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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 C D - KNUwebbuild.knu.ac.kr/~china/CHR/chr2013/chr87pdf/chr87-02... · 2014. 1. 4. · FG9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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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 1: AB C D - KNUwebbuild.knu.ac.kr/~china/CHR/chr2013/chr87pdf/chr87-02... · 2014. 1. 4. · FG9 ±°'c&`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1)

朴 健 柱 (全南大)

Ⅰ 서 언

Ⅱ 주례의 胥徒와 庶民在官者

Ⅲ 職役 담당층의 복무 형태와 봉

록 지급의 문제

Ⅳ 下層 員吏의 役과 徒隸層의 役

Ⅴ lt走馬樓吳簡gt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복무 형태 및 그 성격

Ⅵ 결 언

Ⅰ 서 언

고대사회의 신분은 여러 기준으로 다양하게 나누어지지만 크게 官吏

層과 일반민(庶民 庶人)의 두 계층으로 구분되는 면이 있다 그리고

古來로 양자의 중간층으로서 이른바 庶民在官者 의 존재가 있었다

그들은 庶民이면서 관부에 給事하는 층으로 대개 관부 말단의 下吏로

복무한다 한편 고대사회의 요역제는 만민평등의 균역제를 이념으로

하지만 실제의 운영에 있어서는 신분제사회의 차등을 근간으로 각 신

분 내지 계층에 따라 요역 부과의 내용이 크게 달랐다

모든 계층의 백성은 군주에게 각 職分에 따른 奉公의 의무를 진다

요역은 그 奉公 가운데 주요한 부분을 이룬다 중국사상 봉공의 방식

을 職官과 職役과 일반 요역의 셋으로 구분하는 것도 그 체제의 해부

에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다 일반 요역 의무에 대체하여 복무하는

뜻이 아니라 官人이 될 수 있는 신분으로써 왕명에 의해 임명되는 命

이 논문은 2012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2S1A5B5A07036897)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36官의 복무는 職官이 되는 것이지만 거기에 들지 못하는 일반 吏民이

맡게 되는 職役의 세계는 매우 복잡다단하고 모호한 바가 많다

고대에서 賦役의 복무는 신분 내지 관위별로 차등이 있었다 秦漢에

서 일반 서민이 진급할 수 있는 작위는 제8등 公乘까지이고( 自公士至

公乘 民之爵也 )1) 公乘까지 士의 신분이며 官秩로는 5백석까지이다

제9등 五大夫에서부터는 신분상 下大夫 이상이고 관질로는 (比)6백석

이상에 해당한다 公乘 이하를 吏民爵이라 한 것은 서민도 공승까지는

진급할 수 있기 때문이고 또한 6백석 이상은 官( 自五大夫至徹侯 則

官之爵也 )2) 5백석 이하가 吏인 까닭이다 그리고 5백석에서부터 아

래로 백석 이하 斗食에 이르는 位도 크게 두 계층으로 구분되었다 縣

令長丞尉 등의 官長 내지 副官 급들은 각기 속하의 掾史를 辟召

하여 임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양자의 경계선이 2백석과 1백석이

었기 때문에 전자는 長吏로서 여러 특혜와 우대를 받았고3) 후자는 小

吏로 칭해지며 下待를 받았다 이러한 사정으로 長吏는 吏이면서 官의

대우를 받고 官으로 칭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마찬가지로 신분은 서민

이면서 吏職에 있게 되면 吏로 칭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당

시 官制上 小吏에 員數가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

다 따라서 그들에게도 봉록이 지급되었지만 매우 빈약한 것이었다 그

런데 五大夫 이상의 官位는 賦役 면제의 특혜를 받았고 전 계층은 자

신의 신분과 職位上에서 奉公을 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五大夫 내지 6

百石官 이상은 官職에서의 복무(직무) 즉 職官이 곧 奉公이었다 그렇

다면 官位의 대접을 받는 5백석 이하의 長吏를 제외한 公乘 이하 서민

1) 王先謙 漢書補注 卷19上 (北京 中華書局 1983 p306) 漢書 권19 百官公

卿表7上의 注引 錢大昭曰 續漢書 百官5 注引 荀綽晉百官表注曰 吏民爵不

得過公乘者

2) 위의 漢書補注 p3063) 秦漢시기 長吏의 범위와 시기에 따른 변화에 대해 몇 가지 다른 견해들이 있

다 이 문제는 이 글에서 핵심 주제가 아닌 까닭에 상론하지 아니하고 가장

널리 통용되는 설에 의한다 長吏에 대한 근래의 주요 專論으로는 鄒水杰 秦

漢長吏考 (中國史硏究 2004-3 2004 8) 張欣 秦漢長吏再考 -與鄒水杰先

生商榷 (中國史硏究 2010-3 20108)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37의 吏職은 어떠하였을까 그 문제는 그 吏職이 일반요역에 대신하는

것이었는가의 여부 및 그들에게 賦役 면제의 특혜가 있었는가 없었는

가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지는데 고대사에서 그 사항이 분명치 않다

그래서 이 문제도 본고의 과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漢代의 여러 자료와 孫吳期의 lt長沙走馬樓吳簡(이하 lsquo吳簡rsquo

으로 약칭)gt의 여러 簿籍에 某吏로 칭해지는 이른바 吏戶(吏家)가 있

는데 그들은 그 吏職에 복무하면서 동시에 일반서민과 마찬가지로 여

러 賦稅役을 부담하고 있으며 세습호이고 그 家內 식구 모두 그 吏役

의 범주에 예속되어 관부에 給事하는 등의 諸役에 차출된다 lt吳簡gt

에 의하면 만약 그 吏役의 노동력에 부족분이 생기면 戶의 9품 가운데

下品이나 下品之下의 戶에서 그 수만큼 충원된다(후술) 이들은 대대로

관부에 예속된 신분으로 하급의 吏에 給事하는데 후한 후기의 자료에

서 이미 일반 서민 보다 그 부담이 더 크다 후한 후기나 lt오간gt에

보이는 이러한 吏戶의 모습에서 당시 吏戶制가 성립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에 대한 여러 異見이 있지만(후술) 본고는 그러한 吏戶의 존

재는 주례 내지 先秦 이래 실재하였던 것으로 보고 그 내역과 의미

를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그렇다면 이러한 다방면에 걸친 吏戶의

복무는 役制上에서 어느 범주에 들어가는 것일까 하는 문제가 제기된

다 본고에서는 이를 職役의 범주에서 이해하여 그 성격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편 先秦 이래 이른바 庶民在官者 가 있고 위의 부류 가운데 小

吏나 吏戶 등도 이에 포함되는 면이 있다 그런데 小吏나 吏戶가 직업

적 생업적으로 관부에 給事하는 반면에 서민 가운데 일반 요역에 대신

하여 일정기간 한시적으로 관부에 차출되어 給事하는 복역자가 있다

그리고 lt吳簡gt에 많이 보이는 수십종의 給某吏(이하 lsquo給吏rsquo로 약칭)의

부류가 있는데 현금 그에 대한 해석에 異說이 분분하다(후술) 吏와 給

吏의 구분 문제는 고대 職役의 존재형태와 관련하여 필히 해명되어야

할 사항이다 이들의 職役으로서의 측면은 주례 등에 보이는 lsquo府

史胥徒rsquo 및 이후 이어지고 있는 工商食官 에 속하는 工商 皁隸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38食職 에 포함되는 吏에 속한 徒隸 층 넓은 의미의 徒隸層이라 할 수

있는 皂 隸 牧 圄 僕輿人 下吏層으로서의 樂祝醫衛

士 및 走卒伍伯之類 등 각 종의 관부에 예속된 신분들의 존재형태

와 상통하는 면이 많기 때문에 그 연원문제와 관련하여 그들의 존재

형태와 운영방식 등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관부 내의 給事가 아닌 일반 요역에 복무하는 서민 계층의

복무가 있다 이는 諸役 가운데 가장 많은 민중이 이에 복역하며 職役

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대체로 職官이나 職役은 일반 요역에 상대되

는 용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고찰은 제

외된다

종래 고대 요역제도 연구사에서 가장 疏略한 부분이 職役 관련 사항

이다 비록 職役이 주로 당송 시대에서부터 상견되는 사항이고 중국고

대사에서 잘 논급되지 않는 사항이라 하더라도 국가 통치상 그러한 제

도가 구비되지 않을 수 없는 면이 있다 후대의 職役과 모든 면에서

동일한 형태는 아니지만 고대적 職役이라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고찰

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職役제도의 운영이 고대 요역제도와 신

분제상 어떠한 위치에 있고 어떠한 기능을 한 것인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고대 職役의 계승과 변화 등의 사항도 더불어 검토

되어야 할 과제이다

송대에 집중된 職役 관련 연구사에 의하면 그 연원과 개념 및 定義

관련 여타 제도 내지 규정과의 상관문제 운영상의 실태 성격 등의 사

항에 대해 수많은 異見들이 제기되어 온 바가 있다4) 職役은 대체로

당송 시대에 부유층 내지 上等戶에게 부과된 관부 물자의 운송 官莊

경작 징세 鐵冶업무 木材벌채 창고관리 관리의 送迎 통행세징수 등

의 役을 지칭하고 있다 職役은 일반민의 요역 복무에 대신하여 복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래 賦役이 면제되는 관리가 봉록을 받으면서 일

정한 품계를 지니고 업무에 복무하는 職官과는 구분된다 그렇다면 후

4) 勺培俊 當代中國學者關於宋朝職役制度硏究的回顧與展望 (漢學硏究通訊 22-3 2003)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39대의 職役과 같은 類의 제도가 고대사에서는 없었던 것일까 하는 의문

이 본 과제를 모색하게 된 출발점이다 따라서 고찰의 출발은 先秦의

윗 시기로부터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후대의 대부분 職官들은 고대

의 사례에 의거하여 제정된 것이다 송대 직역 관련 여러 연구는 그

연원을 漢 또는 위진수당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5) 본고는 그러한

類의 제도가 온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이미 周代 이래 실재하였다는

시각에 입각하여 살펴보고 그러한 모습이 선진에서 진한에 걸쳐 이어

지고 나아가 삼국기의 lt吳簡gt의 여러 실태에서 계승되고 있는 면을

입증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대체로 후대의 여러 제도는 거의 대

부분 이미 前代에 시행되었던 것들이며 나중에 여러 사정의 변화로

중단되었다가 재차 복구되면서 약간 변용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의미

에서 고대 제도사의 연원이 되고 있는 주례 등의 관련 사항과 고대

의 끝자락에서 이루어진 lt吳簡gt의 여러 명확한 자료에서 보이는 職役

制의 면모를 통하여 그 연원과 전개 과정 그리고 그 계승과 변용의

맥락을 일면이나마 해명할 수 있는 성과가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근래 lt吳簡gt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구별 吏役 문제 등 職役 관련

주요 사항에 대한 여러 난문제가 얽혀 있고 그에 대한 갖가지 異見이

분분하여 뚜렷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당한 혼란을 주고 있다

lt오간gt의 신출 자료들은 그간 관련 자료가 零碎하여 충분히 거론하기

어려웠던 고대 직역 관련 제반 사항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고 있어 가

히 획기적인 자료의 등장이라 할 수 있다 周代의 자료에서 삼국시기

까지 긴 기간 동안의 事跡을 망라하며 검토하게 된 것은 그 성과를 바

탕으로 lt오간gt의 신출 자료를 명확히 올바로 해석하는데 도움을 얻고

자 함이라는 면도 있다 필자의 기본 입장에서 보면 lt오간gt의 관련

문서에서 lt주례gt 이래 일맥 상통하며 전해져 온 職役의 맥락과 전통

을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고자 함에 본고의 주안점이

있다

5) 勺培俊 위의 글 pp17-18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0

Ⅱ 周禮의 胥徒와 庶民在官者

秦漢 官制에서 官階는 대체로 皇命에 의해 除授되는 命官 내지 長吏

와 그 명관에 의해 辟除되는 屬吏 내지 小吏로 크게 구분된다 그리고

양 官階의 秩祿에 의한 구분은 漢初의 lt이년율령gt秩律에 의하면 300

石 전한 중기 이후에는 200石이 기준이 되고 있다6) 그 실제의 관직

은 전자는 丞佐史尉의 佐官 내지 副官級 이상에 해당하고 후자는

그 미만인 鄉有秩獄史佐史鄉佐斗食令史嗇夫假官掾史

幹小史書佐循[脩]行 등의 掾屬 佐史類이다7) 그런데 이러한 구

성의 구분은 이미 주례의 官階 구성에서도 보인다 天官 冢宰에 治

官之屬 大宰 卿 1人 小宰 中大夫 2人 宰夫 下大夫 4인 上士 8인 中

士 16인 旅 (鄭玄의 注 lsquo衆也rsquo) 下士 32인 府 6인 史 12인 胥 12인

徒 120인 인데 주례의 거의 모든 관부가 이러한 구성으로 되어 있

다8)후한의 鄭玄과 唐의 賈公彦은 下士 이상은 왕명에 의해 임관된 王

臣이고 그 이하의 府史胥徒는 王臣에 의해 辟除된 계층으로 王

臣이 아니라고 하였다 즉 위에서 下士까지가 이른바 命官이고 그 아

래는 屬吏이다 특히 정현은 주례 여타 조목에 보이는 官階에서 lsquo群

臣rsquo을 卿大夫士로 해석하고9) lsquo群吏rsquo를 lsquo府史rsquo (秋官 司寇 小司寇 및

同 朝士 등에서의 鄭注) 또는 lsquo府史 以下rsquo(夏官 司馬 御僕의 鄭注)로

해석한다 庶人在官者 란 예기 王制제5에 農田을 100畝 단위로

만들어서 100畝씩 분여하는데 上農夫가 받는 田은 9인이 食할 수 있

고 그 아래는 8인이 食 할 수 있으며 그 아래는 7인이 食할 수 있고

6) 孫鴻燕 秦漢時期郡縣屬吏辟除問題硏究 (秦漢硏究 第一輯 三秦出版社

20071)

7) 後漢書 권28 백관5 注引 漢官曰 雒陽令middotmiddotmiddot(이하의 속관명)

8) 단지 예외로 角人이나 羽人은 그 직무의 성격에 따라 府와 史 중 어느 한 쪽

만 설치되어 있고 腊人과 食医는 양자 모두 설치되어 있지 않다 周禮注疏 같은 條의 贾公彦의 疏

9) 한편 주례 司寇 小司寇의 經文에서 경대부 하위의 lsquo群士rsquo의 稱이 있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1그 아래는 6인이 食할 수 있으며 下農夫는 5인이 食할 수 있다 庶人

在官者 는 그 祿이 이것으로써(8인에서 5인까지) 차등을 삼는다 제후

의 下士는 上農夫로 하고 그 祿으로 그 농경에 대신하기에 족하다 中

士는 下士에 倍하고 上士는 中士에 倍하며 下大夫는 上士에 倍한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라 10)하였고 맹자萬章句下에는 耕者가 수확하는 것으로 一

夫 當 百畝씩 百畝의 分田에서 上農夫는 九人이 食할 수 있고 그 다

음은 8인이 食할 수 있으며 中은 7인이 食할 수 있고 그 다음은 6인

이 食할 수 있고 下는 5인이 食할 수 있다 庶人在官者는 그 祿이 이

를 차등으로 한다 라11) 한 바에 의하면 庶人在官者 는 下士 아래

등급인 府史胥徒에 해당하며 차례로 9인이 食할 수 있는 百畝

의 최상급 농지를 경작하는 상농부(제후의 下士)의 아래 등급에 해당

하는 8인이 食할 수 있는 百畝의 경지 보유자는 府가 되고 그 아래

순으로 각각 7인의 食地 보유자는 史 그 아래 6인의 食地 보유자는

胥 그 아래 5인의 食地 보유자는 徒가 된다 이 규정에 의하면 下士에

서 徒까지는 모두 百畝의 경지를 보유하게 되는 면에서는 같지만 그

경지의 質에 따라서 5 단계의 차이 나는 경지를 차등으로 받게 된다는

것이 된다 上農夫 등의 차등은 주례의 鄭注에는 田의 肥瘠에 5등

급이 있어 수입이 같지 않다 라 하였고 위 인용문의 맹자 注에 一

夫一婦에 佃田이 百畝인데 百畝의 田에 糞을 퇴비로 주면 이것이 上農

夫이고 그 소득의 곡식으로 9口를 족히 먹일 수 있다(一夫一婦 佃田

百畝 百畝之田 加之以糞 是爲上農夫 其所得穀 足以食九口) 라 한

것에 의하면 糞의 퇴비 사용 여부 등으로 인한 토지의 肥瘠으로 발생

하는 수확의 양적 차이에 따른 구분임이 분명하다 즉 祿田 지급의 면

적 크기는 같지만 토지의 질적 차등을 기준으로 下位 5등의 차별이 결

10) 制農田百畝 百畝之分 上農夫食九人 其次食八人 其次食七人 其次食六人

下農夫食五人 庶人在官者 其祿以是爲差也 諸侯之下士視上農夫 祿足以代其耕

也 中士倍下士 上士倍中士 下大夫倍上士middotmiddotmiddot

11) 耕者之所獲 一夫百畝 百畝之分 上農夫食九人 上次食八人 中食七人 中次

食六人 下食五人 庶人在官者 其祿以是爲次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2정되고 있다 漢唐의 주석가들이 庶人在官者 를 주례의 府史

胥徒에 해당시킨 해석은 그들이 살던 시기의 정황에 의거한 것이고

관련 자료들도 충분히 현전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인정될 수 있는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일찍이 曾我部精雄은 鄭注와 賈疏의 차이를 제시하길 鄭玄은

府와 史가 庶人在官者 에 들어가지만 胥와 徒는 그에 들지 못한다고

한 반면 賈公彦은 4者가 모두 그에 포함되는 것으로 본 차이가 있고

鄭注의 해석이 옳다고 하였다12) 그는 상기의 주례 胥十有二人徒

百有二十人 에 대한 鄭注에 이는 民이 徭役을 給한 것이니 지금의 衛

士와 같다(民给徭役者若今衛士矣) 라 하였고 賈疏도 이에 따르고

있는데 胥와 徒는 요역 의무에 복무하는 것인 까닭에 봉록이나 수당이

지급되지 않았고 官長으로부터 辟除 임용된 것도 아니었으며 육체노

동이었던 반면 官長으로부터 선발되어 辟除 임용된 府와 史는 관부의

정신노동에 복무하였기 때문에 다르다고 하였다13) 때문에 庶民在官

者 에 胥와 徒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曾我部精雄은 鄭注와 賈

疏의 그러한 입장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여러 조문을 열거하고 있지만

賈疏가 府史胥徒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나 그가

열거한 자료에서 鄭注가 胥徒를 배제하고 있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주

는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屬이라 함은 그 屬인 胥徒이다 (春

官 宗伯 典祀) 群吏는 府史 이하이다 (夏官 司馬 御僕)라고 해석한

부분에 의하면 胥徒도 屬吏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는 입장이었을 것 같

다 또 曾我部精雄이 胥徒는 給徭役의 의무로 복무하는 것인 까닭에

봉록이 지급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위의 경문에서 최하급의 田地이지

만 1백무의 祿田이 지급된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 주장도 어긋나게 된

다 庶民在官者 의 봉록 문제는 아래에서 다시 상론한다

여기서 주의할 사항은 鄭注와 賈疏가 모두 한에서의 사정에 입각하

12) 曾我部靜雄 中國往古の胥吏制度 (中國律令史の硏究 東京 1971) pp456

-8

13) 위의 글 pp456-7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3여 府史와는 달리 胥徒가 모두 요역 의무로 징발되어 복무하는 자들로

본 것이라는 점이다 이 府와 史의 직무에 대해 정현과 가공언은 주례 小宰 宰夫의 8職 가운데 다섯째 府는 契하여 藏을 治하고 여섯

째 史는 문서로 贊治(보좌관의 업무)함을 관장한다( 五曰府 掌官契以

治藏 六曰史掌官书以赞治 에 의거하여 府는 문서와 器物의 藏(보

관 관리)을 관장하고 史는 문서의 起草를 관장하는 직책으로 해석하

였다 이는 진한시기 각 관부의 屬吏 掾史의 庶務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lt雲夢秦律gt 秦律雜抄(p133)에 佐 史 이상인 吏가 짐을 지고

운반하는 馬와 문서 간수를 담당하는 私卒(隨從의 卒)을 부려서 장사

하도록 하여 이익(錢)을 취하였으면 모두 遷刑에 처한다 라 하였는데

lsquo문서 간수를 담당하는 私卒rsquo이란 佐史 이상 관리 직속의 下屬으로서

그 상관을 隨從하며 보좌하는 까닭에 私卒이라 한 것이고 家內의 私

卒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정리소조가 lsquo隨從의 士卒rsquo로 해석하였는데

문서 간수를 직분으로 하는 史에 下屬된 卒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

든 府史의 史 및 그 下屬의 인력이 전국진에서도 설치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周禮天官 宰夫에 기술된 宰夫8職에서 일곱째 胥는 그 업무가 掌

官叙以治叙 인데 鄭注는 治叙란 관부에서 次序함이니 마치 지금(漢에

서) 侍曹 伍伯이 관리의 朝會에서 傳言 報告하는 것과 같다 胥가 什

長이 된 경우도 또한 그러하다 까닭에 漢法의 사정을 든 것이다(如今

侍曹伍伯 傳吏朝也 胥爲什長亦然 故擧漢法况之也) 라 해석하였다

좀 난해한 설명인데 이를 부연 설명한 賈疏는 이미 才智가 있어 什

長이 되어 관부에서 次序의 업무에 當하니 반드시 사람을 使役하는 곳

에서 그 徒를 科次한다 까닭에 관부에서 次叙한다고 하였다 로 해석

한다 즉 보통 胥徒로 함께 칭해지는 胥는 徒 중에서 才智가 있어 什

長으로 선발된 층으로 관부의 次序 업무를 맡게 되는데 徒를 使役하는

곳에서 그들을 통솔하며 科役한다는 것이다 如今侍曹伍伯 傳吏朝也

도 난해한데 賈疏는 漢에서 侍曹에서 伍의 長인 伍伯(伍長)에 이르기

까지 吏朝(관리의 朝會)에서 群吏가 諸官의 사무를 보고하여 傳하는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4것으로 해석하였다14)즉 侍曹에서 최말단의 부서 단위에 이르기까지

담당 부서의 朝會 때 각 하급 단위의 長이 업무 보고를 하는 것이다

그런대 이 伍伯은 5인조의 長이 아니고 漢의 執金吾의 속관에 (持戟)

五百(伍伯)二十人 이 있고 이 lsquo伍rsquo의 義를 lsquo當rsquo으로 lsquo伯rsquo의 義를 lsquo道rsquo로

해석하여 앞에서 導引하며 길을 驅除 정리하는 吏라고 한 韋召의 해석

이나15) 司隸校尉의 속관으로 先導隊나16) 門番의 임무를 하고 있는 사

례에17) 의하면 하급의 賤職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후한에 伍伯이

자주 보이는데 모두 走卒 鈴下와 連稱되거나 병렬되어 있어 일찍이 好

並隆司는 走卒은 伍伯이라고 하는 職役에 類한다 고 하여(후술) 모두

관부 말단의 職役 내지 賤職이라 하였다18) 凍國棟은 漢唐間의 伍伯이

微賤의 役이였지만 그 職의 성격상 권세를 빌려 남의 생사를 좌우하

고 謝禮錢을 챙길 수 있는 자리였다고 하였다19) 따라서 여기서는 吏

朝에 참석하는 최말단의 吏員으로서 先導 門番 등 役에 복무하는 伍伯

을 기술한 것이라 하겠다 胥徒는 곧 伍伯과 같이 관리의 최말단 수종

원이면서 그 손발 내지 爪牙의 기능도 하는 층이다 이러한 류의 최하

급 단위의 長은 什長이고 胥는 곧 그 什長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주례에서 각 관부의 徒는 그 員數가 거의 대부분 胥의 10배수이다 그

리고 관부의 次序 업무란 담당 단위의 胥가 그 소속 성원의 질서를 유

지하며 아울러 요역 징발된 民의 徒를 지휘 통제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후술)

이어 여덟째 徒는 그 업무가 官의 令으로써 徵令을 관장함(掌官令

14) lsquo如今侍曹五伯传吏朝也rsquo者漢時五人爲伍 伯 長也 是五人之長 言傳吏朝者

傳在朝群吏諸官事務於朝也

15) 후한서 宦者列傳 曹節條의 注에 韋召辯釋名曰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伍 當也 伯 道也

使之導引 當道陌中 以驅除也

16) 續漢書 輿服志上에 公卿以下至縣三百石導從 置門下五吏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車前伍伯 公

八人 中二千石 二千石 六百石 皆四人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17) 謝承後漢書에 華松家孤微 其母夜夢兩伍伯夾門 言司隸在此

18) 好並隆司 漢代下層庶人の存在形態(一) (史學雜誌 82-1 1973) pp17-1919) 凍國棟 漢唐間lsquo伍伯rsquo淺識 (中國中古經濟與社會史論考 湖北敎育出版社

2005) pp25-35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5以徵令) 인데 얼핏 徒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내용인 듯하다 정현은

이 lsquo徵令rsquo의 업무를 趨走給召呼 라 하였다 賈疏는 그 徒가 朝會에서

뛰어다니는 것을 금지시키고 官人에게 복역자를 공급하고 그들을 호

령하며 사역시키는 일이다(其徒止爲在朝趨走 供給官人召呼使役之事也)

고 해석하였다 관부 내에서 많은 복역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까닭에

그들이 소란 피우지 못하게 질서를 잡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서 徒에 의해 징발되고 사역되는 층은 관부에 복역 중인 刑徒 요역에

복무 중인 일반 서민 등일 것이다 주례의 각 관부에서 徒의 수는

수십 명에서 수백 명 많은 경우 8백명에 이르기도 한다 이들의 노동

력은 각 관부별로 항상적으로 갖추어진 것이지만 이 보다 더 많은 노

동력이 필요하여 형도나 일반 요역 복무자들을 징발하게 된다 그리고

그 징발된 노동력을 호령하며 질서를 잡고 사역시키는 직무도 필요하

게 된다 물론 징발된 자들을 사역시키는 일 뿐 아니라 자신들이 직

접 여러 노역의 所管 업무에 복무해야 한다 이를테면 地官 牛人에

胥二十人 徒二百人 이 있고 그 직책은 公牛의 사육이며 稻人에 胥

十人 徒百人 인데 그 직책이 稻田의 경작이고 夏官 虎贲氏에 胥八十

人虎士八百人 인데 鄭注에 의하면 徒라 하지 아니하고 虎士라 한 것

은 徒 가운데 勇力者로 선발된 까닭이다 하였으며 그 일부 직무에 同

司甲 司戈盾 司弓矢 繕人 校人 趣馬 巫馬 등에 속한 수십

명 내외의 徒는 모두 무기제조나 다루는 법 무기 성능 감별 馬의 감

별 養馬기술 馬祖 馬步 등의 神을 통해 馬의 질병을 파악하는 巫術

등에 뛰어난 상급자들 밑에서 보조 지원의 일 등 말단의 업무를 처리

한다 전문 기술과 지능이 필요한 업무인지라 말단의 업무 처리도 상

당히 명민한 자질이 필요하다 따라서 일반 서민 가운데서 이러한 재

능과 자질이 있는 자로 충원한다 이러한 각 관부의 업무 처리는 후대

에도 익히 보이는 사례이다 鄭玄은 胥를 lsquo諝(智者)ldquo로 읽어 才知의 뜻

으로 해석하였는데 같은 徒의 무리 중에서 才知者로 뽑힌 자라는 뜻으

로 보았다 胥가 什長인 까닭에 10인 가운데 1인 비율로 뽑힌 셈이다

아울러 徒 전체가 일반 서민으로부터 뽑힌 자들이라 할 수 있다 단지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6胥徒의 신분상 복무형태상의 제반 사항이 후대에 그에 상당하거나 유

사한 신분층과 사례에 대비할 때 상당히 다른 면이 많다는 사실이다

趙伯雄은 주례의 胥徒는 전국기까지 노예 厮 童보다 윗 등급이지만

거의 비슷한 신분이었고 厮役 내지 賤役의 담당층이었으며 徒가 한에

서는 주로 刑徒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고 하였으나20) 아래

기술하는 내용에 의하면 그러한 해석에 따를 수 없는 면이 많다 또한

한에서 徒는 형도 뿐 아니라 여러 무리를 가리키는데 통용되고 있어

여러 자료에 등장하는 徒가 가리키는 사항은 무척 다양하다

위의 注疏에 의하면 經文에서 徒의 업무를 官의 令으로써 徵令을

관장함(掌官令以徵令) 이라 한 것은 上部의 지시를 받은 徒가 새로

징발되는 徒의 징발 업무 및 이들을 인솔 지휘 사역하며 그 지시사항

(작업)을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胥와 徒가 모두 庶民在官者 라는 입

장에서 보면 徒가 최하위이지만 lsquo在官者rsquo이고 제8위와 제9위의 서열에

있으며 胥와 徒가 각각 6인과 5인이 食할 수 있는 토질의 경지 百畝

를 代耕의 봉록으로 받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이 출신은 징발된 요

역 복무자와 같다고 하더라도 여타의 징발된 일반 요역 복무자와는 구

분되는 계층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후대의 胥吏도 일반 서민출신이지

만 일반 서민과 다른 계층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 같다 만약 曾我部精

雄의 견해와 같이 府와 史까지만 庶民在官者 이고 胥와 徒는 그에

들지 못하는 것이라 한다면 주례 원문에 胥와 徒가 엄연히 제8위와

제9위에 올라 있고 봉록으로써 百畝를 받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기 어

렵게 된다

그리고 특별히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앞에 인용한 鄭注에 이는(胥

와 徒는) 民이 徭役을 給한 것이니 지금의 衛士와 같다 고 한 점이다

그래서 후한 중후기 衛士의 운영 형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또 鄭

玄은 駁五經異義에서 周禮에서 이른바 모두 징발한다 한 것은 胥

徒로 하여금 公家의 事에 給하게 한 것을 말함이니 지금의 正衛와 같

20) 趙伯雄 lt周禮gt胥徒考 (中國史硏究 2000-4) pp10-12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7다 고21) 하였다 한에서 궁성 내지 중도관에 番上 守衛하는 役은 正卒

의 役과 일반 更卒의 役이 있는데 鄭玄이 특별히 正衛라 한 것은 正卒

로서의 役임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의 요역 운영체제에서

衛士가 上番하는 役은 한구의에 民의 나이 23세가 되면 正이 되고

1년간 衛士 1년간 材官 騎士에 복무하며 활쏘기 말달리기 戰陣을 익

힌다(民年二十三爲正 一歲以爲衛士 一歲爲材官騎士 習射御騎馳戰陣)

라 한 것에 의하면 正卒이 그 복역 대상자이고22) 각 군 단위로 1년씩

21) 禮記王制 五十不從力征middotmiddotmiddot 의 條 孔穎達疏引 周禮所謂皆征之者 使爲胥

徒 給公家之事 如今之正衛耳

22) 漢의 正과 正卒 및 상비군의 문제에 대해서는 종래 여러 이견이 있다

正을 正卒로 보고 正卒이란 更卒(小繇)의 對稱으로서 병역의무자이고 재관

기사 위사등이 곧 정졸이라는 설이 가장 많이 받아드려지고 있다(濱口重國

秦漢時代の繇役勞働に關する一問題 秦漢隋唐史の硏究』上卷 東京 1966

1980 勞幹 漢代兵制及漢簡中的兵制 歷史語言硏究所集刊 10 1948 山田

勝芳 後漢時代の繇役と兵役 歷史 66 19869)正卒은 앞의 설과 같지만 正은 23세에서 56세 사이의 남자 즉 正丁 을 가리

킨다는 설(西村元佑 漢代の繇役制度 東洋史硏究 12-5 1953)正卒과 更卒이 별개인이 아니라 동일인이고 更卒은 正卒이 된 이외의 해에

매년 1개월의 역역에 복무하는 자를 가리키며 正은 23세-55세까지의 正丁인

데 正卒은 그 가운데 2년간 衛士 材官 騎士 등의 實役에 복역하는 것이라는

설(西田太一郞 漢の正卒について 東洋の文化と社會1 東京 1955)

材官 騎士등이 일반민에서 材力 있는 자로 선발되어 군국에서 常駐하는 전

문병사로서 직업군인인 lsquo士rsquo인데 대해 正卒은 일반민이 23세에 1년간 병졸로서

근무하고 1년간 衛士로 長安에 上番한다는 설 즉 正卒은 직업군인인 材官 騎

士와는 兵役體系上 別個의 것으로서 일반민의 병역 복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는 설(大庭脩 材官攷 -漢代の兵制の一班について 龍谷史壇 36 1953)正卒이란 23세에 이른 자 가운데서 신체강건한 자를 뽑아 衛士 材官 騎士

樓船 등의 어느 한 兵種에 복무하게 한 것이라는 설(濱口重國 勞幹 西村元佑

山田勝芳 앞의 논문 平中苓次 漢代の官吏の家族の復除と軍賦の負擔 中國

古代の田制と稅法 京都 1967) 諸說의 대부분은 이 견해를 공통적으로 취하

고 있다

秦漢에서는 始傅에서 免老까지의 모든 남자가 병역의무를 지는데 正卒은 그

適齡남자를 統稱하는 말이며 따라서 郡兵이나 衛士 戍卒은 正卒의 일부분이라

는 설(臧知非 秦漢lsquo正卒rsquo辨釋 中國史硏究 1988-1)正이란 傅籍된 待役者(兵役과 力役 포함)를 말하며 正卒은 어떤 특정의 役

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고 正(待役者)과 卒(服役中에 있는 正)로 구분되어 있

는 말이며 秦漢代에 병역 복무는 일부 병역신분에게 만 부과된 것이어서 나머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8조별 순번으로 상경하여 복역한다 正卒은 일반 更卒 중에서 신체강건

용맹 등으로 선발된 자들로 상비군 내지 직업군인의 성격이 강한 집단

이다 즉 그들은 일반민(서인)이면서도 그 중에서 선발되어 군사로써

免老에 이르기까지 복무하는 까닭에 일반민과는 다르다 胥徒 또한 서

인이면서 관부에 복무하는 까닭에 일반민과는 다르다 衛士는 특히 평

시에 도성(중도관)을 수비하기 때문에 관부에 거처하게 되고 胥徒 또

한 관부에서 직접 給事하는 까닭에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면에서 鄭玄

은 양자를 같은 성격의 계층으로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衛士가 일반

민에서 선발된 자들이고 胥는 徒 중에서 才智로 선발되고 徒는 분명

치는 않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일반 民庶 가운데 담당 직무 수행에 어

느 정도 자질을 갖춘 자로 선발된 자들일 가능성이 크다 또 漢書권74魏相傳의 顔注에 京師의 여러 관부에 와서 戍卒이 되는데 지금의

衛士가 上番하여 여러 官司에 나누어져 복무하는 것과 같다 라23) 한

것에 의하면 衛士의 이러한 복역 모습은 각 官司에 배치된 胥徒의 복

역 형태와 같다 전한 京師에서 복무중인 衛士의 수는 景帝末傾에 매

지 일반 白徒는 병역에 복역하지 않는다는 설(孫言誠 秦漢的繇役和兵役 中國史硏究 19873 및 ldquo爲正一歲rdquo辨 文史 31 198811)濱口說과 같이 正을 正卒의 略稱으로 보지만 濱口씨가 正卒을 일반적인 兵

士로 본 것과는 달리 庶民 중에서 일부가 선발되어 兵士(材官 騎士 등)가 된

것이며 이들은 일반서민과는 상대적으로 구별되는 신분 말하자면 獨自의 兵

士身分 으로서 일반서민과 같은 역역(更卒) 의무가 없었고 일반서민과는 다른

부담체계하에 있었다는 설(重近啓樹 秦漢の兵制について -地方軍を中心とし

て- 人文論集(靜岡大學) 36 1985)正卒은 일반민이 20세로 부터 2년간 복무하는 것이며 材官 騎士는 이와는

달리 전문병사로서 23세에서 56세까지 복무하는 것이라는 설(藤田勝久 前漢

の繇役勞動とその運營形態 中國史硏究 8 1984)한편 李成珪는 材官 騎士는 卒에서 징발된 전문 병사였고 1년 복역 후에도

예비역으로 분류 비상시 동원되었지만 (軍)吏나 士에 속하지 않는 자들로서

力役 복역의 한 형태인데 董仲舒가 말한 lsquo一歲力役rsquo은 바로 郡卒로 1년 복무하

는 材官 騎士의 役을 말한 것이라 한다(이성규 前漢 更卒의 徵集과 服役 方

式 -松栢木牘 47호의 분석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09 200912

pp33-34)

23) 來京師諸官府爲戍卒 若今衛士上番分諸司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9년 2만인 武帝 즉위 후 1만인으로 감하고 얼마 후 5천인을 늘려 武帝

후기에는 1만5천이었을 것으로 보인다24) 또 1개 군에서 番上하는 수

가 數千에서 2~3천인이었던 사례가 있다25) 전한 말 成帝 시기의 사

정을 말해주는 尹灣漢簡의 lt東海郡下轄長吏不在署 未到官者名籍gt

에 군현 밖으로 外勤出張 중에 있는 長吏의 현황표에 費長孫敞 十月

五日送衛士 가 있는데26) 費邑의 長 孫敞이 衛士를 送하는 업무로 출

장하여 아직 귀환하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동해군 下轄의 縣(18)邑

(2)侯國(18) 38곳(lt集簿gt) 가운데 오직 費邑에서만 衛士가 上番되고

있다 이에 의하면 衛士의 상번은 각 군에서 縣級 단위로 교대 상번하

는 것으로 보인다 濱口重國은 후한에서 正卒의 군현상비군이 폐지되

었지만 전한에서와 마찬가지로 매년 연말에 1년의 복무가 끝나고 귀향

하는 衛士들에게 황제가 향연을 베푸는 饗遣故衛士儀가 행해지고 있는

사례를 들어 衛士의 上番은 후한에서도 행해지고 있음을 지적한 바가

있다27) 아울러 그는 군현 상비군 폐지 후 중앙의 衛士 부대가 2500

내지 2600명인데 이는 중앙 인근 지역에 한정하여 징발된 자들로 보

아야 한다고 하였다28) 후한 周禮注에서 鄭玄(127-200)의 衛士 인용

이 전한시기의 사정에 의거한 것인지 아니면 그의 활동시기인 후한 후

기의 사정에 의거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후한 중 후기에도 衛士의

上番制가 부분적으로나마 유지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4) 濱口重國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隋唐史の硏究』上卷 東京

1966 1980) p286 注2)

25) 「上臨饗罷衛卒 衛卒數千middotmiddotmiddot」 (漢書 권77 蓋寬饒傳) 「河南卒戍中都官者二三

千人middotmiddotmiddot」 (漢書 권74 魏相傳)

26) 張顯成 周羣麗 尹灣漢墓簡牘校理(上篇) (天津古籍出版社 2011 3) p32

27) 濱口重國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隋唐史の硏究 (上)) p283

28) 濱口重國 위의 글 pp284-285 그 주된 근거는 속한서 백관지3 尙書條에

蔡質漢儀曰 ldquo右丞與僕射對掌授廩假錢穀 與左丞無所不統 凡中宮漏夜盡 鼓鳴

則起 鍾鳴則息 衛士甲乙徼相傳 甲夜畢 傳乙夜 相傳盡五更 衛士傳言五更 未

明三刻後 雞鳴 衛士踵丞郎趨嚴上臺 不畜宮中雞 汝南出雞鳴 衛士候朱爵門外

專傳雞鳴於宮中rdquo 應劭曰 ldquo楚歌 今雞鳴歌也rdquo 晉太康地道記曰 ldquo後漢固

始鮦陽公安細陽四縣衛士 習此曲於闕下歌之 今雞鳴是也rdquo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0中都官의 몇 몇 部署에 給事하는 衛士의 員數 규정이 있는데 속한

서 백관2 注引 漢官의 光祿勳에 81인 太宰令에 15인 高廟令에 15

인 世祖廟令에 20인 衛尉에 60인 南宮衛士令에 537인 北宮衛士令에

471인 右都候에 416인 左都候에 383인 南宮南屯司馬에 102인 (北)宮

門蒼龍司馬에 40인 玄武司馬에 38인 北屯司馬에 38인 北宮朱爵司馬

에 124인 東明司馬에 180인 朔平司馬에 117인의 衛士가 소속되어 있

다 이는 후한의 사정을 기록한 것인데 그 총합이 2637인이다 전한에

비해 그 員數가 급감한 것은 광무제의 부역 경감정책과에 의한 것이라

하겠고29) 소수지만 그 員數가 규정되어 있다는 것은 후한에서 代役制

내지 雇傭制로 대체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전과 같은 上番制가

시행되었음을 말해준다 후한에서 正卒 및 군현의 상비군제가 온전히

사라진 것이 아닌 것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후한의 2637명의

員數는 전한에 비해 대략 15 정도 되는데 전한의 사정을 기준으로 한

다 하더라도 군현의 正卒은 평생 1회만 당번이 되어 上番하더라도 중

도관의 衛士 給事가 충분히 운영될 수 있다 위의 lt윤만한간gt에서 전

체 38현읍후국 가운데 그 해에 費邑의 正卒 만이 상번하고 있고 당시

郡別로 상번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동해군이 매년 상번의 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각 正卒은 38년에 1회만 상번하면 된다 물론 군별 현

읍후국의 수가 다르기 때문에 그 回次의 수도 다르고 현읍후국별 正

卒의 수에 따라 1개 이상의 현읍후국이 함께 동원된 경우도 충분히 있

을 수 있다 그러나 각 군의 현읍후국 수가 보통 20개는 넘는다 게다

가 費邑의 正卒도 몇 개 조로 나뉘어 순차로 상번하는 것이라던가 각

郡도 매년 상번이 아니라 몇 년 만에 순번이 돌아오는 체제라면 각 正

卒의 중도관 衛士 복무는 아무리 많아도 일생에 1회를 넘기 어렵다

앞에 든 漢舊儀의 民年二十三爲正 一歲以爲衛士 는 곧 그러한 사

정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일생 1회의 복무형태는 胥徒의

29) 濱口重國은 광무제의 경감책과 아울러 虎賁 羽林 羽林左右騎 五校尉의 軍이

警備에 추가되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위의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

隋唐史の硏究(上)) p283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1평생 내지 세습되는 면과(후술) 다르지만 일반의 役 대상자에서 선발

되어 중도관에 給事한다는 면에서는 공통이다 그런데 전한에서 lsquo父死

子代rsquo였던 중앙군은 羽林孤兒 뿐이었지만 후한에서 虎賁 羽林 羽林左

右騎 五營士의 중앙군에까지 확대되었다고 한 濱口重國의 지적이 있

다 그에 의하면 후한에서 중앙군단의 세습화와 함께 바로 지방에 特

設된 군단의 세습화도 이루어지면서 魏晋시기 兵民分離의 前段을 이루

게 되었다고 한다30)후한 후기 특히 羌의 侵寇 이후 郡에 都尉를 설치

하고 全民을 징병대상으로 삼아 상비의 郡兵을 다시 설치하고 있으

며31) 여러 출신 성원을 규합한 병단이 私屬이 되기도 하고 국가의 군

단이 되기도 하며 部曲 내지 그와 같은 류의 세습 병단화 하는 과정

에 대해서는 필자도 일견을 피력한 바 있다32)따라서 징병제에 의한

正卒의 상비군 운영이 폐지된 이후 15 수준으로 급감한 정졸의 衛士

가 上番하고 있었지만 이 군단 또한 후한 중기 이후 전란시기가 되면

서 世兵化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胥徒의 세습과 후한 후기에

활동하였던 鄭玄 당시 衛士의 세습화는 일치하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鄭玄이 말한 衛士는 한초의 사정이 아니라 그가 활동하였던 후한 후기

의 사정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鄭玄이 漢의 衛士 上番制에 의거하여 주례의 胥徒制를 해석한 것

은 양자의 해명에 큰 도움을 준다 상술한 바에 의하면 몇 가지 면에

서 양자가 일치하는 점이 대체로 인정된 셈이지만 胥徒가 거의 모든

관부에 설치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漢代의 衛士는 광록훈이나 衛尉

제사 守陵등 일부 한정된 관부에 설치되어 있다 또한 주례의 胥徒

가 士 이상의 신분과 마찬가지로 代耕의 봉록으로써 농지를 받고 있는

봉록자라는 면은 지방에서 상경하여 1년의 기간만 한시적으로 복무하

는 衛士의 경우와는 자못 어울리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衛

士는 上番者로 충당되지만 일단 관부별로 員數가 규정된 員吏로서 복

30) 濱口重國 앞의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p285

31) 濱口重國 光武帝の軍備縮小とその影響 (秦漢隋唐史の硏究(上)) p30832) 박건주 한대의 지방 상비군과 部曲의 推移 (동양사학연구 118 20123)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2무하게 되기 때문에 일부는 胥徒처럼 員吏로서 수년 이상을 관부에 居

하는 어느 정도 전문화 한 衛士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鄭玄의 활

동 시기와 큰 차이가 없는 lt長沙走馬樓吳簡(이하 lt吳簡gt으로 약칭)gt

領二年四家衛士田漆十五畝 畝收限米二斛 合爲吳平斛米一百五十斛

(5-1669)에 의하면 4家의 衛士가 限田75畝 佃作에 대한 租로 畝當 限

米2斛을 납부하고 있다 lt오간gt의 限田에 대해 여러 異說이 있지만

(후술) 그 佃作者와 限米 납부자의 계층에 수십 종의 吏員들이 포함되

어 있는 것에 의하면(후술) 衛士도 그러한 吏員으로서 限田이 지급된

것으로 보인다 단지 限田을 佃作케 한 것이 吏員에 대한 경작의 부과

(경작 노동력의 징발)를 뜻하는 것인지 혜택의 수여를 뜻하는 것인지

는 아직 분명치 않지만 于振波의 분석과 같이 畝當 限米2斛의 징수는

대단히 과중한 액수인 까닭에33) 受惠라기 보다는 경작 노동력의 징발

내지 課役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祿田의 의미로 보기

어렵지만 당시 吏職의 賤役化 현상을 고려하면 그러한 시대적 여건 하

에서 實益이 거의 없는 祿田으로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어쨌

든 후한말 이래 小吏 내지 吏戶와 병사층의 세습화 진전을 고려한다면

어떠한 방식이든 그 가족의 생계를 위한 봉록의 지급이 있었을 가능성

이 더욱 커진다

이상에서 검토한 몇 가지 면에서 보면 府史와 胥徒 중에 후자 만

lsquo給徭役rsquo에 의거한 복무라는 점 등에서 다른 계층이지만 庶民在官者

로서 함께 칭해질 수 있는 층이었다고 본다 무엇보다 胥徒가 각각 제

8위와 제9위의 在官者 서열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동시에 府史는 모두 官長으로부터 선발되고 辟除 임용된 자들인데 비

해 胥徒는 일반의 요역의무를 대체하여 官에서 給事中인 계층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胥徒가 lsquo在官者rsquo로 칭해지는 이유는 관부 내에 거

처하면서 노동을 통하여 잡다한 庶事를 직접 처리하고 있으며 국가로

33) 于振波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中國社會科學院硏究生員學報 2004

-1) p122 限米 납부액의 과중성에 의거해서 限米 납부자는 屯田노동자 限米

는 屯田의 租稅라고 본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3부터 代耕의 祿田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관부의 제반 업무는 각 업무

分司 말단에 속한 胥徒의 노역에 의해 완수될 수 있다 이들은 노역

징발 대상자인 徒 중에서 재능 등의 명목으로 선발된 자들이고 그 중

에서도 才智가 있는 자가 胥이다 이들은 선임자 내지 연장자의 지휘

감독 아래 각 관서의 노역 업무와 勞役者 징발 업무 등으로 奉公한다

이것이 胥徒의 在官者로서의 職事이다 胥徒의 職事는 어디까지나 노

동이 전제되는 勞役이며 일반민의 요역의무에 대신하여 관부의 職에

給事하는 까닭에 職役이라 할 수 있고 官長의 선발로 辟除된 府史는

정식의 官員으로서 奉公하는 것이고 給徭役 에 대신하여 복무하는

것이 아닌 까닭에 胥徒의 職役과 구분하여 그 職을 職官이라 할 수 있

다 그 上級인 命官도 물론 職官이다 職官의 기본 요건은 그 官職에

任職인 상태가 그대로 王命을 받들어 奉公 중인 것을 뜻하는 까닭에

이미 王命을 수행중인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체로 일반 서민

의 기본 요역에서 면제된다 단지 면제의 세부 규정에 의하면 役의 종

류와 신분의 차등에 따라 그 면제 대상의 범위가 구분된다 한편 전쟁

에 참전하는 의무는 면제되지 않는다 모든 官吏는 유사시 종군해야

한다 官人이 본래 戰士層인 國人 출신에서 나온 때문이다 일반 서민

은 매년 일정 기간 동안 만 국가의 命을 받아 노역에 징발되어 복역하

는 까닭에 그 생업은 징발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시적인 노역이 아니라

그들이 부여받은 職인 恒常의 耕作奉公에 있다 職官은 그 복무를 통

해 생활이 영위되지만 일반 서민이 징발되어 이행하는 노역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無償이다

官職앞에 인용한 宰夫8職에 대한 賈疏의 끝 부분에 周禮 위 아래

의 글에 胥가 있으면 반드시 徒가 있는 것은 胥가 什長인 까닭이다

鱉人과 臘人의 類는 徒만 있고 胥가 없는 것은 徒만 있으면 충분하여

지휘자(長師)를 둘(빌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食醫의 類에는 胥徒가

모두 없는 것은 그 官만의 行事(업무처리)로도 충분하여 胥徒의 도움

을 빌리지 않는 까닭이다 고34) 하였는데 胥와 徒가 모두 설치되지 않

은 部署는 그 官만의 업무처리만으로 충분한 까닭이라 하였으니 바로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4府史까지의 屬吏를 官으로 한정한 것이다 즉 胥徒는 官에서 복무하고

있지만 官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庶民이고 庶民在官者 이며 그들의

복무는 職官이 아니고 職役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들도 그 職役으

로 생업을 유지하는 까닭에 職官과 동일성을 지닌다 주례에 의하는

한 胥徒가 일시적으로 복무하는 형태는 아닌 듯 하다 무엇보다도 그

들에게 祿田이 지급되고 있기 때문에 매년 혹은 매월 교체되는 요역

형태의 근무는 아닐 것이다 또한 각 분야별로 상당한 전문 지식과 숙

련도가 요구되는 업무 처리상 단기간 교체되는 근무형태를 취하였을

것 같지도 않다

이렇게 볼 때 胥徒가 官에서 일반 관리와 마찬가지로 계속적으로 근

무하면서도 그 근무를 lsquo給徭役rsquo의 代替로 본 주석이 옳다면 아무래도

胥徒는 신분제사회에서 官이 될 수 없는 자 또는 現任의 官과는 엄밀

히 구분되는 신분이었던 까닭에 그 직무 또한 (일반 서민의) 노역의

의미로 인지되고 평가된 것이 아닐까 한다 漢代사회의 신분구조는 漢

家의 주인인 天子가 그의 家人인 일반 民庶를 직접 장악하는 구조가

있고 동시에 漢家로부터 독립된 개별의 士族이 각각 lsquo家rsquo의 주인으로

서 천자와 主客의 관계가 아직 유지되는 체제가 병존하는 二元의 구조

로 되어 있다고 본 濱口重國의 견해가 있다35)이러한 입장을 발전시켜

漢帝國은 황제가 인민을 인두적으로 지배하는 lsquo齊民制rsquo와 천자가 lsquo家rsquo를

非人頭的으로 지배하는 家父長制的 관계로서의 lsquo家産制rsquo라는 이중구조

로 되어 있다고 본 好並隆司의 견해도 있다36) 그리고 이러한 이중성

의 사회구조를 公과 私 君臣관계의 면에서 진전시킨 尾形 勇은 그 臣

이 되는 층을 仕宦者와 從役者로 나누고 있다37) 위의 설들은 모두 한

34) 周禮 上下文有胥必有徒胥爲什長故也 鳖人腊人之類空有徒無胥

者得徒则足不假長師故也 食醫之類胥徒并無者以其專官行事不假胥徒

35) 濱口重國 唐王朝の賤人制度 主篇 第六章 第二節 (東洋史硏究會 1966)

36) 好並隆司 前漢帝國の二重構造と時代規定 (歷史學硏究 375 秦漢帝國史

硏究 東京 1978에 재수록)

37) 尾形 勇 漢代における 家人 と君臣關係 (史學雜誌 83-4 1974) pp3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5대의 사정을 말한 것이지만 이러한 이중구조의 신분제 내지 사회구조

는 주례의 관부 구성 체제에 의하면 상위에서 下士 내지 府史까지가

仕宦者에 해당하고 胥徒를 후자 즉 從役者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연원은 이미 周代에 있다 士人 내지 仕宦者는

그 직무로써 奉公하고 從役者는 賦稅役의 부담으로써 奉公한다38)胥徒

가 비록 官에 있는 자이지만 二元구조의 신분제 하에서 士人이 되지

못한 가운데 그 직무는 職官이 되지 못하고 職役에 머무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Ⅲ 職役 담당층의 복무 형태와 봉록 지급의

문제

周代에 lsquo給徭役rsquo의 차원에서 관부에 給事하는 胥徒가 있었다면 후대

의 요역 가운데도 그러한 항목이나 사례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다 또한 胥徒의 직무는 續漢書 輿服志上에 보이는 伍伯辟車

鈴下侍閣門蘭部署街里走卒 등 관부 말단에서 경호導從심

부름侍衛車馬관리 巡邏 등의 賤職에 종사하는 이른바 徒卒의 職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그런데 이들의 役이 民의 일반 요역 의무에 따

라 징발되어 일시적으로 복역하는 것인지 아니면 상술한 胥徒와 같이

庶民在官者 로서 관부의 최말단에서 상시로 근무하며 관부에 의지하

여 생업을 유지하는 下吏로서의 복무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후한서권58 虞詡傳에 永平(후한 明帝期) 章和(章帝期) 중에 州郡이 走卒錢으

로 貧人을 給貸(雇賃金을 지급)하였다 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集解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35

38) 尾形 勇 위의 글 pp28-29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6走卒伍伯之類란 續漢志에 이른다

(車前에) 伍伯은 公은 8인中二千石은 6인千石과 六百石은 모두 4인百石

이하에서 二百石은 모두 2인을 둔다 黃綬(4백석에서 2백석의 관리)의 武官에

는 伍伯을 따르게 하고 文官에는 辟車鈴下侍閤門闌部署街(里)走卒

을 따르게 하는데 모두 程品의 多少가 있으며 맡은 바 직무에 따라 領率하게

한다 (驛馬는 30里에 하나를 설치한다) (卒은) 모두 적색 두건과 진홍색 소창

옷을 착용한다

즉 지금 鞭杖을 잡고 따르는 자들이다 이는 錢이 있는 자로 하여금 그 (役

에) 대한 資錢을 내게 하여 몸으로 직접 노역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39)

〔 ( ) 내의 글은 결락된 부분을 輿服志 원문에서 보완함〕

인용된 속한지輿服志의 기사는 公卿 以下 縣의 三百石 官長에 이르

기까지 이들을 導從하는 下吏들의 配屬 員數를 규정한 것이다 열거된

役職들은 모두 300석 이상 관원을 導從하는 役員들인데 후한 明帝 章

帝期에 일부 지역에서 이 役職의 명목으로 走卒錢을 징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記事는 順帝 연간에 尙書僕射 虞詡가 上言한 것인데 당시

長吏 2천석관들이 謫罰者에게 貧人 구호를 위한 lsquo義錢rsquo의 명목으로 贖

錢을 강요하고 守令은 이를 빌미로 聚斂함에 順帝 원년 이래 백만전

이상을 受取한 長吏가 끊이지 않고 있는 사정을 진언한 가운데 그 이

전 永平 章和 연간에 있었던 사실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즉 州郡에

서 走卒錢을 징수하여 그 역을 면제시켜주고 대신 빈궁한 자를 그

役에 고용하여 그 錢을 雇賃으로 지급해주는 일이 있었다 당시 司空

이 이 事案을 탄핵하니 해당 州郡縣이 모두 坐되어 免黜되었었다 그

때의 전례와 마찬가지로 당시 임시로 사용하였던 제도(走卒錢 징수와

雇賃 지불)를 蠲制할 것을( 蠲制權制 ) 주청하였고 이에 조서를 내려

州郡을 切責함으로써 그러한 贖錢 강요가 이로부터 그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40) 따라서 走卒錢 징수와 導從役의 雇傭 방식 운영은 후한

39) ldquo卽今行鞭杖者也 此言錢者令其出資錢 不役其身也 走卒伍伯之類也 續漢

志曰 (車前)伍伯 公八人中二千石六人千石六百石皆四人自百石以下至二

百石皆二人 黃綬 武官 伍伯 文官 辟車鈴下侍閤門闌部署街

(里)走卒 皆有程品多少 隨所典領率 (驛馬三十里一置 卒)皆赤幘絳褠 卽

今行鞭杖者也 此言錢者令其出資錢 不役其身也

40) 후한서 권58 虞詡傳에 是時長吏二千石聽百姓謫罰者輸贖 號為lsquo義錢rsquo 託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7明帝 章帝期에 한정되어 시행된 것으로 모두 不法이었고 虞詡의 順帝

시기에는 시행되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渡邊信一郞에

의하면 이들은 秦漢에서 관부의 최하층으로서 관부에서 필요로 하는

導從役 등 일상적인 노역에 복무하며 民으로부터 강제 징발되어 복무

하였는데 후한 초에 이미 走卒錢이 징수되고 특정 임무는 면역전을

재원으로 한 고용노동으로 전환되었다고 한다41) 그러나 章帝 이후 50

여년이 지난 順帝期에 이르기까지 고용 형태의 운영이 반복되지 않고

있는 것에 의하면 고용 노동으로의 진전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

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어쨌든 導從役의 고용 방식 운영이 不法

이었다 함은 그것이 본래 징발 형식으로 운영되는 것이었음을 말해준

다 錢이 있는 자로부터 走卒錢을 받고 이 재원으로 빈한한 자를 고용

하여 雇賃을 지급하는 不法을 행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어지는 지적에

서 順帝 때 지방관들의 贖錢 강요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관리들의 私利

도모에 의한 것이다 또한 그 의무자에 富者가 있어 그 實役을 피하고

자 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導從役과 같은 下吏의 봉록은 매

우 적기 때문에 여타의 수익이 있다면 그 봉록에 꼭 의지할 필요는 없

었을 것이다 이들이 비록 관부의 員吏이고 그 吏職이 생업이 되는 것

이지만 최말단의 賤役 내지 厮役으로서 천대받는 면이 많았을 것이다

때문에 이 職役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도 많았을 것이다

예기王制에 무릇 전문기능으로 事上(奉公)하는 자가 祝史

射御醫卜 및 百工이다 무릇 전문기능으로 事上하는 자는 다른

일을 해서는 안 되며(不貳事) 근무하는 관서를 옮겨서도 안 된다(不移

官) 出鄕하면 士와 抗禮하지 못하며 家에서 仕하는 자도 出鄕하면 士

와 抗禮하지 못한다 고42) 하였다 즉 士의 신분이 아닌 일반서민 출신

為貧人儲 而守令因以聚斂 詡上疏曰 ldquo元年以來 貧百姓章言長吏受取百萬以上

者 匈匈不絕 謫罰吏人至數千萬 而三公刺史少所舉奏 尋永平章和中 州郡

以走卒錢給貸貧人 司空劾案 州及郡縣皆坐免黜 今宜遵前典 蠲除權制 於是詔

書下詡章 切責州郡 謫罰輸贖自此而止rdquo

41) 渡邊信一郞 中國古代の財政と國家 (汲古書院 2010 第三章) p128

42) 禮記王制 (十三經注疏 中文出版社) p2905에 凡執技以事上者 祝史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8이 여러 기능직의 吏職에 복무하면서 함께 관부에 있지만 본 소속의

직장에서 다른 직장으로 옮길 수도 없고 신분상 士와 대등한 위치에

처하지 못하며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또한

府史 이상의 職官과 구분되는 胥徒의 특성과 상통한다

속한서 백관지2에 射聲校尉一人 比二千石 의 本注에 服虔曰

工射이다 어두운데서 소리를 듣고 활을 쏘아 명중시키는 까닭에 이름

하였다(工射也 冥寞中聞聲則射中之 故以為名 고 하였는데 여기서

工射 는 射도 工 의 한 분야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은 그 기능으로

奉公하는 것이 그 職分이고 생업이기도 하며 다른 직종이나 직업을

갖을 수 없고 옮길 수도 없는 자들이다( 不貳事 不移官 ) 이들은 그

職能으로 생업을 유지하지만43) lsquo父死子代rsquo 의 世業으로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고 賤職인 까닭에 여기에서 벗어나 신분상승을 바라는 경향이

있게 된다 이를테면 三國魏의 黃朗은 그 부친이 縣卒로서 鈴下 伍伯

의 職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抗志 遊學하여 현령을

거쳐 군태수에 이르렀는데 부친의 일을 생각하여 屬下의 鈴下 伍伯을

부를 때 鈴下 伍伯이라 부르지 않고 항상 姓字로 불렀다 비록 분노

하였을 때도 鈴下 伍伯으로 부르지 않았다44)

그런데 導從役 복무자는 징발되어 관부 내에서 복역하는 인원 중에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전체 복역 대상자 가운데 극히 소수에 불과하

다 특히 黃綬의 武官을 導從하는 伍伯 등의 직무가 護衛와 侍衛 警備

등이 위주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무술과 용력을 갖춘 이들로 선발된

그룹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黃綬 이상의 문무관에 소속되어 그 員數

射御醫卜 及百工 凡執技以事上者 不貳事 不移官 出鄕不與士齒 仕於

家者 出鄕不與士齒

43) 禮記 王制에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百工 各以其器食之 (注에 器 能也)

44) 三國志 권23 裴潛傳 所引 魏略에 黃朗字文達 沛郡人也 爲人弘通有性

實 父爲本縣卒 朗感其如此 抗志遊學 由是爲方國及其郡士大夫所禮異 特與東

平右姓王惠陽爲碩交 惠陽親拜朗母於床下 朗始仕黃初中 爲長吏 遷長安令 會

喪母不赴 復爲魏令 遷襄城典農中郎將涿郡太守 以明帝時疾病卒 始朗爲君長

自以父故 常忌不呼鈴下伍伯 而呼其姓字 至於忿怒 亦終不言 朗旣仕至二千石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9가 정해진 것에 의하면 庶民在官者 로서의 胥徒에 상당한다 봉록이

지급되는 일자리이며 민의 공동의무인 일반요역에 대신하여 복무하는

것인 만큼 면역전의 授受 행위는 不法이다

상술한 輿服志에 각 300석 이상의 官員 당 이들의 배당 員數가 규

정되어 있는 것에 의하면 이들도 분명히 관부의 한 구성원들이다 속한서 백관지 注引의 漢官에는 官長 내지 命官級 屬下의 員吏 員數

및 秩祿을 기재하고 있다 이를테면 속한서 백관2에 衛尉 卿一人

中二千石 本注曰 掌宮門衛士 宮中徼循事 丞一人 比千石 이라 하였

고 注引에 漢官曰「員吏四十一人 其九人四科 二人二百石 文學三人

百石 十二人斗食 二人佐 十二人學事 一人官醫 衛士六十人」이라 하

였다 이 가운데 百石까지는 봉록 지급이 명시되어 있지만 그 이하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봉록이 전혀 지급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斗食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斗升으로 계산되는

日數 계산에 의한 연봉액이 정해져 있다 百官受奉例의 注 所引 漢書音義에 斗食祿 日以斗爲計 라 하였고 한서 百官表上에 漢官名

秩簿에 이르길 斗食은 月俸 11斛 佐史는 월봉 8斛이다 一說에 斗食

이란 연봉이 百石에 이르지 못하여 日當으로 계산해서 1斗2升을 食하

는 까닭에 斗食이라 한다 고 하였다 속한서 백관5의 百官受奉例에

서는 百石이 月 16斛이고 斗食 이하는 위와 같다 또 墨子 雜守篇에

斗食은 1년에 36石이다 參食이면 1년에 24石이고 四食이면 1년에 18

石 五食이면 1년에 14石4斗 六食이면 1년에 12石이다 斗食은 5升을

食하고 參食은 3升小半을 五食은 2升 六食은 1升大半을 食한다 하루

에 2회 食한다 고 한데서 알 수 있다 斗食 은 1食에 5升 하루에 2

食이니 매일 1斗를 받아 1년 360일에 총 36石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

參食 은 1食에 3과 13升 즉 13斗를 받아 1일에 23斗가 되고 1년에

24石을 받는다 그 이하의 四食에서 六食까지는 斗食 이하에 열거된

下吏의 지급액 규정일 것이다

閻步克에 의하면45) 周代에서는 士 이상에게 祿田을 지급하여 그

수익을 食하게 하는 것으로 연봉을 지급하는 형태였는데 하급관리나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0工醫師 등 기술직 및 兵員에게는 月 단위로 지급하는 이른바 稍食

형태로 운영하였으며 나중에 증액 고정화 되고 아울러 錢으로 지불하

게 됨으로써 月俸의 秩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稍食 이란 주례天官

宮正에 宮正이란 왕궁의 戒令糾禁을 맡는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그 출입을 검찰

하고 그 稍食을 균등히 하고 그 淫怠하고 奇邪한 民을 제거하고 그

什伍를 모아 道義를 가르친다 月이 끝나면 그 稍食을 會計하고 1년이

끝나면 그 (吏職의) 行事를 검열한다 라46) 하였는데 이 稍食에 대해

鄭司農은 禄廪 疏는 宫中官府 등의 月禄 이라 하였다 즉 稍食은

月俸인 셈인데 이를 하급관리의 月俸이라 한 것은 國語晋語4에 公

은 貢을 食하고 대부는 읍을 食하며 士는 田(公田)을 食한다 庶人은

力으로 食하고 工商은 官(官으로부터 받은 田)을 食하며 皁隸(吏에

속한 徒隸)는 職을 食하고(각 담당 職의 大小에 따라 食祿) 官宰(大夫

의 家臣)는 加(大夫의 家臣)를 食한다 에서 公 大夫 士까지는 國 邑

田을 봉록으로 받는 까닭에 연봉을 받는 것이 되고 庶人 이하는 관부

에 給事한 力(勞役) 등을 계산하여 지급 받는 까닭에 월봉이라는 것이

다 또 주례 夏官 校人의 校人은 王馬之政을 관장한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馭夫

의 祿과 궁중의 稍食을 균등히 한다 라 하였는데 그 注에 師圉는 府

史 以下다 고 하였다 즉 府史 이하 下吏의 봉록 관련 업무이다 또 주례 天官 醫師에 연말이 되면 그 醫療한 실적을 검사하여 그 食을

정한다 十점 만점이면 上 十에 一을 失하면 次等 十에 二를 失하였

으면 그 次等 十에 四를 失하였으면 下로 한다 하였고 또 방비를

굳건히 하기 위해 성곽 溝池 등의 役事와 守備를 관장하는 掌固는 이

에 복무한 士庶子와 衆庶에 대해 필요한 도구와 財用을 공급해주고 그

稍食을 균등히 한다고 하였다(同 夏官 掌固) 이러한 자료에 의하면 府

史 이하의 下吏에 대해 祿俸 지급의 額이 기술되어 있지 않는 것은 食

邑田이나 百石까지는 年俸의 일정액이 규정되어 있고 이 액수가 월봉

45) 閻步克 從稍食到月俸mdash戰國秦漢祿秩等級制新探 (學術界 20002)46) 宮正 掌王宮之戒令糾禁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幾其出入 均其稍食 去其淫怠與其奇邪之民

會其什伍而敎之道義 月終 則會其稍食 歲終 則會其行事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1으로 나뉘어 지급되는 것과는 달리 그 이하의 吏는 月別 給事한 日數

나 실적을 계산하여 지급하는 月俸 형태였고 그 총합이 百石 이하였

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앞에 든 百官名秩表나 묵자의 기사는 그

러한 사정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府史 이하인 胥徒나 그 직급에 상당

하는 속한서 백관지의 각 관부별 官長 屬下의 員吏로서 有秩 아래에

나열된 직급들도 그 근무일수나 실적에 따라 봉록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有秩의 官은 百石 이상의 年俸이 지급되는 下限의 관리

를 가리키며 佐史 이하의 월봉 수입자에 대비하여 쓰이는 용어이다

근래 楊振紅 廣懶薰雄 宮宅 潔 등은 佐史 이하의 下吏에는 1개

월을 단위로 윤번 근무하는 자들이 있어 이들은 그 이름 앞에 更 이

붙고 이에 대비하여 常勤하는 자들은 冗 이 붙어 구분되었다 하고

그 내역과 성격을 고찰하였다47)사실 후대의 冗 내지 冗官 이 보통

散官 의 뜻이었던 것에 비해 선진에서 진한 시기의 여러 자료에 보이

는 冗 은 위의 연구들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更 에 대한 相對로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lt운몽진간gt 秦律十八種 工人程에 冗

隸妾 2인은 工 1인에 當하고 更隸妾 4인은 工 1인에 당한다 小隸臣妾

으로서 可使者 5인은 工 1인에 당한다(冗隸妾二人當工一人 更隸妾四

人當工一人 小隸臣妾可使者五人當工一人) 에서48) 冗隸妾은 更隸妾에

비해 2배의 우대를 받고 있으며 lt이년율령gt史律에 大祝이 祝을 시

험해보아 祝에 뛰어나고 祠事에 밝으면 冗祝으로 삼아 이들을 冗한다

(大祝試祝 善祝 明祠事者 以爲冗祝 冗之) 고 하였는데 이 冗 은 같

은 史律의 祝十四章으로 學童들을 시험해서 능히 7천언 이상을 誦할

수 있어야 祝으로 삼고 5更으로 한다(以祝十四章 試祝學童 能誦七千

言以上者 〔乃得〕爲祝 五更) 에서의 更 과 相對로 위치하고 있다

47) 楊振紅 秦漢簡中的ldquo冗rdquordquo更rdquo餘供役方式middotmiddotmiddot從lt二年律令 史律gt談起 (簡帛硏究 廣西師範大學出版社 2006) 廣懶薰雄 秦漢律令硏究 (汲古書院

20103) pp297-304 宮宅 潔 漢代官僚組織の最下層 - 官 と 民のはざま-

(東方學報 87 2012) pp11-1248) 睡虎地秦墓竹簡 (北京 文物出版社 1978) p74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2또 lt里耶秦簡gt에도 冗戍士五(伍) (⑧666+ ⑧2006)와 更戍(某) (⑧

143 ⑧149 ⑧694)의 對稱 용어가 있다 한편 주례春官 槀人에 外

內朝의 冗食者의 食을 공급해주는 것을 관장한다(掌共外內朝冗食者之

食) 라 하였고 이에 대한 鄭注는 冗食者란 (관부에 밤까지) 머무르며

문서 작업을 하는 것이 마치 지금의 尙書의 屬吏로서 當直하는 者들과

같다(冗食者 謂留治文書 若今尙書之屬 諸直上者) 賈疏는 ldquo(鄭注에

서)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rdquo라 한 것은 또한 漢法을 인용하여 설명한 것이니 차례로 당직

하는데 관부에 留宿하며 (집에) 돌아가지 않는 까닭에 반드시 음식을

제공해야 한다(亦引漢法說之 謂以次當直 留在朝 宿不還 須以食供之)

고 해석하였다 여기서의 冗 은 夜勤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일

상 정규의 일을 넘어선다는 뜻을 지닌다 冗食 은 야근하는 관리에게

제공되는 음식이기 때문에 정규의 음식 지급에 추가되는 것을 의미한

다 전한 成帝 河平 연간에 수해를 입은 군국을 구휼하면서 그 지역민

을 다른 군국으로 피신시키고 그 곳에서 冗食케 하라 고 하였는데49)

文穎은 冗이란 散이다 廩食을 散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遊離되어) 정착하지 못하는 戶를 役事시켜 일자리를 주는 것이다(冗

散也 散廩食使生活 不占著戶給役使也) 로 해석하였고 如淳은 離散

된 자들에게 給食하고 관부는 그 임금을 지불한 것이다( 散著人間給

食之 官償其直也 )고 해석하였다 즉 수해로 유민이 된 자들에게 給

食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하고 아울러 役事의 일자리를 주어 그 임금

을 지불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석자들이 冗 을 散 의 뜻으

로 해석한 것은 국가의 재정을 풀어서 지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國錢의

lsquo散布rsquo라는 뜻으로 본 것이다 이 또한 정규의 재정 지출을 넘어선 추

가의 지출이므로 실은 위의 사례들과 같은 뜻이 된다 또 한서권24

하 식화지하에 또한 周官의 稅民 제도에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民이 떠돌아다니면서

일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夫布一匹을 납부하게 하며 布를 납부할 수

49) 漢書 卷10 成帝紀 河平4년조에 遣光祿大夫博士嘉等十一人行舉瀕河之郡水

所毀傷困乏不能自存者 財振貸 其爲水所流壓死 不能自葬 令郡國給槥櫝葬埋

已葬者與錢 人二千 避水它郡國 在所冗食之 謹遇以文理 無令失職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3없는 자에게는 縣官에서 冗作케 하고 이들에게 衣食을 제공한다 고50)

하였다 여기서 冗作 이란 정규의 요역 부과 외에 징벌의 뜻으로 역

을 추가하여 부과한다는 의미이다

또 lt운몽진율gt 司空에 冗邊 이 있다

백성에게 모친 및 동생이 있어 隸妾이 되었는데 謫罪가 아니고 冗邊5

歲에 복역하되 근무 기간을 無償으로 하고 1인을 면하여 庶人으로 하고

자 한다면 이를 허용해준다(百姓有母及同牲(生)爲隸妾 非適(謫)罪殹(也)

而欲爲冗邊五歲 無賞(償)興日 以免一人爲庶人 許之) (司空 p91)

이 冗邊五歲 도 규정된 정규 戍邊役의 額 외로 추가된 役이란 뜻의

용어이다 그래서 이 또한 위의 사례들과 마찬가지의 뜻이다 이렇게

冗 에는 更 에 相對한 지칭으로 更 에 복무하는 자들에 비해 전문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갖춘 자들이거나 기타 사유로 정규의 額을 넘

어서는 복무를 하는 것 또는 그 役者 또는 職名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즉 정규 일반의 更 방식의 근무 額(日數)에 비해 담당

분야의 뛰어난 능력이나 징벌 등 기타 사유로 더 많은 근무를 추가로

하게 되는 자들의 職을 冗 이라 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러한 冗 을 쓰는 데는 국가의 재정 지출도 추가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국가재정의 추가 지출의 뜻으로서 散(散布)

이라는 뜻이 되어 후대 冗官==散官의 칭이 생긴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해석된다면 그간 충분히 해석되지 못한 lt운몽진률gt廏苑

律에 연간의 養牛 실적 평가에서 下等을 받은 宂皂에게 2개월의 복무

기간을 추가하는 벌을 내린다는 律文에 보이는 宂皂51) 그리고 同 秦

律雜抄 屯表律에 나오는 lsquo冗募rsquo도52) 위와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50) 又以周官稅民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民浮游無事 出夫布一匹 其不能出布者 冗作縣官 衣食

51) lt雲夢秦律gt p30 廏苑律의 율문 卒歲 以正月大課之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殿者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罰

冗皂者二月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52) lt雲夢秦律gt p145 秦律雜抄의 율문 冗募歸 辭曰日已備 致未來 不如辭

貲日四月居邊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4것이다 廣懶薰雄은 更 을 非常勤 冗 을 常勤의 뜻으로 요약하였는

데53) 그러한 일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는 更 이 본래 규정된

交代근무라면 冗 은 본래의 규정액을 넘어선 근무를 뜻하는 까닭에

그러한 해석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설문宀部에 冗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人在屋下 無田事也 라 하였는데 無田事 로서의 冗의 뜻도 更

이 당번으로 給事하는 기간을 제외하면 田事에 있어야 하는 것과는 달

리 冗은 비당번인 경우에도 관부에서 給事하는데서 칭해진 것이라 하

겠다

예기중용에 忠信인 자에게 봉록을 두텁게 주는 것은 士를 勸함이

고 때로(일시적으로) 使役시키되 賦斂을 가볍게 하는 것은 백성을 勸

하기 때문이며 日用으로 근무시키되 그 근무기간과 성과를 계산하여

급료(廩)를 지급하여 그 근무에 합당하게 보상해주는 것은 百工을 권

하기 위함이다(忠信重祿 所以勸士也 時使薄斂 所以勸百姓也 日省月

試 旣廩稱事 所以勸百工也) 라 하였다 여기서 忠信 이란 禮記禮器에 忠信 禮之本也 라 하였고 여기서는 이를 修學하고 실행할 수

있는 사대부 내지 命官層을 가리키고 있다 百工에 대해 日省月試

한다 함은 근무한 日數와 그 성과를 월 단위로 계산한다는 것이다 注

에서 旣廩稱事 의 旣 를 lsquo餼rsquo로 해석하고 lsquo餼廩rsquo은 稍食 이라 하였

다54) 여기에서 일반 백성에게 때로(일시적으로) 사역시킨다는 時使

가 곧 更 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진한 시기 更徭制의 운영에

서 충분히 입증된다 宮宅 潔은 年俸이 있는 것이 有秩인데 그 最下가

百石이며 연봉이 없고 본래 日食과 月食으로 지급되는 등급을 斗食이

라고 한다 하였다55) 그가 말한 斗食은 백관표에 나열된 斗食과 그 이

하의 여리 吏職을 포함한 것이다 그런데 일반 백성에게 更役이 부과

되고 그들에게 동원된 기간 동안 당연히 매일의 給食은 지원되겠지만

그 일반 요역으로서의 更役에 대한 日當의 보수가 지급된 것은 아닐

53) 廣懶薰雄 앞의 글 p304

54) 注에 日省月試 考校其成功也 lsquo旣rsquo讀爲餼 餼廩 稍食也

55) 宮宅 潔 앞의 글 p39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5것이다 그 일반 요역은 일반 백성의 기본 의무사항인 까닭이다 반면

百工의 근무일수와 성과액에 대해 稍食 (日俸 내지 月俸)이 지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매 끼니의 급식이 아니라 工役에 대한 보수 내

지 給料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근무일수라든가 성과액을 계산

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기서의 百工은 관부의

員吏에 속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관부에 속하여 매

끼니의 식사 뿐 아니라 工役한 일수와 성과량에 따라 봉록이 지급된다

는 것이다 그래서 봉록 지급은 錢이나 곡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반

면 전기한 국어晋語4 文公修內政納襄王 章에 公食貢 大夫食邑 士

食田 庶人食力 工商食官 皁隸食職 官宰食加 에서 工商食官 의 工

商은 모두 관부의 員吏에 속한 자들인데 그 注에 옛날에는 田을 주는

것으로 祿俸을 제정하였다 관부에서 주는 廩이란 곧 관부에서 田을

받는 것이니 후세에 錢粟을 주는 것으로 祿俸을 제정한 것과 같지 않

다(古者以田制祿 官廩之者 卽受田於官 非如後世之以錢粟制祿也) 고56)

하였다 또 한서권24식화지상에 士工商이 田을 받는 것은 5口가 받

는 것이 되어야 농부1인이 받는 것에 當한다(士工商家受田 五口乃當

農夫一人) 고 하였다 즉 百工과 商賈는 그 직무에 따라 俸祿을 받는

데 후대와 같이 錢粟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田으로 받으며 그 액수는

일반 농민의 15이라는 것이다 이는 전술한 주례의 胥徒가 최하품

의 田 1百畝를 俸祿으로 받는 것과 lsquo以田制祿rsquo이라는 면에서 일치한다

그리고 lsquo以田制祿rsquo이 후대에 lsquo以錢粟制祿rsquo으로 변천 된 것은 秦漢의 사

례를 통해 분명하다 어쨌든 관부의 員吏인 百工과 商賈에게 일반 백

성의 更役과는 달리 祿田 또는 월봉 형태의 錢粟 지급이 행해진 것이

라 하겠다 또한 工商이 일반 요역 대신에 전문기능인으로서의 工役과

관부 소요 물품의 調達役의 職分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이 또한 職

役에 해당하는 셈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관부의 員吏이면서 斗食 보다 下位에 위치하여 稍

56) 國語正義(下冊) (董增齡 撰 巴蜀書社 1985) pp815-6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6食 내지 月俸을 받는 여러 導從役 祝醫工商 등의 役은 그 職分

의 役 즉 職役으로 奉公한다 그런데 후한 초에 이 職役의 면역전으로

서 走卒錢을 징수하고 그 재원으로 빈민을 고용한 것이 不法이었으며

수십 년 이어지다가 금지되고 違法한 관료들이 처벌받고 있는 것에

의하면 이 役들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戶가 지정되어 있어 여타의 일반

戶가 대신하여 맡을 수 없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은 導

從役 등의 담당자는 일반서민이되 그 중에서 특별히 선발된 층으로 구

성되어 전문의 분야를 세습하며 의무로 담당하는 하나의 신분층으로

형성되어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그 役은 하나의 身分役이기

도 하였던 셈이다 또한 그 代役錢으로서 走卒錢 징수 및 雇傭 방식이

나오게 된 것은 그 역의 담당층 가운데 錢으로 實役을 피할 수 있는

부유충이 형성되었고 후한 前期에 전통의 身分制가 느슨해진 여건에

서 身分役의 근본 형태가 유지되지 못하고 일탈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속한서백관3에 執金吾의 속관 중에 화려 장려한 복장

과 장식으로 황제의 행차를 호위 수종하는 騎士로서 緹騎二百人이 있

는데57) 本注에 無秩 比吏食奉 이라 하였다 즉 吏가 아니지만 吏의

대우를 받아 봉록을 받는 계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下吏에

들지 못하지만 봉록을 받는 면에서는 동일한 계층이다

한편 앞에 든 國語 晋語4에서 工商食官 에 이어 下記된 皁隸(吏

에 下屬한 徒隸)食職 이 있다 이 皁隸 계층은 지금까지 검토한 庶民

在官者 로서의 胥徒導從役 담당자 및 樂祝醫衛士工商 등

보다 下位 내지 그 下屬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그 담당 신분과 그 役의 성격에 대해 검토한다

Ⅳ 下層 員吏의 役과 徒隸層의 役

57) 당 조목의 注 所引 漢官曰 執金吾緹騎二百人 [持戟]五百二十人 輿服導從

光滿道路 群僚之中 斯最壯矣 世祖歎曰 ldquo仕宦當作執金吾rdquo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7

앞에서 검토한 관부 구성의 최말단에 위치한 주례에서의 胥徒와

춘추진한 시기의 導從役 담당자 및 樂祝醫衛士工商 등의 下

吏層 외에 그 下屬으로 보이는 皁隸가 있다 앞에 든 각 신분에 따른

奉公의 職分을 나열하고 있는 國語晋語4의 記事 皁隸食職 의 注에

皁隸를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라 한 것에 의하면 이 계층은 위에 열거한

여러 下吏에 下屬한 노역자들이라 할 수 있다 胥徒와 導從役 담당자

등은 각각 주례와 漢官 등에 그 員數가 규정된 까닭에 이들은 員

數 규정에 들지 못한 皁隸에 대비해 下層의 員吏로 칭할 수 있다

皁隸가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라 하였으니 곧 관노비 내지 그에 類하는

계층일 것인데 그들이 lsquo職을 食한다rsquo고 한 것은 각 분야의 官署에 分屬

되어 그 職務에 給事함으로써 생업을 삼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皂

隸 牧 圄 僕 등이 후대의 천민이나 隸民이 아니라 일반민이었다

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58)그러한 주장은 이들이 대체로 관부에 給

事하는 계층으로 여러 기사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고 위의 皁隸食

職 은 곧 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관부에 給事

하는 면으로 인해 예속성이 있게 된다는 면이 있다 후술하는 바와 같

이 그들이 일반 서민 출신이면서도 후대에 그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모

두 예속신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통용되는 것은 그러한 관부에의 예속

성이 분명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예속성을 말해주는 것이 또한 職

役의 한 속성이다

한편 國語 晋語4 文公修內政納襄王章에 (晋文公)元年 春에 公(晋

文公)과 부인 嬴氏(秦穆公의 女인 文嬴)가 王城(秦의 地名)에서 돌아올

때 秦伯이 衛士3천인을 納하였는데 실로 기강이 있는 僕들이었다(元年

春 公及夫人嬴氏至自王城 秦伯納衛三千人 實紀綱之僕) 고59) 하였다

秦漢의 衛士 출신과 달리 여기서는 그 출신 신분이 僕인 자들로 구성

58) 黃中業 春秋時期的ldquo皂隸牧圉rdquo屬于平民階層說 (齊魯學刊 阜師院學報) 1984-2 19844) pp69-72

59) 위의 책 pp809-810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8되어 있다 이 당시는 秦 穆公의 지원으로 晋의 文公이 귀국하여 懷公

을 죽이고 즉위한 때인 까닭에 군사 내지 호위부대의 지원이었다 그

衛士 군단의 신분은 皁隸層에 들어가는 僕인데 관부에 給事하는 職分

은 衛士이다 이들의 紀綱이 선 자들이었다고 한 것은 본래 秦에서도

衛士의 職으로 給事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춘추기에 邑數百이나 社

數百의 단위로 국가 사이에 分與되는 일이 자주 있었고 3천인에 이르

는 多數의 전문 집단이 타국에 分與된 것이긴 하지만 일부 전문의 인

력을 分與나 上納 하는 것 또한 당시 종종 일어났던 일이다 어쨌든

그 衛士집단이 모두 僕이었다는 것은 일반민이 아니고 관부에 예속되

는 신분이었음을 말해준다 예속신분으로 궁성을 지키는 衛士로 삼는

것은 주례地官 師氏에서 그 직무 가운데 (師氏는) 그 소속의 四夷

之隸를 거느리고 각기 그 병력으로 왕성의 문밖을 지키는데 복무하며

또한 (행차 때) 앞에서 길 정리를 한다(師其屬帥四夷之隸 各以其兵服

守王之門外 且蹕) 에 이미 보이고 漢武帝 때 제후왕 貴戚의 不服을

다스리기 위해 중앙 내사지역을 감찰하는 司隸校尉와 지방의 刺史에게

중도관의 徒奴 1200인을 보내어 二千石官을 독찰하게 하였는데60) 이

1200인의 徒奴부대는 이후 사예교위 내지 刺史 직속의 상비군단이 되

었고 그 성원은 세습 병사집단의 근간이 되어 牧使 刺史 등 將領下의

公兵이나 私兵으로 활약하였다61) 漢官舊儀 卷上에 漢代 長安에 騎

亭長 79인과 함께 6월 1更의 倉頭盧兒를 給事하게 하였다62)이들 四夷

之隸나 徒奴倉頭盧兒 등은 적군포로이거나 刑徒 계통 출신으로 관부

에 예속된 신분일 것이다 특히 관부에 囚禁된 형도들은 여러 방면의

60) 北堂書鈔設官部 및 漢官儀권2補遺2에 ldquo司隸校尉는 武帝 때 처음 설치되

었다 이후 諸侯王 貴戚이 不服함에 中都 中官의 徒奴千二百人을 (파견해서)

一校尉部刺史에게 속하게 하여 二千石官을 독찰하게 하였다(司隸校尉 武帝初

置 後諸侯王貴戚不服 乃以中都中官徒奴千二百人屬爲一校尉部刺史 督二千石

也)rdquo

61) 이에 대해서는 박건주 한대의 지방상비군과 部曲의 推移 (동양사학연구118 20123) 참조

62) 長安給騎亭長七十人 六月一更倉頭盧兒 (漢官六種 北京 中華書局 1990

9) p3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9노역에 활용되었는데 근래 石岡 浩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刑徒 집단

은 크게 세 부류 내지 등급으로 나누어져 활용되고 대우에 차별이 있

었다고 한다 즉 가장 上位에 있는 司寇는 특정 임무에 복무하는 것이

정해진 형도이며 전택을 소유하여 戶主가 되는 권리(lt二年律令gt

310-316簡) 왕조로부터 사여 받는 권리(同 291-293) 子가 士伍로 복

귀할 수 있는 권리(同 364-365)를 갖는다 다음으로 徒隸 는 특정 관

서에 예속하여 직무를 숙지하였거나 기술에 숙련하여 전문기능자에 동

등한 가치를 지니는 형도 를 지칭하며 그것으로 동일 직장에 계속 근

무하는 까닭에 일반 형도와는 달리 토목공사나 물자운송 등의 노역에

서 제외된다 또한 왕조에 공헌하는 자로서 사여를 받는 대상도 된다

(同 291-293) 즉 그들은 隸臣鬼薪城旦이면서 숙련자 기능자로서

일반 형도보다 우대받는 자들이다 위 양자에 비해 일반 형도는 위의

여러 특혜를 받지 못하며 城旦은 주로 토목사업에 隸臣은 주로 여러

관서의 잡다한 노역에 복역한다63)이는 충분히 수긍되는 견해이다 이

가운데 徒隸는 관부 내 각 分署의 전문 직장에 分屬되어 사역될 것이

기 때문에 전술한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로서의 皁隸가 곧 그들의 주요 부

분이 될 것이다 그 중에 일반 관노비로부터 개인적 재능과 기술로 선

발되어 해당 관서에 給事하는 자들도 포함될 것이다 단지 정규의 전

쟁에 형도를 동원하는 사례가 많은데 그들이 정규의 병사가 된 것은

아니고 군공을 세워 免刑되기 이전에는 그대로 형도인 것과 같이 함께

관부에 給事하고 있다 하더라도 각 신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상의 검토에 의하면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에는 이른바 lsquo吏에 下屬

한 徒隸rsquo로서 食職하는 皁隸집단이 있고 그 구성에는 관노비 뿐 아니

라 적군포로나 관노비 및 형도 출신의 衛士 그리고 刺史 牧使 등의

將領下에 있는 직속 상비군 형도 가운데 司寇 그리고 기능과 숙련으

로 형도 중에서 선발된 職能의 徒隸집단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員

吏이되 下吏인 계층의 복무가 그 신분에 따른 職役인 것과 마찬가지로

63) 石岡 浩 秦漢代の徒隸と司寇 -官署に隸屬する有職刑徒 (史學雜誌 121-120121) p32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0이 皁隸層의 복역도 모두 관부에 생업을 의존하는(食職) 職役이라 할

수 있다

또 좌전에 주로 보이는 輿人이 있는데 同 昭公7년조에 天에 十日

이 있고 人에 十等이 있으니 下가 上에 事하는 所以이다 까닭에 王의

臣은 公 公의 臣은 大夫 대부의 臣은 士 士의 臣은 皁 皁의 臣은

輿 輿의 臣은 隸 隸의 臣은 僚 僚의 臣은 僕 僕의 臣은 臺이다 馬

에 圉가 있고 牛에 牧이 있어 百事를 待한다 라 하였다 古來의 여러

注疏에서부터 이미 lsquo輿人rsquo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지만 이를 분석한 宇

都木 章의 견해에 의하면 縣鄙의 野人이 평시이든 戰時이든 國都의

귀족에 징발되어 葬儀戰士補助 車馬와 관련되는 여러 役務에 종사

하는 때 그들을 lsquo輿人rsquo이라 칭하였다고 한다64) 여러 자료에 의하면 皁

에서 牧에 이르는 서열 순위가 어디에서나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

고 대개 동일 계층의 異稱인 경우가 많다 皁 이하의 서열에 이렇게

다단계의 臣屬 관계가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같은 徒에도 上位 순서로 胥와 徒 및 그 徒의 지휘를 받는 징발된 徒

가 있으며 員吏에 들어가는 導從役 등의 庶民在官者 가 있고 그에

下屬하는 皁隸의 구분이 있는 것에 의하면 최소한 士 아래의 서민 계

층에 3 - 4 단계의 차등 신분이 있을 수 있다 위의 十等 순위에서 士

이하에 위치하여야 할 庶民이 곧 皁輿 등에 해당할 것인데 모두 관

부에 給事하는 면에서 후대 예속신분을 가리키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

다 그리고 일반 서민 가운데서도 皁輿 이하는 모두 전문의 職分으

로 관부에 給事하는 의무가 주어진 계층이므로 일반 농민으로서의 서

민과는 구분되는 서민이었다고 생각한다 즉 일반 농민이 농업을 생업

으로 하며 일반의 요역 의무가 주어진 반면에 皁輿 등은 주로 전문

의 기능을 요하는 관부의 직무에 給事하는 것으로 일반요역을 대신하

며 때문에 일반 서민이면서 관부에 예속된 신분의 일면을 지닌다 그

렇지만 관노비나 형도로서 관부에 예속되어 給事하는 신분과는 명확히

64) 宇都木 章 輿人考 (三上博士頌壽記念 東洋史考古學論集 朋友書店 1979

12) pp108-11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1다르며 주례의 胥徒와 같은 下吏의 員吏 보다 보통 下位이지만 胥

徒와 마찬가지로 주로 전문 기능의 職分에 복역한다는 면에서 같고 그

일부분은 下吏에 충당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곧 胥徒가 일반 서민의

徒로부터 선발된 자들인 것과 같다 위의 十等 서열은 농민을 제외하

고 관부에 給事하는 신분만을 총괄하여 나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

술한 工商食官 皁隸食職 도 모두 관부에 給事하는 工商과 皁隸를 열

거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복무도 당연히 職役이 되는데 그 職能 내

지 職分의 종류별로 숙련도 및 경력 등에 따른 그룹 내에서의 서열이

있게 되고 이를 계층으로 인식해서 lsquo皁臣(臣屬)輿rsquo 등과 같은 記述이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 각 직능별 部署별 전문화된 職役의 활용은 관

부의 운영상 당시의 사정으로는 불가피한 면이 있다 그러한 체제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점차 계층 구분의 엄밀성이 느슨해지고 세분된

차등의 질서가 점차 단순화되면서 그 용어도 혼용되기에 이른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위의 계층 구분은 세분된 서열만이 아니라 각 계층

의 담당 職分을 구분해주는 칭호로 쓰인 면도 있다 그렇다면 輿人은

戰時에 주로 戰車부대를 보조하는 직무 분야를 담당하는 계층이라 할

수 있고 그러한 면에서 여러 下屬 계층 가운데 가장 상위의 계층이었

지 않을까 한다

한편 이상의 皁隸層이 본래 일반서민 출신이었다는 입장에서 보면

관부에 給事하되 향리에 거처하면서 일정 기간 만 순번으로 복역하는

交代制가 있었을 수가 있고 또는 대체로 일부 기능자나 世戶에 한정

되었겠지만 휴가 기간 외에는 상근하는 형태도 있었을 것이다 예속된

신분인 경우 그 거처도 대체로 관부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앞에 든 秦

漢律에 교대 근무하는 更隸妾의 존재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근무

기간에만 관부에서 거처하는 예속 신분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刑徒

중에서도 司寇는 田宅을 소유하고 戶主가 될 수 있었으며 徒隸도 賜

與를 받을 수 있는 까닭에 이들 중에 일부는 관부 밖에 따로 거처를

지니고 출퇴근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단지 衛士나 部曲 집단은

대체로 屯營 내에 거주하였을 것이다 위로는 승상으로부터 아래로는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2하급의 吏에 이르기까지 吏舍에 거처하며 휴가 기간이 되어야 비로소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는 大庭脩의 연구가 있지만65) 漢舊儀 卷下

에 舊制에 尉는 모두 관서에서 거처하였다( 舊制尉皆居官暑 ) 라66)한

것에 의하면 舊制 가 어느 시기를 말하는 것인지 불분명하지만 宿衛

와 경찰 임무의 尉職 외에는 관서에서 거처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음을

말해준다 매년 직급에 따른 수개월의 휴가 기간이 설정되어 있지만

이는 성내에 거주하며 매일 출퇴근 하더라도 고향은 먼 곳에 있는 경

우가 많아 歸鄕 휴가를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外地 출신으로 城內

에 거처가 없는 관리들을 위한 吏舍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吏舍의 존재가 모든 관리의 관부 거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居官府의 여러 給事職 관노비 司寇나 일부 徒隸를 제외한 일

반 형도 여러 當番의 宿衛職 등을 제외한 관리는 官舍 밖의 私家에서

거처한 것으로 본다

庶民在官者 로서의 職役 복무는 常勤과 교대근무의 두 시스템으로

운영되었을 것이다 胥徒는 본래 모두 징발된 徒 가운데서 재능 있는

자로 선발되어 관부에의 給事가 생업이 된 자들로서 祿田을 받는 자들

이며 員數가 책정되어 있는 까닭에 常勤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

나 함께 징발된 여타의 徒는 胥徒와 같은 給徭役의 奉公을 행하지만

순번으로 동원된 기간 만 한시적으로 복무하는 까닭에 동원 기간 동안

의 食料 이외에 노동의 보수를 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그들은 만

민의 기본 의무를 職役으로 이행하는 것일 뿐이다 정부로서는 관부에

給事할 人才와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지만 필요한 부

분을 모두 常勤하는 자로 임용하여 그들의 생업을 봉록 지급 등으로

전면 지원하는 것은 재정에 큰 부담이 되는 것이었다 즉 관부에서 필

요로 하는 특정 업무 기능자들을 일반 요역 면제 대신으로 복역케 하

고 이를 순번제로 운영하면 복무 당번 기간 외에 그들은 다른 생업을

65) 大庭脩 漢代官吏の勤務休暇 (秦漢法制史の硏究 創文社 1982) p584

66) 앞의 漢官六種 p81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3꾸려나갈 수 있기 때문에 국가는 그들에 대한 생업 유지 지원 부담이

훨씬 적어진다 관부 給事層 가운데 命官과 員吏 이상이 常勤制라면

그 이하의 여러 職役層들은 대체로 교대근무제 중심으로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테면 lt奏讞書gt 案例17에서 秦王政元年 雍縣人 樂人 講이 자신

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사건 당일 자신은 踐更에 복무하러 11월 한

달간 함양의 外樂(관서 기구 名)에67) 소집되어 복무 중이었음을 진술

하고 있다 따라서 함양에 거주하지 않은 樂人이 그 관서에서 常勤하

지 아니하고 특정시기 일정 기간 만 교대로 근무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獄事에서 피고인 樂人 講이 踐更으로 1개월 간 복무한

곳이 外樂인 까닭에 일반 요역이 아니라 樂人의 職役을 이행한 것이라

고 본다 전한 哀帝 때 樂人의 員數를 罷하라는 명령에 대해 승상 孔

光과 대사공 何武가 진언하길 각 담당별 樂人의 현재 員數와 罷할 수

없는 수를 열거한 후 총 829인의 員數 가운데 388인은 罷할 수 없다고

하자 이를 재가한 바가 있다68) 이는 전한말의 사정이지만 전국진에서

도 郊祭 등의 각종 국가제사와 宮中 樂이 행해졌기 때문에 위의 수치

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속한서 백관2 大樂令 注引의

漢官과 盧植禮注에 의하면 八佾舞를 추는 樂人의 員數가 380인인

데 여기에 卑者之子는 임용될 수 없고 6백석에서 2천석 및 관내후에

서 五大夫의 嫡子 출신 5척 이상의 신장 12세에서 30세 顔色온화 등

의 조건을 갖춘 자에 한정되었다69) 이에 의하면 樂人 講은 走馬의 傭

이 되어 京師에 왕래하고 있는 빈한한 자로서 도저히 중앙 大樂令 속

67) 관서 기구 이름으로서의 外樂은 lt이년율령gt秩律 449簡 및 西安相家巷出土

秦封泥에 보인다(周曉陸路東之 編著 秦封泥集 三秦出版社 2000 一

二44)68) 漢書 권22 예락지2

69) 漢官曰 ldquo員吏二十五人 其二人百石 二人斗食 七人佐 十人學事 四人守學事

樂人八佾舞三百八十人rdquo 盧植禮注曰 ldquo大(子)[予]令如古大胥 漢大樂律 卑者

之子不得舞宗廟之酎 除吏二千石到六百石 及關內侯到五大夫子 取適子高五尺已

上 年十二到三十 顏色和 身體修治者 以為舞人rdquo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4하의 樂人 員數에 들어갈 수 있는 처지가 못 되는 자이다 그는 향리

에 거주하면서 매년 1개월씩 京師의 外樂에 가서 복무하는 기간 외에

는 傭賃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下吏의 員吏가 아

니면서 樂工의 職能으로 일반 요역 대신에 京師의 제사나 예락 행사에

나아가 給事하는 자이다 그래서 그의 복역도 職役인 셈인데 이러한

모습은 주례의 胥徒와 흡사하다 단지 胥徒가 員吏로서 봉록은 받는

것과는 다르다 양자가 모두 職役이지만 胥徒는 庶民在官者 이고 樂

人 講은 lsquo非吏인 職能人rsquo이다 그렇지만 양자 모두 개인적인 職能으로

관부에 給事하는 면에서는 상통한다 따라서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

부에 給事하는데는 員吏로서 복무하는 경우와 非吏로서 복무하는 경우

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Ⅴ lt走馬樓吳簡gt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복무

형태 및 그 성격

1996년에 호남성 長沙市 도심 우물에서 발굴된 lt吳簡gt은 총 17萬

餘 枚로 아직 그 일부만이 정리 해독되어 출간된 상태이지만 이미 출

간된 분량 가운데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의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자

료들을 많이 지니고 있다 孫吳 嘉禾 연간(232-238)의 여러 戶籍簿

내지 吏民簿 등에 吏와 給吏로 구분된 人名簿가 다수 존재한다 이 자

료들은 그간 명확하지 못하였던 吏役과 吏戶의 존재형태와 관부에 給

事하는 계층 및 그 職役의 실태를 파악하는데 획기적인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근간의 연구에서 여러 異見으로 그 문서가 지니

는 뜻을 파악하는데 상당히 혼란을 초래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전술한

職役의 전통과 여러 계층의 형태를 살펴본 성과를 참고로 하여 나름대

로 새로운 해석을 추구해보고자 한다

lt吳簡gt의 lt吏民人名年紀口食簿gt(竹簡(肆))에서는 각 里別로 里魁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5가 領하는 食口數를 吏와 民으로 구분하여 통계하고 있는데 그 일례를

다음에 든다

(A)

(이하 簡文 인용에서 內에 있는 字를 괄호 하여 표기함〕

集凡五唐里魁周領吏民五十戶 口食二百八十九人 (簡380)

其一百六十二人男 (379)

其一百卄七人女 (378)

其四戶縣吏 (377)

其二戶郡吏 (376)

其戶州吏 (374)

其五戶給新吏 (373)

其一戶縣卒 (372)

其一戶佃帥 (371)

이는 孫吳 嘉禾 연간 里別吏民口食簿인데 五唐里 50戶 가운데 일반 民

戶를 제외하고 州吏에서 佃帥까지의 戶를 따로 특기하고 있는 것에 의

하면 크게 民戶層과 州吏 이하의 吏층으로 양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

다 먼저 縣吏 이하를 이른바 세습 吏職戶인 吏戶로 볼 수 있는가 하

는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여러 異見이 제기되어 있는데 이 문

제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그런데 lt吳簡gt의 여타 戶籍簿나 戶口簡에

의하면 民戶를 제외한 縣吏 이하의 戶도 다시 縣吏 郡吏 州吏 軍吏 등

의 類와 맨 앞에 lsquo給rsquo字가 붙어 있는 계층의 類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즉 縣吏類의 吏 외에 其十二戶給縣吏下品 (壹5467)

其三戶給郡縣卒 (貳2318) 등과 같은 예들인데 그 職事나 給事

하는 관서의 명칭에 따라 多種의 명칭이 보인다 이를테면 給郡吏 給

縣吏 給州吏 給軍吏 給郡園父 給朝丞 給子弟 給驛兵 給鍛佐 給庫

吏 給縣卒 給度卒 給驛卒 給子弟佃客 給限田客 給佃帥 給常佃 給

家種客 給乞兒 給三州倉父 給養官牛 給習射 給私學 給官瓦師 給

亭復人 給亭雜人 給任師 給郡醫 給縣帥 給州私學 給新吏 給佃吏

給郵卒 給鹽兵 給關父 등이다 이렇게 앞에 lsquo給rsquo字가 들어간 계층을

일단 동일 계층으로 보아 lsquo給吏rsquo로 칭하고 縣吏 群吏 州吏 軍吏 등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6lsquo給rsquo이 붙어 있지 않은 계층을 lsquo吏rsquo로 칭하여 양자를 구분하고자 한다

lt오간gt에서 人名에 붙는 신분명은 크게 眞吏 某吏 給某吏 大男(大

女 民)의 4종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들은 그 표기상의 차이만으로도

일단 구분되는 존재라고 보이는데 현재 앞의 3종 신분명의 구분 문제

와 관련하여 몇 가지 다른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먼저 黎虎는 縣吏나

郡吏州吏 등의 吏가 侯家나 司隸校尉 또는 郡內에 소재한 전문 기

관 州郡 관내의 遠縣에 일정 기간 파견되어 給事하고 있는 자들을 칭

하여 給郡吏 등으로 칭하는 것일 뿐 그 신분은 本州 本郡 本縣의 吏

와 동일하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本郡의 郡吏가 곧 給郡吏이기

때문에 다른 계층이나 신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眞吏는 無職事

의 冗散官에 상대하여 쓰이는 용어로 실제 除授된 관원이라고 한다70)

黎虎와는 달리 양자를 다른 계층으로 보는 견해들도 제기되었다 먼저

韓樹峰은 給吏는 비록 吏의 名은 있지만 일반 백성으로서 잠시 吏의

職事에 종사하는 것일 뿐이고 혹 吏로 임명될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그 신분은 여전히 보통 백성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給吏와 구분하여

口算錢의 면제 특혜를 받는 州吏 郡吏 縣吏 등을 총칭하여 眞吏라 한

다고 하였다 즉 眞吏가 정식의 吏인데 비해 給吏는 일반민이며 일정

기간 만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給吏의

관부給事는 실제상 요역의 일종이라 한다 71) 한편 楊振紅은 동일인의

신분이 문서에 따라 다른 신분으로 등록되어 있는 점에 의거하여 이를

테면 給郡吏가 郡吏나 眞吏로 簡稱된 것이라 하고 眞吏나 給吏 모두

吏로 簡稱되며 州郡縣의 掾史職에 있는 자들로서 署長 佐官 등의 lsquo官rsquo

에 상대되는 자들을 지칭한다고 하였다 아울러 吏는 그 작위가 公乘

이면서 賦役 대상이고 漢魏시기에 吏職의 세습화가 이루어지면서 전문

70) 黎虎 說ldquo給吏rdquo -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社會科學戰線 2008-11) pp89

-94 說ldquo眞吏rdquo-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史學月刊 2009-5) p5071) 韓樹峰 走馬樓吳簡中的ldquo眞吏rdquo與ldquo給吏rdquo (吳簡硏究 2 武漢 崇文書局

2006) 韓樹峰王貴永 孫吳時期的ldquo給吏rdquo與ldquo給戶rdquo -以走馬樓吳簡爲中心 (吳簡硏究 3 2011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7적 吏戶인 眞吏가 출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吏가 본래 일반 서민

이었던 까닭에 公乘 이하의 서민과 합칭하여 吏民이라 한 것이며 삼

국시기 官과 吏가 구별된 연원은 漢代의 長吏와 小吏 내지 士와 庶民

의 구분에 있다고 한다72)다소 혼란스러운 견해들이고 용어상의 해석

문제가 겹쳐 있어 난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들 異見의 관건은 吏와 給

吏의 구분 문제 그리고 吏戶에서의 吏가 어떠한 吏를 가리키는가 하

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여러 견해에서 공통으로 들고 있는 lt吳簡gt의 다음 문서를 먼저 살

펴본다

(B)

廣成鄕勸農掾區光言 被書條列州吏父兄子弟伏處 人名 年紀爲簿

輒隱核鄕界 州吏七人 父兄子弟合卄三人 其四人刑 踵 聾 歐病 一人

被病物故 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 十二人細小 一人限田 一人

先出給縣吏 隱核人名 年紀相應 無有遺脫 若後爲他官所覺 光自坐 嘉禾

四年八月卄六日破莂保據(此簡無編戶)73)

이 자료는 광성향 勸農掾 區光이 작성하여 보고한 문서인데 廣成鄕 領

內 州吏7인의 父兄子弟 23인의 현황을 파악하여 嘉禾4년(235년)에 보

고한 내용이다 lt吳簡gt戶籍簿에서 州吏 등의 吏가 있는 戶는 그 州吏

가 戶人(戶主)으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 州吏7인이란 모두 그 戶의

戶人이다 이 현황 내역에 의하면 州吏7인의 父兄子弟 총합은 23인이

고 이 가운데 4인은 受刑 질병 중이며 1인은 物故 4인은 이미 관부

에 보내져 그 本主에 從事하며 관부에서 복무 중이다 12인은 細小 즉

소인이고 1인은 限田을 경작 중이다 이 限田이 lt吳簡gt의 lt吏民田家

莂gt 등에 보이는 lsquo二年常限rsquo의 田으로 보아 侯家의 田이나74) 屯田을75)

72) 楊振紅 吳簡中的吏 吏民與漢魏時期官 吏的分野 -中國古代官僚政治社會構

造硏究之二 (史學月刊2012-1)73) 侯旭東 三國吳簡兩文書初探 (歷史硏究 2001-4) p172에서 轉引

74) 入都鄕嘉禾二年步侯還民限米一斛 (5-1556) 其卄六斛民還黃龍年臨湘侯

限米 (602017)

75) 黃龍元年文入郡屯田民吳平斛米一百六斛二斗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6227) 其三斛五斗郡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8吏民에게 分給하여 佃作케 한 田으로 보는 것이 일반이다 그 경작자

는 그 田地(佃地)를 국가로부터 할당 받아 의무로 경작하기에 佃民과

같다 그 佃民에는 諸吏와 일반 民戶가 다 포함되고 있다76) lt吏民田

家莂gt에서 그 限田이 lsquo二年常限rsquo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그 의미에 대해

佃作기간 내지 佃種權이 2년으로 한정되어 있어 계약 기간이 지나면

배속되는 田地가 바꾸어지는 방식이었다는 견해가 있고77) 반면에 佃

地의 경작 기간이 아니라 地租額을 2년간 固定하는 것을 말한다는 견

해가 있다78) 사실이 어느 쪽이든 吏戶의 식구 가운데 일부는 국가의

농지를 佃作하고 地租를 납부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 액수가 漢代

사유지에 대한 조세보다 높다 같은 문서에는 租米 뿐 아니라 동시에

畝當 布2匹와 錢70-80까지 징수되고 있다 따라서 二年常限田의 分給

과 佃作은 受惠라기 보다는 노동력의 징발이고 耕作의 賦課로 보는 것

이 마땅하다 于振波가 常限田의 분급 액수를 정의하길 lsquo强制性的 生産

定額rsquo이라79) 본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 이어 1인은 先出給縣吏 인데

먼저 給縣吏로 보내졌다는 의미이다 先給吏의 사례는 嵩男弟恭年十

九先給州吏 (參1450) 등 몇 개가 더 보인다 이렇게 해서 총 23인의

食口 현황이 명료하게 보고되고 있다 그 내역에 의하면 州吏의 식구

는 受刑중인 자 질병자나 小人을 제외하고는 모두 관부에 給事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1인의 先出給縣吏 와

이미 관부에 보내져 本主 따라 從事하며 관부에 복무 중이라는 4인은

( 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 ) 내용상 모두 이미 관부에 보내져 현재

掾利焉黃龍理年屯田限米 (2157)

76) 于振波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南都學壇 24 2004年 第1期 湖南大

學 20041) p30 이 글은 앞에 든 中國社會科學院硏究生員學報 2004-1과 같

음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形成與演變 -談長沙

走馬樓簡牘札記之六 (鄭州大學學報 2001-1) 77) 張福亞 也談lt嘉禾吏民田家莂gt中ldquo二年常限rdquo田的函義 (首都師範大學學報

(社會科學版) 142期 2001-5) p8

78) 高敏 lt吏民田家莂gt中所見ldquo餘力田rdquo ldquo常限rdquo田等名稱的函義試釋 (鄭州大學

學報(社會科學版) 33-5 20009)79) 于振波 앞의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p12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9給事 중인 것은 마찬가지인데 어떠한 차이가 있어 다른 항목으로 구분

하여 기재한 것일까 이것은 바로 給縣吏와 縣吏의 차이를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후술) 州吏7인의 食口 23인의 현황 名簿를 작성하여 면밀

히 조사 보고하게 함으로써 그 遺脫을 막고 있는 것에 의하면 州吏 軍

吏 群吏 縣吏 등의 食口는 여타 일반 민과는 다른 賦役체제 아래 놓여

있는 계층이다 또 軍吏의 父兄子弟에 대해서도 그 食口簿를 따로 작

성하여 관리하고 있다

集凡中鄕州軍吏四人父(子)兄弟三人 中(參3012)

集凡南鄕領軍吏父兄弟合十九人 中(參 464)

이러한 사례들은 吏가 있는 戶는 그 食口들까지 포함하여 吏가 있는

戶 즉 吏戶로서 별개로 관리되고 그 성원은 모두 吏戶의 役 내지 賦

役체계에 들어가는 것임을 말해준다

위와 같이 州吏 縣吏 등 吏戶의 戶口簿는 그 食口 가운데 州吏 縣吏

등 그 吏인 자가 맨 앞에 戶人으로서 위치하지만 給吏는 戶人이드라도

앞에 위치하지 못한다

小武陵鄕嘉禾四年吏民人名妻子年紀簿(壹101533)

吉陽里戶人公乘張惕年卄八算一給縣吏(壹1018232)

吉陽里戶人公乘廖裕年卄七算一給郡吏(壹1017525)

高遷里戶人公乘黃毛年卅四算一給軍吏(壹10306)80)

또한 同 戶籍簿에 縣吏 州吏 등은 아래와 같이 맨 앞에 위치하여 일반

민이 아님을 명기하고 있지만

縣吏鄧橎年卄七 璠()妻大女金年卄一 算 (貳 1729)

州吏蔡區年卅二 區妻大女年卄七 算 (貳 1822)

軍吏朱謙年卅五 謙妻大女壹年卄六 算一 (貳 1723)

80) 인용된 4簡文은 凌文超가 재정리 조립하여 올린 글(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

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型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의

lt表二gt(pp25-37)에서 인용함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0給吏인 경우는 일반민을 가리키는 lsquo民男子rsquo로 기재되어 있다

民男子蔡若年卅七給驛兵 若妻大女四年卅算一(貳 1781)

民男子蔡喬年六十二給驛兵 喬妻大女典年卅八 (算) (貳1903)

따라서 위와 같은 吏民簿에서 民戶를 제외한 州吏나 郡吏 縣吏 軍

吏가 吏戶라면 給州吏 給郡吏 등 여러 職事의 관서에 給事하는 수십

종의 다양한 給某吏 신분은 전술한 庶民在官者 나 lsquo非吏이면서 관부

에 있는 자rsquo와 매우 유사하거나 일치한다

여기에서 吏戶나 吏役의 존재 여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는데 黎虎

는 삼국시기 吏戶의 존재를 인정치 않으나81) 高敏과 孟彦弘은 그 존

재를 인정하며 특히 高敏은 吏役制도 漢末三國시기에 확실히 형성되

었다고 한다82) 韓樹峰王貴永은 후한말 孫吳시기에 卑賤化가 이루어

지면서 吏戶의 萌芽가 이루어졌으며 lt吳簡gt에서의 給吏는 吏가 아니

고 民에 속한다고 한다83) 이러한 여러 異見의 배경에는 吏로 칭해지

는 계층에 전술한 바와 같이 다시 두 계층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계층

이 있는데 그 면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

각한다 양자의 구분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자료를 든다 속한서 百官3 大司農條의 注引 漢官에 丞一人 三百石 員吏四十人 其十一人

斗食 十七人佐 七人學事 五人守學事 皆河南屬縣給吏者 라 하였다

대사농승 속하의 斗食 이하 員吏 40인을 모두 하남군 속현에서 조달된

吏로 충원한다는 것이다 즉 후한 수도 낙양 인근인 하남군 속현에서

吏員을 차출한다는 것인데 斗食 佐 學事 등의 員吏는 해당 분야의 職

81) 黎虎 ldquo吏戶rdquo獻疑 (歷史硏究 2005-3) pp53-6882)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形成與演變 mdash談長沙走

馬樓簡牘札記之六 (鄭州大學學報 2001-1) p61孟彦弘 吳簡所見ldquo事rdquo臆說 mdash從ldquo事rdquo到ldquo課rdquo (吳簡硏究 2 2006) pp205-208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爲役之制 (魏晋南北朝隋

唐史資料 24 2008) pp8-2183) 韓樹峰 앞의 走馬樓吳簡中的ldquo眞吏rdquo與ldquo給吏rdquo pp33-38 韓樹峰王貴永 앞

에 든 孫吳時期的ldquo給吏rdquo與ldquo給戶rdquo -以走馬樓吳簡爲中心 p99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1事를 처리할 수 있는 職能者여야 하기 때문에 하남군에서 이러한 職事

로 근무하고 있는 員吏를 파견하거나 일반민 가운데서 새로 선발하여

파견 조달하였을 것이다 상하급 관부끼리 상호 관리를 파견하여 일정

기간 복무하게 하는 경우에 조달 지원한다는 의미로 動詞語로서 lsquo給rsquo을

쓸 수 있고 이러한 사례는 문헌에 이미 자주 보인다 위에 든 lsquo屬縣給

吏者rsquo도 그 한 실례이다 이러한 경우는 본래 吏의 신분이 여타의 관부

에 일정기간 출장 근무하는 것일 뿐인 까닭에 그 신분은 그대로 吏일

것은 자명한 일이다 즉 縣吏가 郡府에 출장근무 중일 때 그 신분은

그대로 縣吏이고 해당 名簿에 縣吏A가 여타 名簿에서 給郡吏A로 표

기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동일인이 名簿에 따라 신분명이 달리 기

재되어 있는 사례가 약간이나마 보이고 있는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된다(후술) 그런데 給州吏 給郡吏 給縣吏 등 수십종의 給吏에는 이런

경우가 아니고 lsquo州吏 등 諸吏에 배속되어 給事 중인 非吏로서 관부에

복무 중인 民rsquo이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給某吏로 표기된 자들은 lsquo給rsquo

이 붙지 아니한 州吏 郡吏 縣吏와는 달리 lsquo民男子rsquo로 표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給州吏는 非吏로서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그 관서에서 하나

의 職役의 형태로 복무 중인 民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들은 실은 民으로서 관부 업무상 필요한 노역에 동원되는 셈이지만

일부는 여러 관서의 하급 실무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전문의 職能을

갖춘 자들도 있다 縣吏 州吏의 職事 뿐 아니라 앞에 든 수십 종의 전

문 분야 부서별 給吏의 명칭은 그에 상응하는 사례들이다 정부는 이

들이 본래 일반 서민이지만 관부 운영의 필요상 특별 관리를 하지 않

으면 안 된다 그 결과 후한의 여러 사례에서 보듯이 대개 그 職을 세

습토록 하고 이들을 일반 民과 구분하여 칭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lt吳簡gt에 忠子男仲年十五 任給吏 (參 1805)라 한 것은 給吏가 民

에서 차출되어 임용되는 독립 계층임을 말해준다 또 草言府大男吳杭

不是卒子弟不應給卒事 八月卅日兼兵曹掾潘(因)()白(柒總49968)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卒의 子弟가 아니면 給卒事에 복무하게 할 수

없었다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2그들이 본래 吏의 신분이 아닌 까닭에 바로 吏로 칭하지 못하고 그

吏에 배속되어 給事하는 자 또 그 戶의 뜻으로 給某吏 給戶와 같은

칭호가 나오게 된 것으로 본다 이 칭호는 사실 관리와 民 사이에 있

는 이들 계층의 성격을 상당히 잘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이 給吏 계

층의 부담이 커지고 그 賤役 부담자로서의 성격이 뚜렷해감에 따라 給

吏나 給戶가 吏戶나 吏家로 칭해지고 給吏나 給戶의 役이 吏役으로

칭해진 것인데 그렇게 간략한 형태로 칭하여도 이미 관리의 吏와 충분

히 구분되는 것으로 사회가 인지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의하면 lt吳簡gt에 보이는 眞吏도 사실 眞吏라 할 수 없는 給吏

에 대비하여 쓰이게 된 용어가 아닐까 한수봉왕기영은 眞吏란 給吏

에 대비된 용어라 하고 lt吳簡gt에서 給吏가 口算 납부 의무가 있지만

眞吏는 면제되며 정식의 吏이고 신분성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羅新도

眞吏에게 口算錢이 면제되고 있다고 하였다84) 眞吏에 대한 여타의 견

해도 있지만85) 給吏와 관련하여 참고할 만 한 지적이다 또한 lt吳簡gt

에서 其七戶給郡吏 下品(壹5447) 其十二戶給郡吏 下品 (壹

5677) 其十二戶給縣吏 下品 (壹5467) 其一戶給軍吏 下品 (參

430336) 給度吏 下品之下 (5653) 등에서와 같이 給吏는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여서 평균의 民戶 보다 더 빈천한 계층인 점도 그

들이 관부에 給事하는 吏라기 보다는 非吏인 民으로서 民의 일반 요역

에 대신하여 관서에 給事(給役)하는 자들이되 그 일부는 職能에 따라

세습하여 관련 관서의 吏에 배속되고 給事 복무해야 하는 예속된 신

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lt吳簡gt에는 하나의 戶人을 首로 하고 그에 배속된 듯 한 여

러 신분의 戶數와 신분명을 기록한 簿가 있다 lt走馬樓吳簡竹簡gt에

84) 羅新 ldquo眞吏rdquo新解 (中華文史論叢 2009-1) p129 단지 그는 眞吏란 非華

夏系 출신의 編戶化된 토착 사회를 관리하는 인원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85) 이를테면 黎虎는 眞吏란 非眞吏에 대한 대칭이 아니고 실제로 除授 받은 관

원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說ldquo眞吏rdquo -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史學月刊2009-5) p5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3다음의 예들이 있다

-1 里戶人公乘縫繒年卄五苦腹心病 (5443)

- - - - - - -

其七戶給郡吏下品 (5447)

- - - - - - -

其一戶給州吏下品 (5452)

-2 平樂里戶人公乘鄭張年五十 (5460)

- - - - - - -

其十二戶給縣吏下品 (5467)

-3 東陽里戶人公乘扶侈年十四 (5471)

其二戶給庫吏中品 (5472)

- - - - -

其一戶給縣卒下品 (5474)

-4 宜陽里戶人公乘區歸年卄二眞吏 (8962)

- - - 給州卒 (8965)

- - - -

年六十一給驛兵 (8976)

右尙書吏三(戶) (8517)

孫吳에서 公乘의 작위 소유자는 일반민 중에서도 상당히 많지만 漢

代 民爵의 최고위 爵인 公乘(第8等)의 戶人에게 보통 여러 신분의 수

십호를 배속시키고 있다 그 중에 10戶 내외의 給吏가 배속되어 있다

또한 이들 戶人은 배속된 戶가 납부한 租稅를 거두어들이고 이를 일괄

해서 관부에 납부하고 있다 먼저 각 戶로부터 受領한 내역은 문장 앞

에 lsquo領rsquo으로 표기하고 受領한 액수를 총합하여 관부에 납부한 내역은

앞에 lsquo入rsquo으로 표기하고 있다

里戶人公乘曾(年五十三)妻年卅九 (簡 1631-1652)

- - - - - -

領二年郵卒限米田六頃五十畝收限米二斛合爲吳平斛米一千三百斛

其三百十四斛五斗府州中倉關邸閣李崇吏黃諱潘慮 中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4領二年民田三百七十六頃六十五畝二百卅八步畝收米一斛二斗合四萬

五千一百九十九斛一斗 - - - - - - - - -

常遷里戶人公乘李漠年卅七 妻大女思年卅一

入嘉禾二年郵卒限米七百九十八斛二斗八升

入嘉禾二年佃帥限米九百五十五斛八斗七升

- - - - - - -

이 戶人은 대부분 公乘이고 노비를 소유하고 있으며 配屬된 戶의

徵稅와 총괄 납입의 업무에 복무하고 있는데 이는 후대 富戶에게 差役

복무를 부과한 사정과 비슷한 면이 있다 후대 差役제도와 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1인의 戶人을 賦稅 징수 납입의 책임

자로 하여 향리에서 이 방면의 기층단위로 운영하고 있는 셈인데 戶籍

簿와는 그 내역과 용도가 다른 별개의 독립 帳簿이다 그런데 劉家軍

은 限米 납부자 신분인 私學還民叛士吏卒 등이 모두 流民이

며 그 戶人에게 依附하고 있는 자들이라 하고 국가가 그 依附관계를

승인해주면서 그들이 경작할 토지를 戶人에게 分級해주고 그들이 납

부하는 地租인 限米도 戶人의 이름 아래 등기한 것이라고 보았다86)당

시 嘉禾연간에 전란으로 長沙 임상현 지역에 流民이 많이 流入되었을

가능성은 이미 여러 연구에서 지적된 바 있고 還民 叛士 등 일부는

流民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限米와 屯田限米 납부자 신분에는

이밖에 大男 州倉吏 吏帥客 金民 佃吏 郵卒 衛士 傳卒 子弟 佃卒

復客 新吏 兵客 故師子弟 兵師士 故帥客 後客 船師 司馬 士

등 거의 전 계층을 망라하고 있는데 이들 중에 유민이 있을 수 있으나

모두 流民 출신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새로 屯田이나 侯國의 田을

경작시키기 위해 유민 뿐 아니라 在地의 吏民에게 할당하여 佃作으로

운영하는 것은 여러 문헌자료에도 있고 lt吳簡gt의 lt吏民田家莂gt은

주로 在地의 호적에 올라 있는 吏民의 佃作 내역 장부이다 또 lt吳

簡gt 草言府部諸鄕吏區光等招誘諸限田客八十三人首見事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曹史趙野

86) 劉家軍 論lt走馬樓吳簡竹簡gt中 ldquo限米rdquo的性質 (中國社會經濟史硏究 2005-2) p87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5白 (柒總 49782)에 의하면 당시 長沙 지역에서 鄕吏에 의해 限田客

83인을 招誘했다는 성과를 보고하고 있는데 이와 같이 佃作 인력의 확

보에 애쓰는 상황에서 전술한 바와 같은 본래 限田의 佃作 의무를 지

고 있는 在地 吏戶의 家內 성원이 그 佃作者 명단에서 제외될 리가 없

그래서 簡文(B) lt州吏父兄子弟年紀簿gt에서 吏戶의 家內 父兄子弟

인력 23인 가운데 lsquo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rsquo과 lsquo一人先出給縣吏rsquo가

관부에 급사하는 給吏에 해당하고 lsquo一人限田rsquo은 限田의 佃作에 복무하

는 자이다 바로 이어 인용하는 孫休의 詔文에서 吏家의 어려운 사정

에 대해 ldquo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이미 限米를

납부하였는데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rdquo라 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전반부는 給吏로서 복무

하는 것이고 뒷부분은 限田 佃作 복역을 말함이다 즉 한 吏戶의 父兄

子弟 가운데 일부는 전자에 복무하고 일부는 후자에 복무한다 똑 같

은 관부 내지 국가의 역에 복역하는 것이지만 給吏는 분명히 吏(分署

의 담당 吏 州吏)에 給事하는 자라는 점에서 給吏로 칭하여 여타의

복역과 구분한다 그리하여 그 給吏가 결혼이나 계승으로 하나의 戶를

이루면 簡文(A)에서와 같이 某里의 戶籍簿上에서 里의 총 戶民數 아래

에 lsquo其四戶給縣吏rsquo와 같은 형식으로 戶를 本으로 한 給吏로서 명기된

다 그런데 一人의 給吏가 아직 戶를 이루지 못하고 한 吏戶의 成員

(父兄 子弟)으로서 있는 상황이라면 그 戶人의 현재 신분에 의해 그

戶가 표기되었을 것이다

이 문제와 직결되는 다음 기사를 살펴보자 孫權의 제6子로 孫亮에

이어 즉위한 孫休는 그의 즉위 年인 영안원년(258)에 다음과 같이 詔

하였다

「諸吏家에 5인이 있으면 (그 가운데) 3인은 겹쳐서 役에 복무하고 있

다 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이미 限米를 납부하

였는데 군대가 출정하면 또 종군함에 심지어는 家事를 돌볼 자도 없게

되는 것을 짐은 매우 애처롭게 생각한다 그 5인 가운데 3인이 役에 복무

하고 있다면 그 父兄이 (家에) 머물고자 하는 것을 허용해주어 1인을 (役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6에 나가지 않고) 머물게 하고 그 限米를 면제해주며 군대가 출정해도 종

군하지 않도록 하라 (삼국지 권48 吳書 孫休傳 永安元年條)87)

孫休는 즉위 전 재야에 있을 때 시골 생활을 보냈던 바가 있어 그

들의 참상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吏家(吏戶)가 지는 과중한 부담

은 곧 그들이 그만큼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 吏役이 賤視化 되고 厮役으로 인지되고 있던 배경을 위의 詔文은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lsquo吏家rsquo의 식구는 여러 방면의 복무를

중복하여 부담하고 있다 그 가운데 限米 납부 의무는 lt吳簡gt에 의하

면 국가에서 佃作케 하여 운영하는 限田 경작에 대한 租로써 납부하는

것이다 즉 전술한 lsquo二年常限rsquo田을 이 限田으로 보아 그 地租를 限米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다88) 단지 于振波는 限米란 二年常限田과는 관

계가 없고 屯田 경작에 대한 조세인데 衛士 郵卒 傳卒 등의 상비병

과 토지가 없는 수공업자 외지에서 수학하기 위해 온 私學 이탈하였

다가 새로 돌아와 附籍된 還民에게 軍屯이나 民屯에 종사하게 하고 일

부의 부세와 요역을 면제해주면서 限米를 납부하게 한 것이라 한다89)

그의 동일한 글에서 여타 사항에 대해 필자와 일치한 부분에 대해서는

앞에서 찬동한 바 있지만 이 부분에는 수긍하기 어렵다 lt走馬樓吳

簡竹簡gt에는 限米 납부자로 기재된 신분에 전술한 바와 같이 많은

신분이 망라되어 있고 孫休傳에서 말하는 吏戶가 일부 상비병이나 귀

환민 私學등에 한정한 것이 아니고 吏戶 전반의 형편을 들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lt吏民田家莂gt에서 佃田의 총수는 二年常限田과 餘力

田으로 구성 내지 구분되어 있다 즉 常限田은 餘力田에 對比되는 용

어이다 그리고 양자의 畝當 租額이 嘉禾4년 民의 경우 12斛 0456

87) 詔曰 ldquo諸吏家有五人 三人兼重爲役 父兄在都 子弟給郡縣吏 旣出限米 軍出

又從 至於家事無經護者 朕甚湣之 其有五人 三人爲役 聽其父兄所欲留 爲留

一人 除其米限 軍出不從rdquo」

88) 앞에 든 高敏의 글 lt吏民田家莂gt中所見ldquo餘力田rdquo ldquo常限rdquo田等名稱的函義試釋

이래 대부분 이 견해에 따른다

89) 于振波 앞에 든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7斛 州吏의 경우 0586斛 0456斛으로 차이가 있다90) 무엇보다 앞에

서 살펴 본 lt오간gt lt廣成鄕州吏父兄子弟伏處 人名 年紀爲簿gt에 기재

된 州吏의 食口 현황 내역은 孫休傳에서 吏戶의 식구 사정을 말하고

있는 내역과 같은 모습을 전하고 있는데 91)전자에서는 限田이라 하였

고 孫休傳에서는 限米라고 한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限田에 대해 징

수하는 것이 곧 限米이다 따라서 限田이란 二年常限田의 簡稱일 것으

로 본다 lt吳簡gt의 lt吏民田家莂gt에는 이들 限田戶의 佃田額과 그에

대한 租賦稅 납부 內譯이 있다 이 戶는 州郡縣吏 등으로 담당 吏職에

給事해야 하고 從軍도 해야 한다 이러한 양상은 분명히 역의 부담이

중첩된 것으로 일반민보다 더 과중하다 租額인 限米 납부액도 일반민

의 사유지에 대한 租額보다 비율이 높았다

그런데 중요한 사항은 첫째 이렇게 과중한 부담이 중첩된 吏戶의

일면을 보여주는 lt吏民田家莂gt에서 佃作吏民의 戶人(戶主) 신분을 보

면 大男大女州吏群吏縣吏軍吏州卒郡卒縣卒復民士

등으로 吏와 民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들 吏民 모두 佃作

의 의무와 함께 地租로 米穀 布 錢을 납부해야 하고 從軍의 役이 있

으며 그리고 대량의 lt오간gt에 다량으로 보이는 子弟 및 給子弟가 곧

吏의 子弟로 파악된 것에 의하면92) 그들이 납부하는 子弟限米의 부담

도 吏戶의 부담이 된다 또한 lt오간gt에

郡吏公乘李年卅二 算一 (貳2460)

侄子年卅九給子弟 妻大女衷()年卄六 算一 (貳1754)

吉陽里戶人公乘張惕年卄八 算一 給縣吏 (壹1018232)

등의 많은 簡文에서 吏와 그 子弟 給吏들에게 算賦도 부과되고 있다

90) 앞에 든 張福亞 也談lt嘉禾吏民田家莂gt中ldquo二年常限rdquo田的函義 p11의 表1

91) 이에 대해서는 앞에 든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

形成與演變 mdash談長沙走馬樓簡牘札記之六 pp62-63 참조

92) 孟彦弘 앞에 든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爲役之

制 pp1-7 子弟는 吏의 子弟 給子弟는 관부의 給事에 差出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8단지 吉陽里戶人公乘鄭龍(龍 下에 田)年卅六算一給州吏復 (壹3323)

과 같은 lsquo給州吏復rsquo 즉 給州吏이면서 算賦가 復除된 경우가 있는데 이

에 의거하여 給吏는 算賦에서 復除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93) 그러나

위에 든 簡文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부분의 給吏가 lsquo算一rsquo로 기재

되어 있고 소수만이 lsquo復rsquo으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復除되는 경우는

특별한 사정이 있어 그 給吏에게만 특혜를 준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

으로 생각한다 참고로 lsquo腫兩足rsquo자나 lsquo刑兩足rsquo자인 民戶의 戶人도 算賦

가 면제되지 않고 있으며94) 大女도 算賦 납부 의무가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吏戶와 民戶가 지는 국가에의 부담은 吏戶가 각기의 吏職

에 복무하고 일반민호는 그러한 吏職에 있지 않다는 정도 외에는 별다

른 차이가 없다 물론 일반민은 吏職의 役 즉 吏役이 없는 대신에 일

반요역에 복역해야 하고 吏戶는 일반요역에서 면제된다 그러한 사실

을 말해주는 자료로 lt오간gt 戶口簿에 里別로 定應役의 戶數 즉 일반

요역에 응당 복역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진 里別 戶數 문서가 있다

其一百卅八人男 (參431548)

其八十一人(女) (參431144)

其一戶給軍吏 下品 (參430336)

其五戶民 (下)品 (參430235)

其七戶女戶不任調 下品之下 (參430134)

其領役民卅七戶 (參430033)

이 里別 戶口簡은 凌文超의 編次 정리 작업에 의하면 新成里의 總

結簡에 해당하는데95)여기서 일반민호수는 생략하고 給軍吏나 調에서

면제되는 女戶 등의 수만을 기재한 것은 맨 아래의 定應役 戶數를 算

出하는 근거를 기록하기 위함이다 즉 일반민호 외의 給吏 등의 戶數

93) 凌文超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型

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 p5494) 高平里戶人公乘黃高鼰五十二算一腫兩足 (貳 2903) (大)成里戶人公乘何軼年

五十五算一刑兩足 (參626736)

95) 凌文超 앞에 든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

簿rdquo的類型與功能 p40과 lt表3gt 중 p45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9가 총 13戶이고 이들을 제외한 定應役의 戶數가 37호란 뜻이다 그래

서 新成里의 총 호수는 50戶였음을 알 수 있다 新成里의 총 口數 219

명은 lt오간gt의 戶當 口數 평균이 대략 45명 정도임을 감안하면 486

戶이고 50戶와 근접한다 따라서 給軍吏 등 13호는 定應役에서 면제되

는 戶임을 알 수 있다 또 다음 戶口簡은 앞부분 里의 총 口數가 결락

되어 있다

其一戶給朝丞 (貳170263)

其二戶給郡園父 (貳170162)

其五戶尫嬴老頓貧窮女戶 (貳170567)

定應役民卄戶 (貳170466)

여기서는 給朝丞1戶 給郡園2戶 절름발이 노인 빈궁자 女戶 등 5

戶가 役에서 면제되고 그 나머지 20戶가 定應役民이 되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즉 給吏는 定應役에서 면제되고 있다 따라서 給吏는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부에 給事하는 것이기에 당연히 일반요역에서 면제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給吏에도 전술한 바와 같이 吏戶의 가속인 경우가 있고 일

반민 중에 차출된 경우가 있는데 전자의 경우는 관부에서 필요할 때

마다 고정적으로 차출되었을 것이며 일반민의 경우는 본래는 일시적

한시적으로 징발되었을 것이지만 여러 簡文에 戶人으로서 給吏인 자가

있는 것에 의하면 점차 전자의 경우와 같이 吏戶와 마찬가지로 給吏戶

로서 고정적으로 차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定應役이 戶를 부과

단위로 삼고 있다는 점 또한 吏戶의 家屬이 하나의 徵役 단위로서 운

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도 吏戶의 실재성과 그 독립적인

신분성을 말해준다 더구나 일반 민호와 구분된 吏戶 名籍(lsquo吏名籍rsquo)의

존재가 다음의 簡文에서 확인된다

諸鄕謹列郡縣吏兄弟 幷攴 吏名籍 (13-7638)

吏戶의 막중한 부담은 그 家屬의 叛走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0를테면 縣吏 毛章의 15세인 弟(壹 7865) 縣吏 毛車世의 49세인 父(壹

7868) 群吏 黃의 13세인 弟(壹7893) 群吏 谷漢의 29세인 兄子

(壹7905)가 嘉禾 2년에서 3년 사이에 叛走하였다 후한 말 陳寔은 어

려서 縣吏가 되어 항상 厮役에 給事하였는데( 常給事厮役 ) 후에 都亭

의 佐가 되었다96) 그리고 郭太는 대대로 집안이 빈천하고 어려서 고

아가 되었는데 모친이 縣廷에 給事하게 하려 함에 말하길 ldquo대장부가

어찌 斗筲의 役에 處해 있을 것입니까rdquo라 하고 마침내 떠났다97) 당

시 이미 吏役이 厮役으로 인식되어 있었고 斗筲의 役 즉 100석 이하

인 斗食의 位에 처하였음을 말해준다 즉 같은 吏이더라도 100석 이상

인 掾史와 그 이하 사이에는 차등과 구분이 있었다(후술) 그렇지만 이

두 경우는 모두 吏가 되는 것이 선택의 길이었기 때문에 吏戶에 속한

자들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吏戶가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던

것에 비해 이 두 경우는 선택사항이었다 斗食에게도 매우 소액이지만

月俸이 지급되었기 때문에 빈천하거나 고아가 되어 생업을 위해 吏職

을 선택한 것이다 나이도 어리고 집안의 세력 배경도 없는 가운데 吏

가 된 것에 의하면 斗食의 최하단에 속한 吏였을 것이며 이들이 給吏

가 아니고 吏로 칭해진 것은 일반요역 복무에 대신하여 징발 내지 차

출된 경우가 아니고 吏職에 임명된 것이기에 당연하다

縣吏 등의 諸吏役이 厮役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무엇 보다 그 雜

役的인 吏役의 과중함 때문이다 후한 lt張景碑文gt에서 14鄕의 正을

調發하여 勸農의식에 소요되는 土牛 제작에 육칠십만전이 들어가 吏와

正이 매년 患苦에 처함에 男子(庶民) 張景이 매년 그 비용을 출연하여

土牛를 義作해주겠다 하고 그 대신 자신을 縣吏 列長 伍長에 임

용되지 않게 해줄 것과 小繇 징발을 면해줄 것을 청하고 있다98) 즉

96) 후한서 권62 陳寔傳에 (陳寔)少作縣吏 常給事厮役 後爲都亭(刺)佐

p2065

97) 후한서 권68 郭太傳에 (郭太)家世貧賤 早孤 母欲使給事縣廷 林宗曰 ldquo大

丈夫焉能處斗筲之役乎rdquo 遂辭 就成皐屈伯彦學 三年業畢 博通墳籍 p2225

98) 府告宛 男子張景記言 府南門外勸〔農〕土牛 調發十四鄕正 上賦

斂作治 幷土人 犂 耒 卄 蓎 屋 功費六七十萬 重勞人功 吏正患苦 愿以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1서민이었던 張景은 거액의 자금을 출연하면서까지 縣吏 등의 吏役과

小繇의 복역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있다 그는 아직 非吏였지만 吏役에

언제든지 차출될 수 있었고 그 吏役은 매우 번거롭고 힘든 것이었음

을 알 수 있다 단지 張景과 같은 서민이 縣吏가 되어 吏役에 差出되

는 경우 바로 lt오간gt에서와 같은 吏戶가 되어 그 가속이 모두 吏役의

범위에 들어가게 되는지는 不明이다 推斷이지만 世戶로서의 吏戶와

함께 일시적으로 차출되어 일정 기간 만 복무하는 非世戶로서의 吏戶

가 공존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요컨대 lt오간gt과 문헌자료에 보이는 吏戶와 給吏의 면모들은 앞에

서 검토한 胥徒와 lt庶民在官者gt 내지 徒御 導從役人 등과 일맥상통

하는 면이 있다 孫休傳이라든가 lt오간gt에 빈출하는 吏戶 吏民에서의

吏는 500石 이하인 吏 중에서도 200석 이상의 長吏級을 제외한 下吏

즉 百石 이하의 吏를 가리키고 給吏는 吏가 아니되 관부에서 일정 기

간 여러 분서에 勞役으로 복무하는 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즉

庶民在官者 와 상통한다 특히 그들에게 부과되었던 賦稅役의 내역에

서도 위에서 검토한 여러 職役 계통 신분이나 계층의 예와 거의 비슷

하다

孫休傳에서 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라 한

것은 吏家의 父兄은 都에서 州郡縣의 吏로 복무한다는 뜻이고 나머지

3인의 자제는 郡縣吏에 給事한다는 뜻이다 즉 lsquo郡縣吏에 給事함( 給郡

縣吏 )rsquo이란 子弟3인이 郡縣吏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郡縣吏에 下屬되

어 그 업무에 給事한다는 뜻이다 위의 廣成鄕의 lt人名年紀簿gt 簡文

에서 lsquo先出給縣吏rsquo도 州吏7家의 식구 가운데 먼저 縣吏의 업무를 보좌

하기 위해 차출되어 나간 것을 뜻한다 여기서 말하는 郡縣吏는 주로

掾史職으로 사무 업무 중심이고 그 업무를 노동력으로 보좌하는 인력

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lt오간gt의 도처에 諸吏의 사례로써 諸曹倉

吏庫吏監運掾關邸閣船師田戶曹史 등 수십종의 職名이 보이

家錢 義作土牛 上瓦屋 欄楯什物 世世作治 乞不爲縣吏 列長 伍長 徵發小

繇 (高文 漢碑集釋 開封 河南大學出版社 1997 p227)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2는데 대부분 그 업무 처리에 노동인력이 필요하다 십 명 내외의 掾史

員吏 만으로는 사무나 문서작성 관리 업무 이외에는 수행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 인력을 吏戶의 식구로부터 자동으로 差役시키는 시스템이

漢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었음을 위 孫休傳의 기사는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이들 吏家의 식구 현황 파악은 관부에서 항상 필요

로 하고 확보해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lt오간gt의 여러 문서는

그러한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東鄕勸農掾殷連被書條列州吏父兄人名年紀爲簿

輒科核鄕界 州吏三人 父兄二人刑蹱叛走 以下戶民自代 謹列年紀 以

(已)審實 無有遺脫 若有他官所覺 連自坐 嘉(禾)四年八月卄六日破莂

保據 (J22-2543)

여기에서 담당 鄕界의 州吏3인 가운데 그 父兄2인이 受刑과 叛走로

비게 됨에 下戶의 民을 징발하여 바로 충당시켰다는 것이다 이 以下

戶民自代 에 대한 해석에서 下戶를 고용하여 자신을 代理케 한 것이라

는 견해가 있는데99) 그렇다면 戶人인 州吏가 자신의 식구 결원을 책

임지고 직접 下戶를 고용한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해당 州吏의 부담

이 너무 크게 되어 당시 下戶가 자동으로 보충되는 시스템으로 운영된

것일 가능성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諸家의 견해 모두 不明

임을 인정하고 있다100) 어쨌든 吏戶의 노동력을 신속하고 철저하게

보충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은 吏戶 전체의 식구가 관부에

예속되어 있고 세습화 된 상태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단지 孟彦弘은

이 자료를 통해 당시 吏戶의 家屬이 모두 吏였음을 말해준다고 하였으

나101)그렇지 아니하고 吏의 가속에 吏도 있을 수 있지만 아직 吏가

아니고 吏를 노동력 지원으로 보조해주는 給吏도 있고 그 給吏는 非

99) 이 점에 대한 정리는 王素 長沙吳簡勸農掾條列軍州吏等人名年紀三文書新探

(魏晋南北朝隋唐史資料 25 2009) p9의 注 11) 참조

100) 이를테면 孟言弘 앞의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

爲役之制 p16

101) 위의 글 p1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3吏로서 관부에 給事하는 자이며 이런 면에서 전술한 庶民在官者 내

지 lsquo非吏이면서 관에 있는 자rsquo lsquo官과 民 사이rsquo lsquo lsquo半官 半民rsquo lsquo踐更小史

(小吏)rsquo(續漢書輿服志) 등과 상통한 계층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吏戶에 포함되지 않는 給吏가 있었다 吏戶와 給吏戶가 구분되

고 있음은 lt吏民人名年紀口食簿gt의

其七戶給郡吏下品 (壹5447)

其十二戶給縣吏下品 (壹5467)

其一戶給軍吏下品 (參430336)

(其)六戶郡吏(中)(品) ---- (貳4490)

其二戶縣吏(下)品 (貳3307)

등에서 給郡吏 등의 戶와 縣吏의 戶가 구분되어 기록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다 그리고 給吏가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에 속하였음은 위

의 사례 뿐 아니라 lt吳簡gt에서 給度吏 下品之下 (5653) 등에서 알

수 있는데 下戶로 결원을 보충하는 것은 同級의 戶로 충원한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면 또한 당시 吏戶와 給吏의 관부에의 예속성과 신분

성을 보여준다 요컨대 給吏는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여서 평균

의 民戶 보다 더 빈천한 계층인 점도 그들이 관부에 정식의 吏職으로

임명된 吏라기 보다는 非吏인 民으로서 民의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

서에 給事(給役)하는 자들이되 관련 관서의 吏에 배속되고 給事 복무

해야 하는 예속된 신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찍이 宮崎市定이 宋書권94恩倖傳序의 郡縣掾史 幷出

豪家 負戈宿衛 皆由勢族 를 인용하여 豪家 출신으로서의 掾史가 고

관으로 진출하는 경향이 累代 이어지면서 右族이 이루어지고 이를 통

해 위진남북조 귀족제가 출현하였다 하였고102) 楊振紅이 이에 동조하

고 있는 것은103) 부분적으로 再考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당시 孫休

102) 宮崎市定 九品官人法の硏究 -科擧前史 (京都 同朋社 1979(1956)) pp86

-89

103) 楊振紅 앞에 든 吳簡中的吏 吏民與漢魏時期官 吏的分野 mdash中國古代官僚

政治社會構造硏究之二 p34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4傳에서 말한 吏戶는 분명히 豪族勢家가 아니었고 lt오간gt에서 民戶와

함께 lt吏民簿gt에 기록된 吏戶는 下品에 속한 貧層이었으며 그 식구

모두 중복된 賦役의 부담에 시달리는 계층이었다 그 吏戶에는 吏와

給吏로 구분되어 관부에 예속되고 있다 즉 아무래도 豪族大家로서의

掾史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정을 이해하는 데는 전술한

lt周禮gt의 府史胥徒에서 府史가 호족대가로서 辟除된 掾史에 類하고

胥徒가 곧 관부 예속하의 吏戶와 給吏에 거의 相當하다는 면이 있다

吏戶에서의 吏職에 掾史가 있겠지만 관부에 예속되어 있고 직업적 세

습화 되어 있어 호족대가 출신의 掾史와는 구분되었을 것이다 무엇보

다 호족대가 출신의 掾史은 관부에 예속되지도 아니하고 세습의 신분

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掾史層의 존재는 군현의 장관 辟召로 임

용되었을 것이다 반면 吏戶 출신의 掾史는 기술 계통의 전문직일 경

우이거나 개인적 기능의 능력으로 또는 部曲과 같은 상비병 출신이

일반 요역 부담에 대신하여 관련 직무에 세습하게 되거나 또는 일반민

호에서 급히 所要되어 임시로 차출되었다가 점차 세습의 吏戶로 예속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관부에 진 빚으로 예속되었다가 吏戶로 남

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즉 이 吏戶는 관부의 갖가지 所要 用務

에 差出될 상황에 대기되어 있는 戶이다 그 중에 일부는 정식으로 掾

史로 승진되지만 나머지는 윤번이나 필요시 이 방면 저 방면의 分署에

차출되어 給事하며 分署의 長을 主로 모시고 그 아래에서 給事한다

掾史의 吏와 구분하여 그러한 뜻을 반영한 것이 lt오간gt의 도처에 보

이는 수십종의 給某吏다고 생각한다 호족대가 출신으로서의 掾史와

예속신분인 吏戶 출신으로서의 掾史는 그 신분상으로도 士와 서민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기에 宮崎市定의 立論 또한 양자의 구분을 통한

위진남북조의 귀족제 내지 良賤制의 형성을 논하는 보완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근래의 여러 연구들은 掾史에 이렇게 두 방면으

로 구분되는 면과 계층이 있다는 점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였고 吏戶

의 家屬에 吏와 給吏로 구분되는 층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양자의 성

격이 어떠한가를 파악하지 못한 셈이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5한편 給吏는 吏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戶人이나 父兄이 郡吏 등의

諸吏에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당시 吏戶가 직업화 내지 세습화 되어

있었기 때문에 子弟의 給吏 신분도 곧이어 諸吏로 진전될 것은 당연하

다 그래서 lt嘉禾四年吉陽里戶籍簿gt에 吉陽里에 호적이 올라 있는 給

郡吏 逢杲(壹10169) 給郡吏 寥裕(壹10175) 給縣吏 張惕(壹

10182) 給州吏 區張(壹10367) 給州吏 嚴追(壹10149) 등이 lt嘉禾四

年五年吏民田家莂gt의 下伍丘 소속 佃民 名簿에서는 거의 同一人일

것이 분명한데 給郡吏가 群吏로 給縣吏가 縣吏로 給州吏가 州卒이나

州吏로 기재되어 있는 경우도104)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

다 이 경우는 丘에서는 給吏가 보이지 아니하고 里에서만 보이기 때

문에 아직 명확히 해명이 되지 않고 있는 里와 丘의 차이에 따른 것일

가능성도 있고 嘉禾4년과 嘉禾4-5년 戶籍簿에서의 1년 내외의 기간

차이에 따른 신분의 변화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또

한 侯旭東의 정리 조사에 의하면 高遷里의 給縣吏 松棐가 위의 lt田家

莂gt에서는 武龍丘의 縣吏로 기재되어 있고 같은 里의 給縣吏 張喬는

亻平 丘의 縣吏로 기재되어 있으며 宜陽里에 眞吏로 등재된 黃阿 등

6인도 각각 6곳의 다른 丘의 州吏 男子 男子 郡吏로 기재되어 있다

또 陽里의 給郡吏 謝鼠는 夫丘의 男子로 기재되어 있다105)里의 호

적부와 lt吏民田家莂gt의 丘別 佃民 명부에서 그 신분이 男子인 경우

일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양편 모두 里의 호적부에 給郡吏 給縣

吏 給州吏등 給吏로 기재된 경우는 대부분 丘의 佃民 명부에서 각각

群吏 縣吏 州吏로 되어 있고 眞吏가 州吏 郡吏 男子로 기재되기도

하고 給縣吏가 男子로 기재된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일부 사례들은 眞

吏 吏 給吏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것이어서 그 해명이 필요한

데 현재 里와 丘의 구별 차이 眞吏와 諸吏 給吏등의 실체 문제가 아

104) 凌文超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

型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 pp17-18의 lt表一gt

105) 侯旭東 長沙走馬樓吳簡ldquo里rdquoldquo丘rdquo關係再硏究 (魏晋南北朝隋唐史資料2006) pp19-21의 表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6직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어 그 이유를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실

정이다 그러나 신분명으로 이름을 달리하여 그렇게 구분하고 있으며

전술한 바와 같이 給吏가 吏나 眞吏와 다르게 취급되면서 여러 名簿에

구별되어 기재되어 있고 그 독자성도 충분히 입증되기 때문에 위의

예외적인 사항들은 개인별 특별한 사정에 따른 것이거나 아직 여러 異

說로 논란이 되고 있는 里와 丘 등의 구분과 차이 등에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고에서 갖추어 고찰하지 못하고

후고로 미룬다

Ⅵ 결 언

이상의 검토에서 고대 職役의 범주에 들어가는 다종의 신분 내지 계

층과 吏職의 類 그 복무형태 삼국시기에 이르는 전승과 변화의 모습

들을 살펴보았다 우선 職官과 일반요역 복무자와는 신분제와 賦役체

계상 엄연히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례 地官 鄕大夫에 그

舍란 國中의 貴者賢者能者服公事者老者疾者에게는 모두 舍

한다는 것이다 에 대한 후한의 鄭司農의 注에 服公事者란 지금 吏에

게 復除해주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고 하였다106) 여기서 lsquo舍rsquo란 復

除와 같은 뜻이다 그 대상 가운데 lsquo國中의 貴者賢者能者rsquo 가운데

貴者는 공경귀족 賢者와 能者는 命官과 辟召된 관리에 해당한다 그리

고 그 아래의 服工事者는 다시 2분되는데 200석 이하의 吏職 내지 掾

史職(小吏)이 있고 그 아래에 庶民在官者 내지 lsquo非吏로서 官에 給事

하는 자rsquo로서 給吏層이 있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賢者와 能者 까지를

職官이라 하면 그 이하인 服工事者 가 곧 職役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

석된다 그리고 職官과 職役 복무자는 모두 일반요역에서 면제되는 자

106) 其舍 國中貴者賢者能者服公事者老者疾者 皆舍 注云 lsquo服公事者rsquo

謂若今吏有復除也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7들이다 이 중에서 職役 복무자는 일반요역에서 면제되는 대신에 각종

의 吏職과 給吏職에 복무하였다 여기서 칭한 給吏職은 lsquo(小)吏rsquo에 대비

하여 칭한 給吏를 그 성격상 그렇게 칭할 수 있으며 그 독립적 계층

내지 신분으로서의 실태가 lt長沙走馬樓吳簡gt의 발현에 의해 상당 부

분 밝혀지게 되었다 그런데 服工事者 즉 職役 담당 계층의 범위가

상당히 넓어서 그 職役의 양태가 모든 면에서 같은 것은 아니고 일부

분 다른 측면들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고대의 긴 기간에 걸쳐 거의

공통으로 庶民在官者 lsquo非吏이면서 관부에 給事하는 자rsquo lsquo官과 民 사

이rsquo lsquo半官半民rsquo의 성격이 유지되고 있는 면을 볼 수 있다

이렇게 職役 담당자의 연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곧 lt주례gt에 보이

는 관리 조직의 최하위에 위치한 府史胥徒이다 이 가운데 府史

가 대략 후대의 掾史職이나 lt吳簡gt의 諸吏에 속한다면 胥徒는 給吏層

에 상통하는 면이 많다 단지 lt吳簡gt에 다수 보이는 吏役 下의 吏戶

는 그 과중한 부담과 厮役 및 빈천함의 성격상 오히려 胥徒에 상통하

는 면이 많다 이러한 시대적 차이는 吏戶의 예속화 및 세습화의 진전

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한편 시대의 여건 차이로 여러 부분에서 胥徒

와 후대의 職役 담당 계층 사이에는 다른 면도 있다 胥徒나 給吏層이

기본적으로 일반 서민 출신으로서의 服工事者 였던 것과는 달리 周에

서 三國에 이르는 동안 服工事者 라는 면에서 同類이지만 일반 서민

과는 구분되는 여러 相異한 계층에 속한 신분들이 속하여 있었다 예

를 들면 工商食官 에 속하는 工商 皁隸食職 에 포함되는 吏에 속

한 徒隸 층 넓은 의미의 徒隸層이라 할 수 있는 皂隸牧圄

僕輿人 그리고 下吏層에 들어가는 樂祝醫衛士 및 走卒伍伯

之類 등이 그들로 그 출신은 일반 서민이거나 賤民 또는 刑徒였지만

관부에 寄生하며 給事한다는 면에서는 공통이다

이들의 복무 형태는 항상적 근무 일시적 근무 組別 교대제 등 여러

가지로 징발 내지 차출되었고 lsquo冗rsquo과 lsquo更rsquo은 그러한 차이를 구분하는

용어로서 나온 것이다 근무에 따른 보수를 받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 구분은 아직 분명치 않은 부분이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8있다 그러하지만 최소한 생업을 관부에 의탁하는 자들에게는 지급되

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年俸制에 대비되는 稍食 즉 소액의 月俸 내

지는 근무일수 기준의 지급 형태로 지급되었다 이는 그들의 근무가

주로 일 단위나 월 단위로 이루어지고 계산되었기 때문이다

lsquo官rsquo과 lsquo吏rsquo는 서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선진 이래 본래 상하의 신

분으로 명확히 구분되었고 漢代에 혼용 내지 통용되는 경향이 있었지

만 양자가 구분되는 면 또한 여전하였다 吏는 官에 가까운 吏가 있고

民으로서의 吏가 있어 전자를 lsquo官吏rsquo라고 하면 孫休傳의 詔에서 거론된

吏家는 보통 吏民으로 합칭될 경우의 吏라고 할 수 있다 lt吳簡gt의

lt吏民簿gt나 lt戶口簿gt 등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실태에서 후한 말에

서 삼국기의 전형적인 職役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이제까지 그

존재에 대해 거의 간과되어 왔던 給吏에 대해 lt吳簡gt은 수십종의 給

吏 실태를 전해주고 있어 그 의의가 크다 吏의 사무 업무를 직접 勞

役으로 보조해주는 給吏는 관부의 행정 업무 처리에 있어서 항상 필요

한 노동력 제공자였다 이러한 노동력은 어느 시기이든 공통으로 필요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연원을 lt주례gt의 胥徒에서 찾아볼 수 있었

고 여러 면에서 職役의 실례로서 공통하는 면들을 지적할 수 있었다

후한 말 삼국시기의 吏와 給吏는 일반서민 신분으로서의 吏이며 吏戶

로써 관부에 예속되어 그 食口 성원이 거의 세습하여 吏役에 종사하

고 있다 이들은 일반서민에 비해 일반요역이 면제된다는 점을 제외하

면 그밖에 각 吏職에 따른 吏役의 기본 직무 외에 限田의 佃作 의무와

그 地租로서 限米 布 錢을 납부해야 하며 從軍해야 하는 등 중첩된

부역으로 일반서민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또한 그 戶品 이

下品 내지 下品之下에 속한 貧戶 출신이다 따라서 같이 吏로 칭하지

만 豪族勢家 출신으로 掾史職을 거쳐 상급관으로 진급하고 命官에 오

르는 累代 高族의 世家 출신 掾史와 빈천한 서민 출신으로서 관부에

예속된 吏戶 출신으로서의 掾史와는 구분된다 이 吏家 내지 吏戶는

吏의 칭호로 불리지만 일반민보다 더 많은 부담을 지고 있기에 그들의

役은 후한과 삼국기에 賤役 賤職 내지 厮役으로 칭해지며 기피되고 있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9다 따라서 이 계층이 官吏로 합칭되는 경우의 吏와 구분되는 것은 당

연하며 그 호칭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늦어도 孫休 시기의

문서와 간독자료에 등장하는 lsquo吏家rsquo나 lsquo吏戶rsquo는 이미 그러한 계층에 대

한 專稱으로 형성된 듯하다

한편 諸吏役의 복무에는 常勤의 방식과 1년에 1개월 내지 수개월만

輪番 형식으로 복무하는 비상근의 lsquo踐更 방식의 근무rsquo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한 비상근 복무자도 있었을 것이다107)그리고 그 복무에

대한 급여가 그 吏役을 생업으로 하는 常勤者에게는 당연히 小吏에 대

한 봉록이 지급되었을 것이다 반면에 給吏의 役은 일반요역에 대신하

는 복역이라는 면에서 비상근 내지 윤번 형식의 차출이었을 가능성이

많지만 지금까지 lt오간gt에 소개된 자료로는 어느 쪽이라 단정하기가

어렵다 胥徒의 役은 어디까지나 상급의 관원들과는 달리 일반민의 요

역 의무를 대신하여 관부에 給事하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lt오간gt

에서의 給吏와 상통한다 給吏에 대한 봉록 지급의 여부도 아직 不明

이다 단지 限田의 지급이 祿田과 같은 성격의 것이었을 가능성도 고

려되지만 그 租額이 커서 혜택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노동력의 징발로

서 해석되는 부분도 있다 또한 給吏의 관부에의 給事가 일반 요역과

같이 組別 순환제였는지의 여부는 아직 분명치 않다 lt奏讞書gt의 樂

人의 예와 같이 一月一更制와 같은 순환근무제였을 가능성도 있는데

대체로 두 가지 형태가 공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lt吳簡gt에 의거한 의론들은 아직 자료 해석과 해명이 충분치 못하여

불분명한 상태에 있는 사항들이 많은 실정이기 때문에 해당 사항이 새

로 규명 되는대로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lt오간gt의 미해명 사항

에 대한 개별적인 탐구도 본 과제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필요하다 그

리고 아직 소개되지 않은 대량의 lt오간gt이 연속하여 출간되면서 새로

운 자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107) 廣懶薰雄 앞의 秦漢律令硏究 pp310-311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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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103

(中文摘要)

中國古代的職役與職官的問題

朴 健 柱

通過上述的檢討 基本上職役範疇內的多種身分 乃至階層與吏職之類

其服務形態至三國期的傳承與變化等方面已然解明 職官與職役服務者

的一般徭役均免除了 此二者中職役服務者 用種種lsquo吏職rsquo與lsquo給吏職rsquo服務來

代替其一般徭役 直至三國時期爲至漫長的期間內職役擔當者 庶民在官者

lsquo非吏而給事官府者rsquolsquo官與民之間者rsquolsquo半官半民rsquo的性格几乎共通維持

職役擔當者的淵源卽是lt周禮gt所見的官吏組織最下位的府史胥

徒 此中 府史是大略屬于後代掾史職或是lt吳簡gt的諸吏 胥徒則是相通于

給吏層的側面多的 但是lt吳簡gt所見多數的吏役下吏戶其過重的負擔與厮

役及貧賤的性格上 倒是與胥徒相通方面較多 這個時代的差異像是吏戶的

隸屬化及世襲化的進展招來的結果 一方面因爲時代的與件差異 胥徒與後

代的職役擔當階層間有多方面的異質 胥徒與給吏層基本上是一般庶民出

身的 服工事者 如此不同 從周至三國期間從 服工事者 上是同類而與一

般庶民相區分的多種相異的階層面上身分較多 例如 工商食官 所屬的工

商 皁隸食職 所包含的 吏所屬的徒隸 層以廣義的徒隸層可以稱謂的

皂隸牧圄僕輿人 以及下吏層所屬的樂祝醫衛士 及走

卒伍伯之類等 他們的出身是一般庶民 或是賤民乃至刑徒 在官府寄生

而給事的層面上是共通的

其服務形態是恒常的勤務 一時的勤務 組別交代制等以多種方式徵發乃

至差出 lsquo冗rsquo與lsquo更rsquo是其差異區分用的用語 支給勤務報酬與否是不分明之事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04項 可是至少生業官府依託者是被支給的 其支給方式是與年俸制相對的稍

食 卽少額的月俸乃至勤務日數基準的支給方式 因此他們的勤務和支給計

算主要是日單位或是月單位

於lt吳簡gt之lt吏民簿gtlt戶口簿gt等所見的吏與給吏的實態 可以看到

從後漢末至三國期間典型的職役的樣相 尤其向來看過給吏的存在 lt吳

簡gt所傳數十種給吏的實態 其意義是巨大 給吏是以直接的勞役補助吏的

事務業務 是官府的行政業務處理上恒常的必要勞動力提供者 這種勞動力

許是官府運營上至今爲至所有過的任何時期共通要緊事項 可以推斷給吏

的淵源於lt周禮gt的胥徒 而且可以指摘以職役的實例有多方面共通的層面

後漢末三國時期的吏與給吏是一般庶民身分之吏 以吏戶隸屬於官府 其食

口成員率多世襲地從事吏役 他們除比一般庶民免一般徭役外 也需要履行

各吏職別吏役的基本職務 佃作限田義務 以其地租納付限米布錢 從

軍義務等重疊的賦役 因此他們有比一般庶民更重的負擔 而且他們的戶品

是下品乃至下品之下所屬的貧戶出身 從而他們雖一樣稱謂lsquo吏rsquo 却與豪族

勢家出身經歷掾史職進級上級命官的累代高族的世家出身的掾史與以貧賤

的庶民出身於官府隸屬的吏戶出身的掾史是不同的階層 這個吏家乃至吏

戶雖被稱謂lsquo吏rsquo 但是彼役後漢三國期被稱謂賤役 賤職乃至厮役 而且被忌

避 從而此階層是與lsquo官吏rsquo合稱的境遇的lsquo吏rsquo爲區分是理所當然 其稱號也只

得相殊 于是最遲至少到於孫休時期文書與簡牘資料所見的lsquo吏家rsquo與lsquo吏戶rsquo

許是已經成爲如此階層的專稱

依照給吏的役是一般徭役代替的服役 其運營形態是非常勤乃至輪番形

式的可能性大的 但是迄今依據lt吳簡gt所見的資料還難以斷定何者是對的

胥徒的役是與上級官員異樣 以一般民的徭役義務代替給事於官府 本着那

樣的側面與lt吳簡gt所見的給吏相通 給給吏俸祿與否也還不明 但是從限

田的支給是與祿田同一的性格的可能性上看 因爲其租額是多的 與其說惠

澤倒是有可能解釋爲勞動力的徵發 給吏的官府給事是與一般徭役同一方

式的組別交代制與否還不分明 如lt奏讞書gt所見樂人的事例 有可能一月

一更制方式交代勤務制 筆者認爲大體上是兩個方式共存

關於lt吳簡gt資料的議論是因爲解釋與解明上許多異說 不分明的關聯事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105項也有很多 所以該事項的解明將其完備需要補完

주제어 직역 직관 서도 도예 이역 이호 급리 서민재관자

關鍵詞 職役 職官 胥徒 徒隸 吏役 吏戶 給吏 庶民在官者

Keywords lavor duty at office(official lavor) high-ranking officialrsquos duty(official

post) xu-tu tu-li minor officials lavor minor officials family minor half

officials and half the masses in lavor services at office the masses in lavor

services at office

(원고접수 2013년 11월 15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12월 16일 수

정원고 접수 12월 19일 게재 확정 1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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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36官의 복무는 職官이 되는 것이지만 거기에 들지 못하는 일반 吏民이

맡게 되는 職役의 세계는 매우 복잡다단하고 모호한 바가 많다

고대에서 賦役의 복무는 신분 내지 관위별로 차등이 있었다 秦漢에

서 일반 서민이 진급할 수 있는 작위는 제8등 公乘까지이고( 自公士至

公乘 民之爵也 )1) 公乘까지 士의 신분이며 官秩로는 5백석까지이다

제9등 五大夫에서부터는 신분상 下大夫 이상이고 관질로는 (比)6백석

이상에 해당한다 公乘 이하를 吏民爵이라 한 것은 서민도 공승까지는

진급할 수 있기 때문이고 또한 6백석 이상은 官( 自五大夫至徹侯 則

官之爵也 )2) 5백석 이하가 吏인 까닭이다 그리고 5백석에서부터 아

래로 백석 이하 斗食에 이르는 位도 크게 두 계층으로 구분되었다 縣

令長丞尉 등의 官長 내지 副官 급들은 각기 속하의 掾史를 辟召

하여 임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양자의 경계선이 2백석과 1백석이

었기 때문에 전자는 長吏로서 여러 특혜와 우대를 받았고3) 후자는 小

吏로 칭해지며 下待를 받았다 이러한 사정으로 長吏는 吏이면서 官의

대우를 받고 官으로 칭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마찬가지로 신분은 서민

이면서 吏職에 있게 되면 吏로 칭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당

시 官制上 小吏에 員數가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

다 따라서 그들에게도 봉록이 지급되었지만 매우 빈약한 것이었다 그

런데 五大夫 이상의 官位는 賦役 면제의 특혜를 받았고 전 계층은 자

신의 신분과 職位上에서 奉公을 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五大夫 내지 6

百石官 이상은 官職에서의 복무(직무) 즉 職官이 곧 奉公이었다 그렇

다면 官位의 대접을 받는 5백석 이하의 長吏를 제외한 公乘 이하 서민

1) 王先謙 漢書補注 卷19上 (北京 中華書局 1983 p306) 漢書 권19 百官公

卿表7上의 注引 錢大昭曰 續漢書 百官5 注引 荀綽晉百官表注曰 吏民爵不

得過公乘者

2) 위의 漢書補注 p3063) 秦漢시기 長吏의 범위와 시기에 따른 변화에 대해 몇 가지 다른 견해들이 있

다 이 문제는 이 글에서 핵심 주제가 아닌 까닭에 상론하지 아니하고 가장

널리 통용되는 설에 의한다 長吏에 대한 근래의 주요 專論으로는 鄒水杰 秦

漢長吏考 (中國史硏究 2004-3 2004 8) 張欣 秦漢長吏再考 -與鄒水杰先

生商榷 (中國史硏究 2010-3 20108)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37의 吏職은 어떠하였을까 그 문제는 그 吏職이 일반요역에 대신하는

것이었는가의 여부 및 그들에게 賦役 면제의 특혜가 있었는가 없었는

가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지는데 고대사에서 그 사항이 분명치 않다

그래서 이 문제도 본고의 과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漢代의 여러 자료와 孫吳期의 lt長沙走馬樓吳簡(이하 lsquo吳簡rsquo

으로 약칭)gt의 여러 簿籍에 某吏로 칭해지는 이른바 吏戶(吏家)가 있

는데 그들은 그 吏職에 복무하면서 동시에 일반서민과 마찬가지로 여

러 賦稅役을 부담하고 있으며 세습호이고 그 家內 식구 모두 그 吏役

의 범주에 예속되어 관부에 給事하는 등의 諸役에 차출된다 lt吳簡gt

에 의하면 만약 그 吏役의 노동력에 부족분이 생기면 戶의 9품 가운데

下品이나 下品之下의 戶에서 그 수만큼 충원된다(후술) 이들은 대대로

관부에 예속된 신분으로 하급의 吏에 給事하는데 후한 후기의 자료에

서 이미 일반 서민 보다 그 부담이 더 크다 후한 후기나 lt오간gt에

보이는 이러한 吏戶의 모습에서 당시 吏戶制가 성립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에 대한 여러 異見이 있지만(후술) 본고는 그러한 吏戶의 존

재는 주례 내지 先秦 이래 실재하였던 것으로 보고 그 내역과 의미

를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그렇다면 이러한 다방면에 걸친 吏戶의

복무는 役制上에서 어느 범주에 들어가는 것일까 하는 문제가 제기된

다 본고에서는 이를 職役의 범주에서 이해하여 그 성격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편 先秦 이래 이른바 庶民在官者 가 있고 위의 부류 가운데 小

吏나 吏戶 등도 이에 포함되는 면이 있다 그런데 小吏나 吏戶가 직업

적 생업적으로 관부에 給事하는 반면에 서민 가운데 일반 요역에 대신

하여 일정기간 한시적으로 관부에 차출되어 給事하는 복역자가 있다

그리고 lt吳簡gt에 많이 보이는 수십종의 給某吏(이하 lsquo給吏rsquo로 약칭)의

부류가 있는데 현금 그에 대한 해석에 異說이 분분하다(후술) 吏와 給

吏의 구분 문제는 고대 職役의 존재형태와 관련하여 필히 해명되어야

할 사항이다 이들의 職役으로서의 측면은 주례 등에 보이는 lsquo府

史胥徒rsquo 및 이후 이어지고 있는 工商食官 에 속하는 工商 皁隸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38食職 에 포함되는 吏에 속한 徒隸 층 넓은 의미의 徒隸層이라 할 수

있는 皂 隸 牧 圄 僕輿人 下吏層으로서의 樂祝醫衛

士 및 走卒伍伯之類 등 각 종의 관부에 예속된 신분들의 존재형태

와 상통하는 면이 많기 때문에 그 연원문제와 관련하여 그들의 존재

형태와 운영방식 등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관부 내의 給事가 아닌 일반 요역에 복무하는 서민 계층의

복무가 있다 이는 諸役 가운데 가장 많은 민중이 이에 복역하며 職役

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대체로 職官이나 職役은 일반 요역에 상대되

는 용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고찰은 제

외된다

종래 고대 요역제도 연구사에서 가장 疏略한 부분이 職役 관련 사항

이다 비록 職役이 주로 당송 시대에서부터 상견되는 사항이고 중국고

대사에서 잘 논급되지 않는 사항이라 하더라도 국가 통치상 그러한 제

도가 구비되지 않을 수 없는 면이 있다 후대의 職役과 모든 면에서

동일한 형태는 아니지만 고대적 職役이라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고찰

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職役제도의 운영이 고대 요역제도와 신

분제상 어떠한 위치에 있고 어떠한 기능을 한 것인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고대 職役의 계승과 변화 등의 사항도 더불어 검토

되어야 할 과제이다

송대에 집중된 職役 관련 연구사에 의하면 그 연원과 개념 및 定義

관련 여타 제도 내지 규정과의 상관문제 운영상의 실태 성격 등의 사

항에 대해 수많은 異見들이 제기되어 온 바가 있다4) 職役은 대체로

당송 시대에 부유층 내지 上等戶에게 부과된 관부 물자의 운송 官莊

경작 징세 鐵冶업무 木材벌채 창고관리 관리의 送迎 통행세징수 등

의 役을 지칭하고 있다 職役은 일반민의 요역 복무에 대신하여 복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래 賦役이 면제되는 관리가 봉록을 받으면서 일

정한 품계를 지니고 업무에 복무하는 職官과는 구분된다 그렇다면 후

4) 勺培俊 當代中國學者關於宋朝職役制度硏究的回顧與展望 (漢學硏究通訊 22-3 2003)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39대의 職役과 같은 類의 제도가 고대사에서는 없었던 것일까 하는 의문

이 본 과제를 모색하게 된 출발점이다 따라서 고찰의 출발은 先秦의

윗 시기로부터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후대의 대부분 職官들은 고대

의 사례에 의거하여 제정된 것이다 송대 직역 관련 여러 연구는 그

연원을 漢 또는 위진수당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5) 본고는 그러한

類의 제도가 온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이미 周代 이래 실재하였다는

시각에 입각하여 살펴보고 그러한 모습이 선진에서 진한에 걸쳐 이어

지고 나아가 삼국기의 lt吳簡gt의 여러 실태에서 계승되고 있는 면을

입증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대체로 후대의 여러 제도는 거의 대

부분 이미 前代에 시행되었던 것들이며 나중에 여러 사정의 변화로

중단되었다가 재차 복구되면서 약간 변용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의미

에서 고대 제도사의 연원이 되고 있는 주례 등의 관련 사항과 고대

의 끝자락에서 이루어진 lt吳簡gt의 여러 명확한 자료에서 보이는 職役

制의 면모를 통하여 그 연원과 전개 과정 그리고 그 계승과 변용의

맥락을 일면이나마 해명할 수 있는 성과가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근래 lt吳簡gt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구별 吏役 문제 등 職役 관련

주요 사항에 대한 여러 난문제가 얽혀 있고 그에 대한 갖가지 異見이

분분하여 뚜렷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당한 혼란을 주고 있다

lt오간gt의 신출 자료들은 그간 관련 자료가 零碎하여 충분히 거론하기

어려웠던 고대 직역 관련 제반 사항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고 있어 가

히 획기적인 자료의 등장이라 할 수 있다 周代의 자료에서 삼국시기

까지 긴 기간 동안의 事跡을 망라하며 검토하게 된 것은 그 성과를 바

탕으로 lt오간gt의 신출 자료를 명확히 올바로 해석하는데 도움을 얻고

자 함이라는 면도 있다 필자의 기본 입장에서 보면 lt오간gt의 관련

문서에서 lt주례gt 이래 일맥 상통하며 전해져 온 職役의 맥락과 전통

을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고자 함에 본고의 주안점이

있다

5) 勺培俊 위의 글 pp17-18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0

Ⅱ 周禮의 胥徒와 庶民在官者

秦漢 官制에서 官階는 대체로 皇命에 의해 除授되는 命官 내지 長吏

와 그 명관에 의해 辟除되는 屬吏 내지 小吏로 크게 구분된다 그리고

양 官階의 秩祿에 의한 구분은 漢初의 lt이년율령gt秩律에 의하면 300

石 전한 중기 이후에는 200石이 기준이 되고 있다6) 그 실제의 관직

은 전자는 丞佐史尉의 佐官 내지 副官級 이상에 해당하고 후자는

그 미만인 鄉有秩獄史佐史鄉佐斗食令史嗇夫假官掾史

幹小史書佐循[脩]行 등의 掾屬 佐史類이다7) 그런데 이러한 구

성의 구분은 이미 주례의 官階 구성에서도 보인다 天官 冢宰에 治

官之屬 大宰 卿 1人 小宰 中大夫 2人 宰夫 下大夫 4인 上士 8인 中

士 16인 旅 (鄭玄의 注 lsquo衆也rsquo) 下士 32인 府 6인 史 12인 胥 12인

徒 120인 인데 주례의 거의 모든 관부가 이러한 구성으로 되어 있

다8)후한의 鄭玄과 唐의 賈公彦은 下士 이상은 왕명에 의해 임관된 王

臣이고 그 이하의 府史胥徒는 王臣에 의해 辟除된 계층으로 王

臣이 아니라고 하였다 즉 위에서 下士까지가 이른바 命官이고 그 아

래는 屬吏이다 특히 정현은 주례 여타 조목에 보이는 官階에서 lsquo群

臣rsquo을 卿大夫士로 해석하고9) lsquo群吏rsquo를 lsquo府史rsquo (秋官 司寇 小司寇 및

同 朝士 등에서의 鄭注) 또는 lsquo府史 以下rsquo(夏官 司馬 御僕의 鄭注)로

해석한다 庶人在官者 란 예기 王制제5에 農田을 100畝 단위로

만들어서 100畝씩 분여하는데 上農夫가 받는 田은 9인이 食할 수 있

고 그 아래는 8인이 食 할 수 있으며 그 아래는 7인이 食할 수 있고

6) 孫鴻燕 秦漢時期郡縣屬吏辟除問題硏究 (秦漢硏究 第一輯 三秦出版社

20071)

7) 後漢書 권28 백관5 注引 漢官曰 雒陽令middotmiddotmiddot(이하의 속관명)

8) 단지 예외로 角人이나 羽人은 그 직무의 성격에 따라 府와 史 중 어느 한 쪽

만 설치되어 있고 腊人과 食医는 양자 모두 설치되어 있지 않다 周禮注疏 같은 條의 贾公彦의 疏

9) 한편 주례 司寇 小司寇의 經文에서 경대부 하위의 lsquo群士rsquo의 稱이 있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1그 아래는 6인이 食할 수 있으며 下農夫는 5인이 食할 수 있다 庶人

在官者 는 그 祿이 이것으로써(8인에서 5인까지) 차등을 삼는다 제후

의 下士는 上農夫로 하고 그 祿으로 그 농경에 대신하기에 족하다 中

士는 下士에 倍하고 上士는 中士에 倍하며 下大夫는 上士에 倍한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라 10)하였고 맹자萬章句下에는 耕者가 수확하는 것으로 一

夫 當 百畝씩 百畝의 分田에서 上農夫는 九人이 食할 수 있고 그 다

음은 8인이 食할 수 있으며 中은 7인이 食할 수 있고 그 다음은 6인

이 食할 수 있고 下는 5인이 食할 수 있다 庶人在官者는 그 祿이 이

를 차등으로 한다 라11) 한 바에 의하면 庶人在官者 는 下士 아래

등급인 府史胥徒에 해당하며 차례로 9인이 食할 수 있는 百畝

의 최상급 농지를 경작하는 상농부(제후의 下士)의 아래 등급에 해당

하는 8인이 食할 수 있는 百畝의 경지 보유자는 府가 되고 그 아래

순으로 각각 7인의 食地 보유자는 史 그 아래 6인의 食地 보유자는

胥 그 아래 5인의 食地 보유자는 徒가 된다 이 규정에 의하면 下士에

서 徒까지는 모두 百畝의 경지를 보유하게 되는 면에서는 같지만 그

경지의 質에 따라서 5 단계의 차이 나는 경지를 차등으로 받게 된다는

것이 된다 上農夫 등의 차등은 주례의 鄭注에는 田의 肥瘠에 5등

급이 있어 수입이 같지 않다 라 하였고 위 인용문의 맹자 注에 一

夫一婦에 佃田이 百畝인데 百畝의 田에 糞을 퇴비로 주면 이것이 上農

夫이고 그 소득의 곡식으로 9口를 족히 먹일 수 있다(一夫一婦 佃田

百畝 百畝之田 加之以糞 是爲上農夫 其所得穀 足以食九口) 라 한

것에 의하면 糞의 퇴비 사용 여부 등으로 인한 토지의 肥瘠으로 발생

하는 수확의 양적 차이에 따른 구분임이 분명하다 즉 祿田 지급의 면

적 크기는 같지만 토지의 질적 차등을 기준으로 下位 5등의 차별이 결

10) 制農田百畝 百畝之分 上農夫食九人 其次食八人 其次食七人 其次食六人

下農夫食五人 庶人在官者 其祿以是爲差也 諸侯之下士視上農夫 祿足以代其耕

也 中士倍下士 上士倍中士 下大夫倍上士middotmiddotmiddot

11) 耕者之所獲 一夫百畝 百畝之分 上農夫食九人 上次食八人 中食七人 中次

食六人 下食五人 庶人在官者 其祿以是爲次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2정되고 있다 漢唐의 주석가들이 庶人在官者 를 주례의 府史

胥徒에 해당시킨 해석은 그들이 살던 시기의 정황에 의거한 것이고

관련 자료들도 충분히 현전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인정될 수 있는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일찍이 曾我部精雄은 鄭注와 賈疏의 차이를 제시하길 鄭玄은

府와 史가 庶人在官者 에 들어가지만 胥와 徒는 그에 들지 못한다고

한 반면 賈公彦은 4者가 모두 그에 포함되는 것으로 본 차이가 있고

鄭注의 해석이 옳다고 하였다12) 그는 상기의 주례 胥十有二人徒

百有二十人 에 대한 鄭注에 이는 民이 徭役을 給한 것이니 지금의 衛

士와 같다(民给徭役者若今衛士矣) 라 하였고 賈疏도 이에 따르고

있는데 胥와 徒는 요역 의무에 복무하는 것인 까닭에 봉록이나 수당이

지급되지 않았고 官長으로부터 辟除 임용된 것도 아니었으며 육체노

동이었던 반면 官長으로부터 선발되어 辟除 임용된 府와 史는 관부의

정신노동에 복무하였기 때문에 다르다고 하였다13) 때문에 庶民在官

者 에 胥와 徒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曾我部精雄은 鄭注와 賈

疏의 그러한 입장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여러 조문을 열거하고 있지만

賈疏가 府史胥徒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나 그가

열거한 자료에서 鄭注가 胥徒를 배제하고 있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주

는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屬이라 함은 그 屬인 胥徒이다 (春

官 宗伯 典祀) 群吏는 府史 이하이다 (夏官 司馬 御僕)라고 해석한

부분에 의하면 胥徒도 屬吏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는 입장이었을 것 같

다 또 曾我部精雄이 胥徒는 給徭役의 의무로 복무하는 것인 까닭에

봉록이 지급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위의 경문에서 최하급의 田地이지

만 1백무의 祿田이 지급된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 주장도 어긋나게 된

다 庶民在官者 의 봉록 문제는 아래에서 다시 상론한다

여기서 주의할 사항은 鄭注와 賈疏가 모두 한에서의 사정에 입각하

12) 曾我部靜雄 中國往古の胥吏制度 (中國律令史の硏究 東京 1971) pp456

-8

13) 위의 글 pp456-7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3여 府史와는 달리 胥徒가 모두 요역 의무로 징발되어 복무하는 자들로

본 것이라는 점이다 이 府와 史의 직무에 대해 정현과 가공언은 주례 小宰 宰夫의 8職 가운데 다섯째 府는 契하여 藏을 治하고 여섯

째 史는 문서로 贊治(보좌관의 업무)함을 관장한다( 五曰府 掌官契以

治藏 六曰史掌官书以赞治 에 의거하여 府는 문서와 器物의 藏(보

관 관리)을 관장하고 史는 문서의 起草를 관장하는 직책으로 해석하

였다 이는 진한시기 각 관부의 屬吏 掾史의 庶務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lt雲夢秦律gt 秦律雜抄(p133)에 佐 史 이상인 吏가 짐을 지고

운반하는 馬와 문서 간수를 담당하는 私卒(隨從의 卒)을 부려서 장사

하도록 하여 이익(錢)을 취하였으면 모두 遷刑에 처한다 라 하였는데

lsquo문서 간수를 담당하는 私卒rsquo이란 佐史 이상 관리 직속의 下屬으로서

그 상관을 隨從하며 보좌하는 까닭에 私卒이라 한 것이고 家內의 私

卒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정리소조가 lsquo隨從의 士卒rsquo로 해석하였는데

문서 간수를 직분으로 하는 史에 下屬된 卒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

든 府史의 史 및 그 下屬의 인력이 전국진에서도 설치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周禮天官 宰夫에 기술된 宰夫8職에서 일곱째 胥는 그 업무가 掌

官叙以治叙 인데 鄭注는 治叙란 관부에서 次序함이니 마치 지금(漢에

서) 侍曹 伍伯이 관리의 朝會에서 傳言 報告하는 것과 같다 胥가 什

長이 된 경우도 또한 그러하다 까닭에 漢法의 사정을 든 것이다(如今

侍曹伍伯 傳吏朝也 胥爲什長亦然 故擧漢法况之也) 라 해석하였다

좀 난해한 설명인데 이를 부연 설명한 賈疏는 이미 才智가 있어 什

長이 되어 관부에서 次序의 업무에 當하니 반드시 사람을 使役하는 곳

에서 그 徒를 科次한다 까닭에 관부에서 次叙한다고 하였다 로 해석

한다 즉 보통 胥徒로 함께 칭해지는 胥는 徒 중에서 才智가 있어 什

長으로 선발된 층으로 관부의 次序 업무를 맡게 되는데 徒를 使役하는

곳에서 그들을 통솔하며 科役한다는 것이다 如今侍曹伍伯 傳吏朝也

도 난해한데 賈疏는 漢에서 侍曹에서 伍의 長인 伍伯(伍長)에 이르기

까지 吏朝(관리의 朝會)에서 群吏가 諸官의 사무를 보고하여 傳하는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4것으로 해석하였다14)즉 侍曹에서 최말단의 부서 단위에 이르기까지

담당 부서의 朝會 때 각 하급 단위의 長이 업무 보고를 하는 것이다

그런대 이 伍伯은 5인조의 長이 아니고 漢의 執金吾의 속관에 (持戟)

五百(伍伯)二十人 이 있고 이 lsquo伍rsquo의 義를 lsquo當rsquo으로 lsquo伯rsquo의 義를 lsquo道rsquo로

해석하여 앞에서 導引하며 길을 驅除 정리하는 吏라고 한 韋召의 해석

이나15) 司隸校尉의 속관으로 先導隊나16) 門番의 임무를 하고 있는 사

례에17) 의하면 하급의 賤職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후한에 伍伯이

자주 보이는데 모두 走卒 鈴下와 連稱되거나 병렬되어 있어 일찍이 好

並隆司는 走卒은 伍伯이라고 하는 職役에 類한다 고 하여(후술) 모두

관부 말단의 職役 내지 賤職이라 하였다18) 凍國棟은 漢唐間의 伍伯이

微賤의 役이였지만 그 職의 성격상 권세를 빌려 남의 생사를 좌우하

고 謝禮錢을 챙길 수 있는 자리였다고 하였다19) 따라서 여기서는 吏

朝에 참석하는 최말단의 吏員으로서 先導 門番 등 役에 복무하는 伍伯

을 기술한 것이라 하겠다 胥徒는 곧 伍伯과 같이 관리의 최말단 수종

원이면서 그 손발 내지 爪牙의 기능도 하는 층이다 이러한 류의 최하

급 단위의 長은 什長이고 胥는 곧 그 什長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주례에서 각 관부의 徒는 그 員數가 거의 대부분 胥의 10배수이다 그

리고 관부의 次序 업무란 담당 단위의 胥가 그 소속 성원의 질서를 유

지하며 아울러 요역 징발된 民의 徒를 지휘 통제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후술)

이어 여덟째 徒는 그 업무가 官의 令으로써 徵令을 관장함(掌官令

14) lsquo如今侍曹五伯传吏朝也rsquo者漢時五人爲伍 伯 長也 是五人之長 言傳吏朝者

傳在朝群吏諸官事務於朝也

15) 후한서 宦者列傳 曹節條의 注에 韋召辯釋名曰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伍 當也 伯 道也

使之導引 當道陌中 以驅除也

16) 續漢書 輿服志上에 公卿以下至縣三百石導從 置門下五吏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車前伍伯 公

八人 中二千石 二千石 六百石 皆四人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17) 謝承後漢書에 華松家孤微 其母夜夢兩伍伯夾門 言司隸在此

18) 好並隆司 漢代下層庶人の存在形態(一) (史學雜誌 82-1 1973) pp17-1919) 凍國棟 漢唐間lsquo伍伯rsquo淺識 (中國中古經濟與社會史論考 湖北敎育出版社

2005) pp25-35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5以徵令) 인데 얼핏 徒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내용인 듯하다 정현은

이 lsquo徵令rsquo의 업무를 趨走給召呼 라 하였다 賈疏는 그 徒가 朝會에서

뛰어다니는 것을 금지시키고 官人에게 복역자를 공급하고 그들을 호

령하며 사역시키는 일이다(其徒止爲在朝趨走 供給官人召呼使役之事也)

고 해석하였다 관부 내에서 많은 복역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까닭에

그들이 소란 피우지 못하게 질서를 잡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서 徒에 의해 징발되고 사역되는 층은 관부에 복역 중인 刑徒 요역에

복무 중인 일반 서민 등일 것이다 주례의 각 관부에서 徒의 수는

수십 명에서 수백 명 많은 경우 8백명에 이르기도 한다 이들의 노동

력은 각 관부별로 항상적으로 갖추어진 것이지만 이 보다 더 많은 노

동력이 필요하여 형도나 일반 요역 복무자들을 징발하게 된다 그리고

그 징발된 노동력을 호령하며 질서를 잡고 사역시키는 직무도 필요하

게 된다 물론 징발된 자들을 사역시키는 일 뿐 아니라 자신들이 직

접 여러 노역의 所管 업무에 복무해야 한다 이를테면 地官 牛人에

胥二十人 徒二百人 이 있고 그 직책은 公牛의 사육이며 稻人에 胥

十人 徒百人 인데 그 직책이 稻田의 경작이고 夏官 虎贲氏에 胥八十

人虎士八百人 인데 鄭注에 의하면 徒라 하지 아니하고 虎士라 한 것

은 徒 가운데 勇力者로 선발된 까닭이다 하였으며 그 일부 직무에 同

司甲 司戈盾 司弓矢 繕人 校人 趣馬 巫馬 등에 속한 수십

명 내외의 徒는 모두 무기제조나 다루는 법 무기 성능 감별 馬의 감

별 養馬기술 馬祖 馬步 등의 神을 통해 馬의 질병을 파악하는 巫術

등에 뛰어난 상급자들 밑에서 보조 지원의 일 등 말단의 업무를 처리

한다 전문 기술과 지능이 필요한 업무인지라 말단의 업무 처리도 상

당히 명민한 자질이 필요하다 따라서 일반 서민 가운데서 이러한 재

능과 자질이 있는 자로 충원한다 이러한 각 관부의 업무 처리는 후대

에도 익히 보이는 사례이다 鄭玄은 胥를 lsquo諝(智者)ldquo로 읽어 才知의 뜻

으로 해석하였는데 같은 徒의 무리 중에서 才知者로 뽑힌 자라는 뜻으

로 보았다 胥가 什長인 까닭에 10인 가운데 1인 비율로 뽑힌 셈이다

아울러 徒 전체가 일반 서민으로부터 뽑힌 자들이라 할 수 있다 단지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6胥徒의 신분상 복무형태상의 제반 사항이 후대에 그에 상당하거나 유

사한 신분층과 사례에 대비할 때 상당히 다른 면이 많다는 사실이다

趙伯雄은 주례의 胥徒는 전국기까지 노예 厮 童보다 윗 등급이지만

거의 비슷한 신분이었고 厮役 내지 賤役의 담당층이었으며 徒가 한에

서는 주로 刑徒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고 하였으나20) 아래

기술하는 내용에 의하면 그러한 해석에 따를 수 없는 면이 많다 또한

한에서 徒는 형도 뿐 아니라 여러 무리를 가리키는데 통용되고 있어

여러 자료에 등장하는 徒가 가리키는 사항은 무척 다양하다

위의 注疏에 의하면 經文에서 徒의 업무를 官의 令으로써 徵令을

관장함(掌官令以徵令) 이라 한 것은 上部의 지시를 받은 徒가 새로

징발되는 徒의 징발 업무 및 이들을 인솔 지휘 사역하며 그 지시사항

(작업)을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胥와 徒가 모두 庶民在官者 라는 입

장에서 보면 徒가 최하위이지만 lsquo在官者rsquo이고 제8위와 제9위의 서열에

있으며 胥와 徒가 각각 6인과 5인이 食할 수 있는 토질의 경지 百畝

를 代耕의 봉록으로 받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이 출신은 징발된 요

역 복무자와 같다고 하더라도 여타의 징발된 일반 요역 복무자와는 구

분되는 계층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후대의 胥吏도 일반 서민출신이지

만 일반 서민과 다른 계층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 같다 만약 曾我部精

雄의 견해와 같이 府와 史까지만 庶民在官者 이고 胥와 徒는 그에

들지 못하는 것이라 한다면 주례 원문에 胥와 徒가 엄연히 제8위와

제9위에 올라 있고 봉록으로써 百畝를 받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기 어

렵게 된다

그리고 특별히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앞에 인용한 鄭注에 이는(胥

와 徒는) 民이 徭役을 給한 것이니 지금의 衛士와 같다 고 한 점이다

그래서 후한 중후기 衛士의 운영 형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또 鄭

玄은 駁五經異義에서 周禮에서 이른바 모두 징발한다 한 것은 胥

徒로 하여금 公家의 事에 給하게 한 것을 말함이니 지금의 正衛와 같

20) 趙伯雄 lt周禮gt胥徒考 (中國史硏究 2000-4) pp10-12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7다 고21) 하였다 한에서 궁성 내지 중도관에 番上 守衛하는 役은 正卒

의 役과 일반 更卒의 役이 있는데 鄭玄이 특별히 正衛라 한 것은 正卒

로서의 役임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의 요역 운영체제에서

衛士가 上番하는 役은 한구의에 民의 나이 23세가 되면 正이 되고

1년간 衛士 1년간 材官 騎士에 복무하며 활쏘기 말달리기 戰陣을 익

힌다(民年二十三爲正 一歲以爲衛士 一歲爲材官騎士 習射御騎馳戰陣)

라 한 것에 의하면 正卒이 그 복역 대상자이고22) 각 군 단위로 1년씩

21) 禮記王制 五十不從力征middotmiddotmiddot 의 條 孔穎達疏引 周禮所謂皆征之者 使爲胥

徒 給公家之事 如今之正衛耳

22) 漢의 正과 正卒 및 상비군의 문제에 대해서는 종래 여러 이견이 있다

正을 正卒로 보고 正卒이란 更卒(小繇)의 對稱으로서 병역의무자이고 재관

기사 위사등이 곧 정졸이라는 설이 가장 많이 받아드려지고 있다(濱口重國

秦漢時代の繇役勞働に關する一問題 秦漢隋唐史の硏究』上卷 東京 1966

1980 勞幹 漢代兵制及漢簡中的兵制 歷史語言硏究所集刊 10 1948 山田

勝芳 後漢時代の繇役と兵役 歷史 66 19869)正卒은 앞의 설과 같지만 正은 23세에서 56세 사이의 남자 즉 正丁 을 가리

킨다는 설(西村元佑 漢代の繇役制度 東洋史硏究 12-5 1953)正卒과 更卒이 별개인이 아니라 동일인이고 更卒은 正卒이 된 이외의 해에

매년 1개월의 역역에 복무하는 자를 가리키며 正은 23세-55세까지의 正丁인

데 正卒은 그 가운데 2년간 衛士 材官 騎士 등의 實役에 복역하는 것이라는

설(西田太一郞 漢の正卒について 東洋の文化と社會1 東京 1955)

材官 騎士등이 일반민에서 材力 있는 자로 선발되어 군국에서 常駐하는 전

문병사로서 직업군인인 lsquo士rsquo인데 대해 正卒은 일반민이 23세에 1년간 병졸로서

근무하고 1년간 衛士로 長安에 上番한다는 설 즉 正卒은 직업군인인 材官 騎

士와는 兵役體系上 別個의 것으로서 일반민의 병역 복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는 설(大庭脩 材官攷 -漢代の兵制の一班について 龍谷史壇 36 1953)正卒이란 23세에 이른 자 가운데서 신체강건한 자를 뽑아 衛士 材官 騎士

樓船 등의 어느 한 兵種에 복무하게 한 것이라는 설(濱口重國 勞幹 西村元佑

山田勝芳 앞의 논문 平中苓次 漢代の官吏の家族の復除と軍賦の負擔 中國

古代の田制と稅法 京都 1967) 諸說의 대부분은 이 견해를 공통적으로 취하

고 있다

秦漢에서는 始傅에서 免老까지의 모든 남자가 병역의무를 지는데 正卒은 그

適齡남자를 統稱하는 말이며 따라서 郡兵이나 衛士 戍卒은 正卒의 일부분이라

는 설(臧知非 秦漢lsquo正卒rsquo辨釋 中國史硏究 1988-1)正이란 傅籍된 待役者(兵役과 力役 포함)를 말하며 正卒은 어떤 특정의 役

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고 正(待役者)과 卒(服役中에 있는 正)로 구분되어 있

는 말이며 秦漢代에 병역 복무는 일부 병역신분에게 만 부과된 것이어서 나머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8조별 순번으로 상경하여 복역한다 正卒은 일반 更卒 중에서 신체강건

용맹 등으로 선발된 자들로 상비군 내지 직업군인의 성격이 강한 집단

이다 즉 그들은 일반민(서인)이면서도 그 중에서 선발되어 군사로써

免老에 이르기까지 복무하는 까닭에 일반민과는 다르다 胥徒 또한 서

인이면서 관부에 복무하는 까닭에 일반민과는 다르다 衛士는 특히 평

시에 도성(중도관)을 수비하기 때문에 관부에 거처하게 되고 胥徒 또

한 관부에서 직접 給事하는 까닭에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면에서 鄭玄

은 양자를 같은 성격의 계층으로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衛士가 일반

민에서 선발된 자들이고 胥는 徒 중에서 才智로 선발되고 徒는 분명

치는 않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일반 民庶 가운데 담당 직무 수행에 어

느 정도 자질을 갖춘 자로 선발된 자들일 가능성이 크다 또 漢書권74魏相傳의 顔注에 京師의 여러 관부에 와서 戍卒이 되는데 지금의

衛士가 上番하여 여러 官司에 나누어져 복무하는 것과 같다 라23) 한

것에 의하면 衛士의 이러한 복역 모습은 각 官司에 배치된 胥徒의 복

역 형태와 같다 전한 京師에서 복무중인 衛士의 수는 景帝末傾에 매

지 일반 白徒는 병역에 복역하지 않는다는 설(孫言誠 秦漢的繇役和兵役 中國史硏究 19873 및 ldquo爲正一歲rdquo辨 文史 31 198811)濱口說과 같이 正을 正卒의 略稱으로 보지만 濱口씨가 正卒을 일반적인 兵

士로 본 것과는 달리 庶民 중에서 일부가 선발되어 兵士(材官 騎士 등)가 된

것이며 이들은 일반서민과는 상대적으로 구별되는 신분 말하자면 獨自의 兵

士身分 으로서 일반서민과 같은 역역(更卒) 의무가 없었고 일반서민과는 다른

부담체계하에 있었다는 설(重近啓樹 秦漢の兵制について -地方軍を中心とし

て- 人文論集(靜岡大學) 36 1985)正卒은 일반민이 20세로 부터 2년간 복무하는 것이며 材官 騎士는 이와는

달리 전문병사로서 23세에서 56세까지 복무하는 것이라는 설(藤田勝久 前漢

の繇役勞動とその運營形態 中國史硏究 8 1984)한편 李成珪는 材官 騎士는 卒에서 징발된 전문 병사였고 1년 복역 후에도

예비역으로 분류 비상시 동원되었지만 (軍)吏나 士에 속하지 않는 자들로서

力役 복역의 한 형태인데 董仲舒가 말한 lsquo一歲力役rsquo은 바로 郡卒로 1년 복무하

는 材官 騎士의 役을 말한 것이라 한다(이성규 前漢 更卒의 徵集과 服役 方

式 -松栢木牘 47호의 분석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09 200912

pp33-34)

23) 來京師諸官府爲戍卒 若今衛士上番分諸司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9년 2만인 武帝 즉위 후 1만인으로 감하고 얼마 후 5천인을 늘려 武帝

후기에는 1만5천이었을 것으로 보인다24) 또 1개 군에서 番上하는 수

가 數千에서 2~3천인이었던 사례가 있다25) 전한 말 成帝 시기의 사

정을 말해주는 尹灣漢簡의 lt東海郡下轄長吏不在署 未到官者名籍gt

에 군현 밖으로 外勤出張 중에 있는 長吏의 현황표에 費長孫敞 十月

五日送衛士 가 있는데26) 費邑의 長 孫敞이 衛士를 送하는 업무로 출

장하여 아직 귀환하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동해군 下轄의 縣(18)邑

(2)侯國(18) 38곳(lt集簿gt) 가운데 오직 費邑에서만 衛士가 上番되고

있다 이에 의하면 衛士의 상번은 각 군에서 縣級 단위로 교대 상번하

는 것으로 보인다 濱口重國은 후한에서 正卒의 군현상비군이 폐지되

었지만 전한에서와 마찬가지로 매년 연말에 1년의 복무가 끝나고 귀향

하는 衛士들에게 황제가 향연을 베푸는 饗遣故衛士儀가 행해지고 있는

사례를 들어 衛士의 上番은 후한에서도 행해지고 있음을 지적한 바가

있다27) 아울러 그는 군현 상비군 폐지 후 중앙의 衛士 부대가 2500

내지 2600명인데 이는 중앙 인근 지역에 한정하여 징발된 자들로 보

아야 한다고 하였다28) 후한 周禮注에서 鄭玄(127-200)의 衛士 인용

이 전한시기의 사정에 의거한 것인지 아니면 그의 활동시기인 후한 후

기의 사정에 의거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후한 중 후기에도 衛士의

上番制가 부분적으로나마 유지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4) 濱口重國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隋唐史の硏究』上卷 東京

1966 1980) p286 注2)

25) 「上臨饗罷衛卒 衛卒數千middotmiddotmiddot」 (漢書 권77 蓋寬饒傳) 「河南卒戍中都官者二三

千人middotmiddotmiddot」 (漢書 권74 魏相傳)

26) 張顯成 周羣麗 尹灣漢墓簡牘校理(上篇) (天津古籍出版社 2011 3) p32

27) 濱口重國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隋唐史の硏究 (上)) p283

28) 濱口重國 위의 글 pp284-285 그 주된 근거는 속한서 백관지3 尙書條에

蔡質漢儀曰 ldquo右丞與僕射對掌授廩假錢穀 與左丞無所不統 凡中宮漏夜盡 鼓鳴

則起 鍾鳴則息 衛士甲乙徼相傳 甲夜畢 傳乙夜 相傳盡五更 衛士傳言五更 未

明三刻後 雞鳴 衛士踵丞郎趨嚴上臺 不畜宮中雞 汝南出雞鳴 衛士候朱爵門外

專傳雞鳴於宮中rdquo 應劭曰 ldquo楚歌 今雞鳴歌也rdquo 晉太康地道記曰 ldquo後漢固

始鮦陽公安細陽四縣衛士 習此曲於闕下歌之 今雞鳴是也rdquo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0中都官의 몇 몇 部署에 給事하는 衛士의 員數 규정이 있는데 속한

서 백관2 注引 漢官의 光祿勳에 81인 太宰令에 15인 高廟令에 15

인 世祖廟令에 20인 衛尉에 60인 南宮衛士令에 537인 北宮衛士令에

471인 右都候에 416인 左都候에 383인 南宮南屯司馬에 102인 (北)宮

門蒼龍司馬에 40인 玄武司馬에 38인 北屯司馬에 38인 北宮朱爵司馬

에 124인 東明司馬에 180인 朔平司馬에 117인의 衛士가 소속되어 있

다 이는 후한의 사정을 기록한 것인데 그 총합이 2637인이다 전한에

비해 그 員數가 급감한 것은 광무제의 부역 경감정책과에 의한 것이라

하겠고29) 소수지만 그 員數가 규정되어 있다는 것은 후한에서 代役制

내지 雇傭制로 대체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전과 같은 上番制가

시행되었음을 말해준다 후한에서 正卒 및 군현의 상비군제가 온전히

사라진 것이 아닌 것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후한의 2637명의

員數는 전한에 비해 대략 15 정도 되는데 전한의 사정을 기준으로 한

다 하더라도 군현의 正卒은 평생 1회만 당번이 되어 上番하더라도 중

도관의 衛士 給事가 충분히 운영될 수 있다 위의 lt윤만한간gt에서 전

체 38현읍후국 가운데 그 해에 費邑의 正卒 만이 상번하고 있고 당시

郡別로 상번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동해군이 매년 상번의 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각 正卒은 38년에 1회만 상번하면 된다 물론 군별 현

읍후국의 수가 다르기 때문에 그 回次의 수도 다르고 현읍후국별 正

卒의 수에 따라 1개 이상의 현읍후국이 함께 동원된 경우도 충분히 있

을 수 있다 그러나 각 군의 현읍후국 수가 보통 20개는 넘는다 게다

가 費邑의 正卒도 몇 개 조로 나뉘어 순차로 상번하는 것이라던가 각

郡도 매년 상번이 아니라 몇 년 만에 순번이 돌아오는 체제라면 각 正

卒의 중도관 衛士 복무는 아무리 많아도 일생에 1회를 넘기 어렵다

앞에 든 漢舊儀의 民年二十三爲正 一歲以爲衛士 는 곧 그러한 사

정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일생 1회의 복무형태는 胥徒의

29) 濱口重國은 광무제의 경감책과 아울러 虎賁 羽林 羽林左右騎 五校尉의 軍이

警備에 추가되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위의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

隋唐史の硏究(上)) p283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1평생 내지 세습되는 면과(후술) 다르지만 일반의 役 대상자에서 선발

되어 중도관에 給事한다는 면에서는 공통이다 그런데 전한에서 lsquo父死

子代rsquo였던 중앙군은 羽林孤兒 뿐이었지만 후한에서 虎賁 羽林 羽林左

右騎 五營士의 중앙군에까지 확대되었다고 한 濱口重國의 지적이 있

다 그에 의하면 후한에서 중앙군단의 세습화와 함께 바로 지방에 特

設된 군단의 세습화도 이루어지면서 魏晋시기 兵民分離의 前段을 이루

게 되었다고 한다30)후한 후기 특히 羌의 侵寇 이후 郡에 都尉를 설치

하고 全民을 징병대상으로 삼아 상비의 郡兵을 다시 설치하고 있으

며31) 여러 출신 성원을 규합한 병단이 私屬이 되기도 하고 국가의 군

단이 되기도 하며 部曲 내지 그와 같은 류의 세습 병단화 하는 과정

에 대해서는 필자도 일견을 피력한 바 있다32)따라서 징병제에 의한

正卒의 상비군 운영이 폐지된 이후 15 수준으로 급감한 정졸의 衛士

가 上番하고 있었지만 이 군단 또한 후한 중기 이후 전란시기가 되면

서 世兵化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胥徒의 세습과 후한 후기에

활동하였던 鄭玄 당시 衛士의 세습화는 일치하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鄭玄이 말한 衛士는 한초의 사정이 아니라 그가 활동하였던 후한 후기

의 사정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鄭玄이 漢의 衛士 上番制에 의거하여 주례의 胥徒制를 해석한 것

은 양자의 해명에 큰 도움을 준다 상술한 바에 의하면 몇 가지 면에

서 양자가 일치하는 점이 대체로 인정된 셈이지만 胥徒가 거의 모든

관부에 설치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漢代의 衛士는 광록훈이나 衛尉

제사 守陵등 일부 한정된 관부에 설치되어 있다 또한 주례의 胥徒

가 士 이상의 신분과 마찬가지로 代耕의 봉록으로써 농지를 받고 있는

봉록자라는 면은 지방에서 상경하여 1년의 기간만 한시적으로 복무하

는 衛士의 경우와는 자못 어울리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衛

士는 上番者로 충당되지만 일단 관부별로 員數가 규정된 員吏로서 복

30) 濱口重國 앞의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p285

31) 濱口重國 光武帝の軍備縮小とその影響 (秦漢隋唐史の硏究(上)) p30832) 박건주 한대의 지방 상비군과 部曲의 推移 (동양사학연구 118 20123)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2무하게 되기 때문에 일부는 胥徒처럼 員吏로서 수년 이상을 관부에 居

하는 어느 정도 전문화 한 衛士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鄭玄의 활

동 시기와 큰 차이가 없는 lt長沙走馬樓吳簡(이하 lt吳簡gt으로 약칭)gt

領二年四家衛士田漆十五畝 畝收限米二斛 合爲吳平斛米一百五十斛

(5-1669)에 의하면 4家의 衛士가 限田75畝 佃作에 대한 租로 畝當 限

米2斛을 납부하고 있다 lt오간gt의 限田에 대해 여러 異說이 있지만

(후술) 그 佃作者와 限米 납부자의 계층에 수십 종의 吏員들이 포함되

어 있는 것에 의하면(후술) 衛士도 그러한 吏員으로서 限田이 지급된

것으로 보인다 단지 限田을 佃作케 한 것이 吏員에 대한 경작의 부과

(경작 노동력의 징발)를 뜻하는 것인지 혜택의 수여를 뜻하는 것인지

는 아직 분명치 않지만 于振波의 분석과 같이 畝當 限米2斛의 징수는

대단히 과중한 액수인 까닭에33) 受惠라기 보다는 경작 노동력의 징발

내지 課役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祿田의 의미로 보기

어렵지만 당시 吏職의 賤役化 현상을 고려하면 그러한 시대적 여건 하

에서 實益이 거의 없는 祿田으로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어쨌

든 후한말 이래 小吏 내지 吏戶와 병사층의 세습화 진전을 고려한다면

어떠한 방식이든 그 가족의 생계를 위한 봉록의 지급이 있었을 가능성

이 더욱 커진다

이상에서 검토한 몇 가지 면에서 보면 府史와 胥徒 중에 후자 만

lsquo給徭役rsquo에 의거한 복무라는 점 등에서 다른 계층이지만 庶民在官者

로서 함께 칭해질 수 있는 층이었다고 본다 무엇보다 胥徒가 각각 제

8위와 제9위의 在官者 서열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동시에 府史는 모두 官長으로부터 선발되고 辟除 임용된 자들인데 비

해 胥徒는 일반의 요역의무를 대체하여 官에서 給事中인 계층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胥徒가 lsquo在官者rsquo로 칭해지는 이유는 관부 내에 거

처하면서 노동을 통하여 잡다한 庶事를 직접 처리하고 있으며 국가로

33) 于振波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中國社會科學院硏究生員學報 2004

-1) p122 限米 납부액의 과중성에 의거해서 限米 납부자는 屯田노동자 限米

는 屯田의 租稅라고 본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3부터 代耕의 祿田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관부의 제반 업무는 각 업무

分司 말단에 속한 胥徒의 노역에 의해 완수될 수 있다 이들은 노역

징발 대상자인 徒 중에서 재능 등의 명목으로 선발된 자들이고 그 중

에서도 才智가 있는 자가 胥이다 이들은 선임자 내지 연장자의 지휘

감독 아래 각 관서의 노역 업무와 勞役者 징발 업무 등으로 奉公한다

이것이 胥徒의 在官者로서의 職事이다 胥徒의 職事는 어디까지나 노

동이 전제되는 勞役이며 일반민의 요역의무에 대신하여 관부의 職에

給事하는 까닭에 職役이라 할 수 있고 官長의 선발로 辟除된 府史는

정식의 官員으로서 奉公하는 것이고 給徭役 에 대신하여 복무하는

것이 아닌 까닭에 胥徒의 職役과 구분하여 그 職을 職官이라 할 수 있

다 그 上級인 命官도 물론 職官이다 職官의 기본 요건은 그 官職에

任職인 상태가 그대로 王命을 받들어 奉公 중인 것을 뜻하는 까닭에

이미 王命을 수행중인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체로 일반 서민

의 기본 요역에서 면제된다 단지 면제의 세부 규정에 의하면 役의 종

류와 신분의 차등에 따라 그 면제 대상의 범위가 구분된다 한편 전쟁

에 참전하는 의무는 면제되지 않는다 모든 官吏는 유사시 종군해야

한다 官人이 본래 戰士層인 國人 출신에서 나온 때문이다 일반 서민

은 매년 일정 기간 동안 만 국가의 命을 받아 노역에 징발되어 복역하

는 까닭에 그 생업은 징발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시적인 노역이 아니라

그들이 부여받은 職인 恒常의 耕作奉公에 있다 職官은 그 복무를 통

해 생활이 영위되지만 일반 서민이 징발되어 이행하는 노역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無償이다

官職앞에 인용한 宰夫8職에 대한 賈疏의 끝 부분에 周禮 위 아래

의 글에 胥가 있으면 반드시 徒가 있는 것은 胥가 什長인 까닭이다

鱉人과 臘人의 類는 徒만 있고 胥가 없는 것은 徒만 있으면 충분하여

지휘자(長師)를 둘(빌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食醫의 類에는 胥徒가

모두 없는 것은 그 官만의 行事(업무처리)로도 충분하여 胥徒의 도움

을 빌리지 않는 까닭이다 고34) 하였는데 胥와 徒가 모두 설치되지 않

은 部署는 그 官만의 업무처리만으로 충분한 까닭이라 하였으니 바로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4府史까지의 屬吏를 官으로 한정한 것이다 즉 胥徒는 官에서 복무하고

있지만 官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庶民이고 庶民在官者 이며 그들의

복무는 職官이 아니고 職役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들도 그 職役으

로 생업을 유지하는 까닭에 職官과 동일성을 지닌다 주례에 의하는

한 胥徒가 일시적으로 복무하는 형태는 아닌 듯 하다 무엇보다도 그

들에게 祿田이 지급되고 있기 때문에 매년 혹은 매월 교체되는 요역

형태의 근무는 아닐 것이다 또한 각 분야별로 상당한 전문 지식과 숙

련도가 요구되는 업무 처리상 단기간 교체되는 근무형태를 취하였을

것 같지도 않다

이렇게 볼 때 胥徒가 官에서 일반 관리와 마찬가지로 계속적으로 근

무하면서도 그 근무를 lsquo給徭役rsquo의 代替로 본 주석이 옳다면 아무래도

胥徒는 신분제사회에서 官이 될 수 없는 자 또는 現任의 官과는 엄밀

히 구분되는 신분이었던 까닭에 그 직무 또한 (일반 서민의) 노역의

의미로 인지되고 평가된 것이 아닐까 한다 漢代사회의 신분구조는 漢

家의 주인인 天子가 그의 家人인 일반 民庶를 직접 장악하는 구조가

있고 동시에 漢家로부터 독립된 개별의 士族이 각각 lsquo家rsquo의 주인으로

서 천자와 主客의 관계가 아직 유지되는 체제가 병존하는 二元의 구조

로 되어 있다고 본 濱口重國의 견해가 있다35)이러한 입장을 발전시켜

漢帝國은 황제가 인민을 인두적으로 지배하는 lsquo齊民制rsquo와 천자가 lsquo家rsquo를

非人頭的으로 지배하는 家父長制的 관계로서의 lsquo家産制rsquo라는 이중구조

로 되어 있다고 본 好並隆司의 견해도 있다36) 그리고 이러한 이중성

의 사회구조를 公과 私 君臣관계의 면에서 진전시킨 尾形 勇은 그 臣

이 되는 층을 仕宦者와 從役者로 나누고 있다37) 위의 설들은 모두 한

34) 周禮 上下文有胥必有徒胥爲什長故也 鳖人腊人之類空有徒無胥

者得徒则足不假長師故也 食醫之類胥徒并無者以其專官行事不假胥徒

35) 濱口重國 唐王朝の賤人制度 主篇 第六章 第二節 (東洋史硏究會 1966)

36) 好並隆司 前漢帝國の二重構造と時代規定 (歷史學硏究 375 秦漢帝國史

硏究 東京 1978에 재수록)

37) 尾形 勇 漢代における 家人 と君臣關係 (史學雜誌 83-4 1974) pp3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5대의 사정을 말한 것이지만 이러한 이중구조의 신분제 내지 사회구조

는 주례의 관부 구성 체제에 의하면 상위에서 下士 내지 府史까지가

仕宦者에 해당하고 胥徒를 후자 즉 從役者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연원은 이미 周代에 있다 士人 내지 仕宦者는

그 직무로써 奉公하고 從役者는 賦稅役의 부담으로써 奉公한다38)胥徒

가 비록 官에 있는 자이지만 二元구조의 신분제 하에서 士人이 되지

못한 가운데 그 직무는 職官이 되지 못하고 職役에 머무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Ⅲ 職役 담당층의 복무 형태와 봉록 지급의

문제

周代에 lsquo給徭役rsquo의 차원에서 관부에 給事하는 胥徒가 있었다면 후대

의 요역 가운데도 그러한 항목이나 사례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다 또한 胥徒의 직무는 續漢書 輿服志上에 보이는 伍伯辟車

鈴下侍閣門蘭部署街里走卒 등 관부 말단에서 경호導從심

부름侍衛車馬관리 巡邏 등의 賤職에 종사하는 이른바 徒卒의 職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그런데 이들의 役이 民의 일반 요역 의무에 따

라 징발되어 일시적으로 복역하는 것인지 아니면 상술한 胥徒와 같이

庶民在官者 로서 관부의 최말단에서 상시로 근무하며 관부에 의지하

여 생업을 유지하는 下吏로서의 복무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후한서권58 虞詡傳에 永平(후한 明帝期) 章和(章帝期) 중에 州郡이 走卒錢으

로 貧人을 給貸(雇賃金을 지급)하였다 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集解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35

38) 尾形 勇 위의 글 pp28-29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6走卒伍伯之類란 續漢志에 이른다

(車前에) 伍伯은 公은 8인中二千石은 6인千石과 六百石은 모두 4인百石

이하에서 二百石은 모두 2인을 둔다 黃綬(4백석에서 2백석의 관리)의 武官에

는 伍伯을 따르게 하고 文官에는 辟車鈴下侍閤門闌部署街(里)走卒

을 따르게 하는데 모두 程品의 多少가 있으며 맡은 바 직무에 따라 領率하게

한다 (驛馬는 30里에 하나를 설치한다) (卒은) 모두 적색 두건과 진홍색 소창

옷을 착용한다

즉 지금 鞭杖을 잡고 따르는 자들이다 이는 錢이 있는 자로 하여금 그 (役

에) 대한 資錢을 내게 하여 몸으로 직접 노역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39)

〔 ( ) 내의 글은 결락된 부분을 輿服志 원문에서 보완함〕

인용된 속한지輿服志의 기사는 公卿 以下 縣의 三百石 官長에 이르

기까지 이들을 導從하는 下吏들의 配屬 員數를 규정한 것이다 열거된

役職들은 모두 300석 이상 관원을 導從하는 役員들인데 후한 明帝 章

帝期에 일부 지역에서 이 役職의 명목으로 走卒錢을 징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記事는 順帝 연간에 尙書僕射 虞詡가 上言한 것인데 당시

長吏 2천석관들이 謫罰者에게 貧人 구호를 위한 lsquo義錢rsquo의 명목으로 贖

錢을 강요하고 守令은 이를 빌미로 聚斂함에 順帝 원년 이래 백만전

이상을 受取한 長吏가 끊이지 않고 있는 사정을 진언한 가운데 그 이

전 永平 章和 연간에 있었던 사실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즉 州郡에

서 走卒錢을 징수하여 그 역을 면제시켜주고 대신 빈궁한 자를 그

役에 고용하여 그 錢을 雇賃으로 지급해주는 일이 있었다 당시 司空

이 이 事案을 탄핵하니 해당 州郡縣이 모두 坐되어 免黜되었었다 그

때의 전례와 마찬가지로 당시 임시로 사용하였던 제도(走卒錢 징수와

雇賃 지불)를 蠲制할 것을( 蠲制權制 ) 주청하였고 이에 조서를 내려

州郡을 切責함으로써 그러한 贖錢 강요가 이로부터 그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40) 따라서 走卒錢 징수와 導從役의 雇傭 방식 운영은 후한

39) ldquo卽今行鞭杖者也 此言錢者令其出資錢 不役其身也 走卒伍伯之類也 續漢

志曰 (車前)伍伯 公八人中二千石六人千石六百石皆四人自百石以下至二

百石皆二人 黃綬 武官 伍伯 文官 辟車鈴下侍閤門闌部署街

(里)走卒 皆有程品多少 隨所典領率 (驛馬三十里一置 卒)皆赤幘絳褠 卽

今行鞭杖者也 此言錢者令其出資錢 不役其身也

40) 후한서 권58 虞詡傳에 是時長吏二千石聽百姓謫罰者輸贖 號為lsquo義錢rsquo 託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7明帝 章帝期에 한정되어 시행된 것으로 모두 不法이었고 虞詡의 順帝

시기에는 시행되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渡邊信一郞에

의하면 이들은 秦漢에서 관부의 최하층으로서 관부에서 필요로 하는

導從役 등 일상적인 노역에 복무하며 民으로부터 강제 징발되어 복무

하였는데 후한 초에 이미 走卒錢이 징수되고 특정 임무는 면역전을

재원으로 한 고용노동으로 전환되었다고 한다41) 그러나 章帝 이후 50

여년이 지난 順帝期에 이르기까지 고용 형태의 운영이 반복되지 않고

있는 것에 의하면 고용 노동으로의 진전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

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어쨌든 導從役의 고용 방식 운영이 不法

이었다 함은 그것이 본래 징발 형식으로 운영되는 것이었음을 말해준

다 錢이 있는 자로부터 走卒錢을 받고 이 재원으로 빈한한 자를 고용

하여 雇賃을 지급하는 不法을 행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어지는 지적에

서 順帝 때 지방관들의 贖錢 강요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관리들의 私利

도모에 의한 것이다 또한 그 의무자에 富者가 있어 그 實役을 피하고

자 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導從役과 같은 下吏의 봉록은 매

우 적기 때문에 여타의 수익이 있다면 그 봉록에 꼭 의지할 필요는 없

었을 것이다 이들이 비록 관부의 員吏이고 그 吏職이 생업이 되는 것

이지만 최말단의 賤役 내지 厮役으로서 천대받는 면이 많았을 것이다

때문에 이 職役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도 많았을 것이다

예기王制에 무릇 전문기능으로 事上(奉公)하는 자가 祝史

射御醫卜 및 百工이다 무릇 전문기능으로 事上하는 자는 다른

일을 해서는 안 되며(不貳事) 근무하는 관서를 옮겨서도 안 된다(不移

官) 出鄕하면 士와 抗禮하지 못하며 家에서 仕하는 자도 出鄕하면 士

와 抗禮하지 못한다 고42) 하였다 즉 士의 신분이 아닌 일반서민 출신

為貧人儲 而守令因以聚斂 詡上疏曰 ldquo元年以來 貧百姓章言長吏受取百萬以上

者 匈匈不絕 謫罰吏人至數千萬 而三公刺史少所舉奏 尋永平章和中 州郡

以走卒錢給貸貧人 司空劾案 州及郡縣皆坐免黜 今宜遵前典 蠲除權制 於是詔

書下詡章 切責州郡 謫罰輸贖自此而止rdquo

41) 渡邊信一郞 中國古代の財政と國家 (汲古書院 2010 第三章) p128

42) 禮記王制 (十三經注疏 中文出版社) p2905에 凡執技以事上者 祝史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8이 여러 기능직의 吏職에 복무하면서 함께 관부에 있지만 본 소속의

직장에서 다른 직장으로 옮길 수도 없고 신분상 士와 대등한 위치에

처하지 못하며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또한

府史 이상의 職官과 구분되는 胥徒의 특성과 상통한다

속한서 백관지2에 射聲校尉一人 比二千石 의 本注에 服虔曰

工射이다 어두운데서 소리를 듣고 활을 쏘아 명중시키는 까닭에 이름

하였다(工射也 冥寞中聞聲則射中之 故以為名 고 하였는데 여기서

工射 는 射도 工 의 한 분야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은 그 기능으로

奉公하는 것이 그 職分이고 생업이기도 하며 다른 직종이나 직업을

갖을 수 없고 옮길 수도 없는 자들이다( 不貳事 不移官 ) 이들은 그

職能으로 생업을 유지하지만43) lsquo父死子代rsquo 의 世業으로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고 賤職인 까닭에 여기에서 벗어나 신분상승을 바라는 경향이

있게 된다 이를테면 三國魏의 黃朗은 그 부친이 縣卒로서 鈴下 伍伯

의 職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抗志 遊學하여 현령을

거쳐 군태수에 이르렀는데 부친의 일을 생각하여 屬下의 鈴下 伍伯을

부를 때 鈴下 伍伯이라 부르지 않고 항상 姓字로 불렀다 비록 분노

하였을 때도 鈴下 伍伯으로 부르지 않았다44)

그런데 導從役 복무자는 징발되어 관부 내에서 복역하는 인원 중에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전체 복역 대상자 가운데 극히 소수에 불과하

다 특히 黃綬의 武官을 導從하는 伍伯 등의 직무가 護衛와 侍衛 警備

등이 위주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무술과 용력을 갖춘 이들로 선발된

그룹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黃綬 이상의 문무관에 소속되어 그 員數

射御醫卜 及百工 凡執技以事上者 不貳事 不移官 出鄕不與士齒 仕於

家者 出鄕不與士齒

43) 禮記 王制에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百工 各以其器食之 (注에 器 能也)

44) 三國志 권23 裴潛傳 所引 魏略에 黃朗字文達 沛郡人也 爲人弘通有性

實 父爲本縣卒 朗感其如此 抗志遊學 由是爲方國及其郡士大夫所禮異 特與東

平右姓王惠陽爲碩交 惠陽親拜朗母於床下 朗始仕黃初中 爲長吏 遷長安令 會

喪母不赴 復爲魏令 遷襄城典農中郎將涿郡太守 以明帝時疾病卒 始朗爲君長

自以父故 常忌不呼鈴下伍伯 而呼其姓字 至於忿怒 亦終不言 朗旣仕至二千石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9가 정해진 것에 의하면 庶民在官者 로서의 胥徒에 상당한다 봉록이

지급되는 일자리이며 민의 공동의무인 일반요역에 대신하여 복무하는

것인 만큼 면역전의 授受 행위는 不法이다

상술한 輿服志에 각 300석 이상의 官員 당 이들의 배당 員數가 규

정되어 있는 것에 의하면 이들도 분명히 관부의 한 구성원들이다 속한서 백관지 注引의 漢官에는 官長 내지 命官級 屬下의 員吏 員數

및 秩祿을 기재하고 있다 이를테면 속한서 백관2에 衛尉 卿一人

中二千石 本注曰 掌宮門衛士 宮中徼循事 丞一人 比千石 이라 하였

고 注引에 漢官曰「員吏四十一人 其九人四科 二人二百石 文學三人

百石 十二人斗食 二人佐 十二人學事 一人官醫 衛士六十人」이라 하

였다 이 가운데 百石까지는 봉록 지급이 명시되어 있지만 그 이하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봉록이 전혀 지급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斗食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斗升으로 계산되는

日數 계산에 의한 연봉액이 정해져 있다 百官受奉例의 注 所引 漢書音義에 斗食祿 日以斗爲計 라 하였고 한서 百官表上에 漢官名

秩簿에 이르길 斗食은 月俸 11斛 佐史는 월봉 8斛이다 一說에 斗食

이란 연봉이 百石에 이르지 못하여 日當으로 계산해서 1斗2升을 食하

는 까닭에 斗食이라 한다 고 하였다 속한서 백관5의 百官受奉例에

서는 百石이 月 16斛이고 斗食 이하는 위와 같다 또 墨子 雜守篇에

斗食은 1년에 36石이다 參食이면 1년에 24石이고 四食이면 1년에 18

石 五食이면 1년에 14石4斗 六食이면 1년에 12石이다 斗食은 5升을

食하고 參食은 3升小半을 五食은 2升 六食은 1升大半을 食한다 하루

에 2회 食한다 고 한데서 알 수 있다 斗食 은 1食에 5升 하루에 2

食이니 매일 1斗를 받아 1년 360일에 총 36石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

參食 은 1食에 3과 13升 즉 13斗를 받아 1일에 23斗가 되고 1년에

24石을 받는다 그 이하의 四食에서 六食까지는 斗食 이하에 열거된

下吏의 지급액 규정일 것이다

閻步克에 의하면45) 周代에서는 士 이상에게 祿田을 지급하여 그

수익을 食하게 하는 것으로 연봉을 지급하는 형태였는데 하급관리나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0工醫師 등 기술직 및 兵員에게는 月 단위로 지급하는 이른바 稍食

형태로 운영하였으며 나중에 증액 고정화 되고 아울러 錢으로 지불하

게 됨으로써 月俸의 秩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稍食 이란 주례天官

宮正에 宮正이란 왕궁의 戒令糾禁을 맡는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그 출입을 검찰

하고 그 稍食을 균등히 하고 그 淫怠하고 奇邪한 民을 제거하고 그

什伍를 모아 道義를 가르친다 月이 끝나면 그 稍食을 會計하고 1년이

끝나면 그 (吏職의) 行事를 검열한다 라46) 하였는데 이 稍食에 대해

鄭司農은 禄廪 疏는 宫中官府 등의 月禄 이라 하였다 즉 稍食은

月俸인 셈인데 이를 하급관리의 月俸이라 한 것은 國語晋語4에 公

은 貢을 食하고 대부는 읍을 食하며 士는 田(公田)을 食한다 庶人은

力으로 食하고 工商은 官(官으로부터 받은 田)을 食하며 皁隸(吏에

속한 徒隸)는 職을 食하고(각 담당 職의 大小에 따라 食祿) 官宰(大夫

의 家臣)는 加(大夫의 家臣)를 食한다 에서 公 大夫 士까지는 國 邑

田을 봉록으로 받는 까닭에 연봉을 받는 것이 되고 庶人 이하는 관부

에 給事한 力(勞役) 등을 계산하여 지급 받는 까닭에 월봉이라는 것이

다 또 주례 夏官 校人의 校人은 王馬之政을 관장한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馭夫

