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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권 제3호(통권 제42호) 377-402, 2012년 12월 │377 의사학 제21권 제3호(통권 제42호) 2012년 12월 Korean J Med Hist 21 ː377-402 Dec. 2012 ⓒ대한의사학회 pISSN 1225-505X, eISSN 2093-5609 조선총독부의 우두정책과 두창의 지속 박윤재* 1. 머리말 2. 조선총독부 우두정책의 전개 3. 조선총독부 우두정책의 한계 4. 맺음말 1. 머리말 듣기만 하여도 무서운 천연두.1) 1930년대 중반 식민지 조선의 한 언론은 두창을 이렇게 표현했다. 단어 그 자체만으로도 공포감을 일으키는 질병이 천 연두, 즉 두창이었다. 두창은 전염력이 강할 뿐 아니라 치사율도 높았다. 설 사 목숨을 구한다 해도 얼굴에 곰보자국을 남기는 질병이었다. 아리따운 처 자가 두창으로 인해 평생을 그늘 속에서 보내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두창은 말 그대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1796년 영국 의사 제너에 의해 우두법이 발견되면서 상황은 달라졌 다. 우두 접종을 통해 두창 예방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우두에 대한 신뢰는 높았다. 우두는 완전한 예방법으로 간주되었다. 2)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던 세균학자도 종두에 의한 예방법은 거의 무해하다고 할 정도로 효력은 확실 * 경희대학교 사학과 주소: 서울시 동대문구 회기동 1번지 경희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130-701 전화: 02-961-9271/ 이메일: [email protected] 대한의사학회 The Korean Society for the History of Medicine 1) 천연두환자 안동에서 발견, 東亞日報, 1934년 2월 8일. 2) 加加見鐵太郞, 天然痘に就て, 朝鮮及滿洲153, 1920, 65쪽. 377

조선총독부의 우두정책과 두창의 지속medhist.or.kr/upload/pdf/kjmh-21-3-377.pdfPARK Yunjae : A Study on the Anti-smallpox Policy of Joseon Government-General 382 醫史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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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1권 제3호(통권 제42호) 377-402, 2012년 12월 │377

    의사학�제21권�제3호(통권�제42호)�2012년�12월� Korean�J�Med�Hist�21�ː377-402�Dec.�2012ⓒ대한의사학회� pISSN�1225-505X,�eISSN�2093-5609

    조선총독부의 우두정책과 두창의 지속

    박윤재*

    1. 머리말

    2. 조선총독부 우두정책의 전개

    3. 조선총독부 우두정책의 한계

    4. 맺음말

    1. 머리말

    “듣기만 하여도 무서운 천연두.”1) 1930년대 중반 식민지 조선의 한 언론은

    두창을 이렇게 표현했다. 단어 그 자체만으로도 공포감을 일으키는 질병이 천

    연두, 즉 두창이었다. 두창은 전염력이 강할 뿐 아니라 치사율도 높았다. 설

    사 목숨을 구한다 해도 얼굴에 곰보자국을 남기는 질병이었다. 아리따운 처

    자가 두창으로 인해 평생을 그늘 속에서 보내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두창은

    말 그대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1796년 영국 의사 제너에 의해 우두법이 발견되면서 상황은 달라졌

    다. 우두 접종을 통해 두창 예방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우두에 대한 신뢰는

    높았다. 우두는 “완전한 예방법”으로 간주되었다.2)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던

    세균학자도 “종두에 의한 예방법은 거의 무해하다고 할 정도로 효력은 확실

    * 경희대학교 사학과

    주소: 서울시 동대문구 회기동 1번지 경희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130-701

    전화: 02-961-9271/ 이메일: [email protected]

    ⓒ 대한의사학회 The Korean Society for the History of Medicine

    1) 「천연두환자 안동에서 발견」, 『東亞日報』, 1934년 2월 8일.

    2) 加加見鐵太郞, 「天然痘に就て」, 『朝鮮及滿洲』 153, 1920, 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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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ARK Yunjae : A Study on the Anti-smallpox Policy of Joseon Government-Gene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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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다”고 평가했다.3) 우두는 인류에게 글자 그대로 축복이었다.

    그러나 우두법이 전세계로 확산되던 19세기는 제국주의의 시대이기도 했

    다. 제국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우두는 매력적인 대상이었다. 침략과 지배과

    정에서 우두를 시행함으로써 식민지의 저항을 순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하던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

    제는 조선에 진출하는 초기부터 우두법을 이용하였다.(신동원, 1997: 61) 그

    효과는 분명하였고, 본격적인 식민 지배 과정에서도 우두법은 주요한 의료정

    책으로 기능하였다.

    이 글은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우두정책의 내용을 검토하는 가운데 조선인

    들이 그 정책에 어떻게 반응하였는지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아무리

    효과적인 예방법일지라도 낯선 시술에 반감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하

    지만 조선인들에게 우두법은 단지 낯선 시술을 넘어 식민 국가가 시행하는 정

    책이라는 점에서 거부의 대상이었다. 일본인이 조선인을 박멸하기 위해 우두

    라는 ‘독물’을 주사한다는 풍문이 돌 정도였다.4)

    그러나 당시 최고의 예방법이라는 점에서 우두법은 단순한 거부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조선인들은 총독부가 시행하는 강제 접종을 수용해나갔다. 그

    과정을 지켜본 총독부는 두창의 절멸을 확신했다. 하지만 식민 지배 말기까

    지 두창은 종식되지 않았다. 19세기 주요한 전염병이었던 콜레라가 1920년

    대 이후 거의 종식 상태에 이른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렇다면 같은 급성 전

    염병임에도 불구하고 두창이 콜레라와 다른 경향을 보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은 그 이유를 총독부가 시행한 우두정책의 일방성에서 찾고자 한다.

    일방성은 일제의 식민 지배가 가지는 성격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글은 총독

    부가 지녔던 식민 지배의 성격을 우두정책이라는 소재를 통해 밝히는 작업이

    라고 할 수 있다.

    3) 志賀潔, 「痘瘡の傳染と朝鮮の傳染病に就て」, 『朝鮮及滿洲』 184, 1923, 63쪽.

    4) 「痘瘡及種痘の狀況」, 『警務彙報』 142, 1917, 21쪽.

  • 박윤재 : 조선총독부의 우두정책과 두창의 지속

    제21권 제3호(통권 제42호) 377-402, 2012년 12월 │379

    2. 조선총독부 우두정책의 전개

    1)�1910년�한일병합과�강제�우두접종

    조선을 식민 지배하면서 총독부가 의료분야 중 가장 우선시한 정책은 우두

    였다. “우리나라 위생행정 중 가장 급무는 종두의 보급”이었다.5) 총독부가 파

    악하기에 두창은 거의 풍토병과 같았다. “조선에서 두창은 매년 사계절을 통

    해 각지에 발생하고 때때로 유행상태를 보이기” 때문이었다.6) 따라서 우두를

    시행할 경우 조선인의 건강이 향상될 수 있었다. 과거에 인구 차이가 없던 조

    선과 일본이 식민 지배 초기 1천 3백만과 5천만이라는 3배의 차이를 보인 이

    유도 우두법 시행 유무에 있었다.7) 일본이 19세기 중반부터 우두를 전면적으

    로 실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아니었다.

    총독부는 우두정책을 시행하면서 대한제국 정부가 시행한 방식 중 일부를

    그대로 채용하였다. 1895년 반포된 종두규칙을 인정하였고, 우두시술자로 종

    두인허원을 활용하였던 것이다. 종두규칙은 종두의양성소와 함께 갑오개혁

    정부의 주요 의료정책 중 하나로 반포되었고, 우두법이 전국적으로 확대되

    는 과정에서 종두인허원은 각 지방의 시술인으로 활약하였다.(신동원, 1997:

    169-75, 209-11) 종두의양성소의 졸업생들이 각 지방의 종두의를 인가함으로

    써 지방 차원에서 이루어지던 종두의 양성이 중앙 차원으로 수렴되는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박윤재, 2009: 39-43) 조선이 실시한 거의 모든 정책을 부정

    한 총독부도 우두사업만은 평가하였다. “종두에 대해서는 한국정부도 비교적

    일찍부터 주의를 기울였다”는 평가였다.8)

    달라진 것도 있었다. 강제 접종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졌다. 대한제국도 종

    두규칙을 통해 강제적인 접종을 규정하고 있었지만 현실에서 실질적으로 이

    5) 『韓國衛生一斑』 (內部 衛生局, 1909), 22쪽.

