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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譯官 洪純彥과 朝明外交

    金 英 淑 (仁荷大)*

    Ⅰ. 머리말

    Ⅱ. 역관 洪氏 집안과 홍순언

    1. 역관 홍씨 집안

    2. 홍순언

    Ⅲ. 조명외교에서 홍순언의 역할

    1. 종계변무

    2. 임진왜란

    Ⅳ. 맺음말

    Ⅰ. 머리말

    洪純彦(1530-1598)을 주목하게 된 계기는 許篈의 朝天記이다. 그것은 일개 역관1)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허봉은 홍순언의 말은 조리가

    있어서 기록할 만하고, 들어도 싫증나지 않으며 피로도 잊었다고 높게

    평가하였기 때문이다.2) 홍순언은 역관의 신분으로 光國勳臣에 녹훈되

    고 唐陵君에 봉해졌으며, 羽林衛將까지 지낸 인물이다. 그러나 국내에

    서 홍순언보다는 홍순언의 일화가 더욱 유명하고, 홍순언은 전혀 연구

    된바 없다.

    홍순언이 주목되지 않은 제일 중요한 원인은 사료의 결핍일 것이다.

    조선의 官撰書와 私撰書에 역관을 기록한 경우는 매우 적으며, 역관이

    * 인하대학교 사학과 박사수료, 인하대 한국학과 BK21 참여 대학원생.

    1) 본 고에서는 역관의 직제와 상관없이 편의상 국내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명칭

    인 역관으로 통칭하였다.

    2) 허봉, 조천기(상)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행록선집 1, 경인문화사, 1976,pp.86-169), 갑술년 6월 7일조.

  • 中國史硏究 第70輯 (2011. 2)196개인문집을 남긴 경우는 거의 없다. 따라서 역관에 대한 연구는 주로

    역관의 職制와 充員, 경제활동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3) 조명

    외교의 연구에서도 역관은 늘 소외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4)

    본고에서는 허봉의 조천기를 중점적으로 분석하고, 기타 자료를참고하여, 역관 홍순언을 통하여 三使가 아닌 외교통역 실무자가 외교

    사안을 해결할 때,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역관 홍씨 집안과 홍순언을 살펴보고 다음, 宗系辨誣와 임진왜란

    에서 홍순언의 역할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역관 홍순언의 구체적인 인간상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고, 조명외교에서 홍순언의 역할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조명외교에서 역관의 역할도 어느 정도 조명할 수 있을 것이

    다. 필자의 이러한 연구가 조명관계사 연구에서 직접적인 외교실무자

    인 역관을 주목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Ⅱ. 역관 홍씨 집안과 홍순언

    3) 김경록, 조선 초기 통사의 활동과 위상 변화 (한국학보 26, 2000); 김양수,조선시대의 譯官 등 中人活動을 찾아서 (실학사상연구 39, 2009); 김양수,조선전기의 역관활동(상) (실학사상연구 7, 1996); 김양수, 조선전기의 역관활동(하) (실학사상연구 8, 1996); 백옥경, 조선전기 역관의 충원에 대한고찰 (조선시대사학보 26, 2003); 백옥경, 조선전기 역관의 직제에 대한 고찰 (이화사학연구 29, 2002); 白玉敬, 朝鮮前期 譯官의 性格에 대한 一考察

    (이대사원 22·23, 1988); 백옥경, 조선전기 역관연구 (이화여대박사학위논문, 2000); 백옥경, 조선전기의 使行 密貿易 硏究 -赴京使行을 중심으로-

    (역사문화연구 25, 2006) 등.4) 권인용, 明中期 조선의 宗系辨誣와 對明外交 -권벌의 朝天錄을 중심으로-

    (명청사연구 24, 2005); 김경록, 조선초기 대명외교와 외교절차 (한국사론 44, 2000); 박성주, 조선전기 조명 관계에서의 종계문제 (경주사학 22,2003); 이영춘, 丙子胡亂 전후의 조선, 明, 淸 관계와 김육의 朝京日錄 (조선시대사학보 38, 2006); 졸고, 明末의 中國社會와 朝鮮使臣의 外交活動 -金堉의 朝京日錄과 朝天錄의 분석을 중심으로- (명청사연구 31, 2009)등.

  • 譯官 洪純彥과 朝明外交 (金英淑) 197

    1. 역관 홍씨 집안

    鄭寅普는 홍순언의 初諱는 德龍이고, 純彥은 字인데, 字를 주로 사용

    하다가 임금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자 자를 이름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홍순언의 生沒年代 및 官歷 品階는 기록하지 않고, 오직 洪氏

    族譜에 기록되어 있다고 설명하였다.5) 그리고 唐陵君遺事徵 을 쓰게

    된 계기를 당릉군의 동생 선전관(德麟)의 후손인 正求의 부탁을 받았

    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6) 그러나 南陽洪氏族譜에 의하면,7) 홍순언8)

    은 洪謙의 아들로 태어나고, 그에게는 洪秀彥이라는 동생이 있었으며,

    이들 삼부자는 모두 유명한 漢語 역관이었다.

    홍순언의 본명과 동생에 관해서는 기록마다 약간씩 다른데, 필자는

    아직 이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다. 본고에

    서는 조선왕조실록, 南陽洪氏族譜 및 기타 자료에 근거하여, 純彥은 字

    가 아니라 원명이고, 홍순언의 字는 士俊이고, 호는 東皐9)이며, 홍순언

    의 삼부자는 모두 조선중기의 유명한 漢語譯官이었다고 판단하고 아래

    의 논술은 모두 여기에 따를 것이다.

    洪謙前에 홍씨 집안은 三代가 文官이었고, 홍겸의 아버지와 형은 모

    두 과거급제자였다.10) 홍겸의 아버지 洪慶昌은 司諫院 正言, 安東府使

    5) 鄭寅普 저·정양완 역, 담원문록 (태학사, 2006), p.473.6) 정인보, 위의 책, pp.412-414.

    7) 洪鐘文, 南陽大譜 (南陽洪氏大宗中中央宗會, 1993), p.158.8) 澓(4)

    │ ┌師壽

    漢升 溟─┼師錫 ┌吉昌

    │ │ └師悌─係江┼孝昌 당릉군

    沖 福海 └慶昌┬愼 ↓ ┌建─孝孫

    │ │ └謙┬純彥─┼遵─孝承

    世─芬─由道 └秀彥 ├運─孝善

    (無後) └選─孝烝

    9) 許國, 許文穆公集 卷6 (四庫禁燬書叢刊(4), 集部40, 북경출판사, 2000),p.517.

    10) 皇華集 (四庫全書存目叢書 集部, 第301冊, 齊魯書社, 1997), pp.549-550.

  • 中國史硏究 第70輯 (2011. 2)198

    年度 사신 및 직급 목적 典據 통사

    11536.11-

    1537.9

    龔用卿(翰林院修撰)皇嗣誕生조서 반포

    공용경, 사조선록;중종실록 홍겸吳希孟(戶科給事中)2 1539.2-

    華察(翰林院侍讀)황태자책립조서 반포 중종실록

    薛廷寵(工科給事中)

    3

    1545

    郭璈15)(太監) 인종 諡호·제문·賻儀頒賜

    인종실록張承憲(行人)

    4張奉(太監)

    誥命·칙명반사 인종실록 홍겸吾猷(太監)

    5

    1546

    劉遠(太監)제문·시호·賻儀 반사 명종실록

    王鶴(行人)

    6聶寶(太監)

    誥命·칙명을 반사 명종실록郭鑾(太監)

    7 1558 王本(太監) 세자책봉칙명 반사 명종실록

    明使의 조선출사표(1530-1598)

    등을 지내고,11) 형 洪愼은 平壤庶尹·楊州牧使·刑曹參議·工曹參議 등을

    지냈으며, 1539년에는 進賀使로 明에 출사하였다.12) 홍순언의 아들 洪

    建은 임진왜란에 공을 세워 당상관으로 승진하고,13) 손자 洪孝孫은 肅

    川府使까지 지냈다.14) 이렇듯 홍씨 집안에서 홍순언의 삼부자만이 역

    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관 홍씨 집안으로 칭하였는데, 그것은

    역관이 勳臣으로 錄勳된 자는 홍순언이 전무후무할 것이고, 조명외교

    에서 홍순언의 삼부자와 같이 큰 역할을 한 가문 또한 전무후무하기

    때문이다.

    홍순언의 삼부자가 조명외교에 참여한 시기, 明使의 조선 출사 상황

    과 이들의 참여 여부를 아래의 로 정리하였다. 여기에는 임진왜

    란 중에 명군과 조선군신의 교섭에 참여한 활동도 포함시켰다.

    11) 중종실록 권1, 1년 10월 정미③; 중종실록 권29, 12년 8월 임신⑥(원문자는 몇 번째 기사임을 가리킴).

    12) 중종실록 권63, 23년 9월 경진②; 중종실록 권77, 29년 윤2월 을축⑤; 중종실록 권82, 31년 11월 무인①; 중종실록 권89, 33년 12월 임인②; 중종실록 권89, 34년 1월 병신④ 등을 참조.

