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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7 - 醫史學 제16권 제2호(통권 제31호) 2007년 12월 Korean J Med Hist 16ː177191 Dec 2007 大韓醫史學會 ISSN 1225505X 1918년 한국 내 인플루엔자 유행의 양상과 연구 현황 : 스코필드 박사의 논문을 중심으로 천명선, 양일석* I. 서론 1918년 세계 전역을 휩쓸었던 인플루엔자 는 우리나라에서도 대유행을 거쳐, 일제 하 피폐한 삶을 살아가던 국민들에게 큰 고통 을 안겼다. 그러나 아쉽게도 당시 인플루엔 자로 인한 피해상황에 대한 신뢰할 만한 통 계자료를 구하기도 쉽지 않고 한국 내 학자 들의 인플루엔자 연구 상황이나 예방 및 치 료 대책에 대한 자료도 매우 제한되어 있는 형편이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았던 당시의 의학 수준과 서구 식 의학 교육과 연구방법이 막 자리를 잡아 가고 있던 당시 한국의 상황을 고려할 현대적 의미의 역학적 조사는 매우 어려웠 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1889~1970) 박사가 1919년 미국의학회지 (Journal of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에 게재한 ‘Pandemic Influenza In Korea with Special References to Its Etiology' 1) 인플루엔자 환자들의 임상증 례와 함께 혈청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한 원 인체 규명과 백신 제조 및 접종에 대한 정 보를 담고 있어, 당시의 인플루엔자 피해상 황과 세균학적 연구현황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본 논문에서는 스코필드 박사의 논 문을 바탕으로 당시의 신문자료와 총독부 통계 자료 등을 비교하며 한국 1918년 인플루엔자 피해상황과 연구 현황을 살펴보 고자 한다. 세브란스의학교 세균학 교수 스코필드 박사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 8월 세브란스 병 원 의학교에 세균학 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 *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1) F.W. Schofield and H.C. Cynn. Pandemic Influenza In Korea with Special References to Its Etiology. Journal of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1919;72(14):981-983. 공저자인 Cynn은 세 브란스 의학교 졸업생(1918)인 신현창으로 추측된다. 연세의료원 120년사 자료에 신현창은 1923-24 년까지 해부학, 세균학 및 위생학 조수를 역임한 것으로 명기되어 있으나 1919년 당시에도 연구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연세의료원120년사 편찬위원회. 인술, 봉사 그리고 개척과 도전의 120년, 서울. 2005.p339).

1918년 한국 내 인플루엔자 유행의 양상과 연구 현황 : 스코필드 ...medhist.or.kr/upload/pdf/kjmh-16-2-177.pdf · 2015. 12. 8. · - 177 - 醫史學 제16권 제2호(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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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77 -

    醫史學 제16권 제2호(통권 제31호) 2007년 12월 Korean J Med Hist 16ː177191 Dec 2007

    Ⓒ大韓醫史學會 ISSN 1225505X

    1918년 한국 내 인플루엔자 유행의 양상과 연구 현황: 스코필드 박사의 논문을 중심으로

    천명선, 양일석*

    I. 서론

    1918년 세계 전역을 휩쓸었던 인플루엔자

    는 우리나라에서도 대유행을 거쳐, 일제 하

    피폐한 삶을 살아가던 국민들에게 큰 고통

    을 안겼다. 그러나 아쉽게도 당시 인플루엔

    자로 인한 피해상황에 대한 신뢰할 만한 통

    계자료를 구하기도 쉽지 않고 한국 내 학자

    들의 인플루엔자 연구 상황이나 예방 및 치

    료 대책에 대한 자료도 매우 제한되어 있는

    형편이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았던 당시의 의학 수준과 서구

    식 의학 교육과 연구방법이 막 자리를 잡아

    가고 있던 당시 한국의 상황을 고려할 때

    현대적 의미의 역학적 조사는 매우 어려웠

    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1889~1970) 박사가 1919년 미국의학회지

    (Journal of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에 게재한 ‘Pandemic Influenza

    In Korea with Special References to Its

    Etiology'1)는 인플루엔자 환자들의 임상증

    례와 함께 혈청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한 원

    인체 규명과 백신 제조 및 접종에 대한 정

    보를 담고 있어, 당시의 인플루엔자 피해상

    황과 세균학적 연구현황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본 논문에서는 스코필드 박사의 논

    문을 바탕으로 당시의 신문자료와 총독부

    통계 자료 등을 비교하며 한국 내 1918년

    인플루엔자 피해상황과 연구 현황을 살펴보

    고자 한다.

    세브란스의학교 세균학 교수 스코필드 박사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 8월 세브란스 병

    원 의학교에 세균학 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

    *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1) F.W. Schofield and H.C. Cynn. Pandemic Influenza In Korea with Special References to Its

    Etiology. Journal of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1919;72(14):981-983. 공저자인 Cynn은 세

    브란스 의학교 졸업생(1918)인 신현창으로 추측된다. 연세의료원 120년사 자료에 신현창은 1923-24

    년까지 해부학, 세균학 및 위생학 조수를 역임한 것으로 명기되어 있으나 1919년 당시에도 연구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연세의료원120년사 편찬위원회. 인술, 봉사 그리고 개척과 도전의 120년,

    서울. 2005.p339).

  • 醫史學 제16권 제2호(통권 제31호) 177-191,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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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영국 태생인

    스코필드 박사는 1911년 토론토 대학교 온

    타리오 수의과대학에서 수의학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에서 세균학 강의를 맡았다.

    1916년부터 1920년까지 스코필드 박사가 세

    브란스 의학교 교수를 역임하는 동안 한국

    은 고종황제의 의문사를 비롯한 일련의 사

    건들과 3.1 독립운동으로 인해 심화되는 일

    제의 탄압으로 어지럽고 각박한 시기를 겪

    고 있었다. 스코필드 박사는 한국의 독립운

    동가들과 친분을 맺고 당시 한국의 상황과

    일제의 만행과 수탈을 세계에 알리는 노력

    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한국인들에

    게 스코필드 박사는 교육자나 연구자라기보

    다는 독립운동의 조력자로서 잘 알려져 있

    다.2)

    세브란스 의학교에서 그는 2학년 1학기에

    매주 5시간, 2학기에 6시간, 3학기에 3시간

    씩 배정된 세균학 강의를 맡았다(그림 1).

