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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경기도민’입니까? 한국 전쟁 후, 수원 지역을 비롯한 경기도 일대에는 거대한 ‘피난촌’이 형성되었다. 근현대사를 관통하면서 피난촌은 일부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 사라졌고, 고향을 등지고 떠나온 실향 민들은 흩어졌다. 그러나 ‘피난촌’이 사라졌다고 해서, ‘실향 민’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경기도 곳곳에서 각자의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고 있다. 실향민의 삶이나 역사적 고통, 기록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삶은 곧 경기도의 근현대사, 나아가 대한민국 근현대사이다. 경기 도에서 삶을 일궈낸 실향민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의 삶을 기억하고자 한다. 경기도민 이야기 1 경기도사이버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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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경기도민’입니까?

한국 전쟁 후, 수원 지역을 비롯한 경기도 일대에는 거대한

‘피난촌’이 형성되었다. 근현대사를 관통하면서 피난촌은 일부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 사라졌고, 고향을 등지고 떠나온 실향

민들은 흩어졌다. 그러나 ‘피난촌’이 사라졌다고 해서, ‘실향

민’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경기도 곳곳에서 각자의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고 있다. 실향민의 삶이나 역사적 고통,

기록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삶은 곧 경기도의 근현대사, 나아가 대한민국 근현대사이다. 경기

도에서 삶을 일궈낸 실향민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의 삶을 기억하고자 한다.

경기도민 이야기 1

경기도사이버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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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민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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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경기도민입니다

우리는 경기도에 살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곳에 처음부터 뿌리

를 내리고 살았을 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어찌하여 살다보니 경기도

가 고향이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경기도라는 ‘공간’ 속에서 같이 ‘삶’

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누구나 함께 공유할만한 기억들을 갖고 있

습니다.

그 기억들은 참 소중합니다.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는 그동안 경기도와 관련된 기록들을 수

집하고 정리하기 위한 여러 가지 사업들을 추진해왔습니다. 2002년

도부터 경기도내 공공기관에서 발간한 기록물들을 디지털화하는 작

업을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2010년부터는 경기도민들이 소장하고

| 여는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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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일상기록물을 디지털화하여 DB로 구축하는 ‘e-추억상자’ 사업

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새롭게 경기도라는 ‘공간’ 안에서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경기도민의 이야기를 소개하기 위한 구술 채록 사

업 ‘경기도민 이야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첫 번째 이야기는 전쟁으로 인해 삶의 터전이 바뀐 경기도 한

국전쟁 실향민 어르신들의 이야기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던 해, 생과

사를 넘어서 경기도에 정착하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단

순히 짧은 이야기로 엮어내기에는 방대한 내용이었습니다. 다 표현

하지 못한 이야기들로 아쉬움이 가득하지만 여기에 담겨진 이야기

하나 하나가 우리 모두에게는 그 시절을 살아왔던 한 개인의 삶으로

묵직하게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언젠가 그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떠나가더라도

우리는 이분들의 구술을 통해 과거를 기억하며 현재를 바라보고 다

가올 다음 미래를 기약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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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술 채록 사업에 참여해주신 김숙현, 김순균, 김연순, 김영

태, 박순옥, 박순이, 박종훈, 이춘신, 조문선, 황광태 어르신들 모두

에게 감사 말씀드립니다. 모두들 적극적으로 여러 번 이야기를 풀어

주셨으며, 가지고 계신 사진자료들도 협조해 주셨습니다.

더불어 구술 사업을 진행하고 채록내용을 풀어준 ㈜더페이퍼의

최서영 대표님을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

록 글을 다듬어 준 은정아, 최주영 작가님, 마지막으로 영상자료 제작

에 힘써준 땅도프로덕션 류승진 PD님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경기도사이버도서관은 앞으로도 새로운 주제를 선정하여 경기도

민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발굴할 예정입니다. 따뜻한 관심 부탁드

립니다.

2015. 2.

경기도사이버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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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달문 앞 미7사단 군인들과 사람들, 1950. 09. 22

(사진제공 수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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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수원천변 풍경, 1960년대

(사진제공 수원화성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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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고, 다듬어 완성시킨 삶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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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목차

첫 번째 이야기 •11

김숙현 | 다듬고, 다듬어 완성시킨 삶

두 번째 이야기 •29

김순균 | 가장 추웠던, 그 해 겨울

세 번째 이야기 •57

김연순 | 가난한 자들의 보금자리 금보여인숙

네 번째 이야기 •83

김영태 | 끊어진 선로 위의 인생,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

다섯 번째 이야기 •105

박순옥 | 생과 사, 그 좁은 틈 사이에서

여섯 번째 이야기 •133

박순이 | 비단만큼 고운, 당신의 성마른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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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고, 다듬어 완성시킨 삶 9

일곱 번째 이야기 •155

박종훈 | 오늘을 위한 시간

여덟 번째 이야기 •183

이춘신 | 두 개의 고향

아홉 번째 이야기 •203

조문선 | 거친 바다를 건너 풍랑 걷힌 삶 속으로

열 번째 이야기 •229

황광태 | 기억나지 않지만, 기억되는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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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 나가니까 웬 40대 남자가 나한테 인사를 해.

그래서 나는 누군지 모르고 누구시냐고 했더니,

할머니가 저를 받으셨대요. 하더라고.

그래서 어떻게 아느냐 했더니 지나가다가 나를 보고,

자기 어머니가 저 할머니가 너를 받으셨다.

이 얘기를 3번 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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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고

다듬어 완성시킨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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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세상 모든 일에는 ‘전조’가 있다. 한국전쟁도 마찬가지다. 6월 25

일 갑자기 날벼락처럼 사람들의 삶을 뒤흔든 것이 아니다. 그 전부터

전쟁의 징후들이 있었다. 1921년 황해도 출생인 김숙현 할머니는 그

‘징조’를 온몸으로 겪었다.

할머니의 집안은 황해도의 알아주는 엘리트였다. 아버지는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다. 교육열이 높았던 아버지는 늘 1등을 놓치지 않는

딸을 보며 큰 꿈을 품었다. 그러나 작은 전쟁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

다. 결국 사상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피난

을 떠났다. 할머니는 아버지를 따라 고향을 떠나 이른 피난길에 올라

야만 했다.

다듬고,

다듬어 완성시킨

∷ 김 숙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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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고, 다듬어 완성시킨 삶 13

그리고 지금까지 할머니는 한 세기 가까이 살아냈다. 그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남편을 만났고, 4남매를

낳았다. 남편이 일찍 세상을 뜬 뒤 할머니는 오로지 아이들을 위해서

만 살았다. 조산원을 운영했던 할머니는 밤낮으로 새 생명을 받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아이들도 어느덧 어미와 같이 늙기 시작했다. 그

리고 그 중 둘이 어미보다 앞서갔다. 짧은 문장 속 할머니 삶이 묵직

하다. 그러니 할머니의 어깨 위로 내려앉은 시간의 무게가 얼마나 무

거울지, 고작 수십 년을 살아온 우리가 어찌 짐작이나 하겠는가.

소복소복 가벼운 눈이 쌓여 곧은 나뭇가지를 휘게 만들 듯, 무심

한 일상이 쌓여 할머니 생각의 가지를 휘게 만들었다. 구부러진 가지

끝에서 할머니 기억의 파편들이 흩날리고 있다.

할머니를 처음 인터뷰한 것은 2013년 여름, 할머니는 정정하셨

고 과거의 것들을 자세히 기억하고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

나 동시에 최근의 시간들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지 못하거나, 헛갈려

했다. 그리고 일 년 뒤 겨울, 다시 할머니를 찾았을 때 할머니는 조금

더 지쳐보였다. 그래서 김숙현 할머니의 기록을 완성시키기 위해, 여

기저기 흩어진 기억의 조각들을 모으고, 주위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자료를 모았다. 최대한 노력했으나, 어쩔 수 없이 찾지 못한 퍼

즐 조각들이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숙현 할머니의 이야

기를 기록하고, 연보를 작성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그

흩날리는 파편의 기억만 좇아보아도 할머니의 삶은 기록되고 기억되

어, 그래서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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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기억 : 잃어버린 고향의 시간 & 부유 : 생과 사를 넘던 그날들

“동네에 다 상투쟁이 뿐인데, 양복 입은 양반은

우리 아버지 하나였어. 나는 학교에서는 1등만 했어.

그 당시에는 계집아이들은 공부를 안 시켰는데,

우리 아버지가 우리 공부시키려고 애를 썼지.

그래서 사람들이 흉봤어. 계집애들 공부시킨다고.”

1921년 황해도에서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본에

서 대학까지 나온 엘리트였다. 교육열이 높았던 아버지는 늘 1등을

놓치지 않는 딸을 보며 일본 유학까지 보낼 작정이었다. 그러나 세월

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작은 전쟁

이 끊이질 않았다. 사상, 이념의 대립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할퀴어 됐다. 결국 아버지는 그 틈바구니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족들

을 데리고 인천으로 왔다. 전쟁 전에 이미 피난을 떠났던 것이다. 그

리고 할머니는 그곳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그렇게 의대에 가고 싶었어. 주사 놓는 거 좋아하고 별나게

‘의’자 붙은 걸 좋아했다고. 아버지가 의사 만든다고 일본으로

의대 보낸다고 하셨어. 너무 좋아하니까. 그런데 아버지가

딱 돌아가시잖아. 입학원서 썼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셔, 폐병으로.

그때는 약이 있어 뭐가 있어? 폐병에 걸리면 살아나질 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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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고, 다듬어 완성시킨 삶 15김숙현 할머니와 언니, 2013. 06. 27(수원 교동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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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그래서 어머니가 바느질해 우릴 공부시켰어. 그때는 윗저고리를

잘 해 입어야 시집에서 좋아했거든.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 딸

하나만, 하나만 해서 어머니가 하신거야.”

어머니는 유난히 손끝이 야무졌다. 어머니가 만든 저고리며 치마

를 사람들이 찾았고, 어머니는 그렇게 바느질을 하면서 아이들 공부

를 시켰다. 당시 딸, 아들 가리지 않고 5남매 모두를 공부시켰으니

어머니의 열정이 대단했다. 할머니는 그렇게 딸을 든든하게 지원해

주신 어머니의 힘으로 1935년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홀어머니

의 바느질로 ‘의대’까지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가 선택한 것

이 ‘의학 전문학교 산파양성소’였다. 당시 ‘산파’는 미래 유망 직종으

로, 여성 엘리트들이 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학교였다. 실제로 자료를

보면 1911년부터 1943년까지 32년간 산파 수가 1,795명, 간호부는

1,853명으로 급속히 증가했다. 그렇게 할머니는 산파 양성소를 거

쳐, 간호원이 되었다.

사실 당시의 할머니가 이런 교육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집안이 독실한 기독교였던 것과도 큰 관계가 있는 듯 보인다. 할머니

의 오빠는 사범대학을 나와 교사를 하다가 다시 신학대학에 진학했

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라 아들이 교사보다는 목사가 되길 바랐던

것이다. 당시 간호원, 산파양성소 등도 선교사들에 의해 운영된 경우

가 많았다. 그렇게 할머니는 산파양성소를 졸업하고 간호원 면허를

땄다. 그리고 그 즈음 한 남자와 선을 봐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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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고, 다듬어 완성시킨 삶 17

“남편 친척이 우리 오라버니랑 학교 동창이야. 옛날에는

어른들이 가라 그러면 미우나 고우나 갔지. 공부도 잘 하고

잘 생기고 그랬더라고. 그런데 몸이 약해. 과부의 외아들이라

너무 오냐오냐 길러서. 서울의 의대를 갈려다가 못 갔어.”

신랑은 피부가 뽀얗고 귀티가 났다. 시청에 다녔다가 관두었다.

지금은 남편의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잘생겼던 얼굴만은 생생하

다. 그러나 몸이 약했던 남편 대신 할머니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아이들을 낳고 키우면서 간호사로도 근무를 했고, 해방되던 해에는

조산원을 개업하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전쟁이 터졌다. 할머니는

다시 인천에서 수원으로 피난을 왔다. 당시만 해도 수원은 시골이었

다. 할머니는 그 당시에도 조산원이 도심지보다는 시골에서 더 잘 될

거라는 계산을 했다.

“조산사 면허는 서울에서 받았어. 그런데 아무래도 조산원은

서울보다는 시골이 낫지 않아. 그래서 내가 일부러 수원으로

이사를 왔지. (수원에서도) 시내에서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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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정착 : 뿌리 없는 삶의 고단함

처음 수원에 와서 자리를 잡자마자 할머니는 교회를 다녔다. 할머

니가 다녔던 교회는 중앙침례 교회로, 당시는 개척 단계였다.

“교회에 가면 거의 혼자 앉아 있을 때가 많았지. 그때가 개척할 때

니까 신도수가 20명도 안 됐어. 그래서 내가 김장환 목사님과 함께

전도를 하러 다녔지. 당시에 개척 교회 목사는 여유가 없었지.

그래서 내가 우동을 한 그릇 사서 같이 먹기도 하고 그랬어.”

당시 수원은 논밭이 대부분인 시골이었다. 그러나 교동은 말 그대

로 ‘수원 1번지’였다. 1987년 수원시청이 이전하기 전까지 이곳에 있

었다는 것이 그 단적인 예다. ‘김숙현 조산원’은 수원에서도 도회지에

속하는 교동에서 간판을 내걸었다. 그리고 50년 이상 조산원을 운영

했다. 할머니와 40년 정도 알고 지낸 안순덕(68세, 교동 약 30년 거

주 후 정자동 이주) 씨는 김숙현 조산원이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

루었다고 회고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시 수원시에는 8개에 조산

원이 있었는데 ‘김숙현 조산원’이 거의 석권을 했다고 한다. 당시 조

산원은 방이 대여섯 개 정도 되는데 사람이 많을 때는 한방에 4명도

들어가 누워 있을 정도로 늘 만원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조산원은 가정집에서 무면허로 운영했다. 정식 교

육을 받지 않은 산파가 소위 ‘어깨너머’로 배워 아이를 받는 경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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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고, 다듬어 완성시킨 삶 19

많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의료사고가 빈번했다. 반면 ‘김숙현 조

산원’는 달랐다. 번듯한 조산원도 그렇지만, 정식교육을 받은 ‘조산

사, 김숙현’이 직접 운영하고 있었다. 또한 응급 상황에는 병원에 바

로 이송될 수 있었다. 정식 허가를 받은 조산원이었기에 가능한 일이

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이곳으로 아이를 낳기

위해 몰려들었다. 실제로 당시에는 교동은 물론 수원 전 지역에서 사

람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지금도 교동에서 오래 산 주민의 상당수가

김숙현 조산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수가 자신의 아이를

이곳에서 낳았다.

“거리에 나가니까 웬 40대 남자가 나한테 인사를 해. 그래서 나는

누군지 모르고 누구시냐고 했더니, 할머니가 저를 받으셨대요.

하더라고. 그래서 어떻게 아느냐 했더니 지나가다가 나를 보고,

자기 어머니가 저 할머니가 너를 받으셨다. 이 얘기를 3번 했대.”

젊은 시절부터 할머니는 가장으로 살았다. 약했던 남편이 일찍 세

상을 뜬 뒤, 4남매를 교육시키고, 시어머니를 봉양해야 했던 시절이

만만치 않았다. 평생을 조산원을 운영했던 할머니에게는 밤낮이 따

로 없었다. 자다가도 문을 두드리면 달려 나가야 했다. 그때부터 누

가 찾으면 언제라도 뛰쳐나갈 수 있게 옷을 입고 자는 게 습관이 됐

다. 한 평생 그렇게 산 습관이 몸에 남아 아흔이 넘은 할머니는 아직

도 옷을 입어야 잠이 온다. 어느 날은 새벽부터 받기 시작해 무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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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명의 아이를 받은 적도 있었다. 산모는 10명이었는데 한 명이 쌍둥이

였다. 그날따라 한 명 놓고 씻겨 놓고 나면, 또 한 명이 진통이 온다

며 오고, 또 한 명 씻겨 놓고 나면 한 명이 왔다고 한다. 주위에서도

신기해했고, 자신도 신기해 아직도 그 일만은 잊히지 않는다. 매일

같이 아이들을 받는 일은 보람도 크지만 그 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매일 잠도 제대로 못자는 생활에 늘 쪼그려 앉아 아이를 받으니 허리

를 비롯해 온 몸이 쑤셨다. 그리고 당시에는 왕진이 많았다. 별다른

교통편이 없던 시절, 할머니는 늘 종종거리며 뛰어다녔다. 또한 산고

속에 할머니의 머리를 쥐어짜거나 때리는 산모도 있었고, 몰래 아이

를 두고 도망가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에게 온 아이는 누구나 성심을 다 해 받았다. 받기

전과 후에 아이와 산모를 위해 정성껏 기도를 드렸다. 당시에 병원에

서 아이를 낳는 건 부잣집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는 대부분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았다. 병원에 비해서는 턱없이 낮은

비용이었지만 그조차 못 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애기 받으러 갔는데 (살림이) 너무 없는 거야. 아무리 없어도

죽게 생겼으니까 산파를 부른 거야. 그러면 애 기저귀가 있나

뭐가 있나. 아빠 런닝셔츠, 가난하니까 가보면 그걸로 그냥

애기를 싸라고 내놓더라고. 어른 셔츠를 입혔으니 어떡해?

그걸 내가 다 가위로 오려가지고 전부 다시 꿰매 가지고.

기저귀 만들고, 저고리는 요렇게요렇게 해서 만들고, 집에 있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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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고, 다듬어 완성시킨 삶 21

우리 애들이 입던 거 가져다주고 그랬지. 쌀도 없고 미역도 없어

외려 내가 갖다 줘야 해. 미역 요만치, 쌀 요만치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가지고 가서 해주고 그랬지. 뭐.”

그렇게 밤낮으로 아이를 받으러 다니며 50여 년이 흘렀다. 고단

할 때도 있었지만, 고달팠던 기억은 없다. 할머니에게는 분명한 목표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4남매를 제대로 교육시켜야 한

다는 것이었다.

“아이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나. 그게 가장 큰 고민이었지 뭐.

아이들을 무식하게 만들면 그 죄를 어떻게 하나. 그게 내 죄거든.

제대로 못 기르고, 교육 못 시킬까봐. 지들이 하고 싶어 하는

공부 못 시킬까봐. 그게 고민이었어.”

할머니는 조산원 일 때문에 바빠 아이들을 세세하게 신경써주진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어머니의 그런 마음을 몰랐을 리 없

다. 4남매 모두 어머니의 바람대로 번듯하게 잘 자라주었다. 4남매가

골고루 경기고, 서울대 등의 명문학교에 다녔다. 유학을 다녀와 교수

가 된 아이도 있었다. 그리고 모두 훌륭한 배필을 만나 가정도 꾸렸

다. 그렇게 아이들의 성장과 함께 할머니의 한 세월이 가고 있었다.

이제는 조산원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가끔 찾아오는 사람들

도 산부인과로 보냈다. 그렇게 ‘김숙현 조산원’은 자연스럽게 문을 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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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1층 조산원은 노인들의 사랑방 구실을 했다.

노인들은 이곳에 와서 밥도 먹고 이야기도 나누고

쉬기도 했다. 퍼주고, 베풀기 좋아했던 할머니는

사람들이 오면 가장 먼저

‘밥 먹었어? 밥 먹고 가.’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김숙현 할머니의 조산원 마당, 2013. 0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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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고, 다듬어 완성시킨 삶 23

았다. 하지만 조산원을 했던 건물에 그대로 머물렀다. 건물은 할머니

가 직접 지은 것으로 1층은 조산원이고, 2층은 가정집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좁다란 마당이 보인다. 그런데 그 마당에는 아주 인상

적인 것이 있다. 바로 조산원 건물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오

래된 나무다. 건물이 들어서기 전부터 있었을 그 나무는 조산원의 긴

세월을 보여준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생각보다 넓은 실내에 놀라

게 된다. 1층에는 산모들이 기거했던 방, 5~6개가 복도를 마주보고

있다. 조산원이 문을 닫으면서 그 방들이 비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

지 않아 방들이 채워졌다. 바로 의지할 곳이 필요한 노인들에 의해서

였다.

1층 조산원은 노인들의 사랑방 구실을 했다. 노인들은 이곳에 와

서 밥도 먹고 이야기도 나누고 쉬기도 했다. 퍼주고, 베풀기 좋아했

던 할머니는 사람들이 오면 가장 먼저 ‘밥 먹었어? 밥 먹고 가.’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사랑방처럼 오가던 노인들 중 쉴 곳이 여의치 않

던 이들은 이곳에서 장기 투숙을 하기도 했다.

사실 할머니는 인터뷰 당시, 이와 관련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단순히 기억력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신앙심이 깊었던 김숙현

할머니는 조산사로 살면서 늘 사람들을 도왔다. 그러나 나서서 생색

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 집에 온 손님 밥 주고, 쉬게 해

준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섣부른

추측을 싣기가 어려워 할머니의 이야기가 실린 책의 일부를 직접 인

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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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제가 많이 사랑하던, 아니 저를 많이 사랑해 주셨던 김대화 할머니께

서 92세의 연세로 하나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김대화 할머니는 북에서 내

려 오셔서 가족도 없이, 교회만 의지하면서 일평생 살아오셨지요. 그런데

할머니가 교회 외에 의지하신 곳이 하나있는데, 그곳은 '김숙현 조산원'이

라는, 아주 오래되고 허름한 조산원입니다. 할머니는 그 조산원에서 오랜

세월을 지내셨습니다. '김숙현 조산원'은 예전에는 조산원이었지만 지금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머무는 곳으로 변했습니다. 아기를 받던 대여섯 개의

작은 방은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가 머무는 곳이 되었고, 아기들 울음소리

가 가득했던 자리를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하게 되었지요.

김숙현 조산원은 참 특별한 곳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는 아기를 처음

으로 받아 주던 곳에서, 이제는 갈 곳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받아 주는

곳이 되었으니까요. 김숙현 조산원은 김대화 할머니처럼 가족이 없는 분

들을 위해 가족이 되어 주었고, 집이 없는 분들에게는 안식처가 되어 주었

습니다. 그곳은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을 위한 꽃밭이 되었습니다.

김대화 할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김숙현 조산원'이 떠오릅니다. 그리

고 김숙현 조산원을 떠올릴 때마다 어린아이든, 할머니, 할아버지든 가리

지 않고 누구나 따뜻하게 안아 주는 가슴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

짐합니다. 알고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이 거듭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산원 같은 사람들이고, 또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로 편안

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양로원 같은 사람들이기도 하지요.

- 김요한, <목사님, 오늘도 청바지 입으셨네요>(고즈윈,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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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고, 다듬어 완성시킨 삶 25

김숙현 할머니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할머니가 다른 시대에 태

어났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상상을 했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따뜻하

고 태도는 진중했다. 조용조용 낮게 읊조리듯 목소리에는 기품이 담

겨 있었다. 간혹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해도 아흔이 넘은 나이를 감안

한다면 여전히 명석하면서도 예리했다.

할머니는 어린 시절, ‘피난’을 떠나야만 했다. 그것은 곧 삶의 모

든 것이 흔들린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할머니의 일생은 ‘일제시대,

전쟁, 해방, 산업화 시대’를 홀로 관통하며 끊임없이 흔들려왔다. 어

느 시대인들 4남매를 홀로 키우며, 조산원을 운영했던 여성의 삶이

녹록했을 리 없다. 그러나 그 수많은 흔들림 속에서도 할머니는 늘

자신만의 중심을 잡아온 듯 보였다. 이를 위해서는 할머니는 스스로

를 끊임없이 다듬고, 또 다듬어 왔을 것이다.

많은 이들에게 세월은 모진 바람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게 뭔

지도 모른 채 살다가, 세월의 바람에 깎여 모래처럼 흩어져 버리고

만다. 그러나 김숙현 할머니는 세월을 가르며 스스로를 다듬어 왔다.

말하지 않았어도 느낄 수 있었던 ‘기품, 명석함, 예리함’은 찬란한 고

통의 세월 속에 다져진 할머니 본연의 모습일 것이다.

구술정리 / 은정아

사진 / 박김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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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김숙현 할머니(94세) 연보

1921년 1월 5일 황해도 (송본군) 풍해면에서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남

1920~30년대 6.25전쟁 전에는 다양한 인민항쟁을 비롯한

작은 전쟁들이 있었음

그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것으로 추정됨

1933년 (13세) 인천고녀 입학

1935년 (15세) 인천고녀 졸업

아버지(김호근) 사망

의학 전문학교 산파양성소 입학

1937년 (17세) 간호원 면허 취득

1938년 (18세) 남편 최일출과 혼인

첫 아들 출생

1941년 (21세) 둘째 아들 출생

1942년 (22세) 경기도 위생과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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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고, 다듬어 완성시킨 삶 27

1945년 (25세) 조산원 개업

1946년 (26세) 셋째 딸 출생

1948년 (28세) 넷째 아들 출생

1950년 전후 전쟁으로 인천에서 수원으로 피난 옴

1960년대 수원의 중앙 침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함

개척단계라 신도수가 약 20명도 되지 않던

시절이었음

1950~80년대 5년의 셋방살이 끝에 교동 67번지에 조산원 지음

김숙현 조산원의 전성기였음

1990년대 후반 조산원 폐업(추정)

2000~10년대 조산원이 할머니들의 사랑방이 됨

어떤 노인들은 조산원에서 장기 투숙을 하기도 함

2014년 (94세) 같이 살던 언니가 세상을 떠나

간병인과 함께 지내기 시작

현재 여전히 조산원 건물 2층에서 살고 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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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솔직히 우리가 그때 당시에는

피난 자체가 뭔지도 몰랐어요.

그냥 여론에서 ‘피난 가야 된다. 나가야 된다.’ 그러니까.

뭐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누가 와 일러 준 것도 아닌데,

자연히 그렇게 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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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추웠던, 그 해 겨울 29

가장 추웠던

해 겨울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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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김순균 할아버지는 이제 여든이다. 여든 번의 겨울을 지나왔단 얘

기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보낸 여든 번의 겨울 중 가장 추웠던 겨울

은 ‘그 해 겨울’이었다.

작은 옷 보퉁이를 짊어진 16살의 소년, 시리게 언 임진강을 건너

며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가야할지’

막막했던 아이의 마음은 손과 발처럼 푸르게 얼어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 소년은 여든의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 해 겨울’의

일만큼은 여전히 생생하다. 그 겨울을 기점으로 김순균 할아버지는

소년에서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추웠던,

그 해 겨울

∷ 김 순 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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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추웠던, 그 해 겨울 31

기억 : 잃어버린 고향의 시간

할아버지는 1935년 평양 출생이다. 위로는 9살 많은 누나가 한

명 있고, 아버지는 상업에 종사했다. 당시에도 평양에는 농사짓는 사

람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김순균 할아버지는 학창시절 적극적인 학

생이었다. 반장도 하고 공을 좋아해서 축구도 곧잘 했다. 그러다 초

등학교 4학년 될 때 해방을 맞았다.

당시 북한에는 김일성의 보천보전투1)가 신화화되어 있었다. 김일

성의 활동을 신화나 전설로 전해들은 시민들은 김일성을 고령의 노

장군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은 34살의

젊디젊은 청년이었다. 김일성은 인민공화국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자

신을 먼저 알려야 했다. 이를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는데, 인민

학교에 다니던 아이들 역시 동원되었다. 늘 활발했던 김순균 할아버

지도 선발되었다. 할아버지는 이것을 ‘연예활동’이라고 불렀다. 이 같

은 활동의 기억이 할아버지는 지금도 생생하다.

“기억나는 게 북한의 김일성이가 나와 가지고 선거가 있었는데

제가 학급에서 연예활동을 했었어요. 학교서 이제 학예회라고

하는데, 1년에 한 번씩 연극 이런 거 있었어요.

1) 1937년 6월 4일 항일유격대가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천보(현재 북한의 행정구역상 양강

도 보천군 보천읍)를 습격하여 승리했다는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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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가쿠게이카요2)라고 하는데, 지금 모라고 해야 하나? 학예회라고

해야 하나? 학교에서 그런 반이 있었어요. 한 20명 정도 선생

지도하에서 연극 연습도 하고 그러는 거예요. 김일성이는 평양

시내에서 출마한 게 아니고 시골로 다 출마를 했어요.

왜 그러냐면 그때 당시에는 몰랐는데, 제가 이제 나이 들면서

알고 보니까 김일성이라는 사람은 평양 시내서 아는 사람이

없잖아. 나이 먹은 사람도 김일성이하면 60이 넘은 걸로 다 알고

그랬거든요. 근데 이제 우리는 그 학예회서 연극반을 만들어

가지고 김일성이가 출마한 그 시골에 가가지고 연극도 주민들

한테 보여주고 그때 그 기억나는 게 고기 먹을 기회가 없잖아요.

근데 그 동네서 소를 잡아가지고 학생들 먼데 여까지 왔다고

소고기 이런 덩어리를 하나씩 담아줄 때. 야~ 우린 양손에 쥐고

(먹고) 고런 게 기억나지요.”

그러던 중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시름시름 앓긴

했지만 특별한 지병이 있는 건 아니었다. 돌아가신 날도 특별했던 기

억은 없다. 평소처럼 등교를 했고 한두 시간 수업을 받고 있는데 연

락이 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사촌형 부부가 평양으로 왔다. 홀로

남은 어머니와 어린 소년이었던 할아버지를 돌보기 위해서였다. 이

제 막 스물을 넘긴 사촌형은 양말 공장을 다니며 식구들을 부양했다.

2) がくげいかい (가쿠게이카이) 학예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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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추웠던, 그 해 겨울 33

자연히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그러던 중 6.25가 터졌다.

“전쟁 난 거 기억나죠. 제가 16살 때 그랬으니까. 지금도 생생

하게 기억나는 게 그날 6월 25일이 일요일이었잖아요. 평양에서

그날 비가 왔어요. 비가 오게 되면 학교등교 안 해도 된다.

당시에는 중학생만 되도 주말에 일이 많아요. 환경 정리다 많이

시켰어요. 가만 놔두질 않고. 심지어는 중학생만 되면 밤에

나가서 경비하라고 숙직을 시키고 그랬다고요. 그랬는데

(6월 25일 일요일) 아침에 깨니까 비가 오는데, ‘아 오늘 학교

안 가도 되겠구나.’ 해서 기분이 좋더라고요. 그래서 친구네 집에

놀러왔지. 근데 그때는 통신망이 거의 없으니까 시내에 보면

벽보판이 있어요. 그 시벽보판에 신문들 붙이고 그래요.

그거 보고 (전쟁 난 줄) 알았어요. 남조선 괴뢰군이 뭐 아침은

38선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서 먹는다

하면서 북침을 했다고. 적혀 있더라고요. 그래도 그냥 북침을

했다고 그런 것만 알지. 전쟁 자체가 뭔지 모르죠. 그때는...”

16살의 소년이었던 할아버지는 ‘전쟁’이 어떤 재앙을 가져올지,

자신의 삶이 얼마나 달라질지 몰랐다. 그러나 물기를 머금고 가라앉

은 그날의 공기, 낯설고 이해할 수 없었던 벽보에 적힌 문구들, 친구

집으로 가던 길의 휘청거림의 느낌들은 할아버지의 행간 사이에 고

스란히 숨어 필자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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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전쟁’이 어떤 재앙을 가져올지, 자신의 삶이 얼마나

달라질지 몰랐다. 그러나 물기를 머금고 가라앉은

그날의 공기, 낯설고 이해할 수 없었던 벽보에 적힌

문구들, 친구 집으로 가던 길의 휘청거림의 느낌들은

할아버지의 행간 사이에 고스란히 숨어

필자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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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추웠던, 그 해 겨울 35

서서히 전쟁의 포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튿날 학교 가니까 학교도 이제 올스톱되는 거죠 뭐. 16살이면

나이로 봐서 강제 징집은 안 돼요. 그래도 자기가 자원해서 군대

갈 수도 있어요. 우리 동창애 중에는 자기가 자원해서 인민군대간

애도 있어요. 그때에는 (우리 인식 속에) ‘우리 인민공화국이

잘 돼야 된다.’ 그것밖에 없잖아요. 학교서 배우는 게 그거니까.

당시에 3일만에 서울 탈환했나? 그렇게 됐을 거야. 그리고

5일만에 수원(을 탈환하고). 당시에는 수원이 어디에 붙었는지도

몰랐죠. 그래도 꿈에 부풀었어. ‘야 이제 통일되나 보다.

우리도 이제 남한에 갈 수 있겠네. 남조선에 가서 살 거다.’

기대가 부푸는 거지. 그때 생활은 그랬어요.”

전쟁이 나고 학교마저 휴교를 했다. 그렇지만 평양 시내 사람들은

그저 통일이 되겠거니 생각하고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

서히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인천상륙작전 그 자체는 몰랐어요. 근데 어떻게

알았냐면 오후 3시쯤 됐는데 쌍발 폭격기가 평양 시내에 뜬 거야.

그리고 삐라를 뿌리는데 나가면 걸릴 것 같아요. 그러다가 어떻게

용케 나가서 그 삐라를 한 장 주웠어요. 그랬더니 인천을 가위로

딱 자르는 그림이 있고, 머지않아 북진통일이 될 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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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이렇게 (적혀)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땐 진짜인줄 안 거예요.

그래 가주고 동네 청년들 몇 사람들은 땅굴을 파고서 숨어 있고

그랬어요. 그리고 은둔생활을 하고 그랬어요. 나가면 인민군대에

끌려가고 그러니까. 나도 16살이지만 형들 숨어 있는데 가서 같이

있기도 하고 심부름도 해주고 그런 적도 있었어요.”

할아버지 집에서 생활을 돌봐주던 사촌형도 징집 대상이 되었다.

결국 사촌형도 인민군이 되어 전쟁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19

일날 평양 시내까지 유엔군이 들어왔다, 인민군들은 다 후퇴했다. 땅

굴을 파고 숨어있던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왔다. 머리와 수염이 한

자씩 자라 있었다. 그 시간만큼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승리를 확신

한 이승만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평양에 와서 나도 환영 나갔던 기억이 나요.

그때 평안북도 초산까지 진군했죠. 그러다가 또 갑자기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전세가 역전됐어요. 그래서 피난을 가게 된 거죠.

솔직히 우리가 그때 당시에는 피난 자체가 뭔지도 몰랐어요.

그냥 여론에서 ‘피난 가야 된다. 나가야 된다.’ 그러니까.

뭐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누가 와 일러 준 것도 아닌데,

자연히 그렇게 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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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추웠던, 그 해 겨울 37

부유 : 생과 사를 넘던 그날들

10월 말경에 중공군이 들어왔고, 12월 6일 피난을 나섰다. 그러나

대동강 다리는 이미 폭격 맞아서 무너져 있어 건널 수 없었다. 겨울

추위는 피난민들의 몸과 마음까지 얼어붙게 만들었다. 옷가지 몇 개

만 든 보따리를 든 할아버지와 가족들은 대동강을 건너는 대신 (평안

남도 평원군 공덕면) 성교리에 있는 지인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가

는 길이 쉽지 않았다.

“성교리에 우리 어머니의 수양딸이 살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당시 마흔 정도 되셨지만, 그냥 누님이라고 불렀어요.

그 누님 댁으로 갈려고 했어요. 성교리 가는 길에 원래 철교가

있었는데 무너졌어요. 그래서 통대원리라고 성교리 건너가는

목다리가 임시적으로 가설됐어요. 그랬는데 워낙 추우니까

나무판자가 얼어가지고 그걸 이제 타고서 건너가는 거예요.

겨우겨우 건너와가지고 끝에 오니까 또 그때는 누가 불을

놨나 봐. 아마 그때 인민군들이 후퇴하면서 불을 놨겠지.

그렇게 목다리 간신히 건너가지고 누님네 집으로 간다고 가는데

폭격이 심해가지고 갈 수가 없는 거야. 같은 성교린데도.

그래도 그때는 피난은 잠시 나온 거라 생각했어요. 한 일주일이고

보름이고 있으면 다시 만날 테니까 가는 데까지 가자 그래가지고

나온 게 이렇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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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피난길은 고달팠다. 야속한 겨울 해는 빨리도 졌다. 해가 지면 어

디론가 들어가서 빈집을 찾았다. 모두들 피난을 떠났으니 사방이 빈

집이었다. 바람만 간신히 막아주는 빈집에서 하루를 낫다. 간혹 운이

좋으면 끼니 때울 양식이 남아있는 집에 머물기도 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던 피난길이 이어졌다.

“기가 맥혔지요. 춥긴 춥지, 먹을 것도 뭐 집에서 (어떻게) 준비해

갈 수가 있나. 또 생활이 다 어려운데 양식 같은 게 뭐 있어요.

그냥 쌀 몇 됫박 되는 거 그거하고 옷 몇 가지하고 가지고

나왔지요. 그릇 같은 거도 가지고 오면 되는데 누님네 집에 가면

그릇은 있으니까 하고, 그냥 나왔죠. 근데 누님네 집에 못 가고

그대로 피난 나오니까 아무것도 없었죠. 피난 가는데 한겨울

이니까 해가 짧잖아요. 4시만 좀 넘으면 벌써 해가 지니까 가면

시골동네로 들어가야 돼요. 시골에 가면 또 다들 피난 갔으니까

빈 집이잖아요. 그런데 가서 (혹시 놔두고 간) 먹을 게 있으면

좀 보탬이 되고 먹을 게 있으면 그냥 먹는 거예요. 그러고 다음날

놔두고 또 피난 나오고 그렇게 했죠.”

