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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홍해작전' 그 진실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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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홍해작전' 그 진실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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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1

1

‘홍해작전’은 이스라엘만의 이적일까?

‘홍해작전’, 그 진정한 의도

다급히 세워진 ‘홍해작전’이 아니다

홍해의 그 밤

‘출애굽’ ‘홍해작전’, 완전한 구원이었나?

‘홍해작전’은 십자가의 예표

2

제 Ⅰ 편

본 문 : 출애굽기 제 14 장 제 1 ~ 3절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돌쳐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다 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3.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아득

하여 광야에 갇힌바 되었다 할찌라

‘홍해작전’은 이스라엘만의 이적일까?

낮의 뜨거움을 가려주기 위한 구름기둥도, 밤의 추위와 어두움을 피하기 위

한 불기둥도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세워주신 기둥도 아니었다.

저 유명한 ‘홍해사건’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뒤쫓아

온 애급의 마병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무난히 건너게 하기 위하

여, 여호와께서 바다를 가르신 ‘이스라엘을 위한 이적’ 『이스라엘

을 위한 이적』이라는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이적’이

란 평가가, ‘홍해작전’에 부여된 의미의 전부일까요?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또한 구름기둥, 불기둥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광야 길에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

둥을 설치하여, 이들 앞에서 떠나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출13:22)

그렇다면 이 두 기둥은 일반이 알고 있는 것처럼, 전적으로 이스라

엘만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3

낮의 뜨거움을 덮어준 구름 기둥은 그렇다 치고라도, 밤의 불기둥은

무엇 때문에 세워졌을까요?

밤 기온이 급격히 하강하는 광야의 여건상, 추위에 떨지 말고 따뜻

하게 잠자라고 세워주신, 기둥이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

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

니” (출13:21)

불기둥 구름기둥이, 낮이고 밤이고 이스라엘 앞을 떠나지 않게 하셨

던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쉬지 않고 “주야로 진행하게”

『주야로 쉬지 않고 진행하게 하기 위하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

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못 자게 하기 위하여, 두 기둥들을 번갈아 설치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두 기둥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쉴 새 없는 강행군을

시키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갑자기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이 가고 있는 방향을

무조건 돌쳐서,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다 장막을 치라”고 명령하

셨습니다. (본문2절)

본래 계획에 잡혀 있지도 않은, 그야말로 길도 아닌 바닷가로 방향

을 돌치도록, 백성들을 다그치고 닦달하라는 명이었습니다.

노정을 바꾸게 하셨던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던 것일까요?

앞에서도 말씀드렸듯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이스라엘만을 위한 이

적이 아니었던 것처럼, 홍해사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러한 사건들을 만드셨을까요?

지금부터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돌쳐서 홍해에 진을 치라고 하시

던 바로 그 즈음, 애급 바로의 왕궁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것

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일로 해서 애급의 왕과 신하들은 많이도 아쉬

워하면서, ‘우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을 놓아 보냈는고?”(5절) 후회

하며 분노했습니다.

보낼 때 마음 다르고, 보내고 나서의 마음이 다르다는 말처럼, 그랬

었나 봅니다.

5

4백 년 동안이나 자기네 애급을 지극히 섬겨오던 이스라엘이었으

니, 어찌 아쉽지 않았겠습니까?

어찌 후회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때에 참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애급 왕이 후회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하나님

은 왕이 후회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

는 것입니다. (8절a)

강퍅해진 바로는 즉각 특별 병거 6백승과 애급의 모든 병거를 갖추

고, 급하게 이스라엘을 뒤따랐습니다. (6~7절)

불과 얼마 전, 이스라엘에게 출애굽을 허락했던 그가 아니었습니

까?

하나님이 애급왕의 마음을 강퍅케 주장하셨기에 일어난 일이었습니

다.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한편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잠도 안 재우며 행

군시키던 여호와께서는, 갑자기 가던 길에서 방향을 돌이키라고 명

령하십니다. (2절)

6

그리고는 비하히롯 앞 바닷가에다가 장막을 치라고 하십니다.

참 재미난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기에 장막을 친 시점과, 이스

라엘을 뒤따라온 애급 군사들이 그곳에 도착한 시점이, 기가 막히게

도 딱 맞아 떨어졌다는 것이지 뭡니까?

두 나라가 만나는 지점(地點)과 시점(時點)이 일치했다는 사실입니

다.

이스라엘을 내보낸 것을 후회하던 바로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붙들

어 그의 강퍅함을 극에 달하게 하시니, 그는 애급의 모든 마병들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뒤쫓았습니다.

그리고 만난 지점이 홍해 앞이었습니다.

기막히게도 이스라엘과 애급 군사들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맞

닥뜨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여호와의 계획이셨습니다.

여호와의 연출이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두 민족의 만남이 딱 맞아떨어지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당신의 백

성들로 밤낮없이 행군하게 하셨습니다.

7

가던 길을 돌치게 하셨습니다.