의 祿과 궁중의 稍食을 균등히 한다 라 하였는데 그 注에 師圉는 府

史 以下다 고 하였다 즉 府史 이하 下吏의 봉록 관련 업무이다 또 주례 天官 醫師에 연말이 되면 그 醫療한 실적을 검사하여 그 食을

정한다 十점 만점이면 上 十에 一을 失하면 次等 十에 二를 失하였

으면 그 次等 十에 四를 失하였으면 下로 한다 하였고 또 방비를

굳건히 하기 위해 성곽 溝池 등의 役事와 守備를 관장하는 掌固는 이

에 복무한 士庶子와 衆庶에 대해 필요한 도구와 財用을 공급해주고 그

稍食을 균등히 한다고 하였다(同 夏官 掌固) 이러한 자료에 의하면 府

史 이하의 下吏에 대해 祿俸 지급의 額이 기술되어 있지 않는 것은 食

邑田이나 百石까지는 年俸의 일정액이 규정되어 있고 이 액수가 월봉

45) 閻步克 從稍食到月俸mdash戰國秦漢祿秩等級制新探 (學術界 20002)46) 宮正 掌王宮之戒令糾禁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幾其出入 均其稍食 去其淫怠與其奇邪之民

會其什伍而敎之道義 月終 則會其稍食 歲終 則會其行事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1으로 나뉘어 지급되는 것과는 달리 그 이하의 吏는 月別 給事한 日數

나 실적을 계산하여 지급하는 月俸 형태였고 그 총합이 百石 이하였

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앞에 든 百官名秩表나 묵자의 기사는 그

러한 사정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府史 이하인 胥徒나 그 직급에 상당

하는 속한서 백관지의 각 관부별 官長 屬下의 員吏로서 有秩 아래에

나열된 직급들도 그 근무일수나 실적에 따라 봉록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有秩의 官은 百石 이상의 年俸이 지급되는 下限의 관리

를 가리키며 佐史 이하의 월봉 수입자에 대비하여 쓰이는 용어이다

근래 楊振紅 廣懶薰雄 宮宅 潔 등은 佐史 이하의 下吏에는 1개

월을 단위로 윤번 근무하는 자들이 있어 이들은 그 이름 앞에 更 이

붙고 이에 대비하여 常勤하는 자들은 冗 이 붙어 구분되었다 하고

그 내역과 성격을 고찰하였다47)사실 후대의 冗 내지 冗官 이 보통

散官 의 뜻이었던 것에 비해 선진에서 진한 시기의 여러 자료에 보이

는 冗 은 위의 연구들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更 에 대한 相對로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lt운몽진간gt 秦律十八種 工人程에 冗

隸妾 2인은 工 1인에 當하고 更隸妾 4인은 工 1인에 당한다 小隸臣妾

으로서 可使者 5인은 工 1인에 당한다(冗隸妾二人當工一人 更隸妾四

人當工一人 小隸臣妾可使者五人當工一人) 에서48) 冗隸妾은 更隸妾에

비해 2배의 우대를 받고 있으며 lt이년율령gt史律에 大祝이 祝을 시

험해보아 祝에 뛰어나고 祠事에 밝으면 冗祝으로 삼아 이들을 冗한다

(大祝試祝 善祝 明祠事者 以爲冗祝 冗之) 고 하였는데 이 冗 은 같

은 史律의 祝十四章으로 學童들을 시험해서 능히 7천언 이상을 誦할

수 있어야 祝으로 삼고 5更으로 한다(以祝十四章 試祝學童 能誦七千

言以上者 〔乃得〕爲祝 五更) 에서의 更 과 相對로 위치하고 있다

47) 楊振紅 秦漢簡中的ldquo冗rdquordquo更rdquo餘供役方式middotmiddotmiddot從lt二年律令 史律gt談起 (簡帛硏究 廣西師範大學出版社 2006) 廣懶薰雄 秦漢律令硏究 (汲古書院

20103) pp297-304 宮宅 潔 漢代官僚組織の最下層 - 官 と 民のはざま-

(東方學報 87 2012) pp11-1248) 睡虎地秦墓竹簡 (北京 文物出版社 1978) p74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2또 lt里耶秦簡gt에도 冗戍士五(伍) (⑧666+ ⑧2006)와 更戍(某) (⑧

143 ⑧149 ⑧694)의 對稱 용어가 있다 한편 주례春官 槀人에 外

內朝의 冗食者의 食을 공급해주는 것을 관장한다(掌共外內朝冗食者之

食) 라 하였고 이에 대한 鄭注는 冗食者란 (관부에 밤까지) 머무르며

문서 작업을 하는 것이 마치 지금의 尙書의 屬吏로서 當直하는 者들과

같다(冗食者 謂留治文書 若今尙書之屬 諸直上者) 賈疏는 ldquo(鄭注에

서)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rdquo라 한 것은 또한 漢法을 인용하여 설명한 것이니 차례로 당직

하는데 관부에 留宿하며 (집에) 돌아가지 않는 까닭에 반드시 음식을

제공해야 한다(亦引漢法說之 謂以次當直 留在朝 宿不還 須以食供之)

고 해석하였다 여기서의 冗 은 夜勤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일

상 정규의 일을 넘어선다는 뜻을 지닌다 冗食 은 야근하는 관리에게

제공되는 음식이기 때문에 정규의 음식 지급에 추가되는 것을 의미한

다 전한 成帝 河平 연간에 수해를 입은 군국을 구휼하면서 그 지역민

을 다른 군국으로 피신시키고 그 곳에서 冗食케 하라 고 하였는데49)

文穎은 冗이란 散이다 廩食을 散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遊離되어) 정착하지 못하는 戶를 役事시켜 일자리를 주는 것이다(冗

散也 散廩食使生活 不占著戶給役使也) 로 해석하였고 如淳은 離散

된 자들에게 給食하고 관부는 그 임금을 지불한 것이다( 散著人間給

食之 官償其直也 )고 해석하였다 즉 수해로 유민이 된 자들에게 給

食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하고 아울러 役事의 일자리를 주어 그 임금

을 지불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석자들이 冗 을 散 의 뜻으

로 해석한 것은 국가의 재정을 풀어서 지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國錢의

lsquo散布rsquo라는 뜻으로 본 것이다 이 또한 정규의 재정 지출을 넘어선 추

가의 지출이므로 실은 위의 사례들과 같은 뜻이 된다 또 한서권24

하 식화지하에 또한 周官의 稅民 제도에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民이 떠돌아다니면서

일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夫布一匹을 납부하게 하며 布를 납부할 수

49) 漢書 卷10 成帝紀 河平4년조에 遣光祿大夫博士嘉等十一人行舉瀕河之郡水

所毀傷困乏不能自存者 財振貸 其爲水所流壓死 不能自葬 令郡國給槥櫝葬埋

已葬者與錢 人二千 避水它郡國 在所冗食之 謹遇以文理 無令失職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3없는 자에게는 縣官에서 冗作케 하고 이들에게 衣食을 제공한다 고50)

하였다 여기서 冗作 이란 정규의 요역 부과 외에 징벌의 뜻으로 역

을 추가하여 부과한다는 의미이다

또 lt운몽진율gt 司空에 冗邊 이 있다

백성에게 모친 및 동생이 있어 隸妾이 되었는데 謫罪가 아니고 冗邊5

歲에 복역하되 근무 기간을 無償으로 하고 1인을 면하여 庶人으로 하고

자 한다면 이를 허용해준다(百姓有母及同牲(生)爲隸妾 非適(謫)罪殹(也)

而欲爲冗邊五歲 無賞(償)興日 以免一人爲庶人 許之) (司空 p91)

이 冗邊五歲 도 규정된 정규 戍邊役의 額 외로 추가된 役이란 뜻의

용어이다 그래서 이 또한 위의 사례들과 마찬가지의 뜻이다 이렇게

冗 에는 更 에 相對한 지칭으로 更 에 복무하는 자들에 비해 전문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갖춘 자들이거나 기타 사유로 정규의 額을 넘

어서는 복무를 하는 것 또는 그 役者 또는 職名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즉 정규 일반의 更 방식의 근무 額(日數)에 비해 담당

분야의 뛰어난 능력이나 징벌 등 기타 사유로 더 많은 근무를 추가로

하게 되는 자들의 職을 冗 이라 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러한 冗 을 쓰는 데는 국가의 재정 지출도 추가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국가재정의 추가 지출의 뜻으로서 散(散布)

이라는 뜻이 되어 후대 冗官==散官의 칭이 생긴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해석된다면 그간 충분히 해석되지 못한 lt운몽진률gt廏苑

律에 연간의 養牛 실적 평가에서 下等을 받은 宂皂에게 2개월의 복무

기간을 추가하는 벌을 내린다는 律文에 보이는 宂皂51) 그리고 同 秦

律雜抄 屯表律에 나오는 lsquo冗募rsquo도52) 위와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50) 又以周官稅民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民浮游無事 出夫布一匹 其不能出布者 冗作縣官 衣食

51) lt雲夢秦律gt p30 廏苑律의 율문 卒歲 以正月大課之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殿者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罰

冗皂者二月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52) lt雲夢秦律gt p145 秦律雜抄의 율문 冗募歸 辭曰日已備 致未來 不如辭

貲日四月居邊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4것이다 廣懶薰雄은 更 을 非常勤 冗 을 常勤의 뜻으로 요약하였는

데53) 그러한 일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는 更 이 본래 규정된

交代근무라면 冗 은 본래의 규정액을 넘어선 근무를 뜻하는 까닭에

그러한 해석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설문宀部에 冗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人在屋下 無田事也 라 하였는데 無田事 로서의 冗의 뜻도 更

이 당번으로 給事하는 기간을 제외하면 田事에 있어야 하는 것과는 달

리 冗은 비당번인 경우에도 관부에서 給事하는데서 칭해진 것이라 하

겠다

예기중용에 忠信인 자에게 봉록을 두텁게 주는 것은 士를 勸함이

고 때로(일시적으로) 使役시키되 賦斂을 가볍게 하는 것은 백성을 勸

하기 때문이며 日用으로 근무시키되 그 근무기간과 성과를 계산하여

급료(廩)를 지급하여 그 근무에 합당하게 보상해주는 것은 百工을 권

하기 위함이다(忠信重祿 所以勸士也 時使薄斂 所以勸百姓也 日省月

試 旣廩稱事 所以勸百工也) 라 하였다 여기서 忠信 이란 禮記禮器에 忠信 禮之本也 라 하였고 여기서는 이를 修學하고 실행할 수

있는 사대부 내지 命官層을 가리키고 있다 百工에 대해 日省月試

한다 함은 근무한 日數와 그 성과를 월 단위로 계산한다는 것이다 注

에서 旣廩稱事 의 旣 를 lsquo餼rsquo로 해석하고 lsquo餼廩rsquo은 稍食 이라 하였

다54) 여기에서 일반 백성에게 때로(일시적으로) 사역시킨다는 時使

가 곧 更 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진한 시기 更徭制의 운영에

서 충분히 입증된다 宮宅 潔은 年俸이 있는 것이 有秩인데 그 最下가

百石이며 연봉이 없고 본래 日食과 月食으로 지급되는 등급을 斗食이

라고 한다 하였다55) 그가 말한 斗食은 백관표에 나열된 斗食과 그 이

하의 여리 吏職을 포함한 것이다 그런데 일반 백성에게 更役이 부과

되고 그들에게 동원된 기간 동안 당연히 매일의 給食은 지원되겠지만

그 일반 요역으로서의 更役에 대한 日當의 보수가 지급된 것은 아닐

53) 廣懶薰雄 앞의 글 p304

54) 注에 日省月試 考校其成功也 lsquo旣rsquo讀爲餼 餼廩 稍食也

55) 宮宅 潔 앞의 글 p39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5것이다 그 일반 요역은 일반 백성의 기본 의무사항인 까닭이다 반면

百工의 근무일수와 성과액에 대해 稍食 (日俸 내지 月俸)이 지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매 끼니의 급식이 아니라 工役에 대한 보수 내

지 給料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근무일수라든가 성과액을 계산

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기서의 百工은 관부의

員吏에 속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관부에 속하여 매

끼니의 식사 뿐 아니라 工役한 일수와 성과량에 따라 봉록이 지급된다

는 것이다 그래서 봉록 지급은 錢이나 곡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반

면 전기한 국어晋語4 文公修內政納襄王 章에 公食貢 大夫食邑 士

食田 庶人食力 工商食官 皁隸食職 官宰食加 에서 工商食官 의 工

商은 모두 관부의 員吏에 속한 자들인데 그 注에 옛날에는 田을 주는

것으로 祿俸을 제정하였다 관부에서 주는 廩이란 곧 관부에서 田을

받는 것이니 후세에 錢粟을 주는 것으로 祿俸을 제정한 것과 같지 않

다(古者以田制祿 官廩之者 卽受田於官 非如後世之以錢粟制祿也) 고56)

하였다 또 한서권24식화지상에 士工商이 田을 받는 것은 5口가 받

는 것이 되어야 농부1인이 받는 것에 當한다(士工商家受田 五口乃當

農夫一人) 고 하였다 즉 百工과 商賈는 그 직무에 따라 俸祿을 받는

데 후대와 같이 錢粟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田으로 받으며 그 액수는

일반 농민의 15이라는 것이다 이는 전술한 주례의 胥徒가 최하품

의 田 1百畝를 俸祿으로 받는 것과 lsquo以田制祿rsquo이라는 면에서 일치한다

그리고 lsquo以田制祿rsquo이 후대에 lsquo以錢粟制祿rsquo으로 변천 된 것은 秦漢의 사

례를 통해 분명하다 어쨌든 관부의 員吏인 百工과 商賈에게 일반 백

성의 更役과는 달리 祿田 또는 월봉 형태의 錢粟 지급이 행해진 것이

라 하겠다 또한 工商이 일반 요역 대신에 전문기능인으로서의 工役과

관부 소요 물품의 調達役의 職分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이 또한 職

役에 해당하는 셈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관부의 員吏이면서 斗食 보다 下位에 위치하여 稍

56) 國語正義(下冊) (董增齡 撰 巴蜀書社 1985) pp815-6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6食 내지 月俸을 받는 여러 導從役 祝醫工商 등의 役은 그 職分

의 役 즉 職役으로 奉公한다 그런데 후한 초에 이 職役의 면역전으로

서 走卒錢을 징수하고 그 재원으로 빈민을 고용한 것이 不法이었으며

수십 년 이어지다가 금지되고 違法한 관료들이 처벌받고 있는 것에

의하면 이 役들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戶가 지정되어 있어 여타의 일반

戶가 대신하여 맡을 수 없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은 導

從役 등의 담당자는 일반서민이되 그 중에서 특별히 선발된 층으로 구

성되어 전문의 분야를 세습하며 의무로 담당하는 하나의 신분층으로

형성되어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그 役은 하나의 身分役이기

도 하였던 셈이다 또한 그 代役錢으로서 走卒錢 징수 및 雇傭 방식이

나오게 된 것은 그 역의 담당층 가운데 錢으로 實役을 피할 수 있는

부유충이 형성되었고 후한 前期에 전통의 身分制가 느슨해진 여건에

서 身分役의 근본 형태가 유지되지 못하고 일탈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속한서백관3에 執金吾의 속관 중에 화려 장려한 복장

과 장식으로 황제의 행차를 호위 수종하는 騎士로서 緹騎二百人이 있

는데57) 本注에 無秩 比吏食奉 이라 하였다 즉 吏가 아니지만 吏의

대우를 받아 봉록을 받는 계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下吏에

들지 못하지만 봉록을 받는 면에서는 동일한 계층이다

한편 앞에 든 國語 晋語4에서 工商食官 에 이어 下記된 皁隸(吏

에 下屬한 徒隸)食職 이 있다 이 皁隸 계층은 지금까지 검토한 庶民

在官者 로서의 胥徒導從役 담당자 및 樂祝醫衛士工商 등

보다 下位 내지 그 下屬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그 담당 신분과 그 役의 성격에 대해 검토한다

Ⅳ 下層 員吏의 役과 徒隸層의 役

57) 당 조목의 注 所引 漢官曰 執金吾緹騎二百人 [持戟]五百二十人 輿服導從

光滿道路 群僚之中 斯最壯矣 世祖歎曰 ldquo仕宦當作執金吾rdquo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7

앞에서 검토한 관부 구성의 최말단에 위치한 주례에서의 胥徒와

춘추진한 시기의 導從役 담당자 및 樂祝醫衛士工商 등의 下

吏層 외에 그 下屬으로 보이는 皁隸가 있다 앞에 든 각 신분에 따른

奉公의 職分을 나열하고 있는 國語晋語4의 記事 皁隸食職 의 注에

皁隸를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라 한 것에 의하면 이 계층은 위에 열거한

여러 下吏에 下屬한 노역자들이라 할 수 있다 胥徒와 導從役 담당자

등은 각각 주례와 漢官 등에 그 員數가 규정된 까닭에 이들은 員

數 규정에 들지 못한 皁隸에 대비해 下層의 員吏로 칭할 수 있다

皁隸가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라 하였으니 곧 관노비 내지 그에 類하는

계층일 것인데 그들이 lsquo職을 食한다rsquo고 한 것은 각 분야의 官署에 分屬

되어 그 職務에 給事함으로써 생업을 삼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皂

隸 牧 圄 僕 등이 후대의 천민이나 隸民이 아니라 일반민이었다

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58)그러한 주장은 이들이 대체로 관부에 給

事하는 계층으로 여러 기사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고 위의 皁隸食

職 은 곧 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관부에 給事

하는 면으로 인해 예속성이 있게 된다는 면이 있다 후술하는 바와 같

이 그들이 일반 서민 출신이면서도 후대에 그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모

두 예속신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통용되는 것은 그러한 관부에의 예속

성이 분명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예속성을 말해주는 것이 또한 職

役의 한 속성이다

한편 國語 晋語4 文公修內政納襄王章에 (晋文公)元年 春에 公(晋

文公)과 부인 嬴氏(秦穆公의 女인 文嬴)가 王城(秦의 地名)에서 돌아올

때 秦伯이 衛士3천인을 納하였는데 실로 기강이 있는 僕들이었다(元年

春 公及夫人嬴氏至自王城 秦伯納衛三千人 實紀綱之僕) 고59) 하였다

秦漢의 衛士 출신과 달리 여기서는 그 출신 신분이 僕인 자들로 구성

58) 黃中業 春秋時期的ldquo皂隸牧圉rdquo屬于平民階層說 (齊魯學刊 阜師院學報) 1984-2 19844) pp69-72

59) 위의 책 pp809-810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8되어 있다 이 당시는 秦 穆公의 지원으로 晋의 文公이 귀국하여 懷公

을 죽이고 즉위한 때인 까닭에 군사 내지 호위부대의 지원이었다 그

衛士 군단의 신분은 皁隸層에 들어가는 僕인데 관부에 給事하는 職分

은 衛士이다 이들의 紀綱이 선 자들이었다고 한 것은 본래 秦에서도

衛士의 職으로 給事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춘추기에 邑數百이나 社

數百의 단위로 국가 사이에 分與되는 일이 자주 있었고 3천인에 이르

는 多數의 전문 집단이 타국에 分與된 것이긴 하지만 일부 전문의 인

력을 分與나 上納 하는 것 또한 당시 종종 일어났던 일이다 어쨌든

그 衛士집단이 모두 僕이었다는 것은 일반민이 아니고 관부에 예속되

는 신분이었음을 말해준다 예속신분으로 궁성을 지키는 衛士로 삼는

것은 주례地官 師氏에서 그 직무 가운데 (師氏는) 그 소속의 四夷

之隸를 거느리고 각기 그 병력으로 왕성의 문밖을 지키는데 복무하며

또한 (행차 때) 앞에서 길 정리를 한다(師其屬帥四夷之隸 各以其兵服

守王之門外 且蹕) 에 이미 보이고 漢武帝 때 제후왕 貴戚의 不服을

다스리기 위해 중앙 내사지역을 감찰하는 司隸校尉와 지방의 刺史에게

중도관의 徒奴 1200인을 보내어 二千石官을 독찰하게 하였는데60) 이

1200인의 徒奴부대는 이후 사예교위 내지 刺史 직속의 상비군단이 되

었고 그 성원은 세습 병사집단의 근간이 되어 牧使 刺史 등 將領下의

公兵이나 私兵으로 활약하였다61) 漢官舊儀 卷上에 漢代 長安에 騎

亭長 79인과 함께 6월 1更의 倉頭盧兒를 給事하게 하였다62)이들 四夷

之隸나 徒奴倉頭盧兒 등은 적군포로이거나 刑徒 계통 출신으로 관부

에 예속된 신분일 것이다 특히 관부에 囚禁된 형도들은 여러 방면의

60) 北堂書鈔設官部 및 漢官儀권2補遺2에 ldquo司隸校尉는 武帝 때 처음 설치되

었다 이후 諸侯王 貴戚이 不服함에 中都 中官의 徒奴千二百人을 (파견해서)

一校尉部刺史에게 속하게 하여 二千石官을 독찰하게 하였다(司隸校尉 武帝初

置 後諸侯王貴戚不服 乃以中都中官徒奴千二百人屬爲一校尉部刺史 督二千石

也)rdquo

61) 이에 대해서는 박건주 한대의 지방상비군과 部曲의 推移 (동양사학연구118 20123) 참조

62) 長安給騎亭長七十人 六月一更倉頭盧兒 (漢官六種 北京 中華書局 1990

9) p3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9노역에 활용되었는데 근래 石岡 浩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刑徒 집단

은 크게 세 부류 내지 등급으로 나누어져 활용되고 대우에 차별이 있

었다고 한다 즉 가장 上位에 있는 司寇는 특정 임무에 복무하는 것이

정해진 형도이며 전택을 소유하여 戶主가 되는 권리(lt二年律令gt

310-316簡) 왕조로부터 사여 받는 권리(同 291-293) 子가 士伍로 복

귀할 수 있는 권리(同 364-365)를 갖는다 다음으로 徒隸 는 특정 관

서에 예속하여 직무를 숙지하였거나 기술에 숙련하여 전문기능자에 동

등한 가치를 지니는 형도 를 지칭하며 그것으로 동일 직장에 계속 근

무하는 까닭에 일반 형도와는 달리 토목공사나 물자운송 등의 노역에

서 제외된다 또한 왕조에 공헌하는 자로서 사여를 받는 대상도 된다

(同 291-293) 즉 그들은 隸臣鬼薪城旦이면서 숙련자 기능자로서

일반 형도보다 우대받는 자들이다 위 양자에 비해 일반 형도는 위의

여러 특혜를 받지 못하며 城旦은 주로 토목사업에 隸臣은 주로 여러

관서의 잡다한 노역에 복역한다63)이는 충분히 수긍되는 견해이다 이

가운데 徒隸는 관부 내 각 分署의 전문 직장에 分屬되어 사역될 것이

기 때문에 전술한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로서의 皁隸가 곧 그들의 주요 부

분이 될 것이다 그 중에 일반 관노비로부터 개인적 재능과 기술로 선

발되어 해당 관서에 給事하는 자들도 포함될 것이다 단지 정규의 전

쟁에 형도를 동원하는 사례가 많은데 그들이 정규의 병사가 된 것은

아니고 군공을 세워 免刑되기 이전에는 그대로 형도인 것과 같이 함께

관부에 給事하고 있다 하더라도 각 신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상의 검토에 의하면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에는 이른바 lsquo吏에 下屬

한 徒隸rsquo로서 食職하는 皁隸집단이 있고 그 구성에는 관노비 뿐 아니

라 적군포로나 관노비 및 형도 출신의 衛士 그리고 刺史 牧使 등의

將領下에 있는 직속 상비군 형도 가운데 司寇 그리고 기능과 숙련으

로 형도 중에서 선발된 職能의 徒隸집단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員

吏이되 下吏인 계층의 복무가 그 신분에 따른 職役인 것과 마찬가지로

63) 石岡 浩 秦漢代の徒隸と司寇 -官署に隸屬する有職刑徒 (史學雜誌 121-120121) p32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0이 皁隸層의 복역도 모두 관부에 생업을 의존하는(食職) 職役이라 할

수 있다

또 좌전에 주로 보이는 輿人이 있는데 同 昭公7년조에 天에 十日

이 있고 人에 十等이 있으니 下가 上에 事하는 所以이다 까닭에 王의

臣은 公 公의 臣은 大夫 대부의 臣은 士 士의 臣은 皁 皁의 臣은

輿 輿의 臣은 隸 隸의 臣은 僚 僚의 臣은 僕 僕의 臣은 臺이다 馬

에 圉가 있고 牛에 牧이 있어 百事를 待한다 라 하였다 古來의 여러

注疏에서부터 이미 lsquo輿人rsquo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지만 이를 분석한 宇

都木 章의 견해에 의하면 縣鄙의 野人이 평시이든 戰時이든 國都의

귀족에 징발되어 葬儀戰士補助 車馬와 관련되는 여러 役務에 종사

하는 때 그들을 lsquo輿人rsquo이라 칭하였다고 한다64) 여러 자료에 의하면 皁

에서 牧에 이르는 서열 순위가 어디에서나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

고 대개 동일 계층의 異稱인 경우가 많다 皁 이하의 서열에 이렇게

다단계의 臣屬 관계가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같은 徒에도 上位 순서로 胥와 徒 및 그 徒의 지휘를 받는 징발된 徒

가 있으며 員吏에 들어가는 導從役 등의 庶民在官者 가 있고 그에

下屬하는 皁隸의 구분이 있는 것에 의하면 최소한 士 아래의 서민 계

층에 3 - 4 단계의 차등 신분이 있을 수 있다 위의 十等 순위에서 士

이하에 위치하여야 할 庶民이 곧 皁輿 등에 해당할 것인데 모두 관

부에 給事하는 면에서 후대 예속신분을 가리키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

다 그리고 일반 서민 가운데서도 皁輿 이하는 모두 전문의 職分으

로 관부에 給事하는 의무가 주어진 계층이므로 일반 농민으로서의 서

민과는 구분되는 서민이었다고 생각한다 즉 일반 농민이 농업을 생업

으로 하며 일반의 요역 의무가 주어진 반면에 皁輿 등은 주로 전문

의 기능을 요하는 관부의 직무에 給事하는 것으로 일반요역을 대신하

며 때문에 일반 서민이면서 관부에 예속된 신분의 일면을 지닌다 그

렇지만 관노비나 형도로서 관부에 예속되어 給事하는 신분과는 명확히

64) 宇都木 章 輿人考 (三上博士頌壽記念 東洋史考古學論集 朋友書店 1979

12) pp108-11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1다르며 주례의 胥徒와 같은 下吏의 員吏 보다 보통 下位이지만 胥

徒와 마찬가지로 주로 전문 기능의 職分에 복역한다는 면에서 같고 그

일부분은 下吏에 충당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곧 胥徒가 일반 서민의

徒로부터 선발된 자들인 것과 같다 위의 十等 서열은 농민을 제외하

고 관부에 給事하는 신분만을 총괄하여 나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

술한 工商食官 皁隸食職 도 모두 관부에 給事하는 工商과 皁隸를 열

거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복무도 당연히 職役이 되는데 그 職能 내

지 職分의 종류별로 숙련도 및 경력 등에 따른 그룹 내에서의 서열이

있게 되고 이를 계층으로 인식해서 lsquo皁臣(臣屬)輿rsquo 등과 같은 記述이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 각 직능별 部署별 전문화된 職役의 활용은 관

부의 운영상 당시의 사정으로는 불가피한 면이 있다 그러한 체제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점차 계층 구분의 엄밀성이 느슨해지고 세분된

차등의 질서가 점차 단순화되면서 그 용어도 혼용되기에 이른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위의 계층 구분은 세분된 서열만이 아니라 각 계층

의 담당 職分을 구분해주는 칭호로 쓰인 면도 있다 그렇다면 輿人은

戰時에 주로 戰車부대를 보조하는 직무 분야를 담당하는 계층이라 할

수 있고 그러한 면에서 여러 下屬 계층 가운데 가장 상위의 계층이었

지 않을까 한다

한편 이상의 皁隸層이 본래 일반서민 출신이었다는 입장에서 보면

관부에 給事하되 향리에 거처하면서 일정 기간 만 순번으로 복역하는

交代制가 있었을 수가 있고 또는 대체로 일부 기능자나 世戶에 한정

되었겠지만 휴가 기간 외에는 상근하는 형태도 있었을 것이다 예속된

신분인 경우 그 거처도 대체로 관부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앞에 든 秦

漢律에 교대 근무하는 更隸妾의 존재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근무

기간에만 관부에서 거처하는 예속 신분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刑徒

중에서도 司寇는 田宅을 소유하고 戶主가 될 수 있었으며 徒隸도 賜

與를 받을 수 있는 까닭에 이들 중에 일부는 관부 밖에 따로 거처를

지니고 출퇴근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단지 衛士나 部曲 집단은

대체로 屯營 내에 거주하였을 것이다 위로는 승상으로부터 아래로는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2하급의 吏에 이르기까지 吏舍에 거처하며 휴가 기간이 되어야 비로소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는 大庭脩의 연구가 있지만65) 漢舊儀 卷下

에 舊制에 尉는 모두 관서에서 거처하였다( 舊制尉皆居官暑 ) 라66)한

것에 의하면 舊制 가 어느 시기를 말하는 것인지 불분명하지만 宿衛

와 경찰 임무의 尉職 외에는 관서에서 거처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음을

말해준다 매년 직급에 따른 수개월의 휴가 기간이 설정되어 있지만

이는 성내에 거주하며 매일 출퇴근 하더라도 고향은 먼 곳에 있는 경

우가 많아 歸鄕 휴가를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外地 출신으로 城內

에 거처가 없는 관리들을 위한 吏舍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吏舍의 존재가 모든 관리의 관부 거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居官府의 여러 給事職 관노비 司寇나 일부 徒隸를 제외한 일

반 형도 여러 當番의 宿衛職 등을 제외한 관리는 官舍 밖의 私家에서

거처한 것으로 본다

庶民在官者 로서의 職役 복무는 常勤과 교대근무의 두 시스템으로

운영되었을 것이다 胥徒는 본래 모두 징발된 徒 가운데서 재능 있는

자로 선발되어 관부에의 給事가 생업이 된 자들로서 祿田을 받는 자들

이며 員數가 책정되어 있는 까닭에 常勤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

나 함께 징발된 여타의 徒는 胥徒와 같은 給徭役의 奉公을 행하지만

순번으로 동원된 기간 만 한시적으로 복무하는 까닭에 동원 기간 동안

의 食料 이외에 노동의 보수를 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그들은 만

민의 기본 의무를 職役으로 이행하는 것일 뿐이다 정부로서는 관부에

給事할 人才와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지만 필요한 부

분을 모두 常勤하는 자로 임용하여 그들의 생업을 봉록 지급 등으로

전면 지원하는 것은 재정에 큰 부담이 되는 것이었다 즉 관부에서 필

요로 하는 특정 업무 기능자들을 일반 요역 면제 대신으로 복역케 하

고 이를 순번제로 운영하면 복무 당번 기간 외에 그들은 다른 생업을

65) 大庭脩 漢代官吏の勤務休暇 (秦漢法制史の硏究 創文社 1982) p584

66) 앞의 漢官六種 p81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3꾸려나갈 수 있기 때문에 국가는 그들에 대한 생업 유지 지원 부담이

훨씬 적어진다 관부 給事層 가운데 命官과 員吏 이상이 常勤制라면

그 이하의 여러 職役層들은 대체로 교대근무제 중심으로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테면 lt奏讞書gt 案例17에서 秦王政元年 雍縣人 樂人 講이 자신

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사건 당일 자신은 踐更에 복무하러 11월 한

달간 함양의 外樂(관서 기구 名)에67) 소집되어 복무 중이었음을 진술

하고 있다 따라서 함양에 거주하지 않은 樂人이 그 관서에서 常勤하

지 아니하고 특정시기 일정 기간 만 교대로 근무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獄事에서 피고인 樂人 講이 踐更으로 1개월 간 복무한

곳이 外樂인 까닭에 일반 요역이 아니라 樂人의 職役을 이행한 것이라

고 본다 전한 哀帝 때 樂人의 員數를 罷하라는 명령에 대해 승상 孔

光과 대사공 何武가 진언하길 각 담당별 樂人의 현재 員數와 罷할 수

없는 수를 열거한 후 총 829인의 員數 가운데 388인은 罷할 수 없다고

하자 이를 재가한 바가 있다68) 이는 전한말의 사정이지만 전국진에서

도 郊祭 등의 각종 국가제사와 宮中 樂이 행해졌기 때문에 위의 수치

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속한서 백관2 大樂令 注引의

漢官과 盧植禮注에 의하면 八佾舞를 추는 樂人의 員數가 380인인

데 여기에 卑者之子는 임용될 수 없고 6백석에서 2천석 및 관내후에

서 五大夫의 嫡子 출신 5척 이상의 신장 12세에서 30세 顔色온화 등

의 조건을 갖춘 자에 한정되었다69) 이에 의하면 樂人 講은 走馬의 傭

이 되어 京師에 왕래하고 있는 빈한한 자로서 도저히 중앙 大樂令 속

67) 관서 기구 이름으로서의 外樂은 lt이년율령gt秩律 449簡 및 西安相家巷出土

秦封泥에 보인다(周曉陸路東之 編著 秦封泥集 三秦出版社 2000 一

二44)68) 漢書 권22 예락지2

69) 漢官曰 ldquo員吏二十五人 其二人百石 二人斗食 七人佐 十人學事 四人守學事

樂人八佾舞三百八十人rdquo 盧植禮注曰 ldquo大(子)[予]令如古大胥 漢大樂律 卑者

之子不得舞宗廟之酎 除吏二千石到六百石 及關內侯到五大夫子 取適子高五尺已

上 年十二到三十 顏色和 身體修治者 以為舞人rdquo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4하의 樂人 員數에 들어갈 수 있는 처지가 못 되는 자이다 그는 향리

에 거주하면서 매년 1개월씩 京師의 外樂에 가서 복무하는 기간 외에

는 傭賃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下吏의 員吏가 아

니면서 樂工의 職能으로 일반 요역 대신에 京師의 제사나 예락 행사에

나아가 給事하는 자이다 그래서 그의 복역도 職役인 셈인데 이러한

모습은 주례의 胥徒와 흡사하다 단지 胥徒가 員吏로서 봉록은 받는

것과는 다르다 양자가 모두 職役이지만 胥徒는 庶民在官者 이고 樂

人 講은 lsquo非吏인 職能人rsquo이다 그렇지만 양자 모두 개인적인 職能으로

관부에 給事하는 면에서는 상통한다 따라서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

부에 給事하는데는 員吏로서 복무하는 경우와 非吏로서 복무하는 경우

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Ⅴ lt走馬樓吳簡gt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복무

형태 및 그 성격

1996년에 호남성 長沙市 도심 우물에서 발굴된 lt吳簡gt은 총 17萬

餘 枚로 아직 그 일부만이 정리 해독되어 출간된 상태이지만 이미 출

간된 분량 가운데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의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자

료들을 많이 지니고 있다 孫吳 嘉禾 연간(232-238)의 여러 戶籍簿

내지 吏民簿 등에 吏와 給吏로 구분된 人名簿가 다수 존재한다 이 자

료들은 그간 명확하지 못하였던 吏役과 吏戶의 존재형태와 관부에 給

事하는 계층 및 그 職役의 실태를 파악하는데 획기적인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근간의 연구에서 여러 異見으로 그 문서가 지니

는 뜻을 파악하는데 상당히 혼란을 초래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전술한

職役의 전통과 여러 계층의 형태를 살펴본 성과를 참고로 하여 나름대

로 새로운 해석을 추구해보고자 한다

lt吳簡gt의 lt吏民人名年紀口食簿gt(竹簡(肆))에서는 각 里別로 里魁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5가 領하는 食口數를 吏와 民으로 구분하여 통계하고 있는데 그 일례를

다음에 든다

(A)

(이하 簡文 인용에서 內에 있는 字를 괄호 하여 표기함〕

集凡五唐里魁周領吏民五十戶 口食二百八十九人 (簡380)

其一百六十二人男 (379)

其一百卄七人女 (378)

其四戶縣吏 (377)

其二戶郡吏 (376)

其戶州吏 (374)

其五戶給新吏 (373)

其一戶縣卒 (372)

其一戶佃帥 (371)

이는 孫吳 嘉禾 연간 里別吏民口食簿인데 五唐里 50戶 가운데 일반 民

戶를 제외하고 州吏에서 佃帥까지의 戶를 따로 특기하고 있는 것에 의

하면 크게 民戶層과 州吏 이하의 吏층으로 양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

다 먼저 縣吏 이하를 이른바 세습 吏職戶인 吏戶로 볼 수 있는가 하

는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여러 異見이 제기되어 있는데 이 문

제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그런데 lt吳簡gt의 여타 戶籍簿나 戶口簡에

의하면 民戶를 제외한 縣吏 이하의 戶도 다시 縣吏 郡吏 州吏 軍吏 등

의 類와 맨 앞에 lsquo給rsquo字가 붙어 있는 계층의 類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즉 縣吏類의 吏 외에 其十二戶給縣吏下品 (壹5467)

其三戶給郡縣卒 (貳2318) 등과 같은 예들인데 그 職事나 給事

하는 관서의 명칭에 따라 多種의 명칭이 보인다 이를테면 給郡吏 給

縣吏 給州吏 給軍吏 給郡園父 給朝丞 給子弟 給驛兵 給鍛佐 給庫

吏 給縣卒 給度卒 給驛卒 給子弟佃客 給限田客 給佃帥 給常佃 給

家種客 給乞兒 給三州倉父 給養官牛 給習射 給私學 給官瓦師 給

亭復人 給亭雜人 給任師 給郡醫 給縣帥 給州私學 給新吏 給佃吏

給郵卒 給鹽兵 給關父 등이다 이렇게 앞에 lsquo給rsquo字가 들어간 계층을

일단 동일 계층으로 보아 lsquo給吏rsquo로 칭하고 縣吏 群吏 州吏 軍吏 등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6lsquo給rsquo이 붙어 있지 않은 계층을 lsquo吏rsquo로 칭하여 양자를 구분하고자 한다

lt오간gt에서 人名에 붙는 신분명은 크게 眞吏 某吏 給某吏 大男(大

女 民)의 4종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들은 그 표기상의 차이만으로도

일단 구분되는 존재라고 보이는데 현재 앞의 3종 신분명의 구분 문제

와 관련하여 몇 가지 다른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먼저 黎虎는 縣吏나

郡吏州吏 등의 吏가 侯家나 司隸校尉 또는 郡內에 소재한 전문 기

관 州郡 관내의 遠縣에 일정 기간 파견되어 給事하고 있는 자들을 칭

하여 給郡吏 등으로 칭하는 것일 뿐 그 신분은 本州 本郡 本縣의 吏

와 동일하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本郡의 郡吏가 곧 給郡吏이기

때문에 다른 계층이나 신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眞吏는 無職事

의 冗散官에 상대하여 쓰이는 용어로 실제 除授된 관원이라고 한다70)

黎虎와는 달리 양자를 다른 계층으로 보는 견해들도 제기되었다 먼저

韓樹峰은 給吏는 비록 吏의 名은 있지만 일반 백성으로서 잠시 吏의

職事에 종사하는 것일 뿐이고 혹 吏로 임명될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그 신분은 여전히 보통 백성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給吏와 구분하여

口算錢의 면제 특혜를 받는 州吏 郡吏 縣吏 등을 총칭하여 眞吏라 한

다고 하였다 즉 眞吏가 정식의 吏인데 비해 給吏는 일반민이며 일정

기간 만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給吏의

관부給事는 실제상 요역의 일종이라 한다 71) 한편 楊振紅은 동일인의

신분이 문서에 따라 다른 신분으로 등록되어 있는 점에 의거하여 이를

테면 給郡吏가 郡吏나 眞吏로 簡稱된 것이라 하고 眞吏나 給吏 모두

吏로 簡稱되며 州郡縣의 掾史職에 있는 자들로서 署長 佐官 등의 lsquo官rsquo

에 상대되는 자들을 지칭한다고 하였다 아울러 吏는 그 작위가 公乘

이면서 賦役 대상이고 漢魏시기에 吏職의 세습화가 이루어지면서 전문

70) 黎虎 說ldquo給吏rdquo -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社會科學戰線 2008-11) pp89

-94 說ldquo眞吏rdquo-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史學月刊 2009-5) p5071) 韓樹峰 走馬樓吳簡中的ldquo眞吏rdquo與ldquo給吏rdquo (吳簡硏究 2 武漢 崇文書局

2006) 韓樹峰王貴永 孫吳時期的ldquo給吏rdquo與ldquo給戶rdquo -以走馬樓吳簡爲中心 (吳簡硏究 3 2011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7적 吏戶인 眞吏가 출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吏가 본래 일반 서민

이었던 까닭에 公乘 이하의 서민과 합칭하여 吏民이라 한 것이며 삼

국시기 官과 吏가 구별된 연원은 漢代의 長吏와 小吏 내지 士와 庶民

의 구분에 있다고 한다72)다소 혼란스러운 견해들이고 용어상의 해석

문제가 겹쳐 있어 난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들 異見의 관건은 吏와 給

吏의 구분 문제 그리고 吏戶에서의 吏가 어떠한 吏를 가리키는가 하

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여러 견해에서 공통으로 들고 있는 lt吳簡gt의 다음 문서를 먼저 살

펴본다

(B)

廣成鄕勸農掾區光言 被書條列州吏父兄子弟伏處 人名 年紀爲簿

輒隱核鄕界 州吏七人 父兄子弟合卄三人 其四人刑 踵 聾 歐病 一人

被病物故 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 十二人細小 一人限田 一人

先出給縣吏 隱核人名 年紀相應 無有遺脫 若後爲他官所覺 光自坐 嘉禾

四年八月卄六日破莂保據(此簡無編戶)73)

이 자료는 광성향 勸農掾 區光이 작성하여 보고한 문서인데 廣成鄕 領

內 州吏7인의 父兄子弟 23인의 현황을 파악하여 嘉禾4년(235년)에 보

고한 내용이다 lt吳簡gt戶籍簿에서 州吏 등의 吏가 있는 戶는 그 州吏

가 戶人(戶主)으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 州吏7인이란 모두 그 戶의

戶人이다 이 현황 내역에 의하면 州吏7인의 父兄子弟 총합은 23인이

고 이 가운데 4인은 受刑 질병 중이며 1인은 物故 4인은 이미 관부

에 보내져 그 本主에 從事하며 관부에서 복무 중이다 12인은 細小 즉

소인이고 1인은 限田을 경작 중이다 이 限田이 lt吳簡gt의 lt吏民田家

莂gt 등에 보이는 lsquo二年常限rsquo의 田으로 보아 侯家의 田이나74) 屯田을75)

72) 楊振紅 吳簡中的吏 吏民與漢魏時期官 吏的分野 -中國古代官僚政治社會構

造硏究之二 (史學月刊2012-1)73) 侯旭東 三國吳簡兩文書初探 (歷史硏究 2001-4) p172에서 轉引

74) 入都鄕嘉禾二年步侯還民限米一斛 (5-1556) 其卄六斛民還黃龍年臨湘侯

限米 (602017)

75) 黃龍元年文入郡屯田民吳平斛米一百六斛二斗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6227) 其三斛五斗郡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8吏民에게 分給하여 佃作케 한 田으로 보는 것이 일반이다 그 경작자

는 그 田地(佃地)를 국가로부터 할당 받아 의무로 경작하기에 佃民과

같다 그 佃民에는 諸吏와 일반 民戶가 다 포함되고 있다76) lt吏民田

家莂gt에서 그 限田이 lsquo二年常限rsquo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그 의미에 대해

佃作기간 내지 佃種權이 2년으로 한정되어 있어 계약 기간이 지나면

배속되는 田地가 바꾸어지는 방식이었다는 견해가 있고77) 반면에 佃

地의 경작 기간이 아니라 地租額을 2년간 固定하는 것을 말한다는 견

해가 있다78) 사실이 어느 쪽이든 吏戶의 식구 가운데 일부는 국가의

농지를 佃作하고 地租를 납부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 액수가 漢代

사유지에 대한 조세보다 높다 같은 문서에는 租米 뿐 아니라 동시에

畝當 布2匹와 錢70-80까지 징수되고 있다 따라서 二年常限田의 分給

과 佃作은 受惠라기 보다는 노동력의 징발이고 耕作의 賦課로 보는 것

이 마땅하다 于振波가 常限田의 분급 액수를 정의하길 lsquo强制性的 生産

定額rsquo이라79) 본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 이어 1인은 先出給縣吏 인데

먼저 給縣吏로 보내졌다는 의미이다 先給吏의 사례는 嵩男弟恭年十

九先給州吏 (參1450) 등 몇 개가 더 보인다 이렇게 해서 총 23인의

食口 현황이 명료하게 보고되고 있다 그 내역에 의하면 州吏의 식구

는 受刑중인 자 질병자나 小人을 제외하고는 모두 관부에 給事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1인의 先出給縣吏 와

이미 관부에 보내져 本主 따라 從事하며 관부에 복무 중이라는 4인은

( 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 ) 내용상 모두 이미 관부에 보내져 현재

掾利焉黃龍理年屯田限米 (2157)

76) 于振波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南都學壇 24 2004年 第1期 湖南大

學 20041) p30 이 글은 앞에 든 中國社會科學院硏究生員學報 2004-1과 같

음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形成與演變 -談長沙

走馬樓簡牘札記之六 (鄭州大學學報 2001-1) 77) 張福亞 也談lt嘉禾吏民田家莂gt中ldquo二年常限rdquo田的函義 (首都師範大學學報

(社會科學版) 142期 2001-5) p8

78) 高敏 lt吏民田家莂gt中所見ldquo餘力田rdquo ldquo常限rdquo田等名稱的函義試釋 (鄭州大學

學報(社會科學版) 33-5 20009)79) 于振波 앞의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p12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9給事 중인 것은 마찬가지인데 어떠한 차이가 있어 다른 항목으로 구분

하여 기재한 것일까 이것은 바로 給縣吏와 縣吏의 차이를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후술) 州吏7인의 食口 23인의 현황 名簿를 작성하여 면밀

히 조사 보고하게 함으로써 그 遺脫을 막고 있는 것에 의하면 州吏 軍

吏 群吏 縣吏 등의 食口는 여타 일반 민과는 다른 賦役체제 아래 놓여

있는 계층이다 또 軍吏의 父兄子弟에 대해서도 그 食口簿를 따로 작

성하여 관리하고 있다

集凡中鄕州軍吏四人父(子)兄弟三人 中(參3012)

集凡南鄕領軍吏父兄弟合十九人 中(參 464)

이러한 사례들은 吏가 있는 戶는 그 食口들까지 포함하여 吏가 있는

戶 즉 吏戶로서 별개로 관리되고 그 성원은 모두 吏戶의 役 내지 賦

役체계에 들어가는 것임을 말해준다

위와 같이 州吏 縣吏 등 吏戶의 戶口簿는 그 食口 가운데 州吏 縣吏

등 그 吏인 자가 맨 앞에 戶人으로서 위치하지만 給吏는 戶人이드라도

앞에 위치하지 못한다

小武陵鄕嘉禾四年吏民人名妻子年紀簿(壹101533)

吉陽里戶人公乘張惕年卄八算一給縣吏(壹1018232)

吉陽里戶人公乘廖裕年卄七算一給郡吏(壹1017525)

高遷里戶人公乘黃毛年卅四算一給軍吏(壹10306)80)

또한 同 戶籍簿에 縣吏 州吏 등은 아래와 같이 맨 앞에 위치하여 일반

민이 아님을 명기하고 있지만

縣吏鄧橎年卄七 璠()妻大女金年卄一 算 (貳 1729)

州吏蔡區年卅二 區妻大女年卄七 算 (貳 1822)

軍吏朱謙年卅五 謙妻大女壹年卄六 算一 (貳 1723)

80) 인용된 4簡文은 凌文超가 재정리 조립하여 올린 글(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

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型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의

lt表二gt(pp25-37)에서 인용함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0給吏인 경우는 일반민을 가리키는 lsquo民男子rsquo로 기재되어 있다

民男子蔡若年卅七給驛兵 若妻大女四年卅算一(貳 1781)

民男子蔡喬年六十二給驛兵 喬妻大女典年卅八 (算) (貳1903)

따라서 위와 같은 吏民簿에서 民戶를 제외한 州吏나 郡吏 縣吏 軍

吏가 吏戶라면 給州吏 給郡吏 등 여러 職事의 관서에 給事하는 수십

종의 다양한 給某吏 신분은 전술한 庶民在官者 나 lsquo非吏이면서 관부

에 있는 자rsquo와 매우 유사하거나 일치한다

여기에서 吏戶나 吏役의 존재 여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는데 黎虎

는 삼국시기 吏戶의 존재를 인정치 않으나81) 高敏과 孟彦弘은 그 존

재를 인정하며 특히 高敏은 吏役制도 漢末三國시기에 확실히 형성되

었다고 한다82) 韓樹峰王貴永은 후한말 孫吳시기에 卑賤化가 이루어

지면서 吏戶의 萌芽가 이루어졌으며 lt吳簡gt에서의 給吏는 吏가 아니

고 民에 속한다고 한다83) 이러한 여러 異見의 배경에는 吏로 칭해지

는 계층에 전술한 바와 같이 다시 두 계층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계층

이 있는데 그 면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

각한다 양자의 구분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자료를 든다 속한서 百官3 大司農條의 注引 漢官에 丞一人 三百石 員吏四十人 其十一人

斗食 十七人佐 七人學事 五人守學事 皆河南屬縣給吏者 라 하였다

대사농승 속하의 斗食 이하 員吏 40인을 모두 하남군 속현에서 조달된

吏로 충원한다는 것이다 즉 후한 수도 낙양 인근인 하남군 속현에서

吏員을 차출한다는 것인데 斗食 佐 學事 등의 員吏는 해당 분야의 職

81) 黎虎 ldquo吏戶rdquo獻疑 (歷史硏究 2005-3) pp53-6882)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形成與演變 mdash談長沙走

馬樓簡牘札記之六 (鄭州大學學報 2001-1) p61孟彦弘 吳簡所見ldquo事rdquo臆說 mdash從ldquo事rdquo到ldquo課rdquo (吳簡硏究 2 2006) pp205-208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爲役之制 (魏晋南北朝隋

唐史資料 24 2008) pp8-2183) 韓樹峰 앞의 走馬樓吳簡中的ldquo眞吏rdquo與ldquo給吏rdquo pp33-38 韓樹峰王貴永 앞

에 든 孫吳時期的ldquo給吏rdquo與ldquo給戶rdquo -以走馬樓吳簡爲中心 p99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1事를 처리할 수 있는 職能者여야 하기 때문에 하남군에서 이러한 職事

로 근무하고 있는 員吏를 파견하거나 일반민 가운데서 새로 선발하여

파견 조달하였을 것이다 상하급 관부끼리 상호 관리를 파견하여 일정

기간 복무하게 하는 경우에 조달 지원한다는 의미로 動詞語로서 lsquo給rsquo을

쓸 수 있고 이러한 사례는 문헌에 이미 자주 보인다 위에 든 lsquo屬縣給

吏者rsquo도 그 한 실례이다 이러한 경우는 본래 吏의 신분이 여타의 관부

에 일정기간 출장 근무하는 것일 뿐인 까닭에 그 신분은 그대로 吏일

것은 자명한 일이다 즉 縣吏가 郡府에 출장근무 중일 때 그 신분은

그대로 縣吏이고 해당 名簿에 縣吏A가 여타 名簿에서 給郡吏A로 표

기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동일인이 名簿에 따라 신분명이 달리 기

재되어 있는 사례가 약간이나마 보이고 있는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된다(후술) 그런데 給州吏 給郡吏 給縣吏 등 수십종의 給吏에는 이런

경우가 아니고 lsquo州吏 등 諸吏에 배속되어 給事 중인 非吏로서 관부에

복무 중인 民rsquo이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給某吏로 표기된 자들은 lsquo給rsquo

이 붙지 아니한 州吏 郡吏 縣吏와는 달리 lsquo民男子rsquo로 표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給州吏는 非吏로서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그 관서에서 하나

의 職役의 형태로 복무 중인 民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들은 실은 民으로서 관부 업무상 필요한 노역에 동원되는 셈이지만

일부는 여러 관서의 하급 실무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전문의 職能을

갖춘 자들도 있다 縣吏 州吏의 職事 뿐 아니라 앞에 든 수십 종의 전

문 분야 부서별 給吏의 명칭은 그에 상응하는 사례들이다 정부는 이

들이 본래 일반 서민이지만 관부 운영의 필요상 특별 관리를 하지 않

으면 안 된다 그 결과 후한의 여러 사례에서 보듯이 대개 그 職을 세

습토록 하고 이들을 일반 民과 구분하여 칭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lt吳簡gt에 忠子男仲年十五 任給吏 (參 1805)라 한 것은 給吏가 民

에서 차출되어 임용되는 독립 계층임을 말해준다 또 草言府大男吳杭

不是卒子弟不應給卒事 八月卅日兼兵曹掾潘(因)()白(柒總49968)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卒의 子弟가 아니면 給卒事에 복무하게 할 수

없었다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2그들이 본래 吏의 신분이 아닌 까닭에 바로 吏로 칭하지 못하고 그

吏에 배속되어 給事하는 자 또 그 戶의 뜻으로 給某吏 給戶와 같은

칭호가 나오게 된 것으로 본다 이 칭호는 사실 관리와 民 사이에 있

는 이들 계층의 성격을 상당히 잘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이 給吏 계

층의 부담이 커지고 그 賤役 부담자로서의 성격이 뚜렷해감에 따라 給

吏나 給戶가 吏戶나 吏家로 칭해지고 給吏나 給戶의 役이 吏役으로

칭해진 것인데 그렇게 간략한 형태로 칭하여도 이미 관리의 吏와 충분

히 구분되는 것으로 사회가 인지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의하면 lt吳簡gt에 보이는 眞吏도 사실 眞吏라 할 수 없는 給吏

에 대비하여 쓰이게 된 용어가 아닐까 한수봉왕기영은 眞吏란 給吏

에 대비된 용어라 하고 lt吳簡gt에서 給吏가 口算 납부 의무가 있지만

眞吏는 면제되며 정식의 吏이고 신분성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羅新도

眞吏에게 口算錢이 면제되고 있다고 하였다84) 眞吏에 대한 여타의 견

해도 있지만85) 給吏와 관련하여 참고할 만 한 지적이다 또한 lt吳簡gt

에서 其七戶給郡吏 下品(壹5447) 其十二戶給郡吏 下品 (壹

5677) 其十二戶給縣吏 下品 (壹5467) 其一戶給軍吏 下品 (參

430336) 給度吏 下品之下 (5653) 등에서와 같이 給吏는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여서 평균의 民戶 보다 더 빈천한 계층인 점도 그

들이 관부에 給事하는 吏라기 보다는 非吏인 民으로서 民의 일반 요역

에 대신하여 관서에 給事(給役)하는 자들이되 그 일부는 職能에 따라

세습하여 관련 관서의 吏에 배속되고 給事 복무해야 하는 예속된 신

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lt吳簡gt에는 하나의 戶人을 首로 하고 그에 배속된 듯 한 여

러 신분의 戶數와 신분명을 기록한 簿가 있다 lt走馬樓吳簡竹簡gt에

84) 羅新 ldquo眞吏rdquo新解 (中華文史論叢 2009-1) p129 단지 그는 眞吏란 非華

夏系 출신의 編戶化된 토착 사회를 관리하는 인원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85) 이를테면 黎虎는 眞吏란 非眞吏에 대한 대칭이 아니고 실제로 除授 받은 관

원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說ldquo眞吏rdquo -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史學月刊2009-5) p5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3다음의 예들이 있다

-1 里戶人公乘縫繒年卄五苦腹心病 (5443)

- - - - - - -

其七戶給郡吏下品 (5447)

- - - - - - -

其一戶給州吏下品 (5452)

-2 平樂里戶人公乘鄭張年五十 (5460)

- - - - - - -

其十二戶給縣吏下品 (5467)

-3 東陽里戶人公乘扶侈年十四 (5471)

其二戶給庫吏中品 (5472)

- - - - -

其一戶給縣卒下品 (5474)

-4 宜陽里戶人公乘區歸年卄二眞吏 (8962)

- - - 給州卒 (8965)

- - - -

年六十一給驛兵 (8976)

右尙書吏三(戶) (8517)

孫吳에서 公乘의 작위 소유자는 일반민 중에서도 상당히 많지만 漢

代 民爵의 최고위 爵인 公乘(第8等)의 戶人에게 보통 여러 신분의 수

십호를 배속시키고 있다 그 중에 10戶 내외의 給吏가 배속되어 있다

또한 이들 戶人은 배속된 戶가 납부한 租稅를 거두어들이고 이를 일괄

해서 관부에 납부하고 있다 먼저 각 戶로부터 受領한 내역은 문장 앞

에 lsquo領rsquo으로 표기하고 受領한 액수를 총합하여 관부에 납부한 내역은

앞에 lsquo入rsquo으로 표기하고 있다

里戶人公乘曾(年五十三)妻年卅九 (簡 1631-1652)

- - - - - -

領二年郵卒限米田六頃五十畝收限米二斛合爲吳平斛米一千三百斛

其三百十四斛五斗府州中倉關邸閣李崇吏黃諱潘慮 中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4領二年民田三百七十六頃六十五畝二百卅八步畝收米一斛二斗合四萬

五千一百九十九斛一斗 - - - - - - - - -

常遷里戶人公乘李漠年卅七 妻大女思年卅一

入嘉禾二年郵卒限米七百九十八斛二斗八升

入嘉禾二年佃帥限米九百五十五斛八斗七升

- - - - - - -

이 戶人은 대부분 公乘이고 노비를 소유하고 있으며 配屬된 戶의

徵稅와 총괄 납입의 업무에 복무하고 있는데 이는 후대 富戶에게 差役

복무를 부과한 사정과 비슷한 면이 있다 후대 差役제도와 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1인의 戶人을 賦稅 징수 납입의 책임

자로 하여 향리에서 이 방면의 기층단위로 운영하고 있는 셈인데 戶籍

簿와는 그 내역과 용도가 다른 별개의 독립 帳簿이다 그런데 劉家軍

은 限米 납부자 신분인 私學還民叛士吏卒 등이 모두 流民이

며 그 戶人에게 依附하고 있는 자들이라 하고 국가가 그 依附관계를

승인해주면서 그들이 경작할 토지를 戶人에게 分級해주고 그들이 납

부하는 地租인 限米도 戶人의 이름 아래 등기한 것이라고 보았다86)당

시 嘉禾연간에 전란으로 長沙 임상현 지역에 流民이 많이 流入되었을

가능성은 이미 여러 연구에서 지적된 바 있고 還民 叛士 등 일부는

流民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限米와 屯田限米 납부자 신분에는

이밖에 大男 州倉吏 吏帥客 金民 佃吏 郵卒 衛士 傳卒 子弟 佃卒

復客 新吏 兵客 故師子弟 兵師士 故帥客 後客 船師 司馬 士

등 거의 전 계층을 망라하고 있는데 이들 중에 유민이 있을 수 있으나

모두 流民 출신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새로 屯田이나 侯國의 田을

경작시키기 위해 유민 뿐 아니라 在地의 吏民에게 할당하여 佃作으로

운영하는 것은 여러 문헌자료에도 있고 lt吳簡gt의 lt吏民田家莂gt은

주로 在地의 호적에 올라 있는 吏民의 佃作 내역 장부이다 또 lt吳

簡gt 草言府部諸鄕吏區光等招誘諸限田客八十三人首見事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曹史趙野

86) 劉家軍 論lt走馬樓吳簡竹簡gt中 ldquo限米rdquo的性質 (中國社會經濟史硏究 2005-2) p87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5白 (柒總 49782)에 의하면 당시 長沙 지역에서 鄕吏에 의해 限田客

83인을 招誘했다는 성과를 보고하고 있는데 이와 같이 佃作 인력의 확

보에 애쓰는 상황에서 전술한 바와 같은 본래 限田의 佃作 의무를 지

고 있는 在地 吏戶의 家內 성원이 그 佃作者 명단에서 제외될 리가 없

그래서 簡文(B) lt州吏父兄子弟年紀簿gt에서 吏戶의 家內 父兄子弟

인력 23인 가운데 lsquo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rsquo과 lsquo一人先出給縣吏rsquo가

관부에 급사하는 給吏에 해당하고 lsquo一人限田rsquo은 限田의 佃作에 복무하

는 자이다 바로 이어 인용하는 孫休의 詔文에서 吏家의 어려운 사정

에 대해 ldquo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이미 限米를

납부하였는데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rdquo라 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전반부는 給吏로서 복무

하는 것이고 뒷부분은 限田 佃作 복역을 말함이다 즉 한 吏戶의 父兄

子弟 가운데 일부는 전자에 복무하고 일부는 후자에 복무한다 똑 같

은 관부 내지 국가의 역에 복역하는 것이지만 給吏는 분명히 吏(分署

의 담당 吏 州吏)에 給事하는 자라는 점에서 給吏로 칭하여 여타의

복역과 구분한다 그리하여 그 給吏가 결혼이나 계승으로 하나의 戶를

이루면 簡文(A)에서와 같이 某里의 戶籍簿上에서 里의 총 戶民數 아래

에 lsquo其四戶給縣吏rsquo와 같은 형식으로 戶를 本으로 한 給吏로서 명기된

다 그런데 一人의 給吏가 아직 戶를 이루지 못하고 한 吏戶의 成員

(父兄 子弟)으로서 있는 상황이라면 그 戶人의 현재 신분에 의해 그

戶가 표기되었을 것이다

이 문제와 직결되는 다음 기사를 살펴보자 孫權의 제6子로 孫亮에

이어 즉위한 孫休는 그의 즉위 年인 영안원년(258)에 다음과 같이 詔

하였다

「諸吏家에 5인이 있으면 (그 가운데) 3인은 겹쳐서 役에 복무하고 있

다 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이미 限米를 납부하

였는데 군대가 출정하면 또 종군함에 심지어는 家事를 돌볼 자도 없게

되는 것을 짐은 매우 애처롭게 생각한다 그 5인 가운데 3인이 役에 복무

하고 있다면 그 父兄이 (家에) 머물고자 하는 것을 허용해주어 1인을 (役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6에 나가지 않고) 머물게 하고 그 限米를 면제해주며 군대가 출정해도 종

군하지 않도록 하라 (삼국지 권48 吳書 孫休傳 永安元年條)87)

孫休는 즉위 전 재야에 있을 때 시골 생활을 보냈던 바가 있어 그

들의 참상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吏家(吏戶)가 지는 과중한 부담

은 곧 그들이 그만큼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 吏役이 賤視化 되고 厮役으로 인지되고 있던 배경을 위의 詔文은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lsquo吏家rsquo의 식구는 여러 방면의 복무를

중복하여 부담하고 있다 그 가운데 限米 납부 의무는 lt吳簡gt에 의하

면 국가에서 佃作케 하여 운영하는 限田 경작에 대한 租로써 납부하는

것이다 즉 전술한 lsquo二年常限rsquo田을 이 限田으로 보아 그 地租를 限米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다88) 단지 于振波는 限米란 二年常限田과는 관

계가 없고 屯田 경작에 대한 조세인데 衛士 郵卒 傳卒 등의 상비병

과 토지가 없는 수공업자 외지에서 수학하기 위해 온 私學 이탈하였

다가 새로 돌아와 附籍된 還民에게 軍屯이나 民屯에 종사하게 하고 일

부의 부세와 요역을 면제해주면서 限米를 납부하게 한 것이라 한다89)

그의 동일한 글에서 여타 사항에 대해 필자와 일치한 부분에 대해서는

앞에서 찬동한 바 있지만 이 부분에는 수긍하기 어렵다 lt走馬樓吳

簡竹簡gt에는 限米 납부자로 기재된 신분에 전술한 바와 같이 많은

신분이 망라되어 있고 孫休傳에서 말하는 吏戶가 일부 상비병이나 귀

환민 私學등에 한정한 것이 아니고 吏戶 전반의 형편을 들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lt吏民田家莂gt에서 佃田의 총수는 二年常限田과 餘力

田으로 구성 내지 구분되어 있다 즉 常限田은 餘力田에 對比되는 용

어이다 그리고 양자의 畝當 租額이 嘉禾4년 民의 경우 12斛 0456

87) 詔曰 ldquo諸吏家有五人 三人兼重爲役 父兄在都 子弟給郡縣吏 旣出限米 軍出

又從 至於家事無經護者 朕甚湣之 其有五人 三人爲役 聽其父兄所欲留 爲留

一人 除其米限 軍出不從rdquo」

88) 앞에 든 高敏의 글 lt吏民田家莂gt中所見ldquo餘力田rdquo ldquo常限rdquo田等名稱的函義試釋

이래 대부분 이 견해에 따른다

89) 于振波 앞에 든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7斛 州吏의 경우 0586斛 0456斛으로 차이가 있다90) 무엇보다 앞에

서 살펴 본 lt오간gt lt廣成鄕州吏父兄子弟伏處 人名 年紀爲簿gt에 기재

된 州吏의 食口 현황 내역은 孫休傳에서 吏戶의 식구 사정을 말하고

있는 내역과 같은 모습을 전하고 있는데 91)전자에서는 限田이라 하였

고 孫休傳에서는 限米라고 한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限田에 대해 징

수하는 것이 곧 限米이다 따라서 限田이란 二年常限田의 簡稱일 것으

로 본다 lt吳簡gt의 lt吏民田家莂gt에는 이들 限田戶의 佃田額과 그에

대한 租賦稅 납부 內譯이 있다 이 戶는 州郡縣吏 등으로 담당 吏職에

給事해야 하고 從軍도 해야 한다 이러한 양상은 분명히 역의 부담이

중첩된 것으로 일반민보다 더 과중하다 租額인 限米 납부액도 일반민

의 사유지에 대한 租額보다 비율이 높았다

그런데 중요한 사항은 첫째 이렇게 과중한 부담이 중첩된 吏戶의

일면을 보여주는 lt吏民田家莂gt에서 佃作吏民의 戶人(戶主) 신분을 보

면 大男大女州吏群吏縣吏軍吏州卒郡卒縣卒復民士

등으로 吏와 民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들 吏民 모두 佃作

의 의무와 함께 地租로 米穀 布 錢을 납부해야 하고 從軍의 役이 있

으며 그리고 대량의 lt오간gt에 다량으로 보이는 子弟 및 給子弟가 곧

吏의 子弟로 파악된 것에 의하면92) 그들이 납부하는 子弟限米의 부담

도 吏戶의 부담이 된다 또한 lt오간gt에

郡吏公乘李年卅二 算一 (貳2460)

侄子年卅九給子弟 妻大女衷()年卄六 算一 (貳1754)

吉陽里戶人公乘張惕年卄八 算一 給縣吏 (壹1018232)

등의 많은 簡文에서 吏와 그 子弟 給吏들에게 算賦도 부과되고 있다

90) 앞에 든 張福亞 也談lt嘉禾吏民田家莂gt中ldquo二年常限rdquo田的函義 p11의 表1

91) 이에 대해서는 앞에 든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

形成與演變 mdash談長沙走馬樓簡牘札記之六 pp62-63 참조

92) 孟彦弘 앞에 든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爲役之

制 pp1-7 子弟는 吏의 子弟 給子弟는 관부의 給事에 差出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8단지 吉陽里戶人公乘鄭龍(龍 下에 田)年卅六算一給州吏復 (壹3323)

과 같은 lsquo給州吏復rsquo 즉 給州吏이면서 算賦가 復除된 경우가 있는데 이

에 의거하여 給吏는 算賦에서 復除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93) 그러나

위에 든 簡文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부분의 給吏가 lsquo算一rsquo로 기재

되어 있고 소수만이 lsquo復rsquo으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復除되는 경우는

특별한 사정이 있어 그 給吏에게만 특혜를 준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

으로 생각한다 참고로 lsquo腫兩足rsquo자나 lsquo刑兩足rsquo자인 民戶의 戶人도 算賦

가 면제되지 않고 있으며94) 大女도 算賦 납부 의무가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吏戶와 民戶가 지는 국가에의 부담은 吏戶가 각기의 吏職

에 복무하고 일반민호는 그러한 吏職에 있지 않다는 정도 외에는 별다

른 차이가 없다 물론 일반민은 吏職의 役 즉 吏役이 없는 대신에 일

반요역에 복역해야 하고 吏戶는 일반요역에서 면제된다 그러한 사실

을 말해주는 자료로 lt오간gt 戶口簿에 里別로 定應役의 戶數 즉 일반

요역에 응당 복역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진 里別 戶數 문서가 있다

其一百卅八人男 (參431548)

其八十一人(女) (參431144)

其一戶給軍吏 下品 (參430336)

其五戶民 (下)品 (參430235)

其七戶女戶不任調 下品之下 (參430134)

其領役民卅七戶 (參430033)

이 里別 戶口簡은 凌文超의 編次 정리 작업에 의하면 新成里의 總

結簡에 해당하는데95)여기서 일반민호수는 생략하고 給軍吏나 調에서

면제되는 女戶 등의 수만을 기재한 것은 맨 아래의 定應役 戶數를 算

出하는 근거를 기록하기 위함이다 즉 일반민호 외의 給吏 등의 戶數

93) 凌文超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型

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 p5494) 高平里戶人公乘黃高鼰五十二算一腫兩足 (貳 2903) (大)成里戶人公乘何軼年

五十五算一刑兩足 (參626736)

95) 凌文超 앞에 든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

簿rdquo的類型與功能 p40과 lt表3gt 중 p45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9가 총 13戶이고 이들을 제외한 定應役의 戶數가 37호란 뜻이다 그래

서 新成里의 총 호수는 50戶였음을 알 수 있다 新成里의 총 口數 219

명은 lt오간gt의 戶當 口數 평균이 대략 45명 정도임을 감안하면 486

戶이고 50戶와 근접한다 따라서 給軍吏 등 13호는 定應役에서 면제되

는 戶임을 알 수 있다 또 다음 戶口簡은 앞부분 里의 총 口數가 결락

되어 있다

其一戶給朝丞 (貳170263)

其二戶給郡園父 (貳170162)

其五戶尫嬴老頓貧窮女戶 (貳170567)

定應役民卄戶 (貳170466)

여기서는 給朝丞1戶 給郡園2戶 절름발이 노인 빈궁자 女戶 등 5

戶가 役에서 면제되고 그 나머지 20戶가 定應役民이 되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즉 給吏는 定應役에서 면제되고 있다 따라서 給吏는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부에 給事하는 것이기에 당연히 일반요역에서 면제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給吏에도 전술한 바와 같이 吏戶의 가속인 경우가 있고 일

반민 중에 차출된 경우가 있는데 전자의 경우는 관부에서 필요할 때

마다 고정적으로 차출되었을 것이며 일반민의 경우는 본래는 일시적

한시적으로 징발되었을 것이지만 여러 簡文에 戶人으로서 給吏인 자가

있는 것에 의하면 점차 전자의 경우와 같이 吏戶와 마찬가지로 給吏戶

로서 고정적으로 차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定應役이 戶를 부과

단위로 삼고 있다는 점 또한 吏戶의 家屬이 하나의 徵役 단위로서 운

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도 吏戶의 실재성과 그 독립적인

신분성을 말해준다 더구나 일반 민호와 구분된 吏戶 名籍(lsquo吏名籍rsquo)의

존재가 다음의 簡文에서 확인된다

諸鄕謹列郡縣吏兄弟 幷攴 吏名籍 (13-7638)

吏戶의 막중한 부담은 그 家屬의 叛走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0를테면 縣吏 毛章의 15세인 弟(壹 7865) 縣吏 毛車世의 49세인 父(壹

7868) 群吏 黃의 13세인 弟(壹7893) 群吏 谷漢의 29세인 兄子

(壹7905)가 嘉禾 2년에서 3년 사이에 叛走하였다 후한 말 陳寔은 어

려서 縣吏가 되어 항상 厮役에 給事하였는데( 常給事厮役 ) 후에 都亭

의 佐가 되었다96) 그리고 郭太는 대대로 집안이 빈천하고 어려서 고

아가 되었는데 모친이 縣廷에 給事하게 하려 함에 말하길 ldquo대장부가

어찌 斗筲의 役에 處해 있을 것입니까rdquo라 하고 마침내 떠났다97) 당

시 이미 吏役이 厮役으로 인식되어 있었고 斗筲의 役 즉 100석 이하

인 斗食의 位에 처하였음을 말해준다 즉 같은 吏이더라도 100석 이상

인 掾史와 그 이하 사이에는 차등과 구분이 있었다(후술) 그렇지만 이

두 경우는 모두 吏가 되는 것이 선택의 길이었기 때문에 吏戶에 속한

자들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吏戶가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던

것에 비해 이 두 경우는 선택사항이었다 斗食에게도 매우 소액이지만

月俸이 지급되었기 때문에 빈천하거나 고아가 되어 생업을 위해 吏職

을 선택한 것이다 나이도 어리고 집안의 세력 배경도 없는 가운데 吏

가 된 것에 의하면 斗食의 최하단에 속한 吏였을 것이며 이들이 給吏

가 아니고 吏로 칭해진 것은 일반요역 복무에 대신하여 징발 내지 차

출된 경우가 아니고 吏職에 임명된 것이기에 당연하다

縣吏 등의 諸吏役이 厮役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무엇 보다 그 雜

役的인 吏役의 과중함 때문이다 후한 lt張景碑文gt에서 14鄕의 正을

調發하여 勸農의식에 소요되는 土牛 제작에 육칠십만전이 들어가 吏와

正이 매년 患苦에 처함에 男子(庶民) 張景이 매년 그 비용을 출연하여

土牛를 義作해주겠다 하고 그 대신 자신을 縣吏 列長 伍長에 임

용되지 않게 해줄 것과 小繇 징발을 면해줄 것을 청하고 있다98) 즉

96) 후한서 권62 陳寔傳에 (陳寔)少作縣吏 常給事厮役 後爲都亭(刺)佐

p2065

97) 후한서 권68 郭太傳에 (郭太)家世貧賤 早孤 母欲使給事縣廷 林宗曰 ldquo大

丈夫焉能處斗筲之役乎rdquo 遂辭 就成皐屈伯彦學 三年業畢 博通墳籍 p2225

98) 府告宛 男子張景記言 府南門外勸〔農〕土牛 調發十四鄕正 上賦

斂作治 幷土人 犂 耒 卄 蓎 屋 功費六七十萬 重勞人功 吏正患苦 愿以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1서민이었던 張景은 거액의 자금을 출연하면서까지 縣吏 등의 吏役과

小繇의 복역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있다 그는 아직 非吏였지만 吏役에

언제든지 차출될 수 있었고 그 吏役은 매우 번거롭고 힘든 것이었음

을 알 수 있다 단지 張景과 같은 서민이 縣吏가 되어 吏役에 差出되

는 경우 바로 lt오간gt에서와 같은 吏戶가 되어 그 가속이 모두 吏役의

범위에 들어가게 되는지는 不明이다 推斷이지만 世戶로서의 吏戶와

함께 일시적으로 차출되어 일정 기간 만 복무하는 非世戶로서의 吏戶

가 공존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요컨대 lt오간gt과 문헌자료에 보이는 吏戶와 給吏의 면모들은 앞에

서 검토한 胥徒와 lt庶民在官者gt 내지 徒御 導從役人 등과 일맥상통

하는 면이 있다 孫休傳이라든가 lt오간gt에 빈출하는 吏戶 吏民에서의

吏는 500石 이하인 吏 중에서도 200석 이상의 長吏級을 제외한 下吏

즉 百石 이하의 吏를 가리키고 給吏는 吏가 아니되 관부에서 일정 기

간 여러 분서에 勞役으로 복무하는 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즉

庶民在官者 와 상통한다 특히 그들에게 부과되었던 賦稅役의 내역에

서도 위에서 검토한 여러 職役 계통 신분이나 계층의 예와 거의 비슷

하다

孫休傳에서 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라 한

것은 吏家의 父兄은 都에서 州郡縣의 吏로 복무한다는 뜻이고 나머지

3인의 자제는 郡縣吏에 給事한다는 뜻이다 즉 lsquo郡縣吏에 給事함( 給郡

縣吏 )rsquo이란 子弟3인이 郡縣吏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郡縣吏에 下屬되

어 그 업무에 給事한다는 뜻이다 위의 廣成鄕의 lt人名年紀簿gt 簡文

에서 lsquo先出給縣吏rsquo도 州吏7家의 식구 가운데 먼저 縣吏의 업무를 보좌

하기 위해 차출되어 나간 것을 뜻한다 여기서 말하는 郡縣吏는 주로

掾史職으로 사무 업무 중심이고 그 업무를 노동력으로 보좌하는 인력

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lt오간gt의 도처에 諸吏의 사례로써 諸曹倉

吏庫吏監運掾關邸閣船師田戶曹史 등 수십종의 職名이 보이

家錢 義作土牛 上瓦屋 欄楯什物 世世作治 乞不爲縣吏 列長 伍長 徵發小

繇 (高文 漢碑集釋 開封 河南大學出版社 1997 p227)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2는데 대부분 그 업무 처리에 노동인력이 필요하다 십 명 내외의 掾史

員吏 만으로는 사무나 문서작성 관리 업무 이외에는 수행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 인력을 吏戶의 식구로부터 자동으로 差役시키는 시스템이

漢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었음을 위 孫休傳의 기사는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이들 吏家의 식구 현황 파악은 관부에서 항상 필요

로 하고 확보해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lt오간gt의 여러 문서는

그러한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東鄕勸農掾殷連被書條列州吏父兄人名年紀爲簿

輒科核鄕界 州吏三人 父兄二人刑蹱叛走 以下戶民自代 謹列年紀 以

(已)審實 無有遺脫 若有他官所覺 連自坐 嘉(禾)四年八月卄六日破莂

保據 (J22-2543)

여기에서 담당 鄕界의 州吏3인 가운데 그 父兄2인이 受刑과 叛走로

비게 됨에 下戶의 民을 징발하여 바로 충당시켰다는 것이다 이 以下

戶民自代 에 대한 해석에서 下戶를 고용하여 자신을 代理케 한 것이라

는 견해가 있는데99) 그렇다면 戶人인 州吏가 자신의 식구 결원을 책

임지고 직접 下戶를 고용한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해당 州吏의 부담

이 너무 크게 되어 당시 下戶가 자동으로 보충되는 시스템으로 운영된

것일 가능성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諸家의 견해 모두 不明

임을 인정하고 있다100) 어쨌든 吏戶의 노동력을 신속하고 철저하게

보충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은 吏戶 전체의 식구가 관부에

예속되어 있고 세습화 된 상태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단지 孟彦弘은

이 자료를 통해 당시 吏戶의 家屬이 모두 吏였음을 말해준다고 하였으

나101)그렇지 아니하고 吏의 가속에 吏도 있을 수 있지만 아직 吏가

아니고 吏를 노동력 지원으로 보조해주는 給吏도 있고 그 給吏는 非

99) 이 점에 대한 정리는 王素 長沙吳簡勸農掾條列軍州吏等人名年紀三文書新探

(魏晋南北朝隋唐史資料 25 2009) p9의 注 11) 참조

100) 이를테면 孟言弘 앞의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

爲役之制 p16

101) 위의 글 p1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3吏로서 관부에 給事하는 자이며 이런 면에서 전술한 庶民在官者 내

지 lsquo非吏이면서 관에 있는 자rsquo lsquo官과 民 사이rsquo lsquo lsquo半官 半民rsquo lsquo踐更小史

(小吏)rsquo(續漢書輿服志) 등과 상통한 계층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吏戶에 포함되지 않는 給吏가 있었다 吏戶와 給吏戶가 구분되

고 있음은 lt吏民人名年紀口食簿gt의

其七戶給郡吏下品 (壹5447)

其十二戶給縣吏下品 (壹5467)

其一戶給軍吏下品 (參430336)

(其)六戶郡吏(中)(品) ---- (貳4490)

其二戶縣吏(下)品 (貳3307)

등에서 給郡吏 등의 戶와 縣吏의 戶가 구분되어 기록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다 그리고 給吏가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에 속하였음은 위

의 사례 뿐 아니라 lt吳簡gt에서 給度吏 下品之下 (5653) 등에서 알

수 있는데 下戶로 결원을 보충하는 것은 同級의 戶로 충원한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면 또한 당시 吏戶와 給吏의 관부에의 예속성과 신분

성을 보여준다 요컨대 給吏는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여서 평균

의 民戶 보다 더 빈천한 계층인 점도 그들이 관부에 정식의 吏職으로

임명된 吏라기 보다는 非吏인 民으로서 民의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

서에 給事(給役)하는 자들이되 관련 관서의 吏에 배속되고 給事 복무

해야 하는 예속된 신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찍이 宮崎市定이 宋書권94恩倖傳序의 郡縣掾史 幷出

豪家 負戈宿衛 皆由勢族 를 인용하여 豪家 출신으로서의 掾史가 고

관으로 진출하는 경향이 累代 이어지면서 右族이 이루어지고 이를 통

해 위진남북조 귀족제가 출현하였다 하였고102) 楊振紅이 이에 동조하

고 있는 것은103) 부분적으로 再考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당시 孫休

102) 宮崎市定 九品官人法の硏究 -科擧前史 (京都 同朋社 1979(1956)) pp86

-89

103) 楊振紅 앞에 든 吳簡中的吏 吏民與漢魏時期官 吏的分野 mdash中國古代官僚

政治社會構造硏究之二 p34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4傳에서 말한 吏戶는 분명히 豪族勢家가 아니었고 lt오간gt에서 民戶와

함께 lt吏民簿gt에 기록된 吏戶는 下品에 속한 貧層이었으며 그 식구

모두 중복된 賦役의 부담에 시달리는 계층이었다 그 吏戶에는 吏와

給吏로 구분되어 관부에 예속되고 있다 즉 아무래도 豪族大家로서의

掾史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정을 이해하는 데는 전술한

lt周禮gt의 府史胥徒에서 府史가 호족대가로서 辟除된 掾史에 類하고

胥徒가 곧 관부 예속하의 吏戶와 給吏에 거의 相當하다는 면이 있다

吏戶에서의 吏職에 掾史가 있겠지만 관부에 예속되어 있고 직업적 세

습화 되어 있어 호족대가 출신의 掾史와는 구분되었을 것이다 무엇보

다 호족대가 출신의 掾史은 관부에 예속되지도 아니하고 세습의 신분

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掾史層의 존재는 군현의 장관 辟召로 임

용되었을 것이다 반면 吏戶 출신의 掾史는 기술 계통의 전문직일 경

우이거나 개인적 기능의 능력으로 또는 部曲과 같은 상비병 출신이

일반 요역 부담에 대신하여 관련 직무에 세습하게 되거나 또는 일반민

호에서 급히 所要되어 임시로 차출되었다가 점차 세습의 吏戶로 예속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관부에 진 빚으로 예속되었다가 吏戶로 남

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즉 이 吏戶는 관부의 갖가지 所要 用務

에 差出될 상황에 대기되어 있는 戶이다 그 중에 일부는 정식으로 掾

史로 승진되지만 나머지는 윤번이나 필요시 이 방면 저 방면의 分署에

차출되어 給事하며 分署의 長을 主로 모시고 그 아래에서 給事한다

掾史의 吏와 구분하여 그러한 뜻을 반영한 것이 lt오간gt의 도처에 보

이는 수십종의 給某吏다고 생각한다 호족대가 출신으로서의 掾史와

예속신분인 吏戶 출신으로서의 掾史는 그 신분상으로도 士와 서민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기에 宮崎市定의 立論 또한 양자의 구분을 통한

위진남북조의 귀족제 내지 良賤制의 형성을 논하는 보완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근래의 여러 연구들은 掾史에 이렇게 두 방면으

로 구분되는 면과 계층이 있다는 점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였고 吏戶

의 家屬에 吏와 給吏로 구분되는 층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양자의 성

격이 어떠한가를 파악하지 못한 셈이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5한편 給吏는 吏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戶人이나 父兄이 郡吏 등의

諸吏에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당시 吏戶가 직업화 내지 세습화 되어

있었기 때문에 子弟의 給吏 신분도 곧이어 諸吏로 진전될 것은 당연하

다 그래서 lt嘉禾四年吉陽里戶籍簿gt에 吉陽里에 호적이 올라 있는 給

郡吏 逢杲(壹10169) 給郡吏 寥裕(壹10175) 給縣吏 張惕(壹

10182) 給州吏 區張(壹10367) 給州吏 嚴追(壹10149) 등이 lt嘉禾四

年五年吏民田家莂gt의 下伍丘 소속 佃民 名簿에서는 거의 同一人일

것이 분명한데 給郡吏가 群吏로 給縣吏가 縣吏로 給州吏가 州卒이나

州吏로 기재되어 있는 경우도104)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

다 이 경우는 丘에서는 給吏가 보이지 아니하고 里에서만 보이기 때

문에 아직 명확히 해명이 되지 않고 있는 里와 丘의 차이에 따른 것일

가능성도 있고 嘉禾4년과 嘉禾4-5년 戶籍簿에서의 1년 내외의 기간

차이에 따른 신분의 변화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또

한 侯旭東의 정리 조사에 의하면 高遷里의 給縣吏 松棐가 위의 lt田家

莂gt에서는 武龍丘의 縣吏로 기재되어 있고 같은 里의 給縣吏 張喬는

亻平 丘의 縣吏로 기재되어 있으며 宜陽里에 眞吏로 등재된 黃阿 등

6인도 각각 6곳의 다른 丘의 州吏 男子 男子 郡吏로 기재되어 있다

또 陽里의 給郡吏 謝鼠는 夫丘의 男子로 기재되어 있다105)里의 호

적부와 lt吏民田家莂gt의 丘別 佃民 명부에서 그 신분이 男子인 경우

일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양편 모두 里의 호적부에 給郡吏 給縣

吏 給州吏등 給吏로 기재된 경우는 대부분 丘의 佃民 명부에서 각각

群吏 縣吏 州吏로 되어 있고 眞吏가 州吏 郡吏 男子로 기재되기도

하고 給縣吏가 男子로 기재된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일부 사례들은 眞

吏 吏 給吏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것이어서 그 해명이 필요한

데 현재 里와 丘의 구별 차이 眞吏와 諸吏 給吏등의 실체 문제가 아

104) 凌文超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

型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 pp17-18의 lt表一gt

105) 侯旭東 長沙走馬樓吳簡ldquo里rdquoldquo丘rdquo關係再硏究 (魏晋南北朝隋唐史資料2006) pp19-21의 表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6직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어 그 이유를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실

정이다 그러나 신분명으로 이름을 달리하여 그렇게 구분하고 있으며

전술한 바와 같이 給吏가 吏나 眞吏와 다르게 취급되면서 여러 名簿에

구별되어 기재되어 있고 그 독자성도 충분히 입증되기 때문에 위의

예외적인 사항들은 개인별 특별한 사정에 따른 것이거나 아직 여러 異

說로 논란이 되고 있는 里와 丘 등의 구분과 차이 등에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고에서 갖추어 고찰하지 못하고

후고로 미룬다

Ⅵ 결 언

이상의 검토에서 고대 職役의 범주에 들어가는 다종의 신분 내지 계

층과 吏職의 類 그 복무형태 삼국시기에 이르는 전승과 변화의 모습

들을 살펴보았다 우선 職官과 일반요역 복무자와는 신분제와 賦役체

계상 엄연히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례 地官 鄕大夫에 그

舍란 國中의 貴者賢者能者服公事者老者疾者에게는 모두 舍

한다는 것이다 에 대한 후한의 鄭司農의 注에 服公事者란 지금 吏에

게 復除해주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고 하였다106) 여기서 lsquo舍rsquo란 復

除와 같은 뜻이다 그 대상 가운데 lsquo國中의 貴者賢者能者rsquo 가운데

貴者는 공경귀족 賢者와 能者는 命官과 辟召된 관리에 해당한다 그리

고 그 아래의 服工事者는 다시 2분되는데 200석 이하의 吏職 내지 掾

史職(小吏)이 있고 그 아래에 庶民在官者 내지 lsquo非吏로서 官에 給事

하는 자rsquo로서 給吏層이 있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賢者와 能者 까지를

職官이라 하면 그 이하인 服工事者 가 곧 職役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

석된다 그리고 職官과 職役 복무자는 모두 일반요역에서 면제되는 자

106) 其舍 國中貴者賢者能者服公事者老者疾者 皆舍 注云 lsquo服公事者rsquo

謂若今吏有復除也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7들이다 이 중에서 職役 복무자는 일반요역에서 면제되는 대신에 각종

의 吏職과 給吏職에 복무하였다 여기서 칭한 給吏職은 lsquo(小)吏rsquo에 대비

하여 칭한 給吏를 그 성격상 그렇게 칭할 수 있으며 그 독립적 계층

내지 신분으로서의 실태가 lt長沙走馬樓吳簡gt의 발현에 의해 상당 부

분 밝혀지게 되었다 그런데 服工事者 즉 職役 담당 계층의 범위가

상당히 넓어서 그 職役의 양태가 모든 면에서 같은 것은 아니고 일부

분 다른 측면들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고대의 긴 기간에 걸쳐 거의

공통으로 庶民在官者 lsquo非吏이면서 관부에 給事하는 자rsquo lsquo官과 民 사

이rsquo lsquo半官半民rsquo의 성격이 유지되고 있는 면을 볼 수 있다

이렇게 職役 담당자의 연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곧 lt주례gt에 보이

는 관리 조직의 최하위에 위치한 府史胥徒이다 이 가운데 府史

가 대략 후대의 掾史職이나 lt吳簡gt의 諸吏에 속한다면 胥徒는 給吏層

에 상통하는 면이 많다 단지 lt吳簡gt에 다수 보이는 吏役 下의 吏戶

는 그 과중한 부담과 厮役 및 빈천함의 성격상 오히려 胥徒에 상통하

는 면이 많다 이러한 시대적 차이는 吏戶의 예속화 및 세습화의 진전

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한편 시대의 여건 차이로 여러 부분에서 胥徒

와 후대의 職役 담당 계층 사이에는 다른 면도 있다 胥徒나 給吏層이

기본적으로 일반 서민 출신으로서의 服工事者 였던 것과는 달리 周에

서 三國에 이르는 동안 服工事者 라는 면에서 同類이지만 일반 서민

과는 구분되는 여러 相異한 계층에 속한 신분들이 속하여 있었다 예

를 들면 工商食官 에 속하는 工商 皁隸食職 에 포함되는 吏에 속

한 徒隸 층 넓은 의미의 徒隸層이라 할 수 있는 皂隸牧圄

僕輿人 그리고 下吏層에 들어가는 樂祝醫衛士 및 走卒伍伯

之類 등이 그들로 그 출신은 일반 서민이거나 賤民 또는 刑徒였지만

관부에 寄生하며 給事한다는 면에서는 공통이다

이들의 복무 형태는 항상적 근무 일시적 근무 組別 교대제 등 여러

가지로 징발 내지 차출되었고 lsquo冗rsquo과 lsquo更rsquo은 그러한 차이를 구분하는

용어로서 나온 것이다 근무에 따른 보수를 받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 구분은 아직 분명치 않은 부분이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8있다 그러하지만 최소한 생업을 관부에 의탁하는 자들에게는 지급되

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年俸制에 대비되는 稍食 즉 소액의 月俸 내

지는 근무일수 기준의 지급 형태로 지급되었다 이는 그들의 근무가

주로 일 단위나 월 단위로 이루어지고 계산되었기 때문이다

lsquo官rsquo과 lsquo吏rsquo는 서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선진 이래 본래 상하의 신

분으로 명확히 구분되었고 漢代에 혼용 내지 통용되는 경향이 있었지

만 양자가 구분되는 면 또한 여전하였다 吏는 官에 가까운 吏가 있고

民으로서의 吏가 있어 전자를 lsquo官吏rsquo라고 하면 孫休傳의 詔에서 거론된

吏家는 보통 吏民으로 합칭될 경우의 吏라고 할 수 있다 lt吳簡gt의

lt吏民簿gt나 lt戶口簿gt 등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실태에서 후한 말에

서 삼국기의 전형적인 職役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이제까지 그

존재에 대해 거의 간과되어 왔던 給吏에 대해 lt吳簡gt은 수십종의 給

吏 실태를 전해주고 있어 그 의의가 크다 吏의 사무 업무를 직접 勞

役으로 보조해주는 給吏는 관부의 행정 업무 처리에 있어서 항상 필요

한 노동력 제공자였다 이러한 노동력은 어느 시기이든 공통으로 필요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연원을 lt주례gt의 胥徒에서 찾아볼 수 있었

고 여러 면에서 職役의 실례로서 공통하는 면들을 지적할 수 있었다

후한 말 삼국시기의 吏와 給吏는 일반서민 신분으로서의 吏이며 吏戶

로써 관부에 예속되어 그 食口 성원이 거의 세습하여 吏役에 종사하

고 있다 이들은 일반서민에 비해 일반요역이 면제된다는 점을 제외하

면 그밖에 각 吏職에 따른 吏役의 기본 직무 외에 限田의 佃作 의무와

그 地租로서 限米 布 錢을 납부해야 하며 從軍해야 하는 등 중첩된

부역으로 일반서민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또한 그 戶品 이

下品 내지 下品之下에 속한 貧戶 출신이다 따라서 같이 吏로 칭하지

만 豪族勢家 출신으로 掾史職을 거쳐 상급관으로 진급하고 命官에 오

르는 累代 高族의 世家 출신 掾史와 빈천한 서민 출신으로서 관부에

예속된 吏戶 출신으로서의 掾史와는 구분된다 이 吏家 내지 吏戶는

吏의 칭호로 불리지만 일반민보다 더 많은 부담을 지고 있기에 그들의

役은 후한과 삼국기에 賤役 賤職 내지 厮役으로 칭해지며 기피되고 있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9다 따라서 이 계층이 官吏로 합칭되는 경우의 吏와 구분되는 것은 당

연하며 그 호칭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늦어도 孫休 시기의

문서와 간독자료에 등장하는 lsquo吏家rsquo나 lsquo吏戶rsquo는 이미 그러한 계층에 대

한 專稱으로 형성된 듯하다

한편 諸吏役의 복무에는 常勤의 방식과 1년에 1개월 내지 수개월만

輪番 형식으로 복무하는 비상근의 lsquo踐更 방식의 근무rsquo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한 비상근 복무자도 있었을 것이다107)그리고 그 복무에

대한 급여가 그 吏役을 생업으로 하는 常勤者에게는 당연히 小吏에 대

한 봉록이 지급되었을 것이다 반면에 給吏의 役은 일반요역에 대신하

는 복역이라는 면에서 비상근 내지 윤번 형식의 차출이었을 가능성이

많지만 지금까지 lt오간gt에 소개된 자료로는 어느 쪽이라 단정하기가

어렵다 胥徒의 役은 어디까지나 상급의 관원들과는 달리 일반민의 요

역 의무를 대신하여 관부에 給事하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lt오간gt

에서의 給吏와 상통한다 給吏에 대한 봉록 지급의 여부도 아직 不明

이다 단지 限田의 지급이 祿田과 같은 성격의 것이었을 가능성도 고

려되지만 그 租額이 커서 혜택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노동력의 징발로

서 해석되는 부분도 있다 또한 給吏의 관부에의 給事가 일반 요역과

같이 組別 순환제였는지의 여부는 아직 분명치 않다 lt奏讞書gt의 樂

人의 예와 같이 一月一更制와 같은 순환근무제였을 가능성도 있는데

대체로 두 가지 형태가 공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lt吳簡gt에 의거한 의론들은 아직 자료 해석과 해명이 충분치 못하여

불분명한 상태에 있는 사항들이 많은 실정이기 때문에 해당 사항이 새

로 규명 되는대로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lt오간gt의 미해명 사항

에 대한 개별적인 탐구도 본 과제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필요하다 그

리고 아직 소개되지 않은 대량의 lt오간gt이 연속하여 출간되면서 새로

운 자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107) 廣懶薰雄 앞의 秦漢律令硏究 pp310-311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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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103

(中文摘要)

中國古代的職役與職官的問題

朴 健 柱

通過上述的檢討 基本上職役範疇內的多種身分 乃至階層與吏職之類

其服務形態至三國期的傳承與變化等方面已然解明 職官與職役服務者

的一般徭役均免除了 此二者中職役服務者 用種種lsquo吏職rsquo與lsquo給吏職rsquo服務來

代替其一般徭役 直至三國時期爲至漫長的期間內職役擔當者 庶民在官者

lsquo非吏而給事官府者rsquolsquo官與民之間者rsquolsquo半官半民rsquo的性格几乎共通維持

職役擔當者的淵源卽是lt周禮gt所見的官吏組織最下位的府史胥

徒 此中 府史是大略屬于後代掾史職或是lt吳簡gt的諸吏 胥徒則是相通于

給吏層的側面多的 但是lt吳簡gt所見多數的吏役下吏戶其過重的負擔與厮

役及貧賤的性格上 倒是與胥徒相通方面較多 這個時代的差異像是吏戶的

隸屬化及世襲化的進展招來的結果 一方面因爲時代的與件差異 胥徒與後

代的職役擔當階層間有多方面的異質 胥徒與給吏層基本上是一般庶民出

身的 服工事者 如此不同 從周至三國期間從 服工事者 上是同類而與一

般庶民相區分的多種相異的階層面上身分較多 例如 工商食官 所屬的工

商 皁隸食職 所包含的 吏所屬的徒隸 層以廣義的徒隸層可以稱謂的

皂隸牧圄僕輿人 以及下吏層所屬的樂祝醫衛士 及走

卒伍伯之類等 他們的出身是一般庶民 或是賤民乃至刑徒 在官府寄生

而給事的層面上是共通的

其服務形態是恒常的勤務 一時的勤務 組別交代制等以多種方式徵發乃

至差出 lsquo冗rsquo與lsquo更rsquo是其差異區分用的用語 支給勤務報酬與否是不分明之事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04項 可是至少生業官府依託者是被支給的 其支給方式是與年俸制相對的稍

食 卽少額的月俸乃至勤務日數基準的支給方式 因此他們的勤務和支給計

算主要是日單位或是月單位

於lt吳簡gt之lt吏民簿gtlt戶口簿gt等所見的吏與給吏的實態 可以看到

從後漢末至三國期間典型的職役的樣相 尤其向來看過給吏的存在 lt吳

簡gt所傳數十種給吏的實態 其意義是巨大 給吏是以直接的勞役補助吏的

事務業務 是官府的行政業務處理上恒常的必要勞動力提供者 這種勞動力

許是官府運營上至今爲至所有過的任何時期共通要緊事項 可以推斷給吏

的淵源於lt周禮gt的胥徒 而且可以指摘以職役的實例有多方面共通的層面

後漢末三國時期的吏與給吏是一般庶民身分之吏 以吏戶隸屬於官府 其食

口成員率多世襲地從事吏役 他們除比一般庶民免一般徭役外 也需要履行

各吏職別吏役的基本職務 佃作限田義務 以其地租納付限米布錢 從

軍義務等重疊的賦役 因此他們有比一般庶民更重的負擔 而且他們的戶品

是下品乃至下品之下所屬的貧戶出身 從而他們雖一樣稱謂lsquo吏rsquo 却與豪族

勢家出身經歷掾史職進級上級命官的累代高族的世家出身的掾史與以貧賤

的庶民出身於官府隸屬的吏戶出身的掾史是不同的階層 這個吏家乃至吏

戶雖被稱謂lsquo吏rsquo 但是彼役後漢三國期被稱謂賤役 賤職乃至厮役 而且被忌

避 從而此階層是與lsquo官吏rsquo合稱的境遇的lsquo吏rsquo爲區分是理所當然 其稱號也只

得相殊 于是最遲至少到於孫休時期文書與簡牘資料所見的lsquo吏家rsquo與lsquo吏戶rsquo

許是已經成爲如此階層的專稱

依照給吏的役是一般徭役代替的服役 其運營形態是非常勤乃至輪番形

式的可能性大的 但是迄今依據lt吳簡gt所見的資料還難以斷定何者是對的

胥徒的役是與上級官員異樣 以一般民的徭役義務代替給事於官府 本着那

樣的側面與lt吳簡gt所見的給吏相通 給給吏俸祿與否也還不明 但是從限

田的支給是與祿田同一的性格的可能性上看 因爲其租額是多的 與其說惠

澤倒是有可能解釋爲勞動力的徵發 給吏的官府給事是與一般徭役同一方

式的組別交代制與否還不分明 如lt奏讞書gt所見樂人的事例 有可能一月

一更制方式交代勤務制 筆者認爲大體上是兩個方式共存

關於lt吳簡gt資料的議論是因爲解釋與解明上許多異說 不分明的關聯事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105項也有很多 所以該事項的解明將其完備需要補完

주제어 직역 직관 서도 도예 이역 이호 급리 서민재관자

關鍵詞 職役 職官 胥徒 徒隸 吏役 吏戶 給吏 庶民在官者

Keywords lavor duty at office(official lavor) high-ranking officialrsquos duty(official

post) xu-tu tu-li minor officials lavor minor officials family minor half

officials and half the masses in lavor services at office the masses in lavor

services at office

(원고접수 2013년 11월 15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12월 16일 수

정원고 접수 12월 19일 게재 확정 1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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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37의 吏職은 어떠하였을까 그 문제는 그 吏職이 일반요역에 대신하는

것이었는가의 여부 및 그들에게 賦役 면제의 특혜가 있었는가 없었는

가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지는데 고대사에서 그 사항이 분명치 않다

그래서 이 문제도 본고의 과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漢代의 여러 자료와 孫吳期의 lt長沙走馬樓吳簡(이하 lsquo吳簡rsquo

으로 약칭)gt의 여러 簿籍에 某吏로 칭해지는 이른바 吏戶(吏家)가 있

는데 그들은 그 吏職에 복무하면서 동시에 일반서민과 마찬가지로 여

러 賦稅役을 부담하고 있으며 세습호이고 그 家內 식구 모두 그 吏役

의 범주에 예속되어 관부에 給事하는 등의 諸役에 차출된다 lt吳簡gt

에 의하면 만약 그 吏役의 노동력에 부족분이 생기면 戶의 9품 가운데

下品이나 下品之下의 戶에서 그 수만큼 충원된다(후술) 이들은 대대로

관부에 예속된 신분으로 하급의 吏에 給事하는데 후한 후기의 자료에

서 이미 일반 서민 보다 그 부담이 더 크다 후한 후기나 lt오간gt에

보이는 이러한 吏戶의 모습에서 당시 吏戶制가 성립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에 대한 여러 異見이 있지만(후술) 본고는 그러한 吏戶의 존

재는 주례 내지 先秦 이래 실재하였던 것으로 보고 그 내역과 의미

를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그렇다면 이러한 다방면에 걸친 吏戶의

복무는 役制上에서 어느 범주에 들어가는 것일까 하는 문제가 제기된

다 본고에서는 이를 職役의 범주에서 이해하여 그 성격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편 先秦 이래 이른바 庶民在官者 가 있고 위의 부류 가운데 小

吏나 吏戶 등도 이에 포함되는 면이 있다 그런데 小吏나 吏戶가 직업

적 생업적으로 관부에 給事하는 반면에 서민 가운데 일반 요역에 대신

하여 일정기간 한시적으로 관부에 차출되어 給事하는 복역자가 있다

그리고 lt吳簡gt에 많이 보이는 수십종의 給某吏(이하 lsquo給吏rsquo로 약칭)의

부류가 있는데 현금 그에 대한 해석에 異說이 분분하다(후술) 吏와 給

吏의 구분 문제는 고대 職役의 존재형태와 관련하여 필히 해명되어야

할 사항이다 이들의 職役으로서의 측면은 주례 등에 보이는 lsquo府

史胥徒rsquo 및 이후 이어지고 있는 工商食官 에 속하는 工商 皁隸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38食職 에 포함되는 吏에 속한 徒隸 층 넓은 의미의 徒隸層이라 할 수

있는 皂 隸 牧 圄 僕輿人 下吏層으로서의 樂祝醫衛

士 및 走卒伍伯之類 등 각 종의 관부에 예속된 신분들의 존재형태

와 상통하는 면이 많기 때문에 그 연원문제와 관련하여 그들의 존재

형태와 운영방식 등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관부 내의 給事가 아닌 일반 요역에 복무하는 서민 계층의

복무가 있다 이는 諸役 가운데 가장 많은 민중이 이에 복역하며 職役

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대체로 職官이나 職役은 일반 요역에 상대되

는 용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고찰은 제

외된다

종래 고대 요역제도 연구사에서 가장 疏略한 부분이 職役 관련 사항

이다 비록 職役이 주로 당송 시대에서부터 상견되는 사항이고 중국고

대사에서 잘 논급되지 않는 사항이라 하더라도 국가 통치상 그러한 제

도가 구비되지 않을 수 없는 면이 있다 후대의 職役과 모든 면에서

동일한 형태는 아니지만 고대적 職役이라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고찰

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職役제도의 운영이 고대 요역제도와 신

분제상 어떠한 위치에 있고 어떠한 기능을 한 것인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고대 職役의 계승과 변화 등의 사항도 더불어 검토

되어야 할 과제이다

송대에 집중된 職役 관련 연구사에 의하면 그 연원과 개념 및 定義

관련 여타 제도 내지 규정과의 상관문제 운영상의 실태 성격 등의 사

항에 대해 수많은 異見들이 제기되어 온 바가 있다4) 職役은 대체로

당송 시대에 부유층 내지 上等戶에게 부과된 관부 물자의 운송 官莊

경작 징세 鐵冶업무 木材벌채 창고관리 관리의 送迎 통행세징수 등

의 役을 지칭하고 있다 職役은 일반민의 요역 복무에 대신하여 복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래 賦役이 면제되는 관리가 봉록을 받으면서 일

정한 품계를 지니고 업무에 복무하는 職官과는 구분된다 그렇다면 후

4) 勺培俊 當代中國學者關於宋朝職役制度硏究的回顧與展望 (漢學硏究通訊 22-3 2003)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39대의 職役과 같은 類의 제도가 고대사에서는 없었던 것일까 하는 의문

이 본 과제를 모색하게 된 출발점이다 따라서 고찰의 출발은 先秦의

윗 시기로부터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후대의 대부분 職官들은 고대

의 사례에 의거하여 제정된 것이다 송대 직역 관련 여러 연구는 그

연원을 漢 또는 위진수당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5) 본고는 그러한

類의 제도가 온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이미 周代 이래 실재하였다는

시각에 입각하여 살펴보고 그러한 모습이 선진에서 진한에 걸쳐 이어

지고 나아가 삼국기의 lt吳簡gt의 여러 실태에서 계승되고 있는 면을

입증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대체로 후대의 여러 제도는 거의 대

부분 이미 前代에 시행되었던 것들이며 나중에 여러 사정의 변화로

중단되었다가 재차 복구되면서 약간 변용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의미

에서 고대 제도사의 연원이 되고 있는 주례 등의 관련 사항과 고대

의 끝자락에서 이루어진 lt吳簡gt의 여러 명확한 자료에서 보이는 職役

制의 면모를 통하여 그 연원과 전개 과정 그리고 그 계승과 변용의

맥락을 일면이나마 해명할 수 있는 성과가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근래 lt吳簡gt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구별 吏役 문제 등 職役 관련

주요 사항에 대한 여러 난문제가 얽혀 있고 그에 대한 갖가지 異見이

분분하여 뚜렷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당한 혼란을 주고 있다

lt오간gt의 신출 자료들은 그간 관련 자료가 零碎하여 충분히 거론하기

어려웠던 고대 직역 관련 제반 사항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고 있어 가

히 획기적인 자료의 등장이라 할 수 있다 周代의 자료에서 삼국시기

까지 긴 기간 동안의 事跡을 망라하며 검토하게 된 것은 그 성과를 바

탕으로 lt오간gt의 신출 자료를 명확히 올바로 해석하는데 도움을 얻고

자 함이라는 면도 있다 필자의 기본 입장에서 보면 lt오간gt의 관련

문서에서 lt주례gt 이래 일맥 상통하며 전해져 온 職役의 맥락과 전통

을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고자 함에 본고의 주안점이

있다

5) 勺培俊 위의 글 pp17-18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0

Ⅱ 周禮의 胥徒와 庶民在官者

秦漢 官制에서 官階는 대체로 皇命에 의해 除授되는 命官 내지 長吏

와 그 명관에 의해 辟除되는 屬吏 내지 小吏로 크게 구분된다 그리고

양 官階의 秩祿에 의한 구분은 漢初의 lt이년율령gt秩律에 의하면 300

石 전한 중기 이후에는 200石이 기준이 되고 있다6) 그 실제의 관직

은 전자는 丞佐史尉의 佐官 내지 副官級 이상에 해당하고 후자는

그 미만인 鄉有秩獄史佐史鄉佐斗食令史嗇夫假官掾史

幹小史書佐循[脩]行 등의 掾屬 佐史類이다7) 그런데 이러한 구

성의 구분은 이미 주례의 官階 구성에서도 보인다 天官 冢宰에 治

官之屬 大宰 卿 1人 小宰 中大夫 2人 宰夫 下大夫 4인 上士 8인 中

士 16인 旅 (鄭玄의 注 lsquo衆也rsquo) 下士 32인 府 6인 史 12인 胥 12인

徒 120인 인데 주례의 거의 모든 관부가 이러한 구성으로 되어 있

다8)후한의 鄭玄과 唐의 賈公彦은 下士 이상은 왕명에 의해 임관된 王

臣이고 그 이하의 府史胥徒는 王臣에 의해 辟除된 계층으로 王

臣이 아니라고 하였다 즉 위에서 下士까지가 이른바 命官이고 그 아

래는 屬吏이다 특히 정현은 주례 여타 조목에 보이는 官階에서 lsquo群

臣rsquo을 卿大夫士로 해석하고9) lsquo群吏rsquo를 lsquo府史rsquo (秋官 司寇 小司寇 및

同 朝士 등에서의 鄭注) 또는 lsquo府史 以下rsquo(夏官 司馬 御僕의 鄭注)로

해석한다 庶人在官者 란 예기 王制제5에 農田을 100畝 단위로

만들어서 100畝씩 분여하는데 上農夫가 받는 田은 9인이 食할 수 있

고 그 아래는 8인이 食 할 수 있으며 그 아래는 7인이 食할 수 있고

6) 孫鴻燕 秦漢時期郡縣屬吏辟除問題硏究 (秦漢硏究 第一輯 三秦出版社

20071)

7) 後漢書 권28 백관5 注引 漢官曰 雒陽令middotmiddotmiddot(이하의 속관명)

8) 단지 예외로 角人이나 羽人은 그 직무의 성격에 따라 府와 史 중 어느 한 쪽

만 설치되어 있고 腊人과 食医는 양자 모두 설치되어 있지 않다 周禮注疏 같은 條의 贾公彦의 疏

9) 한편 주례 司寇 小司寇의 經文에서 경대부 하위의 lsquo群士rsquo의 稱이 있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1그 아래는 6인이 食할 수 있으며 下農夫는 5인이 食할 수 있다 庶人

在官者 는 그 祿이 이것으로써(8인에서 5인까지) 차등을 삼는다 제후

의 下士는 上農夫로 하고 그 祿으로 그 농경에 대신하기에 족하다 中

士는 下士에 倍하고 上士는 中士에 倍하며 下大夫는 上士에 倍한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라 10)하였고 맹자萬章句下에는 耕者가 수확하는 것으로 一

夫 當 百畝씩 百畝의 分田에서 上農夫는 九人이 食할 수 있고 그 다

음은 8인이 食할 수 있으며 中은 7인이 食할 수 있고 그 다음은 6인

이 食할 수 있고 下는 5인이 食할 수 있다 庶人在官者는 그 祿이 이

를 차등으로 한다 라11) 한 바에 의하면 庶人在官者 는 下士 아래

등급인 府史胥徒에 해당하며 차례로 9인이 食할 수 있는 百畝

의 최상급 농지를 경작하는 상농부(제후의 下士)의 아래 등급에 해당

하는 8인이 食할 수 있는 百畝의 경지 보유자는 府가 되고 그 아래

순으로 각각 7인의 食地 보유자는 史 그 아래 6인의 食地 보유자는

胥 그 아래 5인의 食地 보유자는 徒가 된다 이 규정에 의하면 下士에

서 徒까지는 모두 百畝의 경지를 보유하게 되는 면에서는 같지만 그

경지의 質에 따라서 5 단계의 차이 나는 경지를 차등으로 받게 된다는

것이 된다 上農夫 등의 차등은 주례의 鄭注에는 田의 肥瘠에 5등

급이 있어 수입이 같지 않다 라 하였고 위 인용문의 맹자 注에 一

夫一婦에 佃田이 百畝인데 百畝의 田에 糞을 퇴비로 주면 이것이 上農

夫이고 그 소득의 곡식으로 9口를 족히 먹일 수 있다(一夫一婦 佃田

百畝 百畝之田 加之以糞 是爲上農夫 其所得穀 足以食九口) 라 한

것에 의하면 糞의 퇴비 사용 여부 등으로 인한 토지의 肥瘠으로 발생

하는 수확의 양적 차이에 따른 구분임이 분명하다 즉 祿田 지급의 면

적 크기는 같지만 토지의 질적 차등을 기준으로 下位 5등의 차별이 결

10) 制農田百畝 百畝之分 上農夫食九人 其次食八人 其次食七人 其次食六人

下農夫食五人 庶人在官者 其祿以是爲差也 諸侯之下士視上農夫 祿足以代其耕

也 中士倍下士 上士倍中士 下大夫倍上士middotmiddotmiddot

11) 耕者之所獲 一夫百畝 百畝之分 上農夫食九人 上次食八人 中食七人 中次

食六人 下食五人 庶人在官者 其祿以是爲次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2정되고 있다 漢唐의 주석가들이 庶人在官者 를 주례의 府史

胥徒에 해당시킨 해석은 그들이 살던 시기의 정황에 의거한 것이고

관련 자료들도 충분히 현전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인정될 수 있는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일찍이 曾我部精雄은 鄭注와 賈疏의 차이를 제시하길 鄭玄은

府와 史가 庶人在官者 에 들어가지만 胥와 徒는 그에 들지 못한다고

한 반면 賈公彦은 4者가 모두 그에 포함되는 것으로 본 차이가 있고

鄭注의 해석이 옳다고 하였다12) 그는 상기의 주례 胥十有二人徒

百有二十人 에 대한 鄭注에 이는 民이 徭役을 給한 것이니 지금의 衛

士와 같다(民给徭役者若今衛士矣) 라 하였고 賈疏도 이에 따르고

있는데 胥와 徒는 요역 의무에 복무하는 것인 까닭에 봉록이나 수당이

지급되지 않았고 官長으로부터 辟除 임용된 것도 아니었으며 육체노

동이었던 반면 官長으로부터 선발되어 辟除 임용된 府와 史는 관부의

정신노동에 복무하였기 때문에 다르다고 하였다13) 때문에 庶民在官

者 에 胥와 徒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曾我部精雄은 鄭注와 賈

疏의 그러한 입장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여러 조문을 열거하고 있지만

賈疏가 府史胥徒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나 그가

열거한 자료에서 鄭注가 胥徒를 배제하고 있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주

는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屬이라 함은 그 屬인 胥徒이다 (春

官 宗伯 典祀) 群吏는 府史 이하이다 (夏官 司馬 御僕)라고 해석한

부분에 의하면 胥徒도 屬吏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는 입장이었을 것 같

다 또 曾我部精雄이 胥徒는 給徭役의 의무로 복무하는 것인 까닭에

봉록이 지급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위의 경문에서 최하급의 田地이지

만 1백무의 祿田이 지급된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 주장도 어긋나게 된

다 庶民在官者 의 봉록 문제는 아래에서 다시 상론한다

여기서 주의할 사항은 鄭注와 賈疏가 모두 한에서의 사정에 입각하

12) 曾我部靜雄 中國往古の胥吏制度 (中國律令史の硏究 東京 1971) pp456

-8

13) 위의 글 pp456-7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3여 府史와는 달리 胥徒가 모두 요역 의무로 징발되어 복무하는 자들로

본 것이라는 점이다 이 府와 史의 직무에 대해 정현과 가공언은 주례 小宰 宰夫의 8職 가운데 다섯째 府는 契하여 藏을 治하고 여섯

째 史는 문서로 贊治(보좌관의 업무)함을 관장한다( 五曰府 掌官契以

治藏 六曰史掌官书以赞治 에 의거하여 府는 문서와 器物의 藏(보

관 관리)을 관장하고 史는 문서의 起草를 관장하는 직책으로 해석하

였다 이는 진한시기 각 관부의 屬吏 掾史의 庶務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lt雲夢秦律gt 秦律雜抄(p133)에 佐 史 이상인 吏가 짐을 지고

운반하는 馬와 문서 간수를 담당하는 私卒(隨從의 卒)을 부려서 장사

하도록 하여 이익(錢)을 취하였으면 모두 遷刑에 처한다 라 하였는데

lsquo문서 간수를 담당하는 私卒rsquo이란 佐史 이상 관리 직속의 下屬으로서

그 상관을 隨從하며 보좌하는 까닭에 私卒이라 한 것이고 家內의 私

卒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정리소조가 lsquo隨從의 士卒rsquo로 해석하였는데

문서 간수를 직분으로 하는 史에 下屬된 卒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

든 府史의 史 및 그 下屬의 인력이 전국진에서도 설치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周禮天官 宰夫에 기술된 宰夫8職에서 일곱째 胥는 그 업무가 掌

官叙以治叙 인데 鄭注는 治叙란 관부에서 次序함이니 마치 지금(漢에

서) 侍曹 伍伯이 관리의 朝會에서 傳言 報告하는 것과 같다 胥가 什

長이 된 경우도 또한 그러하다 까닭에 漢法의 사정을 든 것이다(如今

侍曹伍伯 傳吏朝也 胥爲什長亦然 故擧漢法况之也) 라 해석하였다

좀 난해한 설명인데 이를 부연 설명한 賈疏는 이미 才智가 있어 什

長이 되어 관부에서 次序의 업무에 當하니 반드시 사람을 使役하는 곳

에서 그 徒를 科次한다 까닭에 관부에서 次叙한다고 하였다 로 해석

한다 즉 보통 胥徒로 함께 칭해지는 胥는 徒 중에서 才智가 있어 什

長으로 선발된 층으로 관부의 次序 업무를 맡게 되는데 徒를 使役하는

곳에서 그들을 통솔하며 科役한다는 것이다 如今侍曹伍伯 傳吏朝也

도 난해한데 賈疏는 漢에서 侍曹에서 伍의 長인 伍伯(伍長)에 이르기

까지 吏朝(관리의 朝會)에서 群吏가 諸官의 사무를 보고하여 傳하는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4것으로 해석하였다14)즉 侍曹에서 최말단의 부서 단위에 이르기까지

담당 부서의 朝會 때 각 하급 단위의 長이 업무 보고를 하는 것이다

그런대 이 伍伯은 5인조의 長이 아니고 漢의 執金吾의 속관에 (持戟)

五百(伍伯)二十人 이 있고 이 lsquo伍rsquo의 義를 lsquo當rsquo으로 lsquo伯rsquo의 義를 lsquo道rsquo로

해석하여 앞에서 導引하며 길을 驅除 정리하는 吏라고 한 韋召의 해석

이나15) 司隸校尉의 속관으로 先導隊나16) 門番의 임무를 하고 있는 사

례에17) 의하면 하급의 賤職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후한에 伍伯이

자주 보이는데 모두 走卒 鈴下와 連稱되거나 병렬되어 있어 일찍이 好

並隆司는 走卒은 伍伯이라고 하는 職役에 類한다 고 하여(후술) 모두

관부 말단의 職役 내지 賤職이라 하였다18) 凍國棟은 漢唐間의 伍伯이

微賤의 役이였지만 그 職의 성격상 권세를 빌려 남의 생사를 좌우하

고 謝禮錢을 챙길 수 있는 자리였다고 하였다19) 따라서 여기서는 吏

朝에 참석하는 최말단의 吏員으로서 先導 門番 등 役에 복무하는 伍伯

을 기술한 것이라 하겠다 胥徒는 곧 伍伯과 같이 관리의 최말단 수종

원이면서 그 손발 내지 爪牙의 기능도 하는 층이다 이러한 류의 최하

급 단위의 長은 什長이고 胥는 곧 그 什長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주례에서 각 관부의 徒는 그 員數가 거의 대부분 胥의 10배수이다 그

리고 관부의 次序 업무란 담당 단위의 胥가 그 소속 성원의 질서를 유

지하며 아울러 요역 징발된 民의 徒를 지휘 통제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후술)

이어 여덟째 徒는 그 업무가 官의 令으로써 徵令을 관장함(掌官令

14) lsquo如今侍曹五伯传吏朝也rsquo者漢時五人爲伍 伯 長也 是五人之長 言傳吏朝者

傳在朝群吏諸官事務於朝也

15) 후한서 宦者列傳 曹節條의 注에 韋召辯釋名曰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伍 當也 伯 道也

使之導引 當道陌中 以驅除也

16) 續漢書 輿服志上에 公卿以下至縣三百石導從 置門下五吏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車前伍伯 公

八人 中二千石 二千石 六百石 皆四人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17) 謝承後漢書에 華松家孤微 其母夜夢兩伍伯夾門 言司隸在此

18) 好並隆司 漢代下層庶人の存在形態(一) (史學雜誌 82-1 1973) pp17-1919) 凍國棟 漢唐間lsquo伍伯rsquo淺識 (中國中古經濟與社會史論考 湖北敎育出版社

2005) pp25-35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5以徵令) 인데 얼핏 徒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내용인 듯하다 정현은

이 lsquo徵令rsquo의 업무를 趨走給召呼 라 하였다 賈疏는 그 徒가 朝會에서

뛰어다니는 것을 금지시키고 官人에게 복역자를 공급하고 그들을 호

령하며 사역시키는 일이다(其徒止爲在朝趨走 供給官人召呼使役之事也)

고 해석하였다 관부 내에서 많은 복역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까닭에

그들이 소란 피우지 못하게 질서를 잡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서 徒에 의해 징발되고 사역되는 층은 관부에 복역 중인 刑徒 요역에

복무 중인 일반 서민 등일 것이다 주례의 각 관부에서 徒의 수는

수십 명에서 수백 명 많은 경우 8백명에 이르기도 한다 이들의 노동

력은 각 관부별로 항상적으로 갖추어진 것이지만 이 보다 더 많은 노

동력이 필요하여 형도나 일반 요역 복무자들을 징발하게 된다 그리고

그 징발된 노동력을 호령하며 질서를 잡고 사역시키는 직무도 필요하

게 된다 물론 징발된 자들을 사역시키는 일 뿐 아니라 자신들이 직

접 여러 노역의 所管 업무에 복무해야 한다 이를테면 地官 牛人에

胥二十人 徒二百人 이 있고 그 직책은 公牛의 사육이며 稻人에 胥

十人 徒百人 인데 그 직책이 稻田의 경작이고 夏官 虎贲氏에 胥八十

人虎士八百人 인데 鄭注에 의하면 徒라 하지 아니하고 虎士라 한 것

은 徒 가운데 勇力者로 선발된 까닭이다 하였으며 그 일부 직무에 同

司甲 司戈盾 司弓矢 繕人 校人 趣馬 巫馬 등에 속한 수십

명 내외의 徒는 모두 무기제조나 다루는 법 무기 성능 감별 馬의 감

별 養馬기술 馬祖 馬步 등의 神을 통해 馬의 질병을 파악하는 巫術

등에 뛰어난 상급자들 밑에서 보조 지원의 일 등 말단의 업무를 처리

한다 전문 기술과 지능이 필요한 업무인지라 말단의 업무 처리도 상

당히 명민한 자질이 필요하다 따라서 일반 서민 가운데서 이러한 재

능과 자질이 있는 자로 충원한다 이러한 각 관부의 업무 처리는 후대

에도 익히 보이는 사례이다 鄭玄은 胥를 lsquo諝(智者)ldquo로 읽어 才知의 뜻

으로 해석하였는데 같은 徒의 무리 중에서 才知者로 뽑힌 자라는 뜻으

로 보았다 胥가 什長인 까닭에 10인 가운데 1인 비율로 뽑힌 셈이다

아울러 徒 전체가 일반 서민으로부터 뽑힌 자들이라 할 수 있다 단지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6胥徒의 신분상 복무형태상의 제반 사항이 후대에 그에 상당하거나 유

사한 신분층과 사례에 대비할 때 상당히 다른 면이 많다는 사실이다

趙伯雄은 주례의 胥徒는 전국기까지 노예 厮 童보다 윗 등급이지만

거의 비슷한 신분이었고 厮役 내지 賤役의 담당층이었으며 徒가 한에

서는 주로 刑徒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고 하였으나20) 아래

기술하는 내용에 의하면 그러한 해석에 따를 수 없는 면이 많다 또한

한에서 徒는 형도 뿐 아니라 여러 무리를 가리키는데 통용되고 있어

여러 자료에 등장하는 徒가 가리키는 사항은 무척 다양하다

위의 注疏에 의하면 經文에서 徒의 업무를 官의 令으로써 徵令을

관장함(掌官令以徵令) 이라 한 것은 上部의 지시를 받은 徒가 새로

징발되는 徒의 징발 업무 및 이들을 인솔 지휘 사역하며 그 지시사항

(작업)을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胥와 徒가 모두 庶民在官者 라는 입

장에서 보면 徒가 최하위이지만 lsquo在官者rsquo이고 제8위와 제9위의 서열에

있으며 胥와 徒가 각각 6인과 5인이 食할 수 있는 토질의 경지 百畝

를 代耕의 봉록으로 받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이 출신은 징발된 요

역 복무자와 같다고 하더라도 여타의 징발된 일반 요역 복무자와는 구

분되는 계층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후대의 胥吏도 일반 서민출신이지

만 일반 서민과 다른 계층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 같다 만약 曾我部精

雄의 견해와 같이 府와 史까지만 庶民在官者 이고 胥와 徒는 그에

들지 못하는 것이라 한다면 주례 원문에 胥와 徒가 엄연히 제8위와

제9위에 올라 있고 봉록으로써 百畝를 받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기 어

렵게 된다

그리고 특별히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앞에 인용한 鄭注에 이는(胥

와 徒는) 民이 徭役을 給한 것이니 지금의 衛士와 같다 고 한 점이다

그래서 후한 중후기 衛士의 운영 형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또 鄭

玄은 駁五經異義에서 周禮에서 이른바 모두 징발한다 한 것은 胥

徒로 하여금 公家의 事에 給하게 한 것을 말함이니 지금의 正衛와 같

20) 趙伯雄 lt周禮gt胥徒考 (中國史硏究 2000-4) pp10-12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7다 고21) 하였다 한에서 궁성 내지 중도관에 番上 守衛하는 役은 正卒

의 役과 일반 更卒의 役이 있는데 鄭玄이 특별히 正衛라 한 것은 正卒

로서의 役임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의 요역 운영체제에서

衛士가 上番하는 役은 한구의에 民의 나이 23세가 되면 正이 되고

1년간 衛士 1년간 材官 騎士에 복무하며 활쏘기 말달리기 戰陣을 익

힌다(民年二十三爲正 一歲以爲衛士 一歲爲材官騎士 習射御騎馳戰陣)

라 한 것에 의하면 正卒이 그 복역 대상자이고22) 각 군 단위로 1년씩

21) 禮記王制 五十不從力征middotmiddotmiddot 의 條 孔穎達疏引 周禮所謂皆征之者 使爲胥

徒 給公家之事 如今之正衛耳

22) 漢의 正과 正卒 및 상비군의 문제에 대해서는 종래 여러 이견이 있다

正을 正卒로 보고 正卒이란 更卒(小繇)의 對稱으로서 병역의무자이고 재관

기사 위사등이 곧 정졸이라는 설이 가장 많이 받아드려지고 있다(濱口重國

秦漢時代の繇役勞働に關する一問題 秦漢隋唐史の硏究』上卷 東京 1966

1980 勞幹 漢代兵制及漢簡中的兵制 歷史語言硏究所集刊 10 1948 山田

勝芳 後漢時代の繇役と兵役 歷史 66 19869)正卒은 앞의 설과 같지만 正은 23세에서 56세 사이의 남자 즉 正丁 을 가리

킨다는 설(西村元佑 漢代の繇役制度 東洋史硏究 12-5 1953)正卒과 更卒이 별개인이 아니라 동일인이고 更卒은 正卒이 된 이외의 해에

매년 1개월의 역역에 복무하는 자를 가리키며 正은 23세-55세까지의 正丁인

데 正卒은 그 가운데 2년간 衛士 材官 騎士 등의 實役에 복역하는 것이라는

설(西田太一郞 漢の正卒について 東洋の文化と社會1 東京 1955)

材官 騎士등이 일반민에서 材力 있는 자로 선발되어 군국에서 常駐하는 전

문병사로서 직업군인인 lsquo士rsquo인데 대해 正卒은 일반민이 23세에 1년간 병졸로서

근무하고 1년간 衛士로 長安에 上番한다는 설 즉 正卒은 직업군인인 材官 騎

士와는 兵役體系上 別個의 것으로서 일반민의 병역 복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는 설(大庭脩 材官攷 -漢代の兵制の一班について 龍谷史壇 36 1953)正卒이란 23세에 이른 자 가운데서 신체강건한 자를 뽑아 衛士 材官 騎士

樓船 등의 어느 한 兵種에 복무하게 한 것이라는 설(濱口重國 勞幹 西村元佑

山田勝芳 앞의 논문 平中苓次 漢代の官吏の家族の復除と軍賦の負擔 中國

古代の田制と稅法 京都 1967) 諸說의 대부분은 이 견해를 공통적으로 취하

고 있다

秦漢에서는 始傅에서 免老까지의 모든 남자가 병역의무를 지는데 正卒은 그

適齡남자를 統稱하는 말이며 따라서 郡兵이나 衛士 戍卒은 正卒의 일부분이라

는 설(臧知非 秦漢lsquo正卒rsquo辨釋 中國史硏究 1988-1)正이란 傅籍된 待役者(兵役과 力役 포함)를 말하며 正卒은 어떤 특정의 役

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고 正(待役者)과 卒(服役中에 있는 正)로 구분되어 있

는 말이며 秦漢代에 병역 복무는 일부 병역신분에게 만 부과된 것이어서 나머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8조별 순번으로 상경하여 복역한다 正卒은 일반 更卒 중에서 신체강건

용맹 등으로 선발된 자들로 상비군 내지 직업군인의 성격이 강한 집단

이다 즉 그들은 일반민(서인)이면서도 그 중에서 선발되어 군사로써

免老에 이르기까지 복무하는 까닭에 일반민과는 다르다 胥徒 또한 서

인이면서 관부에 복무하는 까닭에 일반민과는 다르다 衛士는 특히 평

시에 도성(중도관)을 수비하기 때문에 관부에 거처하게 되고 胥徒 또

한 관부에서 직접 給事하는 까닭에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면에서 鄭玄

은 양자를 같은 성격의 계층으로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衛士가 일반

민에서 선발된 자들이고 胥는 徒 중에서 才智로 선발되고 徒는 분명

치는 않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일반 民庶 가운데 담당 직무 수행에 어

느 정도 자질을 갖춘 자로 선발된 자들일 가능성이 크다 또 漢書권74魏相傳의 顔注에 京師의 여러 관부에 와서 戍卒이 되는데 지금의

衛士가 上番하여 여러 官司에 나누어져 복무하는 것과 같다 라23) 한

것에 의하면 衛士의 이러한 복역 모습은 각 官司에 배치된 胥徒의 복

역 형태와 같다 전한 京師에서 복무중인 衛士의 수는 景帝末傾에 매

지 일반 白徒는 병역에 복역하지 않는다는 설(孫言誠 秦漢的繇役和兵役 中國史硏究 19873 및 ldquo爲正一歲rdquo辨 文史 31 198811)濱口說과 같이 正을 正卒의 略稱으로 보지만 濱口씨가 正卒을 일반적인 兵

士로 본 것과는 달리 庶民 중에서 일부가 선발되어 兵士(材官 騎士 등)가 된

것이며 이들은 일반서민과는 상대적으로 구별되는 신분 말하자면 獨自의 兵

士身分 으로서 일반서민과 같은 역역(更卒) 의무가 없었고 일반서민과는 다른

부담체계하에 있었다는 설(重近啓樹 秦漢の兵制について -地方軍を中心とし

て- 人文論集(靜岡大學) 36 1985)正卒은 일반민이 20세로 부터 2년간 복무하는 것이며 材官 騎士는 이와는

달리 전문병사로서 23세에서 56세까지 복무하는 것이라는 설(藤田勝久 前漢

の繇役勞動とその運營形態 中國史硏究 8 1984)한편 李成珪는 材官 騎士는 卒에서 징발된 전문 병사였고 1년 복역 후에도

예비역으로 분류 비상시 동원되었지만 (軍)吏나 士에 속하지 않는 자들로서

力役 복역의 한 형태인데 董仲舒가 말한 lsquo一歲力役rsquo은 바로 郡卒로 1년 복무하

는 材官 騎士의 役을 말한 것이라 한다(이성규 前漢 更卒의 徵集과 服役 方

式 -松栢木牘 47호의 분석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09 200912

pp33-34)

23) 來京師諸官府爲戍卒 若今衛士上番分諸司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9년 2만인 武帝 즉위 후 1만인으로 감하고 얼마 후 5천인을 늘려 武帝

후기에는 1만5천이었을 것으로 보인다24) 또 1개 군에서 番上하는 수

가 數千에서 2~3천인이었던 사례가 있다25) 전한 말 成帝 시기의 사

정을 말해주는 尹灣漢簡의 lt東海郡下轄長吏不在署 未到官者名籍gt

에 군현 밖으로 外勤出張 중에 있는 長吏의 현황표에 費長孫敞 十月

五日送衛士 가 있는데26) 費邑의 長 孫敞이 衛士를 送하는 업무로 출

장하여 아직 귀환하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동해군 下轄의 縣(18)邑

(2)侯國(18) 38곳(lt集簿gt) 가운데 오직 費邑에서만 衛士가 上番되고

있다 이에 의하면 衛士의 상번은 각 군에서 縣級 단위로 교대 상번하

는 것으로 보인다 濱口重國은 후한에서 正卒의 군현상비군이 폐지되

었지만 전한에서와 마찬가지로 매년 연말에 1년의 복무가 끝나고 귀향

하는 衛士들에게 황제가 향연을 베푸는 饗遣故衛士儀가 행해지고 있는

사례를 들어 衛士의 上番은 후한에서도 행해지고 있음을 지적한 바가

있다27) 아울러 그는 군현 상비군 폐지 후 중앙의 衛士 부대가 2500

내지 2600명인데 이는 중앙 인근 지역에 한정하여 징발된 자들로 보

아야 한다고 하였다28) 후한 周禮注에서 鄭玄(127-200)의 衛士 인용

이 전한시기의 사정에 의거한 것인지 아니면 그의 활동시기인 후한 후

기의 사정에 의거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후한 중 후기에도 衛士의

上番制가 부분적으로나마 유지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4) 濱口重國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隋唐史の硏究』上卷 東京

1966 1980) p286 注2)

25) 「上臨饗罷衛卒 衛卒數千middotmiddotmiddot」 (漢書 권77 蓋寬饒傳) 「河南卒戍中都官者二三

千人middotmiddotmiddot」 (漢書 권74 魏相傳)

26) 張顯成 周羣麗 尹灣漢墓簡牘校理(上篇) (天津古籍出版社 2011 3) p32

27) 濱口重國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隋唐史の硏究 (上)) p283

28) 濱口重國 위의 글 pp284-285 그 주된 근거는 속한서 백관지3 尙書條에

蔡質漢儀曰 ldquo右丞與僕射對掌授廩假錢穀 與左丞無所不統 凡中宮漏夜盡 鼓鳴

則起 鍾鳴則息 衛士甲乙徼相傳 甲夜畢 傳乙夜 相傳盡五更 衛士傳言五更 未

明三刻後 雞鳴 衛士踵丞郎趨嚴上臺 不畜宮中雞 汝南出雞鳴 衛士候朱爵門外

專傳雞鳴於宮中rdquo 應劭曰 ldquo楚歌 今雞鳴歌也rdquo 晉太康地道記曰 ldquo後漢固

始鮦陽公安細陽四縣衛士 習此曲於闕下歌之 今雞鳴是也rdquo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0中都官의 몇 몇 部署에 給事하는 衛士의 員數 규정이 있는데 속한

서 백관2 注引 漢官의 光祿勳에 81인 太宰令에 15인 高廟令에 15

인 世祖廟令에 20인 衛尉에 60인 南宮衛士令에 537인 北宮衛士令에

471인 右都候에 416인 左都候에 383인 南宮南屯司馬에 102인 (北)宮

門蒼龍司馬에 40인 玄武司馬에 38인 北屯司馬에 38인 北宮朱爵司馬

에 124인 東明司馬에 180인 朔平司馬에 117인의 衛士가 소속되어 있

다 이는 후한의 사정을 기록한 것인데 그 총합이 2637인이다 전한에

비해 그 員數가 급감한 것은 광무제의 부역 경감정책과에 의한 것이라

하겠고29) 소수지만 그 員數가 규정되어 있다는 것은 후한에서 代役制

내지 雇傭制로 대체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전과 같은 上番制가

시행되었음을 말해준다 후한에서 正卒 및 군현의 상비군제가 온전히

사라진 것이 아닌 것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후한의 2637명의

員數는 전한에 비해 대략 15 정도 되는데 전한의 사정을 기준으로 한

다 하더라도 군현의 正卒은 평생 1회만 당번이 되어 上番하더라도 중

도관의 衛士 給事가 충분히 운영될 수 있다 위의 lt윤만한간gt에서 전

체 38현읍후국 가운데 그 해에 費邑의 正卒 만이 상번하고 있고 당시

郡別로 상번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동해군이 매년 상번의 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각 正卒은 38년에 1회만 상번하면 된다 물론 군별 현

읍후국의 수가 다르기 때문에 그 回次의 수도 다르고 현읍후국별 正

卒의 수에 따라 1개 이상의 현읍후국이 함께 동원된 경우도 충분히 있

을 수 있다 그러나 각 군의 현읍후국 수가 보통 20개는 넘는다 게다

가 費邑의 正卒도 몇 개 조로 나뉘어 순차로 상번하는 것이라던가 각

郡도 매년 상번이 아니라 몇 년 만에 순번이 돌아오는 체제라면 각 正

卒의 중도관 衛士 복무는 아무리 많아도 일생에 1회를 넘기 어렵다

앞에 든 漢舊儀의 民年二十三爲正 一歲以爲衛士 는 곧 그러한 사

정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일생 1회의 복무형태는 胥徒의

29) 濱口重國은 광무제의 경감책과 아울러 虎賁 羽林 羽林左右騎 五校尉의 軍이

警備에 추가되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위의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

隋唐史の硏究(上)) p283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1평생 내지 세습되는 면과(후술) 다르지만 일반의 役 대상자에서 선발

되어 중도관에 給事한다는 면에서는 공통이다 그런데 전한에서 lsquo父死

子代rsquo였던 중앙군은 羽林孤兒 뿐이었지만 후한에서 虎賁 羽林 羽林左

右騎 五營士의 중앙군에까지 확대되었다고 한 濱口重國의 지적이 있

다 그에 의하면 후한에서 중앙군단의 세습화와 함께 바로 지방에 特

設된 군단의 세습화도 이루어지면서 魏晋시기 兵民分離의 前段을 이루

게 되었다고 한다30)후한 후기 특히 羌의 侵寇 이후 郡에 都尉를 설치

하고 全民을 징병대상으로 삼아 상비의 郡兵을 다시 설치하고 있으

며31) 여러 출신 성원을 규합한 병단이 私屬이 되기도 하고 국가의 군

단이 되기도 하며 部曲 내지 그와 같은 류의 세습 병단화 하는 과정

에 대해서는 필자도 일견을 피력한 바 있다32)따라서 징병제에 의한

正卒의 상비군 운영이 폐지된 이후 15 수준으로 급감한 정졸의 衛士

가 上番하고 있었지만 이 군단 또한 후한 중기 이후 전란시기가 되면

서 世兵化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胥徒의 세습과 후한 후기에

활동하였던 鄭玄 당시 衛士의 세습화는 일치하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鄭玄이 말한 衛士는 한초의 사정이 아니라 그가 활동하였던 후한 후기

의 사정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鄭玄이 漢의 衛士 上番制에 의거하여 주례의 胥徒制를 해석한 것

은 양자의 해명에 큰 도움을 준다 상술한 바에 의하면 몇 가지 면에

서 양자가 일치하는 점이 대체로 인정된 셈이지만 胥徒가 거의 모든

관부에 설치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漢代의 衛士는 광록훈이나 衛尉

제사 守陵등 일부 한정된 관부에 설치되어 있다 또한 주례의 胥徒

가 士 이상의 신분과 마찬가지로 代耕의 봉록으로써 농지를 받고 있는

봉록자라는 면은 지방에서 상경하여 1년의 기간만 한시적으로 복무하

는 衛士의 경우와는 자못 어울리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衛

士는 上番者로 충당되지만 일단 관부별로 員數가 규정된 員吏로서 복

30) 濱口重國 앞의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p285

31) 濱口重國 光武帝の軍備縮小とその影響 (秦漢隋唐史の硏究(上)) p30832) 박건주 한대의 지방 상비군과 部曲의 推移 (동양사학연구 118 20123)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2무하게 되기 때문에 일부는 胥徒처럼 員吏로서 수년 이상을 관부에 居

하는 어느 정도 전문화 한 衛士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鄭玄의 활

동 시기와 큰 차이가 없는 lt長沙走馬樓吳簡(이하 lt吳簡gt으로 약칭)gt

領二年四家衛士田漆十五畝 畝收限米二斛 合爲吳平斛米一百五十斛

(5-1669)에 의하면 4家의 衛士가 限田75畝 佃作에 대한 租로 畝當 限

米2斛을 납부하고 있다 lt오간gt의 限田에 대해 여러 異說이 있지만

(후술) 그 佃作者와 限米 납부자의 계층에 수십 종의 吏員들이 포함되

어 있는 것에 의하면(후술) 衛士도 그러한 吏員으로서 限田이 지급된

것으로 보인다 단지 限田을 佃作케 한 것이 吏員에 대한 경작의 부과

(경작 노동력의 징발)를 뜻하는 것인지 혜택의 수여를 뜻하는 것인지

는 아직 분명치 않지만 于振波의 분석과 같이 畝當 限米2斛의 징수는

대단히 과중한 액수인 까닭에33) 受惠라기 보다는 경작 노동력의 징발

내지 課役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祿田의 의미로 보기

어렵지만 당시 吏職의 賤役化 현상을 고려하면 그러한 시대적 여건 하

에서 實益이 거의 없는 祿田으로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어쨌

든 후한말 이래 小吏 내지 吏戶와 병사층의 세습화 진전을 고려한다면

어떠한 방식이든 그 가족의 생계를 위한 봉록의 지급이 있었을 가능성

이 더욱 커진다

이상에서 검토한 몇 가지 면에서 보면 府史와 胥徒 중에 후자 만

lsquo給徭役rsquo에 의거한 복무라는 점 등에서 다른 계층이지만 庶民在官者

로서 함께 칭해질 수 있는 층이었다고 본다 무엇보다 胥徒가 각각 제

8위와 제9위의 在官者 서열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동시에 府史는 모두 官長으로부터 선발되고 辟除 임용된 자들인데 비

해 胥徒는 일반의 요역의무를 대체하여 官에서 給事中인 계층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胥徒가 lsquo在官者rsquo로 칭해지는 이유는 관부 내에 거

처하면서 노동을 통하여 잡다한 庶事를 직접 처리하고 있으며 국가로

33) 于振波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中國社會科學院硏究生員學報 2004

-1) p122 限米 납부액의 과중성에 의거해서 限米 납부자는 屯田노동자 限米

는 屯田의 租稅라고 본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3부터 代耕의 祿田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관부의 제반 업무는 각 업무

分司 말단에 속한 胥徒의 노역에 의해 완수될 수 있다 이들은 노역

징발 대상자인 徒 중에서 재능 등의 명목으로 선발된 자들이고 그 중

에서도 才智가 있는 자가 胥이다 이들은 선임자 내지 연장자의 지휘

감독 아래 각 관서의 노역 업무와 勞役者 징발 업무 등으로 奉公한다

이것이 胥徒의 在官者로서의 職事이다 胥徒의 職事는 어디까지나 노

동이 전제되는 勞役이며 일반민의 요역의무에 대신하여 관부의 職에

給事하는 까닭에 職役이라 할 수 있고 官長의 선발로 辟除된 府史는

정식의 官員으로서 奉公하는 것이고 給徭役 에 대신하여 복무하는

것이 아닌 까닭에 胥徒의 職役과 구분하여 그 職을 職官이라 할 수 있

다 그 上級인 命官도 물론 職官이다 職官의 기본 요건은 그 官職에

任職인 상태가 그대로 王命을 받들어 奉公 중인 것을 뜻하는 까닭에

이미 王命을 수행중인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체로 일반 서민

의 기본 요역에서 면제된다 단지 면제의 세부 규정에 의하면 役의 종

류와 신분의 차등에 따라 그 면제 대상의 범위가 구분된다 한편 전쟁

에 참전하는 의무는 면제되지 않는다 모든 官吏는 유사시 종군해야

한다 官人이 본래 戰士層인 國人 출신에서 나온 때문이다 일반 서민

은 매년 일정 기간 동안 만 국가의 命을 받아 노역에 징발되어 복역하

는 까닭에 그 생업은 징발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시적인 노역이 아니라

그들이 부여받은 職인 恒常의 耕作奉公에 있다 職官은 그 복무를 통

해 생활이 영위되지만 일반 서민이 징발되어 이행하는 노역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無償이다

官職앞에 인용한 宰夫8職에 대한 賈疏의 끝 부분에 周禮 위 아래

의 글에 胥가 있으면 반드시 徒가 있는 것은 胥가 什長인 까닭이다

鱉人과 臘人의 類는 徒만 있고 胥가 없는 것은 徒만 있으면 충분하여

지휘자(長師)를 둘(빌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食醫의 類에는 胥徒가

모두 없는 것은 그 官만의 行事(업무처리)로도 충분하여 胥徒의 도움

을 빌리지 않는 까닭이다 고34) 하였는데 胥와 徒가 모두 설치되지 않

은 部署는 그 官만의 업무처리만으로 충분한 까닭이라 하였으니 바로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4府史까지의 屬吏를 官으로 한정한 것이다 즉 胥徒는 官에서 복무하고

있지만 官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庶民이고 庶民在官者 이며 그들의

복무는 職官이 아니고 職役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들도 그 職役으

로 생업을 유지하는 까닭에 職官과 동일성을 지닌다 주례에 의하는

한 胥徒가 일시적으로 복무하는 형태는 아닌 듯 하다 무엇보다도 그

들에게 祿田이 지급되고 있기 때문에 매년 혹은 매월 교체되는 요역

형태의 근무는 아닐 것이다 또한 각 분야별로 상당한 전문 지식과 숙

련도가 요구되는 업무 처리상 단기간 교체되는 근무형태를 취하였을

것 같지도 않다

이렇게 볼 때 胥徒가 官에서 일반 관리와 마찬가지로 계속적으로 근

무하면서도 그 근무를 lsquo給徭役rsquo의 代替로 본 주석이 옳다면 아무래도

胥徒는 신분제사회에서 官이 될 수 없는 자 또는 現任의 官과는 엄밀

히 구분되는 신분이었던 까닭에 그 직무 또한 (일반 서민의) 노역의

의미로 인지되고 평가된 것이 아닐까 한다 漢代사회의 신분구조는 漢

家의 주인인 天子가 그의 家人인 일반 民庶를 직접 장악하는 구조가

있고 동시에 漢家로부터 독립된 개별의 士族이 각각 lsquo家rsquo의 주인으로

서 천자와 主客의 관계가 아직 유지되는 체제가 병존하는 二元의 구조

로 되어 있다고 본 濱口重國의 견해가 있다35)이러한 입장을 발전시켜

漢帝國은 황제가 인민을 인두적으로 지배하는 lsquo齊民制rsquo와 천자가 lsquo家rsquo를

非人頭的으로 지배하는 家父長制的 관계로서의 lsquo家産制rsquo라는 이중구조

로 되어 있다고 본 好並隆司의 견해도 있다36) 그리고 이러한 이중성

의 사회구조를 公과 私 君臣관계의 면에서 진전시킨 尾形 勇은 그 臣

이 되는 층을 仕宦者와 從役者로 나누고 있다37) 위의 설들은 모두 한

34) 周禮 上下文有胥必有徒胥爲什長故也 鳖人腊人之類空有徒無胥

者得徒则足不假長師故也 食醫之類胥徒并無者以其專官行事不假胥徒

35) 濱口重國 唐王朝の賤人制度 主篇 第六章 第二節 (東洋史硏究會 1966)

36) 好並隆司 前漢帝國の二重構造と時代規定 (歷史學硏究 375 秦漢帝國史

硏究 東京 1978에 재수록)

37) 尾形 勇 漢代における 家人 と君臣關係 (史學雜誌 83-4 1974) pp3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5대의 사정을 말한 것이지만 이러한 이중구조의 신분제 내지 사회구조

는 주례의 관부 구성 체제에 의하면 상위에서 下士 내지 府史까지가

仕宦者에 해당하고 胥徒를 후자 즉 從役者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연원은 이미 周代에 있다 士人 내지 仕宦者는

그 직무로써 奉公하고 從役者는 賦稅役의 부담으로써 奉公한다38)胥徒

가 비록 官에 있는 자이지만 二元구조의 신분제 하에서 士人이 되지

못한 가운데 그 직무는 職官이 되지 못하고 職役에 머무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Ⅲ 職役 담당층의 복무 형태와 봉록 지급의

문제

周代에 lsquo給徭役rsquo의 차원에서 관부에 給事하는 胥徒가 있었다면 후대

의 요역 가운데도 그러한 항목이나 사례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다 또한 胥徒의 직무는 續漢書 輿服志上에 보이는 伍伯辟車

鈴下侍閣門蘭部署街里走卒 등 관부 말단에서 경호導從심

부름侍衛車馬관리 巡邏 등의 賤職에 종사하는 이른바 徒卒의 職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그런데 이들의 役이 民의 일반 요역 의무에 따

라 징발되어 일시적으로 복역하는 것인지 아니면 상술한 胥徒와 같이

庶民在官者 로서 관부의 최말단에서 상시로 근무하며 관부에 의지하

여 생업을 유지하는 下吏로서의 복무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후한서권58 虞詡傳에 永平(후한 明帝期) 章和(章帝期) 중에 州郡이 走卒錢으

로 貧人을 給貸(雇賃金을 지급)하였다 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集解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35

38) 尾形 勇 위의 글 pp28-29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6走卒伍伯之類란 續漢志에 이른다

(車前에) 伍伯은 公은 8인中二千石은 6인千石과 六百石은 모두 4인百石

이하에서 二百石은 모두 2인을 둔다 黃綬(4백석에서 2백석의 관리)의 武官에

는 伍伯을 따르게 하고 文官에는 辟車鈴下侍閤門闌部署街(里)走卒

을 따르게 하는데 모두 程品의 多少가 있으며 맡은 바 직무에 따라 領率하게

한다 (驛馬는 30里에 하나를 설치한다) (卒은) 모두 적색 두건과 진홍색 소창

옷을 착용한다

즉 지금 鞭杖을 잡고 따르는 자들이다 이는 錢이 있는 자로 하여금 그 (役

에) 대한 資錢을 내게 하여 몸으로 직접 노역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39)

〔 ( ) 내의 글은 결락된 부분을 輿服志 원문에서 보완함〕

인용된 속한지輿服志의 기사는 公卿 以下 縣의 三百石 官長에 이르

기까지 이들을 導從하는 下吏들의 配屬 員數를 규정한 것이다 열거된

役職들은 모두 300석 이상 관원을 導從하는 役員들인데 후한 明帝 章

帝期에 일부 지역에서 이 役職의 명목으로 走卒錢을 징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記事는 順帝 연간에 尙書僕射 虞詡가 上言한 것인데 당시

長吏 2천석관들이 謫罰者에게 貧人 구호를 위한 lsquo義錢rsquo의 명목으로 贖

錢을 강요하고 守令은 이를 빌미로 聚斂함에 順帝 원년 이래 백만전

이상을 受取한 長吏가 끊이지 않고 있는 사정을 진언한 가운데 그 이

전 永平 章和 연간에 있었던 사실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즉 州郡에

서 走卒錢을 징수하여 그 역을 면제시켜주고 대신 빈궁한 자를 그

役에 고용하여 그 錢을 雇賃으로 지급해주는 일이 있었다 당시 司空

이 이 事案을 탄핵하니 해당 州郡縣이 모두 坐되어 免黜되었었다 그

때의 전례와 마찬가지로 당시 임시로 사용하였던 제도(走卒錢 징수와

雇賃 지불)를 蠲制할 것을( 蠲制權制 ) 주청하였고 이에 조서를 내려

州郡을 切責함으로써 그러한 贖錢 강요가 이로부터 그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40) 따라서 走卒錢 징수와 導從役의 雇傭 방식 운영은 후한

39) ldquo卽今行鞭杖者也 此言錢者令其出資錢 不役其身也 走卒伍伯之類也 續漢

志曰 (車前)伍伯 公八人中二千石六人千石六百石皆四人自百石以下至二

百石皆二人 黃綬 武官 伍伯 文官 辟車鈴下侍閤門闌部署街

(里)走卒 皆有程品多少 隨所典領率 (驛馬三十里一置 卒)皆赤幘絳褠 卽

今行鞭杖者也 此言錢者令其出資錢 不役其身也

40) 후한서 권58 虞詡傳에 是時長吏二千石聽百姓謫罰者輸贖 號為lsquo義錢rsquo 託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7明帝 章帝期에 한정되어 시행된 것으로 모두 不法이었고 虞詡의 順帝

시기에는 시행되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渡邊信一郞에

의하면 이들은 秦漢에서 관부의 최하층으로서 관부에서 필요로 하는

導從役 등 일상적인 노역에 복무하며 民으로부터 강제 징발되어 복무

하였는데 후한 초에 이미 走卒錢이 징수되고 특정 임무는 면역전을

재원으로 한 고용노동으로 전환되었다고 한다41) 그러나 章帝 이후 50

여년이 지난 順帝期에 이르기까지 고용 형태의 운영이 반복되지 않고

있는 것에 의하면 고용 노동으로의 진전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

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어쨌든 導從役의 고용 방식 운영이 不法

이었다 함은 그것이 본래 징발 형식으로 운영되는 것이었음을 말해준

다 錢이 있는 자로부터 走卒錢을 받고 이 재원으로 빈한한 자를 고용

하여 雇賃을 지급하는 不法을 행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어지는 지적에

서 順帝 때 지방관들의 贖錢 강요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관리들의 私利

도모에 의한 것이다 또한 그 의무자에 富者가 있어 그 實役을 피하고

자 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導從役과 같은 下吏의 봉록은 매

우 적기 때문에 여타의 수익이 있다면 그 봉록에 꼭 의지할 필요는 없

었을 것이다 이들이 비록 관부의 員吏이고 그 吏職이 생업이 되는 것

이지만 최말단의 賤役 내지 厮役으로서 천대받는 면이 많았을 것이다

때문에 이 職役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도 많았을 것이다

예기王制에 무릇 전문기능으로 事上(奉公)하는 자가 祝史

射御醫卜 및 百工이다 무릇 전문기능으로 事上하는 자는 다른

일을 해서는 안 되며(不貳事) 근무하는 관서를 옮겨서도 안 된다(不移

官) 出鄕하면 士와 抗禮하지 못하며 家에서 仕하는 자도 出鄕하면 士

와 抗禮하지 못한다 고42) 하였다 즉 士의 신분이 아닌 일반서민 출신

為貧人儲 而守令因以聚斂 詡上疏曰 ldquo元年以來 貧百姓章言長吏受取百萬以上

者 匈匈不絕 謫罰吏人至數千萬 而三公刺史少所舉奏 尋永平章和中 州郡

以走卒錢給貸貧人 司空劾案 州及郡縣皆坐免黜 今宜遵前典 蠲除權制 於是詔

書下詡章 切責州郡 謫罰輸贖自此而止rdquo

41) 渡邊信一郞 中國古代の財政と國家 (汲古書院 2010 第三章) p128

42) 禮記王制 (十三經注疏 中文出版社) p2905에 凡執技以事上者 祝史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8이 여러 기능직의 吏職에 복무하면서 함께 관부에 있지만 본 소속의

직장에서 다른 직장으로 옮길 수도 없고 신분상 士와 대등한 위치에

처하지 못하며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또한

府史 이상의 職官과 구분되는 胥徒의 특성과 상통한다

속한서 백관지2에 射聲校尉一人 比二千石 의 本注에 服虔曰

工射이다 어두운데서 소리를 듣고 활을 쏘아 명중시키는 까닭에 이름

하였다(工射也 冥寞中聞聲則射中之 故以為名 고 하였는데 여기서

工射 는 射도 工 의 한 분야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은 그 기능으로

奉公하는 것이 그 職分이고 생업이기도 하며 다른 직종이나 직업을

갖을 수 없고 옮길 수도 없는 자들이다( 不貳事 不移官 ) 이들은 그

職能으로 생업을 유지하지만43) lsquo父死子代rsquo 의 世業으로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고 賤職인 까닭에 여기에서 벗어나 신분상승을 바라는 경향이

있게 된다 이를테면 三國魏의 黃朗은 그 부친이 縣卒로서 鈴下 伍伯

의 職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抗志 遊學하여 현령을

거쳐 군태수에 이르렀는데 부친의 일을 생각하여 屬下의 鈴下 伍伯을

부를 때 鈴下 伍伯이라 부르지 않고 항상 姓字로 불렀다 비록 분노

하였을 때도 鈴下 伍伯으로 부르지 않았다44)

그런데 導從役 복무자는 징발되어 관부 내에서 복역하는 인원 중에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전체 복역 대상자 가운데 극히 소수에 불과하

다 특히 黃綬의 武官을 導從하는 伍伯 등의 직무가 護衛와 侍衛 警備

등이 위주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무술과 용력을 갖춘 이들로 선발된

그룹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黃綬 이상의 문무관에 소속되어 그 員數

射御醫卜 及百工 凡執技以事上者 不貳事 不移官 出鄕不與士齒 仕於

家者 出鄕不與士齒

43) 禮記 王制에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百工 各以其器食之 (注에 器 能也)

44) 三國志 권23 裴潛傳 所引 魏略에 黃朗字文達 沛郡人也 爲人弘通有性

實 父爲本縣卒 朗感其如此 抗志遊學 由是爲方國及其郡士大夫所禮異 特與東

平右姓王惠陽爲碩交 惠陽親拜朗母於床下 朗始仕黃初中 爲長吏 遷長安令 會

喪母不赴 復爲魏令 遷襄城典農中郎將涿郡太守 以明帝時疾病卒 始朗爲君長

自以父故 常忌不呼鈴下伍伯 而呼其姓字 至於忿怒 亦終不言 朗旣仕至二千石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9가 정해진 것에 의하면 庶民在官者 로서의 胥徒에 상당한다 봉록이

지급되는 일자리이며 민의 공동의무인 일반요역에 대신하여 복무하는

것인 만큼 면역전의 授受 행위는 不法이다

상술한 輿服志에 각 300석 이상의 官員 당 이들의 배당 員數가 규

정되어 있는 것에 의하면 이들도 분명히 관부의 한 구성원들이다 속한서 백관지 注引의 漢官에는 官長 내지 命官級 屬下의 員吏 員數

및 秩祿을 기재하고 있다 이를테면 속한서 백관2에 衛尉 卿一人

中二千石 本注曰 掌宮門衛士 宮中徼循事 丞一人 比千石 이라 하였

고 注引에 漢官曰「員吏四十一人 其九人四科 二人二百石 文學三人

百石 十二人斗食 二人佐 十二人學事 一人官醫 衛士六十人」이라 하

였다 이 가운데 百石까지는 봉록 지급이 명시되어 있지만 그 이하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봉록이 전혀 지급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斗食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斗升으로 계산되는

日數 계산에 의한 연봉액이 정해져 있다 百官受奉例의 注 所引 漢書音義에 斗食祿 日以斗爲計 라 하였고 한서 百官表上에 漢官名

秩簿에 이르길 斗食은 月俸 11斛 佐史는 월봉 8斛이다 一說에 斗食

이란 연봉이 百石에 이르지 못하여 日當으로 계산해서 1斗2升을 食하

는 까닭에 斗食이라 한다 고 하였다 속한서 백관5의 百官受奉例에

서는 百石이 月 16斛이고 斗食 이하는 위와 같다 또 墨子 雜守篇에

斗食은 1년에 36石이다 參食이면 1년에 24石이고 四食이면 1년에 18

石 五食이면 1년에 14石4斗 六食이면 1년에 12石이다 斗食은 5升을

食하고 參食은 3升小半을 五食은 2升 六食은 1升大半을 食한다 하루

에 2회 食한다 고 한데서 알 수 있다 斗食 은 1食에 5升 하루에 2

食이니 매일 1斗를 받아 1년 360일에 총 36石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

參食 은 1食에 3과 13升 즉 13斗를 받아 1일에 23斗가 되고 1년에

24石을 받는다 그 이하의 四食에서 六食까지는 斗食 이하에 열거된

下吏의 지급액 규정일 것이다

閻步克에 의하면45) 周代에서는 士 이상에게 祿田을 지급하여 그

수익을 食하게 하는 것으로 연봉을 지급하는 형태였는데 하급관리나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0工醫師 등 기술직 및 兵員에게는 月 단위로 지급하는 이른바 稍食

형태로 운영하였으며 나중에 증액 고정화 되고 아울러 錢으로 지불하

게 됨으로써 月俸의 秩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稍食 이란 주례天官

宮正에 宮正이란 왕궁의 戒令糾禁을 맡는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그 출입을 검찰

하고 그 稍食을 균등히 하고 그 淫怠하고 奇邪한 民을 제거하고 그

什伍를 모아 道義를 가르친다 月이 끝나면 그 稍食을 會計하고 1년이

끝나면 그 (吏職의) 行事를 검열한다 라46) 하였는데 이 稍食에 대해

鄭司農은 禄廪 疏는 宫中官府 등의 月禄 이라 하였다 즉 稍食은

月俸인 셈인데 이를 하급관리의 月俸이라 한 것은 國語晋語4에 公

은 貢을 食하고 대부는 읍을 食하며 士는 田(公田)을 食한다 庶人은

力으로 食하고 工商은 官(官으로부터 받은 田)을 食하며 皁隸(吏에

속한 徒隸)는 職을 食하고(각 담당 職의 大小에 따라 食祿) 官宰(大夫

의 家臣)는 加(大夫의 家臣)를 食한다 에서 公 大夫 士까지는 國 邑

田을 봉록으로 받는 까닭에 연봉을 받는 것이 되고 庶人 이하는 관부

에 給事한 力(勞役) 등을 계산하여 지급 받는 까닭에 월봉이라는 것이

다 또 주례 夏官 校人의 校人은 王馬之政을 관장한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馭夫

의 祿과 궁중의 稍食을 균등히 한다 라 하였는데 그 注에 師圉는 府

史 以下다 고 하였다 즉 府史 이하 下吏의 봉록 관련 업무이다 또 주례 天官 醫師에 연말이 되면 그 醫療한 실적을 검사하여 그 食을

정한다 十점 만점이면 上 十에 一을 失하면 次等 十에 二를 失하였

으면 그 次等 十에 四를 失하였으면 下로 한다 하였고 또 방비를

굳건히 하기 위해 성곽 溝池 등의 役事와 守備를 관장하는 掌固는 이

에 복무한 士庶子와 衆庶에 대해 필요한 도구와 財用을 공급해주고 그

稍食을 균등히 한다고 하였다(同 夏官 掌固) 이러한 자료에 의하면 府

史 이하의 下吏에 대해 祿俸 지급의 額이 기술되어 있지 않는 것은 食

邑田이나 百石까지는 年俸의 일정액이 규정되어 있고 이 액수가 월봉

45) 閻步克 從稍食到月俸mdash戰國秦漢祿秩等級制新探 (學術界 20002)46) 宮正 掌王宮之戒令糾禁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幾其出入 均其稍食 去其淫怠與其奇邪之民

會其什伍而敎之道義 月終 則會其稍食 歲終 則會其行事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1으로 나뉘어 지급되는 것과는 달리 그 이하의 吏는 月別 給事한 日數

나 실적을 계산하여 지급하는 月俸 형태였고 그 총합이 百石 이하였

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앞에 든 百官名秩表나 묵자의 기사는 그

러한 사정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府史 이하인 胥徒나 그 직급에 상당

하는 속한서 백관지의 각 관부별 官長 屬下의 員吏로서 有秩 아래에

나열된 직급들도 그 근무일수나 실적에 따라 봉록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有秩의 官은 百石 이상의 年俸이 지급되는 下限의 관리

를 가리키며 佐史 이하의 월봉 수입자에 대비하여 쓰이는 용어이다

근래 楊振紅 廣懶薰雄 宮宅 潔 등은 佐史 이하의 下吏에는 1개

월을 단위로 윤번 근무하는 자들이 있어 이들은 그 이름 앞에 更 이

붙고 이에 대비하여 常勤하는 자들은 冗 이 붙어 구분되었다 하고

그 내역과 성격을 고찰하였다47)사실 후대의 冗 내지 冗官 이 보통

散官 의 뜻이었던 것에 비해 선진에서 진한 시기의 여러 자료에 보이

는 冗 은 위의 연구들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更 에 대한 相對로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lt운몽진간gt 秦律十八種 工人程에 冗

隸妾 2인은 工 1인에 當하고 更隸妾 4인은 工 1인에 당한다 小隸臣妾

으로서 可使者 5인은 工 1인에 당한다(冗隸妾二人當工一人 更隸妾四

人當工一人 小隸臣妾可使者五人當工一人) 에서48) 冗隸妾은 更隸妾에

비해 2배의 우대를 받고 있으며 lt이년율령gt史律에 大祝이 祝을 시

험해보아 祝에 뛰어나고 祠事에 밝으면 冗祝으로 삼아 이들을 冗한다

(大祝試祝 善祝 明祠事者 以爲冗祝 冗之) 고 하였는데 이 冗 은 같

은 史律의 祝十四章으로 學童들을 시험해서 능히 7천언 이상을 誦할

수 있어야 祝으로 삼고 5更으로 한다(以祝十四章 試祝學童 能誦七千

言以上者 〔乃得〕爲祝 五更) 에서의 更 과 相對로 위치하고 있다

47) 楊振紅 秦漢簡中的ldquo冗rdquordquo更rdquo餘供役方式middotmiddotmiddot從lt二年律令 史律gt談起 (簡帛硏究 廣西師範大學出版社 2006) 廣懶薰雄 秦漢律令硏究 (汲古書院

20103) pp297-304 宮宅 潔 漢代官僚組織の最下層 - 官 と 民のはざま-

(東方學報 87 2012) pp11-1248) 睡虎地秦墓竹簡 (北京 文物出版社 1978) p74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2또 lt里耶秦簡gt에도 冗戍士五(伍) (⑧666+ ⑧2006)와 更戍(某) (⑧

143 ⑧149 ⑧694)의 對稱 용어가 있다 한편 주례春官 槀人에 外

內朝의 冗食者의 食을 공급해주는 것을 관장한다(掌共外內朝冗食者之

食) 라 하였고 이에 대한 鄭注는 冗食者란 (관부에 밤까지) 머무르며

문서 작업을 하는 것이 마치 지금의 尙書의 屬吏로서 當直하는 者들과

같다(冗食者 謂留治文書 若今尙書之屬 諸直上者) 賈疏는 ldquo(鄭注에

서)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rdquo라 한 것은 또한 漢法을 인용하여 설명한 것이니 차례로 당직

하는데 관부에 留宿하며 (집에) 돌아가지 않는 까닭에 반드시 음식을

제공해야 한다(亦引漢法說之 謂以次當直 留在朝 宿不還 須以食供之)

고 해석하였다 여기서의 冗 은 夜勤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일

상 정규의 일을 넘어선다는 뜻을 지닌다 冗食 은 야근하는 관리에게

제공되는 음식이기 때문에 정규의 음식 지급에 추가되는 것을 의미한

다 전한 成帝 河平 연간에 수해를 입은 군국을 구휼하면서 그 지역민

을 다른 군국으로 피신시키고 그 곳에서 冗食케 하라 고 하였는데49)

文穎은 冗이란 散이다 廩食을 散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遊離되어) 정착하지 못하는 戶를 役事시켜 일자리를 주는 것이다(冗

散也 散廩食使生活 不占著戶給役使也) 로 해석하였고 如淳은 離散

된 자들에게 給食하고 관부는 그 임금을 지불한 것이다( 散著人間給

食之 官償其直也 )고 해석하였다 즉 수해로 유민이 된 자들에게 給

食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하고 아울러 役事의 일자리를 주어 그 임금

을 지불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석자들이 冗 을 散 의 뜻으

로 해석한 것은 국가의 재정을 풀어서 지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國錢의

lsquo散布rsquo라는 뜻으로 본 것이다 이 또한 정규의 재정 지출을 넘어선 추

가의 지출이므로 실은 위의 사례들과 같은 뜻이 된다 또 한서권24

하 식화지하에 또한 周官의 稅民 제도에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民이 떠돌아다니면서

일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夫布一匹을 납부하게 하며 布를 납부할 수

49) 漢書 卷10 成帝紀 河平4년조에 遣光祿大夫博士嘉等十一人行舉瀕河之郡水

所毀傷困乏不能自存者 財振貸 其爲水所流壓死 不能自葬 令郡國給槥櫝葬埋

已葬者與錢 人二千 避水它郡國 在所冗食之 謹遇以文理 無令失職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3없는 자에게는 縣官에서 冗作케 하고 이들에게 衣食을 제공한다 고50)

하였다 여기서 冗作 이란 정규의 요역 부과 외에 징벌의 뜻으로 역

을 추가하여 부과한다는 의미이다

또 lt운몽진율gt 司空에 冗邊 이 있다

백성에게 모친 및 동생이 있어 隸妾이 되었는데 謫罪가 아니고 冗邊5

歲에 복역하되 근무 기간을 無償으로 하고 1인을 면하여 庶人으로 하고

자 한다면 이를 허용해준다(百姓有母及同牲(生)爲隸妾 非適(謫)罪殹(也)

而欲爲冗邊五歲 無賞(償)興日 以免一人爲庶人 許之) (司空 p91)

이 冗邊五歲 도 규정된 정규 戍邊役의 額 외로 추가된 役이란 뜻의

용어이다 그래서 이 또한 위의 사례들과 마찬가지의 뜻이다 이렇게

冗 에는 更 에 相對한 지칭으로 更 에 복무하는 자들에 비해 전문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갖춘 자들이거나 기타 사유로 정규의 額을 넘

어서는 복무를 하는 것 또는 그 役者 또는 職名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즉 정규 일반의 更 방식의 근무 額(日數)에 비해 담당

분야의 뛰어난 능력이나 징벌 등 기타 사유로 더 많은 근무를 추가로

하게 되는 자들의 職을 冗 이라 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러한 冗 을 쓰는 데는 국가의 재정 지출도 추가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국가재정의 추가 지출의 뜻으로서 散(散布)

이라는 뜻이 되어 후대 冗官==散官의 칭이 생긴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해석된다면 그간 충분히 해석되지 못한 lt운몽진률gt廏苑

律에 연간의 養牛 실적 평가에서 下等을 받은 宂皂에게 2개월의 복무

기간을 추가하는 벌을 내린다는 律文에 보이는 宂皂51) 그리고 同 秦

律雜抄 屯表律에 나오는 lsquo冗募rsquo도52) 위와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50) 又以周官稅民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民浮游無事 出夫布一匹 其不能出布者 冗作縣官 衣食

51) lt雲夢秦律gt p30 廏苑律의 율문 卒歲 以正月大課之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殿者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罰

冗皂者二月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52) lt雲夢秦律gt p145 秦律雜抄의 율문 冗募歸 辭曰日已備 致未來 不如辭

貲日四月居邊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4것이다 廣懶薰雄은 更 을 非常勤 冗 을 常勤의 뜻으로 요약하였는

데53) 그러한 일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는 更 이 본래 규정된

交代근무라면 冗 은 본래의 규정액을 넘어선 근무를 뜻하는 까닭에

그러한 해석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설문宀部에 冗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人在屋下 無田事也 라 하였는데 無田事 로서의 冗의 뜻도 更

이 당번으로 給事하는 기간을 제외하면 田事에 있어야 하는 것과는 달

리 冗은 비당번인 경우에도 관부에서 給事하는데서 칭해진 것이라 하

겠다

예기중용에 忠信인 자에게 봉록을 두텁게 주는 것은 士를 勸함이

고 때로(일시적으로) 使役시키되 賦斂을 가볍게 하는 것은 백성을 勸

하기 때문이며 日用으로 근무시키되 그 근무기간과 성과를 계산하여

급료(廩)를 지급하여 그 근무에 합당하게 보상해주는 것은 百工을 권

하기 위함이다(忠信重祿 所以勸士也 時使薄斂 所以勸百姓也 日省月

試 旣廩稱事 所以勸百工也) 라 하였다 여기서 忠信 이란 禮記禮器에 忠信 禮之本也 라 하였고 여기서는 이를 修學하고 실행할 수

있는 사대부 내지 命官層을 가리키고 있다 百工에 대해 日省月試

한다 함은 근무한 日數와 그 성과를 월 단위로 계산한다는 것이다 注

에서 旣廩稱事 의 旣 를 lsquo餼rsquo로 해석하고 lsquo餼廩rsquo은 稍食 이라 하였

다54) 여기에서 일반 백성에게 때로(일시적으로) 사역시킨다는 時使

가 곧 更 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진한 시기 更徭制의 운영에

서 충분히 입증된다 宮宅 潔은 年俸이 있는 것이 有秩인데 그 最下가

百石이며 연봉이 없고 본래 日食과 月食으로 지급되는 등급을 斗食이

라고 한다 하였다55) 그가 말한 斗食은 백관표에 나열된 斗食과 그 이

하의 여리 吏職을 포함한 것이다 그런데 일반 백성에게 更役이 부과

되고 그들에게 동원된 기간 동안 당연히 매일의 給食은 지원되겠지만

그 일반 요역으로서의 更役에 대한 日當의 보수가 지급된 것은 아닐

53) 廣懶薰雄 앞의 글 p304

54) 注에 日省月試 考校其成功也 lsquo旣rsquo讀爲餼 餼廩 稍食也

55) 宮宅 潔 앞의 글 p39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5것이다 그 일반 요역은 일반 백성의 기본 의무사항인 까닭이다 반면

百工의 근무일수와 성과액에 대해 稍食 (日俸 내지 月俸)이 지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매 끼니의 급식이 아니라 工役에 대한 보수 내

지 給料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근무일수라든가 성과액을 계산

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기서의 百工은 관부의

員吏에 속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관부에 속하여 매

끼니의 식사 뿐 아니라 工役한 일수와 성과량에 따라 봉록이 지급된다

는 것이다 그래서 봉록 지급은 錢이나 곡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반

면 전기한 국어晋語4 文公修內政納襄王 章에 公食貢 大夫食邑 士

食田 庶人食力 工商食官 皁隸食職 官宰食加 에서 工商食官 의 工

商은 모두 관부의 員吏에 속한 자들인데 그 注에 옛날에는 田을 주는

것으로 祿俸을 제정하였다 관부에서 주는 廩이란 곧 관부에서 田을

받는 것이니 후세에 錢粟을 주는 것으로 祿俸을 제정한 것과 같지 않

다(古者以田制祿 官廩之者 卽受田於官 非如後世之以錢粟制祿也) 고56)

하였다 또 한서권24식화지상에 士工商이 田을 받는 것은 5口가 받

는 것이 되어야 농부1인이 받는 것에 當한다(士工商家受田 五口乃當

農夫一人) 고 하였다 즉 百工과 商賈는 그 직무에 따라 俸祿을 받는

데 후대와 같이 錢粟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田으로 받으며 그 액수는

일반 농민의 15이라는 것이다 이는 전술한 주례의 胥徒가 최하품

의 田 1百畝를 俸祿으로 받는 것과 lsquo以田制祿rsquo이라는 면에서 일치한다

그리고 lsquo以田制祿rsquo이 후대에 lsquo以錢粟制祿rsquo으로 변천 된 것은 秦漢의 사

례를 통해 분명하다 어쨌든 관부의 員吏인 百工과 商賈에게 일반 백

성의 更役과는 달리 祿田 또는 월봉 형태의 錢粟 지급이 행해진 것이

라 하겠다 또한 工商이 일반 요역 대신에 전문기능인으로서의 工役과

관부 소요 물품의 調達役의 職分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이 또한 職

役에 해당하는 셈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관부의 員吏이면서 斗食 보다 下位에 위치하여 稍

56) 國語正義(下冊) (董增齡 撰 巴蜀書社 1985) pp815-6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6食 내지 月俸을 받는 여러 導從役 祝醫工商 등의 役은 그 職分

의 役 즉 職役으로 奉公한다 그런데 후한 초에 이 職役의 면역전으로

서 走卒錢을 징수하고 그 재원으로 빈민을 고용한 것이 不法이었으며

수십 년 이어지다가 금지되고 違法한 관료들이 처벌받고 있는 것에

의하면 이 役들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戶가 지정되어 있어 여타의 일반

戶가 대신하여 맡을 수 없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은 導

從役 등의 담당자는 일반서민이되 그 중에서 특별히 선발된 층으로 구

성되어 전문의 분야를 세습하며 의무로 담당하는 하나의 신분층으로

형성되어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그 役은 하나의 身分役이기

도 하였던 셈이다 또한 그 代役錢으로서 走卒錢 징수 및 雇傭 방식이

나오게 된 것은 그 역의 담당층 가운데 錢으로 實役을 피할 수 있는

부유충이 형성되었고 후한 前期에 전통의 身分制가 느슨해진 여건에

서 身分役의 근본 형태가 유지되지 못하고 일탈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속한서백관3에 執金吾의 속관 중에 화려 장려한 복장

과 장식으로 황제의 행차를 호위 수종하는 騎士로서 緹騎二百人이 있

는데57) 本注에 無秩 比吏食奉 이라 하였다 즉 吏가 아니지만 吏의

대우를 받아 봉록을 받는 계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下吏에

들지 못하지만 봉록을 받는 면에서는 동일한 계층이다

한편 앞에 든 國語 晋語4에서 工商食官 에 이어 下記된 皁隸(吏

에 下屬한 徒隸)食職 이 있다 이 皁隸 계층은 지금까지 검토한 庶民

在官者 로서의 胥徒導從役 담당자 및 樂祝醫衛士工商 등

보다 下位 내지 그 下屬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그 담당 신분과 그 役의 성격에 대해 검토한다

Ⅳ 下層 員吏의 役과 徒隸層의 役

57) 당 조목의 注 所引 漢官曰 執金吾緹騎二百人 [持戟]五百二十人 輿服導從

光滿道路 群僚之中 斯最壯矣 世祖歎曰 ldquo仕宦當作執金吾rdquo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7

앞에서 검토한 관부 구성의 최말단에 위치한 주례에서의 胥徒와

춘추진한 시기의 導從役 담당자 및 樂祝醫衛士工商 등의 下

吏層 외에 그 下屬으로 보이는 皁隸가 있다 앞에 든 각 신분에 따른

奉公의 職分을 나열하고 있는 國語晋語4의 記事 皁隸食職 의 注에

皁隸를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라 한 것에 의하면 이 계층은 위에 열거한

여러 下吏에 下屬한 노역자들이라 할 수 있다 胥徒와 導從役 담당자

등은 각각 주례와 漢官 등에 그 員數가 규정된 까닭에 이들은 員

數 규정에 들지 못한 皁隸에 대비해 下層의 員吏로 칭할 수 있다

皁隸가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라 하였으니 곧 관노비 내지 그에 類하는

계층일 것인데 그들이 lsquo職을 食한다rsquo고 한 것은 각 분야의 官署에 分屬

되어 그 職務에 給事함으로써 생업을 삼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皂

隸 牧 圄 僕 등이 후대의 천민이나 隸民이 아니라 일반민이었다

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58)그러한 주장은 이들이 대체로 관부에 給

事하는 계층으로 여러 기사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고 위의 皁隸食

職 은 곧 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관부에 給事

하는 면으로 인해 예속성이 있게 된다는 면이 있다 후술하는 바와 같

이 그들이 일반 서민 출신이면서도 후대에 그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모

두 예속신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통용되는 것은 그러한 관부에의 예속

성이 분명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예속성을 말해주는 것이 또한 職

役의 한 속성이다

한편 國語 晋語4 文公修內政納襄王章에 (晋文公)元年 春에 公(晋

文公)과 부인 嬴氏(秦穆公의 女인 文嬴)가 王城(秦의 地名)에서 돌아올

때 秦伯이 衛士3천인을 納하였는데 실로 기강이 있는 僕들이었다(元年

春 公及夫人嬴氏至自王城 秦伯納衛三千人 實紀綱之僕) 고59) 하였다

秦漢의 衛士 출신과 달리 여기서는 그 출신 신분이 僕인 자들로 구성

58) 黃中業 春秋時期的ldquo皂隸牧圉rdquo屬于平民階層說 (齊魯學刊 阜師院學報) 1984-2 19844) pp69-72

59) 위의 책 pp809-810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8되어 있다 이 당시는 秦 穆公의 지원으로 晋의 文公이 귀국하여 懷公

을 죽이고 즉위한 때인 까닭에 군사 내지 호위부대의 지원이었다 그

衛士 군단의 신분은 皁隸層에 들어가는 僕인데 관부에 給事하는 職分

은 衛士이다 이들의 紀綱이 선 자들이었다고 한 것은 본래 秦에서도

衛士의 職으로 給事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춘추기에 邑數百이나 社

數百의 단위로 국가 사이에 分與되는 일이 자주 있었고 3천인에 이르

는 多數의 전문 집단이 타국에 分與된 것이긴 하지만 일부 전문의 인

력을 分與나 上納 하는 것 또한 당시 종종 일어났던 일이다 어쨌든

그 衛士집단이 모두 僕이었다는 것은 일반민이 아니고 관부에 예속되

는 신분이었음을 말해준다 예속신분으로 궁성을 지키는 衛士로 삼는

것은 주례地官 師氏에서 그 직무 가운데 (師氏는) 그 소속의 四夷

之隸를 거느리고 각기 그 병력으로 왕성의 문밖을 지키는데 복무하며

또한 (행차 때) 앞에서 길 정리를 한다(師其屬帥四夷之隸 各以其兵服

守王之門外 且蹕) 에 이미 보이고 漢武帝 때 제후왕 貴戚의 不服을

다스리기 위해 중앙 내사지역을 감찰하는 司隸校尉와 지방의 刺史에게

중도관의 徒奴 1200인을 보내어 二千石官을 독찰하게 하였는데60) 이

1200인의 徒奴부대는 이후 사예교위 내지 刺史 직속의 상비군단이 되

었고 그 성원은 세습 병사집단의 근간이 되어 牧使 刺史 등 將領下의

公兵이나 私兵으로 활약하였다61) 漢官舊儀 卷上에 漢代 長安에 騎

亭長 79인과 함께 6월 1更의 倉頭盧兒를 給事하게 하였다62)이들 四夷

之隸나 徒奴倉頭盧兒 등은 적군포로이거나 刑徒 계통 출신으로 관부

에 예속된 신분일 것이다 특히 관부에 囚禁된 형도들은 여러 방면의

60) 北堂書鈔設官部 및 漢官儀권2補遺2에 ldquo司隸校尉는 武帝 때 처음 설치되

었다 이후 諸侯王 貴戚이 不服함에 中都 中官의 徒奴千二百人을 (파견해서)

一校尉部刺史에게 속하게 하여 二千石官을 독찰하게 하였다(司隸校尉 武帝初

置 後諸侯王貴戚不服 乃以中都中官徒奴千二百人屬爲一校尉部刺史 督二千石

也)rdquo

61) 이에 대해서는 박건주 한대의 지방상비군과 部曲의 推移 (동양사학연구118 20123) 참조

62) 長安給騎亭長七十人 六月一更倉頭盧兒 (漢官六種 北京 中華書局 1990

9) p3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9노역에 활용되었는데 근래 石岡 浩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刑徒 집단

은 크게 세 부류 내지 등급으로 나누어져 활용되고 대우에 차별이 있

었다고 한다 즉 가장 上位에 있는 司寇는 특정 임무에 복무하는 것이

정해진 형도이며 전택을 소유하여 戶主가 되는 권리(lt二年律令gt

310-316簡) 왕조로부터 사여 받는 권리(同 291-293) 子가 士伍로 복

귀할 수 있는 권리(同 364-365)를 갖는다 다음으로 徒隸 는 특정 관

서에 예속하여 직무를 숙지하였거나 기술에 숙련하여 전문기능자에 동

등한 가치를 지니는 형도 를 지칭하며 그것으로 동일 직장에 계속 근

무하는 까닭에 일반 형도와는 달리 토목공사나 물자운송 등의 노역에

서 제외된다 또한 왕조에 공헌하는 자로서 사여를 받는 대상도 된다

(同 291-293) 즉 그들은 隸臣鬼薪城旦이면서 숙련자 기능자로서

일반 형도보다 우대받는 자들이다 위 양자에 비해 일반 형도는 위의

여러 특혜를 받지 못하며 城旦은 주로 토목사업에 隸臣은 주로 여러

관서의 잡다한 노역에 복역한다63)이는 충분히 수긍되는 견해이다 이

가운데 徒隸는 관부 내 각 分署의 전문 직장에 分屬되어 사역될 것이

기 때문에 전술한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로서의 皁隸가 곧 그들의 주요 부

분이 될 것이다 그 중에 일반 관노비로부터 개인적 재능과 기술로 선

발되어 해당 관서에 給事하는 자들도 포함될 것이다 단지 정규의 전

쟁에 형도를 동원하는 사례가 많은데 그들이 정규의 병사가 된 것은

아니고 군공을 세워 免刑되기 이전에는 그대로 형도인 것과 같이 함께

관부에 給事하고 있다 하더라도 각 신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상의 검토에 의하면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에는 이른바 lsquo吏에 下屬

한 徒隸rsquo로서 食職하는 皁隸집단이 있고 그 구성에는 관노비 뿐 아니

라 적군포로나 관노비 및 형도 출신의 衛士 그리고 刺史 牧使 등의

將領下에 있는 직속 상비군 형도 가운데 司寇 그리고 기능과 숙련으

로 형도 중에서 선발된 職能의 徒隸집단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員

吏이되 下吏인 계층의 복무가 그 신분에 따른 職役인 것과 마찬가지로

63) 石岡 浩 秦漢代の徒隸と司寇 -官署に隸屬する有職刑徒 (史學雜誌 121-120121) p32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0이 皁隸層의 복역도 모두 관부에 생업을 의존하는(食職) 職役이라 할

수 있다

또 좌전에 주로 보이는 輿人이 있는데 同 昭公7년조에 天에 十日

이 있고 人에 十等이 있으니 下가 上에 事하는 所以이다 까닭에 王의

臣은 公 公의 臣은 大夫 대부의 臣은 士 士의 臣은 皁 皁의 臣은

輿 輿의 臣은 隸 隸의 臣은 僚 僚의 臣은 僕 僕의 臣은 臺이다 馬

에 圉가 있고 牛에 牧이 있어 百事를 待한다 라 하였다 古來의 여러

注疏에서부터 이미 lsquo輿人rsquo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지만 이를 분석한 宇

都木 章의 견해에 의하면 縣鄙의 野人이 평시이든 戰時이든 國都의

귀족에 징발되어 葬儀戰士補助 車馬와 관련되는 여러 役務에 종사

하는 때 그들을 lsquo輿人rsquo이라 칭하였다고 한다64) 여러 자료에 의하면 皁

에서 牧에 이르는 서열 순위가 어디에서나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

고 대개 동일 계층의 異稱인 경우가 많다 皁 이하의 서열에 이렇게

다단계의 臣屬 관계가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같은 徒에도 上位 순서로 胥와 徒 및 그 徒의 지휘를 받는 징발된 徒

가 있으며 員吏에 들어가는 導從役 등의 庶民在官者 가 있고 그에

下屬하는 皁隸의 구분이 있는 것에 의하면 최소한 士 아래의 서민 계

층에 3 - 4 단계의 차등 신분이 있을 수 있다 위의 十等 순위에서 士

이하에 위치하여야 할 庶民이 곧 皁輿 등에 해당할 것인데 모두 관

부에 給事하는 면에서 후대 예속신분을 가리키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

다 그리고 일반 서민 가운데서도 皁輿 이하는 모두 전문의 職分으

로 관부에 給事하는 의무가 주어진 계층이므로 일반 농민으로서의 서

민과는 구분되는 서민이었다고 생각한다 즉 일반 농민이 농업을 생업

으로 하며 일반의 요역 의무가 주어진 반면에 皁輿 등은 주로 전문

의 기능을 요하는 관부의 직무에 給事하는 것으로 일반요역을 대신하

며 때문에 일반 서민이면서 관부에 예속된 신분의 일면을 지닌다 그

렇지만 관노비나 형도로서 관부에 예속되어 給事하는 신분과는 명확히

64) 宇都木 章 輿人考 (三上博士頌壽記念 東洋史考古學論集 朋友書店 1979

12) pp108-11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1다르며 주례의 胥徒와 같은 下吏의 員吏 보다 보통 下位이지만 胥

徒와 마찬가지로 주로 전문 기능의 職分에 복역한다는 면에서 같고 그

일부분은 下吏에 충당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곧 胥徒가 일반 서민의

徒로부터 선발된 자들인 것과 같다 위의 十等 서열은 농민을 제외하

고 관부에 給事하는 신분만을 총괄하여 나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

술한 工商食官 皁隸食職 도 모두 관부에 給事하는 工商과 皁隸를 열

거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복무도 당연히 職役이 되는데 그 職能 내

지 職分의 종류별로 숙련도 및 경력 등에 따른 그룹 내에서의 서열이

있게 되고 이를 계층으로 인식해서 lsquo皁臣(臣屬)輿rsquo 등과 같은 記述이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 각 직능별 部署별 전문화된 職役의 활용은 관

부의 운영상 당시의 사정으로는 불가피한 면이 있다 그러한 체제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점차 계층 구분의 엄밀성이 느슨해지고 세분된

차등의 질서가 점차 단순화되면서 그 용어도 혼용되기에 이른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위의 계층 구분은 세분된 서열만이 아니라 각 계층

의 담당 職分을 구분해주는 칭호로 쓰인 면도 있다 그렇다면 輿人은

戰時에 주로 戰車부대를 보조하는 직무 분야를 담당하는 계층이라 할

수 있고 그러한 면에서 여러 下屬 계층 가운데 가장 상위의 계층이었

지 않을까 한다

한편 이상의 皁隸層이 본래 일반서민 출신이었다는 입장에서 보면

관부에 給事하되 향리에 거처하면서 일정 기간 만 순번으로 복역하는

交代制가 있었을 수가 있고 또는 대체로 일부 기능자나 世戶에 한정

되었겠지만 휴가 기간 외에는 상근하는 형태도 있었을 것이다 예속된

신분인 경우 그 거처도 대체로 관부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앞에 든 秦

漢律에 교대 근무하는 更隸妾의 존재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근무

기간에만 관부에서 거처하는 예속 신분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刑徒

중에서도 司寇는 田宅을 소유하고 戶主가 될 수 있었으며 徒隸도 賜

與를 받을 수 있는 까닭에 이들 중에 일부는 관부 밖에 따로 거처를

지니고 출퇴근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단지 衛士나 部曲 집단은

대체로 屯營 내에 거주하였을 것이다 위로는 승상으로부터 아래로는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2하급의 吏에 이르기까지 吏舍에 거처하며 휴가 기간이 되어야 비로소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는 大庭脩의 연구가 있지만65) 漢舊儀 卷下

에 舊制에 尉는 모두 관서에서 거처하였다( 舊制尉皆居官暑 ) 라66)한

것에 의하면 舊制 가 어느 시기를 말하는 것인지 불분명하지만 宿衛

와 경찰 임무의 尉職 외에는 관서에서 거처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음을

말해준다 매년 직급에 따른 수개월의 휴가 기간이 설정되어 있지만

이는 성내에 거주하며 매일 출퇴근 하더라도 고향은 먼 곳에 있는 경

우가 많아 歸鄕 휴가를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外地 출신으로 城內

에 거처가 없는 관리들을 위한 吏舍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吏舍의 존재가 모든 관리의 관부 거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居官府의 여러 給事職 관노비 司寇나 일부 徒隸를 제외한 일

반 형도 여러 當番의 宿衛職 등을 제외한 관리는 官舍 밖의 私家에서

거처한 것으로 본다

庶民在官者 로서의 職役 복무는 常勤과 교대근무의 두 시스템으로

운영되었을 것이다 胥徒는 본래 모두 징발된 徒 가운데서 재능 있는

자로 선발되어 관부에의 給事가 생업이 된 자들로서 祿田을 받는 자들

이며 員數가 책정되어 있는 까닭에 常勤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

나 함께 징발된 여타의 徒는 胥徒와 같은 給徭役의 奉公을 행하지만

순번으로 동원된 기간 만 한시적으로 복무하는 까닭에 동원 기간 동안

의 食料 이외에 노동의 보수를 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그들은 만

민의 기본 의무를 職役으로 이행하는 것일 뿐이다 정부로서는 관부에

給事할 人才와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지만 필요한 부

분을 모두 常勤하는 자로 임용하여 그들의 생업을 봉록 지급 등으로

전면 지원하는 것은 재정에 큰 부담이 되는 것이었다 즉 관부에서 필

요로 하는 특정 업무 기능자들을 일반 요역 면제 대신으로 복역케 하

고 이를 순번제로 운영하면 복무 당번 기간 외에 그들은 다른 생업을

65) 大庭脩 漢代官吏の勤務休暇 (秦漢法制史の硏究 創文社 1982) p584

66) 앞의 漢官六種 p81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3꾸려나갈 수 있기 때문에 국가는 그들에 대한 생업 유지 지원 부담이

훨씬 적어진다 관부 給事層 가운데 命官과 員吏 이상이 常勤制라면

그 이하의 여러 職役層들은 대체로 교대근무제 중심으로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테면 lt奏讞書gt 案例17에서 秦王政元年 雍縣人 樂人 講이 자신

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사건 당일 자신은 踐更에 복무하러 11월 한

달간 함양의 外樂(관서 기구 名)에67) 소집되어 복무 중이었음을 진술

하고 있다 따라서 함양에 거주하지 않은 樂人이 그 관서에서 常勤하

지 아니하고 특정시기 일정 기간 만 교대로 근무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獄事에서 피고인 樂人 講이 踐更으로 1개월 간 복무한

곳이 外樂인 까닭에 일반 요역이 아니라 樂人의 職役을 이행한 것이라

고 본다 전한 哀帝 때 樂人의 員數를 罷하라는 명령에 대해 승상 孔

光과 대사공 何武가 진언하길 각 담당별 樂人의 현재 員數와 罷할 수

없는 수를 열거한 후 총 829인의 員數 가운데 388인은 罷할 수 없다고

하자 이를 재가한 바가 있다68) 이는 전한말의 사정이지만 전국진에서

도 郊祭 등의 각종 국가제사와 宮中 樂이 행해졌기 때문에 위의 수치

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속한서 백관2 大樂令 注引의

漢官과 盧植禮注에 의하면 八佾舞를 추는 樂人의 員數가 380인인

데 여기에 卑者之子는 임용될 수 없고 6백석에서 2천석 및 관내후에

서 五大夫의 嫡子 출신 5척 이상의 신장 12세에서 30세 顔色온화 등

의 조건을 갖춘 자에 한정되었다69) 이에 의하면 樂人 講은 走馬의 傭

이 되어 京師에 왕래하고 있는 빈한한 자로서 도저히 중앙 大樂令 속

67) 관서 기구 이름으로서의 外樂은 lt이년율령gt秩律 449簡 및 西安相家巷出土

秦封泥에 보인다(周曉陸路東之 編著 秦封泥集 三秦出版社 2000 一

二44)68) 漢書 권22 예락지2

69) 漢官曰 ldquo員吏二十五人 其二人百石 二人斗食 七人佐 十人學事 四人守學事

樂人八佾舞三百八十人rdquo 盧植禮注曰 ldquo大(子)[予]令如古大胥 漢大樂律 卑者

之子不得舞宗廟之酎 除吏二千石到六百石 及關內侯到五大夫子 取適子高五尺已

上 年十二到三十 顏色和 身體修治者 以為舞人rdquo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4하의 樂人 員數에 들어갈 수 있는 처지가 못 되는 자이다 그는 향리

에 거주하면서 매년 1개월씩 京師의 外樂에 가서 복무하는 기간 외에

는 傭賃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下吏의 員吏가 아

니면서 樂工의 職能으로 일반 요역 대신에 京師의 제사나 예락 행사에

나아가 給事하는 자이다 그래서 그의 복역도 職役인 셈인데 이러한

모습은 주례의 胥徒와 흡사하다 단지 胥徒가 員吏로서 봉록은 받는

것과는 다르다 양자가 모두 職役이지만 胥徒는 庶民在官者 이고 樂

人 講은 lsquo非吏인 職能人rsquo이다 그렇지만 양자 모두 개인적인 職能으로

관부에 給事하는 면에서는 상통한다 따라서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

부에 給事하는데는 員吏로서 복무하는 경우와 非吏로서 복무하는 경우

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Ⅴ lt走馬樓吳簡gt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복무

형태 및 그 성격

1996년에 호남성 長沙市 도심 우물에서 발굴된 lt吳簡gt은 총 17萬

餘 枚로 아직 그 일부만이 정리 해독되어 출간된 상태이지만 이미 출

간된 분량 가운데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의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자

료들을 많이 지니고 있다 孫吳 嘉禾 연간(232-238)의 여러 戶籍簿

내지 吏民簿 등에 吏와 給吏로 구분된 人名簿가 다수 존재한다 이 자

료들은 그간 명확하지 못하였던 吏役과 吏戶의 존재형태와 관부에 給

事하는 계층 및 그 職役의 실태를 파악하는데 획기적인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근간의 연구에서 여러 異見으로 그 문서가 지니

는 뜻을 파악하는데 상당히 혼란을 초래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전술한

職役의 전통과 여러 계층의 형태를 살펴본 성과를 참고로 하여 나름대

로 새로운 해석을 추구해보고자 한다

lt吳簡gt의 lt吏民人名年紀口食簿gt(竹簡(肆))에서는 각 里別로 里魁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5가 領하는 食口數를 吏와 民으로 구분하여 통계하고 있는데 그 일례를

다음에 든다

(A)

(이하 簡文 인용에서 內에 있는 字를 괄호 하여 표기함〕

集凡五唐里魁周領吏民五十戶 口食二百八十九人 (簡380)

其一百六十二人男 (379)

其一百卄七人女 (378)

其四戶縣吏 (377)

其二戶郡吏 (376)

其戶州吏 (374)

其五戶給新吏 (373)

其一戶縣卒 (372)

其一戶佃帥 (371)

이는 孫吳 嘉禾 연간 里別吏民口食簿인데 五唐里 50戶 가운데 일반 民

戶를 제외하고 州吏에서 佃帥까지의 戶를 따로 특기하고 있는 것에 의

하면 크게 民戶層과 州吏 이하의 吏층으로 양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

다 먼저 縣吏 이하를 이른바 세습 吏職戶인 吏戶로 볼 수 있는가 하

는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여러 異見이 제기되어 있는데 이 문

제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그런데 lt吳簡gt의 여타 戶籍簿나 戶口簡에

의하면 民戶를 제외한 縣吏 이하의 戶도 다시 縣吏 郡吏 州吏 軍吏 등

의 類와 맨 앞에 lsquo給rsquo字가 붙어 있는 계층의 類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즉 縣吏類의 吏 외에 其十二戶給縣吏下品 (壹5467)

其三戶給郡縣卒 (貳2318) 등과 같은 예들인데 그 職事나 給事

하는 관서의 명칭에 따라 多種의 명칭이 보인다 이를테면 給郡吏 給

縣吏 給州吏 給軍吏 給郡園父 給朝丞 給子弟 給驛兵 給鍛佐 給庫

吏 給縣卒 給度卒 給驛卒 給子弟佃客 給限田客 給佃帥 給常佃 給

家種客 給乞兒 給三州倉父 給養官牛 給習射 給私學 給官瓦師 給

亭復人 給亭雜人 給任師 給郡醫 給縣帥 給州私學 給新吏 給佃吏

給郵卒 給鹽兵 給關父 등이다 이렇게 앞에 lsquo給rsquo字가 들어간 계층을

일단 동일 계층으로 보아 lsquo給吏rsquo로 칭하고 縣吏 群吏 州吏 軍吏 등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6lsquo給rsquo이 붙어 있지 않은 계층을 lsquo吏rsquo로 칭하여 양자를 구분하고자 한다

lt오간gt에서 人名에 붙는 신분명은 크게 眞吏 某吏 給某吏 大男(大

女 民)의 4종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들은 그 표기상의 차이만으로도

일단 구분되는 존재라고 보이는데 현재 앞의 3종 신분명의 구분 문제

와 관련하여 몇 가지 다른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먼저 黎虎는 縣吏나

郡吏州吏 등의 吏가 侯家나 司隸校尉 또는 郡內에 소재한 전문 기

관 州郡 관내의 遠縣에 일정 기간 파견되어 給事하고 있는 자들을 칭

하여 給郡吏 등으로 칭하는 것일 뿐 그 신분은 本州 本郡 本縣의 吏

와 동일하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本郡의 郡吏가 곧 給郡吏이기

때문에 다른 계층이나 신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眞吏는 無職事

의 冗散官에 상대하여 쓰이는 용어로 실제 除授된 관원이라고 한다70)

黎虎와는 달리 양자를 다른 계층으로 보는 견해들도 제기되었다 먼저

韓樹峰은 給吏는 비록 吏의 名은 있지만 일반 백성으로서 잠시 吏의

職事에 종사하는 것일 뿐이고 혹 吏로 임명될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그 신분은 여전히 보통 백성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給吏와 구분하여

口算錢의 면제 특혜를 받는 州吏 郡吏 縣吏 등을 총칭하여 眞吏라 한

다고 하였다 즉 眞吏가 정식의 吏인데 비해 給吏는 일반민이며 일정

기간 만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給吏의

관부給事는 실제상 요역의 일종이라 한다 71) 한편 楊振紅은 동일인의

신분이 문서에 따라 다른 신분으로 등록되어 있는 점에 의거하여 이를

테면 給郡吏가 郡吏나 眞吏로 簡稱된 것이라 하고 眞吏나 給吏 모두

吏로 簡稱되며 州郡縣의 掾史職에 있는 자들로서 署長 佐官 등의 lsquo官rsquo

에 상대되는 자들을 지칭한다고 하였다 아울러 吏는 그 작위가 公乘

이면서 賦役 대상이고 漢魏시기에 吏職의 세습화가 이루어지면서 전문

70) 黎虎 說ldquo給吏rdquo -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社會科學戰線 2008-11) pp89

-94 說ldquo眞吏rdquo-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史學月刊 2009-5) p5071) 韓樹峰 走馬樓吳簡中的ldquo眞吏rdquo與ldquo給吏rdquo (吳簡硏究 2 武漢 崇文書局

2006) 韓樹峰王貴永 孫吳時期的ldquo給吏rdquo與ldquo給戶rdquo -以走馬樓吳簡爲中心 (吳簡硏究 3 2011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7적 吏戶인 眞吏가 출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吏가 본래 일반 서민

이었던 까닭에 公乘 이하의 서민과 합칭하여 吏民이라 한 것이며 삼

국시기 官과 吏가 구별된 연원은 漢代의 長吏와 小吏 내지 士와 庶民

의 구분에 있다고 한다72)다소 혼란스러운 견해들이고 용어상의 해석

문제가 겹쳐 있어 난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들 異見의 관건은 吏와 給

吏의 구분 문제 그리고 吏戶에서의 吏가 어떠한 吏를 가리키는가 하

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여러 견해에서 공통으로 들고 있는 lt吳簡gt의 다음 문서를 먼저 살

펴본다

(B)

廣成鄕勸農掾區光言 被書條列州吏父兄子弟伏處 人名 年紀爲簿

輒隱核鄕界 州吏七人 父兄子弟合卄三人 其四人刑 踵 聾 歐病 一人

被病物故 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 十二人細小 一人限田 一人

先出給縣吏 隱核人名 年紀相應 無有遺脫 若後爲他官所覺 光自坐 嘉禾

四年八月卄六日破莂保據(此簡無編戶)73)

이 자료는 광성향 勸農掾 區光이 작성하여 보고한 문서인데 廣成鄕 領

內 州吏7인의 父兄子弟 23인의 현황을 파악하여 嘉禾4년(235년)에 보

고한 내용이다 lt吳簡gt戶籍簿에서 州吏 등의 吏가 있는 戶는 그 州吏

가 戶人(戶主)으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 州吏7인이란 모두 그 戶의

戶人이다 이 현황 내역에 의하면 州吏7인의 父兄子弟 총합은 23인이

고 이 가운데 4인은 受刑 질병 중이며 1인은 物故 4인은 이미 관부

에 보내져 그 本主에 從事하며 관부에서 복무 중이다 12인은 細小 즉

소인이고 1인은 限田을 경작 중이다 이 限田이 lt吳簡gt의 lt吏民田家

莂gt 등에 보이는 lsquo二年常限rsquo의 田으로 보아 侯家의 田이나74) 屯田을75)

72) 楊振紅 吳簡中的吏 吏民與漢魏時期官 吏的分野 -中國古代官僚政治社會構

造硏究之二 (史學月刊2012-1)73) 侯旭東 三國吳簡兩文書初探 (歷史硏究 2001-4) p172에서 轉引

74) 入都鄕嘉禾二年步侯還民限米一斛 (5-1556) 其卄六斛民還黃龍年臨湘侯

限米 (602017)

75) 黃龍元年文入郡屯田民吳平斛米一百六斛二斗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6227) 其三斛五斗郡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8吏民에게 分給하여 佃作케 한 田으로 보는 것이 일반이다 그 경작자

는 그 田地(佃地)를 국가로부터 할당 받아 의무로 경작하기에 佃民과

같다 그 佃民에는 諸吏와 일반 民戶가 다 포함되고 있다76) lt吏民田

家莂gt에서 그 限田이 lsquo二年常限rsquo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그 의미에 대해

佃作기간 내지 佃種權이 2년으로 한정되어 있어 계약 기간이 지나면

배속되는 田地가 바꾸어지는 방식이었다는 견해가 있고77) 반면에 佃

地의 경작 기간이 아니라 地租額을 2년간 固定하는 것을 말한다는 견

해가 있다78) 사실이 어느 쪽이든 吏戶의 식구 가운데 일부는 국가의

농지를 佃作하고 地租를 납부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 액수가 漢代

사유지에 대한 조세보다 높다 같은 문서에는 租米 뿐 아니라 동시에

畝當 布2匹와 錢70-80까지 징수되고 있다 따라서 二年常限田의 分給

과 佃作은 受惠라기 보다는 노동력의 징발이고 耕作의 賦課로 보는 것

이 마땅하다 于振波가 常限田의 분급 액수를 정의하길 lsquo强制性的 生産

定額rsquo이라79) 본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 이어 1인은 先出給縣吏 인데

먼저 給縣吏로 보내졌다는 의미이다 先給吏의 사례는 嵩男弟恭年十

九先給州吏 (參1450) 등 몇 개가 더 보인다 이렇게 해서 총 23인의

食口 현황이 명료하게 보고되고 있다 그 내역에 의하면 州吏의 식구

는 受刑중인 자 질병자나 小人을 제외하고는 모두 관부에 給事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1인의 先出給縣吏 와

이미 관부에 보내져 本主 따라 從事하며 관부에 복무 중이라는 4인은

( 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 ) 내용상 모두 이미 관부에 보내져 현재

掾利焉黃龍理年屯田限米 (2157)

76) 于振波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南都學壇 24 2004年 第1期 湖南大

學 20041) p30 이 글은 앞에 든 中國社會科學院硏究生員學報 2004-1과 같

음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形成與演變 -談長沙

走馬樓簡牘札記之六 (鄭州大學學報 2001-1) 77) 張福亞 也談lt嘉禾吏民田家莂gt中ldquo二年常限rdquo田的函義 (首都師範大學學報

(社會科學版) 142期 2001-5) p8

78) 高敏 lt吏民田家莂gt中所見ldquo餘力田rdquo ldquo常限rdquo田等名稱的函義試釋 (鄭州大學

學報(社會科學版) 33-5 20009)79) 于振波 앞의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p12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9給事 중인 것은 마찬가지인데 어떠한 차이가 있어 다른 항목으로 구분

하여 기재한 것일까 이것은 바로 給縣吏와 縣吏의 차이를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후술) 州吏7인의 食口 23인의 현황 名簿를 작성하여 면밀

히 조사 보고하게 함으로써 그 遺脫을 막고 있는 것에 의하면 州吏 軍

吏 群吏 縣吏 등의 食口는 여타 일반 민과는 다른 賦役체제 아래 놓여

있는 계층이다 또 軍吏의 父兄子弟에 대해서도 그 食口簿를 따로 작

성하여 관리하고 있다

集凡中鄕州軍吏四人父(子)兄弟三人 中(參3012)

集凡南鄕領軍吏父兄弟合十九人 中(參 464)

이러한 사례들은 吏가 있는 戶는 그 食口들까지 포함하여 吏가 있는

戶 즉 吏戶로서 별개로 관리되고 그 성원은 모두 吏戶의 役 내지 賦

役체계에 들어가는 것임을 말해준다

위와 같이 州吏 縣吏 등 吏戶의 戶口簿는 그 食口 가운데 州吏 縣吏

등 그 吏인 자가 맨 앞에 戶人으로서 위치하지만 給吏는 戶人이드라도

앞에 위치하지 못한다

小武陵鄕嘉禾四年吏民人名妻子年紀簿(壹101533)

吉陽里戶人公乘張惕年卄八算一給縣吏(壹1018232)

吉陽里戶人公乘廖裕年卄七算一給郡吏(壹1017525)

高遷里戶人公乘黃毛年卅四算一給軍吏(壹10306)80)

또한 同 戶籍簿에 縣吏 州吏 등은 아래와 같이 맨 앞에 위치하여 일반

민이 아님을 명기하고 있지만

縣吏鄧橎年卄七 璠()妻大女金年卄一 算 (貳 1729)

州吏蔡區年卅二 區妻大女年卄七 算 (貳 1822)

軍吏朱謙年卅五 謙妻大女壹年卄六 算一 (貳 1723)

80) 인용된 4簡文은 凌文超가 재정리 조립하여 올린 글(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

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型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의

lt表二gt(pp25-37)에서 인용함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0給吏인 경우는 일반민을 가리키는 lsquo民男子rsquo로 기재되어 있다

民男子蔡若年卅七給驛兵 若妻大女四年卅算一(貳 1781)

民男子蔡喬年六十二給驛兵 喬妻大女典年卅八 (算) (貳1903)

따라서 위와 같은 吏民簿에서 民戶를 제외한 州吏나 郡吏 縣吏 軍

吏가 吏戶라면 給州吏 給郡吏 등 여러 職事의 관서에 給事하는 수십

종의 다양한 給某吏 신분은 전술한 庶民在官者 나 lsquo非吏이면서 관부

에 있는 자rsquo와 매우 유사하거나 일치한다

여기에서 吏戶나 吏役의 존재 여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는데 黎虎

는 삼국시기 吏戶의 존재를 인정치 않으나81) 高敏과 孟彦弘은 그 존

재를 인정하며 특히 高敏은 吏役制도 漢末三國시기에 확실히 형성되

었다고 한다82) 韓樹峰王貴永은 후한말 孫吳시기에 卑賤化가 이루어

지면서 吏戶의 萌芽가 이루어졌으며 lt吳簡gt에서의 給吏는 吏가 아니

고 民에 속한다고 한다83) 이러한 여러 異見의 배경에는 吏로 칭해지

는 계층에 전술한 바와 같이 다시 두 계층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계층

이 있는데 그 면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

각한다 양자의 구분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자료를 든다 속한서 百官3 大司農條의 注引 漢官에 丞一人 三百石 員吏四十人 其十一人

斗食 十七人佐 七人學事 五人守學事 皆河南屬縣給吏者 라 하였다

대사농승 속하의 斗食 이하 員吏 40인을 모두 하남군 속현에서 조달된

吏로 충원한다는 것이다 즉 후한 수도 낙양 인근인 하남군 속현에서

吏員을 차출한다는 것인데 斗食 佐 學事 등의 員吏는 해당 분야의 職

81) 黎虎 ldquo吏戶rdquo獻疑 (歷史硏究 2005-3) pp53-6882)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形成與演變 mdash談長沙走

馬樓簡牘札記之六 (鄭州大學學報 2001-1) p61孟彦弘 吳簡所見ldquo事rdquo臆說 mdash從ldquo事rdquo到ldquo課rdquo (吳簡硏究 2 2006) pp205-208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爲役之制 (魏晋南北朝隋

唐史資料 24 2008) pp8-2183) 韓樹峰 앞의 走馬樓吳簡中的ldquo眞吏rdquo與ldquo給吏rdquo pp33-38 韓樹峰王貴永 앞

에 든 孫吳時期的ldquo給吏rdquo與ldquo給戶rdquo -以走馬樓吳簡爲中心 p99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1事를 처리할 수 있는 職能者여야 하기 때문에 하남군에서 이러한 職事

로 근무하고 있는 員吏를 파견하거나 일반민 가운데서 새로 선발하여

파견 조달하였을 것이다 상하급 관부끼리 상호 관리를 파견하여 일정

기간 복무하게 하는 경우에 조달 지원한다는 의미로 動詞語로서 lsquo給rsquo을

쓸 수 있고 이러한 사례는 문헌에 이미 자주 보인다 위에 든 lsquo屬縣給

吏者rsquo도 그 한 실례이다 이러한 경우는 본래 吏의 신분이 여타의 관부

에 일정기간 출장 근무하는 것일 뿐인 까닭에 그 신분은 그대로 吏일

것은 자명한 일이다 즉 縣吏가 郡府에 출장근무 중일 때 그 신분은

그대로 縣吏이고 해당 名簿에 縣吏A가 여타 名簿에서 給郡吏A로 표

기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동일인이 名簿에 따라 신분명이 달리 기

재되어 있는 사례가 약간이나마 보이고 있는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된다(후술) 그런데 給州吏 給郡吏 給縣吏 등 수십종의 給吏에는 이런

경우가 아니고 lsquo州吏 등 諸吏에 배속되어 給事 중인 非吏로서 관부에

복무 중인 民rsquo이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給某吏로 표기된 자들은 lsquo給rsquo

이 붙지 아니한 州吏 郡吏 縣吏와는 달리 lsquo民男子rsquo로 표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給州吏는 非吏로서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그 관서에서 하나

의 職役의 형태로 복무 중인 民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들은 실은 民으로서 관부 업무상 필요한 노역에 동원되는 셈이지만

일부는 여러 관서의 하급 실무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전문의 職能을

갖춘 자들도 있다 縣吏 州吏의 職事 뿐 아니라 앞에 든 수십 종의 전

문 분야 부서별 給吏의 명칭은 그에 상응하는 사례들이다 정부는 이

들이 본래 일반 서민이지만 관부 운영의 필요상 특별 관리를 하지 않

으면 안 된다 그 결과 후한의 여러 사례에서 보듯이 대개 그 職을 세

습토록 하고 이들을 일반 民과 구분하여 칭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lt吳簡gt에 忠子男仲年十五 任給吏 (參 1805)라 한 것은 給吏가 民

에서 차출되어 임용되는 독립 계층임을 말해준다 또 草言府大男吳杭

不是卒子弟不應給卒事 八月卅日兼兵曹掾潘(因)()白(柒總49968)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卒의 子弟가 아니면 給卒事에 복무하게 할 수

없었다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2그들이 본래 吏의 신분이 아닌 까닭에 바로 吏로 칭하지 못하고 그

吏에 배속되어 給事하는 자 또 그 戶의 뜻으로 給某吏 給戶와 같은

칭호가 나오게 된 것으로 본다 이 칭호는 사실 관리와 民 사이에 있

는 이들 계층의 성격을 상당히 잘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이 給吏 계

층의 부담이 커지고 그 賤役 부담자로서의 성격이 뚜렷해감에 따라 給

吏나 給戶가 吏戶나 吏家로 칭해지고 給吏나 給戶의 役이 吏役으로

칭해진 것인데 그렇게 간략한 형태로 칭하여도 이미 관리의 吏와 충분

히 구분되는 것으로 사회가 인지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의하면 lt吳簡gt에 보이는 眞吏도 사실 眞吏라 할 수 없는 給吏

에 대비하여 쓰이게 된 용어가 아닐까 한수봉왕기영은 眞吏란 給吏

에 대비된 용어라 하고 lt吳簡gt에서 給吏가 口算 납부 의무가 있지만

眞吏는 면제되며 정식의 吏이고 신분성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羅新도

眞吏에게 口算錢이 면제되고 있다고 하였다84) 眞吏에 대한 여타의 견

해도 있지만85) 給吏와 관련하여 참고할 만 한 지적이다 또한 lt吳簡gt

에서 其七戶給郡吏 下品(壹5447) 其十二戶給郡吏 下品 (壹

5677) 其十二戶給縣吏 下品 (壹5467) 其一戶給軍吏 下品 (參

430336) 給度吏 下品之下 (5653) 등에서와 같이 給吏는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여서 평균의 民戶 보다 더 빈천한 계층인 점도 그

들이 관부에 給事하는 吏라기 보다는 非吏인 民으로서 民의 일반 요역

에 대신하여 관서에 給事(給役)하는 자들이되 그 일부는 職能에 따라

세습하여 관련 관서의 吏에 배속되고 給事 복무해야 하는 예속된 신

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lt吳簡gt에는 하나의 戶人을 首로 하고 그에 배속된 듯 한 여

러 신분의 戶數와 신분명을 기록한 簿가 있다 lt走馬樓吳簡竹簡gt에

84) 羅新 ldquo眞吏rdquo新解 (中華文史論叢 2009-1) p129 단지 그는 眞吏란 非華

夏系 출신의 編戶化된 토착 사회를 관리하는 인원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85) 이를테면 黎虎는 眞吏란 非眞吏에 대한 대칭이 아니고 실제로 除授 받은 관

원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說ldquo眞吏rdquo -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史學月刊2009-5) p5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3다음의 예들이 있다

-1 里戶人公乘縫繒年卄五苦腹心病 (5443)

- - - - - - -

其七戶給郡吏下品 (5447)

- - - - - - -

其一戶給州吏下品 (5452)

-2 平樂里戶人公乘鄭張年五十 (5460)

- - - - - - -

其十二戶給縣吏下品 (5467)

-3 東陽里戶人公乘扶侈年十四 (5471)

其二戶給庫吏中品 (5472)

- - - - -

其一戶給縣卒下品 (5474)

-4 宜陽里戶人公乘區歸年卄二眞吏 (8962)

- - - 給州卒 (8965)

- - - -

年六十一給驛兵 (8976)

右尙書吏三(戶) (8517)

孫吳에서 公乘의 작위 소유자는 일반민 중에서도 상당히 많지만 漢

代 民爵의 최고위 爵인 公乘(第8等)의 戶人에게 보통 여러 신분의 수

십호를 배속시키고 있다 그 중에 10戶 내외의 給吏가 배속되어 있다

또한 이들 戶人은 배속된 戶가 납부한 租稅를 거두어들이고 이를 일괄

해서 관부에 납부하고 있다 먼저 각 戶로부터 受領한 내역은 문장 앞

에 lsquo領rsquo으로 표기하고 受領한 액수를 총합하여 관부에 납부한 내역은

앞에 lsquo入rsquo으로 표기하고 있다

里戶人公乘曾(年五十三)妻年卅九 (簡 1631-1652)

- - - - - -

領二年郵卒限米田六頃五十畝收限米二斛合爲吳平斛米一千三百斛

其三百十四斛五斗府州中倉關邸閣李崇吏黃諱潘慮 中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4領二年民田三百七十六頃六十五畝二百卅八步畝收米一斛二斗合四萬

五千一百九十九斛一斗 - - - - - - - - -

常遷里戶人公乘李漠年卅七 妻大女思年卅一

入嘉禾二年郵卒限米七百九十八斛二斗八升

入嘉禾二年佃帥限米九百五十五斛八斗七升

- - - - - - -

이 戶人은 대부분 公乘이고 노비를 소유하고 있으며 配屬된 戶의

徵稅와 총괄 납입의 업무에 복무하고 있는데 이는 후대 富戶에게 差役

복무를 부과한 사정과 비슷한 면이 있다 후대 差役제도와 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1인의 戶人을 賦稅 징수 납입의 책임

자로 하여 향리에서 이 방면의 기층단위로 운영하고 있는 셈인데 戶籍

簿와는 그 내역과 용도가 다른 별개의 독립 帳簿이다 그런데 劉家軍

은 限米 납부자 신분인 私學還民叛士吏卒 등이 모두 流民이

며 그 戶人에게 依附하고 있는 자들이라 하고 국가가 그 依附관계를

승인해주면서 그들이 경작할 토지를 戶人에게 分級해주고 그들이 납

부하는 地租인 限米도 戶人의 이름 아래 등기한 것이라고 보았다86)당

시 嘉禾연간에 전란으로 長沙 임상현 지역에 流民이 많이 流入되었을

가능성은 이미 여러 연구에서 지적된 바 있고 還民 叛士 등 일부는

流民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限米와 屯田限米 납부자 신분에는

이밖에 大男 州倉吏 吏帥客 金民 佃吏 郵卒 衛士 傳卒 子弟 佃卒

復客 新吏 兵客 故師子弟 兵師士 故帥客 後客 船師 司馬 士

등 거의 전 계층을 망라하고 있는데 이들 중에 유민이 있을 수 있으나

모두 流民 출신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새로 屯田이나 侯國의 田을

경작시키기 위해 유민 뿐 아니라 在地의 吏民에게 할당하여 佃作으로

운영하는 것은 여러 문헌자료에도 있고 lt吳簡gt의 lt吏民田家莂gt은

주로 在地의 호적에 올라 있는 吏民의 佃作 내역 장부이다 또 lt吳

簡gt 草言府部諸鄕吏區光等招誘諸限田客八十三人首見事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曹史趙野

86) 劉家軍 論lt走馬樓吳簡竹簡gt中 ldquo限米rdquo的性質 (中國社會經濟史硏究 2005-2) p87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5白 (柒總 49782)에 의하면 당시 長沙 지역에서 鄕吏에 의해 限田客

83인을 招誘했다는 성과를 보고하고 있는데 이와 같이 佃作 인력의 확

보에 애쓰는 상황에서 전술한 바와 같은 본래 限田의 佃作 의무를 지

고 있는 在地 吏戶의 家內 성원이 그 佃作者 명단에서 제외될 리가 없

그래서 簡文(B) lt州吏父兄子弟年紀簿gt에서 吏戶의 家內 父兄子弟

인력 23인 가운데 lsquo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rsquo과 lsquo一人先出給縣吏rsquo가

관부에 급사하는 給吏에 해당하고 lsquo一人限田rsquo은 限田의 佃作에 복무하

는 자이다 바로 이어 인용하는 孫休의 詔文에서 吏家의 어려운 사정

에 대해 ldquo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이미 限米를

납부하였는데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rdquo라 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전반부는 給吏로서 복무

하는 것이고 뒷부분은 限田 佃作 복역을 말함이다 즉 한 吏戶의 父兄

子弟 가운데 일부는 전자에 복무하고 일부는 후자에 복무한다 똑 같

은 관부 내지 국가의 역에 복역하는 것이지만 給吏는 분명히 吏(分署

의 담당 吏 州吏)에 給事하는 자라는 점에서 給吏로 칭하여 여타의

복역과 구분한다 그리하여 그 給吏가 결혼이나 계승으로 하나의 戶를

이루면 簡文(A)에서와 같이 某里의 戶籍簿上에서 里의 총 戶民數 아래

에 lsquo其四戶給縣吏rsquo와 같은 형식으로 戶를 本으로 한 給吏로서 명기된

다 그런데 一人의 給吏가 아직 戶를 이루지 못하고 한 吏戶의 成員

(父兄 子弟)으로서 있는 상황이라면 그 戶人의 현재 신분에 의해 그

戶가 표기되었을 것이다

이 문제와 직결되는 다음 기사를 살펴보자 孫權의 제6子로 孫亮에

이어 즉위한 孫休는 그의 즉위 年인 영안원년(258)에 다음과 같이 詔

하였다

「諸吏家에 5인이 있으면 (그 가운데) 3인은 겹쳐서 役에 복무하고 있

다 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이미 限米를 납부하

였는데 군대가 출정하면 또 종군함에 심지어는 家事를 돌볼 자도 없게

되는 것을 짐은 매우 애처롭게 생각한다 그 5인 가운데 3인이 役에 복무

하고 있다면 그 父兄이 (家에) 머물고자 하는 것을 허용해주어 1인을 (役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6에 나가지 않고) 머물게 하고 그 限米를 면제해주며 군대가 출정해도 종

군하지 않도록 하라 (삼국지 권48 吳書 孫休傳 永安元年條)87)

孫休는 즉위 전 재야에 있을 때 시골 생활을 보냈던 바가 있어 그

들의 참상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吏家(吏戶)가 지는 과중한 부담

은 곧 그들이 그만큼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 吏役이 賤視化 되고 厮役으로 인지되고 있던 배경을 위의 詔文은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lsquo吏家rsquo의 식구는 여러 방면의 복무를

중복하여 부담하고 있다 그 가운데 限米 납부 의무는 lt吳簡gt에 의하

면 국가에서 佃作케 하여 운영하는 限田 경작에 대한 租로써 납부하는

것이다 즉 전술한 lsquo二年常限rsquo田을 이 限田으로 보아 그 地租를 限米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다88) 단지 于振波는 限米란 二年常限田과는 관

계가 없고 屯田 경작에 대한 조세인데 衛士 郵卒 傳卒 등의 상비병

과 토지가 없는 수공업자 외지에서 수학하기 위해 온 私學 이탈하였

다가 새로 돌아와 附籍된 還民에게 軍屯이나 民屯에 종사하게 하고 일

부의 부세와 요역을 면제해주면서 限米를 납부하게 한 것이라 한다89)

그의 동일한 글에서 여타 사항에 대해 필자와 일치한 부분에 대해서는

앞에서 찬동한 바 있지만 이 부분에는 수긍하기 어렵다 lt走馬樓吳

簡竹簡gt에는 限米 납부자로 기재된 신분에 전술한 바와 같이 많은

신분이 망라되어 있고 孫休傳에서 말하는 吏戶가 일부 상비병이나 귀

환민 私學등에 한정한 것이 아니고 吏戶 전반의 형편을 들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lt吏民田家莂gt에서 佃田의 총수는 二年常限田과 餘力

田으로 구성 내지 구분되어 있다 즉 常限田은 餘力田에 對比되는 용

어이다 그리고 양자의 畝當 租額이 嘉禾4년 民의 경우 12斛 0456

87) 詔曰 ldquo諸吏家有五人 三人兼重爲役 父兄在都 子弟給郡縣吏 旣出限米 軍出

又從 至於家事無經護者 朕甚湣之 其有五人 三人爲役 聽其父兄所欲留 爲留

一人 除其米限 軍出不從rdquo」

88) 앞에 든 高敏의 글 lt吏民田家莂gt中所見ldquo餘力田rdquo ldquo常限rdquo田等名稱的函義試釋

이래 대부분 이 견해에 따른다

89) 于振波 앞에 든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7斛 州吏의 경우 0586斛 0456斛으로 차이가 있다90) 무엇보다 앞에

서 살펴 본 lt오간gt lt廣成鄕州吏父兄子弟伏處 人名 年紀爲簿gt에 기재

된 州吏의 食口 현황 내역은 孫休傳에서 吏戶의 식구 사정을 말하고

있는 내역과 같은 모습을 전하고 있는데 91)전자에서는 限田이라 하였

고 孫休傳에서는 限米라고 한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限田에 대해 징

수하는 것이 곧 限米이다 따라서 限田이란 二年常限田의 簡稱일 것으

로 본다 lt吳簡gt의 lt吏民田家莂gt에는 이들 限田戶의 佃田額과 그에

대한 租賦稅 납부 內譯이 있다 이 戶는 州郡縣吏 등으로 담당 吏職에

給事해야 하고 從軍도 해야 한다 이러한 양상은 분명히 역의 부담이

중첩된 것으로 일반민보다 더 과중하다 租額인 限米 납부액도 일반민

의 사유지에 대한 租額보다 비율이 높았다

그런데 중요한 사항은 첫째 이렇게 과중한 부담이 중첩된 吏戶의

일면을 보여주는 lt吏民田家莂gt에서 佃作吏民의 戶人(戶主) 신분을 보

면 大男大女州吏群吏縣吏軍吏州卒郡卒縣卒復民士

등으로 吏와 民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들 吏民 모두 佃作

의 의무와 함께 地租로 米穀 布 錢을 납부해야 하고 從軍의 役이 있

으며 그리고 대량의 lt오간gt에 다량으로 보이는 子弟 및 給子弟가 곧

吏의 子弟로 파악된 것에 의하면92) 그들이 납부하는 子弟限米의 부담

도 吏戶의 부담이 된다 또한 lt오간gt에

郡吏公乘李年卅二 算一 (貳2460)

侄子年卅九給子弟 妻大女衷()年卄六 算一 (貳1754)

吉陽里戶人公乘張惕年卄八 算一 給縣吏 (壹1018232)

등의 많은 簡文에서 吏와 그 子弟 給吏들에게 算賦도 부과되고 있다

90) 앞에 든 張福亞 也談lt嘉禾吏民田家莂gt中ldquo二年常限rdquo田的函義 p11의 表1

91) 이에 대해서는 앞에 든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

形成與演變 mdash談長沙走馬樓簡牘札記之六 pp62-63 참조

92) 孟彦弘 앞에 든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爲役之

制 pp1-7 子弟는 吏의 子弟 給子弟는 관부의 給事에 差出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8단지 吉陽里戶人公乘鄭龍(龍 下에 田)年卅六算一給州吏復 (壹3323)

과 같은 lsquo給州吏復rsquo 즉 給州吏이면서 算賦가 復除된 경우가 있는데 이

에 의거하여 給吏는 算賦에서 復除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93) 그러나

위에 든 簡文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부분의 給吏가 lsquo算一rsquo로 기재

되어 있고 소수만이 lsquo復rsquo으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復除되는 경우는

특별한 사정이 있어 그 給吏에게만 특혜를 준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

으로 생각한다 참고로 lsquo腫兩足rsquo자나 lsquo刑兩足rsquo자인 民戶의 戶人도 算賦

가 면제되지 않고 있으며94) 大女도 算賦 납부 의무가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吏戶와 民戶가 지는 국가에의 부담은 吏戶가 각기의 吏職

에 복무하고 일반민호는 그러한 吏職에 있지 않다는 정도 외에는 별다

른 차이가 없다 물론 일반민은 吏職의 役 즉 吏役이 없는 대신에 일

반요역에 복역해야 하고 吏戶는 일반요역에서 면제된다 그러한 사실

을 말해주는 자료로 lt오간gt 戶口簿에 里別로 定應役의 戶數 즉 일반

요역에 응당 복역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진 里別 戶數 문서가 있다

其一百卅八人男 (參431548)

其八十一人(女) (參431144)

其一戶給軍吏 下品 (參430336)