피난길은 고됐다.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예정대로 되는 건 아무것

도 없었다. 수양 누님이 사시는 성교리를 못 가고 방향을 돌렸다. 황

해도 중화 쪽으로 향했다. 그날도 빈 집을 찾아 하루를 자고 일어났

을 때였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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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추웠던, 그 해 겨울 39

“원래 우리가 가려던 데 있잖아요. 우리 어머니 딸 수양딸이라는

그 집. 성교리에 있는 그 집 갈려다가 못가고 중화 쪽에 빠져서

자고 일어났는데. 거기서 그 수양누님의 딸, 기복이를 만난

거예요. 정말 기적이죠. 기복이네는 중화에서 잘 데가 없으니까

수수대 얽혀 놓은 게 있는데 거기서 자고 나오다가 만나거야.

정말, ‘야~ 기적이구나’ 했어요.”

그때부터 피난의 일행이 불어났고, 남한에서 정착하기까지 기복

이네 식구들과 함께 했다. 지금도 그 해 겨울의 찬바람은 할아버지에

게 생생하다. 하루 40리, 막막한 길을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임진

강까지 왔다. 그러나 임진강은 막혀 있었다. 유엔군이 피난민 못 건

너오게 막았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임진강 옆 고랑포리라는 시골집에

머물렀다. 그러나 먹을 것이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임진강 건너 장

좌리라는 곳에 가면 쌀을 구할 수 있을 거라 했다.

“거기 가본다고 쌀 구할 데가 있겠어요. 먹고 살기 막막한 거지.

그래서 어떡하지 하고 있는데. 마침 농협 창고 같은 게 있어.

그래서 우리 일행 형이 들여다 보니까 쌀이 그대로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창고를 어떡해야 되냐’ 하는데 피난 내려오는 사람들이

모이니까 금방 몇 십 명이 되잖아요. 그래서 칼 가지고 있는

젊은 사람들이 붙어서 창고를 뜯었지. 쌀가마가 그대로 있잖아.

그래서 그걸 쏟아서 나눠 가졌어. 여자들이나 애들은 반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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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나눠 짊어지고). 그래서 올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그때만 해도

피난들을 그리 많이 안 갔나봐. 젊은 사람들이 그냥 창고

뜯었다는 소문을 듣고서는 막 패 죽인다고 몽둥이들 들고 오는

거야. 거기서 여기까지는 한 200미터? 잡히면 죽는 거죠 뭐.

그래서 마침 우리는 철도 보수할 때 쓰는 차가 있었어요.

구르마 같은 거. 그 위에다가 (쌀을) 싣고서 그 장단에서

임진강 철교까지 약간 내리막길이에요. 그걸 그냥 우리 일행이

타고 쌀 있는 걸 싣고서 미니까 그대로 내려가니까

따라 올 수 없지. 자기네가.”

그렇게 어렵게 쌀을 구해서 돌아왔다. 그래도 먹고 살 쌀이 생기

니 든든했다. 그러나 그날 밤 누군가 이상한 군인이 깃발을 들고 올

라가는 걸 봤다고 했다. 지대가 높은 곳에 묵고 있던 할아버지 일행

은 군인의 정체가 무엇인지 살펴봤다. 자세히 보니 인민군 패전병들

이었다. 그들이 들고 올라간 깃발은 인민공화국 깃발을 만 것이었다.

그날 밤 일행들은 잠들지 못했다. 이제 다 죽은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어떻게 끌려갈 지 알 수 없었다.

“그 이튿날 아침이 됐는데, 약간 컴컴했어요.

시계들이 없으니까 잘은 모르지만 한겨울에는 컴컴하니까

아마 8시 가까이 됐을 거예요. 문을 두드리기에 문을 열고

나갈라하니까 총부리를 들이대는 거야. 다 나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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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추웠던, 그 해 겨울 41

그래도 나랑 수양 누님의 딸 기복이는 어렸으니까 괜찮았는데.

우리 누님이나 일행 중에 아줌마들은 다 끌려간 거지.

머리에 손 얹으라고 하고서 끌려갔는데, 이런 시골방 사랑방인데,

인민군 하나가 가운데 화로를 하나 갖다놓고 앉아 있어.

그리고 끝에는 보초 두 명이 총을 갖고 있고. 그리고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심사를 하는 거야. 그 사람이 왜 피난 가냐고 물어.

그래서 평양 시내에 원자탄을 쏜다. 그래서 피난 나간다 그러니까

원자폭탄이 그렇게 무섭냐고 해서 우린 무서운지 안 무서운지

모르지만 피난 나가야 된다. 그래서 여론화가 돼가지고 우린 뭣도

모르고 피난 가는데, 고향에 갈 수만 있으면 가겠다고 그랬어요.”

이야기를 듣던 인민군은 차를 보내 일행에게 무사히 고향에 돌려

보내 줄 테니 준비하고 있으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 대기하던 일행

에게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막혀있던 임진강의 길이 열렸다는 것

이었다. 어떤 통신수단도 보도도 없던 시절 소문은 그 무엇보다 빨랐

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일행은 고민했다.

“자, 이제 (임진강 건너러) 나가다가 인민군한테 걸리믄

죽는 거야. (인민군이) 자기네 차까지 보내줄 테니까

고향 갈 준비하라고 그랬는데. 그래도 고민하다가 ‘일단 나가자.

나갔다가 인민군한테 걸리믄 지금 차 오나 기다리러 나왔다’

그러자. 입을 맞췄어. 그렇지 않고 그냥 가는데 까지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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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이상 없으면 임진강을 건너가자. 하고 나왔지.”

다행히 임진강을 건너기까지 인민군은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겨

울의 한복판에 있는 임진강을 건너는 것도 생사를 걸고 해야 하는 일

이었다. 곳곳에 얼음이 깨져 있었다. 소를 끌고 나왔던 시골 사람들

의 소가 여기저기 빠져 얼음 속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

저것 재고 따질 여유가 없었다. 그저 무사히 이 강을 건널 수 있기를

바라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수밖에 없었다.

“임진강을 간신히 건너가지고 오니까. 이제 북한에서 가져온

돈은 필요가 없는 거야. 가마니에다 돈들을...

국군들이 얘기해줘요. 여러분들이 가지고 온 돈들은 더 이상

쓸 수가 없으니까 다 여기다 놓고 가라고. 그러니 그것마저

놓고 가려니 너무 막막한 거지. 이제 고향 가면 쓸 돈인데.

미련이라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마저 없어지니까

정말 뭐 막막한 거야.”

피난 행렬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 거대한 물결 속에서 할아

버지 일행들이 있었다. 그러나 어디론가 향하고 있지만, 어디로 향할

지 몰랐다. 행선지도 돈도 연고도 없었다. 그저 남으로 내려갈 뿐이

었다. 한참을 가다보니 거의 서울이었다. 그러나 다시 소문이 들렸

다. 서울 들어가는 길이 막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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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추웠던, 그 해 겨울 43

“지금 생각하니까 마포대교로 건넌 거야.

대교가 아니라 얼음 위로 건너는 거지. 또 그저 아침 한술 먹고

걷는 거야. 그러다 보니 시흥이라는 거야. 시흥 왔는데,

열차가 있더라고 화물열찬데, 사람들이 그 열차를 탈라고

개미떼 같이 모여들었는데, 자리를 잡을 수가 없잖아.

간신히 그 위에 몇 사람이 올라 자리를 잡아가지고 일행이 자리를

잡았는데, 조금 있다가 그 미군의 하우스보이라는 젊은 사람이

오더니 이 열차는 피난 나가는 게 아니고 폭파 시킬라고

여기 놔뒀으니까 각자 돌아가라고 첨엔 믿어요?

‘피난민들 못 타게 하려고 그러지.’ 하고 안 믿지.

그런데 그러다 나중엔 2차, 3차까지 경고하고 이 이상은

모른다고 그래. 그럼 결국은 불안해. 그래서 보따리 내려가지고

다시 걷기 시작하는 거야. 그렇게 걷기를 몇 달을 걸어서

평택까지 내려간 거죠.”

중공군과 유엔군의 전세는 엎치락뒤치락했다. 평택에서는 유엔군

이 길을 막는다고 해서 더는 못 내려갔다. 대신 국군이 다시 북진하

던 시기에 할아버지 가족들은 국군을 따라 인천까지 갔다. 그러나 유

엔군은 인천에서 다시 후퇴하기 시작했다. 당시 할아버지는 17살. 부

두에서 임시직으로 일을 했다. 그러다가 화물선 한 척이 군산으로 간

다고 했다. 가족들 모두 그 배를 올라탔다. 5,6일 정도 걸렸을까? 드

디어 군산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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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군산 가니까 피난민이라고 구르마에다 주먹밥을 주더라고요.

전라도는 그래도 대우가 좋았어요. 단순히 쌀이 많고 그래서인 것

같진 않고, 주민들이 피난민 도울 라고 협력했겠죠.

학교에 임시 수용소를 마련해주더라고요. 그래서 수용소에

있다가 거기서 같이 피난 오던 일행들이 헤어졌어요.

일행이 너무 많으면 힘드니까. 우리 일행 중에 익산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어떻게 부탁해서 방 하나를 얻었어요. 그래서 나랑

어머니 그리고 9살 많은 누님이랑 (수양누님 딸) 기복이랑

네 식구가 거기 따로 떨어져서 살기 시작했죠.”

아무 연고도 없는 지역이었다. 매형은 폭격으로 헤어졌고 할아버

지만이 유일한 남자였다.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제가 콩나물 장사를 해봤어요. 누가 소개해주는데,

콩나물 키우는 집인데, 콩나물 키우는데 물을 줘야 하잖아요.

물주는 걸로 해서 밥은 먹여주고 수입은 콩나물 팔아서 남는 돈을

이익으로 하는데, 아이고~ 콩나물 사란 소리가 나와야지.

구르마만 끌고 다니는 거야. 어떻게 맞닥뜨린 아주머니는

아니 학생 콩나물 사라고 소리를 질러야지 구르마만 끌고 다니면

어떻게 하냐고 그러니 뭐 죽어도 소리 안 나오고 며칠 끌고

댕기면서 그냥 사람 없는데 가선 ‘콩~’하다가는 쑥 들어가고

(하하) 그러니까 조금 나아지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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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추웠던, 그 해 겨울 45

‘콩나물’ 말이 겨우 나오기 시작할 쯤 다시 대구로 이사 갔다. 대

구에서는 철길 옆에다가 나무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그러다가 한참

후 신암동에 자리 잡았다. 그곳에서는 누님이 피복 미싱을 시작했다.

대구 동촌에 군인 옷 만드는 일을 하셨다. 할아버지 나이 18살이었

다. 그렇게 조금씩 생활이 안정되어 나가자 할아버지도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졸업할 때쯤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피난길에 헤어

졌던 매형과 연락이 닿은 것이다.

“기적이죠, 피난 갈 때 매형이랑 폭격으로 헤어졌거든요.

근데 어떻게 연줄연줄 소문에 의해서 연락이 닿은 거죠.

이 소문 같이 빠른 거는 난 없다고 생각해. 뭐 누가 대구 내려와서

알려 준 것도 아닌데. 근데 어떻게 알게 되어 가주고서 만나거야.

그래서 매형이 서울에 있데요. 그래서 다 같이 서울에 올라왔지.”

정착 : 뿌리 없는 삶의 고단함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서울에 올라온 할아버지는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하게 된 일이 구두 직공이었다. 그 무렵 누님 네에서

도 독립을 했다. 어머니와 (어머니 수양딸의 딸인) 기복이, 그리고 할

아버지가 해방촌에서 함께 살았다. 구두 만드는 일이 쉽진 않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저 주어진 일이 있다는 것만 해도 감사했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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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아내와 함께, 1958

아내와

인천 자유공원에서,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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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추웠던, 그 해 겨울 47

떻게든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구두 직공 일을 열심히 하다가

또 3,4년이 흘렀다. 어느덧 20대 중반의 나이였다. 주위에서 결혼하

라고 여기저기 소개도 시켜준다고 했지만 정작 할아버지는 큰 관심

이 없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인연은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같이 피난 왔던 사람 중에 한 사람 딸이, 이름이 미자예요.

미자가 나보고 삼촌삼촌 불렀으니.

‘삼촌 나 사진 하나줘’ 하더니. 내 사진을 몰래 빼갔어요.

나는 사진 돌리고 이런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근데 어떻게 빼가지고 간 게 (미자) 선생에게 갔어요.

그래서 그 누이동생이 사진을 보게 된 거야.

그렇게 돼서 결혼이 된 거예요.”

25살에 결혼을 한 할아버지는 이듬해 군대에 가게 된다. 그런데

거기에도 사연이 있다. 1935년에 태어난 할아버지는 호적상 1939년

생이다. 이승만대통령 당시 피난민들에게는 가호적제도라는 것이 있

었다. 가호적이라는 것이 신고만 하면 받아주는 거라서 몇 번을 해도

괜찮았다.

군대갈 일이 걱정이었던 할아버지는 나이를 줄여서 가호적을 만

들어놨다가 일정 시점이 지나면 다시 신고를 해서 나이를 늘리려고

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면서 호적이 정비되었

다. 가호적도 다 원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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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어느덧 20대 중반의 나이였다.

주위에서 결혼하라고 여기저기 소개도 시켜준다고 했지만

정작 할아버지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인연은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 을지로5가 통일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린 김순균 할아버지,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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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추웠던, 그 해 겨울 49

“꼼짝없이 군대를 갔죠. 근데 그때 의가사 제대라는 걸 몰랐어요.

사실 알고 보니 제가 그 대상이었던 거죠.

원래 군대를 안 가고 훈련만 받으면 되는 거였거든요.

어머니 계시고, 애들도 있고. 내 직계만 해도 식구가 몇이니까

안 가도 되는 건데. 군대 가서 알았어요.

그래서 1년 1개월 하고 제대했죠.”

제대 후 할아버지는 수원으로 오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이 수원에

세운 ‘직업재활원’에서 일하기 위해서였다. ‘직업재활원’은 신체의 장

애로 직업을 갖지 못하거나, 상이군인 등의 원호 대상자의 재활 교육

을 위해 세워졌다. 이곳에서는 목공장, 인쇄, 피복, 재화, 공구, 보철

6개 분야의 공장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재화 부분에 종사했다. 직접

사람들을 가르치며 군인 장교화 등을 만드는 일을 했다. 직업 재활원

에 처음 올 때만 해도 할아버지는 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신문에

구인 광고가 났을 때 조건이 아주 좋았기 때문이다. 집, 위생수당, 장

학금 등이 제공된다고 나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와보니 그렇지 않

았다. 당시 기술자들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직업

재활원에서 거의 20년 정도 일을 했다.

“사십 좀 넘어서 직업재활원에서 나왔지.

그리고 내가 직접 양화점을 차렸어. 이름은 평안양화점.

내가 평안도니까. (웃음) 매향교 앞이었는데 그 길 따라 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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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양화점이 몇 개 있었어. 나는 신사화를 주로 했는데

잘 안 됐어요. 운 때가 잘 안 맞았어요.

하다 안 되면 접고 또 딴 데 취직하고 그랬지.”

결국 할아버지는 ‘평안양화점’을 접고 인천에 있는 한 회사에 취

직을 한다. 출퇴근 시간만 왕복 4시간. 그러나 할아버지는 그 거리를

묵묵히 다녔다. 아이들이 한창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라 이사가 쉽

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그런 아버지의 성실함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 큰 아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공무원이 됐다. 그러나 공

무원 생활을 하면서 석·박사를 해냈다. 작은 아들은 성악과를 졸업

해 자신의 길을 가고 있으며, 딸은 교편을 잡고 있다. 할아버지는 아

이들 모두 ‘스스로 잘 커줬다고’ 이야기했다.

“내가 쭉 지나보면 뭐 (자식일은 마음대로) 안 되니까

속상할 때도 있지만, 고걸 하루빨리 남보다 캐치하는 게

중요한 거지. 노력했다 해도 두 가지 일은 못 하잖아요.

또 제일 중요한건 사람들이 자식들 잘 키웠다고 하는데,

저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아요. 자식들을 잘 키운 게 아니라

잘 커준 거예요. 자식들이 협력 안 하면 안 돼요.

내가 아무리 잘 키울라 그래도 잘 커 줘야 돼요.

그 옛날에 그 얘기를 들을 때 저는

‘제가 잘 키운 건 없습니다. 잘 커주었습니다.’ 그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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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추웠던, 그 해 겨울 51

나의 아이들, 1969

큰아들 수성고 졸업식날,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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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또 제일 중요한건 사람들이 자식들 잘 키웠다고 하는데,

저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아요.

자식들을 잘 키운 게 아니라 잘 커준 거예요.

자식들이 협력 안 하면 안 돼요.

내가 아무리 잘 키울라 그래도 잘 커 줘야 돼요.”

가족과 함께,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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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추웠던, 그 해 겨울 53

요즘 할아버지는 오산의 조용하고 공기 좋은 동네에 자리를 잡고,

소일거리를 하며 지낸다. 전쟁과 피난은 아주 오래전 기억이지만, 여

전히 생생하다. 그도 그럴 것이다. 김순균 할아버지는 14살에 아버

지를 잃었다. 그리고 16살에 전쟁을 경험했다. 살얼음 위를 넘어 피

난을 왔고,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살아왔다. 갑자기 소년에서 어른이

되어버린 할아버지에게 삶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할아버지

의 회고는 시종일관 담담했다. 세월을 원망하지도 않았고, 사람들을

나쁘게 말하는 경우도 없었다. 짧은 인터뷰에서도 할아버지의 흔들

림 없는 마음이 그대로 보였다. 그 마음이 느껴지니 할아버지가 ‘자

식들을 잘 키운 게 아니다’라는 말이 어쩌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어른의 말이 아니라,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한다. 김순균

할아버지는 평생을 그렇게 바르고 올바르게 걸어오셨고,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자식들은 자연히 잘 자랐을 것이다. 삶은 그렇게 시간을

넘어, 계속 되는 것이다.

구술정리 / 은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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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김순균 할아버지(80세) 연보

1935년 평양 출생 (위로 9살 많은 누나 1명이 있음)

1948년 (14세) 아버지 사망

1950년 (16세) 한국전쟁 발발, ‘비오는 일요일’이었던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음

(12월) 피난 떠남

1951년 (17세) 얼어있는 임진강 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건너옴

배를 타고 군산으로 이동

군산에서 ‘콩나물’ 장사를 5~6개월 정도 함

1952년 (18세) 대구로 이주

우연히 북한에서 알던 선생님을 길에서 만남

선생님의 도움으로 ‘성광고등학교’에 다님

1955년 (21세) 폭격으로 헤어졌던 매형에게서 연락 옴

누님과 함께 서울로 상경

구두일을 배우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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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추웠던, 그 해 겨울 55

1959년 (25세) 결혼

큰 아들 출생

1961년 (27세) 5.16 군사정변 발생

피난민 가호적이 원호적으로 정리 됨

군대 입대

작은 아들 출생

1962년 (28세) 1년 1개월 군대 생활 후, 의가사 제대

1963년 (29세) 수원‘직업재활원’ 재화 부분에 취직해

수원에 내려옴

약 십여 년간 직업재활원에서 근무

1965년 (31세) 셋째 딸 출생

1970년대 ‘평안양화점’ 운영

1980년대 초반 인천에 있는 재화 수출업체 취직

1990년대 말 은퇴

2000년대 이후 오산에 있는 아파트에서 소일거리를 하면서 지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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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내 앞으로 된 재산이 있으면 뭐 할 거야.

나도 금방 가.

그래도 이 여인숙 사업자등록증에는

아직 김.연.순

내 이름 석 자가 박혀 있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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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들의 보금자리 금보여인숙 57

가난한 자들의

보금자리 금보여인숙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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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수원 북수동, 과거 팔부자거리로 불렸던 이곳에 커다란 황금물고

기를 가진 오래된 금보여인숙이 자리하고 있다. 이 여인숙의 방들은

모두 달마다 숙박비를 지불하며 사는 달방 사람들의 보금자리가 되

고 있다. 그곳에서 금보여인숙의 안주인 김연순 할머니를 만났다.

기억 : 잃어버린 고향의 시간

황해도 개성읍에서 사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김연순 할머니는 6

살 때 부모님을 결핵으로 여의고 외할머니가 계신 개풍군 봉동면 백

가난한 자들의

보금자리

금보여인숙

∷ 김 연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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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들의 보금자리 금보여인숙 59

전리 흔드리미로 이사를 가게 된다.

초파일이 되면 할머니와 함께 선죽교로 나갔다. 이방원에 의해 피

살된 정몽주의 혈흔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역사 속의 선죽교 다리,

그 크지도 작지도 않은 다리 위로 달구경을 하러 놀러가곤 했단다.

그날은 외할머니가 어린 손녀에게 곱게 노랑 저고리를 입혀 주었다.

수십 년의 시간이 할머니의 삶을 스쳐지나갔지만 잊을 수도, 지울

수도 없는 기억들은 생의 꼬리표처럼 할머니를 따라 움직인다. 옛 일

이 가물가물할 때면 눈을 지그시 감고, 기억의 자취를 더듬거리며 말

을 이어가신다.

“우리 외할머니가 사는 건 형편없이 가난했어도

양반 출신이었던가 봐. 머슴애들하고는 말도 못 하게 했어.

학교도 안 보내주고. 그때 김호성이라는 면서기가 개성읍에서 온

전도사 선생이랑 야학을 만들었단 말이야. 그 학교 못 가는

가난한 아이들 데려다 글을 가르치고 그랬지. 할머니 몰래 다니다

들켜서 싸릿대 있잖아. 목침 위에 올라가 낭창한 그 싸릿대로

종아리 많이 맞았지. 지렁이 같이 시커멓게 들러붙어 있는

맷자국 때문에 아주 형편없었어.”

돼지기름, 들기름으로 밥해먹을 불을 피우던 시절, 집에 기름이 떨

어지자 외할머니는 손녀에게 석유 심부름을 시켰다. 그 심부름 길에

어린 김연순은 야학 여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선생님이 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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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그 학교 못 가는 가난한 아이들 데려다 글을 가르치고

그랬지. 할머니 몰래 다니다 들켜서 싸릿대 있잖아.

목침 위에 올라가 낭창한 그 싸릿대로

종아리 많이 맞았지. 지렁이 같이 시커멓게

들러붙어 있는 맷자국 때문에 아주 형편없었어.

개성 제일야학 당시, 왼편 윗줄쯤 얼굴이 없는 김연순 할머니.

자신이 얼굴이 초라하다며 손톱으로 긁어내셨다,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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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들의 보금자리 금보여인숙 61

한 장의 사진은 13살 소녀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보자기에 싸인 사진 하나를 보여 주면서 예수님이래.

그렇게 하나님을 처음 만났어.”

종교를 가지게 된 이후로 외할머니가 열두 군데를 돌아다니면서

고사를 지내는 모습이 할머니는 눈에는 영 마뜩잖아졌다.

“그래 할머니에게 그랬지. 당신 자식 다 죽은 이 땅에다 머할라고

고사를 지내냐, 사람도 못 먹는 밥을 한 바가지씩 귀신한테 주고

버리냐고 대들었지 않갓어? 그랬는데 그 호랑이 같은 할머니가

듣고 보니 네 말도 맞다 그러면서 더 고사를 안 지내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해. 다 하나님이 시킨 것 같아.”

15살 무렵, 외할머니는 혼기가 찬 당신의 손녀딸을 위해 데릴사

위를 들이려 했지만 김연순 할머니는 그 사람의 옷깃만 봐도 몸서리

를 쳤다. 다행히도 사촌고모의 도움을 받아 서울로 도피 아닌 도피를

떠났다. 외할머니는 손녀딸 행방이 묘연해지자 온 동네 우물이란 우

물과 개울가 풀숲을 여러 날 뒤지고 다녔다 하셨다. 하나뿐인 손녀가

죽었다고만 생각하셨던 것이다.

서울로 상경한 후 목욕탕이 딸린 일본 사람의 집에서 일을 했다.

아이가 다섯인 집이라 정신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처음에는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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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식도 입에 맞지 않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음식이 차츰 익숙해

지면서 밍밍한 음식도 할머니에게 먹을 만해졌다.

하루는 옥상에서 빨래를 너는데 옆집 남자가 말하기를 ‘석 달을

못 버티는 집에서 1년이 다 되도록 일하는 것이 기특하다’며 일이 덜

한 집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소개를 받아 간 곳이

백화점 지배인의 집이었다. 안주인이 아이를 못 낳아서 동생 딸을 수

양딸 삼아 키우던 집이었는데, 그 집 사람들은 할머니에게 여러모로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주인내외의 의식 수준이 높았던 집인 듯했다.

그 집에서 3년을 수월하게 지냈다. 나중에는 주인내외가 할머니를

데리고 일본에 같이 들어가려고까지 했으나 김연순 할머니는 고향에

홀로 계신 외할머니 때문에 선뜻 따라나서질 못했다.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던 일본인 부부는 딸아이의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를 작별의 선물로 할머니에게 남기고 떠났다. 잊지말자는 하

나의 표식이었을까? 이제는 모두 낡은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있다.

가끔 그때를 회상하며 그 사람들과 일본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할

머니는 생각해 본다.

고된 4년간의 서울살이 생활을 청산하고서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외할머니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손녀딸과의 재회를 무척이나 반

가워하셨다. 그렇게나 세던 고집은 어디로 가버리고 오직 손녀딸에

게만 의지하는 외로운 외할머니의 모습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

이었다. 그렇게 김연순 할머니는 다시 외할머니를 모시고 바느질품

을 팔아가며 4년간을 함께 생활했다. 정신대에 끌려 갈 뻔했던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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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들의 보금자리 금보여인숙 63

천만한 순간도 있었지만 부락 이장으로 있던 사촌고모의 도움으로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1945년 일제강점기에서 해방이 되던 그 시절에 할머니는 장단군

군내면 조산리의 부잣집 둘째 아들 김덕영을 사촌고모의 소개로 만

나 결혼에 이르게 된다. 할머니는 가난한, 게다가 고아나 다름없는

자신에게 남편은 애초에 결혼 상대자로 과분한 사람이었다 말한다.

“남편은 전부인과 사별하고 애가 둘 딸린 부잣집

둘째 아들이었어. 음력 8월 15일 날 만나서 그믐에 했으니

보름 만에 시집을 간 거지.”

“우리 시부가 땅을 만평을 가지고 해마다 천 평씩 늘려 인삼을

심고 그랬다고. 한자리에 또 심으면 효과가 없대.

10년이 넘어가야 땅의 효력이 있대. 올해는 이 밭에 심구,

다음 해에는 저 밭에 또 심구. 7~8월이면 삼을 캐고 봄에는

삼을 심궈. 지금은 시상이 좋아서 검은 비닐로 덮으면 되지만

옛날엔 짚으로 엮고 솔가지를 꺾어가지고 덮었어.

인삼은 그늘에서만 자라지 햇볕에서는 효과가 없대.

삼은 얼만큼 심구냐면은 무릎팍까지 땅을 파.

파가지고 벌어진 채 잡고서야 삼을 심궈. 사람의 노력을 많이

들여서 심었기 때문에 인삼이라고 하면 최고로 쳤지.

아닌게 아니라 시댁이 부자 소리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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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해방 이전 일본인들의 수탈이 심했던 당시에는 쌀이며, 유기그릇

이며 남아 날 것 없이 죄다 빼앗김을 당했다. 가난하고 없이 살았던

형편이었지만 일 년에 몇 가마씩 쌀이 나오는 땅이 있었던 외할머니

의 덕택으로 집안에 몰래 숨겨놓을 쌀가마가 남아 있었다. 할머니와

손녀딸 둘이서만 사는 가난한 집이라 먹을 양식조차 없을 거란 이야

기로 일본인들의 수색에서 운 좋게 비켜갈 수 있었다.

“일본 사람들이 작대기로 두들겨 가면서 쌀 숨겨 놓은걸

기가 막히게 찾아내서 다 뺏어 가던 때란 말이지. 아무리 부잣집

이라도 쌀이 귀했거든. 묵은 쌀 세 가마를 들고 시집을 갔는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쌀을 들키지 않고 숨겨 놓았냐면서

신기해 해. 시부가 삼밭의 일꾼들한테 전부 자랑을 했다고.

큰 동서한테 살림 배우면서 삼 농사 크게 짓던 시댁 일꾼들

밥해 날라 가며 시집살이를 했어. 아이 둘을 더 낳아

전실 자식까지 넷을 길렀지.”

부유 : 생과 사를 넘던 그날들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일본의 통치 아래에서 해방되었다.

그 통치 지역이었던 한반도에는 군사 편의에 따라 38선을 경계로 남

과 북으로 갈리게 되었고 미국과 소련 양군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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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들의 보금자리 금보여인숙 65

다. 미국과 소련이 그어 놓은 잠정적 군사분계선이었던 38선은 이제

남북한이 각각 별개의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국경 아닌 국경선이 되

어버렸다.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도 38선 부근에서는

간헐적으로 국지전이 일어났다. 장단군 대성동 마을은 그 전쟁의 정

점에 위치해 있었다.

그 당시 남편은 서울에 있는 소방서에 취직이 되어 장단군과 서울

을 바삐 오갔다. 주중에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주일날에는 집으로

올라와 서울서 한 주 동안 먹을 쌀이며 김치 같은 식량을 깡통에 담

아서 다시 서울로 내려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땅을 재는 측량 토목과

출신이었던 남편은 경찰이나 여타의 다른 직업은 마음에 없었고 학

생을 가르치는 교편직에 몸담고 싶다며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개성

읍으로 들어가 6개월 동안 자취생활을 하며 공부한 덕택으로 어렵지

않게 교편직을 붙잡게 되었다.

제일 먼저 발령이 난 곳은 수원 고색초등학교였다. 당시 식구라

고는 전실 자식 둘과 내가 낳은 자식 둘에 외할머니까지, 여섯 식구

였다. 여섯 식구를 끌고 생활하기가 벅찼던 남편은 홀로 수원엘 먼저

나왔다. 할머니는 또 다시 남편과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 사이 마을에서는 몇 번의 전투가 벌어졌고 이북에서 군

인들이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끔찍했던 세월이었다. 대성동마을 옆

에 위치한 장단마을이란 곳에서는 7,80호 가까이 되는 집들이 모여

있었는데 한밤중 비행기가 와서는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그 난리통에 사람들은 모두 땅을 파고 서까래를 지고 굴을 파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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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어갔다. 연기에 질식해 땅속에서도 죽어나간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마을 사람이 죽고 소 아홉 필이 불에 타 죽고, 마을은 아비규환 그 자

체였다. 할머니 역시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땅굴을 팠다. 10살 된

딸과 함께 말이다.

“갓난쟁이 아이는 등에다 업고 굴을 팠지 내가.

어린 딸은 세숫대야에다 파는 대로 흙을 담아서는

‘야 청자야. 이거 내다버려라’ 하면 말을 잘 들어.

아무도 없으니깐 그래도 사는 데까진 살려고 그만치 앉아선

흙을 담아다주면 갖다버리고. 굴 아가리를 요만큼 잡아가지고

넓이는 두 갑절 되게, 사람 구부리고 댕길만하게. 그리고 여기다

짚을 깔고 공석을 깔고 이불을 덮으면 훈훈한 게 잘 만해.”

김연순 할머니는 1년여란 시간 동안 전쟁의 중심에 놓인 마을, 그

차디찬 땅속에서 한 해 겨울을 나야만 했다. 마을로 이북군인이 내려

와 한 손에는 전화줄을, 다른 한 손에는 땅 파는 곡괭이를 들고는 먹

을 것을 찾아다니곤 했단다. 마을 주민들도, 남과 북의 군인도 모두

가 배고프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한해 겨울을 지나고 나니깐 남쪽 군인이 또 도로 찾아

올러오기 시작한거야. 그니깐 그 장단군 대성동 마을이란 데가

밀물썰물 모냥으로 왔다갔다 허기를 아마 횟수로 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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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들의 보금자리 금보여인숙 67

1~2년 걸리지 않았을까.”

할머니는 자신의 걸어온 길을 회상하시며 그렇게도 살았던 사람

이 있었다니...라며 홀로 작은 탄식을 내뱉으셨다.

그 사이 큰시숙과 남편이 먼저 남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1.4후퇴

무렵, 장단군에서 남편과 형님동생하며 절친하게 지내던 양씨라는

이가 트럭 한 대를 몰고 대성동 마을을 찾아왔다. 교편직에 잠시 몸

담았던 양씨는 그 뒤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군대에 있었던지라 가장

먼저 우리 편에 차를 보내주어 제때 난리를 피할 수 있었다.

“그 정신없는 중에도 옷가지 챙기는 것보담 먹을 게

중요하것다 싶은 거야. 집에 있는 웬만한 쌀가마하고 재봉틀만

들고 피난길에 올랐지. 다른 건 다 버리고.

아래쪽으로 내려 간다길래 땅이 낮은 덴 줄 알았지 않갓어?

가는데 어찌나 산골짝인지 아주, 아이구야… 많이도 굶었다.

풀이란 풀은 다 뜯어 먹어 안 먹어 본 풀이 없다니.”

남편이 있는 문산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몇 개월을 지내고 다시 일

산으로 와서는 또 몇 개월 있었는데도 가정집을 얻어서 피난살이를

해서 그런지 고생은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었다.

남편은 큰 아이를 데리고 문산에서 다시 수원까지 자전거를 타고

먼저 내려갔다. 1년간 문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다가 휴전이 되고 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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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남편과 금보여인숙마당에서,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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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들의 보금자리 금보여인숙 69

니는 남편이 있는 수원으로 내려왔다. 수원에 처음 정착한 곳은 고색

동이었다. 사택이 따로 없어 삼거리 조씨네 행랑방에 근 2년을 지냈

단다. 그 다음에는 반월 샘골로 교감 발령이 나서 3년을 지냈다. 할

머니는 샘골교회 다니며 기도도 많이 했다. 칠보로 발령이 났을 때는

5년간을 그곳에서 살았다. 외할머니는 칠보에서 89세의 나이로 세

상을 뜨셨다. 장례를 치르면서 칠보 한 씨네 사람들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며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하셨다. 그러고 나서는 과수원하던 권

교감네랑 바꾼 발령지에서 남편은 정년퇴임을 했다.

“새벽에 과수원 가운뎃길로 다니면서 기도를 다녔지.

그라믄 개가 컹컹 짖을 거 아이야. 권 교감네 집에 일하는 아이가

나를 보더니 그래. 지네 사모가 저 미친년 또 어디 가는갑다

하면서 욕을 한다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햐, 니 사모가 옳다.

남들 다 자는 새벽에 돌아다니니 미친년 맞다.”

굽이치는 할머니의 인생에 있어서 종교 없이 살기란 어려운 세월

이었으리라. 죽을 마음도 여러 번 먹었었지만 그때마다 아이들을 생

각했다. 모두가 하나님의 시험이라 생각하며 버텼단다.

“진흙이 토기쟁이 손에 만들어지듯이 하나님도 못난 나를

만들어 놓고 아직 안 깨트리는 건 어디 쓰임이 있어 그러겠구나.

안 그래? 토기쟁이가 지가 만든 그릇이 맘에 안 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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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깨부술 거 아니야? 햐, 인내로 돌고 도는 인생이구나.

내 목숨이 내 것이 아니니 또 살아보자.

하나님이 연장해 주는 만큼 열심히 살아보자 이러고 또 살았지.”

정착 : 뿌리 없는 삶의 고단함

1977년 5월 5일은 할머니가 금보여인숙으로 이사를 들어온 날이

다. 세월이야 어찌되었든 남편은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했고 그 퇴직

금으로 지금의 금보여인숙을 장만하였다. 지나가던 행인이 이사 잘

왔다며, 부자되겠네요 라는 기분 좋은 한마디를 남기고 가던 바로 그

날이다.

“그때 이 집이 생긴 지 60년이 넘었다 했으니 지금이

몇 년이야. 100년이 다 넘은 거이지. 아주 형편없어져 가는 거를

우리 아들이 다 고쳐 가면서 살고 있다구.”

퇴직금 1700만원을 받아 700만원은 남편의 오락 빚 갚는 돈으로

들어가고 1200만원 하는 이 집을 샀는데도 200만원이 모자라 간신

히 돈을 만들어 빚을 갚았다. 남편은 계속 집을 잡혀 빚을 만들었고,

다시 그 빚 갚기를 수차례. 나중에는 아예 집문서를 며느리 방에 숨

겨놓고 내주지 않았단다. 할머니의 속은 영감의 빚으로 시커멓게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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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들의 보금자리 금보여인숙 71

들어갔다. 그래도 여전히 북수동 금보여인숙은 건재하다. 수많은 사

람들이 이 여인숙을 드나들었고, 별의별 손님들을 만나고 헤어졌다.

“이 근방이 다 여인숙이었어. 와룡여인숙, 서울여인숙….

