작품 중에서의 우수 작품을 가

려낸다는 것은 이거 상식 문제가 아닙니다

임 그렇죠

이 아 그런데 어떻게 해서 현상에 당선이 되거나 특히 특선이라도 하면 그만 자기가 갑자기 위대한

작가라도 된 것처럼 대가연(大家然) 하고 으쓱대는 친구들이 많아서 걱정이야helliphellip (웃음)

이 lsquo특선rsquo이라는 것은 응모해 온 작품들 중에서 특선이지 결코 한국 사단 전체의 수준에서 특선이라

는 것은 아닌데helliphellip 그만 한 번만 당선되면 코가 높아지고 대뜸 대가 행세를 하려고 드니helliphellip 참

신인들은 특히 조심해야 할 일이지

남의 것보고hellip 우리 것도 보내고hellip

본지 이제 화제를 좀 바꾸어서 세계사단의 동향을 좀 말씀해 주실까요

임 세계사단의 얘기라면 직접 보아야만 얘기가 될 텐데helliphellip

이 서울 바닥에서 썩으면서 세계사단의 얘기를 어떻게 본 듯이 할 수가 있겠나 카메라를 메고 세계일

관련 자료 소개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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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도 했어야 얘기가 되지

임 그것보다도 사진을 통한 국제 교류 얘기나 합시다

이 그게 좋겠군helliphellip 얼마 전에 덕수궁에서 자유중국의 소개사진전시가 있었죠 미국공보원의 활동도

이를 테면 국제교류의 한 형식일게고helliphellip

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자유중국과 월남의 사진전시가 있었는데helliphellip 우리도 수출을 한다면 그 보

다 훨씬 좋은 작품들이 나갈걸요helliphellip

이 한미합동전이던가 한중합동전 같은 것도 하면 역시 국제교류가 되겠지요helliphellip

임 한미합동전은 불원한 장래에 개최될 것입니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lsquo인간일가(人間一家)rsquo의 사진

이 아마 이월쯤 한국에 올 겝니다 미국대사관이 주동이 돼서 작품 503점 전부의 전시회 계획이 추

진되고 있으니까요

이 남이 보내줘서 본 것은 있지만 우리가 남에게 보여준 것은 없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야 우리도 남에

게 보여줘야 교류가 될 텐데helliphellip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두 사람의 작품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임 개인적인 활동은 있었지요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사진살롱에 사진을 보내고 있으니까 개인

적으로는 더러 나간 셈이죠 개인들의 수출이라도 좀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지만

이 우리의 것을 내보내고 외국 것을 들여와서 서로 감상하고 연구하는 게 이를 테면 국제교류인데

아마 명년쯤엔 될까 몰라

임 작품교환전 같은 것을 위해서 대대적인 계몽운동이 필요 하겠죠

이 그렇죠 운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어요

임 그런데 근본적인 얘기를 하자면 한국 작가의 역량이 아직도 부족한 것 같아요 언젠가 외국 작가에

게서 들은 말인데mdash한국 사람은 한국을 보지 않았다mdash하는 얘길 해요 사진 작가에게 대한 말이지

만helliphellip 나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이 퍽 중요한 얘기다mdash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를 직시하는 것만이

사진은 아니겠지만 실용사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것이 사실 아닐까요 회화적인 쌀롱 픽처라던

가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리얼리즘 사진이라는 것에 너무들 치우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 국제 교류의 시발은 역시 소개적(紹介的)인 것 다시 말해서 르포르타주적인 것이겠으니까helliphellip

임 외국 작품의 모방 같은 것은 이제 집어치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mdash예술적인 것 이것만을 너무 추

구했기 때문에 사실이 한국적인 것과 국민성의 묘사 같은 것이 잘 되지 않았지요 정서적인 것에만

너무 골몰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일이고 helliphellip 예술을 위한 예술에 정신들이 팔려 있었지나 않은

지helliphellip 예술을 하기 위한 사진이라는 관념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이 예술을 염두에 안 둔다면 실용사진이 돼 버리게

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너무 치우친 것 같단 말입니다

이 특히 국제 교류를 생각한다면 아닌 게 아니라 외국처럼 르포르타주적인 사진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할거에요

임 그래요 거기에 예술성을 띄워서 소화할 만한 역량 있는 작가가 필요해요

이 또 하나의 가장 큰 문제는 위정자의 관심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 큰 난관입니다 국제 교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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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가족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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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말이고 역시 정부당국자의 적극적인 주

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어디 그래요

임 우선 사단 자체의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작가들의 작업도 촉구되어야 하구helliphellip 아까도 말이 나왔지

만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 출품을 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점 같은데서 작가들의 반성도 필

요하고helliphellip

이 개별적으로 미국 등지에 보낸 것은 아마 상당한 수가 되겠지요

임 그럼요 그랬는데 왜 성과가 없느냐mdash하는 반성이 있어야죠

이 오늘의 현실을 예술적인 면에서 기록하고 작품화 해야겠는데helliphellip 막연하게 예술을 위한 작품을 보

내니까 기교적으론 훌륭할지 몰라도 작품 자체에 내용이 없어서helliphellip 그래서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닐

임 그런 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빨리 우리의 수준을 높여서 국제 조류와 호흡을 맞추어 나가

야 할 것입니다

이 이거 아마추어를 위한 얘기라는 것이 잠깐 탈선을 한 것 같군 그러나 이런 문제도 참고가 되긴 하니

까helliphellip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합시다

본지 수고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helliphellip

(기록 O기자)

이해선 「lsquo백오(白烏)rsquo의 변(辯)」 『동아일보』 1957년 4월 9일 4면

30여년 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입학

이 되었을 당시 자축기념하는 의미에서 호(號)를

하나 지어본 것이 백오(白烏)라는 두 글자였다 처

음 듣는 사람들 중에서는 거문[검은] 까마귀는 있

지만 흰 까마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서로 웃어버리고 그 뜻을

설명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자의

(字意)를 해명해볼까 한다 백(白)은 흰 빛이요 오

(烏)는 흑색으로 통하므로 우선 흑백을 대조시켜

놓고 흰 종이 위에다 검은 먹으로 휘호(揮毫)할 것

이니 그 뜻이 내 생활과 부합될 것 같으며 둘째로

백 자(字)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첫 자를 떼어놓

고 오는 반포오(反哺烏)로 그 이름이 높은 새이므

로 평소에 효자 노릇을 못하여 온 나의 좌우명으로도 적당할 듯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새 중에서는

혹간(或間) 백변종(白變種)이 생겨나는 수가 있는데 그 흰새를 서조(瑞鳥)라고 떠들던 옛 시절도 있었으므

관련 자료 소개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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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내가 우연히 호를 지어 본 것이 검은 까마귀떼 속에서 서조 백오를 발견하였으니 나의 전도(前途)에는

반드시 서광(瑞光)이 비칠 것 같으므로 이상 여러 가지 의미를 차례로 생각해 볼 때에 나에게는 이 외에 더

좋은 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자의였었고 궁금한채로 불려온 백오

였었다 만담궁변(漫談窮辯)을 물소물책(勿笑勿責) 하소서 (사진가)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

이해선 「중요한 내용middot형식-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년 10월 20일 5면

사진작품에는 사진 특유의 형식이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러한 특유의 형식에 알맞은 표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의 특수성은 형식이 가지는 특수성 보다는

기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주관적이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작품심사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동일하게 중요시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작

품 속에서 그야말로 형식과 내용이 알맞게 부합된 특출한 작

품을 볼 수는 없었다 형식이 좋으면 내용이 빈약하고 좀 내

용이 있으면 형식이 미숙하고helliphellip 모두 결점이 있다 그러나

입상작으로 뽑은 8 점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

다 그리고 금년에는 lsquo칼러rsquo사진의 응모 점수가 30점이나 되

고 그중에서도 3점이 입상되었고 또 9점이 입선되었다는 것

은 lsquo칼러rsquo 사진의 앞날을 위해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lt전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장gt

[제1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년 2월 8일 5면

외국작품의 세련되고 빈틈없는 lsquo테크닉rsquo은 국내작품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서 우선 국내

작품을 형식에서부터 누르고 말았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이루게 된 것은 국내작가들

의 역량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lsquo국산인화지rsquo가 얼마나 엉터리고 조악한 것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대체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더욱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은 이와 반대적인 경향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예술이든 먼저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볼 때 국내작품의 후진성은

두말할 것 없이 형식의 경시에 있다고 하겠다 심사결과 흑백부에서나 lsquo칼라rsquo부에서 겨우 동상으로 한 점

씩 밖에 국내작품이 입상되지 못했다는 것은 다소 섭섭한 느낌이나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경종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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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더욱 우리 심사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독에서 응모한 lsquo칼라rsquo

작품이었다 물체의 외관 색감을 초월한 내면의 lsquo이미지rsquo가 발

산하는 짙은 감정의 색감으로 작가의 개성과 사상을 인상 깊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내 lsquo칼라라보rsquo의 후진

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상작으로 뽑힌 외국작품들은 오

늘의 세계 사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는 큰 자극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

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제2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총 818점 응모-사진예술에 도움」

『동아일보』 1967년 2월 9일 4면

지난해와 같이 흑백부문에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들은 모두가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산인화지의 조악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작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올해는 흑백

부문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기꺼운 일이라고

하겠다

특히 칼라작품에 있어서는 독일의 작품들이 특출했고 이들 작품들의 색감은 현대 과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 최고상으로 뽑힌 lt잊은 친구gt와 몇 점의 입상작품들은 칼라릴리프와 소라리

세이숀[솔라리제이션] 등의 수법으로써 모티

브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를 초객체적이고 추

상적으로 표현하고 작가의 짙은 개성과 사상

과 철학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입상작으로 뽑은 16점의 작품들은 오늘의

세계사단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

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심사위원 이해선 (위원장) 임응식 서순삼

박필호 안월산 정인성 최경덕 (이상 7명)

관련 자료 소개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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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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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관련 자료 소개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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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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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관련 자료 소개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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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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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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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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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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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관련 자료 소개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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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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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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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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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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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차 정기총회 개최 대림정대한사협사진강좌 개최(연8회) 월례촬영회 개최(연8회)제26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 서울대청호

『대한사협회보』 제11호 발간대한사협 대구지회-중국 연길시 촬영가협회와 자매결연(연길시 청년호텔)원주지회 재설립≪제8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최흥만)≪제47회 대한사협전≫ 예총화랑창립 55주년 기념 『2000대한사협사진집』 발간

제55차 정기총회 개최 대림정대한사협 사진강좌 개최(연8회) 월례촬영회 개최(연5회)정읍지회 창립제27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정읍 내장산)≪제48회 대한사협전≫ 및 CD작품집 제작 예총화랑 제1전시실

제56차 정기총회 개최 사랑채월례촬영회 개최(연4회)제28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서울 남한산성)≪한중 국제교류전≫ 대한사협 대구지회 대구 대덕문화회관≪제49회 대한사협전≫ 및 CD작품집 제작 예총화랑 제1전시실

제57차 정기총회 개최 스칸디나비안클럽월례촬영회 개최(연6회)제29회 전국회원합동촬영대회(충주 중앙탑공원)≪제9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김한용)≪제50회 대한사협전≫ 및 2003대한사협작품집(CD작품집) 발간예총화랑1-2전시실

『대한사협회보』 제12호 발간

제58-60차 정기총회 개최제51-53회 ≪대한사협전≫제30-32회 전국회원촬영대회대한사협 인터넷홈페이지 개설(wwwpaakoreacom)제1회 대한사협 사진공모전

『대한사협회보』 제13호 발간『창립60주년 전국회원전 작품집』 발간(2005)이해선 선생 탄신 100년기념 유작전(대구middot충주middot원주middot대전middot전주순회전) 개최 및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보는 1950-60년대』 (눈빛) 발간(문화관광부middot조선일보 후원)남원지회 청주지회 구미지회 폐쇄(2006년)전주지회 설립(2006년)

제61-63차 정기총회 개최≪제54-56회 대한사협전≫제33-34회 전국회원촬영대회이천지회 폐쇄(2007년)

2000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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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위원rarr고문 안장헌 이정훈고문추대 방대훈이사 강승규(면) 김이경(면) 원종철 김광석

고문 김조현 안준천 이순흥 김용필 박노택안장헌 이정훈 방대훈 회장 김완기 부회장 황순조 유병주(대전) 총무이사 윤중일이사 김준영 원종철 김광석 심재욱감사 강승규 이재옥

총무이사 윤중일(면) 최인호

회장 최진연

회장 최진연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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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지회 김제지회 원주지회 폐쇄(2008년)한밭지회 설립(2008년)≪제10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안장헌 2007)≪제11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조세현 2009)

제64차 정기총회 개최 PJ호텔 4층 카라디움≪제57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제35회 전국촬영회

제65차 정기총회 개최 충무로 아스토리아호텔제36회 전국촬영회 및 대천지회 전국 사진인리더 초청세미나(한화콘도 세미나실 대천해수욕장)김제지회 재설립(지회장 이성수 총무 구반반) ≪제58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

제66차 정기총회 개최 충무로 아스토리아호텔≪제12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안희탁) 제37회 전국촬영회 및 대천지회 전국사진인 리더 초청 세미나(대천해수욕장내 청주대 수련원 및 머드축제광장)울산지회 설립(지회장 이헌배 총무 심화실) ≪제59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

2013년 제1차 이사회 개최 충무로 통로이미지(주) 회의실 참석 이정훈 외8명제67차 정기총회 개최 캐피탈호텔 뷔페식당 스카이(그릴 룸)≪제60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회원 자질 향상을 위한 사진학 강좌 개설(강사 진동선 2013~2014)

≪제13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마이클 케나(MichaelKenna))

2010

2011

2012

2013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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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1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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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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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회장 정건영

회장 이철집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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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3

김 완 기(金莞祁 1944~ )

1962 충주고등학교 졸업

1964 청주교육대학교 졸업

1969 《제1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입선

1977~1991 KBSEBS방송 출연 15년

1989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교육학 석사)

1990~1999 《대한민국사진전림회》 8회 입선

1993~1999 청영회 회장 역임

1997 《제16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 특선

1998 교육부 초등교육정책과장 역임

1999~2013 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 3회 역임

1999~2014 《전국사진공모전》 심사위원 70회 역임

2002 강남구사진작가회 창립회원 및 회장 역임

2003 서울성북교육청 교육장 역임

2004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초대작가

《서울특별시사진대전》 초대작가

《제1회 김완기사진전》 세종문화회관별관 광화문갤러리

2004~2008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 역임

2005 2013 제24회 제31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심사위원 역임

2005~2007 서울특별시사진작가협의회 초대 회장 역임

2006 『김완기사진집』 출판 창조집단 시빌구

《제2회 김완기사진전》 세종문화회관별관 광화문갤러리

2008~2014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조정위원

2011 《서울특별시사진대전》 운영위원 역임

2011~2014 APC뉴스(한국예술사진인연합회) 회장

2013 김완기 자서전 『분필과 셔터로 그린 자화상』 출판 하얀나무

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고문

강남구사진작가회 자문위원

서울특별시사진작가협의회 고문

청영회 고문

한국사진작가협회 자문위원

구 술 자 연 보

안장헌(安章憲 1947~ )

1969 2 고려대학교 농업경제학과 졸업

1966~2014 고려대학교 호영회 창립회원 호영동우회 회장역임 및 회원

1968~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원 이사(1973~1992) 회장(1993~1995) 현 자문

1973~1975 동화출판공사 『한국미술전집』 사진담당

1976~1977 월간 『영상』 편집장

1977~1979 현암사 『한국미술오천년』 기획 및 편집책임

1979~1995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 3회 역임 현 자문위원

1980~2005 호영문화사 편집인

1981~1992 신구대 사진과 강사

1984~1987 서울교육대학 미술교육과 객원교수(사진학)

1990~1994 롯데문화센터 사진교실 강사

1994~1998 삼성사진문화교실 전임강사

1995~2014 한국불교사진협회 고문

1995~2014 (사)신라문화원 이사 현 자문위원

2000~2014 경주 계림사우회 지도교수

2004~2009 동강사진마을 운영위원

2005~2014 문화유산사진연구소 소장

2009 봉은사진교실(봉은사) 강사

2010~2014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 안장헌디지털사진교실 지도교수

그룹전

1966~2014 고려대학교 호영회 호영동우회 회원전 80여점 출품

1968~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전(17~60회전) 70여점 출품

1990 《사진가 8인전》 후지포토살롱

1994 《한국현대사진의 흐름전》 〈산사일기〉 출품

1996 《Image ofKoreanCultual Heritage》 UNESCO본부 파리

1997 《Buddist Images ofKorea》 독일 함부르그

1997~1998 《서울사진대전》 〈낙선재 일곽〉 〈금원에서〉 출품

1997~2014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전 19점 출품

1998~1999 《경기도사진작가초대전》 출품

1999 《한일사진교류전~자연과 인간을 향하여》 출품

2001 《아름다운 우리 문화재 4인전》 국립진주박물관

2004 《한국다큐멘터리사진 33인전》 동강사진축전

개인전

1996 《서라벌 빛 그리고 향기》 서라벌문화회관

2002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신라문화원 화랑

2003 《세계문화유산과 경북》 경주문화EXPO솔거방

2007 《왕릉의 호랑이》 동강사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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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창호》 인사동 갤러리 북스

2010 《돌 호랑이 그림 호랑이》 인사동 갤러리 북스

2012 《선비의 고향 서원》 인제대 도서관 김학수기념박물관

주요 사진저작

1982 『석불』 호영

1989 『석굴암』 예경

1991 『경주 남산의 탑골』 열화당

1992 『선의 세계』 호영

1993 『영겁의 미소』 불광

1994 『신라의 동해구』 열화당

1996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삼성문화재단

1998 『서원』 열화당

2002 『신라의 마음 경주』 한길아트

『남산』 한길아트

2003 『돌에 새긴 정토의 꿈~석불』 한길아트

『석조미술의 꽃~석가탑과 다보탑』 한길아트

『사진으로 보는 한국미~무늬』 호영

2005 『BUDDHA~Bildnisse ausStein inKorea』 ErnstWasmuthVerlog

Tubingen 독일 베를린

2006 『범종~생명의 소리를 담은 장엄』 한길아트

저서

1987 『국립공원』 김성옥 문순화 송기엽 안장헌 공저 호영)

1995 『사진으로 배우는 사진촬영교실』 호영

2001 『아름다운 우리문화재』 관조 김대벽 한석홍 안장헌 공저 국립진주박물관

2003 『문화유산 일기』 진선출판사

수상

1977 《백오사진상》 작품상 수상(대한사진예술가협회)

1999 『서원』으로 《간행물윤리상》 저작상 수상(간행물윤리위원회)

2006 《한국사진문화상》 공로상 수상(한국사진작가협회)

2007 《이해선사진문화상》 수상(대한사진예술가협회)

2011 《대한민국문화유산상(대통령상)》 봉사활용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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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5

참 고 문 헌 목 록

「봄 국전심사에 물의 사진 심사위원에 시비」 『동아일보』 1977421

「봄 국전 심사 낙수(落穗)」 『경향신문』 1977425

「현대사진문화상 이해선 씨 뽑아」 『동아일보』 19781128

「사진문화-사협고문 이해선 씨 작품집 발간」 『매일경제』 19801129

「사진 50년 역사를 한 눈에」 『매일경제』 1981120

「사진작가 이해선 작품집 두 권 내놔」 『동아일보』 1981629

「부고-원로 사진작가 이해선 씨」 『동아일보』 1983111

「일화로 엮는 명암 100년 화단이면사( ) (27) 화가와 문인과 신식 여성」

『경향신문』 198554

「이해선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사진전」 『연합뉴스』 20051026

「lt단신gt 백오 선생 탄신 100돌 사진전」 『문화일보』 20051031

「사진예술가협회 창립 60주년 기념전」 『매일신문』 20051117

「문화의 향기-전시」 『부산일보』 200615

「백오 이해선 선생 미발표유작 사진전」 『부산일보』 200617

「[전북][광주전남][제주][대전충남]문화가」 『동아일보』 2006120

「영월 동강사진박물관-이해선 특별기획전 2007년 3월 첫 주까지」 『뉴시스』

20061227

「사진과 친해지려면 옛 서울역사로 가보세요」 『헤럴드경제』 201041

월간지 계간지

김용준 「서화협전의 의미」 『삼천리』 1931년 11월호

「lt부감(俯瞰)gt(이해선 작)gt」 『사진문화』 1956년 6월호

「아마츄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호

연성숙 「일제 한인귀족의 근황」 『진상(眞相)』 1960년 3월호

「창간사 이해선 씨」 『포토그라피』 1966년 8월호

「나의 발언」 『포토그라피』 1966년 8월호

「작가 지상초빙작가-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달의 작품사진 제주풍물-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해선 「해외 예술사진 감상실 (1회)」 『포토그라피』 1968년 4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6) 석가탄일」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7)」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제1회 새한사진콘테스트」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8) 동해진미」 『포토그라피』 1969년 9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9) 야채밭」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0) 건제(乾梯)」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제18회 국전 소식」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1) 초설(初雪)」 『포토그라피』 1969년 12월호

이해선 「돌과의 대화 30년」 『월간 중앙』 1969년 12월호

「초대작가 사진」 『포토그라피』 1970년 9월호

이해선 「고궁풍물(1)」 『포토그라피』 1971년 1월호

_______ 「고궁풍물(2)」 『포토그라피』 1971년 2월호

이해선 관련

일간지

「입선자의 방명록」 『매일신보』 1926512

이태준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1029

「금조개장한 동미전 제2회」 『동아일보』 1931412

홍득순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417

「인사(人事)」 『매일신보』 193886

이해선 「예술사진의 연혁과 개념」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동인전」 『경향신문』 19491115

「인사(人事)」 『경향신문』 1953110

이해선 「등하수상(燈下隨想)」 『동아일보』 19551112

_______ 「사진예술의 독자성」 『동아일보』 1956126

_______ 「사진 8인전 소감」 『경향신문』 195647

_______ 「백오(白烏)의 변(辯)」 『동아일보』 195749

「김포공항에 내린 덕혜옹주-이해선 씨가 부축하고 있다」 『경향신문』 1962126

「5월 예술상에 붙이는 제언」 『경향신문』 196231

「2명이 사퇴 사진부문심위원」 『경향신문』 1964109

「영예의 산실 안팎」 『동아일보』 19641013

「횡설수설-국전 사진부 이해선 심사위원 사퇴」 『동아일보』 19641014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중요한 내용middot형식 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1020

「열띤 감정으로 충만-창협 창립 사진전」 『동아일보』 1965119

「한국국제사진살롱 위원 명단」 『동아일보』 1965116

「동아국제사진살롱 심사평-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28

「제4회 사진동우회전」 『동아일보』 1966121

「동아사진살롱 심사평-총 801 응모」 『동아일보』 196729

「위원장에 이종우 씨 국전심사위원 위촉」 『동아일보』 1967920

「국전심사위원장 도상봉 씨 선출」 『경향신문』 1968919

「석우회(石友會)서 돌 전람회」 『동아일보』 1970428

「예술인에 훈장 이해랑 씨 등 9명」 『경향신문』 1972118

「외길 한평생 lt11gt 사진middot예술 이해선」 『선데이서울』 1973318

「현역 원로 작가 초대전 일제하의 침울이긴 예술자세 생생하게」 『경향신문』

1974831

「이해선 씨 작품전 향토풍물 50점 전시」 『동아일보』 19741118

「이해선 사진전」 『경향신문』 19741119

「이해선 사진 작품전 24일까지 신문회관」 『매일경제』 19741121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423

「국전운영위원 위촉」 『동아일보』 1976317

「국전사진부문 사단중진들 반발」 『동아일보』 1976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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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_______ 「고궁풍물(3)」 『포토그라피』 1971년 3월호

_______ 「고궁풍물(4)」 『포토그라피』 1971년 4월호

_______ 「고궁풍물(5)」 『포토그라피』 1971년 5월호

_______ 「고궁풍물(6)」 『포토그라피』 1971년 6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7)」 『포토그라피』 1971년 7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8)」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포토그라피 창간5주년에 붙여서」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9)」 『포토그라피』 1971년 9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0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1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2)」 『포토그라피』 1971년 12월호

「제2회 사진국전마감 심사위원결정」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이해선 「이해선 떡에 얽힌 시속(時俗)의 금석(今昔) 옛떡이 사라져 간다는데」

『월간 중앙』 1973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1)」 『포토그라피』 1973년 8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2)」 『포토그라피』 1973년 9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0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6)」 『포토그라피』 1974년 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7)」 『포토그라피』 1974년 3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8)」 『포토그라피』 1974년 4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9)」 『포토그라피』 1974년 5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끝)」 『포토그라피』 1974년 6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 『포토그라피』 1974년 7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2)」 『포토그라피』 1974년 8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3)」 『포토그라피』 1974년 9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4)」 『포토그라피』 1974년 10월호

_______ 「작가와 작품-풍물백태 중에서」 『포토그라피』 1974년 1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6)」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7)」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8)」 『포토그라피』 1975년 3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9)」 『포토그라피』 1975년 4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0)」 『포토그라피』 1975년 5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1)」 『포토그라피』 1975년 6월호

_______ 「곡필무사(曲筆誣事)를 밝힌다」 『월간 중앙』 1975년 11월호

「영상 창간 1주년 기념 좌담회 한국 사진 산업의 의 오늘과 내일」 『영상』 1976년 6월호

「국전 초대작가 8인선 김조현 이건중 이경모 이해선 임응식 이형록 정인선

조현두」 『영상』 1977년 1월호

「남기고 싶은 작품 3 이해선」 『영상』 1977년 5월호

「예술사진에 대한 견고한 확신 이해선 사진의 예술성」 『영상』 1978년 5월호

「한국현대미술대전」 『영상』 1978년 10월호

이명동 「처음 제정된 사진문화상에의 기대」 『영상』 1979년 2월호

「행사 백오 이해선 선생의 사진작품집 출판기념회」 『영상』 1981년 2월호

「작품집 소개 이해선 작품집 중에서」 『영상』 1981년 4월호

박재능 「다양한 자기 세계의 길」 『영상』 1981년 12월호

「영상방담-사단의 이 얘기 저 얘기 김정래 임석제」 『영상』 1982년 1월호

「이미지의 합창-봄의 첫 장」 『영상』 1982년 4월호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 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호

岩宮武二 「너 어디 있느냐」 『영상』 1983년 1월호

최인진 「1930년대의 아마츄어 사진활동」 『사진사연구』 통권 제5호 1983년 9월호

박재능 「월평-원로 이해선 선생을 추모한다」 『영상』 1983년 12월호

「한국 근대미술의 발자취」 『계간미술』 중앙일보사 1985년 봄호

「다시 보는 명작 정도선 정인선 신현국 강대환 김일창 이해선」 『영상』 1986년 10월호

「고 백오 이해선 선생 추모비 건립」 『영상』 1989년 1월호

「동경 유학생들의 한국 근대미술」 『월간미술』 1989년 9월호

「화보로 보는 한국 동경 유학생들의 자화상」 『미술세계』 1993년 5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조선총독부 관보』 제4087호(192647) 한국학문헌연구소 서울 아세아문화사 1926

이태현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1집 서

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2

_______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 자화상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3집 서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4

신명호 「일제하 이왕직과 이왕가 족보」 『한국학대학원논문집』 제11집 한국정신문화

연구소 1996

최인진 「한국사진 역사의 증인(4) - 사단의 단체 활동과 이해선」 『한국사진』 2002

이가라시 코이치 이중희 역 「조선미술전람회의 창설과 서화」 『한국근대미술사학』

제12집 한국근대미술사학회 2004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의 입학제도와 조선인 유학생」 『동악미술사』 제6호 2005

허보윤 「미술로서의 디자인 이순석의 1946-1959년 응용미술교육」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단행본

조우석 『한국사진가론』 눈빛 1998

작품집 도록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1926

이해선 『이해선 사진작품집』 평화당 1980

_______ 『한국의 고궁』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0

Tucker Anne Iizawa Kotaro Kinoshita Naoyuki The History of

Japanese Photography London YaleUniversityPress 2003

이해선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남은 1950-60년대』 눈빛 2005

_______ 『이해선 사진집 1950~1960년대 이야기』 동강사진박물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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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7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일간지

「부산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24531

「성공을 기대 조선사진연구회 현일영 씨 담」 『조선중앙일보』 1936826

「경성아마사진구락부 제1회전」 『조선일보』 1938417

「사진작품전」 『동아일보』 19381014

「경성사진동호회 작품전람회개최」 『조선일보』 19381027

「사진동호회작품전」 『동아일보』 1938112

「경성아마추어 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39527

「아마추어 사진인화전」 『매일신보』 19391115

「동서남북-lsquo아마추어rsquo 제4회 인화전람회」 『동아일보』 19391115

「동서남북-합동인화전」 『동아일보』 1940126

「아마추어 사진의 인화전」 『매일신보』 194074

「경성아마츄어 제5회 인화전」 『조선일보』 194075

「경성백양사우회 제1회 인화전람회 개최」 『매일신보』 19401113

「제2회 사진전 명일부터 화신에서-백양사우회」 『매일신보』 19411124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55

「사진작품전」 『조선일보』 1946119

「전국문화총연발족」 『동아일보』 194729

「제1회 조선사진예술전」 『경향신문』 19475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7510

「사진전람회개최」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전응모작 답지」 『경향신문』 1947615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 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629

「제1회예술사진전람회 15일부터 동화백화점」 『경향신문』 1947713

「예술사진 입선 수상식을 거행」 『경향신문』 1947720

「예술사진전 19일부터」 『동아일보』 1947121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8224

「사예(寫藝) 2회전 작품을 현상모집」 『경향신문』 19481013

「예술사진전 심사 오는 8일로 연기」 『동아일보』 1948127

「지방출품우수-제2회 예사전」 『동아일보』 19481212

「사진예술전 22일부터 동화화랑서」 『동아일보』 19481221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964

「전국종합사진전 심사결과-특선1석 최인집 씨」 『동아일보』 194977

「사진예술의 정화-제3회 전국예술사진전」 『경향신문』 19491010

「예술사진전 30일로 마감박도」 『경향신문』 19491128

「예술사진전 입선자 발표」 『경향신문』 19491213

「예술사진전시회」 『동아일보』 195316

「춘계사진섭영회 26일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3

「본사후원 춘계촬영대회 오늘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6

「사진현상모집」 『경향신문』 1953517

「특선에 lt만춘gt」 『경향신문』 1953527

「인화 당선자 수여식」 『경향신문』 1953529

「사진작품발표전」 『경향신문』 1954413

「예술사진전시회 US-S화랑서」 『동아일보』 1954415

「집회」 『동아일보』 1954916

「경복궁서 촬영대회」 『경향신문』 1954919

「내 26일 촬영대회 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4922

「사연 촬영대회 여감(餘感) 아마추어 사진도(寫眞道)」 『동아일보』 1954103

「문화집합」 『동아일보』 1955122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77

「사연(寫硏) 창립 10주년 기념 어제 촬영대회 성황」 『동아일보』 1955711

「촬영대회 입선작 결정」 『동아일보』 1955819

「8인 사진전 개최」 『동아일보』 1956329

「9회 사연(寫硏)전」 『동아일보』 1957414

「신록촬영대회 개최 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62

「대한사진예술가협회서 사진전시회 개최」 『동아일보』 1958711

「10년 후의 우리 문화 건국 20주년을 장식하고 싶은 것」 『동아일보』 1958821

「사진예술가협회 11회 회원작품전」 『동아일보』 195979

「문화 소식」 『동아일보』 1960119

「국전에 사진부문도」 『동아일보』 1963410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결정 특선 조천용 작」 『동아일보』 19641020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653

「렌즈의 향연 영예의 초점-제4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동아일보』 196667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61217

「사진예술가협회전」 『동아일보』 19681022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9830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996

「국립공보관 12월 전시회 스케쥴」 『경향신문』 1971126

「문화단신」 『경향신문』 19721128

「사진예술협 작품전 7일까지 공보관서」 『매일경제』 1973111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에 안준천 씨」 『경향신문』 197526

「동아포우스트」 『동아일보』 19751117

「사진예술가협회 창립30돌 기념전」 『경향신문』 19751118

「추계 친목 촬영대회」 『매일경제』 197610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7830

「사진예술가협 정총(定總) 31일 하오 대동관서」 『매일경제』 19781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81031

「문화광장」 『동아일보』 1993121

「한국사진예술 50년을 펼친다」 『한겨례』 1994111

「사진예술가협 사라진 풍물전」 『서울신문』 20051025

월간지 계간지

「사진클럽 지상소개 대한사협의 발자취」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박필호 「논단 대한사협16회전을 보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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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대한사협 16회전」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사협 16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8년 7월호

「대한사협 충남지부 회원전」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경축 창간 3주년 사진과 관광 포토그라피-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대한사협 18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제18회 대한사협전」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 작품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70년 3월호

「축 창간4주년 서울 선데이 카메라 클럽」 『포토그라피』 1970년 8월호

「축 포토그라피 창간 5주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김종양 씨 대한사협 고문 추대」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3년 3월호

「lt파도gt 김도현 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신춘초대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근하신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75년도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창작선」 『영상』 1977년 1월호

「전시장 순례 대한사진협회 회원전」 『영상』 1977년 11월호

「지상소개-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대한사협 제27회 정기총회 개최」 『영상』 1979년 7월호

박필호 「대한사협 27돐에 대한 축사」 『영상』 1979년 7월호

「제26회 대한사협전」 『영상』 1980년 1월호

「제27회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사진전시회」 『영상』 1980년 12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요강」 『영상』 1981년 5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영상』 1981년 10월호

「탐방-뜻이 있으면 길이 있게 마련 세 번째 전국대학사진 공모전을 연 대한사협충

남지회의 단합된 모습」 『영상』 1983년 1월호

「제3회 전국대학생사진 공모 제12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월호

「제13회 대한사협 충남 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2월호

최인진 「경성아마츄어카메라구락부를 말한다」 『사진사연구』 1984년 7월호

「대한사협본부 주최 제9회 한국국제사진전 입상자」 『영상』 1989년 1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대한민국예술원 편 『한국예술총감 자료편』 대한민국예술원 1965

한국사진협회 「사진계소식 1969년도」 『한국사진연감』 1970

_____________「한국사진협회의 연혁 1976년 10월 30일」 『한국사진연감』 1976

임범택 「사진」 『1977년도 문예연감』 1978

______ 「사진」 『1978년도 문예연감』 1979

한국사진협회 「역대역원명단(歷代役員名單) 1962년~1987년」 『한국사진연감』

1988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제1장 한국사진협회 창립 이전의 사진계 동향」 『한국사협

사 I 1945-1970』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01

최인진 「해방 초기의 사진잡지 연구-『국제보도』와 『사진문화』를 중심으로」 『한국

사진학회지 AURA』 제10호 2003

박혜성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사진문화』 목록 및 해제」 『한국 사진 잡지

『사진문화』 연구』 명지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한국사협 50년사』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13

단행본

임응식 『내가 걸어온 한국사단 임응식 회고록』 눈빛 1999

작품집 도록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제16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7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8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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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9

원 문 자 료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년 10월 29일 4면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년 4월 17일 4면

1 이해선 양화기(洋畵期) 관련 참고 자료

「입선자의 방명록」『매일신보』 1926년 5월 12일 3면

「금조 개장한 동미전 제2회」『동아일보』 1931년 4월 12일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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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참고 자료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년 5월 5일 2면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년 6월 29일 3면

「신록촬영대회개최-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년 6월 2일 4면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년 7월 7일 4면

예술사진전 조선사진예술연구회에서는 5월 6일부터 동11일까지의 6일간에 걸쳐 동화백화점(舊三越) 갸라리--에서 창립기념사진전을 개최하기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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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해선 관련 원문 자료

원문은 당시의 표기를 그대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현재의 띄어쓰기와 맞춤법에 맞지 않는 부분들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수정하였고 일부 [ ] 안에 병기했다 원문의 한자는 모두 한글 독음으로 고쳤으며 의미 전달을 위해 필요한 경우 ( )안에 병기했다

「대담 아마추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 pp 48~52

작가가 사태(沙汰)났어

본지 공사간에 바쁘실 텐데helliphellip 사진문화의 발전을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

해 주십사 하는 것은helliphellip 요즘 각 직장이나 학생들 간에 사진열이 굉장히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 비

추어서 이 아마추어 카메라맨의 지도 문제를 비롯하여 초보자의 진로랄까helliphellip 이런 문제에 대한 말

씀을 좀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해선6middot25 동란 후에 개인적으로 사진을 연구해 보겠다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직장이나 학교 단위로

사진동호자의 클럽이 많아 지고 작품 발표라던가 전시회 같은 것이 무척 많아졌는데helliphellip 어쨌든

일반 사회인이나 학생 간에 사진열이 높아졌다는 건 기쁜 일이야

임응식그런데 아직도 이 카메라를 사치품으로 취급하는 층이 많아서 곤란해요

이 나라(정부)에서부터 사치품 취급을 하더군helliphellip 여자들이 다이아몬드를 사려는 것과 사진을 연구하

려는 사람이 카메라 장만하는 것을 똑같이 취급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곤란

하지

임 헌데 우리 사단(寫壇)에선 우선 lsquo사진작가rsquo라는 용어를 쓰는 데에 신중을 기해야 하겠어요 웬 놈의

lsquo사진작가rsquo가 그리도 많은지helliphellip 이건 카메라만 메고 다니면 모두 작가 행세를 하니helliphellip

이 카메라 멘 것이 모두 lsquo작가rsquo라면 대한민국에 lsquo사진작가rsquo가 수 십만도 될 걸helliphellip 작가라는 친구들을

체에 넣어서 걸러 놓으면 엄격한 의미에서 진짜 lsquo작가rsquo는 몇 사람 밖에 없을 텐데helliphellip

임 호주머니에 만년필을 꽂았다고 해서 문학가 혹은 소설가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겠는데hellip

hellip 어쨌든 요즘 성행하는 사진작가의 사태를 우선 잡지에서 만이라도 용어 사용에 엄격한 규정을

지어서 질서를 잡아 주어야겠어요

이 그것도 과도기적 현상이겠으니까 차차 지양되겠지helliphellip 오늘 해달라는 얘기는 그런 넋두리가 아닐

테니까 어디 이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본지 한마디로 얘기하자면helliphellip 카메라는 어떻게 해서 장만을 했는데 mdash 자 그 다음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겐지 몰라서 어쩔 줄 모르는helliphellip 이런 아마추어와 초보자들의 진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얘기를

좀helliphellip 현재 직장 단위로 사진 동호자들이 모여서 클럽을 이룩한 것이 십 여 개 있고 학교 단위로는

이십 여 개나 되는데요helliphellip

관련 자료 소개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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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인식이 안이해서 탈이야

이 극히 초보적인 입장에서 사진을 해보고 싶다helliphellip 다년간 연구를 한 다음엔 작가가 돼 보겠다 mdash 하

는 사람들을 회원으로 해서 수 십 년 동안 연구를 해 왔는데helliphellip 오늘날 하고 있는 일도 그것이지만

helliphellip 여러 부문에 걸쳐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서적인 면에서 사진과 친해보고 싶다던가

또는 카메라를 장만했는데 어떻게 하면 앞으로 향상 발전할 수 있는가 mdash 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신인이라고 하겠지 특히 학생들의 교내 활동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helliphellip 헌데 막상 다다

르고 보면helliphellip 어떠한 길이 올바른 길인지 막연해 하는 모양이더군요

임 초보자들은 무엇보다도 사진 자체에 대한 정의를 뚜렷이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아마추어 mdash

하면 취미적 입장에서 사진을 다루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조각이나 회화와 같이 사진도 어엿한 예술이니

까 취미 도락(道樂)적인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예술을 추구하는 진지한 마음의 준비가 우선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물론이죠 대개 클럽 조직이 되어 있으니까 선생들의 지도를 받고 있겠지만 내가 알기에는 전문가

가 아닌 다시 말하면 취미 정도에서 관심이 있는 선생들이 지도를 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역시 전문으

로 사진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지도를 가끔씩이라도 받는 게 좋겠지요

임 지도를 한다는 사람들의 태도부터가 성실성이 없는 것 같아요 만년필을 샀으니까 나도 한 번 써 보

자 mdash 해서 작가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취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남의 lsquo지도rsquo를 담당

할 수는 없을 텐데 mdash 우리가 사진을 전공한대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억지로 지도해 주겠다고 밀고

들어 가겠다는 건 아니지만 mdash (웃음) mdash 어쨌든 전문가의 지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학생 클럽이나 직장 클럽 같은 동호자의 모임을 사단의 일부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취미

에서 시작했더라도 일정한 과정을 밟고 다년 연구를 거듭하면 자연히 작가를 지향하게 되겠지만hellip

hellip 그런 면에서도 처음 싹트기 시작하는 신인의 지도가 퍽 중요한 것이지요

취미middot도락이란 관념을 버려야 해

임 지금 형성되어 있다는 직장이나 학교 단체의 거의 전부가 전문적인 입장에 서 있지 않은 것 같더군

요helliphellip 사진에 대한 근본 의식이 너무도 안이한 것 같아요 카메라를 통한 표현의식에 절실한 감정

이 없어요helliphellip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비판을 받지 않는다helliphellip 하는 따위의 도피를 해서는 곤란

하죠helliphellip 창작의식이 확고하게 수립되지 않아서는 향상이 없는 것인데helliphellip 소문에 듣자면helliphellip 너

무 기술 면에만 치중하고 정신적인 면이 소홀히 취급된다는 거에요 helliphellip 나는 직장을 갖고 있으니

까 사진이란 것은 취미 정도로 한다 mdash 하는 태도를 버려야죠 특히 이 점은 지도자들에게 권하고 싶

은데helliphellip 예술의식helliphellip 이것이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절대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까

이 그렇구 말구요helliphellip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새로 사진을 공부하겠다는 신인들에게 네 가지 의식을 주

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휴머니즘 mdash 우선 사람이 돼야 하거든요 교양이라던가 인격 덕망helliphellip 이런 면에서 인간이

돼 있어야 하고 둘째는 사진예술을 한다고 해서 사진예술이 무엇이냐helliphellip 이것만을 추궁해서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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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요 좀 더 시야를 넓혀서 예술이라는 게 뭐냐 mdash 하는 걸 먼저 알아야지 셋째에 가서 사진예술이

라는 게 뭐냐 mdash 를 연구하고 넷째에 가서야 비로소 작품이라던가 창작의식 기교 기술에 대한 검

토를 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기본조건을 머리 속에 언제나 간직하도록 나는 주장해 왔어요

임 기술면을 등한히 할 수는 없겠지요 기술 없이는 표현이 안되니까helliphellip 그러나 이선생 말씀처럼 인

간본연의 문제도 크긴 큽니다 다른 예술부문의 사람보다 교양면에서 뒤떨어지지나 않는가 mdash 하는

것이 항상 염려되는데helliphellip 만일 뒤떨어진다면 큰일이지요 기술도 중요한 문제겠지만 교양인격 같

은 것도 예술가가로서의 긍지를 위해선 떨어질 수 없는 문제고helliphellip 더욱이 좋은 기술을 가졌으면서

도 기초교양이 모자라서 좋은 작품을 낼 수 없다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으니까helliphellip 교양인으로서의

자격도 다른 예술부문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사진을 해야할겝니다

이 기교나 기술을 어떻게 우물쭈물 배웠다고 해서 작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helliphellip 예술이란 그 자체

에 대한 조예부터 깊어야 합니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조리개가 얼마다 타임이 어

떻다helliphellip 암실작업은 어떻게 하는 거다helliphellip 이것만을 알았다고 해서 작가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에

요helliphellip 인간면 예술면 기술면에 똑 같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마 사진을 연구하겠다는 신

인들의 기본이념이 돼야 할겝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지도한다는 면에서

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거든요 mdash

임 어쨌든 기술을 위주로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난 옛날 얘기입니다

지도자 시비

이 지났다기 보다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는 장래에나 변할 수 없는 기본이념이겠지요 사진이라는 것

은 더욱이나 고도의 대중성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인격과 교양이 필요해요 기계라는 거야 찍으면

사진이 되도록 마련된 것이니까 예술까지는 못 가도 사진은 되거든 mdash 그러니까 그것을 예술로 이

끌려면 찍는 사람의 성분이 문제되는 것이지요helliphellip

임 그런 의미에서도 사단의 규정이 필요하고 작가라는 규정이 필요해요 사단이라는 것에 너무 엄격한

규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helliphellip 만년필을 가졌다고 해서 전부 문학가가 아니라면helliphellip 카메라를 메었

으니 작가다 mdash 하는 엉터리도 용납될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우선 필요한 것은 취미 도락이라는 관념

을 지양해야 할 텐데helliphellip

이 취미가 차차 심각해지면 창작의식도 생기는게니까helliphellip 그런 사람들을 지도 계몽해서 한 사람이라

도 작가로 이끌어야 하겠지요helliphellip 카메라를 살 때부터 나는 사진작가가 되겠다 mdash 하는 사람은 있

을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임 lsquo싼데이rsquo 카메라맨은 논의의 대상이 안되구요helliphellip (웃음)

이 그러니까 지도자들이 작가적인 태도에 확고한 이념을 앞세우고 지도에 임해야 하는 건데helliphellip

본지 각 단체 지도층의 지도방침에 대한 구체적인 태도를 어떻게 규정하겠습니까 helliphellip

임 우선 사진에 대한 인식부터 고쳐야 해요 말이 중복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친구 좋고 사진 좋아서 우리

끼리 하면 그만이다 mdash 하는 생각들이 많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만이라도 그렇지 않다

관련 자료 소개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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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싶어요 학생들이 카메라를 사 가지고 몇 사람 모였으니까 책임자 격

인 선생이 필요하다 mdash 해서 책임 맡았다는 사람으로는 지도가 안 될 게 아닙니까 그렇다고 청해 오

지도 않는데 내정 격으로 뛰어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구helliphellip (웃음)

본지 또 한 가지 요즘 일대 성황을 이루는 것이 소위 현상사진(懸賞寫眞)이라는 건데요helliphellip 이 현상사진

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진에 대한 모욕도 있지helliphellip

임 거 참 꼴사나운 일이 많아요 현상이란 걸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helliphellip 그 하나는 어느 연구

단체에서 순수한 의미에서 발표 바탕이 없는 아마추어를 위해 마련하는 경우가 있을게고 또 하나는

선전용으로 포스터 mdash 같은 데에 써먹기 위한 상업 정책적인 의식에서 모집하는 현상이 있을 테지요

이 어느 경우이건 간에 좌우간 현상 모집을 하는 목적이 있는데helliphellip 응모자는 우선 현상의 목적부터 확

실히 알고 응모를 해야 하겠지helliphellip

임 그렇죠 그런데 이 상업 정책적인 현상의 경우에는 사진문화에 대한 모욕적인 행동이 퍽 많습니다

이거 참 불유쾌한 일이지만helliphellip 가령 예를 들자면 응모자는 원판을 제공하라던가 또 낙선자의 작

품은 일체 반환치 않는다는 따위helliphellip이게 얼마나 사진예술에 대한 모욕적 행위입니까 helliphellip

이 그래요helliphellip 확실히 모순된 일입니다

임 필요에 의해서 현상모집을 했으니까 당선된 작품은 물론 필요하겠지만helliphellip 낙선작품을 반환치 않는

다는 것은 언어도단 입니다 낙선이 됐다 해도 작가의 입장으론 대단히 귀중한 하나의 작품일 텐데

그걸 안 돌려 준대서야 말이 되나요 주최측은 낙선작품의 원화를 돌려 줄만한 성의를 가져야 도리

에 맞을 텐데helliphellip 요즘 현실은 lsquo낙선rsquo이란 푸대접 밑에 원판까지 몰수당하는 판국이니helliphellip 원 참

이 그러니까 응모자는 무엇보다도 현상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지helliphellip 여러 번 겪은 일이지만 심사를

하다 보면 전혀 현상 취지를 도외시한 작품들이 있는데helliphellip

임 그거야 보나마나 낙선이죠 (웃음)

이 그러믄요 현상 응모자로서는 출품 규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 아니겠어요

임 그럼요

이 그런데 어떤 것은 작품에 제목도 없는 것이 있거든요 그런가 하면 제목과 작품내용이 전혀 특이한

엉터리도 있구helliphellip

임 저도 여러 번 겪은 일입니다

이 제목이란 것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벌써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찍는다는 의식이 있는 이상

제목도 정해져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아주 작품과 제목이 동떨어진 것들이 응모해 오니까

낙선의 자격이 충분할 수밖에helliphellip 하하하 (웃음)

임 그게 모두 사진에 대한 성의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이 그래요 성의가 없어요 자기 작품에 대해선 최선의 성의를 다 해야 할 텐데 그런 태도가 없거든helliphellip

제목을 안 썼는지 못 썼는지는 모르지만helliphel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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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그저 무턱대고 발표의식만 왕성한 까닭이 아닐까요

이 그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된 작가가 아닌 이상 발표기회가 좀처럼 없을 테니까

자기 실력의 평가를 받는다던가 남들과 경쟁해 본다는 의미에서 현상에 자주 응모하는 것은 좋은데

helliphellip 아 어떤 친구는 자기 실력 생각은 하지도 않고 상품이 적다 많다 시비를 하는 친구도 있으니 참

기가 막힐 일이지

주최자의 무성의도 고쳐져야 하고

임 그건 lsquo현상rsquo이라고 내거는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순수한 사진연구단체에서 모집할 때는

lsquo공모전rsquo이라던가 하는 문구가 좋지 않을까요 lsquo현상rsquo이라니까 lsquo상rsquo을 바라게도 되겠지만 어쨌든

lsquo현상rsquo이란 말 자체가 순수하지 못해요

이 그건 확실히 생각해 볼 문제이겠군요helliphellip 순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helliphellip 응모자들이 심

사원이 누구냐mdash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도 순수하지 못하고helliphellip 또 주최자가 모집광고를 낼 때

lsquo심사원은 추후발표rsquo라mdash하는 것도 순수하지 못해요 이것도 참 불쾌한 일인데 lsquo추후발표rsquo라는 걸

다시 생각하면 lsquo준비가 안됐다rsquo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심사원의 준비도 안 해 놓고 현상을 모

집하는 그런 무성의가 또 어디 있어helliphellip 이건 일종의 사기가 아니면 거만일 겝니다

임 그나 그뿐인가요 lsquo심사원은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함rsquohelliphellip 하는 모호한 광고도 있지요 응모자의 입

장에서 생각하면helliphellip 심사원에 불만이 있으면 응모를 아니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 심사원 문제만

은 정정당당히 명시해야만 나중에 가서 심사에 대한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출품을 한 다음에 심사

원이 발표된다는 것은 심사에 대한 불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helliphellip

이 그리고 응모자의 동태를 가만히 보면 아까 얘기가 나왔던 소위 lsquo취미정도rsquo라는 층의 발표 의욕이 굉

장해서 대부분의 응모자가 이 부류인 것 같은데helliphellip 여기 한 가지 탈이 있어요 현상응모 작품의 심

사라는 것은 무제한의 심사 레벨을 놓고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응모 작품 중에서의 우수 작품을 가

려낸다는 것은 이거 상식 문제가 아닙니다

임 그렇죠

이 아 그런데 어떻게 해서 현상에 당선이 되거나 특히 특선이라도 하면 그만 자기가 갑자기 위대한

작가라도 된 것처럼 대가연(大家然) 하고 으쓱대는 친구들이 많아서 걱정이야helliphellip (웃음)

이 lsquo특선rsquo이라는 것은 응모해 온 작품들 중에서 특선이지 결코 한국 사단 전체의 수준에서 특선이라

는 것은 아닌데helliphellip 그만 한 번만 당선되면 코가 높아지고 대뜸 대가 행세를 하려고 드니helliphellip 참

신인들은 특히 조심해야 할 일이지

남의 것보고hellip 우리 것도 보내고hellip

본지 이제 화제를 좀 바꾸어서 세계사단의 동향을 좀 말씀해 주실까요

임 세계사단의 얘기라면 직접 보아야만 얘기가 될 텐데helliphellip

이 서울 바닥에서 썩으면서 세계사단의 얘기를 어떻게 본 듯이 할 수가 있겠나 카메라를 메고 세계일

관련 자료 소개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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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도 했어야 얘기가 되지

임 그것보다도 사진을 통한 국제 교류 얘기나 합시다

이 그게 좋겠군helliphellip 얼마 전에 덕수궁에서 자유중국의 소개사진전시가 있었죠 미국공보원의 활동도

이를 테면 국제교류의 한 형식일게고helliphellip

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자유중국과 월남의 사진전시가 있었는데helliphellip 우리도 수출을 한다면 그 보

다 훨씬 좋은 작품들이 나갈걸요helliphellip

이 한미합동전이던가 한중합동전 같은 것도 하면 역시 국제교류가 되겠지요helliphellip

임 한미합동전은 불원한 장래에 개최될 것입니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lsquo인간일가(人間一家)rsquo의 사진

이 아마 이월쯤 한국에 올 겝니다 미국대사관이 주동이 돼서 작품 503점 전부의 전시회 계획이 추

진되고 있으니까요

이 남이 보내줘서 본 것은 있지만 우리가 남에게 보여준 것은 없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야 우리도 남에

게 보여줘야 교류가 될 텐데helliphellip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두 사람의 작품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임 개인적인 활동은 있었지요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사진살롱에 사진을 보내고 있으니까 개인

적으로는 더러 나간 셈이죠 개인들의 수출이라도 좀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지만

이 우리의 것을 내보내고 외국 것을 들여와서 서로 감상하고 연구하는 게 이를 테면 국제교류인데

아마 명년쯤엔 될까 몰라

임 작품교환전 같은 것을 위해서 대대적인 계몽운동이 필요 하겠죠

이 그렇죠 운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어요

임 그런데 근본적인 얘기를 하자면 한국 작가의 역량이 아직도 부족한 것 같아요 언젠가 외국 작가에

게서 들은 말인데mdash한국 사람은 한국을 보지 않았다mdash하는 얘길 해요 사진 작가에게 대한 말이지

만helliphellip 나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이 퍽 중요한 얘기다mdash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를 직시하는 것만이

사진은 아니겠지만 실용사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것이 사실 아닐까요 회화적인 쌀롱 픽처라던

가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리얼리즘 사진이라는 것에 너무들 치우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 국제 교류의 시발은 역시 소개적(紹介的)인 것 다시 말해서 르포르타주적인 것이겠으니까helliphellip

임 외국 작품의 모방 같은 것은 이제 집어치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mdash예술적인 것 이것만을 너무 추

구했기 때문에 사실이 한국적인 것과 국민성의 묘사 같은 것이 잘 되지 않았지요 정서적인 것에만

너무 골몰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일이고 helliphellip 예술을 위한 예술에 정신들이 팔려 있었지나 않은

지helliphellip 예술을 하기 위한 사진이라는 관념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이 예술을 염두에 안 둔다면 실용사진이 돼 버리게

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너무 치우친 것 같단 말입니다

이 특히 국제 교류를 생각한다면 아닌 게 아니라 외국처럼 르포르타주적인 사진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할거에요

임 그래요 거기에 예술성을 띄워서 소화할 만한 역량 있는 작가가 필요해요

이 또 하나의 가장 큰 문제는 위정자의 관심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 큰 난관입니다 국제 교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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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가족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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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말이고 역시 정부당국자의 적극적인 주

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어디 그래요

임 우선 사단 자체의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작가들의 작업도 촉구되어야 하구helliphellip 아까도 말이 나왔지

만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 출품을 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점 같은데서 작가들의 반성도 필

요하고helliphellip

이 개별적으로 미국 등지에 보낸 것은 아마 상당한 수가 되겠지요

임 그럼요 그랬는데 왜 성과가 없느냐mdash하는 반성이 있어야죠

이 오늘의 현실을 예술적인 면에서 기록하고 작품화 해야겠는데helliphellip 막연하게 예술을 위한 작품을 보

내니까 기교적으론 훌륭할지 몰라도 작품 자체에 내용이 없어서helliphellip 그래서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닐

임 그런 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빨리 우리의 수준을 높여서 국제 조류와 호흡을 맞추어 나가

야 할 것입니다

이 이거 아마추어를 위한 얘기라는 것이 잠깐 탈선을 한 것 같군 그러나 이런 문제도 참고가 되긴 하니

까helliphellip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합시다

본지 수고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helliphellip

(기록 O기자)

이해선 「lsquo백오(白烏)rsquo의 변(辯)」 『동아일보』 1957년 4월 9일 4면

30여년 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입학

이 되었을 당시 자축기념하는 의미에서 호(號)를

하나 지어본 것이 백오(白烏)라는 두 글자였다 처

음 듣는 사람들 중에서는 거문[검은] 까마귀는 있

지만 흰 까마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서로 웃어버리고 그 뜻을

설명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자의

(字意)를 해명해볼까 한다 백(白)은 흰 빛이요 오

(烏)는 흑색으로 통하므로 우선 흑백을 대조시켜

놓고 흰 종이 위에다 검은 먹으로 휘호(揮毫)할 것

이니 그 뜻이 내 생활과 부합될 것 같으며 둘째로

백 자(字)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첫 자를 떼어놓

고 오는 반포오(反哺烏)로 그 이름이 높은 새이므

로 평소에 효자 노릇을 못하여 온 나의 좌우명으로도 적당할 듯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새 중에서는

혹간(或間) 백변종(白變種)이 생겨나는 수가 있는데 그 흰새를 서조(瑞鳥)라고 떠들던 옛 시절도 있었으므

관련 자료 소개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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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내가 우연히 호를 지어 본 것이 검은 까마귀떼 속에서 서조 백오를 발견하였으니 나의 전도(前途)에는

반드시 서광(瑞光)이 비칠 것 같으므로 이상 여러 가지 의미를 차례로 생각해 볼 때에 나에게는 이 외에 더

좋은 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자의였었고 궁금한채로 불려온 백오

였었다 만담궁변(漫談窮辯)을 물소물책(勿笑勿責) 하소서 (사진가)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

이해선 「중요한 내용middot형식-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년 10월 20일 5면

사진작품에는 사진 특유의 형식이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러한 특유의 형식에 알맞은 표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의 특수성은 형식이 가지는 특수성 보다는

기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주관적이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작품심사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동일하게 중요시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작

품 속에서 그야말로 형식과 내용이 알맞게 부합된 특출한 작

품을 볼 수는 없었다 형식이 좋으면 내용이 빈약하고 좀 내

용이 있으면 형식이 미숙하고helliphellip 모두 결점이 있다 그러나

입상작으로 뽑은 8 점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

다 그리고 금년에는 lsquo칼러rsquo사진의 응모 점수가 30점이나 되

고 그중에서도 3점이 입상되었고 또 9점이 입선되었다는 것

은 lsquo칼러rsquo 사진의 앞날을 위해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lt전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장gt

[제1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년 2월 8일 5면

외국작품의 세련되고 빈틈없는 lsquo테크닉rsquo은 국내작품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서 우선 국내

작품을 형식에서부터 누르고 말았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이루게 된 것은 국내작가들

의 역량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lsquo국산인화지rsquo가 얼마나 엉터리고 조악한 것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대체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더욱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은 이와 반대적인 경향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예술이든 먼저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볼 때 국내작품의 후진성은

두말할 것 없이 형식의 경시에 있다고 하겠다 심사결과 흑백부에서나 lsquo칼라rsquo부에서 겨우 동상으로 한 점

씩 밖에 국내작품이 입상되지 못했다는 것은 다소 섭섭한 느낌이나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경종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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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더욱 우리 심사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독에서 응모한 lsquo칼라rsquo

작품이었다 물체의 외관 색감을 초월한 내면의 lsquo이미지rsquo가 발

산하는 짙은 감정의 색감으로 작가의 개성과 사상을 인상 깊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내 lsquo칼라라보rsquo의 후진

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상작으로 뽑힌 외국작품들은 오

늘의 세계 사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는 큰 자극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

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제2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총 818점 응모-사진예술에 도움」

『동아일보』 1967년 2월 9일 4면

지난해와 같이 흑백부문에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들은 모두가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산인화지의 조악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작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올해는 흑백

부문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기꺼운 일이라고

하겠다

특히 칼라작품에 있어서는 독일의 작품들이 특출했고 이들 작품들의 색감은 현대 과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 최고상으로 뽑힌 lt잊은 친구gt와 몇 점의 입상작품들은 칼라릴리프와 소라리

세이숀[솔라리제이션] 등의 수법으로써 모티

브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를 초객체적이고 추

상적으로 표현하고 작가의 짙은 개성과 사상

과 철학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입상작으로 뽑은 16점의 작품들은 오늘의

세계사단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

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심사위원 이해선 (위원장) 임응식 서순삼

박필호 안월산 정인성 최경덕 (이상 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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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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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관련 자료 소개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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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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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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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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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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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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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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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관련 자료 소개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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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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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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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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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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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2: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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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지회 김제지회 원주지회 폐쇄(2008년)한밭지회 설립(2008년)≪제10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안장헌 2007)≪제11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조세현 2009)

제64차 정기총회 개최 PJ호텔 4층 카라디움≪제57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제35회 전국촬영회

제65차 정기총회 개최 충무로 아스토리아호텔제36회 전국촬영회 및 대천지회 전국 사진인리더 초청세미나(한화콘도 세미나실 대천해수욕장)김제지회 재설립(지회장 이성수 총무 구반반) ≪제58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

제66차 정기총회 개최 충무로 아스토리아호텔≪제12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안희탁) 제37회 전국촬영회 및 대천지회 전국사진인 리더 초청 세미나(대천해수욕장내 청주대 수련원 및 머드축제광장)울산지회 설립(지회장 이헌배 총무 심화실) ≪제59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

2013년 제1차 이사회 개최 충무로 통로이미지(주) 회의실 참석 이정훈 외8명제67차 정기총회 개최 캐피탈호텔 뷔페식당 스카이(그릴 룸)≪제60회 대한사협전≫ 충무로 갤러리 이룸회원 자질 향상을 위한 사진학 강좌 개설(강사 진동선 2013~2014)

≪제13회 백오이해선사진문화상≫ 시상(수상자 마이클 케나(MichaelKenna))

2010

2011

2012

2013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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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723

9월1110~16

128

723

8월1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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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정건영

회장 이철집

연도 일시 전시 및 활동 임원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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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3

김 완 기(金莞祁 1944~ )

1962 충주고등학교 졸업

1964 청주교육대학교 졸업

1969 《제1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입선

1977~1991 KBSEBS방송 출연 15년

1989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교육학 석사)

1990~1999 《대한민국사진전림회》 8회 입선

1993~1999 청영회 회장 역임

1997 《제16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 특선

1998 교육부 초등교육정책과장 역임

1999~2013 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 3회 역임

1999~2014 《전국사진공모전》 심사위원 70회 역임

2002 강남구사진작가회 창립회원 및 회장 역임

2003 서울성북교육청 교육장 역임

2004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초대작가

《서울특별시사진대전》 초대작가

《제1회 김완기사진전》 세종문화회관별관 광화문갤러리

2004~2008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 역임

2005 2013 제24회 제31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심사위원 역임

2005~2007 서울특별시사진작가협의회 초대 회장 역임

2006 『김완기사진집』 출판 창조집단 시빌구

《제2회 김완기사진전》 세종문화회관별관 광화문갤러리

2008~2014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조정위원

2011 《서울특별시사진대전》 운영위원 역임

2011~2014 APC뉴스(한국예술사진인연합회) 회장

2013 김완기 자서전 『분필과 셔터로 그린 자화상』 출판 하얀나무

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고문

강남구사진작가회 자문위원

서울특별시사진작가협의회 고문

청영회 고문

한국사진작가협회 자문위원

구 술 자 연 보

안장헌(安章憲 1947~ )

1969 2 고려대학교 농업경제학과 졸업

1966~2014 고려대학교 호영회 창립회원 호영동우회 회장역임 및 회원

1968~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원 이사(1973~1992) 회장(1993~1995) 현 자문

1973~1975 동화출판공사 『한국미술전집』 사진담당

1976~1977 월간 『영상』 편집장

1977~1979 현암사 『한국미술오천년』 기획 및 편집책임

1979~1995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 3회 역임 현 자문위원

1980~2005 호영문화사 편집인

1981~1992 신구대 사진과 강사

1984~1987 서울교육대학 미술교육과 객원교수(사진학)

1990~1994 롯데문화센터 사진교실 강사

1994~1998 삼성사진문화교실 전임강사

1995~2014 한국불교사진협회 고문

1995~2014 (사)신라문화원 이사 현 자문위원

2000~2014 경주 계림사우회 지도교수

2004~2009 동강사진마을 운영위원

2005~2014 문화유산사진연구소 소장

2009 봉은사진교실(봉은사) 강사

2010~2014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 안장헌디지털사진교실 지도교수

그룹전

1966~2014 고려대학교 호영회 호영동우회 회원전 80여점 출품

1968~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전(17~60회전) 70여점 출품

1990 《사진가 8인전》 후지포토살롱

1994 《한국현대사진의 흐름전》 〈산사일기〉 출품

1996 《Image ofKoreanCultual Heritage》 UNESCO본부 파리

1997 《Buddist Images ofKorea》 독일 함부르그

1997~1998 《서울사진대전》 〈낙선재 일곽〉 〈금원에서〉 출품

1997~2014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전 19점 출품

1998~1999 《경기도사진작가초대전》 출품

1999 《한일사진교류전~자연과 인간을 향하여》 출품

2001 《아름다운 우리 문화재 4인전》 국립진주박물관

2004 《한국다큐멘터리사진 33인전》 동강사진축전

개인전

1996 《서라벌 빛 그리고 향기》 서라벌문화회관

2002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신라문화원 화랑

2003 《세계문화유산과 경북》 경주문화EXPO솔거방

2007 《왕릉의 호랑이》 동강사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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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창호》 인사동 갤러리 북스

2010 《돌 호랑이 그림 호랑이》 인사동 갤러리 북스

2012 《선비의 고향 서원》 인제대 도서관 김학수기념박물관

주요 사진저작

1982 『석불』 호영

1989 『석굴암』 예경

1991 『경주 남산의 탑골』 열화당

1992 『선의 세계』 호영

1993 『영겁의 미소』 불광

1994 『신라의 동해구』 열화당

1996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삼성문화재단

1998 『서원』 열화당

2002 『신라의 마음 경주』 한길아트

『남산』 한길아트

2003 『돌에 새긴 정토의 꿈~석불』 한길아트

『석조미술의 꽃~석가탑과 다보탑』 한길아트

『사진으로 보는 한국미~무늬』 호영

2005 『BUDDHA~Bildnisse ausStein inKorea』 ErnstWasmuthVerlog

Tubingen 독일 베를린

2006 『범종~생명의 소리를 담은 장엄』 한길아트

저서

1987 『국립공원』 김성옥 문순화 송기엽 안장헌 공저 호영)

1995 『사진으로 배우는 사진촬영교실』 호영

2001 『아름다운 우리문화재』 관조 김대벽 한석홍 안장헌 공저 국립진주박물관

2003 『문화유산 일기』 진선출판사

수상

1977 《백오사진상》 작품상 수상(대한사진예술가협회)

1999 『서원』으로 《간행물윤리상》 저작상 수상(간행물윤리위원회)

2006 《한국사진문화상》 공로상 수상(한국사진작가협회)

2007 《이해선사진문화상》 수상(대한사진예술가협회)

2011 《대한민국문화유산상(대통령상)》 봉사활용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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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5