바로 왕으로 하여금 후회하며 아쉬워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여, 그를

강퍅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상황들이 서로 어우러져, 애급의 마병들이 이스라엘을 쫓아

오게 되었으며, 마침내는 두 나라가 같은 장소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겁니다.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

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 장막친 데 미치니라”

(14:9)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을 세워주심으로, 이스라엘로 잠

한숨 못 자게 하면서 진행시키신 그 이유를 이제 알았습니까?

마냥 자면서 쉬면서 걸었다면, 어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었겠습니

까?

어린아이, 노인네, 짐승까지 함께였던 출애굽이었습니다.

이 같은 이스라엘 민족의 대이동이, 어찌 말을 타고 쫓아오는 애급

군대가 도착하기 전, 홍해 바닷가에다 장막을 칠 수 있었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서두르셨던 그 이유를, 이제 알 수 있습니까?

두 나라가 맞닥뜨리는 그 순간, 『두 나라가 맞닥뜨린 그 순간을 위

해서』였습니다.

8

이스라엘이 행하던 길을 돌이키게 하여 장막을 치게 하셨던 곳은,

바알스본과 비하히롯 계곡아래 바닷가였습니다. (2절b)

그곳 이스라엘의 장막을 본 바로 왕은, “그들이 그 땅에서 아득하여 광

야에 갇힌바 되었다”(3절)고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볕이 쨍쨍한 날 먼 곳에 있는 바다를 바라보았을 때, 바다가 지면보

다 높아 보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각적으로 바다가 들떠있는 것 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당시 애급 군사들이 도착한 지점에서 이스라엘의 장막을 보았을 때,

이스라엘이 바다 한가운데에 오갈 데 없이 갇혀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물론 여호와께서 미리 내다보시고, 일부러 그런 장소에다 이스라엘

의 진을 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바로 왕의 판단력이 흐려질 정도로 강퍅하게 만드셨

습니다.

이성을 잃은 채 성질만 극에 달하게 하여, ‘이스라엘이 가는 곳이라

면 육지든지 물속이든지 가리지 않고 뒤따라가서 잡고야 말겠다.’는

강한 마음을 먹도록 하셨습니다.

9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4절)

이것이 하나님의 ‘홍해작전’에 대한 분석입니다.

영상 보기 >>>

10

‘홍해작전’, 그 진정한 의도

이스라엘은 자기들 중심에서 ‘출애굽’ ‘홍해작전’을, ‘죄에 대한 응징’, ‘멸애

급’이라 말하나,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무리하면서까지 만들어내신 여호와의 ‘홍해작전’이라는 사실을 알

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작전의 진정한 의도는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이것이 본편의 핵심입니다.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 (4절b)

애급의 온 군대로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급으로 영광을 얻어』

당신이 여호와이신 줄 알게 하시겠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애급 사람들이 알

게 하기 위하여 이 작전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무리하게 행군하게 하신 일, 돌쳐서 바닷가에다 진을

치게 하신 일, 애급의 바로를 강퍅케 하여 뒤따르게 하신 일, 그 모

든 과정들이 『애급으로 하여금 당신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기 위

함』이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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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말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 드리면, 바로와 그의 군대를 바다 가운데로 끌어

들여 모두 멸하게 함으로, 영광을 얻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셨

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강퍅에 강퍅을 더하며 하나님을 거역해왔던 바로 왕과 애급

을, 홍해 속에 집어넣어 몰사시킴으로 여호와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

시겠다는 것이, ‘홍해작전’의 핵심 『홍해작전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 강퍅한 자들의 죄악을, 결코 용서하지 아니하시겠다는 뜻

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재앙들을 통하여 애급을 도와주기도 하고 풀어주기도 하셨지

만, 여호와는 어떠한 죄도 결코 용서하지 않는 분이심을, 저희로 알

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연출하셨다 그겁니다.

이것이 구름기둥 불기둥을 비롯한, ‘홍해작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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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자기들 중심으로, 자기들 입장에

서만 헤아려 ‘이스라엘의 출애굽’, ‘이스라엘의 홍해 통과’에다 비중

을 두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그렇게 평가하고 그렇게 선전해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민의식을 가지고 ‘홍해작전’을 해석한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강퍅함으로 일관해온 ‘바로와 애급에 대한 여호와의 응징’이라고 주

장할 수도 있습니다.

‘멸(滅)애굽’ 『멸 애급』으로 이해해온 것이,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사안이었다는 말입니다.

허나 성경은, 하나님 중심에서 객관적으로 보아야합니다.

바로 왕과 애급 군대가 이스라엘이 진 친 곳으로 가까이 오자, 이스

라엘 자손들은 심히 두려워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10절)

또한 모세를 향하여는 “애급에 매장지가 없어 우리를 광야로 이끌어

내어 여기서 죽게 하느냐?”(11절)고 원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때마다, 무조건

원망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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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자기들에게 유익이 되면 받아들이고, 아니면 불평불만하고 있

으니 말입니다.

이러한 백성들을 향하여 인도자 모세가 말합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13절a)

『가만히 서서 보기만 하라』가만히만 있으면 하나님이 다 해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 대신 싸워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14절)

‘홍해작전’ 같은 엄청난 상황에서도 자기들은 가만히 보고만 있을

것이니, 하나님 혼자 싸우시라는 말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지금 모세는 하나님이 직접 싸워주실 것을, 당연한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가만히만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물론 모세도 그리 알고 있었으니, 백성과 인도자의 손발이

척척 맞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14

하나님이 왜 저희만,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만』위하여 일하셔야

한다는 것입니까?