이 집도 살 때 여인숙이었지. 옆집 공사하기 전에는 햇볕이

잘 들어 국화가 잘 됐지 뭐야. 지나가는 사람들이 국화 구경하러

일부러 들어오고 그랬단 말이지. 근데 이제는 해가 안 드니끼니

국화가 안 돼. 그거이 많이 아쉽다. 밸에밸 손님이 다 있었지.

여자헌티 버림받고 지 손가락 자르는 놈, 꼬챙이로 팔을 찌르는

놈, 똥을 싸고 이불로 덮어 놓는 놈, 숙박비 떼먹고 도망가는

놈들도 하나둘이 아니야. 색시들이 남자들 델꼬 와서 자고 가던

시절에는 그래도 좀 나았어. 그때 방심부름 하는 아이(조바)3)를

뒀는데 이 아이가 영 게을시런거라. 물을 끓여서 주전자에 부어야

하지 않갓어? 그런데 언제 다 하냐고 보리차를 맹물에 타서

담는 거야. 햐, 이거 이거 내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이라면 안 되것구나. 그래 그 아이를 내보내고 그 다음부텀

내가 쭉 이 방에서 조바 노릇을 했지.”

수여고에 다니던 재주 많은 셋째 딸은 뭐든 한 번 보면 그대로 따

3) 일본어의 ちょう-ば [帳場](cho-ba)에서 유래된 말로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사용되던 말

이다. 상점이나 여관 등의 계산대, 또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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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그때 이 집이 생긴 지 60년이 넘었다 했으니

지금이 몇 년이야. 100년이 다 넘은 거이지.

아주 형편없어져 가는 거를

우리 아들이 다 고쳐 가면서 살고 있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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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라 해서 공부도 잘 하고 솜씨도 좋았다. 그러나 그런 아이를 연탄가

스로 먼저 보냈다. 몇 년 전 교통사고로 아들 하나를 또 보내고, 현재

는 내가 낳은 큰 아들 내외와 같이 살고 있다. 둘째 아들도 먼저 세상

을 뜨고…. 아이 셋이 할머니를 앞서 먼저 갔다. 다행히 전실 자식들

은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막내 딸내미가 저 문간방에서 피아노 석 대 놓고 애들 가르쳤어.

사람은 고생이 복이라. 내가 자석들을 많이 가르치지는 못했어도

지들이 배워 앞가림들 다 하는 거야. 큰딸은 바이올린.

둘째 딸은 피아노. 다 교회 봉사함서 하나님 품안에 잘 지낸다.”

“넘들은 빚내서 아이들 공부시키고 하더라만 형편이 안 되는데

억지로 공부하는 것도 순리가 아닌 거이야.

바보짓 안 하고 넘한테 손 안 벌리고 살면 그기 상덕이지.

요새 사람들이 어디 못 배워서 세상이 이리 시끄럽나.

잘 배워야 돼. 몸으로 배워야 되는 거야.”

남편은 79세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떴다. 아흔까지 같이 살아보

자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를 두고선 먼 길을 떠난 것이다. 할머

니만이 그 약속 홀로 지켰다.

“영감하고 90까지는 살아 보자 했지. 영감님은 일흔 아홉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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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들의 보금자리 금보여인숙 75

먼저 갔어. 나만 90을 넘겼지. 한 달 내도록 잠만 자더라고.

휘청휘청 걷지를 못해. 아주대(병원)도 가고 후생병원도 가고

했는데도 그냥 노환이래. 계속 먹지를 못하고 딸꾹질만 하는

거야. 거 집에 다니면서 영양주사 놔주는 이들 있잖어.

그 나그네한테 오천 원 주고 주사를 맞았는데도 똑같아.

그러고 한 13일 만에 세상 떴지.”

남편은 세상을 뜨기 전 목사를 불러 재산 정리를 말끔히 마쳤다.

괜한 분란은 애초에 만들지 않겠다면서 말이다.

“내 앞으로 된 재산이 있으면 뭐 할 거야. 나도 금방 가.

그래도 이 여인숙 사업자등록증에는 아직 김.연.순

내 이름 석 자가 박혀 있단 말이지.”

그리고 할머니는 남편이 숨을 거둔 뒤에 늦깎이 한글 공부를 시작

했다. 친절하고 좋은 선생님 만나서 금방 익혔단다. 이제는 어떤 책

이든 돋보기안경 너머로 글자를 더듬더듬이나마 천천히 읽어내려 갈

수 있게 되었다. 한글을 깨치는 데 있어서 할머니 인생에서는 더없는

성취감이자 자부심이 되셨으리라.

“내가 야학에서 가갸거겨 배우다 (받침)기역을 못 얹어서

글을 못 배웠지만서도 세상 이치는 좀 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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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뭘 알까 싶어도 죽을 날이 가까우면

보이거든. 아무리 정치가 앞서도 백성이 똑바르지 않으면 세상은

안 바뀌는 거야. 가족도 마찬가지지. 하나만 잘 나면 그게

뭐냔 말이야. 다 자기 자리에서 책임을 맡어야 누구한테 피해가

안 가는거야. 내가 이 나이 먹도록 몸을 움직거리는 것도 다 그런

까닭인 거이지. 이래 텔레비를 보다 보믄 햐, 우리나라 사람들

아직 형편없구나 싶을 때가 많아. 일거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일을

안 할라고 하는 것 같단 말이지. 거머리를 떼어 낼 새도 없이

논에서 일하고 머리가 벗겨지도록 짐을 이어 나르며 살던

사람들이라 우리는 집에 가만히 앉아 있질 못한단 말이야.

힘들이지 않고 어떻게 밥이 입에 들어 오갓어?

이리 구르마를 끌고 골목을 다니다 보믄 꽃 같은 처녀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어. 저 꽃 같은 아이들이 어쩌려고 저러나, 좋게 이야기

하믄 얼른 끄면서 안 피울게요 하는 이가 있고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피우는 이가 있단 말이야. 햐, 이거 누구의 귀를 울려

이것을 바로 세울까 싶을 때가 많아.”

고된 세월을 참고 견뎌온 할머니의 일상은 여전히 분주하다. 오전

에는 버려진 유모차 위에 폐지와 빈병들을 실어 고물상에 넘기고 오

후에는 함석판으로 둘러싸인 밭에서 고구마도 캐고 구기자도 거둔

다. 폐지 수집하여 얻은 돈으로는 본인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를 하시고 주일마다 성경책 한 권을 들고 교회를 다니시며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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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들의 보금자리 금보여인숙 77

에 여념 없는 삶을 살아내신다. 그리고 계속하여 작은 쪽방, 할머니

의 자리에서 금보여인숙을 지키고 계신다.

“이 시간이라는 게 금쪽같은 거야.

시간 함부로 낭비하면 안 돼.”

“내 멋대로 살면은 내 손해 와.”

“옛날 사람 불쌍하다.

이렇게 좋은 세상 구경도 못해보고...”

자신의 못난 얼굴이 싫어 사진 속 얼굴을 손톱으로 긁어내던 작

은 아이에서 이제는 세월 지나 늙을 대로 늙어버린 이 나이에 손해

볼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다는 할머니로 살아오기까지, 아흔 해를 훌

쩍 넘긴 할머니의 지난 이야기들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그 실타래

처럼 얽히고설킨 이야기들을 풀어내면서 한국근대현사를 관통하는

격동의 세월을 살아냈던 작고 힘없던, 그러나 당차고 강단 있었던 한

여인의 삶을 내밀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모진 세월, 모진 풍파를 다

겪어내시고도 세상에 감사할 일이 많다는 할머니에게 평온한 지금의

시간들이 좀 더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본다.

구술정리 / 최주영

사진 / 박김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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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김연순 할머니(93) 연보

1922년 황해도 개성읍에서 사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6살 때 부모를 결핵으로 모두 잃고 외가가 있는

개풍군 봉동면 백전리 흔드리미로 이사 감

1934년 (13세) 15살 먹은 언니 김옥순이 같은 부락 김 씨 총각

에게 시집 감. 남자 아이들과 말만해도 목침 위에

올라가게 해서 싸릿대로 종아리를 때리던

외할머니는 학교 근처에도 보내주지 않음.

야학 여선생님을 통해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남

1936년 (15세) 외할머니가 오로지 자신에게만 의지하다 혼기가

차자 데릴사위를 들이려 함. 배우자 될 이가

너무 싫어 사촌 고모의 도움으로 서울로 떠남

1937년 (16세) 서울에서 아이만 다섯인 일본인 가족 식모로

일함. 까다롭기로 유명해 석 달을 못 버티고

도망쳐 버리는 집에서 1년이 다 되도록

묵묵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고 이웃 사는 이가

일이 덜한 집을 소개해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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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들의 보금자리 금보여인숙 79

1938년 (17세) 동생의 딸을 수양딸로 삼은 후지타백화점 지배인

집에서 3년간 수월하게 지냄. 일본으로 함께

데리고 들어가려 하였으나 외할머니 때문에

떠나지 못하고 서울에 남음

1942년 (21세) 4년간의 서울살이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 옴.

정신대에 끌려 갈 뻔 했으나 부락 이장이었던

사촌 고모 도움으로 간신히 피함. 재봉일해서

바느질품 팔아 생활하며 외할머니와 3년간 지냄

1945년 (24세) 8월 15일 사촌 고모 며느리의 친정 조카인

남편 김덕영을 소개받고 보름 만에 결혼함.

남편은 장단군 군내면 조산리 부잣집 둘째

아들로 상처한 28살 가장이었음.

여섯 살 딸과 세 살 아들이 있는 남편에게

24살 나이로 묵은쌀 세 가마를 들고 시집 감.

수탈이 극심했던 시기라 시댁에서 고마워 함

1951년 (30세) 1.4 후퇴 때 외할머니, 아이 넷을 데리고 먼저

피난을 떠나, 남편이 있는 문산군 덕성면으로 감.

남편은 큰 아이만 데리고 수원 친척집으로

먼저 내려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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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1953년 (32세) 토목기술을 공부했던 남편이 국민학교 선생으로

일함. 북에서 딴 기술이라 외곽으로만 발령이 남.

고색동, 칠보를 거쳐 교장으로 퇴임함

1977년 5월 5일 남편의 퇴직금으로 1200만원에

(56세) 금보여인숙을 사서 이사 옴

1997년 (76세) 남편이 79세로 세상 떠남. 7남매 중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먼저 보내고는 더 신앙에 의지하여 살게 됨

2014년 (93세)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살고 있지만 평생 쉬어

본 적이 없는 몸이라 지금도 폐지 줍고 텃밭 농사

지으며 살고 있음. 짧게는 2년 길게는 7년 동안

여인숙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이웃들과 한 식구

처럼 서로 도우며 지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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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들의 보금자리 금보여인숙 81

“이 시간이라는 게 금쪽같은 거야.

시간 함부로 낭비하면 안 돼.”

“내 멋대로 살면은 내 손해 와.”

“옛날 사람 불쌍하다.

이렇게 좋은 세상 구경도 못해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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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그 역경을 기억을 하면 못살아요.

다 나쁜 건 잊어버리고,

사전에서 안 된다는 단어를 없애버려.

하면 된다. 노력한다.

이 개념만 가지면 뭐든지 돼요.

내가 왜 이럴까 하면 안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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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선로 위의 인생,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 83

끊어진 선로

위의

인생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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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고향을 잃고 떠도는 많은

실향민들을 양산해냈다. 하지만 6.25전쟁을 계기로 월남한 사람들만

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종교적, 민족적, 정치적 박해로부터 북에서

탈출하고자 한 사람들, 1947년부터 벌어졌던 수많은 국지전으로 인

해 폭격을 피해 내려온 사람들 등 1946년 이후 다양한 이유들로 북

에서 남으로 사람들은 월남해왔다. 김영태 할아버지 또한 6.25 전

쟁 이전, 북청에서 서울까지 경원선으로 철도학교를 통학하던 그 당

시 오가지도 못하게 된 철도와 마주해야 했다. 숨 쉬는 공기도, 두 발

을 내딛고 있는 땅도, 마주치는 사람들도 모두 다를 게 없는 대한민

국 땅이었지만 나의 부모가, 쉴 수 있는 나의 집이 없어진 하늘 아래

끊어진 선로 위의 인생,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

∷ 김 영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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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선로 위의 인생,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 85

서울이란 할아버지에게는 타국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하

지만 끊어진 선로 위의 철도처럼 그대로 멈춰 있을 수만은 없는 시간

들. 할아버지의 삶은 계속 되어야만 했다.

기억 : 잃어버린 고향의 시간

과거 만주 지역은 우리 선조들이 세운 고조선을 비롯해 고구려,

발해가 건국된 곳이다. 다양한 민족들이 삶의 터전을 일구며 살아가

던 지역이었다. 그리고 17세기 중엽, 만주족에 의해서 만주는 온전히

중국의 영토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한편 조선의 북부지방에서는 빈

곤한 한인 농민들의 생존을 위한 만주 지역으로의 이주가 본격화 되

었고, 1910년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인 이유

로 만주로 이주해 가는 성향이 더해졌다. 김영태 할아버지도 한인들

이 많이 이주해간 만주, 그 드넓은 지역의 봉천에서 태어났다.

“봉천이 북간도. 만주지 만주. 지금 말하자면 봉천이 어디냐면

길림성하고 흑룡강성하고 아마 그렇게 돼 있을 거야. 옛날 고구려

땅이지. 요동땅이에요, 요동땅. 근데 거기가 우리 어린 시절에

얼마나 촌이었냐면 영하 30도에서 35도 정도 되는데,

조금 심하게 얘길하면은 소변을 보고 돌아서면 얼 정도로 춥고,

할아버지 수염에 고드름이 매달릴 정도예요. 그렇게 추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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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왜 옛날에는 왜놈들이 전매서에서 만든 담배가 귀하고 비싸니까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은) 담배밭에서 기른 잎사귀담배,

그걸 엽초라 해요. 그걸 비벼서 쌈지에 넣었다가

담뱃대에 넣어 피는 시절이라고 이게.

해방되기 전에는. (우리 조부께서도 엽초를 피셨는데)

그걸 순사가 붙잡아서 벌금을 물고 벌을 주려고 하니까

(조부께서) 설대(담뱃대)를 분지르고

그걸 담배하고 순사 얼굴에다 집어던지고 두들겨 패고

가족들하고 가신 곳이 만주야.”

당시만 해도 관에서 나온 담배를 피게 만들어 세수(稅收)를 확보

하려던 일본인들은 술도 집에서 담가 먹지 못하게 하는 등 감시가 철

저했다. 김영태 할아버지의 조부님은 도망치듯 가족들을 데리고 만

주로 야반도주를 하셨다. 그리고 만주에서 다시 함경도 북청이라는

곳에 정착을 했다. 낭림산맥을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북청이, 서쪽에

는 평안도 강계가 자리한 곳이다.

“북청에서 바닷가 신포가 서울에서 인천 가는 거리 정도 돼요.

그런 곳에서 생활하면서 할아버지 덕분에 안 굶고

잘 얻어먹고 잘 살았지. 할아버지가 어척을 5대를 가지고

부유한 생활을 하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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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선로 위의 인생,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 87

부유 : 생과 사를 넘던 그날들

넉넉한 가정형편이었던 할아버지는 서울로 유학길에 올랐다. 아버

지께서 철도학교를 보내신 것이다. 북청에서 서울까지 먼 길을 다닐

수 있었던 유일한 등하교 수단은 바로 경원선이었다. 철도학교를 다

니던 그 사이 나라는 해방을 맞이했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48년, 철도

는 끊겨버렸고 할아버지와 가족과의 인연도 갑자기 끊어져버렸다.

“경원선이 옛날에 어디서 출발했냐하면 지금 청량리 미도파

백화점 자리가 성북역이에요. 경원선 출발역이야. 그래서

원산까지 가는 거거든. 금강산 지나서. 그 원산까지 가서 이제

북청으로 다른 차편을 이용해서 다니고 그랬는데, 1948년도 여름

방학 때부터 못 간 거야. 딱 (경원선 선로를) 막아 버린 거야.”

경원선은 본래 서울에서 원산까지 연결된 철도 노선이었으나, 한

반도 분단 이후 신탄리에서 군사분계선에 이르는 구간이 폐선되었

다. 현재의 경원선은 대한민국 내의 구간인 용산~백마고지 구간만

해당된다.

“그땐 우리가 전기사정이 나쁘니까 압록강 수력발전소가

전기량이 많아서 이 남쪽에서 전기를 갖다 썼는데, 재령에 황해도

재령에가 남쪽으로 오는 송전선에 분기점이 거기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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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거길 잘라버리면 남쪽에 전기가 안 오는 거야. 그런 시절인데,

이놈들이 48년에 전기도 잘라버렸지, 철도도 잘라버렸지,

다 막아버렸지. 그래서 2년 있다가 전쟁 일으킨 거잖아.

전쟁준비할라고. 그래서 (난) 전쟁고아가 된 거야.”

하루아침에 천애고아로 전락해버린 할아버지의 삶은 잔혹하게 돌

변했다. 공부는 고사하고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아 막막한 하루하루

를 보냈다. 국가의 분단은 열다섯 살 소년에게는 차마 극복하기 힘든

상황으로 다가왔다.

“그 시절이 열다섯 시절이구나. 의식주가 해결이 안 되니까

어느 상점 같은데 종업원으로 들어가는 거야. 조건은 심부름하고

일만 하기로. 책 안 보고. 책 보다 쫓겨나고, 책 보다 쫓겨나고

여러 집을 쫓겨 난거야. 학업은 하고 싶고, 시간이 없으니까

시간 나는 대로 이제 공부는 해야겠으니까. 쫓겨나고 쫓겨나고,

끝내는 주먹세계까지 내가 포섭이 돼가지고 갔다고.

그런데도 나쁜짓거리는 안 해서 5.16혁명이 났을 때도

난 안 붙잡아가데? 주먹세계(있던 사람들) 다 붙잡혀 갔는데,

난 착한 일을 많이 했다고 안 붙잡아가.”

이리저리 고단한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면서도 할아버지는 학업에

대한 열망을 놓을 수가 없어 독학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낮에는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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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선로 위의 인생,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 89

하고 밤에는 학업을 이어나갔다. 당시만 해도 검정고시라는 것은 없

었고, 보통고시, 고등고시가 있었다. 보통고시라 함은 주사급 공무원

의 임용 자격고시로서 수험자의 학력제한이 없어 누구나 응시가 가

능했다. 주경야독 부단한 할아버지의 노력으로 1954년 보통고시에

합격했지만 뒤늦게 받은 합격통지서에는 이미 날짜가 훌쩍 지나버린

등록기간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좌절할 틈도

없이 전국 각지를 돌며 일을 해나갔다.

“나한테는 졸업증이 하나도 없어요. 졸업증명서가 없어.

졸업을 할 수 없으니까 다니다가 형편 안 되면 그만두고

해야 하니까. 그 대신 그때는 국가시책이 뭐냐면은 지금처럼

자격고시를 봐야 되는데, 학적증명서 이런 것이 없어요.

내가 능력만 되면 아무 국가고시를 볼 자격을 주던 시절이니까

여러 가지 기술자격을 취득했지.”

취득한 기술자격증만해도 종류별로 다양하다. 전기설비, 전기시

설에서부터 공인중개사, 건강관리사, 분재관리사, 근래에 나온 장례

위생사 등등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다. 할아버지의 배움에 대한 열의

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1958년쯤엔 성광사란 절에 들어가 공

부를 하며 잠시 승려생활을 하기도 했다.

“승려 중에도 승려가 세 분류가 있어요. 가르치고 연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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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하는 학승. 기도만 열심히 하는 불경승. 다니면서 먹거리하는

시주승, 그 세 가지가 있어요. 근데 학승은 그 세 가지를

다 할 줄 알아야 해요.”

할아버지는 그 시절 학승과 시주승을 병행하였고, 도처를 떠돌며

시주를 하러 다니기도 하셨단다. 그러나 큰스님의 권유로 2년간의

절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하산하게 된다.

그때와 맞물려 1959~60년대까지는 대구공군비행장에 내려가

K-2 격납고 건설 현장에서 감독을 맡기도 했다. 당시 한국공군의 수

송기나 전투기를 국내에서 수리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지지 않아 대

만이나 일본 등지로 보내어 수리하던 상황이었으나, 할아버지가 건

설 현장 감독으로 근무하던 그 격납고의 건물은 한국 최초의 항공기

수리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일을 했는데 제일 기억이 나는 것이 9.28수복이

돼가지고 중앙청 복구공사를 했어요. 중앙청을 인민군이

다 부숴놓고 간 것을 낮에는 행정공무원들이 일을 하고 밤에만

일을 해줘야 돼. 그때는 도면도 없고 다 없는 것에서 안에 묻히게

매몰공사는 못하고 바깥에 보이게끔 공사를 해가지고 그 중앙청

에 행정업무를 보게끔 모든 시설을 복구하는 작업을한거지.”

5.16 후인 1961년 9월에 가서야 시작된 중앙청 복구공사는 이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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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선로 위의 인생,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 91

경북영천 금호강 단포교 시설현장 근무 시절, 1956. 09. 24

주경야독 부단한 할아버지의 노력으로

1954년 보통고시에 합격했지만 뒤늦게 받은

합격통지서에는 이미 날짜가 훌쩍 지나버린

등록기간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좌절할 틈도 없이

전국 각지를 돌며 일을 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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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해 공사를 마쳤고, 정부기관들은 입주를 시작해 다시 본격적인 중앙

청 시대를 열었다. 중앙청이 다시 정부청사로 문을 열던 1962년도에

는 제4차 화폐개혁이 이루어졌던 시기기도 하다.

“노무자가, 노동자가 하루에 일당이 100원 할 때거든.

중앙청 서북쪽이 통의동인데, 그 통의동 시장에가

제일 싼 것이 국수야. 국수가 5원, 한 그릇에. 팥죽은 10원.

전차가 2원 50전 할 때니까. 그래서 그걸 먹고 잠자리는

공사장 창고에 창고지기로 하면서 담요 뒤집어쓰고 자는 거야.”

그렇게 일과 학업을 병행하면서도 할아버지의 일념은 오직 고향

으로 다시 돌아가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직장생활로 여수, 진해,

제주도 등지를 돌며 마이크로웨이브 통신시설 장비 감독을 위해 전

국 곳곳을 누볐다.

“남으로 내려와서 여기저기 많이 다녔지. 내가 전국적으로

철도로 치면 나진에서부터 나진이 우리나라 철도 제일 북단

이에요. 나진 철도학교 다녔으니까. 나진에서부터 경부선은 부산

까지. 호남선은 목포까지. 철도로서는 내가 다 다녔고. 또 남으로

서는 제주도까지 내가 가봤으니까. 내가 지역 방언도 잘 해요.”

그 사이 할아버지는 1961년 중매로 배필을 만나 결혼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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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선로 위의 인생,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 93

6.25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 하나를 양녀로 들이고 아들 둘을 낳

아 다복한 가정을 꾸렸다.

1968년경 할아버지는 언커크(UNCURK) 청사 건물을 관리

감독하면서 언커크로 입사하게 된다.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으

로 불리는 언커크는 한국 전쟁으로 파괴된 대한민국 재건을 목적으

로 1951년 세워진 유엔의 기구였다. 일명 '한국통일부흥위원회'라고

도 부른다.

유엔 기구에서 근무하게 된 할아버지는 자연스럽게 군 입대 명단

에서도 제외되었다. 이승만 정권 당시 맺은 정부와 유엔의 협정으로

인해 유엔 근무 한국인 종사자는 징용이나 징벌 대상에서 제외된다

는 조항 때문이었다.

“(언커크 청사가) 원래 5층을 올라갈 건데, 예산이 요것만 짓고

이걸 나중에 올리자고 해가지고 2층만 짓는데,

여기에 모든 시설이 다 있어 가지고 본부에 무선도 해주고

내가 무선사 자격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기술직하고

업무직하고 겸직을 한 거예요. 영상이라는 게 기술직인데,

전기설비, 무선설비 이런 거 본부에 통신관계도 하고

또 행정업무도 보고하니까 그래서 명이 길지. 잘 쫓겨나질 않지.”

“임무가 뭐냐 하면 전국에 다니면서 선거 시찰도 하고 선거감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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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하고 유엔군들 통제 지휘도 하고 그렇게 하는 곳이에요.

그게 72년도에 동맹연합국. 비동맹, 민주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도 아니고 비동맹국가에서 언커크를 없애버리자

해가지고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유엔군이 참전한 전쟁은

우리나라 한국전쟁밖에 없어요. 그걸 와서 폐지시켰거든.”

“언커크가 없어지고 뭐가 됐냐면 유니세프라고 아동기금,

그것도 들어와 있다가 그 담에UNDP라고 유엔개발기구거든.

디벨로브먼트 프로그램에 있으면서 내가 정년퇴임을 했는데,

30년을 채워달라고 했더니 연금관계 때문에 안 채워주더라고.

그래서 내가 92년 9월 30날까지 근무했으니까 한 30년 되나?

아시아에서 최장근속자라해서 유엔에서 증서 하나 준 것도 있어.

우리나라로 치면 뭐라 그럴까? 공로패라 그럴까.

훈장 비슷한 거 하나 줬다고. 내 서재에 있지.”

언커크에 있을 당시 할아버지는 헤어졌던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

다. 언커크는 당시 상당한 권력기구였고, 외무부에 조회를 부탁해 아

버지의 행적을 찾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전쟁 중 폭사로 생을 달리

하시고 아버지만이 돌아오셨다. 그리고 새어머니와 이복형제들이 생

겼다. 할아버지는 형제들의 학교 공부며, 시집장가 보내는 일에서부

터 병상에 있는 가족들까지 집안의 대소사를 책임져야 했다. 모든 것

이 할아버지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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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선로 위의 인생,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 95

언커크(UNCURK) 시설준공 감독 당시, 1968. 06. 20

UNDP 근무 당시 갑인회,

1977. 10.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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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나중에 유엔에서 퇴임을 하고 나진선봉지역이라고

우리나라에 지도 맨 꼭대기 블라디보스토크 경계, 함경남도 가는

경계 있는 거기가 나진선봉지역이에요. 유엔개발사업을 하는

곳이 있어가지고 거기에 첫 발령이 났는데, 북쪽에 갔더니 김일성

이가 살아 있을 때야. 남쪽으로 간 거 걔들(북한) 리스트가

다 있어요. 고관직 생활한 그거, 남쪽으로 간 거는

리스트 다 있어요. 안받아주잖아.”

정착 : 뿌리 없는 삶의 고단함

1992년, 오랜 직장을 퇴직하고 나서는 할아버지 삶의 시계는 더

빠르게 움직였다.

“근무를 할 때는 내 할일만 하면 되니까 안 바빴는데,

퇴직을 하고 나니까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고 봉사직도

해야 되고 무지하게 바빠요. 지금도. 실향민 단체 일 보느라고.

우리 가족들이 모두 한다는 소리가 소득도 없는데,

그 일을 한다고 돈벌이 안한다고. 근데 돈은 벌고 싶으면 벌지만,

사람은 돈 주고도 못 사요. 내가 그쪽들 돈 주고 살 수 있어?

못 사잖아. 나라는 걸 존재를 알았으니까 이쪽으로 오지.

내가 그쪽한테 돈 주고 못 사잖아. 이렇게 다니면서 인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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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선로 위의 인생,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 97

가꿔놓으면 그것이 돈이란 말이야. 급한 일 있거나 아쉬울 때

하나라도 도움 받으면 돈이잖아 그게. 꼭 현금만 돈이 아니라고.

사람을 사귀는 게 그래, 그래서 내가 퇴직을 해서는 더 바빴어요.”

할아버지의 배움에 대한 열망은 수많은 자격증에서 여실히 드러

난다. 분재강의 자격증을 가지고 분재협회에서 위탁이 들어오면 학

교를 돌며 분재강의나 특강을 나가신다. 또 성균관에서 예절강의도

도맡아 하신다. 천주교 교구의 노인대학에서는 65세 이상의 노인들

을 교육시키는 과정을 교구청이나 지역 성당에서 강의하신다. 노인

대학에서 할아버지의 별명은 호랑이 선생님으로 통한다.

“강의를 다니고 여기 경찰대학이나 그런데는 요새는 지자체가

생겨서 그런 게 없지만, 인명제로 할 때는 군수나 경찰서장 같은

사람이 중앙에 교육을 받으러 와요. 교육장소가 안양하고

수원하고 가는 중간에가 중앙교육원이라고 있는데, 지금 뭘로

쓰는진 모르겠어. 세무공무원 교육받고 정통부도 교육받고

하는 데에요. 공무원들 인성교육도 시켜주고 뭐 골고루 다 해요.”

할아버지는 교육에 대한 높은 열의만큼이나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밴 분이셨다. 물건 하나 허투루 버리는 일이 없다.

“우리 큰 애 키울 때에 사용하던 석유난로가 아직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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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45년이 된 것이 아직도 있어. 그 옛날에 쓰던 거 제니스 라디오도

있고 다 있어요. 나는 버리지 않는 거야. 우리나라 사람들은

새 것을 좋아해. 그래서 내가 강의장에 가서 그럽니다.

남편도 새 걸로 바꾸고 아내도 새 걸로 바꿔라. 고장이 나면

고치지. 못 고치는 게 어딨어? 부속이 없어 못 고치지. 유럽이나

구라파사람들은요, 찌그러지고 깨지고 그래도 조상님들이

사용하던 거는 참 보물같이 아낍니다. 우리사람들은 뭐야

이사 가면 다 버리고 새로 산대. 그래서 내가 신랑도 바꾸고

각시도 바꾸라하는 거여.”

유엔에서 일하기 전까지만 해도 여러 곳을 떠돌며 일하기에도 바

쁜 나날들을 보냈던 할아버지는 유엔에서의 근무를 기점으로 한곳에

정착해 살아가는 시간을 점차 늘려갔다.

“오래 산 곳이 없지. 유엔에 근무하면서부턴 여기 와서

오래 산거지. 유엔 사무실이 원래 적선동이라고 서울 통의동 뒤에

옛날에 왕가집인데 그게 불이 나는 바람에 새로 집지은거야.

영등포에서 쭉 근무하다가 정부에서 집이 필요하대서

그걸 내주고 한남동으로 얻어가지고 가고 그러면서

내가 서울에서 생활할 때는 청량리, 마포에서 지냈지.”

할아버지가 가장 오래 살던 곳은 광명시였다. 1963년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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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선로 위의 인생,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 99

2000년도까지 살았으니 과히 제2의 고향으로 손꼽힐만하겠다. 광명

시를 떠나 지금의 시흥에 정착한 것은 2000년 2월. 사실 할아버지와

가족들은 이북과도 가깝고 문중에 선조선산이 있는 강원도 고성 쪽

으로 가 정착하려 했었다. 한 발짝이라도 고향과 가깝게 맞닿아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던 것이리라. 잠시 머물다 가려했던 시흥 집에서의

시간은 벌써 햇수로 15년이 되어간다.

“지금도 내 마음엔 북쪽 고향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넓은 고구려

땅을 되찾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에요. 지금 그 쪽에

중국에서 안 쓰는 내버린 땅이 엄청 많아요. 그게 우리가 가면 다

쓸 수 있는 땅이라고. 얼마나 아깝고 좋은 땅이야.

요새 대조영이 다시 재조명해서 보여주는 모양인데, 발해잖아.

발해가 고구려 후손인데, 그 발해 땅만 해도 좀 넓어요?

그런 것이 가고 싶지, 뭐. 더 넓은 땅을 밟아야 되잖아요.

그래서 차차 됐으면 좋은데, 사실 명천에 있는 칠보산은

금강산보다 더 좋아요. 명천에 12키로가 명사십리인데 해당화도

쭉 펴 있고 정말 멋쟁이야. 이쪽 남쪽에는 그런 것이 없어.”

할아버지가 꿈꾸는 작은 희망도 있다. 넉넉한 운영자금이 주어진

다면 조용하고 맑은 넓은 터전에 실버타운 시설을 만드는 것이다. 괄

시받는 실버가족들을 모셔다 아픈 이는 병원에서 치료해주고 노인들

에게 소일거리를 제공하면서 죽으면 화장을 해서 납골당에 안치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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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복지사업을 희망하신다.

“당신네들 잘 사는 것이 어디까지냐? 날 보고 물어.

잘 사는 게 뭐? 요새는 잘 살아서 좋은 시절이지만은 잘 사는

목적이 집에 연탄불 안 꺼뜨리는 거, 하루 세끼 굶지 않는 거,

담배 피는 사람은 담배 안 꺼뜨리고 담배 필 수 있는 거,

술 마시는 사람은 매일 술 한 잔 즐겁게 마실 수 있는 거

그 정도면 부자다 이거야. 그게 어렵습니다. 쉬울 것 같지요?

어렵다구요.”

한국전쟁은 할아버지가 바랐던 법관의 꿈을, 고향을, 가족을 앗아

간 안타까운 일로 가슴에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역경을 딛고 일

어선 할아버지는 잃어버린 꿈과 돌아오지 않을 시간에 어느새 초연

해 계셨다.

“그 역경을 기억을 하면 못살아요. 다 나쁜 건 잊어버리고,

사전에서 안 된다는 단어를 없애버려. 하면 된다. 노력한다.

이 개념만 가지면 뭐든지 돼요. 내가 왜 이럴까 하면 안돼요.

되겠지. 내가 전생에 뭘 잘못했으니까 시련을 주겠지.

이 생각을 가지면 뭐든지 다 풀립니다. 아니 남의 머릿속에

든 글도 배우는데, 해서 안 되는 게 어딨어. 노력하면 다 돼요.

지금도 자식 놈이 힘든 일하면 나한테 못 이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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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선로 위의 인생,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 101

일은 힘 가지고 하면 바보야. 꾀를 가지고 해야 해, 지혜.

지혜 가지고 해야 되는 거예요.”

끊어진 철도 선로처럼 갑자기 우뚝 멈춰버린 할아버지의 지난 인

생길. 가장 많이 배워야할 시기에 전쟁으로 인해 사회에 홀로 내던져

진 할아버지는 무수한 역경을 딛고 지금의 자리에 섰다. 전쟁이 할아

버지의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경원선이 다시 복원되었듯 할아버지의

인생도 다시금 잘 닦인 선로 위를 내달렸다. 종착역이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할아버지의 삶은 아직도 힘차게 인생이란 열차 선로 위를

달려간다.

구술정리 / 최주영

사진 / 류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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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김영태 할아버지(80세) 연보

1935년 만주 봉천에서 출생

1948년 (14세) 북청에서 서울로 철도학교를 다니다가

경원선 철도가 끊김

1949년 (15세) 철도가 끊겨 졸지에 고아가 됨

1956년 (22세) 중앙청 복구공사 감독

1958년 (24세) 성광사에서 승려생활을 하다가

하산을 권유로 나옴

1959년 (25세) 대구공군비행장에서 건설현장 관리 감독

1961년 (27세) 중매로 결혼

전쟁으로 고아가 된 양녀를 들임

1963년 (29세) 개화도간척사업장에서 감독

1967년 (33세) 첫째 아들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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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선로 위의 인생, 그러나 삶은 계속된다 103

1968년 (34세) 언커크 입사

헤어졌던 가족들과 상봉

어머니는 피난 중 폭사로 돌아가심

1970년 (36세) 둘째 아들 출생

1973년 (39세) 언커크 해체

1974년 (40세) UNDP에서 근무

1992년 (58세) UN에서 정년퇴임을 맞이함

2000년 (66세) 현재 사시는 시흥으로 이사

2014년 (80세) 실향민 단체 활동과 여러 강의를 다니시며

바쁜 일상을 보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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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파도는 나가기만 하는 거 아니야.

들어오면 또 그렇게 살면 되는 거야. 너나 내나 다 운세지.

어떻게 다 틀어막니? 나갈 운세에는 주저 없이 내보내.

나갈 운세니까. 내가 어떻게 막니? 세상.

그리고 조금만 더 참고 극복해 가.

그럼 살길이 돌아온다. 살던 놈은 또 산다. 걱정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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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 그 좁은 틈 사이에서 105

생과 사

좁은 틈

사이에서

다섯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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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할머니는 철원에서 태어났다. 일제 시대였지만 부잣집 지주 딸이

라 남부럽지 않게 자랐다. 마을에서 학교를 다니는 여자아이가 딱 2

명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할머니였다. 그러나 시대는 할머니의 삶

에 조금씩 그늘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해방이 되고, 6.25가 발발하고

피난길에 오르고, 한국 사회에서 정착하는 전 생애 동안 할머니는 맨

발로 질퍽거리는 늪 가장자리를 걷는 심정으로 살았다. 언제 깊은 늪

으로 빠질지 알 수는 공포를 안은 채 매일 걸어야 했다. 옆에서는 가

족과 친지들이 아무 이유도 없이 그 늪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념분쟁

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빠가 희생되었다. 집으로 폭탄이 떨어졌고, 엄

마의 다리는 폭탄의 파편으로 붉게 물들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

생과 사,

그 좁은

틈 사이에서

∷ 박 순 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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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 그 좁은 틈 사이에서 107

던 어린 소녀였던 할머니는 외숙모의 주검 위로 도망쳤다. 생과 사는

종이 한 장 차이였고, 그 사이 위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

야 할지 막막했다. 그렇게 깃털보다 가벼운 삶을 부여잡고, 할머니는

‘살아냈다.’