    이 시간을 통해 기초 이론 교육과 더불어

    배지를 만들고 세균을 배양하고 동정하는

    미생물학 기본 실험법 등을 익힌 학생들은

    4학년 과정에서는 전염병의 백신, 혈청 등

    을 만드는 좀 더 실제적인 지식을 습득했

    다.3) 세균학 교수로서 그는 당시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스페인 독감’에 대해 당연

    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도 1918년 인플루엔자 유행은 가을부터 겨

    울 사이에 극심한 상태로 치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환자들의 임상 증례를 관찰하

    고 환자의 가검물에서 원인체를 동정하고,

    혈청학적 검사와 동물 접종을 실시하는 등

    일련의 연구기록을 한 편의 논문 ‘Pandemic

    Influenza In Korea with Special References

    to Its Etiology’에 담아 미국의학회지(Journal

    of American Medical Association)에 실었

    다. 이 논문은 같은 해 중국 의학 저널(China

    Medical Journal)에도 ‘A brief report on

    pandemic influenza in Korea with special

    reference to its etiology’라는 제목으로 게

    재되었다.4)

    그림 1. 세브란스 의학교 실험실에서의 스코

    필드 박사. (이장락, 1962, 사진자료 인용)

    스코필드 박사의 학자로서의 활동은 캐나

    다 온타리오 수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계속된다. 1921년 캐나다에서 원인불명의

    소 출혈증(haemorrhagic septicemia)이 유

    행했을 때, 세균학과 병리학을 담당하고 있

    던 스코필드 박사는 역학조사를 통해 소 사

    2) 이장락. 우리의 벗 스코필드. 서울:정음사; 1962. pp.12-149.

    3) 박형우. 세브란스와 한국의료의 여명. 서울: 청년의사 ; 2006. p.362.

    4) F.W. Schofield, H.C. Cynn. A brief report on pandemic influenza in Korea with special reference

    to its etiology. China Med J 1919;33:203-209. Chinese Medical Journal(CMJ)은 1887년 'China

    Medical Missionary Journal'로 창간되어 1907년부터는 'China Medical Journal'로 명명되었다.

  • 천명선·양일석ː1918년 한국내 인플루엔자 양상과 연구현황 : 스코필드 박사의 논문을 중심으로

    - 179 -

    료에 섞여있는 전동싸리(sweet clover)가

    부패하면서 생긴 물질(와파린, 디쿠마롤)이

    항응고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냈

    다.5) 뒤 이은 학자들의 연구로 디쿠마롤

    (dicumarol)이 비타민 K의 작용을 억제해

    혈액응고를 방해한다는 기전이 알려졌다.

    은퇴 후 국빈 자격으로 한국에 돌아온 스코

    필드 박사는 본인의 희망에 따라 서울대학

    교 수의과대학 병리학 초빙교수로 재직하

    며, 당시 미국에서 수입된 돼지를 통해 유

    입된 위축성 비염에 대한 조사 논문을 발표

    하기도 했다.6)

    1970년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국에 머물며 끊임없이 한국 사회

    와 정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저술과 강의

    를 지속했던 그는 일제 통치 당시부터 한국

    인과 한국사회에 보여주었던 애정과 노력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0년에는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1968년에는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국민장)을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수

    의과대학에서는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스

    코필드 홀’을 만들고 2003년부터 매년 스코

    필드 기념 심포지움을 개최하고 있다.

    1918~1919년 당시 한국 및 주변 지역의 인

    플루엔자 유행 상황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아시아 지역의 1918

    년 인플루엔자 유행에 대한 통계 조사자료

    는 매우 드물다.7) 게다가 자료마다 그 피해

    상황을 각각 다르게 보고하고 있어서 정확

    한 상황을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90년대 초

    반의 한 조사연구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1918년 10월에서 12월 사이에 인플루엔자가

    가장 기승을 부렸고 전 인구의 1/3이 이환

    되었다고 한다.8) 사망자는 25만 명이 넘었

    고 인플루엔자에 의한 사망률은 4.25명9)으

    로 보고되었다. 그 이후에도 1919년 9월부

    터 다음해 2월까지 약 6만 6천명이 더 사망

    했다. 이는 약 7백만 명의 사망자를 낸 인

    도와 비교하거나 55만 명에 달했던 미국,

    20만 명의 사망자를 낸 영국 등과 비교해서

    매우 낮은 수치이다.

    그러나 Johnson과 Mueller10)는 1918년부

    터 1920년까지 일본에서 인플루엔자에 의한

    총 사망자수를 38만8천명(사망률 7명)으로

    추론한다. 이 자료에 따르면 인도의 경우

    인플루엔자에 의한 사망률이 6.1명, 스리랑

    카는 17.9명에 달한다. 중국의 경우도 이용

    할 수 있는 참고 자료들이 서로 큰 차이를

    5) F.W. Schofield. Damaged sweet clover; the cause of a new disease in cattle simulating

    haemorrhagic septicemia and blackleg. Journal of the American Veterinary Medical Association

    1924;64:553-556.

    6) F.W. Schofield, U.I. Chung. The introduction and spread of atrophic rhinitis of swine in Korea.

    Journal of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1959;135:375-376.

    7) 전종휘. 한국급성전염병 개관. 서울. 최신의학사; 1975. pp.107-111.

    8) G.W. Rice, E. Palmer. Pandemic Influenza in Japan, 1918-19: Morality Patterns and Official

    Responses. Journal of Japanese Studies 1993;19(2):389-420.

    9) 사망률은 ‘천명당’ 인플루엔자로 인한 사망자 수를 의미한다.

    10) N. Johnson and J. Mueller. Updating the Accounts: Global Motality of the 1918-1920 "Spanish"

    Influenza Pandemic. Bull Hist Med 2002;76:105-115.

  • 醫史學 제16권 제2호(통권 제31호) 177-191,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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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고 있어 정확한 추정이 어렵지만, 어림

    잡아 8.4~20.1명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

    다. 또한 1920년 영국 위생성 보고서11)는

    1918년 10월부터 1919년 4월까지 일본에서

    인플루엔자로 인한 총 사망자가 250,333명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일본 내에서만 최소한 25만 명이

    1918-1919년 겨울에 인플루엔자로 인해 사

    망했다.

    우리나라의 사정 역시 다르지 않았다. 스

    코필드 박사는 논문의 서두에서 1918년 9월

    부터 인플루엔자가 유행하기 시작했으며 인

    구의 25~50%가 이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

    고 있다. 물론 이는 역학조사를 통한 과학

    적인 수치는 아니지만, 다른 자료들과 비교

    해 보면 전혀 근거 없는 추정은 아니다.

