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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RD Together 기관소식 「내 一生 祖國과 民族을 爲하여」 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휘호를 새긴 휘호석은 1974년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舊 중앙 공무원교육원) 대전청사 시절 충북 영동군 심천면 하천에서 발굴한 자연석이다. 휘호 문안 구성은 노산 이은상 선생에게 의뢰 「내 一生 祖國과 겨레를 爲해」 「쓰이는 사람이 되자」 「救國濟民」등 5개의 문안을 받았으나 「내 一生 祖國과 民族을 爲하여」를 최종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휘호를 받아 새겼다. 「애국애족의 산 교육실천」이 새겨진 또 하나의 휘호석은 조성년도가 1972. 1. 로 표기되었는데 명확한 자료 가 없어 과거 인재원의 장충동청사나 청량리청사에 조성되어 대전으로 이전한 것이 아닌가 미루어 짐작을 하고 있다. 이 두 점의 휘호석은 1981년 과천청사 개청시 이전을 검토하였으나 기술력 부족과 과다비용으로 2016년 7월 27일까지 체신공무원 교육원(現 KT인재개발원)에 그대로 존치되어 왔다. 우리는 인재원의 역사를 옮겼다!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의 충북혁신도시 진천청사 이전 1년여를 앞두고 가장 큰 숙제는 신청사에 어떻게 인재원 의 정체성을 계승시킬 것 인가였다. 70여 년 전통의 대한 민국 국가공무원교육훈련기관으로서 인재원의 역사와 전 통이 단절되지 않고 면면히 이어질 수 있도록 하려면 어 떻게 해야 할 것인지 깊은 숙고의 날들이 이어졌다. 그 중 심에 ‘교육훈련을 통한 공무원의 확고한 국가관 확립’이라 는 교육이념이 담긴 「내 一生 祖國과 民族을 爲하여」와 「애 국애족의 산 교육실천」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휘호 석 이전이 있었다. 휘호석 이전 문제는 역대 원장들의 관심사항으로 매번 「KT인재개발원」측과 접촉을 해 왔으나 번번이 무산되었 다. 이번에도 수차례 의사를 타진했으나 역시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KT인재개발원」은 KT의 자산관리부문 자회사인 「KT 에스테이트」 소유였고 교육시설 위탁·임대 사업으로 수 익창출을 하는 전형적인 민간기관으로 1972년 인재원의 대전청사 이전 당시 조성된 태극무늬 중앙정원과 함께 호석을 교육생들의 포토존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공무원 에 대한 교육이념을 담고 있는 휘호석의 가치와 상징성이 살아 숨쉬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상황 이었다. 그러나 휘호석 자체가 양쪽 기관 모두 등재된 재 산물이 아니라 인재원의 입장에서 법적인 구상권과 소유 권을 주장할 수 없는 아주 애매한 상태였다. 기존과 같은 전화 통화나 서류검토 등 소극적인 방식으 로는 도저히 돌파구를 찾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 고 민 끝에 이명식 교육지원과장이 사전예고 없이 2015년 5 월 21일 「KT인재개발원」현지방문을 단행했다. 01. 02. 이전하기 전 휘호석 03. 태극정원 01. 02. 03. 2016년 7월 28일 새벽 2시, 어둠을 가르며 거대한 몸집의 트레일러 2대 가 집채만 한 암석을 H빔 속에 담아 싣고 서서히 진천 혁신도시 국가공 무원인재개발원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국가공무원 인재양성의 상징물인 휘호석이 35년 만에 본래의 주인을 찾아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의 신축 청사로 들어서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취재·정리 홍종의 휘호석 연혁 82/83

82/83 HRD Together · 2017-01-04 · HRD Together 기관소식 「내 一生 祖國과 民族을 爲하여」 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휘호를 새긴 휘호석은 197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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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82/83 HRD Together · 2017-01-04 · HRD Together 기관소식 「내 一生 祖國과 民族을 爲하여」 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휘호를 새긴 휘호석은 1974년

HRD Together

기관소식

「내 一生 祖國과 民族을 爲하여」 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휘호를 새긴 휘호석은 1974년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舊 중앙