할머니의 삶의 공간은 크게 3곳이다. 태어나서 시집을 갔던 철원,

그리고 피난 과정에서 잠깐 머물렀던 김천, 그리고 정착한 수원이 그

것이다. 시간상으로는 철원과 피난길의 과정이 길지 않다. 그러나 할

머니의 머릿속에서는 가장 ‘자세히’ 기억되고 있다. 원래 시공간은 함

께 가는 것이다. 내가 어떤 시간으로 그 공간을 채우느냐에 따라 공

간은 무한히 확장되기도 하고, 송곳 하나 세울 수 없을 정도로 좁아

지기도 한다. 할머니가 가족들과 함께 생과 사를 넘나들었던 ‘시간’들

이 넘치고 넘쳐, 철원과 피난길이라는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기억 : 잃어버린 고향의 시간

“우리 동네에서 초등학교를 나하고,

오촌 네 큰 댁 걔하고 둘만 댕겼지.”

지주집안에서 유복하게 자란 할머니는 마을의 둘 뿐인 초등학교

‘여’학생이었다. 그러나 그 삶 역시 평탄치는 않았다. 해방 직전 사실

상 패망의 길을 걷고 있던 일제는 거의 ‘발악’에 가까운 정책들을 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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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쳤다. 공공연하게 정신대에 소녀들을 끌고 갔고, 학도병을 모집했다.

초등학생들 역시 단체로 실 만드는 공장에서 한 달씩 강제 노동을 해

야 했다. 그 와중에 공장에 폭탄이 떨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흉흉한

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할머니는 돌연 ‘해방’을 맞이한다.

“학교에서 4반, 5반이 여자반인데. 4반은 일본 선생님,

5반은 한국선생님이었어요. 하루는 학교를 가니까 학교가

어리둥절 숭덩숭덩해요. 그래서 ‘왜 그러냐? 해방 됐데.

해방이 뭔데? 나도 몰라.’ 쑥덕쑥덕하는데, (일본)선생님이

우리를 보고 막 울어. 선생님이 우니까 우리도 막 울었던 말이야.

선생님이 그러다가 눈물을 스치면서 나간단 말이야.

그런데 옆 반에는 동해물과 백두산을 애국가 부르는 소리가 나.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몰라’ 쑥덕쑥덕하는데, (한국)선생님이

와서 ‘야, 니들 왜 울어?’해요. 그래서 막 웃었어. 원래 한국말

한 번 하면 변소 청소를 시켰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한국말

하니까 웃긴 거야. 그러자 선생님이 니들 울지 마라.

이러면서 풍금을 치면서 애국가를 가르쳐 주는 거예요.”

그렇게 ‘해방’이란 의미조차 알지 못 할 정도로 어린 소녀였던 할

머니는 울고 웃으며 ‘해방’을 맞았다. 그리고 두 해 뒤, 결혼을 한다.

당시 근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박부자네 딸’과 결혼을 하고 싶어

했다. 어머니는 청혼이 들어온 집 중 좋은 집을 골랐다. 시아버지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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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 그 좁은 틈 사이에서 109

사람이 한약방을 하며 동네 청년들을 가르치는 괜찮은 집이었다. 어

머니는 사위 될 사람을 직접 보고 나니 더 마음에 들어 했다. 키가 장

대하게 큰 멋쟁이였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곧 결혼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마을은 더욱 흉흉해졌다. 우리 힘으로 찾

지 않은 ‘해방’은 우리가 기대한 ‘평화’를 주지 않았다. 한때 같은 마

을 사람이었던 이들은 이제 서로의 ‘이념’을 감시하는 감시자가 되었

고, 그 잣대로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 출발은 1945년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결정된 연합국의 조선 처리 방침(신탁통치)이었다. 그러자

이남에서는 대규모 반탁 운동이 일어났다. 반면 이북에서는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세워지고 3월 토지 개혁이 실시되었다.

서로 다른 길을 가는 이남과 이북의 ‘이념’대립은 철원에 매섭게 불어

닥쳤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이웃이 무서워 새댁이었던 할머니는

남편과 함께 친정에 와 있었다. 그러나 친정은 결코 안전한 곳이 아

니었다.

“오빠, 엄마, 나 다 붙잡혀 갔지. 빨갱이한테 붙잡혀 갔지.

지주라고. 남편은 똥통에 숨어서 간신히 모면했어. 빨갱이들이

후퇴를 하면서 우리를 붙잡아갔는데, 오빠만 붙잡고 우리를

내주더라. 오빠를 고문하는데. 말도 못해……. 눈이 펄펄

쏟아지는데 오빠를 발가벗겨놓고 고문을 하는 거야. 동생이 그걸

어떡해봐. 이 얘기를 어디다 다해…….(울음) 같은 조선 사람끼리

서로 의지해 사는 거지. 이럴 수 있냐고. 그냥 막 들이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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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민청 남자들이 붙잡아. 그래서 ‘이 개새끼들. 너희들이 뭔데

나를 붙잡아. 어째 사람들이 죄 없는 줄 뻔히 알면서 잡아다가

이 따위 짓거리를 하냐!’ 오빠가 그 고문을 당하고, 며칠 있다가

또 붙잡혀 가서 행방불명으로 죽은 거예요.”

불행은 겹쳐왔다. 친정어머니가 미군 폭격을 맞고 다리가 부러졌

다. 거기에 아버지와 두 동생 역시 열병에 걸렸다. 약도 없던 시절 친

정식구 모두가 꼼짝없이 누워있었다. 결국 할머니가 친정에 머물며

식구들 병수발을 해야 했다.

“아버지도 아프고 동생들도 아프고 엄마도 드러누워 있고.

이러니까 애들이 똥을 못 누잖아요. 그래서 똥요강을 방 가운데다

두고, 요강에도 똥 누고 이러면 내가 갖다 버리고 갖다 놓고

이랬거든요. 그때 인민군대가 집집마다 댕기면서 총 들고

쏴 죽인다고 빨리 나가라는 거예요. ‘집집마다 댕기면서 인민군들

오면 빨리 이북으로 가라고.’ (그런데 인민군이 와서 보니)

똥요강 거기 있지. 아프다고 야단이지. 성한 사람은 나가고.

다 난리고. 식구들 간호하는 사람 나 하나뿐이지.

아버지 아프시고. 애들 아프고 이러니까. 이불 냄새 나고.

빨아 덮을 새가 어디 있어. (이불을) 풀떡풀떡 하면 냄새만

쿨쿨 나지. 땀내 나고 똥요강 가운데 놔두고. ‘아이구아이구.

아이고, 죽는다.’고 엄살을 더 했잖아요. 끌어갈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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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 그 좁은 틈 사이에서 111

아프기도 아프지. 열이 펄펄 나고 약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냥 가더라고요.”

부유 : 생과 사를 넘던 그날들

할머니가 친정 식구들을 돌보는 사이 남편은 방공호에 숨어 있었

다. 몇 달 뒤에 보니 남편은 ‘여드름이 덕지덕지, 머리끝마다 머릿니

와 서캐가 조롱조롱’ 달려있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남편은 몰래 이불

을 덮고 매일 라디오를 들었다. 만약 그 모습을 이웃의 누가 봐서 고

발이라도 한다면 바로, ‘총살’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할머

니를 불렀다.

“남편이 이불 속에서 라디오를 듣더니 이남으로 가야 산대요.

근데 그런 중간에도 이 양반은 옷이 그리워. 아주 옷 탐이 많은

사람이야. 나를 불러서 ‘여보 이남에 가면 사지스봉

(청바지로 추정됨)이라는 게 있는데. 구기지도 않고 물도 안 먹고

좋은 게 있대. 그런 좋은 천으로 만든 게 있는데 빨리 이남으로

가서 사 입어야 돼.’ (웃음) 농담 삼아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

그렇게 남편은 만날 이불을 뒤집어쓰고 라디오 뉴스를 듣다가 월

하리에 가면 미군 트럭이 몇 대씩 오고, 그 트럭이 이남으로 간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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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할머니는 친정에 머물며 아픈 식구들을 돌보

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누이가 찾아왔다. 시누이는 식구 모

두가 피난을 떠나기로 했다며 ‘지금 빨리 오지 않으며 영영 이별이니’

어서 돌아오라고 했다. 그러나 거동도 못하는 친정 식구들을 두고 할

머니의 발걸음이 쉬이 떨어질리 없었다.

“아버지가 쭉쭉 우시는 거야. 너 가면 우리 식구는 어떻게

되는 거냐. 네가 죽 쑤고 밥해서 먹이는데. 너 가면 우리 식구는

다 죽는다. 하면서 눈물을 흘리셔. 안 갈 수도 없고.

갈 수도 없고. 그래서 (내가 엄마에게 물었어) 어떡하지 엄마.

그러니까 엄마가 드러누워서 어떡하랴. 시집을 갔으니,

시집을 가야지. 아버지는 울면서 어떡해. 이 난리 통에 죽지 말고

살아라……. (그때는 서로 얼굴) 보는 그 시간만 살은 거예요.

서로 떨어지면 언제 죽을는지 살는지 몰라.

예측도 못해. 폭격 맞음 금방이라도 죽으니까.”

시댁으로 온 할머니는 피난 보따리를 꾸렸다. 시할머니, 시부모

님, 남편, 시누이, 시동생, 조카들까지 대식구의 이동이었다. 먹을

식량과 옷 보따리를 이고 매고, 월하리에 가니 정말 미군 트럭이 있

었다. 사람들은 꾸역꾸역 올라탔고, 할머니네 가족도 올라탔다.

그런데 그때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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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 그 좁은 틈 사이에서 113

“우리가 트럭에 올라 타 있는데 인민군대가 들어왔어요.

그러더니 남자 세 사람을 끌어내리는 거예요. 아니 근데 저그

아버지(남편)까지 끌어내리네. 어떤 사상인지 모르기 때문에

이 사람은 수상한 사람이다. 이러면서 끌어내리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내리면서 차가 붕 떠나네. 아이고, 이를 어째.

시동생들은 아직 어려서 올망졸망하고, 시아버지, 시어머니,

할머니 고모들 이렇게 다 있는데. 젊은 사람 하나만 든든한데.

저걸 끌어내리니 어떡해.”

졸지에 남편과 생이별을 한 할머니는 서울역까지 정신없이 실려

온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다시 기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또 기차에 올라탔다. 어리둥절해 올라타고 보니 그곳은

사람이 타는 ‘객차’가 아니라, 연탄을 싣고 나르던 ‘짐칸’이었다.

“사람들이 (연탄 때문에) 눈만 빤질빤질, 모두 새까매.

(피난민들의 몰골이) 짐승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미군들이

와서 ‘쏼라쏼라’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있나. 그렇게 가다 서다,

가다 서다 사흘을 가는데. 배가 고파 죽겠는 거야. 피난 나올 때

이만큼 큰 통에 밥을 해 가지고 나갔는데. 시할머니가, 아휴…….

내 식구가 최고지. 글쎄 ‘아무개 아버지 이리 오소!’ 하면서

동네사람들을 먹이고 여자가 먹으면 뭐해 하고 나를 못 먹게

하더라고. 고모는 뒤에서 손만 넣어서 주먹으로 퍼서 잡수시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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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나는 손 넣고는 못 먹겠소. 체면 가리다 보니 나만 굶은 거야.

세상에. 한 끼 건너, 두 끼 건너, 세 끼 건너 다 죽게 생겼네.”

더 이상 배고픔을 견딜 수 없던 할머니는 식구들과 함께 기차에서

내린다. 내리고 보니 그곳은 ‘김천’이었다. 보따리를 이고 내리긴 했

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그때 누군가 김천시청에 가서 피난

민이라고 이야기하면 자리를 봐줄 거라고 했다. 그래서 물어물어 시

청에 갔다. 시청에서 사람이 나왔다. 그는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았다.

“시청마당에 다 모였는데 세상에 (연탄가루를 뒤집어써서)

강아지 새끼인지, 사람인지 서로 쳐다보고 웃는 거야.

그러고 있으니까 어디도 못나가게 하더니 띠띠약(가루소독약,

DDT)을 확 뿌려놓네. 소독을 시키는 거야. 열병을 앓은

사람이 많으니, 하얀 가루 홀랑 뒤집어 씌어 놓는 거야.

그리고 서도립병원 입원실로 가래. 거기 비웠다고

피난민들을 한꺼번에 칸칸이 넣어주더라고.”

그러나 할머니는 그때부터 열이 펄펄 나기 시작했다. 피난 전부터

친정식구들을 돌보며 무리했던 몸이 피난길에 내리 굶다보니 사단이

난 것이다. 달랑 옷이 3개든 보따리가 천근만근 느껴졌다. 발 한걸음

도 떼기 힘든데 시할머니는 다른 짐 안 옮긴다고 야단을 쳤다. 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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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 그 좁은 틈 사이에서 115

니의 발걸음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기어가듯 서도립병원에 도

착했다. 그렇게 몇 달을 지냈을까. 갑자기 김천으로 편지가 왔다. 생

전에 다시 못 볼 줄 알았던 남편이었다.

“김천에 같이 피난 왔던 친구가 수원에 피난민이 많다고 해서

수원으로 갔어요. 그런데 수원서 댕기다가 지 아버지(남편)를

만난 거예요. 그래서 순옥이 여기 있다. 라고 알려주니까.

주소를 알려달라고 해서 그 주소로 편지를 한 거예요.

‘옷 팔아서 수원으로 와. 내가 더 좋은 옷 사줄게’(웃음) 이렇게.”

그러나 당시 김천에서 수원까지는 너무나 먼 거리였다. 딸린 식구

들은 많은데 먹고, 잘 노잣돈은커녕 차비도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가야 했기에, 지나가는 트럭을 잡아 올라탔다. 날이 어둑해질 무렵

트럭기사는 식구들을 대전에 내려주었다. 갈 곳이 없는 식구들은 옹

기종기 남의 처마 밑에 모여 앉았다. 이미 날은 저물어가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아이들과 노인들의 몸을 매섭게 파고들었다. 안 되겠

다 싶어 할머니는 지나가던 사람을 무작정 잡았다. 그리고 사정을 해

그 집에서 하룻밤을 났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눈뜨자마자 장에 나

가 자신의 옷을 팔았다. 간단한 요기와 차비를 벌기 위해서였다. 그

렇게 김천을 출발한지 며칠 만에 수원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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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정착 : 뿌리 없는 삶의 고단함

“수원 역전에 내려서 저그 아버지(남편)를 만났어요.

저그 아버지만 있을게 아니라 친구들도 있고, 아이고 세상에,

친정 식구들도 다 여기 있는 거예요. 저 북중학교 있는 데 거기

피난민들이 다 모여서 움막집을 짓고 살고 있더라고. 그래서

우리도 한 달 동안 움막집을 지었어요. 광교산을 가서 섯가리해서

얼기설기 살아야지 어뜩하냐고. 배급 쌀을 타다가 밥 해먹고.

몸빼 하나만 입고 만날 나무를 댕기니까. 이게 긁혀가지고

벌렁벌렁. 창피해서 죽겠는데 어떡하냐고. 헝겊쪼가리라도

있으면 대서 기는데. 헝겊쪼가리 없어서 못 대서기고.”

당시 수원에는 거대한 피난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김천에서 올라

온 할머니는 그곳에서 남편은 물론, 친정식구들 그리고 고향 사람들

까지 다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은

군인으로 나가버렸다. 또 홀로 남은 할머니는 제분 집에 다니면서 일

을 했다. 집안의 유일한 수입이었다.

그 무렵 원래 한약방을 운영했던 시아버지가 살길을 찾았다. 조그

만 한약방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작은 집에서 시작했지만 약이

입소문을 타고 금방 돈이 벌리기 시작했다. 당시에 한약방은 곧 ‘한

의사’였다. 늘 한약방에는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

의 삶은 편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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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 그 좁은 틈 사이에서 117

“돈이 벌리니까 여자들이 기어들잖아요. 그러니까 바람을 피우는

거야. 바람을 피는데 확 달라지더라고. 나보고 나가래. 애기도

못 낳는 거 살아서 뭐하냐고. 애기 낳아야지. 집안을 이어가지.

막 가라고 구박을 해. 근데 무서운 게 뭐냐면, 약방에 어떤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데리고 와서 ‘우리 아기가 수태를 못해서

데려왔다.’ 그러면 진작 데려오셨어야죠 해. 막상 나한테는

약 한 첩도 안 주시고. 애기 못 낳으면 나가라고 그러시더라고.

그 난리를 겪고, 곤란할 때는 뒷바라지를 했는데 밥 먹고

살만하니까 내쫓을라고.” (눈시울이 붉어짐)

결혼한 지 5년. 그러나 결혼하자마자 남편과 떨어져 친정 식구들

을 돌봤고, 피난살이 내내 남편과 떨어져 있었다. 수원으로 와서 만

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남편은 군대로 가버렸다. 현실적으로 아이를

가지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시댁 식구 그 누구도 할머

니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심지어 시누이는 ‘애기 못 낳으면 지가 알

아서 나가야지’라고 자기 친구를 남편에게 ‘붙여주기’도 했다. 그래도

할머니는 속으로 그랬다. ‘그래 봐라. 나도 병신은 아니니까. 낳을 때

되면 낳겠지.’ 정말로, 할머니는 남편이 군대에서 제대하자마자 26살

에 첫 아들을 낳고, 내리 삼형제를 낳았다.

“(아들 낳았다고 대우가) 나아지긴 뭐가 나아져.

더 구박해. 정말 일만 하고 살았어. 창만 희끄번쩍하면 일어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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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그날 일을 다 못하고 살았지. 한창 바쁠 때는 부엌 단반에

밥 비벼놓고. 오며 한 숟갈, 가며 한 숟갈 하면서 일했어요.

집은 점점 부자가 됐지. 우리 시아버지 약이 잘 듣는다고 소문이

나서 돈을 끌었어. 그래도 나한테 오는 건 없어. 대신 부잣집

마누라는 일 부자야. 도대체 일이 너무 많아서. 세세 틈틈이

당신 친구들 오시면 술상 봐야지. 술국 끓여야지. 빨래해야지.

집안 청소해야지. 애들 밥해 먹어야지. 거기다가 약 바라지까지

해야 하는데 너무 힘이 드는데. 밤중까지 해도 끝이 없어요.”

당시에는 약재가 가공되지 않고 그대로 통째로 한약방으로 왔다.

그러면 그 약재를 말리고 썰고 하는 일을 모두 한약방에서 해야 했다.

“약재가 짝으로 들어와. 그러면 법제(약재에 맞게 다양한

방법으로 손질)할 거 법제하고, 말릴 거 말리고, 쓰릴거 쓰리고.

그렇게 깨끗하게 해서 약방에 착착 다 해놓으면 약제사들이

자기가 필요한 거 꺼내다가 약을 지었어요. 우리가 뒷바라지

하는데. 하루 종일 바쁘죠. 약을 당시에 써리지 않으면 그게

다 섞어. 그래서 나는 천기박사야. 만날 하늘보지.

어떤 날 비오는 날인가. 구름이 어떻게 뜨면 비가 오던가.

아침에 해가 반짝. 아침에 해 오를 적에. 저기.

아침노을이 반짝 떠서 환했다가 없어지면 눈이 와도 오고,

비가 와도 와요. 사흘 안에 와도 꼭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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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 그 좁은 틈 사이에서 119

“하루 종일 바쁘죠.

약을 당시에 써리지 않으면 그게 다 섞어.

그래서 나는 천기박사야. 만날 하늘보지.

어떤 날 비오는 날인가.

구름이 어떻게 뜨면 비가 오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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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그 대식구들을 뒷바라지하며, 약 바라지까지 해야 했던 할머니는

하루도 몸이 편할 날이 없었다. 그러나 몸의 고단함은 마음의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시대가 그렇다고 하지만, 남편이 다른 여

자들을 공공연하게 만났던 것이다. 걔 중에 몇몇과는 실제로 결혼식

까지 올렸다.

“(결혼할 여자를 데리고 와서) 시아버지가 ‘점심을 해내라.’ 하시데.

그러니 내 정신이 내 정신이 아니야. 바가지 가지고 장 뜨러 가려다

우물가기 일쑤야. 안개가 머릿속에 껴서. 아이고...무슨 말을 해.”

그래도 남편이 가장 급할 때 찾는 건 할머니였다. 남편이 약제사

자격증을 따자 다른 지역에 가서 한약방을 차려야 했다. 당시에는 약

제사 협회에서 지정해준 곳에서만 한약방을 열 수 있었다. 처음 지정

받은 곳이 동두천이었다. 그러나 한참 아이들과 수원 한약방 뒷바라

지를 같이 해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먼 곳에 한약방을 낼 수는 없었

다. 그런데 당시에는 일정 기간 안에 한약방을 내지 않으면 면허가

취소됐다. 그때 다행히도 가까운 군포에 한약방 자리가 하나 났다.

그러나 그곳은 협회가 지정해주는 곳이 아니었기에 돈을 주고 사야

했다. 거금 30만원이었다.

“시아버지가 돈은 잘 벌어도 나한테 돈은 안줘. 남편도 아직

자기 한약방이 없으니 돈도 없고 있어도 나가서 다 써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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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 그 좁은 틈 사이에서 121

그럼 어떡해. 애들 키우고 살림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내가 밤에 뜨개질, 수예품을 했어요. 당시에는 학교에서도

수예품을 배워서 샘플이 많이 필요했어. 잘해야 샘플을

할 거 아냐. 내가 놓은 게 다 샘플이었어. 밤새 수예품 놓아서

하지. 조그만 애들 ‘짠짠복’이라고 떠서 갖다 주면 돈도 좀 주고

그래요. 그래서 애들 공책도 사고, 연필도 사주고 했지.

그리고 내가 그 수예품 놓은 돈으로 곗돈을 부은 게 있었어.

그게 마침 30만원이야. 근데 그걸 타자마자 남편이 이야기를 해.

그래서 내가 남편이 돈 없어서 고개를 꾸부리고 있어 이야기

했지. 뿌리박아서 살려면 돈 돼 준다. 이거 내가 수예품 놓아서

모은 돈이야 했더니 남편이 눈을 번쩍 뜨데.”

그렇게 군포에 한약방을 차리기 시작하면서 돈이 모였다. 그 돈을

관리하고, 불린 것은 다 할머니의 공이었다. 허름한 집을 사서 목욕

탕을 지어 팔았다. 그 뒤로 몇 채의 집을 더 샀고, 집만 4~5채가 되

었다. 현재 있는 ‘동창당 한약방’ 역시 할머니가 직접 지은 것으로 원

래는 오두막집이었다. 그렇게 동네에서 소문난 부잣집이 되어갔다.

“어느 날 남편이 그래요. ‘나는 우리 마누라 아니었으면 사기꾼

거지밖에 안 됐을 텐데. 노숙자가 됐을 텐데. 우리 마누라가

알뜰히 먹고, 뒷돈 대주고 그러는 바람에 난 부자소리 듣고

살았다.’ 그렇게 인정해 주니 고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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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어느 날 남편이 그래요.

‘나는 우리 마누라 아니었으면 사기꾼 거지밖에

안 됐을 텐데. 노숙자가 됐을 텐데.

우리 마누라가 알뜰히 먹고, 뒷돈 대주고 그러는 바람에

난 부자소리 듣고 살았다.’ 그렇게 인정해 주니 고맙죠.”

동창당 한약방에서 박순옥 할머니,

2013.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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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 그 좁은 틈 사이에서 123

그렇게 큰 집안 살림 뒷바라지 다하며, 집안 살림을 불린 며느리

였지만 시아버지는 여전히 며느리를 냉대했다. 그것들은 조금씩 쌓

여 어느새 할머니의 가슴에 커다란 돌덩이가 되었다. 그런 즈음에 할

머니가 대수술을 하게 되었다. 자궁에 혹이 생겨, 자궁을 들어내게

된 것이다. 수술을 마치고 아파서 누워있는데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커다란 수박을 손에 든 시아버지였다.

“아버님이 이만한 수박을 들여놔주시면서, ‘얼른 일어나거라.

우리 집안은 니가 있어야 집안 이끌고 나가지. 집안 이끌고 나갈

사람이 없어’ 하시데. 작은 며느리가 3명이나 되는데도 나한테

그 얘길 하시더라고요. 이거 먹고 정신 차려라 하는데 속으로

눈물이 철철철 흐르는 거야.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실까. 그냥 마음이

서늘하면서 안으로 눈물이 절절 흐르는 거야. 여태까지 모질게

했던 그런 말이. 여기 쌓여 있던 게 봄눈 설듯 하는 거야. 그런 말

한마디에 쓰러지는 거예요. 그러면서 혼자 훌쩍훌쩍 울었어.

눈물이 나서. 그러고 나서 3년 만에 돌아가시네.”

시아버지는 63세 라는 한창 나이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전날 저

녁까지도 진료를 보시고, 밤중에 갑자기 심장마비가 온 것이다. 그때

남편이 군포의 한약방을 접고 지금의 수원 한약방으로 와서 진료를

시작했다. 이때가 동창당 한약방의 전성시대이기도 했다. 그 당시 그

곳에 머무는 사람이 23명에 이르렀다. 시할머니와 시누이 조카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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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친척들도 이곳에 와서 일을 돕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시아버지처럼 남편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갓 환갑을 지난

나이였다. 아들들은 아직 어렸다. 그 빈 공백이 ‘동창당 한약방’에는

치명적이었다. 물론 달라진 세월도 한 몫을 했다. 현재는 둘째 아들

이 동창당 한약방을 이어 받아 하고 있다. 여전히 약을 지으러 오는

사람들이 있지만, 과거에 비하면 그 수가 많지 않다. 간혹 아들이 조

급해 하면 박순옥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없을 때는 공부하고, 있을 때는 보시하라고 했어.

지금 공부해야 돼. 아버지 있을 적에 고통 안 받고 호강스럽게

살다가, 어떻게 그렇게만 사니? 없을 적에 공부해야지.

파도는 나가기만 하는 거 아니야. 들어오면 알게 되는 거야.

돌부리 직접 차 본 사람이랑 알기만 하는 사람은 달라.

사람이 살다보면 어려울 때도 있고 좋은 적도 있고 나쁜 적도

있지. 어떻게 좋을 때만 있게 사냐. 그 공간을 잘 메꿔서

살아놓으면 다 살길이 돌아온다. 걱정하지 마라.”

화홍문에서 수원천을 따라 골목을 내려오면 낡고 큰 간판이 보인

다. ‘동창당 한약방’이 그것이다. 큰 간판과 탄탄한 건물이 당시의 위

용을 말해준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한약 냄새가 반기는데, 내부는

고풍스러우면서도 깔끔하다. 그리고 그곳에는 박순옥 할머니가 있

다. 할머니는 85세란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하얗고 맑은 피부를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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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 그 좁은 틈 사이에서 125

지고 계신다. 처음에는 ‘좋은 한약’ 때문 인가했다. 그러나 인터뷰를

모두 마치고 보니 ‘산전수전 다 겪고’ 이를 승화시킨 할머니의 ‘내공’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할머니와의 인터뷰는 긴 시간동안 진행되었다. 파란만장했던 한

평생, 긴 한숨으로 얼룩진 할머니의 세월의 이야기를 들어준 이 누

가 있었을까? 할머니는 필자를 만나 토해내듯 이야기를 쏟아 내셨

다. 놀라운 것은 그 시간들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할머

니의 눈빛은 아이의 그것처럼 청명했고, 표현력은 유명 작가 못지않

게 생생했다. 말과 말 사이사이, 행간에서 자신의 몸에 체화된 ‘희로

애락’이 읽혔다. 할머니가 지나온 시간은 그렇게 할머니에게 ‘청명하

고, 생생하게’ 아로새겨져 여든이 넘은 할머니에게 여전히 ‘생생한 기

운’을 주고 있었다.

삶의 ‘희망’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재산이나 재능과 같이 내

가 가진 어떤 것 혹은 환경이 전제가 되어야 할 것처럼 생각한다. 그

러나 박순옥 할머니는 그 굴곡진 인생 단면 단면에서 끊임없이 자신

만의 ‘희망’을 키워왔다.

박순옥 할머니의 말처럼 ‘돌부리를 직접 차본 사람’이 그 진정한

아픔을 안다. 할머니는 파도가 왔다가 가듯 사는 게 인생이라고 말한

다. 지금 파도가 나가서 괴로운 인생이 있다면 걱정 마시라.

여기에 한 현자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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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파도는 나가기만 하는 거 아니야.

들어오면 또 그렇게 살면 되는 거야. 너나 내나 다 운세지.

어떻게 다 틀어막니? 나갈 운세에는 주저 없이 내보내.

나갈 운세니까. 내가 어떻게 막니?

세상. 그리고 조금만 더 참고 극복해 가.

그럼 살길이 돌아온다. 살던 놈은 또 산다.

걱정하지 마.”

구술정리 / 은정아

사진 / 박김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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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 그 좁은 틈 사이에서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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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박순옥 할머니(83세) 연보

1932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에서 지주집안의

부잣집 딸로 태어남

1945년 (14세) 해방

1946년 (15세) 읍에 있는 초등학교 졸업

초등학교 내내 일본어만 배우다가 졸업 전

6개월만 한글을 공부함

1948년 (17세) 두 살 연하의 이형제와 결혼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에 가서 시집살이를 시작

1949년 (18세) 해방 후, 지주였던 친정 식구들이 ‘빨갱이’로 몰림

민청 사람들에 의해 오빠 행방불명 됨

(사망으로 추정)

친정어머니는 폭격을 맞아 다리를 잃고,

아버지와 동생들은 열병 앓음

친정에 와서 식구들 간호함

1950년 이후 6.25 전쟁 발발

(1.4후퇴로 추정) 미군 트럭을 타고 피난길에 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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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 그 좁은 틈 사이에서 129

사상검증을 하겠다는 북한군에 의해

남편이 트럭에서 강제로 내려짐

친정식구들 역시 피난길에 오름

다리가 아픈 어머니는 리어카에 실려 트럭까지 옴

1951년 (20세) 김천에서 피난살이 중 박순옥씨 본인도

열병을 앓음, 그 와중에 시 조카가 사망

“천금 같은 내 아들은 죽고 쓸데없는 여편네가

살았다”는 구박을 받음

1952년 (추정) 남편의 연락을 받고, 수원으로 올라옴

(21세) 친정식구들도 다시 만남. 그러나 어머니가

행방불명됨. 어머니와 동생들 다 같이 병원에

있었는데. 미군들이 영어로 무엇이라고 말하고

데려갔다고 함

1953~56년 남편은 군대에 감

(22~25세) 수원 피난촌에 움막을 짓고 살기 시작

시아버지가 한약방에 월급 약제사를 하다가

셋방을 얻어 ‘동창당 한약방’을 차림

어머니의 소재를 알게 됨. 미군들이 병원에

데려가 다리를 고쳐준 것임.

본인이 돈을 마련해 어머니의 노잣돈을 마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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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어머니를 수원으로 모심.

(그 후 친정은 철원으로 돌아가서 농사지음)

아이를 낳지 못한다며 시댁에서 구박을 받음.

아버님이 버리려던 약을 먹고 임신이 되었다고 함

1956년 (25세) 첫째 아들 탄생

1958년 (27세) 둘째 아들 탄생

1961년 (30세) 셋째 아들 첫째 딸 탄생

1963년 (추정) 남편이 약제사 시험 치러 가면 시험을 제대로

(32세) 안보고 술만 먹음, 그래서 순옥씨가 따끔하게

이야기했더니, 3번의 낙방 끝에

한약방 면허를 땄음

1964년 (33세) 막내딸 탄생

그즈음 자궁적출 수술 받음.

대수술 후 시아버지가 ‘우리 집에는 네가 있어야

한다.’라는 말씀을 하셔서 감동 받음

1964~70년 (추정) 군포에서 남편이 한약방 차림.

(33~39세) 돈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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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 그 좁은 틈 사이에서 131

1970년 (39세) 시아버지 심장마비로 사망. 11시까지 텔레비전

보고 주무시다가 갑자기 혼절 병원에 갔으나

괜찮아서 다시 집으로 왔는데 몇 시간 후 사망

남편이 <동창당 한약방>을 이어 받음

1980~90년대 <동창당 한약방>의 전성기. 건물을 4,5대 지어

가며 ‘유명한 부잣집’이 됨, 당시 동창당 한약방의

식구는 23명에 이르렀음. 시누이 2명에, 시동생이

3명. 거기에 수많은 친척까지 수시로 찾아옴.

박순옥 할머니가 대식구 뒷바라지를 모두 함

1990년 (59세) 남편 ‘이형제’ 심장마비로 돌연사

둘째 아들이 충분히 준비가 안 된 상태로

<동창당 한약방>을 이어받음

현재 첫째 아들은 근처에 살고, 둘째 아들이 한약방 운영.

셋째 아들은 미국에서 태권도장 운영하고 있음.

딸들도 수원에 살고 있음.

박순옥 할머니(83)는 둘째 아들과 함께 ‘동창당

한약방’ 거주. 시집간 손녀가 갓난 애기를 데리고

자주 들름. 할머니와 증손주는 서로를 바라보며

함께 웃는 시간이 많음.

그렇게 동창당의 ‘오늘’은 계속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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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그래도 애가 다섯 아니에요.

그럼 걔네들 다 굶어죽어. 피난 와서 작은 딸 낳았잖아요.

그랬는데. 지금은 얘네들 다 두고 죽으면

어떤 여자가 들어와서 얘네들 기르나.

나도 기 쓰고 살아야지.

그래서 거적때기 하나 펴놓고 장사를 시작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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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만큼 고운, 당신의 성마른 손 133

비단만큼

고운

당신의 성마른

여섯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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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시간은 지극히 주관적인 개념이다. 실제 우리 뇌의 작용이 그렇

다. 뇌는 많은 자극을 받으면 기억량이 많아지고, 그래서 시간이 길

게 느껴진다. 반대의 경우 자극이 없고 평온하면 시간이 짧게 느껴진

다. 이렇게 우리는 똑같은 24시간이라도 각자의 경험과 자극에 따라

다른 시간을 사는 것이다. 그렇게 따져보면 박순이 할머니의 시간은

다른 사람보다 몇 배는 더 길 수밖에 없다.

박순이 할머니는 일제시대 태어나 만주와 서울, 수원을 오가는 피

난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 세월동안 시간은 엿가락처럼 길어졌다.

그러나 다섯 아이를 피난길 사이사이에 낳아 길렀던 새댁은 이제 아

흔이 훌쩍 넘은 할머니가 되었다. 그러나 수십 년 전의 막막함만은

비단만큼 고운,

당신의

성마른 손

∷ 박 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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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만큼 고운, 당신의 성마른 손 135

여전히 생생하다. 여전히 그 시간을 회고할 때 박순이 할머니의 눈에

물기가 차오른다.

기억 : 잃어버린 고향의 시간

1923년에 서울에서 태어난 박순이 할머니는 대동아전쟁이 거의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시절, 남편을 만났다. 당시 결혼 안 한 처녀들

은 정신대로 끌려가던 흉흉한 시절이었다. 19살 소녀였던 할머니도

쫓기듯 결혼했다. 그러나 사진 속 새색시는 잔인했던 세월의 풍파에

빗겨난 듯 평온해 보인다. 팔짱을 끼고 선, 5살 연상의 남편이 좋고

든든했기 때문이었다. 시댁은 소문난 부잣집이었다. 과연 부잣집답

게, 결혼도 신식이었다. 할머니는 한복 저고리를 드레스처럼 차려입

고 종로 예식장에 섰다. 꽃 같던 그날의 순간은 사진으로 남아 호호

백발이 된 할머니를 여전히 설레게 한다. 그러나 결혼식이 신식이라

고 해서 삶의 방식이 신식으로 바뀐 것은 아니었다. 시댁은 옛 전통

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었다. 3대 독자였던 시아버지는 여전히 상투

를 하고 계셨다.

“종로 예식장에서 예식을 하고 가니까, 가마. 있잖아. 가마.

대청마루에 솥뚜껑과 바가지를 났더라.

난 19살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이거 뭐하는 건가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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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서울 종로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린 박순이 할머니,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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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만큼 고운, 당신의 성마른 손 137

시어머니가 ‘아가. 너 발만 내 놓고 솥뚜껑과 바가지를 밟아라.’

이러시더라고. 그랬더니 바가지가 아삭 깨졌어.

이게 뭐하는 건가 (그땐) 몰랐어.”

그러나 막상 결혼을 하고 시댁으로 오자, 상황이 달라졌다. 시댁

은 부자가 아니라, 부자였었다. 할머니는 복숭아밭이며 과수원이며

그 많던 논과 밭을 시아주버님이 다 ‘해 잡수신 것’을 나중에야 알았

다. 집에 쌀이 없어 어머님은 매일같이 쌀을 꾸러 다니셨다. 안 그래

도 없는 살림에 새색시에게 돌아올 밥이 있을 리 없었다.