    6) 『朝鮮總督府施政年報(1910)』, 1912, 329쪽.

    7) 「衛生講話」, 『每日申報』, 1910년 12월 11일.

    8) 『朝鮮統監府施政年報(1906-1907)』, 1908, 383쪽. 하지만 우호적인 평가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1910년 시정연보는 대한제국 우두정책을 “그 실적은 거의 볼 것이 없었”다고 평가하

    였다. 『朝鮮總督府施政年報(1910)』, 1912, 330쪽.

  • PARK Yunjae : A Study on the Anti-smallpox Policy of Joseon Government-Gene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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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어지지는 않았다. 우두에 대한 불신이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고, 의료

    인이나 종두인허원이 접종비를 받았던 까닭에 강제력에는 한계가 있었다.(신

    동원, 1997: 212-8) 정부가 강력하게 개입하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총

    독부는 강제 접종을 실시해나갔다.

    총독부에 따르면, 강제 접종은 서양 문명국이 일반적으로 채택하는 정책이

    었다.9) 서양의 국가들이 우두를 강제로 접종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

    지만 처음부터 강제 접종이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우두 도입 초기 접종 대

    상자는 군인이나 피구호자에 국한되었다. 단독(丹毒)이나 매독을 유발할 가

    능성이 있었고, 효과에 대한 의심도 있었다. 우두 그 자체는 아니지만 강제적

    인 접종에 반대하는 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그 결과 1898년 영국은 국민

    에게 양심적인 거부의 권리를 인정하였다. 우두의 안전과 효율에 대한 신뢰

    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서양의 경우 강제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것 역

    시 분명했다.(Harrison, 2004: 92-6)

    그러나 총독부는 논의를 하기보다는 실행을 하고자 했다. 총독부에게 강

    제 접종은 반드시 이루어야할 목표였다. 무엇보다 먼저 조선인의 유치한 위

    생사상 때문이었다. 총독부는 조선인의 위생 인식이 낮은 상황에서 자율이나

    권유로는 우두의 확산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강제력을 쓰지 않

    으면 도저히 보급을 기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경찰이 지휘하는 강제

    접종이 시작되었다.10)

    대한제국의 종두규칙과 달라진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접종 횟수였다. 종두

    규칙은 생후 70일부터 만 1세 사이에 한 번 우두를 접종받도록 규정하고 있

    었다. 하지만 총독부는 우두를 두 번 접종받도록 변경하였다. 접종 시기는 생

    후 90일 이후, 접종 성공 후 5년 이후였다. 처음 받은 우두가 성공적이지 못

    할 경우 다시 접종을 받아야 했다. 재종두 시기가 5년 후인 것도 일본과 달랐

    다. 일본에서는 제1기부터 제2기 사이의 기간을 10년으로 정하고 있었기 때

    9) 『衛生警察講義一斑』 (平安南道 警務部, 1913), 202-3쪽.

    10) 『朝鮮衛生要覽』 (朝鮮總督府, 1929), 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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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1권 제3호(통권 제42호) 377-402, 2012년 12월 │381

    문이다.11) 조선인들 사이에 더욱 강력하게 우두를 보급하려는 의도로 추정된

    다. 접종은 매년 춘추 2회 실시했지만, 두창이 발생한 경우에는 임시 종두를

    시행하였다.12)

    우두는 정해진 일자, 정해진 장소에서 시행되었다. 평소 작성된 호구조사

    부나 특별히 제작된 종두명부에 따라 일시와 장소가 통고되었다. 접종은 의

    료인이나 종두인허원이 하였지만, 지휘는 경찰이 담당하였다. 경찰은 작성된

    명부를 대조하면서 지휘하였고, 경찰의와 공의도 직무의 하나로 우두 접종을

    시행하였다. 종두인허원에게는 급여가 지급되었는데, 강제 접종에 참여시키

    기 위한 조치였다.13) 도시 지역의 경우 경찰의, 다른 지역에서는 공의 또는 종

    두인허원이 시술하는 경우가 많았다. 성공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접종 며칠

    후 종두자를 집합시키거나 집을 직접 방문하여 조사하고 기록을 남겼다.14)

    총독부는 조선인 여성들이 남녀유별이라는 유교 관습 때문에 남성 시술자

    에게 접종받는 것을 기피하자 여성 종두인허원을 육성하였다. 일본인의 경우

    산파, 간호부 자격을 가진 사람 중에서 우두술에 경험이 있는 자, 조선인은 일

    정한 학력을 가지고 2년 이상 간호부 실무에 종사한 사람 중에서 우두술에 경

    험이 있는 자를 채용한다는 방침이 세워졌다.15)

    각 지방에 배치된 일본 경찰의들은 종래 종두인허원을 대체하기도 하였

    다.16) 종두인허원 중에서 기술이 부족하다고 평가된 사람들은 해직되었고, 동

    시에 그들의 기술을 개선시키기 위한 노력도 이루어졌다.17) 기술 개선을 위해

    자혜의원 의사나 촉탁 경찰의가 강습회에 참여하여 종두인허원들을 교육시

    11) 「種痘に關する警務總長訓令」, 『朝鮮彙報』 5, 1919, 157쪽.

    12) 『朝鮮總督府施政年報(1911)』, 1913, 348쪽.

    13) 白石保成, 『朝鮮衛生要義』, 1918, 350쪽.

    14) 「痘瘡及種痘の狀況」, 『警務彙報』 142, 1917, 22쪽.

    15) 『衛生警察講義一斑』 (平安南道 警務部, 1913), 150쪽. 1909년의 경우 일본인 여성 21명, 한

    국인 여성 4명, 총 25명이 여성 종두인허원으로 채용되었다. 『朝鮮總督府施政年報(1909)

    』, 1911, 216-7쪽.

    16) 『朝鮮總督府施政年報(1910)』, 1912, 330쪽.

    17) 『衛生警察講義一斑』 (平安南道 警務部, 1913), 205쪽. 『朝鮮總督府施政年報(1909)』, 1911,

    216-7쪽.

  • PARK Yunjae : A Study on the Anti-smallpox Policy of Joseon Government-Gene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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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켰다.18) 1912년에는 종두인허원들에게 우두 시술 방법, 성공의 감별 방법 등

    을 기술한 『종두시술서 심득』을 배부하였고, 약품기구를 넣는 휴대용 상자를

    제공하여 시술 기구나 약품의 보존에 이용하도록 하였다.19)

    조선인 계몽을 위한 총독부의 노력도 이어졌다. 두창이 발생하면 경찰이

    환자를 방문하여 우두 접종 여부를 조사하고 두창이 대개 미종두자나 접종 후

    오랜 시간을 경과한 사람에게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렸다.20) 1922년에는 우두

    의 효과를 알리기 위해 선전영화를 제작하여 보급하기도 하였다.21)

    2)�1923년�조선종두령�반포와�강제성�강화

    총독부는 강제적인 우두 접종을 시행하면서 결과를 낙관하고 있었다. 이미

    보호국시기부터 강제 접종의 결과에 대한 기대는 높았다. 1910년 보호국시기

    경찰 활동을 정리한 보고서는 “경찰서에서 강제종두를 시행하되 일본의사로

    하게 함으로써 성적이 특히 현저”해졌다고 평가하였다.22)

    강제접종의 효과는 수치상으로도 나타났다. 1910년 병합에 즈음하여 대대

    적으로 우두를 실시한 결과 접종 인원이 122만 명을 넘어섰다. 총 인구에 대

    비하면 약 10%를 점하는 숫자였다.23) 대한제국이 우두를 시행할 당시 매년

    전국적으로 몇 만 명 정도가 접종을 받았음을 고려할 때 수십 배에 달하는 숫

    자였다.(신동원, 1997: 217-8)

    우두 시행이 확대되면서 실제로 두창은 감소하고 있었다. 1913년 발생한

    226명 환자의 대부분은 중국과 인접한 국경지방에서 발생하였고, 기타 각 도

    에서는 1~8명 정도가 발생하는 정도였다. 매년 위생난에 ‘두창’을 별도로 게

    재했던 『조선총독부시정연보』도 1913년판부터 그 구분을 없애 버렸다. 두창

    18) 「衛生」, 『朝鮮總督府月報』 1-5, 1911, 56쪽.

