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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세기 전반 上海 銀錢業과 銀行 法制-관습법과 국가법의 충돌-

    金 承 郁 (서울市立大)

    Ⅰ. 머리말

    Ⅱ. 청, 남경임시정부, 북경정부의 은

    행 법제

    Ⅲ. 전장 관습법의 법제화: 장정, 업규

    Ⅳ. 남경국민정부의 銀行法

    제정과 은전업의 대응

    Ⅴ. 맺음말

    Ⅰ. 머리말

    더글러스 노스는 제도(institution)란 사회에 적용되는 게임의 법칙

    (the rules of game)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제도는 인간이 고안한

    제약으로 그들 간의 상호작용을 구체화하며, 그에 따라 정치적, 사회

    적, 경제적 그리고 그 밖의 어떤 것이든 인간의 교환에서의 인센티브

    를 구조화한다. 이러한 제도의 변화는 사회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

    화하는 양식을 구체화하기 때문에 역사변화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제도를 이해할 때, 그것은 법규와 같은 공식적 규범

    뿐 아니라 관습이나 행동양식과 같은 비공식적 규범을 폭넓게 포함한

    다.1) 본고에서 논의하는 관습법, 국가법은 모두 이러한 제도의 다른

    형태들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D. C. North, Institutions, Institutional Change and Economic Performance,(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더글러스 C. 노스 적, 이병기 역, 제도․제도변화․경제적 성과, 한국경제연구원, 1996) 참조.

  • 中國史硏究 第68輯 (2010. 10)290오늘날 중국에서는 민법, 상법 등의 국가적 법제 정비와 관련해서

    관습법, 민간법, 종족법 등에 대한 이론적 관심이 늘고 있다.2) 광대한

    지역과 다양한 민족․종족을 국가적 규범체제 안에 통합해야 하는 중

    국 권력으로서는, 각 지역, 민족의 규범체계가 국가법과 충돌하는 것을

    피하고 그들 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요컨대 다원성을 내포한 통합성을 지향해야 하는 중국으로서

    는, 그 법제 건설의 과정에서 법률적 다원주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

    다. 이는 오늘날뿐만 아니라 중국이 근대적 국민국가를 건설해오는 과

    정에서 줄곧 직면해온 과제였다. 이점에서 역대 권력들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대응해왔는지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20세기 전반 상해의 은행업 제도와 관련해서, 지금까지 관습법은 그

    리 주목되지 못했다. 기존 연구에서 은행업 제도는 주로 정치권력과

    근대 은행업의 역할을 중심으로 설명되어왔으며 錢莊과 같은 전통 은

    행업의 관습법은 상대적으로 크게 고려되지 않았다. 이는 은행자본을

    권력에 대해 종속적인 존재로 다루어온 개혁개방 이전의 연구에 대한

    반성적 관점에서, 은행업의 제도 개혁에서의 주체적 역할과 의의를 높

    이 평가하는 관점이 부각되는 경향이 때문이다. 특히 이 지역 은행업

    의 동업조직인 上海銀行公會의 제도 개혁과 관련한 활동들은 관련 연

    구자들에 의해 집중적인 주목을 받아왔다.3) 이 연구들은 대체로 근대

    2) 宋一欣, 我國現代商法實踐中的民間法,習慣法問題 (山東大學學報 2006-2);張明新, 民間法與習慣法: 原理,規範與方法 -全國首屆民間法,習慣法學術硏討會

    綜述 (山東大學學報 2006-1); 張明新, 法治,善治理念法律方法與民間規則-第二屆全國民間法,民族習慣法學術硏討會綜述 (山東大學學報 2007-2).

    3) 吳景平, 從銀行立法看30年代國民政府與滬銀行業關係 (史學月刊 2001-2);鄭成林, 上海銀行公會與銀行法制建設述評(1927-1936) (華中師範大學學報 43-4, 2004.7); 鄭成林, 1927-1936年上海銀行公會與國民政府關係論述 (江蘇社會科學 2005-3); 鄭成林, 上海銀行公會與近代中國幣制改革述評 (史學月刊 2005-2); 鄭成林, 上海銀行公會與近代中國票據市場的發展 (江西社會科學 2005.10); 鄭成林, 從雙向橋梁到多邊網絡 -上海銀行公會與銀行業(1918-1936) (華中師範大學出版社, 2007); 張徐樂, 上海銀行公會結束始末論述 (中國經濟史硏究 2003-3); 張秀莉, 上海銀行公會與1927年的政局 (檔案與史學 2003.1); 張天政, 略論上海銀行公會與20世紀20年代華商銀行業務制度建設

  • 20세기 전반 上海 銀錢業과 銀行 法制 (金承郁) 291은행을 통해 서구로부터 이식된 새로운 제도의 효율성을 강조한 반면

    기존 제도의 효용에 대해서는 그리 깊이 고려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

    다. 다른 한편 근래 은행업 제도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 전장업의 관습

    법을 포함해 보다 폭넓은 범위에서 접근해보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는데,4) 이에 대해 앞으로 보다 주목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다.

    이에 본고에서는 20세기 전반 상해에서 은행업 제도의 형성 과정을

    관습법과 국가법의 상호관계에 초점을 두고 정리해보려고 한다. 이 시

    기 중국의 중앙정부는 청, 남경임시정부, 북경정부, 남경국민정부를 차

    례로 거치며 국가법 차원에서의 법제 건설을 꾸준히 진행해갔다. 이는

    은행 법제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때 국가법이 각지의 관습법

    들을 얼마나 충돌을 피해 포용해냈는가는 그 법제의 완결성과 실효성

    에서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상해의 경우 전장업의 관습법과의

    관계는 매우 중요했다. 이 점에 주목하여, 중앙정부의 국가법과 지역적

    관습법의 상호관계 하에서 상해 지역에서 은행업 제도가 어떻게 변천

    해갔는지 검토해볼 것이다.

    각 장에서 구체적으로 다루려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2장에서는 청,

    남경임시정부, 북경정부의 은행 법제를 차례로 검토해보면서 그 법제

    건설의 방향을 정리할 것이다. 3장에서는 상해 전장업의 “章程”, “業

    規”를 통해 국가법과 별도로 진행되었던 관습법의 법제화에 대해 기술

    할 것이다. 다음 4장에서 남경국민정부의 은행법 제정에 대한 은행

    업과 전장업의 대응에 대한 분석을 통해 당시 은행업 제도의 성격과

    (中國經濟史硏究 2005-2); 拙稿, 上海銀行公會(1918-1927) -근대은행의 동업조직과 지향 (중국사연구 17, 2002.12); 拙稿, 《銀行週報》와 상해금융업의 공론 형성: 1917-1925年 (아시아문화연구 17, 2009.11).

    4) 杜恂誠, 上海金融的制度,功能與變遷(1897-1997) (上海人民出版社, 2002); 杜恂誠, 金融制度變遷史的中外比較 (上海社會科學院出版社, 2004); 杜恂誠, 近代上海錢業習慣法初探 (歷史硏究 2006-1); 朱英, 魏文亨, 行業習慣與國家法令 -以1930年行規討論案爲中心的分析- (歷史硏究 2004-6); 李婧, 民國時期錢業習慣法與國家法的衝突 -以三十年代銀行立法爲視角- (法制與社會發展 2009-1).

  • 中國史硏究 第68輯 (2010. 10)292문제점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한다. 이를 통해 근현대 중국사회가 그

    법제 건설에서 직면했던 과제들에 대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

    게 되기를 기대한다.

    Ⅱ. 淸, 南京臨時政府, 北京政府의 은행 법제

    근대 중국은 국민국가 체제로 이행하면서 국가적 법제의 건설을 진

    행해야 했다. 국가적 법제의 건설은 각 지역 질서들을 통일적으로 포

    섭하는 과정이어야 했다. 금융 면에서 당시 중국은 각기 다른 통화, 금

    융시장, 금융기관들로 구성된 상이한 ‘금융세계’로 각기 분할되어 있었

    다. 비록 각 성마다 관방의 官銀錢號가 설치, 운영되고 있었지만 결코

    통합적인 금융 제도를 형성하지는 못했다.5) 통화, 금융시장이 통일되

    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각 지역에서는 관방의 官銀錢號와 민간의 錢

    莊, 票號, 그리고 외국자본, 중국 자본의 은행들이 ‘무질서’하게 뒤섞인

    가운데, 그 거래 당사자 간에 자율적으로 형성되어온 관습법적 규범들

    에 따라 금융활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국가 법제의 건설에서 이러한

    각 지역의 관습법을 포용하는 것은 중요한 관건이었다.

    실제로 淸 이래 중국의 중앙권력은 국가 법제를 건립하기 위한 사

    전 작업으로 각 지역의 민사, 상사 관행에 대해 광범위한 조사 사업을

    진행했다. 청은 민법, 상법 제정에 앞서 민간의 慣行에 대한 조사가 필

    요하다는 건의에 따라, 光緖33년(1907년)부터 중앙의 修訂法律館과 각

    성의 調査局, 각 부현의 調査法制科 등의 조직을 통해 체계적으로 각

    지역의 민사, 상사 관행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또한 북경정부도

    1918년부터 사법부의 지휘 하에 法律修訂館과 각 성 高等審判廳에 설

    치된 民商事習慣調査會를 통해 조사 사업을 전개했다. 남경국민정부

    역시 1930년 민법 제정 과정에서 관행 조사를 활발히 진행했다.6) 이러

    5) 黃亨俊, 淸代官銀錢號發行史 (臺北: 國立歷史博物館, 2001).