이기적인 백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답답하게 여기셨던지, 모세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15절a)

“너희는 가만히 서 있겠으니, 나더러만 싸우라고 부르짖는 것이

냐”는 말씀이십니다.

그리고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

라”(15절b)고 엄중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때 앞으로 나간다는 것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앞에는 홍해가 가로 놓여있었을 뿐이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양 옆으로 피할 수도 없었습니다.

뒤에는 애급이 바짝 따라와 있으니, 뒤로 도망칠 수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여호와께서는 앞으로 나가라는 것입니다.

빠져 죽을 상황인데도 말입니다.

그때 여호와께서는 또다시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16절a)고 명령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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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다급하게 쫓기듯 바다 가운데로 들어가야, 바로와 그의

군대도 뒤따라 뛰어들 것이 아니겠습니까?

애급에게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앞도 뒤도 돌아볼 틈도 주지 않

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작품이 만들어질 것이니 말입니다.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이스라엘)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

을 인하여 (홍해 바다 한 가운데서 몰사케 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17절)

바로와 그의 군대 모두를 홍해 한가운데 몰사케 함으로, 영광을 얻

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감히 종으로 삼아온 세상 임

금 바로와 그의 신하들을 살려둔 채, 도망치듯 겨우 빠져나온 출애

굽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급을 나올 때에는, 유교병도 되지못한 무교병을 싸들

고 부랴사랴 도망 나온 처지였습니다.

그런 구원은, 당신께 영광도 무엇도 아니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

습니다.

16

그런 구원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면, 너무 초라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 주여!

주께서만 영광 받으소서.

우리는 홍해 저 편까지 건너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애급과 함께 한

바다에서 죽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좋사오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손쉬울 대로 역사하옵소서.

우리의 죽고 사는 것 개의치 마시고, 애급을 홍해 속에 수장시킴으로

당신이 여호와인줄을 온 세상에 드러낼 일이면, 쉬운 대로 하옵소서.

죽어도 주를 위해 죽고, 살아도 주를 위해 살겠다고 노래하듯 말씀드

린 우리의 고백이, 부끄럽지 않기를 원합니다.

당신께서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내가 주를 위해 지어졌기

때문이옵니다.

주여!

영상 보기 >>>

17

갈렙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여호와의 ‘홍해작전’ 그 진실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았나이다.

그러는 중 하나님이 우리만을 위하여 일해주시기를 원했던 것이, 얼

마나 옳지 않았는지를 알게 되었나이다.

모름지기 우리 인생이란 하나님을 위하여 지어진 존재인데, 하나님

으로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게 하고, 우리는 가만히 서서 구경이나 하

겠다는 자세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도 알았나이다.

세상임금 애급이 무서워 밤에 도주하듯 나왔던 출애굽의 구원을, 하

나님의 영광이라고 한다면, 그 영광은 참으로 초라한 것이 아니겠나

이까?

애급의 손아귀로부터 건져낸 그 구원도 큰 역사이겠으나, 그것만으

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늠하기에는 부족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맞서 세상을 지배해온 세상임금과 그 백성들을, 영원한 불

못으로 던져 넣는 것만이, 주께 영광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나이다.

오, 주여.

우리의 안위만을 위하여, 하찮은 일에도 불평했던 저희를 용서해주

시옵소서.

18

주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라면, 순교해서라도 우선하기를 원하나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19

장 2

20

제 Ⅱ 편

본 문 : 출애굽기 제 14 장 제 19 ~ 20절

19. 이스라엘 진 앞에 행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옮겨 그 뒤로 행하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20.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 편은 구름과 흑암

이 있고 이 편은 밤이 광명하므로 밤새도록 저 편이 이 편에 가까이 못하

였더라

다급히 세워진 ‘홍해작전’이 아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이스라엘을 홍해까지 밤낮 강행시키기 위한 안내 깃봉

에 불과했던 것으로, 이후 성경 어디에서도 이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애급의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보낸 후에 일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을 향하여 갈 때, 블레셋 땅을

통과하면 가깝게 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길로 인

도하지 않고 광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블레셋의 막강한 세력에 이스라엘이 놀라서 겁을 먹고, 애급으로 되

돌아갈까 걱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

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

라” (출13:17)

하나님은 위험부담이 별로 없는 길을 택하여 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먼 길을 돌게 되더라도 안전한 행로인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가

끝나는 에담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13:20)

21

이스라엘이 에담에 장막을 치려하자 여호와께서는 이를 막으셨습니

다.

이스라엘 앞에다 불기둥을 세워주시어, 거기에다 진 치려는 작업을

못하게 하셨습니다.

거기에 머무르지 말고, 계속 진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앞에다 낮에는 구름기둥을, 밤에는 불기둥을 비춰주심으

로, 주야로 쉴 사이 없이 이동할 것을 독촉하셨던 것입니다.