其五戶民 (下)品 (參430235)

其七戶女戶不任調 下品之下 (參430134)

其領役民卅七戶 (參430033)

이 里別 戶口簡은 凌文超의 編次 정리 작업에 의하면 新成里의 總

結簡에 해당하는데95)여기서 일반민호수는 생략하고 給軍吏나 調에서

면제되는 女戶 등의 수만을 기재한 것은 맨 아래의 定應役 戶數를 算

出하는 근거를 기록하기 위함이다 즉 일반민호 외의 給吏 등의 戶數

93) 凌文超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型

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 p5494) 高平里戶人公乘黃高鼰五十二算一腫兩足 (貳 2903) (大)成里戶人公乘何軼年

五十五算一刑兩足 (參626736)

95) 凌文超 앞에 든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

簿rdquo的類型與功能 p40과 lt表3gt 중 p45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9가 총 13戶이고 이들을 제외한 定應役의 戶數가 37호란 뜻이다 그래

서 新成里의 총 호수는 50戶였음을 알 수 있다 新成里의 총 口數 219

명은 lt오간gt의 戶當 口數 평균이 대략 45명 정도임을 감안하면 486

戶이고 50戶와 근접한다 따라서 給軍吏 등 13호는 定應役에서 면제되

는 戶임을 알 수 있다 또 다음 戶口簡은 앞부분 里의 총 口數가 결락

되어 있다

其一戶給朝丞 (貳170263)

其二戶給郡園父 (貳170162)

其五戶尫嬴老頓貧窮女戶 (貳170567)

定應役民卄戶 (貳170466)

여기서는 給朝丞1戶 給郡園2戶 절름발이 노인 빈궁자 女戶 등 5

戶가 役에서 면제되고 그 나머지 20戶가 定應役民이 되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즉 給吏는 定應役에서 면제되고 있다 따라서 給吏는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부에 給事하는 것이기에 당연히 일반요역에서 면제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給吏에도 전술한 바와 같이 吏戶의 가속인 경우가 있고 일

반민 중에 차출된 경우가 있는데 전자의 경우는 관부에서 필요할 때

마다 고정적으로 차출되었을 것이며 일반민의 경우는 본래는 일시적

한시적으로 징발되었을 것이지만 여러 簡文에 戶人으로서 給吏인 자가

있는 것에 의하면 점차 전자의 경우와 같이 吏戶와 마찬가지로 給吏戶

로서 고정적으로 차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定應役이 戶를 부과

단위로 삼고 있다는 점 또한 吏戶의 家屬이 하나의 徵役 단위로서 운

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도 吏戶의 실재성과 그 독립적인

신분성을 말해준다 더구나 일반 민호와 구분된 吏戶 名籍(lsquo吏名籍rsquo)의

존재가 다음의 簡文에서 확인된다

諸鄕謹列郡縣吏兄弟 幷攴 吏名籍 (13-7638)

吏戶의 막중한 부담은 그 家屬의 叛走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0를테면 縣吏 毛章의 15세인 弟(壹 7865) 縣吏 毛車世의 49세인 父(壹

7868) 群吏 黃의 13세인 弟(壹7893) 群吏 谷漢의 29세인 兄子

(壹7905)가 嘉禾 2년에서 3년 사이에 叛走하였다 후한 말 陳寔은 어

려서 縣吏가 되어 항상 厮役에 給事하였는데( 常給事厮役 ) 후에 都亭

의 佐가 되었다96) 그리고 郭太는 대대로 집안이 빈천하고 어려서 고

아가 되었는데 모친이 縣廷에 給事하게 하려 함에 말하길 ldquo대장부가

어찌 斗筲의 役에 處해 있을 것입니까rdquo라 하고 마침내 떠났다97) 당

시 이미 吏役이 厮役으로 인식되어 있었고 斗筲의 役 즉 100석 이하

인 斗食의 位에 처하였음을 말해준다 즉 같은 吏이더라도 100석 이상

인 掾史와 그 이하 사이에는 차등과 구분이 있었다(후술) 그렇지만 이

두 경우는 모두 吏가 되는 것이 선택의 길이었기 때문에 吏戶에 속한

자들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吏戶가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던

것에 비해 이 두 경우는 선택사항이었다 斗食에게도 매우 소액이지만

月俸이 지급되었기 때문에 빈천하거나 고아가 되어 생업을 위해 吏職

을 선택한 것이다 나이도 어리고 집안의 세력 배경도 없는 가운데 吏

가 된 것에 의하면 斗食의 최하단에 속한 吏였을 것이며 이들이 給吏

가 아니고 吏로 칭해진 것은 일반요역 복무에 대신하여 징발 내지 차

출된 경우가 아니고 吏職에 임명된 것이기에 당연하다

縣吏 등의 諸吏役이 厮役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무엇 보다 그 雜

役的인 吏役의 과중함 때문이다 후한 lt張景碑文gt에서 14鄕의 正을

調發하여 勸農의식에 소요되는 土牛 제작에 육칠십만전이 들어가 吏와

正이 매년 患苦에 처함에 男子(庶民) 張景이 매년 그 비용을 출연하여

土牛를 義作해주겠다 하고 그 대신 자신을 縣吏 列長 伍長에 임

용되지 않게 해줄 것과 小繇 징발을 면해줄 것을 청하고 있다98) 즉

96) 후한서 권62 陳寔傳에 (陳寔)少作縣吏 常給事厮役 後爲都亭(刺)佐

p2065

97) 후한서 권68 郭太傳에 (郭太)家世貧賤 早孤 母欲使給事縣廷 林宗曰 ldquo大

丈夫焉能處斗筲之役乎rdquo 遂辭 就成皐屈伯彦學 三年業畢 博通墳籍 p2225

98) 府告宛 男子張景記言 府南門外勸〔農〕土牛 調發十四鄕正 上賦

斂作治 幷土人 犂 耒 卄 蓎 屋 功費六七十萬 重勞人功 吏正患苦 愿以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1서민이었던 張景은 거액의 자금을 출연하면서까지 縣吏 등의 吏役과

小繇의 복역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있다 그는 아직 非吏였지만 吏役에

언제든지 차출될 수 있었고 그 吏役은 매우 번거롭고 힘든 것이었음

을 알 수 있다 단지 張景과 같은 서민이 縣吏가 되어 吏役에 差出되

는 경우 바로 lt오간gt에서와 같은 吏戶가 되어 그 가속이 모두 吏役의

범위에 들어가게 되는지는 不明이다 推斷이지만 世戶로서의 吏戶와

함께 일시적으로 차출되어 일정 기간 만 복무하는 非世戶로서의 吏戶

가 공존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요컨대 lt오간gt과 문헌자료에 보이는 吏戶와 給吏의 면모들은 앞에

서 검토한 胥徒와 lt庶民在官者gt 내지 徒御 導從役人 등과 일맥상통

하는 면이 있다 孫休傳이라든가 lt오간gt에 빈출하는 吏戶 吏民에서의

吏는 500石 이하인 吏 중에서도 200석 이상의 長吏級을 제외한 下吏

즉 百石 이하의 吏를 가리키고 給吏는 吏가 아니되 관부에서 일정 기

간 여러 분서에 勞役으로 복무하는 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즉

庶民在官者 와 상통한다 특히 그들에게 부과되었던 賦稅役의 내역에

서도 위에서 검토한 여러 職役 계통 신분이나 계층의 예와 거의 비슷

하다

孫休傳에서 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라 한

것은 吏家의 父兄은 都에서 州郡縣의 吏로 복무한다는 뜻이고 나머지

3인의 자제는 郡縣吏에 給事한다는 뜻이다 즉 lsquo郡縣吏에 給事함( 給郡

縣吏 )rsquo이란 子弟3인이 郡縣吏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郡縣吏에 下屬되

어 그 업무에 給事한다는 뜻이다 위의 廣成鄕의 lt人名年紀簿gt 簡文

에서 lsquo先出給縣吏rsquo도 州吏7家의 식구 가운데 먼저 縣吏의 업무를 보좌

하기 위해 차출되어 나간 것을 뜻한다 여기서 말하는 郡縣吏는 주로

掾史職으로 사무 업무 중심이고 그 업무를 노동력으로 보좌하는 인력

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lt오간gt의 도처에 諸吏의 사례로써 諸曹倉

吏庫吏監運掾關邸閣船師田戶曹史 등 수십종의 職名이 보이

家錢 義作土牛 上瓦屋 欄楯什物 世世作治 乞不爲縣吏 列長 伍長 徵發小

繇 (高文 漢碑集釋 開封 河南大學出版社 1997 p227)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2는데 대부분 그 업무 처리에 노동인력이 필요하다 십 명 내외의 掾史

員吏 만으로는 사무나 문서작성 관리 업무 이외에는 수행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 인력을 吏戶의 식구로부터 자동으로 差役시키는 시스템이

漢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었음을 위 孫休傳의 기사는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이들 吏家의 식구 현황 파악은 관부에서 항상 필요

로 하고 확보해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lt오간gt의 여러 문서는

그러한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東鄕勸農掾殷連被書條列州吏父兄人名年紀爲簿

輒科核鄕界 州吏三人 父兄二人刑蹱叛走 以下戶民自代 謹列年紀 以

(已)審實 無有遺脫 若有他官所覺 連自坐 嘉(禾)四年八月卄六日破莂

保據 (J22-2543)

여기에서 담당 鄕界의 州吏3인 가운데 그 父兄2인이 受刑과 叛走로

비게 됨에 下戶의 民을 징발하여 바로 충당시켰다는 것이다 이 以下

戶民自代 에 대한 해석에서 下戶를 고용하여 자신을 代理케 한 것이라

는 견해가 있는데99) 그렇다면 戶人인 州吏가 자신의 식구 결원을 책

임지고 직접 下戶를 고용한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해당 州吏의 부담

이 너무 크게 되어 당시 下戶가 자동으로 보충되는 시스템으로 운영된

것일 가능성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諸家의 견해 모두 不明

임을 인정하고 있다100) 어쨌든 吏戶의 노동력을 신속하고 철저하게

보충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은 吏戶 전체의 식구가 관부에

예속되어 있고 세습화 된 상태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단지 孟彦弘은

이 자료를 통해 당시 吏戶의 家屬이 모두 吏였음을 말해준다고 하였으

나101)그렇지 아니하고 吏의 가속에 吏도 있을 수 있지만 아직 吏가

아니고 吏를 노동력 지원으로 보조해주는 給吏도 있고 그 給吏는 非

99) 이 점에 대한 정리는 王素 長沙吳簡勸農掾條列軍州吏等人名年紀三文書新探

(魏晋南北朝隋唐史資料 25 2009) p9의 注 11) 참조

100) 이를테면 孟言弘 앞의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

爲役之制 p16

101) 위의 글 p1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3吏로서 관부에 給事하는 자이며 이런 면에서 전술한 庶民在官者 내

지 lsquo非吏이면서 관에 있는 자rsquo lsquo官과 民 사이rsquo lsquo lsquo半官 半民rsquo lsquo踐更小史

(小吏)rsquo(續漢書輿服志) 등과 상통한 계층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吏戶에 포함되지 않는 給吏가 있었다 吏戶와 給吏戶가 구분되

고 있음은 lt吏民人名年紀口食簿gt의

其七戶給郡吏下品 (壹5447)

其十二戶給縣吏下品 (壹5467)

其一戶給軍吏下品 (參430336)

(其)六戶郡吏(中)(品) ---- (貳4490)

其二戶縣吏(下)品 (貳3307)

등에서 給郡吏 등의 戶와 縣吏의 戶가 구분되어 기록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다 그리고 給吏가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에 속하였음은 위

의 사례 뿐 아니라 lt吳簡gt에서 給度吏 下品之下 (5653) 등에서 알

수 있는데 下戶로 결원을 보충하는 것은 同級의 戶로 충원한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면 또한 당시 吏戶와 給吏의 관부에의 예속성과 신분

성을 보여준다 요컨대 給吏는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여서 평균

의 民戶 보다 더 빈천한 계층인 점도 그들이 관부에 정식의 吏職으로

임명된 吏라기 보다는 非吏인 民으로서 民의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

서에 給事(給役)하는 자들이되 관련 관서의 吏에 배속되고 給事 복무

해야 하는 예속된 신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찍이 宮崎市定이 宋書권94恩倖傳序의 郡縣掾史 幷出

豪家 負戈宿衛 皆由勢族 를 인용하여 豪家 출신으로서의 掾史가 고

관으로 진출하는 경향이 累代 이어지면서 右族이 이루어지고 이를 통

해 위진남북조 귀족제가 출현하였다 하였고102) 楊振紅이 이에 동조하

고 있는 것은103) 부분적으로 再考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당시 孫休

102) 宮崎市定 九品官人法の硏究 -科擧前史 (京都 同朋社 1979(1956)) pp86

-89

103) 楊振紅 앞에 든 吳簡中的吏 吏民與漢魏時期官 吏的分野 mdash中國古代官僚

政治社會構造硏究之二 p34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4傳에서 말한 吏戶는 분명히 豪族勢家가 아니었고 lt오간gt에서 民戶와

함께 lt吏民簿gt에 기록된 吏戶는 下品에 속한 貧層이었으며 그 식구

모두 중복된 賦役의 부담에 시달리는 계층이었다 그 吏戶에는 吏와

給吏로 구분되어 관부에 예속되고 있다 즉 아무래도 豪族大家로서의

掾史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정을 이해하는 데는 전술한

lt周禮gt의 府史胥徒에서 府史가 호족대가로서 辟除된 掾史에 類하고

胥徒가 곧 관부 예속하의 吏戶와 給吏에 거의 相當하다는 면이 있다

吏戶에서의 吏職에 掾史가 있겠지만 관부에 예속되어 있고 직업적 세

습화 되어 있어 호족대가 출신의 掾史와는 구분되었을 것이다 무엇보

다 호족대가 출신의 掾史은 관부에 예속되지도 아니하고 세습의 신분

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掾史層의 존재는 군현의 장관 辟召로 임

용되었을 것이다 반면 吏戶 출신의 掾史는 기술 계통의 전문직일 경

우이거나 개인적 기능의 능력으로 또는 部曲과 같은 상비병 출신이

일반 요역 부담에 대신하여 관련 직무에 세습하게 되거나 또는 일반민

호에서 급히 所要되어 임시로 차출되었다가 점차 세습의 吏戶로 예속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관부에 진 빚으로 예속되었다가 吏戶로 남

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즉 이 吏戶는 관부의 갖가지 所要 用務

에 差出될 상황에 대기되어 있는 戶이다 그 중에 일부는 정식으로 掾

史로 승진되지만 나머지는 윤번이나 필요시 이 방면 저 방면의 分署에

차출되어 給事하며 分署의 長을 主로 모시고 그 아래에서 給事한다

掾史의 吏와 구분하여 그러한 뜻을 반영한 것이 lt오간gt의 도처에 보

이는 수십종의 給某吏다고 생각한다 호족대가 출신으로서의 掾史와

예속신분인 吏戶 출신으로서의 掾史는 그 신분상으로도 士와 서민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기에 宮崎市定의 立論 또한 양자의 구분을 통한

위진남북조의 귀족제 내지 良賤制의 형성을 논하는 보완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근래의 여러 연구들은 掾史에 이렇게 두 방면으

로 구분되는 면과 계층이 있다는 점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였고 吏戶

의 家屬에 吏와 給吏로 구분되는 층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양자의 성

격이 어떠한가를 파악하지 못한 셈이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5한편 給吏는 吏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戶人이나 父兄이 郡吏 등의

諸吏에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당시 吏戶가 직업화 내지 세습화 되어

있었기 때문에 子弟의 給吏 신분도 곧이어 諸吏로 진전될 것은 당연하

다 그래서 lt嘉禾四年吉陽里戶籍簿gt에 吉陽里에 호적이 올라 있는 給

郡吏 逢杲(壹10169) 給郡吏 寥裕(壹10175) 給縣吏 張惕(壹

10182) 給州吏 區張(壹10367) 給州吏 嚴追(壹10149) 등이 lt嘉禾四

年五年吏民田家莂gt의 下伍丘 소속 佃民 名簿에서는 거의 同一人일

것이 분명한데 給郡吏가 群吏로 給縣吏가 縣吏로 給州吏가 州卒이나

州吏로 기재되어 있는 경우도104)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

다 이 경우는 丘에서는 給吏가 보이지 아니하고 里에서만 보이기 때

문에 아직 명확히 해명이 되지 않고 있는 里와 丘의 차이에 따른 것일

가능성도 있고 嘉禾4년과 嘉禾4-5년 戶籍簿에서의 1년 내외의 기간

차이에 따른 신분의 변화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또

한 侯旭東의 정리 조사에 의하면 高遷里의 給縣吏 松棐가 위의 lt田家

莂gt에서는 武龍丘의 縣吏로 기재되어 있고 같은 里의 給縣吏 張喬는

亻平 丘의 縣吏로 기재되어 있으며 宜陽里에 眞吏로 등재된 黃阿 등

6인도 각각 6곳의 다른 丘의 州吏 男子 男子 郡吏로 기재되어 있다

또 陽里의 給郡吏 謝鼠는 夫丘의 男子로 기재되어 있다105)里의 호

적부와 lt吏民田家莂gt의 丘別 佃民 명부에서 그 신분이 男子인 경우

일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양편 모두 里의 호적부에 給郡吏 給縣

吏 給州吏등 給吏로 기재된 경우는 대부분 丘의 佃民 명부에서 각각

群吏 縣吏 州吏로 되어 있고 眞吏가 州吏 郡吏 男子로 기재되기도

하고 給縣吏가 男子로 기재된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일부 사례들은 眞

吏 吏 給吏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것이어서 그 해명이 필요한

데 현재 里와 丘의 구별 차이 眞吏와 諸吏 給吏등의 실체 문제가 아

104) 凌文超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

型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 pp17-18의 lt表一gt

105) 侯旭東 長沙走馬樓吳簡ldquo里rdquoldquo丘rdquo關係再硏究 (魏晋南北朝隋唐史資料2006) pp19-21의 表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6직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어 그 이유를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실

정이다 그러나 신분명으로 이름을 달리하여 그렇게 구분하고 있으며

전술한 바와 같이 給吏가 吏나 眞吏와 다르게 취급되면서 여러 名簿에

구별되어 기재되어 있고 그 독자성도 충분히 입증되기 때문에 위의

예외적인 사항들은 개인별 특별한 사정에 따른 것이거나 아직 여러 異

說로 논란이 되고 있는 里와 丘 등의 구분과 차이 등에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고에서 갖추어 고찰하지 못하고

후고로 미룬다

Ⅵ 결 언

이상의 검토에서 고대 職役의 범주에 들어가는 다종의 신분 내지 계

층과 吏職의 類 그 복무형태 삼국시기에 이르는 전승과 변화의 모습

들을 살펴보았다 우선 職官과 일반요역 복무자와는 신분제와 賦役체

계상 엄연히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례 地官 鄕大夫에 그

舍란 國中의 貴者賢者能者服公事者老者疾者에게는 모두 舍

한다는 것이다 에 대한 후한의 鄭司農의 注에 服公事者란 지금 吏에

게 復除해주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고 하였다106) 여기서 lsquo舍rsquo란 復

除와 같은 뜻이다 그 대상 가운데 lsquo國中의 貴者賢者能者rsquo 가운데

貴者는 공경귀족 賢者와 能者는 命官과 辟召된 관리에 해당한다 그리

고 그 아래의 服工事者는 다시 2분되는데 200석 이하의 吏職 내지 掾

史職(小吏)이 있고 그 아래에 庶民在官者 내지 lsquo非吏로서 官에 給事

하는 자rsquo로서 給吏層이 있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賢者와 能者 까지를

職官이라 하면 그 이하인 服工事者 가 곧 職役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

석된다 그리고 職官과 職役 복무자는 모두 일반요역에서 면제되는 자

106) 其舍 國中貴者賢者能者服公事者老者疾者 皆舍 注云 lsquo服公事者rsquo

謂若今吏有復除也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7들이다 이 중에서 職役 복무자는 일반요역에서 면제되는 대신에 각종

의 吏職과 給吏職에 복무하였다 여기서 칭한 給吏職은 lsquo(小)吏rsquo에 대비

하여 칭한 給吏를 그 성격상 그렇게 칭할 수 있으며 그 독립적 계층

내지 신분으로서의 실태가 lt長沙走馬樓吳簡gt의 발현에 의해 상당 부

분 밝혀지게 되었다 그런데 服工事者 즉 職役 담당 계층의 범위가

상당히 넓어서 그 職役의 양태가 모든 면에서 같은 것은 아니고 일부

분 다른 측면들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고대의 긴 기간에 걸쳐 거의

공통으로 庶民在官者 lsquo非吏이면서 관부에 給事하는 자rsquo lsquo官과 民 사

이rsquo lsquo半官半民rsquo의 성격이 유지되고 있는 면을 볼 수 있다

이렇게 職役 담당자의 연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곧 lt주례gt에 보이

는 관리 조직의 최하위에 위치한 府史胥徒이다 이 가운데 府史

가 대략 후대의 掾史職이나 lt吳簡gt의 諸吏에 속한다면 胥徒는 給吏層

에 상통하는 면이 많다 단지 lt吳簡gt에 다수 보이는 吏役 下의 吏戶

는 그 과중한 부담과 厮役 및 빈천함의 성격상 오히려 胥徒에 상통하

는 면이 많다 이러한 시대적 차이는 吏戶의 예속화 및 세습화의 진전

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한편 시대의 여건 차이로 여러 부분에서 胥徒

와 후대의 職役 담당 계층 사이에는 다른 면도 있다 胥徒나 給吏層이

기본적으로 일반 서민 출신으로서의 服工事者 였던 것과는 달리 周에

서 三國에 이르는 동안 服工事者 라는 면에서 同類이지만 일반 서민

과는 구분되는 여러 相異한 계층에 속한 신분들이 속하여 있었다 예

를 들면 工商食官 에 속하는 工商 皁隸食職 에 포함되는 吏에 속

한 徒隸 층 넓은 의미의 徒隸層이라 할 수 있는 皂隸牧圄

僕輿人 그리고 下吏層에 들어가는 樂祝醫衛士 및 走卒伍伯

之類 등이 그들로 그 출신은 일반 서민이거나 賤民 또는 刑徒였지만

관부에 寄生하며 給事한다는 면에서는 공통이다

이들의 복무 형태는 항상적 근무 일시적 근무 組別 교대제 등 여러

가지로 징발 내지 차출되었고 lsquo冗rsquo과 lsquo更rsquo은 그러한 차이를 구분하는

용어로서 나온 것이다 근무에 따른 보수를 받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 구분은 아직 분명치 않은 부분이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8있다 그러하지만 최소한 생업을 관부에 의탁하는 자들에게는 지급되

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年俸制에 대비되는 稍食 즉 소액의 月俸 내

지는 근무일수 기준의 지급 형태로 지급되었다 이는 그들의 근무가

주로 일 단위나 월 단위로 이루어지고 계산되었기 때문이다

lsquo官rsquo과 lsquo吏rsquo는 서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선진 이래 본래 상하의 신

분으로 명확히 구분되었고 漢代에 혼용 내지 통용되는 경향이 있었지

만 양자가 구분되는 면 또한 여전하였다 吏는 官에 가까운 吏가 있고

民으로서의 吏가 있어 전자를 lsquo官吏rsquo라고 하면 孫休傳의 詔에서 거론된

吏家는 보통 吏民으로 합칭될 경우의 吏라고 할 수 있다 lt吳簡gt의

lt吏民簿gt나 lt戶口簿gt 등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실태에서 후한 말에

서 삼국기의 전형적인 職役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이제까지 그

존재에 대해 거의 간과되어 왔던 給吏에 대해 lt吳簡gt은 수십종의 給

吏 실태를 전해주고 있어 그 의의가 크다 吏의 사무 업무를 직접 勞

役으로 보조해주는 給吏는 관부의 행정 업무 처리에 있어서 항상 필요

한 노동력 제공자였다 이러한 노동력은 어느 시기이든 공통으로 필요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연원을 lt주례gt의 胥徒에서 찾아볼 수 있었

고 여러 면에서 職役의 실례로서 공통하는 면들을 지적할 수 있었다

후한 말 삼국시기의 吏와 給吏는 일반서민 신분으로서의 吏이며 吏戶

로써 관부에 예속되어 그 食口 성원이 거의 세습하여 吏役에 종사하

고 있다 이들은 일반서민에 비해 일반요역이 면제된다는 점을 제외하

면 그밖에 각 吏職에 따른 吏役의 기본 직무 외에 限田의 佃作 의무와

그 地租로서 限米 布 錢을 납부해야 하며 從軍해야 하는 등 중첩된

부역으로 일반서민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또한 그 戶品 이

下品 내지 下品之下에 속한 貧戶 출신이다 따라서 같이 吏로 칭하지

만 豪族勢家 출신으로 掾史職을 거쳐 상급관으로 진급하고 命官에 오

르는 累代 高族의 世家 출신 掾史와 빈천한 서민 출신으로서 관부에

예속된 吏戶 출신으로서의 掾史와는 구분된다 이 吏家 내지 吏戶는

吏의 칭호로 불리지만 일반민보다 더 많은 부담을 지고 있기에 그들의

役은 후한과 삼국기에 賤役 賤職 내지 厮役으로 칭해지며 기피되고 있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9다 따라서 이 계층이 官吏로 합칭되는 경우의 吏와 구분되는 것은 당

연하며 그 호칭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늦어도 孫休 시기의

문서와 간독자료에 등장하는 lsquo吏家rsquo나 lsquo吏戶rsquo는 이미 그러한 계층에 대

한 專稱으로 형성된 듯하다

한편 諸吏役의 복무에는 常勤의 방식과 1년에 1개월 내지 수개월만

輪番 형식으로 복무하는 비상근의 lsquo踐更 방식의 근무rsquo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한 비상근 복무자도 있었을 것이다107)그리고 그 복무에

대한 급여가 그 吏役을 생업으로 하는 常勤者에게는 당연히 小吏에 대

한 봉록이 지급되었을 것이다 반면에 給吏의 役은 일반요역에 대신하

는 복역이라는 면에서 비상근 내지 윤번 형식의 차출이었을 가능성이

많지만 지금까지 lt오간gt에 소개된 자료로는 어느 쪽이라 단정하기가

어렵다 胥徒의 役은 어디까지나 상급의 관원들과는 달리 일반민의 요

역 의무를 대신하여 관부에 給事하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lt오간gt

에서의 給吏와 상통한다 給吏에 대한 봉록 지급의 여부도 아직 不明

이다 단지 限田의 지급이 祿田과 같은 성격의 것이었을 가능성도 고

려되지만 그 租額이 커서 혜택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노동력의 징발로

서 해석되는 부분도 있다 또한 給吏의 관부에의 給事가 일반 요역과

같이 組別 순환제였는지의 여부는 아직 분명치 않다 lt奏讞書gt의 樂

人의 예와 같이 一月一更制와 같은 순환근무제였을 가능성도 있는데

대체로 두 가지 형태가 공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lt吳簡gt에 의거한 의론들은 아직 자료 해석과 해명이 충분치 못하여

불분명한 상태에 있는 사항들이 많은 실정이기 때문에 해당 사항이 새

로 규명 되는대로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lt오간gt의 미해명 사항

에 대한 개별적인 탐구도 본 과제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필요하다 그

리고 아직 소개되지 않은 대량의 lt오간gt이 연속하여 출간되면서 새로

운 자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107) 廣懶薰雄 앞의 秦漢律令硏究 pp310-311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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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103

(中文摘要)

中國古代的職役與職官的問題

朴 健 柱

通過上述的檢討 基本上職役範疇內的多種身分 乃至階層與吏職之類

其服務形態至三國期的傳承與變化等方面已然解明 職官與職役服務者

的一般徭役均免除了 此二者中職役服務者 用種種lsquo吏職rsquo與lsquo給吏職rsquo服務來

代替其一般徭役 直至三國時期爲至漫長的期間內職役擔當者 庶民在官者

lsquo非吏而給事官府者rsquolsquo官與民之間者rsquolsquo半官半民rsquo的性格几乎共通維持

職役擔當者的淵源卽是lt周禮gt所見的官吏組織最下位的府史胥

徒 此中 府史是大略屬于後代掾史職或是lt吳簡gt的諸吏 胥徒則是相通于

給吏層的側面多的 但是lt吳簡gt所見多數的吏役下吏戶其過重的負擔與厮

役及貧賤的性格上 倒是與胥徒相通方面較多 這個時代的差異像是吏戶的

隸屬化及世襲化的進展招來的結果 一方面因爲時代的與件差異 胥徒與後

代的職役擔當階層間有多方面的異質 胥徒與給吏層基本上是一般庶民出

身的 服工事者 如此不同 從周至三國期間從 服工事者 上是同類而與一

般庶民相區分的多種相異的階層面上身分較多 例如 工商食官 所屬的工

商 皁隸食職 所包含的 吏所屬的徒隸 層以廣義的徒隸層可以稱謂的

皂隸牧圄僕輿人 以及下吏層所屬的樂祝醫衛士 及走

卒伍伯之類等 他們的出身是一般庶民 或是賤民乃至刑徒 在官府寄生

而給事的層面上是共通的

其服務形態是恒常的勤務 一時的勤務 組別交代制等以多種方式徵發乃

至差出 lsquo冗rsquo與lsquo更rsquo是其差異區分用的用語 支給勤務報酬與否是不分明之事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04項 可是至少生業官府依託者是被支給的 其支給方式是與年俸制相對的稍

食 卽少額的月俸乃至勤務日數基準的支給方式 因此他們的勤務和支給計

算主要是日單位或是月單位

於lt吳簡gt之lt吏民簿gtlt戶口簿gt等所見的吏與給吏的實態 可以看到

從後漢末至三國期間典型的職役的樣相 尤其向來看過給吏的存在 lt吳

簡gt所傳數十種給吏的實態 其意義是巨大 給吏是以直接的勞役補助吏的

事務業務 是官府的行政業務處理上恒常的必要勞動力提供者 這種勞動力

許是官府運營上至今爲至所有過的任何時期共通要緊事項 可以推斷給吏

的淵源於lt周禮gt的胥徒 而且可以指摘以職役的實例有多方面共通的層面

後漢末三國時期的吏與給吏是一般庶民身分之吏 以吏戶隸屬於官府 其食

口成員率多世襲地從事吏役 他們除比一般庶民免一般徭役外 也需要履行

各吏職別吏役的基本職務 佃作限田義務 以其地租納付限米布錢 從

軍義務等重疊的賦役 因此他們有比一般庶民更重的負擔 而且他們的戶品

是下品乃至下品之下所屬的貧戶出身 從而他們雖一樣稱謂lsquo吏rsquo 却與豪族

勢家出身經歷掾史職進級上級命官的累代高族的世家出身的掾史與以貧賤

的庶民出身於官府隸屬的吏戶出身的掾史是不同的階層 這個吏家乃至吏

戶雖被稱謂lsquo吏rsquo 但是彼役後漢三國期被稱謂賤役 賤職乃至厮役 而且被忌

避 從而此階層是與lsquo官吏rsquo合稱的境遇的lsquo吏rsquo爲區分是理所當然 其稱號也只

得相殊 于是最遲至少到於孫休時期文書與簡牘資料所見的lsquo吏家rsquo與lsquo吏戶rsquo

許是已經成爲如此階層的專稱

依照給吏的役是一般徭役代替的服役 其運營形態是非常勤乃至輪番形

式的可能性大的 但是迄今依據lt吳簡gt所見的資料還難以斷定何者是對的

胥徒的役是與上級官員異樣 以一般民的徭役義務代替給事於官府 本着那

樣的側面與lt吳簡gt所見的給吏相通 給給吏俸祿與否也還不明 但是從限

田的支給是與祿田同一的性格的可能性上看 因爲其租額是多的 與其說惠

澤倒是有可能解釋爲勞動力的徵發 給吏的官府給事是與一般徭役同一方

式的組別交代制與否還不分明 如lt奏讞書gt所見樂人的事例 有可能一月

一更制方式交代勤務制 筆者認爲大體上是兩個方式共存

關於lt吳簡gt資料的議論是因爲解釋與解明上許多異說 不分明的關聯事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105項也有很多 所以該事項的解明將其完備需要補完

주제어 직역 직관 서도 도예 이역 이호 급리 서민재관자

關鍵詞 職役 職官 胥徒 徒隸 吏役 吏戶 給吏 庶民在官者

Keywords lavor duty at office(official lavor) high-ranking officialrsquos duty(official

post) xu-tu tu-li minor officials lavor minor officials family minor half

officials and half the masses in lavor services at office the masses in lavor

services at office

(원고접수 2013년 11월 15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12월 16일 수

정원고 접수 12월 19일 게재 확정 12월 26일)

Page 4: AB C D - KNUwebbuild.knu.ac.kr/~china/CHR/chr2013/chr87pdf/chr87-02... · 2014. 1. 4. · FG9 ±°'c&`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38食職 에 포함되는 吏에 속한 徒隸 층 넓은 의미의 徒隸層이라 할 수

있는 皂 隸 牧 圄 僕輿人 下吏層으로서의 樂祝醫衛

士 및 走卒伍伯之類 등 각 종의 관부에 예속된 신분들의 존재형태

와 상통하는 면이 많기 때문에 그 연원문제와 관련하여 그들의 존재

형태와 운영방식 등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관부 내의 給事가 아닌 일반 요역에 복무하는 서민 계층의

복무가 있다 이는 諸役 가운데 가장 많은 민중이 이에 복역하며 職役

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대체로 職官이나 職役은 일반 요역에 상대되

는 용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고찰은 제

외된다

종래 고대 요역제도 연구사에서 가장 疏略한 부분이 職役 관련 사항

이다 비록 職役이 주로 당송 시대에서부터 상견되는 사항이고 중국고

대사에서 잘 논급되지 않는 사항이라 하더라도 국가 통치상 그러한 제

도가 구비되지 않을 수 없는 면이 있다 후대의 職役과 모든 면에서

동일한 형태는 아니지만 고대적 職役이라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고찰

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職役제도의 운영이 고대 요역제도와 신

분제상 어떠한 위치에 있고 어떠한 기능을 한 것인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고대 職役의 계승과 변화 등의 사항도 더불어 검토

되어야 할 과제이다

송대에 집중된 職役 관련 연구사에 의하면 그 연원과 개념 및 定義

관련 여타 제도 내지 규정과의 상관문제 운영상의 실태 성격 등의 사

항에 대해 수많은 異見들이 제기되어 온 바가 있다4) 職役은 대체로

당송 시대에 부유층 내지 上等戶에게 부과된 관부 물자의 운송 官莊

경작 징세 鐵冶업무 木材벌채 창고관리 관리의 送迎 통행세징수 등

의 役을 지칭하고 있다 職役은 일반민의 요역 복무에 대신하여 복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래 賦役이 면제되는 관리가 봉록을 받으면서 일

정한 품계를 지니고 업무에 복무하는 職官과는 구분된다 그렇다면 후

4) 勺培俊 當代中國學者關於宋朝職役制度硏究的回顧與展望 (漢學硏究通訊 22-3 2003)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39대의 職役과 같은 類의 제도가 고대사에서는 없었던 것일까 하는 의문

이 본 과제를 모색하게 된 출발점이다 따라서 고찰의 출발은 先秦의

윗 시기로부터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후대의 대부분 職官들은 고대

의 사례에 의거하여 제정된 것이다 송대 직역 관련 여러 연구는 그

연원을 漢 또는 위진수당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5) 본고는 그러한

類의 제도가 온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이미 周代 이래 실재하였다는

시각에 입각하여 살펴보고 그러한 모습이 선진에서 진한에 걸쳐 이어

지고 나아가 삼국기의 lt吳簡gt의 여러 실태에서 계승되고 있는 면을

입증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대체로 후대의 여러 제도는 거의 대

부분 이미 前代에 시행되었던 것들이며 나중에 여러 사정의 변화로

중단되었다가 재차 복구되면서 약간 변용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의미

에서 고대 제도사의 연원이 되고 있는 주례 등의 관련 사항과 고대

의 끝자락에서 이루어진 lt吳簡gt의 여러 명확한 자료에서 보이는 職役

制의 면모를 통하여 그 연원과 전개 과정 그리고 그 계승과 변용의

맥락을 일면이나마 해명할 수 있는 성과가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근래 lt吳簡gt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구별 吏役 문제 등 職役 관련

주요 사항에 대한 여러 난문제가 얽혀 있고 그에 대한 갖가지 異見이

분분하여 뚜렷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당한 혼란을 주고 있다

lt오간gt의 신출 자료들은 그간 관련 자료가 零碎하여 충분히 거론하기

어려웠던 고대 직역 관련 제반 사항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고 있어 가

히 획기적인 자료의 등장이라 할 수 있다 周代의 자료에서 삼국시기

까지 긴 기간 동안의 事跡을 망라하며 검토하게 된 것은 그 성과를 바

탕으로 lt오간gt의 신출 자료를 명확히 올바로 해석하는데 도움을 얻고

자 함이라는 면도 있다 필자의 기본 입장에서 보면 lt오간gt의 관련

문서에서 lt주례gt 이래 일맥 상통하며 전해져 온 職役의 맥락과 전통

을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고자 함에 본고의 주안점이

있다

5) 勺培俊 위의 글 pp17-18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0

Ⅱ 周禮의 胥徒와 庶民在官者

秦漢 官制에서 官階는 대체로 皇命에 의해 除授되는 命官 내지 長吏

와 그 명관에 의해 辟除되는 屬吏 내지 小吏로 크게 구분된다 그리고

양 官階의 秩祿에 의한 구분은 漢初의 lt이년율령gt秩律에 의하면 300

石 전한 중기 이후에는 200石이 기준이 되고 있다6) 그 실제의 관직

은 전자는 丞佐史尉의 佐官 내지 副官級 이상에 해당하고 후자는

그 미만인 鄉有秩獄史佐史鄉佐斗食令史嗇夫假官掾史

幹小史書佐循[脩]行 등의 掾屬 佐史類이다7) 그런데 이러한 구

성의 구분은 이미 주례의 官階 구성에서도 보인다 天官 冢宰에 治

官之屬 大宰 卿 1人 小宰 中大夫 2人 宰夫 下大夫 4인 上士 8인 中

士 16인 旅 (鄭玄의 注 lsquo衆也rsquo) 下士 32인 府 6인 史 12인 胥 12인

徒 120인 인데 주례의 거의 모든 관부가 이러한 구성으로 되어 있

다8)후한의 鄭玄과 唐의 賈公彦은 下士 이상은 왕명에 의해 임관된 王

臣이고 그 이하의 府史胥徒는 王臣에 의해 辟除된 계층으로 王

臣이 아니라고 하였다 즉 위에서 下士까지가 이른바 命官이고 그 아

래는 屬吏이다 특히 정현은 주례 여타 조목에 보이는 官階에서 lsquo群

臣rsquo을 卿大夫士로 해석하고9) lsquo群吏rsquo를 lsquo府史rsquo (秋官 司寇 小司寇 및

同 朝士 등에서의 鄭注) 또는 lsquo府史 以下rsquo(夏官 司馬 御僕의 鄭注)로

해석한다 庶人在官者 란 예기 王制제5에 農田을 100畝 단위로

만들어서 100畝씩 분여하는데 上農夫가 받는 田은 9인이 食할 수 있

고 그 아래는 8인이 食 할 수 있으며 그 아래는 7인이 食할 수 있고

6) 孫鴻燕 秦漢時期郡縣屬吏辟除問題硏究 (秦漢硏究 第一輯 三秦出版社

20071)

7) 後漢書 권28 백관5 注引 漢官曰 雒陽令middotmiddotmiddot(이하의 속관명)

8) 단지 예외로 角人이나 羽人은 그 직무의 성격에 따라 府와 史 중 어느 한 쪽

만 설치되어 있고 腊人과 食医는 양자 모두 설치되어 있지 않다 周禮注疏 같은 條의 贾公彦의 疏

9) 한편 주례 司寇 小司寇의 經文에서 경대부 하위의 lsquo群士rsquo의 稱이 있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1그 아래는 6인이 食할 수 있으며 下農夫는 5인이 食할 수 있다 庶人

在官者 는 그 祿이 이것으로써(8인에서 5인까지) 차등을 삼는다 제후

의 下士는 上農夫로 하고 그 祿으로 그 농경에 대신하기에 족하다 中

士는 下士에 倍하고 上士는 中士에 倍하며 下大夫는 上士에 倍한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라 10)하였고 맹자萬章句下에는 耕者가 수확하는 것으로 一

夫 當 百畝씩 百畝의 分田에서 上農夫는 九人이 食할 수 있고 그 다

음은 8인이 食할 수 있으며 中은 7인이 食할 수 있고 그 다음은 6인

이 食할 수 있고 下는 5인이 食할 수 있다 庶人在官者는 그 祿이 이

를 차등으로 한다 라11) 한 바에 의하면 庶人在官者 는 下士 아래

등급인 府史胥徒에 해당하며 차례로 9인이 食할 수 있는 百畝

의 최상급 농지를 경작하는 상농부(제후의 下士)의 아래 등급에 해당

하는 8인이 食할 수 있는 百畝의 경지 보유자는 府가 되고 그 아래

순으로 각각 7인의 食地 보유자는 史 그 아래 6인의 食地 보유자는

胥 그 아래 5인의 食地 보유자는 徒가 된다 이 규정에 의하면 下士에

서 徒까지는 모두 百畝의 경지를 보유하게 되는 면에서는 같지만 그

경지의 質에 따라서 5 단계의 차이 나는 경지를 차등으로 받게 된다는

것이 된다 上農夫 등의 차등은 주례의 鄭注에는 田의 肥瘠에 5등

급이 있어 수입이 같지 않다 라 하였고 위 인용문의 맹자 注에 一

夫一婦에 佃田이 百畝인데 百畝의 田에 糞을 퇴비로 주면 이것이 上農

夫이고 그 소득의 곡식으로 9口를 족히 먹일 수 있다(一夫一婦 佃田

百畝 百畝之田 加之以糞 是爲上農夫 其所得穀 足以食九口) 라 한

것에 의하면 糞의 퇴비 사용 여부 등으로 인한 토지의 肥瘠으로 발생

하는 수확의 양적 차이에 따른 구분임이 분명하다 즉 祿田 지급의 면

적 크기는 같지만 토지의 질적 차등을 기준으로 下位 5등의 차별이 결

10) 制農田百畝 百畝之分 上農夫食九人 其次食八人 其次食七人 其次食六人

下農夫食五人 庶人在官者 其祿以是爲差也 諸侯之下士視上農夫 祿足以代其耕

也 中士倍下士 上士倍中士 下大夫倍上士middotmiddotmiddot

11) 耕者之所獲 一夫百畝 百畝之分 上農夫食九人 上次食八人 中食七人 中次

食六人 下食五人 庶人在官者 其祿以是爲次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2정되고 있다 漢唐의 주석가들이 庶人在官者 를 주례의 府史

胥徒에 해당시킨 해석은 그들이 살던 시기의 정황에 의거한 것이고

관련 자료들도 충분히 현전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인정될 수 있는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일찍이 曾我部精雄은 鄭注와 賈疏의 차이를 제시하길 鄭玄은

府와 史가 庶人在官者 에 들어가지만 胥와 徒는 그에 들지 못한다고

한 반면 賈公彦은 4者가 모두 그에 포함되는 것으로 본 차이가 있고

鄭注의 해석이 옳다고 하였다12) 그는 상기의 주례 胥十有二人徒

百有二十人 에 대한 鄭注에 이는 民이 徭役을 給한 것이니 지금의 衛

士와 같다(民给徭役者若今衛士矣) 라 하였고 賈疏도 이에 따르고

있는데 胥와 徒는 요역 의무에 복무하는 것인 까닭에 봉록이나 수당이

지급되지 않았고 官長으로부터 辟除 임용된 것도 아니었으며 육체노

동이었던 반면 官長으로부터 선발되어 辟除 임용된 府와 史는 관부의

정신노동에 복무하였기 때문에 다르다고 하였다13) 때문에 庶民在官

者 에 胥와 徒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曾我部精雄은 鄭注와 賈

疏의 그러한 입장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여러 조문을 열거하고 있지만

賈疏가 府史胥徒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나 그가

열거한 자료에서 鄭注가 胥徒를 배제하고 있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주

는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屬이라 함은 그 屬인 胥徒이다 (春

官 宗伯 典祀) 群吏는 府史 이하이다 (夏官 司馬 御僕)라고 해석한

부분에 의하면 胥徒도 屬吏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는 입장이었을 것 같

다 또 曾我部精雄이 胥徒는 給徭役의 의무로 복무하는 것인 까닭에

봉록이 지급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위의 경문에서 최하급의 田地이지

만 1백무의 祿田이 지급된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 주장도 어긋나게 된

다 庶民在官者 의 봉록 문제는 아래에서 다시 상론한다

여기서 주의할 사항은 鄭注와 賈疏가 모두 한에서의 사정에 입각하

12) 曾我部靜雄 中國往古の胥吏制度 (中國律令史の硏究 東京 1971) pp456

-8

13) 위의 글 pp456-7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3여 府史와는 달리 胥徒가 모두 요역 의무로 징발되어 복무하는 자들로

본 것이라는 점이다 이 府와 史의 직무에 대해 정현과 가공언은 주례 小宰 宰夫의 8職 가운데 다섯째 府는 契하여 藏을 治하고 여섯

째 史는 문서로 贊治(보좌관의 업무)함을 관장한다( 五曰府 掌官契以

治藏 六曰史掌官书以赞治 에 의거하여 府는 문서와 器物의 藏(보

관 관리)을 관장하고 史는 문서의 起草를 관장하는 직책으로 해석하

였다 이는 진한시기 각 관부의 屬吏 掾史의 庶務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lt雲夢秦律gt 秦律雜抄(p133)에 佐 史 이상인 吏가 짐을 지고

운반하는 馬와 문서 간수를 담당하는 私卒(隨從의 卒)을 부려서 장사

하도록 하여 이익(錢)을 취하였으면 모두 遷刑에 처한다 라 하였는데

lsquo문서 간수를 담당하는 私卒rsquo이란 佐史 이상 관리 직속의 下屬으로서

그 상관을 隨從하며 보좌하는 까닭에 私卒이라 한 것이고 家內의 私

卒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정리소조가 lsquo隨從의 士卒rsquo로 해석하였는데

문서 간수를 직분으로 하는 史에 下屬된 卒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

든 府史의 史 및 그 下屬의 인력이 전국진에서도 설치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周禮天官 宰夫에 기술된 宰夫8職에서 일곱째 胥는 그 업무가 掌

官叙以治叙 인데 鄭注는 治叙란 관부에서 次序함이니 마치 지금(漢에

서) 侍曹 伍伯이 관리의 朝會에서 傳言 報告하는 것과 같다 胥가 什

長이 된 경우도 또한 그러하다 까닭에 漢法의 사정을 든 것이다(如今

侍曹伍伯 傳吏朝也 胥爲什長亦然 故擧漢法况之也) 라 해석하였다

좀 난해한 설명인데 이를 부연 설명한 賈疏는 이미 才智가 있어 什

長이 되어 관부에서 次序의 업무에 當하니 반드시 사람을 使役하는 곳

에서 그 徒를 科次한다 까닭에 관부에서 次叙한다고 하였다 로 해석

한다 즉 보통 胥徒로 함께 칭해지는 胥는 徒 중에서 才智가 있어 什

長으로 선발된 층으로 관부의 次序 업무를 맡게 되는데 徒를 使役하는

곳에서 그들을 통솔하며 科役한다는 것이다 如今侍曹伍伯 傳吏朝也

도 난해한데 賈疏는 漢에서 侍曹에서 伍의 長인 伍伯(伍長)에 이르기

까지 吏朝(관리의 朝會)에서 群吏가 諸官의 사무를 보고하여 傳하는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4것으로 해석하였다14)즉 侍曹에서 최말단의 부서 단위에 이르기까지

담당 부서의 朝會 때 각 하급 단위의 長이 업무 보고를 하는 것이다

그런대 이 伍伯은 5인조의 長이 아니고 漢의 執金吾의 속관에 (持戟)

五百(伍伯)二十人 이 있고 이 lsquo伍rsquo의 義를 lsquo當rsquo으로 lsquo伯rsquo의 義를 lsquo道rsquo로

해석하여 앞에서 導引하며 길을 驅除 정리하는 吏라고 한 韋召의 해석

이나15) 司隸校尉의 속관으로 先導隊나16) 門番의 임무를 하고 있는 사

례에17) 의하면 하급의 賤職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후한에 伍伯이

자주 보이는데 모두 走卒 鈴下와 連稱되거나 병렬되어 있어 일찍이 好

並隆司는 走卒은 伍伯이라고 하는 職役에 類한다 고 하여(후술) 모두

관부 말단의 職役 내지 賤職이라 하였다18) 凍國棟은 漢唐間의 伍伯이

微賤의 役이였지만 그 職의 성격상 권세를 빌려 남의 생사를 좌우하

고 謝禮錢을 챙길 수 있는 자리였다고 하였다19) 따라서 여기서는 吏

朝에 참석하는 최말단의 吏員으로서 先導 門番 등 役에 복무하는 伍伯

을 기술한 것이라 하겠다 胥徒는 곧 伍伯과 같이 관리의 최말단 수종

원이면서 그 손발 내지 爪牙의 기능도 하는 층이다 이러한 류의 최하

급 단위의 長은 什長이고 胥는 곧 그 什長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주례에서 각 관부의 徒는 그 員數가 거의 대부분 胥의 10배수이다 그

리고 관부의 次序 업무란 담당 단위의 胥가 그 소속 성원의 질서를 유

지하며 아울러 요역 징발된 民의 徒를 지휘 통제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후술)

이어 여덟째 徒는 그 업무가 官의 令으로써 徵令을 관장함(掌官令

14) lsquo如今侍曹五伯传吏朝也rsquo者漢時五人爲伍 伯 長也 是五人之長 言傳吏朝者

傳在朝群吏諸官事務於朝也

15) 후한서 宦者列傳 曹節條의 注에 韋召辯釋名曰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伍 當也 伯 道也

使之導引 當道陌中 以驅除也

16) 續漢書 輿服志上에 公卿以下至縣三百石導從 置門下五吏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車前伍伯 公

八人 中二千石 二千石 六百石 皆四人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17) 謝承後漢書에 華松家孤微 其母夜夢兩伍伯夾門 言司隸在此

18) 好並隆司 漢代下層庶人の存在形態(一) (史學雜誌 82-1 1973) pp17-1919) 凍國棟 漢唐間lsquo伍伯rsquo淺識 (中國中古經濟與社會史論考 湖北敎育出版社

2005) pp25-35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5以徵令) 인데 얼핏 徒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내용인 듯하다 정현은

이 lsquo徵令rsquo의 업무를 趨走給召呼 라 하였다 賈疏는 그 徒가 朝會에서

뛰어다니는 것을 금지시키고 官人에게 복역자를 공급하고 그들을 호

령하며 사역시키는 일이다(其徒止爲在朝趨走 供給官人召呼使役之事也)

고 해석하였다 관부 내에서 많은 복역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까닭에

그들이 소란 피우지 못하게 질서를 잡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서 徒에 의해 징발되고 사역되는 층은 관부에 복역 중인 刑徒 요역에

복무 중인 일반 서민 등일 것이다 주례의 각 관부에서 徒의 수는

수십 명에서 수백 명 많은 경우 8백명에 이르기도 한다 이들의 노동

력은 각 관부별로 항상적으로 갖추어진 것이지만 이 보다 더 많은 노

동력이 필요하여 형도나 일반 요역 복무자들을 징발하게 된다 그리고

그 징발된 노동력을 호령하며 질서를 잡고 사역시키는 직무도 필요하

게 된다 물론 징발된 자들을 사역시키는 일 뿐 아니라 자신들이 직

접 여러 노역의 所管 업무에 복무해야 한다 이를테면 地官 牛人에

胥二十人 徒二百人 이 있고 그 직책은 公牛의 사육이며 稻人에 胥

十人 徒百人 인데 그 직책이 稻田의 경작이고 夏官 虎贲氏에 胥八十

人虎士八百人 인데 鄭注에 의하면 徒라 하지 아니하고 虎士라 한 것

은 徒 가운데 勇力者로 선발된 까닭이다 하였으며 그 일부 직무에 同

司甲 司戈盾 司弓矢 繕人 校人 趣馬 巫馬 등에 속한 수십

명 내외의 徒는 모두 무기제조나 다루는 법 무기 성능 감별 馬의 감

별 養馬기술 馬祖 馬步 등의 神을 통해 馬의 질병을 파악하는 巫術

등에 뛰어난 상급자들 밑에서 보조 지원의 일 등 말단의 업무를 처리

한다 전문 기술과 지능이 필요한 업무인지라 말단의 업무 처리도 상

당히 명민한 자질이 필요하다 따라서 일반 서민 가운데서 이러한 재

능과 자질이 있는 자로 충원한다 이러한 각 관부의 업무 처리는 후대

에도 익히 보이는 사례이다 鄭玄은 胥를 lsquo諝(智者)ldquo로 읽어 才知의 뜻

으로 해석하였는데 같은 徒의 무리 중에서 才知者로 뽑힌 자라는 뜻으

로 보았다 胥가 什長인 까닭에 10인 가운데 1인 비율로 뽑힌 셈이다

아울러 徒 전체가 일반 서민으로부터 뽑힌 자들이라 할 수 있다 단지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6胥徒의 신분상 복무형태상의 제반 사항이 후대에 그에 상당하거나 유

사한 신분층과 사례에 대비할 때 상당히 다른 면이 많다는 사실이다

趙伯雄은 주례의 胥徒는 전국기까지 노예 厮 童보다 윗 등급이지만

거의 비슷한 신분이었고 厮役 내지 賤役의 담당층이었으며 徒가 한에

서는 주로 刑徒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고 하였으나20) 아래

기술하는 내용에 의하면 그러한 해석에 따를 수 없는 면이 많다 또한

한에서 徒는 형도 뿐 아니라 여러 무리를 가리키는데 통용되고 있어

여러 자료에 등장하는 徒가 가리키는 사항은 무척 다양하다

위의 注疏에 의하면 經文에서 徒의 업무를 官의 令으로써 徵令을

관장함(掌官令以徵令) 이라 한 것은 上部의 지시를 받은 徒가 새로

징발되는 徒의 징발 업무 및 이들을 인솔 지휘 사역하며 그 지시사항

(작업)을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胥와 徒가 모두 庶民在官者 라는 입

장에서 보면 徒가 최하위이지만 lsquo在官者rsquo이고 제8위와 제9위의 서열에

있으며 胥와 徒가 각각 6인과 5인이 食할 수 있는 토질의 경지 百畝

를 代耕의 봉록으로 받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이 출신은 징발된 요

역 복무자와 같다고 하더라도 여타의 징발된 일반 요역 복무자와는 구

분되는 계층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후대의 胥吏도 일반 서민출신이지

만 일반 서민과 다른 계층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 같다 만약 曾我部精

雄의 견해와 같이 府와 史까지만 庶民在官者 이고 胥와 徒는 그에

들지 못하는 것이라 한다면 주례 원문에 胥와 徒가 엄연히 제8위와

제9위에 올라 있고 봉록으로써 百畝를 받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기 어

렵게 된다

그리고 특별히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앞에 인용한 鄭注에 이는(胥

와 徒는) 民이 徭役을 給한 것이니 지금의 衛士와 같다 고 한 점이다

그래서 후한 중후기 衛士의 운영 형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또 鄭

玄은 駁五經異義에서 周禮에서 이른바 모두 징발한다 한 것은 胥

徒로 하여금 公家의 事에 給하게 한 것을 말함이니 지금의 正衛와 같

20) 趙伯雄 lt周禮gt胥徒考 (中國史硏究 2000-4) pp10-12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7다 고21) 하였다 한에서 궁성 내지 중도관에 番上 守衛하는 役은 正卒

의 役과 일반 更卒의 役이 있는데 鄭玄이 특별히 正衛라 한 것은 正卒

로서의 役임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의 요역 운영체제에서

衛士가 上番하는 役은 한구의에 民의 나이 23세가 되면 正이 되고

1년간 衛士 1년간 材官 騎士에 복무하며 활쏘기 말달리기 戰陣을 익

힌다(民年二十三爲正 一歲以爲衛士 一歲爲材官騎士 習射御騎馳戰陣)

라 한 것에 의하면 正卒이 그 복역 대상자이고22) 각 군 단위로 1년씩

21) 禮記王制 五十不從力征middotmiddotmiddot 의 條 孔穎達疏引 周禮所謂皆征之者 使爲胥

徒 給公家之事 如今之正衛耳

22) 漢의 正과 正卒 및 상비군의 문제에 대해서는 종래 여러 이견이 있다

正을 正卒로 보고 正卒이란 更卒(小繇)의 對稱으로서 병역의무자이고 재관

기사 위사등이 곧 정졸이라는 설이 가장 많이 받아드려지고 있다(濱口重國

秦漢時代の繇役勞働に關する一問題 秦漢隋唐史の硏究』上卷 東京 1966

1980 勞幹 漢代兵制及漢簡中的兵制 歷史語言硏究所集刊 10 1948 山田

勝芳 後漢時代の繇役と兵役 歷史 66 19869)正卒은 앞의 설과 같지만 正은 23세에서 56세 사이의 남자 즉 正丁 을 가리

킨다는 설(西村元佑 漢代の繇役制度 東洋史硏究 12-5 1953)正卒과 更卒이 별개인이 아니라 동일인이고 更卒은 正卒이 된 이외의 해에

매년 1개월의 역역에 복무하는 자를 가리키며 正은 23세-55세까지의 正丁인

데 正卒은 그 가운데 2년간 衛士 材官 騎士 등의 實役에 복역하는 것이라는

설(西田太一郞 漢の正卒について 東洋の文化と社會1 東京 1955)

材官 騎士등이 일반민에서 材力 있는 자로 선발되어 군국에서 常駐하는 전

문병사로서 직업군인인 lsquo士rsquo인데 대해 正卒은 일반민이 23세에 1년간 병졸로서

근무하고 1년간 衛士로 長安에 上番한다는 설 즉 正卒은 직업군인인 材官 騎

士와는 兵役體系上 別個의 것으로서 일반민의 병역 복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는 설(大庭脩 材官攷 -漢代の兵制の一班について 龍谷史壇 36 1953)正卒이란 23세에 이른 자 가운데서 신체강건한 자를 뽑아 衛士 材官 騎士

樓船 등의 어느 한 兵種에 복무하게 한 것이라는 설(濱口重國 勞幹 西村元佑

山田勝芳 앞의 논문 平中苓次 漢代の官吏の家族の復除と軍賦の負擔 中國

古代の田制と稅法 京都 1967) 諸說의 대부분은 이 견해를 공통적으로 취하

고 있다

秦漢에서는 始傅에서 免老까지의 모든 남자가 병역의무를 지는데 正卒은 그

適齡남자를 統稱하는 말이며 따라서 郡兵이나 衛士 戍卒은 正卒의 일부분이라

는 설(臧知非 秦漢lsquo正卒rsquo辨釋 中國史硏究 1988-1)正이란 傅籍된 待役者(兵役과 力役 포함)를 말하며 正卒은 어떤 특정의 役

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고 正(待役者)과 卒(服役中에 있는 正)로 구분되어 있

는 말이며 秦漢代에 병역 복무는 일부 병역신분에게 만 부과된 것이어서 나머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8조별 순번으로 상경하여 복역한다 正卒은 일반 更卒 중에서 신체강건

용맹 등으로 선발된 자들로 상비군 내지 직업군인의 성격이 강한 집단

이다 즉 그들은 일반민(서인)이면서도 그 중에서 선발되어 군사로써

免老에 이르기까지 복무하는 까닭에 일반민과는 다르다 胥徒 또한 서

인이면서 관부에 복무하는 까닭에 일반민과는 다르다 衛士는 특히 평

시에 도성(중도관)을 수비하기 때문에 관부에 거처하게 되고 胥徒 또

한 관부에서 직접 給事하는 까닭에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면에서 鄭玄

은 양자를 같은 성격의 계층으로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衛士가 일반

민에서 선발된 자들이고 胥는 徒 중에서 才智로 선발되고 徒는 분명

치는 않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일반 民庶 가운데 담당 직무 수행에 어

느 정도 자질을 갖춘 자로 선발된 자들일 가능성이 크다 또 漢書권74魏相傳의 顔注에 京師의 여러 관부에 와서 戍卒이 되는데 지금의

衛士가 上番하여 여러 官司에 나누어져 복무하는 것과 같다 라23) 한

것에 의하면 衛士의 이러한 복역 모습은 각 官司에 배치된 胥徒의 복

역 형태와 같다 전한 京師에서 복무중인 衛士의 수는 景帝末傾에 매

지 일반 白徒는 병역에 복역하지 않는다는 설(孫言誠 秦漢的繇役和兵役 中國史硏究 19873 및 ldquo爲正一歲rdquo辨 文史 31 198811)濱口說과 같이 正을 正卒의 略稱으로 보지만 濱口씨가 正卒을 일반적인 兵

士로 본 것과는 달리 庶民 중에서 일부가 선발되어 兵士(材官 騎士 등)가 된

것이며 이들은 일반서민과는 상대적으로 구별되는 신분 말하자면 獨自의 兵

士身分 으로서 일반서민과 같은 역역(更卒) 의무가 없었고 일반서민과는 다른

부담체계하에 있었다는 설(重近啓樹 秦漢の兵制について -地方軍を中心とし

て- 人文論集(靜岡大學) 36 1985)正卒은 일반민이 20세로 부터 2년간 복무하는 것이며 材官 騎士는 이와는

달리 전문병사로서 23세에서 56세까지 복무하는 것이라는 설(藤田勝久 前漢

の繇役勞動とその運營形態 中國史硏究 8 1984)한편 李成珪는 材官 騎士는 卒에서 징발된 전문 병사였고 1년 복역 후에도

예비역으로 분류 비상시 동원되었지만 (軍)吏나 士에 속하지 않는 자들로서

力役 복역의 한 형태인데 董仲舒가 말한 lsquo一歲力役rsquo은 바로 郡卒로 1년 복무하

는 材官 騎士의 役을 말한 것이라 한다(이성규 前漢 更卒의 徵集과 服役 方

式 -松栢木牘 47호의 분석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09 200912

pp33-34)

23) 來京師諸官府爲戍卒 若今衛士上番分諸司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9년 2만인 武帝 즉위 후 1만인으로 감하고 얼마 후 5천인을 늘려 武帝

후기에는 1만5천이었을 것으로 보인다24) 또 1개 군에서 番上하는 수

가 數千에서 2~3천인이었던 사례가 있다25) 전한 말 成帝 시기의 사

정을 말해주는 尹灣漢簡의 lt東海郡下轄長吏不在署 未到官者名籍gt

에 군현 밖으로 外勤出張 중에 있는 長吏의 현황표에 費長孫敞 十月

五日送衛士 가 있는데26) 費邑의 長 孫敞이 衛士를 送하는 업무로 출

장하여 아직 귀환하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동해군 下轄의 縣(18)邑

(2)侯國(18) 38곳(lt集簿gt) 가운데 오직 費邑에서만 衛士가 上番되고

있다 이에 의하면 衛士의 상번은 각 군에서 縣級 단위로 교대 상번하

는 것으로 보인다 濱口重國은 후한에서 正卒의 군현상비군이 폐지되

었지만 전한에서와 마찬가지로 매년 연말에 1년의 복무가 끝나고 귀향

하는 衛士들에게 황제가 향연을 베푸는 饗遣故衛士儀가 행해지고 있는

사례를 들어 衛士의 上番은 후한에서도 행해지고 있음을 지적한 바가

있다27) 아울러 그는 군현 상비군 폐지 후 중앙의 衛士 부대가 2500

내지 2600명인데 이는 중앙 인근 지역에 한정하여 징발된 자들로 보

아야 한다고 하였다28) 후한 周禮注에서 鄭玄(127-200)의 衛士 인용

이 전한시기의 사정에 의거한 것인지 아니면 그의 활동시기인 후한 후

기의 사정에 의거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후한 중 후기에도 衛士의

上番制가 부분적으로나마 유지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4) 濱口重國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隋唐史の硏究』上卷 東京

1966 1980) p286 注2)

25) 「上臨饗罷衛卒 衛卒數千middotmiddotmiddot」 (漢書 권77 蓋寬饒傳) 「河南卒戍中都官者二三

千人middotmiddotmiddot」 (漢書 권74 魏相傳)

26) 張顯成 周羣麗 尹灣漢墓簡牘校理(上篇) (天津古籍出版社 2011 3) p32

27) 濱口重國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隋唐史の硏究 (上)) p283

28) 濱口重國 위의 글 pp284-285 그 주된 근거는 속한서 백관지3 尙書條에

蔡質漢儀曰 ldquo右丞與僕射對掌授廩假錢穀 與左丞無所不統 凡中宮漏夜盡 鼓鳴

則起 鍾鳴則息 衛士甲乙徼相傳 甲夜畢 傳乙夜 相傳盡五更 衛士傳言五更 未

明三刻後 雞鳴 衛士踵丞郎趨嚴上臺 不畜宮中雞 汝南出雞鳴 衛士候朱爵門外

專傳雞鳴於宮中rdquo 應劭曰 ldquo楚歌 今雞鳴歌也rdquo 晉太康地道記曰 ldquo後漢固

始鮦陽公安細陽四縣衛士 習此曲於闕下歌之 今雞鳴是也rdquo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0中都官의 몇 몇 部署에 給事하는 衛士의 員數 규정이 있는데 속한

서 백관2 注引 漢官의 光祿勳에 81인 太宰令에 15인 高廟令에 15

인 世祖廟令에 20인 衛尉에 60인 南宮衛士令에 537인 北宮衛士令에

471인 右都候에 416인 左都候에 383인 南宮南屯司馬에 102인 (北)宮

門蒼龍司馬에 40인 玄武司馬에 38인 北屯司馬에 38인 北宮朱爵司馬

에 124인 東明司馬에 180인 朔平司馬에 117인의 衛士가 소속되어 있

다 이는 후한의 사정을 기록한 것인데 그 총합이 2637인이다 전한에

비해 그 員數가 급감한 것은 광무제의 부역 경감정책과에 의한 것이라

하겠고29) 소수지만 그 員數가 규정되어 있다는 것은 후한에서 代役制

내지 雇傭制로 대체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전과 같은 上番制가

시행되었음을 말해준다 후한에서 正卒 및 군현의 상비군제가 온전히

사라진 것이 아닌 것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후한의 2637명의

員數는 전한에 비해 대략 15 정도 되는데 전한의 사정을 기준으로 한

다 하더라도 군현의 正卒은 평생 1회만 당번이 되어 上番하더라도 중

도관의 衛士 給事가 충분히 운영될 수 있다 위의 lt윤만한간gt에서 전

체 38현읍후국 가운데 그 해에 費邑의 正卒 만이 상번하고 있고 당시

郡別로 상번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동해군이 매년 상번의 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각 正卒은 38년에 1회만 상번하면 된다 물론 군별 현

읍후국의 수가 다르기 때문에 그 回次의 수도 다르고 현읍후국별 正

卒의 수에 따라 1개 이상의 현읍후국이 함께 동원된 경우도 충분히 있

을 수 있다 그러나 각 군의 현읍후국 수가 보통 20개는 넘는다 게다

가 費邑의 正卒도 몇 개 조로 나뉘어 순차로 상번하는 것이라던가 각

郡도 매년 상번이 아니라 몇 년 만에 순번이 돌아오는 체제라면 각 正

卒의 중도관 衛士 복무는 아무리 많아도 일생에 1회를 넘기 어렵다

앞에 든 漢舊儀의 民年二十三爲正 一歲以爲衛士 는 곧 그러한 사

정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일생 1회의 복무형태는 胥徒의

29) 濱口重國은 광무제의 경감책과 아울러 虎賁 羽林 羽林左右騎 五校尉의 軍이

警備에 추가되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위의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

隋唐史の硏究(上)) p283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1평생 내지 세습되는 면과(후술) 다르지만 일반의 役 대상자에서 선발

되어 중도관에 給事한다는 면에서는 공통이다 그런데 전한에서 lsquo父死

子代rsquo였던 중앙군은 羽林孤兒 뿐이었지만 후한에서 虎賁 羽林 羽林左

右騎 五營士의 중앙군에까지 확대되었다고 한 濱口重國의 지적이 있

다 그에 의하면 후한에서 중앙군단의 세습화와 함께 바로 지방에 特

設된 군단의 세습화도 이루어지면서 魏晋시기 兵民分離의 前段을 이루

게 되었다고 한다30)후한 후기 특히 羌의 侵寇 이후 郡에 都尉를 설치

하고 全民을 징병대상으로 삼아 상비의 郡兵을 다시 설치하고 있으

며31) 여러 출신 성원을 규합한 병단이 私屬이 되기도 하고 국가의 군

단이 되기도 하며 部曲 내지 그와 같은 류의 세습 병단화 하는 과정

에 대해서는 필자도 일견을 피력한 바 있다32)따라서 징병제에 의한

正卒의 상비군 운영이 폐지된 이후 15 수준으로 급감한 정졸의 衛士

가 上番하고 있었지만 이 군단 또한 후한 중기 이후 전란시기가 되면

서 世兵化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胥徒의 세습과 후한 후기에

활동하였던 鄭玄 당시 衛士의 세습화는 일치하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鄭玄이 말한 衛士는 한초의 사정이 아니라 그가 활동하였던 후한 후기

의 사정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鄭玄이 漢의 衛士 上番制에 의거하여 주례의 胥徒制를 해석한 것

은 양자의 해명에 큰 도움을 준다 상술한 바에 의하면 몇 가지 면에

서 양자가 일치하는 점이 대체로 인정된 셈이지만 胥徒가 거의 모든

관부에 설치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漢代의 衛士는 광록훈이나 衛尉

제사 守陵등 일부 한정된 관부에 설치되어 있다 또한 주례의 胥徒

가 士 이상의 신분과 마찬가지로 代耕의 봉록으로써 농지를 받고 있는

봉록자라는 면은 지방에서 상경하여 1년의 기간만 한시적으로 복무하

는 衛士의 경우와는 자못 어울리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衛

士는 上番者로 충당되지만 일단 관부별로 員數가 규정된 員吏로서 복

30) 濱口重國 앞의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p285

31) 濱口重國 光武帝の軍備縮小とその影響 (秦漢隋唐史の硏究(上)) p30832) 박건주 한대의 지방 상비군과 部曲의 推移 (동양사학연구 118 20123)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2무하게 되기 때문에 일부는 胥徒처럼 員吏로서 수년 이상을 관부에 居

하는 어느 정도 전문화 한 衛士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鄭玄의 활

동 시기와 큰 차이가 없는 lt長沙走馬樓吳簡(이하 lt吳簡gt으로 약칭)gt

領二年四家衛士田漆十五畝 畝收限米二斛 合爲吳平斛米一百五十斛

(5-1669)에 의하면 4家의 衛士가 限田75畝 佃作에 대한 租로 畝當 限

米2斛을 납부하고 있다 lt오간gt의 限田에 대해 여러 異說이 있지만

(후술) 그 佃作者와 限米 납부자의 계층에 수십 종의 吏員들이 포함되

어 있는 것에 의하면(후술) 衛士도 그러한 吏員으로서 限田이 지급된

것으로 보인다 단지 限田을 佃作케 한 것이 吏員에 대한 경작의 부과

(경작 노동력의 징발)를 뜻하는 것인지 혜택의 수여를 뜻하는 것인지

는 아직 분명치 않지만 于振波의 분석과 같이 畝當 限米2斛의 징수는

대단히 과중한 액수인 까닭에33) 受惠라기 보다는 경작 노동력의 징발

내지 課役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祿田의 의미로 보기

어렵지만 당시 吏職의 賤役化 현상을 고려하면 그러한 시대적 여건 하

에서 實益이 거의 없는 祿田으로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어쨌

든 후한말 이래 小吏 내지 吏戶와 병사층의 세습화 진전을 고려한다면

어떠한 방식이든 그 가족의 생계를 위한 봉록의 지급이 있었을 가능성

이 더욱 커진다

이상에서 검토한 몇 가지 면에서 보면 府史와 胥徒 중에 후자 만

lsquo給徭役rsquo에 의거한 복무라는 점 등에서 다른 계층이지만 庶民在官者

로서 함께 칭해질 수 있는 층이었다고 본다 무엇보다 胥徒가 각각 제

8위와 제9위의 在官者 서열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동시에 府史는 모두 官長으로부터 선발되고 辟除 임용된 자들인데 비

해 胥徒는 일반의 요역의무를 대체하여 官에서 給事中인 계층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胥徒가 lsquo在官者rsquo로 칭해지는 이유는 관부 내에 거

처하면서 노동을 통하여 잡다한 庶事를 직접 처리하고 있으며 국가로

33) 于振波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中國社會科學院硏究生員學報 2004

-1) p122 限米 납부액의 과중성에 의거해서 限米 납부자는 屯田노동자 限米

는 屯田의 租稅라고 본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3부터 代耕의 祿田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관부의 제반 업무는 각 업무

分司 말단에 속한 胥徒의 노역에 의해 완수될 수 있다 이들은 노역

징발 대상자인 徒 중에서 재능 등의 명목으로 선발된 자들이고 그 중

에서도 才智가 있는 자가 胥이다 이들은 선임자 내지 연장자의 지휘

감독 아래 각 관서의 노역 업무와 勞役者 징발 업무 등으로 奉公한다

이것이 胥徒의 在官者로서의 職事이다 胥徒의 職事는 어디까지나 노

동이 전제되는 勞役이며 일반민의 요역의무에 대신하여 관부의 職에

給事하는 까닭에 職役이라 할 수 있고 官長의 선발로 辟除된 府史는

정식의 官員으로서 奉公하는 것이고 給徭役 에 대신하여 복무하는

것이 아닌 까닭에 胥徒의 職役과 구분하여 그 職을 職官이라 할 수 있

다 그 上級인 命官도 물론 職官이다 職官의 기본 요건은 그 官職에

任職인 상태가 그대로 王命을 받들어 奉公 중인 것을 뜻하는 까닭에

이미 王命을 수행중인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체로 일반 서민

의 기본 요역에서 면제된다 단지 면제의 세부 규정에 의하면 役의 종

류와 신분의 차등에 따라 그 면제 대상의 범위가 구분된다 한편 전쟁

에 참전하는 의무는 면제되지 않는다 모든 官吏는 유사시 종군해야

한다 官人이 본래 戰士層인 國人 출신에서 나온 때문이다 일반 서민

은 매년 일정 기간 동안 만 국가의 命을 받아 노역에 징발되어 복역하

는 까닭에 그 생업은 징발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시적인 노역이 아니라

그들이 부여받은 職인 恒常의 耕作奉公에 있다 職官은 그 복무를 통

해 생활이 영위되지만 일반 서민이 징발되어 이행하는 노역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無償이다

官職앞에 인용한 宰夫8職에 대한 賈疏의 끝 부분에 周禮 위 아래

의 글에 胥가 있으면 반드시 徒가 있는 것은 胥가 什長인 까닭이다

鱉人과 臘人의 類는 徒만 있고 胥가 없는 것은 徒만 있으면 충분하여

지휘자(長師)를 둘(빌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食醫의 類에는 胥徒가

모두 없는 것은 그 官만의 行事(업무처리)로도 충분하여 胥徒의 도움

을 빌리지 않는 까닭이다 고34) 하였는데 胥와 徒가 모두 설치되지 않

은 部署는 그 官만의 업무처리만으로 충분한 까닭이라 하였으니 바로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4府史까지의 屬吏를 官으로 한정한 것이다 즉 胥徒는 官에서 복무하고

있지만 官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庶民이고 庶民在官者 이며 그들의

복무는 職官이 아니고 職役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들도 그 職役으

로 생업을 유지하는 까닭에 職官과 동일성을 지닌다 주례에 의하는

한 胥徒가 일시적으로 복무하는 형태는 아닌 듯 하다 무엇보다도 그

들에게 祿田이 지급되고 있기 때문에 매년 혹은 매월 교체되는 요역

형태의 근무는 아닐 것이다 또한 각 분야별로 상당한 전문 지식과 숙

련도가 요구되는 업무 처리상 단기간 교체되는 근무형태를 취하였을

것 같지도 않다

이렇게 볼 때 胥徒가 官에서 일반 관리와 마찬가지로 계속적으로 근

무하면서도 그 근무를 lsquo給徭役rsquo의 代替로 본 주석이 옳다면 아무래도

胥徒는 신분제사회에서 官이 될 수 없는 자 또는 現任의 官과는 엄밀

히 구분되는 신분이었던 까닭에 그 직무 또한 (일반 서민의) 노역의

의미로 인지되고 평가된 것이 아닐까 한다 漢代사회의 신분구조는 漢

家의 주인인 天子가 그의 家人인 일반 民庶를 직접 장악하는 구조가

있고 동시에 漢家로부터 독립된 개별의 士族이 각각 lsquo家rsquo의 주인으로

서 천자와 主客의 관계가 아직 유지되는 체제가 병존하는 二元의 구조

로 되어 있다고 본 濱口重國의 견해가 있다35)이러한 입장을 발전시켜

漢帝國은 황제가 인민을 인두적으로 지배하는 lsquo齊民制rsquo와 천자가 lsquo家rsquo를

非人頭的으로 지배하는 家父長制的 관계로서의 lsquo家産制rsquo라는 이중구조

로 되어 있다고 본 好並隆司의 견해도 있다36) 그리고 이러한 이중성

의 사회구조를 公과 私 君臣관계의 면에서 진전시킨 尾形 勇은 그 臣

이 되는 층을 仕宦者와 從役者로 나누고 있다37) 위의 설들은 모두 한

34) 周禮 上下文有胥必有徒胥爲什長故也 鳖人腊人之類空有徒無胥

者得徒则足不假長師故也 食醫之類胥徒并無者以其專官行事不假胥徒

35) 濱口重國 唐王朝の賤人制度 主篇 第六章 第二節 (東洋史硏究會 1966)

36) 好並隆司 前漢帝國の二重構造と時代規定 (歷史學硏究 375 秦漢帝國史

硏究 東京 1978에 재수록)

37) 尾形 勇 漢代における 家人 と君臣關係 (史學雜誌 83-4 1974) pp3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5대의 사정을 말한 것이지만 이러한 이중구조의 신분제 내지 사회구조

는 주례의 관부 구성 체제에 의하면 상위에서 下士 내지 府史까지가

仕宦者에 해당하고 胥徒를 후자 즉 從役者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연원은 이미 周代에 있다 士人 내지 仕宦者는

그 직무로써 奉公하고 從役者는 賦稅役의 부담으로써 奉公한다38)胥徒

가 비록 官에 있는 자이지만 二元구조의 신분제 하에서 士人이 되지

못한 가운데 그 직무는 職官이 되지 못하고 職役에 머무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Ⅲ 職役 담당층의 복무 형태와 봉록 지급의

문제

周代에 lsquo給徭役rsquo의 차원에서 관부에 給事하는 胥徒가 있었다면 후대

의 요역 가운데도 그러한 항목이나 사례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다 또한 胥徒의 직무는 續漢書 輿服志上에 보이는 伍伯辟車

鈴下侍閣門蘭部署街里走卒 등 관부 말단에서 경호導從심

부름侍衛車馬관리 巡邏 등의 賤職에 종사하는 이른바 徒卒의 職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그런데 이들의 役이 民의 일반 요역 의무에 따

라 징발되어 일시적으로 복역하는 것인지 아니면 상술한 胥徒와 같이

庶民在官者 로서 관부의 최말단에서 상시로 근무하며 관부에 의지하

여 생업을 유지하는 下吏로서의 복무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후한서권58 虞詡傳에 永平(후한 明帝期) 章和(章帝期) 중에 州郡이 走卒錢으

로 貧人을 給貸(雇賃金을 지급)하였다 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集解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35

38) 尾形 勇 위의 글 pp28-29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6走卒伍伯之類란 續漢志에 이른다

(車前에) 伍伯은 公은 8인中二千石은 6인千石과 六百石은 모두 4인百石

이하에서 二百石은 모두 2인을 둔다 黃綬(4백석에서 2백석의 관리)의 武官에

는 伍伯을 따르게 하고 文官에는 辟車鈴下侍閤門闌部署街(里)走卒

을 따르게 하는데 모두 程品의 多少가 있으며 맡은 바 직무에 따라 領率하게

한다 (驛馬는 30里에 하나를 설치한다) (卒은) 모두 적색 두건과 진홍색 소창

옷을 착용한다

즉 지금 鞭杖을 잡고 따르는 자들이다 이는 錢이 있는 자로 하여금 그 (役

에) 대한 資錢을 내게 하여 몸으로 직접 노역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39)

〔 ( ) 내의 글은 결락된 부분을 輿服志 원문에서 보완함〕

인용된 속한지輿服志의 기사는 公卿 以下 縣의 三百石 官長에 이르

기까지 이들을 導從하는 下吏들의 配屬 員數를 규정한 것이다 열거된

役職들은 모두 300석 이상 관원을 導從하는 役員들인데 후한 明帝 章

帝期에 일부 지역에서 이 役職의 명목으로 走卒錢을 징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記事는 順帝 연간에 尙書僕射 虞詡가 上言한 것인데 당시

長吏 2천석관들이 謫罰者에게 貧人 구호를 위한 lsquo義錢rsquo의 명목으로 贖

錢을 강요하고 守令은 이를 빌미로 聚斂함에 順帝 원년 이래 백만전

이상을 受取한 長吏가 끊이지 않고 있는 사정을 진언한 가운데 그 이

전 永平 章和 연간에 있었던 사실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즉 州郡에

서 走卒錢을 징수하여 그 역을 면제시켜주고 대신 빈궁한 자를 그

役에 고용하여 그 錢을 雇賃으로 지급해주는 일이 있었다 당시 司空

이 이 事案을 탄핵하니 해당 州郡縣이 모두 坐되어 免黜되었었다 그

때의 전례와 마찬가지로 당시 임시로 사용하였던 제도(走卒錢 징수와

雇賃 지불)를 蠲制할 것을( 蠲制權制 ) 주청하였고 이에 조서를 내려

州郡을 切責함으로써 그러한 贖錢 강요가 이로부터 그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40) 따라서 走卒錢 징수와 導從役의 雇傭 방식 운영은 후한

39) ldquo卽今行鞭杖者也 此言錢者令其出資錢 不役其身也 走卒伍伯之類也 續漢

志曰 (車前)伍伯 公八人中二千石六人千石六百石皆四人自百石以下至二

百石皆二人 黃綬 武官 伍伯 文官 辟車鈴下侍閤門闌部署街

(里)走卒 皆有程品多少 隨所典領率 (驛馬三十里一置 卒)皆赤幘絳褠 卽

今行鞭杖者也 此言錢者令其出資錢 不役其身也

40) 후한서 권58 虞詡傳에 是時長吏二千石聽百姓謫罰者輸贖 號為lsquo義錢rsquo 託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7明帝 章帝期에 한정되어 시행된 것으로 모두 不法이었고 虞詡의 順帝

시기에는 시행되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渡邊信一郞에

의하면 이들은 秦漢에서 관부의 최하층으로서 관부에서 필요로 하는

導從役 등 일상적인 노역에 복무하며 民으로부터 강제 징발되어 복무

하였는데 후한 초에 이미 走卒錢이 징수되고 특정 임무는 면역전을

재원으로 한 고용노동으로 전환되었다고 한다41) 그러나 章帝 이후 50

여년이 지난 順帝期에 이르기까지 고용 형태의 운영이 반복되지 않고

있는 것에 의하면 고용 노동으로의 진전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

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어쨌든 導從役의 고용 방식 운영이 不法

이었다 함은 그것이 본래 징발 형식으로 운영되는 것이었음을 말해준

다 錢이 있는 자로부터 走卒錢을 받고 이 재원으로 빈한한 자를 고용

하여 雇賃을 지급하는 不法을 행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어지는 지적에

서 順帝 때 지방관들의 贖錢 강요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관리들의 私利

도모에 의한 것이다 또한 그 의무자에 富者가 있어 그 實役을 피하고

자 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導從役과 같은 下吏의 봉록은 매

우 적기 때문에 여타의 수익이 있다면 그 봉록에 꼭 의지할 필요는 없

었을 것이다 이들이 비록 관부의 員吏이고 그 吏職이 생업이 되는 것

이지만 최말단의 賤役 내지 厮役으로서 천대받는 면이 많았을 것이다

때문에 이 職役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도 많았을 것이다

예기王制에 무릇 전문기능으로 事上(奉公)하는 자가 祝史

射御醫卜 및 百工이다 무릇 전문기능으로 事上하는 자는 다른

일을 해서는 안 되며(不貳事) 근무하는 관서를 옮겨서도 안 된다(不移

官) 出鄕하면 士와 抗禮하지 못하며 家에서 仕하는 자도 出鄕하면 士

와 抗禮하지 못한다 고42) 하였다 즉 士의 신분이 아닌 일반서민 출신

為貧人儲 而守令因以聚斂 詡上疏曰 ldquo元年以來 貧百姓章言長吏受取百萬以上

者 匈匈不絕 謫罰吏人至數千萬 而三公刺史少所舉奏 尋永平章和中 州郡

以走卒錢給貸貧人 司空劾案 州及郡縣皆坐免黜 今宜遵前典 蠲除權制 於是詔

書下詡章 切責州郡 謫罰輸贖自此而止rdquo

41) 渡邊信一郞 中國古代の財政と國家 (汲古書院 2010 第三章) p128

42) 禮記王制 (十三經注疏 中文出版社) p2905에 凡執技以事上者 祝史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8이 여러 기능직의 吏職에 복무하면서 함께 관부에 있지만 본 소속의

직장에서 다른 직장으로 옮길 수도 없고 신분상 士와 대등한 위치에

처하지 못하며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또한

府史 이상의 職官과 구분되는 胥徒의 특성과 상통한다

속한서 백관지2에 射聲校尉一人 比二千石 의 本注에 服虔曰

工射이다 어두운데서 소리를 듣고 활을 쏘아 명중시키는 까닭에 이름

하였다(工射也 冥寞中聞聲則射中之 故以為名 고 하였는데 여기서

工射 는 射도 工 의 한 분야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은 그 기능으로

奉公하는 것이 그 職分이고 생업이기도 하며 다른 직종이나 직업을

갖을 수 없고 옮길 수도 없는 자들이다( 不貳事 不移官 ) 이들은 그

職能으로 생업을 유지하지만43) lsquo父死子代rsquo 의 世業으로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고 賤職인 까닭에 여기에서 벗어나 신분상승을 바라는 경향이

있게 된다 이를테면 三國魏의 黃朗은 그 부친이 縣卒로서 鈴下 伍伯

의 職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抗志 遊學하여 현령을

거쳐 군태수에 이르렀는데 부친의 일을 생각하여 屬下의 鈴下 伍伯을

부를 때 鈴下 伍伯이라 부르지 않고 항상 姓字로 불렀다 비록 분노

하였을 때도 鈴下 伍伯으로 부르지 않았다44)

그런데 導從役 복무자는 징발되어 관부 내에서 복역하는 인원 중에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전체 복역 대상자 가운데 극히 소수에 불과하

다 특히 黃綬의 武官을 導從하는 伍伯 등의 직무가 護衛와 侍衛 警備

등이 위주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무술과 용력을 갖춘 이들로 선발된

그룹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黃綬 이상의 문무관에 소속되어 그 員數

射御醫卜 及百工 凡執技以事上者 不貳事 不移官 出鄕不與士齒 仕於

家者 出鄕不與士齒

43) 禮記 王制에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百工 各以其器食之 (注에 器 能也)

44) 三國志 권23 裴潛傳 所引 魏略에 黃朗字文達 沛郡人也 爲人弘通有性

實 父爲本縣卒 朗感其如此 抗志遊學 由是爲方國及其郡士大夫所禮異 特與東

平右姓王惠陽爲碩交 惠陽親拜朗母於床下 朗始仕黃初中 爲長吏 遷長安令 會

喪母不赴 復爲魏令 遷襄城典農中郎將涿郡太守 以明帝時疾病卒 始朗爲君長

自以父故 常忌不呼鈴下伍伯 而呼其姓字 至於忿怒 亦終不言 朗旣仕至二千石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9가 정해진 것에 의하면 庶民在官者 로서의 胥徒에 상당한다 봉록이

지급되는 일자리이며 민의 공동의무인 일반요역에 대신하여 복무하는

것인 만큼 면역전의 授受 행위는 不法이다

상술한 輿服志에 각 300석 이상의 官員 당 이들의 배당 員數가 규

정되어 있는 것에 의하면 이들도 분명히 관부의 한 구성원들이다 속한서 백관지 注引의 漢官에는 官長 내지 命官級 屬下의 員吏 員數

및 秩祿을 기재하고 있다 이를테면 속한서 백관2에 衛尉 卿一人

中二千石 本注曰 掌宮門衛士 宮中徼循事 丞一人 比千石 이라 하였

고 注引에 漢官曰「員吏四十一人 其九人四科 二人二百石 文學三人

百石 十二人斗食 二人佐 十二人學事 一人官醫 衛士六十人」이라 하

였다 이 가운데 百石까지는 봉록 지급이 명시되어 있지만 그 이하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봉록이 전혀 지급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斗食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斗升으로 계산되는

日數 계산에 의한 연봉액이 정해져 있다 百官受奉例의 注 所引 漢書音義에 斗食祿 日以斗爲計 라 하였고 한서 百官表上에 漢官名

秩簿에 이르길 斗食은 月俸 11斛 佐史는 월봉 8斛이다 一說에 斗食

이란 연봉이 百石에 이르지 못하여 日當으로 계산해서 1斗2升을 食하

는 까닭에 斗食이라 한다 고 하였다 속한서 백관5의 百官受奉例에

서는 百石이 月 16斛이고 斗食 이하는 위와 같다 또 墨子 雜守篇에

斗食은 1년에 36石이다 參食이면 1년에 24石이고 四食이면 1년에 18

石 五食이면 1년에 14石4斗 六食이면 1년에 12石이다 斗食은 5升을

食하고 參食은 3升小半을 五食은 2升 六食은 1升大半을 食한다 하루

에 2회 食한다 고 한데서 알 수 있다 斗食 은 1食에 5升 하루에 2

食이니 매일 1斗를 받아 1년 360일에 총 36石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

參食 은 1食에 3과 13升 즉 13斗를 받아 1일에 23斗가 되고 1년에

24石을 받는다 그 이하의 四食에서 六食까지는 斗食 이하에 열거된

下吏의 지급액 규정일 것이다

閻步克에 의하면45) 周代에서는 士 이상에게 祿田을 지급하여 그

수익을 食하게 하는 것으로 연봉을 지급하는 형태였는데 하급관리나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0工醫師 등 기술직 및 兵員에게는 月 단위로 지급하는 이른바 稍食

형태로 운영하였으며 나중에 증액 고정화 되고 아울러 錢으로 지불하

게 됨으로써 月俸의 秩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稍食 이란 주례天官

宮正에 宮正이란 왕궁의 戒令糾禁을 맡는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그 출입을 검찰

하고 그 稍食을 균등히 하고 그 淫怠하고 奇邪한 民을 제거하고 그

什伍를 모아 道義를 가르친다 月이 끝나면 그 稍食을 會計하고 1년이

끝나면 그 (吏職의) 行事를 검열한다 라46) 하였는데 이 稍食에 대해

鄭司農은 禄廪 疏는 宫中官府 등의 月禄 이라 하였다 즉 稍食은

月俸인 셈인데 이를 하급관리의 月俸이라 한 것은 國語晋語4에 公

은 貢을 食하고 대부는 읍을 食하며 士는 田(公田)을 食한다 庶人은

力으로 食하고 工商은 官(官으로부터 받은 田)을 食하며 皁隸(吏에

속한 徒隸)는 職을 食하고(각 담당 職의 大小에 따라 食祿) 官宰(大夫

의 家臣)는 加(大夫의 家臣)를 食한다 에서 公 大夫 士까지는 國 邑

田을 봉록으로 받는 까닭에 연봉을 받는 것이 되고 庶人 이하는 관부

에 給事한 力(勞役) 등을 계산하여 지급 받는 까닭에 월봉이라는 것이

다 또 주례 夏官 校人의 校人은 王馬之政을 관장한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馭夫

의 祿과 궁중의 稍食을 균등히 한다 라 하였는데 그 注에 師圉는 府

史 以下다 고 하였다 즉 府史 이하 下吏의 봉록 관련 업무이다 또 주례 天官 醫師에 연말이 되면 그 醫療한 실적을 검사하여 그 食을

정한다 十점 만점이면 上 十에 一을 失하면 次等 十에 二를 失하였

으면 그 次等 十에 四를 失하였으면 下로 한다 하였고 또 방비를

굳건히 하기 위해 성곽 溝池 등의 役事와 守備를 관장하는 掌固는 이

에 복무한 士庶子와 衆庶에 대해 필요한 도구와 財用을 공급해주고 그

稍食을 균등히 한다고 하였다(同 夏官 掌固) 이러한 자료에 의하면 府

史 이하의 下吏에 대해 祿俸 지급의 額이 기술되어 있지 않는 것은 食

邑田이나 百石까지는 年俸의 일정액이 규정되어 있고 이 액수가 월봉

45) 閻步克 從稍食到月俸mdash戰國秦漢祿秩等級制新探 (學術界 20002)46) 宮正 掌王宮之戒令糾禁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幾其出入 均其稍食 去其淫怠與其奇邪之民

會其什伍而敎之道義 月終 則會其稍食 歲終 則會其行事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1으로 나뉘어 지급되는 것과는 달리 그 이하의 吏는 月別 給事한 日數

나 실적을 계산하여 지급하는 月俸 형태였고 그 총합이 百石 이하였

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앞에 든 百官名秩表나 묵자의 기사는 그

러한 사정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府史 이하인 胥徒나 그 직급에 상당

하는 속한서 백관지의 각 관부별 官長 屬下의 員吏로서 有秩 아래에

나열된 직급들도 그 근무일수나 실적에 따라 봉록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有秩의 官은 百石 이상의 年俸이 지급되는 下限의 관리

를 가리키며 佐史 이하의 월봉 수입자에 대비하여 쓰이는 용어이다

근래 楊振紅 廣懶薰雄 宮宅 潔 등은 佐史 이하의 下吏에는 1개

월을 단위로 윤번 근무하는 자들이 있어 이들은 그 이름 앞에 更 이

붙고 이에 대비하여 常勤하는 자들은 冗 이 붙어 구분되었다 하고

그 내역과 성격을 고찰하였다47)사실 후대의 冗 내지 冗官 이 보통

散官 의 뜻이었던 것에 비해 선진에서 진한 시기의 여러 자료에 보이

는 冗 은 위의 연구들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更 에 대한 相對로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lt운몽진간gt 秦律十八種 工人程에 冗

隸妾 2인은 工 1인에 當하고 更隸妾 4인은 工 1인에 당한다 小隸臣妾

으로서 可使者 5인은 工 1인에 당한다(冗隸妾二人當工一人 更隸妾四

人當工一人 小隸臣妾可使者五人當工一人) 에서48) 冗隸妾은 更隸妾에

비해 2배의 우대를 받고 있으며 lt이년율령gt史律에 大祝이 祝을 시

험해보아 祝에 뛰어나고 祠事에 밝으면 冗祝으로 삼아 이들을 冗한다

(大祝試祝 善祝 明祠事者 以爲冗祝 冗之) 고 하였는데 이 冗 은 같

은 史律의 祝十四章으로 學童들을 시험해서 능히 7천언 이상을 誦할

수 있어야 祝으로 삼고 5更으로 한다(以祝十四章 試祝學童 能誦七千

言以上者 〔乃得〕爲祝 五更) 에서의 更 과 相對로 위치하고 있다

47) 楊振紅 秦漢簡中的ldquo冗rdquordquo更rdquo餘供役方式middotmiddotmiddot從lt二年律令 史律gt談起 (簡帛硏究 廣西師範大學出版社 2006) 廣懶薰雄 秦漢律令硏究 (汲古書院

20103) pp297-304 宮宅 潔 漢代官僚組織の最下層 - 官 と 民のはざま-

(東方學報 87 2012) pp11-1248) 睡虎地秦墓竹簡 (北京 文物出版社 1978) p74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2또 lt里耶秦簡gt에도 冗戍士五(伍) (⑧666+ ⑧2006)와 更戍(某) (⑧

143 ⑧149 ⑧694)의 對稱 용어가 있다 한편 주례春官 槀人에 外

內朝의 冗食者의 食을 공급해주는 것을 관장한다(掌共外內朝冗食者之

食) 라 하였고 이에 대한 鄭注는 冗食者란 (관부에 밤까지) 머무르며

문서 작업을 하는 것이 마치 지금의 尙書의 屬吏로서 當直하는 者들과

같다(冗食者 謂留治文書 若今尙書之屬 諸直上者) 賈疏는 ldquo(鄭注에

서)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rdquo라 한 것은 또한 漢法을 인용하여 설명한 것이니 차례로 당직

하는데 관부에 留宿하며 (집에) 돌아가지 않는 까닭에 반드시 음식을

제공해야 한다(亦引漢法說之 謂以次當直 留在朝 宿不還 須以食供之)

고 해석하였다 여기서의 冗 은 夜勤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일

상 정규의 일을 넘어선다는 뜻을 지닌다 冗食 은 야근하는 관리에게

제공되는 음식이기 때문에 정규의 음식 지급에 추가되는 것을 의미한

다 전한 成帝 河平 연간에 수해를 입은 군국을 구휼하면서 그 지역민

을 다른 군국으로 피신시키고 그 곳에서 冗食케 하라 고 하였는데49)

文穎은 冗이란 散이다 廩食을 散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遊離되어) 정착하지 못하는 戶를 役事시켜 일자리를 주는 것이다(冗

散也 散廩食使生活 不占著戶給役使也) 로 해석하였고 如淳은 離散

된 자들에게 給食하고 관부는 그 임금을 지불한 것이다( 散著人間給

食之 官償其直也 )고 해석하였다 즉 수해로 유민이 된 자들에게 給

食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하고 아울러 役事의 일자리를 주어 그 임금

을 지불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석자들이 冗 을 散 의 뜻으

로 해석한 것은 국가의 재정을 풀어서 지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國錢의

lsquo散布rsquo라는 뜻으로 본 것이다 이 또한 정규의 재정 지출을 넘어선 추

가의 지출이므로 실은 위의 사례들과 같은 뜻이 된다 또 한서권24

하 식화지하에 또한 周官의 稅民 제도에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民이 떠돌아다니면서

일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夫布一匹을 납부하게 하며 布를 납부할 수

49) 漢書 卷10 成帝紀 河平4년조에 遣光祿大夫博士嘉等十一人行舉瀕河之郡水

所毀傷困乏不能自存者 財振貸 其爲水所流壓死 不能自葬 令郡國給槥櫝葬埋

已葬者與錢 人二千 避水它郡國 在所冗食之 謹遇以文理 無令失職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3없는 자에게는 縣官에서 冗作케 하고 이들에게 衣食을 제공한다 고50)

하였다 여기서 冗作 이란 정규의 요역 부과 외에 징벌의 뜻으로 역

을 추가하여 부과한다는 의미이다

또 lt운몽진율gt 司空에 冗邊 이 있다

백성에게 모친 및 동생이 있어 隸妾이 되었는데 謫罪가 아니고 冗邊5

歲에 복역하되 근무 기간을 無償으로 하고 1인을 면하여 庶人으로 하고

자 한다면 이를 허용해준다(百姓有母及同牲(生)爲隸妾 非適(謫)罪殹(也)

而欲爲冗邊五歲 無賞(償)興日 以免一人爲庶人 許之) (司空 p91)

이 冗邊五歲 도 규정된 정규 戍邊役의 額 외로 추가된 役이란 뜻의

용어이다 그래서 이 또한 위의 사례들과 마찬가지의 뜻이다 이렇게

冗 에는 更 에 相對한 지칭으로 更 에 복무하는 자들에 비해 전문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갖춘 자들이거나 기타 사유로 정규의 額을 넘

어서는 복무를 하는 것 또는 그 役者 또는 職名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즉 정규 일반의 更 방식의 근무 額(日數)에 비해 담당

분야의 뛰어난 능력이나 징벌 등 기타 사유로 더 많은 근무를 추가로

하게 되는 자들의 職을 冗 이라 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러한 冗 을 쓰는 데는 국가의 재정 지출도 추가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국가재정의 추가 지출의 뜻으로서 散(散布)

이라는 뜻이 되어 후대 冗官==散官의 칭이 생긴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해석된다면 그간 충분히 해석되지 못한 lt운몽진률gt廏苑

律에 연간의 養牛 실적 평가에서 下等을 받은 宂皂에게 2개월의 복무

기간을 추가하는 벌을 내린다는 律文에 보이는 宂皂51) 그리고 同 秦

律雜抄 屯表律에 나오는 lsquo冗募rsquo도52) 위와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50) 又以周官稅民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民浮游無事 出夫布一匹 其不能出布者 冗作縣官 衣食

51) lt雲夢秦律gt p30 廏苑律의 율문 卒歲 以正月大課之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殿者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罰

冗皂者二月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52) lt雲夢秦律gt p145 秦律雜抄의 율문 冗募歸 辭曰日已備 致未來 不如辭

貲日四月居邊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4것이다 廣懶薰雄은 更 을 非常勤 冗 을 常勤의 뜻으로 요약하였는

데53) 그러한 일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는 更 이 본래 규정된

交代근무라면 冗 은 본래의 규정액을 넘어선 근무를 뜻하는 까닭에

그러한 해석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설문宀部에 冗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人在屋下 無田事也 라 하였는데 無田事 로서의 冗의 뜻도 更

이 당번으로 給事하는 기간을 제외하면 田事에 있어야 하는 것과는 달

리 冗은 비당번인 경우에도 관부에서 給事하는데서 칭해진 것이라 하

겠다

예기중용에 忠信인 자에게 봉록을 두텁게 주는 것은 士를 勸함이

고 때로(일시적으로) 使役시키되 賦斂을 가볍게 하는 것은 백성을 勸

하기 때문이며 日用으로 근무시키되 그 근무기간과 성과를 계산하여

급료(廩)를 지급하여 그 근무에 합당하게 보상해주는 것은 百工을 권

하기 위함이다(忠信重祿 所以勸士也 時使薄斂 所以勸百姓也 日省月

試 旣廩稱事 所以勸百工也) 라 하였다 여기서 忠信 이란 禮記禮器에 忠信 禮之本也 라 하였고 여기서는 이를 修學하고 실행할 수

있는 사대부 내지 命官層을 가리키고 있다 百工에 대해 日省月試

한다 함은 근무한 日數와 그 성과를 월 단위로 계산한다는 것이다 注

에서 旣廩稱事 의 旣 를 lsquo餼rsquo로 해석하고 lsquo餼廩rsquo은 稍食 이라 하였

다54) 여기에서 일반 백성에게 때로(일시적으로) 사역시킨다는 時使

가 곧 更 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진한 시기 更徭制의 운영에

서 충분히 입증된다 宮宅 潔은 年俸이 있는 것이 有秩인데 그 最下가

百石이며 연봉이 없고 본래 日食과 月食으로 지급되는 등급을 斗食이

라고 한다 하였다55) 그가 말한 斗食은 백관표에 나열된 斗食과 그 이

하의 여리 吏職을 포함한 것이다 그런데 일반 백성에게 更役이 부과

되고 그들에게 동원된 기간 동안 당연히 매일의 給食은 지원되겠지만

그 일반 요역으로서의 更役에 대한 日當의 보수가 지급된 것은 아닐

53) 廣懶薰雄 앞의 글 p304

54) 注에 日省月試 考校其成功也 lsquo旣rsquo讀爲餼 餼廩 稍食也

55) 宮宅 潔 앞의 글 p39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5것이다 그 일반 요역은 일반 백성의 기본 의무사항인 까닭이다 반면

百工의 근무일수와 성과액에 대해 稍食 (日俸 내지 月俸)이 지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매 끼니의 급식이 아니라 工役에 대한 보수 내

지 給料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근무일수라든가 성과액을 계산

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기서의 百工은 관부의

員吏에 속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관부에 속하여 매

끼니의 식사 뿐 아니라 工役한 일수와 성과량에 따라 봉록이 지급된다

는 것이다 그래서 봉록 지급은 錢이나 곡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반

면 전기한 국어晋語4 文公修內政納襄王 章에 公食貢 大夫食邑 士

食田 庶人食力 工商食官 皁隸食職 官宰食加 에서 工商食官 의 工

商은 모두 관부의 員吏에 속한 자들인데 그 注에 옛날에는 田을 주는

것으로 祿俸을 제정하였다 관부에서 주는 廩이란 곧 관부에서 田을

받는 것이니 후세에 錢粟을 주는 것으로 祿俸을 제정한 것과 같지 않

다(古者以田制祿 官廩之者 卽受田於官 非如後世之以錢粟制祿也) 고56)

하였다 또 한서권24식화지상에 士工商이 田을 받는 것은 5口가 받

는 것이 되어야 농부1인이 받는 것에 當한다(士工商家受田 五口乃當

農夫一人) 고 하였다 즉 百工과 商賈는 그 직무에 따라 俸祿을 받는

데 후대와 같이 錢粟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田으로 받으며 그 액수는

일반 농민의 15이라는 것이다 이는 전술한 주례의 胥徒가 최하품

의 田 1百畝를 俸祿으로 받는 것과 lsquo以田制祿rsquo이라는 면에서 일치한다

그리고 lsquo以田制祿rsquo이 후대에 lsquo以錢粟制祿rsquo으로 변천 된 것은 秦漢의 사

례를 통해 분명하다 어쨌든 관부의 員吏인 百工과 商賈에게 일반 백

성의 更役과는 달리 祿田 또는 월봉 형태의 錢粟 지급이 행해진 것이

라 하겠다 또한 工商이 일반 요역 대신에 전문기능인으로서의 工役과

관부 소요 물품의 調達役의 職分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이 또한 職

役에 해당하는 셈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관부의 員吏이면서 斗食 보다 下位에 위치하여 稍

56) 國語正義(下冊) (董增齡 撰 巴蜀書社 1985) pp815-6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6食 내지 月俸을 받는 여러 導從役 祝醫工商 등의 役은 그 職分

의 役 즉 職役으로 奉公한다 그런데 후한 초에 이 職役의 면역전으로

서 走卒錢을 징수하고 그 재원으로 빈민을 고용한 것이 不法이었으며

수십 년 이어지다가 금지되고 違法한 관료들이 처벌받고 있는 것에

의하면 이 役들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戶가 지정되어 있어 여타의 일반

戶가 대신하여 맡을 수 없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은 導

從役 등의 담당자는 일반서민이되 그 중에서 특별히 선발된 층으로 구

성되어 전문의 분야를 세습하며 의무로 담당하는 하나의 신분층으로

형성되어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그 役은 하나의 身分役이기

도 하였던 셈이다 또한 그 代役錢으로서 走卒錢 징수 및 雇傭 방식이

나오게 된 것은 그 역의 담당층 가운데 錢으로 實役을 피할 수 있는

부유충이 형성되었고 후한 前期에 전통의 身分制가 느슨해진 여건에

서 身分役의 근본 형태가 유지되지 못하고 일탈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속한서백관3에 執金吾의 속관 중에 화려 장려한 복장

과 장식으로 황제의 행차를 호위 수종하는 騎士로서 緹騎二百人이 있

는데57) 本注에 無秩 比吏食奉 이라 하였다 즉 吏가 아니지만 吏의

대우를 받아 봉록을 받는 계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下吏에

들지 못하지만 봉록을 받는 면에서는 동일한 계층이다

한편 앞에 든 國語 晋語4에서 工商食官 에 이어 下記된 皁隸(吏

에 下屬한 徒隸)食職 이 있다 이 皁隸 계층은 지금까지 검토한 庶民

在官者 로서의 胥徒導從役 담당자 및 樂祝醫衛士工商 등

보다 下位 내지 그 下屬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그 담당 신분과 그 役의 성격에 대해 검토한다

Ⅳ 下層 員吏의 役과 徒隸層의 役

57) 당 조목의 注 所引 漢官曰 執金吾緹騎二百人 [持戟]五百二十人 輿服導從

光滿道路 群僚之中 斯最壯矣 世祖歎曰 ldquo仕宦當作執金吾rdquo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7

앞에서 검토한 관부 구성의 최말단에 위치한 주례에서의 胥徒와

춘추진한 시기의 導從役 담당자 및 樂祝醫衛士工商 등의 下

吏層 외에 그 下屬으로 보이는 皁隸가 있다 앞에 든 각 신분에 따른

奉公의 職分을 나열하고 있는 國語晋語4의 記事 皁隸食職 의 注에

皁隸를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라 한 것에 의하면 이 계층은 위에 열거한

여러 下吏에 下屬한 노역자들이라 할 수 있다 胥徒와 導從役 담당자

등은 각각 주례와 漢官 등에 그 員數가 규정된 까닭에 이들은 員

數 규정에 들지 못한 皁隸에 대비해 下層의 員吏로 칭할 수 있다

皁隸가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라 하였으니 곧 관노비 내지 그에 類하는

계층일 것인데 그들이 lsquo職을 食한다rsquo고 한 것은 각 분야의 官署에 分屬

되어 그 職務에 給事함으로써 생업을 삼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皂

隸 牧 圄 僕 등이 후대의 천민이나 隸民이 아니라 일반민이었다

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58)그러한 주장은 이들이 대체로 관부에 給

事하는 계층으로 여러 기사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고 위의 皁隸食

職 은 곧 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관부에 給事

하는 면으로 인해 예속성이 있게 된다는 면이 있다 후술하는 바와 같

이 그들이 일반 서민 출신이면서도 후대에 그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모

두 예속신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통용되는 것은 그러한 관부에의 예속

성이 분명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예속성을 말해주는 것이 또한 職

役의 한 속성이다

한편 國語 晋語4 文公修內政納襄王章에 (晋文公)元年 春에 公(晋

文公)과 부인 嬴氏(秦穆公의 女인 文嬴)가 王城(秦의 地名)에서 돌아올

때 秦伯이 衛士3천인을 納하였는데 실로 기강이 있는 僕들이었다(元年

春 公及夫人嬴氏至自王城 秦伯納衛三千人 實紀綱之僕) 고59) 하였다

秦漢의 衛士 출신과 달리 여기서는 그 출신 신분이 僕인 자들로 구성

58) 黃中業 春秋時期的ldquo皂隸牧圉rdquo屬于平民階層說 (齊魯學刊 阜師院學報) 1984-2 19844) pp69-72

59) 위의 책 pp809-810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8되어 있다 이 당시는 秦 穆公의 지원으로 晋의 文公이 귀국하여 懷公

을 죽이고 즉위한 때인 까닭에 군사 내지 호위부대의 지원이었다 그

衛士 군단의 신분은 皁隸層에 들어가는 僕인데 관부에 給事하는 職分

은 衛士이다 이들의 紀綱이 선 자들이었다고 한 것은 본래 秦에서도

衛士의 職으로 給事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춘추기에 邑數百이나 社

數百의 단위로 국가 사이에 分與되는 일이 자주 있었고 3천인에 이르

는 多數의 전문 집단이 타국에 分與된 것이긴 하지만 일부 전문의 인

력을 分與나 上納 하는 것 또한 당시 종종 일어났던 일이다 어쨌든

그 衛士집단이 모두 僕이었다는 것은 일반민이 아니고 관부에 예속되

는 신분이었음을 말해준다 예속신분으로 궁성을 지키는 衛士로 삼는

것은 주례地官 師氏에서 그 직무 가운데 (師氏는) 그 소속의 四夷

之隸를 거느리고 각기 그 병력으로 왕성의 문밖을 지키는데 복무하며

또한 (행차 때) 앞에서 길 정리를 한다(師其屬帥四夷之隸 各以其兵服

守王之門外 且蹕) 에 이미 보이고 漢武帝 때 제후왕 貴戚의 不服을

다스리기 위해 중앙 내사지역을 감찰하는 司隸校尉와 지방의 刺史에게

중도관의 徒奴 1200인을 보내어 二千石官을 독찰하게 하였는데60) 이

1200인의 徒奴부대는 이후 사예교위 내지 刺史 직속의 상비군단이 되

었고 그 성원은 세습 병사집단의 근간이 되어 牧使 刺史 등 將領下의

公兵이나 私兵으로 활약하였다61) 漢官舊儀 卷上에 漢代 長安에 騎

亭長 79인과 함께 6월 1更의 倉頭盧兒를 給事하게 하였다62)이들 四夷

之隸나 徒奴倉頭盧兒 등은 적군포로이거나 刑徒 계통 출신으로 관부

에 예속된 신분일 것이다 특히 관부에 囚禁된 형도들은 여러 방면의

60) 北堂書鈔設官部 및 漢官儀권2補遺2에 ldquo司隸校尉는 武帝 때 처음 설치되

었다 이후 諸侯王 貴戚이 不服함에 中都 中官의 徒奴千二百人을 (파견해서)

一校尉部刺史에게 속하게 하여 二千石官을 독찰하게 하였다(司隸校尉 武帝初

置 後諸侯王貴戚不服 乃以中都中官徒奴千二百人屬爲一校尉部刺史 督二千石

也)rdquo

61) 이에 대해서는 박건주 한대의 지방상비군과 部曲의 推移 (동양사학연구118 20123) 참조

62) 長安給騎亭長七十人 六月一更倉頭盧兒 (漢官六種 北京 中華書局 1990

9) p3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9노역에 활용되었는데 근래 石岡 浩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刑徒 집단

은 크게 세 부류 내지 등급으로 나누어져 활용되고 대우에 차별이 있

었다고 한다 즉 가장 上位에 있는 司寇는 특정 임무에 복무하는 것이

정해진 형도이며 전택을 소유하여 戶主가 되는 권리(lt二年律令gt

310-316簡) 왕조로부터 사여 받는 권리(同 291-293) 子가 士伍로 복

귀할 수 있는 권리(同 364-365)를 갖는다 다음으로 徒隸 는 특정 관

서에 예속하여 직무를 숙지하였거나 기술에 숙련하여 전문기능자에 동

등한 가치를 지니는 형도 를 지칭하며 그것으로 동일 직장에 계속 근

무하는 까닭에 일반 형도와는 달리 토목공사나 물자운송 등의 노역에

서 제외된다 또한 왕조에 공헌하는 자로서 사여를 받는 대상도 된다

(同 291-293) 즉 그들은 隸臣鬼薪城旦이면서 숙련자 기능자로서

일반 형도보다 우대받는 자들이다 위 양자에 비해 일반 형도는 위의

여러 특혜를 받지 못하며 城旦은 주로 토목사업에 隸臣은 주로 여러

관서의 잡다한 노역에 복역한다63)이는 충분히 수긍되는 견해이다 이

가운데 徒隸는 관부 내 각 分署의 전문 직장에 分屬되어 사역될 것이

기 때문에 전술한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로서의 皁隸가 곧 그들의 주요 부

분이 될 것이다 그 중에 일반 관노비로부터 개인적 재능과 기술로 선

발되어 해당 관서에 給事하는 자들도 포함될 것이다 단지 정규의 전

쟁에 형도를 동원하는 사례가 많은데 그들이 정규의 병사가 된 것은

아니고 군공을 세워 免刑되기 이전에는 그대로 형도인 것과 같이 함께

관부에 給事하고 있다 하더라도 각 신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상의 검토에 의하면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에는 이른바 lsquo吏에 下屬

한 徒隸rsquo로서 食職하는 皁隸집단이 있고 그 구성에는 관노비 뿐 아니

라 적군포로나 관노비 및 형도 출신의 衛士 그리고 刺史 牧使 등의

將領下에 있는 직속 상비군 형도 가운데 司寇 그리고 기능과 숙련으

로 형도 중에서 선발된 職能의 徒隸집단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員

吏이되 下吏인 계층의 복무가 그 신분에 따른 職役인 것과 마찬가지로

63) 石岡 浩 秦漢代の徒隸と司寇 -官署に隸屬する有職刑徒 (史學雜誌 121-120121) p32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0이 皁隸層의 복역도 모두 관부에 생업을 의존하는(食職) 職役이라 할

수 있다

또 좌전에 주로 보이는 輿人이 있는데 同 昭公7년조에 天에 十日

이 있고 人에 十等이 있으니 下가 上에 事하는 所以이다 까닭에 王의

臣은 公 公의 臣은 大夫 대부의 臣은 士 士의 臣은 皁 皁의 臣은

輿 輿의 臣은 隸 隸의 臣은 僚 僚의 臣은 僕 僕의 臣은 臺이다 馬

에 圉가 있고 牛에 牧이 있어 百事를 待한다 라 하였다 古來의 여러

注疏에서부터 이미 lsquo輿人rsquo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지만 이를 분석한 宇

都木 章의 견해에 의하면 縣鄙의 野人이 평시이든 戰時이든 國都의

귀족에 징발되어 葬儀戰士補助 車馬와 관련되는 여러 役務에 종사

하는 때 그들을 lsquo輿人rsquo이라 칭하였다고 한다64) 여러 자료에 의하면 皁

에서 牧에 이르는 서열 순위가 어디에서나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

고 대개 동일 계층의 異稱인 경우가 많다 皁 이하의 서열에 이렇게

다단계의 臣屬 관계가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같은 徒에도 上位 순서로 胥와 徒 및 그 徒의 지휘를 받는 징발된 徒

가 있으며 員吏에 들어가는 導從役 등의 庶民在官者 가 있고 그에

下屬하는 皁隸의 구분이 있는 것에 의하면 최소한 士 아래의 서민 계

층에 3 - 4 단계의 차등 신분이 있을 수 있다 위의 十等 순위에서 士

이하에 위치하여야 할 庶民이 곧 皁輿 등에 해당할 것인데 모두 관

부에 給事하는 면에서 후대 예속신분을 가리키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

다 그리고 일반 서민 가운데서도 皁輿 이하는 모두 전문의 職分으

로 관부에 給事하는 의무가 주어진 계층이므로 일반 농민으로서의 서

민과는 구분되는 서민이었다고 생각한다 즉 일반 농민이 농업을 생업

으로 하며 일반의 요역 의무가 주어진 반면에 皁輿 등은 주로 전문

의 기능을 요하는 관부의 직무에 給事하는 것으로 일반요역을 대신하

며 때문에 일반 서민이면서 관부에 예속된 신분의 일면을 지닌다 그

렇지만 관노비나 형도로서 관부에 예속되어 給事하는 신분과는 명확히

64) 宇都木 章 輿人考 (三上博士頌壽記念 東洋史考古學論集 朋友書店 1979

12) pp108-11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1다르며 주례의 胥徒와 같은 下吏의 員吏 보다 보통 下位이지만 胥

徒와 마찬가지로 주로 전문 기능의 職分에 복역한다는 면에서 같고 그

일부분은 下吏에 충당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곧 胥徒가 일반 서민의

徒로부터 선발된 자들인 것과 같다 위의 十等 서열은 농민을 제외하

고 관부에 給事하는 신분만을 총괄하여 나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

술한 工商食官 皁隸食職 도 모두 관부에 給事하는 工商과 皁隸를 열

거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복무도 당연히 職役이 되는데 그 職能 내

지 職分의 종류별로 숙련도 및 경력 등에 따른 그룹 내에서의 서열이

있게 되고 이를 계층으로 인식해서 lsquo皁臣(臣屬)輿rsquo 등과 같은 記述이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 각 직능별 部署별 전문화된 職役의 활용은 관

부의 운영상 당시의 사정으로는 불가피한 면이 있다 그러한 체제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점차 계층 구분의 엄밀성이 느슨해지고 세분된

차등의 질서가 점차 단순화되면서 그 용어도 혼용되기에 이른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위의 계층 구분은 세분된 서열만이 아니라 각 계층

의 담당 職分을 구분해주는 칭호로 쓰인 면도 있다 그렇다면 輿人은

戰時에 주로 戰車부대를 보조하는 직무 분야를 담당하는 계층이라 할

수 있고 그러한 면에서 여러 下屬 계층 가운데 가장 상위의 계층이었

지 않을까 한다

한편 이상의 皁隸層이 본래 일반서민 출신이었다는 입장에서 보면

관부에 給事하되 향리에 거처하면서 일정 기간 만 순번으로 복역하는

交代制가 있었을 수가 있고 또는 대체로 일부 기능자나 世戶에 한정

되었겠지만 휴가 기간 외에는 상근하는 형태도 있었을 것이다 예속된

신분인 경우 그 거처도 대체로 관부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앞에 든 秦

漢律에 교대 근무하는 更隸妾의 존재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근무

기간에만 관부에서 거처하는 예속 신분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刑徒

중에서도 司寇는 田宅을 소유하고 戶主가 될 수 있었으며 徒隸도 賜

與를 받을 수 있는 까닭에 이들 중에 일부는 관부 밖에 따로 거처를

지니고 출퇴근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단지 衛士나 部曲 집단은

대체로 屯營 내에 거주하였을 것이다 위로는 승상으로부터 아래로는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2하급의 吏에 이르기까지 吏舍에 거처하며 휴가 기간이 되어야 비로소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는 大庭脩의 연구가 있지만65) 漢舊儀 卷下

에 舊制에 尉는 모두 관서에서 거처하였다( 舊制尉皆居官暑 ) 라66)한

것에 의하면 舊制 가 어느 시기를 말하는 것인지 불분명하지만 宿衛

와 경찰 임무의 尉職 외에는 관서에서 거처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음을

말해준다 매년 직급에 따른 수개월의 휴가 기간이 설정되어 있지만

이는 성내에 거주하며 매일 출퇴근 하더라도 고향은 먼 곳에 있는 경

우가 많아 歸鄕 휴가를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外地 출신으로 城內

에 거처가 없는 관리들을 위한 吏舍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吏舍의 존재가 모든 관리의 관부 거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居官府의 여러 給事職 관노비 司寇나 일부 徒隸를 제외한 일

반 형도 여러 當番의 宿衛職 등을 제외한 관리는 官舍 밖의 私家에서

거처한 것으로 본다

庶民在官者 로서의 職役 복무는 常勤과 교대근무의 두 시스템으로

운영되었을 것이다 胥徒는 본래 모두 징발된 徒 가운데서 재능 있는

자로 선발되어 관부에의 給事가 생업이 된 자들로서 祿田을 받는 자들

이며 員數가 책정되어 있는 까닭에 常勤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

나 함께 징발된 여타의 徒는 胥徒와 같은 給徭役의 奉公을 행하지만

순번으로 동원된 기간 만 한시적으로 복무하는 까닭에 동원 기간 동안

의 食料 이외에 노동의 보수를 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그들은 만

민의 기본 의무를 職役으로 이행하는 것일 뿐이다 정부로서는 관부에

給事할 人才와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지만 필요한 부

분을 모두 常勤하는 자로 임용하여 그들의 생업을 봉록 지급 등으로

전면 지원하는 것은 재정에 큰 부담이 되는 것이었다 즉 관부에서 필

요로 하는 특정 업무 기능자들을 일반 요역 면제 대신으로 복역케 하

고 이를 순번제로 운영하면 복무 당번 기간 외에 그들은 다른 생업을

65) 大庭脩 漢代官吏の勤務休暇 (秦漢法制史の硏究 創文社 1982) p584

66) 앞의 漢官六種 p81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3꾸려나갈 수 있기 때문에 국가는 그들에 대한 생업 유지 지원 부담이

훨씬 적어진다 관부 給事層 가운데 命官과 員吏 이상이 常勤制라면

그 이하의 여러 職役層들은 대체로 교대근무제 중심으로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테면 lt奏讞書gt 案例17에서 秦王政元年 雍縣人 樂人 講이 자신

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사건 당일 자신은 踐更에 복무하러 11월 한

달간 함양의 外樂(관서 기구 名)에67) 소집되어 복무 중이었음을 진술

하고 있다 따라서 함양에 거주하지 않은 樂人이 그 관서에서 常勤하

지 아니하고 특정시기 일정 기간 만 교대로 근무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獄事에서 피고인 樂人 講이 踐更으로 1개월 간 복무한

곳이 外樂인 까닭에 일반 요역이 아니라 樂人의 職役을 이행한 것이라

고 본다 전한 哀帝 때 樂人의 員數를 罷하라는 명령에 대해 승상 孔

光과 대사공 何武가 진언하길 각 담당별 樂人의 현재 員數와 罷할 수

없는 수를 열거한 후 총 829인의 員數 가운데 388인은 罷할 수 없다고

하자 이를 재가한 바가 있다68) 이는 전한말의 사정이지만 전국진에서

도 郊祭 등의 각종 국가제사와 宮中 樂이 행해졌기 때문에 위의 수치

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속한서 백관2 大樂令 注引의

漢官과 盧植禮注에 의하면 八佾舞를 추는 樂人의 員數가 380인인

데 여기에 卑者之子는 임용될 수 없고 6백석에서 2천석 및 관내후에

서 五大夫의 嫡子 출신 5척 이상의 신장 12세에서 30세 顔色온화 등

의 조건을 갖춘 자에 한정되었다69) 이에 의하면 樂人 講은 走馬의 傭

이 되어 京師에 왕래하고 있는 빈한한 자로서 도저히 중앙 大樂令 속

67) 관서 기구 이름으로서의 外樂은 lt이년율령gt秩律 449簡 및 西安相家巷出土

秦封泥에 보인다(周曉陸路東之 編著 秦封泥集 三秦出版社 2000 一

二44)68) 漢書 권22 예락지2

69) 漢官曰 ldquo員吏二十五人 其二人百石 二人斗食 七人佐 十人學事 四人守學事

樂人八佾舞三百八十人rdquo 盧植禮注曰 ldquo大(子)[予]令如古大胥 漢大樂律 卑者

之子不得舞宗廟之酎 除吏二千石到六百石 及關內侯到五大夫子 取適子高五尺已

上 年十二到三十 顏色和 身體修治者 以為舞人rdquo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4하의 樂人 員數에 들어갈 수 있는 처지가 못 되는 자이다 그는 향리

에 거주하면서 매년 1개월씩 京師의 外樂에 가서 복무하는 기간 외에

는 傭賃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下吏의 員吏가 아

니면서 樂工의 職能으로 일반 요역 대신에 京師의 제사나 예락 행사에

나아가 給事하는 자이다 그래서 그의 복역도 職役인 셈인데 이러한

모습은 주례의 胥徒와 흡사하다 단지 胥徒가 員吏로서 봉록은 받는

것과는 다르다 양자가 모두 職役이지만 胥徒는 庶民在官者 이고 樂

人 講은 lsquo非吏인 職能人rsquo이다 그렇지만 양자 모두 개인적인 職能으로

관부에 給事하는 면에서는 상통한다 따라서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

부에 給事하는데는 員吏로서 복무하는 경우와 非吏로서 복무하는 경우

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Ⅴ lt走馬樓吳簡gt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복무

형태 및 그 성격

1996년에 호남성 長沙市 도심 우물에서 발굴된 lt吳簡gt은 총 17萬

餘 枚로 아직 그 일부만이 정리 해독되어 출간된 상태이지만 이미 출

간된 분량 가운데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의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자

료들을 많이 지니고 있다 孫吳 嘉禾 연간(232-238)의 여러 戶籍簿

내지 吏民簿 등에 吏와 給吏로 구분된 人名簿가 다수 존재한다 이 자

료들은 그간 명확하지 못하였던 吏役과 吏戶의 존재형태와 관부에 給

事하는 계층 및 그 職役의 실태를 파악하는데 획기적인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근간의 연구에서 여러 異見으로 그 문서가 지니

는 뜻을 파악하는데 상당히 혼란을 초래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전술한

職役의 전통과 여러 계층의 형태를 살펴본 성과를 참고로 하여 나름대

로 새로운 해석을 추구해보고자 한다

lt吳簡gt의 lt吏民人名年紀口食簿gt(竹簡(肆))에서는 각 里別로 里魁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5가 領하는 食口數를 吏와 民으로 구분하여 통계하고 있는데 그 일례를

다음에 든다

(A)

(이하 簡文 인용에서 內에 있는 字를 괄호 하여 표기함〕

集凡五唐里魁周領吏民五十戶 口食二百八十九人 (簡380)

其一百六十二人男 (379)

其一百卄七人女 (378)

其四戶縣吏 (377)

其二戶郡吏 (376)

其戶州吏 (374)

其五戶給新吏 (373)

其一戶縣卒 (372)

其一戶佃帥 (371)

이는 孫吳 嘉禾 연간 里別吏民口食簿인데 五唐里 50戶 가운데 일반 民

戶를 제외하고 州吏에서 佃帥까지의 戶를 따로 특기하고 있는 것에 의

하면 크게 民戶層과 州吏 이하의 吏층으로 양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

다 먼저 縣吏 이하를 이른바 세습 吏職戶인 吏戶로 볼 수 있는가 하

는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여러 異見이 제기되어 있는데 이 문

제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그런데 lt吳簡gt의 여타 戶籍簿나 戶口簡에

의하면 民戶를 제외한 縣吏 이하의 戶도 다시 縣吏 郡吏 州吏 軍吏 등

의 類와 맨 앞에 lsquo給rsquo字가 붙어 있는 계층의 類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즉 縣吏類의 吏 외에 其十二戶給縣吏下品 (壹5467)

其三戶給郡縣卒 (貳2318) 등과 같은 예들인데 그 職事나 給事

하는 관서의 명칭에 따라 多種의 명칭이 보인다 이를테면 給郡吏 給

縣吏 給州吏 給軍吏 給郡園父 給朝丞 給子弟 給驛兵 給鍛佐 給庫

吏 給縣卒 給度卒 給驛卒 給子弟佃客 給限田客 給佃帥 給常佃 給

家種客 給乞兒 給三州倉父 給養官牛 給習射 給私學 給官瓦師 給

亭復人 給亭雜人 給任師 給郡醫 給縣帥 給州私學 給新吏 給佃吏

給郵卒 給鹽兵 給關父 등이다 이렇게 앞에 lsquo給rsquo字가 들어간 계층을

일단 동일 계층으로 보아 lsquo給吏rsquo로 칭하고 縣吏 群吏 州吏 軍吏 등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6lsquo給rsquo이 붙어 있지 않은 계층을 lsquo吏rsquo로 칭하여 양자를 구분하고자 한다

lt오간gt에서 人名에 붙는 신분명은 크게 眞吏 某吏 給某吏 大男(大

女 民)의 4종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들은 그 표기상의 차이만으로도

일단 구분되는 존재라고 보이는데 현재 앞의 3종 신분명의 구분 문제

와 관련하여 몇 가지 다른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먼저 黎虎는 縣吏나

郡吏州吏 등의 吏가 侯家나 司隸校尉 또는 郡內에 소재한 전문 기

관 州郡 관내의 遠縣에 일정 기간 파견되어 給事하고 있는 자들을 칭

하여 給郡吏 등으로 칭하는 것일 뿐 그 신분은 本州 本郡 本縣의 吏

와 동일하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本郡의 郡吏가 곧 給郡吏이기

때문에 다른 계층이나 신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眞吏는 無職事

의 冗散官에 상대하여 쓰이는 용어로 실제 除授된 관원이라고 한다70)

黎虎와는 달리 양자를 다른 계층으로 보는 견해들도 제기되었다 먼저

韓樹峰은 給吏는 비록 吏의 名은 있지만 일반 백성으로서 잠시 吏의

職事에 종사하는 것일 뿐이고 혹 吏로 임명될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그 신분은 여전히 보통 백성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給吏와 구분하여

口算錢의 면제 특혜를 받는 州吏 郡吏 縣吏 등을 총칭하여 眞吏라 한

다고 하였다 즉 眞吏가 정식의 吏인데 비해 給吏는 일반민이며 일정

기간 만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給吏의

관부給事는 실제상 요역의 일종이라 한다 71) 한편 楊振紅은 동일인의

신분이 문서에 따라 다른 신분으로 등록되어 있는 점에 의거하여 이를

테면 給郡吏가 郡吏나 眞吏로 簡稱된 것이라 하고 眞吏나 給吏 모두

吏로 簡稱되며 州郡縣의 掾史職에 있는 자들로서 署長 佐官 등의 lsquo官rsquo

에 상대되는 자들을 지칭한다고 하였다 아울러 吏는 그 작위가 公乘

이면서 賦役 대상이고 漢魏시기에 吏職의 세습화가 이루어지면서 전문

70) 黎虎 說ldquo給吏rdquo -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社會科學戰線 2008-11) pp89

-94 說ldquo眞吏rdquo-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史學月刊 2009-5) p5071) 韓樹峰 走馬樓吳簡中的ldquo眞吏rdquo與ldquo給吏rdquo (吳簡硏究 2 武漢 崇文書局

2006) 韓樹峰王貴永 孫吳時期的ldquo給吏rdquo與ldquo給戶rdquo -以走馬樓吳簡爲中心 (吳簡硏究 3 2011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7적 吏戶인 眞吏가 출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吏가 본래 일반 서민

이었던 까닭에 公乘 이하의 서민과 합칭하여 吏民이라 한 것이며 삼

국시기 官과 吏가 구별된 연원은 漢代의 長吏와 小吏 내지 士와 庶民

의 구분에 있다고 한다72)다소 혼란스러운 견해들이고 용어상의 해석

문제가 겹쳐 있어 난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들 異見의 관건은 吏와 給

吏의 구분 문제 그리고 吏戶에서의 吏가 어떠한 吏를 가리키는가 하

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여러 견해에서 공통으로 들고 있는 lt吳簡gt의 다음 문서를 먼저 살

펴본다

(B)

廣成鄕勸農掾區光言 被書條列州吏父兄子弟伏處 人名 年紀爲簿

輒隱核鄕界 州吏七人 父兄子弟合卄三人 其四人刑 踵 聾 歐病 一人

被病物故 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 十二人細小 一人限田 一人

先出給縣吏 隱核人名 年紀相應 無有遺脫 若後爲他官所覺 光自坐 嘉禾

四年八月卄六日破莂保據(此簡無編戶)73)

이 자료는 광성향 勸農掾 區光이 작성하여 보고한 문서인데 廣成鄕 領

內 州吏7인의 父兄子弟 23인의 현황을 파악하여 嘉禾4년(235년)에 보

고한 내용이다 lt吳簡gt戶籍簿에서 州吏 등의 吏가 있는 戶는 그 州吏

가 戶人(戶主)으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 州吏7인이란 모두 그 戶의

戶人이다 이 현황 내역에 의하면 州吏7인의 父兄子弟 총합은 23인이

고 이 가운데 4인은 受刑 질병 중이며 1인은 物故 4인은 이미 관부

에 보내져 그 本主에 從事하며 관부에서 복무 중이다 12인은 細小 즉

소인이고 1인은 限田을 경작 중이다 이 限田이 lt吳簡gt의 lt吏民田家

莂gt 등에 보이는 lsquo二年常限rsquo의 田으로 보아 侯家의 田이나74) 屯田을75)

72) 楊振紅 吳簡中的吏 吏民與漢魏時期官 吏的分野 -中國古代官僚政治社會構

造硏究之二 (史學月刊2012-1)73) 侯旭東 三國吳簡兩文書初探 (歷史硏究 2001-4) p172에서 轉引

74) 入都鄕嘉禾二年步侯還民限米一斛 (5-1556) 其卄六斛民還黃龍年臨湘侯

限米 (602017)

75) 黃龍元年文入郡屯田民吳平斛米一百六斛二斗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6227) 其三斛五斗郡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8吏民에게 分給하여 佃作케 한 田으로 보는 것이 일반이다 그 경작자

는 그 田地(佃地)를 국가로부터 할당 받아 의무로 경작하기에 佃民과

같다 그 佃民에는 諸吏와 일반 民戶가 다 포함되고 있다76) lt吏民田

家莂gt에서 그 限田이 lsquo二年常限rsquo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그 의미에 대해

佃作기간 내지 佃種權이 2년으로 한정되어 있어 계약 기간이 지나면

배속되는 田地가 바꾸어지는 방식이었다는 견해가 있고77) 반면에 佃

地의 경작 기간이 아니라 地租額을 2년간 固定하는 것을 말한다는 견

해가 있다78) 사실이 어느 쪽이든 吏戶의 식구 가운데 일부는 국가의

농지를 佃作하고 地租를 납부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 액수가 漢代

사유지에 대한 조세보다 높다 같은 문서에는 租米 뿐 아니라 동시에

畝當 布2匹와 錢70-80까지 징수되고 있다 따라서 二年常限田의 分給

과 佃作은 受惠라기 보다는 노동력의 징발이고 耕作의 賦課로 보는 것

이 마땅하다 于振波가 常限田의 분급 액수를 정의하길 lsquo强制性的 生産

定額rsquo이라79) 본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 이어 1인은 先出給縣吏 인데

먼저 給縣吏로 보내졌다는 의미이다 先給吏의 사례는 嵩男弟恭年十

九先給州吏 (參1450) 등 몇 개가 더 보인다 이렇게 해서 총 23인의

食口 현황이 명료하게 보고되고 있다 그 내역에 의하면 州吏의 식구

는 受刑중인 자 질병자나 小人을 제외하고는 모두 관부에 給事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1인의 先出給縣吏 와

이미 관부에 보내져 本主 따라 從事하며 관부에 복무 중이라는 4인은

( 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 ) 내용상 모두 이미 관부에 보내져 현재

掾利焉黃龍理年屯田限米 (2157)

76) 于振波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南都學壇 24 2004年 第1期 湖南大

學 20041) p30 이 글은 앞에 든 中國社會科學院硏究生員學報 2004-1과 같

음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形成與演變 -談長沙

走馬樓簡牘札記之六 (鄭州大學學報 2001-1) 77) 張福亞 也談lt嘉禾吏民田家莂gt中ldquo二年常限rdquo田的函義 (首都師範大學學報

(社會科學版) 142期 2001-5) p8

78) 高敏 lt吏民田家莂gt中所見ldquo餘力田rdquo ldquo常限rdquo田等名稱的函義試釋 (鄭州大學

學報(社會科學版) 33-5 20009)79) 于振波 앞의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p12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9給事 중인 것은 마찬가지인데 어떠한 차이가 있어 다른 항목으로 구분

하여 기재한 것일까 이것은 바로 給縣吏와 縣吏의 차이를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후술) 州吏7인의 食口 23인의 현황 名簿를 작성하여 면밀

히 조사 보고하게 함으로써 그 遺脫을 막고 있는 것에 의하면 州吏 軍

吏 群吏 縣吏 등의 食口는 여타 일반 민과는 다른 賦役체제 아래 놓여

있는 계층이다 또 軍吏의 父兄子弟에 대해서도 그 食口簿를 따로 작

성하여 관리하고 있다

集凡中鄕州軍吏四人父(子)兄弟三人 中(參3012)

集凡南鄕領軍吏父兄弟合十九人 中(參 464)

이러한 사례들은 吏가 있는 戶는 그 食口들까지 포함하여 吏가 있는

戶 즉 吏戶로서 별개로 관리되고 그 성원은 모두 吏戶의 役 내지 賦

役체계에 들어가는 것임을 말해준다

위와 같이 州吏 縣吏 등 吏戶의 戶口簿는 그 食口 가운데 州吏 縣吏

등 그 吏인 자가 맨 앞에 戶人으로서 위치하지만 給吏는 戶人이드라도

앞에 위치하지 못한다

小武陵鄕嘉禾四年吏民人名妻子年紀簿(壹101533)

吉陽里戶人公乘張惕年卄八算一給縣吏(壹1018232)

吉陽里戶人公乘廖裕年卄七算一給郡吏(壹1017525)

高遷里戶人公乘黃毛年卅四算一給軍吏(壹10306)80)

또한 同 戶籍簿에 縣吏 州吏 등은 아래와 같이 맨 앞에 위치하여 일반

민이 아님을 명기하고 있지만

縣吏鄧橎年卄七 璠()妻大女金年卄一 算 (貳 1729)

州吏蔡區年卅二 區妻大女年卄七 算 (貳 1822)

軍吏朱謙年卅五 謙妻大女壹年卄六 算一 (貳 1723)

80) 인용된 4簡文은 凌文超가 재정리 조립하여 올린 글(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

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型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의

lt表二gt(pp25-37)에서 인용함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0給吏인 경우는 일반민을 가리키는 lsquo民男子rsquo로 기재되어 있다

民男子蔡若年卅七給驛兵 若妻大女四年卅算一(貳 1781)

民男子蔡喬年六十二給驛兵 喬妻大女典年卅八 (算) (貳1903)

따라서 위와 같은 吏民簿에서 民戶를 제외한 州吏나 郡吏 縣吏 軍

吏가 吏戶라면 給州吏 給郡吏 등 여러 職事의 관서에 給事하는 수십

종의 다양한 給某吏 신분은 전술한 庶民在官者 나 lsquo非吏이면서 관부

에 있는 자rsquo와 매우 유사하거나 일치한다

여기에서 吏戶나 吏役의 존재 여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는데 黎虎

는 삼국시기 吏戶의 존재를 인정치 않으나81) 高敏과 孟彦弘은 그 존

재를 인정하며 특히 高敏은 吏役制도 漢末三國시기에 확실히 형성되

었다고 한다82) 韓樹峰王貴永은 후한말 孫吳시기에 卑賤化가 이루어

지면서 吏戶의 萌芽가 이루어졌으며 lt吳簡gt에서의 給吏는 吏가 아니

고 民에 속한다고 한다83) 이러한 여러 異見의 배경에는 吏로 칭해지

는 계층에 전술한 바와 같이 다시 두 계층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계층

이 있는데 그 면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

각한다 양자의 구분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자료를 든다 속한서 百官3 大司農條의 注引 漢官에 丞一人 三百石 員吏四十人 其十一人

斗食 十七人佐 七人學事 五人守學事 皆河南屬縣給吏者 라 하였다

대사농승 속하의 斗食 이하 員吏 40인을 모두 하남군 속현에서 조달된

吏로 충원한다는 것이다 즉 후한 수도 낙양 인근인 하남군 속현에서

吏員을 차출한다는 것인데 斗食 佐 學事 등의 員吏는 해당 분야의 職

81) 黎虎 ldquo吏戶rdquo獻疑 (歷史硏究 2005-3) pp53-6882)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形成與演變 mdash談長沙走

馬樓簡牘札記之六 (鄭州大學學報 2001-1) p61孟彦弘 吳簡所見ldquo事rdquo臆說 mdash從ldquo事rdquo到ldquo課rdquo (吳簡硏究 2 2006) pp205-208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爲役之制 (魏晋南北朝隋

唐史資料 24 2008) pp8-2183) 韓樹峰 앞의 走馬樓吳簡中的ldquo眞吏rdquo與ldquo給吏rdquo pp33-38 韓樹峰王貴永 앞

에 든 孫吳時期的ldquo給吏rdquo與ldquo給戶rdquo -以走馬樓吳簡爲中心 p99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1事를 처리할 수 있는 職能者여야 하기 때문에 하남군에서 이러한 職事

로 근무하고 있는 員吏를 파견하거나 일반민 가운데서 새로 선발하여

파견 조달하였을 것이다 상하급 관부끼리 상호 관리를 파견하여 일정

기간 복무하게 하는 경우에 조달 지원한다는 의미로 動詞語로서 lsquo給rsquo을

쓸 수 있고 이러한 사례는 문헌에 이미 자주 보인다 위에 든 lsquo屬縣給

吏者rsquo도 그 한 실례이다 이러한 경우는 본래 吏의 신분이 여타의 관부

에 일정기간 출장 근무하는 것일 뿐인 까닭에 그 신분은 그대로 吏일

것은 자명한 일이다 즉 縣吏가 郡府에 출장근무 중일 때 그 신분은

그대로 縣吏이고 해당 名簿에 縣吏A가 여타 名簿에서 給郡吏A로 표

기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동일인이 名簿에 따라 신분명이 달리 기

재되어 있는 사례가 약간이나마 보이고 있는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된다(후술) 그런데 給州吏 給郡吏 給縣吏 등 수십종의 給吏에는 이런

경우가 아니고 lsquo州吏 등 諸吏에 배속되어 給事 중인 非吏로서 관부에

복무 중인 民rsquo이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給某吏로 표기된 자들은 lsquo給rsquo

이 붙지 아니한 州吏 郡吏 縣吏와는 달리 lsquo民男子rsquo로 표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給州吏는 非吏로서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그 관서에서 하나

의 職役의 형태로 복무 중인 民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들은 실은 民으로서 관부 업무상 필요한 노역에 동원되는 셈이지만

일부는 여러 관서의 하급 실무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전문의 職能을

갖춘 자들도 있다 縣吏 州吏의 職事 뿐 아니라 앞에 든 수십 종의 전

문 분야 부서별 給吏의 명칭은 그에 상응하는 사례들이다 정부는 이

들이 본래 일반 서민이지만 관부 운영의 필요상 특별 관리를 하지 않

으면 안 된다 그 결과 후한의 여러 사례에서 보듯이 대개 그 職을 세

습토록 하고 이들을 일반 民과 구분하여 칭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lt吳簡gt에 忠子男仲年十五 任給吏 (參 1805)라 한 것은 給吏가 民

에서 차출되어 임용되는 독립 계층임을 말해준다 또 草言府大男吳杭

不是卒子弟不應給卒事 八月卅日兼兵曹掾潘(因)()白(柒總49968)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卒의 子弟가 아니면 給卒事에 복무하게 할 수

없었다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2그들이 본래 吏의 신분이 아닌 까닭에 바로 吏로 칭하지 못하고 그

吏에 배속되어 給事하는 자 또 그 戶의 뜻으로 給某吏 給戶와 같은

칭호가 나오게 된 것으로 본다 이 칭호는 사실 관리와 民 사이에 있

는 이들 계층의 성격을 상당히 잘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이 給吏 계

층의 부담이 커지고 그 賤役 부담자로서의 성격이 뚜렷해감에 따라 給

吏나 給戶가 吏戶나 吏家로 칭해지고 給吏나 給戶의 役이 吏役으로

칭해진 것인데 그렇게 간략한 형태로 칭하여도 이미 관리의 吏와 충분

히 구분되는 것으로 사회가 인지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의하면 lt吳簡gt에 보이는 眞吏도 사실 眞吏라 할 수 없는 給吏

에 대비하여 쓰이게 된 용어가 아닐까 한수봉왕기영은 眞吏란 給吏

에 대비된 용어라 하고 lt吳簡gt에서 給吏가 口算 납부 의무가 있지만

眞吏는 면제되며 정식의 吏이고 신분성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羅新도

眞吏에게 口算錢이 면제되고 있다고 하였다84) 眞吏에 대한 여타의 견

해도 있지만85) 給吏와 관련하여 참고할 만 한 지적이다 또한 lt吳簡gt

에서 其七戶給郡吏 下品(壹5447) 其十二戶給郡吏 下品 (壹

5677) 其十二戶給縣吏 下品 (壹5467) 其一戶給軍吏 下品 (參

430336) 給度吏 下品之下 (5653) 등에서와 같이 給吏는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여서 평균의 民戶 보다 더 빈천한 계층인 점도 그

들이 관부에 給事하는 吏라기 보다는 非吏인 民으로서 民의 일반 요역

에 대신하여 관서에 給事(給役)하는 자들이되 그 일부는 職能에 따라

세습하여 관련 관서의 吏에 배속되고 給事 복무해야 하는 예속된 신

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lt吳簡gt에는 하나의 戶人을 首로 하고 그에 배속된 듯 한 여

러 신분의 戶數와 신분명을 기록한 簿가 있다 lt走馬樓吳簡竹簡gt에

84) 羅新 ldquo眞吏rdquo新解 (中華文史論叢 2009-1) p129 단지 그는 眞吏란 非華

夏系 출신의 編戶化된 토착 사회를 관리하는 인원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85) 이를테면 黎虎는 眞吏란 非眞吏에 대한 대칭이 아니고 실제로 除授 받은 관

원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說ldquo眞吏rdquo -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史學月刊2009-5) p5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3다음의 예들이 있다

-1 里戶人公乘縫繒年卄五苦腹心病 (5443)

- - - - - - -

其七戶給郡吏下品 (5447)

- - - - - - -

其一戶給州吏下品 (5452)

-2 平樂里戶人公乘鄭張年五十 (5460)

- - - - - - -

其十二戶給縣吏下品 (5467)

-3 東陽里戶人公乘扶侈年十四 (5471)

其二戶給庫吏中品 (5472)

- - - - -

其一戶給縣卒下品 (5474)

-4 宜陽里戶人公乘區歸年卄二眞吏 (8962)

- - - 給州卒 (8965)

- - - -

年六十一給驛兵 (8976)

右尙書吏三(戶) (8517)

孫吳에서 公乘의 작위 소유자는 일반민 중에서도 상당히 많지만 漢

代 民爵의 최고위 爵인 公乘(第8等)의 戶人에게 보통 여러 신분의 수

십호를 배속시키고 있다 그 중에 10戶 내외의 給吏가 배속되어 있다

또한 이들 戶人은 배속된 戶가 납부한 租稅를 거두어들이고 이를 일괄

해서 관부에 납부하고 있다 먼저 각 戶로부터 受領한 내역은 문장 앞

에 lsquo領rsquo으로 표기하고 受領한 액수를 총합하여 관부에 납부한 내역은

앞에 lsquo入rsquo으로 표기하고 있다

里戶人公乘曾(年五十三)妻年卅九 (簡 1631-1652)

- - - - - -

領二年郵卒限米田六頃五十畝收限米二斛合爲吳平斛米一千三百斛

其三百十四斛五斗府州中倉關邸閣李崇吏黃諱潘慮 中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4領二年民田三百七十六頃六十五畝二百卅八步畝收米一斛二斗合四萬

五千一百九十九斛一斗 - - - - - - - - -

常遷里戶人公乘李漠年卅七 妻大女思年卅一

入嘉禾二年郵卒限米七百九十八斛二斗八升

入嘉禾二年佃帥限米九百五十五斛八斗七升

- - - - - - -

이 戶人은 대부분 公乘이고 노비를 소유하고 있으며 配屬된 戶의

徵稅와 총괄 납입의 업무에 복무하고 있는데 이는 후대 富戶에게 差役

복무를 부과한 사정과 비슷한 면이 있다 후대 差役제도와 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1인의 戶人을 賦稅 징수 납입의 책임

자로 하여 향리에서 이 방면의 기층단위로 운영하고 있는 셈인데 戶籍

簿와는 그 내역과 용도가 다른 별개의 독립 帳簿이다 그런데 劉家軍

은 限米 납부자 신분인 私學還民叛士吏卒 등이 모두 流民이

며 그 戶人에게 依附하고 있는 자들이라 하고 국가가 그 依附관계를

승인해주면서 그들이 경작할 토지를 戶人에게 分級해주고 그들이 납

부하는 地租인 限米도 戶人의 이름 아래 등기한 것이라고 보았다86)당

시 嘉禾연간에 전란으로 長沙 임상현 지역에 流民이 많이 流入되었을

가능성은 이미 여러 연구에서 지적된 바 있고 還民 叛士 등 일부는

流民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限米와 屯田限米 납부자 신분에는

이밖에 大男 州倉吏 吏帥客 金民 佃吏 郵卒 衛士 傳卒 子弟 佃卒

復客 新吏 兵客 故師子弟 兵師士 故帥客 後客 船師 司馬 士

등 거의 전 계층을 망라하고 있는데 이들 중에 유민이 있을 수 있으나

모두 流民 출신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새로 屯田이나 侯國의 田을

경작시키기 위해 유민 뿐 아니라 在地의 吏民에게 할당하여 佃作으로

운영하는 것은 여러 문헌자료에도 있고 lt吳簡gt의 lt吏民田家莂gt은

주로 在地의 호적에 올라 있는 吏民의 佃作 내역 장부이다 또 lt吳

簡gt 草言府部諸鄕吏區光等招誘諸限田客八十三人首見事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曹史趙野

86) 劉家軍 論lt走馬樓吳簡竹簡gt中 ldquo限米rdquo的性質 (中國社會經濟史硏究 2005-2) p87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5白 (柒總 49782)에 의하면 당시 長沙 지역에서 鄕吏에 의해 限田客

83인을 招誘했다는 성과를 보고하고 있는데 이와 같이 佃作 인력의 확

보에 애쓰는 상황에서 전술한 바와 같은 본래 限田의 佃作 의무를 지

고 있는 在地 吏戶의 家內 성원이 그 佃作者 명단에서 제외될 리가 없

그래서 簡文(B) lt州吏父兄子弟年紀簿gt에서 吏戶의 家內 父兄子弟

인력 23인 가운데 lsquo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rsquo과 lsquo一人先出給縣吏rsquo가

관부에 급사하는 給吏에 해당하고 lsquo一人限田rsquo은 限田의 佃作에 복무하

는 자이다 바로 이어 인용하는 孫休의 詔文에서 吏家의 어려운 사정

에 대해 ldquo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이미 限米를

납부하였는데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rdquo라 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전반부는 給吏로서 복무

하는 것이고 뒷부분은 限田 佃作 복역을 말함이다 즉 한 吏戶의 父兄

子弟 가운데 일부는 전자에 복무하고 일부는 후자에 복무한다 똑 같

은 관부 내지 국가의 역에 복역하는 것이지만 給吏는 분명히 吏(分署

의 담당 吏 州吏)에 給事하는 자라는 점에서 給吏로 칭하여 여타의

복역과 구분한다 그리하여 그 給吏가 결혼이나 계승으로 하나의 戶를

이루면 簡文(A)에서와 같이 某里의 戶籍簿上에서 里의 총 戶民數 아래

에 lsquo其四戶給縣吏rsquo와 같은 형식으로 戶를 本으로 한 給吏로서 명기된

다 그런데 一人의 給吏가 아직 戶를 이루지 못하고 한 吏戶의 成員

(父兄 子弟)으로서 있는 상황이라면 그 戶人의 현재 신분에 의해 그

戶가 표기되었을 것이다

이 문제와 직결되는 다음 기사를 살펴보자 孫權의 제6子로 孫亮에

이어 즉위한 孫休는 그의 즉위 年인 영안원년(258)에 다음과 같이 詔

하였다

「諸吏家에 5인이 있으면 (그 가운데) 3인은 겹쳐서 役에 복무하고 있

다 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이미 限米를 납부하

였는데 군대가 출정하면 또 종군함에 심지어는 家事를 돌볼 자도 없게

되는 것을 짐은 매우 애처롭게 생각한다 그 5인 가운데 3인이 役에 복무

하고 있다면 그 父兄이 (家에) 머물고자 하는 것을 허용해주어 1인을 (役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6에 나가지 않고) 머물게 하고 그 限米를 면제해주며 군대가 출정해도 종

군하지 않도록 하라 (삼국지 권48 吳書 孫休傳 永安元年條)87)

孫休는 즉위 전 재야에 있을 때 시골 생활을 보냈던 바가 있어 그

들의 참상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吏家(吏戶)가 지는 과중한 부담

은 곧 그들이 그만큼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 吏役이 賤視化 되고 厮役으로 인지되고 있던 배경을 위의 詔文은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lsquo吏家rsquo의 식구는 여러 방면의 복무를

중복하여 부담하고 있다 그 가운데 限米 납부 의무는 lt吳簡gt에 의하

면 국가에서 佃作케 하여 운영하는 限田 경작에 대한 租로써 납부하는

것이다 즉 전술한 lsquo二年常限rsquo田을 이 限田으로 보아 그 地租를 限米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다88) 단지 于振波는 限米란 二年常限田과는 관

계가 없고 屯田 경작에 대한 조세인데 衛士 郵卒 傳卒 등의 상비병

과 토지가 없는 수공업자 외지에서 수학하기 위해 온 私學 이탈하였

다가 새로 돌아와 附籍된 還民에게 軍屯이나 民屯에 종사하게 하고 일

부의 부세와 요역을 면제해주면서 限米를 납부하게 한 것이라 한다89)

그의 동일한 글에서 여타 사항에 대해 필자와 일치한 부분에 대해서는

앞에서 찬동한 바 있지만 이 부분에는 수긍하기 어렵다 lt走馬樓吳

簡竹簡gt에는 限米 납부자로 기재된 신분에 전술한 바와 같이 많은

신분이 망라되어 있고 孫休傳에서 말하는 吏戶가 일부 상비병이나 귀

환민 私學등에 한정한 것이 아니고 吏戶 전반의 형편을 들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lt吏民田家莂gt에서 佃田의 총수는 二年常限田과 餘力

田으로 구성 내지 구분되어 있다 즉 常限田은 餘力田에 對比되는 용

어이다 그리고 양자의 畝當 租額이 嘉禾4년 民의 경우 12斛 0456

87) 詔曰 ldquo諸吏家有五人 三人兼重爲役 父兄在都 子弟給郡縣吏 旣出限米 軍出

又從 至於家事無經護者 朕甚湣之 其有五人 三人爲役 聽其父兄所欲留 爲留

一人 除其米限 軍出不從rdquo」

88) 앞에 든 高敏의 글 lt吏民田家莂gt中所見ldquo餘力田rdquo ldquo常限rdquo田等名稱的函義試釋

이래 대부분 이 견해에 따른다

89) 于振波 앞에 든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7斛 州吏의 경우 0586斛 0456斛으로 차이가 있다90) 무엇보다 앞에

서 살펴 본 lt오간gt lt廣成鄕州吏父兄子弟伏處 人名 年紀爲簿gt에 기재

된 州吏의 食口 현황 내역은 孫休傳에서 吏戶의 식구 사정을 말하고

있는 내역과 같은 모습을 전하고 있는데 91)전자에서는 限田이라 하였

고 孫休傳에서는 限米라고 한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限田에 대해 징

수하는 것이 곧 限米이다 따라서 限田이란 二年常限田의 簡稱일 것으

로 본다 lt吳簡gt의 lt吏民田家莂gt에는 이들 限田戶의 佃田額과 그에

대한 租賦稅 납부 內譯이 있다 이 戶는 州郡縣吏 등으로 담당 吏職에

給事해야 하고 從軍도 해야 한다 이러한 양상은 분명히 역의 부담이

중첩된 것으로 일반민보다 더 과중하다 租額인 限米 납부액도 일반민

의 사유지에 대한 租額보다 비율이 높았다

그런데 중요한 사항은 첫째 이렇게 과중한 부담이 중첩된 吏戶의

일면을 보여주는 lt吏民田家莂gt에서 佃作吏民의 戶人(戶主) 신분을 보

면 大男大女州吏群吏縣吏軍吏州卒郡卒縣卒復民士

등으로 吏와 民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들 吏民 모두 佃作

의 의무와 함께 地租로 米穀 布 錢을 납부해야 하고 從軍의 役이 있

으며 그리고 대량의 lt오간gt에 다량으로 보이는 子弟 및 給子弟가 곧

吏의 子弟로 파악된 것에 의하면92) 그들이 납부하는 子弟限米의 부담

도 吏戶의 부담이 된다 또한 lt오간gt에

郡吏公乘李年卅二 算一 (貳2460)

侄子年卅九給子弟 妻大女衷()年卄六 算一 (貳1754)

吉陽里戶人公乘張惕年卄八 算一 給縣吏 (壹1018232)

등의 많은 簡文에서 吏와 그 子弟 給吏들에게 算賦도 부과되고 있다

90) 앞에 든 張福亞 也談lt嘉禾吏民田家莂gt中ldquo二年常限rdquo田的函義 p11의 表1

91) 이에 대해서는 앞에 든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

形成與演變 mdash談長沙走馬樓簡牘札記之六 pp62-63 참조

92) 孟彦弘 앞에 든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爲役之

制 pp1-7 子弟는 吏의 子弟 給子弟는 관부의 給事에 差出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8단지 吉陽里戶人公乘鄭龍(龍 下에 田)年卅六算一給州吏復 (壹3323)

과 같은 lsquo給州吏復rsquo 즉 給州吏이면서 算賦가 復除된 경우가 있는데 이

에 의거하여 給吏는 算賦에서 復除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93) 그러나

위에 든 簡文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부분의 給吏가 lsquo算一rsquo로 기재

되어 있고 소수만이 lsquo復rsquo으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復除되는 경우는

특별한 사정이 있어 그 給吏에게만 특혜를 준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

으로 생각한다 참고로 lsquo腫兩足rsquo자나 lsquo刑兩足rsquo자인 民戶의 戶人도 算賦

가 면제되지 않고 있으며94) 大女도 算賦 납부 의무가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吏戶와 民戶가 지는 국가에의 부담은 吏戶가 각기의 吏職

에 복무하고 일반민호는 그러한 吏職에 있지 않다는 정도 외에는 별다

른 차이가 없다 물론 일반민은 吏職의 役 즉 吏役이 없는 대신에 일

반요역에 복역해야 하고 吏戶는 일반요역에서 면제된다 그러한 사실

을 말해주는 자료로 lt오간gt 戶口簿에 里別로 定應役의 戶數 즉 일반

요역에 응당 복역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진 里別 戶數 문서가 있다

其一百卅八人男 (參431548)

其八十一人(女) (參431144)

其一戶給軍吏 下品 (參430336)

其五戶民 (下)品 (參430235)

其七戶女戶不任調 下品之下 (參430134)

其領役民卅七戶 (參430033)

이 里別 戶口簡은 凌文超의 編次 정리 작업에 의하면 新成里의 總

結簡에 해당하는데95)여기서 일반민호수는 생략하고 給軍吏나 調에서

면제되는 女戶 등의 수만을 기재한 것은 맨 아래의 定應役 戶數를 算

出하는 근거를 기록하기 위함이다 즉 일반민호 외의 給吏 등의 戶數

93) 凌文超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型

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 p5494) 高平里戶人公乘黃高鼰五十二算一腫兩足 (貳 2903) (大)成里戶人公乘何軼年

五十五算一刑兩足 (參626736)

95) 凌文超 앞에 든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

簿rdquo的類型與功能 p40과 lt表3gt 중 p45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9가 총 13戶이고 이들을 제외한 定應役의 戶數가 37호란 뜻이다 그래

서 新成里의 총 호수는 50戶였음을 알 수 있다 新成里의 총 口數 219

명은 lt오간gt의 戶當 口數 평균이 대략 45명 정도임을 감안하면 486

戶이고 50戶와 근접한다 따라서 給軍吏 등 13호는 定應役에서 면제되

는 戶임을 알 수 있다 또 다음 戶口簡은 앞부분 里의 총 口數가 결락

되어 있다

其一戶給朝丞 (貳170263)

其二戶給郡園父 (貳170162)

其五戶尫嬴老頓貧窮女戶 (貳170567)

定應役民卄戶 (貳170466)

여기서는 給朝丞1戶 給郡園2戶 절름발이 노인 빈궁자 女戶 등 5

戶가 役에서 면제되고 그 나머지 20戶가 定應役民이 되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즉 給吏는 定應役에서 면제되고 있다 따라서 給吏는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부에 給事하는 것이기에 당연히 일반요역에서 면제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給吏에도 전술한 바와 같이 吏戶의 가속인 경우가 있고 일

반민 중에 차출된 경우가 있는데 전자의 경우는 관부에서 필요할 때

마다 고정적으로 차출되었을 것이며 일반민의 경우는 본래는 일시적

한시적으로 징발되었을 것이지만 여러 簡文에 戶人으로서 給吏인 자가

있는 것에 의하면 점차 전자의 경우와 같이 吏戶와 마찬가지로 給吏戶

로서 고정적으로 차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定應役이 戶를 부과

단위로 삼고 있다는 점 또한 吏戶의 家屬이 하나의 徵役 단위로서 운

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도 吏戶의 실재성과 그 독립적인

신분성을 말해준다 더구나 일반 민호와 구분된 吏戶 名籍(lsquo吏名籍rsquo)의

존재가 다음의 簡文에서 확인된다

諸鄕謹列郡縣吏兄弟 幷攴 吏名籍 (13-7638)

吏戶의 막중한 부담은 그 家屬의 叛走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0를테면 縣吏 毛章의 15세인 弟(壹 7865) 縣吏 毛車世의 49세인 父(壹

7868) 群吏 黃의 13세인 弟(壹7893) 群吏 谷漢의 29세인 兄子

(壹7905)가 嘉禾 2년에서 3년 사이에 叛走하였다 후한 말 陳寔은 어

려서 縣吏가 되어 항상 厮役에 給事하였는데( 常給事厮役 ) 후에 都亭

의 佐가 되었다96) 그리고 郭太는 대대로 집안이 빈천하고 어려서 고

아가 되었는데 모친이 縣廷에 給事하게 하려 함에 말하길 ldquo대장부가

어찌 斗筲의 役에 處해 있을 것입니까rdquo라 하고 마침내 떠났다97) 당

시 이미 吏役이 厮役으로 인식되어 있었고 斗筲의 役 즉 100석 이하

인 斗食의 位에 처하였음을 말해준다 즉 같은 吏이더라도 100석 이상

인 掾史와 그 이하 사이에는 차등과 구분이 있었다(후술) 그렇지만 이

두 경우는 모두 吏가 되는 것이 선택의 길이었기 때문에 吏戶에 속한

자들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吏戶가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던

것에 비해 이 두 경우는 선택사항이었다 斗食에게도 매우 소액이지만

月俸이 지급되었기 때문에 빈천하거나 고아가 되어 생업을 위해 吏職

을 선택한 것이다 나이도 어리고 집안의 세력 배경도 없는 가운데 吏

가 된 것에 의하면 斗食의 최하단에 속한 吏였을 것이며 이들이 給吏

가 아니고 吏로 칭해진 것은 일반요역 복무에 대신하여 징발 내지 차

출된 경우가 아니고 吏職에 임명된 것이기에 당연하다

縣吏 등의 諸吏役이 厮役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무엇 보다 그 雜

役的인 吏役의 과중함 때문이다 후한 lt張景碑文gt에서 14鄕의 正을

調發하여 勸農의식에 소요되는 土牛 제작에 육칠십만전이 들어가 吏와

正이 매년 患苦에 처함에 男子(庶民) 張景이 매년 그 비용을 출연하여

土牛를 義作해주겠다 하고 그 대신 자신을 縣吏 列長 伍長에 임

용되지 않게 해줄 것과 小繇 징발을 면해줄 것을 청하고 있다98) 즉

96) 후한서 권62 陳寔傳에 (陳寔)少作縣吏 常給事厮役 後爲都亭(刺)佐

p2065

97) 후한서 권68 郭太傳에 (郭太)家世貧賤 早孤 母欲使給事縣廷 林宗曰 ldquo大

丈夫焉能處斗筲之役乎rdquo 遂辭 就成皐屈伯彦學 三年業畢 博通墳籍 p2225

98) 府告宛 男子張景記言 府南門外勸〔農〕土牛 調發十四鄕正 上賦

斂作治 幷土人 犂 耒 卄 蓎 屋 功費六七十萬 重勞人功 吏正患苦 愿以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1서민이었던 張景은 거액의 자금을 출연하면서까지 縣吏 등의 吏役과

小繇의 복역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있다 그는 아직 非吏였지만 吏役에

언제든지 차출될 수 있었고 그 吏役은 매우 번거롭고 힘든 것이었음

을 알 수 있다 단지 張景과 같은 서민이 縣吏가 되어 吏役에 差出되

는 경우 바로 lt오간gt에서와 같은 吏戶가 되어 그 가속이 모두 吏役의

범위에 들어가게 되는지는 不明이다 推斷이지만 世戶로서의 吏戶와

함께 일시적으로 차출되어 일정 기간 만 복무하는 非世戶로서의 吏戶

가 공존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요컨대 lt오간gt과 문헌자료에 보이는 吏戶와 給吏의 면모들은 앞에

서 검토한 胥徒와 lt庶民在官者gt 내지 徒御 導從役人 등과 일맥상통

하는 면이 있다 孫休傳이라든가 lt오간gt에 빈출하는 吏戶 吏民에서의

吏는 500石 이하인 吏 중에서도 200석 이상의 長吏級을 제외한 下吏

즉 百石 이하의 吏를 가리키고 給吏는 吏가 아니되 관부에서 일정 기

간 여러 분서에 勞役으로 복무하는 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즉

庶民在官者 와 상통한다 특히 그들에게 부과되었던 賦稅役의 내역에

서도 위에서 검토한 여러 職役 계통 신분이나 계층의 예와 거의 비슷

하다

孫休傳에서 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라 한

것은 吏家의 父兄은 都에서 州郡縣의 吏로 복무한다는 뜻이고 나머지

3인의 자제는 郡縣吏에 給事한다는 뜻이다 즉 lsquo郡縣吏에 給事함( 給郡

縣吏 )rsquo이란 子弟3인이 郡縣吏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郡縣吏에 下屬되

어 그 업무에 給事한다는 뜻이다 위의 廣成鄕의 lt人名年紀簿gt 簡文

에서 lsquo先出給縣吏rsquo도 州吏7家의 식구 가운데 먼저 縣吏의 업무를 보좌

하기 위해 차출되어 나간 것을 뜻한다 여기서 말하는 郡縣吏는 주로

掾史職으로 사무 업무 중심이고 그 업무를 노동력으로 보좌하는 인력

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lt오간gt의 도처에 諸吏의 사례로써 諸曹倉

吏庫吏監運掾關邸閣船師田戶曹史 등 수십종의 職名이 보이

家錢 義作土牛 上瓦屋 欄楯什物 世世作治 乞不爲縣吏 列長 伍長 徵發小

繇 (高文 漢碑集釋 開封 河南大學出版社 1997 p227)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2는데 대부분 그 업무 처리에 노동인력이 필요하다 십 명 내외의 掾史

員吏 만으로는 사무나 문서작성 관리 업무 이외에는 수행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 인력을 吏戶의 식구로부터 자동으로 差役시키는 시스템이

漢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었음을 위 孫休傳의 기사는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이들 吏家의 식구 현황 파악은 관부에서 항상 필요

로 하고 확보해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lt오간gt의 여러 문서는

그러한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東鄕勸農掾殷連被書條列州吏父兄人名年紀爲簿

輒科核鄕界 州吏三人 父兄二人刑蹱叛走 以下戶民自代 謹列年紀 以

(已)審實 無有遺脫 若有他官所覺 連自坐 嘉(禾)四年八月卄六日破莂

保據 (J22-2543)

여기에서 담당 鄕界의 州吏3인 가운데 그 父兄2인이 受刑과 叛走로

비게 됨에 下戶의 民을 징발하여 바로 충당시켰다는 것이다 이 以下

戶民自代 에 대한 해석에서 下戶를 고용하여 자신을 代理케 한 것이라

는 견해가 있는데99) 그렇다면 戶人인 州吏가 자신의 식구 결원을 책

임지고 직접 下戶를 고용한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해당 州吏의 부담

이 너무 크게 되어 당시 下戶가 자동으로 보충되는 시스템으로 운영된

것일 가능성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諸家의 견해 모두 不明

임을 인정하고 있다100) 어쨌든 吏戶의 노동력을 신속하고 철저하게

보충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은 吏戶 전체의 식구가 관부에

예속되어 있고 세습화 된 상태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단지 孟彦弘은

이 자료를 통해 당시 吏戶의 家屬이 모두 吏였음을 말해준다고 하였으

나101)그렇지 아니하고 吏의 가속에 吏도 있을 수 있지만 아직 吏가

아니고 吏를 노동력 지원으로 보조해주는 給吏도 있고 그 給吏는 非

99) 이 점에 대한 정리는 王素 長沙吳簡勸農掾條列軍州吏等人名年紀三文書新探

(魏晋南北朝隋唐史資料 25 2009) p9의 注 11) 참조

100) 이를테면 孟言弘 앞의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

爲役之制 p16

101) 위의 글 p1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3吏로서 관부에 給事하는 자이며 이런 면에서 전술한 庶民在官者 내

지 lsquo非吏이면서 관에 있는 자rsquo lsquo官과 民 사이rsquo lsquo lsquo半官 半民rsquo lsquo踐更小史

(小吏)rsquo(續漢書輿服志) 등과 상통한 계층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吏戶에 포함되지 않는 給吏가 있었다 吏戶와 給吏戶가 구분되

고 있음은 lt吏民人名年紀口食簿gt의

其七戶給郡吏下品 (壹5447)

其十二戶給縣吏下品 (壹5467)

其一戶給軍吏下品 (參430336)

(其)六戶郡吏(中)(品) ---- (貳4490)

其二戶縣吏(下)品 (貳3307)

등에서 給郡吏 등의 戶와 縣吏의 戶가 구분되어 기록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다 그리고 給吏가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에 속하였음은 위

의 사례 뿐 아니라 lt吳簡gt에서 給度吏 下品之下 (5653) 등에서 알

수 있는데 下戶로 결원을 보충하는 것은 同級의 戶로 충원한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면 또한 당시 吏戶와 給吏의 관부에의 예속성과 신분

성을 보여준다 요컨대 給吏는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여서 평균

의 民戶 보다 더 빈천한 계층인 점도 그들이 관부에 정식의 吏職으로

임명된 吏라기 보다는 非吏인 民으로서 民의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

서에 給事(給役)하는 자들이되 관련 관서의 吏에 배속되고 給事 복무

해야 하는 예속된 신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찍이 宮崎市定이 宋書권94恩倖傳序의 郡縣掾史 幷出

豪家 負戈宿衛 皆由勢族 를 인용하여 豪家 출신으로서의 掾史가 고

관으로 진출하는 경향이 累代 이어지면서 右族이 이루어지고 이를 통

해 위진남북조 귀족제가 출현하였다 하였고102) 楊振紅이 이에 동조하

고 있는 것은103) 부분적으로 再考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당시 孫休

102) 宮崎市定 九品官人法の硏究 -科擧前史 (京都 同朋社 1979(1956)) pp86

-89

103) 楊振紅 앞에 든 吳簡中的吏 吏民與漢魏時期官 吏的分野 mdash中國古代官僚

政治社會構造硏究之二 p34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4傳에서 말한 吏戶는 분명히 豪族勢家가 아니었고 lt오간gt에서 民戶와

함께 lt吏民簿gt에 기록된 吏戶는 下品에 속한 貧層이었으며 그 식구

모두 중복된 賦役의 부담에 시달리는 계층이었다 그 吏戶에는 吏와

給吏로 구분되어 관부에 예속되고 있다 즉 아무래도 豪族大家로서의

掾史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정을 이해하는 데는 전술한

lt周禮gt의 府史胥徒에서 府史가 호족대가로서 辟除된 掾史에 類하고

胥徒가 곧 관부 예속하의 吏戶와 給吏에 거의 相當하다는 면이 있다

吏戶에서의 吏職에 掾史가 있겠지만 관부에 예속되어 있고 직업적 세

습화 되어 있어 호족대가 출신의 掾史와는 구분되었을 것이다 무엇보

다 호족대가 출신의 掾史은 관부에 예속되지도 아니하고 세습의 신분

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掾史層의 존재는 군현의 장관 辟召로 임

용되었을 것이다 반면 吏戶 출신의 掾史는 기술 계통의 전문직일 경

우이거나 개인적 기능의 능력으로 또는 部曲과 같은 상비병 출신이

일반 요역 부담에 대신하여 관련 직무에 세습하게 되거나 또는 일반민

호에서 급히 所要되어 임시로 차출되었다가 점차 세습의 吏戶로 예속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관부에 진 빚으로 예속되었다가 吏戶로 남

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즉 이 吏戶는 관부의 갖가지 所要 用務

에 差出될 상황에 대기되어 있는 戶이다 그 중에 일부는 정식으로 掾

史로 승진되지만 나머지는 윤번이나 필요시 이 방면 저 방면의 分署에

차출되어 給事하며 分署의 長을 主로 모시고 그 아래에서 給事한다

掾史의 吏와 구분하여 그러한 뜻을 반영한 것이 lt오간gt의 도처에 보

이는 수십종의 給某吏다고 생각한다 호족대가 출신으로서의 掾史와

예속신분인 吏戶 출신으로서의 掾史는 그 신분상으로도 士와 서민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기에 宮崎市定의 立論 또한 양자의 구분을 통한

위진남북조의 귀족제 내지 良賤制의 형성을 논하는 보완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근래의 여러 연구들은 掾史에 이렇게 두 방면으

로 구분되는 면과 계층이 있다는 점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였고 吏戶

의 家屬에 吏와 給吏로 구분되는 층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양자의 성

격이 어떠한가를 파악하지 못한 셈이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5한편 給吏는 吏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戶人이나 父兄이 郡吏 등의

諸吏에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당시 吏戶가 직업화 내지 세습화 되어

있었기 때문에 子弟의 給吏 신분도 곧이어 諸吏로 진전될 것은 당연하

다 그래서 lt嘉禾四年吉陽里戶籍簿gt에 吉陽里에 호적이 올라 있는 給

郡吏 逢杲(壹10169) 給郡吏 寥裕(壹10175) 給縣吏 張惕(壹

10182) 給州吏 區張(壹10367) 給州吏 嚴追(壹10149) 등이 lt嘉禾四

年五年吏民田家莂gt의 下伍丘 소속 佃民 名簿에서는 거의 同一人일

것이 분명한데 給郡吏가 群吏로 給縣吏가 縣吏로 給州吏가 州卒이나

州吏로 기재되어 있는 경우도104)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

다 이 경우는 丘에서는 給吏가 보이지 아니하고 里에서만 보이기 때

문에 아직 명확히 해명이 되지 않고 있는 里와 丘의 차이에 따른 것일

가능성도 있고 嘉禾4년과 嘉禾4-5년 戶籍簿에서의 1년 내외의 기간

차이에 따른 신분의 변화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또

한 侯旭東의 정리 조사에 의하면 高遷里의 給縣吏 松棐가 위의 lt田家

莂gt에서는 武龍丘의 縣吏로 기재되어 있고 같은 里의 給縣吏 張喬는

亻平 丘의 縣吏로 기재되어 있으며 宜陽里에 眞吏로 등재된 黃阿 등

6인도 각각 6곳의 다른 丘의 州吏 男子 男子 郡吏로 기재되어 있다

또 陽里의 給郡吏 謝鼠는 夫丘의 男子로 기재되어 있다105)里의 호

적부와 lt吏民田家莂gt의 丘別 佃民 명부에서 그 신분이 男子인 경우

일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양편 모두 里의 호적부에 給郡吏 給縣

吏 給州吏등 給吏로 기재된 경우는 대부분 丘의 佃民 명부에서 각각

群吏 縣吏 州吏로 되어 있고 眞吏가 州吏 郡吏 男子로 기재되기도

하고 給縣吏가 男子로 기재된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일부 사례들은 眞

吏 吏 給吏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것이어서 그 해명이 필요한

데 현재 里와 丘의 구별 차이 眞吏와 諸吏 給吏등의 실체 문제가 아

104) 凌文超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

型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 pp17-18의 lt表一gt

105) 侯旭東 長沙走馬樓吳簡ldquo里rdquoldquo丘rdquo關係再硏究 (魏晋南北朝隋唐史資料2006) pp19-21의 表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6직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어 그 이유를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실

정이다 그러나 신분명으로 이름을 달리하여 그렇게 구분하고 있으며

전술한 바와 같이 給吏가 吏나 眞吏와 다르게 취급되면서 여러 名簿에

구별되어 기재되어 있고 그 독자성도 충분히 입증되기 때문에 위의

예외적인 사항들은 개인별 특별한 사정에 따른 것이거나 아직 여러 異

說로 논란이 되고 있는 里와 丘 등의 구분과 차이 등에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고에서 갖추어 고찰하지 못하고

후고로 미룬다

Ⅵ 결 언

이상의 검토에서 고대 職役의 범주에 들어가는 다종의 신분 내지 계

층과 吏職의 類 그 복무형태 삼국시기에 이르는 전승과 변화의 모습

들을 살펴보았다 우선 職官과 일반요역 복무자와는 신분제와 賦役체

계상 엄연히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례 地官 鄕大夫에 그

舍란 國中의 貴者賢者能者服公事者老者疾者에게는 모두 舍

한다는 것이다 에 대한 후한의 鄭司農의 注에 服公事者란 지금 吏에

게 復除해주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고 하였다106) 여기서 lsquo舍rsquo란 復

除와 같은 뜻이다 그 대상 가운데 lsquo國中의 貴者賢者能者rsquo 가운데

貴者는 공경귀족 賢者와 能者는 命官과 辟召된 관리에 해당한다 그리

고 그 아래의 服工事者는 다시 2분되는데 200석 이하의 吏職 내지 掾

史職(小吏)이 있고 그 아래에 庶民在官者 내지 lsquo非吏로서 官에 給事

하는 자rsquo로서 給吏層이 있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賢者와 能者 까지를

職官이라 하면 그 이하인 服工事者 가 곧 職役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

석된다 그리고 職官과 職役 복무자는 모두 일반요역에서 면제되는 자

106) 其舍 國中貴者賢者能者服公事者老者疾者 皆舍 注云 lsquo服公事者rsquo

謂若今吏有復除也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7들이다 이 중에서 職役 복무자는 일반요역에서 면제되는 대신에 각종

의 吏職과 給吏職에 복무하였다 여기서 칭한 給吏職은 lsquo(小)吏rsquo에 대비

하여 칭한 給吏를 그 성격상 그렇게 칭할 수 있으며 그 독립적 계층

내지 신분으로서의 실태가 lt長沙走馬樓吳簡gt의 발현에 의해 상당 부

분 밝혀지게 되었다 그런데 服工事者 즉 職役 담당 계층의 범위가

상당히 넓어서 그 職役의 양태가 모든 면에서 같은 것은 아니고 일부

분 다른 측면들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고대의 긴 기간에 걸쳐 거의

공통으로 庶民在官者 lsquo非吏이면서 관부에 給事하는 자rsquo lsquo官과 民 사

이rsquo lsquo半官半民rsquo의 성격이 유지되고 있는 면을 볼 수 있다

이렇게 職役 담당자의 연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곧 lt주례gt에 보이

는 관리 조직의 최하위에 위치한 府史胥徒이다 이 가운데 府史

가 대략 후대의 掾史職이나 lt吳簡gt의 諸吏에 속한다면 胥徒는 給吏層

에 상통하는 면이 많다 단지 lt吳簡gt에 다수 보이는 吏役 下의 吏戶

는 그 과중한 부담과 厮役 및 빈천함의 성격상 오히려 胥徒에 상통하

는 면이 많다 이러한 시대적 차이는 吏戶의 예속화 및 세습화의 진전

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한편 시대의 여건 차이로 여러 부분에서 胥徒

와 후대의 職役 담당 계층 사이에는 다른 면도 있다 胥徒나 給吏層이

기본적으로 일반 서민 출신으로서의 服工事者 였던 것과는 달리 周에

서 三國에 이르는 동안 服工事者 라는 면에서 同類이지만 일반 서민

과는 구분되는 여러 相異한 계층에 속한 신분들이 속하여 있었다 예

를 들면 工商食官 에 속하는 工商 皁隸食職 에 포함되는 吏에 속

한 徒隸 층 넓은 의미의 徒隸層이라 할 수 있는 皂隸牧圄

僕輿人 그리고 下吏層에 들어가는 樂祝醫衛士 및 走卒伍伯

之類 등이 그들로 그 출신은 일반 서민이거나 賤民 또는 刑徒였지만

관부에 寄生하며 給事한다는 면에서는 공통이다

이들의 복무 형태는 항상적 근무 일시적 근무 組別 교대제 등 여러

가지로 징발 내지 차출되었고 lsquo冗rsquo과 lsquo更rsquo은 그러한 차이를 구분하는

용어로서 나온 것이다 근무에 따른 보수를 받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 구분은 아직 분명치 않은 부분이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8있다 그러하지만 최소한 생업을 관부에 의탁하는 자들에게는 지급되

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年俸制에 대비되는 稍食 즉 소액의 月俸 내

지는 근무일수 기준의 지급 형태로 지급되었다 이는 그들의 근무가

주로 일 단위나 월 단위로 이루어지고 계산되었기 때문이다

lsquo官rsquo과 lsquo吏rsquo는 서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선진 이래 본래 상하의 신

분으로 명확히 구분되었고 漢代에 혼용 내지 통용되는 경향이 있었지

만 양자가 구분되는 면 또한 여전하였다 吏는 官에 가까운 吏가 있고

民으로서의 吏가 있어 전자를 lsquo官吏rsquo라고 하면 孫休傳의 詔에서 거론된

吏家는 보통 吏民으로 합칭될 경우의 吏라고 할 수 있다 lt吳簡gt의

lt吏民簿gt나 lt戶口簿gt 등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실태에서 후한 말에

서 삼국기의 전형적인 職役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이제까지 그

존재에 대해 거의 간과되어 왔던 給吏에 대해 lt吳簡gt은 수십종의 給

吏 실태를 전해주고 있어 그 의의가 크다 吏의 사무 업무를 직접 勞

役으로 보조해주는 給吏는 관부의 행정 업무 처리에 있어서 항상 필요

한 노동력 제공자였다 이러한 노동력은 어느 시기이든 공통으로 필요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연원을 lt주례gt의 胥徒에서 찾아볼 수 있었

고 여러 면에서 職役의 실례로서 공통하는 면들을 지적할 수 있었다

후한 말 삼국시기의 吏와 給吏는 일반서민 신분으로서의 吏이며 吏戶

로써 관부에 예속되어 그 食口 성원이 거의 세습하여 吏役에 종사하

고 있다 이들은 일반서민에 비해 일반요역이 면제된다는 점을 제외하

면 그밖에 각 吏職에 따른 吏役의 기본 직무 외에 限田의 佃作 의무와

그 地租로서 限米 布 錢을 납부해야 하며 從軍해야 하는 등 중첩된

부역으로 일반서민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또한 그 戶品 이

下品 내지 下品之下에 속한 貧戶 출신이다 따라서 같이 吏로 칭하지

만 豪族勢家 출신으로 掾史職을 거쳐 상급관으로 진급하고 命官에 오

르는 累代 高族의 世家 출신 掾史와 빈천한 서민 출신으로서 관부에

예속된 吏戶 출신으로서의 掾史와는 구분된다 이 吏家 내지 吏戶는

吏의 칭호로 불리지만 일반민보다 더 많은 부담을 지고 있기에 그들의

役은 후한과 삼국기에 賤役 賤職 내지 厮役으로 칭해지며 기피되고 있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9다 따라서 이 계층이 官吏로 합칭되는 경우의 吏와 구분되는 것은 당

연하며 그 호칭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늦어도 孫休 시기의

문서와 간독자료에 등장하는 lsquo吏家rsquo나 lsquo吏戶rsquo는 이미 그러한 계층에 대

한 專稱으로 형성된 듯하다

한편 諸吏役의 복무에는 常勤의 방식과 1년에 1개월 내지 수개월만

輪番 형식으로 복무하는 비상근의 lsquo踐更 방식의 근무rsquo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한 비상근 복무자도 있었을 것이다107)그리고 그 복무에

대한 급여가 그 吏役을 생업으로 하는 常勤者에게는 당연히 小吏에 대

한 봉록이 지급되었을 것이다 반면에 給吏의 役은 일반요역에 대신하

는 복역이라는 면에서 비상근 내지 윤번 형식의 차출이었을 가능성이

많지만 지금까지 lt오간gt에 소개된 자료로는 어느 쪽이라 단정하기가

어렵다 胥徒의 役은 어디까지나 상급의 관원들과는 달리 일반민의 요

역 의무를 대신하여 관부에 給事하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lt오간gt

에서의 給吏와 상통한다 給吏에 대한 봉록 지급의 여부도 아직 不明

이다 단지 限田의 지급이 祿田과 같은 성격의 것이었을 가능성도 고

려되지만 그 租額이 커서 혜택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노동력의 징발로

서 해석되는 부분도 있다 또한 給吏의 관부에의 給事가 일반 요역과

같이 組別 순환제였는지의 여부는 아직 분명치 않다 lt奏讞書gt의 樂

人의 예와 같이 一月一更制와 같은 순환근무제였을 가능성도 있는데

대체로 두 가지 형태가 공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lt吳簡gt에 의거한 의론들은 아직 자료 해석과 해명이 충분치 못하여

불분명한 상태에 있는 사항들이 많은 실정이기 때문에 해당 사항이 새

로 규명 되는대로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lt오간gt의 미해명 사항

에 대한 개별적인 탐구도 본 과제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필요하다 그

리고 아직 소개되지 않은 대량의 lt오간gt이 연속하여 출간되면서 새로

운 자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107) 廣懶薰雄 앞의 秦漢律令硏究 pp310-311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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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103

(中文摘要)

中國古代的職役與職官的問題

朴 健 柱

通過上述的檢討 基本上職役範疇內的多種身分 乃至階層與吏職之類

其服務形態至三國期的傳承與變化等方面已然解明 職官與職役服務者

的一般徭役均免除了 此二者中職役服務者 用種種lsquo吏職rsquo與lsquo給吏職rsquo服務來

代替其一般徭役 直至三國時期爲至漫長的期間內職役擔當者 庶民在官者

lsquo非吏而給事官府者rsquolsquo官與民之間者rsquolsquo半官半民rsquo的性格几乎共通維持

職役擔當者的淵源卽是lt周禮gt所見的官吏組織最下位的府史胥

徒 此中 府史是大略屬于後代掾史職或是lt吳簡gt的諸吏 胥徒則是相通于

給吏層的側面多的 但是lt吳簡gt所見多數的吏役下吏戶其過重的負擔與厮

役及貧賤的性格上 倒是與胥徒相通方面較多 這個時代的差異像是吏戶的

隸屬化及世襲化的進展招來的結果 一方面因爲時代的與件差異 胥徒與後

代的職役擔當階層間有多方面的異質 胥徒與給吏層基本上是一般庶民出

身的 服工事者 如此不同 從周至三國期間從 服工事者 上是同類而與一

般庶民相區分的多種相異的階層面上身分較多 例如 工商食官 所屬的工

商 皁隸食職 所包含的 吏所屬的徒隸 層以廣義的徒隸層可以稱謂的

皂隸牧圄僕輿人 以及下吏層所屬的樂祝醫衛士 及走

卒伍伯之類等 他們的出身是一般庶民 或是賤民乃至刑徒 在官府寄生

而給事的層面上是共通的

其服務形態是恒常的勤務 一時的勤務 組別交代制等以多種方式徵發乃

至差出 lsquo冗rsquo與lsquo更rsquo是其差異區分用的用語 支給勤務報酬與否是不分明之事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04項 可是至少生業官府依託者是被支給的 其支給方式是與年俸制相對的稍

食 卽少額的月俸乃至勤務日數基準的支給方式 因此他們的勤務和支給計

算主要是日單位或是月單位

於lt吳簡gt之lt吏民簿gtlt戶口簿gt等所見的吏與給吏的實態 可以看到

從後漢末至三國期間典型的職役的樣相 尤其向來看過給吏的存在 lt吳

簡gt所傳數十種給吏的實態 其意義是巨大 給吏是以直接的勞役補助吏的

事務業務 是官府的行政業務處理上恒常的必要勞動力提供者 這種勞動力

許是官府運營上至今爲至所有過的任何時期共通要緊事項 可以推斷給吏

的淵源於lt周禮gt的胥徒 而且可以指摘以職役的實例有多方面共通的層面

後漢末三國時期的吏與給吏是一般庶民身分之吏 以吏戶隸屬於官府 其食

口成員率多世襲地從事吏役 他們除比一般庶民免一般徭役外 也需要履行

各吏職別吏役的基本職務 佃作限田義務 以其地租納付限米布錢 從

軍義務等重疊的賦役 因此他們有比一般庶民更重的負擔 而且他們的戶品

是下品乃至下品之下所屬的貧戶出身 從而他們雖一樣稱謂lsquo吏rsquo 却與豪族

勢家出身經歷掾史職進級上級命官的累代高族的世家出身的掾史與以貧賤

的庶民出身於官府隸屬的吏戶出身的掾史是不同的階層 這個吏家乃至吏

戶雖被稱謂lsquo吏rsquo 但是彼役後漢三國期被稱謂賤役 賤職乃至厮役 而且被忌

避 從而此階層是與lsquo官吏rsquo合稱的境遇的lsquo吏rsquo爲區分是理所當然 其稱號也只

得相殊 于是最遲至少到於孫休時期文書與簡牘資料所見的lsquo吏家rsquo與lsquo吏戶rsquo

許是已經成爲如此階層的專稱

依照給吏的役是一般徭役代替的服役 其運營形態是非常勤乃至輪番形

式的可能性大的 但是迄今依據lt吳簡gt所見的資料還難以斷定何者是對的

胥徒的役是與上級官員異樣 以一般民的徭役義務代替給事於官府 本着那

樣的側面與lt吳簡gt所見的給吏相通 給給吏俸祿與否也還不明 但是從限

田的支給是與祿田同一的性格的可能性上看 因爲其租額是多的 與其說惠

澤倒是有可能解釋爲勞動力的徵發 給吏的官府給事是與一般徭役同一方

式的組別交代制與否還不分明 如lt奏讞書gt所見樂人的事例 有可能一月

一更制方式交代勤務制 筆者認爲大體上是兩個方式共存

關於lt吳簡gt資料的議論是因爲解釋與解明上許多異說 不分明的關聯事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105項也有很多 所以該事項的解明將其完備需要補完

주제어 직역 직관 서도 도예 이역 이호 급리 서민재관자

關鍵詞 職役 職官 胥徒 徒隸 吏役 吏戶 給吏 庶民在官者

Keywords lavor duty at office(official lavor) high-ranking officialrsquos duty(official

post) xu-tu tu-li minor officials lavor minor officials family minor half

officials and half the masses in lavor services at office the masses in lavor

services at office

(원고접수 2013년 11월 15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12월 16일 수

정원고 접수 12월 19일 게재 확정 12월 26일)

Page 5: AB C D - KNUwebbuild.knu.ac.kr/~china/CHR/chr2013/chr87pdf/chr87-02... · 2014. 1. 4. · FG9 ±°'c&`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39대의 職役과 같은 類의 제도가 고대사에서는 없었던 것일까 하는 의문

이 본 과제를 모색하게 된 출발점이다 따라서 고찰의 출발은 先秦의

윗 시기로부터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후대의 대부분 職官들은 고대

의 사례에 의거하여 제정된 것이다 송대 직역 관련 여러 연구는 그

연원을 漢 또는 위진수당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5) 본고는 그러한

類의 제도가 온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이미 周代 이래 실재하였다는

시각에 입각하여 살펴보고 그러한 모습이 선진에서 진한에 걸쳐 이어

지고 나아가 삼국기의 lt吳簡gt의 여러 실태에서 계승되고 있는 면을

입증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대체로 후대의 여러 제도는 거의 대

부분 이미 前代에 시행되었던 것들이며 나중에 여러 사정의 변화로

중단되었다가 재차 복구되면서 약간 변용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의미

에서 고대 제도사의 연원이 되고 있는 주례 등의 관련 사항과 고대

의 끝자락에서 이루어진 lt吳簡gt의 여러 명확한 자료에서 보이는 職役

制의 면모를 통하여 그 연원과 전개 과정 그리고 그 계승과 변용의

맥락을 일면이나마 해명할 수 있는 성과가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근래 lt吳簡gt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구별 吏役 문제 등 職役 관련

주요 사항에 대한 여러 난문제가 얽혀 있고 그에 대한 갖가지 異見이

분분하여 뚜렷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당한 혼란을 주고 있다

lt오간gt의 신출 자료들은 그간 관련 자료가 零碎하여 충분히 거론하기

어려웠던 고대 직역 관련 제반 사항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고 있어 가

히 획기적인 자료의 등장이라 할 수 있다 周代의 자료에서 삼국시기

까지 긴 기간 동안의 事跡을 망라하며 검토하게 된 것은 그 성과를 바

탕으로 lt오간gt의 신출 자료를 명확히 올바로 해석하는데 도움을 얻고

자 함이라는 면도 있다 필자의 기본 입장에서 보면 lt오간gt의 관련

문서에서 lt주례gt 이래 일맥 상통하며 전해져 온 職役의 맥락과 전통

을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고자 함에 본고의 주안점이

있다

5) 勺培俊 위의 글 pp17-18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0

Ⅱ 周禮의 胥徒와 庶民在官者

秦漢 官制에서 官階는 대체로 皇命에 의해 除授되는 命官 내지 長吏

와 그 명관에 의해 辟除되는 屬吏 내지 小吏로 크게 구분된다 그리고

양 官階의 秩祿에 의한 구분은 漢初의 lt이년율령gt秩律에 의하면 300

石 전한 중기 이후에는 200石이 기준이 되고 있다6) 그 실제의 관직

은 전자는 丞佐史尉의 佐官 내지 副官級 이상에 해당하고 후자는

그 미만인 鄉有秩獄史佐史鄉佐斗食令史嗇夫假官掾史

幹小史書佐循[脩]行 등의 掾屬 佐史類이다7) 그런데 이러한 구

성의 구분은 이미 주례의 官階 구성에서도 보인다 天官 冢宰에 治

官之屬 大宰 卿 1人 小宰 中大夫 2人 宰夫 下大夫 4인 上士 8인 中

士 16인 旅 (鄭玄의 注 lsquo衆也rsquo) 下士 32인 府 6인 史 12인 胥 12인

徒 120인 인데 주례의 거의 모든 관부가 이러한 구성으로 되어 있

다8)후한의 鄭玄과 唐의 賈公彦은 下士 이상은 왕명에 의해 임관된 王

臣이고 그 이하의 府史胥徒는 王臣에 의해 辟除된 계층으로 王

臣이 아니라고 하였다 즉 위에서 下士까지가 이른바 命官이고 그 아

래는 屬吏이다 특히 정현은 주례 여타 조목에 보이는 官階에서 lsquo群

臣rsquo을 卿大夫士로 해석하고9) lsquo群吏rsquo를 lsquo府史rsquo (秋官 司寇 小司寇 및

同 朝士 등에서의 鄭注) 또는 lsquo府史 以下rsquo(夏官 司馬 御僕의 鄭注)로

해석한다 庶人在官者 란 예기 王制제5에 農田을 100畝 단위로

만들어서 100畝씩 분여하는데 上農夫가 받는 田은 9인이 食할 수 있

고 그 아래는 8인이 食 할 수 있으며 그 아래는 7인이 食할 수 있고

6) 孫鴻燕 秦漢時期郡縣屬吏辟除問題硏究 (秦漢硏究 第一輯 三秦出版社

20071)

7) 後漢書 권28 백관5 注引 漢官曰 雒陽令middotmiddotmiddot(이하의 속관명)

8) 단지 예외로 角人이나 羽人은 그 직무의 성격에 따라 府와 史 중 어느 한 쪽

만 설치되어 있고 腊人과 食医는 양자 모두 설치되어 있지 않다 周禮注疏 같은 條의 贾公彦의 疏

9) 한편 주례 司寇 小司寇의 經文에서 경대부 하위의 lsquo群士rsquo의 稱이 있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1그 아래는 6인이 食할 수 있으며 下農夫는 5인이 食할 수 있다 庶人

在官者 는 그 祿이 이것으로써(8인에서 5인까지) 차등을 삼는다 제후

의 下士는 上農夫로 하고 그 祿으로 그 농경에 대신하기에 족하다 中

士는 下士에 倍하고 上士는 中士에 倍하며 下大夫는 上士에 倍한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라 10)하였고 맹자萬章句下에는 耕者가 수확하는 것으로 一

夫 當 百畝씩 百畝의 分田에서 上農夫는 九人이 食할 수 있고 그 다

음은 8인이 食할 수 있으며 中은 7인이 食할 수 있고 그 다음은 6인

이 食할 수 있고 下는 5인이 食할 수 있다 庶人在官者는 그 祿이 이

를 차등으로 한다 라11) 한 바에 의하면 庶人在官者 는 下士 아래

등급인 府史胥徒에 해당하며 차례로 9인이 食할 수 있는 百畝

의 최상급 농지를 경작하는 상농부(제후의 下士)의 아래 등급에 해당

하는 8인이 食할 수 있는 百畝의 경지 보유자는 府가 되고 그 아래

순으로 각각 7인의 食地 보유자는 史 그 아래 6인의 食地 보유자는

胥 그 아래 5인의 食地 보유자는 徒가 된다 이 규정에 의하면 下士에

서 徒까지는 모두 百畝의 경지를 보유하게 되는 면에서는 같지만 그

경지의 質에 따라서 5 단계의 차이 나는 경지를 차등으로 받게 된다는

것이 된다 上農夫 등의 차등은 주례의 鄭注에는 田의 肥瘠에 5등

급이 있어 수입이 같지 않다 라 하였고 위 인용문의 맹자 注에 一

夫一婦에 佃田이 百畝인데 百畝의 田에 糞을 퇴비로 주면 이것이 上農

夫이고 그 소득의 곡식으로 9口를 족히 먹일 수 있다(一夫一婦 佃田

百畝 百畝之田 加之以糞 是爲上農夫 其所得穀 足以食九口) 라 한

것에 의하면 糞의 퇴비 사용 여부 등으로 인한 토지의 肥瘠으로 발생

하는 수확의 양적 차이에 따른 구분임이 분명하다 즉 祿田 지급의 면

적 크기는 같지만 토지의 질적 차등을 기준으로 下位 5등의 차별이 결

10) 制農田百畝 百畝之分 上農夫食九人 其次食八人 其次食七人 其次食六人

下農夫食五人 庶人在官者 其祿以是爲差也 諸侯之下士視上農夫 祿足以代其耕

也 中士倍下士 上士倍中士 下大夫倍上士middotmiddotmiddot

11) 耕者之所獲 一夫百畝 百畝之分 上農夫食九人 上次食八人 中食七人 中次

食六人 下食五人 庶人在官者 其祿以是爲次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2정되고 있다 漢唐의 주석가들이 庶人在官者 를 주례의 府史

胥徒에 해당시킨 해석은 그들이 살던 시기의 정황에 의거한 것이고

관련 자료들도 충분히 현전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인정될 수 있는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일찍이 曾我部精雄은 鄭注와 賈疏의 차이를 제시하길 鄭玄은

府와 史가 庶人在官者 에 들어가지만 胥와 徒는 그에 들지 못한다고

한 반면 賈公彦은 4者가 모두 그에 포함되는 것으로 본 차이가 있고

鄭注의 해석이 옳다고 하였다12) 그는 상기의 주례 胥十有二人徒

百有二十人 에 대한 鄭注에 이는 民이 徭役을 給한 것이니 지금의 衛

士와 같다(民给徭役者若今衛士矣) 라 하였고 賈疏도 이에 따르고

있는데 胥와 徒는 요역 의무에 복무하는 것인 까닭에 봉록이나 수당이

지급되지 않았고 官長으로부터 辟除 임용된 것도 아니었으며 육체노

동이었던 반면 官長으로부터 선발되어 辟除 임용된 府와 史는 관부의

정신노동에 복무하였기 때문에 다르다고 하였다13) 때문에 庶民在官

者 에 胥와 徒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曾我部精雄은 鄭注와 賈

疏의 그러한 입장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여러 조문을 열거하고 있지만

賈疏가 府史胥徒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나 그가

열거한 자료에서 鄭注가 胥徒를 배제하고 있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주

는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屬이라 함은 그 屬인 胥徒이다 (春

官 宗伯 典祀) 群吏는 府史 이하이다 (夏官 司馬 御僕)라고 해석한

부분에 의하면 胥徒도 屬吏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는 입장이었을 것 같

다 또 曾我部精雄이 胥徒는 給徭役의 의무로 복무하는 것인 까닭에

봉록이 지급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위의 경문에서 최하급의 田地이지

만 1백무의 祿田이 지급된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 주장도 어긋나게 된

다 庶民在官者 의 봉록 문제는 아래에서 다시 상론한다

여기서 주의할 사항은 鄭注와 賈疏가 모두 한에서의 사정에 입각하

12) 曾我部靜雄 中國往古の胥吏制度 (中國律令史の硏究 東京 1971) pp456

-8

13) 위의 글 pp456-7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3여 府史와는 달리 胥徒가 모두 요역 의무로 징발되어 복무하는 자들로

본 것이라는 점이다 이 府와 史의 직무에 대해 정현과 가공언은 주례 小宰 宰夫의 8職 가운데 다섯째 府는 契하여 藏을 治하고 여섯

째 史는 문서로 贊治(보좌관의 업무)함을 관장한다( 五曰府 掌官契以

治藏 六曰史掌官书以赞治 에 의거하여 府는 문서와 器物의 藏(보

관 관리)을 관장하고 史는 문서의 起草를 관장하는 직책으로 해석하

였다 이는 진한시기 각 관부의 屬吏 掾史의 庶務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lt雲夢秦律gt 秦律雜抄(p133)에 佐 史 이상인 吏가 짐을 지고

운반하는 馬와 문서 간수를 담당하는 私卒(隨從의 卒)을 부려서 장사

하도록 하여 이익(錢)을 취하였으면 모두 遷刑에 처한다 라 하였는데

lsquo문서 간수를 담당하는 私卒rsquo이란 佐史 이상 관리 직속의 下屬으로서

그 상관을 隨從하며 보좌하는 까닭에 私卒이라 한 것이고 家內의 私

卒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정리소조가 lsquo隨從의 士卒rsquo로 해석하였는데

문서 간수를 직분으로 하는 史에 下屬된 卒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

든 府史의 史 및 그 下屬의 인력이 전국진에서도 설치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周禮天官 宰夫에 기술된 宰夫8職에서 일곱째 胥는 그 업무가 掌

官叙以治叙 인데 鄭注는 治叙란 관부에서 次序함이니 마치 지금(漢에

서) 侍曹 伍伯이 관리의 朝會에서 傳言 報告하는 것과 같다 胥가 什

長이 된 경우도 또한 그러하다 까닭에 漢法의 사정을 든 것이다(如今

侍曹伍伯 傳吏朝也 胥爲什長亦然 故擧漢法况之也) 라 해석하였다

좀 난해한 설명인데 이를 부연 설명한 賈疏는 이미 才智가 있어 什

長이 되어 관부에서 次序의 업무에 當하니 반드시 사람을 使役하는 곳

에서 그 徒를 科次한다 까닭에 관부에서 次叙한다고 하였다 로 해석

한다 즉 보통 胥徒로 함께 칭해지는 胥는 徒 중에서 才智가 있어 什

長으로 선발된 층으로 관부의 次序 업무를 맡게 되는데 徒를 使役하는

곳에서 그들을 통솔하며 科役한다는 것이다 如今侍曹伍伯 傳吏朝也

도 난해한데 賈疏는 漢에서 侍曹에서 伍의 長인 伍伯(伍長)에 이르기

까지 吏朝(관리의 朝會)에서 群吏가 諸官의 사무를 보고하여 傳하는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4것으로 해석하였다14)즉 侍曹에서 최말단의 부서 단위에 이르기까지

담당 부서의 朝會 때 각 하급 단위의 長이 업무 보고를 하는 것이다

그런대 이 伍伯은 5인조의 長이 아니고 漢의 執金吾의 속관에 (持戟)

五百(伍伯)二十人 이 있고 이 lsquo伍rsquo의 義를 lsquo當rsquo으로 lsquo伯rsquo의 義를 lsquo道rsquo로

해석하여 앞에서 導引하며 길을 驅除 정리하는 吏라고 한 韋召의 해석

이나15) 司隸校尉의 속관으로 先導隊나16) 門番의 임무를 하고 있는 사

례에17) 의하면 하급의 賤職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후한에 伍伯이

자주 보이는데 모두 走卒 鈴下와 連稱되거나 병렬되어 있어 일찍이 好

並隆司는 走卒은 伍伯이라고 하는 職役에 類한다 고 하여(후술) 모두

관부 말단의 職役 내지 賤職이라 하였다18) 凍國棟은 漢唐間의 伍伯이

微賤의 役이였지만 그 職의 성격상 권세를 빌려 남의 생사를 좌우하

고 謝禮錢을 챙길 수 있는 자리였다고 하였다19) 따라서 여기서는 吏

朝에 참석하는 최말단의 吏員으로서 先導 門番 등 役에 복무하는 伍伯

을 기술한 것이라 하겠다 胥徒는 곧 伍伯과 같이 관리의 최말단 수종

원이면서 그 손발 내지 爪牙의 기능도 하는 층이다 이러한 류의 최하

급 단위의 長은 什長이고 胥는 곧 그 什長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주례에서 각 관부의 徒는 그 員數가 거의 대부분 胥의 10배수이다 그

리고 관부의 次序 업무란 담당 단위의 胥가 그 소속 성원의 질서를 유

지하며 아울러 요역 징발된 民의 徒를 지휘 통제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후술)

이어 여덟째 徒는 그 업무가 官의 令으로써 徵令을 관장함(掌官令

14) lsquo如今侍曹五伯传吏朝也rsquo者漢時五人爲伍 伯 長也 是五人之長 言傳吏朝者

傳在朝群吏諸官事務於朝也

15) 후한서 宦者列傳 曹節條의 注에 韋召辯釋名曰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伍 當也 伯 道也

使之導引 當道陌中 以驅除也

16) 續漢書 輿服志上에 公卿以下至縣三百石導從 置門下五吏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車前伍伯 公

八人 中二千石 二千石 六百石 皆四人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17) 謝承後漢書에 華松家孤微 其母夜夢兩伍伯夾門 言司隸在此

18) 好並隆司 漢代下層庶人の存在形態(一) (史學雜誌 82-1 1973) pp17-1919) 凍國棟 漢唐間lsquo伍伯rsquo淺識 (中國中古經濟與社會史論考 湖北敎育出版社

2005) pp25-35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5以徵令) 인데 얼핏 徒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내용인 듯하다 정현은

이 lsquo徵令rsquo의 업무를 趨走給召呼 라 하였다 賈疏는 그 徒가 朝會에서

뛰어다니는 것을 금지시키고 官人에게 복역자를 공급하고 그들을 호

령하며 사역시키는 일이다(其徒止爲在朝趨走 供給官人召呼使役之事也)

고 해석하였다 관부 내에서 많은 복역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까닭에

그들이 소란 피우지 못하게 질서를 잡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서 徒에 의해 징발되고 사역되는 층은 관부에 복역 중인 刑徒 요역에

복무 중인 일반 서민 등일 것이다 주례의 각 관부에서 徒의 수는

수십 명에서 수백 명 많은 경우 8백명에 이르기도 한다 이들의 노동

력은 각 관부별로 항상적으로 갖추어진 것이지만 이 보다 더 많은 노

동력이 필요하여 형도나 일반 요역 복무자들을 징발하게 된다 그리고

그 징발된 노동력을 호령하며 질서를 잡고 사역시키는 직무도 필요하

게 된다 물론 징발된 자들을 사역시키는 일 뿐 아니라 자신들이 직

접 여러 노역의 所管 업무에 복무해야 한다 이를테면 地官 牛人에

胥二十人 徒二百人 이 있고 그 직책은 公牛의 사육이며 稻人에 胥

十人 徒百人 인데 그 직책이 稻田의 경작이고 夏官 虎贲氏에 胥八十

人虎士八百人 인데 鄭注에 의하면 徒라 하지 아니하고 虎士라 한 것

은 徒 가운데 勇力者로 선발된 까닭이다 하였으며 그 일부 직무에 同

司甲 司戈盾 司弓矢 繕人 校人 趣馬 巫馬 등에 속한 수십

명 내외의 徒는 모두 무기제조나 다루는 법 무기 성능 감별 馬의 감

별 養馬기술 馬祖 馬步 등의 神을 통해 馬의 질병을 파악하는 巫術

등에 뛰어난 상급자들 밑에서 보조 지원의 일 등 말단의 업무를 처리

한다 전문 기술과 지능이 필요한 업무인지라 말단의 업무 처리도 상

당히 명민한 자질이 필요하다 따라서 일반 서민 가운데서 이러한 재

능과 자질이 있는 자로 충원한다 이러한 각 관부의 업무 처리는 후대

에도 익히 보이는 사례이다 鄭玄은 胥를 lsquo諝(智者)ldquo로 읽어 才知의 뜻

으로 해석하였는데 같은 徒의 무리 중에서 才知者로 뽑힌 자라는 뜻으

로 보았다 胥가 什長인 까닭에 10인 가운데 1인 비율로 뽑힌 셈이다

아울러 徒 전체가 일반 서민으로부터 뽑힌 자들이라 할 수 있다 단지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6胥徒의 신분상 복무형태상의 제반 사항이 후대에 그에 상당하거나 유

사한 신분층과 사례에 대비할 때 상당히 다른 면이 많다는 사실이다

趙伯雄은 주례의 胥徒는 전국기까지 노예 厮 童보다 윗 등급이지만

거의 비슷한 신분이었고 厮役 내지 賤役의 담당층이었으며 徒가 한에

서는 주로 刑徒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고 하였으나20) 아래

기술하는 내용에 의하면 그러한 해석에 따를 수 없는 면이 많다 또한

한에서 徒는 형도 뿐 아니라 여러 무리를 가리키는데 통용되고 있어

여러 자료에 등장하는 徒가 가리키는 사항은 무척 다양하다

위의 注疏에 의하면 經文에서 徒의 업무를 官의 令으로써 徵令을

관장함(掌官令以徵令) 이라 한 것은 上部의 지시를 받은 徒가 새로

징발되는 徒의 징발 업무 및 이들을 인솔 지휘 사역하며 그 지시사항

(작업)을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胥와 徒가 모두 庶民在官者 라는 입

장에서 보면 徒가 최하위이지만 lsquo在官者rsquo이고 제8위와 제9위의 서열에

있으며 胥와 徒가 각각 6인과 5인이 食할 수 있는 토질의 경지 百畝

를 代耕의 봉록으로 받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이 출신은 징발된 요

역 복무자와 같다고 하더라도 여타의 징발된 일반 요역 복무자와는 구

분되는 계층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후대의 胥吏도 일반 서민출신이지

만 일반 서민과 다른 계층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 같다 만약 曾我部精

雄의 견해와 같이 府와 史까지만 庶民在官者 이고 胥와 徒는 그에

들지 못하는 것이라 한다면 주례 원문에 胥와 徒가 엄연히 제8위와

제9위에 올라 있고 봉록으로써 百畝를 받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기 어

렵게 된다

그리고 특별히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앞에 인용한 鄭注에 이는(胥

와 徒는) 民이 徭役을 給한 것이니 지금의 衛士와 같다 고 한 점이다

그래서 후한 중후기 衛士의 운영 형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또 鄭

玄은 駁五經異義에서 周禮에서 이른바 모두 징발한다 한 것은 胥

徒로 하여금 公家의 事에 給하게 한 것을 말함이니 지금의 正衛와 같

20) 趙伯雄 lt周禮gt胥徒考 (中國史硏究 2000-4) pp10-12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7다 고21) 하였다 한에서 궁성 내지 중도관에 番上 守衛하는 役은 正卒

의 役과 일반 更卒의 役이 있는데 鄭玄이 특별히 正衛라 한 것은 正卒

로서의 役임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의 요역 운영체제에서

衛士가 上番하는 役은 한구의에 民의 나이 23세가 되면 正이 되고

1년간 衛士 1년간 材官 騎士에 복무하며 활쏘기 말달리기 戰陣을 익

힌다(民年二十三爲正 一歲以爲衛士 一歲爲材官騎士 習射御騎馳戰陣)

라 한 것에 의하면 正卒이 그 복역 대상자이고22) 각 군 단위로 1년씩

21) 禮記王制 五十不從力征middotmiddotmiddot 의 條 孔穎達疏引 周禮所謂皆征之者 使爲胥

徒 給公家之事 如今之正衛耳

22) 漢의 正과 正卒 및 상비군의 문제에 대해서는 종래 여러 이견이 있다

正을 正卒로 보고 正卒이란 更卒(小繇)의 對稱으로서 병역의무자이고 재관

기사 위사등이 곧 정졸이라는 설이 가장 많이 받아드려지고 있다(濱口重國

秦漢時代の繇役勞働に關する一問題 秦漢隋唐史の硏究』上卷 東京 1966

1980 勞幹 漢代兵制及漢簡中的兵制 歷史語言硏究所集刊 10 1948 山田

勝芳 後漢時代の繇役と兵役 歷史 66 19869)正卒은 앞의 설과 같지만 正은 23세에서 56세 사이의 남자 즉 正丁 을 가리

킨다는 설(西村元佑 漢代の繇役制度 東洋史硏究 12-5 1953)正卒과 更卒이 별개인이 아니라 동일인이고 更卒은 正卒이 된 이외의 해에

매년 1개월의 역역에 복무하는 자를 가리키며 正은 23세-55세까지의 正丁인

데 正卒은 그 가운데 2년간 衛士 材官 騎士 등의 實役에 복역하는 것이라는

설(西田太一郞 漢の正卒について 東洋の文化と社會1 東京 1955)

材官 騎士등이 일반민에서 材力 있는 자로 선발되어 군국에서 常駐하는 전

문병사로서 직업군인인 lsquo士rsquo인데 대해 正卒은 일반민이 23세에 1년간 병졸로서

근무하고 1년간 衛士로 長安에 上番한다는 설 즉 正卒은 직업군인인 材官 騎

士와는 兵役體系上 別個의 것으로서 일반민의 병역 복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는 설(大庭脩 材官攷 -漢代の兵制の一班について 龍谷史壇 36 1953)正卒이란 23세에 이른 자 가운데서 신체강건한 자를 뽑아 衛士 材官 騎士

樓船 등의 어느 한 兵種에 복무하게 한 것이라는 설(濱口重國 勞幹 西村元佑

山田勝芳 앞의 논문 平中苓次 漢代の官吏の家族の復除と軍賦の負擔 中國

古代の田制と稅法 京都 1967) 諸說의 대부분은 이 견해를 공통적으로 취하

고 있다

秦漢에서는 始傅에서 免老까지의 모든 남자가 병역의무를 지는데 正卒은 그

適齡남자를 統稱하는 말이며 따라서 郡兵이나 衛士 戍卒은 正卒의 일부분이라

는 설(臧知非 秦漢lsquo正卒rsquo辨釋 中國史硏究 1988-1)正이란 傅籍된 待役者(兵役과 力役 포함)를 말하며 正卒은 어떤 특정의 役

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고 正(待役者)과 卒(服役中에 있는 正)로 구분되어 있

는 말이며 秦漢代에 병역 복무는 일부 병역신분에게 만 부과된 것이어서 나머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8조별 순번으로 상경하여 복역한다 正卒은 일반 更卒 중에서 신체강건

용맹 등으로 선발된 자들로 상비군 내지 직업군인의 성격이 강한 집단

이다 즉 그들은 일반민(서인)이면서도 그 중에서 선발되어 군사로써

免老에 이르기까지 복무하는 까닭에 일반민과는 다르다 胥徒 또한 서

인이면서 관부에 복무하는 까닭에 일반민과는 다르다 衛士는 특히 평

시에 도성(중도관)을 수비하기 때문에 관부에 거처하게 되고 胥徒 또

한 관부에서 직접 給事하는 까닭에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면에서 鄭玄

은 양자를 같은 성격의 계층으로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衛士가 일반

민에서 선발된 자들이고 胥는 徒 중에서 才智로 선발되고 徒는 분명

치는 않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일반 民庶 가운데 담당 직무 수행에 어

느 정도 자질을 갖춘 자로 선발된 자들일 가능성이 크다 또 漢書권74魏相傳의 顔注에 京師의 여러 관부에 와서 戍卒이 되는데 지금의

衛士가 上番하여 여러 官司에 나누어져 복무하는 것과 같다 라23) 한

것에 의하면 衛士의 이러한 복역 모습은 각 官司에 배치된 胥徒의 복

역 형태와 같다 전한 京師에서 복무중인 衛士의 수는 景帝末傾에 매

지 일반 白徒는 병역에 복역하지 않는다는 설(孫言誠 秦漢的繇役和兵役 中國史硏究 19873 및 ldquo爲正一歲rdquo辨 文史 31 198811)濱口說과 같이 正을 正卒의 略稱으로 보지만 濱口씨가 正卒을 일반적인 兵

士로 본 것과는 달리 庶民 중에서 일부가 선발되어 兵士(材官 騎士 등)가 된

것이며 이들은 일반서민과는 상대적으로 구별되는 신분 말하자면 獨自의 兵

士身分 으로서 일반서민과 같은 역역(更卒) 의무가 없었고 일반서민과는 다른

부담체계하에 있었다는 설(重近啓樹 秦漢の兵制について -地方軍を中心とし

て- 人文論集(靜岡大學) 36 1985)正卒은 일반민이 20세로 부터 2년간 복무하는 것이며 材官 騎士는 이와는

달리 전문병사로서 23세에서 56세까지 복무하는 것이라는 설(藤田勝久 前漢

の繇役勞動とその運營形態 中國史硏究 8 1984)한편 李成珪는 材官 騎士는 卒에서 징발된 전문 병사였고 1년 복역 후에도

예비역으로 분류 비상시 동원되었지만 (軍)吏나 士에 속하지 않는 자들로서

力役 복역의 한 형태인데 董仲舒가 말한 lsquo一歲力役rsquo은 바로 郡卒로 1년 복무하

는 材官 騎士의 役을 말한 것이라 한다(이성규 前漢 更卒의 徵集과 服役 方

式 -松栢木牘 47호의 분석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09 200912

pp33-34)

23) 來京師諸官府爲戍卒 若今衛士上番分諸司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9년 2만인 武帝 즉위 후 1만인으로 감하고 얼마 후 5천인을 늘려 武帝

후기에는 1만5천이었을 것으로 보인다24) 또 1개 군에서 番上하는 수

가 數千에서 2~3천인이었던 사례가 있다25) 전한 말 成帝 시기의 사

정을 말해주는 尹灣漢簡의 lt東海郡下轄長吏不在署 未到官者名籍gt

에 군현 밖으로 外勤出張 중에 있는 長吏의 현황표에 費長孫敞 十月

五日送衛士 가 있는데26) 費邑의 長 孫敞이 衛士를 送하는 업무로 출

장하여 아직 귀환하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동해군 下轄의 縣(18)邑

(2)侯國(18) 38곳(lt集簿gt) 가운데 오직 費邑에서만 衛士가 上番되고

있다 이에 의하면 衛士의 상번은 각 군에서 縣級 단위로 교대 상번하

는 것으로 보인다 濱口重國은 후한에서 正卒의 군현상비군이 폐지되

었지만 전한에서와 마찬가지로 매년 연말에 1년의 복무가 끝나고 귀향

하는 衛士들에게 황제가 향연을 베푸는 饗遣故衛士儀가 행해지고 있는

사례를 들어 衛士의 上番은 후한에서도 행해지고 있음을 지적한 바가

있다27) 아울러 그는 군현 상비군 폐지 후 중앙의 衛士 부대가 2500

내지 2600명인데 이는 중앙 인근 지역에 한정하여 징발된 자들로 보

아야 한다고 하였다28) 후한 周禮注에서 鄭玄(127-200)의 衛士 인용

이 전한시기의 사정에 의거한 것인지 아니면 그의 활동시기인 후한 후

기의 사정에 의거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후한 중 후기에도 衛士의

上番制가 부분적으로나마 유지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4) 濱口重國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隋唐史の硏究』上卷 東京

1966 1980) p286 注2)

25) 「上臨饗罷衛卒 衛卒數千middotmiddotmiddot」 (漢書 권77 蓋寬饒傳) 「河南卒戍中都官者二三

千人middotmiddotmiddot」 (漢書 권74 魏相傳)

26) 張顯成 周羣麗 尹灣漢墓簡牘校理(上篇) (天津古籍出版社 2011 3) p32

27) 濱口重國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隋唐史の硏究 (上)) p283

28) 濱口重國 위의 글 pp284-285 그 주된 근거는 속한서 백관지3 尙書條에

蔡質漢儀曰 ldquo右丞與僕射對掌授廩假錢穀 與左丞無所不統 凡中宮漏夜盡 鼓鳴

則起 鍾鳴則息 衛士甲乙徼相傳 甲夜畢 傳乙夜 相傳盡五更 衛士傳言五更 未

明三刻後 雞鳴 衛士踵丞郎趨嚴上臺 不畜宮中雞 汝南出雞鳴 衛士候朱爵門外

專傳雞鳴於宮中rdquo 應劭曰 ldquo楚歌 今雞鳴歌也rdquo 晉太康地道記曰 ldquo後漢固

始鮦陽公安細陽四縣衛士 習此曲於闕下歌之 今雞鳴是也rdquo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0中都官의 몇 몇 部署에 給事하는 衛士의 員數 규정이 있는데 속한

서 백관2 注引 漢官의 光祿勳에 81인 太宰令에 15인 高廟令에 15

인 世祖廟令에 20인 衛尉에 60인 南宮衛士令에 537인 北宮衛士令에

471인 右都候에 416인 左都候에 383인 南宮南屯司馬에 102인 (北)宮

門蒼龍司馬에 40인 玄武司馬에 38인 北屯司馬에 38인 北宮朱爵司馬

에 124인 東明司馬에 180인 朔平司馬에 117인의 衛士가 소속되어 있

다 이는 후한의 사정을 기록한 것인데 그 총합이 2637인이다 전한에

비해 그 員數가 급감한 것은 광무제의 부역 경감정책과에 의한 것이라

하겠고29) 소수지만 그 員數가 규정되어 있다는 것은 후한에서 代役制

내지 雇傭制로 대체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전과 같은 上番制가

시행되었음을 말해준다 후한에서 正卒 및 군현의 상비군제가 온전히

사라진 것이 아닌 것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후한의 2637명의

員數는 전한에 비해 대략 15 정도 되는데 전한의 사정을 기준으로 한

다 하더라도 군현의 正卒은 평생 1회만 당번이 되어 上番하더라도 중

도관의 衛士 給事가 충분히 운영될 수 있다 위의 lt윤만한간gt에서 전

체 38현읍후국 가운데 그 해에 費邑의 正卒 만이 상번하고 있고 당시

郡別로 상번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동해군이 매년 상번의 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각 正卒은 38년에 1회만 상번하면 된다 물론 군별 현

읍후국의 수가 다르기 때문에 그 回次의 수도 다르고 현읍후국별 正

卒의 수에 따라 1개 이상의 현읍후국이 함께 동원된 경우도 충분히 있

을 수 있다 그러나 각 군의 현읍후국 수가 보통 20개는 넘는다 게다

가 費邑의 正卒도 몇 개 조로 나뉘어 순차로 상번하는 것이라던가 각

郡도 매년 상번이 아니라 몇 년 만에 순번이 돌아오는 체제라면 각 正

卒의 중도관 衛士 복무는 아무리 많아도 일생에 1회를 넘기 어렵다

앞에 든 漢舊儀의 民年二十三爲正 一歲以爲衛士 는 곧 그러한 사

정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일생 1회의 복무형태는 胥徒의

29) 濱口重國은 광무제의 경감책과 아울러 虎賁 羽林 羽林左右騎 五校尉의 軍이

警備에 추가되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위의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

隋唐史の硏究(上)) p283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1평생 내지 세습되는 면과(후술) 다르지만 일반의 役 대상자에서 선발

되어 중도관에 給事한다는 면에서는 공통이다 그런데 전한에서 lsquo父死

子代rsquo였던 중앙군은 羽林孤兒 뿐이었지만 후한에서 虎賁 羽林 羽林左

右騎 五營士의 중앙군에까지 확대되었다고 한 濱口重國의 지적이 있

다 그에 의하면 후한에서 중앙군단의 세습화와 함께 바로 지방에 特

設된 군단의 세습화도 이루어지면서 魏晋시기 兵民分離의 前段을 이루

게 되었다고 한다30)후한 후기 특히 羌의 侵寇 이후 郡에 都尉를 설치

하고 全民을 징병대상으로 삼아 상비의 郡兵을 다시 설치하고 있으

며31) 여러 출신 성원을 규합한 병단이 私屬이 되기도 하고 국가의 군

단이 되기도 하며 部曲 내지 그와 같은 류의 세습 병단화 하는 과정

에 대해서는 필자도 일견을 피력한 바 있다32)따라서 징병제에 의한

正卒의 상비군 운영이 폐지된 이후 15 수준으로 급감한 정졸의 衛士

가 上番하고 있었지만 이 군단 또한 후한 중기 이후 전란시기가 되면

서 世兵化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胥徒의 세습과 후한 후기에

활동하였던 鄭玄 당시 衛士의 세습화는 일치하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鄭玄이 말한 衛士는 한초의 사정이 아니라 그가 활동하였던 후한 후기

의 사정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鄭玄이 漢의 衛士 上番制에 의거하여 주례의 胥徒制를 해석한 것

은 양자의 해명에 큰 도움을 준다 상술한 바에 의하면 몇 가지 면에

서 양자가 일치하는 점이 대체로 인정된 셈이지만 胥徒가 거의 모든

관부에 설치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漢代의 衛士는 광록훈이나 衛尉

제사 守陵등 일부 한정된 관부에 설치되어 있다 또한 주례의 胥徒

가 士 이상의 신분과 마찬가지로 代耕의 봉록으로써 농지를 받고 있는

봉록자라는 면은 지방에서 상경하여 1년의 기간만 한시적으로 복무하

는 衛士의 경우와는 자못 어울리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衛

士는 上番者로 충당되지만 일단 관부별로 員數가 규정된 員吏로서 복

30) 濱口重國 앞의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p285

31) 濱口重國 光武帝の軍備縮小とその影響 (秦漢隋唐史の硏究(上)) p30832) 박건주 한대의 지방 상비군과 部曲의 推移 (동양사학연구 118 20123)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2무하게 되기 때문에 일부는 胥徒처럼 員吏로서 수년 이상을 관부에 居

하는 어느 정도 전문화 한 衛士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鄭玄의 활

동 시기와 큰 차이가 없는 lt長沙走馬樓吳簡(이하 lt吳簡gt으로 약칭)gt

領二年四家衛士田漆十五畝 畝收限米二斛 合爲吳平斛米一百五十斛

(5-1669)에 의하면 4家의 衛士가 限田75畝 佃作에 대한 租로 畝當 限

米2斛을 납부하고 있다 lt오간gt의 限田에 대해 여러 異說이 있지만

(후술) 그 佃作者와 限米 납부자의 계층에 수십 종의 吏員들이 포함되

어 있는 것에 의하면(후술) 衛士도 그러한 吏員으로서 限田이 지급된

것으로 보인다 단지 限田을 佃作케 한 것이 吏員에 대한 경작의 부과

(경작 노동력의 징발)를 뜻하는 것인지 혜택의 수여를 뜻하는 것인지

는 아직 분명치 않지만 于振波의 분석과 같이 畝當 限米2斛의 징수는

대단히 과중한 액수인 까닭에33) 受惠라기 보다는 경작 노동력의 징발

내지 課役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祿田의 의미로 보기

어렵지만 당시 吏職의 賤役化 현상을 고려하면 그러한 시대적 여건 하

에서 實益이 거의 없는 祿田으로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어쨌

든 후한말 이래 小吏 내지 吏戶와 병사층의 세습화 진전을 고려한다면

어떠한 방식이든 그 가족의 생계를 위한 봉록의 지급이 있었을 가능성

이 더욱 커진다

이상에서 검토한 몇 가지 면에서 보면 府史와 胥徒 중에 후자 만

lsquo給徭役rsquo에 의거한 복무라는 점 등에서 다른 계층이지만 庶民在官者

로서 함께 칭해질 수 있는 층이었다고 본다 무엇보다 胥徒가 각각 제

8위와 제9위의 在官者 서열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동시에 府史는 모두 官長으로부터 선발되고 辟除 임용된 자들인데 비

해 胥徒는 일반의 요역의무를 대체하여 官에서 給事中인 계층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胥徒가 lsquo在官者rsquo로 칭해지는 이유는 관부 내에 거

처하면서 노동을 통하여 잡다한 庶事를 직접 처리하고 있으며 국가로

33) 于振波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中國社會科學院硏究生員學報 2004

-1) p122 限米 납부액의 과중성에 의거해서 限米 납부자는 屯田노동자 限米

는 屯田의 租稅라고 본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3부터 代耕의 祿田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관부의 제반 업무는 각 업무