  • 20세기 전반 上海 銀錢業과 銀行 法制 (金承郁) 293한 조사 사업들은 국가 법제의 건설에서 각 지역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권력의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말기로 접어들어 청조는 쇠락해진 군주제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을 시도하면서 이른바 “新政” 과정에서 국가 법제

    를 제정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는 은행 법규도 포함되었다. 우선 光

    緖30년(1904년) 試辦銀行章程 이 공포되고 交通銀行章程 , 大淸銀行

    則例 가 제정되었으며, 이어 광서34년(1908년) 1월 銀行通行則例 ,

    儲蓄銀行則例 , 殖業銀行則例 등 일련의 칙례가 奏准되었다. 또한 같

    은 해 6월 銀行注冊章程 이 제정되었다.7)

    이 가운데 銀行通行則例 (총15조)는 은행업 전반에 대한 규정을 담고 있는 최초의 법규다. 이 법규에서 주목되는 것은, 錢莊, 票號 등과

    같은 전통적 금융기관을 은행의 범주에 포괄하고 그에 대한 관리, 감

    독의 방침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제1조에서는 은행의 범주를 설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업을

    경영하는 경우에는 그 점포가 어떤 점포명, 상호를 사용하는가를 막론

    하고 은행으로 총칭하며 모두 본 칙례를 준수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

    고 하고 그 사업 내용으로 ① 각종 약속어음(期票),환어음(滙票)의 어

    음할인(貼現), ② 단기차관이자(短期拆息), ③ 예금, ④ 대출, ⑤ 금은

    매매, ⑥ 銀錢의 兌換, ⑦ 公司, 銀行, 商家가 발행한 어음의 대리 수

    취, ⑧ 각종 약속어음, 환어음의 발행, ⑨ 금융시장에 통용되는 銀錢票

    의 발행 등을 들고 있다. 이에 따르면 관영, 민영은행, 官銀錢號은 물

    론이고 票號, 銀號, 錢莊 등도 포함한 다양한 유형의 금융기관은 포괄

    6) 胡旭晟, 20世紀前期中國之民商事習慣調査及其意義 (湘潭大學學報(第23卷),1999-2) 참조. 이는 民事習慣調査報告錄의 서장으로 쓰여진 글로 20세기 중국의 관행조사에 대해 개략적으로 잘 정리하고 있다. 前南京國民政府司法行政

    部 編, 民事習慣調査報告錄 (中國政法大學出版社, 1997).7) 淸度支部銀行通行則例 (1908年) (中國第二歷史檔案館, 中國人民銀行江蘇省分

    行, 江蘇省金融志 合編, 中華民國金融法規檔案資料選編(上), 檔案出版社,1989), pp.145-148; 淸度支部儲蓄銀行則例(1908年) , 上同, pp.148-150; 淸度支

    部殖業銀行則例 (1908年), 上同, pp.150-153; 淸度支部銀行注冊章程 (1908年),

    上同, pp.154-156.

  • 中國史硏究 第68輯 (2010. 10)294적으로 ‘은행’으로 규정되어 해당 법의 적용을 받게 되었다.8) 또한 제

    12조에서는 “이전에 각 지역에서 상인들이 설립한 票莊, 은호, 전장 등

    각 항의 사업은 모두 은행의 성격을 가짐으로 마땅히 이 칙례를 준수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칙례에 준해서 등록한 경우에는 탁지

    부가 특별히 보호할 것이며 등록을 하지 않은 자들은 3년 안에는 모두

    등록해야 하며, 만약 기한을 채우고서도 등록을 하지 않으면 모든 관

    방 자금(官款)의 송금, 예금, 대출을 경영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규

    정하여 票莊, 은호, 전장 등 전통적 금융기관들이 모두 이 법규의 대상

    이 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은행통행칙례 는 그 기본 방침을 규정한 간략한 법규로 그 시행법

    은 따로 제정되지 않았다. 또한 청조는 얼마 되지 않아 무너졌기 때문

    에 이를 통한 은행업에 대한 통합적인 관리, 감독은 실제로 이루어졌

    던 것은 아니다. 이 법규가 각 지역의 다양한 금융업 현실을 통괄할

    수 있는 실제적 내용을 갖추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지만 은행통행

    칙례 는 중앙정부 차원에서 신,구 금융기관을 모두 포함하는 은행업

    구조의 정리에 대한 기본 방향을 처음으로 제시했다는 데 큰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신해혁명을 거쳐 청을 무너뜨리고 등장한 남경임시정부는 공화체제

    에 맞춰 법제를 다시 제정했다. 은행 법규들은 度支部 대신 은행 관리,

    감독을 맡게 된 財政部의 주도로 입안되었다. 재정부는 1912년 3월 11

    일 商業銀行暫行則例 를 의정한 데 이어 3월 12일 海外滙業銀行則例

    , 3월 18일 興農銀行則例 , 農業銀行則例 , 殖邊銀行則例 , 3월 20

    일 中華惠工銀行則例 , 儲蓄銀行則例 , 3월 22일 庶民銀行則例 를

    잇따라 제안했다. 또한 實業部는 3월 23일 約束錢莊暫行章程 을 제안

    했다.9) 하지만 이러한 은행 법규들은 4월 5일 남경 참의원이 문을 닫

    8) 부칙에서 은전의 태환만을 하는 은전태환소에 대해서는 은행으로 볼 수 없어

    등록을 면한다고 따로 규정하고 있다. 淸度支部銀行通行則例 (1908年), 上同,

    p.148.

    9) 財政部爲擬訂商業銀行暫行則例請交院議決呈稿 (1912年3月11日), 上同,

  • 20세기 전반 上海 銀錢業과 銀行 法制 (金承郁) 295고, 4월 29일 북경에 참의원이 새로 문을 열었기 때문에 비준 절차를

    거치지 못했다.

    商業銀行暫行則例 (총14조)의 은행 범주에 대한 규정은 기본적으로

    은행통행칙례 와 같다. 제1조에서 “점포를 개설하고 어음할인, 예금,

    대출, 송금 등 사업을 경영하는 것은 그것이 어떠한 명칭을 사용하던

    가를 불문하고 은행으로 총칭한다”고 규정했으며, 제13조에서는 “칙례

    실행이전에 성립된 표장, 은호, 전장 등 모든 은행 성격의 것들은 모두

    이 칙례를 준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칙례를 준수해서 등록하는 경우에

    재정부는 특별히 보호할 것이며, 등록하지 않은 경우는 금년 안에 등

    록을 마쳐야 한다”고 규정했다. 추가된 내용으로 눈에 띄는 것은 제4

    조의 자본 규정으로 “무릇 은행의 자본은 有限組織의 경우 적어도 10

    만 원 이상 無限責任의 경우는 5만 원보다 적을 수 없으며, 은행의 간

    판에 유한, 무한이라는 글자를 내걸어야 한다”고 하면서 그에 대해

    “단 인구의 다과, 상업의 성쇠에 따라 재정부의 비준을 얻어 줄일 수

    있다”는 예외 단서를 달고 있다. 1912년 당시 상해 전장의 평균자본

    규모는 5만원 정도였음으로10) 이는 전장들에게 부담스러운 것이며 반

    발을 야기할 수 있는 민감한 규정이었다. 이에 덧붙여 실업부는 約束

    錢莊暫行章程 을 제정해 전장에 대한 엄격한 통제 방침을 보다 구체적

    으로 표명했다. 장정은 “중국의 은행 제도는 아직 성행하지 못하고 있

    고 성행하는 것은 단지 전장 같은 부류뿐이다. 근래 몇 년 동안 상업

    이 부진하고 공황이 번번히 보이는데 그 원인을 미루어보면 모두 금융

    기관이 민활하지 못한 것 때문이다. 전장에 그 책임이 있다”고 지적하

    pp.11-13; 財政部爲擬訂海外滙業銀行則例請交院議決呈稿 (1912年3月12日), 上

    同, pp.13-17; 陳錦濤爲擬訂興農農業殖邊銀行則例請咨交參議院議決公布呈稿

    (1912年3月18日) , 上同, pp.17-32; 財政部爲擬訂中華惠工銀行則例請咨交院議

    決施行呈稿 (1912年3月20日) , 上同, pp.32-36; 財政部爲擬訂貯蓄銀行則例請察

    核咨交參議院決議施行呈稿 (1912年3月21日) , 上同, pp.36-37; 陳錦濤爲擬訂庶

    民銀行則例請咨交參議院議決施行呈稿 (1912年3月22日) , 上同, pp.38-45; 實業

    部爲送核約束錢莊暫行章程咨 (1912年3月23日), 上同, pp.46-48.

    10) 1912-1926年錢莊資本增長情況表 , 上海錢莊史料, p.191.

  • 中國史硏究 第68輯 (2010. 10)296면서, 전장의 자본, 영업방식, 조직 그리고 감독, 관리 방침 등에 대해

    엄격한 자격, 제한 규정을 제시했다.

    남경임시정부의 은행 법제는 청조의 그것과 기본적으로 맥락을 같

    이 하면서도 전장 등 전통적 금융기관에 대해서 더 엄격한 통제 방침

    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橡皮風潮, 신해혁

    명 등 정권 교체를 전후로 발생했던 전장업의 위기와 그 과정에서 드

    러났던 전장업의 취약성에 대해,11) ‘혁명’을 통해 새로운 정체를 구축

    해갔던 신생 정권으로서의 면모가 더해져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 등장한 북경정부는 성립 초 은행에 대해 추가적인 제정 작업

    에 곧바로 착수하지는 못했다. 북경정부는 1912년 9월 18일 淸 度支部

    가 제정한 銀行通行則例 와 銀行注冊章程 을 은행업 관리의 준거로

    삼을 것이라는 방침을 공포했다.12) 하지만 북경정부에서 은행 법제의

    건설은 완만하기는 해도 꾸준히 진행되었다. 興華滙業銀行則例

    (1912.11.26), 中國銀行則例 (1913.4.9), 各省官銀錢行號監理官章程

    (12.19), 殖邊銀行條例 (1914.3.6), 交通銀行則例 (4.7), 勸業銀行條例

    (4.17), 典當業條例 (1914.6.24), 新華儲蓄銀行儲蓄章程 (11.11), 證券

    交易所法 (12.29) 農工銀行條例 (1915.11.21), 中國銀行章程 (1918.1.