    19) 『朝鮮總督府施政年報(1912)』, 1914, 370쪽.

    20) 『朝鮮總督府施政年報(1911)』, 1913, 348쪽.

    21) 『朝鮮警察の槪要』 (朝鮮總督府 警務局, 1927), 188쪽.

    22) 『顧問警察小誌』 (韓國內部警務局, 1910), 222쪽.

    23) 『朝鮮總督府施政年報(1910)』, 1912, 330쪽.

  • 박윤재 : 조선총독부의 우두정책과 두창의 지속

    제21권 제3호(통권 제42호) 377-402, 2012년 12월 │383

    의 위험이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반증이었다. 1913년 총독부는 “두창은 거의

    절멸에 가까이 갔다”고 평가하였다.24) 강제 접종을 조선보다 일찍 시작했던

    대만총독부도 비슷한 결과를 얻고 있었다. 일본이 대만을 통치한 지 10년 가

    까이 되는 1900년대 초반부터 두창 환자 수가 두 자리에 머무르게 되었다. 대

    만에서 두창은 의미 없는 질병이 되어가고 있었다.(Shepherd, 2001: 275) 강

    제 접종의 효과는 분명해보였다.

    총독부의 기대가 무너진 시기는 1919~20년이었다. 1919년에는 2,140명 환

    자, 700명의 사망자, 다음 해에는 11,532명의 환자, 3,614명의 사망자가 발생

    하였다. 1915~7년 사이에 50명이 채 안 되는 환자, 10명이 안 되는 사망자 수

    에 비하면 놀라운 숫자였다. 이 숫자 역시 축소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통계

    작성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촌락에서 실제 발생한 환

    자 수가 한 군에서 발생했다고 보고된 숫자의 2/3에 달하는 경우도 있었다.25)

    총독부는 두창 환자의 급증 원인을 삼일운동에서 찾았다. 만세 시위가 전

    국적으로 확대되면서 경찰이 진압에 동원되었고, 그 결과 경찰의 다른 업무

    였던 위생활동에 참여할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26) 두창뿐 아니었다. 1919

    년 한국을 침입한 콜레라는 병합 이후 가장 피해를 입히고 있었는데, 총독부

    는 그 이유 역시 삼일운동에서 찾았다. “3월 소요사건으로 인해 각지의 모든

    방역이 거의 멈추게” 되었기 때문이다.27) 삼일운동의 목표가 식민 지배에 대

    한 반대였던 만큼 조선인들도 경찰의 위생업무에 협조하지 않았다. 민심은 명

    백히 동요하고 있었다.28)

    그러나 문제는 다음이었다. 1919~20년은 총독부의 설명처럼 삼일운동에

    따른 결과, 즉 방역에 동원할 경찰 인력의 부족, 방역체계의 이완 등에서 두

    창 유행의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삼일운동의 여파가 가라앉은 뒤인

    24) 『朝鮮總督府施政年報(1913)』, 1915, 213쪽.

    25) 경기도 수원군의 경우가 그랬다. 原親雄, 「種痘の勵行に就て」, 『警務彙報』 180, 1920, 4쪽.

    26) 關水武, 「朝鮮の衛生狀態と傳染病に就て」, 『朝鮮及滿洲』 189, 1923, 33쪽.

    27) 「痘瘡及發疹チフスの流行」, 『朝鮮彙報』 8, 1919, 138쪽.

    28) 原親雄, 「種痘の勵行に就て」, 『警務彙報』 180, 192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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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史學384

    1922년, 1923년에도 각각 3천 명이 넘는 환자가 발생하였고, 1천 명 이상의 사

    망자가 발생하였다. 연속된 두창의 대량 발생은 총독부를 긴장시켰다. 새로

    운 조치가 필요했다. 1922년 간행된 총독부 보고서는 “불비한 점이 많은 종래

    종두에 관한 규칙을 폐지하고 새로이 종두령을 제정하기 위해 현재 성안 심

    의 중”이라는 소식을 전하였다.29) 새로운 법령이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었다.

    1923년 반포된 조선종두령은 총독부가 입안한 새로운 조치였다. 조선종두

    령의 핵심은 종래 2번에 걸쳐 맞도록 되어 있던 우두 접종 횟수를 3번으로 늘

    린 것에 있었다. 제1기는 생후 1년 이내, 제2기는 6세, 제3기는 12세였다. 나

    아가 접종 연령의 제한을 없앴다. “정기 종두를 받지 않거나 종두를 받은 증

    거가 불명확한 자에 대해서는 연령에 관계없이 종두를 행하기”로 한 것이었

    다.30) 두 가지 내용 모두 일본 본국의 종두법과 달랐다. 일본의 우두 접종 횟

    수는 2회였고, 성인은 접종 대상이 아니었다.

    총독부는 종두령 반포의 배경을 우두 접종 횟수의 부족에서 찾았다. 조선

    에서 발생하는 두창 환자 중에서 이미 우두를 접종받은 사람이 접종받지 않

    은 사람보다 많은 경우가 나타나고 있었다.31) 면역기간 역시 일반적인 통례를

    따를 수 없었다. 종두령이 반포되기 전까지는 우두의 면역 기간을 10~12년으

    로 상정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이에 반하는 많은 사례가 발견

    되어 이것을 3기로 나누어 1세, 6세, 12세의 3회로 종두”한다는 것이었다.32)

    그러나 우두의 면역기간이 대체로 5~6년이라는 사실은 종두령 반포 이전

    부터 이미 알려져 있었다. 전염병 전문병원인 순화원의 주임은 우두 면역기

    간이 5~6년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접종 후 2~3년이 지나지 않아 두창에 걸

    리는 경우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면역기간이 예상보다 짧기에 “가능한

    한 매년 종두를 받는 것이 안전하다”는 권고도 이어졌다.33) 면역기간이 5~6

    29) 『朝鮮總督府施政年報(1921)』, 1922, 339쪽.

    30) 「朝鮮種痘令」, 『朝鮮總督府官報』 1923년 4월 2일.

    31) 井野場粂次郞, 「驢痘及驢化牛痘の硏究」, 『警務彙報』 190, 1921, 36쪽.

    32) 村田昇淸, 「種痘に就て」, 『朝鮮及滿洲』 184, 1923, 65쪽.

    33) 加加見鐵太郞, 「天然痘に就て」, 『朝鮮及滿洲』 153, 1920, 67쪽.

  • 박윤재 : 조선총독부의 우두정책과 두창의 지속

    제21권 제3호(통권 제42호) 377-402, 2012년 12월 │385

    년이라는 사실이 이미 알려진 상황에서 다시 면역기간을 거론하는 것은 총독

    부가 두창 만연의 책임을 우두 접종 횟수의 부족에 돌리고 있음을 알려준다.

    나아가 총독부는 일본과 달리 성인도 접종 대상에 포함시켰다. 이유는, 조

    선에는 일본과 달리 성인이 되어도 우두를 한 번도 받지 않은 사람이 적지 않

    았기 때문이다.34) 조선인의 열악한 위생인식을 지적한 것이었다. 결국 종두

    령은 총독부가 위생사상의 부족을 명분으로 접종 횟수를 늘리기 위해 만든

    법령이었다.