참 고 문 헌 목 록

「봄 국전심사에 물의 사진 심사위원에 시비」 『동아일보』 1977421

「봄 국전 심사 낙수(落穗)」 『경향신문』 1977425

「현대사진문화상 이해선 씨 뽑아」 『동아일보』 19781128

「사진문화-사협고문 이해선 씨 작품집 발간」 『매일경제』 19801129

「사진 50년 역사를 한 눈에」 『매일경제』 1981120

「사진작가 이해선 작품집 두 권 내놔」 『동아일보』 1981629

「부고-원로 사진작가 이해선 씨」 『동아일보』 1983111

「일화로 엮는 명암 100년 화단이면사( ) (27) 화가와 문인과 신식 여성」

『경향신문』 198554

「이해선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사진전」 『연합뉴스』 20051026

「lt단신gt 백오 선생 탄신 100돌 사진전」 『문화일보』 20051031

「사진예술가협회 창립 60주년 기념전」 『매일신문』 20051117

「문화의 향기-전시」 『부산일보』 200615

「백오 이해선 선생 미발표유작 사진전」 『부산일보』 200617

「[전북][광주전남][제주][대전충남]문화가」 『동아일보』 2006120

「영월 동강사진박물관-이해선 특별기획전 2007년 3월 첫 주까지」 『뉴시스』

20061227

「사진과 친해지려면 옛 서울역사로 가보세요」 『헤럴드경제』 201041

월간지 계간지

김용준 「서화협전의 의미」 『삼천리』 1931년 11월호

「lt부감(俯瞰)gt(이해선 작)gt」 『사진문화』 1956년 6월호

「아마츄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호

연성숙 「일제 한인귀족의 근황」 『진상(眞相)』 1960년 3월호

「창간사 이해선 씨」 『포토그라피』 1966년 8월호

「나의 발언」 『포토그라피』 1966년 8월호

「작가 지상초빙작가-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달의 작품사진 제주풍물-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해선 「해외 예술사진 감상실 (1회)」 『포토그라피』 1968년 4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6) 석가탄일」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7)」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제1회 새한사진콘테스트」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8) 동해진미」 『포토그라피』 1969년 9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9) 야채밭」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0) 건제(乾梯)」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제18회 국전 소식」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1) 초설(初雪)」 『포토그라피』 1969년 12월호

이해선 「돌과의 대화 30년」 『월간 중앙』 1969년 12월호

「초대작가 사진」 『포토그라피』 1970년 9월호

이해선 「고궁풍물(1)」 『포토그라피』 1971년 1월호

_______ 「고궁풍물(2)」 『포토그라피』 1971년 2월호

이해선 관련

일간지

「입선자의 방명록」 『매일신보』 1926512

이태준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1029

「금조개장한 동미전 제2회」 『동아일보』 1931412

홍득순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417

「인사(人事)」 『매일신보』 193886

이해선 「예술사진의 연혁과 개념」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동인전」 『경향신문』 19491115

「인사(人事)」 『경향신문』 1953110

이해선 「등하수상(燈下隨想)」 『동아일보』 19551112

_______ 「사진예술의 독자성」 『동아일보』 1956126

_______ 「사진 8인전 소감」 『경향신문』 195647

_______ 「백오(白烏)의 변(辯)」 『동아일보』 195749

「김포공항에 내린 덕혜옹주-이해선 씨가 부축하고 있다」 『경향신문』 1962126

「5월 예술상에 붙이는 제언」 『경향신문』 196231

「2명이 사퇴 사진부문심위원」 『경향신문』 1964109

「영예의 산실 안팎」 『동아일보』 19641013

「횡설수설-국전 사진부 이해선 심사위원 사퇴」 『동아일보』 19641014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중요한 내용middot형식 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1020

「열띤 감정으로 충만-창협 창립 사진전」 『동아일보』 1965119

「한국국제사진살롱 위원 명단」 『동아일보』 1965116

「동아국제사진살롱 심사평-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28

「제4회 사진동우회전」 『동아일보』 1966121

「동아사진살롱 심사평-총 801 응모」 『동아일보』 196729

「위원장에 이종우 씨 국전심사위원 위촉」 『동아일보』 1967920

「국전심사위원장 도상봉 씨 선출」 『경향신문』 1968919

「석우회(石友會)서 돌 전람회」 『동아일보』 1970428

「예술인에 훈장 이해랑 씨 등 9명」 『경향신문』 1972118

「외길 한평생 lt11gt 사진middot예술 이해선」 『선데이서울』 1973318

「현역 원로 작가 초대전 일제하의 침울이긴 예술자세 생생하게」 『경향신문』

1974831

「이해선 씨 작품전 향토풍물 50점 전시」 『동아일보』 19741118

「이해선 사진전」 『경향신문』 19741119

「이해선 사진 작품전 24일까지 신문회관」 『매일경제』 19741121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423

「국전운영위원 위촉」 『동아일보』 1976317

「국전사진부문 사단중진들 반발」 『동아일보』 1976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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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_______ 「고궁풍물(3)」 『포토그라피』 1971년 3월호

_______ 「고궁풍물(4)」 『포토그라피』 1971년 4월호

_______ 「고궁풍물(5)」 『포토그라피』 1971년 5월호

_______ 「고궁풍물(6)」 『포토그라피』 1971년 6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7)」 『포토그라피』 1971년 7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8)」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포토그라피 창간5주년에 붙여서」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9)」 『포토그라피』 1971년 9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0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1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2)」 『포토그라피』 1971년 12월호

「제2회 사진국전마감 심사위원결정」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이해선 「이해선 떡에 얽힌 시속(時俗)의 금석(今昔) 옛떡이 사라져 간다는데」

『월간 중앙』 1973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1)」 『포토그라피』 1973년 8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2)」 『포토그라피』 1973년 9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0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6)」 『포토그라피』 1974년 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7)」 『포토그라피』 1974년 3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8)」 『포토그라피』 1974년 4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9)」 『포토그라피』 1974년 5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끝)」 『포토그라피』 1974년 6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 『포토그라피』 1974년 7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2)」 『포토그라피』 1974년 8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3)」 『포토그라피』 1974년 9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4)」 『포토그라피』 1974년 10월호

_______ 「작가와 작품-풍물백태 중에서」 『포토그라피』 1974년 1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6)」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7)」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8)」 『포토그라피』 1975년 3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9)」 『포토그라피』 1975년 4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0)」 『포토그라피』 1975년 5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1)」 『포토그라피』 1975년 6월호

_______ 「곡필무사(曲筆誣事)를 밝힌다」 『월간 중앙』 1975년 11월호

「영상 창간 1주년 기념 좌담회 한국 사진 산업의 의 오늘과 내일」 『영상』 1976년 6월호

「국전 초대작가 8인선 김조현 이건중 이경모 이해선 임응식 이형록 정인선

조현두」 『영상』 1977년 1월호

「남기고 싶은 작품 3 이해선」 『영상』 1977년 5월호

「예술사진에 대한 견고한 확신 이해선 사진의 예술성」 『영상』 1978년 5월호

「한국현대미술대전」 『영상』 1978년 10월호

이명동 「처음 제정된 사진문화상에의 기대」 『영상』 1979년 2월호

「행사 백오 이해선 선생의 사진작품집 출판기념회」 『영상』 1981년 2월호

「작품집 소개 이해선 작품집 중에서」 『영상』 1981년 4월호

박재능 「다양한 자기 세계의 길」 『영상』 1981년 12월호

「영상방담-사단의 이 얘기 저 얘기 김정래 임석제」 『영상』 1982년 1월호

「이미지의 합창-봄의 첫 장」 『영상』 1982년 4월호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 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호

岩宮武二 「너 어디 있느냐」 『영상』 1983년 1월호

최인진 「1930년대의 아마츄어 사진활동」 『사진사연구』 통권 제5호 1983년 9월호

박재능 「월평-원로 이해선 선생을 추모한다」 『영상』 1983년 12월호

「한국 근대미술의 발자취」 『계간미술』 중앙일보사 1985년 봄호

「다시 보는 명작 정도선 정인선 신현국 강대환 김일창 이해선」 『영상』 1986년 10월호

「고 백오 이해선 선생 추모비 건립」 『영상』 1989년 1월호

「동경 유학생들의 한국 근대미술」 『월간미술』 1989년 9월호

「화보로 보는 한국 동경 유학생들의 자화상」 『미술세계』 1993년 5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조선총독부 관보』 제4087호(192647) 한국학문헌연구소 서울 아세아문화사 1926

이태현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1집 서

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2

_______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 자화상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3집 서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4

신명호 「일제하 이왕직과 이왕가 족보」 『한국학대학원논문집』 제11집 한국정신문화

연구소 1996

최인진 「한국사진 역사의 증인(4) - 사단의 단체 활동과 이해선」 『한국사진』 2002

이가라시 코이치 이중희 역 「조선미술전람회의 창설과 서화」 『한국근대미술사학』

제12집 한국근대미술사학회 2004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의 입학제도와 조선인 유학생」 『동악미술사』 제6호 2005

허보윤 「미술로서의 디자인 이순석의 1946-1959년 응용미술교육」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단행본

조우석 『한국사진가론』 눈빛 1998

작품집 도록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1926

이해선 『이해선 사진작품집』 평화당 1980

_______ 『한국의 고궁』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0

Tucker Anne Iizawa Kotaro Kinoshita Naoyuki The History of

Japanese Photography London YaleUniversityPress 2003

이해선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남은 1950-60년대』 눈빛 2005

_______ 『이해선 사진집 1950~1960년대 이야기』 동강사진박물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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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7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일간지

「부산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24531

「성공을 기대 조선사진연구회 현일영 씨 담」 『조선중앙일보』 1936826

「경성아마사진구락부 제1회전」 『조선일보』 1938417

「사진작품전」 『동아일보』 19381014

「경성사진동호회 작품전람회개최」 『조선일보』 19381027

「사진동호회작품전」 『동아일보』 1938112

「경성아마추어 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39527

「아마추어 사진인화전」 『매일신보』 19391115

「동서남북-lsquo아마추어rsquo 제4회 인화전람회」 『동아일보』 19391115

「동서남북-합동인화전」 『동아일보』 1940126

「아마추어 사진의 인화전」 『매일신보』 194074

「경성아마츄어 제5회 인화전」 『조선일보』 194075

「경성백양사우회 제1회 인화전람회 개최」 『매일신보』 19401113

「제2회 사진전 명일부터 화신에서-백양사우회」 『매일신보』 19411124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55

「사진작품전」 『조선일보』 1946119

「전국문화총연발족」 『동아일보』 194729

「제1회 조선사진예술전」 『경향신문』 19475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7510

「사진전람회개최」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전응모작 답지」 『경향신문』 1947615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 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629

「제1회예술사진전람회 15일부터 동화백화점」 『경향신문』 1947713

「예술사진 입선 수상식을 거행」 『경향신문』 1947720

「예술사진전 19일부터」 『동아일보』 1947121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8224

「사예(寫藝) 2회전 작품을 현상모집」 『경향신문』 19481013

「예술사진전 심사 오는 8일로 연기」 『동아일보』 1948127

「지방출품우수-제2회 예사전」 『동아일보』 19481212

「사진예술전 22일부터 동화화랑서」 『동아일보』 19481221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964

「전국종합사진전 심사결과-특선1석 최인집 씨」 『동아일보』 194977

「사진예술의 정화-제3회 전국예술사진전」 『경향신문』 19491010

「예술사진전 30일로 마감박도」 『경향신문』 19491128

「예술사진전 입선자 발표」 『경향신문』 19491213

「예술사진전시회」 『동아일보』 195316

「춘계사진섭영회 26일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3

「본사후원 춘계촬영대회 오늘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6

「사진현상모집」 『경향신문』 1953517

「특선에 lt만춘gt」 『경향신문』 1953527

「인화 당선자 수여식」 『경향신문』 1953529

「사진작품발표전」 『경향신문』 1954413

「예술사진전시회 US-S화랑서」 『동아일보』 1954415

「집회」 『동아일보』 1954916

「경복궁서 촬영대회」 『경향신문』 1954919

「내 26일 촬영대회 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4922

「사연 촬영대회 여감(餘感) 아마추어 사진도(寫眞道)」 『동아일보』 1954103

「문화집합」 『동아일보』 1955122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77

「사연(寫硏) 창립 10주년 기념 어제 촬영대회 성황」 『동아일보』 1955711

「촬영대회 입선작 결정」 『동아일보』 1955819

「8인 사진전 개최」 『동아일보』 1956329

「9회 사연(寫硏)전」 『동아일보』 1957414

「신록촬영대회 개최 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62

「대한사진예술가협회서 사진전시회 개최」 『동아일보』 1958711

「10년 후의 우리 문화 건국 20주년을 장식하고 싶은 것」 『동아일보』 1958821

「사진예술가협회 11회 회원작품전」 『동아일보』 195979

「문화 소식」 『동아일보』 1960119

「국전에 사진부문도」 『동아일보』 1963410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결정 특선 조천용 작」 『동아일보』 19641020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653

「렌즈의 향연 영예의 초점-제4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동아일보』 196667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61217

「사진예술가협회전」 『동아일보』 19681022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9830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996

「국립공보관 12월 전시회 스케쥴」 『경향신문』 1971126

「문화단신」 『경향신문』 19721128

「사진예술협 작품전 7일까지 공보관서」 『매일경제』 1973111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에 안준천 씨」 『경향신문』 197526

「동아포우스트」 『동아일보』 19751117

「사진예술가협회 창립30돌 기념전」 『경향신문』 19751118

「추계 친목 촬영대회」 『매일경제』 197610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7830

「사진예술가협 정총(定總) 31일 하오 대동관서」 『매일경제』 19781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81031

「문화광장」 『동아일보』 1993121

「한국사진예술 50년을 펼친다」 『한겨례』 1994111

「사진예술가협 사라진 풍물전」 『서울신문』 20051025

월간지 계간지

「사진클럽 지상소개 대한사협의 발자취」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박필호 「논단 대한사협16회전을 보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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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대한사협 16회전」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사협 16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8년 7월호

「대한사협 충남지부 회원전」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경축 창간 3주년 사진과 관광 포토그라피-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대한사협 18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제18회 대한사협전」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 작품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70년 3월호

「축 창간4주년 서울 선데이 카메라 클럽」 『포토그라피』 1970년 8월호

「축 포토그라피 창간 5주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김종양 씨 대한사협 고문 추대」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3년 3월호

「lt파도gt 김도현 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신춘초대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근하신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75년도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창작선」 『영상』 1977년 1월호

「전시장 순례 대한사진협회 회원전」 『영상』 1977년 11월호

「지상소개-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대한사협 제27회 정기총회 개최」 『영상』 1979년 7월호

박필호 「대한사협 27돐에 대한 축사」 『영상』 1979년 7월호

「제26회 대한사협전」 『영상』 1980년 1월호

「제27회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사진전시회」 『영상』 1980년 12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요강」 『영상』 1981년 5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영상』 1981년 10월호

「탐방-뜻이 있으면 길이 있게 마련 세 번째 전국대학사진 공모전을 연 대한사협충

남지회의 단합된 모습」 『영상』 1983년 1월호

「제3회 전국대학생사진 공모 제12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월호

「제13회 대한사협 충남 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2월호

최인진 「경성아마츄어카메라구락부를 말한다」 『사진사연구』 1984년 7월호

「대한사협본부 주최 제9회 한국국제사진전 입상자」 『영상』 1989년 1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대한민국예술원 편 『한국예술총감 자료편』 대한민국예술원 1965

한국사진협회 「사진계소식 1969년도」 『한국사진연감』 1970

_____________「한국사진협회의 연혁 1976년 10월 30일」 『한국사진연감』 1976

임범택 「사진」 『1977년도 문예연감』 1978

______ 「사진」 『1978년도 문예연감』 1979

한국사진협회 「역대역원명단(歷代役員名單) 1962년~1987년」 『한국사진연감』

1988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제1장 한국사진협회 창립 이전의 사진계 동향」 『한국사협

사 I 1945-1970』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01

최인진 「해방 초기의 사진잡지 연구-『국제보도』와 『사진문화』를 중심으로」 『한국

사진학회지 AURA』 제10호 2003

박혜성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사진문화』 목록 및 해제」 『한국 사진 잡지

『사진문화』 연구』 명지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한국사협 50년사』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13

단행본

임응식 『내가 걸어온 한국사단 임응식 회고록』 눈빛 1999

작품집 도록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제16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7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8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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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9

원 문 자 료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년 10월 29일 4면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년 4월 17일 4면

1 이해선 양화기(洋畵期) 관련 참고 자료

「입선자의 방명록」『매일신보』 1926년 5월 12일 3면

「금조 개장한 동미전 제2회」『동아일보』 1931년 4월 12일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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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참고 자료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년 5월 5일 2면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년 6월 29일 3면

「신록촬영대회개최-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년 6월 2일 4면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년 7월 7일 4면

예술사진전 조선사진예술연구회에서는 5월 6일부터 동11일까지의 6일간에 걸쳐 동화백화점(舊三越) 갸라리--에서 창립기념사진전을 개최하기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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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해선 관련 원문 자료

원문은 당시의 표기를 그대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현재의 띄어쓰기와 맞춤법에 맞지 않는 부분들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수정하였고 일부 [ ] 안에 병기했다 원문의 한자는 모두 한글 독음으로 고쳤으며 의미 전달을 위해 필요한 경우 ( )안에 병기했다

「대담 아마추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 pp 48~52

작가가 사태(沙汰)났어

본지 공사간에 바쁘실 텐데helliphellip 사진문화의 발전을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

해 주십사 하는 것은helliphellip 요즘 각 직장이나 학생들 간에 사진열이 굉장히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 비

추어서 이 아마추어 카메라맨의 지도 문제를 비롯하여 초보자의 진로랄까helliphellip 이런 문제에 대한 말

씀을 좀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해선6middot25 동란 후에 개인적으로 사진을 연구해 보겠다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직장이나 학교 단위로

사진동호자의 클럽이 많아 지고 작품 발표라던가 전시회 같은 것이 무척 많아졌는데helliphellip 어쨌든

일반 사회인이나 학생 간에 사진열이 높아졌다는 건 기쁜 일이야

임응식그런데 아직도 이 카메라를 사치품으로 취급하는 층이 많아서 곤란해요

이 나라(정부)에서부터 사치품 취급을 하더군helliphellip 여자들이 다이아몬드를 사려는 것과 사진을 연구하

려는 사람이 카메라 장만하는 것을 똑같이 취급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곤란

하지

임 헌데 우리 사단(寫壇)에선 우선 lsquo사진작가rsquo라는 용어를 쓰는 데에 신중을 기해야 하겠어요 웬 놈의

lsquo사진작가rsquo가 그리도 많은지helliphellip 이건 카메라만 메고 다니면 모두 작가 행세를 하니helliphellip

이 카메라 멘 것이 모두 lsquo작가rsquo라면 대한민국에 lsquo사진작가rsquo가 수 십만도 될 걸helliphellip 작가라는 친구들을

체에 넣어서 걸러 놓으면 엄격한 의미에서 진짜 lsquo작가rsquo는 몇 사람 밖에 없을 텐데helliphellip

임 호주머니에 만년필을 꽂았다고 해서 문학가 혹은 소설가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겠는데hellip

hellip 어쨌든 요즘 성행하는 사진작가의 사태를 우선 잡지에서 만이라도 용어 사용에 엄격한 규정을

지어서 질서를 잡아 주어야겠어요

이 그것도 과도기적 현상이겠으니까 차차 지양되겠지helliphellip 오늘 해달라는 얘기는 그런 넋두리가 아닐

테니까 어디 이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본지 한마디로 얘기하자면helliphellip 카메라는 어떻게 해서 장만을 했는데 mdash 자 그 다음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겐지 몰라서 어쩔 줄 모르는helliphellip 이런 아마추어와 초보자들의 진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얘기를

좀helliphellip 현재 직장 단위로 사진 동호자들이 모여서 클럽을 이룩한 것이 십 여 개 있고 학교 단위로는

이십 여 개나 되는데요helliphellip

관련 자료 소개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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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인식이 안이해서 탈이야

이 극히 초보적인 입장에서 사진을 해보고 싶다helliphellip 다년간 연구를 한 다음엔 작가가 돼 보겠다 mdash 하

는 사람들을 회원으로 해서 수 십 년 동안 연구를 해 왔는데helliphellip 오늘날 하고 있는 일도 그것이지만

helliphellip 여러 부문에 걸쳐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서적인 면에서 사진과 친해보고 싶다던가

또는 카메라를 장만했는데 어떻게 하면 앞으로 향상 발전할 수 있는가 mdash 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신인이라고 하겠지 특히 학생들의 교내 활동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helliphellip 헌데 막상 다다

르고 보면helliphellip 어떠한 길이 올바른 길인지 막연해 하는 모양이더군요

임 초보자들은 무엇보다도 사진 자체에 대한 정의를 뚜렷이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아마추어 mdash

하면 취미적 입장에서 사진을 다루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조각이나 회화와 같이 사진도 어엿한 예술이니

까 취미 도락(道樂)적인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예술을 추구하는 진지한 마음의 준비가 우선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물론이죠 대개 클럽 조직이 되어 있으니까 선생들의 지도를 받고 있겠지만 내가 알기에는 전문가

가 아닌 다시 말하면 취미 정도에서 관심이 있는 선생들이 지도를 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역시 전문으

로 사진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지도를 가끔씩이라도 받는 게 좋겠지요

임 지도를 한다는 사람들의 태도부터가 성실성이 없는 것 같아요 만년필을 샀으니까 나도 한 번 써 보

자 mdash 해서 작가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취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남의 lsquo지도rsquo를 담당

할 수는 없을 텐데 mdash 우리가 사진을 전공한대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억지로 지도해 주겠다고 밀고

들어 가겠다는 건 아니지만 mdash (웃음) mdash 어쨌든 전문가의 지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학생 클럽이나 직장 클럽 같은 동호자의 모임을 사단의 일부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취미

에서 시작했더라도 일정한 과정을 밟고 다년 연구를 거듭하면 자연히 작가를 지향하게 되겠지만hellip

hellip 그런 면에서도 처음 싹트기 시작하는 신인의 지도가 퍽 중요한 것이지요

취미middot도락이란 관념을 버려야 해

임 지금 형성되어 있다는 직장이나 학교 단체의 거의 전부가 전문적인 입장에 서 있지 않은 것 같더군

요helliphellip 사진에 대한 근본 의식이 너무도 안이한 것 같아요 카메라를 통한 표현의식에 절실한 감정

이 없어요helliphellip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비판을 받지 않는다helliphellip 하는 따위의 도피를 해서는 곤란

하죠helliphellip 창작의식이 확고하게 수립되지 않아서는 향상이 없는 것인데helliphellip 소문에 듣자면helliphellip 너

무 기술 면에만 치중하고 정신적인 면이 소홀히 취급된다는 거에요 helliphellip 나는 직장을 갖고 있으니

까 사진이란 것은 취미 정도로 한다 mdash 하는 태도를 버려야죠 특히 이 점은 지도자들에게 권하고 싶

은데helliphellip 예술의식helliphellip 이것이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절대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까

이 그렇구 말구요helliphellip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새로 사진을 공부하겠다는 신인들에게 네 가지 의식을 주

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휴머니즘 mdash 우선 사람이 돼야 하거든요 교양이라던가 인격 덕망helliphellip 이런 면에서 인간이

돼 있어야 하고 둘째는 사진예술을 한다고 해서 사진예술이 무엇이냐helliphellip 이것만을 추궁해서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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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요 좀 더 시야를 넓혀서 예술이라는 게 뭐냐 mdash 하는 걸 먼저 알아야지 셋째에 가서 사진예술이

라는 게 뭐냐 mdash 를 연구하고 넷째에 가서야 비로소 작품이라던가 창작의식 기교 기술에 대한 검

토를 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기본조건을 머리 속에 언제나 간직하도록 나는 주장해 왔어요

임 기술면을 등한히 할 수는 없겠지요 기술 없이는 표현이 안되니까helliphellip 그러나 이선생 말씀처럼 인

간본연의 문제도 크긴 큽니다 다른 예술부문의 사람보다 교양면에서 뒤떨어지지나 않는가 mdash 하는

것이 항상 염려되는데helliphellip 만일 뒤떨어진다면 큰일이지요 기술도 중요한 문제겠지만 교양인격 같

은 것도 예술가가로서의 긍지를 위해선 떨어질 수 없는 문제고helliphellip 더욱이 좋은 기술을 가졌으면서

도 기초교양이 모자라서 좋은 작품을 낼 수 없다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으니까helliphellip 교양인으로서의

자격도 다른 예술부문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사진을 해야할겝니다

이 기교나 기술을 어떻게 우물쭈물 배웠다고 해서 작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helliphellip 예술이란 그 자체

에 대한 조예부터 깊어야 합니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조리개가 얼마다 타임이 어

떻다helliphellip 암실작업은 어떻게 하는 거다helliphellip 이것만을 알았다고 해서 작가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에

요helliphellip 인간면 예술면 기술면에 똑 같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마 사진을 연구하겠다는 신

인들의 기본이념이 돼야 할겝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지도한다는 면에서

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거든요 mdash

임 어쨌든 기술을 위주로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난 옛날 얘기입니다

지도자 시비

이 지났다기 보다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는 장래에나 변할 수 없는 기본이념이겠지요 사진이라는 것

은 더욱이나 고도의 대중성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인격과 교양이 필요해요 기계라는 거야 찍으면

사진이 되도록 마련된 것이니까 예술까지는 못 가도 사진은 되거든 mdash 그러니까 그것을 예술로 이

끌려면 찍는 사람의 성분이 문제되는 것이지요helliphellip

임 그런 의미에서도 사단의 규정이 필요하고 작가라는 규정이 필요해요 사단이라는 것에 너무 엄격한

규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helliphellip 만년필을 가졌다고 해서 전부 문학가가 아니라면helliphellip 카메라를 메었

으니 작가다 mdash 하는 엉터리도 용납될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우선 필요한 것은 취미 도락이라는 관념

을 지양해야 할 텐데helliphellip

이 취미가 차차 심각해지면 창작의식도 생기는게니까helliphellip 그런 사람들을 지도 계몽해서 한 사람이라

도 작가로 이끌어야 하겠지요helliphellip 카메라를 살 때부터 나는 사진작가가 되겠다 mdash 하는 사람은 있

을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임 lsquo싼데이rsquo 카메라맨은 논의의 대상이 안되구요helliphellip (웃음)

이 그러니까 지도자들이 작가적인 태도에 확고한 이념을 앞세우고 지도에 임해야 하는 건데helliphellip

본지 각 단체 지도층의 지도방침에 대한 구체적인 태도를 어떻게 규정하겠습니까 helliphellip

임 우선 사진에 대한 인식부터 고쳐야 해요 말이 중복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친구 좋고 사진 좋아서 우리

끼리 하면 그만이다 mdash 하는 생각들이 많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만이라도 그렇지 않다

관련 자료 소개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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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싶어요 학생들이 카메라를 사 가지고 몇 사람 모였으니까 책임자 격

인 선생이 필요하다 mdash 해서 책임 맡았다는 사람으로는 지도가 안 될 게 아닙니까 그렇다고 청해 오

지도 않는데 내정 격으로 뛰어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구helliphellip (웃음)

본지 또 한 가지 요즘 일대 성황을 이루는 것이 소위 현상사진(懸賞寫眞)이라는 건데요helliphellip 이 현상사진

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진에 대한 모욕도 있지helliphellip

임 거 참 꼴사나운 일이 많아요 현상이란 걸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helliphellip 그 하나는 어느 연구

단체에서 순수한 의미에서 발표 바탕이 없는 아마추어를 위해 마련하는 경우가 있을게고 또 하나는

선전용으로 포스터 mdash 같은 데에 써먹기 위한 상업 정책적인 의식에서 모집하는 현상이 있을 테지요

이 어느 경우이건 간에 좌우간 현상 모집을 하는 목적이 있는데helliphellip 응모자는 우선 현상의 목적부터 확

실히 알고 응모를 해야 하겠지helliphellip

임 그렇죠 그런데 이 상업 정책적인 현상의 경우에는 사진문화에 대한 모욕적인 행동이 퍽 많습니다

이거 참 불유쾌한 일이지만helliphellip 가령 예를 들자면 응모자는 원판을 제공하라던가 또 낙선자의 작

품은 일체 반환치 않는다는 따위helliphellip이게 얼마나 사진예술에 대한 모욕적 행위입니까 helliphellip

이 그래요helliphellip 확실히 모순된 일입니다

임 필요에 의해서 현상모집을 했으니까 당선된 작품은 물론 필요하겠지만helliphellip 낙선작품을 반환치 않는

다는 것은 언어도단 입니다 낙선이 됐다 해도 작가의 입장으론 대단히 귀중한 하나의 작품일 텐데

그걸 안 돌려 준대서야 말이 되나요 주최측은 낙선작품의 원화를 돌려 줄만한 성의를 가져야 도리

에 맞을 텐데helliphellip 요즘 현실은 lsquo낙선rsquo이란 푸대접 밑에 원판까지 몰수당하는 판국이니helliphellip 원 참

이 그러니까 응모자는 무엇보다도 현상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지helliphellip 여러 번 겪은 일이지만 심사를

하다 보면 전혀 현상 취지를 도외시한 작품들이 있는데helliphellip

임 그거야 보나마나 낙선이죠 (웃음)

이 그러믄요 현상 응모자로서는 출품 규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 아니겠어요

임 그럼요

이 그런데 어떤 것은 작품에 제목도 없는 것이 있거든요 그런가 하면 제목과 작품내용이 전혀 특이한

엉터리도 있구helliphellip

임 저도 여러 번 겪은 일입니다

이 제목이란 것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벌써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찍는다는 의식이 있는 이상

제목도 정해져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아주 작품과 제목이 동떨어진 것들이 응모해 오니까

낙선의 자격이 충분할 수밖에helliphellip 하하하 (웃음)

임 그게 모두 사진에 대한 성의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이 그래요 성의가 없어요 자기 작품에 대해선 최선의 성의를 다 해야 할 텐데 그런 태도가 없거든helliphellip

제목을 안 썼는지 못 썼는지는 모르지만helliphel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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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그저 무턱대고 발표의식만 왕성한 까닭이 아닐까요

이 그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된 작가가 아닌 이상 발표기회가 좀처럼 없을 테니까

자기 실력의 평가를 받는다던가 남들과 경쟁해 본다는 의미에서 현상에 자주 응모하는 것은 좋은데

helliphellip 아 어떤 친구는 자기 실력 생각은 하지도 않고 상품이 적다 많다 시비를 하는 친구도 있으니 참

기가 막힐 일이지

주최자의 무성의도 고쳐져야 하고

임 그건 lsquo현상rsquo이라고 내거는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순수한 사진연구단체에서 모집할 때는

lsquo공모전rsquo이라던가 하는 문구가 좋지 않을까요 lsquo현상rsquo이라니까 lsquo상rsquo을 바라게도 되겠지만 어쨌든

lsquo현상rsquo이란 말 자체가 순수하지 못해요

이 그건 확실히 생각해 볼 문제이겠군요helliphellip 순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helliphellip 응모자들이 심

사원이 누구냐mdash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도 순수하지 못하고helliphellip 또 주최자가 모집광고를 낼 때

lsquo심사원은 추후발표rsquo라mdash하는 것도 순수하지 못해요 이것도 참 불쾌한 일인데 lsquo추후발표rsquo라는 걸

다시 생각하면 lsquo준비가 안됐다rsquo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심사원의 준비도 안 해 놓고 현상을 모

집하는 그런 무성의가 또 어디 있어helliphellip 이건 일종의 사기가 아니면 거만일 겝니다

임 그나 그뿐인가요 lsquo심사원은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함rsquohelliphellip 하는 모호한 광고도 있지요 응모자의 입

장에서 생각하면helliphellip 심사원에 불만이 있으면 응모를 아니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 심사원 문제만

은 정정당당히 명시해야만 나중에 가서 심사에 대한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출품을 한 다음에 심사

원이 발표된다는 것은 심사에 대한 불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helliphellip

이 그리고 응모자의 동태를 가만히 보면 아까 얘기가 나왔던 소위 lsquo취미정도rsquo라는 층의 발표 의욕이 굉

장해서 대부분의 응모자가 이 부류인 것 같은데helliphellip 여기 한 가지 탈이 있어요 현상응모 작품의 심

사라는 것은 무제한의 심사 레벨을 놓고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응모 작품 중에서의 우수 작품을 가

려낸다는 것은 이거 상식 문제가 아닙니다

임 그렇죠

이 아 그런데 어떻게 해서 현상에 당선이 되거나 특히 특선이라도 하면 그만 자기가 갑자기 위대한

작가라도 된 것처럼 대가연(大家然) 하고 으쓱대는 친구들이 많아서 걱정이야helliphellip (웃음)

이 lsquo특선rsquo이라는 것은 응모해 온 작품들 중에서 특선이지 결코 한국 사단 전체의 수준에서 특선이라

는 것은 아닌데helliphellip 그만 한 번만 당선되면 코가 높아지고 대뜸 대가 행세를 하려고 드니helliphellip 참

신인들은 특히 조심해야 할 일이지

남의 것보고hellip 우리 것도 보내고hellip

본지 이제 화제를 좀 바꾸어서 세계사단의 동향을 좀 말씀해 주실까요

임 세계사단의 얘기라면 직접 보아야만 얘기가 될 텐데helliphellip

이 서울 바닥에서 썩으면서 세계사단의 얘기를 어떻게 본 듯이 할 수가 있겠나 카메라를 메고 세계일

관련 자료 소개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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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도 했어야 얘기가 되지

임 그것보다도 사진을 통한 국제 교류 얘기나 합시다

이 그게 좋겠군helliphellip 얼마 전에 덕수궁에서 자유중국의 소개사진전시가 있었죠 미국공보원의 활동도

이를 테면 국제교류의 한 형식일게고helliphellip

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자유중국과 월남의 사진전시가 있었는데helliphellip 우리도 수출을 한다면 그 보

다 훨씬 좋은 작품들이 나갈걸요helliphellip

이 한미합동전이던가 한중합동전 같은 것도 하면 역시 국제교류가 되겠지요helliphellip

임 한미합동전은 불원한 장래에 개최될 것입니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lsquo인간일가(人間一家)rsquo의 사진

이 아마 이월쯤 한국에 올 겝니다 미국대사관이 주동이 돼서 작품 503점 전부의 전시회 계획이 추

진되고 있으니까요

이 남이 보내줘서 본 것은 있지만 우리가 남에게 보여준 것은 없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야 우리도 남에

게 보여줘야 교류가 될 텐데helliphellip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두 사람의 작품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임 개인적인 활동은 있었지요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사진살롱에 사진을 보내고 있으니까 개인

적으로는 더러 나간 셈이죠 개인들의 수출이라도 좀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지만

이 우리의 것을 내보내고 외국 것을 들여와서 서로 감상하고 연구하는 게 이를 테면 국제교류인데

아마 명년쯤엔 될까 몰라

임 작품교환전 같은 것을 위해서 대대적인 계몽운동이 필요 하겠죠

이 그렇죠 운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어요

임 그런데 근본적인 얘기를 하자면 한국 작가의 역량이 아직도 부족한 것 같아요 언젠가 외국 작가에

게서 들은 말인데mdash한국 사람은 한국을 보지 않았다mdash하는 얘길 해요 사진 작가에게 대한 말이지

만helliphellip 나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이 퍽 중요한 얘기다mdash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를 직시하는 것만이

사진은 아니겠지만 실용사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것이 사실 아닐까요 회화적인 쌀롱 픽처라던

가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리얼리즘 사진이라는 것에 너무들 치우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 국제 교류의 시발은 역시 소개적(紹介的)인 것 다시 말해서 르포르타주적인 것이겠으니까helliphellip

임 외국 작품의 모방 같은 것은 이제 집어치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mdash예술적인 것 이것만을 너무 추

구했기 때문에 사실이 한국적인 것과 국민성의 묘사 같은 것이 잘 되지 않았지요 정서적인 것에만

너무 골몰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일이고 helliphellip 예술을 위한 예술에 정신들이 팔려 있었지나 않은

지helliphellip 예술을 하기 위한 사진이라는 관념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이 예술을 염두에 안 둔다면 실용사진이 돼 버리게

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너무 치우친 것 같단 말입니다

이 특히 국제 교류를 생각한다면 아닌 게 아니라 외국처럼 르포르타주적인 사진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할거에요

임 그래요 거기에 예술성을 띄워서 소화할 만한 역량 있는 작가가 필요해요

이 또 하나의 가장 큰 문제는 위정자의 관심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 큰 난관입니다 국제 교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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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가족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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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말이고 역시 정부당국자의 적극적인 주

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어디 그래요

임 우선 사단 자체의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작가들의 작업도 촉구되어야 하구helliphellip 아까도 말이 나왔지

만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 출품을 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점 같은데서 작가들의 반성도 필

요하고helliphellip

이 개별적으로 미국 등지에 보낸 것은 아마 상당한 수가 되겠지요

임 그럼요 그랬는데 왜 성과가 없느냐mdash하는 반성이 있어야죠

이 오늘의 현실을 예술적인 면에서 기록하고 작품화 해야겠는데helliphellip 막연하게 예술을 위한 작품을 보

내니까 기교적으론 훌륭할지 몰라도 작품 자체에 내용이 없어서helliphellip 그래서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닐

임 그런 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빨리 우리의 수준을 높여서 국제 조류와 호흡을 맞추어 나가

야 할 것입니다

이 이거 아마추어를 위한 얘기라는 것이 잠깐 탈선을 한 것 같군 그러나 이런 문제도 참고가 되긴 하니

까helliphellip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합시다

본지 수고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helliphellip

(기록 O기자)

이해선 「lsquo백오(白烏)rsquo의 변(辯)」 『동아일보』 1957년 4월 9일 4면

30여년 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입학

이 되었을 당시 자축기념하는 의미에서 호(號)를

하나 지어본 것이 백오(白烏)라는 두 글자였다 처

음 듣는 사람들 중에서는 거문[검은] 까마귀는 있

지만 흰 까마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서로 웃어버리고 그 뜻을

설명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자의

(字意)를 해명해볼까 한다 백(白)은 흰 빛이요 오

(烏)는 흑색으로 통하므로 우선 흑백을 대조시켜

놓고 흰 종이 위에다 검은 먹으로 휘호(揮毫)할 것

이니 그 뜻이 내 생활과 부합될 것 같으며 둘째로

백 자(字)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첫 자를 떼어놓

고 오는 반포오(反哺烏)로 그 이름이 높은 새이므

로 평소에 효자 노릇을 못하여 온 나의 좌우명으로도 적당할 듯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새 중에서는

혹간(或間) 백변종(白變種)이 생겨나는 수가 있는데 그 흰새를 서조(瑞鳥)라고 떠들던 옛 시절도 있었으므

관련 자료 소개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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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내가 우연히 호를 지어 본 것이 검은 까마귀떼 속에서 서조 백오를 발견하였으니 나의 전도(前途)에는

반드시 서광(瑞光)이 비칠 것 같으므로 이상 여러 가지 의미를 차례로 생각해 볼 때에 나에게는 이 외에 더

좋은 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자의였었고 궁금한채로 불려온 백오

였었다 만담궁변(漫談窮辯)을 물소물책(勿笑勿責) 하소서 (사진가)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

이해선 「중요한 내용middot형식-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년 10월 20일 5면

사진작품에는 사진 특유의 형식이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러한 특유의 형식에 알맞은 표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의 특수성은 형식이 가지는 특수성 보다는

기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주관적이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작품심사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동일하게 중요시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작

품 속에서 그야말로 형식과 내용이 알맞게 부합된 특출한 작

품을 볼 수는 없었다 형식이 좋으면 내용이 빈약하고 좀 내

용이 있으면 형식이 미숙하고helliphellip 모두 결점이 있다 그러나

입상작으로 뽑은 8 점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

다 그리고 금년에는 lsquo칼러rsquo사진의 응모 점수가 30점이나 되

고 그중에서도 3점이 입상되었고 또 9점이 입선되었다는 것

은 lsquo칼러rsquo 사진의 앞날을 위해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lt전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장gt

[제1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년 2월 8일 5면

외국작품의 세련되고 빈틈없는 lsquo테크닉rsquo은 국내작품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서 우선 국내

작품을 형식에서부터 누르고 말았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이루게 된 것은 국내작가들

의 역량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lsquo국산인화지rsquo가 얼마나 엉터리고 조악한 것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대체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더욱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은 이와 반대적인 경향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예술이든 먼저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볼 때 국내작품의 후진성은

두말할 것 없이 형식의 경시에 있다고 하겠다 심사결과 흑백부에서나 lsquo칼라rsquo부에서 겨우 동상으로 한 점

씩 밖에 국내작품이 입상되지 못했다는 것은 다소 섭섭한 느낌이나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경종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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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더욱 우리 심사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독에서 응모한 lsquo칼라rsquo

작품이었다 물체의 외관 색감을 초월한 내면의 lsquo이미지rsquo가 발

산하는 짙은 감정의 색감으로 작가의 개성과 사상을 인상 깊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내 lsquo칼라라보rsquo의 후진

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상작으로 뽑힌 외국작품들은 오

늘의 세계 사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는 큰 자극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

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제2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총 818점 응모-사진예술에 도움」

『동아일보』 1967년 2월 9일 4면

지난해와 같이 흑백부문에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들은 모두가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산인화지의 조악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작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올해는 흑백

부문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기꺼운 일이라고

하겠다

특히 칼라작품에 있어서는 독일의 작품들이 특출했고 이들 작품들의 색감은 현대 과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 최고상으로 뽑힌 lt잊은 친구gt와 몇 점의 입상작품들은 칼라릴리프와 소라리

세이숀[솔라리제이션] 등의 수법으로써 모티

브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를 초객체적이고 추

상적으로 표현하고 작가의 짙은 개성과 사상

과 철학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입상작으로 뽑은 16점의 작품들은 오늘의

세계사단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

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심사위원 이해선 (위원장) 임응식 서순삼

박필호 안월산 정인성 최경덕 (이상 7명)

관련 자료 소개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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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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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관련 자료 소개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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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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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관련 자료 소개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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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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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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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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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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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관련 자료 소개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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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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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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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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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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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3: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자료 소개 153

김 완 기(金莞祁 1944~ )

1962 충주고등학교 졸업

1964 청주교육대학교 졸업

1969 《제1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입선

1977~1991 KBSEBS방송 출연 15년

1989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교육학 석사)

1990~1999 《대한민국사진전림회》 8회 입선

1993~1999 청영회 회장 역임

1997 《제16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 특선

1998 교육부 초등교육정책과장 역임

1999~2013 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 3회 역임

1999~2014 《전국사진공모전》 심사위원 70회 역임

2002 강남구사진작가회 창립회원 및 회장 역임

2003 서울성북교육청 교육장 역임

2004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초대작가

《서울특별시사진대전》 초대작가

《제1회 김완기사진전》 세종문화회관별관 광화문갤러리

2004~2008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 역임

2005 2013 제24회 제31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 심사위원 역임

2005~2007 서울특별시사진작가협의회 초대 회장 역임

2006 『김완기사진집』 출판 창조집단 시빌구

《제2회 김완기사진전》 세종문화회관별관 광화문갤러리

2008~2014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조정위원

2011 《서울특별시사진대전》 운영위원 역임

2011~2014 APC뉴스(한국예술사진인연합회) 회장

2013 김완기 자서전 『분필과 셔터로 그린 자화상』 출판 하얀나무

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고문

강남구사진작가회 자문위원

서울특별시사진작가협의회 고문

청영회 고문

한국사진작가협회 자문위원

구 술 자 연 보

안장헌(安章憲 1947~ )

1969 2 고려대학교 농업경제학과 졸업

1966~2014 고려대학교 호영회 창립회원 호영동우회 회장역임 및 회원

1968~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원 이사(1973~1992) 회장(1993~1995) 현 자문

1973~1975 동화출판공사 『한국미술전집』 사진담당

1976~1977 월간 『영상』 편집장

1977~1979 현암사 『한국미술오천년』 기획 및 편집책임

1979~1995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 3회 역임 현 자문위원

1980~2005 호영문화사 편집인

1981~1992 신구대 사진과 강사

1984~1987 서울교육대학 미술교육과 객원교수(사진학)

1990~1994 롯데문화센터 사진교실 강사

1994~1998 삼성사진문화교실 전임강사

1995~2014 한국불교사진협회 고문

1995~2014 (사)신라문화원 이사 현 자문위원

2000~2014 경주 계림사우회 지도교수

2004~2009 동강사진마을 운영위원

2005~2014 문화유산사진연구소 소장

2009 봉은사진교실(봉은사) 강사

2010~2014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 안장헌디지털사진교실 지도교수

그룹전

1966~2014 고려대학교 호영회 호영동우회 회원전 80여점 출품

1968~2014 대한사진예술가협회전(17~60회전) 70여점 출품

1990 《사진가 8인전》 후지포토살롱

1994 《한국현대사진의 흐름전》 〈산사일기〉 출품

1996 《Image ofKoreanCultual Heritage》 UNESCO본부 파리

1997 《Buddist Images ofKorea》 독일 함부르그

1997~1998 《서울사진대전》 〈낙선재 일곽〉 〈금원에서〉 출품

1997~2014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전 19점 출품

1998~1999 《경기도사진작가초대전》 출품

1999 《한일사진교류전~자연과 인간을 향하여》 출품

2001 《아름다운 우리 문화재 4인전》 국립진주박물관

2004 《한국다큐멘터리사진 33인전》 동강사진축전

개인전

1996 《서라벌 빛 그리고 향기》 서라벌문화회관

2002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신라문화원 화랑

2003 《세계문화유산과 경북》 경주문화EXPO솔거방

2007 《왕릉의 호랑이》 동강사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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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창호》 인사동 갤러리 북스

2010 《돌 호랑이 그림 호랑이》 인사동 갤러리 북스

2012 《선비의 고향 서원》 인제대 도서관 김학수기념박물관

주요 사진저작

1982 『석불』 호영

1989 『석굴암』 예경

1991 『경주 남산의 탑골』 열화당

1992 『선의 세계』 호영

1993 『영겁의 미소』 불광

1994 『신라의 동해구』 열화당

1996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삼성문화재단

1998 『서원』 열화당

2002 『신라의 마음 경주』 한길아트

『남산』 한길아트

2003 『돌에 새긴 정토의 꿈~석불』 한길아트

『석조미술의 꽃~석가탑과 다보탑』 한길아트

『사진으로 보는 한국미~무늬』 호영

2005 『BUDDHA~Bildnisse ausStein inKorea』 ErnstWasmuthVerlog

Tubingen 독일 베를린

2006 『범종~생명의 소리를 담은 장엄』 한길아트

저서

1987 『국립공원』 김성옥 문순화 송기엽 안장헌 공저 호영)

1995 『사진으로 배우는 사진촬영교실』 호영

2001 『아름다운 우리문화재』 관조 김대벽 한석홍 안장헌 공저 국립진주박물관

2003 『문화유산 일기』 진선출판사

수상

1977 《백오사진상》 작품상 수상(대한사진예술가협회)

1999 『서원』으로 《간행물윤리상》 저작상 수상(간행물윤리위원회)

2006 《한국사진문화상》 공로상 수상(한국사진작가협회)

2007 《이해선사진문화상》 수상(대한사진예술가협회)

2011 《대한민국문화유산상(대통령상)》 봉사활용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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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5

참 고 문 헌 목 록

「봄 국전심사에 물의 사진 심사위원에 시비」 『동아일보』 1977421

「봄 국전 심사 낙수(落穗)」 『경향신문』 1977425

「현대사진문화상 이해선 씨 뽑아」 『동아일보』 19781128

「사진문화-사협고문 이해선 씨 작품집 발간」 『매일경제』 19801129

「사진 50년 역사를 한 눈에」 『매일경제』 1981120

「사진작가 이해선 작품집 두 권 내놔」 『동아일보』 1981629

「부고-원로 사진작가 이해선 씨」 『동아일보』 1983111

「일화로 엮는 명암 100년 화단이면사( ) (27) 화가와 문인과 신식 여성」

『경향신문』 198554

「이해선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사진전」 『연합뉴스』 20051026

「lt단신gt 백오 선생 탄신 100돌 사진전」 『문화일보』 20051031

「사진예술가협회 창립 60주년 기념전」 『매일신문』 20051117

「문화의 향기-전시」 『부산일보』 200615

「백오 이해선 선생 미발표유작 사진전」 『부산일보』 200617

「[전북][광주전남][제주][대전충남]문화가」 『동아일보』 2006120

「영월 동강사진박물관-이해선 특별기획전 2007년 3월 첫 주까지」 『뉴시스』

20061227

「사진과 친해지려면 옛 서울역사로 가보세요」 『헤럴드경제』 201041

월간지 계간지

김용준 「서화협전의 의미」 『삼천리』 1931년 11월호

「lt부감(俯瞰)gt(이해선 작)gt」 『사진문화』 1956년 6월호

「아마츄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호

연성숙 「일제 한인귀족의 근황」 『진상(眞相)』 1960년 3월호

「창간사 이해선 씨」 『포토그라피』 1966년 8월호

「나의 발언」 『포토그라피』 1966년 8월호

「작가 지상초빙작가-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달의 작품사진 제주풍물-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해선 「해외 예술사진 감상실 (1회)」 『포토그라피』 1968년 4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6) 석가탄일」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7)」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제1회 새한사진콘테스트」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8) 동해진미」 『포토그라피』 1969년 9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9) 야채밭」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0) 건제(乾梯)」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제18회 국전 소식」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1) 초설(初雪)」 『포토그라피』 1969년 12월호

이해선 「돌과의 대화 30년」 『월간 중앙』 1969년 12월호

「초대작가 사진」 『포토그라피』 1970년 9월호

이해선 「고궁풍물(1)」 『포토그라피』 1971년 1월호

_______ 「고궁풍물(2)」 『포토그라피』 1971년 2월호

이해선 관련

일간지

「입선자의 방명록」 『매일신보』 1926512

이태준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1029

「금조개장한 동미전 제2회」 『동아일보』 1931412

홍득순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417

「인사(人事)」 『매일신보』 193886

이해선 「예술사진의 연혁과 개념」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동인전」 『경향신문』 19491115

「인사(人事)」 『경향신문』 1953110

이해선 「등하수상(燈下隨想)」 『동아일보』 19551112

_______ 「사진예술의 독자성」 『동아일보』 1956126

_______ 「사진 8인전 소감」 『경향신문』 195647

_______ 「백오(白烏)의 변(辯)」 『동아일보』 195749

「김포공항에 내린 덕혜옹주-이해선 씨가 부축하고 있다」 『경향신문』 1962126

「5월 예술상에 붙이는 제언」 『경향신문』 196231

「2명이 사퇴 사진부문심위원」 『경향신문』 1964109

「영예의 산실 안팎」 『동아일보』 19641013

「횡설수설-국전 사진부 이해선 심사위원 사퇴」 『동아일보』 19641014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중요한 내용middot형식 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1020

「열띤 감정으로 충만-창협 창립 사진전」 『동아일보』 1965119

「한국국제사진살롱 위원 명단」 『동아일보』 1965116

「동아국제사진살롱 심사평-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28

「제4회 사진동우회전」 『동아일보』 1966121

「동아사진살롱 심사평-총 801 응모」 『동아일보』 196729

「위원장에 이종우 씨 국전심사위원 위촉」 『동아일보』 1967920

「국전심사위원장 도상봉 씨 선출」 『경향신문』 1968919

「석우회(石友會)서 돌 전람회」 『동아일보』 1970428

「예술인에 훈장 이해랑 씨 등 9명」 『경향신문』 1972118

「외길 한평생 lt11gt 사진middot예술 이해선」 『선데이서울』 1973318

「현역 원로 작가 초대전 일제하의 침울이긴 예술자세 생생하게」 『경향신문』

1974831

「이해선 씨 작품전 향토풍물 50점 전시」 『동아일보』 19741118

「이해선 사진전」 『경향신문』 19741119

「이해선 사진 작품전 24일까지 신문회관」 『매일경제』 19741121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423

「국전운영위원 위촉」 『동아일보』 1976317

「국전사진부문 사단중진들 반발」 『동아일보』 1976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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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_______ 「고궁풍물(3)」 『포토그라피』 1971년 3월호

_______ 「고궁풍물(4)」 『포토그라피』 1971년 4월호

_______ 「고궁풍물(5)」 『포토그라피』 1971년 5월호

_______ 「고궁풍물(6)」 『포토그라피』 1971년 6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7)」 『포토그라피』 1971년 7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8)」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포토그라피 창간5주년에 붙여서」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9)」 『포토그라피』 1971년 9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0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1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2)」 『포토그라피』 1971년 12월호

「제2회 사진국전마감 심사위원결정」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이해선 「이해선 떡에 얽힌 시속(時俗)의 금석(今昔) 옛떡이 사라져 간다는데」

『월간 중앙』 1973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1)」 『포토그라피』 1973년 8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2)」 『포토그라피』 1973년 9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0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6)」 『포토그라피』 1974년 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7)」 『포토그라피』 1974년 3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8)」 『포토그라피』 1974년 4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9)」 『포토그라피』 1974년 5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끝)」 『포토그라피』 1974년 6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 『포토그라피』 1974년 7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2)」 『포토그라피』 1974년 8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3)」 『포토그라피』 1974년 9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4)」 『포토그라피』 1974년 10월호

_______ 「작가와 작품-풍물백태 중에서」 『포토그라피』 1974년 1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6)」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7)」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8)」 『포토그라피』 1975년 3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9)」 『포토그라피』 1975년 4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0)」 『포토그라피』 1975년 5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1)」 『포토그라피』 1975년 6월호

_______ 「곡필무사(曲筆誣事)를 밝힌다」 『월간 중앙』 1975년 11월호

「영상 창간 1주년 기념 좌담회 한국 사진 산업의 의 오늘과 내일」 『영상』 1976년 6월호

「국전 초대작가 8인선 김조현 이건중 이경모 이해선 임응식 이형록 정인선

조현두」 『영상』 1977년 1월호

「남기고 싶은 작품 3 이해선」 『영상』 1977년 5월호

「예술사진에 대한 견고한 확신 이해선 사진의 예술성」 『영상』 1978년 5월호

「한국현대미술대전」 『영상』 1978년 10월호

이명동 「처음 제정된 사진문화상에의 기대」 『영상』 1979년 2월호

「행사 백오 이해선 선생의 사진작품집 출판기념회」 『영상』 1981년 2월호

「작품집 소개 이해선 작품집 중에서」 『영상』 1981년 4월호

박재능 「다양한 자기 세계의 길」 『영상』 1981년 12월호

「영상방담-사단의 이 얘기 저 얘기 김정래 임석제」 『영상』 1982년 1월호

「이미지의 합창-봄의 첫 장」 『영상』 1982년 4월호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 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호

岩宮武二 「너 어디 있느냐」 『영상』 1983년 1월호

최인진 「1930년대의 아마츄어 사진활동」 『사진사연구』 통권 제5호 1983년 9월호

박재능 「월평-원로 이해선 선생을 추모한다」 『영상』 1983년 12월호

「한국 근대미술의 발자취」 『계간미술』 중앙일보사 1985년 봄호

「다시 보는 명작 정도선 정인선 신현국 강대환 김일창 이해선」 『영상』 1986년 10월호

「고 백오 이해선 선생 추모비 건립」 『영상』 1989년 1월호

「동경 유학생들의 한국 근대미술」 『월간미술』 1989년 9월호

「화보로 보는 한국 동경 유학생들의 자화상」 『미술세계』 1993년 5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조선총독부 관보』 제4087호(192647) 한국학문헌연구소 서울 아세아문화사 1926

이태현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1집 서

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2

_______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 자화상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3집 서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4

신명호 「일제하 이왕직과 이왕가 족보」 『한국학대학원논문집』 제11집 한국정신문화

연구소 1996

최인진 「한국사진 역사의 증인(4) - 사단의 단체 활동과 이해선」 『한국사진』 2002

이가라시 코이치 이중희 역 「조선미술전람회의 창설과 서화」 『한국근대미술사학』

제12집 한국근대미술사학회 2004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의 입학제도와 조선인 유학생」 『동악미술사』 제6호 2005

허보윤 「미술로서의 디자인 이순석의 1946-1959년 응용미술교육」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단행본

조우석 『한국사진가론』 눈빛 1998

작품집 도록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1926

이해선 『이해선 사진작품집』 평화당 1980

_______ 『한국의 고궁』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0

Tucker Anne Iizawa Kotaro Kinoshita Naoyuki The History of

Japanese Photography London YaleUniversityPress 2003

이해선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남은 1950-60년대』 눈빛 2005

_______ 『이해선 사진집 1950~1960년대 이야기』 동강사진박물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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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7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일간지

「부산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24531

「성공을 기대 조선사진연구회 현일영 씨 담」 『조선중앙일보』 1936826

「경성아마사진구락부 제1회전」 『조선일보』 1938417

「사진작품전」 『동아일보』 19381014

「경성사진동호회 작품전람회개최」 『조선일보』 19381027

「사진동호회작품전」 『동아일보』 1938112

「경성아마추어 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39527

「아마추어 사진인화전」 『매일신보』 19391115

「동서남북-lsquo아마추어rsquo 제4회 인화전람회」 『동아일보』 19391115

「동서남북-합동인화전」 『동아일보』 1940126

「아마추어 사진의 인화전」 『매일신보』 194074

「경성아마츄어 제5회 인화전」 『조선일보』 194075

「경성백양사우회 제1회 인화전람회 개최」 『매일신보』 19401113

「제2회 사진전 명일부터 화신에서-백양사우회」 『매일신보』 19411124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55

「사진작품전」 『조선일보』 1946119

「전국문화총연발족」 『동아일보』 194729

「제1회 조선사진예술전」 『경향신문』 19475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7510

「사진전람회개최」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전응모작 답지」 『경향신문』 1947615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 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629

「제1회예술사진전람회 15일부터 동화백화점」 『경향신문』 1947713

「예술사진 입선 수상식을 거행」 『경향신문』 1947720

「예술사진전 19일부터」 『동아일보』 1947121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8224

「사예(寫藝) 2회전 작품을 현상모집」 『경향신문』 19481013

「예술사진전 심사 오는 8일로 연기」 『동아일보』 1948127

「지방출품우수-제2회 예사전」 『동아일보』 19481212

「사진예술전 22일부터 동화화랑서」 『동아일보』 19481221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964

「전국종합사진전 심사결과-특선1석 최인집 씨」 『동아일보』 194977

「사진예술의 정화-제3회 전국예술사진전」 『경향신문』 19491010

「예술사진전 30일로 마감박도」 『경향신문』 19491128

「예술사진전 입선자 발표」 『경향신문』 19491213

「예술사진전시회」 『동아일보』 195316

「춘계사진섭영회 26일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3

「본사후원 춘계촬영대회 오늘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6

「사진현상모집」 『경향신문』 1953517

「특선에 lt만춘gt」 『경향신문』 1953527

「인화 당선자 수여식」 『경향신문』 1953529

「사진작품발표전」 『경향신문』 1954413

「예술사진전시회 US-S화랑서」 『동아일보』 1954415

「집회」 『동아일보』 1954916

「경복궁서 촬영대회」 『경향신문』 1954919

「내 26일 촬영대회 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4922

「사연 촬영대회 여감(餘感) 아마추어 사진도(寫眞道)」 『동아일보』 1954103

「문화집합」 『동아일보』 1955122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77

「사연(寫硏) 창립 10주년 기념 어제 촬영대회 성황」 『동아일보』 1955711

「촬영대회 입선작 결정」 『동아일보』 1955819

「8인 사진전 개최」 『동아일보』 1956329

「9회 사연(寫硏)전」 『동아일보』 1957414

「신록촬영대회 개최 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62

「대한사진예술가협회서 사진전시회 개최」 『동아일보』 1958711

「10년 후의 우리 문화 건국 20주년을 장식하고 싶은 것」 『동아일보』 1958821

「사진예술가협회 11회 회원작품전」 『동아일보』 195979

「문화 소식」 『동아일보』 1960119

「국전에 사진부문도」 『동아일보』 1963410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결정 특선 조천용 작」 『동아일보』 19641020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653

「렌즈의 향연 영예의 초점-제4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동아일보』 196667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61217

「사진예술가협회전」 『동아일보』 19681022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9830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996

「국립공보관 12월 전시회 스케쥴」 『경향신문』 1971126

「문화단신」 『경향신문』 19721128

「사진예술협 작품전 7일까지 공보관서」 『매일경제』 1973111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에 안준천 씨」 『경향신문』 197526

「동아포우스트」 『동아일보』 19751117

「사진예술가협회 창립30돌 기념전」 『경향신문』 19751118

「추계 친목 촬영대회」 『매일경제』 197610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7830

「사진예술가협 정총(定總) 31일 하오 대동관서」 『매일경제』 19781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81031

「문화광장」 『동아일보』 1993121

「한국사진예술 50년을 펼친다」 『한겨례』 1994111

「사진예술가협 사라진 풍물전」 『서울신문』 20051025

월간지 계간지

「사진클럽 지상소개 대한사협의 발자취」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박필호 「논단 대한사협16회전을 보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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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대한사협 16회전」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사협 16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8년 7월호

「대한사협 충남지부 회원전」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경축 창간 3주년 사진과 관광 포토그라피-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대한사협 18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제18회 대한사협전」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 작품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70년 3월호

「축 창간4주년 서울 선데이 카메라 클럽」 『포토그라피』 1970년 8월호

「축 포토그라피 창간 5주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김종양 씨 대한사협 고문 추대」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3년 3월호

「lt파도gt 김도현 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신춘초대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근하신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75년도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창작선」 『영상』 1977년 1월호

「전시장 순례 대한사진협회 회원전」 『영상』 1977년 11월호

「지상소개-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대한사협 제27회 정기총회 개최」 『영상』 1979년 7월호

박필호 「대한사협 27돐에 대한 축사」 『영상』 1979년 7월호

「제26회 대한사협전」 『영상』 1980년 1월호

「제27회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사진전시회」 『영상』 1980년 12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요강」 『영상』 1981년 5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영상』 1981년 10월호

「탐방-뜻이 있으면 길이 있게 마련 세 번째 전국대학사진 공모전을 연 대한사협충

남지회의 단합된 모습」 『영상』 1983년 1월호

「제3회 전국대학생사진 공모 제12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월호

「제13회 대한사협 충남 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2월호

최인진 「경성아마츄어카메라구락부를 말한다」 『사진사연구』 1984년 7월호

「대한사협본부 주최 제9회 한국국제사진전 입상자」 『영상』 1989년 1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대한민국예술원 편 『한국예술총감 자료편』 대한민국예술원 1965

한국사진협회 「사진계소식 1969년도」 『한국사진연감』 1970

_____________「한국사진협회의 연혁 1976년 10월 30일」 『한국사진연감』 1976

임범택 「사진」 『1977년도 문예연감』 1978

______ 「사진」 『1978년도 문예연감』 1979

한국사진협회 「역대역원명단(歷代役員名單) 1962년~1987년」 『한국사진연감』

1988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제1장 한국사진협회 창립 이전의 사진계 동향」 『한국사협

사 I 1945-1970』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01

최인진 「해방 초기의 사진잡지 연구-『국제보도』와 『사진문화』를 중심으로」 『한국

사진학회지 AURA』 제10호 2003

박혜성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사진문화』 목록 및 해제」 『한국 사진 잡지

『사진문화』 연구』 명지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한국사협 50년사』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13

단행본

임응식 『내가 걸어온 한국사단 임응식 회고록』 눈빛 1999

작품집 도록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제16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7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8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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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9

원 문 자 료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년 10월 29일 4면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년 4월 17일 4면

1 이해선 양화기(洋畵期) 관련 참고 자료

「입선자의 방명록」『매일신보』 1926년 5월 12일 3면

「금조 개장한 동미전 제2회」『동아일보』 1931년 4월 12일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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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참고 자료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년 5월 5일 2면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년 6월 29일 3면

「신록촬영대회개최-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년 6월 2일 4면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년 7월 7일 4면

예술사진전 조선사진예술연구회에서는 5월 6일부터 동11일까지의 6일간에 걸쳐 동화백화점(舊三越) 갸라리--에서 창립기념사진전을 개최하기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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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해선 관련 원문 자료

원문은 당시의 표기를 그대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현재의 띄어쓰기와 맞춤법에 맞지 않는 부분들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수정하였고 일부 [ ] 안에 병기했다 원문의 한자는 모두 한글 독음으로 고쳤으며 의미 전달을 위해 필요한 경우 ( )안에 병기했다

「대담 아마추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 pp 48~52

작가가 사태(沙汰)났어

본지 공사간에 바쁘실 텐데helliphellip 사진문화의 발전을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

해 주십사 하는 것은helliphellip 요즘 각 직장이나 학생들 간에 사진열이 굉장히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 비

추어서 이 아마추어 카메라맨의 지도 문제를 비롯하여 초보자의 진로랄까helliphellip 이런 문제에 대한 말

씀을 좀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해선6middot25 동란 후에 개인적으로 사진을 연구해 보겠다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직장이나 학교 단위로

사진동호자의 클럽이 많아 지고 작품 발표라던가 전시회 같은 것이 무척 많아졌는데helliphellip 어쨌든

일반 사회인이나 학생 간에 사진열이 높아졌다는 건 기쁜 일이야

임응식그런데 아직도 이 카메라를 사치품으로 취급하는 층이 많아서 곤란해요

이 나라(정부)에서부터 사치품 취급을 하더군helliphellip 여자들이 다이아몬드를 사려는 것과 사진을 연구하

려는 사람이 카메라 장만하는 것을 똑같이 취급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곤란

하지

임 헌데 우리 사단(寫壇)에선 우선 lsquo사진작가rsquo라는 용어를 쓰는 데에 신중을 기해야 하겠어요 웬 놈의

lsquo사진작가rsquo가 그리도 많은지helliphellip 이건 카메라만 메고 다니면 모두 작가 행세를 하니helliphellip

이 카메라 멘 것이 모두 lsquo작가rsquo라면 대한민국에 lsquo사진작가rsquo가 수 십만도 될 걸helliphellip 작가라는 친구들을

체에 넣어서 걸러 놓으면 엄격한 의미에서 진짜 lsquo작가rsquo는 몇 사람 밖에 없을 텐데helliphellip

임 호주머니에 만년필을 꽂았다고 해서 문학가 혹은 소설가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겠는데hellip

hellip 어쨌든 요즘 성행하는 사진작가의 사태를 우선 잡지에서 만이라도 용어 사용에 엄격한 규정을

지어서 질서를 잡아 주어야겠어요

이 그것도 과도기적 현상이겠으니까 차차 지양되겠지helliphellip 오늘 해달라는 얘기는 그런 넋두리가 아닐

테니까 어디 이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본지 한마디로 얘기하자면helliphellip 카메라는 어떻게 해서 장만을 했는데 mdash 자 그 다음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겐지 몰라서 어쩔 줄 모르는helliphellip 이런 아마추어와 초보자들의 진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얘기를

좀helliphellip 현재 직장 단위로 사진 동호자들이 모여서 클럽을 이룩한 것이 십 여 개 있고 학교 단위로는

이십 여 개나 되는데요helliphellip

관련 자료 소개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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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인식이 안이해서 탈이야

이 극히 초보적인 입장에서 사진을 해보고 싶다helliphellip 다년간 연구를 한 다음엔 작가가 돼 보겠다 mdash 하

는 사람들을 회원으로 해서 수 십 년 동안 연구를 해 왔는데helliphellip 오늘날 하고 있는 일도 그것이지만

helliphellip 여러 부문에 걸쳐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서적인 면에서 사진과 친해보고 싶다던가

또는 카메라를 장만했는데 어떻게 하면 앞으로 향상 발전할 수 있는가 mdash 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신인이라고 하겠지 특히 학생들의 교내 활동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helliphellip 헌데 막상 다다

르고 보면helliphellip 어떠한 길이 올바른 길인지 막연해 하는 모양이더군요

임 초보자들은 무엇보다도 사진 자체에 대한 정의를 뚜렷이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아마추어 mdash

하면 취미적 입장에서 사진을 다루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조각이나 회화와 같이 사진도 어엿한 예술이니