공무원교육원) 대전청사 시절 충북 영동군 심천면 하천에서

발굴한 자연석이다. 휘호 문안 구성은 노산 이은상 선생에게

의뢰 「내 一生 祖國과 겨레를 爲해」 「쓰이는 사람이 되자」

「救國濟民」등 5개의 문안을 받았으나 「내 一生 祖國과

民族을 爲하여」를 최종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휘호를

받아 새겼다. 「애국애족의 산 교육실천」이 새겨진 또 하나의

휘호석은 조성년도가 1972. 1. 로 표기되었는데 명확한 자료

가 없어 과거 인재원의 장충동청사나 청량리청사에 조성되어

대전으로 이전한 것이 아닌가 미루어 짐작을 하고 있다. 이 두

점의 휘호석은 1981년 과천청사 개청시 이전을 검토하였으나

기술력 부족과 과다비용으로 2016년 7월 27일까지 체신공무원

교육원(現 KT인재개발원)에 그대로 존치되어 왔다.

우리는 인재원의

역사를 옮겼다!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의 충북혁신도시 진천청사 이전

1년여를 앞두고 가장 큰 숙제는 신청사에 어떻게 인재원

의 정체성을 계승시킬 것 인가였다. 70여 년 전통의 대한

민국 국가공무원교육훈련기관으로서 인재원의 역사와 전

통이 단절되지 않고 면면히 이어질 수 있도록 하려면 어

떻게 해야 할 것인지 깊은 숙고의 날들이 이어졌다. 그 중

심에 ‘교육훈련을 통한 공무원의 확고한 국가관 확립’이라

는 교육이념이 담긴 「내 一生 祖國과 民族을 爲하여」와 「애

국애족의 산 교육실천」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휘호

석 이전이 있었다.

휘호석 이전 문제는 역대 원장들의 관심사항으로 매번

「KT인재개발원」측과 접촉을 해 왔으나 번번이 무산되었

다. 이번에도 수차례 의사를 타진했으나 역시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KT인재개발원」은 KT의 자산관리부문 자회사인 「KT

에스테이트」 소유였고 교육시설 위탁·임대 사업으로 수

익창출을 하는 전형적인 민간기관으로 1972년 인재원의

대전청사 이전 당시 조성된 태극무늬 중앙정원과 함께 휘

호석을 교육생들의 포토존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공무원

에 대한 교육이념을 담고 있는 휘호석의 가치와 상징성이

살아 숨쉬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상황

이었다. 그러나 휘호석 자체가 양쪽 기관 모두 등재된 재

산물이 아니라 인재원의 입장에서 법적인 구상권과 소유

권을 주장할 수 없는 아주 애매한 상태였다.

기존과 같은 전화 통화나 서류검토 등 소극적인 방식으

로는 도저히 돌파구를 찾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 고

민 끝에 이명식 교육지원과장이 사전예고 없이 2015년 5

월 21일 「KT인재개발원」현지방문을 단행했다.

01. 02.이전하기 전 휘호석

03. 태극정원

01.

02. 03.

2016년 7월 28일 새벽 2시, 어둠을 가르며 거대한 몸집의 트레일러 2대

가 집채만 한 암석을 H빔 속에 담아 싣고 서서히 진천 혁신도시 국가공

무원인재개발원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국가공무원 인재양성의 상징물인

휘호석이 35년 만에 본래의 주인을 찾아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의 신축

청사로 들어서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취재·정리 홍종의

휘호석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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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2: 82/83 HRD Together · 2017-01-04 · HRD Together 기관소식 「내 一生 祖國과 民族을 爲하여」 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휘호를 새긴 휘호석은 1974년

이명식교육지원과장│ 검토 과정에서 휘호석이 우리 인재원의 역사

에 미치는 가치와 의미를 누누이 설명을 했지만 부정적 반응이었습니다.

이전협조공문 조차도 받지 않겠다는 입장이었으니까요. 또한 잊을 만하

면 왜 또 그 문제를 들춰내 괴롭히느냐 강력하게 항의를 하기도 했고요.

제가 알기로는 역대 원장님들이 취임을 하면 한 번씩은 거론되었던 문

제였던지라 그쪽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갔습니다. 차라리 그 당시 우

리 인재원에서 좀 더 적극성을 보였더라면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대면을 하고 부딪쳐 보자는

마음으로 현지방문을 했던 것입니다.