    13) 선조실록 권107, 31년 12월 무인②.14) 인조실록 권45, 22년 9월 병술②.

  • 譯官 洪純彥과 朝明外交 (金英淑) 199

    趙芬(太監)

    8

    1567

    許國(翰林院檢討)隆慶帝登極조서 반포.

    명종실록 황화집 홍순언魏時亮(兵科給事中)

    9姚臣(太監)

    선조책봉조서 반사 선조실록李慶(太監)

    10

    1568

    張朝(太監)제문·시호·부의 반사 선조실록

    歐希稷(行人)

    11成憲(翰林院檢討)

    황태자책립조서 반포선조실록松溪漫錄 홍순언王璽(兵科給事中)

    12 1572.8韓世能(翰林院編修)

    만력제登極조서 반포선조실록;황화집;허봉,조천기

    홍순언

    홍수언陳三謀(吏科給事中)

    13 1582.9黃洪憲(翰林院編修)

    皇嗣탄생조서 반포선조실록황화집 홍순언王敬民(工科給事中)

    14 1592.8 薛藩(行人) 칙서 반사 선조실록;정곤수,赴京日錄홍순언

    151593

    李如松(提督) 임진왜란홍순언

    홍수언

    16 司憲(行人) 칙서 頒賜 선조실록 홍순언

    洪謙은 字가 受益이고, 1531년 式年식 譯科에 장원으로 급제한 인물

    이며,16) 중종·인종·명종대의 유명한 漢語역관이다. 외모가 출중하고 중

    국어의 구사력과 이해력이 뛰어나며, 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외

    교활동에 참여하여 보는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했다고 한다.17)

    과 같이 홍겸은 明使의 영접에 두 번 참여하였다.18)

    홍수언은 字가 士美이고, 1549년 式年試 역과에 8위로 급제한 인물

    15) 인종실록은 郭王放으로 기록, 璈의 오식인 듯하다.16) 패관잡기 권4와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을 참조.17) 공용경: 洪生年少且淸妙, 華言一一能通曉; 賓筵秩秩儼胡越, 洪生一來皆了了;

    聞汝三世俱文官, 汝今繼美能衣冠; 長裾日曳王門下, 出入譯院馳雕鞍; 東藩侍予一

    月久, 入耳傳言如出口; 達意只在片辭間, 旦暮侍立無頹顔; 義順館中覓詩句, 爾今

    東去我西還; 爾歸國王知錫予, 我亦倍道慰當宁; 東方朝貢爾必來, 與爾會有相逢

    處. 오희맹: 譯士靑春洪受益, 體脩貌麗衣冠爽; 魯向遼陽送虜氓, 華音淸朗鳴泉石;

    追随館穀多勤渠, 每誦詩篇令人■; 因而詢問何門里, 父兄登科雙及第; 從行策馬爲

    前驅, 啓事聞言卽中契; 音響眞得都人遺, 錐處囊中宜脫銳; 如爾才識淹邑久, 一歲

    超遷應至九(皇華集, pp.549-550) (■는 원문에 누락된 글자를 표시함, 밑줄은필자).

    18) 중종실록 권84, 32년 3월 경인⑥; 인종실록 권2, 1년 5월 무인①.

  • 中國史硏究 第70輯 (2011. 2)200

    年度 사절명칭 삼사 역관 典據

    1 1533 하절사書: 趙士秀

    미상: 魚叔權홍겸 패관잡기 권4

    2 1537 사은사정: 姜顯

    서: 丁煥홍겸 정환, 朝天錄; 중종실록

    3 1541 성절사정: 홍춘경

    미상: 魚叔權홍겸 중종실록; 패관잡기 권2

    4 1543 동지사정: 崔輔漢

    부: 李澯홍겸 중종실록

    5 1555 홍순언 허봉, 조천기; 조헌, 조천록

    이며,19) 명종·선조대의 유명한 한어역관이다. 홍수언은 예의바르고, 용

    모가 준수하며, 총명·영리하였다. 중국어의 이해력과 표현력이 매우 좋

    으며, 산천·도로·풍속도 잘 알고 있었다.20) 과 같이 그는 明使의

    영접에 두 번 참여하였는데, 임진왜란 중에는 天使의 역관으로서21) 명

    군과 조선 대신의 의사소통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22)

    홍순언의 삼부자가 조명외교에 참여한 시기 조선은 明에 대체로 218

    번 사절을 파견하였다.23) 아래의 는 이들이 明에 출사한 목록이

    다. 비록 17차에 불과하지만, 당시의 시대배경을 고려하면, 결코 적은

    수치는 아니다.

    홍순언 삼부자의 출사 상황(1530-1598)

    19)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에 근거하였음.

    20) 縹緲峰主人: 馬度千山雪更深, 憑君一語寄愁心; 東邦繾綣君臣意, 欲向天涯夢裏

    尋. 西湖主人: 洪生颇通敏, 容止甚趍蹌; 華言皆洞曉, 出語聲洋洋; 薊門頻來往,

    上國幾觀光; 江滸遠迎迓, 驅馳道路長; 指點山川勝, 數揚風俗詳; 盛筵敍賓主, 對

    面隔層岡; 慇懃一傳語, 彼此情昭彰; 兩地同肯首, 燕笑滿華堂; 有時歷深夜, 秉燭

    侍詩場; 岐路將分別, 東西各一方; 拜手索詩句, 燈下賦篇章; 豈不憚勞倦, 念汝意

    難忘; 我今渡江去, 雲樹正蒼茫; 好爵厼是縻, 應共海天長(皇華集, pp.814-815)(밑줄 필자).

    21) 정곤수, 赴京日錄 (栢穀先生集 권3), 壬辰 8월 24일조.22) 선조실록 권28, 25년 7월 정축⑤⑦; 선조실록 권28, 25년 7월 정해③;

    선조실록 권37, 26년 4월 을유③, 4월 병술⑥, 4월 경인②; 선조실록 권75,29년 5월 경오④, 윤8월 기축⑤ 등.

    23) 劉菁華·許清玉·胡顯慧 選編, 明實錄朝鮮資料輯錄 (四川出版集團, 2005)에 근거함.

  • 譯官 洪純彥과 朝明外交 (金英淑) 201

    6 1557 종계주청사 정: 趙士秀 홍겸 명종실록7 1556-1561 赴京使 홍순언 허봉, 조천기; 명사권188 1561 遼東押解官 홍순언 명종실록 9 1562-1573 遼東押解官 홍수언 허봉, 조천기10 1573 주청사

    정: 李後白

    부: 尹根壽

    서: 尹卓然

    홍순언 허봉, 조천기

    11 1574 성절사

    정: 朴希立

    서: 許篈

    질: 趙憲

    홍순언허봉, 조천기조헌, 조천일기

    12 1577 사은사정: 尹斗壽

    부: 김성일홍수언 김성일, 조천일기

    13 1584 주청사정: 황정욱

    서: 韓應寅홍순언 선조실록

    14 1589 종계주청사

    정: 이양원

    부: 尹根壽

    서: 李海壽

    홍순언尹根壽, 月汀漫筆선조실록

    15 1591 성절사정: 김응남

    서: 黃致敬홍순언 선조실록

    16 1592 사은사정: 申點

    서: 鄭期遠홍순언

    선조실록;박동량, 壬辰日錄

    17 1592 請援사 정: 李德馨 홍수언 선조실록

    홍겸은 明에 5차례 출사하였으며, 종계변무에도 참여하였다.24) 홍겸

    의 대인관계는 상당히 좋았는데, 조선사신과는 물론,25) 중국인들과도

    매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明에서 쉬쉬하고 있던

    사건, 즉 궁녀들의 황제시해 사건에 관한 정보도 확보할 수 있었다.26)

    洪秀彥은 종계변무의 주청활동에 참여하고, 임진왜란 중에는 청병활

    동에도 참여하였다.27) 홍수언은 明에 3차례 출사하였는데, 요동압해관

    24) 魚叔權, 패관잡기 권4; 중종실록 권85, 32년 6월 정사②; 丁煥, 조천록;중종실록 권95, 36년 5월 병술②; 중종실록 권100, 38년 1월 계유①; 명종실록 권23, 12년 10월 을유②.