까 취미 도락(道樂)적인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예술을 추구하는 진지한 마음의 준비가 우선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물론이죠 대개 클럽 조직이 되어 있으니까 선생들의 지도를 받고 있겠지만 내가 알기에는 전문가

가 아닌 다시 말하면 취미 정도에서 관심이 있는 선생들이 지도를 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역시 전문으

로 사진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지도를 가끔씩이라도 받는 게 좋겠지요

임 지도를 한다는 사람들의 태도부터가 성실성이 없는 것 같아요 만년필을 샀으니까 나도 한 번 써 보

자 mdash 해서 작가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취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남의 lsquo지도rsquo를 담당

할 수는 없을 텐데 mdash 우리가 사진을 전공한대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억지로 지도해 주겠다고 밀고

들어 가겠다는 건 아니지만 mdash (웃음) mdash 어쨌든 전문가의 지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학생 클럽이나 직장 클럽 같은 동호자의 모임을 사단의 일부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취미

에서 시작했더라도 일정한 과정을 밟고 다년 연구를 거듭하면 자연히 작가를 지향하게 되겠지만hellip

hellip 그런 면에서도 처음 싹트기 시작하는 신인의 지도가 퍽 중요한 것이지요

취미middot도락이란 관념을 버려야 해

임 지금 형성되어 있다는 직장이나 학교 단체의 거의 전부가 전문적인 입장에 서 있지 않은 것 같더군

요helliphellip 사진에 대한 근본 의식이 너무도 안이한 것 같아요 카메라를 통한 표현의식에 절실한 감정

이 없어요helliphellip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비판을 받지 않는다helliphellip 하는 따위의 도피를 해서는 곤란

하죠helliphellip 창작의식이 확고하게 수립되지 않아서는 향상이 없는 것인데helliphellip 소문에 듣자면helliphellip 너

무 기술 면에만 치중하고 정신적인 면이 소홀히 취급된다는 거에요 helliphellip 나는 직장을 갖고 있으니

까 사진이란 것은 취미 정도로 한다 mdash 하는 태도를 버려야죠 특히 이 점은 지도자들에게 권하고 싶

은데helliphellip 예술의식helliphellip 이것이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절대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까

이 그렇구 말구요helliphellip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새로 사진을 공부하겠다는 신인들에게 네 가지 의식을 주

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휴머니즘 mdash 우선 사람이 돼야 하거든요 교양이라던가 인격 덕망helliphellip 이런 면에서 인간이

돼 있어야 하고 둘째는 사진예술을 한다고 해서 사진예술이 무엇이냐helliphellip 이것만을 추궁해서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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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요 좀 더 시야를 넓혀서 예술이라는 게 뭐냐 mdash 하는 걸 먼저 알아야지 셋째에 가서 사진예술이

라는 게 뭐냐 mdash 를 연구하고 넷째에 가서야 비로소 작품이라던가 창작의식 기교 기술에 대한 검

토를 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기본조건을 머리 속에 언제나 간직하도록 나는 주장해 왔어요

임 기술면을 등한히 할 수는 없겠지요 기술 없이는 표현이 안되니까helliphellip 그러나 이선생 말씀처럼 인

간본연의 문제도 크긴 큽니다 다른 예술부문의 사람보다 교양면에서 뒤떨어지지나 않는가 mdash 하는

것이 항상 염려되는데helliphellip 만일 뒤떨어진다면 큰일이지요 기술도 중요한 문제겠지만 교양인격 같

은 것도 예술가가로서의 긍지를 위해선 떨어질 수 없는 문제고helliphellip 더욱이 좋은 기술을 가졌으면서

도 기초교양이 모자라서 좋은 작품을 낼 수 없다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으니까helliphellip 교양인으로서의

자격도 다른 예술부문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사진을 해야할겝니다

이 기교나 기술을 어떻게 우물쭈물 배웠다고 해서 작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helliphellip 예술이란 그 자체

에 대한 조예부터 깊어야 합니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조리개가 얼마다 타임이 어

떻다helliphellip 암실작업은 어떻게 하는 거다helliphellip 이것만을 알았다고 해서 작가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에

요helliphellip 인간면 예술면 기술면에 똑 같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마 사진을 연구하겠다는 신

인들의 기본이념이 돼야 할겝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지도한다는 면에서

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거든요 mdash

임 어쨌든 기술을 위주로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난 옛날 얘기입니다

지도자 시비

이 지났다기 보다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는 장래에나 변할 수 없는 기본이념이겠지요 사진이라는 것

은 더욱이나 고도의 대중성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인격과 교양이 필요해요 기계라는 거야 찍으면

사진이 되도록 마련된 것이니까 예술까지는 못 가도 사진은 되거든 mdash 그러니까 그것을 예술로 이

끌려면 찍는 사람의 성분이 문제되는 것이지요helliphellip

임 그런 의미에서도 사단의 규정이 필요하고 작가라는 규정이 필요해요 사단이라는 것에 너무 엄격한

규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helliphellip 만년필을 가졌다고 해서 전부 문학가가 아니라면helliphellip 카메라를 메었

으니 작가다 mdash 하는 엉터리도 용납될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우선 필요한 것은 취미 도락이라는 관념

을 지양해야 할 텐데helliphellip

이 취미가 차차 심각해지면 창작의식도 생기는게니까helliphellip 그런 사람들을 지도 계몽해서 한 사람이라

도 작가로 이끌어야 하겠지요helliphellip 카메라를 살 때부터 나는 사진작가가 되겠다 mdash 하는 사람은 있

을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임 lsquo싼데이rsquo 카메라맨은 논의의 대상이 안되구요helliphellip (웃음)

이 그러니까 지도자들이 작가적인 태도에 확고한 이념을 앞세우고 지도에 임해야 하는 건데helliphellip

본지 각 단체 지도층의 지도방침에 대한 구체적인 태도를 어떻게 규정하겠습니까 helliphellip

임 우선 사진에 대한 인식부터 고쳐야 해요 말이 중복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친구 좋고 사진 좋아서 우리

끼리 하면 그만이다 mdash 하는 생각들이 많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만이라도 그렇지 않다

관련 자료 소개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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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싶어요 학생들이 카메라를 사 가지고 몇 사람 모였으니까 책임자 격

인 선생이 필요하다 mdash 해서 책임 맡았다는 사람으로는 지도가 안 될 게 아닙니까 그렇다고 청해 오

지도 않는데 내정 격으로 뛰어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구helliphellip (웃음)

본지 또 한 가지 요즘 일대 성황을 이루는 것이 소위 현상사진(懸賞寫眞)이라는 건데요helliphellip 이 현상사진

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진에 대한 모욕도 있지helliphellip

임 거 참 꼴사나운 일이 많아요 현상이란 걸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helliphellip 그 하나는 어느 연구

단체에서 순수한 의미에서 발표 바탕이 없는 아마추어를 위해 마련하는 경우가 있을게고 또 하나는

선전용으로 포스터 mdash 같은 데에 써먹기 위한 상업 정책적인 의식에서 모집하는 현상이 있을 테지요

이 어느 경우이건 간에 좌우간 현상 모집을 하는 목적이 있는데helliphellip 응모자는 우선 현상의 목적부터 확

실히 알고 응모를 해야 하겠지helliphellip

임 그렇죠 그런데 이 상업 정책적인 현상의 경우에는 사진문화에 대한 모욕적인 행동이 퍽 많습니다

이거 참 불유쾌한 일이지만helliphellip 가령 예를 들자면 응모자는 원판을 제공하라던가 또 낙선자의 작

품은 일체 반환치 않는다는 따위helliphellip이게 얼마나 사진예술에 대한 모욕적 행위입니까 helliphellip

이 그래요helliphellip 확실히 모순된 일입니다

임 필요에 의해서 현상모집을 했으니까 당선된 작품은 물론 필요하겠지만helliphellip 낙선작품을 반환치 않는

다는 것은 언어도단 입니다 낙선이 됐다 해도 작가의 입장으론 대단히 귀중한 하나의 작품일 텐데

그걸 안 돌려 준대서야 말이 되나요 주최측은 낙선작품의 원화를 돌려 줄만한 성의를 가져야 도리

에 맞을 텐데helliphellip 요즘 현실은 lsquo낙선rsquo이란 푸대접 밑에 원판까지 몰수당하는 판국이니helliphellip 원 참

이 그러니까 응모자는 무엇보다도 현상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지helliphellip 여러 번 겪은 일이지만 심사를

하다 보면 전혀 현상 취지를 도외시한 작품들이 있는데helliphellip

임 그거야 보나마나 낙선이죠 (웃음)

이 그러믄요 현상 응모자로서는 출품 규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 아니겠어요

임 그럼요

이 그런데 어떤 것은 작품에 제목도 없는 것이 있거든요 그런가 하면 제목과 작품내용이 전혀 특이한

엉터리도 있구helliphellip

임 저도 여러 번 겪은 일입니다

이 제목이란 것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벌써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찍는다는 의식이 있는 이상

제목도 정해져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아주 작품과 제목이 동떨어진 것들이 응모해 오니까

낙선의 자격이 충분할 수밖에helliphellip 하하하 (웃음)

임 그게 모두 사진에 대한 성의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이 그래요 성의가 없어요 자기 작품에 대해선 최선의 성의를 다 해야 할 텐데 그런 태도가 없거든helliphellip

제목을 안 썼는지 못 썼는지는 모르지만helliphel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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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그저 무턱대고 발표의식만 왕성한 까닭이 아닐까요

이 그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된 작가가 아닌 이상 발표기회가 좀처럼 없을 테니까

자기 실력의 평가를 받는다던가 남들과 경쟁해 본다는 의미에서 현상에 자주 응모하는 것은 좋은데

helliphellip 아 어떤 친구는 자기 실력 생각은 하지도 않고 상품이 적다 많다 시비를 하는 친구도 있으니 참

기가 막힐 일이지

주최자의 무성의도 고쳐져야 하고

임 그건 lsquo현상rsquo이라고 내거는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순수한 사진연구단체에서 모집할 때는

lsquo공모전rsquo이라던가 하는 문구가 좋지 않을까요 lsquo현상rsquo이라니까 lsquo상rsquo을 바라게도 되겠지만 어쨌든

lsquo현상rsquo이란 말 자체가 순수하지 못해요

이 그건 확실히 생각해 볼 문제이겠군요helliphellip 순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helliphellip 응모자들이 심

사원이 누구냐mdash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도 순수하지 못하고helliphellip 또 주최자가 모집광고를 낼 때

lsquo심사원은 추후발표rsquo라mdash하는 것도 순수하지 못해요 이것도 참 불쾌한 일인데 lsquo추후발표rsquo라는 걸

다시 생각하면 lsquo준비가 안됐다rsquo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심사원의 준비도 안 해 놓고 현상을 모

집하는 그런 무성의가 또 어디 있어helliphellip 이건 일종의 사기가 아니면 거만일 겝니다

임 그나 그뿐인가요 lsquo심사원은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함rsquohelliphellip 하는 모호한 광고도 있지요 응모자의 입

장에서 생각하면helliphellip 심사원에 불만이 있으면 응모를 아니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 심사원 문제만

은 정정당당히 명시해야만 나중에 가서 심사에 대한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출품을 한 다음에 심사

원이 발표된다는 것은 심사에 대한 불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helliphellip

이 그리고 응모자의 동태를 가만히 보면 아까 얘기가 나왔던 소위 lsquo취미정도rsquo라는 층의 발표 의욕이 굉

장해서 대부분의 응모자가 이 부류인 것 같은데helliphellip 여기 한 가지 탈이 있어요 현상응모 작품의 심

사라는 것은 무제한의 심사 레벨을 놓고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응모 작품 중에서의 우수 작품을 가

려낸다는 것은 이거 상식 문제가 아닙니다

임 그렇죠

이 아 그런데 어떻게 해서 현상에 당선이 되거나 특히 특선이라도 하면 그만 자기가 갑자기 위대한

작가라도 된 것처럼 대가연(大家然) 하고 으쓱대는 친구들이 많아서 걱정이야helliphellip (웃음)

이 lsquo특선rsquo이라는 것은 응모해 온 작품들 중에서 특선이지 결코 한국 사단 전체의 수준에서 특선이라

는 것은 아닌데helliphellip 그만 한 번만 당선되면 코가 높아지고 대뜸 대가 행세를 하려고 드니helliphellip 참

신인들은 특히 조심해야 할 일이지

남의 것보고hellip 우리 것도 보내고hellip

본지 이제 화제를 좀 바꾸어서 세계사단의 동향을 좀 말씀해 주실까요

임 세계사단의 얘기라면 직접 보아야만 얘기가 될 텐데helliphellip

이 서울 바닥에서 썩으면서 세계사단의 얘기를 어떻게 본 듯이 할 수가 있겠나 카메라를 메고 세계일

관련 자료 소개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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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도 했어야 얘기가 되지

임 그것보다도 사진을 통한 국제 교류 얘기나 합시다

이 그게 좋겠군helliphellip 얼마 전에 덕수궁에서 자유중국의 소개사진전시가 있었죠 미국공보원의 활동도

이를 테면 국제교류의 한 형식일게고helliphellip

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자유중국과 월남의 사진전시가 있었는데helliphellip 우리도 수출을 한다면 그 보

다 훨씬 좋은 작품들이 나갈걸요helliphellip

이 한미합동전이던가 한중합동전 같은 것도 하면 역시 국제교류가 되겠지요helliphellip

임 한미합동전은 불원한 장래에 개최될 것입니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lsquo인간일가(人間一家)rsquo의 사진

이 아마 이월쯤 한국에 올 겝니다 미국대사관이 주동이 돼서 작품 503점 전부의 전시회 계획이 추

진되고 있으니까요

이 남이 보내줘서 본 것은 있지만 우리가 남에게 보여준 것은 없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야 우리도 남에

게 보여줘야 교류가 될 텐데helliphellip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두 사람의 작품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임 개인적인 활동은 있었지요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사진살롱에 사진을 보내고 있으니까 개인

적으로는 더러 나간 셈이죠 개인들의 수출이라도 좀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지만

이 우리의 것을 내보내고 외국 것을 들여와서 서로 감상하고 연구하는 게 이를 테면 국제교류인데

아마 명년쯤엔 될까 몰라

임 작품교환전 같은 것을 위해서 대대적인 계몽운동이 필요 하겠죠

이 그렇죠 운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어요

임 그런데 근본적인 얘기를 하자면 한국 작가의 역량이 아직도 부족한 것 같아요 언젠가 외국 작가에

게서 들은 말인데mdash한국 사람은 한국을 보지 않았다mdash하는 얘길 해요 사진 작가에게 대한 말이지

만helliphellip 나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이 퍽 중요한 얘기다mdash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를 직시하는 것만이

사진은 아니겠지만 실용사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것이 사실 아닐까요 회화적인 쌀롱 픽처라던

가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리얼리즘 사진이라는 것에 너무들 치우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 국제 교류의 시발은 역시 소개적(紹介的)인 것 다시 말해서 르포르타주적인 것이겠으니까helliphellip

임 외국 작품의 모방 같은 것은 이제 집어치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mdash예술적인 것 이것만을 너무 추

구했기 때문에 사실이 한국적인 것과 국민성의 묘사 같은 것이 잘 되지 않았지요 정서적인 것에만

너무 골몰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일이고 helliphellip 예술을 위한 예술에 정신들이 팔려 있었지나 않은

지helliphellip 예술을 하기 위한 사진이라는 관념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이 예술을 염두에 안 둔다면 실용사진이 돼 버리게

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너무 치우친 것 같단 말입니다

이 특히 국제 교류를 생각한다면 아닌 게 아니라 외국처럼 르포르타주적인 사진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할거에요

임 그래요 거기에 예술성을 띄워서 소화할 만한 역량 있는 작가가 필요해요

이 또 하나의 가장 큰 문제는 위정자의 관심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 큰 난관입니다 국제 교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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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가족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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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말이고 역시 정부당국자의 적극적인 주

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어디 그래요

임 우선 사단 자체의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작가들의 작업도 촉구되어야 하구helliphellip 아까도 말이 나왔지

만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 출품을 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점 같은데서 작가들의 반성도 필

요하고helliphellip

이 개별적으로 미국 등지에 보낸 것은 아마 상당한 수가 되겠지요

임 그럼요 그랬는데 왜 성과가 없느냐mdash하는 반성이 있어야죠

이 오늘의 현실을 예술적인 면에서 기록하고 작품화 해야겠는데helliphellip 막연하게 예술을 위한 작품을 보

내니까 기교적으론 훌륭할지 몰라도 작품 자체에 내용이 없어서helliphellip 그래서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닐

임 그런 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빨리 우리의 수준을 높여서 국제 조류와 호흡을 맞추어 나가

야 할 것입니다

이 이거 아마추어를 위한 얘기라는 것이 잠깐 탈선을 한 것 같군 그러나 이런 문제도 참고가 되긴 하니

까helliphellip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합시다

본지 수고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helliphellip

(기록 O기자)

이해선 「lsquo백오(白烏)rsquo의 변(辯)」 『동아일보』 1957년 4월 9일 4면

30여년 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입학

이 되었을 당시 자축기념하는 의미에서 호(號)를

하나 지어본 것이 백오(白烏)라는 두 글자였다 처

음 듣는 사람들 중에서는 거문[검은] 까마귀는 있

지만 흰 까마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서로 웃어버리고 그 뜻을

설명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자의

(字意)를 해명해볼까 한다 백(白)은 흰 빛이요 오

(烏)는 흑색으로 통하므로 우선 흑백을 대조시켜

놓고 흰 종이 위에다 검은 먹으로 휘호(揮毫)할 것

이니 그 뜻이 내 생활과 부합될 것 같으며 둘째로

백 자(字)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첫 자를 떼어놓

고 오는 반포오(反哺烏)로 그 이름이 높은 새이므

로 평소에 효자 노릇을 못하여 온 나의 좌우명으로도 적당할 듯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새 중에서는

혹간(或間) 백변종(白變種)이 생겨나는 수가 있는데 그 흰새를 서조(瑞鳥)라고 떠들던 옛 시절도 있었으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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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내가 우연히 호를 지어 본 것이 검은 까마귀떼 속에서 서조 백오를 발견하였으니 나의 전도(前途)에는

반드시 서광(瑞光)이 비칠 것 같으므로 이상 여러 가지 의미를 차례로 생각해 볼 때에 나에게는 이 외에 더

좋은 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자의였었고 궁금한채로 불려온 백오

였었다 만담궁변(漫談窮辯)을 물소물책(勿笑勿責) 하소서 (사진가)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

이해선 「중요한 내용middot형식-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년 10월 20일 5면

사진작품에는 사진 특유의 형식이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러한 특유의 형식에 알맞은 표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의 특수성은 형식이 가지는 특수성 보다는

기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주관적이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작품심사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동일하게 중요시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작

품 속에서 그야말로 형식과 내용이 알맞게 부합된 특출한 작

품을 볼 수는 없었다 형식이 좋으면 내용이 빈약하고 좀 내

용이 있으면 형식이 미숙하고helliphellip 모두 결점이 있다 그러나

입상작으로 뽑은 8 점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

다 그리고 금년에는 lsquo칼러rsquo사진의 응모 점수가 30점이나 되

고 그중에서도 3점이 입상되었고 또 9점이 입선되었다는 것

은 lsquo칼러rsquo 사진의 앞날을 위해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lt전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장gt

[제1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년 2월 8일 5면

외국작품의 세련되고 빈틈없는 lsquo테크닉rsquo은 국내작품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서 우선 국내

작품을 형식에서부터 누르고 말았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이루게 된 것은 국내작가들

의 역량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lsquo국산인화지rsquo가 얼마나 엉터리고 조악한 것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대체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더욱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은 이와 반대적인 경향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예술이든 먼저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볼 때 국내작품의 후진성은

두말할 것 없이 형식의 경시에 있다고 하겠다 심사결과 흑백부에서나 lsquo칼라rsquo부에서 겨우 동상으로 한 점

씩 밖에 국내작품이 입상되지 못했다는 것은 다소 섭섭한 느낌이나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경종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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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더욱 우리 심사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독에서 응모한 lsquo칼라rsquo

작품이었다 물체의 외관 색감을 초월한 내면의 lsquo이미지rsquo가 발

산하는 짙은 감정의 색감으로 작가의 개성과 사상을 인상 깊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내 lsquo칼라라보rsquo의 후진

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상작으로 뽑힌 외국작품들은 오

늘의 세계 사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는 큰 자극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

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제2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총 818점 응모-사진예술에 도움」

『동아일보』 1967년 2월 9일 4면

지난해와 같이 흑백부문에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들은 모두가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산인화지의 조악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작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올해는 흑백

부문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기꺼운 일이라고

하겠다

특히 칼라작품에 있어서는 독일의 작품들이 특출했고 이들 작품들의 색감은 현대 과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 최고상으로 뽑힌 lt잊은 친구gt와 몇 점의 입상작품들은 칼라릴리프와 소라리

세이숀[솔라리제이션] 등의 수법으로써 모티

브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를 초객체적이고 추

상적으로 표현하고 작가의 짙은 개성과 사상

과 철학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입상작으로 뽑은 16점의 작품들은 오늘의

세계사단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

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심사위원 이해선 (위원장) 임응식 서순삼

박필호 안월산 정인성 최경덕 (이상 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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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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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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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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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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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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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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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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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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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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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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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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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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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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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4: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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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창호》 인사동 갤러리 북스

2010 《돌 호랑이 그림 호랑이》 인사동 갤러리 북스

2012 《선비의 고향 서원》 인제대 도서관 김학수기념박물관

주요 사진저작

1982 『석불』 호영

1989 『석굴암』 예경

1991 『경주 남산의 탑골』 열화당

1992 『선의 세계』 호영

1993 『영겁의 미소』 불광

1994 『신라의 동해구』 열화당

1996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삼성문화재단

1998 『서원』 열화당

2002 『신라의 마음 경주』 한길아트

『남산』 한길아트

2003 『돌에 새긴 정토의 꿈~석불』 한길아트

『석조미술의 꽃~석가탑과 다보탑』 한길아트

『사진으로 보는 한국미~무늬』 호영

2005 『BUDDHA~Bildnisse ausStein inKorea』 ErnstWasmuthVerlog

Tubingen 독일 베를린

2006 『범종~생명의 소리를 담은 장엄』 한길아트

저서

1987 『국립공원』 김성옥 문순화 송기엽 안장헌 공저 호영)

1995 『사진으로 배우는 사진촬영교실』 호영

2001 『아름다운 우리문화재』 관조 김대벽 한석홍 안장헌 공저 국립진주박물관

2003 『문화유산 일기』 진선출판사

수상

1977 《백오사진상》 작품상 수상(대한사진예술가협회)

1999 『서원』으로 《간행물윤리상》 저작상 수상(간행물윤리위원회)

2006 《한국사진문화상》 공로상 수상(한국사진작가협회)

2007 《이해선사진문화상》 수상(대한사진예술가협회)

2011 《대한민국문화유산상(대통령상)》 봉사활용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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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고 문 헌 목 록

「봄 국전심사에 물의 사진 심사위원에 시비」 『동아일보』 1977421

「봄 국전 심사 낙수(落穗)」 『경향신문』 1977425

「현대사진문화상 이해선 씨 뽑아」 『동아일보』 19781128

「사진문화-사협고문 이해선 씨 작품집 발간」 『매일경제』 19801129

「사진 50년 역사를 한 눈에」 『매일경제』 1981120

「사진작가 이해선 작품집 두 권 내놔」 『동아일보』 1981629

「부고-원로 사진작가 이해선 씨」 『동아일보』 1983111

「일화로 엮는 명암 100년 화단이면사( ) (27) 화가와 문인과 신식 여성」

『경향신문』 198554

「이해선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사진전」 『연합뉴스』 20051026

「lt단신gt 백오 선생 탄신 100돌 사진전」 『문화일보』 20051031

「사진예술가협회 창립 60주년 기념전」 『매일신문』 20051117

「문화의 향기-전시」 『부산일보』 200615

「백오 이해선 선생 미발표유작 사진전」 『부산일보』 200617

「[전북][광주전남][제주][대전충남]문화가」 『동아일보』 2006120

「영월 동강사진박물관-이해선 특별기획전 2007년 3월 첫 주까지」 『뉴시스』

20061227

「사진과 친해지려면 옛 서울역사로 가보세요」 『헤럴드경제』 201041

월간지 계간지

김용준 「서화협전의 의미」 『삼천리』 1931년 11월호

「lt부감(俯瞰)gt(이해선 작)gt」 『사진문화』 1956년 6월호

「아마츄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호

연성숙 「일제 한인귀족의 근황」 『진상(眞相)』 1960년 3월호

「창간사 이해선 씨」 『포토그라피』 1966년 8월호

「나의 발언」 『포토그라피』 1966년 8월호

「작가 지상초빙작가-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달의 작품사진 제주풍물-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해선 「해외 예술사진 감상실 (1회)」 『포토그라피』 1968년 4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6) 석가탄일」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7)」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제1회 새한사진콘테스트」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8) 동해진미」 『포토그라피』 1969년 9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9) 야채밭」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0) 건제(乾梯)」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제18회 국전 소식」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1) 초설(初雪)」 『포토그라피』 1969년 12월호

이해선 「돌과의 대화 30년」 『월간 중앙』 1969년 12월호

「초대작가 사진」 『포토그라피』 1970년 9월호

이해선 「고궁풍물(1)」 『포토그라피』 1971년 1월호

_______ 「고궁풍물(2)」 『포토그라피』 1971년 2월호

이해선 관련

일간지

「입선자의 방명록」 『매일신보』 1926512

이태준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1029

「금조개장한 동미전 제2회」 『동아일보』 1931412

홍득순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417

「인사(人事)」 『매일신보』 193886

이해선 「예술사진의 연혁과 개념」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동인전」 『경향신문』 19491115

「인사(人事)」 『경향신문』 1953110

이해선 「등하수상(燈下隨想)」 『동아일보』 19551112

_______ 「사진예술의 독자성」 『동아일보』 1956126

_______ 「사진 8인전 소감」 『경향신문』 195647

_______ 「백오(白烏)의 변(辯)」 『동아일보』 195749

「김포공항에 내린 덕혜옹주-이해선 씨가 부축하고 있다」 『경향신문』 1962126

「5월 예술상에 붙이는 제언」 『경향신문』 196231

「2명이 사퇴 사진부문심위원」 『경향신문』 1964109

「영예의 산실 안팎」 『동아일보』 19641013

「횡설수설-국전 사진부 이해선 심사위원 사퇴」 『동아일보』 19641014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중요한 내용middot형식 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1020

「열띤 감정으로 충만-창협 창립 사진전」 『동아일보』 1965119

「한국국제사진살롱 위원 명단」 『동아일보』 1965116

「동아국제사진살롱 심사평-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28

「제4회 사진동우회전」 『동아일보』 1966121

「동아사진살롱 심사평-총 801 응모」 『동아일보』 196729

「위원장에 이종우 씨 국전심사위원 위촉」 『동아일보』 1967920

「국전심사위원장 도상봉 씨 선출」 『경향신문』 1968919

「석우회(石友會)서 돌 전람회」 『동아일보』 1970428

「예술인에 훈장 이해랑 씨 등 9명」 『경향신문』 1972118

「외길 한평생 lt11gt 사진middot예술 이해선」 『선데이서울』 1973318

「현역 원로 작가 초대전 일제하의 침울이긴 예술자세 생생하게」 『경향신문』

1974831

「이해선 씨 작품전 향토풍물 50점 전시」 『동아일보』 19741118

「이해선 사진전」 『경향신문』 19741119

「이해선 사진 작품전 24일까지 신문회관」 『매일경제』 19741121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423

「국전운영위원 위촉」 『동아일보』 1976317

「국전사진부문 사단중진들 반발」 『동아일보』 1976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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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_______ 「고궁풍물(3)」 『포토그라피』 1971년 3월호

_______ 「고궁풍물(4)」 『포토그라피』 1971년 4월호

_______ 「고궁풍물(5)」 『포토그라피』 1971년 5월호

_______ 「고궁풍물(6)」 『포토그라피』 1971년 6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7)」 『포토그라피』 1971년 7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8)」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포토그라피 창간5주년에 붙여서」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9)」 『포토그라피』 1971년 9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0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1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2)」 『포토그라피』 1971년 12월호

「제2회 사진국전마감 심사위원결정」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이해선 「이해선 떡에 얽힌 시속(時俗)의 금석(今昔) 옛떡이 사라져 간다는데」

『월간 중앙』 1973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1)」 『포토그라피』 1973년 8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2)」 『포토그라피』 1973년 9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0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6)」 『포토그라피』 1974년 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7)」 『포토그라피』 1974년 3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8)」 『포토그라피』 1974년 4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9)」 『포토그라피』 1974년 5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끝)」 『포토그라피』 1974년 6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 『포토그라피』 1974년 7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2)」 『포토그라피』 1974년 8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3)」 『포토그라피』 1974년 9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4)」 『포토그라피』 1974년 10월호

_______ 「작가와 작품-풍물백태 중에서」 『포토그라피』 1974년 1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6)」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7)」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8)」 『포토그라피』 1975년 3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9)」 『포토그라피』 1975년 4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0)」 『포토그라피』 1975년 5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1)」 『포토그라피』 1975년 6월호

_______ 「곡필무사(曲筆誣事)를 밝힌다」 『월간 중앙』 1975년 11월호

「영상 창간 1주년 기념 좌담회 한국 사진 산업의 의 오늘과 내일」 『영상』 1976년 6월호

「국전 초대작가 8인선 김조현 이건중 이경모 이해선 임응식 이형록 정인선

조현두」 『영상』 1977년 1월호

「남기고 싶은 작품 3 이해선」 『영상』 1977년 5월호

「예술사진에 대한 견고한 확신 이해선 사진의 예술성」 『영상』 1978년 5월호

「한국현대미술대전」 『영상』 1978년 10월호

이명동 「처음 제정된 사진문화상에의 기대」 『영상』 1979년 2월호

「행사 백오 이해선 선생의 사진작품집 출판기념회」 『영상』 1981년 2월호

「작품집 소개 이해선 작품집 중에서」 『영상』 1981년 4월호

박재능 「다양한 자기 세계의 길」 『영상』 1981년 12월호

「영상방담-사단의 이 얘기 저 얘기 김정래 임석제」 『영상』 1982년 1월호

「이미지의 합창-봄의 첫 장」 『영상』 1982년 4월호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 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호

岩宮武二 「너 어디 있느냐」 『영상』 1983년 1월호

최인진 「1930년대의 아마츄어 사진활동」 『사진사연구』 통권 제5호 1983년 9월호

박재능 「월평-원로 이해선 선생을 추모한다」 『영상』 1983년 12월호

「한국 근대미술의 발자취」 『계간미술』 중앙일보사 1985년 봄호

「다시 보는 명작 정도선 정인선 신현국 강대환 김일창 이해선」 『영상』 1986년 10월호

「고 백오 이해선 선생 추모비 건립」 『영상』 1989년 1월호

「동경 유학생들의 한국 근대미술」 『월간미술』 1989년 9월호

「화보로 보는 한국 동경 유학생들의 자화상」 『미술세계』 1993년 5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조선총독부 관보』 제4087호(192647) 한국학문헌연구소 서울 아세아문화사 1926

이태현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1집 서

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2

_______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 자화상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3집 서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4

신명호 「일제하 이왕직과 이왕가 족보」 『한국학대학원논문집』 제11집 한국정신문화

연구소 1996

최인진 「한국사진 역사의 증인(4) - 사단의 단체 활동과 이해선」 『한국사진』 2002

이가라시 코이치 이중희 역 「조선미술전람회의 창설과 서화」 『한국근대미술사학』

제12집 한국근대미술사학회 2004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의 입학제도와 조선인 유학생」 『동악미술사』 제6호 2005

허보윤 「미술로서의 디자인 이순석의 1946-1959년 응용미술교육」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단행본

조우석 『한국사진가론』 눈빛 1998

작품집 도록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1926

이해선 『이해선 사진작품집』 평화당 1980

_______ 『한국의 고궁』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0

Tucker Anne Iizawa Kotaro Kinoshita Naoyuki The History of

Japanese Photography London YaleUniversityPress 2003

이해선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남은 1950-60년대』 눈빛 2005

_______ 『이해선 사진집 1950~1960년대 이야기』 동강사진박물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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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7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일간지

「부산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24531

「성공을 기대 조선사진연구회 현일영 씨 담」 『조선중앙일보』 1936826

「경성아마사진구락부 제1회전」 『조선일보』 1938417

「사진작품전」 『동아일보』 19381014

「경성사진동호회 작품전람회개최」 『조선일보』 19381027

「사진동호회작품전」 『동아일보』 1938112

「경성아마추어 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39527

「아마추어 사진인화전」 『매일신보』 19391115

「동서남북-lsquo아마추어rsquo 제4회 인화전람회」 『동아일보』 19391115

「동서남북-합동인화전」 『동아일보』 1940126

「아마추어 사진의 인화전」 『매일신보』 194074

「경성아마츄어 제5회 인화전」 『조선일보』 194075

「경성백양사우회 제1회 인화전람회 개최」 『매일신보』 19401113

「제2회 사진전 명일부터 화신에서-백양사우회」 『매일신보』 19411124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55

「사진작품전」 『조선일보』 1946119

「전국문화총연발족」 『동아일보』 194729

「제1회 조선사진예술전」 『경향신문』 19475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7510

「사진전람회개최」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전응모작 답지」 『경향신문』 1947615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 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629

「제1회예술사진전람회 15일부터 동화백화점」 『경향신문』 1947713

「예술사진 입선 수상식을 거행」 『경향신문』 1947720

「예술사진전 19일부터」 『동아일보』 1947121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8224

「사예(寫藝) 2회전 작품을 현상모집」 『경향신문』 19481013

「예술사진전 심사 오는 8일로 연기」 『동아일보』 1948127

「지방출품우수-제2회 예사전」 『동아일보』 19481212

「사진예술전 22일부터 동화화랑서」 『동아일보』 19481221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964

「전국종합사진전 심사결과-특선1석 최인집 씨」 『동아일보』 194977

「사진예술의 정화-제3회 전국예술사진전」 『경향신문』 19491010

「예술사진전 30일로 마감박도」 『경향신문』 19491128

「예술사진전 입선자 발표」 『경향신문』 19491213

「예술사진전시회」 『동아일보』 195316

「춘계사진섭영회 26일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3

「본사후원 춘계촬영대회 오늘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6

「사진현상모집」 『경향신문』 1953517

「특선에 lt만춘gt」 『경향신문』 1953527

「인화 당선자 수여식」 『경향신문』 1953529

「사진작품발표전」 『경향신문』 1954413

「예술사진전시회 US-S화랑서」 『동아일보』 1954415

「집회」 『동아일보』 1954916

「경복궁서 촬영대회」 『경향신문』 1954919

「내 26일 촬영대회 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4922

「사연 촬영대회 여감(餘感) 아마추어 사진도(寫眞道)」 『동아일보』 1954103

「문화집합」 『동아일보』 1955122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77

「사연(寫硏) 창립 10주년 기념 어제 촬영대회 성황」 『동아일보』 1955711

「촬영대회 입선작 결정」 『동아일보』 1955819

「8인 사진전 개최」 『동아일보』 1956329

「9회 사연(寫硏)전」 『동아일보』 1957414

「신록촬영대회 개최 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62

「대한사진예술가협회서 사진전시회 개최」 『동아일보』 1958711

「10년 후의 우리 문화 건국 20주년을 장식하고 싶은 것」 『동아일보』 1958821

「사진예술가협회 11회 회원작품전」 『동아일보』 195979

「문화 소식」 『동아일보』 1960119

「국전에 사진부문도」 『동아일보』 1963410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결정 특선 조천용 작」 『동아일보』 19641020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653

「렌즈의 향연 영예의 초점-제4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동아일보』 196667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61217

「사진예술가협회전」 『동아일보』 19681022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9830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996

「국립공보관 12월 전시회 스케쥴」 『경향신문』 1971126

「문화단신」 『경향신문』 19721128

「사진예술협 작품전 7일까지 공보관서」 『매일경제』 1973111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에 안준천 씨」 『경향신문』 197526

「동아포우스트」 『동아일보』 19751117

「사진예술가협회 창립30돌 기념전」 『경향신문』 19751118

「추계 친목 촬영대회」 『매일경제』 197610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7830

「사진예술가협 정총(定總) 31일 하오 대동관서」 『매일경제』 19781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81031

「문화광장」 『동아일보』 1993121

「한국사진예술 50년을 펼친다」 『한겨례』 1994111

「사진예술가협 사라진 풍물전」 『서울신문』 20051025

월간지 계간지

「사진클럽 지상소개 대한사협의 발자취」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박필호 「논단 대한사협16회전을 보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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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대한사협 16회전」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사협 16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8년 7월호

「대한사협 충남지부 회원전」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경축 창간 3주년 사진과 관광 포토그라피-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대한사협 18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제18회 대한사협전」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 작품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70년 3월호

「축 창간4주년 서울 선데이 카메라 클럽」 『포토그라피』 1970년 8월호

「축 포토그라피 창간 5주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김종양 씨 대한사협 고문 추대」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3년 3월호

「lt파도gt 김도현 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신춘초대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근하신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75년도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창작선」 『영상』 1977년 1월호

「전시장 순례 대한사진협회 회원전」 『영상』 1977년 11월호

「지상소개-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대한사협 제27회 정기총회 개최」 『영상』 1979년 7월호

박필호 「대한사협 27돐에 대한 축사」 『영상』 1979년 7월호

「제26회 대한사협전」 『영상』 1980년 1월호

「제27회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사진전시회」 『영상』 1980년 12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요강」 『영상』 1981년 5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영상』 1981년 10월호

「탐방-뜻이 있으면 길이 있게 마련 세 번째 전국대학사진 공모전을 연 대한사협충

남지회의 단합된 모습」 『영상』 1983년 1월호

「제3회 전국대학생사진 공모 제12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월호

「제13회 대한사협 충남 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2월호

최인진 「경성아마츄어카메라구락부를 말한다」 『사진사연구』 1984년 7월호

「대한사협본부 주최 제9회 한국국제사진전 입상자」 『영상』 1989년 1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대한민국예술원 편 『한국예술총감 자료편』 대한민국예술원 1965

한국사진협회 「사진계소식 1969년도」 『한국사진연감』 1970

_____________「한국사진협회의 연혁 1976년 10월 30일」 『한국사진연감』 1976

임범택 「사진」 『1977년도 문예연감』 1978

______ 「사진」 『1978년도 문예연감』 1979

한국사진협회 「역대역원명단(歷代役員名單) 1962년~1987년」 『한국사진연감』

1988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제1장 한국사진협회 창립 이전의 사진계 동향」 『한국사협

사 I 1945-1970』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01

최인진 「해방 초기의 사진잡지 연구-『국제보도』와 『사진문화』를 중심으로」 『한국

사진학회지 AURA』 제10호 2003

박혜성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사진문화』 목록 및 해제」 『한국 사진 잡지

『사진문화』 연구』 명지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한국사협 50년사』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13

단행본

임응식 『내가 걸어온 한국사단 임응식 회고록』 눈빛 1999

작품집 도록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제16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7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8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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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9

원 문 자 료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년 10월 29일 4면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년 4월 17일 4면

1 이해선 양화기(洋畵期) 관련 참고 자료

「입선자의 방명록」『매일신보』 1926년 5월 12일 3면

「금조 개장한 동미전 제2회」『동아일보』 1931년 4월 12일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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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참고 자료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년 5월 5일 2면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년 6월 29일 3면

「신록촬영대회개최-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년 6월 2일 4면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년 7월 7일 4면

예술사진전 조선사진예술연구회에서는 5월 6일부터 동11일까지의 6일간에 걸쳐 동화백화점(舊三越) 갸라리--에서 창립기념사진전을 개최하기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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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해선 관련 원문 자료

원문은 당시의 표기를 그대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현재의 띄어쓰기와 맞춤법에 맞지 않는 부분들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수정하였고 일부 [ ] 안에 병기했다 원문의 한자는 모두 한글 독음으로 고쳤으며 의미 전달을 위해 필요한 경우 ( )안에 병기했다

「대담 아마추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 pp 48~52

작가가 사태(沙汰)났어

본지 공사간에 바쁘실 텐데helliphellip 사진문화의 발전을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

해 주십사 하는 것은helliphellip 요즘 각 직장이나 학생들 간에 사진열이 굉장히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 비

추어서 이 아마추어 카메라맨의 지도 문제를 비롯하여 초보자의 진로랄까helliphellip 이런 문제에 대한 말

씀을 좀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해선6middot25 동란 후에 개인적으로 사진을 연구해 보겠다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직장이나 학교 단위로

사진동호자의 클럽이 많아 지고 작품 발표라던가 전시회 같은 것이 무척 많아졌는데helliphellip 어쨌든

일반 사회인이나 학생 간에 사진열이 높아졌다는 건 기쁜 일이야

임응식그런데 아직도 이 카메라를 사치품으로 취급하는 층이 많아서 곤란해요

이 나라(정부)에서부터 사치품 취급을 하더군helliphellip 여자들이 다이아몬드를 사려는 것과 사진을 연구하

려는 사람이 카메라 장만하는 것을 똑같이 취급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곤란

하지

임 헌데 우리 사단(寫壇)에선 우선 lsquo사진작가rsquo라는 용어를 쓰는 데에 신중을 기해야 하겠어요 웬 놈의

lsquo사진작가rsquo가 그리도 많은지helliphellip 이건 카메라만 메고 다니면 모두 작가 행세를 하니helliphellip

이 카메라 멘 것이 모두 lsquo작가rsquo라면 대한민국에 lsquo사진작가rsquo가 수 십만도 될 걸helliphellip 작가라는 친구들을

체에 넣어서 걸러 놓으면 엄격한 의미에서 진짜 lsquo작가rsquo는 몇 사람 밖에 없을 텐데helliphellip

임 호주머니에 만년필을 꽂았다고 해서 문학가 혹은 소설가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겠는데hellip

hellip 어쨌든 요즘 성행하는 사진작가의 사태를 우선 잡지에서 만이라도 용어 사용에 엄격한 규정을

지어서 질서를 잡아 주어야겠어요

이 그것도 과도기적 현상이겠으니까 차차 지양되겠지helliphellip 오늘 해달라는 얘기는 그런 넋두리가 아닐

테니까 어디 이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본지 한마디로 얘기하자면helliphellip 카메라는 어떻게 해서 장만을 했는데 mdash 자 그 다음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겐지 몰라서 어쩔 줄 모르는helliphellip 이런 아마추어와 초보자들의 진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얘기를

좀helliphellip 현재 직장 단위로 사진 동호자들이 모여서 클럽을 이룩한 것이 십 여 개 있고 학교 단위로는

이십 여 개나 되는데요helliphel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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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인식이 안이해서 탈이야

이 극히 초보적인 입장에서 사진을 해보고 싶다helliphellip 다년간 연구를 한 다음엔 작가가 돼 보겠다 mdash 하

는 사람들을 회원으로 해서 수 십 년 동안 연구를 해 왔는데helliphellip 오늘날 하고 있는 일도 그것이지만

helliphellip 여러 부문에 걸쳐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서적인 면에서 사진과 친해보고 싶다던가

또는 카메라를 장만했는데 어떻게 하면 앞으로 향상 발전할 수 있는가 mdash 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신인이라고 하겠지 특히 학생들의 교내 활동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helliphellip 헌데 막상 다다

르고 보면helliphellip 어떠한 길이 올바른 길인지 막연해 하는 모양이더군요

임 초보자들은 무엇보다도 사진 자체에 대한 정의를 뚜렷이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아마추어 mdash

하면 취미적 입장에서 사진을 다루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조각이나 회화와 같이 사진도 어엿한 예술이니

까 취미 도락(道樂)적인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예술을 추구하는 진지한 마음의 준비가 우선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물론이죠 대개 클럽 조직이 되어 있으니까 선생들의 지도를 받고 있겠지만 내가 알기에는 전문가

가 아닌 다시 말하면 취미 정도에서 관심이 있는 선생들이 지도를 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역시 전문으

로 사진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지도를 가끔씩이라도 받는 게 좋겠지요

임 지도를 한다는 사람들의 태도부터가 성실성이 없는 것 같아요 만년필을 샀으니까 나도 한 번 써 보

자 mdash 해서 작가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취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남의 lsquo지도rsquo를 담당

할 수는 없을 텐데 mdash 우리가 사진을 전공한대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억지로 지도해 주겠다고 밀고

들어 가겠다는 건 아니지만 mdash (웃음) mdash 어쨌든 전문가의 지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학생 클럽이나 직장 클럽 같은 동호자의 모임을 사단의 일부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취미

에서 시작했더라도 일정한 과정을 밟고 다년 연구를 거듭하면 자연히 작가를 지향하게 되겠지만hellip

hellip 그런 면에서도 처음 싹트기 시작하는 신인의 지도가 퍽 중요한 것이지요

취미middot도락이란 관념을 버려야 해

임 지금 형성되어 있다는 직장이나 학교 단체의 거의 전부가 전문적인 입장에 서 있지 않은 것 같더군

요helliphellip 사진에 대한 근본 의식이 너무도 안이한 것 같아요 카메라를 통한 표현의식에 절실한 감정

이 없어요helliphellip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비판을 받지 않는다helliphellip 하는 따위의 도피를 해서는 곤란

하죠helliphellip 창작의식이 확고하게 수립되지 않아서는 향상이 없는 것인데helliphellip 소문에 듣자면helliphellip 너

무 기술 면에만 치중하고 정신적인 면이 소홀히 취급된다는 거에요 helliphellip 나는 직장을 갖고 있으니

까 사진이란 것은 취미 정도로 한다 mdash 하는 태도를 버려야죠 특히 이 점은 지도자들에게 권하고 싶

은데helliphellip 예술의식helliphellip 이것이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절대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까

이 그렇구 말구요helliphellip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새로 사진을 공부하겠다는 신인들에게 네 가지 의식을 주

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휴머니즘 mdash 우선 사람이 돼야 하거든요 교양이라던가 인격 덕망helliphellip 이런 면에서 인간이

돼 있어야 하고 둘째는 사진예술을 한다고 해서 사진예술이 무엇이냐helliphellip 이것만을 추궁해서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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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요 좀 더 시야를 넓혀서 예술이라는 게 뭐냐 mdash 하는 걸 먼저 알아야지 셋째에 가서 사진예술이

라는 게 뭐냐 mdash 를 연구하고 넷째에 가서야 비로소 작품이라던가 창작의식 기교 기술에 대한 검

토를 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기본조건을 머리 속에 언제나 간직하도록 나는 주장해 왔어요

임 기술면을 등한히 할 수는 없겠지요 기술 없이는 표현이 안되니까helliphellip 그러나 이선생 말씀처럼 인

간본연의 문제도 크긴 큽니다 다른 예술부문의 사람보다 교양면에서 뒤떨어지지나 않는가 mdash 하는

것이 항상 염려되는데helliphellip 만일 뒤떨어진다면 큰일이지요 기술도 중요한 문제겠지만 교양인격 같

은 것도 예술가가로서의 긍지를 위해선 떨어질 수 없는 문제고helliphellip 더욱이 좋은 기술을 가졌으면서

도 기초교양이 모자라서 좋은 작품을 낼 수 없다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으니까helliphellip 교양인으로서의

자격도 다른 예술부문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사진을 해야할겝니다

이 기교나 기술을 어떻게 우물쭈물 배웠다고 해서 작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helliphellip 예술이란 그 자체

에 대한 조예부터 깊어야 합니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조리개가 얼마다 타임이 어

떻다helliphellip 암실작업은 어떻게 하는 거다helliphellip 이것만을 알았다고 해서 작가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에

요helliphellip 인간면 예술면 기술면에 똑 같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마 사진을 연구하겠다는 신

인들의 기본이념이 돼야 할겝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지도한다는 면에서

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거든요 mdash

임 어쨌든 기술을 위주로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난 옛날 얘기입니다

지도자 시비

이 지났다기 보다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는 장래에나 변할 수 없는 기본이념이겠지요 사진이라는 것

은 더욱이나 고도의 대중성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인격과 교양이 필요해요 기계라는 거야 찍으면

사진이 되도록 마련된 것이니까 예술까지는 못 가도 사진은 되거든 mdash 그러니까 그것을 예술로 이

끌려면 찍는 사람의 성분이 문제되는 것이지요helliphellip

임 그런 의미에서도 사단의 규정이 필요하고 작가라는 규정이 필요해요 사단이라는 것에 너무 엄격한

규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helliphellip 만년필을 가졌다고 해서 전부 문학가가 아니라면helliphellip 카메라를 메었

으니 작가다 mdash 하는 엉터리도 용납될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우선 필요한 것은 취미 도락이라는 관념

을 지양해야 할 텐데helliphellip

이 취미가 차차 심각해지면 창작의식도 생기는게니까helliphellip 그런 사람들을 지도 계몽해서 한 사람이라

도 작가로 이끌어야 하겠지요helliphellip 카메라를 살 때부터 나는 사진작가가 되겠다 mdash 하는 사람은 있

을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임 lsquo싼데이rsquo 카메라맨은 논의의 대상이 안되구요helliphellip (웃음)

이 그러니까 지도자들이 작가적인 태도에 확고한 이념을 앞세우고 지도에 임해야 하는 건데helliphellip

본지 각 단체 지도층의 지도방침에 대한 구체적인 태도를 어떻게 규정하겠습니까 helliphellip

임 우선 사진에 대한 인식부터 고쳐야 해요 말이 중복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친구 좋고 사진 좋아서 우리

끼리 하면 그만이다 mdash 하는 생각들이 많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만이라도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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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싶어요 학생들이 카메라를 사 가지고 몇 사람 모였으니까 책임자 격

인 선생이 필요하다 mdash 해서 책임 맡았다는 사람으로는 지도가 안 될 게 아닙니까 그렇다고 청해 오

지도 않는데 내정 격으로 뛰어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구helliphellip (웃음)

본지 또 한 가지 요즘 일대 성황을 이루는 것이 소위 현상사진(懸賞寫眞)이라는 건데요helliphellip 이 현상사진

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진에 대한 모욕도 있지helliphellip

임 거 참 꼴사나운 일이 많아요 현상이란 걸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helliphellip 그 하나는 어느 연구

단체에서 순수한 의미에서 발표 바탕이 없는 아마추어를 위해 마련하는 경우가 있을게고 또 하나는

선전용으로 포스터 mdash 같은 데에 써먹기 위한 상업 정책적인 의식에서 모집하는 현상이 있을 테지요

이 어느 경우이건 간에 좌우간 현상 모집을 하는 목적이 있는데helliphellip 응모자는 우선 현상의 목적부터 확

실히 알고 응모를 해야 하겠지helliphellip

임 그렇죠 그런데 이 상업 정책적인 현상의 경우에는 사진문화에 대한 모욕적인 행동이 퍽 많습니다

이거 참 불유쾌한 일이지만helliphellip 가령 예를 들자면 응모자는 원판을 제공하라던가 또 낙선자의 작

품은 일체 반환치 않는다는 따위helliphellip이게 얼마나 사진예술에 대한 모욕적 행위입니까 helliphellip

이 그래요helliphellip 확실히 모순된 일입니다

임 필요에 의해서 현상모집을 했으니까 당선된 작품은 물론 필요하겠지만helliphellip 낙선작품을 반환치 않는

다는 것은 언어도단 입니다 낙선이 됐다 해도 작가의 입장으론 대단히 귀중한 하나의 작품일 텐데

그걸 안 돌려 준대서야 말이 되나요 주최측은 낙선작품의 원화를 돌려 줄만한 성의를 가져야 도리

에 맞을 텐데helliphellip 요즘 현실은 lsquo낙선rsquo이란 푸대접 밑에 원판까지 몰수당하는 판국이니helliphellip 원 참

이 그러니까 응모자는 무엇보다도 현상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지helliphellip 여러 번 겪은 일이지만 심사를

하다 보면 전혀 현상 취지를 도외시한 작품들이 있는데helliphellip

임 그거야 보나마나 낙선이죠 (웃음)

이 그러믄요 현상 응모자로서는 출품 규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 아니겠어요

임 그럼요

이 그런데 어떤 것은 작품에 제목도 없는 것이 있거든요 그런가 하면 제목과 작품내용이 전혀 특이한

엉터리도 있구helliphellip

임 저도 여러 번 겪은 일입니다

이 제목이란 것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벌써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찍는다는 의식이 있는 이상

제목도 정해져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아주 작품과 제목이 동떨어진 것들이 응모해 오니까

낙선의 자격이 충분할 수밖에helliphellip 하하하 (웃음)

임 그게 모두 사진에 대한 성의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이 그래요 성의가 없어요 자기 작품에 대해선 최선의 성의를 다 해야 할 텐데 그런 태도가 없거든helliphellip

제목을 안 썼는지 못 썼는지는 모르지만helliphel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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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그저 무턱대고 발표의식만 왕성한 까닭이 아닐까요

이 그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된 작가가 아닌 이상 발표기회가 좀처럼 없을 테니까

자기 실력의 평가를 받는다던가 남들과 경쟁해 본다는 의미에서 현상에 자주 응모하는 것은 좋은데

helliphellip 아 어떤 친구는 자기 실력 생각은 하지도 않고 상품이 적다 많다 시비를 하는 친구도 있으니 참

기가 막힐 일이지

주최자의 무성의도 고쳐져야 하고

임 그건 lsquo현상rsquo이라고 내거는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순수한 사진연구단체에서 모집할 때는

lsquo공모전rsquo이라던가 하는 문구가 좋지 않을까요 lsquo현상rsquo이라니까 lsquo상rsquo을 바라게도 되겠지만 어쨌든

lsquo현상rsquo이란 말 자체가 순수하지 못해요

이 그건 확실히 생각해 볼 문제이겠군요helliphellip 순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helliphellip 응모자들이 심

사원이 누구냐mdash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도 순수하지 못하고helliphellip 또 주최자가 모집광고를 낼 때

lsquo심사원은 추후발표rsquo라mdash하는 것도 순수하지 못해요 이것도 참 불쾌한 일인데 lsquo추후발표rsquo라는 걸

다시 생각하면 lsquo준비가 안됐다rsquo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심사원의 준비도 안 해 놓고 현상을 모

집하는 그런 무성의가 또 어디 있어helliphellip 이건 일종의 사기가 아니면 거만일 겝니다

임 그나 그뿐인가요 lsquo심사원은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함rsquohelliphellip 하는 모호한 광고도 있지요 응모자의 입

장에서 생각하면helliphellip 심사원에 불만이 있으면 응모를 아니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 심사원 문제만

은 정정당당히 명시해야만 나중에 가서 심사에 대한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출품을 한 다음에 심사

원이 발표된다는 것은 심사에 대한 불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helliphellip

이 그리고 응모자의 동태를 가만히 보면 아까 얘기가 나왔던 소위 lsquo취미정도rsquo라는 층의 발표 의욕이 굉

장해서 대부분의 응모자가 이 부류인 것 같은데helliphellip 여기 한 가지 탈이 있어요 현상응모 작품의 심

사라는 것은 무제한의 심사 레벨을 놓고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응모 작품 중에서의 우수 작품을 가

려낸다는 것은 이거 상식 문제가 아닙니다

임 그렇죠

이 아 그런데 어떻게 해서 현상에 당선이 되거나 특히 특선이라도 하면 그만 자기가 갑자기 위대한

작가라도 된 것처럼 대가연(大家然) 하고 으쓱대는 친구들이 많아서 걱정이야helliphellip (웃음)

이 lsquo특선rsquo이라는 것은 응모해 온 작품들 중에서 특선이지 결코 한국 사단 전체의 수준에서 특선이라

는 것은 아닌데helliphellip 그만 한 번만 당선되면 코가 높아지고 대뜸 대가 행세를 하려고 드니helliphellip 참

신인들은 특히 조심해야 할 일이지

남의 것보고hellip 우리 것도 보내고hellip

본지 이제 화제를 좀 바꾸어서 세계사단의 동향을 좀 말씀해 주실까요

임 세계사단의 얘기라면 직접 보아야만 얘기가 될 텐데helliphellip

이 서울 바닥에서 썩으면서 세계사단의 얘기를 어떻게 본 듯이 할 수가 있겠나 카메라를 메고 세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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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도 했어야 얘기가 되지

임 그것보다도 사진을 통한 국제 교류 얘기나 합시다

이 그게 좋겠군helliphellip 얼마 전에 덕수궁에서 자유중국의 소개사진전시가 있었죠 미국공보원의 활동도

이를 테면 국제교류의 한 형식일게고helliphellip

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자유중국과 월남의 사진전시가 있었는데helliphellip 우리도 수출을 한다면 그 보

다 훨씬 좋은 작품들이 나갈걸요helliphellip

이 한미합동전이던가 한중합동전 같은 것도 하면 역시 국제교류가 되겠지요helliphellip

임 한미합동전은 불원한 장래에 개최될 것입니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lsquo인간일가(人間一家)rsquo의 사진

이 아마 이월쯤 한국에 올 겝니다 미국대사관이 주동이 돼서 작품 503점 전부의 전시회 계획이 추

진되고 있으니까요

이 남이 보내줘서 본 것은 있지만 우리가 남에게 보여준 것은 없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야 우리도 남에

게 보여줘야 교류가 될 텐데helliphellip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두 사람의 작품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임 개인적인 활동은 있었지요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사진살롱에 사진을 보내고 있으니까 개인

적으로는 더러 나간 셈이죠 개인들의 수출이라도 좀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지만

이 우리의 것을 내보내고 외국 것을 들여와서 서로 감상하고 연구하는 게 이를 테면 국제교류인데

아마 명년쯤엔 될까 몰라

임 작품교환전 같은 것을 위해서 대대적인 계몽운동이 필요 하겠죠

이 그렇죠 운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어요

임 그런데 근본적인 얘기를 하자면 한국 작가의 역량이 아직도 부족한 것 같아요 언젠가 외국 작가에

게서 들은 말인데mdash한국 사람은 한국을 보지 않았다mdash하는 얘길 해요 사진 작가에게 대한 말이지

만helliphellip 나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이 퍽 중요한 얘기다mdash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를 직시하는 것만이

사진은 아니겠지만 실용사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것이 사실 아닐까요 회화적인 쌀롱 픽처라던

가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리얼리즘 사진이라는 것에 너무들 치우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 국제 교류의 시발은 역시 소개적(紹介的)인 것 다시 말해서 르포르타주적인 것이겠으니까helliphellip

임 외국 작품의 모방 같은 것은 이제 집어치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mdash예술적인 것 이것만을 너무 추

구했기 때문에 사실이 한국적인 것과 국민성의 묘사 같은 것이 잘 되지 않았지요 정서적인 것에만

너무 골몰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일이고 helliphellip 예술을 위한 예술에 정신들이 팔려 있었지나 않은

지helliphellip 예술을 하기 위한 사진이라는 관념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이 예술을 염두에 안 둔다면 실용사진이 돼 버리게

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너무 치우친 것 같단 말입니다

이 특히 국제 교류를 생각한다면 아닌 게 아니라 외국처럼 르포르타주적인 사진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할거에요

임 그래요 거기에 예술성을 띄워서 소화할 만한 역량 있는 작가가 필요해요

이 또 하나의 가장 큰 문제는 위정자의 관심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 큰 난관입니다 국제 교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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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가족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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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말이고 역시 정부당국자의 적극적인 주

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어디 그래요

임 우선 사단 자체의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작가들의 작업도 촉구되어야 하구helliphellip 아까도 말이 나왔지

만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 출품을 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점 같은데서 작가들의 반성도 필

요하고helliphellip

이 개별적으로 미국 등지에 보낸 것은 아마 상당한 수가 되겠지요

임 그럼요 그랬는데 왜 성과가 없느냐mdash하는 반성이 있어야죠

이 오늘의 현실을 예술적인 면에서 기록하고 작품화 해야겠는데helliphellip 막연하게 예술을 위한 작품을 보

내니까 기교적으론 훌륭할지 몰라도 작품 자체에 내용이 없어서helliphellip 그래서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닐

임 그런 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빨리 우리의 수준을 높여서 국제 조류와 호흡을 맞추어 나가

야 할 것입니다

이 이거 아마추어를 위한 얘기라는 것이 잠깐 탈선을 한 것 같군 그러나 이런 문제도 참고가 되긴 하니

까helliphellip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합시다

본지 수고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helliphellip

(기록 O기자)

이해선 「lsquo백오(白烏)rsquo의 변(辯)」 『동아일보』 1957년 4월 9일 4면

30여년 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입학

이 되었을 당시 자축기념하는 의미에서 호(號)를

하나 지어본 것이 백오(白烏)라는 두 글자였다 처

음 듣는 사람들 중에서는 거문[검은] 까마귀는 있

지만 흰 까마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서로 웃어버리고 그 뜻을

설명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자의

(字意)를 해명해볼까 한다 백(白)은 흰 빛이요 오

(烏)는 흑색으로 통하므로 우선 흑백을 대조시켜

놓고 흰 종이 위에다 검은 먹으로 휘호(揮毫)할 것

이니 그 뜻이 내 생활과 부합될 것 같으며 둘째로

백 자(字)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첫 자를 떼어놓

고 오는 반포오(反哺烏)로 그 이름이 높은 새이므

로 평소에 효자 노릇을 못하여 온 나의 좌우명으로도 적당할 듯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새 중에서는

혹간(或間) 백변종(白變種)이 생겨나는 수가 있는데 그 흰새를 서조(瑞鳥)라고 떠들던 옛 시절도 있었으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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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내가 우연히 호를 지어 본 것이 검은 까마귀떼 속에서 서조 백오를 발견하였으니 나의 전도(前途)에는

반드시 서광(瑞光)이 비칠 것 같으므로 이상 여러 가지 의미를 차례로 생각해 볼 때에 나에게는 이 외에 더

좋은 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자의였었고 궁금한채로 불려온 백오

였었다 만담궁변(漫談窮辯)을 물소물책(勿笑勿責) 하소서 (사진가)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

이해선 「중요한 내용middot형식-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년 10월 20일 5면

사진작품에는 사진 특유의 형식이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러한 특유의 형식에 알맞은 표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의 특수성은 형식이 가지는 특수성 보다는

기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주관적이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작품심사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동일하게 중요시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작

품 속에서 그야말로 형식과 내용이 알맞게 부합된 특출한 작

품을 볼 수는 없었다 형식이 좋으면 내용이 빈약하고 좀 내

용이 있으면 형식이 미숙하고helliphellip 모두 결점이 있다 그러나

입상작으로 뽑은 8 점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

다 그리고 금년에는 lsquo칼러rsquo사진의 응모 점수가 30점이나 되

고 그중에서도 3점이 입상되었고 또 9점이 입선되었다는 것

은 lsquo칼러rsquo 사진의 앞날을 위해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lt전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장gt

[제1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년 2월 8일 5면

외국작품의 세련되고 빈틈없는 lsquo테크닉rsquo은 국내작품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서 우선 국내

작품을 형식에서부터 누르고 말았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이루게 된 것은 국내작가들

의 역량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lsquo국산인화지rsquo가 얼마나 엉터리고 조악한 것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대체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더욱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은 이와 반대적인 경향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예술이든 먼저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볼 때 국내작품의 후진성은

두말할 것 없이 형식의 경시에 있다고 하겠다 심사결과 흑백부에서나 lsquo칼라rsquo부에서 겨우 동상으로 한 점

씩 밖에 국내작품이 입상되지 못했다는 것은 다소 섭섭한 느낌이나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경종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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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더욱 우리 심사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독에서 응모한 lsquo칼라rsquo

작품이었다 물체의 외관 색감을 초월한 내면의 lsquo이미지rsquo가 발

산하는 짙은 감정의 색감으로 작가의 개성과 사상을 인상 깊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내 lsquo칼라라보rsquo의 후진

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상작으로 뽑힌 외국작품들은 오

늘의 세계 사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는 큰 자극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

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제2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총 818점 응모-사진예술에 도움」

『동아일보』 1967년 2월 9일 4면

지난해와 같이 흑백부문에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들은 모두가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산인화지의 조악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작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올해는 흑백

부문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기꺼운 일이라고

하겠다

특히 칼라작품에 있어서는 독일의 작품들이 특출했고 이들 작품들의 색감은 현대 과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 최고상으로 뽑힌 lt잊은 친구gt와 몇 점의 입상작품들은 칼라릴리프와 소라리

세이숀[솔라리제이션] 등의 수법으로써 모티

브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를 초객체적이고 추

상적으로 표현하고 작가의 짙은 개성과 사상

과 철학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입상작으로 뽑은 16점의 작품들은 오늘의

세계사단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

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심사위원 이해선 (위원장) 임응식 서순삼

박필호 안월산 정인성 최경덕 (이상 7명)

관련 자료 소개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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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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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관련 자료 소개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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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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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관련 자료 소개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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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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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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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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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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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관련 자료 소개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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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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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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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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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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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5: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자료 소개 155

참 고 문 헌 목 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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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진문화상 이해선 씨 뽑아」 『동아일보』 19781128

「사진문화-사협고문 이해선 씨 작품집 발간」 『매일경제』 19801129

「사진 50년 역사를 한 눈에」 『매일경제』 1981120

「사진작가 이해선 작품집 두 권 내놔」 『동아일보』 1981629

「부고-원로 사진작가 이해선 씨」 『동아일보』 1983111

「일화로 엮는 명암 100년 화단이면사( ) (27) 화가와 문인과 신식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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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단신gt 백오 선생 탄신 100돌 사진전」 『문화일보』 2005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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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오 이해선 선생 미발표유작 사진전」 『부산일보』 2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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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친해지려면 옛 서울역사로 가보세요」 『헤럴드경제』 201041

월간지 계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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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지상초빙작가-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달의 작품사진 제주풍물-이해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이해선 「해외 예술사진 감상실 (1회)」 『포토그라피』 1968년 4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6) 석가탄일」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7)」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제1회 새한사진콘테스트」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8) 동해진미」 『포토그라피』 1969년 9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9) 야채밭」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0) 건제(乾梯)」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제18회 국전 소식」 『포토그라피』 1969년 11월호

「백오 이해선 작품 연재 (11) 초설(初雪)」 『포토그라피』 1969년 12월호

이해선 「돌과의 대화 30년」 『월간 중앙』 1969년 12월호

「초대작가 사진」 『포토그라피』 1970년 9월호

이해선 「고궁풍물(1)」 『포토그라피』 1971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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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선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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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1029

「금조개장한 동미전 제2회」 『동아일보』 1931412

홍득순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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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선 「예술사진의 연혁과 개념」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동인전」 『경향신문』 19491115

「인사(人事)」 『경향신문』 1953110

이해선 「등하수상(燈下隨想)」 『동아일보』 195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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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 「사진 8인전 소감」 『경향신문』 195647

_______ 「백오(白烏)의 변(辯)」 『동아일보』 195749

「김포공항에 내린 덕혜옹주-이해선 씨가 부축하고 있다」 『경향신문』 1962126

「5월 예술상에 붙이는 제언」 『경향신문』 196231

「2명이 사퇴 사진부문심위원」 『경향신문』 1964109

「영예의 산실 안팎」 『동아일보』 19641013

「횡설수설-국전 사진부 이해선 심사위원 사퇴」 『동아일보』 19641014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중요한 내용middot형식 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1020

「열띤 감정으로 충만-창협 창립 사진전」 『동아일보』 1965119

「한국국제사진살롱 위원 명단」 『동아일보』 1965116

「동아국제사진살롱 심사평-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28

「제4회 사진동우회전」 『동아일보』 1966121

「동아사진살롱 심사평-총 801 응모」 『동아일보』 196729

「위원장에 이종우 씨 국전심사위원 위촉」 『동아일보』 1967920

「국전심사위원장 도상봉 씨 선출」 『경향신문』 1968919

「석우회(石友會)서 돌 전람회」 『동아일보』 1970428

「예술인에 훈장 이해랑 씨 등 9명」 『경향신문』 1972118

「외길 한평생 lt11gt 사진middot예술 이해선」 『선데이서울』 1973318

「현역 원로 작가 초대전 일제하의 침울이긴 예술자세 생생하게」 『경향신문』

1974831

「이해선 씨 작품전 향토풍물 50점 전시」 『동아일보』 19741118

「이해선 사진전」 『경향신문』 19741119

「이해선 사진 작품전 24일까지 신문회관」 『매일경제』 19741121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423