分司 말단에 속한 胥徒의 노역에 의해 완수될 수 있다 이들은 노역

징발 대상자인 徒 중에서 재능 등의 명목으로 선발된 자들이고 그 중

에서도 才智가 있는 자가 胥이다 이들은 선임자 내지 연장자의 지휘

감독 아래 각 관서의 노역 업무와 勞役者 징발 업무 등으로 奉公한다

이것이 胥徒의 在官者로서의 職事이다 胥徒의 職事는 어디까지나 노

동이 전제되는 勞役이며 일반민의 요역의무에 대신하여 관부의 職에

給事하는 까닭에 職役이라 할 수 있고 官長의 선발로 辟除된 府史는

정식의 官員으로서 奉公하는 것이고 給徭役 에 대신하여 복무하는

것이 아닌 까닭에 胥徒의 職役과 구분하여 그 職을 職官이라 할 수 있

다 그 上級인 命官도 물론 職官이다 職官의 기본 요건은 그 官職에

任職인 상태가 그대로 王命을 받들어 奉公 중인 것을 뜻하는 까닭에

이미 王命을 수행중인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체로 일반 서민

의 기본 요역에서 면제된다 단지 면제의 세부 규정에 의하면 役의 종

류와 신분의 차등에 따라 그 면제 대상의 범위가 구분된다 한편 전쟁

에 참전하는 의무는 면제되지 않는다 모든 官吏는 유사시 종군해야

한다 官人이 본래 戰士層인 國人 출신에서 나온 때문이다 일반 서민

은 매년 일정 기간 동안 만 국가의 命을 받아 노역에 징발되어 복역하

는 까닭에 그 생업은 징발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시적인 노역이 아니라

그들이 부여받은 職인 恒常의 耕作奉公에 있다 職官은 그 복무를 통

해 생활이 영위되지만 일반 서민이 징발되어 이행하는 노역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無償이다

官職앞에 인용한 宰夫8職에 대한 賈疏의 끝 부분에 周禮 위 아래

의 글에 胥가 있으면 반드시 徒가 있는 것은 胥가 什長인 까닭이다

鱉人과 臘人의 類는 徒만 있고 胥가 없는 것은 徒만 있으면 충분하여

지휘자(長師)를 둘(빌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食醫의 類에는 胥徒가

모두 없는 것은 그 官만의 行事(업무처리)로도 충분하여 胥徒의 도움

을 빌리지 않는 까닭이다 고34) 하였는데 胥와 徒가 모두 설치되지 않

은 部署는 그 官만의 업무처리만으로 충분한 까닭이라 하였으니 바로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4府史까지의 屬吏를 官으로 한정한 것이다 즉 胥徒는 官에서 복무하고

있지만 官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庶民이고 庶民在官者 이며 그들의

복무는 職官이 아니고 職役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들도 그 職役으

로 생업을 유지하는 까닭에 職官과 동일성을 지닌다 주례에 의하는

한 胥徒가 일시적으로 복무하는 형태는 아닌 듯 하다 무엇보다도 그

들에게 祿田이 지급되고 있기 때문에 매년 혹은 매월 교체되는 요역

형태의 근무는 아닐 것이다 또한 각 분야별로 상당한 전문 지식과 숙

련도가 요구되는 업무 처리상 단기간 교체되는 근무형태를 취하였을

것 같지도 않다

이렇게 볼 때 胥徒가 官에서 일반 관리와 마찬가지로 계속적으로 근

무하면서도 그 근무를 lsquo給徭役rsquo의 代替로 본 주석이 옳다면 아무래도

胥徒는 신분제사회에서 官이 될 수 없는 자 또는 現任의 官과는 엄밀

히 구분되는 신분이었던 까닭에 그 직무 또한 (일반 서민의) 노역의

의미로 인지되고 평가된 것이 아닐까 한다 漢代사회의 신분구조는 漢

家의 주인인 天子가 그의 家人인 일반 民庶를 직접 장악하는 구조가

있고 동시에 漢家로부터 독립된 개별의 士族이 각각 lsquo家rsquo의 주인으로

서 천자와 主客의 관계가 아직 유지되는 체제가 병존하는 二元의 구조

로 되어 있다고 본 濱口重國의 견해가 있다35)이러한 입장을 발전시켜

漢帝國은 황제가 인민을 인두적으로 지배하는 lsquo齊民制rsquo와 천자가 lsquo家rsquo를

非人頭的으로 지배하는 家父長制的 관계로서의 lsquo家産制rsquo라는 이중구조

로 되어 있다고 본 好並隆司의 견해도 있다36) 그리고 이러한 이중성

의 사회구조를 公과 私 君臣관계의 면에서 진전시킨 尾形 勇은 그 臣

이 되는 층을 仕宦者와 從役者로 나누고 있다37) 위의 설들은 모두 한

34) 周禮 上下文有胥必有徒胥爲什長故也 鳖人腊人之類空有徒無胥

者得徒则足不假長師故也 食醫之類胥徒并無者以其專官行事不假胥徒

35) 濱口重國 唐王朝の賤人制度 主篇 第六章 第二節 (東洋史硏究會 1966)

36) 好並隆司 前漢帝國の二重構造と時代規定 (歷史學硏究 375 秦漢帝國史

硏究 東京 1978에 재수록)

37) 尾形 勇 漢代における 家人 と君臣關係 (史學雜誌 83-4 1974) pp3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5대의 사정을 말한 것이지만 이러한 이중구조의 신분제 내지 사회구조

는 주례의 관부 구성 체제에 의하면 상위에서 下士 내지 府史까지가

仕宦者에 해당하고 胥徒를 후자 즉 從役者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연원은 이미 周代에 있다 士人 내지 仕宦者는

그 직무로써 奉公하고 從役者는 賦稅役의 부담으로써 奉公한다38)胥徒

가 비록 官에 있는 자이지만 二元구조의 신분제 하에서 士人이 되지

못한 가운데 그 직무는 職官이 되지 못하고 職役에 머무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Ⅲ 職役 담당층의 복무 형태와 봉록 지급의

문제

周代에 lsquo給徭役rsquo의 차원에서 관부에 給事하는 胥徒가 있었다면 후대

의 요역 가운데도 그러한 항목이나 사례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다 또한 胥徒의 직무는 續漢書 輿服志上에 보이는 伍伯辟車

鈴下侍閣門蘭部署街里走卒 등 관부 말단에서 경호導從심

부름侍衛車馬관리 巡邏 등의 賤職에 종사하는 이른바 徒卒의 職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그런데 이들의 役이 民의 일반 요역 의무에 따

라 징발되어 일시적으로 복역하는 것인지 아니면 상술한 胥徒와 같이

庶民在官者 로서 관부의 최말단에서 상시로 근무하며 관부에 의지하

여 생업을 유지하는 下吏로서의 복무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후한서권58 虞詡傳에 永平(후한 明帝期) 章和(章帝期) 중에 州郡이 走卒錢으

로 貧人을 給貸(雇賃金을 지급)하였다 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集解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35

38) 尾形 勇 위의 글 pp28-29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6走卒伍伯之類란 續漢志에 이른다

(車前에) 伍伯은 公은 8인中二千石은 6인千石과 六百石은 모두 4인百石

이하에서 二百石은 모두 2인을 둔다 黃綬(4백석에서 2백석의 관리)의 武官에

는 伍伯을 따르게 하고 文官에는 辟車鈴下侍閤門闌部署街(里)走卒

을 따르게 하는데 모두 程品의 多少가 있으며 맡은 바 직무에 따라 領率하게

한다 (驛馬는 30里에 하나를 설치한다) (卒은) 모두 적색 두건과 진홍색 소창

옷을 착용한다

즉 지금 鞭杖을 잡고 따르는 자들이다 이는 錢이 있는 자로 하여금 그 (役

에) 대한 資錢을 내게 하여 몸으로 직접 노역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39)

〔 ( ) 내의 글은 결락된 부분을 輿服志 원문에서 보완함〕

인용된 속한지輿服志의 기사는 公卿 以下 縣의 三百石 官長에 이르

기까지 이들을 導從하는 下吏들의 配屬 員數를 규정한 것이다 열거된

役職들은 모두 300석 이상 관원을 導從하는 役員들인데 후한 明帝 章

帝期에 일부 지역에서 이 役職의 명목으로 走卒錢을 징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記事는 順帝 연간에 尙書僕射 虞詡가 上言한 것인데 당시

長吏 2천석관들이 謫罰者에게 貧人 구호를 위한 lsquo義錢rsquo의 명목으로 贖

錢을 강요하고 守令은 이를 빌미로 聚斂함에 順帝 원년 이래 백만전

이상을 受取한 長吏가 끊이지 않고 있는 사정을 진언한 가운데 그 이

전 永平 章和 연간에 있었던 사실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즉 州郡에

서 走卒錢을 징수하여 그 역을 면제시켜주고 대신 빈궁한 자를 그

役에 고용하여 그 錢을 雇賃으로 지급해주는 일이 있었다 당시 司空

이 이 事案을 탄핵하니 해당 州郡縣이 모두 坐되어 免黜되었었다 그

때의 전례와 마찬가지로 당시 임시로 사용하였던 제도(走卒錢 징수와

雇賃 지불)를 蠲制할 것을( 蠲制權制 ) 주청하였고 이에 조서를 내려

州郡을 切責함으로써 그러한 贖錢 강요가 이로부터 그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40) 따라서 走卒錢 징수와 導從役의 雇傭 방식 운영은 후한

39) ldquo卽今行鞭杖者也 此言錢者令其出資錢 不役其身也 走卒伍伯之類也 續漢

志曰 (車前)伍伯 公八人中二千石六人千石六百石皆四人自百石以下至二

百石皆二人 黃綬 武官 伍伯 文官 辟車鈴下侍閤門闌部署街

(里)走卒 皆有程品多少 隨所典領率 (驛馬三十里一置 卒)皆赤幘絳褠 卽

今行鞭杖者也 此言錢者令其出資錢 不役其身也

40) 후한서 권58 虞詡傳에 是時長吏二千石聽百姓謫罰者輸贖 號為lsquo義錢rsquo 託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7明帝 章帝期에 한정되어 시행된 것으로 모두 不法이었고 虞詡의 順帝

시기에는 시행되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渡邊信一郞에

의하면 이들은 秦漢에서 관부의 최하층으로서 관부에서 필요로 하는

導從役 등 일상적인 노역에 복무하며 民으로부터 강제 징발되어 복무

하였는데 후한 초에 이미 走卒錢이 징수되고 특정 임무는 면역전을

재원으로 한 고용노동으로 전환되었다고 한다41) 그러나 章帝 이후 50

여년이 지난 順帝期에 이르기까지 고용 형태의 운영이 반복되지 않고

있는 것에 의하면 고용 노동으로의 진전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

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어쨌든 導從役의 고용 방식 운영이 不法

이었다 함은 그것이 본래 징발 형식으로 운영되는 것이었음을 말해준

다 錢이 있는 자로부터 走卒錢을 받고 이 재원으로 빈한한 자를 고용

하여 雇賃을 지급하는 不法을 행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어지는 지적에

서 順帝 때 지방관들의 贖錢 강요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관리들의 私利

도모에 의한 것이다 또한 그 의무자에 富者가 있어 그 實役을 피하고

자 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導從役과 같은 下吏의 봉록은 매

우 적기 때문에 여타의 수익이 있다면 그 봉록에 꼭 의지할 필요는 없

었을 것이다 이들이 비록 관부의 員吏이고 그 吏職이 생업이 되는 것

이지만 최말단의 賤役 내지 厮役으로서 천대받는 면이 많았을 것이다

때문에 이 職役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도 많았을 것이다

예기王制에 무릇 전문기능으로 事上(奉公)하는 자가 祝史

射御醫卜 및 百工이다 무릇 전문기능으로 事上하는 자는 다른

일을 해서는 안 되며(不貳事) 근무하는 관서를 옮겨서도 안 된다(不移

官) 出鄕하면 士와 抗禮하지 못하며 家에서 仕하는 자도 出鄕하면 士

와 抗禮하지 못한다 고42) 하였다 즉 士의 신분이 아닌 일반서민 출신

為貧人儲 而守令因以聚斂 詡上疏曰 ldquo元年以來 貧百姓章言長吏受取百萬以上

者 匈匈不絕 謫罰吏人至數千萬 而三公刺史少所舉奏 尋永平章和中 州郡

以走卒錢給貸貧人 司空劾案 州及郡縣皆坐免黜 今宜遵前典 蠲除權制 於是詔

書下詡章 切責州郡 謫罰輸贖自此而止rdquo

41) 渡邊信一郞 中國古代の財政と國家 (汲古書院 2010 第三章) p128

42) 禮記王制 (十三經注疏 中文出版社) p2905에 凡執技以事上者 祝史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8이 여러 기능직의 吏職에 복무하면서 함께 관부에 있지만 본 소속의

직장에서 다른 직장으로 옮길 수도 없고 신분상 士와 대등한 위치에

처하지 못하며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또한

府史 이상의 職官과 구분되는 胥徒의 특성과 상통한다

속한서 백관지2에 射聲校尉一人 比二千石 의 本注에 服虔曰

工射이다 어두운데서 소리를 듣고 활을 쏘아 명중시키는 까닭에 이름

하였다(工射也 冥寞中聞聲則射中之 故以為名 고 하였는데 여기서

工射 는 射도 工 의 한 분야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은 그 기능으로

奉公하는 것이 그 職分이고 생업이기도 하며 다른 직종이나 직업을

갖을 수 없고 옮길 수도 없는 자들이다( 不貳事 不移官 ) 이들은 그

職能으로 생업을 유지하지만43) lsquo父死子代rsquo 의 世業으로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고 賤職인 까닭에 여기에서 벗어나 신분상승을 바라는 경향이

있게 된다 이를테면 三國魏의 黃朗은 그 부친이 縣卒로서 鈴下 伍伯

의 職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抗志 遊學하여 현령을

거쳐 군태수에 이르렀는데 부친의 일을 생각하여 屬下의 鈴下 伍伯을

부를 때 鈴下 伍伯이라 부르지 않고 항상 姓字로 불렀다 비록 분노

하였을 때도 鈴下 伍伯으로 부르지 않았다44)

그런데 導從役 복무자는 징발되어 관부 내에서 복역하는 인원 중에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전체 복역 대상자 가운데 극히 소수에 불과하

다 특히 黃綬의 武官을 導從하는 伍伯 등의 직무가 護衛와 侍衛 警備

등이 위주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무술과 용력을 갖춘 이들로 선발된

그룹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黃綬 이상의 문무관에 소속되어 그 員數

射御醫卜 及百工 凡執技以事上者 不貳事 不移官 出鄕不與士齒 仕於

家者 出鄕不與士齒

43) 禮記 王制에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百工 各以其器食之 (注에 器 能也)

44) 三國志 권23 裴潛傳 所引 魏略에 黃朗字文達 沛郡人也 爲人弘通有性

實 父爲本縣卒 朗感其如此 抗志遊學 由是爲方國及其郡士大夫所禮異 特與東

平右姓王惠陽爲碩交 惠陽親拜朗母於床下 朗始仕黃初中 爲長吏 遷長安令 會

喪母不赴 復爲魏令 遷襄城典農中郎將涿郡太守 以明帝時疾病卒 始朗爲君長

自以父故 常忌不呼鈴下伍伯 而呼其姓字 至於忿怒 亦終不言 朗旣仕至二千石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9가 정해진 것에 의하면 庶民在官者 로서의 胥徒에 상당한다 봉록이

지급되는 일자리이며 민의 공동의무인 일반요역에 대신하여 복무하는

것인 만큼 면역전의 授受 행위는 不法이다

상술한 輿服志에 각 300석 이상의 官員 당 이들의 배당 員數가 규

정되어 있는 것에 의하면 이들도 분명히 관부의 한 구성원들이다 속한서 백관지 注引의 漢官에는 官長 내지 命官級 屬下의 員吏 員數

및 秩祿을 기재하고 있다 이를테면 속한서 백관2에 衛尉 卿一人

中二千石 本注曰 掌宮門衛士 宮中徼循事 丞一人 比千石 이라 하였

고 注引에 漢官曰「員吏四十一人 其九人四科 二人二百石 文學三人

百石 十二人斗食 二人佐 十二人學事 一人官醫 衛士六十人」이라 하

였다 이 가운데 百石까지는 봉록 지급이 명시되어 있지만 그 이하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봉록이 전혀 지급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斗食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斗升으로 계산되는

日數 계산에 의한 연봉액이 정해져 있다 百官受奉例의 注 所引 漢書音義에 斗食祿 日以斗爲計 라 하였고 한서 百官表上에 漢官名

秩簿에 이르길 斗食은 月俸 11斛 佐史는 월봉 8斛이다 一說에 斗食

이란 연봉이 百石에 이르지 못하여 日當으로 계산해서 1斗2升을 食하

는 까닭에 斗食이라 한다 고 하였다 속한서 백관5의 百官受奉例에

서는 百石이 月 16斛이고 斗食 이하는 위와 같다 또 墨子 雜守篇에

斗食은 1년에 36石이다 參食이면 1년에 24石이고 四食이면 1년에 18

石 五食이면 1년에 14石4斗 六食이면 1년에 12石이다 斗食은 5升을

食하고 參食은 3升小半을 五食은 2升 六食은 1升大半을 食한다 하루

에 2회 食한다 고 한데서 알 수 있다 斗食 은 1食에 5升 하루에 2

食이니 매일 1斗를 받아 1년 360일에 총 36石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

參食 은 1食에 3과 13升 즉 13斗를 받아 1일에 23斗가 되고 1년에

24石을 받는다 그 이하의 四食에서 六食까지는 斗食 이하에 열거된

下吏의 지급액 규정일 것이다

閻步克에 의하면45) 周代에서는 士 이상에게 祿田을 지급하여 그

수익을 食하게 하는 것으로 연봉을 지급하는 형태였는데 하급관리나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0工醫師 등 기술직 및 兵員에게는 月 단위로 지급하는 이른바 稍食

형태로 운영하였으며 나중에 증액 고정화 되고 아울러 錢으로 지불하

게 됨으로써 月俸의 秩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稍食 이란 주례天官

宮正에 宮正이란 왕궁의 戒令糾禁을 맡는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그 출입을 검찰

하고 그 稍食을 균등히 하고 그 淫怠하고 奇邪한 民을 제거하고 그

什伍를 모아 道義를 가르친다 月이 끝나면 그 稍食을 會計하고 1년이

끝나면 그 (吏職의) 行事를 검열한다 라46) 하였는데 이 稍食에 대해

鄭司農은 禄廪 疏는 宫中官府 등의 月禄 이라 하였다 즉 稍食은

月俸인 셈인데 이를 하급관리의 月俸이라 한 것은 國語晋語4에 公

은 貢을 食하고 대부는 읍을 食하며 士는 田(公田)을 食한다 庶人은

力으로 食하고 工商은 官(官으로부터 받은 田)을 食하며 皁隸(吏에

속한 徒隸)는 職을 食하고(각 담당 職의 大小에 따라 食祿) 官宰(大夫

의 家臣)는 加(大夫의 家臣)를 食한다 에서 公 大夫 士까지는 國 邑

田을 봉록으로 받는 까닭에 연봉을 받는 것이 되고 庶人 이하는 관부

에 給事한 力(勞役) 등을 계산하여 지급 받는 까닭에 월봉이라는 것이

다 또 주례 夏官 校人의 校人은 王馬之政을 관장한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馭夫

의 祿과 궁중의 稍食을 균등히 한다 라 하였는데 그 注에 師圉는 府

史 以下다 고 하였다 즉 府史 이하 下吏의 봉록 관련 업무이다 또 주례 天官 醫師에 연말이 되면 그 醫療한 실적을 검사하여 그 食을

정한다 十점 만점이면 上 十에 一을 失하면 次等 十에 二를 失하였

으면 그 次等 十에 四를 失하였으면 下로 한다 하였고 또 방비를

굳건히 하기 위해 성곽 溝池 등의 役事와 守備를 관장하는 掌固는 이

에 복무한 士庶子와 衆庶에 대해 필요한 도구와 財用을 공급해주고 그

稍食을 균등히 한다고 하였다(同 夏官 掌固) 이러한 자료에 의하면 府

史 이하의 下吏에 대해 祿俸 지급의 額이 기술되어 있지 않는 것은 食

邑田이나 百石까지는 年俸의 일정액이 규정되어 있고 이 액수가 월봉

45) 閻步克 從稍食到月俸mdash戰國秦漢祿秩等級制新探 (學術界 20002)46) 宮正 掌王宮之戒令糾禁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幾其出入 均其稍食 去其淫怠與其奇邪之民

會其什伍而敎之道義 月終 則會其稍食 歲終 則會其行事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1으로 나뉘어 지급되는 것과는 달리 그 이하의 吏는 月別 給事한 日數

나 실적을 계산하여 지급하는 月俸 형태였고 그 총합이 百石 이하였

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앞에 든 百官名秩表나 묵자의 기사는 그

러한 사정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府史 이하인 胥徒나 그 직급에 상당

하는 속한서 백관지의 각 관부별 官長 屬下의 員吏로서 有秩 아래에

나열된 직급들도 그 근무일수나 실적에 따라 봉록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有秩의 官은 百石 이상의 年俸이 지급되는 下限의 관리

를 가리키며 佐史 이하의 월봉 수입자에 대비하여 쓰이는 용어이다

근래 楊振紅 廣懶薰雄 宮宅 潔 등은 佐史 이하의 下吏에는 1개

월을 단위로 윤번 근무하는 자들이 있어 이들은 그 이름 앞에 更 이

붙고 이에 대비하여 常勤하는 자들은 冗 이 붙어 구분되었다 하고

그 내역과 성격을 고찰하였다47)사실 후대의 冗 내지 冗官 이 보통

散官 의 뜻이었던 것에 비해 선진에서 진한 시기의 여러 자료에 보이

는 冗 은 위의 연구들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更 에 대한 相對로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lt운몽진간gt 秦律十八種 工人程에 冗

隸妾 2인은 工 1인에 當하고 更隸妾 4인은 工 1인에 당한다 小隸臣妾

으로서 可使者 5인은 工 1인에 당한다(冗隸妾二人當工一人 更隸妾四

人當工一人 小隸臣妾可使者五人當工一人) 에서48) 冗隸妾은 更隸妾에

비해 2배의 우대를 받고 있으며 lt이년율령gt史律에 大祝이 祝을 시

험해보아 祝에 뛰어나고 祠事에 밝으면 冗祝으로 삼아 이들을 冗한다

(大祝試祝 善祝 明祠事者 以爲冗祝 冗之) 고 하였는데 이 冗 은 같

은 史律의 祝十四章으로 學童들을 시험해서 능히 7천언 이상을 誦할

수 있어야 祝으로 삼고 5更으로 한다(以祝十四章 試祝學童 能誦七千

言以上者 〔乃得〕爲祝 五更) 에서의 更 과 相對로 위치하고 있다

47) 楊振紅 秦漢簡中的ldquo冗rdquordquo更rdquo餘供役方式middotmiddotmiddot從lt二年律令 史律gt談起 (簡帛硏究 廣西師範大學出版社 2006) 廣懶薰雄 秦漢律令硏究 (汲古書院

20103) pp297-304 宮宅 潔 漢代官僚組織の最下層 - 官 と 民のはざま-

(東方學報 87 2012) pp11-1248) 睡虎地秦墓竹簡 (北京 文物出版社 1978) p74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2또 lt里耶秦簡gt에도 冗戍士五(伍) (⑧666+ ⑧2006)와 更戍(某) (⑧

143 ⑧149 ⑧694)의 對稱 용어가 있다 한편 주례春官 槀人에 外

內朝의 冗食者의 食을 공급해주는 것을 관장한다(掌共外內朝冗食者之

食) 라 하였고 이에 대한 鄭注는 冗食者란 (관부에 밤까지) 머무르며

문서 작업을 하는 것이 마치 지금의 尙書의 屬吏로서 當直하는 者들과

같다(冗食者 謂留治文書 若今尙書之屬 諸直上者) 賈疏는 ldquo(鄭注에

서)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rdquo라 한 것은 또한 漢法을 인용하여 설명한 것이니 차례로 당직

하는데 관부에 留宿하며 (집에) 돌아가지 않는 까닭에 반드시 음식을

제공해야 한다(亦引漢法說之 謂以次當直 留在朝 宿不還 須以食供之)

고 해석하였다 여기서의 冗 은 夜勤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일

상 정규의 일을 넘어선다는 뜻을 지닌다 冗食 은 야근하는 관리에게

제공되는 음식이기 때문에 정규의 음식 지급에 추가되는 것을 의미한

다 전한 成帝 河平 연간에 수해를 입은 군국을 구휼하면서 그 지역민

을 다른 군국으로 피신시키고 그 곳에서 冗食케 하라 고 하였는데49)

文穎은 冗이란 散이다 廩食을 散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遊離되어) 정착하지 못하는 戶를 役事시켜 일자리를 주는 것이다(冗

散也 散廩食使生活 不占著戶給役使也) 로 해석하였고 如淳은 離散

된 자들에게 給食하고 관부는 그 임금을 지불한 것이다( 散著人間給

食之 官償其直也 )고 해석하였다 즉 수해로 유민이 된 자들에게 給

食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하고 아울러 役事의 일자리를 주어 그 임금

을 지불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석자들이 冗 을 散 의 뜻으

로 해석한 것은 국가의 재정을 풀어서 지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國錢의

lsquo散布rsquo라는 뜻으로 본 것이다 이 또한 정규의 재정 지출을 넘어선 추

가의 지출이므로 실은 위의 사례들과 같은 뜻이 된다 또 한서권24

하 식화지하에 또한 周官의 稅民 제도에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民이 떠돌아다니면서

일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夫布一匹을 납부하게 하며 布를 납부할 수

49) 漢書 卷10 成帝紀 河平4년조에 遣光祿大夫博士嘉等十一人行舉瀕河之郡水

所毀傷困乏不能自存者 財振貸 其爲水所流壓死 不能自葬 令郡國給槥櫝葬埋

已葬者與錢 人二千 避水它郡國 在所冗食之 謹遇以文理 無令失職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3없는 자에게는 縣官에서 冗作케 하고 이들에게 衣食을 제공한다 고50)

하였다 여기서 冗作 이란 정규의 요역 부과 외에 징벌의 뜻으로 역

을 추가하여 부과한다는 의미이다

또 lt운몽진율gt 司空에 冗邊 이 있다

백성에게 모친 및 동생이 있어 隸妾이 되었는데 謫罪가 아니고 冗邊5

歲에 복역하되 근무 기간을 無償으로 하고 1인을 면하여 庶人으로 하고

자 한다면 이를 허용해준다(百姓有母及同牲(生)爲隸妾 非適(謫)罪殹(也)

而欲爲冗邊五歲 無賞(償)興日 以免一人爲庶人 許之) (司空 p91)

이 冗邊五歲 도 규정된 정규 戍邊役의 額 외로 추가된 役이란 뜻의

용어이다 그래서 이 또한 위의 사례들과 마찬가지의 뜻이다 이렇게

冗 에는 更 에 相對한 지칭으로 更 에 복무하는 자들에 비해 전문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갖춘 자들이거나 기타 사유로 정규의 額을 넘

어서는 복무를 하는 것 또는 그 役者 또는 職名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즉 정규 일반의 更 방식의 근무 額(日數)에 비해 담당

분야의 뛰어난 능력이나 징벌 등 기타 사유로 더 많은 근무를 추가로

하게 되는 자들의 職을 冗 이라 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러한 冗 을 쓰는 데는 국가의 재정 지출도 추가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국가재정의 추가 지출의 뜻으로서 散(散布)

이라는 뜻이 되어 후대 冗官==散官의 칭이 생긴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해석된다면 그간 충분히 해석되지 못한 lt운몽진률gt廏苑

律에 연간의 養牛 실적 평가에서 下等을 받은 宂皂에게 2개월의 복무

기간을 추가하는 벌을 내린다는 律文에 보이는 宂皂51) 그리고 同 秦

律雜抄 屯表律에 나오는 lsquo冗募rsquo도52) 위와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50) 又以周官稅民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民浮游無事 出夫布一匹 其不能出布者 冗作縣官 衣食

51) lt雲夢秦律gt p30 廏苑律의 율문 卒歲 以正月大課之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殿者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罰

冗皂者二月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52) lt雲夢秦律gt p145 秦律雜抄의 율문 冗募歸 辭曰日已備 致未來 不如辭

貲日四月居邊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4것이다 廣懶薰雄은 更 을 非常勤 冗 을 常勤의 뜻으로 요약하였는

데53) 그러한 일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는 更 이 본래 규정된

交代근무라면 冗 은 본래의 규정액을 넘어선 근무를 뜻하는 까닭에

그러한 해석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설문宀部에 冗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人在屋下 無田事也 라 하였는데 無田事 로서의 冗의 뜻도 更

이 당번으로 給事하는 기간을 제외하면 田事에 있어야 하는 것과는 달

리 冗은 비당번인 경우에도 관부에서 給事하는데서 칭해진 것이라 하

겠다

예기중용에 忠信인 자에게 봉록을 두텁게 주는 것은 士를 勸함이

고 때로(일시적으로) 使役시키되 賦斂을 가볍게 하는 것은 백성을 勸

하기 때문이며 日用으로 근무시키되 그 근무기간과 성과를 계산하여

급료(廩)를 지급하여 그 근무에 합당하게 보상해주는 것은 百工을 권

하기 위함이다(忠信重祿 所以勸士也 時使薄斂 所以勸百姓也 日省月

試 旣廩稱事 所以勸百工也) 라 하였다 여기서 忠信 이란 禮記禮器에 忠信 禮之本也 라 하였고 여기서는 이를 修學하고 실행할 수

있는 사대부 내지 命官層을 가리키고 있다 百工에 대해 日省月試

한다 함은 근무한 日數와 그 성과를 월 단위로 계산한다는 것이다 注

에서 旣廩稱事 의 旣 를 lsquo餼rsquo로 해석하고 lsquo餼廩rsquo은 稍食 이라 하였

다54) 여기에서 일반 백성에게 때로(일시적으로) 사역시킨다는 時使

가 곧 更 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진한 시기 更徭制의 운영에

서 충분히 입증된다 宮宅 潔은 年俸이 있는 것이 有秩인데 그 最下가

百石이며 연봉이 없고 본래 日食과 月食으로 지급되는 등급을 斗食이

라고 한다 하였다55) 그가 말한 斗食은 백관표에 나열된 斗食과 그 이

하의 여리 吏職을 포함한 것이다 그런데 일반 백성에게 更役이 부과

되고 그들에게 동원된 기간 동안 당연히 매일의 給食은 지원되겠지만

그 일반 요역으로서의 更役에 대한 日當의 보수가 지급된 것은 아닐

53) 廣懶薰雄 앞의 글 p304

54) 注에 日省月試 考校其成功也 lsquo旣rsquo讀爲餼 餼廩 稍食也

55) 宮宅 潔 앞의 글 p39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5것이다 그 일반 요역은 일반 백성의 기본 의무사항인 까닭이다 반면

百工의 근무일수와 성과액에 대해 稍食 (日俸 내지 月俸)이 지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매 끼니의 급식이 아니라 工役에 대한 보수 내

지 給料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근무일수라든가 성과액을 계산

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기서의 百工은 관부의

員吏에 속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관부에 속하여 매

끼니의 식사 뿐 아니라 工役한 일수와 성과량에 따라 봉록이 지급된다

는 것이다 그래서 봉록 지급은 錢이나 곡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반

면 전기한 국어晋語4 文公修內政納襄王 章에 公食貢 大夫食邑 士

食田 庶人食力 工商食官 皁隸食職 官宰食加 에서 工商食官 의 工

商은 모두 관부의 員吏에 속한 자들인데 그 注에 옛날에는 田을 주는

것으로 祿俸을 제정하였다 관부에서 주는 廩이란 곧 관부에서 田을

받는 것이니 후세에 錢粟을 주는 것으로 祿俸을 제정한 것과 같지 않

다(古者以田制祿 官廩之者 卽受田於官 非如後世之以錢粟制祿也) 고56)

하였다 또 한서권24식화지상에 士工商이 田을 받는 것은 5口가 받

는 것이 되어야 농부1인이 받는 것에 當한다(士工商家受田 五口乃當

農夫一人) 고 하였다 즉 百工과 商賈는 그 직무에 따라 俸祿을 받는

데 후대와 같이 錢粟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田으로 받으며 그 액수는

일반 농민의 15이라는 것이다 이는 전술한 주례의 胥徒가 최하품

의 田 1百畝를 俸祿으로 받는 것과 lsquo以田制祿rsquo이라는 면에서 일치한다

그리고 lsquo以田制祿rsquo이 후대에 lsquo以錢粟制祿rsquo으로 변천 된 것은 秦漢의 사

례를 통해 분명하다 어쨌든 관부의 員吏인 百工과 商賈에게 일반 백

성의 更役과는 달리 祿田 또는 월봉 형태의 錢粟 지급이 행해진 것이

라 하겠다 또한 工商이 일반 요역 대신에 전문기능인으로서의 工役과

관부 소요 물품의 調達役의 職分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이 또한 職

役에 해당하는 셈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관부의 員吏이면서 斗食 보다 下位에 위치하여 稍

56) 國語正義(下冊) (董增齡 撰 巴蜀書社 1985) pp815-6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6食 내지 月俸을 받는 여러 導從役 祝醫工商 등의 役은 그 職分

의 役 즉 職役으로 奉公한다 그런데 후한 초에 이 職役의 면역전으로

서 走卒錢을 징수하고 그 재원으로 빈민을 고용한 것이 不法이었으며

수십 년 이어지다가 금지되고 違法한 관료들이 처벌받고 있는 것에

의하면 이 役들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戶가 지정되어 있어 여타의 일반

戶가 대신하여 맡을 수 없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은 導

從役 등의 담당자는 일반서민이되 그 중에서 특별히 선발된 층으로 구

성되어 전문의 분야를 세습하며 의무로 담당하는 하나의 신분층으로

형성되어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그 役은 하나의 身分役이기

도 하였던 셈이다 또한 그 代役錢으로서 走卒錢 징수 및 雇傭 방식이

나오게 된 것은 그 역의 담당층 가운데 錢으로 實役을 피할 수 있는

부유충이 형성되었고 후한 前期에 전통의 身分制가 느슨해진 여건에

서 身分役의 근본 형태가 유지되지 못하고 일탈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속한서백관3에 執金吾의 속관 중에 화려 장려한 복장

과 장식으로 황제의 행차를 호위 수종하는 騎士로서 緹騎二百人이 있

는데57) 本注에 無秩 比吏食奉 이라 하였다 즉 吏가 아니지만 吏의

대우를 받아 봉록을 받는 계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下吏에

들지 못하지만 봉록을 받는 면에서는 동일한 계층이다

한편 앞에 든 國語 晋語4에서 工商食官 에 이어 下記된 皁隸(吏

에 下屬한 徒隸)食職 이 있다 이 皁隸 계층은 지금까지 검토한 庶民

在官者 로서의 胥徒導從役 담당자 및 樂祝醫衛士工商 등

보다 下位 내지 그 下屬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그 담당 신분과 그 役의 성격에 대해 검토한다

Ⅳ 下層 員吏의 役과 徒隸層의 役

57) 당 조목의 注 所引 漢官曰 執金吾緹騎二百人 [持戟]五百二十人 輿服導從

光滿道路 群僚之中 斯最壯矣 世祖歎曰 ldquo仕宦當作執金吾rdquo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7

앞에서 검토한 관부 구성의 최말단에 위치한 주례에서의 胥徒와

춘추진한 시기의 導從役 담당자 및 樂祝醫衛士工商 등의 下

吏層 외에 그 下屬으로 보이는 皁隸가 있다 앞에 든 각 신분에 따른

奉公의 職分을 나열하고 있는 國語晋語4의 記事 皁隸食職 의 注에

皁隸를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라 한 것에 의하면 이 계층은 위에 열거한

여러 下吏에 下屬한 노역자들이라 할 수 있다 胥徒와 導從役 담당자

등은 각각 주례와 漢官 등에 그 員數가 규정된 까닭에 이들은 員

數 규정에 들지 못한 皁隸에 대비해 下層의 員吏로 칭할 수 있다

皁隸가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라 하였으니 곧 관노비 내지 그에 類하는

계층일 것인데 그들이 lsquo職을 食한다rsquo고 한 것은 각 분야의 官署에 分屬

되어 그 職務에 給事함으로써 생업을 삼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皂

隸 牧 圄 僕 등이 후대의 천민이나 隸民이 아니라 일반민이었다

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58)그러한 주장은 이들이 대체로 관부에 給

事하는 계층으로 여러 기사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고 위의 皁隸食

職 은 곧 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관부에 給事

하는 면으로 인해 예속성이 있게 된다는 면이 있다 후술하는 바와 같

이 그들이 일반 서민 출신이면서도 후대에 그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모

두 예속신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통용되는 것은 그러한 관부에의 예속

성이 분명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예속성을 말해주는 것이 또한 職

役의 한 속성이다

한편 國語 晋語4 文公修內政納襄王章에 (晋文公)元年 春에 公(晋

文公)과 부인 嬴氏(秦穆公의 女인 文嬴)가 王城(秦의 地名)에서 돌아올

때 秦伯이 衛士3천인을 納하였는데 실로 기강이 있는 僕들이었다(元年

春 公及夫人嬴氏至自王城 秦伯納衛三千人 實紀綱之僕) 고59) 하였다

秦漢의 衛士 출신과 달리 여기서는 그 출신 신분이 僕인 자들로 구성

58) 黃中業 春秋時期的ldquo皂隸牧圉rdquo屬于平民階層說 (齊魯學刊 阜師院學報) 1984-2 19844) pp69-72

59) 위의 책 pp809-810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8되어 있다 이 당시는 秦 穆公의 지원으로 晋의 文公이 귀국하여 懷公

을 죽이고 즉위한 때인 까닭에 군사 내지 호위부대의 지원이었다 그

衛士 군단의 신분은 皁隸層에 들어가는 僕인데 관부에 給事하는 職分

은 衛士이다 이들의 紀綱이 선 자들이었다고 한 것은 본래 秦에서도

衛士의 職으로 給事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춘추기에 邑數百이나 社

數百의 단위로 국가 사이에 分與되는 일이 자주 있었고 3천인에 이르

는 多數의 전문 집단이 타국에 分與된 것이긴 하지만 일부 전문의 인

력을 分與나 上納 하는 것 또한 당시 종종 일어났던 일이다 어쨌든

그 衛士집단이 모두 僕이었다는 것은 일반민이 아니고 관부에 예속되

는 신분이었음을 말해준다 예속신분으로 궁성을 지키는 衛士로 삼는

것은 주례地官 師氏에서 그 직무 가운데 (師氏는) 그 소속의 四夷

之隸를 거느리고 각기 그 병력으로 왕성의 문밖을 지키는데 복무하며

또한 (행차 때) 앞에서 길 정리를 한다(師其屬帥四夷之隸 各以其兵服

守王之門外 且蹕) 에 이미 보이고 漢武帝 때 제후왕 貴戚의 不服을

다스리기 위해 중앙 내사지역을 감찰하는 司隸校尉와 지방의 刺史에게

중도관의 徒奴 1200인을 보내어 二千石官을 독찰하게 하였는데60) 이

1200인의 徒奴부대는 이후 사예교위 내지 刺史 직속의 상비군단이 되

었고 그 성원은 세습 병사집단의 근간이 되어 牧使 刺史 등 將領下의

公兵이나 私兵으로 활약하였다61) 漢官舊儀 卷上에 漢代 長安에 騎

亭長 79인과 함께 6월 1更의 倉頭盧兒를 給事하게 하였다62)이들 四夷

之隸나 徒奴倉頭盧兒 등은 적군포로이거나 刑徒 계통 출신으로 관부

에 예속된 신분일 것이다 특히 관부에 囚禁된 형도들은 여러 방면의

60) 北堂書鈔設官部 및 漢官儀권2補遺2에 ldquo司隸校尉는 武帝 때 처음 설치되

었다 이후 諸侯王 貴戚이 不服함에 中都 中官의 徒奴千二百人을 (파견해서)

一校尉部刺史에게 속하게 하여 二千石官을 독찰하게 하였다(司隸校尉 武帝初

置 後諸侯王貴戚不服 乃以中都中官徒奴千二百人屬爲一校尉部刺史 督二千石

也)rdquo

61) 이에 대해서는 박건주 한대의 지방상비군과 部曲의 推移 (동양사학연구118 20123) 참조

62) 長安給騎亭長七十人 六月一更倉頭盧兒 (漢官六種 北京 中華書局 1990

9) p3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9노역에 활용되었는데 근래 石岡 浩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刑徒 집단

은 크게 세 부류 내지 등급으로 나누어져 활용되고 대우에 차별이 있

었다고 한다 즉 가장 上位에 있는 司寇는 특정 임무에 복무하는 것이

정해진 형도이며 전택을 소유하여 戶主가 되는 권리(lt二年律令gt

310-316簡) 왕조로부터 사여 받는 권리(同 291-293) 子가 士伍로 복

귀할 수 있는 권리(同 364-365)를 갖는다 다음으로 徒隸 는 특정 관

서에 예속하여 직무를 숙지하였거나 기술에 숙련하여 전문기능자에 동

등한 가치를 지니는 형도 를 지칭하며 그것으로 동일 직장에 계속 근

무하는 까닭에 일반 형도와는 달리 토목공사나 물자운송 등의 노역에

서 제외된다 또한 왕조에 공헌하는 자로서 사여를 받는 대상도 된다

(同 291-293) 즉 그들은 隸臣鬼薪城旦이면서 숙련자 기능자로서

일반 형도보다 우대받는 자들이다 위 양자에 비해 일반 형도는 위의

여러 특혜를 받지 못하며 城旦은 주로 토목사업에 隸臣은 주로 여러

관서의 잡다한 노역에 복역한다63)이는 충분히 수긍되는 견해이다 이

가운데 徒隸는 관부 내 각 分署의 전문 직장에 分屬되어 사역될 것이

기 때문에 전술한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로서의 皁隸가 곧 그들의 주요 부

분이 될 것이다 그 중에 일반 관노비로부터 개인적 재능과 기술로 선

발되어 해당 관서에 給事하는 자들도 포함될 것이다 단지 정규의 전

쟁에 형도를 동원하는 사례가 많은데 그들이 정규의 병사가 된 것은

아니고 군공을 세워 免刑되기 이전에는 그대로 형도인 것과 같이 함께

관부에 給事하고 있다 하더라도 각 신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상의 검토에 의하면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에는 이른바 lsquo吏에 下屬

한 徒隸rsquo로서 食職하는 皁隸집단이 있고 그 구성에는 관노비 뿐 아니

라 적군포로나 관노비 및 형도 출신의 衛士 그리고 刺史 牧使 등의

將領下에 있는 직속 상비군 형도 가운데 司寇 그리고 기능과 숙련으

로 형도 중에서 선발된 職能의 徒隸집단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員

吏이되 下吏인 계층의 복무가 그 신분에 따른 職役인 것과 마찬가지로

63) 石岡 浩 秦漢代の徒隸と司寇 -官署に隸屬する有職刑徒 (史學雜誌 121-120121) p32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0이 皁隸層의 복역도 모두 관부에 생업을 의존하는(食職) 職役이라 할

수 있다

또 좌전에 주로 보이는 輿人이 있는데 同 昭公7년조에 天에 十日

이 있고 人에 十等이 있으니 下가 上에 事하는 所以이다 까닭에 王의

臣은 公 公의 臣은 大夫 대부의 臣은 士 士의 臣은 皁 皁의 臣은

輿 輿의 臣은 隸 隸의 臣은 僚 僚의 臣은 僕 僕의 臣은 臺이다 馬

에 圉가 있고 牛에 牧이 있어 百事를 待한다 라 하였다 古來의 여러

注疏에서부터 이미 lsquo輿人rsquo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지만 이를 분석한 宇

都木 章의 견해에 의하면 縣鄙의 野人이 평시이든 戰時이든 國都의

귀족에 징발되어 葬儀戰士補助 車馬와 관련되는 여러 役務에 종사

하는 때 그들을 lsquo輿人rsquo이라 칭하였다고 한다64) 여러 자료에 의하면 皁

에서 牧에 이르는 서열 순위가 어디에서나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

고 대개 동일 계층의 異稱인 경우가 많다 皁 이하의 서열에 이렇게

다단계의 臣屬 관계가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같은 徒에도 上位 순서로 胥와 徒 및 그 徒의 지휘를 받는 징발된 徒

가 있으며 員吏에 들어가는 導從役 등의 庶民在官者 가 있고 그에

下屬하는 皁隸의 구분이 있는 것에 의하면 최소한 士 아래의 서민 계

층에 3 - 4 단계의 차등 신분이 있을 수 있다 위의 十等 순위에서 士

이하에 위치하여야 할 庶民이 곧 皁輿 등에 해당할 것인데 모두 관

부에 給事하는 면에서 후대 예속신분을 가리키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

다 그리고 일반 서민 가운데서도 皁輿 이하는 모두 전문의 職分으

로 관부에 給事하는 의무가 주어진 계층이므로 일반 농민으로서의 서

민과는 구분되는 서민이었다고 생각한다 즉 일반 농민이 농업을 생업

으로 하며 일반의 요역 의무가 주어진 반면에 皁輿 등은 주로 전문

의 기능을 요하는 관부의 직무에 給事하는 것으로 일반요역을 대신하

며 때문에 일반 서민이면서 관부에 예속된 신분의 일면을 지닌다 그

렇지만 관노비나 형도로서 관부에 예속되어 給事하는 신분과는 명확히

64) 宇都木 章 輿人考 (三上博士頌壽記念 東洋史考古學論集 朋友書店 1979

12) pp108-11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1다르며 주례의 胥徒와 같은 下吏의 員吏 보다 보통 下位이지만 胥

徒와 마찬가지로 주로 전문 기능의 職分에 복역한다는 면에서 같고 그

일부분은 下吏에 충당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곧 胥徒가 일반 서민의

徒로부터 선발된 자들인 것과 같다 위의 十等 서열은 농민을 제외하

고 관부에 給事하는 신분만을 총괄하여 나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

술한 工商食官 皁隸食職 도 모두 관부에 給事하는 工商과 皁隸를 열

거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복무도 당연히 職役이 되는데 그 職能 내

지 職分의 종류별로 숙련도 및 경력 등에 따른 그룹 내에서의 서열이

있게 되고 이를 계층으로 인식해서 lsquo皁臣(臣屬)輿rsquo 등과 같은 記述이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 각 직능별 部署별 전문화된 職役의 활용은 관

부의 운영상 당시의 사정으로는 불가피한 면이 있다 그러한 체제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점차 계층 구분의 엄밀성이 느슨해지고 세분된

차등의 질서가 점차 단순화되면서 그 용어도 혼용되기에 이른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위의 계층 구분은 세분된 서열만이 아니라 각 계층

의 담당 職分을 구분해주는 칭호로 쓰인 면도 있다 그렇다면 輿人은

戰時에 주로 戰車부대를 보조하는 직무 분야를 담당하는 계층이라 할

수 있고 그러한 면에서 여러 下屬 계층 가운데 가장 상위의 계층이었

지 않을까 한다

한편 이상의 皁隸層이 본래 일반서민 출신이었다는 입장에서 보면

관부에 給事하되 향리에 거처하면서 일정 기간 만 순번으로 복역하는

交代制가 있었을 수가 있고 또는 대체로 일부 기능자나 世戶에 한정

되었겠지만 휴가 기간 외에는 상근하는 형태도 있었을 것이다 예속된

신분인 경우 그 거처도 대체로 관부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앞에 든 秦

漢律에 교대 근무하는 更隸妾의 존재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근무

기간에만 관부에서 거처하는 예속 신분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刑徒

중에서도 司寇는 田宅을 소유하고 戶主가 될 수 있었으며 徒隸도 賜

與를 받을 수 있는 까닭에 이들 중에 일부는 관부 밖에 따로 거처를

지니고 출퇴근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단지 衛士나 部曲 집단은

대체로 屯營 내에 거주하였을 것이다 위로는 승상으로부터 아래로는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2하급의 吏에 이르기까지 吏舍에 거처하며 휴가 기간이 되어야 비로소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는 大庭脩의 연구가 있지만65) 漢舊儀 卷下

에 舊制에 尉는 모두 관서에서 거처하였다( 舊制尉皆居官暑 ) 라66)한

것에 의하면 舊制 가 어느 시기를 말하는 것인지 불분명하지만 宿衛

와 경찰 임무의 尉職 외에는 관서에서 거처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음을

말해준다 매년 직급에 따른 수개월의 휴가 기간이 설정되어 있지만

이는 성내에 거주하며 매일 출퇴근 하더라도 고향은 먼 곳에 있는 경

우가 많아 歸鄕 휴가를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外地 출신으로 城內

에 거처가 없는 관리들을 위한 吏舍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吏舍의 존재가 모든 관리의 관부 거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居官府의 여러 給事職 관노비 司寇나 일부 徒隸를 제외한 일

반 형도 여러 當番의 宿衛職 등을 제외한 관리는 官舍 밖의 私家에서

거처한 것으로 본다

庶民在官者 로서의 職役 복무는 常勤과 교대근무의 두 시스템으로

운영되었을 것이다 胥徒는 본래 모두 징발된 徒 가운데서 재능 있는

자로 선발되어 관부에의 給事가 생업이 된 자들로서 祿田을 받는 자들

이며 員數가 책정되어 있는 까닭에 常勤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

나 함께 징발된 여타의 徒는 胥徒와 같은 給徭役의 奉公을 행하지만

순번으로 동원된 기간 만 한시적으로 복무하는 까닭에 동원 기간 동안

의 食料 이외에 노동의 보수를 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그들은 만

민의 기본 의무를 職役으로 이행하는 것일 뿐이다 정부로서는 관부에

給事할 人才와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지만 필요한 부

분을 모두 常勤하는 자로 임용하여 그들의 생업을 봉록 지급 등으로

전면 지원하는 것은 재정에 큰 부담이 되는 것이었다 즉 관부에서 필

요로 하는 특정 업무 기능자들을 일반 요역 면제 대신으로 복역케 하

고 이를 순번제로 운영하면 복무 당번 기간 외에 그들은 다른 생업을

65) 大庭脩 漢代官吏の勤務休暇 (秦漢法制史の硏究 創文社 1982) p584

66) 앞의 漢官六種 p81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3꾸려나갈 수 있기 때문에 국가는 그들에 대한 생업 유지 지원 부담이

훨씬 적어진다 관부 給事層 가운데 命官과 員吏 이상이 常勤制라면

그 이하의 여러 職役層들은 대체로 교대근무제 중심으로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테면 lt奏讞書gt 案例17에서 秦王政元年 雍縣人 樂人 講이 자신

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사건 당일 자신은 踐更에 복무하러 11월 한

달간 함양의 外樂(관서 기구 名)에67) 소집되어 복무 중이었음을 진술

하고 있다 따라서 함양에 거주하지 않은 樂人이 그 관서에서 常勤하

지 아니하고 특정시기 일정 기간 만 교대로 근무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獄事에서 피고인 樂人 講이 踐更으로 1개월 간 복무한

곳이 外樂인 까닭에 일반 요역이 아니라 樂人의 職役을 이행한 것이라

고 본다 전한 哀帝 때 樂人의 員數를 罷하라는 명령에 대해 승상 孔

光과 대사공 何武가 진언하길 각 담당별 樂人의 현재 員數와 罷할 수

없는 수를 열거한 후 총 829인의 員數 가운데 388인은 罷할 수 없다고

하자 이를 재가한 바가 있다68) 이는 전한말의 사정이지만 전국진에서

도 郊祭 등의 각종 국가제사와 宮中 樂이 행해졌기 때문에 위의 수치

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속한서 백관2 大樂令 注引의

漢官과 盧植禮注에 의하면 八佾舞를 추는 樂人의 員數가 380인인

데 여기에 卑者之子는 임용될 수 없고 6백석에서 2천석 및 관내후에

서 五大夫의 嫡子 출신 5척 이상의 신장 12세에서 30세 顔色온화 등

의 조건을 갖춘 자에 한정되었다69) 이에 의하면 樂人 講은 走馬의 傭

이 되어 京師에 왕래하고 있는 빈한한 자로서 도저히 중앙 大樂令 속

67) 관서 기구 이름으로서의 外樂은 lt이년율령gt秩律 449簡 및 西安相家巷出土

秦封泥에 보인다(周曉陸路東之 編著 秦封泥集 三秦出版社 2000 一

二44)68) 漢書 권22 예락지2

69) 漢官曰 ldquo員吏二十五人 其二人百石 二人斗食 七人佐 十人學事 四人守學事

樂人八佾舞三百八十人rdquo 盧植禮注曰 ldquo大(子)[予]令如古大胥 漢大樂律 卑者

之子不得舞宗廟之酎 除吏二千石到六百石 及關內侯到五大夫子 取適子高五尺已

上 年十二到三十 顏色和 身體修治者 以為舞人rdquo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4하의 樂人 員數에 들어갈 수 있는 처지가 못 되는 자이다 그는 향리

에 거주하면서 매년 1개월씩 京師의 外樂에 가서 복무하는 기간 외에

는 傭賃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下吏의 員吏가 아

니면서 樂工의 職能으로 일반 요역 대신에 京師의 제사나 예락 행사에

나아가 給事하는 자이다 그래서 그의 복역도 職役인 셈인데 이러한

모습은 주례의 胥徒와 흡사하다 단지 胥徒가 員吏로서 봉록은 받는

것과는 다르다 양자가 모두 職役이지만 胥徒는 庶民在官者 이고 樂

人 講은 lsquo非吏인 職能人rsquo이다 그렇지만 양자 모두 개인적인 職能으로

관부에 給事하는 면에서는 상통한다 따라서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

부에 給事하는데는 員吏로서 복무하는 경우와 非吏로서 복무하는 경우

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Ⅴ lt走馬樓吳簡gt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복무

형태 및 그 성격

1996년에 호남성 長沙市 도심 우물에서 발굴된 lt吳簡gt은 총 17萬

餘 枚로 아직 그 일부만이 정리 해독되어 출간된 상태이지만 이미 출

간된 분량 가운데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의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자

료들을 많이 지니고 있다 孫吳 嘉禾 연간(232-238)의 여러 戶籍簿

내지 吏民簿 등에 吏와 給吏로 구분된 人名簿가 다수 존재한다 이 자

료들은 그간 명확하지 못하였던 吏役과 吏戶의 존재형태와 관부에 給

事하는 계층 및 그 職役의 실태를 파악하는데 획기적인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근간의 연구에서 여러 異見으로 그 문서가 지니

는 뜻을 파악하는데 상당히 혼란을 초래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전술한

職役의 전통과 여러 계층의 형태를 살펴본 성과를 참고로 하여 나름대

로 새로운 해석을 추구해보고자 한다

lt吳簡gt의 lt吏民人名年紀口食簿gt(竹簡(肆))에서는 각 里別로 里魁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5가 領하는 食口數를 吏와 民으로 구분하여 통계하고 있는데 그 일례를

다음에 든다

(A)

(이하 簡文 인용에서 內에 있는 字를 괄호 하여 표기함〕

集凡五唐里魁周領吏民五十戶 口食二百八十九人 (簡380)

其一百六十二人男 (379)

其一百卄七人女 (378)

其四戶縣吏 (377)

其二戶郡吏 (376)

其戶州吏 (374)

其五戶給新吏 (373)

其一戶縣卒 (372)

其一戶佃帥 (371)

이는 孫吳 嘉禾 연간 里別吏民口食簿인데 五唐里 50戶 가운데 일반 民

戶를 제외하고 州吏에서 佃帥까지의 戶를 따로 특기하고 있는 것에 의

하면 크게 民戶層과 州吏 이하의 吏층으로 양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

다 먼저 縣吏 이하를 이른바 세습 吏職戶인 吏戶로 볼 수 있는가 하

는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여러 異見이 제기되어 있는데 이 문

제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그런데 lt吳簡gt의 여타 戶籍簿나 戶口簡에

의하면 民戶를 제외한 縣吏 이하의 戶도 다시 縣吏 郡吏 州吏 軍吏 등

의 類와 맨 앞에 lsquo給rsquo字가 붙어 있는 계층의 類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즉 縣吏類의 吏 외에 其十二戶給縣吏下品 (壹5467)

其三戶給郡縣卒 (貳2318) 등과 같은 예들인데 그 職事나 給事

하는 관서의 명칭에 따라 多種의 명칭이 보인다 이를테면 給郡吏 給

縣吏 給州吏 給軍吏 給郡園父 給朝丞 給子弟 給驛兵 給鍛佐 給庫

吏 給縣卒 給度卒 給驛卒 給子弟佃客 給限田客 給佃帥 給常佃 給

家種客 給乞兒 給三州倉父 給養官牛 給習射 給私學 給官瓦師 給

亭復人 給亭雜人 給任師 給郡醫 給縣帥 給州私學 給新吏 給佃吏

給郵卒 給鹽兵 給關父 등이다 이렇게 앞에 lsquo給rsquo字가 들어간 계층을

일단 동일 계층으로 보아 lsquo給吏rsquo로 칭하고 縣吏 群吏 州吏 軍吏 등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6lsquo給rsquo이 붙어 있지 않은 계층을 lsquo吏rsquo로 칭하여 양자를 구분하고자 한다

lt오간gt에서 人名에 붙는 신분명은 크게 眞吏 某吏 給某吏 大男(大

女 民)의 4종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들은 그 표기상의 차이만으로도

일단 구분되는 존재라고 보이는데 현재 앞의 3종 신분명의 구분 문제

와 관련하여 몇 가지 다른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먼저 黎虎는 縣吏나

郡吏州吏 등의 吏가 侯家나 司隸校尉 또는 郡內에 소재한 전문 기

관 州郡 관내의 遠縣에 일정 기간 파견되어 給事하고 있는 자들을 칭

하여 給郡吏 등으로 칭하는 것일 뿐 그 신분은 本州 本郡 本縣의 吏

와 동일하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本郡의 郡吏가 곧 給郡吏이기

때문에 다른 계층이나 신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眞吏는 無職事

의 冗散官에 상대하여 쓰이는 용어로 실제 除授된 관원이라고 한다70)

黎虎와는 달리 양자를 다른 계층으로 보는 견해들도 제기되었다 먼저

韓樹峰은 給吏는 비록 吏의 名은 있지만 일반 백성으로서 잠시 吏의

職事에 종사하는 것일 뿐이고 혹 吏로 임명될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그 신분은 여전히 보통 백성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給吏와 구분하여

口算錢의 면제 특혜를 받는 州吏 郡吏 縣吏 등을 총칭하여 眞吏라 한

다고 하였다 즉 眞吏가 정식의 吏인데 비해 給吏는 일반민이며 일정

기간 만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給吏의

관부給事는 실제상 요역의 일종이라 한다 71) 한편 楊振紅은 동일인의

신분이 문서에 따라 다른 신분으로 등록되어 있는 점에 의거하여 이를

테면 給郡吏가 郡吏나 眞吏로 簡稱된 것이라 하고 眞吏나 給吏 모두

吏로 簡稱되며 州郡縣의 掾史職에 있는 자들로서 署長 佐官 등의 lsquo官rsquo

에 상대되는 자들을 지칭한다고 하였다 아울러 吏는 그 작위가 公乘

이면서 賦役 대상이고 漢魏시기에 吏職의 세습화가 이루어지면서 전문

70) 黎虎 說ldquo給吏rdquo -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社會科學戰線 2008-11) pp89

-94 說ldquo眞吏rdquo-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史學月刊 2009-5) p5071) 韓樹峰 走馬樓吳簡中的ldquo眞吏rdquo與ldquo給吏rdquo (吳簡硏究 2 武漢 崇文書局

2006) 韓樹峰王貴永 孫吳時期的ldquo給吏rdquo與ldquo給戶rdquo -以走馬樓吳簡爲中心 (吳簡硏究 3 2011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7적 吏戶인 眞吏가 출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吏가 본래 일반 서민

이었던 까닭에 公乘 이하의 서민과 합칭하여 吏民이라 한 것이며 삼

국시기 官과 吏가 구별된 연원은 漢代의 長吏와 小吏 내지 士와 庶民

의 구분에 있다고 한다72)다소 혼란스러운 견해들이고 용어상의 해석

문제가 겹쳐 있어 난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들 異見의 관건은 吏와 給

吏의 구분 문제 그리고 吏戶에서의 吏가 어떠한 吏를 가리키는가 하

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여러 견해에서 공통으로 들고 있는 lt吳簡gt의 다음 문서를 먼저 살

펴본다

(B)

廣成鄕勸農掾區光言 被書條列州吏父兄子弟伏處 人名 年紀爲簿

輒隱核鄕界 州吏七人 父兄子弟合卄三人 其四人刑 踵 聾 歐病 一人

被病物故 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 十二人細小 一人限田 一人

先出給縣吏 隱核人名 年紀相應 無有遺脫 若後爲他官所覺 光自坐 嘉禾

四年八月卄六日破莂保據(此簡無編戶)73)

이 자료는 광성향 勸農掾 區光이 작성하여 보고한 문서인데 廣成鄕 領

內 州吏7인의 父兄子弟 23인의 현황을 파악하여 嘉禾4년(235년)에 보

고한 내용이다 lt吳簡gt戶籍簿에서 州吏 등의 吏가 있는 戶는 그 州吏

가 戶人(戶主)으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 州吏7인이란 모두 그 戶의

戶人이다 이 현황 내역에 의하면 州吏7인의 父兄子弟 총합은 23인이

고 이 가운데 4인은 受刑 질병 중이며 1인은 物故 4인은 이미 관부

에 보내져 그 本主에 從事하며 관부에서 복무 중이다 12인은 細小 즉

소인이고 1인은 限田을 경작 중이다 이 限田이 lt吳簡gt의 lt吏民田家

莂gt 등에 보이는 lsquo二年常限rsquo의 田으로 보아 侯家의 田이나74) 屯田을75)

72) 楊振紅 吳簡中的吏 吏民與漢魏時期官 吏的分野 -中國古代官僚政治社會構

造硏究之二 (史學月刊2012-1)73) 侯旭東 三國吳簡兩文書初探 (歷史硏究 2001-4) p172에서 轉引

74) 入都鄕嘉禾二年步侯還民限米一斛 (5-1556) 其卄六斛民還黃龍年臨湘侯

限米 (602017)

75) 黃龍元年文入郡屯田民吳平斛米一百六斛二斗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6227) 其三斛五斗郡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8吏民에게 分給하여 佃作케 한 田으로 보는 것이 일반이다 그 경작자

는 그 田地(佃地)를 국가로부터 할당 받아 의무로 경작하기에 佃民과

같다 그 佃民에는 諸吏와 일반 民戶가 다 포함되고 있다76) lt吏民田

家莂gt에서 그 限田이 lsquo二年常限rsquo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그 의미에 대해

佃作기간 내지 佃種權이 2년으로 한정되어 있어 계약 기간이 지나면

배속되는 田地가 바꾸어지는 방식이었다는 견해가 있고77) 반면에 佃

地의 경작 기간이 아니라 地租額을 2년간 固定하는 것을 말한다는 견

해가 있다78) 사실이 어느 쪽이든 吏戶의 식구 가운데 일부는 국가의

농지를 佃作하고 地租를 납부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 액수가 漢代

사유지에 대한 조세보다 높다 같은 문서에는 租米 뿐 아니라 동시에

畝當 布2匹와 錢70-80까지 징수되고 있다 따라서 二年常限田의 分給

과 佃作은 受惠라기 보다는 노동력의 징발이고 耕作의 賦課로 보는 것

이 마땅하다 于振波가 常限田의 분급 액수를 정의하길 lsquo强制性的 生産

定額rsquo이라79) 본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 이어 1인은 先出給縣吏 인데

먼저 給縣吏로 보내졌다는 의미이다 先給吏의 사례는 嵩男弟恭年十

九先給州吏 (參1450) 등 몇 개가 더 보인다 이렇게 해서 총 23인의

食口 현황이 명료하게 보고되고 있다 그 내역에 의하면 州吏의 식구

는 受刑중인 자 질병자나 小人을 제외하고는 모두 관부에 給事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1인의 先出給縣吏 와

이미 관부에 보내져 本主 따라 從事하며 관부에 복무 중이라는 4인은

( 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 ) 내용상 모두 이미 관부에 보내져 현재

掾利焉黃龍理年屯田限米 (2157)

76) 于振波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南都學壇 24 2004年 第1期 湖南大

學 20041) p30 이 글은 앞에 든 中國社會科學院硏究生員學報 2004-1과 같

음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形成與演變 -談長沙

走馬樓簡牘札記之六 (鄭州大學學報 2001-1) 77) 張福亞 也談lt嘉禾吏民田家莂gt中ldquo二年常限rdquo田的函義 (首都師範大學學報

(社會科學版) 142期 2001-5) p8

78) 高敏 lt吏民田家莂gt中所見ldquo餘力田rdquo ldquo常限rdquo田等名稱的函義試釋 (鄭州大學

學報(社會科學版) 33-5 20009)79) 于振波 앞의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p12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9給事 중인 것은 마찬가지인데 어떠한 차이가 있어 다른 항목으로 구분

하여 기재한 것일까 이것은 바로 給縣吏와 縣吏의 차이를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후술) 州吏7인의 食口 23인의 현황 名簿를 작성하여 면밀

히 조사 보고하게 함으로써 그 遺脫을 막고 있는 것에 의하면 州吏 軍

吏 群吏 縣吏 등의 食口는 여타 일반 민과는 다른 賦役체제 아래 놓여

있는 계층이다 또 軍吏의 父兄子弟에 대해서도 그 食口簿를 따로 작

성하여 관리하고 있다

集凡中鄕州軍吏四人父(子)兄弟三人 中(參3012)

集凡南鄕領軍吏父兄弟合十九人 中(參 464)

이러한 사례들은 吏가 있는 戶는 그 食口들까지 포함하여 吏가 있는

戶 즉 吏戶로서 별개로 관리되고 그 성원은 모두 吏戶의 役 내지 賦

役체계에 들어가는 것임을 말해준다

위와 같이 州吏 縣吏 등 吏戶의 戶口簿는 그 食口 가운데 州吏 縣吏

등 그 吏인 자가 맨 앞에 戶人으로서 위치하지만 給吏는 戶人이드라도

앞에 위치하지 못한다

小武陵鄕嘉禾四年吏民人名妻子年紀簿(壹101533)

吉陽里戶人公乘張惕年卄八算一給縣吏(壹1018232)

吉陽里戶人公乘廖裕年卄七算一給郡吏(壹1017525)

高遷里戶人公乘黃毛年卅四算一給軍吏(壹10306)80)

또한 同 戶籍簿에 縣吏 州吏 등은 아래와 같이 맨 앞에 위치하여 일반

민이 아님을 명기하고 있지만

縣吏鄧橎年卄七 璠()妻大女金年卄一 算 (貳 1729)

州吏蔡區年卅二 區妻大女年卄七 算 (貳 1822)

軍吏朱謙年卅五 謙妻大女壹年卄六 算一 (貳 1723)

80) 인용된 4簡文은 凌文超가 재정리 조립하여 올린 글(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

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型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의

lt表二gt(pp25-37)에서 인용함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0給吏인 경우는 일반민을 가리키는 lsquo民男子rsquo로 기재되어 있다

民男子蔡若年卅七給驛兵 若妻大女四年卅算一(貳 1781)

民男子蔡喬年六十二給驛兵 喬妻大女典年卅八 (算) (貳1903)

따라서 위와 같은 吏民簿에서 民戶를 제외한 州吏나 郡吏 縣吏 軍

吏가 吏戶라면 給州吏 給郡吏 등 여러 職事의 관서에 給事하는 수십

종의 다양한 給某吏 신분은 전술한 庶民在官者 나 lsquo非吏이면서 관부

에 있는 자rsquo와 매우 유사하거나 일치한다

여기에서 吏戶나 吏役의 존재 여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는데 黎虎

는 삼국시기 吏戶의 존재를 인정치 않으나81) 高敏과 孟彦弘은 그 존

재를 인정하며 특히 高敏은 吏役制도 漢末三國시기에 확실히 형성되

었다고 한다82) 韓樹峰王貴永은 후한말 孫吳시기에 卑賤化가 이루어

지면서 吏戶의 萌芽가 이루어졌으며 lt吳簡gt에서의 給吏는 吏가 아니

고 民에 속한다고 한다83) 이러한 여러 異見의 배경에는 吏로 칭해지

는 계층에 전술한 바와 같이 다시 두 계층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계층

이 있는데 그 면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

각한다 양자의 구분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자료를 든다 속한서 百官3 大司農條의 注引 漢官에 丞一人 三百石 員吏四十人 其十一人

斗食 十七人佐 七人學事 五人守學事 皆河南屬縣給吏者 라 하였다

대사농승 속하의 斗食 이하 員吏 40인을 모두 하남군 속현에서 조달된

吏로 충원한다는 것이다 즉 후한 수도 낙양 인근인 하남군 속현에서

吏員을 차출한다는 것인데 斗食 佐 學事 등의 員吏는 해당 분야의 職

81) 黎虎 ldquo吏戶rdquo獻疑 (歷史硏究 2005-3) pp53-6882)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形成與演變 mdash談長沙走

馬樓簡牘札記之六 (鄭州大學學報 2001-1) p61孟彦弘 吳簡所見ldquo事rdquo臆說 mdash從ldquo事rdquo到ldquo課rdquo (吳簡硏究 2 2006) pp205-208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爲役之制 (魏晋南北朝隋

唐史資料 24 2008) pp8-2183) 韓樹峰 앞의 走馬樓吳簡中的ldquo眞吏rdquo與ldquo給吏rdquo pp33-38 韓樹峰王貴永 앞

에 든 孫吳時期的ldquo給吏rdquo與ldquo給戶rdquo -以走馬樓吳簡爲中心 p99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1事를 처리할 수 있는 職能者여야 하기 때문에 하남군에서 이러한 職事

로 근무하고 있는 員吏를 파견하거나 일반민 가운데서 새로 선발하여

파견 조달하였을 것이다 상하급 관부끼리 상호 관리를 파견하여 일정

기간 복무하게 하는 경우에 조달 지원한다는 의미로 動詞語로서 lsquo給rsquo을

쓸 수 있고 이러한 사례는 문헌에 이미 자주 보인다 위에 든 lsquo屬縣給

吏者rsquo도 그 한 실례이다 이러한 경우는 본래 吏의 신분이 여타의 관부

에 일정기간 출장 근무하는 것일 뿐인 까닭에 그 신분은 그대로 吏일

것은 자명한 일이다 즉 縣吏가 郡府에 출장근무 중일 때 그 신분은

그대로 縣吏이고 해당 名簿에 縣吏A가 여타 名簿에서 給郡吏A로 표

기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동일인이 名簿에 따라 신분명이 달리 기

재되어 있는 사례가 약간이나마 보이고 있는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된다(후술) 그런데 給州吏 給郡吏 給縣吏 등 수십종의 給吏에는 이런

경우가 아니고 lsquo州吏 등 諸吏에 배속되어 給事 중인 非吏로서 관부에

복무 중인 民rsquo이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給某吏로 표기된 자들은 lsquo給rsquo

이 붙지 아니한 州吏 郡吏 縣吏와는 달리 lsquo民男子rsquo로 표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給州吏는 非吏로서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그 관서에서 하나

의 職役의 형태로 복무 중인 民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들은 실은 民으로서 관부 업무상 필요한 노역에 동원되는 셈이지만

일부는 여러 관서의 하급 실무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전문의 職能을

갖춘 자들도 있다 縣吏 州吏의 職事 뿐 아니라 앞에 든 수십 종의 전

문 분야 부서별 給吏의 명칭은 그에 상응하는 사례들이다 정부는 이

들이 본래 일반 서민이지만 관부 운영의 필요상 특별 관리를 하지 않

으면 안 된다 그 결과 후한의 여러 사례에서 보듯이 대개 그 職을 세

습토록 하고 이들을 일반 民과 구분하여 칭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lt吳簡gt에 忠子男仲年十五 任給吏 (參 1805)라 한 것은 給吏가 民

에서 차출되어 임용되는 독립 계층임을 말해준다 또 草言府大男吳杭

不是卒子弟不應給卒事 八月卅日兼兵曹掾潘(因)()白(柒總49968)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卒의 子弟가 아니면 給卒事에 복무하게 할 수

없었다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2그들이 본래 吏의 신분이 아닌 까닭에 바로 吏로 칭하지 못하고 그

吏에 배속되어 給事하는 자 또 그 戶의 뜻으로 給某吏 給戶와 같은

칭호가 나오게 된 것으로 본다 이 칭호는 사실 관리와 民 사이에 있

는 이들 계층의 성격을 상당히 잘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이 給吏 계

층의 부담이 커지고 그 賤役 부담자로서의 성격이 뚜렷해감에 따라 給

吏나 給戶가 吏戶나 吏家로 칭해지고 給吏나 給戶의 役이 吏役으로

칭해진 것인데 그렇게 간략한 형태로 칭하여도 이미 관리의 吏와 충분

히 구분되는 것으로 사회가 인지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의하면 lt吳簡gt에 보이는 眞吏도 사실 眞吏라 할 수 없는 給吏

에 대비하여 쓰이게 된 용어가 아닐까 한수봉왕기영은 眞吏란 給吏

에 대비된 용어라 하고 lt吳簡gt에서 給吏가 口算 납부 의무가 있지만

眞吏는 면제되며 정식의 吏이고 신분성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羅新도

眞吏에게 口算錢이 면제되고 있다고 하였다84) 眞吏에 대한 여타의 견

해도 있지만85) 給吏와 관련하여 참고할 만 한 지적이다 또한 lt吳簡gt

에서 其七戶給郡吏 下品(壹5447) 其十二戶給郡吏 下品 (壹

5677) 其十二戶給縣吏 下品 (壹5467) 其一戶給軍吏 下品 (參

430336) 給度吏 下品之下 (5653) 등에서와 같이 給吏는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여서 평균의 民戶 보다 더 빈천한 계층인 점도 그

들이 관부에 給事하는 吏라기 보다는 非吏인 民으로서 民의 일반 요역

에 대신하여 관서에 給事(給役)하는 자들이되 그 일부는 職能에 따라

세습하여 관련 관서의 吏에 배속되고 給事 복무해야 하는 예속된 신

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lt吳簡gt에는 하나의 戶人을 首로 하고 그에 배속된 듯 한 여

러 신분의 戶數와 신분명을 기록한 簿가 있다 lt走馬樓吳簡竹簡gt에

84) 羅新 ldquo眞吏rdquo新解 (中華文史論叢 2009-1) p129 단지 그는 眞吏란 非華

夏系 출신의 編戶化된 토착 사회를 관리하는 인원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85) 이를테면 黎虎는 眞吏란 非眞吏에 대한 대칭이 아니고 실제로 除授 받은 관

원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說ldquo眞吏rdquo -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史學月刊2009-5) p5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3다음의 예들이 있다

-1 里戶人公乘縫繒年卄五苦腹心病 (5443)

- - - - - - -

其七戶給郡吏下品 (5447)

- - - - - - -

其一戶給州吏下品 (5452)

-2 平樂里戶人公乘鄭張年五十 (5460)

- - - - - - -

其十二戶給縣吏下品 (5467)

-3 東陽里戶人公乘扶侈年十四 (5471)

其二戶給庫吏中品 (5472)

- - - - -

其一戶給縣卒下品 (5474)

-4 宜陽里戶人公乘區歸年卄二眞吏 (8962)

- - - 給州卒 (8965)

- - - -

年六十一給驛兵 (8976)

右尙書吏三(戶) (8517)

孫吳에서 公乘의 작위 소유자는 일반민 중에서도 상당히 많지만 漢

代 民爵의 최고위 爵인 公乘(第8等)의 戶人에게 보통 여러 신분의 수

십호를 배속시키고 있다 그 중에 10戶 내외의 給吏가 배속되어 있다

또한 이들 戶人은 배속된 戶가 납부한 租稅를 거두어들이고 이를 일괄

해서 관부에 납부하고 있다 먼저 각 戶로부터 受領한 내역은 문장 앞

에 lsquo領rsquo으로 표기하고 受領한 액수를 총합하여 관부에 납부한 내역은

앞에 lsquo入rsquo으로 표기하고 있다

里戶人公乘曾(年五十三)妻年卅九 (簡 1631-1652)

- - - - - -

領二年郵卒限米田六頃五十畝收限米二斛合爲吳平斛米一千三百斛

其三百十四斛五斗府州中倉關邸閣李崇吏黃諱潘慮 中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4領二年民田三百七十六頃六十五畝二百卅八步畝收米一斛二斗合四萬

五千一百九十九斛一斗 - - - - - - - - -

常遷里戶人公乘李漠年卅七 妻大女思年卅一

入嘉禾二年郵卒限米七百九十八斛二斗八升

入嘉禾二年佃帥限米九百五十五斛八斗七升

- - - - - - -

이 戶人은 대부분 公乘이고 노비를 소유하고 있으며 配屬된 戶의

徵稅와 총괄 납입의 업무에 복무하고 있는데 이는 후대 富戶에게 差役

복무를 부과한 사정과 비슷한 면이 있다 후대 差役제도와 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1인의 戶人을 賦稅 징수 납입의 책임

자로 하여 향리에서 이 방면의 기층단위로 운영하고 있는 셈인데 戶籍

簿와는 그 내역과 용도가 다른 별개의 독립 帳簿이다 그런데 劉家軍

은 限米 납부자 신분인 私學還民叛士吏卒 등이 모두 流民이

며 그 戶人에게 依附하고 있는 자들이라 하고 국가가 그 依附관계를

승인해주면서 그들이 경작할 토지를 戶人에게 分級해주고 그들이 납

부하는 地租인 限米도 戶人의 이름 아래 등기한 것이라고 보았다86)당

시 嘉禾연간에 전란으로 長沙 임상현 지역에 流民이 많이 流入되었을

가능성은 이미 여러 연구에서 지적된 바 있고 還民 叛士 등 일부는

流民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限米와 屯田限米 납부자 신분에는

이밖에 大男 州倉吏 吏帥客 金民 佃吏 郵卒 衛士 傳卒 子弟 佃卒

復客 新吏 兵客 故師子弟 兵師士 故帥客 後客 船師 司馬 士

등 거의 전 계층을 망라하고 있는데 이들 중에 유민이 있을 수 있으나

모두 流民 출신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새로 屯田이나 侯國의 田을

경작시키기 위해 유민 뿐 아니라 在地의 吏民에게 할당하여 佃作으로

운영하는 것은 여러 문헌자료에도 있고 lt吳簡gt의 lt吏民田家莂gt은

주로 在地의 호적에 올라 있는 吏民의 佃作 내역 장부이다 또 lt吳

簡gt 草言府部諸鄕吏區光等招誘諸限田客八十三人首見事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曹史趙野

86) 劉家軍 論lt走馬樓吳簡竹簡gt中 ldquo限米rdquo的性質 (中國社會經濟史硏究 2005-2) p87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5白 (柒總 49782)에 의하면 당시 長沙 지역에서 鄕吏에 의해 限田客

83인을 招誘했다는 성과를 보고하고 있는데 이와 같이 佃作 인력의 확

보에 애쓰는 상황에서 전술한 바와 같은 본래 限田의 佃作 의무를 지

고 있는 在地 吏戶의 家內 성원이 그 佃作者 명단에서 제외될 리가 없

그래서 簡文(B) lt州吏父兄子弟年紀簿gt에서 吏戶의 家內 父兄子弟

인력 23인 가운데 lsquo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rsquo과 lsquo一人先出給縣吏rsquo가

관부에 급사하는 給吏에 해당하고 lsquo一人限田rsquo은 限田의 佃作에 복무하

는 자이다 바로 이어 인용하는 孫休의 詔文에서 吏家의 어려운 사정

에 대해 ldquo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이미 限米를

납부하였는데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rdquo라 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전반부는 給吏로서 복무

하는 것이고 뒷부분은 限田 佃作 복역을 말함이다 즉 한 吏戶의 父兄

子弟 가운데 일부는 전자에 복무하고 일부는 후자에 복무한다 똑 같

은 관부 내지 국가의 역에 복역하는 것이지만 給吏는 분명히 吏(分署

의 담당 吏 州吏)에 給事하는 자라는 점에서 給吏로 칭하여 여타의

복역과 구분한다 그리하여 그 給吏가 결혼이나 계승으로 하나의 戶를

이루면 簡文(A)에서와 같이 某里의 戶籍簿上에서 里의 총 戶民數 아래

에 lsquo其四戶給縣吏rsquo와 같은 형식으로 戶를 本으로 한 給吏로서 명기된

다 그런데 一人의 給吏가 아직 戶를 이루지 못하고 한 吏戶의 成員

(父兄 子弟)으로서 있는 상황이라면 그 戶人의 현재 신분에 의해 그

戶가 표기되었을 것이다

이 문제와 직결되는 다음 기사를 살펴보자 孫權의 제6子로 孫亮에

이어 즉위한 孫休는 그의 즉위 年인 영안원년(258)에 다음과 같이 詔

하였다

「諸吏家에 5인이 있으면 (그 가운데) 3인은 겹쳐서 役에 복무하고 있

다 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이미 限米를 납부하

였는데 군대가 출정하면 또 종군함에 심지어는 家事를 돌볼 자도 없게

되는 것을 짐은 매우 애처롭게 생각한다 그 5인 가운데 3인이 役에 복무

하고 있다면 그 父兄이 (家에) 머물고자 하는 것을 허용해주어 1인을 (役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6에 나가지 않고) 머물게 하고 그 限米를 면제해주며 군대가 출정해도 종

군하지 않도록 하라 (삼국지 권48 吳書 孫休傳 永安元年條)87)

孫休는 즉위 전 재야에 있을 때 시골 생활을 보냈던 바가 있어 그

들의 참상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吏家(吏戶)가 지는 과중한 부담

은 곧 그들이 그만큼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 吏役이 賤視化 되고 厮役으로 인지되고 있던 배경을 위의 詔文은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lsquo吏家rsquo의 식구는 여러 방면의 복무를

중복하여 부담하고 있다 그 가운데 限米 납부 의무는 lt吳簡gt에 의하

면 국가에서 佃作케 하여 운영하는 限田 경작에 대한 租로써 납부하는

것이다 즉 전술한 lsquo二年常限rsquo田을 이 限田으로 보아 그 地租를 限米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다88) 단지 于振波는 限米란 二年常限田과는 관

계가 없고 屯田 경작에 대한 조세인데 衛士 郵卒 傳卒 등의 상비병

과 토지가 없는 수공업자 외지에서 수학하기 위해 온 私學 이탈하였

다가 새로 돌아와 附籍된 還民에게 軍屯이나 民屯에 종사하게 하고 일

부의 부세와 요역을 면제해주면서 限米를 납부하게 한 것이라 한다89)

그의 동일한 글에서 여타 사항에 대해 필자와 일치한 부분에 대해서는

앞에서 찬동한 바 있지만 이 부분에는 수긍하기 어렵다 lt走馬樓吳

簡竹簡gt에는 限米 납부자로 기재된 신분에 전술한 바와 같이 많은

신분이 망라되어 있고 孫休傳에서 말하는 吏戶가 일부 상비병이나 귀

환민 私學등에 한정한 것이 아니고 吏戶 전반의 형편을 들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lt吏民田家莂gt에서 佃田의 총수는 二年常限田과 餘力

田으로 구성 내지 구분되어 있다 즉 常限田은 餘力田에 對比되는 용

어이다 그리고 양자의 畝當 租額이 嘉禾4년 民의 경우 12斛 0456

87) 詔曰 ldquo諸吏家有五人 三人兼重爲役 父兄在都 子弟給郡縣吏 旣出限米 軍出

又從 至於家事無經護者 朕甚湣之 其有五人 三人爲役 聽其父兄所欲留 爲留

一人 除其米限 軍出不從rdquo」

88) 앞에 든 高敏의 글 lt吏民田家莂gt中所見ldquo餘力田rdquo ldquo常限rdquo田等名稱的函義試釋

이래 대부분 이 견해에 따른다

89) 于振波 앞에 든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7斛 州吏의 경우 0586斛 0456斛으로 차이가 있다90) 무엇보다 앞에

서 살펴 본 lt오간gt lt廣成鄕州吏父兄子弟伏處 人名 年紀爲簿gt에 기재

된 州吏의 食口 현황 내역은 孫休傳에서 吏戶의 식구 사정을 말하고

있는 내역과 같은 모습을 전하고 있는데 91)전자에서는 限田이라 하였

고 孫休傳에서는 限米라고 한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限田에 대해 징

수하는 것이 곧 限米이다 따라서 限田이란 二年常限田의 簡稱일 것으

로 본다 lt吳簡gt의 lt吏民田家莂gt에는 이들 限田戶의 佃田額과 그에

대한 租賦稅 납부 內譯이 있다 이 戶는 州郡縣吏 등으로 담당 吏職에

給事해야 하고 從軍도 해야 한다 이러한 양상은 분명히 역의 부담이

중첩된 것으로 일반민보다 더 과중하다 租額인 限米 납부액도 일반민

의 사유지에 대한 租額보다 비율이 높았다

그런데 중요한 사항은 첫째 이렇게 과중한 부담이 중첩된 吏戶의

일면을 보여주는 lt吏民田家莂gt에서 佃作吏民의 戶人(戶主) 신분을 보

면 大男大女州吏群吏縣吏軍吏州卒郡卒縣卒復民士

등으로 吏와 民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들 吏民 모두 佃作

의 의무와 함께 地租로 米穀 布 錢을 납부해야 하고 從軍의 役이 있

으며 그리고 대량의 lt오간gt에 다량으로 보이는 子弟 및 給子弟가 곧

吏의 子弟로 파악된 것에 의하면92) 그들이 납부하는 子弟限米의 부담

도 吏戶의 부담이 된다 또한 lt오간gt에

郡吏公乘李年卅二 算一 (貳2460)

侄子年卅九給子弟 妻大女衷()年卄六 算一 (貳1754)

吉陽里戶人公乘張惕年卄八 算一 給縣吏 (壹1018232)

등의 많은 簡文에서 吏와 그 子弟 給吏들에게 算賦도 부과되고 있다

90) 앞에 든 張福亞 也談lt嘉禾吏民田家莂gt中ldquo二年常限rdquo田的函義 p11의 表1

91) 이에 대해서는 앞에 든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

形成與演變 mdash談長沙走馬樓簡牘札記之六 pp62-63 참조

92) 孟彦弘 앞에 든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爲役之

制 pp1-7 子弟는 吏의 子弟 給子弟는 관부의 給事에 差出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8단지 吉陽里戶人公乘鄭龍(龍 下에 田)年卅六算一給州吏復 (壹3323)

과 같은 lsquo給州吏復rsquo 즉 給州吏이면서 算賦가 復除된 경우가 있는데 이

에 의거하여 給吏는 算賦에서 復除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93) 그러나

위에 든 簡文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부분의 給吏가 lsquo算一rsquo로 기재

되어 있고 소수만이 lsquo復rsquo으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復除되는 경우는

특별한 사정이 있어 그 給吏에게만 특혜를 준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

으로 생각한다 참고로 lsquo腫兩足rsquo자나 lsquo刑兩足rsquo자인 民戶의 戶人도 算賦

가 면제되지 않고 있으며94) 大女도 算賦 납부 의무가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吏戶와 民戶가 지는 국가에의 부담은 吏戶가 각기의 吏職

에 복무하고 일반민호는 그러한 吏職에 있지 않다는 정도 외에는 별다

른 차이가 없다 물론 일반민은 吏職의 役 즉 吏役이 없는 대신에 일

반요역에 복역해야 하고 吏戶는 일반요역에서 면제된다 그러한 사실

을 말해주는 자료로 lt오간gt 戶口簿에 里別로 定應役의 戶數 즉 일반

요역에 응당 복역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진 里別 戶數 문서가 있다

其一百卅八人男 (參431548)

其八十一人(女) (參431144)

其一戶給軍吏 下品 (參430336)

其五戶民 (下)品 (參430235)

其七戶女戶不任調 下品之下 (參430134)

其領役民卅七戶 (參430033)

이 里別 戶口簡은 凌文超의 編次 정리 작업에 의하면 新成里의 總

結簡에 해당하는데95)여기서 일반민호수는 생략하고 給軍吏나 調에서

면제되는 女戶 등의 수만을 기재한 것은 맨 아래의 定應役 戶數를 算

出하는 근거를 기록하기 위함이다 즉 일반민호 외의 給吏 등의 戶數

93) 凌文超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型

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 p5494) 高平里戶人公乘黃高鼰五十二算一腫兩足 (貳 2903) (大)成里戶人公乘何軼年

五十五算一刑兩足 (參626736)

95) 凌文超 앞에 든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

簿rdquo的類型與功能 p40과 lt表3gt 중 p45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9가 총 13戶이고 이들을 제외한 定應役의 戶數가 37호란 뜻이다 그래

서 新成里의 총 호수는 50戶였음을 알 수 있다 新成里의 총 口數 219

명은 lt오간gt의 戶當 口數 평균이 대략 45명 정도임을 감안하면 486

戶이고 50戶와 근접한다 따라서 給軍吏 등 13호는 定應役에서 면제되

는 戶임을 알 수 있다 또 다음 戶口簡은 앞부분 里의 총 口數가 결락

되어 있다

其一戶給朝丞 (貳170263)

其二戶給郡園父 (貳170162)

其五戶尫嬴老頓貧窮女戶 (貳170567)

定應役民卄戶 (貳170466)

여기서는 給朝丞1戶 給郡園2戶 절름발이 노인 빈궁자 女戶 등 5

戶가 役에서 면제되고 그 나머지 20戶가 定應役民이 되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즉 給吏는 定應役에서 면제되고 있다 따라서 給吏는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부에 給事하는 것이기에 당연히 일반요역에서 면제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給吏에도 전술한 바와 같이 吏戶의 가속인 경우가 있고 일

반민 중에 차출된 경우가 있는데 전자의 경우는 관부에서 필요할 때

마다 고정적으로 차출되었을 것이며 일반민의 경우는 본래는 일시적

한시적으로 징발되었을 것이지만 여러 簡文에 戶人으로서 給吏인 자가

있는 것에 의하면 점차 전자의 경우와 같이 吏戶와 마찬가지로 給吏戶

로서 고정적으로 차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定應役이 戶를 부과

단위로 삼고 있다는 점 또한 吏戶의 家屬이 하나의 徵役 단위로서 운

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도 吏戶의 실재성과 그 독립적인

신분성을 말해준다 더구나 일반 민호와 구분된 吏戶 名籍(lsquo吏名籍rsquo)의

존재가 다음의 簡文에서 확인된다

諸鄕謹列郡縣吏兄弟 幷攴 吏名籍 (13-7638)

吏戶의 막중한 부담은 그 家屬의 叛走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0를테면 縣吏 毛章의 15세인 弟(壹 7865) 縣吏 毛車世의 49세인 父(壹

7868) 群吏 黃의 13세인 弟(壹7893) 群吏 谷漢의 29세인 兄子

(壹7905)가 嘉禾 2년에서 3년 사이에 叛走하였다 후한 말 陳寔은 어

려서 縣吏가 되어 항상 厮役에 給事하였는데( 常給事厮役 ) 후에 都亭

의 佐가 되었다96) 그리고 郭太는 대대로 집안이 빈천하고 어려서 고

아가 되었는데 모친이 縣廷에 給事하게 하려 함에 말하길 ldquo대장부가

어찌 斗筲의 役에 處해 있을 것입니까rdquo라 하고 마침내 떠났다97) 당

시 이미 吏役이 厮役으로 인식되어 있었고 斗筲의 役 즉 100석 이하

인 斗食의 位에 처하였음을 말해준다 즉 같은 吏이더라도 100석 이상

인 掾史와 그 이하 사이에는 차등과 구분이 있었다(후술) 그렇지만 이

두 경우는 모두 吏가 되는 것이 선택의 길이었기 때문에 吏戶에 속한

자들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吏戶가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던

것에 비해 이 두 경우는 선택사항이었다 斗食에게도 매우 소액이지만

月俸이 지급되었기 때문에 빈천하거나 고아가 되어 생업을 위해 吏職

을 선택한 것이다 나이도 어리고 집안의 세력 배경도 없는 가운데 吏

가 된 것에 의하면 斗食의 최하단에 속한 吏였을 것이며 이들이 給吏

가 아니고 吏로 칭해진 것은 일반요역 복무에 대신하여 징발 내지 차

출된 경우가 아니고 吏職에 임명된 것이기에 당연하다

縣吏 등의 諸吏役이 厮役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무엇 보다 그 雜

役的인 吏役의 과중함 때문이다 후한 lt張景碑文gt에서 14鄕의 正을

調發하여 勸農의식에 소요되는 土牛 제작에 육칠십만전이 들어가 吏와

正이 매년 患苦에 처함에 男子(庶民) 張景이 매년 그 비용을 출연하여

土牛를 義作해주겠다 하고 그 대신 자신을 縣吏 列長 伍長에 임

용되지 않게 해줄 것과 小繇 징발을 면해줄 것을 청하고 있다98) 즉

96) 후한서 권62 陳寔傳에 (陳寔)少作縣吏 常給事厮役 後爲都亭(刺)佐

p2065

97) 후한서 권68 郭太傳에 (郭太)家世貧賤 早孤 母欲使給事縣廷 林宗曰 ldquo大

丈夫焉能處斗筲之役乎rdquo 遂辭 就成皐屈伯彦學 三年業畢 博通墳籍 p2225

98) 府告宛 男子張景記言 府南門外勸〔農〕土牛 調發十四鄕正 上賦

斂作治 幷土人 犂 耒 卄 蓎 屋 功費六七十萬 重勞人功 吏正患苦 愿以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1서민이었던 張景은 거액의 자금을 출연하면서까지 縣吏 등의 吏役과

小繇의 복역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있다 그는 아직 非吏였지만 吏役에

언제든지 차출될 수 있었고 그 吏役은 매우 번거롭고 힘든 것이었음

을 알 수 있다 단지 張景과 같은 서민이 縣吏가 되어 吏役에 差出되

는 경우 바로 lt오간gt에서와 같은 吏戶가 되어 그 가속이 모두 吏役의

범위에 들어가게 되는지는 不明이다 推斷이지만 世戶로서의 吏戶와

함께 일시적으로 차출되어 일정 기간 만 복무하는 非世戶로서의 吏戶

가 공존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요컨대 lt오간gt과 문헌자료에 보이는 吏戶와 給吏의 면모들은 앞에

서 검토한 胥徒와 lt庶民在官者gt 내지 徒御 導從役人 등과 일맥상통

하는 면이 있다 孫休傳이라든가 lt오간gt에 빈출하는 吏戶 吏民에서의

吏는 500石 이하인 吏 중에서도 200석 이상의 長吏級을 제외한 下吏

즉 百石 이하의 吏를 가리키고 給吏는 吏가 아니되 관부에서 일정 기

간 여러 분서에 勞役으로 복무하는 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즉

庶民在官者 와 상통한다 특히 그들에게 부과되었던 賦稅役의 내역에

서도 위에서 검토한 여러 職役 계통 신분이나 계층의 예와 거의 비슷

하다

孫休傳에서 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라 한

것은 吏家의 父兄은 都에서 州郡縣의 吏로 복무한다는 뜻이고 나머지

3인의 자제는 郡縣吏에 給事한다는 뜻이다 즉 lsquo郡縣吏에 給事함( 給郡

縣吏 )rsquo이란 子弟3인이 郡縣吏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郡縣吏에 下屬되

어 그 업무에 給事한다는 뜻이다 위의 廣成鄕의 lt人名年紀簿gt 簡文

에서 lsquo先出給縣吏rsquo도 州吏7家의 식구 가운데 먼저 縣吏의 업무를 보좌

하기 위해 차출되어 나간 것을 뜻한다 여기서 말하는 郡縣吏는 주로

掾史職으로 사무 업무 중심이고 그 업무를 노동력으로 보좌하는 인력

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lt오간gt의 도처에 諸吏의 사례로써 諸曹倉

吏庫吏監運掾關邸閣船師田戶曹史 등 수십종의 職名이 보이

家錢 義作土牛 上瓦屋 欄楯什物 世世作治 乞不爲縣吏 列長 伍長 徵發小

繇 (高文 漢碑集釋 開封 河南大學出版社 1997 p227)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2는데 대부분 그 업무 처리에 노동인력이 필요하다 십 명 내외의 掾史

員吏 만으로는 사무나 문서작성 관리 업무 이외에는 수행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 인력을 吏戶의 식구로부터 자동으로 差役시키는 시스템이

漢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었음을 위 孫休傳의 기사는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이들 吏家의 식구 현황 파악은 관부에서 항상 필요

로 하고 확보해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lt오간gt의 여러 문서는

그러한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東鄕勸農掾殷連被書條列州吏父兄人名年紀爲簿

輒科核鄕界 州吏三人 父兄二人刑蹱叛走 以下戶民自代 謹列年紀 以

(已)審實 無有遺脫 若有他官所覺 連自坐 嘉(禾)四年八月卄六日破莂

保據 (J22-2543)

여기에서 담당 鄕界의 州吏3인 가운데 그 父兄2인이 受刑과 叛走로

비게 됨에 下戶의 民을 징발하여 바로 충당시켰다는 것이다 이 以下

戶民自代 에 대한 해석에서 下戶를 고용하여 자신을 代理케 한 것이라

는 견해가 있는데99) 그렇다면 戶人인 州吏가 자신의 식구 결원을 책

임지고 직접 下戶를 고용한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해당 州吏의 부담

이 너무 크게 되어 당시 下戶가 자동으로 보충되는 시스템으로 운영된

것일 가능성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諸家의 견해 모두 不明

임을 인정하고 있다100) 어쨌든 吏戶의 노동력을 신속하고 철저하게

보충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은 吏戶 전체의 식구가 관부에

예속되어 있고 세습화 된 상태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단지 孟彦弘은

이 자료를 통해 당시 吏戶의 家屬이 모두 吏였음을 말해준다고 하였으

나101)그렇지 아니하고 吏의 가속에 吏도 있을 수 있지만 아직 吏가

아니고 吏를 노동력 지원으로 보조해주는 給吏도 있고 그 給吏는 非

99) 이 점에 대한 정리는 王素 長沙吳簡勸農掾條列軍州吏等人名年紀三文書新探

(魏晋南北朝隋唐史資料 25 2009) p9의 注 11) 참조

100) 이를테면 孟言弘 앞의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

爲役之制 p16

101) 위의 글 p1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3吏로서 관부에 給事하는 자이며 이런 면에서 전술한 庶民在官者 내

지 lsquo非吏이면서 관에 있는 자rsquo lsquo官과 民 사이rsquo lsquo lsquo半官 半民rsquo lsquo踐更小史

(小吏)rsquo(續漢書輿服志) 등과 상통한 계층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吏戶에 포함되지 않는 給吏가 있었다 吏戶와 給吏戶가 구분되

고 있음은 lt吏民人名年紀口食簿gt의

其七戶給郡吏下品 (壹5447)

其十二戶給縣吏下品 (壹5467)

其一戶給軍吏下品 (參430336)

(其)六戶郡吏(中)(品) ---- (貳4490)

其二戶縣吏(下)品 (貳3307)

등에서 給郡吏 등의 戶와 縣吏의 戶가 구분되어 기록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다 그리고 給吏가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에 속하였음은 위

의 사례 뿐 아니라 lt吳簡gt에서 給度吏 下品之下 (5653) 등에서 알

수 있는데 下戶로 결원을 보충하는 것은 同級의 戶로 충원한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면 또한 당시 吏戶와 給吏의 관부에의 예속성과 신분

성을 보여준다 요컨대 給吏는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여서 평균

의 民戶 보다 더 빈천한 계층인 점도 그들이 관부에 정식의 吏職으로

임명된 吏라기 보다는 非吏인 民으로서 民의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

서에 給事(給役)하는 자들이되 관련 관서의 吏에 배속되고 給事 복무

해야 하는 예속된 신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찍이 宮崎市定이 宋書권94恩倖傳序의 郡縣掾史 幷出

豪家 負戈宿衛 皆由勢族 를 인용하여 豪家 출신으로서의 掾史가 고

관으로 진출하는 경향이 累代 이어지면서 右族이 이루어지고 이를 통

해 위진남북조 귀족제가 출현하였다 하였고102) 楊振紅이 이에 동조하

고 있는 것은103) 부분적으로 再考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당시 孫休

102) 宮崎市定 九品官人法の硏究 -科擧前史 (京都 同朋社 1979(1956)) pp86

-89

103) 楊振紅 앞에 든 吳簡中的吏 吏民與漢魏時期官 吏的分野 mdash中國古代官僚

政治社會構造硏究之二 p34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4傳에서 말한 吏戶는 분명히 豪族勢家가 아니었고 lt오간gt에서 民戶와

함께 lt吏民簿gt에 기록된 吏戶는 下品에 속한 貧層이었으며 그 식구

모두 중복된 賦役의 부담에 시달리는 계층이었다 그 吏戶에는 吏와

給吏로 구분되어 관부에 예속되고 있다 즉 아무래도 豪族大家로서의

掾史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정을 이해하는 데는 전술한

lt周禮gt의 府史胥徒에서 府史가 호족대가로서 辟除된 掾史에 類하고

胥徒가 곧 관부 예속하의 吏戶와 給吏에 거의 相當하다는 면이 있다

吏戶에서의 吏職에 掾史가 있겠지만 관부에 예속되어 있고 직업적 세

습화 되어 있어 호족대가 출신의 掾史와는 구분되었을 것이다 무엇보

다 호족대가 출신의 掾史은 관부에 예속되지도 아니하고 세습의 신분

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掾史層의 존재는 군현의 장관 辟召로 임

용되었을 것이다 반면 吏戶 출신의 掾史는 기술 계통의 전문직일 경

우이거나 개인적 기능의 능력으로 또는 部曲과 같은 상비병 출신이

일반 요역 부담에 대신하여 관련 직무에 세습하게 되거나 또는 일반민

호에서 급히 所要되어 임시로 차출되었다가 점차 세습의 吏戶로 예속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관부에 진 빚으로 예속되었다가 吏戶로 남

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즉 이 吏戶는 관부의 갖가지 所要 用務

에 差出될 상황에 대기되어 있는 戶이다 그 중에 일부는 정식으로 掾

史로 승진되지만 나머지는 윤번이나 필요시 이 방면 저 방면의 分署에

차출되어 給事하며 分署의 長을 主로 모시고 그 아래에서 給事한다

掾史의 吏와 구분하여 그러한 뜻을 반영한 것이 lt오간gt의 도처에 보

이는 수십종의 給某吏다고 생각한다 호족대가 출신으로서의 掾史와

예속신분인 吏戶 출신으로서의 掾史는 그 신분상으로도 士와 서민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기에 宮崎市定의 立論 또한 양자의 구분을 통한

위진남북조의 귀족제 내지 良賤制의 형성을 논하는 보완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근래의 여러 연구들은 掾史에 이렇게 두 방면으

로 구분되는 면과 계층이 있다는 점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였고 吏戶

의 家屬에 吏와 給吏로 구분되는 층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양자의 성

격이 어떠한가를 파악하지 못한 셈이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5한편 給吏는 吏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戶人이나 父兄이 郡吏 등의

諸吏에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당시 吏戶가 직업화 내지 세습화 되어

있었기 때문에 子弟의 給吏 신분도 곧이어 諸吏로 진전될 것은 당연하

다 그래서 lt嘉禾四年吉陽里戶籍簿gt에 吉陽里에 호적이 올라 있는 給

郡吏 逢杲(壹10169) 給郡吏 寥裕(壹10175) 給縣吏 張惕(壹

10182) 給州吏 區張(壹10367) 給州吏 嚴追(壹10149) 등이 lt嘉禾四

年五年吏民田家莂gt의 下伍丘 소속 佃民 名簿에서는 거의 同一人일

것이 분명한데 給郡吏가 群吏로 給縣吏가 縣吏로 給州吏가 州卒이나

州吏로 기재되어 있는 경우도104)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

다 이 경우는 丘에서는 給吏가 보이지 아니하고 里에서만 보이기 때

문에 아직 명확히 해명이 되지 않고 있는 里와 丘의 차이에 따른 것일

가능성도 있고 嘉禾4년과 嘉禾4-5년 戶籍簿에서의 1년 내외의 기간

차이에 따른 신분의 변화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또

한 侯旭東의 정리 조사에 의하면 高遷里의 給縣吏 松棐가 위의 lt田家

莂gt에서는 武龍丘의 縣吏로 기재되어 있고 같은 里의 給縣吏 張喬는

亻平 丘의 縣吏로 기재되어 있으며 宜陽里에 眞吏로 등재된 黃阿 등

6인도 각각 6곳의 다른 丘의 州吏 男子 男子 郡吏로 기재되어 있다

또 陽里의 給郡吏 謝鼠는 夫丘의 男子로 기재되어 있다105)里의 호

적부와 lt吏民田家莂gt의 丘別 佃民 명부에서 그 신분이 男子인 경우

일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양편 모두 里의 호적부에 給郡吏 給縣

吏 給州吏등 給吏로 기재된 경우는 대부분 丘의 佃民 명부에서 각각

群吏 縣吏 州吏로 되어 있고 眞吏가 州吏 郡吏 男子로 기재되기도

하고 給縣吏가 男子로 기재된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일부 사례들은 眞

吏 吏 給吏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것이어서 그 해명이 필요한

데 현재 里와 丘의 구별 차이 眞吏와 諸吏 給吏등의 실체 문제가 아

104) 凌文超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

型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 pp17-18의 lt表一gt

105) 侯旭東 長沙走馬樓吳簡ldquo里rdquoldquo丘rdquo關係再硏究 (魏晋南北朝隋唐史資料2006) pp19-21의 表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6직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어 그 이유를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실

정이다 그러나 신분명으로 이름을 달리하여 그렇게 구분하고 있으며

전술한 바와 같이 給吏가 吏나 眞吏와 다르게 취급되면서 여러 名簿에

구별되어 기재되어 있고 그 독자성도 충분히 입증되기 때문에 위의

예외적인 사항들은 개인별 특별한 사정에 따른 것이거나 아직 여러 異

說로 논란이 되고 있는 里와 丘 등의 구분과 차이 등에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고에서 갖추어 고찰하지 못하고

후고로 미룬다

Ⅵ 결 언

이상의 검토에서 고대 職役의 범주에 들어가는 다종의 신분 내지 계

층과 吏職의 類 그 복무형태 삼국시기에 이르는 전승과 변화의 모습

들을 살펴보았다 우선 職官과 일반요역 복무자와는 신분제와 賦役체

계상 엄연히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례 地官 鄕大夫에 그

舍란 國中의 貴者賢者能者服公事者老者疾者에게는 모두 舍

한다는 것이다 에 대한 후한의 鄭司農의 注에 服公事者란 지금 吏에

게 復除해주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고 하였다106) 여기서 lsquo舍rsquo란 復

除와 같은 뜻이다 그 대상 가운데 lsquo國中의 貴者賢者能者rsquo 가운데

貴者는 공경귀족 賢者와 能者는 命官과 辟召된 관리에 해당한다 그리

고 그 아래의 服工事者는 다시 2분되는데 200석 이하의 吏職 내지 掾

史職(小吏)이 있고 그 아래에 庶民在官者 내지 lsquo非吏로서 官에 給事

하는 자rsquo로서 給吏層이 있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賢者와 能者 까지를

職官이라 하면 그 이하인 服工事者 가 곧 職役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

석된다 그리고 職官과 職役 복무자는 모두 일반요역에서 면제되는 자

106) 其舍 國中貴者賢者能者服公事者老者疾者 皆舍 注云 lsquo服公事者rsquo

謂若今吏有復除也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7들이다 이 중에서 職役 복무자는 일반요역에서 면제되는 대신에 각종

의 吏職과 給吏職에 복무하였다 여기서 칭한 給吏職은 lsquo(小)吏rsquo에 대비

하여 칭한 給吏를 그 성격상 그렇게 칭할 수 있으며 그 독립적 계층

내지 신분으로서의 실태가 lt長沙走馬樓吳簡gt의 발현에 의해 상당 부

분 밝혀지게 되었다 그런데 服工事者 즉 職役 담당 계층의 범위가

상당히 넓어서 그 職役의 양태가 모든 면에서 같은 것은 아니고 일부

분 다른 측면들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고대의 긴 기간에 걸쳐 거의

공통으로 庶民在官者 lsquo非吏이면서 관부에 給事하는 자rsquo lsquo官과 民 사

이rsquo lsquo半官半民rsquo의 성격이 유지되고 있는 면을 볼 수 있다

이렇게 職役 담당자의 연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곧 lt주례gt에 보이

는 관리 조직의 최하위에 위치한 府史胥徒이다 이 가운데 府史

가 대략 후대의 掾史職이나 lt吳簡gt의 諸吏에 속한다면 胥徒는 給吏層

에 상통하는 면이 많다 단지 lt吳簡gt에 다수 보이는 吏役 下의 吏戶

는 그 과중한 부담과 厮役 및 빈천함의 성격상 오히려 胥徒에 상통하

는 면이 많다 이러한 시대적 차이는 吏戶의 예속화 및 세습화의 진전

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한편 시대의 여건 차이로 여러 부분에서 胥徒

와 후대의 職役 담당 계층 사이에는 다른 면도 있다 胥徒나 給吏層이

기본적으로 일반 서민 출신으로서의 服工事者 였던 것과는 달리 周에

서 三國에 이르는 동안 服工事者 라는 면에서 同類이지만 일반 서민

과는 구분되는 여러 相異한 계층에 속한 신분들이 속하여 있었다 예

를 들면 工商食官 에 속하는 工商 皁隸食職 에 포함되는 吏에 속

한 徒隸 층 넓은 의미의 徒隸層이라 할 수 있는 皂隸牧圄

僕輿人 그리고 下吏層에 들어가는 樂祝醫衛士 및 走卒伍伯

之類 등이 그들로 그 출신은 일반 서민이거나 賤民 또는 刑徒였지만

관부에 寄生하며 給事한다는 면에서는 공통이다

이들의 복무 형태는 항상적 근무 일시적 근무 組別 교대제 등 여러

가지로 징발 내지 차출되었고 lsquo冗rsquo과 lsquo更rsquo은 그러한 차이를 구분하는

용어로서 나온 것이다 근무에 따른 보수를 받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 구분은 아직 분명치 않은 부분이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8있다 그러하지만 최소한 생업을 관부에 의탁하는 자들에게는 지급되

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年俸制에 대비되는 稍食 즉 소액의 月俸 내

지는 근무일수 기준의 지급 형태로 지급되었다 이는 그들의 근무가

주로 일 단위나 월 단위로 이루어지고 계산되었기 때문이다

lsquo官rsquo과 lsquo吏rsquo는 서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선진 이래 본래 상하의 신

분으로 명확히 구분되었고 漢代에 혼용 내지 통용되는 경향이 있었지

만 양자가 구분되는 면 또한 여전하였다 吏는 官에 가까운 吏가 있고

民으로서의 吏가 있어 전자를 lsquo官吏rsquo라고 하면 孫休傳의 詔에서 거론된

吏家는 보통 吏民으로 합칭될 경우의 吏라고 할 수 있다 lt吳簡gt의

lt吏民簿gt나 lt戶口簿gt 등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실태에서 후한 말에

서 삼국기의 전형적인 職役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이제까지 그

존재에 대해 거의 간과되어 왔던 給吏에 대해 lt吳簡gt은 수십종의 給

吏 실태를 전해주고 있어 그 의의가 크다 吏의 사무 업무를 직접 勞

役으로 보조해주는 給吏는 관부의 행정 업무 처리에 있어서 항상 필요

한 노동력 제공자였다 이러한 노동력은 어느 시기이든 공통으로 필요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연원을 lt주례gt의 胥徒에서 찾아볼 수 있었

고 여러 면에서 職役의 실례로서 공통하는 면들을 지적할 수 있었다

후한 말 삼국시기의 吏와 給吏는 일반서민 신분으로서의 吏이며 吏戶

로써 관부에 예속되어 그 食口 성원이 거의 세습하여 吏役에 종사하

고 있다 이들은 일반서민에 비해 일반요역이 면제된다는 점을 제외하

면 그밖에 각 吏職에 따른 吏役의 기본 직무 외에 限田의 佃作 의무와

그 地租로서 限米 布 錢을 납부해야 하며 從軍해야 하는 등 중첩된

부역으로 일반서민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또한 그 戶品 이

下品 내지 下品之下에 속한 貧戶 출신이다 따라서 같이 吏로 칭하지

만 豪族勢家 출신으로 掾史職을 거쳐 상급관으로 진급하고 命官에 오

르는 累代 高族의 世家 출신 掾史와 빈천한 서민 출신으로서 관부에

예속된 吏戶 출신으로서의 掾史와는 구분된다 이 吏家 내지 吏戶는

吏의 칭호로 불리지만 일반민보다 더 많은 부담을 지고 있기에 그들의

役은 후한과 삼국기에 賤役 賤職 내지 厮役으로 칭해지며 기피되고 있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9다 따라서 이 계층이 官吏로 합칭되는 경우의 吏와 구분되는 것은 당

연하며 그 호칭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늦어도 孫休 시기의

문서와 간독자료에 등장하는 lsquo吏家rsquo나 lsquo吏戶rsquo는 이미 그러한 계층에 대

한 專稱으로 형성된 듯하다

한편 諸吏役의 복무에는 常勤의 방식과 1년에 1개월 내지 수개월만

輪番 형식으로 복무하는 비상근의 lsquo踐更 방식의 근무rsquo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한 비상근 복무자도 있었을 것이다107)그리고 그 복무에

대한 급여가 그 吏役을 생업으로 하는 常勤者에게는 당연히 小吏에 대

한 봉록이 지급되었을 것이다 반면에 給吏의 役은 일반요역에 대신하

는 복역이라는 면에서 비상근 내지 윤번 형식의 차출이었을 가능성이

많지만 지금까지 lt오간gt에 소개된 자료로는 어느 쪽이라 단정하기가

어렵다 胥徒의 役은 어디까지나 상급의 관원들과는 달리 일반민의 요

역 의무를 대신하여 관부에 給事하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lt오간gt

에서의 給吏와 상통한다 給吏에 대한 봉록 지급의 여부도 아직 不明

이다 단지 限田의 지급이 祿田과 같은 성격의 것이었을 가능성도 고

려되지만 그 租額이 커서 혜택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노동력의 징발로

서 해석되는 부분도 있다 또한 給吏의 관부에의 給事가 일반 요역과

같이 組別 순환제였는지의 여부는 아직 분명치 않다 lt奏讞書gt의 樂

人의 예와 같이 一月一更制와 같은 순환근무제였을 가능성도 있는데

대체로 두 가지 형태가 공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lt吳簡gt에 의거한 의론들은 아직 자료 해석과 해명이 충분치 못하여

불분명한 상태에 있는 사항들이 많은 실정이기 때문에 해당 사항이 새

로 규명 되는대로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lt오간gt의 미해명 사항

에 대한 개별적인 탐구도 본 과제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필요하다 그

리고 아직 소개되지 않은 대량의 lt오간gt이 연속하여 출간되면서 새로

운 자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107) 廣懶薰雄 앞의 秦漢律令硏究 pp310-311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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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103

(中文摘要)

中國古代的職役與職官的問題

朴 健 柱

通過上述的檢討 基本上職役範疇內的多種身分 乃至階層與吏職之類

其服務形態至三國期的傳承與變化等方面已然解明 職官與職役服務者

的一般徭役均免除了 此二者中職役服務者 用種種lsquo吏職rsquo與lsquo給吏職rsquo服務來

代替其一般徭役 直至三國時期爲至漫長的期間內職役擔當者 庶民在官者

lsquo非吏而給事官府者rsquolsquo官與民之間者rsquolsquo半官半民rsquo的性格几乎共通維持

職役擔當者的淵源卽是lt周禮gt所見的官吏組織最下位的府史胥

徒 此中 府史是大略屬于後代掾史職或是lt吳簡gt的諸吏 胥徒則是相通于

給吏層的側面多的 但是lt吳簡gt所見多數的吏役下吏戶其過重的負擔與厮

役及貧賤的性格上 倒是與胥徒相通方面較多 這個時代的差異像是吏戶的

隸屬化及世襲化的進展招來的結果 一方面因爲時代的與件差異 胥徒與後

代的職役擔當階層間有多方面的異質 胥徒與給吏層基本上是一般庶民出

身的 服工事者 如此不同 從周至三國期間從 服工事者 上是同類而與一

般庶民相區分的多種相異的階層面上身分較多 例如 工商食官 所屬的工

商 皁隸食職 所包含的 吏所屬的徒隸 層以廣義的徒隸層可以稱謂的

皂隸牧圄僕輿人 以及下吏層所屬的樂祝醫衛士 及走

卒伍伯之類等 他們的出身是一般庶民 或是賤民乃至刑徒 在官府寄生

而給事的層面上是共通的

其服務形態是恒常的勤務 一時的勤務 組別交代制等以多種方式徵發乃

至差出 lsquo冗rsquo與lsquo更rsquo是其差異區分用的用語 支給勤務報酬與否是不分明之事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04項 可是至少生業官府依託者是被支給的 其支給方式是與年俸制相對的稍

食 卽少額的月俸乃至勤務日數基準的支給方式 因此他們的勤務和支給計

算主要是日單位或是月單位

於lt吳簡gt之lt吏民簿gtlt戶口簿gt等所見的吏與給吏的實態 可以看到

從後漢末至三國期間典型的職役的樣相 尤其向來看過給吏的存在 lt吳

簡gt所傳數十種給吏的實態 其意義是巨大 給吏是以直接的勞役補助吏的

事務業務 是官府的行政業務處理上恒常的必要勞動力提供者 這種勞動力

許是官府運營上至今爲至所有過的任何時期共通要緊事項 可以推斷給吏

的淵源於lt周禮gt的胥徒 而且可以指摘以職役的實例有多方面共通的層面

後漢末三國時期的吏與給吏是一般庶民身分之吏 以吏戶隸屬於官府 其食

口成員率多世襲地從事吏役 他們除比一般庶民免一般徭役外 也需要履行

各吏職別吏役的基本職務 佃作限田義務 以其地租納付限米布錢 從

軍義務等重疊的賦役 因此他們有比一般庶民更重的負擔 而且他們的戶品

是下品乃至下品之下所屬的貧戶出身 從而他們雖一樣稱謂lsquo吏rsquo 却與豪族

勢家出身經歷掾史職進級上級命官的累代高族的世家出身的掾史與以貧賤

的庶民出身於官府隸屬的吏戶出身的掾史是不同的階層 這個吏家乃至吏

戶雖被稱謂lsquo吏rsquo 但是彼役後漢三國期被稱謂賤役 賤職乃至厮役 而且被忌

避 從而此階層是與lsquo官吏rsquo合稱的境遇的lsquo吏rsquo爲區分是理所當然 其稱號也只

得相殊 于是最遲至少到於孫休時期文書與簡牘資料所見的lsquo吏家rsquo與lsquo吏戶rsquo

許是已經成爲如此階層的專稱

依照給吏的役是一般徭役代替的服役 其運營形態是非常勤乃至輪番形

式的可能性大的 但是迄今依據lt吳簡gt所見的資料還難以斷定何者是對的

胥徒的役是與上級官員異樣 以一般民的徭役義務代替給事於官府 本着那

樣的側面與lt吳簡gt所見的給吏相通 給給吏俸祿與否也還不明 但是從限

田的支給是與祿田同一的性格的可能性上看 因爲其租額是多的 與其說惠

澤倒是有可能解釋爲勞動力的徵發 給吏的官府給事是與一般徭役同一方

式的組別交代制與否還不分明 如lt奏讞書gt所見樂人的事例 有可能一月

一更制方式交代勤務制 筆者認爲大體上是兩個方式共存

關於lt吳簡gt資料的議論是因爲解釋與解明上許多異說 不分明的關聯事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105項也有很多 所以該事項的解明將其完備需要補完

주제어 직역 직관 서도 도예 이역 이호 급리 서민재관자

關鍵詞 職役 職官 胥徒 徒隸 吏役 吏戶 給吏 庶民在官者

Keywords lavor duty at office(official lavor) high-ranking officialrsquos duty(official

post) xu-tu tu-li minor officials lavor minor officials family minor half

officials and half the masses in lavor services at office the masses in lavor

services at office

(원고접수 2013년 11월 15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12월 16일 수

정원고 접수 12월 19일 게재 확정 12월 26일)

Page 6: AB C D - KNUwebbuild.knu.ac.kr/~china/CHR/chr2013/chr87pdf/chr87-02... · 2014. 1. 4. · FG9 ±°'c&`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0

Ⅱ 周禮의 胥徒와 庶民在官者

秦漢 官制에서 官階는 대체로 皇命에 의해 除授되는 命官 내지 長吏

와 그 명관에 의해 辟除되는 屬吏 내지 小吏로 크게 구분된다 그리고

양 官階의 秩祿에 의한 구분은 漢初의 lt이년율령gt秩律에 의하면 300

石 전한 중기 이후에는 200石이 기준이 되고 있다6) 그 실제의 관직

은 전자는 丞佐史尉의 佐官 내지 副官級 이상에 해당하고 후자는

그 미만인 鄉有秩獄史佐史鄉佐斗食令史嗇夫假官掾史

幹小史書佐循[脩]行 등의 掾屬 佐史類이다7) 그런데 이러한 구

성의 구분은 이미 주례의 官階 구성에서도 보인다 天官 冢宰에 治

官之屬 大宰 卿 1人 小宰 中大夫 2人 宰夫 下大夫 4인 上士 8인 中

士 16인 旅 (鄭玄의 注 lsquo衆也rsquo) 下士 32인 府 6인 史 12인 胥 12인

徒 120인 인데 주례의 거의 모든 관부가 이러한 구성으로 되어 있

다8)후한의 鄭玄과 唐의 賈公彦은 下士 이상은 왕명에 의해 임관된 王

臣이고 그 이하의 府史胥徒는 王臣에 의해 辟除된 계층으로 王

臣이 아니라고 하였다 즉 위에서 下士까지가 이른바 命官이고 그 아

래는 屬吏이다 특히 정현은 주례 여타 조목에 보이는 官階에서 lsquo群

臣rsquo을 卿大夫士로 해석하고9) lsquo群吏rsquo를 lsquo府史rsquo (秋官 司寇 小司寇 및

同 朝士 등에서의 鄭注) 또는 lsquo府史 以下rsquo(夏官 司馬 御僕의 鄭注)로

해석한다 庶人在官者 란 예기 王制제5에 農田을 100畝 단위로

만들어서 100畝씩 분여하는데 上農夫가 받는 田은 9인이 食할 수 있

고 그 아래는 8인이 食 할 수 있으며 그 아래는 7인이 食할 수 있고

6) 孫鴻燕 秦漢時期郡縣屬吏辟除問題硏究 (秦漢硏究 第一輯 三秦出版社

20071)

7) 後漢書 권28 백관5 注引 漢官曰 雒陽令middotmiddotmiddot(이하의 속관명)

8) 단지 예외로 角人이나 羽人은 그 직무의 성격에 따라 府와 史 중 어느 한 쪽

만 설치되어 있고 腊人과 食医는 양자 모두 설치되어 있지 않다 周禮注疏 같은 條의 贾公彦의 疏

9) 한편 주례 司寇 小司寇의 經文에서 경대부 하위의 lsquo群士rsquo의 稱이 있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1그 아래는 6인이 食할 수 있으며 下農夫는 5인이 食할 수 있다 庶人

在官者 는 그 祿이 이것으로써(8인에서 5인까지) 차등을 삼는다 제후

의 下士는 上農夫로 하고 그 祿으로 그 농경에 대신하기에 족하다 中

士는 下士에 倍하고 上士는 中士에 倍하며 下大夫는 上士에 倍한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라 10)하였고 맹자萬章句下에는 耕者가 수확하는 것으로 一

夫 當 百畝씩 百畝의 分田에서 上農夫는 九人이 食할 수 있고 그 다

음은 8인이 食할 수 있으며 中은 7인이 食할 수 있고 그 다음은 6인

이 食할 수 있고 下는 5인이 食할 수 있다 庶人在官者는 그 祿이 이

를 차등으로 한다 라11) 한 바에 의하면 庶人在官者 는 下士 아래

등급인 府史胥徒에 해당하며 차례로 9인이 食할 수 있는 百畝

의 최상급 농지를 경작하는 상농부(제후의 下士)의 아래 등급에 해당

하는 8인이 食할 수 있는 百畝의 경지 보유자는 府가 되고 그 아래

순으로 각각 7인의 食地 보유자는 史 그 아래 6인의 食地 보유자는

胥 그 아래 5인의 食地 보유자는 徒가 된다 이 규정에 의하면 下士에

서 徒까지는 모두 百畝의 경지를 보유하게 되는 면에서는 같지만 그

경지의 質에 따라서 5 단계의 차이 나는 경지를 차등으로 받게 된다는

것이 된다 上農夫 등의 차등은 주례의 鄭注에는 田의 肥瘠에 5등

급이 있어 수입이 같지 않다 라 하였고 위 인용문의 맹자 注에 一

夫一婦에 佃田이 百畝인데 百畝의 田에 糞을 퇴비로 주면 이것이 上農

夫이고 그 소득의 곡식으로 9口를 족히 먹일 수 있다(一夫一婦 佃田

百畝 百畝之田 加之以糞 是爲上農夫 其所得穀 足以食九口) 라 한

것에 의하면 糞의 퇴비 사용 여부 등으로 인한 토지의 肥瘠으로 발생

하는 수확의 양적 차이에 따른 구분임이 분명하다 즉 祿田 지급의 면

적 크기는 같지만 토지의 질적 차등을 기준으로 下位 5등의 차별이 결

10) 制農田百畝 百畝之分 上農夫食九人 其次食八人 其次食七人 其次食六人

下農夫食五人 庶人在官者 其祿以是爲差也 諸侯之下士視上農夫 祿足以代其耕

也 中士倍下士 上士倍中士 下大夫倍上士middotmiddotmiddot

11) 耕者之所獲 一夫百畝 百畝之分 上農夫食九人 上次食八人 中食七人 中次

食六人 下食五人 庶人在官者 其祿以是爲次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2정되고 있다 漢唐의 주석가들이 庶人在官者 를 주례의 府史

胥徒에 해당시킨 해석은 그들이 살던 시기의 정황에 의거한 것이고

관련 자료들도 충분히 현전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인정될 수 있는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일찍이 曾我部精雄은 鄭注와 賈疏의 차이를 제시하길 鄭玄은

府와 史가 庶人在官者 에 들어가지만 胥와 徒는 그에 들지 못한다고

한 반면 賈公彦은 4者가 모두 그에 포함되는 것으로 본 차이가 있고

鄭注의 해석이 옳다고 하였다12) 그는 상기의 주례 胥十有二人徒

百有二十人 에 대한 鄭注에 이는 民이 徭役을 給한 것이니 지금의 衛

士와 같다(民给徭役者若今衛士矣) 라 하였고 賈疏도 이에 따르고

있는데 胥와 徒는 요역 의무에 복무하는 것인 까닭에 봉록이나 수당이

지급되지 않았고 官長으로부터 辟除 임용된 것도 아니었으며 육체노

동이었던 반면 官長으로부터 선발되어 辟除 임용된 府와 史는 관부의

정신노동에 복무하였기 때문에 다르다고 하였다13) 때문에 庶民在官

者 에 胥와 徒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曾我部精雄은 鄭注와 賈

疏의 그러한 입장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여러 조문을 열거하고 있지만

賈疏가 府史胥徒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나 그가

열거한 자료에서 鄭注가 胥徒를 배제하고 있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주

는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屬이라 함은 그 屬인 胥徒이다 (春

官 宗伯 典祀) 群吏는 府史 이하이다 (夏官 司馬 御僕)라고 해석한

부분에 의하면 胥徒도 屬吏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는 입장이었을 것 같

다 또 曾我部精雄이 胥徒는 給徭役의 의무로 복무하는 것인 까닭에

봉록이 지급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위의 경문에서 최하급의 田地이지

만 1백무의 祿田이 지급된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 주장도 어긋나게 된

다 庶民在官者 의 봉록 문제는 아래에서 다시 상론한다

여기서 주의할 사항은 鄭注와 賈疏가 모두 한에서의 사정에 입각하

12) 曾我部靜雄 中國往古の胥吏制度 (中國律令史の硏究 東京 1971) pp456

-8

13) 위의 글 pp456-7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3여 府史와는 달리 胥徒가 모두 요역 의무로 징발되어 복무하는 자들로

본 것이라는 점이다 이 府와 史의 직무에 대해 정현과 가공언은 주례 小宰 宰夫의 8職 가운데 다섯째 府는 契하여 藏을 治하고 여섯

째 史는 문서로 贊治(보좌관의 업무)함을 관장한다( 五曰府 掌官契以

治藏 六曰史掌官书以赞治 에 의거하여 府는 문서와 器物의 藏(보

관 관리)을 관장하고 史는 문서의 起草를 관장하는 직책으로 해석하

였다 이는 진한시기 각 관부의 屬吏 掾史의 庶務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lt雲夢秦律gt 秦律雜抄(p133)에 佐 史 이상인 吏가 짐을 지고

운반하는 馬와 문서 간수를 담당하는 私卒(隨從의 卒)을 부려서 장사

하도록 하여 이익(錢)을 취하였으면 모두 遷刑에 처한다 라 하였는데

lsquo문서 간수를 담당하는 私卒rsquo이란 佐史 이상 관리 직속의 下屬으로서

그 상관을 隨從하며 보좌하는 까닭에 私卒이라 한 것이고 家內의 私

卒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정리소조가 lsquo隨從의 士卒rsquo로 해석하였는데

문서 간수를 직분으로 하는 史에 下屬된 卒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

든 府史의 史 및 그 下屬의 인력이 전국진에서도 설치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周禮天官 宰夫에 기술된 宰夫8職에서 일곱째 胥는 그 업무가 掌

官叙以治叙 인데 鄭注는 治叙란 관부에서 次序함이니 마치 지금(漢에

서) 侍曹 伍伯이 관리의 朝會에서 傳言 報告하는 것과 같다 胥가 什

長이 된 경우도 또한 그러하다 까닭에 漢法의 사정을 든 것이다(如今

侍曹伍伯 傳吏朝也 胥爲什長亦然 故擧漢法况之也) 라 해석하였다

좀 난해한 설명인데 이를 부연 설명한 賈疏는 이미 才智가 있어 什

長이 되어 관부에서 次序의 업무에 當하니 반드시 사람을 使役하는 곳

에서 그 徒를 科次한다 까닭에 관부에서 次叙한다고 하였다 로 해석

한다 즉 보통 胥徒로 함께 칭해지는 胥는 徒 중에서 才智가 있어 什

長으로 선발된 층으로 관부의 次序 업무를 맡게 되는데 徒를 使役하는

곳에서 그들을 통솔하며 科役한다는 것이다 如今侍曹伍伯 傳吏朝也

도 난해한데 賈疏는 漢에서 侍曹에서 伍의 長인 伍伯(伍長)에 이르기

까지 吏朝(관리의 朝會)에서 群吏가 諸官의 사무를 보고하여 傳하는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4것으로 해석하였다14)즉 侍曹에서 최말단의 부서 단위에 이르기까지

담당 부서의 朝會 때 각 하급 단위의 長이 업무 보고를 하는 것이다

그런대 이 伍伯은 5인조의 長이 아니고 漢의 執金吾의 속관에 (持戟)

五百(伍伯)二十人 이 있고 이 lsquo伍rsquo의 義를 lsquo當rsquo으로 lsquo伯rsquo의 義를 lsquo道rsquo로

해석하여 앞에서 導引하며 길을 驅除 정리하는 吏라고 한 韋召의 해석

이나15) 司隸校尉의 속관으로 先導隊나16) 門番의 임무를 하고 있는 사

례에17) 의하면 하급의 賤職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후한에 伍伯이

자주 보이는데 모두 走卒 鈴下와 連稱되거나 병렬되어 있어 일찍이 好

並隆司는 走卒은 伍伯이라고 하는 職役에 類한다 고 하여(후술) 모두

관부 말단의 職役 내지 賤職이라 하였다18) 凍國棟은 漢唐間의 伍伯이

微賤의 役이였지만 그 職의 성격상 권세를 빌려 남의 생사를 좌우하

고 謝禮錢을 챙길 수 있는 자리였다고 하였다19) 따라서 여기서는 吏

朝에 참석하는 최말단의 吏員으로서 先導 門番 등 役에 복무하는 伍伯

을 기술한 것이라 하겠다 胥徒는 곧 伍伯과 같이 관리의 최말단 수종

원이면서 그 손발 내지 爪牙의 기능도 하는 층이다 이러한 류의 최하

급 단위의 長은 什長이고 胥는 곧 그 什長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주례에서 각 관부의 徒는 그 員數가 거의 대부분 胥의 10배수이다 그

리고 관부의 次序 업무란 담당 단위의 胥가 그 소속 성원의 질서를 유

지하며 아울러 요역 징발된 民의 徒를 지휘 통제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후술)

이어 여덟째 徒는 그 업무가 官의 令으로써 徵令을 관장함(掌官令

14) lsquo如今侍曹五伯传吏朝也rsquo者漢時五人爲伍 伯 長也 是五人之長 言傳吏朝者

傳在朝群吏諸官事務於朝也

15) 후한서 宦者列傳 曹節條의 注에 韋召辯釋名曰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伍 當也 伯 道也

使之導引 當道陌中 以驅除也

16) 續漢書 輿服志上에 公卿以下至縣三百石導從 置門下五吏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車前伍伯 公

八人 中二千石 二千石 六百石 皆四人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17) 謝承後漢書에 華松家孤微 其母夜夢兩伍伯夾門 言司隸在此

18) 好並隆司 漢代下層庶人の存在形態(一) (史學雜誌 82-1 1973) pp17-1919) 凍國棟 漢唐間lsquo伍伯rsquo淺識 (中國中古經濟與社會史論考 湖北敎育出版社

2005) pp25-35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5以徵令) 인데 얼핏 徒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내용인 듯하다 정현은

이 lsquo徵令rsquo의 업무를 趨走給召呼 라 하였다 賈疏는 그 徒가 朝會에서

뛰어다니는 것을 금지시키고 官人에게 복역자를 공급하고 그들을 호

령하며 사역시키는 일이다(其徒止爲在朝趨走 供給官人召呼使役之事也)

고 해석하였다 관부 내에서 많은 복역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까닭에

그들이 소란 피우지 못하게 질서를 잡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서 徒에 의해 징발되고 사역되는 층은 관부에 복역 중인 刑徒 요역에

복무 중인 일반 서민 등일 것이다 주례의 각 관부에서 徒의 수는

수십 명에서 수백 명 많은 경우 8백명에 이르기도 한다 이들의 노동

력은 각 관부별로 항상적으로 갖추어진 것이지만 이 보다 더 많은 노

동력이 필요하여 형도나 일반 요역 복무자들을 징발하게 된다 그리고

그 징발된 노동력을 호령하며 질서를 잡고 사역시키는 직무도 필요하

게 된다 물론 징발된 자들을 사역시키는 일 뿐 아니라 자신들이 직

접 여러 노역의 所管 업무에 복무해야 한다 이를테면 地官 牛人에

胥二十人 徒二百人 이 있고 그 직책은 公牛의 사육이며 稻人에 胥

十人 徒百人 인데 그 직책이 稻田의 경작이고 夏官 虎贲氏에 胥八十

人虎士八百人 인데 鄭注에 의하면 徒라 하지 아니하고 虎士라 한 것

은 徒 가운데 勇力者로 선발된 까닭이다 하였으며 그 일부 직무에 同

司甲 司戈盾 司弓矢 繕人 校人 趣馬 巫馬 등에 속한 수십

명 내외의 徒는 모두 무기제조나 다루는 법 무기 성능 감별 馬의 감

별 養馬기술 馬祖 馬步 등의 神을 통해 馬의 질병을 파악하는 巫術

등에 뛰어난 상급자들 밑에서 보조 지원의 일 등 말단의 업무를 처리

한다 전문 기술과 지능이 필요한 업무인지라 말단의 업무 처리도 상

당히 명민한 자질이 필요하다 따라서 일반 서민 가운데서 이러한 재

능과 자질이 있는 자로 충원한다 이러한 각 관부의 업무 처리는 후대

에도 익히 보이는 사례이다 鄭玄은 胥를 lsquo諝(智者)ldquo로 읽어 才知의 뜻

으로 해석하였는데 같은 徒의 무리 중에서 才知者로 뽑힌 자라는 뜻으

로 보았다 胥가 什長인 까닭에 10인 가운데 1인 비율로 뽑힌 셈이다

아울러 徒 전체가 일반 서민으로부터 뽑힌 자들이라 할 수 있다 단지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6胥徒의 신분상 복무형태상의 제반 사항이 후대에 그에 상당하거나 유

사한 신분층과 사례에 대비할 때 상당히 다른 면이 많다는 사실이다

趙伯雄은 주례의 胥徒는 전국기까지 노예 厮 童보다 윗 등급이지만

거의 비슷한 신분이었고 厮役 내지 賤役의 담당층이었으며 徒가 한에

서는 주로 刑徒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고 하였으나20) 아래

기술하는 내용에 의하면 그러한 해석에 따를 수 없는 면이 많다 또한

한에서 徒는 형도 뿐 아니라 여러 무리를 가리키는데 통용되고 있어

여러 자료에 등장하는 徒가 가리키는 사항은 무척 다양하다

위의 注疏에 의하면 經文에서 徒의 업무를 官의 令으로써 徵令을

관장함(掌官令以徵令) 이라 한 것은 上部의 지시를 받은 徒가 새로

징발되는 徒의 징발 업무 및 이들을 인솔 지휘 사역하며 그 지시사항

(작업)을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胥와 徒가 모두 庶民在官者 라는 입

장에서 보면 徒가 최하위이지만 lsquo在官者rsquo이고 제8위와 제9위의 서열에

있으며 胥와 徒가 각각 6인과 5인이 食할 수 있는 토질의 경지 百畝

를 代耕의 봉록으로 받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이 출신은 징발된 요

역 복무자와 같다고 하더라도 여타의 징발된 일반 요역 복무자와는 구

분되는 계층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후대의 胥吏도 일반 서민출신이지

만 일반 서민과 다른 계층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 같다 만약 曾我部精

雄의 견해와 같이 府와 史까지만 庶民在官者 이고 胥와 徒는 그에

들지 못하는 것이라 한다면 주례 원문에 胥와 徒가 엄연히 제8위와

제9위에 올라 있고 봉록으로써 百畝를 받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기 어

렵게 된다

그리고 특별히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앞에 인용한 鄭注에 이는(胥

와 徒는) 民이 徭役을 給한 것이니 지금의 衛士와 같다 고 한 점이다

그래서 후한 중후기 衛士의 운영 형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또 鄭

玄은 駁五經異義에서 周禮에서 이른바 모두 징발한다 한 것은 胥

徒로 하여금 公家의 事에 給하게 한 것을 말함이니 지금의 正衛와 같

20) 趙伯雄 lt周禮gt胥徒考 (中國史硏究 2000-4) pp10-12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7다 고21) 하였다 한에서 궁성 내지 중도관에 番上 守衛하는 役은 正卒

의 役과 일반 更卒의 役이 있는데 鄭玄이 특별히 正衛라 한 것은 正卒

로서의 役임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의 요역 운영체제에서

衛士가 上番하는 役은 한구의에 民의 나이 23세가 되면 正이 되고

1년간 衛士 1년간 材官 騎士에 복무하며 활쏘기 말달리기 戰陣을 익

힌다(民年二十三爲正 一歲以爲衛士 一歲爲材官騎士 習射御騎馳戰陣)

라 한 것에 의하면 正卒이 그 복역 대상자이고22) 각 군 단위로 1년씩

21) 禮記王制 五十不從力征middotmiddotmiddot 의 條 孔穎達疏引 周禮所謂皆征之者 使爲胥

徒 給公家之事 如今之正衛耳

22) 漢의 正과 正卒 및 상비군의 문제에 대해서는 종래 여러 이견이 있다

正을 正卒로 보고 正卒이란 更卒(小繇)의 對稱으로서 병역의무자이고 재관

기사 위사등이 곧 정졸이라는 설이 가장 많이 받아드려지고 있다(濱口重國

秦漢時代の繇役勞働に關する一問題 秦漢隋唐史の硏究』上卷 東京 1966

1980 勞幹 漢代兵制及漢簡中的兵制 歷史語言硏究所集刊 10 1948 山田

勝芳 後漢時代の繇役と兵役 歷史 66 19869)正卒은 앞의 설과 같지만 正은 23세에서 56세 사이의 남자 즉 正丁 을 가리

킨다는 설(西村元佑 漢代の繇役制度 東洋史硏究 12-5 1953)正卒과 更卒이 별개인이 아니라 동일인이고 更卒은 正卒이 된 이외의 해에

매년 1개월의 역역에 복무하는 자를 가리키며 正은 23세-55세까지의 正丁인

데 正卒은 그 가운데 2년간 衛士 材官 騎士 등의 實役에 복역하는 것이라는

설(西田太一郞 漢の正卒について 東洋の文化と社會1 東京 1955)

材官 騎士등이 일반민에서 材力 있는 자로 선발되어 군국에서 常駐하는 전

문병사로서 직업군인인 lsquo士rsquo인데 대해 正卒은 일반민이 23세에 1년간 병졸로서

근무하고 1년간 衛士로 長安에 上番한다는 설 즉 正卒은 직업군인인 材官 騎

士와는 兵役體系上 別個의 것으로서 일반민의 병역 복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는 설(大庭脩 材官攷 -漢代の兵制の一班について 龍谷史壇 36 1953)正卒이란 23세에 이른 자 가운데서 신체강건한 자를 뽑아 衛士 材官 騎士

樓船 등의 어느 한 兵種에 복무하게 한 것이라는 설(濱口重國 勞幹 西村元佑

山田勝芳 앞의 논문 平中苓次 漢代の官吏の家族の復除と軍賦の負擔 中國

古代の田制と稅法 京都 1967) 諸說의 대부분은 이 견해를 공통적으로 취하

고 있다

秦漢에서는 始傅에서 免老까지의 모든 남자가 병역의무를 지는데 正卒은 그

適齡남자를 統稱하는 말이며 따라서 郡兵이나 衛士 戍卒은 正卒의 일부분이라

는 설(臧知非 秦漢lsquo正卒rsquo辨釋 中國史硏究 1988-1)正이란 傅籍된 待役者(兵役과 力役 포함)를 말하며 正卒은 어떤 특정의 役

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고 正(待役者)과 卒(服役中에 있는 正)로 구분되어 있

는 말이며 秦漢代에 병역 복무는 일부 병역신분에게 만 부과된 것이어서 나머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8조별 순번으로 상경하여 복역한다 正卒은 일반 更卒 중에서 신체강건

용맹 등으로 선발된 자들로 상비군 내지 직업군인의 성격이 강한 집단

이다 즉 그들은 일반민(서인)이면서도 그 중에서 선발되어 군사로써

免老에 이르기까지 복무하는 까닭에 일반민과는 다르다 胥徒 또한 서

인이면서 관부에 복무하는 까닭에 일반민과는 다르다 衛士는 특히 평

시에 도성(중도관)을 수비하기 때문에 관부에 거처하게 되고 胥徒 또

한 관부에서 직접 給事하는 까닭에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면에서 鄭玄

은 양자를 같은 성격의 계층으로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衛士가 일반

민에서 선발된 자들이고 胥는 徒 중에서 才智로 선발되고 徒는 분명

치는 않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일반 民庶 가운데 담당 직무 수행에 어

느 정도 자질을 갖춘 자로 선발된 자들일 가능성이 크다 또 漢書권74魏相傳의 顔注에 京師의 여러 관부에 와서 戍卒이 되는데 지금의

衛士가 上番하여 여러 官司에 나누어져 복무하는 것과 같다 라23) 한

것에 의하면 衛士의 이러한 복역 모습은 각 官司에 배치된 胥徒의 복

역 형태와 같다 전한 京師에서 복무중인 衛士의 수는 景帝末傾에 매

지 일반 白徒는 병역에 복역하지 않는다는 설(孫言誠 秦漢的繇役和兵役 中國史硏究 19873 및 ldquo爲正一歲rdquo辨 文史 31 198811)濱口說과 같이 正을 正卒의 略稱으로 보지만 濱口씨가 正卒을 일반적인 兵

士로 본 것과는 달리 庶民 중에서 일부가 선발되어 兵士(材官 騎士 등)가 된

것이며 이들은 일반서민과는 상대적으로 구별되는 신분 말하자면 獨自의 兵

士身分 으로서 일반서민과 같은 역역(更卒) 의무가 없었고 일반서민과는 다른

부담체계하에 있었다는 설(重近啓樹 秦漢の兵制について -地方軍を中心とし

て- 人文論集(靜岡大學) 36 1985)正卒은 일반민이 20세로 부터 2년간 복무하는 것이며 材官 騎士는 이와는

달리 전문병사로서 23세에서 56세까지 복무하는 것이라는 설(藤田勝久 前漢

の繇役勞動とその運營形態 中國史硏究 8 1984)한편 李成珪는 材官 騎士는 卒에서 징발된 전문 병사였고 1년 복역 후에도

예비역으로 분류 비상시 동원되었지만 (軍)吏나 士에 속하지 않는 자들로서

力役 복역의 한 형태인데 董仲舒가 말한 lsquo一歲力役rsquo은 바로 郡卒로 1년 복무하

는 材官 騎士의 役을 말한 것이라 한다(이성규 前漢 更卒의 徵集과 服役 方

式 -松栢木牘 47호의 분석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09 200912

pp33-34)

23) 來京師諸官府爲戍卒 若今衛士上番分諸司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9년 2만인 武帝 즉위 후 1만인으로 감하고 얼마 후 5천인을 늘려 武帝

후기에는 1만5천이었을 것으로 보인다24) 또 1개 군에서 番上하는 수

가 數千에서 2~3천인이었던 사례가 있다25) 전한 말 成帝 시기의 사

정을 말해주는 尹灣漢簡의 lt東海郡下轄長吏不在署 未到官者名籍gt

에 군현 밖으로 外勤出張 중에 있는 長吏의 현황표에 費長孫敞 十月

五日送衛士 가 있는데26) 費邑의 長 孫敞이 衛士를 送하는 업무로 출

장하여 아직 귀환하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동해군 下轄의 縣(18)邑

(2)侯國(18) 38곳(lt集簿gt) 가운데 오직 費邑에서만 衛士가 上番되고

있다 이에 의하면 衛士의 상번은 각 군에서 縣級 단위로 교대 상번하

는 것으로 보인다 濱口重國은 후한에서 正卒의 군현상비군이 폐지되

었지만 전한에서와 마찬가지로 매년 연말에 1년의 복무가 끝나고 귀향

하는 衛士들에게 황제가 향연을 베푸는 饗遣故衛士儀가 행해지고 있는

사례를 들어 衛士의 上番은 후한에서도 행해지고 있음을 지적한 바가

있다27) 아울러 그는 군현 상비군 폐지 후 중앙의 衛士 부대가 2500

내지 2600명인데 이는 중앙 인근 지역에 한정하여 징발된 자들로 보

아야 한다고 하였다28) 후한 周禮注에서 鄭玄(127-200)의 衛士 인용

이 전한시기의 사정에 의거한 것인지 아니면 그의 활동시기인 후한 후

기의 사정에 의거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후한 중 후기에도 衛士의

上番制가 부분적으로나마 유지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4) 濱口重國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隋唐史の硏究』上卷 東京

1966 1980) p286 注2)

25) 「上臨饗罷衛卒 衛卒數千middotmiddotmiddot」 (漢書 권77 蓋寬饒傳) 「河南卒戍中都官者二三

千人middotmiddotmiddot」 (漢書 권74 魏相傳)

26) 張顯成 周羣麗 尹灣漢墓簡牘校理(上篇) (天津古籍出版社 2011 3) p32

27) 濱口重國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隋唐史の硏究 (上)) p283

28) 濱口重國 위의 글 pp284-285 그 주된 근거는 속한서 백관지3 尙書條에

蔡質漢儀曰 ldquo右丞與僕射對掌授廩假錢穀 與左丞無所不統 凡中宮漏夜盡 鼓鳴

則起 鍾鳴則息 衛士甲乙徼相傳 甲夜畢 傳乙夜 相傳盡五更 衛士傳言五更 未

明三刻後 雞鳴 衛士踵丞郎趨嚴上臺 不畜宮中雞 汝南出雞鳴 衛士候朱爵門外

專傳雞鳴於宮中rdquo 應劭曰 ldquo楚歌 今雞鳴歌也rdquo 晉太康地道記曰 ldquo後漢固

始鮦陽公安細陽四縣衛士 習此曲於闕下歌之 今雞鳴是也rdquo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0中都官의 몇 몇 部署에 給事하는 衛士의 員數 규정이 있는데 속한

서 백관2 注引 漢官의 光祿勳에 81인 太宰令에 15인 高廟令에 15

인 世祖廟令에 20인 衛尉에 60인 南宮衛士令에 537인 北宮衛士令에

471인 右都候에 416인 左都候에 383인 南宮南屯司馬에 102인 (北)宮

門蒼龍司馬에 40인 玄武司馬에 38인 北屯司馬에 38인 北宮朱爵司馬

에 124인 東明司馬에 180인 朔平司馬에 117인의 衛士가 소속되어 있

다 이는 후한의 사정을 기록한 것인데 그 총합이 2637인이다 전한에

비해 그 員數가 급감한 것은 광무제의 부역 경감정책과에 의한 것이라

하겠고29) 소수지만 그 員數가 규정되어 있다는 것은 후한에서 代役制

내지 雇傭制로 대체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전과 같은 上番制가

시행되었음을 말해준다 후한에서 正卒 및 군현의 상비군제가 온전히

사라진 것이 아닌 것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후한의 2637명의

員數는 전한에 비해 대략 15 정도 되는데 전한의 사정을 기준으로 한

다 하더라도 군현의 正卒은 평생 1회만 당번이 되어 上番하더라도 중

도관의 衛士 給事가 충분히 운영될 수 있다 위의 lt윤만한간gt에서 전

체 38현읍후국 가운데 그 해에 費邑의 正卒 만이 상번하고 있고 당시

郡別로 상번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동해군이 매년 상번의 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각 正卒은 38년에 1회만 상번하면 된다 물론 군별 현

읍후국의 수가 다르기 때문에 그 回次의 수도 다르고 현읍후국별 正

卒의 수에 따라 1개 이상의 현읍후국이 함께 동원된 경우도 충분히 있

을 수 있다 그러나 각 군의 현읍후국 수가 보통 20개는 넘는다 게다

가 費邑의 正卒도 몇 개 조로 나뉘어 순차로 상번하는 것이라던가 각

郡도 매년 상번이 아니라 몇 년 만에 순번이 돌아오는 체제라면 각 正

卒의 중도관 衛士 복무는 아무리 많아도 일생에 1회를 넘기 어렵다

앞에 든 漢舊儀의 民年二十三爲正 一歲以爲衛士 는 곧 그러한 사

정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일생 1회의 복무형태는 胥徒의

29) 濱口重國은 광무제의 경감책과 아울러 虎賁 羽林 羽林左右騎 五校尉의 軍이

警備에 추가되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위의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

隋唐史の硏究(上)) p283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1평생 내지 세습되는 면과(후술) 다르지만 일반의 役 대상자에서 선발

되어 중도관에 給事한다는 면에서는 공통이다 그런데 전한에서 lsquo父死

子代rsquo였던 중앙군은 羽林孤兒 뿐이었지만 후한에서 虎賁 羽林 羽林左

右騎 五營士의 중앙군에까지 확대되었다고 한 濱口重國의 지적이 있

다 그에 의하면 후한에서 중앙군단의 세습화와 함께 바로 지방에 特

設된 군단의 세습화도 이루어지면서 魏晋시기 兵民分離의 前段을 이루

게 되었다고 한다30)후한 후기 특히 羌의 侵寇 이후 郡에 都尉를 설치

하고 全民을 징병대상으로 삼아 상비의 郡兵을 다시 설치하고 있으

며31) 여러 출신 성원을 규합한 병단이 私屬이 되기도 하고 국가의 군

단이 되기도 하며 部曲 내지 그와 같은 류의 세습 병단화 하는 과정

에 대해서는 필자도 일견을 피력한 바 있다32)따라서 징병제에 의한

正卒의 상비군 운영이 폐지된 이후 15 수준으로 급감한 정졸의 衛士

가 上番하고 있었지만 이 군단 또한 후한 중기 이후 전란시기가 되면

서 世兵化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胥徒의 세습과 후한 후기에

활동하였던 鄭玄 당시 衛士의 세습화는 일치하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鄭玄이 말한 衛士는 한초의 사정이 아니라 그가 활동하였던 후한 후기

의 사정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鄭玄이 漢의 衛士 上番制에 의거하여 주례의 胥徒制를 해석한 것

은 양자의 해명에 큰 도움을 준다 상술한 바에 의하면 몇 가지 면에

서 양자가 일치하는 점이 대체로 인정된 셈이지만 胥徒가 거의 모든

관부에 설치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漢代의 衛士는 광록훈이나 衛尉

제사 守陵등 일부 한정된 관부에 설치되어 있다 또한 주례의 胥徒

가 士 이상의 신분과 마찬가지로 代耕의 봉록으로써 농지를 받고 있는

봉록자라는 면은 지방에서 상경하여 1년의 기간만 한시적으로 복무하

는 衛士의 경우와는 자못 어울리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衛

士는 上番者로 충당되지만 일단 관부별로 員數가 규정된 員吏로서 복

30) 濱口重國 앞의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p285

31) 濱口重國 光武帝の軍備縮小とその影響 (秦漢隋唐史の硏究(上)) p30832) 박건주 한대의 지방 상비군과 部曲의 推移 (동양사학연구 118 20123)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2무하게 되기 때문에 일부는 胥徒처럼 員吏로서 수년 이상을 관부에 居

하는 어느 정도 전문화 한 衛士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鄭玄의 활

동 시기와 큰 차이가 없는 lt長沙走馬樓吳簡(이하 lt吳簡gt으로 약칭)gt

領二年四家衛士田漆十五畝 畝收限米二斛 合爲吳平斛米一百五十斛

(5-1669)에 의하면 4家의 衛士가 限田75畝 佃作에 대한 租로 畝當 限

米2斛을 납부하고 있다 lt오간gt의 限田에 대해 여러 異說이 있지만

(후술) 그 佃作者와 限米 납부자의 계층에 수십 종의 吏員들이 포함되

어 있는 것에 의하면(후술) 衛士도 그러한 吏員으로서 限田이 지급된

것으로 보인다 단지 限田을 佃作케 한 것이 吏員에 대한 경작의 부과

(경작 노동력의 징발)를 뜻하는 것인지 혜택의 수여를 뜻하는 것인지

는 아직 분명치 않지만 于振波의 분석과 같이 畝當 限米2斛의 징수는

대단히 과중한 액수인 까닭에33) 受惠라기 보다는 경작 노동력의 징발

내지 課役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祿田의 의미로 보기

어렵지만 당시 吏職의 賤役化 현상을 고려하면 그러한 시대적 여건 하

에서 實益이 거의 없는 祿田으로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어쨌

든 후한말 이래 小吏 내지 吏戶와 병사층의 세습화 진전을 고려한다면

어떠한 방식이든 그 가족의 생계를 위한 봉록의 지급이 있었을 가능성

이 더욱 커진다

이상에서 검토한 몇 가지 면에서 보면 府史와 胥徒 중에 후자 만

lsquo給徭役rsquo에 의거한 복무라는 점 등에서 다른 계층이지만 庶民在官者

로서 함께 칭해질 수 있는 층이었다고 본다 무엇보다 胥徒가 각각 제

8위와 제9위의 在官者 서열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동시에 府史는 모두 官長으로부터 선발되고 辟除 임용된 자들인데 비

해 胥徒는 일반의 요역의무를 대체하여 官에서 給事中인 계층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胥徒가 lsquo在官者rsquo로 칭해지는 이유는 관부 내에 거

처하면서 노동을 통하여 잡다한 庶事를 직접 처리하고 있으며 국가로

33) 于振波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中國社會科學院硏究生員學報 2004

-1) p122 限米 납부액의 과중성에 의거해서 限米 납부자는 屯田노동자 限米

는 屯田의 租稅라고 본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3부터 代耕의 祿田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관부의 제반 업무는 각 업무

分司 말단에 속한 胥徒의 노역에 의해 완수될 수 있다 이들은 노역

징발 대상자인 徒 중에서 재능 등의 명목으로 선발된 자들이고 그 중

에서도 才智가 있는 자가 胥이다 이들은 선임자 내지 연장자의 지휘

감독 아래 각 관서의 노역 업무와 勞役者 징발 업무 등으로 奉公한다

이것이 胥徒의 在官者로서의 職事이다 胥徒의 職事는 어디까지나 노

동이 전제되는 勞役이며 일반민의 요역의무에 대신하여 관부의 職에

給事하는 까닭에 職役이라 할 수 있고 官長의 선발로 辟除된 府史는

정식의 官員으로서 奉公하는 것이고 給徭役 에 대신하여 복무하는

것이 아닌 까닭에 胥徒의 職役과 구분하여 그 職을 職官이라 할 수 있

다 그 上級인 命官도 물론 職官이다 職官의 기본 요건은 그 官職에

任職인 상태가 그대로 王命을 받들어 奉公 중인 것을 뜻하는 까닭에

이미 王命을 수행중인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체로 일반 서민

의 기본 요역에서 면제된다 단지 면제의 세부 규정에 의하면 役의 종

류와 신분의 차등에 따라 그 면제 대상의 범위가 구분된다 한편 전쟁

에 참전하는 의무는 면제되지 않는다 모든 官吏는 유사시 종군해야

한다 官人이 본래 戰士層인 國人 출신에서 나온 때문이다 일반 서민

은 매년 일정 기간 동안 만 국가의 命을 받아 노역에 징발되어 복역하

는 까닭에 그 생업은 징발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시적인 노역이 아니라

그들이 부여받은 職인 恒常의 耕作奉公에 있다 職官은 그 복무를 통

해 생활이 영위되지만 일반 서민이 징발되어 이행하는 노역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無償이다

官職앞에 인용한 宰夫8職에 대한 賈疏의 끝 부분에 周禮 위 아래

의 글에 胥가 있으면 반드시 徒가 있는 것은 胥가 什長인 까닭이다

鱉人과 臘人의 類는 徒만 있고 胥가 없는 것은 徒만 있으면 충분하여

지휘자(長師)를 둘(빌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食醫의 類에는 胥徒가

모두 없는 것은 그 官만의 行事(업무처리)로도 충분하여 胥徒의 도움

을 빌리지 않는 까닭이다 고34) 하였는데 胥와 徒가 모두 설치되지 않

은 部署는 그 官만의 업무처리만으로 충분한 까닭이라 하였으니 바로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4府史까지의 屬吏를 官으로 한정한 것이다 즉 胥徒는 官에서 복무하고

있지만 官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庶民이고 庶民在官者 이며 그들의

복무는 職官이 아니고 職役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들도 그 職役으

로 생업을 유지하는 까닭에 職官과 동일성을 지닌다 주례에 의하는

한 胥徒가 일시적으로 복무하는 형태는 아닌 듯 하다 무엇보다도 그

들에게 祿田이 지급되고 있기 때문에 매년 혹은 매월 교체되는 요역

형태의 근무는 아닐 것이다 또한 각 분야별로 상당한 전문 지식과 숙

련도가 요구되는 업무 처리상 단기간 교체되는 근무형태를 취하였을

것 같지도 않다

이렇게 볼 때 胥徒가 官에서 일반 관리와 마찬가지로 계속적으로 근

무하면서도 그 근무를 lsquo給徭役rsquo의 代替로 본 주석이 옳다면 아무래도

胥徒는 신분제사회에서 官이 될 수 없는 자 또는 現任의 官과는 엄밀

히 구분되는 신분이었던 까닭에 그 직무 또한 (일반 서민의) 노역의

의미로 인지되고 평가된 것이 아닐까 한다 漢代사회의 신분구조는 漢

家의 주인인 天子가 그의 家人인 일반 民庶를 직접 장악하는 구조가

있고 동시에 漢家로부터 독립된 개별의 士族이 각각 lsquo家rsquo의 주인으로

서 천자와 主客의 관계가 아직 유지되는 체제가 병존하는 二元의 구조

로 되어 있다고 본 濱口重國의 견해가 있다35)이러한 입장을 발전시켜

漢帝國은 황제가 인민을 인두적으로 지배하는 lsquo齊民制rsquo와 천자가 lsquo家rsquo를

非人頭的으로 지배하는 家父長制的 관계로서의 lsquo家産制rsquo라는 이중구조

로 되어 있다고 본 好並隆司의 견해도 있다36) 그리고 이러한 이중성

의 사회구조를 公과 私 君臣관계의 면에서 진전시킨 尾形 勇은 그 臣

이 되는 층을 仕宦者와 從役者로 나누고 있다37) 위의 설들은 모두 한

34) 周禮 上下文有胥必有徒胥爲什長故也 鳖人腊人之類空有徒無胥

者得徒则足不假長師故也 食醫之類胥徒并無者以其專官行事不假胥徒

35) 濱口重國 唐王朝の賤人制度 主篇 第六章 第二節 (東洋史硏究會 1966)

36) 好並隆司 前漢帝國の二重構造と時代規定 (歷史學硏究 375 秦漢帝國史

硏究 東京 1978에 재수록)

37) 尾形 勇 漢代における 家人 と君臣關係 (史學雜誌 83-4 1974) pp3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5대의 사정을 말한 것이지만 이러한 이중구조의 신분제 내지 사회구조

는 주례의 관부 구성 체제에 의하면 상위에서 下士 내지 府史까지가

仕宦者에 해당하고 胥徒를 후자 즉 從役者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연원은 이미 周代에 있다 士人 내지 仕宦者는

그 직무로써 奉公하고 從役者는 賦稅役의 부담으로써 奉公한다38)胥徒

가 비록 官에 있는 자이지만 二元구조의 신분제 하에서 士人이 되지

못한 가운데 그 직무는 職官이 되지 못하고 職役에 머무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Ⅲ 職役 담당층의 복무 형태와 봉록 지급의

문제

周代에 lsquo給徭役rsquo의 차원에서 관부에 給事하는 胥徒가 있었다면 후대

의 요역 가운데도 그러한 항목이나 사례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다 또한 胥徒의 직무는 續漢書 輿服志上에 보이는 伍伯辟車

鈴下侍閣門蘭部署街里走卒 등 관부 말단에서 경호導從심

부름侍衛車馬관리 巡邏 등의 賤職에 종사하는 이른바 徒卒의 職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그런데 이들의 役이 民의 일반 요역 의무에 따

라 징발되어 일시적으로 복역하는 것인지 아니면 상술한 胥徒와 같이

庶民在官者 로서 관부의 최말단에서 상시로 근무하며 관부에 의지하

여 생업을 유지하는 下吏로서의 복무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후한서권58 虞詡傳에 永平(후한 明帝期) 章和(章帝期) 중에 州郡이 走卒錢으

로 貧人을 給貸(雇賃金을 지급)하였다 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集解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35

38) 尾形 勇 위의 글 pp28-29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6走卒伍伯之類란 續漢志에 이른다

(車前에) 伍伯은 公은 8인中二千石은 6인千石과 六百石은 모두 4인百石

이하에서 二百石은 모두 2인을 둔다 黃綬(4백석에서 2백석의 관리)의 武官에

는 伍伯을 따르게 하고 文官에는 辟車鈴下侍閤門闌部署街(里)走卒

을 따르게 하는데 모두 程品의 多少가 있으며 맡은 바 직무에 따라 領率하게

한다 (驛馬는 30里에 하나를 설치한다) (卒은) 모두 적색 두건과 진홍색 소창

옷을 착용한다

즉 지금 鞭杖을 잡고 따르는 자들이다 이는 錢이 있는 자로 하여금 그 (役

에) 대한 資錢을 내게 하여 몸으로 직접 노역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39)

〔 ( ) 내의 글은 결락된 부분을 輿服志 원문에서 보완함〕

인용된 속한지輿服志의 기사는 公卿 以下 縣의 三百石 官長에 이르

기까지 이들을 導從하는 下吏들의 配屬 員數를 규정한 것이다 열거된

役職들은 모두 300석 이상 관원을 導從하는 役員들인데 후한 明帝 章

帝期에 일부 지역에서 이 役職의 명목으로 走卒錢을 징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記事는 順帝 연간에 尙書僕射 虞詡가 上言한 것인데 당시

長吏 2천석관들이 謫罰者에게 貧人 구호를 위한 lsquo義錢rsquo의 명목으로 贖

錢을 강요하고 守令은 이를 빌미로 聚斂함에 順帝 원년 이래 백만전

이상을 受取한 長吏가 끊이지 않고 있는 사정을 진언한 가운데 그 이

전 永平 章和 연간에 있었던 사실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즉 州郡에

서 走卒錢을 징수하여 그 역을 면제시켜주고 대신 빈궁한 자를 그

役에 고용하여 그 錢을 雇賃으로 지급해주는 일이 있었다 당시 司空

이 이 事案을 탄핵하니 해당 州郡縣이 모두 坐되어 免黜되었었다 그

때의 전례와 마찬가지로 당시 임시로 사용하였던 제도(走卒錢 징수와

雇賃 지불)를 蠲制할 것을( 蠲制權制 ) 주청하였고 이에 조서를 내려

州郡을 切責함으로써 그러한 贖錢 강요가 이로부터 그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40) 따라서 走卒錢 징수와 導從役의 雇傭 방식 운영은 후한

39) ldquo卽今行鞭杖者也 此言錢者令其出資錢 不役其身也 走卒伍伯之類也 續漢

志曰 (車前)伍伯 公八人中二千石六人千石六百石皆四人自百石以下至二

百石皆二人 黃綬 武官 伍伯 文官 辟車鈴下侍閤門闌部署街

(里)走卒 皆有程品多少 隨所典領率 (驛馬三十里一置 卒)皆赤幘絳褠 卽

今行鞭杖者也 此言錢者令其出資錢 不役其身也

40) 후한서 권58 虞詡傳에 是時長吏二千石聽百姓謫罰者輸贖 號為lsquo義錢rsquo 託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7明帝 章帝期에 한정되어 시행된 것으로 모두 不法이었고 虞詡의 順帝

시기에는 시행되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渡邊信一郞에

의하면 이들은 秦漢에서 관부의 최하층으로서 관부에서 필요로 하는

導從役 등 일상적인 노역에 복무하며 民으로부터 강제 징발되어 복무

하였는데 후한 초에 이미 走卒錢이 징수되고 특정 임무는 면역전을

재원으로 한 고용노동으로 전환되었다고 한다41) 그러나 章帝 이후 50

여년이 지난 順帝期에 이르기까지 고용 형태의 운영이 반복되지 않고

있는 것에 의하면 고용 노동으로의 진전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

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어쨌든 導從役의 고용 방식 운영이 不法

이었다 함은 그것이 본래 징발 형식으로 운영되는 것이었음을 말해준

다 錢이 있는 자로부터 走卒錢을 받고 이 재원으로 빈한한 자를 고용

하여 雇賃을 지급하는 不法을 행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어지는 지적에

서 順帝 때 지방관들의 贖錢 강요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관리들의 私利

도모에 의한 것이다 또한 그 의무자에 富者가 있어 그 實役을 피하고

자 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導從役과 같은 下吏의 봉록은 매

우 적기 때문에 여타의 수익이 있다면 그 봉록에 꼭 의지할 필요는 없

었을 것이다 이들이 비록 관부의 員吏이고 그 吏職이 생업이 되는 것

이지만 최말단의 賤役 내지 厮役으로서 천대받는 면이 많았을 것이다

때문에 이 職役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도 많았을 것이다

예기王制에 무릇 전문기능으로 事上(奉公)하는 자가 祝史

射御醫卜 및 百工이다 무릇 전문기능으로 事上하는 자는 다른

일을 해서는 안 되며(不貳事) 근무하는 관서를 옮겨서도 안 된다(不移

官) 出鄕하면 士와 抗禮하지 못하며 家에서 仕하는 자도 出鄕하면 士

와 抗禮하지 못한다 고42) 하였다 즉 士의 신분이 아닌 일반서민 출신

為貧人儲 而守令因以聚斂 詡上疏曰 ldquo元年以來 貧百姓章言長吏受取百萬以上

者 匈匈不絕 謫罰吏人至數千萬 而三公刺史少所舉奏 尋永平章和中 州郡

以走卒錢給貸貧人 司空劾案 州及郡縣皆坐免黜 今宜遵前典 蠲除權制 於是詔

書下詡章 切責州郡 謫罰輸贖自此而止rdquo

41) 渡邊信一郞 中國古代の財政と國家 (汲古書院 2010 第三章) p128

42) 禮記王制 (十三經注疏 中文出版社) p2905에 凡執技以事上者 祝史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8이 여러 기능직의 吏職에 복무하면서 함께 관부에 있지만 본 소속의

직장에서 다른 직장으로 옮길 수도 없고 신분상 士와 대등한 위치에

처하지 못하며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또한

府史 이상의 職官과 구분되는 胥徒의 특성과 상통한다

속한서 백관지2에 射聲校尉一人 比二千石 의 本注에 服虔曰

工射이다 어두운데서 소리를 듣고 활을 쏘아 명중시키는 까닭에 이름

하였다(工射也 冥寞中聞聲則射中之 故以為名 고 하였는데 여기서

工射 는 射도 工 의 한 분야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은 그 기능으로

奉公하는 것이 그 職分이고 생업이기도 하며 다른 직종이나 직업을

갖을 수 없고 옮길 수도 없는 자들이다( 不貳事 不移官 ) 이들은 그

職能으로 생업을 유지하지만43) lsquo父死子代rsquo 의 世業으로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고 賤職인 까닭에 여기에서 벗어나 신분상승을 바라는 경향이

있게 된다 이를테면 三國魏의 黃朗은 그 부친이 縣卒로서 鈴下 伍伯

의 職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抗志 遊學하여 현령을

거쳐 군태수에 이르렀는데 부친의 일을 생각하여 屬下의 鈴下 伍伯을

부를 때 鈴下 伍伯이라 부르지 않고 항상 姓字로 불렀다 비록 분노

하였을 때도 鈴下 伍伯으로 부르지 않았다44)

그런데 導從役 복무자는 징발되어 관부 내에서 복역하는 인원 중에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전체 복역 대상자 가운데 극히 소수에 불과하

다 특히 黃綬의 武官을 導從하는 伍伯 등의 직무가 護衛와 侍衛 警備

등이 위주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무술과 용력을 갖춘 이들로 선발된

그룹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黃綬 이상의 문무관에 소속되어 그 員數

射御醫卜 及百工 凡執技以事上者 不貳事 不移官 出鄕不與士齒 仕於

家者 出鄕不與士齒

43) 禮記 王制에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百工 各以其器食之 (注에 器 能也)

44) 三國志 권23 裴潛傳 所引 魏略에 黃朗字文達 沛郡人也 爲人弘通有性

實 父爲本縣卒 朗感其如此 抗志遊學 由是爲方國及其郡士大夫所禮異 特與東

平右姓王惠陽爲碩交 惠陽親拜朗母於床下 朗始仕黃初中 爲長吏 遷長安令 會

喪母不赴 復爲魏令 遷襄城典農中郎將涿郡太守 以明帝時疾病卒 始朗爲君長

自以父故 常忌不呼鈴下伍伯 而呼其姓字 至於忿怒 亦終不言 朗旣仕至二千石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9가 정해진 것에 의하면 庶民在官者 로서의 胥徒에 상당한다 봉록이

지급되는 일자리이며 민의 공동의무인 일반요역에 대신하여 복무하는

것인 만큼 면역전의 授受 행위는 不法이다

상술한 輿服志에 각 300석 이상의 官員 당 이들의 배당 員數가 규

정되어 있는 것에 의하면 이들도 분명히 관부의 한 구성원들이다 속한서 백관지 注引의 漢官에는 官長 내지 命官級 屬下의 員吏 員數

및 秩祿을 기재하고 있다 이를테면 속한서 백관2에 衛尉 卿一人

中二千石 本注曰 掌宮門衛士 宮中徼循事 丞一人 比千石 이라 하였

고 注引에 漢官曰「員吏四十一人 其九人四科 二人二百石 文學三人

百石 十二人斗食 二人佐 十二人學事 一人官醫 衛士六十人」이라 하

였다 이 가운데 百石까지는 봉록 지급이 명시되어 있지만 그 이하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봉록이 전혀 지급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斗食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斗升으로 계산되는

日數 계산에 의한 연봉액이 정해져 있다 百官受奉例의 注 所引 漢書音義에 斗食祿 日以斗爲計 라 하였고 한서 百官表上에 漢官名

秩簿에 이르길 斗食은 月俸 11斛 佐史는 월봉 8斛이다 一說에 斗食

이란 연봉이 百石에 이르지 못하여 日當으로 계산해서 1斗2升을 食하

는 까닭에 斗食이라 한다 고 하였다 속한서 백관5의 百官受奉例에

서는 百石이 月 16斛이고 斗食 이하는 위와 같다 또 墨子 雜守篇에

斗食은 1년에 36石이다 參食이면 1년에 24石이고 四食이면 1년에 18

石 五食이면 1년에 14石4斗 六食이면 1년에 12石이다 斗食은 5升을

食하고 參食은 3升小半을 五食은 2升 六食은 1升大半을 食한다 하루

에 2회 食한다 고 한데서 알 수 있다 斗食 은 1食에 5升 하루에 2

食이니 매일 1斗를 받아 1년 360일에 총 36石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

參食 은 1食에 3과 13升 즉 13斗를 받아 1일에 23斗가 되고 1년에

24石을 받는다 그 이하의 四食에서 六食까지는 斗食 이하에 열거된

下吏의 지급액 규정일 것이다

閻步克에 의하면45) 周代에서는 士 이상에게 祿田을 지급하여 그

수익을 食하게 하는 것으로 연봉을 지급하는 형태였는데 하급관리나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0工醫師 등 기술직 및 兵員에게는 月 단위로 지급하는 이른바 稍食

형태로 운영하였으며 나중에 증액 고정화 되고 아울러 錢으로 지불하

게 됨으로써 月俸의 秩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稍食 이란 주례天官

宮正에 宮正이란 왕궁의 戒令糾禁을 맡는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그 출입을 검찰

하고 그 稍食을 균등히 하고 그 淫怠하고 奇邪한 民을 제거하고 그

什伍를 모아 道義를 가르친다 月이 끝나면 그 稍食을 會計하고 1년이

끝나면 그 (吏職의) 行事를 검열한다 라46) 하였는데 이 稍食에 대해

鄭司農은 禄廪 疏는 宫中官府 등의 月禄 이라 하였다 즉 稍食은

月俸인 셈인데 이를 하급관리의 月俸이라 한 것은 國語晋語4에 公

은 貢을 食하고 대부는 읍을 食하며 士는 田(公田)을 食한다 庶人은

力으로 食하고 工商은 官(官으로부터 받은 田)을 食하며 皁隸(吏에

속한 徒隸)는 職을 食하고(각 담당 職의 大小에 따라 食祿) 官宰(大夫

의 家臣)는 加(大夫의 家臣)를 食한다 에서 公 大夫 士까지는 國 邑

田을 봉록으로 받는 까닭에 연봉을 받는 것이 되고 庶人 이하는 관부

에 給事한 力(勞役) 등을 계산하여 지급 받는 까닭에 월봉이라는 것이

다 또 주례 夏官 校人의 校人은 王馬之政을 관장한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馭夫

의 祿과 궁중의 稍食을 균등히 한다 라 하였는데 그 注에 師圉는 府

史 以下다 고 하였다 즉 府史 이하 下吏의 봉록 관련 업무이다 또 주례 天官 醫師에 연말이 되면 그 醫療한 실적을 검사하여 그 食을

정한다 十점 만점이면 上 十에 一을 失하면 次等 十에 二를 失하였

으면 그 次等 十에 四를 失하였으면 下로 한다 하였고 또 방비를

굳건히 하기 위해 성곽 溝池 등의 役事와 守備를 관장하는 掌固는 이

에 복무한 士庶子와 衆庶에 대해 필요한 도구와 財用을 공급해주고 그

稍食을 균등히 한다고 하였다(同 夏官 掌固) 이러한 자료에 의하면 府

史 이하의 下吏에 대해 祿俸 지급의 額이 기술되어 있지 않는 것은 食

邑田이나 百石까지는 年俸의 일정액이 규정되어 있고 이 액수가 월봉

45) 閻步克 從稍食到月俸mdash戰國秦漢祿秩等級制新探 (學術界 20002)46) 宮正 掌王宮之戒令糾禁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幾其出入 均其稍食 去其淫怠與其奇邪之民

會其什伍而敎之道義 月終 則會其稍食 歲終 則會其行事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1으로 나뉘어 지급되는 것과는 달리 그 이하의 吏는 月別 給事한 日數

나 실적을 계산하여 지급하는 月俸 형태였고 그 총합이 百石 이하였

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앞에 든 百官名秩表나 묵자의 기사는 그

러한 사정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府史 이하인 胥徒나 그 직급에 상당

하는 속한서 백관지의 각 관부별 官長 屬下의 員吏로서 有秩 아래에

나열된 직급들도 그 근무일수나 실적에 따라 봉록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有秩의 官은 百石 이상의 年俸이 지급되는 下限의 관리

를 가리키며 佐史 이하의 월봉 수입자에 대비하여 쓰이는 용어이다

근래 楊振紅 廣懶薰雄 宮宅 潔 등은 佐史 이하의 下吏에는 1개

월을 단위로 윤번 근무하는 자들이 있어 이들은 그 이름 앞에 更 이

붙고 이에 대비하여 常勤하는 자들은 冗 이 붙어 구분되었다 하고

그 내역과 성격을 고찰하였다47)사실 후대의 冗 내지 冗官 이 보통

散官 의 뜻이었던 것에 비해 선진에서 진한 시기의 여러 자료에 보이

는 冗 은 위의 연구들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更 에 대한 相對로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lt운몽진간gt 秦律十八種 工人程에 冗

隸妾 2인은 工 1인에 當하고 更隸妾 4인은 工 1인에 당한다 小隸臣妾

으로서 可使者 5인은 工 1인에 당한다(冗隸妾二人當工一人 更隸妾四

人當工一人 小隸臣妾可使者五人當工一人) 에서48) 冗隸妾은 更隸妾에

비해 2배의 우대를 받고 있으며 lt이년율령gt史律에 大祝이 祝을 시

험해보아 祝에 뛰어나고 祠事에 밝으면 冗祝으로 삼아 이들을 冗한다

(大祝試祝 善祝 明祠事者 以爲冗祝 冗之) 고 하였는데 이 冗 은 같

은 史律의 祝十四章으로 學童들을 시험해서 능히 7천언 이상을 誦할

수 있어야 祝으로 삼고 5更으로 한다(以祝十四章 試祝學童 能誦七千

言以上者 〔乃得〕爲祝 五更) 에서의 更 과 相對로 위치하고 있다

47) 楊振紅 秦漢簡中的ldquo冗rdquordquo更rdquo餘供役方式middotmiddotmiddot從lt二年律令 史律gt談起 (簡帛硏究 廣西師範大學出版社 2006) 廣懶薰雄 秦漢律令硏究 (汲古書院

20103) pp297-304 宮宅 潔 漢代官僚組織の最下層 - 官 と 民のはざま-

(東方學報 87 2012) pp11-1248) 睡虎地秦墓竹簡 (北京 文物出版社 1978) p74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2또 lt里耶秦簡gt에도 冗戍士五(伍) (⑧666+ ⑧2006)와 更戍(某) (⑧

143 ⑧149 ⑧694)의 對稱 용어가 있다 한편 주례春官 槀人에 外

內朝의 冗食者의 食을 공급해주는 것을 관장한다(掌共外內朝冗食者之

食) 라 하였고 이에 대한 鄭注는 冗食者란 (관부에 밤까지) 머무르며

문서 작업을 하는 것이 마치 지금의 尙書의 屬吏로서 當直하는 者들과

같다(冗食者 謂留治文書 若今尙書之屬 諸直上者) 賈疏는 ldquo(鄭注에

서)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rdquo라 한 것은 또한 漢法을 인용하여 설명한 것이니 차례로 당직

하는데 관부에 留宿하며 (집에) 돌아가지 않는 까닭에 반드시 음식을

제공해야 한다(亦引漢法說之 謂以次當直 留在朝 宿不還 須以食供之)

고 해석하였다 여기서의 冗 은 夜勤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일

상 정규의 일을 넘어선다는 뜻을 지닌다 冗食 은 야근하는 관리에게

제공되는 음식이기 때문에 정규의 음식 지급에 추가되는 것을 의미한

다 전한 成帝 河平 연간에 수해를 입은 군국을 구휼하면서 그 지역민

을 다른 군국으로 피신시키고 그 곳에서 冗食케 하라 고 하였는데49)

文穎은 冗이란 散이다 廩食을 散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遊離되어) 정착하지 못하는 戶를 役事시켜 일자리를 주는 것이다(冗

散也 散廩食使生活 不占著戶給役使也) 로 해석하였고 如淳은 離散

된 자들에게 給食하고 관부는 그 임금을 지불한 것이다( 散著人間給

食之 官償其直也 )고 해석하였다 즉 수해로 유민이 된 자들에게 給

食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하고 아울러 役事의 일자리를 주어 그 임금

을 지불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석자들이 冗 을 散 의 뜻으

로 해석한 것은 국가의 재정을 풀어서 지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國錢의

lsquo散布rsquo라는 뜻으로 본 것이다 이 또한 정규의 재정 지출을 넘어선 추

가의 지출이므로 실은 위의 사례들과 같은 뜻이 된다 또 한서권24

하 식화지하에 또한 周官의 稅民 제도에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民이 떠돌아다니면서

일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夫布一匹을 납부하게 하며 布를 납부할 수

49) 漢書 卷10 成帝紀 河平4년조에 遣光祿大夫博士嘉等十一人行舉瀕河之郡水

所毀傷困乏不能自存者 財振貸 其爲水所流壓死 不能自葬 令郡國給槥櫝葬埋

已葬者與錢 人二千 避水它郡國 在所冗食之 謹遇以文理 無令失職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3없는 자에게는 縣官에서 冗作케 하고 이들에게 衣食을 제공한다 고50)

하였다 여기서 冗作 이란 정규의 요역 부과 외에 징벌의 뜻으로 역

을 추가하여 부과한다는 의미이다

또 lt운몽진율gt 司空에 冗邊 이 있다

백성에게 모친 및 동생이 있어 隸妾이 되었는데 謫罪가 아니고 冗邊5

歲에 복역하되 근무 기간을 無償으로 하고 1인을 면하여 庶人으로 하고

자 한다면 이를 허용해준다(百姓有母及同牲(生)爲隸妾 非適(謫)罪殹(也)

而欲爲冗邊五歲 無賞(償)興日 以免一人爲庶人 許之) (司空 p91)

이 冗邊五歲 도 규정된 정규 戍邊役의 額 외로 추가된 役이란 뜻의

용어이다 그래서 이 또한 위의 사례들과 마찬가지의 뜻이다 이렇게

冗 에는 更 에 相對한 지칭으로 更 에 복무하는 자들에 비해 전문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갖춘 자들이거나 기타 사유로 정규의 額을 넘

어서는 복무를 하는 것 또는 그 役者 또는 職名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즉 정규 일반의 更 방식의 근무 額(日數)에 비해 담당

분야의 뛰어난 능력이나 징벌 등 기타 사유로 더 많은 근무를 추가로

하게 되는 자들의 職을 冗 이라 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러한 冗 을 쓰는 데는 국가의 재정 지출도 추가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국가재정의 추가 지출의 뜻으로서 散(散布)

이라는 뜻이 되어 후대 冗官==散官의 칭이 생긴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해석된다면 그간 충분히 해석되지 못한 lt운몽진률gt廏苑

律에 연간의 養牛 실적 평가에서 下等을 받은 宂皂에게 2개월의 복무

기간을 추가하는 벌을 내린다는 律文에 보이는 宂皂51) 그리고 同 秦

律雜抄 屯表律에 나오는 lsquo冗募rsquo도52) 위와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50) 又以周官稅民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民浮游無事 出夫布一匹 其不能出布者 冗作縣官 衣食

51) lt雲夢秦律gt p30 廏苑律의 율문 卒歲 以正月大課之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殿者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罰

冗皂者二月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52) lt雲夢秦律gt p145 秦律雜抄의 율문 冗募歸 辭曰日已備 致未來 不如辭

貲日四月居邊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4것이다 廣懶薰雄은 更 을 非常勤 冗 을 常勤의 뜻으로 요약하였는

데53) 그러한 일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는 更 이 본래 규정된

交代근무라면 冗 은 본래의 규정액을 넘어선 근무를 뜻하는 까닭에

그러한 해석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설문宀部에 冗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人在屋下 無田事也 라 하였는데 無田事 로서의 冗의 뜻도 更

이 당번으로 給事하는 기간을 제외하면 田事에 있어야 하는 것과는 달

리 冗은 비당번인 경우에도 관부에서 給事하는데서 칭해진 것이라 하

겠다

예기중용에 忠信인 자에게 봉록을 두텁게 주는 것은 士를 勸함이

고 때로(일시적으로) 使役시키되 賦斂을 가볍게 하는 것은 백성을 勸

하기 때문이며 日用으로 근무시키되 그 근무기간과 성과를 계산하여

급료(廩)를 지급하여 그 근무에 합당하게 보상해주는 것은 百工을 권

하기 위함이다(忠信重祿 所以勸士也 時使薄斂 所以勸百姓也 日省月

試 旣廩稱事 所以勸百工也) 라 하였다 여기서 忠信 이란 禮記禮器에 忠信 禮之本也 라 하였고 여기서는 이를 修學하고 실행할 수

있는 사대부 내지 命官層을 가리키고 있다 百工에 대해 日省月試

한다 함은 근무한 日數와 그 성과를 월 단위로 계산한다는 것이다 注

에서 旣廩稱事 의 旣 를 lsquo餼rsquo로 해석하고 lsquo餼廩rsquo은 稍食 이라 하였

다54) 여기에서 일반 백성에게 때로(일시적으로) 사역시킨다는 時使

가 곧 更 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진한 시기 更徭制의 운영에

서 충분히 입증된다 宮宅 潔은 年俸이 있는 것이 有秩인데 그 最下가

百石이며 연봉이 없고 본래 日食과 月食으로 지급되는 등급을 斗食이

라고 한다 하였다55) 그가 말한 斗食은 백관표에 나열된 斗食과 그 이

하의 여리 吏職을 포함한 것이다 그런데 일반 백성에게 更役이 부과

되고 그들에게 동원된 기간 동안 당연히 매일의 給食은 지원되겠지만

그 일반 요역으로서의 更役에 대한 日當의 보수가 지급된 것은 아닐

53) 廣懶薰雄 앞의 글 p304

54) 注에 日省月試 考校其成功也 lsquo旣rsquo讀爲餼 餼廩 稍食也

55) 宮宅 潔 앞의 글 p39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5것이다 그 일반 요역은 일반 백성의 기본 의무사항인 까닭이다 반면

百工의 근무일수와 성과액에 대해 稍食 (日俸 내지 月俸)이 지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매 끼니의 급식이 아니라 工役에 대한 보수 내

지 給料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근무일수라든가 성과액을 계산

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기서의 百工은 관부의

員吏에 속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관부에 속하여 매

끼니의 식사 뿐 아니라 工役한 일수와 성과량에 따라 봉록이 지급된다

는 것이다 그래서 봉록 지급은 錢이나 곡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반

면 전기한 국어晋語4 文公修內政納襄王 章에 公食貢 大夫食邑 士

食田 庶人食力 工商食官 皁隸食職 官宰食加 에서 工商食官 의 工

商은 모두 관부의 員吏에 속한 자들인데 그 注에 옛날에는 田을 주는

것으로 祿俸을 제정하였다 관부에서 주는 廩이란 곧 관부에서 田을

받는 것이니 후세에 錢粟을 주는 것으로 祿俸을 제정한 것과 같지 않

다(古者以田制祿 官廩之者 卽受田於官 非如後世之以錢粟制祿也) 고56)

하였다 또 한서권24식화지상에 士工商이 田을 받는 것은 5口가 받

는 것이 되어야 농부1인이 받는 것에 當한다(士工商家受田 五口乃當

農夫一人) 고 하였다 즉 百工과 商賈는 그 직무에 따라 俸祿을 받는

데 후대와 같이 錢粟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田으로 받으며 그 액수는

일반 농민의 15이라는 것이다 이는 전술한 주례의 胥徒가 최하품

의 田 1百畝를 俸祿으로 받는 것과 lsquo以田制祿rsquo이라는 면에서 일치한다

그리고 lsquo以田制祿rsquo이 후대에 lsquo以錢粟制祿rsquo으로 변천 된 것은 秦漢의 사

례를 통해 분명하다 어쨌든 관부의 員吏인 百工과 商賈에게 일반 백

성의 更役과는 달리 祿田 또는 월봉 형태의 錢粟 지급이 행해진 것이

라 하겠다 또한 工商이 일반 요역 대신에 전문기능인으로서의 工役과

관부 소요 물품의 調達役의 職分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이 또한 職

役에 해당하는 셈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관부의 員吏이면서 斗食 보다 下位에 위치하여 稍

56) 國語正義(下冊) (董增齡 撰 巴蜀書社 1985) pp815-6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6食 내지 月俸을 받는 여러 導從役 祝醫工商 등의 役은 그 職分

의 役 즉 職役으로 奉公한다 그런데 후한 초에 이 職役의 면역전으로

서 走卒錢을 징수하고 그 재원으로 빈민을 고용한 것이 不法이었으며

수십 년 이어지다가 금지되고 違法한 관료들이 처벌받고 있는 것에

의하면 이 役들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戶가 지정되어 있어 여타의 일반

戶가 대신하여 맡을 수 없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은 導

從役 등의 담당자는 일반서민이되 그 중에서 특별히 선발된 층으로 구

성되어 전문의 분야를 세습하며 의무로 담당하는 하나의 신분층으로

형성되어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그 役은 하나의 身分役이기

도 하였던 셈이다 또한 그 代役錢으로서 走卒錢 징수 및 雇傭 방식이

나오게 된 것은 그 역의 담당층 가운데 錢으로 實役을 피할 수 있는

부유충이 형성되었고 후한 前期에 전통의 身分制가 느슨해진 여건에

서 身分役의 근본 형태가 유지되지 못하고 일탈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속한서백관3에 執金吾의 속관 중에 화려 장려한 복장

과 장식으로 황제의 행차를 호위 수종하는 騎士로서 緹騎二百人이 있

는데57) 本注에 無秩 比吏食奉 이라 하였다 즉 吏가 아니지만 吏의

대우를 받아 봉록을 받는 계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下吏에

들지 못하지만 봉록을 받는 면에서는 동일한 계층이다

한편 앞에 든 國語 晋語4에서 工商食官 에 이어 下記된 皁隸(吏

에 下屬한 徒隸)食職 이 있다 이 皁隸 계층은 지금까지 검토한 庶民

在官者 로서의 胥徒導從役 담당자 및 樂祝醫衛士工商 등

보다 下位 내지 그 下屬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그 담당 신분과 그 役의 성격에 대해 검토한다

Ⅳ 下層 員吏의 役과 徒隸層의 役

57) 당 조목의 注 所引 漢官曰 執金吾緹騎二百人 [持戟]五百二十人 輿服導從

光滿道路 群僚之中 斯最壯矣 世祖歎曰 ldquo仕宦當作執金吾rdquo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7

앞에서 검토한 관부 구성의 최말단에 위치한 주례에서의 胥徒와

춘추진한 시기의 導從役 담당자 및 樂祝醫衛士工商 등의 下

吏層 외에 그 下屬으로 보이는 皁隸가 있다 앞에 든 각 신분에 따른

奉公의 職分을 나열하고 있는 國語晋語4의 記事 皁隸食職 의 注에

皁隸를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라 한 것에 의하면 이 계층은 위에 열거한

여러 下吏에 下屬한 노역자들이라 할 수 있다 胥徒와 導從役 담당자

등은 각각 주례와 漢官 등에 그 員數가 규정된 까닭에 이들은 員

數 규정에 들지 못한 皁隸에 대비해 下層의 員吏로 칭할 수 있다

皁隸가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라 하였으니 곧 관노비 내지 그에 類하는

계층일 것인데 그들이 lsquo職을 食한다rsquo고 한 것은 각 분야의 官署에 分屬

되어 그 職務에 給事함으로써 생업을 삼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皂

隸 牧 圄 僕 등이 후대의 천민이나 隸民이 아니라 일반민이었다

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58)그러한 주장은 이들이 대체로 관부에 給

事하는 계층으로 여러 기사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고 위의 皁隸食

職 은 곧 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관부에 給事

하는 면으로 인해 예속성이 있게 된다는 면이 있다 후술하는 바와 같

이 그들이 일반 서민 출신이면서도 후대에 그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모

두 예속신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통용되는 것은 그러한 관부에의 예속

성이 분명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예속성을 말해주는 것이 또한 職

役의 한 속성이다

한편 國語 晋語4 文公修內政納襄王章에 (晋文公)元年 春에 公(晋

文公)과 부인 嬴氏(秦穆公의 女인 文嬴)가 王城(秦의 地名)에서 돌아올

때 秦伯이 衛士3천인을 納하였는데 실로 기강이 있는 僕들이었다(元年

春 公及夫人嬴氏至自王城 秦伯納衛三千人 實紀綱之僕) 고59) 하였다

秦漢의 衛士 출신과 달리 여기서는 그 출신 신분이 僕인 자들로 구성

58) 黃中業 春秋時期的ldquo皂隸牧圉rdquo屬于平民階層說 (齊魯學刊 阜師院學報) 1984-2 19844) pp69-72

59) 위의 책 pp809-810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8되어 있다 이 당시는 秦 穆公의 지원으로 晋의 文公이 귀국하여 懷公

을 죽이고 즉위한 때인 까닭에 군사 내지 호위부대의 지원이었다 그

衛士 군단의 신분은 皁隸層에 들어가는 僕인데 관부에 給事하는 職分

은 衛士이다 이들의 紀綱이 선 자들이었다고 한 것은 본래 秦에서도

衛士의 職으로 給事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춘추기에 邑數百이나 社

數百의 단위로 국가 사이에 分與되는 일이 자주 있었고 3천인에 이르

는 多數의 전문 집단이 타국에 分與된 것이긴 하지만 일부 전문의 인

력을 分與나 上納 하는 것 또한 당시 종종 일어났던 일이다 어쨌든

그 衛士집단이 모두 僕이었다는 것은 일반민이 아니고 관부에 예속되

는 신분이었음을 말해준다 예속신분으로 궁성을 지키는 衛士로 삼는

것은 주례地官 師氏에서 그 직무 가운데 (師氏는) 그 소속의 四夷

之隸를 거느리고 각기 그 병력으로 왕성의 문밖을 지키는데 복무하며

또한 (행차 때) 앞에서 길 정리를 한다(師其屬帥四夷之隸 各以其兵服

守王之門外 且蹕) 에 이미 보이고 漢武帝 때 제후왕 貴戚의 不服을

다스리기 위해 중앙 내사지역을 감찰하는 司隸校尉와 지방의 刺史에게

중도관의 徒奴 1200인을 보내어 二千石官을 독찰하게 하였는데60) 이

1200인의 徒奴부대는 이후 사예교위 내지 刺史 직속의 상비군단이 되

었고 그 성원은 세습 병사집단의 근간이 되어 牧使 刺史 등 將領下의

公兵이나 私兵으로 활약하였다61) 漢官舊儀 卷上에 漢代 長安에 騎

亭長 79인과 함께 6월 1更의 倉頭盧兒를 給事하게 하였다62)이들 四夷

之隸나 徒奴倉頭盧兒 등은 적군포로이거나 刑徒 계통 출신으로 관부

에 예속된 신분일 것이다 특히 관부에 囚禁된 형도들은 여러 방면의

60) 北堂書鈔設官部 및 漢官儀권2補遺2에 ldquo司隸校尉는 武帝 때 처음 설치되

었다 이후 諸侯王 貴戚이 不服함에 中都 中官의 徒奴千二百人을 (파견해서)

一校尉部刺史에게 속하게 하여 二千石官을 독찰하게 하였다(司隸校尉 武帝初

置 後諸侯王貴戚不服 乃以中都中官徒奴千二百人屬爲一校尉部刺史 督二千石

也)rdquo

61) 이에 대해서는 박건주 한대의 지방상비군과 部曲의 推移 (동양사학연구118 20123) 참조

62) 長安給騎亭長七十人 六月一更倉頭盧兒 (漢官六種 北京 中華書局 1990

9) p3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9노역에 활용되었는데 근래 石岡 浩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刑徒 집단

은 크게 세 부류 내지 등급으로 나누어져 활용되고 대우에 차별이 있

었다고 한다 즉 가장 上位에 있는 司寇는 특정 임무에 복무하는 것이

정해진 형도이며 전택을 소유하여 戶主가 되는 권리(lt二年律令gt

310-316簡) 왕조로부터 사여 받는 권리(同 291-293) 子가 士伍로 복

귀할 수 있는 권리(同 364-365)를 갖는다 다음으로 徒隸 는 특정 관

서에 예속하여 직무를 숙지하였거나 기술에 숙련하여 전문기능자에 동

등한 가치를 지니는 형도 를 지칭하며 그것으로 동일 직장에 계속 근

무하는 까닭에 일반 형도와는 달리 토목공사나 물자운송 등의 노역에

서 제외된다 또한 왕조에 공헌하는 자로서 사여를 받는 대상도 된다

(同 291-293) 즉 그들은 隸臣鬼薪城旦이면서 숙련자 기능자로서

일반 형도보다 우대받는 자들이다 위 양자에 비해 일반 형도는 위의

여러 특혜를 받지 못하며 城旦은 주로 토목사업에 隸臣은 주로 여러

관서의 잡다한 노역에 복역한다63)이는 충분히 수긍되는 견해이다 이

가운데 徒隸는 관부 내 각 分署의 전문 직장에 分屬되어 사역될 것이

기 때문에 전술한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로서의 皁隸가 곧 그들의 주요 부

분이 될 것이다 그 중에 일반 관노비로부터 개인적 재능과 기술로 선

발되어 해당 관서에 給事하는 자들도 포함될 것이다 단지 정규의 전

쟁에 형도를 동원하는 사례가 많은데 그들이 정규의 병사가 된 것은

아니고 군공을 세워 免刑되기 이전에는 그대로 형도인 것과 같이 함께

관부에 給事하고 있다 하더라도 각 신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상의 검토에 의하면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에는 이른바 lsquo吏에 下屬

한 徒隸rsquo로서 食職하는 皁隸집단이 있고 그 구성에는 관노비 뿐 아니

라 적군포로나 관노비 및 형도 출신의 衛士 그리고 刺史 牧使 등의

將領下에 있는 직속 상비군 형도 가운데 司寇 그리고 기능과 숙련으

로 형도 중에서 선발된 職能의 徒隸집단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員

吏이되 下吏인 계층의 복무가 그 신분에 따른 職役인 것과 마찬가지로

63) 石岡 浩 秦漢代の徒隸と司寇 -官署に隸屬する有職刑徒 (史學雜誌 121-120121) p32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0이 皁隸層의 복역도 모두 관부에 생업을 의존하는(食職) 職役이라 할

수 있다

또 좌전에 주로 보이는 輿人이 있는데 同 昭公7년조에 天에 十日

이 있고 人에 十等이 있으니 下가 上에 事하는 所以이다 까닭에 王의

臣은 公 公의 臣은 大夫 대부의 臣은 士 士의 臣은 皁 皁의 臣은

輿 輿의 臣은 隸 隸의 臣은 僚 僚의 臣은 僕 僕의 臣은 臺이다 馬

에 圉가 있고 牛에 牧이 있어 百事를 待한다 라 하였다 古來의 여러

注疏에서부터 이미 lsquo輿人rsquo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지만 이를 분석한 宇

都木 章의 견해에 의하면 縣鄙의 野人이 평시이든 戰時이든 國都의

귀족에 징발되어 葬儀戰士補助 車馬와 관련되는 여러 役務에 종사

하는 때 그들을 lsquo輿人rsquo이라 칭하였다고 한다64) 여러 자료에 의하면 皁

에서 牧에 이르는 서열 순위가 어디에서나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

고 대개 동일 계층의 異稱인 경우가 많다 皁 이하의 서열에 이렇게

다단계의 臣屬 관계가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같은 徒에도 上位 순서로 胥와 徒 및 그 徒의 지휘를 받는 징발된 徒

가 있으며 員吏에 들어가는 導從役 등의 庶民在官者 가 있고 그에

下屬하는 皁隸의 구분이 있는 것에 의하면 최소한 士 아래의 서민 계

층에 3 - 4 단계의 차등 신분이 있을 수 있다 위의 十等 순위에서 士

이하에 위치하여야 할 庶民이 곧 皁輿 등에 해당할 것인데 모두 관

부에 給事하는 면에서 후대 예속신분을 가리키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

다 그리고 일반 서민 가운데서도 皁輿 이하는 모두 전문의 職分으

로 관부에 給事하는 의무가 주어진 계층이므로 일반 농민으로서의 서

민과는 구분되는 서민이었다고 생각한다 즉 일반 농민이 농업을 생업

으로 하며 일반의 요역 의무가 주어진 반면에 皁輿 등은 주로 전문

의 기능을 요하는 관부의 직무에 給事하는 것으로 일반요역을 대신하

며 때문에 일반 서민이면서 관부에 예속된 신분의 일면을 지닌다 그

렇지만 관노비나 형도로서 관부에 예속되어 給事하는 신분과는 명확히

64) 宇都木 章 輿人考 (三上博士頌壽記念 東洋史考古學論集 朋友書店 1979

12) pp108-11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1다르며 주례의 胥徒와 같은 下吏의 員吏 보다 보통 下位이지만 胥

徒와 마찬가지로 주로 전문 기능의 職分에 복역한다는 면에서 같고 그

일부분은 下吏에 충당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곧 胥徒가 일반 서민의

徒로부터 선발된 자들인 것과 같다 위의 十等 서열은 농민을 제외하

고 관부에 給事하는 신분만을 총괄하여 나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

술한 工商食官 皁隸食職 도 모두 관부에 給事하는 工商과 皁隸를 열

거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복무도 당연히 職役이 되는데 그 職能 내

지 職分의 종류별로 숙련도 및 경력 등에 따른 그룹 내에서의 서열이

있게 되고 이를 계층으로 인식해서 lsquo皁臣(臣屬)輿rsquo 등과 같은 記述이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 각 직능별 部署별 전문화된 職役의 활용은 관

부의 운영상 당시의 사정으로는 불가피한 면이 있다 그러한 체제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점차 계층 구분의 엄밀성이 느슨해지고 세분된

차등의 질서가 점차 단순화되면서 그 용어도 혼용되기에 이른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위의 계층 구분은 세분된 서열만이 아니라 각 계층

의 담당 職分을 구분해주는 칭호로 쓰인 면도 있다 그렇다면 輿人은

戰時에 주로 戰車부대를 보조하는 직무 분야를 담당하는 계층이라 할

수 있고 그러한 면에서 여러 下屬 계층 가운데 가장 상위의 계층이었

지 않을까 한다

한편 이상의 皁隸層이 본래 일반서민 출신이었다는 입장에서 보면

관부에 給事하되 향리에 거처하면서 일정 기간 만 순번으로 복역하는

交代制가 있었을 수가 있고 또는 대체로 일부 기능자나 世戶에 한정

되었겠지만 휴가 기간 외에는 상근하는 형태도 있었을 것이다 예속된

신분인 경우 그 거처도 대체로 관부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앞에 든 秦

漢律에 교대 근무하는 更隸妾의 존재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근무

기간에만 관부에서 거처하는 예속 신분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刑徒

중에서도 司寇는 田宅을 소유하고 戶主가 될 수 있었으며 徒隸도 賜

與를 받을 수 있는 까닭에 이들 중에 일부는 관부 밖에 따로 거처를

지니고 출퇴근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단지 衛士나 部曲 집단은

대체로 屯營 내에 거주하였을 것이다 위로는 승상으로부터 아래로는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2하급의 吏에 이르기까지 吏舍에 거처하며 휴가 기간이 되어야 비로소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는 大庭脩의 연구가 있지만65) 漢舊儀 卷下

에 舊制에 尉는 모두 관서에서 거처하였다( 舊制尉皆居官暑 ) 라66)한

것에 의하면 舊制 가 어느 시기를 말하는 것인지 불분명하지만 宿衛

와 경찰 임무의 尉職 외에는 관서에서 거처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음을

말해준다 매년 직급에 따른 수개월의 휴가 기간이 설정되어 있지만

이는 성내에 거주하며 매일 출퇴근 하더라도 고향은 먼 곳에 있는 경

우가 많아 歸鄕 휴가를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外地 출신으로 城內

에 거처가 없는 관리들을 위한 吏舍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吏舍의 존재가 모든 관리의 관부 거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居官府의 여러 給事職 관노비 司寇나 일부 徒隸를 제외한 일

반 형도 여러 當番의 宿衛職 등을 제외한 관리는 官舍 밖의 私家에서

거처한 것으로 본다

庶民在官者 로서의 職役 복무는 常勤과 교대근무의 두 시스템으로

운영되었을 것이다 胥徒는 본래 모두 징발된 徒 가운데서 재능 있는

자로 선발되어 관부에의 給事가 생업이 된 자들로서 祿田을 받는 자들

이며 員數가 책정되어 있는 까닭에 常勤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

나 함께 징발된 여타의 徒는 胥徒와 같은 給徭役의 奉公을 행하지만

순번으로 동원된 기간 만 한시적으로 복무하는 까닭에 동원 기간 동안

의 食料 이외에 노동의 보수를 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그들은 만

민의 기본 의무를 職役으로 이행하는 것일 뿐이다 정부로서는 관부에

給事할 人才와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지만 필요한 부

분을 모두 常勤하는 자로 임용하여 그들의 생업을 봉록 지급 등으로

전면 지원하는 것은 재정에 큰 부담이 되는 것이었다 즉 관부에서 필

요로 하는 특정 업무 기능자들을 일반 요역 면제 대신으로 복역케 하

고 이를 순번제로 운영하면 복무 당번 기간 외에 그들은 다른 생업을

65) 大庭脩 漢代官吏の勤務休暇 (秦漢法制史の硏究 創文社 1982) p584

66) 앞의 漢官六種 p81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3꾸려나갈 수 있기 때문에 국가는 그들에 대한 생업 유지 지원 부담이

훨씬 적어진다 관부 給事層 가운데 命官과 員吏 이상이 常勤制라면

그 이하의 여러 職役層들은 대체로 교대근무제 중심으로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테면 lt奏讞書gt 案例17에서 秦王政元年 雍縣人 樂人 講이 자신

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사건 당일 자신은 踐更에 복무하러 11월 한

달간 함양의 外樂(관서 기구 名)에67) 소집되어 복무 중이었음을 진술

하고 있다 따라서 함양에 거주하지 않은 樂人이 그 관서에서 常勤하

지 아니하고 특정시기 일정 기간 만 교대로 근무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獄事에서 피고인 樂人 講이 踐更으로 1개월 간 복무한

곳이 外樂인 까닭에 일반 요역이 아니라 樂人의 職役을 이행한 것이라

고 본다 전한 哀帝 때 樂人의 員數를 罷하라는 명령에 대해 승상 孔

光과 대사공 何武가 진언하길 각 담당별 樂人의 현재 員數와 罷할 수

없는 수를 열거한 후 총 829인의 員數 가운데 388인은 罷할 수 없다고

하자 이를 재가한 바가 있다68) 이는 전한말의 사정이지만 전국진에서

도 郊祭 등의 각종 국가제사와 宮中 樂이 행해졌기 때문에 위의 수치

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속한서 백관2 大樂令 注引의

漢官과 盧植禮注에 의하면 八佾舞를 추는 樂人의 員數가 380인인

데 여기에 卑者之子는 임용될 수 없고 6백석에서 2천석 및 관내후에

서 五大夫의 嫡子 출신 5척 이상의 신장 12세에서 30세 顔色온화 등

의 조건을 갖춘 자에 한정되었다69) 이에 의하면 樂人 講은 走馬의 傭

이 되어 京師에 왕래하고 있는 빈한한 자로서 도저히 중앙 大樂令 속

67) 관서 기구 이름으로서의 外樂은 lt이년율령gt秩律 449簡 및 西安相家巷出土

秦封泥에 보인다(周曉陸路東之 編著 秦封泥集 三秦出版社 2000 一

二44)68) 漢書 권22 예락지2

69) 漢官曰 ldquo員吏二十五人 其二人百石 二人斗食 七人佐 十人學事 四人守學事

樂人八佾舞三百八十人rdquo 盧植禮注曰 ldquo大(子)[予]令如古大胥 漢大樂律 卑者

之子不得舞宗廟之酎 除吏二千石到六百石 及關內侯到五大夫子 取適子高五尺已

上 年十二到三十 顏色和 身體修治者 以為舞人rdquo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4하의 樂人 員數에 들어갈 수 있는 처지가 못 되는 자이다 그는 향리

에 거주하면서 매년 1개월씩 京師의 外樂에 가서 복무하는 기간 외에

는 傭賃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下吏의 員吏가 아

니면서 樂工의 職能으로 일반 요역 대신에 京師의 제사나 예락 행사에

나아가 給事하는 자이다 그래서 그의 복역도 職役인 셈인데 이러한

모습은 주례의 胥徒와 흡사하다 단지 胥徒가 員吏로서 봉록은 받는

것과는 다르다 양자가 모두 職役이지만 胥徒는 庶民在官者 이고 樂

人 講은 lsquo非吏인 職能人rsquo이다 그렇지만 양자 모두 개인적인 職能으로

관부에 給事하는 면에서는 상통한다 따라서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

부에 給事하는데는 員吏로서 복무하는 경우와 非吏로서 복무하는 경우

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Ⅴ lt走馬樓吳簡gt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복무

형태 및 그 성격

1996년에 호남성 長沙市 도심 우물에서 발굴된 lt吳簡gt은 총 17萬

餘 枚로 아직 그 일부만이 정리 해독되어 출간된 상태이지만 이미 출

간된 분량 가운데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의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자

료들을 많이 지니고 있다 孫吳 嘉禾 연간(232-238)의 여러 戶籍簿

내지 吏民簿 등에 吏와 給吏로 구분된 人名簿가 다수 존재한다 이 자

료들은 그간 명확하지 못하였던 吏役과 吏戶의 존재형태와 관부에 給

事하는 계층 및 그 職役의 실태를 파악하는데 획기적인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근간의 연구에서 여러 異見으로 그 문서가 지니

는 뜻을 파악하는데 상당히 혼란을 초래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전술한

職役의 전통과 여러 계층의 형태를 살펴본 성과를 참고로 하여 나름대

로 새로운 해석을 추구해보고자 한다

lt吳簡gt의 lt吏民人名年紀口食簿gt(竹簡(肆))에서는 각 里別로 里魁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5가 領하는 食口數를 吏와 民으로 구분하여 통계하고 있는데 그 일례를

다음에 든다

(A)

(이하 簡文 인용에서 內에 있는 字를 괄호 하여 표기함〕

集凡五唐里魁周領吏民五十戶 口食二百八十九人 (簡380)

其一百六十二人男 (379)

其一百卄七人女 (378)

其四戶縣吏 (377)

其二戶郡吏 (376)

其戶州吏 (374)

其五戶給新吏 (373)

其一戶縣卒 (372)

其一戶佃帥 (371)

이는 孫吳 嘉禾 연간 里別吏民口食簿인데 五唐里 50戶 가운데 일반 民

戶를 제외하고 州吏에서 佃帥까지의 戶를 따로 특기하고 있는 것에 의

하면 크게 民戶層과 州吏 이하의 吏층으로 양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

다 먼저 縣吏 이하를 이른바 세습 吏職戶인 吏戶로 볼 수 있는가 하

는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여러 異見이 제기되어 있는데 이 문

제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그런데 lt吳簡gt의 여타 戶籍簿나 戶口簡에

의하면 民戶를 제외한 縣吏 이하의 戶도 다시 縣吏 郡吏 州吏 軍吏 등

의 類와 맨 앞에 lsquo給rsquo字가 붙어 있는 계층의 類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즉 縣吏類의 吏 외에 其十二戶給縣吏下品 (壹5467)

其三戶給郡縣卒 (貳2318) 등과 같은 예들인데 그 職事나 給事

하는 관서의 명칭에 따라 多種의 명칭이 보인다 이를테면 給郡吏 給

縣吏 給州吏 給軍吏 給郡園父 給朝丞 給子弟 給驛兵 給鍛佐 給庫

吏 給縣卒 給度卒 給驛卒 給子弟佃客 給限田客 給佃帥 給常佃 給

家種客 給乞兒 給三州倉父 給養官牛 給習射 給私學 給官瓦師 給

亭復人 給亭雜人 給任師 給郡醫 給縣帥 給州私學 給新吏 給佃吏

給郵卒 給鹽兵 給關父 등이다 이렇게 앞에 lsquo給rsquo字가 들어간 계층을

일단 동일 계층으로 보아 lsquo給吏rsquo로 칭하고 縣吏 群吏 州吏 軍吏 등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6lsquo給rsquo이 붙어 있지 않은 계층을 lsquo吏rsquo로 칭하여 양자를 구분하고자 한다

lt오간gt에서 人名에 붙는 신분명은 크게 眞吏 某吏 給某吏 大男(大

女 民)의 4종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들은 그 표기상의 차이만으로도

일단 구분되는 존재라고 보이는데 현재 앞의 3종 신분명의 구분 문제

와 관련하여 몇 가지 다른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먼저 黎虎는 縣吏나

郡吏州吏 등의 吏가 侯家나 司隸校尉 또는 郡內에 소재한 전문 기

관 州郡 관내의 遠縣에 일정 기간 파견되어 給事하고 있는 자들을 칭

하여 給郡吏 등으로 칭하는 것일 뿐 그 신분은 本州 本郡 本縣의 吏

와 동일하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本郡의 郡吏가 곧 給郡吏이기

때문에 다른 계층이나 신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眞吏는 無職事

의 冗散官에 상대하여 쓰이는 용어로 실제 除授된 관원이라고 한다70)

黎虎와는 달리 양자를 다른 계층으로 보는 견해들도 제기되었다 먼저

韓樹峰은 給吏는 비록 吏의 名은 있지만 일반 백성으로서 잠시 吏의

職事에 종사하는 것일 뿐이고 혹 吏로 임명될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그 신분은 여전히 보통 백성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給吏와 구분하여

口算錢의 면제 특혜를 받는 州吏 郡吏 縣吏 등을 총칭하여 眞吏라 한

다고 하였다 즉 眞吏가 정식의 吏인데 비해 給吏는 일반민이며 일정

기간 만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給吏의

관부給事는 실제상 요역의 일종이라 한다 71) 한편 楊振紅은 동일인의

신분이 문서에 따라 다른 신분으로 등록되어 있는 점에 의거하여 이를

테면 給郡吏가 郡吏나 眞吏로 簡稱된 것이라 하고 眞吏나 給吏 모두

吏로 簡稱되며 州郡縣의 掾史職에 있는 자들로서 署長 佐官 등의 lsquo官rsquo

에 상대되는 자들을 지칭한다고 하였다 아울러 吏는 그 작위가 公乘

이면서 賦役 대상이고 漢魏시기에 吏職의 세습화가 이루어지면서 전문

70) 黎虎 說ldquo給吏rdquo -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社會科學戰線 2008-11) pp89

-94 說ldquo眞吏rdquo-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史學月刊 2009-5) p5071) 韓樹峰 走馬樓吳簡中的ldquo眞吏rdquo與ldquo給吏rdquo (吳簡硏究 2 武漢 崇文書局

2006) 韓樹峰王貴永 孫吳時期的ldquo給吏rdquo與ldquo給戶rdquo -以走馬樓吳簡爲中心 (吳簡硏究 3 2011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7적 吏戶인 眞吏가 출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吏가 본래 일반 서민

이었던 까닭에 公乘 이하의 서민과 합칭하여 吏民이라 한 것이며 삼

국시기 官과 吏가 구별된 연원은 漢代의 長吏와 小吏 내지 士와 庶民

의 구분에 있다고 한다72)다소 혼란스러운 견해들이고 용어상의 해석

문제가 겹쳐 있어 난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들 異見의 관건은 吏와 給

吏의 구분 문제 그리고 吏戶에서의 吏가 어떠한 吏를 가리키는가 하

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여러 견해에서 공통으로 들고 있는 lt吳簡gt의 다음 문서를 먼저 살

펴본다

(B)

廣成鄕勸農掾區光言 被書條列州吏父兄子弟伏處 人名 年紀爲簿

輒隱核鄕界 州吏七人 父兄子弟合卄三人 其四人刑 踵 聾 歐病 一人

被病物故 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 十二人細小 一人限田 一人

先出給縣吏 隱核人名 年紀相應 無有遺脫 若後爲他官所覺 光自坐 嘉禾

四年八月卄六日破莂保據(此簡無編戶)73)

이 자료는 광성향 勸農掾 區光이 작성하여 보고한 문서인데 廣成鄕 領

內 州吏7인의 父兄子弟 23인의 현황을 파악하여 嘉禾4년(235년)에 보

고한 내용이다 lt吳簡gt戶籍簿에서 州吏 등의 吏가 있는 戶는 그 州吏

가 戶人(戶主)으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 州吏7인이란 모두 그 戶의

戶人이다 이 현황 내역에 의하면 州吏7인의 父兄子弟 총합은 23인이

고 이 가운데 4인은 受刑 질병 중이며 1인은 物故 4인은 이미 관부

에 보내져 그 本主에 從事하며 관부에서 복무 중이다 12인은 細小 즉

소인이고 1인은 限田을 경작 중이다 이 限田이 lt吳簡gt의 lt吏民田家

莂gt 등에 보이는 lsquo二年常限rsquo의 田으로 보아 侯家의 田이나74) 屯田을75)

72) 楊振紅 吳簡中的吏 吏民與漢魏時期官 吏的分野 -中國古代官僚政治社會構

造硏究之二 (史學月刊2012-1)73) 侯旭東 三國吳簡兩文書初探 (歷史硏究 2001-4) p172에서 轉引

74) 入都鄕嘉禾二年步侯還民限米一斛 (5-1556) 其卄六斛民還黃龍年臨湘侯

限米 (602017)

75) 黃龍元年文入郡屯田民吳平斛米一百六斛二斗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6227) 其三斛五斗郡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8吏民에게 分給하여 佃作케 한 田으로 보는 것이 일반이다 그 경작자

는 그 田地(佃地)를 국가로부터 할당 받아 의무로 경작하기에 佃民과

같다 그 佃民에는 諸吏와 일반 民戶가 다 포함되고 있다76) lt吏民田

家莂gt에서 그 限田이 lsquo二年常限rsquo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그 의미에 대해

佃作기간 내지 佃種權이 2년으로 한정되어 있어 계약 기간이 지나면

배속되는 田地가 바꾸어지는 방식이었다는 견해가 있고77) 반면에 佃

地의 경작 기간이 아니라 地租額을 2년간 固定하는 것을 말한다는 견

해가 있다78) 사실이 어느 쪽이든 吏戶의 식구 가운데 일부는 국가의

농지를 佃作하고 地租를 납부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 액수가 漢代

사유지에 대한 조세보다 높다 같은 문서에는 租米 뿐 아니라 동시에

畝當 布2匹와 錢70-80까지 징수되고 있다 따라서 二年常限田의 分給

과 佃作은 受惠라기 보다는 노동력의 징발이고 耕作의 賦課로 보는 것

이 마땅하다 于振波가 常限田의 분급 액수를 정의하길 lsquo强制性的 生産

定額rsquo이라79) 본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 이어 1인은 先出給縣吏 인데

먼저 給縣吏로 보내졌다는 의미이다 先給吏의 사례는 嵩男弟恭年十

九先給州吏 (參1450) 등 몇 개가 더 보인다 이렇게 해서 총 23인의

食口 현황이 명료하게 보고되고 있다 그 내역에 의하면 州吏의 식구

는 受刑중인 자 질병자나 小人을 제외하고는 모두 관부에 給事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1인의 先出給縣吏 와

이미 관부에 보내져 本主 따라 從事하며 관부에 복무 중이라는 4인은

( 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 ) 내용상 모두 이미 관부에 보내져 현재

掾利焉黃龍理年屯田限米 (2157)

76) 于振波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南都學壇 24 2004年 第1期 湖南大

學 20041) p30 이 글은 앞에 든 中國社會科學院硏究生員學報 2004-1과 같

음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形成與演變 -談長沙

走馬樓簡牘札記之六 (鄭州大學學報 2001-1) 77) 張福亞 也談lt嘉禾吏民田家莂gt中ldquo二年常限rdquo田的函義 (首都師範大學學報

(社會科學版) 142期 2001-5) p8

78) 高敏 lt吏民田家莂gt中所見ldquo餘力田rdquo ldquo常限rdquo田等名稱的函義試釋 (鄭州大學

學報(社會科學版) 33-5 20009)79) 于振波 앞의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p12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9給事 중인 것은 마찬가지인데 어떠한 차이가 있어 다른 항목으로 구분

하여 기재한 것일까 이것은 바로 給縣吏와 縣吏의 차이를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후술) 州吏7인의 食口 23인의 현황 名簿를 작성하여 면밀

히 조사 보고하게 함으로써 그 遺脫을 막고 있는 것에 의하면 州吏 軍

吏 群吏 縣吏 등의 食口는 여타 일반 민과는 다른 賦役체제 아래 놓여

있는 계층이다 또 軍吏의 父兄子弟에 대해서도 그 食口簿를 따로 작

성하여 관리하고 있다

集凡中鄕州軍吏四人父(子)兄弟三人 中(參3012)

集凡南鄕領軍吏父兄弟合十九人 中(參 464)

이러한 사례들은 吏가 있는 戶는 그 食口들까지 포함하여 吏가 있는

戶 즉 吏戶로서 별개로 관리되고 그 성원은 모두 吏戶의 役 내지 賦

役체계에 들어가는 것임을 말해준다

위와 같이 州吏 縣吏 등 吏戶의 戶口簿는 그 食口 가운데 州吏 縣吏

등 그 吏인 자가 맨 앞에 戶人으로서 위치하지만 給吏는 戶人이드라도

앞에 위치하지 못한다

小武陵鄕嘉禾四年吏民人名妻子年紀簿(壹101533)

吉陽里戶人公乘張惕年卄八算一給縣吏(壹1018232)

吉陽里戶人公乘廖裕年卄七算一給郡吏(壹1017525)

高遷里戶人公乘黃毛年卅四算一給軍吏(壹10306)80)

또한 同 戶籍簿에 縣吏 州吏 등은 아래와 같이 맨 앞에 위치하여 일반

민이 아님을 명기하고 있지만

縣吏鄧橎年卄七 璠()妻大女金年卄一 算 (貳 1729)

州吏蔡區年卅二 區妻大女年卄七 算 (貳 1822)

軍吏朱謙年卅五 謙妻大女壹年卄六 算一 (貳 1723)

80) 인용된 4簡文은 凌文超가 재정리 조립하여 올린 글(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

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型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의

lt表二gt(pp25-37)에서 인용함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0給吏인 경우는 일반민을 가리키는 lsquo民男子rsquo로 기재되어 있다

民男子蔡若年卅七給驛兵 若妻大女四年卅算一(貳 1781)

民男子蔡喬年六十二給驛兵 喬妻大女典年卅八 (算) (貳1903)

따라서 위와 같은 吏民簿에서 民戶를 제외한 州吏나 郡吏 縣吏 軍

吏가 吏戶라면 給州吏 給郡吏 등 여러 職事의 관서에 給事하는 수십

종의 다양한 給某吏 신분은 전술한 庶民在官者 나 lsquo非吏이면서 관부

에 있는 자rsquo와 매우 유사하거나 일치한다

여기에서 吏戶나 吏役의 존재 여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는데 黎虎

는 삼국시기 吏戶의 존재를 인정치 않으나81) 高敏과 孟彦弘은 그 존

재를 인정하며 특히 高敏은 吏役制도 漢末三國시기에 확실히 형성되

었다고 한다82) 韓樹峰王貴永은 후한말 孫吳시기에 卑賤化가 이루어

지면서 吏戶의 萌芽가 이루어졌으며 lt吳簡gt에서의 給吏는 吏가 아니

고 民에 속한다고 한다83) 이러한 여러 異見의 배경에는 吏로 칭해지

는 계층에 전술한 바와 같이 다시 두 계층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계층

이 있는데 그 면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

각한다 양자의 구분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자료를 든다 속한서 百官3 大司農條의 注引 漢官에 丞一人 三百石 員吏四十人 其十一人

斗食 十七人佐 七人學事 五人守學事 皆河南屬縣給吏者 라 하였다

대사농승 속하의 斗食 이하 員吏 40인을 모두 하남군 속현에서 조달된

吏로 충원한다는 것이다 즉 후한 수도 낙양 인근인 하남군 속현에서

吏員을 차출한다는 것인데 斗食 佐 學事 등의 員吏는 해당 분야의 職

81) 黎虎 ldquo吏戶rdquo獻疑 (歷史硏究 2005-3) pp53-6882)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形成與演變 mdash談長沙走

馬樓簡牘札記之六 (鄭州大學學報 2001-1) p61孟彦弘 吳簡所見ldquo事rdquo臆說 mdash從ldquo事rdquo到ldquo課rdquo (吳簡硏究 2 2006) pp205-208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爲役之制 (魏晋南北朝隋

唐史資料 24 2008) pp8-2183) 韓樹峰 앞의 走馬樓吳簡中的ldquo眞吏rdquo與ldquo給吏rdquo pp33-38 韓樹峰王貴永 앞

에 든 孫吳時期的ldquo給吏rdquo與ldquo給戶rdquo -以走馬樓吳簡爲中心 p99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1事를 처리할 수 있는 職能者여야 하기 때문에 하남군에서 이러한 職事

로 근무하고 있는 員吏를 파견하거나 일반민 가운데서 새로 선발하여

파견 조달하였을 것이다 상하급 관부끼리 상호 관리를 파견하여 일정

기간 복무하게 하는 경우에 조달 지원한다는 의미로 動詞語로서 lsquo給rsquo을

쓸 수 있고 이러한 사례는 문헌에 이미 자주 보인다 위에 든 lsquo屬縣給

吏者rsquo도 그 한 실례이다 이러한 경우는 본래 吏의 신분이 여타의 관부

에 일정기간 출장 근무하는 것일 뿐인 까닭에 그 신분은 그대로 吏일

것은 자명한 일이다 즉 縣吏가 郡府에 출장근무 중일 때 그 신분은

그대로 縣吏이고 해당 名簿에 縣吏A가 여타 名簿에서 給郡吏A로 표

기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동일인이 名簿에 따라 신분명이 달리 기

재되어 있는 사례가 약간이나마 보이고 있는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된다(후술) 그런데 給州吏 給郡吏 給縣吏 등 수십종의 給吏에는 이런

경우가 아니고 lsquo州吏 등 諸吏에 배속되어 給事 중인 非吏로서 관부에

복무 중인 民rsquo이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給某吏로 표기된 자들은 lsquo給rsquo

이 붙지 아니한 州吏 郡吏 縣吏와는 달리 lsquo民男子rsquo로 표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給州吏는 非吏로서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그 관서에서 하나

의 職役의 형태로 복무 중인 民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들은 실은 民으로서 관부 업무상 필요한 노역에 동원되는 셈이지만

일부는 여러 관서의 하급 실무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전문의 職能을

갖춘 자들도 있다 縣吏 州吏의 職事 뿐 아니라 앞에 든 수십 종의 전

문 분야 부서별 給吏의 명칭은 그에 상응하는 사례들이다 정부는 이

들이 본래 일반 서민이지만 관부 운영의 필요상 특별 관리를 하지 않

으면 안 된다 그 결과 후한의 여러 사례에서 보듯이 대개 그 職을 세

습토록 하고 이들을 일반 民과 구분하여 칭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lt吳簡gt에 忠子男仲年十五 任給吏 (參 1805)라 한 것은 給吏가 民

에서 차출되어 임용되는 독립 계층임을 말해준다 또 草言府大男吳杭

不是卒子弟不應給卒事 八月卅日兼兵曹掾潘(因)()白(柒總49968)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卒의 子弟가 아니면 給卒事에 복무하게 할 수

없었다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2그들이 본래 吏의 신분이 아닌 까닭에 바로 吏로 칭하지 못하고 그

吏에 배속되어 給事하는 자 또 그 戶의 뜻으로 給某吏 給戶와 같은

칭호가 나오게 된 것으로 본다 이 칭호는 사실 관리와 民 사이에 있

는 이들 계층의 성격을 상당히 잘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이 給吏 계

층의 부담이 커지고 그 賤役 부담자로서의 성격이 뚜렷해감에 따라 給

吏나 給戶가 吏戶나 吏家로 칭해지고 給吏나 給戶의 役이 吏役으로

칭해진 것인데 그렇게 간략한 형태로 칭하여도 이미 관리의 吏와 충분

히 구분되는 것으로 사회가 인지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의하면 lt吳簡gt에 보이는 眞吏도 사실 眞吏라 할 수 없는 給吏

에 대비하여 쓰이게 된 용어가 아닐까 한수봉왕기영은 眞吏란 給吏

에 대비된 용어라 하고 lt吳簡gt에서 給吏가 口算 납부 의무가 있지만

眞吏는 면제되며 정식의 吏이고 신분성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羅新도

眞吏에게 口算錢이 면제되고 있다고 하였다84) 眞吏에 대한 여타의 견

해도 있지만85) 給吏와 관련하여 참고할 만 한 지적이다 또한 lt吳簡gt

에서 其七戶給郡吏 下品(壹5447) 其十二戶給郡吏 下品 (壹

5677) 其十二戶給縣吏 下品 (壹5467) 其一戶給軍吏 下品 (參

430336) 給度吏 下品之下 (5653) 등에서와 같이 給吏는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여서 평균의 民戶 보다 더 빈천한 계층인 점도 그

들이 관부에 給事하는 吏라기 보다는 非吏인 民으로서 民의 일반 요역

에 대신하여 관서에 給事(給役)하는 자들이되 그 일부는 職能에 따라

세습하여 관련 관서의 吏에 배속되고 給事 복무해야 하는 예속된 신

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lt吳簡gt에는 하나의 戶人을 首로 하고 그에 배속된 듯 한 여

러 신분의 戶數와 신분명을 기록한 簿가 있다 lt走馬樓吳簡竹簡gt에

84) 羅新 ldquo眞吏rdquo新解 (中華文史論叢 2009-1) p129 단지 그는 眞吏란 非華

夏系 출신의 編戶化된 토착 사회를 관리하는 인원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85) 이를테면 黎虎는 眞吏란 非眞吏에 대한 대칭이 아니고 실제로 除授 받은 관

원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說ldquo眞吏rdquo -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史學月刊2009-5) p5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3다음의 예들이 있다

-1 里戶人公乘縫繒年卄五苦腹心病 (5443)

- - - - - - -

其七戶給郡吏下品 (5447)

- - - - - - -

其一戶給州吏下品 (5452)

-2 平樂里戶人公乘鄭張年五十 (5460)

- - - - - - -

其十二戶給縣吏下品 (5467)

-3 東陽里戶人公乘扶侈年十四 (5471)

其二戶給庫吏中品 (5472)

- - - - -

其一戶給縣卒下品 (5474)

-4 宜陽里戶人公乘區歸年卄二眞吏 (8962)

- - - 給州卒 (8965)

- - - -

年六十一給驛兵 (8976)

右尙書吏三(戶) (8517)

孫吳에서 公乘의 작위 소유자는 일반민 중에서도 상당히 많지만 漢

代 民爵의 최고위 爵인 公乘(第8等)의 戶人에게 보통 여러 신분의 수

십호를 배속시키고 있다 그 중에 10戶 내외의 給吏가 배속되어 있다

또한 이들 戶人은 배속된 戶가 납부한 租稅를 거두어들이고 이를 일괄

해서 관부에 납부하고 있다 먼저 각 戶로부터 受領한 내역은 문장 앞

에 lsquo領rsquo으로 표기하고 受領한 액수를 총합하여 관부에 납부한 내역은

앞에 lsquo入rsquo으로 표기하고 있다

里戶人公乘曾(年五十三)妻年卅九 (簡 1631-1652)