    25) 魚叔權, 패관잡기 권2.26) 冬至使 崔輔漢은 “通州 집主人이 비밀리에 洪謙에게 ‘황제가 궁녀들에게 목

    매어져 죽을 뻔했는데 어린 궁녀의 고발로 살아났지만, 아직 생사는 모른다’고

    하였다”고 고함(중종실록 권100, 38년 1월 계유①).27) 허봉, 조천기(하), 갑술년 9월 4일조와 9월 8일조; 金誠一, 조천일기(학

  • 中國史硏究 第70輯 (2011. 2)202으로 다녀온 기록은 분명하지 않다. 또한 1562년에 공조참판 尹玉은

    홍겸이 자신의 아들을 요동압해관으로 삼아달라고 청하였지만 거절했

    다고 한다.28) 하지만 遼東巡撫御使에게 보낸 禮部의 覆本29)과 안정란

    의 증언30)에 의하면, 홍수언은 1562-1573년 사이에 적어도 1차례는 遼

    東押解官으로 明에 다녀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외교활동은 필자가 정리한데 그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공용경과 오희맹은 홍겸에게 증한 시에서 “東方朝貢爾必來”, “魯向遼陽

    送虜氓”이라고 하고,31) 縹緲峰主人은 홍수언에게 증한 시에서 “薊門頻

    來往, 上國幾觀光”이라고 하였다.32) 게다가 이들은 모두 유능한 역관이

    고, 사신파견이 빈번한 시기였기에, 별다른 瑕疵가 없는 한, 유능한 역

    관을 그냥 쉬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2. 홍순언

    1555년에 홍순언은 25세의 젊은 나이로 조명외교에 참여하기 시작하

    였다. 비록 명백한 기록은 없지만, 홍순언의 언사를 통하여 유추할 수

    있다. 홍순언은 중국인들과 말하면서 1555년의 순안어사 陳瓚에 대하

    여 매우 분명하게 설명하였다.33) 그리고 전공을 세워 百戶가 되기 위

    하여 일반백성을 죽여 달자라고 거짓으로 고하는 현상을 논하면서,

    봉유고 권3); 선조실록 권27, 25년 6월 을사③.28) 명종실록 권28, 17년 3월 계축①.29) 遼東巡撫御史에 보낸 禮部覆本: 司譯院正 全希獻, 通事 權輔倫, 權士義, 洪純

    彥, 敎授 洪秀彥, 副正 朴效欽, 通事司果 韓潤輔, 通事 柳廷良 등이 전후 9차례

    피로인을 요동도사에 刷還하였다(허봉, 조천기(하), 갑술년 9월 4일조).30) 예부자문에 9차례 쇄환하였다고 하지만, 押解通事는 8명밖에 되지 않고, 韓閏

    輔는 司果로 誤記되었다. 이는 遼東都司에서 巡撫衙門에 보고할 때, 최세협의

    이름을 빠뜨린 것이다. 최세협은 1572년 겨울에 薪島網石하는 일로 咨文을 가

    지고 都司에 가면서 唐人을 刷還하였다(허봉, 조천기(하), 갑술년 9월 8일조).31) 주16의 밑줄 부분을 참조.

    32) 주19의 밑줄 부분을 참조.

    33) 허봉, 조천기(상), 갑술년 6월 24일조.

  • 譯官 洪純彥과 朝明外交 (金英淑) 2031555년의 南征之變에 어느 한 京軍이 강가에서 놀고 있는 某 관원의

    아들을 죽여서 달자를 잡았다고 고한 사건을 언급하였다.34) 이러한 점

    에 근거하여 1555년에 홍순언은 明에 다녀온 것으로 판단하였다.

    홍순언은 허봉에게 광녕의 총병관 杨照의 사적을 설명하면서, 전에

    赴京使를 수행하여 廣寧 王政의 집에 묵은 적이 있다고 설명하였다.

    당시 왕정의 아들은 양조군에 있었는데, 홍순언은 왕정의 아들이 출정

    하는 과정을 통해 양조군의 엄격한 紀律과 用兵의 신속함을 살펴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양조는 殷尙質의 戰死로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이라고 하면서 1560년과 1561년에 㺚賊이 침범하였을 때, 양조는

    輕騎兵으로 기습하여 수백 명을 살상하는 전공을 세웠다고 설명하였

    다.35) 明史에 의하면, 광녕총병 殷尙質은 1556년 11월에 打來孫이 침범하였을 때 전사하였다.36) 이러한 점에 근거하여 1556-1561년 사이에

    홍순언은 明에 출사한 적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홍순언은 1562년에 처음으로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다. 명종실록에 의하면, 前年에 遼東押解官으로 吉禮에 쓰일 물화를 무역해 왔다고

    하였다.37) 즉, 1561년에 요동압해관으로 明에 다녀왔던 것이다.

    1567년에 明使 許國과 魏時亮이 조선에 출사하였을 때, 홍순언은 司

    譯院正으로 正使廳의 供事를 맡았다.38) 1568년에 明使 成憲과 王璽가

    조선에 출사하였을 때에도,39) 홍순언은 사신의 영접에 참여하였다. 선조실록에는 홍순언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松溪漫錄에는 明使과 홍순언의 대화내용이 기록되어 있다.40)

    1572년에 明使 韓世能이 조선에 왔을 때,41) 비록 분명한 기록은 없

    34) 조헌, 조천일기, 갑술년 7월 16일조.35) 허봉, 조천기(하), 갑술년 9월 29일조.36) 明史 卷18, 世宗2, 35년 11월 戊午條.37) 명종실록 권28, 17년 3월 계축①.38) 明實錄朝鮮資料輯錄, p.238; 許國, 許文穆公集 卷6, p.517.39) 宣祖실록 권2, 1年 7月 己酉①.40) 權應仁, 松溪漫錄(下)(大東野乘).41) 선조수정실록 권6, 5년 11월 계미①.

  • 中國史硏究 第70輯 (2011. 2)204지만, 홍순언이 사신의 영접에 참여하였을 것으로 본다. 홍순언은 한세

    능의 행차에 대비하여 起草한 종계변무呈文의 漢語번역에 참여하고,42)

    이듬해에 주청사 이후백을 수행한 인물이다. 게다가 홍순언은 한세능

    의 사행 길에 발생한 사건도 분명하게 알고 있고,43) 한세능 및 그의

    舍人 滕季達과도 친분이 있다.44) 이러한 점에 근거하여 한세능의 영접

    에 참여하였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1573년에는 奏請使 李後白을 수행하고,45) 1574년에는 聖節使

    朴希立를 수행하였다.46) 1582년에 翰林院 編修 黃洪憲과 工科右給事中

    王敬民이 조선에 출사하였을 때에도,47) 홍순언은 사신의 영접에 참여

    하였다.48) 황화집에는 天籟居士가 홍순언에게 증한 시가 있는데,49)이 시는 황홍헌의 문집에도 수록되어 있다.50) 이름을 쓰지 않고 호를

    사용한데서 이들의 친분을 엿볼 수 있다.

    1584년에는 주청사 황정욱을 수행하고,51) 1589년에는 종계주청사 윤

    근수를 수행하였으며,52) 1591년에는 성절사 김응남을 수행하였다.53)

    42) 선조실록 권6, 5년 9월 갑오①.43) 허봉, 조천기(상), 갑술년 6월 7일조.44) 홍순언은 遼東의 掌印大人 陳言의 출신전말을 언급하면서, 韓世能과 陳三謨

    가 廣寧에 이르자, 당시 都御史 中軍指揮인 진언은 館門에 거짓 榜文을 걸고

    侵擾를 嚴禁하게 하였다고 언급하였다(허봉, 조천기(상), 갑술년 6월 23일조).45) 선조실록 권7, 6년 2월 기묘①; 허봉, 조천기(상), 갑술년 6월 7일조.46) 선조실록 권8, 7년 5월 갑신③.47) 明實錄朝鮮資料輯錄, p.253.48) 선조수정실록 권16, 15년 10월 을유①와 11월 을묘①.49) ①渡江醉筆贈洪司譯(天籟居士): 我從長安來, 復歸長安去; 驅車三韓道, 念子殷

    厪御; 迎我江南雲, 送我江北樹; 雲樹何迢遙, 人生若飛絮; 春花復秋月, 流景豈常

    駐; 憐君有二毛, 駸駸桑楡暮; 誰攀弱木枝, 爲汝淹羲馭; 所貴崇明德, 永永垂芳譽;

    我今入都門, 無能托飛羽; 朝謁承明廬, 暮宿北門署; 汝來會有時, 咫尺安得遇; 金

    門老歲星, 耿耿東方曙; 令汝欲見我, 凝眸仰天注; 醉後狂歌來, 一笑渡江去. ②西

    華儆吾王子書于車輦館: 重重樓閣大江濱, 詔諭東邦漢使臣; 無那方言渾未解, 向來

    傳命賴斯人(황화집(황홍헌, 왕경민), pp.64-66).50) 황홍헌, 碧山學士集(四庫禁燬書叢刋4, 集部30, 北京出版社, 2000), p.419.51) 선조실록 권18, 17년 11월 계유②.52) 尹根壽, 月汀漫筆.53) 선조실록 권25, 24년 11월 갑자①.