    25), 中國惠工銀行則例 , 新華儲蓄銀行章程 (1919.4.4), 中國實業銀行

    章程 (10.15), 農商銀行章程 (1920.7.2), 交通銀行章程 (1925) 등을 포

    함해 많은 은행 법규가 제정되었다.13) 통화 정리와 관련한 國幣條例

    11) 盛丕華, 上海錢莊亟宜改良圖存私議 (新聞報 1911.9.11-13).12) 財政部關于設立銀行號暫照前淸度支部各種則例及注冊章程辦理的令稿 (1912年

    9月18日), 中華民國金融法規檔案資料選編(上), p.14513) 北洋政府頒布之興華滙業銀行則例 (1912年11月26日), 上同, p.156-159; 參議

    院錄送常會議決之中國銀行則例致大總統咨 (1913年4月9日), 上同, pp.160-163;

    財政部爲報批各省官銀錢號監理官章程致大總統呈稿 (1913年10月22日), 上同,

    pp.164-166; 財政部轉送殖邊銀行條例請批准施行呈及批 (1914年3月6日), 上同,

    pp.170-173; 大總統公布交通銀行則例令 (1914年4月7日), 上同, pp.173-176; 財

    政部農商部會訂之勸業銀行條例 (1914年4月17日), 上同, pp.176-181; 北洋政府

    頒布之新華儲蓄銀行儲蓄章程 (1914年11月11日), 上同, pp.183-188; 農商部呈准

  • 20세기 전반 上海 銀錢業과 銀行 法制 (金承郁) 297(1914.2.7.)의 공포와 동업조직과 관련한 銀行公會章程 (15.8.24)의 공

    포도 은행업과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규정이었다.14)

    하지만 북경정부는 끝내 청의 은행통행칙례 를 대체하는 완정한

    “은행법” 제정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북경정부 재정부 參事室은 1915

    년 4월 6일 泉幣司가 은행통행칙례 를 참조해 개수한 商業銀行條例

    草案 을 비준했지만 공포되지는 못했다.15) 또 1920년에도 修正銀行法

    草案 , 銀行法施行細則草案 등을 작성했다.16) 또한 같은 해 5월 1일

    재정부는 銀行法規修訂會를 조직해 법규 수정 작업을 진행하고 아울러

    銀行法規修訂會簡章 도 공포해 이를 체계적으로 지원했다.17) 그렇지

    만 은행법규수정회가 설립된 뒤에도 그 제정 작업은 그리 진척되지 않

    았다.

    한편 1910년대 중반 이후 민영은행을 중심으로 은행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고 있었고 이러한 은행업의 팽창 상황에 대응해 은행 법규의 제

    정이 절실했다. 따라서 은행업 인사들은 북경정부 하에서 법 제정이

    지체되는 것에 대해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예컨대 상해은행공회의

    徐滄水는 銀行週報를 통해 재정부의 은행칙례 수정 작업이 진척을보이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해 강력히 비판했다.18) 1921년 5월 천진에서

    之證券交易所法 (1914年12月30日), 上同, pp.328-332; 財政部爲錄送有關籌建農

    工銀行原呈曁農工銀行條例致全國農工銀行籌備處函稿 (1915年10月22日), 上同,

    pp.212-219; 中國銀行章程 (1918年1月25日), 上同, pp.238-247; 中國惠工銀行

    則例 (1918年), 上同, pp.234-238; 北洋政府頒之新華儲蓄銀行章程 (1919年4月4

    日), 上同, pp.251-253; 財政部關于修正中國實業銀行章程令 (1919年10月15日),

    上同, pp.253-258; 財政部農商部呈准之農商銀行章程 (1920年7月2日), 上同,

    pp.260-262; 交通銀行章程 (1925年), 上同, pp.290-297.

    14) 大總統公布國幣條例及 國幣條例施行細則令 (1914年2月7日), 上同, pp.74-77;

    財政部總務廳機要科送還銀行公會章程曁取締銀行職員章程付 (1915年8月24日),

    上同, pp.313-315.

    15) 財政部參事實爲送還商業銀行條例草案致泉幣司付 (1915年4月6日), 上同,

    pp.191-194.

    16) 譪廬, 普通銀行法之意義(續) (銀行周報 4-31, 1920.8.24).17) 滄水, 對于銀行法規修訂會先進一言 (銀行周報 4-31, 1920.8.24). 銀行法規修訂會는 財政次長, 幣制局副總裁를 회장으로 하고 회원은 部,局의 위임, 초빙

    으로 구성되었다. 銀行法規修訂會簡章 (銀行周報 4-31, 1920.8.24).

  • 中國史硏究 第68輯 (2010. 10)298개최된 第2屆全國銀行公會聯合會는 北京銀行公會의 제안으로 정부에

    대해 개정 작업을 서둘러 줄 것을 주문하는 건의를 제기했다. 당시 上

    海銀行公會는 각지 은행공회가 법률, 은행 전문가의 자문을 얻어 은행

    법규를 기초하고 그 초안을 종합해 건의안을 만들어 전국은행공회연합

    회의 명의로 정부에 제시할 것을 제안했다. 회의가 종료된 뒤 각지 은

    행공회는 연합해 재정부에 법규 수정 작업의 서둘러 줄 것을 촉구하는

    청원을 발했다.19)

    이러한 요구를 반영해 북경정부는 다시 “은행법” 제정을 위한 작업

    에 착수했으며, 그 결과 1924년 12월에는 銀行通行法草案 (25조), 銀

    行通行法草案施行細則草案 (19조)과 儲蓄銀行法草案 (21조), 儲蓄銀

    行法施行細則草案 (19조)을 마련하고, 그에 대한 심의 작업을 진행했

    다. 그러나 이 작업이 진행되던 중에 북경정부는 붕괴했고 이 초안 역

    시 끝내 공포되지는 못했다.20) 심의 작업은 다음 정권인 남경국민정부

    로 넘겨졌다.

    위와 같이 청의 은행통행칙례 이후 남경임시정부, 북경정부를 거

    치며 은행의 통합적 관리, 감독을 위한 “은행법”을 제정하기 위한 노

    력은 꾸준히 진행되었지만 끝내 공포되지는 못했다. 이는 물론 청, 남

    경임시정부, 북경정부의 중앙정부로서의 권력적 한계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 뒤에 등장한 남경국민정부는 전 정권들보다 분명 중앙

    집권적인 역량을 보다 강하게 발휘했던 정권이었던 것은 분명했다.21)

    그렇지만 중앙정부로서 행정 역량 외에, 당시 “은행법”의 제정이 쉽게

    마무리될 수 없었던 데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해야 한다.

    그것은 국가법 차원의 은행 법제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각

    지역 은행업의 “현실”에 대한 이해와 고려가 우선 필요했다는 것이다.

    18) 滄水, 財政部修正銀行則例之如何 (銀行周報 5-15, 1921.4.26).19) 上海銀行週報社 編纂, 歷屆銀行公會聯合會會議滙記 (上海銀行週報社, 1923),p.32.

    20) 財政部關于厘訂銀行法等草案請査核致法制局函稿 (1928年4月11日), 中華民國金融法規檔案資料選編(上), pp.300-312.

    21) 鄭成林, 前揭書, p.307.

  • 20세기 전반 上海 銀錢業과 銀行 法制 (金承郁) 299예를 들어 북경정부의 銀行通行法草案 은 제2조에서 “무릇 은행의 업

    무를 경영하는 경우 公司든 다른 형태의 조직이든 막론하고 그 자본

    총액이 50만 元에 달해야 한다.”고 하면서 “단 상업이 단순한(“簡單”)

    지역은 지방장관을 통해 재정부의 허락을 받아 그 자본총액을 감할 수

    있다”고 예외 단서를 달고 있다. 50만 원이라는 자본 규정은 남경임시

    정부의 商業銀行暫行則例 에서의 5-10만 원 규정보다 훨씬 강화된

    조건으로 자본 규모가 은행보다 작은 전장으로서는 준수하기 어려운

    것임이 분명했다.22) 또한 상해는 “상업이 단순한 지역”도 아니었음으

    로 전장은 그 예외의 적용대상도 될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재정부 參

    事室은 이 예외 조건이 소도시에서 소자본 금융기관을 설립할 수 있도

    록 하는 좋은 의도에서 마련된 것이기는 해도 사실상 각 통상항구에서

    소규모 전장이 자유롭게 개설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해서 입법 초에는

    “간단”이라는 단어를 빼고 재정부가 각 지방의 경제 상황을 고려해 그

    자본 총액을 줄일 수 있다는 정도로 그 표현을 고치자고 제의했다.23)

    이는 국가법이 지역 현실과 충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각 지역

    의 현실에 대한 지식과 그것을 법규의 내용에 반영하기 위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던 중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청조 이래 폭넓게 진행했던 민사, 상사 관행에 대한 조사 사업은, 각

    지역의 관습법을 국가법 체계에 반영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 그

    법규와 현실을 어떻게 조합할 것인가를 둘러싸고는 고려해야 할 난제

    들이 적지 않았다. 銀行通行則例 에서 신,구 금융업에 대한 법제적 통

    합이라는 기본 방향을 설정하고서 銀行通行法草案 에 이르기까지 은

    행법을 실제로 제정하는 데 시간을 소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렇

    게 국가법과 관습법의 관계를 설정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가 신중히 이

    루어져야 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뒤에 살펴볼 것이지만 남경

    22) 1924년 당시 상해 전장의 평균자본 규모는 20만원에 미치지 못했다.

    1912-1926年錢莊資本增長情況表 , p.191.

    23) 財政部參事室關于審核銀行通行法等各項草案中疑問致財政總長呈 (1924年4月

    18日), 中華民國金融法規檔案資料選編(上), pp.286-287.