- - - - - -

領二年郵卒限米田六頃五十畝收限米二斛合爲吳平斛米一千三百斛

其三百十四斛五斗府州中倉關邸閣李崇吏黃諱潘慮 中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4領二年民田三百七十六頃六十五畝二百卅八步畝收米一斛二斗合四萬

五千一百九十九斛一斗 - - - - - - - - -

常遷里戶人公乘李漠年卅七 妻大女思年卅一

入嘉禾二年郵卒限米七百九十八斛二斗八升

入嘉禾二年佃帥限米九百五十五斛八斗七升

- - - - - - -

이 戶人은 대부분 公乘이고 노비를 소유하고 있으며 配屬된 戶의

徵稅와 총괄 납입의 업무에 복무하고 있는데 이는 후대 富戶에게 差役

복무를 부과한 사정과 비슷한 면이 있다 후대 差役제도와 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1인의 戶人을 賦稅 징수 납입의 책임

자로 하여 향리에서 이 방면의 기층단위로 운영하고 있는 셈인데 戶籍

簿와는 그 내역과 용도가 다른 별개의 독립 帳簿이다 그런데 劉家軍

은 限米 납부자 신분인 私學還民叛士吏卒 등이 모두 流民이

며 그 戶人에게 依附하고 있는 자들이라 하고 국가가 그 依附관계를

승인해주면서 그들이 경작할 토지를 戶人에게 分級해주고 그들이 납

부하는 地租인 限米도 戶人의 이름 아래 등기한 것이라고 보았다86)당

시 嘉禾연간에 전란으로 長沙 임상현 지역에 流民이 많이 流入되었을

가능성은 이미 여러 연구에서 지적된 바 있고 還民 叛士 등 일부는

流民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限米와 屯田限米 납부자 신분에는

이밖에 大男 州倉吏 吏帥客 金民 佃吏 郵卒 衛士 傳卒 子弟 佃卒

復客 新吏 兵客 故師子弟 兵師士 故帥客 後客 船師 司馬 士

등 거의 전 계층을 망라하고 있는데 이들 중에 유민이 있을 수 있으나

모두 流民 출신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새로 屯田이나 侯國의 田을

경작시키기 위해 유민 뿐 아니라 在地의 吏民에게 할당하여 佃作으로

운영하는 것은 여러 문헌자료에도 있고 lt吳簡gt의 lt吏民田家莂gt은

주로 在地의 호적에 올라 있는 吏民의 佃作 내역 장부이다 또 lt吳

簡gt 草言府部諸鄕吏區光等招誘諸限田客八十三人首見事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曹史趙野

86) 劉家軍 論lt走馬樓吳簡竹簡gt中 ldquo限米rdquo的性質 (中國社會經濟史硏究 2005-2) p87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5白 (柒總 49782)에 의하면 당시 長沙 지역에서 鄕吏에 의해 限田客

83인을 招誘했다는 성과를 보고하고 있는데 이와 같이 佃作 인력의 확

보에 애쓰는 상황에서 전술한 바와 같은 본래 限田의 佃作 의무를 지

고 있는 在地 吏戶의 家內 성원이 그 佃作者 명단에서 제외될 리가 없

그래서 簡文(B) lt州吏父兄子弟年紀簿gt에서 吏戶의 家內 父兄子弟

인력 23인 가운데 lsquo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rsquo과 lsquo一人先出給縣吏rsquo가

관부에 급사하는 給吏에 해당하고 lsquo一人限田rsquo은 限田의 佃作에 복무하

는 자이다 바로 이어 인용하는 孫休의 詔文에서 吏家의 어려운 사정

에 대해 ldquo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이미 限米를

납부하였는데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rdquo라 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전반부는 給吏로서 복무

하는 것이고 뒷부분은 限田 佃作 복역을 말함이다 즉 한 吏戶의 父兄

子弟 가운데 일부는 전자에 복무하고 일부는 후자에 복무한다 똑 같

은 관부 내지 국가의 역에 복역하는 것이지만 給吏는 분명히 吏(分署

의 담당 吏 州吏)에 給事하는 자라는 점에서 給吏로 칭하여 여타의

복역과 구분한다 그리하여 그 給吏가 결혼이나 계승으로 하나의 戶를

이루면 簡文(A)에서와 같이 某里의 戶籍簿上에서 里의 총 戶民數 아래

에 lsquo其四戶給縣吏rsquo와 같은 형식으로 戶를 本으로 한 給吏로서 명기된

다 그런데 一人의 給吏가 아직 戶를 이루지 못하고 한 吏戶의 成員

(父兄 子弟)으로서 있는 상황이라면 그 戶人의 현재 신분에 의해 그

戶가 표기되었을 것이다

이 문제와 직결되는 다음 기사를 살펴보자 孫權의 제6子로 孫亮에

이어 즉위한 孫休는 그의 즉위 年인 영안원년(258)에 다음과 같이 詔

하였다

「諸吏家에 5인이 있으면 (그 가운데) 3인은 겹쳐서 役에 복무하고 있

다 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이미 限米를 납부하

였는데 군대가 출정하면 또 종군함에 심지어는 家事를 돌볼 자도 없게

되는 것을 짐은 매우 애처롭게 생각한다 그 5인 가운데 3인이 役에 복무

하고 있다면 그 父兄이 (家에) 머물고자 하는 것을 허용해주어 1인을 (役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6에 나가지 않고) 머물게 하고 그 限米를 면제해주며 군대가 출정해도 종

군하지 않도록 하라 (삼국지 권48 吳書 孫休傳 永安元年條)87)

孫休는 즉위 전 재야에 있을 때 시골 생활을 보냈던 바가 있어 그

들의 참상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吏家(吏戶)가 지는 과중한 부담

은 곧 그들이 그만큼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 吏役이 賤視化 되고 厮役으로 인지되고 있던 배경을 위의 詔文은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lsquo吏家rsquo의 식구는 여러 방면의 복무를

중복하여 부담하고 있다 그 가운데 限米 납부 의무는 lt吳簡gt에 의하

면 국가에서 佃作케 하여 운영하는 限田 경작에 대한 租로써 납부하는

것이다 즉 전술한 lsquo二年常限rsquo田을 이 限田으로 보아 그 地租를 限米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다88) 단지 于振波는 限米란 二年常限田과는 관

계가 없고 屯田 경작에 대한 조세인데 衛士 郵卒 傳卒 등의 상비병

과 토지가 없는 수공업자 외지에서 수학하기 위해 온 私學 이탈하였

다가 새로 돌아와 附籍된 還民에게 軍屯이나 民屯에 종사하게 하고 일

부의 부세와 요역을 면제해주면서 限米를 납부하게 한 것이라 한다89)

그의 동일한 글에서 여타 사항에 대해 필자와 일치한 부분에 대해서는

앞에서 찬동한 바 있지만 이 부분에는 수긍하기 어렵다 lt走馬樓吳

簡竹簡gt에는 限米 납부자로 기재된 신분에 전술한 바와 같이 많은

신분이 망라되어 있고 孫休傳에서 말하는 吏戶가 일부 상비병이나 귀

환민 私學등에 한정한 것이 아니고 吏戶 전반의 형편을 들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lt吏民田家莂gt에서 佃田의 총수는 二年常限田과 餘力

田으로 구성 내지 구분되어 있다 즉 常限田은 餘力田에 對比되는 용

어이다 그리고 양자의 畝當 租額이 嘉禾4년 民의 경우 12斛 0456

87) 詔曰 ldquo諸吏家有五人 三人兼重爲役 父兄在都 子弟給郡縣吏 旣出限米 軍出

又從 至於家事無經護者 朕甚湣之 其有五人 三人爲役 聽其父兄所欲留 爲留

一人 除其米限 軍出不從rdquo」

88) 앞에 든 高敏의 글 lt吏民田家莂gt中所見ldquo餘力田rdquo ldquo常限rdquo田等名稱的函義試釋

이래 대부분 이 견해에 따른다

89) 于振波 앞에 든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7斛 州吏의 경우 0586斛 0456斛으로 차이가 있다90) 무엇보다 앞에

서 살펴 본 lt오간gt lt廣成鄕州吏父兄子弟伏處 人名 年紀爲簿gt에 기재

된 州吏의 食口 현황 내역은 孫休傳에서 吏戶의 식구 사정을 말하고

있는 내역과 같은 모습을 전하고 있는데 91)전자에서는 限田이라 하였

고 孫休傳에서는 限米라고 한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限田에 대해 징

수하는 것이 곧 限米이다 따라서 限田이란 二年常限田의 簡稱일 것으

로 본다 lt吳簡gt의 lt吏民田家莂gt에는 이들 限田戶의 佃田額과 그에

대한 租賦稅 납부 內譯이 있다 이 戶는 州郡縣吏 등으로 담당 吏職에

給事해야 하고 從軍도 해야 한다 이러한 양상은 분명히 역의 부담이

중첩된 것으로 일반민보다 더 과중하다 租額인 限米 납부액도 일반민

의 사유지에 대한 租額보다 비율이 높았다

그런데 중요한 사항은 첫째 이렇게 과중한 부담이 중첩된 吏戶의

일면을 보여주는 lt吏民田家莂gt에서 佃作吏民의 戶人(戶主) 신분을 보

면 大男大女州吏群吏縣吏軍吏州卒郡卒縣卒復民士

등으로 吏와 民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들 吏民 모두 佃作

의 의무와 함께 地租로 米穀 布 錢을 납부해야 하고 從軍의 役이 있

으며 그리고 대량의 lt오간gt에 다량으로 보이는 子弟 및 給子弟가 곧

吏의 子弟로 파악된 것에 의하면92) 그들이 납부하는 子弟限米의 부담

도 吏戶의 부담이 된다 또한 lt오간gt에

郡吏公乘李年卅二 算一 (貳2460)

侄子年卅九給子弟 妻大女衷()年卄六 算一 (貳1754)

吉陽里戶人公乘張惕年卄八 算一 給縣吏 (壹1018232)

등의 많은 簡文에서 吏와 그 子弟 給吏들에게 算賦도 부과되고 있다

90) 앞에 든 張福亞 也談lt嘉禾吏民田家莂gt中ldquo二年常限rdquo田的函義 p11의 表1

91) 이에 대해서는 앞에 든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

形成與演變 mdash談長沙走馬樓簡牘札記之六 pp62-63 참조

92) 孟彦弘 앞에 든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爲役之

制 pp1-7 子弟는 吏의 子弟 給子弟는 관부의 給事에 差出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8단지 吉陽里戶人公乘鄭龍(龍 下에 田)年卅六算一給州吏復 (壹3323)

과 같은 lsquo給州吏復rsquo 즉 給州吏이면서 算賦가 復除된 경우가 있는데 이

에 의거하여 給吏는 算賦에서 復除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93) 그러나

위에 든 簡文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부분의 給吏가 lsquo算一rsquo로 기재

되어 있고 소수만이 lsquo復rsquo으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復除되는 경우는

특별한 사정이 있어 그 給吏에게만 특혜를 준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

으로 생각한다 참고로 lsquo腫兩足rsquo자나 lsquo刑兩足rsquo자인 民戶의 戶人도 算賦

가 면제되지 않고 있으며94) 大女도 算賦 납부 의무가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吏戶와 民戶가 지는 국가에의 부담은 吏戶가 각기의 吏職

에 복무하고 일반민호는 그러한 吏職에 있지 않다는 정도 외에는 별다

른 차이가 없다 물론 일반민은 吏職의 役 즉 吏役이 없는 대신에 일

반요역에 복역해야 하고 吏戶는 일반요역에서 면제된다 그러한 사실

을 말해주는 자료로 lt오간gt 戶口簿에 里別로 定應役의 戶數 즉 일반

요역에 응당 복역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진 里別 戶數 문서가 있다

其一百卅八人男 (參431548)

其八十一人(女) (參431144)

其一戶給軍吏 下品 (參430336)

其五戶民 (下)品 (參430235)

其七戶女戶不任調 下品之下 (參430134)

其領役民卅七戶 (參430033)

이 里別 戶口簡은 凌文超의 編次 정리 작업에 의하면 新成里의 總

結簡에 해당하는데95)여기서 일반민호수는 생략하고 給軍吏나 調에서

면제되는 女戶 등의 수만을 기재한 것은 맨 아래의 定應役 戶數를 算

出하는 근거를 기록하기 위함이다 즉 일반민호 외의 給吏 등의 戶數

93) 凌文超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型

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 p5494) 高平里戶人公乘黃高鼰五十二算一腫兩足 (貳 2903) (大)成里戶人公乘何軼年

五十五算一刑兩足 (參626736)

95) 凌文超 앞에 든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

簿rdquo的類型與功能 p40과 lt表3gt 중 p45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9가 총 13戶이고 이들을 제외한 定應役의 戶數가 37호란 뜻이다 그래

서 新成里의 총 호수는 50戶였음을 알 수 있다 新成里의 총 口數 219

명은 lt오간gt의 戶當 口數 평균이 대략 45명 정도임을 감안하면 486

戶이고 50戶와 근접한다 따라서 給軍吏 등 13호는 定應役에서 면제되

는 戶임을 알 수 있다 또 다음 戶口簡은 앞부분 里의 총 口數가 결락

되어 있다

其一戶給朝丞 (貳170263)

其二戶給郡園父 (貳170162)

其五戶尫嬴老頓貧窮女戶 (貳170567)

定應役民卄戶 (貳170466)

여기서는 給朝丞1戶 給郡園2戶 절름발이 노인 빈궁자 女戶 등 5

戶가 役에서 면제되고 그 나머지 20戶가 定應役民이 되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즉 給吏는 定應役에서 면제되고 있다 따라서 給吏는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부에 給事하는 것이기에 당연히 일반요역에서 면제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給吏에도 전술한 바와 같이 吏戶의 가속인 경우가 있고 일

반민 중에 차출된 경우가 있는데 전자의 경우는 관부에서 필요할 때

마다 고정적으로 차출되었을 것이며 일반민의 경우는 본래는 일시적

한시적으로 징발되었을 것이지만 여러 簡文에 戶人으로서 給吏인 자가

있는 것에 의하면 점차 전자의 경우와 같이 吏戶와 마찬가지로 給吏戶

로서 고정적으로 차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定應役이 戶를 부과

단위로 삼고 있다는 점 또한 吏戶의 家屬이 하나의 徵役 단위로서 운

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도 吏戶의 실재성과 그 독립적인

신분성을 말해준다 더구나 일반 민호와 구분된 吏戶 名籍(lsquo吏名籍rsquo)의

존재가 다음의 簡文에서 확인된다

諸鄕謹列郡縣吏兄弟 幷攴 吏名籍 (13-7638)

吏戶의 막중한 부담은 그 家屬의 叛走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0를테면 縣吏 毛章의 15세인 弟(壹 7865) 縣吏 毛車世의 49세인 父(壹

7868) 群吏 黃의 13세인 弟(壹7893) 群吏 谷漢의 29세인 兄子

(壹7905)가 嘉禾 2년에서 3년 사이에 叛走하였다 후한 말 陳寔은 어

려서 縣吏가 되어 항상 厮役에 給事하였는데( 常給事厮役 ) 후에 都亭

의 佐가 되었다96) 그리고 郭太는 대대로 집안이 빈천하고 어려서 고

아가 되었는데 모친이 縣廷에 給事하게 하려 함에 말하길 ldquo대장부가

어찌 斗筲의 役에 處해 있을 것입니까rdquo라 하고 마침내 떠났다97) 당

시 이미 吏役이 厮役으로 인식되어 있었고 斗筲의 役 즉 100석 이하

인 斗食의 位에 처하였음을 말해준다 즉 같은 吏이더라도 100석 이상

인 掾史와 그 이하 사이에는 차등과 구분이 있었다(후술) 그렇지만 이

두 경우는 모두 吏가 되는 것이 선택의 길이었기 때문에 吏戶에 속한

자들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吏戶가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던

것에 비해 이 두 경우는 선택사항이었다 斗食에게도 매우 소액이지만

月俸이 지급되었기 때문에 빈천하거나 고아가 되어 생업을 위해 吏職

을 선택한 것이다 나이도 어리고 집안의 세력 배경도 없는 가운데 吏

가 된 것에 의하면 斗食의 최하단에 속한 吏였을 것이며 이들이 給吏

가 아니고 吏로 칭해진 것은 일반요역 복무에 대신하여 징발 내지 차

출된 경우가 아니고 吏職에 임명된 것이기에 당연하다

縣吏 등의 諸吏役이 厮役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무엇 보다 그 雜

役的인 吏役의 과중함 때문이다 후한 lt張景碑文gt에서 14鄕의 正을

調發하여 勸農의식에 소요되는 土牛 제작에 육칠십만전이 들어가 吏와

正이 매년 患苦에 처함에 男子(庶民) 張景이 매년 그 비용을 출연하여

土牛를 義作해주겠다 하고 그 대신 자신을 縣吏 列長 伍長에 임

용되지 않게 해줄 것과 小繇 징발을 면해줄 것을 청하고 있다98) 즉

96) 후한서 권62 陳寔傳에 (陳寔)少作縣吏 常給事厮役 後爲都亭(刺)佐

p2065

97) 후한서 권68 郭太傳에 (郭太)家世貧賤 早孤 母欲使給事縣廷 林宗曰 ldquo大

丈夫焉能處斗筲之役乎rdquo 遂辭 就成皐屈伯彦學 三年業畢 博通墳籍 p2225

98) 府告宛 男子張景記言 府南門外勸〔農〕土牛 調發十四鄕正 上賦

斂作治 幷土人 犂 耒 卄 蓎 屋 功費六七十萬 重勞人功 吏正患苦 愿以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1서민이었던 張景은 거액의 자금을 출연하면서까지 縣吏 등의 吏役과

小繇의 복역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있다 그는 아직 非吏였지만 吏役에

언제든지 차출될 수 있었고 그 吏役은 매우 번거롭고 힘든 것이었음

을 알 수 있다 단지 張景과 같은 서민이 縣吏가 되어 吏役에 差出되

는 경우 바로 lt오간gt에서와 같은 吏戶가 되어 그 가속이 모두 吏役의

범위에 들어가게 되는지는 不明이다 推斷이지만 世戶로서의 吏戶와

함께 일시적으로 차출되어 일정 기간 만 복무하는 非世戶로서의 吏戶

가 공존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요컨대 lt오간gt과 문헌자료에 보이는 吏戶와 給吏의 면모들은 앞에

서 검토한 胥徒와 lt庶民在官者gt 내지 徒御 導從役人 등과 일맥상통

하는 면이 있다 孫休傳이라든가 lt오간gt에 빈출하는 吏戶 吏民에서의

吏는 500石 이하인 吏 중에서도 200석 이상의 長吏級을 제외한 下吏

즉 百石 이하의 吏를 가리키고 給吏는 吏가 아니되 관부에서 일정 기

간 여러 분서에 勞役으로 복무하는 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즉

庶民在官者 와 상통한다 특히 그들에게 부과되었던 賦稅役의 내역에

서도 위에서 검토한 여러 職役 계통 신분이나 계층의 예와 거의 비슷

하다

孫休傳에서 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라 한

것은 吏家의 父兄은 都에서 州郡縣의 吏로 복무한다는 뜻이고 나머지

3인의 자제는 郡縣吏에 給事한다는 뜻이다 즉 lsquo郡縣吏에 給事함( 給郡

縣吏 )rsquo이란 子弟3인이 郡縣吏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郡縣吏에 下屬되

어 그 업무에 給事한다는 뜻이다 위의 廣成鄕의 lt人名年紀簿gt 簡文

에서 lsquo先出給縣吏rsquo도 州吏7家의 식구 가운데 먼저 縣吏의 업무를 보좌

하기 위해 차출되어 나간 것을 뜻한다 여기서 말하는 郡縣吏는 주로

掾史職으로 사무 업무 중심이고 그 업무를 노동력으로 보좌하는 인력

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lt오간gt의 도처에 諸吏의 사례로써 諸曹倉

吏庫吏監運掾關邸閣船師田戶曹史 등 수십종의 職名이 보이

家錢 義作土牛 上瓦屋 欄楯什物 世世作治 乞不爲縣吏 列長 伍長 徵發小

繇 (高文 漢碑集釋 開封 河南大學出版社 1997 p227)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2는데 대부분 그 업무 처리에 노동인력이 필요하다 십 명 내외의 掾史

員吏 만으로는 사무나 문서작성 관리 업무 이외에는 수행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 인력을 吏戶의 식구로부터 자동으로 差役시키는 시스템이

漢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었음을 위 孫休傳의 기사는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이들 吏家의 식구 현황 파악은 관부에서 항상 필요

로 하고 확보해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lt오간gt의 여러 문서는

그러한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東鄕勸農掾殷連被書條列州吏父兄人名年紀爲簿

輒科核鄕界 州吏三人 父兄二人刑蹱叛走 以下戶民自代 謹列年紀 以

(已)審實 無有遺脫 若有他官所覺 連自坐 嘉(禾)四年八月卄六日破莂

保據 (J22-2543)

여기에서 담당 鄕界의 州吏3인 가운데 그 父兄2인이 受刑과 叛走로

비게 됨에 下戶의 民을 징발하여 바로 충당시켰다는 것이다 이 以下

戶民自代 에 대한 해석에서 下戶를 고용하여 자신을 代理케 한 것이라

는 견해가 있는데99) 그렇다면 戶人인 州吏가 자신의 식구 결원을 책

임지고 직접 下戶를 고용한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해당 州吏의 부담

이 너무 크게 되어 당시 下戶가 자동으로 보충되는 시스템으로 운영된

것일 가능성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諸家의 견해 모두 不明

임을 인정하고 있다100) 어쨌든 吏戶의 노동력을 신속하고 철저하게

보충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은 吏戶 전체의 식구가 관부에

예속되어 있고 세습화 된 상태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단지 孟彦弘은

이 자료를 통해 당시 吏戶의 家屬이 모두 吏였음을 말해준다고 하였으

나101)그렇지 아니하고 吏의 가속에 吏도 있을 수 있지만 아직 吏가

아니고 吏를 노동력 지원으로 보조해주는 給吏도 있고 그 給吏는 非

99) 이 점에 대한 정리는 王素 長沙吳簡勸農掾條列軍州吏等人名年紀三文書新探

(魏晋南北朝隋唐史資料 25 2009) p9의 注 11) 참조

100) 이를테면 孟言弘 앞의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

爲役之制 p16

101) 위의 글 p1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3吏로서 관부에 給事하는 자이며 이런 면에서 전술한 庶民在官者 내

지 lsquo非吏이면서 관에 있는 자rsquo lsquo官과 民 사이rsquo lsquo lsquo半官 半民rsquo lsquo踐更小史

(小吏)rsquo(續漢書輿服志) 등과 상통한 계층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吏戶에 포함되지 않는 給吏가 있었다 吏戶와 給吏戶가 구분되

고 있음은 lt吏民人名年紀口食簿gt의

其七戶給郡吏下品 (壹5447)

其十二戶給縣吏下品 (壹5467)

其一戶給軍吏下品 (參430336)

(其)六戶郡吏(中)(品) ---- (貳4490)

其二戶縣吏(下)品 (貳3307)

등에서 給郡吏 등의 戶와 縣吏의 戶가 구분되어 기록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다 그리고 給吏가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에 속하였음은 위

의 사례 뿐 아니라 lt吳簡gt에서 給度吏 下品之下 (5653) 등에서 알

수 있는데 下戶로 결원을 보충하는 것은 同級의 戶로 충원한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면 또한 당시 吏戶와 給吏의 관부에의 예속성과 신분

성을 보여준다 요컨대 給吏는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여서 평균

의 民戶 보다 더 빈천한 계층인 점도 그들이 관부에 정식의 吏職으로

임명된 吏라기 보다는 非吏인 民으로서 民의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

서에 給事(給役)하는 자들이되 관련 관서의 吏에 배속되고 給事 복무

해야 하는 예속된 신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찍이 宮崎市定이 宋書권94恩倖傳序의 郡縣掾史 幷出

豪家 負戈宿衛 皆由勢族 를 인용하여 豪家 출신으로서의 掾史가 고

관으로 진출하는 경향이 累代 이어지면서 右族이 이루어지고 이를 통

해 위진남북조 귀족제가 출현하였다 하였고102) 楊振紅이 이에 동조하

고 있는 것은103) 부분적으로 再考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당시 孫休

102) 宮崎市定 九品官人法の硏究 -科擧前史 (京都 同朋社 1979(1956)) pp86

-89

103) 楊振紅 앞에 든 吳簡中的吏 吏民與漢魏時期官 吏的分野 mdash中國古代官僚

政治社會構造硏究之二 p34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4傳에서 말한 吏戶는 분명히 豪族勢家가 아니었고 lt오간gt에서 民戶와

함께 lt吏民簿gt에 기록된 吏戶는 下品에 속한 貧層이었으며 그 식구

모두 중복된 賦役의 부담에 시달리는 계층이었다 그 吏戶에는 吏와

給吏로 구분되어 관부에 예속되고 있다 즉 아무래도 豪族大家로서의

掾史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정을 이해하는 데는 전술한

lt周禮gt의 府史胥徒에서 府史가 호족대가로서 辟除된 掾史에 類하고

胥徒가 곧 관부 예속하의 吏戶와 給吏에 거의 相當하다는 면이 있다

吏戶에서의 吏職에 掾史가 있겠지만 관부에 예속되어 있고 직업적 세

습화 되어 있어 호족대가 출신의 掾史와는 구분되었을 것이다 무엇보

다 호족대가 출신의 掾史은 관부에 예속되지도 아니하고 세습의 신분

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掾史層의 존재는 군현의 장관 辟召로 임

용되었을 것이다 반면 吏戶 출신의 掾史는 기술 계통의 전문직일 경

우이거나 개인적 기능의 능력으로 또는 部曲과 같은 상비병 출신이

일반 요역 부담에 대신하여 관련 직무에 세습하게 되거나 또는 일반민

호에서 급히 所要되어 임시로 차출되었다가 점차 세습의 吏戶로 예속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관부에 진 빚으로 예속되었다가 吏戶로 남

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즉 이 吏戶는 관부의 갖가지 所要 用務

에 差出될 상황에 대기되어 있는 戶이다 그 중에 일부는 정식으로 掾

史로 승진되지만 나머지는 윤번이나 필요시 이 방면 저 방면의 分署에

차출되어 給事하며 分署의 長을 主로 모시고 그 아래에서 給事한다

掾史의 吏와 구분하여 그러한 뜻을 반영한 것이 lt오간gt의 도처에 보

이는 수십종의 給某吏다고 생각한다 호족대가 출신으로서의 掾史와

예속신분인 吏戶 출신으로서의 掾史는 그 신분상으로도 士와 서민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기에 宮崎市定의 立論 또한 양자의 구분을 통한

위진남북조의 귀족제 내지 良賤制의 형성을 논하는 보완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근래의 여러 연구들은 掾史에 이렇게 두 방면으

로 구분되는 면과 계층이 있다는 점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였고 吏戶

의 家屬에 吏와 給吏로 구분되는 층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양자의 성

격이 어떠한가를 파악하지 못한 셈이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5한편 給吏는 吏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戶人이나 父兄이 郡吏 등의

諸吏에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당시 吏戶가 직업화 내지 세습화 되어

있었기 때문에 子弟의 給吏 신분도 곧이어 諸吏로 진전될 것은 당연하

다 그래서 lt嘉禾四年吉陽里戶籍簿gt에 吉陽里에 호적이 올라 있는 給

郡吏 逢杲(壹10169) 給郡吏 寥裕(壹10175) 給縣吏 張惕(壹

10182) 給州吏 區張(壹10367) 給州吏 嚴追(壹10149) 등이 lt嘉禾四

年五年吏民田家莂gt의 下伍丘 소속 佃民 名簿에서는 거의 同一人일

것이 분명한데 給郡吏가 群吏로 給縣吏가 縣吏로 給州吏가 州卒이나

州吏로 기재되어 있는 경우도104)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

다 이 경우는 丘에서는 給吏가 보이지 아니하고 里에서만 보이기 때

문에 아직 명확히 해명이 되지 않고 있는 里와 丘의 차이에 따른 것일

가능성도 있고 嘉禾4년과 嘉禾4-5년 戶籍簿에서의 1년 내외의 기간

차이에 따른 신분의 변화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또

한 侯旭東의 정리 조사에 의하면 高遷里의 給縣吏 松棐가 위의 lt田家

莂gt에서는 武龍丘의 縣吏로 기재되어 있고 같은 里의 給縣吏 張喬는

亻平 丘의 縣吏로 기재되어 있으며 宜陽里에 眞吏로 등재된 黃阿 등

6인도 각각 6곳의 다른 丘의 州吏 男子 男子 郡吏로 기재되어 있다

또 陽里의 給郡吏 謝鼠는 夫丘의 男子로 기재되어 있다105)里의 호

적부와 lt吏民田家莂gt의 丘別 佃民 명부에서 그 신분이 男子인 경우

일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양편 모두 里의 호적부에 給郡吏 給縣

吏 給州吏등 給吏로 기재된 경우는 대부분 丘의 佃民 명부에서 각각

群吏 縣吏 州吏로 되어 있고 眞吏가 州吏 郡吏 男子로 기재되기도

하고 給縣吏가 男子로 기재된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일부 사례들은 眞

吏 吏 給吏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것이어서 그 해명이 필요한

데 현재 里와 丘의 구별 차이 眞吏와 諸吏 給吏등의 실체 문제가 아

104) 凌文超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

型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 pp17-18의 lt表一gt

105) 侯旭東 長沙走馬樓吳簡ldquo里rdquoldquo丘rdquo關係再硏究 (魏晋南北朝隋唐史資料2006) pp19-21의 表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6직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어 그 이유를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실

정이다 그러나 신분명으로 이름을 달리하여 그렇게 구분하고 있으며

전술한 바와 같이 給吏가 吏나 眞吏와 다르게 취급되면서 여러 名簿에

구별되어 기재되어 있고 그 독자성도 충분히 입증되기 때문에 위의

예외적인 사항들은 개인별 특별한 사정에 따른 것이거나 아직 여러 異

說로 논란이 되고 있는 里와 丘 등의 구분과 차이 등에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고에서 갖추어 고찰하지 못하고

후고로 미룬다

Ⅵ 결 언

이상의 검토에서 고대 職役의 범주에 들어가는 다종의 신분 내지 계

층과 吏職의 類 그 복무형태 삼국시기에 이르는 전승과 변화의 모습

들을 살펴보았다 우선 職官과 일반요역 복무자와는 신분제와 賦役체

계상 엄연히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례 地官 鄕大夫에 그

舍란 國中의 貴者賢者能者服公事者老者疾者에게는 모두 舍

한다는 것이다 에 대한 후한의 鄭司農의 注에 服公事者란 지금 吏에

게 復除해주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고 하였다106) 여기서 lsquo舍rsquo란 復

除와 같은 뜻이다 그 대상 가운데 lsquo國中의 貴者賢者能者rsquo 가운데

貴者는 공경귀족 賢者와 能者는 命官과 辟召된 관리에 해당한다 그리

고 그 아래의 服工事者는 다시 2분되는데 200석 이하의 吏職 내지 掾

史職(小吏)이 있고 그 아래에 庶民在官者 내지 lsquo非吏로서 官에 給事

하는 자rsquo로서 給吏層이 있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賢者와 能者 까지를

職官이라 하면 그 이하인 服工事者 가 곧 職役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

석된다 그리고 職官과 職役 복무자는 모두 일반요역에서 면제되는 자

106) 其舍 國中貴者賢者能者服公事者老者疾者 皆舍 注云 lsquo服公事者rsquo

謂若今吏有復除也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7들이다 이 중에서 職役 복무자는 일반요역에서 면제되는 대신에 각종

의 吏職과 給吏職에 복무하였다 여기서 칭한 給吏職은 lsquo(小)吏rsquo에 대비

하여 칭한 給吏를 그 성격상 그렇게 칭할 수 있으며 그 독립적 계층

내지 신분으로서의 실태가 lt長沙走馬樓吳簡gt의 발현에 의해 상당 부

분 밝혀지게 되었다 그런데 服工事者 즉 職役 담당 계층의 범위가

상당히 넓어서 그 職役의 양태가 모든 면에서 같은 것은 아니고 일부

분 다른 측면들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고대의 긴 기간에 걸쳐 거의

공통으로 庶民在官者 lsquo非吏이면서 관부에 給事하는 자rsquo lsquo官과 民 사

이rsquo lsquo半官半民rsquo의 성격이 유지되고 있는 면을 볼 수 있다

이렇게 職役 담당자의 연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곧 lt주례gt에 보이

는 관리 조직의 최하위에 위치한 府史胥徒이다 이 가운데 府史

가 대략 후대의 掾史職이나 lt吳簡gt의 諸吏에 속한다면 胥徒는 給吏層

에 상통하는 면이 많다 단지 lt吳簡gt에 다수 보이는 吏役 下의 吏戶

는 그 과중한 부담과 厮役 및 빈천함의 성격상 오히려 胥徒에 상통하

는 면이 많다 이러한 시대적 차이는 吏戶의 예속화 및 세습화의 진전

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한편 시대의 여건 차이로 여러 부분에서 胥徒

와 후대의 職役 담당 계층 사이에는 다른 면도 있다 胥徒나 給吏層이

기본적으로 일반 서민 출신으로서의 服工事者 였던 것과는 달리 周에

서 三國에 이르는 동안 服工事者 라는 면에서 同類이지만 일반 서민

과는 구분되는 여러 相異한 계층에 속한 신분들이 속하여 있었다 예

를 들면 工商食官 에 속하는 工商 皁隸食職 에 포함되는 吏에 속

한 徒隸 층 넓은 의미의 徒隸層이라 할 수 있는 皂隸牧圄

僕輿人 그리고 下吏層에 들어가는 樂祝醫衛士 및 走卒伍伯

之類 등이 그들로 그 출신은 일반 서민이거나 賤民 또는 刑徒였지만

관부에 寄生하며 給事한다는 면에서는 공통이다

이들의 복무 형태는 항상적 근무 일시적 근무 組別 교대제 등 여러

가지로 징발 내지 차출되었고 lsquo冗rsquo과 lsquo更rsquo은 그러한 차이를 구분하는

용어로서 나온 것이다 근무에 따른 보수를 받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 구분은 아직 분명치 않은 부분이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8있다 그러하지만 최소한 생업을 관부에 의탁하는 자들에게는 지급되

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年俸制에 대비되는 稍食 즉 소액의 月俸 내

지는 근무일수 기준의 지급 형태로 지급되었다 이는 그들의 근무가

주로 일 단위나 월 단위로 이루어지고 계산되었기 때문이다

lsquo官rsquo과 lsquo吏rsquo는 서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선진 이래 본래 상하의 신

분으로 명확히 구분되었고 漢代에 혼용 내지 통용되는 경향이 있었지

만 양자가 구분되는 면 또한 여전하였다 吏는 官에 가까운 吏가 있고

民으로서의 吏가 있어 전자를 lsquo官吏rsquo라고 하면 孫休傳의 詔에서 거론된

吏家는 보통 吏民으로 합칭될 경우의 吏라고 할 수 있다 lt吳簡gt의

lt吏民簿gt나 lt戶口簿gt 등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실태에서 후한 말에

서 삼국기의 전형적인 職役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이제까지 그

존재에 대해 거의 간과되어 왔던 給吏에 대해 lt吳簡gt은 수십종의 給

吏 실태를 전해주고 있어 그 의의가 크다 吏의 사무 업무를 직접 勞

役으로 보조해주는 給吏는 관부의 행정 업무 처리에 있어서 항상 필요

한 노동력 제공자였다 이러한 노동력은 어느 시기이든 공통으로 필요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연원을 lt주례gt의 胥徒에서 찾아볼 수 있었

고 여러 면에서 職役의 실례로서 공통하는 면들을 지적할 수 있었다

후한 말 삼국시기의 吏와 給吏는 일반서민 신분으로서의 吏이며 吏戶

로써 관부에 예속되어 그 食口 성원이 거의 세습하여 吏役에 종사하

고 있다 이들은 일반서민에 비해 일반요역이 면제된다는 점을 제외하

면 그밖에 각 吏職에 따른 吏役의 기본 직무 외에 限田의 佃作 의무와

그 地租로서 限米 布 錢을 납부해야 하며 從軍해야 하는 등 중첩된

부역으로 일반서민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또한 그 戶品 이

下品 내지 下品之下에 속한 貧戶 출신이다 따라서 같이 吏로 칭하지

만 豪族勢家 출신으로 掾史職을 거쳐 상급관으로 진급하고 命官에 오

르는 累代 高族의 世家 출신 掾史와 빈천한 서민 출신으로서 관부에

예속된 吏戶 출신으로서의 掾史와는 구분된다 이 吏家 내지 吏戶는

吏의 칭호로 불리지만 일반민보다 더 많은 부담을 지고 있기에 그들의

役은 후한과 삼국기에 賤役 賤職 내지 厮役으로 칭해지며 기피되고 있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9다 따라서 이 계층이 官吏로 합칭되는 경우의 吏와 구분되는 것은 당

연하며 그 호칭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늦어도 孫休 시기의

문서와 간독자료에 등장하는 lsquo吏家rsquo나 lsquo吏戶rsquo는 이미 그러한 계층에 대

한 專稱으로 형성된 듯하다

한편 諸吏役의 복무에는 常勤의 방식과 1년에 1개월 내지 수개월만

輪番 형식으로 복무하는 비상근의 lsquo踐更 방식의 근무rsquo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한 비상근 복무자도 있었을 것이다107)그리고 그 복무에

대한 급여가 그 吏役을 생업으로 하는 常勤者에게는 당연히 小吏에 대

한 봉록이 지급되었을 것이다 반면에 給吏의 役은 일반요역에 대신하

는 복역이라는 면에서 비상근 내지 윤번 형식의 차출이었을 가능성이

많지만 지금까지 lt오간gt에 소개된 자료로는 어느 쪽이라 단정하기가

어렵다 胥徒의 役은 어디까지나 상급의 관원들과는 달리 일반민의 요

역 의무를 대신하여 관부에 給事하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lt오간gt

에서의 給吏와 상통한다 給吏에 대한 봉록 지급의 여부도 아직 不明

이다 단지 限田의 지급이 祿田과 같은 성격의 것이었을 가능성도 고

려되지만 그 租額이 커서 혜택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노동력의 징발로

서 해석되는 부분도 있다 또한 給吏의 관부에의 給事가 일반 요역과

같이 組別 순환제였는지의 여부는 아직 분명치 않다 lt奏讞書gt의 樂

人의 예와 같이 一月一更制와 같은 순환근무제였을 가능성도 있는데

대체로 두 가지 형태가 공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lt吳簡gt에 의거한 의론들은 아직 자료 해석과 해명이 충분치 못하여

불분명한 상태에 있는 사항들이 많은 실정이기 때문에 해당 사항이 새

로 규명 되는대로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lt오간gt의 미해명 사항

에 대한 개별적인 탐구도 본 과제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필요하다 그

리고 아직 소개되지 않은 대량의 lt오간gt이 연속하여 출간되면서 새로

운 자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107) 廣懶薰雄 앞의 秦漢律令硏究 pp310-311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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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103

(中文摘要)

中國古代的職役與職官的問題

朴 健 柱

通過上述的檢討 基本上職役範疇內的多種身分 乃至階層與吏職之類

其服務形態至三國期的傳承與變化等方面已然解明 職官與職役服務者

的一般徭役均免除了 此二者中職役服務者 用種種lsquo吏職rsquo與lsquo給吏職rsquo服務來

代替其一般徭役 直至三國時期爲至漫長的期間內職役擔當者 庶民在官者

lsquo非吏而給事官府者rsquolsquo官與民之間者rsquolsquo半官半民rsquo的性格几乎共通維持

職役擔當者的淵源卽是lt周禮gt所見的官吏組織最下位的府史胥

徒 此中 府史是大略屬于後代掾史職或是lt吳簡gt的諸吏 胥徒則是相通于

給吏層的側面多的 但是lt吳簡gt所見多數的吏役下吏戶其過重的負擔與厮

役及貧賤的性格上 倒是與胥徒相通方面較多 這個時代的差異像是吏戶的

隸屬化及世襲化的進展招來的結果 一方面因爲時代的與件差異 胥徒與後

代的職役擔當階層間有多方面的異質 胥徒與給吏層基本上是一般庶民出

身的 服工事者 如此不同 從周至三國期間從 服工事者 上是同類而與一

般庶民相區分的多種相異的階層面上身分較多 例如 工商食官 所屬的工

商 皁隸食職 所包含的 吏所屬的徒隸 層以廣義的徒隸層可以稱謂的

皂隸牧圄僕輿人 以及下吏層所屬的樂祝醫衛士 及走

卒伍伯之類等 他們的出身是一般庶民 或是賤民乃至刑徒 在官府寄生

而給事的層面上是共通的

其服務形態是恒常的勤務 一時的勤務 組別交代制等以多種方式徵發乃

至差出 lsquo冗rsquo與lsquo更rsquo是其差異區分用的用語 支給勤務報酬與否是不分明之事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04項 可是至少生業官府依託者是被支給的 其支給方式是與年俸制相對的稍

食 卽少額的月俸乃至勤務日數基準的支給方式 因此他們的勤務和支給計

算主要是日單位或是月單位

於lt吳簡gt之lt吏民簿gtlt戶口簿gt等所見的吏與給吏的實態 可以看到

從後漢末至三國期間典型的職役的樣相 尤其向來看過給吏的存在 lt吳

簡gt所傳數十種給吏的實態 其意義是巨大 給吏是以直接的勞役補助吏的

事務業務 是官府的行政業務處理上恒常的必要勞動力提供者 這種勞動力

許是官府運營上至今爲至所有過的任何時期共通要緊事項 可以推斷給吏

的淵源於lt周禮gt的胥徒 而且可以指摘以職役的實例有多方面共通的層面

後漢末三國時期的吏與給吏是一般庶民身分之吏 以吏戶隸屬於官府 其食

口成員率多世襲地從事吏役 他們除比一般庶民免一般徭役外 也需要履行

各吏職別吏役的基本職務 佃作限田義務 以其地租納付限米布錢 從

軍義務等重疊的賦役 因此他們有比一般庶民更重的負擔 而且他們的戶品

是下品乃至下品之下所屬的貧戶出身 從而他們雖一樣稱謂lsquo吏rsquo 却與豪族

勢家出身經歷掾史職進級上級命官的累代高族的世家出身的掾史與以貧賤

的庶民出身於官府隸屬的吏戶出身的掾史是不同的階層 這個吏家乃至吏

戶雖被稱謂lsquo吏rsquo 但是彼役後漢三國期被稱謂賤役 賤職乃至厮役 而且被忌

避 從而此階層是與lsquo官吏rsquo合稱的境遇的lsquo吏rsquo爲區分是理所當然 其稱號也只

得相殊 于是最遲至少到於孫休時期文書與簡牘資料所見的lsquo吏家rsquo與lsquo吏戶rsquo

許是已經成爲如此階層的專稱

依照給吏的役是一般徭役代替的服役 其運營形態是非常勤乃至輪番形

式的可能性大的 但是迄今依據lt吳簡gt所見的資料還難以斷定何者是對的

胥徒的役是與上級官員異樣 以一般民的徭役義務代替給事於官府 本着那

樣的側面與lt吳簡gt所見的給吏相通 給給吏俸祿與否也還不明 但是從限

田的支給是與祿田同一的性格的可能性上看 因爲其租額是多的 與其說惠

澤倒是有可能解釋爲勞動力的徵發 給吏的官府給事是與一般徭役同一方

式的組別交代制與否還不分明 如lt奏讞書gt所見樂人的事例 有可能一月

一更制方式交代勤務制 筆者認爲大體上是兩個方式共存

關於lt吳簡gt資料的議論是因爲解釋與解明上許多異說 不分明的關聯事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105項也有很多 所以該事項的解明將其完備需要補完

주제어 직역 직관 서도 도예 이역 이호 급리 서민재관자

關鍵詞 職役 職官 胥徒 徒隸 吏役 吏戶 給吏 庶民在官者

Keywords lavor duty at office(official lavor) high-ranking officialrsquos duty(official

post) xu-tu tu-li minor officials lavor minor officials family minor half

officials and half the masses in lavor services at office the masses in lavor

services at office

(원고접수 2013년 11월 15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12월 16일 수

정원고 접수 12월 19일 게재 확정 12월 26일)

Page 7: AB C D - KNUwebbuild.knu.ac.kr/~china/CHR/chr2013/chr87pdf/chr87-02... · 2014. 1. 4. · FG9 ±°'c&`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1그 아래는 6인이 食할 수 있으며 下農夫는 5인이 食할 수 있다 庶人

在官者 는 그 祿이 이것으로써(8인에서 5인까지) 차등을 삼는다 제후

의 下士는 上農夫로 하고 그 祿으로 그 농경에 대신하기에 족하다 中

士는 下士에 倍하고 上士는 中士에 倍하며 下大夫는 上士에 倍한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라 10)하였고 맹자萬章句下에는 耕者가 수확하는 것으로 一

夫 當 百畝씩 百畝의 分田에서 上農夫는 九人이 食할 수 있고 그 다

음은 8인이 食할 수 있으며 中은 7인이 食할 수 있고 그 다음은 6인

이 食할 수 있고 下는 5인이 食할 수 있다 庶人在官者는 그 祿이 이

를 차등으로 한다 라11) 한 바에 의하면 庶人在官者 는 下士 아래

등급인 府史胥徒에 해당하며 차례로 9인이 食할 수 있는 百畝

의 최상급 농지를 경작하는 상농부(제후의 下士)의 아래 등급에 해당

하는 8인이 食할 수 있는 百畝의 경지 보유자는 府가 되고 그 아래

순으로 각각 7인의 食地 보유자는 史 그 아래 6인의 食地 보유자는

胥 그 아래 5인의 食地 보유자는 徒가 된다 이 규정에 의하면 下士에

서 徒까지는 모두 百畝의 경지를 보유하게 되는 면에서는 같지만 그

경지의 質에 따라서 5 단계의 차이 나는 경지를 차등으로 받게 된다는

것이 된다 上農夫 등의 차등은 주례의 鄭注에는 田의 肥瘠에 5등

급이 있어 수입이 같지 않다 라 하였고 위 인용문의 맹자 注에 一

夫一婦에 佃田이 百畝인데 百畝의 田에 糞을 퇴비로 주면 이것이 上農

夫이고 그 소득의 곡식으로 9口를 족히 먹일 수 있다(一夫一婦 佃田

百畝 百畝之田 加之以糞 是爲上農夫 其所得穀 足以食九口) 라 한

것에 의하면 糞의 퇴비 사용 여부 등으로 인한 토지의 肥瘠으로 발생

하는 수확의 양적 차이에 따른 구분임이 분명하다 즉 祿田 지급의 면

적 크기는 같지만 토지의 질적 차등을 기준으로 下位 5등의 차별이 결

10) 制農田百畝 百畝之分 上農夫食九人 其次食八人 其次食七人 其次食六人

下農夫食五人 庶人在官者 其祿以是爲差也 諸侯之下士視上農夫 祿足以代其耕

也 中士倍下士 上士倍中士 下大夫倍上士middotmiddotmiddot

11) 耕者之所獲 一夫百畝 百畝之分 上農夫食九人 上次食八人 中食七人 中次

食六人 下食五人 庶人在官者 其祿以是爲次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2정되고 있다 漢唐의 주석가들이 庶人在官者 를 주례의 府史

胥徒에 해당시킨 해석은 그들이 살던 시기의 정황에 의거한 것이고

관련 자료들도 충분히 현전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인정될 수 있는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일찍이 曾我部精雄은 鄭注와 賈疏의 차이를 제시하길 鄭玄은

府와 史가 庶人在官者 에 들어가지만 胥와 徒는 그에 들지 못한다고

한 반면 賈公彦은 4者가 모두 그에 포함되는 것으로 본 차이가 있고

鄭注의 해석이 옳다고 하였다12) 그는 상기의 주례 胥十有二人徒

百有二十人 에 대한 鄭注에 이는 民이 徭役을 給한 것이니 지금의 衛

士와 같다(民给徭役者若今衛士矣) 라 하였고 賈疏도 이에 따르고

있는데 胥와 徒는 요역 의무에 복무하는 것인 까닭에 봉록이나 수당이

지급되지 않았고 官長으로부터 辟除 임용된 것도 아니었으며 육체노

동이었던 반면 官長으로부터 선발되어 辟除 임용된 府와 史는 관부의

정신노동에 복무하였기 때문에 다르다고 하였다13) 때문에 庶民在官

者 에 胥와 徒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曾我部精雄은 鄭注와 賈

疏의 그러한 입장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여러 조문을 열거하고 있지만

賈疏가 府史胥徒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나 그가

열거한 자료에서 鄭注가 胥徒를 배제하고 있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주

는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屬이라 함은 그 屬인 胥徒이다 (春

官 宗伯 典祀) 群吏는 府史 이하이다 (夏官 司馬 御僕)라고 해석한

부분에 의하면 胥徒도 屬吏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는 입장이었을 것 같

다 또 曾我部精雄이 胥徒는 給徭役의 의무로 복무하는 것인 까닭에

봉록이 지급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위의 경문에서 최하급의 田地이지

만 1백무의 祿田이 지급된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 주장도 어긋나게 된

다 庶民在官者 의 봉록 문제는 아래에서 다시 상론한다

여기서 주의할 사항은 鄭注와 賈疏가 모두 한에서의 사정에 입각하

12) 曾我部靜雄 中國往古の胥吏制度 (中國律令史の硏究 東京 1971) pp456

-8

13) 위의 글 pp456-7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3여 府史와는 달리 胥徒가 모두 요역 의무로 징발되어 복무하는 자들로

본 것이라는 점이다 이 府와 史의 직무에 대해 정현과 가공언은 주례 小宰 宰夫의 8職 가운데 다섯째 府는 契하여 藏을 治하고 여섯

째 史는 문서로 贊治(보좌관의 업무)함을 관장한다( 五曰府 掌官契以

治藏 六曰史掌官书以赞治 에 의거하여 府는 문서와 器物의 藏(보

관 관리)을 관장하고 史는 문서의 起草를 관장하는 직책으로 해석하

였다 이는 진한시기 각 관부의 屬吏 掾史의 庶務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lt雲夢秦律gt 秦律雜抄(p133)에 佐 史 이상인 吏가 짐을 지고

운반하는 馬와 문서 간수를 담당하는 私卒(隨從의 卒)을 부려서 장사

하도록 하여 이익(錢)을 취하였으면 모두 遷刑에 처한다 라 하였는데

lsquo문서 간수를 담당하는 私卒rsquo이란 佐史 이상 관리 직속의 下屬으로서

그 상관을 隨從하며 보좌하는 까닭에 私卒이라 한 것이고 家內의 私

卒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정리소조가 lsquo隨從의 士卒rsquo로 해석하였는데

문서 간수를 직분으로 하는 史에 下屬된 卒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

든 府史의 史 및 그 下屬의 인력이 전국진에서도 설치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周禮天官 宰夫에 기술된 宰夫8職에서 일곱째 胥는 그 업무가 掌

官叙以治叙 인데 鄭注는 治叙란 관부에서 次序함이니 마치 지금(漢에

서) 侍曹 伍伯이 관리의 朝會에서 傳言 報告하는 것과 같다 胥가 什

長이 된 경우도 또한 그러하다 까닭에 漢法의 사정을 든 것이다(如今

侍曹伍伯 傳吏朝也 胥爲什長亦然 故擧漢法况之也) 라 해석하였다

좀 난해한 설명인데 이를 부연 설명한 賈疏는 이미 才智가 있어 什

長이 되어 관부에서 次序의 업무에 當하니 반드시 사람을 使役하는 곳

에서 그 徒를 科次한다 까닭에 관부에서 次叙한다고 하였다 로 해석

한다 즉 보통 胥徒로 함께 칭해지는 胥는 徒 중에서 才智가 있어 什

長으로 선발된 층으로 관부의 次序 업무를 맡게 되는데 徒를 使役하는

곳에서 그들을 통솔하며 科役한다는 것이다 如今侍曹伍伯 傳吏朝也

도 난해한데 賈疏는 漢에서 侍曹에서 伍의 長인 伍伯(伍長)에 이르기

까지 吏朝(관리의 朝會)에서 群吏가 諸官의 사무를 보고하여 傳하는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4것으로 해석하였다14)즉 侍曹에서 최말단의 부서 단위에 이르기까지

담당 부서의 朝會 때 각 하급 단위의 長이 업무 보고를 하는 것이다

그런대 이 伍伯은 5인조의 長이 아니고 漢의 執金吾의 속관에 (持戟)

五百(伍伯)二十人 이 있고 이 lsquo伍rsquo의 義를 lsquo當rsquo으로 lsquo伯rsquo의 義를 lsquo道rsquo로

해석하여 앞에서 導引하며 길을 驅除 정리하는 吏라고 한 韋召의 해석

이나15) 司隸校尉의 속관으로 先導隊나16) 門番의 임무를 하고 있는 사

례에17) 의하면 하급의 賤職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후한에 伍伯이

자주 보이는데 모두 走卒 鈴下와 連稱되거나 병렬되어 있어 일찍이 好

並隆司는 走卒은 伍伯이라고 하는 職役에 類한다 고 하여(후술) 모두

관부 말단의 職役 내지 賤職이라 하였다18) 凍國棟은 漢唐間의 伍伯이

微賤의 役이였지만 그 職의 성격상 권세를 빌려 남의 생사를 좌우하

고 謝禮錢을 챙길 수 있는 자리였다고 하였다19) 따라서 여기서는 吏

朝에 참석하는 최말단의 吏員으로서 先導 門番 등 役에 복무하는 伍伯

을 기술한 것이라 하겠다 胥徒는 곧 伍伯과 같이 관리의 최말단 수종

원이면서 그 손발 내지 爪牙의 기능도 하는 층이다 이러한 류의 최하

급 단위의 長은 什長이고 胥는 곧 그 什長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주례에서 각 관부의 徒는 그 員數가 거의 대부분 胥의 10배수이다 그

리고 관부의 次序 업무란 담당 단위의 胥가 그 소속 성원의 질서를 유

지하며 아울러 요역 징발된 民의 徒를 지휘 통제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후술)

이어 여덟째 徒는 그 업무가 官의 令으로써 徵令을 관장함(掌官令

14) lsquo如今侍曹五伯传吏朝也rsquo者漢時五人爲伍 伯 長也 是五人之長 言傳吏朝者

傳在朝群吏諸官事務於朝也

15) 후한서 宦者列傳 曹節條의 注에 韋召辯釋名曰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伍 當也 伯 道也

使之導引 當道陌中 以驅除也

16) 續漢書 輿服志上에 公卿以下至縣三百石導從 置門下五吏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車前伍伯 公

八人 中二千石 二千石 六百石 皆四人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17) 謝承後漢書에 華松家孤微 其母夜夢兩伍伯夾門 言司隸在此

18) 好並隆司 漢代下層庶人の存在形態(一) (史學雜誌 82-1 1973) pp17-1919) 凍國棟 漢唐間lsquo伍伯rsquo淺識 (中國中古經濟與社會史論考 湖北敎育出版社

2005) pp25-35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5以徵令) 인데 얼핏 徒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내용인 듯하다 정현은

이 lsquo徵令rsquo의 업무를 趨走給召呼 라 하였다 賈疏는 그 徒가 朝會에서

뛰어다니는 것을 금지시키고 官人에게 복역자를 공급하고 그들을 호

령하며 사역시키는 일이다(其徒止爲在朝趨走 供給官人召呼使役之事也)

고 해석하였다 관부 내에서 많은 복역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까닭에

그들이 소란 피우지 못하게 질서를 잡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서 徒에 의해 징발되고 사역되는 층은 관부에 복역 중인 刑徒 요역에

복무 중인 일반 서민 등일 것이다 주례의 각 관부에서 徒의 수는

수십 명에서 수백 명 많은 경우 8백명에 이르기도 한다 이들의 노동

력은 각 관부별로 항상적으로 갖추어진 것이지만 이 보다 더 많은 노

동력이 필요하여 형도나 일반 요역 복무자들을 징발하게 된다 그리고

그 징발된 노동력을 호령하며 질서를 잡고 사역시키는 직무도 필요하

게 된다 물론 징발된 자들을 사역시키는 일 뿐 아니라 자신들이 직

접 여러 노역의 所管 업무에 복무해야 한다 이를테면 地官 牛人에

胥二十人 徒二百人 이 있고 그 직책은 公牛의 사육이며 稻人에 胥

十人 徒百人 인데 그 직책이 稻田의 경작이고 夏官 虎贲氏에 胥八十

人虎士八百人 인데 鄭注에 의하면 徒라 하지 아니하고 虎士라 한 것

은 徒 가운데 勇力者로 선발된 까닭이다 하였으며 그 일부 직무에 同

司甲 司戈盾 司弓矢 繕人 校人 趣馬 巫馬 등에 속한 수십

명 내외의 徒는 모두 무기제조나 다루는 법 무기 성능 감별 馬의 감

별 養馬기술 馬祖 馬步 등의 神을 통해 馬의 질병을 파악하는 巫術

등에 뛰어난 상급자들 밑에서 보조 지원의 일 등 말단의 업무를 처리

한다 전문 기술과 지능이 필요한 업무인지라 말단의 업무 처리도 상

당히 명민한 자질이 필요하다 따라서 일반 서민 가운데서 이러한 재

능과 자질이 있는 자로 충원한다 이러한 각 관부의 업무 처리는 후대

에도 익히 보이는 사례이다 鄭玄은 胥를 lsquo諝(智者)ldquo로 읽어 才知의 뜻

으로 해석하였는데 같은 徒의 무리 중에서 才知者로 뽑힌 자라는 뜻으

로 보았다 胥가 什長인 까닭에 10인 가운데 1인 비율로 뽑힌 셈이다

아울러 徒 전체가 일반 서민으로부터 뽑힌 자들이라 할 수 있다 단지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6胥徒의 신분상 복무형태상의 제반 사항이 후대에 그에 상당하거나 유

사한 신분층과 사례에 대비할 때 상당히 다른 면이 많다는 사실이다

趙伯雄은 주례의 胥徒는 전국기까지 노예 厮 童보다 윗 등급이지만

거의 비슷한 신분이었고 厮役 내지 賤役의 담당층이었으며 徒가 한에

서는 주로 刑徒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고 하였으나20) 아래

기술하는 내용에 의하면 그러한 해석에 따를 수 없는 면이 많다 또한

한에서 徒는 형도 뿐 아니라 여러 무리를 가리키는데 통용되고 있어

여러 자료에 등장하는 徒가 가리키는 사항은 무척 다양하다

위의 注疏에 의하면 經文에서 徒의 업무를 官의 令으로써 徵令을

관장함(掌官令以徵令) 이라 한 것은 上部의 지시를 받은 徒가 새로

징발되는 徒의 징발 업무 및 이들을 인솔 지휘 사역하며 그 지시사항

(작업)을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胥와 徒가 모두 庶民在官者 라는 입

장에서 보면 徒가 최하위이지만 lsquo在官者rsquo이고 제8위와 제9위의 서열에

있으며 胥와 徒가 각각 6인과 5인이 食할 수 있는 토질의 경지 百畝

를 代耕의 봉록으로 받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이 출신은 징발된 요

역 복무자와 같다고 하더라도 여타의 징발된 일반 요역 복무자와는 구

분되는 계층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후대의 胥吏도 일반 서민출신이지

만 일반 서민과 다른 계층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 같다 만약 曾我部精

雄의 견해와 같이 府와 史까지만 庶民在官者 이고 胥와 徒는 그에

들지 못하는 것이라 한다면 주례 원문에 胥와 徒가 엄연히 제8위와

제9위에 올라 있고 봉록으로써 百畝를 받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기 어

렵게 된다

그리고 특별히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앞에 인용한 鄭注에 이는(胥

와 徒는) 民이 徭役을 給한 것이니 지금의 衛士와 같다 고 한 점이다

그래서 후한 중후기 衛士의 운영 형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또 鄭

玄은 駁五經異義에서 周禮에서 이른바 모두 징발한다 한 것은 胥

徒로 하여금 公家의 事에 給하게 한 것을 말함이니 지금의 正衛와 같

20) 趙伯雄 lt周禮gt胥徒考 (中國史硏究 2000-4) pp10-12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7다 고21) 하였다 한에서 궁성 내지 중도관에 番上 守衛하는 役은 正卒

의 役과 일반 更卒의 役이 있는데 鄭玄이 특별히 正衛라 한 것은 正卒

로서의 役임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의 요역 운영체제에서

衛士가 上番하는 役은 한구의에 民의 나이 23세가 되면 正이 되고

1년간 衛士 1년간 材官 騎士에 복무하며 활쏘기 말달리기 戰陣을 익

힌다(民年二十三爲正 一歲以爲衛士 一歲爲材官騎士 習射御騎馳戰陣)

라 한 것에 의하면 正卒이 그 복역 대상자이고22) 각 군 단위로 1년씩

21) 禮記王制 五十不從力征middotmiddotmiddot 의 條 孔穎達疏引 周禮所謂皆征之者 使爲胥

徒 給公家之事 如今之正衛耳

22) 漢의 正과 正卒 및 상비군의 문제에 대해서는 종래 여러 이견이 있다

正을 正卒로 보고 正卒이란 更卒(小繇)의 對稱으로서 병역의무자이고 재관

기사 위사등이 곧 정졸이라는 설이 가장 많이 받아드려지고 있다(濱口重國

秦漢時代の繇役勞働に關する一問題 秦漢隋唐史の硏究』上卷 東京 1966

1980 勞幹 漢代兵制及漢簡中的兵制 歷史語言硏究所集刊 10 1948 山田

勝芳 後漢時代の繇役と兵役 歷史 66 19869)正卒은 앞의 설과 같지만 正은 23세에서 56세 사이의 남자 즉 正丁 을 가리

킨다는 설(西村元佑 漢代の繇役制度 東洋史硏究 12-5 1953)正卒과 更卒이 별개인이 아니라 동일인이고 更卒은 正卒이 된 이외의 해에

매년 1개월의 역역에 복무하는 자를 가리키며 正은 23세-55세까지의 正丁인

데 正卒은 그 가운데 2년간 衛士 材官 騎士 등의 實役에 복역하는 것이라는

설(西田太一郞 漢の正卒について 東洋の文化と社會1 東京 1955)

材官 騎士등이 일반민에서 材力 있는 자로 선발되어 군국에서 常駐하는 전

문병사로서 직업군인인 lsquo士rsquo인데 대해 正卒은 일반민이 23세에 1년간 병졸로서

근무하고 1년간 衛士로 長安에 上番한다는 설 즉 正卒은 직업군인인 材官 騎

士와는 兵役體系上 別個의 것으로서 일반민의 병역 복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는 설(大庭脩 材官攷 -漢代の兵制の一班について 龍谷史壇 36 1953)正卒이란 23세에 이른 자 가운데서 신체강건한 자를 뽑아 衛士 材官 騎士

樓船 등의 어느 한 兵種에 복무하게 한 것이라는 설(濱口重國 勞幹 西村元佑

山田勝芳 앞의 논문 平中苓次 漢代の官吏の家族の復除と軍賦の負擔 中國

古代の田制と稅法 京都 1967) 諸說의 대부분은 이 견해를 공통적으로 취하

고 있다

秦漢에서는 始傅에서 免老까지의 모든 남자가 병역의무를 지는데 正卒은 그

適齡남자를 統稱하는 말이며 따라서 郡兵이나 衛士 戍卒은 正卒의 일부분이라

는 설(臧知非 秦漢lsquo正卒rsquo辨釋 中國史硏究 1988-1)正이란 傅籍된 待役者(兵役과 力役 포함)를 말하며 正卒은 어떤 특정의 役

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고 正(待役者)과 卒(服役中에 있는 正)로 구분되어 있

는 말이며 秦漢代에 병역 복무는 일부 병역신분에게 만 부과된 것이어서 나머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8조별 순번으로 상경하여 복역한다 正卒은 일반 更卒 중에서 신체강건

용맹 등으로 선발된 자들로 상비군 내지 직업군인의 성격이 강한 집단

이다 즉 그들은 일반민(서인)이면서도 그 중에서 선발되어 군사로써

免老에 이르기까지 복무하는 까닭에 일반민과는 다르다 胥徒 또한 서

인이면서 관부에 복무하는 까닭에 일반민과는 다르다 衛士는 특히 평

시에 도성(중도관)을 수비하기 때문에 관부에 거처하게 되고 胥徒 또

한 관부에서 직접 給事하는 까닭에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면에서 鄭玄

은 양자를 같은 성격의 계층으로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衛士가 일반

민에서 선발된 자들이고 胥는 徒 중에서 才智로 선발되고 徒는 분명

치는 않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일반 民庶 가운데 담당 직무 수행에 어

느 정도 자질을 갖춘 자로 선발된 자들일 가능성이 크다 또 漢書권74魏相傳의 顔注에 京師의 여러 관부에 와서 戍卒이 되는데 지금의

衛士가 上番하여 여러 官司에 나누어져 복무하는 것과 같다 라23) 한

것에 의하면 衛士의 이러한 복역 모습은 각 官司에 배치된 胥徒의 복

역 형태와 같다 전한 京師에서 복무중인 衛士의 수는 景帝末傾에 매

지 일반 白徒는 병역에 복역하지 않는다는 설(孫言誠 秦漢的繇役和兵役 中國史硏究 19873 및 ldquo爲正一歲rdquo辨 文史 31 198811)濱口說과 같이 正을 正卒의 略稱으로 보지만 濱口씨가 正卒을 일반적인 兵

士로 본 것과는 달리 庶民 중에서 일부가 선발되어 兵士(材官 騎士 등)가 된

것이며 이들은 일반서민과는 상대적으로 구별되는 신분 말하자면 獨自의 兵

士身分 으로서 일반서민과 같은 역역(更卒) 의무가 없었고 일반서민과는 다른

부담체계하에 있었다는 설(重近啓樹 秦漢の兵制について -地方軍を中心とし

て- 人文論集(靜岡大學) 36 1985)正卒은 일반민이 20세로 부터 2년간 복무하는 것이며 材官 騎士는 이와는

달리 전문병사로서 23세에서 56세까지 복무하는 것이라는 설(藤田勝久 前漢

の繇役勞動とその運營形態 中國史硏究 8 1984)한편 李成珪는 材官 騎士는 卒에서 징발된 전문 병사였고 1년 복역 후에도

예비역으로 분류 비상시 동원되었지만 (軍)吏나 士에 속하지 않는 자들로서

力役 복역의 한 형태인데 董仲舒가 말한 lsquo一歲力役rsquo은 바로 郡卒로 1년 복무하

는 材官 騎士의 役을 말한 것이라 한다(이성규 前漢 更卒의 徵集과 服役 方

式 -松栢木牘 47호의 분석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09 200912

pp33-34)

23) 來京師諸官府爲戍卒 若今衛士上番分諸司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9년 2만인 武帝 즉위 후 1만인으로 감하고 얼마 후 5천인을 늘려 武帝

후기에는 1만5천이었을 것으로 보인다24) 또 1개 군에서 番上하는 수

가 數千에서 2~3천인이었던 사례가 있다25) 전한 말 成帝 시기의 사

정을 말해주는 尹灣漢簡의 lt東海郡下轄長吏不在署 未到官者名籍gt

에 군현 밖으로 外勤出張 중에 있는 長吏의 현황표에 費長孫敞 十月

五日送衛士 가 있는데26) 費邑의 長 孫敞이 衛士를 送하는 업무로 출

장하여 아직 귀환하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동해군 下轄의 縣(18)邑

(2)侯國(18) 38곳(lt集簿gt) 가운데 오직 費邑에서만 衛士가 上番되고

있다 이에 의하면 衛士의 상번은 각 군에서 縣級 단위로 교대 상번하

는 것으로 보인다 濱口重國은 후한에서 正卒의 군현상비군이 폐지되

었지만 전한에서와 마찬가지로 매년 연말에 1년의 복무가 끝나고 귀향

하는 衛士들에게 황제가 향연을 베푸는 饗遣故衛士儀가 행해지고 있는

사례를 들어 衛士의 上番은 후한에서도 행해지고 있음을 지적한 바가

있다27) 아울러 그는 군현 상비군 폐지 후 중앙의 衛士 부대가 2500

내지 2600명인데 이는 중앙 인근 지역에 한정하여 징발된 자들로 보

아야 한다고 하였다28) 후한 周禮注에서 鄭玄(127-200)의 衛士 인용

이 전한시기의 사정에 의거한 것인지 아니면 그의 활동시기인 후한 후

기의 사정에 의거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후한 중 후기에도 衛士의

上番制가 부분적으로나마 유지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4) 濱口重國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隋唐史の硏究』上卷 東京

1966 1980) p286 注2)

25) 「上臨饗罷衛卒 衛卒數千middotmiddotmiddot」 (漢書 권77 蓋寬饒傳) 「河南卒戍中都官者二三

千人middotmiddotmiddot」 (漢書 권74 魏相傳)

26) 張顯成 周羣麗 尹灣漢墓簡牘校理(上篇) (天津古籍出版社 2011 3) p32

27) 濱口重國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隋唐史の硏究 (上)) p283

28) 濱口重國 위의 글 pp284-285 그 주된 근거는 속한서 백관지3 尙書條에

蔡質漢儀曰 ldquo右丞與僕射對掌授廩假錢穀 與左丞無所不統 凡中宮漏夜盡 鼓鳴

則起 鍾鳴則息 衛士甲乙徼相傳 甲夜畢 傳乙夜 相傳盡五更 衛士傳言五更 未

明三刻後 雞鳴 衛士踵丞郎趨嚴上臺 不畜宮中雞 汝南出雞鳴 衛士候朱爵門外

專傳雞鳴於宮中rdquo 應劭曰 ldquo楚歌 今雞鳴歌也rdquo 晉太康地道記曰 ldquo後漢固

始鮦陽公安細陽四縣衛士 習此曲於闕下歌之 今雞鳴是也rdquo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0中都官의 몇 몇 部署에 給事하는 衛士의 員數 규정이 있는데 속한

서 백관2 注引 漢官의 光祿勳에 81인 太宰令에 15인 高廟令에 15

인 世祖廟令에 20인 衛尉에 60인 南宮衛士令에 537인 北宮衛士令에

471인 右都候에 416인 左都候에 383인 南宮南屯司馬에 102인 (北)宮

門蒼龍司馬에 40인 玄武司馬에 38인 北屯司馬에 38인 北宮朱爵司馬

에 124인 東明司馬에 180인 朔平司馬에 117인의 衛士가 소속되어 있

다 이는 후한의 사정을 기록한 것인데 그 총합이 2637인이다 전한에

비해 그 員數가 급감한 것은 광무제의 부역 경감정책과에 의한 것이라

하겠고29) 소수지만 그 員數가 규정되어 있다는 것은 후한에서 代役制

내지 雇傭制로 대체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전과 같은 上番制가

시행되었음을 말해준다 후한에서 正卒 및 군현의 상비군제가 온전히

사라진 것이 아닌 것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후한의 2637명의

員數는 전한에 비해 대략 15 정도 되는데 전한의 사정을 기준으로 한

다 하더라도 군현의 正卒은 평생 1회만 당번이 되어 上番하더라도 중

도관의 衛士 給事가 충분히 운영될 수 있다 위의 lt윤만한간gt에서 전

체 38현읍후국 가운데 그 해에 費邑의 正卒 만이 상번하고 있고 당시

郡別로 상번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동해군이 매년 상번의 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각 正卒은 38년에 1회만 상번하면 된다 물론 군별 현

읍후국의 수가 다르기 때문에 그 回次의 수도 다르고 현읍후국별 正

卒의 수에 따라 1개 이상의 현읍후국이 함께 동원된 경우도 충분히 있

을 수 있다 그러나 각 군의 현읍후국 수가 보통 20개는 넘는다 게다

가 費邑의 正卒도 몇 개 조로 나뉘어 순차로 상번하는 것이라던가 각

郡도 매년 상번이 아니라 몇 년 만에 순번이 돌아오는 체제라면 각 正

卒의 중도관 衛士 복무는 아무리 많아도 일생에 1회를 넘기 어렵다

앞에 든 漢舊儀의 民年二十三爲正 一歲以爲衛士 는 곧 그러한 사

정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일생 1회의 복무형태는 胥徒의

29) 濱口重國은 광무제의 경감책과 아울러 虎賁 羽林 羽林左右騎 五校尉의 軍이

警備에 추가되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위의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

隋唐史の硏究(上)) p283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1평생 내지 세습되는 면과(후술) 다르지만 일반의 役 대상자에서 선발

되어 중도관에 給事한다는 면에서는 공통이다 그런데 전한에서 lsquo父死

子代rsquo였던 중앙군은 羽林孤兒 뿐이었지만 후한에서 虎賁 羽林 羽林左

右騎 五營士의 중앙군에까지 확대되었다고 한 濱口重國의 지적이 있

다 그에 의하면 후한에서 중앙군단의 세습화와 함께 바로 지방에 特

設된 군단의 세습화도 이루어지면서 魏晋시기 兵民分離의 前段을 이루

게 되었다고 한다30)후한 후기 특히 羌의 侵寇 이후 郡에 都尉를 설치

하고 全民을 징병대상으로 삼아 상비의 郡兵을 다시 설치하고 있으

며31) 여러 출신 성원을 규합한 병단이 私屬이 되기도 하고 국가의 군

단이 되기도 하며 部曲 내지 그와 같은 류의 세습 병단화 하는 과정

에 대해서는 필자도 일견을 피력한 바 있다32)따라서 징병제에 의한

正卒의 상비군 운영이 폐지된 이후 15 수준으로 급감한 정졸의 衛士

가 上番하고 있었지만 이 군단 또한 후한 중기 이후 전란시기가 되면

서 世兵化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胥徒의 세습과 후한 후기에

활동하였던 鄭玄 당시 衛士의 세습화는 일치하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鄭玄이 말한 衛士는 한초의 사정이 아니라 그가 활동하였던 후한 후기

의 사정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鄭玄이 漢의 衛士 上番制에 의거하여 주례의 胥徒制를 해석한 것

은 양자의 해명에 큰 도움을 준다 상술한 바에 의하면 몇 가지 면에

서 양자가 일치하는 점이 대체로 인정된 셈이지만 胥徒가 거의 모든

관부에 설치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漢代의 衛士는 광록훈이나 衛尉

제사 守陵등 일부 한정된 관부에 설치되어 있다 또한 주례의 胥徒

가 士 이상의 신분과 마찬가지로 代耕의 봉록으로써 농지를 받고 있는

봉록자라는 면은 지방에서 상경하여 1년의 기간만 한시적으로 복무하

는 衛士의 경우와는 자못 어울리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衛

士는 上番者로 충당되지만 일단 관부별로 員數가 규정된 員吏로서 복

30) 濱口重國 앞의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p285

31) 濱口重國 光武帝の軍備縮小とその影響 (秦漢隋唐史の硏究(上)) p30832) 박건주 한대의 지방 상비군과 部曲의 推移 (동양사학연구 118 20123)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2무하게 되기 때문에 일부는 胥徒처럼 員吏로서 수년 이상을 관부에 居

하는 어느 정도 전문화 한 衛士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鄭玄의 활

동 시기와 큰 차이가 없는 lt長沙走馬樓吳簡(이하 lt吳簡gt으로 약칭)gt

領二年四家衛士田漆十五畝 畝收限米二斛 合爲吳平斛米一百五十斛

(5-1669)에 의하면 4家의 衛士가 限田75畝 佃作에 대한 租로 畝當 限

米2斛을 납부하고 있다 lt오간gt의 限田에 대해 여러 異說이 있지만

(후술) 그 佃作者와 限米 납부자의 계층에 수십 종의 吏員들이 포함되

어 있는 것에 의하면(후술) 衛士도 그러한 吏員으로서 限田이 지급된

것으로 보인다 단지 限田을 佃作케 한 것이 吏員에 대한 경작의 부과

(경작 노동력의 징발)를 뜻하는 것인지 혜택의 수여를 뜻하는 것인지

는 아직 분명치 않지만 于振波의 분석과 같이 畝當 限米2斛의 징수는

대단히 과중한 액수인 까닭에33) 受惠라기 보다는 경작 노동력의 징발

내지 課役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祿田의 의미로 보기

어렵지만 당시 吏職의 賤役化 현상을 고려하면 그러한 시대적 여건 하

에서 實益이 거의 없는 祿田으로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어쨌

든 후한말 이래 小吏 내지 吏戶와 병사층의 세습화 진전을 고려한다면

어떠한 방식이든 그 가족의 생계를 위한 봉록의 지급이 있었을 가능성

이 더욱 커진다

이상에서 검토한 몇 가지 면에서 보면 府史와 胥徒 중에 후자 만

lsquo給徭役rsquo에 의거한 복무라는 점 등에서 다른 계층이지만 庶民在官者

로서 함께 칭해질 수 있는 층이었다고 본다 무엇보다 胥徒가 각각 제

8위와 제9위의 在官者 서열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동시에 府史는 모두 官長으로부터 선발되고 辟除 임용된 자들인데 비

해 胥徒는 일반의 요역의무를 대체하여 官에서 給事中인 계층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胥徒가 lsquo在官者rsquo로 칭해지는 이유는 관부 내에 거

처하면서 노동을 통하여 잡다한 庶事를 직접 처리하고 있으며 국가로

33) 于振波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中國社會科學院硏究生員學報 2004

-1) p122 限米 납부액의 과중성에 의거해서 限米 납부자는 屯田노동자 限米

는 屯田의 租稅라고 본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3부터 代耕의 祿田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관부의 제반 업무는 각 업무

分司 말단에 속한 胥徒의 노역에 의해 완수될 수 있다 이들은 노역

징발 대상자인 徒 중에서 재능 등의 명목으로 선발된 자들이고 그 중

에서도 才智가 있는 자가 胥이다 이들은 선임자 내지 연장자의 지휘

감독 아래 각 관서의 노역 업무와 勞役者 징발 업무 등으로 奉公한다

이것이 胥徒의 在官者로서의 職事이다 胥徒의 職事는 어디까지나 노

동이 전제되는 勞役이며 일반민의 요역의무에 대신하여 관부의 職에

給事하는 까닭에 職役이라 할 수 있고 官長의 선발로 辟除된 府史는

정식의 官員으로서 奉公하는 것이고 給徭役 에 대신하여 복무하는

것이 아닌 까닭에 胥徒의 職役과 구분하여 그 職을 職官이라 할 수 있

다 그 上級인 命官도 물론 職官이다 職官의 기본 요건은 그 官職에

任職인 상태가 그대로 王命을 받들어 奉公 중인 것을 뜻하는 까닭에

이미 王命을 수행중인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체로 일반 서민

의 기본 요역에서 면제된다 단지 면제의 세부 규정에 의하면 役의 종

류와 신분의 차등에 따라 그 면제 대상의 범위가 구분된다 한편 전쟁

에 참전하는 의무는 면제되지 않는다 모든 官吏는 유사시 종군해야

한다 官人이 본래 戰士層인 國人 출신에서 나온 때문이다 일반 서민

은 매년 일정 기간 동안 만 국가의 命을 받아 노역에 징발되어 복역하

는 까닭에 그 생업은 징발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시적인 노역이 아니라

그들이 부여받은 職인 恒常의 耕作奉公에 있다 職官은 그 복무를 통

해 생활이 영위되지만 일반 서민이 징발되어 이행하는 노역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無償이다

官職앞에 인용한 宰夫8職에 대한 賈疏의 끝 부분에 周禮 위 아래

의 글에 胥가 있으면 반드시 徒가 있는 것은 胥가 什長인 까닭이다

鱉人과 臘人의 類는 徒만 있고 胥가 없는 것은 徒만 있으면 충분하여

지휘자(長師)를 둘(빌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食醫의 類에는 胥徒가

모두 없는 것은 그 官만의 行事(업무처리)로도 충분하여 胥徒의 도움

을 빌리지 않는 까닭이다 고34) 하였는데 胥와 徒가 모두 설치되지 않

은 部署는 그 官만의 업무처리만으로 충분한 까닭이라 하였으니 바로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4府史까지의 屬吏를 官으로 한정한 것이다 즉 胥徒는 官에서 복무하고

있지만 官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庶民이고 庶民在官者 이며 그들의

복무는 職官이 아니고 職役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들도 그 職役으

로 생업을 유지하는 까닭에 職官과 동일성을 지닌다 주례에 의하는

한 胥徒가 일시적으로 복무하는 형태는 아닌 듯 하다 무엇보다도 그

들에게 祿田이 지급되고 있기 때문에 매년 혹은 매월 교체되는 요역

형태의 근무는 아닐 것이다 또한 각 분야별로 상당한 전문 지식과 숙

련도가 요구되는 업무 처리상 단기간 교체되는 근무형태를 취하였을

것 같지도 않다

이렇게 볼 때 胥徒가 官에서 일반 관리와 마찬가지로 계속적으로 근

무하면서도 그 근무를 lsquo給徭役rsquo의 代替로 본 주석이 옳다면 아무래도

胥徒는 신분제사회에서 官이 될 수 없는 자 또는 現任의 官과는 엄밀

히 구분되는 신분이었던 까닭에 그 직무 또한 (일반 서민의) 노역의

의미로 인지되고 평가된 것이 아닐까 한다 漢代사회의 신분구조는 漢

家의 주인인 天子가 그의 家人인 일반 民庶를 직접 장악하는 구조가

있고 동시에 漢家로부터 독립된 개별의 士族이 각각 lsquo家rsquo의 주인으로

서 천자와 主客의 관계가 아직 유지되는 체제가 병존하는 二元의 구조

로 되어 있다고 본 濱口重國의 견해가 있다35)이러한 입장을 발전시켜

漢帝國은 황제가 인민을 인두적으로 지배하는 lsquo齊民制rsquo와 천자가 lsquo家rsquo를

非人頭的으로 지배하는 家父長制的 관계로서의 lsquo家産制rsquo라는 이중구조

로 되어 있다고 본 好並隆司의 견해도 있다36) 그리고 이러한 이중성

의 사회구조를 公과 私 君臣관계의 면에서 진전시킨 尾形 勇은 그 臣

이 되는 층을 仕宦者와 從役者로 나누고 있다37) 위의 설들은 모두 한

34) 周禮 上下文有胥必有徒胥爲什長故也 鳖人腊人之類空有徒無胥

者得徒则足不假長師故也 食醫之類胥徒并無者以其專官行事不假胥徒

35) 濱口重國 唐王朝の賤人制度 主篇 第六章 第二節 (東洋史硏究會 1966)

36) 好並隆司 前漢帝國の二重構造と時代規定 (歷史學硏究 375 秦漢帝國史

硏究 東京 1978에 재수록)

37) 尾形 勇 漢代における 家人 と君臣關係 (史學雜誌 83-4 1974) pp3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5대의 사정을 말한 것이지만 이러한 이중구조의 신분제 내지 사회구조

는 주례의 관부 구성 체제에 의하면 상위에서 下士 내지 府史까지가

仕宦者에 해당하고 胥徒를 후자 즉 從役者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연원은 이미 周代에 있다 士人 내지 仕宦者는

그 직무로써 奉公하고 從役者는 賦稅役의 부담으로써 奉公한다38)胥徒

가 비록 官에 있는 자이지만 二元구조의 신분제 하에서 士人이 되지

못한 가운데 그 직무는 職官이 되지 못하고 職役에 머무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Ⅲ 職役 담당층의 복무 형태와 봉록 지급의

문제

周代에 lsquo給徭役rsquo의 차원에서 관부에 給事하는 胥徒가 있었다면 후대

의 요역 가운데도 그러한 항목이나 사례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다 또한 胥徒의 직무는 續漢書 輿服志上에 보이는 伍伯辟車

鈴下侍閣門蘭部署街里走卒 등 관부 말단에서 경호導從심

부름侍衛車馬관리 巡邏 등의 賤職에 종사하는 이른바 徒卒의 職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그런데 이들의 役이 民의 일반 요역 의무에 따

라 징발되어 일시적으로 복역하는 것인지 아니면 상술한 胥徒와 같이

庶民在官者 로서 관부의 최말단에서 상시로 근무하며 관부에 의지하

여 생업을 유지하는 下吏로서의 복무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후한서권58 虞詡傳에 永平(후한 明帝期) 章和(章帝期) 중에 州郡이 走卒錢으

로 貧人을 給貸(雇賃金을 지급)하였다 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集解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35

38) 尾形 勇 위의 글 pp28-29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6走卒伍伯之類란 續漢志에 이른다

(車前에) 伍伯은 公은 8인中二千石은 6인千石과 六百石은 모두 4인百石

이하에서 二百石은 모두 2인을 둔다 黃綬(4백석에서 2백석의 관리)의 武官에

는 伍伯을 따르게 하고 文官에는 辟車鈴下侍閤門闌部署街(里)走卒

을 따르게 하는데 모두 程品의 多少가 있으며 맡은 바 직무에 따라 領率하게

한다 (驛馬는 30里에 하나를 설치한다) (卒은) 모두 적색 두건과 진홍색 소창

옷을 착용한다

즉 지금 鞭杖을 잡고 따르는 자들이다 이는 錢이 있는 자로 하여금 그 (役

에) 대한 資錢을 내게 하여 몸으로 직접 노역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39)

〔 ( ) 내의 글은 결락된 부분을 輿服志 원문에서 보완함〕

인용된 속한지輿服志의 기사는 公卿 以下 縣의 三百石 官長에 이르

기까지 이들을 導從하는 下吏들의 配屬 員數를 규정한 것이다 열거된

役職들은 모두 300석 이상 관원을 導從하는 役員들인데 후한 明帝 章

帝期에 일부 지역에서 이 役職의 명목으로 走卒錢을 징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記事는 順帝 연간에 尙書僕射 虞詡가 上言한 것인데 당시

長吏 2천석관들이 謫罰者에게 貧人 구호를 위한 lsquo義錢rsquo의 명목으로 贖

錢을 강요하고 守令은 이를 빌미로 聚斂함에 順帝 원년 이래 백만전

이상을 受取한 長吏가 끊이지 않고 있는 사정을 진언한 가운데 그 이

전 永平 章和 연간에 있었던 사실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즉 州郡에

서 走卒錢을 징수하여 그 역을 면제시켜주고 대신 빈궁한 자를 그

役에 고용하여 그 錢을 雇賃으로 지급해주는 일이 있었다 당시 司空

이 이 事案을 탄핵하니 해당 州郡縣이 모두 坐되어 免黜되었었다 그

때의 전례와 마찬가지로 당시 임시로 사용하였던 제도(走卒錢 징수와

雇賃 지불)를 蠲制할 것을( 蠲制權制 ) 주청하였고 이에 조서를 내려

州郡을 切責함으로써 그러한 贖錢 강요가 이로부터 그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40) 따라서 走卒錢 징수와 導從役의 雇傭 방식 운영은 후한

39) ldquo卽今行鞭杖者也 此言錢者令其出資錢 不役其身也 走卒伍伯之類也 續漢

志曰 (車前)伍伯 公八人中二千石六人千石六百石皆四人自百石以下至二

百石皆二人 黃綬 武官 伍伯 文官 辟車鈴下侍閤門闌部署街

(里)走卒 皆有程品多少 隨所典領率 (驛馬三十里一置 卒)皆赤幘絳褠 卽

今行鞭杖者也 此言錢者令其出資錢 不役其身也

40) 후한서 권58 虞詡傳에 是時長吏二千石聽百姓謫罰者輸贖 號為lsquo義錢rsquo 託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7明帝 章帝期에 한정되어 시행된 것으로 모두 不法이었고 虞詡의 順帝

시기에는 시행되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渡邊信一郞에

의하면 이들은 秦漢에서 관부의 최하층으로서 관부에서 필요로 하는

導從役 등 일상적인 노역에 복무하며 民으로부터 강제 징발되어 복무

하였는데 후한 초에 이미 走卒錢이 징수되고 특정 임무는 면역전을

재원으로 한 고용노동으로 전환되었다고 한다41) 그러나 章帝 이후 50

여년이 지난 順帝期에 이르기까지 고용 형태의 운영이 반복되지 않고

있는 것에 의하면 고용 노동으로의 진전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

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어쨌든 導從役의 고용 방식 운영이 不法

이었다 함은 그것이 본래 징발 형식으로 운영되는 것이었음을 말해준

다 錢이 있는 자로부터 走卒錢을 받고 이 재원으로 빈한한 자를 고용

하여 雇賃을 지급하는 不法을 행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어지는 지적에

서 順帝 때 지방관들의 贖錢 강요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관리들의 私利

도모에 의한 것이다 또한 그 의무자에 富者가 있어 그 實役을 피하고

자 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導從役과 같은 下吏의 봉록은 매

우 적기 때문에 여타의 수익이 있다면 그 봉록에 꼭 의지할 필요는 없

었을 것이다 이들이 비록 관부의 員吏이고 그 吏職이 생업이 되는 것

이지만 최말단의 賤役 내지 厮役으로서 천대받는 면이 많았을 것이다

때문에 이 職役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도 많았을 것이다

예기王制에 무릇 전문기능으로 事上(奉公)하는 자가 祝史

射御醫卜 및 百工이다 무릇 전문기능으로 事上하는 자는 다른

일을 해서는 안 되며(不貳事) 근무하는 관서를 옮겨서도 안 된다(不移

官) 出鄕하면 士와 抗禮하지 못하며 家에서 仕하는 자도 出鄕하면 士

와 抗禮하지 못한다 고42) 하였다 즉 士의 신분이 아닌 일반서민 출신

為貧人儲 而守令因以聚斂 詡上疏曰 ldquo元年以來 貧百姓章言長吏受取百萬以上

者 匈匈不絕 謫罰吏人至數千萬 而三公刺史少所舉奏 尋永平章和中 州郡

以走卒錢給貸貧人 司空劾案 州及郡縣皆坐免黜 今宜遵前典 蠲除權制 於是詔

書下詡章 切責州郡 謫罰輸贖自此而止rdquo

41) 渡邊信一郞 中國古代の財政と國家 (汲古書院 2010 第三章) p128

42) 禮記王制 (十三經注疏 中文出版社) p2905에 凡執技以事上者 祝史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8이 여러 기능직의 吏職에 복무하면서 함께 관부에 있지만 본 소속의

직장에서 다른 직장으로 옮길 수도 없고 신분상 士와 대등한 위치에

처하지 못하며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또한

府史 이상의 職官과 구분되는 胥徒의 특성과 상통한다

속한서 백관지2에 射聲校尉一人 比二千石 의 本注에 服虔曰

工射이다 어두운데서 소리를 듣고 활을 쏘아 명중시키는 까닭에 이름

하였다(工射也 冥寞中聞聲則射中之 故以為名 고 하였는데 여기서

工射 는 射도 工 의 한 분야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은 그 기능으로

奉公하는 것이 그 職分이고 생업이기도 하며 다른 직종이나 직업을

갖을 수 없고 옮길 수도 없는 자들이다( 不貳事 不移官 ) 이들은 그

職能으로 생업을 유지하지만43) lsquo父死子代rsquo 의 世業으로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고 賤職인 까닭에 여기에서 벗어나 신분상승을 바라는 경향이

있게 된다 이를테면 三國魏의 黃朗은 그 부친이 縣卒로서 鈴下 伍伯

의 職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抗志 遊學하여 현령을

거쳐 군태수에 이르렀는데 부친의 일을 생각하여 屬下의 鈴下 伍伯을

부를 때 鈴下 伍伯이라 부르지 않고 항상 姓字로 불렀다 비록 분노

하였을 때도 鈴下 伍伯으로 부르지 않았다44)

그런데 導從役 복무자는 징발되어 관부 내에서 복역하는 인원 중에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전체 복역 대상자 가운데 극히 소수에 불과하

다 특히 黃綬의 武官을 導從하는 伍伯 등의 직무가 護衛와 侍衛 警備

등이 위주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무술과 용력을 갖춘 이들로 선발된

그룹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黃綬 이상의 문무관에 소속되어 그 員數

射御醫卜 及百工 凡執技以事上者 不貳事 不移官 出鄕不與士齒 仕於

家者 出鄕不與士齒

43) 禮記 王制에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百工 各以其器食之 (注에 器 能也)

44) 三國志 권23 裴潛傳 所引 魏略에 黃朗字文達 沛郡人也 爲人弘通有性

實 父爲本縣卒 朗感其如此 抗志遊學 由是爲方國及其郡士大夫所禮異 特與東

平右姓王惠陽爲碩交 惠陽親拜朗母於床下 朗始仕黃初中 爲長吏 遷長安令 會

喪母不赴 復爲魏令 遷襄城典農中郎將涿郡太守 以明帝時疾病卒 始朗爲君長

自以父故 常忌不呼鈴下伍伯 而呼其姓字 至於忿怒 亦終不言 朗旣仕至二千石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9가 정해진 것에 의하면 庶民在官者 로서의 胥徒에 상당한다 봉록이

지급되는 일자리이며 민의 공동의무인 일반요역에 대신하여 복무하는

것인 만큼 면역전의 授受 행위는 不法이다

상술한 輿服志에 각 300석 이상의 官員 당 이들의 배당 員數가 규

정되어 있는 것에 의하면 이들도 분명히 관부의 한 구성원들이다 속한서 백관지 注引의 漢官에는 官長 내지 命官級 屬下의 員吏 員數

및 秩祿을 기재하고 있다 이를테면 속한서 백관2에 衛尉 卿一人

中二千石 本注曰 掌宮門衛士 宮中徼循事 丞一人 比千石 이라 하였

고 注引에 漢官曰「員吏四十一人 其九人四科 二人二百石 文學三人

百石 十二人斗食 二人佐 十二人學事 一人官醫 衛士六十人」이라 하

였다 이 가운데 百石까지는 봉록 지급이 명시되어 있지만 그 이하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봉록이 전혀 지급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斗食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斗升으로 계산되는

日數 계산에 의한 연봉액이 정해져 있다 百官受奉例의 注 所引 漢書音義에 斗食祿 日以斗爲計 라 하였고 한서 百官表上에 漢官名

秩簿에 이르길 斗食은 月俸 11斛 佐史는 월봉 8斛이다 一說에 斗食

이란 연봉이 百石에 이르지 못하여 日當으로 계산해서 1斗2升을 食하

는 까닭에 斗食이라 한다 고 하였다 속한서 백관5의 百官受奉例에

서는 百石이 月 16斛이고 斗食 이하는 위와 같다 또 墨子 雜守篇에

斗食은 1년에 36石이다 參食이면 1년에 24石이고 四食이면 1년에 18

石 五食이면 1년에 14石4斗 六食이면 1년에 12石이다 斗食은 5升을

食하고 參食은 3升小半을 五食은 2升 六食은 1升大半을 食한다 하루

에 2회 食한다 고 한데서 알 수 있다 斗食 은 1食에 5升 하루에 2

食이니 매일 1斗를 받아 1년 360일에 총 36石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

參食 은 1食에 3과 13升 즉 13斗를 받아 1일에 23斗가 되고 1년에

24石을 받는다 그 이하의 四食에서 六食까지는 斗食 이하에 열거된

下吏의 지급액 규정일 것이다

閻步克에 의하면45) 周代에서는 士 이상에게 祿田을 지급하여 그

수익을 食하게 하는 것으로 연봉을 지급하는 형태였는데 하급관리나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0工醫師 등 기술직 및 兵員에게는 月 단위로 지급하는 이른바 稍食

형태로 운영하였으며 나중에 증액 고정화 되고 아울러 錢으로 지불하

게 됨으로써 月俸의 秩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稍食 이란 주례天官

宮正에 宮正이란 왕궁의 戒令糾禁을 맡는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그 출입을 검찰

하고 그 稍食을 균등히 하고 그 淫怠하고 奇邪한 民을 제거하고 그

什伍를 모아 道義를 가르친다 月이 끝나면 그 稍食을 會計하고 1년이

끝나면 그 (吏職의) 行事를 검열한다 라46) 하였는데 이 稍食에 대해

鄭司農은 禄廪 疏는 宫中官府 등의 月禄 이라 하였다 즉 稍食은

月俸인 셈인데 이를 하급관리의 月俸이라 한 것은 國語晋語4에 公

은 貢을 食하고 대부는 읍을 食하며 士는 田(公田)을 食한다 庶人은

力으로 食하고 工商은 官(官으로부터 받은 田)을 食하며 皁隸(吏에

속한 徒隸)는 職을 食하고(각 담당 職의 大小에 따라 食祿) 官宰(大夫

의 家臣)는 加(大夫의 家臣)를 食한다 에서 公 大夫 士까지는 國 邑

田을 봉록으로 받는 까닭에 연봉을 받는 것이 되고 庶人 이하는 관부

에 給事한 力(勞役) 등을 계산하여 지급 받는 까닭에 월봉이라는 것이

다 또 주례 夏官 校人의 校人은 王馬之政을 관장한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馭夫

의 祿과 궁중의 稍食을 균등히 한다 라 하였는데 그 注에 師圉는 府

史 以下다 고 하였다 즉 府史 이하 下吏의 봉록 관련 업무이다 또 주례 天官 醫師에 연말이 되면 그 醫療한 실적을 검사하여 그 食을

정한다 十점 만점이면 上 十에 一을 失하면 次等 十에 二를 失하였

으면 그 次等 十에 四를 失하였으면 下로 한다 하였고 또 방비를

굳건히 하기 위해 성곽 溝池 등의 役事와 守備를 관장하는 掌固는 이

에 복무한 士庶子와 衆庶에 대해 필요한 도구와 財用을 공급해주고 그

稍食을 균등히 한다고 하였다(同 夏官 掌固) 이러한 자료에 의하면 府

史 이하의 下吏에 대해 祿俸 지급의 額이 기술되어 있지 않는 것은 食

邑田이나 百石까지는 年俸의 일정액이 규정되어 있고 이 액수가 월봉

45) 閻步克 從稍食到月俸mdash戰國秦漢祿秩等級制新探 (學術界 20002)46) 宮正 掌王宮之戒令糾禁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幾其出入 均其稍食 去其淫怠與其奇邪之民

會其什伍而敎之道義 月終 則會其稍食 歲終 則會其行事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1으로 나뉘어 지급되는 것과는 달리 그 이하의 吏는 月別 給事한 日數

나 실적을 계산하여 지급하는 月俸 형태였고 그 총합이 百石 이하였

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앞에 든 百官名秩表나 묵자의 기사는 그

러한 사정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府史 이하인 胥徒나 그 직급에 상당

하는 속한서 백관지의 각 관부별 官長 屬下의 員吏로서 有秩 아래에

나열된 직급들도 그 근무일수나 실적에 따라 봉록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有秩의 官은 百石 이상의 年俸이 지급되는 下限의 관리

를 가리키며 佐史 이하의 월봉 수입자에 대비하여 쓰이는 용어이다

근래 楊振紅 廣懶薰雄 宮宅 潔 등은 佐史 이하의 下吏에는 1개

월을 단위로 윤번 근무하는 자들이 있어 이들은 그 이름 앞에 更 이

붙고 이에 대비하여 常勤하는 자들은 冗 이 붙어 구분되었다 하고

그 내역과 성격을 고찰하였다47)사실 후대의 冗 내지 冗官 이 보통

散官 의 뜻이었던 것에 비해 선진에서 진한 시기의 여러 자료에 보이

는 冗 은 위의 연구들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更 에 대한 相對로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lt운몽진간gt 秦律十八種 工人程에 冗

隸妾 2인은 工 1인에 當하고 更隸妾 4인은 工 1인에 당한다 小隸臣妾

으로서 可使者 5인은 工 1인에 당한다(冗隸妾二人當工一人 更隸妾四

人當工一人 小隸臣妾可使者五人當工一人) 에서48) 冗隸妾은 更隸妾에

비해 2배의 우대를 받고 있으며 lt이년율령gt史律에 大祝이 祝을 시

험해보아 祝에 뛰어나고 祠事에 밝으면 冗祝으로 삼아 이들을 冗한다

(大祝試祝 善祝 明祠事者 以爲冗祝 冗之) 고 하였는데 이 冗 은 같

은 史律의 祝十四章으로 學童들을 시험해서 능히 7천언 이상을 誦할

수 있어야 祝으로 삼고 5更으로 한다(以祝十四章 試祝學童 能誦七千

言以上者 〔乃得〕爲祝 五更) 에서의 更 과 相對로 위치하고 있다

47) 楊振紅 秦漢簡中的ldquo冗rdquordquo更rdquo餘供役方式middotmiddotmiddot從lt二年律令 史律gt談起 (簡帛硏究 廣西師範大學出版社 2006) 廣懶薰雄 秦漢律令硏究 (汲古書院

20103) pp297-304 宮宅 潔 漢代官僚組織の最下層 - 官 と 民のはざま-

(東方學報 87 2012) pp11-1248) 睡虎地秦墓竹簡 (北京 文物出版社 1978) p74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2또 lt里耶秦簡gt에도 冗戍士五(伍) (⑧666+ ⑧2006)와 更戍(某) (⑧

143 ⑧149 ⑧694)의 對稱 용어가 있다 한편 주례春官 槀人에 外

內朝의 冗食者의 食을 공급해주는 것을 관장한다(掌共外內朝冗食者之

食) 라 하였고 이에 대한 鄭注는 冗食者란 (관부에 밤까지) 머무르며

문서 작업을 하는 것이 마치 지금의 尙書의 屬吏로서 當直하는 者들과

같다(冗食者 謂留治文書 若今尙書之屬 諸直上者) 賈疏는 ldquo(鄭注에

서)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rdquo라 한 것은 또한 漢法을 인용하여 설명한 것이니 차례로 당직

하는데 관부에 留宿하며 (집에) 돌아가지 않는 까닭에 반드시 음식을

제공해야 한다(亦引漢法說之 謂以次當直 留在朝 宿不還 須以食供之)

고 해석하였다 여기서의 冗 은 夜勤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일

상 정규의 일을 넘어선다는 뜻을 지닌다 冗食 은 야근하는 관리에게

제공되는 음식이기 때문에 정규의 음식 지급에 추가되는 것을 의미한

다 전한 成帝 河平 연간에 수해를 입은 군국을 구휼하면서 그 지역민

을 다른 군국으로 피신시키고 그 곳에서 冗食케 하라 고 하였는데49)

文穎은 冗이란 散이다 廩食을 散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遊離되어) 정착하지 못하는 戶를 役事시켜 일자리를 주는 것이다(冗

散也 散廩食使生活 不占著戶給役使也) 로 해석하였고 如淳은 離散

된 자들에게 給食하고 관부는 그 임금을 지불한 것이다( 散著人間給

食之 官償其直也 )고 해석하였다 즉 수해로 유민이 된 자들에게 給

食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하고 아울러 役事의 일자리를 주어 그 임금

을 지불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석자들이 冗 을 散 의 뜻으

로 해석한 것은 국가의 재정을 풀어서 지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國錢의

lsquo散布rsquo라는 뜻으로 본 것이다 이 또한 정규의 재정 지출을 넘어선 추

가의 지출이므로 실은 위의 사례들과 같은 뜻이 된다 또 한서권24

하 식화지하에 또한 周官의 稅民 제도에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民이 떠돌아다니면서

일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夫布一匹을 납부하게 하며 布를 납부할 수

49) 漢書 卷10 成帝紀 河平4년조에 遣光祿大夫博士嘉等十一人行舉瀕河之郡水

所毀傷困乏不能自存者 財振貸 其爲水所流壓死 不能自葬 令郡國給槥櫝葬埋

已葬者與錢 人二千 避水它郡國 在所冗食之 謹遇以文理 無令失職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3없는 자에게는 縣官에서 冗作케 하고 이들에게 衣食을 제공한다 고50)

하였다 여기서 冗作 이란 정규의 요역 부과 외에 징벌의 뜻으로 역

을 추가하여 부과한다는 의미이다

또 lt운몽진율gt 司空에 冗邊 이 있다

백성에게 모친 및 동생이 있어 隸妾이 되었는데 謫罪가 아니고 冗邊5

歲에 복역하되 근무 기간을 無償으로 하고 1인을 면하여 庶人으로 하고

자 한다면 이를 허용해준다(百姓有母及同牲(生)爲隸妾 非適(謫)罪殹(也)

而欲爲冗邊五歲 無賞(償)興日 以免一人爲庶人 許之) (司空 p91)

이 冗邊五歲 도 규정된 정규 戍邊役의 額 외로 추가된 役이란 뜻의

용어이다 그래서 이 또한 위의 사례들과 마찬가지의 뜻이다 이렇게

冗 에는 更 에 相對한 지칭으로 更 에 복무하는 자들에 비해 전문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갖춘 자들이거나 기타 사유로 정규의 額을 넘

어서는 복무를 하는 것 또는 그 役者 또는 職名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즉 정규 일반의 更 방식의 근무 額(日數)에 비해 담당

분야의 뛰어난 능력이나 징벌 등 기타 사유로 더 많은 근무를 추가로

하게 되는 자들의 職을 冗 이라 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러한 冗 을 쓰는 데는 국가의 재정 지출도 추가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국가재정의 추가 지출의 뜻으로서 散(散布)

이라는 뜻이 되어 후대 冗官==散官의 칭이 생긴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해석된다면 그간 충분히 해석되지 못한 lt운몽진률gt廏苑

律에 연간의 養牛 실적 평가에서 下等을 받은 宂皂에게 2개월의 복무

기간을 추가하는 벌을 내린다는 律文에 보이는 宂皂51) 그리고 同 秦

律雜抄 屯表律에 나오는 lsquo冗募rsquo도52) 위와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50) 又以周官稅民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民浮游無事 出夫布一匹 其不能出布者 冗作縣官 衣食

51) lt雲夢秦律gt p30 廏苑律의 율문 卒歲 以正月大課之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殿者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罰

冗皂者二月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52) lt雲夢秦律gt p145 秦律雜抄의 율문 冗募歸 辭曰日已備 致未來 不如辭

貲日四月居邊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4것이다 廣懶薰雄은 更 을 非常勤 冗 을 常勤의 뜻으로 요약하였는

데53) 그러한 일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는 更 이 본래 규정된

交代근무라면 冗 은 본래의 규정액을 넘어선 근무를 뜻하는 까닭에

그러한 해석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설문宀部에 冗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人在屋下 無田事也 라 하였는데 無田事 로서의 冗의 뜻도 更

이 당번으로 給事하는 기간을 제외하면 田事에 있어야 하는 것과는 달

리 冗은 비당번인 경우에도 관부에서 給事하는데서 칭해진 것이라 하

겠다

예기중용에 忠信인 자에게 봉록을 두텁게 주는 것은 士를 勸함이

고 때로(일시적으로) 使役시키되 賦斂을 가볍게 하는 것은 백성을 勸

하기 때문이며 日用으로 근무시키되 그 근무기간과 성과를 계산하여

급료(廩)를 지급하여 그 근무에 합당하게 보상해주는 것은 百工을 권

하기 위함이다(忠信重祿 所以勸士也 時使薄斂 所以勸百姓也 日省月

試 旣廩稱事 所以勸百工也) 라 하였다 여기서 忠信 이란 禮記禮器에 忠信 禮之本也 라 하였고 여기서는 이를 修學하고 실행할 수

있는 사대부 내지 命官層을 가리키고 있다 百工에 대해 日省月試

한다 함은 근무한 日數와 그 성과를 월 단위로 계산한다는 것이다 注

에서 旣廩稱事 의 旣 를 lsquo餼rsquo로 해석하고 lsquo餼廩rsquo은 稍食 이라 하였

다54) 여기에서 일반 백성에게 때로(일시적으로) 사역시킨다는 時使

가 곧 更 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진한 시기 更徭制의 운영에

서 충분히 입증된다 宮宅 潔은 年俸이 있는 것이 有秩인데 그 最下가

百石이며 연봉이 없고 본래 日食과 月食으로 지급되는 등급을 斗食이

라고 한다 하였다55) 그가 말한 斗食은 백관표에 나열된 斗食과 그 이

하의 여리 吏職을 포함한 것이다 그런데 일반 백성에게 更役이 부과

되고 그들에게 동원된 기간 동안 당연히 매일의 給食은 지원되겠지만

그 일반 요역으로서의 更役에 대한 日當의 보수가 지급된 것은 아닐

53) 廣懶薰雄 앞의 글 p304

54) 注에 日省月試 考校其成功也 lsquo旣rsquo讀爲餼 餼廩 稍食也

55) 宮宅 潔 앞의 글 p39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5것이다 그 일반 요역은 일반 백성의 기본 의무사항인 까닭이다 반면

百工의 근무일수와 성과액에 대해 稍食 (日俸 내지 月俸)이 지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매 끼니의 급식이 아니라 工役에 대한 보수 내

지 給料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근무일수라든가 성과액을 계산

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기서의 百工은 관부의

員吏에 속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관부에 속하여 매

끼니의 식사 뿐 아니라 工役한 일수와 성과량에 따라 봉록이 지급된다

는 것이다 그래서 봉록 지급은 錢이나 곡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반

면 전기한 국어晋語4 文公修內政納襄王 章에 公食貢 大夫食邑 士

食田 庶人食力 工商食官 皁隸食職 官宰食加 에서 工商食官 의 工

商은 모두 관부의 員吏에 속한 자들인데 그 注에 옛날에는 田을 주는

것으로 祿俸을 제정하였다 관부에서 주는 廩이란 곧 관부에서 田을

받는 것이니 후세에 錢粟을 주는 것으로 祿俸을 제정한 것과 같지 않

다(古者以田制祿 官廩之者 卽受田於官 非如後世之以錢粟制祿也) 고56)

하였다 또 한서권24식화지상에 士工商이 田을 받는 것은 5口가 받

는 것이 되어야 농부1인이 받는 것에 當한다(士工商家受田 五口乃當

農夫一人) 고 하였다 즉 百工과 商賈는 그 직무에 따라 俸祿을 받는

데 후대와 같이 錢粟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田으로 받으며 그 액수는

일반 농민의 15이라는 것이다 이는 전술한 주례의 胥徒가 최하품

의 田 1百畝를 俸祿으로 받는 것과 lsquo以田制祿rsquo이라는 면에서 일치한다

그리고 lsquo以田制祿rsquo이 후대에 lsquo以錢粟制祿rsquo으로 변천 된 것은 秦漢의 사

례를 통해 분명하다 어쨌든 관부의 員吏인 百工과 商賈에게 일반 백

성의 更役과는 달리 祿田 또는 월봉 형태의 錢粟 지급이 행해진 것이

라 하겠다 또한 工商이 일반 요역 대신에 전문기능인으로서의 工役과

관부 소요 물품의 調達役의 職分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이 또한 職

役에 해당하는 셈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관부의 員吏이면서 斗食 보다 下位에 위치하여 稍

56) 國語正義(下冊) (董增齡 撰 巴蜀書社 1985) pp815-6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6食 내지 月俸을 받는 여러 導從役 祝醫工商 등의 役은 그 職分

의 役 즉 職役으로 奉公한다 그런데 후한 초에 이 職役의 면역전으로

서 走卒錢을 징수하고 그 재원으로 빈민을 고용한 것이 不法이었으며

수십 년 이어지다가 금지되고 違法한 관료들이 처벌받고 있는 것에

의하면 이 役들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戶가 지정되어 있어 여타의 일반

戶가 대신하여 맡을 수 없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은 導

從役 등의 담당자는 일반서민이되 그 중에서 특별히 선발된 층으로 구

성되어 전문의 분야를 세습하며 의무로 담당하는 하나의 신분층으로

형성되어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그 役은 하나의 身分役이기

도 하였던 셈이다 또한 그 代役錢으로서 走卒錢 징수 및 雇傭 방식이

나오게 된 것은 그 역의 담당층 가운데 錢으로 實役을 피할 수 있는

부유충이 형성되었고 후한 前期에 전통의 身分制가 느슨해진 여건에

서 身分役의 근본 형태가 유지되지 못하고 일탈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속한서백관3에 執金吾의 속관 중에 화려 장려한 복장

과 장식으로 황제의 행차를 호위 수종하는 騎士로서 緹騎二百人이 있

는데57) 本注에 無秩 比吏食奉 이라 하였다 즉 吏가 아니지만 吏의

대우를 받아 봉록을 받는 계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下吏에

들지 못하지만 봉록을 받는 면에서는 동일한 계층이다

한편 앞에 든 國語 晋語4에서 工商食官 에 이어 下記된 皁隸(吏

에 下屬한 徒隸)食職 이 있다 이 皁隸 계층은 지금까지 검토한 庶民

在官者 로서의 胥徒導從役 담당자 및 樂祝醫衛士工商 등

보다 下位 내지 그 下屬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그 담당 신분과 그 役의 성격에 대해 검토한다

Ⅳ 下層 員吏의 役과 徒隸層의 役

57) 당 조목의 注 所引 漢官曰 執金吾緹騎二百人 [持戟]五百二十人 輿服導從

光滿道路 群僚之中 斯最壯矣 世祖歎曰 ldquo仕宦當作執金吾rdquo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7

앞에서 검토한 관부 구성의 최말단에 위치한 주례에서의 胥徒와

춘추진한 시기의 導從役 담당자 및 樂祝醫衛士工商 등의 下

吏層 외에 그 下屬으로 보이는 皁隸가 있다 앞에 든 각 신분에 따른

奉公의 職分을 나열하고 있는 國語晋語4의 記事 皁隸食職 의 注에

皁隸를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라 한 것에 의하면 이 계층은 위에 열거한

여러 下吏에 下屬한 노역자들이라 할 수 있다 胥徒와 導從役 담당자

등은 각각 주례와 漢官 등에 그 員數가 규정된 까닭에 이들은 員

數 규정에 들지 못한 皁隸에 대비해 下層의 員吏로 칭할 수 있다

皁隸가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라 하였으니 곧 관노비 내지 그에 類하는

계층일 것인데 그들이 lsquo職을 食한다rsquo고 한 것은 각 분야의 官署에 分屬

되어 그 職務에 給事함으로써 생업을 삼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皂

隸 牧 圄 僕 등이 후대의 천민이나 隸民이 아니라 일반민이었다

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58)그러한 주장은 이들이 대체로 관부에 給

事하는 계층으로 여러 기사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고 위의 皁隸食

職 은 곧 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관부에 給事

하는 면으로 인해 예속성이 있게 된다는 면이 있다 후술하는 바와 같

이 그들이 일반 서민 출신이면서도 후대에 그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모

두 예속신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통용되는 것은 그러한 관부에의 예속

성이 분명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예속성을 말해주는 것이 또한 職

役의 한 속성이다

한편 國語 晋語4 文公修內政納襄王章에 (晋文公)元年 春에 公(晋

文公)과 부인 嬴氏(秦穆公의 女인 文嬴)가 王城(秦의 地名)에서 돌아올

때 秦伯이 衛士3천인을 納하였는데 실로 기강이 있는 僕들이었다(元年

春 公及夫人嬴氏至自王城 秦伯納衛三千人 實紀綱之僕) 고59) 하였다

秦漢의 衛士 출신과 달리 여기서는 그 출신 신분이 僕인 자들로 구성

58) 黃中業 春秋時期的ldquo皂隸牧圉rdquo屬于平民階層說 (齊魯學刊 阜師院學報) 1984-2 19844) pp69-72

59) 위의 책 pp809-810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8되어 있다 이 당시는 秦 穆公의 지원으로 晋의 文公이 귀국하여 懷公

을 죽이고 즉위한 때인 까닭에 군사 내지 호위부대의 지원이었다 그

衛士 군단의 신분은 皁隸層에 들어가는 僕인데 관부에 給事하는 職分

은 衛士이다 이들의 紀綱이 선 자들이었다고 한 것은 본래 秦에서도

衛士의 職으로 給事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춘추기에 邑數百이나 社

數百의 단위로 국가 사이에 分與되는 일이 자주 있었고 3천인에 이르

는 多數의 전문 집단이 타국에 分與된 것이긴 하지만 일부 전문의 인

력을 分與나 上納 하는 것 또한 당시 종종 일어났던 일이다 어쨌든

그 衛士집단이 모두 僕이었다는 것은 일반민이 아니고 관부에 예속되

는 신분이었음을 말해준다 예속신분으로 궁성을 지키는 衛士로 삼는

것은 주례地官 師氏에서 그 직무 가운데 (師氏는) 그 소속의 四夷

之隸를 거느리고 각기 그 병력으로 왕성의 문밖을 지키는데 복무하며

또한 (행차 때) 앞에서 길 정리를 한다(師其屬帥四夷之隸 各以其兵服

守王之門外 且蹕) 에 이미 보이고 漢武帝 때 제후왕 貴戚의 不服을

다스리기 위해 중앙 내사지역을 감찰하는 司隸校尉와 지방의 刺史에게

중도관의 徒奴 1200인을 보내어 二千石官을 독찰하게 하였는데60) 이

1200인의 徒奴부대는 이후 사예교위 내지 刺史 직속의 상비군단이 되

었고 그 성원은 세습 병사집단의 근간이 되어 牧使 刺史 등 將領下의

公兵이나 私兵으로 활약하였다61) 漢官舊儀 卷上에 漢代 長安에 騎

亭長 79인과 함께 6월 1更의 倉頭盧兒를 給事하게 하였다62)이들 四夷

之隸나 徒奴倉頭盧兒 등은 적군포로이거나 刑徒 계통 출신으로 관부

에 예속된 신분일 것이다 특히 관부에 囚禁된 형도들은 여러 방면의

60) 北堂書鈔設官部 및 漢官儀권2補遺2에 ldquo司隸校尉는 武帝 때 처음 설치되

었다 이후 諸侯王 貴戚이 不服함에 中都 中官의 徒奴千二百人을 (파견해서)

一校尉部刺史에게 속하게 하여 二千石官을 독찰하게 하였다(司隸校尉 武帝初

置 後諸侯王貴戚不服 乃以中都中官徒奴千二百人屬爲一校尉部刺史 督二千石

也)rdquo

61) 이에 대해서는 박건주 한대의 지방상비군과 部曲의 推移 (동양사학연구118 20123) 참조

62) 長安給騎亭長七十人 六月一更倉頭盧兒 (漢官六種 北京 中華書局 1990

9) p3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9노역에 활용되었는데 근래 石岡 浩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刑徒 집단

은 크게 세 부류 내지 등급으로 나누어져 활용되고 대우에 차별이 있

었다고 한다 즉 가장 上位에 있는 司寇는 특정 임무에 복무하는 것이

정해진 형도이며 전택을 소유하여 戶主가 되는 권리(lt二年律令gt

310-316簡) 왕조로부터 사여 받는 권리(同 291-293) 子가 士伍로 복

귀할 수 있는 권리(同 364-365)를 갖는다 다음으로 徒隸 는 특정 관

서에 예속하여 직무를 숙지하였거나 기술에 숙련하여 전문기능자에 동

등한 가치를 지니는 형도 를 지칭하며 그것으로 동일 직장에 계속 근

무하는 까닭에 일반 형도와는 달리 토목공사나 물자운송 등의 노역에

서 제외된다 또한 왕조에 공헌하는 자로서 사여를 받는 대상도 된다

(同 291-293) 즉 그들은 隸臣鬼薪城旦이면서 숙련자 기능자로서

일반 형도보다 우대받는 자들이다 위 양자에 비해 일반 형도는 위의

여러 특혜를 받지 못하며 城旦은 주로 토목사업에 隸臣은 주로 여러

관서의 잡다한 노역에 복역한다63)이는 충분히 수긍되는 견해이다 이

가운데 徒隸는 관부 내 각 分署의 전문 직장에 分屬되어 사역될 것이

기 때문에 전술한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로서의 皁隸가 곧 그들의 주요 부

분이 될 것이다 그 중에 일반 관노비로부터 개인적 재능과 기술로 선

발되어 해당 관서에 給事하는 자들도 포함될 것이다 단지 정규의 전

쟁에 형도를 동원하는 사례가 많은데 그들이 정규의 병사가 된 것은

아니고 군공을 세워 免刑되기 이전에는 그대로 형도인 것과 같이 함께

관부에 給事하고 있다 하더라도 각 신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상의 검토에 의하면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에는 이른바 lsquo吏에 下屬

한 徒隸rsquo로서 食職하는 皁隸집단이 있고 그 구성에는 관노비 뿐 아니

라 적군포로나 관노비 및 형도 출신의 衛士 그리고 刺史 牧使 등의

將領下에 있는 직속 상비군 형도 가운데 司寇 그리고 기능과 숙련으

로 형도 중에서 선발된 職能의 徒隸집단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員

吏이되 下吏인 계층의 복무가 그 신분에 따른 職役인 것과 마찬가지로

63) 石岡 浩 秦漢代の徒隸と司寇 -官署に隸屬する有職刑徒 (史學雜誌 121-120121) p32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0이 皁隸層의 복역도 모두 관부에 생업을 의존하는(食職) 職役이라 할

수 있다

또 좌전에 주로 보이는 輿人이 있는데 同 昭公7년조에 天에 十日

이 있고 人에 十等이 있으니 下가 上에 事하는 所以이다 까닭에 王의

臣은 公 公의 臣은 大夫 대부의 臣은 士 士의 臣은 皁 皁의 臣은

輿 輿의 臣은 隸 隸의 臣은 僚 僚의 臣은 僕 僕의 臣은 臺이다 馬

에 圉가 있고 牛에 牧이 있어 百事를 待한다 라 하였다 古來의 여러

注疏에서부터 이미 lsquo輿人rsquo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지만 이를 분석한 宇

都木 章의 견해에 의하면 縣鄙의 野人이 평시이든 戰時이든 國都의

귀족에 징발되어 葬儀戰士補助 車馬와 관련되는 여러 役務에 종사

하는 때 그들을 lsquo輿人rsquo이라 칭하였다고 한다64) 여러 자료에 의하면 皁

에서 牧에 이르는 서열 순위가 어디에서나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

고 대개 동일 계층의 異稱인 경우가 많다 皁 이하의 서열에 이렇게

다단계의 臣屬 관계가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같은 徒에도 上位 순서로 胥와 徒 및 그 徒의 지휘를 받는 징발된 徒

가 있으며 員吏에 들어가는 導從役 등의 庶民在官者 가 있고 그에

下屬하는 皁隸의 구분이 있는 것에 의하면 최소한 士 아래의 서민 계

층에 3 - 4 단계의 차등 신분이 있을 수 있다 위의 十等 순위에서 士

이하에 위치하여야 할 庶民이 곧 皁輿 등에 해당할 것인데 모두 관

부에 給事하는 면에서 후대 예속신분을 가리키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

다 그리고 일반 서민 가운데서도 皁輿 이하는 모두 전문의 職分으

로 관부에 給事하는 의무가 주어진 계층이므로 일반 농민으로서의 서

민과는 구분되는 서민이었다고 생각한다 즉 일반 농민이 농업을 생업

으로 하며 일반의 요역 의무가 주어진 반면에 皁輿 등은 주로 전문

의 기능을 요하는 관부의 직무에 給事하는 것으로 일반요역을 대신하

며 때문에 일반 서민이면서 관부에 예속된 신분의 일면을 지닌다 그

렇지만 관노비나 형도로서 관부에 예속되어 給事하는 신분과는 명확히

64) 宇都木 章 輿人考 (三上博士頌壽記念 東洋史考古學論集 朋友書店 1979

12) pp108-11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1다르며 주례의 胥徒와 같은 下吏의 員吏 보다 보통 下位이지만 胥

徒와 마찬가지로 주로 전문 기능의 職分에 복역한다는 면에서 같고 그

일부분은 下吏에 충당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곧 胥徒가 일반 서민의

徒로부터 선발된 자들인 것과 같다 위의 十等 서열은 농민을 제외하

고 관부에 給事하는 신분만을 총괄하여 나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

술한 工商食官 皁隸食職 도 모두 관부에 給事하는 工商과 皁隸를 열

거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복무도 당연히 職役이 되는데 그 職能 내

지 職分의 종류별로 숙련도 및 경력 등에 따른 그룹 내에서의 서열이

있게 되고 이를 계층으로 인식해서 lsquo皁臣(臣屬)輿rsquo 등과 같은 記述이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 각 직능별 部署별 전문화된 職役의 활용은 관

부의 운영상 당시의 사정으로는 불가피한 면이 있다 그러한 체제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점차 계층 구분의 엄밀성이 느슨해지고 세분된

차등의 질서가 점차 단순화되면서 그 용어도 혼용되기에 이른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위의 계층 구분은 세분된 서열만이 아니라 각 계층

의 담당 職分을 구분해주는 칭호로 쓰인 면도 있다 그렇다면 輿人은

戰時에 주로 戰車부대를 보조하는 직무 분야를 담당하는 계층이라 할

수 있고 그러한 면에서 여러 下屬 계층 가운데 가장 상위의 계층이었

지 않을까 한다

한편 이상의 皁隸層이 본래 일반서민 출신이었다는 입장에서 보면

관부에 給事하되 향리에 거처하면서 일정 기간 만 순번으로 복역하는

交代制가 있었을 수가 있고 또는 대체로 일부 기능자나 世戶에 한정

되었겠지만 휴가 기간 외에는 상근하는 형태도 있었을 것이다 예속된

신분인 경우 그 거처도 대체로 관부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앞에 든 秦

漢律에 교대 근무하는 更隸妾의 존재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근무

기간에만 관부에서 거처하는 예속 신분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刑徒

중에서도 司寇는 田宅을 소유하고 戶主가 될 수 있었으며 徒隸도 賜

與를 받을 수 있는 까닭에 이들 중에 일부는 관부 밖에 따로 거처를

지니고 출퇴근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단지 衛士나 部曲 집단은

대체로 屯營 내에 거주하였을 것이다 위로는 승상으로부터 아래로는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2하급의 吏에 이르기까지 吏舍에 거처하며 휴가 기간이 되어야 비로소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는 大庭脩의 연구가 있지만65) 漢舊儀 卷下

에 舊制에 尉는 모두 관서에서 거처하였다( 舊制尉皆居官暑 ) 라66)한

것에 의하면 舊制 가 어느 시기를 말하는 것인지 불분명하지만 宿衛

와 경찰 임무의 尉職 외에는 관서에서 거처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음을

말해준다 매년 직급에 따른 수개월의 휴가 기간이 설정되어 있지만

이는 성내에 거주하며 매일 출퇴근 하더라도 고향은 먼 곳에 있는 경

우가 많아 歸鄕 휴가를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外地 출신으로 城內

에 거처가 없는 관리들을 위한 吏舍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吏舍의 존재가 모든 관리의 관부 거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居官府의 여러 給事職 관노비 司寇나 일부 徒隸를 제외한 일

반 형도 여러 當番의 宿衛職 등을 제외한 관리는 官舍 밖의 私家에서

거처한 것으로 본다

庶民在官者 로서의 職役 복무는 常勤과 교대근무의 두 시스템으로

운영되었을 것이다 胥徒는 본래 모두 징발된 徒 가운데서 재능 있는

자로 선발되어 관부에의 給事가 생업이 된 자들로서 祿田을 받는 자들

이며 員數가 책정되어 있는 까닭에 常勤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

나 함께 징발된 여타의 徒는 胥徒와 같은 給徭役의 奉公을 행하지만

순번으로 동원된 기간 만 한시적으로 복무하는 까닭에 동원 기간 동안

의 食料 이외에 노동의 보수를 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그들은 만

민의 기본 의무를 職役으로 이행하는 것일 뿐이다 정부로서는 관부에

給事할 人才와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지만 필요한 부

분을 모두 常勤하는 자로 임용하여 그들의 생업을 봉록 지급 등으로

전면 지원하는 것은 재정에 큰 부담이 되는 것이었다 즉 관부에서 필

요로 하는 특정 업무 기능자들을 일반 요역 면제 대신으로 복역케 하

고 이를 순번제로 운영하면 복무 당번 기간 외에 그들은 다른 생업을

65) 大庭脩 漢代官吏の勤務休暇 (秦漢法制史の硏究 創文社 1982) p584

66) 앞의 漢官六種 p81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3꾸려나갈 수 있기 때문에 국가는 그들에 대한 생업 유지 지원 부담이

훨씬 적어진다 관부 給事層 가운데 命官과 員吏 이상이 常勤制라면

그 이하의 여러 職役層들은 대체로 교대근무제 중심으로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테면 lt奏讞書gt 案例17에서 秦王政元年 雍縣人 樂人 講이 자신

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사건 당일 자신은 踐更에 복무하러 11월 한

달간 함양의 外樂(관서 기구 名)에67) 소집되어 복무 중이었음을 진술

하고 있다 따라서 함양에 거주하지 않은 樂人이 그 관서에서 常勤하

지 아니하고 특정시기 일정 기간 만 교대로 근무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獄事에서 피고인 樂人 講이 踐更으로 1개월 간 복무한

곳이 外樂인 까닭에 일반 요역이 아니라 樂人의 職役을 이행한 것이라

고 본다 전한 哀帝 때 樂人의 員數를 罷하라는 명령에 대해 승상 孔

光과 대사공 何武가 진언하길 각 담당별 樂人의 현재 員數와 罷할 수

없는 수를 열거한 후 총 829인의 員數 가운데 388인은 罷할 수 없다고

하자 이를 재가한 바가 있다68) 이는 전한말의 사정이지만 전국진에서

도 郊祭 등의 각종 국가제사와 宮中 樂이 행해졌기 때문에 위의 수치

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속한서 백관2 大樂令 注引의

漢官과 盧植禮注에 의하면 八佾舞를 추는 樂人의 員數가 380인인

데 여기에 卑者之子는 임용될 수 없고 6백석에서 2천석 및 관내후에

서 五大夫의 嫡子 출신 5척 이상의 신장 12세에서 30세 顔色온화 등

의 조건을 갖춘 자에 한정되었다69) 이에 의하면 樂人 講은 走馬의 傭

이 되어 京師에 왕래하고 있는 빈한한 자로서 도저히 중앙 大樂令 속

67) 관서 기구 이름으로서의 外樂은 lt이년율령gt秩律 449簡 및 西安相家巷出土

秦封泥에 보인다(周曉陸路東之 編著 秦封泥集 三秦出版社 2000 一

二44)68) 漢書 권22 예락지2

69) 漢官曰 ldquo員吏二十五人 其二人百石 二人斗食 七人佐 十人學事 四人守學事

樂人八佾舞三百八十人rdquo 盧植禮注曰 ldquo大(子)[予]令如古大胥 漢大樂律 卑者

之子不得舞宗廟之酎 除吏二千石到六百石 及關內侯到五大夫子 取適子高五尺已

上 年十二到三十 顏色和 身體修治者 以為舞人rdquo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4하의 樂人 員數에 들어갈 수 있는 처지가 못 되는 자이다 그는 향리

에 거주하면서 매년 1개월씩 京師의 外樂에 가서 복무하는 기간 외에

는 傭賃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下吏의 員吏가 아

니면서 樂工의 職能으로 일반 요역 대신에 京師의 제사나 예락 행사에

나아가 給事하는 자이다 그래서 그의 복역도 職役인 셈인데 이러한

모습은 주례의 胥徒와 흡사하다 단지 胥徒가 員吏로서 봉록은 받는

것과는 다르다 양자가 모두 職役이지만 胥徒는 庶民在官者 이고 樂

人 講은 lsquo非吏인 職能人rsquo이다 그렇지만 양자 모두 개인적인 職能으로

관부에 給事하는 면에서는 상통한다 따라서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

부에 給事하는데는 員吏로서 복무하는 경우와 非吏로서 복무하는 경우

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Ⅴ lt走馬樓吳簡gt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복무

형태 및 그 성격

1996년에 호남성 長沙市 도심 우물에서 발굴된 lt吳簡gt은 총 17萬

餘 枚로 아직 그 일부만이 정리 해독되어 출간된 상태이지만 이미 출

간된 분량 가운데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의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자

료들을 많이 지니고 있다 孫吳 嘉禾 연간(232-238)의 여러 戶籍簿

내지 吏民簿 등에 吏와 給吏로 구분된 人名簿가 다수 존재한다 이 자

료들은 그간 명확하지 못하였던 吏役과 吏戶의 존재형태와 관부에 給

事하는 계층 및 그 職役의 실태를 파악하는데 획기적인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근간의 연구에서 여러 異見으로 그 문서가 지니

는 뜻을 파악하는데 상당히 혼란을 초래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전술한

職役의 전통과 여러 계층의 형태를 살펴본 성과를 참고로 하여 나름대

로 새로운 해석을 추구해보고자 한다

lt吳簡gt의 lt吏民人名年紀口食簿gt(竹簡(肆))에서는 각 里別로 里魁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5가 領하는 食口數를 吏와 民으로 구분하여 통계하고 있는데 그 일례를

다음에 든다

(A)

(이하 簡文 인용에서 內에 있는 字를 괄호 하여 표기함〕

集凡五唐里魁周領吏民五十戶 口食二百八十九人 (簡380)

其一百六十二人男 (379)

其一百卄七人女 (378)

其四戶縣吏 (377)

其二戶郡吏 (376)

其戶州吏 (374)

其五戶給新吏 (373)

其一戶縣卒 (372)

其一戶佃帥 (371)

이는 孫吳 嘉禾 연간 里別吏民口食簿인데 五唐里 50戶 가운데 일반 民

戶를 제외하고 州吏에서 佃帥까지의 戶를 따로 특기하고 있는 것에 의

하면 크게 民戶層과 州吏 이하의 吏층으로 양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

다 먼저 縣吏 이하를 이른바 세습 吏職戶인 吏戶로 볼 수 있는가 하

는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여러 異見이 제기되어 있는데 이 문

제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그런데 lt吳簡gt의 여타 戶籍簿나 戶口簡에

의하면 民戶를 제외한 縣吏 이하의 戶도 다시 縣吏 郡吏 州吏 軍吏 등

의 類와 맨 앞에 lsquo給rsquo字가 붙어 있는 계층의 類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즉 縣吏類의 吏 외에 其十二戶給縣吏下品 (壹5467)

其三戶給郡縣卒 (貳2318) 등과 같은 예들인데 그 職事나 給事

하는 관서의 명칭에 따라 多種의 명칭이 보인다 이를테면 給郡吏 給

縣吏 給州吏 給軍吏 給郡園父 給朝丞 給子弟 給驛兵 給鍛佐 給庫

吏 給縣卒 給度卒 給驛卒 給子弟佃客 給限田客 給佃帥 給常佃 給

家種客 給乞兒 給三州倉父 給養官牛 給習射 給私學 給官瓦師 給

亭復人 給亭雜人 給任師 給郡醫 給縣帥 給州私學 給新吏 給佃吏

給郵卒 給鹽兵 給關父 등이다 이렇게 앞에 lsquo給rsquo字가 들어간 계층을

일단 동일 계층으로 보아 lsquo給吏rsquo로 칭하고 縣吏 群吏 州吏 軍吏 등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6lsquo給rsquo이 붙어 있지 않은 계층을 lsquo吏rsquo로 칭하여 양자를 구분하고자 한다

lt오간gt에서 人名에 붙는 신분명은 크게 眞吏 某吏 給某吏 大男(大

女 民)의 4종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들은 그 표기상의 차이만으로도

일단 구분되는 존재라고 보이는데 현재 앞의 3종 신분명의 구분 문제

와 관련하여 몇 가지 다른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먼저 黎虎는 縣吏나

郡吏州吏 등의 吏가 侯家나 司隸校尉 또는 郡內에 소재한 전문 기

관 州郡 관내의 遠縣에 일정 기간 파견되어 給事하고 있는 자들을 칭

하여 給郡吏 등으로 칭하는 것일 뿐 그 신분은 本州 本郡 本縣의 吏

와 동일하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本郡의 郡吏가 곧 給郡吏이기

때문에 다른 계층이나 신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眞吏는 無職事

의 冗散官에 상대하여 쓰이는 용어로 실제 除授된 관원이라고 한다70)

黎虎와는 달리 양자를 다른 계층으로 보는 견해들도 제기되었다 먼저

韓樹峰은 給吏는 비록 吏의 名은 있지만 일반 백성으로서 잠시 吏의

職事에 종사하는 것일 뿐이고 혹 吏로 임명될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그 신분은 여전히 보통 백성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給吏와 구분하여

口算錢의 면제 특혜를 받는 州吏 郡吏 縣吏 등을 총칭하여 眞吏라 한

다고 하였다 즉 眞吏가 정식의 吏인데 비해 給吏는 일반민이며 일정

기간 만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給吏의

관부給事는 실제상 요역의 일종이라 한다 71) 한편 楊振紅은 동일인의

신분이 문서에 따라 다른 신분으로 등록되어 있는 점에 의거하여 이를

테면 給郡吏가 郡吏나 眞吏로 簡稱된 것이라 하고 眞吏나 給吏 모두

吏로 簡稱되며 州郡縣의 掾史職에 있는 자들로서 署長 佐官 등의 lsquo官rsquo

에 상대되는 자들을 지칭한다고 하였다 아울러 吏는 그 작위가 公乘

이면서 賦役 대상이고 漢魏시기에 吏職의 세습화가 이루어지면서 전문

70) 黎虎 說ldquo給吏rdquo -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社會科學戰線 2008-11) pp89

-94 說ldquo眞吏rdquo-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史學月刊 2009-5) p5071) 韓樹峰 走馬樓吳簡中的ldquo眞吏rdquo與ldquo給吏rdquo (吳簡硏究 2 武漢 崇文書局

2006) 韓樹峰王貴永 孫吳時期的ldquo給吏rdquo與ldquo給戶rdquo -以走馬樓吳簡爲中心 (吳簡硏究 3 2011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7적 吏戶인 眞吏가 출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吏가 본래 일반 서민

이었던 까닭에 公乘 이하의 서민과 합칭하여 吏民이라 한 것이며 삼

국시기 官과 吏가 구별된 연원은 漢代의 長吏와 小吏 내지 士와 庶民

의 구분에 있다고 한다72)다소 혼란스러운 견해들이고 용어상의 해석

문제가 겹쳐 있어 난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들 異見의 관건은 吏와 給

吏의 구분 문제 그리고 吏戶에서의 吏가 어떠한 吏를 가리키는가 하

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여러 견해에서 공통으로 들고 있는 lt吳簡gt의 다음 문서를 먼저 살

펴본다

(B)

廣成鄕勸農掾區光言 被書條列州吏父兄子弟伏處 人名 年紀爲簿

輒隱核鄕界 州吏七人 父兄子弟合卄三人 其四人刑 踵 聾 歐病 一人

被病物故 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 十二人細小 一人限田 一人

先出給縣吏 隱核人名 年紀相應 無有遺脫 若後爲他官所覺 光自坐 嘉禾

四年八月卄六日破莂保據(此簡無編戶)73)

이 자료는 광성향 勸農掾 區光이 작성하여 보고한 문서인데 廣成鄕 領

內 州吏7인의 父兄子弟 23인의 현황을 파악하여 嘉禾4년(235년)에 보

고한 내용이다 lt吳簡gt戶籍簿에서 州吏 등의 吏가 있는 戶는 그 州吏

가 戶人(戶主)으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 州吏7인이란 모두 그 戶의

戶人이다 이 현황 내역에 의하면 州吏7인의 父兄子弟 총합은 23인이

고 이 가운데 4인은 受刑 질병 중이며 1인은 物故 4인은 이미 관부

에 보내져 그 本主에 從事하며 관부에서 복무 중이다 12인은 細小 즉

소인이고 1인은 限田을 경작 중이다 이 限田이 lt吳簡gt의 lt吏民田家

莂gt 등에 보이는 lsquo二年常限rsquo의 田으로 보아 侯家의 田이나74) 屯田을75)

72) 楊振紅 吳簡中的吏 吏民與漢魏時期官 吏的分野 -中國古代官僚政治社會構

造硏究之二 (史學月刊2012-1)73) 侯旭東 三國吳簡兩文書初探 (歷史硏究 2001-4) p172에서 轉引

74) 入都鄕嘉禾二年步侯還民限米一斛 (5-1556) 其卄六斛民還黃龍年臨湘侯

限米 (602017)

75) 黃龍元年文入郡屯田民吳平斛米一百六斛二斗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6227) 其三斛五斗郡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8吏民에게 分給하여 佃作케 한 田으로 보는 것이 일반이다 그 경작자

는 그 田地(佃地)를 국가로부터 할당 받아 의무로 경작하기에 佃民과

같다 그 佃民에는 諸吏와 일반 民戶가 다 포함되고 있다76) lt吏民田

家莂gt에서 그 限田이 lsquo二年常限rsquo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그 의미에 대해

佃作기간 내지 佃種權이 2년으로 한정되어 있어 계약 기간이 지나면

배속되는 田地가 바꾸어지는 방식이었다는 견해가 있고77) 반면에 佃

地의 경작 기간이 아니라 地租額을 2년간 固定하는 것을 말한다는 견

해가 있다78) 사실이 어느 쪽이든 吏戶의 식구 가운데 일부는 국가의

농지를 佃作하고 地租를 납부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 액수가 漢代

사유지에 대한 조세보다 높다 같은 문서에는 租米 뿐 아니라 동시에

畝當 布2匹와 錢70-80까지 징수되고 있다 따라서 二年常限田의 分給

과 佃作은 受惠라기 보다는 노동력의 징발이고 耕作의 賦課로 보는 것

이 마땅하다 于振波가 常限田의 분급 액수를 정의하길 lsquo强制性的 生産

定額rsquo이라79) 본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 이어 1인은 先出給縣吏 인데

먼저 給縣吏로 보내졌다는 의미이다 先給吏의 사례는 嵩男弟恭年十

九先給州吏 (參1450) 등 몇 개가 더 보인다 이렇게 해서 총 23인의

食口 현황이 명료하게 보고되고 있다 그 내역에 의하면 州吏의 식구

는 受刑중인 자 질병자나 小人을 제외하고는 모두 관부에 給事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1인의 先出給縣吏 와

이미 관부에 보내져 本主 따라 從事하며 관부에 복무 중이라는 4인은

( 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 ) 내용상 모두 이미 관부에 보내져 현재

掾利焉黃龍理年屯田限米 (2157)

76) 于振波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南都學壇 24 2004年 第1期 湖南大

學 20041) p30 이 글은 앞에 든 中國社會科學院硏究生員學報 2004-1과 같

음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形成與演變 -談長沙

走馬樓簡牘札記之六 (鄭州大學學報 2001-1) 77) 張福亞 也談lt嘉禾吏民田家莂gt中ldquo二年常限rdquo田的函義 (首都師範大學學報

(社會科學版) 142期 2001-5) p8

78) 高敏 lt吏民田家莂gt中所見ldquo餘力田rdquo ldquo常限rdquo田等名稱的函義試釋 (鄭州大學

學報(社會科學版) 33-5 20009)79) 于振波 앞의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p12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9給事 중인 것은 마찬가지인데 어떠한 차이가 있어 다른 항목으로 구분

하여 기재한 것일까 이것은 바로 給縣吏와 縣吏의 차이를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후술) 州吏7인의 食口 23인의 현황 名簿를 작성하여 면밀

히 조사 보고하게 함으로써 그 遺脫을 막고 있는 것에 의하면 州吏 軍

吏 群吏 縣吏 등의 食口는 여타 일반 민과는 다른 賦役체제 아래 놓여

있는 계층이다 또 軍吏의 父兄子弟에 대해서도 그 食口簿를 따로 작

성하여 관리하고 있다

集凡中鄕州軍吏四人父(子)兄弟三人 中(參3012)

集凡南鄕領軍吏父兄弟合十九人 中(參 464)

이러한 사례들은 吏가 있는 戶는 그 食口들까지 포함하여 吏가 있는

戶 즉 吏戶로서 별개로 관리되고 그 성원은 모두 吏戶의 役 내지 賦

役체계에 들어가는 것임을 말해준다

위와 같이 州吏 縣吏 등 吏戶의 戶口簿는 그 食口 가운데 州吏 縣吏

등 그 吏인 자가 맨 앞에 戶人으로서 위치하지만 給吏는 戶人이드라도

앞에 위치하지 못한다

小武陵鄕嘉禾四年吏民人名妻子年紀簿(壹101533)

吉陽里戶人公乘張惕年卄八算一給縣吏(壹1018232)

吉陽里戶人公乘廖裕年卄七算一給郡吏(壹1017525)

高遷里戶人公乘黃毛年卅四算一給軍吏(壹10306)80)

또한 同 戶籍簿에 縣吏 州吏 등은 아래와 같이 맨 앞에 위치하여 일반

민이 아님을 명기하고 있지만

縣吏鄧橎年卄七 璠()妻大女金年卄一 算 (貳 1729)

州吏蔡區年卅二 區妻大女年卄七 算 (貳 1822)

軍吏朱謙年卅五 謙妻大女壹年卄六 算一 (貳 1723)

80) 인용된 4簡文은 凌文超가 재정리 조립하여 올린 글(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

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型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의

lt表二gt(pp25-37)에서 인용함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0給吏인 경우는 일반민을 가리키는 lsquo民男子rsquo로 기재되어 있다

民男子蔡若年卅七給驛兵 若妻大女四年卅算一(貳 1781)

民男子蔡喬年六十二給驛兵 喬妻大女典年卅八 (算) (貳1903)

따라서 위와 같은 吏民簿에서 民戶를 제외한 州吏나 郡吏 縣吏 軍

吏가 吏戶라면 給州吏 給郡吏 등 여러 職事의 관서에 給事하는 수십

종의 다양한 給某吏 신분은 전술한 庶民在官者 나 lsquo非吏이면서 관부

에 있는 자rsquo와 매우 유사하거나 일치한다

여기에서 吏戶나 吏役의 존재 여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는데 黎虎

는 삼국시기 吏戶의 존재를 인정치 않으나81) 高敏과 孟彦弘은 그 존

재를 인정하며 특히 高敏은 吏役制도 漢末三國시기에 확실히 형성되

었다고 한다82) 韓樹峰王貴永은 후한말 孫吳시기에 卑賤化가 이루어

지면서 吏戶의 萌芽가 이루어졌으며 lt吳簡gt에서의 給吏는 吏가 아니

고 民에 속한다고 한다83) 이러한 여러 異見의 배경에는 吏로 칭해지

는 계층에 전술한 바와 같이 다시 두 계층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계층

이 있는데 그 면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

각한다 양자의 구분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자료를 든다 속한서 百官3 大司農條의 注引 漢官에 丞一人 三百石 員吏四十人 其十一人

斗食 十七人佐 七人學事 五人守學事 皆河南屬縣給吏者 라 하였다

대사농승 속하의 斗食 이하 員吏 40인을 모두 하남군 속현에서 조달된

吏로 충원한다는 것이다 즉 후한 수도 낙양 인근인 하남군 속현에서

吏員을 차출한다는 것인데 斗食 佐 學事 등의 員吏는 해당 분야의 職

81) 黎虎 ldquo吏戶rdquo獻疑 (歷史硏究 2005-3) pp53-6882)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形成與演變 mdash談長沙走

馬樓簡牘札記之六 (鄭州大學學報 2001-1) p61孟彦弘 吳簡所見ldquo事rdquo臆說 mdash從ldquo事rdquo到ldquo課rdquo (吳簡硏究 2 2006) pp205-208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爲役之制 (魏晋南北朝隋

唐史資料 24 2008) pp8-2183) 韓樹峰 앞의 走馬樓吳簡中的ldquo眞吏rdquo與ldquo給吏rdquo pp33-38 韓樹峰王貴永 앞

에 든 孫吳時期的ldquo給吏rdquo與ldquo給戶rdquo -以走馬樓吳簡爲中心 p99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1事를 처리할 수 있는 職能者여야 하기 때문에 하남군에서 이러한 職事

로 근무하고 있는 員吏를 파견하거나 일반민 가운데서 새로 선발하여

파견 조달하였을 것이다 상하급 관부끼리 상호 관리를 파견하여 일정

기간 복무하게 하는 경우에 조달 지원한다는 의미로 動詞語로서 lsquo給rsquo을

쓸 수 있고 이러한 사례는 문헌에 이미 자주 보인다 위에 든 lsquo屬縣給

吏者rsquo도 그 한 실례이다 이러한 경우는 본래 吏의 신분이 여타의 관부

에 일정기간 출장 근무하는 것일 뿐인 까닭에 그 신분은 그대로 吏일

것은 자명한 일이다 즉 縣吏가 郡府에 출장근무 중일 때 그 신분은

그대로 縣吏이고 해당 名簿에 縣吏A가 여타 名簿에서 給郡吏A로 표

기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동일인이 名簿에 따라 신분명이 달리 기

재되어 있는 사례가 약간이나마 보이고 있는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된다(후술) 그런데 給州吏 給郡吏 給縣吏 등 수십종의 給吏에는 이런

경우가 아니고 lsquo州吏 등 諸吏에 배속되어 給事 중인 非吏로서 관부에

복무 중인 民rsquo이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給某吏로 표기된 자들은 lsquo給rsquo

이 붙지 아니한 州吏 郡吏 縣吏와는 달리 lsquo民男子rsquo로 표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給州吏는 非吏로서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그 관서에서 하나

의 職役의 형태로 복무 중인 民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들은 실은 民으로서 관부 업무상 필요한 노역에 동원되는 셈이지만

일부는 여러 관서의 하급 실무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전문의 職能을

갖춘 자들도 있다 縣吏 州吏의 職事 뿐 아니라 앞에 든 수십 종의 전

문 분야 부서별 給吏의 명칭은 그에 상응하는 사례들이다 정부는 이

들이 본래 일반 서민이지만 관부 운영의 필요상 특별 관리를 하지 않

으면 안 된다 그 결과 후한의 여러 사례에서 보듯이 대개 그 職을 세

습토록 하고 이들을 일반 民과 구분하여 칭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lt吳簡gt에 忠子男仲年十五 任給吏 (參 1805)라 한 것은 給吏가 民

에서 차출되어 임용되는 독립 계층임을 말해준다 또 草言府大男吳杭

不是卒子弟不應給卒事 八月卅日兼兵曹掾潘(因)()白(柒總49968)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卒의 子弟가 아니면 給卒事에 복무하게 할 수

없었다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2그들이 본래 吏의 신분이 아닌 까닭에 바로 吏로 칭하지 못하고 그

吏에 배속되어 給事하는 자 또 그 戶의 뜻으로 給某吏 給戶와 같은

칭호가 나오게 된 것으로 본다 이 칭호는 사실 관리와 民 사이에 있

는 이들 계층의 성격을 상당히 잘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이 給吏 계

층의 부담이 커지고 그 賤役 부담자로서의 성격이 뚜렷해감에 따라 給

吏나 給戶가 吏戶나 吏家로 칭해지고 給吏나 給戶의 役이 吏役으로

칭해진 것인데 그렇게 간략한 형태로 칭하여도 이미 관리의 吏와 충분

히 구분되는 것으로 사회가 인지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의하면 lt吳簡gt에 보이는 眞吏도 사실 眞吏라 할 수 없는 給吏

에 대비하여 쓰이게 된 용어가 아닐까 한수봉왕기영은 眞吏란 給吏

에 대비된 용어라 하고 lt吳簡gt에서 給吏가 口算 납부 의무가 있지만

眞吏는 면제되며 정식의 吏이고 신분성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羅新도

眞吏에게 口算錢이 면제되고 있다고 하였다84) 眞吏에 대한 여타의 견

해도 있지만85) 給吏와 관련하여 참고할 만 한 지적이다 또한 lt吳簡gt

에서 其七戶給郡吏 下品(壹5447) 其十二戶給郡吏 下品 (壹

5677) 其十二戶給縣吏 下品 (壹5467) 其一戶給軍吏 下品 (參

430336) 給度吏 下品之下 (5653) 등에서와 같이 給吏는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여서 평균의 民戶 보다 더 빈천한 계층인 점도 그

들이 관부에 給事하는 吏라기 보다는 非吏인 民으로서 民의 일반 요역

에 대신하여 관서에 給事(給役)하는 자들이되 그 일부는 職能에 따라

세습하여 관련 관서의 吏에 배속되고 給事 복무해야 하는 예속된 신

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lt吳簡gt에는 하나의 戶人을 首로 하고 그에 배속된 듯 한 여

러 신분의 戶數와 신분명을 기록한 簿가 있다 lt走馬樓吳簡竹簡gt에

84) 羅新 ldquo眞吏rdquo新解 (中華文史論叢 2009-1) p129 단지 그는 眞吏란 非華

夏系 출신의 編戶化된 토착 사회를 관리하는 인원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85) 이를테면 黎虎는 眞吏란 非眞吏에 대한 대칭이 아니고 실제로 除授 받은 관

원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說ldquo眞吏rdquo -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史學月刊2009-5) p5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3다음의 예들이 있다

-1 里戶人公乘縫繒年卄五苦腹心病 (5443)

- - - - - - -

其七戶給郡吏下品 (5447)

- - - - - - -

其一戶給州吏下品 (5452)

-2 平樂里戶人公乘鄭張年五十 (5460)

- - - - - - -

其十二戶給縣吏下品 (5467)

-3 東陽里戶人公乘扶侈年十四 (5471)

其二戶給庫吏中品 (5472)

- - - - -

其一戶給縣卒下品 (5474)

-4 宜陽里戶人公乘區歸年卄二眞吏 (8962)

- - - 給州卒 (8965)

- - - -

年六十一給驛兵 (8976)

右尙書吏三(戶) (8517)

孫吳에서 公乘의 작위 소유자는 일반민 중에서도 상당히 많지만 漢

代 民爵의 최고위 爵인 公乘(第8等)의 戶人에게 보통 여러 신분의 수

십호를 배속시키고 있다 그 중에 10戶 내외의 給吏가 배속되어 있다

또한 이들 戶人은 배속된 戶가 납부한 租稅를 거두어들이고 이를 일괄

해서 관부에 납부하고 있다 먼저 각 戶로부터 受領한 내역은 문장 앞

에 lsquo領rsquo으로 표기하고 受領한 액수를 총합하여 관부에 납부한 내역은

앞에 lsquo入rsquo으로 표기하고 있다

里戶人公乘曾(年五十三)妻年卅九 (簡 1631-1652)

- - - - - -

領二年郵卒限米田六頃五十畝收限米二斛合爲吳平斛米一千三百斛

其三百十四斛五斗府州中倉關邸閣李崇吏黃諱潘慮 中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4領二年民田三百七十六頃六十五畝二百卅八步畝收米一斛二斗合四萬

五千一百九十九斛一斗 - - - - - - - - -

常遷里戶人公乘李漠年卅七 妻大女思年卅一

入嘉禾二年郵卒限米七百九十八斛二斗八升

入嘉禾二年佃帥限米九百五十五斛八斗七升

- - - - - - -

이 戶人은 대부분 公乘이고 노비를 소유하고 있으며 配屬된 戶의

徵稅와 총괄 납입의 업무에 복무하고 있는데 이는 후대 富戶에게 差役

복무를 부과한 사정과 비슷한 면이 있다 후대 差役제도와 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1인의 戶人을 賦稅 징수 납입의 책임

자로 하여 향리에서 이 방면의 기층단위로 운영하고 있는 셈인데 戶籍

簿와는 그 내역과 용도가 다른 별개의 독립 帳簿이다 그런데 劉家軍

은 限米 납부자 신분인 私學還民叛士吏卒 등이 모두 流民이

며 그 戶人에게 依附하고 있는 자들이라 하고 국가가 그 依附관계를

승인해주면서 그들이 경작할 토지를 戶人에게 分級해주고 그들이 납

부하는 地租인 限米도 戶人의 이름 아래 등기한 것이라고 보았다86)당

시 嘉禾연간에 전란으로 長沙 임상현 지역에 流民이 많이 流入되었을

가능성은 이미 여러 연구에서 지적된 바 있고 還民 叛士 등 일부는

流民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限米와 屯田限米 납부자 신분에는

이밖에 大男 州倉吏 吏帥客 金民 佃吏 郵卒 衛士 傳卒 子弟 佃卒

復客 新吏 兵客 故師子弟 兵師士 故帥客 後客 船師 司馬 士

등 거의 전 계층을 망라하고 있는데 이들 중에 유민이 있을 수 있으나

모두 流民 출신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새로 屯田이나 侯國의 田을

경작시키기 위해 유민 뿐 아니라 在地의 吏民에게 할당하여 佃作으로

운영하는 것은 여러 문헌자료에도 있고 lt吳簡gt의 lt吏民田家莂gt은

주로 在地의 호적에 올라 있는 吏民의 佃作 내역 장부이다 또 lt吳

簡gt 草言府部諸鄕吏區光等招誘諸限田客八十三人首見事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曹史趙野

86) 劉家軍 論lt走馬樓吳簡竹簡gt中 ldquo限米rdquo的性質 (中國社會經濟史硏究 2005-2) p87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5白 (柒總 49782)에 의하면 당시 長沙 지역에서 鄕吏에 의해 限田客

83인을 招誘했다는 성과를 보고하고 있는데 이와 같이 佃作 인력의 확

보에 애쓰는 상황에서 전술한 바와 같은 본래 限田의 佃作 의무를 지

고 있는 在地 吏戶의 家內 성원이 그 佃作者 명단에서 제외될 리가 없

그래서 簡文(B) lt州吏父兄子弟年紀簿gt에서 吏戶의 家內 父兄子弟

인력 23인 가운데 lsquo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rsquo과 lsquo一人先出給縣吏rsquo가

관부에 급사하는 給吏에 해당하고 lsquo一人限田rsquo은 限田의 佃作에 복무하

는 자이다 바로 이어 인용하는 孫休의 詔文에서 吏家의 어려운 사정

에 대해 ldquo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이미 限米를

납부하였는데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rdquo라 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전반부는 給吏로서 복무

하는 것이고 뒷부분은 限田 佃作 복역을 말함이다 즉 한 吏戶의 父兄

子弟 가운데 일부는 전자에 복무하고 일부는 후자에 복무한다 똑 같

은 관부 내지 국가의 역에 복역하는 것이지만 給吏는 분명히 吏(分署

의 담당 吏 州吏)에 給事하는 자라는 점에서 給吏로 칭하여 여타의

복역과 구분한다 그리하여 그 給吏가 결혼이나 계승으로 하나의 戶를

이루면 簡文(A)에서와 같이 某里의 戶籍簿上에서 里의 총 戶民數 아래

에 lsquo其四戶給縣吏rsquo와 같은 형식으로 戶를 本으로 한 給吏로서 명기된

다 그런데 一人의 給吏가 아직 戶를 이루지 못하고 한 吏戶의 成員

(父兄 子弟)으로서 있는 상황이라면 그 戶人의 현재 신분에 의해 그

戶가 표기되었을 것이다

이 문제와 직결되는 다음 기사를 살펴보자 孫權의 제6子로 孫亮에

이어 즉위한 孫休는 그의 즉위 年인 영안원년(258)에 다음과 같이 詔

하였다

「諸吏家에 5인이 있으면 (그 가운데) 3인은 겹쳐서 役에 복무하고 있

다 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이미 限米를 납부하

였는데 군대가 출정하면 또 종군함에 심지어는 家事를 돌볼 자도 없게

되는 것을 짐은 매우 애처롭게 생각한다 그 5인 가운데 3인이 役에 복무

하고 있다면 그 父兄이 (家에) 머물고자 하는 것을 허용해주어 1인을 (役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6에 나가지 않고) 머물게 하고 그 限米를 면제해주며 군대가 출정해도 종

군하지 않도록 하라 (삼국지 권48 吳書 孫休傳 永安元年條)87)

孫休는 즉위 전 재야에 있을 때 시골 생활을 보냈던 바가 있어 그

들의 참상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吏家(吏戶)가 지는 과중한 부담

은 곧 그들이 그만큼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 吏役이 賤視化 되고 厮役으로 인지되고 있던 배경을 위의 詔文은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lsquo吏家rsquo의 식구는 여러 방면의 복무를

중복하여 부담하고 있다 그 가운데 限米 납부 의무는 lt吳簡gt에 의하

면 국가에서 佃作케 하여 운영하는 限田 경작에 대한 租로써 납부하는

것이다 즉 전술한 lsquo二年常限rsquo田을 이 限田으로 보아 그 地租를 限米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다88) 단지 于振波는 限米란 二年常限田과는 관

계가 없고 屯田 경작에 대한 조세인데 衛士 郵卒 傳卒 등의 상비병

과 토지가 없는 수공업자 외지에서 수학하기 위해 온 私學 이탈하였

다가 새로 돌아와 附籍된 還民에게 軍屯이나 民屯에 종사하게 하고 일

부의 부세와 요역을 면제해주면서 限米를 납부하게 한 것이라 한다89)

그의 동일한 글에서 여타 사항에 대해 필자와 일치한 부분에 대해서는

앞에서 찬동한 바 있지만 이 부분에는 수긍하기 어렵다 lt走馬樓吳

簡竹簡gt에는 限米 납부자로 기재된 신분에 전술한 바와 같이 많은

신분이 망라되어 있고 孫休傳에서 말하는 吏戶가 일부 상비병이나 귀

환민 私學등에 한정한 것이 아니고 吏戶 전반의 형편을 들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lt吏民田家莂gt에서 佃田의 총수는 二年常限田과 餘力

田으로 구성 내지 구분되어 있다 즉 常限田은 餘力田에 對比되는 용

어이다 그리고 양자의 畝當 租額이 嘉禾4년 民의 경우 12斛 0456

87) 詔曰 ldquo諸吏家有五人 三人兼重爲役 父兄在都 子弟給郡縣吏 旣出限米 軍出

又從 至於家事無經護者 朕甚湣之 其有五人 三人爲役 聽其父兄所欲留 爲留

一人 除其米限 軍出不從rdquo」

88) 앞에 든 高敏의 글 lt吏民田家莂gt中所見ldquo餘力田rdquo ldquo常限rdquo田等名稱的函義試釋

이래 대부분 이 견해에 따른다

89) 于振波 앞에 든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7斛 州吏의 경우 0586斛 0456斛으로 차이가 있다90) 무엇보다 앞에

서 살펴 본 lt오간gt lt廣成鄕州吏父兄子弟伏處 人名 年紀爲簿gt에 기재

된 州吏의 食口 현황 내역은 孫休傳에서 吏戶의 식구 사정을 말하고

있는 내역과 같은 모습을 전하고 있는데 91)전자에서는 限田이라 하였

고 孫休傳에서는 限米라고 한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限田에 대해 징

수하는 것이 곧 限米이다 따라서 限田이란 二年常限田의 簡稱일 것으

로 본다 lt吳簡gt의 lt吏民田家莂gt에는 이들 限田戶의 佃田額과 그에

대한 租賦稅 납부 內譯이 있다 이 戶는 州郡縣吏 등으로 담당 吏職에

給事해야 하고 從軍도 해야 한다 이러한 양상은 분명히 역의 부담이

중첩된 것으로 일반민보다 더 과중하다 租額인 限米 납부액도 일반민

의 사유지에 대한 租額보다 비율이 높았다

그런데 중요한 사항은 첫째 이렇게 과중한 부담이 중첩된 吏戶의

일면을 보여주는 lt吏民田家莂gt에서 佃作吏民의 戶人(戶主) 신분을 보

면 大男大女州吏群吏縣吏軍吏州卒郡卒縣卒復民士

등으로 吏와 民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들 吏民 모두 佃作

의 의무와 함께 地租로 米穀 布 錢을 납부해야 하고 從軍의 役이 있

으며 그리고 대량의 lt오간gt에 다량으로 보이는 子弟 및 給子弟가 곧

吏의 子弟로 파악된 것에 의하면92) 그들이 납부하는 子弟限米의 부담

도 吏戶의 부담이 된다 또한 lt오간gt에

郡吏公乘李年卅二 算一 (貳2460)

侄子年卅九給子弟 妻大女衷()年卄六 算一 (貳1754)

吉陽里戶人公乘張惕年卄八 算一 給縣吏 (壹1018232)

등의 많은 簡文에서 吏와 그 子弟 給吏들에게 算賦도 부과되고 있다

90) 앞에 든 張福亞 也談lt嘉禾吏民田家莂gt中ldquo二年常限rdquo田的函義 p11의 表1

91) 이에 대해서는 앞에 든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

形成與演變 mdash談長沙走馬樓簡牘札記之六 pp62-63 참조

92) 孟彦弘 앞에 든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爲役之

制 pp1-7 子弟는 吏의 子弟 給子弟는 관부의 給事에 差出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8단지 吉陽里戶人公乘鄭龍(龍 下에 田)年卅六算一給州吏復 (壹3323)

과 같은 lsquo給州吏復rsquo 즉 給州吏이면서 算賦가 復除된 경우가 있는데 이

에 의거하여 給吏는 算賦에서 復除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93) 그러나

위에 든 簡文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부분의 給吏가 lsquo算一rsquo로 기재

되어 있고 소수만이 lsquo復rsquo으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復除되는 경우는

특별한 사정이 있어 그 給吏에게만 특혜를 준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

으로 생각한다 참고로 lsquo腫兩足rsquo자나 lsquo刑兩足rsquo자인 民戶의 戶人도 算賦

가 면제되지 않고 있으며94) 大女도 算賦 납부 의무가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吏戶와 民戶가 지는 국가에의 부담은 吏戶가 각기의 吏職

에 복무하고 일반민호는 그러한 吏職에 있지 않다는 정도 외에는 별다

른 차이가 없다 물론 일반민은 吏職의 役 즉 吏役이 없는 대신에 일

반요역에 복역해야 하고 吏戶는 일반요역에서 면제된다 그러한 사실

을 말해주는 자료로 lt오간gt 戶口簿에 里別로 定應役의 戶數 즉 일반

요역에 응당 복역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진 里別 戶數 문서가 있다

其一百卅八人男 (參431548)

其八十一人(女) (參431144)

其一戶給軍吏 下品 (參430336)

其五戶民 (下)品 (參430235)

其七戶女戶不任調 下品之下 (參430134)

其領役民卅七戶 (參430033)

이 里別 戶口簡은 凌文超의 編次 정리 작업에 의하면 新成里의 總

結簡에 해당하는데95)여기서 일반민호수는 생략하고 給軍吏나 調에서

면제되는 女戶 등의 수만을 기재한 것은 맨 아래의 定應役 戶數를 算

出하는 근거를 기록하기 위함이다 즉 일반민호 외의 給吏 등의 戶數

93) 凌文超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型

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 p5494) 高平里戶人公乘黃高鼰五十二算一腫兩足 (貳 2903) (大)成里戶人公乘何軼年

五十五算一刑兩足 (參626736)

95) 凌文超 앞에 든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

簿rdquo的類型與功能 p40과 lt表3gt 중 p45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9가 총 13戶이고 이들을 제외한 定應役의 戶數가 37호란 뜻이다 그래

서 新成里의 총 호수는 50戶였음을 알 수 있다 新成里의 총 口數 219

명은 lt오간gt의 戶當 口數 평균이 대략 45명 정도임을 감안하면 486

戶이고 50戶와 근접한다 따라서 給軍吏 등 13호는 定應役에서 면제되

는 戶임을 알 수 있다 또 다음 戶口簡은 앞부분 里의 총 口數가 결락

되어 있다

其一戶給朝丞 (貳170263)

其二戶給郡園父 (貳170162)

其五戶尫嬴老頓貧窮女戶 (貳170567)

定應役民卄戶 (貳170466)

여기서는 給朝丞1戶 給郡園2戶 절름발이 노인 빈궁자 女戶 등 5

戶가 役에서 면제되고 그 나머지 20戶가 定應役民이 되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즉 給吏는 定應役에서 면제되고 있다 따라서 給吏는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부에 給事하는 것이기에 당연히 일반요역에서 면제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給吏에도 전술한 바와 같이 吏戶의 가속인 경우가 있고 일

반민 중에 차출된 경우가 있는데 전자의 경우는 관부에서 필요할 때

마다 고정적으로 차출되었을 것이며 일반민의 경우는 본래는 일시적

한시적으로 징발되었을 것이지만 여러 簡文에 戶人으로서 給吏인 자가

있는 것에 의하면 점차 전자의 경우와 같이 吏戶와 마찬가지로 給吏戶

로서 고정적으로 차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定應役이 戶를 부과

단위로 삼고 있다는 점 또한 吏戶의 家屬이 하나의 徵役 단위로서 운

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도 吏戶의 실재성과 그 독립적인

신분성을 말해준다 더구나 일반 민호와 구분된 吏戶 名籍(lsquo吏名籍rsquo)의

존재가 다음의 簡文에서 확인된다

諸鄕謹列郡縣吏兄弟 幷攴 吏名籍 (13-7638)

吏戶의 막중한 부담은 그 家屬의 叛走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0를테면 縣吏 毛章의 15세인 弟(壹 7865) 縣吏 毛車世의 49세인 父(壹

7868) 群吏 黃의 13세인 弟(壹7893) 群吏 谷漢의 29세인 兄子

(壹7905)가 嘉禾 2년에서 3년 사이에 叛走하였다 후한 말 陳寔은 어

려서 縣吏가 되어 항상 厮役에 給事하였는데( 常給事厮役 ) 후에 都亭

의 佐가 되었다96) 그리고 郭太는 대대로 집안이 빈천하고 어려서 고

아가 되었는데 모친이 縣廷에 給事하게 하려 함에 말하길 ldquo대장부가

어찌 斗筲의 役에 處해 있을 것입니까rdquo라 하고 마침내 떠났다97) 당

시 이미 吏役이 厮役으로 인식되어 있었고 斗筲의 役 즉 100석 이하

인 斗食의 位에 처하였음을 말해준다 즉 같은 吏이더라도 100석 이상

인 掾史와 그 이하 사이에는 차등과 구분이 있었다(후술) 그렇지만 이

두 경우는 모두 吏가 되는 것이 선택의 길이었기 때문에 吏戶에 속한

자들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吏戶가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던

것에 비해 이 두 경우는 선택사항이었다 斗食에게도 매우 소액이지만

月俸이 지급되었기 때문에 빈천하거나 고아가 되어 생업을 위해 吏職

을 선택한 것이다 나이도 어리고 집안의 세력 배경도 없는 가운데 吏

가 된 것에 의하면 斗食의 최하단에 속한 吏였을 것이며 이들이 給吏

가 아니고 吏로 칭해진 것은 일반요역 복무에 대신하여 징발 내지 차

출된 경우가 아니고 吏職에 임명된 것이기에 당연하다

縣吏 등의 諸吏役이 厮役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무엇 보다 그 雜

役的인 吏役의 과중함 때문이다 후한 lt張景碑文gt에서 14鄕의 正을

調發하여 勸農의식에 소요되는 土牛 제작에 육칠십만전이 들어가 吏와

正이 매년 患苦에 처함에 男子(庶民) 張景이 매년 그 비용을 출연하여

土牛를 義作해주겠다 하고 그 대신 자신을 縣吏 列長 伍長에 임

용되지 않게 해줄 것과 小繇 징발을 면해줄 것을 청하고 있다98) 즉

96) 후한서 권62 陳寔傳에 (陳寔)少作縣吏 常給事厮役 後爲都亭(刺)佐

p2065

97) 후한서 권68 郭太傳에 (郭太)家世貧賤 早孤 母欲使給事縣廷 林宗曰 ldquo大

丈夫焉能處斗筲之役乎rdquo 遂辭 就成皐屈伯彦學 三年業畢 博通墳籍 p2225

98) 府告宛 男子張景記言 府南門外勸〔農〕土牛 調發十四鄕正 上賦

斂作治 幷土人 犂 耒 卄 蓎 屋 功費六七十萬 重勞人功 吏正患苦 愿以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1서민이었던 張景은 거액의 자금을 출연하면서까지 縣吏 등의 吏役과

小繇의 복역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있다 그는 아직 非吏였지만 吏役에

언제든지 차출될 수 있었고 그 吏役은 매우 번거롭고 힘든 것이었음

을 알 수 있다 단지 張景과 같은 서민이 縣吏가 되어 吏役에 差出되

는 경우 바로 lt오간gt에서와 같은 吏戶가 되어 그 가속이 모두 吏役의

범위에 들어가게 되는지는 不明이다 推斷이지만 世戶로서의 吏戶와

함께 일시적으로 차출되어 일정 기간 만 복무하는 非世戶로서의 吏戶

가 공존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요컨대 lt오간gt과 문헌자료에 보이는 吏戶와 給吏의 면모들은 앞에

서 검토한 胥徒와 lt庶民在官者gt 내지 徒御 導從役人 등과 일맥상통

하는 면이 있다 孫休傳이라든가 lt오간gt에 빈출하는 吏戶 吏民에서의

吏는 500石 이하인 吏 중에서도 200석 이상의 長吏級을 제외한 下吏

즉 百石 이하의 吏를 가리키고 給吏는 吏가 아니되 관부에서 일정 기

간 여러 분서에 勞役으로 복무하는 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즉

庶民在官者 와 상통한다 특히 그들에게 부과되었던 賦稅役의 내역에

서도 위에서 검토한 여러 職役 계통 신분이나 계층의 예와 거의 비슷

하다

孫休傳에서 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라 한

것은 吏家의 父兄은 都에서 州郡縣의 吏로 복무한다는 뜻이고 나머지

3인의 자제는 郡縣吏에 給事한다는 뜻이다 즉 lsquo郡縣吏에 給事함( 給郡

縣吏 )rsquo이란 子弟3인이 郡縣吏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郡縣吏에 下屬되

어 그 업무에 給事한다는 뜻이다 위의 廣成鄕의 lt人名年紀簿gt 簡文

에서 lsquo先出給縣吏rsquo도 州吏7家의 식구 가운데 먼저 縣吏의 업무를 보좌

하기 위해 차출되어 나간 것을 뜻한다 여기서 말하는 郡縣吏는 주로

掾史職으로 사무 업무 중심이고 그 업무를 노동력으로 보좌하는 인력

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lt오간gt의 도처에 諸吏의 사례로써 諸曹倉

吏庫吏監運掾關邸閣船師田戶曹史 등 수십종의 職名이 보이

家錢 義作土牛 上瓦屋 欄楯什物 世世作治 乞不爲縣吏 列長 伍長 徵發小

繇 (高文 漢碑集釋 開封 河南大學出版社 1997 p227)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2는데 대부분 그 업무 처리에 노동인력이 필요하다 십 명 내외의 掾史

員吏 만으로는 사무나 문서작성 관리 업무 이외에는 수행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 인력을 吏戶의 식구로부터 자동으로 差役시키는 시스템이

漢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었음을 위 孫休傳의 기사는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이들 吏家의 식구 현황 파악은 관부에서 항상 필요

로 하고 확보해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lt오간gt의 여러 문서는

그러한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東鄕勸農掾殷連被書條列州吏父兄人名年紀爲簿

輒科核鄕界 州吏三人 父兄二人刑蹱叛走 以下戶民自代 謹列年紀 以

(已)審實 無有遺脫 若有他官所覺 連自坐 嘉(禾)四年八月卄六日破莂

保據 (J22-2543)

여기에서 담당 鄕界의 州吏3인 가운데 그 父兄2인이 受刑과 叛走로

비게 됨에 下戶의 民을 징발하여 바로 충당시켰다는 것이다 이 以下

戶民自代 에 대한 해석에서 下戶를 고용하여 자신을 代理케 한 것이라

는 견해가 있는데99) 그렇다면 戶人인 州吏가 자신의 식구 결원을 책

임지고 직접 下戶를 고용한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해당 州吏의 부담

이 너무 크게 되어 당시 下戶가 자동으로 보충되는 시스템으로 운영된

것일 가능성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諸家의 견해 모두 不明

임을 인정하고 있다100) 어쨌든 吏戶의 노동력을 신속하고 철저하게

보충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은 吏戶 전체의 식구가 관부에

예속되어 있고 세습화 된 상태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단지 孟彦弘은

이 자료를 통해 당시 吏戶의 家屬이 모두 吏였음을 말해준다고 하였으

나101)그렇지 아니하고 吏의 가속에 吏도 있을 수 있지만 아직 吏가

아니고 吏를 노동력 지원으로 보조해주는 給吏도 있고 그 給吏는 非

99) 이 점에 대한 정리는 王素 長沙吳簡勸農掾條列軍州吏等人名年紀三文書新探

(魏晋南北朝隋唐史資料 25 2009) p9의 注 11) 참조

100) 이를테면 孟言弘 앞의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

爲役之制 p16

101) 위의 글 p1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3吏로서 관부에 給事하는 자이며 이런 면에서 전술한 庶民在官者 내

지 lsquo非吏이면서 관에 있는 자rsquo lsquo官과 民 사이rsquo lsquo lsquo半官 半民rsquo lsquo踐更小史

(小吏)rsquo(續漢書輿服志) 등과 상통한 계층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吏戶에 포함되지 않는 給吏가 있었다 吏戶와 給吏戶가 구분되

고 있음은 lt吏民人名年紀口食簿gt의

其七戶給郡吏下品 (壹5447)

其十二戶給縣吏下品 (壹5467)

其一戶給軍吏下品 (參430336)

(其)六戶郡吏(中)(品) ---- (貳4490)

其二戶縣吏(下)品 (貳3307)

등에서 給郡吏 등의 戶와 縣吏의 戶가 구분되어 기록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다 그리고 給吏가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에 속하였음은 위

의 사례 뿐 아니라 lt吳簡gt에서 給度吏 下品之下 (5653) 등에서 알

수 있는데 下戶로 결원을 보충하는 것은 同級의 戶로 충원한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면 또한 당시 吏戶와 給吏의 관부에의 예속성과 신분

성을 보여준다 요컨대 給吏는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여서 평균

의 民戶 보다 더 빈천한 계층인 점도 그들이 관부에 정식의 吏職으로

임명된 吏라기 보다는 非吏인 民으로서 民의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

서에 給事(給役)하는 자들이되 관련 관서의 吏에 배속되고 給事 복무

해야 하는 예속된 신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찍이 宮崎市定이 宋書권94恩倖傳序의 郡縣掾史 幷出

豪家 負戈宿衛 皆由勢族 를 인용하여 豪家 출신으로서의 掾史가 고

관으로 진출하는 경향이 累代 이어지면서 右族이 이루어지고 이를 통

해 위진남북조 귀족제가 출현하였다 하였고102) 楊振紅이 이에 동조하

고 있는 것은103) 부분적으로 再考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당시 孫休

102) 宮崎市定 九品官人法の硏究 -科擧前史 (京都 同朋社 1979(1956)) pp86

-89

103) 楊振紅 앞에 든 吳簡中的吏 吏民與漢魏時期官 吏的分野 mdash中國古代官僚

政治社會構造硏究之二 p34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4傳에서 말한 吏戶는 분명히 豪族勢家가 아니었고 lt오간gt에서 民戶와

함께 lt吏民簿gt에 기록된 吏戶는 下品에 속한 貧層이었으며 그 식구

모두 중복된 賦役의 부담에 시달리는 계층이었다 그 吏戶에는 吏와

給吏로 구분되어 관부에 예속되고 있다 즉 아무래도 豪族大家로서의

掾史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정을 이해하는 데는 전술한

lt周禮gt의 府史胥徒에서 府史가 호족대가로서 辟除된 掾史에 類하고

胥徒가 곧 관부 예속하의 吏戶와 給吏에 거의 相當하다는 면이 있다

吏戶에서의 吏職에 掾史가 있겠지만 관부에 예속되어 있고 직업적 세

습화 되어 있어 호족대가 출신의 掾史와는 구분되었을 것이다 무엇보

다 호족대가 출신의 掾史은 관부에 예속되지도 아니하고 세습의 신분

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掾史層의 존재는 군현의 장관 辟召로 임

용되었을 것이다 반면 吏戶 출신의 掾史는 기술 계통의 전문직일 경

우이거나 개인적 기능의 능력으로 또는 部曲과 같은 상비병 출신이

일반 요역 부담에 대신하여 관련 직무에 세습하게 되거나 또는 일반민

호에서 급히 所要되어 임시로 차출되었다가 점차 세습의 吏戶로 예속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관부에 진 빚으로 예속되었다가 吏戶로 남

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즉 이 吏戶는 관부의 갖가지 所要 用務

에 差出될 상황에 대기되어 있는 戶이다 그 중에 일부는 정식으로 掾

史로 승진되지만 나머지는 윤번이나 필요시 이 방면 저 방면의 分署에

차출되어 給事하며 分署의 長을 主로 모시고 그 아래에서 給事한다

掾史의 吏와 구분하여 그러한 뜻을 반영한 것이 lt오간gt의 도처에 보

이는 수십종의 給某吏다고 생각한다 호족대가 출신으로서의 掾史와

예속신분인 吏戶 출신으로서의 掾史는 그 신분상으로도 士와 서민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기에 宮崎市定의 立論 또한 양자의 구분을 통한

위진남북조의 귀족제 내지 良賤制의 형성을 논하는 보완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근래의 여러 연구들은 掾史에 이렇게 두 방면으

로 구분되는 면과 계층이 있다는 점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였고 吏戶

의 家屬에 吏와 給吏로 구분되는 층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양자의 성

격이 어떠한가를 파악하지 못한 셈이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5한편 給吏는 吏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戶人이나 父兄이 郡吏 등의

諸吏에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당시 吏戶가 직업화 내지 세습화 되어

있었기 때문에 子弟의 給吏 신분도 곧이어 諸吏로 진전될 것은 당연하

다 그래서 lt嘉禾四年吉陽里戶籍簿gt에 吉陽里에 호적이 올라 있는 給

郡吏 逢杲(壹10169) 給郡吏 寥裕(壹10175) 給縣吏 張惕(壹

10182) 給州吏 區張(壹10367) 給州吏 嚴追(壹10149) 등이 lt嘉禾四

年五年吏民田家莂gt의 下伍丘 소속 佃民 名簿에서는 거의 同一人일

것이 분명한데 給郡吏가 群吏로 給縣吏가 縣吏로 給州吏가 州卒이나

州吏로 기재되어 있는 경우도104)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

다 이 경우는 丘에서는 給吏가 보이지 아니하고 里에서만 보이기 때

문에 아직 명확히 해명이 되지 않고 있는 里와 丘의 차이에 따른 것일

가능성도 있고 嘉禾4년과 嘉禾4-5년 戶籍簿에서의 1년 내외의 기간

차이에 따른 신분의 변화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또

한 侯旭東의 정리 조사에 의하면 高遷里의 給縣吏 松棐가 위의 lt田家

莂gt에서는 武龍丘의 縣吏로 기재되어 있고 같은 里의 給縣吏 張喬는

亻平 丘의 縣吏로 기재되어 있으며 宜陽里에 眞吏로 등재된 黃阿 등

6인도 각각 6곳의 다른 丘의 州吏 男子 男子 郡吏로 기재되어 있다

또 陽里의 給郡吏 謝鼠는 夫丘의 男子로 기재되어 있다105)里의 호

적부와 lt吏民田家莂gt의 丘別 佃民 명부에서 그 신분이 男子인 경우

일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양편 모두 里의 호적부에 給郡吏 給縣

吏 給州吏등 給吏로 기재된 경우는 대부분 丘의 佃民 명부에서 각각

群吏 縣吏 州吏로 되어 있고 眞吏가 州吏 郡吏 男子로 기재되기도

하고 給縣吏가 男子로 기재된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일부 사례들은 眞

吏 吏 給吏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것이어서 그 해명이 필요한

데 현재 里와 丘의 구별 차이 眞吏와 諸吏 給吏등의 실체 문제가 아

104) 凌文超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

型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 pp17-18의 lt表一gt

105) 侯旭東 長沙走馬樓吳簡ldquo里rdquoldquo丘rdquo關係再硏究 (魏晋南北朝隋唐史資料2006) pp19-21의 表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6직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어 그 이유를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실

정이다 그러나 신분명으로 이름을 달리하여 그렇게 구분하고 있으며

전술한 바와 같이 給吏가 吏나 眞吏와 다르게 취급되면서 여러 名簿에

구별되어 기재되어 있고 그 독자성도 충분히 입증되기 때문에 위의

예외적인 사항들은 개인별 특별한 사정에 따른 것이거나 아직 여러 異

說로 논란이 되고 있는 里와 丘 등의 구분과 차이 등에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고에서 갖추어 고찰하지 못하고

후고로 미룬다

Ⅵ 결 언

이상의 검토에서 고대 職役의 범주에 들어가는 다종의 신분 내지 계

층과 吏職의 類 그 복무형태 삼국시기에 이르는 전승과 변화의 모습

들을 살펴보았다 우선 職官과 일반요역 복무자와는 신분제와 賦役체

계상 엄연히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례 地官 鄕大夫에 그

舍란 國中의 貴者賢者能者服公事者老者疾者에게는 모두 舍

한다는 것이다 에 대한 후한의 鄭司農의 注에 服公事者란 지금 吏에

게 復除해주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고 하였다106) 여기서 lsquo舍rsquo란 復

除와 같은 뜻이다 그 대상 가운데 lsquo國中의 貴者賢者能者rsquo 가운데

貴者는 공경귀족 賢者와 能者는 命官과 辟召된 관리에 해당한다 그리

고 그 아래의 服工事者는 다시 2분되는데 200석 이하의 吏職 내지 掾

史職(小吏)이 있고 그 아래에 庶民在官者 내지 lsquo非吏로서 官에 給事

하는 자rsquo로서 給吏層이 있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賢者와 能者 까지를

職官이라 하면 그 이하인 服工事者 가 곧 職役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

석된다 그리고 職官과 職役 복무자는 모두 일반요역에서 면제되는 자

106) 其舍 國中貴者賢者能者服公事者老者疾者 皆舍 注云 lsquo服公事者rsquo

謂若今吏有復除也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7들이다 이 중에서 職役 복무자는 일반요역에서 면제되는 대신에 각종

의 吏職과 給吏職에 복무하였다 여기서 칭한 給吏職은 lsquo(小)吏rsquo에 대비

하여 칭한 給吏를 그 성격상 그렇게 칭할 수 있으며 그 독립적 계층

내지 신분으로서의 실태가 lt長沙走馬樓吳簡gt의 발현에 의해 상당 부

분 밝혀지게 되었다 그런데 服工事者 즉 職役 담당 계층의 범위가

상당히 넓어서 그 職役의 양태가 모든 면에서 같은 것은 아니고 일부

분 다른 측면들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고대의 긴 기간에 걸쳐 거의

공통으로 庶民在官者 lsquo非吏이면서 관부에 給事하는 자rsquo lsquo官과 民 사

이rsquo lsquo半官半民rsquo의 성격이 유지되고 있는 면을 볼 수 있다

이렇게 職役 담당자의 연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곧 lt주례gt에 보이

는 관리 조직의 최하위에 위치한 府史胥徒이다 이 가운데 府史

가 대략 후대의 掾史職이나 lt吳簡gt의 諸吏에 속한다면 胥徒는 給吏層

에 상통하는 면이 많다 단지 lt吳簡gt에 다수 보이는 吏役 下의 吏戶

는 그 과중한 부담과 厮役 및 빈천함의 성격상 오히려 胥徒에 상통하

는 면이 많다 이러한 시대적 차이는 吏戶의 예속화 및 세습화의 진전

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한편 시대의 여건 차이로 여러 부분에서 胥徒

와 후대의 職役 담당 계층 사이에는 다른 면도 있다 胥徒나 給吏層이

기본적으로 일반 서민 출신으로서의 服工事者 였던 것과는 달리 周에

서 三國에 이르는 동안 服工事者 라는 면에서 同類이지만 일반 서민

과는 구분되는 여러 相異한 계층에 속한 신분들이 속하여 있었다 예

를 들면 工商食官 에 속하는 工商 皁隸食職 에 포함되는 吏에 속

한 徒隸 층 넓은 의미의 徒隸層이라 할 수 있는 皂隸牧圄

僕輿人 그리고 下吏層에 들어가는 樂祝醫衛士 및 走卒伍伯

之類 등이 그들로 그 출신은 일반 서민이거나 賤民 또는 刑徒였지만

관부에 寄生하며 給事한다는 면에서는 공통이다

이들의 복무 형태는 항상적 근무 일시적 근무 組別 교대제 등 여러

가지로 징발 내지 차출되었고 lsquo冗rsquo과 lsquo更rsquo은 그러한 차이를 구분하는

용어로서 나온 것이다 근무에 따른 보수를 받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 구분은 아직 분명치 않은 부분이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8있다 그러하지만 최소한 생업을 관부에 의탁하는 자들에게는 지급되

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年俸制에 대비되는 稍食 즉 소액의 月俸 내

지는 근무일수 기준의 지급 형태로 지급되었다 이는 그들의 근무가

주로 일 단위나 월 단위로 이루어지고 계산되었기 때문이다

lsquo官rsquo과 lsquo吏rsquo는 서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선진 이래 본래 상하의 신

분으로 명확히 구분되었고 漢代에 혼용 내지 통용되는 경향이 있었지

만 양자가 구분되는 면 또한 여전하였다 吏는 官에 가까운 吏가 있고

民으로서의 吏가 있어 전자를 lsquo官吏rsquo라고 하면 孫休傳의 詔에서 거론된

吏家는 보통 吏民으로 합칭될 경우의 吏라고 할 수 있다 lt吳簡gt의

lt吏民簿gt나 lt戶口簿gt 등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실태에서 후한 말에

서 삼국기의 전형적인 職役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이제까지 그

존재에 대해 거의 간과되어 왔던 給吏에 대해 lt吳簡gt은 수십종의 給

吏 실태를 전해주고 있어 그 의의가 크다 吏의 사무 업무를 직접 勞

役으로 보조해주는 給吏는 관부의 행정 업무 처리에 있어서 항상 필요

한 노동력 제공자였다 이러한 노동력은 어느 시기이든 공통으로 필요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연원을 lt주례gt의 胥徒에서 찾아볼 수 있었

고 여러 면에서 職役의 실례로서 공통하는 면들을 지적할 수 있었다

후한 말 삼국시기의 吏와 給吏는 일반서민 신분으로서의 吏이며 吏戶

로써 관부에 예속되어 그 食口 성원이 거의 세습하여 吏役에 종사하

고 있다 이들은 일반서민에 비해 일반요역이 면제된다는 점을 제외하

면 그밖에 각 吏職에 따른 吏役의 기본 직무 외에 限田의 佃作 의무와

그 地租로서 限米 布 錢을 납부해야 하며 從軍해야 하는 등 중첩된

부역으로 일반서민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또한 그 戶品 이

下品 내지 下品之下에 속한 貧戶 출신이다 따라서 같이 吏로 칭하지

만 豪族勢家 출신으로 掾史職을 거쳐 상급관으로 진급하고 命官에 오

르는 累代 高族의 世家 출신 掾史와 빈천한 서민 출신으로서 관부에

예속된 吏戶 출신으로서의 掾史와는 구분된다 이 吏家 내지 吏戶는

吏의 칭호로 불리지만 일반민보다 더 많은 부담을 지고 있기에 그들의

役은 후한과 삼국기에 賤役 賤職 내지 厮役으로 칭해지며 기피되고 있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9다 따라서 이 계층이 官吏로 합칭되는 경우의 吏와 구분되는 것은 당

연하며 그 호칭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늦어도 孫休 시기의

문서와 간독자료에 등장하는 lsquo吏家rsquo나 lsquo吏戶rsquo는 이미 그러한 계층에 대

한 專稱으로 형성된 듯하다

한편 諸吏役의 복무에는 常勤의 방식과 1년에 1개월 내지 수개월만

輪番 형식으로 복무하는 비상근의 lsquo踐更 방식의 근무rsquo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한 비상근 복무자도 있었을 것이다107)그리고 그 복무에

대한 급여가 그 吏役을 생업으로 하는 常勤者에게는 당연히 小吏에 대

한 봉록이 지급되었을 것이다 반면에 給吏의 役은 일반요역에 대신하

는 복역이라는 면에서 비상근 내지 윤번 형식의 차출이었을 가능성이

많지만 지금까지 lt오간gt에 소개된 자료로는 어느 쪽이라 단정하기가

어렵다 胥徒의 役은 어디까지나 상급의 관원들과는 달리 일반민의 요

역 의무를 대신하여 관부에 給事하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lt오간gt

에서의 給吏와 상통한다 給吏에 대한 봉록 지급의 여부도 아직 不明

이다 단지 限田의 지급이 祿田과 같은 성격의 것이었을 가능성도 고

려되지만 그 租額이 커서 혜택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노동력의 징발로

서 해석되는 부분도 있다 또한 給吏의 관부에의 給事가 일반 요역과

같이 組別 순환제였는지의 여부는 아직 분명치 않다 lt奏讞書gt의 樂

人의 예와 같이 一月一更制와 같은 순환근무제였을 가능성도 있는데

대체로 두 가지 형태가 공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lt吳簡gt에 의거한 의론들은 아직 자료 해석과 해명이 충분치 못하여

불분명한 상태에 있는 사항들이 많은 실정이기 때문에 해당 사항이 새

로 규명 되는대로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lt오간gt의 미해명 사항

에 대한 개별적인 탐구도 본 과제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필요하다 그

리고 아직 소개되지 않은 대량의 lt오간gt이 연속하여 출간되면서 새로

운 자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107) 廣懶薰雄 앞의 秦漢律令硏究 pp310-311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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凌文超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mdash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型與功

能 (吳簡硏究 3 20116)孟彦弘 吳簡所見ldquo事rdquo臆說mdash從ldquo事rdquo到ldquo課rdquo (吳簡硏究 2 2006)孟彦弘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爲役之制 (魏晋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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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103

(中文摘要)

中國古代的職役與職官的問題

朴 健 柱

通過上述的檢討 基本上職役範疇內的多種身分 乃至階層與吏職之類

其服務形態至三國期的傳承與變化等方面已然解明 職官與職役服務者

的一般徭役均免除了 此二者中職役服務者 用種種lsquo吏職rsquo與lsquo給吏職rsquo服務來

代替其一般徭役 直至三國時期爲至漫長的期間內職役擔當者 庶民在官者

lsquo非吏而給事官府者rsquolsquo官與民之間者rsquolsquo半官半民rsquo的性格几乎共通維持

職役擔當者的淵源卽是lt周禮gt所見的官吏組織最下位的府史胥

徒 此中 府史是大略屬于後代掾史職或是lt吳簡gt的諸吏 胥徒則是相通于

給吏層的側面多的 但是lt吳簡gt所見多數的吏役下吏戶其過重的負擔與厮

役及貧賤的性格上 倒是與胥徒相通方面較多 這個時代的差異像是吏戶的

隸屬化及世襲化的進展招來的結果 一方面因爲時代的與件差異 胥徒與後

代的職役擔當階層間有多方面的異質 胥徒與給吏層基本上是一般庶民出

身的 服工事者 如此不同 從周至三國期間從 服工事者 上是同類而與一

般庶民相區分的多種相異的階層面上身分較多 例如 工商食官 所屬的工

商 皁隸食職 所包含的 吏所屬的徒隸 層以廣義的徒隸層可以稱謂的

皂隸牧圄僕輿人 以及下吏層所屬的樂祝醫衛士 及走

卒伍伯之類等 他們的出身是一般庶民 或是賤民乃至刑徒 在官府寄生

而給事的層面上是共通的

其服務形態是恒常的勤務 一時的勤務 組別交代制等以多種方式徵發乃

至差出 lsquo冗rsquo與lsquo更rsquo是其差異區分用的用語 支給勤務報酬與否是不分明之事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04項 可是至少生業官府依託者是被支給的 其支給方式是與年俸制相對的稍

食 卽少額的月俸乃至勤務日數基準的支給方式 因此他們的勤務和支給計

算主要是日單位或是月單位

於lt吳簡gt之lt吏民簿gtlt戶口簿gt等所見的吏與給吏的實態 可以看到

從後漢末至三國期間典型的職役的樣相 尤其向來看過給吏的存在 lt吳

簡gt所傳數十種給吏的實態 其意義是巨大 給吏是以直接的勞役補助吏的

事務業務 是官府的行政業務處理上恒常的必要勞動力提供者 這種勞動力

許是官府運營上至今爲至所有過的任何時期共通要緊事項 可以推斷給吏

的淵源於lt周禮gt的胥徒 而且可以指摘以職役的實例有多方面共通的層面

後漢末三國時期的吏與給吏是一般庶民身分之吏 以吏戶隸屬於官府 其食

口成員率多世襲地從事吏役 他們除比一般庶民免一般徭役外 也需要履行

各吏職別吏役的基本職務 佃作限田義務 以其地租納付限米布錢 從

軍義務等重疊的賦役 因此他們有比一般庶民更重的負擔 而且他們的戶品

是下品乃至下品之下所屬的貧戶出身 從而他們雖一樣稱謂lsquo吏rsquo 却與豪族

勢家出身經歷掾史職進級上級命官的累代高族的世家出身的掾史與以貧賤

的庶民出身於官府隸屬的吏戶出身的掾史是不同的階層 這個吏家乃至吏

戶雖被稱謂lsquo吏rsquo 但是彼役後漢三國期被稱謂賤役 賤職乃至厮役 而且被忌

避 從而此階層是與lsquo官吏rsquo合稱的境遇的lsquo吏rsquo爲區分是理所當然 其稱號也只

得相殊 于是最遲至少到於孫休時期文書與簡牘資料所見的lsquo吏家rsquo與lsquo吏戶rsquo

許是已經成爲如此階層的專稱

依照給吏的役是一般徭役代替的服役 其運營形態是非常勤乃至輪番形

式的可能性大的 但是迄今依據lt吳簡gt所見的資料還難以斷定何者是對的

胥徒的役是與上級官員異樣 以一般民的徭役義務代替給事於官府 本着那

樣的側面與lt吳簡gt所見的給吏相通 給給吏俸祿與否也還不明 但是從限

田的支給是與祿田同一的性格的可能性上看 因爲其租額是多的 與其說惠

澤倒是有可能解釋爲勞動力的徵發 給吏的官府給事是與一般徭役同一方

式的組別交代制與否還不分明 如lt奏讞書gt所見樂人的事例 有可能一月

一更制方式交代勤務制 筆者認爲大體上是兩個方式共存

關於lt吳簡gt資料的議論是因爲解釋與解明上許多異說 不分明的關聯事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105項也有很多 所以該事項的解明將其完備需要補完

주제어 직역 직관 서도 도예 이역 이호 급리 서민재관자

關鍵詞 職役 職官 胥徒 徒隸 吏役 吏戶 給吏 庶民在官者

Keywords lavor duty at office(official lavor) high-ranking officialrsquos duty(official

post) xu-tu tu-li minor officials lavor minor officials family minor half

officials and half the masses in lavor services at office the masses in lavor

services at office

(원고접수 2013년 11월 15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12월 16일 수

정원고 접수 12월 19일 게재 확정 12월 26일)

Page 8: AB C D - KNUwebbuild.knu.ac.kr/~china/CHR/chr2013/chr87pdf/chr87-02... · 2014. 1. 4. · FG9 ±°'c&`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2정되고 있다 漢唐의 주석가들이 庶人在官者 를 주례의 府史

胥徒에 해당시킨 해석은 그들이 살던 시기의 정황에 의거한 것이고

관련 자료들도 충분히 현전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인정될 수 있는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일찍이 曾我部精雄은 鄭注와 賈疏의 차이를 제시하길 鄭玄은

府와 史가 庶人在官者 에 들어가지만 胥와 徒는 그에 들지 못한다고

한 반면 賈公彦은 4者가 모두 그에 포함되는 것으로 본 차이가 있고

鄭注의 해석이 옳다고 하였다12) 그는 상기의 주례 胥十有二人徒

百有二十人 에 대한 鄭注에 이는 民이 徭役을 給한 것이니 지금의 衛

士와 같다(民给徭役者若今衛士矣) 라 하였고 賈疏도 이에 따르고

있는데 胥와 徒는 요역 의무에 복무하는 것인 까닭에 봉록이나 수당이

지급되지 않았고 官長으로부터 辟除 임용된 것도 아니었으며 육체노

동이었던 반면 官長으로부터 선발되어 辟除 임용된 府와 史는 관부의

정신노동에 복무하였기 때문에 다르다고 하였다13) 때문에 庶民在官

者 에 胥와 徒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曾我部精雄은 鄭注와 賈

疏의 그러한 입장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여러 조문을 열거하고 있지만

賈疏가 府史胥徒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나 그가

열거한 자료에서 鄭注가 胥徒를 배제하고 있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주

는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屬이라 함은 그 屬인 胥徒이다 (春

官 宗伯 典祀) 群吏는 府史 이하이다 (夏官 司馬 御僕)라고 해석한

부분에 의하면 胥徒도 屬吏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는 입장이었을 것 같

다 또 曾我部精雄이 胥徒는 給徭役의 의무로 복무하는 것인 까닭에

봉록이 지급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위의 경문에서 최하급의 田地이지

만 1백무의 祿田이 지급된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 주장도 어긋나게 된

다 庶民在官者 의 봉록 문제는 아래에서 다시 상론한다

여기서 주의할 사항은 鄭注와 賈疏가 모두 한에서의 사정에 입각하

12) 曾我部靜雄 中國往古の胥吏制度 (中國律令史の硏究 東京 1971) pp456

-8

13) 위의 글 pp456-7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3여 府史와는 달리 胥徒가 모두 요역 의무로 징발되어 복무하는 자들로

본 것이라는 점이다 이 府와 史의 직무에 대해 정현과 가공언은 주례 小宰 宰夫의 8職 가운데 다섯째 府는 契하여 藏을 治하고 여섯

째 史는 문서로 贊治(보좌관의 업무)함을 관장한다( 五曰府 掌官契以

治藏 六曰史掌官书以赞治 에 의거하여 府는 문서와 器物의 藏(보

관 관리)을 관장하고 史는 문서의 起草를 관장하는 직책으로 해석하

였다 이는 진한시기 각 관부의 屬吏 掾史의 庶務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lt雲夢秦律gt 秦律雜抄(p133)에 佐 史 이상인 吏가 짐을 지고

운반하는 馬와 문서 간수를 담당하는 私卒(隨從의 卒)을 부려서 장사

하도록 하여 이익(錢)을 취하였으면 모두 遷刑에 처한다 라 하였는데

lsquo문서 간수를 담당하는 私卒rsquo이란 佐史 이상 관리 직속의 下屬으로서

그 상관을 隨從하며 보좌하는 까닭에 私卒이라 한 것이고 家內의 私

卒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정리소조가 lsquo隨從의 士卒rsquo로 해석하였는데

문서 간수를 직분으로 하는 史에 下屬된 卒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

든 府史의 史 및 그 下屬의 인력이 전국진에서도 설치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周禮天官 宰夫에 기술된 宰夫8職에서 일곱째 胥는 그 업무가 掌

官叙以治叙 인데 鄭注는 治叙란 관부에서 次序함이니 마치 지금(漢에

서) 侍曹 伍伯이 관리의 朝會에서 傳言 報告하는 것과 같다 胥가 什

長이 된 경우도 또한 그러하다 까닭에 漢法의 사정을 든 것이다(如今

侍曹伍伯 傳吏朝也 胥爲什長亦然 故擧漢法况之也) 라 해석하였다

좀 난해한 설명인데 이를 부연 설명한 賈疏는 이미 才智가 있어 什

長이 되어 관부에서 次序의 업무에 當하니 반드시 사람을 使役하는 곳

에서 그 徒를 科次한다 까닭에 관부에서 次叙한다고 하였다 로 해석

한다 즉 보통 胥徒로 함께 칭해지는 胥는 徒 중에서 才智가 있어 什

長으로 선발된 층으로 관부의 次序 업무를 맡게 되는데 徒를 使役하는

곳에서 그들을 통솔하며 科役한다는 것이다 如今侍曹伍伯 傳吏朝也

도 난해한데 賈疏는 漢에서 侍曹에서 伍의 長인 伍伯(伍長)에 이르기

까지 吏朝(관리의 朝會)에서 群吏가 諸官의 사무를 보고하여 傳하는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4것으로 해석하였다14)즉 侍曹에서 최말단의 부서 단위에 이르기까지

담당 부서의 朝會 때 각 하급 단위의 長이 업무 보고를 하는 것이다

그런대 이 伍伯은 5인조의 長이 아니고 漢의 執金吾의 속관에 (持戟)

五百(伍伯)二十人 이 있고 이 lsquo伍rsquo의 義를 lsquo當rsquo으로 lsquo伯rsquo의 義를 lsquo道rsquo로

해석하여 앞에서 導引하며 길을 驅除 정리하는 吏라고 한 韋召의 해석

이나15) 司隸校尉의 속관으로 先導隊나16) 門番의 임무를 하고 있는 사

례에17) 의하면 하급의 賤職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후한에 伍伯이

자주 보이는데 모두 走卒 鈴下와 連稱되거나 병렬되어 있어 일찍이 好

並隆司는 走卒은 伍伯이라고 하는 職役에 類한다 고 하여(후술) 모두

관부 말단의 職役 내지 賤職이라 하였다18) 凍國棟은 漢唐間의 伍伯이

微賤의 役이였지만 그 職의 성격상 권세를 빌려 남의 생사를 좌우하

고 謝禮錢을 챙길 수 있는 자리였다고 하였다19) 따라서 여기서는 吏

朝에 참석하는 최말단의 吏員으로서 先導 門番 등 役에 복무하는 伍伯

을 기술한 것이라 하겠다 胥徒는 곧 伍伯과 같이 관리의 최말단 수종

원이면서 그 손발 내지 爪牙의 기능도 하는 층이다 이러한 류의 최하

급 단위의 長은 什長이고 胥는 곧 그 什長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주례에서 각 관부의 徒는 그 員數가 거의 대부분 胥의 10배수이다 그

리고 관부의 次序 업무란 담당 단위의 胥가 그 소속 성원의 질서를 유

지하며 아울러 요역 징발된 民의 徒를 지휘 통제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후술)

이어 여덟째 徒는 그 업무가 官의 令으로써 徵令을 관장함(掌官令

14) lsquo如今侍曹五伯传吏朝也rsquo者漢時五人爲伍 伯 長也 是五人之長 言傳吏朝者

傳在朝群吏諸官事務於朝也

15) 후한서 宦者列傳 曹節條의 注에 韋召辯釋名曰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伍 當也 伯 道也

使之導引 當道陌中 以驅除也

16) 續漢書 輿服志上에 公卿以下至縣三百石導從 置門下五吏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車前伍伯 公

八人 中二千石 二千石 六百石 皆四人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17) 謝承後漢書에 華松家孤微 其母夜夢兩伍伯夾門 言司隸在此

18) 好並隆司 漢代下層庶人の存在形態(一) (史學雜誌 82-1 1973) pp17-1919) 凍國棟 漢唐間lsquo伍伯rsquo淺識 (中國中古經濟與社會史論考 湖北敎育出版社

2005) pp25-35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5以徵令) 인데 얼핏 徒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내용인 듯하다 정현은

이 lsquo徵令rsquo의 업무를 趨走給召呼 라 하였다 賈疏는 그 徒가 朝會에서

뛰어다니는 것을 금지시키고 官人에게 복역자를 공급하고 그들을 호

령하며 사역시키는 일이다(其徒止爲在朝趨走 供給官人召呼使役之事也)

고 해석하였다 관부 내에서 많은 복역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까닭에

그들이 소란 피우지 못하게 질서를 잡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서 徒에 의해 징발되고 사역되는 층은 관부에 복역 중인 刑徒 요역에

복무 중인 일반 서민 등일 것이다 주례의 각 관부에서 徒의 수는

수십 명에서 수백 명 많은 경우 8백명에 이르기도 한다 이들의 노동

력은 각 관부별로 항상적으로 갖추어진 것이지만 이 보다 더 많은 노

동력이 필요하여 형도나 일반 요역 복무자들을 징발하게 된다 그리고

그 징발된 노동력을 호령하며 질서를 잡고 사역시키는 직무도 필요하

게 된다 물론 징발된 자들을 사역시키는 일 뿐 아니라 자신들이 직

접 여러 노역의 所管 업무에 복무해야 한다 이를테면 地官 牛人에

胥二十人 徒二百人 이 있고 그 직책은 公牛의 사육이며 稻人에 胥

十人 徒百人 인데 그 직책이 稻田의 경작이고 夏官 虎贲氏에 胥八十

人虎士八百人 인데 鄭注에 의하면 徒라 하지 아니하고 虎士라 한 것

은 徒 가운데 勇力者로 선발된 까닭이다 하였으며 그 일부 직무에 同

司甲 司戈盾 司弓矢 繕人 校人 趣馬 巫馬 등에 속한 수십

명 내외의 徒는 모두 무기제조나 다루는 법 무기 성능 감별 馬의 감

별 養馬기술 馬祖 馬步 등의 神을 통해 馬의 질병을 파악하는 巫術

등에 뛰어난 상급자들 밑에서 보조 지원의 일 등 말단의 업무를 처리

한다 전문 기술과 지능이 필요한 업무인지라 말단의 업무 처리도 상

당히 명민한 자질이 필요하다 따라서 일반 서민 가운데서 이러한 재

능과 자질이 있는 자로 충원한다 이러한 각 관부의 업무 처리는 후대

에도 익히 보이는 사례이다 鄭玄은 胥를 lsquo諝(智者)ldquo로 읽어 才知의 뜻

으로 해석하였는데 같은 徒의 무리 중에서 才知者로 뽑힌 자라는 뜻으

로 보았다 胥가 什長인 까닭에 10인 가운데 1인 비율로 뽑힌 셈이다

아울러 徒 전체가 일반 서민으로부터 뽑힌 자들이라 할 수 있다 단지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6胥徒의 신분상 복무형태상의 제반 사항이 후대에 그에 상당하거나 유

사한 신분층과 사례에 대비할 때 상당히 다른 면이 많다는 사실이다

趙伯雄은 주례의 胥徒는 전국기까지 노예 厮 童보다 윗 등급이지만

거의 비슷한 신분이었고 厮役 내지 賤役의 담당층이었으며 徒가 한에

서는 주로 刑徒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고 하였으나20) 아래

기술하는 내용에 의하면 그러한 해석에 따를 수 없는 면이 많다 또한

한에서 徒는 형도 뿐 아니라 여러 무리를 가리키는데 통용되고 있어

여러 자료에 등장하는 徒가 가리키는 사항은 무척 다양하다

위의 注疏에 의하면 經文에서 徒의 업무를 官의 令으로써 徵令을

관장함(掌官令以徵令) 이라 한 것은 上部의 지시를 받은 徒가 새로

징발되는 徒의 징발 업무 및 이들을 인솔 지휘 사역하며 그 지시사항

(작업)을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胥와 徒가 모두 庶民在官者 라는 입

장에서 보면 徒가 최하위이지만 lsquo在官者rsquo이고 제8위와 제9위의 서열에

있으며 胥와 徒가 각각 6인과 5인이 食할 수 있는 토질의 경지 百畝

를 代耕의 봉록으로 받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이 출신은 징발된 요

역 복무자와 같다고 하더라도 여타의 징발된 일반 요역 복무자와는 구

분되는 계층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후대의 胥吏도 일반 서민출신이지

만 일반 서민과 다른 계층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 같다 만약 曾我部精

雄의 견해와 같이 府와 史까지만 庶民在官者 이고 胥와 徒는 그에

들지 못하는 것이라 한다면 주례 원문에 胥와 徒가 엄연히 제8위와

제9위에 올라 있고 봉록으로써 百畝를 받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기 어

렵게 된다

그리고 특별히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앞에 인용한 鄭注에 이는(胥

와 徒는) 民이 徭役을 給한 것이니 지금의 衛士와 같다 고 한 점이다

그래서 후한 중후기 衛士의 운영 형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또 鄭

玄은 駁五經異義에서 周禮에서 이른바 모두 징발한다 한 것은 胥

徒로 하여금 公家의 事에 給하게 한 것을 말함이니 지금의 正衛와 같

20) 趙伯雄 lt周禮gt胥徒考 (中國史硏究 2000-4) pp10-12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7다 고21) 하였다 한에서 궁성 내지 중도관에 番上 守衛하는 役은 正卒

의 役과 일반 更卒의 役이 있는데 鄭玄이 특별히 正衛라 한 것은 正卒

로서의 役임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의 요역 운영체제에서

衛士가 上番하는 役은 한구의에 民의 나이 23세가 되면 正이 되고

1년간 衛士 1년간 材官 騎士에 복무하며 활쏘기 말달리기 戰陣을 익

힌다(民年二十三爲正 一歲以爲衛士 一歲爲材官騎士 習射御騎馳戰陣)

라 한 것에 의하면 正卒이 그 복역 대상자이고22) 각 군 단위로 1년씩

21) 禮記王制 五十不從力征middotmiddotmiddot 의 條 孔穎達疏引 周禮所謂皆征之者 使爲胥

徒 給公家之事 如今之正衛耳

22) 漢의 正과 正卒 및 상비군의 문제에 대해서는 종래 여러 이견이 있다

正을 正卒로 보고 正卒이란 更卒(小繇)의 對稱으로서 병역의무자이고 재관

기사 위사등이 곧 정졸이라는 설이 가장 많이 받아드려지고 있다(濱口重國

秦漢時代の繇役勞働に關する一問題 秦漢隋唐史の硏究』上卷 東京 1966

1980 勞幹 漢代兵制及漢簡中的兵制 歷史語言硏究所集刊 10 1948 山田

勝芳 後漢時代の繇役と兵役 歷史 66 19869)正卒은 앞의 설과 같지만 正은 23세에서 56세 사이의 남자 즉 正丁 을 가리

킨다는 설(西村元佑 漢代の繇役制度 東洋史硏究 12-5 1953)正卒과 更卒이 별개인이 아니라 동일인이고 更卒은 正卒이 된 이외의 해에

매년 1개월의 역역에 복무하는 자를 가리키며 正은 23세-55세까지의 正丁인

데 正卒은 그 가운데 2년간 衛士 材官 騎士 등의 實役에 복역하는 것이라는

설(西田太一郞 漢の正卒について 東洋の文化と社會1 東京 1955)

材官 騎士등이 일반민에서 材力 있는 자로 선발되어 군국에서 常駐하는 전

문병사로서 직업군인인 lsquo士rsquo인데 대해 正卒은 일반민이 23세에 1년간 병졸로서

근무하고 1년간 衛士로 長安에 上番한다는 설 즉 正卒은 직업군인인 材官 騎

士와는 兵役體系上 別個의 것으로서 일반민의 병역 복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는 설(大庭脩 材官攷 -漢代の兵制の一班について 龍谷史壇 36 1953)正卒이란 23세에 이른 자 가운데서 신체강건한 자를 뽑아 衛士 材官 騎士

樓船 등의 어느 한 兵種에 복무하게 한 것이라는 설(濱口重國 勞幹 西村元佑

山田勝芳 앞의 논문 平中苓次 漢代の官吏の家族の復除と軍賦の負擔 中國

古代の田制と稅法 京都 1967) 諸說의 대부분은 이 견해를 공통적으로 취하

고 있다

秦漢에서는 始傅에서 免老까지의 모든 남자가 병역의무를 지는데 正卒은 그

適齡남자를 統稱하는 말이며 따라서 郡兵이나 衛士 戍卒은 正卒의 일부분이라

는 설(臧知非 秦漢lsquo正卒rsquo辨釋 中國史硏究 1988-1)正이란 傅籍된 待役者(兵役과 力役 포함)를 말하며 正卒은 어떤 특정의 役

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고 正(待役者)과 卒(服役中에 있는 正)로 구분되어 있

는 말이며 秦漢代에 병역 복무는 일부 병역신분에게 만 부과된 것이어서 나머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8조별 순번으로 상경하여 복역한다 正卒은 일반 更卒 중에서 신체강건

용맹 등으로 선발된 자들로 상비군 내지 직업군인의 성격이 강한 집단

이다 즉 그들은 일반민(서인)이면서도 그 중에서 선발되어 군사로써

免老에 이르기까지 복무하는 까닭에 일반민과는 다르다 胥徒 또한 서

인이면서 관부에 복무하는 까닭에 일반민과는 다르다 衛士는 특히 평

시에 도성(중도관)을 수비하기 때문에 관부에 거처하게 되고 胥徒 또

한 관부에서 직접 給事하는 까닭에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면에서 鄭玄

은 양자를 같은 성격의 계층으로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衛士가 일반

민에서 선발된 자들이고 胥는 徒 중에서 才智로 선발되고 徒는 분명

치는 않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일반 民庶 가운데 담당 직무 수행에 어

느 정도 자질을 갖춘 자로 선발된 자들일 가능성이 크다 또 漢書권74魏相傳의 顔注에 京師의 여러 관부에 와서 戍卒이 되는데 지금의

衛士가 上番하여 여러 官司에 나누어져 복무하는 것과 같다 라23) 한

것에 의하면 衛士의 이러한 복역 모습은 각 官司에 배치된 胥徒의 복

역 형태와 같다 전한 京師에서 복무중인 衛士의 수는 景帝末傾에 매

지 일반 白徒는 병역에 복역하지 않는다는 설(孫言誠 秦漢的繇役和兵役 中國史硏究 19873 및 ldquo爲正一歲rdquo辨 文史 31 198811)濱口說과 같이 正을 正卒의 略稱으로 보지만 濱口씨가 正卒을 일반적인 兵

士로 본 것과는 달리 庶民 중에서 일부가 선발되어 兵士(材官 騎士 등)가 된

것이며 이들은 일반서민과는 상대적으로 구별되는 신분 말하자면 獨自의 兵

士身分 으로서 일반서민과 같은 역역(更卒) 의무가 없었고 일반서민과는 다른

부담체계하에 있었다는 설(重近啓樹 秦漢の兵制について -地方軍を中心とし

て- 人文論集(靜岡大學) 36 1985)正卒은 일반민이 20세로 부터 2년간 복무하는 것이며 材官 騎士는 이와는

달리 전문병사로서 23세에서 56세까지 복무하는 것이라는 설(藤田勝久 前漢

の繇役勞動とその運營形態 中國史硏究 8 1984)한편 李成珪는 材官 騎士는 卒에서 징발된 전문 병사였고 1년 복역 후에도

예비역으로 분류 비상시 동원되었지만 (軍)吏나 士에 속하지 않는 자들로서

力役 복역의 한 형태인데 董仲舒가 말한 lsquo一歲力役rsquo은 바로 郡卒로 1년 복무하

는 材官 騎士의 役을 말한 것이라 한다(이성규 前漢 更卒의 徵集과 服役 方

式 -松栢木牘 47호의 분석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09 200912

pp33-34)

23) 來京師諸官府爲戍卒 若今衛士上番分諸司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9년 2만인 武帝 즉위 후 1만인으로 감하고 얼마 후 5천인을 늘려 武帝

후기에는 1만5천이었을 것으로 보인다24) 또 1개 군에서 番上하는 수

가 數千에서 2~3천인이었던 사례가 있다25) 전한 말 成帝 시기의 사

정을 말해주는 尹灣漢簡의 lt東海郡下轄長吏不在署 未到官者名籍gt

에 군현 밖으로 外勤出張 중에 있는 長吏의 현황표에 費長孫敞 十月

五日送衛士 가 있는데26) 費邑의 長 孫敞이 衛士를 送하는 업무로 출

장하여 아직 귀환하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동해군 下轄의 縣(18)邑

(2)侯國(18) 38곳(lt集簿gt) 가운데 오직 費邑에서만 衛士가 上番되고

있다 이에 의하면 衛士의 상번은 각 군에서 縣級 단위로 교대 상번하

는 것으로 보인다 濱口重國은 후한에서 正卒의 군현상비군이 폐지되

었지만 전한에서와 마찬가지로 매년 연말에 1년의 복무가 끝나고 귀향

하는 衛士들에게 황제가 향연을 베푸는 饗遣故衛士儀가 행해지고 있는

사례를 들어 衛士의 上番은 후한에서도 행해지고 있음을 지적한 바가

있다27) 아울러 그는 군현 상비군 폐지 후 중앙의 衛士 부대가 2500

내지 2600명인데 이는 중앙 인근 지역에 한정하여 징발된 자들로 보

아야 한다고 하였다28) 후한 周禮注에서 鄭玄(127-200)의 衛士 인용

이 전한시기의 사정에 의거한 것인지 아니면 그의 활동시기인 후한 후

기의 사정에 의거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후한 중 후기에도 衛士의

上番制가 부분적으로나마 유지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4) 濱口重國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隋唐史の硏究』上卷 東京

1966 1980) p286 注2)

25) 「上臨饗罷衛卒 衛卒數千middotmiddotmiddot」 (漢書 권77 蓋寬饒傳) 「河南卒戍中都官者二三

千人middotmiddotmiddot」 (漢書 권74 魏相傳)

26) 張顯成 周羣麗 尹灣漢墓簡牘校理(上篇) (天津古籍出版社 2011 3) p32

27) 濱口重國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隋唐史の硏究 (上)) p283

28) 濱口重國 위의 글 pp284-285 그 주된 근거는 속한서 백관지3 尙書條에

蔡質漢儀曰 ldquo右丞與僕射對掌授廩假錢穀 與左丞無所不統 凡中宮漏夜盡 鼓鳴

則起 鍾鳴則息 衛士甲乙徼相傳 甲夜畢 傳乙夜 相傳盡五更 衛士傳言五更 未

明三刻後 雞鳴 衛士踵丞郎趨嚴上臺 不畜宮中雞 汝南出雞鳴 衛士候朱爵門外

專傳雞鳴於宮中rdquo 應劭曰 ldquo楚歌 今雞鳴歌也rdquo 晉太康地道記曰 ldquo後漢固

始鮦陽公安細陽四縣衛士 習此曲於闕下歌之 今雞鳴是也rdquo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0中都官의 몇 몇 部署에 給事하는 衛士의 員數 규정이 있는데 속한

서 백관2 注引 漢官의 光祿勳에 81인 太宰令에 15인 高廟令에 15

인 世祖廟令에 20인 衛尉에 60인 南宮衛士令에 537인 北宮衛士令에

471인 右都候에 416인 左都候에 383인 南宮南屯司馬에 102인 (北)宮

門蒼龍司馬에 40인 玄武司馬에 38인 北屯司馬에 38인 北宮朱爵司馬

에 124인 東明司馬에 180인 朔平司馬에 117인의 衛士가 소속되어 있

다 이는 후한의 사정을 기록한 것인데 그 총합이 2637인이다 전한에

비해 그 員數가 급감한 것은 광무제의 부역 경감정책과에 의한 것이라

하겠고29) 소수지만 그 員數가 규정되어 있다는 것은 후한에서 代役制

내지 雇傭制로 대체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전과 같은 上番制가

시행되었음을 말해준다 후한에서 正卒 및 군현의 상비군제가 온전히

사라진 것이 아닌 것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후한의 2637명의

員數는 전한에 비해 대략 15 정도 되는데 전한의 사정을 기준으로 한

다 하더라도 군현의 正卒은 평생 1회만 당번이 되어 上番하더라도 중

도관의 衛士 給事가 충분히 운영될 수 있다 위의 lt윤만한간gt에서 전

체 38현읍후국 가운데 그 해에 費邑의 正卒 만이 상번하고 있고 당시

郡別로 상번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동해군이 매년 상번의 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각 正卒은 38년에 1회만 상번하면 된다 물론 군별 현

읍후국의 수가 다르기 때문에 그 回次의 수도 다르고 현읍후국별 正

卒의 수에 따라 1개 이상의 현읍후국이 함께 동원된 경우도 충분히 있

을 수 있다 그러나 각 군의 현읍후국 수가 보통 20개는 넘는다 게다

가 費邑의 正卒도 몇 개 조로 나뉘어 순차로 상번하는 것이라던가 각

郡도 매년 상번이 아니라 몇 년 만에 순번이 돌아오는 체제라면 각 正

卒의 중도관 衛士 복무는 아무리 많아도 일생에 1회를 넘기 어렵다

앞에 든 漢舊儀의 民年二十三爲正 一歲以爲衛士 는 곧 그러한 사

정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일생 1회의 복무형태는 胥徒의

29) 濱口重國은 광무제의 경감책과 아울러 虎賁 羽林 羽林左右騎 五校尉의 軍이

警備에 추가되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위의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

隋唐史の硏究(上)) p283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1평생 내지 세습되는 면과(후술) 다르지만 일반의 役 대상자에서 선발

되어 중도관에 給事한다는 면에서는 공통이다 그런데 전한에서 lsquo父死

子代rsquo였던 중앙군은 羽林孤兒 뿐이었지만 후한에서 虎賁 羽林 羽林左

右騎 五營士의 중앙군에까지 확대되었다고 한 濱口重國의 지적이 있

다 그에 의하면 후한에서 중앙군단의 세습화와 함께 바로 지방에 特

設된 군단의 세습화도 이루어지면서 魏晋시기 兵民分離의 前段을 이루

게 되었다고 한다30)후한 후기 특히 羌의 侵寇 이후 郡에 都尉를 설치

하고 全民을 징병대상으로 삼아 상비의 郡兵을 다시 설치하고 있으

며31) 여러 출신 성원을 규합한 병단이 私屬이 되기도 하고 국가의 군

단이 되기도 하며 部曲 내지 그와 같은 류의 세습 병단화 하는 과정

에 대해서는 필자도 일견을 피력한 바 있다32)따라서 징병제에 의한

正卒의 상비군 운영이 폐지된 이후 15 수준으로 급감한 정졸의 衛士

가 上番하고 있었지만 이 군단 또한 후한 중기 이후 전란시기가 되면

서 世兵化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胥徒의 세습과 후한 후기에

활동하였던 鄭玄 당시 衛士의 세습화는 일치하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鄭玄이 말한 衛士는 한초의 사정이 아니라 그가 활동하였던 후한 후기

의 사정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鄭玄이 漢의 衛士 上番制에 의거하여 주례의 胥徒制를 해석한 것

은 양자의 해명에 큰 도움을 준다 상술한 바에 의하면 몇 가지 면에

서 양자가 일치하는 점이 대체로 인정된 셈이지만 胥徒가 거의 모든

관부에 설치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漢代의 衛士는 광록훈이나 衛尉

제사 守陵등 일부 한정된 관부에 설치되어 있다 또한 주례의 胥徒

가 士 이상의 신분과 마찬가지로 代耕의 봉록으로써 농지를 받고 있는

봉록자라는 면은 지방에서 상경하여 1년의 기간만 한시적으로 복무하

는 衛士의 경우와는 자못 어울리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衛

士는 上番者로 충당되지만 일단 관부별로 員數가 규정된 員吏로서 복

30) 濱口重國 앞의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p285

31) 濱口重國 光武帝の軍備縮小とその影響 (秦漢隋唐史の硏究(上)) p30832) 박건주 한대의 지방 상비군과 部曲의 推移 (동양사학연구 118 20123)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2무하게 되기 때문에 일부는 胥徒처럼 員吏로서 수년 이상을 관부에 居

하는 어느 정도 전문화 한 衛士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鄭玄의 활

동 시기와 큰 차이가 없는 lt長沙走馬樓吳簡(이하 lt吳簡gt으로 약칭)gt

領二年四家衛士田漆十五畝 畝收限米二斛 合爲吳平斛米一百五十斛

(5-1669)에 의하면 4家의 衛士가 限田75畝 佃作에 대한 租로 畝當 限

米2斛을 납부하고 있다 lt오간gt의 限田에 대해 여러 異說이 있지만

(후술) 그 佃作者와 限米 납부자의 계층에 수십 종의 吏員들이 포함되

어 있는 것에 의하면(후술) 衛士도 그러한 吏員으로서 限田이 지급된

것으로 보인다 단지 限田을 佃作케 한 것이 吏員에 대한 경작의 부과

(경작 노동력의 징발)를 뜻하는 것인지 혜택의 수여를 뜻하는 것인지

는 아직 분명치 않지만 于振波의 분석과 같이 畝當 限米2斛의 징수는

대단히 과중한 액수인 까닭에33) 受惠라기 보다는 경작 노동력의 징발

내지 課役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祿田의 의미로 보기

어렵지만 당시 吏職의 賤役化 현상을 고려하면 그러한 시대적 여건 하

에서 實益이 거의 없는 祿田으로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어쨌

든 후한말 이래 小吏 내지 吏戶와 병사층의 세습화 진전을 고려한다면

어떠한 방식이든 그 가족의 생계를 위한 봉록의 지급이 있었을 가능성

이 더욱 커진다

이상에서 검토한 몇 가지 면에서 보면 府史와 胥徒 중에 후자 만

lsquo給徭役rsquo에 의거한 복무라는 점 등에서 다른 계층이지만 庶民在官者

로서 함께 칭해질 수 있는 층이었다고 본다 무엇보다 胥徒가 각각 제

8위와 제9위의 在官者 서열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동시에 府史는 모두 官長으로부터 선발되고 辟除 임용된 자들인데 비

해 胥徒는 일반의 요역의무를 대체하여 官에서 給事中인 계층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胥徒가 lsquo在官者rsquo로 칭해지는 이유는 관부 내에 거

처하면서 노동을 통하여 잡다한 庶事를 직접 처리하고 있으며 국가로

33) 于振波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中國社會科學院硏究生員學報 2004

-1) p122 限米 납부액의 과중성에 의거해서 限米 납부자는 屯田노동자 限米

는 屯田의 租稅라고 본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3부터 代耕의 祿田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관부의 제반 업무는 각 업무

分司 말단에 속한 胥徒의 노역에 의해 완수될 수 있다 이들은 노역

징발 대상자인 徒 중에서 재능 등의 명목으로 선발된 자들이고 그 중

에서도 才智가 있는 자가 胥이다 이들은 선임자 내지 연장자의 지휘

감독 아래 각 관서의 노역 업무와 勞役者 징발 업무 등으로 奉公한다

이것이 胥徒의 在官者로서의 職事이다 胥徒의 職事는 어디까지나 노

동이 전제되는 勞役이며 일반민의 요역의무에 대신하여 관부의 職에

給事하는 까닭에 職役이라 할 수 있고 官長의 선발로 辟除된 府史는

정식의 官員으로서 奉公하는 것이고 給徭役 에 대신하여 복무하는

것이 아닌 까닭에 胥徒의 職役과 구분하여 그 職을 職官이라 할 수 있

다 그 上級인 命官도 물론 職官이다 職官의 기본 요건은 그 官職에

任職인 상태가 그대로 王命을 받들어 奉公 중인 것을 뜻하는 까닭에

이미 王命을 수행중인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체로 일반 서민

의 기본 요역에서 면제된다 단지 면제의 세부 규정에 의하면 役의 종

류와 신분의 차등에 따라 그 면제 대상의 범위가 구분된다 한편 전쟁

에 참전하는 의무는 면제되지 않는다 모든 官吏는 유사시 종군해야

한다 官人이 본래 戰士層인 國人 출신에서 나온 때문이다 일반 서민

은 매년 일정 기간 동안 만 국가의 命을 받아 노역에 징발되어 복역하

는 까닭에 그 생업은 징발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시적인 노역이 아니라

그들이 부여받은 職인 恒常의 耕作奉公에 있다 職官은 그 복무를 통

해 생활이 영위되지만 일반 서민이 징발되어 이행하는 노역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無償이다

官職앞에 인용한 宰夫8職에 대한 賈疏의 끝 부분에 周禮 위 아래

의 글에 胥가 있으면 반드시 徒가 있는 것은 胥가 什長인 까닭이다

鱉人과 臘人의 類는 徒만 있고 胥가 없는 것은 徒만 있으면 충분하여

지휘자(長師)를 둘(빌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食醫의 類에는 胥徒가

모두 없는 것은 그 官만의 行事(업무처리)로도 충분하여 胥徒의 도움

을 빌리지 않는 까닭이다 고34) 하였는데 胥와 徒가 모두 설치되지 않

은 部署는 그 官만의 업무처리만으로 충분한 까닭이라 하였으니 바로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4府史까지의 屬吏를 官으로 한정한 것이다 즉 胥徒는 官에서 복무하고