  • 譯官 洪純彥과 朝明外交 (金英淑) 205그리고 1592년에는 사은사 신점을 수행하여 지원군의 파견을 요청하였

    다.54)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선조가 의주로 거둥한 이후, 8월에 明使 薛藩

    이 조선에 출사하였을 때,55) 請兵奏請使 정곤수는 홍순언을 대동하지

    못함을 매우 아쉬워하였다.56) 그 원인은 홍순언이 사신의 영접에 참여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의주에 처한 선조에게 홍순언과 같이 유능

    하고 明에 ‘關係’가 있는 노련한 역관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였을 것

    이다. 1593년에 明使 司憲이 조선에 출사하였을 때에도,57) 홍순언은 御

    前에서 활동하고 있었기에58) 당시의 특수한 상황에서는 자연스럽게

    사신의 영접에 참여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홍순언은 25세의 젊은 나이로 조명외교에 참여한 이래 빈번

    하게 明使의 영접에 참여하고 조선사신을 수행하여 明에 출사하였으

    며, 임진왜란 중에 선조가 의주에 처하고 있는 위급한 시기에도 어전

    역관으로써의 역할을 충분히 하였다. 그러면 홍순언은 구체적으로 어

    떠한 인물이었던 것일까.

    첫째, 홍순언의 외모와 풍채는 매우 출중하였을 것으로 본다. 동시대

    에 생활한 유몽인은 “홍순언은 영민하고 외모가 출중하다”고 증언하였

    다.59)

    둘째, 홍순언의 언어표현력은 매우 뛰어났다. 사행도중에 허봉이 중

    국의 옛일을 묻자, 홍순언은 夏言과 嚴嵩이 화를 입은 연유, 龔用卿의

    현황, 序班의 횡포, 遼東의 掌印都司 陳言의 탐욕 등 복잡하고 많은 문

    제들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역관의 어려움도 호소하였다. 홍순언의

    화술은 허봉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60) 홍순언의 漢語 구사와 이해력은

    54) 선조실록 권28, 25년 7월 신사⑥.55) 明實錄朝鮮資料輯錄, p.261.56) 선조수정실록 권26, 25년 9월정사⑥; 박동량, 壬辰日錄(三) , 寄齋史草(下)

    ; 정곤수, 赴京日錄 , 壬辰 8월 24일조 참조.57) 선조실록 권45, 26년 윤11월 임오①.58) 선조실록 권45, 26년 윤11월 신묘③.59) 유몽인, 어우야담, p.584.

  • 中國史硏究 第70輯 (2011. 2)206중국인과 비슷한 수준이었으나,61) 譯科 합격여부와 漢語를 배운 과정

    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셋째, 홍순언의 글이나 詩를 짓는 翰墨 능력은 매우 출중하였다. 사

    행도중에 허봉과 같은 대문장가와 시로서 화답하였는데,62) 이 사실은

    홍순언의 시적 재능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특히, 許國은 홍순언의

    翰墨 능력을 높게 평가하였고,63) 三十六峰騎鹿客은 홍순언을 群鷄一鶴

    과 같은 희귀한 인재라고 평가하였다.64) 군계일학으로 평가한데는 그

    럴만한 원인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홍순언은 종계변무에 관한

    呈文의 한어번역에도 참여하였다.65)

    넷째, 홍순언은 조명외교의 전문가로서 明使의 迎接禮儀는 禮官보다

    더욱 분명하게 알고 있고,66) 사행에서 발생한 모든 사건,67) 그리고 遼

    東의 관리들도 잘 알고 있었다. 杨照는 俺答軍과의 전쟁에서 수차례

    전공을 세우고, 요동의 유격장군, 총병관을 지낸 인물이지만,68) 중국에

    서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생몰연대도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홍순언은

    “양조가 1524년에 태어나서 40세에 戰死하였다”고 하고, 양조의 爲人

    과 戰功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설명하였다.69) 이는 사행기록의 사료적

    60) 허봉, 조천기(상), 갑술년 6월 7일조.61) 허봉, 조천기(중), 갑술년 8월 18일조.62) 허봉, 조천기(중), 갑술년 8월 10일조.63) 許國, 許文穆公集 卷6, p.517.64) 贈別洪生純彥: 念爾相從一月餘, 數千里外逐軺車; 朱頻綠髮秋霜入, 仍得緇塵染

    素裾; 久知此地富瑰奇, 文雅如生亦所稀; 鷄群獨鶴看標格, 好向煙霄奮翮飛; 別情

    無限對江流, 潮落潮生海國秋; 海潮朝去暮還至, 此地予安得再遊; 予歸知是再遊難,

    爾別何時更晤歡; 聞道漢城頻遣使, 應隨重譯到長安(皇華集, p.773).65) 선조실록 권6, 5년 9월 갑오①.66) 尹斗壽, 梧陰遺稿 권3, 雜說.67) 遼東의 掌印都司 陳言은 지난번 謝恩使 행차의 역관일로 송대춘을 크게 야단

    쳤다. 허봉이 이 일을 물으니, 洪純彥은 당시의 상황을 매우 분명하게 설명하

    였다(허봉, 조천기(상), 갑술년 6월 23일조). 이 사행은 허봉일행의 직전에사행한 사절인데, 宗系惡名 奏請使(李陽元)였다(선조실록 권6, 5년 12월무인②; 선조실록권7, 6년 10월 갑자①).

    68) 張㧑之·沈起煒·劉德重 主編, 中國歷代人物大辭典 (上海古籍出版社, 1999),p.855.

  • 譯官 洪純彥과 朝明外交 (金英淑) 207가치를 설명하는 좋은 단서이다.

    다섯째, 홍순언은 매우 노련하여 중국인들의 농간에 잘 넘어가지 않

    았다. 이번 사행에 역관들은 遼東 하급관리들의 청탁으로 인삼 40근을

    조달해야 하였다. 중국인들은 이러한 횡포는 종래에 없었고, 조선에만

    피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도 감당할 수 없다고 하면서, 예부

    에 가서 고소하라고 선동하였다. 홍순언은 외국인이라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오히려 당신들이 巡按衙門에 고소하라고 하였다. 그러

    자 중국인들은 御使도 돈을 좋아하고 이들은 서로 아는 사이기에 소용

    없다고 하였다. 이에 홍순언은, “1555년의 순안어사 陳瓚은 몸가짐이

    청고하여 아침저녁의 음식재료도 자기 집에서 가져왔으며 稅課司에서

    관례대로 供物을 지급하였으나 한 가지도 받지 않았다”고 하였다.70)

    이렇게 홍순언은 중국의 예로서 중국인들의 선동에 응하고 있다. 당시

    역관들은 명 관리들의 경제적인 횡포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조선 사신

    들은 이들의 고충을 크게 헤아리지 않았다.71) 그렇지만 역관들은 사행

    길에서 봉착하게 되는 모든 어려움을 해결함으로써 사행의 정상적인

    운영을 보장해야 하였다.72)

    여섯째, 홍순언은 정직하고, 의리가 있었으며,73) 뇌물을 사용하여 외

    교사안을 해결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서반 高雲程은 조선사신이 예부

    에 정문을 올리는 것을 뇌물을 요구하는 기회로 간주하고 여러 가지로

    공갈 협박하였다. 그는 이 일은 나의 말 한 마디에 달렸으니, 은자 30

    냥을 주어야 한다고 하고, 또 勅書를 받은 與否를 묻자, 內閣에 들어가

    려면 문지기에게 뇌물을 주어야 하니 銀 5냥을 주면 알아보겠다고 하

    69) 허봉, 조천기(상), 갑술년 9월 29일조.70) 허봉, 조천기(상), 갑술년 6월 24일조.71) 요동성의 鎭撫 등이 역관에게 二大人과 三大人에게도 人情物件을 바쳐야 한

    다고 하여 송대춘은 單子를 상사에게 전하였다. 그러자 상사는 ‘송대춘이 진무

    와 결탁하여 농간한 것’으로 간주하여 문책하려고 하였다. 역관들은 하는 수

    없이 물건을 모아 이에 응하였다(허봉, 조천기(상), 갑술년 6월 25일조).72) 허봉, 조천기(중), 갑술년 7월 15일조.73) 조헌,『조천일기, 갑술년 9월 4일조.

  • 中國史硏究 第70輯 (2011. 2)208였으나 홍순언은 모두 거절 하였다.74)

    宗系辨誣의 조속한 해결을 위하여 재물을 사용하려고 할 때, 홍순언

    이 뇌물의 濫用이 국가적인 폐단으로 될 것이라고 주장하여 조정에서

    뇌물을 쓰지 않았다.75)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奏請使를 보낼 때에는

    홍순언의 강경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銀貨로써 예를 행하였

    는데, 과연 홍순언의 말과 같이 되었다.76) 이후 은화로 예를 행하는 것

    을 반대할 때 늘 홍순언의 말을 인용하였다.77)

    일곱째, 홍순언은 조명외교에 참여하면서 양국의 문인들과 친분을

    맺었으며 이들의 교량역할을 하였다. 1567년에 사신으로 조선에 온 허

    국과 그의 舍人 유심을 알게 된 이후, 줄곧 이들과 조선 문인의 교량

    역할을 하고,78) 1572년에 사신으로 조선에 온 한세능과 그의 舍人 滕

    季達을 알게 된 이후 줄곧 이들과 조선 문인의 매개역할을 하였다.79)

    이상과 같이 홍순언은 학식이 있고, 화술이 출중하며 중국어의 구사

    력과 이해력은 중국인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게다가 풍채가 출중하고

    정직하였다. 이렇게 훌륭한 조건을 구비하였기에 조명양국을 오가면서

    늘 양국 문인들의 매개역할을 하였으며, 조명외교의 추진에서도 중요

    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74) 허봉, 조천기(중), 갑술년 8월 18일조와 8월 30일조.75) 李肯翊, 燃藜室記述 권17, 宣朝朝故事本末 .76) 林下筆記 권23, 文獻指掌編 .77) 영조실록 권9, 2년 1월 경술①.78) 許國은 귀국 후, 洪純彦을 통해 牧隱集 여러 질을 청하였다(李德泂, 竹窓閑話). 1573년에 홍순언이 奏請使(이후백)를 수행하여 북경에 출사했을 때, 허국은 朴忠元과 李汝受에게 七言律 3편을 전하였다(허봉, 조천기(상), 갑술년6월 7일조).