(13:21~22)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와 믹돌 언덕 사이 비하히롯과 마주하는 바알

스본에 이르자, 하나님은 돌연 모세에게 “돌치라”고 명령하십니다.

“돌쳐서 . . . .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14:2)

앞면은 바다요, 양 옆은 둔덕이며, 뒤에서는 바로의 마병이 뒤쫓아

오고 있으니, 그야말로 이스라엘은 사면초가가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거기에다가 장막을 치라는 명을 받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성을 잃어버릴 지경이 되고 맙니다.

그럴 만도 했을 것입니다.

두려움이 폭발한 백성들은 여호와께 부르짖는 한편(14:10), 모세를

향하여는 따지고 원망했습니다.(14:11)

드디어 저들의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22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세워졌다고는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도리어 그 반대였다는 것을, 앞에서도 언급해드린바 있습니다.

참고로 부연의 말씀을 드립니다.

불과 구름이 기둥으로 만들어졌던 것을 감안해보면, 이는 단지 이스

라엘을 강행시키려는 안내 깃봉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상의 별다른 어떤 의미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기둥은 이스라엘을 홍해까지 강행군 시키는데 사용된 도구,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이스라엘 행군을 위한 안내 깃발』이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홍해작전’ 이후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용도폐기 된듯합니다.

두 기둥들에 관한 이야기는, 그 후 성경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를 않

으니 말입니다.

만일 두 기둥들이 계속 이스라엘과 함께 했다면, 이슬과 서리 상태

로 만들어진 만나는 먹을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녁 시간마다 우수수 떨어졌던 메추라기 역시, 불기둥의 훤한 빛으

로 인하여 떨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23

그런 사실을 보건대 불기둥이나 구름기둥은 제한된 용도로, 한시적

으로만 쓰였던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 현장까지 강행군시키는데 쓰임 받은 도구

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쨌건 이스라엘에게 있어 불기둥 구름기둥은, 저들을 홍해까지 이

끌어오는데 큰 역할을 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숨차게 달려와 도착한 장소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앞도 뒤도 옆도 다 막혀버린 사지(死地)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현장의 상황을 본 그들은, 결국 폭발하고 맙니다.

하나님도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셨던지, 모세에게 황급히 이르십니

다.

“당장 네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를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바다

를 갈라지게 하라. 그렇게 하지 않고 왜 부르짖고만 있느냐?” (16절

a)

24

바다가 갈라지게 되면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

라”(16절b), 바다 가운데로 생겨난 육지로, 백성들이 무난하게 건너

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감정을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이 ‘수습책’으로 폭발했던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저들의 생각을 달리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수습책’이라고 하여, 다급해진 상황에서 갑자기 만들어진

전술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갑자기 만들어낸 ‘홍해작전’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급조된 ‘홍해작전’이 아니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애급을 출발하던 그때의 말씀을 보면 알게 됩니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여 너희의 뒤를 따르게 할 것인데, 그

이유는 그와 그의 온 군대를 홍해 가운데서 수장시키려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나는 영광을 얻을 것이며, 저희로 나 여호와가 누구인 줄

을 알게 하리라”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4절)

25

이 말씀으로 우리는 이 작전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감정폭발에 대한

하나님의 ‘급조된 수습책’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홍해작전’은 이미 오래전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었던, 『이미 오래

전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영상 보기 >>>

26

홍해의 그 밤

홍해작전은 밤의 역사로, 불기둥이 세워진 이스라엘은 광명한 가운데 바다를

통과할 수 있었으나, 애급은 구름기둥 때문에 앞을 분간치 못해 수장되었다.

하나님의 홍해 전술 내용을 다시 한 번 살펴드리겠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 길을 가던 때의 진행 속도는, 느

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린아이들도 있었으며, 노인들도 함께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생축들까지 같이 가야했습니다.

이에 반하여 애급의 병정들은 말이나 병거를 타고 이스라엘의 뒤를

쫓아왔으니, 어느 순간 애급을 덮칠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도저히 안심할 수 없었던, ‘홍해의 밤’이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홍해작전’이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이스라엘 진 앞에 서서 인도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뒤로 갑니다.

이에 따라 구름기둥도 앞에서 뒤로 옮겨갑니다.

그러다보니 이스라엘 뒤를 따라오던 애급 쪽(‘저편’)에는 구름과 흑

암이 가득하게 됩니다.

한 치 앞을 분간 못할 정도의 어두움에 쌓이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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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구름기둥이 애급 쪽으로 넘어가므로, ‘이편’인 이스라엘은 더

욱 광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밤새도록 저편이 이편에 가까이 못하였더라”(20절b)고 했습니

다.

여러분이 알면 좋을 정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것이라고 하여 언제나 다 좋거나, 다 안 좋

거나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구름기둥, 불기둥도 그렇습니다.

구름기둥은 낮 동안에는 행진의 안내 봉이 되어, 길의 방향을 잡아

주는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밤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잖아도 사방이 어두워 분간할 수 없는 밤에, 구름기둥까지 옮겨

와 세워졌으니, 오히려 더 칠흑 같은 밤이 될 뿐입니다.

밤에 이동하는데 있어 구름기둥은, 불편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밤중 행군에는 필요 없는 구름기둥이란 말입니다.

