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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권 제1호(통권 제43호) 217-274, 2013년 4월 │217 의사학 제22권 제1호(통권 제43호) 2013년 4월 Korean J Med Hist 22 ː217-274 Apr. 2013 ⓒ대한의사학회 pISSN 1225-505X, eISSN 2093-5609 인도 안과의학의 동아시아 전래와 용수보살안론(龍樹菩薩眼論)* 김성수**·강성용*** 1. 머리말 2. 인도 안과의학의 동아시아 전래 1) 인도의학과 중국 전래 2) 인도 안과의학의 내용과 전파 3. 용수안론(龍樹眼論)의방유취(醫方類聚)1) 당·송대 안과치료와 용수론(龍樹論)2) 용수안론전승과 의방유취편찬 4. 용수안론의 의학론(醫學論)과 금침술(金針術) 1) 용수안론의 안과의학 2) 내장(內障)과 금침술 5. 맺음말 1. 머리말 육식(六識) 가운데 두 눈이 매우 중요하니, 일월(日月)이라 칭할 수 있으며 한 쌍의 구슬과 같다. 햇빛과 달빛에 의하여 현황(玄黃, 즉 天地)을 분간하고 사기(四氣)를 간직하여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 217 * 본 연구는 2007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 인문학진흥방안 인문한국지원사업비)으로 한 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NRF-2007-361-AL0016).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조교수 주소: 서울시 관악구 관악로1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151-742 전화: 02-880-6121/ 이메일: [email protected] *** 교신저자: 강성용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조교수 주소: 서울시 관악구 관악로1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151-742 전화: 02-880-6015/ 이메일: [email protected] 대한의사학회 The Korean Society for the History of Medicine

인도 안과의학의 동아시아 전래와 용수보살안론(龍樹菩薩眼論)medhist.or.kr/upload/pdf/kjmh-22-1-217.pdf · 2015. 12. 10. · 217 1) * 본 연구는 2007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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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2권 제1호(통권 제43호) 217-274, 2013년 4월 │217

    의사학 제22권 제1호(통권 제43호) 2013년 4월 Korean J Med Hist 22 ː217-274 Apr. 2013ⓒ대한의사학회 pISSN 1225-505X, eISSN 2093-5609

    인도 안과의학의 동아시아 전래와 『용수보살안론(龍樹菩薩眼論)』*

    김성수**·강성용***

    1. 머리말

    2. 인도 안과의학의 동아시아 전래

    1) 인도의학과 중국 전래

    2) 인도 안과의학의 내용과 전파

    3. 『용수안론(龍樹眼論)』과 『의방유취(醫方類聚)』

    1) 당·송대 안과치료와 『용수론(龍樹論)』

    2) 『용수안론』 전승과 『의방유취』 편찬

    4. 『용수안론』의 의학론(醫學論)과 금침술(金針術)

    1) 『용수안론』의 안과의학

    2) 내장(內障)과 금침술

    5. 맺음말

    1. 머리말

    육식(六識) 가운데 두 눈이 매우 중요하니, 일월(日月)이라 칭할

    수 있으며 한 쌍의 구슬과 같다. 햇빛과 달빛에 의하여 현황(玄黃,

    즉 天地)을 분간하고 사기(四氣)를 간직하여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

    217

    1)

    * 본 연구는 2007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 인문학진흥방안 인문한국지원사업비)으로 한

    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NRF-2007-361-AL0016).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조교수

    주소: 서울시 관악구 관악로1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151-742

    전화: 02-880-6121/ 이메일: [email protected]

    *** 교신저자: 강성용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조교수

    주소: 서울시 관악구 관악로1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151-742

    전화: 02-880-6015/ 이메일: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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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IM Seongsu et al. : On Textual and Contextual Position of The Ophthalmological Treatise of Bodhisattva Nāgārjuna (龍樹菩薩眼論)

    │ 醫史學218

    기 때문에 몸을 온전히 하여 이름을 알릴 수 있다. 그러므로 온 몸

    을 법도에 맞게 하는데 있어서 눈보다 더 귀중한 것이 없다. 상사

    (上士)는 이치(理致)에 밝기 때문에 스스로 오장(五臟)을 순조롭게

    하여 정신을 수양한다. 그래서 정신이 안정되면 오장이 고르게 되

    고, 오장이 고르면 눈이 깨끗하고 밝아진다.1)

    중국의 송(宋) 대에 편찬된 『태평성혜방(太平聖惠方)』에서는 눈의 중요성

    을 위와 같이 설명하고 있었다. 인간은 주로 시각을 통해서 자신 바깥의 대상

    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그에 맞도록 처신함으로써 자신의 몸을 온전히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육식(六識, 여섯 가지 인식작용), 즉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

    이라는 불교적인 용어와 아마도 지수화풍(地水火風)을 의미하는 사기를 거론

    하고 있는 점이다. 동시에 정신과 오장의 안정이 눈의 건강과 연결된다는 중

    국 전통의학의 일반론도 말하고 있다.

    『성혜방』 일부에서 보이는 불교적 색채는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와 그 안에

    담겨 있는 인도 전통의 의학론이 결합되어 나타난 현상이었다. 즉 음양오행론

    (陰陽五行論)을 기반으로 인체와 질병을 이해하고 치료하려는 중국의 전통의

    학과 불교를 통해 전해진 인도의 의학이 서로 융합되어 안과학에 대한 이해를

    풍성히 한 것이다. 중국의 전통의학, 나아가 동아시아 전통의학이 내부적 의

    학발전 이외에도 외부에서 전래된 의학지식을 흡수하여 의학이론을 정교하게

    만들고 치료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시도를 꾸준히 진행함으로써 만들어진 결

    과였다. 중국의 전통의학에 미친 영향에도 불구하고 불교의학의 모습이 제대

    로 남아 있는 분야가 거의 없다는 일반적인 상황과 다르게, 안과학분야는 인도

    의학의 모습을 그나마 온전히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아울러 그 수용과정의

    다층성과 함께 사회적으로 미친 영향력이 상당했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1) 『醫方類聚』 卷64, 眼門1, 聖惠方, 「眼論」, “夫六識之中 雙眸爲上所 以稱爲日月 喩若驪珠 託二

    耀而辯玄黃 藏四氣而通瞻視 故得身安名達 規矩全軀 莫不貴乎斯也 上士明哲 自調五藏 而能

    養神 神安則藏和 藏和則眼目淸潔”.

  • 김성수·강성용 : 인도 안과의학의 동아시아 전래와 『용수보살안론(龍樹菩薩眼論)』

    제22권 제1호(통권 제43호) 217-274, 2013년 4월 │219

    즉 인체를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사대론(四大論)과 의학 활동을 한 승의(僧

    醫)들의 역할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중국의 사료에서 언급되고 있지 않은 인

    도 혹은 불교의학의 다양한 측면들 중에서 안과의학만은 차지하고 있는 역사

    적 위치가 남다르다. 이는 불교의 중관(中觀, Madhyamaka)전통을 대표하는

    학자이며 승려로 알려져 있는 용수(龍樹, Nāgārjuna), 그리고 그의 이름을 딴

    『용수보살안론(龍樹菩薩眼論)』(이하 용수안론)의 영향이었다. 후에 집필된

    『안과용목론(眼科龍木論)』에서 제시된 오륜(五輪)과 팔곽설(八廓說)이 중국

    안과의학의 대명사가 됨으로써 『용수안론』의 비중이 축소되기는 하였지만,

    그 안에 실려 있는 내장의 외과적 치료법만큼은 그대로 전승되었다.2) 침을 이

    용한 내장의 치료는 동아시아에 전래되어 오랜 기간 임상에서 이용되었을 뿐

    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19세기 까지 널리 행해진 시술법이었다는 점에서, 『용

    수안론』은 의사학적 측면에서 세계사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3)

    이처럼 인도의 불교의학이 중국에 전래되어 영향을 미쳤음은 상당 부분 알

    려져 있고 또한 그 핵심의 하나로 이글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용수안론』이 있

    2) 본 연구에서 참조한 『용수보살안론』은 『의방유취』 내 인용 자료로, 다음의 판본을 대조하여

    검토하였다. 기타무라 나오히로(喜多村直寬) 覆刊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소장); 東洋醫

    科大學 重刊本(東洋醫科大學, 1965); 釋永信 李良松 主編, 『中國佛敎醫藥全書』 28 (北京:中

    國書名, 2011). 한편 『비전안과용목론(秘傳眼科龍木論)』은 아래의 판본을 검토하였다. 中華

    中醫藥學會 편, 『中醫必讀百部名著-眼科卷』 (北京: 華夏出版社, 2008); 釋永信 李良松 主編, 『

    中國佛敎醫藥全書』 78 (北京:中國書名, 2011). 용수(Nāgārjuna)에 가탁된 수많은 불교 텍스트들이 여러 언어로 전해지는데, 특히 의학텍스트들이 용수의 저작으로 전승되고 전파된 맥

    락에는 불교의 역사와 연관된 종교적이고 사상사적인 이유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

    문에서 다루도록 할 것이다.