    79) 등계달은 조선문인과 친분을 맺었다. 정유일, 文峯先生文集 卷2, 詩에 送別滕季達 3수와 酬滕季達 3수가 있고, 玉峯集에는 白光勳의 贈北海處士滕季達이라는 詩가 있다. 1574년에 홍순언이 북경에 갔을 때, 한세능은 홍순언에게

    편지를 보내고, 등계달은 홍순언과 여러 차례 만났으며, 사신과도 만나려고 하

    였으나 廠衛의 감시로 시와 선물만 전했다(허봉, 조천기(중), 갑술년 8월 9일조, 8월 14일조, 8월 25일조). 그리고 1582년에는 黃洪憲편에 편지를 보냈다(허

    균, 惺所覆瓿槁 권26, 부록1, 鶴山樵談 ).

  • 譯官 洪純彥과 朝明外交 (金英淑) 209

    Ⅲ. 조명외교에서 홍순언의 역할

    1. 宗系辨誣

    종계변무는 大明會典 및 청대에 출간된 官撰書와 私撰書에 잘못기록된 태조 李成桂의 世系와 被誣사건의 개정을 奏請했던 사건이

    다.80) 조선은 1394년에 明使 黃永奇의 海嶽山川에 고하는 축문에서 처

    음으로 이 사실을 알고, 사신의 귀국 편에 바로 辨明奏文을 보냈다.81)

    이렇게 종계변무의 서막이 열렸다.

    그런데 1403년에 사신 趙溫은 皇明祖訓에도 동일한 오류가 있음을 보고하였다.82) 태종은 바로 사은사 林彬과 閔無恤을 파견하여 奏請

    함으로써 明의 시정약속을 받았다.83) 그러나 正德4年에 大明會典이중수되었지만, 조선의 종계는 개정되지 않고 그대로 기록되었다. 1518

    년에 주청사 李繼孟으로부터 이 사실을 보고받고,84) 중종은 바로 주청

    사 南袞과 李耔를 파견하여 종계개정과 악명을 변무하여, 예부의 개정

    80) 종계변무 顚末은 增補文獻備考 卷174, 조선과 중국교빙 1; 魚叔權, 稗官雜記(卷1)(大東野乘 卷四); 韓浚謙, 柳川箚記(大東野乘 卷71)에 간결하게 기록되어 있다. 종계변무에 대한 연구로는 末松保和, 麗末鮮初に於ける對

    明關係 제12장 宗系弁誣の發端 (京城帝國大學文學會論纂제10집; 史學論叢2, 1941); 黃元九, 淸代七種書所載 朝鮮記事의 辯正 (東方學志 30, 1982); 李成珪, 明·淸史書의 朝鮮‘曲筆’과 朝鮮의 ‘辨誣’ ((五松李公範敎授停年紀念)東洋史論叢, 知識産業社, 1993); 한명기, 17·8세기 韓中關係와 仁祖反正 -조선후기 ‘仁祖反正 辨誣’문제- (한국사학보 13, 2002); 박성주, 조선전기 朝·明관계에서의 宗系문제 (慶州史學 22, 2003); 권인용, 明中期 조선의 宗系辨誣와對明外交 -권벌의 朝天錄을 중심으로- (명청사연구 24, 2005); 하정식, 태평천국과 조선왕조(지식산업사, 2008), pp.286-311) 등이 있다.

    81) 增補文獻備考 권174, 交聘考 4, 一右.82) 이성규, 위의 논문, p.505.

    83) 태종실록 권6, 3년 11월 기축①; 增補文獻備考 권174, 交聘考 4, 三右.84) 朝鮮國, 即高麗. 其李仁任及子李成桂, 今名旦者, 自洪武六年至洪武二十八年,

    首尾凡弒王氏四王, 姑待之(李東陽等修, (正德四年)大明會典(文淵閣四庫全書電子版) 권96, 禮部55, 朝貢1).

  • 中國史硏究 第70輯 (2011. 2)210

    시간 사절명칭 정사 수행역관 출 처

    1573 奏請使 李後白 홍순언 선조실록권7, 6년 2월 己卯①1573 奏請使 李陽元 선조실록권6, 5年 12月 戊寅②1574 성절사 박희립 홍순언 선조실록권8, 7년 5월 甲申③1574 동지사 安自裕 선조실록권8, 7년 윤12월 乙酉①1575 사은사 洪聖民 선조수정실록권9, 8년 12월 乙丑②1577 사은사 尹斗壽 홍수언 선조수정실록권11, 10년 4월 戊午②1577 주청사 黃琳 선조수정실록권11, 10년 9월 甲寅③1580 성절사 李增 선조수정실록권14,13년 11월 丁卯③1581 奏請使 金繼輝 선조수정실록권15, 14년 5월 癸亥⑦1584 奏請使 黃廷彧 홍순언 선조실록권18, 17년 5월 戊寅①

    허락을 통보받았다.85) 대명회전이 중수되었지만 조선의 종계가 그대로 기록된 사실은 조선을 분개하게 하였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

    된 正德四年本 대명회전중 위의 기사가 수록된 부분이 잘려나간 사실은 이를 충분히 설명해준다.86)

    1537년에 龔用卿이 조선에 출사한 이후, 종계변무의 주청 열의는 매

    우 고앙되었다.87) 그러나 명 관원들은 祖訓이라 고칠 수 없다거나, 혹

    은 고칠 수 있지만 누차 주문을 올려야 될 것이라고 하였다.88) 한세능

    이 조선에 왔을 때, 선조는 宗系辨誣를 위해 奏請使를 파견하려고 한

    다고 하자 한세능은 지금 주청하면 반드시 허락을 받을 수 있을 것이

    라고 하였다.89) 따라서 萬曆年間에 조선은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하여

    주청하였다.

    만력연간 종계변무를 위해 파견한 사신 목록

    85) 增補文獻備考 권174, 交聘考 4, 十一右.86) 이성규, 위의 논문, p.506.

    87) 1538년에 성절사 許寬을 파견하여 공용경을 방문하여 종계개정을 제기(중종실록 권89, 33년 11월 乙未①); 1539년에 주청사 權撥을 파견하여 종계변무를주청(중종실록 권91, 34년 윤7월 임술①); 1539년 윤7월 冬至使 任權에게 종계변무를 주청하게 함(명종실록 권91, 34년 윤7월 己亥①); 1539년에 千秋使尹思翼이 종계변무를 주청(중종실록 권92, 34년 12월 임술①).

    88) 중종실록 권92, 34년 12월 계사①.89) 선조실록 권6, 5년 11월 丙戌①.

  • 譯官 洪純彥과 朝明外交 (金英淑) 2111584년은 종계변무의 소원이 성취된 중요한 해이다. 奏請使 黃廷彧

    은 만력제의 칙서와 개정된 대명회전 朝鮮國條 의 全文(필사본)을가져왔다. 선조는 慕華館에 나가 사신을 마중하고 宗廟에 고하였으며,

    이번 사행에 참여한 사신 黃廷彧과 韓應寅, 그리고 역관 홍순언 등에

    게 상을 내렸다.90) 1588년에 謝恩使 兪泓은 중수된 대명회전 朝鮮國條 1질을 받아오고,91) 1589년에 聖節使 尹根壽은 중수된 大明會典 全帙과 勅書를 받아왔다.92)

    이렇게 근 200년간 지속된 종계변무의 소원이 이룩되자 선조는 1590

    년 8월에 光國功臣의 錄卷을 반사하였다. 광국공신은 宗系辨誣에 공을

    세운 공신으로 모두 19명인데, 사신으로 가서 허락을 받아냈거나 의논

    을 드리고 奏文을 지은 공이 뛰어난 사람들이다.93) 이중 특히 주목되

    는 것은 당연히 홍순언이다. 이후 홍순언은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하여

    羽林衛將까지 승진하였다. 그러나 홍순언을 遞差시키라는 상소가 여러

    번 있었다. 그 원인은 寒微한 서얼출신이기에 금군의 장수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선조는 홍순언은 공신이고, 우림위장은 서얼