‘홍해작전’이 시행된 시각은 밤이었습니다.

그 밤 구름기둥은 이스라엘 뒤편으로 옮겨갔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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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둥만 남겨진 이스라엘 쪽은, 두 기둥이 함께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밝은 광명이 되어, 바다 속 길까지 무난히 통과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애급 군사들의 경우에는 구름기둥이 앞에 서있는 관계로, 너

무 어두워 행진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렇잖아도 어두운 밤인데다가 하필이면 구름기둥까지 자기네 앞으

로 옮겨와 세워졌으니, 칠흑 같은 흑암으로 아무 것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도저히 방향을 잡을 수 없었던 애급은,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홍해의 그 밤, 이스라엘 앞에는 광명의 불기둥이, 애급 앞에는 흑암

의 구름기둥이 세워졌다는 사실을, 어찌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우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과, 이를 섭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사건을 하나의 자연현상으로 볼 것입니

다.

‘이스라엘 쪽은 다행히 자연적으로 맑은 하늘이었고, 애급 쪽은 불행

하게도 자연적으로 흐려있었다’고, 단순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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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은 하나님 세계에 관해 더 이상 아는 바가 없었을 테니 말입니

다.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홍해작전’이 있었던 그 밤 애급 쪽이 어두웠던 것은, 하나님의 사자

가 구름기둥을 이스라엘의 뒤편, 즉 애급 쪽으로 옮겨 놓았기 때문

이었습니다. (14:19)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사자 때문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불기둥은 이스라엘 진에 머물고, 구름기둥은 나를 따라서 뒤쪽 애

급 군사 편으로 옮길 지어다”

사자의 명령으로 이스라엘은 백일(白日) 같은 광명 아래에 들게 되

었고, 애급 마병은 칠흑 속에 갇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사용하기도 하시며, ‘불꽃’으

로 삼기도 하십니다.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히1:7)

또한 자연 가운데 움직이는 모든 것들을, 당신의 사자들을 통하여

자연하게도 하시지만, 때로는 이변하게도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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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자들로 땅과 하늘을 붙잡게 하심으로, 계속

자연의 모습 그대로 있게도 하시지만, 때로는 나누게도 하시고 흔들

리게도 하십니다. (계7:1~4)

베드로 사도는 세상 끝 날에 관하여,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

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벧후3:10)라고 기록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풀어지게도 하시며 흩어지게도 하시다

가, 결국에는 ‘종이 축이 말리듯’ 날아가 버리게 하실 것입니다.

“하늘은 종이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계6:14a)

하나님의 말씀이시니, 분명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까?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그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해야할 것입니다. (벧후3:11~12)

엘리야와 엘리사 두 사람을 격하여 분리, 하늘로 끌어올렸던 회리

바람도 하나님의 사자가 담당했던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토네이도라 불리는 그런 바람 말입니다.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왕하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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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가 타고 올라갔던 그 회리바람의 강도와 크기를, 누가 주도했

겠습니까?

하나님의 사자들이었습니다.

그때 그 사자들이 ‘홍해작전’에도 어김없이 파송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잡고서, 하나님의 지시에 따

라 두 기둥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날 그 밤 그 바다 앞에 선 자라면, 누구라도 자기들 앞에는 불기

둥만 있어주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누가 구름 기둥을 원하여, 흑암에 갇히기를 원

했겠습니까?

허나 원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홍해작전’은, 하나님의 감정에 의해서 갑자기 만

들어진 전략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 작전에서는 하나님의 사자들이 모든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말입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사람을 구름기둥 아래 집어넣어 흑암 속에

가두기도 하고, 불기둥으로 밤이 백일 같이 밝게도 역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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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이런 말들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찌 이 땅에 가뭄이 있고, 어찌 홍수가 있으며,

어찌 굶어죽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저 많은 사

람들을 태풍으로 쓸어가게 놔둔단 말인가?”

이 물음에 저 갈렙이 대답해 주리이까?

“그렇소, 하나님이 계시기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오.

하나님이 계시기에 자연이 자연스럽게 나아가고 있다는 말이오.

한마디 더하리까?

창조주 하나님은 지음 받은 당신을 위하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지

음 받은 당신이 하나님을 위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고로 세세무궁토록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드려

야 된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지 않더이까?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그분은 마땅히 보좌에 앉아 영광

받으실 것이며, 우리는 그분께 영광 돌리는 존재가 되어야 행복할

것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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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렙의 기도

하나님이시여,

당신의 사자 손에 두신 그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우리에게도 보내시

되, 우리가 윤택하게 살 수 있도록 유익한 기둥만 세워주시옵소서.

그러므로 어려운 길을 무난하게 통과, 밝은 길로 들어가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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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성도가 보내온 글

우리는 편 가르기를 좋아하여, 흑백논리로 평가하는 일에 익숙

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자 편, 불신자는 마귀편이라 쉽게 단정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내 편, 교회편이라는 오해도 합니다.

이것은 “자기중심적” 사고인 동시에, 매우 위험한 “이원론적” 사

고입니다.

홍해사건 역시 그런 시각에서 해석해 왔습니다.