    3) 서양에 널리 알려져 있던 (백)내장 시술법인 ‘cataract couching’ 시술법이 어디에서 전해져

    온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다른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다만 인도에서 고대부터 알려져 있던

    유사한 시술법이 인도 고유의 전통이었을 것으로 많은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음을 밝혀 둔

    다. 이러한 의의에도 불구하고 『의방유취』 내에 인용된 『용수안론』에 대한 국내의 본격적인

    연구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지만 안상우의 개략적인 소개와 쑤쉬루따쌍히따의 1권에 대한 연

    구가 있어 참고가 된다. 안상우, 「[고의서산책149] 龍樹菩薩眼論」, 『민족의학신문』, 2003년 4

    월 19일; 徐志泳, 『Suśruta-sa hitā^Sūtrasthāna(수슈르따-상히따^수뜨라스타나)의 編譯을 통한 ‘Āyurveda (아유르베다)’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박사학위논문, 2010; 金基郁·朴炫局·徐志泳, 「‘아유르베다’(Āyurveda)의 醫經에 관한 연구」, 『大韓韓醫學元典學會志』 20-4, 2007. 다만 인도 의학전통 일반이나 해당 원전에 대한 정확한 이해, 인도학 분야 전문가들의

    기존 연구성과를 반영하고 있지 못한 점에서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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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 그 영향력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해가 공존하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부

    분적으로는 『용수안론』의 원본이 전해지지 않고 다만 조선에서 편찬된 『의방

    유취(醫方類聚)』 안에 일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과 함께 의학의 원류에

    대한 자국주의적인 이해 방식에 따라 다양한 혹은 편파적인 해석들도 제기되

    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안과 분야와 관련하여 인도의학이 중국에서 수용

    되었다는 견해가 있는 반면에,4) 대조적으로 1990년대 초반에 완성된 중국의

    『중국과학기술사(中國科學技術史)』나 『중외의학문화교류사(中外醫學文化交

    流史)』와 같은 저술에서는 그 영향력이 그다지 크지 않다고 이해한다.5) 1980

    년대 중국과학원(中國科學院)의 발의에 의해서 시작된 과학기술사 정리의 일

    부로 간행된 의학부분에서 이와 같은 견해를 제시하고 있음은 중국 의학사 분

    야에 있어서 정설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인도 의학의 영향을 받은 분야로서 안과의학, 그 중에서도 백내

    장에 대한 외과적 수술법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최근

    『용수안론』의 의학이론이 중국 자생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의 연구자들이

    속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못하는 듯하다.6)

    대신 중국 전통의학계에서 이해하는 안과분야의 특색인 오륜설(五輪說)이

    『안과용목론』에서 등장한다는 점만이 주목되면서, 『용수안론』 역시도 중국 전

    4) 중국 안과의학에 미친 인도의학의 영향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를 참조하시오. Vijaya

    Deshpande, “Indian Influences on Early Chinese Ophthalmology: Glaucoma as a Case

    Study,” Bulletin of 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 Studies (University of London) 62-2, 1999; Vijaya Deshpande, “Ophthalmic Surgery: A Chapter in the History of Sino-Indian

    Medical Contacts,” Bulletin of 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 Studies 63-3, 2000. 데쉬빤데는 인도의학이 미친 영향의 근거로 내장에 대해서 언급하였지만, 그 치료법으로서 금비

    술의 자세한 내용을 밝히는 면에서는 부정확한 점들이 많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별도의 논

    문에서 다루고자 한다.

    5) 傅芳 鄭金生 廖育群, 『中國科學技術史(醫學卷)』(北京:科学出版社, 1998) 박현국 외 역, 『중국과학기술사(의학편)』(서울: 一中社, 2003); 馬伯英 高晞 洪中立, 『中外醫學文化交流史』(上海:

    文匯出版社, 1992), 鄭遇悅 역, 『中外醫學文化交流史』(서울:電波科學社, 1997).

    6) 이는 최근의 중국학계의 경향으로, 중국의학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강화하는 측면에서 나타

    난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邓来送, 「论佛教医药对中医药的影响」 『五台山硏究』 1, 2005의 연구나 杨鸿,『《眼科龙木论》学术源流硏究』 成都中医药大学 博士学位论文, 2010 등에서 잘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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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2권 제1호(통권 제43호) 217-274, 2013년 4월 │221

    통의학에서 자생한 것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즉 중국의학 전

    통에 일부 인도에서 전래된 안과지식이 결합되어 당대 후반 『유호안론준적가

    (劉皓眼論准的歌)』가 나왔고, 다시 송대에 『안과용목론』이 만들어지게 되었

    다고 한다.7) 특히 송 영종(英宗)의 이름이 ‘조서(趙曙)’였던 까닭에, ‘曙’에 대

    한 피휘(避諱)로 ‘樹’를 ‘木’으로 고치면서 일반적으로 ‘용목(龍木)’으로 불렸

    고, 이에 따라서 『용수론』이 『용목론』으로 변화되었다고 한다.8)

    이글에서는 인도의 안과의학이 중국을 통해서 동아시아에 전래된 과정과

    안과지식을 전하였던 『용수안론』이 형성된 시기와 내용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밝히기 위해서 우선 인도·불교의학이 중국에 소개되면서 중국 의학이

    론 안에서 어떻게 수용·융화되면서 변화되어 갔는지를 고찰하고, 최초로 소

    개된 안과서적인 「천축경론안(天竺經論眼)」 분석을 통해 인도 안과의학의 내

    용과 성격을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용수안론』에서 제시된 내장 치료술인 금

    침술의 정착 과정과 시술의 방법,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의학론의 특색을

    밝히고자 한다. 따라서 이 연구는 서로 다른 문명권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의

    학지식의 교류와 융합을 통해 종교적인 신념체계와 함께 전래된 의학지식이

    어떻게 새로운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맥락 안에서 고급 지식체계의 일부로 수

    용되고 또 새로운 의학분야를 개척해 가는 추동력을 만들어 냈는지에 대한 기

    초연구가 될 것이다.

    2. 인도 안과의학의 동아시아 전래

    1) 인도의학과 중국 전래

    현재의 남인도지역을 제외한 광범위한 인도대륙에 걸쳐 정착하고 있는 사

    7) 본 논문에서는 『안과용목론』이 저술된 시기를 『태평성혜방』과 『성제총록』의 중간인 11세기

    정도로 파악하였는데, 3장 2절을 참조하시오.

    8) 杨鸿·和中浚, 「眼科文献中“龙树”与“龙木”关系考」, 『江西中医学院学报』 21-1, 20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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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람들의 문화는 대체적으로 고대에 이주해 온 인도아리안(Indo-Aryan) 사람들

    의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들이 인도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베다(Veda)

    』라고 알려진 텍스트를 구술로 생산하고 전승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시기에

    이들의 문화는 북인도 전역에 걸쳐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하였다.9)

    베다시기의 종교는 우주의 운행원리(brahman ⓝ)를 파악하고 활용하여 우주

    적 질서를 유지해 나가도록 노력하는 제사의식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는데, 이

    제사의식의 맥락에서 발생되고 사용되었던 텍스트들이 바로 『베다』였다. 시간

    이 지나면서 점점 더 체계화된 제사의식들이 수행되었고 그에 따른 이론적 해

    석의 틀이 마련되어 가면서 제사의식에 대한 지식을 지닌 사제들(Brāhma a)

    의 사회적 지배력이 강화되어 가는 경향이 나타났다.

    원래의 세 『베다』였던, 『릭베다( gveda)』와 『싸마베다(Sāmaveda)』와 『야

    주르베다(Yajurveda)』에 나중에 『아타르바베다(Atharvaveda)』가 보태어지면

    서 네 『베다』 텍스트 체계가 완성되었다. 초기의 『베다』 텍스트 자체에도 이미

    의학적인 내용이라고 해야 할 것들이 일부 포함되어 있었지만, 장수나 성공

    등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것은 물론이고 특히 나쁜 귀신이나 재앙을 막고

    또는 병을 고치기 위한 주문이나 마술을 많이 포함하고 있던 『아타르바베다』

    에는 질병의 치료나 예방과 연관되는 주문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10) 제

    사의식의 맥락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지식체계들이 후대에 『베다』에 부속되

    는 지식체계(vedā ga)로 체계화되어 전해지게 되었는데, 여기에 직접 의학이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 ‘베다’라는 말 자체는 일반명사로 ‘지식’을 의미하는데

    『베다』 텍스트에 대한 부수적 지식(upaveda)으로 인도전통은 흔히 네 가지 지

    9) ‘베다시기’의 추정 연대를 빗쩰과 제머슨은 기원전 1500-500년으로 제시하고 있고, 쿨케와 로터문트는 기원전 1400-600년으로 제시하고 있다. W. Jamison and M. Witzel, Vedic Hinduism (http://www.people.fas.harvard.edu/~witzel/vedica.pdf) 검색일 2013년 3월 5일; Hermann Kulke and Dietmar Rothermund, Geschichte Indiens von der Induskultur bis heute(München: C.H. Beck, 1998), p.468. 학자들 간의 개략적인 합의는 있지만, 언어학적 자료에 크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인데다 확보된 고고학적 자료에 대한 해석에는 이견이 많아

    정확한 연대추정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10) 연관된 내용에 대한 개괄은 Kenneth G. Zysk, Medicine in the Veda Religious Healing in the Veda (Delhi: Motilal Banarsidass, 1996), pp.4-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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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체계들을 꼽는다.11) 이 네 가지 지식체계들의 목록은 편차들이 있지만, 일

    반적으로 의학(āyurveda), 궁술(dhanurveda), 음악과 무용(gāndharvaveda)

    이 포함된다. 여기서 ‘의학’을 의미하는 ‘āyurveda’는 장수(āyus)를 구현하기

    위한 지식(veda)체계를 의미한다.

    현재 전해지는 인도 의학서들은 여러 문헌들의 편찬과 그것들의 재편집

    및 재조합의 결과들이다. 각 편찬자들의 이름을 딴 제목을 가진 의학서들이

    여럿 전해지지만 개인의 저작으로 판단되는 경우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개

    별 작품들마다 포함하고 있는 내용이 너무나 다양한 것이 현실이다. ‘3대 걸

    작’(b hattrayī)이라고 차별되어 불리는 대표적인 세 전통 인도 의학서들만 보더라도 그 텍스트의 성격이 상이하다. 이 중에서 『짜라까쌍히따(Carakasa hitā)』

    가 단연 가장 오래되고 방대한 내용을 담은 의학의 고전인데, 실크로드를 따

    라 다른 문화권에도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12) 이와는 다르게 『쑤쉬루따쌍히

    따(Suśrutasa hitā)』는 현존하는 편찬 형태로는 『짜라까쌍히따』보다 1-2 세기 늦게 완성된 자료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 자료가 후자에는 보이지 않는

    외과수술 기법에 대한 새로운 내용들은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13)

    본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안과수술과 연관되는 내용은 바로 『쑤쉬루따쌍

    히따』에 서술되어 있는 안과시술에 관한 것이다. 현재로서는 『짜라까쌍히따』

    나 『쑤쉬루따쌍히따』의 문헌비평판본도 마련되어 있지 못한 것이 인도의학

    관련 고전연구의 현실이며 따라서 의학 관련 문헌들의 편찬사와 전승사에 대

    11) 진정한 의미에서 『베다』에 대한 부수적 지식체계라고 한다면 당연히 베다시기부터 인정되

    어 오던 지식체계들로서의 6가지‘베다의 부속[체계]’(vedā ga)를 꼽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음성학(śik ā), 제례학(kalpa), 문법학(vyākara a), 어원론(nirukta), 운율론(chandas), 점성학(jyoti a)이 포함되는데 모두 『베다』의 제사의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12) Dominik Wujastyk, The Roots of Ayurveda Selections from Sanskrit Medical Writings (London: Penguin Books, 2003), pp.3-4에서는 한역경전에 나타나는 짜라까에 대한 언급

    을 밝히고 있다.