    “한국에서 인플루엔자 대 유행은 1918

    년 9월 처음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감염이

    시베리아를 통해 유럽에서 전파되어 왔음

    을 의심할 여지는 없는 듯하다. 이 질병은

    북쪽으로부터 철도선을 따라 남쪽으로 퍼

    졌다. 우리는 서울에서 9월 하순에 처음으

    로 그 증례를 보게 되었다. 10월 중순에

    이르기 전에 전염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 일본 당국으로부터 정보를 받은 바가

    없어, 현재 정확한 환자와 사망자의 수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구의 1/4에

    서 1/2이 감염되었을 것이다. 교사와 학생

    들에서 높은 발생률을 보여 대부분의 학

    교는 문을 닫았다.”12)

    1917년 말 당시 인구가 1천7백만명에 약

    간 못 미치는 것을 기준으로 하면 약

    400~800만 명에 달하는 이환자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일본의 인플루엔자 이환률을 적

    용해도 최소한 500만 명의 이환자가 있었다

    고 볼 수 있다. 또한 학생들과 교사들 사이

    에 유행이 심해서 학교의 대부분이 문을 닫

    았다는 설명은 젊은 층을 공략하는 1918년

    인플루엔자의 감염 특징을 그대로 드러

    낸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13)를 보면 1918년 감

    모14)(感冒)에 의한 사망자는 1917년에 비해

    두 배 증가하여 39,689명에 달했다. 이 자료

    를 근거로 하면 감모에 의한 조사망률은

    2.38명으로 일본에 비해 비교적 낮다. 그러

    11) S.P. James. The general statistics of Influenza in Australasia and parts of Africa and Asia.

    Ministry of Health. Reports on the pandemic of Influenza 1918-19. London, His Majesty's

    Stationery;1920. p.386.

    12) F.W. Schofield, H.C. Cynn. 1919. ibid.

    13) 조선총독부 통계연감. 서울;조선총독부;1918. pp.92-95.

    14) 조선총독부 통계연감에서 전통의학의 용어가 쓰였다. 감모(感冒)는 감기(感氣)와 같은

    말로 한의학에서 외감병의 하나로 풍사나 한사가 몸에 침입하여 생기는 질병이다. (김

    동일 외. 동의학사전. 서울;과학원출판사;1990. p. 34). 이것이 현대 의학에서 말하는 ‘감

    기’와 같은 개념으로 쓰였는지 확언할 수는 없다. 인플루엔자의 원인체가 알려지지 않

    았던 당시의 의학 수준으로 미루어 진단의 기준이 명확할 수 없었음을 고려할 때 이

    질병을 ‘감기’와 ‘독감’으로 명확히 분류하기는 힘들다. 또한 호흡기 증상과 고열을 수반

    하는 유사 질병들과 구분하기도 용이하지 않다. 다만 당시 기록들을 참고할 때 1918년

    급격한 증가를 보인 ‘감모’로 인한 사망자는 일반 감기보다는 독감에 의한 사망자에 포

  • 천명선·양일석ː1918년 한국내 인플루엔자 양상과 연구현황 : 스코필드 박사의 논문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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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1918년 인플루엔자로 인한 사망자를 이

    통계수치에 제한시킬 수는 없다. 우선, 1917

    년 42,209명으로 집계되었던 한국인 전염성

    질병 사망자가 1918년에는 139,152명으로 3

    배 이상 증가했다. 이 통계가 어떤 전염성

    질병을 포함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므

    로 여러 가지 가능성을 타진해 보아야 한

    다. 월별 통계자료를 보면 한국인 총 사망

    자 수는 11월에 급격히 증가했다(그림 2).

    이 사망률의 증가가 인플루엔자 유행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는지 의심해볼 여

    지가 충분하다. 콜레라 등의 다른 전염병

    유입을 의심할 수도 있으나, 또 다른 자료

    인 한국방역통계15)에 나타난 콜레라에 대한

    통계자료는 1918년이 아닌 1919년의 대유행

    을 기록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계절적으

    로 콜레라에 대한 의심은 적절치 않다. 장

    티푸스와 두창 역시 증가 추세에 있기는 했

    지만 폭발적이지는 않았다. 두 통계자료의

    일관성 없음을 논외로 하더라도, 한국방역

    통계에 나타난 9대 전염병 사망자 집계가

    큰 증가를 보이지 않는데도 전염성 질병이

    눈에 띄는 증가를 보인 것은 인플루엔자 유

    행에 그 원인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비인후병 및 호흡기병으로 분류된 환자의

    수 역시 1917년 79,183명에서 1918년에는

    87,386명으로 약 10% 정도 증가를 보였는

    데, 인플루엔자 감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폐렴이나 기타 관련 합병증으로 진단 받았

    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환자들을

    포함시키면 사망률은 더 높아진다(표 1).

    이정은16)은 매일신보를 바탕으로 당시 인

    플루엔자로 인한 피해상황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이 논문에 따르면 1918년 7,422,113명

    의 인플루엔자 환자가 있었으며 그 중

    139,128명이 사망했다. 즉, 인플루엔자로 인

    한 조사망률은 8.1명이고 인구의 약 40%가

    이환된 셈이다. 1918년 강원도 지역에서의

    유행성 감기와 그에 따른 폐렴 환자에 대한

    일본인 의사 료슌(嶺峻)17)의 보고는 이 통

    계적 수치가 과장된 것이 아님을 뒷받침해

    준다. 1918년 강원도 지역에서만 조선인

    448,347명이 인플루엔자에 이환되었으며 이

    로 인한 사망자는 5,220명, 합병증인 폐렴과

    기관지염으로 인한 사망자는 2,409명에 이

    르렀다고 하는데, 당시 강원도의 인구는 조

    선인만 1,143,402명으로 조사망률은 6.7명으

    로 추론된다. 인구가 밀집된 도시 지역이나

    외항을 접하고 있어 왕래가 잦았던 경기도

    지역과 해안지역의 사망률은 의심할 나위

    없이 더 높았을 것이다. 일본의 경우에도

    1918년 인플루엔자 유행은 고베, 오사카 등

    에서 피해가 더 컸다.18)

    함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정희영, 전종휘. 감염질환. 서울;수문사;1987. pp.230-234,

    511-522)

    15) 朝鮮防疫統計. 서울; 朝鮮總督府 警務局;.1935, pp.4-7. 콜레라는 1919년(대정8년) 다시 한 번 맹위

    를 떨쳤다. 9대 전염병은 콜레라, 적리, 장티푸스, 파라티푸스, 두창, 발진티푸스, 성홍열, 디프테리

    아, 유행성뇌척수막염(epidemic cerebrospinal meningitis)이다.