    접종 범위를 확대하기 위한 방법도 시도되었다. 매일 직장에 나가야 하는

    노동자를 배려하여 일정한 장소에 소집하는 대신 우두접종반이 가정을 방문

    하는 방식이 채택되었다.35) 활용할 수 있는 의료 인력의 범위를 확대하는 노

    력도 이어졌다. 경찰의, 공의 등 기존에 활용하던 의료인의 범위를 관립병원

    의사, 나아가 개원하고 있는 의사로까지 확대하였다. 그 결과 경성제국대학

    이나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재직하는 의료인, 도립의원 의사가 종두반으로 동

    원되었다.36) 한성의사회나 용산의사회와 같은 의사회에 우두가 무료로 지급

    되었고, 각 사립병원 의사들은 우두접종 참여를 권유받았다.37)

    우두 접종에 참여하는 의료인의 범위가 확대되는 경향과 함께 일반 지방조

    직의 개입 범위도 확장되었다. 종두령이 반포되면서 우두접종 비용을 부면(

    府面)에서 부담하게 되었다. 두묘를 포함한 기타 잡비의 지불 주체가 경찰에

    서 부면을 포함한 지방 조직으로 변경된 것이었다.38) 이전에는 지방조직, 예

    를 들면 부는 경비의 일부분을 지출할 뿐이었다.39) 1919년 문화정치 이후 일

    반 지방조직이 경찰을 대신하여 일부 위생행정을 담당하기 시작한 경향과 함

    34) 大久保利政, 「朝鮮種痘令に就て」, 『警務彙報』 227, 1924, 59쪽.

    35) 「가가호호 방문」, 『東亞日報』, 1932년 5월 14일.

    36) 「천연두 창궐」, 『東亞日報』, 1931년 3월 8일. 「천연두의 폭위(暴威) 익급(益急)」, 『東亞日報』,

    1933년 2월 18일.

    37) 「거익(去益) 만연하는 천연두」, 『東亞日報』, 1933년 2월 23일. 「안성에 천연두 환자」, 『朝鮮

    日報』, 1940년 1월 21일.

    38) 太田資生, 「種痘の話」, 『警務彙報』 218, 1923, 33쪽.

    39) 『京城府衛生施設槪要』 (京城府衛生課, 1928), 7쪽.

  • PARK Yunjae : A Study on the Anti-smallpox Policy of Joseon Government-General

    │ 醫史學386

    께 중앙의 재정 부담을 축소하려는 총독부의 의향이 반영된 결과로 보여진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우두 접종이 다른 위생행정과 마찬가지로 경찰 중심으

    로 진행된다는 점에는 차이가 없었다. 지방조직의 경비 부담에도 한계가 있

    었다. 재정이 충분하지 못한 상황에서 방역을 위한 예산 투여는 용이하지 않

    았다.40) 원칙적으로는 부면이 경비를 부담하지만 우두 시행과 결과의 정리 능

    력, 경비부담 능력 등을 고려하여 부나 지정면 이외에는 종래대로 경찰이 경

    비를 부담하였다.41) 그 이유는 경찰이 더 효율적으로 우두를 확산시킬 수 있

    다는 인식에 있었다. 지방조직이 진행한 우두 접종보다 “경찰관서에서 시행

    하는 쪽이 양호한 결과”를 낳는다는 인식이었다.42) 경찰이 우두 시행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면, 경찰이 우두 접종에 매진

    하는 사이에 치안 단속이 소홀해져 도굴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

    을 정도였기 때문이다.43)

    그러나 우두 접종이 경찰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강제성은 더욱 강화되었다.

    접종 예정자에게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공지하여 접종을 실시하는 수준을 넘

    어 미종두자를 적극적으로 파악하는 활동이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우체국

    이나 공회당 같은 시내의 주요 건물에 일종의 감시소를 설치하고 행인들의 접

    종 여부를 확인한 후 미종두자는 경찰서로 보내져 우두를 맞았다.44) 경찰이

    호별 방문을 통해 일일이 종두증을 검사하고 미종두자가 발견되면 역시 경찰

    서에 보내 우두를 접종받도록 하였다.45) 우두를 맞지 않은 경우는 다른 지역

    으로 통행이 금지되었다.46) 철저한 확인을 위해 비밀 조사원을 파견하기도 하

    였다.47) 접종 여부를 보다 철저히 파악하기 위한 조치였다.

    40) 「천연두 만연」, 『東亞日報』, 1931년 5월 24일.

    41) 關水 衛生課長, 「朝鮮種痘令と健康診斷又は檢診に要する費用負擔の府令廢布に就て」, 『警務

    彙報』 216, 1923, 16쪽.

    42) 大久保利政, 「朝鮮種痘令に就て」, 『警務彙報』 227, 1924, 60쪽.

    43) 「금강산 대화(大火)를 계기로」, 『東亞日報』, 1940년 1월 4일.

    44) 「창궐하는 천연두」, 『朝鮮日報』, 1939년 12월 22일.

    45) 「북청 두역 예방진」, 『朝鮮日報』, 1940년 1월 14일.

    46) 「천연두 칩입 방지코저」, 『東亞日報』, 1939년 12월 31일.

    47) 「대전 천연두」, 『東亞日報』, 1933년 2월 26일.

  • 박윤재 : 조선총독부의 우두정책과 두창의 지속

    제21권 제3호(통권 제42호) 377-402, 2012년 12월 │387

    미종두자에게는 범칙금이 부과되었다. 우두를 접종하지 않은데 대한 처벌

    이었다. 범칙금은 적발된 후 강제 접종을 받더라도 부과되었다. 두창에 걸린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미종두 상태에서 두창에 걸리면 범칙금을 냈고 심지

    어 완쾌 후 구속되는 경우도 있었다.48)

    종두령의 반포로 접종 횟수가 3회로 증가되었고, 강제성은 더욱 강화되었

    다. 종두령이 반포된 다음 해인 1924년 두창 환자 수는 439명이었다. 전년도

    3,722명에 비해 거의 9배 가까이 감소된 숫자였다. 하지만 1915~17년 사이의

    50명 미만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총독부 보고서는 1910년대와 같은 성

    급한 낙관보다는 조심스러운 견해를 내놓았다. 1923~4년 사이 “상당한 환자

    가 발생하여 병독을 절멸시키는데” 이르지 못했지만, 절멸을 위해 “계속하여

    방역을 진행 중에 있다”는 보고였다.49)

    총독부의 절제된 평가는 현명한 것이었다. 1930년을 넘으면서 두창 환자

    수는 다시 1천 명을 넘어섰다.50) 1932년 다시 두창이 유행하는 상황을 맞이

    하여 총독부 위생과장은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진실로 한심하기 그지 없

    다.”51) 우두라는 '완벽한' 예방법을 가지고도 두창을 절멸시키지 못하는 상

    황에 대한 탄식이었다. 두창 유행은 끊이지 않아 1940년 환자 3,265명, 1941

    년에는 4,720명이 발생하였다. 총독부의 통계가 확인되는 마지막 해인 1942

    년 두창 환자 수는 1,600명이었다. 식민지 말기까지 두창은 조선에서 절멸되

    지 않았다. 좀 더 기대를 낮춘다 해도, 적어도 1910년대 수준으로도 격감되

    지 않았다.

    48) 「두창환자 은닉한 십삼명에 벌금형」, 『東亞日報』, 1935년 4월 7일. 「경성역에 천연두」, 『東

    亞日報』, 1940년 1월 18일.

    49) 『朝鮮總督府施政年報(1925)』, 1927, 371쪽.

    50) 1930년 1,418명, 1931년 1,376명, 1932년 2,787명, 1933년 4,928명이었다.

    51) 西龜三圭, 「天然痘に就て」, 『朝鮮及滿洲』 294, 1932, 91쪽.