「국전운영위원 위촉」 『동아일보』 1976317

「국전사진부문 사단중진들 반발」 『동아일보』 1976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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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_______ 「고궁풍물(3)」 『포토그라피』 1971년 3월호

_______ 「고궁풍물(4)」 『포토그라피』 1971년 4월호

_______ 「고궁풍물(5)」 『포토그라피』 1971년 5월호

_______ 「고궁풍물(6)」 『포토그라피』 1971년 6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7)」 『포토그라피』 1971년 7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8)」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포토그라피 창간5주년에 붙여서」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9)」 『포토그라피』 1971년 9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0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1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2)」 『포토그라피』 1971년 12월호

「제2회 사진국전마감 심사위원결정」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이해선 「이해선 떡에 얽힌 시속(時俗)의 금석(今昔) 옛떡이 사라져 간다는데」

『월간 중앙』 1973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1)」 『포토그라피』 1973년 8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2)」 『포토그라피』 1973년 9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0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6)」 『포토그라피』 1974년 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7)」 『포토그라피』 1974년 3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8)」 『포토그라피』 1974년 4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9)」 『포토그라피』 1974년 5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끝)」 『포토그라피』 1974년 6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 『포토그라피』 1974년 7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2)」 『포토그라피』 1974년 8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3)」 『포토그라피』 1974년 9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4)」 『포토그라피』 1974년 10월호

_______ 「작가와 작품-풍물백태 중에서」 『포토그라피』 1974년 1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6)」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7)」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8)」 『포토그라피』 1975년 3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9)」 『포토그라피』 1975년 4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0)」 『포토그라피』 1975년 5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1)」 『포토그라피』 1975년 6월호

_______ 「곡필무사(曲筆誣事)를 밝힌다」 『월간 중앙』 1975년 11월호

「영상 창간 1주년 기념 좌담회 한국 사진 산업의 의 오늘과 내일」 『영상』 1976년 6월호

「국전 초대작가 8인선 김조현 이건중 이경모 이해선 임응식 이형록 정인선

조현두」 『영상』 1977년 1월호

「남기고 싶은 작품 3 이해선」 『영상』 1977년 5월호

「예술사진에 대한 견고한 확신 이해선 사진의 예술성」 『영상』 1978년 5월호

「한국현대미술대전」 『영상』 1978년 10월호

이명동 「처음 제정된 사진문화상에의 기대」 『영상』 1979년 2월호

「행사 백오 이해선 선생의 사진작품집 출판기념회」 『영상』 1981년 2월호

「작품집 소개 이해선 작품집 중에서」 『영상』 1981년 4월호

박재능 「다양한 자기 세계의 길」 『영상』 1981년 12월호

「영상방담-사단의 이 얘기 저 얘기 김정래 임석제」 『영상』 1982년 1월호

「이미지의 합창-봄의 첫 장」 『영상』 1982년 4월호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 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호

岩宮武二 「너 어디 있느냐」 『영상』 1983년 1월호

최인진 「1930년대의 아마츄어 사진활동」 『사진사연구』 통권 제5호 1983년 9월호

박재능 「월평-원로 이해선 선생을 추모한다」 『영상』 1983년 12월호

「한국 근대미술의 발자취」 『계간미술』 중앙일보사 1985년 봄호

「다시 보는 명작 정도선 정인선 신현국 강대환 김일창 이해선」 『영상』 1986년 10월호

「고 백오 이해선 선생 추모비 건립」 『영상』 1989년 1월호

「동경 유학생들의 한국 근대미술」 『월간미술』 1989년 9월호

「화보로 보는 한국 동경 유학생들의 자화상」 『미술세계』 1993년 5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조선총독부 관보』 제4087호(192647) 한국학문헌연구소 서울 아세아문화사 1926

이태현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1집 서

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2

_______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 자화상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3집 서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4

신명호 「일제하 이왕직과 이왕가 족보」 『한국학대학원논문집』 제11집 한국정신문화

연구소 1996

최인진 「한국사진 역사의 증인(4) - 사단의 단체 활동과 이해선」 『한국사진』 2002

이가라시 코이치 이중희 역 「조선미술전람회의 창설과 서화」 『한국근대미술사학』

제12집 한국근대미술사학회 2004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의 입학제도와 조선인 유학생」 『동악미술사』 제6호 2005

허보윤 「미술로서의 디자인 이순석의 1946-1959년 응용미술교육」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김용철 「도쿄미술학교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단행본

조우석 『한국사진가론』 눈빛 1998

작품집 도록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1926

이해선 『이해선 사진작품집』 평화당 1980

_______ 『한국의 고궁』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0

Tucker Anne Iizawa Kotaro Kinoshita Naoyuki The History of

Japanese Photography London YaleUniversityPress 2003

이해선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남은 1950-60년대』 눈빛 2005

_______ 『이해선 사진집 1950~1960년대 이야기』 동강사진박물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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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7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일간지

「부산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24531

「성공을 기대 조선사진연구회 현일영 씨 담」 『조선중앙일보』 1936826

「경성아마사진구락부 제1회전」 『조선일보』 1938417

「사진작품전」 『동아일보』 19381014

「경성사진동호회 작품전람회개최」 『조선일보』 19381027

「사진동호회작품전」 『동아일보』 1938112

「경성아마추어 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39527

「아마추어 사진인화전」 『매일신보』 19391115

「동서남북-lsquo아마추어rsquo 제4회 인화전람회」 『동아일보』 19391115

「동서남북-합동인화전」 『동아일보』 1940126

「아마추어 사진의 인화전」 『매일신보』 194074

「경성아마츄어 제5회 인화전」 『조선일보』 194075

「경성백양사우회 제1회 인화전람회 개최」 『매일신보』 19401113

「제2회 사진전 명일부터 화신에서-백양사우회」 『매일신보』 19411124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55

「사진작품전」 『조선일보』 1946119

「전국문화총연발족」 『동아일보』 194729

「제1회 조선사진예술전」 『경향신문』 19475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7510

「사진전람회개최」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전응모작 답지」 『경향신문』 1947615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 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629

「제1회예술사진전람회 15일부터 동화백화점」 『경향신문』 1947713

「예술사진 입선 수상식을 거행」 『경향신문』 1947720

「예술사진전 19일부터」 『동아일보』 1947121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8224

「사예(寫藝) 2회전 작품을 현상모집」 『경향신문』 19481013

「예술사진전 심사 오는 8일로 연기」 『동아일보』 1948127

「지방출품우수-제2회 예사전」 『동아일보』 19481212

「사진예술전 22일부터 동화화랑서」 『동아일보』 19481221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964

「전국종합사진전 심사결과-특선1석 최인집 씨」 『동아일보』 194977

「사진예술의 정화-제3회 전국예술사진전」 『경향신문』 19491010

「예술사진전 30일로 마감박도」 『경향신문』 19491128

「예술사진전 입선자 발표」 『경향신문』 19491213

「예술사진전시회」 『동아일보』 195316

「춘계사진섭영회 26일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3

「본사후원 춘계촬영대회 오늘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6

「사진현상모집」 『경향신문』 1953517

「특선에 lt만춘gt」 『경향신문』 1953527

「인화 당선자 수여식」 『경향신문』 1953529

「사진작품발표전」 『경향신문』 1954413

「예술사진전시회 US-S화랑서」 『동아일보』 1954415

「집회」 『동아일보』 1954916

「경복궁서 촬영대회」 『경향신문』 1954919

「내 26일 촬영대회 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4922

「사연 촬영대회 여감(餘感) 아마추어 사진도(寫眞道)」 『동아일보』 1954103

「문화집합」 『동아일보』 1955122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77

「사연(寫硏) 창립 10주년 기념 어제 촬영대회 성황」 『동아일보』 1955711

「촬영대회 입선작 결정」 『동아일보』 1955819

「8인 사진전 개최」 『동아일보』 1956329

「9회 사연(寫硏)전」 『동아일보』 1957414

「신록촬영대회 개최 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62

「대한사진예술가협회서 사진전시회 개최」 『동아일보』 1958711

「10년 후의 우리 문화 건국 20주년을 장식하고 싶은 것」 『동아일보』 1958821

「사진예술가협회 11회 회원작품전」 『동아일보』 195979

「문화 소식」 『동아일보』 1960119

「국전에 사진부문도」 『동아일보』 1963410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결정 특선 조천용 작」 『동아일보』 19641020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653

「렌즈의 향연 영예의 초점-제4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동아일보』 196667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61217

「사진예술가협회전」 『동아일보』 19681022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9830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996

「국립공보관 12월 전시회 스케쥴」 『경향신문』 1971126

「문화단신」 『경향신문』 19721128

「사진예술협 작품전 7일까지 공보관서」 『매일경제』 1973111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에 안준천 씨」 『경향신문』 197526

「동아포우스트」 『동아일보』 19751117

「사진예술가협회 창립30돌 기념전」 『경향신문』 19751118

「추계 친목 촬영대회」 『매일경제』 197610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7830

「사진예술가협 정총(定總) 31일 하오 대동관서」 『매일경제』 19781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81031

「문화광장」 『동아일보』 1993121

「한국사진예술 50년을 펼친다」 『한겨례』 1994111

「사진예술가협 사라진 풍물전」 『서울신문』 20051025

월간지 계간지

「사진클럽 지상소개 대한사협의 발자취」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박필호 「논단 대한사협16회전을 보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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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대한사협 16회전」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사협 16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8년 7월호

「대한사협 충남지부 회원전」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경축 창간 3주년 사진과 관광 포토그라피-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대한사협 18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제18회 대한사협전」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 작품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70년 3월호

「축 창간4주년 서울 선데이 카메라 클럽」 『포토그라피』 1970년 8월호

「축 포토그라피 창간 5주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김종양 씨 대한사협 고문 추대」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3년 3월호

「lt파도gt 김도현 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신춘초대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근하신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75년도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창작선」 『영상』 1977년 1월호

「전시장 순례 대한사진협회 회원전」 『영상』 1977년 11월호

「지상소개-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대한사협 제27회 정기총회 개최」 『영상』 1979년 7월호

박필호 「대한사협 27돐에 대한 축사」 『영상』 1979년 7월호

「제26회 대한사협전」 『영상』 1980년 1월호

「제27회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사진전시회」 『영상』 1980년 12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요강」 『영상』 1981년 5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영상』 1981년 10월호

「탐방-뜻이 있으면 길이 있게 마련 세 번째 전국대학사진 공모전을 연 대한사협충

남지회의 단합된 모습」 『영상』 1983년 1월호

「제3회 전국대학생사진 공모 제12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월호

「제13회 대한사협 충남 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2월호

최인진 「경성아마츄어카메라구락부를 말한다」 『사진사연구』 1984년 7월호

「대한사협본부 주최 제9회 한국국제사진전 입상자」 『영상』 1989년 1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대한민국예술원 편 『한국예술총감 자료편』 대한민국예술원 1965

한국사진협회 「사진계소식 1969년도」 『한국사진연감』 1970

_____________「한국사진협회의 연혁 1976년 10월 30일」 『한국사진연감』 1976

임범택 「사진」 『1977년도 문예연감』 1978

______ 「사진」 『1978년도 문예연감』 1979

한국사진협회 「역대역원명단(歷代役員名單) 1962년~1987년」 『한국사진연감』

1988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제1장 한국사진협회 창립 이전의 사진계 동향」 『한국사협

사 I 1945-1970』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01

최인진 「해방 초기의 사진잡지 연구-『국제보도』와 『사진문화』를 중심으로」 『한국

사진학회지 AURA』 제10호 2003

박혜성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사진문화』 목록 및 해제」 『한국 사진 잡지

『사진문화』 연구』 명지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한국사협 50년사』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13

단행본

임응식 『내가 걸어온 한국사단 임응식 회고록』 눈빛 1999

작품집 도록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제16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7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8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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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9

원 문 자 료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년 10월 29일 4면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년 4월 17일 4면

1 이해선 양화기(洋畵期) 관련 참고 자료

「입선자의 방명록」『매일신보』 1926년 5월 12일 3면

「금조 개장한 동미전 제2회」『동아일보』 1931년 4월 12일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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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참고 자료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년 5월 5일 2면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년 6월 29일 3면

「신록촬영대회개최-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년 6월 2일 4면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년 7월 7일 4면

예술사진전 조선사진예술연구회에서는 5월 6일부터 동11일까지의 6일간에 걸쳐 동화백화점(舊三越) 갸라리--에서 창립기념사진전을 개최하기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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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해선 관련 원문 자료

원문은 당시의 표기를 그대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현재의 띄어쓰기와 맞춤법에 맞지 않는 부분들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수정하였고 일부 [ ] 안에 병기했다 원문의 한자는 모두 한글 독음으로 고쳤으며 의미 전달을 위해 필요한 경우 ( )안에 병기했다

「대담 아마추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 pp 48~52

작가가 사태(沙汰)났어

본지 공사간에 바쁘실 텐데helliphellip 사진문화의 발전을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

해 주십사 하는 것은helliphellip 요즘 각 직장이나 학생들 간에 사진열이 굉장히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 비

추어서 이 아마추어 카메라맨의 지도 문제를 비롯하여 초보자의 진로랄까helliphellip 이런 문제에 대한 말

씀을 좀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해선6middot25 동란 후에 개인적으로 사진을 연구해 보겠다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직장이나 학교 단위로

사진동호자의 클럽이 많아 지고 작품 발표라던가 전시회 같은 것이 무척 많아졌는데helliphellip 어쨌든

일반 사회인이나 학생 간에 사진열이 높아졌다는 건 기쁜 일이야

임응식그런데 아직도 이 카메라를 사치품으로 취급하는 층이 많아서 곤란해요

이 나라(정부)에서부터 사치품 취급을 하더군helliphellip 여자들이 다이아몬드를 사려는 것과 사진을 연구하

려는 사람이 카메라 장만하는 것을 똑같이 취급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곤란

하지

임 헌데 우리 사단(寫壇)에선 우선 lsquo사진작가rsquo라는 용어를 쓰는 데에 신중을 기해야 하겠어요 웬 놈의

lsquo사진작가rsquo가 그리도 많은지helliphellip 이건 카메라만 메고 다니면 모두 작가 행세를 하니helliphellip

이 카메라 멘 것이 모두 lsquo작가rsquo라면 대한민국에 lsquo사진작가rsquo가 수 십만도 될 걸helliphellip 작가라는 친구들을

체에 넣어서 걸러 놓으면 엄격한 의미에서 진짜 lsquo작가rsquo는 몇 사람 밖에 없을 텐데helliphellip

임 호주머니에 만년필을 꽂았다고 해서 문학가 혹은 소설가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겠는데hellip

hellip 어쨌든 요즘 성행하는 사진작가의 사태를 우선 잡지에서 만이라도 용어 사용에 엄격한 규정을

지어서 질서를 잡아 주어야겠어요

이 그것도 과도기적 현상이겠으니까 차차 지양되겠지helliphellip 오늘 해달라는 얘기는 그런 넋두리가 아닐

테니까 어디 이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본지 한마디로 얘기하자면helliphellip 카메라는 어떻게 해서 장만을 했는데 mdash 자 그 다음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겐지 몰라서 어쩔 줄 모르는helliphellip 이런 아마추어와 초보자들의 진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얘기를

좀helliphellip 현재 직장 단위로 사진 동호자들이 모여서 클럽을 이룩한 것이 십 여 개 있고 학교 단위로는

이십 여 개나 되는데요helliphel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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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인식이 안이해서 탈이야

이 극히 초보적인 입장에서 사진을 해보고 싶다helliphellip 다년간 연구를 한 다음엔 작가가 돼 보겠다 mdash 하

는 사람들을 회원으로 해서 수 십 년 동안 연구를 해 왔는데helliphellip 오늘날 하고 있는 일도 그것이지만

helliphellip 여러 부문에 걸쳐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서적인 면에서 사진과 친해보고 싶다던가

또는 카메라를 장만했는데 어떻게 하면 앞으로 향상 발전할 수 있는가 mdash 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신인이라고 하겠지 특히 학생들의 교내 활동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helliphellip 헌데 막상 다다

르고 보면helliphellip 어떠한 길이 올바른 길인지 막연해 하는 모양이더군요

임 초보자들은 무엇보다도 사진 자체에 대한 정의를 뚜렷이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아마추어 mdash

하면 취미적 입장에서 사진을 다루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조각이나 회화와 같이 사진도 어엿한 예술이니

까 취미 도락(道樂)적인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예술을 추구하는 진지한 마음의 준비가 우선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물론이죠 대개 클럽 조직이 되어 있으니까 선생들의 지도를 받고 있겠지만 내가 알기에는 전문가

가 아닌 다시 말하면 취미 정도에서 관심이 있는 선생들이 지도를 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역시 전문으

로 사진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지도를 가끔씩이라도 받는 게 좋겠지요

임 지도를 한다는 사람들의 태도부터가 성실성이 없는 것 같아요 만년필을 샀으니까 나도 한 번 써 보

자 mdash 해서 작가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취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남의 lsquo지도rsquo를 담당

할 수는 없을 텐데 mdash 우리가 사진을 전공한대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억지로 지도해 주겠다고 밀고

들어 가겠다는 건 아니지만 mdash (웃음) mdash 어쨌든 전문가의 지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학생 클럽이나 직장 클럽 같은 동호자의 모임을 사단의 일부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취미

에서 시작했더라도 일정한 과정을 밟고 다년 연구를 거듭하면 자연히 작가를 지향하게 되겠지만hellip

hellip 그런 면에서도 처음 싹트기 시작하는 신인의 지도가 퍽 중요한 것이지요

취미middot도락이란 관념을 버려야 해

임 지금 형성되어 있다는 직장이나 학교 단체의 거의 전부가 전문적인 입장에 서 있지 않은 것 같더군

요helliphellip 사진에 대한 근본 의식이 너무도 안이한 것 같아요 카메라를 통한 표현의식에 절실한 감정

이 없어요helliphellip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비판을 받지 않는다helliphellip 하는 따위의 도피를 해서는 곤란

하죠helliphellip 창작의식이 확고하게 수립되지 않아서는 향상이 없는 것인데helliphellip 소문에 듣자면helliphellip 너

무 기술 면에만 치중하고 정신적인 면이 소홀히 취급된다는 거에요 helliphellip 나는 직장을 갖고 있으니

까 사진이란 것은 취미 정도로 한다 mdash 하는 태도를 버려야죠 특히 이 점은 지도자들에게 권하고 싶

은데helliphellip 예술의식helliphellip 이것이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절대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까

이 그렇구 말구요helliphellip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새로 사진을 공부하겠다는 신인들에게 네 가지 의식을 주

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휴머니즘 mdash 우선 사람이 돼야 하거든요 교양이라던가 인격 덕망helliphellip 이런 면에서 인간이

돼 있어야 하고 둘째는 사진예술을 한다고 해서 사진예술이 무엇이냐helliphellip 이것만을 추궁해서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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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요 좀 더 시야를 넓혀서 예술이라는 게 뭐냐 mdash 하는 걸 먼저 알아야지 셋째에 가서 사진예술이

라는 게 뭐냐 mdash 를 연구하고 넷째에 가서야 비로소 작품이라던가 창작의식 기교 기술에 대한 검

토를 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기본조건을 머리 속에 언제나 간직하도록 나는 주장해 왔어요

임 기술면을 등한히 할 수는 없겠지요 기술 없이는 표현이 안되니까helliphellip 그러나 이선생 말씀처럼 인

간본연의 문제도 크긴 큽니다 다른 예술부문의 사람보다 교양면에서 뒤떨어지지나 않는가 mdash 하는

것이 항상 염려되는데helliphellip 만일 뒤떨어진다면 큰일이지요 기술도 중요한 문제겠지만 교양인격 같

은 것도 예술가가로서의 긍지를 위해선 떨어질 수 없는 문제고helliphellip 더욱이 좋은 기술을 가졌으면서

도 기초교양이 모자라서 좋은 작품을 낼 수 없다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으니까helliphellip 교양인으로서의

자격도 다른 예술부문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사진을 해야할겝니다

이 기교나 기술을 어떻게 우물쭈물 배웠다고 해서 작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helliphellip 예술이란 그 자체

에 대한 조예부터 깊어야 합니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조리개가 얼마다 타임이 어

떻다helliphellip 암실작업은 어떻게 하는 거다helliphellip 이것만을 알았다고 해서 작가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에

요helliphellip 인간면 예술면 기술면에 똑 같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마 사진을 연구하겠다는 신

인들의 기본이념이 돼야 할겝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지도한다는 면에서

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거든요 mdash

임 어쨌든 기술을 위주로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난 옛날 얘기입니다

지도자 시비

이 지났다기 보다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는 장래에나 변할 수 없는 기본이념이겠지요 사진이라는 것

은 더욱이나 고도의 대중성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인격과 교양이 필요해요 기계라는 거야 찍으면

사진이 되도록 마련된 것이니까 예술까지는 못 가도 사진은 되거든 mdash 그러니까 그것을 예술로 이

끌려면 찍는 사람의 성분이 문제되는 것이지요helliphellip

임 그런 의미에서도 사단의 규정이 필요하고 작가라는 규정이 필요해요 사단이라는 것에 너무 엄격한

규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helliphellip 만년필을 가졌다고 해서 전부 문학가가 아니라면helliphellip 카메라를 메었

으니 작가다 mdash 하는 엉터리도 용납될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우선 필요한 것은 취미 도락이라는 관념

을 지양해야 할 텐데helliphellip

이 취미가 차차 심각해지면 창작의식도 생기는게니까helliphellip 그런 사람들을 지도 계몽해서 한 사람이라

도 작가로 이끌어야 하겠지요helliphellip 카메라를 살 때부터 나는 사진작가가 되겠다 mdash 하는 사람은 있

을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임 lsquo싼데이rsquo 카메라맨은 논의의 대상이 안되구요helliphellip (웃음)

이 그러니까 지도자들이 작가적인 태도에 확고한 이념을 앞세우고 지도에 임해야 하는 건데helliphellip

본지 각 단체 지도층의 지도방침에 대한 구체적인 태도를 어떻게 규정하겠습니까 helliphellip

임 우선 사진에 대한 인식부터 고쳐야 해요 말이 중복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친구 좋고 사진 좋아서 우리

끼리 하면 그만이다 mdash 하는 생각들이 많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만이라도 그렇지 않다

관련 자료 소개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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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싶어요 학생들이 카메라를 사 가지고 몇 사람 모였으니까 책임자 격

인 선생이 필요하다 mdash 해서 책임 맡았다는 사람으로는 지도가 안 될 게 아닙니까 그렇다고 청해 오

지도 않는데 내정 격으로 뛰어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구helliphellip (웃음)

본지 또 한 가지 요즘 일대 성황을 이루는 것이 소위 현상사진(懸賞寫眞)이라는 건데요helliphellip 이 현상사진

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진에 대한 모욕도 있지helliphellip

임 거 참 꼴사나운 일이 많아요 현상이란 걸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helliphellip 그 하나는 어느 연구

단체에서 순수한 의미에서 발표 바탕이 없는 아마추어를 위해 마련하는 경우가 있을게고 또 하나는

선전용으로 포스터 mdash 같은 데에 써먹기 위한 상업 정책적인 의식에서 모집하는 현상이 있을 테지요

이 어느 경우이건 간에 좌우간 현상 모집을 하는 목적이 있는데helliphellip 응모자는 우선 현상의 목적부터 확

실히 알고 응모를 해야 하겠지helliphellip

임 그렇죠 그런데 이 상업 정책적인 현상의 경우에는 사진문화에 대한 모욕적인 행동이 퍽 많습니다

이거 참 불유쾌한 일이지만helliphellip 가령 예를 들자면 응모자는 원판을 제공하라던가 또 낙선자의 작

품은 일체 반환치 않는다는 따위helliphellip이게 얼마나 사진예술에 대한 모욕적 행위입니까 helliphellip

이 그래요helliphellip 확실히 모순된 일입니다

임 필요에 의해서 현상모집을 했으니까 당선된 작품은 물론 필요하겠지만helliphellip 낙선작품을 반환치 않는

다는 것은 언어도단 입니다 낙선이 됐다 해도 작가의 입장으론 대단히 귀중한 하나의 작품일 텐데

그걸 안 돌려 준대서야 말이 되나요 주최측은 낙선작품의 원화를 돌려 줄만한 성의를 가져야 도리

에 맞을 텐데helliphellip 요즘 현실은 lsquo낙선rsquo이란 푸대접 밑에 원판까지 몰수당하는 판국이니helliphellip 원 참

이 그러니까 응모자는 무엇보다도 현상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지helliphellip 여러 번 겪은 일이지만 심사를

하다 보면 전혀 현상 취지를 도외시한 작품들이 있는데helliphellip

임 그거야 보나마나 낙선이죠 (웃음)

이 그러믄요 현상 응모자로서는 출품 규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 아니겠어요

임 그럼요

이 그런데 어떤 것은 작품에 제목도 없는 것이 있거든요 그런가 하면 제목과 작품내용이 전혀 특이한

엉터리도 있구helliphellip

임 저도 여러 번 겪은 일입니다

이 제목이란 것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벌써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찍는다는 의식이 있는 이상

제목도 정해져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아주 작품과 제목이 동떨어진 것들이 응모해 오니까

낙선의 자격이 충분할 수밖에helliphellip 하하하 (웃음)

임 그게 모두 사진에 대한 성의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이 그래요 성의가 없어요 자기 작품에 대해선 최선의 성의를 다 해야 할 텐데 그런 태도가 없거든helliphellip

제목을 안 썼는지 못 썼는지는 모르지만helliphel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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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그저 무턱대고 발표의식만 왕성한 까닭이 아닐까요

이 그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된 작가가 아닌 이상 발표기회가 좀처럼 없을 테니까

자기 실력의 평가를 받는다던가 남들과 경쟁해 본다는 의미에서 현상에 자주 응모하는 것은 좋은데

helliphellip 아 어떤 친구는 자기 실력 생각은 하지도 않고 상품이 적다 많다 시비를 하는 친구도 있으니 참

기가 막힐 일이지

주최자의 무성의도 고쳐져야 하고

임 그건 lsquo현상rsquo이라고 내거는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순수한 사진연구단체에서 모집할 때는

lsquo공모전rsquo이라던가 하는 문구가 좋지 않을까요 lsquo현상rsquo이라니까 lsquo상rsquo을 바라게도 되겠지만 어쨌든

lsquo현상rsquo이란 말 자체가 순수하지 못해요

이 그건 확실히 생각해 볼 문제이겠군요helliphellip 순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helliphellip 응모자들이 심

사원이 누구냐mdash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도 순수하지 못하고helliphellip 또 주최자가 모집광고를 낼 때

lsquo심사원은 추후발표rsquo라mdash하는 것도 순수하지 못해요 이것도 참 불쾌한 일인데 lsquo추후발표rsquo라는 걸

다시 생각하면 lsquo준비가 안됐다rsquo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심사원의 준비도 안 해 놓고 현상을 모

집하는 그런 무성의가 또 어디 있어helliphellip 이건 일종의 사기가 아니면 거만일 겝니다

임 그나 그뿐인가요 lsquo심사원은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함rsquohelliphellip 하는 모호한 광고도 있지요 응모자의 입

장에서 생각하면helliphellip 심사원에 불만이 있으면 응모를 아니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 심사원 문제만

은 정정당당히 명시해야만 나중에 가서 심사에 대한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출품을 한 다음에 심사

원이 발표된다는 것은 심사에 대한 불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helliphellip

이 그리고 응모자의 동태를 가만히 보면 아까 얘기가 나왔던 소위 lsquo취미정도rsquo라는 층의 발표 의욕이 굉

장해서 대부분의 응모자가 이 부류인 것 같은데helliphellip 여기 한 가지 탈이 있어요 현상응모 작품의 심

사라는 것은 무제한의 심사 레벨을 놓고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응모 작품 중에서의 우수 작품을 가

려낸다는 것은 이거 상식 문제가 아닙니다

임 그렇죠

이 아 그런데 어떻게 해서 현상에 당선이 되거나 특히 특선이라도 하면 그만 자기가 갑자기 위대한

작가라도 된 것처럼 대가연(大家然) 하고 으쓱대는 친구들이 많아서 걱정이야helliphellip (웃음)

이 lsquo특선rsquo이라는 것은 응모해 온 작품들 중에서 특선이지 결코 한국 사단 전체의 수준에서 특선이라

는 것은 아닌데helliphellip 그만 한 번만 당선되면 코가 높아지고 대뜸 대가 행세를 하려고 드니helliphellip 참

신인들은 특히 조심해야 할 일이지

남의 것보고hellip 우리 것도 보내고hellip

본지 이제 화제를 좀 바꾸어서 세계사단의 동향을 좀 말씀해 주실까요

임 세계사단의 얘기라면 직접 보아야만 얘기가 될 텐데helliphellip

이 서울 바닥에서 썩으면서 세계사단의 얘기를 어떻게 본 듯이 할 수가 있겠나 카메라를 메고 세계일

관련 자료 소개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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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도 했어야 얘기가 되지

임 그것보다도 사진을 통한 국제 교류 얘기나 합시다

이 그게 좋겠군helliphellip 얼마 전에 덕수궁에서 자유중국의 소개사진전시가 있었죠 미국공보원의 활동도

이를 테면 국제교류의 한 형식일게고helliphellip

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자유중국과 월남의 사진전시가 있었는데helliphellip 우리도 수출을 한다면 그 보

다 훨씬 좋은 작품들이 나갈걸요helliphellip

이 한미합동전이던가 한중합동전 같은 것도 하면 역시 국제교류가 되겠지요helliphellip

임 한미합동전은 불원한 장래에 개최될 것입니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lsquo인간일가(人間一家)rsquo의 사진

이 아마 이월쯤 한국에 올 겝니다 미국대사관이 주동이 돼서 작품 503점 전부의 전시회 계획이 추

진되고 있으니까요

이 남이 보내줘서 본 것은 있지만 우리가 남에게 보여준 것은 없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야 우리도 남에

게 보여줘야 교류가 될 텐데helliphellip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두 사람의 작품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임 개인적인 활동은 있었지요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사진살롱에 사진을 보내고 있으니까 개인

적으로는 더러 나간 셈이죠 개인들의 수출이라도 좀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지만

이 우리의 것을 내보내고 외국 것을 들여와서 서로 감상하고 연구하는 게 이를 테면 국제교류인데

아마 명년쯤엔 될까 몰라

임 작품교환전 같은 것을 위해서 대대적인 계몽운동이 필요 하겠죠

이 그렇죠 운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어요

임 그런데 근본적인 얘기를 하자면 한국 작가의 역량이 아직도 부족한 것 같아요 언젠가 외국 작가에

게서 들은 말인데mdash한국 사람은 한국을 보지 않았다mdash하는 얘길 해요 사진 작가에게 대한 말이지

만helliphellip 나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이 퍽 중요한 얘기다mdash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를 직시하는 것만이

사진은 아니겠지만 실용사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것이 사실 아닐까요 회화적인 쌀롱 픽처라던

가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리얼리즘 사진이라는 것에 너무들 치우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 국제 교류의 시발은 역시 소개적(紹介的)인 것 다시 말해서 르포르타주적인 것이겠으니까helliphellip

임 외국 작품의 모방 같은 것은 이제 집어치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mdash예술적인 것 이것만을 너무 추

구했기 때문에 사실이 한국적인 것과 국민성의 묘사 같은 것이 잘 되지 않았지요 정서적인 것에만

너무 골몰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일이고 helliphellip 예술을 위한 예술에 정신들이 팔려 있었지나 않은

지helliphellip 예술을 하기 위한 사진이라는 관념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이 예술을 염두에 안 둔다면 실용사진이 돼 버리게

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너무 치우친 것 같단 말입니다

이 특히 국제 교류를 생각한다면 아닌 게 아니라 외국처럼 르포르타주적인 사진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할거에요

임 그래요 거기에 예술성을 띄워서 소화할 만한 역량 있는 작가가 필요해요

이 또 하나의 가장 큰 문제는 위정자의 관심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 큰 난관입니다 국제 교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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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가족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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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말이고 역시 정부당국자의 적극적인 주

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어디 그래요

임 우선 사단 자체의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작가들의 작업도 촉구되어야 하구helliphellip 아까도 말이 나왔지

만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 출품을 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점 같은데서 작가들의 반성도 필

요하고helliphellip

이 개별적으로 미국 등지에 보낸 것은 아마 상당한 수가 되겠지요

임 그럼요 그랬는데 왜 성과가 없느냐mdash하는 반성이 있어야죠

이 오늘의 현실을 예술적인 면에서 기록하고 작품화 해야겠는데helliphellip 막연하게 예술을 위한 작품을 보

내니까 기교적으론 훌륭할지 몰라도 작품 자체에 내용이 없어서helliphellip 그래서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닐

임 그런 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빨리 우리의 수준을 높여서 국제 조류와 호흡을 맞추어 나가

야 할 것입니다

이 이거 아마추어를 위한 얘기라는 것이 잠깐 탈선을 한 것 같군 그러나 이런 문제도 참고가 되긴 하니

까helliphellip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합시다

본지 수고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helliphellip

(기록 O기자)

이해선 「lsquo백오(白烏)rsquo의 변(辯)」 『동아일보』 1957년 4월 9일 4면

30여년 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입학

이 되었을 당시 자축기념하는 의미에서 호(號)를

하나 지어본 것이 백오(白烏)라는 두 글자였다 처

음 듣는 사람들 중에서는 거문[검은] 까마귀는 있

지만 흰 까마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서로 웃어버리고 그 뜻을

설명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자의

(字意)를 해명해볼까 한다 백(白)은 흰 빛이요 오

(烏)는 흑색으로 통하므로 우선 흑백을 대조시켜

놓고 흰 종이 위에다 검은 먹으로 휘호(揮毫)할 것

이니 그 뜻이 내 생활과 부합될 것 같으며 둘째로

백 자(字)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첫 자를 떼어놓

고 오는 반포오(反哺烏)로 그 이름이 높은 새이므

로 평소에 효자 노릇을 못하여 온 나의 좌우명으로도 적당할 듯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새 중에서는

혹간(或間) 백변종(白變種)이 생겨나는 수가 있는데 그 흰새를 서조(瑞鳥)라고 떠들던 옛 시절도 있었으므

관련 자료 소개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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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내가 우연히 호를 지어 본 것이 검은 까마귀떼 속에서 서조 백오를 발견하였으니 나의 전도(前途)에는

반드시 서광(瑞光)이 비칠 것 같으므로 이상 여러 가지 의미를 차례로 생각해 볼 때에 나에게는 이 외에 더

좋은 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자의였었고 궁금한채로 불려온 백오

였었다 만담궁변(漫談窮辯)을 물소물책(勿笑勿責) 하소서 (사진가)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

이해선 「중요한 내용middot형식-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년 10월 20일 5면

사진작품에는 사진 특유의 형식이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러한 특유의 형식에 알맞은 표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의 특수성은 형식이 가지는 특수성 보다는

기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주관적이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작품심사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동일하게 중요시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작

품 속에서 그야말로 형식과 내용이 알맞게 부합된 특출한 작

품을 볼 수는 없었다 형식이 좋으면 내용이 빈약하고 좀 내

용이 있으면 형식이 미숙하고helliphellip 모두 결점이 있다 그러나

입상작으로 뽑은 8 점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

다 그리고 금년에는 lsquo칼러rsquo사진의 응모 점수가 30점이나 되

고 그중에서도 3점이 입상되었고 또 9점이 입선되었다는 것

은 lsquo칼러rsquo 사진의 앞날을 위해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lt전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장gt

[제1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년 2월 8일 5면

외국작품의 세련되고 빈틈없는 lsquo테크닉rsquo은 국내작품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서 우선 국내

작품을 형식에서부터 누르고 말았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이루게 된 것은 국내작가들

의 역량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lsquo국산인화지rsquo가 얼마나 엉터리고 조악한 것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대체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더욱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은 이와 반대적인 경향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예술이든 먼저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볼 때 국내작품의 후진성은

두말할 것 없이 형식의 경시에 있다고 하겠다 심사결과 흑백부에서나 lsquo칼라rsquo부에서 겨우 동상으로 한 점

씩 밖에 국내작품이 입상되지 못했다는 것은 다소 섭섭한 느낌이나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경종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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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더욱 우리 심사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독에서 응모한 lsquo칼라rsquo

작품이었다 물체의 외관 색감을 초월한 내면의 lsquo이미지rsquo가 발

산하는 짙은 감정의 색감으로 작가의 개성과 사상을 인상 깊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내 lsquo칼라라보rsquo의 후진

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상작으로 뽑힌 외국작품들은 오

늘의 세계 사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는 큰 자극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

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제2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총 818점 응모-사진예술에 도움」

『동아일보』 1967년 2월 9일 4면

지난해와 같이 흑백부문에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들은 모두가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산인화지의 조악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작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올해는 흑백

부문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기꺼운 일이라고

하겠다

특히 칼라작품에 있어서는 독일의 작품들이 특출했고 이들 작품들의 색감은 현대 과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 최고상으로 뽑힌 lt잊은 친구gt와 몇 점의 입상작품들은 칼라릴리프와 소라리

세이숀[솔라리제이션] 등의 수법으로써 모티

브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를 초객체적이고 추

상적으로 표현하고 작가의 짙은 개성과 사상

과 철학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입상작으로 뽑은 16점의 작품들은 오늘의

세계사단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

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심사위원 이해선 (위원장) 임응식 서순삼

박필호 안월산 정인성 최경덕 (이상 7명)

관련 자료 소개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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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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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관련 자료 소개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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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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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관련 자료 소개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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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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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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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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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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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관련 자료 소개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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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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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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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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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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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6: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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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 「고궁풍물(3)」 『포토그라피』 1971년 3월호

_______ 「고궁풍물(4)」 『포토그라피』 1971년 4월호

_______ 「고궁풍물(5)」 『포토그라피』 1971년 5월호

_______ 「고궁풍물(6)」 『포토그라피』 1971년 6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7)」 『포토그라피』 1971년 7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8)」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포토그라피 창간5주년에 붙여서」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9)」 『포토그라피』 1971년 9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0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1)」 『포토그라피』 1971년 11월호

_______ 「고궁풍물-경복궁 편(12)」 『포토그라피』 1971년 12월호

「제2회 사진국전마감 심사위원결정」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이해선 「이해선 떡에 얽힌 시속(時俗)의 금석(今昔) 옛떡이 사라져 간다는데」

『월간 중앙』 1973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1)」 『포토그라피』 1973년 8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2)」 『포토그라피』 1973년 9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0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3)」 『포토그라피』 1973년 1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6)」 『포토그라피』 1974년 2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7)」 『포토그라피』 1974년 3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8)」 『포토그라피』 1974년 4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9)」 『포토그라피』 1974년 5월호

_______ 「고궁-창덕궁 편(끝)」 『포토그라피』 1974년 6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 『포토그라피』 1974년 7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2)」 『포토그라피』 1974년 8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3)」 『포토그라피』 1974년 9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4)」 『포토그라피』 1974년 10월호

_______ 「작가와 작품-풍물백태 중에서」 『포토그라피』 1974년 1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5)」 『포토그라피』 1974년 1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6)」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7)」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8)」 『포토그라피』 1975년 3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9)」 『포토그라피』 1975년 4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0)」 『포토그라피』 1975년 5월호

_______ 「고궁-비원 편(11)」 『포토그라피』 1975년 6월호

_______ 「곡필무사(曲筆誣事)를 밝힌다」 『월간 중앙』 1975년 11월호

「영상 창간 1주년 기념 좌담회 한국 사진 산업의 의 오늘과 내일」 『영상』 1976년 6월호

「국전 초대작가 8인선 김조현 이건중 이경모 이해선 임응식 이형록 정인선

조현두」 『영상』 1977년 1월호

「남기고 싶은 작품 3 이해선」 『영상』 1977년 5월호

「예술사진에 대한 견고한 확신 이해선 사진의 예술성」 『영상』 1978년 5월호

「한국현대미술대전」 『영상』 1978년 10월호

이명동 「처음 제정된 사진문화상에의 기대」 『영상』 1979년 2월호

「행사 백오 이해선 선생의 사진작품집 출판기념회」 『영상』 1981년 2월호

「작품집 소개 이해선 작품집 중에서」 『영상』 1981년 4월호

박재능 「다양한 자기 세계의 길」 『영상』 1981년 12월호

「영상방담-사단의 이 얘기 저 얘기 김정래 임석제」 『영상』 1982년 1월호

「이미지의 합창-봄의 첫 장」 『영상』 1982년 4월호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 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호

岩宮武二 「너 어디 있느냐」 『영상』 1983년 1월호

최인진 「1930년대의 아마츄어 사진활동」 『사진사연구』 통권 제5호 1983년 9월호

박재능 「월평-원로 이해선 선생을 추모한다」 『영상』 1983년 12월호

「한국 근대미술의 발자취」 『계간미술』 중앙일보사 1985년 봄호

「다시 보는 명작 정도선 정인선 신현국 강대환 김일창 이해선」 『영상』 1986년 10월호

「고 백오 이해선 선생 추모비 건립」 『영상』 1989년 1월호

「동경 유학생들의 한국 근대미술」 『월간미술』 1989년 9월호

「화보로 보는 한국 동경 유학생들의 자화상」 『미술세계』 1993년 5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조선총독부 관보』 제4087호(192647) 한국학문헌연구소 서울 아세아문화사 1926

이태현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1집 서

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2

_______ 「동경미술학교 유학 한국인 졸업작품 자화상에 관한 연구」 『예술문화논총』

제3집 서원대학교 예술문화연구소 1994

신명호 「일제하 이왕직과 이왕가 족보」 『한국학대학원논문집』 제11집 한국정신문화

연구소 1996

최인진 「한국사진 역사의 증인(4) - 사단의 단체 활동과 이해선」 『한국사진』 2002

이가라시 코이치 이중희 역 「조선미술전람회의 창설과 서화」 『한국근대미술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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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철 「도쿄미술학교의 입학제도와 조선인 유학생」 『동악미술사』 제6호 2005

허보윤 「미술로서의 디자인 이순석의 1946-1959년 응용미술교육」 『조형_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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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철 「도쿄미술학교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_아카이브』 제2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형연구소 2010

단행본

조우석 『한국사진가론』 눈빛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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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cker Anne Iizawa Kotaro Kinoshita Naoyuki The History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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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선 『이해선 사진집 사진으로 남은 1950-60년대』 눈빛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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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7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일간지

「부산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24531

「성공을 기대 조선사진연구회 현일영 씨 담」 『조선중앙일보』 1936826

「경성아마사진구락부 제1회전」 『조선일보』 1938417

「사진작품전」 『동아일보』 19381014

「경성사진동호회 작품전람회개최」 『조선일보』 19381027

「사진동호회작품전」 『동아일보』 1938112

「경성아마추어 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39527

「아마추어 사진인화전」 『매일신보』 19391115

「동서남북-lsquo아마추어rsquo 제4회 인화전람회」 『동아일보』 19391115

「동서남북-합동인화전」 『동아일보』 1940126

「아마추어 사진의 인화전」 『매일신보』 194074

「경성아마츄어 제5회 인화전」 『조선일보』 194075

「경성백양사우회 제1회 인화전람회 개최」 『매일신보』 19401113

「제2회 사진전 명일부터 화신에서-백양사우회」 『매일신보』 19411124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55

「사진작품전」 『조선일보』 1946119

「전국문화총연발족」 『동아일보』 194729

「제1회 조선사진예술전」 『경향신문』 19475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7510

「사진전람회개최」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전응모작 답지」 『경향신문』 1947615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 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629

「제1회예술사진전람회 15일부터 동화백화점」 『경향신문』 1947713

「예술사진 입선 수상식을 거행」 『경향신문』 1947720

「예술사진전 19일부터」 『동아일보』 1947121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8224

「사예(寫藝) 2회전 작품을 현상모집」 『경향신문』 19481013

「예술사진전 심사 오는 8일로 연기」 『동아일보』 1948127

「지방출품우수-제2회 예사전」 『동아일보』 19481212

「사진예술전 22일부터 동화화랑서」 『동아일보』 19481221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964

「전국종합사진전 심사결과-특선1석 최인집 씨」 『동아일보』 194977

「사진예술의 정화-제3회 전국예술사진전」 『경향신문』 19491010

「예술사진전 30일로 마감박도」 『경향신문』 19491128

「예술사진전 입선자 발표」 『경향신문』 19491213

「예술사진전시회」 『동아일보』 195316

「춘계사진섭영회 26일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3

「본사후원 춘계촬영대회 오늘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6

「사진현상모집」 『경향신문』 1953517

「특선에 lt만춘gt」 『경향신문』 1953527

「인화 당선자 수여식」 『경향신문』 1953529

「사진작품발표전」 『경향신문』 1954413

「예술사진전시회 US-S화랑서」 『동아일보』 1954415

「집회」 『동아일보』 1954916

「경복궁서 촬영대회」 『경향신문』 1954919

「내 26일 촬영대회 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4922

「사연 촬영대회 여감(餘感) 아마추어 사진도(寫眞道)」 『동아일보』 1954103

「문화집합」 『동아일보』 1955122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77

「사연(寫硏) 창립 10주년 기념 어제 촬영대회 성황」 『동아일보』 1955711

「촬영대회 입선작 결정」 『동아일보』 1955819

「8인 사진전 개최」 『동아일보』 1956329

「9회 사연(寫硏)전」 『동아일보』 1957414

「신록촬영대회 개최 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62

「대한사진예술가협회서 사진전시회 개최」 『동아일보』 1958711

「10년 후의 우리 문화 건국 20주년을 장식하고 싶은 것」 『동아일보』 1958821

「사진예술가협회 11회 회원작품전」 『동아일보』 195979

「문화 소식」 『동아일보』 1960119

「국전에 사진부문도」 『동아일보』 1963410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결정 특선 조천용 작」 『동아일보』 19641020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653

「렌즈의 향연 영예의 초점-제4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동아일보』 196667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61217

「사진예술가협회전」 『동아일보』 19681022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9830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996

「국립공보관 12월 전시회 스케쥴」 『경향신문』 1971126

「문화단신」 『경향신문』 19721128

「사진예술협 작품전 7일까지 공보관서」 『매일경제』 1973111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에 안준천 씨」 『경향신문』 197526

「동아포우스트」 『동아일보』 19751117

「사진예술가협회 창립30돌 기념전」 『경향신문』 19751118

「추계 친목 촬영대회」 『매일경제』 197610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7830

「사진예술가협 정총(定總) 31일 하오 대동관서」 『매일경제』 19781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81031

「문화광장」 『동아일보』 1993121

「한국사진예술 50년을 펼친다」 『한겨례』 1994111

「사진예술가협 사라진 풍물전」 『서울신문』 20051025

월간지 계간지

「사진클럽 지상소개 대한사협의 발자취」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박필호 「논단 대한사협16회전을 보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210-280 140p-180p 0723_1 14 07 23 오후 823 페이지 157

158

「대한사협 16회전」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사협 16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8년 7월호

「대한사협 충남지부 회원전」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경축 창간 3주년 사진과 관광 포토그라피-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대한사협 18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제18회 대한사협전」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 작품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70년 3월호

「축 창간4주년 서울 선데이 카메라 클럽」 『포토그라피』 1970년 8월호

「축 포토그라피 창간 5주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김종양 씨 대한사협 고문 추대」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3년 3월호

「lt파도gt 김도현 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신춘초대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근하신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75년도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창작선」 『영상』 1977년 1월호

「전시장 순례 대한사진협회 회원전」 『영상』 1977년 11월호

「지상소개-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대한사협 제27회 정기총회 개최」 『영상』 1979년 7월호

박필호 「대한사협 27돐에 대한 축사」 『영상』 1979년 7월호

「제26회 대한사협전」 『영상』 1980년 1월호

「제27회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사진전시회」 『영상』 1980년 12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요강」 『영상』 1981년 5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영상』 1981년 10월호

「탐방-뜻이 있으면 길이 있게 마련 세 번째 전국대학사진 공모전을 연 대한사협충

남지회의 단합된 모습」 『영상』 1983년 1월호

「제3회 전국대학생사진 공모 제12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월호

「제13회 대한사협 충남 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2월호

최인진 「경성아마츄어카메라구락부를 말한다」 『사진사연구』 1984년 7월호

「대한사협본부 주최 제9회 한국국제사진전 입상자」 『영상』 1989년 1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대한민국예술원 편 『한국예술총감 자료편』 대한민국예술원 1965

한국사진협회 「사진계소식 1969년도」 『한국사진연감』 1970

_____________「한국사진협회의 연혁 1976년 10월 30일」 『한국사진연감』 1976

임범택 「사진」 『1977년도 문예연감』 1978

______ 「사진」 『1978년도 문예연감』 1979

한국사진협회 「역대역원명단(歷代役員名單) 1962년~1987년」 『한국사진연감』

1988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제1장 한국사진협회 창립 이전의 사진계 동향」 『한국사협

사 I 1945-1970』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01

최인진 「해방 초기의 사진잡지 연구-『국제보도』와 『사진문화』를 중심으로」 『한국

사진학회지 AURA』 제10호 2003

박혜성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사진문화』 목록 및 해제」 『한국 사진 잡지

『사진문화』 연구』 명지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한국사협 50년사』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13

단행본

임응식 『내가 걸어온 한국사단 임응식 회고록』 눈빛 1999

작품집 도록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제16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7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8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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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9

원 문 자 료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년 10월 29일 4면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년 4월 17일 4면

1 이해선 양화기(洋畵期) 관련 참고 자료

「입선자의 방명록」『매일신보』 1926년 5월 12일 3면

「금조 개장한 동미전 제2회」『동아일보』 1931년 4월 12일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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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참고 자료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년 5월 5일 2면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년 6월 29일 3면

「신록촬영대회개최-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년 6월 2일 4면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년 7월 7일 4면

예술사진전 조선사진예술연구회에서는 5월 6일부터 동11일까지의 6일간에 걸쳐 동화백화점(舊三越) 갸라리--에서 창립기념사진전을 개최하기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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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해선 관련 원문 자료

원문은 당시의 표기를 그대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현재의 띄어쓰기와 맞춤법에 맞지 않는 부분들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수정하였고 일부 [ ] 안에 병기했다 원문의 한자는 모두 한글 독음으로 고쳤으며 의미 전달을 위해 필요한 경우 ( )안에 병기했다

「대담 아마추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 pp 48~52

작가가 사태(沙汰)났어

본지 공사간에 바쁘실 텐데helliphellip 사진문화의 발전을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

해 주십사 하는 것은helliphellip 요즘 각 직장이나 학생들 간에 사진열이 굉장히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 비

추어서 이 아마추어 카메라맨의 지도 문제를 비롯하여 초보자의 진로랄까helliphellip 이런 문제에 대한 말

씀을 좀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해선6middot25 동란 후에 개인적으로 사진을 연구해 보겠다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직장이나 학교 단위로

사진동호자의 클럽이 많아 지고 작품 발표라던가 전시회 같은 것이 무척 많아졌는데helliphellip 어쨌든

일반 사회인이나 학생 간에 사진열이 높아졌다는 건 기쁜 일이야

임응식그런데 아직도 이 카메라를 사치품으로 취급하는 층이 많아서 곤란해요

이 나라(정부)에서부터 사치품 취급을 하더군helliphellip 여자들이 다이아몬드를 사려는 것과 사진을 연구하

려는 사람이 카메라 장만하는 것을 똑같이 취급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곤란

하지

임 헌데 우리 사단(寫壇)에선 우선 lsquo사진작가rsquo라는 용어를 쓰는 데에 신중을 기해야 하겠어요 웬 놈의

lsquo사진작가rsquo가 그리도 많은지helliphellip 이건 카메라만 메고 다니면 모두 작가 행세를 하니helliphellip

이 카메라 멘 것이 모두 lsquo작가rsquo라면 대한민국에 lsquo사진작가rsquo가 수 십만도 될 걸helliphellip 작가라는 친구들을

체에 넣어서 걸러 놓으면 엄격한 의미에서 진짜 lsquo작가rsquo는 몇 사람 밖에 없을 텐데helliphellip

임 호주머니에 만년필을 꽂았다고 해서 문학가 혹은 소설가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겠는데hellip

hellip 어쨌든 요즘 성행하는 사진작가의 사태를 우선 잡지에서 만이라도 용어 사용에 엄격한 규정을

지어서 질서를 잡아 주어야겠어요

이 그것도 과도기적 현상이겠으니까 차차 지양되겠지helliphellip 오늘 해달라는 얘기는 그런 넋두리가 아닐

테니까 어디 이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본지 한마디로 얘기하자면helliphellip 카메라는 어떻게 해서 장만을 했는데 mdash 자 그 다음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겐지 몰라서 어쩔 줄 모르는helliphellip 이런 아마추어와 초보자들의 진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얘기를

좀helliphellip 현재 직장 단위로 사진 동호자들이 모여서 클럽을 이룩한 것이 십 여 개 있고 학교 단위로는

이십 여 개나 되는데요helliphellip

관련 자료 소개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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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인식이 안이해서 탈이야

이 극히 초보적인 입장에서 사진을 해보고 싶다helliphellip 다년간 연구를 한 다음엔 작가가 돼 보겠다 mdash 하

는 사람들을 회원으로 해서 수 십 년 동안 연구를 해 왔는데helliphellip 오늘날 하고 있는 일도 그것이지만

helliphellip 여러 부문에 걸쳐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서적인 면에서 사진과 친해보고 싶다던가

또는 카메라를 장만했는데 어떻게 하면 앞으로 향상 발전할 수 있는가 mdash 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신인이라고 하겠지 특히 학생들의 교내 활동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helliphellip 헌데 막상 다다

르고 보면helliphellip 어떠한 길이 올바른 길인지 막연해 하는 모양이더군요

임 초보자들은 무엇보다도 사진 자체에 대한 정의를 뚜렷이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아마추어 mdash

하면 취미적 입장에서 사진을 다루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조각이나 회화와 같이 사진도 어엿한 예술이니

까 취미 도락(道樂)적인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예술을 추구하는 진지한 마음의 준비가 우선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물론이죠 대개 클럽 조직이 되어 있으니까 선생들의 지도를 받고 있겠지만 내가 알기에는 전문가

가 아닌 다시 말하면 취미 정도에서 관심이 있는 선생들이 지도를 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역시 전문으

로 사진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지도를 가끔씩이라도 받는 게 좋겠지요

임 지도를 한다는 사람들의 태도부터가 성실성이 없는 것 같아요 만년필을 샀으니까 나도 한 번 써 보

자 mdash 해서 작가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취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남의 lsquo지도rsquo를 담당

할 수는 없을 텐데 mdash 우리가 사진을 전공한대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억지로 지도해 주겠다고 밀고

들어 가겠다는 건 아니지만 mdash (웃음) mdash 어쨌든 전문가의 지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학생 클럽이나 직장 클럽 같은 동호자의 모임을 사단의 일부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취미

에서 시작했더라도 일정한 과정을 밟고 다년 연구를 거듭하면 자연히 작가를 지향하게 되겠지만hellip

hellip 그런 면에서도 처음 싹트기 시작하는 신인의 지도가 퍽 중요한 것이지요

취미middot도락이란 관념을 버려야 해

임 지금 형성되어 있다는 직장이나 학교 단체의 거의 전부가 전문적인 입장에 서 있지 않은 것 같더군

요helliphellip 사진에 대한 근본 의식이 너무도 안이한 것 같아요 카메라를 통한 표현의식에 절실한 감정

이 없어요helliphellip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비판을 받지 않는다helliphellip 하는 따위의 도피를 해서는 곤란

하죠helliphellip 창작의식이 확고하게 수립되지 않아서는 향상이 없는 것인데helliphellip 소문에 듣자면helliphellip 너

무 기술 면에만 치중하고 정신적인 면이 소홀히 취급된다는 거에요 helliphellip 나는 직장을 갖고 있으니

까 사진이란 것은 취미 정도로 한다 mdash 하는 태도를 버려야죠 특히 이 점은 지도자들에게 권하고 싶

은데helliphellip 예술의식helliphellip 이것이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절대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까

이 그렇구 말구요helliphellip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새로 사진을 공부하겠다는 신인들에게 네 가지 의식을 주

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휴머니즘 mdash 우선 사람이 돼야 하거든요 교양이라던가 인격 덕망helliphellip 이런 면에서 인간이

돼 있어야 하고 둘째는 사진예술을 한다고 해서 사진예술이 무엇이냐helliphellip 이것만을 추궁해서는 안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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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요 좀 더 시야를 넓혀서 예술이라는 게 뭐냐 mdash 하는 걸 먼저 알아야지 셋째에 가서 사진예술이

라는 게 뭐냐 mdash 를 연구하고 넷째에 가서야 비로소 작품이라던가 창작의식 기교 기술에 대한 검

토를 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기본조건을 머리 속에 언제나 간직하도록 나는 주장해 왔어요

임 기술면을 등한히 할 수는 없겠지요 기술 없이는 표현이 안되니까helliphellip 그러나 이선생 말씀처럼 인

간본연의 문제도 크긴 큽니다 다른 예술부문의 사람보다 교양면에서 뒤떨어지지나 않는가 mdash 하는

것이 항상 염려되는데helliphellip 만일 뒤떨어진다면 큰일이지요 기술도 중요한 문제겠지만 교양인격 같

은 것도 예술가가로서의 긍지를 위해선 떨어질 수 없는 문제고helliphellip 더욱이 좋은 기술을 가졌으면서

도 기초교양이 모자라서 좋은 작품을 낼 수 없다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으니까helliphellip 교양인으로서의

자격도 다른 예술부문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사진을 해야할겝니다

이 기교나 기술을 어떻게 우물쭈물 배웠다고 해서 작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helliphellip 예술이란 그 자체

에 대한 조예부터 깊어야 합니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조리개가 얼마다 타임이 어

떻다helliphellip 암실작업은 어떻게 하는 거다helliphellip 이것만을 알았다고 해서 작가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에

요helliphellip 인간면 예술면 기술면에 똑 같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마 사진을 연구하겠다는 신

인들의 기본이념이 돼야 할겝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지도한다는 면에서

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거든요 mdash

임 어쨌든 기술을 위주로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난 옛날 얘기입니다

지도자 시비

이 지났다기 보다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는 장래에나 변할 수 없는 기본이념이겠지요 사진이라는 것

은 더욱이나 고도의 대중성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인격과 교양이 필요해요 기계라는 거야 찍으면

사진이 되도록 마련된 것이니까 예술까지는 못 가도 사진은 되거든 mdash 그러니까 그것을 예술로 이

끌려면 찍는 사람의 성분이 문제되는 것이지요helliphellip

임 그런 의미에서도 사단의 규정이 필요하고 작가라는 규정이 필요해요 사단이라는 것에 너무 엄격한

규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helliphellip 만년필을 가졌다고 해서 전부 문학가가 아니라면helliphellip 카메라를 메었

으니 작가다 mdash 하는 엉터리도 용납될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우선 필요한 것은 취미 도락이라는 관념

을 지양해야 할 텐데helliphellip

이 취미가 차차 심각해지면 창작의식도 생기는게니까helliphellip 그런 사람들을 지도 계몽해서 한 사람이라

도 작가로 이끌어야 하겠지요helliphellip 카메라를 살 때부터 나는 사진작가가 되겠다 mdash 하는 사람은 있

을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임 lsquo싼데이rsquo 카메라맨은 논의의 대상이 안되구요helliphellip (웃음)

이 그러니까 지도자들이 작가적인 태도에 확고한 이념을 앞세우고 지도에 임해야 하는 건데helliphellip

본지 각 단체 지도층의 지도방침에 대한 구체적인 태도를 어떻게 규정하겠습니까 helliphellip

임 우선 사진에 대한 인식부터 고쳐야 해요 말이 중복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친구 좋고 사진 좋아서 우리

끼리 하면 그만이다 mdash 하는 생각들이 많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만이라도 그렇지 않다

관련 자료 소개 163

210-280 140p-180p 0723_1 14 07 23 오후 823 페이지 163

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싶어요 학생들이 카메라를 사 가지고 몇 사람 모였으니까 책임자 격

인 선생이 필요하다 mdash 해서 책임 맡았다는 사람으로는 지도가 안 될 게 아닙니까 그렇다고 청해 오

지도 않는데 내정 격으로 뛰어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구helliphellip (웃음)

본지 또 한 가지 요즘 일대 성황을 이루는 것이 소위 현상사진(懸賞寫眞)이라는 건데요helliphellip 이 현상사진

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진에 대한 모욕도 있지helliphellip

임 거 참 꼴사나운 일이 많아요 현상이란 걸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helliphellip 그 하나는 어느 연구

단체에서 순수한 의미에서 발표 바탕이 없는 아마추어를 위해 마련하는 경우가 있을게고 또 하나는

선전용으로 포스터 mdash 같은 데에 써먹기 위한 상업 정책적인 의식에서 모집하는 현상이 있을 테지요

이 어느 경우이건 간에 좌우간 현상 모집을 하는 목적이 있는데helliphellip 응모자는 우선 현상의 목적부터 확

실히 알고 응모를 해야 하겠지helliphellip

임 그렇죠 그런데 이 상업 정책적인 현상의 경우에는 사진문화에 대한 모욕적인 행동이 퍽 많습니다

이거 참 불유쾌한 일이지만helliphellip 가령 예를 들자면 응모자는 원판을 제공하라던가 또 낙선자의 작

품은 일체 반환치 않는다는 따위helliphellip이게 얼마나 사진예술에 대한 모욕적 행위입니까 helliphellip

이 그래요helliphellip 확실히 모순된 일입니다

임 필요에 의해서 현상모집을 했으니까 당선된 작품은 물론 필요하겠지만helliphellip 낙선작품을 반환치 않는

다는 것은 언어도단 입니다 낙선이 됐다 해도 작가의 입장으론 대단히 귀중한 하나의 작품일 텐데

그걸 안 돌려 준대서야 말이 되나요 주최측은 낙선작품의 원화를 돌려 줄만한 성의를 가져야 도리

에 맞을 텐데helliphellip 요즘 현실은 lsquo낙선rsquo이란 푸대접 밑에 원판까지 몰수당하는 판국이니helliphellip 원 참

이 그러니까 응모자는 무엇보다도 현상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지helliphellip 여러 번 겪은 일이지만 심사를

하다 보면 전혀 현상 취지를 도외시한 작품들이 있는데helliphellip

임 그거야 보나마나 낙선이죠 (웃음)

이 그러믄요 현상 응모자로서는 출품 규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 아니겠어요

임 그럼요

이 그런데 어떤 것은 작품에 제목도 없는 것이 있거든요 그런가 하면 제목과 작품내용이 전혀 특이한

엉터리도 있구helliphellip

임 저도 여러 번 겪은 일입니다

이 제목이란 것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벌써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찍는다는 의식이 있는 이상

제목도 정해져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아주 작품과 제목이 동떨어진 것들이 응모해 오니까

낙선의 자격이 충분할 수밖에helliphellip 하하하 (웃음)

임 그게 모두 사진에 대한 성의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이 그래요 성의가 없어요 자기 작품에 대해선 최선의 성의를 다 해야 할 텐데 그런 태도가 없거든helliphellip

제목을 안 썼는지 못 썼는지는 모르지만helliphel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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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그저 무턱대고 발표의식만 왕성한 까닭이 아닐까요

이 그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된 작가가 아닌 이상 발표기회가 좀처럼 없을 테니까

자기 실력의 평가를 받는다던가 남들과 경쟁해 본다는 의미에서 현상에 자주 응모하는 것은 좋은데

helliphellip 아 어떤 친구는 자기 실력 생각은 하지도 않고 상품이 적다 많다 시비를 하는 친구도 있으니 참

기가 막힐 일이지

주최자의 무성의도 고쳐져야 하고

임 그건 lsquo현상rsquo이라고 내거는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순수한 사진연구단체에서 모집할 때는

lsquo공모전rsquo이라던가 하는 문구가 좋지 않을까요 lsquo현상rsquo이라니까 lsquo상rsquo을 바라게도 되겠지만 어쨌든

lsquo현상rsquo이란 말 자체가 순수하지 못해요

이 그건 확실히 생각해 볼 문제이겠군요helliphellip 순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helliphellip 응모자들이 심

사원이 누구냐mdash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도 순수하지 못하고helliphellip 또 주최자가 모집광고를 낼 때

lsquo심사원은 추후발표rsquo라mdash하는 것도 순수하지 못해요 이것도 참 불쾌한 일인데 lsquo추후발표rsquo라는 걸

다시 생각하면 lsquo준비가 안됐다rsquo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심사원의 준비도 안 해 놓고 현상을 모

집하는 그런 무성의가 또 어디 있어helliphellip 이건 일종의 사기가 아니면 거만일 겝니다

임 그나 그뿐인가요 lsquo심사원은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함rsquohelliphellip 하는 모호한 광고도 있지요 응모자의 입

장에서 생각하면helliphellip 심사원에 불만이 있으면 응모를 아니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 심사원 문제만

은 정정당당히 명시해야만 나중에 가서 심사에 대한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출품을 한 다음에 심사

원이 발표된다는 것은 심사에 대한 불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helliphellip

이 그리고 응모자의 동태를 가만히 보면 아까 얘기가 나왔던 소위 lsquo취미정도rsquo라는 층의 발표 의욕이 굉

장해서 대부분의 응모자가 이 부류인 것 같은데helliphellip 여기 한 가지 탈이 있어요 현상응모 작품의 심

사라는 것은 무제한의 심사 레벨을 놓고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응모 작품 중에서의 우수 작품을 가

려낸다는 것은 이거 상식 문제가 아닙니다

임 그렇죠

이 아 그런데 어떻게 해서 현상에 당선이 되거나 특히 특선이라도 하면 그만 자기가 갑자기 위대한

작가라도 된 것처럼 대가연(大家然) 하고 으쓱대는 친구들이 많아서 걱정이야helliphellip (웃음)

이 lsquo특선rsquo이라는 것은 응모해 온 작품들 중에서 특선이지 결코 한국 사단 전체의 수준에서 특선이라

는 것은 아닌데helliphellip 그만 한 번만 당선되면 코가 높아지고 대뜸 대가 행세를 하려고 드니helliphellip 참

신인들은 특히 조심해야 할 일이지

남의 것보고hellip 우리 것도 보내고hellip

본지 이제 화제를 좀 바꾸어서 세계사단의 동향을 좀 말씀해 주실까요

임 세계사단의 얘기라면 직접 보아야만 얘기가 될 텐데helliphellip

이 서울 바닥에서 썩으면서 세계사단의 얘기를 어떻게 본 듯이 할 수가 있겠나 카메라를 메고 세계일

관련 자료 소개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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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도 했어야 얘기가 되지

임 그것보다도 사진을 통한 국제 교류 얘기나 합시다

이 그게 좋겠군helliphellip 얼마 전에 덕수궁에서 자유중국의 소개사진전시가 있었죠 미국공보원의 활동도

이를 테면 국제교류의 한 형식일게고helliphellip

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자유중국과 월남의 사진전시가 있었는데helliphellip 우리도 수출을 한다면 그 보

다 훨씬 좋은 작품들이 나갈걸요helliphellip

이 한미합동전이던가 한중합동전 같은 것도 하면 역시 국제교류가 되겠지요helliphellip

임 한미합동전은 불원한 장래에 개최될 것입니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lsquo인간일가(人間一家)rsquo의 사진