“처음에 시집와서는 아무것도 몰랐지.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시어머니가 도둑질 하듯 앞치마 속에다 뭘 감춰서 방으로 빨리

들어가요. 저는 속으로만 ‘이상하다.’ 그랬지. 근데 당시의

시어머니 방에 커다란 독이 있었어요. 그 독안에 옷도 있고,

자루에 쌀도 조금 있었어. 그러면 어머니가 ‘아가 밥해야지’ 하고

쌀을 꺼내 줬어. 그렇게 솥에 밥을 했잖아요. 근데 식구들 밥을

다 푸고 나면, 밥이 없어. 그래서 그 누른 밥을 퉁퉁 불려서

김치 꼬다리 있잖아요. 그걸 넣고 퉁퉁 불려서 먹었어요.

나는 시집가서 신랑보고 이 집에서 밥도 제대로 못 먹는다

말을 못하잖아. 새색시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래서 어떤 날은

밥도 굶고 자고 그랬지. 그런데 어느 날은 시어머니가 밥을 반만

잡수고, 안 잡숴. 그래서 ‘왜 안 잡수세요. 남기셨어요?’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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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너 누룽지 먹는걸 보니. 내가 정말 눈물이 펑펑 난다.

그래서 밥이 맛이 없어. 너 먹으라고,’ 그래서 밥그릇에 반만

잡수고 나를 갖다 줘요.”

그렇게 자애로운 시부모님 덕분에 당시 할머니는 힘든지 몰랐다

고 한다. 본인 밥을 남겨 며느리에게 주는 시어머니뿐만 아니라 시아

버지도 인자했다. 아버님은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며느리에게 몰래

와 ‘아무도 주지 말고, 너 혼자 먹어.’ 라며 앞치마에 땅콩을 한 움큼

씩 넣어주셨다. 그 마음이 어찌나 고맙던지, 막내 시동생에게 늘 뺏

기면서도 박순이 할머니의 마음만은 늘 그득했다.

부유 : 생과 사를 넘던 그날들

일제 말기, 만주로 이주를 하게 된다. 당시 만주에는 작은 시누가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만주는 아주 먼 곳이었다. 만주 역시

일제가 장악하고 있긴 했지만 시골구석까지 그 손길이 미치진 않았

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일제는 더욱 잔혹해졌다. 할머니는 남편

과 함께 살길을 찾아 군수열차를 타고 만주까지 갔다. 물론 그 과정

이 쉽진 않았다. 신의주까지 기차를 타고 갔다가 또 갈아타고 갈아타

는 형식이었다. 기차는 가다서다 느릿느릿 움직였고 만주까지 열흘

넘는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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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만큼 고운, 당신의 성마른 손 139

“작은 시누가 만주 봉천리라는 데 있었어요. 시누 남편

그 양반하고. 우리 신랑보고 고생시키지 말고, ‘일루 와라’ 해서.

그때 갔지. 근데 갔는데, 시누가 직공이 20명 돼요. 우리 신랑은

철도국에 가서 옷 주문 받아오라 심부름 시키고. 나는 자기네

집에서 밥하라고 해서 식모 살고. 에구, 자식들에게는

그런 말 안했지만. 남편이 니꾸사꾸4)를 매고 주문을 받으러

가는 걸 보면,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그것도 가슴 아픈데 내가

큰 애를 업고 일했거든. 그러면 시누이가 ‘저거는 애 업고,

한국으로 보내고 너는 새 장가 들어라’ 이러는 거야. 근데 우리

영감이 ‘나는 깡통을 들고 밥을 얻어먹어도 안 보내요.’

소리가 들려요. 그래서 안심을 했지.”

만주에 대한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종합해

추론해 보면 나중에 남편이 만주 철도에서 노무자로 일을 했고, 글

을 쓰고 한문을 알아 반장급 정도까지 올라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

나 만주의 삶은 늘 황량하고, 춥고, 배고팠다. 쌀밥은커녕 강냉이밥

도 어려워 빨간 수수밥을 먹었다. 그래도 할머니는 남편에게는 쌀밥

을 조금이라도 얹어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었다. 처음에는 소식을 몰랐다가 한 달쯤 지

났을까, 사람들로부터 ‘이제 한국으로 가도 된다’라는 이야기들이 들

4) リックサック(릿쿠삿쿠) 배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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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려왔다. 가족들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고향집은 망가

져 있었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살다가 버리고 간 적산가옥에 들어

가 살았다. 그러다가 6.25 한국전쟁이 터졌다. 그때 할머니는 올망

졸망한 어린아이가 셋이었고, 만삭의 몸이었다. 그러나 서울은 곧 전

쟁의 중심에 들어섰다. 그러나 오늘 내일 아이를 낳을지 모르는 만삭

의 몸으로 쉽게 피난을 떠나기 어려웠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서울을

버리고 피난을 떠나면서 녹음된 음성을 들려주며 시민들을 안심시켰

다. 그리고는 적군의 반격을 피하기 위해 한강다리를 폭파시켜버렸

다. 피난민들은 갑자기 큰 위기에 빠졌다. 할머니네 가족 역시 더 이

상 서울에 머무를 수 없었다. 남편은 어디선가 소달구지를 구해 왔

다. 그리고 할머니와 어린 자식들을 태웠다.

“우리 집이 지금 제3한강교 자리에 있었거든요. 남편이 다리

끊길 걸 알고 돌아와서 내가 못 걸으니까 소달구지에 태워서

배 타는 데 갔어요. 그때 배가 있었는데 ‘통통통통~’ 하면서

차도 싣고 그랬었어요. 피난 할 때는 그것보다 작은 건데.

그걸 막 집어 타가지고 뒤에 매달려서 피난 갔어요.”

어린 아이들과 만삭의 몸, 그리고 아수라장 같던 피난의 길에도

할머니가 잊지 않고 챙긴 것이 있었다. 바로 유기그릇과 집안의 신돌

이었다. 유기그릇은 당시 제사와 일상생활에도 꼭 필요한 그릇으로

부의 상징이었다. 신돌은 예부터 집안에서 모셔온 신주단지였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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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만큼 고운, 당신의 성마른 손 141

머니는 고단한 피난길에도 이 두 가지는 잊지 않고 꼭 챙겼다.

서울에서 내려와 자리 잡은 곳은 수원의 오목동이었다. 당시 그곳

에는 거대한 피난민 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피난민들은 서로를 도와

가며 그곳에서 모여 살았다. 정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몸

을 풀었다. 음력으로 6월 29일이었다. 아직 제대로 된 거처도 마련

되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할머니는 옛날 가마니 같은 것으로 간신

히 몸만 가린 채 아이를 낳았다. 다행히 추운 계절이 아니었다. 아이

를 낳고 정신없이 누워있는데, 남편이 어디론가 갔다. 그리고는 얼마

뒤 할머니에게 그릇을 하나 내밀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죽’이었다.

남편은 아이를 낳은 아내를 위해 남의 부엌에 들어갔다. 그러나 당시

미역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결국 남편은 다양한 재료를 모아 죽을

끓였다. 할머니는 그 따뜻한 마음이 너무 고마워 미역국을 먹은 거

마냥 든든했다.

피난촌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당장 먹고 살 일이 걱정이었다.

그러나 당장 어디서 먹을 것이 나올 구멍도 없었다. 결국 고민하던

할머니는 길을 나섰다. 그리고 밤새도록 걸어 서울에 도착했다. 족히

40키로가 넘는 길이었다.

“우리가 서울에서 살던 적산가옥에는 방공호가 있었어요.

그래서 피난 올 때 쌀하고 물을 거기 놓고 피난을 온 거야.

근데 당장 먹을 게 없으니까. 어쩌겠어요.

그걸 가지러 서울까지 가는 거야. 굶어죽게 생겼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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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밤새도록 걸어서 가서 그걸 가지고 다시 또 걸어오는 거예요.

혼자서 몇 번을 그렇게 다녔어. 우리 아버지나 남편이 다니다가

중간에 걸리면 그대로 끌고 가서 즉결 처분하거나

아님 징집으로 데려가거든. 근데 여자는 붙잡혀도 그렇게

가혹하진 않으니까 내가 갔다 오는 거예요.

몇 번 갔더라. 한 3,4번 그렇게 갔다왔나봐.”

그래도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52년 막내가 태어났다.

“전쟁 통에는 미역국이 뭐야. 에구. 그래도 막내를 52년에 낳는데

그때는 미역국을 먹었어요. 애를 갑자기 낳는데 산파하는 사람을

빨리 부를 수가 없으니까, 탯줄을 우리 집 양반이 잘랐어요.

집에서 애기를 받아서 물을 팔팔 끓여 가지고 (가위를) 소독하고

그 다음에 그 양반이 탯줄을 잘라서 태우고 그 다음에

이제 미역국도 끓여주고 그랬지. 당시에 산파는 뭐,

동네에 여러 번 출산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와서 도와주고

그랬지. 그때 우리 집 양반 얼굴이 시커먼 거야.

숯 검둥이가 묻어가지고. 혼자 불 때서 미역국 끓이다보니

그렇게 된 거지. 그래도 그때 미역국 실컷 얻어먹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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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만큼 고운, 당신의 성마른 손 143

정착 : 뿌리 없는 삶의 고단함

다행히 수원에서의 정착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평동 이모의 집

앞에는 직조공장이 하나 있었다. 그것이 SK의 전신인 선경직물이었

다. 일본 사람이 운영했던 이 공장을 최종건 씨가 받아 막 키우려고

하던 참이었다. 최종건 씨와 할머니의 남편과는 서로 반말을 쓸 정도

로 막역한 사이였다.

“이제 우리는 고향이 서울이니까 돌아갈 수도 있었지.

근데 선경직물 만든 최종건 회장하고, 또 다른 양반하고,

우리 남편하고 세 사람이 찢어지게 가난한 상태에서 모여서

형제처럼 지내면서 자리를 잡은 거예요. 그래서 돌아가면 뭐하나.

집은 (서울에) 그대로 있었어요. 집은 그대로 있었는데 폭격

맞아서 수리할 돈도 없고 여기저기 비도 세고 쓰러진 상태로 있는

거니까 아예 여기서 자리를 잡아서 생활한 거예요. 우리 양반이

돌아가실 때까지 선경 1대 회장하고 막역한 친구였으니까.”

그곳에서 할아버지는 영동 시장 안에서 수원산업이라는 직물 도

매상을 운영했다. 용인, 서정리, 이천 등에서 사람들이 몰려왔고 사

업은 번창했다. 남편은 영동시장 번영회장까지 맡았다. 그러나 사람

좋은 할아버지는 외상으로 퍼주고 못 받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그때

영동시장에서 연달아 2번의 화재가 발생했다. 할머니는 수원산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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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라는 도매상을 운영하고 있었다. 화재로 가게 안에 있던 물건들이 타

버렸고, 할머니의 속도 시커멓게 타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다 타버렸어요. 물건이 하나도 안 남았어.

큰 아들이랑 둘째 아들이 불나서 우리 집 거지 됐다 라면서

막 울었어. 다행히 살림집은 따로 있었어. 다친 사람은 없었어요.

우리가 당시 도매를 했잖아요. 불쌍한 사람 있으면 물건을

대 줬어요. 용인, 이천, 서정리. 같은데 있는 사람들.

그런데 화재가 났으니. 공장에서 물건 해 온 거는 우리가 다 물어

줘야 해요. 근데 우리한테 물건 가져간 사람은 돈을 안 갚아.

나는 물건 값을 줘야하는데 받지는 못하고.

그래서 죽어라 돈 벌어서 갚고... 에구, 그랬죠. 뭐.”

이러다가 5남매 굶어죽기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할머니는 거

적자리를 하나 마련해 노점을 펼쳤다.

“수원 와서 알거지 돼서 애들 어떻게 길러요? 그래서 내가

가마통이라도 하나 놓고 팔아야지. 그러니까 우리 영감이 자기가

수원산업 하다가 다 망했는데. 여편네가 거적 앉고 파는 걸

볼 수 있겠어요. (하하) 옛날에는 그랬어. 그래도 애가 다섯

아니에요. 그럼 걔네들 다 굶어죽어. 피난 와서 작은 딸

낳았잖아요. 그랬는데. 지금은 얘네들 다 두고 죽으면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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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만큼 고운, 당신의 성마른 손 145

여자가 들어와서 얘네들 기르나. 나도 기 쓰고 살아야지.

그래서 거적때기 하나 펴놓고 장사를 시작했지.”

부산 국제시장에서 일본산 비로드, 양단 같은 밀수품을, 대구에서

는 포플린, 옥양목 같은 것을 구입해 팔았다. 일본산 밀수품은 단속

이 심했는데 할머니는 임신한 사람처럼 배에다 감고 운반했다. 가끔

순경이 산달이 언제냐고 물어보면 “새 달이 순산달인데, 그때까지 밥

먹여 주실 라오?”하고 짐짓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그렇게 구해온 비

로드와 양단은 옷감 속에 숨겨서 팔았다. 하루는 수원에 영화촬영이

있었다. 그때 대배우 주증녀가 영동시장을 와서 비로드 옷감을 찾았

다. 이집 저집 다니던 주증녀는 별로 마음에 드는 게 없는지 할머니

집 앞에 섰다.

“주증녀가 와서 ‘당신 것 좀 보시자.’ 하데요. 나는 ‘내거는

좋은 건데요. 이걸 팔아먹으면 순경이 잡으러 올지도 몰라.’ 하고

앞집에서 만원 부른 걸 내가 2만원을 불렀어요. 앞집 거는

한국 거고, 나는 일본 거라고. 그러니까 주증녀가 만져보더니

‘확실히 다르긴 다르네.’하더니 2만원 주고 사가는 거예요.

사실은 앞집 거나 우리집거나 같은 집에서 가져 온 건데.

똑같은 건데.(웃음) 그리고는 중앙극장표를 주더라고요.

그래서 극장 나들이 갔어요. ‘주증녀가 나 (속여 장사한걸 알고)

집어넣으면 어떻게 할 거야.’ 했지만, 그래도 극장은 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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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배포가 크고 장사수완이 남달랐던 할머니는 금세 노점을 털고, 가

게 터를 잡았다. 할머니는 한복을 맞춘 손님들을 영동시장의 유명한

갈빗집 ‘명성옥’에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갈비탕과 갈비구이를 배부

르게 먹였다. 당시 귀했던 갈비를 배부르게 먹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

들에게 할머니를 소개했다. 장사가 잘 되는 날에는 돈 세느라 밤잠을

설칠 정도로 장사는 번창했다. 그러나 그렇게 돈을 벌었어도 할머니

는 가게의 옷감을 뚝 끊어, 자신의 옷 한 벌 해 입은 적이 없었다. 늘

자투리 천을 모아서 해 입다보니 치마길이 짧기가 예사였다. 그러나

손님들은 그런 할머니 옷이 예쁘다고 그렇게 만들어 달라고 했다.

아흔이 넘은 할머니는 인터뷰 내내 ‘영감’ 이야기를 했다. ‘너무 착

해서 부처님 반 토막’ 같은 할아버지의 옛날이야기를 할 때는 할머니

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도와 물건을 떼

러 다녔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할머니에 비해 수완이 좋은 편은 아니

었다.

“이 양반이 물건을 떼러 기차를 타고 가는데, 침대칸에 탔어.

그래서 파자마바람으로 있는데, 천안역에 도착한 거여.

근데 이 양반이 시장한 걸 못 참는 거예요. 그래서 역에 내려서

파자마바람으로 잠깐 내려서 우동을 얼른 먹고 간다는 게

기차가 떠나버렸어. 돈 보따리도 기차에 감췄는데.

옛날에는 배에다가 전대를 하고 다녔거든. 그래서 우동도

다 못 잡숫고 놓고 갔는데. 기차가 벌써 떠났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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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만큼 고운, 당신의 성마른 손 147

장사가 잘 되는 날에는 돈 세느라 밤잠을 설칠 정도로

장사는 번창했다. 그러나 그렇게 돈을 벌었어도

할머니는 가게의 옷감을 뚝 끊어, 자신의 옷 한 벌 해

입은 적이 없었다. 늘 자투리 천을 모아서 해 입다보니

치마길이 짧기가 예사였다.

수원 영동시장 화천상회 시절,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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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그래서 우동도 못 잡숫고 역전에 말해가지고 그전에 택시도

많지 않았는데. 택시를 잡아주더래. 기차역에 전화를 하니까.

영감님의 침대 거기는 번호가 있잖아요. 그래서 갔지.

근데 돈은 그새 잊어먹고. 거기서도 별 수 없다고 (하지).

파자마 바람으로 택시로 쫓아가도 뭘 잡아요. 잡기는.

다 잃어버리고 집에는 못 들어가겠으니 이 노릇을 어찌나.

물건도 못하고. 파자마 바람으로 부산 영도다리에 올라가서

울었대요. 돈 다 내버리고 어떻게 집에 들어와요.”

그러나 할아버지의 이런 실수는 한두 번이 아니었다. 소매치기를

당하기도 했고, 무작정 거래처를 믿어 손해를 보는 일도 많았다. 그

러나 이 모든 사건을 이야기하는 할머니의 눈은 언제나 따뜻했다. 사

람 좋아 외상값 못 받고, 남 좋은 일 많이 시킨 할아버지. 그 덕에 아

이 업은 할머니가 거적 펴놓고 노점까지 했으면 얼핏 원망할 만도 한

데 할머니는 시종일관 할아버지 칭찬 일색이다.

간이 안 좋아 수술까지 받았던 할아버지는 결국 간암으로 55세에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지금도 할아버지 제사 때마다 눈물을 흘리신

다. 이 극진한 감정은 할머니만의 것은 아니었나보다. 할머니가 79

세 되던 해, 교통사고를 당해 중환자실에 한 달 동안 있었다. 옆 침대

에서 젊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며 할머니는 마음이 너무 스

산하며,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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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만큼 고운, 당신의 성마른 손 149

“그런데 그날 밤 꿈에 영감이 나온 거예요. 관복을 입고 갔어.

그러더니 날 불러요. 내가 너무 반가워서 ‘어이구~ 웬일이오?’

했더니, ‘여기 당신 데리러 왔는데, 아직은 아닌데.

그러니 이리저리 울지 말고 정신 바짝 차리고 더 살다 와요.’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나도 데려가라 했더니, ‘

아직은 당신을 데려갈 수는 없어요. 정신 차리고 살아요.’해.

그러고 나서 눈을 떠보니 이게 꿈이라.”

할아버지의 육성은 할머니의 귓가를 맴돌았다. 젊을 때처럼 나를

생각해 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할머니의 마음을 울렸다.

할머니는 도매업인 화천상회를 소매업으로 변경해 73살까지 가

게를 운영했다. 그 힘으로 5남매 모두 대학을 시켰고, 시집 장가도

잘 보냈다. 돈도 많이 벌었지만, 그보다는 자식들 잘 키워낸 뿌듯함

이 더 크다. 자식들은 할머니의 바람대로 똑똑하고 건강하게 자랐다.

딸들은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고, 아들들도 모두 명문대를 졸업했다.

그리고 현재는 3살에 벌써 한글과 영어를 깨친 똑똑한 증손주까지

봤다.

할머니는 두 번의 피난을 경험했다. 한 번은 일제를 피해 만주로

간 것이고, 또 다른 한번은 서울에서 수원을 온 것이다. ‘피난’이라는

한 단어 속에 할머니의 삶은 응축되어 있다. 그 시간의 깊이나 고통

을 우리가 쉽게 가늠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있다. 그 깊이만큼 삶 역시 깊어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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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긴 세월 그 옷감을 만져온 할머니의 손은

성마르고 거칠지만 동시에 아름답다.

그리고 할머니의 깊이 있는 삶 역시,

성마르고 거칠지만 동시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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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만큼 고운, 당신의 성마른 손 151

흔히 사람들은 곱고 매끈한 것을 ‘비단 같다’라고 표현한다. 박순

이 할머니는 반평생을 그 ‘비단’을 만지고 살았다. 그러나 보기에 곱

고 부드러운 비단도 매일 매만지는 사람에게는 그냥 옷감일 뿐이다.

긴 세월 그 옷감을 만져온 할머니의 손은 성마르고 거칠지만 동시에

아름답다. 그리고 할머니의 깊이 있는 삶 역시, 성마르고 거칠지만

동시에 아름답다.

요즘 할머니는 유유자적 세월을 낚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근처

복지회관에 가서 친구들과 소일거리를 한다. 그리고 느릿느릿 집으

로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오는 여유로운 할머니 그림자 위로, 비단

같은 시간들이 총총히 수놓여 있다.

구술정리 / 은정아

사진 / 김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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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박순이 할머니(92세) 연보

1923년 서울출생

1943년 (21세) 양은용(24세)과 결혼

1944년 (22세) 큰 아들 출생

중국(만주)봉천, 작은 시누댁에서 잠시 거주

작은 시누 공장에서 남편은 심부름을 하고,

자신은 부엌일을 함

시누가 자신은 한국으로 돌려보내고,

남편은 거기서 새장가 보내려 했음

1946년 (24세) 다시 서울로 돌아옴

큰 딸 출생

1948년 (26세) 둘째 아들 출생

1950년 (28세) 6.25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뒤 수원으로

피난 내려옴, 유기그릇과 신돌을 안고 내려왔음

둘째 딸 출생

1952년 (30세) 셋째 아들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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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만큼 고운, 당신의 성마른 손 153

1950년대 영동시장에서 ‘수원산업’ 운영

2차례 화재로 손해를 입음

1960년대 노점으로 시작해 ‘화천상회’ 운영

장사 수완이 좋아서 잘 되는 날에는 밤늦도록

돈을 샐 정도로 번성함

밤늦게 온 손님들을 재우기도 하고,

갈빗집에 데려가서 고기를 배불리 먹이기도 함

1973년 (51세) 남편 간암으로 사망

1992(4)년 (70세) 도매업인 ‘화천상회’를 소매업인 ‘화성상회’로

변경해 운영하다가 그만둠

1990년대 후반 막내며느리가 할머니께 정식 구입해 임대를 줌

현재 막내아들과 함께 수원에 거주하며 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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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내가 평생을 어머니한테

멸치 꽁다리 하나를 못 해드렸어.

멸치 꽁다리 하나 못해준 자식이 자식이야?

우리 어머니가 아프다고 편지가 왔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어. 난 자식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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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위한 시간 155

오늘을 위한

시간

일곱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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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그날, 바람은 매서웠다.

28살의 청년이었던 할아버지는 한국전쟁이 나던 해 겨울, 갑자기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5남매 중 할아버지와 셋째 동생 둘만 남으로

내려왔다. 어머니, 아버지를 비롯한 다른 식구들은 모두 북한에 남아

있었다. 피난을 떠날 때 옷 몇 가지, 돈 몇 푼만 쥐고 집을 나섰다. 일

주일 정도면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12월의 겨울바람이 옷 사이로 스며들어 걸을 때마다 서걱거렸다.

어머니는 머리끝까지 담요를 뒤집어쓰고 점점 멀어지는 아들의 뒷모

습을 사라질 때까지 바라봤다. 아들과 어미 사이에는 겨울바람만이

휘몰아쳤다. 발걸음 사이사이 어머니에게 손 인사를 했다. 금방 다시

오늘을

위한

시간

∷ 박 종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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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위한 시간 157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젊었던 아들은 어느새 그때의 어미보다 훨씬 늙어버렸다. 그러나

백발의 노인이 된 할아버지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날의 그 청년이

있다. ‘차갑던 겨울바람, 자신을 말없이 배웅하던 어머니의 모습, 손

에 들린 작은 보퉁이, 그리고 서걱거리던 발걸음.’ 그날 이후, 할아버

지의 삶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기억 : 잃어버린 고향의 시간

1923년, 할아버지는 함경북도에서 태어났다. 200여 개의 모여 사

는 제법 큰 동네에서 나고 자랐다. 동네에서 할아버지 집은 알아주는

부잣집이었다.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서울에 와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근무하다 소방서 소장도 역임했다. 할아버지도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왔다. 그리고 아버지처럼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서였다.

“북한에서 소핵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대신중핵교를

졸업하고서 나왔지. 내가 생각할 때는 당시에는 초등학교도

20프로 내지 10프로 정도만 갈 수 있었어. 그러니 중학교는

엄두도 못 내는 거야. 그래도 우리 집은 좀 살았으니까

(서울로 유학을 갔지). 일정 시대 때 중학교를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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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졸업하고, 취직을 했어. 그 당시에는 취직이라 하는 게 별다를 게

없었어. 조그마한 회사 같은 데 취직했지. 알선 받아가지고

거기 가서 지도도 하고 이러고 있는데, 1945년 해방이 됐잖아.

해방되기 전에 한 5월달쯤 고향으로 돌아갔어. 거기서 다시

공업전문학교에 진학했지. 그러다 그 해 8월 해방을 맞았지.”

당시 북한에는 최북단인 청진에서 나진까지 철도가 연결되어 있

었다. 어마어마하게 매장되어 있던 석탄을 나르기 위해서였다. 석탄

은 서울을 거쳐 부산까지 내려갔다. 자연히 북한에서는 석탄 공장이

매우 번창했다. 할아버지는 제일 큰 공장 중 하나인 ‘청진일처리 공

장’이라는 곳에 취직했다.

“공업전문핵교 졸업을 마치고서는 청진일처리라는 공장에

취직했어. 거가 제일 커. 거기서 철 가주고 만드는,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크게 만든 공장인거야. 그때는 전기가 없지.

석탄을 때가주고 철을 만드는 거야. 두드려 가주고 맨드는데.

북한 곳곳에 석탄이 많았으니까. 석탄뿐만 아니라 모든 광물이

많았지. 그걸 중국에다 팔아가지고서는 쌀은 비싸서 못 사고

옥수수를 사다가 배급을 줬어.”

해방이 되고 소련군이 북한군에 들어오면서 할아버지의 삶은 급

격히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집이 반동분자로 낙인찍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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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위한 시간 159

때문이다. 일제시대 때 지주, 면서기, 공무원 생활한 사람들은 모두

반동분자로 분류되었다. 점점 할아버지의 집은 창살 없는 감옥이 되

었다. 언제 어디서나 아버지 식구들을 감시하는 눈동자들이 따라다

녔다. 노동당 위원장에게 가서 여행증명서를 떼야만 기차표를 끊을

수 있을 정도로 행동의 제약을 받았다.

“밤낮 감시 속에 살았지. 내가 땅을 빌려준 사람이 날 감시를

하게 돼 있어. 그 사람이 어디를 가는가, 또 어떤 사람이

그 집으로 들어가는가를 수시로 감시를 해야 돼요. 만일에

그 감시가 소홀하게 되면 그 사람이 붙잡혀 들어가서 욕을

보게 되거든. 그러니까 열심히 하지. 또 그 사람 뒤에 또 있어요.

나를 감시할 사람이 그 사람이 또 뒤에 또 이런 감시가 있는 거야.

그러니까 꼼짝 못하는 거지. 말하자면 개미새끼 그 집에

들어가는 거 다 알 정도로... 그렇게 세포조직을 다~이렇게 해서

나, 또 그 사람 이렇게 연줄을 해서 전부 감시를 하는 거야.

그 감시체제를 세포조직이라 그래.”

비단 감시에만 그치지 않았다. ‘인민재판’이 열렸고, 반동분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은 수시로 잡혀갔다.

“동네에 인민재판을 했어. 큰 거는 면에서 하고 조그마한 범죄는

동네에서 하는데, 붙잡아다놓고 ‘아무 날 몇 시에 아무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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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이래 이래해서 나쁜 짓을 했다.’ 이러한 죄목 하에 인민 재판하지.

그리고 사람들한테 ‘동네 동사무소 같은데 몇 시까지 오너라!’

이렇게 알려. 그것도 애들은 안 되고 투표권이 있는 유권자 이상.

그때는 스무 살인가 이렇게 유권자가 됐나봐.

그래 오라 그래 놓고서는 이제 이 사람이 죄목을 얘기해.

판사가 이 사람이 ‘아무 때 이래 이래 했는데, 이 사람을 징역을

5년을 줘야 된다.’ 그러면은 고기서 이제 동네사람이

다 모였으니까 판결을 하지. 안 나가면 반동분자인거야.

안 나가면 반동분자.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나가네.

나가면 이제 이 사람이 징역5년을 받아. 그리고 ‘찬성합니까?

찬성하는 사람 손드시오.’ 그래. 그리고 있다가 ‘반대하는 사람

손드시오!’ 하지. 반대하면 큰일 나니까 붙잡혀 들어가니

다 찬성하지. 그렇게 무조건 형식적으로 이렇게 하지.

실지적으론 강제지. 반대를 했다간 똑같이 붙잡혀 들어가니깐.

그렇게 그 사람들은 말로만 그렇게 하지 실질적으론 독재지.

자기 독재. 그렇게 이제 하니까 꼼짝 못하는 거야.”

그렇게 감시를 당하던 중 6.25가 터졌다. 반동분자로 낙인찍힌

할아버지는 입대 1순위였다. 할아버지는 강제 입대를 안 당하기 위해

숨어야 했다. 처음에는 천장 같은 눈에 잘 안 띄는 집안에 숨었다. 그

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것도 불가능해졌다. 할아버지를 찾기 위해 집

곳곳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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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위한 시간 161

“(가택수사를 하니까) 할 수 없이 집을 나왔지. 여름이었어.

아카시아 나무 있는데 이런 데 가 있는 거여. 이제 그러니까

한 10월? 9월쯤 되가 주고선. 비행기. 말하자면 유엔 비행기지.

거기선 남조선 비행기라 그랬는데, 비행기가 들어와서 막 폭격을

하는 거여. 폭격을 어딜 하냐면 대개 우리는 변전소가 있는데,

그 변전소에다가 폭격을 하는데, 빙빙 두 대가 돌다가 하나가

이렇게 ‘툭!’ 쏘면은 ‘토로로록.’ 떨어지는 거야. 그리고 이렇게

쏘면은 하나가 올라가서 또 이렇게 떨어지고. 그때는 그냥 이렇게

수수밭에 이 비행기가 내려오면 수수밭이 착착 갈라지는 거야.

그렇게 폭탄이 떨어지니까 총 맞을까 봐 겁이 나서 입이 바삭

바싹 타들어가. 그래도 꼼짝 못하고 죽으나 사나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 그렇게 떨면서 수수밭에서 숨어있는데 비행기가

탁! 들이받으니 그냥 가버리더라구. 아이구, 이제 살았다 했지.

그래 가고 나니 입이 말라가지고. 물이 있어요?

이거 나갈 순 없지 그래서 길바닥에 소. 소가 지나간 데 거가

물이 있어. 그걸 먹어. 뭐 더러워도 물이 거기밖에 없는데

별 도리 있어? 목이 마르니까. 그렇게 숨어 있다가

이제 그쪽으로도 점점 수색을 해. 그래서 산에 갔지. 산에.”

할아버지는 그렇게 수색을 피해 마을 청년들과 함께 산에 숨었다.

마을과 연락은 여동생이 쪽지를 전해줬다. 마을에 있던 어머니가 수

색이 시작된다 싶으면 여동생 손에 쪽지를 들려 보내 알려주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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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이다.

하루는 여동생에게 쪽지가 왔다. 친구 아버지가 보낸 것이었다.

쪽지에는 밤에 자신의 사랑방으로 오라고 적혀 있었다. 그래서 친구

와 함께 내려갔다. 사랑방 옆에 옛날 부엌이 있었다.

“거기 가보니 이렇게 불 땔 때 쓰는 큰 나무 단을 거기다가

쳐 놨어. 그걸 들췄더니 아궁이 안쪽으로 커다란 구덩이를

파 놨어. 구덩이를 파가주고선 거다 짚을 깔고 이제 저길

들어가라는 거야. 아, 거길 어떻게 들어가나 싶어 물었더니.

뒤로 들어가라 이거야. 둘이 뒤로 들어갔지. 구멍은 한 사람만

들어가는 거고, 안에서는 꼼짝도 못하지 뭐. 고개를 들지도 못해.

답답하고 힘들지만 어쨌거나 목숨이 중하니까 뭐 괴롭고 이런 게

생각이 안나. 친구랑 들어가서 위로는 구들장이니 이렇게

(고개를 숙여서) 얘길하는 거여. 거기 들어가 있으면 멀리서

사람 오는 발자국소리가 잘 들려요. 땅속에 들어가니까.

이렇게 이렇게 걸어오는 소리가 잘 들려.”

그렇게 여기저기 숨어 지내던 어느 날 인민군에게 잡히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이제 죽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인민군은 탈영

한 군인이었다. 게다가 할아버지의 아저씨뻘 되는 친척이었다. 아저

씨는 자기와 함께 동네에 있는 빨갱이들을 모두 잡아들이자고 했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아저씨 그리고 숨어 지내던 몇몇이 나와 7,8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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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위한 시간 163

사람들을 잡았다. 그리고 그들을 외따로 있는 상여 집에 가두고 보초

를 섰다. 지금 생각하면 같은 마을 사람들이 서로 감시하고 적대시하

는 것이 비극이지만,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처절한 시대를 온 몸으로 관통하며 청년시절을 보냈다.

부유 : 생과 사를 넘던 그날들

어느새 여름이 지나, 가을의 문턱인 10월로 접어들고 있었다. 전

세는 다시 국군으로 기울었다. 인민군들은 후퇴를 했고, 국군이 청진

을 지나 나남까지 북진했다. 할아버지와 숨어 지내던 사람들은 마을

치안을 다시 정립했다. 그리고 학교를 개교시켰다. 그러던 중 12월

쯤 되었을 때 일이었다. 갑자기 준비를 해서 성진이라는 곳에 집합하

라고 했다. 한 일주일 정도만 갔다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집에 오니

어머니가 다들 갔다며 할아버지 보고도 빨리 가라고 했다. 간단한 옷

몇 가지 돈 몇 푼 쥐고 집을 나섰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황량하게 불

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먼저 가고, 나 혼자 저녁에 어슬렁 걸어서

가는 거야 혼자. 그렇게 혼자 가는데 날이 추우니까 어머니가

담요를 쓰고 내 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지. 그게 끝인 거야.

그게 어머니와 끝이지,,.(울음) 그때는 정신이 없어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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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뭐 누굴 찾고 할 시간이 없는 거야. 집에 다들 어디가고 어머니만

혼자 계셨지. 어머니만 나와서 나를 배웅하는 모습이 아직 선해.

안 보일 때까지 서서.....”

성진까지는 백리 길이었다. 혼자 출발했지만 가는 길에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낮에는 열심히 걷고, 밤이 되면 빈집에 들어가

숨었다. 인민군을 만날까봐 걱정이 되어 늘 선잠을 잤다. 열시가 지

나면 ‘딱꽁딱꽁’ 총 쏘는 소리가 들렸다. 어찌나 불안했던지 총이 벽

을 뚫고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매일 매일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하루를 보내며 걸어갔다. 그렇게 겨우겨우 성진에 도착했다.

가보니 모인 수가 엄청났다. 군인들과 사방에서 모인 젊은이들을

학교를 하나 얻어서 북적거리면서 함께 지냈다. 학교 강당에 일렬로

누워서 자고 먹고 했다. 밥은 주먹밥을 군인들이 만들어 나눠줬다.

제대로 덮을 것도, 많이 먹지도 못했는데 춥지도 않고 배고프지도 않

았다. 그렇게 모든 감각이 얼어붙을 정도로 할아버지의 삶은 막막했

다. 어디로 갈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며칠을 그렇게 보냈

다. 그때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왔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군인들은

청년들을 불러 모았다. 이제는 여기서 나가야 한다고 했다.

“근데 여기를 나가려면 현지입대를 해야 된다는 거야. 어쩌겠어?

현지입대를 해도 나가야지 뭐. 그래서 이제 거기 있는 사람들을

핵교에다 쭉~ 빤스만 입혀놓고서는 두 줄을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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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위한 시간 165

저 앞에서 군의관 둘이 합격, 불합격 봐가지고 하는 거여.

뭐 제대로 된 기준도 없어. 그냥 봐 가주고선 시원찮으면 불합격.

괜찮으면 합격이야. 불합격은 저리 서고 합격자는 이리 서라.

알려줘. 나는 합격이 됐지 뭐. 합격이 됐어. 그때 어떤 놈은

불합격됐는데, 몰래 이쪽으로 와서 서기도 했어. 나올라고..

그리고 12월 21일인가. 23일인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큰 배가 그냥 와. 생전 보지도 못한 엄청나게 큰 배야.

이름이 ‘엘스틴’인가 그래. 그래 그런가보다 하고선 빨리 타는가

했더니 이게 며칠 거기서 또 걸려. 뭘 하느냐 그러면은 거기

트럭 있잖아요. 군대 트럭. 이렇게 (배에) 다리를 해놓고

트럭이 들어가는데 수없이 들어가요. 그 배 안으로. 이야~

그때는 저런 무거운 트럭이 수십 대 기냥 뭐 며칠을 들어가니,

어느 만큼 크냐. 상상도 못하지. 처음 보는 배니까.

그렇게 한 사나흘 싣더니 이제 아마 다 실었나 봐.

그담에 이제 우리 군대하고 우리하고 올라가라 그래요.

인도를 해요. 군인이. 그런데 이 배는 이런 유선이 아니라

앉을 자리도 없어. 그냥 이렇게 곳간이야. 그냥 거기 바닥에 앉는

거야. 짐 싣고, 공양미도 싣고 이런데 거기 갖다 들어갔어.

근데 거기 들어갔더니 밀가루로 (빵을) 맨들어서 주는 거여.