    13) 『짜라까쌍히따』는 물론 『쑤쉬루따쌍히따』의 전승사는 불분명하거나 논의되어야 할 내

    용이 많다. 가장 간략한 개괄로는 Anthony Cerulli, “Āyurveda,” Brill's Encyclopedia of Hinduism 2 (Leiden and Boston: Brill, 2010), pp.267-280에 있는 개괄적인 서술과 도표들을 참조하라. 두 텍스트에서 밝히고 있는 의학지식의 전승사 자체가 총괄적으로 연관되면

    서 재구성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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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연구도 무척 미진할 수밖에 없다.14) 하지만 현재 국제학계의 연구가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결코 아니며 특히나 모일렌벨트 등 해당분야의 대학

    자들이 남긴 방대한 연구업적을 근거로 우리는 인도의학사의 많은 부분들에

    대한 비판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인식을 얻을 수 있다.15)

    『용수안론』에 상응하는 수술법이 설명되는 인도의학서에서의 서술은 바로

    『쑤쉬루따쌍히따』의 ‘욷따라딴뜨라(Uttaratantra)’라는 장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다. 수술과정에 대한 직접적인 서술이 들어 있는 대목만을 좁게 따지자면

    욷따라딴뜨라 Uttaratantra XVII 52-84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인데,16) 이 부분 이외에도 수술과 연관된 처방들이 서술된 다른 부분들도 더 있고, 이 처방에 대

    한 내용들도 『용수안론』 안에서 상응하는 내용들이 발견되기 때문에 본 연구

    의 맥락에서는 무시될 수 없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이 욷따라딴뜨라 부분이 『쑤쉬루

    따쌍히따』의 재편집 과정에서 나중에 추가로 첨부된 부분이라는 점이다. 그

    내용 자체가 후대에 생겨난 것은 아닐 수 있지만 『쑤쉬루따쌍히따』의 문헌편

    찬사의 측면에서 이러한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특히나 후대의

    주석가들 중에서 달하나( alha a)가 욷따라딴뜨라를 첨가해 넣은 재편집을

    했던 사람(pratisa skart )의 이름을 ‘Nāgārjuna’라고 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

    14) 따라서 인도 의학을 논할 때에는 항상 이러한 토대연구의 한계를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최

    근에는 이러한 토대연구의 한계는 의식하지 못한 채 『쑤쉬루따쌍히따』의 해당 텍스트 부분

    의 번역을 근거로 고대 인도의 백내장 수술이 ‘chouching’이라 불리는 수술법이 아니라 축

    출(extracapsular extraction) 방식의 수술이었다고 주장하는 논문도 발표된 바 있다. P. N.

    Roy, K. S. Mehra and P. J. Deshpande, “Cataract Surgery Performed before 800 B.C.,”

    British Journal of Ophthalmology (BMJ) 59, 1975, p. 171 참조. 이러한 오해에 대한 반박은 추후 별도의 논문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또한 이들이 제시한 『쑤쉬루따쌍히따』의 추정

    연대인 기원전 800년은 필자들의 상상력과 민족주의적 동기 이상의 아무 근거도 갖고 있

    지 못하다고 해야 한다.

    15) 모일렌벨트(J. Meulenbeld)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Meulenbeld, G. Jan. A History of Indian Medical Literature. Groningen Oriental Studies Volume XV/I-III.(Groningen: Egbert Forsten) Ia and Ib 1999; IIa and IIb 2000; III 2002.

    16) 본 논문에서는 현재 학계에서 가장 널리 쓰리고 있는 뜨리깜지(Trikamji)가 주로 편집한

    1938년의 뭄바이 판본을 사용하며, 텍스트 번호 매김도 이 판본에 따른다. 자세한 서지사

    항은 참고문헌을 참조하시오.

  • 김성수·강성용 : 인도 안과의학의 동아시아 전래와 『용수보살안론(龍樹菩薩眼論)』

    제22권 제1호(통권 제43호) 217-274, 2013년 4월 │225

    다.17) ‘Nāgārjuna’의 한역이 ‘龍樹’이고 『용수안론』의 저자가 용수라고 제시된

    점에는 후대 불교 딴뜨라전통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다시 말해서 중관불

    교의 용수와는 다른 동명이인인 용수에 대한 종교적인 관념이 흐릿하게 중첩

    되어 반영되었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베다에서 정리된 의학가운데 중국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체액론

    (體液論)과 사대설(四大說)이었는데, 인체는 바따(vāta), 삗따 (pitta), 까파

    (kapha)의 세 체액(trido a)의 상호작용과 균형을 통해 유지된다는 것이 전자

    의 이론이다. 세 체액들 상호간에 그리고 또 일곱가지 육체를 이루는 근본요

    소들과18)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신체의 생리작용을 이루어간다. 이 체

    액들이란 따라서 병을 일으키는 원인을 탐구하고 설명하는 맥락에서만 그 실

    재성이 드러나는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체액론보다 중국의학에 강한 영향을 미친 것은 인체가 지수화풍

    (地水火風)에 의해서 구성되며 이들 사이에 부조화가 발생하면 질병이 된다

    는 사대론이었다. 베다텍스트 중 최초기의 『릭베다』에도 이미 우주나 혹은 인

    간을 이루는 요소들에 대한 사변들이 나타난다. 시간이 흐르면서 베다 후기

    에 이르러 이러한 사변들이 더욱 발전되어 가는데 『우빠니샫(Upani ad)』 텍

    스트들에는 단 하나의 기초물질로 우주를 설명하고자 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보

    인다.19)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불교에서 제시되는 네 가지 기본 원소

    들(mahābhūta, 사대)에 대한 이론을 이해해야 하는데, 이 네 가지 기본 원소

    들은 땅(p thivī), 물(āpas), 불(tejas), 바람(vāyu)으로 불교텍스트의 초기 문

    헌들에서부터 이들에 대한 의식은 자주 드러난다. 이들은 초기 텍스트에서는

    통합적인 四大로 나타나기보다는 주로 개별적으로 다루어지면서 각각이 인

    17) Meulenbeld, A History of Indian Medical Literature IA, p.347ff 참조. 이 문제와 관련된 종교사적인 맥락에서의 『용수안론』의 수용사는 별개의 논문에서 다룰 예정이다.

    18) 유미, 피, 살, 지방, 뼈, 골수, 정액이 여기에 해당한다.

    19) Erich Frauwallner (ed. by G. Oberhammer and Ch. Werba), Nachgelassene Werke II: Philosophische Texte Des Hinduismus (Wien: Verlag der Österreich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 1992), pp.31-73이 이와 연관된 연구사 면에서나 심도 있는 분석에서나 가

    장 기초가 되는 자료이다.

  • KIM Seongsu et al. : On Textual and Contextual Position of The Ophthalmological Treatise of Bodhisattva Nāgārjuna (龍樹菩薩眼論)

    │ 醫史學226

    간은 물론 인간이 경험하는 대상세계를 이루는 부분으로서의 ‘층위’(dhātu,

    界)라 불리는 요소로 제시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네 가지 기본요소를 통해 인

    간과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를 설명하는 시도는 불교전통에 의해서 강하게 추

    동되었고, 이 전통이 불교의 중국전파와 더불어 중국인들의 자연관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20) 가령 오(吳) 나라 때에 천축(天竺)의 승려 축률염(竺律炎)

    이 지월(支越)과 함께 번역한 『불설불의경(佛說佛醫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의 몸 가운데에는 본래 네 가지 병이 있다. 첫째는 지병

    (地病)이고, 둘째는 수병(水病), 셋째는 화병(火病), 넷째는 풍병

    (風病)이다. 풍이 증가하면 기(氣)가 일어나고, 화가 증가하면 열

    (熱)이 일어나며, 수가 증가하면 한(寒)이 발생하고, 지가 증가하

    면 힘이 왕성해진다. 본래 이 네 가지 병으로부터 404가지 병이 발

    생한다.21)

    이는 『불설불의경』의 맨 처음 부분으로, 서명(書名)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

    이 불교 및 의학과의 관련성이 드러나는 것과 함께 불교적 인도의학의 핵심으

    로서, 앞서 지적한 생리와 병리의 근원을 바로 사대설에 자리매김하고 있었

    다.22) 인도의 의학이 중국에 전해진 것은 불교의 전파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

    20) 허공(ākāśa)처럼 세계를 이루는 요소로 간주되기는 하지만 사대(四大)에 포함되지는 않는 항목들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 기원 전부터 독립된 텍스트로 확립되기 시작한 불교 전통 내

    의 사변적 이론체계들(abhidharma)에서 나타나는 설명은 논의하지 않는다. 다만 초기 불

    교텍스트에서부터 확인되는 것은 이러한 세계를 이루는 요소에 대한 사유는 불교 이외의

    여러 전통들에서도 제시되었다는 사실이고, 이러한 맥락에서 요소들을 네 가지로 제한하는

    것도 인도 사상사의 보편적인 방식은 아니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21) 『佛說佛醫經』, “人身中本有四病 一者地 二者水 三者火 四者風 風增氣起 火增熱起 水增寒起

    土增力盛 本從是四病 起四百四病”.