    16) 이정은. 매일신보에 나타난 3.1운동 직전의 사회상황.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1990;4:193-220. 이 논

    문의 내용은 프라임경제(2006년 2월 24일)를 통해 보도되었다. 매일신보 기사는 조선총독부에서

    나온 자료를 인용했다고 하지만, 1918년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는 일치하는 자료가 없다.

    17) 嶺峻. 江原道ニ於ケル流行性感氣 ニ之ニ倂發セル 肺炎ノ臨床的觀察. 朝鮮醫學會誌 1919;24:30-50.

  • 醫史學 제16권 제2호(통권 제31호) 177-191,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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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분 감모(감기) 비인후병 호흡기병 9대 전염병*

    전염성병 총 사망자

    1915년 21,890 9,624 50,754 1,041 32,415 336,936

    1916년 20,864 10,462 59,905 2,198 43,047 363,529

    1917년 19,578 10,910 68,273 1,266 42,209 402,709

    1918년 39,689 12,025 75,361 1,317 139,152 515,243

    1919년 22,915 8,084 48,658 13,599 92,338 374,507

    스코필드 박사는 한국 내 인플루엔자가

    유럽으로부터 시베리아를 거쳐 유입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지만, 당시 인플루엔

    자 유행의 근원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

    의 여지가 남아있는 듯하다. 피해 상황 근

    거자료를 통해 인도나 다른 아시아 지역에

    비해 중국의 피해가 약했다고 주장하는 학

    자들은 인플루엔자가 이미 1918년 유행 전

    에 중국에서 발생하여 어느 정도 집단면역

    이 형성된 후였다고 말한다. 거위, 돼지 등

    을 인간과 가까이에 키우는 중국 남부의 농

    업 양상으로 볼 때, 돼지가 일종의 바이러

    스 혼합숙주(mixing vessel)로 작용해 사람

    에게 치명적인 새로운 바이러스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이들이 1916-1917년에 영국

    에서 발생했던 인플루엔자의 발원지에서

    18) G.W. Rice, E. Palmer, 1993. ibid.

    표 1. 1915 - 1919년 감기 및 관련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 수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1919:94-95, *조선방역통계 1934:6-7)

    그림 2. 1917-1919년 월별 조선인 사망자 수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1918;101)

  • 천명선·양일석ː1918년 한국내 인플루엔자 양상과 연구현황 : 스코필드 박사의 논문을 중심으로

    - 183 -

    1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정착했다는

    사실이 유럽에서의 유행이 1914-1918년 당

    시 중국 노동자들을 통해 시작되었다는 증

    거로 제시됐다.19) 그렇다면 중국과 교역이

    잦고 위치상으로 가까운 한국의 경우 비슷

    한 양상을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

    이나 일본의 피해 상황으로 볼 때, 중국의

    피해가 특별히 미미했으리라는 확신을 내릴

    수는 없다. 오히려 신뢰성이 부족한 보고 자

    료나 누락된 자료들로 인해 이환률이나 사

    망률이 낮게 나타났을 가능성이 높다.

    스코필드 박사는 ‘위생적이지 못한 동양

    의 생활환경(insanitary conditions of oriental

    life)이 한국 내 인플루엔자 유행을 악화시

    켰다’라는 언급을 덧붙이고 있으나 유럽과

    미국의 피해 상황이 한국보다 심했던 사실

    을 고려해보면, 이는 질병유행에 대한 과학

    적인 소견이라고 보기 어렵다. 동아일보 기

    사를 보면 인플루엔자 유행이 수그러든

    1920년과 1921년에도 일본에서는 상당히 심

    한 양상을 보였던 것 같다. 한국에서도

    1918년 유행만큼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그

    이후에 매년 겨울이면 인플루엔자가 발생해

    상당한 피해를 안겼던 것으로 보인다.20)

    “일본에 毒感 尙熾

    독감의 류은 일본 각지와 각 군대에

    는 자못 렬하야 지난일월 이로 삼월

    말지 환자 총 수가 실로 이십칠만팔

    쳔삼구십구인에 달하고 사망자가 십만

    구쳔오이십사인에 달한 외에 각 사단의

    작년 십이월초 지의 환자 수가 삼만

    육쳔이삼십오인 중 사망자가 일쳔칠백

    육십이명에 달하엿더라. 그리고 조선에 와

    잇는 뎨이십사단과 십구사단에도 환자총

    수가 이쳔일칠십삼 명즁 사망자가 사십

    구명에 달하엿다더라.“21)

    “일개월에 만명

    조선 젼도에 발하는 감긔환자

    지금부터 삼년전에 종에는 조선에서

    보지 못하든 이상스러운 감긔가 돌아다니

    어 그해 초가을부터 시작하야 조선에서도

    그 감긔로 인하야 사망한 사람이 수만 명

    에 달하야 한참 참상을 이른 후로는 …

    그러나 금년에는 증세가 그다지 심하지는

    아니하나 간혹 사망하는 사람들이 잇는

    모양인즉 일반은 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고 도위생과에서는 말하더라.“22)

    유행성 감기 환자에서 ‘파이퍼 바실러스’의

    분리 동정

    파스퇴르와 코흐에 의해 구체화된 ‘세균

    설(germ theory)’의 영향으로 20세기 초 과

    학자들은 모든 전염병의 ‘원인체(the causal

    agent of a disease)’를 찾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바이러스의 존재를 알 수 없었던

    19) C. Langford. Did the 1918-19 Influenza Pandemic Originate in China? Population and

    development Review 2005;31(3):473-505.

    20) 신문기사에서 이후의 유행이 인플루엔자 소유행이었는지 혹은 일반 감기였는지 구분하

    기는 힘들다. 당시 유행을 겪었던 대중과 정부 기관은 3년간의 ‘유행성 독감’을 같은 질

    병으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아진다. (각주14) 참조)

    21) 일본에 毒感 尙熾 . 동아일보 1920년 4월 18일.

    22) 일개월에 만 명, 조선 젼도에 발하는 감긔환자. 동아일보 1921년 12월 26일.

  • 醫史學 제16권 제2호(통권 제31호) 177-191, 2007년 12월

    - 184 -

    당시, 인플루엔자의 원인체로 제기된 것은

    바로 ‘파이퍼 바실러스(Pfeiffer’s bacillus,

    Influenza bacillus)’이다. 이는 1892년 이 균

    을 발견한 독일 과학자 파이퍼(Richard E.