주는데 나는 이노무걸 먹으니까 그냥 멀미가 나서 먹을 수가

없어. 근데 다른 사람들은 없어서 못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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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정착 : 뿌리 없는 삶의 고단함

배는 사람과 짐을 잔뜩 싣고 항해를 시작했다. 시계도 없었고 날

짜 관념도 없어 정확하진 않지만, 저녁에 출발해 그 이튿날 아침쯤이

되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누군가가 그곳이 부산이라고 했다.

“우리를 부산 범일동에 내려놨어. 거기 군인 초소가 있더구만.

그리 들이 보내. 그래 들어갔지. 들어가니까 핵교처럼 생겼는데,

군대처럼 되어 있어. 이렇게 앉으면 한 여덟 명씩 쪽쪽 앉혀.

그러고 가운데 신 벗어 놓게 가운데 들어오게 맨들어 놓고

저 짝에도 마찬가지로 넓으니까 가운데 길이면 양쪽에 쪽쪽

앉혀놓고 완전히 군대식이요. 저녁에 9신가 취침해요. 그냥

취침하면 드러누워야 해. 그런데 드러누울 자리가 어딨어.

그러면 안 드러눕는다고 몽둥이를 들고 두드리니까 무서워서

드러누워요. 그래도 잠은 잘 와. 그 담에 그 위에다가 담요를

이렇게 덮어 줘요. 근데 다음날 보면 담요가 어딜 간지 몰라.

자다가 소변이 마려우면 주번한테 군인한테 얘길해요. 그럼

데려가고, 데려와요. 완전히 죄인 취급이야. 지금 생각하니까

거기가 수용을 하는 곳 인가봐. 주로 피난민을 수용하는 곳. 특히

군인으로 이북에서 오는 사람들 수용하는 장소였던 것 같아.”

그렇게 며칠을 지냈을까, 갑자기 밤에 소집을 당했다. 그리고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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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위한 시간 167

작정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두가 컴컴한 길을 걸어 구포까지 갔

다. 구포에도 역시 한 학교로 배치되었다. 가마니를 깔아놓고 다시

자리를 잡았다. 다 똑같아 보여도 신기하게 다들 자기 자리를 잘 찾

았다. 거기서도 똑같았다. 9시 취침에 밥은 주먹밥이었다. 그렇게 교

육대에 2~3개월간 있었다.

“3월 초쯤 됐나봐. 보리가 요렇게 나올 때였으니. 우리 고향

사람이 의사야. 의사가 돼가지고 거길 갔어. 내가 가면 치료를

잘 해줬지. 거긴 약이 다이아찐, 아스피린하고 고와노찡,

아까징끼 이것밖에 없어. 가면 상처에 아까징끼나 바르고

어디가 아픈가 다이아찐, 고와노찡 이렇게 주는 거야. 그때에는

전염병인 열병이란 게 엄청나게 퍼졌어. 여기서는 염병이라 그래.

그 병이 확산이 되가지고 이게 봄이 되니까 전부 다 전염이

되가지고 아픈 사람들은 병사로 창고 같은데다가 따로 수용해.

거기에 가마때기 해놓고 있지. 뭐 다른 게 있어? 가마니 때기로

해서 있다가. 죽으면 어떻게 하냐면 나무랑 가마니가 있어서

들것을 맹글어. 그리고 갖다가 파묻는 거여. 파묻는데, 나무때기

에다가 그 사람 주소는 안 쓰고 이름만 거기다 써가지고 묻지.

그걸 이제 갖다가 내버리는 사람은 밥을 하나 더 줘. 사람들이

그 맛에 간단 말이여. 암튼 내가 그 고향사람, 의사 양반 밑에

부책임자로 있어서 그 사람이 나한테 많이 가르쳐줬어.

그래서 내가 지식이 많아졌지. 그러다가 그 의사 양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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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1차적으로 초과 연령이라 해서 나가버렸어. 그래서 그 후임자를

나를 줬단 말이야. 내가 이제 그 자릴 맡았는데, 그 자리는

무슨 자리냐 하면 환자를 치료하는 게 첫째 목적이고 두 번째는

우리 관내에 있는 음식을 검사를 하는 거야. 검사를 맡으러 와요.

그럼 검칙을 하는데 뭐 형식적이지 뭐. 형식적으로 와서 검칙을

하고 이제 배식을 하는 거여. 그러니까 먹는 거는 많지요. 그리고

또 약 취급을 하니까 (편했지.) 그때는 약이 아주 귀했거든.”

1950년대 미군과 함께 들어온 다이아찐5)은 곧 만병통치약으로 통

했다. 사람들은 약이라고는 다이아찐과 아까징끼6) 밖에 몰랐다. 감

기에 걸려도, 몸살이 나도, 전염병에 걸려도 다이아찐을 먹었다. 한

편 부스럼이 나면 아까징끼를 발랐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몇 가지 약

만 가지고 군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돌봤다. 그러던 중 연령 제

대를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당시 할아버지 나이는 29살. 나이가

많다고 제대를 하라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제대증이라고 작은 종

이 조각 하나와 쌀 두세 됫박을 받았다. 그리고 의무대에 있었으니

약도 넉넉히 챙겨서 나왔다. 그러나 군대를 나오니 막상 갈 데가 없

었다. 그래서 막연히 당숙모가 살고 있는 서울로 가야겠다고 생각했

다. 3,4명이 함께 상경하기 시작했다.

5) 다이아진(diazine): 폐렴 구균, 연쇄상 구균 따위의 세균성 질환 치료에 효과가 있는 설파제

6) 요오드팅크(Iodine tincture): 상처나 피부의 소독에 사용하는 알코올 용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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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위한 시간 169

“서울로 올라오면서 그네들하고 함께 올라왔지. 혼자 오는 것보다

서넛이 함께 올라오니까 서로 이제 의지하고 믿었어. 그때 심정

으로는 그 사람들이 형제보다 더 진했지. 전쟁터에서 아무도 없는데

서로 의지하니까. 그렇게 서로 의지하면서 평택까지 왔어. 올라

오면서 날이 저물면 그럭저럭 어떻게 남의 집에 가서 사랑방에 가서

자고 이랬어요. 평택에도 가서 어느 집에 부탁을 했더니 노인네가

사랑방에 있는데, ‘여기 우리 애기가 아파서 안 됩니다.’ 이러는

거야. ‘아, 그러냐고 내가 약이 있으니까 어디 봅시다.’ 그래요

하더니 얼굴이 반색해 얼른 들어오라 해. 그래서 사랑방에 셋이

데리고 들어갔어. 어디 그 애기 봅시다 해서 감기가 있어. 열이 나.

체하기도 하고. 그래서 아스피린 줬지 뭐. 이걸 먹이라고 물이랑

이래 반쪽을 잘라줬거든. 그러니까 아침에 자고 일어나니 낫다

이거야. 그래서 그 집에서 아침을 해왔는데 진수성찬을 해서

가져왔어, 야~ 피난길에 그런 걸 언제 먹어봤겠어? 이거 참 생전에

이렇게 먹어보지 못한 그런 거처럼 생각이 됐지. 희구했어.”

그렇게 평택의 노인네 집을 떠나 다시 길을 나섰다. 판교를 지나

야탑에 이르렀다. 어둡기 전에 머물 집을 찾아야 하는데 전부 다 거

절이었다. 그래서 올라올라 가다보니 꼭대기 두 번째 집에까지 갔다.

꼬부랑 할머니가 나오더니 자신의 아들도 군대에 갔다며 반갑게 맞

아주셨다. 다음날 아침 나가려는데 한 할머니가 올라오셨다. 할아버

지 군복에 십자마크가 달려있는걸 어제 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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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3월 말? 4월 초쯤 됐나 봐. 비도 쫌 내리고 추울 때야.

천에 포대길 쓰고선 할머니가 총총총 왔어. 그때 내 군복에

거기서 쓰던 십자마크가 그대로 달려 있었어. 거기서 준거

그대로. 옷에다. 그랬더니 동네사람들이 보고

‘어? 여기 십자마크네.’ 하더니 애들이 개울에서 수류탄 가지고

놀다가 터져가지고 여섯 명이 다리, 배꼽이 나가고 크게 다쳤대.

그러더니 나한테 약이 있냐고. 약이 있다고 했지.

다이아찐 같은 좋은 약이 있었거든. 아까징끼하고 다이아찐하고

고약하고 그것밖에 없었지 뭐. 해서 이제 이게 딱 보니까 내가

그 치료를 하자면 (함께 올라온) 사람들하고 같이 못 있겠다

싶었어. 그래서 아무래도 내 이 사람들 치료를 해주고 서울로

가야겠다. 낭중에 만나.. 당신네들은 먼저 가시오. 하고

헤어졌어. 헤어지고선 이제 그 여섯 명을 전부다 돈도 안 받고

치료를 해줬어. 나야 뭐 밥이랑 잠자리를 주니 좋았지.

아이들을 보니 장딴지가 파편에 떨어져 나갔어. 어깨가 떨어져

뼈가 보이고. 배 위장을 뚫고나갔더라고. 그래서 서울서 피난 온

사람이 치료를 해줬다는데. 여기다가 옛날에 시커먼 이불솜을

틀어박아놨어. 솜을 틀어막고 아까징끼 바르고 급하니까

누룽지를 먹였는데, 숨 쉬면 풀풀 나오는 거야. 그때 그놈들이

열다섯 살, 열여섯 살인데, 그래서 어쨌든 그거 치료를

해주느냐고 이제 몇 달 걸렸어. 그렇게 치료를 해주니까

다 낫긴 나았어. 여섯 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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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위한 시간 171

아이들이 다 낫자, 다시 길을 떠나려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만류했다. 할아버지에겐 아직 약도 많이 남아있었다. 그렇게 할아버

지는 마을 사람들 치료도 해주고, 농사도 좀 지어주면서 2,3년을 지

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할아버지는 금방 통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

다. 그래서 여기서 결혼을 하거나 자리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통일 후, 고향에 돌아갈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통일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 자리에 머물다 보

니 선자리가 들어왔고 결혼도 하게 됐다. 자리를 잡아야겠기에 ‘약종

상면허 시험’도 봤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약국이었다. 그래서 시골에

약국을 차렸다.

“(약국) 장사가 안 돼. 외상이야 전부. 가을에 쌀로 가져와.

쌀이 얼맨데, 돈으로 쳐서 가져오는 거지. 그러니까 우리 아내가

그거가지고 안 되니까 양말 짜는 공장에 가서 양말 짜고. 그랬지.

근데 두 식구였다가 이제 첫 딸을 낳게 됐지. 그러다보니까

생활이 안 돼. 집도 남의 집에 있지. 뭐 튼튼한 기반도 없고,

가게에는 먼지만 쌓였지. 그렇게 결혼생활이 지속되고 아이들도

하나둘씩 늘어나는데, 생활이 계속 고단해. 그러던 중에 중학교

교장이 날 찾아와. 당시에는 정부가 아직 정리가 안됐지, 핵교도

그렇고, 선생도 전쟁 난리통에 뭐 어디 가서 죽었는지 알 수도

없고. 이래가지고 학교가 유지가 잘 안되니까 교장이 날 찾아 온

거야. 교장이 와서 얘기 들으니까 당신 뭐 고등학교까지 나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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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들었다고. 동네에서 다 알자나. 과목이 뭐가 자신 있나 그래.

나 수학은 자신 있다 하니까 아 그럼 좋다고 아주 수학선생이

없는데, 임시로 와서 수학을 좀 가르쳐달라고 하더라고.

뭐 까짓것 인수분해 공식만 알면 다 되니까.”

그렇게 2~3년 수학 교사를 하다가 아는 고향 사람의 권유로 약초

채집을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가진 의학 지식도 있었기에 훨씬 더 재

미있고 보람도 있었다. 약초 채집을 위해서는 곤지암으로 들어갔다.

당시 곤지암은 시골 중에 시골이었다.

“땔나무는 맨 산에 가면 땔나무니까. 옛날에는 보일러나 연탄이

없으니까. 전부 나무를 땠지. 그 당시에는 전부 나무를

잘라가지고선 (난방을 했지). 그래서 산이 뻘갰지.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나무도 흔하고 밤도 흔하고 거기는 밤이 산밤이

엄청 나. 노력만 하면 그게 다 돈이야. 밤이 많고 도토리 많지.

또 참나무도 많아서 수출도 하지. 그렇게 돈 벌기가 쉬우니까.

동네 인심이 좋았어. 그래서 거기서 좀 돈을 모았지. 그리고 다시

이천으로 나와 가지고 논 여덟 마지기 사고 집 짓고 약국 했지.

약국을 받아서 하는데, 약국은 안 돼. 에이~ 도저히 안 돼.”

우여곡절 끝에, 70년대에 성남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다시 약국

을 차렸다. 그러나 역시나 잘 되진 않았다. 그때 할아버지는 색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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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위한 시간 173

경험을 하게 된다.

“내가 잘 아는 친구가 있는데, 내가 약국을 했으니까 애가

그 경기를 해가지고 내가 약을 줬어. 그 후에 물어봤지. 약을

먹고 효과를 봤냐고 하니까 아니래. 그리고는 어떤 양반 침 맞고

나았다 그래. 이상하다 싶었지. 침이란 게 약도 아니고 무슨

과학적으로 아무것도 아닌데 어떻게 낫지 싶은 거야. 그래서 거기

침놓는 데 갔어. 그리고 가서 물었지. ‘어떻게 낫느냐?’ 그랬더니

오행이 어떻고, 음양이 어떻고 반사작전에 의해서 뭐 이렇게

뭐라뭐라 해. 근데 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 돼. 그래서 침 가르쳐

주는데, 어디가 제일 유명하냐 찾아 달라 얘길 했지. 그러니까

종로5가에 최주약이라는 침술학원이 있는데, 그리 가서

배우시오. 그래. 그래서 거길 갔어. 가서 한 달쯤 배웠더니

배울게 없어. 그래 이거 가주고 안 되는데. 더 좋은 데가 없느냐

그러니 무슨 조양학원이라고 또 있다 그래. 또 한 달을 배웠는데,

배울게 없어. 그 담에 이제 약국을 하는데 어떤 친구가 와서

그 침술 학원이, 내가 졸업장이 있는데, 혜원 침술학원이라고

그리 가라 그래. 그리 갔지. 약국을 하는 친구들하고 같이 갔지.

그래서 과정이 4개월인데 4개월을 다 배웠어.”

시간을 따로 내기가 힘들었다. 저녁에 약국 끝나고 나면 가서 배

웠다. 복습할 시간도 없어 바로 머리에 넣었다. 그렇게 배운 것이 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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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이자, 사람들이 조금씩 할아버지에게 다시 묻기 시작했다.

“내가 가면 (배우러 온 다른) 학생들이 있잖아요? 그래 내가 가면

질문을 해. 내가 이제 아는 대로 설명을 해주다보니까 선생이

들어온단 말이야. 그래서 배우지. 그리고 시간 돼서 끝나면

저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어. 그렇게 하다보니까 얼마 후에

나한테 침술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수백 명 돼. 나가서 또

가르쳐 주고 집에서 가르쳐 주고 교회 나가서도 가르쳐 주고

지금도 현재도 가르쳐 주고 있어요. 침술을.

그 후에는 내가 침술학원을 맹글었지. 책도 쓰고.”

가르칠수록 사람들이 더 몰려들었다. 할아버지는 계속 공부하면

서 기록도 해 나갔다. 할아버지는 실제로 모든 임상 체험을 여기에

다 일일이 기록했다. 단정한 손 글씨 하나하나에 할아버지의 노하우

가 차곡차곡 쌓였다. 그러던 중 1991년 중국 등소평이 개방 정책을

펼치면서 우리나라가 중국을 방문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자 할

아버지는 침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중국까지 무작정 떠났다. 60이

훨씬 넘은 나이였다.

“혼자 갔지. 침을 배우기 위해 무작정 중국으로 갔어.

그래 거기서 조선족을 만났어. 조선족을 만나가지고, 그 사람이

일억이라고 박일억이야. 그 사람을 만나서 내가 여기 침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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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위한 시간 175

평생 가족을 볼 수도, 고향을 돌아갈 수도 없는

상처만은 결코 아물지 않고 더욱 커져갔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그 상처를 외면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생 다른 사람을 돌보고 치료하면서

자신의 상처도 보듬어 나갔다.

연변교수 병원에서,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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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좀 배우려고 하는데, 여기 학교를 좀 들어갈라 한다. 하니까

그 사람이 여기 북경은 전부다 조선족이 없기 때문에 말이

안 통하니 연변으로 가라 이거야. 그래서 비행기 조그만 거 타고

연변을 갔지. 거기서 물어물어 조선족을 찾았어. 찾아가지고선

나 이래이래해서 왔는데, 여기서 좀 쉬자 그랬더니 어유~

한국 사람이 왔다고 대단히 환영을 해요. 어떻게 한국 사람이

이렇게 왔느냐고 그때는 우리 한국 사람이 별로 없었어. 댕기는

사람이 없는데, 갔더니 한국 사람이 왔다고 대단히 좋아해.”

그렇게 발로 찾아다닌 끝에 여러 사람을 거쳐 침술에 능한 박사를

소개 받았다. 그 박사에게 중국에 침술을 배우러 왔다고 말했다. 그

러자 그 박사가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다고 소개해줬다. 그래서 얼마

후에 거기를 들어가기로 하고 한의과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연변에

있는 중의학원이라는 곳에 입학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넘어서야 할 산이 있었다. 바로 언어였다. 먼저 중국어를 1

년간 배웠다. 그리고 4년제 한의학 대학을 공부했다. 아이들은 이미

다 커서 시집, 장가를 갔고, 중국 물가는 워낙 쌌기 때문에 생활에 걱

정은 없었다.

중국에 가 있는 동안 다른 성과도 있었다. 북한에 있던 가족들과

연락이 닿았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형제들의 편지에 울고 웃으며 돈

도 보내고, 약도 보냈다. 그리고 몇 차례 편지도 주고받았다. 편지에

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아프다는 이야기도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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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위한 시간 177

“내가 평생을 어머니한테 멸치 꽁다리 하나를 못 해드렸어.

(울음) 멸치 꽁다리 하나 못해준 자식이 자식이야?

(편지를 보여주시며) 우리 어머니가 아프다고 편지가 왔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어. 난 자식도 아니야.”

1923년생, 아흔이 넘은 자식의 마음은 여전히 1950년, 그해 겨울

에 머물러 있었다. 차갑게 서걱거리던 바람은 얼어붙어 비수가 되었

다. 한 세기 가깝게 살아오면서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살아왔다. 그

러나 평생 가족을 볼 수도, 고향을 돌아갈 수도 없는 상처만은 결코

아물지 않고 더욱 커져갔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그 상처를 외면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생 다른 사람을 돌보고 치료하면서 자신의 상처도

보듬어 나갔다.

팔순잔치에 아내와,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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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경험하지 못한 우리에게 ‘전쟁과 피난’은 단지 하나의 단어일 뿐

이다. 그러나 직접 이 세월을 통과한 사람들에게 전쟁과 피난은 살아

가는 내내 삶의 한 부분을 짓누른 거대하고 무거운 추다. 할아버지는

평생 그 무거운 추를 가슴에 달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다. 아흔을

훌쩍 넘은 할아버지는 여전히 열심히 사신다. 매일 공부를 하고 사람

들을 만나고 또 다른 책을 내기 위해 교정도 보고 있다. 할아버지는

이 같은 ‘성실함’이라는 무기로 무거운 추를 깎고 깎아 삶을 지탱해

왔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아흔 셋, 할아버지의 ‘오늘’을 위한 시

간은 계속되고 있다.

구술정리 / 은정아

사진 / 류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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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위한 시간 179

박종훈 할아버지(92세) 연보

1923년 함경북도 길주군 덕산면 출생

5남매 중 둘째

아버지는 서울유학 다녀온 후 교사,

소방서장 등을 역임

200호 있는 마을에서 부잣집이었음

1930년대 북한에서 초등학교 재학, 졸업

1940년대 서울대신중학교로 유학 옴

졸업 후, 서울에서 작은 회사 재직

1945년 5월 (23세) 북한으로 다시 돌아옴

1945년 8월 광복

1945~50년 공업전문학교 졸업

(23~28세) 청진일처리 공장(석탄공장) 취직

1950년 6월 (28세) 6.25 발발

‘반동분자’로 낙인 찍혀 가족들 모두 고초를 겪음

징집을 피하기 위해 숨어 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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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1950년 12월 셋째 남동생과 할아버지만 남으로 피난 옴

‘성진’에 모여 군 입대 후, 배를 타고 부산으로 피난

1951년 (29세) 부산, 구포 등에서 군대생활

군의관으로 활동함

29살. 연령 제대를 함

1952년 (30세) 서울로 올라오던 중, 다친 사람들을 도와주다가

성남 야탑에서 자리 잡게 됨

1955년 (33세) 소개로 결혼

‘약종상면허증’ 따고 약국 차리지만 잘 되지 않음

1956~58년 중학교 수학 교사로 재직

(34~36세)

1960년대 곤지암에 들어가서 생활

약초 채집, 밤 채집 등을 하며 재산을 모음

1968년 (46세) 이천으로 다시 나옴. 국회의원 선거에서

선거 운동. 지지자 당선시킴

1970년대 성남으로 이주, 약국 경영하던 중 ‘침’에 대해서

알게 됨, 침술학원에 다니면서 침술을 익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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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위한 시간 181

1980년대 침술 학원을 열어 후학을 양성함

1991년 (69세) 등소평 개방

1990년대 중국으로 홀로 넘어가 연변 중의학원

(한의과대학)에서 수학

2000년대~현재 침술학원 경영, 교육, 집필 등을 하며 보냄

현재도 자필로 쓴 임상 기록을 수십 권 가지고

있으며 이를 책으로 출판할 계획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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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수원은 내 고향이죠.

그래도 언젠가는 진짜 고향에 가고 싶기도 해요.

(사람들이) ‘죽기 전에 고향에 갈 수 있을까?’ 하는데

난 항상 그렇게 얘기해요. 통일이 곧 온다고.

평양에 갈 일이 이제 생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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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고향 183

두 개의

고향

여덟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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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고향은 실제로 지도상에만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우리의 추억 속

에, 마음속에 그리고 울고 웃던 세월 속에 존재한다. 평양에서 태어

나 수원에서 평생을 산 이춘신 할아버지에게도 고향은 그런 곳이다.

평양은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장소지만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

으리라 믿는다.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할아버지 마음속에 생생하다.

그리고 평생을 살아온 수원 역시 할아버지에게는 늘 간직하고 싶은

마음의 고향이다.

할아버지가 마음에 품고 있는 두 개의 고향 이야기가, 곧 할아버

지의 삶의 이야기다.

두 개의

고향

∷ 이 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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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고향 185

기억 : 잃어버린 고향의 시간

할아버지는 1942년 평양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

버지는 평양에서 빵공장을 운영하셨다. 당시 평양에는 전차가 다녔

고, 집은 전차길 바로 옆이었다. 어릴 때 기억은 마치 흑백사진처럼

단편으로 조각나 있다. 어머니가 시장에 가면 동생들과 집을 지키며

어머니를 기다렸던 기억, 대동강에서 찰박찰박 수영을 할 때 맨살에

와 닿던 차가운 물살의 느낌, 국민 학교에 다니면서 교실에 앉아 있

었던 시간들... 이 기억의 조각들이 마치 흑백 영화처럼 할아버지의

머릿속에 남아있다.

“평양에는 학교 이름이 숫자로 나가요. 1,2,3,4 이렇게.

나는 평양 37 초등학교를 나왔지. 학교 갔다 와가지고선

대동강에서 친구들과 수영하고 놀았던 기억이 지금도 나요.

물이 깊지 않았어요. 평양 하류에서 친구들하고 같이

물놀이하고 그게 생각나죠.”

할아버지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였다. 부모님 두 분 다 교회 집사

로 활동했다. 당시 가족들은 평양에서 제일 큰 교회를 다녔다. 그러

나 북한에서 기독교는 일제 강점기부터 핍박의 대상이었다. 1938년

장로회 총회가 일제의 신사 참배를 정면으로 거부하면서 200여 교

회가 폐쇄되고, 2,000여 명의 신도들이 체포되거나 투옥되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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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후 8.15 해방과 더불어 각 교단에서는 교회 재건과 각종 단체 결성을

시도했다. 그 중에서도 평양을 중심으로 한 관서지방이 가장 활발하

게 움직였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면서 공산당 세력이 서서히 종교단

체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교회, 성당, 사찰 등 종교

시설들을 그대로 묵인하면서 그곳에서 대규모 공식적인 종교 의식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공산당은 그 가운데서 비교적

세력이 강했던 기독교에 대해서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로의 이행에서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다른 종교에 비해 집중적으로 제한을 가하

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50년도에 들어오면서 종교의식이 발각되

면 모조리 체포하고, 수시로 종교인들의 가택을 수색하고, 박해하는

등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자연히 많은 기독교나 천주교

인들이 전쟁 피난민이 되었다. 독실한 신자였던 할아버지네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가족이 다 산정현교회를 다녔어요. 평양의 대표적인

교회로 (현재 많은 교회의) 모델이 된 교회입니다.

그 교회의 모델이 서울에 와서 계속 이어지고 있어요.

당시 북한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많이 있었어.

지금도 있었지만, 옛날부터. 원래가 신탁통치할 때부터

남북으로 바뀌면서 ‘종교는 아편이다.’ (라고 핍박했지)

옛날부터 오면서 김일성 역시 유일체제로다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탄압이 많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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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고향 187

할아버지가 초등학교를 들어간 해, 6.25전쟁이 터졌다. 처음에는

전쟁이 금방 끝날 줄 알았다. 당연히 모든 기반이 있는 고향을 떠나

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고, 종교에 대한 탄압

이 심해지자 할아버지의 부모들은 남쪽으로 피난을 결심했다.

“부모님은 (종교를 탄압하는) 공산주의가 싫어서 자유 남한으로

와야 된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러다가 대동강 다리를 끊는 것을

B20폭격기가 폭격하는 걸 봤어요. 그래서 다리를 끊었단 말이야.

평양 대동강 다리를. 그걸 목격하고선 아, 이제는 안 되겠다.

이제 남으로 가야겠다. 그 결론을 낸 거여.”

부유 : 생과 사를 넘던 그날들

전쟁은 쉬이 끝나지 않았다. 전세는 하루가 다르게 달라졌다. 51

년, 1.4 후퇴가 후 일어났고, 중공군이 위쪽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평양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할아버지의 부모님은 2월에 피난을

결심했다.

“중공군 백 만 명이 인해전술로 오고 아군이 후퇴를 하니까,

야~ 여기서 있으면 안 되겠다 하니까 후퇴할 때 우리도 내려가자

해서 같이 내려 온 거지. 육군들이 오면서 피난민도 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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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도로에 그냥 차량이 얼마나 많아. 그냥 오고 지금처럼 고속도로가

됐으면 좋지만, 그때는 길이 나빠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거지 뭐.

군인은 군인대로 후퇴하고 피난민은 피난민대로 오고 그래서

함경도에 있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군함을 타고 오는 게

함경도철수가 마지막이잖아 거기에. 거기선 걸어서 올 수

없으니까. 너무 머니까. 그래서 그런 거지.”

하지만 어린 아이 6명을 포함한 8명의 식구들의 피난길은 길고도

더뎠다. 하루에 걸을 수 있는 양도 제한적이었고, 식량도 많지 않았

다. 아이들이 너무 어렸기에 어둡기 전에 꼭 묵을 곳을 찾아야 했다.

“평양에서 서울 마포구 아현동까지 28일 동안 걸어서 왔어요.

그 후에 다시 수원까지 오게 된거죠. 걸어서 올 때에 우리가

애들이 많았기 때문에 (힘들었어요). 나 같은 경우에는 9살이면

걸어서 오는데, 나보다 세 살 아래 동생들이 있으니까 힘들어서

잘 못 걸었죠. 그리고 워낙 천 만 명이라는 사람들이 피난길을

오다보니까 (피난 자체가) 힘들어가지고 많이 못 가요.

오다가 마을이라도 들리면 ‘아 오늘은 여기서 하룻밤 자면

좋겠다.’ 그래가지고서 해가 지기 전에 미리 (묵죠).

또 힘드니까 하루 뭐 한 30리 걸어오다 보니까 힘이 든다.

그 얘기죠. 워낙 사람이 많으니까 빨리 못가잖아요.

그래서 28일 동안 걸어오면서 오다가 적당한 집이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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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고향 189

거기 가서 쉬고 거기서 자고 또 창고에 쌀이 있으면 쌀 갖다가

밥 해먹고, 또 없을 때는 굶기도 하고, 그래 된 거여.”

길고 긴 피난 행렬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그저 남쪽으로 내

려갔다. 제대로 된 가방 하나 없던 시절, 사람들은 저마다 손에 보자

기를 하나씩 들었다. 당시 10살 남짓이던 할아버지 역시 조그만 보퉁

이를 들고 따랐다. 어린 아이가 들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보퉁

이 속에 든 쌀은 들고 다닐 때는 힘들어도, 먹기에는 항상 턱 없이 부

족했다.

“그저 애들이고 어른이고 조금 나이가 있는 사람은 쌀이라도

가져오고 짐이라도 이렇게 했는데, 근데 지금 같아서는 등산 백이

있어서는 물건을 넣어가지고 오면 좋은데 그때 당시에는 등산

백이라는 게 없었거든. 그냥 그 보자기. 보자기에 그냥 옷 조금

담고, 가방도 없고 말이지, 쌀 있으면 쌀 조금 이렇게 가지고

와야 되는데, 오다가 한 열흘 되면 식량 다 떨어지지 뭐.

쌀 한 말이면 그 얼마나 무거워요. 20키로자나 쌀 한 말이.

쌀 한 말이 20키로, 40키로 되는데 한 열흘 되면 다 없어지니까,

28일 동안 오면서 많이 목말라 했죠. 배고파 했고.”

매일 밤, 빈 집에서 머물 때 어머니는 주먹밥을 만들었다. 말이

주먹밥이지 그릇에 밥을 조금 넣고 소금을 넣은 게 다였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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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피난 길 중에 너무 배가 고프면 그걸 좀 먹었다. 그러나 그 밥

조차 먹기가 힘들었다. 길고 긴 피난길에 굶주린 아이들과 그 아이들

을 데려가야 하는 부모들의 심정은 말도 못 할 만큼 비참했다.

“하루 한 끼도 힘든 거죠. 아주 먹는 거로 고생한 거죠. 그때.

그러다가 마포 아현동. 아현동에 와 가지고선 그때 당시에는

가래떡이 많았었어요. 그래서 옛날에 그 북한의 빨간 돈.

가격이 얼마인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는데 당시에는

환이었으니 1환, 2환 이렇게 주고 사먹었어요.

그걸 사먹었는데, 세상에 그건 평생 잊을 수가 없는 거여.

돈 좀 있으면 그거 가서 사먹어야 되니까. 가래떡을.”

피난 중에도 전쟁은 계속되었다. 국군과 중공군이 엎치락뒤치락

했다. 아현동에서 얼마간 지내는 중에도 식구들은 계속 불안했다. 그

래서 이왕 집을 떠나 온 거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자고 결정했다. 그

래서 오게 된 곳이 수원이었다. 수원에서 자리 잡게 된 데에는 교회

의 힘도 컸다. 당시 수원에서 가장 큰 교회였던 수원교회에서 피난민

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수원에 와서 예배를 드리니까 아, 이 교회가 수원에서 제일

크구나. 여기서 그럼 정착하자. 해서 정착하게 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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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고향 191

정착 : 뿌리 없는 삶의 고단함

수원에 와서 처음 머문 곳은 남창동에 있는 99칸 집이었다. 당시

많은 피난민들이 그 한옥에서 모여 살았다. 얼마 뒤 남수동에 정착하

게 된다.

“99칸 집에서 임시로 살다가 피난 올 때 귀금속 가져온 것이

좀 있었어요. 그래가지고 남수동에다 집을 하나 산거죠.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에요. 돈이 조금이라도 있으니까 집을

장만한 거여. 60년대 들어서 정부한테 불하를 받아가지고

사가지고 등기까지 했으니까. 그때 완전히 우리 집이 된 거지.”

피난 올 때 가지고 나온 귀금속을 기반으로 집을 사고, 남은 돈으

로는 아버지는 평양에서 빵공장을 했던 경력을 살려 빵장사를 했다.

그러다가 당시 군수물자가 잘 팔리는 것을 보고 군수물품을 팔기 시

작했다. 주로 워커, 구두장사였다. 그러나 얼마 뒤 정부가 ‘양키시장’

을 없애야 한다며 단속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몰래 팔았다. 그

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단속이 점점 심해졌다. 그래서 아예 양화점을

열었다. 장사 자리를 고민하다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시장으

로 잡았다. 수원은 예전부터 지방의 모든 물품이 서울로 가는 길에

집결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시장이 발달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영동

시장은 중심에 있었다. 아버지는 조금씩 자리를 잡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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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살기 어려웠는데, 그때 우리가 수원에 와가지고 영동시장에서

양화점을 했어요. 그래서 8식구가 양화점에서 나오는 수입으로다가

생활하게 된 거죠. 처음에는 워커 장사, 구두 장사를 했어요.

구두 장사를 하다가 자연적으로 양화점을 하게 된 거죠.

그렇게 연결된 거예요. 그래서 남수동에 가서 공장을 만들었어요.

아버지가 공장을 했는데, 그때 당시 직원 다섯 명. 양화기술자

다섯 명이 그때 신발을 만드는 거죠.”

어머니도 아버지와 함께 영동시장에 가서 양화점에서 일을 했다.

장남이었던 할아버지는 신풍초등학교를 다녔다. 학교가 끝나서 집으

로 가면 부모님은 일을 하러 가고 안 계셨다. 그러면 어린 동생들에

게 집을 보라고 하고, 할아버지는 집을 나섰다. 나무를 하러 가기 위

해서였다.

“수원에서 힘든 게 뭐냐 하면 땔감이 제일 힘들었어요. 그래서

광교산까지 가서 나무를 지게를 지고선 왔어요. 팔달산보다

광교산이 나무가 많았거든요. 그런데 나중에는 산에 벌목을 많이

하게 되니까 산림간수가 나타나서 그걸 못하게 했어요. 골목에서

지키고 있었죠. 그래서 저녁에 컴컴할 때 나무를 해왔어요.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동네 전부다 젊은 사람들이. 나무를 베가지고

와가지고 그걸 가지고선 전부 아궁이가 있었어요. 그때 당시에

온돌방의 아궁이를 전부 그냥 나무 패다가서 땠으니까 땔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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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고향 193

없어가지고. 그래가지고 구공탄이 나중에 생긴 거여. 그땐 뭐

석유난로도 없었고. 제일 힘든 게 그거여. 땔감. 밥 해먹을 때

불을 때야만 밥을 해먹거든. 아버지 엄마도 시장서 장사하고

자식 놈들 할게 뭐 있어. 나무해야지.”

6.25 한국전쟁으로 수원지역에 이북을 떠난 사람들이 많이 몰렸

다. 그래서 피난민 교회를 설립하자는 것에 뜻을 모으게 되었다. 그

리고 이춘신 할아버지의 아버지도 주도적인 발기인 중 한 명이었다.

이처럼 특별한 교회의 역사는 교회설립 당시의 첫 당회록 서문에도

기록되어 있다.

우리 한국의 무서운 6.25동란을 비롯하고, 1.4 후퇴를 계기로 하

야 이북의 고향산천을 이별하고 부모처자를 떠나서 망명객처럼 경

기일우에서 유리하다가 수원에서 하나님의 제단을 쌓을 줄이야 어찌

뜻하였으리요.

그러나 수원제일교회는 첫 예배를 드린 지 한 달 만에 천막을 쳤

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다. 수원 유교의 중심지인 교동의 향교 바로

뒤에 있는 땅을 임대하여 천막을 쳤기 때문이다. 기도, 찬송 소리는

당시 유가 세도가 당당하던 수원의 선비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상한 소리’일 뿐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자리를 옮겼다. 그

렇게 세워진 것이 인계동 판잣집의 교회였다. 피난민들이 중심이 된

만큼 여유롭진 않았지만 모두 십시일반해서 교회를 개척해나갔다.

그리고 주위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러다가 최종적으로 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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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우리 한국의 무서운 6.25동란을 비롯하고,

1.4 후퇴를 계기로 하야 이북의 고향산천을 이별하고

부모처자를 떠나서 망명객처럼

경기일우에서 유리하다가 수원에서 하나님의 제단을

쌓을 줄이야 어찌 뜻하였으리요.

수원제일교회 출판부 회의 당시,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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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고향 195

으로 옮겨 정착하게 된다.

“그래서 팔달산에서 시작한 것이 그것이 4월 19일이여.

팔달산에서 창립예배 드린 날짜가. 지금의 시민회관.