  • 中國史硏究 第68輯 (2010. 10)300정부의 은행법 제정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양자의 충돌 양상은 이에

    대한 접근이 그만큼 신중해야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Ⅲ. 錢業 慣習法의 법제화: 章程과 業規

    청 이래 정권들이 은행법의 제정을 추진하면서 전장, 표호 등의 금

    융기관을 그 속에서 포함시켰던 것은, 그 금융기관으로서의 기능이 본

    질적으로 은행의 범주 속에 속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은행 법

    규의 규제력을 통해 구식 ‘은행’들이 신식 은행으로 전화하도록 유도하

    고, 궁극적으로 은행업의 구성을 균질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그 은행 법제 속에서는

    전통적 금융기관이 형성했던 관습법적 규범체계에 대해서 별도의 영역

    이 설정되지는 않았다. 24)

    그렇지만 당시 전통적 금융기관들의 규범체계는 가볍게 취급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상해 지역의 경우 전장업을 중심으로 조

    성된 관습법적 규범체계가 이미 오래 전부터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向來定章”, “歷來循辦”과 같은 표현과 같이 성문화되지 않은 관습법에

    대한 인식이 오래 전부터 있었다.25) 이러한 관습법은 아래 살펴볼 것

    과 같이 業規, 章程 등 성문화된 규칙으로 정리되어, 사회적, 법률적으

    로 실제적인 법제로서 수용되고 있었다.

    상해 전장업은 1900년 기존의 동업 규칙을 재정리해 처음으로 성문

    화된 규칙을 제정했다.26) 重整條規 모두에서 “상해 시장에는 수많은

    24) 전장 등의 전통적 금융기관은 지폐를 남발하고 투기적 경영을 통해 통화, 금

    융시장을 혼란시켜온 ‘무질서’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黃鑒暉, 中國銀行業史 (山西經濟出版社, 1994), pp.96-104.

    25) 1868년 상해 지현 朱鳳娣의 고시, 1893년 상해전업 동사의 상해 지현에의 稟

    文, 1899년 상해 지현 王豫熙의 고시 등에서 성문화되지 않은 전장업 관습법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발견된다고 지적된다. 杜恂誠, 전게논문(2006), p.67.

    26) 申報 1900年 2月 23日.

  • 20세기 전반 上海 銀錢業과 銀行 法制 (金承郁) 301상인들이 모여 있고 은량, 은원의 유통이 많고 빈번하다. 근래 인심이

    예전 같이 않아 종종 市規를 따르지 않아 이를 정돈해 유폐를 막아야

    할 필요가 있어 동업 인사들을 모아 장정을 다시 제정한다”고 그 제정

    의도를 밝히고 있는데, 성문화되어 있지 않았던 기존 "시규“의 규제력

    이 이완되고 있던 상황에서 이를 재확인하는 의미로 성문화된 규칙을

    제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重整條規 는 총 7항목 중 5항목이 장표

    와 관련된 규정으로 당시 시급했던 장표 거래와 관련한 규칙만을 일단

    정리한 것이다. 이후 1906년 25항목으로 추가된 南北市錢業重整條規

    가 다시 제정되었다.27)

    1910년대 중반 전장업 동업조직의 통합은 그 제도 정비에 중요한 계

    기가 되었다. 錢業總公所라는 하나의 중심으로 운용되었던 상해 전장

    업은 19세기 후반부터 南市, 北市로 분리되었다. 남시에는 광서9년

    (1883년) 전업공소가, 북시에는 광서15년(1889년) 전업회관이 건립되어

    각기 따로 전업시장을 운영하는 “南公所北會館”의 분리 구도가 형성되

    었다.28) 남,북시가 분리된 뒤에도 양시는 전업총공소를 상징적인 중심

    으로 유지했지만, 이러한 전업시장의 분리 하에서 그 규범체계가 이완

    되는 것도 불가피했다. 1900년 重整條規 에서 “市規”의 규제력이 이

    완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동업조직의 내부 분열에도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917년 2월 10일 북시 전장들이 대외사

    무를 위해 명목상 존재했던 錢業會商處를 滬北錢業公會로 개조하여 상

    해총상회 내에 부설했는데, 이러한 북시 전장의 움직임에 남시 전장들

    이 호응해오면서 호북전업공회는 2월 23일 上海錢業公會로 이름을 바

    27) 新聞報 1906年 3月 4日.28) 光緖9年 錢業總公所 董事 馮蓮汀 등은 大同門 바깥에 토지를 구입해 전업공

    소를 건립하고 따로 동사를 선출해 의사를 진행했다( 1906年重建滬南錢業公所

    落成記略 , 上海錢莊史料, p.34). 반면 남시에 모이는 것을 불편하게 여긴 북시 전장들은 光緖15년 陳笙郊, 屠雲峰, 王蓂生, 謝倫輝, 羅秉衡, 袁聯淸, 李墨君

    등의 주도로 北閘路에 따로 전업회관을 개설했고, 다시 2년 뒤에는 12만량의

    자금을 모아 唐沽路에 회관을 建成했다고 한다( 秦潤卿談話記錄 (1957年7月),

    上海錢莊史料, p.646).

  • 中國史硏究 第68輯 (2010. 10)302꾸고 남,북 양시를 통합한 동업조직을 출범시켰다.29) 상해전업공회의

    출현으로 남,북시로 분리되었던 전업시장도 다시 통합되었다.

    1917년 2월 상해 전장업은 錢業營業章程 (총 39조)과 同行規則

    (총 21조)을 제정했다.30) 이는 형식적으로 항목 분류 등의 체계 없이

    동업의 기존 ‘市規’들을 명문화하며 나열한 것으로, 이를 통해 동업의

    금융거래에서 기본적인 원칙, 규범들이 제시되었다. 예를 들어 營業章

    程 제34조는 “우리 업계가 발행한 장표 및 客路의 환어음 등은 모두

    滙劃으로, 기한이 되어 장표를 소지하고 현 은량, 은원을 수취하려는

    것은 모두 다음 날 지급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1900년 重整

    條規 에서 “만약 모르는 사람이 장표를 가지고 와서 현 은량, 은원을

    수취하려고 하면 당일 起燈 시에 지급한다”(제4조), 1906년 南北市錢

    業重整條規 에서 “만약 모르는 사람이 장표를 가지고 와서 현 은량,

    은원을 수취하려고 하면 錢市의 通例에 따라 당일 밤12시에 지급한

    다”(제8조)라고 한 규정과 달리 예외 없이 모든 경우에 일괄해서 다음

    날 지급하는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 장표의 운영에 있어서 일률적으로

    “滙劃”을 적용한다고 명시하여 부실장표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서

    이자 수입을 확보하는 전장의 관행을 확인한 것이다. 또한 금융시장의

    거래에서 기준이 되는 銀拆에 대해서, 營業章程 제1조는 동업의 銀

    拆이 1량을 한도로 정해왔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높다고 지적하고 상

    해 남,북시의 은탁의 한도를 7전으로 명확히 규정했다. 이 원칙은 1933

    년 “폐량개원”으로 은탁이 취소될 때까지 기본적인 원칙으로 유지되었

    다.31)

    29) 秦潤卿談話記錄 (1957年7月), 上海錢莊史料, p.646.30) 本會章程,規則及修正報批有關的往來文書(1904-1937) (上海市檔案館, S174-1

    -11); 錢業營業章程 (申報 1917年 3月 13日); 錢業公訂同行規則 (申報 1917年 3月 15日).

    31) 1872-1876년 간 은탁의 최고 시세는 1량5전이었고, 1877-1904년 간은 1량이

    었으며 1906년에는 7전이었다. 은탁 시세가 하락하는 상황에서 상해 전업은

    1906년 重整條規 제2조에서 은탁의 한도를 7전으로 정했다. 이후 1917년,

    1920년, 1923년 수정된 업규에서도 이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 20세기 전반 上海 銀錢業과 銀行 法制 (金承郁) 303아울러 회원 전장의 영업 활동에 대한 관리, 감독의 요구가 제기되

    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금융 안정을 위협하는 전장들의 “非違” 행위

    에 대한 경계가 강하게 표명되고 있다. 예컨대 “연말 결산 때 동업의

    劃頭를 종종 고의로 액수를 채우지 않거나 송금에 늦장을 부리는 경우

    가 있다. 시기가 연말인지라 대조확인할 겨를이 없음으로 그것을 이득

    으로 판단하는 것일텐데, 여기서 하면 저기서 그대로 따라함으로 결국

    임의로 떼어먹거나 元旦이 되어서야 느즈막히 보내는 자로 있으니 실

    로 체계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동업규칙 제12조), “근래 동업 가운데

    寶批를 涂改하여 암암리에 이득을 챙김으로써 公估局의 명예를 방애할

    뿐 아니라 동업의 신용을 상실케 하는 경우가 있다”(동업규칙 제17조)

    는 지적들과 같이 규정 속에 포함시키기에는 지나치게 상세하다고 할

    만큼 동업의 비위를 언급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議規를 어긴 전장

    에 대해 벌금 200량을 규정하는(장정 제4조) 등 처벌 규정도 마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직후 1918년 4월 27일 북경정부 농상부는 工商同業公會規則 과

    그 施行辦法 을 공포했다. 여기서 동업공회는 “동업의 공공 이익을

    지킴으로써 영업상의 폐해를 교정하는 것을 종지로 한다”고 그 비영리

    원칙이 천명되었다.32) 이러한 정부의 규칙 제정은 동업공회에 대한 통

    제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는 전업공회로서는 ‘법정단체’로서

    의 지위와 그 동업규칙의 ‘법제’로서의 위상을 기대하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1920년 6월 상해전업공회는 북경정부의 동업공회 규칙을 반영해, 새

    로운 체제로 수정한 上海錢業營業規則 과 錢業公會章程 을 공포했

    다.33) 이 上海錢業營業規則 은 총 7장, 62조로 구성되었으며, 각 장마

    다 本埠, 外埠, 票類, 防弊, 同業, 停業, 附則 등의 표제를 달아 그 아래

    관련 항목을 체계적으로 배열했다. 또한 錢業公會章程 은 총 6장, 18

    32) 彭澤益 編, 中國工商行會史料集 (下) (中華書局, 1995), pp.985-995.33) 上海錢業營業規則 (銀行週報 4-19, 1920.6.1). pp.50-55; 錢業公會章程

    (銀行週報 4-20, 1920.6.8), pp.41-44.