    Pfeiffer)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인플루엔자의

    원인체에 대한 보고는 전 세계의 과학자들

    에게 곧 파장을 일으켰다. 같은 해 2월 미

    국 사이언스지도 코흐(Robert Koch)가 이

    결과를 인증했다는 사실과 함께 파이퍼 바

    실러스의 발견을 전하고 있으며, 4월에는

    좀 더 자세하게 이 인플루엔자 원인균에 대

    해 다뤘다.23) 그러나 곧 이 발견에 이의를

    제기하는 과학자들이 논문을 발표한다. ‘코

    흐의 가설’에 따르면 특정 질병을 일으키는

    병원체는 병에 걸린 동물에서는 항상 존재

    하고, 체외에서도 순수 배양할 수 있음은

    물론, 감수성 있는 동물에 재접종해서 다시

    동일한 질병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또

    한 이 실험동물로부터 분리된 병원체는 접

    종한 병원체와 일치해야 한다.24) 하지만 파

    이퍼 바실러스는 이런 조건들을 항상 만족

    시키지는 못했다. 무엇보다도 인플루엔자

    감염자에서 파이퍼 바실러스를 분리해내는

    확률이 너무 낮았다. 파이퍼 자신도 환자의

    혈액에서는 균을 분리하는 데 실패한 바 있

    다. 다수의 과학자들이 오히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즉, ‘여과되는 바이러스(filterable

    virus)’25)가 그 원인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인플루엔자의 원인체는 따로 있고 폐렴균

    (pneumococci)이나 연쇄구균(streptococci)

    혹은 파이퍼 바실러스 등으로 인한 ‘2차 감

    염’에 의해 심한 폐렴 및 기관지염 증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의견이 팽배했다. 1920년

    영국 보건성의 인플루엔자 보고서에도 같은

    예를 들어 ‘여과되는 바이러스’가 인플루엔

    자의 원인체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26) 그럼

    에도 불구하고 1892년부터 1918년 인플루엔

    자 대유행 당시까지 이 파이퍼 바실러스가

    인플루엔자 유행의 원인체인지 혹은 다른

    원인체가 있는지에 대해 자신 있게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1918-1919년 인플

    루엔자 대유행 이후로도 10년간은 인플루엔

    23) A. MacDonald. Confermation of the discovery of the influenza bacillus. Science 1892;19(472):100

    G.H. Nuttall. The bacillus of Influenza. Science 1892;19(478):193-194.

    24) R.Koch. The Etiology of tuberculosis. In : Milestones in Microbiology. Ed. T. Brock. Englewood Cliff;Prentice-Hall INC.; 1961. pp.116-118.

    25) 물론 여기서 바이러스는 바이러스 어원에 충실한 의미인 ‘병을 일으키는 원인(독소)’ 즉, Materies

    morbis의 뜻으로 세균과 구별 없이 쓰였다. 세균을 걸러내는 필터를 통과하는 매우 작은 병원체

    로서의 바이러스의 존재는 1898년 뢰플러와 프로쉬의 구제역의 전파에 관한 연구(F.Loeffler and

    P.Frosch. Berichte der Kommission zur Erforschung der Maul und Klaunseuche bei dem

    Institut für Infektionskrankheiten in Berlin. Zentralblatt für Bakteriologie, Parasitenkunde und

    Infektionskrankheiten. Part I, 1898;23: 371-391)와 1898년 베이제린크의 담배잎의 모자이크병 연

    구(M.W. Beijerinck ; Über ein Contagium vivum fluidum als Ursache der Fleckenkrankheit der

    Tabaksblätter. Verhandelingen der Koninklyke akademie van Wetternschappen te Amsterdam.

    1898;65: 3-21)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아직 바이러스라는 용어가 현재의 의미로 쓰이고 있

    지는 못했다.

    26) F.W. Andrews. The Bacteriology of Influenza. Ministry of Health. Reports on the pandemic of

    Influenza 1918-19. London, His Majesty's Stationery;1920. pp.110-125

  • 천명선·양일석ː1918년 한국내 인플루엔자 양상과 연구현황 : 스코필드 박사의 논문을 중심으로

    - 185 -

    자의 원인체는 여전히 세균학계의 말 많은

    논쟁거리였을 것이다. 실제로 바이러스의

    실체가 알려진 것은 1931년 이후의 일이

    다.27) 파이퍼 바실러스는 인플루엔자 바이

    러스와는 별도로 Haemophilus influenzae로

    규명되었다.28) 이 병원성 세균은 병후를 나

    타내지 않고 인간의 호흡기에 상재하다가

    바이러스 감염 등을 계기로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

    스코필드 박사의 논문에도 세균학자로서

    같은 고민이 묻어난다. 그는 당시의 다른

    세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코흐의 가설에 입

    각해 연구를 펼쳐나갔다. 스코필드 박사의

    임상증례보고에 따르면, 서울 지역에서 인

    플루엔자에 이환된 사람들은 40~41℃의 고

    열과 두통, 사지의 통증을 비롯해 기관지염,

    기관지성 폐렴, 심부전 등 전형적인 증상을

    보였다. 그러나 전형적인 증세를 보이는 7

    명의 환자의 혈액에서 모두 파이퍼 바실러

    스 배양에 실패했다. 14명의 환자에서 채취

    한 객담을 혈액배지에서 배양했을 때, 급성

    증상을 보인 3명에서만 파이퍼 바실러스를

    배양해낼 수 있었다. 다른 11명의 환자들에

    서는 복합적으로 폐렴균과 연쇄구균 등이

    배양되었다.

    또한 스코필드 박사는 백신 제조를 위해

    모두 20명의 유행성 감기 환자로부터 객담

    을 모았는데, 그 중 8명의 객담에서만 파이

    퍼 바실러스를 분리해낼 수 있었다. 이들

    환자들은 모두 전형적인 인플루엔자 증세를

    보였다. 몇 개월간 만성 기관지염을 앓고

    있었던 한 환자(case D)의 경우 인플루엔자

    증세를 보이기 전에 환자의 객담에서 ‘파이

    퍼 바실러스’가 발견되었다. 스코필드 박사

    의 분석에 따르면, 이 환자는 이미 인플루

    엔자 바실러스를 보유하고 있다가 백신 접

    종으로 인해 감염이 일어나서 질병을 앓은

    셈이다. “그렇다면 인플루엔자는 어떤 다른

    병인체(1차 원인체)가 있고 이 원인체가 파

    이퍼 바실러스나 폐렴균을 동반할 경우 증

    상이 현저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이 균들이

    환자에서 분리되는 확률이 높은 것은 아닐

    까?” 이는 임상적 관찰과 실험을 거쳐 내릴

    수 있는 옳은 결론이다.