있지만 官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庶民이고 庶民在官者 이며 그들의

복무는 職官이 아니고 職役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들도 그 職役으

로 생업을 유지하는 까닭에 職官과 동일성을 지닌다 주례에 의하는

한 胥徒가 일시적으로 복무하는 형태는 아닌 듯 하다 무엇보다도 그

들에게 祿田이 지급되고 있기 때문에 매년 혹은 매월 교체되는 요역

형태의 근무는 아닐 것이다 또한 각 분야별로 상당한 전문 지식과 숙

련도가 요구되는 업무 처리상 단기간 교체되는 근무형태를 취하였을

것 같지도 않다

이렇게 볼 때 胥徒가 官에서 일반 관리와 마찬가지로 계속적으로 근

무하면서도 그 근무를 lsquo給徭役rsquo의 代替로 본 주석이 옳다면 아무래도

胥徒는 신분제사회에서 官이 될 수 없는 자 또는 現任의 官과는 엄밀

히 구분되는 신분이었던 까닭에 그 직무 또한 (일반 서민의) 노역의

의미로 인지되고 평가된 것이 아닐까 한다 漢代사회의 신분구조는 漢

家의 주인인 天子가 그의 家人인 일반 民庶를 직접 장악하는 구조가

있고 동시에 漢家로부터 독립된 개별의 士族이 각각 lsquo家rsquo의 주인으로

서 천자와 主客의 관계가 아직 유지되는 체제가 병존하는 二元의 구조

로 되어 있다고 본 濱口重國의 견해가 있다35)이러한 입장을 발전시켜

漢帝國은 황제가 인민을 인두적으로 지배하는 lsquo齊民制rsquo와 천자가 lsquo家rsquo를

非人頭的으로 지배하는 家父長制的 관계로서의 lsquo家産制rsquo라는 이중구조

로 되어 있다고 본 好並隆司의 견해도 있다36) 그리고 이러한 이중성

의 사회구조를 公과 私 君臣관계의 면에서 진전시킨 尾形 勇은 그 臣

이 되는 층을 仕宦者와 從役者로 나누고 있다37) 위의 설들은 모두 한

34) 周禮 上下文有胥必有徒胥爲什長故也 鳖人腊人之類空有徒無胥

者得徒则足不假長師故也 食醫之類胥徒并無者以其專官行事不假胥徒

35) 濱口重國 唐王朝の賤人制度 主篇 第六章 第二節 (東洋史硏究會 1966)

36) 好並隆司 前漢帝國の二重構造と時代規定 (歷史學硏究 375 秦漢帝國史

硏究 東京 1978에 재수록)

37) 尾形 勇 漢代における 家人 と君臣關係 (史學雜誌 83-4 1974) pp3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5대의 사정을 말한 것이지만 이러한 이중구조의 신분제 내지 사회구조

는 주례의 관부 구성 체제에 의하면 상위에서 下士 내지 府史까지가

仕宦者에 해당하고 胥徒를 후자 즉 從役者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연원은 이미 周代에 있다 士人 내지 仕宦者는

그 직무로써 奉公하고 從役者는 賦稅役의 부담으로써 奉公한다38)胥徒

가 비록 官에 있는 자이지만 二元구조의 신분제 하에서 士人이 되지

못한 가운데 그 직무는 職官이 되지 못하고 職役에 머무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Ⅲ 職役 담당층의 복무 형태와 봉록 지급의

문제

周代에 lsquo給徭役rsquo의 차원에서 관부에 給事하는 胥徒가 있었다면 후대

의 요역 가운데도 그러한 항목이나 사례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다 또한 胥徒의 직무는 續漢書 輿服志上에 보이는 伍伯辟車

鈴下侍閣門蘭部署街里走卒 등 관부 말단에서 경호導從심

부름侍衛車馬관리 巡邏 등의 賤職에 종사하는 이른바 徒卒의 職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그런데 이들의 役이 民의 일반 요역 의무에 따

라 징발되어 일시적으로 복역하는 것인지 아니면 상술한 胥徒와 같이

庶民在官者 로서 관부의 최말단에서 상시로 근무하며 관부에 의지하

여 생업을 유지하는 下吏로서의 복무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후한서권58 虞詡傳에 永平(후한 明帝期) 章和(章帝期) 중에 州郡이 走卒錢으

로 貧人을 給貸(雇賃金을 지급)하였다 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集解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35

38) 尾形 勇 위의 글 pp28-29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6走卒伍伯之類란 續漢志에 이른다

(車前에) 伍伯은 公은 8인中二千石은 6인千石과 六百石은 모두 4인百石

이하에서 二百石은 모두 2인을 둔다 黃綬(4백석에서 2백석의 관리)의 武官에

는 伍伯을 따르게 하고 文官에는 辟車鈴下侍閤門闌部署街(里)走卒

을 따르게 하는데 모두 程品의 多少가 있으며 맡은 바 직무에 따라 領率하게

한다 (驛馬는 30里에 하나를 설치한다) (卒은) 모두 적색 두건과 진홍색 소창

옷을 착용한다

즉 지금 鞭杖을 잡고 따르는 자들이다 이는 錢이 있는 자로 하여금 그 (役

에) 대한 資錢을 내게 하여 몸으로 직접 노역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39)

〔 ( ) 내의 글은 결락된 부분을 輿服志 원문에서 보완함〕

인용된 속한지輿服志의 기사는 公卿 以下 縣의 三百石 官長에 이르

기까지 이들을 導從하는 下吏들의 配屬 員數를 규정한 것이다 열거된

役職들은 모두 300석 이상 관원을 導從하는 役員들인데 후한 明帝 章

帝期에 일부 지역에서 이 役職의 명목으로 走卒錢을 징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記事는 順帝 연간에 尙書僕射 虞詡가 上言한 것인데 당시

長吏 2천석관들이 謫罰者에게 貧人 구호를 위한 lsquo義錢rsquo의 명목으로 贖

錢을 강요하고 守令은 이를 빌미로 聚斂함에 順帝 원년 이래 백만전

이상을 受取한 長吏가 끊이지 않고 있는 사정을 진언한 가운데 그 이

전 永平 章和 연간에 있었던 사실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즉 州郡에

서 走卒錢을 징수하여 그 역을 면제시켜주고 대신 빈궁한 자를 그

役에 고용하여 그 錢을 雇賃으로 지급해주는 일이 있었다 당시 司空

이 이 事案을 탄핵하니 해당 州郡縣이 모두 坐되어 免黜되었었다 그

때의 전례와 마찬가지로 당시 임시로 사용하였던 제도(走卒錢 징수와

雇賃 지불)를 蠲制할 것을( 蠲制權制 ) 주청하였고 이에 조서를 내려

州郡을 切責함으로써 그러한 贖錢 강요가 이로부터 그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40) 따라서 走卒錢 징수와 導從役의 雇傭 방식 운영은 후한

39) ldquo卽今行鞭杖者也 此言錢者令其出資錢 不役其身也 走卒伍伯之類也 續漢

志曰 (車前)伍伯 公八人中二千石六人千石六百石皆四人自百石以下至二

百石皆二人 黃綬 武官 伍伯 文官 辟車鈴下侍閤門闌部署街

(里)走卒 皆有程品多少 隨所典領率 (驛馬三十里一置 卒)皆赤幘絳褠 卽

今行鞭杖者也 此言錢者令其出資錢 不役其身也

40) 후한서 권58 虞詡傳에 是時長吏二千石聽百姓謫罰者輸贖 號為lsquo義錢rsquo 託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7明帝 章帝期에 한정되어 시행된 것으로 모두 不法이었고 虞詡의 順帝

시기에는 시행되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渡邊信一郞에

의하면 이들은 秦漢에서 관부의 최하층으로서 관부에서 필요로 하는

導從役 등 일상적인 노역에 복무하며 民으로부터 강제 징발되어 복무

하였는데 후한 초에 이미 走卒錢이 징수되고 특정 임무는 면역전을

재원으로 한 고용노동으로 전환되었다고 한다41) 그러나 章帝 이후 50

여년이 지난 順帝期에 이르기까지 고용 형태의 운영이 반복되지 않고

있는 것에 의하면 고용 노동으로의 진전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

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어쨌든 導從役의 고용 방식 운영이 不法

이었다 함은 그것이 본래 징발 형식으로 운영되는 것이었음을 말해준

다 錢이 있는 자로부터 走卒錢을 받고 이 재원으로 빈한한 자를 고용

하여 雇賃을 지급하는 不法을 행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어지는 지적에

서 順帝 때 지방관들의 贖錢 강요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관리들의 私利

도모에 의한 것이다 또한 그 의무자에 富者가 있어 그 實役을 피하고

자 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導從役과 같은 下吏의 봉록은 매

우 적기 때문에 여타의 수익이 있다면 그 봉록에 꼭 의지할 필요는 없

었을 것이다 이들이 비록 관부의 員吏이고 그 吏職이 생업이 되는 것

이지만 최말단의 賤役 내지 厮役으로서 천대받는 면이 많았을 것이다

때문에 이 職役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도 많았을 것이다

예기王制에 무릇 전문기능으로 事上(奉公)하는 자가 祝史

射御醫卜 및 百工이다 무릇 전문기능으로 事上하는 자는 다른

일을 해서는 안 되며(不貳事) 근무하는 관서를 옮겨서도 안 된다(不移

官) 出鄕하면 士와 抗禮하지 못하며 家에서 仕하는 자도 出鄕하면 士

와 抗禮하지 못한다 고42) 하였다 즉 士의 신분이 아닌 일반서민 출신

為貧人儲 而守令因以聚斂 詡上疏曰 ldquo元年以來 貧百姓章言長吏受取百萬以上

者 匈匈不絕 謫罰吏人至數千萬 而三公刺史少所舉奏 尋永平章和中 州郡

以走卒錢給貸貧人 司空劾案 州及郡縣皆坐免黜 今宜遵前典 蠲除權制 於是詔

書下詡章 切責州郡 謫罰輸贖自此而止rdquo

41) 渡邊信一郞 中國古代の財政と國家 (汲古書院 2010 第三章) p128

42) 禮記王制 (十三經注疏 中文出版社) p2905에 凡執技以事上者 祝史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8이 여러 기능직의 吏職에 복무하면서 함께 관부에 있지만 본 소속의

직장에서 다른 직장으로 옮길 수도 없고 신분상 士와 대등한 위치에

처하지 못하며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또한

府史 이상의 職官과 구분되는 胥徒의 특성과 상통한다

속한서 백관지2에 射聲校尉一人 比二千石 의 本注에 服虔曰

工射이다 어두운데서 소리를 듣고 활을 쏘아 명중시키는 까닭에 이름

하였다(工射也 冥寞中聞聲則射中之 故以為名 고 하였는데 여기서

工射 는 射도 工 의 한 분야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은 그 기능으로

奉公하는 것이 그 職分이고 생업이기도 하며 다른 직종이나 직업을

갖을 수 없고 옮길 수도 없는 자들이다( 不貳事 不移官 ) 이들은 그

職能으로 생업을 유지하지만43) lsquo父死子代rsquo 의 世業으로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고 賤職인 까닭에 여기에서 벗어나 신분상승을 바라는 경향이

있게 된다 이를테면 三國魏의 黃朗은 그 부친이 縣卒로서 鈴下 伍伯

의 職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抗志 遊學하여 현령을

거쳐 군태수에 이르렀는데 부친의 일을 생각하여 屬下의 鈴下 伍伯을

부를 때 鈴下 伍伯이라 부르지 않고 항상 姓字로 불렀다 비록 분노

하였을 때도 鈴下 伍伯으로 부르지 않았다44)

그런데 導從役 복무자는 징발되어 관부 내에서 복역하는 인원 중에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전체 복역 대상자 가운데 극히 소수에 불과하

다 특히 黃綬의 武官을 導從하는 伍伯 등의 직무가 護衛와 侍衛 警備

등이 위주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무술과 용력을 갖춘 이들로 선발된

그룹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黃綬 이상의 문무관에 소속되어 그 員數

射御醫卜 及百工 凡執技以事上者 不貳事 不移官 出鄕不與士齒 仕於

家者 出鄕不與士齒

43) 禮記 王制에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百工 各以其器食之 (注에 器 能也)

44) 三國志 권23 裴潛傳 所引 魏略에 黃朗字文達 沛郡人也 爲人弘通有性

實 父爲本縣卒 朗感其如此 抗志遊學 由是爲方國及其郡士大夫所禮異 特與東

平右姓王惠陽爲碩交 惠陽親拜朗母於床下 朗始仕黃初中 爲長吏 遷長安令 會

喪母不赴 復爲魏令 遷襄城典農中郎將涿郡太守 以明帝時疾病卒 始朗爲君長

自以父故 常忌不呼鈴下伍伯 而呼其姓字 至於忿怒 亦終不言 朗旣仕至二千石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9가 정해진 것에 의하면 庶民在官者 로서의 胥徒에 상당한다 봉록이

지급되는 일자리이며 민의 공동의무인 일반요역에 대신하여 복무하는

것인 만큼 면역전의 授受 행위는 不法이다

상술한 輿服志에 각 300석 이상의 官員 당 이들의 배당 員數가 규

정되어 있는 것에 의하면 이들도 분명히 관부의 한 구성원들이다 속한서 백관지 注引의 漢官에는 官長 내지 命官級 屬下의 員吏 員數

및 秩祿을 기재하고 있다 이를테면 속한서 백관2에 衛尉 卿一人

中二千石 本注曰 掌宮門衛士 宮中徼循事 丞一人 比千石 이라 하였

고 注引에 漢官曰「員吏四十一人 其九人四科 二人二百石 文學三人

百石 十二人斗食 二人佐 十二人學事 一人官醫 衛士六十人」이라 하

였다 이 가운데 百石까지는 봉록 지급이 명시되어 있지만 그 이하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봉록이 전혀 지급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斗食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斗升으로 계산되는

日數 계산에 의한 연봉액이 정해져 있다 百官受奉例의 注 所引 漢書音義에 斗食祿 日以斗爲計 라 하였고 한서 百官表上에 漢官名

秩簿에 이르길 斗食은 月俸 11斛 佐史는 월봉 8斛이다 一說에 斗食

이란 연봉이 百石에 이르지 못하여 日當으로 계산해서 1斗2升을 食하

는 까닭에 斗食이라 한다 고 하였다 속한서 백관5의 百官受奉例에

서는 百石이 月 16斛이고 斗食 이하는 위와 같다 또 墨子 雜守篇에

斗食은 1년에 36石이다 參食이면 1년에 24石이고 四食이면 1년에 18

石 五食이면 1년에 14石4斗 六食이면 1년에 12石이다 斗食은 5升을

食하고 參食은 3升小半을 五食은 2升 六食은 1升大半을 食한다 하루

에 2회 食한다 고 한데서 알 수 있다 斗食 은 1食에 5升 하루에 2

食이니 매일 1斗를 받아 1년 360일에 총 36石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

參食 은 1食에 3과 13升 즉 13斗를 받아 1일에 23斗가 되고 1년에

24石을 받는다 그 이하의 四食에서 六食까지는 斗食 이하에 열거된

下吏의 지급액 규정일 것이다

閻步克에 의하면45) 周代에서는 士 이상에게 祿田을 지급하여 그

수익을 食하게 하는 것으로 연봉을 지급하는 형태였는데 하급관리나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0工醫師 등 기술직 및 兵員에게는 月 단위로 지급하는 이른바 稍食

형태로 운영하였으며 나중에 증액 고정화 되고 아울러 錢으로 지불하

게 됨으로써 月俸의 秩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稍食 이란 주례天官

宮正에 宮正이란 왕궁의 戒令糾禁을 맡는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그 출입을 검찰

하고 그 稍食을 균등히 하고 그 淫怠하고 奇邪한 民을 제거하고 그

什伍를 모아 道義를 가르친다 月이 끝나면 그 稍食을 會計하고 1년이

끝나면 그 (吏職의) 行事를 검열한다 라46) 하였는데 이 稍食에 대해

鄭司農은 禄廪 疏는 宫中官府 등의 月禄 이라 하였다 즉 稍食은

月俸인 셈인데 이를 하급관리의 月俸이라 한 것은 國語晋語4에 公

은 貢을 食하고 대부는 읍을 食하며 士는 田(公田)을 食한다 庶人은

力으로 食하고 工商은 官(官으로부터 받은 田)을 食하며 皁隸(吏에

속한 徒隸)는 職을 食하고(각 담당 職의 大小에 따라 食祿) 官宰(大夫

의 家臣)는 加(大夫의 家臣)를 食한다 에서 公 大夫 士까지는 國 邑

田을 봉록으로 받는 까닭에 연봉을 받는 것이 되고 庶人 이하는 관부

에 給事한 力(勞役) 등을 계산하여 지급 받는 까닭에 월봉이라는 것이

다 또 주례 夏官 校人의 校人은 王馬之政을 관장한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馭夫

의 祿과 궁중의 稍食을 균등히 한다 라 하였는데 그 注에 師圉는 府

史 以下다 고 하였다 즉 府史 이하 下吏의 봉록 관련 업무이다 또 주례 天官 醫師에 연말이 되면 그 醫療한 실적을 검사하여 그 食을

정한다 十점 만점이면 上 十에 一을 失하면 次等 十에 二를 失하였

으면 그 次等 十에 四를 失하였으면 下로 한다 하였고 또 방비를

굳건히 하기 위해 성곽 溝池 등의 役事와 守備를 관장하는 掌固는 이

에 복무한 士庶子와 衆庶에 대해 필요한 도구와 財用을 공급해주고 그

稍食을 균등히 한다고 하였다(同 夏官 掌固) 이러한 자료에 의하면 府

史 이하의 下吏에 대해 祿俸 지급의 額이 기술되어 있지 않는 것은 食

邑田이나 百石까지는 年俸의 일정액이 규정되어 있고 이 액수가 월봉

45) 閻步克 從稍食到月俸mdash戰國秦漢祿秩等級制新探 (學術界 20002)46) 宮正 掌王宮之戒令糾禁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幾其出入 均其稍食 去其淫怠與其奇邪之民

會其什伍而敎之道義 月終 則會其稍食 歲終 則會其行事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1으로 나뉘어 지급되는 것과는 달리 그 이하의 吏는 月別 給事한 日數

나 실적을 계산하여 지급하는 月俸 형태였고 그 총합이 百石 이하였

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앞에 든 百官名秩表나 묵자의 기사는 그

러한 사정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府史 이하인 胥徒나 그 직급에 상당

하는 속한서 백관지의 각 관부별 官長 屬下의 員吏로서 有秩 아래에

나열된 직급들도 그 근무일수나 실적에 따라 봉록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有秩의 官은 百石 이상의 年俸이 지급되는 下限의 관리

를 가리키며 佐史 이하의 월봉 수입자에 대비하여 쓰이는 용어이다

근래 楊振紅 廣懶薰雄 宮宅 潔 등은 佐史 이하의 下吏에는 1개

월을 단위로 윤번 근무하는 자들이 있어 이들은 그 이름 앞에 更 이

붙고 이에 대비하여 常勤하는 자들은 冗 이 붙어 구분되었다 하고

그 내역과 성격을 고찰하였다47)사실 후대의 冗 내지 冗官 이 보통

散官 의 뜻이었던 것에 비해 선진에서 진한 시기의 여러 자료에 보이

는 冗 은 위의 연구들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更 에 대한 相對로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lt운몽진간gt 秦律十八種 工人程에 冗

隸妾 2인은 工 1인에 當하고 更隸妾 4인은 工 1인에 당한다 小隸臣妾

으로서 可使者 5인은 工 1인에 당한다(冗隸妾二人當工一人 更隸妾四

人當工一人 小隸臣妾可使者五人當工一人) 에서48) 冗隸妾은 更隸妾에

비해 2배의 우대를 받고 있으며 lt이년율령gt史律에 大祝이 祝을 시

험해보아 祝에 뛰어나고 祠事에 밝으면 冗祝으로 삼아 이들을 冗한다

(大祝試祝 善祝 明祠事者 以爲冗祝 冗之) 고 하였는데 이 冗 은 같

은 史律의 祝十四章으로 學童들을 시험해서 능히 7천언 이상을 誦할

수 있어야 祝으로 삼고 5更으로 한다(以祝十四章 試祝學童 能誦七千

言以上者 〔乃得〕爲祝 五更) 에서의 更 과 相對로 위치하고 있다

47) 楊振紅 秦漢簡中的ldquo冗rdquordquo更rdquo餘供役方式middotmiddotmiddot從lt二年律令 史律gt談起 (簡帛硏究 廣西師範大學出版社 2006) 廣懶薰雄 秦漢律令硏究 (汲古書院

20103) pp297-304 宮宅 潔 漢代官僚組織の最下層 - 官 と 民のはざま-

(東方學報 87 2012) pp11-1248) 睡虎地秦墓竹簡 (北京 文物出版社 1978) p74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2또 lt里耶秦簡gt에도 冗戍士五(伍) (⑧666+ ⑧2006)와 更戍(某) (⑧

143 ⑧149 ⑧694)의 對稱 용어가 있다 한편 주례春官 槀人에 外

內朝의 冗食者의 食을 공급해주는 것을 관장한다(掌共外內朝冗食者之

食) 라 하였고 이에 대한 鄭注는 冗食者란 (관부에 밤까지) 머무르며

문서 작업을 하는 것이 마치 지금의 尙書의 屬吏로서 當直하는 者들과

같다(冗食者 謂留治文書 若今尙書之屬 諸直上者) 賈疏는 ldquo(鄭注에

서)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rdquo라 한 것은 또한 漢法을 인용하여 설명한 것이니 차례로 당직

하는데 관부에 留宿하며 (집에) 돌아가지 않는 까닭에 반드시 음식을

제공해야 한다(亦引漢法說之 謂以次當直 留在朝 宿不還 須以食供之)

고 해석하였다 여기서의 冗 은 夜勤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일

상 정규의 일을 넘어선다는 뜻을 지닌다 冗食 은 야근하는 관리에게

제공되는 음식이기 때문에 정규의 음식 지급에 추가되는 것을 의미한

다 전한 成帝 河平 연간에 수해를 입은 군국을 구휼하면서 그 지역민

을 다른 군국으로 피신시키고 그 곳에서 冗食케 하라 고 하였는데49)

文穎은 冗이란 散이다 廩食을 散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遊離되어) 정착하지 못하는 戶를 役事시켜 일자리를 주는 것이다(冗

散也 散廩食使生活 不占著戶給役使也) 로 해석하였고 如淳은 離散

된 자들에게 給食하고 관부는 그 임금을 지불한 것이다( 散著人間給

食之 官償其直也 )고 해석하였다 즉 수해로 유민이 된 자들에게 給

食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하고 아울러 役事의 일자리를 주어 그 임금

을 지불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석자들이 冗 을 散 의 뜻으

로 해석한 것은 국가의 재정을 풀어서 지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國錢의

lsquo散布rsquo라는 뜻으로 본 것이다 이 또한 정규의 재정 지출을 넘어선 추

가의 지출이므로 실은 위의 사례들과 같은 뜻이 된다 또 한서권24

하 식화지하에 또한 周官의 稅民 제도에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民이 떠돌아다니면서

일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夫布一匹을 납부하게 하며 布를 납부할 수

49) 漢書 卷10 成帝紀 河平4년조에 遣光祿大夫博士嘉等十一人行舉瀕河之郡水

所毀傷困乏不能自存者 財振貸 其爲水所流壓死 不能自葬 令郡國給槥櫝葬埋

已葬者與錢 人二千 避水它郡國 在所冗食之 謹遇以文理 無令失職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3없는 자에게는 縣官에서 冗作케 하고 이들에게 衣食을 제공한다 고50)

하였다 여기서 冗作 이란 정규의 요역 부과 외에 징벌의 뜻으로 역

을 추가하여 부과한다는 의미이다

또 lt운몽진율gt 司空에 冗邊 이 있다

백성에게 모친 및 동생이 있어 隸妾이 되었는데 謫罪가 아니고 冗邊5

歲에 복역하되 근무 기간을 無償으로 하고 1인을 면하여 庶人으로 하고

자 한다면 이를 허용해준다(百姓有母及同牲(生)爲隸妾 非適(謫)罪殹(也)

而欲爲冗邊五歲 無賞(償)興日 以免一人爲庶人 許之) (司空 p91)

이 冗邊五歲 도 규정된 정규 戍邊役의 額 외로 추가된 役이란 뜻의

용어이다 그래서 이 또한 위의 사례들과 마찬가지의 뜻이다 이렇게

冗 에는 更 에 相對한 지칭으로 更 에 복무하는 자들에 비해 전문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갖춘 자들이거나 기타 사유로 정규의 額을 넘

어서는 복무를 하는 것 또는 그 役者 또는 職名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즉 정규 일반의 更 방식의 근무 額(日數)에 비해 담당

분야의 뛰어난 능력이나 징벌 등 기타 사유로 더 많은 근무를 추가로

하게 되는 자들의 職을 冗 이라 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러한 冗 을 쓰는 데는 국가의 재정 지출도 추가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국가재정의 추가 지출의 뜻으로서 散(散布)

이라는 뜻이 되어 후대 冗官==散官의 칭이 생긴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해석된다면 그간 충분히 해석되지 못한 lt운몽진률gt廏苑

律에 연간의 養牛 실적 평가에서 下等을 받은 宂皂에게 2개월의 복무

기간을 추가하는 벌을 내린다는 律文에 보이는 宂皂51) 그리고 同 秦

律雜抄 屯表律에 나오는 lsquo冗募rsquo도52) 위와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50) 又以周官稅民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民浮游無事 出夫布一匹 其不能出布者 冗作縣官 衣食

51) lt雲夢秦律gt p30 廏苑律의 율문 卒歲 以正月大課之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殿者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罰

冗皂者二月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52) lt雲夢秦律gt p145 秦律雜抄의 율문 冗募歸 辭曰日已備 致未來 不如辭

貲日四月居邊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4것이다 廣懶薰雄은 更 을 非常勤 冗 을 常勤의 뜻으로 요약하였는

데53) 그러한 일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는 更 이 본래 규정된

交代근무라면 冗 은 본래의 규정액을 넘어선 근무를 뜻하는 까닭에

그러한 해석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설문宀部에 冗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人在屋下 無田事也 라 하였는데 無田事 로서의 冗의 뜻도 更

이 당번으로 給事하는 기간을 제외하면 田事에 있어야 하는 것과는 달

리 冗은 비당번인 경우에도 관부에서 給事하는데서 칭해진 것이라 하

겠다

예기중용에 忠信인 자에게 봉록을 두텁게 주는 것은 士를 勸함이

고 때로(일시적으로) 使役시키되 賦斂을 가볍게 하는 것은 백성을 勸

하기 때문이며 日用으로 근무시키되 그 근무기간과 성과를 계산하여

급료(廩)를 지급하여 그 근무에 합당하게 보상해주는 것은 百工을 권

하기 위함이다(忠信重祿 所以勸士也 時使薄斂 所以勸百姓也 日省月

試 旣廩稱事 所以勸百工也) 라 하였다 여기서 忠信 이란 禮記禮器에 忠信 禮之本也 라 하였고 여기서는 이를 修學하고 실행할 수

있는 사대부 내지 命官層을 가리키고 있다 百工에 대해 日省月試

한다 함은 근무한 日數와 그 성과를 월 단위로 계산한다는 것이다 注

에서 旣廩稱事 의 旣 를 lsquo餼rsquo로 해석하고 lsquo餼廩rsquo은 稍食 이라 하였

다54) 여기에서 일반 백성에게 때로(일시적으로) 사역시킨다는 時使

가 곧 更 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진한 시기 更徭制의 운영에

서 충분히 입증된다 宮宅 潔은 年俸이 있는 것이 有秩인데 그 最下가

百石이며 연봉이 없고 본래 日食과 月食으로 지급되는 등급을 斗食이

라고 한다 하였다55) 그가 말한 斗食은 백관표에 나열된 斗食과 그 이

하의 여리 吏職을 포함한 것이다 그런데 일반 백성에게 更役이 부과

되고 그들에게 동원된 기간 동안 당연히 매일의 給食은 지원되겠지만

그 일반 요역으로서의 更役에 대한 日當의 보수가 지급된 것은 아닐

53) 廣懶薰雄 앞의 글 p304

54) 注에 日省月試 考校其成功也 lsquo旣rsquo讀爲餼 餼廩 稍食也

55) 宮宅 潔 앞의 글 p39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5것이다 그 일반 요역은 일반 백성의 기본 의무사항인 까닭이다 반면

百工의 근무일수와 성과액에 대해 稍食 (日俸 내지 月俸)이 지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매 끼니의 급식이 아니라 工役에 대한 보수 내

지 給料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근무일수라든가 성과액을 계산

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기서의 百工은 관부의

員吏에 속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관부에 속하여 매

끼니의 식사 뿐 아니라 工役한 일수와 성과량에 따라 봉록이 지급된다

는 것이다 그래서 봉록 지급은 錢이나 곡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반

면 전기한 국어晋語4 文公修內政納襄王 章에 公食貢 大夫食邑 士

食田 庶人食力 工商食官 皁隸食職 官宰食加 에서 工商食官 의 工

商은 모두 관부의 員吏에 속한 자들인데 그 注에 옛날에는 田을 주는

것으로 祿俸을 제정하였다 관부에서 주는 廩이란 곧 관부에서 田을

받는 것이니 후세에 錢粟을 주는 것으로 祿俸을 제정한 것과 같지 않

다(古者以田制祿 官廩之者 卽受田於官 非如後世之以錢粟制祿也) 고56)

하였다 또 한서권24식화지상에 士工商이 田을 받는 것은 5口가 받

는 것이 되어야 농부1인이 받는 것에 當한다(士工商家受田 五口乃當

農夫一人) 고 하였다 즉 百工과 商賈는 그 직무에 따라 俸祿을 받는

데 후대와 같이 錢粟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田으로 받으며 그 액수는

일반 농민의 15이라는 것이다 이는 전술한 주례의 胥徒가 최하품

의 田 1百畝를 俸祿으로 받는 것과 lsquo以田制祿rsquo이라는 면에서 일치한다

그리고 lsquo以田制祿rsquo이 후대에 lsquo以錢粟制祿rsquo으로 변천 된 것은 秦漢의 사

례를 통해 분명하다 어쨌든 관부의 員吏인 百工과 商賈에게 일반 백

성의 更役과는 달리 祿田 또는 월봉 형태의 錢粟 지급이 행해진 것이

라 하겠다 또한 工商이 일반 요역 대신에 전문기능인으로서의 工役과

관부 소요 물품의 調達役의 職分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이 또한 職

役에 해당하는 셈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관부의 員吏이면서 斗食 보다 下位에 위치하여 稍

56) 國語正義(下冊) (董增齡 撰 巴蜀書社 1985) pp815-6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6食 내지 月俸을 받는 여러 導從役 祝醫工商 등의 役은 그 職分

의 役 즉 職役으로 奉公한다 그런데 후한 초에 이 職役의 면역전으로

서 走卒錢을 징수하고 그 재원으로 빈민을 고용한 것이 不法이었으며

수십 년 이어지다가 금지되고 違法한 관료들이 처벌받고 있는 것에

의하면 이 役들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戶가 지정되어 있어 여타의 일반

戶가 대신하여 맡을 수 없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은 導

從役 등의 담당자는 일반서민이되 그 중에서 특별히 선발된 층으로 구

성되어 전문의 분야를 세습하며 의무로 담당하는 하나의 신분층으로

형성되어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그 役은 하나의 身分役이기

도 하였던 셈이다 또한 그 代役錢으로서 走卒錢 징수 및 雇傭 방식이

나오게 된 것은 그 역의 담당층 가운데 錢으로 實役을 피할 수 있는

부유충이 형성되었고 후한 前期에 전통의 身分制가 느슨해진 여건에

서 身分役의 근본 형태가 유지되지 못하고 일탈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속한서백관3에 執金吾의 속관 중에 화려 장려한 복장

과 장식으로 황제의 행차를 호위 수종하는 騎士로서 緹騎二百人이 있

는데57) 本注에 無秩 比吏食奉 이라 하였다 즉 吏가 아니지만 吏의

대우를 받아 봉록을 받는 계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下吏에

들지 못하지만 봉록을 받는 면에서는 동일한 계층이다

한편 앞에 든 國語 晋語4에서 工商食官 에 이어 下記된 皁隸(吏

에 下屬한 徒隸)食職 이 있다 이 皁隸 계층은 지금까지 검토한 庶民

在官者 로서의 胥徒導從役 담당자 및 樂祝醫衛士工商 등

보다 下位 내지 그 下屬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그 담당 신분과 그 役의 성격에 대해 검토한다

Ⅳ 下層 員吏의 役과 徒隸層의 役

57) 당 조목의 注 所引 漢官曰 執金吾緹騎二百人 [持戟]五百二十人 輿服導從

光滿道路 群僚之中 斯最壯矣 世祖歎曰 ldquo仕宦當作執金吾rdquo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7

앞에서 검토한 관부 구성의 최말단에 위치한 주례에서의 胥徒와

춘추진한 시기의 導從役 담당자 및 樂祝醫衛士工商 등의 下

吏層 외에 그 下屬으로 보이는 皁隸가 있다 앞에 든 각 신분에 따른

奉公의 職分을 나열하고 있는 國語晋語4의 記事 皁隸食職 의 注에

皁隸를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라 한 것에 의하면 이 계층은 위에 열거한

여러 下吏에 下屬한 노역자들이라 할 수 있다 胥徒와 導從役 담당자

등은 각각 주례와 漢官 등에 그 員數가 규정된 까닭에 이들은 員

數 규정에 들지 못한 皁隸에 대비해 下層의 員吏로 칭할 수 있다

皁隸가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라 하였으니 곧 관노비 내지 그에 類하는

계층일 것인데 그들이 lsquo職을 食한다rsquo고 한 것은 각 분야의 官署에 分屬

되어 그 職務에 給事함으로써 생업을 삼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皂

隸 牧 圄 僕 등이 후대의 천민이나 隸民이 아니라 일반민이었다

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58)그러한 주장은 이들이 대체로 관부에 給

事하는 계층으로 여러 기사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고 위의 皁隸食

職 은 곧 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관부에 給事

하는 면으로 인해 예속성이 있게 된다는 면이 있다 후술하는 바와 같

이 그들이 일반 서민 출신이면서도 후대에 그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모

두 예속신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통용되는 것은 그러한 관부에의 예속

성이 분명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예속성을 말해주는 것이 또한 職

役의 한 속성이다

한편 國語 晋語4 文公修內政納襄王章에 (晋文公)元年 春에 公(晋

文公)과 부인 嬴氏(秦穆公의 女인 文嬴)가 王城(秦의 地名)에서 돌아올

때 秦伯이 衛士3천인을 納하였는데 실로 기강이 있는 僕들이었다(元年

春 公及夫人嬴氏至自王城 秦伯納衛三千人 實紀綱之僕) 고59) 하였다

秦漢의 衛士 출신과 달리 여기서는 그 출신 신분이 僕인 자들로 구성

58) 黃中業 春秋時期的ldquo皂隸牧圉rdquo屬于平民階層說 (齊魯學刊 阜師院學報) 1984-2 19844) pp69-72

59) 위의 책 pp809-810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8되어 있다 이 당시는 秦 穆公의 지원으로 晋의 文公이 귀국하여 懷公

을 죽이고 즉위한 때인 까닭에 군사 내지 호위부대의 지원이었다 그

衛士 군단의 신분은 皁隸層에 들어가는 僕인데 관부에 給事하는 職分

은 衛士이다 이들의 紀綱이 선 자들이었다고 한 것은 본래 秦에서도

衛士의 職으로 給事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춘추기에 邑數百이나 社

數百의 단위로 국가 사이에 分與되는 일이 자주 있었고 3천인에 이르

는 多數의 전문 집단이 타국에 分與된 것이긴 하지만 일부 전문의 인

력을 分與나 上納 하는 것 또한 당시 종종 일어났던 일이다 어쨌든

그 衛士집단이 모두 僕이었다는 것은 일반민이 아니고 관부에 예속되

는 신분이었음을 말해준다 예속신분으로 궁성을 지키는 衛士로 삼는

것은 주례地官 師氏에서 그 직무 가운데 (師氏는) 그 소속의 四夷

之隸를 거느리고 각기 그 병력으로 왕성의 문밖을 지키는데 복무하며

또한 (행차 때) 앞에서 길 정리를 한다(師其屬帥四夷之隸 各以其兵服

守王之門外 且蹕) 에 이미 보이고 漢武帝 때 제후왕 貴戚의 不服을

다스리기 위해 중앙 내사지역을 감찰하는 司隸校尉와 지방의 刺史에게

중도관의 徒奴 1200인을 보내어 二千石官을 독찰하게 하였는데60) 이

1200인의 徒奴부대는 이후 사예교위 내지 刺史 직속의 상비군단이 되

었고 그 성원은 세습 병사집단의 근간이 되어 牧使 刺史 등 將領下의

公兵이나 私兵으로 활약하였다61) 漢官舊儀 卷上에 漢代 長安에 騎

亭長 79인과 함께 6월 1更의 倉頭盧兒를 給事하게 하였다62)이들 四夷

之隸나 徒奴倉頭盧兒 등은 적군포로이거나 刑徒 계통 출신으로 관부

에 예속된 신분일 것이다 특히 관부에 囚禁된 형도들은 여러 방면의

60) 北堂書鈔設官部 및 漢官儀권2補遺2에 ldquo司隸校尉는 武帝 때 처음 설치되

었다 이후 諸侯王 貴戚이 不服함에 中都 中官의 徒奴千二百人을 (파견해서)

一校尉部刺史에게 속하게 하여 二千石官을 독찰하게 하였다(司隸校尉 武帝初

置 後諸侯王貴戚不服 乃以中都中官徒奴千二百人屬爲一校尉部刺史 督二千石

也)rdquo

61) 이에 대해서는 박건주 한대의 지방상비군과 部曲의 推移 (동양사학연구118 20123) 참조

62) 長安給騎亭長七十人 六月一更倉頭盧兒 (漢官六種 北京 中華書局 1990

9) p3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9노역에 활용되었는데 근래 石岡 浩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刑徒 집단

은 크게 세 부류 내지 등급으로 나누어져 활용되고 대우에 차별이 있

었다고 한다 즉 가장 上位에 있는 司寇는 특정 임무에 복무하는 것이

정해진 형도이며 전택을 소유하여 戶主가 되는 권리(lt二年律令gt

310-316簡) 왕조로부터 사여 받는 권리(同 291-293) 子가 士伍로 복

귀할 수 있는 권리(同 364-365)를 갖는다 다음으로 徒隸 는 특정 관

서에 예속하여 직무를 숙지하였거나 기술에 숙련하여 전문기능자에 동

등한 가치를 지니는 형도 를 지칭하며 그것으로 동일 직장에 계속 근

무하는 까닭에 일반 형도와는 달리 토목공사나 물자운송 등의 노역에

서 제외된다 또한 왕조에 공헌하는 자로서 사여를 받는 대상도 된다

(同 291-293) 즉 그들은 隸臣鬼薪城旦이면서 숙련자 기능자로서

일반 형도보다 우대받는 자들이다 위 양자에 비해 일반 형도는 위의

여러 특혜를 받지 못하며 城旦은 주로 토목사업에 隸臣은 주로 여러

관서의 잡다한 노역에 복역한다63)이는 충분히 수긍되는 견해이다 이

가운데 徒隸는 관부 내 각 分署의 전문 직장에 分屬되어 사역될 것이

기 때문에 전술한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로서의 皁隸가 곧 그들의 주요 부

분이 될 것이다 그 중에 일반 관노비로부터 개인적 재능과 기술로 선

발되어 해당 관서에 給事하는 자들도 포함될 것이다 단지 정규의 전

쟁에 형도를 동원하는 사례가 많은데 그들이 정규의 병사가 된 것은

아니고 군공을 세워 免刑되기 이전에는 그대로 형도인 것과 같이 함께

관부에 給事하고 있다 하더라도 각 신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상의 검토에 의하면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에는 이른바 lsquo吏에 下屬

한 徒隸rsquo로서 食職하는 皁隸집단이 있고 그 구성에는 관노비 뿐 아니

라 적군포로나 관노비 및 형도 출신의 衛士 그리고 刺史 牧使 등의

將領下에 있는 직속 상비군 형도 가운데 司寇 그리고 기능과 숙련으

로 형도 중에서 선발된 職能의 徒隸집단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員

吏이되 下吏인 계층의 복무가 그 신분에 따른 職役인 것과 마찬가지로

63) 石岡 浩 秦漢代の徒隸と司寇 -官署に隸屬する有職刑徒 (史學雜誌 121-120121) p32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0이 皁隸層의 복역도 모두 관부에 생업을 의존하는(食職) 職役이라 할

수 있다

또 좌전에 주로 보이는 輿人이 있는데 同 昭公7년조에 天에 十日

이 있고 人에 十等이 있으니 下가 上에 事하는 所以이다 까닭에 王의

臣은 公 公의 臣은 大夫 대부의 臣은 士 士의 臣은 皁 皁의 臣은

輿 輿의 臣은 隸 隸의 臣은 僚 僚의 臣은 僕 僕의 臣은 臺이다 馬

에 圉가 있고 牛에 牧이 있어 百事를 待한다 라 하였다 古來의 여러

注疏에서부터 이미 lsquo輿人rsquo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지만 이를 분석한 宇

都木 章의 견해에 의하면 縣鄙의 野人이 평시이든 戰時이든 國都의

귀족에 징발되어 葬儀戰士補助 車馬와 관련되는 여러 役務에 종사

하는 때 그들을 lsquo輿人rsquo이라 칭하였다고 한다64) 여러 자료에 의하면 皁

에서 牧에 이르는 서열 순위가 어디에서나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

고 대개 동일 계층의 異稱인 경우가 많다 皁 이하의 서열에 이렇게

다단계의 臣屬 관계가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같은 徒에도 上位 순서로 胥와 徒 및 그 徒의 지휘를 받는 징발된 徒

가 있으며 員吏에 들어가는 導從役 등의 庶民在官者 가 있고 그에

下屬하는 皁隸의 구분이 있는 것에 의하면 최소한 士 아래의 서민 계

층에 3 - 4 단계의 차등 신분이 있을 수 있다 위의 十等 순위에서 士

이하에 위치하여야 할 庶民이 곧 皁輿 등에 해당할 것인데 모두 관

부에 給事하는 면에서 후대 예속신분을 가리키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

다 그리고 일반 서민 가운데서도 皁輿 이하는 모두 전문의 職分으

로 관부에 給事하는 의무가 주어진 계층이므로 일반 농민으로서의 서

민과는 구분되는 서민이었다고 생각한다 즉 일반 농민이 농업을 생업

으로 하며 일반의 요역 의무가 주어진 반면에 皁輿 등은 주로 전문

의 기능을 요하는 관부의 직무에 給事하는 것으로 일반요역을 대신하

며 때문에 일반 서민이면서 관부에 예속된 신분의 일면을 지닌다 그

렇지만 관노비나 형도로서 관부에 예속되어 給事하는 신분과는 명확히

64) 宇都木 章 輿人考 (三上博士頌壽記念 東洋史考古學論集 朋友書店 1979

12) pp108-11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1다르며 주례의 胥徒와 같은 下吏의 員吏 보다 보통 下位이지만 胥

徒와 마찬가지로 주로 전문 기능의 職分에 복역한다는 면에서 같고 그

일부분은 下吏에 충당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곧 胥徒가 일반 서민의

徒로부터 선발된 자들인 것과 같다 위의 十等 서열은 농민을 제외하

고 관부에 給事하는 신분만을 총괄하여 나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

술한 工商食官 皁隸食職 도 모두 관부에 給事하는 工商과 皁隸를 열

거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복무도 당연히 職役이 되는데 그 職能 내

지 職分의 종류별로 숙련도 및 경력 등에 따른 그룹 내에서의 서열이

있게 되고 이를 계층으로 인식해서 lsquo皁臣(臣屬)輿rsquo 등과 같은 記述이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 각 직능별 部署별 전문화된 職役의 활용은 관

부의 운영상 당시의 사정으로는 불가피한 면이 있다 그러한 체제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점차 계층 구분의 엄밀성이 느슨해지고 세분된

차등의 질서가 점차 단순화되면서 그 용어도 혼용되기에 이른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위의 계층 구분은 세분된 서열만이 아니라 각 계층

의 담당 職分을 구분해주는 칭호로 쓰인 면도 있다 그렇다면 輿人은

戰時에 주로 戰車부대를 보조하는 직무 분야를 담당하는 계층이라 할

수 있고 그러한 면에서 여러 下屬 계층 가운데 가장 상위의 계층이었

지 않을까 한다

한편 이상의 皁隸層이 본래 일반서민 출신이었다는 입장에서 보면

관부에 給事하되 향리에 거처하면서 일정 기간 만 순번으로 복역하는

交代制가 있었을 수가 있고 또는 대체로 일부 기능자나 世戶에 한정

되었겠지만 휴가 기간 외에는 상근하는 형태도 있었을 것이다 예속된

신분인 경우 그 거처도 대체로 관부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앞에 든 秦

漢律에 교대 근무하는 更隸妾의 존재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근무

기간에만 관부에서 거처하는 예속 신분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刑徒

중에서도 司寇는 田宅을 소유하고 戶主가 될 수 있었으며 徒隸도 賜

與를 받을 수 있는 까닭에 이들 중에 일부는 관부 밖에 따로 거처를

지니고 출퇴근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단지 衛士나 部曲 집단은

대체로 屯營 내에 거주하였을 것이다 위로는 승상으로부터 아래로는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2하급의 吏에 이르기까지 吏舍에 거처하며 휴가 기간이 되어야 비로소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는 大庭脩의 연구가 있지만65) 漢舊儀 卷下

에 舊制에 尉는 모두 관서에서 거처하였다( 舊制尉皆居官暑 ) 라66)한

것에 의하면 舊制 가 어느 시기를 말하는 것인지 불분명하지만 宿衛

와 경찰 임무의 尉職 외에는 관서에서 거처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음을

말해준다 매년 직급에 따른 수개월의 휴가 기간이 설정되어 있지만

이는 성내에 거주하며 매일 출퇴근 하더라도 고향은 먼 곳에 있는 경

우가 많아 歸鄕 휴가를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外地 출신으로 城內

에 거처가 없는 관리들을 위한 吏舍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吏舍의 존재가 모든 관리의 관부 거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居官府의 여러 給事職 관노비 司寇나 일부 徒隸를 제외한 일

반 형도 여러 當番의 宿衛職 등을 제외한 관리는 官舍 밖의 私家에서

거처한 것으로 본다

庶民在官者 로서의 職役 복무는 常勤과 교대근무의 두 시스템으로

운영되었을 것이다 胥徒는 본래 모두 징발된 徒 가운데서 재능 있는

자로 선발되어 관부에의 給事가 생업이 된 자들로서 祿田을 받는 자들

이며 員數가 책정되어 있는 까닭에 常勤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

나 함께 징발된 여타의 徒는 胥徒와 같은 給徭役의 奉公을 행하지만

순번으로 동원된 기간 만 한시적으로 복무하는 까닭에 동원 기간 동안

의 食料 이외에 노동의 보수를 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그들은 만

민의 기본 의무를 職役으로 이행하는 것일 뿐이다 정부로서는 관부에

給事할 人才와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지만 필요한 부

분을 모두 常勤하는 자로 임용하여 그들의 생업을 봉록 지급 등으로

전면 지원하는 것은 재정에 큰 부담이 되는 것이었다 즉 관부에서 필

요로 하는 특정 업무 기능자들을 일반 요역 면제 대신으로 복역케 하

고 이를 순번제로 운영하면 복무 당번 기간 외에 그들은 다른 생업을

65) 大庭脩 漢代官吏の勤務休暇 (秦漢法制史の硏究 創文社 1982) p584

66) 앞의 漢官六種 p81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3꾸려나갈 수 있기 때문에 국가는 그들에 대한 생업 유지 지원 부담이

훨씬 적어진다 관부 給事層 가운데 命官과 員吏 이상이 常勤制라면

그 이하의 여러 職役層들은 대체로 교대근무제 중심으로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테면 lt奏讞書gt 案例17에서 秦王政元年 雍縣人 樂人 講이 자신

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사건 당일 자신은 踐更에 복무하러 11월 한

달간 함양의 外樂(관서 기구 名)에67) 소집되어 복무 중이었음을 진술

하고 있다 따라서 함양에 거주하지 않은 樂人이 그 관서에서 常勤하

지 아니하고 특정시기 일정 기간 만 교대로 근무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獄事에서 피고인 樂人 講이 踐更으로 1개월 간 복무한

곳이 外樂인 까닭에 일반 요역이 아니라 樂人의 職役을 이행한 것이라

고 본다 전한 哀帝 때 樂人의 員數를 罷하라는 명령에 대해 승상 孔

光과 대사공 何武가 진언하길 각 담당별 樂人의 현재 員數와 罷할 수

없는 수를 열거한 후 총 829인의 員數 가운데 388인은 罷할 수 없다고

하자 이를 재가한 바가 있다68) 이는 전한말의 사정이지만 전국진에서

도 郊祭 등의 각종 국가제사와 宮中 樂이 행해졌기 때문에 위의 수치

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속한서 백관2 大樂令 注引의

漢官과 盧植禮注에 의하면 八佾舞를 추는 樂人의 員數가 380인인

데 여기에 卑者之子는 임용될 수 없고 6백석에서 2천석 및 관내후에

서 五大夫의 嫡子 출신 5척 이상의 신장 12세에서 30세 顔色온화 등

의 조건을 갖춘 자에 한정되었다69) 이에 의하면 樂人 講은 走馬의 傭

이 되어 京師에 왕래하고 있는 빈한한 자로서 도저히 중앙 大樂令 속

67) 관서 기구 이름으로서의 外樂은 lt이년율령gt秩律 449簡 및 西安相家巷出土

秦封泥에 보인다(周曉陸路東之 編著 秦封泥集 三秦出版社 2000 一

二44)68) 漢書 권22 예락지2

69) 漢官曰 ldquo員吏二十五人 其二人百石 二人斗食 七人佐 十人學事 四人守學事

樂人八佾舞三百八十人rdquo 盧植禮注曰 ldquo大(子)[予]令如古大胥 漢大樂律 卑者

之子不得舞宗廟之酎 除吏二千石到六百石 及關內侯到五大夫子 取適子高五尺已

上 年十二到三十 顏色和 身體修治者 以為舞人rdquo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4하의 樂人 員數에 들어갈 수 있는 처지가 못 되는 자이다 그는 향리

에 거주하면서 매년 1개월씩 京師의 外樂에 가서 복무하는 기간 외에

는 傭賃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下吏의 員吏가 아

니면서 樂工의 職能으로 일반 요역 대신에 京師의 제사나 예락 행사에

나아가 給事하는 자이다 그래서 그의 복역도 職役인 셈인데 이러한

모습은 주례의 胥徒와 흡사하다 단지 胥徒가 員吏로서 봉록은 받는

것과는 다르다 양자가 모두 職役이지만 胥徒는 庶民在官者 이고 樂

人 講은 lsquo非吏인 職能人rsquo이다 그렇지만 양자 모두 개인적인 職能으로

관부에 給事하는 면에서는 상통한다 따라서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

부에 給事하는데는 員吏로서 복무하는 경우와 非吏로서 복무하는 경우

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Ⅴ lt走馬樓吳簡gt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복무

형태 및 그 성격

1996년에 호남성 長沙市 도심 우물에서 발굴된 lt吳簡gt은 총 17萬

餘 枚로 아직 그 일부만이 정리 해독되어 출간된 상태이지만 이미 출

간된 분량 가운데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의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자

료들을 많이 지니고 있다 孫吳 嘉禾 연간(232-238)의 여러 戶籍簿

내지 吏民簿 등에 吏와 給吏로 구분된 人名簿가 다수 존재한다 이 자

료들은 그간 명확하지 못하였던 吏役과 吏戶의 존재형태와 관부에 給

事하는 계층 및 그 職役의 실태를 파악하는데 획기적인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근간의 연구에서 여러 異見으로 그 문서가 지니

는 뜻을 파악하는데 상당히 혼란을 초래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전술한

職役의 전통과 여러 계층의 형태를 살펴본 성과를 참고로 하여 나름대

로 새로운 해석을 추구해보고자 한다

lt吳簡gt의 lt吏民人名年紀口食簿gt(竹簡(肆))에서는 각 里別로 里魁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5가 領하는 食口數를 吏와 民으로 구분하여 통계하고 있는데 그 일례를

다음에 든다

(A)

(이하 簡文 인용에서 內에 있는 字를 괄호 하여 표기함〕

集凡五唐里魁周領吏民五十戶 口食二百八十九人 (簡380)

其一百六十二人男 (379)

其一百卄七人女 (378)

其四戶縣吏 (377)

其二戶郡吏 (376)

其戶州吏 (374)

其五戶給新吏 (373)

其一戶縣卒 (372)

其一戶佃帥 (371)

이는 孫吳 嘉禾 연간 里別吏民口食簿인데 五唐里 50戶 가운데 일반 民

戶를 제외하고 州吏에서 佃帥까지의 戶를 따로 특기하고 있는 것에 의

하면 크게 民戶層과 州吏 이하의 吏층으로 양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

다 먼저 縣吏 이하를 이른바 세습 吏職戶인 吏戶로 볼 수 있는가 하

는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여러 異見이 제기되어 있는데 이 문

제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그런데 lt吳簡gt의 여타 戶籍簿나 戶口簡에

의하면 民戶를 제외한 縣吏 이하의 戶도 다시 縣吏 郡吏 州吏 軍吏 등

의 類와 맨 앞에 lsquo給rsquo字가 붙어 있는 계층의 類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즉 縣吏類의 吏 외에 其十二戶給縣吏下品 (壹5467)

其三戶給郡縣卒 (貳2318) 등과 같은 예들인데 그 職事나 給事

하는 관서의 명칭에 따라 多種의 명칭이 보인다 이를테면 給郡吏 給

縣吏 給州吏 給軍吏 給郡園父 給朝丞 給子弟 給驛兵 給鍛佐 給庫

吏 給縣卒 給度卒 給驛卒 給子弟佃客 給限田客 給佃帥 給常佃 給

家種客 給乞兒 給三州倉父 給養官牛 給習射 給私學 給官瓦師 給

亭復人 給亭雜人 給任師 給郡醫 給縣帥 給州私學 給新吏 給佃吏

給郵卒 給鹽兵 給關父 등이다 이렇게 앞에 lsquo給rsquo字가 들어간 계층을

일단 동일 계층으로 보아 lsquo給吏rsquo로 칭하고 縣吏 群吏 州吏 軍吏 등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6lsquo給rsquo이 붙어 있지 않은 계층을 lsquo吏rsquo로 칭하여 양자를 구분하고자 한다

lt오간gt에서 人名에 붙는 신분명은 크게 眞吏 某吏 給某吏 大男(大

女 民)의 4종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들은 그 표기상의 차이만으로도

일단 구분되는 존재라고 보이는데 현재 앞의 3종 신분명의 구분 문제

와 관련하여 몇 가지 다른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먼저 黎虎는 縣吏나

郡吏州吏 등의 吏가 侯家나 司隸校尉 또는 郡內에 소재한 전문 기

관 州郡 관내의 遠縣에 일정 기간 파견되어 給事하고 있는 자들을 칭

하여 給郡吏 등으로 칭하는 것일 뿐 그 신분은 本州 本郡 本縣의 吏

와 동일하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本郡의 郡吏가 곧 給郡吏이기

때문에 다른 계층이나 신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眞吏는 無職事

의 冗散官에 상대하여 쓰이는 용어로 실제 除授된 관원이라고 한다70)

黎虎와는 달리 양자를 다른 계층으로 보는 견해들도 제기되었다 먼저

韓樹峰은 給吏는 비록 吏의 名은 있지만 일반 백성으로서 잠시 吏의

職事에 종사하는 것일 뿐이고 혹 吏로 임명될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그 신분은 여전히 보통 백성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給吏와 구분하여

口算錢의 면제 특혜를 받는 州吏 郡吏 縣吏 등을 총칭하여 眞吏라 한

다고 하였다 즉 眞吏가 정식의 吏인데 비해 給吏는 일반민이며 일정

기간 만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給吏의

관부給事는 실제상 요역의 일종이라 한다 71) 한편 楊振紅은 동일인의

신분이 문서에 따라 다른 신분으로 등록되어 있는 점에 의거하여 이를

테면 給郡吏가 郡吏나 眞吏로 簡稱된 것이라 하고 眞吏나 給吏 모두

吏로 簡稱되며 州郡縣의 掾史職에 있는 자들로서 署長 佐官 등의 lsquo官rsquo

에 상대되는 자들을 지칭한다고 하였다 아울러 吏는 그 작위가 公乘

이면서 賦役 대상이고 漢魏시기에 吏職의 세습화가 이루어지면서 전문

70) 黎虎 說ldquo給吏rdquo -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社會科學戰線 2008-11) pp89

-94 說ldquo眞吏rdquo-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史學月刊 2009-5) p5071) 韓樹峰 走馬樓吳簡中的ldquo眞吏rdquo與ldquo給吏rdquo (吳簡硏究 2 武漢 崇文書局

2006) 韓樹峰王貴永 孫吳時期的ldquo給吏rdquo與ldquo給戶rdquo -以走馬樓吳簡爲中心 (吳簡硏究 3 2011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7적 吏戶인 眞吏가 출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吏가 본래 일반 서민

이었던 까닭에 公乘 이하의 서민과 합칭하여 吏民이라 한 것이며 삼

국시기 官과 吏가 구별된 연원은 漢代의 長吏와 小吏 내지 士와 庶民

의 구분에 있다고 한다72)다소 혼란스러운 견해들이고 용어상의 해석

문제가 겹쳐 있어 난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들 異見의 관건은 吏와 給

吏의 구분 문제 그리고 吏戶에서의 吏가 어떠한 吏를 가리키는가 하

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여러 견해에서 공통으로 들고 있는 lt吳簡gt의 다음 문서를 먼저 살

펴본다

(B)

廣成鄕勸農掾區光言 被書條列州吏父兄子弟伏處 人名 年紀爲簿

輒隱核鄕界 州吏七人 父兄子弟合卄三人 其四人刑 踵 聾 歐病 一人

被病物故 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 十二人細小 一人限田 一人

先出給縣吏 隱核人名 年紀相應 無有遺脫 若後爲他官所覺 光自坐 嘉禾

四年八月卄六日破莂保據(此簡無編戶)73)

이 자료는 광성향 勸農掾 區光이 작성하여 보고한 문서인데 廣成鄕 領

內 州吏7인의 父兄子弟 23인의 현황을 파악하여 嘉禾4년(235년)에 보

고한 내용이다 lt吳簡gt戶籍簿에서 州吏 등의 吏가 있는 戶는 그 州吏

가 戶人(戶主)으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 州吏7인이란 모두 그 戶의

戶人이다 이 현황 내역에 의하면 州吏7인의 父兄子弟 총합은 23인이

고 이 가운데 4인은 受刑 질병 중이며 1인은 物故 4인은 이미 관부

에 보내져 그 本主에 從事하며 관부에서 복무 중이다 12인은 細小 즉

소인이고 1인은 限田을 경작 중이다 이 限田이 lt吳簡gt의 lt吏民田家

莂gt 등에 보이는 lsquo二年常限rsquo의 田으로 보아 侯家의 田이나74) 屯田을75)

72) 楊振紅 吳簡中的吏 吏民與漢魏時期官 吏的分野 -中國古代官僚政治社會構

造硏究之二 (史學月刊2012-1)73) 侯旭東 三國吳簡兩文書初探 (歷史硏究 2001-4) p172에서 轉引

74) 入都鄕嘉禾二年步侯還民限米一斛 (5-1556) 其卄六斛民還黃龍年臨湘侯

限米 (602017)

75) 黃龍元年文入郡屯田民吳平斛米一百六斛二斗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6227) 其三斛五斗郡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8吏民에게 分給하여 佃作케 한 田으로 보는 것이 일반이다 그 경작자

는 그 田地(佃地)를 국가로부터 할당 받아 의무로 경작하기에 佃民과

같다 그 佃民에는 諸吏와 일반 民戶가 다 포함되고 있다76) lt吏民田

家莂gt에서 그 限田이 lsquo二年常限rsquo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그 의미에 대해

佃作기간 내지 佃種權이 2년으로 한정되어 있어 계약 기간이 지나면

배속되는 田地가 바꾸어지는 방식이었다는 견해가 있고77) 반면에 佃

地의 경작 기간이 아니라 地租額을 2년간 固定하는 것을 말한다는 견

해가 있다78) 사실이 어느 쪽이든 吏戶의 식구 가운데 일부는 국가의

농지를 佃作하고 地租를 납부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 액수가 漢代

사유지에 대한 조세보다 높다 같은 문서에는 租米 뿐 아니라 동시에

畝當 布2匹와 錢70-80까지 징수되고 있다 따라서 二年常限田의 分給

과 佃作은 受惠라기 보다는 노동력의 징발이고 耕作의 賦課로 보는 것

이 마땅하다 于振波가 常限田의 분급 액수를 정의하길 lsquo强制性的 生産

定額rsquo이라79) 본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 이어 1인은 先出給縣吏 인데

먼저 給縣吏로 보내졌다는 의미이다 先給吏의 사례는 嵩男弟恭年十

九先給州吏 (參1450) 등 몇 개가 더 보인다 이렇게 해서 총 23인의

食口 현황이 명료하게 보고되고 있다 그 내역에 의하면 州吏의 식구

는 受刑중인 자 질병자나 小人을 제외하고는 모두 관부에 給事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1인의 先出給縣吏 와

이미 관부에 보내져 本主 따라 從事하며 관부에 복무 중이라는 4인은

( 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 ) 내용상 모두 이미 관부에 보내져 현재

掾利焉黃龍理年屯田限米 (2157)

76) 于振波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南都學壇 24 2004年 第1期 湖南大

學 20041) p30 이 글은 앞에 든 中國社會科學院硏究生員學報 2004-1과 같

음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形成與演變 -談長沙

走馬樓簡牘札記之六 (鄭州大學學報 2001-1) 77) 張福亞 也談lt嘉禾吏民田家莂gt中ldquo二年常限rdquo田的函義 (首都師範大學學報

(社會科學版) 142期 2001-5) p8

78) 高敏 lt吏民田家莂gt中所見ldquo餘力田rdquo ldquo常限rdquo田等名稱的函義試釋 (鄭州大學

學報(社會科學版) 33-5 20009)79) 于振波 앞의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p12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9給事 중인 것은 마찬가지인데 어떠한 차이가 있어 다른 항목으로 구분

하여 기재한 것일까 이것은 바로 給縣吏와 縣吏의 차이를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후술) 州吏7인의 食口 23인의 현황 名簿를 작성하여 면밀

히 조사 보고하게 함으로써 그 遺脫을 막고 있는 것에 의하면 州吏 軍

吏 群吏 縣吏 등의 食口는 여타 일반 민과는 다른 賦役체제 아래 놓여

있는 계층이다 또 軍吏의 父兄子弟에 대해서도 그 食口簿를 따로 작

성하여 관리하고 있다

集凡中鄕州軍吏四人父(子)兄弟三人 中(參3012)

集凡南鄕領軍吏父兄弟合十九人 中(參 464)

이러한 사례들은 吏가 있는 戶는 그 食口들까지 포함하여 吏가 있는

戶 즉 吏戶로서 별개로 관리되고 그 성원은 모두 吏戶의 役 내지 賦

役체계에 들어가는 것임을 말해준다

위와 같이 州吏 縣吏 등 吏戶의 戶口簿는 그 食口 가운데 州吏 縣吏

등 그 吏인 자가 맨 앞에 戶人으로서 위치하지만 給吏는 戶人이드라도

앞에 위치하지 못한다

小武陵鄕嘉禾四年吏民人名妻子年紀簿(壹101533)

吉陽里戶人公乘張惕年卄八算一給縣吏(壹1018232)

吉陽里戶人公乘廖裕年卄七算一給郡吏(壹1017525)

高遷里戶人公乘黃毛年卅四算一給軍吏(壹10306)80)

또한 同 戶籍簿에 縣吏 州吏 등은 아래와 같이 맨 앞에 위치하여 일반

민이 아님을 명기하고 있지만

縣吏鄧橎年卄七 璠()妻大女金年卄一 算 (貳 1729)

州吏蔡區年卅二 區妻大女年卄七 算 (貳 1822)

軍吏朱謙年卅五 謙妻大女壹年卄六 算一 (貳 1723)

80) 인용된 4簡文은 凌文超가 재정리 조립하여 올린 글(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

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型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의

lt表二gt(pp25-37)에서 인용함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0給吏인 경우는 일반민을 가리키는 lsquo民男子rsquo로 기재되어 있다

民男子蔡若年卅七給驛兵 若妻大女四年卅算一(貳 1781)

民男子蔡喬年六十二給驛兵 喬妻大女典年卅八 (算) (貳1903)

따라서 위와 같은 吏民簿에서 民戶를 제외한 州吏나 郡吏 縣吏 軍

吏가 吏戶라면 給州吏 給郡吏 등 여러 職事의 관서에 給事하는 수십

종의 다양한 給某吏 신분은 전술한 庶民在官者 나 lsquo非吏이면서 관부

에 있는 자rsquo와 매우 유사하거나 일치한다

여기에서 吏戶나 吏役의 존재 여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는데 黎虎

는 삼국시기 吏戶의 존재를 인정치 않으나81) 高敏과 孟彦弘은 그 존

재를 인정하며 특히 高敏은 吏役制도 漢末三國시기에 확실히 형성되

었다고 한다82) 韓樹峰王貴永은 후한말 孫吳시기에 卑賤化가 이루어

지면서 吏戶의 萌芽가 이루어졌으며 lt吳簡gt에서의 給吏는 吏가 아니

고 民에 속한다고 한다83) 이러한 여러 異見의 배경에는 吏로 칭해지

는 계층에 전술한 바와 같이 다시 두 계층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계층

이 있는데 그 면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

각한다 양자의 구분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자료를 든다 속한서 百官3 大司農條의 注引 漢官에 丞一人 三百石 員吏四十人 其十一人

斗食 十七人佐 七人學事 五人守學事 皆河南屬縣給吏者 라 하였다

대사농승 속하의 斗食 이하 員吏 40인을 모두 하남군 속현에서 조달된

吏로 충원한다는 것이다 즉 후한 수도 낙양 인근인 하남군 속현에서

吏員을 차출한다는 것인데 斗食 佐 學事 등의 員吏는 해당 분야의 職

81) 黎虎 ldquo吏戶rdquo獻疑 (歷史硏究 2005-3) pp53-6882)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形成與演變 mdash談長沙走

馬樓簡牘札記之六 (鄭州大學學報 2001-1) p61孟彦弘 吳簡所見ldquo事rdquo臆說 mdash從ldquo事rdquo到ldquo課rdquo (吳簡硏究 2 2006) pp205-208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爲役之制 (魏晋南北朝隋

唐史資料 24 2008) pp8-2183) 韓樹峰 앞의 走馬樓吳簡中的ldquo眞吏rdquo與ldquo給吏rdquo pp33-38 韓樹峰王貴永 앞

에 든 孫吳時期的ldquo給吏rdquo與ldquo給戶rdquo -以走馬樓吳簡爲中心 p99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1事를 처리할 수 있는 職能者여야 하기 때문에 하남군에서 이러한 職事

로 근무하고 있는 員吏를 파견하거나 일반민 가운데서 새로 선발하여

파견 조달하였을 것이다 상하급 관부끼리 상호 관리를 파견하여 일정

기간 복무하게 하는 경우에 조달 지원한다는 의미로 動詞語로서 lsquo給rsquo을

쓸 수 있고 이러한 사례는 문헌에 이미 자주 보인다 위에 든 lsquo屬縣給

吏者rsquo도 그 한 실례이다 이러한 경우는 본래 吏의 신분이 여타의 관부

에 일정기간 출장 근무하는 것일 뿐인 까닭에 그 신분은 그대로 吏일

것은 자명한 일이다 즉 縣吏가 郡府에 출장근무 중일 때 그 신분은

그대로 縣吏이고 해당 名簿에 縣吏A가 여타 名簿에서 給郡吏A로 표

기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동일인이 名簿에 따라 신분명이 달리 기

재되어 있는 사례가 약간이나마 보이고 있는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된다(후술) 그런데 給州吏 給郡吏 給縣吏 등 수십종의 給吏에는 이런

경우가 아니고 lsquo州吏 등 諸吏에 배속되어 給事 중인 非吏로서 관부에

복무 중인 民rsquo이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給某吏로 표기된 자들은 lsquo給rsquo

이 붙지 아니한 州吏 郡吏 縣吏와는 달리 lsquo民男子rsquo로 표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給州吏는 非吏로서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그 관서에서 하나

의 職役의 형태로 복무 중인 民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들은 실은 民으로서 관부 업무상 필요한 노역에 동원되는 셈이지만

일부는 여러 관서의 하급 실무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전문의 職能을

갖춘 자들도 있다 縣吏 州吏의 職事 뿐 아니라 앞에 든 수십 종의 전

문 분야 부서별 給吏의 명칭은 그에 상응하는 사례들이다 정부는 이

들이 본래 일반 서민이지만 관부 운영의 필요상 특별 관리를 하지 않

으면 안 된다 그 결과 후한의 여러 사례에서 보듯이 대개 그 職을 세

습토록 하고 이들을 일반 民과 구분하여 칭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lt吳簡gt에 忠子男仲年十五 任給吏 (參 1805)라 한 것은 給吏가 民

에서 차출되어 임용되는 독립 계층임을 말해준다 또 草言府大男吳杭

不是卒子弟不應給卒事 八月卅日兼兵曹掾潘(因)()白(柒總49968)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卒의 子弟가 아니면 給卒事에 복무하게 할 수

없었다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2그들이 본래 吏의 신분이 아닌 까닭에 바로 吏로 칭하지 못하고 그

吏에 배속되어 給事하는 자 또 그 戶의 뜻으로 給某吏 給戶와 같은

칭호가 나오게 된 것으로 본다 이 칭호는 사실 관리와 民 사이에 있

는 이들 계층의 성격을 상당히 잘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이 給吏 계

층의 부담이 커지고 그 賤役 부담자로서의 성격이 뚜렷해감에 따라 給

吏나 給戶가 吏戶나 吏家로 칭해지고 給吏나 給戶의 役이 吏役으로

칭해진 것인데 그렇게 간략한 형태로 칭하여도 이미 관리의 吏와 충분

히 구분되는 것으로 사회가 인지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의하면 lt吳簡gt에 보이는 眞吏도 사실 眞吏라 할 수 없는 給吏

에 대비하여 쓰이게 된 용어가 아닐까 한수봉왕기영은 眞吏란 給吏

에 대비된 용어라 하고 lt吳簡gt에서 給吏가 口算 납부 의무가 있지만

眞吏는 면제되며 정식의 吏이고 신분성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羅新도

眞吏에게 口算錢이 면제되고 있다고 하였다84) 眞吏에 대한 여타의 견

해도 있지만85) 給吏와 관련하여 참고할 만 한 지적이다 또한 lt吳簡gt

에서 其七戶給郡吏 下品(壹5447) 其十二戶給郡吏 下品 (壹

5677) 其十二戶給縣吏 下品 (壹5467) 其一戶給軍吏 下品 (參

430336) 給度吏 下品之下 (5653) 등에서와 같이 給吏는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여서 평균의 民戶 보다 더 빈천한 계층인 점도 그

들이 관부에 給事하는 吏라기 보다는 非吏인 民으로서 民의 일반 요역

에 대신하여 관서에 給事(給役)하는 자들이되 그 일부는 職能에 따라

세습하여 관련 관서의 吏에 배속되고 給事 복무해야 하는 예속된 신

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lt吳簡gt에는 하나의 戶人을 首로 하고 그에 배속된 듯 한 여

러 신분의 戶數와 신분명을 기록한 簿가 있다 lt走馬樓吳簡竹簡gt에

84) 羅新 ldquo眞吏rdquo新解 (中華文史論叢 2009-1) p129 단지 그는 眞吏란 非華

夏系 출신의 編戶化된 토착 사회를 관리하는 인원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85) 이를테면 黎虎는 眞吏란 非眞吏에 대한 대칭이 아니고 실제로 除授 받은 관

원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說ldquo眞吏rdquo -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史學月刊2009-5) p5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3다음의 예들이 있다

-1 里戶人公乘縫繒年卄五苦腹心病 (5443)

- - - - - - -

其七戶給郡吏下品 (5447)

- - - - - - -

其一戶給州吏下品 (5452)

-2 平樂里戶人公乘鄭張年五十 (5460)

- - - - - - -

其十二戶給縣吏下品 (5467)

-3 東陽里戶人公乘扶侈年十四 (5471)

其二戶給庫吏中品 (5472)

- - - - -

其一戶給縣卒下品 (5474)

-4 宜陽里戶人公乘區歸年卄二眞吏 (8962)

- - - 給州卒 (8965)

- - - -

年六十一給驛兵 (8976)

右尙書吏三(戶) (8517)

孫吳에서 公乘의 작위 소유자는 일반민 중에서도 상당히 많지만 漢

代 民爵의 최고위 爵인 公乘(第8等)의 戶人에게 보통 여러 신분의 수

십호를 배속시키고 있다 그 중에 10戶 내외의 給吏가 배속되어 있다

또한 이들 戶人은 배속된 戶가 납부한 租稅를 거두어들이고 이를 일괄

해서 관부에 납부하고 있다 먼저 각 戶로부터 受領한 내역은 문장 앞

에 lsquo領rsquo으로 표기하고 受領한 액수를 총합하여 관부에 납부한 내역은

앞에 lsquo入rsquo으로 표기하고 있다

里戶人公乘曾(年五十三)妻年卅九 (簡 1631-1652)

- - - - - -

領二年郵卒限米田六頃五十畝收限米二斛合爲吳平斛米一千三百斛

其三百十四斛五斗府州中倉關邸閣李崇吏黃諱潘慮 中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4領二年民田三百七十六頃六十五畝二百卅八步畝收米一斛二斗合四萬

五千一百九十九斛一斗 - - - - - - - - -

常遷里戶人公乘李漠年卅七 妻大女思年卅一

入嘉禾二年郵卒限米七百九十八斛二斗八升

入嘉禾二年佃帥限米九百五十五斛八斗七升

- - - - - - -

이 戶人은 대부분 公乘이고 노비를 소유하고 있으며 配屬된 戶의

徵稅와 총괄 납입의 업무에 복무하고 있는데 이는 후대 富戶에게 差役

복무를 부과한 사정과 비슷한 면이 있다 후대 差役제도와 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1인의 戶人을 賦稅 징수 납입의 책임

자로 하여 향리에서 이 방면의 기층단위로 운영하고 있는 셈인데 戶籍

簿와는 그 내역과 용도가 다른 별개의 독립 帳簿이다 그런데 劉家軍

은 限米 납부자 신분인 私學還民叛士吏卒 등이 모두 流民이

며 그 戶人에게 依附하고 있는 자들이라 하고 국가가 그 依附관계를

승인해주면서 그들이 경작할 토지를 戶人에게 分級해주고 그들이 납

부하는 地租인 限米도 戶人의 이름 아래 등기한 것이라고 보았다86)당

시 嘉禾연간에 전란으로 長沙 임상현 지역에 流民이 많이 流入되었을

가능성은 이미 여러 연구에서 지적된 바 있고 還民 叛士 등 일부는

流民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限米와 屯田限米 납부자 신분에는

이밖에 大男 州倉吏 吏帥客 金民 佃吏 郵卒 衛士 傳卒 子弟 佃卒

復客 新吏 兵客 故師子弟 兵師士 故帥客 後客 船師 司馬 士

등 거의 전 계층을 망라하고 있는데 이들 중에 유민이 있을 수 있으나

모두 流民 출신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새로 屯田이나 侯國의 田을

경작시키기 위해 유민 뿐 아니라 在地의 吏民에게 할당하여 佃作으로

운영하는 것은 여러 문헌자료에도 있고 lt吳簡gt의 lt吏民田家莂gt은

주로 在地의 호적에 올라 있는 吏民의 佃作 내역 장부이다 또 lt吳

簡gt 草言府部諸鄕吏區光等招誘諸限田客八十三人首見事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曹史趙野

86) 劉家軍 論lt走馬樓吳簡竹簡gt中 ldquo限米rdquo的性質 (中國社會經濟史硏究 2005-2) p87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5白 (柒總 49782)에 의하면 당시 長沙 지역에서 鄕吏에 의해 限田客

83인을 招誘했다는 성과를 보고하고 있는데 이와 같이 佃作 인력의 확

보에 애쓰는 상황에서 전술한 바와 같은 본래 限田의 佃作 의무를 지

고 있는 在地 吏戶의 家內 성원이 그 佃作者 명단에서 제외될 리가 없

그래서 簡文(B) lt州吏父兄子弟年紀簿gt에서 吏戶의 家內 父兄子弟

인력 23인 가운데 lsquo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rsquo과 lsquo一人先出給縣吏rsquo가

관부에 급사하는 給吏에 해당하고 lsquo一人限田rsquo은 限田의 佃作에 복무하

는 자이다 바로 이어 인용하는 孫休의 詔文에서 吏家의 어려운 사정

에 대해 ldquo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이미 限米를

납부하였는데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rdquo라 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전반부는 給吏로서 복무

하는 것이고 뒷부분은 限田 佃作 복역을 말함이다 즉 한 吏戶의 父兄

子弟 가운데 일부는 전자에 복무하고 일부는 후자에 복무한다 똑 같

은 관부 내지 국가의 역에 복역하는 것이지만 給吏는 분명히 吏(分署

의 담당 吏 州吏)에 給事하는 자라는 점에서 給吏로 칭하여 여타의

복역과 구분한다 그리하여 그 給吏가 결혼이나 계승으로 하나의 戶를

이루면 簡文(A)에서와 같이 某里의 戶籍簿上에서 里의 총 戶民數 아래

에 lsquo其四戶給縣吏rsquo와 같은 형식으로 戶를 本으로 한 給吏로서 명기된

다 그런데 一人의 給吏가 아직 戶를 이루지 못하고 한 吏戶의 成員

(父兄 子弟)으로서 있는 상황이라면 그 戶人의 현재 신분에 의해 그

戶가 표기되었을 것이다

이 문제와 직결되는 다음 기사를 살펴보자 孫權의 제6子로 孫亮에

이어 즉위한 孫休는 그의 즉위 年인 영안원년(258)에 다음과 같이 詔

하였다

「諸吏家에 5인이 있으면 (그 가운데) 3인은 겹쳐서 役에 복무하고 있

다 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이미 限米를 납부하

였는데 군대가 출정하면 또 종군함에 심지어는 家事를 돌볼 자도 없게

되는 것을 짐은 매우 애처롭게 생각한다 그 5인 가운데 3인이 役에 복무

하고 있다면 그 父兄이 (家에) 머물고자 하는 것을 허용해주어 1인을 (役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6에 나가지 않고) 머물게 하고 그 限米를 면제해주며 군대가 출정해도 종

군하지 않도록 하라 (삼국지 권48 吳書 孫休傳 永安元年條)87)

孫休는 즉위 전 재야에 있을 때 시골 생활을 보냈던 바가 있어 그

들의 참상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吏家(吏戶)가 지는 과중한 부담

은 곧 그들이 그만큼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 吏役이 賤視化 되고 厮役으로 인지되고 있던 배경을 위의 詔文은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lsquo吏家rsquo의 식구는 여러 방면의 복무를

중복하여 부담하고 있다 그 가운데 限米 납부 의무는 lt吳簡gt에 의하

면 국가에서 佃作케 하여 운영하는 限田 경작에 대한 租로써 납부하는

것이다 즉 전술한 lsquo二年常限rsquo田을 이 限田으로 보아 그 地租를 限米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다88) 단지 于振波는 限米란 二年常限田과는 관

계가 없고 屯田 경작에 대한 조세인데 衛士 郵卒 傳卒 등의 상비병

과 토지가 없는 수공업자 외지에서 수학하기 위해 온 私學 이탈하였

다가 새로 돌아와 附籍된 還民에게 軍屯이나 民屯에 종사하게 하고 일

부의 부세와 요역을 면제해주면서 限米를 납부하게 한 것이라 한다89)

그의 동일한 글에서 여타 사항에 대해 필자와 일치한 부분에 대해서는

앞에서 찬동한 바 있지만 이 부분에는 수긍하기 어렵다 lt走馬樓吳

簡竹簡gt에는 限米 납부자로 기재된 신분에 전술한 바와 같이 많은

신분이 망라되어 있고 孫休傳에서 말하는 吏戶가 일부 상비병이나 귀

환민 私學등에 한정한 것이 아니고 吏戶 전반의 형편을 들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lt吏民田家莂gt에서 佃田의 총수는 二年常限田과 餘力

田으로 구성 내지 구분되어 있다 즉 常限田은 餘力田에 對比되는 용

어이다 그리고 양자의 畝當 租額이 嘉禾4년 民의 경우 12斛 0456

87) 詔曰 ldquo諸吏家有五人 三人兼重爲役 父兄在都 子弟給郡縣吏 旣出限米 軍出

又從 至於家事無經護者 朕甚湣之 其有五人 三人爲役 聽其父兄所欲留 爲留

一人 除其米限 軍出不從rdquo」

88) 앞에 든 高敏의 글 lt吏民田家莂gt中所見ldquo餘力田rdquo ldquo常限rdquo田等名稱的函義試釋

이래 대부분 이 견해에 따른다

89) 于振波 앞에 든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7斛 州吏의 경우 0586斛 0456斛으로 차이가 있다90) 무엇보다 앞에

서 살펴 본 lt오간gt lt廣成鄕州吏父兄子弟伏處 人名 年紀爲簿gt에 기재

된 州吏의 食口 현황 내역은 孫休傳에서 吏戶의 식구 사정을 말하고

있는 내역과 같은 모습을 전하고 있는데 91)전자에서는 限田이라 하였

고 孫休傳에서는 限米라고 한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限田에 대해 징

수하는 것이 곧 限米이다 따라서 限田이란 二年常限田의 簡稱일 것으

로 본다 lt吳簡gt의 lt吏民田家莂gt에는 이들 限田戶의 佃田額과 그에

대한 租賦稅 납부 內譯이 있다 이 戶는 州郡縣吏 등으로 담당 吏職에

給事해야 하고 從軍도 해야 한다 이러한 양상은 분명히 역의 부담이

중첩된 것으로 일반민보다 더 과중하다 租額인 限米 납부액도 일반민

의 사유지에 대한 租額보다 비율이 높았다

그런데 중요한 사항은 첫째 이렇게 과중한 부담이 중첩된 吏戶의

일면을 보여주는 lt吏民田家莂gt에서 佃作吏民의 戶人(戶主) 신분을 보

면 大男大女州吏群吏縣吏軍吏州卒郡卒縣卒復民士

등으로 吏와 民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들 吏民 모두 佃作

의 의무와 함께 地租로 米穀 布 錢을 납부해야 하고 從軍의 役이 있

으며 그리고 대량의 lt오간gt에 다량으로 보이는 子弟 및 給子弟가 곧

吏의 子弟로 파악된 것에 의하면92) 그들이 납부하는 子弟限米의 부담

도 吏戶의 부담이 된다 또한 lt오간gt에

郡吏公乘李年卅二 算一 (貳2460)

侄子年卅九給子弟 妻大女衷()年卄六 算一 (貳1754)

吉陽里戶人公乘張惕年卄八 算一 給縣吏 (壹1018232)

등의 많은 簡文에서 吏와 그 子弟 給吏들에게 算賦도 부과되고 있다

90) 앞에 든 張福亞 也談lt嘉禾吏民田家莂gt中ldquo二年常限rdquo田的函義 p11의 表1

91) 이에 대해서는 앞에 든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

形成與演變 mdash談長沙走馬樓簡牘札記之六 pp62-63 참조

92) 孟彦弘 앞에 든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爲役之

制 pp1-7 子弟는 吏의 子弟 給子弟는 관부의 給事에 差出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8단지 吉陽里戶人公乘鄭龍(龍 下에 田)年卅六算一給州吏復 (壹3323)

과 같은 lsquo給州吏復rsquo 즉 給州吏이면서 算賦가 復除된 경우가 있는데 이

에 의거하여 給吏는 算賦에서 復除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93) 그러나

위에 든 簡文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부분의 給吏가 lsquo算一rsquo로 기재

되어 있고 소수만이 lsquo復rsquo으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復除되는 경우는

특별한 사정이 있어 그 給吏에게만 특혜를 준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

으로 생각한다 참고로 lsquo腫兩足rsquo자나 lsquo刑兩足rsquo자인 民戶의 戶人도 算賦

가 면제되지 않고 있으며94) 大女도 算賦 납부 의무가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吏戶와 民戶가 지는 국가에의 부담은 吏戶가 각기의 吏職

에 복무하고 일반민호는 그러한 吏職에 있지 않다는 정도 외에는 별다

른 차이가 없다 물론 일반민은 吏職의 役 즉 吏役이 없는 대신에 일

반요역에 복역해야 하고 吏戶는 일반요역에서 면제된다 그러한 사실

을 말해주는 자료로 lt오간gt 戶口簿에 里別로 定應役의 戶數 즉 일반

요역에 응당 복역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진 里別 戶數 문서가 있다

其一百卅八人男 (參431548)

其八十一人(女) (參431144)

其一戶給軍吏 下品 (參430336)

其五戶民 (下)品 (參430235)

其七戶女戶不任調 下品之下 (參430134)

其領役民卅七戶 (參430033)

이 里別 戶口簡은 凌文超의 編次 정리 작업에 의하면 新成里의 總

結簡에 해당하는데95)여기서 일반민호수는 생략하고 給軍吏나 調에서

면제되는 女戶 등의 수만을 기재한 것은 맨 아래의 定應役 戶數를 算

出하는 근거를 기록하기 위함이다 즉 일반민호 외의 給吏 등의 戶數

93) 凌文超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型

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 p5494) 高平里戶人公乘黃高鼰五十二算一腫兩足 (貳 2903) (大)成里戶人公乘何軼年

五十五算一刑兩足 (參626736)

95) 凌文超 앞에 든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

簿rdquo的類型與功能 p40과 lt表3gt 중 p45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9가 총 13戶이고 이들을 제외한 定應役의 戶數가 37호란 뜻이다 그래

서 新成里의 총 호수는 50戶였음을 알 수 있다 新成里의 총 口數 219

명은 lt오간gt의 戶當 口數 평균이 대략 45명 정도임을 감안하면 486

戶이고 50戶와 근접한다 따라서 給軍吏 등 13호는 定應役에서 면제되

는 戶임을 알 수 있다 또 다음 戶口簡은 앞부분 里의 총 口數가 결락

되어 있다

其一戶給朝丞 (貳170263)

其二戶給郡園父 (貳170162)

其五戶尫嬴老頓貧窮女戶 (貳170567)

定應役民卄戶 (貳170466)

여기서는 給朝丞1戶 給郡園2戶 절름발이 노인 빈궁자 女戶 등 5

戶가 役에서 면제되고 그 나머지 20戶가 定應役民이 되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즉 給吏는 定應役에서 면제되고 있다 따라서 給吏는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부에 給事하는 것이기에 당연히 일반요역에서 면제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給吏에도 전술한 바와 같이 吏戶의 가속인 경우가 있고 일

반민 중에 차출된 경우가 있는데 전자의 경우는 관부에서 필요할 때

마다 고정적으로 차출되었을 것이며 일반민의 경우는 본래는 일시적

한시적으로 징발되었을 것이지만 여러 簡文에 戶人으로서 給吏인 자가

있는 것에 의하면 점차 전자의 경우와 같이 吏戶와 마찬가지로 給吏戶

로서 고정적으로 차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定應役이 戶를 부과

단위로 삼고 있다는 점 또한 吏戶의 家屬이 하나의 徵役 단위로서 운

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도 吏戶의 실재성과 그 독립적인

신분성을 말해준다 더구나 일반 민호와 구분된 吏戶 名籍(lsquo吏名籍rsquo)의

존재가 다음의 簡文에서 확인된다

諸鄕謹列郡縣吏兄弟 幷攴 吏名籍 (13-7638)

吏戶의 막중한 부담은 그 家屬의 叛走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0를테면 縣吏 毛章의 15세인 弟(壹 7865) 縣吏 毛車世의 49세인 父(壹

7868) 群吏 黃의 13세인 弟(壹7893) 群吏 谷漢의 29세인 兄子

(壹7905)가 嘉禾 2년에서 3년 사이에 叛走하였다 후한 말 陳寔은 어

려서 縣吏가 되어 항상 厮役에 給事하였는데( 常給事厮役 ) 후에 都亭

의 佐가 되었다96) 그리고 郭太는 대대로 집안이 빈천하고 어려서 고

아가 되었는데 모친이 縣廷에 給事하게 하려 함에 말하길 ldquo대장부가

어찌 斗筲의 役에 處해 있을 것입니까rdquo라 하고 마침내 떠났다97) 당

시 이미 吏役이 厮役으로 인식되어 있었고 斗筲의 役 즉 100석 이하

인 斗食의 位에 처하였음을 말해준다 즉 같은 吏이더라도 100석 이상

인 掾史와 그 이하 사이에는 차등과 구분이 있었다(후술) 그렇지만 이

두 경우는 모두 吏가 되는 것이 선택의 길이었기 때문에 吏戶에 속한

자들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吏戶가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던

것에 비해 이 두 경우는 선택사항이었다 斗食에게도 매우 소액이지만

月俸이 지급되었기 때문에 빈천하거나 고아가 되어 생업을 위해 吏職

을 선택한 것이다 나이도 어리고 집안의 세력 배경도 없는 가운데 吏

가 된 것에 의하면 斗食의 최하단에 속한 吏였을 것이며 이들이 給吏

가 아니고 吏로 칭해진 것은 일반요역 복무에 대신하여 징발 내지 차

출된 경우가 아니고 吏職에 임명된 것이기에 당연하다

縣吏 등의 諸吏役이 厮役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무엇 보다 그 雜

役的인 吏役의 과중함 때문이다 후한 lt張景碑文gt에서 14鄕의 正을

調發하여 勸農의식에 소요되는 土牛 제작에 육칠십만전이 들어가 吏와

正이 매년 患苦에 처함에 男子(庶民) 張景이 매년 그 비용을 출연하여

土牛를 義作해주겠다 하고 그 대신 자신을 縣吏 列長 伍長에 임

용되지 않게 해줄 것과 小繇 징발을 면해줄 것을 청하고 있다98) 즉

96) 후한서 권62 陳寔傳에 (陳寔)少作縣吏 常給事厮役 後爲都亭(刺)佐

p2065

97) 후한서 권68 郭太傳에 (郭太)家世貧賤 早孤 母欲使給事縣廷 林宗曰 ldquo大

丈夫焉能處斗筲之役乎rdquo 遂辭 就成皐屈伯彦學 三年業畢 博通墳籍 p2225

98) 府告宛 男子張景記言 府南門外勸〔農〕土牛 調發十四鄕正 上賦

斂作治 幷土人 犂 耒 卄 蓎 屋 功費六七十萬 重勞人功 吏正患苦 愿以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1서민이었던 張景은 거액의 자금을 출연하면서까지 縣吏 등의 吏役과

小繇의 복역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있다 그는 아직 非吏였지만 吏役에

언제든지 차출될 수 있었고 그 吏役은 매우 번거롭고 힘든 것이었음

을 알 수 있다 단지 張景과 같은 서민이 縣吏가 되어 吏役에 差出되

는 경우 바로 lt오간gt에서와 같은 吏戶가 되어 그 가속이 모두 吏役의

범위에 들어가게 되는지는 不明이다 推斷이지만 世戶로서의 吏戶와

함께 일시적으로 차출되어 일정 기간 만 복무하는 非世戶로서의 吏戶

가 공존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요컨대 lt오간gt과 문헌자료에 보이는 吏戶와 給吏의 면모들은 앞에

서 검토한 胥徒와 lt庶民在官者gt 내지 徒御 導從役人 등과 일맥상통

하는 면이 있다 孫休傳이라든가 lt오간gt에 빈출하는 吏戶 吏民에서의

吏는 500石 이하인 吏 중에서도 200석 이상의 長吏級을 제외한 下吏

즉 百石 이하의 吏를 가리키고 給吏는 吏가 아니되 관부에서 일정 기

간 여러 분서에 勞役으로 복무하는 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즉

庶民在官者 와 상통한다 특히 그들에게 부과되었던 賦稅役의 내역에

서도 위에서 검토한 여러 職役 계통 신분이나 계층의 예와 거의 비슷

하다

孫休傳에서 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라 한

것은 吏家의 父兄은 都에서 州郡縣의 吏로 복무한다는 뜻이고 나머지

3인의 자제는 郡縣吏에 給事한다는 뜻이다 즉 lsquo郡縣吏에 給事함( 給郡

縣吏 )rsquo이란 子弟3인이 郡縣吏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郡縣吏에 下屬되

어 그 업무에 給事한다는 뜻이다 위의 廣成鄕의 lt人名年紀簿gt 簡文

에서 lsquo先出給縣吏rsquo도 州吏7家의 식구 가운데 먼저 縣吏의 업무를 보좌

하기 위해 차출되어 나간 것을 뜻한다 여기서 말하는 郡縣吏는 주로

掾史職으로 사무 업무 중심이고 그 업무를 노동력으로 보좌하는 인력

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lt오간gt의 도처에 諸吏의 사례로써 諸曹倉

吏庫吏監運掾關邸閣船師田戶曹史 등 수십종의 職名이 보이

家錢 義作土牛 上瓦屋 欄楯什物 世世作治 乞不爲縣吏 列長 伍長 徵發小

繇 (高文 漢碑集釋 開封 河南大學出版社 1997 p227)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2는데 대부분 그 업무 처리에 노동인력이 필요하다 십 명 내외의 掾史

員吏 만으로는 사무나 문서작성 관리 업무 이외에는 수행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 인력을 吏戶의 식구로부터 자동으로 差役시키는 시스템이

漢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었음을 위 孫休傳의 기사는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이들 吏家의 식구 현황 파악은 관부에서 항상 필요

로 하고 확보해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lt오간gt의 여러 문서는

그러한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東鄕勸農掾殷連被書條列州吏父兄人名年紀爲簿

輒科核鄕界 州吏三人 父兄二人刑蹱叛走 以下戶民自代 謹列年紀 以

(已)審實 無有遺脫 若有他官所覺 連自坐 嘉(禾)四年八月卄六日破莂

保據 (J22-2543)

여기에서 담당 鄕界의 州吏3인 가운데 그 父兄2인이 受刑과 叛走로

비게 됨에 下戶의 民을 징발하여 바로 충당시켰다는 것이다 이 以下

戶民自代 에 대한 해석에서 下戶를 고용하여 자신을 代理케 한 것이라

는 견해가 있는데99) 그렇다면 戶人인 州吏가 자신의 식구 결원을 책

임지고 직접 下戶를 고용한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해당 州吏의 부담

이 너무 크게 되어 당시 下戶가 자동으로 보충되는 시스템으로 운영된

것일 가능성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諸家의 견해 모두 不明

임을 인정하고 있다100) 어쨌든 吏戶의 노동력을 신속하고 철저하게

보충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은 吏戶 전체의 식구가 관부에

예속되어 있고 세습화 된 상태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단지 孟彦弘은

이 자료를 통해 당시 吏戶의 家屬이 모두 吏였음을 말해준다고 하였으

나101)그렇지 아니하고 吏의 가속에 吏도 있을 수 있지만 아직 吏가

아니고 吏를 노동력 지원으로 보조해주는 給吏도 있고 그 給吏는 非

99) 이 점에 대한 정리는 王素 長沙吳簡勸農掾條列軍州吏等人名年紀三文書新探

(魏晋南北朝隋唐史資料 25 2009) p9의 注 11) 참조

100) 이를테면 孟言弘 앞의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

爲役之制 p16

101) 위의 글 p1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3吏로서 관부에 給事하는 자이며 이런 면에서 전술한 庶民在官者 내

지 lsquo非吏이면서 관에 있는 자rsquo lsquo官과 民 사이rsquo lsquo lsquo半官 半民rsquo lsquo踐更小史

(小吏)rsquo(續漢書輿服志) 등과 상통한 계층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吏戶에 포함되지 않는 給吏가 있었다 吏戶와 給吏戶가 구분되

고 있음은 lt吏民人名年紀口食簿gt의

其七戶給郡吏下品 (壹5447)

其十二戶給縣吏下品 (壹5467)

其一戶給軍吏下品 (參430336)

(其)六戶郡吏(中)(品) ---- (貳4490)

其二戶縣吏(下)品 (貳3307)

등에서 給郡吏 등의 戶와 縣吏의 戶가 구분되어 기록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다 그리고 給吏가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에 속하였음은 위

의 사례 뿐 아니라 lt吳簡gt에서 給度吏 下品之下 (5653) 등에서 알

수 있는데 下戶로 결원을 보충하는 것은 同級의 戶로 충원한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면 또한 당시 吏戶와 給吏의 관부에의 예속성과 신분

성을 보여준다 요컨대 給吏는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여서 평균

의 民戶 보다 더 빈천한 계층인 점도 그들이 관부에 정식의 吏職으로

임명된 吏라기 보다는 非吏인 民으로서 民의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

서에 給事(給役)하는 자들이되 관련 관서의 吏에 배속되고 給事 복무

해야 하는 예속된 신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찍이 宮崎市定이 宋書권94恩倖傳序의 郡縣掾史 幷出

豪家 負戈宿衛 皆由勢族 를 인용하여 豪家 출신으로서의 掾史가 고

관으로 진출하는 경향이 累代 이어지면서 右族이 이루어지고 이를 통

해 위진남북조 귀족제가 출현하였다 하였고102) 楊振紅이 이에 동조하

고 있는 것은103) 부분적으로 再考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당시 孫休

102) 宮崎市定 九品官人法の硏究 -科擧前史 (京都 同朋社 1979(1956)) pp86

-89

103) 楊振紅 앞에 든 吳簡中的吏 吏民與漢魏時期官 吏的分野 mdash中國古代官僚

政治社會構造硏究之二 p34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4傳에서 말한 吏戶는 분명히 豪族勢家가 아니었고 lt오간gt에서 民戶와

함께 lt吏民簿gt에 기록된 吏戶는 下品에 속한 貧層이었으며 그 식구

모두 중복된 賦役의 부담에 시달리는 계층이었다 그 吏戶에는 吏와

給吏로 구분되어 관부에 예속되고 있다 즉 아무래도 豪族大家로서의

掾史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정을 이해하는 데는 전술한

lt周禮gt의 府史胥徒에서 府史가 호족대가로서 辟除된 掾史에 類하고

胥徒가 곧 관부 예속하의 吏戶와 給吏에 거의 相當하다는 면이 있다

吏戶에서의 吏職에 掾史가 있겠지만 관부에 예속되어 있고 직업적 세

습화 되어 있어 호족대가 출신의 掾史와는 구분되었을 것이다 무엇보

다 호족대가 출신의 掾史은 관부에 예속되지도 아니하고 세습의 신분

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掾史層의 존재는 군현의 장관 辟召로 임

용되었을 것이다 반면 吏戶 출신의 掾史는 기술 계통의 전문직일 경

우이거나 개인적 기능의 능력으로 또는 部曲과 같은 상비병 출신이

일반 요역 부담에 대신하여 관련 직무에 세습하게 되거나 또는 일반민

호에서 급히 所要되어 임시로 차출되었다가 점차 세습의 吏戶로 예속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관부에 진 빚으로 예속되었다가 吏戶로 남

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즉 이 吏戶는 관부의 갖가지 所要 用務

에 差出될 상황에 대기되어 있는 戶이다 그 중에 일부는 정식으로 掾

史로 승진되지만 나머지는 윤번이나 필요시 이 방면 저 방면의 分署에

차출되어 給事하며 分署의 長을 主로 모시고 그 아래에서 給事한다

掾史의 吏와 구분하여 그러한 뜻을 반영한 것이 lt오간gt의 도처에 보

이는 수십종의 給某吏다고 생각한다 호족대가 출신으로서의 掾史와

예속신분인 吏戶 출신으로서의 掾史는 그 신분상으로도 士와 서민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기에 宮崎市定의 立論 또한 양자의 구분을 통한

위진남북조의 귀족제 내지 良賤制의 형성을 논하는 보완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근래의 여러 연구들은 掾史에 이렇게 두 방면으

로 구분되는 면과 계층이 있다는 점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였고 吏戶

의 家屬에 吏와 給吏로 구분되는 층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양자의 성

격이 어떠한가를 파악하지 못한 셈이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5한편 給吏는 吏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戶人이나 父兄이 郡吏 등의

諸吏에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당시 吏戶가 직업화 내지 세습화 되어

있었기 때문에 子弟의 給吏 신분도 곧이어 諸吏로 진전될 것은 당연하

다 그래서 lt嘉禾四年吉陽里戶籍簿gt에 吉陽里에 호적이 올라 있는 給

郡吏 逢杲(壹10169) 給郡吏 寥裕(壹10175) 給縣吏 張惕(壹

10182) 給州吏 區張(壹10367) 給州吏 嚴追(壹10149) 등이 lt嘉禾四

年五年吏民田家莂gt의 下伍丘 소속 佃民 名簿에서는 거의 同一人일

것이 분명한데 給郡吏가 群吏로 給縣吏가 縣吏로 給州吏가 州卒이나

州吏로 기재되어 있는 경우도104)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

다 이 경우는 丘에서는 給吏가 보이지 아니하고 里에서만 보이기 때

문에 아직 명확히 해명이 되지 않고 있는 里와 丘의 차이에 따른 것일

가능성도 있고 嘉禾4년과 嘉禾4-5년 戶籍簿에서의 1년 내외의 기간

차이에 따른 신분의 변화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또

한 侯旭東의 정리 조사에 의하면 高遷里의 給縣吏 松棐가 위의 lt田家

莂gt에서는 武龍丘의 縣吏로 기재되어 있고 같은 里의 給縣吏 張喬는

亻平 丘의 縣吏로 기재되어 있으며 宜陽里에 眞吏로 등재된 黃阿 등

6인도 각각 6곳의 다른 丘의 州吏 男子 男子 郡吏로 기재되어 있다

또 陽里의 給郡吏 謝鼠는 夫丘의 男子로 기재되어 있다105)里의 호

적부와 lt吏民田家莂gt의 丘別 佃民 명부에서 그 신분이 男子인 경우

일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양편 모두 里의 호적부에 給郡吏 給縣

吏 給州吏등 給吏로 기재된 경우는 대부분 丘의 佃民 명부에서 각각

群吏 縣吏 州吏로 되어 있고 眞吏가 州吏 郡吏 男子로 기재되기도

하고 給縣吏가 男子로 기재된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일부 사례들은 眞

吏 吏 給吏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것이어서 그 해명이 필요한

데 현재 里와 丘의 구별 차이 眞吏와 諸吏 給吏등의 실체 문제가 아

104) 凌文超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

型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 pp17-18의 lt表一gt

105) 侯旭東 長沙走馬樓吳簡ldquo里rdquoldquo丘rdquo關係再硏究 (魏晋南北朝隋唐史資料2006) pp19-21의 表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6직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어 그 이유를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실

정이다 그러나 신분명으로 이름을 달리하여 그렇게 구분하고 있으며

전술한 바와 같이 給吏가 吏나 眞吏와 다르게 취급되면서 여러 名簿에

구별되어 기재되어 있고 그 독자성도 충분히 입증되기 때문에 위의

예외적인 사항들은 개인별 특별한 사정에 따른 것이거나 아직 여러 異

說로 논란이 되고 있는 里와 丘 등의 구분과 차이 등에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고에서 갖추어 고찰하지 못하고

후고로 미룬다

Ⅵ 결 언

이상의 검토에서 고대 職役의 범주에 들어가는 다종의 신분 내지 계

층과 吏職의 類 그 복무형태 삼국시기에 이르는 전승과 변화의 모습

들을 살펴보았다 우선 職官과 일반요역 복무자와는 신분제와 賦役체

계상 엄연히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례 地官 鄕大夫에 그

舍란 國中의 貴者賢者能者服公事者老者疾者에게는 모두 舍

한다는 것이다 에 대한 후한의 鄭司農의 注에 服公事者란 지금 吏에

게 復除해주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고 하였다106) 여기서 lsquo舍rsquo란 復

除와 같은 뜻이다 그 대상 가운데 lsquo國中의 貴者賢者能者rsquo 가운데

貴者는 공경귀족 賢者와 能者는 命官과 辟召된 관리에 해당한다 그리

고 그 아래의 服工事者는 다시 2분되는데 200석 이하의 吏職 내지 掾

史職(小吏)이 있고 그 아래에 庶民在官者 내지 lsquo非吏로서 官에 給事

하는 자rsquo로서 給吏層이 있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賢者와 能者 까지를

職官이라 하면 그 이하인 服工事者 가 곧 職役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

석된다 그리고 職官과 職役 복무자는 모두 일반요역에서 면제되는 자

106) 其舍 國中貴者賢者能者服公事者老者疾者 皆舍 注云 lsquo服公事者rsquo

謂若今吏有復除也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7들이다 이 중에서 職役 복무자는 일반요역에서 면제되는 대신에 각종

의 吏職과 給吏職에 복무하였다 여기서 칭한 給吏職은 lsquo(小)吏rsquo에 대비

하여 칭한 給吏를 그 성격상 그렇게 칭할 수 있으며 그 독립적 계층

내지 신분으로서의 실태가 lt長沙走馬樓吳簡gt의 발현에 의해 상당 부

분 밝혀지게 되었다 그런데 服工事者 즉 職役 담당 계층의 범위가

상당히 넓어서 그 職役의 양태가 모든 면에서 같은 것은 아니고 일부

분 다른 측면들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고대의 긴 기간에 걸쳐 거의

공통으로 庶民在官者 lsquo非吏이면서 관부에 給事하는 자rsquo lsquo官과 民 사

이rsquo lsquo半官半民rsquo의 성격이 유지되고 있는 면을 볼 수 있다

이렇게 職役 담당자의 연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곧 lt주례gt에 보이

는 관리 조직의 최하위에 위치한 府史胥徒이다 이 가운데 府史

가 대략 후대의 掾史職이나 lt吳簡gt의 諸吏에 속한다면 胥徒는 給吏層

에 상통하는 면이 많다 단지 lt吳簡gt에 다수 보이는 吏役 下의 吏戶

는 그 과중한 부담과 厮役 및 빈천함의 성격상 오히려 胥徒에 상통하

는 면이 많다 이러한 시대적 차이는 吏戶의 예속화 및 세습화의 진전

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한편 시대의 여건 차이로 여러 부분에서 胥徒

와 후대의 職役 담당 계층 사이에는 다른 면도 있다 胥徒나 給吏層이

기본적으로 일반 서민 출신으로서의 服工事者 였던 것과는 달리 周에

서 三國에 이르는 동안 服工事者 라는 면에서 同類이지만 일반 서민

과는 구분되는 여러 相異한 계층에 속한 신분들이 속하여 있었다 예

를 들면 工商食官 에 속하는 工商 皁隸食職 에 포함되는 吏에 속

한 徒隸 층 넓은 의미의 徒隸層이라 할 수 있는 皂隸牧圄

僕輿人 그리고 下吏層에 들어가는 樂祝醫衛士 및 走卒伍伯

之類 등이 그들로 그 출신은 일반 서민이거나 賤民 또는 刑徒였지만

관부에 寄生하며 給事한다는 면에서는 공통이다

이들의 복무 형태는 항상적 근무 일시적 근무 組別 교대제 등 여러

가지로 징발 내지 차출되었고 lsquo冗rsquo과 lsquo更rsquo은 그러한 차이를 구분하는

용어로서 나온 것이다 근무에 따른 보수를 받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 구분은 아직 분명치 않은 부분이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8있다 그러하지만 최소한 생업을 관부에 의탁하는 자들에게는 지급되

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年俸制에 대비되는 稍食 즉 소액의 月俸 내

지는 근무일수 기준의 지급 형태로 지급되었다 이는 그들의 근무가

주로 일 단위나 월 단위로 이루어지고 계산되었기 때문이다

lsquo官rsquo과 lsquo吏rsquo는 서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선진 이래 본래 상하의 신

분으로 명확히 구분되었고 漢代에 혼용 내지 통용되는 경향이 있었지

만 양자가 구분되는 면 또한 여전하였다 吏는 官에 가까운 吏가 있고

民으로서의 吏가 있어 전자를 lsquo官吏rsquo라고 하면 孫休傳의 詔에서 거론된

吏家는 보통 吏民으로 합칭될 경우의 吏라고 할 수 있다 lt吳簡gt의

lt吏民簿gt나 lt戶口簿gt 등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실태에서 후한 말에

서 삼국기의 전형적인 職役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이제까지 그

존재에 대해 거의 간과되어 왔던 給吏에 대해 lt吳簡gt은 수십종의 給

吏 실태를 전해주고 있어 그 의의가 크다 吏의 사무 업무를 직접 勞

役으로 보조해주는 給吏는 관부의 행정 업무 처리에 있어서 항상 필요

한 노동력 제공자였다 이러한 노동력은 어느 시기이든 공통으로 필요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연원을 lt주례gt의 胥徒에서 찾아볼 수 있었

고 여러 면에서 職役의 실례로서 공통하는 면들을 지적할 수 있었다

후한 말 삼국시기의 吏와 給吏는 일반서민 신분으로서의 吏이며 吏戶

로써 관부에 예속되어 그 食口 성원이 거의 세습하여 吏役에 종사하

고 있다 이들은 일반서민에 비해 일반요역이 면제된다는 점을 제외하

면 그밖에 각 吏職에 따른 吏役의 기본 직무 외에 限田의 佃作 의무와

그 地租로서 限米 布 錢을 납부해야 하며 從軍해야 하는 등 중첩된

부역으로 일반서민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또한 그 戶品 이

下品 내지 下品之下에 속한 貧戶 출신이다 따라서 같이 吏로 칭하지

만 豪族勢家 출신으로 掾史職을 거쳐 상급관으로 진급하고 命官에 오

르는 累代 高族의 世家 출신 掾史와 빈천한 서민 출신으로서 관부에

예속된 吏戶 출신으로서의 掾史와는 구분된다 이 吏家 내지 吏戶는

吏의 칭호로 불리지만 일반민보다 더 많은 부담을 지고 있기에 그들의

役은 후한과 삼국기에 賤役 賤職 내지 厮役으로 칭해지며 기피되고 있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9다 따라서 이 계층이 官吏로 합칭되는 경우의 吏와 구분되는 것은 당

연하며 그 호칭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늦어도 孫休 시기의

문서와 간독자료에 등장하는 lsquo吏家rsquo나 lsquo吏戶rsquo는 이미 그러한 계층에 대

한 專稱으로 형성된 듯하다

한편 諸吏役의 복무에는 常勤의 방식과 1년에 1개월 내지 수개월만

輪番 형식으로 복무하는 비상근의 lsquo踐更 방식의 근무rsquo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한 비상근 복무자도 있었을 것이다107)그리고 그 복무에

대한 급여가 그 吏役을 생업으로 하는 常勤者에게는 당연히 小吏에 대

한 봉록이 지급되었을 것이다 반면에 給吏의 役은 일반요역에 대신하

는 복역이라는 면에서 비상근 내지 윤번 형식의 차출이었을 가능성이

많지만 지금까지 lt오간gt에 소개된 자료로는 어느 쪽이라 단정하기가

어렵다 胥徒의 役은 어디까지나 상급의 관원들과는 달리 일반민의 요

역 의무를 대신하여 관부에 給事하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lt오간gt

에서의 給吏와 상통한다 給吏에 대한 봉록 지급의 여부도 아직 不明

이다 단지 限田의 지급이 祿田과 같은 성격의 것이었을 가능성도 고

려되지만 그 租額이 커서 혜택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노동력의 징발로

서 해석되는 부분도 있다 또한 給吏의 관부에의 給事가 일반 요역과

같이 組別 순환제였는지의 여부는 아직 분명치 않다 lt奏讞書gt의 樂

人의 예와 같이 一月一更制와 같은 순환근무제였을 가능성도 있는데

대체로 두 가지 형태가 공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lt吳簡gt에 의거한 의론들은 아직 자료 해석과 해명이 충분치 못하여

불분명한 상태에 있는 사항들이 많은 실정이기 때문에 해당 사항이 새

로 규명 되는대로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lt오간gt의 미해명 사항

에 대한 개별적인 탐구도 본 과제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필요하다 그

리고 아직 소개되지 않은 대량의 lt오간gt이 연속하여 출간되면서 새로

운 자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107) 廣懶薰雄 앞의 秦漢律令硏究 pp310-311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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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103

(中文摘要)

中國古代的職役與職官的問題

朴 健 柱

通過上述的檢討 基本上職役範疇內的多種身分 乃至階層與吏職之類

其服務形態至三國期的傳承與變化等方面已然解明 職官與職役服務者

的一般徭役均免除了 此二者中職役服務者 用種種lsquo吏職rsquo與lsquo給吏職rsquo服務來

代替其一般徭役 直至三國時期爲至漫長的期間內職役擔當者 庶民在官者

lsquo非吏而給事官府者rsquolsquo官與民之間者rsquolsquo半官半民rsquo的性格几乎共通維持

職役擔當者的淵源卽是lt周禮gt所見的官吏組織最下位的府史胥

徒 此中 府史是大略屬于後代掾史職或是lt吳簡gt的諸吏 胥徒則是相通于

給吏層的側面多的 但是lt吳簡gt所見多數的吏役下吏戶其過重的負擔與厮

役及貧賤的性格上 倒是與胥徒相通方面較多 這個時代的差異像是吏戶的

隸屬化及世襲化的進展招來的結果 一方面因爲時代的與件差異 胥徒與後

代的職役擔當階層間有多方面的異質 胥徒與給吏層基本上是一般庶民出

身的 服工事者 如此不同 從周至三國期間從 服工事者 上是同類而與一

般庶民相區分的多種相異的階層面上身分較多 例如 工商食官 所屬的工

商 皁隸食職 所包含的 吏所屬的徒隸 層以廣義的徒隸層可以稱謂的

皂隸牧圄僕輿人 以及下吏層所屬的樂祝醫衛士 及走

卒伍伯之類等 他們的出身是一般庶民 或是賤民乃至刑徒 在官府寄生

而給事的層面上是共通的

其服務形態是恒常的勤務 一時的勤務 組別交代制等以多種方式徵發乃

至差出 lsquo冗rsquo與lsquo更rsquo是其差異區分用的用語 支給勤務報酬與否是不分明之事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04項 可是至少生業官府依託者是被支給的 其支給方式是與年俸制相對的稍

食 卽少額的月俸乃至勤務日數基準的支給方式 因此他們的勤務和支給計

算主要是日單位或是月單位

於lt吳簡gt之lt吏民簿gtlt戶口簿gt等所見的吏與給吏的實態 可以看到

從後漢末至三國期間典型的職役的樣相 尤其向來看過給吏的存在 lt吳

簡gt所傳數十種給吏的實態 其意義是巨大 給吏是以直接的勞役補助吏的

事務業務 是官府的行政業務處理上恒常的必要勞動力提供者 這種勞動力

許是官府運營上至今爲至所有過的任何時期共通要緊事項 可以推斷給吏

的淵源於lt周禮gt的胥徒 而且可以指摘以職役的實例有多方面共通的層面

後漢末三國時期的吏與給吏是一般庶民身分之吏 以吏戶隸屬於官府 其食

口成員率多世襲地從事吏役 他們除比一般庶民免一般徭役外 也需要履行

各吏職別吏役的基本職務 佃作限田義務 以其地租納付限米布錢 從

軍義務等重疊的賦役 因此他們有比一般庶民更重的負擔 而且他們的戶品

是下品乃至下品之下所屬的貧戶出身 從而他們雖一樣稱謂lsquo吏rsquo 却與豪族

勢家出身經歷掾史職進級上級命官的累代高族的世家出身的掾史與以貧賤

的庶民出身於官府隸屬的吏戶出身的掾史是不同的階層 這個吏家乃至吏

戶雖被稱謂lsquo吏rsquo 但是彼役後漢三國期被稱謂賤役 賤職乃至厮役 而且被忌

避 從而此階層是與lsquo官吏rsquo合稱的境遇的lsquo吏rsquo爲區分是理所當然 其稱號也只

得相殊 于是最遲至少到於孫休時期文書與簡牘資料所見的lsquo吏家rsquo與lsquo吏戶rsquo

許是已經成爲如此階層的專稱

依照給吏的役是一般徭役代替的服役 其運營形態是非常勤乃至輪番形

式的可能性大的 但是迄今依據lt吳簡gt所見的資料還難以斷定何者是對的

胥徒的役是與上級官員異樣 以一般民的徭役義務代替給事於官府 本着那

樣的側面與lt吳簡gt所見的給吏相通 給給吏俸祿與否也還不明 但是從限

田的支給是與祿田同一的性格的可能性上看 因爲其租額是多的 與其說惠

澤倒是有可能解釋爲勞動力的徵發 給吏的官府給事是與一般徭役同一方

式的組別交代制與否還不分明 如lt奏讞書gt所見樂人的事例 有可能一月

一更制方式交代勤務制 筆者認爲大體上是兩個方式共存

關於lt吳簡gt資料的議論是因爲解釋與解明上許多異說 不分明的關聯事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105項也有很多 所以該事項的解明將其完備需要補完

주제어 직역 직관 서도 도예 이역 이호 급리 서민재관자

關鍵詞 職役 職官 胥徒 徒隸 吏役 吏戶 給吏 庶民在官者

Keywords lavor duty at office(official lavor) high-ranking officialrsquos duty(official

post) xu-tu tu-li minor officials lavor minor officials family minor half

officials and half the masses in lavor services at office the masses in lavor

services at office

(원고접수 2013년 11월 15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12월 16일 수

정원고 접수 12월 19일 게재 확정 12월 26일)

Page 9: AB C D - KNUwebbuild.knu.ac.kr/~china/CHR/chr2013/chr87pdf/chr87-02... · 2014. 1. 4. · FG9 ±°'c&`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3여 府史와는 달리 胥徒가 모두 요역 의무로 징발되어 복무하는 자들로

본 것이라는 점이다 이 府와 史의 직무에 대해 정현과 가공언은 주례 小宰 宰夫의 8職 가운데 다섯째 府는 契하여 藏을 治하고 여섯

째 史는 문서로 贊治(보좌관의 업무)함을 관장한다( 五曰府 掌官契以

治藏 六曰史掌官书以赞治 에 의거하여 府는 문서와 器物의 藏(보

관 관리)을 관장하고 史는 문서의 起草를 관장하는 직책으로 해석하

였다 이는 진한시기 각 관부의 屬吏 掾史의 庶務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lt雲夢秦律gt 秦律雜抄(p133)에 佐 史 이상인 吏가 짐을 지고

운반하는 馬와 문서 간수를 담당하는 私卒(隨從의 卒)을 부려서 장사

하도록 하여 이익(錢)을 취하였으면 모두 遷刑에 처한다 라 하였는데

lsquo문서 간수를 담당하는 私卒rsquo이란 佐史 이상 관리 직속의 下屬으로서

그 상관을 隨從하며 보좌하는 까닭에 私卒이라 한 것이고 家內의 私

卒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정리소조가 lsquo隨從의 士卒rsquo로 해석하였는데

문서 간수를 직분으로 하는 史에 下屬된 卒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

든 府史의 史 및 그 下屬의 인력이 전국진에서도 설치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周禮天官 宰夫에 기술된 宰夫8職에서 일곱째 胥는 그 업무가 掌

官叙以治叙 인데 鄭注는 治叙란 관부에서 次序함이니 마치 지금(漢에

서) 侍曹 伍伯이 관리의 朝會에서 傳言 報告하는 것과 같다 胥가 什

長이 된 경우도 또한 그러하다 까닭에 漢法의 사정을 든 것이다(如今

侍曹伍伯 傳吏朝也 胥爲什長亦然 故擧漢法况之也) 라 해석하였다

좀 난해한 설명인데 이를 부연 설명한 賈疏는 이미 才智가 있어 什

長이 되어 관부에서 次序의 업무에 當하니 반드시 사람을 使役하는 곳

에서 그 徒를 科次한다 까닭에 관부에서 次叙한다고 하였다 로 해석

한다 즉 보통 胥徒로 함께 칭해지는 胥는 徒 중에서 才智가 있어 什

長으로 선발된 층으로 관부의 次序 업무를 맡게 되는데 徒를 使役하는

곳에서 그들을 통솔하며 科役한다는 것이다 如今侍曹伍伯 傳吏朝也

도 난해한데 賈疏는 漢에서 侍曹에서 伍의 長인 伍伯(伍長)에 이르기

까지 吏朝(관리의 朝會)에서 群吏가 諸官의 사무를 보고하여 傳하는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4것으로 해석하였다14)즉 侍曹에서 최말단의 부서 단위에 이르기까지

담당 부서의 朝會 때 각 하급 단위의 長이 업무 보고를 하는 것이다

그런대 이 伍伯은 5인조의 長이 아니고 漢의 執金吾의 속관에 (持戟)

五百(伍伯)二十人 이 있고 이 lsquo伍rsquo의 義를 lsquo當rsquo으로 lsquo伯rsquo의 義를 lsquo道rsquo로

해석하여 앞에서 導引하며 길을 驅除 정리하는 吏라고 한 韋召의 해석

이나15) 司隸校尉의 속관으로 先導隊나16) 門番의 임무를 하고 있는 사

례에17) 의하면 하급의 賤職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후한에 伍伯이

자주 보이는데 모두 走卒 鈴下와 連稱되거나 병렬되어 있어 일찍이 好

並隆司는 走卒은 伍伯이라고 하는 職役에 類한다 고 하여(후술) 모두

관부 말단의 職役 내지 賤職이라 하였다18) 凍國棟은 漢唐間의 伍伯이

微賤의 役이였지만 그 職의 성격상 권세를 빌려 남의 생사를 좌우하

고 謝禮錢을 챙길 수 있는 자리였다고 하였다19) 따라서 여기서는 吏

朝에 참석하는 최말단의 吏員으로서 先導 門番 등 役에 복무하는 伍伯

을 기술한 것이라 하겠다 胥徒는 곧 伍伯과 같이 관리의 최말단 수종

원이면서 그 손발 내지 爪牙의 기능도 하는 층이다 이러한 류의 최하

급 단위의 長은 什長이고 胥는 곧 그 什長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주례에서 각 관부의 徒는 그 員數가 거의 대부분 胥의 10배수이다 그

리고 관부의 次序 업무란 담당 단위의 胥가 그 소속 성원의 질서를 유

지하며 아울러 요역 징발된 民의 徒를 지휘 통제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후술)

이어 여덟째 徒는 그 업무가 官의 令으로써 徵令을 관장함(掌官令

14) lsquo如今侍曹五伯传吏朝也rsquo者漢時五人爲伍 伯 長也 是五人之長 言傳吏朝者

傳在朝群吏諸官事務於朝也

15) 후한서 宦者列傳 曹節條의 注에 韋召辯釋名曰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伍 當也 伯 道也

使之導引 當道陌中 以驅除也

16) 續漢書 輿服志上에 公卿以下至縣三百石導從 置門下五吏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車前伍伯 公

八人 中二千石 二千石 六百石 皆四人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17) 謝承後漢書에 華松家孤微 其母夜夢兩伍伯夾門 言司隸在此

18) 好並隆司 漢代下層庶人の存在形態(一) (史學雜誌 82-1 1973) pp17-1919) 凍國棟 漢唐間lsquo伍伯rsquo淺識 (中國中古經濟與社會史論考 湖北敎育出版社

2005) pp25-35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5以徵令) 인데 얼핏 徒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내용인 듯하다 정현은

이 lsquo徵令rsquo의 업무를 趨走給召呼 라 하였다 賈疏는 그 徒가 朝會에서

뛰어다니는 것을 금지시키고 官人에게 복역자를 공급하고 그들을 호

령하며 사역시키는 일이다(其徒止爲在朝趨走 供給官人召呼使役之事也)

고 해석하였다 관부 내에서 많은 복역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까닭에

그들이 소란 피우지 못하게 질서를 잡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서 徒에 의해 징발되고 사역되는 층은 관부에 복역 중인 刑徒 요역에

복무 중인 일반 서민 등일 것이다 주례의 각 관부에서 徒의 수는

수십 명에서 수백 명 많은 경우 8백명에 이르기도 한다 이들의 노동

력은 각 관부별로 항상적으로 갖추어진 것이지만 이 보다 더 많은 노

동력이 필요하여 형도나 일반 요역 복무자들을 징발하게 된다 그리고

그 징발된 노동력을 호령하며 질서를 잡고 사역시키는 직무도 필요하

게 된다 물론 징발된 자들을 사역시키는 일 뿐 아니라 자신들이 직

접 여러 노역의 所管 업무에 복무해야 한다 이를테면 地官 牛人에

胥二十人 徒二百人 이 있고 그 직책은 公牛의 사육이며 稻人에 胥

十人 徒百人 인데 그 직책이 稻田의 경작이고 夏官 虎贲氏에 胥八十

人虎士八百人 인데 鄭注에 의하면 徒라 하지 아니하고 虎士라 한 것

은 徒 가운데 勇力者로 선발된 까닭이다 하였으며 그 일부 직무에 同

司甲 司戈盾 司弓矢 繕人 校人 趣馬 巫馬 등에 속한 수십

명 내외의 徒는 모두 무기제조나 다루는 법 무기 성능 감별 馬의 감

별 養馬기술 馬祖 馬步 등의 神을 통해 馬의 질병을 파악하는 巫術

등에 뛰어난 상급자들 밑에서 보조 지원의 일 등 말단의 업무를 처리

한다 전문 기술과 지능이 필요한 업무인지라 말단의 업무 처리도 상

당히 명민한 자질이 필요하다 따라서 일반 서민 가운데서 이러한 재

능과 자질이 있는 자로 충원한다 이러한 각 관부의 업무 처리는 후대

에도 익히 보이는 사례이다 鄭玄은 胥를 lsquo諝(智者)ldquo로 읽어 才知의 뜻

으로 해석하였는데 같은 徒의 무리 중에서 才知者로 뽑힌 자라는 뜻으

로 보았다 胥가 什長인 까닭에 10인 가운데 1인 비율로 뽑힌 셈이다

아울러 徒 전체가 일반 서민으로부터 뽑힌 자들이라 할 수 있다 단지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6胥徒의 신분상 복무형태상의 제반 사항이 후대에 그에 상당하거나 유

사한 신분층과 사례에 대비할 때 상당히 다른 면이 많다는 사실이다

趙伯雄은 주례의 胥徒는 전국기까지 노예 厮 童보다 윗 등급이지만

거의 비슷한 신분이었고 厮役 내지 賤役의 담당층이었으며 徒가 한에

서는 주로 刑徒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고 하였으나20) 아래

기술하는 내용에 의하면 그러한 해석에 따를 수 없는 면이 많다 또한

한에서 徒는 형도 뿐 아니라 여러 무리를 가리키는데 통용되고 있어

여러 자료에 등장하는 徒가 가리키는 사항은 무척 다양하다

위의 注疏에 의하면 經文에서 徒의 업무를 官의 令으로써 徵令을

관장함(掌官令以徵令) 이라 한 것은 上部의 지시를 받은 徒가 새로

징발되는 徒의 징발 업무 및 이들을 인솔 지휘 사역하며 그 지시사항

(작업)을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胥와 徒가 모두 庶民在官者 라는 입

장에서 보면 徒가 최하위이지만 lsquo在官者rsquo이고 제8위와 제9위의 서열에

있으며 胥와 徒가 각각 6인과 5인이 食할 수 있는 토질의 경지 百畝

를 代耕의 봉록으로 받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이 출신은 징발된 요

역 복무자와 같다고 하더라도 여타의 징발된 일반 요역 복무자와는 구

분되는 계층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후대의 胥吏도 일반 서민출신이지

만 일반 서민과 다른 계층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 같다 만약 曾我部精

雄의 견해와 같이 府와 史까지만 庶民在官者 이고 胥와 徒는 그에

들지 못하는 것이라 한다면 주례 원문에 胥와 徒가 엄연히 제8위와

제9위에 올라 있고 봉록으로써 百畝를 받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기 어

렵게 된다

그리고 특별히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앞에 인용한 鄭注에 이는(胥

와 徒는) 民이 徭役을 給한 것이니 지금의 衛士와 같다 고 한 점이다

그래서 후한 중후기 衛士의 운영 형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또 鄭

玄은 駁五經異義에서 周禮에서 이른바 모두 징발한다 한 것은 胥

徒로 하여금 公家의 事에 給하게 한 것을 말함이니 지금의 正衛와 같

20) 趙伯雄 lt周禮gt胥徒考 (中國史硏究 2000-4) pp10-12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7다 고21) 하였다 한에서 궁성 내지 중도관에 番上 守衛하는 役은 正卒

의 役과 일반 更卒의 役이 있는데 鄭玄이 특별히 正衛라 한 것은 正卒

로서의 役임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의 요역 운영체제에서

衛士가 上番하는 役은 한구의에 民의 나이 23세가 되면 正이 되고

1년간 衛士 1년간 材官 騎士에 복무하며 활쏘기 말달리기 戰陣을 익

힌다(民年二十三爲正 一歲以爲衛士 一歲爲材官騎士 習射御騎馳戰陣)

라 한 것에 의하면 正卒이 그 복역 대상자이고22) 각 군 단위로 1년씩

21) 禮記王制 五十不從力征middotmiddotmiddot 의 條 孔穎達疏引 周禮所謂皆征之者 使爲胥

徒 給公家之事 如今之正衛耳

22) 漢의 正과 正卒 및 상비군의 문제에 대해서는 종래 여러 이견이 있다

正을 正卒로 보고 正卒이란 更卒(小繇)의 對稱으로서 병역의무자이고 재관

기사 위사등이 곧 정졸이라는 설이 가장 많이 받아드려지고 있다(濱口重國

秦漢時代の繇役勞働に關する一問題 秦漢隋唐史の硏究』上卷 東京 1966

1980 勞幹 漢代兵制及漢簡中的兵制 歷史語言硏究所集刊 10 1948 山田

勝芳 後漢時代の繇役と兵役 歷史 66 19869)正卒은 앞의 설과 같지만 正은 23세에서 56세 사이의 남자 즉 正丁 을 가리

킨다는 설(西村元佑 漢代の繇役制度 東洋史硏究 12-5 1953)正卒과 更卒이 별개인이 아니라 동일인이고 更卒은 正卒이 된 이외의 해에

매년 1개월의 역역에 복무하는 자를 가리키며 正은 23세-55세까지의 正丁인

데 正卒은 그 가운데 2년간 衛士 材官 騎士 등의 實役에 복역하는 것이라는

설(西田太一郞 漢の正卒について 東洋の文化と社會1 東京 1955)

材官 騎士등이 일반민에서 材力 있는 자로 선발되어 군국에서 常駐하는 전

문병사로서 직업군인인 lsquo士rsquo인데 대해 正卒은 일반민이 23세에 1년간 병졸로서

근무하고 1년간 衛士로 長安에 上番한다는 설 즉 正卒은 직업군인인 材官 騎

士와는 兵役體系上 別個의 것으로서 일반민의 병역 복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는 설(大庭脩 材官攷 -漢代の兵制の一班について 龍谷史壇 36 1953)正卒이란 23세에 이른 자 가운데서 신체강건한 자를 뽑아 衛士 材官 騎士

樓船 등의 어느 한 兵種에 복무하게 한 것이라는 설(濱口重國 勞幹 西村元佑

山田勝芳 앞의 논문 平中苓次 漢代の官吏の家族の復除と軍賦の負擔 中國

古代の田制と稅法 京都 1967) 諸說의 대부분은 이 견해를 공통적으로 취하

고 있다

秦漢에서는 始傅에서 免老까지의 모든 남자가 병역의무를 지는데 正卒은 그

適齡남자를 統稱하는 말이며 따라서 郡兵이나 衛士 戍卒은 正卒의 일부분이라

는 설(臧知非 秦漢lsquo正卒rsquo辨釋 中國史硏究 1988-1)正이란 傅籍된 待役者(兵役과 力役 포함)를 말하며 正卒은 어떤 특정의 役

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고 正(待役者)과 卒(服役中에 있는 正)로 구분되어 있

는 말이며 秦漢代에 병역 복무는 일부 병역신분에게 만 부과된 것이어서 나머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8조별 순번으로 상경하여 복역한다 正卒은 일반 更卒 중에서 신체강건

용맹 등으로 선발된 자들로 상비군 내지 직업군인의 성격이 강한 집단

이다 즉 그들은 일반민(서인)이면서도 그 중에서 선발되어 군사로써

免老에 이르기까지 복무하는 까닭에 일반민과는 다르다 胥徒 또한 서

인이면서 관부에 복무하는 까닭에 일반민과는 다르다 衛士는 특히 평

시에 도성(중도관)을 수비하기 때문에 관부에 거처하게 되고 胥徒 또

한 관부에서 직접 給事하는 까닭에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면에서 鄭玄

은 양자를 같은 성격의 계층으로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衛士가 일반

민에서 선발된 자들이고 胥는 徒 중에서 才智로 선발되고 徒는 분명

치는 않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일반 民庶 가운데 담당 직무 수행에 어

느 정도 자질을 갖춘 자로 선발된 자들일 가능성이 크다 또 漢書권74魏相傳의 顔注에 京師의 여러 관부에 와서 戍卒이 되는데 지금의

衛士가 上番하여 여러 官司에 나누어져 복무하는 것과 같다 라23) 한

것에 의하면 衛士의 이러한 복역 모습은 각 官司에 배치된 胥徒의 복

역 형태와 같다 전한 京師에서 복무중인 衛士의 수는 景帝末傾에 매

지 일반 白徒는 병역에 복역하지 않는다는 설(孫言誠 秦漢的繇役和兵役 中國史硏究 19873 및 ldquo爲正一歲rdquo辨 文史 31 198811)濱口說과 같이 正을 正卒의 略稱으로 보지만 濱口씨가 正卒을 일반적인 兵

士로 본 것과는 달리 庶民 중에서 일부가 선발되어 兵士(材官 騎士 등)가 된

것이며 이들은 일반서민과는 상대적으로 구별되는 신분 말하자면 獨自의 兵

士身分 으로서 일반서민과 같은 역역(更卒) 의무가 없었고 일반서민과는 다른

부담체계하에 있었다는 설(重近啓樹 秦漢の兵制について -地方軍を中心とし

て- 人文論集(靜岡大學) 36 1985)正卒은 일반민이 20세로 부터 2년간 복무하는 것이며 材官 騎士는 이와는

달리 전문병사로서 23세에서 56세까지 복무하는 것이라는 설(藤田勝久 前漢

の繇役勞動とその運營形態 中國史硏究 8 1984)한편 李成珪는 材官 騎士는 卒에서 징발된 전문 병사였고 1년 복역 후에도

예비역으로 분류 비상시 동원되었지만 (軍)吏나 士에 속하지 않는 자들로서

力役 복역의 한 형태인데 董仲舒가 말한 lsquo一歲力役rsquo은 바로 郡卒로 1년 복무하

는 材官 騎士의 役을 말한 것이라 한다(이성규 前漢 更卒의 徵集과 服役 方

式 -松栢木牘 47호의 분석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09 200912

pp33-34)

23) 來京師諸官府爲戍卒 若今衛士上番分諸司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9년 2만인 武帝 즉위 후 1만인으로 감하고 얼마 후 5천인을 늘려 武帝

후기에는 1만5천이었을 것으로 보인다24) 또 1개 군에서 番上하는 수

가 數千에서 2~3천인이었던 사례가 있다25) 전한 말 成帝 시기의 사

정을 말해주는 尹灣漢簡의 lt東海郡下轄長吏不在署 未到官者名籍gt

에 군현 밖으로 外勤出張 중에 있는 長吏의 현황표에 費長孫敞 十月

五日送衛士 가 있는데26) 費邑의 長 孫敞이 衛士를 送하는 업무로 출

장하여 아직 귀환하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동해군 下轄의 縣(18)邑

(2)侯國(18) 38곳(lt集簿gt) 가운데 오직 費邑에서만 衛士가 上番되고

있다 이에 의하면 衛士의 상번은 각 군에서 縣級 단위로 교대 상번하

는 것으로 보인다 濱口重國은 후한에서 正卒의 군현상비군이 폐지되

었지만 전한에서와 마찬가지로 매년 연말에 1년의 복무가 끝나고 귀향

하는 衛士들에게 황제가 향연을 베푸는 饗遣故衛士儀가 행해지고 있는

사례를 들어 衛士의 上番은 후한에서도 행해지고 있음을 지적한 바가

있다27) 아울러 그는 군현 상비군 폐지 후 중앙의 衛士 부대가 2500

내지 2600명인데 이는 중앙 인근 지역에 한정하여 징발된 자들로 보

아야 한다고 하였다28) 후한 周禮注에서 鄭玄(127-200)의 衛士 인용

이 전한시기의 사정에 의거한 것인지 아니면 그의 활동시기인 후한 후

기의 사정에 의거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후한 중 후기에도 衛士의

上番制가 부분적으로나마 유지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4) 濱口重國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隋唐史の硏究』上卷 東京

1966 1980) p286 注2)

25) 「上臨饗罷衛卒 衛卒數千middotmiddotmiddot」 (漢書 권77 蓋寬饒傳) 「河南卒戍中都官者二三

千人middotmiddotmiddot」 (漢書 권74 魏相傳)

26) 張顯成 周羣麗 尹灣漢墓簡牘校理(上篇) (天津古籍出版社 2011 3) p32

27) 濱口重國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隋唐史の硏究 (上)) p283

28) 濱口重國 위의 글 pp284-285 그 주된 근거는 속한서 백관지3 尙書條에

蔡質漢儀曰 ldquo右丞與僕射對掌授廩假錢穀 與左丞無所不統 凡中宮漏夜盡 鼓鳴

則起 鍾鳴則息 衛士甲乙徼相傳 甲夜畢 傳乙夜 相傳盡五更 衛士傳言五更 未

明三刻後 雞鳴 衛士踵丞郎趨嚴上臺 不畜宮中雞 汝南出雞鳴 衛士候朱爵門外

專傳雞鳴於宮中rdquo 應劭曰 ldquo楚歌 今雞鳴歌也rdquo 晉太康地道記曰 ldquo後漢固

始鮦陽公安細陽四縣衛士 習此曲於闕下歌之 今雞鳴是也rdquo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0中都官의 몇 몇 部署에 給事하는 衛士의 員數 규정이 있는데 속한

서 백관2 注引 漢官의 光祿勳에 81인 太宰令에 15인 高廟令에 15

인 世祖廟令에 20인 衛尉에 60인 南宮衛士令에 537인 北宮衛士令에

471인 右都候에 416인 左都候에 383인 南宮南屯司馬에 102인 (北)宮

門蒼龍司馬에 40인 玄武司馬에 38인 北屯司馬에 38인 北宮朱爵司馬

에 124인 東明司馬에 180인 朔平司馬에 117인의 衛士가 소속되어 있

다 이는 후한의 사정을 기록한 것인데 그 총합이 2637인이다 전한에

비해 그 員數가 급감한 것은 광무제의 부역 경감정책과에 의한 것이라

하겠고29) 소수지만 그 員數가 규정되어 있다는 것은 후한에서 代役制

내지 雇傭制로 대체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전과 같은 上番制가

시행되었음을 말해준다 후한에서 正卒 및 군현의 상비군제가 온전히

사라진 것이 아닌 것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후한의 2637명의

員數는 전한에 비해 대략 15 정도 되는데 전한의 사정을 기준으로 한

다 하더라도 군현의 正卒은 평생 1회만 당번이 되어 上番하더라도 중

도관의 衛士 給事가 충분히 운영될 수 있다 위의 lt윤만한간gt에서 전

체 38현읍후국 가운데 그 해에 費邑의 正卒 만이 상번하고 있고 당시

郡別로 상번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동해군이 매년 상번의 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각 正卒은 38년에 1회만 상번하면 된다 물론 군별 현

읍후국의 수가 다르기 때문에 그 回次의 수도 다르고 현읍후국별 正

卒의 수에 따라 1개 이상의 현읍후국이 함께 동원된 경우도 충분히 있

을 수 있다 그러나 각 군의 현읍후국 수가 보통 20개는 넘는다 게다

가 費邑의 正卒도 몇 개 조로 나뉘어 순차로 상번하는 것이라던가 각

郡도 매년 상번이 아니라 몇 년 만에 순번이 돌아오는 체제라면 각 正

卒의 중도관 衛士 복무는 아무리 많아도 일생에 1회를 넘기 어렵다

앞에 든 漢舊儀의 民年二十三爲正 一歲以爲衛士 는 곧 그러한 사

정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일생 1회의 복무형태는 胥徒의

29) 濱口重國은 광무제의 경감책과 아울러 虎賁 羽林 羽林左右騎 五校尉의 軍이

警備에 추가되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위의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

隋唐史の硏究(上)) p283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1평생 내지 세습되는 면과(후술) 다르지만 일반의 役 대상자에서 선발

되어 중도관에 給事한다는 면에서는 공통이다 그런데 전한에서 lsquo父死

子代rsquo였던 중앙군은 羽林孤兒 뿐이었지만 후한에서 虎賁 羽林 羽林左

右騎 五營士의 중앙군에까지 확대되었다고 한 濱口重國의 지적이 있

다 그에 의하면 후한에서 중앙군단의 세습화와 함께 바로 지방에 特

設된 군단의 세습화도 이루어지면서 魏晋시기 兵民分離의 前段을 이루

게 되었다고 한다30)후한 후기 특히 羌의 侵寇 이후 郡에 都尉를 설치

하고 全民을 징병대상으로 삼아 상비의 郡兵을 다시 설치하고 있으

며31) 여러 출신 성원을 규합한 병단이 私屬이 되기도 하고 국가의 군

단이 되기도 하며 部曲 내지 그와 같은 류의 세습 병단화 하는 과정

에 대해서는 필자도 일견을 피력한 바 있다32)따라서 징병제에 의한

正卒의 상비군 운영이 폐지된 이후 15 수준으로 급감한 정졸의 衛士

가 上番하고 있었지만 이 군단 또한 후한 중기 이후 전란시기가 되면

서 世兵化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胥徒의 세습과 후한 후기에

활동하였던 鄭玄 당시 衛士의 세습화는 일치하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鄭玄이 말한 衛士는 한초의 사정이 아니라 그가 활동하였던 후한 후기

의 사정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鄭玄이 漢의 衛士 上番制에 의거하여 주례의 胥徒制를 해석한 것

은 양자의 해명에 큰 도움을 준다 상술한 바에 의하면 몇 가지 면에

서 양자가 일치하는 점이 대체로 인정된 셈이지만 胥徒가 거의 모든

관부에 설치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漢代의 衛士는 광록훈이나 衛尉

제사 守陵등 일부 한정된 관부에 설치되어 있다 또한 주례의 胥徒

가 士 이상의 신분과 마찬가지로 代耕의 봉록으로써 농지를 받고 있는

봉록자라는 면은 지방에서 상경하여 1년의 기간만 한시적으로 복무하

는 衛士의 경우와는 자못 어울리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衛

士는 上番者로 충당되지만 일단 관부별로 員數가 규정된 員吏로서 복

30) 濱口重國 앞의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p285

31) 濱口重國 光武帝の軍備縮小とその影響 (秦漢隋唐史の硏究(上)) p30832) 박건주 한대의 지방 상비군과 部曲의 推移 (동양사학연구 118 20123)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2무하게 되기 때문에 일부는 胥徒처럼 員吏로서 수년 이상을 관부에 居

하는 어느 정도 전문화 한 衛士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鄭玄의 활

동 시기와 큰 차이가 없는 lt長沙走馬樓吳簡(이하 lt吳簡gt으로 약칭)gt

領二年四家衛士田漆十五畝 畝收限米二斛 合爲吳平斛米一百五十斛

(5-1669)에 의하면 4家의 衛士가 限田75畝 佃作에 대한 租로 畝當 限

米2斛을 납부하고 있다 lt오간gt의 限田에 대해 여러 異說이 있지만

(후술) 그 佃作者와 限米 납부자의 계층에 수십 종의 吏員들이 포함되

어 있는 것에 의하면(후술) 衛士도 그러한 吏員으로서 限田이 지급된

것으로 보인다 단지 限田을 佃作케 한 것이 吏員에 대한 경작의 부과

(경작 노동력의 징발)를 뜻하는 것인지 혜택의 수여를 뜻하는 것인지

는 아직 분명치 않지만 于振波의 분석과 같이 畝當 限米2斛의 징수는

대단히 과중한 액수인 까닭에33) 受惠라기 보다는 경작 노동력의 징발

내지 課役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祿田의 의미로 보기

어렵지만 당시 吏職의 賤役化 현상을 고려하면 그러한 시대적 여건 하

에서 實益이 거의 없는 祿田으로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어쨌

든 후한말 이래 小吏 내지 吏戶와 병사층의 세습화 진전을 고려한다면

어떠한 방식이든 그 가족의 생계를 위한 봉록의 지급이 있었을 가능성

이 더욱 커진다

이상에서 검토한 몇 가지 면에서 보면 府史와 胥徒 중에 후자 만

lsquo給徭役rsquo에 의거한 복무라는 점 등에서 다른 계층이지만 庶民在官者

로서 함께 칭해질 수 있는 층이었다고 본다 무엇보다 胥徒가 각각 제

8위와 제9위의 在官者 서열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동시에 府史는 모두 官長으로부터 선발되고 辟除 임용된 자들인데 비

해 胥徒는 일반의 요역의무를 대체하여 官에서 給事中인 계층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胥徒가 lsquo在官者rsquo로 칭해지는 이유는 관부 내에 거

처하면서 노동을 통하여 잡다한 庶事를 직접 처리하고 있으며 국가로

33) 于振波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中國社會科學院硏究生員學報 2004

-1) p122 限米 납부액의 과중성에 의거해서 限米 납부자는 屯田노동자 限米

는 屯田의 租稅라고 본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3부터 代耕의 祿田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관부의 제반 업무는 각 업무

分司 말단에 속한 胥徒의 노역에 의해 완수될 수 있다 이들은 노역

징발 대상자인 徒 중에서 재능 등의 명목으로 선발된 자들이고 그 중

에서도 才智가 있는 자가 胥이다 이들은 선임자 내지 연장자의 지휘

감독 아래 각 관서의 노역 업무와 勞役者 징발 업무 등으로 奉公한다

이것이 胥徒의 在官者로서의 職事이다 胥徒의 職事는 어디까지나 노

동이 전제되는 勞役이며 일반민의 요역의무에 대신하여 관부의 職에

給事하는 까닭에 職役이라 할 수 있고 官長의 선발로 辟除된 府史는

정식의 官員으로서 奉公하는 것이고 給徭役 에 대신하여 복무하는

것이 아닌 까닭에 胥徒의 職役과 구분하여 그 職을 職官이라 할 수 있

다 그 上級인 命官도 물론 職官이다 職官의 기본 요건은 그 官職에

任職인 상태가 그대로 王命을 받들어 奉公 중인 것을 뜻하는 까닭에

이미 王命을 수행중인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체로 일반 서민

의 기본 요역에서 면제된다 단지 면제의 세부 규정에 의하면 役의 종

류와 신분의 차등에 따라 그 면제 대상의 범위가 구분된다 한편 전쟁

에 참전하는 의무는 면제되지 않는다 모든 官吏는 유사시 종군해야

한다 官人이 본래 戰士層인 國人 출신에서 나온 때문이다 일반 서민

은 매년 일정 기간 동안 만 국가의 命을 받아 노역에 징발되어 복역하

는 까닭에 그 생업은 징발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시적인 노역이 아니라

그들이 부여받은 職인 恒常의 耕作奉公에 있다 職官은 그 복무를 통

해 생활이 영위되지만 일반 서민이 징발되어 이행하는 노역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無償이다

官職앞에 인용한 宰夫8職에 대한 賈疏의 끝 부분에 周禮 위 아래

의 글에 胥가 있으면 반드시 徒가 있는 것은 胥가 什長인 까닭이다

鱉人과 臘人의 類는 徒만 있고 胥가 없는 것은 徒만 있으면 충분하여

지휘자(長師)를 둘(빌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食醫의 類에는 胥徒가

모두 없는 것은 그 官만의 行事(업무처리)로도 충분하여 胥徒의 도움

을 빌리지 않는 까닭이다 고34) 하였는데 胥와 徒가 모두 설치되지 않

은 部署는 그 官만의 업무처리만으로 충분한 까닭이라 하였으니 바로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4府史까지의 屬吏를 官으로 한정한 것이다 즉 胥徒는 官에서 복무하고

있지만 官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庶民이고 庶民在官者 이며 그들의

복무는 職官이 아니고 職役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들도 그 職役으

로 생업을 유지하는 까닭에 職官과 동일성을 지닌다 주례에 의하는

한 胥徒가 일시적으로 복무하는 형태는 아닌 듯 하다 무엇보다도 그

들에게 祿田이 지급되고 있기 때문에 매년 혹은 매월 교체되는 요역

형태의 근무는 아닐 것이다 또한 각 분야별로 상당한 전문 지식과 숙

련도가 요구되는 업무 처리상 단기간 교체되는 근무형태를 취하였을

것 같지도 않다

이렇게 볼 때 胥徒가 官에서 일반 관리와 마찬가지로 계속적으로 근

무하면서도 그 근무를 lsquo給徭役rsquo의 代替로 본 주석이 옳다면 아무래도

胥徒는 신분제사회에서 官이 될 수 없는 자 또는 現任의 官과는 엄밀

히 구분되는 신분이었던 까닭에 그 직무 또한 (일반 서민의) 노역의

의미로 인지되고 평가된 것이 아닐까 한다 漢代사회의 신분구조는 漢

家의 주인인 天子가 그의 家人인 일반 民庶를 직접 장악하는 구조가

있고 동시에 漢家로부터 독립된 개별의 士族이 각각 lsquo家rsquo의 주인으로

서 천자와 主客의 관계가 아직 유지되는 체제가 병존하는 二元의 구조

로 되어 있다고 본 濱口重國의 견해가 있다35)이러한 입장을 발전시켜

漢帝國은 황제가 인민을 인두적으로 지배하는 lsquo齊民制rsquo와 천자가 lsquo家rsquo를

非人頭的으로 지배하는 家父長制的 관계로서의 lsquo家産制rsquo라는 이중구조

로 되어 있다고 본 好並隆司의 견해도 있다36) 그리고 이러한 이중성

의 사회구조를 公과 私 君臣관계의 면에서 진전시킨 尾形 勇은 그 臣

이 되는 층을 仕宦者와 從役者로 나누고 있다37) 위의 설들은 모두 한

34) 周禮 上下文有胥必有徒胥爲什長故也 鳖人腊人之類空有徒無胥

者得徒则足不假長師故也 食醫之類胥徒并無者以其專官行事不假胥徒

35) 濱口重國 唐王朝の賤人制度 主篇 第六章 第二節 (東洋史硏究會 1966)

36) 好並隆司 前漢帝國の二重構造と時代規定 (歷史學硏究 375 秦漢帝國史

硏究 東京 1978에 재수록)

37) 尾形 勇 漢代における 家人 と君臣關係 (史學雜誌 83-4 1974) pp3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5대의 사정을 말한 것이지만 이러한 이중구조의 신분제 내지 사회구조

는 주례의 관부 구성 체제에 의하면 상위에서 下士 내지 府史까지가

仕宦者에 해당하고 胥徒를 후자 즉 從役者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연원은 이미 周代에 있다 士人 내지 仕宦者는

그 직무로써 奉公하고 從役者는 賦稅役의 부담으로써 奉公한다38)胥徒

가 비록 官에 있는 자이지만 二元구조의 신분제 하에서 士人이 되지

못한 가운데 그 직무는 職官이 되지 못하고 職役에 머무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Ⅲ 職役 담당층의 복무 형태와 봉록 지급의

문제

周代에 lsquo給徭役rsquo의 차원에서 관부에 給事하는 胥徒가 있었다면 후대

의 요역 가운데도 그러한 항목이나 사례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다 또한 胥徒의 직무는 續漢書 輿服志上에 보이는 伍伯辟車

鈴下侍閣門蘭部署街里走卒 등 관부 말단에서 경호導從심

부름侍衛車馬관리 巡邏 등의 賤職에 종사하는 이른바 徒卒의 職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그런데 이들의 役이 民의 일반 요역 의무에 따

라 징발되어 일시적으로 복역하는 것인지 아니면 상술한 胥徒와 같이

庶民在官者 로서 관부의 최말단에서 상시로 근무하며 관부에 의지하

여 생업을 유지하는 下吏로서의 복무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후한서권58 虞詡傳에 永平(후한 明帝期) 章和(章帝期) 중에 州郡이 走卒錢으

로 貧人을 給貸(雇賃金을 지급)하였다 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集解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35

38) 尾形 勇 위의 글 pp28-29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6走卒伍伯之類란 續漢志에 이른다

(車前에) 伍伯은 公은 8인中二千石은 6인千石과 六百石은 모두 4인百石

이하에서 二百石은 모두 2인을 둔다 黃綬(4백석에서 2백석의 관리)의 武官에

는 伍伯을 따르게 하고 文官에는 辟車鈴下侍閤門闌部署街(里)走卒

을 따르게 하는데 모두 程品의 多少가 있으며 맡은 바 직무에 따라 領率하게

한다 (驛馬는 30里에 하나를 설치한다) (卒은) 모두 적색 두건과 진홍색 소창

옷을 착용한다

즉 지금 鞭杖을 잡고 따르는 자들이다 이는 錢이 있는 자로 하여금 그 (役

에) 대한 資錢을 내게 하여 몸으로 직접 노역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39)

〔 ( ) 내의 글은 결락된 부분을 輿服志 원문에서 보완함〕

인용된 속한지輿服志의 기사는 公卿 以下 縣의 三百石 官長에 이르

기까지 이들을 導從하는 下吏들의 配屬 員數를 규정한 것이다 열거된

役職들은 모두 300석 이상 관원을 導從하는 役員들인데 후한 明帝 章

帝期에 일부 지역에서 이 役職의 명목으로 走卒錢을 징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記事는 順帝 연간에 尙書僕射 虞詡가 上言한 것인데 당시

長吏 2천석관들이 謫罰者에게 貧人 구호를 위한 lsquo義錢rsquo의 명목으로 贖

錢을 강요하고 守令은 이를 빌미로 聚斂함에 順帝 원년 이래 백만전

이상을 受取한 長吏가 끊이지 않고 있는 사정을 진언한 가운데 그 이

전 永平 章和 연간에 있었던 사실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즉 州郡에

서 走卒錢을 징수하여 그 역을 면제시켜주고 대신 빈궁한 자를 그

役에 고용하여 그 錢을 雇賃으로 지급해주는 일이 있었다 당시 司空

이 이 事案을 탄핵하니 해당 州郡縣이 모두 坐되어 免黜되었었다 그

때의 전례와 마찬가지로 당시 임시로 사용하였던 제도(走卒錢 징수와

雇賃 지불)를 蠲制할 것을( 蠲制權制 ) 주청하였고 이에 조서를 내려

州郡을 切責함으로써 그러한 贖錢 강요가 이로부터 그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40) 따라서 走卒錢 징수와 導從役의 雇傭 방식 운영은 후한

39) ldquo卽今行鞭杖者也 此言錢者令其出資錢 不役其身也 走卒伍伯之類也 續漢

志曰 (車前)伍伯 公八人中二千石六人千石六百石皆四人自百石以下至二

百石皆二人 黃綬 武官 伍伯 文官 辟車鈴下侍閤門闌部署街

(里)走卒 皆有程品多少 隨所典領率 (驛馬三十里一置 卒)皆赤幘絳褠 卽

今行鞭杖者也 此言錢者令其出資錢 不役其身也

40) 후한서 권58 虞詡傳에 是時長吏二千石聽百姓謫罰者輸贖 號為lsquo義錢rsquo 託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7明帝 章帝期에 한정되어 시행된 것으로 모두 不法이었고 虞詡의 順帝

시기에는 시행되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渡邊信一郞에

의하면 이들은 秦漢에서 관부의 최하층으로서 관부에서 필요로 하는

導從役 등 일상적인 노역에 복무하며 民으로부터 강제 징발되어 복무

하였는데 후한 초에 이미 走卒錢이 징수되고 특정 임무는 면역전을

재원으로 한 고용노동으로 전환되었다고 한다41) 그러나 章帝 이후 50

여년이 지난 順帝期에 이르기까지 고용 형태의 운영이 반복되지 않고

있는 것에 의하면 고용 노동으로의 진전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

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어쨌든 導從役의 고용 방식 운영이 不法

이었다 함은 그것이 본래 징발 형식으로 운영되는 것이었음을 말해준

다 錢이 있는 자로부터 走卒錢을 받고 이 재원으로 빈한한 자를 고용

하여 雇賃을 지급하는 不法을 행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어지는 지적에

서 順帝 때 지방관들의 贖錢 강요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관리들의 私利

도모에 의한 것이다 또한 그 의무자에 富者가 있어 그 實役을 피하고

자 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導從役과 같은 下吏의 봉록은 매

우 적기 때문에 여타의 수익이 있다면 그 봉록에 꼭 의지할 필요는 없

었을 것이다 이들이 비록 관부의 員吏이고 그 吏職이 생업이 되는 것

이지만 최말단의 賤役 내지 厮役으로서 천대받는 면이 많았을 것이다

때문에 이 職役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도 많았을 것이다

예기王制에 무릇 전문기능으로 事上(奉公)하는 자가 祝史

射御醫卜 및 百工이다 무릇 전문기능으로 事上하는 자는 다른

일을 해서는 안 되며(不貳事) 근무하는 관서를 옮겨서도 안 된다(不移

官) 出鄕하면 士와 抗禮하지 못하며 家에서 仕하는 자도 出鄕하면 士

와 抗禮하지 못한다 고42) 하였다 즉 士의 신분이 아닌 일반서민 출신

為貧人儲 而守令因以聚斂 詡上疏曰 ldquo元年以來 貧百姓章言長吏受取百萬以上

者 匈匈不絕 謫罰吏人至數千萬 而三公刺史少所舉奏 尋永平章和中 州郡

以走卒錢給貸貧人 司空劾案 州及郡縣皆坐免黜 今宜遵前典 蠲除權制 於是詔

書下詡章 切責州郡 謫罰輸贖自此而止rdquo

41) 渡邊信一郞 中國古代の財政と國家 (汲古書院 2010 第三章) p128

42) 禮記王制 (十三經注疏 中文出版社) p2905에 凡執技以事上者 祝史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8이 여러 기능직의 吏職에 복무하면서 함께 관부에 있지만 본 소속의

직장에서 다른 직장으로 옮길 수도 없고 신분상 士와 대등한 위치에

처하지 못하며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또한

府史 이상의 職官과 구분되는 胥徒의 특성과 상통한다

속한서 백관지2에 射聲校尉一人 比二千石 의 本注에 服虔曰

工射이다 어두운데서 소리를 듣고 활을 쏘아 명중시키는 까닭에 이름

하였다(工射也 冥寞中聞聲則射中之 故以為名 고 하였는데 여기서

工射 는 射도 工 의 한 분야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은 그 기능으로

奉公하는 것이 그 職分이고 생업이기도 하며 다른 직종이나 직업을

갖을 수 없고 옮길 수도 없는 자들이다( 不貳事 不移官 ) 이들은 그

職能으로 생업을 유지하지만43) lsquo父死子代rsquo 의 世業으로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고 賤職인 까닭에 여기에서 벗어나 신분상승을 바라는 경향이

있게 된다 이를테면 三國魏의 黃朗은 그 부친이 縣卒로서 鈴下 伍伯

의 職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抗志 遊學하여 현령을

거쳐 군태수에 이르렀는데 부친의 일을 생각하여 屬下의 鈴下 伍伯을

부를 때 鈴下 伍伯이라 부르지 않고 항상 姓字로 불렀다 비록 분노

하였을 때도 鈴下 伍伯으로 부르지 않았다44)

그런데 導從役 복무자는 징발되어 관부 내에서 복역하는 인원 중에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전체 복역 대상자 가운데 극히 소수에 불과하

다 특히 黃綬의 武官을 導從하는 伍伯 등의 직무가 護衛와 侍衛 警備

등이 위주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무술과 용력을 갖춘 이들로 선발된

그룹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黃綬 이상의 문무관에 소속되어 그 員數

射御醫卜 及百工 凡執技以事上者 不貳事 不移官 出鄕不與士齒 仕於

家者 出鄕不與士齒

43) 禮記 王制에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百工 各以其器食之 (注에 器 能也)

44) 三國志 권23 裴潛傳 所引 魏略에 黃朗字文達 沛郡人也 爲人弘通有性

實 父爲本縣卒 朗感其如此 抗志遊學 由是爲方國及其郡士大夫所禮異 特與東

平右姓王惠陽爲碩交 惠陽親拜朗母於床下 朗始仕黃初中 爲長吏 遷長安令 會

喪母不赴 復爲魏令 遷襄城典農中郎將涿郡太守 以明帝時疾病卒 始朗爲君長

自以父故 常忌不呼鈴下伍伯 而呼其姓字 至於忿怒 亦終不言 朗旣仕至二千石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9가 정해진 것에 의하면 庶民在官者 로서의 胥徒에 상당한다 봉록이

지급되는 일자리이며 민의 공동의무인 일반요역에 대신하여 복무하는

것인 만큼 면역전의 授受 행위는 不法이다

상술한 輿服志에 각 300석 이상의 官員 당 이들의 배당 員數가 규

정되어 있는 것에 의하면 이들도 분명히 관부의 한 구성원들이다 속한서 백관지 注引의 漢官에는 官長 내지 命官級 屬下의 員吏 員數

및 秩祿을 기재하고 있다 이를테면 속한서 백관2에 衛尉 卿一人

中二千石 本注曰 掌宮門衛士 宮中徼循事 丞一人 比千石 이라 하였

고 注引에 漢官曰「員吏四十一人 其九人四科 二人二百石 文學三人

百石 十二人斗食 二人佐 十二人學事 一人官醫 衛士六十人」이라 하

였다 이 가운데 百石까지는 봉록 지급이 명시되어 있지만 그 이하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봉록이 전혀 지급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斗食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斗升으로 계산되는

日數 계산에 의한 연봉액이 정해져 있다 百官受奉例의 注 所引 漢書音義에 斗食祿 日以斗爲計 라 하였고 한서 百官表上에 漢官名

秩簿에 이르길 斗食은 月俸 11斛 佐史는 월봉 8斛이다 一說에 斗食

이란 연봉이 百石에 이르지 못하여 日當으로 계산해서 1斗2升을 食하

는 까닭에 斗食이라 한다 고 하였다 속한서 백관5의 百官受奉例에

서는 百石이 月 16斛이고 斗食 이하는 위와 같다 또 墨子 雜守篇에

斗食은 1년에 36石이다 參食이면 1년에 24石이고 四食이면 1년에 18

石 五食이면 1년에 14石4斗 六食이면 1년에 12石이다 斗食은 5升을

食하고 參食은 3升小半을 五食은 2升 六食은 1升大半을 食한다 하루

에 2회 食한다 고 한데서 알 수 있다 斗食 은 1食에 5升 하루에 2

食이니 매일 1斗를 받아 1년 360일에 총 36石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

參食 은 1食에 3과 13升 즉 13斗를 받아 1일에 23斗가 되고 1년에

24石을 받는다 그 이하의 四食에서 六食까지는 斗食 이하에 열거된

下吏의 지급액 규정일 것이다

閻步克에 의하면45) 周代에서는 士 이상에게 祿田을 지급하여 그

수익을 食하게 하는 것으로 연봉을 지급하는 형태였는데 하급관리나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0工醫師 등 기술직 및 兵員에게는 月 단위로 지급하는 이른바 稍食

형태로 운영하였으며 나중에 증액 고정화 되고 아울러 錢으로 지불하

게 됨으로써 月俸의 秩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稍食 이란 주례天官

宮正에 宮正이란 왕궁의 戒令糾禁을 맡는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그 출입을 검찰

하고 그 稍食을 균등히 하고 그 淫怠하고 奇邪한 民을 제거하고 그

什伍를 모아 道義를 가르친다 月이 끝나면 그 稍食을 會計하고 1년이

끝나면 그 (吏職의) 行事를 검열한다 라46) 하였는데 이 稍食에 대해

鄭司農은 禄廪 疏는 宫中官府 등의 月禄 이라 하였다 즉 稍食은

月俸인 셈인데 이를 하급관리의 月俸이라 한 것은 國語晋語4에 公

은 貢을 食하고 대부는 읍을 食하며 士는 田(公田)을 食한다 庶人은

力으로 食하고 工商은 官(官으로부터 받은 田)을 食하며 皁隸(吏에

속한 徒隸)는 職을 食하고(각 담당 職의 大小에 따라 食祿) 官宰(大夫

의 家臣)는 加(大夫의 家臣)를 食한다 에서 公 大夫 士까지는 國 邑

田을 봉록으로 받는 까닭에 연봉을 받는 것이 되고 庶人 이하는 관부

에 給事한 力(勞役) 등을 계산하여 지급 받는 까닭에 월봉이라는 것이

다 또 주례 夏官 校人의 校人은 王馬之政을 관장한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馭夫

의 祿과 궁중의 稍食을 균등히 한다 라 하였는데 그 注에 師圉는 府

史 以下다 고 하였다 즉 府史 이하 下吏의 봉록 관련 업무이다 또 주례 天官 醫師에 연말이 되면 그 醫療한 실적을 검사하여 그 食을

정한다 十점 만점이면 上 十에 一을 失하면 次等 十에 二를 失하였

으면 그 次等 十에 四를 失하였으면 下로 한다 하였고 또 방비를

굳건히 하기 위해 성곽 溝池 등의 役事와 守備를 관장하는 掌固는 이

에 복무한 士庶子와 衆庶에 대해 필요한 도구와 財用을 공급해주고 그

稍食을 균등히 한다고 하였다(同 夏官 掌固) 이러한 자료에 의하면 府

史 이하의 下吏에 대해 祿俸 지급의 額이 기술되어 있지 않는 것은 食

邑田이나 百石까지는 年俸의 일정액이 규정되어 있고 이 액수가 월봉

45) 閻步克 從稍食到月俸mdash戰國秦漢祿秩等級制新探 (學術界 20002)46) 宮正 掌王宮之戒令糾禁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幾其出入 均其稍食 去其淫怠與其奇邪之民

會其什伍而敎之道義 月終 則會其稍食 歲終 則會其行事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1으로 나뉘어 지급되는 것과는 달리 그 이하의 吏는 月別 給事한 日數

나 실적을 계산하여 지급하는 月俸 형태였고 그 총합이 百石 이하였

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앞에 든 百官名秩表나 묵자의 기사는 그

러한 사정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府史 이하인 胥徒나 그 직급에 상당

하는 속한서 백관지의 각 관부별 官長 屬下의 員吏로서 有秩 아래에

나열된 직급들도 그 근무일수나 실적에 따라 봉록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有秩의 官은 百石 이상의 年俸이 지급되는 下限의 관리

를 가리키며 佐史 이하의 월봉 수입자에 대비하여 쓰이는 용어이다

근래 楊振紅 廣懶薰雄 宮宅 潔 등은 佐史 이하의 下吏에는 1개

월을 단위로 윤번 근무하는 자들이 있어 이들은 그 이름 앞에 更 이

붙고 이에 대비하여 常勤하는 자들은 冗 이 붙어 구분되었다 하고

그 내역과 성격을 고찰하였다47)사실 후대의 冗 내지 冗官 이 보통

散官 의 뜻이었던 것에 비해 선진에서 진한 시기의 여러 자료에 보이

는 冗 은 위의 연구들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更 에 대한 相對로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lt운몽진간gt 秦律十八種 工人程에 冗

隸妾 2인은 工 1인에 當하고 更隸妾 4인은 工 1인에 당한다 小隸臣妾

으로서 可使者 5인은 工 1인에 당한다(冗隸妾二人當工一人 更隸妾四

人當工一人 小隸臣妾可使者五人當工一人) 에서48) 冗隸妾은 更隸妾에

비해 2배의 우대를 받고 있으며 lt이년율령gt史律에 大祝이 祝을 시

험해보아 祝에 뛰어나고 祠事에 밝으면 冗祝으로 삼아 이들을 冗한다

(大祝試祝 善祝 明祠事者 以爲冗祝 冗之) 고 하였는데 이 冗 은 같

은 史律의 祝十四章으로 學童들을 시험해서 능히 7천언 이상을 誦할

수 있어야 祝으로 삼고 5更으로 한다(以祝十四章 試祝學童 能誦七千

言以上者 〔乃得〕爲祝 五更) 에서의 更 과 相對로 위치하고 있다

47) 楊振紅 秦漢簡中的ldquo冗rdquordquo更rdquo餘供役方式middotmiddotmiddot從lt二年律令 史律gt談起 (簡帛硏究 廣西師範大學出版社 2006) 廣懶薰雄 秦漢律令硏究 (汲古書院

20103) pp297-304 宮宅 潔 漢代官僚組織の最下層 - 官 と 民のはざま-

(東方學報 87 2012) pp11-1248) 睡虎地秦墓竹簡 (北京 文物出版社 1978) p74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2또 lt里耶秦簡gt에도 冗戍士五(伍) (⑧666+ ⑧2006)와 更戍(某) (⑧

143 ⑧149 ⑧694)의 對稱 용어가 있다 한편 주례春官 槀人에 外

內朝의 冗食者의 食을 공급해주는 것을 관장한다(掌共外內朝冗食者之

食) 라 하였고 이에 대한 鄭注는 冗食者란 (관부에 밤까지) 머무르며

문서 작업을 하는 것이 마치 지금의 尙書의 屬吏로서 當直하는 者들과

같다(冗食者 謂留治文書 若今尙書之屬 諸直上者) 賈疏는 ldquo(鄭注에

서)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rdquo라 한 것은 또한 漢法을 인용하여 설명한 것이니 차례로 당직

하는데 관부에 留宿하며 (집에) 돌아가지 않는 까닭에 반드시 음식을

제공해야 한다(亦引漢法說之 謂以次當直 留在朝 宿不還 須以食供之)

고 해석하였다 여기서의 冗 은 夜勤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일

상 정규의 일을 넘어선다는 뜻을 지닌다 冗食 은 야근하는 관리에게

제공되는 음식이기 때문에 정규의 음식 지급에 추가되는 것을 의미한

다 전한 成帝 河平 연간에 수해를 입은 군국을 구휼하면서 그 지역민

을 다른 군국으로 피신시키고 그 곳에서 冗食케 하라 고 하였는데49)

文穎은 冗이란 散이다 廩食을 散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遊離되어) 정착하지 못하는 戶를 役事시켜 일자리를 주는 것이다(冗

散也 散廩食使生活 不占著戶給役使也) 로 해석하였고 如淳은 離散

된 자들에게 給食하고 관부는 그 임금을 지불한 것이다( 散著人間給

食之 官償其直也 )고 해석하였다 즉 수해로 유민이 된 자들에게 給

食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하고 아울러 役事의 일자리를 주어 그 임금

을 지불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석자들이 冗 을 散 의 뜻으

로 해석한 것은 국가의 재정을 풀어서 지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國錢의

lsquo散布rsquo라는 뜻으로 본 것이다 이 또한 정규의 재정 지출을 넘어선 추

가의 지출이므로 실은 위의 사례들과 같은 뜻이 된다 또 한서권24

하 식화지하에 또한 周官의 稅民 제도에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民이 떠돌아다니면서

일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夫布一匹을 납부하게 하며 布를 납부할 수

49) 漢書 卷10 成帝紀 河平4년조에 遣光祿大夫博士嘉等十一人行舉瀕河之郡水

所毀傷困乏不能自存者 財振貸 其爲水所流壓死 不能自葬 令郡國給槥櫝葬埋

已葬者與錢 人二千 避水它郡國 在所冗食之 謹遇以文理 無令失職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3없는 자에게는 縣官에서 冗作케 하고 이들에게 衣食을 제공한다 고50)

하였다 여기서 冗作 이란 정규의 요역 부과 외에 징벌의 뜻으로 역

을 추가하여 부과한다는 의미이다

또 lt운몽진율gt 司空에 冗邊 이 있다

백성에게 모친 및 동생이 있어 隸妾이 되었는데 謫罪가 아니고 冗邊5

歲에 복역하되 근무 기간을 無償으로 하고 1인을 면하여 庶人으로 하고

자 한다면 이를 허용해준다(百姓有母及同牲(生)爲隸妾 非適(謫)罪殹(也)

而欲爲冗邊五歲 無賞(償)興日 以免一人爲庶人 許之) (司空 p91)

이 冗邊五歲 도 규정된 정규 戍邊役의 額 외로 추가된 役이란 뜻의

용어이다 그래서 이 또한 위의 사례들과 마찬가지의 뜻이다 이렇게

冗 에는 更 에 相對한 지칭으로 更 에 복무하는 자들에 비해 전문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갖춘 자들이거나 기타 사유로 정규의 額을 넘

어서는 복무를 하는 것 또는 그 役者 또는 職名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즉 정규 일반의 更 방식의 근무 額(日數)에 비해 담당

분야의 뛰어난 능력이나 징벌 등 기타 사유로 더 많은 근무를 추가로

하게 되는 자들의 職을 冗 이라 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러한 冗 을 쓰는 데는 국가의 재정 지출도 추가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국가재정의 추가 지출의 뜻으로서 散(散布)

이라는 뜻이 되어 후대 冗官==散官의 칭이 생긴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해석된다면 그간 충분히 해석되지 못한 lt운몽진률gt廏苑

律에 연간의 養牛 실적 평가에서 下等을 받은 宂皂에게 2개월의 복무

기간을 추가하는 벌을 내린다는 律文에 보이는 宂皂51) 그리고 同 秦

律雜抄 屯表律에 나오는 lsquo冗募rsquo도52) 위와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50) 又以周官稅民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民浮游無事 出夫布一匹 其不能出布者 冗作縣官 衣食

51) lt雲夢秦律gt p30 廏苑律의 율문 卒歲 以正月大課之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殿者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罰

冗皂者二月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52) lt雲夢秦律gt p145 秦律雜抄의 율문 冗募歸 辭曰日已備 致未來 不如辭

貲日四月居邊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4것이다 廣懶薰雄은 更 을 非常勤 冗 을 常勤의 뜻으로 요약하였는

데53) 그러한 일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는 更 이 본래 규정된

交代근무라면 冗 은 본래의 규정액을 넘어선 근무를 뜻하는 까닭에

그러한 해석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설문宀部에 冗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人在屋下 無田事也 라 하였는데 無田事 로서의 冗의 뜻도 更

이 당번으로 給事하는 기간을 제외하면 田事에 있어야 하는 것과는 달

리 冗은 비당번인 경우에도 관부에서 給事하는데서 칭해진 것이라 하

겠다

예기중용에 忠信인 자에게 봉록을 두텁게 주는 것은 士를 勸함이

고 때로(일시적으로) 使役시키되 賦斂을 가볍게 하는 것은 백성을 勸

하기 때문이며 日用으로 근무시키되 그 근무기간과 성과를 계산하여

급료(廩)를 지급하여 그 근무에 합당하게 보상해주는 것은 百工을 권

하기 위함이다(忠信重祿 所以勸士也 時使薄斂 所以勸百姓也 日省月

試 旣廩稱事 所以勸百工也) 라 하였다 여기서 忠信 이란 禮記禮器에 忠信 禮之本也 라 하였고 여기서는 이를 修學하고 실행할 수

있는 사대부 내지 命官層을 가리키고 있다 百工에 대해 日省月試

한다 함은 근무한 日數와 그 성과를 월 단위로 계산한다는 것이다 注

에서 旣廩稱事 의 旣 를 lsquo餼rsquo로 해석하고 lsquo餼廩rsquo은 稍食 이라 하였

다54) 여기에서 일반 백성에게 때로(일시적으로) 사역시킨다는 時使

가 곧 更 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진한 시기 更徭制의 운영에

서 충분히 입증된다 宮宅 潔은 年俸이 있는 것이 有秩인데 그 最下가

百石이며 연봉이 없고 본래 日食과 月食으로 지급되는 등급을 斗食이

라고 한다 하였다55) 그가 말한 斗食은 백관표에 나열된 斗食과 그 이

하의 여리 吏職을 포함한 것이다 그런데 일반 백성에게 更役이 부과

되고 그들에게 동원된 기간 동안 당연히 매일의 給食은 지원되겠지만

그 일반 요역으로서의 更役에 대한 日當의 보수가 지급된 것은 아닐

53) 廣懶薰雄 앞의 글 p304

54) 注에 日省月試 考校其成功也 lsquo旣rsquo讀爲餼 餼廩 稍食也

55) 宮宅 潔 앞의 글 p39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5것이다 그 일반 요역은 일반 백성의 기본 의무사항인 까닭이다 반면

百工의 근무일수와 성과액에 대해 稍食 (日俸 내지 月俸)이 지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매 끼니의 급식이 아니라 工役에 대한 보수 내

지 給料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근무일수라든가 성과액을 계산

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기서의 百工은 관부의

員吏에 속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관부에 속하여 매

끼니의 식사 뿐 아니라 工役한 일수와 성과량에 따라 봉록이 지급된다

는 것이다 그래서 봉록 지급은 錢이나 곡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반

면 전기한 국어晋語4 文公修內政納襄王 章에 公食貢 大夫食邑 士

食田 庶人食力 工商食官 皁隸食職 官宰食加 에서 工商食官 의 工

商은 모두 관부의 員吏에 속한 자들인데 그 注에 옛날에는 田을 주는

것으로 祿俸을 제정하였다 관부에서 주는 廩이란 곧 관부에서 田을

받는 것이니 후세에 錢粟을 주는 것으로 祿俸을 제정한 것과 같지 않

다(古者以田制祿 官廩之者 卽受田於官 非如後世之以錢粟制祿也) 고56)

하였다 또 한서권24식화지상에 士工商이 田을 받는 것은 5口가 받

는 것이 되어야 농부1인이 받는 것에 當한다(士工商家受田 五口乃當

農夫一人) 고 하였다 즉 百工과 商賈는 그 직무에 따라 俸祿을 받는

데 후대와 같이 錢粟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田으로 받으며 그 액수는

일반 농민의 15이라는 것이다 이는 전술한 주례의 胥徒가 최하품

의 田 1百畝를 俸祿으로 받는 것과 lsquo以田制祿rsquo이라는 면에서 일치한다

그리고 lsquo以田制祿rsquo이 후대에 lsquo以錢粟制祿rsquo으로 변천 된 것은 秦漢의 사

례를 통해 분명하다 어쨌든 관부의 員吏인 百工과 商賈에게 일반 백

성의 更役과는 달리 祿田 또는 월봉 형태의 錢粟 지급이 행해진 것이

라 하겠다 또한 工商이 일반 요역 대신에 전문기능인으로서의 工役과

관부 소요 물품의 調達役의 職分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이 또한 職

役에 해당하는 셈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관부의 員吏이면서 斗食 보다 下位에 위치하여 稍

56) 國語正義(下冊) (董增齡 撰 巴蜀書社 1985) pp815-6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6食 내지 月俸을 받는 여러 導從役 祝醫工商 등의 役은 그 職分

의 役 즉 職役으로 奉公한다 그런데 후한 초에 이 職役의 면역전으로

서 走卒錢을 징수하고 그 재원으로 빈민을 고용한 것이 不法이었으며

수십 년 이어지다가 금지되고 違法한 관료들이 처벌받고 있는 것에

의하면 이 役들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戶가 지정되어 있어 여타의 일반

戶가 대신하여 맡을 수 없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은 導

從役 등의 담당자는 일반서민이되 그 중에서 특별히 선발된 층으로 구

성되어 전문의 분야를 세습하며 의무로 담당하는 하나의 신분층으로

형성되어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그 役은 하나의 身分役이기

도 하였던 셈이다 또한 그 代役錢으로서 走卒錢 징수 및 雇傭 방식이

나오게 된 것은 그 역의 담당층 가운데 錢으로 實役을 피할 수 있는

부유충이 형성되었고 후한 前期에 전통의 身分制가 느슨해진 여건에

서 身分役의 근본 형태가 유지되지 못하고 일탈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속한서백관3에 執金吾의 속관 중에 화려 장려한 복장

과 장식으로 황제의 행차를 호위 수종하는 騎士로서 緹騎二百人이 있

는데57) 本注에 無秩 比吏食奉 이라 하였다 즉 吏가 아니지만 吏의

대우를 받아 봉록을 받는 계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下吏에

들지 못하지만 봉록을 받는 면에서는 동일한 계층이다

한편 앞에 든 國語 晋語4에서 工商食官 에 이어 下記된 皁隸(吏

에 下屬한 徒隸)食職 이 있다 이 皁隸 계층은 지금까지 검토한 庶民

在官者 로서의 胥徒導從役 담당자 및 樂祝醫衛士工商 등

보다 下位 내지 그 下屬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그 담당 신분과 그 役의 성격에 대해 검토한다

Ⅳ 下層 員吏의 役과 徒隸層의 役

57) 당 조목의 注 所引 漢官曰 執金吾緹騎二百人 [持戟]五百二十人 輿服導從

光滿道路 群僚之中 斯最壯矣 世祖歎曰 ldquo仕宦當作執金吾rdquo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7

앞에서 검토한 관부 구성의 최말단에 위치한 주례에서의 胥徒와

춘추진한 시기의 導從役 담당자 및 樂祝醫衛士工商 등의 下

吏層 외에 그 下屬으로 보이는 皁隸가 있다 앞에 든 각 신분에 따른

奉公의 職分을 나열하고 있는 國語晋語4의 記事 皁隸食職 의 注에

皁隸를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라 한 것에 의하면 이 계층은 위에 열거한

여러 下吏에 下屬한 노역자들이라 할 수 있다 胥徒와 導從役 담당자

등은 각각 주례와 漢官 등에 그 員數가 규정된 까닭에 이들은 員

數 규정에 들지 못한 皁隸에 대비해 下層의 員吏로 칭할 수 있다

皁隸가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라 하였으니 곧 관노비 내지 그에 類하는

계층일 것인데 그들이 lsquo職을 食한다rsquo고 한 것은 각 분야의 官署에 分屬

되어 그 職務에 給事함으로써 생업을 삼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皂

隸 牧 圄 僕 등이 후대의 천민이나 隸民이 아니라 일반민이었다

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58)그러한 주장은 이들이 대체로 관부에 給

事하는 계층으로 여러 기사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고 위의 皁隸食

職 은 곧 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관부에 給事

하는 면으로 인해 예속성이 있게 된다는 면이 있다 후술하는 바와 같

이 그들이 일반 서민 출신이면서도 후대에 그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모

두 예속신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통용되는 것은 그러한 관부에의 예속

성이 분명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예속성을 말해주는 것이 또한 職

役의 한 속성이다

한편 國語 晋語4 文公修內政納襄王章에 (晋文公)元年 春에 公(晋

文公)과 부인 嬴氏(秦穆公의 女인 文嬴)가 王城(秦의 地名)에서 돌아올

때 秦伯이 衛士3천인을 納하였는데 실로 기강이 있는 僕들이었다(元年

春 公及夫人嬴氏至自王城 秦伯納衛三千人 實紀綱之僕) 고59) 하였다

秦漢의 衛士 출신과 달리 여기서는 그 출신 신분이 僕인 자들로 구성

58) 黃中業 春秋時期的ldquo皂隸牧圉rdquo屬于平民階層說 (齊魯學刊 阜師院學報) 1984-2 19844) pp69-72

59) 위의 책 pp809-810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8되어 있다 이 당시는 秦 穆公의 지원으로 晋의 文公이 귀국하여 懷公

을 죽이고 즉위한 때인 까닭에 군사 내지 호위부대의 지원이었다 그

衛士 군단의 신분은 皁隸層에 들어가는 僕인데 관부에 給事하는 職分

은 衛士이다 이들의 紀綱이 선 자들이었다고 한 것은 본래 秦에서도

衛士의 職으로 給事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춘추기에 邑數百이나 社

數百의 단위로 국가 사이에 分與되는 일이 자주 있었고 3천인에 이르

는 多數의 전문 집단이 타국에 分與된 것이긴 하지만 일부 전문의 인

력을 分與나 上納 하는 것 또한 당시 종종 일어났던 일이다 어쨌든

그 衛士집단이 모두 僕이었다는 것은 일반민이 아니고 관부에 예속되

는 신분이었음을 말해준다 예속신분으로 궁성을 지키는 衛士로 삼는

것은 주례地官 師氏에서 그 직무 가운데 (師氏는) 그 소속의 四夷

之隸를 거느리고 각기 그 병력으로 왕성의 문밖을 지키는데 복무하며

또한 (행차 때) 앞에서 길 정리를 한다(師其屬帥四夷之隸 各以其兵服

守王之門外 且蹕) 에 이미 보이고 漢武帝 때 제후왕 貴戚의 不服을

다스리기 위해 중앙 내사지역을 감찰하는 司隸校尉와 지방의 刺史에게

중도관의 徒奴 1200인을 보내어 二千石官을 독찰하게 하였는데60) 이

1200인의 徒奴부대는 이후 사예교위 내지 刺史 직속의 상비군단이 되

었고 그 성원은 세습 병사집단의 근간이 되어 牧使 刺史 등 將領下의

公兵이나 私兵으로 활약하였다61) 漢官舊儀 卷上에 漢代 長安에 騎

亭長 79인과 함께 6월 1更의 倉頭盧兒를 給事하게 하였다62)이들 四夷

之隸나 徒奴倉頭盧兒 등은 적군포로이거나 刑徒 계통 출신으로 관부

에 예속된 신분일 것이다 특히 관부에 囚禁된 형도들은 여러 방면의

60) 北堂書鈔設官部 및 漢官儀권2補遺2에 ldquo司隸校尉는 武帝 때 처음 설치되

었다 이후 諸侯王 貴戚이 不服함에 中都 中官의 徒奴千二百人을 (파견해서)

一校尉部刺史에게 속하게 하여 二千石官을 독찰하게 하였다(司隸校尉 武帝初

置 後諸侯王貴戚不服 乃以中都中官徒奴千二百人屬爲一校尉部刺史 督二千石

也)rdquo

61) 이에 대해서는 박건주 한대의 지방상비군과 部曲의 推移 (동양사학연구118 20123) 참조

62) 長安給騎亭長七十人 六月一更倉頭盧兒 (漢官六種 北京 中華書局 1990

9) p3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9노역에 활용되었는데 근래 石岡 浩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刑徒 집단

은 크게 세 부류 내지 등급으로 나누어져 활용되고 대우에 차별이 있

었다고 한다 즉 가장 上位에 있는 司寇는 특정 임무에 복무하는 것이

정해진 형도이며 전택을 소유하여 戶主가 되는 권리(lt二年律令gt

310-316簡) 왕조로부터 사여 받는 권리(同 291-293) 子가 士伍로 복

귀할 수 있는 권리(同 364-365)를 갖는다 다음으로 徒隸 는 특정 관

서에 예속하여 직무를 숙지하였거나 기술에 숙련하여 전문기능자에 동

등한 가치를 지니는 형도 를 지칭하며 그것으로 동일 직장에 계속 근

무하는 까닭에 일반 형도와는 달리 토목공사나 물자운송 등의 노역에

서 제외된다 또한 왕조에 공헌하는 자로서 사여를 받는 대상도 된다

(同 291-293) 즉 그들은 隸臣鬼薪城旦이면서 숙련자 기능자로서

일반 형도보다 우대받는 자들이다 위 양자에 비해 일반 형도는 위의

여러 특혜를 받지 못하며 城旦은 주로 토목사업에 隸臣은 주로 여러

관서의 잡다한 노역에 복역한다63)이는 충분히 수긍되는 견해이다 이

가운데 徒隸는 관부 내 각 分署의 전문 직장에 分屬되어 사역될 것이

기 때문에 전술한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로서의 皁隸가 곧 그들의 주요 부

분이 될 것이다 그 중에 일반 관노비로부터 개인적 재능과 기술로 선

발되어 해당 관서에 給事하는 자들도 포함될 것이다 단지 정규의 전

쟁에 형도를 동원하는 사례가 많은데 그들이 정규의 병사가 된 것은

아니고 군공을 세워 免刑되기 이전에는 그대로 형도인 것과 같이 함께

관부에 給事하고 있다 하더라도 각 신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상의 검토에 의하면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에는 이른바 lsquo吏에 下屬

한 徒隸rsquo로서 食職하는 皁隸집단이 있고 그 구성에는 관노비 뿐 아니

라 적군포로나 관노비 및 형도 출신의 衛士 그리고 刺史 牧使 등의

將領下에 있는 직속 상비군 형도 가운데 司寇 그리고 기능과 숙련으

로 형도 중에서 선발된 職能의 徒隸집단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員

吏이되 下吏인 계층의 복무가 그 신분에 따른 職役인 것과 마찬가지로

63) 石岡 浩 秦漢代の徒隸と司寇 -官署に隸屬する有職刑徒 (史學雜誌 121-120121) p32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0이 皁隸層의 복역도 모두 관부에 생업을 의존하는(食職) 職役이라 할

수 있다

또 좌전에 주로 보이는 輿人이 있는데 同 昭公7년조에 天에 十日

이 있고 人에 十等이 있으니 下가 上에 事하는 所以이다 까닭에 王의

臣은 公 公의 臣은 大夫 대부의 臣은 士 士의 臣은 皁 皁의 臣은

輿 輿의 臣은 隸 隸의 臣은 僚 僚의 臣은 僕 僕의 臣은 臺이다 馬

에 圉가 있고 牛에 牧이 있어 百事를 待한다 라 하였다 古來의 여러

注疏에서부터 이미 lsquo輿人rsquo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지만 이를 분석한 宇

都木 章의 견해에 의하면 縣鄙의 野人이 평시이든 戰時이든 國都의

귀족에 징발되어 葬儀戰士補助 車馬와 관련되는 여러 役務에 종사

하는 때 그들을 lsquo輿人rsquo이라 칭하였다고 한다64) 여러 자료에 의하면 皁

에서 牧에 이르는 서열 순위가 어디에서나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

고 대개 동일 계층의 異稱인 경우가 많다 皁 이하의 서열에 이렇게

다단계의 臣屬 관계가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같은 徒에도 上位 순서로 胥와 徒 및 그 徒의 지휘를 받는 징발된 徒

가 있으며 員吏에 들어가는 導從役 등의 庶民在官者 가 있고 그에

下屬하는 皁隸의 구분이 있는 것에 의하면 최소한 士 아래의 서민 계

층에 3 - 4 단계의 차등 신분이 있을 수 있다 위의 十等 순위에서 士

이하에 위치하여야 할 庶民이 곧 皁輿 등에 해당할 것인데 모두 관

부에 給事하는 면에서 후대 예속신분을 가리키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

다 그리고 일반 서민 가운데서도 皁輿 이하는 모두 전문의 職分으

로 관부에 給事하는 의무가 주어진 계층이므로 일반 농민으로서의 서

민과는 구분되는 서민이었다고 생각한다 즉 일반 농민이 농업을 생업

으로 하며 일반의 요역 의무가 주어진 반면에 皁輿 등은 주로 전문

의 기능을 요하는 관부의 직무에 給事하는 것으로 일반요역을 대신하

며 때문에 일반 서민이면서 관부에 예속된 신분의 일면을 지닌다 그

렇지만 관노비나 형도로서 관부에 예속되어 給事하는 신분과는 명확히

64) 宇都木 章 輿人考 (三上博士頌壽記念 東洋史考古學論集 朋友書店 1979

12) pp108-11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1다르며 주례의 胥徒와 같은 下吏의 員吏 보다 보통 下位이지만 胥

徒와 마찬가지로 주로 전문 기능의 職分에 복역한다는 면에서 같고 그

일부분은 下吏에 충당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곧 胥徒가 일반 서민의

徒로부터 선발된 자들인 것과 같다 위의 十等 서열은 농민을 제외하

고 관부에 給事하는 신분만을 총괄하여 나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

술한 工商食官 皁隸食職 도 모두 관부에 給事하는 工商과 皁隸를 열

거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복무도 당연히 職役이 되는데 그 職能 내

지 職分의 종류별로 숙련도 및 경력 등에 따른 그룹 내에서의 서열이

있게 되고 이를 계층으로 인식해서 lsquo皁臣(臣屬)輿rsquo 등과 같은 記述이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 각 직능별 部署별 전문화된 職役의 활용은 관

부의 운영상 당시의 사정으로는 불가피한 면이 있다 그러한 체제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점차 계층 구분의 엄밀성이 느슨해지고 세분된

차등의 질서가 점차 단순화되면서 그 용어도 혼용되기에 이른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위의 계층 구분은 세분된 서열만이 아니라 각 계층

의 담당 職分을 구분해주는 칭호로 쓰인 면도 있다 그렇다면 輿人은

戰時에 주로 戰車부대를 보조하는 직무 분야를 담당하는 계층이라 할

수 있고 그러한 면에서 여러 下屬 계층 가운데 가장 상위의 계층이었

지 않을까 한다

한편 이상의 皁隸層이 본래 일반서민 출신이었다는 입장에서 보면

관부에 給事하되 향리에 거처하면서 일정 기간 만 순번으로 복역하는

交代制가 있었을 수가 있고 또는 대체로 일부 기능자나 世戶에 한정

되었겠지만 휴가 기간 외에는 상근하는 형태도 있었을 것이다 예속된

신분인 경우 그 거처도 대체로 관부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앞에 든 秦

漢律에 교대 근무하는 更隸妾의 존재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근무

기간에만 관부에서 거처하는 예속 신분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刑徒

중에서도 司寇는 田宅을 소유하고 戶主가 될 수 있었으며 徒隸도 賜

與를 받을 수 있는 까닭에 이들 중에 일부는 관부 밖에 따로 거처를

지니고 출퇴근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단지 衛士나 部曲 집단은

대체로 屯營 내에 거주하였을 것이다 위로는 승상으로부터 아래로는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2하급의 吏에 이르기까지 吏舍에 거처하며 휴가 기간이 되어야 비로소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는 大庭脩의 연구가 있지만65) 漢舊儀 卷下

에 舊制에 尉는 모두 관서에서 거처하였다( 舊制尉皆居官暑 ) 라66)한

것에 의하면 舊制 가 어느 시기를 말하는 것인지 불분명하지만 宿衛

와 경찰 임무의 尉職 외에는 관서에서 거처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음을

말해준다 매년 직급에 따른 수개월의 휴가 기간이 설정되어 있지만

이는 성내에 거주하며 매일 출퇴근 하더라도 고향은 먼 곳에 있는 경

우가 많아 歸鄕 휴가를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外地 출신으로 城內

에 거처가 없는 관리들을 위한 吏舍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吏舍의 존재가 모든 관리의 관부 거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居官府의 여러 給事職 관노비 司寇나 일부 徒隸를 제외한 일

반 형도 여러 當番의 宿衛職 등을 제외한 관리는 官舍 밖의 私家에서

거처한 것으로 본다

庶民在官者 로서의 職役 복무는 常勤과 교대근무의 두 시스템으로

운영되었을 것이다 胥徒는 본래 모두 징발된 徒 가운데서 재능 있는

자로 선발되어 관부에의 給事가 생업이 된 자들로서 祿田을 받는 자들

이며 員數가 책정되어 있는 까닭에 常勤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

나 함께 징발된 여타의 徒는 胥徒와 같은 給徭役의 奉公을 행하지만

순번으로 동원된 기간 만 한시적으로 복무하는 까닭에 동원 기간 동안

의 食料 이외에 노동의 보수를 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그들은 만

민의 기본 의무를 職役으로 이행하는 것일 뿐이다 정부로서는 관부에

給事할 人才와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지만 필요한 부

분을 모두 常勤하는 자로 임용하여 그들의 생업을 봉록 지급 등으로

전면 지원하는 것은 재정에 큰 부담이 되는 것이었다 즉 관부에서 필

요로 하는 특정 업무 기능자들을 일반 요역 면제 대신으로 복역케 하

고 이를 순번제로 운영하면 복무 당번 기간 외에 그들은 다른 생업을

65) 大庭脩 漢代官吏の勤務休暇 (秦漢法制史の硏究 創文社 1982) p584

66) 앞의 漢官六種 p81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3꾸려나갈 수 있기 때문에 국가는 그들에 대한 생업 유지 지원 부담이

훨씬 적어진다 관부 給事層 가운데 命官과 員吏 이상이 常勤制라면

그 이하의 여러 職役層들은 대체로 교대근무제 중심으로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테면 lt奏讞書gt 案例17에서 秦王政元年 雍縣人 樂人 講이 자신

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사건 당일 자신은 踐更에 복무하러 11월 한

달간 함양의 外樂(관서 기구 名)에67) 소집되어 복무 중이었음을 진술

하고 있다 따라서 함양에 거주하지 않은 樂人이 그 관서에서 常勤하

지 아니하고 특정시기 일정 기간 만 교대로 근무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獄事에서 피고인 樂人 講이 踐更으로 1개월 간 복무한

곳이 外樂인 까닭에 일반 요역이 아니라 樂人의 職役을 이행한 것이라

고 본다 전한 哀帝 때 樂人의 員數를 罷하라는 명령에 대해 승상 孔

光과 대사공 何武가 진언하길 각 담당별 樂人의 현재 員數와 罷할 수

없는 수를 열거한 후 총 829인의 員數 가운데 388인은 罷할 수 없다고

하자 이를 재가한 바가 있다68) 이는 전한말의 사정이지만 전국진에서

도 郊祭 등의 각종 국가제사와 宮中 樂이 행해졌기 때문에 위의 수치

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속한서 백관2 大樂令 注引의

漢官과 盧植禮注에 의하면 八佾舞를 추는 樂人의 員數가 380인인

데 여기에 卑者之子는 임용될 수 없고 6백석에서 2천석 및 관내후에

서 五大夫의 嫡子 출신 5척 이상의 신장 12세에서 30세 顔色온화 등

의 조건을 갖춘 자에 한정되었다69) 이에 의하면 樂人 講은 走馬의 傭

이 되어 京師에 왕래하고 있는 빈한한 자로서 도저히 중앙 大樂令 속

67) 관서 기구 이름으로서의 外樂은 lt이년율령gt秩律 449簡 및 西安相家巷出土

秦封泥에 보인다(周曉陸路東之 編著 秦封泥集 三秦出版社 2000 一

二44)68) 漢書 권22 예락지2

69) 漢官曰 ldquo員吏二十五人 其二人百石 二人斗食 七人佐 十人學事 四人守學事

樂人八佾舞三百八十人rdquo 盧植禮注曰 ldquo大(子)[予]令如古大胥 漢大樂律 卑者

之子不得舞宗廟之酎 除吏二千石到六百石 及關內侯到五大夫子 取適子高五尺已

上 年十二到三十 顏色和 身體修治者 以為舞人rdquo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4하의 樂人 員數에 들어갈 수 있는 처지가 못 되는 자이다 그는 향리

에 거주하면서 매년 1개월씩 京師의 外樂에 가서 복무하는 기간 외에

는 傭賃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下吏의 員吏가 아

니면서 樂工의 職能으로 일반 요역 대신에 京師의 제사나 예락 행사에

나아가 給事하는 자이다 그래서 그의 복역도 職役인 셈인데 이러한

모습은 주례의 胥徒와 흡사하다 단지 胥徒가 員吏로서 봉록은 받는

것과는 다르다 양자가 모두 職役이지만 胥徒는 庶民在官者 이고 樂

人 講은 lsquo非吏인 職能人rsquo이다 그렇지만 양자 모두 개인적인 職能으로

관부에 給事하는 면에서는 상통한다 따라서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

부에 給事하는데는 員吏로서 복무하는 경우와 非吏로서 복무하는 경우

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Ⅴ lt走馬樓吳簡gt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복무

형태 및 그 성격

1996년에 호남성 長沙市 도심 우물에서 발굴된 lt吳簡gt은 총 17萬

餘 枚로 아직 그 일부만이 정리 해독되어 출간된 상태이지만 이미 출

간된 분량 가운데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의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자

료들을 많이 지니고 있다 孫吳 嘉禾 연간(232-238)의 여러 戶籍簿

내지 吏民簿 등에 吏와 給吏로 구분된 人名簿가 다수 존재한다 이 자

료들은 그간 명확하지 못하였던 吏役과 吏戶의 존재형태와 관부에 給

事하는 계층 및 그 職役의 실태를 파악하는데 획기적인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근간의 연구에서 여러 異見으로 그 문서가 지니

는 뜻을 파악하는데 상당히 혼란을 초래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전술한

職役의 전통과 여러 계층의 형태를 살펴본 성과를 참고로 하여 나름대

로 새로운 해석을 추구해보고자 한다

lt吳簡gt의 lt吏民人名年紀口食簿gt(竹簡(肆))에서는 각 里別로 里魁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5가 領하는 食口數를 吏와 民으로 구분하여 통계하고 있는데 그 일례를

다음에 든다

(A)

(이하 簡文 인용에서 內에 있는 字를 괄호 하여 표기함〕

集凡五唐里魁周領吏民五十戶 口食二百八十九人 (簡380)

其一百六十二人男 (379)

其一百卄七人女 (378)

其四戶縣吏 (377)

其二戶郡吏 (376)

其戶州吏 (374)

其五戶給新吏 (373)

其一戶縣卒 (372)

其一戶佃帥 (371)

이는 孫吳 嘉禾 연간 里別吏民口食簿인데 五唐里 50戶 가운데 일반 民

戶를 제외하고 州吏에서 佃帥까지의 戶를 따로 특기하고 있는 것에 의

하면 크게 民戶層과 州吏 이하의 吏층으로 양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

다 먼저 縣吏 이하를 이른바 세습 吏職戶인 吏戶로 볼 수 있는가 하

는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여러 異見이 제기되어 있는데 이 문

제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그런데 lt吳簡gt의 여타 戶籍簿나 戶口簡에

의하면 民戶를 제외한 縣吏 이하의 戶도 다시 縣吏 郡吏 州吏 軍吏 등

의 類와 맨 앞에 lsquo給rsquo字가 붙어 있는 계층의 類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즉 縣吏類의 吏 외에 其十二戶給縣吏下品 (壹5467)

其三戶給郡縣卒 (貳2318) 등과 같은 예들인데 그 職事나 給事

하는 관서의 명칭에 따라 多種의 명칭이 보인다 이를테면 給郡吏 給

縣吏 給州吏 給軍吏 給郡園父 給朝丞 給子弟 給驛兵 給鍛佐 給庫

吏 給縣卒 給度卒 給驛卒 給子弟佃客 給限田客 給佃帥 給常佃 給

家種客 給乞兒 給三州倉父 給養官牛 給習射 給私學 給官瓦師 給

亭復人 給亭雜人 給任師 給郡醫 給縣帥 給州私學 給新吏 給佃吏

給郵卒 給鹽兵 給關父 등이다 이렇게 앞에 lsquo給rsquo字가 들어간 계층을

일단 동일 계층으로 보아 lsquo給吏rsquo로 칭하고 縣吏 群吏 州吏 軍吏 등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6lsquo給rsquo이 붙어 있지 않은 계층을 lsquo吏rsquo로 칭하여 양자를 구분하고자 한다

lt오간gt에서 人名에 붙는 신분명은 크게 眞吏 某吏 給某吏 大男(大

女 民)의 4종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들은 그 표기상의 차이만으로도

일단 구분되는 존재라고 보이는데 현재 앞의 3종 신분명의 구분 문제

와 관련하여 몇 가지 다른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먼저 黎虎는 縣吏나

郡吏州吏 등의 吏가 侯家나 司隸校尉 또는 郡內에 소재한 전문 기

관 州郡 관내의 遠縣에 일정 기간 파견되어 給事하고 있는 자들을 칭

하여 給郡吏 등으로 칭하는 것일 뿐 그 신분은 本州 本郡 本縣의 吏

와 동일하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本郡의 郡吏가 곧 給郡吏이기

때문에 다른 계층이나 신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眞吏는 無職事

의 冗散官에 상대하여 쓰이는 용어로 실제 除授된 관원이라고 한다70)

黎虎와는 달리 양자를 다른 계층으로 보는 견해들도 제기되었다 먼저

韓樹峰은 給吏는 비록 吏의 名은 있지만 일반 백성으로서 잠시 吏의

職事에 종사하는 것일 뿐이고 혹 吏로 임명될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그 신분은 여전히 보통 백성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給吏와 구분하여

口算錢의 면제 특혜를 받는 州吏 郡吏 縣吏 등을 총칭하여 眞吏라 한

다고 하였다 즉 眞吏가 정식의 吏인데 비해 給吏는 일반민이며 일정

기간 만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給吏의

관부給事는 실제상 요역의 일종이라 한다 71) 한편 楊振紅은 동일인의

신분이 문서에 따라 다른 신분으로 등록되어 있는 점에 의거하여 이를

테면 給郡吏가 郡吏나 眞吏로 簡稱된 것이라 하고 眞吏나 給吏 모두

吏로 簡稱되며 州郡縣의 掾史職에 있는 자들로서 署長 佐官 등의 lsquo官rsquo

에 상대되는 자들을 지칭한다고 하였다 아울러 吏는 그 작위가 公乘

이면서 賦役 대상이고 漢魏시기에 吏職의 세습화가 이루어지면서 전문

70) 黎虎 說ldquo給吏rdquo -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社會科學戰線 2008-11) pp89

-94 說ldquo眞吏rdquo-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史學月刊 2009-5) p5071) 韓樹峰 走馬樓吳簡中的ldquo眞吏rdquo與ldquo給吏rdquo (吳簡硏究 2 武漢 崇文書局

2006) 韓樹峰王貴永 孫吳時期的ldquo給吏rdquo與ldquo給戶rdquo -以走馬樓吳簡爲中心 (吳簡硏究 3 2011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7적 吏戶인 眞吏가 출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吏가 본래 일반 서민

이었던 까닭에 公乘 이하의 서민과 합칭하여 吏民이라 한 것이며 삼

국시기 官과 吏가 구별된 연원은 漢代의 長吏와 小吏 내지 士와 庶民

의 구분에 있다고 한다72)다소 혼란스러운 견해들이고 용어상의 해석

문제가 겹쳐 있어 난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들 異見의 관건은 吏와 給

吏의 구분 문제 그리고 吏戶에서의 吏가 어떠한 吏를 가리키는가 하

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여러 견해에서 공통으로 들고 있는 lt吳簡gt의 다음 문서를 먼저 살

펴본다

(B)

廣成鄕勸農掾區光言 被書條列州吏父兄子弟伏處 人名 年紀爲簿

輒隱核鄕界 州吏七人 父兄子弟合卄三人 其四人刑 踵 聾 歐病 一人

被病物故 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 十二人細小 一人限田 一人

先出給縣吏 隱核人名 年紀相應 無有遺脫 若後爲他官所覺 光自坐 嘉禾

四年八月卄六日破莂保據(此簡無編戶)73)

이 자료는 광성향 勸農掾 區光이 작성하여 보고한 문서인데 廣成鄕 領

內 州吏7인의 父兄子弟 23인의 현황을 파악하여 嘉禾4년(235년)에 보

고한 내용이다 lt吳簡gt戶籍簿에서 州吏 등의 吏가 있는 戶는 그 州吏

가 戶人(戶主)으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 州吏7인이란 모두 그 戶의

戶人이다 이 현황 내역에 의하면 州吏7인의 父兄子弟 총합은 23인이

고 이 가운데 4인은 受刑 질병 중이며 1인은 物故 4인은 이미 관부

에 보내져 그 本主에 從事하며 관부에서 복무 중이다 12인은 細小 즉

소인이고 1인은 限田을 경작 중이다 이 限田이 lt吳簡gt의 lt吏民田家

莂gt 등에 보이는 lsquo二年常限rsquo의 田으로 보아 侯家의 田이나74) 屯田을75)

72) 楊振紅 吳簡中的吏 吏民與漢魏時期官 吏的分野 -中國古代官僚政治社會構

造硏究之二 (史學月刊2012-1)73) 侯旭東 三國吳簡兩文書初探 (歷史硏究 2001-4) p172에서 轉引

74) 入都鄕嘉禾二年步侯還民限米一斛 (5-1556) 其卄六斛民還黃龍年臨湘侯

限米 (602017)

75) 黃龍元年文入郡屯田民吳平斛米一百六斛二斗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6227) 其三斛五斗郡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8吏民에게 分給하여 佃作케 한 田으로 보는 것이 일반이다 그 경작자

는 그 田地(佃地)를 국가로부터 할당 받아 의무로 경작하기에 佃民과

같다 그 佃民에는 諸吏와 일반 民戶가 다 포함되고 있다76) lt吏民田

家莂gt에서 그 限田이 lsquo二年常限rsquo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그 의미에 대해

佃作기간 내지 佃種權이 2년으로 한정되어 있어 계약 기간이 지나면

배속되는 田地가 바꾸어지는 방식이었다는 견해가 있고77) 반면에 佃

地의 경작 기간이 아니라 地租額을 2년간 固定하는 것을 말한다는 견

해가 있다78) 사실이 어느 쪽이든 吏戶의 식구 가운데 일부는 국가의

농지를 佃作하고 地租를 납부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 액수가 漢代

사유지에 대한 조세보다 높다 같은 문서에는 租米 뿐 아니라 동시에

畝當 布2匹와 錢70-80까지 징수되고 있다 따라서 二年常限田의 分給

과 佃作은 受惠라기 보다는 노동력의 징발이고 耕作의 賦課로 보는 것

이 마땅하다 于振波가 常限田의 분급 액수를 정의하길 lsquo强制性的 生産

定額rsquo이라79) 본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 이어 1인은 先出給縣吏 인데

먼저 給縣吏로 보내졌다는 의미이다 先給吏의 사례는 嵩男弟恭年十

九先給州吏 (參1450) 등 몇 개가 더 보인다 이렇게 해서 총 23인의

食口 현황이 명료하게 보고되고 있다 그 내역에 의하면 州吏의 식구

는 受刑중인 자 질병자나 小人을 제외하고는 모두 관부에 給事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1인의 先出給縣吏 와

이미 관부에 보내져 本主 따라 從事하며 관부에 복무 중이라는 4인은

( 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 ) 내용상 모두 이미 관부에 보내져 현재

掾利焉黃龍理年屯田限米 (2157)

76) 于振波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南都學壇 24 2004年 第1期 湖南大

學 20041) p30 이 글은 앞에 든 中國社會科學院硏究生員學報 2004-1과 같

음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形成與演變 -談長沙

走馬樓簡牘札記之六 (鄭州大學學報 2001-1) 77) 張福亞 也談lt嘉禾吏民田家莂gt中ldquo二年常限rdquo田的函義 (首都師範大學學報

(社會科學版) 142期 2001-5) p8

78) 高敏 lt吏民田家莂gt中所見ldquo餘力田rdquo ldquo常限rdquo田等名稱的函義試釋 (鄭州大學

學報(社會科學版) 33-5 20009)79) 于振波 앞의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p12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9給事 중인 것은 마찬가지인데 어떠한 차이가 있어 다른 항목으로 구분

하여 기재한 것일까 이것은 바로 給縣吏와 縣吏의 차이를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후술) 州吏7인의 食口 23인의 현황 名簿를 작성하여 면밀

히 조사 보고하게 함으로써 그 遺脫을 막고 있는 것에 의하면 州吏 軍

吏 群吏 縣吏 등의 食口는 여타 일반 민과는 다른 賦役체제 아래 놓여

있는 계층이다 또 軍吏의 父兄子弟에 대해서도 그 食口簿를 따로 작

성하여 관리하고 있다

集凡中鄕州軍吏四人父(子)兄弟三人 中(參3012)

集凡南鄕領軍吏父兄弟合十九人 中(參 464)

이러한 사례들은 吏가 있는 戶는 그 食口들까지 포함하여 吏가 있는

戶 즉 吏戶로서 별개로 관리되고 그 성원은 모두 吏戶의 役 내지 賦

役체계에 들어가는 것임을 말해준다

위와 같이 州吏 縣吏 등 吏戶의 戶口簿는 그 食口 가운데 州吏 縣吏

등 그 吏인 자가 맨 앞에 戶人으로서 위치하지만 給吏는 戶人이드라도

앞에 위치하지 못한다

小武陵鄕嘉禾四年吏民人名妻子年紀簿(壹101533)

吉陽里戶人公乘張惕年卄八算一給縣吏(壹1018232)

吉陽里戶人公乘廖裕年卄七算一給郡吏(壹1017525)

高遷里戶人公乘黃毛年卅四算一給軍吏(壹10306)80)

또한 同 戶籍簿에 縣吏 州吏 등은 아래와 같이 맨 앞에 위치하여 일반

민이 아님을 명기하고 있지만

縣吏鄧橎年卄七 璠()妻大女金年卄一 算 (貳 1729)

州吏蔡區年卅二 區妻大女年卄七 算 (貳 1822)

軍吏朱謙年卅五 謙妻大女壹年卄六 算一 (貳 1723)

80) 인용된 4簡文은 凌文超가 재정리 조립하여 올린 글(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

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型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의

lt表二gt(pp25-37)에서 인용함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0給吏인 경우는 일반민을 가리키는 lsquo民男子rsquo로 기재되어 있다

民男子蔡若年卅七給驛兵 若妻大女四年卅算一(貳 1781)

民男子蔡喬年六十二給驛兵 喬妻大女典年卅八 (算) (貳1903)

따라서 위와 같은 吏民簿에서 民戶를 제외한 州吏나 郡吏 縣吏 軍

吏가 吏戶라면 給州吏 給郡吏 등 여러 職事의 관서에 給事하는 수십

종의 다양한 給某吏 신분은 전술한 庶民在官者 나 lsquo非吏이면서 관부

에 있는 자rsquo와 매우 유사하거나 일치한다

여기에서 吏戶나 吏役의 존재 여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는데 黎虎

는 삼국시기 吏戶의 존재를 인정치 않으나81) 高敏과 孟彦弘은 그 존

재를 인정하며 특히 高敏은 吏役制도 漢末三國시기에 확실히 형성되

었다고 한다82) 韓樹峰王貴永은 후한말 孫吳시기에 卑賤化가 이루어

지면서 吏戶의 萌芽가 이루어졌으며 lt吳簡gt에서의 給吏는 吏가 아니

고 民에 속한다고 한다83) 이러한 여러 異見의 배경에는 吏로 칭해지

는 계층에 전술한 바와 같이 다시 두 계층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계층

이 있는데 그 면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

각한다 양자의 구분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자료를 든다 속한서 百官3 大司農條의 注引 漢官에 丞一人 三百石 員吏四十人 其十一人

斗食 十七人佐 七人學事 五人守學事 皆河南屬縣給吏者 라 하였다

대사농승 속하의 斗食 이하 員吏 40인을 모두 하남군 속현에서 조달된

吏로 충원한다는 것이다 즉 후한 수도 낙양 인근인 하남군 속현에서

吏員을 차출한다는 것인데 斗食 佐 學事 등의 員吏는 해당 분야의 職

81) 黎虎 ldquo吏戶rdquo獻疑 (歷史硏究 2005-3) pp53-6882)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形成與演變 mdash談長沙走

馬樓簡牘札記之六 (鄭州大學學報 2001-1) p61孟彦弘 吳簡所見ldquo事rdquo臆說 mdash從ldquo事rdquo到ldquo課rdquo (吳簡硏究 2 2006) pp205-208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爲役之制 (魏晋南北朝隋

唐史資料 24 2008) pp8-2183) 韓樹峰 앞의 走馬樓吳簡中的ldquo眞吏rdquo與ldquo給吏rdquo pp33-38 韓樹峰王貴永 앞

에 든 孫吳時期的ldquo給吏rdquo與ldquo給戶rdquo -以走馬樓吳簡爲中心 p99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1事를 처리할 수 있는 職能者여야 하기 때문에 하남군에서 이러한 職事

로 근무하고 있는 員吏를 파견하거나 일반민 가운데서 새로 선발하여

파견 조달하였을 것이다 상하급 관부끼리 상호 관리를 파견하여 일정

기간 복무하게 하는 경우에 조달 지원한다는 의미로 動詞語로서 lsquo給rsquo을

쓸 수 있고 이러한 사례는 문헌에 이미 자주 보인다 위에 든 lsquo屬縣給

吏者rsquo도 그 한 실례이다 이러한 경우는 본래 吏의 신분이 여타의 관부

에 일정기간 출장 근무하는 것일 뿐인 까닭에 그 신분은 그대로 吏일

것은 자명한 일이다 즉 縣吏가 郡府에 출장근무 중일 때 그 신분은

그대로 縣吏이고 해당 名簿에 縣吏A가 여타 名簿에서 給郡吏A로 표

기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동일인이 名簿에 따라 신분명이 달리 기

재되어 있는 사례가 약간이나마 보이고 있는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된다(후술) 그런데 給州吏 給郡吏 給縣吏 등 수십종의 給吏에는 이런

경우가 아니고 lsquo州吏 등 諸吏에 배속되어 給事 중인 非吏로서 관부에

복무 중인 民rsquo이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給某吏로 표기된 자들은 lsquo給rsquo

이 붙지 아니한 州吏 郡吏 縣吏와는 달리 lsquo民男子rsquo로 표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給州吏는 非吏로서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그 관서에서 하나

의 職役의 형태로 복무 중인 民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들은 실은 民으로서 관부 업무상 필요한 노역에 동원되는 셈이지만

일부는 여러 관서의 하급 실무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전문의 職能을

갖춘 자들도 있다 縣吏 州吏의 職事 뿐 아니라 앞에 든 수십 종의 전

문 분야 부서별 給吏의 명칭은 그에 상응하는 사례들이다 정부는 이

들이 본래 일반 서민이지만 관부 운영의 필요상 특별 관리를 하지 않

으면 안 된다 그 결과 후한의 여러 사례에서 보듯이 대개 그 職을 세

습토록 하고 이들을 일반 民과 구분하여 칭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lt吳簡gt에 忠子男仲年十五 任給吏 (參 1805)라 한 것은 給吏가 民

에서 차출되어 임용되는 독립 계층임을 말해준다 또 草言府大男吳杭

不是卒子弟不應給卒事 八月卅日兼兵曹掾潘(因)()白(柒總49968)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卒의 子弟가 아니면 給卒事에 복무하게 할 수

없었다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2그들이 본래 吏의 신분이 아닌 까닭에 바로 吏로 칭하지 못하고 그

吏에 배속되어 給事하는 자 또 그 戶의 뜻으로 給某吏 給戶와 같은

칭호가 나오게 된 것으로 본다 이 칭호는 사실 관리와 民 사이에 있

는 이들 계층의 성격을 상당히 잘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이 給吏 계

층의 부담이 커지고 그 賤役 부담자로서의 성격이 뚜렷해감에 따라 給

吏나 給戶가 吏戶나 吏家로 칭해지고 給吏나 給戶의 役이 吏役으로

칭해진 것인데 그렇게 간략한 형태로 칭하여도 이미 관리의 吏와 충분

히 구분되는 것으로 사회가 인지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의하면 lt吳簡gt에 보이는 眞吏도 사실 眞吏라 할 수 없는 給吏

에 대비하여 쓰이게 된 용어가 아닐까 한수봉왕기영은 眞吏란 給吏

에 대비된 용어라 하고 lt吳簡gt에서 給吏가 口算 납부 의무가 있지만

眞吏는 면제되며 정식의 吏이고 신분성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羅新도

眞吏에게 口算錢이 면제되고 있다고 하였다84) 眞吏에 대한 여타의 견

해도 있지만85) 給吏와 관련하여 참고할 만 한 지적이다 또한 lt吳簡gt

에서 其七戶給郡吏 下品(壹5447) 其十二戶給郡吏 下品 (壹

5677) 其十二戶給縣吏 下品 (壹5467) 其一戶給軍吏 下品 (參

430336) 給度吏 下品之下 (5653) 등에서와 같이 給吏는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여서 평균의 民戶 보다 더 빈천한 계층인 점도 그

들이 관부에 給事하는 吏라기 보다는 非吏인 民으로서 民의 일반 요역

에 대신하여 관서에 給事(給役)하는 자들이되 그 일부는 職能에 따라

세습하여 관련 관서의 吏에 배속되고 給事 복무해야 하는 예속된 신

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lt吳簡gt에는 하나의 戶人을 首로 하고 그에 배속된 듯 한 여

러 신분의 戶數와 신분명을 기록한 簿가 있다 lt走馬樓吳簡竹簡gt에

84) 羅新 ldquo眞吏rdquo新解 (中華文史論叢 2009-1) p129 단지 그는 眞吏란 非華

夏系 출신의 編戶化된 토착 사회를 관리하는 인원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85) 이를테면 黎虎는 眞吏란 非眞吏에 대한 대칭이 아니고 실제로 除授 받은 관

원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說ldquo眞吏rdquo -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史學月刊2009-5) p5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3다음의 예들이 있다

-1 里戶人公乘縫繒年卄五苦腹心病 (5443)

- - - - - - -

其七戶給郡吏下品 (5447)

- - - - - - -

其一戶給州吏下品 (5452)

-2 平樂里戶人公乘鄭張年五十 (5460)

- - - - - - -

其十二戶給縣吏下品 (5467)

-3 東陽里戶人公乘扶侈年十四 (5471)

其二戶給庫吏中品 (5472)

- - - - -

其一戶給縣卒下品 (5474)

-4 宜陽里戶人公乘區歸年卄二眞吏 (8962)

- - - 給州卒 (8965)

- - - -

年六十一給驛兵 (8976)

右尙書吏三(戶) (8517)

孫吳에서 公乘의 작위 소유자는 일반민 중에서도 상당히 많지만 漢

代 民爵의 최고위 爵인 公乘(第8等)의 戶人에게 보통 여러 신분의 수

십호를 배속시키고 있다 그 중에 10戶 내외의 給吏가 배속되어 있다

또한 이들 戶人은 배속된 戶가 납부한 租稅를 거두어들이고 이를 일괄

해서 관부에 납부하고 있다 먼저 각 戶로부터 受領한 내역은 문장 앞

에 lsquo領rsquo으로 표기하고 受領한 액수를 총합하여 관부에 납부한 내역은

앞에 lsquo入rsquo으로 표기하고 있다

里戶人公乘曾(年五十三)妻年卅九 (簡 1631-1652)

- - - - - -

領二年郵卒限米田六頃五十畝收限米二斛合爲吳平斛米一千三百斛

其三百十四斛五斗府州中倉關邸閣李崇吏黃諱潘慮 中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4領二年民田三百七十六頃六十五畝二百卅八步畝收米一斛二斗合四萬

五千一百九十九斛一斗 - - - - - - - - -

常遷里戶人公乘李漠年卅七 妻大女思年卅一

入嘉禾二年郵卒限米七百九十八斛二斗八升

入嘉禾二年佃帥限米九百五十五斛八斗七升

- - - - - - -

이 戶人은 대부분 公乘이고 노비를 소유하고 있으며 配屬된 戶의

徵稅와 총괄 납입의 업무에 복무하고 있는데 이는 후대 富戶에게 差役

복무를 부과한 사정과 비슷한 면이 있다 후대 差役제도와 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1인의 戶人을 賦稅 징수 납입의 책임

자로 하여 향리에서 이 방면의 기층단위로 운영하고 있는 셈인데 戶籍

簿와는 그 내역과 용도가 다른 별개의 독립 帳簿이다 그런데 劉家軍

은 限米 납부자 신분인 私學還民叛士吏卒 등이 모두 流民이

며 그 戶人에게 依附하고 있는 자들이라 하고 국가가 그 依附관계를

승인해주면서 그들이 경작할 토지를 戶人에게 分級해주고 그들이 납

부하는 地租인 限米도 戶人의 이름 아래 등기한 것이라고 보았다86)당

시 嘉禾연간에 전란으로 長沙 임상현 지역에 流民이 많이 流入되었을

가능성은 이미 여러 연구에서 지적된 바 있고 還民 叛士 등 일부는

流民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限米와 屯田限米 납부자 신분에는

이밖에 大男 州倉吏 吏帥客 金民 佃吏 郵卒 衛士 傳卒 子弟 佃卒

復客 新吏 兵客 故師子弟 兵師士 故帥客 後客 船師 司馬 士

등 거의 전 계층을 망라하고 있는데 이들 중에 유민이 있을 수 있으나

모두 流民 출신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새로 屯田이나 侯國의 田을

경작시키기 위해 유민 뿐 아니라 在地의 吏民에게 할당하여 佃作으로

운영하는 것은 여러 문헌자료에도 있고 lt吳簡gt의 lt吏民田家莂gt은

주로 在地의 호적에 올라 있는 吏民의 佃作 내역 장부이다 또 lt吳

簡gt 草言府部諸鄕吏區光等招誘諸限田客八十三人首見事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曹史趙野

86) 劉家軍 論lt走馬樓吳簡竹簡gt中 ldquo限米rdquo的性質 (中國社會經濟史硏究 2005-2) p87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5白 (柒總 49782)에 의하면 당시 長沙 지역에서 鄕吏에 의해 限田客

83인을 招誘했다는 성과를 보고하고 있는데 이와 같이 佃作 인력의 확

보에 애쓰는 상황에서 전술한 바와 같은 본래 限田의 佃作 의무를 지

고 있는 在地 吏戶의 家內 성원이 그 佃作者 명단에서 제외될 리가 없

그래서 簡文(B) lt州吏父兄子弟年紀簿gt에서 吏戶의 家內 父兄子弟

인력 23인 가운데 lsquo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rsquo과 lsquo一人先出給縣吏rsquo가

관부에 급사하는 給吏에 해당하고 lsquo一人限田rsquo은 限田의 佃作에 복무하

는 자이다 바로 이어 인용하는 孫休의 詔文에서 吏家의 어려운 사정

에 대해 ldquo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이미 限米를

납부하였는데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rdquo라 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전반부는 給吏로서 복무

하는 것이고 뒷부분은 限田 佃作 복역을 말함이다 즉 한 吏戶의 父兄

子弟 가운데 일부는 전자에 복무하고 일부는 후자에 복무한다 똑 같

은 관부 내지 국가의 역에 복역하는 것이지만 給吏는 분명히 吏(分署

의 담당 吏 州吏)에 給事하는 자라는 점에서 給吏로 칭하여 여타의

복역과 구분한다 그리하여 그 給吏가 결혼이나 계승으로 하나의 戶를

이루면 簡文(A)에서와 같이 某里의 戶籍簿上에서 里의 총 戶民數 아래

에 lsquo其四戶給縣吏rsquo와 같은 형식으로 戶를 本으로 한 給吏로서 명기된

다 그런데 一人의 給吏가 아직 戶를 이루지 못하고 한 吏戶의 成員

(父兄 子弟)으로서 있는 상황이라면 그 戶人의 현재 신분에 의해 그

戶가 표기되었을 것이다

이 문제와 직결되는 다음 기사를 살펴보자 孫權의 제6子로 孫亮에

이어 즉위한 孫休는 그의 즉위 年인 영안원년(258)에 다음과 같이 詔

하였다

「諸吏家에 5인이 있으면 (그 가운데) 3인은 겹쳐서 役에 복무하고 있

다 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이미 限米를 납부하

였는데 군대가 출정하면 또 종군함에 심지어는 家事를 돌볼 자도 없게

되는 것을 짐은 매우 애처롭게 생각한다 그 5인 가운데 3인이 役에 복무

하고 있다면 그 父兄이 (家에) 머물고자 하는 것을 허용해주어 1인을 (役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6에 나가지 않고) 머물게 하고 그 限米를 면제해주며 군대가 출정해도 종

군하지 않도록 하라 (삼국지 권48 吳書 孫休傳 永安元年條)87)

孫休는 즉위 전 재야에 있을 때 시골 생활을 보냈던 바가 있어 그

들의 참상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吏家(吏戶)가 지는 과중한 부담

은 곧 그들이 그만큼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 吏役이 賤視化 되고 厮役으로 인지되고 있던 배경을 위의 詔文은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lsquo吏家rsquo의 식구는 여러 방면의 복무를

중복하여 부담하고 있다 그 가운데 限米 납부 의무는 lt吳簡gt에 의하

면 국가에서 佃作케 하여 운영하는 限田 경작에 대한 租로써 납부하는

것이다 즉 전술한 lsquo二年常限rsquo田을 이 限田으로 보아 그 地租를 限米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다88) 단지 于振波는 限米란 二年常限田과는 관

계가 없고 屯田 경작에 대한 조세인데 衛士 郵卒 傳卒 등의 상비병

과 토지가 없는 수공업자 외지에서 수학하기 위해 온 私學 이탈하였

다가 새로 돌아와 附籍된 還民에게 軍屯이나 民屯에 종사하게 하고 일

부의 부세와 요역을 면제해주면서 限米를 납부하게 한 것이라 한다89)

그의 동일한 글에서 여타 사항에 대해 필자와 일치한 부분에 대해서는

앞에서 찬동한 바 있지만 이 부분에는 수긍하기 어렵다 lt走馬樓吳

簡竹簡gt에는 限米 납부자로 기재된 신분에 전술한 바와 같이 많은

신분이 망라되어 있고 孫休傳에서 말하는 吏戶가 일부 상비병이나 귀

환민 私學등에 한정한 것이 아니고 吏戶 전반의 형편을 들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lt吏民田家莂gt에서 佃田의 총수는 二年常限田과 餘力

田으로 구성 내지 구분되어 있다 즉 常限田은 餘力田에 對比되는 용

어이다 그리고 양자의 畝當 租額이 嘉禾4년 民의 경우 12斛 0456

87) 詔曰 ldquo諸吏家有五人 三人兼重爲役 父兄在都 子弟給郡縣吏 旣出限米 軍出

又從 至於家事無經護者 朕甚湣之 其有五人 三人爲役 聽其父兄所欲留 爲留

一人 除其米限 軍出不從rdquo」

88) 앞에 든 高敏의 글 lt吏民田家莂gt中所見ldquo餘力田rdquo ldquo常限rdquo田等名稱的函義試釋

이래 대부분 이 견해에 따른다

89) 于振波 앞에 든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7斛 州吏의 경우 0586斛 0456斛으로 차이가 있다90) 무엇보다 앞에

서 살펴 본 lt오간gt lt廣成鄕州吏父兄子弟伏處 人名 年紀爲簿gt에 기재

된 州吏의 食口 현황 내역은 孫休傳에서 吏戶의 식구 사정을 말하고

있는 내역과 같은 모습을 전하고 있는데 91)전자에서는 限田이라 하였

고 孫休傳에서는 限米라고 한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限田에 대해 징

수하는 것이 곧 限米이다 따라서 限田이란 二年常限田의 簡稱일 것으

로 본다 lt吳簡gt의 lt吏民田家莂gt에는 이들 限田戶의 佃田額과 그에

대한 租賦稅 납부 內譯이 있다 이 戶는 州郡縣吏 등으로 담당 吏職에

給事해야 하고 從軍도 해야 한다 이러한 양상은 분명히 역의 부담이

중첩된 것으로 일반민보다 더 과중하다 租額인 限米 납부액도 일반민

의 사유지에 대한 租額보다 비율이 높았다

그런데 중요한 사항은 첫째 이렇게 과중한 부담이 중첩된 吏戶의

일면을 보여주는 lt吏民田家莂gt에서 佃作吏民의 戶人(戶主) 신분을 보

면 大男大女州吏群吏縣吏軍吏州卒郡卒縣卒復民士

등으로 吏와 民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들 吏民 모두 佃作

의 의무와 함께 地租로 米穀 布 錢을 납부해야 하고 從軍의 役이 있

으며 그리고 대량의 lt오간gt에 다량으로 보이는 子弟 및 給子弟가 곧

吏의 子弟로 파악된 것에 의하면92) 그들이 납부하는 子弟限米의 부담

도 吏戶의 부담이 된다 또한 lt오간gt에

郡吏公乘李年卅二 算一 (貳2460)

侄子年卅九給子弟 妻大女衷()年卄六 算一 (貳1754)

吉陽里戶人公乘張惕年卄八 算一 給縣吏 (壹1018232)

등의 많은 簡文에서 吏와 그 子弟 給吏들에게 算賦도 부과되고 있다

90) 앞에 든 張福亞 也談lt嘉禾吏民田家莂gt中ldquo二年常限rdquo田的函義 p11의 表1

91) 이에 대해서는 앞에 든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

形成與演變 mdash談長沙走馬樓簡牘札記之六 pp62-63 참조

92) 孟彦弘 앞에 든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爲役之

制 pp1-7 子弟는 吏의 子弟 給子弟는 관부의 給事에 差出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8단지 吉陽里戶人公乘鄭龍(龍 下에 田)年卅六算一給州吏復 (壹3323)

과 같은 lsquo給州吏復rsquo 즉 給州吏이면서 算賦가 復除된 경우가 있는데 이

에 의거하여 給吏는 算賦에서 復除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93) 그러나

위에 든 簡文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부분의 給吏가 lsquo算一rsquo로 기재

되어 있고 소수만이 lsquo復rsquo으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復除되는 경우는

특별한 사정이 있어 그 給吏에게만 특혜를 준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

으로 생각한다 참고로 lsquo腫兩足rsquo자나 lsquo刑兩足rsquo자인 民戶의 戶人도 算賦

가 면제되지 않고 있으며94) 大女도 算賦 납부 의무가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吏戶와 民戶가 지는 국가에의 부담은 吏戶가 각기의 吏職