    22) 물론 무엇이 인도의학 전반과 구분되는 인도의 불교전통이 이루어낸 의학적 성취인지에 대

    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이후의 연구를 통해서 밝힐 예정이다. 다

    만 대표적으로 제시할 만한 Kenneth G. Zysk, Asceticism and Healing in Ancient India: Medicine in the Buddhist Monastery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등의 연구 작업들이 발표되어 있으며, 출가 고행주의(śrama a, 沙門)전통에 속하던 불교가 인도의학사에서 차지하던 중요한 위치는 이미 큰 부분 해명되어 있다. 가장 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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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2권 제1호(통권 제43호) 217-274, 2013년 4월 │227

    으로 생각되는데, 구체적인 시기는 대략 한나라 말기에서부터 위진남북조(魏

    晉南北朝) 시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대장경(大藏經)』을 통해 파악되는 것을

    보면, 이 시기에 번역된 불경 가운데 의학에 관련한 것으로는 대략 21종류가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것이다. 이들을 보면 후한(後漢) 말 안세고

    (安世高)가 번역한 『불설바라문피사경(佛說婆羅門避死經)』 『불설나녀기파경

    (佛說奈女耆婆經)』 『불설나녀기역인연경(佛說奈女耆域因緣經)』 『불설온실세

    욕중승경(佛說溫室洗欲衆僧經)』을 비롯하여, 앞서 언급된 오의 축률염이 번

    역한 『불설불의경』 이외에 진(晋)의 법호(法護)가 번역한 『불설포태경(佛說胞

    胎經)』, 동진(東晋)의 현무란(縣無蘭)이 번역한 『불설주시기병경(佛說呪時氣

    病經)』 『불설주치경(佛說呪齒經)』 『불설주목경(佛說呪目經)』 『불설소아경(佛

    說小兒經)』, 송(宋)의 법현(法賢)이 번역한 『가섭선인설의여인경(迦葉仙人說

    醫女人經)』, 시호(施護)가 번역한 『불설의유경(佛說醫喩經)』 등과 함께 번역

    자의 이름을 알 수 없는 불의경(佛醫經)이 있었다. 이들 번역자들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인물인 안세고는 안식국23) 출신이라고 전해지는데 『개원석교록

    (開元釋敎錄)』에서는 “동한 말에 안세고가 의술이 유명하였으며 역경으로 인

    도의 의약이 전해져 들어왔다”고 하여 그의 역할에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24)

    이들 의서 이외에도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는 『용수보살약방(龍

    樹菩薩藥方)』 4권, 『서역제선소설약방(西域諸仙所說藥方)』 25권, 『향산선인

    약방(香山仙人藥方)』 10권, 『서역바라선인방(西域婆羅仙人方)』 3권, 『서역명

    의소집요방(西域名醫所集要方)』 12권, 『바라문제선약방(婆羅門諸仙藥方)』

    20권, 『바라문약방(婆羅門藥方)』 5권, 『기파소술선인명론방(耆婆所述仙人命

    論方)』 3권, 『건타리치귀방(乾陀利治鬼方)』 10권, 『신록건타리치귀방(新錄乾

    심적인 맥락은 바로 베다시대 말기부터 강화되어 오던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청정함에 대

    한 이데올로기가 의사들을 천민이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사람들로 몰아가게 되

    던 상황에서, 베다 전통에서 자유로운 출가 고행주의 전통들이 해낼 수 있던 역할이 있었

    다는 점이다.

    23) 서아시아의 이란계 사람들이 이룬 파르티아 왕국(Arsacid Empire)를 말한다.

    24) 蔡景峰, 「唐以前的中印医学交流」 『中国科技史料』 7-6, 1986, 16-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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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史學228

    陀利治鬼方)』 5권, 『용수보살화향법(龍樹菩薩和香法)』 2권, 『용수보살양성방

    (龍樹菩薩養性方)』 1권처럼 인도에서 전해진 것으로 보이는 의서들이 등장한

    다.25) 이전의 사서(史書)에서는 「경적지」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는 관계로 이

    들 의서가 언제 들어왔는지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수대까지 전

    해졌다는 점은 분명한데 당시에도 이미 상당수의 의서들이 산실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중간 중간 원래는 몇 권이었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거나 하는 등의 표현이 있기 때문이다.

    승려들이 저술한 의서들도 상당수 있었는데, 그 중에는 분명히 인도의 의학

    을 반영한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승려 도홍(道洪)이 편찬한 『한식산대료(寒

    食散對療)』 1권, 지빈(智斌)의 『한식산잡방(寒食散雜方)』 2권, 막만(莫滿)의

    『단복요험방(單複要驗方)』 2권, 담난(曇鸞)의 『요백병잡환방(療百病雜丸方)』

    3권과 『논기치료방(論氣治療方)』 1권이나 의서의 명칭에 승려가 들어가 있는

    『석혜의한식해잡론(釋慧義寒食解雜論)』 7권, 『지법존신소방(支法存申蘇方)』

    5권, 『석승심약방(釋僧深藥方)』 30권, 『석도홍방(釋道洪方)』 1권 등이 나타난

    다. 의서들의 명칭으로 보면 일반 의학을 다룬 것과 함께 특히 한식산에 대

    한 전문서적이 세 종류가 있다는 점에서, 당시 사회문제로 되고 있었던 한식

    산 치료에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26) 그리고 사문(沙門) 행구(行矩)가 편찬했

    다는 『제약이명(諸藥異名)』 8권은 인도 내지는 불교의학이 전래되면서 알려

    진 약물들의 명칭을 정리한 것으로 보이며, 『석승광침구경(釋僧匡針灸經)』 1

    권을 보면 승려들이 침구치료에도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의서들은 중

    국의 승려들에 의해서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와 다르게 호승(胡僧)이 편

    찬한 의서도 등장하였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호사문(胡沙門) 즉 호승이

    편찬했다는 『마하출호국방(摩訶出胡國方)』은 10권이나 되는 점을 보건대, 분

    명 인도의학의 내용이 대량으로 전래되고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5) 『隋書』 志29, 經籍志3, 子, 醫方.

    26) 한식산과 관련해서는 김인숙, 『사대부와 술, 그리고 여자』 (서울:서경문화사, 1998), 41-52

    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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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2권 제1호(통권 제43호) 217-274, 2013년 4월 │229

    위진남북조 시기에 대규모로 불교 관련 의학서적들이 등장하였던 것과는

    다르게 당대에는 관련 의학저술이 나타나지 않으며, 담난(曇鸞)의 저술로 보

    이는 1권의 『조기방(調氣方)』과 『제약이명』, 그리고 『석승심약방』 만이 언급

    되고 있다.27) 아울러 수에서 당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많은 의서가 산실되었던

    모양인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이후 송대에 들어서면 잠시 주춤했던 불

    교의학 관련서적들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송사(宋史)』 「예문지(藝

    文志)」에는 『용수안론(龍樹眼論)』 1권, 파타파리(波駝波利)가 번역한 『탄자첩

    종방(呑字貼腫方)』 1권, 『바라문승복선모방(婆羅門僧服仙茅方)』 1권과 인도

    의 명의였던 기파를 차명한 것으로 보이는 『기파맥경(耆婆脈經)』 3권, 『기파

    육십사문(耆婆六十四問)』 1권, 『기파요용방(耆婆要用方)』 1권, 『기파오장론

    (耆婆五藏論)』 1권이 보인다.28)

    이처럼 불교의 전래와 함께 진행된 의학의 교류는 시기적으로 부침이 있

    었지만, 중국 의학계에 미친 영향은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사대론으로 대표되는 인체의 구성요소에 대한 인식과 질병의 분류가 주목받

    았는데, 도홍경(陶弘景)의 『본초경집주(本草經集註)』와 『화양은거보궐주후

    백일방(華陽隱居補闕肘後百一方)』에서 가장 먼저 나타났다. 포박자(抱朴子)

    갈홍(葛洪)이 지은 『주후구졸방(肘後救卒方)』을 재편집하고 증보한 『주후백

    일방』에서는 불교의 영향이 더욱 드러나고 있다.

    그는 총 86항목으로 되어 있었던 갈홍의 저술을 79개로 조정하고 여기에

    다시 22개를 더하여 총 101개로 만들었다.29) 굳이 101로 하였던 것은 404병

    27) 『舊唐書』 志27, 經籍下 및 『新唐書』 卷65, 志49, 藝文3.

    28) 『宋史』 志160, 藝文6. 여기에서 나타나는 ‘기파(耆婆)’라는 이름은 불교전승에서 명의

    로 알려진 지바까(Jīvaka)를 가리킨다. 의학분야의 한역용어들의 인도 원어에 대한 개괄과 내용 소개는 C. Pierce Salguero, “The Buddhist Medicine King in Literary Context:

    Reconsidering an Early Medieval Example of Indian influence on Chinese Medicine and

    Surgery,” History of Religions 48, 2009, pp.183-210을 참조.29) 『華陽隱居補闕肘後百一方』 「序」, “尋葛氏舊方 至今已二百許年 播於海內 因而齊者 其效實

    多 余今重以該要 庶亦傳之千祀 豈止於空衛我躬乎 舊方都有八十六首 檢其四蛇兩犬不假殊

    題 喉舌之間 亦非異處 入塚御氣 不足專名 雜治一條 猶是諸病部類 強致殊分 複成失例 今乃配合爲七十九首 於本文究具都無忖減 複添二十二首 或因葛一事 增構成篇 或補葛所遺 準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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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史學230

    과 사대(四大)와의 관계를 고려한 것으로, “포박자가 방서를 만들었으니 진

    실로 매우 이롭다. 그러나 오히려 빠진 것이 있어 완전하지 못하니 문득 다시

    빠진 부분을 찾아 보충하였으니 무릇 101수가 된다. … 불경(佛經)에서 말하

    기를 사람은 사대로 몸이 이루어져 있는데 1대에 101병이 있다.”30)라고 하여

    불교와의 관련성을 적극적으로 밝혔다. 이렇게 질병을 사대 원칙에 따라 분

    류·체계화하려는 노력은 새로운 의학이론체계의 구상을 선언한 것이었지

    만, 그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평가를 받기도 한다.31) 그렇지만 의학체

    계의 재구성을 고려할 정도로 불교 의학이 중국 의학계에 주었던 충격이 작

    지 않았음은 분명하였다.

    불교를 통해 전해진 인도의학과 중국의 의학이 결합하는 양상은 도홍경처

    럼 근본 뼈대를 재조정하려는 시도와 함께 병에 대한 이론을 구성하고 그 근

    본실체를 밝히는 이론들을 해석하고 수용하는 지점에서도 진행되었다. 가령

    불교전승 내에서는 용수(龍樹)가 지은 것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인도에서 전

    해진 자료들을 근거로 중국 내에서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대지도론(大智度

    論)』에서는 사람의 몸에 404병이 있고, 이것은 각각의 大에서 101병이 일어나

    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404병이란 사대가 몸이 되어 항상 서로 침해하여 발생한다. 하

    나하나의 대(大)에서 101병이 일어난다. 냉병(冷病)에는 202병이

    있는데 그것은 수풍(水風)이 일으키기 때문이며, 열병(熱病)에 202

    병이 있는데 그것은 지화(地火)가 일으키기 때문이다.32)

    更撰 具如後錄”.