이명식교육지원과장│ 걱정을 했는데 정작 현지에 도착해 보니 책임

자인 센터장이 웃으면서 맞아 주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이미 인재원의 입

장은 검토과정에서 사전에 충분히 설명을 한 상태라 상대방의 의견을 경

청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휘호석이 설치된 현장을 직접 보여주며 자기들의 입장을 설

명했습니다. 휘호석 「내 一生 祖國과 民族을 爲하여」 는 기관의 정중앙

에 위치해 있고 「애국애족의 산 교육실천」은 식당 입구에 자리 잡고 있

어 교육생들의 명소가 되어 이미 기관차원에서 상징화 되었다는 설명

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관을 해 줄 수 없다는 강경한 의사 표현이었습니다. 아

울러 과거에도 이전문제가 거론 될 때마다 자체 보고를 통해 나온 결론

이 부정적이었다는 말도 전하면서요. 특히 이관을 결정하는 문제가 기관

조직의 절차상 굉장히 복잡하다는 애로사항을 피력했습니다. 그래도 이

번 한 번만 더 수고를 해 달라, 즉 보고를 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

랬더니 마지못해 보고를 해 보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습니다. 그래도 방

문 성과가 있었습니다.

마지막 심정으로 진천 청사 신축을 맡은 인본산업에 매달렸습니다. 인

본산업 측에서도 역시 난감해 했습니다. 오죽하면 절박한 마음에 휘호

석 이설을 못하면 사직을 해야 한다고도 말했을까요. 순전히 목숨을 걸

고 매달리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신축현장 책임을 맡은 신중모 소

장이 마지못해 승낙을 했고 그때부터 이전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무

엇보다도 큰 용기를 얻은 것은 한순동 기획부장님의 한 마디였습니다.

“용구씨, 설혹 이전을 하다가 휘호석이 파손되어서 접착제로 조각조각

이어 붙인다고 해도 그 또한 휘호석 역사의 일부로 남을 거야. 한번 해 보

자고.” 이렇게 말입니다. 지나고 보니 그 모든 일련의 과정들이 꿈만 같습

니다. 도움을 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막상 이전 업체가 결정되자 실무진들은 사명감이 더해 완전하고 완벽

한 이전에 대한 도전의식이 생겼다. 인본산업 측에 이전에 따른 기술 대

안을 제시해 달라고 했지만 전혀 무방비 상태였다. 경험이 전무한 상태

인데 기술 대안을 달라는 것이 무리였는지 업체 측과의 갈등이 점점 깊

어졌다. 업체에서 기술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자 한순동 기획부장을 중심

으로 실무진들이 머리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고민하던 실무진들은 현장

에 가서 직접 판단을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리하여 2016년 6월 2일 한

순동 기획부장, 정지만 기획협력과장, 김용구 주무관이 급히「KT인재개발

원」으로 떠났다. 물론 국내에서 내놓으라 하는 석재가공회사 전문가들을

현지에 대기 시켜 놓은 상태였다.

옥동석원장│ 휘호석 이전 결정에 큰 부담이 있었다는 점을 이해해 주

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저로서는 큰 부담이 있었습니다. 1970년대

에 통했던 공무원 교육의 표어가 과연 지금도 의미가 있는가 라는 점 때

문이었습니다. 국가지상주의, 병영주의 색채가 짙다는 비판에 대해 어떻

게 해명할 것인가. 그런데 저는 우리의 선배 공직자들이 이 표어를 기리

며 자기희생의 정신을 발휘했다는 사실을 여러 문헌과 대면을 통해 깨

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순동 기획부장의 주장이 결정적으로 결심을 굳히게 했습

니다. 1981년 과천청사 개청시 비록 원본 휘호석은 아니지만 ‘내 一生 祖

國과 民族을 爲하여’ 라는 휘호석을 조성하여 현재까지 지난 35년간이

나 인재원의 교육이념으로 면면히 계승해 왔다는 것입니다. 진천 신청사

에 원본 휘호석을 옮기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교육이념을 계승하는 당연

한 일이라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이 휘호석이야말로 대한민국 형성기의 선배 공직자들이 가

졌던 희생정신을 느낄 수 있게 하고 또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한 헌신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고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오늘날 우리 공직자들에게 과거를 느끼고 미래를 설계하는