  • PARK Yunjae : A Study on the Anti-smallpox Policy of Joseon Government-General

    │ 醫史學388

    3. 조선총독부 우두정책의 한계

    1)�불완전한�위생사상과�민적

    식민지 조선에서 두창이 격감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발병한 이유를 총독부

    의 우두정책에서 찾는다면, 우선 기대만큼 높지 않은 접종률이 있었다. 총독

    부의 접종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두는 충분히 시행되지 않고 있었다. 종두령

    이 반포되기 전인 1920년 통계에 따르면, 두창 환자 중 규정된 제2기 종두까

    지 완료한 사람은 63.8%에 지나지 않는다.52) 36%가 넘는 사람들이 총독부가

    지정한 우두 접종을 받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1930년대 통계에 따르면, 총독

    부의 행정력이 가장 깊숙이 침투한 경성부조차 접종 예정자 중 70%의 사람

    만이 춘추 정기 종두에 참여할 뿐이었다. 성공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검두(檢

    痘)에 오는 사람은 그 중 다시 반이었다. 두창이 유행할 때마다 임시종두를 시

    행하고 있었지만,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같은 사람들이었고, “오

    지 않는 사람은 어느 때라도 오지 않았다.”53) 상대적으로 행정력이 덜 미치는

    지방의 경우 미종두자의 비율은 더 높을 수밖에 없었다.

    미종두자는 두창 유행의 원인이었다. 1932년 강원도 통계에 따르면 1월부

    터 4월까지 발생한 환자 538명 중 미종두자가 204명이었다. 총 환자의 37%가

    미종두자였던 것이다. 전체 환자 중 정기 종두까지 미종두 상태에 놓이기 마

    련인 2세 이하 유아 환자 118명을 제외한다고 해도 15%의 환자가 미종두자였

    다.54) 총독부 위생 담당자는 두창 환자의 “대부분은 미종두자 또는 종두 후 꽤

    연수가 경과한 자”라고 파악하고 있었다.55)

    총독부는 접종률이 높지 않은 원인을 조선인의 유치한 위생사상에서 찾

    았다.56) 총독부에 따르면, 조선인들은 두창을 평생 한번은 반드시 겪어야 하

    52) 原親雄, 「種痘の勵行に就て」, 『警務彙報』 180, 1920, 7쪽.

    53) 荻野正俊, 「種痘の話」, 『朝鮮及滿洲』 304, 1933, 102-3쪽.

    54) 西龜三圭, 「天然痘に就て(續)」, 『朝鮮及滿洲』 295, 1932, 51쪽.

    55) 西龜三圭, 「天然痘に就て」, 『朝鮮及滿洲』 295, 1932, 51쪽.

    56) 原親雄, 「種痘の勵行に就て」, 『警務彙報』 180, 1920,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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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1권 제3호(통권 제42호) 377-402, 2012년 12월 │389

    는 질병으로 생각하여 어떤 예방법도 강구하지 않고 있었다.57) 만일 두창으

    로 집안 식구가 사망하면 사체를 나무 위에 걸어 두는 관습도 있었다. 심지

    어 시체를 오랫동안 집안에 두고 친척이 모여 음식을 함께 먹는 풍습조차 있

    었다.58) 다음은 조선인들의 두창 문화에 대해 총독부가 가지고 있었던 대표

    적인 의견이었다.

    두창은 조선에서 거의 지방병적인 모습을 보이고 고래부터 사

    계절을 통해 각지에서 발생한다. 매년 다소의 유행을 보지 않은 적

    이 없으니 실로 문명의 일대 치욕이다. 그렇지만 위생사상이 매

    우 유치한 조선인 사이에서는 두창이 전염병이라는 것을 이해하

    는 자가 적고 두창의 효력을 이해하는 자도 매우 적어 관으로부터

    종두 시행의 명령을 받아도 다만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피하는 풍

    습이 있다.59)

    두창에 대한 인식도 없고, 우두에 대한 이해도 없다는 비판이었다. 위생사

    상이 유치한 조선인들은 두창을 예방할 수 있는 우두를 맞지 않고 도망가기

    일쑤였다.60) 설령 우두를 접종했더라도 곧 그 자리를 소금으로 문질러 씻어

    내는 사람도 있었다.61) 민중의 무지로 인해 우두 접종이 철저하게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낳는 정황이었다.62) 미종두자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두

    창이 발생할 경우 전염의 속도나 규모는 빠르며 넓었고, 방역은 쉽게 이루어

    질 수 없었다.

    조선인들이, 특히 민중들이 열악한 위생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지적은 총

    독부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선의 지식인, 예를 들면, 조선의 언

    론 역시 민중의 부족한 위생의식을 지적하고 있었다. 민중은 우두법이 발견

    57) 『朝鮮總督府施政年報(1918-1920)』, 1922, 285쪽.

    58) 「痘瘡及種痘の狀況」, 『警務彙報』 142, 1917, 21쪽.

    59) 『朝鮮衛生事情要覽』 (朝鮮總督府, 1922), 43쪽.

    60) 大久保利政, 「朝鮮種痘令に就て」, 『警務彙報』 227, 1924, 57쪽.

    61) 太田資生, 「種痘の話」, 『警務彙報』 218, 1923, 31쪽.

    62) 西龜三圭, 「天然痘に就て」, 『朝鮮及滿洲』 295, 1932, 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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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醫史學390

    되기 전에 만들어진 풍습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었다. 두창을 예방한다는 이

    유로 개를 잡아 먹었고, 마마신은 피를 무서워 한다고 생각하여 개의 피를 문

    앞에 흘려놓았다.63) 두창을 일으키는 마마신을 속이기 위해 방아를 시체로 가

    장하여 거꾸로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64) 신체는 부모에게서 받은 소중한 것

    이라는 유교적 구습에 젖어 “더러은 균을 깨끗한 몸에 너허서 내 몸을 더럽힐

    수 없다는 이유로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었다.65) 지식인들은 문명의 혜

    택을 받은 기독교 신자나 초등학교의 교사조차 이런 구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탄식했다.66)

    조선의 지식인들에 따르면, 민중들은 미개하고 어리석은 풍속을 유지하기

    보다 총독부의 방역정책에 순종해야했다. 두창 환자가 발생하면 즉시 경찰서

    에 신고하고 필요한 방역 조치를 요구해야 했다.67) 언론은 조선인을 위생관

    념 소유 여부로 구분하기도 하였다. 위생의식이 없는 집의 경우 경찰의 단속

    을 귀찮아 하면서 비밀리에 환자 치료를 시도하는 반면, 위생사상이 있는 사

    람들은 “당국의 엄중한 조사를 희망”하였다.68) 한 의사는 조선 민중의 열악한

    위생의식을 생각하면 ”무의식 간에 한심이 나오며 조선의 위생은 언제나 발

    전”이 되는가 하는 비감에 젖는다고 고백하였다.69)

    위생의식의 개선을 위해 필요한 일은 계몽이었다. 우두의 효과를 이해하

    지 못하고 있는 ‘무식자’를 계몽해야 했다.70) 총독부가 그렇듯이 조선의 지식

    인들에게도 민중은 미개하고 야만적인 존재였다. 계몽의 대상이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계몽이라는 입장에서는 총독부와 같은 곳에 서있었다.

    63) 「문전 혈흔을 주의」, 『朝鮮日報』, 1923년 2월 20일.

    64) 「천연두 창궐」, 『朝鮮日報』, 1932년 12월 4일. 「천연두 거익(去益) 창궐」, 『朝鮮日報』, 1933년 2

    월 26일.

    65) 「끄칠줄 모르는 천연두」, 『東亞日報』, 1940년 2월 5일.

    66) 「천연두 예방에 개를 잡아먹어」, 『朝鮮日報』, 1932년 5월 22일.

    67) 「가소로운 천연두 예방법」, 『朝鮮日報』, 1932년 5월 22일.

    68) 「파주에도 천연두」, 『東亞日報』, 1921년 5월 14일.

    69) 고영순(高永珣), 「근일 류행하는 천연두에 대한 아동에게 조심할 점」, 『朝鮮日報』, 1932년 5

    월 6일.

    70) 「천연두의 만연」, 『東亞日報』, 1932년 5월 4일.