    30) 『華陽隱居補闕肘後百一方』 「序」, “太歲庚辰隱居曰 余宅身幽嶺 迄將十載 雖每植德施功 多止一時之設 可以傳方遠裔者 莫過於撰述 見葛氏肘後救卒 殊足申一隅之思 夫生人所爲大患 莫急於疾 疾而不治 猶救火而不以水也 今輦掖左右 藥師易尋 郊郭之外 已似難値 況窮村迥野 遙山絶浦 其間枉夭 安可勝言 方術之書 卷軸徒煩 拯濟殊寡 欲就披覽 迷惑多端 抱朴此製 實

    爲深益 然尚闕漏未盡 輒更采集補闕 凡一百一首 以朱書甄別 爲肘後百一方 於雜病單治 略爲周遍矣 昔應璩爲百一詩 以箴規心行 今余撰此 蓋欲衛輔我躬 且佛經云 人用四大成身 一大輒有一百一病 是故深宜自想 上自通人 下達衆庶 莫不各加繕寫 而究括之”.

    31) 鄭遇悅 역, 『中外醫學文化交流史』 (서울: 電波科學社, 1997), 174-175쪽.

    32) 『大智度論』 卷58,“四百四病者 四大爲身常相侵害 一一大中 百一病起 冷病有二百二 水風起

  • 김성수·강성용 : 인도 안과의학의 동아시아 전래와 『용수보살안론(龍樹菩薩眼論)』

    제22권 제1호(통권 제43호) 217-274, 2013년 4월 │231

    여기서는 질병을 크게 냉(冷)과 열(熱) 두 가지로 구분하고, 거기에다 사

    대의 요소들을 결합시켜서 이해한다. 『대지도론』이 의서가 아닌 관계로 매우

    단순한 도식으로만 언급되었지만, 수(水)와 풍(風)에 의해 냉병이 발생하고,

    지화(地火)에 의해서 열병이 생긴다는 분명한 병인론(病因論)이 들어 있다.

    사대론에 근간한 단순한 병인론을 더욱 발전시킨 것은 손사막(孫思邈)이

    었다. 그는 삼교(三敎)를 의학에 접목할 정도로 정통했던 인물로, 병증을 냉

    열 혹은 한열로 이분하여 보았던 『대지도론』의 견해를 사대에 근간한 사분법

    으로 변화시킨다.

    경(經)에 지수화풍(地水火風)이 화합하여 인신(人身)이 된다고

    하였다. 무릇 화기(火氣)가 부조하면 온몸이 증열(蒸熱)하고, 풍기

    (風氣)가 부조하면 전신이 강직(强直)해지며 모든 모공(毛孔)이 폐

    색(閉塞)하며, 수기(水氣)가 부조하면 신체가 부종(浮腫)하고 기만

    하여 기침이 거칠며, 토기(土氣)가 부조하면 사지가 움직이기 어렵

    고 말을 하여도 말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화(火)가 없어지면 몸이

    차고, 풍(風)이 그치면 기(氣)가 끊어지고 수(水)가 다하면 혈(血)

    이 없어지고, 토(土)가 흩어지면 몸이 갈라진다.33)

    그런데 손사막이 제시한 예를 고찰하면 사대를 큰 범주로 삼고, 각 항목에

    다 음양오행설에 근간했던 중국의학의 내용들을 대입시켜 이해하고자 노력

    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지수화풍을 오행인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 중에서 토

    수화목(土水火木)에 해당시키는데, 가령 풍기가 부족하면 몸이 강직된다는

    것은 중풍의 대표적인 증상으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중국 의학의 관점을 수용

    한 것이며, 아울러 풍이 기와 관련이 있다고 이해한 측면은 이와 다르게 인도

    의학 중심의 관점이었다.

    이처럼 인도의 의학은 중국에 전해져 새롭게 이해되고 의약 이론의 면에

    故 熱病有二百二 地火起故”.

    33) 『備急千金要方』 卷1, 「論診候第四」, “爲其解釋經說 地水火風 和合成人 凡人火氣不調 擧身

    蒸熱 風氣不調 全身強直 諸毛孔閉塞 水氣不調 身體浮腫 氣滿喘粗 土氣不調 四肢不擧 言無音聲 火去則身冷 風止則氣絶 水竭則無血 土散則身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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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史學232

    서 다양한 변화를 겪게 되는데, 이후 한국과 일본에도 전래되어 동아시아 세

    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34) 특히 후지와라노 스케요(藤原佐世, 847-898)가

    891년에 작성한 『일본국견재서목록(日本國見在書目錄)』을 보면 당시의 일본

    에 전해진 인도의학의 상황을 대략이나마 파악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용수

    병화향방』이나 『용수보살안경(龍樹菩薩眼經)』 등과 이름을 가탁한 것으로 보

    이는 『기파복령산방(耆婆茯笭散方)』 『기파맥법(耆婆脈法)』 등이 포함되어 있

    으며, 불교의 동아시아 전래와 함께 일본에까지 이른 시기에 인도 의학이 상

    당히 알려졌음을 볼 수 있다.35)

    2) 인도 안과의학의 내용과 전파

    인도의 의학이 중국에 전래되면서 안과학도 함께 전해졌는데, 『쑤쉬루따쌍

    히따』에서는 안질환을 병인에 따라 총 76가지를 제시하였다. 바따(vāta)에 의

    한 10가지, 삗따 (pitta)가 원인인 10가지, 까파(kapha)에 의한 13가지, 혈액

    에 의한 16가지와 세 체액(trido a) 전체에 의한 25가지, 외부적 요인에 의한 2

    가지로 정리되어 있다.36) 이 내용 전부가 소개된 것은 아니지만, 인도의 안과

    의학이 중국에 전래된 사실을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은 당대(唐代)의 의관이

    었던 왕도(王燾)가 편찬한 『외대비요(外臺秘要)』이다.

    왕도는 당 태종(太宗) 시기 재상이었던 왕규(王珪)의 자손으로 부친과 형이

    관료를 지낸 집안에서 자랐고, 그 역시 관료 생활을 역임하였다고 한다. 다만

    어려서부터 병약하였던 까닭에 의학에 관심을 두었고, 특히 홍문관에서 20여

    년간 재직하며 많은 의서를 열람하면서 문헌을 정리하는 가운데 752년에 40

    34) 한국에 전해진 불교 의학에 대해서는 金斗鍾, 『韓國醫學史』 (서울:探究堂, 1966); 여인석, 「

    삼국시대의 불교교학과 치병활동의 관계」 『의사학』 5-2, 1996 참조. 일본의 경우에는 酒井

    シヅ, 『日本の医療史』(東京:東京書籍, 1982), 34-36쪽 참조.35) 鄭遇悅 역, 『中外醫學文化交流史』 (서울:電波科學社, 1997), 78-80쪽.

    36) 『쑤쉬루따쌍히따』 Uttaratantra I. 28-29ab:

    vātād daśa tathā pittāt kaphāc caiva trayodaśa || raktāt o aśa vijñeyā sarvajā pañcavi śati || 28|| tathā bāhyau punar dvau ca rogā a saptati sm t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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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2권 제1호(통권 제43호) 217-274, 2013년 4월 │233

    권으로 완성한 것이 바로 『외대비요』였다. 그는 이전의 방서를 집대성하는 가

    운데 1,104문(門)으로 나누어 의론(醫論)을 달고 6,800여 개의 처방을 달았는

    데, 인용된 서적들에 대한 출전과 함께 문헌마다의 차이점을 지적하고 자신

    의 견해를 밝히는 주해작업을 최초로 해낸 인물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외대

    비요』가 갖는 자료로서의 가치는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외대비요』 권21에서 「천축경론안(天竺經論眼)」이라는 의서를 거

    론하면서, 그것은 농상도인(隴上道人)이 편찬한 것으로 인도의 승 처(處)라

    는 인물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따라서 처(處)에 의해서 중국에 전해졌

    고, 그것을 왕도가 보고서 『외대비요』를 편찬하면서 기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천축경안론(天竺經論眼) 서문 1수」(농상도인(隴上道人)이 편찬한 것이다. 속성은 사(謝)씨로 제주(齊州)에 거주하였는데, 서국

    (西國)의 호승(胡僧) 처(處)에게 전해주었다.) 대개 천지의 이치 가

    운데 오직 사람이 귀하니, 사람의 몸에서 소중한 것으로는 눈이 가

    장 중요하다고 한다. 관계된 바가 절묘하고 신통하여 육근(六根)

    으로 말하면 눈이 최상이니, 이러한 까닭에 눈을 고치는 방도를 가

    벼이 여길 수가 없다.37)

    여기서 주목할 것은 책의 제목과 편찬한 인물이다. 우선 서명이 ‘천축경론

    안’이라고 한 점에서 ‘천축’ 즉 인도에서 전해진 것이라고 당시에 인식했다는

    점이며, 편찬자인 농상도인은 불교의 승려인 용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는 점이다. 그러나 이전의 연구에서는 호승(胡僧)이 등장하고 또한 의학론과

    처방을 보면 인도의학임은 분명하지만, 용수와는 관련이 없으며 농상은 중국

    의 감숙성(甘肅省) 지역을 지칭하는 표현이므로, 농상도인도 감숙지역의 인

    37) 『外臺秘要』 卷21, 「天竺經論眼序一首」, “(隴上道人撰 俗姓謝 住齊州 於西國胡僧處授) 蓋聞乾坤之道 唯人爲貴 在身所重 唯眼爲寳 以其所繫 妙絶通神 語其六根 眼最稱上 是以 療眼之方 無輕易爾”.

  • KIM Seongsu et al. : On Textual and Contextual Position of The Ophthalmological Treatise of Bodhisattva Nāgārjuna (龍樹菩薩眼論)

    │ 醫史學234

    물일 것이라고 말한다.38)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도 있다. 원문의 내

    용이 상당히 애매하여 문맥이 분명하지 않은 까닭에, 농상도인과 호승의 관

    계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대부분의 연구들에서는 이에 대

    한 분명한 해석을 피하면서 호승이 의학을 전해주어 농상도인이 편찬한 것으

    로 이해하는데, 농상도인이 편찬해서 호승에게 전해주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고 보인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러한 관계가 가능한 일인가? 농상도인이 어떠

    한 인물인지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태평성혜방』에서 안질을 잘

    치료하면 용상(龍上)의 공(功)을 이룰 것이라고 하였던 점이 단서를 준다.39)

    즉 『태평성혜방』에서 말하는 용상은 안과의의 대명사였던 용수를 지칭하

    는 표현이었고, 음차의 과정에서 ‘농상’과 ‘용상’으로 달리 표기되었던 것이라

    고 볼 수 있다.40) 그럼에도 농상도인이 제주에 살았다고 하는 언급은 설명하

    기 어려운데, 일반적으로 제주가 중앙부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인도의 중앙이

    라는 말이 그와 같이 번역된 것은 아닌지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해서

    는 더 치밀한 고찰이 필요하고 관련 자료를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단언

    하기는 어렵지만, 농상도인으로 묘사된 용수의 의학론이 호승에 의해서 중국

    에 전래되었다고 생각한다.