초석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옥동석 원장의 휘호석 이전 결심이 굳혀지자 정작 이전 실무

자인 김용구 주무관은 새로운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1981년 과천 청

사 개청 시에도 운송의 기술적인 문제로 이전 시기를 놓치고 35년 동안

방치했던 휘호석이었다. 현재 운송기술이 발달했다 해도 무려 30톤이었

고 또 하나는 15톤이었다. 그것도 석질이 무른 자연석이라 완전한 운송을

누구도 보장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미 휘호석 이전 문제가 거론되고 나

서 초기부터 운송업체를 물색해 왔지만 모두들 현지 실사를 한 후 한 걸

음 뒤로 빠지는 상황이었다. 전문업체라지만 보험 가입도 안 되는 이런

위험부담의 큰 대상물을 옮긴다는 것에 선뜻 나서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김용구주무관│ 업체 선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휘호석 자체

에 균열이 많아 책임지고 선뜻 나서는 곳이 없고 업체들도 설치 된지 35

년이 넘는 자연석을 이설해본 경험이 없다는 것이 제일 큰 장벽이었습

니다. 기대를 했던 보령석재에서는 자연석에 균열이 많다는 것도 있지

만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휘호석이라는 부담감 때문에 결국 포기를 했

습니다.

질문│ 「KT인재개발원」에서는 휘호석 이관 협의 자

체를 강력히 거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 상황

에서 무작정 현지방문협의를 단행하셨습니다. 당

시의 상황을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질문│ 시대 상황상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석 이전

을 결정한다는 것이 기관장의 입장에서 큰 부담이

되셨을 줄 압니다. 어떻게 그렇게 어려운 결정을 하

셨는지요.

질문│ 실무자로서 업체 선정 과정에서 굉장히 힘

들었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 인본산업에서 과업을

맡아 성공을 했지만 어떤 설득 과정과 어려움이 있

었는지요.

질문│환영을 받지 못하고 부탁하는 입장에서의 방

문이라 분위기가 상당히 거북하셨을 것 같은데 방

문결과는 어땠습니까?

현지 방문협의 이후, 모든 절차를 공문으로 하지 말고 담당자간 메일

을 주고받자고 협의되었다. 공문처리시 의사 결정기간이 장기화 되어 자

칫하면 이전 시기를 놓칠 것 같아 인재원 측에서 강력히 요구한 사항이

었다. 2015년 9월 3일 「KT인재개발원」으로부터 전화상 구두 답변이 왔다.

자체 보고 결과 휘호석 이관이 불가하다는 내용이었다.

혹시나 기대를 했었지만 한편으로 예상했던 결과였다. 급히 자체 실

무 대책회의가 열렸다. 회의 결과 인재원의 입장에서는 충북혁신도시로

의 청사 이전이 명분상 휘호석을 되찾을 수 있는 가장 큰 호기라고 의견

이 모아졌다. 이 시기를 놓치면 앞으로 어떤 사유로든 휘호석 이전이 불

가하다는 판단이었다.

결론적으로 휘호석 이전의 당위성과 필연성을 주장할 수 있는 최적기

임을 감안,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설득을 계속해 나가자는데 의견이 모

아졌다. 또한 앞서 언급한 대로 휘호석 자체는 등재된 재산물이 아니라

서 복잡한 행정절차 없이 양 기관장의 의사결정에 따라 상대적으로 수월

하게 결론이 날 수도 있다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이 모아졌다. 지속적

인 설득의 성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은 2016년 2월이었다. 「KT에스테

이트」 본사로부터 3월 이전에 최종 의사결정을 해 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KT에스테이트이메일답변│ 오랜만에 연락드립니다. 3월 이전 의사

결정을 완료하기로 약속하였고 오늘이 3월 마지막 날임에도 불구하고 완

벽한 결론이 안 나고 있어 죄송할 따름입니다. 제 나름대로는 손쉬운 의

사결정이라 생각했었는데 많은 임원 분들이 굳이 현 시점에서 이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하고 이전에 따른 여론 등도 우려하고

있는 상황입니다.(이후 생략)」

절망적인 답변이었다.