  • 박윤재 : 조선총독부의 우두정책과 두창의 지속

    제21권 제3호(통권 제42호) 377-402, 2012년 12월 │391

    그러나 조선의 지식인들은 위생사상의 유치함만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총

    독부의 위생행정을 비판했다. 위생을 담당하고 있는 총독부가 책임을 다하

    고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비판이었다. 근절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두창은 지

    속적으로 창궐하고 있고, 이런 상황은 결국 조선이 미개 정치 아래 있기 때

    문이 아니냐며 공격하였다. 한 언론은 총독부가 사무적 근성을 가지고 있다

    고 비판하였다. 전염병 관련 조사나 방역작업을 근무 시간에만 시행한다는

    비판이었다. 한마디로 태만하다는 비판이었다.71) 위생사업을 자신의 치적으

    로 자랑하던 총독부는 스스로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가일층 노력을 할 필

    요가 있었다.72)

    그러나 단기적인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현실적으로

    우두 접종 대상지역이 광범위할 경우 단 한 번의 통지로 접종 대상자들을 지

    정된 장소에 모으기는 쉽지 않았다.73) 나아가 총독부는 각 개인의 신상을 파

    악한 민적(民籍)이 완벽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였다. “조선에 민적부 정리가

    완전하지 않다”는 점이 두창 박멸로 나가는 길에 장애물로 서있다는 지적이

    었다.74) 구체적으로 종두자와 두창 감염 여부에 관한 조사 정리가 부족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75)

    1923년 반포된 조선종두령 시행규칙에 따르면, 부윤이나 면장은 매년 3월

    과 8월에 요종두자명부(要種痘者名簿)를 만들고 대상자의 종두 여부, 성공 여

    부 등을 기재해야 했다. 접종 대상자가 본적이나 주소를 이전했을 때는 변동

    사항을 이전지 부윤이나 면장에게 통지해야 했다.76) 하지만 민적이 정리되지

    않음에 따라 종두자의 명부 정리에 결점이 생겼다. 가장 중요한 접종 대상자

    인 신생아의 출생 신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출생신고서를 본적지에

    71) 「천연두 거익(去益) 창궐」, 『東亞日報』, 1933년 2월 23일.

    72) 「천연두의 만연」, 『東亞日報』, 1932년 5월 4일.

    73) 『朝鮮衛生要覽』, 朝鮮總督府, 1929, 103쪽.

    74) 村田昇淸, 「種痘に就て」, 『朝鮮及滿洲』 184, 1923, 65쪽.

    75) 「경무국장 지시」, 『朝鮮日報』, 1923년 8월 6일.

    76) 「朝鮮種痘令施行規則」, 『朝鮮總督府官報』 1923년 5월 23일.

  • PARK Yunjae : A Study on the Anti-smallpox Policy of Joseon Government-General

    │ 醫史學392

    만 제출하고 부읍면에는 제출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소위 무적자(無籍者)

    들이 다수 존재하였다. 주소를 이동하고 신고서를 제출하지 않음에 따라 거

    주등록부에 등재되지 않는 사람들도 다수 발생하였다.

    신상 파악을 어렵게 만드는 다른 요인으로는 부랑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민적으로 파악할 수 없었다. 주거지를 이동하며 생활하기 때문에 완전한 우

    두 접종과 발병 파악이 불가능했다.77) 1923년부터 1927년까지 이루어진 경성

    부의 종두성적표를 보면 접종 대상자 중 1/3이 이동과 거주지 불명으로 인한

    행방불명자로 밝혀졌다.78) 실질적인 접종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장부에 적지

    않게 포함되었던 것이다. 총독부 위생과에서는 완벽한 ‘요종두자명부’ 작성을

    위해 부읍면과 경찰서가 긴밀히 협조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였다.79) 하지만

    일반적으로 요종두자명부가 부읍면의 호적부나 거주등록부만으로 제작되는

    상황에서 “상당히 다수의 탈루자가 있음”은 분명했다. 부실한 민적은 종두율

    을 낮추고, 따라서 두창을 지속시키는 주요 원인이었다.

    2)�불완전한�우두기술과�효과

    민적부가 완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우두를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해서는

    접종 대상자의 협력이 필요했다. 한 언론의 지적처럼 “민간의 협력이 업시 그

    신속한 주효(奏效)를 바라기 극히 곤란”했다.80) 콜레라와 같은 급성 전염병

    은 1920년대부터 거의 종식에 가까운 상태를 유지하였고, 그 배경에는 경찰

    이 주도하는 강제적인 검역이 있었다.(Park, 2010: 164-5) 콜레라는 환자의

    분비물을 통해 전파된다는 점에서 검역을 통해 한반도 상륙을 제어하고 전

    파를 차단할 수 있었다. 즉, 콜레라는 강제적인 방역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

    는 질병이었다.

    77) 西龜三圭, 「天然痘に就て」, 『朝鮮及滿洲』 295, 1932, 51쪽. 「인천의 천연두」, 『東亞日報』,

    1935년 8월 4일.

    78) 『京城府衛生施設槪要』 (京城府衛生課, 1928), 8쪽.

    79) 本府 衛生課, 「朝鮮に於ける昭和六年種痘成績に就て」, 『警務彙報』 315, 1932, 121쪽.

    80) 「두역의 만연과 그 예방」, 『朝鮮日報』, 1940년 1월 9일.

  • 박윤재 : 조선총독부의 우두정책과 두창의 지속

    제21권 제3호(통권 제42호) 377-402, 2012년 12월 │393

    식민지시기 동안 지속적으로 발병했던 급성 전염병에 장티푸스가 있었다.

    장티푸스는 식민지 말기에 이르면서 오히려 환자 수가 증가하고 있었다. 식민

    지시기 “한국 전염병의 왕좌를 차지하는 전염병”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

    다.(全鍾暉, 1965: 18) 장티푸스는 발병 초기 다른 열성 질병과 혼동되기 쉽고

    경증 환자도 많았다.81) 확진까지 일정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병독이 확산

    될 위험성도 많았다.82) 장티푸스는 방역이 어려운 질병이었다.

    그러나 장티푸스의 유행을 방역의 어려움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장티푸스

    의 근본적인 예방을 위해서는 상하수도 설비의 개선이 필요했다. 장티푸스균

    이 주로 물을 통해 전파되기 때문이었다.83) 장티푸스를 방어하기 위해 상하수

    도 시설의 보완과 같은 기반시설의 정비가 필요했듯이 두창도 기반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 기반은 가장 효과적인 방역수단인 우두 접종의 비율을 높

    이기 위한 조선인의 협조였다.

    그러나 종두자의 동의나 협력을 얻기 위해서 총독부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

    은 적지 않았다. 총독부는 조선인들의 자발적인 협조를 얻기 위해 계몽에 나

    섰다. 지배 초기부터 “경찰관 기타 담당원이 간절히 미신을 훈계하고 백방 종

    두 효과를 설명”하는 등 계몽을 위해 노력했다.84) 민중 설득을 위해 조선의 지

    식인들도 나섰다. 언론은 우두만 접종하면 두창은 완전히 피할 수 있다고 독

    자들을 설득했다.85) 두창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은 우두가 유일했고, 따라서

    정기 접종이 공시되면 의심하거나 지체하는 일 없이 그 지시를 따라 우두를

    맞아야 했다.86) 특히 두창이 유행할 징조가 보이면 접종한 시일이 오래된 사

    람들은 설사 건강하더라도 자진해서 우두를 맞아야 했다.87)

    나아가 조선인들의 위생사상은 점차 개선되고 있었다. 이미 1910년대 초

    81) 『朝鮮衛生事情要覽』 (朝鮮總督府, 1922), 40쪽.

    82) 『朝鮮警察の槪要』 (朝鮮總督府 警務局, 1927), 189쪽.

    83) 白石保成, 『朝鮮衛生要義』, 1918, 262쪽.

    84) 『朝鮮總督府施政年報(1918-1920)』, 1922, 286쪽.

    85) 「천연두 우(又) 만연」, 『東亞日報』, 1922년 6월 18일.