    어찌되었건 「천축경론안」에서는 눈이란 신체에서 가장 귀하고 또한 육근

    (六根) 가운데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까닭에 눈병을 고치는 것이 중요

    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런데 농상도인이 호승에게 전해준 의학론은 인도의학

    의 기본인 사대론에 근간하고 있었으며, 지수화풍의 사대 가운데에서 눈은

    물에 해당하였다.41) 다만 물에 해당하는 눈의 표면에 가볍고 얇으며 또한 투

    38) 鄭遇悅 역, 『中外醫學文化交流史』 (서울:電波科學社, 1997), 181쪽.

    39) 각주 64) 참조.

    40) 『佛說如來不思議秘密大乘經』 권1에서는 대승불교와 관련 있는 보살들을 언급하면서 용희

    보살(龍喜菩薩), 용상보살(龍上菩薩), 용수보살(龍樹菩薩) 등을 거론하는데, 당시 이를 혼

    동하여 용수를 용상으로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41) 『外臺秘要』 卷21, 「敍眼生起一首」, “謝道人曰 夫眼者 六神之主也 身者 四大所成也 地水火

    風 陰陽氣候 以成人身 八尺之體 骨肉肌膚 塊然而處 是地大也 血淚膏涕 津潤之處 是水大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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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2권 제1호(통권 제43호) 217-274, 2013년 4월 │235

    명한 막이 이를 둘러싸고 있어서 보호를 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눈동

    자가 단단하게 형성되어 있다는 당시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살아 있는 어류

    나 동물의 눈을 관찰하여 보면 살아 있을 때에는 모두 물처럼 되어 있지만, 죽

    거나 혹은 열이 가해지게 되면 단단해지는데 이를 정확하게 분별하지 못한다

    고 비판하였다.42)

    뿐만 아니라 눈의 구조에 대해서도 상당히 축적된 지식을 보여주고 있었

    는데, 눈의 흰자위는 세 겹으로 되어 있어서 크게 다치지 않지만 검은 눈동자

    는 단지 한 겹이기에 가볍게 접촉하더라도 쉽게 상처를 받을 수 있다고 하였

    다. 이와 함께 눈이 7겹 혹은 5겹이라는 설(說)들은 틀렸음을 비판하고, 눈은

    정미(精微)롭고 수영(水映)은 얇기 때문에 병에 걸리기 쉬우므로 의학을 배

    우는 사람은 매우 신중하여서 눈을 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울

    러 증상이 나타나면 가급적 빨리 치료해야 하는데, 초반에는 치료가 용이하

    지만 오래되어 병의 근원이 사방으로 퍼져 고질(痼疾)이 되면 치료하기 어렵

    다고 한다.43)

    이러한 지식은 흰자위에 해당하는 안구의 후방부가 공막, 맥락막, 망막으

    로 이루어져있으며, 검은 눈동자에 해당하는 전방부는 각막으로 되어 있다는

    현대의학의 해부학적 지식에서도 크게 틀리지 않다. 아울러 대부분 수분으로

    구성된 젤리 모양의 조직인 유리체가 안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 역

    시 마찬가지로 적절하게 이해한 셈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눈의 해부학

    生氣温暖 是火大也 擧動行來 屈伸俛仰 喘息視瞑 是風大也 四種假合 以成人身 父母精血 實斯增長而精成者也”.

    42) 『外臺秘要』 卷21, 「敍眼生起一首」, “其眼根尋無他物 直是水耳 輕膜裹水 圓滿精微 皎潔明淨 狀如寳珠 稱曰眼珠 實無別珠也 黑白分明 肝管無滯 外託三光 内因神識 故有所見 凡人不解 謂眼有珠 喩若魚之被煮 此事不然 夫魚畜水陸之有目者 悉皆是水 無有別珠 直以湯火煎

    煮 水凝結變自成珠 但看生魚未被煮炙 豈有珠義 直置死魚 水已凝厚 論其活者 水亦輕薄”.

    43) 『外臺秘要』 卷21, 「出眼疾候一首」, “謝道人曰 夫人眼 白睛重數 有三設 小小犯觸 無過傷損 但

    黒睛水膜 止有一重 不可輕觸 致敗俄頃 深可愼之 凡人不究 謬據多重 或七或五 此皆是其妄說 一家成言耳 然眼之精微 水映輕薄 無所堪耐 易致諸疾 故學療之者 事須安審 不可麤疎 恐致毁傷 患眼之家 自須謹愼 諸所禁忌 悉不應犯 若覺有疾 卽宜早療 當及其初 根脚未立 則易

    驅遣 若其久後 根盤四布 旣成痼疾 雖復行療 極難成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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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史學236

    적 지식을 상당한 정도로 축적하고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으며, 이전의 의서

    에서는 언급된 적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도에서 전해진 안과 의학론 가

    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44)

    한편 치료의 원칙으로 몸이 품부(稟賦) 받은 사대의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

    해야 하며, 그 중에서도 냉열풍손(冷熱風損)과 상노허실(傷勞虛實)을 살펴서

    조치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령 열독(熱毒)으로 생긴 병에 건강(乾薑)을 처방

    하거나 풍한(風寒)으로 인한 증상에 냉수(冷水)를 이용하게 되면 냉열(冷熱)

    이 서로 맞지 않아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45) 이어서 눈에 나타나는 증상과 병

    명을 기술하였는데, 특히 금침 발장술(撥障術)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

    하고 있다.

    눈이 까닭 없이 갑작스레 막막하고 아프지도 않고 가렵지도 않

    으면서 점점 어두워지다가, 여러 해를 거쳐서 결국에는 실명에 이

    른다. 가령 얼굴의 모습을 보면 눈의 형태는 특이하지 않으며, 오

    직 눈 가운데에 있는 소주자(小珠子) 안에 장애가 있다. 청백색(靑

    白色)을 띠는데, 비록 사물을 분간하지 못하지만, 명암(明暗)과 삼

    광(三光)을 알며 낮과 밤을 안다. 이와 같은 것을 뇌류청맹(腦流靑

    盲)이라고 한다. 눈에 다른 질병을 겪지 않았는데 갑작스레 눈앞에

    때때로 날 파리나 검은 것이 눈을 따라 오르내리거나 한다. 여기에

    는 마땅히 금비(金篦)를 이용하여 한번 침(鍼)을 놓으면 구름이 걷히듯이 밝은 해를 볼 수 있다. 침 치료를 마치면 대황환(大黃丸)을

    복용해야 하며, 크게 설사를 하면 좋지 않다. 이 질병은 모두 허열

    (虛熱)에 풍(風)이 겸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46)

    44) 이와 같은 눈의 해부학적 지식은 중국 전통의학의 의서들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설명

    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이전의 연구들에서는 이러한 부분들을 지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놀라울 뿐이다.

    45) 『外臺秘要』 卷21, 「出眼疾候一首」, “身稟四大 性各不同 是以治者 證候非一 冷熱風損 疾生不

    同 傷勞虛實 其方各異 宜應察其元起 尋究本根 按法依源 以行療救 不得謬濫措方 以乾薑療

    熱毒之眼 以冷水療風寒之目 非直冷熱無効 蓋亦致患”.46) 『外臺秘要』 卷21, 「出眼疾候一首」, “眼無所因起 忽然膜膜 不痛不痒 漸漸不明 久歷年歲 遂

    致失明 令觀容狀 眼形不異 唯正當眼中央 小珠子裏 乃有其障 作靑白色 雖不辨物 猶知明暗

    三光 知晝知夜 如此之者 名作腦流靑盲 眼未患時 忽覺眼前 時見飛蠅 黑子逐眼 上下來去 此

    宜用金篦 決一針之 後豁若開雲而見白日 針訖宜服大黄丸 不宜大泄 此疾皆由虛熱 兼風所

  • 김성수·강성용 : 인도 안과의학의 동아시아 전래와 『용수보살안론(龍樹菩薩眼論)』

    제22권 제1호(통권 제43호) 217-274, 2013년 4월 │237

    이에 따르면 눈 가운데가 청백색으로 변하면서 사물을 분간하지 못하는 뇌

    류청맹은 열과 풍에 의해서 발생하며 금비 혹은 금침으로 치료를 하면 구름이

    걷히듯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농상도인이 치료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금비술의 방법에 대한 정확한 기술이 아직 정립되지 못하였을 가

    능성도 있지만,47) 왕도가 주로 다루고자 했던 치료법과는 차이가 있는 까닭에

    편입되지 못한 점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농상도인이 「천축경론안」을 편찬한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는

    까닭에 판단하기 어렵다. 630년 편찬된 『천금방(千金方)』에 그 내용이 언급되

    고 있지 않음을 들어 이때부터 왕도의 『외대비요』가 편찬된 시기까지의 중간

    무렵에 나왔을 것으로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에 소개된 「천

    축경론안」을 증보하여 개편한 것이 『용수안론』이라고도 말한다.48)

    실제로 「천축경론안」의 후반부에는 『천금방』을 언급하는 내용이 나올 뿐만

    아니라, 오행을 인용하여 안질환을 설명하고자 하였다.49) 다만 『천금방』의 처

    방 소개를 본래 「천축경론안」의 저자가 말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한편으로 왕

    도에게 전해진 정보에 이들 내용이 함께 섞여 있었거나 혹은 『외대비요』를 편

    찬한 왕도가 삽입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인다. 아울러 불교의학 저술이 두

    드러지게 나타났던 시기가 주로 당대 이전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전

    의 견해를 그대로 수용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50)

    作也”.