    그는 논문에서 파이퍼 바실러스가 인플루

    엔자의 원인체라는 의견에 대해 부정적인,

    그리고 긍정적인 분석을 모두 제시했다. 이

    질병의 감염성은 매우 높지만, 감염자의 객

    담에서 발견되는 균의 양이 너무 적다는

    점, 감염자 중에서 이 균이 발견되는 확률

    이 너무 낮다는 점, 이 질병은 파이퍼 바실

    러스에 이미 감염되어 있는 사람에게도 나

    타난다는 점, 균이 분리 동정된 경우를 제

    외하고 항체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은 파

    이퍼 바실러스가 원인균이 아님을 보여주었

    다. 그러나 이 균이 그나마 다른 세균들에

    비해 유행성 감기 환자에서 가장 발견 빈도

    가 높다는 것은 파이퍼 바실러스에 대한 긍

    정적인 증거가 된다. ‘여과되는 바이러스’를

    지지하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 역시

    인플루엔자 원인체로서의 파이퍼 바실러스

    27) R.E. Shope. The Etiology of Swine Influenza. Science, 1931;73(1886):214-213.

    28) Tognotii는 파이퍼 바실러스의 예는 명백한 과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한 반박에도 불구하고 학계

    의 권위에 눌려 의학발전이 저해된 예라고 지적하고 있다. (E. Tognotti. Scientific Triumphalism

    and Learning from Facts: Bacteriology and the ‘Spanish Flu’ Challenge of 1918. The Journal of

    the Society for the Social History of Medicine 2003;16(1):97-110.

  • 醫史學 제16권 제2호(통권 제31호) 177-191, 2007년 12월

    - 186 -

    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스코필드 박사는 파이퍼 바실러스

    가 인플루엔자의 원인체라는 가설보다 1차

    원인체로서의 ‘여과되는 바이러스’의 존재를

    더 지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증

    거로 돼지콜레라(hog cholera, swine fever)

    를 언급하고 있다. 처음에 Bacillus suipes-

    tifer나 B. choleraesuis가 돼지콜레라의 원

    인균으로 잘못 알려졌다. 그러나 이 질병의

    원인체는 돼지 콜레라 바이러스(Classic

    Swine Fever Virus)이다. 바이러스의 실체

    를 몰랐던 그 당시에도 과학자들은 이 ‘여

    과되는 바이러스’가 질병의 직접적인 원인

    이라는 사실을 밝혀냈고, 인플루엔자에서도

    같은 결론이 도출될 수 있었다.29)

    인플루엔자 전파 실험 및 감수성 동물 접종

    인플루엔자의 원인균으로서 이 ‘여과되는

    바이러스’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주지는 못

    했지만, 스코필드 박사는 몇 건의 임상실험

    을 수행했다. 우선 확연한 인플루엔자 증상

    을 보이는 환자 두 명의 혈액을 처리해서

    버크펠트(Berkefeld N) 필터로 여과한 액을

    각각 1ml 씩 한 명의 한국인 의사에게 접

    종했다. 증상이 발현되고 24시간 정도 지난

    한국인들에게서 채취한 여과하지 않은 혈액

    또한 혼합하여 다른 한 명의 한국인과 스코

    필드 (Senior author) 스스로에게 접종했다.

    여과한 혈액을 접종한 한국인 의사는 접종

    3일째 되는 날에 인플루엔자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여과하지 않은 혈액을 접종 받은

    스코필드 자신에게는 48시간 내에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극심하지는 않았다.

    한국인 의사는 후유증으로 급성기관지염을

    앓았으나 그 분비물에서는 파이퍼 바실러스

    가 검출되지 않았다. 여과되지 않은 혈액을

    접종한 다른 한국인은 접종 직전에 인플루

    엔자에서 회복된 후였는데, 그에게서는 어

    떤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실험에서

    인플루엔자에 걸리지 않은 두 명의 학생에

    게 여과한 혈액을 접종했지만 아무런 증상

    도 나타내지 않았다. 환자의 객담으로부터

    얻은 균액을 배양하여 두 명의 건강한 학생

    에게 접종하였고 접종 후 45분 만에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이 증

    상이 급성 독혈증(acute toxemia)에 의해

    유발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의 증상은 점

    진적으로 잦아들었고 6시간 정도 후에는 회

    복되었다. 이 실험에 쓰인 객담에서는 파이

    퍼 바실러스가 발견되지 않았다.30)

    당시에는 바이러스 실험 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지거나 환자나 실험자들이 격리된 상태

    가 아니었기 때문에, 주사한 환자의 혈액

    속에 원인체가 존재하는가와는 상관없이 자

    연 감염의 위험이 컸다. 실험이 매우 제한

    적이고, 실험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실험

    전이나 실험 중에도 바이러스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실험 결과가 자연 감염으로 인

    해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은 당시에 수행되었

    던 많은 연구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었

    다. 스코필드 박사도 이 실험들의 한계점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으며, 실험 결과에 회의

    적인 태도를 보였다. 다만 실험 전 인플루

    29) R.E. Shope. Influenza, History, Epidemiology, and Speculation. Public Health Report,

    1958;73(2):165-179.

    30) F.W. Schofield and H.C. Cynn. 1919. ibid.

  • 천명선·양일석ː1918년 한국내 인플루엔자 양상과 연구현황 : 스코필드 박사의 논문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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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자에서 회복한 한국인 의사의 경우는 혈

    액 내에 충분한 항체가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객담에서 얻은 균액에도 마찬가

    지로 바이러스가 존재할 수 있지만, ‘건강한

    학생들’이 항체를 보유했는지의 여부를 확

    신할 수는 없다.