인재원실무자이메일전송│ 중앙공무원교육원 대전 청사 개청시 설

치되었던 휘호석 2점에 대해 양도 문제를 협의한 바와 같이 동 휘호석은

“교육훈련을 통한 공무원의 확고한 국가관 확립” 이라는 박정희 대통령

의 의지를 담은 유일한 친필 휘호로 현재까지 인재원의 교육이념으로 계

승되고 있어 시대적 역사적으로 매우 필요한 상징물입니다.(이후 생략)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실무진들은 「KT에스테이트」뿐만 아니라 모

회사인「KT」의 관련 부서들을 줄기차게 찾아 다녔다. 신축 청사의 공사감

독과 병행을 해야 하는 아주 험난한 나날이었다. 아울러 옥동석 원장도

이전에 따른 당위성을 각계각층에 설명하는 한편 유관기관의 기관장과

관계자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현실로 나

타났다. 드디어 2016년 4월, 「KT에스테이트」본사로부터 이전을 허용한다

는 반가운 결정을 이끌어 내었다.

기관소식

휘호석의 균열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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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동기획부장│ 현장에 내려가기 전에 실무진들과 휘호석의 이전방

식에 대해 무척 고민을 했습니다. 아무리 찾아 봐도 육중한 자연석 휘호

를 통째로 옮겼다는 사례는 없었고 거의가 문화재급의 석물 운반이 전부

였습니다. 순전히 자체에서 판단하고 추진해야 될 일이었습니다.

균열부분에 에폭시를 주입하는 것은 기본적인 기술 대안이었고, 도자

기 같은 깨지기 쉬운 상품을 포장하는 방식에서 착안해 휘호석을 덮는

거대한 상자를 짜 그 속의 빈 공간에 고밀도 액체 스티로폼을 주입해 굳

힌 다음 운송하는 방안도 검토했습니다. 그 외에 학부 시절 물리학도로서

의 과학적 지식을 응용해 상상력을 총동원했지만 정작 업체에서 그것을

실행해 낼 역량이나 의지가 있을지도 미지수였습니다. 현장 실사를 가서

도 막막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석재가공회사의 전문가들을 만났지만 모

두 난색을 표할 뿐이었지요.

제가 그 순간에 주저한다면 일을 하는 업체나 실무진들이 믿음을 갖

지 못하고 일을 추진 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어떤 일을 추진함에 있

어 믿음이란 절반의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저 역시 처음에는

언덕위에 버티고 있는 휘호석의 거대함에 압도되어 내심 걱정이 앞섰지

만 시간이 흐를수록 옮길 수 있다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아

마 휘호석의 기운이 제게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북돋아 주었거나, 휘호

석 스스로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겠다는 암시를 제게 주었는지

도 모르겠습니다.

현장 실사를 다녀 온 실무진들은 2016년 7월 27일로 이전 운송일자

를 잡았다. 그때부터 인재원의 기술자원이 총동원되기 시작했다. 건축·

토목 전문가인 배중호 관리계장이 이전현장을 총괄 지휘하기로 하고 정

원식 주무관이 상황에 맞는 전문적인 기술 대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 첫째로는 파손에 대비한 휘호석 탁본 뜨기였다. 탁본이라도 떠서

진천 신청사에 휘호석을 새롭게 조성할 계획까지 고려했던 사항이었다.

그만큼 휘호석 이전은 인재원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다. 둘째가 균열부분

보강 작업, 셋째가 휘호석 양중시 하중 문제와 차량 탑재 시 충격 감소

의 방법이었다.

기술검토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휘호석의 차량 탑재 시 세워서 운반하

느냐 눕혀서 운반하느냐 까지 세심하게 논의되었다. 결국 H빔의 틀을 제

작해 안착을 시켜 운송하는 것으로 최종결론을 냈다.