    이라도 합당하지 않을 것이 없다고 무마시켰다.94)

    중수된 大明會典에는 종계변무과정을 기록하고, 이성계의 종계를개정하여 기록하였다.95) 이중 “萬曆三年, 使臣復申前請, 詔付史館編輯,

    90) 선조실록 권18, 17년 11월 계유②.91) 선조실록 권21, 20년 10월 을축①; 선조실록 권22, 21년 3월 신해①.92) 선조실록 권23, 22년 11월 병인①.93) 1등 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은 尹根壽(貳相, 海平府院君)·黃廷彧(예조판서,

    長溪府院君)·兪泓(우의정, 杞溪府院君) 등 3인; 2등 輸忠貢誠翼謨光國功臣은 洪

    聖民(이조판서, 益城君)·李後白(이조판서, 延陽君으로 追封)·尹鬥壽(영의정, 海

    原府院君)·韓應寅(좌의정, 淸平府院君)·尹暹(교리, 龍城君 추봉)·尹泂(공조판서,

    茂陵府院君)·洪純彥(唐陵君, 譯官)등 7인; 3등 輸忠貢誠光國功臣은 奇大升(대사

    간, 德原君으로 추봉)·金澍(花山君으로 추봉)·李陽元(우의정, 漢山府院君)·黃琳

    (호조판서, 義城君)·尹卓然(순찰사, 漆溪君)·鄭徹(좌의정, 寅城府院君)·李山海(영

    의정, 鵝城府院君)·柳成龍(영의정, 豊原府院君)·崔滉(貳相, 海城君) 등 9인(선조수정실록 권24, 23년 8월 경오①).

    94) 선조실록 권25, 선조24년 2월 정축①; 동년 4월 정미①; 동년 4월 무신②등을 참조.

  • 中國史硏究 第70輯 (2011. 2)212今錄於後”라는 기록이 주목된다. 만력3년(1575)의 사신은 사은사 홍성

    민을 가리키는데, 明은 이번 사행의 요구를 받아들여 개정한다고 하였

    다. 그런데 조선은 1584년의 주청사(황정욱)행이 종계변무를 성공적으

    로 해결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가 발생한 원인은 무엇일까.

    이는 양국의 입장 차이에서 기인하였을 것으로 본다. 조선은 正德年

    間에 大明會典을 중수할 때의 시행착오로 인해,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주청사 황정욱은 비록 필사본을 가져왔

    지만, 바로 3-4년 뒤에 대명회전의 발간이 현실화되었으므로 이들의공로는 크게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明은 만력4년에 대명회전의 중수를 지시하였기에 바로 전해에 주청한 사은사(홍성민)행을 기록하였을 것이다.

    홍성민의 사행을 기록하고, 史官은 성민이 조정에 돌아와 칙서를 내

    리려 한 일을 말하지 않은 것은 상을 받는 것을 꺼려서라고 하였다.96)

    사실 종계변무를 진행하는 근 200년간, 명에서 허락을 받아온 사신들

    은 적지 않다. 그러나 正德年間의 前車之鑒으로 명회전의 중수가 이루어지기전까지는 그 누구도 낙관할 수 없었다. 또한 明의 허락을 받

    아와 상을 받았었던 사신이 개정된 사실이 확인되지 않아 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97)

    특히, 종계변무가 이룩된 공을 어느 한 차례의 사행으로 돌릴 수 없

    다고 본다. 홍순언은 1574년에 성절사 박희립 일행을 수행하여 북경에

    갔을 때, 종계변무를 위하여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일정한 결실을

    맺었다.98) 그해 12월에 동지사 安自裕는 선래통사를 보내어 宗系改正

    95) 祖訓, 朝鮮國即高麗. 其李仁任及子李成桂, 今名旦者, 自洪武六年, 至洪武二十

    八年, 首尾凡弒王氏四王. 姑待之.〔…〕先是永樂元年, 其國王具奏, 世系不係李仁

    任之後, 以辯明祖訓所載弒逆事, 詔許改正.〔…〕萬曆三年, 使臣復申前請, 詔付史

    館編輯, 今錄於後(申時行等修, (萬曆朝重修本)大明會典卷105, 禮部63, 朝貢1,東南夷(上), 朝鮮國條, 중화서국, 1989, pp.571-572) (밑줄 필자).

    96) 선조수정실록 권9, 8년 12월 을축②.97) 중종실록 권94, 35년 10월 병인①.98) 허봉, 조천기(중), 갑술년 8월 21일조.

  • 譯官 洪純彥과 朝明外交 (金英淑) 213의 일이 해결되었다고 계문하였다.99) 동지사(안자유)는 바로 성절사(박

    희립) 뒤에 사행한 사절이고,100) 동지사 바로 뒤에 사행한 사절이 사은

    사(홍성민)이다. 따라서 홍성민이 종계변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

    다고 하여도, 바로 전에 사행하여 일정한 목적에 도달한 사신들의 공

    로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홍순언은 종계변무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하였던 것일까.

    우선, 홍순언은 와 같이 주청사행만 3차례나 수행하였다. 이중

    1584년의 주청사(황정욱)행과 1589년의 주청사(윤근수)행은 종계변무의

    해결에서 매우 중요한 사행으로 간주되는데, 조선에서 눈으로 직접 소

    원이 성취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사행이다. 그리고 1574년에 비록

    성절사행을 수행하였지만 종계변무의 해결을 위하여 수많은 노력을 기

    울였다.

    다음, 홍순언은 노련한 역관, 종계변무의 전문가로서 종계변무의 전

    과정에 참여하였다. 그는 明에 올릴 宗系辨誣呈文의 한어번역에서 시

    작하여,101) 예부에 종계변무의 呈文을 올리고, 명 관원과 교섭하는 등

    과정에 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현재 이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오직 허봉의 조천기뿐이지만, 이를 통하여 다른 사행에서의 역할도어느 정도 엿볼 수 있을 것으로 思慮된다. 이번 사행은 반년

    (1574.5.11-11.3)이 걸렸는데, 북경에 체류한 시간은 한 달(8.4-9.6)이

    조금 넘는다. 6월 7일에 홍순언이 처음으로 허봉의 조천기에 출현하였고, 중국경내에 진입하여서부터 홍순언에 관한 기록이 점점 많아지

    다가, 옥하관에 도착한 후부터는 홍순언에 관한 기록이 폭증한다. 특

    히, 8월 9일부터 시작하여 귀국길에 올라 통주에 도착한 9월 7일까지

    종계변무를 위하여 분주하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홍순언이 등장하고

    있다.

    셋째, 홍순언은 사신의 지시에 따라 종계변무를 추진하는 것이 아니

    99) 선조실록 권8, 7년 윤12월 을유①.100) 허봉, 조천기(하), 갑술년 10월 9일조.101) 선조실록 권6, 5년 9월 갑오①.

  • 中國史硏究 第70輯 (2011. 2)214라 본인이 알아서 추진하였다.102) 明 관원의 물음에는 홍순언이 주로

    대답하였고,103) 사신의 말을 통역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알아서 대

    답하였으며, 심지어 “국왕께서 감격하실 뜻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

    습니까?”라고 미끼를 던지면서 明 관원을 회유하고 있다.104) 특히 홍

    순언은 대명회전의 重修가 시작되는 시간과 예부의 인사변동을 크게주목하였다.105) 그것은 적기에 適任者에게 정문을 올려야 최적의 효과

    를 발생할 수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특히, 예부상서 萬士和와 右侍

    郞 林士章이 皇命이 있었기에 실록이 완성되면 자연적으로 개정될 것

    이라고 하면서 정문을 올리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때 홍순언은 重修가

    시작되면 일이 많아지고 복잡해지며, 외국사정은 누락될 위험이 있다

    고 주장하여 끝내 정문을 올렸다.106)

    넷째, 홍순언은 明 인사들과의 ‘관계’를 적절하게 이용하여 조명외교

    를 직접 추진하였다. 홍순언은 1567년에 허국 및 舍人 유심과 맺은 친

    분을 이용하여,107) 兪深에게 편지를 보내 종계변무의 전개상황을 물어

    보았다. 그러자 유심은 답서를 보내와 조선의 종계가 개정되지 않은데

    울분을 토로하면서 자신이 힘을 쓰겠다고 하였으며,108) 귀국길에는 통

    주까지 와서 世宗實錄에 기록된, 嘉靖8년과 36년의 宗系事全文을 보여 주고,109) 또 세 가지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였다.110) 유심이 돕겠다

    는 것은 당연히 허국을 움직여서 돕겠다는 뜻으로 이해하야 한다. 사

    실 종계변무의 해결은 許國이 內閣에서 주선한 공이 크다고 한다.111)

    허국의 이력을 살펴보면,

    102) 허봉, 조천기(하), 갑술년 9월 6일조.103) 허봉, 조천기(중), 갑술년 8월 12일조.104) 허봉, 조천기(중), 갑술년 8월 18일조.105) 허봉, 조천기(중), 갑술년 8월 17일조.106) 허봉, 조천기(중), 갑술년 8월 19일조.107) 李德泂, 竹窓閑話; 허봉, 조천기(상), 갑술년 6월 7일조.108) 허봉, 조천기(중), 갑술년 8월 14일조와 8월 18일조.109) 허봉, 조천기(하), 갑술년 9월 6일조.110) 허봉, 조천기(하), 갑술년 9월 7일조.111) 李肯翊, 燃藜室記述 권17, 宣朝朝故事本末 , 宗系辨誣.