    2마리의 기니피그에는 여과된 혈액을, 다

    른 두 마리에는 여과되지 않은 혈액을 접종

    했지만 어떤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일부에서는 이미 거의 모든 환경이 병원체

    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에서 사람에게 행해

    지는 실험을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로 동물

    접종 실험이 선호되기도 했다. 1920년경 한

    보고서는 이미 당시에 실험동물에 환자의

    혈액과 객담을 접종하여 원숭이, 바비원숭

    이, 토끼, 기니피그, 마우스에서 감염에 성

    공했다고 적고 있다. 여과 여부에 관계없이

    혈액과 객담 모두 실험동물을 감염시킬 수

    있었으며 실험동물 사이에 전파도 가능하다

    고 전했다.31)

    인플루엔자 백신

    스코필드 박사의 논문은 한국 내 인플루

    엔자 백신 접종에 대한 흔하지 않은 증거자

    료이다. 4학년 과정에서 백신과 혈청을 만

    드는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던 세브란스 의

    학교 학생들은 인플루엔자 백신에 대한 실

    습도 거쳤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32)

    스코필드 박사는 파이퍼 바실러스 보균

    여부에 관계없이 백신 접종이 인플루엔자

    감염을 예방하거나 약하게 발현되도록 하는

    데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

    다. 수동적으로 전달된 항체가 어느 정도

    질병의 예방에 도움을 주었는지 알 수는 없

    다. 원인체인 바이러스의 실체가 파악되지

    도 않았고 혈청형에 대한 지식도 전혀 없었

    던 당시에 제조된 이 백신의 효과에 대해

    신뢰할 만한 보고는 아니기 때문이다. 스코

    필드 박사의 논문에는 백신 제조 및 투여

    방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3회 백

    신을 투여했다는 언급이 있다. 비슷한 시기

    미국 보건학회지에 실린 논문을 참고하면,

    미국에서는 3가지 균주(Carney, Navy,

    Devens)에 대한 백신이 제조되었다.33) 배지

    를 멸균하고 3종류의 균주를 접종하여 37℃

    에서 18시간 배양 후 균을 식염수로 부유시

    켜 상층액을 56℃의 물에서 25분간 불활화

    시킨 후 다시 식염수를 이용한 다양한 농도

    의 백신을 제조한다. 예방 목적으로는 0.5%

    백신 1~1.5 cc를 24시간 간격으로 3번 주사

    하고 치료 목적으로는 0.5 cc 용량으로 12시

    간마다 주사했다. 치료 목적으로는 감기 초

    기에 고용량으로 투여 했을 때 효과가 있었

    으며 예후가 불량한 환자에게는 권장되지

    않았다. 스코필드 박사 역시 이와 유사한

    31) F.W. Andrews, The bacteriology of Influenza, Ministry of Health. Reports on the pandemic of

    Influenza 1918-19. London, His Majesty's Stationery;1920. pp.110-126에서 재인용.

    32) 연세의료원 120년사 편찬위원회. 2005. ibid. p.205.

    33) T. Leary. The Use of Influenza Vaccine in the Present Epidemic. The American Journal of

    Public Health, 1918;8(10):754-768. 각 균주는 당시 미국의 대표적인 인플루엔자 유행지에서 수집

    된 것이다. 카네이(Carney) 병원은 1918년 8월 인플루엔자 대유행이 시작한 보스턴 항에 있었으

    며, 매사추세츠 주의 데븐스(Devens) 기지 역시 큰 피해가 있었던 곳이다. 해군병원에서 죄수들을

    상대로 감염실험을 했던 키건 중위(J.Keegan)가 사용한 균주(Navy)도 백신 제조에 이용되었다.

  • 醫史學 제16권 제2호(통권 제31호) 177-191, 2007년 12월

    - 188 -

    방법을 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의학교에서 백신을 제조하고 접종하는 실

    험이 이루어지는 동안, 이미 종두법에 대한

    교육으로 인해 일반인들 역시 백신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추었을 수 있다. 그

    러나 다음 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독감의

    종두법(예방주사)’은 신문기자들에게조차도

    신기한 묘약으로 인식된 듯하다.

    毒感의 種痘法, 한번 쥬로 면다, 미

    국의 신발명

    서반아 감긔라 이번의 돌님감긔

    근쟈에 외인셰계를 흔드러인 젼염병으

    로셔 미국의 동부디방 더구나 늬우욕 시에 지달부터 이달지 렬렬 셰력

    으로 류지라 … 이병은 젼부터잇

    보통 돌님감긔가 안이라 아주 로긴

    누슨균이 침범 열병인 위국에셔

    균연구부댱 비-크 박사 이 돌님감긔를 예방 죵두법을 발견엿다고 발표

    얏 … 환자던지 건강자던지 예방주

    사 … 비-크 박사가 실험야 본 이병균

    은 … 약야 병이들어 고 쟈에게

    도 예방쥬만면 낫다고 무병자에

    게 훌륭게 효력이 잇다더라… 아모쪼

    럭 빗이들고 바람잘통도록 것이 죳

    타며 늬우욕의 위생국에서… 꼭 필요

    경우에는 션풍긔 지랴도 노아셔 공

    긔 잘박구도록 라 게시 붓혓더

    라34)

    1918년 매일신보에는 미국에서 개발한

    ‘돌림 감기 종두법’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뉴욕시의 비크 박사가 누구인지, 어떤 백신

    이었는지 명확하지는 않다. 게다가 볕이 잘

    들고, 환기가 잘 되는 병실환경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환기가 잘되게 해야 한다

    는 위생지침은 세균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장기설(miasma theory)에 의거한 예방법이

    다. 장기설에 의한 예방법이 위생상태를 개

    선한 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실이지만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유행을 막는 데 큰 도

    움을 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일본에서는 1918년 11월 이미 국가의 지

    도 아래 대량으로 인플루엔자 백신이 제조

    되었으며 도쿄에만 33곳의 접종소가 있었

    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 백신을 맞았고

    빈곤자들에게는 무료로 접종했다. 종두법을

    시행하던 접종소가 이 임무를 함께 수행했

    다.35) 당시 한국 내 종두법 접종소가 있기

    는 했지만, 이곳을 통해 유행성 감기 백신

    을 공급했는지는 명백하지 않다.36)

    결 론

    20세기 초 서양식 의료와 교육이 체계를

    갖추면서 한국 내 세균학 연구가 시작되었

    다. 관립 의료 교육기관(의학교, 경성의학전

    문학교 등)에서는 일본을 통해 세균설(germ

    theory)을 기초로 한 전염병학과 세균학의

    기틀이 다져졌다. 일본은 초기 의학자들을

    독일로 유학 보냈다. 기타사토 시부사부로

    (北里柴三郞, 1852-1931)나 시가 기요시(志

    34) 毒感의 種痘法, 한번 쥬로 면다. 매일신보 1918년 11월 20일.

    35) G.W. Rice, E. Palmer, 1993. ibid.

    36) 신동원. 한국근대보건의료사, 서울;한울아카데미;1997. pp.204-218.