또 하나의 난제는 운송이었다. 보통 화물차량의 적재함 높이가 1m 이

상으로 휘호석을 세웠을 시, 4.5m에 이른다. 그리고 대전 「KT인재개발

원」에서 진천 신청사까지의 이동 거리가 80km. 주 노정이 지방도이며 교

량 등을 지날 때의 하중 문제와 터널 통과, 노면 요철, 교통체증 유발 문

제 등 대비해야 할 숨은 장애물이 산적해 있었다. 급히 업체 측에 요구

하여 무진동 로우베드 차량(Lowbed Trailer, 적재함 높이 0.4m∼0.8m)

을 섭외하고 화물 전체 높이를 4m 이하로 낮추었다. 그래도 미심쩍어 사

전에 이동경로를 세밀하게 답사하여 운송 장애물에 대한 대처에 만반의

준비를 했다. 이전을 일주일 앞두고 휘호석의 탁본을 뜬 후 균열부분에

에폭시를 꼼꼼하게 주입했다. 에폭시가 굳기만을 기다리는 일주일이 아

주 더디게 흘러갔다.

2016년 7월 23일 토요일, 배중호 관리계장, 김용구 주무관, 정원식 주

무관이 본격적인 사전 준비를 하기 위해 「KT인재개발원」에 도착했다. 이

관 결정이 내려지자 「KT인재개발원」 측에서도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출

장 실무자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휴무일임에도 관계자들이 총 동원되

어 지원을 해 주었다. 특히 실무책임자인 정진수 센터장은 이전 협의 단

계부터 이전 준비까지 인재원의 실무진들과 고락을 같이 했다.

배중호관리계장│ 기술전문가요? (웃음) 건축·토목일이라면 평생 해

온 일이라서 거칠 것이 없는데 자연석 이전은 저도 생전 처음입니다. 제

가 한 일은 현장에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응급구조대 같은 역할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령 업체 측에서 준비해 온 로프가 약해 보이면 두세 겹으

로 포박을 하자하고 또 양중시 크레인의 위치라든가 그런 의견을 보태

는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입이 아프게 잔소리를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으로 경험한 일이지만 성공적인 이전을 마치

자 마치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된 듯 뿌듯합니다. 실무진들 모두 저와 똑같

은 심정일 겁니다. 솔직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한다면 이번보

다는 더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모

해 보이는 일도 도전을 하면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 아주 소

중한 경험이었습니다. 함께 고생하신 모든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입니다. 감사드립니다.

기관소식

질문│현지에서 석재 전문가들이 휘호석의 균열 등

상태를 진단하고 완전한 운송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운송하는 것으

로 단호한 결정을 내리게 되셨는지요.

질문│이전 현장을 총괄 지휘하게 되어 굉장히 부

담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휘호

석을 온전히 들어내고 운송하여 파손없이 현지에

무사히 안착시키는 책임을 맡으셨는데 앞서 설명

한 사항 외에 기술전문가로서 다른 대안이 있었는

지요. 이전 준비작업 기간(7. 24∼7. 26)에는 그렇게 날씨가 무덥고 화창

하더니 아침부터 검은 구름이 몰려들고 날씨가 흐렸다. 몇 방울 비까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안착지인 진천 신축 청사에서 휘호석 좌대를

마련하고 대기중이던 유재문 주무관의 전화가 걸려왔다. 진천에 폭우

가 내려서 대전도 그런 상황인지 걱정이 되어서 확인차 연락한 것 이었

다. 일기예보에도 충청지방에 비가 온다고 했던 터라 정말 폭우라도 내

리면 불가피하게 운송 작업을 미룰 수밖에 없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그

런데 잠시 후 거짓말처럼 날이 화창하게 개기 시작했다. 천우신조(天佑

神助)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그날 150톤급 크레인으로도 충분할 것이라고 장담하던 업체에서는

만일을 대비해 대당 20억원에 달하는 300톤급 첨단 크레인을 조달했

다. 휘호석과 좌대의 접합이 오랜 시간에 걸쳐 콘크리트로 단단히 결합

되어 있어서 분리가 어려울 경우를 가정한 조치였다. 일단 로프를 걸

어 들어보고 안되면 좌대 밑면을 천공하여 H빔을 괴어 통째로 들어 보

려는 만일의 경우까지 이미 고려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드디어 크레인

의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기 시작했다. 양중 작업중 가장 긴장되는 순

간이었다.

2016년 7월 27일, D-day!

휘호석 들어 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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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동기획부장│ 우리 인재원의 오랜 숙원사업인 휘호석을 무사히

이전했다는 성취감이나 자부심 보다 부분적으로나마 인재원의 정체성

과 역사를 이어가는 가교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낍니다.