  • 譯官 洪純彥과 朝明外交 (金英淑) 215

    시 간 직 책

    1574년전 한림원 편수

    1574년 右春坊 右贊善, 황제의 日講官

    1576년 司經局 洗馬 겸 預修兩朝實錄의 修撰

    1580년 太常寺卿 國子祭酒 敎士務 詹府事 兼 侍讀學士

    1580년가을 協理 詹府事, 會典의 副總裁

    1581년 禮部右侍郞, 左兼官, 直講

    1583년 예부상서 겸 동각대학사

    1584년 雲南의 平夷공로→武英殿 대학사

    1587년 명회전의 總裁

    허국의 이력112)

    당시 종계변

    무에 충분히 도

    움을 줄 수 있

    는 위치에 있었

    음을 확인할 수

    있다. 1584년에

    허국은 조정의

    비준으로 牌樓

    를 건축하였다.

    허국의 패루는 중국에서 유일한 八角패루인데, 아직도 그 모습을 유지

    하고 있다. 종계변무가 해결될 무렵에 허국은 최고의 위치에 올라있었

    다.

    이외 홍순언은 禮部 左侍郎 韓世能과도 줄곧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1574년에 홍순언이 북경에 갔을 때, 한세능은 홍순언에게 문안편지를

    보내왔고,113) 한세능을 수행하여 조선에 출사하였던 등계달은 홍순언

    을 만나 자신은 물론, 한세능도 조선의 종계개정에 도움을 주려고 한

    다고 하였다.114) 한세능은 穆宗實錄과 世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經筵의 日講官으로 활약하고 있었기에115) 종계변무의 해결에 도

    움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하

    였는지 확인할 수 없다.

    그리고 1582년에 홍순언이 영접하였던 明使 황홍헌은 중수대명회전의 副總裁였다. 그의 朝鮮國紀 에도 종계변무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116) 명신종실록,117) 중수대명회전의 내용과 일치하다.

    112) 허봉, 조천기(하), 갑술년 9월 7일조; 許國, 許文穆公集, pp.519-524; 申時行等修, 大明會典, 중화서국, 1989, p.8 등 참조.

    113) 허봉, 조천기(하), 갑술년 9월 3일조.114) 허봉, 조천기(중), 갑술년 8월 25일조.115) 明史, 列傳 卷104, 黃鳳翔傳.

  • 中國史硏究 第70輯 (2011. 2)216황홍헌이 언제 朝鮮國紀 를 작성했는지, 종계변무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1584년에 중수된 대명회전 朝鮮條 부분의 필사본은 이미 완성되었던 것으로 보아, 적어도 황홍헌의

    조선사행으로 조선에서는 正德年間때와 동일한 착오를 범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홍순언은 종계변무의 전 과정에 참여하였는데, 종계변무의

    전문가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明에 출사하여 예부에 정문을

    올리고 명 관원과 교섭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게 되는 변수도 지혜롭게

    해결함으로써 종계변무를 성공적으로 추진하였다.

    2. 임진왜란

    壬辰倭亂은 조명연합군이 7년간 일본군의 침략에 대항한 國際戰爭

    으로서 조선시대의 최대사건이었으며, 조선의 정치·문화·경제, 그리고

    백성들의 생활·언어·풍속 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때 홍순언은 역관의 신분으로 일본이 퍼뜨린 유언비어를 해명하

    는데 공을 세웠다. 일본은 전쟁발발 전에, 조선은 일본의 앞잡이가 되

    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여러 문헌에 기록된 유언비어의 해명에

    관한 내용은 대체적으로 대동소이하다.118) 선조실록에 의하면, 1591년 4월에 玄蘇 등이 재차 조선에 출사하여 ‘假道入明’을 요구하였다.

    조선은 의논 끝에 聖節使 金應南에게 왜적이 중국을 침범하려고 한다

    고 禮部에 移咨하게 하였다. 그런데 왜적은 유구에도 明을 침범하겠다

    는 것과, ‘조선은 이미 굴복하여 3백인이 항복해 왔는데 지금 배를 만

    들어 그들을 앞잡이로 삼을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유구에서

    116) 황홍헌, 碧山學士集, pp.420-430.117) 明實錄朝鮮資料輯錄, p.248.118) 선조실록 권27, 25년 6월 병오⑤; 박동량, 寄齋史草(下), 壬辰日錄 ; 李裕元, 林下筆記 권18, 文獻指掌編 ; 申炅, 再造藩邦志卷一; 柳成龍, 西厓先生文集 권16, 雜著, 雜記 등.

  • 譯官 洪純彥과 朝明外交 (金英淑) 217이를 明에 보고하자 兵部가 遼東都司를 시켜 조선에 咨文을 보내 사실

    여부를 물었다. 조선은 奏請使(韓應寅)를 파견하여 그간의 곡절을 해명

    하게 하였다.119)

    유언비어의 해명은 성절사 김응남 일행이 해결하였다. 이들이 북경

    에 왔을 때 마침 琉球의 陳奏使도 머물고 있어 明은 조선의 咨文과 유

    구의 보고를 보고 왜적의 속임수를 알아챘다. 황제는 칙서를 내려 襃

    獎하고 表裏와 銀兩을 넉넉히 주었다.120) 이 사건으로 김응남과 홍순

    언 등이 모두 상을 받았다.121) 이번 사행에 이문학관으로 동행한 許澂

    은 홍순언의 역할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①중국국경을 넘자 보는 사람마다 손가락질〔…〕景色이 전과 판이하

    였다. 산해관에 도착하니, 사람들은 “조선은 왜놈들과 함께 배반하고 왜

    왔느냐?”고 큰소리로 욕했다. 洪純彥의 노련한 통역으로 사건은 해결되었

    지만, ②사신들은 두려워서 홍순언과 의논하고 비밀리에 유심에게 편지를

    보내 본국의 사정을 각로(허국)에게 전하게 하였다.〔…〕通州에 도착하

    자 유심〔…〕“근래 福建省 등지에서 조선이 왜놈을 유인하여 중국을 침

    범하려고 한다는 보고가 올라와 의논이 자자한데, 각로만이 조선을 비호

    하고 있다. 각로는 ‘조선節使가 오면 반드시 보고할 것이다. 만약 조선에

    서 보고하지 않는다면 과연 의심할 만하다’고 하였다. 과도관이 조선사신

    이 오면 鞠問하라고 요청하려 하자, 각로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면서 사

    신을 국문하는 것은 먼 나라를 회유하는 도리가 아니다’고 하여 논의가

    조금 수그러졌지만, 조선의 변란보고를 기다려서 처리하기로 하였다. 마

    침 편지를 받으니, 각로께서 기뻐하면서 저더러 알리라고 해서 왔다”고

    말을 마치자, 남이 볼까 두려워하면서 말을 달려 가버렸다. ③북경에 도

    착하자 각로는 아국의 사정과 왜노의 반역에 대하여 자세히 물은 후, 조

    정에 알려 사람들의 의심이 차츰 풀렸다.122)

    ①은 중국인들의 오해로 심한 욕설을 듣게 되어 사신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중요한 시각에 홍순언이 자신의 경험과 인맥을 통하여 노

    련하게 사건을 무마하였음을 설명한다. ②는 홍순언이 유심을 통하여

    119) 선조실록 권25, 24년 10월 병진①.120) 선조실록 권25, 24년 10월 병진②.121) 선조실록 권25, 24년 11월 갑자①.122) 柳成龍, 西厓先生文集 권16, 雜著, 雜記. ( )는 필자.