갈렙 목사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눈으로 성경을 볼 수 있도록

가르쳐주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뜻대로 진행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이스라엘인들이 바닷가에 진을 친 시점과, 바로 군대가 좇아온

시점이 맞아 떨어진 것이 우연일까요?

모세의 지팡이로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하는 것만

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면, 굳이 그 시점에 맞춰 그곳에다 진을

치게 하실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이시며, 그들 역시 구원의 대상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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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과 애급군사가 수장된 사건은, 하나

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되(요3:8) 마귀는 진멸하심(요일3:8)을, 만

인에게 선포하시는 예수 십자가 사건의 증표입니다.

믿는 자들 편에서 하나님은 그들만을 위해 싸우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유치한 “인간본위 적” 사고이며, “우상숭배 적” 발상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 하에 피조 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

해 사는 것이 마땅하며, 그것이 온전한 인간의 정체성입니다.

갈렙 목사님은 우리의 이기적 신앙 탈선에서 항상 길잡이가 되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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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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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Ⅲ 편

본 문 : 출애굽기 제 14 장 제 28 ~ 30절

28.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쫓아 바다

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 하였더라

29.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

에 벽이 되었었더라

30.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

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의 애굽 사람의 시체를 보았더라

‘출애굽’ ‘홍해작전’, 완전한 구원이었나?

‘출애굽’이나 애급의 시체를 보았던 ‘홍해작전’의 성공은, 안전이 보장된 구원

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계속 더 싸워야 가나안을 차지, 안전할 수 있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다에 떠있는 애급 군사들의 시

체를 보게 되었습니다.

본문은 “그날에” 『그날에』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

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날에 . . . .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의 애굽 사람의 시체를 보았더라”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표현입니다.

이런 일이 왜 가능했는지를 설명하고자, 이스라엘이 애급에 있을 적

에 내려졌던 마지막 재앙, 곧 애급의 장자나 생축의 초태생을 죽이

던 그 죽음의 유월절 그날에, 애급 사람들의 움직임을 회상해보겠습

니다.

애급의 모든 장자를 죽게 했던 그 유월절, 저들은 “우리가 다 죽은 자

가 되도다” 하면서, 이스라엘을 자기들 지경에서 내보려고 재촉했습

니다. (출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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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장자만 죽이지만, 앞으로는 애급 백성 모두를 죽일 것으로

여겨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은, 금, 패물과 의복 등을 이스라엘에게 막 내주면서, 내쫓

다시피 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자손들은 아주 담대히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14:8b)

그렇게 기다리던 ‘출애굽’, 애급으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출애굽’으로서 이스라엘의 구원은 안전할 수 있었을까?

과연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는, 완전한 구원이었을까?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애급의 경우, 더 가해져야 할 것들이 남아있었습니다.

저들의 장자들과 생축의 초태생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아직 받아야

것들이 더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출애굽으로 완벽한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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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 속량의 피로 살리심을 입었더라도, 아직 더 거쳐야 할 게 남

아있었다는 말입니다.

‘출애굽’이란 사건은 이스라엘과 애급 양쪽 모두에게, 완벽한 결론

을 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유월의 구원’으로 이스라엘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면, 굳이

‘홍해작전’ 같은 것은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홍해가 나뉘어 바닷물이 좌우에 벽을 만들어주므로, 이스라엘 자손

들은 바다 가운데 난 육지로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이를 목격한 애급 군사들 역시 망설이지도 않고, 이스라엘의 뒤를

좇아 바다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스라엘 자손들 모두가 바다를 통과하자마자, 바로 그 순간 양편으

로 갈라졌던 물이 다시 합쳐 원래 상태가 된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애급의 병거들과 기병들은, 일순간에 모두 물속에 잠기고 맙

니다. (14:28~29)

여호와께서는 바로의 군대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멸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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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급 군사들은 모조리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닷가에는 밀려온 저들의 시체가 즐비했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았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 일이 있던 바로 “그날에” 『이같이 된 그날에』“여호와께서 이

스라엘을 애급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셨다”고 성경은 평가하고 있습

니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

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의 애굽 사람의 시체를 보았더라” (30절)

말하자면 ‘그날에야’ 비로소, 이스라엘의 구원이 확보되고 보장되었

다는 뜻입니다.

양의 피로 말미암아 죽음으로부터 유월했다 하여, 그것이 안전한 구

원은 아니었다는 의미입니다.

양의 ‘피 설주’, ‘피 인방’을 만들어 죽음의 재앙에서 유월하심을 입

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어디 계속적인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

이었습니까?

출애굽 후에도 애급의 마병들이 홍해까지 뒤쫓아 와 이스라엘을 해

하려던 상황만 보더라도, 애급의 손에서 벗어났다는 사실만 가지고

는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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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유월절’에 이어 ‘출애굽’, 그리고 ‘홍해작전’을 왜 연결하셨

는지를 헤아려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홍해작전’의 엄청난 성공이, 이스라엘에게 완벽한

구원을 가져다 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규정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홍해작전’이 끝났다고 해서, 곧바로 가나안이 시작된 것은 아니었

습니다.