에 복무하고 일반민호는 그러한 吏職에 있지 않다는 정도 외에는 별다

른 차이가 없다 물론 일반민은 吏職의 役 즉 吏役이 없는 대신에 일

반요역에 복역해야 하고 吏戶는 일반요역에서 면제된다 그러한 사실

을 말해주는 자료로 lt오간gt 戶口簿에 里別로 定應役의 戶數 즉 일반

요역에 응당 복역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진 里別 戶數 문서가 있다

其一百卅八人男 (參431548)

其八十一人(女) (參431144)

其一戶給軍吏 下品 (參430336)

其五戶民 (下)品 (參430235)

其七戶女戶不任調 下品之下 (參430134)

其領役民卅七戶 (參430033)

이 里別 戶口簡은 凌文超의 編次 정리 작업에 의하면 新成里의 總

結簡에 해당하는데95)여기서 일반민호수는 생략하고 給軍吏나 調에서

면제되는 女戶 등의 수만을 기재한 것은 맨 아래의 定應役 戶數를 算

出하는 근거를 기록하기 위함이다 즉 일반민호 외의 給吏 등의 戶數

93) 凌文超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型

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 p5494) 高平里戶人公乘黃高鼰五十二算一腫兩足 (貳 2903) (大)成里戶人公乘何軼年

五十五算一刑兩足 (參626736)

95) 凌文超 앞에 든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

簿rdquo的類型與功能 p40과 lt表3gt 중 p45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9가 총 13戶이고 이들을 제외한 定應役의 戶數가 37호란 뜻이다 그래

서 新成里의 총 호수는 50戶였음을 알 수 있다 新成里의 총 口數 219

명은 lt오간gt의 戶當 口數 평균이 대략 45명 정도임을 감안하면 486

戶이고 50戶와 근접한다 따라서 給軍吏 등 13호는 定應役에서 면제되

는 戶임을 알 수 있다 또 다음 戶口簡은 앞부분 里의 총 口數가 결락

되어 있다

其一戶給朝丞 (貳170263)

其二戶給郡園父 (貳170162)

其五戶尫嬴老頓貧窮女戶 (貳170567)

定應役民卄戶 (貳170466)

여기서는 給朝丞1戶 給郡園2戶 절름발이 노인 빈궁자 女戶 등 5

戶가 役에서 면제되고 그 나머지 20戶가 定應役民이 되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즉 給吏는 定應役에서 면제되고 있다 따라서 給吏는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부에 給事하는 것이기에 당연히 일반요역에서 면제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給吏에도 전술한 바와 같이 吏戶의 가속인 경우가 있고 일

반민 중에 차출된 경우가 있는데 전자의 경우는 관부에서 필요할 때

마다 고정적으로 차출되었을 것이며 일반민의 경우는 본래는 일시적

한시적으로 징발되었을 것이지만 여러 簡文에 戶人으로서 給吏인 자가

있는 것에 의하면 점차 전자의 경우와 같이 吏戶와 마찬가지로 給吏戶

로서 고정적으로 차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定應役이 戶를 부과

단위로 삼고 있다는 점 또한 吏戶의 家屬이 하나의 徵役 단위로서 운

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도 吏戶의 실재성과 그 독립적인

신분성을 말해준다 더구나 일반 민호와 구분된 吏戶 名籍(lsquo吏名籍rsquo)의

존재가 다음의 簡文에서 확인된다

諸鄕謹列郡縣吏兄弟 幷攴 吏名籍 (13-7638)

吏戶의 막중한 부담은 그 家屬의 叛走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0를테면 縣吏 毛章의 15세인 弟(壹 7865) 縣吏 毛車世의 49세인 父(壹

7868) 群吏 黃의 13세인 弟(壹7893) 群吏 谷漢의 29세인 兄子

(壹7905)가 嘉禾 2년에서 3년 사이에 叛走하였다 후한 말 陳寔은 어

려서 縣吏가 되어 항상 厮役에 給事하였는데( 常給事厮役 ) 후에 都亭

의 佐가 되었다96) 그리고 郭太는 대대로 집안이 빈천하고 어려서 고

아가 되었는데 모친이 縣廷에 給事하게 하려 함에 말하길 ldquo대장부가

어찌 斗筲의 役에 處해 있을 것입니까rdquo라 하고 마침내 떠났다97) 당

시 이미 吏役이 厮役으로 인식되어 있었고 斗筲의 役 즉 100석 이하

인 斗食의 位에 처하였음을 말해준다 즉 같은 吏이더라도 100석 이상

인 掾史와 그 이하 사이에는 차등과 구분이 있었다(후술) 그렇지만 이

두 경우는 모두 吏가 되는 것이 선택의 길이었기 때문에 吏戶에 속한

자들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吏戶가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던

것에 비해 이 두 경우는 선택사항이었다 斗食에게도 매우 소액이지만

月俸이 지급되었기 때문에 빈천하거나 고아가 되어 생업을 위해 吏職

을 선택한 것이다 나이도 어리고 집안의 세력 배경도 없는 가운데 吏

가 된 것에 의하면 斗食의 최하단에 속한 吏였을 것이며 이들이 給吏

가 아니고 吏로 칭해진 것은 일반요역 복무에 대신하여 징발 내지 차

출된 경우가 아니고 吏職에 임명된 것이기에 당연하다

縣吏 등의 諸吏役이 厮役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무엇 보다 그 雜

役的인 吏役의 과중함 때문이다 후한 lt張景碑文gt에서 14鄕의 正을

調發하여 勸農의식에 소요되는 土牛 제작에 육칠십만전이 들어가 吏와

正이 매년 患苦에 처함에 男子(庶民) 張景이 매년 그 비용을 출연하여

土牛를 義作해주겠다 하고 그 대신 자신을 縣吏 列長 伍長에 임

용되지 않게 해줄 것과 小繇 징발을 면해줄 것을 청하고 있다98) 즉

96) 후한서 권62 陳寔傳에 (陳寔)少作縣吏 常給事厮役 後爲都亭(刺)佐

p2065

97) 후한서 권68 郭太傳에 (郭太)家世貧賤 早孤 母欲使給事縣廷 林宗曰 ldquo大

丈夫焉能處斗筲之役乎rdquo 遂辭 就成皐屈伯彦學 三年業畢 博通墳籍 p2225

98) 府告宛 男子張景記言 府南門外勸〔農〕土牛 調發十四鄕正 上賦

斂作治 幷土人 犂 耒 卄 蓎 屋 功費六七十萬 重勞人功 吏正患苦 愿以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1서민이었던 張景은 거액의 자금을 출연하면서까지 縣吏 등의 吏役과

小繇의 복역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있다 그는 아직 非吏였지만 吏役에

언제든지 차출될 수 있었고 그 吏役은 매우 번거롭고 힘든 것이었음

을 알 수 있다 단지 張景과 같은 서민이 縣吏가 되어 吏役에 差出되

는 경우 바로 lt오간gt에서와 같은 吏戶가 되어 그 가속이 모두 吏役의

범위에 들어가게 되는지는 不明이다 推斷이지만 世戶로서의 吏戶와

함께 일시적으로 차출되어 일정 기간 만 복무하는 非世戶로서의 吏戶

가 공존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요컨대 lt오간gt과 문헌자료에 보이는 吏戶와 給吏의 면모들은 앞에

서 검토한 胥徒와 lt庶民在官者gt 내지 徒御 導從役人 등과 일맥상통

하는 면이 있다 孫休傳이라든가 lt오간gt에 빈출하는 吏戶 吏民에서의

吏는 500石 이하인 吏 중에서도 200석 이상의 長吏級을 제외한 下吏

즉 百石 이하의 吏를 가리키고 給吏는 吏가 아니되 관부에서 일정 기

간 여러 분서에 勞役으로 복무하는 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즉

庶民在官者 와 상통한다 특히 그들에게 부과되었던 賦稅役의 내역에

서도 위에서 검토한 여러 職役 계통 신분이나 계층의 예와 거의 비슷

하다

孫休傳에서 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라 한

것은 吏家의 父兄은 都에서 州郡縣의 吏로 복무한다는 뜻이고 나머지

3인의 자제는 郡縣吏에 給事한다는 뜻이다 즉 lsquo郡縣吏에 給事함( 給郡

縣吏 )rsquo이란 子弟3인이 郡縣吏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郡縣吏에 下屬되

어 그 업무에 給事한다는 뜻이다 위의 廣成鄕의 lt人名年紀簿gt 簡文

에서 lsquo先出給縣吏rsquo도 州吏7家의 식구 가운데 먼저 縣吏의 업무를 보좌

하기 위해 차출되어 나간 것을 뜻한다 여기서 말하는 郡縣吏는 주로

掾史職으로 사무 업무 중심이고 그 업무를 노동력으로 보좌하는 인력

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lt오간gt의 도처에 諸吏의 사례로써 諸曹倉

吏庫吏監運掾關邸閣船師田戶曹史 등 수십종의 職名이 보이

家錢 義作土牛 上瓦屋 欄楯什物 世世作治 乞不爲縣吏 列長 伍長 徵發小

繇 (高文 漢碑集釋 開封 河南大學出版社 1997 p227)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2는데 대부분 그 업무 처리에 노동인력이 필요하다 십 명 내외의 掾史

員吏 만으로는 사무나 문서작성 관리 업무 이외에는 수행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 인력을 吏戶의 식구로부터 자동으로 差役시키는 시스템이

漢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었음을 위 孫休傳의 기사는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이들 吏家의 식구 현황 파악은 관부에서 항상 필요

로 하고 확보해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lt오간gt의 여러 문서는

그러한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東鄕勸農掾殷連被書條列州吏父兄人名年紀爲簿

輒科核鄕界 州吏三人 父兄二人刑蹱叛走 以下戶民自代 謹列年紀 以

(已)審實 無有遺脫 若有他官所覺 連自坐 嘉(禾)四年八月卄六日破莂

保據 (J22-2543)

여기에서 담당 鄕界의 州吏3인 가운데 그 父兄2인이 受刑과 叛走로

비게 됨에 下戶의 民을 징발하여 바로 충당시켰다는 것이다 이 以下

戶民自代 에 대한 해석에서 下戶를 고용하여 자신을 代理케 한 것이라

는 견해가 있는데99) 그렇다면 戶人인 州吏가 자신의 식구 결원을 책

임지고 직접 下戶를 고용한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해당 州吏의 부담

이 너무 크게 되어 당시 下戶가 자동으로 보충되는 시스템으로 운영된

것일 가능성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諸家의 견해 모두 不明

임을 인정하고 있다100) 어쨌든 吏戶의 노동력을 신속하고 철저하게

보충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은 吏戶 전체의 식구가 관부에

예속되어 있고 세습화 된 상태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단지 孟彦弘은

이 자료를 통해 당시 吏戶의 家屬이 모두 吏였음을 말해준다고 하였으

나101)그렇지 아니하고 吏의 가속에 吏도 있을 수 있지만 아직 吏가

아니고 吏를 노동력 지원으로 보조해주는 給吏도 있고 그 給吏는 非

99) 이 점에 대한 정리는 王素 長沙吳簡勸農掾條列軍州吏等人名年紀三文書新探

(魏晋南北朝隋唐史資料 25 2009) p9의 注 11) 참조

100) 이를테면 孟言弘 앞의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

爲役之制 p16

101) 위의 글 p1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3吏로서 관부에 給事하는 자이며 이런 면에서 전술한 庶民在官者 내

지 lsquo非吏이면서 관에 있는 자rsquo lsquo官과 民 사이rsquo lsquo lsquo半官 半民rsquo lsquo踐更小史

(小吏)rsquo(續漢書輿服志) 등과 상통한 계층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吏戶에 포함되지 않는 給吏가 있었다 吏戶와 給吏戶가 구분되

고 있음은 lt吏民人名年紀口食簿gt의

其七戶給郡吏下品 (壹5447)

其十二戶給縣吏下品 (壹5467)

其一戶給軍吏下品 (參430336)

(其)六戶郡吏(中)(品) ---- (貳4490)

其二戶縣吏(下)品 (貳3307)

등에서 給郡吏 등의 戶와 縣吏의 戶가 구분되어 기록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다 그리고 給吏가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에 속하였음은 위

의 사례 뿐 아니라 lt吳簡gt에서 給度吏 下品之下 (5653) 등에서 알

수 있는데 下戶로 결원을 보충하는 것은 同級의 戶로 충원한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면 또한 당시 吏戶와 給吏의 관부에의 예속성과 신분

성을 보여준다 요컨대 給吏는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여서 평균

의 民戶 보다 더 빈천한 계층인 점도 그들이 관부에 정식의 吏職으로

임명된 吏라기 보다는 非吏인 民으로서 民의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

서에 給事(給役)하는 자들이되 관련 관서의 吏에 배속되고 給事 복무

해야 하는 예속된 신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찍이 宮崎市定이 宋書권94恩倖傳序의 郡縣掾史 幷出

豪家 負戈宿衛 皆由勢族 를 인용하여 豪家 출신으로서의 掾史가 고

관으로 진출하는 경향이 累代 이어지면서 右族이 이루어지고 이를 통

해 위진남북조 귀족제가 출현하였다 하였고102) 楊振紅이 이에 동조하

고 있는 것은103) 부분적으로 再考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당시 孫休

102) 宮崎市定 九品官人法の硏究 -科擧前史 (京都 同朋社 1979(1956)) pp86

-89

103) 楊振紅 앞에 든 吳簡中的吏 吏民與漢魏時期官 吏的分野 mdash中國古代官僚

政治社會構造硏究之二 p34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4傳에서 말한 吏戶는 분명히 豪族勢家가 아니었고 lt오간gt에서 民戶와

함께 lt吏民簿gt에 기록된 吏戶는 下品에 속한 貧層이었으며 그 식구

모두 중복된 賦役의 부담에 시달리는 계층이었다 그 吏戶에는 吏와

給吏로 구분되어 관부에 예속되고 있다 즉 아무래도 豪族大家로서의

掾史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정을 이해하는 데는 전술한

lt周禮gt의 府史胥徒에서 府史가 호족대가로서 辟除된 掾史에 類하고

胥徒가 곧 관부 예속하의 吏戶와 給吏에 거의 相當하다는 면이 있다

吏戶에서의 吏職에 掾史가 있겠지만 관부에 예속되어 있고 직업적 세

습화 되어 있어 호족대가 출신의 掾史와는 구분되었을 것이다 무엇보

다 호족대가 출신의 掾史은 관부에 예속되지도 아니하고 세습의 신분

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掾史層의 존재는 군현의 장관 辟召로 임

용되었을 것이다 반면 吏戶 출신의 掾史는 기술 계통의 전문직일 경

우이거나 개인적 기능의 능력으로 또는 部曲과 같은 상비병 출신이

일반 요역 부담에 대신하여 관련 직무에 세습하게 되거나 또는 일반민

호에서 급히 所要되어 임시로 차출되었다가 점차 세습의 吏戶로 예속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관부에 진 빚으로 예속되었다가 吏戶로 남

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즉 이 吏戶는 관부의 갖가지 所要 用務

에 差出될 상황에 대기되어 있는 戶이다 그 중에 일부는 정식으로 掾

史로 승진되지만 나머지는 윤번이나 필요시 이 방면 저 방면의 分署에

차출되어 給事하며 分署의 長을 主로 모시고 그 아래에서 給事한다

掾史의 吏와 구분하여 그러한 뜻을 반영한 것이 lt오간gt의 도처에 보

이는 수십종의 給某吏다고 생각한다 호족대가 출신으로서의 掾史와

예속신분인 吏戶 출신으로서의 掾史는 그 신분상으로도 士와 서민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기에 宮崎市定의 立論 또한 양자의 구분을 통한

위진남북조의 귀족제 내지 良賤制의 형성을 논하는 보완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근래의 여러 연구들은 掾史에 이렇게 두 방면으

로 구분되는 면과 계층이 있다는 점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였고 吏戶

의 家屬에 吏와 給吏로 구분되는 층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양자의 성

격이 어떠한가를 파악하지 못한 셈이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5한편 給吏는 吏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戶人이나 父兄이 郡吏 등의

諸吏에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당시 吏戶가 직업화 내지 세습화 되어

있었기 때문에 子弟의 給吏 신분도 곧이어 諸吏로 진전될 것은 당연하

다 그래서 lt嘉禾四年吉陽里戶籍簿gt에 吉陽里에 호적이 올라 있는 給

郡吏 逢杲(壹10169) 給郡吏 寥裕(壹10175) 給縣吏 張惕(壹

10182) 給州吏 區張(壹10367) 給州吏 嚴追(壹10149) 등이 lt嘉禾四

年五年吏民田家莂gt의 下伍丘 소속 佃民 名簿에서는 거의 同一人일

것이 분명한데 給郡吏가 群吏로 給縣吏가 縣吏로 給州吏가 州卒이나

州吏로 기재되어 있는 경우도104)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

다 이 경우는 丘에서는 給吏가 보이지 아니하고 里에서만 보이기 때

문에 아직 명확히 해명이 되지 않고 있는 里와 丘의 차이에 따른 것일

가능성도 있고 嘉禾4년과 嘉禾4-5년 戶籍簿에서의 1년 내외의 기간

차이에 따른 신분의 변화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또

한 侯旭東의 정리 조사에 의하면 高遷里의 給縣吏 松棐가 위의 lt田家

莂gt에서는 武龍丘의 縣吏로 기재되어 있고 같은 里의 給縣吏 張喬는

亻平 丘의 縣吏로 기재되어 있으며 宜陽里에 眞吏로 등재된 黃阿 등

6인도 각각 6곳의 다른 丘의 州吏 男子 男子 郡吏로 기재되어 있다

또 陽里의 給郡吏 謝鼠는 夫丘의 男子로 기재되어 있다105)里의 호

적부와 lt吏民田家莂gt의 丘別 佃民 명부에서 그 신분이 男子인 경우

일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양편 모두 里의 호적부에 給郡吏 給縣

吏 給州吏등 給吏로 기재된 경우는 대부분 丘의 佃民 명부에서 각각

群吏 縣吏 州吏로 되어 있고 眞吏가 州吏 郡吏 男子로 기재되기도

하고 給縣吏가 男子로 기재된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일부 사례들은 眞

吏 吏 給吏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것이어서 그 해명이 필요한

데 현재 里와 丘의 구별 차이 眞吏와 諸吏 給吏등의 실체 문제가 아

104) 凌文超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

型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 pp17-18의 lt表一gt

105) 侯旭東 長沙走馬樓吳簡ldquo里rdquoldquo丘rdquo關係再硏究 (魏晋南北朝隋唐史資料2006) pp19-21의 表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6직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어 그 이유를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실

정이다 그러나 신분명으로 이름을 달리하여 그렇게 구분하고 있으며

전술한 바와 같이 給吏가 吏나 眞吏와 다르게 취급되면서 여러 名簿에

구별되어 기재되어 있고 그 독자성도 충분히 입증되기 때문에 위의

예외적인 사항들은 개인별 특별한 사정에 따른 것이거나 아직 여러 異

說로 논란이 되고 있는 里와 丘 등의 구분과 차이 등에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고에서 갖추어 고찰하지 못하고

후고로 미룬다

Ⅵ 결 언

이상의 검토에서 고대 職役의 범주에 들어가는 다종의 신분 내지 계

층과 吏職의 類 그 복무형태 삼국시기에 이르는 전승과 변화의 모습

들을 살펴보았다 우선 職官과 일반요역 복무자와는 신분제와 賦役체

계상 엄연히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례 地官 鄕大夫에 그

舍란 國中의 貴者賢者能者服公事者老者疾者에게는 모두 舍

한다는 것이다 에 대한 후한의 鄭司農의 注에 服公事者란 지금 吏에

게 復除해주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고 하였다106) 여기서 lsquo舍rsquo란 復

除와 같은 뜻이다 그 대상 가운데 lsquo國中의 貴者賢者能者rsquo 가운데

貴者는 공경귀족 賢者와 能者는 命官과 辟召된 관리에 해당한다 그리

고 그 아래의 服工事者는 다시 2분되는데 200석 이하의 吏職 내지 掾

史職(小吏)이 있고 그 아래에 庶民在官者 내지 lsquo非吏로서 官에 給事

하는 자rsquo로서 給吏層이 있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賢者와 能者 까지를

職官이라 하면 그 이하인 服工事者 가 곧 職役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

석된다 그리고 職官과 職役 복무자는 모두 일반요역에서 면제되는 자

106) 其舍 國中貴者賢者能者服公事者老者疾者 皆舍 注云 lsquo服公事者rsquo

謂若今吏有復除也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7들이다 이 중에서 職役 복무자는 일반요역에서 면제되는 대신에 각종

의 吏職과 給吏職에 복무하였다 여기서 칭한 給吏職은 lsquo(小)吏rsquo에 대비

하여 칭한 給吏를 그 성격상 그렇게 칭할 수 있으며 그 독립적 계층

내지 신분으로서의 실태가 lt長沙走馬樓吳簡gt의 발현에 의해 상당 부

분 밝혀지게 되었다 그런데 服工事者 즉 職役 담당 계층의 범위가

상당히 넓어서 그 職役의 양태가 모든 면에서 같은 것은 아니고 일부

분 다른 측면들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고대의 긴 기간에 걸쳐 거의

공통으로 庶民在官者 lsquo非吏이면서 관부에 給事하는 자rsquo lsquo官과 民 사

이rsquo lsquo半官半民rsquo의 성격이 유지되고 있는 면을 볼 수 있다

이렇게 職役 담당자의 연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곧 lt주례gt에 보이

는 관리 조직의 최하위에 위치한 府史胥徒이다 이 가운데 府史

가 대략 후대의 掾史職이나 lt吳簡gt의 諸吏에 속한다면 胥徒는 給吏層

에 상통하는 면이 많다 단지 lt吳簡gt에 다수 보이는 吏役 下의 吏戶

는 그 과중한 부담과 厮役 및 빈천함의 성격상 오히려 胥徒에 상통하

는 면이 많다 이러한 시대적 차이는 吏戶의 예속화 및 세습화의 진전

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한편 시대의 여건 차이로 여러 부분에서 胥徒

와 후대의 職役 담당 계층 사이에는 다른 면도 있다 胥徒나 給吏層이

기본적으로 일반 서민 출신으로서의 服工事者 였던 것과는 달리 周에

서 三國에 이르는 동안 服工事者 라는 면에서 同類이지만 일반 서민

과는 구분되는 여러 相異한 계층에 속한 신분들이 속하여 있었다 예

를 들면 工商食官 에 속하는 工商 皁隸食職 에 포함되는 吏에 속

한 徒隸 층 넓은 의미의 徒隸層이라 할 수 있는 皂隸牧圄

僕輿人 그리고 下吏層에 들어가는 樂祝醫衛士 및 走卒伍伯

之類 등이 그들로 그 출신은 일반 서민이거나 賤民 또는 刑徒였지만

관부에 寄生하며 給事한다는 면에서는 공통이다

이들의 복무 형태는 항상적 근무 일시적 근무 組別 교대제 등 여러

가지로 징발 내지 차출되었고 lsquo冗rsquo과 lsquo更rsquo은 그러한 차이를 구분하는

용어로서 나온 것이다 근무에 따른 보수를 받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 구분은 아직 분명치 않은 부분이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8있다 그러하지만 최소한 생업을 관부에 의탁하는 자들에게는 지급되

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年俸制에 대비되는 稍食 즉 소액의 月俸 내

지는 근무일수 기준의 지급 형태로 지급되었다 이는 그들의 근무가

주로 일 단위나 월 단위로 이루어지고 계산되었기 때문이다

lsquo官rsquo과 lsquo吏rsquo는 서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선진 이래 본래 상하의 신

분으로 명확히 구분되었고 漢代에 혼용 내지 통용되는 경향이 있었지

만 양자가 구분되는 면 또한 여전하였다 吏는 官에 가까운 吏가 있고

民으로서의 吏가 있어 전자를 lsquo官吏rsquo라고 하면 孫休傳의 詔에서 거론된

吏家는 보통 吏民으로 합칭될 경우의 吏라고 할 수 있다 lt吳簡gt의

lt吏民簿gt나 lt戶口簿gt 등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실태에서 후한 말에

서 삼국기의 전형적인 職役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이제까지 그

존재에 대해 거의 간과되어 왔던 給吏에 대해 lt吳簡gt은 수십종의 給

吏 실태를 전해주고 있어 그 의의가 크다 吏의 사무 업무를 직접 勞

役으로 보조해주는 給吏는 관부의 행정 업무 처리에 있어서 항상 필요

한 노동력 제공자였다 이러한 노동력은 어느 시기이든 공통으로 필요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연원을 lt주례gt의 胥徒에서 찾아볼 수 있었

고 여러 면에서 職役의 실례로서 공통하는 면들을 지적할 수 있었다

후한 말 삼국시기의 吏와 給吏는 일반서민 신분으로서의 吏이며 吏戶

로써 관부에 예속되어 그 食口 성원이 거의 세습하여 吏役에 종사하

고 있다 이들은 일반서민에 비해 일반요역이 면제된다는 점을 제외하

면 그밖에 각 吏職에 따른 吏役의 기본 직무 외에 限田의 佃作 의무와

그 地租로서 限米 布 錢을 납부해야 하며 從軍해야 하는 등 중첩된

부역으로 일반서민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또한 그 戶品 이

下品 내지 下品之下에 속한 貧戶 출신이다 따라서 같이 吏로 칭하지

만 豪族勢家 출신으로 掾史職을 거쳐 상급관으로 진급하고 命官에 오

르는 累代 高族의 世家 출신 掾史와 빈천한 서민 출신으로서 관부에

예속된 吏戶 출신으로서의 掾史와는 구분된다 이 吏家 내지 吏戶는

吏의 칭호로 불리지만 일반민보다 더 많은 부담을 지고 있기에 그들의

役은 후한과 삼국기에 賤役 賤職 내지 厮役으로 칭해지며 기피되고 있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9다 따라서 이 계층이 官吏로 합칭되는 경우의 吏와 구분되는 것은 당

연하며 그 호칭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늦어도 孫休 시기의

문서와 간독자료에 등장하는 lsquo吏家rsquo나 lsquo吏戶rsquo는 이미 그러한 계층에 대

한 專稱으로 형성된 듯하다

한편 諸吏役의 복무에는 常勤의 방식과 1년에 1개월 내지 수개월만

輪番 형식으로 복무하는 비상근의 lsquo踐更 방식의 근무rsquo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한 비상근 복무자도 있었을 것이다107)그리고 그 복무에

대한 급여가 그 吏役을 생업으로 하는 常勤者에게는 당연히 小吏에 대

한 봉록이 지급되었을 것이다 반면에 給吏의 役은 일반요역에 대신하

는 복역이라는 면에서 비상근 내지 윤번 형식의 차출이었을 가능성이

많지만 지금까지 lt오간gt에 소개된 자료로는 어느 쪽이라 단정하기가

어렵다 胥徒의 役은 어디까지나 상급의 관원들과는 달리 일반민의 요

역 의무를 대신하여 관부에 給事하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lt오간gt

에서의 給吏와 상통한다 給吏에 대한 봉록 지급의 여부도 아직 不明

이다 단지 限田의 지급이 祿田과 같은 성격의 것이었을 가능성도 고

려되지만 그 租額이 커서 혜택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노동력의 징발로

서 해석되는 부분도 있다 또한 給吏의 관부에의 給事가 일반 요역과

같이 組別 순환제였는지의 여부는 아직 분명치 않다 lt奏讞書gt의 樂

人의 예와 같이 一月一更制와 같은 순환근무제였을 가능성도 있는데

대체로 두 가지 형태가 공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lt吳簡gt에 의거한 의론들은 아직 자료 해석과 해명이 충분치 못하여

불분명한 상태에 있는 사항들이 많은 실정이기 때문에 해당 사항이 새

로 규명 되는대로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lt오간gt의 미해명 사항

에 대한 개별적인 탐구도 본 과제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필요하다 그

리고 아직 소개되지 않은 대량의 lt오간gt이 연속하여 출간되면서 새로

운 자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107) 廣懶薰雄 앞의 秦漢律令硏究 pp310-311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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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103

(中文摘要)

中國古代的職役與職官的問題

朴 健 柱

通過上述的檢討 基本上職役範疇內的多種身分 乃至階層與吏職之類

其服務形態至三國期的傳承與變化等方面已然解明 職官與職役服務者

的一般徭役均免除了 此二者中職役服務者 用種種lsquo吏職rsquo與lsquo給吏職rsquo服務來

代替其一般徭役 直至三國時期爲至漫長的期間內職役擔當者 庶民在官者

lsquo非吏而給事官府者rsquolsquo官與民之間者rsquolsquo半官半民rsquo的性格几乎共通維持

職役擔當者的淵源卽是lt周禮gt所見的官吏組織最下位的府史胥

徒 此中 府史是大略屬于後代掾史職或是lt吳簡gt的諸吏 胥徒則是相通于

給吏層的側面多的 但是lt吳簡gt所見多數的吏役下吏戶其過重的負擔與厮

役及貧賤的性格上 倒是與胥徒相通方面較多 這個時代的差異像是吏戶的

隸屬化及世襲化的進展招來的結果 一方面因爲時代的與件差異 胥徒與後

代的職役擔當階層間有多方面的異質 胥徒與給吏層基本上是一般庶民出

身的 服工事者 如此不同 從周至三國期間從 服工事者 上是同類而與一

般庶民相區分的多種相異的階層面上身分較多 例如 工商食官 所屬的工

商 皁隸食職 所包含的 吏所屬的徒隸 層以廣義的徒隸層可以稱謂的

皂隸牧圄僕輿人 以及下吏層所屬的樂祝醫衛士 及走

卒伍伯之類等 他們的出身是一般庶民 或是賤民乃至刑徒 在官府寄生

而給事的層面上是共通的

其服務形態是恒常的勤務 一時的勤務 組別交代制等以多種方式徵發乃

至差出 lsquo冗rsquo與lsquo更rsquo是其差異區分用的用語 支給勤務報酬與否是不分明之事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04項 可是至少生業官府依託者是被支給的 其支給方式是與年俸制相對的稍

食 卽少額的月俸乃至勤務日數基準的支給方式 因此他們的勤務和支給計

算主要是日單位或是月單位

於lt吳簡gt之lt吏民簿gtlt戶口簿gt等所見的吏與給吏的實態 可以看到

從後漢末至三國期間典型的職役的樣相 尤其向來看過給吏的存在 lt吳

簡gt所傳數十種給吏的實態 其意義是巨大 給吏是以直接的勞役補助吏的

事務業務 是官府的行政業務處理上恒常的必要勞動力提供者 這種勞動力

許是官府運營上至今爲至所有過的任何時期共通要緊事項 可以推斷給吏

的淵源於lt周禮gt的胥徒 而且可以指摘以職役的實例有多方面共通的層面

後漢末三國時期的吏與給吏是一般庶民身分之吏 以吏戶隸屬於官府 其食

口成員率多世襲地從事吏役 他們除比一般庶民免一般徭役外 也需要履行

各吏職別吏役的基本職務 佃作限田義務 以其地租納付限米布錢 從

軍義務等重疊的賦役 因此他們有比一般庶民更重的負擔 而且他們的戶品

是下品乃至下品之下所屬的貧戶出身 從而他們雖一樣稱謂lsquo吏rsquo 却與豪族

勢家出身經歷掾史職進級上級命官的累代高族的世家出身的掾史與以貧賤

的庶民出身於官府隸屬的吏戶出身的掾史是不同的階層 這個吏家乃至吏

戶雖被稱謂lsquo吏rsquo 但是彼役後漢三國期被稱謂賤役 賤職乃至厮役 而且被忌

避 從而此階層是與lsquo官吏rsquo合稱的境遇的lsquo吏rsquo爲區分是理所當然 其稱號也只

得相殊 于是最遲至少到於孫休時期文書與簡牘資料所見的lsquo吏家rsquo與lsquo吏戶rsquo

許是已經成爲如此階層的專稱

依照給吏的役是一般徭役代替的服役 其運營形態是非常勤乃至輪番形

式的可能性大的 但是迄今依據lt吳簡gt所見的資料還難以斷定何者是對的

胥徒的役是與上級官員異樣 以一般民的徭役義務代替給事於官府 本着那

樣的側面與lt吳簡gt所見的給吏相通 給給吏俸祿與否也還不明 但是從限

田的支給是與祿田同一的性格的可能性上看 因爲其租額是多的 與其說惠

澤倒是有可能解釋爲勞動力的徵發 給吏的官府給事是與一般徭役同一方

式的組別交代制與否還不分明 如lt奏讞書gt所見樂人的事例 有可能一月

一更制方式交代勤務制 筆者認爲大體上是兩個方式共存

關於lt吳簡gt資料的議論是因爲解釋與解明上許多異說 不分明的關聯事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105項也有很多 所以該事項的解明將其完備需要補完

주제어 직역 직관 서도 도예 이역 이호 급리 서민재관자

關鍵詞 職役 職官 胥徒 徒隸 吏役 吏戶 給吏 庶民在官者

Keywords lavor duty at office(official lavor) high-ranking officialrsquos duty(official

post) xu-tu tu-li minor officials lavor minor officials family minor half

officials and half the masses in lavor services at office the masses in lavor

services at office

(원고접수 2013년 11월 15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12월 16일 수

정원고 접수 12월 19일 게재 확정 1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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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4것으로 해석하였다14)즉 侍曹에서 최말단의 부서 단위에 이르기까지

담당 부서의 朝會 때 각 하급 단위의 長이 업무 보고를 하는 것이다

그런대 이 伍伯은 5인조의 長이 아니고 漢의 執金吾의 속관에 (持戟)

五百(伍伯)二十人 이 있고 이 lsquo伍rsquo의 義를 lsquo當rsquo으로 lsquo伯rsquo의 義를 lsquo道rsquo로

해석하여 앞에서 導引하며 길을 驅除 정리하는 吏라고 한 韋召의 해석

이나15) 司隸校尉의 속관으로 先導隊나16) 門番의 임무를 하고 있는 사

례에17) 의하면 하급의 賤職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후한에 伍伯이

자주 보이는데 모두 走卒 鈴下와 連稱되거나 병렬되어 있어 일찍이 好

並隆司는 走卒은 伍伯이라고 하는 職役에 類한다 고 하여(후술) 모두

관부 말단의 職役 내지 賤職이라 하였다18) 凍國棟은 漢唐間의 伍伯이

微賤의 役이였지만 그 職의 성격상 권세를 빌려 남의 생사를 좌우하

고 謝禮錢을 챙길 수 있는 자리였다고 하였다19) 따라서 여기서는 吏

朝에 참석하는 최말단의 吏員으로서 先導 門番 등 役에 복무하는 伍伯

을 기술한 것이라 하겠다 胥徒는 곧 伍伯과 같이 관리의 최말단 수종

원이면서 그 손발 내지 爪牙의 기능도 하는 층이다 이러한 류의 최하

급 단위의 長은 什長이고 胥는 곧 그 什長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주례에서 각 관부의 徒는 그 員數가 거의 대부분 胥의 10배수이다 그

리고 관부의 次序 업무란 담당 단위의 胥가 그 소속 성원의 질서를 유

지하며 아울러 요역 징발된 民의 徒를 지휘 통제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후술)

이어 여덟째 徒는 그 업무가 官의 令으로써 徵令을 관장함(掌官令

14) lsquo如今侍曹五伯传吏朝也rsquo者漢時五人爲伍 伯 長也 是五人之長 言傳吏朝者

傳在朝群吏諸官事務於朝也

15) 후한서 宦者列傳 曹節條의 注에 韋召辯釋名曰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伍 當也 伯 道也

使之導引 當道陌中 以驅除也

16) 續漢書 輿服志上에 公卿以下至縣三百石導從 置門下五吏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車前伍伯 公

八人 中二千石 二千石 六百石 皆四人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17) 謝承後漢書에 華松家孤微 其母夜夢兩伍伯夾門 言司隸在此

18) 好並隆司 漢代下層庶人の存在形態(一) (史學雜誌 82-1 1973) pp17-1919) 凍國棟 漢唐間lsquo伍伯rsquo淺識 (中國中古經濟與社會史論考 湖北敎育出版社

2005) pp25-35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5以徵令) 인데 얼핏 徒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내용인 듯하다 정현은

이 lsquo徵令rsquo의 업무를 趨走給召呼 라 하였다 賈疏는 그 徒가 朝會에서

뛰어다니는 것을 금지시키고 官人에게 복역자를 공급하고 그들을 호

령하며 사역시키는 일이다(其徒止爲在朝趨走 供給官人召呼使役之事也)

고 해석하였다 관부 내에서 많은 복역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까닭에

그들이 소란 피우지 못하게 질서를 잡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서 徒에 의해 징발되고 사역되는 층은 관부에 복역 중인 刑徒 요역에

복무 중인 일반 서민 등일 것이다 주례의 각 관부에서 徒의 수는

수십 명에서 수백 명 많은 경우 8백명에 이르기도 한다 이들의 노동

력은 각 관부별로 항상적으로 갖추어진 것이지만 이 보다 더 많은 노

동력이 필요하여 형도나 일반 요역 복무자들을 징발하게 된다 그리고

그 징발된 노동력을 호령하며 질서를 잡고 사역시키는 직무도 필요하

게 된다 물론 징발된 자들을 사역시키는 일 뿐 아니라 자신들이 직

접 여러 노역의 所管 업무에 복무해야 한다 이를테면 地官 牛人에

胥二十人 徒二百人 이 있고 그 직책은 公牛의 사육이며 稻人에 胥

十人 徒百人 인데 그 직책이 稻田의 경작이고 夏官 虎贲氏에 胥八十

人虎士八百人 인데 鄭注에 의하면 徒라 하지 아니하고 虎士라 한 것

은 徒 가운데 勇力者로 선발된 까닭이다 하였으며 그 일부 직무에 同

司甲 司戈盾 司弓矢 繕人 校人 趣馬 巫馬 등에 속한 수십

명 내외의 徒는 모두 무기제조나 다루는 법 무기 성능 감별 馬의 감

별 養馬기술 馬祖 馬步 등의 神을 통해 馬의 질병을 파악하는 巫術

등에 뛰어난 상급자들 밑에서 보조 지원의 일 등 말단의 업무를 처리

한다 전문 기술과 지능이 필요한 업무인지라 말단의 업무 처리도 상

당히 명민한 자질이 필요하다 따라서 일반 서민 가운데서 이러한 재

능과 자질이 있는 자로 충원한다 이러한 각 관부의 업무 처리는 후대

에도 익히 보이는 사례이다 鄭玄은 胥를 lsquo諝(智者)ldquo로 읽어 才知의 뜻

으로 해석하였는데 같은 徒의 무리 중에서 才知者로 뽑힌 자라는 뜻으

로 보았다 胥가 什長인 까닭에 10인 가운데 1인 비율로 뽑힌 셈이다

아울러 徒 전체가 일반 서민으로부터 뽑힌 자들이라 할 수 있다 단지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6胥徒의 신분상 복무형태상의 제반 사항이 후대에 그에 상당하거나 유

사한 신분층과 사례에 대비할 때 상당히 다른 면이 많다는 사실이다

趙伯雄은 주례의 胥徒는 전국기까지 노예 厮 童보다 윗 등급이지만

거의 비슷한 신분이었고 厮役 내지 賤役의 담당층이었으며 徒가 한에

서는 주로 刑徒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고 하였으나20) 아래

기술하는 내용에 의하면 그러한 해석에 따를 수 없는 면이 많다 또한

한에서 徒는 형도 뿐 아니라 여러 무리를 가리키는데 통용되고 있어

여러 자료에 등장하는 徒가 가리키는 사항은 무척 다양하다

위의 注疏에 의하면 經文에서 徒의 업무를 官의 令으로써 徵令을

관장함(掌官令以徵令) 이라 한 것은 上部의 지시를 받은 徒가 새로

징발되는 徒의 징발 업무 및 이들을 인솔 지휘 사역하며 그 지시사항

(작업)을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胥와 徒가 모두 庶民在官者 라는 입

장에서 보면 徒가 최하위이지만 lsquo在官者rsquo이고 제8위와 제9위의 서열에

있으며 胥와 徒가 각각 6인과 5인이 食할 수 있는 토질의 경지 百畝

를 代耕의 봉록으로 받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이 출신은 징발된 요

역 복무자와 같다고 하더라도 여타의 징발된 일반 요역 복무자와는 구

분되는 계층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후대의 胥吏도 일반 서민출신이지

만 일반 서민과 다른 계층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 같다 만약 曾我部精

雄의 견해와 같이 府와 史까지만 庶民在官者 이고 胥와 徒는 그에

들지 못하는 것이라 한다면 주례 원문에 胥와 徒가 엄연히 제8위와

제9위에 올라 있고 봉록으로써 百畝를 받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기 어

렵게 된다

그리고 특별히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앞에 인용한 鄭注에 이는(胥

와 徒는) 民이 徭役을 給한 것이니 지금의 衛士와 같다 고 한 점이다

그래서 후한 중후기 衛士의 운영 형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또 鄭

玄은 駁五經異義에서 周禮에서 이른바 모두 징발한다 한 것은 胥

徒로 하여금 公家의 事에 給하게 한 것을 말함이니 지금의 正衛와 같

20) 趙伯雄 lt周禮gt胥徒考 (中國史硏究 2000-4) pp10-12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7다 고21) 하였다 한에서 궁성 내지 중도관에 番上 守衛하는 役은 正卒

의 役과 일반 更卒의 役이 있는데 鄭玄이 특별히 正衛라 한 것은 正卒

로서의 役임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의 요역 운영체제에서

衛士가 上番하는 役은 한구의에 民의 나이 23세가 되면 正이 되고

1년간 衛士 1년간 材官 騎士에 복무하며 활쏘기 말달리기 戰陣을 익

힌다(民年二十三爲正 一歲以爲衛士 一歲爲材官騎士 習射御騎馳戰陣)

라 한 것에 의하면 正卒이 그 복역 대상자이고22) 각 군 단위로 1년씩

21) 禮記王制 五十不從力征middotmiddotmiddot 의 條 孔穎達疏引 周禮所謂皆征之者 使爲胥

徒 給公家之事 如今之正衛耳

22) 漢의 正과 正卒 및 상비군의 문제에 대해서는 종래 여러 이견이 있다

正을 正卒로 보고 正卒이란 更卒(小繇)의 對稱으로서 병역의무자이고 재관

기사 위사등이 곧 정졸이라는 설이 가장 많이 받아드려지고 있다(濱口重國

秦漢時代の繇役勞働に關する一問題 秦漢隋唐史の硏究』上卷 東京 1966

1980 勞幹 漢代兵制及漢簡中的兵制 歷史語言硏究所集刊 10 1948 山田

勝芳 後漢時代の繇役と兵役 歷史 66 19869)正卒은 앞의 설과 같지만 正은 23세에서 56세 사이의 남자 즉 正丁 을 가리

킨다는 설(西村元佑 漢代の繇役制度 東洋史硏究 12-5 1953)正卒과 更卒이 별개인이 아니라 동일인이고 更卒은 正卒이 된 이외의 해에

매년 1개월의 역역에 복무하는 자를 가리키며 正은 23세-55세까지의 正丁인

데 正卒은 그 가운데 2년간 衛士 材官 騎士 등의 實役에 복역하는 것이라는

설(西田太一郞 漢の正卒について 東洋の文化と社會1 東京 1955)

材官 騎士등이 일반민에서 材力 있는 자로 선발되어 군국에서 常駐하는 전

문병사로서 직업군인인 lsquo士rsquo인데 대해 正卒은 일반민이 23세에 1년간 병졸로서

근무하고 1년간 衛士로 長安에 上番한다는 설 즉 正卒은 직업군인인 材官 騎

士와는 兵役體系上 別個의 것으로서 일반민의 병역 복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는 설(大庭脩 材官攷 -漢代の兵制の一班について 龍谷史壇 36 1953)正卒이란 23세에 이른 자 가운데서 신체강건한 자를 뽑아 衛士 材官 騎士

樓船 등의 어느 한 兵種에 복무하게 한 것이라는 설(濱口重國 勞幹 西村元佑

山田勝芳 앞의 논문 平中苓次 漢代の官吏の家族の復除と軍賦の負擔 中國

古代の田制と稅法 京都 1967) 諸說의 대부분은 이 견해를 공통적으로 취하

고 있다

秦漢에서는 始傅에서 免老까지의 모든 남자가 병역의무를 지는데 正卒은 그

適齡남자를 統稱하는 말이며 따라서 郡兵이나 衛士 戍卒은 正卒의 일부분이라

는 설(臧知非 秦漢lsquo正卒rsquo辨釋 中國史硏究 1988-1)正이란 傅籍된 待役者(兵役과 力役 포함)를 말하며 正卒은 어떤 특정의 役

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고 正(待役者)과 卒(服役中에 있는 正)로 구분되어 있

는 말이며 秦漢代에 병역 복무는 일부 병역신분에게 만 부과된 것이어서 나머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8조별 순번으로 상경하여 복역한다 正卒은 일반 更卒 중에서 신체강건

용맹 등으로 선발된 자들로 상비군 내지 직업군인의 성격이 강한 집단

이다 즉 그들은 일반민(서인)이면서도 그 중에서 선발되어 군사로써

免老에 이르기까지 복무하는 까닭에 일반민과는 다르다 胥徒 또한 서

인이면서 관부에 복무하는 까닭에 일반민과는 다르다 衛士는 특히 평

시에 도성(중도관)을 수비하기 때문에 관부에 거처하게 되고 胥徒 또

한 관부에서 직접 給事하는 까닭에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면에서 鄭玄

은 양자를 같은 성격의 계층으로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衛士가 일반

민에서 선발된 자들이고 胥는 徒 중에서 才智로 선발되고 徒는 분명

치는 않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일반 民庶 가운데 담당 직무 수행에 어

느 정도 자질을 갖춘 자로 선발된 자들일 가능성이 크다 또 漢書권74魏相傳의 顔注에 京師의 여러 관부에 와서 戍卒이 되는데 지금의

衛士가 上番하여 여러 官司에 나누어져 복무하는 것과 같다 라23) 한

것에 의하면 衛士의 이러한 복역 모습은 각 官司에 배치된 胥徒의 복

역 형태와 같다 전한 京師에서 복무중인 衛士의 수는 景帝末傾에 매

지 일반 白徒는 병역에 복역하지 않는다는 설(孫言誠 秦漢的繇役和兵役 中國史硏究 19873 및 ldquo爲正一歲rdquo辨 文史 31 198811)濱口說과 같이 正을 正卒의 略稱으로 보지만 濱口씨가 正卒을 일반적인 兵

士로 본 것과는 달리 庶民 중에서 일부가 선발되어 兵士(材官 騎士 등)가 된

것이며 이들은 일반서민과는 상대적으로 구별되는 신분 말하자면 獨自의 兵

士身分 으로서 일반서민과 같은 역역(更卒) 의무가 없었고 일반서민과는 다른

부담체계하에 있었다는 설(重近啓樹 秦漢の兵制について -地方軍を中心とし

て- 人文論集(靜岡大學) 36 1985)正卒은 일반민이 20세로 부터 2년간 복무하는 것이며 材官 騎士는 이와는

달리 전문병사로서 23세에서 56세까지 복무하는 것이라는 설(藤田勝久 前漢

の繇役勞動とその運營形態 中國史硏究 8 1984)한편 李成珪는 材官 騎士는 卒에서 징발된 전문 병사였고 1년 복역 후에도

예비역으로 분류 비상시 동원되었지만 (軍)吏나 士에 속하지 않는 자들로서

力役 복역의 한 형태인데 董仲舒가 말한 lsquo一歲力役rsquo은 바로 郡卒로 1년 복무하

는 材官 騎士의 役을 말한 것이라 한다(이성규 前漢 更卒의 徵集과 服役 方

式 -松栢木牘 47호의 분석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09 200912

pp33-34)

23) 來京師諸官府爲戍卒 若今衛士上番分諸司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9년 2만인 武帝 즉위 후 1만인으로 감하고 얼마 후 5천인을 늘려 武帝

후기에는 1만5천이었을 것으로 보인다24) 또 1개 군에서 番上하는 수

가 數千에서 2~3천인이었던 사례가 있다25) 전한 말 成帝 시기의 사

정을 말해주는 尹灣漢簡의 lt東海郡下轄長吏不在署 未到官者名籍gt

에 군현 밖으로 外勤出張 중에 있는 長吏의 현황표에 費長孫敞 十月

五日送衛士 가 있는데26) 費邑의 長 孫敞이 衛士를 送하는 업무로 출

장하여 아직 귀환하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동해군 下轄의 縣(18)邑

(2)侯國(18) 38곳(lt集簿gt) 가운데 오직 費邑에서만 衛士가 上番되고

있다 이에 의하면 衛士의 상번은 각 군에서 縣級 단위로 교대 상번하

는 것으로 보인다 濱口重國은 후한에서 正卒의 군현상비군이 폐지되

었지만 전한에서와 마찬가지로 매년 연말에 1년의 복무가 끝나고 귀향

하는 衛士들에게 황제가 향연을 베푸는 饗遣故衛士儀가 행해지고 있는

사례를 들어 衛士의 上番은 후한에서도 행해지고 있음을 지적한 바가

있다27) 아울러 그는 군현 상비군 폐지 후 중앙의 衛士 부대가 2500

내지 2600명인데 이는 중앙 인근 지역에 한정하여 징발된 자들로 보

아야 한다고 하였다28) 후한 周禮注에서 鄭玄(127-200)의 衛士 인용

이 전한시기의 사정에 의거한 것인지 아니면 그의 활동시기인 후한 후

기의 사정에 의거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후한 중 후기에도 衛士의

上番制가 부분적으로나마 유지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4) 濱口重國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隋唐史の硏究』上卷 東京

1966 1980) p286 注2)

25) 「上臨饗罷衛卒 衛卒數千middotmiddotmiddot」 (漢書 권77 蓋寬饒傳) 「河南卒戍中都官者二三

千人middotmiddotmiddot」 (漢書 권74 魏相傳)

26) 張顯成 周羣麗 尹灣漢墓簡牘校理(上篇) (天津古籍出版社 2011 3) p32

27) 濱口重國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隋唐史の硏究 (上)) p283

28) 濱口重國 위의 글 pp284-285 그 주된 근거는 속한서 백관지3 尙書條에

蔡質漢儀曰 ldquo右丞與僕射對掌授廩假錢穀 與左丞無所不統 凡中宮漏夜盡 鼓鳴

則起 鍾鳴則息 衛士甲乙徼相傳 甲夜畢 傳乙夜 相傳盡五更 衛士傳言五更 未

明三刻後 雞鳴 衛士踵丞郎趨嚴上臺 不畜宮中雞 汝南出雞鳴 衛士候朱爵門外

專傳雞鳴於宮中rdquo 應劭曰 ldquo楚歌 今雞鳴歌也rdquo 晉太康地道記曰 ldquo後漢固

始鮦陽公安細陽四縣衛士 習此曲於闕下歌之 今雞鳴是也rdquo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0中都官의 몇 몇 部署에 給事하는 衛士의 員數 규정이 있는데 속한

서 백관2 注引 漢官의 光祿勳에 81인 太宰令에 15인 高廟令에 15

인 世祖廟令에 20인 衛尉에 60인 南宮衛士令에 537인 北宮衛士令에

471인 右都候에 416인 左都候에 383인 南宮南屯司馬에 102인 (北)宮

門蒼龍司馬에 40인 玄武司馬에 38인 北屯司馬에 38인 北宮朱爵司馬

에 124인 東明司馬에 180인 朔平司馬에 117인의 衛士가 소속되어 있

다 이는 후한의 사정을 기록한 것인데 그 총합이 2637인이다 전한에

비해 그 員數가 급감한 것은 광무제의 부역 경감정책과에 의한 것이라

하겠고29) 소수지만 그 員數가 규정되어 있다는 것은 후한에서 代役制

내지 雇傭制로 대체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전과 같은 上番制가

시행되었음을 말해준다 후한에서 正卒 및 군현의 상비군제가 온전히

사라진 것이 아닌 것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후한의 2637명의

員數는 전한에 비해 대략 15 정도 되는데 전한의 사정을 기준으로 한

다 하더라도 군현의 正卒은 평생 1회만 당번이 되어 上番하더라도 중

도관의 衛士 給事가 충분히 운영될 수 있다 위의 lt윤만한간gt에서 전

체 38현읍후국 가운데 그 해에 費邑의 正卒 만이 상번하고 있고 당시

郡別로 상번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동해군이 매년 상번의 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각 正卒은 38년에 1회만 상번하면 된다 물론 군별 현

읍후국의 수가 다르기 때문에 그 回次의 수도 다르고 현읍후국별 正

卒의 수에 따라 1개 이상의 현읍후국이 함께 동원된 경우도 충분히 있

을 수 있다 그러나 각 군의 현읍후국 수가 보통 20개는 넘는다 게다

가 費邑의 正卒도 몇 개 조로 나뉘어 순차로 상번하는 것이라던가 각

郡도 매년 상번이 아니라 몇 년 만에 순번이 돌아오는 체제라면 각 正

卒의 중도관 衛士 복무는 아무리 많아도 일생에 1회를 넘기 어렵다

앞에 든 漢舊儀의 民年二十三爲正 一歲以爲衛士 는 곧 그러한 사

정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일생 1회의 복무형태는 胥徒의

29) 濱口重國은 광무제의 경감책과 아울러 虎賁 羽林 羽林左右騎 五校尉의 軍이

警備에 추가되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위의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

隋唐史の硏究(上)) p283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1평생 내지 세습되는 면과(후술) 다르지만 일반의 役 대상자에서 선발

되어 중도관에 給事한다는 면에서는 공통이다 그런데 전한에서 lsquo父死

子代rsquo였던 중앙군은 羽林孤兒 뿐이었지만 후한에서 虎賁 羽林 羽林左

右騎 五營士의 중앙군에까지 확대되었다고 한 濱口重國의 지적이 있

다 그에 의하면 후한에서 중앙군단의 세습화와 함께 바로 지방에 特

設된 군단의 세습화도 이루어지면서 魏晋시기 兵民分離의 前段을 이루

게 되었다고 한다30)후한 후기 특히 羌의 侵寇 이후 郡에 都尉를 설치

하고 全民을 징병대상으로 삼아 상비의 郡兵을 다시 설치하고 있으

며31) 여러 출신 성원을 규합한 병단이 私屬이 되기도 하고 국가의 군

단이 되기도 하며 部曲 내지 그와 같은 류의 세습 병단화 하는 과정

에 대해서는 필자도 일견을 피력한 바 있다32)따라서 징병제에 의한

正卒의 상비군 운영이 폐지된 이후 15 수준으로 급감한 정졸의 衛士

가 上番하고 있었지만 이 군단 또한 후한 중기 이후 전란시기가 되면

서 世兵化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胥徒의 세습과 후한 후기에

활동하였던 鄭玄 당시 衛士의 세습화는 일치하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鄭玄이 말한 衛士는 한초의 사정이 아니라 그가 활동하였던 후한 후기

의 사정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鄭玄이 漢의 衛士 上番制에 의거하여 주례의 胥徒制를 해석한 것

은 양자의 해명에 큰 도움을 준다 상술한 바에 의하면 몇 가지 면에

서 양자가 일치하는 점이 대체로 인정된 셈이지만 胥徒가 거의 모든

관부에 설치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漢代의 衛士는 광록훈이나 衛尉

제사 守陵등 일부 한정된 관부에 설치되어 있다 또한 주례의 胥徒

가 士 이상의 신분과 마찬가지로 代耕의 봉록으로써 농지를 받고 있는

봉록자라는 면은 지방에서 상경하여 1년의 기간만 한시적으로 복무하

는 衛士의 경우와는 자못 어울리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衛

士는 上番者로 충당되지만 일단 관부별로 員數가 규정된 員吏로서 복

30) 濱口重國 앞의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p285

31) 濱口重國 光武帝の軍備縮小とその影響 (秦漢隋唐史の硏究(上)) p30832) 박건주 한대의 지방 상비군과 部曲의 推移 (동양사학연구 118 20123)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2무하게 되기 때문에 일부는 胥徒처럼 員吏로서 수년 이상을 관부에 居

하는 어느 정도 전문화 한 衛士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鄭玄의 활

동 시기와 큰 차이가 없는 lt長沙走馬樓吳簡(이하 lt吳簡gt으로 약칭)gt

領二年四家衛士田漆十五畝 畝收限米二斛 合爲吳平斛米一百五十斛

(5-1669)에 의하면 4家의 衛士가 限田75畝 佃作에 대한 租로 畝當 限

米2斛을 납부하고 있다 lt오간gt의 限田에 대해 여러 異說이 있지만

(후술) 그 佃作者와 限米 납부자의 계층에 수십 종의 吏員들이 포함되

어 있는 것에 의하면(후술) 衛士도 그러한 吏員으로서 限田이 지급된

것으로 보인다 단지 限田을 佃作케 한 것이 吏員에 대한 경작의 부과

(경작 노동력의 징발)를 뜻하는 것인지 혜택의 수여를 뜻하는 것인지

는 아직 분명치 않지만 于振波의 분석과 같이 畝當 限米2斛의 징수는

대단히 과중한 액수인 까닭에33) 受惠라기 보다는 경작 노동력의 징발

내지 課役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祿田의 의미로 보기

어렵지만 당시 吏職의 賤役化 현상을 고려하면 그러한 시대적 여건 하

에서 實益이 거의 없는 祿田으로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어쨌

든 후한말 이래 小吏 내지 吏戶와 병사층의 세습화 진전을 고려한다면

어떠한 방식이든 그 가족의 생계를 위한 봉록의 지급이 있었을 가능성

이 더욱 커진다

이상에서 검토한 몇 가지 면에서 보면 府史와 胥徒 중에 후자 만

lsquo給徭役rsquo에 의거한 복무라는 점 등에서 다른 계층이지만 庶民在官者

로서 함께 칭해질 수 있는 층이었다고 본다 무엇보다 胥徒가 각각 제

8위와 제9위의 在官者 서열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동시에 府史는 모두 官長으로부터 선발되고 辟除 임용된 자들인데 비

해 胥徒는 일반의 요역의무를 대체하여 官에서 給事中인 계층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胥徒가 lsquo在官者rsquo로 칭해지는 이유는 관부 내에 거

처하면서 노동을 통하여 잡다한 庶事를 직접 처리하고 있으며 국가로

33) 于振波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中國社會科學院硏究生員學報 2004

-1) p122 限米 납부액의 과중성에 의거해서 限米 납부자는 屯田노동자 限米

는 屯田의 租稅라고 본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3부터 代耕의 祿田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관부의 제반 업무는 각 업무

分司 말단에 속한 胥徒의 노역에 의해 완수될 수 있다 이들은 노역

징발 대상자인 徒 중에서 재능 등의 명목으로 선발된 자들이고 그 중

에서도 才智가 있는 자가 胥이다 이들은 선임자 내지 연장자의 지휘

감독 아래 각 관서의 노역 업무와 勞役者 징발 업무 등으로 奉公한다

이것이 胥徒의 在官者로서의 職事이다 胥徒의 職事는 어디까지나 노

동이 전제되는 勞役이며 일반민의 요역의무에 대신하여 관부의 職에

給事하는 까닭에 職役이라 할 수 있고 官長의 선발로 辟除된 府史는

정식의 官員으로서 奉公하는 것이고 給徭役 에 대신하여 복무하는

것이 아닌 까닭에 胥徒의 職役과 구분하여 그 職을 職官이라 할 수 있

다 그 上級인 命官도 물론 職官이다 職官의 기본 요건은 그 官職에

任職인 상태가 그대로 王命을 받들어 奉公 중인 것을 뜻하는 까닭에

이미 王命을 수행중인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체로 일반 서민

의 기본 요역에서 면제된다 단지 면제의 세부 규정에 의하면 役의 종

류와 신분의 차등에 따라 그 면제 대상의 범위가 구분된다 한편 전쟁

에 참전하는 의무는 면제되지 않는다 모든 官吏는 유사시 종군해야

한다 官人이 본래 戰士層인 國人 출신에서 나온 때문이다 일반 서민

은 매년 일정 기간 동안 만 국가의 命을 받아 노역에 징발되어 복역하

는 까닭에 그 생업은 징발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시적인 노역이 아니라

그들이 부여받은 職인 恒常의 耕作奉公에 있다 職官은 그 복무를 통

해 생활이 영위되지만 일반 서민이 징발되어 이행하는 노역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無償이다

官職앞에 인용한 宰夫8職에 대한 賈疏의 끝 부분에 周禮 위 아래

의 글에 胥가 있으면 반드시 徒가 있는 것은 胥가 什長인 까닭이다

鱉人과 臘人의 類는 徒만 있고 胥가 없는 것은 徒만 있으면 충분하여

지휘자(長師)를 둘(빌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食醫의 類에는 胥徒가

모두 없는 것은 그 官만의 行事(업무처리)로도 충분하여 胥徒의 도움

을 빌리지 않는 까닭이다 고34) 하였는데 胥와 徒가 모두 설치되지 않

은 部署는 그 官만의 업무처리만으로 충분한 까닭이라 하였으니 바로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4府史까지의 屬吏를 官으로 한정한 것이다 즉 胥徒는 官에서 복무하고

있지만 官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庶民이고 庶民在官者 이며 그들의

복무는 職官이 아니고 職役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들도 그 職役으

로 생업을 유지하는 까닭에 職官과 동일성을 지닌다 주례에 의하는

한 胥徒가 일시적으로 복무하는 형태는 아닌 듯 하다 무엇보다도 그

들에게 祿田이 지급되고 있기 때문에 매년 혹은 매월 교체되는 요역

형태의 근무는 아닐 것이다 또한 각 분야별로 상당한 전문 지식과 숙

련도가 요구되는 업무 처리상 단기간 교체되는 근무형태를 취하였을

것 같지도 않다

이렇게 볼 때 胥徒가 官에서 일반 관리와 마찬가지로 계속적으로 근

무하면서도 그 근무를 lsquo給徭役rsquo의 代替로 본 주석이 옳다면 아무래도

胥徒는 신분제사회에서 官이 될 수 없는 자 또는 現任의 官과는 엄밀

히 구분되는 신분이었던 까닭에 그 직무 또한 (일반 서민의) 노역의

의미로 인지되고 평가된 것이 아닐까 한다 漢代사회의 신분구조는 漢

家의 주인인 天子가 그의 家人인 일반 民庶를 직접 장악하는 구조가

있고 동시에 漢家로부터 독립된 개별의 士族이 각각 lsquo家rsquo의 주인으로

서 천자와 主客의 관계가 아직 유지되는 체제가 병존하는 二元의 구조

로 되어 있다고 본 濱口重國의 견해가 있다35)이러한 입장을 발전시켜

漢帝國은 황제가 인민을 인두적으로 지배하는 lsquo齊民制rsquo와 천자가 lsquo家rsquo를

非人頭的으로 지배하는 家父長制的 관계로서의 lsquo家産制rsquo라는 이중구조

로 되어 있다고 본 好並隆司의 견해도 있다36) 그리고 이러한 이중성

의 사회구조를 公과 私 君臣관계의 면에서 진전시킨 尾形 勇은 그 臣

이 되는 층을 仕宦者와 從役者로 나누고 있다37) 위의 설들은 모두 한

34) 周禮 上下文有胥必有徒胥爲什長故也 鳖人腊人之類空有徒無胥

者得徒则足不假長師故也 食醫之類胥徒并無者以其專官行事不假胥徒

35) 濱口重國 唐王朝の賤人制度 主篇 第六章 第二節 (東洋史硏究會 1966)

36) 好並隆司 前漢帝國の二重構造と時代規定 (歷史學硏究 375 秦漢帝國史

硏究 東京 1978에 재수록)

37) 尾形 勇 漢代における 家人 と君臣關係 (史學雜誌 83-4 1974) pp3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5대의 사정을 말한 것이지만 이러한 이중구조의 신분제 내지 사회구조

는 주례의 관부 구성 체제에 의하면 상위에서 下士 내지 府史까지가

仕宦者에 해당하고 胥徒를 후자 즉 從役者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연원은 이미 周代에 있다 士人 내지 仕宦者는

그 직무로써 奉公하고 從役者는 賦稅役의 부담으로써 奉公한다38)胥徒

가 비록 官에 있는 자이지만 二元구조의 신분제 하에서 士人이 되지

못한 가운데 그 직무는 職官이 되지 못하고 職役에 머무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Ⅲ 職役 담당층의 복무 형태와 봉록 지급의

문제

周代에 lsquo給徭役rsquo의 차원에서 관부에 給事하는 胥徒가 있었다면 후대

의 요역 가운데도 그러한 항목이나 사례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다 또한 胥徒의 직무는 續漢書 輿服志上에 보이는 伍伯辟車

鈴下侍閣門蘭部署街里走卒 등 관부 말단에서 경호導從심

부름侍衛車馬관리 巡邏 등의 賤職에 종사하는 이른바 徒卒의 職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그런데 이들의 役이 民의 일반 요역 의무에 따

라 징발되어 일시적으로 복역하는 것인지 아니면 상술한 胥徒와 같이

庶民在官者 로서 관부의 최말단에서 상시로 근무하며 관부에 의지하

여 생업을 유지하는 下吏로서의 복무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후한서권58 虞詡傳에 永平(후한 明帝期) 章和(章帝期) 중에 州郡이 走卒錢으

로 貧人을 給貸(雇賃金을 지급)하였다 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集解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35

38) 尾形 勇 위의 글 pp28-29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6走卒伍伯之類란 續漢志에 이른다

(車前에) 伍伯은 公은 8인中二千石은 6인千石과 六百石은 모두 4인百石

이하에서 二百石은 모두 2인을 둔다 黃綬(4백석에서 2백석의 관리)의 武官에

는 伍伯을 따르게 하고 文官에는 辟車鈴下侍閤門闌部署街(里)走卒

을 따르게 하는데 모두 程品의 多少가 있으며 맡은 바 직무에 따라 領率하게

한다 (驛馬는 30里에 하나를 설치한다) (卒은) 모두 적색 두건과 진홍색 소창

옷을 착용한다

즉 지금 鞭杖을 잡고 따르는 자들이다 이는 錢이 있는 자로 하여금 그 (役

에) 대한 資錢을 내게 하여 몸으로 직접 노역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39)

〔 ( ) 내의 글은 결락된 부분을 輿服志 원문에서 보완함〕

인용된 속한지輿服志의 기사는 公卿 以下 縣의 三百石 官長에 이르

기까지 이들을 導從하는 下吏들의 配屬 員數를 규정한 것이다 열거된

役職들은 모두 300석 이상 관원을 導從하는 役員들인데 후한 明帝 章

帝期에 일부 지역에서 이 役職의 명목으로 走卒錢을 징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記事는 順帝 연간에 尙書僕射 虞詡가 上言한 것인데 당시

長吏 2천석관들이 謫罰者에게 貧人 구호를 위한 lsquo義錢rsquo의 명목으로 贖

錢을 강요하고 守令은 이를 빌미로 聚斂함에 順帝 원년 이래 백만전

이상을 受取한 長吏가 끊이지 않고 있는 사정을 진언한 가운데 그 이

전 永平 章和 연간에 있었던 사실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즉 州郡에

서 走卒錢을 징수하여 그 역을 면제시켜주고 대신 빈궁한 자를 그

役에 고용하여 그 錢을 雇賃으로 지급해주는 일이 있었다 당시 司空

이 이 事案을 탄핵하니 해당 州郡縣이 모두 坐되어 免黜되었었다 그

때의 전례와 마찬가지로 당시 임시로 사용하였던 제도(走卒錢 징수와

雇賃 지불)를 蠲制할 것을( 蠲制權制 ) 주청하였고 이에 조서를 내려

州郡을 切責함으로써 그러한 贖錢 강요가 이로부터 그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40) 따라서 走卒錢 징수와 導從役의 雇傭 방식 운영은 후한

39) ldquo卽今行鞭杖者也 此言錢者令其出資錢 不役其身也 走卒伍伯之類也 續漢

志曰 (車前)伍伯 公八人中二千石六人千石六百石皆四人自百石以下至二

百石皆二人 黃綬 武官 伍伯 文官 辟車鈴下侍閤門闌部署街

(里)走卒 皆有程品多少 隨所典領率 (驛馬三十里一置 卒)皆赤幘絳褠 卽

今行鞭杖者也 此言錢者令其出資錢 不役其身也

40) 후한서 권58 虞詡傳에 是時長吏二千石聽百姓謫罰者輸贖 號為lsquo義錢rsquo 託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7明帝 章帝期에 한정되어 시행된 것으로 모두 不法이었고 虞詡의 順帝

시기에는 시행되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渡邊信一郞에

의하면 이들은 秦漢에서 관부의 최하층으로서 관부에서 필요로 하는

導從役 등 일상적인 노역에 복무하며 民으로부터 강제 징발되어 복무

하였는데 후한 초에 이미 走卒錢이 징수되고 특정 임무는 면역전을

재원으로 한 고용노동으로 전환되었다고 한다41) 그러나 章帝 이후 50

여년이 지난 順帝期에 이르기까지 고용 형태의 운영이 반복되지 않고

있는 것에 의하면 고용 노동으로의 진전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

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어쨌든 導從役의 고용 방식 운영이 不法

이었다 함은 그것이 본래 징발 형식으로 운영되는 것이었음을 말해준

다 錢이 있는 자로부터 走卒錢을 받고 이 재원으로 빈한한 자를 고용

하여 雇賃을 지급하는 不法을 행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어지는 지적에

서 順帝 때 지방관들의 贖錢 강요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관리들의 私利

도모에 의한 것이다 또한 그 의무자에 富者가 있어 그 實役을 피하고

자 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導從役과 같은 下吏의 봉록은 매

우 적기 때문에 여타의 수익이 있다면 그 봉록에 꼭 의지할 필요는 없

었을 것이다 이들이 비록 관부의 員吏이고 그 吏職이 생업이 되는 것

이지만 최말단의 賤役 내지 厮役으로서 천대받는 면이 많았을 것이다

때문에 이 職役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도 많았을 것이다

예기王制에 무릇 전문기능으로 事上(奉公)하는 자가 祝史

射御醫卜 및 百工이다 무릇 전문기능으로 事上하는 자는 다른

일을 해서는 안 되며(不貳事) 근무하는 관서를 옮겨서도 안 된다(不移

官) 出鄕하면 士와 抗禮하지 못하며 家에서 仕하는 자도 出鄕하면 士

와 抗禮하지 못한다 고42) 하였다 즉 士의 신분이 아닌 일반서민 출신

為貧人儲 而守令因以聚斂 詡上疏曰 ldquo元年以來 貧百姓章言長吏受取百萬以上

者 匈匈不絕 謫罰吏人至數千萬 而三公刺史少所舉奏 尋永平章和中 州郡

以走卒錢給貸貧人 司空劾案 州及郡縣皆坐免黜 今宜遵前典 蠲除權制 於是詔

書下詡章 切責州郡 謫罰輸贖自此而止rdquo

41) 渡邊信一郞 中國古代の財政と國家 (汲古書院 2010 第三章) p128

42) 禮記王制 (十三經注疏 中文出版社) p2905에 凡執技以事上者 祝史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8이 여러 기능직의 吏職에 복무하면서 함께 관부에 있지만 본 소속의

직장에서 다른 직장으로 옮길 수도 없고 신분상 士와 대등한 위치에

처하지 못하며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또한

府史 이상의 職官과 구분되는 胥徒의 특성과 상통한다

속한서 백관지2에 射聲校尉一人 比二千石 의 本注에 服虔曰

工射이다 어두운데서 소리를 듣고 활을 쏘아 명중시키는 까닭에 이름

하였다(工射也 冥寞中聞聲則射中之 故以為名 고 하였는데 여기서

工射 는 射도 工 의 한 분야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은 그 기능으로

奉公하는 것이 그 職分이고 생업이기도 하며 다른 직종이나 직업을

갖을 수 없고 옮길 수도 없는 자들이다( 不貳事 不移官 ) 이들은 그

職能으로 생업을 유지하지만43) lsquo父死子代rsquo 의 世業으로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고 賤職인 까닭에 여기에서 벗어나 신분상승을 바라는 경향이

있게 된다 이를테면 三國魏의 黃朗은 그 부친이 縣卒로서 鈴下 伍伯

의 職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抗志 遊學하여 현령을

거쳐 군태수에 이르렀는데 부친의 일을 생각하여 屬下의 鈴下 伍伯을

부를 때 鈴下 伍伯이라 부르지 않고 항상 姓字로 불렀다 비록 분노

하였을 때도 鈴下 伍伯으로 부르지 않았다44)

그런데 導從役 복무자는 징발되어 관부 내에서 복역하는 인원 중에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전체 복역 대상자 가운데 극히 소수에 불과하

다 특히 黃綬의 武官을 導從하는 伍伯 등의 직무가 護衛와 侍衛 警備

등이 위주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무술과 용력을 갖춘 이들로 선발된

그룹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黃綬 이상의 문무관에 소속되어 그 員數

射御醫卜 及百工 凡執技以事上者 不貳事 不移官 出鄕不與士齒 仕於

家者 出鄕不與士齒

43) 禮記 王制에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百工 各以其器食之 (注에 器 能也)

44) 三國志 권23 裴潛傳 所引 魏略에 黃朗字文達 沛郡人也 爲人弘通有性

實 父爲本縣卒 朗感其如此 抗志遊學 由是爲方國及其郡士大夫所禮異 特與東

平右姓王惠陽爲碩交 惠陽親拜朗母於床下 朗始仕黃初中 爲長吏 遷長安令 會

喪母不赴 復爲魏令 遷襄城典農中郎將涿郡太守 以明帝時疾病卒 始朗爲君長

自以父故 常忌不呼鈴下伍伯 而呼其姓字 至於忿怒 亦終不言 朗旣仕至二千石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9가 정해진 것에 의하면 庶民在官者 로서의 胥徒에 상당한다 봉록이

지급되는 일자리이며 민의 공동의무인 일반요역에 대신하여 복무하는

것인 만큼 면역전의 授受 행위는 不法이다

상술한 輿服志에 각 300석 이상의 官員 당 이들의 배당 員數가 규

정되어 있는 것에 의하면 이들도 분명히 관부의 한 구성원들이다 속한서 백관지 注引의 漢官에는 官長 내지 命官級 屬下의 員吏 員數

및 秩祿을 기재하고 있다 이를테면 속한서 백관2에 衛尉 卿一人

中二千石 本注曰 掌宮門衛士 宮中徼循事 丞一人 比千石 이라 하였

고 注引에 漢官曰「員吏四十一人 其九人四科 二人二百石 文學三人

百石 十二人斗食 二人佐 十二人學事 一人官醫 衛士六十人」이라 하

였다 이 가운데 百石까지는 봉록 지급이 명시되어 있지만 그 이하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봉록이 전혀 지급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斗食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斗升으로 계산되는

日數 계산에 의한 연봉액이 정해져 있다 百官受奉例의 注 所引 漢書音義에 斗食祿 日以斗爲計 라 하였고 한서 百官表上에 漢官名

秩簿에 이르길 斗食은 月俸 11斛 佐史는 월봉 8斛이다 一說에 斗食

이란 연봉이 百石에 이르지 못하여 日當으로 계산해서 1斗2升을 食하

는 까닭에 斗食이라 한다 고 하였다 속한서 백관5의 百官受奉例에

서는 百石이 月 16斛이고 斗食 이하는 위와 같다 또 墨子 雜守篇에

斗食은 1년에 36石이다 參食이면 1년에 24石이고 四食이면 1년에 18

石 五食이면 1년에 14石4斗 六食이면 1년에 12石이다 斗食은 5升을

食하고 參食은 3升小半을 五食은 2升 六食은 1升大半을 食한다 하루

에 2회 食한다 고 한데서 알 수 있다 斗食 은 1食에 5升 하루에 2

食이니 매일 1斗를 받아 1년 360일에 총 36石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

參食 은 1食에 3과 13升 즉 13斗를 받아 1일에 23斗가 되고 1년에

24石을 받는다 그 이하의 四食에서 六食까지는 斗食 이하에 열거된

下吏의 지급액 규정일 것이다

閻步克에 의하면45) 周代에서는 士 이상에게 祿田을 지급하여 그

수익을 食하게 하는 것으로 연봉을 지급하는 형태였는데 하급관리나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0工醫師 등 기술직 및 兵員에게는 月 단위로 지급하는 이른바 稍食

형태로 운영하였으며 나중에 증액 고정화 되고 아울러 錢으로 지불하

게 됨으로써 月俸의 秩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稍食 이란 주례天官

宮正에 宮正이란 왕궁의 戒令糾禁을 맡는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그 출입을 검찰

하고 그 稍食을 균등히 하고 그 淫怠하고 奇邪한 民을 제거하고 그

什伍를 모아 道義를 가르친다 月이 끝나면 그 稍食을 會計하고 1년이

끝나면 그 (吏職의) 行事를 검열한다 라46) 하였는데 이 稍食에 대해

鄭司農은 禄廪 疏는 宫中官府 등의 月禄 이라 하였다 즉 稍食은

月俸인 셈인데 이를 하급관리의 月俸이라 한 것은 國語晋語4에 公

은 貢을 食하고 대부는 읍을 食하며 士는 田(公田)을 食한다 庶人은

力으로 食하고 工商은 官(官으로부터 받은 田)을 食하며 皁隸(吏에

속한 徒隸)는 職을 食하고(각 담당 職의 大小에 따라 食祿) 官宰(大夫

의 家臣)는 加(大夫의 家臣)를 食한다 에서 公 大夫 士까지는 國 邑

田을 봉록으로 받는 까닭에 연봉을 받는 것이 되고 庶人 이하는 관부

에 給事한 力(勞役) 등을 계산하여 지급 받는 까닭에 월봉이라는 것이

다 또 주례 夏官 校人의 校人은 王馬之政을 관장한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馭夫

의 祿과 궁중의 稍食을 균등히 한다 라 하였는데 그 注에 師圉는 府

史 以下다 고 하였다 즉 府史 이하 下吏의 봉록 관련 업무이다 또 주례 天官 醫師에 연말이 되면 그 醫療한 실적을 검사하여 그 食을

정한다 十점 만점이면 上 十에 一을 失하면 次等 十에 二를 失하였

으면 그 次等 十에 四를 失하였으면 下로 한다 하였고 또 방비를

굳건히 하기 위해 성곽 溝池 등의 役事와 守備를 관장하는 掌固는 이

에 복무한 士庶子와 衆庶에 대해 필요한 도구와 財用을 공급해주고 그

稍食을 균등히 한다고 하였다(同 夏官 掌固) 이러한 자료에 의하면 府

史 이하의 下吏에 대해 祿俸 지급의 額이 기술되어 있지 않는 것은 食

邑田이나 百石까지는 年俸의 일정액이 규정되어 있고 이 액수가 월봉

45) 閻步克 從稍食到月俸mdash戰國秦漢祿秩等級制新探 (學術界 20002)46) 宮正 掌王宮之戒令糾禁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幾其出入 均其稍食 去其淫怠與其奇邪之民

會其什伍而敎之道義 月終 則會其稍食 歲終 則會其行事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1으로 나뉘어 지급되는 것과는 달리 그 이하의 吏는 月別 給事한 日數

나 실적을 계산하여 지급하는 月俸 형태였고 그 총합이 百石 이하였

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앞에 든 百官名秩表나 묵자의 기사는 그

러한 사정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府史 이하인 胥徒나 그 직급에 상당

하는 속한서 백관지의 각 관부별 官長 屬下의 員吏로서 有秩 아래에

나열된 직급들도 그 근무일수나 실적에 따라 봉록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有秩의 官은 百石 이상의 年俸이 지급되는 下限의 관리

를 가리키며 佐史 이하의 월봉 수입자에 대비하여 쓰이는 용어이다

근래 楊振紅 廣懶薰雄 宮宅 潔 등은 佐史 이하의 下吏에는 1개

월을 단위로 윤번 근무하는 자들이 있어 이들은 그 이름 앞에 更 이

붙고 이에 대비하여 常勤하는 자들은 冗 이 붙어 구분되었다 하고

그 내역과 성격을 고찰하였다47)사실 후대의 冗 내지 冗官 이 보통

散官 의 뜻이었던 것에 비해 선진에서 진한 시기의 여러 자료에 보이

는 冗 은 위의 연구들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更 에 대한 相對로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lt운몽진간gt 秦律十八種 工人程에 冗

隸妾 2인은 工 1인에 當하고 更隸妾 4인은 工 1인에 당한다 小隸臣妾

으로서 可使者 5인은 工 1인에 당한다(冗隸妾二人當工一人 更隸妾四

人當工一人 小隸臣妾可使者五人當工一人) 에서48) 冗隸妾은 更隸妾에

비해 2배의 우대를 받고 있으며 lt이년율령gt史律에 大祝이 祝을 시

험해보아 祝에 뛰어나고 祠事에 밝으면 冗祝으로 삼아 이들을 冗한다

(大祝試祝 善祝 明祠事者 以爲冗祝 冗之) 고 하였는데 이 冗 은 같

은 史律의 祝十四章으로 學童들을 시험해서 능히 7천언 이상을 誦할

수 있어야 祝으로 삼고 5更으로 한다(以祝十四章 試祝學童 能誦七千

言以上者 〔乃得〕爲祝 五更) 에서의 更 과 相對로 위치하고 있다

47) 楊振紅 秦漢簡中的ldquo冗rdquordquo更rdquo餘供役方式middotmiddotmiddot從lt二年律令 史律gt談起 (簡帛硏究 廣西師範大學出版社 2006) 廣懶薰雄 秦漢律令硏究 (汲古書院

20103) pp297-304 宮宅 潔 漢代官僚組織の最下層 - 官 と 民のはざま-

(東方學報 87 2012) pp11-1248) 睡虎地秦墓竹簡 (北京 文物出版社 1978) p74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2또 lt里耶秦簡gt에도 冗戍士五(伍) (⑧666+ ⑧2006)와 更戍(某) (⑧

143 ⑧149 ⑧694)의 對稱 용어가 있다 한편 주례春官 槀人에 外

內朝의 冗食者의 食을 공급해주는 것을 관장한다(掌共外內朝冗食者之

食) 라 하였고 이에 대한 鄭注는 冗食者란 (관부에 밤까지) 머무르며

문서 작업을 하는 것이 마치 지금의 尙書의 屬吏로서 當直하는 者들과

같다(冗食者 謂留治文書 若今尙書之屬 諸直上者) 賈疏는 ldquo(鄭注에

서)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rdquo라 한 것은 또한 漢法을 인용하여 설명한 것이니 차례로 당직

하는데 관부에 留宿하며 (집에) 돌아가지 않는 까닭에 반드시 음식을

제공해야 한다(亦引漢法說之 謂以次當直 留在朝 宿不還 須以食供之)

고 해석하였다 여기서의 冗 은 夜勤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일

상 정규의 일을 넘어선다는 뜻을 지닌다 冗食 은 야근하는 관리에게

제공되는 음식이기 때문에 정규의 음식 지급에 추가되는 것을 의미한

다 전한 成帝 河平 연간에 수해를 입은 군국을 구휼하면서 그 지역민

을 다른 군국으로 피신시키고 그 곳에서 冗食케 하라 고 하였는데49)

文穎은 冗이란 散이다 廩食을 散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遊離되어) 정착하지 못하는 戶를 役事시켜 일자리를 주는 것이다(冗

散也 散廩食使生活 不占著戶給役使也) 로 해석하였고 如淳은 離散

된 자들에게 給食하고 관부는 그 임금을 지불한 것이다( 散著人間給

食之 官償其直也 )고 해석하였다 즉 수해로 유민이 된 자들에게 給

食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하고 아울러 役事의 일자리를 주어 그 임금

을 지불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석자들이 冗 을 散 의 뜻으

로 해석한 것은 국가의 재정을 풀어서 지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國錢의

lsquo散布rsquo라는 뜻으로 본 것이다 이 또한 정규의 재정 지출을 넘어선 추

가의 지출이므로 실은 위의 사례들과 같은 뜻이 된다 또 한서권24

하 식화지하에 또한 周官의 稅民 제도에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民이 떠돌아다니면서

일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夫布一匹을 납부하게 하며 布를 납부할 수

49) 漢書 卷10 成帝紀 河平4년조에 遣光祿大夫博士嘉等十一人行舉瀕河之郡水

所毀傷困乏不能自存者 財振貸 其爲水所流壓死 不能自葬 令郡國給槥櫝葬埋

已葬者與錢 人二千 避水它郡國 在所冗食之 謹遇以文理 無令失職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3없는 자에게는 縣官에서 冗作케 하고 이들에게 衣食을 제공한다 고50)

하였다 여기서 冗作 이란 정규의 요역 부과 외에 징벌의 뜻으로 역

을 추가하여 부과한다는 의미이다

또 lt운몽진율gt 司空에 冗邊 이 있다

백성에게 모친 및 동생이 있어 隸妾이 되었는데 謫罪가 아니고 冗邊5

歲에 복역하되 근무 기간을 無償으로 하고 1인을 면하여 庶人으로 하고

자 한다면 이를 허용해준다(百姓有母及同牲(生)爲隸妾 非適(謫)罪殹(也)

而欲爲冗邊五歲 無賞(償)興日 以免一人爲庶人 許之) (司空 p91)

이 冗邊五歲 도 규정된 정규 戍邊役의 額 외로 추가된 役이란 뜻의

용어이다 그래서 이 또한 위의 사례들과 마찬가지의 뜻이다 이렇게

冗 에는 更 에 相對한 지칭으로 更 에 복무하는 자들에 비해 전문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갖춘 자들이거나 기타 사유로 정규의 額을 넘

어서는 복무를 하는 것 또는 그 役者 또는 職名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즉 정규 일반의 更 방식의 근무 額(日數)에 비해 담당

분야의 뛰어난 능력이나 징벌 등 기타 사유로 더 많은 근무를 추가로

하게 되는 자들의 職을 冗 이라 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러한 冗 을 쓰는 데는 국가의 재정 지출도 추가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국가재정의 추가 지출의 뜻으로서 散(散布)

이라는 뜻이 되어 후대 冗官==散官의 칭이 생긴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해석된다면 그간 충분히 해석되지 못한 lt운몽진률gt廏苑

律에 연간의 養牛 실적 평가에서 下等을 받은 宂皂에게 2개월의 복무

기간을 추가하는 벌을 내린다는 律文에 보이는 宂皂51) 그리고 同 秦

律雜抄 屯表律에 나오는 lsquo冗募rsquo도52) 위와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50) 又以周官稅民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民浮游無事 出夫布一匹 其不能出布者 冗作縣官 衣食

51) lt雲夢秦律gt p30 廏苑律의 율문 卒歲 以正月大課之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殿者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罰

冗皂者二月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52) lt雲夢秦律gt p145 秦律雜抄의 율문 冗募歸 辭曰日已備 致未來 不如辭

貲日四月居邊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4것이다 廣懶薰雄은 更 을 非常勤 冗 을 常勤의 뜻으로 요약하였는

데53) 그러한 일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는 更 이 본래 규정된

交代근무라면 冗 은 본래의 규정액을 넘어선 근무를 뜻하는 까닭에

그러한 해석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설문宀部에 冗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人在屋下 無田事也 라 하였는데 無田事 로서의 冗의 뜻도 更

이 당번으로 給事하는 기간을 제외하면 田事에 있어야 하는 것과는 달

리 冗은 비당번인 경우에도 관부에서 給事하는데서 칭해진 것이라 하

겠다

예기중용에 忠信인 자에게 봉록을 두텁게 주는 것은 士를 勸함이

고 때로(일시적으로) 使役시키되 賦斂을 가볍게 하는 것은 백성을 勸

하기 때문이며 日用으로 근무시키되 그 근무기간과 성과를 계산하여

급료(廩)를 지급하여 그 근무에 합당하게 보상해주는 것은 百工을 권

하기 위함이다(忠信重祿 所以勸士也 時使薄斂 所以勸百姓也 日省月

試 旣廩稱事 所以勸百工也) 라 하였다 여기서 忠信 이란 禮記禮器에 忠信 禮之本也 라 하였고 여기서는 이를 修學하고 실행할 수

있는 사대부 내지 命官層을 가리키고 있다 百工에 대해 日省月試

한다 함은 근무한 日數와 그 성과를 월 단위로 계산한다는 것이다 注

에서 旣廩稱事 의 旣 를 lsquo餼rsquo로 해석하고 lsquo餼廩rsquo은 稍食 이라 하였

다54) 여기에서 일반 백성에게 때로(일시적으로) 사역시킨다는 時使

가 곧 更 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진한 시기 更徭制의 운영에

서 충분히 입증된다 宮宅 潔은 年俸이 있는 것이 有秩인데 그 最下가

百石이며 연봉이 없고 본래 日食과 月食으로 지급되는 등급을 斗食이

라고 한다 하였다55) 그가 말한 斗食은 백관표에 나열된 斗食과 그 이

하의 여리 吏職을 포함한 것이다 그런데 일반 백성에게 更役이 부과

되고 그들에게 동원된 기간 동안 당연히 매일의 給食은 지원되겠지만

그 일반 요역으로서의 更役에 대한 日當의 보수가 지급된 것은 아닐

53) 廣懶薰雄 앞의 글 p304

54) 注에 日省月試 考校其成功也 lsquo旣rsquo讀爲餼 餼廩 稍食也

55) 宮宅 潔 앞의 글 p39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5것이다 그 일반 요역은 일반 백성의 기본 의무사항인 까닭이다 반면

百工의 근무일수와 성과액에 대해 稍食 (日俸 내지 月俸)이 지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매 끼니의 급식이 아니라 工役에 대한 보수 내

지 給料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근무일수라든가 성과액을 계산

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기서의 百工은 관부의

員吏에 속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관부에 속하여 매

끼니의 식사 뿐 아니라 工役한 일수와 성과량에 따라 봉록이 지급된다

는 것이다 그래서 봉록 지급은 錢이나 곡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반

면 전기한 국어晋語4 文公修內政納襄王 章에 公食貢 大夫食邑 士

食田 庶人食力 工商食官 皁隸食職 官宰食加 에서 工商食官 의 工

商은 모두 관부의 員吏에 속한 자들인데 그 注에 옛날에는 田을 주는

것으로 祿俸을 제정하였다 관부에서 주는 廩이란 곧 관부에서 田을

받는 것이니 후세에 錢粟을 주는 것으로 祿俸을 제정한 것과 같지 않

다(古者以田制祿 官廩之者 卽受田於官 非如後世之以錢粟制祿也) 고56)

하였다 또 한서권24식화지상에 士工商이 田을 받는 것은 5口가 받

는 것이 되어야 농부1인이 받는 것에 當한다(士工商家受田 五口乃當

農夫一人) 고 하였다 즉 百工과 商賈는 그 직무에 따라 俸祿을 받는

데 후대와 같이 錢粟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田으로 받으며 그 액수는

일반 농민의 15이라는 것이다 이는 전술한 주례의 胥徒가 최하품

의 田 1百畝를 俸祿으로 받는 것과 lsquo以田制祿rsquo이라는 면에서 일치한다

그리고 lsquo以田制祿rsquo이 후대에 lsquo以錢粟制祿rsquo으로 변천 된 것은 秦漢의 사

례를 통해 분명하다 어쨌든 관부의 員吏인 百工과 商賈에게 일반 백

성의 更役과는 달리 祿田 또는 월봉 형태의 錢粟 지급이 행해진 것이

라 하겠다 또한 工商이 일반 요역 대신에 전문기능인으로서의 工役과

관부 소요 물품의 調達役의 職分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이 또한 職

役에 해당하는 셈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관부의 員吏이면서 斗食 보다 下位에 위치하여 稍

56) 國語正義(下冊) (董增齡 撰 巴蜀書社 1985) pp815-6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6食 내지 月俸을 받는 여러 導從役 祝醫工商 등의 役은 그 職分

의 役 즉 職役으로 奉公한다 그런데 후한 초에 이 職役의 면역전으로

서 走卒錢을 징수하고 그 재원으로 빈민을 고용한 것이 不法이었으며

수십 년 이어지다가 금지되고 違法한 관료들이 처벌받고 있는 것에

의하면 이 役들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戶가 지정되어 있어 여타의 일반

戶가 대신하여 맡을 수 없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은 導

從役 등의 담당자는 일반서민이되 그 중에서 특별히 선발된 층으로 구

성되어 전문의 분야를 세습하며 의무로 담당하는 하나의 신분층으로

형성되어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그 役은 하나의 身分役이기

도 하였던 셈이다 또한 그 代役錢으로서 走卒錢 징수 및 雇傭 방식이

나오게 된 것은 그 역의 담당층 가운데 錢으로 實役을 피할 수 있는

부유충이 형성되었고 후한 前期에 전통의 身分制가 느슨해진 여건에

서 身分役의 근본 형태가 유지되지 못하고 일탈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속한서백관3에 執金吾의 속관 중에 화려 장려한 복장

과 장식으로 황제의 행차를 호위 수종하는 騎士로서 緹騎二百人이 있

는데57) 本注에 無秩 比吏食奉 이라 하였다 즉 吏가 아니지만 吏의

대우를 받아 봉록을 받는 계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下吏에

들지 못하지만 봉록을 받는 면에서는 동일한 계층이다

한편 앞에 든 國語 晋語4에서 工商食官 에 이어 下記된 皁隸(吏

에 下屬한 徒隸)食職 이 있다 이 皁隸 계층은 지금까지 검토한 庶民

在官者 로서의 胥徒導從役 담당자 및 樂祝醫衛士工商 등

보다 下位 내지 그 下屬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그 담당 신분과 그 役의 성격에 대해 검토한다

Ⅳ 下層 員吏의 役과 徒隸層의 役

57) 당 조목의 注 所引 漢官曰 執金吾緹騎二百人 [持戟]五百二十人 輿服導從

光滿道路 群僚之中 斯最壯矣 世祖歎曰 ldquo仕宦當作執金吾rdquo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7

앞에서 검토한 관부 구성의 최말단에 위치한 주례에서의 胥徒와

춘추진한 시기의 導從役 담당자 및 樂祝醫衛士工商 등의 下

吏層 외에 그 下屬으로 보이는 皁隸가 있다 앞에 든 각 신분에 따른

奉公의 職分을 나열하고 있는 國語晋語4의 記事 皁隸食職 의 注에

皁隸를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라 한 것에 의하면 이 계층은 위에 열거한

여러 下吏에 下屬한 노역자들이라 할 수 있다 胥徒와 導從役 담당자

등은 각각 주례와 漢官 등에 그 員數가 규정된 까닭에 이들은 員

數 규정에 들지 못한 皁隸에 대비해 下層의 員吏로 칭할 수 있다

皁隸가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라 하였으니 곧 관노비 내지 그에 類하는

계층일 것인데 그들이 lsquo職을 食한다rsquo고 한 것은 각 분야의 官署에 分屬

되어 그 職務에 給事함으로써 생업을 삼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皂

隸 牧 圄 僕 등이 후대의 천민이나 隸民이 아니라 일반민이었다

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58)그러한 주장은 이들이 대체로 관부에 給

事하는 계층으로 여러 기사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고 위의 皁隸食

職 은 곧 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관부에 給事

하는 면으로 인해 예속성이 있게 된다는 면이 있다 후술하는 바와 같

이 그들이 일반 서민 출신이면서도 후대에 그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모

두 예속신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통용되는 것은 그러한 관부에의 예속

성이 분명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예속성을 말해주는 것이 또한 職

役의 한 속성이다

한편 國語 晋語4 文公修內政納襄王章에 (晋文公)元年 春에 公(晋

文公)과 부인 嬴氏(秦穆公의 女인 文嬴)가 王城(秦의 地名)에서 돌아올

때 秦伯이 衛士3천인을 納하였는데 실로 기강이 있는 僕들이었다(元年

春 公及夫人嬴氏至自王城 秦伯納衛三千人 實紀綱之僕) 고59) 하였다

秦漢의 衛士 출신과 달리 여기서는 그 출신 신분이 僕인 자들로 구성

58) 黃中業 春秋時期的ldquo皂隸牧圉rdquo屬于平民階層說 (齊魯學刊 阜師院學報) 1984-2 19844) pp69-72

59) 위의 책 pp809-810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8되어 있다 이 당시는 秦 穆公의 지원으로 晋의 文公이 귀국하여 懷公

을 죽이고 즉위한 때인 까닭에 군사 내지 호위부대의 지원이었다 그

衛士 군단의 신분은 皁隸層에 들어가는 僕인데 관부에 給事하는 職分

은 衛士이다 이들의 紀綱이 선 자들이었다고 한 것은 본래 秦에서도

衛士의 職으로 給事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춘추기에 邑數百이나 社

數百의 단위로 국가 사이에 分與되는 일이 자주 있었고 3천인에 이르

는 多數의 전문 집단이 타국에 分與된 것이긴 하지만 일부 전문의 인

력을 分與나 上納 하는 것 또한 당시 종종 일어났던 일이다 어쨌든

그 衛士집단이 모두 僕이었다는 것은 일반민이 아니고 관부에 예속되

는 신분이었음을 말해준다 예속신분으로 궁성을 지키는 衛士로 삼는

것은 주례地官 師氏에서 그 직무 가운데 (師氏는) 그 소속의 四夷

之隸를 거느리고 각기 그 병력으로 왕성의 문밖을 지키는데 복무하며

또한 (행차 때) 앞에서 길 정리를 한다(師其屬帥四夷之隸 各以其兵服

守王之門外 且蹕) 에 이미 보이고 漢武帝 때 제후왕 貴戚의 不服을

다스리기 위해 중앙 내사지역을 감찰하는 司隸校尉와 지방의 刺史에게

중도관의 徒奴 1200인을 보내어 二千石官을 독찰하게 하였는데60) 이

1200인의 徒奴부대는 이후 사예교위 내지 刺史 직속의 상비군단이 되

었고 그 성원은 세습 병사집단의 근간이 되어 牧使 刺史 등 將領下의

公兵이나 私兵으로 활약하였다61) 漢官舊儀 卷上에 漢代 長安에 騎

亭長 79인과 함께 6월 1更의 倉頭盧兒를 給事하게 하였다62)이들 四夷

之隸나 徒奴倉頭盧兒 등은 적군포로이거나 刑徒 계통 출신으로 관부

에 예속된 신분일 것이다 특히 관부에 囚禁된 형도들은 여러 방면의

60) 北堂書鈔設官部 및 漢官儀권2補遺2에 ldquo司隸校尉는 武帝 때 처음 설치되

었다 이후 諸侯王 貴戚이 不服함에 中都 中官의 徒奴千二百人을 (파견해서)

一校尉部刺史에게 속하게 하여 二千石官을 독찰하게 하였다(司隸校尉 武帝初

置 後諸侯王貴戚不服 乃以中都中官徒奴千二百人屬爲一校尉部刺史 督二千石

也)rdquo

61) 이에 대해서는 박건주 한대의 지방상비군과 部曲의 推移 (동양사학연구118 20123) 참조

62) 長安給騎亭長七十人 六月一更倉頭盧兒 (漢官六種 北京 中華書局 1990

9) p3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9노역에 활용되었는데 근래 石岡 浩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刑徒 집단

은 크게 세 부류 내지 등급으로 나누어져 활용되고 대우에 차별이 있

었다고 한다 즉 가장 上位에 있는 司寇는 특정 임무에 복무하는 것이

정해진 형도이며 전택을 소유하여 戶主가 되는 권리(lt二年律令gt

310-316簡) 왕조로부터 사여 받는 권리(同 291-293) 子가 士伍로 복

귀할 수 있는 권리(同 364-365)를 갖는다 다음으로 徒隸 는 특정 관

서에 예속하여 직무를 숙지하였거나 기술에 숙련하여 전문기능자에 동

등한 가치를 지니는 형도 를 지칭하며 그것으로 동일 직장에 계속 근

무하는 까닭에 일반 형도와는 달리 토목공사나 물자운송 등의 노역에

서 제외된다 또한 왕조에 공헌하는 자로서 사여를 받는 대상도 된다

(同 291-293) 즉 그들은 隸臣鬼薪城旦이면서 숙련자 기능자로서

일반 형도보다 우대받는 자들이다 위 양자에 비해 일반 형도는 위의

여러 특혜를 받지 못하며 城旦은 주로 토목사업에 隸臣은 주로 여러

관서의 잡다한 노역에 복역한다63)이는 충분히 수긍되는 견해이다 이

가운데 徒隸는 관부 내 각 分署의 전문 직장에 分屬되어 사역될 것이

기 때문에 전술한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로서의 皁隸가 곧 그들의 주요 부

분이 될 것이다 그 중에 일반 관노비로부터 개인적 재능과 기술로 선

발되어 해당 관서에 給事하는 자들도 포함될 것이다 단지 정규의 전

쟁에 형도를 동원하는 사례가 많은데 그들이 정규의 병사가 된 것은

아니고 군공을 세워 免刑되기 이전에는 그대로 형도인 것과 같이 함께

관부에 給事하고 있다 하더라도 각 신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상의 검토에 의하면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에는 이른바 lsquo吏에 下屬

한 徒隸rsquo로서 食職하는 皁隸집단이 있고 그 구성에는 관노비 뿐 아니

라 적군포로나 관노비 및 형도 출신의 衛士 그리고 刺史 牧使 등의

將領下에 있는 직속 상비군 형도 가운데 司寇 그리고 기능과 숙련으

로 형도 중에서 선발된 職能의 徒隸집단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員

吏이되 下吏인 계층의 복무가 그 신분에 따른 職役인 것과 마찬가지로

63) 石岡 浩 秦漢代の徒隸と司寇 -官署に隸屬する有職刑徒 (史學雜誌 121-120121) p32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0이 皁隸層의 복역도 모두 관부에 생업을 의존하는(食職) 職役이라 할

수 있다

또 좌전에 주로 보이는 輿人이 있는데 同 昭公7년조에 天에 十日

이 있고 人에 十等이 있으니 下가 上에 事하는 所以이다 까닭에 王의

臣은 公 公의 臣은 大夫 대부의 臣은 士 士의 臣은 皁 皁의 臣은

輿 輿의 臣은 隸 隸의 臣은 僚 僚의 臣은 僕 僕의 臣은 臺이다 馬

에 圉가 있고 牛에 牧이 있어 百事를 待한다 라 하였다 古來의 여러

注疏에서부터 이미 lsquo輿人rsquo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지만 이를 분석한 宇

都木 章의 견해에 의하면 縣鄙의 野人이 평시이든 戰時이든 國都의

귀족에 징발되어 葬儀戰士補助 車馬와 관련되는 여러 役務에 종사

하는 때 그들을 lsquo輿人rsquo이라 칭하였다고 한다64) 여러 자료에 의하면 皁

에서 牧에 이르는 서열 순위가 어디에서나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

고 대개 동일 계층의 異稱인 경우가 많다 皁 이하의 서열에 이렇게

다단계의 臣屬 관계가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같은 徒에도 上位 순서로 胥와 徒 및 그 徒의 지휘를 받는 징발된 徒

가 있으며 員吏에 들어가는 導從役 등의 庶民在官者 가 있고 그에

下屬하는 皁隸의 구분이 있는 것에 의하면 최소한 士 아래의 서민 계

층에 3 - 4 단계의 차등 신분이 있을 수 있다 위의 十等 순위에서 士

이하에 위치하여야 할 庶民이 곧 皁輿 등에 해당할 것인데 모두 관

부에 給事하는 면에서 후대 예속신분을 가리키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

다 그리고 일반 서민 가운데서도 皁輿 이하는 모두 전문의 職分으

로 관부에 給事하는 의무가 주어진 계층이므로 일반 농민으로서의 서

민과는 구분되는 서민이었다고 생각한다 즉 일반 농민이 농업을 생업

으로 하며 일반의 요역 의무가 주어진 반면에 皁輿 등은 주로 전문

의 기능을 요하는 관부의 직무에 給事하는 것으로 일반요역을 대신하

며 때문에 일반 서민이면서 관부에 예속된 신분의 일면을 지닌다 그

렇지만 관노비나 형도로서 관부에 예속되어 給事하는 신분과는 명확히

64) 宇都木 章 輿人考 (三上博士頌壽記念 東洋史考古學論集 朋友書店 1979

12) pp108-11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1다르며 주례의 胥徒와 같은 下吏의 員吏 보다 보통 下位이지만 胥

徒와 마찬가지로 주로 전문 기능의 職分에 복역한다는 면에서 같고 그

일부분은 下吏에 충당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곧 胥徒가 일반 서민의

徒로부터 선발된 자들인 것과 같다 위의 十等 서열은 농민을 제외하

고 관부에 給事하는 신분만을 총괄하여 나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

술한 工商食官 皁隸食職 도 모두 관부에 給事하는 工商과 皁隸를 열

거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복무도 당연히 職役이 되는데 그 職能 내

지 職分의 종류별로 숙련도 및 경력 등에 따른 그룹 내에서의 서열이

있게 되고 이를 계층으로 인식해서 lsquo皁臣(臣屬)輿rsquo 등과 같은 記述이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 각 직능별 部署별 전문화된 職役의 활용은 관

부의 운영상 당시의 사정으로는 불가피한 면이 있다 그러한 체제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점차 계층 구분의 엄밀성이 느슨해지고 세분된

차등의 질서가 점차 단순화되면서 그 용어도 혼용되기에 이른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위의 계층 구분은 세분된 서열만이 아니라 각 계층

의 담당 職分을 구분해주는 칭호로 쓰인 면도 있다 그렇다면 輿人은

戰時에 주로 戰車부대를 보조하는 직무 분야를 담당하는 계층이라 할

수 있고 그러한 면에서 여러 下屬 계층 가운데 가장 상위의 계층이었

지 않을까 한다

한편 이상의 皁隸層이 본래 일반서민 출신이었다는 입장에서 보면

관부에 給事하되 향리에 거처하면서 일정 기간 만 순번으로 복역하는

交代制가 있었을 수가 있고 또는 대체로 일부 기능자나 世戶에 한정

되었겠지만 휴가 기간 외에는 상근하는 형태도 있었을 것이다 예속된

신분인 경우 그 거처도 대체로 관부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앞에 든 秦

漢律에 교대 근무하는 更隸妾의 존재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근무

기간에만 관부에서 거처하는 예속 신분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刑徒

중에서도 司寇는 田宅을 소유하고 戶主가 될 수 있었으며 徒隸도 賜

與를 받을 수 있는 까닭에 이들 중에 일부는 관부 밖에 따로 거처를

지니고 출퇴근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단지 衛士나 部曲 집단은

대체로 屯營 내에 거주하였을 것이다 위로는 승상으로부터 아래로는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2하급의 吏에 이르기까지 吏舍에 거처하며 휴가 기간이 되어야 비로소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는 大庭脩의 연구가 있지만65) 漢舊儀 卷下

에 舊制에 尉는 모두 관서에서 거처하였다( 舊制尉皆居官暑 ) 라66)한

것에 의하면 舊制 가 어느 시기를 말하는 것인지 불분명하지만 宿衛

와 경찰 임무의 尉職 외에는 관서에서 거처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음을

말해준다 매년 직급에 따른 수개월의 휴가 기간이 설정되어 있지만

이는 성내에 거주하며 매일 출퇴근 하더라도 고향은 먼 곳에 있는 경

우가 많아 歸鄕 휴가를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外地 출신으로 城內

에 거처가 없는 관리들을 위한 吏舍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吏舍의 존재가 모든 관리의 관부 거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居官府의 여러 給事職 관노비 司寇나 일부 徒隸를 제외한 일

반 형도 여러 當番의 宿衛職 등을 제외한 관리는 官舍 밖의 私家에서

거처한 것으로 본다

庶民在官者 로서의 職役 복무는 常勤과 교대근무의 두 시스템으로

운영되었을 것이다 胥徒는 본래 모두 징발된 徒 가운데서 재능 있는

자로 선발되어 관부에의 給事가 생업이 된 자들로서 祿田을 받는 자들

이며 員數가 책정되어 있는 까닭에 常勤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

나 함께 징발된 여타의 徒는 胥徒와 같은 給徭役의 奉公을 행하지만

순번으로 동원된 기간 만 한시적으로 복무하는 까닭에 동원 기간 동안

의 食料 이외에 노동의 보수를 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그들은 만

민의 기본 의무를 職役으로 이행하는 것일 뿐이다 정부로서는 관부에

給事할 人才와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지만 필요한 부

분을 모두 常勤하는 자로 임용하여 그들의 생업을 봉록 지급 등으로

전면 지원하는 것은 재정에 큰 부담이 되는 것이었다 즉 관부에서 필

요로 하는 특정 업무 기능자들을 일반 요역 면제 대신으로 복역케 하

고 이를 순번제로 운영하면 복무 당번 기간 외에 그들은 다른 생업을

65) 大庭脩 漢代官吏の勤務休暇 (秦漢法制史の硏究 創文社 1982) p584

66) 앞의 漢官六種 p81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3꾸려나갈 수 있기 때문에 국가는 그들에 대한 생업 유지 지원 부담이

훨씬 적어진다 관부 給事層 가운데 命官과 員吏 이상이 常勤制라면

그 이하의 여러 職役層들은 대체로 교대근무제 중심으로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테면 lt奏讞書gt 案例17에서 秦王政元年 雍縣人 樂人 講이 자신

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사건 당일 자신은 踐更에 복무하러 11월 한

달간 함양의 外樂(관서 기구 名)에67) 소집되어 복무 중이었음을 진술

하고 있다 따라서 함양에 거주하지 않은 樂人이 그 관서에서 常勤하

지 아니하고 특정시기 일정 기간 만 교대로 근무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獄事에서 피고인 樂人 講이 踐更으로 1개월 간 복무한

곳이 外樂인 까닭에 일반 요역이 아니라 樂人의 職役을 이행한 것이라

고 본다 전한 哀帝 때 樂人의 員數를 罷하라는 명령에 대해 승상 孔

光과 대사공 何武가 진언하길 각 담당별 樂人의 현재 員數와 罷할 수

없는 수를 열거한 후 총 829인의 員數 가운데 388인은 罷할 수 없다고

하자 이를 재가한 바가 있다68) 이는 전한말의 사정이지만 전국진에서

도 郊祭 등의 각종 국가제사와 宮中 樂이 행해졌기 때문에 위의 수치

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속한서 백관2 大樂令 注引의

漢官과 盧植禮注에 의하면 八佾舞를 추는 樂人의 員數가 380인인

데 여기에 卑者之子는 임용될 수 없고 6백석에서 2천석 및 관내후에

서 五大夫의 嫡子 출신 5척 이상의 신장 12세에서 30세 顔色온화 등

의 조건을 갖춘 자에 한정되었다69) 이에 의하면 樂人 講은 走馬의 傭

이 되어 京師에 왕래하고 있는 빈한한 자로서 도저히 중앙 大樂令 속

67) 관서 기구 이름으로서의 外樂은 lt이년율령gt秩律 449簡 및 西安相家巷出土

秦封泥에 보인다(周曉陸路東之 編著 秦封泥集 三秦出版社 2000 一

二44)68) 漢書 권22 예락지2

69) 漢官曰 ldquo員吏二十五人 其二人百石 二人斗食 七人佐 十人學事 四人守學事

樂人八佾舞三百八十人rdquo 盧植禮注曰 ldquo大(子)[予]令如古大胥 漢大樂律 卑者

之子不得舞宗廟之酎 除吏二千石到六百石 及關內侯到五大夫子 取適子高五尺已

上 年十二到三十 顏色和 身體修治者 以為舞人rdquo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4하의 樂人 員數에 들어갈 수 있는 처지가 못 되는 자이다 그는 향리

에 거주하면서 매년 1개월씩 京師의 外樂에 가서 복무하는 기간 외에

는 傭賃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下吏의 員吏가 아

니면서 樂工의 職能으로 일반 요역 대신에 京師의 제사나 예락 행사에

나아가 給事하는 자이다 그래서 그의 복역도 職役인 셈인데 이러한

모습은 주례의 胥徒와 흡사하다 단지 胥徒가 員吏로서 봉록은 받는

것과는 다르다 양자가 모두 職役이지만 胥徒는 庶民在官者 이고 樂

人 講은 lsquo非吏인 職能人rsquo이다 그렇지만 양자 모두 개인적인 職能으로

관부에 給事하는 면에서는 상통한다 따라서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

부에 給事하는데는 員吏로서 복무하는 경우와 非吏로서 복무하는 경우

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Ⅴ lt走馬樓吳簡gt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복무

형태 및 그 성격

1996년에 호남성 長沙市 도심 우물에서 발굴된 lt吳簡gt은 총 17萬

餘 枚로 아직 그 일부만이 정리 해독되어 출간된 상태이지만 이미 출

간된 분량 가운데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의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자

료들을 많이 지니고 있다 孫吳 嘉禾 연간(232-238)의 여러 戶籍簿

내지 吏民簿 등에 吏와 給吏로 구분된 人名簿가 다수 존재한다 이 자

료들은 그간 명확하지 못하였던 吏役과 吏戶의 존재형태와 관부에 給

事하는 계층 및 그 職役의 실태를 파악하는데 획기적인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근간의 연구에서 여러 異見으로 그 문서가 지니

는 뜻을 파악하는데 상당히 혼란을 초래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전술한

職役의 전통과 여러 계층의 형태를 살펴본 성과를 참고로 하여 나름대

로 새로운 해석을 추구해보고자 한다

lt吳簡gt의 lt吏民人名年紀口食簿gt(竹簡(肆))에서는 각 里別로 里魁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5가 領하는 食口數를 吏와 民으로 구분하여 통계하고 있는데 그 일례를

다음에 든다

(A)

(이하 簡文 인용에서 內에 있는 字를 괄호 하여 표기함〕

集凡五唐里魁周領吏民五十戶 口食二百八十九人 (簡380)

其一百六十二人男 (379)

其一百卄七人女 (378)

其四戶縣吏 (377)

其二戶郡吏 (376)

其戶州吏 (374)

其五戶給新吏 (373)

其一戶縣卒 (372)

其一戶佃帥 (371)

이는 孫吳 嘉禾 연간 里別吏民口食簿인데 五唐里 50戶 가운데 일반 民

戶를 제외하고 州吏에서 佃帥까지의 戶를 따로 특기하고 있는 것에 의

하면 크게 民戶層과 州吏 이하의 吏층으로 양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

다 먼저 縣吏 이하를 이른바 세습 吏職戶인 吏戶로 볼 수 있는가 하

는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여러 異見이 제기되어 있는데 이 문

제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그런데 lt吳簡gt의 여타 戶籍簿나 戶口簡에

의하면 民戶를 제외한 縣吏 이하의 戶도 다시 縣吏 郡吏 州吏 軍吏 등

의 類와 맨 앞에 lsquo給rsquo字가 붙어 있는 계층의 類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즉 縣吏類의 吏 외에 其十二戶給縣吏下品 (壹5467)

其三戶給郡縣卒 (貳2318) 등과 같은 예들인데 그 職事나 給事

하는 관서의 명칭에 따라 多種의 명칭이 보인다 이를테면 給郡吏 給

縣吏 給州吏 給軍吏 給郡園父 給朝丞 給子弟 給驛兵 給鍛佐 給庫

吏 給縣卒 給度卒 給驛卒 給子弟佃客 給限田客 給佃帥 給常佃 給

家種客 給乞兒 給三州倉父 給養官牛 給習射 給私學 給官瓦師 給

亭復人 給亭雜人 給任師 給郡醫 給縣帥 給州私學 給新吏 給佃吏

給郵卒 給鹽兵 給關父 등이다 이렇게 앞에 lsquo給rsquo字가 들어간 계층을

일단 동일 계층으로 보아 lsquo給吏rsquo로 칭하고 縣吏 群吏 州吏 軍吏 등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6lsquo給rsquo이 붙어 있지 않은 계층을 lsquo吏rsquo로 칭하여 양자를 구분하고자 한다

lt오간gt에서 人名에 붙는 신분명은 크게 眞吏 某吏 給某吏 大男(大

女 民)의 4종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들은 그 표기상의 차이만으로도

일단 구분되는 존재라고 보이는데 현재 앞의 3종 신분명의 구분 문제

와 관련하여 몇 가지 다른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먼저 黎虎는 縣吏나

郡吏州吏 등의 吏가 侯家나 司隸校尉 또는 郡內에 소재한 전문 기

관 州郡 관내의 遠縣에 일정 기간 파견되어 給事하고 있는 자들을 칭

하여 給郡吏 등으로 칭하는 것일 뿐 그 신분은 本州 本郡 本縣의 吏

와 동일하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本郡의 郡吏가 곧 給郡吏이기

때문에 다른 계층이나 신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眞吏는 無職事

의 冗散官에 상대하여 쓰이는 용어로 실제 除授된 관원이라고 한다70)

黎虎와는 달리 양자를 다른 계층으로 보는 견해들도 제기되었다 먼저

韓樹峰은 給吏는 비록 吏의 名은 있지만 일반 백성으로서 잠시 吏의

職事에 종사하는 것일 뿐이고 혹 吏로 임명될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그 신분은 여전히 보통 백성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給吏와 구분하여

口算錢의 면제 특혜를 받는 州吏 郡吏 縣吏 등을 총칭하여 眞吏라 한

다고 하였다 즉 眞吏가 정식의 吏인데 비해 給吏는 일반민이며 일정

기간 만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給吏의

관부給事는 실제상 요역의 일종이라 한다 71) 한편 楊振紅은 동일인의

신분이 문서에 따라 다른 신분으로 등록되어 있는 점에 의거하여 이를

테면 給郡吏가 郡吏나 眞吏로 簡稱된 것이라 하고 眞吏나 給吏 모두

吏로 簡稱되며 州郡縣의 掾史職에 있는 자들로서 署長 佐官 등의 lsquo官rsquo

에 상대되는 자들을 지칭한다고 하였다 아울러 吏는 그 작위가 公乘

이면서 賦役 대상이고 漢魏시기에 吏職의 세습화가 이루어지면서 전문

70) 黎虎 說ldquo給吏rdquo -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社會科學戰線 2008-11) pp89

-94 說ldquo眞吏rdquo-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史學月刊 2009-5) p5071) 韓樹峰 走馬樓吳簡中的ldquo眞吏rdquo與ldquo給吏rdquo (吳簡硏究 2 武漢 崇文書局

2006) 韓樹峰王貴永 孫吳時期的ldquo給吏rdquo與ldquo給戶rdquo -以走馬樓吳簡爲中心 (吳簡硏究 3 2011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7적 吏戶인 眞吏가 출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吏가 본래 일반 서민

이었던 까닭에 公乘 이하의 서민과 합칭하여 吏民이라 한 것이며 삼

국시기 官과 吏가 구별된 연원은 漢代의 長吏와 小吏 내지 士와 庶民

의 구분에 있다고 한다72)다소 혼란스러운 견해들이고 용어상의 해석

문제가 겹쳐 있어 난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들 異見의 관건은 吏와 給

吏의 구분 문제 그리고 吏戶에서의 吏가 어떠한 吏를 가리키는가 하

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여러 견해에서 공통으로 들고 있는 lt吳簡gt의 다음 문서를 먼저 살

펴본다

(B)

廣成鄕勸農掾區光言 被書條列州吏父兄子弟伏處 人名 年紀爲簿

輒隱核鄕界 州吏七人 父兄子弟合卄三人 其四人刑 踵 聾 歐病 一人

被病物故 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 十二人細小 一人限田 一人

先出給縣吏 隱核人名 年紀相應 無有遺脫 若後爲他官所覺 光自坐 嘉禾

四年八月卄六日破莂保據(此簡無編戶)73)

이 자료는 광성향 勸農掾 區光이 작성하여 보고한 문서인데 廣成鄕 領

內 州吏7인의 父兄子弟 23인의 현황을 파악하여 嘉禾4년(235년)에 보

고한 내용이다 lt吳簡gt戶籍簿에서 州吏 등의 吏가 있는 戶는 그 州吏

가 戶人(戶主)으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 州吏7인이란 모두 그 戶의

戶人이다 이 현황 내역에 의하면 州吏7인의 父兄子弟 총합은 23인이

고 이 가운데 4인은 受刑 질병 중이며 1인은 物故 4인은 이미 관부

에 보내져 그 本主에 從事하며 관부에서 복무 중이다 12인은 細小 즉

소인이고 1인은 限田을 경작 중이다 이 限田이 lt吳簡gt의 lt吏民田家

莂gt 등에 보이는 lsquo二年常限rsquo의 田으로 보아 侯家의 田이나74) 屯田을75)

72) 楊振紅 吳簡中的吏 吏民與漢魏時期官 吏的分野 -中國古代官僚政治社會構

造硏究之二 (史學月刊2012-1)73) 侯旭東 三國吳簡兩文書初探 (歷史硏究 2001-4) p172에서 轉引

74) 入都鄕嘉禾二年步侯還民限米一斛 (5-1556) 其卄六斛民還黃龍年臨湘侯

限米 (602017)

75) 黃龍元年文入郡屯田民吳平斛米一百六斛二斗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6227) 其三斛五斗郡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8吏民에게 分給하여 佃作케 한 田으로 보는 것이 일반이다 그 경작자

는 그 田地(佃地)를 국가로부터 할당 받아 의무로 경작하기에 佃民과

같다 그 佃民에는 諸吏와 일반 民戶가 다 포함되고 있다76) lt吏民田

家莂gt에서 그 限田이 lsquo二年常限rsquo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그 의미에 대해

佃作기간 내지 佃種權이 2년으로 한정되어 있어 계약 기간이 지나면

배속되는 田地가 바꾸어지는 방식이었다는 견해가 있고77) 반면에 佃

地의 경작 기간이 아니라 地租額을 2년간 固定하는 것을 말한다는 견

해가 있다78) 사실이 어느 쪽이든 吏戶의 식구 가운데 일부는 국가의

농지를 佃作하고 地租를 납부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 액수가 漢代

사유지에 대한 조세보다 높다 같은 문서에는 租米 뿐 아니라 동시에

畝當 布2匹와 錢70-80까지 징수되고 있다 따라서 二年常限田의 分給

과 佃作은 受惠라기 보다는 노동력의 징발이고 耕作의 賦課로 보는 것

이 마땅하다 于振波가 常限田의 분급 액수를 정의하길 lsquo强制性的 生産

定額rsquo이라79) 본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 이어 1인은 先出給縣吏 인데

먼저 給縣吏로 보내졌다는 의미이다 先給吏의 사례는 嵩男弟恭年十

九先給州吏 (參1450) 등 몇 개가 더 보인다 이렇게 해서 총 23인의

食口 현황이 명료하게 보고되고 있다 그 내역에 의하면 州吏의 식구

는 受刑중인 자 질병자나 小人을 제외하고는 모두 관부에 給事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1인의 先出給縣吏 와

이미 관부에 보내져 本主 따라 從事하며 관부에 복무 중이라는 4인은

( 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 ) 내용상 모두 이미 관부에 보내져 현재

掾利焉黃龍理年屯田限米 (2157)

76) 于振波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南都學壇 24 2004年 第1期 湖南大

學 20041) p30 이 글은 앞에 든 中國社會科學院硏究生員學報 2004-1과 같

음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形成與演變 -談長沙

走馬樓簡牘札記之六 (鄭州大學學報 2001-1) 77) 張福亞 也談lt嘉禾吏民田家莂gt中ldquo二年常限rdquo田的函義 (首都師範大學學報

(社會科學版) 142期 2001-5) p8

78) 高敏 lt吏民田家莂gt中所見ldquo餘力田rdquo ldquo常限rdquo田等名稱的函義試釋 (鄭州大學

學報(社會科學版) 33-5 20009)79) 于振波 앞의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p12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9給事 중인 것은 마찬가지인데 어떠한 차이가 있어 다른 항목으로 구분

하여 기재한 것일까 이것은 바로 給縣吏와 縣吏의 차이를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후술) 州吏7인의 食口 23인의 현황 名簿를 작성하여 면밀

히 조사 보고하게 함으로써 그 遺脫을 막고 있는 것에 의하면 州吏 軍

吏 群吏 縣吏 등의 食口는 여타 일반 민과는 다른 賦役체제 아래 놓여

있는 계층이다 또 軍吏의 父兄子弟에 대해서도 그 食口簿를 따로 작

성하여 관리하고 있다

集凡中鄕州軍吏四人父(子)兄弟三人 中(參3012)

集凡南鄕領軍吏父兄弟合十九人 中(參 464)

이러한 사례들은 吏가 있는 戶는 그 食口들까지 포함하여 吏가 있는

戶 즉 吏戶로서 별개로 관리되고 그 성원은 모두 吏戶의 役 내지 賦

役체계에 들어가는 것임을 말해준다

위와 같이 州吏 縣吏 등 吏戶의 戶口簿는 그 食口 가운데 州吏 縣吏

등 그 吏인 자가 맨 앞에 戶人으로서 위치하지만 給吏는 戶人이드라도

앞에 위치하지 못한다

小武陵鄕嘉禾四年吏民人名妻子年紀簿(壹101533)

吉陽里戶人公乘張惕年卄八算一給縣吏(壹1018232)

吉陽里戶人公乘廖裕年卄七算一給郡吏(壹1017525)

高遷里戶人公乘黃毛年卅四算一給軍吏(壹10306)80)

또한 同 戶籍簿에 縣吏 州吏 등은 아래와 같이 맨 앞에 위치하여 일반

민이 아님을 명기하고 있지만

縣吏鄧橎年卄七 璠()妻大女金年卄一 算 (貳 1729)

州吏蔡區年卅二 區妻大女年卄七 算 (貳 1822)

軍吏朱謙年卅五 謙妻大女壹年卄六 算一 (貳 1723)

80) 인용된 4簡文은 凌文超가 재정리 조립하여 올린 글(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

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型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의

lt表二gt(pp25-37)에서 인용함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0給吏인 경우는 일반민을 가리키는 lsquo民男子rsquo로 기재되어 있다

民男子蔡若年卅七給驛兵 若妻大女四年卅算一(貳 1781)

民男子蔡喬年六十二給驛兵 喬妻大女典年卅八 (算) (貳1903)

따라서 위와 같은 吏民簿에서 民戶를 제외한 州吏나 郡吏 縣吏 軍

吏가 吏戶라면 給州吏 給郡吏 등 여러 職事의 관서에 給事하는 수십

종의 다양한 給某吏 신분은 전술한 庶民在官者 나 lsquo非吏이면서 관부

에 있는 자rsquo와 매우 유사하거나 일치한다

여기에서 吏戶나 吏役의 존재 여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는데 黎虎

는 삼국시기 吏戶의 존재를 인정치 않으나81) 高敏과 孟彦弘은 그 존

재를 인정하며 특히 高敏은 吏役制도 漢末三國시기에 확실히 형성되

었다고 한다82) 韓樹峰王貴永은 후한말 孫吳시기에 卑賤化가 이루어

지면서 吏戶의 萌芽가 이루어졌으며 lt吳簡gt에서의 給吏는 吏가 아니

고 民에 속한다고 한다83) 이러한 여러 異見의 배경에는 吏로 칭해지

는 계층에 전술한 바와 같이 다시 두 계층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계층

이 있는데 그 면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

각한다 양자의 구분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자료를 든다 속한서 百官3 大司農條의 注引 漢官에 丞一人 三百石 員吏四十人 其十一人

斗食 十七人佐 七人學事 五人守學事 皆河南屬縣給吏者 라 하였다

대사농승 속하의 斗食 이하 員吏 40인을 모두 하남군 속현에서 조달된

吏로 충원한다는 것이다 즉 후한 수도 낙양 인근인 하남군 속현에서

吏員을 차출한다는 것인데 斗食 佐 學事 등의 員吏는 해당 분야의 職

81) 黎虎 ldquo吏戶rdquo獻疑 (歷史硏究 2005-3) pp53-6882)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形成與演變 mdash談長沙走

馬樓簡牘札記之六 (鄭州大學學報 2001-1) p61孟彦弘 吳簡所見ldquo事rdquo臆說 mdash從ldquo事rdquo到ldquo課rdquo (吳簡硏究 2 2006) pp205-208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爲役之制 (魏晋南北朝隋

唐史資料 24 2008) pp8-2183) 韓樹峰 앞의 走馬樓吳簡中的ldquo眞吏rdquo與ldquo給吏rdquo pp33-38 韓樹峰王貴永 앞

에 든 孫吳時期的ldquo給吏rdquo與ldquo給戶rdquo -以走馬樓吳簡爲中心 p99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1事를 처리할 수 있는 職能者여야 하기 때문에 하남군에서 이러한 職事

로 근무하고 있는 員吏를 파견하거나 일반민 가운데서 새로 선발하여

파견 조달하였을 것이다 상하급 관부끼리 상호 관리를 파견하여 일정

기간 복무하게 하는 경우에 조달 지원한다는 의미로 動詞語로서 lsquo給rsquo을

쓸 수 있고 이러한 사례는 문헌에 이미 자주 보인다 위에 든 lsquo屬縣給

吏者rsquo도 그 한 실례이다 이러한 경우는 본래 吏의 신분이 여타의 관부

에 일정기간 출장 근무하는 것일 뿐인 까닭에 그 신분은 그대로 吏일

것은 자명한 일이다 즉 縣吏가 郡府에 출장근무 중일 때 그 신분은

그대로 縣吏이고 해당 名簿에 縣吏A가 여타 名簿에서 給郡吏A로 표

기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동일인이 名簿에 따라 신분명이 달리 기

재되어 있는 사례가 약간이나마 보이고 있는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된다(후술) 그런데 給州吏 給郡吏 給縣吏 등 수십종의 給吏에는 이런

경우가 아니고 lsquo州吏 등 諸吏에 배속되어 給事 중인 非吏로서 관부에

복무 중인 民rsquo이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給某吏로 표기된 자들은 lsquo給rsquo

이 붙지 아니한 州吏 郡吏 縣吏와는 달리 lsquo民男子rsquo로 표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給州吏는 非吏로서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그 관서에서 하나

의 職役의 형태로 복무 중인 民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들은 실은 民으로서 관부 업무상 필요한 노역에 동원되는 셈이지만

일부는 여러 관서의 하급 실무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전문의 職能을

갖춘 자들도 있다 縣吏 州吏의 職事 뿐 아니라 앞에 든 수십 종의 전

문 분야 부서별 給吏의 명칭은 그에 상응하는 사례들이다 정부는 이

들이 본래 일반 서민이지만 관부 운영의 필요상 특별 관리를 하지 않

으면 안 된다 그 결과 후한의 여러 사례에서 보듯이 대개 그 職을 세

습토록 하고 이들을 일반 民과 구분하여 칭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lt吳簡gt에 忠子男仲年十五 任給吏 (參 1805)라 한 것은 給吏가 民

에서 차출되어 임용되는 독립 계층임을 말해준다 또 草言府大男吳杭

不是卒子弟不應給卒事 八月卅日兼兵曹掾潘(因)()白(柒總49968)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卒의 子弟가 아니면 給卒事에 복무하게 할 수

없었다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2그들이 본래 吏의 신분이 아닌 까닭에 바로 吏로 칭하지 못하고 그

吏에 배속되어 給事하는 자 또 그 戶의 뜻으로 給某吏 給戶와 같은

칭호가 나오게 된 것으로 본다 이 칭호는 사실 관리와 民 사이에 있

는 이들 계층의 성격을 상당히 잘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이 給吏 계

층의 부담이 커지고 그 賤役 부담자로서의 성격이 뚜렷해감에 따라 給

吏나 給戶가 吏戶나 吏家로 칭해지고 給吏나 給戶의 役이 吏役으로

칭해진 것인데 그렇게 간략한 형태로 칭하여도 이미 관리의 吏와 충분

히 구분되는 것으로 사회가 인지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의하면 lt吳簡gt에 보이는 眞吏도 사실 眞吏라 할 수 없는 給吏

에 대비하여 쓰이게 된 용어가 아닐까 한수봉왕기영은 眞吏란 給吏

에 대비된 용어라 하고 lt吳簡gt에서 給吏가 口算 납부 의무가 있지만

眞吏는 면제되며 정식의 吏이고 신분성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羅新도

眞吏에게 口算錢이 면제되고 있다고 하였다84) 眞吏에 대한 여타의 견

해도 있지만85) 給吏와 관련하여 참고할 만 한 지적이다 또한 lt吳簡gt

에서 其七戶給郡吏 下品(壹5447) 其十二戶給郡吏 下品 (壹

5677) 其十二戶給縣吏 下品 (壹5467) 其一戶給軍吏 下品 (參

430336) 給度吏 下品之下 (5653) 등에서와 같이 給吏는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여서 평균의 民戶 보다 더 빈천한 계층인 점도 그

들이 관부에 給事하는 吏라기 보다는 非吏인 民으로서 民의 일반 요역

에 대신하여 관서에 給事(給役)하는 자들이되 그 일부는 職能에 따라

세습하여 관련 관서의 吏에 배속되고 給事 복무해야 하는 예속된 신

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lt吳簡gt에는 하나의 戶人을 首로 하고 그에 배속된 듯 한 여

러 신분의 戶數와 신분명을 기록한 簿가 있다 lt走馬樓吳簡竹簡gt에

84) 羅新 ldquo眞吏rdquo新解 (中華文史論叢 2009-1) p129 단지 그는 眞吏란 非華

夏系 출신의 編戶化된 토착 사회를 관리하는 인원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85) 이를테면 黎虎는 眞吏란 非眞吏에 대한 대칭이 아니고 실제로 除授 받은 관

원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說ldquo眞吏rdquo -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史學月刊2009-5) p5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3다음의 예들이 있다

-1 里戶人公乘縫繒年卄五苦腹心病 (5443)

- - - - - - -

其七戶給郡吏下品 (5447)

- - - - - - -

其一戶給州吏下品 (5452)

-2 平樂里戶人公乘鄭張年五十 (5460)

- - - - - - -

其十二戶給縣吏下品 (5467)

-3 東陽里戶人公乘扶侈年十四 (5471)

其二戶給庫吏中品 (5472)

- - - - -

其一戶給縣卒下品 (5474)

-4 宜陽里戶人公乘區歸年卄二眞吏 (8962)

- - - 給州卒 (8965)

- - - -

年六十一給驛兵 (8976)

右尙書吏三(戶) (8517)

孫吳에서 公乘의 작위 소유자는 일반민 중에서도 상당히 많지만 漢

代 民爵의 최고위 爵인 公乘(第8等)의 戶人에게 보통 여러 신분의 수

십호를 배속시키고 있다 그 중에 10戶 내외의 給吏가 배속되어 있다

또한 이들 戶人은 배속된 戶가 납부한 租稅를 거두어들이고 이를 일괄

해서 관부에 납부하고 있다 먼저 각 戶로부터 受領한 내역은 문장 앞

에 lsquo領rsquo으로 표기하고 受領한 액수를 총합하여 관부에 납부한 내역은

앞에 lsquo入rsquo으로 표기하고 있다

里戶人公乘曾(年五十三)妻年卅九 (簡 1631-1652)

- - - - - -

領二年郵卒限米田六頃五十畝收限米二斛合爲吳平斛米一千三百斛

其三百十四斛五斗府州中倉關邸閣李崇吏黃諱潘慮 中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4領二年民田三百七十六頃六十五畝二百卅八步畝收米一斛二斗合四萬

五千一百九十九斛一斗 - - - - - - - - -

常遷里戶人公乘李漠年卅七 妻大女思年卅一

入嘉禾二年郵卒限米七百九十八斛二斗八升

入嘉禾二年佃帥限米九百五十五斛八斗七升

- - - - - - -

이 戶人은 대부분 公乘이고 노비를 소유하고 있으며 配屬된 戶의

徵稅와 총괄 납입의 업무에 복무하고 있는데 이는 후대 富戶에게 差役

복무를 부과한 사정과 비슷한 면이 있다 후대 差役제도와 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1인의 戶人을 賦稅 징수 납입의 책임

자로 하여 향리에서 이 방면의 기층단위로 운영하고 있는 셈인데 戶籍

簿와는 그 내역과 용도가 다른 별개의 독립 帳簿이다 그런데 劉家軍

은 限米 납부자 신분인 私學還民叛士吏卒 등이 모두 流民이

며 그 戶人에게 依附하고 있는 자들이라 하고 국가가 그 依附관계를

승인해주면서 그들이 경작할 토지를 戶人에게 分級해주고 그들이 납

부하는 地租인 限米도 戶人의 이름 아래 등기한 것이라고 보았다86)당

시 嘉禾연간에 전란으로 長沙 임상현 지역에 流民이 많이 流入되었을

가능성은 이미 여러 연구에서 지적된 바 있고 還民 叛士 등 일부는

流民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限米와 屯田限米 납부자 신분에는

이밖에 大男 州倉吏 吏帥客 金民 佃吏 郵卒 衛士 傳卒 子弟 佃卒

復客 新吏 兵客 故師子弟 兵師士 故帥客 後客 船師 司馬 士

등 거의 전 계층을 망라하고 있는데 이들 중에 유민이 있을 수 있으나

모두 流民 출신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새로 屯田이나 侯國의 田을

경작시키기 위해 유민 뿐 아니라 在地의 吏民에게 할당하여 佃作으로

운영하는 것은 여러 문헌자료에도 있고 lt吳簡gt의 lt吏民田家莂gt은

주로 在地의 호적에 올라 있는 吏民의 佃作 내역 장부이다 또 lt吳

簡gt 草言府部諸鄕吏區光等招誘諸限田客八十三人首見事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曹史趙野

86) 劉家軍 論lt走馬樓吳簡竹簡gt中 ldquo限米rdquo的性質 (中國社會經濟史硏究 2005-2) p87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5白 (柒總 49782)에 의하면 당시 長沙 지역에서 鄕吏에 의해 限田客

83인을 招誘했다는 성과를 보고하고 있는데 이와 같이 佃作 인력의 확

보에 애쓰는 상황에서 전술한 바와 같은 본래 限田의 佃作 의무를 지

고 있는 在地 吏戶의 家內 성원이 그 佃作者 명단에서 제외될 리가 없

그래서 簡文(B) lt州吏父兄子弟年紀簿gt에서 吏戶의 家內 父兄子弟

인력 23인 가운데 lsquo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rsquo과 lsquo一人先出給縣吏rsquo가

관부에 급사하는 給吏에 해당하고 lsquo一人限田rsquo은 限田의 佃作에 복무하

는 자이다 바로 이어 인용하는 孫休의 詔文에서 吏家의 어려운 사정

에 대해 ldquo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이미 限米를

납부하였는데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rdquo라 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전반부는 給吏로서 복무

하는 것이고 뒷부분은 限田 佃作 복역을 말함이다 즉 한 吏戶의 父兄

子弟 가운데 일부는 전자에 복무하고 일부는 후자에 복무한다 똑 같

은 관부 내지 국가의 역에 복역하는 것이지만 給吏는 분명히 吏(分署

의 담당 吏 州吏)에 給事하는 자라는 점에서 給吏로 칭하여 여타의

복역과 구분한다 그리하여 그 給吏가 결혼이나 계승으로 하나의 戶를

이루면 簡文(A)에서와 같이 某里의 戶籍簿上에서 里의 총 戶民數 아래

에 lsquo其四戶給縣吏rsquo와 같은 형식으로 戶를 本으로 한 給吏로서 명기된

다 그런데 一人의 給吏가 아직 戶를 이루지 못하고 한 吏戶의 成員

(父兄 子弟)으로서 있는 상황이라면 그 戶人의 현재 신분에 의해 그

戶가 표기되었을 것이다

이 문제와 직결되는 다음 기사를 살펴보자 孫權의 제6子로 孫亮에

이어 즉위한 孫休는 그의 즉위 年인 영안원년(258)에 다음과 같이 詔

하였다

「諸吏家에 5인이 있으면 (그 가운데) 3인은 겹쳐서 役에 복무하고 있

다 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이미 限米를 납부하

였는데 군대가 출정하면 또 종군함에 심지어는 家事를 돌볼 자도 없게

되는 것을 짐은 매우 애처롭게 생각한다 그 5인 가운데 3인이 役에 복무

하고 있다면 그 父兄이 (家에) 머물고자 하는 것을 허용해주어 1인을 (役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6에 나가지 않고) 머물게 하고 그 限米를 면제해주며 군대가 출정해도 종

군하지 않도록 하라 (삼국지 권48 吳書 孫休傳 永安元年條)87)

孫休는 즉위 전 재야에 있을 때 시골 생활을 보냈던 바가 있어 그

들의 참상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吏家(吏戶)가 지는 과중한 부담

은 곧 그들이 그만큼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 吏役이 賤視化 되고 厮役으로 인지되고 있던 배경을 위의 詔文은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lsquo吏家rsquo의 식구는 여러 방면의 복무를

중복하여 부담하고 있다 그 가운데 限米 납부 의무는 lt吳簡gt에 의하

면 국가에서 佃作케 하여 운영하는 限田 경작에 대한 租로써 납부하는

것이다 즉 전술한 lsquo二年常限rsquo田을 이 限田으로 보아 그 地租를 限米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다88) 단지 于振波는 限米란 二年常限田과는 관

계가 없고 屯田 경작에 대한 조세인데 衛士 郵卒 傳卒 등의 상비병

과 토지가 없는 수공업자 외지에서 수학하기 위해 온 私學 이탈하였

다가 새로 돌아와 附籍된 還民에게 軍屯이나 民屯에 종사하게 하고 일

부의 부세와 요역을 면제해주면서 限米를 납부하게 한 것이라 한다89)

그의 동일한 글에서 여타 사항에 대해 필자와 일치한 부분에 대해서는

앞에서 찬동한 바 있지만 이 부분에는 수긍하기 어렵다 lt走馬樓吳

簡竹簡gt에는 限米 납부자로 기재된 신분에 전술한 바와 같이 많은

신분이 망라되어 있고 孫休傳에서 말하는 吏戶가 일부 상비병이나 귀

환민 私學등에 한정한 것이 아니고 吏戶 전반의 형편을 들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lt吏民田家莂gt에서 佃田의 총수는 二年常限田과 餘力

田으로 구성 내지 구분되어 있다 즉 常限田은 餘力田에 對比되는 용

어이다 그리고 양자의 畝當 租額이 嘉禾4년 民의 경우 12斛 0456

87) 詔曰 ldquo諸吏家有五人 三人兼重爲役 父兄在都 子弟給郡縣吏 旣出限米 軍出

又從 至於家事無經護者 朕甚湣之 其有五人 三人爲役 聽其父兄所欲留 爲留

一人 除其米限 軍出不從rdquo」

88) 앞에 든 高敏의 글 lt吏民田家莂gt中所見ldquo餘力田rdquo ldquo常限rdquo田等名稱的函義試釋

이래 대부분 이 견해에 따른다

89) 于振波 앞에 든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7斛 州吏의 경우 0586斛 0456斛으로 차이가 있다90) 무엇보다 앞에

서 살펴 본 lt오간gt lt廣成鄕州吏父兄子弟伏處 人名 年紀爲簿gt에 기재

된 州吏의 食口 현황 내역은 孫休傳에서 吏戶의 식구 사정을 말하고

있는 내역과 같은 모습을 전하고 있는데 91)전자에서는 限田이라 하였

고 孫休傳에서는 限米라고 한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限田에 대해 징

수하는 것이 곧 限米이다 따라서 限田이란 二年常限田의 簡稱일 것으

로 본다 lt吳簡gt의 lt吏民田家莂gt에는 이들 限田戶의 佃田額과 그에

대한 租賦稅 납부 內譯이 있다 이 戶는 州郡縣吏 등으로 담당 吏職에

給事해야 하고 從軍도 해야 한다 이러한 양상은 분명히 역의 부담이

중첩된 것으로 일반민보다 더 과중하다 租額인 限米 납부액도 일반민

의 사유지에 대한 租額보다 비율이 높았다

그런데 중요한 사항은 첫째 이렇게 과중한 부담이 중첩된 吏戶의

일면을 보여주는 lt吏民田家莂gt에서 佃作吏民의 戶人(戶主) 신분을 보

면 大男大女州吏群吏縣吏軍吏州卒郡卒縣卒復民士

등으로 吏와 民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들 吏民 모두 佃作

의 의무와 함께 地租로 米穀 布 錢을 납부해야 하고 從軍의 役이 있

으며 그리고 대량의 lt오간gt에 다량으로 보이는 子弟 및 給子弟가 곧

吏의 子弟로 파악된 것에 의하면92) 그들이 납부하는 子弟限米의 부담

도 吏戶의 부담이 된다 또한 lt오간gt에

郡吏公乘李年卅二 算一 (貳2460)

侄子年卅九給子弟 妻大女衷()年卄六 算一 (貳1754)

吉陽里戶人公乘張惕年卄八 算一 給縣吏 (壹1018232)

등의 많은 簡文에서 吏와 그 子弟 給吏들에게 算賦도 부과되고 있다

90) 앞에 든 張福亞 也談lt嘉禾吏民田家莂gt中ldquo二年常限rdquo田的函義 p11의 表1

91) 이에 대해서는 앞에 든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

形成與演變 mdash談長沙走馬樓簡牘札記之六 pp62-63 참조

92) 孟彦弘 앞에 든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爲役之

制 pp1-7 子弟는 吏의 子弟 給子弟는 관부의 給事에 差出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8단지 吉陽里戶人公乘鄭龍(龍 下에 田)年卅六算一給州吏復 (壹3323)

과 같은 lsquo給州吏復rsquo 즉 給州吏이면서 算賦가 復除된 경우가 있는데 이

에 의거하여 給吏는 算賦에서 復除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93) 그러나

위에 든 簡文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부분의 給吏가 lsquo算一rsquo로 기재

되어 있고 소수만이 lsquo復rsquo으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復除되는 경우는

특별한 사정이 있어 그 給吏에게만 특혜를 준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

으로 생각한다 참고로 lsquo腫兩足rsquo자나 lsquo刑兩足rsquo자인 民戶의 戶人도 算賦

가 면제되지 않고 있으며94) 大女도 算賦 납부 의무가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吏戶와 民戶가 지는 국가에의 부담은 吏戶가 각기의 吏職

에 복무하고 일반민호는 그러한 吏職에 있지 않다는 정도 외에는 별다

른 차이가 없다 물론 일반민은 吏職의 役 즉 吏役이 없는 대신에 일

반요역에 복역해야 하고 吏戶는 일반요역에서 면제된다 그러한 사실

을 말해주는 자료로 lt오간gt 戶口簿에 里別로 定應役의 戶數 즉 일반

요역에 응당 복역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진 里別 戶數 문서가 있다

其一百卅八人男 (參431548)

其八十一人(女) (參431144)

其一戶給軍吏 下品 (參430336)

其五戶民 (下)品 (參430235)

其七戶女戶不任調 下品之下 (參430134)

其領役民卅七戶 (參430033)

이 里別 戶口簡은 凌文超의 編次 정리 작업에 의하면 新成里의 總

結簡에 해당하는데95)여기서 일반민호수는 생략하고 給軍吏나 調에서

면제되는 女戶 등의 수만을 기재한 것은 맨 아래의 定應役 戶數를 算

出하는 근거를 기록하기 위함이다 즉 일반민호 외의 給吏 등의 戶數

93) 凌文超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型

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 p5494) 高平里戶人公乘黃高鼰五十二算一腫兩足 (貳 2903) (大)成里戶人公乘何軼年

五十五算一刑兩足 (參626736)

95) 凌文超 앞에 든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

簿rdquo的類型與功能 p40과 lt表3gt 중 p45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9가 총 13戶이고 이들을 제외한 定應役의 戶數가 37호란 뜻이다 그래

서 新成里의 총 호수는 50戶였음을 알 수 있다 新成里의 총 口數 219

명은 lt오간gt의 戶當 口數 평균이 대략 45명 정도임을 감안하면 486

戶이고 50戶와 근접한다 따라서 給軍吏 등 13호는 定應役에서 면제되

는 戶임을 알 수 있다 또 다음 戶口簡은 앞부분 里의 총 口數가 결락

되어 있다

其一戶給朝丞 (貳170263)

其二戶給郡園父 (貳170162)

其五戶尫嬴老頓貧窮女戶 (貳170567)

定應役民卄戶 (貳170466)

여기서는 給朝丞1戶 給郡園2戶 절름발이 노인 빈궁자 女戶 등 5

戶가 役에서 면제되고 그 나머지 20戶가 定應役民이 되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즉 給吏는 定應役에서 면제되고 있다 따라서 給吏는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부에 給事하는 것이기에 당연히 일반요역에서 면제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給吏에도 전술한 바와 같이 吏戶의 가속인 경우가 있고 일

반민 중에 차출된 경우가 있는데 전자의 경우는 관부에서 필요할 때

마다 고정적으로 차출되었을 것이며 일반민의 경우는 본래는 일시적

한시적으로 징발되었을 것이지만 여러 簡文에 戶人으로서 給吏인 자가

있는 것에 의하면 점차 전자의 경우와 같이 吏戶와 마찬가지로 給吏戶

로서 고정적으로 차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定應役이 戶를 부과

단위로 삼고 있다는 점 또한 吏戶의 家屬이 하나의 徵役 단위로서 운

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도 吏戶의 실재성과 그 독립적인

신분성을 말해준다 더구나 일반 민호와 구분된 吏戶 名籍(lsquo吏名籍rsquo)의

존재가 다음의 簡文에서 확인된다

諸鄕謹列郡縣吏兄弟 幷攴 吏名籍 (13-7638)

吏戶의 막중한 부담은 그 家屬의 叛走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0를테면 縣吏 毛章의 15세인 弟(壹 7865) 縣吏 毛車世의 49세인 父(壹

7868) 群吏 黃의 13세인 弟(壹7893) 群吏 谷漢의 29세인 兄子

(壹7905)가 嘉禾 2년에서 3년 사이에 叛走하였다 후한 말 陳寔은 어

려서 縣吏가 되어 항상 厮役에 給事하였는데( 常給事厮役 ) 후에 都亭

의 佐가 되었다96) 그리고 郭太는 대대로 집안이 빈천하고 어려서 고

아가 되었는데 모친이 縣廷에 給事하게 하려 함에 말하길 ldquo대장부가

어찌 斗筲의 役에 處해 있을 것입니까rdquo라 하고 마침내 떠났다97) 당

시 이미 吏役이 厮役으로 인식되어 있었고 斗筲의 役 즉 100석 이하

인 斗食의 位에 처하였음을 말해준다 즉 같은 吏이더라도 100석 이상

인 掾史와 그 이하 사이에는 차등과 구분이 있었다(후술) 그렇지만 이

두 경우는 모두 吏가 되는 것이 선택의 길이었기 때문에 吏戶에 속한

자들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吏戶가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던

것에 비해 이 두 경우는 선택사항이었다 斗食에게도 매우 소액이지만

月俸이 지급되었기 때문에 빈천하거나 고아가 되어 생업을 위해 吏職

을 선택한 것이다 나이도 어리고 집안의 세력 배경도 없는 가운데 吏

가 된 것에 의하면 斗食의 최하단에 속한 吏였을 것이며 이들이 給吏

가 아니고 吏로 칭해진 것은 일반요역 복무에 대신하여 징발 내지 차

출된 경우가 아니고 吏職에 임명된 것이기에 당연하다

縣吏 등의 諸吏役이 厮役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무엇 보다 그 雜

役的인 吏役의 과중함 때문이다 후한 lt張景碑文gt에서 14鄕의 正을

調發하여 勸農의식에 소요되는 土牛 제작에 육칠십만전이 들어가 吏와

正이 매년 患苦에 처함에 男子(庶民) 張景이 매년 그 비용을 출연하여

土牛를 義作해주겠다 하고 그 대신 자신을 縣吏 列長 伍長에 임

용되지 않게 해줄 것과 小繇 징발을 면해줄 것을 청하고 있다98) 즉

96) 후한서 권62 陳寔傳에 (陳寔)少作縣吏 常給事厮役 後爲都亭(刺)佐

p2065

97) 후한서 권68 郭太傳에 (郭太)家世貧賤 早孤 母欲使給事縣廷 林宗曰 ldquo大

丈夫焉能處斗筲之役乎rdquo 遂辭 就成皐屈伯彦學 三年業畢 博通墳籍 p2225

98) 府告宛 男子張景記言 府南門外勸〔農〕土牛 調發十四鄕正 上賦

斂作治 幷土人 犂 耒 卄 蓎 屋 功費六七十萬 重勞人功 吏正患苦 愿以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1서민이었던 張景은 거액의 자금을 출연하면서까지 縣吏 등의 吏役과

小繇의 복역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있다 그는 아직 非吏였지만 吏役에

언제든지 차출될 수 있었고 그 吏役은 매우 번거롭고 힘든 것이었음

을 알 수 있다 단지 張景과 같은 서민이 縣吏가 되어 吏役에 差出되

는 경우 바로 lt오간gt에서와 같은 吏戶가 되어 그 가속이 모두 吏役의

범위에 들어가게 되는지는 不明이다 推斷이지만 世戶로서의 吏戶와

함께 일시적으로 차출되어 일정 기간 만 복무하는 非世戶로서의 吏戶

가 공존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요컨대 lt오간gt과 문헌자료에 보이는 吏戶와 給吏의 면모들은 앞에

서 검토한 胥徒와 lt庶民在官者gt 내지 徒御 導從役人 등과 일맥상통

하는 면이 있다 孫休傳이라든가 lt오간gt에 빈출하는 吏戶 吏民에서의

吏는 500石 이하인 吏 중에서도 200석 이상의 長吏級을 제외한 下吏

즉 百石 이하의 吏를 가리키고 給吏는 吏가 아니되 관부에서 일정 기

간 여러 분서에 勞役으로 복무하는 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즉

庶民在官者 와 상통한다 특히 그들에게 부과되었던 賦稅役의 내역에

서도 위에서 검토한 여러 職役 계통 신분이나 계층의 예와 거의 비슷

하다

孫休傳에서 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라 한

것은 吏家의 父兄은 都에서 州郡縣의 吏로 복무한다는 뜻이고 나머지

3인의 자제는 郡縣吏에 給事한다는 뜻이다 즉 lsquo郡縣吏에 給事함( 給郡

縣吏 )rsquo이란 子弟3인이 郡縣吏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郡縣吏에 下屬되

어 그 업무에 給事한다는 뜻이다 위의 廣成鄕의 lt人名年紀簿gt 簡文

에서 lsquo先出給縣吏rsquo도 州吏7家의 식구 가운데 먼저 縣吏의 업무를 보좌

하기 위해 차출되어 나간 것을 뜻한다 여기서 말하는 郡縣吏는 주로

掾史職으로 사무 업무 중심이고 그 업무를 노동력으로 보좌하는 인력

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lt오간gt의 도처에 諸吏의 사례로써 諸曹倉

吏庫吏監運掾關邸閣船師田戶曹史 등 수십종의 職名이 보이

家錢 義作土牛 上瓦屋 欄楯什物 世世作治 乞不爲縣吏 列長 伍長 徵發小

繇 (高文 漢碑集釋 開封 河南大學出版社 1997 p227)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2는데 대부분 그 업무 처리에 노동인력이 필요하다 십 명 내외의 掾史

員吏 만으로는 사무나 문서작성 관리 업무 이외에는 수행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 인력을 吏戶의 식구로부터 자동으로 差役시키는 시스템이

漢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었음을 위 孫休傳의 기사는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이들 吏家의 식구 현황 파악은 관부에서 항상 필요

로 하고 확보해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lt오간gt의 여러 문서는

그러한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東鄕勸農掾殷連被書條列州吏父兄人名年紀爲簿

輒科核鄕界 州吏三人 父兄二人刑蹱叛走 以下戶民自代 謹列年紀 以

(已)審實 無有遺脫 若有他官所覺 連自坐 嘉(禾)四年八月卄六日破莂

保據 (J22-2543)

여기에서 담당 鄕界의 州吏3인 가운데 그 父兄2인이 受刑과 叛走로

비게 됨에 下戶의 民을 징발하여 바로 충당시켰다는 것이다 이 以下

戶民自代 에 대한 해석에서 下戶를 고용하여 자신을 代理케 한 것이라

는 견해가 있는데99) 그렇다면 戶人인 州吏가 자신의 식구 결원을 책

임지고 직접 下戶를 고용한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해당 州吏의 부담

이 너무 크게 되어 당시 下戶가 자동으로 보충되는 시스템으로 운영된

것일 가능성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諸家의 견해 모두 不明

임을 인정하고 있다100) 어쨌든 吏戶의 노동력을 신속하고 철저하게

보충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은 吏戶 전체의 식구가 관부에

예속되어 있고 세습화 된 상태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단지 孟彦弘은

이 자료를 통해 당시 吏戶의 家屬이 모두 吏였음을 말해준다고 하였으

나101)그렇지 아니하고 吏의 가속에 吏도 있을 수 있지만 아직 吏가

아니고 吏를 노동력 지원으로 보조해주는 給吏도 있고 그 給吏는 非

99) 이 점에 대한 정리는 王素 長沙吳簡勸農掾條列軍州吏等人名年紀三文書新探

(魏晋南北朝隋唐史資料 25 2009) p9의 注 11) 참조

100) 이를테면 孟言弘 앞의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

爲役之制 p16

101) 위의 글 p1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3吏로서 관부에 給事하는 자이며 이런 면에서 전술한 庶民在官者 내

지 lsquo非吏이면서 관에 있는 자rsquo lsquo官과 民 사이rsquo lsquo lsquo半官 半民rsquo lsquo踐更小史

(小吏)rsquo(續漢書輿服志) 등과 상통한 계층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吏戶에 포함되지 않는 給吏가 있었다 吏戶와 給吏戶가 구분되

고 있음은 lt吏民人名年紀口食簿gt의

其七戶給郡吏下品 (壹5447)

其十二戶給縣吏下品 (壹5467)

其一戶給軍吏下品 (參430336)

(其)六戶郡吏(中)(品) ---- (貳4490)

其二戶縣吏(下)品 (貳3307)

등에서 給郡吏 등의 戶와 縣吏의 戶가 구분되어 기록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다 그리고 給吏가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에 속하였음은 위

의 사례 뿐 아니라 lt吳簡gt에서 給度吏 下品之下 (5653) 등에서 알

수 있는데 下戶로 결원을 보충하는 것은 同級의 戶로 충원한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면 또한 당시 吏戶와 給吏의 관부에의 예속성과 신분

성을 보여준다 요컨대 給吏는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여서 평균

의 民戶 보다 더 빈천한 계층인 점도 그들이 관부에 정식의 吏職으로

임명된 吏라기 보다는 非吏인 民으로서 民의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

서에 給事(給役)하는 자들이되 관련 관서의 吏에 배속되고 給事 복무

해야 하는 예속된 신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찍이 宮崎市定이 宋書권94恩倖傳序의 郡縣掾史 幷出

豪家 負戈宿衛 皆由勢族 를 인용하여 豪家 출신으로서의 掾史가 고

관으로 진출하는 경향이 累代 이어지면서 右族이 이루어지고 이를 통

해 위진남북조 귀족제가 출현하였다 하였고102) 楊振紅이 이에 동조하

고 있는 것은103) 부분적으로 再考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당시 孫休

102) 宮崎市定 九品官人法の硏究 -科擧前史 (京都 同朋社 1979(1956)) pp86

-89

103) 楊振紅 앞에 든 吳簡中的吏 吏民與漢魏時期官 吏的分野 mdash中國古代官僚

政治社會構造硏究之二 p34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4傳에서 말한 吏戶는 분명히 豪族勢家가 아니었고 lt오간gt에서 民戶와

함께 lt吏民簿gt에 기록된 吏戶는 下品에 속한 貧層이었으며 그 식구

모두 중복된 賦役의 부담에 시달리는 계층이었다 그 吏戶에는 吏와

給吏로 구분되어 관부에 예속되고 있다 즉 아무래도 豪族大家로서의

掾史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정을 이해하는 데는 전술한

lt周禮gt의 府史胥徒에서 府史가 호족대가로서 辟除된 掾史에 類하고

胥徒가 곧 관부 예속하의 吏戶와 給吏에 거의 相當하다는 면이 있다

吏戶에서의 吏職에 掾史가 있겠지만 관부에 예속되어 있고 직업적 세

습화 되어 있어 호족대가 출신의 掾史와는 구분되었을 것이다 무엇보

다 호족대가 출신의 掾史은 관부에 예속되지도 아니하고 세습의 신분

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掾史層의 존재는 군현의 장관 辟召로 임

용되었을 것이다 반면 吏戶 출신의 掾史는 기술 계통의 전문직일 경

우이거나 개인적 기능의 능력으로 또는 部曲과 같은 상비병 출신이

일반 요역 부담에 대신하여 관련 직무에 세습하게 되거나 또는 일반민

호에서 급히 所要되어 임시로 차출되었다가 점차 세습의 吏戶로 예속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관부에 진 빚으로 예속되었다가 吏戶로 남

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즉 이 吏戶는 관부의 갖가지 所要 用務

에 差出될 상황에 대기되어 있는 戶이다 그 중에 일부는 정식으로 掾

史로 승진되지만 나머지는 윤번이나 필요시 이 방면 저 방면의 分署에

차출되어 給事하며 分署의 長을 主로 모시고 그 아래에서 給事한다

掾史의 吏와 구분하여 그러한 뜻을 반영한 것이 lt오간gt의 도처에 보

이는 수십종의 給某吏다고 생각한다 호족대가 출신으로서의 掾史와

예속신분인 吏戶 출신으로서의 掾史는 그 신분상으로도 士와 서민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기에 宮崎市定의 立論 또한 양자의 구분을 통한

위진남북조의 귀족제 내지 良賤制의 형성을 논하는 보완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근래의 여러 연구들은 掾史에 이렇게 두 방면으

로 구분되는 면과 계층이 있다는 점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였고 吏戶

의 家屬에 吏와 給吏로 구분되는 층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양자의 성

격이 어떠한가를 파악하지 못한 셈이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5한편 給吏는 吏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戶人이나 父兄이 郡吏 등의

諸吏에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당시 吏戶가 직업화 내지 세습화 되어

있었기 때문에 子弟의 給吏 신분도 곧이어 諸吏로 진전될 것은 당연하

다 그래서 lt嘉禾四年吉陽里戶籍簿gt에 吉陽里에 호적이 올라 있는 給

郡吏 逢杲(壹10169) 給郡吏 寥裕(壹10175) 給縣吏 張惕(壹

10182) 給州吏 區張(壹10367) 給州吏 嚴追(壹10149) 등이 lt嘉禾四

年五年吏民田家莂gt의 下伍丘 소속 佃民 名簿에서는 거의 同一人일

것이 분명한데 給郡吏가 群吏로 給縣吏가 縣吏로 給州吏가 州卒이나

州吏로 기재되어 있는 경우도104)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

다 이 경우는 丘에서는 給吏가 보이지 아니하고 里에서만 보이기 때

문에 아직 명확히 해명이 되지 않고 있는 里와 丘의 차이에 따른 것일

가능성도 있고 嘉禾4년과 嘉禾4-5년 戶籍簿에서의 1년 내외의 기간

차이에 따른 신분의 변화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또

한 侯旭東의 정리 조사에 의하면 高遷里의 給縣吏 松棐가 위의 lt田家

莂gt에서는 武龍丘의 縣吏로 기재되어 있고 같은 里의 給縣吏 張喬는

亻平 丘의 縣吏로 기재되어 있으며 宜陽里에 眞吏로 등재된 黃阿 등

6인도 각각 6곳의 다른 丘의 州吏 男子 男子 郡吏로 기재되어 있다

또 陽里의 給郡吏 謝鼠는 夫丘의 男子로 기재되어 있다105)里의 호

적부와 lt吏民田家莂gt의 丘別 佃民 명부에서 그 신분이 男子인 경우

일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양편 모두 里의 호적부에 給郡吏 給縣

吏 給州吏등 給吏로 기재된 경우는 대부분 丘의 佃民 명부에서 각각

群吏 縣吏 州吏로 되어 있고 眞吏가 州吏 郡吏 男子로 기재되기도

하고 給縣吏가 男子로 기재된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일부 사례들은 眞

吏 吏 給吏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것이어서 그 해명이 필요한

데 현재 里와 丘의 구별 차이 眞吏와 諸吏 給吏등의 실체 문제가 아

104) 凌文超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

型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 pp17-18의 lt表一gt

105) 侯旭東 長沙走馬樓吳簡ldquo里rdquoldquo丘rdquo關係再硏究 (魏晋南北朝隋唐史資料2006) pp19-21의 表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6직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어 그 이유를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실

정이다 그러나 신분명으로 이름을 달리하여 그렇게 구분하고 있으며

전술한 바와 같이 給吏가 吏나 眞吏와 다르게 취급되면서 여러 名簿에

구별되어 기재되어 있고 그 독자성도 충분히 입증되기 때문에 위의

예외적인 사항들은 개인별 특별한 사정에 따른 것이거나 아직 여러 異

說로 논란이 되고 있는 里와 丘 등의 구분과 차이 등에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고에서 갖추어 고찰하지 못하고

후고로 미룬다

Ⅵ 결 언

이상의 검토에서 고대 職役의 범주에 들어가는 다종의 신분 내지 계

층과 吏職의 類 그 복무형태 삼국시기에 이르는 전승과 변화의 모습

들을 살펴보았다 우선 職官과 일반요역 복무자와는 신분제와 賦役체

계상 엄연히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례 地官 鄕大夫에 그

舍란 國中의 貴者賢者能者服公事者老者疾者에게는 모두 舍

한다는 것이다 에 대한 후한의 鄭司農의 注에 服公事者란 지금 吏에

게 復除해주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고 하였다106) 여기서 lsquo舍rsquo란 復

除와 같은 뜻이다 그 대상 가운데 lsquo國中의 貴者賢者能者rsquo 가운데

貴者는 공경귀족 賢者와 能者는 命官과 辟召된 관리에 해당한다 그리

고 그 아래의 服工事者는 다시 2분되는데 200석 이하의 吏職 내지 掾

史職(小吏)이 있고 그 아래에 庶民在官者 내지 lsquo非吏로서 官에 給事

하는 자rsquo로서 給吏層이 있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賢者와 能者 까지를

職官이라 하면 그 이하인 服工事者 가 곧 職役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

석된다 그리고 職官과 職役 복무자는 모두 일반요역에서 면제되는 자

106) 其舍 國中貴者賢者能者服公事者老者疾者 皆舍 注云 lsquo服公事者rsquo

謂若今吏有復除也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7들이다 이 중에서 職役 복무자는 일반요역에서 면제되는 대신에 각종

의 吏職과 給吏職에 복무하였다 여기서 칭한 給吏職은 lsquo(小)吏rsquo에 대비

하여 칭한 給吏를 그 성격상 그렇게 칭할 수 있으며 그 독립적 계층

내지 신분으로서의 실태가 lt長沙走馬樓吳簡gt의 발현에 의해 상당 부

분 밝혀지게 되었다 그런데 服工事者 즉 職役 담당 계층의 범위가

상당히 넓어서 그 職役의 양태가 모든 면에서 같은 것은 아니고 일부

분 다른 측면들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고대의 긴 기간에 걸쳐 거의

공통으로 庶民在官者 lsquo非吏이면서 관부에 給事하는 자rsquo lsquo官과 民 사

이rsquo lsquo半官半民rsquo의 성격이 유지되고 있는 면을 볼 수 있다

이렇게 職役 담당자의 연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곧 lt주례gt에 보이

는 관리 조직의 최하위에 위치한 府史胥徒이다 이 가운데 府史

가 대략 후대의 掾史職이나 lt吳簡gt의 諸吏에 속한다면 胥徒는 給吏層

에 상통하는 면이 많다 단지 lt吳簡gt에 다수 보이는 吏役 下의 吏戶

는 그 과중한 부담과 厮役 및 빈천함의 성격상 오히려 胥徒에 상통하

는 면이 많다 이러한 시대적 차이는 吏戶의 예속화 및 세습화의 진전

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한편 시대의 여건 차이로 여러 부분에서 胥徒

와 후대의 職役 담당 계층 사이에는 다른 면도 있다 胥徒나 給吏層이

기본적으로 일반 서민 출신으로서의 服工事者 였던 것과는 달리 周에

서 三國에 이르는 동안 服工事者 라는 면에서 同類이지만 일반 서민

과는 구분되는 여러 相異한 계층에 속한 신분들이 속하여 있었다 예

를 들면 工商食官 에 속하는 工商 皁隸食職 에 포함되는 吏에 속

한 徒隸 층 넓은 의미의 徒隸層이라 할 수 있는 皂隸牧圄

僕輿人 그리고 下吏層에 들어가는 樂祝醫衛士 및 走卒伍伯

之類 등이 그들로 그 출신은 일반 서민이거나 賤民 또는 刑徒였지만

관부에 寄生하며 給事한다는 면에서는 공통이다

이들의 복무 형태는 항상적 근무 일시적 근무 組別 교대제 등 여러

가지로 징발 내지 차출되었고 lsquo冗rsquo과 lsquo更rsquo은 그러한 차이를 구분하는

용어로서 나온 것이다 근무에 따른 보수를 받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 구분은 아직 분명치 않은 부분이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8있다 그러하지만 최소한 생업을 관부에 의탁하는 자들에게는 지급되

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年俸制에 대비되는 稍食 즉 소액의 月俸 내

지는 근무일수 기준의 지급 형태로 지급되었다 이는 그들의 근무가

주로 일 단위나 월 단위로 이루어지고 계산되었기 때문이다

lsquo官rsquo과 lsquo吏rsquo는 서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선진 이래 본래 상하의 신

분으로 명확히 구분되었고 漢代에 혼용 내지 통용되는 경향이 있었지

만 양자가 구분되는 면 또한 여전하였다 吏는 官에 가까운 吏가 있고

民으로서의 吏가 있어 전자를 lsquo官吏rsquo라고 하면 孫休傳의 詔에서 거론된

吏家는 보통 吏民으로 합칭될 경우의 吏라고 할 수 있다 lt吳簡gt의

lt吏民簿gt나 lt戶口簿gt 등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실태에서 후한 말에

서 삼국기의 전형적인 職役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이제까지 그

존재에 대해 거의 간과되어 왔던 給吏에 대해 lt吳簡gt은 수십종의 給

吏 실태를 전해주고 있어 그 의의가 크다 吏의 사무 업무를 직접 勞

役으로 보조해주는 給吏는 관부의 행정 업무 처리에 있어서 항상 필요

한 노동력 제공자였다 이러한 노동력은 어느 시기이든 공통으로 필요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연원을 lt주례gt의 胥徒에서 찾아볼 수 있었

고 여러 면에서 職役의 실례로서 공통하는 면들을 지적할 수 있었다

후한 말 삼국시기의 吏와 給吏는 일반서민 신분으로서의 吏이며 吏戶

로써 관부에 예속되어 그 食口 성원이 거의 세습하여 吏役에 종사하

고 있다 이들은 일반서민에 비해 일반요역이 면제된다는 점을 제외하

면 그밖에 각 吏職에 따른 吏役의 기본 직무 외에 限田의 佃作 의무와

그 地租로서 限米 布 錢을 납부해야 하며 從軍해야 하는 등 중첩된

부역으로 일반서민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또한 그 戶品 이

下品 내지 下品之下에 속한 貧戶 출신이다 따라서 같이 吏로 칭하지

만 豪族勢家 출신으로 掾史職을 거쳐 상급관으로 진급하고 命官에 오

르는 累代 高族의 世家 출신 掾史와 빈천한 서민 출신으로서 관부에

예속된 吏戶 출신으로서의 掾史와는 구분된다 이 吏家 내지 吏戶는

吏의 칭호로 불리지만 일반민보다 더 많은 부담을 지고 있기에 그들의

役은 후한과 삼국기에 賤役 賤職 내지 厮役으로 칭해지며 기피되고 있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9다 따라서 이 계층이 官吏로 합칭되는 경우의 吏와 구분되는 것은 당

연하며 그 호칭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늦어도 孫休 시기의

문서와 간독자료에 등장하는 lsquo吏家rsquo나 lsquo吏戶rsquo는 이미 그러한 계층에 대

한 專稱으로 형성된 듯하다

한편 諸吏役의 복무에는 常勤의 방식과 1년에 1개월 내지 수개월만

輪番 형식으로 복무하는 비상근의 lsquo踐更 방식의 근무rsquo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한 비상근 복무자도 있었을 것이다107)그리고 그 복무에

대한 급여가 그 吏役을 생업으로 하는 常勤者에게는 당연히 小吏에 대

한 봉록이 지급되었을 것이다 반면에 給吏의 役은 일반요역에 대신하

는 복역이라는 면에서 비상근 내지 윤번 형식의 차출이었을 가능성이

많지만 지금까지 lt오간gt에 소개된 자료로는 어느 쪽이라 단정하기가

어렵다 胥徒의 役은 어디까지나 상급의 관원들과는 달리 일반민의 요

역 의무를 대신하여 관부에 給事하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lt오간gt

에서의 給吏와 상통한다 給吏에 대한 봉록 지급의 여부도 아직 不明

이다 단지 限田의 지급이 祿田과 같은 성격의 것이었을 가능성도 고

려되지만 그 租額이 커서 혜택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노동력의 징발로

서 해석되는 부분도 있다 또한 給吏의 관부에의 給事가 일반 요역과

같이 組別 순환제였는지의 여부는 아직 분명치 않다 lt奏讞書gt의 樂

人의 예와 같이 一月一更制와 같은 순환근무제였을 가능성도 있는데

대체로 두 가지 형태가 공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lt吳簡gt에 의거한 의론들은 아직 자료 해석과 해명이 충분치 못하여

불분명한 상태에 있는 사항들이 많은 실정이기 때문에 해당 사항이 새

로 규명 되는대로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lt오간gt의 미해명 사항

에 대한 개별적인 탐구도 본 과제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필요하다 그

리고 아직 소개되지 않은 대량의 lt오간gt이 연속하여 출간되면서 새로

운 자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107) 廣懶薰雄 앞의 秦漢律令硏究 pp310-311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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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103

(中文摘要)

中國古代的職役與職官的問題

朴 健 柱

通過上述的檢討 基本上職役範疇內的多種身分 乃至階層與吏職之類

其服務形態至三國期的傳承與變化等方面已然解明 職官與職役服務者

的一般徭役均免除了 此二者中職役服務者 用種種lsquo吏職rsquo與lsquo給吏職rsquo服務來

代替其一般徭役 直至三國時期爲至漫長的期間內職役擔當者 庶民在官者

lsquo非吏而給事官府者rsquolsquo官與民之間者rsquolsquo半官半民rsquo的性格几乎共通維持

職役擔當者的淵源卽是lt周禮gt所見的官吏組織最下位的府史胥

徒 此中 府史是大略屬于後代掾史職或是lt吳簡gt的諸吏 胥徒則是相通于

給吏層的側面多的 但是lt吳簡gt所見多數的吏役下吏戶其過重的負擔與厮

役及貧賤的性格上 倒是與胥徒相通方面較多 這個時代的差異像是吏戶的

隸屬化及世襲化的進展招來的結果 一方面因爲時代的與件差異 胥徒與後

代的職役擔當階層間有多方面的異質 胥徒與給吏層基本上是一般庶民出

身的 服工事者 如此不同 從周至三國期間從 服工事者 上是同類而與一

般庶民相區分的多種相異的階層面上身分較多 例如 工商食官 所屬的工

商 皁隸食職 所包含的 吏所屬的徒隸 層以廣義的徒隸層可以稱謂的

皂隸牧圄僕輿人 以及下吏層所屬的樂祝醫衛士 及走

卒伍伯之類等 他們的出身是一般庶民 或是賤民乃至刑徒 在官府寄生

而給事的層面上是共通的

其服務形態是恒常的勤務 一時的勤務 組別交代制等以多種方式徵發乃

至差出 lsquo冗rsquo與lsquo更rsquo是其差異區分用的用語 支給勤務報酬與否是不分明之事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04項 可是至少生業官府依託者是被支給的 其支給方式是與年俸制相對的稍

食 卽少額的月俸乃至勤務日數基準的支給方式 因此他們的勤務和支給計

算主要是日單位或是月單位

於lt吳簡gt之lt吏民簿gtlt戶口簿gt等所見的吏與給吏的實態 可以看到

從後漢末至三國期間典型的職役的樣相 尤其向來看過給吏的存在 lt吳

簡gt所傳數十種給吏的實態 其意義是巨大 給吏是以直接的勞役補助吏的

事務業務 是官府的行政業務處理上恒常的必要勞動力提供者 這種勞動力

許是官府運營上至今爲至所有過的任何時期共通要緊事項 可以推斷給吏

的淵源於lt周禮gt的胥徒 而且可以指摘以職役的實例有多方面共通的層面

後漢末三國時期的吏與給吏是一般庶民身分之吏 以吏戶隸屬於官府 其食

口成員率多世襲地從事吏役 他們除比一般庶民免一般徭役外 也需要履行

各吏職別吏役的基本職務 佃作限田義務 以其地租納付限米布錢 從

軍義務等重疊的賦役 因此他們有比一般庶民更重的負擔 而且他們的戶品

是下品乃至下品之下所屬的貧戶出身 從而他們雖一樣稱謂lsquo吏rsquo 却與豪族

勢家出身經歷掾史職進級上級命官的累代高族的世家出身的掾史與以貧賤

的庶民出身於官府隸屬的吏戶出身的掾史是不同的階層 這個吏家乃至吏

戶雖被稱謂lsquo吏rsquo 但是彼役後漢三國期被稱謂賤役 賤職乃至厮役 而且被忌

避 從而此階層是與lsquo官吏rsquo合稱的境遇的lsquo吏rsquo爲區分是理所當然 其稱號也只

得相殊 于是最遲至少到於孫休時期文書與簡牘資料所見的lsquo吏家rsquo與lsquo吏戶rsquo

許是已經成爲如此階層的專稱

依照給吏的役是一般徭役代替的服役 其運營形態是非常勤乃至輪番形

式的可能性大的 但是迄今依據lt吳簡gt所見的資料還難以斷定何者是對的

胥徒的役是與上級官員異樣 以一般民的徭役義務代替給事於官府 本着那

樣的側面與lt吳簡gt所見的給吏相通 給給吏俸祿與否也還不明 但是從限

田的支給是與祿田同一的性格的可能性上看 因爲其租額是多的 與其說惠

澤倒是有可能解釋爲勞動力的徵發 給吏的官府給事是與一般徭役同一方

式的組別交代制與否還不分明 如lt奏讞書gt所見樂人的事例 有可能一月

一更制方式交代勤務制 筆者認爲大體上是兩個方式共存

關於lt吳簡gt資料的議論是因爲解釋與解明上許多異說 不分明的關聯事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105項也有很多 所以該事項的解明將其完備需要補完

주제어 직역 직관 서도 도예 이역 이호 급리 서민재관자

關鍵詞 職役 職官 胥徒 徒隸 吏役 吏戶 給吏 庶民在官者

Keywords lavor duty at office(official lavor) high-ranking officialrsquos duty(official

post) xu-tu tu-li minor officials lavor minor officials family minor half

officials and half the masses in lavor services at office the masses in lavor

services at office

(원고접수 2013년 11월 15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12월 16일 수

정원고 접수 12월 19일 게재 확정 12월 26일)

Page 11: AB C D - KNUwebbuild.knu.ac.kr/~china/CHR/chr2013/chr87pdf/chr87-02... · 2014. 1. 4. · FG9 ±°'c&`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5以徵令) 인데 얼핏 徒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내용인 듯하다 정현은

이 lsquo徵令rsquo의 업무를 趨走給召呼 라 하였다 賈疏는 그 徒가 朝會에서

뛰어다니는 것을 금지시키고 官人에게 복역자를 공급하고 그들을 호

령하며 사역시키는 일이다(其徒止爲在朝趨走 供給官人召呼使役之事也)

고 해석하였다 관부 내에서 많은 복역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까닭에

그들이 소란 피우지 못하게 질서를 잡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서 徒에 의해 징발되고 사역되는 층은 관부에 복역 중인 刑徒 요역에

복무 중인 일반 서민 등일 것이다 주례의 각 관부에서 徒의 수는

수십 명에서 수백 명 많은 경우 8백명에 이르기도 한다 이들의 노동

력은 각 관부별로 항상적으로 갖추어진 것이지만 이 보다 더 많은 노

동력이 필요하여 형도나 일반 요역 복무자들을 징발하게 된다 그리고

그 징발된 노동력을 호령하며 질서를 잡고 사역시키는 직무도 필요하

게 된다 물론 징발된 자들을 사역시키는 일 뿐 아니라 자신들이 직

접 여러 노역의 所管 업무에 복무해야 한다 이를테면 地官 牛人에

胥二十人 徒二百人 이 있고 그 직책은 公牛의 사육이며 稻人에 胥

十人 徒百人 인데 그 직책이 稻田의 경작이고 夏官 虎贲氏에 胥八十

人虎士八百人 인데 鄭注에 의하면 徒라 하지 아니하고 虎士라 한 것

은 徒 가운데 勇力者로 선발된 까닭이다 하였으며 그 일부 직무에 同

司甲 司戈盾 司弓矢 繕人 校人 趣馬 巫馬 등에 속한 수십

명 내외의 徒는 모두 무기제조나 다루는 법 무기 성능 감별 馬의 감

별 養馬기술 馬祖 馬步 등의 神을 통해 馬의 질병을 파악하는 巫術

등에 뛰어난 상급자들 밑에서 보조 지원의 일 등 말단의 업무를 처리

한다 전문 기술과 지능이 필요한 업무인지라 말단의 업무 처리도 상

당히 명민한 자질이 필요하다 따라서 일반 서민 가운데서 이러한 재

능과 자질이 있는 자로 충원한다 이러한 각 관부의 업무 처리는 후대

에도 익히 보이는 사례이다 鄭玄은 胥를 lsquo諝(智者)ldquo로 읽어 才知의 뜻

으로 해석하였는데 같은 徒의 무리 중에서 才知者로 뽑힌 자라는 뜻으

로 보았다 胥가 什長인 까닭에 10인 가운데 1인 비율로 뽑힌 셈이다

아울러 徒 전체가 일반 서민으로부터 뽑힌 자들이라 할 수 있다 단지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6胥徒의 신분상 복무형태상의 제반 사항이 후대에 그에 상당하거나 유

사한 신분층과 사례에 대비할 때 상당히 다른 면이 많다는 사실이다

趙伯雄은 주례의 胥徒는 전국기까지 노예 厮 童보다 윗 등급이지만

거의 비슷한 신분이었고 厮役 내지 賤役의 담당층이었으며 徒가 한에

서는 주로 刑徒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고 하였으나20) 아래

기술하는 내용에 의하면 그러한 해석에 따를 수 없는 면이 많다 또한

한에서 徒는 형도 뿐 아니라 여러 무리를 가리키는데 통용되고 있어

여러 자료에 등장하는 徒가 가리키는 사항은 무척 다양하다

위의 注疏에 의하면 經文에서 徒의 업무를 官의 令으로써 徵令을

관장함(掌官令以徵令) 이라 한 것은 上部의 지시를 받은 徒가 새로

징발되는 徒의 징발 업무 및 이들을 인솔 지휘 사역하며 그 지시사항

(작업)을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胥와 徒가 모두 庶民在官者 라는 입

장에서 보면 徒가 최하위이지만 lsquo在官者rsquo이고 제8위와 제9위의 서열에

있으며 胥와 徒가 각각 6인과 5인이 食할 수 있는 토질의 경지 百畝

를 代耕의 봉록으로 받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이 출신은 징발된 요

역 복무자와 같다고 하더라도 여타의 징발된 일반 요역 복무자와는 구

분되는 계층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후대의 胥吏도 일반 서민출신이지

만 일반 서민과 다른 계층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 같다 만약 曾我部精

雄의 견해와 같이 府와 史까지만 庶民在官者 이고 胥와 徒는 그에

들지 못하는 것이라 한다면 주례 원문에 胥와 徒가 엄연히 제8위와

제9위에 올라 있고 봉록으로써 百畝를 받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기 어

렵게 된다

그리고 특별히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앞에 인용한 鄭注에 이는(胥

와 徒는) 民이 徭役을 給한 것이니 지금의 衛士와 같다 고 한 점이다

그래서 후한 중후기 衛士의 운영 형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또 鄭

玄은 駁五經異義에서 周禮에서 이른바 모두 징발한다 한 것은 胥

徒로 하여금 公家의 事에 給하게 한 것을 말함이니 지금의 正衛와 같

20) 趙伯雄 lt周禮gt胥徒考 (中國史硏究 2000-4) pp10-12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7다 고21) 하였다 한에서 궁성 내지 중도관에 番上 守衛하는 役은 正卒

의 役과 일반 更卒의 役이 있는데 鄭玄이 특별히 正衛라 한 것은 正卒

로서의 役임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의 요역 운영체제에서

衛士가 上番하는 役은 한구의에 民의 나이 23세가 되면 正이 되고

1년간 衛士 1년간 材官 騎士에 복무하며 활쏘기 말달리기 戰陣을 익

힌다(民年二十三爲正 一歲以爲衛士 一歲爲材官騎士 習射御騎馳戰陣)

라 한 것에 의하면 正卒이 그 복역 대상자이고22) 각 군 단위로 1년씩

21) 禮記王制 五十不從力征middotmiddotmiddot 의 條 孔穎達疏引 周禮所謂皆征之者 使爲胥

徒 給公家之事 如今之正衛耳

22) 漢의 正과 正卒 및 상비군의 문제에 대해서는 종래 여러 이견이 있다

正을 正卒로 보고 正卒이란 更卒(小繇)의 對稱으로서 병역의무자이고 재관

기사 위사등이 곧 정졸이라는 설이 가장 많이 받아드려지고 있다(濱口重國

秦漢時代の繇役勞働に關する一問題 秦漢隋唐史の硏究』上卷 東京 1966

1980 勞幹 漢代兵制及漢簡中的兵制 歷史語言硏究所集刊 10 1948 山田

勝芳 後漢時代の繇役と兵役 歷史 66 19869)正卒은 앞의 설과 같지만 正은 23세에서 56세 사이의 남자 즉 正丁 을 가리

킨다는 설(西村元佑 漢代の繇役制度 東洋史硏究 12-5 1953)正卒과 更卒이 별개인이 아니라 동일인이고 更卒은 正卒이 된 이외의 해에

매년 1개월의 역역에 복무하는 자를 가리키며 正은 23세-55세까지의 正丁인

데 正卒은 그 가운데 2년간 衛士 材官 騎士 등의 實役에 복역하는 것이라는

설(西田太一郞 漢の正卒について 東洋の文化と社會1 東京 1955)

材官 騎士등이 일반민에서 材力 있는 자로 선발되어 군국에서 常駐하는 전

문병사로서 직업군인인 lsquo士rsquo인데 대해 正卒은 일반민이 23세에 1년간 병졸로서

근무하고 1년간 衛士로 長安에 上番한다는 설 즉 正卒은 직업군인인 材官 騎

士와는 兵役體系上 別個의 것으로서 일반민의 병역 복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는 설(大庭脩 材官攷 -漢代の兵制の一班について 龍谷史壇 36 1953)正卒이란 23세에 이른 자 가운데서 신체강건한 자를 뽑아 衛士 材官 騎士

樓船 등의 어느 한 兵種에 복무하게 한 것이라는 설(濱口重國 勞幹 西村元佑

山田勝芳 앞의 논문 平中苓次 漢代の官吏の家族の復除と軍賦の負擔 中國

古代の田制と稅法 京都 1967) 諸說의 대부분은 이 견해를 공통적으로 취하

고 있다

秦漢에서는 始傅에서 免老까지의 모든 남자가 병역의무를 지는데 正卒은 그

適齡남자를 統稱하는 말이며 따라서 郡兵이나 衛士 戍卒은 正卒의 일부분이라

는 설(臧知非 秦漢lsquo正卒rsquo辨釋 中國史硏究 1988-1)正이란 傅籍된 待役者(兵役과 力役 포함)를 말하며 正卒은 어떤 특정의 役

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고 正(待役者)과 卒(服役中에 있는 正)로 구분되어 있

는 말이며 秦漢代에 병역 복무는 일부 병역신분에게 만 부과된 것이어서 나머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8조별 순번으로 상경하여 복역한다 正卒은 일반 更卒 중에서 신체강건

용맹 등으로 선발된 자들로 상비군 내지 직업군인의 성격이 강한 집단

이다 즉 그들은 일반민(서인)이면서도 그 중에서 선발되어 군사로써

免老에 이르기까지 복무하는 까닭에 일반민과는 다르다 胥徒 또한 서

인이면서 관부에 복무하는 까닭에 일반민과는 다르다 衛士는 특히 평

시에 도성(중도관)을 수비하기 때문에 관부에 거처하게 되고 胥徒 또

한 관부에서 직접 給事하는 까닭에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면에서 鄭玄

은 양자를 같은 성격의 계층으로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衛士가 일반

민에서 선발된 자들이고 胥는 徒 중에서 才智로 선발되고 徒는 분명

치는 않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일반 民庶 가운데 담당 직무 수행에 어

느 정도 자질을 갖춘 자로 선발된 자들일 가능성이 크다 또 漢書권74魏相傳의 顔注에 京師의 여러 관부에 와서 戍卒이 되는데 지금의

衛士가 上番하여 여러 官司에 나누어져 복무하는 것과 같다 라23) 한

것에 의하면 衛士의 이러한 복역 모습은 각 官司에 배치된 胥徒의 복

역 형태와 같다 전한 京師에서 복무중인 衛士의 수는 景帝末傾에 매

지 일반 白徒는 병역에 복역하지 않는다는 설(孫言誠 秦漢的繇役和兵役 中國史硏究 19873 및 ldquo爲正一歲rdquo辨 文史 31 198811)濱口說과 같이 正을 正卒의 略稱으로 보지만 濱口씨가 正卒을 일반적인 兵

士로 본 것과는 달리 庶民 중에서 일부가 선발되어 兵士(材官 騎士 등)가 된

것이며 이들은 일반서민과는 상대적으로 구별되는 신분 말하자면 獨自의 兵

士身分 으로서 일반서민과 같은 역역(更卒) 의무가 없었고 일반서민과는 다른

부담체계하에 있었다는 설(重近啓樹 秦漢の兵制について -地方軍を中心とし

て- 人文論集(靜岡大學) 36 1985)正卒은 일반민이 20세로 부터 2년간 복무하는 것이며 材官 騎士는 이와는

달리 전문병사로서 23세에서 56세까지 복무하는 것이라는 설(藤田勝久 前漢

の繇役勞動とその運營形態 中國史硏究 8 1984)한편 李成珪는 材官 騎士는 卒에서 징발된 전문 병사였고 1년 복역 후에도

예비역으로 분류 비상시 동원되었지만 (軍)吏나 士에 속하지 않는 자들로서

力役 복역의 한 형태인데 董仲舒가 말한 lsquo一歲力役rsquo은 바로 郡卒로 1년 복무하

는 材官 騎士의 役을 말한 것이라 한다(이성규 前漢 更卒의 徵集과 服役 方

式 -松栢木牘 47호의 분석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09 200912

pp33-34)

23) 來京師諸官府爲戍卒 若今衛士上番分諸司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9년 2만인 武帝 즉위 후 1만인으로 감하고 얼마 후 5천인을 늘려 武帝

후기에는 1만5천이었을 것으로 보인다24) 또 1개 군에서 番上하는 수

가 數千에서 2~3천인이었던 사례가 있다25) 전한 말 成帝 시기의 사

정을 말해주는 尹灣漢簡의 lt東海郡下轄長吏不在署 未到官者名籍gt

에 군현 밖으로 外勤出張 중에 있는 長吏의 현황표에 費長孫敞 十月

五日送衛士 가 있는데26) 費邑의 長 孫敞이 衛士를 送하는 업무로 출

장하여 아직 귀환하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동해군 下轄의 縣(18)邑

(2)侯國(18) 38곳(lt集簿gt) 가운데 오직 費邑에서만 衛士가 上番되고

있다 이에 의하면 衛士의 상번은 각 군에서 縣級 단위로 교대 상번하

는 것으로 보인다 濱口重國은 후한에서 正卒의 군현상비군이 폐지되

었지만 전한에서와 마찬가지로 매년 연말에 1년의 복무가 끝나고 귀향

하는 衛士들에게 황제가 향연을 베푸는 饗遣故衛士儀가 행해지고 있는

사례를 들어 衛士의 上番은 후한에서도 행해지고 있음을 지적한 바가

있다27) 아울러 그는 군현 상비군 폐지 후 중앙의 衛士 부대가 2500

내지 2600명인데 이는 중앙 인근 지역에 한정하여 징발된 자들로 보

아야 한다고 하였다28) 후한 周禮注에서 鄭玄(127-200)의 衛士 인용

이 전한시기의 사정에 의거한 것인지 아니면 그의 활동시기인 후한 후

기의 사정에 의거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후한 중 후기에도 衛士의

上番制가 부분적으로나마 유지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4) 濱口重國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隋唐史の硏究』上卷 東京

1966 1980) p286 注2)

25) 「上臨饗罷衛卒 衛卒數千middotmiddotmiddot」 (漢書 권77 蓋寬饒傳) 「河南卒戍中都官者二三

千人middotmiddotmiddot」 (漢書 권74 魏相傳)

26) 張顯成 周羣麗 尹灣漢墓簡牘校理(上篇) (天津古籍出版社 2011 3) p32

27) 濱口重國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隋唐史の硏究 (上)) p283

28) 濱口重國 위의 글 pp284-285 그 주된 근거는 속한서 백관지3 尙書條에

蔡質漢儀曰 ldquo右丞與僕射對掌授廩假錢穀 與左丞無所不統 凡中宮漏夜盡 鼓鳴

則起 鍾鳴則息 衛士甲乙徼相傳 甲夜畢 傳乙夜 相傳盡五更 衛士傳言五更 未

明三刻後 雞鳴 衛士踵丞郎趨嚴上臺 不畜宮中雞 汝南出雞鳴 衛士候朱爵門外

專傳雞鳴於宮中rdquo 應劭曰 ldquo楚歌 今雞鳴歌也rdquo 晉太康地道記曰 ldquo後漢固

始鮦陽公安細陽四縣衛士 習此曲於闕下歌之 今雞鳴是也rdquo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0中都官의 몇 몇 部署에 給事하는 衛士의 員數 규정이 있는데 속한

서 백관2 注引 漢官의 光祿勳에 81인 太宰令에 15인 高廟令에 15

인 世祖廟令에 20인 衛尉에 60인 南宮衛士令에 537인 北宮衛士令에

471인 右都候에 416인 左都候에 383인 南宮南屯司馬에 102인 (北)宮

門蒼龍司馬에 40인 玄武司馬에 38인 北屯司馬에 38인 北宮朱爵司馬

에 124인 東明司馬에 180인 朔平司馬에 117인의 衛士가 소속되어 있

다 이는 후한의 사정을 기록한 것인데 그 총합이 2637인이다 전한에

비해 그 員數가 급감한 것은 광무제의 부역 경감정책과에 의한 것이라

하겠고29) 소수지만 그 員數가 규정되어 있다는 것은 후한에서 代役制

내지 雇傭制로 대체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전과 같은 上番制가

시행되었음을 말해준다 후한에서 正卒 및 군현의 상비군제가 온전히

사라진 것이 아닌 것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후한의 2637명의

員數는 전한에 비해 대략 15 정도 되는데 전한의 사정을 기준으로 한

다 하더라도 군현의 正卒은 평생 1회만 당번이 되어 上番하더라도 중

도관의 衛士 給事가 충분히 운영될 수 있다 위의 lt윤만한간gt에서 전

체 38현읍후국 가운데 그 해에 費邑의 正卒 만이 상번하고 있고 당시

郡別로 상번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동해군이 매년 상번의 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각 正卒은 38년에 1회만 상번하면 된다 물론 군별 현

읍후국의 수가 다르기 때문에 그 回次의 수도 다르고 현읍후국별 正

卒의 수에 따라 1개 이상의 현읍후국이 함께 동원된 경우도 충분히 있

을 수 있다 그러나 각 군의 현읍후국 수가 보통 20개는 넘는다 게다

가 費邑의 正卒도 몇 개 조로 나뉘어 순차로 상번하는 것이라던가 각

郡도 매년 상번이 아니라 몇 년 만에 순번이 돌아오는 체제라면 각 正

卒의 중도관 衛士 복무는 아무리 많아도 일생에 1회를 넘기 어렵다

앞에 든 漢舊儀의 民年二十三爲正 一歲以爲衛士 는 곧 그러한 사

정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일생 1회의 복무형태는 胥徒의

29) 濱口重國은 광무제의 경감책과 아울러 虎賁 羽林 羽林左右騎 五校尉의 軍이

警備에 추가되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위의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

隋唐史の硏究(上)) p283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1평생 내지 세습되는 면과(후술) 다르지만 일반의 役 대상자에서 선발

되어 중도관에 給事한다는 면에서는 공통이다 그런데 전한에서 lsquo父死

子代rsquo였던 중앙군은 羽林孤兒 뿐이었지만 후한에서 虎賁 羽林 羽林左

右騎 五營士의 중앙군에까지 확대되었다고 한 濱口重國의 지적이 있

다 그에 의하면 후한에서 중앙군단의 세습화와 함께 바로 지방에 特

設된 군단의 세습화도 이루어지면서 魏晋시기 兵民分離의 前段을 이루

게 되었다고 한다30)후한 후기 특히 羌의 侵寇 이후 郡에 都尉를 설치

하고 全民을 징병대상으로 삼아 상비의 郡兵을 다시 설치하고 있으

며31) 여러 출신 성원을 규합한 병단이 私屬이 되기도 하고 국가의 군

단이 되기도 하며 部曲 내지 그와 같은 류의 세습 병단화 하는 과정

에 대해서는 필자도 일견을 피력한 바 있다32)따라서 징병제에 의한

正卒의 상비군 운영이 폐지된 이후 15 수준으로 급감한 정졸의 衛士

가 上番하고 있었지만 이 군단 또한 후한 중기 이후 전란시기가 되면

서 世兵化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胥徒의 세습과 후한 후기에

활동하였던 鄭玄 당시 衛士의 세습화는 일치하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鄭玄이 말한 衛士는 한초의 사정이 아니라 그가 활동하였던 후한 후기

의 사정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鄭玄이 漢의 衛士 上番制에 의거하여 주례의 胥徒制를 해석한 것

은 양자의 해명에 큰 도움을 준다 상술한 바에 의하면 몇 가지 면에

서 양자가 일치하는 점이 대체로 인정된 셈이지만 胥徒가 거의 모든

관부에 설치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漢代의 衛士는 광록훈이나 衛尉

제사 守陵등 일부 한정된 관부에 설치되어 있다 또한 주례의 胥徒

가 士 이상의 신분과 마찬가지로 代耕의 봉록으로써 농지를 받고 있는

봉록자라는 면은 지방에서 상경하여 1년의 기간만 한시적으로 복무하

는 衛士의 경우와는 자못 어울리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衛

士는 上番者로 충당되지만 일단 관부별로 員數가 규정된 員吏로서 복

30) 濱口重國 앞의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p285

31) 濱口重國 光武帝の軍備縮小とその影響 (秦漢隋唐史の硏究(上)) p30832) 박건주 한대의 지방 상비군과 部曲의 推移 (동양사학연구 118 20123)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2무하게 되기 때문에 일부는 胥徒처럼 員吏로서 수년 이상을 관부에 居

하는 어느 정도 전문화 한 衛士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鄭玄의 활

동 시기와 큰 차이가 없는 lt長沙走馬樓吳簡(이하 lt吳簡gt으로 약칭)gt

領二年四家衛士田漆十五畝 畝收限米二斛 合爲吳平斛米一百五十斛

(5-1669)에 의하면 4家의 衛士가 限田75畝 佃作에 대한 租로 畝當 限

米2斛을 납부하고 있다 lt오간gt의 限田에 대해 여러 異說이 있지만

(후술) 그 佃作者와 限米 납부자의 계층에 수십 종의 吏員들이 포함되

어 있는 것에 의하면(후술) 衛士도 그러한 吏員으로서 限田이 지급된

것으로 보인다 단지 限田을 佃作케 한 것이 吏員에 대한 경작의 부과

(경작 노동력의 징발)를 뜻하는 것인지 혜택의 수여를 뜻하는 것인지

는 아직 분명치 않지만 于振波의 분석과 같이 畝當 限米2斛의 징수는

대단히 과중한 액수인 까닭에33) 受惠라기 보다는 경작 노동력의 징발

내지 課役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祿田의 의미로 보기

어렵지만 당시 吏職의 賤役化 현상을 고려하면 그러한 시대적 여건 하

에서 實益이 거의 없는 祿田으로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어쨌

든 후한말 이래 小吏 내지 吏戶와 병사층의 세습화 진전을 고려한다면

어떠한 방식이든 그 가족의 생계를 위한 봉록의 지급이 있었을 가능성

이 더욱 커진다

이상에서 검토한 몇 가지 면에서 보면 府史와 胥徒 중에 후자 만

lsquo給徭役rsquo에 의거한 복무라는 점 등에서 다른 계층이지만 庶民在官者

로서 함께 칭해질 수 있는 층이었다고 본다 무엇보다 胥徒가 각각 제

8위와 제9위의 在官者 서열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동시에 府史는 모두 官長으로부터 선발되고 辟除 임용된 자들인데 비

해 胥徒는 일반의 요역의무를 대체하여 官에서 給事中인 계층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胥徒가 lsquo在官者rsquo로 칭해지는 이유는 관부 내에 거

처하면서 노동을 통하여 잡다한 庶事를 직접 처리하고 있으며 국가로

33) 于振波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中國社會科學院硏究生員學報 2004

-1) p122 限米 납부액의 과중성에 의거해서 限米 납부자는 屯田노동자 限米

는 屯田의 租稅라고 본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3부터 代耕의 祿田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관부의 제반 업무는 각 업무

分司 말단에 속한 胥徒의 노역에 의해 완수될 수 있다 이들은 노역

징발 대상자인 徒 중에서 재능 등의 명목으로 선발된 자들이고 그 중

에서도 才智가 있는 자가 胥이다 이들은 선임자 내지 연장자의 지휘

감독 아래 각 관서의 노역 업무와 勞役者 징발 업무 등으로 奉公한다

이것이 胥徒의 在官者로서의 職事이다 胥徒의 職事는 어디까지나 노

동이 전제되는 勞役이며 일반민의 요역의무에 대신하여 관부의 職에

給事하는 까닭에 職役이라 할 수 있고 官長의 선발로 辟除된 府史는

정식의 官員으로서 奉公하는 것이고 給徭役 에 대신하여 복무하는

것이 아닌 까닭에 胥徒의 職役과 구분하여 그 職을 職官이라 할 수 있

다 그 上級인 命官도 물론 職官이다 職官의 기본 요건은 그 官職에

任職인 상태가 그대로 王命을 받들어 奉公 중인 것을 뜻하는 까닭에

이미 王命을 수행중인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체로 일반 서민

의 기본 요역에서 면제된다 단지 면제의 세부 규정에 의하면 役의 종

류와 신분의 차등에 따라 그 면제 대상의 범위가 구분된다 한편 전쟁

에 참전하는 의무는 면제되지 않는다 모든 官吏는 유사시 종군해야

한다 官人이 본래 戰士層인 國人 출신에서 나온 때문이다 일반 서민

은 매년 일정 기간 동안 만 국가의 命을 받아 노역에 징발되어 복역하

는 까닭에 그 생업은 징발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시적인 노역이 아니라

그들이 부여받은 職인 恒常의 耕作奉公에 있다 職官은 그 복무를 통

해 생활이 영위되지만 일반 서민이 징발되어 이행하는 노역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無償이다

官職앞에 인용한 宰夫8職에 대한 賈疏의 끝 부분에 周禮 위 아래

의 글에 胥가 있으면 반드시 徒가 있는 것은 胥가 什長인 까닭이다

鱉人과 臘人의 類는 徒만 있고 胥가 없는 것은 徒만 있으면 충분하여

지휘자(長師)를 둘(빌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食醫의 類에는 胥徒가

모두 없는 것은 그 官만의 行事(업무처리)로도 충분하여 胥徒의 도움

을 빌리지 않는 까닭이다 고34) 하였는데 胥와 徒가 모두 설치되지 않

은 部署는 그 官만의 업무처리만으로 충분한 까닭이라 하였으니 바로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4府史까지의 屬吏를 官으로 한정한 것이다 즉 胥徒는 官에서 복무하고

있지만 官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庶民이고 庶民在官者 이며 그들의

복무는 職官이 아니고 職役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들도 그 職役으

로 생업을 유지하는 까닭에 職官과 동일성을 지닌다 주례에 의하는

한 胥徒가 일시적으로 복무하는 형태는 아닌 듯 하다 무엇보다도 그

들에게 祿田이 지급되고 있기 때문에 매년 혹은 매월 교체되는 요역

형태의 근무는 아닐 것이다 또한 각 분야별로 상당한 전문 지식과 숙

련도가 요구되는 업무 처리상 단기간 교체되는 근무형태를 취하였을

것 같지도 않다

이렇게 볼 때 胥徒가 官에서 일반 관리와 마찬가지로 계속적으로 근

무하면서도 그 근무를 lsquo給徭役rsquo의 代替로 본 주석이 옳다면 아무래도

胥徒는 신분제사회에서 官이 될 수 없는 자 또는 現任의 官과는 엄밀

히 구분되는 신분이었던 까닭에 그 직무 또한 (일반 서민의) 노역의

의미로 인지되고 평가된 것이 아닐까 한다 漢代사회의 신분구조는 漢

家의 주인인 天子가 그의 家人인 일반 民庶를 직접 장악하는 구조가

있고 동시에 漢家로부터 독립된 개별의 士族이 각각 lsquo家rsquo의 주인으로

서 천자와 主客의 관계가 아직 유지되는 체제가 병존하는 二元의 구조

로 되어 있다고 본 濱口重國의 견해가 있다35)이러한 입장을 발전시켜

漢帝國은 황제가 인민을 인두적으로 지배하는 lsquo齊民制rsquo와 천자가 lsquo家rsquo를

非人頭的으로 지배하는 家父長制的 관계로서의 lsquo家産制rsquo라는 이중구조

로 되어 있다고 본 好並隆司의 견해도 있다36) 그리고 이러한 이중성

의 사회구조를 公과 私 君臣관계의 면에서 진전시킨 尾形 勇은 그 臣

이 되는 층을 仕宦者와 從役者로 나누고 있다37) 위의 설들은 모두 한

34) 周禮 上下文有胥必有徒胥爲什長故也 鳖人腊人之類空有徒無胥

者得徒则足不假長師故也 食醫之類胥徒并無者以其專官行事不假胥徒

35) 濱口重國 唐王朝の賤人制度 主篇 第六章 第二節 (東洋史硏究會 1966)

36) 好並隆司 前漢帝國の二重構造と時代規定 (歷史學硏究 375 秦漢帝國史

硏究 東京 1978에 재수록)

37) 尾形 勇 漢代における 家人 と君臣關係 (史學雜誌 83-4 1974) pp3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5대의 사정을 말한 것이지만 이러한 이중구조의 신분제 내지 사회구조

는 주례의 관부 구성 체제에 의하면 상위에서 下士 내지 府史까지가

仕宦者에 해당하고 胥徒를 후자 즉 從役者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연원은 이미 周代에 있다 士人 내지 仕宦者는

그 직무로써 奉公하고 從役者는 賦稅役의 부담으로써 奉公한다38)胥徒

가 비록 官에 있는 자이지만 二元구조의 신분제 하에서 士人이 되지

못한 가운데 그 직무는 職官이 되지 못하고 職役에 머무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Ⅲ 職役 담당층의 복무 형태와 봉록 지급의

문제

周代에 lsquo給徭役rsquo의 차원에서 관부에 給事하는 胥徒가 있었다면 후대

의 요역 가운데도 그러한 항목이나 사례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다 또한 胥徒의 직무는 續漢書 輿服志上에 보이는 伍伯辟車

鈴下侍閣門蘭部署街里走卒 등 관부 말단에서 경호導從심

부름侍衛車馬관리 巡邏 등의 賤職에 종사하는 이른바 徒卒의 職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그런데 이들의 役이 民의 일반 요역 의무에 따

라 징발되어 일시적으로 복역하는 것인지 아니면 상술한 胥徒와 같이

庶民在官者 로서 관부의 최말단에서 상시로 근무하며 관부에 의지하

여 생업을 유지하는 下吏로서의 복무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후한서권58 虞詡傳에 永平(후한 明帝期) 章和(章帝期) 중에 州郡이 走卒錢으

로 貧人을 給貸(雇賃金을 지급)하였다 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集解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35

38) 尾形 勇 위의 글 pp28-29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6走卒伍伯之類란 續漢志에 이른다

(車前에) 伍伯은 公은 8인中二千石은 6인千石과 六百石은 모두 4인百石

이하에서 二百石은 모두 2인을 둔다 黃綬(4백석에서 2백석의 관리)의 武官에

는 伍伯을 따르게 하고 文官에는 辟車鈴下侍閤門闌部署街(里)走卒

을 따르게 하는데 모두 程品의 多少가 있으며 맡은 바 직무에 따라 領率하게

한다 (驛馬는 30里에 하나를 설치한다) (卒은) 모두 적색 두건과 진홍색 소창

옷을 착용한다

즉 지금 鞭杖을 잡고 따르는 자들이다 이는 錢이 있는 자로 하여금 그 (役

에) 대한 資錢을 내게 하여 몸으로 직접 노역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39)

〔 ( ) 내의 글은 결락된 부분을 輿服志 원문에서 보완함〕

인용된 속한지輿服志의 기사는 公卿 以下 縣의 三百石 官長에 이르

기까지 이들을 導從하는 下吏들의 配屬 員數를 규정한 것이다 열거된

役職들은 모두 300석 이상 관원을 導從하는 役員들인데 후한 明帝 章

帝期에 일부 지역에서 이 役職의 명목으로 走卒錢을 징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記事는 順帝 연간에 尙書僕射 虞詡가 上言한 것인데 당시

長吏 2천석관들이 謫罰者에게 貧人 구호를 위한 lsquo義錢rsquo의 명목으로 贖

錢을 강요하고 守令은 이를 빌미로 聚斂함에 順帝 원년 이래 백만전

이상을 受取한 長吏가 끊이지 않고 있는 사정을 진언한 가운데 그 이

전 永平 章和 연간에 있었던 사실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즉 州郡에

서 走卒錢을 징수하여 그 역을 면제시켜주고 대신 빈궁한 자를 그

役에 고용하여 그 錢을 雇賃으로 지급해주는 일이 있었다 당시 司空

이 이 事案을 탄핵하니 해당 州郡縣이 모두 坐되어 免黜되었었다 그

때의 전례와 마찬가지로 당시 임시로 사용하였던 제도(走卒錢 징수와

雇賃 지불)를 蠲制할 것을( 蠲制權制 ) 주청하였고 이에 조서를 내려

州郡을 切責함으로써 그러한 贖錢 강요가 이로부터 그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40) 따라서 走卒錢 징수와 導從役의 雇傭 방식 운영은 후한

39) ldquo卽今行鞭杖者也 此言錢者令其出資錢 不役其身也 走卒伍伯之類也 續漢

志曰 (車前)伍伯 公八人中二千石六人千石六百石皆四人自百石以下至二

百石皆二人 黃綬 武官 伍伯 文官 辟車鈴下侍閤門闌部署街

(里)走卒 皆有程品多少 隨所典領率 (驛馬三十里一置 卒)皆赤幘絳褠 卽

今行鞭杖者也 此言錢者令其出資錢 不役其身也

40) 후한서 권58 虞詡傳에 是時長吏二千石聽百姓謫罰者輸贖 號為lsquo義錢rsquo 託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7明帝 章帝期에 한정되어 시행된 것으로 모두 不法이었고 虞詡의 順帝

시기에는 시행되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渡邊信一郞에

의하면 이들은 秦漢에서 관부의 최하층으로서 관부에서 필요로 하는

導從役 등 일상적인 노역에 복무하며 民으로부터 강제 징발되어 복무

하였는데 후한 초에 이미 走卒錢이 징수되고 특정 임무는 면역전을

재원으로 한 고용노동으로 전환되었다고 한다41) 그러나 章帝 이후 50

여년이 지난 順帝期에 이르기까지 고용 형태의 운영이 반복되지 않고

있는 것에 의하면 고용 노동으로의 진전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

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어쨌든 導從役의 고용 방식 운영이 不法

이었다 함은 그것이 본래 징발 형식으로 운영되는 것이었음을 말해준

다 錢이 있는 자로부터 走卒錢을 받고 이 재원으로 빈한한 자를 고용

하여 雇賃을 지급하는 不法을 행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어지는 지적에

서 順帝 때 지방관들의 贖錢 강요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관리들의 私利

도모에 의한 것이다 또한 그 의무자에 富者가 있어 그 實役을 피하고

자 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導從役과 같은 下吏의 봉록은 매

우 적기 때문에 여타의 수익이 있다면 그 봉록에 꼭 의지할 필요는 없

었을 것이다 이들이 비록 관부의 員吏이고 그 吏職이 생업이 되는 것

이지만 최말단의 賤役 내지 厮役으로서 천대받는 면이 많았을 것이다

때문에 이 職役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도 많았을 것이다

예기王制에 무릇 전문기능으로 事上(奉公)하는 자가 祝史

射御醫卜 및 百工이다 무릇 전문기능으로 事上하는 자는 다른

일을 해서는 안 되며(不貳事) 근무하는 관서를 옮겨서도 안 된다(不移

官) 出鄕하면 士와 抗禮하지 못하며 家에서 仕하는 자도 出鄕하면 士

와 抗禮하지 못한다 고42) 하였다 즉 士의 신분이 아닌 일반서민 출신

為貧人儲 而守令因以聚斂 詡上疏曰 ldquo元年以來 貧百姓章言長吏受取百萬以上

者 匈匈不絕 謫罰吏人至數千萬 而三公刺史少所舉奏 尋永平章和中 州郡

以走卒錢給貸貧人 司空劾案 州及郡縣皆坐免黜 今宜遵前典 蠲除權制 於是詔

書下詡章 切責州郡 謫罰輸贖自此而止rdquo

41) 渡邊信一郞 中國古代の財政と國家 (汲古書院 2010 第三章) p128

42) 禮記王制 (十三經注疏 中文出版社) p2905에 凡執技以事上者 祝史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8이 여러 기능직의 吏職에 복무하면서 함께 관부에 있지만 본 소속의

직장에서 다른 직장으로 옮길 수도 없고 신분상 士와 대등한 위치에

처하지 못하며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또한

府史 이상의 職官과 구분되는 胥徒의 특성과 상통한다

속한서 백관지2에 射聲校尉一人 比二千石 의 本注에 服虔曰

工射이다 어두운데서 소리를 듣고 활을 쏘아 명중시키는 까닭에 이름

하였다(工射也 冥寞中聞聲則射中之 故以為名 고 하였는데 여기서

工射 는 射도 工 의 한 분야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은 그 기능으로

奉公하는 것이 그 職分이고 생업이기도 하며 다른 직종이나 직업을

갖을 수 없고 옮길 수도 없는 자들이다( 不貳事 不移官 ) 이들은 그

職能으로 생업을 유지하지만43) lsquo父死子代rsquo 의 世業으로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고 賤職인 까닭에 여기에서 벗어나 신분상승을 바라는 경향이

있게 된다 이를테면 三國魏의 黃朗은 그 부친이 縣卒로서 鈴下 伍伯

의 職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抗志 遊學하여 현령을

거쳐 군태수에 이르렀는데 부친의 일을 생각하여 屬下의 鈴下 伍伯을

부를 때 鈴下 伍伯이라 부르지 않고 항상 姓字로 불렀다 비록 분노

하였을 때도 鈴下 伍伯으로 부르지 않았다44)

그런데 導從役 복무자는 징발되어 관부 내에서 복역하는 인원 중에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전체 복역 대상자 가운데 극히 소수에 불과하

다 특히 黃綬의 武官을 導從하는 伍伯 등의 직무가 護衛와 侍衛 警備

등이 위주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무술과 용력을 갖춘 이들로 선발된

그룹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黃綬 이상의 문무관에 소속되어 그 員數

射御醫卜 及百工 凡執技以事上者 不貳事 不移官 出鄕不與士齒 仕於

家者 出鄕不與士齒

43) 禮記 王制에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百工 各以其器食之 (注에 器 能也)

44) 三國志 권23 裴潛傳 所引 魏略에 黃朗字文達 沛郡人也 爲人弘通有性

實 父爲本縣卒 朗感其如此 抗志遊學 由是爲方國及其郡士大夫所禮異 特與東

平右姓王惠陽爲碩交 惠陽親拜朗母於床下 朗始仕黃初中 爲長吏 遷長安令 會

喪母不赴 復爲魏令 遷襄城典農中郎將涿郡太守 以明帝時疾病卒 始朗爲君長

自以父故 常忌不呼鈴下伍伯 而呼其姓字 至於忿怒 亦終不言 朗旣仕至二千石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9가 정해진 것에 의하면 庶民在官者 로서의 胥徒에 상당한다 봉록이

지급되는 일자리이며 민의 공동의무인 일반요역에 대신하여 복무하는

것인 만큼 면역전의 授受 행위는 不法이다

상술한 輿服志에 각 300석 이상의 官員 당 이들의 배당 員數가 규

정되어 있는 것에 의하면 이들도 분명히 관부의 한 구성원들이다 속한서 백관지 注引의 漢官에는 官長 내지 命官級 屬下의 員吏 員數

및 秩祿을 기재하고 있다 이를테면 속한서 백관2에 衛尉 卿一人

中二千石 本注曰 掌宮門衛士 宮中徼循事 丞一人 比千石 이라 하였

고 注引에 漢官曰「員吏四十一人 其九人四科 二人二百石 文學三人

百石 十二人斗食 二人佐 十二人學事 一人官醫 衛士六十人」이라 하

였다 이 가운데 百石까지는 봉록 지급이 명시되어 있지만 그 이하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봉록이 전혀 지급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斗食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斗升으로 계산되는

日數 계산에 의한 연봉액이 정해져 있다 百官受奉例의 注 所引 漢書音義에 斗食祿 日以斗爲計 라 하였고 한서 百官表上에 漢官名

秩簿에 이르길 斗食은 月俸 11斛 佐史는 월봉 8斛이다 一說에 斗食

이란 연봉이 百石에 이르지 못하여 日當으로 계산해서 1斗2升을 食하

는 까닭에 斗食이라 한다 고 하였다 속한서 백관5의 百官受奉例에

서는 百石이 月 16斛이고 斗食 이하는 위와 같다 또 墨子 雜守篇에

斗食은 1년에 36石이다 參食이면 1년에 24石이고 四食이면 1년에 18

石 五食이면 1년에 14石4斗 六食이면 1년에 12石이다 斗食은 5升을

食하고 參食은 3升小半을 五食은 2升 六食은 1升大半을 食한다 하루

에 2회 食한다 고 한데서 알 수 있다 斗食 은 1食에 5升 하루에 2

食이니 매일 1斗를 받아 1년 360일에 총 36石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

參食 은 1食에 3과 13升 즉 13斗를 받아 1일에 23斗가 되고 1년에

24石을 받는다 그 이하의 四食에서 六食까지는 斗食 이하에 열거된

下吏의 지급액 규정일 것이다

閻步克에 의하면45) 周代에서는 士 이상에게 祿田을 지급하여 그

수익을 食하게 하는 것으로 연봉을 지급하는 형태였는데 하급관리나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0工醫師 등 기술직 및 兵員에게는 月 단위로 지급하는 이른바 稍食

형태로 운영하였으며 나중에 증액 고정화 되고 아울러 錢으로 지불하

게 됨으로써 月俸의 秩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稍食 이란 주례天官

宮正에 宮正이란 왕궁의 戒令糾禁을 맡는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그 출입을 검찰

하고 그 稍食을 균등히 하고 그 淫怠하고 奇邪한 民을 제거하고 그

什伍를 모아 道義를 가르친다 月이 끝나면 그 稍食을 會計하고 1년이

끝나면 그 (吏職의) 行事를 검열한다 라46) 하였는데 이 稍食에 대해

鄭司農은 禄廪 疏는 宫中官府 등의 月禄 이라 하였다 즉 稍食은

月俸인 셈인데 이를 하급관리의 月俸이라 한 것은 國語晋語4에 公

은 貢을 食하고 대부는 읍을 食하며 士는 田(公田)을 食한다 庶人은

力으로 食하고 工商은 官(官으로부터 받은 田)을 食하며 皁隸(吏에

속한 徒隸)는 職을 食하고(각 담당 職의 大小에 따라 食祿) 官宰(大夫

의 家臣)는 加(大夫의 家臣)를 食한다 에서 公 大夫 士까지는 國 邑

田을 봉록으로 받는 까닭에 연봉을 받는 것이 되고 庶人 이하는 관부

에 給事한 力(勞役) 등을 계산하여 지급 받는 까닭에 월봉이라는 것이

다 또 주례 夏官 校人의 校人은 王馬之政을 관장한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馭夫

의 祿과 궁중의 稍食을 균등히 한다 라 하였는데 그 注에 師圉는 府

史 以下다 고 하였다 즉 府史 이하 下吏의 봉록 관련 업무이다 또 주례 天官 醫師에 연말이 되면 그 醫療한 실적을 검사하여 그 食을

정한다 十점 만점이면 上 十에 一을 失하면 次等 十에 二를 失하였

으면 그 次等 十에 四를 失하였으면 下로 한다 하였고 또 방비를

굳건히 하기 위해 성곽 溝池 등의 役事와 守備를 관장하는 掌固는 이

에 복무한 士庶子와 衆庶에 대해 필요한 도구와 財用을 공급해주고 그

稍食을 균등히 한다고 하였다(同 夏官 掌固) 이러한 자료에 의하면 府

史 이하의 下吏에 대해 祿俸 지급의 額이 기술되어 있지 않는 것은 食

邑田이나 百石까지는 年俸의 일정액이 규정되어 있고 이 액수가 월봉

45) 閻步克 從稍食到月俸mdash戰國秦漢祿秩等級制新探 (學術界 20002)46) 宮正 掌王宮之戒令糾禁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幾其出入 均其稍食 去其淫怠與其奇邪之民

會其什伍而敎之道義 月終 則會其稍食 歲終 則會其行事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1으로 나뉘어 지급되는 것과는 달리 그 이하의 吏는 月別 給事한 日數

나 실적을 계산하여 지급하는 月俸 형태였고 그 총합이 百石 이하였

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앞에 든 百官名秩表나 묵자의 기사는 그

러한 사정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府史 이하인 胥徒나 그 직급에 상당

하는 속한서 백관지의 각 관부별 官長 屬下의 員吏로서 有秩 아래에

나열된 직급들도 그 근무일수나 실적에 따라 봉록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有秩의 官은 百石 이상의 年俸이 지급되는 下限의 관리

를 가리키며 佐史 이하의 월봉 수입자에 대비하여 쓰이는 용어이다

근래 楊振紅 廣懶薰雄 宮宅 潔 등은 佐史 이하의 下吏에는 1개

월을 단위로 윤번 근무하는 자들이 있어 이들은 그 이름 앞에 更 이

붙고 이에 대비하여 常勤하는 자들은 冗 이 붙어 구분되었다 하고

그 내역과 성격을 고찰하였다47)사실 후대의 冗 내지 冗官 이 보통

散官 의 뜻이었던 것에 비해 선진에서 진한 시기의 여러 자료에 보이

는 冗 은 위의 연구들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更 에 대한 相對로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lt운몽진간gt 秦律十八種 工人程에 冗

隸妾 2인은 工 1인에 當하고 更隸妾 4인은 工 1인에 당한다 小隸臣妾

으로서 可使者 5인은 工 1인에 당한다(冗隸妾二人當工一人 更隸妾四

人當工一人 小隸臣妾可使者五人當工一人) 에서48) 冗隸妾은 更隸妾에

비해 2배의 우대를 받고 있으며 lt이년율령gt史律에 大祝이 祝을 시

험해보아 祝에 뛰어나고 祠事에 밝으면 冗祝으로 삼아 이들을 冗한다

(大祝試祝 善祝 明祠事者 以爲冗祝 冗之) 고 하였는데 이 冗 은 같

은 史律의 祝十四章으로 學童들을 시험해서 능히 7천언 이상을 誦할

수 있어야 祝으로 삼고 5更으로 한다(以祝十四章 試祝學童 能誦七千

言以上者 〔乃得〕爲祝 五更) 에서의 更 과 相對로 위치하고 있다

47) 楊振紅 秦漢簡中的ldquo冗rdquordquo更rdquo餘供役方式middotmiddotmiddot從lt二年律令 史律gt談起 (簡帛硏究 廣西師範大學出版社 2006) 廣懶薰雄 秦漢律令硏究 (汲古書院

20103) pp297-304 宮宅 潔 漢代官僚組織の最下層 - 官 と 民のはざま-

(東方學報 87 2012) pp11-1248) 睡虎地秦墓竹簡 (北京 文物出版社 1978) p74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2또 lt里耶秦簡gt에도 冗戍士五(伍) (⑧666+ ⑧2006)와 更戍(某) (⑧

143 ⑧149 ⑧694)의 對稱 용어가 있다 한편 주례春官 槀人에 外

內朝의 冗食者의 食을 공급해주는 것을 관장한다(掌共外內朝冗食者之

食) 라 하였고 이에 대한 鄭注는 冗食者란 (관부에 밤까지) 머무르며

문서 작업을 하는 것이 마치 지금의 尙書의 屬吏로서 當直하는 者들과

같다(冗食者 謂留治文書 若今尙書之屬 諸直上者) 賈疏는 ldquo(鄭注에

서)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rdquo라 한 것은 또한 漢法을 인용하여 설명한 것이니 차례로 당직

하는데 관부에 留宿하며 (집에) 돌아가지 않는 까닭에 반드시 음식을

제공해야 한다(亦引漢法說之 謂以次當直 留在朝 宿不還 須以食供之)

고 해석하였다 여기서의 冗 은 夜勤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일

상 정규의 일을 넘어선다는 뜻을 지닌다 冗食 은 야근하는 관리에게

제공되는 음식이기 때문에 정규의 음식 지급에 추가되는 것을 의미한

다 전한 成帝 河平 연간에 수해를 입은 군국을 구휼하면서 그 지역민

을 다른 군국으로 피신시키고 그 곳에서 冗食케 하라 고 하였는데49)

文穎은 冗이란 散이다 廩食을 散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遊離되어) 정착하지 못하는 戶를 役事시켜 일자리를 주는 것이다(冗

散也 散廩食使生活 不占著戶給役使也) 로 해석하였고 如淳은 離散

된 자들에게 給食하고 관부는 그 임금을 지불한 것이다( 散著人間給

食之 官償其直也 )고 해석하였다 즉 수해로 유민이 된 자들에게 給

食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하고 아울러 役事의 일자리를 주어 그 임금

을 지불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석자들이 冗 을 散 의 뜻으

로 해석한 것은 국가의 재정을 풀어서 지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國錢의

lsquo散布rsquo라는 뜻으로 본 것이다 이 또한 정규의 재정 지출을 넘어선 추

가의 지출이므로 실은 위의 사례들과 같은 뜻이 된다 또 한서권24

하 식화지하에 또한 周官의 稅民 제도에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民이 떠돌아다니면서

일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夫布一匹을 납부하게 하며 布를 납부할 수

49) 漢書 卷10 成帝紀 河平4년조에 遣光祿大夫博士嘉等十一人行舉瀕河之郡水

所毀傷困乏不能自存者 財振貸 其爲水所流壓死 不能自葬 令郡國給槥櫝葬埋

已葬者與錢 人二千 避水它郡國 在所冗食之 謹遇以文理 無令失職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3없는 자에게는 縣官에서 冗作케 하고 이들에게 衣食을 제공한다 고50)

하였다 여기서 冗作 이란 정규의 요역 부과 외에 징벌의 뜻으로 역

을 추가하여 부과한다는 의미이다

또 lt운몽진율gt 司空에 冗邊 이 있다

백성에게 모친 및 동생이 있어 隸妾이 되었는데 謫罪가 아니고 冗邊5

歲에 복역하되 근무 기간을 無償으로 하고 1인을 면하여 庶人으로 하고

자 한다면 이를 허용해준다(百姓有母及同牲(生)爲隸妾 非適(謫)罪殹(也)

而欲爲冗邊五歲 無賞(償)興日 以免一人爲庶人 許之) (司空 p91)

이 冗邊五歲 도 규정된 정규 戍邊役의 額 외로 추가된 役이란 뜻의

용어이다 그래서 이 또한 위의 사례들과 마찬가지의 뜻이다 이렇게

冗 에는 更 에 相對한 지칭으로 更 에 복무하는 자들에 비해 전문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갖춘 자들이거나 기타 사유로 정규의 額을 넘

어서는 복무를 하는 것 또는 그 役者 또는 職名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즉 정규 일반의 更 방식의 근무 額(日數)에 비해 담당

분야의 뛰어난 능력이나 징벌 등 기타 사유로 더 많은 근무를 추가로

하게 되는 자들의 職을 冗 이라 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러한 冗 을 쓰는 데는 국가의 재정 지출도 추가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국가재정의 추가 지출의 뜻으로서 散(散布)

이라는 뜻이 되어 후대 冗官==散官의 칭이 생긴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해석된다면 그간 충분히 해석되지 못한 lt운몽진률gt廏苑

律에 연간의 養牛 실적 평가에서 下等을 받은 宂皂에게 2개월의 복무

기간을 추가하는 벌을 내린다는 律文에 보이는 宂皂51) 그리고 同 秦

律雜抄 屯表律에 나오는 lsquo冗募rsquo도52) 위와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50) 又以周官稅民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民浮游無事 出夫布一匹 其不能出布者 冗作縣官 衣食

51) lt雲夢秦律gt p30 廏苑律의 율문 卒歲 以正月大課之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殿者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罰

冗皂者二月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52) lt雲夢秦律gt p145 秦律雜抄의 율문 冗募歸 辭曰日已備 致未來 不如辭

貲日四月居邊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4것이다 廣懶薰雄은 更 을 非常勤 冗 을 常勤의 뜻으로 요약하였는

데53) 그러한 일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는 更 이 본래 규정된

交代근무라면 冗 은 본래의 규정액을 넘어선 근무를 뜻하는 까닭에

그러한 해석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설문宀部에 冗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人在屋下 無田事也 라 하였는데 無田事 로서의 冗의 뜻도 更

이 당번으로 給事하는 기간을 제외하면 田事에 있어야 하는 것과는 달

리 冗은 비당번인 경우에도 관부에서 給事하는데서 칭해진 것이라 하

겠다

예기중용에 忠信인 자에게 봉록을 두텁게 주는 것은 士를 勸함이

고 때로(일시적으로) 使役시키되 賦斂을 가볍게 하는 것은 백성을 勸

하기 때문이며 日用으로 근무시키되 그 근무기간과 성과를 계산하여

급료(廩)를 지급하여 그 근무에 합당하게 보상해주는 것은 百工을 권

하기 위함이다(忠信重祿 所以勸士也 時使薄斂 所以勸百姓也 日省月

試 旣廩稱事 所以勸百工也) 라 하였다 여기서 忠信 이란 禮記禮器에 忠信 禮之本也 라 하였고 여기서는 이를 修學하고 실행할 수

있는 사대부 내지 命官層을 가리키고 있다 百工에 대해 日省月試

한다 함은 근무한 日數와 그 성과를 월 단위로 계산한다는 것이다 注

에서 旣廩稱事 의 旣 를 lsquo餼rsquo로 해석하고 lsquo餼廩rsquo은 稍食 이라 하였

다54) 여기에서 일반 백성에게 때로(일시적으로) 사역시킨다는 時使

가 곧 更 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진한 시기 更徭制의 운영에

서 충분히 입증된다 宮宅 潔은 年俸이 있는 것이 有秩인데 그 最下가

百石이며 연봉이 없고 본래 日食과 月食으로 지급되는 등급을 斗食이

라고 한다 하였다55) 그가 말한 斗食은 백관표에 나열된 斗食과 그 이

하의 여리 吏職을 포함한 것이다 그런데 일반 백성에게 更役이 부과

되고 그들에게 동원된 기간 동안 당연히 매일의 給食은 지원되겠지만

그 일반 요역으로서의 更役에 대한 日當의 보수가 지급된 것은 아닐

53) 廣懶薰雄 앞의 글 p304

54) 注에 日省月試 考校其成功也 lsquo旣rsquo讀爲餼 餼廩 稍食也

55) 宮宅 潔 앞의 글 p39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5것이다 그 일반 요역은 일반 백성의 기본 의무사항인 까닭이다 반면