    47) 이는 뒤에서 살필 두목이 기록한 안질치료에서 가늠할 수 있다. 그의 기록에서 등장한 두 명

    의 의사들 중에서 그 어떤 누구도 치료법의 전거를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당시

    까지는 내장치료를 위한 금비술이 완전하게 확립되어 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48) 陈明举, 「眼科文献初考」 『山东中医学院学报』 4, 1981, 48쪽.49) 『外臺秘要』 卷21, 「眼將節謹愼法一首」, “謝道人曰 五行云 肝者 眼家之根本 此乃一家之同類

    而言 其實五藏六腑悉皆相連 故欲療眼 而審其虛實 察其由起 旣識病源 宜先作内療 湯丸散煎 事事分明 旣服諸藥 便須依方謹愼 凡欲療眼 不問輕重 悉不得以風霜雨水寒熱虛損大勞

    并及房室飮食 禁忌悉不得犯 若虛勞冷者 宜服補肝丸 出千金翼第十卷 十五味在此卷下也”.50) 조심스럽게 주장하자면 왕도가 소개한 「천축경론안」이 『용수안론』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

    으며, 저술시기 역시 위진남북조 정도로 소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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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史學238

    3. 『용수안론(龍樹眼論)』과 『의방유취(醫方類聚)』

    1) 당·송대 안과치료와 『용수론(龍樹論)』

    「천축경론안(天竺經論眼)」에 의해서 인도의 안과의학이 소개되었다고 한

    다면, 그것이 당시 중국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 해답은 「천축경론안」이 『외대비요』에서 안질(眼疾)을 설명하

    는 부분 가장 첫머리에서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찾아질 수 있다. 그 정도

    로 비중이 컸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사정을 특히 당대의 기록에서 살펴볼 수

    있다. 가장 잘 알려진 경우는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詩人)인 백거이(白居易,

    772-846)와 유우석(劉禹錫, 772-842)으로, 그들의 시에서 안질의 고통과 함께

    그 치료법으로서 인도 안과의학의 정수라고 할 『용수론』과 함께 금비술이 언

    급되고 있다.

    특히 백거이는 40세부터 안질이 생기기 시작하여 55세 때는 시력이 약화

    되어 심각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안질이 지병이라는 것을 알

    았으며 치유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고 포기하지

    는 않았고 여러 가지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가 발견한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용수론』이었으며, 그 속에서 좋은 처방을 찾기 위하여 열심히 연구하였다.

    그가 지은 「안병(眼病)」이라는 시(詩)에 따르면, 안질을 치료하기 위하여 결

    명환(決明丸)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그다지 효과를 보고 있지는 못하였다. 결

    국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고,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어 본 것이

    바로 금비술이었다.51) 이 금비술이 앞으로 고찰하게 될 『용수안론』을 통해 전

    해진 내장(內障)의 외과적 시술법이었다.52) 그 시술법은 주로 인도에서 들어

    온 승려들에 의해서 실시된 모양인데, 유우석은 금비술을 시술한 바라문승에

    51) 『全唐詩』 卷447, 「眼病二首之二」, “案上漫鋪龍樹論 盒中虛捻決明丸 人間方藥應無益 爭得

    金篦試刮看”.52) 중국 내 금비술(金篦術)이 유행한 사실과 당대 시에서 언급된 상황에 대해서는 鄭遇悅 역, 『中外醫學文化交流史』(서울:電波科學社, 1997), 200-209쪽 참조.

  • 김성수·강성용 : 인도 안과의학의 동아시아 전래와 『용수보살안론(龍樹菩薩眼論)』

    제22권 제1호(통권 제43호) 217-274, 2013년 4월 │239

    게 시를 지어 보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53)

    이들보다 약간 후대인 두목(杜牧, 803-852)의 경우에는 『용수론』을 거론하

    고 있지는 않지만, 그에 근거한 치료법으로 보이는 금비술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두목의 동생인 두의(杜顗)가 어려서부터 병약하였는데 내장

    (內障)으로 인하여 시력이 약화되는 상황과 그 치료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에

    의하면 836년 두목은 어사가 되고 동생인 두의 역시 쇄해군막부리(鎻海軍幕

    府吏)가 되었는데, 2년 정도 사이에 동생의 눈이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하였

    다. 당시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였던 위초로(韋楚老)가 유명한 안과의사인

    석집[石公集]을 소개하였는데, 위초로는 그가 검남소윤(劍南少尹)이었던 강

    면(姜沔)이 실명하였을 때 침을 한번 놓아 고친 신의(神醫)라고 설명하였다.

    이에 두목은 그를 불러다 양주(揚州, 현 江蘇省 양주)의 선지사(禪智寺)에서

    동생의 상태를 살펴보게 하였고,54) 이때 의사인 석집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뇌(腦)에 독(毒)과 열이 쌓여 기름이 녹아서 아래로 흘러

    내려 눈동자를 덮은 것으로 내장(內障)이라고 한다. 눈의 흰자위

    옆으로 침을 놓고서, 위로 비스듬히 제거해야 한다. 마치 밀랍이 관

    을 막고 있는 것과 같은데, 밀랍이 제거되면 관이 분명해진다. 그

    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 만 일 년을 채워 기름이 단단해져서 백

    옥의 색과 같아지면 비로소 치료할 수 있다. 나는 대대로 이 질병

    을 치료하였는데, 조부 및 부친에서부터였다. 내가 고친 사람이 이

    백 명이 넘으니, 이것은 걱정할 바가 아니다.55)

    53) 『全唐詩』 卷357 「贈眼醫婆羅門僧」, “三秋傷望眼 終日哭途窮 兩目今先暗 中年似老翁 看朱漸

    成碧 羞日不禁風 師有金篦術 如何爲發蒙”.54) 『樊川文集』 卷13, 「上宰相求湖州第二啓」, “文宗皇帝 改號初 年某爲御史 分察東都 顗爲鎻海

    軍幕府吏 至二年間 顗疾眼暗 無所覩故 殿中侍御史韋楚老曰 同州有眼醫石公集 劍南少尹姜沔 喪明親見 石生針之 不一刻而愈 其神醫也 某迎石生至洛 吿滿百日 與石生俱東下見病弟 于揚州禪智寺.” 이와 같은 내용은 『樊川文集』 권6, 「唐故淮南支使試大理評事兼監察御史杜

    君墓誌銘」에도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55) 『樊川文集』 卷13, 「上宰相求湖州第二啓」, “石曰 是狀也 腦積毒熱 脂融流下 蓋塞瞳子 名曰内障 法以針旁 入白睛穴 上斜撥去之 如蠟塞管 蠟去管明 然今未可也 後一周歲 脂當老硬 如白

    玉色 始可攻之 某世攻此疾 自祖及父 某所愈者 不下二百人 此不足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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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史學240

    그 다음해 겨울에 다시 석집이 상태를 확인하고는 내년 봄에 수술할 수 있

    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가 전년에 말했던 상태와 같았던 까닭에 두목은 안

    심을 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다음해 봄 4월에 처음으로 시술을 하고, 다시

    9월에 시술을 하였음에도 효과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56) 이후 괵주유사(虢

    州庾使)를 만나서 그로부터 그곳에 안과 의사가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

    은 이전에 치료를 하였던 석집이라는 사람이며 다른 한 사람은 주달[周師達]

    로, 그는 석집의 고종 사촌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리고 주달이 석집보다 노

    련할 뿐만 아니라, 자신 역시 그에게서 치료를 받았으니 그를 찾아보라고 전

    해준다.57) 그리하여 주달을 만났지만, 그는 두목에게 불행한 소식을 전한다.

    주달이 동생의 눈을 보고서 말했다. “이런! 눈에 적맥(赤脈)이

    있군요. 내장(内障)으로 기름이 응고된 데에 적맥이 얽혀있으면, 침으로 적맥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적맥을 제거하지 못하면 침을

    놓을 수 없기에, 적맥에 좋은 약을 써야 하는데 저는 알지 못합니

    다. 이것은 석집[石生; 필자]의 의학이 얕아서 이와 같은 이치를 모

    르고 함부로 재차 침을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침을 놓지

    않고 가버렸다.58)

    이후로도 두목은 여러 가지 방도를 찾아보았으나 결국에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우선 주목할 것은 8-9세기 중국에서 이미 눈 수술이 매우 많

    이 시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며, 그와 함께 눈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의사들

    56) 『樊川文集』 卷13, 「上宰相求湖州第二啓」, “其年秋末 某載病弟與石生 自揚州南渡入宣州幕

    至三年冬 某除補闕 石生自曰 明年春 眼可針矣 視童子中脂色 玉白果符初言 ……其年四月

    石生施針 九月再施針 俱不效”.

    57) 『樊川文集』 卷13, 「上宰相求湖州第二啓」, “五年冬 某爲膳部員外郞 乞假往潯陽 取顗西歸 顗固曰 歸不可議 俟兄慥所之而隨之 會昌元年四月 兄慥自江守蘄 某與顗同舟至蘄 某其年七月卽歸京師 明年七月出守黄州 在京時詣今虢州庾使君 問庾使君眼狀 庾云 同州有二眼醫 石公集是一也 復有周師達者 卽石之姑子 所得當同 周老石少 有術甚妙 似石不及 某常病内障 愈于周手 豈少老間 工拙有異 某至黄州 以重幣卑詞 致周至蘄”.

    58) 『樊川文集』 卷13, 「上宰相求湖州第二啓」, “周見弟眼曰 嗟乎 眼有赤脈 凡内障脂凝 有赤脈綴之者 針撥不能去赤脈 赤脈不除 針不可施 除赤脈必有良藥 某未知之 是石生業淺 不達此理

    妄再施針 周不針而去”.

  • 김성수·강성용 : 인도 안과의학의 동아시아 전래와 『용수보살안론(龍樹菩薩眼論)』

    제22권 제1호(통권 제43호) 217-274, 2013년 4월 │241

    이 등장하였다는 점이다. 다만 치료의 방법이나 치료의 전거가 되었던 의서

    가 무엇인지는 드러나 있지 않으나, 분명 「천축경론안」과 『용수안론』 등에서

    언급된 수술법이었음은 분명하다.59)

    그리고 수술의 기법은 철저히 집안의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

    인다. 앞서 두의의 치료에 나섰던 안과의사인 석씨와 주씨는 가까운 인척이

    었으며, 석씨가 자신의 의술을 내세움에 조부, 부친를 거쳐 이어져 내려왔음

    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가학의 형태로 의학을 전수하

    는 것은 이 시기 일반적인 현상이기도 하였다.60)

    『용수안론』이 분명하게 중국 사서에서 발견되는 것은 송대 무렵이다. 즉

    『송사』 예문지에 『용수안론』 1권이 명시되어 있다는 점과 의관 교육과정에

    『용수론』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이다.61) 이때 『용수론』은 아마도 『용수안론』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송사』의 기록으로는 『용수안론』 이외에

    용수의 명칭이 들어간 의서는 없기 때문이다.