  • 中國史硏究 第68輯 (2010. 10)304조의 구성으로 각 장은 總綱, 職員, 會議, 會員入會, 經費, 附則 등의

    표제를 달았다. 이렇게 체계적으로 정리된 규칙들은 이것들이 보다 실

    효적으로 운용될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전업공회장정 의 내용을 보면, 상해전업공회는 그 조직, 운영에 있

    어서 전장업의 전통적 면모를 적지 않게 포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

    다. 전업공회는 회원 선거로 선출된 3명의 董事들이 자신들 가운데 회

    장 1인, 부회장 1인을 선출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회장은 회무를

    총람하며 대외적으로 전체를 대표하며 본 공회의 函牘은 모두 회장이

    蓋印, 서명한다”(제2장 제4조)고 규정한 것처럼 元老 중심의 권위적 체

    제의 흔적을 볼 수 있으며, 또한 회원 입회 시의 흑, 백으로 찬성, 반

    대를 표시하는 기명투표 방식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

    다. 그렇지만 이 전업공회장정 의 제정 자체는 전반적으로 전장업의

    동업조직 운용이 보다 공적인 양식으로 개혁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

    여준다.

    상해전업영업규칙 에서는, 우선 전장의 영업범위를 ① 예금 업무,

    ② 신용 및 담보대출, ③ 각종 약속어음의 어음할인, ④ 금은 매매, ⑤

    각 지역 은량, 은원 송금 및 화환어음, ⑥ 기타 전업과 관련된 고유한

    관습적 사업 등으로 명시하고 그 영업, 거래 방식을 구체적으로 규정

    했다. 그 규정들은 장표 신용을 유지하기 위한 장표 관련 규정들이 거

    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었다. 장표의 거래와 결산 방식에 관한 광범위

    한 규정들이 포함되었다. 별도의 “停業” 장을 만들어 정업공회의 주도

    하에 고동의 책임을 완수하도록 관리, 감독하는 규정이 마련되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마지막 부칙에서 “본 규칙에서 미진한 사항은 전업의

    고유한 관습에 따라 처리한다”(제61조)고 한 것처럼, 이것이 전장의 관

    습법을 기반으로 한 규칙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1920년의 장정과 업규에는 회원 전장의 조직과 자본 상황에 대해 공

    개 규정들이 마련되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새로 개설한 전장이 공회

    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개업 1달 전에 자본액, 고동의 성명, 주소, 股份

    및 경리인 및 견의인 등에 관해서 보고하고 회원 투표를 거쳐 가입이

  • 20세기 전반 上海 銀錢業과 銀行 法制 (金承郁) 305결정되었는데 투표 결과 2/3 이상이 출석해서 2/3 이상이 찬성하면 회

    원이 될 수 있었다.(제10조) 또한 전장이 상호를 바꾸는 경우도 신입

    회원을 처리하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처리했고(제11조) 고동, 경리가 바

    뀌는 등 전장 내에 변화가 발생하면 그것을 공회에 보고하도록 했다.

    (제12조) 이러한 전장 정보에 대한 공개는 전장의 신용 유지에 있어서

    중요한 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1922년부터는 전장업은 매년 동업록을

    전업월보를 통해 간행하기로 함으로써 그 동안 대외적으로 공개되지않았던 각 전장의 고동, 경리, 무경리 등의 이름과 자본액수 등의 정보

    가 지면에 공개되었다.34)

    1923년 1월 상해전업공회는 다시 그 “장정”과 “영업규칙”을 수정, 보

    완했다.35) 수정된 전업공회장정 에 따르면 전업공회 조직은 각 전장

    이 파견한 회원대표대회가 15인의 집행위원을 선출하고 집행위원은 다

    시 5인의 상무위원를 선출하며 상무위원은 또 1인의 주석을 선출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또한 그 선거방식도 무기명투표로 바뀌었다. 회장

    이 회무를 독람하던 체제에서 위원들이 공동으로 회무를 처리하는 보

    다 민주적인 형태로 개조되었다. “영업규칙”은 장을 없애고 조 아래

    항목을 두어 각 조별로 더 세밀히 관련 항목들을 분류, 배열했다. 장표

    신용과 관련해서 “신용과 관계가 크니 누구를 막론하고 소지한 장표는

    모두 현금으로 본다”(제13조 乙)는 처음 등장하는 규칙으로 주목되며,

    “무릇 倒欠 行戶로 전장의 자금을 折償한 자는 해당 고동 및 경리의

    성명을 본 공회에 보고해 책자로 만들어 참고하도록 구비하고 월보를

    통해 공포한다. 그 후 다시 영업을 한다면 입회 동업은 모두 그 왕래

    를 거절한다. 단 사후 보상한 경우는 예외로 한다”(제19조)는 “倒欠戶”

    에 대한 제재 규정도 주목된다. 또한 “각종 대출방법”이라는 제목을

    34) 상해전업공회는 1921년 2월 錢業月報를 창간해 은행주보와 매체적 경쟁을 시작했다. 이 점에서 전업월보의 출간은 그 자체로 전장업의 내적 개혁의의지를 반영하는 것이다. 田祈原, 答客問 (錢業月報 1-1, 1921.2.15); 秦潤卿, 本報發刊緣起 (上同).

    35) 1923年錢業公會章程 (趙渭人, 上海之錢莊, 1929), pp.89-94; 上海錢業營業規則 (銀行週報 7-8, 1923.3.6), pp.18-24.

  • 中國史硏究 第68輯 (2010. 10)306달고 그 아래 6개 항목으로 대출방식을 자세히 규정한 규칙(제10조)도

    보완되고 있다.

    1923년 수정된 전업공회장정 과 상해전업영업규칙 에는 관련 행정

    부서와 기관들에 대한 보고 절차를 따로 규정하고 있다. “장정” 제17

    조에는 농상부에의 보고 규정을 담고 있는데, 이는 이 규칙이 농상부

    의 工商同業公會規則 에 따른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또

    한 “영업규칙” 제24조에서는 “본 규칙은 재정부, 농상부, 현지 각 관청,

    租界會審公廨, 총상회에 각기 보고하고 각 신문에 공포한다”고 규정했

    다. 이는 “영업규칙”을 단순한 동업 내부에 국한된 규약이 아니라 사

    회적으로 공인 받으려는 의도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전업공회는 1923년 수정한 영업규칙을 북경, 천진 등 주요

    도시의 54개 총상회, 南京, 蘇州, 鎭江, 丹陽, 武進, 無錫, 寧波, 湖北黃

    石港, 漢口, 杭州, 南昌, 長沙, 沙市, 嘉善, 上饒, 寶應 등 16개 전업공회

    그리고 상해의 公所 등 72개 단체에 보내 참조하도록 했다.36) 상해총

    상회 등 다른 조직들도 이러한 상해 전장업의 규칙들을 존중하며 관련

    된 사안이 있을 때 상해전업공회에 자문을 구해오는 경우가 적지 않았

    다.37) 또한 법원, 법률가 등이 상해전업공회의 영업규칙을 그 소송, 판

    결의 근거로 참조하는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어 1923년 10월 鄭子鈞

    이 회심공해에 장표 지급 중단을 청구한 사건에 대해 회심공해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지만, 상해전업공회는 그 판결이 영업규칙에 저촉한

    다고 판단해 원래 판결을 철회해줄 것을 요청해 취소 판결을 얻어냈

    다.38) 상해전업공회는 1928년 11월 30일 劃條와 支票의 성격을 구별하

    36) 上海錢業公會致本,各埠總商會及錢業公會或公所各團體公啓 (1923年 6月 4日)

    (上海市檔案館 S174-2-11).

    37) 예를 들어 상해총상회 林康侯는 상해은행공회, 상해전업공회에 금융업의 회

    획 관계에 관해 문의하는 공함을 보냈다. 上海總商會林康侯分別致上海銀錢兩

    公會函 (1927.5.14) (上海市檔案館 S174-2-147). 또 상해총상회는 1927년 10월

    14일 상해전업공회 등에 合夥制 無限責任의 한계 문제 등을 자문해 왔다. 上

    海總商會分函上海錢業公會等各業公會 (1927.10.14) (上海市檔案館 S174-2-147).

  • 20세기 전반 上海 銀錢業과 銀行 法制 (金承郁) 307는 문제에 대해 강소상해지방법원에 회답하면서 1923년 수정한 영업규

    칙을 첨부해 보내기도 했다.39) 이러한 사례들은 상해 전장업의 관습법

    이 성문화된 규범으로 정리되고 사회적, 법률적으로 그 규범으로서의

    역할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이렇게 상해 전장업은 장정, 업규의 제정, 수정을 통해 그 관습법적

    규범을 법제화하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그들은 전업의 영업 원칙을 보

    다 명확히 제시하고 그에 따라 내적인 규제를 강화함으로써, 자율적인

    규범체계를 구축해갔다. 또한 그것은 사회적, 법률적으로 유효한 규범

    원리로 수용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 볼 때

    상해 전장업의 관습법이 국가 법제의 건설과의 합류해야 할 하나의 흐

    름으로써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후술하

    는 바와 같이 남경국민정부의 은행법은 이를 충분히 포용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종속시키는 방향으로 마무리되었고, 이는 당연히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남경국민정부 하에서 1933년 전장업의 장정과 업규는 다시 한 차례

    개정되었다. 총 7장 38조의 上海市錢業同業公會章程 과 총 13장 57조

    로 구성된 上海市錢業業規 가 제정되었다. 이 개정에서 가장 두드러

    진 변화는 국민정부와 국민당의 동업공회에 대한 통제가 보다 직접적

    으로 그 법규에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장정에는 “본 공회는 상해특별

    시당부의 지도와 시사회국의 감독을 받는다”(제16조)고 명확히 규정하

    고, “반혁명 행위로 법원의 판결을 받은자”는 회원대표를 맡을 수 없

    다(제13조 2항)는 등의 규정이 포함되었다. 장정은 상해시사회국을 통

    해 실업부의 비준을 받아 시행되었고(제38조), 업규는 상해시사회국의

    비준을 받아 시행되고 아울러 실업, 재정부에 보고되었다.(제57조)

    국민정부의 “廢兩改元” 실시에 따라, 업규는 “本位幣” 장을 별도로

    두어 “모든 자금의 收解는 (민국)22년 4월 6일 재정부 부령을 따라 國

    38) “本公會請求撤消廨諭止付莊票案” ( 上海錢業公會第15期常會議案錄 , 1923.10.