잠시 진을 치려다가 돌쳐서 되돌아오긴 했지만, 이스라엘은 어차피

애돔 길로 가야 했습니다.

에돔은 광야가 끝나는 끝자락에 있었던 지역으로, 나름 살만한 땅이

었습니다.

그런 곳에 우거하고 있던 원주민이라고 하면, 어디 만만한 자들이었

겠습니까?

전쟁의 경험이 전혀 없었던 이스라엘로서는, 강한 자들은 피할 수밖

에 없었기에 돌치게 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블레셋

도 만나야 할 상대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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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압도 거쳐야 할 나라였습니다.

그뿐입니까?

그때에 이미 최고의 땅 가나안에 살고 있던 거민들은, 당시 어느 민

족보다 강력한 자들이었습니다.

저들을 몰아내고 가나안을 차지해야 할 일이, 이스라엘에게 남겨진

큰 문제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말입니다.

‘홍해작전’이 성공한 종료일을 두고서, ‘그날에야 이스라엘의 구원

이 완성’되었다고, 성경은 평가 선언(14:30)하고 있습니다.

뭔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홍해작전’ 성공이 지니는 의미는 참으로 위대하며, 참으

로 여러 큰 유익을 가져다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당대 세상 최고의 명주요 최강의 나라 애급이 홍해에서 시체가 되는

사태가 생기자, 애급에 연하여 있던 여러 민족들과 나라들이 동시에

기력을 잃고 말았던 것입니다.

실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는 영적 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상태 중의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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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급의 병사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시체가 된 것을, 직접 눈으

로 목격했던 이스라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두려워했던 애급이, 이제는 더 이상 무

섭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전과는 다르게 담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들과 더불어 여호와를 노래했습니다.

노래의 가사는 애급을, 더 나아가 세상을 이겼다는 확신에 찬 내용

이었습니다.

“열방이 듣고 떨며 블레셋 거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에돔 방백이 놀라

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15:14~15)

열방들이 홍해 사건을 듣고는 놀라고 있으며, 강대한 블레셋 거민들

도 두려움에 잡혀있고, 에돔이 놀라며 모압이 떨고, 가나안 거민들

까지 낙담하고 있다는 가사입니다.

노래에서 열거된 나라들은, 모두가 이스라엘의 대적이요, 복병들이

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한걸음, 한걸음, 그들의 하루하루는 이 노래를

확인하는 것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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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작전’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

지 담대함을 유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애급을 명주로 삼고 있던 세상 나라들과 민족들은, 애급과

함께 모두들 기력이 꺾이고 말았으니, 애급의 마병들과 함께 홍해에

서 심판받았던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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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작전’은 십자가의 예표

하나님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인간구원’과 ‘마귀진멸’ 두 가지 사명을

주셨고, 예수는 이를 십자가에서 이루셨다. 홍해사건은 십자가의 예표였다.

예수께서는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아니하리니”(요14:30)라

고 하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하신 말씀이었습니까?

‘갈보리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고난과 죽음을 맞게 되었으니, 이후에는 너희와 말을 많

이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세상 임금이 내게 나아오겠으나, 저는 내

게 관계할 것이 없노라”는 의미였습니다.

세상 임금 마귀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심판받을 것이니, 더 이상 당

신과 관계할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요16:11)

예수님의 갈보리 십자가로,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세상 임금이 심판받았다’는 말씀이. 홍해의 성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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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b)

“너희가 천국에 들어올 때까지는 앞으로도 환난을 당할 것이지만,

그러나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마귀가 심판을 받았으니 너희는 “담대하라”『담대하라』고 하셨습

니다.

하나님은 그 예표로서, 홍해 사건을 만나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8장에는, 귀신들린 거라사 광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광인은 수천의 군대 귀신에 붙잡혀, 날마다 길길이 소리 지르며

자신과 가족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착고를 차고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 광인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께서 그를 괴롭히던 군대귀신을 쫓아내시니, 그 귀신들은 돼지

떼에게 들어갑니다.

돼지들은 그길로 호수에 뛰어들어 모두 몰사하고 맙니다.

그 순간 군대 귀신에 붙들려 있던 그 광인은, 아주 멀쩡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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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라사 광인은 2천 마리 돼지들의 시체를 직접 눈으로 확인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는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지금까지 그를 짓누르고 있던 두려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동안 자신을 공격하던 존재가 죽은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후 그는 받은바 자유, 받은바 나음, 받은바 구원을 당당히 지켜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자 예수께서는, “나를 따르려 하지 말고 네

가 본 바, 경험한 바를 온 동네에 다니며 증거하라”고 하십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날 그 사건 이후, 거라사 지방에는 전에 없던 큰 일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과 광인의 소문을 들은 인근 사람들이, 예수님과 그 따르는

자들을 두려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에 광인이었다가 나음을 받은 자까지 두려워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예수께 간청합니다.

“죽은 돼지 값은 청구하지 않을 터이니, 제발 우리 동네에서 빨리 떠

나가 주십시오. 이제 더 이상 근처에도 오지 마십시오.”

예수께 어떤 짓도 하지 않고 길을 열어 줄 테니, 자기 동네에서 어서

나가달라고 재촉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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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구약으로 신약을 보고 있습니다.