이 아마 이월쯤 한국에 올 겝니다 미국대사관이 주동이 돼서 작품 503점 전부의 전시회 계획이 추

진되고 있으니까요

이 남이 보내줘서 본 것은 있지만 우리가 남에게 보여준 것은 없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야 우리도 남에

게 보여줘야 교류가 될 텐데helliphellip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두 사람의 작품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임 개인적인 활동은 있었지요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사진살롱에 사진을 보내고 있으니까 개인

적으로는 더러 나간 셈이죠 개인들의 수출이라도 좀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지만

이 우리의 것을 내보내고 외국 것을 들여와서 서로 감상하고 연구하는 게 이를 테면 국제교류인데

아마 명년쯤엔 될까 몰라

임 작품교환전 같은 것을 위해서 대대적인 계몽운동이 필요 하겠죠

이 그렇죠 운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어요

임 그런데 근본적인 얘기를 하자면 한국 작가의 역량이 아직도 부족한 것 같아요 언젠가 외국 작가에

게서 들은 말인데mdash한국 사람은 한국을 보지 않았다mdash하는 얘길 해요 사진 작가에게 대한 말이지

만helliphellip 나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이 퍽 중요한 얘기다mdash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를 직시하는 것만이

사진은 아니겠지만 실용사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것이 사실 아닐까요 회화적인 쌀롱 픽처라던

가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리얼리즘 사진이라는 것에 너무들 치우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 국제 교류의 시발은 역시 소개적(紹介的)인 것 다시 말해서 르포르타주적인 것이겠으니까helliphellip

임 외국 작품의 모방 같은 것은 이제 집어치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mdash예술적인 것 이것만을 너무 추

구했기 때문에 사실이 한국적인 것과 국민성의 묘사 같은 것이 잘 되지 않았지요 정서적인 것에만

너무 골몰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일이고 helliphellip 예술을 위한 예술에 정신들이 팔려 있었지나 않은

지helliphellip 예술을 하기 위한 사진이라는 관념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이 예술을 염두에 안 둔다면 실용사진이 돼 버리게

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너무 치우친 것 같단 말입니다

이 특히 국제 교류를 생각한다면 아닌 게 아니라 외국처럼 르포르타주적인 사진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할거에요

임 그래요 거기에 예술성을 띄워서 소화할 만한 역량 있는 작가가 필요해요

이 또 하나의 가장 큰 문제는 위정자의 관심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 큰 난관입니다 국제 교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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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가족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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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말이고 역시 정부당국자의 적극적인 주

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어디 그래요

임 우선 사단 자체의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작가들의 작업도 촉구되어야 하구helliphellip 아까도 말이 나왔지

만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 출품을 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점 같은데서 작가들의 반성도 필

요하고helliphellip

이 개별적으로 미국 등지에 보낸 것은 아마 상당한 수가 되겠지요

임 그럼요 그랬는데 왜 성과가 없느냐mdash하는 반성이 있어야죠

이 오늘의 현실을 예술적인 면에서 기록하고 작품화 해야겠는데helliphellip 막연하게 예술을 위한 작품을 보

내니까 기교적으론 훌륭할지 몰라도 작품 자체에 내용이 없어서helliphellip 그래서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닐

임 그런 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빨리 우리의 수준을 높여서 국제 조류와 호흡을 맞추어 나가

야 할 것입니다

이 이거 아마추어를 위한 얘기라는 것이 잠깐 탈선을 한 것 같군 그러나 이런 문제도 참고가 되긴 하니

까helliphellip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합시다

본지 수고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helliphellip

(기록 O기자)

이해선 「lsquo백오(白烏)rsquo의 변(辯)」 『동아일보』 1957년 4월 9일 4면

30여년 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입학

이 되었을 당시 자축기념하는 의미에서 호(號)를

하나 지어본 것이 백오(白烏)라는 두 글자였다 처

음 듣는 사람들 중에서는 거문[검은] 까마귀는 있

지만 흰 까마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서로 웃어버리고 그 뜻을

설명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자의

(字意)를 해명해볼까 한다 백(白)은 흰 빛이요 오

(烏)는 흑색으로 통하므로 우선 흑백을 대조시켜

놓고 흰 종이 위에다 검은 먹으로 휘호(揮毫)할 것

이니 그 뜻이 내 생활과 부합될 것 같으며 둘째로

백 자(字)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첫 자를 떼어놓

고 오는 반포오(反哺烏)로 그 이름이 높은 새이므

로 평소에 효자 노릇을 못하여 온 나의 좌우명으로도 적당할 듯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새 중에서는

혹간(或間) 백변종(白變種)이 생겨나는 수가 있는데 그 흰새를 서조(瑞鳥)라고 떠들던 옛 시절도 있었으므

관련 자료 소개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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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내가 우연히 호를 지어 본 것이 검은 까마귀떼 속에서 서조 백오를 발견하였으니 나의 전도(前途)에는

반드시 서광(瑞光)이 비칠 것 같으므로 이상 여러 가지 의미를 차례로 생각해 볼 때에 나에게는 이 외에 더

좋은 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자의였었고 궁금한채로 불려온 백오

였었다 만담궁변(漫談窮辯)을 물소물책(勿笑勿責) 하소서 (사진가)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

이해선 「중요한 내용middot형식-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년 10월 20일 5면

사진작품에는 사진 특유의 형식이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러한 특유의 형식에 알맞은 표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의 특수성은 형식이 가지는 특수성 보다는

기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주관적이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작품심사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동일하게 중요시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작

품 속에서 그야말로 형식과 내용이 알맞게 부합된 특출한 작

품을 볼 수는 없었다 형식이 좋으면 내용이 빈약하고 좀 내

용이 있으면 형식이 미숙하고helliphellip 모두 결점이 있다 그러나

입상작으로 뽑은 8 점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

다 그리고 금년에는 lsquo칼러rsquo사진의 응모 점수가 30점이나 되

고 그중에서도 3점이 입상되었고 또 9점이 입선되었다는 것

은 lsquo칼러rsquo 사진의 앞날을 위해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lt전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장gt

[제1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년 2월 8일 5면

외국작품의 세련되고 빈틈없는 lsquo테크닉rsquo은 국내작품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서 우선 국내

작품을 형식에서부터 누르고 말았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이루게 된 것은 국내작가들

의 역량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lsquo국산인화지rsquo가 얼마나 엉터리고 조악한 것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대체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더욱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은 이와 반대적인 경향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예술이든 먼저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볼 때 국내작품의 후진성은

두말할 것 없이 형식의 경시에 있다고 하겠다 심사결과 흑백부에서나 lsquo칼라rsquo부에서 겨우 동상으로 한 점

씩 밖에 국내작품이 입상되지 못했다는 것은 다소 섭섭한 느낌이나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경종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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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더욱 우리 심사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독에서 응모한 lsquo칼라rsquo

작품이었다 물체의 외관 색감을 초월한 내면의 lsquo이미지rsquo가 발

산하는 짙은 감정의 색감으로 작가의 개성과 사상을 인상 깊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내 lsquo칼라라보rsquo의 후진

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상작으로 뽑힌 외국작품들은 오

늘의 세계 사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는 큰 자극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

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제2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총 818점 응모-사진예술에 도움」

『동아일보』 1967년 2월 9일 4면

지난해와 같이 흑백부문에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들은 모두가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산인화지의 조악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작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올해는 흑백

부문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기꺼운 일이라고

하겠다

특히 칼라작품에 있어서는 독일의 작품들이 특출했고 이들 작품들의 색감은 현대 과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 최고상으로 뽑힌 lt잊은 친구gt와 몇 점의 입상작품들은 칼라릴리프와 소라리

세이숀[솔라리제이션] 등의 수법으로써 모티

브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를 초객체적이고 추

상적으로 표현하고 작가의 짙은 개성과 사상

과 철학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입상작으로 뽑은 16점의 작품들은 오늘의

세계사단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

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심사위원 이해선 (위원장) 임응식 서순삼

박필호 안월산 정인성 최경덕 (이상 7명)

관련 자료 소개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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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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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관련 자료 소개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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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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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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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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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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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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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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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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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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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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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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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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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7: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자료 소개 157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일간지

「부산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24531

「성공을 기대 조선사진연구회 현일영 씨 담」 『조선중앙일보』 1936826

「경성아마사진구락부 제1회전」 『조선일보』 1938417

「사진작품전」 『동아일보』 19381014

「경성사진동호회 작품전람회개최」 『조선일보』 19381027

「사진동호회작품전」 『동아일보』 1938112

「경성아마추어 사진전람회」 『매일신보』 1939527

「아마추어 사진인화전」 『매일신보』 19391115

「동서남북-lsquo아마추어rsquo 제4회 인화전람회」 『동아일보』 19391115

「동서남북-합동인화전」 『동아일보』 1940126

「아마추어 사진의 인화전」 『매일신보』 194074

「경성아마츄어 제5회 인화전」 『조선일보』 194075

「경성백양사우회 제1회 인화전람회 개최」 『매일신보』 19401113

「제2회 사진전 명일부터 화신에서-백양사우회」 『매일신보』 19411124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55

「사진작품전」 『조선일보』 1946119

「전국문화총연발족」 『동아일보』 194729

「제1회 조선사진예술전」 『경향신문』 19475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7510

「사진전람회개최」 『경향신문』 194768

「예술사진전응모작 답지」 『경향신문』 1947615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 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629

「제1회예술사진전람회 15일부터 동화백화점」 『경향신문』 1947713

「예술사진 입선 수상식을 거행」 『경향신문』 1947720

「예술사진전 19일부터」 『동아일보』 19471217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8224

「사예(寫藝) 2회전 작품을 현상모집」 『경향신문』 19481013

「예술사진전 심사 오는 8일로 연기」 『동아일보』 1948127

「지방출품우수-제2회 예사전」 『동아일보』 19481212

「사진예술전 22일부터 동화화랑서」 『동아일보』 19481221

「문화소식」 『동아일보』 194964

「전국종합사진전 심사결과-특선1석 최인집 씨」 『동아일보』 194977

「사진예술의 정화-제3회 전국예술사진전」 『경향신문』 19491010

「예술사진전 30일로 마감박도」 『경향신문』 19491128

「예술사진전 입선자 발표」 『경향신문』 19491213

「예술사진전시회」 『동아일보』 195316

「춘계사진섭영회 26일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3

「본사후원 춘계촬영대회 오늘 창경원에서」 『경향신문』 1953426

「사진현상모집」 『경향신문』 1953517

「특선에 lt만춘gt」 『경향신문』 1953527

「인화 당선자 수여식」 『경향신문』 1953529

「사진작품발표전」 『경향신문』 1954413

「예술사진전시회 US-S화랑서」 『동아일보』 1954415

「집회」 『동아일보』 1954916

「경복궁서 촬영대회」 『경향신문』 1954919

「내 26일 촬영대회 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4922

「사연 촬영대회 여감(餘感) 아마추어 사진도(寫眞道)」 『동아일보』 1954103

「문화집합」 『동아일보』 1955122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77

「사연(寫硏) 창립 10주년 기념 어제 촬영대회 성황」 『동아일보』 1955711

「촬영대회 입선작 결정」 『동아일보』 1955819

「8인 사진전 개최」 『동아일보』 1956329

「9회 사연(寫硏)전」 『동아일보』 1957414

「신록촬영대회 개최 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62

「대한사진예술가협회서 사진전시회 개최」 『동아일보』 1958711

「10년 후의 우리 문화 건국 20주년을 장식하고 싶은 것」 『동아일보』 1958821

「사진예술가협회 11회 회원작품전」 『동아일보』 195979

「문화 소식」 『동아일보』 1960119

「국전에 사진부문도」 『동아일보』 1963410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결정 특선 조천용 작」 『동아일보』 19641020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653

「렌즈의 향연 영예의 초점-제4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작」 『동아일보』 196667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61217

「사진예술가협회전」 『동아일보』 19681022

「문화행사」 『동아일보』 1969830

「문화단신」 『경향신문』 196996

「국립공보관 12월 전시회 스케쥴」 『경향신문』 1971126

「문화단신」 『경향신문』 19721128

「사진예술협 작품전 7일까지 공보관서」 『매일경제』 1973111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에 안준천 씨」 『경향신문』 197526

「동아포우스트」 『동아일보』 19751117

「사진예술가협회 창립30돌 기념전」 『경향신문』 19751118

「추계 친목 촬영대회」 『매일경제』 197610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7830

「사진예술가협 정총(定總) 31일 하오 대동관서」 『매일경제』 1978120

「동아포스트」 『동아일보』 19781031

「문화광장」 『동아일보』 1993121

「한국사진예술 50년을 펼친다」 『한겨례』 1994111

「사진예술가협 사라진 풍물전」 『서울신문』 20051025

월간지 계간지

「사진클럽 지상소개 대한사협의 발자취」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박필호 「논단 대한사협16회전을 보고」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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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사협 16회전」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사협 16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8년 7월호

「대한사협 충남지부 회원전」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경축 창간 3주년 사진과 관광 포토그라피-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대한사협 18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제18회 대한사협전」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 작품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70년 3월호

「축 창간4주년 서울 선데이 카메라 클럽」 『포토그라피』 1970년 8월호

「축 포토그라피 창간 5주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김종양 씨 대한사협 고문 추대」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3년 3월호

「lt파도gt 김도현 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신춘초대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근하신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75년도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창작선」 『영상』 1977년 1월호

「전시장 순례 대한사진협회 회원전」 『영상』 1977년 11월호

「지상소개-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대한사협 제27회 정기총회 개최」 『영상』 1979년 7월호

박필호 「대한사협 27돐에 대한 축사」 『영상』 1979년 7월호

「제26회 대한사협전」 『영상』 1980년 1월호

「제27회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사진전시회」 『영상』 1980년 12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요강」 『영상』 1981년 5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영상』 1981년 10월호

「탐방-뜻이 있으면 길이 있게 마련 세 번째 전국대학사진 공모전을 연 대한사협충

남지회의 단합된 모습」 『영상』 1983년 1월호

「제3회 전국대학생사진 공모 제12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월호

「제13회 대한사협 충남 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2월호

최인진 「경성아마츄어카메라구락부를 말한다」 『사진사연구』 1984년 7월호

「대한사협본부 주최 제9회 한국국제사진전 입상자」 『영상』 1989년 1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대한민국예술원 편 『한국예술총감 자료편』 대한민국예술원 1965

한국사진협회 「사진계소식 1969년도」 『한국사진연감』 1970

_____________「한국사진협회의 연혁 1976년 10월 30일」 『한국사진연감』 1976

임범택 「사진」 『1977년도 문예연감』 1978

______ 「사진」 『1978년도 문예연감』 1979

한국사진협회 「역대역원명단(歷代役員名單) 1962년~1987년」 『한국사진연감』

1988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제1장 한국사진협회 창립 이전의 사진계 동향」 『한국사협

사 I 1945-1970』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01

최인진 「해방 초기의 사진잡지 연구-『국제보도』와 『사진문화』를 중심으로」 『한국

사진학회지 AURA』 제10호 2003

박혜성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사진문화』 목록 및 해제」 『한국 사진 잡지

『사진문화』 연구』 명지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한국사협 50년사』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13

단행본

임응식 『내가 걸어온 한국사단 임응식 회고록』 눈빛 1999

작품집 도록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제16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7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8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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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9

원 문 자 료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년 10월 29일 4면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년 4월 17일 4면

1 이해선 양화기(洋畵期) 관련 참고 자료

「입선자의 방명록」『매일신보』 1926년 5월 12일 3면

「금조 개장한 동미전 제2회」『동아일보』 1931년 4월 12일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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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참고 자료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년 5월 5일 2면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년 6월 29일 3면

「신록촬영대회개최-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년 6월 2일 4면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년 7월 7일 4면

예술사진전 조선사진예술연구회에서는 5월 6일부터 동11일까지의 6일간에 걸쳐 동화백화점(舊三越) 갸라리--에서 창립기념사진전을 개최하기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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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해선 관련 원문 자료

원문은 당시의 표기를 그대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현재의 띄어쓰기와 맞춤법에 맞지 않는 부분들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수정하였고 일부 [ ] 안에 병기했다 원문의 한자는 모두 한글 독음으로 고쳤으며 의미 전달을 위해 필요한 경우 ( )안에 병기했다

「대담 아마추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 pp 48~52

작가가 사태(沙汰)났어

본지 공사간에 바쁘실 텐데helliphellip 사진문화의 발전을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

해 주십사 하는 것은helliphellip 요즘 각 직장이나 학생들 간에 사진열이 굉장히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 비

추어서 이 아마추어 카메라맨의 지도 문제를 비롯하여 초보자의 진로랄까helliphellip 이런 문제에 대한 말

씀을 좀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해선6middot25 동란 후에 개인적으로 사진을 연구해 보겠다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직장이나 학교 단위로

사진동호자의 클럽이 많아 지고 작품 발표라던가 전시회 같은 것이 무척 많아졌는데helliphellip 어쨌든

일반 사회인이나 학생 간에 사진열이 높아졌다는 건 기쁜 일이야

임응식그런데 아직도 이 카메라를 사치품으로 취급하는 층이 많아서 곤란해요

이 나라(정부)에서부터 사치품 취급을 하더군helliphellip 여자들이 다이아몬드를 사려는 것과 사진을 연구하

려는 사람이 카메라 장만하는 것을 똑같이 취급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곤란

하지

임 헌데 우리 사단(寫壇)에선 우선 lsquo사진작가rsquo라는 용어를 쓰는 데에 신중을 기해야 하겠어요 웬 놈의

lsquo사진작가rsquo가 그리도 많은지helliphellip 이건 카메라만 메고 다니면 모두 작가 행세를 하니helliphellip

이 카메라 멘 것이 모두 lsquo작가rsquo라면 대한민국에 lsquo사진작가rsquo가 수 십만도 될 걸helliphellip 작가라는 친구들을

체에 넣어서 걸러 놓으면 엄격한 의미에서 진짜 lsquo작가rsquo는 몇 사람 밖에 없을 텐데helliphellip

임 호주머니에 만년필을 꽂았다고 해서 문학가 혹은 소설가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겠는데hellip

hellip 어쨌든 요즘 성행하는 사진작가의 사태를 우선 잡지에서 만이라도 용어 사용에 엄격한 규정을

지어서 질서를 잡아 주어야겠어요

이 그것도 과도기적 현상이겠으니까 차차 지양되겠지helliphellip 오늘 해달라는 얘기는 그런 넋두리가 아닐

테니까 어디 이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본지 한마디로 얘기하자면helliphellip 카메라는 어떻게 해서 장만을 했는데 mdash 자 그 다음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겐지 몰라서 어쩔 줄 모르는helliphellip 이런 아마추어와 초보자들의 진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얘기를

좀helliphellip 현재 직장 단위로 사진 동호자들이 모여서 클럽을 이룩한 것이 십 여 개 있고 학교 단위로는

이십 여 개나 되는데요helliphellip

관련 자료 소개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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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인식이 안이해서 탈이야

이 극히 초보적인 입장에서 사진을 해보고 싶다helliphellip 다년간 연구를 한 다음엔 작가가 돼 보겠다 mdash 하

는 사람들을 회원으로 해서 수 십 년 동안 연구를 해 왔는데helliphellip 오늘날 하고 있는 일도 그것이지만

helliphellip 여러 부문에 걸쳐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서적인 면에서 사진과 친해보고 싶다던가

또는 카메라를 장만했는데 어떻게 하면 앞으로 향상 발전할 수 있는가 mdash 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신인이라고 하겠지 특히 학생들의 교내 활동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helliphellip 헌데 막상 다다

르고 보면helliphellip 어떠한 길이 올바른 길인지 막연해 하는 모양이더군요

임 초보자들은 무엇보다도 사진 자체에 대한 정의를 뚜렷이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아마추어 mdash

하면 취미적 입장에서 사진을 다루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조각이나 회화와 같이 사진도 어엿한 예술이니

까 취미 도락(道樂)적인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예술을 추구하는 진지한 마음의 준비가 우선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물론이죠 대개 클럽 조직이 되어 있으니까 선생들의 지도를 받고 있겠지만 내가 알기에는 전문가

가 아닌 다시 말하면 취미 정도에서 관심이 있는 선생들이 지도를 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역시 전문으

로 사진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지도를 가끔씩이라도 받는 게 좋겠지요

임 지도를 한다는 사람들의 태도부터가 성실성이 없는 것 같아요 만년필을 샀으니까 나도 한 번 써 보

자 mdash 해서 작가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취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남의 lsquo지도rsquo를 담당

할 수는 없을 텐데 mdash 우리가 사진을 전공한대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억지로 지도해 주겠다고 밀고

들어 가겠다는 건 아니지만 mdash (웃음) mdash 어쨌든 전문가의 지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학생 클럽이나 직장 클럽 같은 동호자의 모임을 사단의 일부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취미

에서 시작했더라도 일정한 과정을 밟고 다년 연구를 거듭하면 자연히 작가를 지향하게 되겠지만hellip

hellip 그런 면에서도 처음 싹트기 시작하는 신인의 지도가 퍽 중요한 것이지요

취미middot도락이란 관념을 버려야 해

임 지금 형성되어 있다는 직장이나 학교 단체의 거의 전부가 전문적인 입장에 서 있지 않은 것 같더군

요helliphellip 사진에 대한 근본 의식이 너무도 안이한 것 같아요 카메라를 통한 표현의식에 절실한 감정

이 없어요helliphellip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비판을 받지 않는다helliphellip 하는 따위의 도피를 해서는 곤란

하죠helliphellip 창작의식이 확고하게 수립되지 않아서는 향상이 없는 것인데helliphellip 소문에 듣자면helliphellip 너

무 기술 면에만 치중하고 정신적인 면이 소홀히 취급된다는 거에요 helliphellip 나는 직장을 갖고 있으니

까 사진이란 것은 취미 정도로 한다 mdash 하는 태도를 버려야죠 특히 이 점은 지도자들에게 권하고 싶

은데helliphellip 예술의식helliphellip 이것이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절대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까

이 그렇구 말구요helliphellip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새로 사진을 공부하겠다는 신인들에게 네 가지 의식을 주

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휴머니즘 mdash 우선 사람이 돼야 하거든요 교양이라던가 인격 덕망helliphellip 이런 면에서 인간이

돼 있어야 하고 둘째는 사진예술을 한다고 해서 사진예술이 무엇이냐helliphellip 이것만을 추궁해서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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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요 좀 더 시야를 넓혀서 예술이라는 게 뭐냐 mdash 하는 걸 먼저 알아야지 셋째에 가서 사진예술이

라는 게 뭐냐 mdash 를 연구하고 넷째에 가서야 비로소 작품이라던가 창작의식 기교 기술에 대한 검

토를 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기본조건을 머리 속에 언제나 간직하도록 나는 주장해 왔어요

임 기술면을 등한히 할 수는 없겠지요 기술 없이는 표현이 안되니까helliphellip 그러나 이선생 말씀처럼 인

간본연의 문제도 크긴 큽니다 다른 예술부문의 사람보다 교양면에서 뒤떨어지지나 않는가 mdash 하는

것이 항상 염려되는데helliphellip 만일 뒤떨어진다면 큰일이지요 기술도 중요한 문제겠지만 교양인격 같

은 것도 예술가가로서의 긍지를 위해선 떨어질 수 없는 문제고helliphellip 더욱이 좋은 기술을 가졌으면서

도 기초교양이 모자라서 좋은 작품을 낼 수 없다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으니까helliphellip 교양인으로서의

자격도 다른 예술부문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사진을 해야할겝니다

이 기교나 기술을 어떻게 우물쭈물 배웠다고 해서 작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helliphellip 예술이란 그 자체

에 대한 조예부터 깊어야 합니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조리개가 얼마다 타임이 어

떻다helliphellip 암실작업은 어떻게 하는 거다helliphellip 이것만을 알았다고 해서 작가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에

요helliphellip 인간면 예술면 기술면에 똑 같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마 사진을 연구하겠다는 신

인들의 기본이념이 돼야 할겝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지도한다는 면에서

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거든요 mdash

임 어쨌든 기술을 위주로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난 옛날 얘기입니다

지도자 시비

이 지났다기 보다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는 장래에나 변할 수 없는 기본이념이겠지요 사진이라는 것

은 더욱이나 고도의 대중성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인격과 교양이 필요해요 기계라는 거야 찍으면

사진이 되도록 마련된 것이니까 예술까지는 못 가도 사진은 되거든 mdash 그러니까 그것을 예술로 이

끌려면 찍는 사람의 성분이 문제되는 것이지요helliphellip

임 그런 의미에서도 사단의 규정이 필요하고 작가라는 규정이 필요해요 사단이라는 것에 너무 엄격한

규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helliphellip 만년필을 가졌다고 해서 전부 문학가가 아니라면helliphellip 카메라를 메었

으니 작가다 mdash 하는 엉터리도 용납될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우선 필요한 것은 취미 도락이라는 관념

을 지양해야 할 텐데helliphellip

이 취미가 차차 심각해지면 창작의식도 생기는게니까helliphellip 그런 사람들을 지도 계몽해서 한 사람이라

도 작가로 이끌어야 하겠지요helliphellip 카메라를 살 때부터 나는 사진작가가 되겠다 mdash 하는 사람은 있

을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임 lsquo싼데이rsquo 카메라맨은 논의의 대상이 안되구요helliphellip (웃음)

이 그러니까 지도자들이 작가적인 태도에 확고한 이념을 앞세우고 지도에 임해야 하는 건데helliphellip

본지 각 단체 지도층의 지도방침에 대한 구체적인 태도를 어떻게 규정하겠습니까 helliphellip

임 우선 사진에 대한 인식부터 고쳐야 해요 말이 중복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친구 좋고 사진 좋아서 우리

끼리 하면 그만이다 mdash 하는 생각들이 많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만이라도 그렇지 않다

관련 자료 소개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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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싶어요 학생들이 카메라를 사 가지고 몇 사람 모였으니까 책임자 격

인 선생이 필요하다 mdash 해서 책임 맡았다는 사람으로는 지도가 안 될 게 아닙니까 그렇다고 청해 오

지도 않는데 내정 격으로 뛰어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구helliphellip (웃음)

본지 또 한 가지 요즘 일대 성황을 이루는 것이 소위 현상사진(懸賞寫眞)이라는 건데요helliphellip 이 현상사진

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진에 대한 모욕도 있지helliphellip

임 거 참 꼴사나운 일이 많아요 현상이란 걸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helliphellip 그 하나는 어느 연구

단체에서 순수한 의미에서 발표 바탕이 없는 아마추어를 위해 마련하는 경우가 있을게고 또 하나는

선전용으로 포스터 mdash 같은 데에 써먹기 위한 상업 정책적인 의식에서 모집하는 현상이 있을 테지요

이 어느 경우이건 간에 좌우간 현상 모집을 하는 목적이 있는데helliphellip 응모자는 우선 현상의 목적부터 확

실히 알고 응모를 해야 하겠지helliphellip

임 그렇죠 그런데 이 상업 정책적인 현상의 경우에는 사진문화에 대한 모욕적인 행동이 퍽 많습니다

이거 참 불유쾌한 일이지만helliphellip 가령 예를 들자면 응모자는 원판을 제공하라던가 또 낙선자의 작

품은 일체 반환치 않는다는 따위helliphellip이게 얼마나 사진예술에 대한 모욕적 행위입니까 helliphellip

이 그래요helliphellip 확실히 모순된 일입니다

임 필요에 의해서 현상모집을 했으니까 당선된 작품은 물론 필요하겠지만helliphellip 낙선작품을 반환치 않는

다는 것은 언어도단 입니다 낙선이 됐다 해도 작가의 입장으론 대단히 귀중한 하나의 작품일 텐데

그걸 안 돌려 준대서야 말이 되나요 주최측은 낙선작품의 원화를 돌려 줄만한 성의를 가져야 도리

에 맞을 텐데helliphellip 요즘 현실은 lsquo낙선rsquo이란 푸대접 밑에 원판까지 몰수당하는 판국이니helliphellip 원 참

이 그러니까 응모자는 무엇보다도 현상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지helliphellip 여러 번 겪은 일이지만 심사를

하다 보면 전혀 현상 취지를 도외시한 작품들이 있는데helliphellip

임 그거야 보나마나 낙선이죠 (웃음)

이 그러믄요 현상 응모자로서는 출품 규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 아니겠어요

임 그럼요

이 그런데 어떤 것은 작품에 제목도 없는 것이 있거든요 그런가 하면 제목과 작품내용이 전혀 특이한

엉터리도 있구helliphellip

임 저도 여러 번 겪은 일입니다

이 제목이란 것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벌써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찍는다는 의식이 있는 이상

제목도 정해져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아주 작품과 제목이 동떨어진 것들이 응모해 오니까

낙선의 자격이 충분할 수밖에helliphellip 하하하 (웃음)

임 그게 모두 사진에 대한 성의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이 그래요 성의가 없어요 자기 작품에 대해선 최선의 성의를 다 해야 할 텐데 그런 태도가 없거든helliphellip

제목을 안 썼는지 못 썼는지는 모르지만helliphel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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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그저 무턱대고 발표의식만 왕성한 까닭이 아닐까요

이 그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된 작가가 아닌 이상 발표기회가 좀처럼 없을 테니까

자기 실력의 평가를 받는다던가 남들과 경쟁해 본다는 의미에서 현상에 자주 응모하는 것은 좋은데

helliphellip 아 어떤 친구는 자기 실력 생각은 하지도 않고 상품이 적다 많다 시비를 하는 친구도 있으니 참

기가 막힐 일이지

주최자의 무성의도 고쳐져야 하고

임 그건 lsquo현상rsquo이라고 내거는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순수한 사진연구단체에서 모집할 때는

lsquo공모전rsquo이라던가 하는 문구가 좋지 않을까요 lsquo현상rsquo이라니까 lsquo상rsquo을 바라게도 되겠지만 어쨌든

lsquo현상rsquo이란 말 자체가 순수하지 못해요

이 그건 확실히 생각해 볼 문제이겠군요helliphellip 순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helliphellip 응모자들이 심

사원이 누구냐mdash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도 순수하지 못하고helliphellip 또 주최자가 모집광고를 낼 때

lsquo심사원은 추후발표rsquo라mdash하는 것도 순수하지 못해요 이것도 참 불쾌한 일인데 lsquo추후발표rsquo라는 걸

다시 생각하면 lsquo준비가 안됐다rsquo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심사원의 준비도 안 해 놓고 현상을 모

집하는 그런 무성의가 또 어디 있어helliphellip 이건 일종의 사기가 아니면 거만일 겝니다

임 그나 그뿐인가요 lsquo심사원은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함rsquohelliphellip 하는 모호한 광고도 있지요 응모자의 입

장에서 생각하면helliphellip 심사원에 불만이 있으면 응모를 아니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 심사원 문제만

은 정정당당히 명시해야만 나중에 가서 심사에 대한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출품을 한 다음에 심사

원이 발표된다는 것은 심사에 대한 불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helliphellip

이 그리고 응모자의 동태를 가만히 보면 아까 얘기가 나왔던 소위 lsquo취미정도rsquo라는 층의 발표 의욕이 굉

장해서 대부분의 응모자가 이 부류인 것 같은데helliphellip 여기 한 가지 탈이 있어요 현상응모 작품의 심

사라는 것은 무제한의 심사 레벨을 놓고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응모 작품 중에서의 우수 작품을 가

려낸다는 것은 이거 상식 문제가 아닙니다

임 그렇죠

이 아 그런데 어떻게 해서 현상에 당선이 되거나 특히 특선이라도 하면 그만 자기가 갑자기 위대한

작가라도 된 것처럼 대가연(大家然) 하고 으쓱대는 친구들이 많아서 걱정이야helliphellip (웃음)

이 lsquo특선rsquo이라는 것은 응모해 온 작품들 중에서 특선이지 결코 한국 사단 전체의 수준에서 특선이라

는 것은 아닌데helliphellip 그만 한 번만 당선되면 코가 높아지고 대뜸 대가 행세를 하려고 드니helliphellip 참

신인들은 특히 조심해야 할 일이지

남의 것보고hellip 우리 것도 보내고hellip

본지 이제 화제를 좀 바꾸어서 세계사단의 동향을 좀 말씀해 주실까요

임 세계사단의 얘기라면 직접 보아야만 얘기가 될 텐데helliphellip

이 서울 바닥에서 썩으면서 세계사단의 얘기를 어떻게 본 듯이 할 수가 있겠나 카메라를 메고 세계일

관련 자료 소개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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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도 했어야 얘기가 되지

임 그것보다도 사진을 통한 국제 교류 얘기나 합시다

이 그게 좋겠군helliphellip 얼마 전에 덕수궁에서 자유중국의 소개사진전시가 있었죠 미국공보원의 활동도

이를 테면 국제교류의 한 형식일게고helliphellip

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자유중국과 월남의 사진전시가 있었는데helliphellip 우리도 수출을 한다면 그 보

다 훨씬 좋은 작품들이 나갈걸요helliphellip

이 한미합동전이던가 한중합동전 같은 것도 하면 역시 국제교류가 되겠지요helliphellip

임 한미합동전은 불원한 장래에 개최될 것입니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lsquo인간일가(人間一家)rsquo의 사진

이 아마 이월쯤 한국에 올 겝니다 미국대사관이 주동이 돼서 작품 503점 전부의 전시회 계획이 추

진되고 있으니까요

이 남이 보내줘서 본 것은 있지만 우리가 남에게 보여준 것은 없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야 우리도 남에

게 보여줘야 교류가 될 텐데helliphellip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두 사람의 작품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임 개인적인 활동은 있었지요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사진살롱에 사진을 보내고 있으니까 개인

적으로는 더러 나간 셈이죠 개인들의 수출이라도 좀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지만

이 우리의 것을 내보내고 외국 것을 들여와서 서로 감상하고 연구하는 게 이를 테면 국제교류인데

아마 명년쯤엔 될까 몰라

임 작품교환전 같은 것을 위해서 대대적인 계몽운동이 필요 하겠죠

이 그렇죠 운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어요

임 그런데 근본적인 얘기를 하자면 한국 작가의 역량이 아직도 부족한 것 같아요 언젠가 외국 작가에

게서 들은 말인데mdash한국 사람은 한국을 보지 않았다mdash하는 얘길 해요 사진 작가에게 대한 말이지

만helliphellip 나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이 퍽 중요한 얘기다mdash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를 직시하는 것만이

사진은 아니겠지만 실용사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것이 사실 아닐까요 회화적인 쌀롱 픽처라던

가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리얼리즘 사진이라는 것에 너무들 치우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 국제 교류의 시발은 역시 소개적(紹介的)인 것 다시 말해서 르포르타주적인 것이겠으니까helliphellip

임 외국 작품의 모방 같은 것은 이제 집어치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mdash예술적인 것 이것만을 너무 추

구했기 때문에 사실이 한국적인 것과 국민성의 묘사 같은 것이 잘 되지 않았지요 정서적인 것에만

너무 골몰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일이고 helliphellip 예술을 위한 예술에 정신들이 팔려 있었지나 않은

지helliphellip 예술을 하기 위한 사진이라는 관념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이 예술을 염두에 안 둔다면 실용사진이 돼 버리게

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너무 치우친 것 같단 말입니다

이 특히 국제 교류를 생각한다면 아닌 게 아니라 외국처럼 르포르타주적인 사진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할거에요

임 그래요 거기에 예술성을 띄워서 소화할 만한 역량 있는 작가가 필요해요

이 또 하나의 가장 큰 문제는 위정자의 관심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 큰 난관입니다 국제 교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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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가족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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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말이고 역시 정부당국자의 적극적인 주

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어디 그래요

임 우선 사단 자체의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작가들의 작업도 촉구되어야 하구helliphellip 아까도 말이 나왔지

만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 출품을 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점 같은데서 작가들의 반성도 필

요하고helliphellip

이 개별적으로 미국 등지에 보낸 것은 아마 상당한 수가 되겠지요

임 그럼요 그랬는데 왜 성과가 없느냐mdash하는 반성이 있어야죠

이 오늘의 현실을 예술적인 면에서 기록하고 작품화 해야겠는데helliphellip 막연하게 예술을 위한 작품을 보

내니까 기교적으론 훌륭할지 몰라도 작품 자체에 내용이 없어서helliphellip 그래서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닐

임 그런 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빨리 우리의 수준을 높여서 국제 조류와 호흡을 맞추어 나가

야 할 것입니다

이 이거 아마추어를 위한 얘기라는 것이 잠깐 탈선을 한 것 같군 그러나 이런 문제도 참고가 되긴 하니

까helliphellip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합시다

본지 수고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helliphellip

(기록 O기자)

이해선 「lsquo백오(白烏)rsquo의 변(辯)」 『동아일보』 1957년 4월 9일 4면

30여년 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입학

이 되었을 당시 자축기념하는 의미에서 호(號)를

하나 지어본 것이 백오(白烏)라는 두 글자였다 처

음 듣는 사람들 중에서는 거문[검은] 까마귀는 있

지만 흰 까마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서로 웃어버리고 그 뜻을

설명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자의

(字意)를 해명해볼까 한다 백(白)은 흰 빛이요 오

(烏)는 흑색으로 통하므로 우선 흑백을 대조시켜

놓고 흰 종이 위에다 검은 먹으로 휘호(揮毫)할 것

이니 그 뜻이 내 생활과 부합될 것 같으며 둘째로

백 자(字)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첫 자를 떼어놓

고 오는 반포오(反哺烏)로 그 이름이 높은 새이므

로 평소에 효자 노릇을 못하여 온 나의 좌우명으로도 적당할 듯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새 중에서는

혹간(或間) 백변종(白變種)이 생겨나는 수가 있는데 그 흰새를 서조(瑞鳥)라고 떠들던 옛 시절도 있었으므

관련 자료 소개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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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내가 우연히 호를 지어 본 것이 검은 까마귀떼 속에서 서조 백오를 발견하였으니 나의 전도(前途)에는

반드시 서광(瑞光)이 비칠 것 같으므로 이상 여러 가지 의미를 차례로 생각해 볼 때에 나에게는 이 외에 더

좋은 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자의였었고 궁금한채로 불려온 백오

였었다 만담궁변(漫談窮辯)을 물소물책(勿笑勿責) 하소서 (사진가)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

이해선 「중요한 내용middot형식-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년 10월 20일 5면

사진작품에는 사진 특유의 형식이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러한 특유의 형식에 알맞은 표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의 특수성은 형식이 가지는 특수성 보다는

기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주관적이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작품심사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동일하게 중요시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작

품 속에서 그야말로 형식과 내용이 알맞게 부합된 특출한 작

품을 볼 수는 없었다 형식이 좋으면 내용이 빈약하고 좀 내

용이 있으면 형식이 미숙하고helliphellip 모두 결점이 있다 그러나

입상작으로 뽑은 8 점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

다 그리고 금년에는 lsquo칼러rsquo사진의 응모 점수가 30점이나 되

고 그중에서도 3점이 입상되었고 또 9점이 입선되었다는 것

은 lsquo칼러rsquo 사진의 앞날을 위해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lt전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장gt

[제1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년 2월 8일 5면

외국작품의 세련되고 빈틈없는 lsquo테크닉rsquo은 국내작품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서 우선 국내

작품을 형식에서부터 누르고 말았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이루게 된 것은 국내작가들

의 역량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lsquo국산인화지rsquo가 얼마나 엉터리고 조악한 것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대체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더욱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은 이와 반대적인 경향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예술이든 먼저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볼 때 국내작품의 후진성은

두말할 것 없이 형식의 경시에 있다고 하겠다 심사결과 흑백부에서나 lsquo칼라rsquo부에서 겨우 동상으로 한 점

씩 밖에 국내작품이 입상되지 못했다는 것은 다소 섭섭한 느낌이나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경종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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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더욱 우리 심사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독에서 응모한 lsquo칼라rsquo

작품이었다 물체의 외관 색감을 초월한 내면의 lsquo이미지rsquo가 발

산하는 짙은 감정의 색감으로 작가의 개성과 사상을 인상 깊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내 lsquo칼라라보rsquo의 후진

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상작으로 뽑힌 외국작품들은 오

늘의 세계 사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는 큰 자극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

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제2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총 818점 응모-사진예술에 도움」

『동아일보』 1967년 2월 9일 4면

지난해와 같이 흑백부문에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들은 모두가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산인화지의 조악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작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올해는 흑백

부문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기꺼운 일이라고

하겠다

특히 칼라작품에 있어서는 독일의 작품들이 특출했고 이들 작품들의 색감은 현대 과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 최고상으로 뽑힌 lt잊은 친구gt와 몇 점의 입상작품들은 칼라릴리프와 소라리

세이숀[솔라리제이션] 등의 수법으로써 모티

브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를 초객체적이고 추

상적으로 표현하고 작가의 짙은 개성과 사상

과 철학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입상작으로 뽑은 16점의 작품들은 오늘의

세계사단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

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심사위원 이해선 (위원장) 임응식 서순삼

박필호 안월산 정인성 최경덕 (이상 7명)

관련 자료 소개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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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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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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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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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관련 자료 소개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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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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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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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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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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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관련 자료 소개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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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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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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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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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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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8: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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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사협 16회전」 『포토그라피』 1968년 1 2월호

「사협 16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8년 7월호

「대한사협 충남지부 회원전」 『포토그라피』 1969년 7월호

「경축 창간 3주년 사진과 관광 포토그라피-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69년 8월호

「대한사협 18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제18회 대한사협전」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 작품집 발행」 『포토그라피』 1969년 10월호

「대한사협 18회전집 발행」 『포토그라피』 1970년 3월호

「축 창간4주년 서울 선데이 카메라 클럽」 『포토그라피』 1970년 8월호

「축 포토그라피 창간 5주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1년 8월호

「김종양 씨 대한사협 고문 추대」 『포토그라피』 1972년 9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3년 3월호

「lt파도gt 김도현 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신춘초대작 대한사협 22회전에서」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근하신년-대한사진예술가협회」 『포토그라피』 1975년 1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75년도 정기총회」 『포토그라피』 1975년 2월호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창작선」 『영상』 1977년 1월호

「전시장 순례 대한사진협회 회원전」 『영상』 1977년 11월호

「지상소개-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제25회 대한사협전」 『영상』 1979년 1월호

「대한사협 제27회 정기총회 개최」 『영상』 1979년 7월호

박필호 「대한사협 27돐에 대한 축사」 『영상』 1979년 7월호

「제26회 대한사협전」 『영상』 1980년 1월호

「제27회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사진전시회」 『영상』 1980년 12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요강」 『영상』 1981년 5월호

「제2회 전국대학생 사진 공모전」 『영상』 1981년 10월호

「탐방-뜻이 있으면 길이 있게 마련 세 번째 전국대학사진 공모전을 연 대한사협충

남지회의 단합된 모습」 『영상』 1983년 1월호

「제3회 전국대학생사진 공모 제12회 대한사협 충남middot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월호

「제13회 대한사협 충남 부산 합동회원전」 『영상』 1983년 12월호

최인진 「경성아마츄어카메라구락부를 말한다」 『사진사연구』 1984년 7월호

「대한사협본부 주최 제9회 한국국제사진전 입상자」 『영상』 1989년 1월호

논문 학술지 연감

대한민국예술원 편 『한국예술총감 자료편』 대한민국예술원 1965

한국사진협회 「사진계소식 1969년도」 『한국사진연감』 1970

_____________「한국사진협회의 연혁 1976년 10월 30일」 『한국사진연감』 1976

임범택 「사진」 『1977년도 문예연감』 1978

______ 「사진」 『1978년도 문예연감』 1979

한국사진협회 「역대역원명단(歷代役員名單) 1962년~1987년」 『한국사진연감』

1988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제1장 한국사진협회 창립 이전의 사진계 동향」 『한국사협

사 I 1945-1970』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01

최인진 「해방 초기의 사진잡지 연구-『국제보도』와 『사진문화』를 중심으로」 『한국

사진학회지 AURA』 제10호 2003

박혜성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사진문화』 목록 및 해제」 『한국 사진 잡지

『사진문화』 연구』 명지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한국사진작가협회 편 『한국사협 50년사』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출판부 2013

단행본

임응식 『내가 걸어온 한국사단 임응식 회고록』 눈빛 1999

작품집 도록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제16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7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8

____________________『제18회 대한사협 작품집』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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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자료 소개 159

원 문 자 료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년 10월 29일 4면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년 4월 17일 4면

1 이해선 양화기(洋畵期) 관련 참고 자료

「입선자의 방명록」『매일신보』 1926년 5월 12일 3면

「금조 개장한 동미전 제2회」『동아일보』 1931년 4월 12일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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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참고 자료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년 5월 5일 2면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년 6월 29일 3면

「신록촬영대회개최-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년 6월 2일 4면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년 7월 7일 4면

예술사진전 조선사진예술연구회에서는 5월 6일부터 동11일까지의 6일간에 걸쳐 동화백화점(舊三越) 갸라리--에서 창립기념사진전을 개최하기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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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해선 관련 원문 자료

원문은 당시의 표기를 그대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현재의 띄어쓰기와 맞춤법에 맞지 않는 부분들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수정하였고 일부 [ ] 안에 병기했다 원문의 한자는 모두 한글 독음으로 고쳤으며 의미 전달을 위해 필요한 경우 ( )안에 병기했다

「대담 아마추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 pp 48~52

작가가 사태(沙汰)났어

본지 공사간에 바쁘실 텐데helliphellip 사진문화의 발전을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

해 주십사 하는 것은helliphellip 요즘 각 직장이나 학생들 간에 사진열이 굉장히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 비

추어서 이 아마추어 카메라맨의 지도 문제를 비롯하여 초보자의 진로랄까helliphellip 이런 문제에 대한 말

씀을 좀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해선6middot25 동란 후에 개인적으로 사진을 연구해 보겠다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직장이나 학교 단위로

사진동호자의 클럽이 많아 지고 작품 발표라던가 전시회 같은 것이 무척 많아졌는데helliphellip 어쨌든

일반 사회인이나 학생 간에 사진열이 높아졌다는 건 기쁜 일이야

임응식그런데 아직도 이 카메라를 사치품으로 취급하는 층이 많아서 곤란해요

이 나라(정부)에서부터 사치품 취급을 하더군helliphellip 여자들이 다이아몬드를 사려는 것과 사진을 연구하

려는 사람이 카메라 장만하는 것을 똑같이 취급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곤란

하지

임 헌데 우리 사단(寫壇)에선 우선 lsquo사진작가rsquo라는 용어를 쓰는 데에 신중을 기해야 하겠어요 웬 놈의

lsquo사진작가rsquo가 그리도 많은지helliphellip 이건 카메라만 메고 다니면 모두 작가 행세를 하니helliphellip

이 카메라 멘 것이 모두 lsquo작가rsquo라면 대한민국에 lsquo사진작가rsquo가 수 십만도 될 걸helliphellip 작가라는 친구들을

체에 넣어서 걸러 놓으면 엄격한 의미에서 진짜 lsquo작가rsquo는 몇 사람 밖에 없을 텐데helliphellip

임 호주머니에 만년필을 꽂았다고 해서 문학가 혹은 소설가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겠는데hellip

hellip 어쨌든 요즘 성행하는 사진작가의 사태를 우선 잡지에서 만이라도 용어 사용에 엄격한 규정을

지어서 질서를 잡아 주어야겠어요

이 그것도 과도기적 현상이겠으니까 차차 지양되겠지helliphellip 오늘 해달라는 얘기는 그런 넋두리가 아닐

테니까 어디 이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본지 한마디로 얘기하자면helliphellip 카메라는 어떻게 해서 장만을 했는데 mdash 자 그 다음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겐지 몰라서 어쩔 줄 모르는helliphellip 이런 아마추어와 초보자들의 진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얘기를

좀helliphellip 현재 직장 단위로 사진 동호자들이 모여서 클럽을 이룩한 것이 십 여 개 있고 학교 단위로는

이십 여 개나 되는데요helliphellip

관련 자료 소개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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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인식이 안이해서 탈이야

이 극히 초보적인 입장에서 사진을 해보고 싶다helliphellip 다년간 연구를 한 다음엔 작가가 돼 보겠다 mdash 하

는 사람들을 회원으로 해서 수 십 년 동안 연구를 해 왔는데helliphellip 오늘날 하고 있는 일도 그것이지만

helliphellip 여러 부문에 걸쳐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서적인 면에서 사진과 친해보고 싶다던가

또는 카메라를 장만했는데 어떻게 하면 앞으로 향상 발전할 수 있는가 mdash 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신인이라고 하겠지 특히 학생들의 교내 활동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helliphellip 헌데 막상 다다

르고 보면helliphellip 어떠한 길이 올바른 길인지 막연해 하는 모양이더군요

임 초보자들은 무엇보다도 사진 자체에 대한 정의를 뚜렷이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아마추어 mdash

하면 취미적 입장에서 사진을 다루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조각이나 회화와 같이 사진도 어엿한 예술이니

까 취미 도락(道樂)적인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예술을 추구하는 진지한 마음의 준비가 우선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물론이죠 대개 클럽 조직이 되어 있으니까 선생들의 지도를 받고 있겠지만 내가 알기에는 전문가

가 아닌 다시 말하면 취미 정도에서 관심이 있는 선생들이 지도를 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역시 전문으

로 사진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지도를 가끔씩이라도 받는 게 좋겠지요

임 지도를 한다는 사람들의 태도부터가 성실성이 없는 것 같아요 만년필을 샀으니까 나도 한 번 써 보

자 mdash 해서 작가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취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남의 lsquo지도rsquo를 담당

할 수는 없을 텐데 mdash 우리가 사진을 전공한대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억지로 지도해 주겠다고 밀고

들어 가겠다는 건 아니지만 mdash (웃음) mdash 어쨌든 전문가의 지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학생 클럽이나 직장 클럽 같은 동호자의 모임을 사단의 일부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취미

에서 시작했더라도 일정한 과정을 밟고 다년 연구를 거듭하면 자연히 작가를 지향하게 되겠지만hellip

hellip 그런 면에서도 처음 싹트기 시작하는 신인의 지도가 퍽 중요한 것이지요

취미middot도락이란 관념을 버려야 해

임 지금 형성되어 있다는 직장이나 학교 단체의 거의 전부가 전문적인 입장에 서 있지 않은 것 같더군

요helliphellip 사진에 대한 근본 의식이 너무도 안이한 것 같아요 카메라를 통한 표현의식에 절실한 감정

이 없어요helliphellip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비판을 받지 않는다helliphellip 하는 따위의 도피를 해서는 곤란

하죠helliphellip 창작의식이 확고하게 수립되지 않아서는 향상이 없는 것인데helliphellip 소문에 듣자면helliphellip 너

무 기술 면에만 치중하고 정신적인 면이 소홀히 취급된다는 거에요 helliphellip 나는 직장을 갖고 있으니

까 사진이란 것은 취미 정도로 한다 mdash 하는 태도를 버려야죠 특히 이 점은 지도자들에게 권하고 싶

은데helliphellip 예술의식helliphellip 이것이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절대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까

이 그렇구 말구요helliphellip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새로 사진을 공부하겠다는 신인들에게 네 가지 의식을 주

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휴머니즘 mdash 우선 사람이 돼야 하거든요 교양이라던가 인격 덕망helliphellip 이런 면에서 인간이

돼 있어야 하고 둘째는 사진예술을 한다고 해서 사진예술이 무엇이냐helliphellip 이것만을 추궁해서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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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요 좀 더 시야를 넓혀서 예술이라는 게 뭐냐 mdash 하는 걸 먼저 알아야지 셋째에 가서 사진예술이

라는 게 뭐냐 mdash 를 연구하고 넷째에 가서야 비로소 작품이라던가 창작의식 기교 기술에 대한 검

토를 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기본조건을 머리 속에 언제나 간직하도록 나는 주장해 왔어요

임 기술면을 등한히 할 수는 없겠지요 기술 없이는 표현이 안되니까helliphellip 그러나 이선생 말씀처럼 인

간본연의 문제도 크긴 큽니다 다른 예술부문의 사람보다 교양면에서 뒤떨어지지나 않는가 mdash 하는

것이 항상 염려되는데helliphellip 만일 뒤떨어진다면 큰일이지요 기술도 중요한 문제겠지만 교양인격 같

은 것도 예술가가로서의 긍지를 위해선 떨어질 수 없는 문제고helliphellip 더욱이 좋은 기술을 가졌으면서

도 기초교양이 모자라서 좋은 작품을 낼 수 없다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으니까helliphellip 교양인으로서의

자격도 다른 예술부문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사진을 해야할겝니다

이 기교나 기술을 어떻게 우물쭈물 배웠다고 해서 작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helliphellip 예술이란 그 자체

에 대한 조예부터 깊어야 합니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조리개가 얼마다 타임이 어

떻다helliphellip 암실작업은 어떻게 하는 거다helliphellip 이것만을 알았다고 해서 작가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에

요helliphellip 인간면 예술면 기술면에 똑 같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마 사진을 연구하겠다는 신

인들의 기본이념이 돼야 할겝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지도한다는 면에서

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거든요 mdash

임 어쨌든 기술을 위주로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난 옛날 얘기입니다

지도자 시비

이 지났다기 보다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는 장래에나 변할 수 없는 기본이념이겠지요 사진이라는 것

은 더욱이나 고도의 대중성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인격과 교양이 필요해요 기계라는 거야 찍으면

사진이 되도록 마련된 것이니까 예술까지는 못 가도 사진은 되거든 mdash 그러니까 그것을 예술로 이

끌려면 찍는 사람의 성분이 문제되는 것이지요helliphellip

임 그런 의미에서도 사단의 규정이 필요하고 작가라는 규정이 필요해요 사단이라는 것에 너무 엄격한

규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helliphellip 만년필을 가졌다고 해서 전부 문학가가 아니라면helliphellip 카메라를 메었

으니 작가다 mdash 하는 엉터리도 용납될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우선 필요한 것은 취미 도락이라는 관념

을 지양해야 할 텐데helliphellip

이 취미가 차차 심각해지면 창작의식도 생기는게니까helliphellip 그런 사람들을 지도 계몽해서 한 사람이라

도 작가로 이끌어야 하겠지요helliphellip 카메라를 살 때부터 나는 사진작가가 되겠다 mdash 하는 사람은 있

을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임 lsquo싼데이rsquo 카메라맨은 논의의 대상이 안되구요helliphellip (웃음)

이 그러니까 지도자들이 작가적인 태도에 확고한 이념을 앞세우고 지도에 임해야 하는 건데helliphellip

본지 각 단체 지도층의 지도방침에 대한 구체적인 태도를 어떻게 규정하겠습니까 helliphellip

임 우선 사진에 대한 인식부터 고쳐야 해요 말이 중복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친구 좋고 사진 좋아서 우리

끼리 하면 그만이다 mdash 하는 생각들이 많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만이라도 그렇지 않다

관련 자료 소개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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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싶어요 학생들이 카메라를 사 가지고 몇 사람 모였으니까 책임자 격

인 선생이 필요하다 mdash 해서 책임 맡았다는 사람으로는 지도가 안 될 게 아닙니까 그렇다고 청해 오

지도 않는데 내정 격으로 뛰어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구helliphellip (웃음)

본지 또 한 가지 요즘 일대 성황을 이루는 것이 소위 현상사진(懸賞寫眞)이라는 건데요helliphellip 이 현상사진

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진에 대한 모욕도 있지helliphellip

임 거 참 꼴사나운 일이 많아요 현상이란 걸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helliphellip 그 하나는 어느 연구

단체에서 순수한 의미에서 발표 바탕이 없는 아마추어를 위해 마련하는 경우가 있을게고 또 하나는

선전용으로 포스터 mdash 같은 데에 써먹기 위한 상업 정책적인 의식에서 모집하는 현상이 있을 테지요

이 어느 경우이건 간에 좌우간 현상 모집을 하는 목적이 있는데helliphellip 응모자는 우선 현상의 목적부터 확

실히 알고 응모를 해야 하겠지helliphellip

임 그렇죠 그런데 이 상업 정책적인 현상의 경우에는 사진문화에 대한 모욕적인 행동이 퍽 많습니다

이거 참 불유쾌한 일이지만helliphellip 가령 예를 들자면 응모자는 원판을 제공하라던가 또 낙선자의 작

품은 일체 반환치 않는다는 따위helliphellip이게 얼마나 사진예술에 대한 모욕적 행위입니까 helliphellip

이 그래요helliphellip 확실히 모순된 일입니다

임 필요에 의해서 현상모집을 했으니까 당선된 작품은 물론 필요하겠지만helliphellip 낙선작품을 반환치 않는

다는 것은 언어도단 입니다 낙선이 됐다 해도 작가의 입장으론 대단히 귀중한 하나의 작품일 텐데

그걸 안 돌려 준대서야 말이 되나요 주최측은 낙선작품의 원화를 돌려 줄만한 성의를 가져야 도리

에 맞을 텐데helliphellip 요즘 현실은 lsquo낙선rsquo이란 푸대접 밑에 원판까지 몰수당하는 판국이니helliphellip 원 참

이 그러니까 응모자는 무엇보다도 현상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지helliphellip 여러 번 겪은 일이지만 심사를

하다 보면 전혀 현상 취지를 도외시한 작품들이 있는데helliphellip

임 그거야 보나마나 낙선이죠 (웃음)

이 그러믄요 현상 응모자로서는 출품 규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 아니겠어요

임 그럼요

이 그런데 어떤 것은 작품에 제목도 없는 것이 있거든요 그런가 하면 제목과 작품내용이 전혀 특이한

엉터리도 있구helliphellip

임 저도 여러 번 겪은 일입니다

이 제목이란 것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벌써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찍는다는 의식이 있는 이상

제목도 정해져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아주 작품과 제목이 동떨어진 것들이 응모해 오니까

낙선의 자격이 충분할 수밖에helliphellip 하하하 (웃음)

임 그게 모두 사진에 대한 성의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이 그래요 성의가 없어요 자기 작품에 대해선 최선의 성의를 다 해야 할 텐데 그런 태도가 없거든helliphellip

제목을 안 썼는지 못 썼는지는 모르지만helliphel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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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그저 무턱대고 발표의식만 왕성한 까닭이 아닐까요

이 그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된 작가가 아닌 이상 발표기회가 좀처럼 없을 테니까

자기 실력의 평가를 받는다던가 남들과 경쟁해 본다는 의미에서 현상에 자주 응모하는 것은 좋은데

helliphellip 아 어떤 친구는 자기 실력 생각은 하지도 않고 상품이 적다 많다 시비를 하는 친구도 있으니 참

기가 막힐 일이지

주최자의 무성의도 고쳐져야 하고

임 그건 lsquo현상rsquo이라고 내거는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순수한 사진연구단체에서 모집할 때는

lsquo공모전rsquo이라던가 하는 문구가 좋지 않을까요 lsquo현상rsquo이라니까 lsquo상rsquo을 바라게도 되겠지만 어쨌든

lsquo현상rsquo이란 말 자체가 순수하지 못해요

이 그건 확실히 생각해 볼 문제이겠군요helliphellip 순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helliphellip 응모자들이 심

사원이 누구냐mdash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도 순수하지 못하고helliphellip 또 주최자가 모집광고를 낼 때

lsquo심사원은 추후발표rsquo라mdash하는 것도 순수하지 못해요 이것도 참 불쾌한 일인데 lsquo추후발표rsquo라는 걸

다시 생각하면 lsquo준비가 안됐다rsquo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심사원의 준비도 안 해 놓고 현상을 모

집하는 그런 무성의가 또 어디 있어helliphellip 이건 일종의 사기가 아니면 거만일 겝니다

임 그나 그뿐인가요 lsquo심사원은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함rsquohelliphellip 하는 모호한 광고도 있지요 응모자의 입

장에서 생각하면helliphellip 심사원에 불만이 있으면 응모를 아니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 심사원 문제만

은 정정당당히 명시해야만 나중에 가서 심사에 대한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출품을 한 다음에 심사

원이 발표된다는 것은 심사에 대한 불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helliphellip

이 그리고 응모자의 동태를 가만히 보면 아까 얘기가 나왔던 소위 lsquo취미정도rsquo라는 층의 발표 의욕이 굉

장해서 대부분의 응모자가 이 부류인 것 같은데helliphellip 여기 한 가지 탈이 있어요 현상응모 작품의 심

사라는 것은 무제한의 심사 레벨을 놓고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응모 작품 중에서의 우수 작품을 가

려낸다는 것은 이거 상식 문제가 아닙니다

임 그렇죠

이 아 그런데 어떻게 해서 현상에 당선이 되거나 특히 특선이라도 하면 그만 자기가 갑자기 위대한

작가라도 된 것처럼 대가연(大家然) 하고 으쓱대는 친구들이 많아서 걱정이야helliphellip (웃음)

이 lsquo특선rsquo이라는 것은 응모해 온 작품들 중에서 특선이지 결코 한국 사단 전체의 수준에서 특선이라

는 것은 아닌데helliphellip 그만 한 번만 당선되면 코가 높아지고 대뜸 대가 행세를 하려고 드니helliphellip 참

신인들은 특히 조심해야 할 일이지

남의 것보고hellip 우리 것도 보내고hellip

본지 이제 화제를 좀 바꾸어서 세계사단의 동향을 좀 말씀해 주실까요

임 세계사단의 얘기라면 직접 보아야만 얘기가 될 텐데helliphellip

이 서울 바닥에서 썩으면서 세계사단의 얘기를 어떻게 본 듯이 할 수가 있겠나 카메라를 메고 세계일

관련 자료 소개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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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도 했어야 얘기가 되지

임 그것보다도 사진을 통한 국제 교류 얘기나 합시다

이 그게 좋겠군helliphellip 얼마 전에 덕수궁에서 자유중국의 소개사진전시가 있었죠 미국공보원의 활동도

이를 테면 국제교류의 한 형식일게고helliphellip

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자유중국과 월남의 사진전시가 있었는데helliphellip 우리도 수출을 한다면 그 보

다 훨씬 좋은 작품들이 나갈걸요helliphellip

이 한미합동전이던가 한중합동전 같은 것도 하면 역시 국제교류가 되겠지요helliphellip

임 한미합동전은 불원한 장래에 개최될 것입니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lsquo인간일가(人間一家)rsquo의 사진

이 아마 이월쯤 한국에 올 겝니다 미국대사관이 주동이 돼서 작품 503점 전부의 전시회 계획이 추

진되고 있으니까요

이 남이 보내줘서 본 것은 있지만 우리가 남에게 보여준 것은 없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야 우리도 남에

게 보여줘야 교류가 될 텐데helliphellip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두 사람의 작품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임 개인적인 활동은 있었지요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사진살롱에 사진을 보내고 있으니까 개인

적으로는 더러 나간 셈이죠 개인들의 수출이라도 좀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지만

이 우리의 것을 내보내고 외국 것을 들여와서 서로 감상하고 연구하는 게 이를 테면 국제교류인데

아마 명년쯤엔 될까 몰라

임 작품교환전 같은 것을 위해서 대대적인 계몽운동이 필요 하겠죠

이 그렇죠 운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어요

임 그런데 근본적인 얘기를 하자면 한국 작가의 역량이 아직도 부족한 것 같아요 언젠가 외국 작가에

게서 들은 말인데mdash한국 사람은 한국을 보지 않았다mdash하는 얘길 해요 사진 작가에게 대한 말이지

만helliphellip 나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이 퍽 중요한 얘기다mdash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를 직시하는 것만이

사진은 아니겠지만 실용사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것이 사실 아닐까요 회화적인 쌀롱 픽처라던

가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리얼리즘 사진이라는 것에 너무들 치우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 국제 교류의 시발은 역시 소개적(紹介的)인 것 다시 말해서 르포르타주적인 것이겠으니까helliphellip

임 외국 작품의 모방 같은 것은 이제 집어치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mdash예술적인 것 이것만을 너무 추

구했기 때문에 사실이 한국적인 것과 국민성의 묘사 같은 것이 잘 되지 않았지요 정서적인 것에만

너무 골몰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일이고 helliphellip 예술을 위한 예술에 정신들이 팔려 있었지나 않은

지helliphellip 예술을 하기 위한 사진이라는 관념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이 예술을 염두에 안 둔다면 실용사진이 돼 버리게

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너무 치우친 것 같단 말입니다

이 특히 국제 교류를 생각한다면 아닌 게 아니라 외국처럼 르포르타주적인 사진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할거에요

임 그래요 거기에 예술성을 띄워서 소화할 만한 역량 있는 작가가 필요해요

이 또 하나의 가장 큰 문제는 위정자의 관심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 큰 난관입니다 국제 교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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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가족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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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말이고 역시 정부당국자의 적극적인 주

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어디 그래요

임 우선 사단 자체의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작가들의 작업도 촉구되어야 하구helliphellip 아까도 말이 나왔지

만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 출품을 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점 같은데서 작가들의 반성도 필

요하고helliphellip

이 개별적으로 미국 등지에 보낸 것은 아마 상당한 수가 되겠지요

임 그럼요 그랬는데 왜 성과가 없느냐mdash하는 반성이 있어야죠

이 오늘의 현실을 예술적인 면에서 기록하고 작품화 해야겠는데helliphellip 막연하게 예술을 위한 작품을 보

내니까 기교적으론 훌륭할지 몰라도 작품 자체에 내용이 없어서helliphellip 그래서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닐

임 그런 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빨리 우리의 수준을 높여서 국제 조류와 호흡을 맞추어 나가

야 할 것입니다

이 이거 아마추어를 위한 얘기라는 것이 잠깐 탈선을 한 것 같군 그러나 이런 문제도 참고가 되긴 하니

까helliphellip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합시다

본지 수고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helliphellip

(기록 O기자)

이해선 「lsquo백오(白烏)rsquo의 변(辯)」 『동아일보』 1957년 4월 9일 4면

30여년 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입학

이 되었을 당시 자축기념하는 의미에서 호(號)를

하나 지어본 것이 백오(白烏)라는 두 글자였다 처

음 듣는 사람들 중에서는 거문[검은] 까마귀는 있

지만 흰 까마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서로 웃어버리고 그 뜻을

설명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자의

(字意)를 해명해볼까 한다 백(白)은 흰 빛이요 오

(烏)는 흑색으로 통하므로 우선 흑백을 대조시켜

놓고 흰 종이 위에다 검은 먹으로 휘호(揮毫)할 것

이니 그 뜻이 내 생활과 부합될 것 같으며 둘째로

백 자(字)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첫 자를 떼어놓

고 오는 반포오(反哺烏)로 그 이름이 높은 새이므

로 평소에 효자 노릇을 못하여 온 나의 좌우명으로도 적당할 듯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새 중에서는

혹간(或間) 백변종(白變種)이 생겨나는 수가 있는데 그 흰새를 서조(瑞鳥)라고 떠들던 옛 시절도 있었으므

관련 자료 소개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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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내가 우연히 호를 지어 본 것이 검은 까마귀떼 속에서 서조 백오를 발견하였으니 나의 전도(前途)에는

반드시 서광(瑞光)이 비칠 것 같으므로 이상 여러 가지 의미를 차례로 생각해 볼 때에 나에게는 이 외에 더

좋은 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자의였었고 궁금한채로 불려온 백오

였었다 만담궁변(漫談窮辯)을 물소물책(勿笑勿責) 하소서 (사진가)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

이해선 「중요한 내용middot형식-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년 10월 20일 5면

사진작품에는 사진 특유의 형식이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러한 특유의 형식에 알맞은 표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의 특수성은 형식이 가지는 특수성 보다는

기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주관적이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작품심사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동일하게 중요시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작

품 속에서 그야말로 형식과 내용이 알맞게 부합된 특출한 작

품을 볼 수는 없었다 형식이 좋으면 내용이 빈약하고 좀 내

용이 있으면 형식이 미숙하고helliphellip 모두 결점이 있다 그러나

입상작으로 뽑은 8 점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

다 그리고 금년에는 lsquo칼러rsquo사진의 응모 점수가 30점이나 되

고 그중에서도 3점이 입상되었고 또 9점이 입선되었다는 것

은 lsquo칼러rsquo 사진의 앞날을 위해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lt전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장gt