    86) 「천연두의 유행」, 『東亞日報』, 1940년 1월 12일.

    87) 「시내 천연두 거익(去益) 창궐」, 『東亞日報』, 1922년 2월 17일.

  • PARK Yunjae : A Study on the Anti-smallpox Policy of Joseon Government-General

    │ 醫史學394

    반부터 우두 접종을 자원하는 조선인이 증대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총

    독부에 의해 내려지고 있었다. “일찍이 종두를 기피하던 일부 조선인도 관헌

    의 계발에 의해 나아가 그것을 희망하는 경향”이 생기고 있다는 평가였다.88)

    우두의 효과를 인식한 조선인들은 위생 담당자에게 인력 충원을 요구했다. “

    예방종두기술원 다수를 채용하야 시급히 종두 시행하기를 갈망”하였다.89) 접

    종이 공지되면 접종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 들어 시술소가 대혼잡을 이

    루기도 했다.90) 1932년 통계에 따르면, 요종두인원에 대한 미종두자 백분비

    가 일본인은 23.4, 조선인은 9.2였다.91)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우두 성적이 우

    수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두 접종을 꺼리게 만드는 요소들이 있었다. 우선 우두 기술이 완

    전하다고 할 수 없었다. 서양에서도 처음부터 우두 기술에 대한 신뢰가 높았

    던 것은 아니다. 우두 기술은 지속적으로 개선되었고, 그 결과 19세기 말이 되

    서야 인두가 아닌 우두만의 접종이 이루어졌다.(Huerkamp, 1985: 630) 조선

    에 우두법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던 바로 그 시기였다. 서양에서 개량된 기술

    이 일본을 통해 조선에 수입되었다고 해도 숙련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우두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우두 기술이 중요했다. 종두침 소독, 두묘

    보관, 접종 수, 접종법, 접종 부위 건조 등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92) 하지

    만 총독부가 판단하기에 접종에 참여하는 의생이나 종두인허원은 기능이 불

    충한 경우가 많았고, 그 결과 조선에서는 일본과 달리 제1기의 실패율이 매

    우 높았다.93) 아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1930년부터 1939년까지 경상북도에

    서 시행된 우두의 성공율은 90%를 넘지 않았다. 80%가 안되는 해도 두 번이

    나 있었다.

    88) 『朝鮮總督府施政年報(1912)』, 1914, 369쪽.

    89) 「천연두 만연」, 『東亞日報』, 1925년 3월 13일.

    90) 「만연중의 천연두」, 『東亞日報』, 1939년 12월 6일.

    91) 本府 衛生課, 「朝鮮に於ける昭和六年種痘成績に就て」, 『警務彙報』 315, 1932, 120쪽.

    92) 西龜三圭, 「天然痘に就て」, 『朝鮮及滿洲』 295, 1932, 52쪽.

    93) 太田資生, 「種痘の話」, 『警務彙報』 218, 1923, 31-2쪽.

  • 박윤재 : 조선총독부의 우두정책과 두창의 지속

    제21권 제3호(통권 제42호) 377-402, 2012년 12월 │395

    표1.1930-39년경상북도우두접종성공률

    1930 1931 1932 1933 1934 1935 1936 1937 1938 1939

    접종

    인원224,236 250,702 248,354 962,219 260,290 244,375 285,206 287,717 303,244 297,888

    선감 195,278 205,923 217,227 718,122 221,287 209,980 247,288 249,302 262,223 237,237

    선감

    비율87.08 82.13 87.46 74.63 85.01 85.96 86.70 86.64 86.47 79

    (『慶北衛生の槪要(昭和14年度)』, 慶尙北道 警察部, 1940, 47-8쪽)

    우두를 맞은 일본인의 경우 처음에 성공률이 높고 횟수가 증가할수록 그

    비율이 낮아지는데 반해 조선인은 그런 경향이 매우 미미했다. 총독부는 그

    이유를 조선인 접종을 담당한 의생, 종두시술생 등이 검진을 하면서 오진했

    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알레르기 반응을 성공이라고 오진할 정도로 기술

    이 미비함에 따라 처음에 성공하는 비율이 낮다는 지적이었다.94) 의생 중에

    는 두창을 종기로 판정하는 경우까지 있었다.95) 총독부가 판단하기에, 한의

    학을 전공한 의생이나 단순 기술 습득자에 불과한 종두시술생들은 신뢰의 대

    상이 될 수 없었다.

    나아가 접종 방법이 미숙하여 피접종자가 고통을 느끼는 경우도 있었다.

    외국의 경우 접종 당시 받는 고통으로 인해 종두자들이 접종을 거부했던 사

    실이 있었던 만큼,(Harrison, 2004: 96) 미숙한 기술로 인해 생긴 고통은 우두

    를 혐오하고 회피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었다.96) 우두기술의 미숙은 우

    두정책을 담당하던 실무자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조선에서 실

    시되고 있는 종두시술은 유감의 점이 없지 않음으로 시술자 각자의 자각이

    필요하다.”97)

    94) 本府 衛生課, 「朝鮮に於ける昭和六年種痘成績に就て」, 『警務彙報』 315, 1932, 122쪽. 1923

    년 조선종두령이 공포되면서 종두인허원의 명칭이 종두시술생으로 변경되었다. 『朝鮮衛生

    要覽』 (朝鮮總督府, 1929), 42-3쪽.

    95) 「영주지방에 천연두 발생」, 『東亞日報』, 1936년 2월 16일.

    96) 「경무국장 지시」, 『朝鮮日報』, 1923년 8월 6일.

    97) 本府 衛生課, 「朝鮮に於ける昭和六年種痘成績に就て」, 『警務彙報』 315, 1932, 120쪽.

  • PARK Yunjae : A Study on the Anti-smallpox Policy of Joseon Government-General

    │ 醫史學396

    그러나 조선인들이 우두 접종을 꺼렸던 이유에 단순히 미숙한 접종 기술만

    있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미숙한 기술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언론에는 우두를 불신하게 만드는 상황들이 보도되고 있었다. 우두 접종을 받

    았음에도 불구하고 두창에 감염되었다는 보도였다. 우두를 두 번이나 맞아 양

    쪽 팔에 우두 자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창에 걸리는 사례가 있었고, 모두

    4차례에 걸쳐 접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두창에 걸렸다는 보도도 있었다.98)

    1932년 함경남도 통계에 따르면, 2,789명의 환자 중 여러 차례 우두를 접종한

    사람의 숫자가 189명이었다.99) 전체 환자의 6%에 해당하는 인원이었다. 두창

    감염의 원인이 면역력의 약화나 환자와 빈번한 접촉 등에 있다고 설명되기도

    하였지만,100) 우두 효과에 대한 의심이 생길 수 있었다.101)

    나아가 두창의 치료책이 존재하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우두는 예방법이

    지 치료책이 아니었다. 우두가 뛰어난 예방 효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기

    도 했지만, 두창 방역에서 우두 이외의 방법은 개발되지 않았다. 치료책이 없

    음에 따라 환자에 대해서는 주로 격리 조치가 취해졌다. 감염의 경로를 차단

    하기 위한 조치였다. 필요한 조치였다. 원인과 계통이 불분명한 두창이 유행

    하는 이유는 환자 은닉에 있었다.102) 하지만 격리시설은 부족했고, 불완전했

    다.103) 가족들이 단순히 위생사상이 부족했기 때문에 환자를 은닉한 것은 아

    니었다. 치료법이 존재하지 않은 상황에서 격리는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었

    다. 따라서 가족들은 환자를 숨겼고, 함께 도망을 가기도 하였다.104) 가족을

    98) 「남원 천연두」, 『東亞日報』, 1927년 4월 26일. 「입원환자에 두창」, 『東亞日報』, 1940년 1월 19

    일.

    99) 미종두자는 990명이었다. 「우두를 너어라」, 『朝鮮日報』, 1933년 9월 15일.

    100) 「서평양 기림리에 천연두 만연」, 『朝鮮中央日報』, 1936년 6월 13일.