신약으로 구약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신약과 구약이 하나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구약이 신약을 말해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홍해작전’의 실제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발견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홍해 사건으로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

가를, 그림자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유월 사건, 곧 출애굽의 구원에서 그치지를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너희 마음대로 가나안까지 들어가라’고 하지도 않으셨습

니다.

‘출애굽’에 이어 ‘홍해작전’까지, 당신의 사자들을 앞세워 이스라엘

을 밀어붙임으로 애급을 심판, 곧 ‘멸애급’ 『멸애급』하셨던 것입

니다.

애급이 심판 받았다는 사실은, 하나님께 진정한 영광이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급 군사들의 시체를 목격함으로, 받은바

구원을 담대하게 지킬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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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작전’을 예수님 십자가의 예표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구원’에만 그치지 않고 ‘마귀진멸’, 이 둘 다를 동시에

성공시킨 사건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구원’과 ‘마귀진멸’을 동시에 이룬 사건』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인간구원’과 ‘마귀

진멸’ 이 두 가지를 사명으로 주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함을 얻게 하려는 것(요3:16)

과, 영생을 얻은 저들이 그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마귀의 일을 멸하

는 목적(요일3:8)을 가지고 오셨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었습니다.

인간구원의 안전보장을 위하여, 마귀의 일을 멸하는 것은 필수조건

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실 때 부여하신 두 가지

사역이 있었으니, 하나는 ‘인간구원’이요, 다른 하나는 ‘마귀진멸’이

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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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마귀가 진멸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마귀진멸이 전제되어야, 인간구원이 지켜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

까?

바꾸어 말하면 마귀진멸을 하여야, 인간구원을 완전케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요일3:8b)

왜 그런지를 확인해드리겠습니다.

자, 보십시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마12:29)

“강한 자, 곧 세상 임금 마귀, 구약이 말하는 애급의 바로 왕, 그런

존재를 먼저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들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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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는, 그가 늑탈해간 하나님 당신의 백성

을 뽑아내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멸애급의 하나님’보다 ‘출애굽의 하나님’만 더 강조하고 있지는 않

습니까?

‘마귀진멸의 하나님’(요일3:8)보다, ‘예수 내 구주’(요3:16) 곧 ‘내

구원’에 더 비중을 두고 있지는 않느냐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구원받은 사실에만 치중한 나머지, ‘예수 내 구주’만

찬양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 중심이 아니라, 내 받은 구원이 중심이라는 비

판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십자가로, 유월절이 말하는 구원과 홍해작

전이 말하는 마귀 심판, 이 둘 다를 동시에 이루어내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담대하십시오.

마귀는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이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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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우리에게 어떠한 환난이 온다 할지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

다.

마귀의 존속들이 무섭게 다가오더라도, 주 예수의 이름으로 ‘물러가

라’ 명하십시오.

여러분을 속이려는 악한 것들을 물리치십시오.

귀신들이 한 길로 숨어들어오다가 일곱 길로 도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담대하십시오.

그 담대함으로 가나안 땅 천국에 입성하는데 성공하십시오.

마귀가 심판 받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영광은 초라한 것이 될 것이

며, 우리의 받은바 구원도 다칠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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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렙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유월절 출애굽에 이어 홍해의 큰 이적을 이루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이스라엘 자손들로 애급 마병들의 시체를 보게 하심은, 그들이 받은

바 구원을 끝까지 지켜나갈 수 있는, 믿음과 담대함을 주기 위함이었

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나이다.

세상 세력들도 홍해의 그 밤에 애급과 함께 심판받았다는 것을, 우리

로 여실히 확인시켜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어떠한 환난이 다가올지라도, 우리와 관계할

것이 없다는 믿음으로 당당히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께서 거라사 지방을 성공적으로 통과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담대

하게 나아가기를 원하나이다.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귀하신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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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성도가 보내온 글

홍해 작전이 우리에게 떠올리는 것은, 이스라엘은 구원 받았고

애급 은 멸망 받았다는 것입니다.

홍해를 건넜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바로 가나안에 입성한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또 다른 적들과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간과해온 매우 중요한 내용을, 갈렙 목사님이 밝

혀주셨습니다.

중요한 핵심은, ‘그 날’을 구원의 완성으로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그 날’에 종의 신분이던 이스라엘은 자유인이 되었고, 악의 축과

같은 애급은 수장되었으며, 열방들은 모두 혼이 빠져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로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만방이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가나안 인들이 크게 낙담하고 두려워함으

로, 사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의 충분조건”은 이미 형성된

것입니다.

홍해사건은 예수 십자가의 예표였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인간구원과 동시에, 마귀심판이 완성된 것이었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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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가 마귀를 두려워하여, 그가 우리 영혼을 멸할 수 있다

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십자가 권능을 절반만 이해하는 것입니

다.

우리의 신앙이 현실적 시각에 매여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다 아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이해하지를 못하여 믿음이

될 수 없는 중요한 내용들을, 갈렙 목사님께서 조목조목 짚어 말

씀해 주심으로, 우리 믿음이 견고해질 수 있음에 감사를 드립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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