[제1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년 2월 8일 5면

외국작품의 세련되고 빈틈없는 lsquo테크닉rsquo은 국내작품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서 우선 국내

작품을 형식에서부터 누르고 말았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이루게 된 것은 국내작가들

의 역량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lsquo국산인화지rsquo가 얼마나 엉터리고 조악한 것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대체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더욱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은 이와 반대적인 경향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예술이든 먼저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볼 때 국내작품의 후진성은

두말할 것 없이 형식의 경시에 있다고 하겠다 심사결과 흑백부에서나 lsquo칼라rsquo부에서 겨우 동상으로 한 점

씩 밖에 국내작품이 입상되지 못했다는 것은 다소 섭섭한 느낌이나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경종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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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더욱 우리 심사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독에서 응모한 lsquo칼라rsquo

작품이었다 물체의 외관 색감을 초월한 내면의 lsquo이미지rsquo가 발

산하는 짙은 감정의 색감으로 작가의 개성과 사상을 인상 깊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내 lsquo칼라라보rsquo의 후진

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상작으로 뽑힌 외국작품들은 오

늘의 세계 사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는 큰 자극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

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제2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총 818점 응모-사진예술에 도움」

『동아일보』 1967년 2월 9일 4면

지난해와 같이 흑백부문에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들은 모두가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산인화지의 조악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작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올해는 흑백

부문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기꺼운 일이라고

하겠다

특히 칼라작품에 있어서는 독일의 작품들이 특출했고 이들 작품들의 색감은 현대 과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 최고상으로 뽑힌 lt잊은 친구gt와 몇 점의 입상작품들은 칼라릴리프와 소라리

세이숀[솔라리제이션] 등의 수법으로써 모티

브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를 초객체적이고 추

상적으로 표현하고 작가의 짙은 개성과 사상

과 철학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입상작으로 뽑은 16점의 작품들은 오늘의

세계사단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

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심사위원 이해선 (위원장) 임응식 서순삼

박필호 안월산 정인성 최경덕 (이상 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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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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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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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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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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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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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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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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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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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관련 자료 소개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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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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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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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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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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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9: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자료 소개 159

원 문 자 료

「제10회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년 10월 29일 4면

「제2회 동미전 평」 『동아일보』 1931년 4월 17일 4면

1 이해선 양화기(洋畵期) 관련 참고 자료

「입선자의 방명록」『매일신보』 1926년 5월 12일 3면

「금조 개장한 동미전 제2회」『동아일보』 1931년 4월 12일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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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참고 자료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년 5월 5일 2면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년 6월 29일 3면

「신록촬영대회개최-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년 6월 2일 4면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년 7월 7일 4면

예술사진전 조선사진예술연구회에서는 5월 6일부터 동11일까지의 6일간에 걸쳐 동화백화점(舊三越) 갸라리--에서 창립기념사진전을 개최하기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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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해선 관련 원문 자료

원문은 당시의 표기를 그대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현재의 띄어쓰기와 맞춤법에 맞지 않는 부분들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수정하였고 일부 [ ] 안에 병기했다 원문의 한자는 모두 한글 독음으로 고쳤으며 의미 전달을 위해 필요한 경우 ( )안에 병기했다

「대담 아마추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 pp 48~52

작가가 사태(沙汰)났어

본지 공사간에 바쁘실 텐데helliphellip 사진문화의 발전을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

해 주십사 하는 것은helliphellip 요즘 각 직장이나 학생들 간에 사진열이 굉장히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 비

추어서 이 아마추어 카메라맨의 지도 문제를 비롯하여 초보자의 진로랄까helliphellip 이런 문제에 대한 말

씀을 좀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해선6middot25 동란 후에 개인적으로 사진을 연구해 보겠다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직장이나 학교 단위로

사진동호자의 클럽이 많아 지고 작품 발표라던가 전시회 같은 것이 무척 많아졌는데helliphellip 어쨌든

일반 사회인이나 학생 간에 사진열이 높아졌다는 건 기쁜 일이야

임응식그런데 아직도 이 카메라를 사치품으로 취급하는 층이 많아서 곤란해요

이 나라(정부)에서부터 사치품 취급을 하더군helliphellip 여자들이 다이아몬드를 사려는 것과 사진을 연구하

려는 사람이 카메라 장만하는 것을 똑같이 취급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곤란

하지

임 헌데 우리 사단(寫壇)에선 우선 lsquo사진작가rsquo라는 용어를 쓰는 데에 신중을 기해야 하겠어요 웬 놈의

lsquo사진작가rsquo가 그리도 많은지helliphellip 이건 카메라만 메고 다니면 모두 작가 행세를 하니helliphellip

이 카메라 멘 것이 모두 lsquo작가rsquo라면 대한민국에 lsquo사진작가rsquo가 수 십만도 될 걸helliphellip 작가라는 친구들을

체에 넣어서 걸러 놓으면 엄격한 의미에서 진짜 lsquo작가rsquo는 몇 사람 밖에 없을 텐데helliphellip

임 호주머니에 만년필을 꽂았다고 해서 문학가 혹은 소설가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겠는데hellip

hellip 어쨌든 요즘 성행하는 사진작가의 사태를 우선 잡지에서 만이라도 용어 사용에 엄격한 규정을

지어서 질서를 잡아 주어야겠어요

이 그것도 과도기적 현상이겠으니까 차차 지양되겠지helliphellip 오늘 해달라는 얘기는 그런 넋두리가 아닐

테니까 어디 이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본지 한마디로 얘기하자면helliphellip 카메라는 어떻게 해서 장만을 했는데 mdash 자 그 다음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겐지 몰라서 어쩔 줄 모르는helliphellip 이런 아마추어와 초보자들의 진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얘기를

좀helliphellip 현재 직장 단위로 사진 동호자들이 모여서 클럽을 이룩한 것이 십 여 개 있고 학교 단위로는

이십 여 개나 되는데요helliphel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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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인식이 안이해서 탈이야

이 극히 초보적인 입장에서 사진을 해보고 싶다helliphellip 다년간 연구를 한 다음엔 작가가 돼 보겠다 mdash 하

는 사람들을 회원으로 해서 수 십 년 동안 연구를 해 왔는데helliphellip 오늘날 하고 있는 일도 그것이지만

helliphellip 여러 부문에 걸쳐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서적인 면에서 사진과 친해보고 싶다던가

또는 카메라를 장만했는데 어떻게 하면 앞으로 향상 발전할 수 있는가 mdash 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신인이라고 하겠지 특히 학생들의 교내 활동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helliphellip 헌데 막상 다다

르고 보면helliphellip 어떠한 길이 올바른 길인지 막연해 하는 모양이더군요

임 초보자들은 무엇보다도 사진 자체에 대한 정의를 뚜렷이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아마추어 mdash

하면 취미적 입장에서 사진을 다루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조각이나 회화와 같이 사진도 어엿한 예술이니

까 취미 도락(道樂)적인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예술을 추구하는 진지한 마음의 준비가 우선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물론이죠 대개 클럽 조직이 되어 있으니까 선생들의 지도를 받고 있겠지만 내가 알기에는 전문가

가 아닌 다시 말하면 취미 정도에서 관심이 있는 선생들이 지도를 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역시 전문으

로 사진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지도를 가끔씩이라도 받는 게 좋겠지요

임 지도를 한다는 사람들의 태도부터가 성실성이 없는 것 같아요 만년필을 샀으니까 나도 한 번 써 보

자 mdash 해서 작가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취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남의 lsquo지도rsquo를 담당

할 수는 없을 텐데 mdash 우리가 사진을 전공한대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억지로 지도해 주겠다고 밀고

들어 가겠다는 건 아니지만 mdash (웃음) mdash 어쨌든 전문가의 지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학생 클럽이나 직장 클럽 같은 동호자의 모임을 사단의 일부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취미

에서 시작했더라도 일정한 과정을 밟고 다년 연구를 거듭하면 자연히 작가를 지향하게 되겠지만hellip

hellip 그런 면에서도 처음 싹트기 시작하는 신인의 지도가 퍽 중요한 것이지요

취미middot도락이란 관념을 버려야 해

임 지금 형성되어 있다는 직장이나 학교 단체의 거의 전부가 전문적인 입장에 서 있지 않은 것 같더군

요helliphellip 사진에 대한 근본 의식이 너무도 안이한 것 같아요 카메라를 통한 표현의식에 절실한 감정

이 없어요helliphellip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비판을 받지 않는다helliphellip 하는 따위의 도피를 해서는 곤란

하죠helliphellip 창작의식이 확고하게 수립되지 않아서는 향상이 없는 것인데helliphellip 소문에 듣자면helliphellip 너

무 기술 면에만 치중하고 정신적인 면이 소홀히 취급된다는 거에요 helliphellip 나는 직장을 갖고 있으니

까 사진이란 것은 취미 정도로 한다 mdash 하는 태도를 버려야죠 특히 이 점은 지도자들에게 권하고 싶

은데helliphellip 예술의식helliphellip 이것이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절대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까

이 그렇구 말구요helliphellip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새로 사진을 공부하겠다는 신인들에게 네 가지 의식을 주

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휴머니즘 mdash 우선 사람이 돼야 하거든요 교양이라던가 인격 덕망helliphellip 이런 면에서 인간이

돼 있어야 하고 둘째는 사진예술을 한다고 해서 사진예술이 무엇이냐helliphellip 이것만을 추궁해서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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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요 좀 더 시야를 넓혀서 예술이라는 게 뭐냐 mdash 하는 걸 먼저 알아야지 셋째에 가서 사진예술이

라는 게 뭐냐 mdash 를 연구하고 넷째에 가서야 비로소 작품이라던가 창작의식 기교 기술에 대한 검

토를 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기본조건을 머리 속에 언제나 간직하도록 나는 주장해 왔어요

임 기술면을 등한히 할 수는 없겠지요 기술 없이는 표현이 안되니까helliphellip 그러나 이선생 말씀처럼 인

간본연의 문제도 크긴 큽니다 다른 예술부문의 사람보다 교양면에서 뒤떨어지지나 않는가 mdash 하는

것이 항상 염려되는데helliphellip 만일 뒤떨어진다면 큰일이지요 기술도 중요한 문제겠지만 교양인격 같

은 것도 예술가가로서의 긍지를 위해선 떨어질 수 없는 문제고helliphellip 더욱이 좋은 기술을 가졌으면서

도 기초교양이 모자라서 좋은 작품을 낼 수 없다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으니까helliphellip 교양인으로서의

자격도 다른 예술부문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사진을 해야할겝니다

이 기교나 기술을 어떻게 우물쭈물 배웠다고 해서 작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helliphellip 예술이란 그 자체

에 대한 조예부터 깊어야 합니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조리개가 얼마다 타임이 어

떻다helliphellip 암실작업은 어떻게 하는 거다helliphellip 이것만을 알았다고 해서 작가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에

요helliphellip 인간면 예술면 기술면에 똑 같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마 사진을 연구하겠다는 신

인들의 기본이념이 돼야 할겝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지도한다는 면에서

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거든요 mdash

임 어쨌든 기술을 위주로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난 옛날 얘기입니다

지도자 시비

이 지났다기 보다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는 장래에나 변할 수 없는 기본이념이겠지요 사진이라는 것

은 더욱이나 고도의 대중성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인격과 교양이 필요해요 기계라는 거야 찍으면

사진이 되도록 마련된 것이니까 예술까지는 못 가도 사진은 되거든 mdash 그러니까 그것을 예술로 이

끌려면 찍는 사람의 성분이 문제되는 것이지요helliphellip

임 그런 의미에서도 사단의 규정이 필요하고 작가라는 규정이 필요해요 사단이라는 것에 너무 엄격한

규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helliphellip 만년필을 가졌다고 해서 전부 문학가가 아니라면helliphellip 카메라를 메었

으니 작가다 mdash 하는 엉터리도 용납될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우선 필요한 것은 취미 도락이라는 관념

을 지양해야 할 텐데helliphellip

이 취미가 차차 심각해지면 창작의식도 생기는게니까helliphellip 그런 사람들을 지도 계몽해서 한 사람이라

도 작가로 이끌어야 하겠지요helliphellip 카메라를 살 때부터 나는 사진작가가 되겠다 mdash 하는 사람은 있

을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임 lsquo싼데이rsquo 카메라맨은 논의의 대상이 안되구요helliphellip (웃음)

이 그러니까 지도자들이 작가적인 태도에 확고한 이념을 앞세우고 지도에 임해야 하는 건데helliphellip

본지 각 단체 지도층의 지도방침에 대한 구체적인 태도를 어떻게 규정하겠습니까 helliphellip

임 우선 사진에 대한 인식부터 고쳐야 해요 말이 중복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친구 좋고 사진 좋아서 우리

끼리 하면 그만이다 mdash 하는 생각들이 많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만이라도 그렇지 않다

관련 자료 소개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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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싶어요 학생들이 카메라를 사 가지고 몇 사람 모였으니까 책임자 격

인 선생이 필요하다 mdash 해서 책임 맡았다는 사람으로는 지도가 안 될 게 아닙니까 그렇다고 청해 오

지도 않는데 내정 격으로 뛰어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구helliphellip (웃음)

본지 또 한 가지 요즘 일대 성황을 이루는 것이 소위 현상사진(懸賞寫眞)이라는 건데요helliphellip 이 현상사진

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진에 대한 모욕도 있지helliphellip

임 거 참 꼴사나운 일이 많아요 현상이란 걸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helliphellip 그 하나는 어느 연구

단체에서 순수한 의미에서 발표 바탕이 없는 아마추어를 위해 마련하는 경우가 있을게고 또 하나는

선전용으로 포스터 mdash 같은 데에 써먹기 위한 상업 정책적인 의식에서 모집하는 현상이 있을 테지요

이 어느 경우이건 간에 좌우간 현상 모집을 하는 목적이 있는데helliphellip 응모자는 우선 현상의 목적부터 확

실히 알고 응모를 해야 하겠지helliphellip

임 그렇죠 그런데 이 상업 정책적인 현상의 경우에는 사진문화에 대한 모욕적인 행동이 퍽 많습니다

이거 참 불유쾌한 일이지만helliphellip 가령 예를 들자면 응모자는 원판을 제공하라던가 또 낙선자의 작

품은 일체 반환치 않는다는 따위helliphellip이게 얼마나 사진예술에 대한 모욕적 행위입니까 helliphellip

이 그래요helliphellip 확실히 모순된 일입니다

임 필요에 의해서 현상모집을 했으니까 당선된 작품은 물론 필요하겠지만helliphellip 낙선작품을 반환치 않는

다는 것은 언어도단 입니다 낙선이 됐다 해도 작가의 입장으론 대단히 귀중한 하나의 작품일 텐데

그걸 안 돌려 준대서야 말이 되나요 주최측은 낙선작품의 원화를 돌려 줄만한 성의를 가져야 도리

에 맞을 텐데helliphellip 요즘 현실은 lsquo낙선rsquo이란 푸대접 밑에 원판까지 몰수당하는 판국이니helliphellip 원 참

이 그러니까 응모자는 무엇보다도 현상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지helliphellip 여러 번 겪은 일이지만 심사를

하다 보면 전혀 현상 취지를 도외시한 작품들이 있는데helliphellip

임 그거야 보나마나 낙선이죠 (웃음)

이 그러믄요 현상 응모자로서는 출품 규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 아니겠어요

임 그럼요

이 그런데 어떤 것은 작품에 제목도 없는 것이 있거든요 그런가 하면 제목과 작품내용이 전혀 특이한

엉터리도 있구helliphellip

임 저도 여러 번 겪은 일입니다

이 제목이란 것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벌써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찍는다는 의식이 있는 이상

제목도 정해져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아주 작품과 제목이 동떨어진 것들이 응모해 오니까

낙선의 자격이 충분할 수밖에helliphellip 하하하 (웃음)

임 그게 모두 사진에 대한 성의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이 그래요 성의가 없어요 자기 작품에 대해선 최선의 성의를 다 해야 할 텐데 그런 태도가 없거든helliphellip

제목을 안 썼는지 못 썼는지는 모르지만helliphel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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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그저 무턱대고 발표의식만 왕성한 까닭이 아닐까요

이 그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된 작가가 아닌 이상 발표기회가 좀처럼 없을 테니까

자기 실력의 평가를 받는다던가 남들과 경쟁해 본다는 의미에서 현상에 자주 응모하는 것은 좋은데

helliphellip 아 어떤 친구는 자기 실력 생각은 하지도 않고 상품이 적다 많다 시비를 하는 친구도 있으니 참

기가 막힐 일이지

주최자의 무성의도 고쳐져야 하고

임 그건 lsquo현상rsquo이라고 내거는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순수한 사진연구단체에서 모집할 때는

lsquo공모전rsquo이라던가 하는 문구가 좋지 않을까요 lsquo현상rsquo이라니까 lsquo상rsquo을 바라게도 되겠지만 어쨌든

lsquo현상rsquo이란 말 자체가 순수하지 못해요

이 그건 확실히 생각해 볼 문제이겠군요helliphellip 순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helliphellip 응모자들이 심

사원이 누구냐mdash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도 순수하지 못하고helliphellip 또 주최자가 모집광고를 낼 때

lsquo심사원은 추후발표rsquo라mdash하는 것도 순수하지 못해요 이것도 참 불쾌한 일인데 lsquo추후발표rsquo라는 걸

다시 생각하면 lsquo준비가 안됐다rsquo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심사원의 준비도 안 해 놓고 현상을 모

집하는 그런 무성의가 또 어디 있어helliphellip 이건 일종의 사기가 아니면 거만일 겝니다

임 그나 그뿐인가요 lsquo심사원은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함rsquohelliphellip 하는 모호한 광고도 있지요 응모자의 입

장에서 생각하면helliphellip 심사원에 불만이 있으면 응모를 아니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 심사원 문제만

은 정정당당히 명시해야만 나중에 가서 심사에 대한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출품을 한 다음에 심사

원이 발표된다는 것은 심사에 대한 불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helliphellip

이 그리고 응모자의 동태를 가만히 보면 아까 얘기가 나왔던 소위 lsquo취미정도rsquo라는 층의 발표 의욕이 굉

장해서 대부분의 응모자가 이 부류인 것 같은데helliphellip 여기 한 가지 탈이 있어요 현상응모 작품의 심

사라는 것은 무제한의 심사 레벨을 놓고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응모 작품 중에서의 우수 작품을 가

려낸다는 것은 이거 상식 문제가 아닙니다

임 그렇죠

이 아 그런데 어떻게 해서 현상에 당선이 되거나 특히 특선이라도 하면 그만 자기가 갑자기 위대한

작가라도 된 것처럼 대가연(大家然) 하고 으쓱대는 친구들이 많아서 걱정이야helliphellip (웃음)

이 lsquo특선rsquo이라는 것은 응모해 온 작품들 중에서 특선이지 결코 한국 사단 전체의 수준에서 특선이라

는 것은 아닌데helliphellip 그만 한 번만 당선되면 코가 높아지고 대뜸 대가 행세를 하려고 드니helliphellip 참

신인들은 특히 조심해야 할 일이지

남의 것보고hellip 우리 것도 보내고hellip

본지 이제 화제를 좀 바꾸어서 세계사단의 동향을 좀 말씀해 주실까요

임 세계사단의 얘기라면 직접 보아야만 얘기가 될 텐데helliphellip

이 서울 바닥에서 썩으면서 세계사단의 얘기를 어떻게 본 듯이 할 수가 있겠나 카메라를 메고 세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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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도 했어야 얘기가 되지

임 그것보다도 사진을 통한 국제 교류 얘기나 합시다

이 그게 좋겠군helliphellip 얼마 전에 덕수궁에서 자유중국의 소개사진전시가 있었죠 미국공보원의 활동도

이를 테면 국제교류의 한 형식일게고helliphellip

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자유중국과 월남의 사진전시가 있었는데helliphellip 우리도 수출을 한다면 그 보

다 훨씬 좋은 작품들이 나갈걸요helliphellip

이 한미합동전이던가 한중합동전 같은 것도 하면 역시 국제교류가 되겠지요helliphellip

임 한미합동전은 불원한 장래에 개최될 것입니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lsquo인간일가(人間一家)rsquo의 사진

이 아마 이월쯤 한국에 올 겝니다 미국대사관이 주동이 돼서 작품 503점 전부의 전시회 계획이 추

진되고 있으니까요

이 남이 보내줘서 본 것은 있지만 우리가 남에게 보여준 것은 없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야 우리도 남에

게 보여줘야 교류가 될 텐데helliphellip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두 사람의 작품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임 개인적인 활동은 있었지요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사진살롱에 사진을 보내고 있으니까 개인

적으로는 더러 나간 셈이죠 개인들의 수출이라도 좀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지만

이 우리의 것을 내보내고 외국 것을 들여와서 서로 감상하고 연구하는 게 이를 테면 국제교류인데

아마 명년쯤엔 될까 몰라

임 작품교환전 같은 것을 위해서 대대적인 계몽운동이 필요 하겠죠

이 그렇죠 운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어요

임 그런데 근본적인 얘기를 하자면 한국 작가의 역량이 아직도 부족한 것 같아요 언젠가 외국 작가에

게서 들은 말인데mdash한국 사람은 한국을 보지 않았다mdash하는 얘길 해요 사진 작가에게 대한 말이지

만helliphellip 나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이 퍽 중요한 얘기다mdash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를 직시하는 것만이

사진은 아니겠지만 실용사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것이 사실 아닐까요 회화적인 쌀롱 픽처라던

가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리얼리즘 사진이라는 것에 너무들 치우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 국제 교류의 시발은 역시 소개적(紹介的)인 것 다시 말해서 르포르타주적인 것이겠으니까helliphellip

임 외국 작품의 모방 같은 것은 이제 집어치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mdash예술적인 것 이것만을 너무 추

구했기 때문에 사실이 한국적인 것과 국민성의 묘사 같은 것이 잘 되지 않았지요 정서적인 것에만

너무 골몰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일이고 helliphellip 예술을 위한 예술에 정신들이 팔려 있었지나 않은

지helliphellip 예술을 하기 위한 사진이라는 관념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이 예술을 염두에 안 둔다면 실용사진이 돼 버리게

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너무 치우친 것 같단 말입니다

이 특히 국제 교류를 생각한다면 아닌 게 아니라 외국처럼 르포르타주적인 사진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할거에요

임 그래요 거기에 예술성을 띄워서 소화할 만한 역량 있는 작가가 필요해요

이 또 하나의 가장 큰 문제는 위정자의 관심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 큰 난관입니다 국제 교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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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가족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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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말이고 역시 정부당국자의 적극적인 주

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어디 그래요

임 우선 사단 자체의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작가들의 작업도 촉구되어야 하구helliphellip 아까도 말이 나왔지

만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 출품을 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점 같은데서 작가들의 반성도 필

요하고helliphellip

이 개별적으로 미국 등지에 보낸 것은 아마 상당한 수가 되겠지요

임 그럼요 그랬는데 왜 성과가 없느냐mdash하는 반성이 있어야죠

이 오늘의 현실을 예술적인 면에서 기록하고 작품화 해야겠는데helliphellip 막연하게 예술을 위한 작품을 보

내니까 기교적으론 훌륭할지 몰라도 작품 자체에 내용이 없어서helliphellip 그래서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닐

임 그런 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빨리 우리의 수준을 높여서 국제 조류와 호흡을 맞추어 나가

야 할 것입니다

이 이거 아마추어를 위한 얘기라는 것이 잠깐 탈선을 한 것 같군 그러나 이런 문제도 참고가 되긴 하니

까helliphellip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합시다

본지 수고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helliphellip

(기록 O기자)

이해선 「lsquo백오(白烏)rsquo의 변(辯)」 『동아일보』 1957년 4월 9일 4면

30여년 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입학

이 되었을 당시 자축기념하는 의미에서 호(號)를

하나 지어본 것이 백오(白烏)라는 두 글자였다 처

음 듣는 사람들 중에서는 거문[검은] 까마귀는 있

지만 흰 까마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서로 웃어버리고 그 뜻을

설명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자의

(字意)를 해명해볼까 한다 백(白)은 흰 빛이요 오

(烏)는 흑색으로 통하므로 우선 흑백을 대조시켜

놓고 흰 종이 위에다 검은 먹으로 휘호(揮毫)할 것

이니 그 뜻이 내 생활과 부합될 것 같으며 둘째로

백 자(字)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첫 자를 떼어놓

고 오는 반포오(反哺烏)로 그 이름이 높은 새이므

로 평소에 효자 노릇을 못하여 온 나의 좌우명으로도 적당할 듯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새 중에서는

혹간(或間) 백변종(白變種)이 생겨나는 수가 있는데 그 흰새를 서조(瑞鳥)라고 떠들던 옛 시절도 있었으므

관련 자료 소개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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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내가 우연히 호를 지어 본 것이 검은 까마귀떼 속에서 서조 백오를 발견하였으니 나의 전도(前途)에는

반드시 서광(瑞光)이 비칠 것 같으므로 이상 여러 가지 의미를 차례로 생각해 볼 때에 나에게는 이 외에 더

좋은 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자의였었고 궁금한채로 불려온 백오

였었다 만담궁변(漫談窮辯)을 물소물책(勿笑勿責) 하소서 (사진가)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

이해선 「중요한 내용middot형식-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년 10월 20일 5면

사진작품에는 사진 특유의 형식이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러한 특유의 형식에 알맞은 표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의 특수성은 형식이 가지는 특수성 보다는

기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주관적이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작품심사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동일하게 중요시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작

품 속에서 그야말로 형식과 내용이 알맞게 부합된 특출한 작

품을 볼 수는 없었다 형식이 좋으면 내용이 빈약하고 좀 내

용이 있으면 형식이 미숙하고helliphellip 모두 결점이 있다 그러나

입상작으로 뽑은 8 점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

다 그리고 금년에는 lsquo칼러rsquo사진의 응모 점수가 30점이나 되

고 그중에서도 3점이 입상되었고 또 9점이 입선되었다는 것

은 lsquo칼러rsquo 사진의 앞날을 위해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lt전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장gt

[제1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년 2월 8일 5면

외국작품의 세련되고 빈틈없는 lsquo테크닉rsquo은 국내작품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서 우선 국내

작품을 형식에서부터 누르고 말았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이루게 된 것은 국내작가들

의 역량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lsquo국산인화지rsquo가 얼마나 엉터리고 조악한 것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대체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더욱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은 이와 반대적인 경향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예술이든 먼저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볼 때 국내작품의 후진성은

두말할 것 없이 형식의 경시에 있다고 하겠다 심사결과 흑백부에서나 lsquo칼라rsquo부에서 겨우 동상으로 한 점

씩 밖에 국내작품이 입상되지 못했다는 것은 다소 섭섭한 느낌이나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경종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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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더욱 우리 심사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독에서 응모한 lsquo칼라rsquo

작품이었다 물체의 외관 색감을 초월한 내면의 lsquo이미지rsquo가 발

산하는 짙은 감정의 색감으로 작가의 개성과 사상을 인상 깊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내 lsquo칼라라보rsquo의 후진

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상작으로 뽑힌 외국작품들은 오

늘의 세계 사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는 큰 자극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

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제2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총 818점 응모-사진예술에 도움」

『동아일보』 1967년 2월 9일 4면

지난해와 같이 흑백부문에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들은 모두가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산인화지의 조악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작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올해는 흑백

부문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기꺼운 일이라고

하겠다

특히 칼라작품에 있어서는 독일의 작품들이 특출했고 이들 작품들의 색감은 현대 과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 최고상으로 뽑힌 lt잊은 친구gt와 몇 점의 입상작품들은 칼라릴리프와 소라리

세이숀[솔라리제이션] 등의 수법으로써 모티

브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를 초객체적이고 추

상적으로 표현하고 작가의 짙은 개성과 사상

과 철학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입상작으로 뽑은 16점의 작품들은 오늘의

세계사단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

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심사위원 이해선 (위원장) 임응식 서순삼

박필호 안월산 정인성 최경덕 (이상 7명)

관련 자료 소개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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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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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관련 자료 소개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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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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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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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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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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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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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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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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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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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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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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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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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0: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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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관련 참고 자료

「예술사진전」 『동아일보』 1946년 5월 5일 2면 「제1회 조선예술사진전 입선심사발표」 『경향신문』 1947년 6월 29일 3면

「신록촬영대회개최-대한사진예술연구회서」 『동아일보』 1957년 6월 2일 4면

「대한사연 10주년 기념 촬영대회」 『동아일보』 1955년 7월 7일 4면

예술사진전 조선사진예술연구회에서는 5월 6일부터 동11일까지의 6일간에 걸쳐 동화백화점(舊三越) 갸라리--에서 창립기념사진전을 개최하기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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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해선 관련 원문 자료

원문은 당시의 표기를 그대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현재의 띄어쓰기와 맞춤법에 맞지 않는 부분들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수정하였고 일부 [ ] 안에 병기했다 원문의 한자는 모두 한글 독음으로 고쳤으며 의미 전달을 위해 필요한 경우 ( )안에 병기했다

「대담 아마추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 pp 48~52

작가가 사태(沙汰)났어

본지 공사간에 바쁘실 텐데helliphellip 사진문화의 발전을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

해 주십사 하는 것은helliphellip 요즘 각 직장이나 학생들 간에 사진열이 굉장히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 비

추어서 이 아마추어 카메라맨의 지도 문제를 비롯하여 초보자의 진로랄까helliphellip 이런 문제에 대한 말

씀을 좀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해선6middot25 동란 후에 개인적으로 사진을 연구해 보겠다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직장이나 학교 단위로

사진동호자의 클럽이 많아 지고 작품 발표라던가 전시회 같은 것이 무척 많아졌는데helliphellip 어쨌든

일반 사회인이나 학생 간에 사진열이 높아졌다는 건 기쁜 일이야

임응식그런데 아직도 이 카메라를 사치품으로 취급하는 층이 많아서 곤란해요

이 나라(정부)에서부터 사치품 취급을 하더군helliphellip 여자들이 다이아몬드를 사려는 것과 사진을 연구하

려는 사람이 카메라 장만하는 것을 똑같이 취급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곤란

하지

임 헌데 우리 사단(寫壇)에선 우선 lsquo사진작가rsquo라는 용어를 쓰는 데에 신중을 기해야 하겠어요 웬 놈의

lsquo사진작가rsquo가 그리도 많은지helliphellip 이건 카메라만 메고 다니면 모두 작가 행세를 하니helliphellip

이 카메라 멘 것이 모두 lsquo작가rsquo라면 대한민국에 lsquo사진작가rsquo가 수 십만도 될 걸helliphellip 작가라는 친구들을

체에 넣어서 걸러 놓으면 엄격한 의미에서 진짜 lsquo작가rsquo는 몇 사람 밖에 없을 텐데helliphellip

임 호주머니에 만년필을 꽂았다고 해서 문학가 혹은 소설가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겠는데hellip

hellip 어쨌든 요즘 성행하는 사진작가의 사태를 우선 잡지에서 만이라도 용어 사용에 엄격한 규정을

지어서 질서를 잡아 주어야겠어요

이 그것도 과도기적 현상이겠으니까 차차 지양되겠지helliphellip 오늘 해달라는 얘기는 그런 넋두리가 아닐

테니까 어디 이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본지 한마디로 얘기하자면helliphellip 카메라는 어떻게 해서 장만을 했는데 mdash 자 그 다음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겐지 몰라서 어쩔 줄 모르는helliphellip 이런 아마추어와 초보자들의 진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얘기를

좀helliphellip 현재 직장 단위로 사진 동호자들이 모여서 클럽을 이룩한 것이 십 여 개 있고 학교 단위로는

이십 여 개나 되는데요helliphellip

관련 자료 소개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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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인식이 안이해서 탈이야

이 극히 초보적인 입장에서 사진을 해보고 싶다helliphellip 다년간 연구를 한 다음엔 작가가 돼 보겠다 mdash 하

는 사람들을 회원으로 해서 수 십 년 동안 연구를 해 왔는데helliphellip 오늘날 하고 있는 일도 그것이지만

helliphellip 여러 부문에 걸쳐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서적인 면에서 사진과 친해보고 싶다던가

또는 카메라를 장만했는데 어떻게 하면 앞으로 향상 발전할 수 있는가 mdash 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신인이라고 하겠지 특히 학생들의 교내 활동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helliphellip 헌데 막상 다다

르고 보면helliphellip 어떠한 길이 올바른 길인지 막연해 하는 모양이더군요

임 초보자들은 무엇보다도 사진 자체에 대한 정의를 뚜렷이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아마추어 mdash

하면 취미적 입장에서 사진을 다루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조각이나 회화와 같이 사진도 어엿한 예술이니

까 취미 도락(道樂)적인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예술을 추구하는 진지한 마음의 준비가 우선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물론이죠 대개 클럽 조직이 되어 있으니까 선생들의 지도를 받고 있겠지만 내가 알기에는 전문가

가 아닌 다시 말하면 취미 정도에서 관심이 있는 선생들이 지도를 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역시 전문으

로 사진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지도를 가끔씩이라도 받는 게 좋겠지요

임 지도를 한다는 사람들의 태도부터가 성실성이 없는 것 같아요 만년필을 샀으니까 나도 한 번 써 보

자 mdash 해서 작가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취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남의 lsquo지도rsquo를 담당

할 수는 없을 텐데 mdash 우리가 사진을 전공한대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억지로 지도해 주겠다고 밀고

들어 가겠다는 건 아니지만 mdash (웃음) mdash 어쨌든 전문가의 지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학생 클럽이나 직장 클럽 같은 동호자의 모임을 사단의 일부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취미

에서 시작했더라도 일정한 과정을 밟고 다년 연구를 거듭하면 자연히 작가를 지향하게 되겠지만hellip

hellip 그런 면에서도 처음 싹트기 시작하는 신인의 지도가 퍽 중요한 것이지요

취미middot도락이란 관념을 버려야 해

임 지금 형성되어 있다는 직장이나 학교 단체의 거의 전부가 전문적인 입장에 서 있지 않은 것 같더군

요helliphellip 사진에 대한 근본 의식이 너무도 안이한 것 같아요 카메라를 통한 표현의식에 절실한 감정

이 없어요helliphellip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비판을 받지 않는다helliphellip 하는 따위의 도피를 해서는 곤란

하죠helliphellip 창작의식이 확고하게 수립되지 않아서는 향상이 없는 것인데helliphellip 소문에 듣자면helliphellip 너

무 기술 면에만 치중하고 정신적인 면이 소홀히 취급된다는 거에요 helliphellip 나는 직장을 갖고 있으니

까 사진이란 것은 취미 정도로 한다 mdash 하는 태도를 버려야죠 특히 이 점은 지도자들에게 권하고 싶

은데helliphellip 예술의식helliphellip 이것이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절대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까

이 그렇구 말구요helliphellip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새로 사진을 공부하겠다는 신인들에게 네 가지 의식을 주

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휴머니즘 mdash 우선 사람이 돼야 하거든요 교양이라던가 인격 덕망helliphellip 이런 면에서 인간이

돼 있어야 하고 둘째는 사진예술을 한다고 해서 사진예술이 무엇이냐helliphellip 이것만을 추궁해서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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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요 좀 더 시야를 넓혀서 예술이라는 게 뭐냐 mdash 하는 걸 먼저 알아야지 셋째에 가서 사진예술이

라는 게 뭐냐 mdash 를 연구하고 넷째에 가서야 비로소 작품이라던가 창작의식 기교 기술에 대한 검

토를 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기본조건을 머리 속에 언제나 간직하도록 나는 주장해 왔어요

임 기술면을 등한히 할 수는 없겠지요 기술 없이는 표현이 안되니까helliphellip 그러나 이선생 말씀처럼 인

간본연의 문제도 크긴 큽니다 다른 예술부문의 사람보다 교양면에서 뒤떨어지지나 않는가 mdash 하는

것이 항상 염려되는데helliphellip 만일 뒤떨어진다면 큰일이지요 기술도 중요한 문제겠지만 교양인격 같

은 것도 예술가가로서의 긍지를 위해선 떨어질 수 없는 문제고helliphellip 더욱이 좋은 기술을 가졌으면서

도 기초교양이 모자라서 좋은 작품을 낼 수 없다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으니까helliphellip 교양인으로서의

자격도 다른 예술부문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사진을 해야할겝니다

이 기교나 기술을 어떻게 우물쭈물 배웠다고 해서 작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helliphellip 예술이란 그 자체

에 대한 조예부터 깊어야 합니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조리개가 얼마다 타임이 어

떻다helliphellip 암실작업은 어떻게 하는 거다helliphellip 이것만을 알았다고 해서 작가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에

요helliphellip 인간면 예술면 기술면에 똑 같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마 사진을 연구하겠다는 신

인들의 기본이념이 돼야 할겝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지도한다는 면에서

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거든요 mdash

임 어쨌든 기술을 위주로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난 옛날 얘기입니다

지도자 시비

이 지났다기 보다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는 장래에나 변할 수 없는 기본이념이겠지요 사진이라는 것

은 더욱이나 고도의 대중성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인격과 교양이 필요해요 기계라는 거야 찍으면

사진이 되도록 마련된 것이니까 예술까지는 못 가도 사진은 되거든 mdash 그러니까 그것을 예술로 이

끌려면 찍는 사람의 성분이 문제되는 것이지요helliphellip

임 그런 의미에서도 사단의 규정이 필요하고 작가라는 규정이 필요해요 사단이라는 것에 너무 엄격한

규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helliphellip 만년필을 가졌다고 해서 전부 문학가가 아니라면helliphellip 카메라를 메었

으니 작가다 mdash 하는 엉터리도 용납될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우선 필요한 것은 취미 도락이라는 관념

을 지양해야 할 텐데helliphellip

이 취미가 차차 심각해지면 창작의식도 생기는게니까helliphellip 그런 사람들을 지도 계몽해서 한 사람이라

도 작가로 이끌어야 하겠지요helliphellip 카메라를 살 때부터 나는 사진작가가 되겠다 mdash 하는 사람은 있

을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임 lsquo싼데이rsquo 카메라맨은 논의의 대상이 안되구요helliphellip (웃음)

이 그러니까 지도자들이 작가적인 태도에 확고한 이념을 앞세우고 지도에 임해야 하는 건데helliphellip

본지 각 단체 지도층의 지도방침에 대한 구체적인 태도를 어떻게 규정하겠습니까 helliphellip

임 우선 사진에 대한 인식부터 고쳐야 해요 말이 중복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친구 좋고 사진 좋아서 우리

끼리 하면 그만이다 mdash 하는 생각들이 많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만이라도 그렇지 않다

관련 자료 소개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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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싶어요 학생들이 카메라를 사 가지고 몇 사람 모였으니까 책임자 격

인 선생이 필요하다 mdash 해서 책임 맡았다는 사람으로는 지도가 안 될 게 아닙니까 그렇다고 청해 오

지도 않는데 내정 격으로 뛰어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구helliphellip (웃음)

본지 또 한 가지 요즘 일대 성황을 이루는 것이 소위 현상사진(懸賞寫眞)이라는 건데요helliphellip 이 현상사진

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진에 대한 모욕도 있지helliphellip

임 거 참 꼴사나운 일이 많아요 현상이란 걸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helliphellip 그 하나는 어느 연구

단체에서 순수한 의미에서 발표 바탕이 없는 아마추어를 위해 마련하는 경우가 있을게고 또 하나는

선전용으로 포스터 mdash 같은 데에 써먹기 위한 상업 정책적인 의식에서 모집하는 현상이 있을 테지요

이 어느 경우이건 간에 좌우간 현상 모집을 하는 목적이 있는데helliphellip 응모자는 우선 현상의 목적부터 확

실히 알고 응모를 해야 하겠지helliphellip

임 그렇죠 그런데 이 상업 정책적인 현상의 경우에는 사진문화에 대한 모욕적인 행동이 퍽 많습니다

이거 참 불유쾌한 일이지만helliphellip 가령 예를 들자면 응모자는 원판을 제공하라던가 또 낙선자의 작

품은 일체 반환치 않는다는 따위helliphellip이게 얼마나 사진예술에 대한 모욕적 행위입니까 helliphellip

이 그래요helliphellip 확실히 모순된 일입니다

임 필요에 의해서 현상모집을 했으니까 당선된 작품은 물론 필요하겠지만helliphellip 낙선작품을 반환치 않는

다는 것은 언어도단 입니다 낙선이 됐다 해도 작가의 입장으론 대단히 귀중한 하나의 작품일 텐데

그걸 안 돌려 준대서야 말이 되나요 주최측은 낙선작품의 원화를 돌려 줄만한 성의를 가져야 도리

에 맞을 텐데helliphellip 요즘 현실은 lsquo낙선rsquo이란 푸대접 밑에 원판까지 몰수당하는 판국이니helliphellip 원 참

이 그러니까 응모자는 무엇보다도 현상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지helliphellip 여러 번 겪은 일이지만 심사를

하다 보면 전혀 현상 취지를 도외시한 작품들이 있는데helliphellip

임 그거야 보나마나 낙선이죠 (웃음)

이 그러믄요 현상 응모자로서는 출품 규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 아니겠어요

임 그럼요

이 그런데 어떤 것은 작품에 제목도 없는 것이 있거든요 그런가 하면 제목과 작품내용이 전혀 특이한

엉터리도 있구helliphellip

임 저도 여러 번 겪은 일입니다

이 제목이란 것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벌써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찍는다는 의식이 있는 이상

제목도 정해져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아주 작품과 제목이 동떨어진 것들이 응모해 오니까

낙선의 자격이 충분할 수밖에helliphellip 하하하 (웃음)

임 그게 모두 사진에 대한 성의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이 그래요 성의가 없어요 자기 작품에 대해선 최선의 성의를 다 해야 할 텐데 그런 태도가 없거든helliphellip

제목을 안 썼는지 못 썼는지는 모르지만helliphel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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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그저 무턱대고 발표의식만 왕성한 까닭이 아닐까요

이 그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된 작가가 아닌 이상 발표기회가 좀처럼 없을 테니까

자기 실력의 평가를 받는다던가 남들과 경쟁해 본다는 의미에서 현상에 자주 응모하는 것은 좋은데

helliphellip 아 어떤 친구는 자기 실력 생각은 하지도 않고 상품이 적다 많다 시비를 하는 친구도 있으니 참

기가 막힐 일이지

주최자의 무성의도 고쳐져야 하고

임 그건 lsquo현상rsquo이라고 내거는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순수한 사진연구단체에서 모집할 때는

lsquo공모전rsquo이라던가 하는 문구가 좋지 않을까요 lsquo현상rsquo이라니까 lsquo상rsquo을 바라게도 되겠지만 어쨌든

lsquo현상rsquo이란 말 자체가 순수하지 못해요

이 그건 확실히 생각해 볼 문제이겠군요helliphellip 순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helliphellip 응모자들이 심

사원이 누구냐mdash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도 순수하지 못하고helliphellip 또 주최자가 모집광고를 낼 때

lsquo심사원은 추후발표rsquo라mdash하는 것도 순수하지 못해요 이것도 참 불쾌한 일인데 lsquo추후발표rsquo라는 걸

다시 생각하면 lsquo준비가 안됐다rsquo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심사원의 준비도 안 해 놓고 현상을 모

집하는 그런 무성의가 또 어디 있어helliphellip 이건 일종의 사기가 아니면 거만일 겝니다

임 그나 그뿐인가요 lsquo심사원은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함rsquohelliphellip 하는 모호한 광고도 있지요 응모자의 입

장에서 생각하면helliphellip 심사원에 불만이 있으면 응모를 아니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 심사원 문제만

은 정정당당히 명시해야만 나중에 가서 심사에 대한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출품을 한 다음에 심사

원이 발표된다는 것은 심사에 대한 불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helliphellip

이 그리고 응모자의 동태를 가만히 보면 아까 얘기가 나왔던 소위 lsquo취미정도rsquo라는 층의 발표 의욕이 굉

장해서 대부분의 응모자가 이 부류인 것 같은데helliphellip 여기 한 가지 탈이 있어요 현상응모 작품의 심

사라는 것은 무제한의 심사 레벨을 놓고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응모 작품 중에서의 우수 작품을 가

려낸다는 것은 이거 상식 문제가 아닙니다

임 그렇죠

이 아 그런데 어떻게 해서 현상에 당선이 되거나 특히 특선이라도 하면 그만 자기가 갑자기 위대한

작가라도 된 것처럼 대가연(大家然) 하고 으쓱대는 친구들이 많아서 걱정이야helliphellip (웃음)

이 lsquo특선rsquo이라는 것은 응모해 온 작품들 중에서 특선이지 결코 한국 사단 전체의 수준에서 특선이라

는 것은 아닌데helliphellip 그만 한 번만 당선되면 코가 높아지고 대뜸 대가 행세를 하려고 드니helliphellip 참

신인들은 특히 조심해야 할 일이지

남의 것보고hellip 우리 것도 보내고hellip

본지 이제 화제를 좀 바꾸어서 세계사단의 동향을 좀 말씀해 주실까요

임 세계사단의 얘기라면 직접 보아야만 얘기가 될 텐데helliphellip

이 서울 바닥에서 썩으면서 세계사단의 얘기를 어떻게 본 듯이 할 수가 있겠나 카메라를 메고 세계일

관련 자료 소개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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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도 했어야 얘기가 되지

임 그것보다도 사진을 통한 국제 교류 얘기나 합시다

이 그게 좋겠군helliphellip 얼마 전에 덕수궁에서 자유중국의 소개사진전시가 있었죠 미국공보원의 활동도

이를 테면 국제교류의 한 형식일게고helliphellip

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자유중국과 월남의 사진전시가 있었는데helliphellip 우리도 수출을 한다면 그 보

다 훨씬 좋은 작품들이 나갈걸요helliphellip

이 한미합동전이던가 한중합동전 같은 것도 하면 역시 국제교류가 되겠지요helliphellip

임 한미합동전은 불원한 장래에 개최될 것입니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lsquo인간일가(人間一家)rsquo의 사진

이 아마 이월쯤 한국에 올 겝니다 미국대사관이 주동이 돼서 작품 503점 전부의 전시회 계획이 추

진되고 있으니까요

이 남이 보내줘서 본 것은 있지만 우리가 남에게 보여준 것은 없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야 우리도 남에

게 보여줘야 교류가 될 텐데helliphellip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두 사람의 작품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임 개인적인 활동은 있었지요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사진살롱에 사진을 보내고 있으니까 개인

적으로는 더러 나간 셈이죠 개인들의 수출이라도 좀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지만

이 우리의 것을 내보내고 외국 것을 들여와서 서로 감상하고 연구하는 게 이를 테면 국제교류인데

아마 명년쯤엔 될까 몰라

임 작품교환전 같은 것을 위해서 대대적인 계몽운동이 필요 하겠죠

이 그렇죠 운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어요

임 그런데 근본적인 얘기를 하자면 한국 작가의 역량이 아직도 부족한 것 같아요 언젠가 외국 작가에

게서 들은 말인데mdash한국 사람은 한국을 보지 않았다mdash하는 얘길 해요 사진 작가에게 대한 말이지

만helliphellip 나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이 퍽 중요한 얘기다mdash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를 직시하는 것만이

사진은 아니겠지만 실용사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것이 사실 아닐까요 회화적인 쌀롱 픽처라던

가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리얼리즘 사진이라는 것에 너무들 치우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 국제 교류의 시발은 역시 소개적(紹介的)인 것 다시 말해서 르포르타주적인 것이겠으니까helliphellip

임 외국 작품의 모방 같은 것은 이제 집어치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mdash예술적인 것 이것만을 너무 추

구했기 때문에 사실이 한국적인 것과 국민성의 묘사 같은 것이 잘 되지 않았지요 정서적인 것에만

너무 골몰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일이고 helliphellip 예술을 위한 예술에 정신들이 팔려 있었지나 않은

지helliphellip 예술을 하기 위한 사진이라는 관념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이 예술을 염두에 안 둔다면 실용사진이 돼 버리게

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너무 치우친 것 같단 말입니다

이 특히 국제 교류를 생각한다면 아닌 게 아니라 외국처럼 르포르타주적인 사진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할거에요

임 그래요 거기에 예술성을 띄워서 소화할 만한 역량 있는 작가가 필요해요

이 또 하나의 가장 큰 문제는 위정자의 관심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 큰 난관입니다 국제 교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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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가족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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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말이고 역시 정부당국자의 적극적인 주

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어디 그래요

임 우선 사단 자체의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작가들의 작업도 촉구되어야 하구helliphellip 아까도 말이 나왔지

만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 출품을 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점 같은데서 작가들의 반성도 필

요하고helliphellip

이 개별적으로 미국 등지에 보낸 것은 아마 상당한 수가 되겠지요

임 그럼요 그랬는데 왜 성과가 없느냐mdash하는 반성이 있어야죠

이 오늘의 현실을 예술적인 면에서 기록하고 작품화 해야겠는데helliphellip 막연하게 예술을 위한 작품을 보

내니까 기교적으론 훌륭할지 몰라도 작품 자체에 내용이 없어서helliphellip 그래서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닐

임 그런 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빨리 우리의 수준을 높여서 국제 조류와 호흡을 맞추어 나가

야 할 것입니다

이 이거 아마추어를 위한 얘기라는 것이 잠깐 탈선을 한 것 같군 그러나 이런 문제도 참고가 되긴 하니

까helliphellip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합시다

본지 수고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helliphellip

(기록 O기자)

이해선 「lsquo백오(白烏)rsquo의 변(辯)」 『동아일보』 1957년 4월 9일 4면

30여년 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입학

이 되었을 당시 자축기념하는 의미에서 호(號)를

하나 지어본 것이 백오(白烏)라는 두 글자였다 처

음 듣는 사람들 중에서는 거문[검은] 까마귀는 있

지만 흰 까마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서로 웃어버리고 그 뜻을

설명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자의

(字意)를 해명해볼까 한다 백(白)은 흰 빛이요 오

(烏)는 흑색으로 통하므로 우선 흑백을 대조시켜

놓고 흰 종이 위에다 검은 먹으로 휘호(揮毫)할 것

이니 그 뜻이 내 생활과 부합될 것 같으며 둘째로

백 자(字)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첫 자를 떼어놓

고 오는 반포오(反哺烏)로 그 이름이 높은 새이므

로 평소에 효자 노릇을 못하여 온 나의 좌우명으로도 적당할 듯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새 중에서는

혹간(或間) 백변종(白變種)이 생겨나는 수가 있는데 그 흰새를 서조(瑞鳥)라고 떠들던 옛 시절도 있었으므

관련 자료 소개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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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내가 우연히 호를 지어 본 것이 검은 까마귀떼 속에서 서조 백오를 발견하였으니 나의 전도(前途)에는

반드시 서광(瑞光)이 비칠 것 같으므로 이상 여러 가지 의미를 차례로 생각해 볼 때에 나에게는 이 외에 더

좋은 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자의였었고 궁금한채로 불려온 백오

였었다 만담궁변(漫談窮辯)을 물소물책(勿笑勿責) 하소서 (사진가)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

이해선 「중요한 내용middot형식-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년 10월 20일 5면

사진작품에는 사진 특유의 형식이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러한 특유의 형식에 알맞은 표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의 특수성은 형식이 가지는 특수성 보다는

기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주관적이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작품심사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동일하게 중요시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작

품 속에서 그야말로 형식과 내용이 알맞게 부합된 특출한 작

품을 볼 수는 없었다 형식이 좋으면 내용이 빈약하고 좀 내

용이 있으면 형식이 미숙하고helliphellip 모두 결점이 있다 그러나

입상작으로 뽑은 8 점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

다 그리고 금년에는 lsquo칼러rsquo사진의 응모 점수가 30점이나 되

고 그중에서도 3점이 입상되었고 또 9점이 입선되었다는 것

은 lsquo칼러rsquo 사진의 앞날을 위해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lt전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장gt

[제1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년 2월 8일 5면

외국작품의 세련되고 빈틈없는 lsquo테크닉rsquo은 국내작품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서 우선 국내

작품을 형식에서부터 누르고 말았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이루게 된 것은 국내작가들

의 역량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lsquo국산인화지rsquo가 얼마나 엉터리고 조악한 것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대체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더욱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은 이와 반대적인 경향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예술이든 먼저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볼 때 국내작품의 후진성은

두말할 것 없이 형식의 경시에 있다고 하겠다 심사결과 흑백부에서나 lsquo칼라rsquo부에서 겨우 동상으로 한 점

씩 밖에 국내작품이 입상되지 못했다는 것은 다소 섭섭한 느낌이나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경종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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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더욱 우리 심사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독에서 응모한 lsquo칼라rsquo

작품이었다 물체의 외관 색감을 초월한 내면의 lsquo이미지rsquo가 발

산하는 짙은 감정의 색감으로 작가의 개성과 사상을 인상 깊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내 lsquo칼라라보rsquo의 후진

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상작으로 뽑힌 외국작품들은 오

늘의 세계 사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는 큰 자극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

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제2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총 818점 응모-사진예술에 도움」

『동아일보』 1967년 2월 9일 4면

지난해와 같이 흑백부문에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들은 모두가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산인화지의 조악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작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올해는 흑백

부문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기꺼운 일이라고

하겠다

특히 칼라작품에 있어서는 독일의 작품들이 특출했고 이들 작품들의 색감은 현대 과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 최고상으로 뽑힌 lt잊은 친구gt와 몇 점의 입상작품들은 칼라릴리프와 소라리

세이숀[솔라리제이션] 등의 수법으로써 모티

브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를 초객체적이고 추

상적으로 표현하고 작가의 짙은 개성과 사상

과 철학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입상작으로 뽑은 16점의 작품들은 오늘의

세계사단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

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심사위원 이해선 (위원장) 임응식 서순삼

박필호 안월산 정인성 최경덕 (이상 7명)

관련 자료 소개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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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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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관련 자료 소개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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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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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관련 자료 소개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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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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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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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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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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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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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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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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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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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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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1: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3 이해선 관련 원문 자료

원문은 당시의 표기를 그대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현재의 띄어쓰기와 맞춤법에 맞지 않는 부분들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수정하였고 일부 [ ] 안에 병기했다 원문의 한자는 모두 한글 독음으로 고쳤으며 의미 전달을 위해 필요한 경우 ( )안에 병기했다

「대담 아마추어의 진로」 『사진문화』 1957년 1월 pp 48~52

작가가 사태(沙汰)났어

본지 공사간에 바쁘실 텐데helliphellip 사진문화의 발전을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

해 주십사 하는 것은helliphellip 요즘 각 직장이나 학생들 간에 사진열이 굉장히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 비

추어서 이 아마추어 카메라맨의 지도 문제를 비롯하여 초보자의 진로랄까helliphellip 이런 문제에 대한 말

씀을 좀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해선6middot25 동란 후에 개인적으로 사진을 연구해 보겠다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직장이나 학교 단위로

사진동호자의 클럽이 많아 지고 작품 발표라던가 전시회 같은 것이 무척 많아졌는데helliphellip 어쨌든

일반 사회인이나 학생 간에 사진열이 높아졌다는 건 기쁜 일이야

임응식그런데 아직도 이 카메라를 사치품으로 취급하는 층이 많아서 곤란해요

이 나라(정부)에서부터 사치품 취급을 하더군helliphellip 여자들이 다이아몬드를 사려는 것과 사진을 연구하

려는 사람이 카메라 장만하는 것을 똑같이 취급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곤란

하지

임 헌데 우리 사단(寫壇)에선 우선 lsquo사진작가rsquo라는 용어를 쓰는 데에 신중을 기해야 하겠어요 웬 놈의

lsquo사진작가rsquo가 그리도 많은지helliphellip 이건 카메라만 메고 다니면 모두 작가 행세를 하니helliphellip

이 카메라 멘 것이 모두 lsquo작가rsquo라면 대한민국에 lsquo사진작가rsquo가 수 십만도 될 걸helliphellip 작가라는 친구들을

체에 넣어서 걸러 놓으면 엄격한 의미에서 진짜 lsquo작가rsquo는 몇 사람 밖에 없을 텐데helliphellip

임 호주머니에 만년필을 꽂았다고 해서 문학가 혹은 소설가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겠는데hellip

hellip 어쨌든 요즘 성행하는 사진작가의 사태를 우선 잡지에서 만이라도 용어 사용에 엄격한 규정을

지어서 질서를 잡아 주어야겠어요

이 그것도 과도기적 현상이겠으니까 차차 지양되겠지helliphellip 오늘 해달라는 얘기는 그런 넋두리가 아닐

테니까 어디 이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본지 한마디로 얘기하자면helliphellip 카메라는 어떻게 해서 장만을 했는데 mdash 자 그 다음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겐지 몰라서 어쩔 줄 모르는helliphellip 이런 아마추어와 초보자들의 진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얘기를

좀helliphellip 현재 직장 단위로 사진 동호자들이 모여서 클럽을 이룩한 것이 십 여 개 있고 학교 단위로는

이십 여 개나 되는데요helliphellip

관련 자료 소개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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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인식이 안이해서 탈이야

이 극히 초보적인 입장에서 사진을 해보고 싶다helliphellip 다년간 연구를 한 다음엔 작가가 돼 보겠다 mdash 하

는 사람들을 회원으로 해서 수 십 년 동안 연구를 해 왔는데helliphellip 오늘날 하고 있는 일도 그것이지만

helliphellip 여러 부문에 걸쳐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서적인 면에서 사진과 친해보고 싶다던가

또는 카메라를 장만했는데 어떻게 하면 앞으로 향상 발전할 수 있는가 mdash 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신인이라고 하겠지 특히 학생들의 교내 활동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helliphellip 헌데 막상 다다

르고 보면helliphellip 어떠한 길이 올바른 길인지 막연해 하는 모양이더군요

임 초보자들은 무엇보다도 사진 자체에 대한 정의를 뚜렷이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아마추어 mdash

하면 취미적 입장에서 사진을 다루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조각이나 회화와 같이 사진도 어엿한 예술이니

까 취미 도락(道樂)적인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예술을 추구하는 진지한 마음의 준비가 우선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물론이죠 대개 클럽 조직이 되어 있으니까 선생들의 지도를 받고 있겠지만 내가 알기에는 전문가

가 아닌 다시 말하면 취미 정도에서 관심이 있는 선생들이 지도를 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역시 전문으

로 사진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지도를 가끔씩이라도 받는 게 좋겠지요

임 지도를 한다는 사람들의 태도부터가 성실성이 없는 것 같아요 만년필을 샀으니까 나도 한 번 써 보

자 mdash 해서 작가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취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남의 lsquo지도rsquo를 담당

할 수는 없을 텐데 mdash 우리가 사진을 전공한대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억지로 지도해 주겠다고 밀고

들어 가겠다는 건 아니지만 mdash (웃음) mdash 어쨌든 전문가의 지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학생 클럽이나 직장 클럽 같은 동호자의 모임을 사단의 일부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취미

에서 시작했더라도 일정한 과정을 밟고 다년 연구를 거듭하면 자연히 작가를 지향하게 되겠지만hellip

hellip 그런 면에서도 처음 싹트기 시작하는 신인의 지도가 퍽 중요한 것이지요

취미middot도락이란 관념을 버려야 해

임 지금 형성되어 있다는 직장이나 학교 단체의 거의 전부가 전문적인 입장에 서 있지 않은 것 같더군

요helliphellip 사진에 대한 근본 의식이 너무도 안이한 것 같아요 카메라를 통한 표현의식에 절실한 감정

이 없어요helliphellip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비판을 받지 않는다helliphellip 하는 따위의 도피를 해서는 곤란

하죠helliphellip 창작의식이 확고하게 수립되지 않아서는 향상이 없는 것인데helliphellip 소문에 듣자면helliphellip 너

무 기술 면에만 치중하고 정신적인 면이 소홀히 취급된다는 거에요 helliphellip 나는 직장을 갖고 있으니

까 사진이란 것은 취미 정도로 한다 mdash 하는 태도를 버려야죠 특히 이 점은 지도자들에게 권하고 싶

은데helliphellip 예술의식helliphellip 이것이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절대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까

이 그렇구 말구요helliphellip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새로 사진을 공부하겠다는 신인들에게 네 가지 의식을 주

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휴머니즘 mdash 우선 사람이 돼야 하거든요 교양이라던가 인격 덕망helliphellip 이런 면에서 인간이

돼 있어야 하고 둘째는 사진예술을 한다고 해서 사진예술이 무엇이냐helliphellip 이것만을 추궁해서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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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요 좀 더 시야를 넓혀서 예술이라는 게 뭐냐 mdash 하는 걸 먼저 알아야지 셋째에 가서 사진예술이

라는 게 뭐냐 mdash 를 연구하고 넷째에 가서야 비로소 작품이라던가 창작의식 기교 기술에 대한 검

토를 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기본조건을 머리 속에 언제나 간직하도록 나는 주장해 왔어요

임 기술면을 등한히 할 수는 없겠지요 기술 없이는 표현이 안되니까helliphellip 그러나 이선생 말씀처럼 인

간본연의 문제도 크긴 큽니다 다른 예술부문의 사람보다 교양면에서 뒤떨어지지나 않는가 mdash 하는

것이 항상 염려되는데helliphellip 만일 뒤떨어진다면 큰일이지요 기술도 중요한 문제겠지만 교양인격 같

은 것도 예술가가로서의 긍지를 위해선 떨어질 수 없는 문제고helliphellip 더욱이 좋은 기술을 가졌으면서

도 기초교양이 모자라서 좋은 작품을 낼 수 없다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으니까helliphellip 교양인으로서의

자격도 다른 예술부문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사진을 해야할겝니다

이 기교나 기술을 어떻게 우물쭈물 배웠다고 해서 작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helliphellip 예술이란 그 자체

에 대한 조예부터 깊어야 합니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조리개가 얼마다 타임이 어

떻다helliphellip 암실작업은 어떻게 하는 거다helliphellip 이것만을 알았다고 해서 작가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에

요helliphellip 인간면 예술면 기술면에 똑 같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마 사진을 연구하겠다는 신

인들의 기본이념이 돼야 할겝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지도한다는 면에서

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거든요 mdash

임 어쨌든 기술을 위주로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난 옛날 얘기입니다

지도자 시비

이 지났다기 보다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는 장래에나 변할 수 없는 기본이념이겠지요 사진이라는 것

은 더욱이나 고도의 대중성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인격과 교양이 필요해요 기계라는 거야 찍으면

사진이 되도록 마련된 것이니까 예술까지는 못 가도 사진은 되거든 mdash 그러니까 그것을 예술로 이

끌려면 찍는 사람의 성분이 문제되는 것이지요helliphellip

임 그런 의미에서도 사단의 규정이 필요하고 작가라는 규정이 필요해요 사단이라는 것에 너무 엄격한

규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helliphellip 만년필을 가졌다고 해서 전부 문학가가 아니라면helliphellip 카메라를 메었

으니 작가다 mdash 하는 엉터리도 용납될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우선 필요한 것은 취미 도락이라는 관념

을 지양해야 할 텐데helliphellip

이 취미가 차차 심각해지면 창작의식도 생기는게니까helliphellip 그런 사람들을 지도 계몽해서 한 사람이라

도 작가로 이끌어야 하겠지요helliphellip 카메라를 살 때부터 나는 사진작가가 되겠다 mdash 하는 사람은 있

을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임 lsquo싼데이rsquo 카메라맨은 논의의 대상이 안되구요helliphellip (웃음)

이 그러니까 지도자들이 작가적인 태도에 확고한 이념을 앞세우고 지도에 임해야 하는 건데helliphellip

본지 각 단체 지도층의 지도방침에 대한 구체적인 태도를 어떻게 규정하겠습니까 helliphellip

임 우선 사진에 대한 인식부터 고쳐야 해요 말이 중복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친구 좋고 사진 좋아서 우리

끼리 하면 그만이다 mdash 하는 생각들이 많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만이라도 그렇지 않다

관련 자료 소개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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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싶어요 학생들이 카메라를 사 가지고 몇 사람 모였으니까 책임자 격

인 선생이 필요하다 mdash 해서 책임 맡았다는 사람으로는 지도가 안 될 게 아닙니까 그렇다고 청해 오

지도 않는데 내정 격으로 뛰어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구helliphellip (웃음)

본지 또 한 가지 요즘 일대 성황을 이루는 것이 소위 현상사진(懸賞寫眞)이라는 건데요helliphellip 이 현상사진

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진에 대한 모욕도 있지helliphellip

임 거 참 꼴사나운 일이 많아요 현상이란 걸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helliphellip 그 하나는 어느 연구

단체에서 순수한 의미에서 발표 바탕이 없는 아마추어를 위해 마련하는 경우가 있을게고 또 하나는

선전용으로 포스터 mdash 같은 데에 써먹기 위한 상업 정책적인 의식에서 모집하는 현상이 있을 테지요

이 어느 경우이건 간에 좌우간 현상 모집을 하는 목적이 있는데helliphellip 응모자는 우선 현상의 목적부터 확

실히 알고 응모를 해야 하겠지helliphellip

임 그렇죠 그런데 이 상업 정책적인 현상의 경우에는 사진문화에 대한 모욕적인 행동이 퍽 많습니다

이거 참 불유쾌한 일이지만helliphellip 가령 예를 들자면 응모자는 원판을 제공하라던가 또 낙선자의 작

품은 일체 반환치 않는다는 따위helliphellip이게 얼마나 사진예술에 대한 모욕적 행위입니까 helliphellip

이 그래요helliphellip 확실히 모순된 일입니다

임 필요에 의해서 현상모집을 했으니까 당선된 작품은 물론 필요하겠지만helliphellip 낙선작품을 반환치 않는

다는 것은 언어도단 입니다 낙선이 됐다 해도 작가의 입장으론 대단히 귀중한 하나의 작품일 텐데

그걸 안 돌려 준대서야 말이 되나요 주최측은 낙선작품의 원화를 돌려 줄만한 성의를 가져야 도리

에 맞을 텐데helliphellip 요즘 현실은 lsquo낙선rsquo이란 푸대접 밑에 원판까지 몰수당하는 판국이니helliphellip 원 참

이 그러니까 응모자는 무엇보다도 현상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지helliphellip 여러 번 겪은 일이지만 심사를

하다 보면 전혀 현상 취지를 도외시한 작품들이 있는데helliphellip

임 그거야 보나마나 낙선이죠 (웃음)

이 그러믄요 현상 응모자로서는 출품 규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 아니겠어요

임 그럼요

이 그런데 어떤 것은 작품에 제목도 없는 것이 있거든요 그런가 하면 제목과 작품내용이 전혀 특이한

엉터리도 있구helliphellip

임 저도 여러 번 겪은 일입니다

이 제목이란 것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벌써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찍는다는 의식이 있는 이상

제목도 정해져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아주 작품과 제목이 동떨어진 것들이 응모해 오니까

낙선의 자격이 충분할 수밖에helliphellip 하하하 (웃음)

임 그게 모두 사진에 대한 성의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이 그래요 성의가 없어요 자기 작품에 대해선 최선의 성의를 다 해야 할 텐데 그런 태도가 없거든helliphellip

제목을 안 썼는지 못 썼는지는 모르지만helliphel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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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그저 무턱대고 발표의식만 왕성한 까닭이 아닐까요

이 그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된 작가가 아닌 이상 발표기회가 좀처럼 없을 테니까

자기 실력의 평가를 받는다던가 남들과 경쟁해 본다는 의미에서 현상에 자주 응모하는 것은 좋은데

helliphellip 아 어떤 친구는 자기 실력 생각은 하지도 않고 상품이 적다 많다 시비를 하는 친구도 있으니 참

기가 막힐 일이지

주최자의 무성의도 고쳐져야 하고

임 그건 lsquo현상rsquo이라고 내거는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순수한 사진연구단체에서 모집할 때는

lsquo공모전rsquo이라던가 하는 문구가 좋지 않을까요 lsquo현상rsquo이라니까 lsquo상rsquo을 바라게도 되겠지만 어쨌든

lsquo현상rsquo이란 말 자체가 순수하지 못해요

이 그건 확실히 생각해 볼 문제이겠군요helliphellip 순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helliphellip 응모자들이 심