먼 훗날 우리들의 이런 노력들이 휘호석으로 인해 인재원 역사의 한 페

이지로 기억되고 인재원을 방문하는 모든 공직자에게 휘호석이 담고 있

는 공직가치의 함축적 의미가 길이 되새겨 졌으면 합니다. 옥동석 원장

님의 말씀처럼 공직자로서, 인재원의 가족으로서 과거를 느끼고 미래를

설계하는 큰 재산을 가질 수 있게 저와 함께 큰일을 이뤄낸 실무진들에

게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실무자인 김용구 주무관에게 특별한 고마움

을 전하고 싶습니다.

다른 차원의 얘기지만 이전하기 전의 휘호석 「내 一生 祖國과 民族을

爲하여」는 높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어서 위엄과 카리스마가 넘치는 모습

이었다면 진천 청사에서는 평지에 위치하고 있어 따뜻하게 포용하는 느

낌을 줍니다. 저는 이것을 지금의 시대가 요구하는 봉사하는 공직자, 낮

은 곳으로 임하는 공직자의 리더십像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것은 아닐

까 생각해 봅니다. 아울러 휘호석 후면에는 푸르고 곧은 장송을 심어 공

직자의 절개와 기백을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육중한 휘호석이 좌대에서 분리되어 가뿐하게 들

어 올려졌다. 다행히 휘호석은 안착부분의 외부만 시멘트 마감이 되어

있었고 내부는 모래였다. 손에 땀을 쥐며 잔뜩 긴장을 하고 있던 실무

진들은 묘한 허탈감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어서 들어 올려 진 30톤

의 휘호석이 조심조심 화물차량 적재함의 H빔 틀 속에 무사히 안착되

었다. 곧 이어 15톤 휘호석의 양중작업은 훨씬 수월하게 마무리 되어

상차되었다. 그때서야 실무진들은 안도의 긴 한숨을 내쉬고 조바심에

바짝 마른 목을 축였다.

한 여름의 밤은 더디게 왔다. 진천으로의 출발 시간을 밤 23:00로 잡

았다. 산 너머 산이라는 말처럼 휘호석을 화물차량에 무사히 옮겨 실었

지만 앞으로 80km를 가야하는 큰 산이 버티고 있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진천에 마련된 좌대 위에 무사 안착이라는 또 다른 큰 산이 남아

있었다.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가고 예정된 시간이 다가왔다. 마침내 칠

흑같이 어두운 밤, 휘호석을 실은 두 대의 화물 차량이 진천을 향해 천

천히 출발했다. 배중호 관리계장이 비상등을 켜고 승용차로 앞장을 섰

고 두 대의 화물차량 뒤에서 이명식 교육지원과장이 역시 승용차의 비

상등을 켜며 뒤를 따랐다. 시속 30km의 속도였다. 실무진들은 마치 군

사작전을 펼치는 군인들처럼 긴박감과 비장함에 말을 아꼈다.

정상 속도라면 1시간 이내의 거리지만 3시간이 걸리는 아주 먼 길이

었다. 실무진 모두 가슴을 조이며 진천 청사에 도착한 시간이 2016년 7

월 28일 새벽 2시였다. 진천 안착 현장에서 휘호석 좌대를 지키고 있던

유재문 주무관이 강렬한 헤트라이트 속에 뛰어 들며 두 팔을 번쩍번쩍

들어 차량을 인도했다. 실무자들은 날이 밝아올 때 까지 승용차 안에서

밤을 지샜다. 아직 신청사의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라 사무실과 숙소의

공간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고 주변은 가로등조차 없어 암흑천지였

다. 정원식 주무관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캄캄하고 긴 밤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해 그나마 경직된 분위기에서 웃을 수 있었다.

날이 밝았다. 한순동 기획부장이 이른 새벽임에도 서울에서 현지로

달려 왔다. 그리고 곧 옥동석 원장도 도착했다. 07:00부터 안착 준비

작업이 시작되었고 드디어 08:00 진천 신청사 맞이마당 좌대 위에 「내

一生 祖國과 民族을 爲하여」 라는 첫 번째 휘호석이 무사히 안착되었다.