    의관 교육을 위한 과목이 되었다는 사실은 당대에 민간에서 유행하였던 안

    과치료가 이제 제도권 안으로 포용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

    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규정이 마련된 것은 신종 때로 신종은 1067-1085에 재

    위하였는데, 다른 기록에 따르면 그 중에서도 1078년에서 1085년 사이라고

    기록하고 있다.62) 송대 태의국(太醫局)의 교과목은 방맥과(方脈科)·침과(鍼

    科)·양과(瘍科)로 구분되었으며, 그중에서도 방맥(方脈)에는 『소문(素問)』

    59) 『용수안론』에 제시되는 치료법과 석집이나 주달이 설명한 치료법의 구조적인 유사점에 대

    해서는 『용수안론』의 해당 부분에 대한 문헌비평본의 마련과 함께 인도 『쑤쉬루따쌍히따』

    의 전거와 대조하면서 내용상의 불분명한 점들이 우선 해명되어야 한다. 이는 별도의 논문

    에서 상세하게 다룰 예정이다.

    60) 이와 같은 사례로는 위진남북조 시기 서문백(徐文伯) 일가의 의학계승이 대표적이다. 李廉

    (1488-1566), 『醫史』(福建:厦門大學出版社, 1992), 39-42쪽 참조.

    61) 『宋史』 志110, 選擧3(學校試 律學等試附), “醫學 初隸太常寺 神宗時始置提擧判局官及教授一人 學生三百人 設三科以敎之 曰方脈科 針科 瘍科 凡方脈以素問·難經·脈經』爲大經 以

    巢氏病源·龍樹論·千金翼方爲小經 針瘍科則去脈經而增三部針灸經”.

    62) 『太醫局諸科程文格』 卷9, 「太醫局程文」, “考宋史 醫學初隸 太常寺元豐間 始置提擧舉判局 設三科以敎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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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史學242

    『난경(難經)』 『맥경(脈經)』을 대경(大經)으로 삼았고 『소씨병원(巢氏病源)』

    『용수론』 『천금익방(千金翼方)』을 소경(小經)으로 삼았다고 하였는데, 『용수

    론』은 『제병원후론』과 『천금방』이 중국의학에 갖는 위치에까지 이를 정도로

    영향력 있는 의서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용수론』으로 대표되는 안과 치료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교육에 이용할 정도로 관련 내용이 중요해진 상황이 반영되어 있었다. 이는

    『용수론』이 담고 있는 의학 지식의 효용성이 인정되었으며 동시에 이것이 사

    회적으로 광범위하게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러한 면에서 고려할 점은 이와 같은 과정이 한 순간에 이루어지기보다는 상

    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을 것이며, 특히 국가가 중요한 의서로 공인하기까지

    여러 임상의 결과 등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용수론』 혹은

    『용수안론』이 하나의 의서로 중국에 보급된 것은 이보다 훨씬 이른 시기였다

    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백거이가 『용수론』을 언급했던 것은 분명 그와 같은 사

    회적·역사적 배경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용수안론』이 전해지지 않는 까닭에 그 구체적인 내용이 어

    떠한 것이었는지는 파악하기 힘든 점이 있다. 이런 면에서 송대에 편찬된 『태

    평성혜방(太平聖惠方)』은 하나의 단서를 전해주고 있다. 『태평성혜방』은 송

    태종(太宗)의 명령으로 왕회은(王懷隱), 진소우(陳昭遇) 등이 982년부터 992

    년까지 10여년에 걸쳐 완성한 100권의 책이다. 여기에서는 송대 이전의 처방

    서를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아울러 민간에서 유행하던 처방들을 모아 편집하

    였는데, 1,670개의 조목에 16,834개의 처방이 실려 있다고 한다.63)

    그런 『태평성혜방』의 권32-33에 실려 있는 안과에 관련한 내용 중 다음과

    같이 언급한 구절이 있다.

    침으로 내장(內障)을 여는 방법을 배울 때에는, 반드시 상세히

    살펴서 증후를 분변하고 병의 정도가 깊고 얕음을 분명히 해야 한

    63) 洪元植, 『中國醫學史』(서울:東洋醫學硏究院, 1993), 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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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2권 제1호(통권 제43호) 217-274, 2013년 4월 │243

    다. 그렇지 않고 병의 근원을 알지 못하며 치료의 요체를 이해하

    지 못하였는데도 함부로 침과 약을 사용하면, 결국에 사람을 손상

    시키기에 이르니 깊이 경계해야 한다. 만약 취지를 끝까지 연구하

    여 미세한 증후를 살펴 구분하기를 조개를 열어 구슬을 꺼내는 듯,

    (눈에 낀) 구름을 걷고 해를 볼 수 있는 것처럼 한다면, 용상(龍上)

    의 공(功)을 얻을 수 있다.64)

    이는 내장을 설명하고 있던 「안내장론(眼內障論)」의 맨 마지막 부분인데,

    치료를 위해서는 학습을 철저히 하여 병의 근원과 치료의 방법을 분명히 알

    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야만 ‘용상의 공’을 얻을 수 있다고 하

    였는데, 이때 용상은 분명 용수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앞서 『외대

    비요』에서 인용한 「천축경론안」을 저술했다고 하는 농상도인과도 밀접한 연

    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11세기 후반 『용수론』이 의관의 교과목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 시기까지 전

    해지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며, 따라서 『태평성혜방』이 편찬될 당시에도 『용수

    론』이 이용되었을 것이다. 다만 『태평성혜방』이 송대 이전의 의방을 정리하였

    지만, 아쉽게도 전거에 대해서는 밝혀놓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단정하기 어

    려운 면이 있다. 또한 문장 가운데 “또 말하기를”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용수론』 이외에 다른 의서를 인용했을 가능성도 있으며, 아니면 『용수

    론』을 인용하더라도 전거 전체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 아니라 분산적으로 인

    용했을 가능성이 높은 점도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두 가지의 가정을 해보게 된다.

    즉 『태평성혜방』의 안과 부분에서 말하는 것이 당시에 존재하였던 『용수안

    론』을 다시 정리하였거나 아니면 『용수안론』이 아닌 다른 의서를 바탕으로 정

    리하였지만 용수의 권위를 빌리려 했을 가능성이다. 이들 가정에서 우리는 전

    64) 『醫方類聚』 卷64, 眼門1, 聖惠方, 「眼內障論」, “凡學針開 然須審細 辯其證候 明其淺深 脫或

    不曉病源 未達機要 妄行針藥 遂致損傷 深可戒也 儻或盡窮旨趣 洞別纖微 如啓蜯以呈珠 似撥雲而見日 則龍上之功 於茲可得矣”. 같은 내용이 『太平聖惠方』 卷33, 「眼內障論」에도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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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史學244

    자의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전의 의서들 가운데 『태평성

    혜방』에서 소개하고 있는 금침술을 언급한 경우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지금

    까지 연구된 바에 따르면 금침술을 소개하고 있는 기록은 앞서 설명한 「천축

    경론안」과 『태평성혜방』 밖에 없다.

    게다가 『태평성혜방』에서는 금침술의 실제 방법까지 자세하게 기록함으로

    써 「천축경론안」보다 상세한 면이 있음을 감안하면, 여기에는 『용수안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즉 『태평성혜방』에서는 송대 초기까지 전해지고 있었

    던 여러 의서들과 함께 『용수안론』을 중요한 전거로 하고 있었는데, 다만 어

    느 부분이 『용수안론』의 내용인지를 파악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을 뿐이다. 아

    울러 11세기 후반 『용수론』이 의과 교육과목이 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당

    연히 이 시기까지 『용수안론』이 있었으며 『태평성혜방』에서는 그것을 상당 부

    분 참조하였을 것이다.

    2) 『용수안론』 전승과 『의방유취』 편찬

    송대에는 안과 전문의서들이 대거 등장하여서, 『송사』에 기록된 것만도

    『용수안론』 이외에도 『유표자안론(劉豹子眼論)』 1권, 『소아안론(小兒眼論)』

    1권, 『침안구방(針眼鉤方)』 1권, 목창서(穆昌緖)가 지은 『료안제방(療眼諸方)』

    1권, 유호(劉皓)의 『안론심적가(眼論審的歌, 혹은 眼論准的歌)』 1권 등이 있

    었다.65) 그만큼 안과학에 대한 수요가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용수안론』이었다. 따라서 『용수안론』을 잇는 여러 가지 이름의 의서도

    동시에 나타났다. 이러한 사정은 송 휘종(徽宗) 정화년간(政和年間, 1111-

    1117)에 편찬되어 대정년간(大定年間1161-1189)에 간행된 『성제총록(聖濟總

    錄)』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세상에서 (내장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사람이 매우 많으며, (시

    술법도 많아서) 책에 실린 것을 전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대

    65) 『宋史』 志160, 藝文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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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2권 제1호(통권 제43호) 217-274, 2013년 4월 │245

    개 『용목(龍木)』이 스승이 되는데, 『용목』에 내장이 23 종류가 있으

    며 침을 놓을 수 있는 경우가 12종류이다.66)

    이 기록에 따르면 내장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의사들이 다수 활동하였으

    며, 다양한 형태의 시술법이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용목』이 가

    장 기준이 된다고 높게 평가하였는데, 이때 언급된 『용목』에는 내장의 종류

    를 23가지로 들고 있다고 언급하였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서적 가운데 『비

    전안과용목론(秘傳眼科龍木論)』에서 내장을 23가지, 외장(外障)을 49가지로

    정리하고 있음을 참고하면, 『성제총록』에서 말한 『용목』은 『비전안과용목론』

    임에 틀림없다.

    한편 『성제총록』의 편찬자들은 내장과 관련한 부분에서 이론과 처방을 설

    명하면서도 금침술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용목론』에 잘 나와

    있으므로 그것을 참조하면 된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장(障)에는 내외(內外)가 있고 예(瞖)에는 부침(浮沈)이 있다. 혹 병이 얕기도 하고 깊기도 하여 치료할 수 있는 것과 치료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용목론(龍木論)』에 실린 것이 상세하다. 세

    상의 속공(俗工)들이 왕왕 갈고리로 끊어내고, 침으로 잘라내며,

    불로 지지는 방법으로 잠시 좋아지게 하지만, (용목론의) 방법을

    알지 못하여 삼가지 않다가 도리어 맹예(盲瞖)에 이르게 된다.67)

    『성제총록』의 편찬자들은 굳이 금침술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다만 『용목

    론』에 실린 것이 상세하기 때문에 그것을 살펴보면 될 것으로 이해하였다. 결

    국 당송대 안과학, 특히 금침술의 유행으로 『용수론』을 필두로 다양한 형태의

    안과저술이 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