    11, 上海市檔案館 S174-1-1).

    39) 上海錢業公會復江蘇上海地方法院函 (1928.1.30) (上海市檔案館 S174-2-147).

  • 中國史硏究 第68輯 (2010. 10)308幣를 通行한다”(제5조)고 명시하고 기존 업규에 포함되어 있던 은량

    관련 항목에 대해 수정을 가했다. 洋釐는 사라졌으며 拆息도 은량 단

    위에서 은원 단위로 바뀌었다. 또한 “票據法” 실시를 반영해 “票據” 부

    분의 처리 수속과 용어가 수정, 보충되었다. 이 업규에서 특히 주목되

    는 것은 그 동안 포함되었던 “본 규칙에서 미진한 사항은 전업의 고유

    한 관습에 따라 처리한다”는 규정이 사라진 것이다. 이는 전장업의 관

    습법 영역이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국가법에 대한 종속성이 강화되었다

    는 것을 보여준다.

    Ⅳ. 남경국민정부의 銀行法 제정과

    은전업의 대응

    1930년 여름 국민정부 입법원 상법위원회는 경제학자 馬寅初의 주

    재 아래 銀行法 의 제정에 착수했다. 이후 1931년 2월 28일 입법원

    제133차회의는 은행법 (총 51조)을 의결, 수정 통과시켰으며, 3월 28

    일 국민정부는 이를 정식 공포했다. 이는 은행통행칙례 , 은행통행법

    에 비해 조직, 영업범위, 자본액 등과 은행에 대한 관리, 감독의 내용

    과 방법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규정들을 포함한 법규였다.40)

    국민정부의 “은행법” 제정에 은행들은 일단 원칙적인 환영을 표시했

    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는 신중히 검토할 것을 주장했다. 은행법 은

    입법원을 통과한 뒤 그 전문이 신문에 공개되었는데, 戴靄慮는 은행주보에 발표한 글에서 “우리나라는 종래 법률관념이 매우 유치하여민국 이래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각종 법률을 차례로 공포하고 있다.

    은행법은 비록 중요한 법률은 아니지만 기왕 이 업계가 희망하는 것인

    40) 단 그 부가1조에서 “본법의 시행일은 명령으로 정한다”고 되어 있어, 이 법

    의 공포가 곧 전국적 시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그 시행 시기가 아직 구체

    적으로 정해지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財政部關于轉發銀行法令 (1931年4月24

    日 , 中華民國金融法規檔案資料選編(上), pp.572-580.

  • 20세기 전반 上海 銀錢業과 銀行 法制 (金承郁) 309이상 그 정립을 조금도 늦출 수 없다. 법이 있는 것은 법이 없는 것보

    다 낫다”고 미온적인 환영을 표명하고 있다.41) 상해은행공회는 1931년

    3월 19일 각 은행에 공함을 보내 은행법 에 대한 보충, 수정 의견을

    구하면서, “실시되고서 모순적 폐해를 면할 수 있도록 이 법이 실시시

    기를 규정하기 전에 우리 업계의 현실에서 실현되기 어려운 점이 있는

    지 세밀히 살펴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42) 상해은행공회는 아울러 재

    정부에 은행법 이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점이 있는지 검토하기 위해

    시행일시를 잠시 늦춰달라고 청원했다.43) 하지만 국민정부는 3월 28일

    일정대로 은행법 을 정식 공포했다.

    은행들의 연기 청원에도 불구하고 은행법 은 일정대로 정식 공포

    되었지만, 상해은행공회는 그 수정을 위한 청원 활동을 지속했다. 상해

    은행공회는 4월 18일 북평, 한구 두 은행공회와 연합해 재정부에 은

    행법 의 수정을 청원하면서 세 은행공회의 수정 의견서를 전달했다.44)

    또한 은행들의 수정 의견을 모아 上海, 漢口, 北平銀行公會聯合意見書

    로 묶어 이를 각 은행에 발송해 의견을 구하고45) 아울러 은행주보에도 이를 실어 공개했다.46) 이때 은행법 에 대한 은행들의 의견은

    주로 그 관리, 감독이 지나치게 엄격해 은행들의 영업을 위축케 한다

    는 데 있었다. 예를 들어 은행 자본과 관련해서 “은행의 未收 자본은

    영업 개시일 이래 3년 내에 모두 다 거둔다”는 규정(제7조)에 대해 그

    것이 자본출자자로 하여금 서둘러 권리를 이양하게 하여 증권 시세가

    급락하면 은행은 자본이 줄어들고 대외신용을 손실케 할 것이라는 우

    려를 표명했다. 또한 영업범위 규정과 관련해서 “은행은 상점 혹은 다

    른 은행, 다른 公司의 股東이 될 수 없다”는 규정(제10조)에 대해서 은

    행이 해당 상점, 은행, 공사의 주식을 담보로 접수하기만 해도 이 규정

    41) 靄慮, 銀行法之訂定 (銀行週報 15-8, 1931.3.10).42) 致各會員和非會員銀行 (1931.3.19) (上海市檔案館, S173-1-79).

    43) 呈財政部 (1931.3.19) (上海市檔案館 S173-1-79).

    44) 呈財政部 (1931.4.18) (上海市檔案館 S173-1-79).

    45) 致各會員和非會員銀行 (1931.4.30) (上海市檔案館, S173-1-79).

    46) 上海,漢口,北平銀行公會聯合意見書 (銀行週報 15-16, 1931.5.5).

  • 中國史硏究 第68輯 (2010. 10)310을 위배하게 된다고 하며 타당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또한 “은행은 재

    정부의 비준을 얻지 않고 신탁 업무를 경영할 수 없다”는 규정(제29

    조)에 대해서 그것이 은행이 대출시 담보로 받은 부동산의 세를 이자

    로 할 경우 저촉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조항을 명확히 보완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은행업의 입장은 은행법 의 제정 자체를 원칙적으로 부정하는 것

    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은행법 을 통해 강화된 정치권력의 통제가

    은행의 영업을 위축시킬 것을 우려하면서, 그러한 우려를 갖게 하는

    몇몇 조항들을 “수정, 보완”할 것을 주장했을 뿐이었다. 이 점에서 은

    행업의 입장은 전장업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에 서 있었다.

    상해전업공회의 진윤경은 공포 전 時事新報에 실린 은행법 전문을 본 뒤 3월 1일 내원의 연례회의에서 이를 보고했다. 여기서 그는

    그 내용이 전장업에 불리하다고 하면서 그에 대해 검토해줄 것을 요청

    했다.47) 3월 7일 謝弢甫가 주재한 先董祠會員會議에서, 진윤경은 은행

    법 이 전장업 상황에 맞지 않아 지키기 어려우니 전업공회가 입법원에

    따로 전장법 을 제정해줄 것을 청원하자고 주장했고 전체 거수로 이

    를 채택했다. 李壽山는 이 일을 전담할 인원을 구성할 것을 건의했는

    데, 이에 따라 3월 11일 집행위원회는 진윤경, 사도보, 胡熙生, 裴雲卿

    과 전업공회 법률고문 馮炳南으로 인원을 구성했다.48)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1931년 3월 16일 상해전업공회는 중국국민당중앙정치회의, 국

    민정부 주석, 입법원, 행정원, 재정부, 실업부에 은행법 과 별도의 전

    장법 을 제정해줄 것을 청원했다.

    또한 전업공회는 국내 각지 전업에 대한 “通告”를 발해49) 은행법

    에 대한 반대 여론을 조직하려고 했다. 이에 각지 전업공회들이 호응

    47) 內園年會 (1931년 3월 1일) (上海市檔案館 S174-1-4).

    48) 執行委員會議 (1931년 3월 11일) (上海市檔案館 S174-1-4). 상해전업공회는

    3월 16일 呈文에 4인으로 하는 것이 법률적 요구에 부합하지 않을 것을 우려

    해 王伯塤을 추가했다.

    49) 上海錢業公會通告國內各埠同業 (銀行週報 15-10, 1931.3.24).

  • 20세기 전반 上海 銀錢業과 銀行 法制 (金承郁) 311해왔다. 50) 4월 하순 상해전업공회는 각지 전업공회의 의견을 종합해,

    이를 상해 공상계에서 국민회의에 출석하는 상해시상회 대표 王延松에

    전달해 이를 가지고 회의에 참석 정부에 전장업의 실상을 살필 것을

    촉구하도록 했다.51) 전업공회뿐만 아니라 여타 업종 동업공회들의 호

    응도 이어졌다. 上海糖業同業公會, 紗業同業公會 등을 위시해 上海國藥

    業, 打鐵業, 水果地貨行業, 木器業, 華商雜糧油餠業, 米號業, 廣告業, 餠

    干糖果罐頭業, 海味雜貨業, 南貨業, 油漆業, 潮糖雜貨業, 紙業, 彩印業,

    營造廠業, 國貨顔料業, 榨油廠業, 百貨商店業, 針織業, 轉運報關業, 火油

    業, 線光棉織業 등 50여 동업공회가 연명으로 중앙당부와 국민정부에

    입법부에 칙령을 내려 조속히 전장법 을 따로 제정할 것을 청원했다.