사원이 누구냐mdash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도 순수하지 못하고helliphellip 또 주최자가 모집광고를 낼 때

lsquo심사원은 추후발표rsquo라mdash하는 것도 순수하지 못해요 이것도 참 불쾌한 일인데 lsquo추후발표rsquo라는 걸

다시 생각하면 lsquo준비가 안됐다rsquo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심사원의 준비도 안 해 놓고 현상을 모

집하는 그런 무성의가 또 어디 있어helliphellip 이건 일종의 사기가 아니면 거만일 겝니다

임 그나 그뿐인가요 lsquo심사원은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함rsquohelliphellip 하는 모호한 광고도 있지요 응모자의 입

장에서 생각하면helliphellip 심사원에 불만이 있으면 응모를 아니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 심사원 문제만

은 정정당당히 명시해야만 나중에 가서 심사에 대한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출품을 한 다음에 심사

원이 발표된다는 것은 심사에 대한 불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helliphellip

이 그리고 응모자의 동태를 가만히 보면 아까 얘기가 나왔던 소위 lsquo취미정도rsquo라는 층의 발표 의욕이 굉

장해서 대부분의 응모자가 이 부류인 것 같은데helliphellip 여기 한 가지 탈이 있어요 현상응모 작품의 심

사라는 것은 무제한의 심사 레벨을 놓고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응모 작품 중에서의 우수 작품을 가

려낸다는 것은 이거 상식 문제가 아닙니다

임 그렇죠

이 아 그런데 어떻게 해서 현상에 당선이 되거나 특히 특선이라도 하면 그만 자기가 갑자기 위대한

작가라도 된 것처럼 대가연(大家然) 하고 으쓱대는 친구들이 많아서 걱정이야helliphellip (웃음)

이 lsquo특선rsquo이라는 것은 응모해 온 작품들 중에서 특선이지 결코 한국 사단 전체의 수준에서 특선이라

는 것은 아닌데helliphellip 그만 한 번만 당선되면 코가 높아지고 대뜸 대가 행세를 하려고 드니helliphellip 참

신인들은 특히 조심해야 할 일이지

남의 것보고hellip 우리 것도 보내고hellip

본지 이제 화제를 좀 바꾸어서 세계사단의 동향을 좀 말씀해 주실까요

임 세계사단의 얘기라면 직접 보아야만 얘기가 될 텐데helliphellip

이 서울 바닥에서 썩으면서 세계사단의 얘기를 어떻게 본 듯이 할 수가 있겠나 카메라를 메고 세계일

관련 자료 소개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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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도 했어야 얘기가 되지

임 그것보다도 사진을 통한 국제 교류 얘기나 합시다

이 그게 좋겠군helliphellip 얼마 전에 덕수궁에서 자유중국의 소개사진전시가 있었죠 미국공보원의 활동도

이를 테면 국제교류의 한 형식일게고helliphellip

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자유중국과 월남의 사진전시가 있었는데helliphellip 우리도 수출을 한다면 그 보

다 훨씬 좋은 작품들이 나갈걸요helliphellip

이 한미합동전이던가 한중합동전 같은 것도 하면 역시 국제교류가 되겠지요helliphellip

임 한미합동전은 불원한 장래에 개최될 것입니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lsquo인간일가(人間一家)rsquo의 사진

이 아마 이월쯤 한국에 올 겝니다 미국대사관이 주동이 돼서 작품 503점 전부의 전시회 계획이 추

진되고 있으니까요

이 남이 보내줘서 본 것은 있지만 우리가 남에게 보여준 것은 없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야 우리도 남에

게 보여줘야 교류가 될 텐데helliphellip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두 사람의 작품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임 개인적인 활동은 있었지요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사진살롱에 사진을 보내고 있으니까 개인

적으로는 더러 나간 셈이죠 개인들의 수출이라도 좀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지만

이 우리의 것을 내보내고 외국 것을 들여와서 서로 감상하고 연구하는 게 이를 테면 국제교류인데

아마 명년쯤엔 될까 몰라

임 작품교환전 같은 것을 위해서 대대적인 계몽운동이 필요 하겠죠

이 그렇죠 운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어요

임 그런데 근본적인 얘기를 하자면 한국 작가의 역량이 아직도 부족한 것 같아요 언젠가 외국 작가에

게서 들은 말인데mdash한국 사람은 한국을 보지 않았다mdash하는 얘길 해요 사진 작가에게 대한 말이지

만helliphellip 나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이 퍽 중요한 얘기다mdash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를 직시하는 것만이

사진은 아니겠지만 실용사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것이 사실 아닐까요 회화적인 쌀롱 픽처라던

가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리얼리즘 사진이라는 것에 너무들 치우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 국제 교류의 시발은 역시 소개적(紹介的)인 것 다시 말해서 르포르타주적인 것이겠으니까helliphellip

임 외국 작품의 모방 같은 것은 이제 집어치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mdash예술적인 것 이것만을 너무 추

구했기 때문에 사실이 한국적인 것과 국민성의 묘사 같은 것이 잘 되지 않았지요 정서적인 것에만

너무 골몰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일이고 helliphellip 예술을 위한 예술에 정신들이 팔려 있었지나 않은

지helliphellip 예술을 하기 위한 사진이라는 관념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이 예술을 염두에 안 둔다면 실용사진이 돼 버리게

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너무 치우친 것 같단 말입니다

이 특히 국제 교류를 생각한다면 아닌 게 아니라 외국처럼 르포르타주적인 사진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할거에요

임 그래요 거기에 예술성을 띄워서 소화할 만한 역량 있는 작가가 필요해요

이 또 하나의 가장 큰 문제는 위정자의 관심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 큰 난관입니다 국제 교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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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가족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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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말이고 역시 정부당국자의 적극적인 주

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어디 그래요

임 우선 사단 자체의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작가들의 작업도 촉구되어야 하구helliphellip 아까도 말이 나왔지

만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 출품을 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점 같은데서 작가들의 반성도 필

요하고helliphellip

이 개별적으로 미국 등지에 보낸 것은 아마 상당한 수가 되겠지요

임 그럼요 그랬는데 왜 성과가 없느냐mdash하는 반성이 있어야죠

이 오늘의 현실을 예술적인 면에서 기록하고 작품화 해야겠는데helliphellip 막연하게 예술을 위한 작품을 보

내니까 기교적으론 훌륭할지 몰라도 작품 자체에 내용이 없어서helliphellip 그래서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닐

임 그런 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빨리 우리의 수준을 높여서 국제 조류와 호흡을 맞추어 나가

야 할 것입니다

이 이거 아마추어를 위한 얘기라는 것이 잠깐 탈선을 한 것 같군 그러나 이런 문제도 참고가 되긴 하니

까helliphellip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합시다

본지 수고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helliphellip

(기록 O기자)

이해선 「lsquo백오(白烏)rsquo의 변(辯)」 『동아일보』 1957년 4월 9일 4면

30여년 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입학

이 되었을 당시 자축기념하는 의미에서 호(號)를

하나 지어본 것이 백오(白烏)라는 두 글자였다 처

음 듣는 사람들 중에서는 거문[검은] 까마귀는 있

지만 흰 까마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서로 웃어버리고 그 뜻을

설명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자의

(字意)를 해명해볼까 한다 백(白)은 흰 빛이요 오

(烏)는 흑색으로 통하므로 우선 흑백을 대조시켜

놓고 흰 종이 위에다 검은 먹으로 휘호(揮毫)할 것

이니 그 뜻이 내 생활과 부합될 것 같으며 둘째로

백 자(字)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첫 자를 떼어놓

고 오는 반포오(反哺烏)로 그 이름이 높은 새이므

로 평소에 효자 노릇을 못하여 온 나의 좌우명으로도 적당할 듯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새 중에서는

혹간(或間) 백변종(白變種)이 생겨나는 수가 있는데 그 흰새를 서조(瑞鳥)라고 떠들던 옛 시절도 있었으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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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내가 우연히 호를 지어 본 것이 검은 까마귀떼 속에서 서조 백오를 발견하였으니 나의 전도(前途)에는

반드시 서광(瑞光)이 비칠 것 같으므로 이상 여러 가지 의미를 차례로 생각해 볼 때에 나에게는 이 외에 더

좋은 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자의였었고 궁금한채로 불려온 백오

였었다 만담궁변(漫談窮辯)을 물소물책(勿笑勿責) 하소서 (사진가)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

이해선 「중요한 내용middot형식-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년 10월 20일 5면

사진작품에는 사진 특유의 형식이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러한 특유의 형식에 알맞은 표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의 특수성은 형식이 가지는 특수성 보다는

기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주관적이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작품심사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동일하게 중요시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작

품 속에서 그야말로 형식과 내용이 알맞게 부합된 특출한 작

품을 볼 수는 없었다 형식이 좋으면 내용이 빈약하고 좀 내

용이 있으면 형식이 미숙하고helliphellip 모두 결점이 있다 그러나

입상작으로 뽑은 8 점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

다 그리고 금년에는 lsquo칼러rsquo사진의 응모 점수가 30점이나 되

고 그중에서도 3점이 입상되었고 또 9점이 입선되었다는 것

은 lsquo칼러rsquo 사진의 앞날을 위해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lt전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장gt

[제1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년 2월 8일 5면

외국작품의 세련되고 빈틈없는 lsquo테크닉rsquo은 국내작품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서 우선 국내

작품을 형식에서부터 누르고 말았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이루게 된 것은 국내작가들

의 역량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lsquo국산인화지rsquo가 얼마나 엉터리고 조악한 것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대체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더욱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은 이와 반대적인 경향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예술이든 먼저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볼 때 국내작품의 후진성은

두말할 것 없이 형식의 경시에 있다고 하겠다 심사결과 흑백부에서나 lsquo칼라rsquo부에서 겨우 동상으로 한 점

씩 밖에 국내작품이 입상되지 못했다는 것은 다소 섭섭한 느낌이나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경종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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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더욱 우리 심사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독에서 응모한 lsquo칼라rsquo

작품이었다 물체의 외관 색감을 초월한 내면의 lsquo이미지rsquo가 발

산하는 짙은 감정의 색감으로 작가의 개성과 사상을 인상 깊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내 lsquo칼라라보rsquo의 후진

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상작으로 뽑힌 외국작품들은 오

늘의 세계 사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는 큰 자극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

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제2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총 818점 응모-사진예술에 도움」

『동아일보』 1967년 2월 9일 4면

지난해와 같이 흑백부문에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들은 모두가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산인화지의 조악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작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올해는 흑백

부문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기꺼운 일이라고

하겠다

특히 칼라작품에 있어서는 독일의 작품들이 특출했고 이들 작품들의 색감은 현대 과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 최고상으로 뽑힌 lt잊은 친구gt와 몇 점의 입상작품들은 칼라릴리프와 소라리

세이숀[솔라리제이션] 등의 수법으로써 모티

브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를 초객체적이고 추

상적으로 표현하고 작가의 짙은 개성과 사상

과 철학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입상작으로 뽑은 16점의 작품들은 오늘의

세계사단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

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심사위원 이해선 (위원장) 임응식 서순삼

박필호 안월산 정인성 최경덕 (이상 7명)

관련 자료 소개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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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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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관련 자료 소개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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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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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관련 자료 소개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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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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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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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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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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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관련 자료 소개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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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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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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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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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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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2: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근본인식이 안이해서 탈이야

이 극히 초보적인 입장에서 사진을 해보고 싶다helliphellip 다년간 연구를 한 다음엔 작가가 돼 보겠다 mdash 하

는 사람들을 회원으로 해서 수 십 년 동안 연구를 해 왔는데helliphellip 오늘날 하고 있는 일도 그것이지만

helliphellip 여러 부문에 걸쳐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서적인 면에서 사진과 친해보고 싶다던가

또는 카메라를 장만했는데 어떻게 하면 앞으로 향상 발전할 수 있는가 mdash 하고 망설이는 사람들을

신인이라고 하겠지 특히 학생들의 교내 활동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helliphellip 헌데 막상 다다

르고 보면helliphellip 어떠한 길이 올바른 길인지 막연해 하는 모양이더군요

임 초보자들은 무엇보다도 사진 자체에 대한 정의를 뚜렷이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아마추어 mdash

하면 취미적 입장에서 사진을 다루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조각이나 회화와 같이 사진도 어엿한 예술이니

까 취미 도락(道樂)적인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예술을 추구하는 진지한 마음의 준비가 우선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물론이죠 대개 클럽 조직이 되어 있으니까 선생들의 지도를 받고 있겠지만 내가 알기에는 전문가

가 아닌 다시 말하면 취미 정도에서 관심이 있는 선생들이 지도를 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역시 전문으

로 사진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지도를 가끔씩이라도 받는 게 좋겠지요

임 지도를 한다는 사람들의 태도부터가 성실성이 없는 것 같아요 만년필을 샀으니까 나도 한 번 써 보

자 mdash 해서 작가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취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남의 lsquo지도rsquo를 담당

할 수는 없을 텐데 mdash 우리가 사진을 전공한대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억지로 지도해 주겠다고 밀고

들어 가겠다는 건 아니지만 mdash (웃음) mdash 어쨌든 전문가의 지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학생 클럽이나 직장 클럽 같은 동호자의 모임을 사단의 일부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취미

에서 시작했더라도 일정한 과정을 밟고 다년 연구를 거듭하면 자연히 작가를 지향하게 되겠지만hellip

hellip 그런 면에서도 처음 싹트기 시작하는 신인의 지도가 퍽 중요한 것이지요

취미middot도락이란 관념을 버려야 해

임 지금 형성되어 있다는 직장이나 학교 단체의 거의 전부가 전문적인 입장에 서 있지 않은 것 같더군

요helliphellip 사진에 대한 근본 의식이 너무도 안이한 것 같아요 카메라를 통한 표현의식에 절실한 감정

이 없어요helliphellip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비판을 받지 않는다helliphellip 하는 따위의 도피를 해서는 곤란

하죠helliphellip 창작의식이 확고하게 수립되지 않아서는 향상이 없는 것인데helliphellip 소문에 듣자면helliphellip 너

무 기술 면에만 치중하고 정신적인 면이 소홀히 취급된다는 거에요 helliphellip 나는 직장을 갖고 있으니

까 사진이란 것은 취미 정도로 한다 mdash 하는 태도를 버려야죠 특히 이 점은 지도자들에게 권하고 싶

은데helliphellip 예술의식helliphellip 이것이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절대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까

이 그렇구 말구요helliphellip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새로 사진을 공부하겠다는 신인들에게 네 가지 의식을 주

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휴머니즘 mdash 우선 사람이 돼야 하거든요 교양이라던가 인격 덕망helliphellip 이런 면에서 인간이

돼 있어야 하고 둘째는 사진예술을 한다고 해서 사진예술이 무엇이냐helliphellip 이것만을 추궁해서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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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요 좀 더 시야를 넓혀서 예술이라는 게 뭐냐 mdash 하는 걸 먼저 알아야지 셋째에 가서 사진예술이

라는 게 뭐냐 mdash 를 연구하고 넷째에 가서야 비로소 작품이라던가 창작의식 기교 기술에 대한 검

토를 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기본조건을 머리 속에 언제나 간직하도록 나는 주장해 왔어요

임 기술면을 등한히 할 수는 없겠지요 기술 없이는 표현이 안되니까helliphellip 그러나 이선생 말씀처럼 인

간본연의 문제도 크긴 큽니다 다른 예술부문의 사람보다 교양면에서 뒤떨어지지나 않는가 mdash 하는

것이 항상 염려되는데helliphellip 만일 뒤떨어진다면 큰일이지요 기술도 중요한 문제겠지만 교양인격 같

은 것도 예술가가로서의 긍지를 위해선 떨어질 수 없는 문제고helliphellip 더욱이 좋은 기술을 가졌으면서

도 기초교양이 모자라서 좋은 작품을 낼 수 없다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으니까helliphellip 교양인으로서의

자격도 다른 예술부문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사진을 해야할겝니다

이 기교나 기술을 어떻게 우물쭈물 배웠다고 해서 작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helliphellip 예술이란 그 자체

에 대한 조예부터 깊어야 합니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조리개가 얼마다 타임이 어

떻다helliphellip 암실작업은 어떻게 하는 거다helliphellip 이것만을 알았다고 해서 작가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에

요helliphellip 인간면 예술면 기술면에 똑 같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마 사진을 연구하겠다는 신

인들의 기본이념이 돼야 할겝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지도한다는 면에서

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거든요 mdash

임 어쨌든 기술을 위주로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난 옛날 얘기입니다

지도자 시비

이 지났다기 보다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는 장래에나 변할 수 없는 기본이념이겠지요 사진이라는 것

은 더욱이나 고도의 대중성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인격과 교양이 필요해요 기계라는 거야 찍으면

사진이 되도록 마련된 것이니까 예술까지는 못 가도 사진은 되거든 mdash 그러니까 그것을 예술로 이

끌려면 찍는 사람의 성분이 문제되는 것이지요helliphellip

임 그런 의미에서도 사단의 규정이 필요하고 작가라는 규정이 필요해요 사단이라는 것에 너무 엄격한

규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helliphellip 만년필을 가졌다고 해서 전부 문학가가 아니라면helliphellip 카메라를 메었

으니 작가다 mdash 하는 엉터리도 용납될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우선 필요한 것은 취미 도락이라는 관념

을 지양해야 할 텐데helliphellip

이 취미가 차차 심각해지면 창작의식도 생기는게니까helliphellip 그런 사람들을 지도 계몽해서 한 사람이라

도 작가로 이끌어야 하겠지요helliphellip 카메라를 살 때부터 나는 사진작가가 되겠다 mdash 하는 사람은 있

을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임 lsquo싼데이rsquo 카메라맨은 논의의 대상이 안되구요helliphellip (웃음)

이 그러니까 지도자들이 작가적인 태도에 확고한 이념을 앞세우고 지도에 임해야 하는 건데helliphellip

본지 각 단체 지도층의 지도방침에 대한 구체적인 태도를 어떻게 규정하겠습니까 helliphellip

임 우선 사진에 대한 인식부터 고쳐야 해요 말이 중복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친구 좋고 사진 좋아서 우리

끼리 하면 그만이다 mdash 하는 생각들이 많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만이라도 그렇지 않다

관련 자료 소개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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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싶어요 학생들이 카메라를 사 가지고 몇 사람 모였으니까 책임자 격

인 선생이 필요하다 mdash 해서 책임 맡았다는 사람으로는 지도가 안 될 게 아닙니까 그렇다고 청해 오

지도 않는데 내정 격으로 뛰어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구helliphellip (웃음)

본지 또 한 가지 요즘 일대 성황을 이루는 것이 소위 현상사진(懸賞寫眞)이라는 건데요helliphellip 이 현상사진

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진에 대한 모욕도 있지helliphellip

임 거 참 꼴사나운 일이 많아요 현상이란 걸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helliphellip 그 하나는 어느 연구

단체에서 순수한 의미에서 발표 바탕이 없는 아마추어를 위해 마련하는 경우가 있을게고 또 하나는

선전용으로 포스터 mdash 같은 데에 써먹기 위한 상업 정책적인 의식에서 모집하는 현상이 있을 테지요

이 어느 경우이건 간에 좌우간 현상 모집을 하는 목적이 있는데helliphellip 응모자는 우선 현상의 목적부터 확

실히 알고 응모를 해야 하겠지helliphellip

임 그렇죠 그런데 이 상업 정책적인 현상의 경우에는 사진문화에 대한 모욕적인 행동이 퍽 많습니다

이거 참 불유쾌한 일이지만helliphellip 가령 예를 들자면 응모자는 원판을 제공하라던가 또 낙선자의 작

품은 일체 반환치 않는다는 따위helliphellip이게 얼마나 사진예술에 대한 모욕적 행위입니까 helliphellip

이 그래요helliphellip 확실히 모순된 일입니다

임 필요에 의해서 현상모집을 했으니까 당선된 작품은 물론 필요하겠지만helliphellip 낙선작품을 반환치 않는

다는 것은 언어도단 입니다 낙선이 됐다 해도 작가의 입장으론 대단히 귀중한 하나의 작품일 텐데

그걸 안 돌려 준대서야 말이 되나요 주최측은 낙선작품의 원화를 돌려 줄만한 성의를 가져야 도리

에 맞을 텐데helliphellip 요즘 현실은 lsquo낙선rsquo이란 푸대접 밑에 원판까지 몰수당하는 판국이니helliphellip 원 참

이 그러니까 응모자는 무엇보다도 현상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지helliphellip 여러 번 겪은 일이지만 심사를

하다 보면 전혀 현상 취지를 도외시한 작품들이 있는데helliphellip

임 그거야 보나마나 낙선이죠 (웃음)

이 그러믄요 현상 응모자로서는 출품 규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 아니겠어요

임 그럼요

이 그런데 어떤 것은 작품에 제목도 없는 것이 있거든요 그런가 하면 제목과 작품내용이 전혀 특이한

엉터리도 있구helliphellip

임 저도 여러 번 겪은 일입니다

이 제목이란 것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벌써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찍는다는 의식이 있는 이상

제목도 정해져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아주 작품과 제목이 동떨어진 것들이 응모해 오니까

낙선의 자격이 충분할 수밖에helliphellip 하하하 (웃음)

임 그게 모두 사진에 대한 성의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이 그래요 성의가 없어요 자기 작품에 대해선 최선의 성의를 다 해야 할 텐데 그런 태도가 없거든helliphellip

제목을 안 썼는지 못 썼는지는 모르지만helliphel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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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그저 무턱대고 발표의식만 왕성한 까닭이 아닐까요

이 그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된 작가가 아닌 이상 발표기회가 좀처럼 없을 테니까

자기 실력의 평가를 받는다던가 남들과 경쟁해 본다는 의미에서 현상에 자주 응모하는 것은 좋은데

helliphellip 아 어떤 친구는 자기 실력 생각은 하지도 않고 상품이 적다 많다 시비를 하는 친구도 있으니 참

기가 막힐 일이지

주최자의 무성의도 고쳐져야 하고

임 그건 lsquo현상rsquo이라고 내거는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순수한 사진연구단체에서 모집할 때는

lsquo공모전rsquo이라던가 하는 문구가 좋지 않을까요 lsquo현상rsquo이라니까 lsquo상rsquo을 바라게도 되겠지만 어쨌든

lsquo현상rsquo이란 말 자체가 순수하지 못해요

이 그건 확실히 생각해 볼 문제이겠군요helliphellip 순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helliphellip 응모자들이 심

사원이 누구냐mdash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도 순수하지 못하고helliphellip 또 주최자가 모집광고를 낼 때

lsquo심사원은 추후발표rsquo라mdash하는 것도 순수하지 못해요 이것도 참 불쾌한 일인데 lsquo추후발표rsquo라는 걸

다시 생각하면 lsquo준비가 안됐다rsquo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심사원의 준비도 안 해 놓고 현상을 모

집하는 그런 무성의가 또 어디 있어helliphellip 이건 일종의 사기가 아니면 거만일 겝니다

임 그나 그뿐인가요 lsquo심사원은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함rsquohelliphellip 하는 모호한 광고도 있지요 응모자의 입

장에서 생각하면helliphellip 심사원에 불만이 있으면 응모를 아니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 심사원 문제만

은 정정당당히 명시해야만 나중에 가서 심사에 대한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출품을 한 다음에 심사

원이 발표된다는 것은 심사에 대한 불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helliphellip

이 그리고 응모자의 동태를 가만히 보면 아까 얘기가 나왔던 소위 lsquo취미정도rsquo라는 층의 발표 의욕이 굉

장해서 대부분의 응모자가 이 부류인 것 같은데helliphellip 여기 한 가지 탈이 있어요 현상응모 작품의 심

사라는 것은 무제한의 심사 레벨을 놓고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응모 작품 중에서의 우수 작품을 가

려낸다는 것은 이거 상식 문제가 아닙니다

임 그렇죠

이 아 그런데 어떻게 해서 현상에 당선이 되거나 특히 특선이라도 하면 그만 자기가 갑자기 위대한

작가라도 된 것처럼 대가연(大家然) 하고 으쓱대는 친구들이 많아서 걱정이야helliphellip (웃음)

이 lsquo특선rsquo이라는 것은 응모해 온 작품들 중에서 특선이지 결코 한국 사단 전체의 수준에서 특선이라

는 것은 아닌데helliphellip 그만 한 번만 당선되면 코가 높아지고 대뜸 대가 행세를 하려고 드니helliphellip 참

신인들은 특히 조심해야 할 일이지

남의 것보고hellip 우리 것도 보내고hellip

본지 이제 화제를 좀 바꾸어서 세계사단의 동향을 좀 말씀해 주실까요

임 세계사단의 얘기라면 직접 보아야만 얘기가 될 텐데helliphellip

이 서울 바닥에서 썩으면서 세계사단의 얘기를 어떻게 본 듯이 할 수가 있겠나 카메라를 메고 세계일

관련 자료 소개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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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도 했어야 얘기가 되지

임 그것보다도 사진을 통한 국제 교류 얘기나 합시다

이 그게 좋겠군helliphellip 얼마 전에 덕수궁에서 자유중국의 소개사진전시가 있었죠 미국공보원의 활동도

이를 테면 국제교류의 한 형식일게고helliphellip

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자유중국과 월남의 사진전시가 있었는데helliphellip 우리도 수출을 한다면 그 보

다 훨씬 좋은 작품들이 나갈걸요helliphellip

이 한미합동전이던가 한중합동전 같은 것도 하면 역시 국제교류가 되겠지요helliphellip

임 한미합동전은 불원한 장래에 개최될 것입니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lsquo인간일가(人間一家)rsquo의 사진

이 아마 이월쯤 한국에 올 겝니다 미국대사관이 주동이 돼서 작품 503점 전부의 전시회 계획이 추

진되고 있으니까요

이 남이 보내줘서 본 것은 있지만 우리가 남에게 보여준 것은 없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야 우리도 남에

게 보여줘야 교류가 될 텐데helliphellip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두 사람의 작품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임 개인적인 활동은 있었지요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사진살롱에 사진을 보내고 있으니까 개인

적으로는 더러 나간 셈이죠 개인들의 수출이라도 좀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지만

이 우리의 것을 내보내고 외국 것을 들여와서 서로 감상하고 연구하는 게 이를 테면 국제교류인데

아마 명년쯤엔 될까 몰라

임 작품교환전 같은 것을 위해서 대대적인 계몽운동이 필요 하겠죠

이 그렇죠 운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어요

임 그런데 근본적인 얘기를 하자면 한국 작가의 역량이 아직도 부족한 것 같아요 언젠가 외국 작가에

게서 들은 말인데mdash한국 사람은 한국을 보지 않았다mdash하는 얘길 해요 사진 작가에게 대한 말이지

만helliphellip 나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이 퍽 중요한 얘기다mdash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를 직시하는 것만이

사진은 아니겠지만 실용사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것이 사실 아닐까요 회화적인 쌀롱 픽처라던

가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리얼리즘 사진이라는 것에 너무들 치우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 국제 교류의 시발은 역시 소개적(紹介的)인 것 다시 말해서 르포르타주적인 것이겠으니까helliphellip

임 외국 작품의 모방 같은 것은 이제 집어치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mdash예술적인 것 이것만을 너무 추

구했기 때문에 사실이 한국적인 것과 국민성의 묘사 같은 것이 잘 되지 않았지요 정서적인 것에만

너무 골몰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일이고 helliphellip 예술을 위한 예술에 정신들이 팔려 있었지나 않은

지helliphellip 예술을 하기 위한 사진이라는 관념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이 예술을 염두에 안 둔다면 실용사진이 돼 버리게

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너무 치우친 것 같단 말입니다

이 특히 국제 교류를 생각한다면 아닌 게 아니라 외국처럼 르포르타주적인 사진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할거에요

임 그래요 거기에 예술성을 띄워서 소화할 만한 역량 있는 작가가 필요해요

이 또 하나의 가장 큰 문제는 위정자의 관심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 큰 난관입니다 국제 교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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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가족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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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말이고 역시 정부당국자의 적극적인 주

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어디 그래요

임 우선 사단 자체의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작가들의 작업도 촉구되어야 하구helliphellip 아까도 말이 나왔지

만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 출품을 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점 같은데서 작가들의 반성도 필

요하고helliphellip

이 개별적으로 미국 등지에 보낸 것은 아마 상당한 수가 되겠지요

임 그럼요 그랬는데 왜 성과가 없느냐mdash하는 반성이 있어야죠

이 오늘의 현실을 예술적인 면에서 기록하고 작품화 해야겠는데helliphellip 막연하게 예술을 위한 작품을 보

내니까 기교적으론 훌륭할지 몰라도 작품 자체에 내용이 없어서helliphellip 그래서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닐

임 그런 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빨리 우리의 수준을 높여서 국제 조류와 호흡을 맞추어 나가

야 할 것입니다

이 이거 아마추어를 위한 얘기라는 것이 잠깐 탈선을 한 것 같군 그러나 이런 문제도 참고가 되긴 하니

까helliphellip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합시다

본지 수고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helliphellip

(기록 O기자)

이해선 「lsquo백오(白烏)rsquo의 변(辯)」 『동아일보』 1957년 4월 9일 4면

30여년 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입학

이 되었을 당시 자축기념하는 의미에서 호(號)를

하나 지어본 것이 백오(白烏)라는 두 글자였다 처

음 듣는 사람들 중에서는 거문[검은] 까마귀는 있

지만 흰 까마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서로 웃어버리고 그 뜻을

설명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자의

(字意)를 해명해볼까 한다 백(白)은 흰 빛이요 오

(烏)는 흑색으로 통하므로 우선 흑백을 대조시켜

놓고 흰 종이 위에다 검은 먹으로 휘호(揮毫)할 것

이니 그 뜻이 내 생활과 부합될 것 같으며 둘째로

백 자(字)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첫 자를 떼어놓

고 오는 반포오(反哺烏)로 그 이름이 높은 새이므

로 평소에 효자 노릇을 못하여 온 나의 좌우명으로도 적당할 듯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새 중에서는

혹간(或間) 백변종(白變種)이 생겨나는 수가 있는데 그 흰새를 서조(瑞鳥)라고 떠들던 옛 시절도 있었으므

관련 자료 소개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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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내가 우연히 호를 지어 본 것이 검은 까마귀떼 속에서 서조 백오를 발견하였으니 나의 전도(前途)에는

반드시 서광(瑞光)이 비칠 것 같으므로 이상 여러 가지 의미를 차례로 생각해 볼 때에 나에게는 이 외에 더

좋은 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자의였었고 궁금한채로 불려온 백오

였었다 만담궁변(漫談窮辯)을 물소물책(勿笑勿責) 하소서 (사진가)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

이해선 「중요한 내용middot형식-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년 10월 20일 5면

사진작품에는 사진 특유의 형식이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러한 특유의 형식에 알맞은 표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의 특수성은 형식이 가지는 특수성 보다는

기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주관적이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작품심사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동일하게 중요시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작

품 속에서 그야말로 형식과 내용이 알맞게 부합된 특출한 작

품을 볼 수는 없었다 형식이 좋으면 내용이 빈약하고 좀 내

용이 있으면 형식이 미숙하고helliphellip 모두 결점이 있다 그러나

입상작으로 뽑은 8 점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

다 그리고 금년에는 lsquo칼러rsquo사진의 응모 점수가 30점이나 되

고 그중에서도 3점이 입상되었고 또 9점이 입선되었다는 것

은 lsquo칼러rsquo 사진의 앞날을 위해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lt전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장gt

[제1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년 2월 8일 5면

외국작품의 세련되고 빈틈없는 lsquo테크닉rsquo은 국내작품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서 우선 국내

작품을 형식에서부터 누르고 말았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이루게 된 것은 국내작가들

의 역량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lsquo국산인화지rsquo가 얼마나 엉터리고 조악한 것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대체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더욱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은 이와 반대적인 경향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예술이든 먼저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볼 때 국내작품의 후진성은

두말할 것 없이 형식의 경시에 있다고 하겠다 심사결과 흑백부에서나 lsquo칼라rsquo부에서 겨우 동상으로 한 점

씩 밖에 국내작품이 입상되지 못했다는 것은 다소 섭섭한 느낌이나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경종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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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더욱 우리 심사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독에서 응모한 lsquo칼라rsquo

작품이었다 물체의 외관 색감을 초월한 내면의 lsquo이미지rsquo가 발

산하는 짙은 감정의 색감으로 작가의 개성과 사상을 인상 깊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내 lsquo칼라라보rsquo의 후진

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상작으로 뽑힌 외국작품들은 오

늘의 세계 사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는 큰 자극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

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제2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총 818점 응모-사진예술에 도움」

『동아일보』 1967년 2월 9일 4면

지난해와 같이 흑백부문에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들은 모두가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산인화지의 조악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작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올해는 흑백

부문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기꺼운 일이라고

하겠다

특히 칼라작품에 있어서는 독일의 작품들이 특출했고 이들 작품들의 색감은 현대 과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 최고상으로 뽑힌 lt잊은 친구gt와 몇 점의 입상작품들은 칼라릴리프와 소라리

세이숀[솔라리제이션] 등의 수법으로써 모티

브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를 초객체적이고 추

상적으로 표현하고 작가의 짙은 개성과 사상

과 철학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입상작으로 뽑은 16점의 작품들은 오늘의

세계사단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

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심사위원 이해선 (위원장) 임응식 서순삼

박필호 안월산 정인성 최경덕 (이상 7명)

관련 자료 소개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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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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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관련 자료 소개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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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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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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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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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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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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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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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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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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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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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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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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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3: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돼요 좀 더 시야를 넓혀서 예술이라는 게 뭐냐 mdash 하는 걸 먼저 알아야지 셋째에 가서 사진예술이

라는 게 뭐냐 mdash 를 연구하고 넷째에 가서야 비로소 작품이라던가 창작의식 기교 기술에 대한 검

토를 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기본조건을 머리 속에 언제나 간직하도록 나는 주장해 왔어요

임 기술면을 등한히 할 수는 없겠지요 기술 없이는 표현이 안되니까helliphellip 그러나 이선생 말씀처럼 인

간본연의 문제도 크긴 큽니다 다른 예술부문의 사람보다 교양면에서 뒤떨어지지나 않는가 mdash 하는

것이 항상 염려되는데helliphellip 만일 뒤떨어진다면 큰일이지요 기술도 중요한 문제겠지만 교양인격 같

은 것도 예술가가로서의 긍지를 위해선 떨어질 수 없는 문제고helliphellip 더욱이 좋은 기술을 가졌으면서

도 기초교양이 모자라서 좋은 작품을 낼 수 없다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으니까helliphellip 교양인으로서의

자격도 다른 예술부문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사진을 해야할겝니다

이 기교나 기술을 어떻게 우물쭈물 배웠다고 해서 작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helliphellip 예술이란 그 자체

에 대한 조예부터 깊어야 합니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조리개가 얼마다 타임이 어

떻다helliphellip 암실작업은 어떻게 하는 거다helliphellip 이것만을 알았다고 해서 작가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에

요helliphellip 인간면 예술면 기술면에 똑 같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마 사진을 연구하겠다는 신

인들의 기본이념이 돼야 할겝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은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지도한다는 면에서

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거든요 mdash

임 어쨌든 기술을 위주로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난 옛날 얘기입니다

지도자 시비

이 지났다기 보다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또는 장래에나 변할 수 없는 기본이념이겠지요 사진이라는 것

은 더욱이나 고도의 대중성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인격과 교양이 필요해요 기계라는 거야 찍으면

사진이 되도록 마련된 것이니까 예술까지는 못 가도 사진은 되거든 mdash 그러니까 그것을 예술로 이

끌려면 찍는 사람의 성분이 문제되는 것이지요helliphellip

임 그런 의미에서도 사단의 규정이 필요하고 작가라는 규정이 필요해요 사단이라는 것에 너무 엄격한

규정을 지을 수는 없지만helliphellip 만년필을 가졌다고 해서 전부 문학가가 아니라면helliphellip 카메라를 메었

으니 작가다 mdash 하는 엉터리도 용납될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우선 필요한 것은 취미 도락이라는 관념

을 지양해야 할 텐데helliphellip

이 취미가 차차 심각해지면 창작의식도 생기는게니까helliphellip 그런 사람들을 지도 계몽해서 한 사람이라

도 작가로 이끌어야 하겠지요helliphellip 카메라를 살 때부터 나는 사진작가가 되겠다 mdash 하는 사람은 있

을 수 없지 않아요helliphellip

임 lsquo싼데이rsquo 카메라맨은 논의의 대상이 안되구요helliphellip (웃음)

이 그러니까 지도자들이 작가적인 태도에 확고한 이념을 앞세우고 지도에 임해야 하는 건데helliphellip

본지 각 단체 지도층의 지도방침에 대한 구체적인 태도를 어떻게 규정하겠습니까 helliphellip

임 우선 사진에 대한 인식부터 고쳐야 해요 말이 중복되는 것 같은데helliphellip 친구 좋고 사진 좋아서 우리

끼리 하면 그만이다 mdash 하는 생각들이 많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만이라도 그렇지 않다

관련 자료 소개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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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싶어요 학생들이 카메라를 사 가지고 몇 사람 모였으니까 책임자 격

인 선생이 필요하다 mdash 해서 책임 맡았다는 사람으로는 지도가 안 될 게 아닙니까 그렇다고 청해 오

지도 않는데 내정 격으로 뛰어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구helliphellip (웃음)

본지 또 한 가지 요즘 일대 성황을 이루는 것이 소위 현상사진(懸賞寫眞)이라는 건데요helliphellip 이 현상사진

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진에 대한 모욕도 있지helliphellip

임 거 참 꼴사나운 일이 많아요 현상이란 걸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helliphellip 그 하나는 어느 연구

단체에서 순수한 의미에서 발표 바탕이 없는 아마추어를 위해 마련하는 경우가 있을게고 또 하나는

선전용으로 포스터 mdash 같은 데에 써먹기 위한 상업 정책적인 의식에서 모집하는 현상이 있을 테지요

이 어느 경우이건 간에 좌우간 현상 모집을 하는 목적이 있는데helliphellip 응모자는 우선 현상의 목적부터 확

실히 알고 응모를 해야 하겠지helliphellip

임 그렇죠 그런데 이 상업 정책적인 현상의 경우에는 사진문화에 대한 모욕적인 행동이 퍽 많습니다

이거 참 불유쾌한 일이지만helliphellip 가령 예를 들자면 응모자는 원판을 제공하라던가 또 낙선자의 작

품은 일체 반환치 않는다는 따위helliphellip이게 얼마나 사진예술에 대한 모욕적 행위입니까 helliphellip

이 그래요helliphellip 확실히 모순된 일입니다

임 필요에 의해서 현상모집을 했으니까 당선된 작품은 물론 필요하겠지만helliphellip 낙선작품을 반환치 않는

다는 것은 언어도단 입니다 낙선이 됐다 해도 작가의 입장으론 대단히 귀중한 하나의 작품일 텐데

그걸 안 돌려 준대서야 말이 되나요 주최측은 낙선작품의 원화를 돌려 줄만한 성의를 가져야 도리

에 맞을 텐데helliphellip 요즘 현실은 lsquo낙선rsquo이란 푸대접 밑에 원판까지 몰수당하는 판국이니helliphellip 원 참

이 그러니까 응모자는 무엇보다도 현상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지helliphellip 여러 번 겪은 일이지만 심사를

하다 보면 전혀 현상 취지를 도외시한 작품들이 있는데helliphellip

임 그거야 보나마나 낙선이죠 (웃음)

이 그러믄요 현상 응모자로서는 출품 규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 아니겠어요

임 그럼요

이 그런데 어떤 것은 작품에 제목도 없는 것이 있거든요 그런가 하면 제목과 작품내용이 전혀 특이한

엉터리도 있구helliphellip

임 저도 여러 번 겪은 일입니다

이 제목이란 것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벌써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찍는다는 의식이 있는 이상

제목도 정해져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아주 작품과 제목이 동떨어진 것들이 응모해 오니까

낙선의 자격이 충분할 수밖에helliphellip 하하하 (웃음)

임 그게 모두 사진에 대한 성의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이 그래요 성의가 없어요 자기 작품에 대해선 최선의 성의를 다 해야 할 텐데 그런 태도가 없거든helliphellip

제목을 안 썼는지 못 썼는지는 모르지만helliphel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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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그저 무턱대고 발표의식만 왕성한 까닭이 아닐까요

이 그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된 작가가 아닌 이상 발표기회가 좀처럼 없을 테니까

자기 실력의 평가를 받는다던가 남들과 경쟁해 본다는 의미에서 현상에 자주 응모하는 것은 좋은데

helliphellip 아 어떤 친구는 자기 실력 생각은 하지도 않고 상품이 적다 많다 시비를 하는 친구도 있으니 참

기가 막힐 일이지

주최자의 무성의도 고쳐져야 하고

임 그건 lsquo현상rsquo이라고 내거는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순수한 사진연구단체에서 모집할 때는

lsquo공모전rsquo이라던가 하는 문구가 좋지 않을까요 lsquo현상rsquo이라니까 lsquo상rsquo을 바라게도 되겠지만 어쨌든

lsquo현상rsquo이란 말 자체가 순수하지 못해요

이 그건 확실히 생각해 볼 문제이겠군요helliphellip 순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helliphellip 응모자들이 심

사원이 누구냐mdash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도 순수하지 못하고helliphellip 또 주최자가 모집광고를 낼 때

lsquo심사원은 추후발표rsquo라mdash하는 것도 순수하지 못해요 이것도 참 불쾌한 일인데 lsquo추후발표rsquo라는 걸

다시 생각하면 lsquo준비가 안됐다rsquo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심사원의 준비도 안 해 놓고 현상을 모

집하는 그런 무성의가 또 어디 있어helliphellip 이건 일종의 사기가 아니면 거만일 겝니다

임 그나 그뿐인가요 lsquo심사원은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함rsquohelliphellip 하는 모호한 광고도 있지요 응모자의 입

장에서 생각하면helliphellip 심사원에 불만이 있으면 응모를 아니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 심사원 문제만

은 정정당당히 명시해야만 나중에 가서 심사에 대한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출품을 한 다음에 심사

원이 발표된다는 것은 심사에 대한 불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helliphellip

이 그리고 응모자의 동태를 가만히 보면 아까 얘기가 나왔던 소위 lsquo취미정도rsquo라는 층의 발표 의욕이 굉

장해서 대부분의 응모자가 이 부류인 것 같은데helliphellip 여기 한 가지 탈이 있어요 현상응모 작품의 심

사라는 것은 무제한의 심사 레벨을 놓고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응모 작품 중에서의 우수 작품을 가

려낸다는 것은 이거 상식 문제가 아닙니다

임 그렇죠

이 아 그런데 어떻게 해서 현상에 당선이 되거나 특히 특선이라도 하면 그만 자기가 갑자기 위대한

작가라도 된 것처럼 대가연(大家然) 하고 으쓱대는 친구들이 많아서 걱정이야helliphellip (웃음)

이 lsquo특선rsquo이라는 것은 응모해 온 작품들 중에서 특선이지 결코 한국 사단 전체의 수준에서 특선이라

는 것은 아닌데helliphellip 그만 한 번만 당선되면 코가 높아지고 대뜸 대가 행세를 하려고 드니helliphellip 참

신인들은 특히 조심해야 할 일이지

남의 것보고hellip 우리 것도 보내고hellip

본지 이제 화제를 좀 바꾸어서 세계사단의 동향을 좀 말씀해 주실까요

임 세계사단의 얘기라면 직접 보아야만 얘기가 될 텐데helliphellip

이 서울 바닥에서 썩으면서 세계사단의 얘기를 어떻게 본 듯이 할 수가 있겠나 카메라를 메고 세계일

관련 자료 소개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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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도 했어야 얘기가 되지

임 그것보다도 사진을 통한 국제 교류 얘기나 합시다

이 그게 좋겠군helliphellip 얼마 전에 덕수궁에서 자유중국의 소개사진전시가 있었죠 미국공보원의 활동도

이를 테면 국제교류의 한 형식일게고helliphellip

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자유중국과 월남의 사진전시가 있었는데helliphellip 우리도 수출을 한다면 그 보

다 훨씬 좋은 작품들이 나갈걸요helliphellip

이 한미합동전이던가 한중합동전 같은 것도 하면 역시 국제교류가 되겠지요helliphellip

임 한미합동전은 불원한 장래에 개최될 것입니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lsquo인간일가(人間一家)rsquo의 사진

이 아마 이월쯤 한국에 올 겝니다 미국대사관이 주동이 돼서 작품 503점 전부의 전시회 계획이 추

진되고 있으니까요

이 남이 보내줘서 본 것은 있지만 우리가 남에게 보여준 것은 없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야 우리도 남에

게 보여줘야 교류가 될 텐데helliphellip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두 사람의 작품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임 개인적인 활동은 있었지요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사진살롱에 사진을 보내고 있으니까 개인

적으로는 더러 나간 셈이죠 개인들의 수출이라도 좀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지만

이 우리의 것을 내보내고 외국 것을 들여와서 서로 감상하고 연구하는 게 이를 테면 국제교류인데

아마 명년쯤엔 될까 몰라

임 작품교환전 같은 것을 위해서 대대적인 계몽운동이 필요 하겠죠

이 그렇죠 운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어요

임 그런데 근본적인 얘기를 하자면 한국 작가의 역량이 아직도 부족한 것 같아요 언젠가 외국 작가에

게서 들은 말인데mdash한국 사람은 한국을 보지 않았다mdash하는 얘길 해요 사진 작가에게 대한 말이지

만helliphellip 나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이 퍽 중요한 얘기다mdash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를 직시하는 것만이

사진은 아니겠지만 실용사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것이 사실 아닐까요 회화적인 쌀롱 픽처라던

가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리얼리즘 사진이라는 것에 너무들 치우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 국제 교류의 시발은 역시 소개적(紹介的)인 것 다시 말해서 르포르타주적인 것이겠으니까helliphellip

임 외국 작품의 모방 같은 것은 이제 집어치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mdash예술적인 것 이것만을 너무 추

구했기 때문에 사실이 한국적인 것과 국민성의 묘사 같은 것이 잘 되지 않았지요 정서적인 것에만

너무 골몰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일이고 helliphellip 예술을 위한 예술에 정신들이 팔려 있었지나 않은

지helliphellip 예술을 하기 위한 사진이라는 관념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이 예술을 염두에 안 둔다면 실용사진이 돼 버리게

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너무 치우친 것 같단 말입니다

이 특히 국제 교류를 생각한다면 아닌 게 아니라 외국처럼 르포르타주적인 사진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할거에요

임 그래요 거기에 예술성을 띄워서 소화할 만한 역량 있는 작가가 필요해요

이 또 하나의 가장 큰 문제는 위정자의 관심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 큰 난관입니다 국제 교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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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가족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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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말이고 역시 정부당국자의 적극적인 주

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어디 그래요

임 우선 사단 자체의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작가들의 작업도 촉구되어야 하구helliphellip 아까도 말이 나왔지

만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 출품을 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점 같은데서 작가들의 반성도 필

요하고helliphellip

이 개별적으로 미국 등지에 보낸 것은 아마 상당한 수가 되겠지요

임 그럼요 그랬는데 왜 성과가 없느냐mdash하는 반성이 있어야죠

이 오늘의 현실을 예술적인 면에서 기록하고 작품화 해야겠는데helliphellip 막연하게 예술을 위한 작품을 보

내니까 기교적으론 훌륭할지 몰라도 작품 자체에 내용이 없어서helliphellip 그래서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닐

임 그런 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빨리 우리의 수준을 높여서 국제 조류와 호흡을 맞추어 나가

야 할 것입니다

이 이거 아마추어를 위한 얘기라는 것이 잠깐 탈선을 한 것 같군 그러나 이런 문제도 참고가 되긴 하니

까helliphellip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합시다

본지 수고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helliphellip

(기록 O기자)

이해선 「lsquo백오(白烏)rsquo의 변(辯)」 『동아일보』 1957년 4월 9일 4면

30여년 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입학

이 되었을 당시 자축기념하는 의미에서 호(號)를

하나 지어본 것이 백오(白烏)라는 두 글자였다 처

음 듣는 사람들 중에서는 거문[검은] 까마귀는 있

지만 흰 까마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서로 웃어버리고 그 뜻을

설명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자의

(字意)를 해명해볼까 한다 백(白)은 흰 빛이요 오

(烏)는 흑색으로 통하므로 우선 흑백을 대조시켜

놓고 흰 종이 위에다 검은 먹으로 휘호(揮毫)할 것

이니 그 뜻이 내 생활과 부합될 것 같으며 둘째로

백 자(字)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첫 자를 떼어놓

고 오는 반포오(反哺烏)로 그 이름이 높은 새이므

로 평소에 효자 노릇을 못하여 온 나의 좌우명으로도 적당할 듯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새 중에서는

혹간(或間) 백변종(白變種)이 생겨나는 수가 있는데 그 흰새를 서조(瑞鳥)라고 떠들던 옛 시절도 있었으므

관련 자료 소개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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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내가 우연히 호를 지어 본 것이 검은 까마귀떼 속에서 서조 백오를 발견하였으니 나의 전도(前途)에는

반드시 서광(瑞光)이 비칠 것 같으므로 이상 여러 가지 의미를 차례로 생각해 볼 때에 나에게는 이 외에 더

좋은 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자의였었고 궁금한채로 불려온 백오

였었다 만담궁변(漫談窮辯)을 물소물책(勿笑勿責) 하소서 (사진가)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

이해선 「중요한 내용middot형식-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년 10월 20일 5면

사진작품에는 사진 특유의 형식이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러한 특유의 형식에 알맞은 표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의 특수성은 형식이 가지는 특수성 보다는

기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주관적이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작품심사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동일하게 중요시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작

품 속에서 그야말로 형식과 내용이 알맞게 부합된 특출한 작

품을 볼 수는 없었다 형식이 좋으면 내용이 빈약하고 좀 내

용이 있으면 형식이 미숙하고helliphellip 모두 결점이 있다 그러나

입상작으로 뽑은 8 점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

다 그리고 금년에는 lsquo칼러rsquo사진의 응모 점수가 30점이나 되

고 그중에서도 3점이 입상되었고 또 9점이 입선되었다는 것

은 lsquo칼러rsquo 사진의 앞날을 위해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lt전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장gt

[제1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년 2월 8일 5면

외국작품의 세련되고 빈틈없는 lsquo테크닉rsquo은 국내작품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서 우선 국내

작품을 형식에서부터 누르고 말았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이루게 된 것은 국내작가들

의 역량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lsquo국산인화지rsquo가 얼마나 엉터리고 조악한 것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대체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더욱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은 이와 반대적인 경향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예술이든 먼저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볼 때 국내작품의 후진성은

두말할 것 없이 형식의 경시에 있다고 하겠다 심사결과 흑백부에서나 lsquo칼라rsquo부에서 겨우 동상으로 한 점

씩 밖에 국내작품이 입상되지 못했다는 것은 다소 섭섭한 느낌이나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경종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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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더욱 우리 심사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독에서 응모한 lsquo칼라rsquo

작품이었다 물체의 외관 색감을 초월한 내면의 lsquo이미지rsquo가 발

산하는 짙은 감정의 색감으로 작가의 개성과 사상을 인상 깊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내 lsquo칼라라보rsquo의 후진

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상작으로 뽑힌 외국작품들은 오

늘의 세계 사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는 큰 자극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

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제2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총 818점 응모-사진예술에 도움」

『동아일보』 1967년 2월 9일 4면

지난해와 같이 흑백부문에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들은 모두가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산인화지의 조악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작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올해는 흑백

부문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기꺼운 일이라고

하겠다

특히 칼라작품에 있어서는 독일의 작품들이 특출했고 이들 작품들의 색감은 현대 과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 최고상으로 뽑힌 lt잊은 친구gt와 몇 점의 입상작품들은 칼라릴리프와 소라리

세이숀[솔라리제이션] 등의 수법으로써 모티

브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를 초객체적이고 추

상적으로 표현하고 작가의 짙은 개성과 사상

과 철학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입상작으로 뽑은 16점의 작품들은 오늘의

세계사단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

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심사위원 이해선 (위원장) 임응식 서순삼

박필호 안월산 정인성 최경덕 (이상 7명)

관련 자료 소개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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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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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관련 자료 소개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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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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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관련 자료 소개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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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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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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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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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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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관련 자료 소개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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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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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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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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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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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4: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싶어요 학생들이 카메라를 사 가지고 몇 사람 모였으니까 책임자 격

인 선생이 필요하다 mdash 해서 책임 맡았다는 사람으로는 지도가 안 될 게 아닙니까 그렇다고 청해 오

지도 않는데 내정 격으로 뛰어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구helliphellip (웃음)

본지 또 한 가지 요즘 일대 성황을 이루는 것이 소위 현상사진(懸賞寫眞)이라는 건데요helliphellip 이 현상사진

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진에 대한 모욕도 있지helliphellip

임 거 참 꼴사나운 일이 많아요 현상이란 걸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는데helliphellip 그 하나는 어느 연구

단체에서 순수한 의미에서 발표 바탕이 없는 아마추어를 위해 마련하는 경우가 있을게고 또 하나는

선전용으로 포스터 mdash 같은 데에 써먹기 위한 상업 정책적인 의식에서 모집하는 현상이 있을 테지요

이 어느 경우이건 간에 좌우간 현상 모집을 하는 목적이 있는데helliphellip 응모자는 우선 현상의 목적부터 확

실히 알고 응모를 해야 하겠지helliphellip

임 그렇죠 그런데 이 상업 정책적인 현상의 경우에는 사진문화에 대한 모욕적인 행동이 퍽 많습니다

이거 참 불유쾌한 일이지만helliphellip 가령 예를 들자면 응모자는 원판을 제공하라던가 또 낙선자의 작

품은 일체 반환치 않는다는 따위helliphellip이게 얼마나 사진예술에 대한 모욕적 행위입니까 helliphellip

이 그래요helliphellip 확실히 모순된 일입니다

임 필요에 의해서 현상모집을 했으니까 당선된 작품은 물론 필요하겠지만helliphellip 낙선작품을 반환치 않는

다는 것은 언어도단 입니다 낙선이 됐다 해도 작가의 입장으론 대단히 귀중한 하나의 작품일 텐데

그걸 안 돌려 준대서야 말이 되나요 주최측은 낙선작품의 원화를 돌려 줄만한 성의를 가져야 도리

에 맞을 텐데helliphellip 요즘 현실은 lsquo낙선rsquo이란 푸대접 밑에 원판까지 몰수당하는 판국이니helliphellip 원 참

이 그러니까 응모자는 무엇보다도 현상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지helliphellip 여러 번 겪은 일이지만 심사를

하다 보면 전혀 현상 취지를 도외시한 작품들이 있는데helliphellip

임 그거야 보나마나 낙선이죠 (웃음)

이 그러믄요 현상 응모자로서는 출품 규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 아니겠어요

임 그럼요

이 그런데 어떤 것은 작품에 제목도 없는 것이 있거든요 그런가 하면 제목과 작품내용이 전혀 특이한

엉터리도 있구helliphellip

임 저도 여러 번 겪은 일입니다

이 제목이란 것은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벌써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찍는다는 의식이 있는 이상

제목도 정해져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아주 작품과 제목이 동떨어진 것들이 응모해 오니까

낙선의 자격이 충분할 수밖에helliphellip 하하하 (웃음)

임 그게 모두 사진에 대한 성의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이 그래요 성의가 없어요 자기 작품에 대해선 최선의 성의를 다 해야 할 텐데 그런 태도가 없거든helliphellip

제목을 안 썼는지 못 썼는지는 모르지만helliphell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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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그저 무턱대고 발표의식만 왕성한 까닭이 아닐까요

이 그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된 작가가 아닌 이상 발표기회가 좀처럼 없을 테니까

자기 실력의 평가를 받는다던가 남들과 경쟁해 본다는 의미에서 현상에 자주 응모하는 것은 좋은데

helliphellip 아 어떤 친구는 자기 실력 생각은 하지도 않고 상품이 적다 많다 시비를 하는 친구도 있으니 참

기가 막힐 일이지

주최자의 무성의도 고쳐져야 하고

임 그건 lsquo현상rsquo이라고 내거는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순수한 사진연구단체에서 모집할 때는

lsquo공모전rsquo이라던가 하는 문구가 좋지 않을까요 lsquo현상rsquo이라니까 lsquo상rsquo을 바라게도 되겠지만 어쨌든

lsquo현상rsquo이란 말 자체가 순수하지 못해요

이 그건 확실히 생각해 볼 문제이겠군요helliphellip 순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helliphellip 응모자들이 심

사원이 누구냐mdash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도 순수하지 못하고helliphellip 또 주최자가 모집광고를 낼 때

lsquo심사원은 추후발표rsquo라mdash하는 것도 순수하지 못해요 이것도 참 불쾌한 일인데 lsquo추후발표rsquo라는 걸

다시 생각하면 lsquo준비가 안됐다rsquo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심사원의 준비도 안 해 놓고 현상을 모

집하는 그런 무성의가 또 어디 있어helliphellip 이건 일종의 사기가 아니면 거만일 겝니다

임 그나 그뿐인가요 lsquo심사원은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함rsquohelliphellip 하는 모호한 광고도 있지요 응모자의 입

장에서 생각하면helliphellip 심사원에 불만이 있으면 응모를 아니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 심사원 문제만

은 정정당당히 명시해야만 나중에 가서 심사에 대한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출품을 한 다음에 심사

원이 발표된다는 것은 심사에 대한 불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helliphellip

이 그리고 응모자의 동태를 가만히 보면 아까 얘기가 나왔던 소위 lsquo취미정도rsquo라는 층의 발표 의욕이 굉

장해서 대부분의 응모자가 이 부류인 것 같은데helliphellip 여기 한 가지 탈이 있어요 현상응모 작품의 심

사라는 것은 무제한의 심사 레벨을 놓고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응모 작품 중에서의 우수 작품을 가

려낸다는 것은 이거 상식 문제가 아닙니다

임 그렇죠

이 아 그런데 어떻게 해서 현상에 당선이 되거나 특히 특선이라도 하면 그만 자기가 갑자기 위대한

작가라도 된 것처럼 대가연(大家然) 하고 으쓱대는 친구들이 많아서 걱정이야helliphellip (웃음)

이 lsquo특선rsquo이라는 것은 응모해 온 작품들 중에서 특선이지 결코 한국 사단 전체의 수준에서 특선이라

는 것은 아닌데helliphellip 그만 한 번만 당선되면 코가 높아지고 대뜸 대가 행세를 하려고 드니helliphellip 참

신인들은 특히 조심해야 할 일이지

남의 것보고hellip 우리 것도 보내고hellip

본지 이제 화제를 좀 바꾸어서 세계사단의 동향을 좀 말씀해 주실까요

임 세계사단의 얘기라면 직접 보아야만 얘기가 될 텐데helliphellip

이 서울 바닥에서 썩으면서 세계사단의 얘기를 어떻게 본 듯이 할 수가 있겠나 카메라를 메고 세계일

관련 자료 소개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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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도 했어야 얘기가 되지

임 그것보다도 사진을 통한 국제 교류 얘기나 합시다

이 그게 좋겠군helliphellip 얼마 전에 덕수궁에서 자유중국의 소개사진전시가 있었죠 미국공보원의 활동도

이를 테면 국제교류의 한 형식일게고helliphellip

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자유중국과 월남의 사진전시가 있었는데helliphellip 우리도 수출을 한다면 그 보

다 훨씬 좋은 작품들이 나갈걸요helliphellip

이 한미합동전이던가 한중합동전 같은 것도 하면 역시 국제교류가 되겠지요helliphellip

임 한미합동전은 불원한 장래에 개최될 것입니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lsquo인간일가(人間一家)rsquo의 사진

이 아마 이월쯤 한국에 올 겝니다 미국대사관이 주동이 돼서 작품 503점 전부의 전시회 계획이 추

진되고 있으니까요

이 남이 보내줘서 본 것은 있지만 우리가 남에게 보여준 것은 없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야 우리도 남에

게 보여줘야 교류가 될 텐데helliphellip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두 사람의 작품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임 개인적인 활동은 있었지요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사진살롱에 사진을 보내고 있으니까 개인

적으로는 더러 나간 셈이죠 개인들의 수출이라도 좀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지만

이 우리의 것을 내보내고 외국 것을 들여와서 서로 감상하고 연구하는 게 이를 테면 국제교류인데

아마 명년쯤엔 될까 몰라

임 작품교환전 같은 것을 위해서 대대적인 계몽운동이 필요 하겠죠

이 그렇죠 운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어요

임 그런데 근본적인 얘기를 하자면 한국 작가의 역량이 아직도 부족한 것 같아요 언젠가 외국 작가에

게서 들은 말인데mdash한국 사람은 한국을 보지 않았다mdash하는 얘길 해요 사진 작가에게 대한 말이지

만helliphellip 나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이 퍽 중요한 얘기다mdash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를 직시하는 것만이

사진은 아니겠지만 실용사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것이 사실 아닐까요 회화적인 쌀롱 픽처라던

가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리얼리즘 사진이라는 것에 너무들 치우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 국제 교류의 시발은 역시 소개적(紹介的)인 것 다시 말해서 르포르타주적인 것이겠으니까helliphellip

임 외국 작품의 모방 같은 것은 이제 집어치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mdash예술적인 것 이것만을 너무 추

구했기 때문에 사실이 한국적인 것과 국민성의 묘사 같은 것이 잘 되지 않았지요 정서적인 것에만

너무 골몰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일이고 helliphellip 예술을 위한 예술에 정신들이 팔려 있었지나 않은

지helliphellip 예술을 하기 위한 사진이라는 관념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이 예술을 염두에 안 둔다면 실용사진이 돼 버리게

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너무 치우친 것 같단 말입니다

이 특히 국제 교류를 생각한다면 아닌 게 아니라 외국처럼 르포르타주적인 사진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할거에요

임 그래요 거기에 예술성을 띄워서 소화할 만한 역량 있는 작가가 필요해요

이 또 하나의 가장 큰 문제는 위정자의 관심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 큰 난관입니다 국제 교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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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가족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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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말이고 역시 정부당국자의 적극적인 주

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어디 그래요

임 우선 사단 자체의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작가들의 작업도 촉구되어야 하구helliphellip 아까도 말이 나왔지

만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 출품을 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점 같은데서 작가들의 반성도 필

요하고helliphellip

이 개별적으로 미국 등지에 보낸 것은 아마 상당한 수가 되겠지요

임 그럼요 그랬는데 왜 성과가 없느냐mdash하는 반성이 있어야죠

이 오늘의 현실을 예술적인 면에서 기록하고 작품화 해야겠는데helliphellip 막연하게 예술을 위한 작품을 보

내니까 기교적으론 훌륭할지 몰라도 작품 자체에 내용이 없어서helliphellip 그래서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닐

임 그런 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빨리 우리의 수준을 높여서 국제 조류와 호흡을 맞추어 나가

야 할 것입니다

이 이거 아마추어를 위한 얘기라는 것이 잠깐 탈선을 한 것 같군 그러나 이런 문제도 참고가 되긴 하니

까helliphellip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합시다

본지 수고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helliphellip

(기록 O기자)

이해선 「lsquo백오(白烏)rsquo의 변(辯)」 『동아일보』 1957년 4월 9일 4면

30여년 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입학

이 되었을 당시 자축기념하는 의미에서 호(號)를

하나 지어본 것이 백오(白烏)라는 두 글자였다 처

음 듣는 사람들 중에서는 거문[검은] 까마귀는 있

지만 흰 까마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서로 웃어버리고 그 뜻을

설명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자의

(字意)를 해명해볼까 한다 백(白)은 흰 빛이요 오

(烏)는 흑색으로 통하므로 우선 흑백을 대조시켜

놓고 흰 종이 위에다 검은 먹으로 휘호(揮毫)할 것

이니 그 뜻이 내 생활과 부합될 것 같으며 둘째로

백 자(字)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첫 자를 떼어놓

고 오는 반포오(反哺烏)로 그 이름이 높은 새이므

로 평소에 효자 노릇을 못하여 온 나의 좌우명으로도 적당할 듯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새 중에서는

혹간(或間) 백변종(白變種)이 생겨나는 수가 있는데 그 흰새를 서조(瑞鳥)라고 떠들던 옛 시절도 있었으므

관련 자료 소개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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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내가 우연히 호를 지어 본 것이 검은 까마귀떼 속에서 서조 백오를 발견하였으니 나의 전도(前途)에는

반드시 서광(瑞光)이 비칠 것 같으므로 이상 여러 가지 의미를 차례로 생각해 볼 때에 나에게는 이 외에 더

좋은 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자의였었고 궁금한채로 불려온 백오

였었다 만담궁변(漫談窮辯)을 물소물책(勿笑勿責) 하소서 (사진가)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

이해선 「중요한 내용middot형식-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년 10월 20일 5면

사진작품에는 사진 특유의 형식이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러한 특유의 형식에 알맞은 표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의 특수성은 형식이 가지는 특수성 보다는

기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주관적이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작품심사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동일하게 중요시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작

품 속에서 그야말로 형식과 내용이 알맞게 부합된 특출한 작

품을 볼 수는 없었다 형식이 좋으면 내용이 빈약하고 좀 내

용이 있으면 형식이 미숙하고helliphellip 모두 결점이 있다 그러나

입상작으로 뽑은 8 점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

다 그리고 금년에는 lsquo칼러rsquo사진의 응모 점수가 30점이나 되

고 그중에서도 3점이 입상되었고 또 9점이 입선되었다는 것

은 lsquo칼러rsquo 사진의 앞날을 위해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lt전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장gt

[제1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년 2월 8일 5면

외국작품의 세련되고 빈틈없는 lsquo테크닉rsquo은 국내작품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서 우선 국내

작품을 형식에서부터 누르고 말았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이루게 된 것은 국내작가들

의 역량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lsquo국산인화지rsquo가 얼마나 엉터리고 조악한 것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대체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더욱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은 이와 반대적인 경향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예술이든 먼저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볼 때 국내작품의 후진성은

두말할 것 없이 형식의 경시에 있다고 하겠다 심사결과 흑백부에서나 lsquo칼라rsquo부에서 겨우 동상으로 한 점

씩 밖에 국내작품이 입상되지 못했다는 것은 다소 섭섭한 느낌이나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경종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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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더욱 우리 심사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독에서 응모한 lsquo칼라rsquo

작품이었다 물체의 외관 색감을 초월한 내면의 lsquo이미지rsquo가 발

산하는 짙은 감정의 색감으로 작가의 개성과 사상을 인상 깊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내 lsquo칼라라보rsquo의 후진

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상작으로 뽑힌 외국작품들은 오

늘의 세계 사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는 큰 자극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

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제2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총 818점 응모-사진예술에 도움」

『동아일보』 1967년 2월 9일 4면

지난해와 같이 흑백부문에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들은 모두가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산인화지의 조악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작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올해는 흑백

부문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기꺼운 일이라고

하겠다

특히 칼라작품에 있어서는 독일의 작품들이 특출했고 이들 작품들의 색감은 현대 과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 최고상으로 뽑힌 lt잊은 친구gt와 몇 점의 입상작품들은 칼라릴리프와 소라리

세이숀[솔라리제이션] 등의 수법으로써 모티

브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를 초객체적이고 추

상적으로 표현하고 작가의 짙은 개성과 사상

과 철학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입상작으로 뽑은 16점의 작품들은 오늘의

세계사단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

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심사위원 이해선 (위원장) 임응식 서순삼

박필호 안월산 정인성 최경덕 (이상 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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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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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관련 자료 소개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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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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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관련 자료 소개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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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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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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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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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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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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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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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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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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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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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5: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임 그저 무턱대고 발표의식만 왕성한 까닭이 아닐까요

이 그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된 작가가 아닌 이상 발표기회가 좀처럼 없을 테니까