    101) 역사적인 자료에 근거해볼 때, 두창 백신의 경우 백만 명당 2명 사망, 52명 치명적 합병증,

    900명 약한 합병증이 나타났다. 2003년 이라크전쟁을 시작하기 전 미국의 부시행정부가

    추진한 대규모 두창 백신계획이 철회된 이유도 접종자에게 심장 근육 발열이라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합병증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Kurt Link, The Vaccine Controversy: The History, Use, and Safety of Vaccinations (Westport: Praeger, 2005), pp. 43-7.

    102) 「시민 십오만명에 종두」, 『朝鮮日報』, 1923년 1월 28일.

    103) 「천연두 거익(去益) 창궐」, 『東亞日報』, 1933년 2월 23일.

    104) 「천연두 환자 탈주 소동」, 『朝鮮日報』, 1933년 2월 16일.

  • 박윤재 : 조선총독부의 우두정책과 두창의 지속

    제21권 제3호(통권 제42호) 377-402, 2012년 12월 │397

    두창으로 확진한 의료인을 폭행하거나 살해하고자 한 이유도 격리에 대한 두

    려움에 있었다.105)

    미숙한 우두 기술, 우두 효과에 대한 불신, 불완전한 격리 시설 등 조선인

    의 자발적인 우두 접종을 가로막는 요소들은 여럿 존재하였다. 한국 우두법

    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지석영은 1908년 강제적인 우두 접종을 비판했다. 피

    접종자의 입장에서 볼 때 낯선 이방인이 갑자기 종두인허원이라 칭하며 강제

    로 우두를 접종하고자 할 때 누가 즐거이 접종을 받겠느냐는 비판이었다.106)

    이 비판은 우두법에 대한 불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설명과 설득이 필요했

    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총독부가 조선인들과 함께 우두를 불신하게 된 원인

    들에 대해 논의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런 논의가 공개되

    지는 않았다.

    4. 맺음말

    식민 지배 초기 조선총독부가 가장 우선시한 의료정책은 우두였다. 총독부

    는 1895년 반포한 종두규칙을 인정하고, 우두시술자로 종두인허원을 활용하

    는 등 대한제국 정부가 시행한 방식 중 일부를 그대로 이용하였다. 기술이 부

    족한 종두인허원은 도태시키고 여성 종두인허원을 육성하는 등 우두정책의

    개선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하지만 총독부 우두정책의 특징은 강제 접종

    에 있었다. 접종의 지휘도 경찰이 담당하였다. 접종 횟수는 2회로 늘어났다.

    1910년대 총독부의 우두정책이 시행되면서 두창은 줄어들었다. 총독부는 두

    창의 절멸까지 전망하였다.

    그러나 1919년을 계기로 두창은 다시 증가하였다. 총독부는 그 원인을 종

    105) 「모친 두창 신고햇다고 의생에게 폭행」, 『東亞日報』, 1936년 5월 24일. 「두창으로 진단해」,

    『朝鮮中央日報』, 1936년 4월 17일.

    106) 「의원감의 의견(醫院監의 意見)」, 『皇城新聞』, 1908년 3월 3일.

  • PARK Yunjae : A Study on the Anti-smallpox Policy of Joseon Government-General

    │ 醫史學398

    두 횟수의 부족에서 찾았다. 총독부는 1923년 조선종두령의 반포를 통해 종

    래 2회의 우두 횟수를 3회로 증가시켰고, 성인도 접종 대상에 포함시켰다. 지

    방조직의 개입 범위도 확대되었다. 하지만 경찰 중심의 우두행정이라는 성격

    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제성은 더욱 강화되었다. 공지를 통해 접종을 실

    시하는 수준을 넘어 미종두자를 적극적으로 파악하는 활동이 이루어졌다. 하

    지만 식민지 말기까지 두창은 절멸되지 않았다.

    기대보다 낮은 접종률은 두창이 지속적으로 발병한 이유였다. 총독부는 우

    두 접종률이 높지 않은 원인을 조선인의 유치한 위생사상에서 찾았다. 조선

    의 지식인들도 민중의 위생의식이 부족하다는 점에는 동의하였다. 하지만 그

    들은 총독부의 위생행정도 비판했다. 나아가 우두의 접종률 향상을 가로막는

    요소들이 있었다. 각 개인의 신상을 파악한 민적이 완벽하지 않은 점은 주요

    요인이었다. 미숙한 우두 기술, 불확실한 우두 효과, 불완전한 격리 시설 등

    은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우두 접종에 나서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장

    애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조선인들의 협조가 필요했다.

    그러나 식민지시기 그 협조는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두 시술과

    관련하여 조선인들이 가질 수 있는 정당한 의구심이 공론의 장을 통해 논의

    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나아가 총독부는 조선인들의 위생사상이 유치하다

    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었다. 총독부의 입장만이 일방적으로 선전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인들은 총독부가 시행하는 강제 접종을 수용하거나 아니면 도망

    을 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는 두창의 지속이었다.

    색인어: 우두, 두창, 조선총독부, 민적, 위생사상

    투고일 2012. 6. 19 심사일 2012. 7. 17 게재확정일 2012. 7. 28

  • 박윤재 : 조선총독부의 우두정책과 두창의 지속

    제21권 제3호(통권 제42호) 377-402, 2012년 12월 │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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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醫史學400

    Korean J Med Hist 21: 377-402 Dec. 2012 pISSN 1225-505X, eISSN 2093-5609Ⓒ The Korean Society for the History of Medicine http://medhist.kams.or.kr

    -Abstract-

    A�Study�on�the�Anti-smallpox�Policy�of�Joseon�Government-General

    PARK Yunjae*

    Departmemt of History, Kyung Hee University, Seoul, KOREA

    In the beginning of the colonial era, the Joseon Government-General’s

    most important medical policy was related to the disease of smallpox. The

    Government-General reused some of policies established by the Great Han

    Empire. They also made an effort to improve the shortcomings in that

    anti-smallpox policy by phasing out technically insufficient vaccinators and

    by incubating female vaccinators. However, compulsory vaccination was

    the major component of the Government-General’s anti-smallpox policy.

    The vaccination effort was lead by police officers and the frequency of

    vaccinations was increased two-fold. When the anti-smallpox policy

    became effective in 1910, the incidence of smallpox decreased.

    However, after 1919, the incidence of smallpox began to increase once

    more. According to the Government-General, this increase was the result

    of a decrease in the frequency of vaccinations. Therefore, in 1923, the

    Government-General increased the frequency of vaccinations from twice

    to three times by implementing the Joseon Cowpox Ordinance. Under this

    *Corresponding author: PARK Yunjae

    Departmemt of History, Kyung Hee University, Seoul, KOREA, 130-701

    Tel: 82-2-961-9271/ E-mail: [email protected]

    Received: Jun. 19, 2012; Reviewed: Jul. 17, 2012; Accepted: Jul. 28,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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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licy adults were also vaccinated. Interventions by local organizations

    were also expanded. However, through the end of the colonial era,

    smallpox never fully disappeared in Joseon. The lower-than-expected

    rate of vaccination has been identified as one of important reasons for

    the constant presence of this pathogenesis. Incomplete census registration

    was identified as the major reason for the decrease in the vaccination

    rate. Insufficient technologies for disseminating the smallpox vaccine and

    ambiguity with regard to the vaccine’s effectiveness also prevented the

    people of Joseon from voluntarily obtaining their vaccinations.

    To increase the rate of vaccination, it was necessary to secure the

    cooperation of Koreans. However, that cooperation has never been

    harmonious. No records exist of any discussions related to the problem

    of smallpox or the effect of the anti-smallpox vaccination, which was

    a reasonable expectation for the citizens of Joseon. Moreover, the

    Government-General kept insisting that the Joseon citizens’ ideas about

    the need for sanitary and effective vaccinations were insufficient. The

    sought-after cooperation was never easy, and this resulted in the extensive

    duration of outbreaks of smallpox.

    Keywords : Anti-smallpox Vaccination, Smallpox, Joseon Government-General,

    Census Registration, Sanitary Thou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