  • 천명선·양일석ː1918년 한국내 인플루엔자 양상과 연구현황 : 스코필드 박사의 논문을 중심으로

    - 189 -

    賀潔, 1870~1957)로 대표되는 이들 유학파

    들은 당시 프랑스의 파스퇴르와 함께 세균

    학의 주축을 이루던 코흐의 연구실에서 함

    께 연구했고,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 세균학

    계를 이끌었다. 이들과 함께 당시 일본의

    세균학은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 있었다. 시

    가 기요시는 1920년부터 경성의학전문학교

    장으로 직접 한국의 의학교육에 직접 관여

    했다.37) 식민지 경영에 필수적인 주제에 집

    중되었을 뿐만 아니라 식민통치의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점, 일본인 연구자가 주체가

    되고 조선인은 보조에 불과했다는 점 등이

    문제로 제기되었으나, 조선에서의 세균학

    교육과 연구 수준이 일본과 비교하여 크게

    뒤지지 않았다는 평가는 공평한 듯하다.38)

    선교사들이 세운 의학교에서는 영미권에

    서 교육을 받은 의학자들이 한국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를 진행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본과 미국에 건너가 의학을 공부한 초기

    의 한국 의사들과 선교사들은 세균이 질병

    의 원인이라는 것 그리고 위생적인 환경을

    통해 이 질병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일반

    인들에게 알리고 교육하게 된다.39) 1914년

    세브란스 의학교에 연구부가 설립되었다.

    연구부 초기에는 주로 외국인 선교사 교수

    진을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졌다. 한국전

    통의학이나 한국인들에게 독특한 건강상의

    문제들, 한국인의 음식 등이 주요 관심사였

    다.40) 따라서 주로 기생충이나 위생학적 연

    구들이 많이 이루어졌지만, 스코필드 박사

    는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스페인 독감’

    에 대한 연구를 위해 연구비를 배당 받았

    다. 국내에서도 그 피해가 적지 않았기 때

    문에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연

    구 결과는 미국과 중국의 저널에 각각 게재

    되었다.

    세균학 교수로서 스코필드 박사는 이 논

    문에서 세 가지 결론을 내린다. 인플루엔자

    의 원인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과 파

    이퍼 바실러스와 인플루엔자의 관계에 대한

    의문점, 그리고 다음 실험에서는 여과된 혈

    액이 아니라 객담을 이용한 실험도 수행하

    겠다는 것이다. 다른 과학자들도 객담에서

    는 파이퍼 바실러스가 분리 동정되기는 하

    지만, 혈액에서는 매우 어렵다는 결론을 내

    리고 있었기 때문에 확인 작업이 필요하다

    고 여겼을 것이다.41) 그러나 이후 같은 주

    제로 논문은 다시 발표되지 않았다. 1919년

    3.1 독립운동 이후에 지속적으로 일본 총독

    부의 감시와 통제를 받아오던 스코필드 박

    사는 세브란스 의학교와 4년간의 계약을 마

    치고 1920년 캐나다로 귀국해야 했기 때문

    이다.

    전 세계를 휩쓸었던 1918년 인플루엔자는

    한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19년 3월의

    전국적인 독립운동을 전후로 사회적으로 매

    우 혼란했을 뿐 아니라 국민들은 일본의 본

    격적인 수탈정책으로 인해 이중 삼중의 고

    통을 겪고 있었다. 일본으로부터 도입된 위

    생 시스템이 적용되면서 콜레라와 결핵 같

    37) 사또 고조. 이충호 옮김. 조선의육사. 서울;형설출판사;1993.

    38) 신동원. 몸과 의학의 한국사,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 서울;역사비평사;2004. pp.82-86.

    39) 신동원. 2004. ibid. pp.59-64.

    40) 여인석. 세브란스의전 연구부의 의학연구 활동. 의사학, 2004;13(2):233-250.

    41) Huber, Ueber den Influenza-Bacillus. Medical Microbiology and Immunology, 1893:14(1):454-459.

  • 醫史學 제16권 제2호(통권 제31호) 177-191, 2007년 12월

    - 190 -

    은 전염병에 대한 방역이 시행되었으나 인

    플루엔자 유행에 대해서는 자국에서와 마찬

    가지로, 일본 역시 속수무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식적인 통계자료에서조차도 정

    확한 상황을 파악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는

    없는 상황에서 세브란스 의학교의 세균학

    교수인 스코필드 박사의 보고는 한국 내 인

    플루엔자 발생 상황과 원인체에 대한 연구

    현장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가치

    를 갖는다.

    색인어 : 1918년, 인플루엔자, 한국, 스코

    필드 박사

    투고일 2007. 11. 22. 심사일 2007. 11. 29. 심사완료일 2007. 12. 13.

  • 천명선·양일석ː1918년 한국내 인플루엔자 양상과 연구현황 : 스코필드 박사의 논문을 중심으로

    - 191 -

    = ABSTRACT =

    1918 Influenza Pandemic in Korea: A Review on Dr. Schofield' Article

    CHUN Myung-Sun* and YANG Il-Suk*

    The article “Pandemic influenza in Korea with special references to its etiology,”

    published in JAMA in April, 1919 by Dr. Frank William Schofield, is a valuable material

    reflecting the influenza pandemic situation in 1918 in Korea. It contains the case reports

    of influenza infected patients and the results of the bacteriological experiments.

    Dr. Schofield worked as a bacteriology professor in Severance Union Medical College

    in Seoul from 1916 to 1920. His academic activities are lesser-known than the role of

    contributor of Korean independent movement. However, he was a remarkable

    veterinarian and scientist.

    According to Dr. Schofield, the number of Influenza infected population in Korea in

    1918 was supposed to be 4,000,000 to 8,000,000, which corresponds with other

    resources(6.7 per 1,000 in Gangwon province). Considering the cases which were not

    registered as influenza infection by misdiagnosis of pneumonia complication the sum

    should be higher. However, the estimated crude influenza death rate from the reports by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was only 2.38(per 1,000). Dr. Schofield and his

    colleague tried to culture “Pfeiffer Bacillus” from the sputum and blood specimens of

    patients showing typical influenza symptoms. The bacterium was mistakenly considered

    as the influenza agent till the virological nature of influenza was discovered in the

    1930s.

    From the results of his study he seemed to agree that “filterable virus” was the

    influenza agent and the secondary infection of the bacillus caused respiratory symptoms.

    He also reported on the influenza vaccination during the epidemics. Dr. Schofield's

    article confirms that the damage caused by the influenza outbreak in Korea was as

    great as in other Asian countries or even worse. It also gives information about the

    researches and education on the etiology and vaccination of influenza based on the germ

    theory in the medical colleges in Korea, which adopted the western medical educational

    system in the early 20th century.

    Key Words : 1918, Influenza, Korea, Schofield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Department of Veterinary Physiology, College of Veterinary Medicine, Seoul National

    University, Seoul 151-742,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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