百工의 근무일수와 성과액에 대해 稍食 (日俸 내지 月俸)이 지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매 끼니의 급식이 아니라 工役에 대한 보수 내

지 給料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근무일수라든가 성과액을 계산

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기서의 百工은 관부의

員吏에 속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관부에 속하여 매

끼니의 식사 뿐 아니라 工役한 일수와 성과량에 따라 봉록이 지급된다

는 것이다 그래서 봉록 지급은 錢이나 곡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반

면 전기한 국어晋語4 文公修內政納襄王 章에 公食貢 大夫食邑 士

食田 庶人食力 工商食官 皁隸食職 官宰食加 에서 工商食官 의 工

商은 모두 관부의 員吏에 속한 자들인데 그 注에 옛날에는 田을 주는

것으로 祿俸을 제정하였다 관부에서 주는 廩이란 곧 관부에서 田을

받는 것이니 후세에 錢粟을 주는 것으로 祿俸을 제정한 것과 같지 않

다(古者以田制祿 官廩之者 卽受田於官 非如後世之以錢粟制祿也) 고56)

하였다 또 한서권24식화지상에 士工商이 田을 받는 것은 5口가 받

는 것이 되어야 농부1인이 받는 것에 當한다(士工商家受田 五口乃當

農夫一人) 고 하였다 즉 百工과 商賈는 그 직무에 따라 俸祿을 받는

데 후대와 같이 錢粟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田으로 받으며 그 액수는

일반 농민의 15이라는 것이다 이는 전술한 주례의 胥徒가 최하품

의 田 1百畝를 俸祿으로 받는 것과 lsquo以田制祿rsquo이라는 면에서 일치한다

그리고 lsquo以田制祿rsquo이 후대에 lsquo以錢粟制祿rsquo으로 변천 된 것은 秦漢의 사

례를 통해 분명하다 어쨌든 관부의 員吏인 百工과 商賈에게 일반 백

성의 更役과는 달리 祿田 또는 월봉 형태의 錢粟 지급이 행해진 것이

라 하겠다 또한 工商이 일반 요역 대신에 전문기능인으로서의 工役과

관부 소요 물품의 調達役의 職分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이 또한 職

役에 해당하는 셈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관부의 員吏이면서 斗食 보다 下位에 위치하여 稍

56) 國語正義(下冊) (董增齡 撰 巴蜀書社 1985) pp815-6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6食 내지 月俸을 받는 여러 導從役 祝醫工商 등의 役은 그 職分

의 役 즉 職役으로 奉公한다 그런데 후한 초에 이 職役의 면역전으로

서 走卒錢을 징수하고 그 재원으로 빈민을 고용한 것이 不法이었으며

수십 년 이어지다가 금지되고 違法한 관료들이 처벌받고 있는 것에

의하면 이 役들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戶가 지정되어 있어 여타의 일반

戶가 대신하여 맡을 수 없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은 導

從役 등의 담당자는 일반서민이되 그 중에서 특별히 선발된 층으로 구

성되어 전문의 분야를 세습하며 의무로 담당하는 하나의 신분층으로

형성되어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그 役은 하나의 身分役이기

도 하였던 셈이다 또한 그 代役錢으로서 走卒錢 징수 및 雇傭 방식이

나오게 된 것은 그 역의 담당층 가운데 錢으로 實役을 피할 수 있는

부유충이 형성되었고 후한 前期에 전통의 身分制가 느슨해진 여건에

서 身分役의 근본 형태가 유지되지 못하고 일탈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속한서백관3에 執金吾의 속관 중에 화려 장려한 복장

과 장식으로 황제의 행차를 호위 수종하는 騎士로서 緹騎二百人이 있

는데57) 本注에 無秩 比吏食奉 이라 하였다 즉 吏가 아니지만 吏의

대우를 받아 봉록을 받는 계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下吏에

들지 못하지만 봉록을 받는 면에서는 동일한 계층이다

한편 앞에 든 國語 晋語4에서 工商食官 에 이어 下記된 皁隸(吏

에 下屬한 徒隸)食職 이 있다 이 皁隸 계층은 지금까지 검토한 庶民

在官者 로서의 胥徒導從役 담당자 및 樂祝醫衛士工商 등

보다 下位 내지 그 下屬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그 담당 신분과 그 役의 성격에 대해 검토한다

Ⅳ 下層 員吏의 役과 徒隸層의 役

57) 당 조목의 注 所引 漢官曰 執金吾緹騎二百人 [持戟]五百二十人 輿服導從

光滿道路 群僚之中 斯最壯矣 世祖歎曰 ldquo仕宦當作執金吾rdquo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7

앞에서 검토한 관부 구성의 최말단에 위치한 주례에서의 胥徒와

춘추진한 시기의 導從役 담당자 및 樂祝醫衛士工商 등의 下

吏層 외에 그 下屬으로 보이는 皁隸가 있다 앞에 든 각 신분에 따른

奉公의 職分을 나열하고 있는 國語晋語4의 記事 皁隸食職 의 注에

皁隸를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라 한 것에 의하면 이 계층은 위에 열거한

여러 下吏에 下屬한 노역자들이라 할 수 있다 胥徒와 導從役 담당자

등은 각각 주례와 漢官 등에 그 員數가 규정된 까닭에 이들은 員

數 규정에 들지 못한 皁隸에 대비해 下層의 員吏로 칭할 수 있다

皁隸가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라 하였으니 곧 관노비 내지 그에 類하는

계층일 것인데 그들이 lsquo職을 食한다rsquo고 한 것은 각 분야의 官署에 分屬

되어 그 職務에 給事함으로써 생업을 삼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皂

隸 牧 圄 僕 등이 후대의 천민이나 隸民이 아니라 일반민이었다

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58)그러한 주장은 이들이 대체로 관부에 給

事하는 계층으로 여러 기사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고 위의 皁隸食

職 은 곧 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관부에 給事

하는 면으로 인해 예속성이 있게 된다는 면이 있다 후술하는 바와 같

이 그들이 일반 서민 출신이면서도 후대에 그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모

두 예속신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통용되는 것은 그러한 관부에의 예속

성이 분명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예속성을 말해주는 것이 또한 職

役의 한 속성이다

한편 國語 晋語4 文公修內政納襄王章에 (晋文公)元年 春에 公(晋

文公)과 부인 嬴氏(秦穆公의 女인 文嬴)가 王城(秦의 地名)에서 돌아올

때 秦伯이 衛士3천인을 納하였는데 실로 기강이 있는 僕들이었다(元年

春 公及夫人嬴氏至自王城 秦伯納衛三千人 實紀綱之僕) 고59) 하였다

秦漢의 衛士 출신과 달리 여기서는 그 출신 신분이 僕인 자들로 구성

58) 黃中業 春秋時期的ldquo皂隸牧圉rdquo屬于平民階層說 (齊魯學刊 阜師院學報) 1984-2 19844) pp69-72

59) 위의 책 pp809-810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8되어 있다 이 당시는 秦 穆公의 지원으로 晋의 文公이 귀국하여 懷公

을 죽이고 즉위한 때인 까닭에 군사 내지 호위부대의 지원이었다 그

衛士 군단의 신분은 皁隸層에 들어가는 僕인데 관부에 給事하는 職分

은 衛士이다 이들의 紀綱이 선 자들이었다고 한 것은 본래 秦에서도

衛士의 職으로 給事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춘추기에 邑數百이나 社

數百의 단위로 국가 사이에 分與되는 일이 자주 있었고 3천인에 이르

는 多數의 전문 집단이 타국에 分與된 것이긴 하지만 일부 전문의 인

력을 分與나 上納 하는 것 또한 당시 종종 일어났던 일이다 어쨌든

그 衛士집단이 모두 僕이었다는 것은 일반민이 아니고 관부에 예속되

는 신분이었음을 말해준다 예속신분으로 궁성을 지키는 衛士로 삼는

것은 주례地官 師氏에서 그 직무 가운데 (師氏는) 그 소속의 四夷

之隸를 거느리고 각기 그 병력으로 왕성의 문밖을 지키는데 복무하며

또한 (행차 때) 앞에서 길 정리를 한다(師其屬帥四夷之隸 各以其兵服

守王之門外 且蹕) 에 이미 보이고 漢武帝 때 제후왕 貴戚의 不服을

다스리기 위해 중앙 내사지역을 감찰하는 司隸校尉와 지방의 刺史에게

중도관의 徒奴 1200인을 보내어 二千石官을 독찰하게 하였는데60) 이

1200인의 徒奴부대는 이후 사예교위 내지 刺史 직속의 상비군단이 되

었고 그 성원은 세습 병사집단의 근간이 되어 牧使 刺史 등 將領下의

公兵이나 私兵으로 활약하였다61) 漢官舊儀 卷上에 漢代 長安에 騎

亭長 79인과 함께 6월 1更의 倉頭盧兒를 給事하게 하였다62)이들 四夷

之隸나 徒奴倉頭盧兒 등은 적군포로이거나 刑徒 계통 출신으로 관부

에 예속된 신분일 것이다 특히 관부에 囚禁된 형도들은 여러 방면의

60) 北堂書鈔設官部 및 漢官儀권2補遺2에 ldquo司隸校尉는 武帝 때 처음 설치되

었다 이후 諸侯王 貴戚이 不服함에 中都 中官의 徒奴千二百人을 (파견해서)

一校尉部刺史에게 속하게 하여 二千石官을 독찰하게 하였다(司隸校尉 武帝初

置 後諸侯王貴戚不服 乃以中都中官徒奴千二百人屬爲一校尉部刺史 督二千石

也)rdquo

61) 이에 대해서는 박건주 한대의 지방상비군과 部曲의 推移 (동양사학연구118 20123) 참조

62) 長安給騎亭長七十人 六月一更倉頭盧兒 (漢官六種 北京 中華書局 1990

9) p3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9노역에 활용되었는데 근래 石岡 浩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刑徒 집단

은 크게 세 부류 내지 등급으로 나누어져 활용되고 대우에 차별이 있

었다고 한다 즉 가장 上位에 있는 司寇는 특정 임무에 복무하는 것이

정해진 형도이며 전택을 소유하여 戶主가 되는 권리(lt二年律令gt

310-316簡) 왕조로부터 사여 받는 권리(同 291-293) 子가 士伍로 복

귀할 수 있는 권리(同 364-365)를 갖는다 다음으로 徒隸 는 특정 관

서에 예속하여 직무를 숙지하였거나 기술에 숙련하여 전문기능자에 동

등한 가치를 지니는 형도 를 지칭하며 그것으로 동일 직장에 계속 근

무하는 까닭에 일반 형도와는 달리 토목공사나 물자운송 등의 노역에

서 제외된다 또한 왕조에 공헌하는 자로서 사여를 받는 대상도 된다

(同 291-293) 즉 그들은 隸臣鬼薪城旦이면서 숙련자 기능자로서

일반 형도보다 우대받는 자들이다 위 양자에 비해 일반 형도는 위의

여러 특혜를 받지 못하며 城旦은 주로 토목사업에 隸臣은 주로 여러

관서의 잡다한 노역에 복역한다63)이는 충분히 수긍되는 견해이다 이

가운데 徒隸는 관부 내 각 分署의 전문 직장에 分屬되어 사역될 것이

기 때문에 전술한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로서의 皁隸가 곧 그들의 주요 부

분이 될 것이다 그 중에 일반 관노비로부터 개인적 재능과 기술로 선

발되어 해당 관서에 給事하는 자들도 포함될 것이다 단지 정규의 전

쟁에 형도를 동원하는 사례가 많은데 그들이 정규의 병사가 된 것은

아니고 군공을 세워 免刑되기 이전에는 그대로 형도인 것과 같이 함께

관부에 給事하고 있다 하더라도 각 신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상의 검토에 의하면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에는 이른바 lsquo吏에 下屬

한 徒隸rsquo로서 食職하는 皁隸집단이 있고 그 구성에는 관노비 뿐 아니

라 적군포로나 관노비 및 형도 출신의 衛士 그리고 刺史 牧使 등의

將領下에 있는 직속 상비군 형도 가운데 司寇 그리고 기능과 숙련으

로 형도 중에서 선발된 職能의 徒隸집단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員

吏이되 下吏인 계층의 복무가 그 신분에 따른 職役인 것과 마찬가지로

63) 石岡 浩 秦漢代の徒隸と司寇 -官署に隸屬する有職刑徒 (史學雜誌 121-120121) p32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0이 皁隸層의 복역도 모두 관부에 생업을 의존하는(食職) 職役이라 할

수 있다

또 좌전에 주로 보이는 輿人이 있는데 同 昭公7년조에 天에 十日

이 있고 人에 十等이 있으니 下가 上에 事하는 所以이다 까닭에 王의

臣은 公 公의 臣은 大夫 대부의 臣은 士 士의 臣은 皁 皁의 臣은

輿 輿의 臣은 隸 隸의 臣은 僚 僚의 臣은 僕 僕의 臣은 臺이다 馬

에 圉가 있고 牛에 牧이 있어 百事를 待한다 라 하였다 古來의 여러

注疏에서부터 이미 lsquo輿人rsquo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지만 이를 분석한 宇

都木 章의 견해에 의하면 縣鄙의 野人이 평시이든 戰時이든 國都의

귀족에 징발되어 葬儀戰士補助 車馬와 관련되는 여러 役務에 종사

하는 때 그들을 lsquo輿人rsquo이라 칭하였다고 한다64) 여러 자료에 의하면 皁

에서 牧에 이르는 서열 순위가 어디에서나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

고 대개 동일 계층의 異稱인 경우가 많다 皁 이하의 서열에 이렇게

다단계의 臣屬 관계가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같은 徒에도 上位 순서로 胥와 徒 및 그 徒의 지휘를 받는 징발된 徒

가 있으며 員吏에 들어가는 導從役 등의 庶民在官者 가 있고 그에

下屬하는 皁隸의 구분이 있는 것에 의하면 최소한 士 아래의 서민 계

층에 3 - 4 단계의 차등 신분이 있을 수 있다 위의 十等 순위에서 士

이하에 위치하여야 할 庶民이 곧 皁輿 등에 해당할 것인데 모두 관

부에 給事하는 면에서 후대 예속신분을 가리키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

다 그리고 일반 서민 가운데서도 皁輿 이하는 모두 전문의 職分으

로 관부에 給事하는 의무가 주어진 계층이므로 일반 농민으로서의 서

민과는 구분되는 서민이었다고 생각한다 즉 일반 농민이 농업을 생업

으로 하며 일반의 요역 의무가 주어진 반면에 皁輿 등은 주로 전문

의 기능을 요하는 관부의 직무에 給事하는 것으로 일반요역을 대신하

며 때문에 일반 서민이면서 관부에 예속된 신분의 일면을 지닌다 그

렇지만 관노비나 형도로서 관부에 예속되어 給事하는 신분과는 명확히

64) 宇都木 章 輿人考 (三上博士頌壽記念 東洋史考古學論集 朋友書店 1979

12) pp108-11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1다르며 주례의 胥徒와 같은 下吏의 員吏 보다 보통 下位이지만 胥

徒와 마찬가지로 주로 전문 기능의 職分에 복역한다는 면에서 같고 그

일부분은 下吏에 충당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곧 胥徒가 일반 서민의

徒로부터 선발된 자들인 것과 같다 위의 十等 서열은 농민을 제외하

고 관부에 給事하는 신분만을 총괄하여 나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

술한 工商食官 皁隸食職 도 모두 관부에 給事하는 工商과 皁隸를 열

거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복무도 당연히 職役이 되는데 그 職能 내

지 職分의 종류별로 숙련도 및 경력 등에 따른 그룹 내에서의 서열이

있게 되고 이를 계층으로 인식해서 lsquo皁臣(臣屬)輿rsquo 등과 같은 記述이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 각 직능별 部署별 전문화된 職役의 활용은 관

부의 운영상 당시의 사정으로는 불가피한 면이 있다 그러한 체제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점차 계층 구분의 엄밀성이 느슨해지고 세분된

차등의 질서가 점차 단순화되면서 그 용어도 혼용되기에 이른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위의 계층 구분은 세분된 서열만이 아니라 각 계층

의 담당 職分을 구분해주는 칭호로 쓰인 면도 있다 그렇다면 輿人은

戰時에 주로 戰車부대를 보조하는 직무 분야를 담당하는 계층이라 할

수 있고 그러한 면에서 여러 下屬 계층 가운데 가장 상위의 계층이었

지 않을까 한다

한편 이상의 皁隸層이 본래 일반서민 출신이었다는 입장에서 보면

관부에 給事하되 향리에 거처하면서 일정 기간 만 순번으로 복역하는

交代制가 있었을 수가 있고 또는 대체로 일부 기능자나 世戶에 한정

되었겠지만 휴가 기간 외에는 상근하는 형태도 있었을 것이다 예속된

신분인 경우 그 거처도 대체로 관부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앞에 든 秦

漢律에 교대 근무하는 更隸妾의 존재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근무

기간에만 관부에서 거처하는 예속 신분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刑徒

중에서도 司寇는 田宅을 소유하고 戶主가 될 수 있었으며 徒隸도 賜

與를 받을 수 있는 까닭에 이들 중에 일부는 관부 밖에 따로 거처를

지니고 출퇴근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단지 衛士나 部曲 집단은

대체로 屯營 내에 거주하였을 것이다 위로는 승상으로부터 아래로는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2하급의 吏에 이르기까지 吏舍에 거처하며 휴가 기간이 되어야 비로소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는 大庭脩의 연구가 있지만65) 漢舊儀 卷下

에 舊制에 尉는 모두 관서에서 거처하였다( 舊制尉皆居官暑 ) 라66)한

것에 의하면 舊制 가 어느 시기를 말하는 것인지 불분명하지만 宿衛

와 경찰 임무의 尉職 외에는 관서에서 거처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음을

말해준다 매년 직급에 따른 수개월의 휴가 기간이 설정되어 있지만

이는 성내에 거주하며 매일 출퇴근 하더라도 고향은 먼 곳에 있는 경

우가 많아 歸鄕 휴가를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外地 출신으로 城內

에 거처가 없는 관리들을 위한 吏舍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吏舍의 존재가 모든 관리의 관부 거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居官府의 여러 給事職 관노비 司寇나 일부 徒隸를 제외한 일

반 형도 여러 當番의 宿衛職 등을 제외한 관리는 官舍 밖의 私家에서

거처한 것으로 본다

庶民在官者 로서의 職役 복무는 常勤과 교대근무의 두 시스템으로

운영되었을 것이다 胥徒는 본래 모두 징발된 徒 가운데서 재능 있는

자로 선발되어 관부에의 給事가 생업이 된 자들로서 祿田을 받는 자들

이며 員數가 책정되어 있는 까닭에 常勤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

나 함께 징발된 여타의 徒는 胥徒와 같은 給徭役의 奉公을 행하지만

순번으로 동원된 기간 만 한시적으로 복무하는 까닭에 동원 기간 동안

의 食料 이외에 노동의 보수를 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그들은 만

민의 기본 의무를 職役으로 이행하는 것일 뿐이다 정부로서는 관부에

給事할 人才와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지만 필요한 부

분을 모두 常勤하는 자로 임용하여 그들의 생업을 봉록 지급 등으로

전면 지원하는 것은 재정에 큰 부담이 되는 것이었다 즉 관부에서 필

요로 하는 특정 업무 기능자들을 일반 요역 면제 대신으로 복역케 하

고 이를 순번제로 운영하면 복무 당번 기간 외에 그들은 다른 생업을

65) 大庭脩 漢代官吏の勤務休暇 (秦漢法制史の硏究 創文社 1982) p584

66) 앞의 漢官六種 p81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3꾸려나갈 수 있기 때문에 국가는 그들에 대한 생업 유지 지원 부담이

훨씬 적어진다 관부 給事層 가운데 命官과 員吏 이상이 常勤制라면

그 이하의 여러 職役層들은 대체로 교대근무제 중심으로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테면 lt奏讞書gt 案例17에서 秦王政元年 雍縣人 樂人 講이 자신

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사건 당일 자신은 踐更에 복무하러 11월 한

달간 함양의 外樂(관서 기구 名)에67) 소집되어 복무 중이었음을 진술

하고 있다 따라서 함양에 거주하지 않은 樂人이 그 관서에서 常勤하

지 아니하고 특정시기 일정 기간 만 교대로 근무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獄事에서 피고인 樂人 講이 踐更으로 1개월 간 복무한

곳이 外樂인 까닭에 일반 요역이 아니라 樂人의 職役을 이행한 것이라

고 본다 전한 哀帝 때 樂人의 員數를 罷하라는 명령에 대해 승상 孔

光과 대사공 何武가 진언하길 각 담당별 樂人의 현재 員數와 罷할 수

없는 수를 열거한 후 총 829인의 員數 가운데 388인은 罷할 수 없다고

하자 이를 재가한 바가 있다68) 이는 전한말의 사정이지만 전국진에서

도 郊祭 등의 각종 국가제사와 宮中 樂이 행해졌기 때문에 위의 수치

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속한서 백관2 大樂令 注引의

漢官과 盧植禮注에 의하면 八佾舞를 추는 樂人의 員數가 380인인

데 여기에 卑者之子는 임용될 수 없고 6백석에서 2천석 및 관내후에

서 五大夫의 嫡子 출신 5척 이상의 신장 12세에서 30세 顔色온화 등

의 조건을 갖춘 자에 한정되었다69) 이에 의하면 樂人 講은 走馬의 傭

이 되어 京師에 왕래하고 있는 빈한한 자로서 도저히 중앙 大樂令 속

67) 관서 기구 이름으로서의 外樂은 lt이년율령gt秩律 449簡 및 西安相家巷出土

秦封泥에 보인다(周曉陸路東之 編著 秦封泥集 三秦出版社 2000 一

二44)68) 漢書 권22 예락지2

69) 漢官曰 ldquo員吏二十五人 其二人百石 二人斗食 七人佐 十人學事 四人守學事

樂人八佾舞三百八十人rdquo 盧植禮注曰 ldquo大(子)[予]令如古大胥 漢大樂律 卑者

之子不得舞宗廟之酎 除吏二千石到六百石 及關內侯到五大夫子 取適子高五尺已

上 年十二到三十 顏色和 身體修治者 以為舞人rdquo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4하의 樂人 員數에 들어갈 수 있는 처지가 못 되는 자이다 그는 향리

에 거주하면서 매년 1개월씩 京師의 外樂에 가서 복무하는 기간 외에

는 傭賃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下吏의 員吏가 아

니면서 樂工의 職能으로 일반 요역 대신에 京師의 제사나 예락 행사에

나아가 給事하는 자이다 그래서 그의 복역도 職役인 셈인데 이러한

모습은 주례의 胥徒와 흡사하다 단지 胥徒가 員吏로서 봉록은 받는

것과는 다르다 양자가 모두 職役이지만 胥徒는 庶民在官者 이고 樂

人 講은 lsquo非吏인 職能人rsquo이다 그렇지만 양자 모두 개인적인 職能으로

관부에 給事하는 면에서는 상통한다 따라서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

부에 給事하는데는 員吏로서 복무하는 경우와 非吏로서 복무하는 경우

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Ⅴ lt走馬樓吳簡gt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복무

형태 및 그 성격

1996년에 호남성 長沙市 도심 우물에서 발굴된 lt吳簡gt은 총 17萬

餘 枚로 아직 그 일부만이 정리 해독되어 출간된 상태이지만 이미 출

간된 분량 가운데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의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자

료들을 많이 지니고 있다 孫吳 嘉禾 연간(232-238)의 여러 戶籍簿

내지 吏民簿 등에 吏와 給吏로 구분된 人名簿가 다수 존재한다 이 자

료들은 그간 명확하지 못하였던 吏役과 吏戶의 존재형태와 관부에 給

事하는 계층 및 그 職役의 실태를 파악하는데 획기적인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근간의 연구에서 여러 異見으로 그 문서가 지니

는 뜻을 파악하는데 상당히 혼란을 초래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전술한

職役의 전통과 여러 계층의 형태를 살펴본 성과를 참고로 하여 나름대

로 새로운 해석을 추구해보고자 한다

lt吳簡gt의 lt吏民人名年紀口食簿gt(竹簡(肆))에서는 각 里別로 里魁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5가 領하는 食口數를 吏와 民으로 구분하여 통계하고 있는데 그 일례를

다음에 든다

(A)

(이하 簡文 인용에서 內에 있는 字를 괄호 하여 표기함〕

集凡五唐里魁周領吏民五十戶 口食二百八十九人 (簡380)

其一百六十二人男 (379)

其一百卄七人女 (378)

其四戶縣吏 (377)

其二戶郡吏 (376)

其戶州吏 (374)

其五戶給新吏 (373)

其一戶縣卒 (372)

其一戶佃帥 (371)

이는 孫吳 嘉禾 연간 里別吏民口食簿인데 五唐里 50戶 가운데 일반 民

戶를 제외하고 州吏에서 佃帥까지의 戶를 따로 특기하고 있는 것에 의

하면 크게 民戶層과 州吏 이하의 吏층으로 양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

다 먼저 縣吏 이하를 이른바 세습 吏職戶인 吏戶로 볼 수 있는가 하

는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여러 異見이 제기되어 있는데 이 문

제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그런데 lt吳簡gt의 여타 戶籍簿나 戶口簡에

의하면 民戶를 제외한 縣吏 이하의 戶도 다시 縣吏 郡吏 州吏 軍吏 등

의 類와 맨 앞에 lsquo給rsquo字가 붙어 있는 계층의 類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즉 縣吏類의 吏 외에 其十二戶給縣吏下品 (壹5467)

其三戶給郡縣卒 (貳2318) 등과 같은 예들인데 그 職事나 給事

하는 관서의 명칭에 따라 多種의 명칭이 보인다 이를테면 給郡吏 給

縣吏 給州吏 給軍吏 給郡園父 給朝丞 給子弟 給驛兵 給鍛佐 給庫

吏 給縣卒 給度卒 給驛卒 給子弟佃客 給限田客 給佃帥 給常佃 給

家種客 給乞兒 給三州倉父 給養官牛 給習射 給私學 給官瓦師 給

亭復人 給亭雜人 給任師 給郡醫 給縣帥 給州私學 給新吏 給佃吏

給郵卒 給鹽兵 給關父 등이다 이렇게 앞에 lsquo給rsquo字가 들어간 계층을

일단 동일 계층으로 보아 lsquo給吏rsquo로 칭하고 縣吏 群吏 州吏 軍吏 등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6lsquo給rsquo이 붙어 있지 않은 계층을 lsquo吏rsquo로 칭하여 양자를 구분하고자 한다

lt오간gt에서 人名에 붙는 신분명은 크게 眞吏 某吏 給某吏 大男(大

女 民)의 4종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들은 그 표기상의 차이만으로도

일단 구분되는 존재라고 보이는데 현재 앞의 3종 신분명의 구분 문제

와 관련하여 몇 가지 다른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먼저 黎虎는 縣吏나

郡吏州吏 등의 吏가 侯家나 司隸校尉 또는 郡內에 소재한 전문 기

관 州郡 관내의 遠縣에 일정 기간 파견되어 給事하고 있는 자들을 칭

하여 給郡吏 등으로 칭하는 것일 뿐 그 신분은 本州 本郡 本縣의 吏

와 동일하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本郡의 郡吏가 곧 給郡吏이기

때문에 다른 계층이나 신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眞吏는 無職事

의 冗散官에 상대하여 쓰이는 용어로 실제 除授된 관원이라고 한다70)

黎虎와는 달리 양자를 다른 계층으로 보는 견해들도 제기되었다 먼저

韓樹峰은 給吏는 비록 吏의 名은 있지만 일반 백성으로서 잠시 吏의

職事에 종사하는 것일 뿐이고 혹 吏로 임명될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그 신분은 여전히 보통 백성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給吏와 구분하여

口算錢의 면제 특혜를 받는 州吏 郡吏 縣吏 등을 총칭하여 眞吏라 한

다고 하였다 즉 眞吏가 정식의 吏인데 비해 給吏는 일반민이며 일정

기간 만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給吏의

관부給事는 실제상 요역의 일종이라 한다 71) 한편 楊振紅은 동일인의

신분이 문서에 따라 다른 신분으로 등록되어 있는 점에 의거하여 이를

테면 給郡吏가 郡吏나 眞吏로 簡稱된 것이라 하고 眞吏나 給吏 모두

吏로 簡稱되며 州郡縣의 掾史職에 있는 자들로서 署長 佐官 등의 lsquo官rsquo

에 상대되는 자들을 지칭한다고 하였다 아울러 吏는 그 작위가 公乘

이면서 賦役 대상이고 漢魏시기에 吏職의 세습화가 이루어지면서 전문

70) 黎虎 說ldquo給吏rdquo -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社會科學戰線 2008-11) pp89

-94 說ldquo眞吏rdquo-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史學月刊 2009-5) p5071) 韓樹峰 走馬樓吳簡中的ldquo眞吏rdquo與ldquo給吏rdquo (吳簡硏究 2 武漢 崇文書局

2006) 韓樹峰王貴永 孫吳時期的ldquo給吏rdquo與ldquo給戶rdquo -以走馬樓吳簡爲中心 (吳簡硏究 3 2011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7적 吏戶인 眞吏가 출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吏가 본래 일반 서민

이었던 까닭에 公乘 이하의 서민과 합칭하여 吏民이라 한 것이며 삼

국시기 官과 吏가 구별된 연원은 漢代의 長吏와 小吏 내지 士와 庶民

의 구분에 있다고 한다72)다소 혼란스러운 견해들이고 용어상의 해석

문제가 겹쳐 있어 난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들 異見의 관건은 吏와 給

吏의 구분 문제 그리고 吏戶에서의 吏가 어떠한 吏를 가리키는가 하

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여러 견해에서 공통으로 들고 있는 lt吳簡gt의 다음 문서를 먼저 살

펴본다

(B)

廣成鄕勸農掾區光言 被書條列州吏父兄子弟伏處 人名 年紀爲簿

輒隱核鄕界 州吏七人 父兄子弟合卄三人 其四人刑 踵 聾 歐病 一人

被病物故 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 十二人細小 一人限田 一人

先出給縣吏 隱核人名 年紀相應 無有遺脫 若後爲他官所覺 光自坐 嘉禾

四年八月卄六日破莂保據(此簡無編戶)73)

이 자료는 광성향 勸農掾 區光이 작성하여 보고한 문서인데 廣成鄕 領

內 州吏7인의 父兄子弟 23인의 현황을 파악하여 嘉禾4년(235년)에 보

고한 내용이다 lt吳簡gt戶籍簿에서 州吏 등의 吏가 있는 戶는 그 州吏

가 戶人(戶主)으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 州吏7인이란 모두 그 戶의

戶人이다 이 현황 내역에 의하면 州吏7인의 父兄子弟 총합은 23인이

고 이 가운데 4인은 受刑 질병 중이며 1인은 物故 4인은 이미 관부

에 보내져 그 本主에 從事하며 관부에서 복무 중이다 12인은 細小 즉

소인이고 1인은 限田을 경작 중이다 이 限田이 lt吳簡gt의 lt吏民田家

莂gt 등에 보이는 lsquo二年常限rsquo의 田으로 보아 侯家의 田이나74) 屯田을75)

72) 楊振紅 吳簡中的吏 吏民與漢魏時期官 吏的分野 -中國古代官僚政治社會構

造硏究之二 (史學月刊2012-1)73) 侯旭東 三國吳簡兩文書初探 (歷史硏究 2001-4) p172에서 轉引

74) 入都鄕嘉禾二年步侯還民限米一斛 (5-1556) 其卄六斛民還黃龍年臨湘侯

限米 (602017)

75) 黃龍元年文入郡屯田民吳平斛米一百六斛二斗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6227) 其三斛五斗郡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8吏民에게 分給하여 佃作케 한 田으로 보는 것이 일반이다 그 경작자

는 그 田地(佃地)를 국가로부터 할당 받아 의무로 경작하기에 佃民과

같다 그 佃民에는 諸吏와 일반 民戶가 다 포함되고 있다76) lt吏民田

家莂gt에서 그 限田이 lsquo二年常限rsquo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그 의미에 대해

佃作기간 내지 佃種權이 2년으로 한정되어 있어 계약 기간이 지나면

배속되는 田地가 바꾸어지는 방식이었다는 견해가 있고77) 반면에 佃

地의 경작 기간이 아니라 地租額을 2년간 固定하는 것을 말한다는 견

해가 있다78) 사실이 어느 쪽이든 吏戶의 식구 가운데 일부는 국가의

농지를 佃作하고 地租를 납부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 액수가 漢代

사유지에 대한 조세보다 높다 같은 문서에는 租米 뿐 아니라 동시에

畝當 布2匹와 錢70-80까지 징수되고 있다 따라서 二年常限田의 分給

과 佃作은 受惠라기 보다는 노동력의 징발이고 耕作의 賦課로 보는 것

이 마땅하다 于振波가 常限田의 분급 액수를 정의하길 lsquo强制性的 生産

定額rsquo이라79) 본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 이어 1인은 先出給縣吏 인데

먼저 給縣吏로 보내졌다는 의미이다 先給吏의 사례는 嵩男弟恭年十

九先給州吏 (參1450) 등 몇 개가 더 보인다 이렇게 해서 총 23인의

食口 현황이 명료하게 보고되고 있다 그 내역에 의하면 州吏의 식구

는 受刑중인 자 질병자나 小人을 제외하고는 모두 관부에 給事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1인의 先出給縣吏 와

이미 관부에 보내져 本主 따라 從事하며 관부에 복무 중이라는 4인은

( 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 ) 내용상 모두 이미 관부에 보내져 현재

掾利焉黃龍理年屯田限米 (2157)

76) 于振波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南都學壇 24 2004年 第1期 湖南大

學 20041) p30 이 글은 앞에 든 中國社會科學院硏究生員學報 2004-1과 같

음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形成與演變 -談長沙

走馬樓簡牘札記之六 (鄭州大學學報 2001-1) 77) 張福亞 也談lt嘉禾吏民田家莂gt中ldquo二年常限rdquo田的函義 (首都師範大學學報

(社會科學版) 142期 2001-5) p8

78) 高敏 lt吏民田家莂gt中所見ldquo餘力田rdquo ldquo常限rdquo田等名稱的函義試釋 (鄭州大學

學報(社會科學版) 33-5 20009)79) 于振波 앞의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p12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9給事 중인 것은 마찬가지인데 어떠한 차이가 있어 다른 항목으로 구분

하여 기재한 것일까 이것은 바로 給縣吏와 縣吏의 차이를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후술) 州吏7인의 食口 23인의 현황 名簿를 작성하여 면밀

히 조사 보고하게 함으로써 그 遺脫을 막고 있는 것에 의하면 州吏 軍

吏 群吏 縣吏 등의 食口는 여타 일반 민과는 다른 賦役체제 아래 놓여

있는 계층이다 또 軍吏의 父兄子弟에 대해서도 그 食口簿를 따로 작

성하여 관리하고 있다

集凡中鄕州軍吏四人父(子)兄弟三人 中(參3012)

集凡南鄕領軍吏父兄弟合十九人 中(參 464)

이러한 사례들은 吏가 있는 戶는 그 食口들까지 포함하여 吏가 있는

戶 즉 吏戶로서 별개로 관리되고 그 성원은 모두 吏戶의 役 내지 賦

役체계에 들어가는 것임을 말해준다

위와 같이 州吏 縣吏 등 吏戶의 戶口簿는 그 食口 가운데 州吏 縣吏

등 그 吏인 자가 맨 앞에 戶人으로서 위치하지만 給吏는 戶人이드라도

앞에 위치하지 못한다

小武陵鄕嘉禾四年吏民人名妻子年紀簿(壹101533)

吉陽里戶人公乘張惕年卄八算一給縣吏(壹1018232)

吉陽里戶人公乘廖裕年卄七算一給郡吏(壹1017525)

高遷里戶人公乘黃毛年卅四算一給軍吏(壹10306)80)

또한 同 戶籍簿에 縣吏 州吏 등은 아래와 같이 맨 앞에 위치하여 일반

민이 아님을 명기하고 있지만

縣吏鄧橎年卄七 璠()妻大女金年卄一 算 (貳 1729)

州吏蔡區年卅二 區妻大女年卄七 算 (貳 1822)

軍吏朱謙年卅五 謙妻大女壹年卄六 算一 (貳 1723)

80) 인용된 4簡文은 凌文超가 재정리 조립하여 올린 글(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

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型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의

lt表二gt(pp25-37)에서 인용함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0給吏인 경우는 일반민을 가리키는 lsquo民男子rsquo로 기재되어 있다

民男子蔡若年卅七給驛兵 若妻大女四年卅算一(貳 1781)

民男子蔡喬年六十二給驛兵 喬妻大女典年卅八 (算) (貳1903)

따라서 위와 같은 吏民簿에서 民戶를 제외한 州吏나 郡吏 縣吏 軍

吏가 吏戶라면 給州吏 給郡吏 등 여러 職事의 관서에 給事하는 수십

종의 다양한 給某吏 신분은 전술한 庶民在官者 나 lsquo非吏이면서 관부

에 있는 자rsquo와 매우 유사하거나 일치한다

여기에서 吏戶나 吏役의 존재 여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는데 黎虎

는 삼국시기 吏戶의 존재를 인정치 않으나81) 高敏과 孟彦弘은 그 존

재를 인정하며 특히 高敏은 吏役制도 漢末三國시기에 확실히 형성되

었다고 한다82) 韓樹峰王貴永은 후한말 孫吳시기에 卑賤化가 이루어

지면서 吏戶의 萌芽가 이루어졌으며 lt吳簡gt에서의 給吏는 吏가 아니

고 民에 속한다고 한다83) 이러한 여러 異見의 배경에는 吏로 칭해지

는 계층에 전술한 바와 같이 다시 두 계층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계층

이 있는데 그 면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

각한다 양자의 구분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자료를 든다 속한서 百官3 大司農條의 注引 漢官에 丞一人 三百石 員吏四十人 其十一人

斗食 十七人佐 七人學事 五人守學事 皆河南屬縣給吏者 라 하였다

대사농승 속하의 斗食 이하 員吏 40인을 모두 하남군 속현에서 조달된

吏로 충원한다는 것이다 즉 후한 수도 낙양 인근인 하남군 속현에서

吏員을 차출한다는 것인데 斗食 佐 學事 등의 員吏는 해당 분야의 職

81) 黎虎 ldquo吏戶rdquo獻疑 (歷史硏究 2005-3) pp53-6882)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形成與演變 mdash談長沙走

馬樓簡牘札記之六 (鄭州大學學報 2001-1) p61孟彦弘 吳簡所見ldquo事rdquo臆說 mdash從ldquo事rdquo到ldquo課rdquo (吳簡硏究 2 2006) pp205-208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爲役之制 (魏晋南北朝隋

唐史資料 24 2008) pp8-2183) 韓樹峰 앞의 走馬樓吳簡中的ldquo眞吏rdquo與ldquo給吏rdquo pp33-38 韓樹峰王貴永 앞

에 든 孫吳時期的ldquo給吏rdquo與ldquo給戶rdquo -以走馬樓吳簡爲中心 p99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1事를 처리할 수 있는 職能者여야 하기 때문에 하남군에서 이러한 職事

로 근무하고 있는 員吏를 파견하거나 일반민 가운데서 새로 선발하여

파견 조달하였을 것이다 상하급 관부끼리 상호 관리를 파견하여 일정

기간 복무하게 하는 경우에 조달 지원한다는 의미로 動詞語로서 lsquo給rsquo을

쓸 수 있고 이러한 사례는 문헌에 이미 자주 보인다 위에 든 lsquo屬縣給

吏者rsquo도 그 한 실례이다 이러한 경우는 본래 吏의 신분이 여타의 관부

에 일정기간 출장 근무하는 것일 뿐인 까닭에 그 신분은 그대로 吏일

것은 자명한 일이다 즉 縣吏가 郡府에 출장근무 중일 때 그 신분은

그대로 縣吏이고 해당 名簿에 縣吏A가 여타 名簿에서 給郡吏A로 표

기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동일인이 名簿에 따라 신분명이 달리 기

재되어 있는 사례가 약간이나마 보이고 있는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된다(후술) 그런데 給州吏 給郡吏 給縣吏 등 수십종의 給吏에는 이런

경우가 아니고 lsquo州吏 등 諸吏에 배속되어 給事 중인 非吏로서 관부에

복무 중인 民rsquo이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給某吏로 표기된 자들은 lsquo給rsquo

이 붙지 아니한 州吏 郡吏 縣吏와는 달리 lsquo民男子rsquo로 표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給州吏는 非吏로서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그 관서에서 하나

의 職役의 형태로 복무 중인 民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들은 실은 民으로서 관부 업무상 필요한 노역에 동원되는 셈이지만

일부는 여러 관서의 하급 실무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전문의 職能을

갖춘 자들도 있다 縣吏 州吏의 職事 뿐 아니라 앞에 든 수십 종의 전

문 분야 부서별 給吏의 명칭은 그에 상응하는 사례들이다 정부는 이

들이 본래 일반 서민이지만 관부 운영의 필요상 특별 관리를 하지 않

으면 안 된다 그 결과 후한의 여러 사례에서 보듯이 대개 그 職을 세

습토록 하고 이들을 일반 民과 구분하여 칭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lt吳簡gt에 忠子男仲年十五 任給吏 (參 1805)라 한 것은 給吏가 民

에서 차출되어 임용되는 독립 계층임을 말해준다 또 草言府大男吳杭

不是卒子弟不應給卒事 八月卅日兼兵曹掾潘(因)()白(柒總49968)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卒의 子弟가 아니면 給卒事에 복무하게 할 수

없었다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2그들이 본래 吏의 신분이 아닌 까닭에 바로 吏로 칭하지 못하고 그

吏에 배속되어 給事하는 자 또 그 戶의 뜻으로 給某吏 給戶와 같은

칭호가 나오게 된 것으로 본다 이 칭호는 사실 관리와 民 사이에 있

는 이들 계층의 성격을 상당히 잘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이 給吏 계

층의 부담이 커지고 그 賤役 부담자로서의 성격이 뚜렷해감에 따라 給

吏나 給戶가 吏戶나 吏家로 칭해지고 給吏나 給戶의 役이 吏役으로

칭해진 것인데 그렇게 간략한 형태로 칭하여도 이미 관리의 吏와 충분

히 구분되는 것으로 사회가 인지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의하면 lt吳簡gt에 보이는 眞吏도 사실 眞吏라 할 수 없는 給吏

에 대비하여 쓰이게 된 용어가 아닐까 한수봉왕기영은 眞吏란 給吏

에 대비된 용어라 하고 lt吳簡gt에서 給吏가 口算 납부 의무가 있지만

眞吏는 면제되며 정식의 吏이고 신분성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羅新도

眞吏에게 口算錢이 면제되고 있다고 하였다84) 眞吏에 대한 여타의 견

해도 있지만85) 給吏와 관련하여 참고할 만 한 지적이다 또한 lt吳簡gt

에서 其七戶給郡吏 下品(壹5447) 其十二戶給郡吏 下品 (壹

5677) 其十二戶給縣吏 下品 (壹5467) 其一戶給軍吏 下品 (參

430336) 給度吏 下品之下 (5653) 등에서와 같이 給吏는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여서 평균의 民戶 보다 더 빈천한 계층인 점도 그

들이 관부에 給事하는 吏라기 보다는 非吏인 民으로서 民의 일반 요역

에 대신하여 관서에 給事(給役)하는 자들이되 그 일부는 職能에 따라

세습하여 관련 관서의 吏에 배속되고 給事 복무해야 하는 예속된 신

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lt吳簡gt에는 하나의 戶人을 首로 하고 그에 배속된 듯 한 여

러 신분의 戶數와 신분명을 기록한 簿가 있다 lt走馬樓吳簡竹簡gt에

84) 羅新 ldquo眞吏rdquo新解 (中華文史論叢 2009-1) p129 단지 그는 眞吏란 非華

夏系 출신의 編戶化된 토착 사회를 관리하는 인원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85) 이를테면 黎虎는 眞吏란 非眞吏에 대한 대칭이 아니고 실제로 除授 받은 관

원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說ldquo眞吏rdquo -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史學月刊2009-5) p5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3다음의 예들이 있다

-1 里戶人公乘縫繒年卄五苦腹心病 (5443)

- - - - - - -

其七戶給郡吏下品 (5447)

- - - - - - -

其一戶給州吏下品 (5452)

-2 平樂里戶人公乘鄭張年五十 (5460)

- - - - - - -

其十二戶給縣吏下品 (5467)

-3 東陽里戶人公乘扶侈年十四 (5471)

其二戶給庫吏中品 (5472)

- - - - -

其一戶給縣卒下品 (5474)

-4 宜陽里戶人公乘區歸年卄二眞吏 (8962)

- - - 給州卒 (8965)

- - - -

年六十一給驛兵 (8976)

右尙書吏三(戶) (8517)

孫吳에서 公乘의 작위 소유자는 일반민 중에서도 상당히 많지만 漢

代 民爵의 최고위 爵인 公乘(第8等)의 戶人에게 보통 여러 신분의 수

십호를 배속시키고 있다 그 중에 10戶 내외의 給吏가 배속되어 있다

또한 이들 戶人은 배속된 戶가 납부한 租稅를 거두어들이고 이를 일괄

해서 관부에 납부하고 있다 먼저 각 戶로부터 受領한 내역은 문장 앞

에 lsquo領rsquo으로 표기하고 受領한 액수를 총합하여 관부에 납부한 내역은

앞에 lsquo入rsquo으로 표기하고 있다

里戶人公乘曾(年五十三)妻年卅九 (簡 1631-1652)

- - - - - -

領二年郵卒限米田六頃五十畝收限米二斛合爲吳平斛米一千三百斛

其三百十四斛五斗府州中倉關邸閣李崇吏黃諱潘慮 中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4領二年民田三百七十六頃六十五畝二百卅八步畝收米一斛二斗合四萬

五千一百九十九斛一斗 - - - - - - - - -

常遷里戶人公乘李漠年卅七 妻大女思年卅一

入嘉禾二年郵卒限米七百九十八斛二斗八升

入嘉禾二年佃帥限米九百五十五斛八斗七升

- - - - - - -

이 戶人은 대부분 公乘이고 노비를 소유하고 있으며 配屬된 戶의

徵稅와 총괄 납입의 업무에 복무하고 있는데 이는 후대 富戶에게 差役

복무를 부과한 사정과 비슷한 면이 있다 후대 差役제도와 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1인의 戶人을 賦稅 징수 납입의 책임

자로 하여 향리에서 이 방면의 기층단위로 운영하고 있는 셈인데 戶籍

簿와는 그 내역과 용도가 다른 별개의 독립 帳簿이다 그런데 劉家軍

은 限米 납부자 신분인 私學還民叛士吏卒 등이 모두 流民이

며 그 戶人에게 依附하고 있는 자들이라 하고 국가가 그 依附관계를

승인해주면서 그들이 경작할 토지를 戶人에게 分級해주고 그들이 납

부하는 地租인 限米도 戶人의 이름 아래 등기한 것이라고 보았다86)당

시 嘉禾연간에 전란으로 長沙 임상현 지역에 流民이 많이 流入되었을

가능성은 이미 여러 연구에서 지적된 바 있고 還民 叛士 등 일부는

流民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限米와 屯田限米 납부자 신분에는

이밖에 大男 州倉吏 吏帥客 金民 佃吏 郵卒 衛士 傳卒 子弟 佃卒

復客 新吏 兵客 故師子弟 兵師士 故帥客 後客 船師 司馬 士

등 거의 전 계층을 망라하고 있는데 이들 중에 유민이 있을 수 있으나

모두 流民 출신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새로 屯田이나 侯國의 田을

경작시키기 위해 유민 뿐 아니라 在地의 吏民에게 할당하여 佃作으로

운영하는 것은 여러 문헌자료에도 있고 lt吳簡gt의 lt吏民田家莂gt은

주로 在地의 호적에 올라 있는 吏民의 佃作 내역 장부이다 또 lt吳

簡gt 草言府部諸鄕吏區光等招誘諸限田客八十三人首見事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曹史趙野

86) 劉家軍 論lt走馬樓吳簡竹簡gt中 ldquo限米rdquo的性質 (中國社會經濟史硏究 2005-2) p87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5白 (柒總 49782)에 의하면 당시 長沙 지역에서 鄕吏에 의해 限田客

83인을 招誘했다는 성과를 보고하고 있는데 이와 같이 佃作 인력의 확

보에 애쓰는 상황에서 전술한 바와 같은 본래 限田의 佃作 의무를 지

고 있는 在地 吏戶의 家內 성원이 그 佃作者 명단에서 제외될 리가 없

그래서 簡文(B) lt州吏父兄子弟年紀簿gt에서 吏戶의 家內 父兄子弟

인력 23인 가운데 lsquo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rsquo과 lsquo一人先出給縣吏rsquo가

관부에 급사하는 給吏에 해당하고 lsquo一人限田rsquo은 限田의 佃作에 복무하

는 자이다 바로 이어 인용하는 孫休의 詔文에서 吏家의 어려운 사정

에 대해 ldquo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이미 限米를

납부하였는데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rdquo라 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전반부는 給吏로서 복무

하는 것이고 뒷부분은 限田 佃作 복역을 말함이다 즉 한 吏戶의 父兄

子弟 가운데 일부는 전자에 복무하고 일부는 후자에 복무한다 똑 같

은 관부 내지 국가의 역에 복역하는 것이지만 給吏는 분명히 吏(分署

의 담당 吏 州吏)에 給事하는 자라는 점에서 給吏로 칭하여 여타의

복역과 구분한다 그리하여 그 給吏가 결혼이나 계승으로 하나의 戶를

이루면 簡文(A)에서와 같이 某里의 戶籍簿上에서 里의 총 戶民數 아래

에 lsquo其四戶給縣吏rsquo와 같은 형식으로 戶를 本으로 한 給吏로서 명기된

다 그런데 一人의 給吏가 아직 戶를 이루지 못하고 한 吏戶의 成員

(父兄 子弟)으로서 있는 상황이라면 그 戶人의 현재 신분에 의해 그

戶가 표기되었을 것이다

이 문제와 직결되는 다음 기사를 살펴보자 孫權의 제6子로 孫亮에

이어 즉위한 孫休는 그의 즉위 年인 영안원년(258)에 다음과 같이 詔

하였다

「諸吏家에 5인이 있으면 (그 가운데) 3인은 겹쳐서 役에 복무하고 있

다 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이미 限米를 납부하

였는데 군대가 출정하면 또 종군함에 심지어는 家事를 돌볼 자도 없게

되는 것을 짐은 매우 애처롭게 생각한다 그 5인 가운데 3인이 役에 복무

하고 있다면 그 父兄이 (家에) 머물고자 하는 것을 허용해주어 1인을 (役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6에 나가지 않고) 머물게 하고 그 限米를 면제해주며 군대가 출정해도 종

군하지 않도록 하라 (삼국지 권48 吳書 孫休傳 永安元年條)87)

孫休는 즉위 전 재야에 있을 때 시골 생활을 보냈던 바가 있어 그

들의 참상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吏家(吏戶)가 지는 과중한 부담

은 곧 그들이 그만큼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 吏役이 賤視化 되고 厮役으로 인지되고 있던 배경을 위의 詔文은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lsquo吏家rsquo의 식구는 여러 방면의 복무를

중복하여 부담하고 있다 그 가운데 限米 납부 의무는 lt吳簡gt에 의하

면 국가에서 佃作케 하여 운영하는 限田 경작에 대한 租로써 납부하는

것이다 즉 전술한 lsquo二年常限rsquo田을 이 限田으로 보아 그 地租를 限米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다88) 단지 于振波는 限米란 二年常限田과는 관

계가 없고 屯田 경작에 대한 조세인데 衛士 郵卒 傳卒 등의 상비병

과 토지가 없는 수공업자 외지에서 수학하기 위해 온 私學 이탈하였

다가 새로 돌아와 附籍된 還民에게 軍屯이나 民屯에 종사하게 하고 일

부의 부세와 요역을 면제해주면서 限米를 납부하게 한 것이라 한다89)

그의 동일한 글에서 여타 사항에 대해 필자와 일치한 부분에 대해서는

앞에서 찬동한 바 있지만 이 부분에는 수긍하기 어렵다 lt走馬樓吳

簡竹簡gt에는 限米 납부자로 기재된 신분에 전술한 바와 같이 많은

신분이 망라되어 있고 孫休傳에서 말하는 吏戶가 일부 상비병이나 귀

환민 私學등에 한정한 것이 아니고 吏戶 전반의 형편을 들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lt吏民田家莂gt에서 佃田의 총수는 二年常限田과 餘力

田으로 구성 내지 구분되어 있다 즉 常限田은 餘力田에 對比되는 용

어이다 그리고 양자의 畝當 租額이 嘉禾4년 民의 경우 12斛 0456

87) 詔曰 ldquo諸吏家有五人 三人兼重爲役 父兄在都 子弟給郡縣吏 旣出限米 軍出

又從 至於家事無經護者 朕甚湣之 其有五人 三人爲役 聽其父兄所欲留 爲留

一人 除其米限 軍出不從rdquo」

88) 앞에 든 高敏의 글 lt吏民田家莂gt中所見ldquo餘力田rdquo ldquo常限rdquo田等名稱的函義試釋

이래 대부분 이 견해에 따른다

89) 于振波 앞에 든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7斛 州吏의 경우 0586斛 0456斛으로 차이가 있다90) 무엇보다 앞에

서 살펴 본 lt오간gt lt廣成鄕州吏父兄子弟伏處 人名 年紀爲簿gt에 기재

된 州吏의 食口 현황 내역은 孫休傳에서 吏戶의 식구 사정을 말하고

있는 내역과 같은 모습을 전하고 있는데 91)전자에서는 限田이라 하였

고 孫休傳에서는 限米라고 한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限田에 대해 징

수하는 것이 곧 限米이다 따라서 限田이란 二年常限田의 簡稱일 것으

로 본다 lt吳簡gt의 lt吏民田家莂gt에는 이들 限田戶의 佃田額과 그에

대한 租賦稅 납부 內譯이 있다 이 戶는 州郡縣吏 등으로 담당 吏職에

給事해야 하고 從軍도 해야 한다 이러한 양상은 분명히 역의 부담이

중첩된 것으로 일반민보다 더 과중하다 租額인 限米 납부액도 일반민

의 사유지에 대한 租額보다 비율이 높았다

그런데 중요한 사항은 첫째 이렇게 과중한 부담이 중첩된 吏戶의

일면을 보여주는 lt吏民田家莂gt에서 佃作吏民의 戶人(戶主) 신분을 보

면 大男大女州吏群吏縣吏軍吏州卒郡卒縣卒復民士

등으로 吏와 民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들 吏民 모두 佃作

의 의무와 함께 地租로 米穀 布 錢을 납부해야 하고 從軍의 役이 있

으며 그리고 대량의 lt오간gt에 다량으로 보이는 子弟 및 給子弟가 곧

吏의 子弟로 파악된 것에 의하면92) 그들이 납부하는 子弟限米의 부담

도 吏戶의 부담이 된다 또한 lt오간gt에

郡吏公乘李年卅二 算一 (貳2460)

侄子年卅九給子弟 妻大女衷()年卄六 算一 (貳1754)

吉陽里戶人公乘張惕年卄八 算一 給縣吏 (壹1018232)

등의 많은 簡文에서 吏와 그 子弟 給吏들에게 算賦도 부과되고 있다

90) 앞에 든 張福亞 也談lt嘉禾吏民田家莂gt中ldquo二年常限rdquo田的函義 p11의 表1

91) 이에 대해서는 앞에 든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

形成與演變 mdash談長沙走馬樓簡牘札記之六 pp62-63 참조

92) 孟彦弘 앞에 든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爲役之

制 pp1-7 子弟는 吏의 子弟 給子弟는 관부의 給事에 差出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8단지 吉陽里戶人公乘鄭龍(龍 下에 田)年卅六算一給州吏復 (壹3323)

과 같은 lsquo給州吏復rsquo 즉 給州吏이면서 算賦가 復除된 경우가 있는데 이

에 의거하여 給吏는 算賦에서 復除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93) 그러나

위에 든 簡文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부분의 給吏가 lsquo算一rsquo로 기재

되어 있고 소수만이 lsquo復rsquo으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復除되는 경우는

특별한 사정이 있어 그 給吏에게만 특혜를 준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

으로 생각한다 참고로 lsquo腫兩足rsquo자나 lsquo刑兩足rsquo자인 民戶의 戶人도 算賦

가 면제되지 않고 있으며94) 大女도 算賦 납부 의무가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吏戶와 民戶가 지는 국가에의 부담은 吏戶가 각기의 吏職

에 복무하고 일반민호는 그러한 吏職에 있지 않다는 정도 외에는 별다

른 차이가 없다 물론 일반민은 吏職의 役 즉 吏役이 없는 대신에 일

반요역에 복역해야 하고 吏戶는 일반요역에서 면제된다 그러한 사실

을 말해주는 자료로 lt오간gt 戶口簿에 里別로 定應役의 戶數 즉 일반

요역에 응당 복역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진 里別 戶數 문서가 있다

其一百卅八人男 (參431548)

其八十一人(女) (參431144)

其一戶給軍吏 下品 (參430336)

其五戶民 (下)品 (參430235)

其七戶女戶不任調 下品之下 (參430134)

其領役民卅七戶 (參430033)

이 里別 戶口簡은 凌文超의 編次 정리 작업에 의하면 新成里의 總

結簡에 해당하는데95)여기서 일반민호수는 생략하고 給軍吏나 調에서

면제되는 女戶 등의 수만을 기재한 것은 맨 아래의 定應役 戶數를 算

出하는 근거를 기록하기 위함이다 즉 일반민호 외의 給吏 등의 戶數

93) 凌文超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型

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 p5494) 高平里戶人公乘黃高鼰五十二算一腫兩足 (貳 2903) (大)成里戶人公乘何軼年

五十五算一刑兩足 (參626736)

95) 凌文超 앞에 든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

簿rdquo的類型與功能 p40과 lt表3gt 중 p45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9가 총 13戶이고 이들을 제외한 定應役의 戶數가 37호란 뜻이다 그래

서 新成里의 총 호수는 50戶였음을 알 수 있다 新成里의 총 口數 219

명은 lt오간gt의 戶當 口數 평균이 대략 45명 정도임을 감안하면 486

戶이고 50戶와 근접한다 따라서 給軍吏 등 13호는 定應役에서 면제되

는 戶임을 알 수 있다 또 다음 戶口簡은 앞부분 里의 총 口數가 결락

되어 있다

其一戶給朝丞 (貳170263)

其二戶給郡園父 (貳170162)

其五戶尫嬴老頓貧窮女戶 (貳170567)

定應役民卄戶 (貳170466)

여기서는 給朝丞1戶 給郡園2戶 절름발이 노인 빈궁자 女戶 등 5

戶가 役에서 면제되고 그 나머지 20戶가 定應役民이 되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즉 給吏는 定應役에서 면제되고 있다 따라서 給吏는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부에 給事하는 것이기에 당연히 일반요역에서 면제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給吏에도 전술한 바와 같이 吏戶의 가속인 경우가 있고 일

반민 중에 차출된 경우가 있는데 전자의 경우는 관부에서 필요할 때

마다 고정적으로 차출되었을 것이며 일반민의 경우는 본래는 일시적

한시적으로 징발되었을 것이지만 여러 簡文에 戶人으로서 給吏인 자가

있는 것에 의하면 점차 전자의 경우와 같이 吏戶와 마찬가지로 給吏戶

로서 고정적으로 차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定應役이 戶를 부과

단위로 삼고 있다는 점 또한 吏戶의 家屬이 하나의 徵役 단위로서 운

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도 吏戶의 실재성과 그 독립적인

신분성을 말해준다 더구나 일반 민호와 구분된 吏戶 名籍(lsquo吏名籍rsquo)의

존재가 다음의 簡文에서 확인된다

諸鄕謹列郡縣吏兄弟 幷攴 吏名籍 (13-7638)

吏戶의 막중한 부담은 그 家屬의 叛走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0를테면 縣吏 毛章의 15세인 弟(壹 7865) 縣吏 毛車世의 49세인 父(壹

7868) 群吏 黃의 13세인 弟(壹7893) 群吏 谷漢의 29세인 兄子

(壹7905)가 嘉禾 2년에서 3년 사이에 叛走하였다 후한 말 陳寔은 어

려서 縣吏가 되어 항상 厮役에 給事하였는데( 常給事厮役 ) 후에 都亭

의 佐가 되었다96) 그리고 郭太는 대대로 집안이 빈천하고 어려서 고

아가 되었는데 모친이 縣廷에 給事하게 하려 함에 말하길 ldquo대장부가

어찌 斗筲의 役에 處해 있을 것입니까rdquo라 하고 마침내 떠났다97) 당

시 이미 吏役이 厮役으로 인식되어 있었고 斗筲의 役 즉 100석 이하

인 斗食의 位에 처하였음을 말해준다 즉 같은 吏이더라도 100석 이상

인 掾史와 그 이하 사이에는 차등과 구분이 있었다(후술) 그렇지만 이

두 경우는 모두 吏가 되는 것이 선택의 길이었기 때문에 吏戶에 속한

자들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吏戶가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던

것에 비해 이 두 경우는 선택사항이었다 斗食에게도 매우 소액이지만

月俸이 지급되었기 때문에 빈천하거나 고아가 되어 생업을 위해 吏職

을 선택한 것이다 나이도 어리고 집안의 세력 배경도 없는 가운데 吏

가 된 것에 의하면 斗食의 최하단에 속한 吏였을 것이며 이들이 給吏

가 아니고 吏로 칭해진 것은 일반요역 복무에 대신하여 징발 내지 차

출된 경우가 아니고 吏職에 임명된 것이기에 당연하다

縣吏 등의 諸吏役이 厮役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무엇 보다 그 雜

役的인 吏役의 과중함 때문이다 후한 lt張景碑文gt에서 14鄕의 正을

調發하여 勸農의식에 소요되는 土牛 제작에 육칠십만전이 들어가 吏와

正이 매년 患苦에 처함에 男子(庶民) 張景이 매년 그 비용을 출연하여

土牛를 義作해주겠다 하고 그 대신 자신을 縣吏 列長 伍長에 임

용되지 않게 해줄 것과 小繇 징발을 면해줄 것을 청하고 있다98) 즉

96) 후한서 권62 陳寔傳에 (陳寔)少作縣吏 常給事厮役 後爲都亭(刺)佐

p2065

97) 후한서 권68 郭太傳에 (郭太)家世貧賤 早孤 母欲使給事縣廷 林宗曰 ldquo大

丈夫焉能處斗筲之役乎rdquo 遂辭 就成皐屈伯彦學 三年業畢 博通墳籍 p2225

98) 府告宛 男子張景記言 府南門外勸〔農〕土牛 調發十四鄕正 上賦

斂作治 幷土人 犂 耒 卄 蓎 屋 功費六七十萬 重勞人功 吏正患苦 愿以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1서민이었던 張景은 거액의 자금을 출연하면서까지 縣吏 등의 吏役과

小繇의 복역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있다 그는 아직 非吏였지만 吏役에

언제든지 차출될 수 있었고 그 吏役은 매우 번거롭고 힘든 것이었음

을 알 수 있다 단지 張景과 같은 서민이 縣吏가 되어 吏役에 差出되

는 경우 바로 lt오간gt에서와 같은 吏戶가 되어 그 가속이 모두 吏役의

범위에 들어가게 되는지는 不明이다 推斷이지만 世戶로서의 吏戶와

함께 일시적으로 차출되어 일정 기간 만 복무하는 非世戶로서의 吏戶

가 공존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요컨대 lt오간gt과 문헌자료에 보이는 吏戶와 給吏의 면모들은 앞에

서 검토한 胥徒와 lt庶民在官者gt 내지 徒御 導從役人 등과 일맥상통

하는 면이 있다 孫休傳이라든가 lt오간gt에 빈출하는 吏戶 吏民에서의

吏는 500石 이하인 吏 중에서도 200석 이상의 長吏級을 제외한 下吏

즉 百石 이하의 吏를 가리키고 給吏는 吏가 아니되 관부에서 일정 기

간 여러 분서에 勞役으로 복무하는 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즉

庶民在官者 와 상통한다 특히 그들에게 부과되었던 賦稅役의 내역에

서도 위에서 검토한 여러 職役 계통 신분이나 계층의 예와 거의 비슷

하다

孫休傳에서 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라 한

것은 吏家의 父兄은 都에서 州郡縣의 吏로 복무한다는 뜻이고 나머지

3인의 자제는 郡縣吏에 給事한다는 뜻이다 즉 lsquo郡縣吏에 給事함( 給郡

縣吏 )rsquo이란 子弟3인이 郡縣吏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郡縣吏에 下屬되

어 그 업무에 給事한다는 뜻이다 위의 廣成鄕의 lt人名年紀簿gt 簡文

에서 lsquo先出給縣吏rsquo도 州吏7家의 식구 가운데 먼저 縣吏의 업무를 보좌

하기 위해 차출되어 나간 것을 뜻한다 여기서 말하는 郡縣吏는 주로

掾史職으로 사무 업무 중심이고 그 업무를 노동력으로 보좌하는 인력

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lt오간gt의 도처에 諸吏의 사례로써 諸曹倉

吏庫吏監運掾關邸閣船師田戶曹史 등 수십종의 職名이 보이

家錢 義作土牛 上瓦屋 欄楯什物 世世作治 乞不爲縣吏 列長 伍長 徵發小

繇 (高文 漢碑集釋 開封 河南大學出版社 1997 p227)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2는데 대부분 그 업무 처리에 노동인력이 필요하다 십 명 내외의 掾史

員吏 만으로는 사무나 문서작성 관리 업무 이외에는 수행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 인력을 吏戶의 식구로부터 자동으로 差役시키는 시스템이

漢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었음을 위 孫休傳의 기사는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이들 吏家의 식구 현황 파악은 관부에서 항상 필요

로 하고 확보해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lt오간gt의 여러 문서는

그러한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東鄕勸農掾殷連被書條列州吏父兄人名年紀爲簿

輒科核鄕界 州吏三人 父兄二人刑蹱叛走 以下戶民自代 謹列年紀 以

(已)審實 無有遺脫 若有他官所覺 連自坐 嘉(禾)四年八月卄六日破莂

保據 (J22-2543)

여기에서 담당 鄕界의 州吏3인 가운데 그 父兄2인이 受刑과 叛走로

비게 됨에 下戶의 民을 징발하여 바로 충당시켰다는 것이다 이 以下

戶民自代 에 대한 해석에서 下戶를 고용하여 자신을 代理케 한 것이라

는 견해가 있는데99) 그렇다면 戶人인 州吏가 자신의 식구 결원을 책

임지고 직접 下戶를 고용한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해당 州吏의 부담

이 너무 크게 되어 당시 下戶가 자동으로 보충되는 시스템으로 운영된

것일 가능성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諸家의 견해 모두 不明

임을 인정하고 있다100) 어쨌든 吏戶의 노동력을 신속하고 철저하게

보충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은 吏戶 전체의 식구가 관부에

예속되어 있고 세습화 된 상태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단지 孟彦弘은

이 자료를 통해 당시 吏戶의 家屬이 모두 吏였음을 말해준다고 하였으

나101)그렇지 아니하고 吏의 가속에 吏도 있을 수 있지만 아직 吏가

아니고 吏를 노동력 지원으로 보조해주는 給吏도 있고 그 給吏는 非

99) 이 점에 대한 정리는 王素 長沙吳簡勸農掾條列軍州吏等人名年紀三文書新探

(魏晋南北朝隋唐史資料 25 2009) p9의 注 11) 참조

100) 이를테면 孟言弘 앞의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

爲役之制 p16

101) 위의 글 p1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3吏로서 관부에 給事하는 자이며 이런 면에서 전술한 庶民在官者 내

지 lsquo非吏이면서 관에 있는 자rsquo lsquo官과 民 사이rsquo lsquo lsquo半官 半民rsquo lsquo踐更小史

(小吏)rsquo(續漢書輿服志) 등과 상통한 계층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吏戶에 포함되지 않는 給吏가 있었다 吏戶와 給吏戶가 구분되

고 있음은 lt吏民人名年紀口食簿gt의

其七戶給郡吏下品 (壹5447)

其十二戶給縣吏下品 (壹5467)

其一戶給軍吏下品 (參430336)

(其)六戶郡吏(中)(品) ---- (貳4490)

其二戶縣吏(下)品 (貳3307)

등에서 給郡吏 등의 戶와 縣吏의 戶가 구분되어 기록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다 그리고 給吏가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에 속하였음은 위

의 사례 뿐 아니라 lt吳簡gt에서 給度吏 下品之下 (5653) 등에서 알

수 있는데 下戶로 결원을 보충하는 것은 同級의 戶로 충원한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면 또한 당시 吏戶와 給吏의 관부에의 예속성과 신분

성을 보여준다 요컨대 給吏는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여서 평균

의 民戶 보다 더 빈천한 계층인 점도 그들이 관부에 정식의 吏職으로

임명된 吏라기 보다는 非吏인 民으로서 民의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

서에 給事(給役)하는 자들이되 관련 관서의 吏에 배속되고 給事 복무

해야 하는 예속된 신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찍이 宮崎市定이 宋書권94恩倖傳序의 郡縣掾史 幷出

豪家 負戈宿衛 皆由勢族 를 인용하여 豪家 출신으로서의 掾史가 고

관으로 진출하는 경향이 累代 이어지면서 右族이 이루어지고 이를 통

해 위진남북조 귀족제가 출현하였다 하였고102) 楊振紅이 이에 동조하

고 있는 것은103) 부분적으로 再考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당시 孫休

102) 宮崎市定 九品官人法の硏究 -科擧前史 (京都 同朋社 1979(1956)) pp86

-89

103) 楊振紅 앞에 든 吳簡中的吏 吏民與漢魏時期官 吏的分野 mdash中國古代官僚

政治社會構造硏究之二 p34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4傳에서 말한 吏戶는 분명히 豪族勢家가 아니었고 lt오간gt에서 民戶와

함께 lt吏民簿gt에 기록된 吏戶는 下品에 속한 貧層이었으며 그 식구

모두 중복된 賦役의 부담에 시달리는 계층이었다 그 吏戶에는 吏와

給吏로 구분되어 관부에 예속되고 있다 즉 아무래도 豪族大家로서의

掾史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정을 이해하는 데는 전술한

lt周禮gt의 府史胥徒에서 府史가 호족대가로서 辟除된 掾史에 類하고

胥徒가 곧 관부 예속하의 吏戶와 給吏에 거의 相當하다는 면이 있다

吏戶에서의 吏職에 掾史가 있겠지만 관부에 예속되어 있고 직업적 세

습화 되어 있어 호족대가 출신의 掾史와는 구분되었을 것이다 무엇보

다 호족대가 출신의 掾史은 관부에 예속되지도 아니하고 세습의 신분

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掾史層의 존재는 군현의 장관 辟召로 임

용되었을 것이다 반면 吏戶 출신의 掾史는 기술 계통의 전문직일 경

우이거나 개인적 기능의 능력으로 또는 部曲과 같은 상비병 출신이

일반 요역 부담에 대신하여 관련 직무에 세습하게 되거나 또는 일반민

호에서 급히 所要되어 임시로 차출되었다가 점차 세습의 吏戶로 예속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관부에 진 빚으로 예속되었다가 吏戶로 남

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즉 이 吏戶는 관부의 갖가지 所要 用務

에 差出될 상황에 대기되어 있는 戶이다 그 중에 일부는 정식으로 掾

史로 승진되지만 나머지는 윤번이나 필요시 이 방면 저 방면의 分署에

차출되어 給事하며 分署의 長을 主로 모시고 그 아래에서 給事한다

掾史의 吏와 구분하여 그러한 뜻을 반영한 것이 lt오간gt의 도처에 보

이는 수십종의 給某吏다고 생각한다 호족대가 출신으로서의 掾史와

예속신분인 吏戶 출신으로서의 掾史는 그 신분상으로도 士와 서민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기에 宮崎市定의 立論 또한 양자의 구분을 통한

위진남북조의 귀족제 내지 良賤制의 형성을 논하는 보완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근래의 여러 연구들은 掾史에 이렇게 두 방면으

로 구분되는 면과 계층이 있다는 점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였고 吏戶

의 家屬에 吏와 給吏로 구분되는 층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양자의 성

격이 어떠한가를 파악하지 못한 셈이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5한편 給吏는 吏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戶人이나 父兄이 郡吏 등의

諸吏에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당시 吏戶가 직업화 내지 세습화 되어

있었기 때문에 子弟의 給吏 신분도 곧이어 諸吏로 진전될 것은 당연하

다 그래서 lt嘉禾四年吉陽里戶籍簿gt에 吉陽里에 호적이 올라 있는 給

郡吏 逢杲(壹10169) 給郡吏 寥裕(壹10175) 給縣吏 張惕(壹

10182) 給州吏 區張(壹10367) 給州吏 嚴追(壹10149) 등이 lt嘉禾四

年五年吏民田家莂gt의 下伍丘 소속 佃民 名簿에서는 거의 同一人일

것이 분명한데 給郡吏가 群吏로 給縣吏가 縣吏로 給州吏가 州卒이나

州吏로 기재되어 있는 경우도104)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

다 이 경우는 丘에서는 給吏가 보이지 아니하고 里에서만 보이기 때

문에 아직 명확히 해명이 되지 않고 있는 里와 丘의 차이에 따른 것일

가능성도 있고 嘉禾4년과 嘉禾4-5년 戶籍簿에서의 1년 내외의 기간

차이에 따른 신분의 변화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또

한 侯旭東의 정리 조사에 의하면 高遷里의 給縣吏 松棐가 위의 lt田家

莂gt에서는 武龍丘의 縣吏로 기재되어 있고 같은 里의 給縣吏 張喬는

亻平 丘의 縣吏로 기재되어 있으며 宜陽里에 眞吏로 등재된 黃阿 등

6인도 각각 6곳의 다른 丘의 州吏 男子 男子 郡吏로 기재되어 있다

또 陽里의 給郡吏 謝鼠는 夫丘의 男子로 기재되어 있다105)里의 호

적부와 lt吏民田家莂gt의 丘別 佃民 명부에서 그 신분이 男子인 경우

일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양편 모두 里의 호적부에 給郡吏 給縣

吏 給州吏등 給吏로 기재된 경우는 대부분 丘의 佃民 명부에서 각각

群吏 縣吏 州吏로 되어 있고 眞吏가 州吏 郡吏 男子로 기재되기도

하고 給縣吏가 男子로 기재된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일부 사례들은 眞

吏 吏 給吏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것이어서 그 해명이 필요한

데 현재 里와 丘의 구별 차이 眞吏와 諸吏 給吏등의 실체 문제가 아

104) 凌文超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

型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 pp17-18의 lt表一gt

105) 侯旭東 長沙走馬樓吳簡ldquo里rdquoldquo丘rdquo關係再硏究 (魏晋南北朝隋唐史資料2006) pp19-21의 表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6직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어 그 이유를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실

정이다 그러나 신분명으로 이름을 달리하여 그렇게 구분하고 있으며

전술한 바와 같이 給吏가 吏나 眞吏와 다르게 취급되면서 여러 名簿에

구별되어 기재되어 있고 그 독자성도 충분히 입증되기 때문에 위의

예외적인 사항들은 개인별 특별한 사정에 따른 것이거나 아직 여러 異

說로 논란이 되고 있는 里와 丘 등의 구분과 차이 등에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고에서 갖추어 고찰하지 못하고

후고로 미룬다

Ⅵ 결 언

이상의 검토에서 고대 職役의 범주에 들어가는 다종의 신분 내지 계

층과 吏職의 類 그 복무형태 삼국시기에 이르는 전승과 변화의 모습

들을 살펴보았다 우선 職官과 일반요역 복무자와는 신분제와 賦役체

계상 엄연히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례 地官 鄕大夫에 그

舍란 國中의 貴者賢者能者服公事者老者疾者에게는 모두 舍

한다는 것이다 에 대한 후한의 鄭司農의 注에 服公事者란 지금 吏에

게 復除해주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고 하였다106) 여기서 lsquo舍rsquo란 復

除와 같은 뜻이다 그 대상 가운데 lsquo國中의 貴者賢者能者rsquo 가운데

貴者는 공경귀족 賢者와 能者는 命官과 辟召된 관리에 해당한다 그리

고 그 아래의 服工事者는 다시 2분되는데 200석 이하의 吏職 내지 掾

史職(小吏)이 있고 그 아래에 庶民在官者 내지 lsquo非吏로서 官에 給事

하는 자rsquo로서 給吏層이 있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賢者와 能者 까지를

職官이라 하면 그 이하인 服工事者 가 곧 職役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

석된다 그리고 職官과 職役 복무자는 모두 일반요역에서 면제되는 자

106) 其舍 國中貴者賢者能者服公事者老者疾者 皆舍 注云 lsquo服公事者rsquo

謂若今吏有復除也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7들이다 이 중에서 職役 복무자는 일반요역에서 면제되는 대신에 각종

의 吏職과 給吏職에 복무하였다 여기서 칭한 給吏職은 lsquo(小)吏rsquo에 대비

하여 칭한 給吏를 그 성격상 그렇게 칭할 수 있으며 그 독립적 계층

내지 신분으로서의 실태가 lt長沙走馬樓吳簡gt의 발현에 의해 상당 부

분 밝혀지게 되었다 그런데 服工事者 즉 職役 담당 계층의 범위가

상당히 넓어서 그 職役의 양태가 모든 면에서 같은 것은 아니고 일부

분 다른 측면들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고대의 긴 기간에 걸쳐 거의

공통으로 庶民在官者 lsquo非吏이면서 관부에 給事하는 자rsquo lsquo官과 民 사

이rsquo lsquo半官半民rsquo의 성격이 유지되고 있는 면을 볼 수 있다

이렇게 職役 담당자의 연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곧 lt주례gt에 보이

는 관리 조직의 최하위에 위치한 府史胥徒이다 이 가운데 府史

가 대략 후대의 掾史職이나 lt吳簡gt의 諸吏에 속한다면 胥徒는 給吏層

에 상통하는 면이 많다 단지 lt吳簡gt에 다수 보이는 吏役 下의 吏戶

는 그 과중한 부담과 厮役 및 빈천함의 성격상 오히려 胥徒에 상통하

는 면이 많다 이러한 시대적 차이는 吏戶의 예속화 및 세습화의 진전

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한편 시대의 여건 차이로 여러 부분에서 胥徒

와 후대의 職役 담당 계층 사이에는 다른 면도 있다 胥徒나 給吏層이

기본적으로 일반 서민 출신으로서의 服工事者 였던 것과는 달리 周에

서 三國에 이르는 동안 服工事者 라는 면에서 同類이지만 일반 서민

과는 구분되는 여러 相異한 계층에 속한 신분들이 속하여 있었다 예

를 들면 工商食官 에 속하는 工商 皁隸食職 에 포함되는 吏에 속

한 徒隸 층 넓은 의미의 徒隸層이라 할 수 있는 皂隸牧圄

僕輿人 그리고 下吏層에 들어가는 樂祝醫衛士 및 走卒伍伯

之類 등이 그들로 그 출신은 일반 서민이거나 賤民 또는 刑徒였지만

관부에 寄生하며 給事한다는 면에서는 공통이다

이들의 복무 형태는 항상적 근무 일시적 근무 組別 교대제 등 여러

가지로 징발 내지 차출되었고 lsquo冗rsquo과 lsquo更rsquo은 그러한 차이를 구분하는

용어로서 나온 것이다 근무에 따른 보수를 받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 구분은 아직 분명치 않은 부분이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8있다 그러하지만 최소한 생업을 관부에 의탁하는 자들에게는 지급되

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年俸制에 대비되는 稍食 즉 소액의 月俸 내

지는 근무일수 기준의 지급 형태로 지급되었다 이는 그들의 근무가

주로 일 단위나 월 단위로 이루어지고 계산되었기 때문이다

lsquo官rsquo과 lsquo吏rsquo는 서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선진 이래 본래 상하의 신

분으로 명확히 구분되었고 漢代에 혼용 내지 통용되는 경향이 있었지

만 양자가 구분되는 면 또한 여전하였다 吏는 官에 가까운 吏가 있고

民으로서의 吏가 있어 전자를 lsquo官吏rsquo라고 하면 孫休傳의 詔에서 거론된

吏家는 보통 吏民으로 합칭될 경우의 吏라고 할 수 있다 lt吳簡gt의

lt吏民簿gt나 lt戶口簿gt 등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실태에서 후한 말에

서 삼국기의 전형적인 職役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이제까지 그

존재에 대해 거의 간과되어 왔던 給吏에 대해 lt吳簡gt은 수십종의 給

吏 실태를 전해주고 있어 그 의의가 크다 吏의 사무 업무를 직접 勞

役으로 보조해주는 給吏는 관부의 행정 업무 처리에 있어서 항상 필요

한 노동력 제공자였다 이러한 노동력은 어느 시기이든 공통으로 필요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연원을 lt주례gt의 胥徒에서 찾아볼 수 있었

고 여러 면에서 職役의 실례로서 공통하는 면들을 지적할 수 있었다

후한 말 삼국시기의 吏와 給吏는 일반서민 신분으로서의 吏이며 吏戶

로써 관부에 예속되어 그 食口 성원이 거의 세습하여 吏役에 종사하

고 있다 이들은 일반서민에 비해 일반요역이 면제된다는 점을 제외하

면 그밖에 각 吏職에 따른 吏役의 기본 직무 외에 限田의 佃作 의무와

그 地租로서 限米 布 錢을 납부해야 하며 從軍해야 하는 등 중첩된

부역으로 일반서민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또한 그 戶品 이

下品 내지 下品之下에 속한 貧戶 출신이다 따라서 같이 吏로 칭하지

만 豪族勢家 출신으로 掾史職을 거쳐 상급관으로 진급하고 命官에 오

르는 累代 高族의 世家 출신 掾史와 빈천한 서민 출신으로서 관부에

예속된 吏戶 출신으로서의 掾史와는 구분된다 이 吏家 내지 吏戶는

吏의 칭호로 불리지만 일반민보다 더 많은 부담을 지고 있기에 그들의

役은 후한과 삼국기에 賤役 賤職 내지 厮役으로 칭해지며 기피되고 있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9다 따라서 이 계층이 官吏로 합칭되는 경우의 吏와 구분되는 것은 당

연하며 그 호칭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늦어도 孫休 시기의

문서와 간독자료에 등장하는 lsquo吏家rsquo나 lsquo吏戶rsquo는 이미 그러한 계층에 대

한 專稱으로 형성된 듯하다

한편 諸吏役의 복무에는 常勤의 방식과 1년에 1개월 내지 수개월만

輪番 형식으로 복무하는 비상근의 lsquo踐更 방식의 근무rsquo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한 비상근 복무자도 있었을 것이다107)그리고 그 복무에

대한 급여가 그 吏役을 생업으로 하는 常勤者에게는 당연히 小吏에 대

한 봉록이 지급되었을 것이다 반면에 給吏의 役은 일반요역에 대신하

는 복역이라는 면에서 비상근 내지 윤번 형식의 차출이었을 가능성이

많지만 지금까지 lt오간gt에 소개된 자료로는 어느 쪽이라 단정하기가

어렵다 胥徒의 役은 어디까지나 상급의 관원들과는 달리 일반민의 요

역 의무를 대신하여 관부에 給事하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lt오간gt

에서의 給吏와 상통한다 給吏에 대한 봉록 지급의 여부도 아직 不明

이다 단지 限田의 지급이 祿田과 같은 성격의 것이었을 가능성도 고

려되지만 그 租額이 커서 혜택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노동력의 징발로

서 해석되는 부분도 있다 또한 給吏의 관부에의 給事가 일반 요역과

같이 組別 순환제였는지의 여부는 아직 분명치 않다 lt奏讞書gt의 樂

人의 예와 같이 一月一更制와 같은 순환근무제였을 가능성도 있는데

대체로 두 가지 형태가 공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lt吳簡gt에 의거한 의론들은 아직 자료 해석과 해명이 충분치 못하여

불분명한 상태에 있는 사항들이 많은 실정이기 때문에 해당 사항이 새

로 규명 되는대로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lt오간gt의 미해명 사항

에 대한 개별적인 탐구도 본 과제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필요하다 그

리고 아직 소개되지 않은 대량의 lt오간gt이 연속하여 출간되면서 새로

운 자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107) 廣懶薰雄 앞의 秦漢律令硏究 pp310-311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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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會科學版 33 卷5期 20009)

凌文超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mdash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型與功

能 (吳簡硏究 3 20116)孟彦弘 吳簡所見ldquo事rdquo臆說mdash從ldquo事rdquo到ldquo課rdquo (吳簡硏究 2 2006)孟彦弘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爲役之制 (魏晋南

北朝隋唐史資料 24 2008)羅新 ldquo眞吏rdquo新解 (中華文史論叢 2009-1)劉家軍 論lt走馬樓吳簡竹簡gt中 ldquo限米rdquo的性質 (中國社會經濟史硏究 2005-2)王素 長沙吳簡勸農掾條列軍州吏等人名年紀三文書新探 (魏晋南北朝隋唐史資料

25 2009)宮崎市定 九品官人法の硏究 -科擧前史 (京都 同朋社 1979 1956)

侯旭東 長沙走馬樓吳簡ldquo里rdquoldquo丘rdquo關係再硏究 (魏晋南北朝隋唐史資料 200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103

(中文摘要)

中國古代的職役與職官的問題

朴 健 柱

通過上述的檢討 基本上職役範疇內的多種身分 乃至階層與吏職之類

其服務形態至三國期的傳承與變化等方面已然解明 職官與職役服務者

的一般徭役均免除了 此二者中職役服務者 用種種lsquo吏職rsquo與lsquo給吏職rsquo服務來

代替其一般徭役 直至三國時期爲至漫長的期間內職役擔當者 庶民在官者

lsquo非吏而給事官府者rsquolsquo官與民之間者rsquolsquo半官半民rsquo的性格几乎共通維持

職役擔當者的淵源卽是lt周禮gt所見的官吏組織最下位的府史胥

徒 此中 府史是大略屬于後代掾史職或是lt吳簡gt的諸吏 胥徒則是相通于

給吏層的側面多的 但是lt吳簡gt所見多數的吏役下吏戶其過重的負擔與厮

役及貧賤的性格上 倒是與胥徒相通方面較多 這個時代的差異像是吏戶的

隸屬化及世襲化的進展招來的結果 一方面因爲時代的與件差異 胥徒與後

代的職役擔當階層間有多方面的異質 胥徒與給吏層基本上是一般庶民出

身的 服工事者 如此不同 從周至三國期間從 服工事者 上是同類而與一

般庶民相區分的多種相異的階層面上身分較多 例如 工商食官 所屬的工

商 皁隸食職 所包含的 吏所屬的徒隸 層以廣義的徒隸層可以稱謂的

皂隸牧圄僕輿人 以及下吏層所屬的樂祝醫衛士 及走

卒伍伯之類等 他們的出身是一般庶民 或是賤民乃至刑徒 在官府寄生

而給事的層面上是共通的

其服務形態是恒常的勤務 一時的勤務 組別交代制等以多種方式徵發乃

至差出 lsquo冗rsquo與lsquo更rsquo是其差異區分用的用語 支給勤務報酬與否是不分明之事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04項 可是至少生業官府依託者是被支給的 其支給方式是與年俸制相對的稍

食 卽少額的月俸乃至勤務日數基準的支給方式 因此他們的勤務和支給計

算主要是日單位或是月單位

於lt吳簡gt之lt吏民簿gtlt戶口簿gt等所見的吏與給吏的實態 可以看到

從後漢末至三國期間典型的職役的樣相 尤其向來看過給吏的存在 lt吳

簡gt所傳數十種給吏的實態 其意義是巨大 給吏是以直接的勞役補助吏的

事務業務 是官府的行政業務處理上恒常的必要勞動力提供者 這種勞動力

許是官府運營上至今爲至所有過的任何時期共通要緊事項 可以推斷給吏

的淵源於lt周禮gt的胥徒 而且可以指摘以職役的實例有多方面共通的層面

後漢末三國時期的吏與給吏是一般庶民身分之吏 以吏戶隸屬於官府 其食

口成員率多世襲地從事吏役 他們除比一般庶民免一般徭役外 也需要履行

各吏職別吏役的基本職務 佃作限田義務 以其地租納付限米布錢 從

軍義務等重疊的賦役 因此他們有比一般庶民更重的負擔 而且他們的戶品

是下品乃至下品之下所屬的貧戶出身 從而他們雖一樣稱謂lsquo吏rsquo 却與豪族

勢家出身經歷掾史職進級上級命官的累代高族的世家出身的掾史與以貧賤

的庶民出身於官府隸屬的吏戶出身的掾史是不同的階層 這個吏家乃至吏

戶雖被稱謂lsquo吏rsquo 但是彼役後漢三國期被稱謂賤役 賤職乃至厮役 而且被忌

避 從而此階層是與lsquo官吏rsquo合稱的境遇的lsquo吏rsquo爲區分是理所當然 其稱號也只

得相殊 于是最遲至少到於孫休時期文書與簡牘資料所見的lsquo吏家rsquo與lsquo吏戶rsquo

許是已經成爲如此階層的專稱

依照給吏的役是一般徭役代替的服役 其運營形態是非常勤乃至輪番形

式的可能性大的 但是迄今依據lt吳簡gt所見的資料還難以斷定何者是對的

胥徒的役是與上級官員異樣 以一般民的徭役義務代替給事於官府 本着那

樣的側面與lt吳簡gt所見的給吏相通 給給吏俸祿與否也還不明 但是從限

田的支給是與祿田同一的性格的可能性上看 因爲其租額是多的 與其說惠

澤倒是有可能解釋爲勞動力的徵發 給吏的官府給事是與一般徭役同一方

式的組別交代制與否還不分明 如lt奏讞書gt所見樂人的事例 有可能一月

一更制方式交代勤務制 筆者認爲大體上是兩個方式共存

關於lt吳簡gt資料的議論是因爲解釋與解明上許多異說 不分明的關聯事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105項也有很多 所以該事項的解明將其完備需要補完

주제어 직역 직관 서도 도예 이역 이호 급리 서민재관자

關鍵詞 職役 職官 胥徒 徒隸 吏役 吏戶 給吏 庶民在官者

Keywords lavor duty at office(official lavor) high-ranking officialrsquos duty(official

post) xu-tu tu-li minor officials lavor minor officials family minor half

officials and half the masses in lavor services at office the masses in lavor

services at office

(원고접수 2013년 11월 15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12월 16일 수

정원고 접수 12월 19일 게재 확정 12월 26일)

Page 12: AB C D - KNUwebbuild.knu.ac.kr/~china/CHR/chr2013/chr87pdf/chr87-02... · 2014. 1. 4. · FG9 ±°'c&`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6胥徒의 신분상 복무형태상의 제반 사항이 후대에 그에 상당하거나 유

사한 신분층과 사례에 대비할 때 상당히 다른 면이 많다는 사실이다

趙伯雄은 주례의 胥徒는 전국기까지 노예 厮 童보다 윗 등급이지만

거의 비슷한 신분이었고 厮役 내지 賤役의 담당층이었으며 徒가 한에

서는 주로 刑徒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고 하였으나20) 아래

기술하는 내용에 의하면 그러한 해석에 따를 수 없는 면이 많다 또한

한에서 徒는 형도 뿐 아니라 여러 무리를 가리키는데 통용되고 있어

여러 자료에 등장하는 徒가 가리키는 사항은 무척 다양하다

위의 注疏에 의하면 經文에서 徒의 업무를 官의 令으로써 徵令을

관장함(掌官令以徵令) 이라 한 것은 上部의 지시를 받은 徒가 새로

징발되는 徒의 징발 업무 및 이들을 인솔 지휘 사역하며 그 지시사항

(작업)을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胥와 徒가 모두 庶民在官者 라는 입

장에서 보면 徒가 최하위이지만 lsquo在官者rsquo이고 제8위와 제9위의 서열에

있으며 胥와 徒가 각각 6인과 5인이 食할 수 있는 토질의 경지 百畝

를 代耕의 봉록으로 받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이 출신은 징발된 요

역 복무자와 같다고 하더라도 여타의 징발된 일반 요역 복무자와는 구

분되는 계층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후대의 胥吏도 일반 서민출신이지

만 일반 서민과 다른 계층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 같다 만약 曾我部精

雄의 견해와 같이 府와 史까지만 庶民在官者 이고 胥와 徒는 그에

들지 못하는 것이라 한다면 주례 원문에 胥와 徒가 엄연히 제8위와

제9위에 올라 있고 봉록으로써 百畝를 받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기 어

렵게 된다

그리고 특별히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앞에 인용한 鄭注에 이는(胥

와 徒는) 民이 徭役을 給한 것이니 지금의 衛士와 같다 고 한 점이다

그래서 후한 중후기 衛士의 운영 형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또 鄭

玄은 駁五經異義에서 周禮에서 이른바 모두 징발한다 한 것은 胥

徒로 하여금 公家의 事에 給하게 한 것을 말함이니 지금의 正衛와 같

20) 趙伯雄 lt周禮gt胥徒考 (中國史硏究 2000-4) pp10-12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7다 고21) 하였다 한에서 궁성 내지 중도관에 番上 守衛하는 役은 正卒

의 役과 일반 更卒의 役이 있는데 鄭玄이 특별히 正衛라 한 것은 正卒

로서의 役임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의 요역 운영체제에서

衛士가 上番하는 役은 한구의에 民의 나이 23세가 되면 正이 되고

1년간 衛士 1년간 材官 騎士에 복무하며 활쏘기 말달리기 戰陣을 익

힌다(民年二十三爲正 一歲以爲衛士 一歲爲材官騎士 習射御騎馳戰陣)

라 한 것에 의하면 正卒이 그 복역 대상자이고22) 각 군 단위로 1년씩

21) 禮記王制 五十不從力征middotmiddotmiddot 의 條 孔穎達疏引 周禮所謂皆征之者 使爲胥

徒 給公家之事 如今之正衛耳

22) 漢의 正과 正卒 및 상비군의 문제에 대해서는 종래 여러 이견이 있다

正을 正卒로 보고 正卒이란 更卒(小繇)의 對稱으로서 병역의무자이고 재관

기사 위사등이 곧 정졸이라는 설이 가장 많이 받아드려지고 있다(濱口重國

秦漢時代の繇役勞働に關する一問題 秦漢隋唐史の硏究』上卷 東京 1966

1980 勞幹 漢代兵制及漢簡中的兵制 歷史語言硏究所集刊 10 1948 山田

勝芳 後漢時代の繇役と兵役 歷史 66 19869)正卒은 앞의 설과 같지만 正은 23세에서 56세 사이의 남자 즉 正丁 을 가리

킨다는 설(西村元佑 漢代の繇役制度 東洋史硏究 12-5 1953)正卒과 更卒이 별개인이 아니라 동일인이고 更卒은 正卒이 된 이외의 해에

매년 1개월의 역역에 복무하는 자를 가리키며 正은 23세-55세까지의 正丁인

데 正卒은 그 가운데 2년간 衛士 材官 騎士 등의 實役에 복역하는 것이라는

설(西田太一郞 漢の正卒について 東洋の文化と社會1 東京 1955)

材官 騎士등이 일반민에서 材力 있는 자로 선발되어 군국에서 常駐하는 전

문병사로서 직업군인인 lsquo士rsquo인데 대해 正卒은 일반민이 23세에 1년간 병졸로서

근무하고 1년간 衛士로 長安에 上番한다는 설 즉 正卒은 직업군인인 材官 騎

士와는 兵役體系上 別個의 것으로서 일반민의 병역 복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는 설(大庭脩 材官攷 -漢代の兵制の一班について 龍谷史壇 36 1953)正卒이란 23세에 이른 자 가운데서 신체강건한 자를 뽑아 衛士 材官 騎士

樓船 등의 어느 한 兵種에 복무하게 한 것이라는 설(濱口重國 勞幹 西村元佑

山田勝芳 앞의 논문 平中苓次 漢代の官吏の家族の復除と軍賦の負擔 中國

古代の田制と稅法 京都 1967) 諸說의 대부분은 이 견해를 공통적으로 취하

고 있다

秦漢에서는 始傅에서 免老까지의 모든 남자가 병역의무를 지는데 正卒은 그

適齡남자를 統稱하는 말이며 따라서 郡兵이나 衛士 戍卒은 正卒의 일부분이라

는 설(臧知非 秦漢lsquo正卒rsquo辨釋 中國史硏究 1988-1)正이란 傅籍된 待役者(兵役과 力役 포함)를 말하며 正卒은 어떤 특정의 役

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고 正(待役者)과 卒(服役中에 있는 正)로 구분되어 있

는 말이며 秦漢代에 병역 복무는 일부 병역신분에게 만 부과된 것이어서 나머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48조별 순번으로 상경하여 복역한다 正卒은 일반 更卒 중에서 신체강건

용맹 등으로 선발된 자들로 상비군 내지 직업군인의 성격이 강한 집단

이다 즉 그들은 일반민(서인)이면서도 그 중에서 선발되어 군사로써

免老에 이르기까지 복무하는 까닭에 일반민과는 다르다 胥徒 또한 서

인이면서 관부에 복무하는 까닭에 일반민과는 다르다 衛士는 특히 평

시에 도성(중도관)을 수비하기 때문에 관부에 거처하게 되고 胥徒 또

한 관부에서 직접 給事하는 까닭에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면에서 鄭玄

은 양자를 같은 성격의 계층으로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衛士가 일반

민에서 선발된 자들이고 胥는 徒 중에서 才智로 선발되고 徒는 분명

치는 않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일반 民庶 가운데 담당 직무 수행에 어

느 정도 자질을 갖춘 자로 선발된 자들일 가능성이 크다 또 漢書권74魏相傳의 顔注에 京師의 여러 관부에 와서 戍卒이 되는데 지금의

衛士가 上番하여 여러 官司에 나누어져 복무하는 것과 같다 라23) 한

것에 의하면 衛士의 이러한 복역 모습은 각 官司에 배치된 胥徒의 복

역 형태와 같다 전한 京師에서 복무중인 衛士의 수는 景帝末傾에 매

지 일반 白徒는 병역에 복역하지 않는다는 설(孫言誠 秦漢的繇役和兵役 中國史硏究 19873 및 ldquo爲正一歲rdquo辨 文史 31 198811)濱口說과 같이 正을 正卒의 略稱으로 보지만 濱口씨가 正卒을 일반적인 兵

士로 본 것과는 달리 庶民 중에서 일부가 선발되어 兵士(材官 騎士 등)가 된

것이며 이들은 일반서민과는 상대적으로 구별되는 신분 말하자면 獨自의 兵

士身分 으로서 일반서민과 같은 역역(更卒) 의무가 없었고 일반서민과는 다른

부담체계하에 있었다는 설(重近啓樹 秦漢の兵制について -地方軍を中心とし

て- 人文論集(靜岡大學) 36 1985)正卒은 일반민이 20세로 부터 2년간 복무하는 것이며 材官 騎士는 이와는

달리 전문병사로서 23세에서 56세까지 복무하는 것이라는 설(藤田勝久 前漢

の繇役勞動とその運營形態 中國史硏究 8 1984)한편 李成珪는 材官 騎士는 卒에서 징발된 전문 병사였고 1년 복역 후에도

예비역으로 분류 비상시 동원되었지만 (軍)吏나 士에 속하지 않는 자들로서

力役 복역의 한 형태인데 董仲舒가 말한 lsquo一歲力役rsquo은 바로 郡卒로 1년 복무하

는 材官 騎士의 役을 말한 것이라 한다(이성규 前漢 更卒의 徵集과 服役 方

式 -松栢木牘 47호의 분석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09 200912

pp33-34)

23) 來京師諸官府爲戍卒 若今衛士上番分諸司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49년 2만인 武帝 즉위 후 1만인으로 감하고 얼마 후 5천인을 늘려 武帝

후기에는 1만5천이었을 것으로 보인다24) 또 1개 군에서 番上하는 수

가 數千에서 2~3천인이었던 사례가 있다25) 전한 말 成帝 시기의 사

정을 말해주는 尹灣漢簡의 lt東海郡下轄長吏不在署 未到官者名籍gt

에 군현 밖으로 外勤出張 중에 있는 長吏의 현황표에 費長孫敞 十月

五日送衛士 가 있는데26) 費邑의 長 孫敞이 衛士를 送하는 업무로 출

장하여 아직 귀환하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동해군 下轄의 縣(18)邑

(2)侯國(18) 38곳(lt集簿gt) 가운데 오직 費邑에서만 衛士가 上番되고

있다 이에 의하면 衛士의 상번은 각 군에서 縣級 단위로 교대 상번하

는 것으로 보인다 濱口重國은 후한에서 正卒의 군현상비군이 폐지되

었지만 전한에서와 마찬가지로 매년 연말에 1년의 복무가 끝나고 귀향

하는 衛士들에게 황제가 향연을 베푸는 饗遣故衛士儀가 행해지고 있는

사례를 들어 衛士의 上番은 후한에서도 행해지고 있음을 지적한 바가

있다27) 아울러 그는 군현 상비군 폐지 후 중앙의 衛士 부대가 2500

내지 2600명인데 이는 중앙 인근 지역에 한정하여 징발된 자들로 보

아야 한다고 하였다28) 후한 周禮注에서 鄭玄(127-200)의 衛士 인용

이 전한시기의 사정에 의거한 것인지 아니면 그의 활동시기인 후한 후

기의 사정에 의거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후한 중 후기에도 衛士의

上番制가 부분적으로나마 유지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4) 濱口重國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隋唐史の硏究』上卷 東京

1966 1980) p286 注2)

25) 「上臨饗罷衛卒 衛卒數千middotmiddotmiddot」 (漢書 권77 蓋寬饒傳) 「河南卒戍中都官者二三

千人middotmiddotmiddot」 (漢書 권74 魏相傳)

26) 張顯成 周羣麗 尹灣漢墓簡牘校理(上篇) (天津古籍出版社 2011 3) p32

27) 濱口重國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隋唐史の硏究 (上)) p283

28) 濱口重國 위의 글 pp284-285 그 주된 근거는 속한서 백관지3 尙書條에

蔡質漢儀曰 ldquo右丞與僕射對掌授廩假錢穀 與左丞無所不統 凡中宮漏夜盡 鼓鳴

則起 鍾鳴則息 衛士甲乙徼相傳 甲夜畢 傳乙夜 相傳盡五更 衛士傳言五更 未

明三刻後 雞鳴 衛士踵丞郎趨嚴上臺 不畜宮中雞 汝南出雞鳴 衛士候朱爵門外

專傳雞鳴於宮中rdquo 應劭曰 ldquo楚歌 今雞鳴歌也rdquo 晉太康地道記曰 ldquo後漢固

始鮦陽公安細陽四縣衛士 習此曲於闕下歌之 今雞鳴是也rdquo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0中都官의 몇 몇 部署에 給事하는 衛士의 員數 규정이 있는데 속한

서 백관2 注引 漢官의 光祿勳에 81인 太宰令에 15인 高廟令에 15

인 世祖廟令에 20인 衛尉에 60인 南宮衛士令에 537인 北宮衛士令에

471인 右都候에 416인 左都候에 383인 南宮南屯司馬에 102인 (北)宮

門蒼龍司馬에 40인 玄武司馬에 38인 北屯司馬에 38인 北宮朱爵司馬

에 124인 東明司馬에 180인 朔平司馬에 117인의 衛士가 소속되어 있

다 이는 후한의 사정을 기록한 것인데 그 총합이 2637인이다 전한에

비해 그 員數가 급감한 것은 광무제의 부역 경감정책과에 의한 것이라

하겠고29) 소수지만 그 員數가 규정되어 있다는 것은 후한에서 代役制

내지 雇傭制로 대체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전과 같은 上番制가

시행되었음을 말해준다 후한에서 正卒 및 군현의 상비군제가 온전히

사라진 것이 아닌 것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후한의 2637명의

員數는 전한에 비해 대략 15 정도 되는데 전한의 사정을 기준으로 한

다 하더라도 군현의 正卒은 평생 1회만 당번이 되어 上番하더라도 중

도관의 衛士 給事가 충분히 운영될 수 있다 위의 lt윤만한간gt에서 전

체 38현읍후국 가운데 그 해에 費邑의 正卒 만이 상번하고 있고 당시

郡別로 상번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동해군이 매년 상번의 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각 正卒은 38년에 1회만 상번하면 된다 물론 군별 현

읍후국의 수가 다르기 때문에 그 回次의 수도 다르고 현읍후국별 正

卒의 수에 따라 1개 이상의 현읍후국이 함께 동원된 경우도 충분히 있

을 수 있다 그러나 각 군의 현읍후국 수가 보통 20개는 넘는다 게다

가 費邑의 正卒도 몇 개 조로 나뉘어 순차로 상번하는 것이라던가 각

郡도 매년 상번이 아니라 몇 년 만에 순번이 돌아오는 체제라면 각 正

卒의 중도관 衛士 복무는 아무리 많아도 일생에 1회를 넘기 어렵다

앞에 든 漢舊儀의 民年二十三爲正 一歲以爲衛士 는 곧 그러한 사

정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일생 1회의 복무형태는 胥徒의

29) 濱口重國은 광무제의 경감책과 아울러 虎賁 羽林 羽林左右騎 五校尉의 軍이

警備에 추가되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위의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秦漢

隋唐史の硏究(上)) p283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1평생 내지 세습되는 면과(후술) 다르지만 일반의 役 대상자에서 선발

되어 중도관에 給事한다는 면에서는 공통이다 그런데 전한에서 lsquo父死

子代rsquo였던 중앙군은 羽林孤兒 뿐이었지만 후한에서 虎賁 羽林 羽林左

右騎 五營士의 중앙군에까지 확대되었다고 한 濱口重國의 지적이 있

다 그에 의하면 후한에서 중앙군단의 세습화와 함께 바로 지방에 特

設된 군단의 세습화도 이루어지면서 魏晋시기 兵民分離의 前段을 이루

게 되었다고 한다30)후한 후기 특히 羌의 侵寇 이후 郡에 都尉를 설치

하고 全民을 징병대상으로 삼아 상비의 郡兵을 다시 설치하고 있으

며31) 여러 출신 성원을 규합한 병단이 私屬이 되기도 하고 국가의 군

단이 되기도 하며 部曲 내지 그와 같은 류의 세습 병단화 하는 과정

에 대해서는 필자도 일견을 피력한 바 있다32)따라서 징병제에 의한

正卒의 상비군 운영이 폐지된 이후 15 수준으로 급감한 정졸의 衛士

가 上番하고 있었지만 이 군단 또한 후한 중기 이후 전란시기가 되면

서 世兵化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胥徒의 세습과 후한 후기에

활동하였던 鄭玄 당시 衛士의 세습화는 일치하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鄭玄이 말한 衛士는 한초의 사정이 아니라 그가 활동하였던 후한 후기

의 사정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鄭玄이 漢의 衛士 上番制에 의거하여 주례의 胥徒制를 해석한 것

은 양자의 해명에 큰 도움을 준다 상술한 바에 의하면 몇 가지 면에

서 양자가 일치하는 점이 대체로 인정된 셈이지만 胥徒가 거의 모든

관부에 설치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漢代의 衛士는 광록훈이나 衛尉

제사 守陵등 일부 한정된 관부에 설치되어 있다 또한 주례의 胥徒

가 士 이상의 신분과 마찬가지로 代耕의 봉록으로써 농지를 받고 있는

봉록자라는 면은 지방에서 상경하여 1년의 기간만 한시적으로 복무하

는 衛士의 경우와는 자못 어울리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衛

士는 上番者로 충당되지만 일단 관부별로 員數가 규정된 員吏로서 복

30) 濱口重國 앞의 兩漢の中央諸軍に就いて p285

31) 濱口重國 光武帝の軍備縮小とその影響 (秦漢隋唐史の硏究(上)) p30832) 박건주 한대의 지방 상비군과 部曲의 推移 (동양사학연구 118 20123)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2무하게 되기 때문에 일부는 胥徒처럼 員吏로서 수년 이상을 관부에 居

하는 어느 정도 전문화 한 衛士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鄭玄의 활

동 시기와 큰 차이가 없는 lt長沙走馬樓吳簡(이하 lt吳簡gt으로 약칭)gt

領二年四家衛士田漆十五畝 畝收限米二斛 合爲吳平斛米一百五十斛

(5-1669)에 의하면 4家의 衛士가 限田75畝 佃作에 대한 租로 畝當 限

米2斛을 납부하고 있다 lt오간gt의 限田에 대해 여러 異說이 있지만

(후술) 그 佃作者와 限米 납부자의 계층에 수십 종의 吏員들이 포함되

어 있는 것에 의하면(후술) 衛士도 그러한 吏員으로서 限田이 지급된

것으로 보인다 단지 限田을 佃作케 한 것이 吏員에 대한 경작의 부과

(경작 노동력의 징발)를 뜻하는 것인지 혜택의 수여를 뜻하는 것인지

는 아직 분명치 않지만 于振波의 분석과 같이 畝當 限米2斛의 징수는

대단히 과중한 액수인 까닭에33) 受惠라기 보다는 경작 노동력의 징발

내지 課役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祿田의 의미로 보기

어렵지만 당시 吏職의 賤役化 현상을 고려하면 그러한 시대적 여건 하

에서 實益이 거의 없는 祿田으로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어쨌

든 후한말 이래 小吏 내지 吏戶와 병사층의 세습화 진전을 고려한다면

어떠한 방식이든 그 가족의 생계를 위한 봉록의 지급이 있었을 가능성

이 더욱 커진다

이상에서 검토한 몇 가지 면에서 보면 府史와 胥徒 중에 후자 만

lsquo給徭役rsquo에 의거한 복무라는 점 등에서 다른 계층이지만 庶民在官者

로서 함께 칭해질 수 있는 층이었다고 본다 무엇보다 胥徒가 각각 제

8위와 제9위의 在官者 서열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동시에 府史는 모두 官長으로부터 선발되고 辟除 임용된 자들인데 비

해 胥徒는 일반의 요역의무를 대체하여 官에서 給事中인 계층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胥徒가 lsquo在官者rsquo로 칭해지는 이유는 관부 내에 거

처하면서 노동을 통하여 잡다한 庶事를 직접 처리하고 있으며 국가로

33) 于振波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中國社會科學院硏究生員學報 2004

-1) p122 限米 납부액의 과중성에 의거해서 限米 납부자는 屯田노동자 限米

는 屯田의 租稅라고 본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3부터 代耕의 祿田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관부의 제반 업무는 각 업무

分司 말단에 속한 胥徒의 노역에 의해 완수될 수 있다 이들은 노역

징발 대상자인 徒 중에서 재능 등의 명목으로 선발된 자들이고 그 중

에서도 才智가 있는 자가 胥이다 이들은 선임자 내지 연장자의 지휘

감독 아래 각 관서의 노역 업무와 勞役者 징발 업무 등으로 奉公한다

이것이 胥徒의 在官者로서의 職事이다 胥徒의 職事는 어디까지나 노

동이 전제되는 勞役이며 일반민의 요역의무에 대신하여 관부의 職에

給事하는 까닭에 職役이라 할 수 있고 官長의 선발로 辟除된 府史는

정식의 官員으로서 奉公하는 것이고 給徭役 에 대신하여 복무하는

것이 아닌 까닭에 胥徒의 職役과 구분하여 그 職을 職官이라 할 수 있

다 그 上級인 命官도 물론 職官이다 職官의 기본 요건은 그 官職에

任職인 상태가 그대로 王命을 받들어 奉公 중인 것을 뜻하는 까닭에

이미 王命을 수행중인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체로 일반 서민

의 기본 요역에서 면제된다 단지 면제의 세부 규정에 의하면 役의 종

류와 신분의 차등에 따라 그 면제 대상의 범위가 구분된다 한편 전쟁

에 참전하는 의무는 면제되지 않는다 모든 官吏는 유사시 종군해야

한다 官人이 본래 戰士層인 國人 출신에서 나온 때문이다 일반 서민

은 매년 일정 기간 동안 만 국가의 命을 받아 노역에 징발되어 복역하

는 까닭에 그 생업은 징발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시적인 노역이 아니라

그들이 부여받은 職인 恒常의 耕作奉公에 있다 職官은 그 복무를 통

해 생활이 영위되지만 일반 서민이 징발되어 이행하는 노역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無償이다

官職앞에 인용한 宰夫8職에 대한 賈疏의 끝 부분에 周禮 위 아래

의 글에 胥가 있으면 반드시 徒가 있는 것은 胥가 什長인 까닭이다

鱉人과 臘人의 類는 徒만 있고 胥가 없는 것은 徒만 있으면 충분하여

지휘자(長師)를 둘(빌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食醫의 類에는 胥徒가

모두 없는 것은 그 官만의 行事(업무처리)로도 충분하여 胥徒의 도움

을 빌리지 않는 까닭이다 고34) 하였는데 胥와 徒가 모두 설치되지 않

은 部署는 그 官만의 업무처리만으로 충분한 까닭이라 하였으니 바로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4府史까지의 屬吏를 官으로 한정한 것이다 즉 胥徒는 官에서 복무하고

있지만 官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庶民이고 庶民在官者 이며 그들의

복무는 職官이 아니고 職役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들도 그 職役으

로 생업을 유지하는 까닭에 職官과 동일성을 지닌다 주례에 의하는

한 胥徒가 일시적으로 복무하는 형태는 아닌 듯 하다 무엇보다도 그

들에게 祿田이 지급되고 있기 때문에 매년 혹은 매월 교체되는 요역

형태의 근무는 아닐 것이다 또한 각 분야별로 상당한 전문 지식과 숙

련도가 요구되는 업무 처리상 단기간 교체되는 근무형태를 취하였을

것 같지도 않다

이렇게 볼 때 胥徒가 官에서 일반 관리와 마찬가지로 계속적으로 근

무하면서도 그 근무를 lsquo給徭役rsquo의 代替로 본 주석이 옳다면 아무래도

胥徒는 신분제사회에서 官이 될 수 없는 자 또는 現任의 官과는 엄밀

히 구분되는 신분이었던 까닭에 그 직무 또한 (일반 서민의) 노역의

의미로 인지되고 평가된 것이 아닐까 한다 漢代사회의 신분구조는 漢

家의 주인인 天子가 그의 家人인 일반 民庶를 직접 장악하는 구조가

있고 동시에 漢家로부터 독립된 개별의 士族이 각각 lsquo家rsquo의 주인으로

서 천자와 主客의 관계가 아직 유지되는 체제가 병존하는 二元의 구조

로 되어 있다고 본 濱口重國의 견해가 있다35)이러한 입장을 발전시켜

漢帝國은 황제가 인민을 인두적으로 지배하는 lsquo齊民制rsquo와 천자가 lsquo家rsquo를

非人頭的으로 지배하는 家父長制的 관계로서의 lsquo家産制rsquo라는 이중구조

로 되어 있다고 본 好並隆司의 견해도 있다36) 그리고 이러한 이중성

의 사회구조를 公과 私 君臣관계의 면에서 진전시킨 尾形 勇은 그 臣

이 되는 층을 仕宦者와 從役者로 나누고 있다37) 위의 설들은 모두 한

34) 周禮 上下文有胥必有徒胥爲什長故也 鳖人腊人之類空有徒無胥

者得徒则足不假長師故也 食醫之類胥徒并無者以其專官行事不假胥徒

35) 濱口重國 唐王朝の賤人制度 主篇 第六章 第二節 (東洋史硏究會 1966)

36) 好並隆司 前漢帝國の二重構造と時代規定 (歷史學硏究 375 秦漢帝國史

硏究 東京 1978에 재수록)

37) 尾形 勇 漢代における 家人 と君臣關係 (史學雜誌 83-4 1974) pp3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5대의 사정을 말한 것이지만 이러한 이중구조의 신분제 내지 사회구조

는 주례의 관부 구성 체제에 의하면 상위에서 下士 내지 府史까지가

仕宦者에 해당하고 胥徒를 후자 즉 從役者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연원은 이미 周代에 있다 士人 내지 仕宦者는

그 직무로써 奉公하고 從役者는 賦稅役의 부담으로써 奉公한다38)胥徒

가 비록 官에 있는 자이지만 二元구조의 신분제 하에서 士人이 되지

못한 가운데 그 직무는 職官이 되지 못하고 職役에 머무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Ⅲ 職役 담당층의 복무 형태와 봉록 지급의

문제

周代에 lsquo給徭役rsquo의 차원에서 관부에 給事하는 胥徒가 있었다면 후대

의 요역 가운데도 그러한 항목이나 사례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다 또한 胥徒의 직무는 續漢書 輿服志上에 보이는 伍伯辟車

鈴下侍閣門蘭部署街里走卒 등 관부 말단에서 경호導從심

부름侍衛車馬관리 巡邏 등의 賤職에 종사하는 이른바 徒卒의 職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그런데 이들의 役이 民의 일반 요역 의무에 따

라 징발되어 일시적으로 복역하는 것인지 아니면 상술한 胥徒와 같이

庶民在官者 로서 관부의 최말단에서 상시로 근무하며 관부에 의지하

여 생업을 유지하는 下吏로서의 복무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후한서권58 虞詡傳에 永平(후한 明帝期) 章和(章帝期) 중에 州郡이 走卒錢으

로 貧人을 給貸(雇賃金을 지급)하였다 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集解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35

38) 尾形 勇 위의 글 pp28-29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6走卒伍伯之類란 續漢志에 이른다

(車前에) 伍伯은 公은 8인中二千石은 6인千石과 六百石은 모두 4인百石

이하에서 二百石은 모두 2인을 둔다 黃綬(4백석에서 2백석의 관리)의 武官에

는 伍伯을 따르게 하고 文官에는 辟車鈴下侍閤門闌部署街(里)走卒

을 따르게 하는데 모두 程品의 多少가 있으며 맡은 바 직무에 따라 領率하게

한다 (驛馬는 30里에 하나를 설치한다) (卒은) 모두 적색 두건과 진홍색 소창

옷을 착용한다

즉 지금 鞭杖을 잡고 따르는 자들이다 이는 錢이 있는 자로 하여금 그 (役

에) 대한 資錢을 내게 하여 몸으로 직접 노역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39)

〔 ( ) 내의 글은 결락된 부분을 輿服志 원문에서 보완함〕

인용된 속한지輿服志의 기사는 公卿 以下 縣의 三百石 官長에 이르

기까지 이들을 導從하는 下吏들의 配屬 員數를 규정한 것이다 열거된

役職들은 모두 300석 이상 관원을 導從하는 役員들인데 후한 明帝 章

帝期에 일부 지역에서 이 役職의 명목으로 走卒錢을 징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記事는 順帝 연간에 尙書僕射 虞詡가 上言한 것인데 당시

長吏 2천석관들이 謫罰者에게 貧人 구호를 위한 lsquo義錢rsquo의 명목으로 贖

錢을 강요하고 守令은 이를 빌미로 聚斂함에 順帝 원년 이래 백만전

이상을 受取한 長吏가 끊이지 않고 있는 사정을 진언한 가운데 그 이

전 永平 章和 연간에 있었던 사실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즉 州郡에

서 走卒錢을 징수하여 그 역을 면제시켜주고 대신 빈궁한 자를 그

役에 고용하여 그 錢을 雇賃으로 지급해주는 일이 있었다 당시 司空

이 이 事案을 탄핵하니 해당 州郡縣이 모두 坐되어 免黜되었었다 그

때의 전례와 마찬가지로 당시 임시로 사용하였던 제도(走卒錢 징수와

雇賃 지불)를 蠲制할 것을( 蠲制權制 ) 주청하였고 이에 조서를 내려

州郡을 切責함으로써 그러한 贖錢 강요가 이로부터 그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40) 따라서 走卒錢 징수와 導從役의 雇傭 방식 운영은 후한

39) ldquo卽今行鞭杖者也 此言錢者令其出資錢 不役其身也 走卒伍伯之類也 續漢

志曰 (車前)伍伯 公八人中二千石六人千石六百石皆四人自百石以下至二

百石皆二人 黃綬 武官 伍伯 文官 辟車鈴下侍閤門闌部署街

(里)走卒 皆有程品多少 隨所典領率 (驛馬三十里一置 卒)皆赤幘絳褠 卽

今行鞭杖者也 此言錢者令其出資錢 不役其身也

40) 후한서 권58 虞詡傳에 是時長吏二千石聽百姓謫罰者輸贖 號為lsquo義錢rsquo 託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7明帝 章帝期에 한정되어 시행된 것으로 모두 不法이었고 虞詡의 順帝

시기에는 시행되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渡邊信一郞에

의하면 이들은 秦漢에서 관부의 최하층으로서 관부에서 필요로 하는

導從役 등 일상적인 노역에 복무하며 民으로부터 강제 징발되어 복무

하였는데 후한 초에 이미 走卒錢이 징수되고 특정 임무는 면역전을

재원으로 한 고용노동으로 전환되었다고 한다41) 그러나 章帝 이후 50

여년이 지난 順帝期에 이르기까지 고용 형태의 운영이 반복되지 않고

있는 것에 의하면 고용 노동으로의 진전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

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어쨌든 導從役의 고용 방식 운영이 不法

이었다 함은 그것이 본래 징발 형식으로 운영되는 것이었음을 말해준

다 錢이 있는 자로부터 走卒錢을 받고 이 재원으로 빈한한 자를 고용

하여 雇賃을 지급하는 不法을 행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어지는 지적에

서 順帝 때 지방관들의 贖錢 강요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관리들의 私利

도모에 의한 것이다 또한 그 의무자에 富者가 있어 그 實役을 피하고

자 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導從役과 같은 下吏의 봉록은 매

우 적기 때문에 여타의 수익이 있다면 그 봉록에 꼭 의지할 필요는 없

었을 것이다 이들이 비록 관부의 員吏이고 그 吏職이 생업이 되는 것

이지만 최말단의 賤役 내지 厮役으로서 천대받는 면이 많았을 것이다

때문에 이 職役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도 많았을 것이다

예기王制에 무릇 전문기능으로 事上(奉公)하는 자가 祝史

射御醫卜 및 百工이다 무릇 전문기능으로 事上하는 자는 다른

일을 해서는 안 되며(不貳事) 근무하는 관서를 옮겨서도 안 된다(不移

官) 出鄕하면 士와 抗禮하지 못하며 家에서 仕하는 자도 出鄕하면 士

와 抗禮하지 못한다 고42) 하였다 즉 士의 신분이 아닌 일반서민 출신

為貧人儲 而守令因以聚斂 詡上疏曰 ldquo元年以來 貧百姓章言長吏受取百萬以上

者 匈匈不絕 謫罰吏人至數千萬 而三公刺史少所舉奏 尋永平章和中 州郡

以走卒錢給貸貧人 司空劾案 州及郡縣皆坐免黜 今宜遵前典 蠲除權制 於是詔

書下詡章 切責州郡 謫罰輸贖自此而止rdquo

41) 渡邊信一郞 中國古代の財政と國家 (汲古書院 2010 第三章) p128

42) 禮記王制 (十三經注疏 中文出版社) p2905에 凡執技以事上者 祝史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58이 여러 기능직의 吏職에 복무하면서 함께 관부에 있지만 본 소속의

직장에서 다른 직장으로 옮길 수도 없고 신분상 士와 대등한 위치에

처하지 못하며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또한

府史 이상의 職官과 구분되는 胥徒의 특성과 상통한다

속한서 백관지2에 射聲校尉一人 比二千石 의 本注에 服虔曰

工射이다 어두운데서 소리를 듣고 활을 쏘아 명중시키는 까닭에 이름

하였다(工射也 冥寞中聞聲則射中之 故以為名 고 하였는데 여기서

工射 는 射도 工 의 한 분야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은 그 기능으로

奉公하는 것이 그 職分이고 생업이기도 하며 다른 직종이나 직업을

갖을 수 없고 옮길 수도 없는 자들이다( 不貳事 不移官 ) 이들은 그

職能으로 생업을 유지하지만43) lsquo父死子代rsquo 의 世業으로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고 賤職인 까닭에 여기에서 벗어나 신분상승을 바라는 경향이

있게 된다 이를테면 三國魏의 黃朗은 그 부친이 縣卒로서 鈴下 伍伯

의 職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抗志 遊學하여 현령을

거쳐 군태수에 이르렀는데 부친의 일을 생각하여 屬下의 鈴下 伍伯을

부를 때 鈴下 伍伯이라 부르지 않고 항상 姓字로 불렀다 비록 분노

하였을 때도 鈴下 伍伯으로 부르지 않았다44)

그런데 導從役 복무자는 징발되어 관부 내에서 복역하는 인원 중에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전체 복역 대상자 가운데 극히 소수에 불과하

다 특히 黃綬의 武官을 導從하는 伍伯 등의 직무가 護衛와 侍衛 警備

등이 위주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무술과 용력을 갖춘 이들로 선발된

그룹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黃綬 이상의 문무관에 소속되어 그 員數

射御醫卜 及百工 凡執技以事上者 不貳事 不移官 出鄕不與士齒 仕於

家者 出鄕不與士齒

43) 禮記 王制에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百工 各以其器食之 (注에 器 能也)

44) 三國志 권23 裴潛傳 所引 魏略에 黃朗字文達 沛郡人也 爲人弘通有性

實 父爲本縣卒 朗感其如此 抗志遊學 由是爲方國及其郡士大夫所禮異 特與東

平右姓王惠陽爲碩交 惠陽親拜朗母於床下 朗始仕黃初中 爲長吏 遷長安令 會

喪母不赴 復爲魏令 遷襄城典農中郎將涿郡太守 以明帝時疾病卒 始朗爲君長

自以父故 常忌不呼鈴下伍伯 而呼其姓字 至於忿怒 亦終不言 朗旣仕至二千石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59가 정해진 것에 의하면 庶民在官者 로서의 胥徒에 상당한다 봉록이

지급되는 일자리이며 민의 공동의무인 일반요역에 대신하여 복무하는

것인 만큼 면역전의 授受 행위는 不法이다

상술한 輿服志에 각 300석 이상의 官員 당 이들의 배당 員數가 규

정되어 있는 것에 의하면 이들도 분명히 관부의 한 구성원들이다 속한서 백관지 注引의 漢官에는 官長 내지 命官級 屬下의 員吏 員數

및 秩祿을 기재하고 있다 이를테면 속한서 백관2에 衛尉 卿一人

中二千石 本注曰 掌宮門衛士 宮中徼循事 丞一人 比千石 이라 하였

고 注引에 漢官曰「員吏四十一人 其九人四科 二人二百石 文學三人

百石 十二人斗食 二人佐 十二人學事 一人官醫 衛士六十人」이라 하

였다 이 가운데 百石까지는 봉록 지급이 명시되어 있지만 그 이하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봉록이 전혀 지급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斗食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斗升으로 계산되는

日數 계산에 의한 연봉액이 정해져 있다 百官受奉例의 注 所引 漢書音義에 斗食祿 日以斗爲計 라 하였고 한서 百官表上에 漢官名

秩簿에 이르길 斗食은 月俸 11斛 佐史는 월봉 8斛이다 一說에 斗食

이란 연봉이 百石에 이르지 못하여 日當으로 계산해서 1斗2升을 食하

는 까닭에 斗食이라 한다 고 하였다 속한서 백관5의 百官受奉例에

서는 百石이 月 16斛이고 斗食 이하는 위와 같다 또 墨子 雜守篇에

斗食은 1년에 36石이다 參食이면 1년에 24石이고 四食이면 1년에 18

石 五食이면 1년에 14石4斗 六食이면 1년에 12石이다 斗食은 5升을

食하고 參食은 3升小半을 五食은 2升 六食은 1升大半을 食한다 하루

에 2회 食한다 고 한데서 알 수 있다 斗食 은 1食에 5升 하루에 2

食이니 매일 1斗를 받아 1년 360일에 총 36石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

參食 은 1食에 3과 13升 즉 13斗를 받아 1일에 23斗가 되고 1년에

24石을 받는다 그 이하의 四食에서 六食까지는 斗食 이하에 열거된

下吏의 지급액 규정일 것이다

閻步克에 의하면45) 周代에서는 士 이상에게 祿田을 지급하여 그

수익을 食하게 하는 것으로 연봉을 지급하는 형태였는데 하급관리나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0工醫師 등 기술직 및 兵員에게는 月 단위로 지급하는 이른바 稍食

형태로 운영하였으며 나중에 증액 고정화 되고 아울러 錢으로 지불하

게 됨으로써 月俸의 秩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稍食 이란 주례天官

宮正에 宮正이란 왕궁의 戒令糾禁을 맡는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그 출입을 검찰

하고 그 稍食을 균등히 하고 그 淫怠하고 奇邪한 民을 제거하고 그

什伍를 모아 道義를 가르친다 月이 끝나면 그 稍食을 會計하고 1년이

끝나면 그 (吏職의) 行事를 검열한다 라46) 하였는데 이 稍食에 대해

鄭司農은 禄廪 疏는 宫中官府 등의 月禄 이라 하였다 즉 稍食은

月俸인 셈인데 이를 하급관리의 月俸이라 한 것은 國語晋語4에 公

은 貢을 食하고 대부는 읍을 食하며 士는 田(公田)을 食한다 庶人은

力으로 食하고 工商은 官(官으로부터 받은 田)을 食하며 皁隸(吏에

속한 徒隸)는 職을 食하고(각 담당 職의 大小에 따라 食祿) 官宰(大夫

의 家臣)는 加(大夫의 家臣)를 食한다 에서 公 大夫 士까지는 國 邑

田을 봉록으로 받는 까닭에 연봉을 받는 것이 되고 庶人 이하는 관부

에 給事한 力(勞役) 등을 계산하여 지급 받는 까닭에 월봉이라는 것이

다 또 주례 夏官 校人의 校人은 王馬之政을 관장한다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馭夫

의 祿과 궁중의 稍食을 균등히 한다 라 하였는데 그 注에 師圉는 府

史 以下다 고 하였다 즉 府史 이하 下吏의 봉록 관련 업무이다 또 주례 天官 醫師에 연말이 되면 그 醫療한 실적을 검사하여 그 食을

정한다 十점 만점이면 上 十에 一을 失하면 次等 十에 二를 失하였

으면 그 次等 十에 四를 失하였으면 下로 한다 하였고 또 방비를

굳건히 하기 위해 성곽 溝池 등의 役事와 守備를 관장하는 掌固는 이

에 복무한 士庶子와 衆庶에 대해 필요한 도구와 財用을 공급해주고 그

稍食을 균등히 한다고 하였다(同 夏官 掌固) 이러한 자료에 의하면 府

史 이하의 下吏에 대해 祿俸 지급의 額이 기술되어 있지 않는 것은 食

邑田이나 百石까지는 年俸의 일정액이 규정되어 있고 이 액수가 월봉

45) 閻步克 從稍食到月俸mdash戰國秦漢祿秩等級制新探 (學術界 20002)46) 宮正 掌王宮之戒令糾禁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幾其出入 均其稍食 去其淫怠與其奇邪之民

會其什伍而敎之道義 月終 則會其稍食 歲終 則會其行事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1으로 나뉘어 지급되는 것과는 달리 그 이하의 吏는 月別 給事한 日數

나 실적을 계산하여 지급하는 月俸 형태였고 그 총합이 百石 이하였

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앞에 든 百官名秩表나 묵자의 기사는 그

러한 사정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府史 이하인 胥徒나 그 직급에 상당

하는 속한서 백관지의 각 관부별 官長 屬下의 員吏로서 有秩 아래에

나열된 직급들도 그 근무일수나 실적에 따라 봉록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有秩의 官은 百石 이상의 年俸이 지급되는 下限의 관리

를 가리키며 佐史 이하의 월봉 수입자에 대비하여 쓰이는 용어이다

근래 楊振紅 廣懶薰雄 宮宅 潔 등은 佐史 이하의 下吏에는 1개

월을 단위로 윤번 근무하는 자들이 있어 이들은 그 이름 앞에 更 이

붙고 이에 대비하여 常勤하는 자들은 冗 이 붙어 구분되었다 하고

그 내역과 성격을 고찰하였다47)사실 후대의 冗 내지 冗官 이 보통

散官 의 뜻이었던 것에 비해 선진에서 진한 시기의 여러 자료에 보이

는 冗 은 위의 연구들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更 에 대한 相對로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lt운몽진간gt 秦律十八種 工人程에 冗

隸妾 2인은 工 1인에 當하고 更隸妾 4인은 工 1인에 당한다 小隸臣妾

으로서 可使者 5인은 工 1인에 당한다(冗隸妾二人當工一人 更隸妾四

人當工一人 小隸臣妾可使者五人當工一人) 에서48) 冗隸妾은 更隸妾에

비해 2배의 우대를 받고 있으며 lt이년율령gt史律에 大祝이 祝을 시

험해보아 祝에 뛰어나고 祠事에 밝으면 冗祝으로 삼아 이들을 冗한다

(大祝試祝 善祝 明祠事者 以爲冗祝 冗之) 고 하였는데 이 冗 은 같

은 史律의 祝十四章으로 學童들을 시험해서 능히 7천언 이상을 誦할

수 있어야 祝으로 삼고 5更으로 한다(以祝十四章 試祝學童 能誦七千

言以上者 〔乃得〕爲祝 五更) 에서의 更 과 相對로 위치하고 있다

47) 楊振紅 秦漢簡中的ldquo冗rdquordquo更rdquo餘供役方式middotmiddotmiddot從lt二年律令 史律gt談起 (簡帛硏究 廣西師範大學出版社 2006) 廣懶薰雄 秦漢律令硏究 (汲古書院

20103) pp297-304 宮宅 潔 漢代官僚組織の最下層 - 官 と 民のはざま-

(東方學報 87 2012) pp11-1248) 睡虎地秦墓竹簡 (北京 文物出版社 1978) p74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2또 lt里耶秦簡gt에도 冗戍士五(伍) (⑧666+ ⑧2006)와 更戍(某) (⑧

143 ⑧149 ⑧694)의 對稱 용어가 있다 한편 주례春官 槀人에 外

內朝의 冗食者의 食을 공급해주는 것을 관장한다(掌共外內朝冗食者之

食) 라 하였고 이에 대한 鄭注는 冗食者란 (관부에 밤까지) 머무르며

문서 작업을 하는 것이 마치 지금의 尙書의 屬吏로서 當直하는 者들과

같다(冗食者 謂留治文書 若今尙書之屬 諸直上者) 賈疏는 ldquo(鄭注에

서)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rdquo라 한 것은 또한 漢法을 인용하여 설명한 것이니 차례로 당직

하는데 관부에 留宿하며 (집에) 돌아가지 않는 까닭에 반드시 음식을

제공해야 한다(亦引漢法說之 謂以次當直 留在朝 宿不還 須以食供之)

고 해석하였다 여기서의 冗 은 夜勤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일

상 정규의 일을 넘어선다는 뜻을 지닌다 冗食 은 야근하는 관리에게

제공되는 음식이기 때문에 정규의 음식 지급에 추가되는 것을 의미한

다 전한 成帝 河平 연간에 수해를 입은 군국을 구휼하면서 그 지역민

을 다른 군국으로 피신시키고 그 곳에서 冗食케 하라 고 하였는데49)

文穎은 冗이란 散이다 廩食을 散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遊離되어) 정착하지 못하는 戶를 役事시켜 일자리를 주는 것이다(冗

散也 散廩食使生活 不占著戶給役使也) 로 해석하였고 如淳은 離散

된 자들에게 給食하고 관부는 그 임금을 지불한 것이다( 散著人間給

食之 官償其直也 )고 해석하였다 즉 수해로 유민이 된 자들에게 給

食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하고 아울러 役事의 일자리를 주어 그 임금

을 지불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석자들이 冗 을 散 의 뜻으

로 해석한 것은 국가의 재정을 풀어서 지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國錢의

lsquo散布rsquo라는 뜻으로 본 것이다 이 또한 정규의 재정 지출을 넘어선 추

가의 지출이므로 실은 위의 사례들과 같은 뜻이 된다 또 한서권24

하 식화지하에 또한 周官의 稅民 제도에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民이 떠돌아다니면서

일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夫布一匹을 납부하게 하며 布를 납부할 수

49) 漢書 卷10 成帝紀 河平4년조에 遣光祿大夫博士嘉等十一人行舉瀕河之郡水

所毀傷困乏不能自存者 財振貸 其爲水所流壓死 不能自葬 令郡國給槥櫝葬埋

已葬者與錢 人二千 避水它郡國 在所冗食之 謹遇以文理 無令失職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3없는 자에게는 縣官에서 冗作케 하고 이들에게 衣食을 제공한다 고50)

하였다 여기서 冗作 이란 정규의 요역 부과 외에 징벌의 뜻으로 역

을 추가하여 부과한다는 의미이다

또 lt운몽진율gt 司空에 冗邊 이 있다

백성에게 모친 및 동생이 있어 隸妾이 되었는데 謫罪가 아니고 冗邊5

歲에 복역하되 근무 기간을 無償으로 하고 1인을 면하여 庶人으로 하고

자 한다면 이를 허용해준다(百姓有母及同牲(生)爲隸妾 非適(謫)罪殹(也)

而欲爲冗邊五歲 無賞(償)興日 以免一人爲庶人 許之) (司空 p91)

이 冗邊五歲 도 규정된 정규 戍邊役의 額 외로 추가된 役이란 뜻의

용어이다 그래서 이 또한 위의 사례들과 마찬가지의 뜻이다 이렇게

冗 에는 更 에 相對한 지칭으로 更 에 복무하는 자들에 비해 전문

분야에서 뛰어난 역량을 갖춘 자들이거나 기타 사유로 정규의 額을 넘

어서는 복무를 하는 것 또는 그 役者 또는 職名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즉 정규 일반의 更 방식의 근무 額(日數)에 비해 담당

분야의 뛰어난 능력이나 징벌 등 기타 사유로 더 많은 근무를 추가로

하게 되는 자들의 職을 冗 이라 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러한 冗 을 쓰는 데는 국가의 재정 지출도 추가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국가재정의 추가 지출의 뜻으로서 散(散布)

이라는 뜻이 되어 후대 冗官==散官의 칭이 생긴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해석된다면 그간 충분히 해석되지 못한 lt운몽진률gt廏苑

律에 연간의 養牛 실적 평가에서 下等을 받은 宂皂에게 2개월의 복무

기간을 추가하는 벌을 내린다는 律文에 보이는 宂皂51) 그리고 同 秦

律雜抄 屯表律에 나오는 lsquo冗募rsquo도52) 위와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50) 又以周官稅民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民浮游無事 出夫布一匹 其不能出布者 冗作縣官 衣食

51) lt雲夢秦律gt p30 廏苑律의 율문 卒歲 以正月大課之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殿者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罰

冗皂者二月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52) lt雲夢秦律gt p145 秦律雜抄의 율문 冗募歸 辭曰日已備 致未來 不如辭

貲日四月居邊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4것이다 廣懶薰雄은 更 을 非常勤 冗 을 常勤의 뜻으로 요약하였는

데53) 그러한 일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는 更 이 본래 규정된

交代근무라면 冗 은 본래의 규정액을 넘어선 근무를 뜻하는 까닭에

그러한 해석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설문宀部에 冗

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人在屋下 無田事也 라 하였는데 無田事 로서의 冗의 뜻도 更

이 당번으로 給事하는 기간을 제외하면 田事에 있어야 하는 것과는 달

리 冗은 비당번인 경우에도 관부에서 給事하는데서 칭해진 것이라 하

겠다

예기중용에 忠信인 자에게 봉록을 두텁게 주는 것은 士를 勸함이

고 때로(일시적으로) 使役시키되 賦斂을 가볍게 하는 것은 백성을 勸

하기 때문이며 日用으로 근무시키되 그 근무기간과 성과를 계산하여

급료(廩)를 지급하여 그 근무에 합당하게 보상해주는 것은 百工을 권

하기 위함이다(忠信重祿 所以勸士也 時使薄斂 所以勸百姓也 日省月

試 旣廩稱事 所以勸百工也) 라 하였다 여기서 忠信 이란 禮記禮器에 忠信 禮之本也 라 하였고 여기서는 이를 修學하고 실행할 수

있는 사대부 내지 命官層을 가리키고 있다 百工에 대해 日省月試

한다 함은 근무한 日數와 그 성과를 월 단위로 계산한다는 것이다 注

에서 旣廩稱事 의 旣 를 lsquo餼rsquo로 해석하고 lsquo餼廩rsquo은 稍食 이라 하였

다54) 여기에서 일반 백성에게 때로(일시적으로) 사역시킨다는 時使

가 곧 更 의 형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진한 시기 更徭制의 운영에

서 충분히 입증된다 宮宅 潔은 年俸이 있는 것이 有秩인데 그 最下가

百石이며 연봉이 없고 본래 日食과 月食으로 지급되는 등급을 斗食이

라고 한다 하였다55) 그가 말한 斗食은 백관표에 나열된 斗食과 그 이

하의 여리 吏職을 포함한 것이다 그런데 일반 백성에게 更役이 부과

되고 그들에게 동원된 기간 동안 당연히 매일의 給食은 지원되겠지만

그 일반 요역으로서의 更役에 대한 日當의 보수가 지급된 것은 아닐

53) 廣懶薰雄 앞의 글 p304

54) 注에 日省月試 考校其成功也 lsquo旣rsquo讀爲餼 餼廩 稍食也

55) 宮宅 潔 앞의 글 p39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5것이다 그 일반 요역은 일반 백성의 기본 의무사항인 까닭이다 반면

百工의 근무일수와 성과액에 대해 稍食 (日俸 내지 月俸)이 지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매 끼니의 급식이 아니라 工役에 대한 보수 내

지 給料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근무일수라든가 성과액을 계산

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기서의 百工은 관부의

員吏에 속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관부에 속하여 매

끼니의 식사 뿐 아니라 工役한 일수와 성과량에 따라 봉록이 지급된다

는 것이다 그래서 봉록 지급은 錢이나 곡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반

면 전기한 국어晋語4 文公修內政納襄王 章에 公食貢 大夫食邑 士

食田 庶人食力 工商食官 皁隸食職 官宰食加 에서 工商食官 의 工

商은 모두 관부의 員吏에 속한 자들인데 그 注에 옛날에는 田을 주는

것으로 祿俸을 제정하였다 관부에서 주는 廩이란 곧 관부에서 田을

받는 것이니 후세에 錢粟을 주는 것으로 祿俸을 제정한 것과 같지 않

다(古者以田制祿 官廩之者 卽受田於官 非如後世之以錢粟制祿也) 고56)

하였다 또 한서권24식화지상에 士工商이 田을 받는 것은 5口가 받

는 것이 되어야 농부1인이 받는 것에 當한다(士工商家受田 五口乃當

農夫一人) 고 하였다 즉 百工과 商賈는 그 직무에 따라 俸祿을 받는

데 후대와 같이 錢粟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田으로 받으며 그 액수는

일반 농민의 15이라는 것이다 이는 전술한 주례의 胥徒가 최하품

의 田 1百畝를 俸祿으로 받는 것과 lsquo以田制祿rsquo이라는 면에서 일치한다

그리고 lsquo以田制祿rsquo이 후대에 lsquo以錢粟制祿rsquo으로 변천 된 것은 秦漢의 사

례를 통해 분명하다 어쨌든 관부의 員吏인 百工과 商賈에게 일반 백

성의 更役과는 달리 祿田 또는 월봉 형태의 錢粟 지급이 행해진 것이

라 하겠다 또한 工商이 일반 요역 대신에 전문기능인으로서의 工役과

관부 소요 물품의 調達役의 職分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이 또한 職

役에 해당하는 셈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관부의 員吏이면서 斗食 보다 下位에 위치하여 稍

56) 國語正義(下冊) (董增齡 撰 巴蜀書社 1985) pp815-6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6食 내지 月俸을 받는 여러 導從役 祝醫工商 등의 役은 그 職分

의 役 즉 職役으로 奉公한다 그런데 후한 초에 이 職役의 면역전으로

서 走卒錢을 징수하고 그 재원으로 빈민을 고용한 것이 不法이었으며

수십 년 이어지다가 금지되고 違法한 관료들이 처벌받고 있는 것에

의하면 이 役들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戶가 지정되어 있어 여타의 일반

戶가 대신하여 맡을 수 없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은 導

從役 등의 담당자는 일반서민이되 그 중에서 특별히 선발된 층으로 구

성되어 전문의 분야를 세습하며 의무로 담당하는 하나의 신분층으로

형성되어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그 役은 하나의 身分役이기

도 하였던 셈이다 또한 그 代役錢으로서 走卒錢 징수 및 雇傭 방식이

나오게 된 것은 그 역의 담당층 가운데 錢으로 實役을 피할 수 있는

부유충이 형성되었고 후한 前期에 전통의 身分制가 느슨해진 여건에

서 身分役의 근본 형태가 유지되지 못하고 일탈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속한서백관3에 執金吾의 속관 중에 화려 장려한 복장

과 장식으로 황제의 행차를 호위 수종하는 騎士로서 緹騎二百人이 있

는데57) 本注에 無秩 比吏食奉 이라 하였다 즉 吏가 아니지만 吏의

대우를 받아 봉록을 받는 계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下吏에

들지 못하지만 봉록을 받는 면에서는 동일한 계층이다

한편 앞에 든 國語 晋語4에서 工商食官 에 이어 下記된 皁隸(吏

에 下屬한 徒隸)食職 이 있다 이 皁隸 계층은 지금까지 검토한 庶民

在官者 로서의 胥徒導從役 담당자 및 樂祝醫衛士工商 등

보다 下位 내지 그 下屬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그 담당 신분과 그 役의 성격에 대해 검토한다

Ⅳ 下層 員吏의 役과 徒隸層의 役

57) 당 조목의 注 所引 漢官曰 執金吾緹騎二百人 [持戟]五百二十人 輿服導從

光滿道路 群僚之中 斯最壯矣 世祖歎曰 ldquo仕宦當作執金吾rdquo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7

앞에서 검토한 관부 구성의 최말단에 위치한 주례에서의 胥徒와

춘추진한 시기의 導從役 담당자 및 樂祝醫衛士工商 등의 下

吏層 외에 그 下屬으로 보이는 皁隸가 있다 앞에 든 각 신분에 따른

奉公의 職分을 나열하고 있는 國語晋語4의 記事 皁隸食職 의 注에

皁隸를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라 한 것에 의하면 이 계층은 위에 열거한

여러 下吏에 下屬한 노역자들이라 할 수 있다 胥徒와 導從役 담당자

등은 각각 주례와 漢官 등에 그 員數가 규정된 까닭에 이들은 員

數 규정에 들지 못한 皁隸에 대비해 下層의 員吏로 칭할 수 있다

皁隸가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라 하였으니 곧 관노비 내지 그에 類하는

계층일 것인데 그들이 lsquo職을 食한다rsquo고 한 것은 각 분야의 官署에 分屬

되어 그 職務에 給事함으로써 생업을 삼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皂

隸 牧 圄 僕 등이 후대의 천민이나 隸民이 아니라 일반민이었다

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58)그러한 주장은 이들이 대체로 관부에 給

事하는 계층으로 여러 기사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고 위의 皁隸食

職 은 곧 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관부에 給事

하는 면으로 인해 예속성이 있게 된다는 면이 있다 후술하는 바와 같

이 그들이 일반 서민 출신이면서도 후대에 그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모

두 예속신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통용되는 것은 그러한 관부에의 예속

성이 분명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예속성을 말해주는 것이 또한 職

役의 한 속성이다

한편 國語 晋語4 文公修內政納襄王章에 (晋文公)元年 春에 公(晋

文公)과 부인 嬴氏(秦穆公의 女인 文嬴)가 王城(秦의 地名)에서 돌아올

때 秦伯이 衛士3천인을 納하였는데 실로 기강이 있는 僕들이었다(元年

春 公及夫人嬴氏至自王城 秦伯納衛三千人 實紀綱之僕) 고59) 하였다

秦漢의 衛士 출신과 달리 여기서는 그 출신 신분이 僕인 자들로 구성

58) 黃中業 春秋時期的ldquo皂隸牧圉rdquo屬于平民階層說 (齊魯學刊 阜師院學報) 1984-2 19844) pp69-72

59) 위의 책 pp809-810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68되어 있다 이 당시는 秦 穆公의 지원으로 晋의 文公이 귀국하여 懷公

을 죽이고 즉위한 때인 까닭에 군사 내지 호위부대의 지원이었다 그

衛士 군단의 신분은 皁隸層에 들어가는 僕인데 관부에 給事하는 職分

은 衛士이다 이들의 紀綱이 선 자들이었다고 한 것은 본래 秦에서도

衛士의 職으로 給事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춘추기에 邑數百이나 社

數百의 단위로 국가 사이에 分與되는 일이 자주 있었고 3천인에 이르

는 多數의 전문 집단이 타국에 分與된 것이긴 하지만 일부 전문의 인

력을 分與나 上納 하는 것 또한 당시 종종 일어났던 일이다 어쨌든

그 衛士집단이 모두 僕이었다는 것은 일반민이 아니고 관부에 예속되

는 신분이었음을 말해준다 예속신분으로 궁성을 지키는 衛士로 삼는

것은 주례地官 師氏에서 그 직무 가운데 (師氏는) 그 소속의 四夷

之隸를 거느리고 각기 그 병력으로 왕성의 문밖을 지키는데 복무하며

또한 (행차 때) 앞에서 길 정리를 한다(師其屬帥四夷之隸 各以其兵服

守王之門外 且蹕) 에 이미 보이고 漢武帝 때 제후왕 貴戚의 不服을

다스리기 위해 중앙 내사지역을 감찰하는 司隸校尉와 지방의 刺史에게

중도관의 徒奴 1200인을 보내어 二千石官을 독찰하게 하였는데60) 이

1200인의 徒奴부대는 이후 사예교위 내지 刺史 직속의 상비군단이 되

었고 그 성원은 세습 병사집단의 근간이 되어 牧使 刺史 등 將領下의

公兵이나 私兵으로 활약하였다61) 漢官舊儀 卷上에 漢代 長安에 騎

亭長 79인과 함께 6월 1更의 倉頭盧兒를 給事하게 하였다62)이들 四夷

之隸나 徒奴倉頭盧兒 등은 적군포로이거나 刑徒 계통 출신으로 관부

에 예속된 신분일 것이다 특히 관부에 囚禁된 형도들은 여러 방면의

60) 北堂書鈔設官部 및 漢官儀권2補遺2에 ldquo司隸校尉는 武帝 때 처음 설치되

었다 이후 諸侯王 貴戚이 不服함에 中都 中官의 徒奴千二百人을 (파견해서)

一校尉部刺史에게 속하게 하여 二千石官을 독찰하게 하였다(司隸校尉 武帝初

置 後諸侯王貴戚不服 乃以中都中官徒奴千二百人屬爲一校尉部刺史 督二千石

也)rdquo

61) 이에 대해서는 박건주 한대의 지방상비군과 部曲의 推移 (동양사학연구118 20123) 참조

62) 長安給騎亭長七十人 六月一更倉頭盧兒 (漢官六種 北京 中華書局 1990

9) p3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69노역에 활용되었는데 근래 石岡 浩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刑徒 집단

은 크게 세 부류 내지 등급으로 나누어져 활용되고 대우에 차별이 있

었다고 한다 즉 가장 上位에 있는 司寇는 특정 임무에 복무하는 것이

정해진 형도이며 전택을 소유하여 戶主가 되는 권리(lt二年律令gt

310-316簡) 왕조로부터 사여 받는 권리(同 291-293) 子가 士伍로 복

귀할 수 있는 권리(同 364-365)를 갖는다 다음으로 徒隸 는 특정 관

서에 예속하여 직무를 숙지하였거나 기술에 숙련하여 전문기능자에 동

등한 가치를 지니는 형도 를 지칭하며 그것으로 동일 직장에 계속 근

무하는 까닭에 일반 형도와는 달리 토목공사나 물자운송 등의 노역에

서 제외된다 또한 왕조에 공헌하는 자로서 사여를 받는 대상도 된다

(同 291-293) 즉 그들은 隸臣鬼薪城旦이면서 숙련자 기능자로서

일반 형도보다 우대받는 자들이다 위 양자에 비해 일반 형도는 위의

여러 특혜를 받지 못하며 城旦은 주로 토목사업에 隸臣은 주로 여러

관서의 잡다한 노역에 복역한다63)이는 충분히 수긍되는 견해이다 이

가운데 徒隸는 관부 내 각 分署의 전문 직장에 分屬되어 사역될 것이

기 때문에 전술한 lsquo吏에 下屬한 徒隸rsquo로서의 皁隸가 곧 그들의 주요 부

분이 될 것이다 그 중에 일반 관노비로부터 개인적 재능과 기술로 선

발되어 해당 관서에 給事하는 자들도 포함될 것이다 단지 정규의 전

쟁에 형도를 동원하는 사례가 많은데 그들이 정규의 병사가 된 것은

아니고 군공을 세워 免刑되기 이전에는 그대로 형도인 것과 같이 함께

관부에 給事하고 있다 하더라도 각 신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상의 검토에 의하면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에는 이른바 lsquo吏에 下屬

한 徒隸rsquo로서 食職하는 皁隸집단이 있고 그 구성에는 관노비 뿐 아니

라 적군포로나 관노비 및 형도 출신의 衛士 그리고 刺史 牧使 등의

將領下에 있는 직속 상비군 형도 가운데 司寇 그리고 기능과 숙련으

로 형도 중에서 선발된 職能의 徒隸집단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員

吏이되 下吏인 계층의 복무가 그 신분에 따른 職役인 것과 마찬가지로

63) 石岡 浩 秦漢代の徒隸と司寇 -官署に隸屬する有職刑徒 (史學雜誌 121-120121) p32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0이 皁隸層의 복역도 모두 관부에 생업을 의존하는(食職) 職役이라 할

수 있다

또 좌전에 주로 보이는 輿人이 있는데 同 昭公7년조에 天에 十日

이 있고 人에 十等이 있으니 下가 上에 事하는 所以이다 까닭에 王의

臣은 公 公의 臣은 大夫 대부의 臣은 士 士의 臣은 皁 皁의 臣은

輿 輿의 臣은 隸 隸의 臣은 僚 僚의 臣은 僕 僕의 臣은 臺이다 馬

에 圉가 있고 牛에 牧이 있어 百事를 待한다 라 하였다 古來의 여러

注疏에서부터 이미 lsquo輿人rsquo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지만 이를 분석한 宇

都木 章의 견해에 의하면 縣鄙의 野人이 평시이든 戰時이든 國都의

귀족에 징발되어 葬儀戰士補助 車馬와 관련되는 여러 役務에 종사

하는 때 그들을 lsquo輿人rsquo이라 칭하였다고 한다64) 여러 자료에 의하면 皁

에서 牧에 이르는 서열 순위가 어디에서나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

고 대개 동일 계층의 異稱인 경우가 많다 皁 이하의 서열에 이렇게

다단계의 臣屬 관계가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같은 徒에도 上位 순서로 胥와 徒 및 그 徒의 지휘를 받는 징발된 徒

가 있으며 員吏에 들어가는 導從役 등의 庶民在官者 가 있고 그에

下屬하는 皁隸의 구분이 있는 것에 의하면 최소한 士 아래의 서민 계

층에 3 - 4 단계의 차등 신분이 있을 수 있다 위의 十等 순위에서 士

이하에 위치하여야 할 庶民이 곧 皁輿 등에 해당할 것인데 모두 관

부에 給事하는 면에서 후대 예속신분을 가리키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

다 그리고 일반 서민 가운데서도 皁輿 이하는 모두 전문의 職分으

로 관부에 給事하는 의무가 주어진 계층이므로 일반 농민으로서의 서

민과는 구분되는 서민이었다고 생각한다 즉 일반 농민이 농업을 생업

으로 하며 일반의 요역 의무가 주어진 반면에 皁輿 등은 주로 전문

의 기능을 요하는 관부의 직무에 給事하는 것으로 일반요역을 대신하

며 때문에 일반 서민이면서 관부에 예속된 신분의 일면을 지닌다 그

렇지만 관노비나 형도로서 관부에 예속되어 給事하는 신분과는 명확히

64) 宇都木 章 輿人考 (三上博士頌壽記念 東洋史考古學論集 朋友書店 1979

12) pp108-11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1다르며 주례의 胥徒와 같은 下吏의 員吏 보다 보통 下位이지만 胥

徒와 마찬가지로 주로 전문 기능의 職分에 복역한다는 면에서 같고 그

일부분은 下吏에 충당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곧 胥徒가 일반 서민의

徒로부터 선발된 자들인 것과 같다 위의 十等 서열은 농민을 제외하

고 관부에 給事하는 신분만을 총괄하여 나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

술한 工商食官 皁隸食職 도 모두 관부에 給事하는 工商과 皁隸를 열

거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복무도 당연히 職役이 되는데 그 職能 내

지 職分의 종류별로 숙련도 및 경력 등에 따른 그룹 내에서의 서열이

있게 되고 이를 계층으로 인식해서 lsquo皁臣(臣屬)輿rsquo 등과 같은 記述이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 각 직능별 部署별 전문화된 職役의 활용은 관

부의 운영상 당시의 사정으로는 불가피한 면이 있다 그러한 체제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점차 계층 구분의 엄밀성이 느슨해지고 세분된

차등의 질서가 점차 단순화되면서 그 용어도 혼용되기에 이른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위의 계층 구분은 세분된 서열만이 아니라 각 계층

의 담당 職分을 구분해주는 칭호로 쓰인 면도 있다 그렇다면 輿人은

戰時에 주로 戰車부대를 보조하는 직무 분야를 담당하는 계층이라 할

수 있고 그러한 면에서 여러 下屬 계층 가운데 가장 상위의 계층이었

지 않을까 한다

한편 이상의 皁隸層이 본래 일반서민 출신이었다는 입장에서 보면

관부에 給事하되 향리에 거처하면서 일정 기간 만 순번으로 복역하는

交代制가 있었을 수가 있고 또는 대체로 일부 기능자나 世戶에 한정

되었겠지만 휴가 기간 외에는 상근하는 형태도 있었을 것이다 예속된

신분인 경우 그 거처도 대체로 관부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앞에 든 秦

漢律에 교대 근무하는 更隸妾의 존재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근무

기간에만 관부에서 거처하는 예속 신분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刑徒

중에서도 司寇는 田宅을 소유하고 戶主가 될 수 있었으며 徒隸도 賜

與를 받을 수 있는 까닭에 이들 중에 일부는 관부 밖에 따로 거처를

지니고 출퇴근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단지 衛士나 部曲 집단은

대체로 屯營 내에 거주하였을 것이다 위로는 승상으로부터 아래로는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2하급의 吏에 이르기까지 吏舍에 거처하며 휴가 기간이 되어야 비로소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는 大庭脩의 연구가 있지만65) 漢舊儀 卷下

에 舊制에 尉는 모두 관서에서 거처하였다( 舊制尉皆居官暑 ) 라66)한

것에 의하면 舊制 가 어느 시기를 말하는 것인지 불분명하지만 宿衛

와 경찰 임무의 尉職 외에는 관서에서 거처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음을

말해준다 매년 직급에 따른 수개월의 휴가 기간이 설정되어 있지만

이는 성내에 거주하며 매일 출퇴근 하더라도 고향은 먼 곳에 있는 경

우가 많아 歸鄕 휴가를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外地 출신으로 城內

에 거처가 없는 관리들을 위한 吏舍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吏舍의 존재가 모든 관리의 관부 거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居官府의 여러 給事職 관노비 司寇나 일부 徒隸를 제외한 일

반 형도 여러 當番의 宿衛職 등을 제외한 관리는 官舍 밖의 私家에서

거처한 것으로 본다

庶民在官者 로서의 職役 복무는 常勤과 교대근무의 두 시스템으로

운영되었을 것이다 胥徒는 본래 모두 징발된 徒 가운데서 재능 있는

자로 선발되어 관부에의 給事가 생업이 된 자들로서 祿田을 받는 자들

이며 員數가 책정되어 있는 까닭에 常勤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

나 함께 징발된 여타의 徒는 胥徒와 같은 給徭役의 奉公을 행하지만

순번으로 동원된 기간 만 한시적으로 복무하는 까닭에 동원 기간 동안

의 食料 이외에 노동의 보수를 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그들은 만

민의 기본 의무를 職役으로 이행하는 것일 뿐이다 정부로서는 관부에

給事할 人才와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지만 필요한 부

분을 모두 常勤하는 자로 임용하여 그들의 생업을 봉록 지급 등으로

전면 지원하는 것은 재정에 큰 부담이 되는 것이었다 즉 관부에서 필

요로 하는 특정 업무 기능자들을 일반 요역 면제 대신으로 복역케 하

고 이를 순번제로 운영하면 복무 당번 기간 외에 그들은 다른 생업을

65) 大庭脩 漢代官吏の勤務休暇 (秦漢法制史の硏究 創文社 1982) p584

66) 앞의 漢官六種 p81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3꾸려나갈 수 있기 때문에 국가는 그들에 대한 생업 유지 지원 부담이

훨씬 적어진다 관부 給事層 가운데 命官과 員吏 이상이 常勤制라면

그 이하의 여러 職役層들은 대체로 교대근무제 중심으로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테면 lt奏讞書gt 案例17에서 秦王政元年 雍縣人 樂人 講이 자신

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사건 당일 자신은 踐更에 복무하러 11월 한

달간 함양의 外樂(관서 기구 名)에67) 소집되어 복무 중이었음을 진술

하고 있다 따라서 함양에 거주하지 않은 樂人이 그 관서에서 常勤하

지 아니하고 특정시기 일정 기간 만 교대로 근무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獄事에서 피고인 樂人 講이 踐更으로 1개월 간 복무한

곳이 外樂인 까닭에 일반 요역이 아니라 樂人의 職役을 이행한 것이라

고 본다 전한 哀帝 때 樂人의 員數를 罷하라는 명령에 대해 승상 孔

光과 대사공 何武가 진언하길 각 담당별 樂人의 현재 員數와 罷할 수

없는 수를 열거한 후 총 829인의 員數 가운데 388인은 罷할 수 없다고

하자 이를 재가한 바가 있다68) 이는 전한말의 사정이지만 전국진에서

도 郊祭 등의 각종 국가제사와 宮中 樂이 행해졌기 때문에 위의 수치

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속한서 백관2 大樂令 注引의

漢官과 盧植禮注에 의하면 八佾舞를 추는 樂人의 員數가 380인인

데 여기에 卑者之子는 임용될 수 없고 6백석에서 2천석 및 관내후에

서 五大夫의 嫡子 출신 5척 이상의 신장 12세에서 30세 顔色온화 등

의 조건을 갖춘 자에 한정되었다69) 이에 의하면 樂人 講은 走馬의 傭

이 되어 京師에 왕래하고 있는 빈한한 자로서 도저히 중앙 大樂令 속

67) 관서 기구 이름으로서의 外樂은 lt이년율령gt秩律 449簡 및 西安相家巷出土

秦封泥에 보인다(周曉陸路東之 編著 秦封泥集 三秦出版社 2000 一

二44)68) 漢書 권22 예락지2

69) 漢官曰 ldquo員吏二十五人 其二人百石 二人斗食 七人佐 十人學事 四人守學事

樂人八佾舞三百八十人rdquo 盧植禮注曰 ldquo大(子)[予]令如古大胥 漢大樂律 卑者

之子不得舞宗廟之酎 除吏二千石到六百石 及關內侯到五大夫子 取適子高五尺已

上 年十二到三十 顏色和 身體修治者 以為舞人rdquo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4하의 樂人 員數에 들어갈 수 있는 처지가 못 되는 자이다 그는 향리

에 거주하면서 매년 1개월씩 京師의 外樂에 가서 복무하는 기간 외에

는 傭賃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下吏의 員吏가 아

니면서 樂工의 職能으로 일반 요역 대신에 京師의 제사나 예락 행사에

나아가 給事하는 자이다 그래서 그의 복역도 職役인 셈인데 이러한

모습은 주례의 胥徒와 흡사하다 단지 胥徒가 員吏로서 봉록은 받는

것과는 다르다 양자가 모두 職役이지만 胥徒는 庶民在官者 이고 樂

人 講은 lsquo非吏인 職能人rsquo이다 그렇지만 양자 모두 개인적인 職能으로

관부에 給事하는 면에서는 상통한다 따라서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

부에 給事하는데는 員吏로서 복무하는 경우와 非吏로서 복무하는 경우

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Ⅴ lt走馬樓吳簡gt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복무

형태 및 그 성격

1996년에 호남성 長沙市 도심 우물에서 발굴된 lt吳簡gt은 총 17萬

餘 枚로 아직 그 일부만이 정리 해독되어 출간된 상태이지만 이미 출

간된 분량 가운데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의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자

료들을 많이 지니고 있다 孫吳 嘉禾 연간(232-238)의 여러 戶籍簿

내지 吏民簿 등에 吏와 給吏로 구분된 人名簿가 다수 존재한다 이 자

료들은 그간 명확하지 못하였던 吏役과 吏戶의 존재형태와 관부에 給

事하는 계층 및 그 職役의 실태를 파악하는데 획기적인 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근간의 연구에서 여러 異見으로 그 문서가 지니

는 뜻을 파악하는데 상당히 혼란을 초래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전술한

職役의 전통과 여러 계층의 형태를 살펴본 성과를 참고로 하여 나름대

로 새로운 해석을 추구해보고자 한다

lt吳簡gt의 lt吏民人名年紀口食簿gt(竹簡(肆))에서는 각 里別로 里魁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5가 領하는 食口數를 吏와 民으로 구분하여 통계하고 있는데 그 일례를

다음에 든다

(A)

(이하 簡文 인용에서 內에 있는 字를 괄호 하여 표기함〕

集凡五唐里魁周領吏民五十戶 口食二百八十九人 (簡380)

其一百六十二人男 (379)

其一百卄七人女 (378)

其四戶縣吏 (377)

其二戶郡吏 (376)

其戶州吏 (374)

其五戶給新吏 (373)

其一戶縣卒 (372)

其一戶佃帥 (371)

이는 孫吳 嘉禾 연간 里別吏民口食簿인데 五唐里 50戶 가운데 일반 民

戶를 제외하고 州吏에서 佃帥까지의 戶를 따로 특기하고 있는 것에 의

하면 크게 民戶層과 州吏 이하의 吏층으로 양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

다 먼저 縣吏 이하를 이른바 세습 吏職戶인 吏戶로 볼 수 있는가 하

는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해 현재 여러 異見이 제기되어 있는데 이 문

제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그런데 lt吳簡gt의 여타 戶籍簿나 戶口簡에

의하면 民戶를 제외한 縣吏 이하의 戶도 다시 縣吏 郡吏 州吏 軍吏 등

의 類와 맨 앞에 lsquo給rsquo字가 붙어 있는 계층의 類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즉 縣吏類의 吏 외에 其十二戶給縣吏下品 (壹5467)

其三戶給郡縣卒 (貳2318) 등과 같은 예들인데 그 職事나 給事

하는 관서의 명칭에 따라 多種의 명칭이 보인다 이를테면 給郡吏 給

縣吏 給州吏 給軍吏 給郡園父 給朝丞 給子弟 給驛兵 給鍛佐 給庫

吏 給縣卒 給度卒 給驛卒 給子弟佃客 給限田客 給佃帥 給常佃 給

家種客 給乞兒 給三州倉父 給養官牛 給習射 給私學 給官瓦師 給

亭復人 給亭雜人 給任師 給郡醫 給縣帥 給州私學 給新吏 給佃吏

給郵卒 給鹽兵 給關父 등이다 이렇게 앞에 lsquo給rsquo字가 들어간 계층을

일단 동일 계층으로 보아 lsquo給吏rsquo로 칭하고 縣吏 群吏 州吏 軍吏 등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6lsquo給rsquo이 붙어 있지 않은 계층을 lsquo吏rsquo로 칭하여 양자를 구분하고자 한다

lt오간gt에서 人名에 붙는 신분명은 크게 眞吏 某吏 給某吏 大男(大

女 民)의 4종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들은 그 표기상의 차이만으로도

일단 구분되는 존재라고 보이는데 현재 앞의 3종 신분명의 구분 문제

와 관련하여 몇 가지 다른 견해가 제기되어 있다 먼저 黎虎는 縣吏나

郡吏州吏 등의 吏가 侯家나 司隸校尉 또는 郡內에 소재한 전문 기

관 州郡 관내의 遠縣에 일정 기간 파견되어 給事하고 있는 자들을 칭

하여 給郡吏 등으로 칭하는 것일 뿐 그 신분은 本州 本郡 本縣의 吏

와 동일하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本郡의 郡吏가 곧 給郡吏이기

때문에 다른 계층이나 신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眞吏는 無職事

의 冗散官에 상대하여 쓰이는 용어로 실제 除授된 관원이라고 한다70)

黎虎와는 달리 양자를 다른 계층으로 보는 견해들도 제기되었다 먼저

韓樹峰은 給吏는 비록 吏의 名은 있지만 일반 백성으로서 잠시 吏의

職事에 종사하는 것일 뿐이고 혹 吏로 임명될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그 신분은 여전히 보통 백성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給吏와 구분하여

口算錢의 면제 특혜를 받는 州吏 郡吏 縣吏 등을 총칭하여 眞吏라 한

다고 하였다 즉 眞吏가 정식의 吏인데 비해 給吏는 일반민이며 일정

기간 만 관부에 給事하는 계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給吏의

관부給事는 실제상 요역의 일종이라 한다 71) 한편 楊振紅은 동일인의

신분이 문서에 따라 다른 신분으로 등록되어 있는 점에 의거하여 이를

테면 給郡吏가 郡吏나 眞吏로 簡稱된 것이라 하고 眞吏나 給吏 모두

吏로 簡稱되며 州郡縣의 掾史職에 있는 자들로서 署長 佐官 등의 lsquo官rsquo

에 상대되는 자들을 지칭한다고 하였다 아울러 吏는 그 작위가 公乘

이면서 賦役 대상이고 漢魏시기에 吏職의 세습화가 이루어지면서 전문

70) 黎虎 說ldquo給吏rdquo -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社會科學戰線 2008-11) pp89

-94 說ldquo眞吏rdquo-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史學月刊 2009-5) p5071) 韓樹峰 走馬樓吳簡中的ldquo眞吏rdquo與ldquo給吏rdquo (吳簡硏究 2 武漢 崇文書局

2006) 韓樹峰王貴永 孫吳時期的ldquo給吏rdquo與ldquo給戶rdquo -以走馬樓吳簡爲中心 (吳簡硏究 3 2011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7적 吏戶인 眞吏가 출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吏가 본래 일반 서민

이었던 까닭에 公乘 이하의 서민과 합칭하여 吏民이라 한 것이며 삼

국시기 官과 吏가 구별된 연원은 漢代의 長吏와 小吏 내지 士와 庶民

의 구분에 있다고 한다72)다소 혼란스러운 견해들이고 용어상의 해석

문제가 겹쳐 있어 난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들 異見의 관건은 吏와 給

吏의 구분 문제 그리고 吏戶에서의 吏가 어떠한 吏를 가리키는가 하

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여러 견해에서 공통으로 들고 있는 lt吳簡gt의 다음 문서를 먼저 살

펴본다

(B)

廣成鄕勸農掾區光言 被書條列州吏父兄子弟伏處 人名 年紀爲簿

輒隱核鄕界 州吏七人 父兄子弟合卄三人 其四人刑 踵 聾 歐病 一人

被病物故 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 十二人細小 一人限田 一人

先出給縣吏 隱核人名 年紀相應 無有遺脫 若後爲他官所覺 光自坐 嘉禾

四年八月卄六日破莂保據(此簡無編戶)73)

이 자료는 광성향 勸農掾 區光이 작성하여 보고한 문서인데 廣成鄕 領

內 州吏7인의 父兄子弟 23인의 현황을 파악하여 嘉禾4년(235년)에 보

고한 내용이다 lt吳簡gt戶籍簿에서 州吏 등의 吏가 있는 戶는 그 州吏

가 戶人(戶主)으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 州吏7인이란 모두 그 戶의

戶人이다 이 현황 내역에 의하면 州吏7인의 父兄子弟 총합은 23인이

고 이 가운데 4인은 受刑 질병 중이며 1인은 物故 4인은 이미 관부

에 보내져 그 本主에 從事하며 관부에서 복무 중이다 12인은 細小 즉

소인이고 1인은 限田을 경작 중이다 이 限田이 lt吳簡gt의 lt吏民田家

莂gt 등에 보이는 lsquo二年常限rsquo의 田으로 보아 侯家의 田이나74) 屯田을75)

72) 楊振紅 吳簡中的吏 吏民與漢魏時期官 吏的分野 -中國古代官僚政治社會構

造硏究之二 (史學月刊2012-1)73) 侯旭東 三國吳簡兩文書初探 (歷史硏究 2001-4) p172에서 轉引

74) 入都鄕嘉禾二年步侯還民限米一斛 (5-1556) 其卄六斛民還黃龍年臨湘侯

限米 (602017)

75) 黃龍元年文入郡屯田民吳平斛米一百六斛二斗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 (6227) 其三斛五斗郡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78吏民에게 分給하여 佃作케 한 田으로 보는 것이 일반이다 그 경작자

는 그 田地(佃地)를 국가로부터 할당 받아 의무로 경작하기에 佃民과

같다 그 佃民에는 諸吏와 일반 民戶가 다 포함되고 있다76) lt吏民田

家莂gt에서 그 限田이 lsquo二年常限rsquo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그 의미에 대해

佃作기간 내지 佃種權이 2년으로 한정되어 있어 계약 기간이 지나면

배속되는 田地가 바꾸어지는 방식이었다는 견해가 있고77) 반면에 佃

地의 경작 기간이 아니라 地租額을 2년간 固定하는 것을 말한다는 견

해가 있다78) 사실이 어느 쪽이든 吏戶의 식구 가운데 일부는 국가의

농지를 佃作하고 地租를 납부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 액수가 漢代

사유지에 대한 조세보다 높다 같은 문서에는 租米 뿐 아니라 동시에

畝當 布2匹와 錢70-80까지 징수되고 있다 따라서 二年常限田의 分給

과 佃作은 受惠라기 보다는 노동력의 징발이고 耕作의 賦課로 보는 것

이 마땅하다 于振波가 常限田의 분급 액수를 정의하길 lsquo强制性的 生産

定額rsquo이라79) 본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 이어 1인은 先出給縣吏 인데

먼저 給縣吏로 보내졌다는 의미이다 先給吏의 사례는 嵩男弟恭年十

九先給州吏 (參1450) 등 몇 개가 더 보인다 이렇게 해서 총 23인의

食口 현황이 명료하게 보고되고 있다 그 내역에 의하면 州吏의 식구

는 受刑중인 자 질병자나 小人을 제외하고는 모두 관부에 給事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1인의 先出給縣吏 와

이미 관부에 보내져 本主 따라 從事하며 관부에 복무 중이라는 4인은

( 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 ) 내용상 모두 이미 관부에 보내져 현재

掾利焉黃龍理年屯田限米 (2157)

76) 于振波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南都學壇 24 2004年 第1期 湖南大

學 20041) p30 이 글은 앞에 든 中國社會科學院硏究生員學報 2004-1과 같

음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形成與演變 -談長沙

走馬樓簡牘札記之六 (鄭州大學學報 2001-1) 77) 張福亞 也談lt嘉禾吏民田家莂gt中ldquo二年常限rdquo田的函義 (首都師範大學學報

(社會科學版) 142期 2001-5) p8

78) 高敏 lt吏民田家莂gt中所見ldquo餘力田rdquo ldquo常限rdquo田等名稱的函義試釋 (鄭州大學

學報(社會科學版) 33-5 20009)79) 于振波 앞의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p12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79給事 중인 것은 마찬가지인데 어떠한 차이가 있어 다른 항목으로 구분

하여 기재한 것일까 이것은 바로 給縣吏와 縣吏의 차이를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후술) 州吏7인의 食口 23인의 현황 名簿를 작성하여 면밀

히 조사 보고하게 함으로써 그 遺脫을 막고 있는 것에 의하면 州吏 軍

吏 群吏 縣吏 등의 食口는 여타 일반 민과는 다른 賦役체제 아래 놓여

있는 계층이다 또 軍吏의 父兄子弟에 대해서도 그 食口簿를 따로 작

성하여 관리하고 있다

集凡中鄕州軍吏四人父(子)兄弟三人 中(參3012)

集凡南鄕領軍吏父兄弟合十九人 中(參 464)

이러한 사례들은 吏가 있는 戶는 그 食口들까지 포함하여 吏가 있는

戶 즉 吏戶로서 별개로 관리되고 그 성원은 모두 吏戶의 役 내지 賦

役체계에 들어가는 것임을 말해준다

위와 같이 州吏 縣吏 등 吏戶의 戶口簿는 그 食口 가운데 州吏 縣吏

등 그 吏인 자가 맨 앞에 戶人으로서 위치하지만 給吏는 戶人이드라도

앞에 위치하지 못한다

小武陵鄕嘉禾四年吏民人名妻子年紀簿(壹101533)

吉陽里戶人公乘張惕年卄八算一給縣吏(壹1018232)

吉陽里戶人公乘廖裕年卄七算一給郡吏(壹1017525)

高遷里戶人公乘黃毛年卅四算一給軍吏(壹10306)80)

또한 同 戶籍簿에 縣吏 州吏 등은 아래와 같이 맨 앞에 위치하여 일반

민이 아님을 명기하고 있지만

縣吏鄧橎年卄七 璠()妻大女金年卄一 算 (貳 1729)

州吏蔡區年卅二 區妻大女年卄七 算 (貳 1822)

軍吏朱謙年卅五 謙妻大女壹年卄六 算一 (貳 1723)

80) 인용된 4簡文은 凌文超가 재정리 조립하여 올린 글(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

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型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의

lt表二gt(pp25-37)에서 인용함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0給吏인 경우는 일반민을 가리키는 lsquo民男子rsquo로 기재되어 있다

民男子蔡若年卅七給驛兵 若妻大女四年卅算一(貳 1781)

民男子蔡喬年六十二給驛兵 喬妻大女典年卅八 (算) (貳1903)

따라서 위와 같은 吏民簿에서 民戶를 제외한 州吏나 郡吏 縣吏 軍

吏가 吏戶라면 給州吏 給郡吏 등 여러 職事의 관서에 給事하는 수십

종의 다양한 給某吏 신분은 전술한 庶民在官者 나 lsquo非吏이면서 관부

에 있는 자rsquo와 매우 유사하거나 일치한다

여기에서 吏戶나 吏役의 존재 여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는데 黎虎

는 삼국시기 吏戶의 존재를 인정치 않으나81) 高敏과 孟彦弘은 그 존

재를 인정하며 특히 高敏은 吏役制도 漢末三國시기에 확실히 형성되

었다고 한다82) 韓樹峰王貴永은 후한말 孫吳시기에 卑賤化가 이루어

지면서 吏戶의 萌芽가 이루어졌으며 lt吳簡gt에서의 給吏는 吏가 아니

고 民에 속한다고 한다83) 이러한 여러 異見의 배경에는 吏로 칭해지

는 계층에 전술한 바와 같이 다시 두 계층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계층

이 있는데 그 면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

각한다 양자의 구분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자료를 든다 속한서 百官3 大司農條의 注引 漢官에 丞一人 三百石 員吏四十人 其十一人

斗食 十七人佐 七人學事 五人守學事 皆河南屬縣給吏者 라 하였다

대사농승 속하의 斗食 이하 員吏 40인을 모두 하남군 속현에서 조달된

吏로 충원한다는 것이다 즉 후한 수도 낙양 인근인 하남군 속현에서

吏員을 차출한다는 것인데 斗食 佐 學事 등의 員吏는 해당 분야의 職

81) 黎虎 ldquo吏戶rdquo獻疑 (歷史硏究 2005-3) pp53-6882)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形成與演變 mdash談長沙走

馬樓簡牘札記之六 (鄭州大學學報 2001-1) p61孟彦弘 吳簡所見ldquo事rdquo臆說 mdash從ldquo事rdquo到ldquo課rdquo (吳簡硏究 2 2006) pp205-208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爲役之制 (魏晋南北朝隋

唐史資料 24 2008) pp8-2183) 韓樹峰 앞의 走馬樓吳簡中的ldquo眞吏rdquo與ldquo給吏rdquo pp33-38 韓樹峰王貴永 앞

에 든 孫吳時期的ldquo給吏rdquo與ldquo給戶rdquo -以走馬樓吳簡爲中心 p99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1事를 처리할 수 있는 職能者여야 하기 때문에 하남군에서 이러한 職事

로 근무하고 있는 員吏를 파견하거나 일반민 가운데서 새로 선발하여

파견 조달하였을 것이다 상하급 관부끼리 상호 관리를 파견하여 일정

기간 복무하게 하는 경우에 조달 지원한다는 의미로 動詞語로서 lsquo給rsquo을

쓸 수 있고 이러한 사례는 문헌에 이미 자주 보인다 위에 든 lsquo屬縣給

吏者rsquo도 그 한 실례이다 이러한 경우는 본래 吏의 신분이 여타의 관부

에 일정기간 출장 근무하는 것일 뿐인 까닭에 그 신분은 그대로 吏일

것은 자명한 일이다 즉 縣吏가 郡府에 출장근무 중일 때 그 신분은

그대로 縣吏이고 해당 名簿에 縣吏A가 여타 名簿에서 給郡吏A로 표

기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동일인이 名簿에 따라 신분명이 달리 기

재되어 있는 사례가 약간이나마 보이고 있는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된다(후술) 그런데 給州吏 給郡吏 給縣吏 등 수십종의 給吏에는 이런

경우가 아니고 lsquo州吏 등 諸吏에 배속되어 給事 중인 非吏로서 관부에

복무 중인 民rsquo이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給某吏로 표기된 자들은 lsquo給rsquo

이 붙지 아니한 州吏 郡吏 縣吏와는 달리 lsquo民男子rsquo로 표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給州吏는 非吏로서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그 관서에서 하나

의 職役의 형태로 복무 중인 民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들은 실은 民으로서 관부 업무상 필요한 노역에 동원되는 셈이지만

일부는 여러 관서의 하급 실무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전문의 職能을

갖춘 자들도 있다 縣吏 州吏의 職事 뿐 아니라 앞에 든 수십 종의 전

문 분야 부서별 給吏의 명칭은 그에 상응하는 사례들이다 정부는 이

들이 본래 일반 서민이지만 관부 운영의 필요상 특별 관리를 하지 않

으면 안 된다 그 결과 후한의 여러 사례에서 보듯이 대개 그 職을 세

습토록 하고 이들을 일반 民과 구분하여 칭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lt吳簡gt에 忠子男仲年十五 任給吏 (參 1805)라 한 것은 給吏가 民

에서 차출되어 임용되는 독립 계층임을 말해준다 또 草言府大男吳杭

不是卒子弟不應給卒事 八月卅日兼兵曹掾潘(因)()白(柒總49968)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卒의 子弟가 아니면 給卒事에 복무하게 할 수

없었다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2그들이 본래 吏의 신분이 아닌 까닭에 바로 吏로 칭하지 못하고 그

吏에 배속되어 給事하는 자 또 그 戶의 뜻으로 給某吏 給戶와 같은

칭호가 나오게 된 것으로 본다 이 칭호는 사실 관리와 民 사이에 있

는 이들 계층의 성격을 상당히 잘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이 給吏 계

층의 부담이 커지고 그 賤役 부담자로서의 성격이 뚜렷해감에 따라 給

吏나 給戶가 吏戶나 吏家로 칭해지고 給吏나 給戶의 役이 吏役으로

칭해진 것인데 그렇게 간략한 형태로 칭하여도 이미 관리의 吏와 충분

히 구분되는 것으로 사회가 인지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의하면 lt吳簡gt에 보이는 眞吏도 사실 眞吏라 할 수 없는 給吏

에 대비하여 쓰이게 된 용어가 아닐까 한수봉왕기영은 眞吏란 給吏

에 대비된 용어라 하고 lt吳簡gt에서 給吏가 口算 납부 의무가 있지만

眞吏는 면제되며 정식의 吏이고 신분성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羅新도

眞吏에게 口算錢이 면제되고 있다고 하였다84) 眞吏에 대한 여타의 견

해도 있지만85) 給吏와 관련하여 참고할 만 한 지적이다 또한 lt吳簡gt

에서 其七戶給郡吏 下品(壹5447) 其十二戶給郡吏 下品 (壹

5677) 其十二戶給縣吏 下品 (壹5467) 其一戶給軍吏 下品 (參

430336) 給度吏 下品之下 (5653) 등에서와 같이 給吏는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여서 평균의 民戶 보다 더 빈천한 계층인 점도 그

들이 관부에 給事하는 吏라기 보다는 非吏인 民으로서 民의 일반 요역

에 대신하여 관서에 給事(給役)하는 자들이되 그 일부는 職能에 따라

세습하여 관련 관서의 吏에 배속되고 給事 복무해야 하는 예속된 신

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lt吳簡gt에는 하나의 戶人을 首로 하고 그에 배속된 듯 한 여

러 신분의 戶數와 신분명을 기록한 簿가 있다 lt走馬樓吳簡竹簡gt에

84) 羅新 ldquo眞吏rdquo新解 (中華文史論叢 2009-1) p129 단지 그는 眞吏란 非華

夏系 출신의 編戶化된 토착 사회를 관리하는 인원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85) 이를테면 黎虎는 眞吏란 非眞吏에 대한 대칭이 아니고 실제로 除授 받은 관

원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說ldquo眞吏rdquo -從長沙走馬樓吳簡談起 (史學月刊2009-5) p50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3다음의 예들이 있다

-1 里戶人公乘縫繒年卄五苦腹心病 (5443)

- - - - - - -

其七戶給郡吏下品 (5447)

- - - - - - -

其一戶給州吏下品 (5452)

-2 平樂里戶人公乘鄭張年五十 (5460)

- - - - - - -

其十二戶給縣吏下品 (5467)

-3 東陽里戶人公乘扶侈年十四 (5471)

其二戶給庫吏中品 (5472)

- - - - -

其一戶給縣卒下品 (5474)

-4 宜陽里戶人公乘區歸年卄二眞吏 (8962)

- - - 給州卒 (8965)

- - - -

年六十一給驛兵 (8976)

右尙書吏三(戶) (8517)

孫吳에서 公乘의 작위 소유자는 일반민 중에서도 상당히 많지만 漢

代 民爵의 최고위 爵인 公乘(第8等)의 戶人에게 보통 여러 신분의 수

십호를 배속시키고 있다 그 중에 10戶 내외의 給吏가 배속되어 있다

또한 이들 戶人은 배속된 戶가 납부한 租稅를 거두어들이고 이를 일괄

해서 관부에 납부하고 있다 먼저 각 戶로부터 受領한 내역은 문장 앞

에 lsquo領rsquo으로 표기하고 受領한 액수를 총합하여 관부에 납부한 내역은

앞에 lsquo入rsquo으로 표기하고 있다

里戶人公乘曾(年五十三)妻年卅九 (簡 1631-1652)

- - - - - -

領二年郵卒限米田六頃五十畝收限米二斛合爲吳平斛米一千三百斛

其三百十四斛五斗府州中倉關邸閣李崇吏黃諱潘慮 中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4領二年民田三百七十六頃六十五畝二百卅八步畝收米一斛二斗合四萬

五千一百九十九斛一斗 - - - - - - - - -

常遷里戶人公乘李漠年卅七 妻大女思年卅一

入嘉禾二年郵卒限米七百九十八斛二斗八升

入嘉禾二年佃帥限米九百五十五斛八斗七升

- - - - - - -

이 戶人은 대부분 公乘이고 노비를 소유하고 있으며 配屬된 戶의

徵稅와 총괄 납입의 업무에 복무하고 있는데 이는 후대 富戶에게 差役

복무를 부과한 사정과 비슷한 면이 있다 후대 差役제도와 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1인의 戶人을 賦稅 징수 납입의 책임

자로 하여 향리에서 이 방면의 기층단위로 운영하고 있는 셈인데 戶籍

簿와는 그 내역과 용도가 다른 별개의 독립 帳簿이다 그런데 劉家軍

은 限米 납부자 신분인 私學還民叛士吏卒 등이 모두 流民이

며 그 戶人에게 依附하고 있는 자들이라 하고 국가가 그 依附관계를

승인해주면서 그들이 경작할 토지를 戶人에게 分級해주고 그들이 납

부하는 地租인 限米도 戶人의 이름 아래 등기한 것이라고 보았다86)당

시 嘉禾연간에 전란으로 長沙 임상현 지역에 流民이 많이 流入되었을

가능성은 이미 여러 연구에서 지적된 바 있고 還民 叛士 등 일부는

流民 계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限米와 屯田限米 납부자 신분에는

이밖에 大男 州倉吏 吏帥客 金民 佃吏 郵卒 衛士 傳卒 子弟 佃卒

復客 新吏 兵客 故師子弟 兵師士 故帥客 後客 船師 司馬 士

등 거의 전 계층을 망라하고 있는데 이들 중에 유민이 있을 수 있으나

모두 流民 출신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새로 屯田이나 侯國의 田을

경작시키기 위해 유민 뿐 아니라 在地의 吏民에게 할당하여 佃作으로

운영하는 것은 여러 문헌자료에도 있고 lt吳簡gt의 lt吏民田家莂gt은

주로 在地의 호적에 올라 있는 吏民의 佃作 내역 장부이다 또 lt吳

簡gt 草言府部諸鄕吏區光等招誘諸限田客八十三人首見事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曹史趙野

86) 劉家軍 論lt走馬樓吳簡竹簡gt中 ldquo限米rdquo的性質 (中國社會經濟史硏究 2005-2) p87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5白 (柒總 49782)에 의하면 당시 長沙 지역에서 鄕吏에 의해 限田客

83인을 招誘했다는 성과를 보고하고 있는데 이와 같이 佃作 인력의 확

보에 애쓰는 상황에서 전술한 바와 같은 본래 限田의 佃作 의무를 지

고 있는 在地 吏戶의 家內 성원이 그 佃作者 명단에서 제외될 리가 없

그래서 簡文(B) lt州吏父兄子弟年紀簿gt에서 吏戶의 家內 父兄子弟

인력 23인 가운데 lsquo四人其身已送及 隨本主在官rsquo과 lsquo一人先出給縣吏rsquo가

관부에 급사하는 給吏에 해당하고 lsquo一人限田rsquo은 限田의 佃作에 복무하

는 자이다 바로 이어 인용하는 孫休의 詔文에서 吏家의 어려운 사정

에 대해 ldquo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이미 限米를

납부하였는데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middotrdquo라 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전반부는 給吏로서 복무

하는 것이고 뒷부분은 限田 佃作 복역을 말함이다 즉 한 吏戶의 父兄

子弟 가운데 일부는 전자에 복무하고 일부는 후자에 복무한다 똑 같

은 관부 내지 국가의 역에 복역하는 것이지만 給吏는 분명히 吏(分署

의 담당 吏 州吏)에 給事하는 자라는 점에서 給吏로 칭하여 여타의

복역과 구분한다 그리하여 그 給吏가 결혼이나 계승으로 하나의 戶를

이루면 簡文(A)에서와 같이 某里의 戶籍簿上에서 里의 총 戶民數 아래

에 lsquo其四戶給縣吏rsquo와 같은 형식으로 戶를 本으로 한 給吏로서 명기된

다 그런데 一人의 給吏가 아직 戶를 이루지 못하고 한 吏戶의 成員

(父兄 子弟)으로서 있는 상황이라면 그 戶人의 현재 신분에 의해 그

戶가 표기되었을 것이다

이 문제와 직결되는 다음 기사를 살펴보자 孫權의 제6子로 孫亮에

이어 즉위한 孫休는 그의 즉위 年인 영안원년(258)에 다음과 같이 詔

하였다

「諸吏家에 5인이 있으면 (그 가운데) 3인은 겹쳐서 役에 복무하고 있

다 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이미 限米를 납부하

였는데 군대가 출정하면 또 종군함에 심지어는 家事를 돌볼 자도 없게

되는 것을 짐은 매우 애처롭게 생각한다 그 5인 가운데 3인이 役에 복무

하고 있다면 그 父兄이 (家에) 머물고자 하는 것을 허용해주어 1인을 (役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6에 나가지 않고) 머물게 하고 그 限米를 면제해주며 군대가 출정해도 종

군하지 않도록 하라 (삼국지 권48 吳書 孫休傳 永安元年條)87)

孫休는 즉위 전 재야에 있을 때 시골 생활을 보냈던 바가 있어 그

들의 참상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吏家(吏戶)가 지는 과중한 부담

은 곧 그들이 그만큼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 吏役이 賤視化 되고 厮役으로 인지되고 있던 배경을 위의 詔文은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lsquo吏家rsquo의 식구는 여러 방면의 복무를

중복하여 부담하고 있다 그 가운데 限米 납부 의무는 lt吳簡gt에 의하

면 국가에서 佃作케 하여 운영하는 限田 경작에 대한 租로써 납부하는

것이다 즉 전술한 lsquo二年常限rsquo田을 이 限田으로 보아 그 地租를 限米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다88) 단지 于振波는 限米란 二年常限田과는 관

계가 없고 屯田 경작에 대한 조세인데 衛士 郵卒 傳卒 등의 상비병

과 토지가 없는 수공업자 외지에서 수학하기 위해 온 私學 이탈하였

다가 새로 돌아와 附籍된 還民에게 軍屯이나 民屯에 종사하게 하고 일

부의 부세와 요역을 면제해주면서 限米를 납부하게 한 것이라 한다89)

그의 동일한 글에서 여타 사항에 대해 필자와 일치한 부분에 대해서는

앞에서 찬동한 바 있지만 이 부분에는 수긍하기 어렵다 lt走馬樓吳

簡竹簡gt에는 限米 납부자로 기재된 신분에 전술한 바와 같이 많은

신분이 망라되어 있고 孫休傳에서 말하는 吏戶가 일부 상비병이나 귀

환민 私學등에 한정한 것이 아니고 吏戶 전반의 형편을 들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lt吏民田家莂gt에서 佃田의 총수는 二年常限田과 餘力

田으로 구성 내지 구분되어 있다 즉 常限田은 餘力田에 對比되는 용

어이다 그리고 양자의 畝當 租額이 嘉禾4년 民의 경우 12斛 0456

87) 詔曰 ldquo諸吏家有五人 三人兼重爲役 父兄在都 子弟給郡縣吏 旣出限米 軍出

又從 至於家事無經護者 朕甚湣之 其有五人 三人爲役 聽其父兄所欲留 爲留

一人 除其米限 軍出不從rdquo」

88) 앞에 든 高敏의 글 lt吏民田家莂gt中所見ldquo餘力田rdquo ldquo常限rdquo田等名稱的函義試釋

이래 대부분 이 견해에 따른다

89) 于振波 앞에 든 走馬樓吳簡中的限米與屯田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7斛 州吏의 경우 0586斛 0456斛으로 차이가 있다90) 무엇보다 앞에

서 살펴 본 lt오간gt lt廣成鄕州吏父兄子弟伏處 人名 年紀爲簿gt에 기재

된 州吏의 食口 현황 내역은 孫休傳에서 吏戶의 식구 사정을 말하고

있는 내역과 같은 모습을 전하고 있는데 91)전자에서는 限田이라 하였

고 孫休傳에서는 限米라고 한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限田에 대해 징

수하는 것이 곧 限米이다 따라서 限田이란 二年常限田의 簡稱일 것으

로 본다 lt吳簡gt의 lt吏民田家莂gt에는 이들 限田戶의 佃田額과 그에

대한 租賦稅 납부 內譯이 있다 이 戶는 州郡縣吏 등으로 담당 吏職에

給事해야 하고 從軍도 해야 한다 이러한 양상은 분명히 역의 부담이

중첩된 것으로 일반민보다 더 과중하다 租額인 限米 납부액도 일반민

의 사유지에 대한 租額보다 비율이 높았다

그런데 중요한 사항은 첫째 이렇게 과중한 부담이 중첩된 吏戶의

일면을 보여주는 lt吏民田家莂gt에서 佃作吏民의 戶人(戶主) 신분을 보

면 大男大女州吏群吏縣吏軍吏州卒郡卒縣卒復民士

등으로 吏와 民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들 吏民 모두 佃作

의 의무와 함께 地租로 米穀 布 錢을 납부해야 하고 從軍의 役이 있

으며 그리고 대량의 lt오간gt에 다량으로 보이는 子弟 및 給子弟가 곧

吏의 子弟로 파악된 것에 의하면92) 그들이 납부하는 子弟限米의 부담

도 吏戶의 부담이 된다 또한 lt오간gt에

郡吏公乘李年卅二 算一 (貳2460)

侄子年卅九給子弟 妻大女衷()年卄六 算一 (貳1754)

吉陽里戶人公乘張惕年卄八 算一 給縣吏 (壹1018232)

등의 많은 簡文에서 吏와 그 子弟 給吏들에게 算賦도 부과되고 있다

90) 앞에 든 張福亞 也談lt嘉禾吏民田家莂gt中ldquo二年常限rdquo田的函義 p11의 表1

91) 이에 대해서는 앞에 든 高敏 從lt嘉禾吏民佃家莂gt中的ldquo諸吏rdquo狀況看異域制的

形成與演變 mdash談長沙走馬樓簡牘札記之六 pp62-63 참조

92) 孟彦弘 앞에 든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爲役之

制 pp1-7 子弟는 吏의 子弟 給子弟는 관부의 給事에 差出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88단지 吉陽里戶人公乘鄭龍(龍 下에 田)年卅六算一給州吏復 (壹3323)

과 같은 lsquo給州吏復rsquo 즉 給州吏이면서 算賦가 復除된 경우가 있는데 이

에 의거하여 給吏는 算賦에서 復除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93) 그러나

위에 든 簡文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부분의 給吏가 lsquo算一rsquo로 기재

되어 있고 소수만이 lsquo復rsquo으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復除되는 경우는

특별한 사정이 있어 그 給吏에게만 특혜를 준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

으로 생각한다 참고로 lsquo腫兩足rsquo자나 lsquo刑兩足rsquo자인 民戶의 戶人도 算賦

가 면제되지 않고 있으며94) 大女도 算賦 납부 의무가 있었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吏戶와 民戶가 지는 국가에의 부담은 吏戶가 각기의 吏職

에 복무하고 일반민호는 그러한 吏職에 있지 않다는 정도 외에는 별다

른 차이가 없다 물론 일반민은 吏職의 役 즉 吏役이 없는 대신에 일

반요역에 복역해야 하고 吏戶는 일반요역에서 면제된다 그러한 사실

을 말해주는 자료로 lt오간gt 戶口簿에 里別로 定應役의 戶數 즉 일반

요역에 응당 복역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진 里別 戶數 문서가 있다

其一百卅八人男 (參431548)

其八十一人(女) (參431144)

其一戶給軍吏 下品 (參430336)

其五戶民 (下)品 (參430235)

其七戶女戶不任調 下品之下 (參430134)

其領役民卅七戶 (參430033)

이 里別 戶口簡은 凌文超의 編次 정리 작업에 의하면 新成里의 總

結簡에 해당하는데95)여기서 일반민호수는 생략하고 給軍吏나 調에서

면제되는 女戶 등의 수만을 기재한 것은 맨 아래의 定應役 戶數를 算

出하는 근거를 기록하기 위함이다 즉 일반민호 외의 給吏 등의 戶數

93) 凌文超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型

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 p5494) 高平里戶人公乘黃高鼰五十二算一腫兩足 (貳 2903) (大)成里戶人公乘何軼年

五十五算一刑兩足 (參626736)

95) 凌文超 앞에 든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 -兼論吳簡ldquo戶籍

簿rdquo的類型與功能 p40과 lt表3gt 중 p45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89가 총 13戶이고 이들을 제외한 定應役의 戶數가 37호란 뜻이다 그래

서 新成里의 총 호수는 50戶였음을 알 수 있다 新成里의 총 口數 219

명은 lt오간gt의 戶當 口數 평균이 대략 45명 정도임을 감안하면 486

戶이고 50戶와 근접한다 따라서 給軍吏 등 13호는 定應役에서 면제되

는 戶임을 알 수 있다 또 다음 戶口簡은 앞부분 里의 총 口數가 결락

되어 있다

其一戶給朝丞 (貳170263)

其二戶給郡園父 (貳170162)

其五戶尫嬴老頓貧窮女戶 (貳170567)

定應役民卄戶 (貳170466)

여기서는 給朝丞1戶 給郡園2戶 절름발이 노인 빈궁자 女戶 등 5

戶가 役에서 면제되고 그 나머지 20戶가 定應役民이 되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즉 給吏는 定應役에서 면제되고 있다 따라서 給吏는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부에 給事하는 것이기에 당연히 일반요역에서 면제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給吏에도 전술한 바와 같이 吏戶의 가속인 경우가 있고 일

반민 중에 차출된 경우가 있는데 전자의 경우는 관부에서 필요할 때

마다 고정적으로 차출되었을 것이며 일반민의 경우는 본래는 일시적

한시적으로 징발되었을 것이지만 여러 簡文에 戶人으로서 給吏인 자가

있는 것에 의하면 점차 전자의 경우와 같이 吏戶와 마찬가지로 給吏戶

로서 고정적으로 차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定應役이 戶를 부과

단위로 삼고 있다는 점 또한 吏戶의 家屬이 하나의 徵役 단위로서 운

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도 吏戶의 실재성과 그 독립적인

신분성을 말해준다 더구나 일반 민호와 구분된 吏戶 名籍(lsquo吏名籍rsquo)의

존재가 다음의 簡文에서 확인된다

諸鄕謹列郡縣吏兄弟 幷攴 吏名籍 (13-7638)

吏戶의 막중한 부담은 그 家屬의 叛走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0를테면 縣吏 毛章의 15세인 弟(壹 7865) 縣吏 毛車世의 49세인 父(壹

7868) 群吏 黃의 13세인 弟(壹7893) 群吏 谷漢의 29세인 兄子

(壹7905)가 嘉禾 2년에서 3년 사이에 叛走하였다 후한 말 陳寔은 어

려서 縣吏가 되어 항상 厮役에 給事하였는데( 常給事厮役 ) 후에 都亭

의 佐가 되었다96) 그리고 郭太는 대대로 집안이 빈천하고 어려서 고

아가 되었는데 모친이 縣廷에 給事하게 하려 함에 말하길 ldquo대장부가

어찌 斗筲의 役에 處해 있을 것입니까rdquo라 하고 마침내 떠났다97) 당

시 이미 吏役이 厮役으로 인식되어 있었고 斗筲의 役 즉 100석 이하

인 斗食의 位에 처하였음을 말해준다 즉 같은 吏이더라도 100석 이상

인 掾史와 그 이하 사이에는 차등과 구분이 있었다(후술) 그렇지만 이

두 경우는 모두 吏가 되는 것이 선택의 길이었기 때문에 吏戶에 속한

자들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吏戶가 관부에 예속된 신분이었던

것에 비해 이 두 경우는 선택사항이었다 斗食에게도 매우 소액이지만

月俸이 지급되었기 때문에 빈천하거나 고아가 되어 생업을 위해 吏職

을 선택한 것이다 나이도 어리고 집안의 세력 배경도 없는 가운데 吏

가 된 것에 의하면 斗食의 최하단에 속한 吏였을 것이며 이들이 給吏

가 아니고 吏로 칭해진 것은 일반요역 복무에 대신하여 징발 내지 차

출된 경우가 아니고 吏職에 임명된 것이기에 당연하다

縣吏 등의 諸吏役이 厮役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무엇 보다 그 雜

役的인 吏役의 과중함 때문이다 후한 lt張景碑文gt에서 14鄕의 正을

調發하여 勸農의식에 소요되는 土牛 제작에 육칠십만전이 들어가 吏와

正이 매년 患苦에 처함에 男子(庶民) 張景이 매년 그 비용을 출연하여

土牛를 義作해주겠다 하고 그 대신 자신을 縣吏 列長 伍長에 임

용되지 않게 해줄 것과 小繇 징발을 면해줄 것을 청하고 있다98) 즉

96) 후한서 권62 陳寔傳에 (陳寔)少作縣吏 常給事厮役 後爲都亭(刺)佐

p2065

97) 후한서 권68 郭太傳에 (郭太)家世貧賤 早孤 母欲使給事縣廷 林宗曰 ldquo大

丈夫焉能處斗筲之役乎rdquo 遂辭 就成皐屈伯彦學 三年業畢 博通墳籍 p2225

98) 府告宛 男子張景記言 府南門外勸〔農〕土牛 調發十四鄕正 上賦

斂作治 幷土人 犂 耒 卄 蓎 屋 功費六七十萬 重勞人功 吏正患苦 愿以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1서민이었던 張景은 거액의 자금을 출연하면서까지 縣吏 등의 吏役과

小繇의 복역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있다 그는 아직 非吏였지만 吏役에

언제든지 차출될 수 있었고 그 吏役은 매우 번거롭고 힘든 것이었음

을 알 수 있다 단지 張景과 같은 서민이 縣吏가 되어 吏役에 差出되

는 경우 바로 lt오간gt에서와 같은 吏戶가 되어 그 가속이 모두 吏役의

범위에 들어가게 되는지는 不明이다 推斷이지만 世戶로서의 吏戶와

함께 일시적으로 차출되어 일정 기간 만 복무하는 非世戶로서의 吏戶

가 공존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요컨대 lt오간gt과 문헌자료에 보이는 吏戶와 給吏의 면모들은 앞에

서 검토한 胥徒와 lt庶民在官者gt 내지 徒御 導從役人 등과 일맥상통

하는 면이 있다 孫休傳이라든가 lt오간gt에 빈출하는 吏戶 吏民에서의

吏는 500石 이하인 吏 중에서도 200석 이상의 長吏級을 제외한 下吏

즉 百石 이하의 吏를 가리키고 給吏는 吏가 아니되 관부에서 일정 기

간 여러 분서에 勞役으로 복무하는 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즉

庶民在官者 와 상통한다 특히 그들에게 부과되었던 賦稅役의 내역에

서도 위에서 검토한 여러 職役 계통 신분이나 계층의 예와 거의 비슷

하다

孫休傳에서 父兄은 都에서 子弟는 郡縣吏에 給事해야 하고 라 한

것은 吏家의 父兄은 都에서 州郡縣의 吏로 복무한다는 뜻이고 나머지

3인의 자제는 郡縣吏에 給事한다는 뜻이다 즉 lsquo郡縣吏에 給事함( 給郡

縣吏 )rsquo이란 子弟3인이 郡縣吏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郡縣吏에 下屬되

어 그 업무에 給事한다는 뜻이다 위의 廣成鄕의 lt人名年紀簿gt 簡文

에서 lsquo先出給縣吏rsquo도 州吏7家의 식구 가운데 먼저 縣吏의 업무를 보좌

하기 위해 차출되어 나간 것을 뜻한다 여기서 말하는 郡縣吏는 주로

掾史職으로 사무 업무 중심이고 그 업무를 노동력으로 보좌하는 인력

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lt오간gt의 도처에 諸吏의 사례로써 諸曹倉

吏庫吏監運掾關邸閣船師田戶曹史 등 수십종의 職名이 보이

家錢 義作土牛 上瓦屋 欄楯什物 世世作治 乞不爲縣吏 列長 伍長 徵發小

繇 (高文 漢碑集釋 開封 河南大學出版社 1997 p227)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2는데 대부분 그 업무 처리에 노동인력이 필요하다 십 명 내외의 掾史

員吏 만으로는 사무나 문서작성 관리 업무 이외에는 수행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 인력을 吏戶의 식구로부터 자동으로 差役시키는 시스템이

漢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었음을 위 孫休傳의 기사는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이들 吏家의 식구 현황 파악은 관부에서 항상 필요

로 하고 확보해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lt오간gt의 여러 문서는

그러한 실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東鄕勸農掾殷連被書條列州吏父兄人名年紀爲簿

輒科核鄕界 州吏三人 父兄二人刑蹱叛走 以下戶民自代 謹列年紀 以

(已)審實 無有遺脫 若有他官所覺 連自坐 嘉(禾)四年八月卄六日破莂

保據 (J22-2543)

여기에서 담당 鄕界의 州吏3인 가운데 그 父兄2인이 受刑과 叛走로

비게 됨에 下戶의 民을 징발하여 바로 충당시켰다는 것이다 이 以下

戶民自代 에 대한 해석에서 下戶를 고용하여 자신을 代理케 한 것이라

는 견해가 있는데99) 그렇다면 戶人인 州吏가 자신의 식구 결원을 책

임지고 직접 下戶를 고용한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해당 州吏의 부담

이 너무 크게 되어 당시 下戶가 자동으로 보충되는 시스템으로 운영된

것일 가능성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諸家의 견해 모두 不明

임을 인정하고 있다100) 어쨌든 吏戶의 노동력을 신속하고 철저하게

보충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은 吏戶 전체의 식구가 관부에

예속되어 있고 세습화 된 상태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단지 孟彦弘은

이 자료를 통해 당시 吏戶의 家屬이 모두 吏였음을 말해준다고 하였으

나101)그렇지 아니하고 吏의 가속에 吏도 있을 수 있지만 아직 吏가

아니고 吏를 노동력 지원으로 보조해주는 給吏도 있고 그 給吏는 非

99) 이 점에 대한 정리는 王素 長沙吳簡勸農掾條列軍州吏等人名年紀三文書新探

(魏晋南北朝隋唐史資料 25 2009) p9의 注 11) 참조

100) 이를테면 孟言弘 앞의 吳簡所見的ldquo子弟rdquo與孫吳的吏戶制 mdash兼論魏晋的吏戶

爲役之制 p16

101) 위의 글 p16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3吏로서 관부에 給事하는 자이며 이런 면에서 전술한 庶民在官者 내

지 lsquo非吏이면서 관에 있는 자rsquo lsquo官과 民 사이rsquo lsquo lsquo半官 半民rsquo lsquo踐更小史

(小吏)rsquo(續漢書輿服志) 등과 상통한 계층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吏戶에 포함되지 않는 給吏가 있었다 吏戶와 給吏戶가 구분되

고 있음은 lt吏民人名年紀口食簿gt의

其七戶給郡吏下品 (壹5447)

其十二戶給縣吏下品 (壹5467)

其一戶給軍吏下品 (參430336)

(其)六戶郡吏(中)(品) ---- (貳4490)

其二戶縣吏(下)品 (貳3307)

등에서 給郡吏 등의 戶와 縣吏의 戶가 구분되어 기록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다 그리고 給吏가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에 속하였음은 위

의 사례 뿐 아니라 lt吳簡gt에서 給度吏 下品之下 (5653) 등에서 알

수 있는데 下戶로 결원을 보충하는 것은 同級의 戶로 충원한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면 또한 당시 吏戶와 給吏의 관부에의 예속성과 신분

성을 보여준다 요컨대 給吏는 대부분 下品이거나 下品之下여서 평균

의 民戶 보다 더 빈천한 계층인 점도 그들이 관부에 정식의 吏職으로

임명된 吏라기 보다는 非吏인 民으로서 民의 일반 요역에 대신하여 관

서에 給事(給役)하는 자들이되 관련 관서의 吏에 배속되고 給事 복무

해야 하는 예속된 신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찍이 宮崎市定이 宋書권94恩倖傳序의 郡縣掾史 幷出

豪家 負戈宿衛 皆由勢族 를 인용하여 豪家 출신으로서의 掾史가 고

관으로 진출하는 경향이 累代 이어지면서 右族이 이루어지고 이를 통

해 위진남북조 귀족제가 출현하였다 하였고102) 楊振紅이 이에 동조하

고 있는 것은103) 부분적으로 再考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당시 孫休

102) 宮崎市定 九品官人法の硏究 -科擧前史 (京都 同朋社 1979(1956)) pp86

-89

103) 楊振紅 앞에 든 吳簡中的吏 吏民與漢魏時期官 吏的分野 mdash中國古代官僚

政治社會構造硏究之二 p34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4傳에서 말한 吏戶는 분명히 豪族勢家가 아니었고 lt오간gt에서 民戶와

함께 lt吏民簿gt에 기록된 吏戶는 下品에 속한 貧層이었으며 그 식구

모두 중복된 賦役의 부담에 시달리는 계층이었다 그 吏戶에는 吏와

給吏로 구분되어 관부에 예속되고 있다 즉 아무래도 豪族大家로서의

掾史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정을 이해하는 데는 전술한

lt周禮gt의 府史胥徒에서 府史가 호족대가로서 辟除된 掾史에 類하고

胥徒가 곧 관부 예속하의 吏戶와 給吏에 거의 相當하다는 면이 있다

吏戶에서의 吏職에 掾史가 있겠지만 관부에 예속되어 있고 직업적 세

습화 되어 있어 호족대가 출신의 掾史와는 구분되었을 것이다 무엇보

다 호족대가 출신의 掾史은 관부에 예속되지도 아니하고 세습의 신분

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掾史層의 존재는 군현의 장관 辟召로 임

용되었을 것이다 반면 吏戶 출신의 掾史는 기술 계통의 전문직일 경

우이거나 개인적 기능의 능력으로 또는 部曲과 같은 상비병 출신이

일반 요역 부담에 대신하여 관련 직무에 세습하게 되거나 또는 일반민

호에서 급히 所要되어 임시로 차출되었다가 점차 세습의 吏戶로 예속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관부에 진 빚으로 예속되었다가 吏戶로 남

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즉 이 吏戶는 관부의 갖가지 所要 用務

에 差出될 상황에 대기되어 있는 戶이다 그 중에 일부는 정식으로 掾

史로 승진되지만 나머지는 윤번이나 필요시 이 방면 저 방면의 分署에

차출되어 給事하며 分署의 長을 主로 모시고 그 아래에서 給事한다

掾史의 吏와 구분하여 그러한 뜻을 반영한 것이 lt오간gt의 도처에 보

이는 수십종의 給某吏다고 생각한다 호족대가 출신으로서의 掾史와

예속신분인 吏戶 출신으로서의 掾史는 그 신분상으로도 士와 서민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기에 宮崎市定의 立論 또한 양자의 구분을 통한

위진남북조의 귀족제 내지 良賤制의 형성을 논하는 보완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근래의 여러 연구들은 掾史에 이렇게 두 방면으

로 구분되는 면과 계층이 있다는 점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였고 吏戶

의 家屬에 吏와 給吏로 구분되는 층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양자의 성

격이 어떠한가를 파악하지 못한 셈이다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5한편 給吏는 吏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戶人이나 父兄이 郡吏 등의

諸吏에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당시 吏戶가 직업화 내지 세습화 되어

있었기 때문에 子弟의 給吏 신분도 곧이어 諸吏로 진전될 것은 당연하

다 그래서 lt嘉禾四年吉陽里戶籍簿gt에 吉陽里에 호적이 올라 있는 給

郡吏 逢杲(壹10169) 給郡吏 寥裕(壹10175) 給縣吏 張惕(壹

10182) 給州吏 區張(壹10367) 給州吏 嚴追(壹10149) 등이 lt嘉禾四

年五年吏民田家莂gt의 下伍丘 소속 佃民 名簿에서는 거의 同一人일

것이 분명한데 給郡吏가 群吏로 給縣吏가 縣吏로 給州吏가 州卒이나

州吏로 기재되어 있는 경우도104)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

다 이 경우는 丘에서는 給吏가 보이지 아니하고 里에서만 보이기 때

문에 아직 명확히 해명이 되지 않고 있는 里와 丘의 차이에 따른 것일

가능성도 있고 嘉禾4년과 嘉禾4-5년 戶籍簿에서의 1년 내외의 기간

차이에 따른 신분의 변화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또

한 侯旭東의 정리 조사에 의하면 高遷里의 給縣吏 松棐가 위의 lt田家

莂gt에서는 武龍丘의 縣吏로 기재되어 있고 같은 里의 給縣吏 張喬는

亻平 丘의 縣吏로 기재되어 있으며 宜陽里에 眞吏로 등재된 黃阿 등

6인도 각각 6곳의 다른 丘의 州吏 男子 男子 郡吏로 기재되어 있다

또 陽里의 給郡吏 謝鼠는 夫丘의 男子로 기재되어 있다105)里의 호

적부와 lt吏民田家莂gt의 丘別 佃民 명부에서 그 신분이 男子인 경우

일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양편 모두 里의 호적부에 給郡吏 給縣

吏 給州吏등 給吏로 기재된 경우는 대부분 丘의 佃民 명부에서 각각

群吏 縣吏 州吏로 되어 있고 眞吏가 州吏 郡吏 男子로 기재되기도

하고 給縣吏가 男子로 기재된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일부 사례들은 眞

吏 吏 給吏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것이어서 그 해명이 필요한

데 현재 里와 丘의 구별 차이 眞吏와 諸吏 給吏등의 실체 문제가 아

104) 凌文超 走馬樓吳簡採集簡ldquo戶籍簿rdquo復原整理與硏究--兼論吳簡ldquo戶籍簿rdquo的類

型與功能 (吳簡硏究 3 20116) pp17-18의 lt表一gt

105) 侯旭東 長沙走馬樓吳簡ldquo里rdquoldquo丘rdquo關係再硏究 (魏晋南北朝隋唐史資料2006) pp19-21의 表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6직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어 그 이유를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실

정이다 그러나 신분명으로 이름을 달리하여 그렇게 구분하고 있으며

전술한 바와 같이 給吏가 吏나 眞吏와 다르게 취급되면서 여러 名簿에

구별되어 기재되어 있고 그 독자성도 충분히 입증되기 때문에 위의

예외적인 사항들은 개인별 특별한 사정에 따른 것이거나 아직 여러 異

說로 논란이 되고 있는 里와 丘 등의 구분과 차이 등에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고에서 갖추어 고찰하지 못하고

후고로 미룬다

Ⅵ 결 언

이상의 검토에서 고대 職役의 범주에 들어가는 다종의 신분 내지 계

층과 吏職의 類 그 복무형태 삼국시기에 이르는 전승과 변화의 모습

들을 살펴보았다 우선 職官과 일반요역 복무자와는 신분제와 賦役체

계상 엄연히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례 地官 鄕大夫에 그

舍란 國中의 貴者賢者能者服公事者老者疾者에게는 모두 舍

한다는 것이다 에 대한 후한의 鄭司農의 注에 服公事者란 지금 吏에

게 復除해주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고 하였다106) 여기서 lsquo舍rsquo란 復

除와 같은 뜻이다 그 대상 가운데 lsquo國中의 貴者賢者能者rsquo 가운데

貴者는 공경귀족 賢者와 能者는 命官과 辟召된 관리에 해당한다 그리

고 그 아래의 服工事者는 다시 2분되는데 200석 이하의 吏職 내지 掾

史職(小吏)이 있고 그 아래에 庶民在官者 내지 lsquo非吏로서 官에 給事

하는 자rsquo로서 給吏層이 있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賢者와 能者 까지를

職官이라 하면 그 이하인 服工事者 가 곧 職役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

석된다 그리고 職官과 職役 복무자는 모두 일반요역에서 면제되는 자

106) 其舍 國中貴者賢者能者服公事者老者疾者 皆舍 注云 lsquo服公事者rsquo

謂若今吏有復除也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7들이다 이 중에서 職役 복무자는 일반요역에서 면제되는 대신에 각종

의 吏職과 給吏職에 복무하였다 여기서 칭한 給吏職은 lsquo(小)吏rsquo에 대비

하여 칭한 給吏를 그 성격상 그렇게 칭할 수 있으며 그 독립적 계층

내지 신분으로서의 실태가 lt長沙走馬樓吳簡gt의 발현에 의해 상당 부

분 밝혀지게 되었다 그런데 服工事者 즉 職役 담당 계층의 범위가

상당히 넓어서 그 職役의 양태가 모든 면에서 같은 것은 아니고 일부

분 다른 측면들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고대의 긴 기간에 걸쳐 거의

공통으로 庶民在官者 lsquo非吏이면서 관부에 給事하는 자rsquo lsquo官과 民 사

이rsquo lsquo半官半民rsquo의 성격이 유지되고 있는 면을 볼 수 있다

이렇게 職役 담당자의 연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곧 lt주례gt에 보이

는 관리 조직의 최하위에 위치한 府史胥徒이다 이 가운데 府史

가 대략 후대의 掾史職이나 lt吳簡gt의 諸吏에 속한다면 胥徒는 給吏層

에 상통하는 면이 많다 단지 lt吳簡gt에 다수 보이는 吏役 下의 吏戶

는 그 과중한 부담과 厮役 및 빈천함의 성격상 오히려 胥徒에 상통하

는 면이 많다 이러한 시대적 차이는 吏戶의 예속화 및 세습화의 진전

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한편 시대의 여건 차이로 여러 부분에서 胥徒

와 후대의 職役 담당 계층 사이에는 다른 면도 있다 胥徒나 給吏層이

기본적으로 일반 서민 출신으로서의 服工事者 였던 것과는 달리 周에

서 三國에 이르는 동안 服工事者 라는 면에서 同類이지만 일반 서민

과는 구분되는 여러 相異한 계층에 속한 신분들이 속하여 있었다 예

를 들면 工商食官 에 속하는 工商 皁隸食職 에 포함되는 吏에 속

한 徒隸 층 넓은 의미의 徒隸層이라 할 수 있는 皂隸牧圄

僕輿人 그리고 下吏層에 들어가는 樂祝醫衛士 및 走卒伍伯

之類 등이 그들로 그 출신은 일반 서민이거나 賤民 또는 刑徒였지만

관부에 寄生하며 給事한다는 면에서는 공통이다

이들의 복무 형태는 항상적 근무 일시적 근무 組別 교대제 등 여러

가지로 징발 내지 차출되었고 lsquo冗rsquo과 lsquo更rsquo은 그러한 차이를 구분하는

용어로서 나온 것이다 근무에 따른 보수를 받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 구분은 아직 분명치 않은 부분이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98있다 그러하지만 최소한 생업을 관부에 의탁하는 자들에게는 지급되

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年俸制에 대비되는 稍食 즉 소액의 月俸 내

지는 근무일수 기준의 지급 형태로 지급되었다 이는 그들의 근무가

주로 일 단위나 월 단위로 이루어지고 계산되었기 때문이다

lsquo官rsquo과 lsquo吏rsquo는 서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선진 이래 본래 상하의 신

분으로 명확히 구분되었고 漢代에 혼용 내지 통용되는 경향이 있었지

만 양자가 구분되는 면 또한 여전하였다 吏는 官에 가까운 吏가 있고

民으로서의 吏가 있어 전자를 lsquo官吏rsquo라고 하면 孫休傳의 詔에서 거론된

吏家는 보통 吏民으로 합칭될 경우의 吏라고 할 수 있다 lt吳簡gt의

lt吏民簿gt나 lt戶口簿gt 등에 보이는 吏와 給吏의 실태에서 후한 말에

서 삼국기의 전형적인 職役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이제까지 그

존재에 대해 거의 간과되어 왔던 給吏에 대해 lt吳簡gt은 수십종의 給

吏 실태를 전해주고 있어 그 의의가 크다 吏의 사무 업무를 직접 勞

役으로 보조해주는 給吏는 관부의 행정 업무 처리에 있어서 항상 필요

한 노동력 제공자였다 이러한 노동력은 어느 시기이든 공통으로 필요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연원을 lt주례gt의 胥徒에서 찾아볼 수 있었

고 여러 면에서 職役의 실례로서 공통하는 면들을 지적할 수 있었다

후한 말 삼국시기의 吏와 給吏는 일반서민 신분으로서의 吏이며 吏戶

로써 관부에 예속되어 그 食口 성원이 거의 세습하여 吏役에 종사하

고 있다 이들은 일반서민에 비해 일반요역이 면제된다는 점을 제외하

면 그밖에 각 吏職에 따른 吏役의 기본 직무 외에 限田의 佃作 의무와

그 地租로서 限米 布 錢을 납부해야 하며 從軍해야 하는 등 중첩된

부역으로 일반서민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또한 그 戶品 이

下品 내지 下品之下에 속한 貧戶 출신이다 따라서 같이 吏로 칭하지

만 豪族勢家 출신으로 掾史職을 거쳐 상급관으로 진급하고 命官에 오

르는 累代 高族의 世家 출신 掾史와 빈천한 서민 출신으로서 관부에

예속된 吏戶 출신으로서의 掾史와는 구분된다 이 吏家 내지 吏戶는

吏의 칭호로 불리지만 일반민보다 더 많은 부담을 지고 있기에 그들의

役은 후한과 삼국기에 賤役 賤職 내지 厮役으로 칭해지며 기피되고 있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99다 따라서 이 계층이 官吏로 합칭되는 경우의 吏와 구분되는 것은 당

연하며 그 호칭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늦어도 孫休 시기의

문서와 간독자료에 등장하는 lsquo吏家rsquo나 lsquo吏戶rsquo는 이미 그러한 계층에 대

한 專稱으로 형성된 듯하다

한편 諸吏役의 복무에는 常勤의 방식과 1년에 1개월 내지 수개월만

輪番 형식으로 복무하는 비상근의 lsquo踐更 방식의 근무rsquo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한 비상근 복무자도 있었을 것이다107)그리고 그 복무에

대한 급여가 그 吏役을 생업으로 하는 常勤者에게는 당연히 小吏에 대

한 봉록이 지급되었을 것이다 반면에 給吏의 役은 일반요역에 대신하

는 복역이라는 면에서 비상근 내지 윤번 형식의 차출이었을 가능성이

많지만 지금까지 lt오간gt에 소개된 자료로는 어느 쪽이라 단정하기가

어렵다 胥徒의 役은 어디까지나 상급의 관원들과는 달리 일반민의 요

역 의무를 대신하여 관부에 給事하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lt오간gt

에서의 給吏와 상통한다 給吏에 대한 봉록 지급의 여부도 아직 不明

이다 단지 限田의 지급이 祿田과 같은 성격의 것이었을 가능성도 고

려되지만 그 租額이 커서 혜택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노동력의 징발로

서 해석되는 부분도 있다 또한 給吏의 관부에의 給事가 일반 요역과

같이 組別 순환제였는지의 여부는 아직 분명치 않다 lt奏讞書gt의 樂

人의 예와 같이 一月一更制와 같은 순환근무제였을 가능성도 있는데

대체로 두 가지 형태가 공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lt吳簡gt에 의거한 의론들은 아직 자료 해석과 해명이 충분치 못하여

불분명한 상태에 있는 사항들이 많은 실정이기 때문에 해당 사항이 새

로 규명 되는대로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lt오간gt의 미해명 사항

에 대한 개별적인 탐구도 본 과제를 보완하는 차원에서 필요하다 그

리고 아직 소개되지 않은 대량의 lt오간gt이 연속하여 출간되면서 새로

운 자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107) 廣懶薰雄 앞의 秦漢律令硏究 pp310-311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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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103

(中文摘要)

中國古代的職役與職官的問題

朴 健 柱

通過上述的檢討 基本上職役範疇內的多種身分 乃至階層與吏職之類

其服務形態至三國期的傳承與變化等方面已然解明 職官與職役服務者

的一般徭役均免除了 此二者中職役服務者 用種種lsquo吏職rsquo與lsquo給吏職rsquo服務來

代替其一般徭役 直至三國時期爲至漫長的期間內職役擔當者 庶民在官者

lsquo非吏而給事官府者rsquolsquo官與民之間者rsquolsquo半官半民rsquo的性格几乎共通維持

職役擔當者的淵源卽是lt周禮gt所見的官吏組織最下位的府史胥

徒 此中 府史是大略屬于後代掾史職或是lt吳簡gt的諸吏 胥徒則是相通于

給吏層的側面多的 但是lt吳簡gt所見多數的吏役下吏戶其過重的負擔與厮

役及貧賤的性格上 倒是與胥徒相通方面較多 這個時代的差異像是吏戶的

隸屬化及世襲化的進展招來的結果 一方面因爲時代的與件差異 胥徒與後

代的職役擔當階層間有多方面的異質 胥徒與給吏層基本上是一般庶民出

身的 服工事者 如此不同 從周至三國期間從 服工事者 上是同類而與一

般庶民相區分的多種相異的階層面上身分較多 例如 工商食官 所屬的工

商 皁隸食職 所包含的 吏所屬的徒隸 層以廣義的徒隸層可以稱謂的

皂隸牧圄僕輿人 以及下吏層所屬的樂祝醫衛士 及走

卒伍伯之類等 他們的出身是一般庶民 或是賤民乃至刑徒 在官府寄生

而給事的層面上是共通的

其服務形態是恒常的勤務 一時的勤務 組別交代制等以多種方式徵發乃

至差出 lsquo冗rsquo與lsquo更rsquo是其差異區分用的用語 支給勤務報酬與否是不分明之事

中國史硏究 第87輯 (201312)104項 可是至少生業官府依託者是被支給的 其支給方式是與年俸制相對的稍

食 卽少額的月俸乃至勤務日數基準的支給方式 因此他們的勤務和支給計

算主要是日單位或是月單位

於lt吳簡gt之lt吏民簿gtlt戶口簿gt等所見的吏與給吏的實態 可以看到

從後漢末至三國期間典型的職役的樣相 尤其向來看過給吏的存在 lt吳

簡gt所傳數十種給吏的實態 其意義是巨大 給吏是以直接的勞役補助吏的

事務業務 是官府的行政業務處理上恒常的必要勞動力提供者 這種勞動力

許是官府運營上至今爲至所有過的任何時期共通要緊事項 可以推斷給吏

的淵源於lt周禮gt的胥徒 而且可以指摘以職役的實例有多方面共通的層面

後漢末三國時期的吏與給吏是一般庶民身分之吏 以吏戶隸屬於官府 其食

口成員率多世襲地從事吏役 他們除比一般庶民免一般徭役外 也需要履行

各吏職別吏役的基本職務 佃作限田義務 以其地租納付限米布錢 從

軍義務等重疊的賦役 因此他們有比一般庶民更重的負擔 而且他們的戶品

是下品乃至下品之下所屬的貧戶出身 從而他們雖一樣稱謂lsquo吏rsquo 却與豪族

勢家出身經歷掾史職進級上級命官的累代高族的世家出身的掾史與以貧賤

的庶民出身於官府隸屬的吏戶出身的掾史是不同的階層 這個吏家乃至吏

戶雖被稱謂lsquo吏rsquo 但是彼役後漢三國期被稱謂賤役 賤職乃至厮役 而且被忌

避 從而此階層是與lsquo官吏rsquo合稱的境遇的lsquo吏rsquo爲區分是理所當然 其稱號也只

得相殊 于是最遲至少到於孫休時期文書與簡牘資料所見的lsquo吏家rsquo與lsquo吏戶rsquo

許是已經成爲如此階層的專稱

依照給吏的役是一般徭役代替的服役 其運營形態是非常勤乃至輪番形

式的可能性大的 但是迄今依據lt吳簡gt所見的資料還難以斷定何者是對的

胥徒的役是與上級官員異樣 以一般民的徭役義務代替給事於官府 本着那

樣的側面與lt吳簡gt所見的給吏相通 給給吏俸祿與否也還不明 但是從限

田的支給是與祿田同一的性格的可能性上看 因爲其租額是多的 與其說惠

澤倒是有可能解釋爲勞動力的徵發 給吏的官府給事是與一般徭役同一方

式的組別交代制與否還不分明 如lt奏讞書gt所見樂人的事例 有可能一月

一更制方式交代勤務制 筆者認爲大體上是兩個方式共存

關於lt吳簡gt資料的議論是因爲解釋與解明上許多異說 不分明的關聯事

중국 고대의 職役과 職官의 문제 (朴健柱) 105項也有很多 所以該事項的解明將其完備需要補完

주제어 직역 직관 서도 도예 이역 이호 급리 서민재관자

關鍵詞 職役 職官 胥徒 徒隸 吏役 吏戶 給吏 庶民在官者

Keywords lavor duty at office(official lavor) high-ranking officialrsquos duty(official

post) xu-tu tu-li minor officials lavor minor officials family minor half

officials and half the masses in lavor services at office the masses in lavor

services at office

(원고접수 2013년 11월 15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12월 16일 수

정원고 접수 12월 19일 게재 확정 1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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