옥동석 원장, 한순동 기획부장, 이명식 교육지원과장, 배중호 관리

계장, 김용구 주무관, 정원식 주무관, 유재문 주무관은 누가 먼저랄 것

도 없이 휘호석 앞에 자리를 펴고 큰 절을 올렸다. 무사 안착에 대한

감사와 벅찬 감격이었다. 모두들 아침 식사도 못한 탓에 아쉬운 대로

빵과 우유로 허기를 달랬지만 자랑과 보람이 곁들어진 최상의 아침식

사였다.

이어서 정심원 앞 법면에 두 번째 「애국애족의 산 교육실천」 휘호석

의 안착이 시작되었다. 휘호석의 안착지가 법면이라서 열악한 작업환

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좌대에 안착되었다.

이로써 좌대위에 앉은 두 점의 휘호석은 인재원의 신축청사의 중심

축이 되어 일직선상에서 서로 마주보게 되었다. 이 또한 인재원의 정신

적 지주로 삼으려는 의미부여의 배치였다. 마침내 안착된 휘호석은 오

래전부터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안정되고 말할 수 없이 평화

로워 보였다. 비로소 휘호석이 제자리를 찾아 온 듯 하다고 실무진들

은 기뻐서 입을 모았다.

기관소식

질문│실제 휘호석 이전의 중심에서 진두지휘를 하

시고 성공적인 이전을 이끌어 내셔서 누구보다도

감회가 새로우실 텐데 소감을 말씀해 주세요.

휘호석을 트레일러에 실어 진천 신청사로 출발

과천 분원 휘호석진천 본원 휘호석

위. 정심원 앞 경사면에 안착된 휘호석

아래. 이전 실무진

좌로부터(김영민,이명식,유재문,옥동석,김용구,한순동,배중호,신중모,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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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원장 옥동석)은 전국 공공기관 교수요원의 연구 및 교수역량을 강화하

고, 교육훈련기관간 교류협력 확산을 위해 11월 24일~25일 양일간 국가인재원(과천분원)에서

「제34회 공공 인적자원개발(HRD)콘테스트 본선대회」를 개최하여 공공HRD분야 최고의 교수

요원을 선발하였다.※ 기존「중앙교육훈련경연대회」가 인재개발 강화로 2016년 명칭이 변경

公共인적자원개발 분야,

최고의 교수요원 선발

기관소식

옥동석원장│ 기관 명칭의 변경, 청사의 이전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그

러나 휘호석은 우리의 과거입니다. 어떠한 개인의 삶에서도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영광과 기쁨도 있지만 시련과 좌절도 있습니다. 희로애락의 수

많은 순간들이 교차하고 쌓이며 삶의 지혜가 생기고, 이 지혜를 통해 사

람들은 마음의 평안을 얻습니다. 한 나라의 역사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

다. 수많은 곡절 속에서 경륜이 쌓이며 국가가 번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 많은 공직자들이 이 휘호석을 보며 대한민국의 과거 역사를

생각할 줄 알고 또 미래의 비전을 꿈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질문│원장님의 재임 시기에 기관명도 바뀌고 또

충북혁신도시로의 청사 이전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하셨습니다. 거기에 맞춰 인재원의 오랜 숙원이었

던 휘호석 이전을 하셨는데 어떤 의의가 있는지요.

2016년 11월 2일 개청식 후 인사혁신처장외 간부진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은 충북 혁신도시로 이전을 완료하여 2016년

11월 2일 개청식을 가졌다. 인재원은 진천 본원, 과천 분원의 이원체

계로 운영되고 있다. 과천 분원 역시 1981년 「내 一生 祖國과 民族을

爲하여」라는 휘호석이 조성되어 35년 동안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16년 7월 28일 08:00, 「내 一生 祖國과 民族을

爲하여」, 「애국애족의 산 교육실천」 두 점의 휘호석이 35년 만에 본래

주인을 찾아 왔다. 진천 본원, 과천 분원의 두 휘호석은 “교육훈련을 통

한 공무원의 확고한 국가관 확립”이라는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의 교육

이념이 담긴 상징물이자 인재원의 역사다.

실무진들은 말한다.

“우리는 인재원의 역사를 옮겼다!”

진천 본원에 이전한 두 점의 휘호석은 이전(移轉)실무진뿐만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이전(移轉)과정을 함께 공유하고 기원했던 국가공무원

인재개발원 교직원들의 자긍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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