    綢緞業同業公會는 입법원에 직접 청원했다.52)

    新聲社 기자는 전업공회가 전장법 별도 제정을 청원한 일에 대해

    전업공회 상무위원이던 진윤경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는 전업공회의

    전장법 제정 주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반영한 것이었다.53) 은행공

    회 상임위원인 林康侯도 전장업에 은행법 을 적용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에 동조하기도 했다.54)

    50) 錢業要求另訂錢莊法 (銀行週報 15-13, 1931.4.14); 各埠錢業公會請另訂錢莊法案復函 (상해당안관 S174-1-28); 各埠錢業紛紛聲援 (銀行週報 15-13,1931.4.14). 常熟銀錢業同業公會, 平湖錢業公會, 南通錢業公會, 杭州錢業同業公

    會, 南京錢業公會, 開封錢業公會, 無錫錢業公會, 烟臺金銀錢業公會, 吳縣錢業同

    業公會, 天津錢商業同業公會, 安慶錢業公會, 宜昌商會錢業公會, 北平錢業同業公

    會, 江西景德鎭錢業公會, 厦門錢莊同業公會, 湖南長沙錢業同業公會 등.

    51) 民國二十年第九期常會議事錄 (1931.5.2., 上海市檔案館).

    52) 당시 동업공회들은 국민정부의 동업업규에 대한 변혁 요구에 대한 압박을 전

    반적으로 받고 있었다. 관습법과 국가법의 전반적인 대립 상황이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樊衛國, 略論近代上海同業業規之變革 (史林 2009-4).53) 秦潤卿談錢莊法之需要 (銀行週報 15-11, 1931.3.31), p.3.54) 그는 “입법원의 의견은 전장의 성격과 영업형태가 대체로 은행과 같음으로

    전장을 은행법 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조는 세계 입장에서

    말하자면 분명 옳다. 세계 각국의 전장 성격은 은행과 같기 때문이다. 유독 중

    국은 그렇지 않은데 향촌 간에 은행은 매우 적어 모든 은전 왕래가 전장을 통

    해 이루어진다. 젊은 사람들의 자본은 매우 미약하다. 1만원이 있는 자도 있고

    2만원이 있는 자도 있다. 만약 은행법 으로 규정하면 그것을 넘을 수 없어 자

  • 中國史硏究 第68輯 (2010. 10)312당시 전업공회가 은행법 이 전장업의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첫째 은행법 는 은행이 신

    탁 업무, 신용대출을 경영하는 것을 엄격히 제한하고 그 업무를 모두

    재정부 비준을 받도록 규정했는데(제29조), 전장업은 이것이 현실에 부

    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전장의 대출은 신용을 위주로 한

    다.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상업은 통도대읍에서 향진벽처에 이르기까

    지 모두 신용대출을 빌려 영업자금을 보조하고 있는데, 지금 은행법

    이 규정한 바대로 제한을 가한다면 일반 자금이 정체될 우려가 있고

    百業이 자금회전이 원활치 못해 工商이 침체될 것이 눈에 보듯 분명하

    다”고 지적했다.

    둘째 은행법 이 은행을 公司 조직으로 할 것을 규정한 데 대해 전

    장업은 이것이 전통적인 合夥 조직의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

    했다. 은행법 은 은행 조직을 반드시 공사로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그 구체 형식을 股份有限公司, 兩合公司, 股份兩合公司, 無限公司 4종

    으로 나누었다. 전장의 기존 합과제 조직은 3년 기한 내에 공사제로

    전환을 완성할 것을 명령했다.

    합과제는 股東이 전장 경영의 결과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도록 하는

    전장업의 관습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전장이 도산해 그 채무가

    완전히 청산되지 못할 때 고동은 자신의 자산으로 모두 채무를 청산해

    주는 것은, 전장업의 관행이었다. 이는 금융기관으로서 전장의 신용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아왔던 중요한 근거였다. 따라서 전장업은 합과가

    지역 상황에 따라 발전해온 관습으로 이를 반드시 公司 조직으로 해야

    한다고 제한한다면 수 백년 동안 이어진 선량한 관습을 바꾸기 어렵다

    고 주장했다.

    셋째 은행법 의 은행 최소 자본에 관한 규정이 전장의 자본 규모

    에 비해 지나치게 높다고 주장했다. 은행법 은 고분유한공사, 양합공

    본의 왕래는 필경 위축된다. 대개 전장은 진용을 전제로 하고 무한책임을 진

    다. 은행은 담보를 전제로 하고 유한 성격이 있다. 피차 다르며 그 조례가 통

    용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錢莊法問之談話 (錢業月報 11-7, 1931.7.15).

  • 20세기 전반 上海 銀錢業과 銀行 法制 (金承郁) 313사, 고분양합공사의 경우 자본액은 적어도 50만원에 달해야 하며, 무한

    공사의 경우는 20만원에 달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아울러 고분유한공

    사의 지주와 양합공사, 고분양합공사의 유한책임 지주는 출자 주식액

    의 배를 책임져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는 분명 전장의 자본 규모를 크

    게 상회하는 것이었다. 1930년 전장의 평균자본은 25만원 정도에 불과

    했다.55) 사실 전장 경영은 경리의 능력과 고동의 신용에 의존하고 있

    어 본래 많은 자본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1903년 상해 82개 전장의

    평균자본액은 5만6천원이었는데 평균이윤은 6천원으로 그 평균이윤률

    은 46%에 달했다. 1912년 평균이윤률은 59%이었다. 따라서 전장업은

    은행법 의 자본액 규정에 대해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넷째 영업, 재산 상황에 대한 투명한 공개는 전장업의 상황에 부합

    하지 않았다. 은행법 은 각 은행이 영업연도 종결 후 은행은 영업보

    고서를 재정부에 보고하고 재정부는 필요시 인원을 파견하거나 소재지

    주관 관서에 위탁해 은행의 영업상황 및 재산상황을 검사하도록 규정

    했다. 그렇지만 전장업은 고동의 무한책임과 관련해서 그 재산증명서

    등을 보고할 경우, 출자영업의 길이 줄어들어 결국 자금 부족에 직면

    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같은 전업공회의 청원을 접수한 국민당중앙정치회의는 실업부에

    전장법 기초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실업부는 조직형식, 자본액, 영업

    범위 등 세 측면에서 전장과 은행은 큰 구별이 존재하며 또한 재정부

    는 전장에 대해 영업세를 징수하고 은행은 징수범위에 속하지 않는다

    고 판단하고, 우선 은행법 시행법 안에 “본법의 규정을 전장에 적용

    하지 않는다”는 1조를 첨가한 뒤 다시 전업 습관을 조사하고 전장 법

    규를 제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중앙정치회의에 전달했다. 이에 중앙정

    치회의는 이 실업부의 의견을 입법원에 전달하고, 입법원은 상법위원

    회를 통해 전장법을 기초하도록 결정했다.56)

    55) 1927-1937年錢莊家數資本統計表 , 上海錢莊史料, p.26256) 立法院143次會議 (銀行週報 15-9, 1931.5.26); 上海錢業公會致國民政府及各院之呈文 (1931.3.16) (上海市檔案館, S174-1-4).

  • 中國史硏究 第68輯 (2010. 10)314입법원의 전장법 기초 결정에 대해 상해전업공회는 곧 각 위원을

    소집해 그에 대해 토론을 진행했다. 그 결과 5월 26일 집행위원들은

    전장업의 관습과 특성을 극력 유지, 보호한다는 원칙 하에 다음과 같

    은 12조의 大綱을 의정했다: (1) 獨資, 合資 조직을 유지한다, (2) 신용

    대출을 제한하지 않고 각 전장의 실력을 고려한다. (3) 직원은 법령을

    위반하거나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는 행위를 하면 안된다. (4) 자본액

    은 지역 상황에 맞춘다, (5) 전업의 자본에 따라 분담하는 습관을 유지

    한다. (6) 합자조직의 전장은 감찰 수 명을 추대해야 한다. (7) 고동은

    전재산을 담보하며, 보증금, 보증서를 찬성하지 않는다. (8) 조직의 면

    에서는 간략함을 따른다. (9) 업무는 각종 예금, 신용대출 및 담보대출,

    담보당좌거래, 각종 기표 첩현, 금은 매매, 각지 회태 및 화물 압회, 창

    고업, 자금 대리 수수 등으로 정한다. (10) 영업은 연한을 규정할 수

    없다. (11) 영업년도는 상계 총결산 시기를 기준으로 한다. (12) 고동

    명부를 보고할 때 성명을 바로 사용해야 하며 모기, 모당 등 명칭을

    사용할 수 없다.57) 집행위원회는 이를 통과시키고, 전업월보 주편 朱宇蒼이 대강의 내용을 근거로 전장법 초안을 작성하기로 결정했다.

    그 뒤 주우창은 대강을 근거로 전장법초안 34조를 작성했다. 이는

    5월 30일 임시집행위원회에서 각 조항을 하나하나 심의해 수정 통과시

    켰다. 전업공회는 이를 同仁律師事務所 馮炳南에 보내 법률적 검토를

    요청했으며 그 수정의견서 를 참고해 심의를 거친 뒤 전장법초안

    31조를 마련했다.58) 6월 6일 상해전업공회는 집행위원회를 소집해 이

    를 심의했다.59)

    그러나 전장법 기초를 담당했던 입법원 상법기초위원회는 별도의

    전장업 법규 제정에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5월 28일 마인초 등

    입법원 상법기초위원회의 위원들은 재정부 등 대표를 초청해 이를 심

    57) 臨時執行委員會議記錄 (1931.5.26) (上海市檔案館 S174-1-4).

    58) 臨時執行委員會議記錄 (1931.5.30) (上海市檔案館 S174-1-4); 馮炳南致上海

    錢業公會函並付錢莊法草案修訂意見書 (1931.6.30) (上海市檔案館 S174-1-28).

    59) 全體執行委員會議記錄 (1931.6.6) (上海市檔案館 S174-1-4).