그 장소예요 바로. 천막을 짓고선. 그래서 나는 수원서

신풍초등학교 1학년 다니면서 지금까지 여기서 한평생 살게 된

거여. 62년 동안을. 우리가 수원교회에 다니다가 그 교회를 나와

가지고 개척 교회를 하게 된 거죠. 시작한 곳이 팔달산부터

시작해서 인계동으로 이사하고 또 인계동에서 부흥해가지고선

지동으로다가 오게 된 거죠. 처음에 여길 와가지고 교회를

짓는데, 헌금들을 그때는 많이 못했어요. 헌금들을 하는데,

돈이 없는 사람들은 공사를 할 때 와서 잡부 일을 해. 벽돌을

운반을 해주고. 물이 필요하니 지게에 떠다가 물을 운반해주고.

그래서 교회가 건축을 하게 된 거여. 왜 그러냐하면 공사현장에

가면은 잡부가 벽돌을 운반해주는 사람이 있고 시멘트를

운반해주는 사람이 있고 물도 운반하고 여러 가지 뭐 이것저것

다 운반하는데, 교인들이 ‘아, 나는 헌금을 할 수가 없어.’

그러면 몸으로 봉사한단 얘기죠. 기도로다가 보탬이 되고 하죠.”

할아버지는 수원에서 신풍초등학교를 다니고 서울에서 야간 중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문선일과 조판 일을 했다.

활자를 모두 골라서 조합을 해서 편집하는 일을 했다. 이 일도 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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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장로님 소개로 입사했다. 후에는 그 기술을 살려 경인일보에 입

사했다.

“경인일보가 1966년에 입사했어요. 결혼한 해였죠.

그리고 1969년에 인천에서 수원으로 옮겨 왔거든요.

거의 30여 년 가까이 일했어요. 신문사 생활을. 신문사하면서

정치도 오래하고 시민운동도 지금도 하고 있고 그래요.”

할아버지는 평생을 부지런하게 살았다.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일을 했다. 교회에서 아이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 교사단기학교도 다

녔다.

“교회에서 애들 가르치려면 실력이 있어야 되니까.

(교사단기학교)가 대학이에요. 대학교. 신구약 이거 신학대학교

4년 다니는 거랑 똑같은 거여. 4년 동안 공부를 한 거야. 알아야

학생들이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잖아. 그리고 신문사 다니면서

정치도 하고 공부도 하고 그냥 바쁘게 산거여. 사람들이 그래요.

칼럼을 내가 많이 써서 나왔어요. 책도 만들어놓고. 신문사 근무

하면서 책도 쓰고 칼럼도 쓰고 정치도 하고 뭘 그렇게 많이

하냐고. 건강하니까 뭐 그냥. 지금도 아침 4시면 일어나요.

평생을. 아침 4시에 일어나서 책 보고 신문 보고. 내가 영화를

천 편을 본 사람이여. 영화를. 그때 목사님 하는 얘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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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고향 197

신사회국민운동 당시, 1995. 05. 22

이처럼 할아버지의 다양한 활동들은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피난을 나와 평생을

수원에서 살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자연히 할아버지에게 수원은 또 다른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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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아유, 영화광이네 광.’ 내가 영화를 천 편을 보고 책을 500권을

읽었어요. 평생 읽은 게 500권이 넘고 이거(성경책) 한 백 번

읽고. 이거 많이 읽어야 돼요. 그래야 기억을 한다고.”

87년 장로가 되고, 92년 경인일보 퇴사를 한다. 그리고 그 전후로

교회와 지역을 연결하는 정치활동을 했다. 당시 민정당에서 만든 정

치연수원의 1기 수료생이 되었다. 그 후 민정당의 부위원장이 되어

정치 홍보하는 역할을 십여 년 동안 했다. 그 후에는 ‘신사회 국민운

동본부’라는 시민단체에서 편집 겸 고문 역할을 오랫동안 했다. 또한

아버지가 창립 멤버 중 하나인 수원제일교회는 더욱 남다를 수밖에

없다. 평생을 교회에 헌신하며 살았다. 현재 할아버지는 원로 장로로

활동하고 있다.

이처럼 할아버지의 다양한 활동들은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피난을 나와 평생을 수원에서 살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자연히 할아버지에게 수원은 또 다른 고향이다. 실제로 인터

뷰 동안 할아버지는 수원에 대해 강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러나 동시에 두고 온 고향, ‘평양’에 대한 생각도 애틋하다. 할

아버지는 지금도 곧 통일이 될 것이라 믿고 있다. 그래서 수영하던

대동강을 언젠가는 가 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할아버지의 고향은

그래서 두 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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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고향 199

“나는 미국도 가보고, 중국도 가봤지만 수원이 제일 좋아요.

수원에는 물이 좋고, 산이 좋고 사람도 좋고. 서울보다도 좋아.

실질적으로 더 좋아. 그래서 수원은 내 고향이죠.

그래도 언젠가는 진짜 고향에 가고 싶기도 해요.

(사람들이) ‘죽기 전에 고향에 갈 수 있을까?’ 하는데

난 항상 그렇게 얘기해요. 통일이 곧 온다고.

평양에 갈 일이 이제 생긴다고.”

구술정리 / 은정아

사진 / 류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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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이춘신 할아버지(73세) 연보

1942년 평안남도 평양시 이암리 37번지 출생

3남 3녀 중 장남

1951년 (10세) 1.4 후퇴 때 가족 8명 전원이 함께 피난

28일 동안 걸어서 평양에서 서울(마포구 아현동)

까지 내려옴

1952년쯤 (11세경) 수원으로 내려옴

수원에 정착. 아버지 양화점 운영함

신풍초등학교 다님

수원교회(돌 교회)에서 피난민들이 모여서 예배

1953년 (12세) 수원교회에서 나와서 팔달산에서 천막을 치고

‘수원제일교회’ 개척

아버지가 ‘수원제일교회’ 발기인 18인 중 한 명

1960년대 초반 서울에서 야간 중·고등학교 다님

졸업 후 문선일, 조판일을 함

1966년 (25세) 제일교회 목사님 중매로 결혼

‘경인일보’ 제작국 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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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고향 201

1969년 (28세) ‘경인일보’ 인천에서 수원으로 이주

약 26년간 근무 (나중에 수석사원까지 됨)

1973년 (32세) 아들 출생

1975년 (34세) 딸 출생

1980~90년대 중반 장로 활동/선교회 활동

1992년 (51세) ‘경인일보’ 신문사 은퇴

1990년대 ‘은성바이어’ 기획실장/‘가나안제과’ 등 근무

2000년대 이후 ‘신사회 국민운동’ 등의 시민단체에서 편집인 겸

고문으로 활동

현재 수원 제일교회 원로 장로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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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연백서 배 타고 나온거야. 배 타고 강화도로 나왔지.

(연백에서 강화로) 이걸 건너오는데

그런 식으로 건너왔어. 배가 뜨지를 못하니

빨개 벗고 배 쭉 타고. 사람이 너무 많아서.

사람이 많아서 배가 뒤집히니까

뱃사공이 죽어도 못가겠다 이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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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바다를 건너 풍랑 걷힌 삶 속으로 203

거친 바다를

건너

풍랑

걷힌 삶

속으로

아홉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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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조문선 할아버지와의 만남은 수원 영화동에 위치한 광복회관 5층

에서 이뤄졌다. 올해로 아흔하고도 한 살을 더한 할아버지의 풍모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건장한 모습이었다.

오직, 한 세기 가까운 세월을 살아낸 할아버지의 성성한 백발만이 그

시간을 증명해주는 듯했다.

굳이 무엇을 묻지 않아도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할아버지의 이야

기는 살아온 세월을 무려 80여 년이나 거슬러 올라가 시작되었고,

현재의 시공간은 할아버지의 이야기로 가득 메워졌다.

거친 바다를 건너

풍랑 걷힌

삶 속으로

∷ 조 문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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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바다를 건너 풍랑 걷힌 삶 속으로 205

기억 : 잃어버린 고향의 시간

“황해도 연백군에서 태어났어. 그때 우리 9살인가 10살적에

학교가 생겼다고 그 동네에. 여기는 우리 황해도 아주 오지예요.

학교가 그것만큼 늦게 들어온거야. 그러니까 나와서 사립학교

다니다가 피난 댕기고 뭐, 구학문 좀 읽다가 (피난) 나온거야.

공부 못했어.”

일제는 1943년 8월 개정병역법에 의해 전면적 징병제를 강행했

다. 그 이듬해인 1944년 4월에서 8월 사이에는 첫 징병검사가 실시

되었고, 20만 명을 넘는 숫자의 사람들이 징병검사를 받았다. 합격

자들은 1944년 9월부터 1945년 일제가 패망하기 전까지 순차적으로

징집되었다. 당시 입대 인원은 최소 17~18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징병 1기생들은 1924년에 태어난 스무 살 갑자생들이 다수를 차지했

다. 할아버지도 그 대상 중 하나였다.

“내가 24년생이지만, 일본군 징병1기생이야. 전부 끌어갔잖아.

1기생이 24년생이야. 그냥 우리 친구들 전부 영장 받아서

그때 다 갔어. 근데 난 안 갔어. 영장 나오길 기다리는데

우리 어머니가 (끌려)가면 죽으니까 손 끊어진다고 (미리) 장가를

보낸거야. 장가를 19살인가 보내가지고 애를 하나 낳았는데

해주 가서 1년 동안 그냥 놀고 먹고 (그러다) 해방이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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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친구들하고 영암 온천에 가서 온천장에서 목욕하고 나왔는데,

어디서 만세 부르고 난리더라고. 이게 무슨 만세냐 그랬더니

해방됐대. 빨리 기차 타고 집엘 오니까 라디오를 틀었는데

해방됐다고 하더라고. 그때가 22살적일거야.”

할아버지는 해방 이후 연백으로 다시 내려와 지내며 갖가지 물건

을 떼다 납품하는 장사를 했다. 연백에서 물건을 받아 해주까지 싣고

가 물건을 팔았는데 특히나 미제품이 큰 인기를 끌었다.

“지역에서 자전거 타고 다니며 국수장사 했지. 국수를 국수기계에

넣고 맨들어서 한 그릇이면 한 그릇씩 이렇게 묶어서 파는 데가

있어. 그 시골사람은 못 먹어요. 그때 그게 처음 나온 거라서.

그걸 자전거 타고 시골 가 팔고. 이제는 국수봉지 이렇게 담지?

한 근 짜리 두 근 짜리 이렇게 맨들어 팔면 우리 집안에서 그걸

(국수공장을) 하기 때문에 그걸 받아다가 외상으로 받아다 팔았다

돈 주고... 이제 이거 받아다 해주 가서 팔고.”

“무슨 기름 사면 요만한 통 있지? 그거 구호물자로 엄청나게

들어왔다고. 다이아찐이라고 알아? 다이아찐. 다이아찐이라고

이건 만병통치약. 이게 피 난 데도 먹으면 낫고, 감기에도 낫고

이게 만병통치약이야. 미국서 나온 건데 먹는 거야. 요만한 거.

알약. 그때 이게 구호물자로 들어온 거야. 근데 우리나라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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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바다를 건너 풍랑 걷힌 삶 속으로 207

그때 약을 안 먹어서 뭐든지 먹어도 낫는 거야. 설사에도 낫고,

배 아픈 데도 낫고, 골 아픈 데 먹어도 낫고. 이게 우리사람은

못 먹어봤잖아. 뭐 장사꾼들이 야단이야. 또 우리가 가게 가서

요만한 눈깔사탕만 사 먹어봤지, 깡통에 있는 사탕을 먹어봤어?

그걸 이북(해주)으로 가져가니 환장을 하는 거야.

이게 무슨 어떻게 된 거냐고. 깡통을 이런 깡통을 갖고 팔아.

그거 한나절 싣고 가면 (마진이) 배가 남아요.”

해방 이후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고 38선이라는 군

사분계선이 그어지면서 연백(군)의 대부분 지역은 38선 이남으로, 해

주(시)는 38선 이북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연백과 해주를 오가며 장

사를 하시던 할아버지는 갈수록 삼엄해지는 군사분계선 경비로 인해

연백으로 아주 넘어오게 된다. 할아버지는 연백에서 집안사람이 하는

국수공장의 국수를 계속 공급 받아 장사를 이어가다 1950년 또 다시

역사의 큰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된다. 6.25사변이 터진 것이다.

부유 : 생과 사를 넘던 그날들

몇 달 전 개봉해 높은 관객 수를 기록한 영화 ‘국제시장’은 한국전

쟁 세대의 삶을 조명한 영화로, 그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을

극장으로 불러 모았다. 조문선 할아버지 역시 할머니와 함께 영화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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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람을 위해 극장을 찾았다. 당시 피난길에 올랐던 많은 사람들의 상황

이 영화에 그대로 재현돼 있었고, 그 시대를 휩쓸고 간 전쟁의 광풍

은 관람객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영화는 할아버지의 험난했던 피난

시절을 상기시켰다.

“함흥에서 미군 군함이 전차를 싣고 왔다가 내리지를 못하고

도로 나가려는걸 우리 한국군 장성이 올라가서 여기 우리 사람들

부두에 있는 사람들 실어달라고 해서 한 시간 동안 실갱이 하다

그 사령관이 전차를 전부 다 내려놨잖아. 그래놓고 사람을 태워서

2만여 명을 싣고나왔잖아 거기서. 근데 그게 실로 군함이 높잖아.

밧줄타고 올라가고 떨어져 죽고. 그 장면이 나 피난 나올 때랑

너무 흡사한 거야.”

할아버지는 6.25사변이 터진 그 이튿날 나왔다. 빗발치는 전쟁의

폭격과 함께 인민군은 사람들을 여지없이 몰아가고 있었다.

“나는 연백이에요. 고향이. 연백. 강화 있죠? 강화 건너에

섬이 교동이라고 있어요. 강화군 교동면. 다리 놨어, 작년에.

교동면에서 이렇게 오면은 우리 동네(연백)가 보여 요렇게.

연백서 배 타고 나온거야. 배 타고 강화도로 나왔지. (연백에서

강화로) 이걸 건너오는데 그런 식으로 건너왔어. 배가 뜨지를

못하니 빨개 벗고 배 쭉 타고. 사람이 너무 많아서.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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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바다를 건너 풍랑 걷힌 삶 속으로 209

많아서 배가 뒤집히니까 뱃사공이 죽어도 못가겠다 이기야.”

최대 20명의 사람을 태울 수 있는 작은 고깃배에 살고자하는

60~70명의 사람들이 올라탔다. 당연히 배는 뜨지 않았고, 뱃사공은

망연자실했다. 한 시간 정도 사라졌다 나타난 뱃사공은 작은 배 위에

운집된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기 타려면 내 말을 들으면 배가 뜨고 그렇지 않으면 배가

못 뜬다. 보시다시피 물이 찰랑찰랑 하는데 배가 뜨냐 이 말이야.

물길이 막 뒤집히는데.”

연백과 강화도 사이는 그리 길지 않았다. 한강에 떠 있는 유람선

너비만 했다고 할아버지는 회고하셨다. 사공이 시키는 대로 40여 명

가량의 젊은 사람들이 전부 옷을 벗고 팬티만 입은 채 배 양편 끝에

매달렸다. 그러자 배가 쑥 올라왔다. 그렇게 살고자하는 사람들의 단

합심으로 배는 작은 바다를 무사히 건너 강화도에 닿았다.

“그니까 뱃사람이 얼마나 영특한 사람이야? 젊은 사람들 전부

벗고. 누구 내리라니까 안 내리잖아. 당신도 살아야 되고 나도

살아야 되니까 내 얘기를 한번 들어보라 말이야. 한 40명이 벗고

내리니까 배가 뜨니까. 거기서 두 명이 떨어져서 죽었어요.

거기서. 그게 (영화 ‘국제시장’이랑) 똑같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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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강화도로 건너와 구호물자로 받은 옷을 입고 인천으로 넘어온 할

아버지는 서울이 점령되면서 또 다시 아래로 후퇴해야만 했다. 할아

버지는 그렇게 혈혈단신 홀로 피난길에 올랐고, 식구들의 생사는 알

수 없었다.

“인천에서 쉬려니까 쉬지도 못해. 그날 밤으로 수원을 왔어.

걸어서 또 수원에 와서 이틀 밤인가 있으니까

또 피난 내려가더라고. 수원에 그 세종대왕 마당 있지?

거기가 도립병원이 있었어. 도립병원. 옛날에 경찰서 앞에

도립병원이 있었어. 경찰서, 우체국이 있었고.

도립병원 마당에서 이틀 밤을 잤나? 그래 또 피난 내려갔어.

그렇게 기찻길 타고. 기찻길 타고 서울 왔거든. 여기 옛날에

기찻길이 있었어요. 조그만. 그거 타고 여길 왔는데, 그 뒤로

또 내려가네. 내려가는데 어떻게 나가니까 화통차들이 있어서

그걸 타고 대전으로 내려갔지. 거기서부터 탈 수가 없더라고.

차가 있어 뭐가 있어. 걸어서 철다리 따라서 그냥 걸어서

내려가다 트럭 같은 거 만나면 타고 내려가서 부산까지 간거야.”

지난한 피난길. 걷다 쉼을 반복하며 걷고 또 걸었다. 운 좋게 먹

을 것을 얻어먹는 날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항상 배가 굶주려

있었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져 밤이 되면 빈 집으로 들어가 고단한

피난 여정 속에서 잠을 청했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강화도에서 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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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바다를 건너 풍랑 걷힌 삶 속으로 211

먼 부산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꼬박 닷새가 걸렸다.

“거제도에 가서 내렸잖아. 그리고 부산을 갔는데 동네 온천 앞이

전부 다 큰 논이었어. 그 논바닥에다가 밭도 있는데 거기다가

천막을 치고 거기다 피난민들 자꾸 실어다 날라. 그래 꿀꿀이죽.

꿀꿀이 죽이란 건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게 꿀꿀이 죽인데,

우린 그때 미국서 나오는 분유 타가지고 죽 쒀 주는 거야.

그걸로다 밥을 주는데, 나이 20대에 그거 먹고 돼? 그러고

거기서 천막에 들어갈 수가 없어, 도저히. 얼마나 이가 많은지.

하룻저녁 자면 이가 벌벌벌. 그냥 밀가루 덮어 쓴 거 마냥...”

피난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할

아버지는 이틀 밤을 겨우 지내고서 친구들과 함께 구포로 넘어갔다.

구포 읍사무소에도 역시나 많은 피난민들로 북적거렸고 잘 자리라곤

없었다. 사람들의 거처는 급기야 구포에 위치한 절로까지 이어졌다.

“그 동네 절이 두 개 있는데. 절에다 거기다 잘 자리를 만들어

놓고 밥을 시청 마당에 거기 어디 있으니까 얻어먹으라 하고

그땐 젊었으니까.”

구포에 있는 절 법당에서 먹고 지내던 할아버지는 밤마다 목탁을

두드리는 소리에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고, 구포 다리에 써 붙인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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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엔군 모집 공고를 보게 되었다.

“구포 다리 나가서 이렇게 있으니까 유엔군 모집이라고

써 붙였더라고. 그래 구포국민핵교로 언제까지 오라나 하고,

그땐 핵교고 뭐고 다 문 닫았을 때지. 국민핵교로 오라 해서

거길 갔지. 가서 밥을 한 끼 얻어먹고서 가보니까 유엔이니까

미군들이 와 있더라고. 통역관 장교들 두 사람이 와 있고.

오늘 저녁 여기서 자고 낼 여기서 시험 친다 하니 이거 거기 또

놀래가지고 시험 친다는데 놀래가지고 ABC를 알아?

영어로 시험 친대는데 이건 뭐야. 시험 친대니 이거 틀렸구나.”

군에 들어가면 밥은 굶지 않고 먹겠다는 생각에 유엔군에 자진 입

대를 신청했지만 시험이란 두 글자는 할아버지를 극도로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게 괜히 벌벌 떨리는 게 내 이름자도 제대로 못 쓰는 게,

ABC를 알아? 뭘 알아? 이거 또 틀렸다 했더니, 아침에 래숑7)

이거 박스가 하나 하루 먹는 거야. 그걸 아침에 하나씩 주더라고.

식량이야. 그게 하루 식량이야. 쓰리 래숑이라고 세끼를 먹게끔

만들었다고. 쓰리 래숑. 군인들이 헬리콥터로 떨어뜨려 주는

7) レ-ション: ration(레이션)의 일본발음으로, 군대의 휴대 식량, 식료품 등의 배급량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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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바다를 건너 풍랑 걷힌 삶 속으로 213

거야. 그걸 하루 음식이라고 주는데, 그걸 먹고 나니 (오전)10시

좀 넘어서 시험 친다고 나오라고 소리를 쳐서 나갔지.

구포 다리에서 저 김해로 2키로 가면 김해면사무소가 있는데,

이제로 말하면 김해비행장 정도 될 거야 아마. 거길 갔다 뛰어만

오면 된다는 거야. 몇 시까지 오면 된 돼. 갔다 뛰어오는 놈은

붙는 거야. 난 글씨 쓰는 게 시험인줄 알고 겁을 먹었더니

뜀박질을... 한 80명이 왔더라고. 근데 한 30명 떨어졌어.”

할아버지는 같이 간 친구들과 함께 시험에 합격했다. 중간에 못

버티고 나온 사람도 있었다. 미군에서 지급하는 군대 식량이 입에 안

맞았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항상 굶주려 있던 할아버지에게 미군에

서 보급되는 음식은 세상 어떤 음식보다 맛난 진수성찬이었으리라.

“어우 (맛이) 좋지. 고기. 깡통에 고기, 그땐 처음 먹어보는 거지.

깡통 속에 고기가 어디가 있어. 세상에 우리 한국사람 누가 먹어

봤겠어. 나밖에. 빵도 이렇게 마른 거. 빠다 이렇게 비벼 먹는 거.

(다른 이는) 그걸 못 이겨서 나오데. 설사해가지고 (못 견디고)

나가는 사람 있더라고. 암튼 그러고 나서 이틀 동안은 딱

총 쏘는 것만 가르쳐줘 끌고나가는 거야. 일선으로.”

“나오라고 해서 문밖으로 딱 나갔더니 트럭에다가 뭘 갖다

떨어뜨리는데 그게 의복이야. 이야, 미군군복을 갖다가 뜯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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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한 벌씩 주지. 속옷을 두 개씩 주더라고. 그때 우리가 뭐 런닝

입고 댕겼어? 런닝구도 못 입었지. 런닝구 두 개에다가

팬티 두 개 그러고 군인복을 주대. 이건 뭐 오늘 죽어도 원이

없는 거야. 거기 가서 깡통에 고기 먹었지. 너무 좋았지.

그러고선 총에 총알 넣어가지고 총 쏘는 거 딱 이틀 동안

훈련시켜 가지고 끌고나가는 거야.”

할아버지는 바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진주에서 전투를 벌이고 나

중에는 이북까지 올라가 전투를 치르던 중 총상을 입고 6.25전쟁이

일어난 그 이듬해 제대를 하게 된다.

정착 : 뿌리 없는 삶의 고단함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다시 인천으로 올라왔을 때는 이미 서울은

수복된 상태였다. 할아버지는 인천 등지를 떠돌며 여기저기서 노동

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리고 헤어졌던 어머니를 인천에서 어렵

사리 만나게 된다. 그러나 아내와 딸은 차마 피난을 나오지 못했다는

소식만을 들어야 했다.

“딸 땜에 (피난을) 못 온 거야. 그때 평양서 (인민군이) 넘어

왔잖아. 또 (남한군은) 후퇴했잖아. 그니까 동네사람들이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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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바다를 건너 풍랑 걷힌 삶 속으로 215

애들 데리고 가면 죽는다고, 또 들어올 거 아니야.

그러니까 못 넘어 왔지. 그니까 딱 끊어지고 만 거야.

근데 우리 어머니도 나중에 어떻게 내가 어딨나 죽었나 해서

니들 여기 있으라 하고 우리 외갓집 동네다가 (가족들을) 둬 두고

나 이리 넘어온 걸 그놈들이 다 알잖아. 집 팽개치고 조그만

집이 하나 있었는데, 외갓집에서 한 50리나 되는 시골에다

둬 두고선 어머니가 (남으로) 넘어 왔어. 어머니가 또 (연백으로)

갈려다 못 갔지. 여기서(수원서) 돌아가셨어.”

이제는 어머니 돌아가신 지가 십 몇 년이 되어간다. 북에 있는 아

내도 생을 달리 했다. 만나고 싶어도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가족들이

그렇게 할아버지 곁에서 하나 둘 사라져갔다.

전쟁으로 남과 북이 갈리고 고향땅을 밟지 못하게 된 할아버지는

그나마 고향과 가까운 인천 등지인 부천으로 생활 터전을 옮기게 된

다. 그리고 중매로 두 번째 아내를 맞이했다. 그 사이에서 아이 다섯

을 낳아 길렀다. 일자리를 소개 받아 간 부천 소사에서 할아버지 인

생의 제2막은 시작되었다.

“누가 농장에 가서 일을 해보라고 해서 팔도 시원찮고 다리도

조금 저니까 좋다고 와서 갔더니 아주 부잣집을 간 거야.

부잣집 농장을 간 거야. 한 1년 동안 일을 하고 그 양반한테

애들 둘인가 있었는데, 조그만 집도 주고 그래서 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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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농장 주인의 동생은 알고 보니 당시 국회의원으로 재직해 있었다.

마침 국회의원 동생의 비서 자리가 비어, 평소 할아버지를 좋게 보았

던 농장 주인은 동생에게 비서 자리로 할아버지를 추천해주었다.

“(농장주인이) 거기 국회위원 형이야. 것도 이북사람이야.

국회위원은 비싸더라도 몇 사람 쓰잖아. 운전수도 있고.

그 비서 있던 사람이 무슨 일이 있어, 변호사도 관두겠다고

나갔는데, 자기 동생보고서 (그때는 국회위원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이 뭐이 무서웠냐면 빨갱이가 무서운거야.) 이놈 군대도

갔다 왔고, 아주 순 빨갱이 잡는 놈인데, 신분은 내가 보장할테니

동생보고 딴 사람 쓰지 말고 이 사람 갖다 쓰라고.

그래서 어떻게 해서 날 보니 그 양반이 날 끌어간 거야.”

전쟁으로 피난을 나와 부산까지 내려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살기

위해 군에 자원입대할 정도였던 할아버지가, 구호물자로 보내온 의

복을 얻어 입고, 미군 보급 식량에 감복하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국회

의원의 비서로 전격 발탁된 것은 인생역전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

었다.

부천 소사에는 할아버지 앞으로 집이 생겼고 별안간 형편은 몰라

보게 좋아졌다. 그리고 비서로 일하며 국회의원의 스케줄에 맞춰 서울

을 바쁘게 오갔다. 그러다 1년 후 농장 주인의 동생인 국회의원은 장관

이 되었고, 할아버지 또한 덩달아 장관의 수행비서로 승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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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바다를 건너 풍랑 걷힌 삶 속으로 217

“이게 집엘 안 보내는 거야. 저녁에 일이 많아. 저녁에 전화

받아야지, 그때는 도지사 임명할 때 아니야. 전부 다 장관이

임명하는 거거든. 전국에서 각 도지사 전화 한 번씩 다 받아야지.

집에서 자고 먹고 하는 비서가 필요한 거야.”

장관의 비서 일을 수행함과 동시에 장관 사모님의 권유로 할아버

지는 경리학원에 들어가 주산과 부기를 익혔다. 훗날 사모님이 주주

로 있는 동방생명에 할아버지를 들여보내려는 배려인 듯싶었다. 5년

간 수행비서로 충실한 소임을 다하던 무렵 3.15 부정선거로 인한 자

유당의 해체와 함께 할아버지의 일자리도 공중분해 되고 말았다.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정·부통령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12년간 지속된 장기집권체제를 연장하기 위해 부정과 무력을 동원하

여 재집권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는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규모

전국 시위로 확산되었고, 4.19혁명으로 말미암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성명을 발표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자유당 정권도 자연스럽게

함께 붕괴된 것이다.

그 후 일자리를 잃어버린 할아버지의 인생에 잠시잠깐 공백기가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농협에 입사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19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났던 그 해였다.

“농협은행이라고 있지? 그게 전신이 농업은행이야. 농업은행으로

있던 거를 박대통령이 정권 쥐면서 농업은행을 반을 쪼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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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기업은행을 맨들고, 반 재산을 농협으로 맨들어서 둘을 만든

거야. 농협은 농업만 책임져라. 농사꾼들만 책임져라.

또 기업은행은 중소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중소기업은행만

지원을 해라 해서 반을 가르고 만 거야. 농업은행이 반쪽이

되니까 사람이 수백 명이 필요한 거야. 그때 사람이 모자라잖아.

그때 들어간 거야. 내가.”

농협에 입사한 할아버지는 3년 만에 과장을 달았고, 연수로 10년

을 채웠다. 그리고 퇴직 후에도 여러 사업을 벌이며 손에서 일을 놓

지 않았다.

“수원에 온 거는 감독하러 왔지. 사업하느라고.

내가 본래 안양으로 내려왔다가 안양에서 공장이 좁아서

수원에 공장을 하나 또 샀다고. 내가 삼성전자 부품을 했어.

옛날에 VCR이라고 있어. VCR 비디오. 거기에 부품 만드는

공장을 했어. 부품공장. 그거 한 10년 했는데. 큰 회사들이

생겨 난 그만두고 공장세만 먹고 살았어. 지금은 다 팔아서

공장이 없지. 그러고 쭉 산거야 지금까지.”

그 이후로 할아버지의 삶은 변함없이 지속돼 왔다. 부족한 것 없

이 지낼만한 경제적 여유도 계속 됐다. 그러나 가슴 한 편에 남아 있

는 유일한 한 글자만이 할아버지를 공허하게 만들었다. 이북에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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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바다를 건너 풍랑 걷힌 삶 속으로 219

온 나의 ‘딸’.

50년에 피난 나와 생사도 모른 채 헤어진 딸의 이야기로 운을 떼

던 할아버지는 어느새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거리셨다.

“나 벌써 딸 얘기만 하면 울잖아. 아이,

난 딸 얘기만 하면 자꾸 눈물이…….”

양 손에 얼굴을 파묻고 할아버지는 딸 생각에 잠기며 눈물을 훔치

셨다.

“2006년도인가. 만 팔천 명이 신청을 하는데, 그게 됐어.

그 해가 또 우리 (두 번째) 마누라 죽은 날이야. 여기 와서

애를 다시 낳았는데, 난 서울서 살았어. (수원으로) 나온 지

얼마 안 돼. 한 20년? 근데 이게 당첨이 됐단 말이야. 가야지.

먼저 갔다 온 사람들 보고 어떻게 하면 되냐니깐 뭐 의복을

비싼 걸 말고 싼 걸 사가지고 가라고. 우리 집사람 죽기 전에

이걸 통지를 받았어. 친구들 부인들이 서울 남문시장을 가서

옷을 갖다 주고 하는데 창고로 하나야. 옷이. 그걸 보따리

보따리... 못다 가져간 것도 여태 있어요. 누가 그러는데

금붙이를 가져가라 그래. 그래서 갔다 말이야.”

2006년, 할아버지의 간절한 소망이 닿은 것일까? 할아버지가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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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송도에서 실향민 모임, 1979. 09

그 이후로 할아버지의 삶은 변함없이 지속돼 왔다.

부족한 것 없이 지낼만한 경제적 여유도 계속 됐다.

그러나 가슴 한 편에 남아 있는 유일한 한 글자만이

할아버지를 공허하게 만들었다.

이북에 두고 온 나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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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바다를 건너 풍랑 걷힌 삶 속으로 221

에 바라던 이산가족상봉의 만남이 성사된 것이다. 봉고차에 옷 보따

리를 가득 싣고 할아버지는 속초로 향했다. 이산가족상봉 신청자들

과 관련자 가족에 기자들까지, 모인 인원만 해도 300~400명으로 추

정되었다. 그렇게 속초에서 모여 하룻밤을, 그리고 고성에서 다시 하

룻밤을 지냈다.

“고성서 30분 만에 가요 거기. 고성 거기서 30분이면 거길

간다고. 현대가 닦아놨어. 이북거기까지 닦아놨어.

벌써 딱 가니까 와 있더라고. 딸이 아주 공주가 와 있어.

자기 번호를 붙여놨으니까 ‘자기번호를 찾아가면 됩니다.’

그래. 저기서 보니까 책상 쫙 놓고 번호를 붙였는데,

저기서 이렇게 보는데 여우새끼 같은 게 딱 내 딸인거야.

난 보지도 못했는데. 그 무섭대요. 저거이 내 딸이구나.

요렇게 하고 있는데, 막말로 하면 똑 여우지 뭐.

이게 본래 이렇게 못 생기지 않았거든. 굶어서 그런거야.

이리와, 껴안고서 젖가슴을 만져보니 젖꼭지만 만져지는거야.

이런 제길... 그러니 내가 얼마나 불쌍해. 먹지 못해서.”

이산가족상봉 당일 금강산 호텔에서 이뤄진 두 번의 면회. 할아버

지에게 그 시간은 찰나와도 같은 순간이었다. 아버지와 딸로 세상에

나와 서로의 얼굴을 인지하고 눈에 담아 둘 새도 없이 전쟁으로 헤어

져야 했던 두 사람은 너무도 오랜 세월의 공백만을 체감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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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이산가족상봉 당일 금강산 호텔에서

이뤄진 두 번의 면회. 할아버지에게 그 시간은

찰나와도 같은 순간이었다. 아버지와 딸로 세상에 나와

서로의 얼굴을 인지하고 눈에 담아 둘 새도 없이

전쟁으로 헤어져야 했던 두 사람은 너무도 오랜 세월의

공백만을 체감할 뿐이었다.

이산가족상봉 당시, 금강산 삼일포에서(왼편의 조문선 할아버지와 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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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바다를 건너 풍랑 걷힌 삶 속으로 223

눈을 들어 바라본 나의 딸은 어느새 자신과 같이 늙어가고 있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두드렸다. 긴 세월의 공백만큼 딸의

어투 또한 다정다감할리 없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말한다.

“그래도 그게 내 딸인 게 이쁜거야...”

이산가족상봉 이후 집으로 돌아온 할아버지는 딸과의 만남이 못

내 아쉬워 아는 사람을 통해 중국 단동에서 이북 딸네 집에 갔다 올

수 있다는 사람을 소개받았다.

“중국. 그래? 한 번 가봐? 누가 그러길 그거 속으면 돈만 짤린다

그러더라고. 그래도 한번 가보자. 너무 아쉽단 말이야.

그때 또 나 마누라 죽고, 같이 사는 (세 번째) 마누라 또 있어요.

그 양반이 여기 양반이에요. 이북서 나와서 여기서 5살적에

나왔는데 이북양반인데, 그 양반이 그전부터 단체생활할 때

같이 했는데, 자꾸 친구들이 나하고 합류시켜서...

이제 벌써 금년 들면 9년째 같이 사는 양반이 있어.

그 양반하고, 가자. 그 양반하고 둘이서 갔지.”

할아버지는 중국 단동으로 건너가 다시 한 번 딸의 얼굴을 볼 수

있기를 학수고대하며 그곳에서 26일을 지냈다. 그리고 그 26일 만에

딸과의 전화통화가 이뤄졌다. 딸은 신의주까지 오다가 삼엄한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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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를 뚫지 못하고 그곳에서 멈춰야만 했다.

“전화 통화 마지막에 아버지, 이제 나 찾지 마세요.

그러더라고. 그러고 끝내고 말았지.”

할아버지는 끝끝내 딸을 만나지 못했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딸의 마지막 음성만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북

에 두고 온 딸 이야기는 끝이 났다.

이산가족상봉 당시 이북의 딸과 함께

(오른편은 대한적십자사 전 총재 한완상 씨),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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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바다를 건너 풍랑 걷힌 삶 속으로 225

할아버지에게는 이산가족 상봉 때 딸과 찍은 사진 한 장만이 딸이

살아있는 유일한 증거이자 위안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함께 찍은 사

진을 내려다보며 애잔한 표정을 지어 보이시던 할아버지는 혼잣말처

럼 나직이 내뱉으셨다.

“야, 이게 딸이야. 여기선 미스코리아가 되는 건데...”

가족을 잃고,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만 했던 이 땅 위의 수많은 이

산가족들은 전쟁이라는 참상이 빚은 쓰디쓴 비극을 맛보아야 했다.

할아버지에게도 전쟁의 비극은 비켜갈 줄을 몰랐고, 그것은 삶의 중

심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북에 홀로 떨어진 딸은 할아버

지에게 전쟁의 큰 상흔으로 남아 있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할아버

지가 그려볼 딸의 마지막 모습은 언제까지나 어여쁜 공주로 기억될

것이다. 아직도 할아버지의 애잔한 부정이 절절히 마음에 와 닿는다.

구술정리 / 최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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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조문선 할아버지(91세) 연보

1924년 황해도 연백군에서 출생

1942년 (19세) 당시 일제의 징병제로 아들이 끌려가면 자손이

끊어질까 염려한 어머니 때문에 결혼을 올림

1943년 (20세) 딸 출생으로 추정

1945년 (22세) 해주에서 해방을 맞이함

1948년 (25세) 국수 납품 장사 등을 하며 생계를 이어감

1950년 (27세) 6.25전쟁 발발, 연백에서 강화도 교동으로.