자기 실력의 평가를 받는다던가 남들과 경쟁해 본다는 의미에서 현상에 자주 응모하는 것은 좋은데

helliphellip 아 어떤 친구는 자기 실력 생각은 하지도 않고 상품이 적다 많다 시비를 하는 친구도 있으니 참

기가 막힐 일이지

주최자의 무성의도 고쳐져야 하고

임 그건 lsquo현상rsquo이라고 내거는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순수한 사진연구단체에서 모집할 때는

lsquo공모전rsquo이라던가 하는 문구가 좋지 않을까요 lsquo현상rsquo이라니까 lsquo상rsquo을 바라게도 되겠지만 어쨌든

lsquo현상rsquo이란 말 자체가 순수하지 못해요

이 그건 확실히 생각해 볼 문제이겠군요helliphellip 순수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만helliphellip 응모자들이 심

사원이 누구냐mdash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도 순수하지 못하고helliphellip 또 주최자가 모집광고를 낼 때

lsquo심사원은 추후발표rsquo라mdash하는 것도 순수하지 못해요 이것도 참 불쾌한 일인데 lsquo추후발표rsquo라는 걸

다시 생각하면 lsquo준비가 안됐다rsquo는 말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심사원의 준비도 안 해 놓고 현상을 모

집하는 그런 무성의가 또 어디 있어helliphellip 이건 일종의 사기가 아니면 거만일 겝니다

임 그나 그뿐인가요 lsquo심사원은 사계의 권위자로 구성함rsquohelliphellip 하는 모호한 광고도 있지요 응모자의 입

장에서 생각하면helliphellip 심사원에 불만이 있으면 응모를 아니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 심사원 문제만

은 정정당당히 명시해야만 나중에 가서 심사에 대한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출품을 한 다음에 심사

원이 발표된다는 것은 심사에 대한 불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helliphellip

이 그리고 응모자의 동태를 가만히 보면 아까 얘기가 나왔던 소위 lsquo취미정도rsquo라는 층의 발표 의욕이 굉

장해서 대부분의 응모자가 이 부류인 것 같은데helliphellip 여기 한 가지 탈이 있어요 현상응모 작품의 심

사라는 것은 무제한의 심사 레벨을 놓고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응모 작품 중에서의 우수 작품을 가

려낸다는 것은 이거 상식 문제가 아닙니다

임 그렇죠

이 아 그런데 어떻게 해서 현상에 당선이 되거나 특히 특선이라도 하면 그만 자기가 갑자기 위대한

작가라도 된 것처럼 대가연(大家然) 하고 으쓱대는 친구들이 많아서 걱정이야helliphellip (웃음)

이 lsquo특선rsquo이라는 것은 응모해 온 작품들 중에서 특선이지 결코 한국 사단 전체의 수준에서 특선이라

는 것은 아닌데helliphellip 그만 한 번만 당선되면 코가 높아지고 대뜸 대가 행세를 하려고 드니helliphellip 참

신인들은 특히 조심해야 할 일이지

남의 것보고hellip 우리 것도 보내고hellip

본지 이제 화제를 좀 바꾸어서 세계사단의 동향을 좀 말씀해 주실까요

임 세계사단의 얘기라면 직접 보아야만 얘기가 될 텐데helliphellip

이 서울 바닥에서 썩으면서 세계사단의 얘기를 어떻게 본 듯이 할 수가 있겠나 카메라를 메고 세계일

관련 자료 소개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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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도 했어야 얘기가 되지

임 그것보다도 사진을 통한 국제 교류 얘기나 합시다

이 그게 좋겠군helliphellip 얼마 전에 덕수궁에서 자유중국의 소개사진전시가 있었죠 미국공보원의 활동도

이를 테면 국제교류의 한 형식일게고helliphellip

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자유중국과 월남의 사진전시가 있었는데helliphellip 우리도 수출을 한다면 그 보

다 훨씬 좋은 작품들이 나갈걸요helliphellip

이 한미합동전이던가 한중합동전 같은 것도 하면 역시 국제교류가 되겠지요helliphellip

임 한미합동전은 불원한 장래에 개최될 것입니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lsquo인간일가(人間一家)rsquo의 사진

이 아마 이월쯤 한국에 올 겝니다 미국대사관이 주동이 돼서 작품 503점 전부의 전시회 계획이 추

진되고 있으니까요

이 남이 보내줘서 본 것은 있지만 우리가 남에게 보여준 것은 없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야 우리도 남에

게 보여줘야 교류가 될 텐데helliphellip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두 사람의 작품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임 개인적인 활동은 있었지요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사진살롱에 사진을 보내고 있으니까 개인

적으로는 더러 나간 셈이죠 개인들의 수출이라도 좀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지만

이 우리의 것을 내보내고 외국 것을 들여와서 서로 감상하고 연구하는 게 이를 테면 국제교류인데

아마 명년쯤엔 될까 몰라

임 작품교환전 같은 것을 위해서 대대적인 계몽운동이 필요 하겠죠

이 그렇죠 운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어요

임 그런데 근본적인 얘기를 하자면 한국 작가의 역량이 아직도 부족한 것 같아요 언젠가 외국 작가에

게서 들은 말인데mdash한국 사람은 한국을 보지 않았다mdash하는 얘길 해요 사진 작가에게 대한 말이지

만helliphellip 나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이 퍽 중요한 얘기다mdash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를 직시하는 것만이

사진은 아니겠지만 실용사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것이 사실 아닐까요 회화적인 쌀롱 픽처라던

가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리얼리즘 사진이라는 것에 너무들 치우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 국제 교류의 시발은 역시 소개적(紹介的)인 것 다시 말해서 르포르타주적인 것이겠으니까helliphellip

임 외국 작품의 모방 같은 것은 이제 집어치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mdash예술적인 것 이것만을 너무 추

구했기 때문에 사실이 한국적인 것과 국민성의 묘사 같은 것이 잘 되지 않았지요 정서적인 것에만

너무 골몰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일이고 helliphellip 예술을 위한 예술에 정신들이 팔려 있었지나 않은

지helliphellip 예술을 하기 위한 사진이라는 관념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이 예술을 염두에 안 둔다면 실용사진이 돼 버리게

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너무 치우친 것 같단 말입니다

이 특히 국제 교류를 생각한다면 아닌 게 아니라 외국처럼 르포르타주적인 사진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할거에요

임 그래요 거기에 예술성을 띄워서 소화할 만한 역량 있는 작가가 필요해요

이 또 하나의 가장 큰 문제는 위정자의 관심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 큰 난관입니다 국제 교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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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가족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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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말이고 역시 정부당국자의 적극적인 주

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어디 그래요

임 우선 사단 자체의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작가들의 작업도 촉구되어야 하구helliphellip 아까도 말이 나왔지

만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 출품을 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점 같은데서 작가들의 반성도 필

요하고helliphellip

이 개별적으로 미국 등지에 보낸 것은 아마 상당한 수가 되겠지요

임 그럼요 그랬는데 왜 성과가 없느냐mdash하는 반성이 있어야죠

이 오늘의 현실을 예술적인 면에서 기록하고 작품화 해야겠는데helliphellip 막연하게 예술을 위한 작품을 보

내니까 기교적으론 훌륭할지 몰라도 작품 자체에 내용이 없어서helliphellip 그래서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닐

임 그런 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빨리 우리의 수준을 높여서 국제 조류와 호흡을 맞추어 나가

야 할 것입니다

이 이거 아마추어를 위한 얘기라는 것이 잠깐 탈선을 한 것 같군 그러나 이런 문제도 참고가 되긴 하니

까helliphellip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합시다

본지 수고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helliphellip

(기록 O기자)

이해선 「lsquo백오(白烏)rsquo의 변(辯)」 『동아일보』 1957년 4월 9일 4면

30여년 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입학

이 되었을 당시 자축기념하는 의미에서 호(號)를

하나 지어본 것이 백오(白烏)라는 두 글자였다 처

음 듣는 사람들 중에서는 거문[검은] 까마귀는 있

지만 흰 까마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서로 웃어버리고 그 뜻을

설명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자의

(字意)를 해명해볼까 한다 백(白)은 흰 빛이요 오

(烏)는 흑색으로 통하므로 우선 흑백을 대조시켜

놓고 흰 종이 위에다 검은 먹으로 휘호(揮毫)할 것

이니 그 뜻이 내 생활과 부합될 것 같으며 둘째로

백 자(字)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첫 자를 떼어놓

고 오는 반포오(反哺烏)로 그 이름이 높은 새이므

로 평소에 효자 노릇을 못하여 온 나의 좌우명으로도 적당할 듯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새 중에서는

혹간(或間) 백변종(白變種)이 생겨나는 수가 있는데 그 흰새를 서조(瑞鳥)라고 떠들던 옛 시절도 있었으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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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내가 우연히 호를 지어 본 것이 검은 까마귀떼 속에서 서조 백오를 발견하였으니 나의 전도(前途)에는

반드시 서광(瑞光)이 비칠 것 같으므로 이상 여러 가지 의미를 차례로 생각해 볼 때에 나에게는 이 외에 더

좋은 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자의였었고 궁금한채로 불려온 백오

였었다 만담궁변(漫談窮辯)을 물소물책(勿笑勿責) 하소서 (사진가)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

이해선 「중요한 내용middot형식-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년 10월 20일 5면

사진작품에는 사진 특유의 형식이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러한 특유의 형식에 알맞은 표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의 특수성은 형식이 가지는 특수성 보다는

기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주관적이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작품심사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동일하게 중요시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작

품 속에서 그야말로 형식과 내용이 알맞게 부합된 특출한 작

품을 볼 수는 없었다 형식이 좋으면 내용이 빈약하고 좀 내

용이 있으면 형식이 미숙하고helliphellip 모두 결점이 있다 그러나

입상작으로 뽑은 8 점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

다 그리고 금년에는 lsquo칼러rsquo사진의 응모 점수가 30점이나 되

고 그중에서도 3점이 입상되었고 또 9점이 입선되었다는 것

은 lsquo칼러rsquo 사진의 앞날을 위해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lt전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장gt

[제1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년 2월 8일 5면

외국작품의 세련되고 빈틈없는 lsquo테크닉rsquo은 국내작품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서 우선 국내

작품을 형식에서부터 누르고 말았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이루게 된 것은 국내작가들

의 역량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lsquo국산인화지rsquo가 얼마나 엉터리고 조악한 것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대체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더욱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은 이와 반대적인 경향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예술이든 먼저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볼 때 국내작품의 후진성은

두말할 것 없이 형식의 경시에 있다고 하겠다 심사결과 흑백부에서나 lsquo칼라rsquo부에서 겨우 동상으로 한 점

씩 밖에 국내작품이 입상되지 못했다는 것은 다소 섭섭한 느낌이나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경종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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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더욱 우리 심사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독에서 응모한 lsquo칼라rsquo

작품이었다 물체의 외관 색감을 초월한 내면의 lsquo이미지rsquo가 발

산하는 짙은 감정의 색감으로 작가의 개성과 사상을 인상 깊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내 lsquo칼라라보rsquo의 후진

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상작으로 뽑힌 외국작품들은 오

늘의 세계 사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는 큰 자극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

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제2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총 818점 응모-사진예술에 도움」

『동아일보』 1967년 2월 9일 4면

지난해와 같이 흑백부문에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들은 모두가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산인화지의 조악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작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올해는 흑백

부문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기꺼운 일이라고

하겠다

특히 칼라작품에 있어서는 독일의 작품들이 특출했고 이들 작품들의 색감은 현대 과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 최고상으로 뽑힌 lt잊은 친구gt와 몇 점의 입상작품들은 칼라릴리프와 소라리

세이숀[솔라리제이션] 등의 수법으로써 모티

브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를 초객체적이고 추

상적으로 표현하고 작가의 짙은 개성과 사상

과 철학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입상작으로 뽑은 16점의 작품들은 오늘의

세계사단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

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심사위원 이해선 (위원장) 임응식 서순삼

박필호 안월산 정인성 최경덕 (이상 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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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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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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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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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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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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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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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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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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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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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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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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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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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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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6: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주라도 했어야 얘기가 되지

임 그것보다도 사진을 통한 국제 교류 얘기나 합시다

이 그게 좋겠군helliphellip 얼마 전에 덕수궁에서 자유중국의 소개사진전시가 있었죠 미국공보원의 활동도

이를 테면 국제교류의 한 형식일게고helliphellip

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자유중국과 월남의 사진전시가 있었는데helliphellip 우리도 수출을 한다면 그 보

다 훨씬 좋은 작품들이 나갈걸요helliphellip

이 한미합동전이던가 한중합동전 같은 것도 하면 역시 국제교류가 되겠지요helliphellip

임 한미합동전은 불원한 장래에 개최될 것입니다 또 세계적으로 유명한 lsquo인간일가(人間一家)rsquo의 사진

이 아마 이월쯤 한국에 올 겝니다 미국대사관이 주동이 돼서 작품 503점 전부의 전시회 계획이 추

진되고 있으니까요

이 남이 보내줘서 본 것은 있지만 우리가 남에게 보여준 것은 없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야 우리도 남에

게 보여줘야 교류가 될 텐데helliphellip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두 사람의 작품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

임 개인적인 활동은 있었지요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사진살롱에 사진을 보내고 있으니까 개인

적으로는 더러 나간 셈이죠 개인들의 수출이라도 좀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지만

이 우리의 것을 내보내고 외국 것을 들여와서 서로 감상하고 연구하는 게 이를 테면 국제교류인데

아마 명년쯤엔 될까 몰라

임 작품교환전 같은 것을 위해서 대대적인 계몽운동이 필요 하겠죠

이 그렇죠 운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어요

임 그런데 근본적인 얘기를 하자면 한국 작가의 역량이 아직도 부족한 것 같아요 언젠가 외국 작가에

게서 들은 말인데mdash한국 사람은 한국을 보지 않았다mdash하는 얘길 해요 사진 작가에게 대한 말이지

만helliphellip 나는 그 말을 듣고 이것이 퍽 중요한 얘기다mdash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회를 직시하는 것만이

사진은 아니겠지만 실용사진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는 것이 사실 아닐까요 회화적인 쌀롱 픽처라던

가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리얼리즘 사진이라는 것에 너무들 치우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이 국제 교류의 시발은 역시 소개적(紹介的)인 것 다시 말해서 르포르타주적인 것이겠으니까helliphellip

임 외국 작품의 모방 같은 것은 이제 집어치울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mdash예술적인 것 이것만을 너무 추

구했기 때문에 사실이 한국적인 것과 국민성의 묘사 같은 것이 잘 되지 않았지요 정서적인 것에만

너무 골몰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일이고 helliphellip 예술을 위한 예술에 정신들이 팔려 있었지나 않은

지helliphellip 예술을 하기 위한 사진이라는 관념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이 예술을 염두에 안 둔다면 실용사진이 돼 버리게

임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너무 치우친 것 같단 말입니다

이 특히 국제 교류를 생각한다면 아닌 게 아니라 외국처럼 르포르타주적인 사진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할거에요

임 그래요 거기에 예술성을 띄워서 소화할 만한 역량 있는 작가가 필요해요

이 또 하나의 가장 큰 문제는 위정자의 관심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 큰 난관입니다 국제 교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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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가족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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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말이고 역시 정부당국자의 적극적인 주

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어디 그래요

임 우선 사단 자체의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작가들의 작업도 촉구되어야 하구helliphellip 아까도 말이 나왔지

만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 출품을 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점 같은데서 작가들의 반성도 필

요하고helliphellip

이 개별적으로 미국 등지에 보낸 것은 아마 상당한 수가 되겠지요

임 그럼요 그랬는데 왜 성과가 없느냐mdash하는 반성이 있어야죠

이 오늘의 현실을 예술적인 면에서 기록하고 작품화 해야겠는데helliphellip 막연하게 예술을 위한 작품을 보

내니까 기교적으론 훌륭할지 몰라도 작품 자체에 내용이 없어서helliphellip 그래서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닐

임 그런 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빨리 우리의 수준을 높여서 국제 조류와 호흡을 맞추어 나가

야 할 것입니다

이 이거 아마추어를 위한 얘기라는 것이 잠깐 탈선을 한 것 같군 그러나 이런 문제도 참고가 되긴 하니

까helliphellip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합시다

본지 수고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helliphellip

(기록 O기자)

이해선 「lsquo백오(白烏)rsquo의 변(辯)」 『동아일보』 1957년 4월 9일 4면

30여년 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입학

이 되었을 당시 자축기념하는 의미에서 호(號)를

하나 지어본 것이 백오(白烏)라는 두 글자였다 처

음 듣는 사람들 중에서는 거문[검은] 까마귀는 있

지만 흰 까마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서로 웃어버리고 그 뜻을

설명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자의

(字意)를 해명해볼까 한다 백(白)은 흰 빛이요 오

(烏)는 흑색으로 통하므로 우선 흑백을 대조시켜

놓고 흰 종이 위에다 검은 먹으로 휘호(揮毫)할 것

이니 그 뜻이 내 생활과 부합될 것 같으며 둘째로

백 자(字)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첫 자를 떼어놓

고 오는 반포오(反哺烏)로 그 이름이 높은 새이므

로 평소에 효자 노릇을 못하여 온 나의 좌우명으로도 적당할 듯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새 중에서는

혹간(或間) 백변종(白變種)이 생겨나는 수가 있는데 그 흰새를 서조(瑞鳥)라고 떠들던 옛 시절도 있었으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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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내가 우연히 호를 지어 본 것이 검은 까마귀떼 속에서 서조 백오를 발견하였으니 나의 전도(前途)에는

반드시 서광(瑞光)이 비칠 것 같으므로 이상 여러 가지 의미를 차례로 생각해 볼 때에 나에게는 이 외에 더

좋은 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자의였었고 궁금한채로 불려온 백오

였었다 만담궁변(漫談窮辯)을 물소물책(勿笑勿責) 하소서 (사진가)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

이해선 「중요한 내용middot형식-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년 10월 20일 5면

사진작품에는 사진 특유의 형식이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러한 특유의 형식에 알맞은 표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의 특수성은 형식이 가지는 특수성 보다는

기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주관적이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작품심사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동일하게 중요시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작

품 속에서 그야말로 형식과 내용이 알맞게 부합된 특출한 작

품을 볼 수는 없었다 형식이 좋으면 내용이 빈약하고 좀 내

용이 있으면 형식이 미숙하고helliphellip 모두 결점이 있다 그러나

입상작으로 뽑은 8 점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

다 그리고 금년에는 lsquo칼러rsquo사진의 응모 점수가 30점이나 되

고 그중에서도 3점이 입상되었고 또 9점이 입선되었다는 것

은 lsquo칼러rsquo 사진의 앞날을 위해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lt전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장gt

[제1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년 2월 8일 5면

외국작품의 세련되고 빈틈없는 lsquo테크닉rsquo은 국내작품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서 우선 국내

작품을 형식에서부터 누르고 말았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이루게 된 것은 국내작가들

의 역량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lsquo국산인화지rsquo가 얼마나 엉터리고 조악한 것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대체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더욱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은 이와 반대적인 경향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예술이든 먼저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볼 때 국내작품의 후진성은

두말할 것 없이 형식의 경시에 있다고 하겠다 심사결과 흑백부에서나 lsquo칼라rsquo부에서 겨우 동상으로 한 점

씩 밖에 국내작품이 입상되지 못했다는 것은 다소 섭섭한 느낌이나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경종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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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더욱 우리 심사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독에서 응모한 lsquo칼라rsquo

작품이었다 물체의 외관 색감을 초월한 내면의 lsquo이미지rsquo가 발

산하는 짙은 감정의 색감으로 작가의 개성과 사상을 인상 깊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내 lsquo칼라라보rsquo의 후진

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상작으로 뽑힌 외국작품들은 오

늘의 세계 사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는 큰 자극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

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제2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총 818점 응모-사진예술에 도움」

『동아일보』 1967년 2월 9일 4면

지난해와 같이 흑백부문에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들은 모두가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산인화지의 조악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작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올해는 흑백

부문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기꺼운 일이라고

하겠다

특히 칼라작품에 있어서는 독일의 작품들이 특출했고 이들 작품들의 색감은 현대 과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 최고상으로 뽑힌 lt잊은 친구gt와 몇 점의 입상작품들은 칼라릴리프와 소라리

세이숀[솔라리제이션] 등의 수법으로써 모티

브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를 초객체적이고 추

상적으로 표현하고 작가의 짙은 개성과 사상

과 철학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입상작으로 뽑은 16점의 작품들은 오늘의

세계사단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

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심사위원 이해선 (위원장) 임응식 서순삼

박필호 안월산 정인성 최경덕 (이상 7명)

관련 자료 소개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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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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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관련 자료 소개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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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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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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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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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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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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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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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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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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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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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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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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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7: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힘으로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말이고 역시 정부당국자의 적극적인 주

동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어디 그래요

임 우선 사단 자체의 계몽운동이 필요해요 작가들의 작업도 촉구되어야 하구helliphellip 아까도 말이 나왔지

만 1953년 이후에 계속해서 국제 출품을 했는데도 성과가 없다는 점 같은데서 작가들의 반성도 필

요하고helliphellip

이 개별적으로 미국 등지에 보낸 것은 아마 상당한 수가 되겠지요

임 그럼요 그랬는데 왜 성과가 없느냐mdash하는 반성이 있어야죠

이 오늘의 현실을 예술적인 면에서 기록하고 작품화 해야겠는데helliphellip 막연하게 예술을 위한 작품을 보

내니까 기교적으론 훌륭할지 몰라도 작품 자체에 내용이 없어서helliphellip 그래서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닐

임 그런 점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빨리 우리의 수준을 높여서 국제 조류와 호흡을 맞추어 나가

야 할 것입니다

이 이거 아마추어를 위한 얘기라는 것이 잠깐 탈선을 한 것 같군 그러나 이런 문제도 참고가 되긴 하니

까helliphellip 자 그럼 오늘은 이만 합시다

본지 수고 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helliphellip

(기록 O기자)

이해선 「lsquo백오(白烏)rsquo의 변(辯)」 『동아일보』 1957년 4월 9일 4면

30여년 전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 입학

이 되었을 당시 자축기념하는 의미에서 호(號)를

하나 지어본 것이 백오(白烏)라는 두 글자였다 처

음 듣는 사람들 중에서는 거문[검은] 까마귀는 있

지만 흰 까마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가

많았으나 그럴 때마다 서로 웃어버리고 그 뜻을

설명한 적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 기회에 자의

(字意)를 해명해볼까 한다 백(白)은 흰 빛이요 오

(烏)는 흑색으로 통하므로 우선 흑백을 대조시켜

놓고 흰 종이 위에다 검은 먹으로 휘호(揮毫)할 것

이니 그 뜻이 내 생활과 부합될 것 같으며 둘째로

백 자(字)는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첫 자를 떼어놓

고 오는 반포오(反哺烏)로 그 이름이 높은 새이므

로 평소에 효자 노릇을 못하여 온 나의 좌우명으로도 적당할 듯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모든 새 중에서는

혹간(或間) 백변종(白變種)이 생겨나는 수가 있는데 그 흰새를 서조(瑞鳥)라고 떠들던 옛 시절도 있었으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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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내가 우연히 호를 지어 본 것이 검은 까마귀떼 속에서 서조 백오를 발견하였으니 나의 전도(前途)에는

반드시 서광(瑞光)이 비칠 것 같으므로 이상 여러 가지 의미를 차례로 생각해 볼 때에 나에게는 이 외에 더

좋은 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자의였었고 궁금한채로 불려온 백오

였었다 만담궁변(漫談窮辯)을 물소물책(勿笑勿責) 하소서 (사진가)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

이해선 「중요한 내용middot형식-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년 10월 20일 5면

사진작품에는 사진 특유의 형식이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러한 특유의 형식에 알맞은 표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의 특수성은 형식이 가지는 특수성 보다는

기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주관적이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작품심사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동일하게 중요시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작

품 속에서 그야말로 형식과 내용이 알맞게 부합된 특출한 작

품을 볼 수는 없었다 형식이 좋으면 내용이 빈약하고 좀 내

용이 있으면 형식이 미숙하고helliphellip 모두 결점이 있다 그러나

입상작으로 뽑은 8 점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

다 그리고 금년에는 lsquo칼러rsquo사진의 응모 점수가 30점이나 되

고 그중에서도 3점이 입상되었고 또 9점이 입선되었다는 것

은 lsquo칼러rsquo 사진의 앞날을 위해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lt전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장gt

[제1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년 2월 8일 5면

외국작품의 세련되고 빈틈없는 lsquo테크닉rsquo은 국내작품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서 우선 국내

작품을 형식에서부터 누르고 말았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이루게 된 것은 국내작가들

의 역량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lsquo국산인화지rsquo가 얼마나 엉터리고 조악한 것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대체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더욱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은 이와 반대적인 경향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예술이든 먼저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볼 때 국내작품의 후진성은

두말할 것 없이 형식의 경시에 있다고 하겠다 심사결과 흑백부에서나 lsquo칼라rsquo부에서 겨우 동상으로 한 점

씩 밖에 국내작품이 입상되지 못했다는 것은 다소 섭섭한 느낌이나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경종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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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더욱 우리 심사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독에서 응모한 lsquo칼라rsquo

작품이었다 물체의 외관 색감을 초월한 내면의 lsquo이미지rsquo가 발

산하는 짙은 감정의 색감으로 작가의 개성과 사상을 인상 깊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내 lsquo칼라라보rsquo의 후진

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상작으로 뽑힌 외국작품들은 오

늘의 세계 사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는 큰 자극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

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제2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총 818점 응모-사진예술에 도움」

『동아일보』 1967년 2월 9일 4면

지난해와 같이 흑백부문에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들은 모두가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산인화지의 조악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작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올해는 흑백

부문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기꺼운 일이라고

하겠다

특히 칼라작품에 있어서는 독일의 작품들이 특출했고 이들 작품들의 색감은 현대 과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 최고상으로 뽑힌 lt잊은 친구gt와 몇 점의 입상작품들은 칼라릴리프와 소라리

세이숀[솔라리제이션] 등의 수법으로써 모티

브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를 초객체적이고 추

상적으로 표현하고 작가의 짙은 개성과 사상

과 철학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입상작으로 뽑은 16점의 작품들은 오늘의

세계사단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

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심사위원 이해선 (위원장) 임응식 서순삼

박필호 안월산 정인성 최경덕 (이상 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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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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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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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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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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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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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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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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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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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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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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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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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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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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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8: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로 내가 우연히 호를 지어 본 것이 검은 까마귀떼 속에서 서조 백오를 발견하였으니 나의 전도(前途)에는

반드시 서광(瑞光)이 비칠 것 같으므로 이상 여러 가지 의미를 차례로 생각해 볼 때에 나에게는 이 외에 더

좋은 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자의였었고 궁금한채로 불려온 백오

였었다 만담궁변(漫談窮辯)을 물소물책(勿笑勿責) 하소서 (사진가)

[제2회 동아사진콘테스트 심사평]

이해선 「중요한 내용middot형식-칼라 부분에 큰 수확」 『동아일보』 1964년 10월 20일 5면

사진작품에는 사진 특유의 형식이 있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언제나 이러한 특유의 형식에 알맞은 표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러한 내용의 특수성은 형식이 가지는 특수성 보다는

기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분히 주관적이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서 나는 작품심사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을 동일하게 중요시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작

품 속에서 그야말로 형식과 내용이 알맞게 부합된 특출한 작

품을 볼 수는 없었다 형식이 좋으면 내용이 빈약하고 좀 내

용이 있으면 형식이 미숙하고helliphellip 모두 결점이 있다 그러나

입상작으로 뽑은 8 점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편이었

다 그리고 금년에는 lsquo칼러rsquo사진의 응모 점수가 30점이나 되

고 그중에서도 3점이 입상되었고 또 9점이 입선되었다는 것

은 lsquo칼러rsquo 사진의 앞날을 위해서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lt전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장gt

[제1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형식middot내용에 모두 뒤진 국내수준」 『동아일보』 1966년 2월 8일 5면

외국작품의 세련되고 빈틈없는 lsquo테크닉rsquo은 국내작품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의 것으로서 우선 국내

작품을 형식에서부터 누르고 말았다 형식적인 면에서 이러한 엄청난 차이를 이루게 된 것은 국내작가들

의 역량을 따지기 이전에 먼저 lsquo국산인화지rsquo가 얼마나 엉터리고 조악한 것인가를 증명해주고 있다

대체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더욱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은 이와 반대적인 경향이다

솔직히 말해서 어떤 예술이든 먼저 형식을 갖추지 못하면 예술이 될 수 없다고 볼 때 국내작품의 후진성은

두말할 것 없이 형식의 경시에 있다고 하겠다 심사결과 흑백부에서나 lsquo칼라rsquo부에서 겨우 동상으로 한 점

씩 밖에 국내작품이 입상되지 못했다는 것은 다소 섭섭한 느낌이나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경종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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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더욱 우리 심사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독에서 응모한 lsquo칼라rsquo

작품이었다 물체의 외관 색감을 초월한 내면의 lsquo이미지rsquo가 발

산하는 짙은 감정의 색감으로 작가의 개성과 사상을 인상 깊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내 lsquo칼라라보rsquo의 후진

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상작으로 뽑힌 외국작품들은 오

늘의 세계 사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는 큰 자극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

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제2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총 818점 응모-사진예술에 도움」

『동아일보』 1967년 2월 9일 4면

지난해와 같이 흑백부문에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들은 모두가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산인화지의 조악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작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올해는 흑백

부문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기꺼운 일이라고

하겠다

특히 칼라작품에 있어서는 독일의 작품들이 특출했고 이들 작품들의 색감은 현대 과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 최고상으로 뽑힌 lt잊은 친구gt와 몇 점의 입상작품들은 칼라릴리프와 소라리

세이숀[솔라리제이션] 등의 수법으로써 모티

브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를 초객체적이고 추

상적으로 표현하고 작가의 짙은 개성과 사상

과 철학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입상작으로 뽑은 16점의 작품들은 오늘의

세계사단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

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심사위원 이해선 (위원장) 임응식 서순삼

박필호 안월산 정인성 최경덕 (이상 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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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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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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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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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관련 자료 소개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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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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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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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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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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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관련 자료 소개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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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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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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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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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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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9: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다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더욱 우리 심사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서독에서 응모한 lsquo칼라rsquo

작품이었다 물체의 외관 색감을 초월한 내면의 lsquo이미지rsquo가 발

산하는 짙은 감정의 색감으로 작가의 개성과 사상을 인상 깊게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내 lsquo칼라라보rsquo의 후진

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상작으로 뽑힌 외국작품들은 오

늘의 세계 사단을 가름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

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는 큰 자극이 되고 유익한 것이 되

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제2회 국제사진살롱 심사평]

이해선 「총 818점 응모-사진예술에 도움」

『동아일보』 1967년 2월 9일 4면

지난해와 같이 흑백부문에서 외국작품들이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작품들은 모두가 내용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국산인화지의 조악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국내작가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올해는 흑백

부문에서 최고상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음은 기꺼운 일이라고

하겠다

특히 칼라작품에 있어서는 독일의 작품들이 특출했고 이들 작품들의 색감은 현대 과학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 더욱 최고상으로 뽑힌 lt잊은 친구gt와 몇 점의 입상작품들은 칼라릴리프와 소라리

세이숀[솔라리제이션] 등의 수법으로써 모티

브가 지닌 내면의 이미지를 초객체적이고 추

상적으로 표현하고 작가의 짙은 개성과 사상

과 철학을 뚜렷이 제시하고 있다

입상작으로 뽑은 16점의 작품들은 오늘의

세계사단을 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나라의 사진예술을 위해서

는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lt심사위원장gt

심사위원 이해선 (위원장) 임응식 서순삼

박필호 안월산 정인성 최경덕 (이상 7명)

관련 자료 소개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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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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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관련 자료 소개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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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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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관련 자료 소개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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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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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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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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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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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관련 자료 소개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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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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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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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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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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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30: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제24회 춘계 ≪국전≫ 제4부 사진분과 심사평]

이해선 「소재 선택에 새로운 안목」 『동아일보』 1975년 4월 23일 6면

이해선 (제4부 심사위원장)

과거와 다른 특별한 심사방침은 없었으며 질적으로 해마다 나아가는 경

향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데도 새로운 점이 크게

눈에 띄고 처리 방법도 많이 정리된 것 같다

「내가 걸어온 사진의 길 60년-이해선 원로와의 대화」 『영상』 1982년 6월 pp 34~35

약력 국전운영위원 역임 국전초대작가 역임 국전심사위원 역임 사단법인 한국사진작가협회 고문 대한사진예술가

협회 명예회장

사회자 이해선

선생님 그 동안 자주 찾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나이는 많지만 바쁘고 건강하게 보내는 편입니다 외출도 자주 하고 또 제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얘

기도 나누고 하면서 건강하게 지냅니다

선생님께서는 사진계의 원로시고 또 사진계를 이끌어 오신 분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 사진을

시작하시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동기라기보다 원래는 내가 미술을 했어요 일본에서 지금의 도쿄예술대학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

고 귀국해서 얼마 동안 작품생활을 했죠 그러다가 중간에 사진하고 서양화를 같이 하다가 1930년경

에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시던 분은 누구십니까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나처럼 사진을 좀 연구하고 그 쪽에 관심을 가졌던 분이 지금 고

인이 된 정해창 씨 정도였고 그 후에 내가 가르쳐서 같이 하던 사람이 몇몇 있었고 그때만해도 사진

계는 거의 황무지 상태라 지금처럼 단체나 클럽활동이 거의 없었죠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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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관련 자료 소개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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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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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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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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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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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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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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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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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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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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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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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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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31: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자기 손으로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는 작품을 내보일만한 무대도 없었겠습니다

처음에는 없었다가 왜정(1935~6) 때 경성아마추어카메라구락부라는 사진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처

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이론도 가르치고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그 달에 찍은 사진 비평

회도 갖고 그랬어요

그때 같이 하시던 분들은 누구신지요

많이 작고했지만 지금 보도사진의 대선배인 김정래 씨가 그때 같이 활동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사진

으로 경제를 해결할 정도로 직업화되지는 못해서 자기 직업에 종사하다가 바빠지면 사진에서 탈락

하기가 쉬워요 그리고 사진을 단계적으로 순서 있게 공부하는 곳이 클럽인데 이걸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탈락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왜정 때라 사진단체에 대한 간섭도 심했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지금 젊은이들은 아주 행복한 환경에서 사진활동을 하는 겁니다 왜정 때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 후

에는 감시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한번 모임을 가지려면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아야 하고 형사가 따라

붙어 일일이 간섭을 해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해방되면 다시 모이자고 일단 해체했지요 그

러다 해방이 되어 사진하는 사람들의 권고로 한국사협의 전신인 대한사진예술가협회를 만들어 쭉

활동을 했습니다

그럼 그 후 한국사협이 발족한 동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대한사진예술가협회는 군정의 포고령으로 없앤 것이지 자의로 없앤 것은 아닙니다 대한사진예술가

협회는 전혀 정치성이 없어요 군정이 민정으로 바뀐 후 처음 7~8 명의 간부가 모여 다시 발족을 하

고 그런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다시 모여 100 여명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 문화공보부가 사진

단체를 통합해 예총 산하 한국사진가협회로 발족시키라는 통지를 받고 사단의 사진단체가 정리되어

한국사협이 발족이 된 것이죠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여러 가지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을 하신 거라고 생각되는군요 선생님께

서 아끼시는 제자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로서는 아끼는 제자라면 중간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다른 예술 분야는 일찍부터 전문교육이 시작되는데 비해 사진은 그렇지 못한 것

도 사진계의 문제점인 것 같은데요

사진의 역사가 짧은데다 우리나라는 또 대학과정에 사진과가 생긴지도 얼마 안 되고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사진기초를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교들이 많아지고 또 좋은 교수들이 많이 배출되

어야 합니다

반드시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진예술의 시초가 그쪽이니만큼 공부

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죠

우리같이 그저 자기체험으로 제자를 육성하는 것보다는 더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또 실기도 많이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가르치면 앞으론 전망이 더 밝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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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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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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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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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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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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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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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관련 자료 소개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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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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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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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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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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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32: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사진은 또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으셨겠어요

경제적인 여유라도 넉넉했으면 모르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해서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예전에는 그

렇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근래에는 정말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데 돈 드는데 비해서 또 좋은 작품은

적게 나오는 것 같아요 요새 젊은 사람들은 사진조류에만 너무 민감해서 정말 두 번 세 번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작품을 배출하는 사람이 적어요 사진클럽은 많은데 그 클럽을 지도해주는 좋은 선생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고 기초 공부가 없이 그저 새것만 원하는 풍토도 사진계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역사성이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진도 그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

고 그 시대에 계속된 사진조류나 흐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그런 조류 편승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것도 문제죠 무조건 새 조류만 탄다고 해서 새로운 작

가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늘날 사단이 있게 되기까지의 밑바탕 역할을 하신 여러 원로들에 대한 평가를 젊은 분들이

너무 경박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사람이라고 아주 무시하고 옛날 작가의 사진작품을 유물로 생각해선 안되겠죠 요즘 새로 사진

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먼저 기초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일단 시작을 하면 꾸준히

지속을 했으면 하는 겁니다

저희 세대의 문제점은 일단 매스콤[매스컴]에 이름만 알려지면 대외적인 홍보에만 신경을 쓰지 예술

작품 쪽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전시회나 무슨 콘테스트에서 특상을 했다든지 하면 자칭 작가가 되는 사람이 100이면 90명이에요

작가란 것은 남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실력을 비판도 하면서 인정을 해줄 때에 비로소 작가란 호칭

을 붙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선생님께서 그런 겸손의 말씀을 하시는데 저희 젊은 세대들은 자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진협회라는 명칭을 젊은 사람들이 우겨서 사진작가협회라고 고쳐버리고 나니까 거기에 소속

된 사람은 전부 작가라는 착각을 하고 또 그 협회만 들어가면 작가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진계의 팽창은 양보다 질적인 것이 우선 되어야 할 텐데요

예를 들면 전시회도 너무 연중행사처럼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로 다투어 각 대학이 전시회를

열고 있는 곳을 가보면 아직 초보단계에도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사진의 우연성 즉 이것저것 찍

다 보니까 어쩌다가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것들이 많아요 이제 갓 사진을 시작한 대학생들이 기성

작가들이 하는 형식으로 전시회를 너무 쉽게 열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진을 하는 사람부터 사진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죠

카메라는 누구나 들고 다니면서 아무나 찍을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죠

사진작가는 어떤 소재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소화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셧터 누르기

전에 여러 분야를 생각해야 하고 내적인 사상의 침투도 고려해서 작품화 해야 하는 겁니다 사진을

가볍게 생각지 말고 진지한 태도로 지속성 있게 단계적으로 연구해야 되는데 자꾸 새것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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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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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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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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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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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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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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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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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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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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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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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33: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문방청완(文房淸玩) 옛 선비가 문방즉 서재에서 향을 피우고 밝은 창 맑은책상 아래 옛 글씨와 그림 잘 만들어진좋은 문방구를 즐겨 본다는 의미

산재(山齋) 산속에 지은 서재(書齋)나운치 있게 지은 집

을 보면 사실 작품은 별로 새것이 없어요

요즘 한창 싸롱사진이니 리얼리즘 사진이니 하고 말하는데 사실 그 한계성이 모호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한계성을 긋지 말고 쭉 해나가다 보면 저절로 자기 방향이 잡혀지는 것입니다 지금

사단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도 요즘 젊은 사람 덕분이고 또 앞으로 맡아야 할 사람들인데 좀 더 확고

하고 올바른 사진사상과 사진인의 길을 걸어가야 떠나는 우리도 홀가분해질 수 있죠

선생님께서 처음 사진을 하실 때 보다는 지금이 훨씬 여건이 좋아졌죠 처음엔 어떤 사진을 주로 하

셨어요

처음엔 회화 종속적인 사진을 했다고 할 수 있죠 회화를 하다가 사진으로 전향하니까 좀 더 유리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칼라사진을 안 합니다 왜냐면 사진은 회화만큼 자유자재로 칼라

를 나타낼 수 없는데 비해 흑백사진은 흑과 백 속에서 자기의 색감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어서 나

는 흑백사진만 합니다

앞으로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요

계획이라기보다는 지난 내 생활의 마무리를 위해서 차차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70살 되던 해에 신

문회관에서 회고전을 한 번 했고 작년에 그 동안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하나 남겼어요 그런 것

이 정리 작업이 되는 거죠

후학들을 위해서라도 선생님께서 계속 건재하셔야죠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해선 「돌과의 대화(對話) 30년(年)」 『월간중앙』 1969년 12월 pp 148~156

돌과 마주 앉으면 누구도 듣지 못하는 엄숙(嚴肅)하고 청정(淸淨)한 대화(對話)를 나누게 된다 이 순간이

야말로 우수사려(憂愁思慮)가 없다

이해선 lt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gt

인자(仁者)의 낙석(樂石)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창포수석전(菖蒲壽石展)≫이라는 전람회가 있었다 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

전(石展)에 대하여 도하(都下) 각 신문에서는 대개 이를 보도한 탓도 있어 그 뒤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차츰

애석(愛石)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때 필자가 속해있는 lsquo석우회(石友會)rsquo는 전시회를 열기에 앞서 다음과 갈은[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ldquo동양인의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문방청완(文房淸玩)과 산재생활(山齋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크다helliphellip 창포수석(菖蒲壽石)이라고 해서 한낱 수구적(守舊的)인 문인취미(文人趣味)로 돌릴 때는

이미 지났으며 오히려 서구나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날로 동양수석이 지니는 괴체미(塊體美) 즉 세계현대

미술 위에 등장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 미술의 경지를 딛고 넘어서는 근대적 아름다움이 재발견되고 있다

관련 자료 소개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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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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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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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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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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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관련 자료 소개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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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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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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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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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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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34: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는 데에 우리는 주의를 돌리고 싶다rdquo

우리는 취미와 오락을 떠난 생활을 생각할 수 없다 고상한 취미는 교양의 바탕이요 건전한 오락은

생활의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문학작품이나 예술을 감상하고 자연의 상태를 관찰하고 혹은 지기자(知己者) 끼리 여행을 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생활을 윤택하고 또 풍부하게 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묻혀

시간과 정력과 재력을 소모하는 각종의 취미와 오락은 결코 무위(無爲)한 소일거리나 도락은 아니다

이는 숨가쁘고 복잡한 현대생활에 있어서 심신의 피로를 풀게 할 뿐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생활

을 명랑하고 충실하게 해주는 존귀(尊貴)한 길잡이도 되는 것이다

취미나 오락은 일신상(一身上)에만 그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유기적(有機的)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사교상(社交上)으로도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것이며 절대적인 생활수단의 하나이

기도 하다 공통된 취미는 대인관계를 더욱 친밀히 맺게 해줄 수도 있으며 이러한 것들은 거개가 동행자

또는 상대자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이들과 교제하는 기회를 자연히 갖게 되는 것이다

각종 취미나 오락을 진정으로 터득하자면 역시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경우가 많

다 현재 나의 공식상의 직명(職名)이 사진작가로 되어 있고 동경미술학교 서양화부에서 수학하였으므로

얼핏 보기엔 그런 면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있을 듯 한데 그 동안 돌을 좋아해서 거기에 심취(心醉)한 것이

나의 전공(專攻)과 비슷한 기간이 된다

내가 돌을 좋아하고 수집해서 감상하기 시작한 것은 약 삼사십년 전부터이다 원래 미술에 뜻을 두어서

화단에 원로라 할 수 있는 도상봉(都相鳳) 이마동(李馬銅) 김인승(金仁承) 씨 등은 나와 동기 혹은 동문들

이며 춘곡(春谷) 선생과의 사이는 내가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 한국에서 가르쳐 주시던 은사이시다 서양

화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한국고미술(韓國古美術)을 연구하다가 그 후 사

진작가로 전향을 하였다

따라서 나의 취미는 자연히 서화(書畵) 골동(骨董) 분재(盆栽)로 흐르게 되었다 내가 돌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돌을 사랑하고 감상하기를 원하는 애석과 감상의 단계는 최소한 분재 서화 골동

품을 사랑하는 단계를 거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애석취미는 대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그 대자연을 그대로 축소하여 갖다 놓고 즐기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우리네 도시생활이 각박하고

윤기 없는 생활인 까닭에 자연에 접하는 기회는 당연히 적어지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고자 하는 마음

은 간절할 때 이 대자연의 축소도를 집안에다 놓고 감상하는 것이다

사향(麝香) 속의 애석

대자연에 접하고 대자연을 사랑하고 그것을 돌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할 때 애석은 최종의

최고급의 절정을 이루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 가운데는 현란한 무늬의 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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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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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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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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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관련 자료 소개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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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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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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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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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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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35: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학자를 가리킴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일컬음

석판(石板)과 동의어

입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동조( )도 있고 애견을 데리고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의 수

렵(狩獵)도 있겠는데 하필이면 돌을 놓고 그렇게 즐거워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기에 애석취미는 구미인(歐美人)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순수히 동양적이며 정적(靜的)인

것이다 그 즐기는 계층의 차원도 옛날부터 고승(高僧) 문인(文人) 묵객(墨客)의 취미였다고 하니 때로 돌

이란 참선의 대상 같이도 여겨졌던 것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오우(五友) 속에(『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되어 있는 고산

의 「오우가(五友歌)」는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의 다섯 가지 자연물을 다섯 장(章)으로 읊어 노

래했음) 돌을 넣었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지만 중국 북송(北宋)의 서화가로 필법(筆法)이 침착 통쾌하

고 준마(駿馬)를 탄 듯 하다고 하는 미불( 자(字) 원장(元章) 호(號) 해악(海岳))은 애석을 넘어 숭배의

염(念)까지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좋은 석벽(石壁)이라도 만나면 곧 말에서 내

려 읍(揖)을 하고는 한참 동안 가부좌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일대(一代)의 석유(碩

儒) 정다산(丁茶山)이 유명하다 그래서 그 분의 저서(著書)를 들쳐 보면 곳곳에 명석의 산지(産地)와

채석법(採石法)을 알려주는 글이 들어있다

감상석(鑑賞石)의 기원은 수반(水盤)에 혹은 대(臺)에다 놓고 아니면 정원을 꾸미고 즐기든가 하는데 있

어서 오늘날 정설(定說)은 없으나 중국에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대(宋代) 부터 시작하여 명

(明) 청(淸)으로 내려왔는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삼국(東洋三國)의 공

통되는 취미가 되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침체상태(沈滯狀態)이었던 반면에 일본에서는 조직적으로

발달이 되어 전성시대(全盛時代)를 이루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당대(唐代)의 시인 백락천(白樂天 772~846)은 태호석(太湖石)을 마당에 두고 감

상했다는데 이 태호석이란 중국 강소(江蘇)middot석강량성(淅江兩省) 건너에 있는 태호(太湖)라는 호수에서 나

온 돌인데 석회암으로 호수에 묻힌 돌의 표면이 침식 용해되어 凸凹과 공동(空洞)이 생겨 이것들은 마치

계곡 산봉오리 동혈(洞穴)로 보이며 색은 백색 회색 청흑(靑黑)이라고 한다 지금도 골동품상에는 자단

(紫檀)으로 만든 대 위에 뻗치고 서있는 오묘한 형상을 가끔 볼 수 있다

백거이(白居易)는 이 태호석으로 향로처럼 만들고 사향을 피우고 아희들을 시켜 파초(芭蕉)부채로 부치

게 하면 흔들흔들 피어오르는 향기가 태호석을 싸고 돌아 마치 솟아있는 암산(岩山)의 허리에 안개가 띠를

두른 듯 할 때 자신은 저 안채에 앉아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맛보았다고 하니 그 즐기는 품위며 취향이

과연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오래된 태호석에는 향기가 그대로 젖어있다고 한다 수

석으로는 태호석이 제일 오랜 것이고 다음으로 영벽석(靈壁石)이 있는데 조그마한 lsquo체크rsquo 무늬가 있어 옛

날 학교에서 쓰던 석반(石盤)을 여러 개 포개놓은 것 같다

특유한 감상법

돌이라는 것이 ldquo돌은 돌이다rdquo 이렇게 생각하면 길바닥에 흩어진 돌도 돌이고 도처에 있는 것이 돌인데

우리는 막된 돌을 줏어다가[주워다가] 감상하는게 아니고 돌은 돌에 대한 규약(規約)과 방법이 따로 있어

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애호하는 것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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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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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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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관련 자료 소개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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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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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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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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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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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36: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일본에 유명한 애석가로 이토 지(伊東俊治)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날 한 80 노

인이 20여개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왔다 인사가 끝나고 용건을 물으니 그 노인은 보따리를 끌러놓고 그

속에서 무수한 돌덩이를 쏟아놓으며 ldquo내가 40년 동안 모은 돌인데 감정을 하여달라rdquo는 것이었다 그 노인

의 태도는 입시(入試)에서 면접을 보는 학생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각했다 돌을 훑어 본 이토 지는 기가

막혔다 40년 동안 모았다는 돌 중에는 단 1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늬[여느] 돌과 다름없는 그저 돌이

었다 노인의 태도로 보아 실망을 주기가 안된 그는 자기가 소장한 것들을 꺼내 일일이 설명을 해주며 위

로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노인은 돌을 수집하는 요령 감상석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

어디까지나 그 나라 특유의 감상방법이 있는 법이다 한 나라의 생활양식(生活樣式)이 각기 다르고 그 나

라의 정원 건물 사고방식이 다른 까닭에 lsquo돌을 사랑한다rsquo는 대원칙에는 공통이지만 그 방향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그 노인의 산더미 같은 돌 중에 단 하나가 쓸모 있었다고 했다 그 한 개는 다음과 같다

부피가 약 4 5센티미터의 각을 이룬 정방형(正方形)으로 테이블 위에 앉음새가 좋고 석회질의 검은 빛

깔 속에 그 배면(背面)에는 흰색이 떠올라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고매화(古梅花) 모양이 있는 문석(紋石)

이었다 여기서 이 노인은 40년 동안 감식안(鑑識眼)이 없이 그저 돌을 모았을 뿐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

돌을 대별할 때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3종류로 나누면 큰 잘못은 없다

3종류란 정원석(庭園石) 수반석(水盤石 일본에서는 수석(水石)이라고 함) 그리고 수석(壽石)을 말하는

데 수반(水盤)이라는 것은 돌을 놓는 쇠 사기 등을 말하고 여기에 돌을 놓고 보는 것을 수반석이라고 한다

수석(壽石)은 돌을 목대(木臺)에 적당한 위치로 놓고 보는 것 쉽게 말해서 대(臺)에 꽂아 놓고 보는 것인

데 대라면 석탑(石塔)의 기단(基壇)과 비슷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돌에 따라 목

질(木質)을 고르고 색을 따르고 또 돌에 맞추어 조화되도록 조각을 하되 그 형태와 방식을 정해야 하는

까다로운 과정이 있다

취미는 정석법(定石法)부터

정원석은 2가지가 있다 수백년 묵은 이끼 낀 돌을 떠다가 정원의 한구석 한구석에 알맞게 조립하여 석

산(石山)을 꾸미듯 하는 정원석과 돌로 돌절구처럼 lsquo돌확rsquo을 만들고 돌로 대를 만드는 정원석 그래서

대와 돌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돌도 살고 정원도 살 수 있나 하는 배치(配置)의 문제가 바로 취미에 통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원은 가옥과 더불어 가족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신선한 공기의 호흡 일광 산책 등

의 가장 원시적인 욕망만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다만 하나의 공지(空地)가 마련됨으로써 만족하겠지만 보

다 더 미적가치(美的價値)와 안정된 생활의 장소로 하기 위해 우리는 정원수(庭園樹)라는 것을 심고 있다

이 정원수의 종류 또한 다양하여 향나무나 고산편백과 같은 침엽수 상록활엽수 녹음수 등이 있어서 여기

에 따르는 방법이 있다

정원석청부(庭園石請負)

근래에 와서 돈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원석이 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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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가 있는 돌

돌로 만든 조그만 절구 혹은 돌을 우묵하게 파서 절구 모양으로 만든 물건을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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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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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178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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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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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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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37: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길을 가다가 보면 보잘것없는 꽃집에도 의례히 간판에는 lsquo정원석 청부rsquo라는 선전이 들어있다 변두리

신흥주택가에 가보면 더욱 심하다 진정한 의미의 정원미화(庭園美化)를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집 정원을

꾸미는 주인 자신이 lsquo데자인[디자인]rsquo을 할 줄 알고 둘째로는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정원을 조성하는 기술자 자신이 또한 돌에 대한 상식이 풍부해서 주인과 뜻이 합치되었을 때 비로

소 좋은 정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실정이 일인(日人)들이 만들어서 놓은 것을 보고 그 눈썰

미로 여기저기 갖다 놓고 심지어는 비싼 돌을 사다가 고석축대(古石築臺) 같은 것을 쌓는 것을 보면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서양에는 소위 lsquo록크 가든(RockGarden)rsquo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연의 한 귀퉁이를 떠다가 그대로

자기 집 정원에 만드는 것으로 폭포 개울 석벽 등이 포함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대로의 가정건물에

조화가 되는 lsquo코리안 록크 가든rsquo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벼락부자의 이야기다 사람이 품위 있어 보이려면 집 안에 난(蘭)이 있어야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 양반은 엄청난 값을 주고 건란(建蘭) 혜란(蕙蘭) 소심란(素心蘭) 같은 것을 들여놓았다 며

칠 못 가서 이 귀한 물건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란(中國蘭)이 유행으로 건란 춘란(春蘭) 추란(秋蘭) 소심란 같은 것은 그 육성방

법과 다루는 계절이 각각 다른 법인데 이 양반은 그저 사다 놓기만 하면 되는 줄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가

바둑을 즐기려면 정석법(定石法)부터 배워야 올바른 바둑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올바른 취미를 위해서는

바른 lsquo룰rsquo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가 놓고 보는 것과 수석(壽石)에 있어서 일본

사람처럼 가공을 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공이라는 것은 돌의 어느 귀퉁이가

좋지 않다면 따버린다든가 혹은 lsquo페이퍼rsquo 같은 것으로 잘 갈아서 윤기를 내게 하는 방법인데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가공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연석으로서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된 것을 일

등품으로 여기고 또 감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조형적인 돌 즉 어느 형태를 닮지 않고 요즘

말로 표현해서 lsquo오브지에[오브제]rsquo를 놓고 보는 것으로 돌 자체에서 나오는 조형적 맛으로 미적가치를 얻

는 것도 있다

모든 돌이 다 수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관상용석(觀賞用石)의 가치기준은 어떤 것인가

학(鶴)이 나는 듯이

돌은 우선 채석을 해오는데 장소가 한 서너 군데 된다 광범위하게 말해서 산에서 줍는 산석(山石)이 있

는데 이것은 뒹구는 것도 있고 파묻힌 것도 있다 다음은 바닷가에서 주워오는 돌이 있고 또 한 곳은 하천

이나 강변이 있다

외형적인 호칭은 산수풍경의 형태에 가까운 돌을 lsquo산수석(山水石)rsquo lsquo산수풍경석(山水風景石)rsquo lsquo산수경

석(山水景石)rsquo이라 부르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자연의 풍경에 가까운 모양을 한 돌을 일컫는 것이고

lsquo형상석(形象石)rsquo이라는 것은 우마(牛馬)나 비둘기 토끼 등 자연계의 짐승이나 기타 삼라만상(森羅萬象)

에 비슷한 것을 통칭하는 것이다 또 lsquo무늬석rsquo(일본명칭 문양석(紋樣石))이라는 것은 달이 구름 위에 떠있

다든가 해가 솟아오른다든가 학이 날아간다든가 물새가 먹이를 채는 형상 등이 검은 돌에 흰 돌이 섞여서

관련 자료 소개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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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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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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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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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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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38: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혹은 녹색 돌에 붉은 돌이 섞여서 이색적인 색채의 혼합이 이루는 형상의 돌을 말한다 다음으로 lsquo색채석

(色彩石)rsquo이라는 것은 모양은 아무 것에도 닮지 않았지만 돌 자체의 색감이 좋은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에

는 이를 마석(磨石)을 해서 색채를 더 빛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lsquo유래석(由來石)rsquo은 어떤 유래가 깃들어

있는 돌로서 예를 들면 lsquo이 돌은 그 옛날 정다산 선생이 애완(愛玩)하시던 돌이다rsquo라던가 lsquo김추사 선생이

늘 문갑 위에 놓고 즐기던 것rsquo이든지 또는 lsquo궁중의 전각(殿閣) 앞에 수백년 동안 놓여 있던 역사를 지켜본

돌rsquo이라든지의 식으로 내력이 들어있는 돌을 말한다 lsquo환상석(幻想石)rsquo은 돌 자체로 조형적인 형태를 갖추

어서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으로 이렇게 한 여섯 가지로 나눈다

이상이 외형적 형태에서 보는 호칭을 들어본 것이고 lsquo산수경석rsquo은 더 자세히 분류해서 말한다면 lsquo원산

석(遠山石)rsquo이 있고 계곡에 가까운 lsquo계곡석(溪谷石)rsquo 절벽같은 단애(斷崖)를 보는 lsquo단애석(斷崖石)rsquo 까만

돌에 흰 돌이 폭포처럼 무늬져 있는 lsquo폭포석(瀑布石)rsquo 구멍이 뚫린 lsquo동굴석(洞窟石)rsquo lsquo고도석(孤島石)rsquo

lsquo계단석(階段石)rsquo lsquo첩석(疊石)rsquo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애석가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lsquo나석(裸石)rsquo이다 이는 돌 자체만 보는 것이다 반면에 lsquo태

석(苔石)rsquo이 있는데 이는 이끼를 앉혀서 보는 것으로 때로 lsquo양석(養石)rsquo한다고 한다 돌을 기르는 것이 아

니고 돌에 붙인 이끼나 창포(菖蒲)를 물을 주며 기른다는 의미에서 양석이라고 하는 이치다 예전에 완당

(阮堂)이 쓴 현판에 ldquo노태수석(老苔壽石)rdquo이라고 쓴 것은 이끼가 늙고 돌이 수(壽) 하다고 즉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또 재호(齋號)를 지을 때 돌의 의미는 아니지만 ldquo양석실(養石室)rdquo이라 흔히 쓴 것은

돌이 자라듯 오래오래 장수하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돌은 보는 방법 이것을 감식안이라고 해도 좋겠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첫째는 면(面)을 본

다 납작한 편석은 볼품이 없지만 조각과 같이 입체적인 것인 만큼 돌의 면은 5면을 보는 것이 보편적이

다 전 후 좌 우 저(底)의 다섯 면인데 밑바닥은 앉음새가 무엇보다 좋아야 하며 다음으로 보는 게 질

(質)인데 경질(硬質) 연질(軟質) 경질(輕質) 중 경질(硬質)을 제일로 친다 그 외 색 선 면 피부인데 특

히 돌의 피부는 풍화작용을 얘기하는 것으로 풍마우세(風磨雨洗)에 시달린 돌의 피부란 상상하기조차 힘

든 무언의 철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분류할 때 대형 표준형 소형이 있어서 대형은 대개 정원석으로 쓰고 표준형이나 소형은 실내

에서 대(臺)나 수반(水盤)에 올려놓고 보는 것인데 치수는 대게 6 7십 센티미터 이상을 대형 3 6십 센티

미터를 표준형 30센티미터 이하를 소형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채석하는 종류의 질은 어느 정도인가 중국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종류가 다

양하고 진기한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그것도 남북으로 갈려서 공급의 범위나 양이 풍부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좋은 돌이란 수성암(水成岩)이나 광물성이 섞인 것이 많은데 지세로 보아 금

강산 백두산 같은 고산 명산이 있는 이북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온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사막(沙漠)의 장미꽃

남한의 하천 산악 해변에서도 좋은 돌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충북 단양에 가면 하천에서 좋은

돌이 많이 나와 천렵(川獵)과 아울러 좋은 행락지이며 제주도 풍화석은 해변석으로 화산석이 있고 형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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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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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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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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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39: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재미있어 수반석 정원석으로 안성맞춤이며 창포를 붙여서 관상하는데는 수품(秀品)으로 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외국의 기석(奇石) 진석(珍石)들을 몇 가지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lsquo사(死)의 계곡석(溪谷石)rsquo이라는 것은 북미 lsquo네바다rsquo 주에 있는 계곡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동그란 호떡

같은데 크기는 대형에 속한다 lsquo폴 빌rsquo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소개하여 알려진 관상석은 만지면 어떻게나

찬지 꼭 얼음덩어리를 손에 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열병환자들에게 주면 놓을 줄을 모르는데 연중 쉬

지 않고 부는 열풍(烈風) 때문에 돌의 모양은 동글동글하다고 한다

lsquo사막(沙漠)의 장미rsquo라 칭하는 돌은 미국의 사막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꽃잎 모양의 주름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서 마치 장미꽃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그란 형태에 담갈색을 띠고 있다 lsquo폴 펨버지rsquo라는

사람이 채석했다고 한다

lsquo멜론석rsquo은 마치 조그마한 수박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외관은 평범한 돌빛이나 촉감은 영낙없는 수

박이며 심지어 수박의 화석(化石)이 아닐까 할 정도인데 가운데를 쪼개면 석영(石英)의 기막힌 성형(星形)

이 마치 수박 속처럼 나타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의에 차도록 만든다고 한다

lsquo국문석(菊紋石)rsquo은 미국 lsquo버지니아rsquo 주에서 채집되는데 lsquo핑크rsquo의 결정체이며 꼴 주위에는 백색에 가까

운 석회질이 국화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 국문석은 미국 외에도 중국 이탈리아에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의 것은 국화보다 단풍에 가깝고 미국의 것은 성냥개비를 펼쳐 실국화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채석장소는 산 바다 하천의 세 곳이 가장 기본이 되는 곳인데 일단 채석지가 결정되면

혼자 보다는 5~7인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찾다 보면 사람에 홀린다고 한다 마찬가

지로 정신 없이 돌을 고르다 보면 돌에 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상지형(異常地形)이나 위험지역에 들어가

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처음에는 산석지(山石地)로 가는 것이 좋다고 본다 왜냐하면 산

형(山形)이 많고 찾기도 쉽고 형도 다양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적합하다 우선은 표면에 있는 것을 고

르되 때로는 끝만 뾰죽이 내밀고 있는 것은 파내야 하므로 삽이나 작은 곡괭이 같은 도구가 필요하다 계

곡에서는 lsquo슬로프rsquo나 뱀 같은 위험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비상용 lsquo픽켈[피켈 pickel]rsquo이 필요할 때도 있

고 꼭 목장갑과 장화 두터운 양말을 신어야 한다 습득한 돌을 발송할 경우에는 반드시 헝겁으로 싸서 단

단히 매어야 하며 한꺼번에 다량운송(多量運送)은 피하는 것이 좋다 되도록 경장(輕裝)을 하되 좀 욕심을

낸다면 채석을 위해 절벽을 기어오르는 때도 있으므로 특수기술(特殊技術)을 습득한다면 이는 금상첨화

격이다

애석인구(愛石人口)

다음으로는 너무 적은 것은 가치가 없고 최소한 20센티미터에서 30센티미터는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색은 무어라해도 흑(烏石)이 우선이며 다음이 청(靑)으로 모양을 따지고 다음에 색을 보는 것이 순서이다

산 모양을 한 것 암형(岩形)의 돌 폭포의 모양 절벽 같은 돌은 반드시 집어가지고 오면 큰 실수는 없다고

본다 실수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큰 돈벌이도 될 수 있다 서울에도 한 두 군데 애완석(愛玩石)을 매매하

는 곳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이름있는 돌은 수백 만원에도 구입이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좋

다 해도 수백만짜리는 없고 몇 십 만원을 홋카[호가]하는 정도이다

관련 자료 소개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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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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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80 140p-180p 0723_1 14 07 23 오후 823 페이지 180

Page 40: 관련 자료 소개 - The Museum of Photography, Seoulphotomuseum.or.kr/store/laboratory_index/140774347124341843.pdf · 관련 자료 소개 1. 이해선 연보 2. 대한사진예술가협회

젊은 채석자(採石者)들에게 나는 이것을 꼭 부탁하고 싶다 ldquo젊은이들은 꼭 동그란 형태의 관상석을 즐

겨 모으라rdquo고 왜냐하면 구형석(球形石)이란 아득한 옛날 상류의 암벽이 충격을 받아 계단을 이루고 다시

쪼개지는 아픔을 맛보고 하류로 하류로 구르다가 다시 씻기고 씻겨서 생긴 것이니 행락의 즐거움 속에 얻

게 될 이 구형석은 태고부터의 사연과 시름을 머금고 한난신고(寒暖辛苦)를 겪은 생활의 좌우명이기 때문

에 젊은이의 앞날에 힘이 될 동반자로 삼을 수 있는 까닭이다

돌이 비록 말은 못한다 해도 돌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른 문인이 있는가 하면 그를 스승 삼아 참선을 한 묵

객(墨客)도 있었다 돌이 말이 없다고 진정 말이 없는 것일까 마음을 바로 하고 마주앉아 당신의 진의(眞

意)를 조용히 전해보라 남이 듣지 못하는 엄숙하고 청정(淸淨)한 대화가 오고 가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염

량세태(炎凉世態)에 찌들은 우수사려(憂愁思慮)를 잊는 순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지금부터 한 3년 전에 lsquo석우회(石友會)rsquo가 조직되어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애석취미를 나

누고 있지만 보다 많은 동지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돈을 많이 들여야 맛이 아니고 멀리 가

야만 맛이 아니다 우이동도 좋고 북한산도 좋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놀더라도 돌아올 때면 기석(奇石) 하

나쯤 들고 와 날짜를 적고 추억을 아로새긴다면 이것이 바로 애석의 초단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일본의 예

를 자주 들어 안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도벌(盜伐)을 막고 애림녹화(愛林綠化)를 위해 lsquo입산금지rsquo이

지만 일본에서는 채석가들의 극성 때문에 lsquo입산금지rsquo를 할 정도라니 그네들의 lsquo붐rsquo을 알고도 남음이 있

여러 사람이 먹기 위해 움직이는데 직업이 필요하고 사회에 나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일 이는 생

을 다하는 날까지 필연적이고 또한 의무적으로 수반되는 일이다 따라서 목적의식 밑에 움직여야 하고 그

런 일이 기계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감정은 살벌해지기 쉽다

이럴 때에 조금만이라도 마음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겠는가

책상 위에서 다정히 피는 한 송이 꽃이나 새벽 영창(映窓)에 우짖는 한 마리의 새 또는 난향기(蘭香氣)

처럼 깔린 달빛 아래 듣는 아름다운 명곡의 물결helliphellip뭣이든 좋다

가객(佳客)과 더불어 창포수석을 바라보며 차를 다리고 때로는 침향(沈香) 어리는 문방(文房) 안에 홀로

누워 영성소석(零星小石)을 바라보는 아취(雅趣)를 갖은[가진] 조촐한 선비들의 생활 속에서 동양의 학문

과 예술은 싹이 터왔고 심오한 미와 고결한 인품은 자리 잡혀 왔다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날로 더해가는

생활의 번뇌(煩惱)와 잡답(雜踏) 속에서 우리가 오히려 수석에 더욱 정애(情愛)를 쏟는 것은 첫째 태초의

생명을 안고 묵묵부답하는 수석의 얼굴에서 동양인 본연의 지조(志操)와 동양미의 진수(眞髓)를 오늘에 이

으고자[잇고자] 함이오 둘째는 비판 없이 번저만[번져만] 들어 오는 서구적인 생활정서와 조형미 속에 영

구히 동양석(東洋石)의 아름다움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더구나 요사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꽃꽂

이의 유행풍조는 필자뿐만 아니라 오랜 문화민족으로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석인구의 증가는 사회전체의 분위기를 곱고 아름답게 하는 커다란 조건의 하나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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