  • 20세기 전반 上海 銀錢業과 銀行 法制 (金承郁) 315사했는데, 여기서 전장의 성격과 영업 상황은 일반 은행과 크게 다르

    지 않으니 마땅히 은행법 의 범위에 귀속되어야 하며 따로 전장업의

    전문 법규를 제정할 필요가 없다고 결정했다.60)

    당시 마인초는 8가지 이유를 들어 전장법 제정에 반대했다. 첫째

    그는 “전장은 신용에 의거하고 은행은 담보에 의거한다”는 전업의 주

    장에 대해서 기실 은행도 신용대출을 하며 전장의 대출도 담보를 요구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고 하물며 은행법은 결코 신용대출을 절대 금지

    하지 않으며 단지 조금 제한할 뿐이라고 했다. 둘째 전장이 “은행법의

    자본 규정은 지나치게 크며” 내지 전장의 자본은 모두 매우 작다는 실

    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자본액에 대한 제한을 적당

    히 줄일 수 있다고 답했다. 셋째 전장이 “독자경영에 준해야 한다”고

    희망한 데 대해, 전장은 다른 업종과 달리 각 방면과 연계되어 있음으

    로 독자경영은 매우 위험해 타당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넷째 은행법

    제9조를 적용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 이는 사실에 부합하지 않으며

    실제로 전장도 금은 및 유가증권을 매매하며 자금 수수를 대리한다고

    지적했다. 다섯째 재산증명서 제출에 반대하면서 “이는 중국에서는 곤

    란하다”는 주장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는 고동은 반드시 재산증명서를

    제출해야 하다고 주장했다. 여섯째 전장이 20%의 보증금을 할 수 있

    다고 여기며, 중앙은행에 예금, 대출에 대해서도 의견이 있으며 이 법

    은 입법위원회를 통해 연구하기로 결정했다. 일곱째 전장은 “재정부의

    검사를 받기 원치 않으며 아울러 자산부채표, 손익계산서 등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이는 이유 없는 주장으로 입법원은

    결코 윤허할 수 없다고 밝혔다. 여덟째 전장은 “영업시간은 제한할

    수 없다” 주장에 대해서는 은행법 에 이미 규정이 있어 영업 시간은

    필요시 연장할 수 있다고 했다. 마인초는 결론적으로 은행, 전장의 영

    60) 상법기초위원들의 교육배경은 馬寅初(콜럼비아대학), 樓桐孫(파리대학), 羅鼎

    (동경제국대학), 史維煥(일본제국대학), 戴修駿, 衛挺生, 黃右昌 등 대부분 서구

    교육을 받은 인사들이었다. 이는 은행법 에 대한 상법기초위원회의 입장이 서

    구적 금융 제도에 편향적인 경향을 갖게 했던 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 中國史硏究 第68輯 (2010. 10)316업은 유사하며 은행법은 전장을 은행의 부속물로 여기지 않으니 단독

    으로 전장법을 기초할 필요가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61)

    이에 대해 상해전업공회 집행위원회는 7월 2일 입법원의 주장이 불

    합리하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전원 찬성으로 전장법 제정을 재차 청

    원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상해시당부, 상해시사회국에 이 청원을 중앙

    정치회의로 올려줄 것을 요청했다. 또한 이들은 이 사안을 장차 시행

    할 上海市營業稅則과 연계하고 있는데, “정부가 전장법을 따로 제정하

    지 않는다면 전장은 이미 은행법에 포함되며 은행은 영업세를 징수하

    지 않으니 전장도 당연히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 세칙은 전장법의 정

    립 여부에 따라 다시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2) 이후 7월 7일 전업

    공회 집행위원회는 계속 정부 관련부문과 교섭을 진행할 것을 결의했

    다.63) 그렇지만 전업공회의 저항 강도는 전반적으로 약화되어갔다.

    상해 은,전업은 은행법 에 대해 반발했지만 그 반발의 입장과 강도

    는 각기 달랐다. 은행업의 경우, 그것은 은행업 활동의 위축을 우려한

    정치권력의 강한 규제에 대한 견제의 성격이 강했다. 그들은 은행업

    제정 원칙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했으며, 그것을 통해 은행업 제도의 통

    합에도 동의했다. 그러나 전장업의 입장은 그 법제 건설의 기본 방향

    에 대해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요컨대 그것은 국가법과 관습법의

    충돌이었다. 전장업은 현실적으로 국가권력에 의해서 종속적 지위로

    점차 밀려가고 있었다고 해도, 관습법은 지역적 차원에서 사회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던 현실적 무게가 있었다. 이는 은행 법제에 있어서

    이를 국가법이 포용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지만 국민정부의 은행 법

    제 속에서 전장업의 관습법은 그 자리를 허용받지 못했다고 할 수 있

    다. 이 점에서 국민정부의 은행 법제는 관습법과 국가법 간의 긴장이

    해결되지 못한 채 잠복시키고 있었으며, 그 만큼 법제의 정합성에서

    61) 馬寅初, 對于錢莊法之意見 -在立法院總理紀念周報告 (銀行週報 15-21,1931.6.9); 立法院不另訂錢莊法 (銀行週報 15-22, 1931.6.16).

    62) 民國二十年第13期常會議事錄 (1931.7.2, 上海市檔案館).

    63) 全體執行委員會議記錄 (1931.7.7, 上海市檔案館).

  • 20세기 전반 上海 銀錢業과 銀行 法制 (金承郁) 317취약한 측면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중국정권이 민법, 상법을

    개수하면서 각지 관습법, 민간법, 종족법 등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이 중국사회의 정합성을 유지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과제라는 점을 보여준다.

    Ⅴ. 맺음말

    근대 중국은 국민국가 체제로 이행하면서, 광대한 지역과 다양한 민

    족, 종족의 규범 체계를 하나의 국가적 법제 속에 담아내야 하는 과제

    에 직면했다. 이때 각 지역의 관습법을 국가법 속에 적절히 녹여내는

    것은 중요한 관건이었다. 이에 본고에서는 관습법과 국가법의 상호관

    계에 초점을 두고 20세기 전반 상해에서의 은행업 제도의 변화 과정을

    정리해보았다.

    청조, 남경임시정부, 북경정부는 그 민법, 상법의 제정을 진행하면서

    각 지역의 민사, 상사 관행에 대해 광범위한 조사 사업을 진행했던 것

    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국가법이 지역 현실을 반영한 위에 건설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그 법제 건설을 추진했다. 그런 가운데 청조

    의 銀行通行則例 (1908년)에서 북경정부의 銀行通行法草案 (1924년)

    에 이르기까지, 역대 정권은 신,구 금융기관을 하나의 법제 하에서 포

    괄적으로 관리, 감독하는 은행법의 제정을 꾸준히 진행했다. 이 은행법

    은 끝내 정식 공포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 과정에서 국가법이 지역

    현실과 충돌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신중한 논의들이 진행되고 있었

    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은행법 제정이 지체되고 있었던 것은,

    단지 그 중앙정부로서의 역량의 한계에 기인한 것만이 아니라, 국가법

    의 건설이라는 과제가 그만큼 해결해야 할 난제들을 많이 내포하고 있

    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청조 이래 중앙권력이 전장, 표호와 같은 전통적 금융기관에 대해

  • 中國史硏究 第68輯 (2010. 10)318별도의 법제를 마련하지 않고 하나의 은행법 내에서 관리, 감독하겠다

    는 방침을 설정하고 있었지만, 당시 전통적 금융기관들이 각 지역에서

    형성하고 있던 규범체제는 가볍게 취급될 수 없는 현실적 무게감이 있

    었다. 상해 전장업의 경우 오래 전부터 성문화되지 않은 관습법의 존

    재가 인식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20세기로 접어들어서는 업규, 장정

    등의 제정을 통해 성문화된 규칙으로 정리되는 등 나름대로 제도적 진

    화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본문에서 살펴보았듯이 전장업은 1900년부

    터 1917년, 1920년, 1923년, 1933년 등 그 업규, 장정을 꾸준히 보완해

    갔다. 특히 이러한 작업은 1910년대 중반 이후 上海錢業公會로 동업조

    직이 통합된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이러한 전장업

    의 관습법은 여타 경제 조직, 사법부 등에서 관련 사안을 처리할 때

    비중 있게 참조되는 등, 사회적, 법률적으로 폭넓게 수용되었다. 이는

    상해 전장업의 관습법이 국가 법제의 건설에 합류해야 할 하나의 흐름

    으로서 계속 진화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남경국민정부의 은행법 은 이러한 관습법을 포용하지 못

    하고 일방적으로 종속시키는 방향으로 마무리됨으로써 銀錢業의 반발

    을 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1년 3월 제정된 銀行法 에 대해, 상

    해 은전업은 그것이 은행업의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

    면서 반발했다. 그 반발의 입장은 은전업이 각기 달랐다. 은행업은 권

    력의 강력한 통제가 금융활동을 위축시킬 것을 우려하는 것으로, 그

    제정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반면 전장업은 은행법 이 전장업

    의 현실과 충돌함으로 전장법 을 별도로 제정해줄 것을 강력히 요구

    했다. 여기서 당시 전장업의 관습법은 국가법과의 적절한 접점을 찾지

    못하고 충돌된 채로 일방적인 종속을 요구받았다는 것을 볼 수 있었

    다. 이러한 문제는 이후 중국의 법제 건설에서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

    제로 남겨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 20세기 전반 上海 銀錢業과 銀行 法制 (金承郁) 319(Abstract)

    The Shanghai Bank Industry in the Early

    20th Century and Bank Legislation: Conflicts

    between Customary law and National

    Legislation

    Kim, Seung Wook

    Modern China in its transition to a people's nation faced the

    challenge of coalescing the different norms followed by members of

    different cultures scattered across different parts of the vast land

    into a national legal system. In that situation, its most obsessive

    issue was how smoothly a wide variety of customary law sources

    working at local level can come to form part of national legislation.

    This paper examined the developments of this issue in reference to

    the regulatory regimes on financial sector activities in Shanghai in

    the early 20th century, focusing on the gaps and conflicts between

    customary law and national legislation.

    주제어: 상해, 금융업, 제도, 법제, 관습법, 국가법

    關鍵詞: 上海, 金融業, 制度, 法制, 習慣法, 國家法

    Keywords: Shanghai, Bank Industry, Institution, Customary law, National

    Legislation

    (원고접수: 2010년 9월 15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10월 6일, 수정원고 접

    수: 10월 20일, 게재 확정: 10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