  • 中國史硏究 第70輯 (2011. 2)218예부상서 허국과 연락을 취하고 있음을 설명한다. 특히, 유심은 홍순언

    의 편지를 받고 통주까지 미리 와서 이들을 만나 조선에 대한 명조정

    의 태도를 알려주었다. 여기에서 홍순언과 유심(나아가 허국)과의 관계

    를 엿볼 수 있다. ③은 조선사신이 북경에 도착하자 예부상서 허국은

    바로 이들을 불러 조선의 사정과 일본의 반역에 관하여 묻고 조정에

    알려 유언비어를 해명하였음을 설명한다. 이렇게 홍순언은 유심을 통

    해 허국을 움직여 유언비어를 해명하였다.123) 조선의 패전소식이 전해

    져 조정의논이 흉흉할 때에도 許國만이 조선은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고 한다.124)

    이렇게 유언비어의 해명에서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당연히

    허국이다. 그러나 조선의 입장에서 適期에 유심을 통해 허국과 연락을

    취한 홍순언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조선에 출사

    하였던 明 인사들은 조선에 대하여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고, 조

    선 문사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만약 홍순언이 이렇게

    중요한 교량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물론 누군가가 이러한 역할을 하였

    을 것이다. 그러나 홍순언과 같이 훌륭하게 일을 해결할 수 있었을지

    는 의문이다. 게다가 조선에서 사신을 파견할 때, 明 사정에 밝은 자를

    선발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125) 때문에 홍순언과 같이 유능하고, 중

    국에 인맥이 넓은 역관이 극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홍순언은 明의 지원군의 요청에 참여하고 派兵時日을 조

    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원병의 파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병부상서 석성이다. 1592년 8월에 북경에서 돌아온 謝恩使 申點

    이 국왕에게 명조정의 상황을 고할 때, 처음으로 석성을 언급하였다.

    그는 병부상서 석성이 三使가 아닌 역관 홍순언을 불러 조선에서 원병

    을 요청하라고 하면서, 파병에 힘써 주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고하였

    123) 申炅은 禮部尙書 허국이 유언비어를 해명하여 조선을 보존하게 하였다고 기

    록하였다(申炅, 再造藩邦志 卷一).124) 선조실록 권27, 25년 6월 병오⑤.125) 중종실록 권65, 24년 6월 갑자④.

  • 譯官 洪純彥과 朝明外交 (金英淑) 219다.126) 이후 석성의 적극적인 주장으로 明은 먼저 군사를 파견하여 선

    조를 호위하게 하고 犒軍銀 3만냥을 주었다.127) 여기에서 비록 홍순언

    과 석성의 특별한 인연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홍순언과 석성은 서로

    알고 있는 사이였고, 홍순언이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리고 예부시랑 한세능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선의 원병요청에 정성을

    쏟았다고 한다.128) 한세능과 홍순언은 친분이 있으며, 1591년에 홍순언

    이 성절사 김응남 일행을 수행하여 북경에 갔을 때에도 韓世能과 만났

    으며 도움을 받았다.129) 이렇게 明에 지원군을 요청할 때, 홍순언의 개

    인적인 ‘관계’가 동원되고, 홍순언과 친분이 있는 明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해결한 것은 분명하다.

    특히, 홍순언은 파병시일 조율문제를 성사시켰다. 선조가 대신을 인

    견하고 明軍의 출정상황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한응인은 “홍순언이 오

    늘 돌아올 것인데, 반드시 師期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130)

    한응인은 홍순언이 수행한 성절사(김응남)행 뒤에 파견된 주청사이다.

    나중에 파견된 사신도 이미 귀국하였는데, 홍순언은 아직도 귀국길에

    있었다고 한다. 이는 홍순언이 북경에 남아서 청병의 마무리 작업을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明에서 파병에 동의하였다고

    하여도 파병시일이 언제 될지는 조선 사신들이 또 넘어야 할 큰 산이

    다.

    셋째, 임진왜란 중에 선조는 홍순언에게 많이 의지하였다. 위에서 이

    미 언급하였듯이 1592년 8月에 請兵陳奏使 정곤수는 홍순언을 대동하

    지 못하였다. 그것은 明使가 오게 되었기 때문이며, 의주에 처한 선조

    에게 明에 ‘관계’가 있는 역관은 그 무엇보다 더욱 중요하였기 때문이

    다. 특히, 홍순언이 주본을 가지고 지나가는 중국인을 보고 “명에서 이

    126) 朴東亮, 壬辰日錄 (寄齋史草(下) 卷三), 선조 25년 8월.127) 柳成龍, 西厓先生文集 권16, 雜著, 雜記.128) 선조실록 권28, 25년 7월 신사⑥.129) 柳成龍, 西厓先生文集 권16, 雜著, 雜記.130) 선조실록 권31, 25년 10월 경인③.

  • 中國史硏究 第70輯 (2011. 2)220것을 만나면 반드시 말에서 내린다”고 하자 선조는 바로 말에서 내렸

    다는 일화는 주목할 만하다.131)

    넷째, 임진왜란 중에 홍순언은 어전역관으로서 明나라 지원군과 조

    선군신의 의사를 소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명군이 조선에 도

    착하여 바로 進兵하지 않아, 조정대신들은 제독(李如松)에게 呈文을 올

    려 진병을 재촉하였다. 제독은 예로부터 문신이 강화를 주장하고 무신

    이 싸움을 주장한다고 하면서 홍순언을 불러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게

    하였다. 홍순언은 조선 대변인의 입장에서 조선의 입장을 표명하였

    다.132) 또한 선조가 평양에 행하여 제독을 만나 진병을 재촉할 때에도,

    제독은 홍순언에게 도움을 청하였다.133)

    이렇게 홍순언은 임진왜란전의 유언비어를 해명하는데 공을 세우고,

    청병에 참여하고 파병의 시기를 조율하였으며, 왜란 중에는 어전역관

    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이후 특별히 녹

    훈된 것은 없고 단지 군사를 청할 때에 공이 있는 5명 역관 중의 한

    명으로 기록되었을 뿐이다.134)

    Ⅳ. 맺음말

    홍순언은 역관으로서의 소질과 조건을 완비한 출중한 역관이었다.

    明使의 영접에 7차례나 참여하고, 9차례나 明에 出使하였으며, 25세의

    젊은 나이로 조명외교에 참여한 이래 평생토록 조명외교의 제일선에

    있었다.

    홍순언은 종계변무 呈文의 한어번역에서 시작하여, 명에 출사하여

    呈文을 올리고, 명 관원과 교섭하는 등 전 과정에서 극히 중요한 역할

    131) 선조실록 권34, 26년 1월 갑술⑧.132) 선조실록 권36, 26년 3월 임술②.133) 선조실록 권36, 26년 3월 기묘①.134) 선조실록 권165, 36년 8월 경자④.

  • 譯官 洪純彥과 朝明外交 (金英淑) 221을 하였다. 壬辰倭亂 중에는 일본이 퍼트린 유언비어를 해명하고, 명

    지원병을 이끌어오는 등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는

    과정에 홍순언은 자신의 관계망, 즉 예부상서 허국, 예부시랑 한세능

    등과의 밀접한 ‘관계’를 적절하게 이용하였다.

    조선 전반시기를 놓고 보아도 홍순언과 같이 역관의 신분으로 광국

    공신에 녹훈되고, 당릉군으로 책봉되었으며, 몇 백년간 회자된 일화의

    주인공으로 된 인물은 다시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홍순언과 홍순언의 일화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본고에서는 홍순언의

    외교활동을 밝히는데 만족하고, 홍순언의 일화에 대한 역사학적인 고

    찰은 이후의 연구과제로 남긴다.

  • 中國史硏究 第70輯 (2011. 2)222(中文摘要)

    译官洪純彥和朝明外交

    金 英 淑

    洪纯彦(1530-1598)是朝鲜中期杰出的汉语译官, 其父是朝鲜中期著名的

    汉语译官洪谦, 其弟洪秀彦也是杰出的译官, 洪纯彦三父子为朝鲜中期的朝

    明外交做出了重大贡献. 特别是洪纯彦, 他在宗系辩诬的奏请过程和壬辰倭

    乱的请兵过程中都立下了汗马功劳, 其禄勋为二等光国功臣, 被宣祖册封为

    唐陵君.

    据笔者考察, 洪純彦曾七次迎接来朝明使, 九次陪同使臣出使到明朝;他

    的语言表达能力非常出众, 其汉语表达和理解能力与中国人无异;洪純彦

    文采出众, 被喻为“鷄群一鶴”, 曾得到过明朝礼部尚书许国的高度评价;他

    了解朝明外交上的每一个环节, 他对外交禮儀的了解比禮官还要分明;他

    还参与翻译了宗系辨誣等有关国家大事的呈文. 洪純彦非常正直而且很讲

    义气, 他反对用行贿的方式去解决朝明外交难题, 并能慷慨解囊来帮助遇难

    之人;他的人际交际网非常广, 很多和他共事过的朝鲜文人以及他接待过

    的明使, 甚至于在使行路上结识的明朝人都会和他保持着友好关系, 在维系

    这些关系的过程中, 很自然地起到了朝明文人之间的媒介作用.

    说到洪纯彦就不能不说比他本人更加闻名的洪纯彦的故事, 有关洪纯彦

    的故事的研究就留作下一个研究主题吧.

    주제어: 역관, 조명외교, 종계변무, 임진왜란, 청병

    关键词: 譯官, 朝明外交, 宗系辨誣, 壬辰倭亂, 請兵

    keywords: interpretation officers, diplomacy between Joseon and Ming, asking

    for correction of Zongxi(宗系), Japanese invasions of Korea, asking for

    Chinese troops

    (원고접수: 2011년 1월 3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월 11일, 수정원고 접

    수: 2월 21일, 게재 확정: 2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