그리고 인천에서 수원, 서울을 거쳐 다시 남쪽

부산까지 피난을 오게 됨

구포로 건너가 UN군 모집으로 군에 입대

1951년 (28세) 총상으로 군 제대

1953년 (30세) 새 아내를 만나 인천에서 결혼식을 올림

(아이 다섯을 낳음)

1954년 (31세) 부잣집 농장에서 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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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바다를 건너 풍랑 걷힌 삶 속으로 227

1955년 (33세) 농장 주인의 동생인 국회의원 비서로 들어가

일을 시작함

1956년 (34세) 모시는 국회의원이 장관으로 올라가면서

장관 수행비서가 됨

1960년 (37세) 3.15 부정선거로 인해 자유당이 해체되면서

비서로 있던 일자리를 잃게 됨

1961년 (38세) 박정희 쿠데타 시절, 서울에 있는 농협에 입사

1971년 (48세) 10년간 근무하던 농협에서 퇴사

1970~90년대 퇴직 후 여러 사업을 하며 지냄

서울과 안양에서 생활

1994년 (71세) 수원으로 이주

2006년 (83세) 두 번째 아내를 먼저 보냄

이산가족 상봉으로 북에 있는 딸을 만남

2007년 (84세) 지금의 아내와 만나 결혼

2014년 (91세) 북에 있는 딸을 그리며 현재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고 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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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사람은 이렇게 보면 헤어지는 연습도 해야 돼.

좋을 때 헤어져야지.

언젠가 너하고 나하고는 헤어지는 거야.

내가 죽던가 뭐 하면 헤어지는 건데.

그 연습도 해야 된다 마음의 준비는.

우리는 그냥 살고 싶지. 계속 평생 같이 못 살잖아.

또 같이 살면 어디 좋기만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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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지 않지만, 기억되는 그곳 229

기억나지

않지만

기억되는 그곳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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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할아버지는 전쟁이 나기 한 해 전에 태어났다. 당연히 ‘잃어버린

고향의 시간’도 ‘생과 사를 넘던 피난의 고단함’도 젖먹이였던 할아버

지의 기억 속에는 없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스스로를 실향민이라고

여겼다. 그것은 아마 살아오면서 뿌리내리고자 부단히 애썼던 기억

때문일 것이다.

기억 : 잃어버린 고향의 시간 & 부유 : 생과 사를 넘던 그날들

할아버지의 고향은 강원도 금북면. 당시 금북면은 북쪽, 금남면

기억나지 않지만,

기억되는

그곳

∷ 황 광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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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지 않지만, 기억되는 그곳 231

은 서쪽이었다. 전쟁이 나고 그 이듬해 1.4후퇴 때 온 가족이 피난을

내려왔다. 살을 에는 듯 찬바람이 부는 한 겨울, 만 2살이 되지 않았

던 할아버지는 어머니 등에 업혀 피난을 왔다. 당연히 가족도, 할아

버지도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위로 누이가 둘이었다. 큰 누이는 할

아버지와 띠동갑이었고, 작은 누이는 10살이 많았다. 철이 든 누이들

은 피난길을 잘 따라왔다. 그러나 젖먹이였던 할아버지에게 피난길

이 쉬웠을 리 없다. 가족들 역시 할아버지 때문에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다.

“당연히 (피난 가던 것은) 기억도 안 나지. 근데 이야기는

좀 들었어. 업혀 오면서 울고 별짓 다 했나봐.

나 때문에 식구들 다 죽는다고 해서 입도 틀어막고. 굉장했나봐.

수틀리면 소리 지르니까. 이동처가 동선이 발각될 거 아냐.

소리 빽빽 지르니까. 어려움이 많았던 모양이에요.

명이 길어가지고 살았지 뭐. 전쟁이 나고 피난 나오기 전에는

중공군들이 와가지고 나를 예쁘다고 안아 주고 그랬대.

하도 어리니까. 그랬겠지.”

누이들과 아버지에게 피난길 이야기를 얼핏 듣기도 했다. 그러나

너무 어렸던 할아버지는 기억도 없다. 고향 역시 마찬가지다. 할아버

지에게 고향은 경험해보지도 못한 채 잃어버린 장소가 되어버렸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가끔씩 고향이야기를 들려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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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어머니가 결혼을 열여덟인가 열아홉에 했지 아마. 그때만 해도

우리 어머니가 키가 컸어. 그때 사진을 보면 툇마루에 돌멩이에

올라 서가지고 (아버지가) 키를 맞췄더라고. 어머니가 고향

이야기한 것은 맨 고생스런 농사짓던 얘기한 거지.

(원래 본가에서 살다가) 아버지가 분가 해 달라 해가지고.

띠어가지고 따로 살다가 6.25나가지고 왔다고 그러더라고.

몇 년을 함께 살다가 조금 분가해가지고 땅도 떼어주고 하니까

그러다가 6.25 나가지고 온 건가 봐. 그래서 좋은 시절도 별로

없었대요. 원래 피난민들은 좋은 시절이 없어. 그냥 내내 죽을 때

까지 고생만 하다가 가는 거여. 예전처럼 농사만 지었어도 옛날엔

농한기 땐 겨울에는 쉬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할 텐데

(피난 나와서 산) 시절이 뭐. 그 시절엔 애만 낳다가 좋은 꼴

못 보고 와가지고 그냥 그렇게 된 거지.”

어릴 때 떠나온 고향은 기억도 없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삶에는

언제나 고향의 흔적이 드리워져 있었다.

“내 원적을 떼어 보면 지저분해. 강원도 금화면 그게 원적이야

원적. 가원적은 그게 제대로 없으니까 새로 만든 거지.

지저분하지. 학교선생들은 모르지 지들이 뭘 알아?

왜 이리 지저분한지.. 나도 뭐 알아 왜 그렇게 만든 지?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거지.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시제 지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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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지 않지만, 기억되는 그곳 233

저기 제 2땅굴. 거기 가서 지내요, 일 년에 한번씩.

그러면 솔직히 이야기해서 비무장지대지. 군인들이 총 들고

들어와 제사 지내는데. 다시 어떻게 될까봐. 뭐 거기 산소에.

잘 살았나봐. 비석이 서가지고 그냥 비석에 총탄구멍이 아직도

있어. 위에 갓이라고 그럴까 비석에 씌우는 거 있잖아요.

그게 나가서 떨어져 있고. 무거우니까 못 올리는 거지.

몇 번 가봤죠 거기. ‘창원 황씨’가 철원 쪽에 엄청나요.

인제 무슨 파, 무슨 파가 인제 헤어져서 그렇지. 큰 철원에

거기 지내는 데가 원주에서 총 철원 황 씨 종친회가 있어.

거긴 안 가봤는데. 우리네 파 지내는 데만. 거기 몇 대조

할아버지가 경기도 시흥시에 와가지고 그 양반이 여기 있다가

돌아가셨나봐. 그래가지고 산 사놔가지고. 그래서 시제를

여기서 지내요. 산소가 여기에 있어.”

사실 피난을 나올 때만 해도 이렇게 영영 못 돌아갈 줄은 몰랐다.

금방 돌아 올 거니까 짐도 간단히 챙겼다. 집안의 중요한 물품들은

집 앞마당에다 파묻고 왔다.

“앞마당에 파묻어놓은 재봉틀이 있다고 통일되면 가서 찾으라

하더라고. 그래서 속으로 생각했지. ‘재봉틀이 있었으니

부자이었나 보네’ 하고. 피난 올 때만 해도 금방 갈 줄만 알았지.

영원히 헤어질 줄은 몰랐지. 옛날에 이산가족 찾는 거랑 똑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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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거야. 그때 내려온 사람은 (남아있는 사람과) 영원히 헤어진

거야 지금. 그때 어른들은 다 돌아가셨지. 그때 부모들이 지금

보통 100살일 거야, 아마. 살아 계셨으면 자식들이 이제

8,90이나 된 거고. 그 담에 이제 우리지. 우리가 아마 기억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 일거야. 아마.”

정착 : 뿌리 없는 삶의 고단함

아버지는 5형제였다. 아버지는 셋째였는데, 작은 아버지만 먼저

내려가고 나머지 형제들은 피난길을 같이 내려와서 같이 자리를 잡

았다. 터를 잡은 곳은 화성시 정남면 덕절리였다. 흙벽돌집에 가마니

를 쳐놓고 지냈다. 아버지 형제들과 함께 아랫마을 윗마을을 왔다갔

다 거리며 살았다.

“우리 아버지가 셋째고, 밑에 넷째 작은 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자고 어딘가에 다녔어. 그냥 이런 방도 없어가지고 한 방에서

다 자는 거여. 대여섯 명이. 시동생이고 뭐고. 지금 같으면

큰일 난다고 그러지. 다 그냥 뭐……. 발만 아랫목에 다 묻고

둥글게 있는 거지. 소변이 얼었을 정도니까 방안에서.

아주 그냥 연탄가스 맡는 건 일쑤였고. 에구, 지금 생각하면

개만도 못한 삶을 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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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지 않지만, 기억되는 그곳 235

당시의 삶은 할아버지가 워낙 어렸을 때라 기억이 희미하다. 그러

나 커서 어른들께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최 씨 아저씨’라는 분이

있었고, 그 분께 임대를 해서 농사를 지어 근근이 살아갔던 것 같다.

그렇게 2년 여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다가 서울시 용산구 효창동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일본군이 버리고 간 적산가옥으로 들어간 것이다.

“먼 친척이 그쪽에 살고 있었어. 그때만 해도 50년대 초반이니까

일본 애들이 해방되고 나갔잖아. 항복하고. 그래서 일본 애들이

살다가 놓고 간 적산가옥이라고 있었어. ‘여기 비었다.’하면

무조건 들어가는 거야. 막 들어가는 거지. 그리고 버티는 거야.

그게 청파동, 효창동에 있었거든. 내가 생각해도 잘 지었어.

근데 가보면 다다미거든. 우리는 다다미에서 못살잖아. 다다미를

뜯으니까 칼이 나오더라고 ‘이렇게 큰 게’ 나오기 일쑤였어.

그래서 다다미를 다 들어내고 우리네 스타일로다가 고쳐야 살 것

아냐 겨울에. 어떻게 살아 그냥 저냥 고쳐서 살았지.”

일본 사람이 살다가 버리고 간 적산가옥은 일단 들어가서 살다

가 정부에게 불하를 받아 소유권을 얻는 형식이었다. 정부에서 얼마

씩 달라고 하면 그 돈을 주고 집을 얻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턱

없이 낮은 가격이었지만, 워낙 없이 살던 시절이라 그 돈도 부담스러

웠다. 그러나 다른 피난민들의 삶에 비하면 적산가옥에 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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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우리 작은 아버지 집이 후암동이라고. 거긴 난민촌이야.

거긴 내가 알아. 거기는 아버지 밑에 밑에 동생이 사셨거든.

그래서 거길 내가 왔다왔다 했어. 효창동에서. 거기 가서 보면

효창동 적산가옥도 그래도 잘 사는 동네야. 후암동 용산 고등학교

뒤쪽은 그냥 일본말로 하꼬방이고 판자촌이야.

지금도 기억나는 게 집에 식구는 많고 하니까 준2층이지.

(천장이) 높으면 거기다 하나 더 들여 가지고 다락방이지.

거기서 살고. 죄다 그렇게 살았지. 그때 사는 게 다 그래.

준2층 만들어 놓고 그냥 크다고 ‘야 올라가 자’ 그러면 올라가고.

그렇게 만들어진 집은 그래도 나은 축이야. 그게 안 되면 아래서

우글우글... (웃음) 개, 돼지 살듯이 사는 거여. 피난 나와 가지고

집도 없고 절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땅도 역시 비어 있었다. 할아버지네 아버지와 어머니도 효창동 빈

터에서 밭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렇게 지내다가 4.19가 났다. 전라도

와 경상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무작정 상경했다. 갈 곳 없던 그들은

농토에 천막집을 짓고 지냈다. 당시 효창동은 소위 ‘4.19 난민촌’으로

불렸다고 한다.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매일 (우리 밭에다가) 천막을 쳐

그러면 우리 농사니까 나가라면 나갔다가 밤에 들어오면 다시

짓고 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걸 우리가 그걸 내 준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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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지 않지만, 기억되는 그곳 237

우리 아버지 엄마하고 매몰차게 못 한 거야. 우리는 적산가옥

사니까, 그 사람들에 비하면 부자지, 그 사람들에 비하면.

당시 땅도 정부에서 불하해 주는 거거든. 니꺼 내꺼 없으니까

그 사람도 살 데가 없고, 갈 데가 없으니까 그냥 하는 거여.

거기서 어떻게 사나 보면 흙벽돌 짓고 살고 있어 반 지하 파고.

그럼 겨울에는 안 춥거든. 반만 지하 파고 흙으로 벽돌 쌓으면

훈훈해요 되게. 땔감 없어도. 그 사람들이 계속 와서 우리 농토에

천막집을 지으니까 ‘그냥 살아라.’ 하고 씨 값 받고 그냥 준거여.

거기서 매몰차게 ‘안 돼’라고 못 한 거지. 그러고 나서 결국

우리가 못 산거야. 그거 잡고 있었으면 수억 수십억 되는 거여

그걸. 그래. 내꺼야 한 사람은 지금까지 떵떵대고 사는 거고 그때

그냥. 강원사람들이 마음이 약한가봐. 모질게 했으면 부자 됐지.”

서울에 아는 사람도 없고, 취직할 곳도 없었던 아버지는 소금 장

사를 하셨다. 띠 동갑인 큰 누나도 장사를 했다. 좌판을 벌려놓고 양

말 같은걸 판 것이다. 누이는 장사 수완이 꽤 좋았다. 누이뿐만 아니

라 당시 많은 피난민들이 동대문, 남대문에 좌판을 벌려놓고 장사를

했다.

“나일론 양말 팔았지. 그거 구멍 나면 다시 전구 다마 끼고

꿰매서 쓰던 시절이지 뭐. 그때는 그래도 미군부대에서 물자가

많이 흘러 나왔을 거야. 미제, 미제면 최고니깐. 물자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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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걔네 물자 좀 흔해. 지금도 흔하지만 옛날에는 먹는 게 최고

귀하니. 노량진에 놀러가 보면 이 드럼통 있지 짠밥통. 꿀꿀이 죽

같은 거지 버리는 거. 이렇게 보고 있으면 고기 같은 거 집어

먹고 그랬어요. 그때. 어렸을 때 한 친구 아버지가 미8군 용산에

다니던 양반이 있었지. 그 양반이 제일 잘 살았었어.

거기 다니면서 미군부대 다니니까 먹는 건 해결되니까 뭐 그냥

하면 뭐 가져오고 먹는 거 먹다 나머지 가져오고 생계는 뭐

거기는 아주 잘 살았어 거기는.”

물자가 귀했던 시절, 미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물건은 최고였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실제로 할아버지는 미군들이 던져주는 캐러멜

이나 초콜릿을 먹기도 했다.

“‘헬로 헬로’ 그러면 던지고 가. 그럼 주워 먹는 거여. 거지야

거지. 걔들이 던지고 가면 주워 먹는 거여. 캬라멜 같은 거. 보면

우마차 같은 거 있으면 몰래 타면 우마차 주인이 회초리로 치고

이런데 맞고 시뻘게지고. 그냥 뭐 지금 큰 일 나지. 사람 때리면.

(그래도 그때는) 맞으면 그만이고 그냥 가는 거야.”

1955년 할아버지는 7살에 금양국민학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2년

뒤에는 청파동에 있는 청파국민학교로 옮겼다. 학교 역시 전쟁 직후

라 어수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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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지 않지만, 기억되는 그곳 239

“그때만 해도 전쟁이 금방 끝난 때라 나보다 나이 많은 애들이

많았어. 다니다 보면. 걔네는 공부 무척 못 했어. 걔들이 뭐

(나이 상으로는) 형이니까 형 소리는 안 해도 ‘이 새끼야 뭐’ 하면

어어 그랬어. 따라서 그냥 하라는 대로 했지. 청소하는 데 같이

청소 걸렸다 그럼 걔들은 안 해, 시키지. 지금하고 비슷해.

힘 좋은 놈이 오야봉 노릇 한다고. 청파동 밑에 미8군 있어가지고

거기 하우스 보이들이 많았거든. 부모 없이 거기서 그냥 먹고 자고

해결하는 애들이 많았어. 그리고 낮에는 학교 다니다가 밤에

일하고 그랬지. 지금 생각해보면 걔들은 나이가 많이 먹어서 아님

미군에서 잘 얻어먹어서 그런지 피부가 뽀얗게 좋았어.”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할아버지는 노량진까지 걸어서 놀러 다

녔다. 원효대교도 없던 시절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냥 벌판을 가로질

러 노량진으로 갔다. 시대는 험했지만, 아이들은 아이들이었다. 할아

버지는 언제나 동네아이들과 몰려다니며 어울려 놀았다.

“그때는 그냥 벌판이니까. 한강은 장마 지면 못 가는 거고.

예전에는 그것도 했어요, 폭격. 한강다리를 밑에서 모형놀이 놓고

국군의 날 같은 거 행사할 때 거기서 길이 허물면 치고 올라오면

허연 게 동네에서 보였거든. 가까웠어, 효창동에서 내려다보면

보였으니까. 그리고 차타고 다니는 건 생각지도 못하고.

죄다 걸어 다니는 거니까. 지금은 생각지도 못 하는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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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적산가옥은 대나무를 넣었어. 집을 넓히다 보면 대나무가 나와.

그럼 그걸로 겨울이면 숙대에서 효창동 내려가는 길에 스키

만들어서 타는 거야. 겨울에 (대나무를) 불에다 구워서 앞으로

이렇게 슉 들면 완전 스키여 그게. 거기서 그냥 겨울엔 타고

그랬지. 그땐 차라는 게 별로 없을 때니깐. 눈이 내리면 그냥 뭐.

그때는 보통 영하 18도, 19도 이랬어요. 낮에 영하 9도, 8도.

고드름 내려오지. 그리고 여름이면 노량진 한강다리 쯤에 수영장

있어. 수영 했어 옛날에. 거기 놀이터였어.

지금도 (노량진 놀러가다가) 발바닥에 사이다 병에 찔려가지고

찢어져서 이만큼 흉이 아직도 있대도.”

서울은 신나는 놀이터였다. 노면 전차를 타고 지금의 청와대가 있

는 곳까지 놀러가기도 했다. 그때는 그곳을 자문 밖이라고 불렀다.

노면 전차는 남대문에서 광화문까지 직선거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어찌나 빨리 다니는지 전차가 흔들흔들 했던 기억이 있다. 함께 놀았

던 동네 친구들 중에 피난민은 할아버지가 유일했다. 그러나 워낙 어

릴 때부터 함께 어울려서 아이들 중 아무도 할아버지를 피난민이라

고 생각지 않았다. 친구들과 전차를 타고 청와대 앞까지 가면 함께

놀던 친구의 외갓집이 있었다. 그때 거기서 얻어먹었던 밥맛을 아직

도 잊을 수 없다.

“거기 가면 자두 한 접, 100개를 100원 주고 사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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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지 않지만, 기억되는 그곳 241

그때는 돈 값어치가 그렇게 있었지.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서

거기가 경비가 심하고 그래서 그렇게 된 거지. 옛날에는, 어...

뭐라 그럴까. 무슨 놀이터라 그러지. 다 잊어버렸네. ‘향약’.

그러니까 술 먹고 노는 데지 뭐 거기가. 세검정 쪽에 있었어.

뒤쪽에 경치가 좋았으니까. 지금도 좋을 거야 아마.”

그렇게 초등학교를 보내고 중학교를 진학했다. 당시에는 모두 시

험제였다. 공립 중학교는 학비가 800원인데, 사립학교는 1,100원이

었다.

“300원이면 엄청나게 큰 돈이여 이거는. 먹고 사는데.

쌀이 몇 말이 왔다 갔다 했을 겨 아마. 난 왜 공부를 못해가지고

사립을 가가지고 없는 집에 돈만 갖다내나. 심정이 복잡했지.

그리고 그냥 (학교에서) 겁나 쫓겨 다니고. (학비) 못 낸다고.

사립학교는 담임선생이 막대그래프로다가 표시해. 뭐 그땐 분단

아니야 1분단 몇 프로(%) 몇 프로. 어느 분단은 푹 올라가고 많이

낸 데는. 안 낸 데는 또 그냥 그니깐 그거로다가 하는 거야.

쫓아 보낸다고 선생은 학교에서 그냥 어떻게 하라니까 쪼니까

쫓아 보내고 쫓아 보내고. 한 놈은 글씨 잘 쓰는 놈이 있어

부모처럼. 그러면 그 놈이 만들어 줘 언제까지 내겠다고 그냥

그렇게 써가지고. 도장 하나 가라 맡아가지고 주고. 그 때 되면

돈이 나오나? 안 나오지. 그니까 밀려 나가는 게 많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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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그니까 한 분기씩은 밀려 나간거야. 그렇게 계속 밀려 나갔는지

떼어 먹었는지 모르겠어. 나는 밀렸다가도 내고, 내고 했는데...

떼어 먹은 건 없는데 없는 집 애들은 층층 지하에 있는 집은

부담 가지. 300원이면 엄청 큰 거거든 그거.”

위로 나이가 많던 누님들은 시집을 갔다. 당시에는 밥만 먹을 수

있으면 맞춰서 시집을 보냈다. 할아버지는 장남이었고 피난 온 뒤 남

동생 둘, 여동생 하나가 더 태어났다. 실향민이 되어 낯선 땅에 갑자

기 떨어진 할아버지의 아버지에게 아이들을 공부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 소금 장사를

시작하셨고, 아이들을 키우고 공부시키기 위해 열심히 사셨다.

“그땐 아버지가 수완이 좋으셨지. 굵은 소금을 불로 때면 그게

허연 소금이 됐어. 그게 원래는 햇빛을 쫴서 허옇게 되어야 하는

건데, 가져다가 불로다가 허옇게 만들었지. 아버지가 살려니까

(그렇게 했지). 자식은 있지 어떻게 할 거야 어디고 비비고

들어가야지. 그렇게 고생을 하셨어.”

1964년 고등학교 입시를 보고 배문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당시의

서울은 시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울 역시 농사짓던 시절이라 온

통 벌판이었다. 지금도 효창동 사무소에 텔레비전이 생겨서 온 동네

사람들이 가서 구경했던 기억이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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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는 온 서울을 누비고 다녔다.

“깡통차기 많이 했어. 겨울에는 자치기, 깡통차기 하다가 그냥

술래가 되면 저기 저 밑에 경보극장이라고 있어. 거기 마포.

거기까지 뛰어가서 잡으러 오고 뭐 그냥 그러고 놀았지.

지금 경보극장도 없어졌드만. 그 쪽 공덕동 끝자락이지.

지금 보면 아마 마포대교 북단쪽 될 거야. 북단쪽 거기까지

가는 거야. 그러면 반나절 가는 거야. 거기 갔다 오면.”

집안 형편이나 주위상황은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비관적이

지도 않았다. 모두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뒤 큰 시

련이 닥쳤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

신 것이다. 고혈압으로 인한 뇌출혈이었다. 작은 아버지가 당시로서

는 구하기 힘든 우황청심환을 사가지고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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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그러나 아버지는 그것도 잘 넘기질 못했다. 그리고 쓰러진 지 일

주일 만에 돌아가셨다. 쉰을 갓 넘은 젊은 나이였다. 평생 전업주부

로 살아왔던 어머니는 경제력이 없었다. 장남이었던 할아버지가 실

질적인 가장이 되었다.

“(마비로 말을 잘 못하셨는데) 혼자, 혼자, 혼자된다고

엄마한테도 말하더라고. 본인은 안거야.

그렇게 아버지 임종을 지켜보는데……. 그때 기분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했지.”

다행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직이 되었다. 사장 역시 실향

민이었다. 형광등 소켓이나 전선을 조이는 볼트를 만드는 회사였다.

월급을 아주 많이 주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사장의 인심이 넉넉하고 좋았다. 그렇게 그 회사에서 한 3년을 일하

다가 군대를 갔다. 군대 생활을 한 곳은 ‘포천시 용곡리’였다. 떠나온

고향이 지척이었다. 그리고 그 마을에 황 씨 집성촌이 있었다. 누구

하나 도움 주는 이도 없고, 고향에 대한 기억도 없지만 이상하게 마

음의 의지가 되었다. 오다가다 사람 얼굴만 봐도 든든하고 반가웠다.

군대 생활 역시 단기 하사로 뽑혀 일반 사병들보다는 더 나은 환경에

서 지냈다.

“군대 훈련소에서 하사관으로 차출 됐어요. 그러니깐 난 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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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지 않지만, 기억되는 그곳 245

하사였지. 지금은 지원을 하는데 나 할 때만 하더라도 서울에서

천 몇 백 명이 단기하사로 차출이 됐어. 그때 처음 시도를

해 본 거야. 그나마도 딴 놈 천오백 원 받을 때 난 삼천오백 원

인가 받았어. 월급을. 잘 썼지. 그거가지고 저축을 했으니까.

밥 주고 삼천오백 원 줬으니깐. 그땐 장기하사들이 칠팔천 원?

만 오천 원인가 받았을 거야 아마. 장기복무자들.

난 이제 단기라고 해서 병장보다 더 받은 거야. 그래가지고

그렇게 큰 고생을 안 했어. 처음에 훈련 받아 고생을 했지만

중간에 잘 해가지고 고생을 안 했어요.

그래도. 계급이 높다고 마음대로 못하고 그랬지.”

그러나 할아버지가 군대 가 있을 동안 집안은 더 힘들었다. 다니

던 직장에서 나오던 고정 수입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말씀은 잘 안

하시지만 어머니가 참기름 장사도 하고 몇몇 장사를 하신 눈치였다.

그러나 평생 전업주부로 살아오신 어머니는 장사에 운이 따르지 않

았다. 여동생 역시 일을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군대에 가 있을 동안

여동생이 고생을 많이 했다. 그런 집안 형편을 알기에 할아버지 역시

휴가 나와서도 공장에 가서 일을 했다.

“한 3년 일하다가 군대를 갔잖아. 휴가 나오면 또 (그 회사에)

잠깐씩 다니고 했어요. 워낙 (집이) 못 사니까 휴가 동안에 가서

또 벌이를 했죠. 거기 가서. 몇 푼 주면 집에다 좀 주고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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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가지고 들어가고 그랬지... 휴가 나와서 속으로 눈물 흘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 있는 집 애들은 놀고 (난 일해야 하니까).

내가 (일하러) 가게 되면 남영동 바닥을 거쳐야 효창동 가니까.

62번 버스를 타면 남영동에서 내리거든. 숙대를 걸어

올라가거든. 그땐 회사가 보통 9시까지 했고 집에 오면 10시,

11시 좀 늦으면 12신데. 겨울철 같은 때는 (서럽지).

내가 겨울철에 두 번 휴가를 나왔지 아마. 젊었으니까 버텼지

그냥. 거기서 자전거를 타고 성수동을 왔다 갔다 했어.

효창동에서. 그래도 휴가 나와서 돈벌이 하다 다시 오라고 했으니

얼마나 고마워. 안 되면 또 어디가. 그때가 휴가가 25일이여.

25일이면 그래도 짭짤하게 줬다고.”

할아버지는 그렇게 19살 처음 들어간 직장에서 군대 휴가 때까지

일을 했다. 그리고 제대 후에도 다시 취직했다. 61살 정년퇴임할 때

까지 평생을 한 직장에 다녔다.

“거기서 잘 해줬으니 (계속 다녔지). 이 회사가 월급은

남들보다는 적었어. 근데 가불이라는 게 있었어. 가불.

목돈 가불을 해줘. 그리고 이자 없는 가불을 해주는 거여.

그리고 푼돈으로 까는 거야. 그러니깐 은행 대출인데 이자 없는

대출이여. 우린 은행 문턱은 넘어 갈 수도 없고. 그 식으로.

거기 다니는 사람들 중에 집 없는 사람이 없었어.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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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지 않지만, 기억되는 그곳 247

(가불을) 해주고 ‘이번에는 좀 어려워요’ 하면 해주고. 그 사장이

아는 거지 (피난) 와가지고 자기도 고생하고. 그 집은 열 명인가

다 살아가지고 데려와 가지고 고생 숱하게 한 거여. 그러니까

아는 거여. 아니깐 해 주고. 그렇게 해서 많이 도움을 받았죠.”

제대하고 첫 월급은 만 오천 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아주 넉

넉하진 않았지만 밥은 먹고 살 정도였다. 제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효창동 집을 팔고 성남으로 이사를 갔다. 당시 집값은 150만원~200

만원 사이였다.

“(우리가 이사 간다고) 동네사람들 울고불고 다했지.

수십 년 살았으니까. 그러다가 다시 몇 년 후에 성수동으로 왔어.

못살겠더라고. 왜 그리 고장이 그렇게 많이 나는지.

잊어버리지도 않아 570번 버스. 을지로인가 성남 가는 버스.

완전히 콩나물시루 짝이야 그거는. 워낙 문짝도 떨어져 나가고

못 다니겠어. 그냥. 거기서 한 번 앉으면 일어날 생각도 안 해.

들어갈 때도 한 번 억지로. 을지로가 이렇게 해서 성수동 둘러

가는 거 아녀. 그냥 뭐 빡빡해 그냥.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뭐.

못 살겠더라고. 1년인가 이사 가고 있다가 250만원인가 300만원

받고 팔았지. 그래도 또 성수동에 전세 좀 얻고 해가지고.

또 하여튼 어떻게 또 하고 그러다가 거기서 몇 년 살다가

경마장 앞으로다가 서른 몇 평짜리로다가 옮기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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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그렇게 할아버지는 수완 좋게 집을 옮기시며 조금씩 재산을 불려

나갔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무리하게 투자를 하진 않았다. 그저 살

집을 조금씩 늘려가는 수준이었다. 당시에 총각이 집을 사러 가면 다

들 놀라곤 했다. 그러다가 할아버지 나이는 어느새 서른을 훌쩍 넘어

있었다. 당시로는 노총각이었다. 그러던 차에 처남이 중매를 섰다.

“동생 남편이 월계동인가 어디서 살다가 장사를 했었거든.

들락날락 하면서 있다고. 거기서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중매를

그냥 한 거여. 그래가지고 뻥 좀 놨겠지. 집 있고 뭐도 있다고

해서 그냥 만난거야. 그때만 해도 어디 잘 씻던 시절이여?

만나러 가면 꼭 목욕하고 나가는 거여 거기는.

깨끗하게 나가려고. 그래도 어떻게 성공해가지고 연애를

1년인가, 몇 개월인가 했지.”

당시 연애하던 아가씨는 한복에 수놓는 일이 직업이었다. 그래서

납품하러 가는 길인 을지로에서 자주 만났다. 그리고 집 근처에서도

만나기도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서른 둘, 아내가 스물아홉 되던

해에 결혼했다.

당시 할아버지는 성남에 살고 있었다. 여동생은 미리 결혼을 해

아이를 낳고, 그곳에서 몸조리를 하고 있었다. 홀시어머니와 시동생

이 둘이었다. 새색시에게는 쉽지 않은 자리였다. 그러나 아내는 묵묵

히 시집을 와줬고, 할아버지는 그게 고마웠다. 얼마 뒤에 다시 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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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지 않지만, 기억되는 그곳 249

동으로 집을 옮기면서 할아버지는 꾀를 냈다. 단층짜리 집이었는데

옥상위에 방을 2개 더 만든 것이다.

“성수동에 내가 슬라브 집을 산거여. 그래서 내가 2층에 방을

2개 들인 거여. 지금 보면 무허가로 들인 거지. 두 개 만들어

가지고. 그 쪽에 머리가 돌아가지고 월세를 받은 거여. 하나는

우리가 쓰고 하나는 세를 줬지. 그때 월세가 잘 나갔어. 딱 지어

놓으니깐 동사무소 소관이여. 또 이게 뭐 무허가니 어쩌니 해서

돈 몇 푼 주고 어쩌고저쩌고하다가. 그러다가 박정희가 시해된

거지. 79년도에 그때. 유야무야 끝난 거야 그냥. 아주 부셔라

마라 아주 골 썩었어. 그거. 내 살림집을 하려니 밑에 노인네

살고 있는데 ‘방 빼소.’ 할 순 없잖아. 내가 위로 가야지

새로 지어가지고. 슬라브에다 방을 두 개 들였거든. 하나는 나 살고

하나는 세 줬지. 몇 십 만원 나오니깐 큰 도움이 되더라고 그게.”

아버지 없이 젊은 시절부터 고생한 것이 지긋했던 할아버지는 딸

하나만 낳아 정성껏 키웠다. 딸을 잘 키우기 위해 더 열심히 살았다.

평생을 같은 직장에 다녔고 이리저리 집을 이사해가면서 조금씩 살

림을 불렸다. 그 덕택에 지금은 아주 많진 않지만 안정적인 수입이

있다. 61살 정년퇴직할 때만 해도 섭섭했는데 지금은 여유 있게 사는

것에 만족한다. 그리고 작년부터 화성으로 내려와 딸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 직장생활 하는 딸의 두 살짜리 손주를 봐주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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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요즘 삼대 바보가 스케줄 바꿔가면서 외손자 봐주는 바보.

또 용돈 쓴다고 다 넘겨주고 용돈 타 쓰는 바보. 집 적다고

넓혀가는 바보가 3대 바보래. 나이 먹고서 절대로 하지 말라는

거여 그거. 집 넓혀 갈 필요도 없고 용돈 싸다가 다 줄 필요도

없고 시간 바꿔가면서 할 필요가 없대. 가만 보니까 그것도 맞는

얘긴데 근데 눈에 빤히 보이는데 안 할 수도 없어. 그러고서

하는 게 부모인거지. 예전에 같이 안 살 때는 와이프하고

금요산악회라고 평일 날 가는 산악회가 있어요. 거기 자주

다녔어. 근데 요즘에는 주말에 가야 하니까 못가.”

젖먹이였던 할아버지는 태어나자마자 ‘피난’이라는 ‘헤어짐’을 경

험했다. 할아버지의 기억 속에는 ‘고향’은 없다. 그러나 삶 전반에 ‘고

향의 기억’은 아로새겨져 있다.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 ‘고향, 그리

고 피난’이라는 헤어짐의 기억은 할아버지의 삶 전반에 큰 영향을 미

쳤다. 뿌리가 얕은 삶을 지켜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할

아버지는 성실함으로 그 시간을 이겨냈다. 그 결과 할아버지의 삶은

더욱 단단해졌다. ‘헤어짐’이 있었기에 ‘채워짐’도 가능했던 것이다.

피난 와서 정착하고, 열심히 일한 시절을 지나 할아버지는 이제

새로운 인생으로 들어서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돌아보니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인생의 순리에 대해서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그렇게 할

아버지의 삶은 오늘 하루도 단단하게 여물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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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지 않지만, 기억되는 그곳 251

구술정리 / 은정아

사진 / 류승진

“사람은 이렇게 보면 헤어지는 연습도 해야 돼.

좋을 때 헤어져야지.

언젠가 너하고 나하고는 헤어지는 거야.

내가 죽던가 뭐 하면 헤어지는 건데.

그 연습도 해야 된다 마음의 준비는. 우리는 그냥 살고 싶지.

계속 평생 같이 못 살잖아. 또 같이 살면 어디 좋기만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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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온 경기도민 이야기

황광태 할아버지(66세) 연보

1949년 강원도 금북면 금촌리 출생

3남 3녀 중 장남(위로 누이 2명)

1951년 (3세) 3살 때 업혀서 피난 옴

큰 소리로 울어서 식구들 고생을 많이 시킴

화성시 정남면 덕절리 자리 잡음

아버지 형제들과 함께 흙벽돌집에

가마니 깔아놓고 삼

1953년 (5세) 효창동 적산가옥으로 이주

이주 후, 나중에 정부의 불하를 받음

1955년 (7세) 금양초등학교 입학

1960년 (12세) 4.19 발생

효창동에 4.19로 올라온 사람들이 몰리면서

원래 붙이고 있던 땅을 그들에게 내줌

배문중학교 입학

1963년 (15세) 배문고등학교 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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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지 않지만, 기억되는 그곳 253

1967년 (19세) 고등학교 졸업. ‘한흥볼트’ 취직

1969년 전후 아버지 사망

1970년 (22세) 군 입대. ‘포천시 용곡리’에서

군 생활 / 하사관으로 차출

휴가 중간에 ‘한흥볼트’에서 일함

1973년 (25세) 제대

다시 ‘한흥볼트’에 취직,

당시 월급 15,000원 정도로 기억

1974년경 (26세) 효창동 집 팔고, 성남으로 이주

1980년 (32세) 결혼. 딸 출생

1980년대 성수동으로 이사

1990년대 이사를 다니면서 조금씩 집을 늘려감

2000년 (52세) 수원으로 이주

2009년 (61세) ‘한흥볼트’에서 정년퇴임

현재 화성에서 딸과 함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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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류동 난민촌의 움막집들, 1953

(사진제공 수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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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매품

ISBN 978-89-93395-48-8 (03810)

경기도민 이야기 1

발 행 일 2015년 2월 28일

발 행 처 경기도사이버도서관

구술정리 은정아, 최주영

주 소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신풍로 23번길 60

전 화 031-252-5237

제작지원 ㈜더페이퍼 031-225-8199(경기도지정 예비사회적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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